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기상 28장에 보면 사울이 위급한 상황에서 엔돌의 영매를 찾아가 죽어 있는 사무엘을 불러오라고 이야기하고 그 영매는 사무엘을 불러옵니다(7-20절).
많은 이들이 이때에 올라온 사무엘은 가짜라고 이야기합니다.영매가 어떻게 죽은 사람을 불러올릴 수 있느냐는 생각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실로 모든 영매나 소위 ‘귀신 쫓는다는 목사’들이 불러올리는 처녀 귀신, 할아버지 귀신 등은 사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 거짓 영인 마귀들입니다.
그런데 마귀들이 진짜로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목소리를 내니까 이들은 자기들이 진짜로 죽은 사람을 불러올린 것으로 착각하게 되고 또 그것을 보는 이들도 그렇게 착각하게 됩니다. 죽은 사람과 목소리도 같고 말하는 게 같기 때문에 그 일에 관련된 모든 사람은 다 마귀들의 장난에 속아 넘어갑니다. 김기동 목사 등의 베뢰아 귀신들도 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속이고 있습니다. 매일 귀신/사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마귀의 종들입니다. 다락방이라는 데도 늘 마귀 이야기하만 하지요. 이런 단체가 사실은 마귀에게 속아 넘어간 단체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영매나 ‘마귀 들려 축사하는 목사’는 결코 죽어 있는 사람의 영/혼을 불러올 수 없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더러 특별한 일을 허용하십니다.
사무엘기상 28장에서는 분명히 사무엘이 올라왔습니다. 영매는 자기가 사무엘을 불러올린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이 일은 사실 하나님의 허용에 의해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매 자신도 놀라고 맙니다(12-13절). 사무엘기상 28장의 앞뒤 문맥 상 땅 속에서 올라온 이 존재가 사무엘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 존재는 분명히 땅속의 낙원에 있던 사무엘입니다. 그는 사울에게 모든 진실을 말하였고 그대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은 싸움터에서 죽어서 사무엘과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근거로 영매가 죽은 사람을 불러올릴 수 있다고 믿으면 안 됩니다. 이런 일은 성경에 단 한 번 나오는 예외적인 기적입니다.
민수기 22장 22-35절에는 나귀가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 역시 성경에 단 한 번 나오는 일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개나 고양이에게 말을 시키려 하면 안 됩니다. 이 일 역시 보편적인 하나님의 일과는 거리가 먼 특별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만 이런 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우리의 간구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어떤 단회적 사건을 가지고 보편적 해석을 하는 오류에 빠지면 안 됩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도 단회적 사건입니다. 지금 이 시간 또 다른 오순절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 한 번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행하신 사건이지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매일 매일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보편적 사건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다마스쿠스(다메섹) 도상의 회심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대개 보편적인 방법으로 섭리를 통해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단회적 특수 상황을 가지고 보편적 교리를 만들려고 하면 여기서 이단 교리나 잘못된 가르침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식과 이성과 논리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변치 않는 말씀의 틀 안에서 바르게 이런 것들을 사용하는 법을 늘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2;15).
다음도 참조하기 바랍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2007&page=
샬롬
2013-06-15 14:39:14 | 관리자
구약 시대 성도(의인)들의 거처는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땅속의 낙원에서 셋째 하늘의 낙원으로 옮겨졌습니다(엡4:7-10). 비록 이들 중 극소수가 예수님 부활 당시 사람들에게 증거가 되기 위해 부활하였으나(마27:51-53) 대부분은 부활하지 않은 채 처소만 옮겼습니다. 구약시대 성도들과 환난기 성도들은 7년 환난기가 끝난 뒤에 부활할 것입니다(욥19:1-27; 사26:16-21; 단12:13 등 참조). 그러므로 비록 그들의 거처가 지금 셋째 하늘의 낙원이라도 그들은 부활의 몸을 입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약 성도들이 부활의 몸을 입기 전에 구약 성도들이 부활의 몸을 입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9 이 사람들은[구약 성도들] 다 믿음을 통해 좋은 평판을 얻었으되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하였으니 40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신약 성도들] 위해 더 좋은 것을 마련하사 우리가 없이는 그들이 완전하게 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히11:39-40).
또한 신약 시대 성도들은 죽으면 곧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빌1:23; 고후5:8). 그런데 이곳을 낙원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물론 구약시대의 낙원이 이제는 옮겨져서 셋째 하늘에 있지만,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셋째 하늘에,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 성도들은 죽어서 예수님과 함께 [낙원이 아니라] 셋째 하늘에 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거기 있던 신약 시대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공중 강림하실 때에 거기로부터 그분과 함께 와서 부활한 몸과 연합할 것입니다(빌3:20-21). 빌3:20-21에서 사도 바울은 휴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장로 교인들은 신약 시대 성도가 죽으면 대피소에 있다가 나중에 주님을 만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대피소를 구체적으로 말하라고 하면 십자가 옆의 강도가 간 낙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바르게 나누지 못한 결과입니다. 우리는 대피소 같은 데 가지 않고 직통으로 셋째 하늘에 갑니다. 이것인 신약 시대 성도들의 더 나은(better) 특권입니다.
샬롬
2013-06-15 14:11:10 | 관리자
요즘 저희 교회 자매님들이 성경을 공부하면서 “사람이 죽어도 여전히 몸이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고 하여 간단히 답을 드립니다.
먼저 영/혼/몸에 대해서는 노영기 형제님이 잘 정리해 놓으셨으니 그 기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3315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실 때부터 영/혼/몸을 동시에 가진 3중적인 존재입니다.
이 말은 사람이 이 땅에 있든, 지옥에 있든, 천국에 있든, 부활하기 전이든, 부활한 후든 언제나 3중적인 존재라는 말입니다. 즉 언제 어디서든 몸이 없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그리고 아브라함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다 죽은 상태에 있습니다. 나사로와 아브라함은 지옥(지하세계)의 아브라함의 품이라 불리는 낙원에 있었습니다. 부자는 지옥(지하세계)의 불타는 뜨거운 부분에 있었습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의 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한 부류는 천국에, 한 부류는 지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모두가 다 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 입, 눈, 손, 발 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몸은 지상에서 그들이 쓰던 몸이 아닙니다. 그 몸들은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2000년 동안 땅속에 묻혀 썩어서 없어졌거나, 부자나 나사로처럼 그 당시 무덤 속에서 썩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다 부활할 때까지 어떤 형태의 중간 단계 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몸을 혼적인 몸(soulish body)라고 말합니다.
계시록 6장 9-11절을 보면 죽임당한 혼들이 나오는데 그 혼들 역시 말도 하고 옷도 입습니다. 몸이 없다면 이런 것들이 다 불가능합니다.
사무엘기상 2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를 통해 단 한 번 낙원에 있던 사무엘을 불러올리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 사무엘도 정상적인 몸을 가진 사람으로 나옵니다. 물론 그의 몸은 그 당시 그의 무덤에서 썩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께서 선인이든 악인이든 모두에게 잠정적인 중간 단계의 몸을 주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공중 강림하실 때에 우리의 몸을 부활시키실까요?
그 이유는 사람의 죄로 인해 이 땅에 들어오게 된 사망을 예수님 스스로 이기시고 또 모든 성도들도 그분의 피로 사망을 이겼음을 입증하시고자 함입니다. 중간 단계의 몸으로는 성도들이 사망 권세를 이긴 것을 입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땅에서 우리가 입고 있는 이 몸은 곡식의 알갱이입니다. 이 알갱이를 뿌린 뒤 이것이 죽어야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죽음을 이기고 되살아나서 하나님이 주기를 원하시는 고유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고전15:35-39).
이 영화로운 몸을 가져야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이 땅에서 먹기도 하고 마음대로 제약 없이 생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과 우주)에 영원히 살게 될 사람들을 통치하게 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땅에서 제약 없이 사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아마 중간 단계의 몸은 이런 면에서 부족함이 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 주 예수님처럼 순식간에 영화로운 몸을 입을 모든 성도들에게 부활의 큰 평강을 기원합니다.
샬롬
2013-06-14 18:47:39 | 관리자
우리는 벧전3:19-20을 통해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의해 노아 시대에 죄를 지은 영들(천사들과 거인들)에게 가셔서 자신의 승리와 그들의 패배를 선언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1214
그런데 곧바로 벧전4:6에 이와 비슷한 구절이 나와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벧전4:6에는 ‘죽어 있는 자들에게 복음이 선포되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 천주교를 포함해서 - 이 두 부분을 이용하여 사람이 죽은 뒤에도 복음을 들을 기회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명백한 말씀 즉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다,”는 히9:27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그러므로 죽은 뒤에 또 다시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벧전4장의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하셨은즉 그와 같이 너희도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라.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한 자는 이미 죄를 그쳤나니 2 그런즉 그는 자기 육체의 남은 때를 더 이상 사람들의 정욕대로 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리라. 3 우리가 색욕과 정욕과 과음과 환락과 연회와 가증한 우상 숭배 속에서 걸어 이방인들이 하고자 하는 바를 행한 것이 우리 삶의 지나간 때로 우리에게 족하도다. 4 이 점에서 그들이 너희가 자기들과 함께 달음질하여 그처럼 극한 방탕에 이르지 아니함을 이상히 여기며 너희를 비방하나 5 그들은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할 준비가 되신 분에게 회계 보고를 하리라. 6 이런 까닭에 죽어 있는 자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나니 이것은 그들이 육신으로는 사람들을 따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1-2절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정욕을 떠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함을 보여 줍니다. 3절은 과거의 우리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변하자 과거에 같이 지내던 불신 친구들은 우리를 이상하게 봅니다. 그것이 4절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주님께 모든 것을 낱낱이 회계 보고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 모든 것을 회계 보고해야 하므로 - 죽어 있는 자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여기의 ‘죽어 있는 자들’은 베드로 당시에 이미 죽어 있는 자들로서, 복음 선포를 받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도 살아 있을 때에는 5절이 이야기하듯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영으로는 살아서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아마 이것이 가장 명백한 해석이 되리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벧전4:6은 벧전3:19-20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문맥이 그렇게 말합니다.
샬롬
2013-06-08 15:47:09 | 관리자
요즘 저희 교회를 방문하시는 분들 가운데 안수 복음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느냐고 제게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50세가 넘도록 교회를 다녔어도 안수 복음이라는 말은 처음 듣기에 그게 무어냐고 물으니 네이버 등에서 찾아보면 된다고 해서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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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소식선교회(기소선) 박옥수 목사의 안수 복음의 정의
요한복음 1장 29절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개역성경)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안수 복음은 곧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세례 요한의 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원래 글에 세례라고 되어 있기에 일단 세례라고 썼지만 세례라는 말은 틀린 것입니다).
박옥수 목사의 책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 1, 영원한 속죄 편)에서 박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 세례를 베풀 때 머리에 안수를 합니까, 안 합니까? 합니다.
이 안수가 전 인류의 죄를 세례 요한이 대표해서 예수님께 넘기는 그 과정입니다.알겠습니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났지요?"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셨습니다.왜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머리에 안수하고 세례식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니까 모든 죄가 예수님께로 건너갔습니까, 안 건너갔습니까?」(1권 218쪽).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에게 안수했을 때,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 넘겨졌고, 예수님이 그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양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이었고요.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1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11:11)
세례 요한은 인간 중에서 가장 큰 자였습니다. 가장 큰 자란,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어른이며 대표자란 의미입니다((기쁜소식지 2001년 8월지. 김성훈)
여러분 모두 여자가 낳았지요. 여자도 여자가 낳았고, 남자도 여자가 낳았어요. 온 세상은 여자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인류의 대표자로 세워졌습니다. 세례 요한은 모든 인간 중에 제일 큰 자이고,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서 마지막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온 인류의 대표자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례 요한을 온 인류의 대표자로 세운 이유는 예수님에게 온 인류의 죄를 넘겨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해야 할 일과 예수님이 하셔야 할 일은 마태복음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 이 두 분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 보면, 하나님을 만나고 복 받는 거는 너무 쉬운 것입니다. 이 두 분이 잘 돼야 저나 여러분이 잘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갈릴리 요단강에서 많은 사람들이 회개의 세례를 받고 있는데, 예수님이 뚜벅뚜벅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세례를 베풀고 있었던 요한이 궁금해 하는데 예수님이 요단강에 세례를 베푸는 요한에게 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한아, 내가 이런 목적을 가지고 왔다.” 하고 이야기를 하시니까 세례 요한이 깨달았습니다. “아, 이분이 죄 사함을 이루기 위하여 준비된 그 예수님이시구나. 구원자시구나.” 그것을 세례 요한이 깨달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한테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세례라는 말은 안수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이 “야, 세례 요한아, 너 나한테 안수해.” 하니까 세례 요한이 깜짝 놀랐습니다.“어떻게 내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 안수를 합니까? 내가 받아야지.” 근데 예수님이 이야기를 해주니까 세례 요한이 깨달았습니다. “내가 진짜 교만한 사람이구나.”“네가 내게 안수해야 모든 의가 이루어진다.”는 말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안수를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을 봅시다.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이 이틀 전에 예수님에게 넘겨준 죄는 세상 죄입니다. 즉 이틀 전에 세례 요한의 안수를 통해 세상 죄가 예수님에게 넘어갔습니다.
세례 요한은 온 인류의 대표자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안수할 때 세례 요한의 죄만 넘어갔습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가 다 넘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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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침례자 요한이 인류의 대표라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2. 침례자 요한이 대제사장으로 예수님에게 안수를 주었다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3. 그 안수에 의해 세상의 모든 죄가 예수님에게 넘어갔다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4. 더욱이 예수님은 머리에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온 몬이 물속에 들어가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안수했다는 주장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5. 침례자 요한은 이스라엘에게 - 이방인들이 아니라 -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회개의 침례를 선포한 구약의 마지막 대언자입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하였으나 그분이 이스라엘에게 드러나야 하므로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주노라, 하니라(요1:31).
6. 세상의 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는 순간에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예수님에게 전가되어 심지어 그분 자신이 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7. 침례자 요한의 안수가 없었으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큰 오류입니다. 기소선의 안수 복음은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고 창조물인 사람을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개입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리는 사람의 혼을 구원하는 데 악한 영향을 미칩니다.
8. 침례자 요한이 안수함으로 모든 의를 이루었다는 것 역시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침례자 요한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한 회개의 침례를 승인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복음으로 즉 다른 복음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을 보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갈라디아서와 고린도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에 다른 복음을 가져오는 자가 있고 그런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강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너희를 부르신 분을 너희가 이렇게 속히 떠나 다른 복음으로 옮겨가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우리가 전에 말한 것 같이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너희가 받아들인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6, 8-9).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선포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선포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이나 너희가 수용하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 너희가 그를 잘 용납하는도다(고후11:4).
이런 복음을 듣고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니 그런 구원이 과연 성경적인지 궁금합니다.
기소선을 세운 대표 목사의 성경 해석이 이 정도면 나머지는 보지 않아도 다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한 사람이 성경 해석의 오류를 범하기 시작하면 한 가지로 끝나지 않고 그 사람의 신학 시스템 자체가 완전히 골병들어 고칠 수 없게 됨을 보여 줍니다. 즉, 오류는 오류를 지키기 위해 계속해서 오류를 생산해 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은 실로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죄악입니다.
사람의 혼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예수님이 홀로 하신 일입니다. 여기에는 절대로 만의 하나라도 사람의 행위가 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침례자 요한 같은 사람을 높이는 안수 복음은 영원히 하나님께 저주받을 ‘다른 복음’입니다.
아, 이런 것을 복음으로 알고 그것으로 인해 구원받았다고 하시는 분들을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마음이 아픕니다. 성도들이 성경을 탐구해야 이런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은 곧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들이니라(요5:39).
2013-06-07 14:41:30 | 관리자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남자와 결혼할까, 다른 사람과 할까?
이 직장으로 할까, 더 기다릴까?
무언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계시를 주실 줄로 생각하고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만을 바라는 분들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뜻을 알려주실까요?
"하나님이 이번에 인도하셨어요. 하나님의 인도를 구해야겠어요. 그분의 뜻을 알아보려고요.'
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것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동그라미 안에 찍혀 있는 자그마한 점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 가지가 가능한 거대한 강과도 같습니다.
그 가능성 안에서 선택할 수 있는 수백 혹은 수천 가지의 대안적 선택들이
다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빨간 색 글은 피터 블룸필드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인도>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http://itempage3.auction.co.kr/DetailView.aspx?ItemNo=A553518626&frm3=V2
성도님들은 이 책을 반드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필독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는 악순환에 들어가면
정상적인 믿음 생활이 불가능합니다.
믿음으로 하기 바랍니다.
이 책은 너무 좋은 내용을 좋은 예와 함께 잘 가르쳐 줍니다.
다음은 책의 내용 중 한 부분입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샬롬
맹목적 신앙이 문제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새로운 계시를 주신다고 주장할 때 일어나는 주된 문제는 주관주의의 문제다. 사람의 지각과 주관적 경험들은 증명할 수 가 없다. 우리 자신의 내적인 경험을 우리는 입증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그것을 반증할 수 없다. 내가 경험하는 것은 그냥 경험일 뿐이다. ‘내가 계시를 받았다’는 말이나 ‘내가 꿈을 꾸었다’는 말이나 다 거기서 거기다. 두 가지 모두 증명되지 않았고 증명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셨다고 누군가가 주장할 때 거기에는 신빙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왜 그 말을 믿어야 하는가? 객관적인 사실들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그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맹목적 신앙일 뿐이다.
참 선지자들의 경우, 하나님은 그들을 입증해 주기 위해서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심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셨다. 그러한 초자연적인 능력이 그 선지자들의 신분증이었다. 하나님이 그 위에다 인증 도장을 찍으셔서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음을 분명히 하셨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메시지를 듣고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하셨다. 모세의 기적, 사도들의 기적, 그리고 예수님의 기적은 그들이 전한 메시지를 믿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표적들이 이제는 멈추었다. 물론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위대한 일들을 하시지만, 그것은 성경적인 의미의 ‘표적’이 아니다. 기적을 행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계시 전달자임을 입증해 주는 것은 아니다. ‘기적’이라는 단어가 흔히 오용되는 현상에 우리는 반대해야 한다.
맹목적 신앙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잭과 질이라고 하는 두 교인들 사이에서 오가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한번 상상해 보자.
잭 : 지난밤에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어.
질 : 아니야, 그렇지 않아 잭. 계시는 성경이 완성되면서 멈추었어.
잭 : 내가 직접 들은 말도 모르겠어? 네가 지금 나한테 말한 것처럼 확실하게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니까.
질 : 잭, 네가 무언가를 경험하기는 한 것 같은데, 그건 잘못 해석한 거야.
잭 : 어떻게 네가 감히 나더러 틀렸다고 말할 수가 있어! 내가 안다니까! 나한테 일어난 일이라고! 어쩜 너는 그렇게 독단적일 수가 있니? 무슨 근거에서 내가 틀렸다고 말하는 건데?
질 : 올바른 성경적 가르침과 정통 기독교 신학에 근거해서야.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 목사님이 설교를 하신 적이 있어.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완전하게 다 말씀하셨다고 했어. 역사적인 증거도 보았고, 성경적인 증거, 그리고 신학적인 증거도 다 보았어. 참교회는 언제나 지속되는 계시를 부인해 왔대. 지속되는 계시는 영지주의자나, 몬타누스파나, 신비가들이나 퀘이커들 같은 분파나 이교들이 하는 전형적인 주장이야.
잭 : 그것 참 안 됐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분명히 내게 말씀하셨고, 나는 무슨 이교를 믿는 게 아니거든!
질 : 좋아, 그렇다면 개신교 신조들이 어떤 부분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지 나한테 설명해 봐! 그리고 목사님이 어느 부분에서 성경을 잘못 해석했는지도 보여줘 봐. 왜냐하면 핵심적인 본문들을 예로 들어서 나를 납득시키셨거든. 목사님의 강해를 하나하나 짚어볼 테니까 어디에서 틀렸는지를 말해 봐.
잭 : 그게 바로 너의 문제야, 질. 너는 너무 지적이야. 너는 너무 논리적인 게 탈이라니까. 기독교는 원래 그렇게 교리적으로 정확한 게 아니야. 너는 성경이 마치 모든 행동과 견해의 최종적 판단자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성경을 대해. 마치 칼처럼 그것을 휘두른 다구! 긴장을 좀 풀고 그 책에만 머리를 박고 있지 말고 성령의 인도에 마음을 열어봐. 내려놓고 하나님이 하시게 해! 하나님이 네게 새로운 계시를 말씀하시게 해드려! 성경과 정통 신학의 역사로 나를 판단하는 일은 이제 그만둬. 모든 위대한 신조들과 신학자들이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상관 안 해. 그건 그 사람들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니까. 내가 확실하게 아는 건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는 거야.
질 : 그러니까, 잭, 네 말은 너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이 틀렸다는 거니? 그거 좀 걱정되니 않니?
잭 : 내가 걱정되는 건, 질 네가 너무 객관적이어서 하나님의 영을 거절할 위험에 처해 있다는 거야. 너는 객관적이고 문법적인 성경적 사실을 너무 중요시한 나머지 ‘열려’ 있지가 않아. 네게는 신앙이 파고들 여지가 없어.
질 : 나는 하나님이 성경에 말씀하신 모든 것을 믿고 거기에서 제대로 추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믿어. 참된 신앙은 합리적이지 너처럼 맹목적이지가 않아. 잭, 너는 너의 감정과 경험이 네 신앙을 지배하게 하고 있어. 그렇기 때문에 네가 지속되는 계시 같은 걸 믿는 거야. 잭, 내가 보기에 너는 신비주의자 같아. 네가 이미 논리적 추론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기 때문에 나는 너를 설득 할 수가 없어. 가장 유능한 사상가와 저자들이 네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너는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 교회사에서 가장 학식 있는 종교 회의와 위원회가 네 견해가 틀렸다 해도 너는 그걸 대수롭게 여기지를 않아. 너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들여서 그들이 성경의 어느 부분을 잘못 해석했는지를 보여 주려고도 하지 않아. 너는 하나님이 너한테 개인적으로 말씀하셨다고 하는 확신 때문에 교만해져서 경건을 가장하는 거만한 태도로 식견 있는 교회를 깔보고 있어. 그들이 네 입장이라면, 하나님이 너한테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말씀하셨다면 이해할 거라는 생각으로 너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어. 너는 속으로 그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겠지.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짐작하다시피 대화는 이렇게 끝도 없이 계속된다. 하지만 모든 논쟁을 아주 빨리 끝내 줄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이 질에게는 있다.
잭 : 지난밤에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어.
질 : 나는 오늘 아침에 하나님께 계시를 받았는데, 네가 그 말을 할 거라고 하셨어. 하지만 네 말을 믿지 말라고 하셨어. 그런 적이 없다고.
불에는 불로 맞서라! 주관적인 허튼 소리는 더한 허튼 소리로 맞서라.
이제 잭은 자신이 촉발시킨 것과 비슷한 종류의 신비주의적 주장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질의 주장을 증명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다. 질은 잭이 자신에게 요구했던 것과 똑같은 ‘맹목적 신앙’의 반응을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만약에 잭이 질이 받은 ‘계시’를 믿지 않겠다고 한다면, 잭은 질에게도 그가 받은 ‘계시’를 부인 할 권리가 있음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한다.
2013-06-05 17:53:54 | 관리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학창시절 도덕책에서 본 기억이 있어 찾아 보니 있네요.
추억이 되 살아나 덧글을 달아 봅니다.
미국 청도교시절 시절,
사형선고를 받은 한 젊은이에게
형이 집행되는날이었어, 집행관이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느냐고 물었는데 사형수는
홀로 계신 어머니를 한 번만 뵙고 인사를 드리고 오면
안 되느냐고 간청을 했어, 집행관들도 그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지만 그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행여 도망가면
누가 그 책임을 지겠어,
그때 사형수 친구의 마지막 모습을
보려고 와 있던 고향 친구가 사형대 앞으로 나왔어,
이 친구가 돌아올 때까지 제가 사형대를 지키고 있겠습니다
집행관이 놀라서 물었어,
친구가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지 않으면 자네가 대신 사형을
당해야 한다. 그럴수 있나?
친구는 조금도 불안한 기색 없이 서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래서 친구가 돌아올 때까지 사형대를 지키게 되었다.
친구가 돌아오기로 약속한 시간이 다 돼 가고 있었어,
하지만 어머니를 보러간 친구는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야유를 보냈다." 바보 같은 놈"
형 집행 시간이 몇 분 남지 않자 집행관이 불쌍한 눈빛으로
그에게 말했어, 이젠 네가 대신 갈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느냐?
내 친구는 분명 올 것입니다. 무슨 사연이 있어서 늦는 것일
뿐입니다. 내가 죽은 뒤에 친구가 도착하면 꼭 이 말을
전해주십시오, 친구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갔다고 말입니다
드라마처럼 형 집행을 바로 눈앞에 두고 친구가 나타났어,
옷은 찢어지고 신발도 벗겨진 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기어오다 시피 도착했어,
사형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어,
어머니를 뵙고 돌아오는 길에 외나무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갑자기 소낙비가 와서 다리가 떠내려 가버렸다는 거야,
할 수 없이 물속에 뛰어들어 헤엄쳐 오느라고 시간이 오래걸렸대.
나 대신 목숨을 내줄 수 있는 친구가 당신에게는 있는가?
나를 대신해 사형대를 지켜줄 만큼은 아니어도 답답할 때
소통이 되고 만나기만 해도 힘이 되는 친구가
당신에게는 있는가?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기 까지...
2013-06-05 16:05:18 | 허광무
대신 죽은 윌리 리어(Willie Lear the Substitute)
위틀 소령(Major D. W. Whittle) 아무에게도 자기 친구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놓는 것,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노라(요한복음 15장 13절). 윌리 리어는 미국 미주리 주 팔미라라는 도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1862년에 그는 열여덟 살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때는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나는 때였고, 그는 그 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남부를 지지하였습니다. 북부의 세력은 팔미라 도시를 점령하고 그 구역을 지배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양쪽 세력 모두 끔찍한 폭동들을 행하였고 도덕적으로 용납 할 수 없는 일들이 역사에 수두룩이 기록되었습니다. 북군들은 총에 맞아 쓰러져 나가곤 했습니다. 또 집에서 쫓겨나 부당한 일을 당하곤 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을 복수하고 적들이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북부의 지휘관은 많은 시민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넣었습니다. 잡힌 시민들은 군법회의 재판에서 게릴라 부대라는 판결을 받고 총살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리어도 그중에 한 명이였습니다. 사형선고를 내린 뒤 장군은 총살형을 받은 사람 중 열 명을 뽑았고, 나머지 시민들은 폭동이 그친 후 사면이나 추후 형벌을 내리기로 했습니다. 즉시 사형 받을 이 열 명은 제비뽑기로 뽑혔는데 다행히 리어는 거기에 들지 많았습니다. 하지만 리어의 이웃은 즉시 총살형을 받을 무리의 한명으로 뽑혔고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몹시 괴로워하였습니다. 그 이웃은 대가족의 가난한 가장이었는데 사형된 뒤 두고 떠날 처자식들 걱정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 이웃의 상황을 지켜본 리어는 마음에 부담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리어는 자기가 그 이웃을 대신하겠다고 장교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장교는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열 명을 뽑으라는 명령이 내려졌기에 열 명이라는 조건만 맞으면 법률상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웃은 리어가 자기 대신 대리자가 되어 죽겠다는 제의를 너무 감사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삼 자 즉 사형 선고를 내린 자와 선고 받은 자 그리고 선고받은 사람을 대신하는 대리자가 동의함으로 이 상황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자신의 이웃 대신 사형장에 나선 리어는 사형 선고를 받은 나머지 아홉 명과 함께 “발사!” 라는 외침과 더불어 소총 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리어가 흘린 피, 그리고 찢기고 망가진 그의 몸을 안으며 리어가 대신 죽어 준 그 이웃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눈물을 흘리며 “나를 위해 생명을 바친 그 사람, 그 사람에게 내 생명을 빚졌구나. 나를 위해 이 엄청난 일을 해 준 그 사람에게 어떻게 감사함을 표현할까!” 라고 생각했을까요? 만약에 누군가가 “당신은 어떻게 당신에게 떨어진 사형을 모면하였나요?” 라고 그에게 물어본다면, 과연 그는 대신 죽겠다는 사람의 제의를 수용할 때에 자기가 행한 멋진 일들이 더 중요했다고 자랑하면서 그 사람이 행한 일을 무시하고자 했을까요? 또는 “아, 나는 나의 믿음과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의지로 인해서 살아남았어요. 이 모든 것이 믿음과 나의 인격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지요.” 라고 대답하고자 했을까요?
만약에 자기를 대신하여 죽은 그 대리자의 값진 희생을 생략한 채 대답을 한다면, 그는 대신 죽어 줄 가치도 없는 배은망덕한, 나쁜 사람일 것입니다. 또한 그 사건은 그의 가족과 이웃들에게 저주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웃은 결코 그런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한 친구의 희생을 그렇게 무심히 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친히 달리심으로 살려 주신 사람들 중에는 이런 식으로 무심히 그리스도를 대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 이웃은 리어가 자기를 위해 대신 죽은 것이 자기를 살렸다는 소식을 쉬지 않고 퍼뜨리는 것이 자신의 도리라고 받아들였습니다. 독자여,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들로 인해 대신 죽으신 것을 믿습니까? 그분께서 당신의 죄들로 인해 죽으셨고 당신이 회개하고 그분을 구원자로 받아들였으므로 당신의 모든 죄들이 용서된 것을 믿습니까? 그분을 믿으면서 당신은 그분을 시인하고 그분을 섬기는 삶을 삶으로써 그분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오, 그리스도의 소유인 우리는 그분의 피로 인한 구속의 이야기를 전하는 데 결코 싫증을 내서는 안 됩니다. 혹은 죄로부터 우리가 구원받은 것과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갖게 된 것이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기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다른 데서 그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함으로써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시요, 구속자이신 그분에게서 그분의 영광을 떼놓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이루신 ‘대신 속죄의 죽음’ 이외의 ‘다른 복음’ 혹은 ‘복음의 다른 형태’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데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복음을 전하는 자가 누구든지 상관없이, 어느 누구도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권능이 없이는 아무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십자가와 그분의 피 즉 ‘죄들의 사면을 위하여 그분께서 흘리신 피’의 의미를 선포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저와 여러분 같은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은 분’입니다.
22 그분께서는 죄를 짓지 아니하시고 입에 교활함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며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자신을 맡기시고 24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길 잃은 양 같았으나 지금은 너희 혼의 목자요 감독이신 분에게로 돌아왔느니라(벧전2:22-25). 나는 선한 목자니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느니라(요10:11).
Taken from Gospel tract distributed by Pilgrim Tract Society, Randleman, N.C.
By Major D.W. Whittle
초역: 정아현
2013-06-05 14:04:44 | 관리자
아침에 제 아내가 읽으라고 준 글입니다.
도전이 되는 말씀이라 같이 공유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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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미로에서 뒤틀린 목회자의 영성
(목회와 신학, 2004년 7월호)- 박영돈(고려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영성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 아마 목회자일 것이다. 그러나 참된 영성을 소유하기가 가장 힘든 사람 역시 목회자이다. 이것이 목회자가 처한 영적 딜레마이다.
최근 영성의 붐이 일어나면서 목회자의 영성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고 있다. 하지만 목회자의 영성이 안고 있는 근본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은 부족한 듯하다. 영성 추구에 있어서 목회자만이 갖는 어려움과 위기가 무엇인지를 바로 직시하고 올바로 대처하는 것이 참된 영성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일 것이다.
욕망의 위력
러브호텔이 전 국토의 구석구석에 창궐했다. 신도시에까지 무섭게 번져가면서 이를 저지하려는 시민들의 시위가 연이어진다. 그러나 이미 공권력으로도 제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소설가 김훈은 다음과 같이 예리한 분석을 하였다.
행정력뿐 아니라 군사력이나 경찰력을 동원해도 러브를 막을 수 없다
종교나 교육의 힘도 러브 앞에서는 무력해 보인다. ‘종말이 가까워 왔다’고 겁주어서 될 일도 아니다. 욕망에는 종말이 없고, 욕망에는 회개가 없다.” 이 말은 욕망의 걷잡을 수 없는 충동과 통제할 수 없는 마력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인간 안에 이보다 더 큰 활력은 없을 것이다.
플라톤에서부터 칸트와 헤겔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전통적인 인간 이해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이성적인 존재로 보았다. 인간은 이성으로 육신의 충동과 욕구를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낙관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렇게 이성적으로 자유롭고 고상한 존재인가?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그의 역작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서 인간은 이성보다 육적인 욕망에 의해 주관되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더욱 사실적인 인간 이해라고 분석했다. 니체나 프로이드 그리고 칼 마르크스의 사상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인간은 이성보다 그 저변에 도사리고 있는 권력에 대한 욕망, 성적 욕망, 물질에 대한 욕망에 의해 더 은밀히 자극되고 주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이성을 이 욕망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또는 합리화하는 방편으로 활용한다. 이성이 욕망의 시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시대의 교육도 권력과 물질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권력의 욕망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와 이념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 세속적 욕망이 가장 교묘하면서도 무섭게 위장되고 합리화될 수 있는 영역이 바로 종교이다. 성스러운 명분과 슬로건 아래 속된 욕망이 흉측스럽게 꿈틀거리는 모습을 감쪽같이 은폐할 수 있다. 사람들의 이기적인 욕망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은 채 종교로 겉포장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도 세속적인 성공주의와 은밀히 결합하여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평안, 세상에서의 형통함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가 되기 쉽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에 여실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축복 신학, 번영 신학, 성공주의 메시지가 이를 부추기는 동시에 합리화한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열심히 추구하는 성령운동은 영적인 에너지와 힘을 끌어당겨 이기적 자기실현의 원동력으로 삼으려는 욕망의 분출구 역할을 한다.
목회자의 세속적 야망이 교인들의 그런 욕심과 하나로 맞물려 대형화와 물량주의, 성장제일주의의 폐단을 불러왔다. 한국사회가 온통 물질과 권력과 쾌락의 욕망에 사로잡혀 휘청거리고 있는데, 세상을 헛된 욕심에서 해방시켜야 할 책무를 띤 교회마저 그 욕망의 광적 질주에 합세하고 있는 형국이 벌어지고 있다.
이 시대는 성속이 함께 뒤엉켜 품어내는 욕망의 열기로 가득한 정욕의 분화구와 같은 모습을 방불케 한다. 한국교회의 세속화 문제는 심층적 분석을 요한다. 한국교회의 부패는 교인들의 ‘욕망의 세속화’에서부터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특별히 목회자들이 성령의 소욕으로 교묘히 위장된 육신의 소욕 - 힘과 성공과 명예에 대한 욕망에 이끌려 성직을 수행하고 영적인 일을 해온 것이 한국교회의 신앙과 영성을 세속에 오염시켜 혼탁하게 하고 뒤틀리게 하는 근본 요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영적 명분으로 가려진 육적 욕망
욕심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하며 그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육적인 욕심은 영안을 멀게 하여 영적 분별력을 둔화시킨다. 그래서 신자가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수록 그 사실을 바르게 인식하기가 힘들어진다. 더욱이 육신의 욕망을 따라 거룩한 일을 하는 성직자의 경우에 있어서 이 사태는 훨씬 더 심각한 양상을 띤다. 육신의 간교함이 성스러운 명분으로 인해 보강되고 이중적으로 위장되면 그 ‘미혹의 힘’은 배가 되어 영적 분별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그래서 이기적 욕망을 따라 목회하는 이들이 자신의 영적인 진상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솔직하게 인정하기가 가장 힘들다. 그런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한다는 투철한 명분론에 빠져서 자신이 그런 줄로 착각하며 그러한 구호를 더욱 힘차게 외치곤 한다.
그러나 존 오웬(John Owen)이 지적했듯이, 육신의 세력은 “가장 잘 느끼지 못하는 곳에서 가장 강력하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안고 있는 영적 문제는 자신 안에 얼마나 육신이 강하게 역사하는지를 알지 못하는데서 비롯된다.
목회자는 힐라리(Hilary)가 말한 “하나님을 위한 불경건한 열심”, 즉 자기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신성 모독적인 열망”을 부단히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열심이 얼마나 자신의 영광과 명성과 성공에 대한 욕망에서 자극될 수 있는지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존 화이트(John White)는 사람들에게 영광과 찬양을 받고 싶은 갈망은 자신이 경배를 받고 싶은 마귀적 욕망이라고 했다. 사람들의 인기와 명성에 대한 욕망은 곧 자기숭배의 열망이라는 것이다. 목회자가 선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자기를 숭배하는 무서운 죄에 빠질 수 있는 매우 위태로운 곳이다.
목회자가 주의 일을 하면서도 은밀히 자신의 이름 내기, 업적 쌓기와 명성 얻기에 집착하게 될 때 이런 위험은 극대화 된다. 더욱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자기중심적인 문화는 목회자의 이런 이기적 야망을 부추기고 고조시킨다. 목회자마저 자기도 모르게 성공지향적인 경쟁사회의 논리와 가치관에 젖어 성장제일주의에 매몰되어가기 쉽다.
또한 교회 성장은 수적 증가라는 가시적인 증거로 나타나야한다는 인식이 교인들 안에 보편화되면서 목사는 보이지 않는 압력과 스트레스에 쫓기며 강박적으로 성장을 추구한다.
‘교인수가 목사의 계급장’이라는 자조적인 말까지 생길 정도로 대형교회를 이루는 것이 목회성공의 척도라는 은연중의 암시가 교계 안에 편만하게 되면서, 이것이 젊은 목회자들 안에 무서운 영향력으로 작용하여 ‘성공 마니아’를 배태하였다.
사무엘 리마(Samuel Rima)는 이렇게 자신의 경험을 토로한다.
나는 노골적으로 영적인 스타의 지위에 오르려고 노력하지는 않았지만, 잠재적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욕구가 내 모든 사역의 은밀한 동기가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완벽하게 정당한 것처럼 보였다…수년 동안 나의 사역의 노력은 미묘하게 나 자신의 개인적인 성공에 의해 운전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항상 천국의 언어로 그러한 의도를 위장했고, 나와 함께 사역한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비슷한 성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양적 팽창과 대형화를 위한 열심이 영적 명분으로 포장된 목회자들의 세속적 욕망에서 상당부분 자극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복음 전파라는 미명으로 섬긴 우상, 교회성장”이라는 손봉호 교수의 비판은 교회성장을 위한 과도한 열심 속에 감추어진 목회자들의 헛된 욕망을 간파한데서 나온 날카로운 지적이라고 하겠다.
헛된 욕망의 열매들
이러한 목회자의 육적인 욕망은 그의 인격과 영성, 그리고 모든 사역을 부패하게 한다. 목회자가 개인적인 야망에 이끌려 목회하고 있다는 분명한 사인 가운데 하나는 교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도구들로 은밀히 이용하려는 것이다.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그의 책 「나와 너」에서 사람들을 “너”아닌 “그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세상에 보편화된 인간관계임을 지적했는데, 목회자가 이런 세속적인 원리를 따라 교회를 운영함으로써 새로운 인간관계가 형성되어야 할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비인간적인 집단으로 변질시키는 데 주역을 담당하고 있다.
사람과 인격 중심의 목회가 아니라 일과 업적 중심의 목회로 치우친다. 이러한 위험에 대해서 찰스 스윈돌(Charles Swindoll)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의 동기를 감추고 교묘한 수법으로 교인들을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도록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감쪽같이 위장해 교인들이 그 일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 사실은 그들이 내 뜻을 행하여, 내가 영광을 받는데도 말이다.
육신을 따르는 목회자는 교인들의 에너지와 자원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세우고 그들의 신앙인격 성숙과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목회자의 성공적인 업적을 증진시키기 위한 목적을 위해 활용하도록 교묘히 유도한다. 그래서 불필요하게 거대한 건물 건축과 숫자 늘이기 전도와 프로그램 확장에 그 힘을 소진하게 한다.
또한 목회자의 이기적인 욕망은 목회자 자신의 인격과 기도와 영성에 매우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의 기도는 순수성을 잃어버린다. 겸손과 거룩함을 구하는 기도마저도 경건 자체보다 경건의 유익과 명성에 더 집착하는 육적인 마음에서 촉발된다.
야고보는 우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고 했는데(약 4:3), 육적인 목회자의 기도가 많은 경우에 이런 기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는 미명으로 치장된 ‘목회자의 은밀한 종교적 정욕’을 채우기 위한 방편이 되어 버린다. 하나님께서 때로 욕망에 사로잡힌 목회자의 이기적인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그의 기도를 기뻐하셔서가 아니라, 그가 섬기는 교인들과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목회자는 그것이 자신의 기도에 대한 응답인 줄 알고 거룩한 성령을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동력으로 이용하는 함정에 빠진다. 이런 욕망이 강할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는 기도가 더욱 간절해진다.
기도라는 욕망의 탱크로 천국을 침노하여 하나님 나라의 영적 보화들을 자신의 육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삼으려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은 육적인 목회자에게 매우 위험한 것이 될 수 있다.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가 부패한 인간의 육신을 섬기는 ‘색욕거리’로 변질된다.
육적인 소욕을 따르는 목회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은 목회자의 영성이 현저히 퇴화된다는 것이다. 육적인 욕망은 목회자를 영적으로 무력하게 하는 역기능을 발휘한다. 목회자를 지치고 탈진하게 하며 영적인 고갈상태에 빠지게 한다. 그는 외적으로 많은 것을 성취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내적으로는 공허하며, 말씀을 전하고 나서도 마음에 허탈함을 느끼게 된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죄에 대한 저항력은 약화되고 유혹에 대한 면역은 저하되어 특별히 자극적인 죄, 음란과 같은 죄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이기적 야망과 음란은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대개 욕심이 많고 이기적 야심이 클수록 음욕이 커진다. 육신의 소욕을 따라 목회하는 이는 결국 여러 가지 부도덕하고 음란한 죄에 연루되기 십상이다.
슈네이즈(Robert Schnase)가 지적했듯이, “목회사역에 있어서 목회자 자신들이 당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대다수의 비극은 목회자의 타락한 욕망에서 초래한 것들이다.”
참 자아를 잃은 목회자
또 다른 치명적인 결과는 목회자의 이기적인 욕망이 진정한 자아형성을 심각하게 저해한다는 점이다. 목회자가 육적소욕을 따라 사역하면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는데 사용되어야 할 모든 정신적인 힘과 영적인 에너지가 자기중심적 추구를 위해 소모된다. 그래서 외적으로 많은 것을 성취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세계는 황폐해진다. 목회자가 성령의 뜻을 거스르는 자아중심적인 뜻과 욕망을 좇을 때 그의 내면세계는 그 안에 계신 성령과 날카로운 긴장과 대립 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성령이 부여하는 풍성한 영적 생명력의 공급이 차단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아를 형성해 가는데 필요한 영적자원이 고갈된다.
자연히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성화는 진행되지 않고, 성령의 열매도 산출되지 않는다. 결국 목회의 은사는 있을지라도 인격의 열매는 없는 목사가 된다. 그래서 뛰어난 설교의 은사는 있지만 좋은 인격의 열매는 없는 목회자가 될 수 있다.
설교와 영성은 꼭 비례하지 않는다. 특별한 말씀의 은사를 가졌다고 해서 그 사람이 참된 영성을 소유했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설교의 은사가 남다르게 뛰어날수록 그 은사의 탁월함과 위력 때문에 더 고차원적으로 자신을 깊은 영성을 소유한 사람으로 가장할 수 있는 위험이 커진다.
물론 영성과 설교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깊은 영성에서 우러나온 말씀이 감동적이고 은혜롭다. 이렇게 영성과 설교는 함께 가는 것이 정상이지만 목회자의 죄성 때문에 이것이 괴리되는 변칙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목사의 진정한 영성의 증거는 우선적으로 설교의 은사가 아니라 인격의 열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인격만을 중시한 나머지 은사를 평가절하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목회자의 참된 영성을 위해서는 인격의 열매와 설교의 은사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영적 성숙과 성화의 진전은 은사와 열매의 상호작용과 연합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 목사가 설교의 은사를 성령의 소욕을 따라 겸손히 교인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사역을 위해 활용할 때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사랑의 인격자로 성숙한다.
반면에 설교의 은사를 육신의 소욕, 즉 이기적 야망을 따라 사용하면 그 은사는 영적성숙에 기여하는 성화론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열매로 귀결되지 못하는 은사로 전락한다. 결국 목회자의 육신적 욕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와 은혜가 자신의 인격개발과 자아성숙에 사용될 수 없게 한다.
육신적 목회자는 성화보다 사역과 업적성취를 위해 성령의 은혜를 더 열심히 구한다. 강단 위에서는 성령충만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강단 밑에서는 성령충만하기를 그렇게 원치 않는다. 그러나 목회자의 참된 영성은 강단 밑에서의 그의 모습에서 더 확실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이 은사와 열매, 사역과 성화가 조화롭게 통합되지 않으면 목회자의 진정한 자아 성숙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설교는 잘하지만 인격에 문제가 있고, 강단 위에서와 아래에서의 모습이 다른 이중적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목회자에게 가식의 무거운 짐이 가중된다.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모순된 모습을 최대한 감추고 자신을 좀 더 의로운 사람으로 보이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교인들이 기대하는 목회자 상에 자신을 맞추거나, 자신이 가장 되고자 하는 사람의 모습을 자아내려고 힘쓴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정한 인격과 욕망을 숨기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이려 하는 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고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리고 그가 애써 창출해낸 경건의 모습은 성령의 은혜로만 가능한 자율성과 창의성이 결여 되었기에 자연스럽지 못하고 경직되고 가식적이다.
목회자가 이런 가식에 익숙해져서 점차 자신의 외양을 실제로 착각하여 가면을 참 자아와 동일시하게 되면 진정한 자아를 상실할 위기에 봉착한다. 그의 열심과 헌신은 그 가면을 보강하여 참된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기 더욱 힘들게 하고, 이렇게 종교적인 가면으로 완고해진 자아는 깨어지기가 가장 힘들다.
진정한 자아를 찾아서
그러므로 목회자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내면세계를 깊이 살펴보는 자기성찰이 있어야 한다.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개혁주의 목사」에서 목회자의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임무는 자기성찰이라는 점을 역설하였다. 지금은 이 고전적 영성훈련의 부활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이다. 목회자들이 외적 성취에 너무 분주하여 자신의 내면세계를 돌아볼만한 여유가 없다. 자신 안에 깊은 마음의 동기와 욕망을 살피는 것을 소홀히 할 뿐 아니라 그것을 매우 꺼려하고 두려워한다.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꿈틀거리고 있는 흉한 “파충류”와 같은 더럽고 추한 욕망의 용솟음침을 예민하고 솔직하게 직시하는 고통스러운 자기성찰을 최대한 회피하려 한다. 그러나 사람은 대개 점검되지 않은 욕망에 의해 주관된다. 자신 안에 측량할 수 없이 간교하고 거짓된 육신의 소욕이 무섭게 역사하며, 이를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통절한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이 욕망의 희생물이 될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자신 안의 욕망의 움직임, 은밀한 동기의 복합성을 판독할 수 있는 예리한 영적 투시력을 갖는 것이 목회자의 영성 계발에 있어서 필수적인 일이다. 시편기자와 같이 “나를 살피소서”라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는 것이 참된 영성으로 나아가는 첩경이다.
자신의 영적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가, 무엇이 나를 어떤 일에 매진하도록 몰아가는가, 내 마음이 지속적으로 애착하며 지향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구할 때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왜 그 은혜를 구하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정규적으로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내가 이 일을 과연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있는가?”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 그리고 이 질문 앞에 자신을 항상 정직하게 돌아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목회자 안에는 항상 개인적인 야망과 주님을 위한 열망 사이에 날카로운 긴장이 존재하며,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사이에 맹렬한 싸움이 계속된다. 목회자의 심령이 가장 격렬한 영적 전쟁터일 것이다. 사탄이 지옥의 권세를 총동원하여 공격하며, 그의 탁월한 위장술로 목회자를 미혹해 자신의 욕망, 즉 육신의 소욕을 따라 주의 일을 하게 한다.
교회의 영적 성쇠는 이 싸움의 결과에 달려 있다. 목회자가 육신의 소욕에 굴복해서 마음의 순수성을 잃어버릴 때 교회의 타락과 세속화는 시작된다. 역으로 목회자가 육신을 쳐서 복종시킬 때 그의 영혼은 성령의 충만한 은혜의 통로가 되어 온 교회에 풍성한 생명력을 공급하게 된다.
그러므로 목사가 살면 교회가 죽고 목사가 죽으면 교회가 산다.
한국교회가 사는 길은
먼저 목회자들이 자신의 이기적 욕심,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욕망에 대해 죽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미명 하에 은밀히 간직하고 있는 우리의 우상들, 성공과 명예와 인기라는 우상들을 쳐부수는 것이다. 칼빈이 강조했듯이, 자기를 철저히 부인할 때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 목회자가 자아 중심성을 포기할 때 그의 자아는 내면세계에 거하시는 성령께 다시 사로잡힘으로써 좁은 자아의 굴레에서 벗어나 더 큰 자아, 하나님께 지배받는 새로운 자아로 거듭난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거짓된 외면을 계속 지탱하기 위해 허비했던 영적 에너지를 성령 안에서 참된 자아의 성숙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욕망으로의 초대
이기적 욕망을 제어한다는 것은 결코 욕망 자체를 아예 죽이거나 그것을 최소한도로 억제해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기적 욕심이 많은 것뿐 아니라 욕망이 없거나 적은 것도 영성의 무서운 적이다. 이기적 동기부여가 없으면 도무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자극되지 않는 영적 냉담함과 나태는 거짓된 육신의 또 다른 얼굴이다. 육신적인 목회자는 자신에게 크게 성공할 만한 잠재력과 은사가 없거나 그럴만한 현실적 가능성이 희박하면 성공에 대한 열망을 잃어버리고 현 상태에 안주하려는 무사안일주의에 빠진다.
뛰어난 설교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그것을 잘 개발하여 성공과 명성을 얻으려는 이기적인 야망에 사로잡힐 확률이 높은 반면, 설교의 은사가 그다지 탁월하지 못한 이들은 그런 야망이 없는 대신 말씀사역에 성의와 열정 없이 임하는 적당주의로 치우치기 쉽다. 이와 같이 육신적인 욕망으로 주의 일을 하는 이들뿐만 아니라 열정을 의무감으로 죽이고 직업적 타성에 젖어 안일하게 목회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 한국교회의 큰 문제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육적인 욕망을 비운 마음의 공백을 새로운 욕망, 더 강하고 고귀한 욕망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 기독교는 결코 욕망을 죽이는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욕망으로 초대하며, 우리 안에 새로운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기독교는 성공을 위한 욕망과 훌륭한 업적을 이루려는 열심 자체를 본질적으로 죄악시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것을 성취하려는 열망을 우리 안에 심어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원대한 꿈과 포부와 비전을 갖게 하신다.
성령이 우리를 갱신하는 사역은 먼저 우리 마음의 깊은 욕망을 변화시킨다. 성령은 우리 마음의 근본적 지향성, 추구, 애착이 획기적으로 전환되게 하신다. 육신의 일에 집착하고 몰두했던 생각이 성령의 일에 집중되고 이끌리게 하신다. 우리 안에 육신의 소욕을 죽이고 성령의 소욕을 소생시키신다. 이기적인 욕망은 소멸되고 거룩한 열망이 타오르게 하신다. 이런 거룩한 욕망이 없이 성화가 이루어 질 수 없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가 “마음의 성결은 오직 한 가지만을 원하는 것”이라고 했듯이, 하나님에 대한 거룩함은 우리의 욕망이 오직 하나의 대상을 향해서만 온전히 집중될 때 가능하다. 우리에게 영적 성숙이 없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두 방향으로 나누이기 때문이다. 하우어와스(Stanley Hauerwas)는 이렇게 분열되어 통합된 욕망의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마음이 다시 하나로 모아져 하나님의 뜻만을 “전심”으로 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진정한 영적 자유함이며, 이러한 자유함 속에서만 성화와 인격의 성숙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거룩한 욕망이 참된 영성의 핵심이다. 이 욕망이 영성의 질을 결정하며, 그 강도가 영성의 깊이를 말해준다. 이런 욕망 없이 성령을 따라 살 수 없으며 성령으로 충만할 수 없다. 또한 이런 욕망 없이는 진정한 기도도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위해 어떤 위대한 일도 성취할 수 없다. 교회사에 길이 빛날 신앙의 본과 자취를 남긴 주의 종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한 불타는 야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 욕망을 죽이는 것은 영적 자살행위이며 영적인 거장이 되게 하는 원동력을 말살해 버리는 것이다. 이 욕망 없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있을 수 없다. 죄에 대한 사랑이 그에 대한 욕망으로 표현되듯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욕망으로 나타난다.
이 시대의 목회자들이 진정한 영성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욕망은 주님께 최상의 존귀함과 영광이 돌아가게 하기 위해 나의 최선을(My Utmost for His Highest)다하려는 열정이며, 주님을 본받아 최대한 성결하게 살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거룩함에 대한 열망이다.
그리고 이 땅위에서 성공한 목회자로 알려지기보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고 자신은 잊혀 질 때 행복해하는 주의 종이 되기를 전심으로 원하는 것이다.
원본 글은 다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m.cafe.daum.net/howsarang/8Xq5/4062?boardType=M®dt=20130604115719&listURI=%2Fhowsarang%2F_rec%3FboardType%3DM
2013-06-05 11:15:43 | 관리자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 관한 66가지 사실
1. 잃어버린 자(that which was lost)[눅19:10]2. 길 잃은 양(sheep going astray)[벧전2:25]3. 세상에서 하나님이 없는 자(without God in the world)[엡2:12]4. 멀리 떨어져 있는 자(who were far off)[엡2:13,17; 골1:21]5. 그리스도 밖에 있음(ye were without Christ)[엡2:12]6. 하나님의 백성이 아님(were not a people of God)[벧전2:10]7. 이스라엘 공영권 밖에 있는 외인(being aliens from the commonwealth of Israel)[엡2:12]8. 육체로는 이방인(Gentiles in the flesh)[엡2:11]9. 무할례자(Uncircumcision)[엡2:11]10.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낯선 자(strangers from the covenants of promise)[엡2:12]11. 하나님의 왕국에 대하여는 외국인(foreigners)[엡2:19]12. 나면서부터 길을 잃고 거짓을 말함(they go astray as soon as they be born, speaking lies)[시58:3]13. 마음에서 생각하여 상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임(every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his heart was only evil continually)[창6:5]14. 그의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심히 사악함(The heart is deceitful above all things, and desperately wicked.)[렘17:9]15. 마음속에서 악을 행하기로 완전히 작정되어 있음(the heart of the sons of men is fully set in them to do evil)[전8:11]16. 불순종함(disobedient)[딛3:3]17. 이 세상의 행로를 따라 걸음(ye walked according to the course of this world)[엡2:2]18. 이방인들의 뜻을 따라 행함(have wrought the will of the Gentiles)[벧전 4:3]19. 육신의 생각과 욕망을 성취함(fulfilling the desires of the flesh and of the mind)[엡2:3]20. 정욕과 향락을 섬김(serving divers lusts and pleasures)[딛3:3]21. 색욕과 정욕과 과음과 환락과 연회와 가증한 우상숭배 가운데 살고 있음(walked in lasciviousness, lusts, excess of wine, revellings, banquetings, and abominable idolatries)[벧전4:3]22. 악의와 시기 속에 살고 있음(living in malice and envy)[딛3:3]23. 증오에 가득 차서 서로 미워하고 있음(hateful, and hating one another)[딛3:3]24.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함(men loved darkness rather than light)[요3:19]25. 사실 그 자신이 ‘어두움’임(darkness)[엡5:8]26.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마귀)를 따름(according to the prince of the power of the air)[엡2:2]27. 이 세상의 신이 그들의 마음을 가려서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도록 하고 있음(the god of this world hath blinded the minds of them which believe not, lest the light of the glorious gospel of Christ, who is the image of God, should shine unto them)[고후4:4]28. 속임을 당함(deceived)[딛3:3]29. 십자가를 선포함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임(the preaching of the cross is to them that perish foolishness.)[고전1:18]30. 어리석음(foolish)[딛3:3]31.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듦(he that believeth not God hath made him a liar)[요일5:10]32. 본성에 속한 사람(the natural man))[고전2:14]33.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are of the works of the law)[갈3:10]34. 그의 모든 의는 더러운 걸레와 같음(all our righteousnesses are as filthy rags)[사64:6]35.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거하지 않음(ye have not his word abiding in you)[요5:38]36.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지 아니함(he receiveth not the things of the Spirit of God)[고전2:14]37. 그의 생각은 하나님을 대적함(the carnal mind is enmity against God)[롬8:7]38.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음(they that are in the flesh cannot please God)[롬8:8]39.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come short of the glory of God)[롬3:23]40.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음(the wrath of God abides on him)[요3:36]41.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음(like the chaff which the wind driveth away)[시1:4]42. 사악한 행위들로 인해 마음에서 (하나님과) 원수가 된 자(enemies in your mind by wicked works)[골:21; 롬5:10]43. 정죄를 받을 것임(he that believeth not shall be damned)[막16:16]44. 사실 그는 이미 정죄 받음(he that believeth not is condemned already)[요3:17-18]45. 저주받은 자(under the curse)[갈3:10]46. 멸망하는 자(them that perish)[고전1:18]47. 마귀의 자녀(the children of the devil)[요일3:10]48. 진노의 자녀(were by nature the children of wrath)[엡2:3]49. 진노의 그릇(the vessels of wrath)[롬9:22]50.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얻지 못함(had not obtained mercy)[벧전2:10]51. 자기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임(ye shall die in your sins)[요8:24]52. 그는 허물과 죄들 가운데 이미 죽어 있음(who were dead in trespasses and sins)[엡2:1]53. 이름이 생명책에 없음(whosoever was not found written in the book of life)[계20:15]54. 생명을 보지 못할 것임(he shall not see life)[요3:36]55. 불 호수에 던져질 것임(cast into the lake of fire)[계20:15]56. 세상에서 아무 소망이 없는 자(having no hope)[엡2:12]
그러나…
57.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심(God so loved the world)[요3:16; 롬5:8]58.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구원자를 준비하셨음(he gave his only begotten Son)[요일2:2]59. 그의 죄는 용서될 수 있음(through his name whosoever believeth in him shall receive remission of sins)[엡1:7; 행10:43]60. 그러나 그는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음(not of works)[엡2:9]61. 그는 오직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by grace are ye saved through faith)[엡2:8]62. 그는 믿지 않는 분을 부를 수 없음(how then shall they call on him in whom they have not believed?)[롬10:14]63. 그는 듣지 못한 분을 믿을 수 없음(how shall they believe in him of whom they have not heard?)[롬10:14]64. 그는 진리의 말씀을 듣기 전에는 예수님을 신뢰할 수 없음(In whom ye also trusted, after that ye heard the word of truth, the gospel of your salvation)[엡1:13]65. 그는 예수님을 자기의 구원자로 믿기 전까지는 다시 태어날 수 없음(whosoever believeth that Jesus is the Christ is born of God)[요일5:1]66. 이 죄인들의 이름은 ‘누구든지’임(whosoever)[요3:16, 행10:43]
2013-06-04 18:16:37 | 관리자
복음의 핵심
구원론을 가르치면서 매년 저는 학생들이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질문을 던집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상상해 보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 죽음의 문턱에 놓여 있는 불신자를 방문하기 위해 병원에 와 있습니다. 당신은 그 사람에게 단 스물다섯 단어를 말해서 복음을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는 시간이 없습니다. 스물다섯째 단어가 끝나면 그 환자는 죽게 됩니다.
당신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복음을 설명할 것입니까?
과연 학생들은 이처럼 복음을 간결하게 표현함으로써 숨이 끊어져가는 그 사람이 올바로 반응하기만 한다면 구원받게 할 수 있을까요? 과연 학생들은 복음을 완전히 이해해서 그렇게 짧은 몇 마디 안에 구원의 메시지를 담을 수 있을까요?
이제 우리도 학생들이 풀어야 했던 그 문제로 돌아가서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창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막16:15).
그렇다면 이제 다음의 세 가지 사항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첫째, 복음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둘째, 복음은 무엇인가? 셋째, 우리가 어떻게 그 복음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가?
1. 복음이 아닌 것들
1. 세계교회협의회(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WCC)는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열린 제5차 회의에서 “복음은 언제나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투쟁에 참여할 책임을 포함하며 인간의 전체성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고발할 의무를 포함한다.” 라고 선언하였습니다(「Christianity Today」, 1972년 1월 2일, p.12). 과연 이것이 복음입니까?
수년 전 복음전도자인 포드(Leighton Ford)는 아이오와 주의 데모인에서 전도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는 청중들에게 ‘두 발의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라고 소개되었습니다. 그런데 포드가 전하는 복음은 WCC의 입장과 흡사한 것으로, 복음은 개인의 구원 뿐 아니라 사회의 구원도 포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복음입니까?
2. 미국의 수정 교회를 담당하던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수치에서 영광으로, 자기 회의와 자기 정죄로부터 자기 확신과 자기 긍정으로 나가는 구원 메시지로 선포되어야 한다.” 라고 역설하였습니다. 슐러는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기 존중의 신학으로 선포될 수 있다.” 라고 주장합니다(「자기 존중: 새로운 종교개혁」(Self-Esteem: The New Reformation) p.161, 47). 과연 이것이 복음입니까?
3. 캘리포니아의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를 담당하는 존 맥아더(John MacArthur) 목사는 자신의 논쟁적인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갈보리로 초청하는 것은 그것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대로 인지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 되신다’(Lordship)는 전제 하에서 제자가 되도록 초청하는 것이다(p.21)…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복음은 제자의 길을 가야 한다는 부르심이었다(p.21)…구원을 가져다주는 믿음의 본질은 자아를 철저히 포기하는 것과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p.153)”(「예수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Jesus)). 과연 이것이 복음입니까?
2. 복음은 무엇인가?
‘복음’(Gospel)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유앙겔리온’(Euangelion)은 ‘좋은 소식’(good news)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무엇에 관한 좋은 소식인가?” 라는 물음이 뒤따릅니다. 신약성경은 복음이라는 용어를 몇 가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1. 복음은 사람들에 관한 좋은 소식일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6절에서 바울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의 흔들림 없는 믿음에 대한 ‘좋은 소식’ 즉 글자 그대로 ‘가스펠’(gospel)을 가져왔다고 적고 있습니다.
2. 신약성경은 더 나아가서 ‘왕국의 복음’(Gospel of the kingdom)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주로 ‘왕국의 복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마3:1-2; 4:17; 10:5-7 등). 이것은 메시아가 유대 땅에 오셔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자신의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좋은 소식’입니다.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이스라엘 민족은 하늘로부터 땅에 임하는 그 왕국에 대한 그분의 참된 제안을 공적으로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왕국의 복음은 천년왕국 곧 다윗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의 7년 환난기에 다시 한 번 온 세상에 선포될 것입니다(마24:14).
3.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의 셋째 용례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Gospel of the grace of God)입니다(행20:24). 이 복음은 서신서들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으며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4절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습니다.
내가 또한 받은 것을 무엇보다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그것은 곧 성경 기록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성경 기록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시고
바울이 선포한 복음 즉 모든 신자들이 선포해야 할 복음은 무엇입니까? 어느 저자가 간결하게 표현했듯이 ‘좋은 소식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해 죽으셨다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복음전도: 성경적 접근」(Evangelism: A Biblical Approach), Cocoris, p.60).
라이리(C. Ryrie)는 고린도전서 15장 3-4절에 나오는 복음의 요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유익한 분석을 했습니다. 복음이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좋은 소식이다. 그분께서 죽으셨고 그분께서 살아나셨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내용이다. 그리스도께서 묻힌 사실은 그분의 죽음이 사실임을 입증한다…그분께서는 실제로 죽으셨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들로 인해서 죽으셨다…부활의 증인들의 목록은 그분의 부활의 사실성을 입증한다(「이토록 큰 구원」(So Great Salvation) p.39).
그렇다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좋은 소식’ 즉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그분께서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며 이 복음에서 그분께서는 죄인들에게 영생의 선물을 제안하십니다. 죄인은 단순히 이 복음을 듣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행16:31). 그러면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과 그것에 속한 모든 복을 값없이 허락해 주십니다(엡1:3).
3. 어떻게 복음을 소개할 것인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핵심은 복음입니다. 죄인의 구원에 있어서 복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WCC나 포드(Leighton Ford)처럼 복음을 ‘죄인을 대속하는 구원의 복음’과 ‘사회를 개혁하는 사회복음’으로 나눠서는 안 됩니다. 또한 슐러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을 요구하는 인간의 죄에 대한 개념을 복음으로부터 제거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맥아더처럼 구원과 성화를 혼동하고 ‘그리스도께서 주님이 되신다’(Lordship of Christ)는 사실에 절대 복종하는 것을 구원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이제 제가 학생들에게 제시했던 신학적 물음으로 다시 한번 돌아가 봅시다. 이 질문은 원래 라이리 박사의 신학 과목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똑똑한 몇몇 학생들은 보통 이 물음의 대답으로 스물다섯 단어로 표현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인용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대답에는 점수를 줄 수가 없습니다. 학생들에게 주어진 질문은 자신의 말로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학생들은 보통 다음과 같은 답을 제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당신이 그분을 당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면 그분께서 당신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대답은 좋은 대답이긴 하지만 썩 훌륭한 대답은 아닙니다. 이 대답에서 부족한 것은 명확한 복음 제시에 필요한 요소들 중 첫째 요소입니다.
완전하면서도 간결하게 복음을 제시하려면 다음의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사람의 문제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예비이며 셋째는 개인의 구원 획득입니다. 첫째로, 사람의 문제에 대한 자각이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자신이 길을 잃고 헤매며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돌이켜야 합니다.
둘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예비하신 것에 대해 들어야 합니다. ‘나쁜 소식’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사람은 잃어버려진 상태에 있고 자기 자신의 공로나 행위로는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죄들로 인한 형벌을 자기 위에 몸소 짊어진 ‘죄인들의 대속 헌물’이십니다. 여기서 대속(代贖)이란 대신 속죄를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개인적으로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음을 맛보셨음을 아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히2:9). 하지만 그 구원자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은 결코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구원받을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죄인은 개인적으로 이 구원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모든 사람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각 사람은 모두에게 값없이 제시된 구원의 선물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복음 제시에 필요한 이 세 가지 기본 요소에 비추어서 학생들의 답안지를 분석한 후에 저는 ‘사람의 문제’와 ‘하나님의 예비’와 ‘개인적인 획득’을 모두 포함시키면서 어떻게 스물다섯 단어로 복음을 제시할 수 있는지 학생들에게 보여 줍니다.
친구여, 당신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오직 그분만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을 영원히 구원하실 것입니다. 지금 그분을 신뢰하기 바랍니다.Friend: You have sinned. But Christ died for sinners and rose again. Trust Him alone and He will save you eternally. Do it now!
간략하지만 이것은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복음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제시할 때 마땅히 포함해야 할 내용과 초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죄인은 왜 구원받아야 하는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진정 복음을 알고 있습니까?
명확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복음을 제시하기 위해 신학 교육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앤더슨 경(Sir Robert Anderson)은 복음의 증언자가 되려는 사람들의 자격 요건에 대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고 복음 사역을 맡기시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바는 그들이 세련되고 잘 교육받은 신사들이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천박하거나 무식한 촌뜨기이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들이 신학 교리에 능통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교리에 무지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재기 넘치는 사람이거나 웅변에 뛰어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예 소질이 없거나 지루하고 따분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분께서 찾는 사람은 단지 그리스도의 권능을 담을 수 있는 적당한 도구 곧 그분께서 값으로 측량할 수 없는 자신의 보화를 채워 넣을 수 있는 빈 질그릇이다(「복음과 복음사역」(The Gosple and Its Ministry), p.6-7).
우리의 책임은 모든 창조물에게 구원자를 알려주고 죄들의 용서와 평화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일을 할 수 있고 또 이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 일을 날마다 더욱 열심히 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명령에 신실하게 반응할 때 우리는 구원을 선포하는 일에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권능을 부어주실 것과 전능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그 일을 형통하게 하실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13-06-03 15:27:16 | 관리자
성경에 있는 단순하고 명확한 진리에 무엇이 부족해서 칼빈의 독선적 가르침을 따른단 말입니까?
신학을 10년이 넘게 공부하며 바다를 건너가 박사과정까지 마치고도 이 위대한 편집광이자
천재적 이론가에게 진리를 양보한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허다합니다. 위의 글을 읽고
그 집요한 가르침의 족쇄를 풀고 나오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늘어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광명한 태양처럼 빛나는 진리가 담긴 귀한 글을 이 아침에 만나게 해 주심에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3-05-28 08:15:35 | 김대용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하나님은 단 한명만이 하나님을 섬기게 될지라도 국가에서 종교를 강요하는 것을 원치 않으실겁니다. 그래서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가 보장이 되어야 합니다.
2013-05-27 22:58:28 | 길준남
다음의 글은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http://www.keepbible.com/Pds1-5/View/3oZ?stype=snc&keyword=%EB%8B%A4%EB%A5%B8%20%EC%9D%98%EA%B2%AC%EC%9D%84%20%EA%B0%80%EC%A7%88%20%EA%B6%8C%EB%A6%AC
중세 카톨릭 교회의 독재를 벗어나고자 했던 제네바 사람들은 칼빈이라는, 천주교 교황보다 더 완고하고 무서운 사람의 독재 아래서 신음하고 죽어가야 했습니다. 칼빈은 이 모든 흉악한 일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시행하였으며 이런 신정국가 독재주의의 근본 원리를 <기독교 강요>라는 책에 고스란히 담아 놓았습니다.
다음은 <기독교 강요>의 일부입니다.
“교회의 설교자들이 가져야 할 권한을 여기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관리하고 알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든 일을 감행할 권한이 있고, 이 세계의 위인이나 모든 권력자를 강요하여 하나님의 권위 앞에 머리 숙여 자기에게 봉사하도록 만들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명령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법령을 세울 수 있고, 사탄의 왕국을 쳐부술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양들을 보살피고 늑대를 절멸시켜야 하며, 복종하는 자들을 격려하고 가르치고, 반항하는 자들을 고소하고 절멸시킬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결합할 수도 해체할 수도 있으며, 번개와 천둥을 내리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과거에 제네바에서 일어난 일들이 지금 이 시간 한국의 교회들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목사의 말 한마디에 벌벌 떠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심지어 국내외에서 킹제임스 성경을 쓰는 교회에서도 칼빈과 같은 독재자가 종종 생깁니다. 이런 목사들은 모두 성도들을 위해 그들의 자유를 억압할 수밖에 없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영혼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라면 교회에서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킹제임스 성경이 옳고 우리의 교리가 옳아도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을 욕하고 감옥에 집어넣고 죽이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합당치 않습니다. 예수님도 그리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런 일을 미워하셨습니다.
목사들이 베드로의 권면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혹시라도 성도들을 압제하는 일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1 너희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권면하노니 나 역시 장로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또한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고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해 하지 말고 오직 준비된 마음으로 하며 3 [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군림하지 말고 오직 양 떼에게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가 사라지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받으리라(벧전5:1-4).
다음은 칼빈에 대한 그 당시 인문주의자 카스텔리오의 평입니다. 아무도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토를 달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청교도 신앙이니 개혁주의니 하는 것을 잘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칼빈이라는 무서운 독재자의 사상을 그대로 지키려는 자들이 그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회보다 더 무서웠던 칼빈의 제네바 철권통치의 실상이 국내 성도들에게 자세히 알려지기를 원합니다. 다시는 이런 만행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진리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독재는 실로 그 어떤 것보다 더 무서운 것임을 역사는 잘 보여 줍니다.
샬롬
---------------칼빈은 타고난 질서의 인간이었다. 불규칙한 것, 체계 없는 것은 수학적으로 정확한 그의 천성에 모두 어긋나는 것이었다. 사람들을 새로운 신앙에 알맞도록 훈련시키려고 한다면, 우선 그들에게 무엇을 믿고 고백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그들은 무엇이 허용된 것이고 무엇이 금지된 것인지 정확하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지상의 왕국처럼 모든 정신의 왕국도 눈에 보이는 경계선과 법칙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칼빈은 석 달이 지나자 벌써 <교리문답서>를 시의회에 제출했다. 그것은 개신교의 기본 원칙들을 21개 조항으로 정확하게 요약한 것이었다. 이 <교리문답서>―어느 정도는 개신교의 십계명으로서―는 시의회로부터 원칙적인 동의를 받았다.
그러나 칼빈은 단순한 동의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단 한 점도 벗어남이 없는 완전한 복종을 요구했다. 교리를 형식화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를 따를 것인지, 그리고 어느 정도나 따를 것인지 하는 자유가 여전히 개인에게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교리문제와 생활에서 한 치의 자유도 허락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정신적․종교적인 문제에서 개인의 내적인 확신을 위해 단 한 줌의 여지도 남겨둘 생각이 없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교회는 모든 인간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할 권리뿐 아니라 의무를 가지며, 단순히 열의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벌을 내려야만 했다.
“다른 사람들은 달리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 직무가 설교를 마친 뒤에는 자기 의무를 다한 것처럼 편안하게 무릎 위에 손을 놓고 있어도 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교리문답서>는 단순히 신앙의 노선만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국가법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제네바 시민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공개적으로 이 교리문답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따르기로 맹세하는 일을 직권으로 강요해달라고 시의회에 요구했다. 시민들은 초등학생처럼 열 명씩 ‘장로’(長老)의 안내를 받아 교회에 가서는 오른손을 들고 장관이 낭독하는 맹세를 같이 해야만 했다. 이 맹세를 거부하는 사람은 곧바로 도시를 떠나라는 강제명령을 받았다. 이 요구는 매우 단호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종교문제에 관한 한 칼빈의 요구와 견해에서 머리카락만큼만 벗어나도 제네바 성벽 안에서 살 수 없다는 뜻이었다.
루터가 요구한 “기독교인의 자유”는 제네바에서 끝이 났으며, 종교가 개인의 양심의 문제라는 생각도 종말을 고했다. 논리가 윤리를 지배하게 되었고, 문자가 종교개혁의 정신 위에 놓이게 되었다. 칼빈이 이 도시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제네바에서는 어떤 형태의 자유도 끝나고 말았다. 이제 단 하나의 의지 [칼빈의 의지]가 모든 사람의 의지 위에 놓이게 되었다.
모든 독재는 폭력 없이는 생각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다. 권력을 유지하려는 사람은 권력의 수단을 쥘 필요가 있다. 명령하는 사람은 형벌을 줄 권리도 함께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칼빈의 임용조건에 따르면, 그에게는 교회의 위반사례에 대해서 추방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었다. 시의원들은 신자들에게 성서를 해석해주는 ‘성서 강사’를 초빙했을 뿐이었다. 즉 설교를 함으로써 신자들을 올바른 신앙으로 이끌 설교자를 초빙한 것이었다.
시의원들은 시민들의 법적․도덕적인 태도에 대해 형벌을 내릴 권한은 자신들의 재판권에 속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루터도 츠빙글리도 다른 어떤 개혁지도자들도 그때까지 시 당국에 이러한 권한이나 권력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천성이 권위적인 칼빈은 시 당국을 자신의 명령과 지시를 실천하는 기관으로 격하시키기 위해 초인적인 의지를 쏟아 부었다. 법적으로 그런 권한이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는 제명이라는 수단을 도입해서 그런 권한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만찬이라는 종교적 신비를 천재적으로 이용해서 그것을 개인적인 권력과 압제의 수단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칼빈파 설교자는 평소 도덕적인 태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만을 ‘주님의 만찬’에 와도 좋다고 허용했다. 그러나 설교자의 만찬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바로 여기에 이 무기의 힘이 실려 있다―은 시민으로서도 끝장이 나버린다. 아무도 그와 이야기하거나 물건을 팔거나 사서는 안 되었다. 그럼으로써 종교적 관청이 이용하는 순전히 종교적인 조치가 곧바로 사회적인 조치로 바뀌고 사업상의 보이콧으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추방된 사람이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설교자가 요구하는 공적인 참회를 거부하면 칼빈은 그에게 추방을 명령했다. 칼빈의 적대자는 비록 가장 존경받는 시민일지라도 제네바에서는 계속 살 수 없었다. 종교적으로 불만을 가진 사람은, 그때부터 시민으로서의 생존에도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이 번개를 손에 든 칼빈은 자기에게 저항하는 모든 사람들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단 한 번 대담하게 움켜쥐는 행동으로 그는 번개와 천둥을 손에 쥐게 되었다. 전에는 도시의 주교도 감히 가져보지 못한 무기였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끝없는 심급 과정을 거쳐야만 교인 한 명의 추방을 결정할 수 있었다. 카톨릭 교회의 파문은 초개인적인 행동으로, 어떤 개인의 독단적 판단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권력의지를 추구하는 경우에는 대단히 합목적적이고 냉혹했던 칼빈은, 그러나 이러한 추방권을 일상적인 일처럼 설교자들과 종교국에 넘겨주었다. 이 무시무시한 위협을 거의 규칙적인 형벌로 만들고, 테러의 효과를 잘 계산하는 심리전문가로서 이 형벌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서 자신의 개인적인 권한을 무한정 높였다.
제네바 시 당국은 아주 애를 써서 간신히 칼빈이 요구한 대로 만찬을 한 달에 한 번이 아니라 일 년에 네 번으로 제한했다. 그러나 칼빈은 이 강력한 무기를 다시는 자기 손에서 내놓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가진 뒤에 그는 비로소 진짜 싸움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총체적인 권력을 얻기 위한 싸움이었다.
대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한 국민은 독재체제의 일시적인 이점들, 그 엄격한 규율과 강화된 집단적 작용력이 언제나 개인의 권리들을 희생시키며, 모든 새로운 법칙은 예외 없이 과거의 자유를 대가로 지불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제네바에서도 이제 서서히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시민들은 정직한 마음으로 종교개혁에 동의를 표시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중앙 광장에 모여들어서 독자적인 인간으로서 손을 높이 쳐들고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제는 형리의 감독 아래 있는 포로들처럼 열 명씩 짝을 지어 도시를 가로질러가서 교회에서 칼빈의 21개 조항에 대해 맹세해야 한다는 사실에 공화주의적인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단지 한 잔의 포도주를 마시면서 즐겁게 노래했거나, 아니면 칼빈이나 파렐의 눈에 너무 울긋불긋해 보이는 옷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새로 온 설교자로부터 추방의 위협을 받으려고 엄격한 관습개혁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도대체 이토록 건방지게 구는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고 시민들은 스스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네바 시민인가? 이전부터 이곳에 정착해 살면서 이 도시의 위대함과 부를 함께 만들어온 사람들인가? 입증된 애국자인가? 수백 년 전부터 최고 가문의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방금 흘러들어온 망명자들에 불과했다. 그들을 친절하게 맞아들여서 방과 거처를 제공해주고 좋은 일자리도 마련해주었다. 그런데 이웃나라에서 온 관세징수인의 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형제와 친척들을 이 따뜻한 보금자리로 불러들이더니, 이제는 이 땅에 뿌리박고 살아온 시민들에게 수치를 안겨주고 책망을 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고용한 이 망명자가 이제 와서 누구는 제네바에서 살아도 되고 누구는 안 되는지를 경정하고 있다니!
독재 초기에 자유로운 사람들이 아직 완전히 억압되지 않고, 독립적인 사람들이 모두 쫓겨나기 전까지는 언제나 저항이 어느 정도 뿌리를 가지는 법이다. 제네바에서 공화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마치 거리의 도둑처럼’ 야단맞을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공공연히 떠들었다. 몇몇 거리, 특히 알레망 거리에서는 맹세를 거부하자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자신은 맹세도 하지 않을 것이고, 이 떠돌이 프랑스 가난뱅이들의 명령에 따라 고향을 떠나지도 않겠노라고 투덜거렸다.
칼빈은 자기에게 헌신적인 ‘작은 시의회’를 이용해서 실제로 맹세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추방령을 내릴 수는 있었지만, 이 인기 없는 조치를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리고 새로운 선거의 결과가 드러나자 시 당국이 칼빈의 독선을 거부하리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무조건 그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은 1538년 시의회에서 열세가 되었다. 제네바에서 민주주의 칼빈의 권위적인 요구에 맞서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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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7 17:30:47 | 관리자
이 책은 신사도 운동의 실상을 보여 주는 좋은 책이지만
장로교 교리에 입각한 입장도 있습니다
샬롬
2013-05-22 22:19:04 | 관리자
오늘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서 기다리는 중에 "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동안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던 회개에 대한 설명이 잘 되어 있어서,
시간상 건강상 습관상 책을 읽지 못하는 분들에게 제가 읽은 내용의 일부분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가끔 저희 교회 홈피와 유튜브를 통한 말씀에 감명 받아 교회를 찾아온 분들 중에는
특히 설교에서 선포하는 죄와 회개 부분에 공감하고 찾아온 분들이 있었습니다.처음에 와서는 너무나 감동되고 감화되어 이전 교회에서 하던 봉사를 스스로 해야겠다고
예배당 청소를 자청하는 모습에 저희는 몸 둘 바를 몰랐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강조하는 부분은 회개였습니다.회개가 있는 믿음.정말로 너무나 안이하고 습관적인 신앙생활에 젖기 쉬운 생활 속에서
그러한 생각은 나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왠지 그분들은 충분히 채워지지 않는 말씀과 회개의 외침 때문인지 얼마 후 떠났습니다.그리고 가끔 믿음이 무언지 고민하는 분들과 전화 통화를 하다 보면
회개에 대해 혼란 때문에 믿음의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느꼈습니다.이에 대해 딱히 설명할 재주가 없었는데
오늘은 이 책을 읽으며 회개에 대한 부분이 있어 발췌해서 적습니다. 4장 율법적 회개인가, 복음적 회개인가? 중에서 믿는 자들을 다 싸잡아서 개독이라 부르는 시대를 살며 “왜 이렇게 되었나, 무엇이 잘못 되었나, 정말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인가?” 라며 반성의 부담을 느끼는 우리들에게 강력한 회개의 메신저로 다가온 자들은 신사도 운동의 선구자들이었다. 신사도 운동 교회들의 강한 회개의 외침은 이런 상황과 잘 맞아 마치 천상으로 호출되어 진노의 하나님을 대변하고 곧 세상에 보내어진 선지자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교회만 다니면 구원받습니까?예수를 영접한다고 기도만 하면 다 구원받습니까?죄를 짓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까?회개하지 않고 어떻게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습니까?회개하세요. 회개하지 않으면 믿는 자도 지옥에 갑니다. 신사도 운동은 복음을 왜곡하면서 회개에 대한 강박 관념만 가지게 한다.사람들은 그들의 설교를 듣고 금세 회개 병에 동화된다.회개해야 해! 회개해야 해! 회개해야 해! 라며 쉽게 노래하는 사람들이 되면서 그런 이상한 회개의 열기를 전파하는 선지자들로 변해 버린다.그럴수록 십자가의 진리와는 점점 더 멀어지는 확실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신사도 운동가들이 전하는 회개는 복음적이지 않고 율법적이다.율법적으로 회개한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보내실 형벌을 예상하고서
그 형벌로 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회개하는 것을 의미한다.회개하게 만드는 원인은 하나님의 진노이고 신자가 회개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진노 아래 떨어지지 않고 현재의 행복과 번영을 유지하려는 것이다(중략).
회개의 개념과 중요성을 강조하고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겸비해져야 한다고 하니 사실 여간 혼란스럽지가 않다.그러나 그런 회개는 절대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회개가 아니다 그런 말을 듣고 아무리 회개를 많이 해도 마음에 평안이 오지 않고 영혼이 행복하지 않다(중략).
율법적인 회개에 세뇌당하면 계속 이러한 진노와 회개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영원한 구원으로 인한 성도의 행복과 기쁨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확실한 은혜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 성도에게 주신 자유 등 기독교 신앙의 중심 기둥들이 부러지고 만다. 그래서 사탄은 시의 적절하게 회개 사상을 퍼트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해야 할 회개는 복음적 회개이다. [구원 받은 이후] 복음적 회개의 원인은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이 아니고
이미 경험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이다.심판을 피하기 위해 억지로 하는 회개가 아니고
십자가를 통하여 그분께서 보내신 성령의 감동을 입어 변화된 마음으로 인한 자발적인 회개다.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고
그 말씀에서 벗어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됨으로 회개하게 된다.그러므로 회개가 많아지고 깊을수록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회개하는 영혼은 더욱 행복해지고 자유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두려움이 없어진다,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성도의 복음적 회개다. 여기서 재미있는 예화 하나를 들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각각 크고 작은 다양한 죄를 짓고 사는 죄인들이다.
그래서 누가 강하게 회개해야 한다고 외치면 대부분의 사람은 마음이 찔려서 고개를 숙인다.아무 사람에게나 무작정 “당신의 죄가 드러났습니다!” 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은 두려워하게 되어 있다
오래전에 영국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유명 정치인 10여 명에게 아무런 보충 설명을 달지 않고 “다 들통 났습니다!” 라는 문장의 전보를 보냈다 그러자 전보를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대로 사라져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다양한 종류의 죄를 항상 짓고 산다.성도들에게도 죄가 있기는 마찬가지다.죽은 사람들에게만 죄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성도는 마음이 순수하고 여리다. 그래서 믿는 자들이 더 신사도 운동의 회개에 쉽게 속아서 휩쓸리는 것이다. 회개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없어진 자리에
뜻 없는 열심과 기도 회개 봉사 충성 순종 찬양 기적 입신 방언 등이 들어선다. 이상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중에서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117558
2013-05-22 22:14:45 | 관리자
다음의 말씀을 이해하면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타언어들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아니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로되 대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요,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니라(고전14:22).
방언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자들과는 사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2013-05-21 11:09:56 | 관리자
방언(타언어)의 목적을 이해하기 앞서 먼저 이해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점을 이해하면 방언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여깁니다.
알다시피 방언과 관련한 성경구절은 고전 14:2-5에서 나옵니다.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말하나니 아무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나 그가 영 안에서 신비들을 말하느니라. 3 그러나 대언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그들을 세우고 권면하며 위로하나니 4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자는 자기를 세우나 대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우느니라. 5 나는 너희가 다 타언어들로 말하기를 원하되 차라리 대언하기를 원하노니 타언어들로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가 세움을 받게 하지 아니하면 대언하는 자가 그보다 더 나으니라."(고전 14:2-5)
이 중에서 "알지 못하는 언어"가 바로 개역성경에서 "방언"으로 번역된 부분입니다. 영어로는 unkown tongue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중 사람들이 현대의 "방언"을 붙드는 이유는 "하나님께 말하나니"와 "그가 영 안에서 신비들을 말함이라" 이 부분일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아시며 나는 영으로 신비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할 부분이 바로 "신비"의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비란, 우리가 신비스럽다고 말할 때의 그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비는 항상 "계시되지 아니한 감추어진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런 점으로 인해 성경에서 "신비"와 함께 사용되는 단어는 거의 대부분이 "알다"와 "계시"입니다. 감추어진 진리가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계시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신 것입니다. 다음의 성경구절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눅 8:10, 킹흠정 그분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왕국의 신비들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유로 되었나니 이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11:25, 킹흠정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신비에 대해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곧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눈멀게 된다는 것이라.
롬 16:26, 킹흠정 이제는 밝히 드러났으며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대언자들의 성경 기록들을 통해 믿음에 순종하게 하려고 모든 민족들에게 알려지게 된 신비의 계시에 따라 너희를 굳게 세우실 분
고전 13:2, 킹흠정 내가 대언하는 선물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이해하며 또 모든 믿음이 있어 산을 옮길 수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고전 15:51, 킹흠정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알리노니 우리가 다 잠자지 아니하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
엡 1:9, 킹흠정 친히 자신 속에서 작정하신 자신의 크신 기쁨을 따라 자신의 뜻의 신비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으니
엡 3:3, 킹흠정 곧 계시로 그분께서 내게 그 신비를 알리셨나니 (그것은 내가 전에 몇 마디 적은 것과 같으니라.
엡 3:4, 킹흠정 그것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읽을 때에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는 바를 깨닫게 되리라.)
엡 3:5, 킹흠정 그분께서는 이제 자신의 거룩한 사도들과 대언자들에게 성령을 통해 이 신비를 계시하신 것 같이 다른 시대들에서는 사람들의 아들들에게 그것을 알리지 아니하셨는데
엡 3:9, 킹흠정 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감추어져 온 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든 사람들이 보게 하려 하심이라.
골 1:26, 킹흠정 이것은 곧 여러 시대와 여러 세대로부터 감추어졌으나 이제는 그분의 성도들에게 드러난 신비에 관한 것이라.
골 1:27, 킹흠정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이 신비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가를 자신의 성도들에게 알리려 하시는데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
골 4:4, 킹흠정 이것은 내가 마땅히 할 말을 하여 이 신비를 드러내고자 함이라.
그렇다면 성경에서 방언을 사람들이 어떻게 사용했는지 보십시오.
방언이 가장 먼저 주어진 때는 오순절 날로 그 때 방언을 받은 제자들이 무엇을 선포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우리 언어들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말함을 우리가 듣는도다"(행 2:11)
그 다음 방언이 등장하는 것은 사도행전 10장입니다. 베드로를 포함하여 이방인들의 구원을 믿지 못했던 유대인들을 위하여 성령께서는 이방인들에게 방언을 허락하심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을 크게 높입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타언어들로 말하며 하나님을 크게 높이는 것을 그들이 들었기 때문이더라."(행 10:46)
그 다음 방언이 등장하는 것은 사도행전 19장입니다. 오직 요한의 침례만을 알고 성령님의 침례에 대해 알지 못하던 사람들을 위해 바울은 그들을 위해 재 침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방언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방언을 받고 한 일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님께서 그들 위에 임하시므로 그들이 타언어들로 말하고 대언하니라."(행 19:6)
이들은 방언을 가지고 대언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약성경이 완전히 주어져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가 드러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용하여 그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언"의 역할입니다. 성경이 완전히 주어지기 전 "대언자"의 역할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였습니다. 문제는 대언자는 자기의 말들을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를 전해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복음이 여러 지역으로 전파됨에 따라 그 지역에서 사용되는 언어로 하나님의 계시를 증거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 "방언"의 은사를 허락하셨습니다. 방언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계시되지 않은 감추어진 진리를 증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어왔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여러가지 은사들이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을 그 목적에 맞게 사용하지 못했고 자기들이 가진 은사들을 남용하였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은 혼란스러워졌고 바울은 그들의 남용되는 은사들의 사용을 바로 잡고자 고린도전서 14장을 기록하였습니다.
대언과 마찬가지로 방언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알립니다. 그러나 방언은 "통역"하는 자가 없다면 그것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방언의 은사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이 세움을 얻게 하려면, 그에게 방언의 은사가 주어진 목적에 따라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를 전해 주던가 아니면, 교회 내에서 "통역자"를 통하여 그에게 계시된 것을 전해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방언은 하나님께서 사람안에서 그의 영을 통하여 역사하심으로써 그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 주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전 14:21에서 인용한 말을 보십시오.
"율법에 기록된바, 내가 다른 언어들과 다른 입술들을 가진 사람들을 써서 이 백성에게 말하리라.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으니"(고전 14:21)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대언과 방언을 같이 말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기 바랍니다. 방언과 대언은 같은 목적으로 주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전 13:10의 완전한 것이 오면에 대해서는 저 역시 그것이 완전한 성경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의 견해는 문맥의 의미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몸같이 되는 것"을 의미할 것이라 판단합니다.
그렇다면 대언과 방언은 완전히 그쳤는가? 저는 그 대답을 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부분들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구절을 드리고자 합니다.
벧후 1: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도 있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
성경은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입니다. 그 어떤 대언이나 방언이라도 성경보다 더 확실한 대언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2013-05-21 11:05:29 | 관리자
성경 말씀을 자세히 알고 싶어하는 김기덕 형제님의 열정과 관심이 여기에 있는 많은 형제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충족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동방에서 온 지혜자들의 말을 듣고서 헤롯은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날지를 물었습니다. 수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은 미가 대언자의 말을 인용하며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답했습니다(마2:5-6). 그들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 경배하러 간 사람이 없었습니다.
벧엘에 있던 대언자들, 여리고에 있던 대언자들은 주께서 엘리야를 하늘로 데려가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왕하2:1-6). 그러나 그들은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러 따라가지도 않았고, 오히려 사람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틀림없이 엘리야는 어느 산이나 골짜기에 떨어졌을 거라고 믿고 실종된 엘리야를 수색, 구조하기 위해 사람들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왕하2:16-18). 그들은 지식적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마귀들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마귀들이 예수님을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눅4:41).
이런 말씀들을 보면 "지식"이 반드시 "믿음"과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지식적으로는 알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겁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으나 선포된 그 말씀이 그것을 들은 자들 속에서 믿음과 섞이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들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하였느니라(히4:2).
2013-05-17 09:04:16 | 김문수
김문수목사님을 비롯해서 여러 형제님들이 좋은 말씀들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요 죄송하지만 제가 알고자 하는 것만큼 제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지는 못한것 같습니다.
전 생각하기를 적은 죄를 지은 사람과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이 받는 지옥의 형벌이 다르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목사님 글 중에서 알면서도 믿지 않는 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 건지요?
알면서도 믿지 않을수가 있는 건지요?
조지 와일드 교수님 그런 사람을 말하는 건가요?
아님 믿다가 타락해서 믿음에서 떨어진 사람을 애기하는 건가요?
제가 질문한 내용은 기존 교회에서 전혀 듣지 못한 것이라 질문을 올렸던 것이었습니다.
이 자유게시판을 통해서 많은 질문에 성실히 답해 주시는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2013-05-17 02:26:17 | 김기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