오늘 아침에는 전병국 형제님이 쓰신 글을 올립니다.
교리의 중요성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바른 성경, 바른 구원, 바른 교리, 바른 교회의 선순환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번 주에는 핵심 요약 성경 해석법 책자를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http://keepbible.com/Pds1-4/View/3oe
샬롬
패스터
교리 공부가 필요한 7가지 이유
우리는 교리(敎理; doctrine)를 소홀히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리 공부를 목회자나 신학자들의 일로 여긴다. 그런가 하면 교리를 공부하면 머리만 커지고 영혼이 메마른다며 교리 공부 자체를 깎아내리는 경우도 있다. 또한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교리 때문이라면서 교리보다는 사랑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신자는 어떤 것에 대해 입장을 정리할 때 사도 바울이 던졌던 질문을 생각해야 한다.
“성경 기록이 무어라 말하느냐? What saith the script-xure?” (로마서 4:3)
자신의 기분이나 경험, 지도자의 가르침, 모임의 분위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은, 교리 공부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1. 교리를 알아야 부흥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행전 2장의 끝 부분과 같은 부흥을 꿈꾼다.
“또 날마다 한마음이 되어 성전에 거하고 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며 빵을 떼면서 단일한 마음으로 즐겁게 자기들의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온 백성에게 호감을 얻으니 주께서 구원받아야 할 자들을 날마다 교회에 더하시니라.”(사도행전 2:46-47)
이렇게 사랑 넘치는 교회, 기쁨 가득한 인생을 살고 싶어한다. 하지만 대개 이런 결과적인 모습을 흠모할 뿐 그들을 진정한 부흥으로 이끌었던 개혁의 모습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 예루살렘 교회로 모인 사람들에게 부흥을 앞두고 나타났던 모습들이 있었다. 오순절에 성령충만을 입은 베드로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기쁘게 예수님을 믿고 침례를 받았다. 그리고 한 교회를 이루어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들이 모여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찬양? 봉사? 기도? 아니다.
“그들이 흔들림 없이 사도들의 교리와 교제 안에 머물고 빵을 떼며 기도하더라.”(사도행전 2:42)
그들은 함께 모여 4가지 실천했다. 사도들의 교리(가르침)를 배우고 교제하고 빵을 떼며 기도했다. 그들은 제일 앞에 사도들의 교리를 두었다. 교제와 만찬과 기도는 그 다음이었다. 사도들의 교리란 오늘날 성경의 교리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의 교리, 성경의 가르침은 신앙생활이라는 기차의 기관실과 같다. 제일 앞에서 끌어주고 방향을 잡아준다. 교제 앞에, 만찬 앞에, 기도 앞에 교리가 있고 성경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이 4가지 일들을 “흔들림 없이, 변함없이(steadfastly)” 계속했다. 다시 말해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재미있을 때나 지루할 때나, 사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교리를 배우고 교제하고 만찬하고 기도했던 것이다. 많은 이적과 표적, 재산의 나눔, 매일의 모임, 교회의 성장 등은 그 뒤에 찾아온 일들이었다. 부흥은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부분이지만 우리에게는 우리의 몫이 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성경의 교리를 배우는 것이다.
2. 교리를 알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
구원의 복음은 감상적인 외침이나 피상적인 말로 꾸민 일시적인 위로가 아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체계적인 가르침이다. 다시 말해서 교리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죄의 종이었으나 너희에게 전달된 교리의 그 틀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고 이로써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느니라.” (로마서 6:17-18)
사도 바울은 “죄의 종이…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어떻게 그런 변화가 생길 수 있는가? 로마의 성도들이 어떻게 했길래 그런 변화가 생긴 것인가? 그들이 “교리의 그 틀(that form of doctrine)”에 반응했기 때문에 그런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복음을 하나의 교리체계로 말하고 있다. 물론 조직신학이나 구원론같이 좀 더 학문적이고 복잡한 지식과는 좀 다른 이야기지만 복음은 분명히 그 자체로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 인간의 죄인 됨,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이에 대한 믿음이 차례로 이어진다(고전 15:1-5). 바울은 우리가 이 복음을, 이 교리의 틀을 지성으로(“전달된”), 감정으로(“마음으로부터”), 의지로(“순종하고”) 믿고 받아들이면 죄로부터 해방된다고 말하고 있다. 신자가 되는 것과 교리를 아는 것은 따로 떨어진 일이 아니다. 신자가 되는 것 자체가 이미 교리 공부의 시작이다.
3. 교리를 알아야 하나 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너희를 간절히 보고 싶다”(롬 1:11)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그렇게 보고 싶어하는 이유를 말한다.
“내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은 내가 너희에게 어떤 영적 선물을 나누어 주어 너희를 굳게 세우고자 함이니 이것은 곧 너희와 나 사이의 공통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와 함께 위로를 받고자 함이라.” (로마서 1:12-13)
간절한 그리움의 첫 번째 이유는 로마 성도들에게 영적 선물을 나누어 주어 그들을 굳게 세우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서로에게 위로받기 위함이었다. 사도 바울과 로마 성도들은 로마서를 썼을 당시 아직까지 서로 만나보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어떻게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 비밀은 “너희와 나 사이의 공통된 믿음(the mutual faith)”에 있었다.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던 사람들이, 서로 만났든 적도 없던 사람들이 만났으나 서로 같은 믿음을 가진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는가? 공통된 믿음이라는 것은 공통된 대상, 공통된 내용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기본적인 교리의 일치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서로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이다. 만약 다른 대상, 다른 내용에 대한 믿음이라면 서로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오히려 서로를 나누어 놓을 것이다. 서로의 믿음을 확인하는 공통의 교리는 신자들에게 위로를 주고 그들을 하나로 만들어준다.
4. 교리를 알아야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다.
흔히 쓰는 단어는 뜻이 왜곡되기 쉽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중년의 나이에 예수님을 영접한 어떤 분이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그분이 신앙을 갖기 전에 교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꼭 나오는 표현 중 하나가 “은혜 받았다”였는데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이 “은혜(grace)”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꽤 있다. 천국행 티켓이나 면죄부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은혜는 그 이상이다. 은혜는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딛 2:11-14; 고전 15:10). 그런데 이런 것이 단지 지식이나 이해의 정도 차이가 아니라 생사(生死)의 차이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너희를 부르신 분을 너희가 이렇게 속히 떠나 다른 복음으로 옮겨가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그것은 또 다른 참 복음이 아니며 다만 너희를 어지럽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 하는 자들이 더러 있도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라디아서 1:6-8)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피상적인 단어에 머무르지 말라고 경고한다. ‘복음’이란 단어를 쓴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참된 복음과 다른 복음, 거짓 복음, 저주받을 가짜 복음이 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단어가 아니라 복음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다. 쓰는 단어가 대충 비슷하면 서둘러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복음, 칭의, 은혜 같은 기독교의 핵심 개념들을 피상적으로 사용하면서 종교통합을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언뜻 관용과 사랑이 넘치는 것처럼 들리지만 성경과는 크게 어긋난 모습이다. 참 사랑은 결코 진리와 충돌하지 않는다. 사랑은 진리를 기뻐한다(고전 13:6) 이 모습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예수님은 우리의 하나가 됨을 위해서 기도하셨지만 아무하고나 무작정 하나가 되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말씀을 지킨” 사람들이(요 17:6), “아버지의 진리로…거룩히 구별된” 사람들이(요 17:17)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며 기도하셨다.
5. 교리를 알아야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다.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그 비결을 보여주고 있다. 성도들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걸으며 서로 참아주고 성령이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하는 것이 기본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신”대로 교회를 잘 섬겨야 한다(엡 4:7). 또한 교회 안에 가르치는 사람들을 잘 세워야 한다.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는” 주님의 뜻이다(엡 4:12). 이렇게 될 때 비로소 건강한 교회를 이루게 된다.
“마침내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 이것은 우리가 이제부터 더 이상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들의 속임수와 몰래 숨어서 속이려 하는 자들이 사용하는 간교한 술수로 말미암아 교리의 모든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 밀려다니지 아니하고” (에베소서 4:13-14)
건강한 교회는 앎에서 하나가 된 교회요, 점점 자라 그리스도께 이르는 교회다. 그리고 속이는 자들이 “교리의 모든 바람(every wind of doctrine)”을 부채질해도 흔들리지 않는 교회다. 진짜를 아는 사람은 가짜에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한국 교회에 신천지 같은 이단이 판을 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교회 안에 바른 교사와 바른 교리가 약하기 때문이다. 에베소서에 나타난 성장은 개인적 성장이 아니라 공동체적 성장이다. 혼자서 열심히 책을 본다고 신앙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몸은 함께 자란다. 신앙은 교회를 이룰 때 자란다. 교리를 알아가며 자란다.
6. 교리를 알아야 싸울 수 있다.
교리는 우리끼리만 알면 그만인 지식이 아니다. 참된 교리는 늘 공격의 대상이 된다. 어떤 때는 노골적인 공격을 받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슬그머니 기어 들어온 자들에 의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오염되어 갈 수도 있다. 이런 공격은 한 교회가 아니라 한 시대의 교회들을 향할 수도 있다. 교회사를 보면 예수님의 신성이나 삼위일체 교리가 공격 당한 때가 있었다. 지난 100여 년간은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에 대한 공격이 특별히 치열했다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우리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공통의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쓰려고 모든 열심을 내던 차에 성도들에게 단 한 번 전달된 믿음을 위해 너희가 힘써 싸우라고 너희에게 써서 권면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알지 못하는 가운데 기어 들어온 어떤 자들이 있기 때문이라.” (유 3-4)
원래 유다는 “공통의 구원(the common salvation)”에 대해서 편지를 쓰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이단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싸움을 독려하는 전투적인 편지를 쓰게 되었다. “단 한 번 전달된 믿음(the faith which was once delivered)”이 공격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편지 속의 이단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핑계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자들에게 예비된 것은 캄캄한 어둠뿐이다(유 13). 참된 믿음은 참된 경건을 낳는 법이다.
싸우려면 무기가 있어야 한다. 믿음을 지키려면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의 공격 무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라.”(엡 6:17)
7. 교리를 알아야 전할 수 있다.
“너희가 선한 것을 따르는 자들이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너희가 의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면 행복한 자니 그들이 두렵게 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고 불안해하지도 말며”(베드로전서 3:13-14)
세상은 고난을 불행이라 말하지만 성경은 행복이라 말한다. “의로 인하여 핍박 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마 5:10). 무서워할 필요도 불안해할 필요도 없다. “아버지께서 너희 머리털까지도 다 세셨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마 10:30-31)
“오직 너희 마음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에게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며” (베드로전서 3:14-15)
신자가 할 일은 상황이나 조건이 아니라 주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다. 고난 속에서 세상과 다르게 반응하는 우리를 보면 사람들은 궁금하게 여길 것이다. ‘도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걸까?’ 그들이 찾아와 우리가 가진 “소망의 이유”에 대해서 묻는다. 우리에게는 구원, 예수님의 재림, 영생의 소망이 있다. 베드로는 이에 대한 대답을 “항상 예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어느 날 찾아올 영혼구령의 기회를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자. 준비된 사람은 좀 더 온유할 수 있다. 자신의 공로는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사람은 교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이야기가 상대의 인생에서 마지막 기회일 수 있기에 애타는 사람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온유함과 두려움 가운데 교리를 알고 있어야 상대를 인도할 수 있다.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 주느니라.” (고린도전서 8:1)
교리 공부 좀 했다고 우쭐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교리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공부하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교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인 지식만 추구했기 때문이다. 거울을 보고 얼굴을 닦지 않은 것이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이다(마 7:24-29; 약 1:22-25). 하나님은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서만’ 아는 불쌍한 사람이다.
하지만 성경의 교리를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귀한 약속이 기다리고 있다. 성경을 통해 교리를 배우고 책망에 귀를 열고 방향을 바로잡으며 의의 가르침을 따르면 점점 더 완전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신다는 약속이다. 교리 공부에 주어진 찬란한 축복이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3:16-17)
2013-10-21 10:00:48 | 관리자
마태복음 23장이 생각납니다. 자기도 천국에 못가면서 가려는 사람도 막는자...
제자교회, 삼일교회등 교회에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2013-10-18 19:45:43 | 김영선
조용기는 복음과 교리 면에서 일말의 동정도 받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는 이단 누명을 돈으로 벗은 사람입니다.
세계최대의 교회, 세계일보에 대항하는 언론 등등을 얻기 위해
교계가 억지로 밀어올린 눈덩이가 두고두고 내려와 마을을 덮치는 꼴입니다.
엉터리 은사주의를 유행시키고,
많은 이단 소지가 있는 목사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종교다원주의 강의를 하고,
멀쩡히 목회자가 있는데도 본부 교회의 영상을 보며 예배하는 프랜차이즈 교회의 효시 격이며,
김태촌 등 가짜 회심자를 이용하고,
펄시 콜레 등 거짓말쟁이를 간증꾼으로 알리고,
토마스 주남 같은 거짓 증언자의 책을 번역 추천하고,
아들이 만드는, 음란물에 가까운 스포츠 투데이를 방관하고,
온갖 재산 축적과 사유화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불법의 종합 패키지 선물세트입니다.
단지 그가 용서받아온 것은 세계최대 교회라는 허울을 같이 공유하려는
종교인들의 무한한 너그러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법이 그를 심판할 때까지도 아무도 손을 못 쓰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뜻 이야기하기 전에 그는 세상에서도 범법자이며
기독교적으로는 큰 해악입니다.
2013-10-18 13:16:50 | 김재욱
지난 주에 순복음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부부가 찾아와 담소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대화 중에 구원교리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순복음교회는 구원을 잃어버린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행위구원'은 절대적인 진리 였습니다.
최근 신사도운동으로 인해서 많은 교회들이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추세이니 그건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황당한 것은 계속 이어서 설명하는 말이었는데, 그것은 구원 받는 것과 천국가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구원은 예수님을 영접하면 받는 것이지만, 행위가 충족되지 못하면 구원을 받았더라도 천국에는 결코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과 천국이 다릅니다.
이러한 교리는 이슬람 교리와 흡사하지만, 사실 이슬람 교리도 이정도로 모순적이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교리이니 그들의 교리대로 적용해보자면, 조용기 목사가 구원은 받았다고 치더라도, 천국에는 절대로 못간다고 봐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고 놀라운 것은 천국도 못가는 목사를 하나님 다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단 교리를 생산해내는 저들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것으로 인해서 스스로 자처하게 된 노예속박.
지금의 교회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이자 분별해야 할 점은, 말씀보다도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전통이나 교리를 더 중시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분깨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명령을 철저히 잘 저버리는도다.
2013-10-17 00:50:51 | 김상진
배임행위 기사를 보니 교회의 재정을 위해서라기 보다 헌금으로 아들을 도와주려고 한 것 같네요.
동국대 특강 내용이나 썩은 열매들을 볼 때 과연 구원받은게 맞는가 할 정도입니다.
조용기 목사가 구원받았는지는 하나님과 마귀와 본인만 알겠지요
구원받았다면 잘못된 성경, 교리에 대한 무지, 경제성장시기, 교만이 어울어져 지금의 모습을 만든거겠지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과연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2013-10-16 23:58:04 | 윤찬수
한국 교회가 다른 것도 아닌 돈과 건물 문제로 이처럼 몸살을 앓고 위상이 추락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조용기 목사는 결코 처음부터 나쁜 마음을 먹고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의 앞날을 위한 선의에서 출발하였거나, 다수를 섬기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필요에 의한 선택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식을 사들였다니 차후에 자산가치가 상승하여 교회재정에 이득이 된다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거라고 판단하여 그러한 결정을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중 삼중의 복을 넘치게 부어주실거란 확실한 믿음에 차 있었을테니까요.
또한 그를 가까이에서 섬기는 회중 역시 그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목회자이며 탁월한 영적 지도자이므로 평소 그의 양심과 언행을 믿고 그러한 일들을 굳이 막으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매주마다 그의 설교를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계속해서 교회는 부흥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대개의 경우 하나님의 뜻은 보통 사람들의 상식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들과 다른 사람이고 우리만은 예외라는 생각은 커다란 교만에서 비롯된 어리석은 것이므로 처음부터 철저하게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바른 성경이나 어려운 교리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건전한 상식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교회의 규모가 크던지 작던지 돈의 액수가 적던지 크던지 예외없이 교회의 재정을 운영함에 있어 항상 투명하게 원칙을 지키며,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위한 민주적인 의사결정 절차를 무시하지 않았었더라면 이와 같이 모두에게 불행한 일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막상 직접 여러가지 문제들을 처리하다보면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서 시끄러운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사공이 많으면 배는 산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시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믿는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평생토록 성경을 공부하고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과 순수한 복음을 위해 헌신했다고 자부하는 조용기 목사는 아마도 매우 억울한 심정일 것입니다.
사소한(?) 일로 자신을 비방하는 무리들의 작은 목소리 역시 귀에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상처받은 여러 성도들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주시길 바랍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주 앞에 가며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 절을 할까?
내가 번제 헌물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분 앞에 갈까?
주께서 수천의 숫양이나 수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가 내 범법으로 인하여 내 맏아들을,
내 혼의 죄로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오 사람아, 그분께서 무엇이 선한 것인지 네게 보이셨나니
주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의롭게 행하고 긍휼을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미6:6-8)
2013-10-16 23:09:06 | 유준호
한국 교회의 목사 숭배 사상이 도를 지나치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 돈 횡령과 부자 세습 등이 뻔뻔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불행은 사실 목사와 성도의 무지에서 나온 합작품입니다.
다음은 조용기 목사에 대한 기사입니다.
배도가 심한 이 세상에서 바르게 알아야 것을 알아야 하기에 올립니다.
참조하기 바랍니다.
조용기 목사를 하나님 다음으로 섬겼으나 배임·탈세 혐의 조용기 목사 2차 공판…전 총무국장 "주식 매매 조 목사 지시 따른 것"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5327
2013-10-16 16:11:18 | 관리자
다시 보려니 게시물이 이동되어서 한참 찾았습니다.
이 분석은 우리가 성경을 번역하거나 이해할 때 단어의 문법적인 해석보다
우선적인 용례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나아가서는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때 원어나, 원어사전(예 : 스트롱코드)을 찾아가며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용례를 잘 파악하고 번역한영어성경(KJV)을 기준으로
역시 영어의 용례를 잘 파악하여 번역한 킹제임스흠정역 성경이
원어사전을 찾아가며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편하고, 정확하고, 따라서 유익합니다.
영어 단어의 용례 파악에 있어 국내에 출간된 여타 다른 킹제임스성경 번역판들은
킹제임스흠정역 만큼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13-09-20 11:34:29 | 류인선
어제 생명의 말씀사에 일을 보러 갔다가 이상한 제목의 책을 보았습니다.
목회, 위험한 소명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278155
안의 내용이 흥미로울 것 같아서 가지고 왔는데 역시 기가 막히게 좋은 책이었습니다.
목사가 자기는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목사라고 생각하며 목사 의식을 가지고 살 때 공인으로서의 목사와
남편과 가장으로서 사적인 목사의 삶에 큰 괴리가 생김을 잘 보여 주는 책입니다.
공적인 목사이기 전에 예수님의 은혜를 늘 갈구하는 한 사람의 죄인으로, 성도로 자기를 바라보지 않으면
위선적인 목사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 주는 책입니다.
저와 제 아내가 추구하려고 한 것이 바로 이런 위선적인 목사 상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부족하지만 저희는 좋은 방향을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 같은 한 죄인이, 상처 입은 사람이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우리 모두의 죄를 보여 주고
주님의 위로로 위로하며 격려하는 설교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목사라 당신들과 다르다"라는 생각이 목사와 사모의 마음에 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끝없는 추락이 시작됩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이 모여도 허사임이 분명합니다.
저자는 자기의 경험을 들어가며 현 시대 목사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잘 보여 줍니다.
이렇게 진솔하게 자신을 드러낼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이 이루어지는 것에 저도 동의합니다.
목사가 아니라도 누구나 한 번씩 보면 좋을 것 같아 강추합니다.
샬롬
DSJ
---------------책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이 목회자이기 전에 매일 은혜를 필요로 하고, 죄와 싸우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도움을 구하면서 성화를 이루어 나가야 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는 나를 목회자로만 생각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목회자의 직분이 교회가 인정하는 하나님의 은사와 소명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목회자’, 바로 그 직분이 나의 정체성을 결정했다. 이제 분명한 사실로 드러났듯이, 그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일이었다. ---「1장」중에서
대중 앞에 비친 내 모습과 개인적인 삶에서의 내 모습이 분리되어 서로 상충되는 현상이 심해질수록 자신의 실상이 겉으로 드러날까 두려워하게 된다. 사람들이 나의 사생활을 알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내게 어떤 태도를 보일까 두려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심지어는 일자리를 잃을까 초조해하기도 한다. 그런 상태에서 사람들이 나를 염려하며 자꾸 의문을 갖는 것을 보면, 두려움에서 비롯하는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동료 사역자들에게 정기적으로 나의 문제와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기도해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이 혹시 나에 대해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만 고민하기에 이른다. ---「2장」중에서
어느 날 저녁, 로마서의 한 대목을 주석하는데 무엇인가가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복음을 가장 훌륭하고 포괄적으로 설명한 로마서를 수개월 동안 매일 몇 시간씩 연구해 왔으면서도 정작 그 메시지에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복음의 메시지는 내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문법과 구문, 신학적 개념과 논리적 논증이 전부였다. 거창한 지적 활동이었을 뿐, 영적 능력은 거의 전무했다. 글자가 빼곡히 적힌 페이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모든 것이 실생활과 동떨어진 것처럼,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멀고 흐릿하게 느껴졌다. 환각은 아니었다. 그것은 모두 내가 직접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 나의 실생활, 결혼생활, 죄와의 투쟁, 나의 과거와 미래, 나의 가장 깊은 희망과 꿈과 두려움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 보였다. 공책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동안 이 모든 것이 단지 학점이나 과제나 학위를 위한 것이라면, 끝까지 마무리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3장」중에서
그리스도께서 몸의 머리시라면, 그 나머지는 모두 그분의 지체에 해당한다. 목회자나 사역의 지도자가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하나의 지체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도 몸의 다른 지체들에게 필요한 것을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행하는 중요한 사역과 그 상호 관계망에 관한 규칙 가운데서 오직 목회자만 예외라고 말하는 성경 구절은 신약성경 어디에도 없다. 겉으로 보기에 덜 중요하게 보이는 지체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목회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목회자가 홀로 동떨어져 고립된 채 살아가는 문화는 영적으로 건강하지도 않을 뿐더러 성경의 가르침에도 어긋난다. ---「5장」중에서
가장 위험한 일은 늘 거룩한 것과 접촉하며 살아가는 데 있다. 그게 왜 위험한 것일까? 하나님의 일에 익숙해지는 것이 경외심을 잃는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성경을 대하다 보면 광대한 지혜가 깃들어 있는 위대한 구원 이야기에 더 이상 감흥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오랫동안 속죄를 설명하다 보면 십자가 밑에 서 있어도 기쁨도 없고, 눈물도 나지 않는다.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제자훈련을 시키다 보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이 더 이상 놀랍지 않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너무 규칙적이고 일상적인 일이 되다 보니 더 이상 마음의 감동을 느낄 수가 없다. ---「8장」중에서
우리는 공인으로서의 삶과 개인으로서의 삶이 서로 충돌하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 따라서 이 상태에 익숙해질 수 있는 위험성이 항상 존재한다. 목회자의 마음속에서는 늘 온갖 우상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아 일종의 예배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치열한 영적 전쟁에 지친 수많은 목회자들이 이중적인 삶과 사역의 우상들에 스스로를 방치하고 있다. 이런 결과를 예방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뿐이다. 오직 은혜만이 줄 수 있는 삶을 살아갈 때 다른 곳에서 생명을 찾으려는 노력을 멈출 수 있다. ---「14장」중에서
2013-09-19 10:57:59 | 관리자
성경교리문답 소책자는 다음에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dodat&write_id=183
샬롬
2013-09-17 14:22:41 | 관리자
안녕하세요?
지난 3주에 걸쳐 성경 신자들이 믿는 교리를 요약/정리하였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 신자들의 교리 문답 01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478
성경 신자들의 교리 문답 02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480
성경 신자들의 교리 문답 03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pe&write_id=481
샬롬
2013-09-17 14:22:35 | 관리자
다시 수정해서 올렸습니다.
참조하기 바랍니다.
샬롬
2013-09-14 16:56:04 | 관리자
형제님의 글을 접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반갑습니다.
원문 해석에 어려움이 있는 분들께 분명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형제님의 좋은 글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2013-09-13 00:17:21 | 김대용
형제님 어떤 뜻일까 참 궁금했는데 이렇게 번역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샬롬
2013-09-13 00:04:03 | 주경선
글씨체가 너무 작아서 안보이시는 분은 한글 문서를 다운 받아서 보시는게 나을 듯 하네요.
아무쪼록 도움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2013-09-12 15:15:45 | 오광일
Replenish 설명
replenish (ed) - (7x) – 간단히 말해서 이 단어는 어떤 것을 처음 받은 수준대로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이 단어의 시작 부분에 있는 ‘re’는 ‘re’라는 접두어를 가진 대부분의 영어 단어들처럼 ‘다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단어의 뿌리는 중세 영어 ‘replenisshen’에서 나오고 이것은 중세 불어인 ‘repleniss’에서 나온다. 이 불어 단어는 ‘replenir’의 가지에서 나왔으며 단순히 “채우다; 사람이나 짐승으로 채우다; 저장하다”를 뜻한다. 이것은 어근 ‘re’와 ‘plenus’라는 단어를 합쳐서 만든 라틴어에서 나온 게 아니다.
예레미야 31장 25절에서 replenish는 ‘흡족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satiate’라는 단어와 평행 단어로 쓰였다. 이것은 히브리어의 반복 용례로서 ‘satiate’와 ‘replenish’가 같은 뜻임을 명백히 보여 준다.
내가 피곤한 혼을 흡족하게 하며 모든 슬퍼하는 혼을 채워 주었노라, 하시니라(렘31:25).For I have satiated the weary soul, and I have replenished every sorrowful soul.
한편 에스겔서 26장 2절에서는 ‘replenish’는 ‘피폐하게 되었다’라는 말과 대조를 이룬다. 이것 역시 두 단어의 대조를 보여 주는 히브리어의 용례이다.
이제 그녀가 피폐하게 되었은즉 내가 충만하게 되리로다, 하였도다(겔26;2). I shall be replenished, [now] she is laid waste:
창세기 1장 28절은 자원들을 사용해서 - 정복하고 복종시켜서 - 처음에 받은 수준으로 땅을 가득 채우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창조의 모든 부분이 그분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물 중 어떤 것도 멸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시19; 롬1). 1.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하시니라. 아담과 이브는 많은 아이의 출생을 통해서 스스로 번성해야만 하였다(하나님의 명령이었으니까). 그런데 땅의 경우 그들은 땅의 자원들을 사용하거나 복종시켜 처음에 하나님이 주신 상태로 땅을 가득 채워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동물과 식물의 수를 임의대로 창조하지 않으셨다. 모든 창조물은 하나님 자신을 반영하는 것이다(시19:1-4; 롬1:20). 어떤 생물 종을 없애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도록 하는 것을 -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창조하셨다는 증거를 - 없애는 것이다.
2. 창세기 9장 1절-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노아는 모든 동물과 식물의 종들을 지켜야 했다. 홍수 이후에는 많은 동물들이 이제 2마리만 남았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것이 쉽게 없어질 상황이었다. 그래서 노아는 어떤 종도 사라지지 않도록 채우고 지켜야 했다. 3. 이사야 2장 5-7절- 오 야곱의 집이여, 너희는 오라. 우리가 주의 빛 안에서 걷자.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백성 곧 야곱의 집을 버리셨나이다. 그들에게는 동쪽에서 온 것들이 가득하며 그들은 블레셋 사람들같이 점쟁이가 되고 낯선 자들의 자손들 가운데서 자신을 기쁘게 하나이다. 그들의 땅에는 또한 은과 금이 가득하여 그들의 보물은 끝이 없고 그들의 땅에는 또한 말이 가득하여 그들의 병거가 끝이 없으며
여기서 이사야는 야곱의 집을 불러 주의 빛 안에서 걸을 것을 촉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버리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에게서가 난 것이 아니라 동쪽에서 온 것들을 생계 유지 수단으로 받아들였고 낯선 자들의 자손들을 기뻐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 안에서 스스로 기뻐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공급하셨고, 히브리 사람들은 그것을 소비했으나 그들은 낯선 자들의 자손들에 의해 가득 채워졌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가 난 것이 아니라 낯선 자들로부터 난 것들을 가지고 이전처럼 동일한 수준으로 생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4. 이사야 23장 2절- 섬의 거주민들아, 너희는 잠잠할지어다. 바다를 넘나드는 시돈의 상인들이 너를 가득히 채웠도다.
섬의 거주민들은 그들이 매일 필요로 한 것을 시돈 상인들로부터 받음으로써 자신들의 생계를 매일 동일한 수준으로 유지하려 했다. 5. 예레미야 31장25절- 내가 피곤한 혼을 흡족하게 하며 모든 슬퍼하는 혼을 채워 주었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replenish는 ‘충분히 만족시키다’(satiate)와 평행을 이루는 단어로서 그 의미는 혼을 흡족하게 하여 한때 그 혼이 피곤하지 않았던 그 지점으로 완전히 되돌린다는 것(이전과 동일한 수준으로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 시편23편... 내 혼을 회복시키시며(restoreth) 6. 에스겔 26장 2절- 사람의 아들아, 두로가 예루살렘을 대적하며 말하기를, 아하, 백성들의 문이던 그녀가 부서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이제 그녀가 피폐하게 되었은 즉 내가 충만하게 되리로다, 하였도다.
여기서 ‘replenish’는 ‘피폐하게 되었다’(laid waste) - 완전히 텅 빈 상태 - 와 대조를 이룬다. 두로는 예루살렘에서 두로 지역으로 도망친 사람들을 통해 예루살렘의 부의 손실이 이제 자신의 것이 될 것을 자랑하고 있다. 즉 예루살렘의 손실은 두로의 이득이 되어 두로가 원래의 충만한 상태가 되었다. 에스겔 27장 25절- 다시스의 배들이 네 시장에서 너에 대하여 노래하였으며 너는 충만히 채워져서 바다들의 한 가운데서 심히 영화롭게 되었도다.
에스겔은 계속해서 두로에 대한 대언을 한다. 두로는 다시스의 배들을 통해서 자기들의 매일의 필요를 충분히 공급받고 있다고 선언한다.
결론 1) 사람은 스스로 수를 늘려 번성해야 했지만 땅의 식물과 동물들은 처음 받은 상태로 가득 채워야 했다. 이것은 신명기 22장 7절 말씀을 설명한다. 신22:7- 어미 새는 반드시 놓아주고 새끼를 취할지니 그리하면 네가 잘되고 네 날들을 길게 하리라. 만약 히브리 사람들이 어미와 새끼를 모두 죽였다면 그 종들은 곧 멸종했을 것이다.
2) 켄달(이 글의 저자, Dr. Bob Kendall)의 식품 저장 방의 예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내가 만든 예가 있다. 나는 3개월 동안 출장 갈 예정이어서 당신에게 우리 집에 와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사용하면 아주 편하게 지낼 것을 요청한다. 내가 식품 저장 방을 열자 거기에는 땅콩버터가 담긴 5개의 병이 있기에 즉시 물어본다. “땅콩버터가 왜 이리 많아요? 혹시 세일했나요? 어째서 당신은 5병이나 가지고 있나요?”
나는 대답합니다, “아니요, 그건 그냥 켄달 가족의 것이에요. 모두 다 켄달의 것이지요. 내 남동생들(Mr. Kendalls), 내 어머니(Mrs. Kendall), 사촌들(Mr and Mrs. Kendalls)은 식품 저장 방에 5개의 땅콩버터 병을 보관하고 있어요. 그것은 우리 가족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 심지어 땅콩버터를 다 먹어도 좋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만 내가 돌아왔을 때 5개의 땅콩버터 병이 있으면 좋겠어요. 식탁에 이전 수준으로 가득 채워서요. 그래야 내 식품 저장 방이 계속해서 켄달 네 집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입니다.” 3) 또 다른 예시만약 내가 당신을 불러 내 냉장고를 replenish 하라고 부탁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알아야만 할까요? 처음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만약 처음에 냉장고 안에 얼마만큼의 우유가 있었고 몇 개의 버터 조각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면 당신은 결코 냉장고를 replenish 할 수 없습니다. 4) ‘replenish’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아담과 이브가 창조되기 훨씬 이전에 원래 지구가 있었고 그 안에 동물과 식물이 살았다고 주장하는 이론 - ‘재창조 이론’ 혹은 ‘갭 이론’ - 이 잘못된 가르침임을 보여 줍니다. 백번 양보해서 이 가정(재창조이론)이 사실이라 해도 아담과 이브가 이전의 지구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모르는데 어떻게 땅을 다시 채울 수(re-fill)있겠습니까?
5) 간단히 말해서, ‘replenish’는 당신이 ‘어떤 것을 발견한 수준으로 그것을 충만히 채워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과 영어 사전의 용례가 이것을 지지합니다.
(*) 17세기 초 KJB가 기록된 때에 ‘replenish’라는 단어는 현대 사전의 용례처럼 ‘다시 채우다’의 의미로 결코 쓰이지 않았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31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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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2 15:14:31 | 오광일
안녕하세요?
창세기 1장 18절의 replenish를 '다시 채우다'로 오해하는 분들이 더러 있어서 켄달 박사님이 영어로 설명해 준 글을 올립니다.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나오는 replenish의 모든 구절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replenish (ed) - (7x) – simply defined this word means to keep something at the same level as it was received. The “re” beginning this word does not mean “again” as in most words with the “re” prefix. It’s root is from the Middle English replenisshen, [note the spelling] which is the same as the Middle French repleniss-, from the stem of replenir, which means to fill; to fill with persons or animals; to stock. It is not from the Latin word which is a combination of the prefix “re” and “plenus.” [note spelling] In Jer 31:25 replenish is paralleled to “satiate” which means also to fill completely. It is contrasted in Ezek 26:2 with “laid waste.” Gen 1:28 means to use the resources (subdue) and then “fill it back up” to its previous level. Don’t allow any of God’s creation to become extinct as every part of creation reveals God Himself (Ps 19; Rom 1)
Genesis 1:28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th upon the earth.
Adam and Eve were to multiply through the birth of many children. However, they were to use the resources of the earth (subdue) and then “fill it back up” to its previous level. God did not create an arbitrary number of each animal and plant. All of the creation is a reflection of God Himself (Ps 19:1-4, Rom 1:20). To erase a species is to take away a visible representation of the invisible God.
Genesis 9:1 And God blessed Noah and his sons, an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Noah was to keep all of the species of animals and plants. There were only 2 of many animals so it would have been very easy to eliminate a reflection of God’s glory. Noah was to make sure no species was erased.
Isaiah 2:5 O house of Jacob, come ye, and let us walk in the light of the LORD. 6 Therefore thou [God] hast forsaken thy people the house of Jacob, because they be replenished from the east, and are soothsayers like the Philistines, and they please themselves in the children of strangers. 7 Their land also is full of silver and gold, neither is there any end of their treasures; their land is also full of horses, neither is there any end of their chariots:
Isaiah calling the house of Jacob back to walk in the light of the LORD. God hast forsaken His people because they are receiving their restored sustenance, not from Him, but from the east; they please themselves in the children of strangers. They are not pleasing themselves in the LORD. God provided, the Hebrews consumed it, but were replenished by the children of strangers; they were kept at the same level of sustenance, not from God, but from strangers.
Isaiah 23:2 Be still, ye inhabitants of the isle; thou whom the merchants of Zidon, that pass over the sea, have replenished. The inhabitants of the isle are keeping their sustenance at the same level daily by receiving what they daily need from the merchants of Zidon.
Jeremiah 31:25 For I have satiated the weary soul, and I have replenished every sorrowful soul.
Here replenish is paralleled to “satiate” which means also to fill completely back to the point where the soul once was, not weary. Cf Psalm 23 “…restoreth my soul…”
Ezekiel 26:2 Son of man, because that Tyrus hath said against Jerusalem, Aha, she is broken that was the gates of the people: she is turned unto me: I shall be replenished, now she is laid waste:
Here replenish is contrasted in with “laid waste”, the complete state of emptiness. Tyrus is boasting that the loss of Jerusalem’s wealth will now be hers through those fleeing from Jerusalem to her. Jerusalem’s loss was Tyrus’ gain back to a full state.
Ezekiel 27:25 The ships of Tarshish did sing of thee in thy market: and thou wast replenished, and made very glorious in the midst of the seas.
Ezekiel continues his prophecy against Tyrus by proclaiming that Tyrus also kept here daily needs filled through the ships of Tarshish.
Conclusions
1) Man himself was to multiply, but he was to replenish the plants and animals. This explains Deut 22:7.
Deuteronomy 22:7 But thou shalt in any wise let the dam go, and take the young to thee; that it may be well with thee, and that thou mayest prolong thy days.
If the Hebrews killed both the dam and the young, the species would soon be extinct.
2) The illustration of the Kendall’s pantry
Here’s a silly made-up illustration. I am going to be gone for 3 months and I ask you to live in my house and “make yourself at home” using all that is there for yourself. When I open the pantry you cannot help but notice that we have 5 jars of peanut butter which prompts you to ask, “Was peanut butter on sale? Is that why you have 5 jars?” I reply, “No, it’s just a Kendall-thing. All of the Kendall’s—my brothers, my mother, cousins—we all keep 5 jars of peanut butter in our pantries. It’s a reflection of the Kendall’s.” So I tell you to eat everything you desire, even the peanut butter. But when I return please have 5 jars of peanut butter; replenish the cupboard. That way my pantry will continue to reflect the Kendall’s.
3) Another illustration If I called you and asked you to replenish my refrigerator, what would you have to know? What was in it in the first place. You cannot replenish if you did not know how many gallons of milk, how many sticks of butter, etc first were in the refrigerator.
4) This definition eliminates the false teaching that there was an early earth before Adam and Eve that had animals and plants upon it. Even if this assumption is true, how could Adam and Eve re-fill the earth if they first did not know what occupied that previous earth?
5) Simply stated, replenish means to keep something at the level you found it.
이 외에 다음 글들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31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229
2013-09-06 14:58:11 | 관리자
완전한 것이 킹제임스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나 보네요,
처음 듣는 일입니다.
새롭고 또 독특한 주장이네요.
다음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6_02&write_id=236
2013-08-28 15:22:49 | 관리자
안녕하세요?
게시판을 통해 질문하시는 분께 먼저 성경지킴이 상단의 구글 검색 등을 이용해 직접 찾아보실 것을 권면하는 이유는 결코 답변하는 것이 번거로워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직접 자료를 찾고 킹제임스 성경의 구절과 대조하며 성경을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키우시는 것이 모든 분께 훨씬 유익하기 때문임을 이해해 주십시오. 벧전3:19절에 대한 의문은 답변으로 제시해 주신 글들을 정독하시면 충분히 풀리시리라 생각합니다. 이 구절 등으로 해괴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 실례로 유명한 기독출판사 홍성사를 경영하는 모 목사도 있습니다. 이분은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 옆에 문화원을 개설하고 천주교의 사제와 수녀, 불교의 승려 등을 초청해 교인들 앞에서 강의하게 하는 등 각종 배교적 일들을 행하는 분입니다. 이런 분들이 교계의 유명한 지도자라 해서 그 주장을 따르거나 그것에 영향을 받아 마음이 흔들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때문에 자신에게 닥치는 영적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키우는 것은 타인(특히, 유명 목사와 신학자)의 권위에 무조건 종속되어 버리는 일에서 벗어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유명한 교계 지도자들의 주장이 항상 옳을 수 없고 더구나 요즘같이 배교가 일반화된 시대에는 많은 목사와 신학자들이 성경에 어긋나는 주장을 하기에 성도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고 바른 교리를 체계화 하는 것만이 올바른 믿음 안에 거하는 길입니다. 제아무리 으리으리한 교회 건물을 지어놓고 각양 다양한 시스템과 프로그램을 자랑하는 교회라도 새벽기도회나 은사주의 집회, 두날개, 관상기도, 알파코스 등을 행하는 교회들은 목회자에게 교인들을 종속시키고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원천차단하는 바르지 못한 교회입니다.
목사가 자신의 부족함까지도 솔직히 내보이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바른 교리를 가르치고 스스로 성경을 연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교회, 지역 교회의 잘된 점과 잘못된 점을 성경을 기준으로 능히 분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교회가 바른 교회란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실상 당대 최고 지성의 반열에 올라섰지만, 진리를 만난 후에 자신에게 이득이 되던 세상의 권위와 명성을 쓸모없는 배설물로 여긴 사도 바울의 담대한 믿음의 고백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참으로 확실히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뛰어나기 때문이라. 내가 그 분을 위하여 모든 것의 손실을 입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율법에서 난 내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난 의를 소유한 채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3:8~9)" 창조,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구원, 성경, 교회, 재림 등 기독교의 바탕을 이루는 핵심 교리들의 본질은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하고 명확한 내용들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간혹 자신을 성경 신자라고 분명하게 얘기했던 사람들 중 일부가 후에 스스로 고백한 믿음을 저버리고 성경 보존의 진리를 부인하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주로 뭘 좀 안다는 식자층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도 누군가에게 바르지 못한 교리와 주장을 주입 당했기 때문이지요. 그 누군가는 대부분 교계의 권위 있는 목회자나 신학자일 것입니다.
성경 보존의 진리를 비웃고 짓밟는 신학자들의 해묵은 주장은 무엇입니까? '개역이나 개정개역판 성경은 매우 훌륭한 성경이고 그것만으로도 바른 신앙생활 하는 것에 전혀 모자람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악한 열매를 거두는 사람들의 주장에서 참고할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지킴이에 있는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완전한 성경으로서의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증거들 대부분은 차근차근 공부하면 초등학생도 이해할 만한 내용입니다. 바른 믿음의 근간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명확하고 쉽고 단순한 것이지 복잡다단한 많은 설명과 현란한 신학적 지식이 동원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완전한 성경이라는 단순하고 명확한 믿음을 기뻐하다가 신학자들과 원어전문가들의 현란한 요설에 넘어가 고귀한 믿음을 져버린 분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벧전3:19절이나 다른 성경의 교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떤 교계의 지도자가 자신의 명성과 권위를 무기로 해괴한 주장을 펼치더라도 쉽게 흔들리지 말고 내가 평소에 배우고 믿었던 바르고 명확한 성경의 교리를 확고하게 붙잡고 그런 잘못된 주장들을 분별하고 걸러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바른 신학적 관점에서 스스로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습관을 키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질문하신 내용과 연결하여 평소에 생각하던 몇 가지를 덧붙여 보았습니다.
한 가지 질문의 답을 얻는 것도 유익이지만 더불어 근본적인 문제들을 생각하고 점검하는 것은 더 큰 유익이라 생각합니다. 읽으시는 분들께 조그만 유익이라도 전해지길 바랄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 안에서 네가 내게 들은 건전한 말씀들의 그 틀을 굳게 붙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네게 맡겨진 그 선한 것을 지키라.(딤후1:13~14)"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2:15)"
2013-08-23 17:24:22 | 관리자
참고로 저는 송인규 교수에 대해 라는 책을 통해 아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어느 분께서 이분의 성경관이나 믿음이 우리와 다르다고 하셔서 참고로 알려드립니다.
그러니 이분의 글은 각자 주의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샬롬
DSJ
2013-08-23 17:16:47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