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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자기가 자라온 환경/배경/지식에 따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있는 집에서 어려서부터 아무 부족함 없이 자란 사람은 세상이 만만해 보일 것이고, 어려운 살림에 어렵게 살아온 사람은 세상이 만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바르게 성경을 이해하고 주님만 의지하여 사는 사람은 세상에 별로 희망을 두지는 않지만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적응하면서 살지요. 그러나 "보이는 세상이 모든 것이다"라고 느끼시는 분들은 주위의 시선을 따져가며 완전히 동화되어 살아가지요.    아래와 같은 사진들을 보십시요.   다들 유명하신 분이며, 유명 교회 집사/장로님들이십니다. (절대 정치적으로는 보지 마십시요) 이해가 되시는지요 ? 저분들은 세상에 적응이 아니라 완전히 동화되어 사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롬 12:2]    그냥 애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묵념만 해도 될 일을 저렇게 오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유명한 신부가 돌아가셔도 스님은 그 앞에서 목탁두들기고 애도하는데 왜 지도자급 크리스찬은 자신의 믿음에 맞게 떳떳하게 애도를 못하고 천주교로 가면 천주교 예법,불교로 가면 불교의 예법을 따르는지 모르겠습니다.이는 세상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두렵지만, 자신이 믿는 주님에 대한 자신감과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특히 이분들 가끔 불교쪽으로 가시면 "합장"하시는데 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그 뜻이 "자신의 마음이 불타와 보살에 전념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의미를 알고서 하시는 건지...., 우리 크리스찬들은 등산후에 일반사찰에 들르는 경우, 스님께 존중한다는 의미로 이런 행위를 하시면 절대로 안됩니다. 이는 주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나타낼 수 없는 세상 권세는 우리에게 필요없습니다.  이런 권세는 저주일뿐입니다. 저도 저 자리에 앉으면 나도 약해져서 저럴까 하고 곰곰히 생각보지만, 저의 그릇을 이미 아시고 넘어지지 않도록 그저 평범한 수준에서 주위 눈치 안보고 믿음지키며 이렇게 살게 해주신 것이 천만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2:10:43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3-23 14:03:02 | 김학준
성경 공부하시다가 혹시 지명의 위치,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하였다고 하는데 얼마의 거리인지, 지역은 어디쯤 인지,궁금하신 경험들이 저를 비롯해서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있을 줄로 압니다.   본 keepbible에서는 참 좋은 자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미 활용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모르시는 분도 계실것 같아 아래와 같이 소개합니다. keepbible->커뮤니티->추천사이트->67번 성경지도(www.biblemap.org)를 클릭하시면 성경의 각 장별로 그 장에 언급되어 있는 지명에 대한 위치와 설명이 표시가 됩니다. (영어 ESV, KJV 기준입니다) 이런 기능이 필요하신 분은 잘 활용하시면 좋을듯 합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2:10:43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3-21 09:35:18 | 김학준
요즘 저는 걱정이 많습니다.   설교 말씀이 퍼지고 여러 곳에서 좋은 반응이 생기며 변화하는 것이 보이고 교회가 부흥하며 킹제임스 성경이 점점 더 알려지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과거에 많은 단체와 교회를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리더의 종이 되어 결국 추종자가 되고 말더군요. 그래서 두렵습니다. 리더도 결국 자기의 추종자를 사랑하지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경우가 많더군요. 그런데 사람의 추종자는 언젠가 떠납니다. 무슨 이유든지 추종할 것이 사라지면 떠납니다.   저는 저의 사역의 추종자나 저의 교회의 추종자를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감히 사도 바울같이 "너희는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분과 저는 급이 다릅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여러분 모두가 항상 예수님만 보고 그분만 따르기를 원합니다.   진리와 리더가 상충하면 진리를 택해야 합니다. 진리와 교회가 상충하면 진리를 택해야 합니다.   리더나 목사나 교회는 다 유한하며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보다, 예수님보다 먼저 자기 교회나 침례나 기타 냄새나는 사람의 무언가를 두는 것은 심각한 죄악입니다. 그런 자들을 눈여겨 보고 뛰쳐나와야 합니다.   우리 모두 침례자 요한 같이 이렇게 외치고 실천합시다.   "그분은 반드시 흥하여야 하되 나는 반드시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혹시 제가 배도하려 하거나 제 자신의 영광을 구하려는 낌새가 있는 것을 보거든 알려주세요. 고쳐야 사니 도와주십시오. 그런 사람이 진짜 저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샬롬.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2:11:5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3-20 16:11:06 | 관리자
안녕하세요? 저는 4년 전부터 중국에 살고 있는 진미희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남편을 따라 이곳에 와서 살게 되었고, 두 아들(17세, 12세)을 두고 있습니다. 제가 keepbible을 알게 된 것은 작년 여름 동생의 소개를 통해서입니다.   그 이후 거의 날마다 이곳에 들어와 설교말씀과 세미나 성경교리 강해등 강의를 듣고, 글들을 읽으면서 성경 전체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과 또한 사탄의 계획도 보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 출판사에서 발행된 흠정역 성경과 도서들을 공부하며 제가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많은 부분을 바로 잡게 되었고, 앞으로 우리 가정이 나아가야 할 신앙의 방향도 잡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채워지지 않았던 영적 갈증과 진리를 찾아 헤매던 방황의 끝이라고나 할까요?   지금은 하루에 한번 저녁시간에 가족이 함께 강해와 여러 유익한 강의를 들으며 공부하고 있고, 게시판에 올라오는 여러 형제자매님들의 좋은 글들도 기회 되는 대로 아이들에게 읽어 주기도 하며 영적인 기쁨을 누리고 있고, 이이들에게 바른 신앙 가치관을 심어주기 위한 노력이 저의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이곳을 통해 계속적인 지도를 받고 싶고, 여러분들은 저희를 모르시지만 이미 친숙한 정동수 목사님과 형제자매님들께 감사를 드리며, keepbible를 통한 귀한 사역이 진리를 사모하는 모든 이들에게 나침반이 되기를 소망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50:41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3-16 11:04:42 | 진미희
(이전에 올린 글인데요, 원인모르게 삭제되어 관리자님 동의하에 다시 올리게 되었습니다)    요즘 교회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느껴보자고 사순절/고난주간 동참 관련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여 깊이 묵상하는 것은 괜챦으나 이것이 믿는 성도에게 신앙생활의 짐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벗겨주신 짐을 우리가 다시 지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이상한 운동/교리/미혹등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이때에 바른교회에서 이상한 것에 얽매이지 않고 낭비없이 성경에 근거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큰 복이라 생각합니다.그런 중에 사순절/고난주간 관련 글을 읽고 공감하여 공유하고자 올립니다. 제목 : 사순절/고난주간을 폐지하라 (오인용 목사) 로마천주교의 더러운 잔재들이 개신교내에는 아직도 많이 있다 그중에서도 고난주간, 사순절 등은 성경적인 어떤 근거도 없는 로마카톨릭에서 온 음녀의 관습이 분명하다, 개신교는 날과 절기에 대해 어떤 절대적인 목적이 없다   그런데 사순절과 고난주간이라는 것들이 개신교교회들에게 아직도 독버섯처럼 뿌리깊이 내려서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예수님의 고난에 같이 동참한다는 ?(그렇게 동참하고 싶다면 십자가에 달려 죽어라 그런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니지만)이상한 교리를 교회에서 가르치고, 교인들은 그것이 진정한 헌신이며 ,주앞에서 보여야할 참된 신앙의 도리인줄을 오해하고 있다   사순절 기간동안 뭐하지 말라, 뭐해서는 안된다, 금지해라,사순절 특별새벽기도사순절을 경건하게 거룩하게 지내라 등등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준비하라는 거룩한(?) 명령을 설교를 통해서 교인들에게 주입한다.   로마천주교는 사순절기간동안 고기를 먹지 말고, 육체적인 다양한 즐거움과 놀이등을 하지 말라는 교리를 가르쳐서 인간의 정상적인 욕구를 억눌러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폭발하게 만든다 그 지긋지긋한 사순절동안 신부나 수녀. 주교, 등 로마교황의 하수인들은 사냥개가 사냥감을 지키듯이 신자들이 혹시나 먹고 마시고, 육적인 즐거움을 얻을가 늘 감시하고사순절을 거부하거나 거역한 자들을 엄한 째찍으로 다루었다   그 사순절이 끝나면 그동안 먹고 마시고, 하지 못했던 정상적인 육체적인 욕구를 발산하는 것이 바로 카니발 축제의 기원이다   브라질이나 남미등지에서  카니발축제는 온갓 사악한 정욕의  무대이며 ,죄악의 축제다이 축제기간동안 음란, 정욕, 술취함, 폭력, 사생아, 살인, 도둑, 강도, 등이 난무하다로마카톨릭 사제들이 정상적인 인간의 욕구를 억누르는 것에 대한 반발이며, 반항인 것이다,   고난주간(?)교회에서 교난주간이라고 해서 금식을 하고,  역시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등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는 엄한 명령을 지키느라 교인들은 금식을 하고, 얼굴을 흉하게 하며 .웃지도 못하고, 이것저것 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등에 교인들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해결하신 죄의짐을  스스로 지려고 한다, 사순절, 고난주간등이런 것들은 결코 참신 신앙, 헌신이 아니다이런 것 잘 지킨다고 해서 좋은 신앙, 참신앙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의와 공로에 물든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희석시키는 것이다   사순절?  고난주간? 성경 어디에서 이것을 지키라고 했는가?기념하라고 했는가? 심지어 부활절도 성경에서는 절기로 지켰다는 말씀이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고난. 희생,등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깊히 묵상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나쁜 것은 왜 쓸데없는 날과 절기를 만들어서 교인들에게 억지로 짐을 지우는가? 왜 사순절기와 고난주간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억지로 짐을 저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의 희생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울고,금식하고, 이런 저런 것들을 하지 않아야  기뻐하시는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은 인간의 죄로 인한 대속의 제물이 되신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무능력과 부패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이 어떤 행위로도 (금식, 새벽기도, 절기, 날, ) 이런 것들은 공로가 될수가 없는 것이다, 로마천주교는 우상의 종교요 마귀의 집단이니 그런 인간의 공로를 떠받치는 날과 절기가 중요하다   그러나 개신교는 그런식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기념하거나, 날과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대속에  대해 감사하고,주님의 말씀에 늘 순종하고,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길을 가는 것이다. 다른 때에는 개떡같이 살면서 절기때 잘하면 복을 받는가?그것이 바로 미신이다,   로마천주교의 미신이 개신교회에 그대로 유입된 것이다, 사순절, 고난주간 만들어서 전교회가 전교인이 얼굴이 어둡고 .웃지도 말고, 질질짜고, 울고 ,이런 저런 것들을 하지 말라는 등 율법을 부여하는 교회가 어떻게 신약의 교회가 될수 있는가?   도대체 성경어디에서 그렇게 하라고 하던가? 그것이 무슨 복음의 자유이며 . 진리가 되는가?그렇다면  예수님은 뭐하시는분이고, 어디계신가? 개신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자유함을 얻고 더 이상 율법의 정죄와 자신의 공로나 의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주셨는데인간은 그 문에다 온갓 장애물을 놓아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가르치지 않는 절기와 날등은 교회에서 이제는 폐지해야 한다,왜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을 지키려고 애쓰고, 억지로 스스로 짐을 지는가? 자신이 뭔가를 해야 마음이 편하고, 뿌듯한 기분이 든다면 그는 예수님으로 구원을 받았는지 점검해보라   어떤 이유로도 사순절이나 고난주간같은 것들은 성경에 없는 것이다 지킬필요 없다  그런 거짓된 것들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 거부하라   복음안에서 자유하라, 기뻐하라, 즐거워하라, 감사하라   오인용 목사  Band of Puritans [출처]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폐지하라 (The Band of Puritans) |작성자 퓨리탄[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50:41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3-14 20:11:21 | 김학준
작년도 마찬가지지만 2010년 올해는 공휴일에 관한 한 정말 재앙(?)인 해이다.지난 삼일절이 월요일이었고 오는 5월에 어린이날(수요일)과 석가탄신일(금요일)에 숨통을 좀 튼 후로는, 주중 빨간날은 추석이 끝이다. 달력을 좀 분석해 본 분들은 알겠지만 우리나라는 현충일, 광복절, 개천절이 모두 같은 요일이다. 그런데 올해는 이들이 모두 일요일이다. ^^;; 거기에다 성탄절마저도 토요일과 겹치니 가히 공휴일 재앙이 아닐 수 없다.   일각에서는 성탄절과 석가탄신일을 빨간날에서 제외하고 차라리 한글날 같은 진짜 뜻 깊은 날을 공휴일로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정치라는 건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니 참 답답한 노릇. 한국인이라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혜택을 보편적으로 입고 있는 한글이라든가 헌법과 관련된 공휴일은 너무나 쉽고 만만하게 제외된 반면, 보편적이지도 못한 종교와 관련된 공휴일은 제외를 극구 반대하는 계층이 존재하니 유지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선택한 것과 같은 잘못된 포퓰리즘의 단면이 아닐까 한다.   중간에 윤년이 낀 적이 있기 때문에, 과거엔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이 아니라 6년 전인 2004년의 공휴일이 올해와 같이 역시 절망적이었다.그때도 현충일에 교회에 갔다. 그런데 당시 본인이 다니던 교회는 3의 배수인 달의 첫 일요일에 주의 만찬을 실시했다. 그래서 그 날이 주의 만찬을 하는 날이었다. 오전 10시엔 사이렌 소리 들으면서 호국 영령 묵념을 하고, 그로부터 2시간 남짓 뒤엔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의식을 치르니 일요일 하루가 이보다 더 숙연할 수가 없었다. 물론 두 의식은 성격이 서로 상당히 다르다.   그리고 바로 그 때 깊이 깨달은 바가 있었다.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기독교가 그냥 인간이 만든 종교이고 성경 역시 인간이 만든 사상과 이념을 담고 있는 논어, 불경 같은 책일 뿐이라면.예수님은 사대성인, 혁명가, 사상가, 열사, 순교자 정도 되는 신흥 종교 교주라면.기독교는 매 예배 때 주의 만찬 정도가 아니라 상식적으로 순“교”선열들에 대한 묵념이라도 꼬박꼬박 해야 할 것이다. 뿌우우우~   한글 학회만 해도 주시경 선생과 조선어 학회의 정통을 이어받은 단체라고 자부하며, 일제 말기의 조선어 학회 사건 때 선조들이 받은 고난에 대한 자부심이 정말 대단하다. 공식 행사라도 할 때는 국민의례가 끝난 뒤에 선배 국어학자들에 대한 묵념을 한다(최현배, 정태진, 한징, 이운재 등~). 한편 군대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상무 정신 강조하고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고서 정신 교육 때 맨날 하는 게 딱 저런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세상에 고난의 짬밥면에서 기독교를 능가할 존재가 있겠으며, 역사적으로 성경만치 무수한 피를 흘리면서 전수된 책이 있었겠는가? 바울, 베드로, 위클리프, 틴데일, 주기철, 손양원 등등, 시기와 분야도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기독교회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주의 만찬을 통해 기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추모하지는 않는다. 또한 우리는 신앙 위인 전기를 접하면서 도전과 감동과 유익을 얻지만,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기독교는 존재조차 할 수 없었을 거라는 식으로 사람을 떠받들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하고 사람에게 고마워해야 할 처지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이건 헌금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똑같이 적용되는 원칙이다.   설교 때도 성경을 강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단순 예화로 아주 잠깐 언급하는 수준 이상으로, 무슨 ‘순교자 열전’처럼 사람을 중심으로 띄우지는 않는다. 사람을 무슨 초인적인 성인으로 치켜세우지도 않는다. 이것이 기독교 예배가 여타 종교/단체의 행사 내지 의례와 근본적으로 다른점일 것이다.   성경은 세상을 정복해서 기독교 학교, 기독교 기업, 기독교 정권을 만들라고 명령하지 않으며, 반대로 너무 수준 낮은 이 세상을 아주 떠나서 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크리스천들끼리 독립된 경제권, 공동체 만들어서 너희들끼리만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미래에 666 안 받으려고 서바이벌 중인 환란 성도들이나 그렇게 살 필요가 있지, 그건 은혜의 교회 시대와는 전혀 상관없는 아주 극단적인 예외 상황일 뿐이다. 세상은 세상대로 교회는 교회대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그 과정에서 혼을 개인적으로 구원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임무일 뿐인 것이다.   이 개념을 알면 성경이 로마서에서 그것도 그 포악한 네로 황제 시절에, 목사뿐만 아니라 세상 공권력을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일컬은 이유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라는 정교 분리 원칙을 이해할 수 있다.국기에 대한 경례는 성경적으로 문제될 게 없지만, 마리아 형상에다 경의를 표하는 건 명백한 우상숭배인 이유를 알 수 있다. keep from이라든가 trump/trumpet 같은 지엽적인 어휘 논쟁을 초월하여 환란 전 휴거가 하나님의 성품상 맞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왜 예수 안 믿는 게 죄이며 더구나 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는 죄인지를 알 수 있다. 이런 것을 보는 안목이 전혀 열려 있지 못한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선포라는 어리석은 방법이 이 비주얼 시대, 인터넷 시대에도 왜 유효한지, 특히 논쟁이란 게 왜 백해무익인지 등에 대한 안목도 생기게 된다. 수학 공식이 착착 증명되듯이 신앙 논리가 명쾌하게 쫙 뚫린다는 얘기이다.   이런 것으로 인해 그 당시 기뻐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 마치 삼겹줄이 쉽게 끊어지지 않듯, 이런 큰 뼈대가 잡히고 나면, 숲이 아닌 잔가지 수준에서 어지간히 말장난하는 이단 교리들에는 빠질래야 빠질 수가 없게 된다. 이제 90일 남짓 남은 올해의 일요일 현충일은 그저 일요일과 겹친 공휴일이라고 원망(?)만 하지 말고,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라든가 나의 신앙이 세상의 여타 종교· 사상· 이념보다 얼마나 더 수준 높은지를 한번 묵상하면서 보내는 게 어떨까?[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50:41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3-08 00:01:08 | 김용묵
미국의 BFT 교회(웨이트 목사님)에는 88세 노인이 피아노 반주를 합니다. 작곡과를 다니셨다고 하는데 참으로 반주가 경쾌합니다.   영어 가사를 보고 따라 해 보세요.   참고로 이 노래의 가사는 웨이트 목사님의 장모님께서 사위를 위해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고 하면서 작사해 준 것입니다. 악보를 가져왔으니 나중에 우리말로 해서 불러도 좋겠습니다.   교회는 크기가 아니라 마음의 자세에 있다고 믿습니다. 영혼의 자유를 가지고 조용히 봉사하다 주님께 가는 것은 참으로 영예로운 일입니다.   사람 눈에도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 하나님의 눈에는 얼마나 귀할까요?   저를 비롯한 모든 성도들이 각자 처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교회는 대접받는 곳이 아닙니다. 섬기는 곳입니다.   사랑합니다.   샬롬.      mms://vod.cbck.org/dsjung/cbck/music/Piano02.wmv
2010-03-06 20:53:31 | 관리자
오늘 참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시간을 내서 읽고 소화하면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올림픽 대표팀의 리더십 비결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3/05/2010030501255.html?Dep0=chosunnews&Dep1=hotnews&Dep2=news02[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50:41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3-06 16:26:10 | 관리자
  여름 방학이던 2005년 7월, 대학 시절에 찍어 놨던 추억의 사진입니다. 교내 기독교 동아리에서 복음을 전하거나 교회를 알리는 자보를 붙이는 건 많이 봐 왔지만, 개인이, 그것도 2학년밖에 안 된 학부 여학생이 이렇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건 처음 봤답니다. (학부 식당 앞) 사진상으로는 모자이크 처리했지만, 자기 전화번호도 공개했죠. ^^   성경 구절이라든가 죄, 심판 같은 단어까지 들어가길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인지 모르겠지만, 참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누군가가 '얼굴 보고'(예쁘면 같이 교회 나가겠다)라고 자보에다 낙서를 해 놨습니다. ㅋ[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50:41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3-06 01:16:42 | 김용묵
마흔살이 저랑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모양 저모양 살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무언가 내 안의 진실과 말씀과 은혜를 쫓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어떻하다가 진실아닌 진실을 보게되어 그것 쫓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오다보니 이제는 목사님들과 교회들이 너무도 멀어졌습니다.   아니 그들은 그대로 있는데 제가 멀리 온것 같습니다.   지금은 사랑침례교회를 왔습니다. 아직 정착은 못하고 기웃기웃 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이 누구인가 어떤 분인가 말씀은 어떠한가를 계속 보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지난  설교들은 들으니 지금까지 내가 발견해온 모든것을 설교하고 계셨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놀라웠습니다.    싫은 소리, 이단취급받는 그런 소리 하고 다닌다고 부모님과 주변의 사람들이 눈치를 주어도 나는 이것을 전해야만 했습니다. 욕먹는것은 신경도 안썼습니다.   그런데 정동수 목사님은 나의 작은 견해로 떠들던 것들을 아주 큰 스케일로 천지창조와 재림의 모든 연대를 들어가며 하나님의 크심과 무한하심, 두려운 하나님을 선포 하셨습니다.   속으로 찾아다. 이분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무겁습니다.   목사님 설교는 분명 다 맞는 것 같이 내게 들립니다. 그런데   제 마음은 무겁습니다   제가 그릇이 너무 작다는 것과 목사님 설교가 감당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제가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교단에서 모태신앙으로 자라왔으며 그 나름대로 교회안에서 성장하면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런 모든 사고와 기억과 행위의 삶과 대치되는 말씀들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면도 있는것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돈키호테가 되어 마치 세상같은 풍차를 상대로 홀로 싸우는 흑기사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만 저의 작은 안목으로는 목사님과 더불어 힘을 다하여야 할 영적 싸움이 장난아닌 정말 심각한 최전방이라는 것이 저를 황당하게 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접한것은 불과 한 달정도 된것 같습니다.   과연 목사님의 사명은 무엇일까? 내가 이 목사님과 더불어 어떤 비젼을 나눌수 있으며 내 삶을 나눌수 있을까?  고민해 보았습니다.   'KeepBible" 말 그대로 성경을 보전하며 지키고 전하는 것이 목사님의 사명이라는 생각을 가질때 나는 아직 "필"도 않꼿혔는데 내가 어찌하여야 하는가! 라는 생각도 나에게 거룩한(?)  부담이 됩니다.   뭐가 몬지 모르겠고 들여다 보아야 할 것이 갑자기 많아져서 지금은 급하게 밥먹는 기분입니다.   아직은 분명 떠돌이 인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하고있는 것이 어린아이의 신앙일지라도 주께서 내 중심을 아시니 주님의지하며 성숙해 지기를 소망합니다.   "어찌하여 주님의 은혜 값으리! 쓸모없는자 위하여 사랑베푸셨네...  나이제 새 소망이 있음은 주님의 은혜라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영과 영원히 영원히 그피로  날구하사 죄에서 건지셨네 하나님께 영과 영원히 영원히 !!!    사망의 그늘에 앉아 죽어가는 나의 백성들    절망과 굶주림에 갖힌 저들은 내마음에 오랜슬픔  고통에 멍에를 메고 울고 있는 나의 자녀들,... 나는 이제 일어나 저들의 멍에를 끊고 눈물 씻기기 원하는데    누가 나를 위해 가서 저들을 구원케 할까 누가 나를 위해 가서 나의 사랑을 전할까?     나는 이제 보기원하네 나의 자녀들 살아나는 그날 기쁜 찬송 소리 하늘에  웃음,,,,,,  가득한 세상 "   가사가 잘 생각이 안나서....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41:55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2010-03-02 18:13:20 | 노영기
이번 겨울에 미국 교회에 갔다가 침례 주는 것을 찍어 왔습니다.부부가 받는 모습입니다.부인은 간단히 간증을 했고 남편은 간증을 안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침례탕은 목사의 설교단 뒤에 높이 솟아 있고 유리로 앞 부분이 되어 있어서 잠기는 것을 멀리서도 볼 수 있습니다.나중에 장소가 허락되면 우리도 이런 식으로 침례탕을 만들어서 예수님의 침례를 시각적으로 보이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미국 사람이 한다고 해서 다 옳지는 않습니다.성도들은 이 점을 조심해야 합니다. 상식적이며 성경적인 것만 받아들여야 합니다.예수님의 교회와 교회의 교리에는 미국식 한국식이 따로 없습니다.오직 성경식만 있습니다.그러므로 모든 실행에서 성경과 양심과 상식이 통해야 합니다.즉 한국 사람이든 미국 사람이든 성경적인 것을 가르치고 행해야 우리는 따를 수 있습니다. 샬롬.
2010-03-02 12:10:20 | 관리자
이번에 정년퇴임을 하는 은사 교수님이 저를 만나더니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정 박사, 지금까지 65년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 중에서 은혜 받은 것을 감사히 여기고 신의를 지키는 사람은 채 15%가 안 되더군.”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꿈을 펴며 살고 싶어 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억지로 무리하게 하면 본인이 나중에 다치게 됩니다. 지금까지 저도 인생을 살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공명정대하지 않게 남을 비방하며 인륜을 무시하면서 신의를 지키지 않은 사람들의 끝을 몇 차례 보았습니다. 모두 신실하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며 나름대로 큰 소리로 외치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면서 비방을 했는데 이상하게도 오랜 시간 뒤에 일의 끝은 그들에게 불리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불리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비방을 한 당사자가 도저히 신용 회복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멸하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한편 비방을 받으면서도 조용히 지낸 사람은 끝에 정당한 것으로 밝혀짐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긴 시간 동안 비방을 받을 때에 곁에서 신실하게 믿어 주고 따라주는 사람은 많지 않더군요. 저도 사람인지라 그런 시간이 쉽지 않았습니다.   요즘도 저는 혀의 말다툼 속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목사와 성경 번역자로서 이런 저런 비방을 듣고 있습니다. 인터넷 세상에서 또한 동료로 알았던 사람들로부터 세상적으로 말하면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듣고 지냅니다.   교회에서 진솔한 마음을 이야기해도 목사가 자기 사업을 발전시키려 하는가 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말과 시선을 대하면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사역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느낍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조용히 있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한 형제에게서 한 줄 편지가 왔습니다.   친구는 언제나 사랑하며 형제는 어려운 때를 위하여 태어났느니라(잠17:17). A friend loveth at all times, and a brother is born for adversity(Prov 17:17).   이 짧은 글과 함께 나와 함께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기에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오늘은 참 이런 친구와 형제가 그립네요.   많은 사람이 “목사님, 제가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감사한 말이지만 이런 피상적인 말은 전혀 도움이 안 되더군요. 어려운 일이기에 함께하고 함께 생각하며 행동하고 내 일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을 찾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정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들을 세우러 다니면서 곳곳에서 많은 비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변함없이 그를 지지해 주는 한 사람이 그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19 그러나 내가 속히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예수님 안에서 바람은 너희 형편을 알게 되어 나도 좋은 위로를 받으려 함이니 20 같은 마음으로 너희 형편을 자발적으로 돌아볼 자가 내게 아무도 없느니라. 21 모든 사람이 자기의 일을 추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일들을 추구하지 아니하되 22 오직 디모데의 증거를 너희가 아나니 아들이 아버지에게 하듯 그가 나와 함께 복음 안에서 섬겨 왔느니라(빌2:19-22).   우리 교회 안에, 출판 사역 속에 나와 함께 같은 마음으로 목회를 하고 성경 출간과 보급을 하는 사람이 더 많이 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특별히 삼일절에 아무도 없는 학교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는 내게 간절히 듭니다.   내 자신이 부족하기에 이런 글도 쓰며 어려움을 겪지만 정말로 요즘은 다음의 말씀이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친구는 언제나 사랑하며 형제는 어려운 때를 위하여 태어났느니라(잠17:17).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44:58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3-01 12:43:50 | 관리자
예수님과 사도들이 인정한 가장 성경적이고 효과적인 복음 전파/구령(전도) 방법은 가정 방문과 거리 설교이다.하지만 통탄스럽게도 오늘날 이 방법을 제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곳은 거의 전부 이단들, 아니면 교회 간판만 달고 있으면서 전혀 건전하지 못한(은사주의 등) 교회들이다.   한쪽 집단에서는 기독교라는 타이틀과 역사적 정체성을 도둑질해 간 반면, 전도는 저렇게 극성스럽게 안 하기 때문에 불신자들로부터 그런 쪽의 반감을 사지는 않는다. 아무리 봐도 진짜 머리 좋게 전술을 구사하고 있는 곳이다. (저기가 어딘지는 이곳의 교리 노선에 공감하는 분이라면 아주 쉽게 눈치챌 것이다)   그런데 또 반대편 집단에서는 이거 뭐 정말 복음을 전해야 하는 건전한 교회들이 차마 전파를 엄두를 못 내게 만들 정도로, 구령을 가장한 찌질한 짓은 전부 도맡아 해 놨으니, 지능안티도 정말 분야별로 골고루 다 한다. 이런 시국에서 진짜배기 예수쟁이들은 세상을 향해 복음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 것일까?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띠 두르고 있는 것까지는 좋다. 그건 맞는 말이니까.그런데 인간적으로 빨간 조끼, 붉은 십자가 차림은 안 했으면 좋겠다. ㅜㅜ그런 차림은 한 1900년대에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들어올 때 최권능 목사 같은 사람이 했으면 효과가 있었을지 모르나, 지금은 약발이 너무 떨어졌다. =_=;;   주변으로부터 복음에 대해 온갖 삐딱한 편견으로 세뇌돼 있는 다른 불신자들의 눈높이도 좀 생각해라.차라리 단정한 검은 정장 차림이 낫다.   지하철 안에서 가끔 나이 지긋하신 중년 신사가 성경책 들고 선교 행위(?) 하는 걸 보면 참 애증이 교차한다.본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복음 전파에 관한 한,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는 못할망정, 남을 뒷다리 잡고 김 빠뜨리고 분위기 깨는 짓은 절대로 안 한다. "나도 교회 다녀요, 안 주셔도 돼요"하고 전도자를 매몰차게 피하는 게 아니라, "아멘 할렐루야, 수고하십니다" 이런 격려 정도는 주변에서 누가 보든 말든 해 줄 준비가 돼 있다. 누군가가 똑바로 복음만 제대로 전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복음 전한다는 사람이 좀비가 연상될 정도로 흐리멍덩한 눈빛. 개그만화 표현을 빌리자면 눈이 죽어 있다. (메가신데루. -_-)염불하는 듯한 어눌한 말투.. 이건 뭐 구원은커녕 기겁을 하고 달아날 그런 인상이다. 담대한 것과 무례한 것은 서로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복음 전파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저런 것만 자꾸 보다 보면, 전도란 광신자 미친놈, 맛이 간 이단들밖에 안 한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에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지하철에서 그렇게 뭔가를 선포하고 전도지 나눠 주는 것은 어지간한 담력 없이는 못 할 일인데, 그렇게까지 하고서 겨우 한다는 말이 죄와 심판에 대한 선포는 없고 예수님의 무슨 면모를 믿으라는 말도 없고... 나눠주는 전도지를 보면 그냥 자기네 교회 자랑에다, 목사인지 무당인지 분간이 안 되는 영험하고 신령한(?) 목사 프로필들. 여자 목사 사진까지 보면 정말 민망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러니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다. 창궐하는 이단들과 극심한 반기독교 정서가 지난날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과 팽창을 완전히 무력화시켜 놓았다. 하나님은 아무리 자신의 뜻이 이뤄지길 원하신다고 해도 그 과정을 결코 등한시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내가 믿는 성경의 하나님은 섬뜩할 정도로,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공의로우신 분이다.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교회라고 해서 죄를 묵인하고 자신의 법을 범해 가면서까지 자신의 뜻을 성급히 이루게 하시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반대로 자기 편인 애들에게까지 공정하고 엄격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과 은혜를 거절한 진짜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에게는 얼마나 추상 같은 심판주가 되실지를 우리는 다시 한번 묵상하면서 떨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서 자동으로 때에 적절한 말을 준비할 능력이 없다. 복음 전파를 위해 믿음의 선배들을 경험적으로 구축해 놓은 많은 매뉴얼(로마서의 대로 같은)과 노하우가 존재하겠으나, 결국 최종적으로는 지금도 살아 계신 주님, 즉 인간의 위기를 자신의 기회로 언제나 뒤바꿔 놓는 그분의 능력을 기도로 구하고 불신자들의 마음밭을 갈아 놓는 초기화 단계가 필요할 것이다. 욕을 먹고 핍박은 받더라도, 복음에 대해서 정확하게 전달은 제대로 하고서 그 전달에 대한 반응으로 반발을 받아야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한 것이며, 겔 3:19가 말하는 면책 사유가 성립하여 수고에 대한 보상이 있지 않겠는가.[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41:55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2010-02-27 20:18:41 | 김용묵
킹제임스 성경을 전할 때에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 그래요 !"하고 호기심을 보이고 본인도 정보를 알아본다고 인터넷을 검색해봅니다.정성권 형제님도 언급하셨듯이 이내 "이거 이상한 성경인 것같은데 ?"하고 바로 전화가 옵니다. (저도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는 교회로 옮기면서 겪었던 저를 보는 부담스런 시선들 때문에 무척 고통스러웠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럼 아는 범위내에서 설명하고 선입견을 버리고 킹제임스에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고 스스로 판단해보라고 하며 자료도 드립니다.하지만 기대보다는 모자라서 솔직히 낙담할때가 많습니다.  그들이 처음에 갖게되는 세상적 시각/선입견을 극복하기가 어려운가 봅니다.   저 또한, 킹제임스를 너무 세상지식같이 전달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도 됩니다.    그런데 왜 옳은 말씀을 읽으라고 전하는데 있어 사람마다 반응하는 것이 다를까요 ?믿음의 방향과 정도에 따라 다릅니다.  자기가 가는 길이 절대적인 길이라고 맹신하시는 분과 방향은 잘못됐지만 그쪽으로의 옅은 믿음을 가지신 분은 반응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후자는 대화라도 좀 되지요....물리적 현상에는 관성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외부로부터 힘이 작용하지 않는한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등속으로 움직이려고 하고 정지상태는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입니다.모든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믿음에 맞는 일정 속도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지요, 어떤 사람은 빠른 속도를 가지고 그 방향으로 급속히 성장하시는 분도 있고 느린 속도를 가지신 분도 있으며 반면에 거의 정지 상태로 머물러 있는 분들도 계십니다. 옳은 방향으로 가시는 분들은 점점 더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하시겠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빠른 속도로 가시는 분들은 상당한 외부의 힘이 작용해야 정지상태를 거쳐 "돌이키게" 됩니다.이런 분들에게 킹제임스 소개를 처음할 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로 밖에 들리지 않습니다.돌이키도록하기 위해서는 정말 엄청난 힘이 필요합니다.   이 힘이 어디서 올까요 ?  말씀과 주님의 도우심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알려주는 메신저에 불과한 아무 힘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Word는 말씀이고 World는 word에 l이 추가된 것이라 하며 여기서 l은 lie 거짓말이라고 합니다.그래서 말씀과 세상은 절대로 같이 공존할 수 가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에 옳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세상에 옳은 말씀을 전할때에 오해를 당하거나 세상이 우리의 열심/노력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아무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주의 능력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빛을 발할 것이기 때문에 더욱 더 희망적입니다.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장 13절)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41:55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2010-02-25 13:12:37 | 김학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어떤 형태였습니까?   유관순, 전태일 같은 열사형? 전혀 아닙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라!” “우리 유대인에게 독립을 달라!” 열사라고 부르기에는 예수님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너무나 조용히 침묵을 지켰으며, 오히려 자기를 죽이는 무리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흥분한 군중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제자들까지 맥빠지게 하는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하신 것입니다.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던 사람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허무하게 죽을 수가 있는지 저라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순교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과거에 우상 숭배하던 동족을 책망하다 죽어간 그런 대언자들과 같은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우상 숭배와는 정반대로 제 딴에는 ‘신성모독’이라는 구실로 정작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정말 말이 안 되죠. 예수님을 따라 훗날 이루 셀 수 없는 크리스천들의 순교 행렬이 이어졌지만, 예수님 자신이 무슨 이념이나 신앙을 위해 순교한 것은 아닙니다.   흔히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피땀을 흘리면서 괴로워하면서 아버지께 기도하는 모습을 두고 예수님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게 예수님이 좀 있다 체포되고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대못이 박힐 게 무서워서, 그게 두려워서 그렇게 괴로워한 거라고 믿는다면, 심하게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형은 전인류 역사를 통틀어 매우 고통스럽고 잔학한 사형 방법으로 손꼽히지만, 역사적으로 예수님만 십자가형으로 죽은 것은 아닙니다. 또한 십자가형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엽기적인 방법으로 비참하게 죽은 순교자도 많습니다.   예수님이 괴로워한 이유는 그런 것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더 고차원적인 것입니다. 창세 이래로 서로 사랑하며 기쁨만을 주고받던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제가 오로지 인간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잠시 끊어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전혀 짓지 않은 차원을 넘어 죄라고는 알지도 못하던 분이 죄 덩어리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게만 하던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저주가 되고 진노를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늘 아버지라고만 부르다가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처음으로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잖아요?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이 모든 계획이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지혜로 나온 것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인간의 감정으로 쉽사리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이 아니옵고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그분께서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큰 핏방울같이 되어 땅에 떨어지더라. (눅 22:42, 44)   그래도 결국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순종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뤘습니다. 예수님은 탈진과 과다출혈로 목숨을 잃기에 앞서 스스로 자기가 목숨을 내어 줬습니다. (요 10:15)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죄수들보다 유난히 빨리 숨을 거두었지만, 장사된 후 부활하셨고, 우리 크리스천들의 믿음의 창시자가 되고 우리의 구원자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순교는 우리에게 감동과 도전은 주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비교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걸 한낱 고문과 사형 집행이 두려워서 예수님이 저렇게 기도한 거라고 아는 건 정말...   그나저나 하나님께서 왜 십자가형을 택하셨을까요? 성경적인 원칙대로라면 인간의 죄를 사하려면 피를 흘려야 했기 때문에 일단 독극물 주사나 교수대, 화형 등은 아닙니다. 유혈 공법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능지처참 정도로 오버(?)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돌로 쳐 죽이는 것은 율법을 어긴 죄인을 사형에 처하는 방법인데 예수님이 그런 사유로 죽으시는 건 아니기 때문에 제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미 예수님은 몇 차례 돌로 맞을 위기를 겪었지만 그때는 오히려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럼 참수는? 참수의 신약 성경적 의미는 믿음을 지킨 의인의 억울한 죽음에 가깝습니다. 침례인 요한의 죽음이나 계시록에 기록된 환란 성도들의 죽음 등. 이것도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예수님의 죽음과는 성격이 약간 다릅니다. 이거야말로 예수님 자신보다는 그 이후의 순교자적 죽음이란 의미로 남겨 둬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 반면 십자가형은 채찍질부터 시작해서 충분히 유혈 공법임과 동시에 나무에 매달린 자라는 수치와 저주의 의미(신 21:23, 갈 3:13)를 담고 있습니다. 모세가 높게 쳐든 불뱀에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란 의미를 넣어 둔 것도 정말 절묘한 일치입니다. (요 3:14)   십자가형은 그 자체가 죄수의 목숨을 끊는 방법이 아닙니다. 죄수를 극도의 수치스럽고 고통스런 상태로 만들어 놓고 죽을 때까지 내버려 두는 방법이란 점에서 더욱 잔인하고 비인간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갑자기 숨을 거두신 것 역시 십자가형 자체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 언제까지나 '내가 스스로 목숨을 내어 놓은 것'이라는 논리가 틈탈 여지가 있습니다. 이런 집행 방법 하나하나에도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가 숨어 있습니다.   명절은 사형 집행은커녕 오히려 죄수를 한 명 풀어 주는 날이었고 오히려 악한 무리들부터가 명절에는 예수님을 안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배신자 가룟 유다의 동조 덕분에 기적적으로 명절 바로 직전에 사형이 집행됐습니다. 부적절한 시기에 완전히 졸속으로 전시용으로 사형이 집행된 바람에, 옆의 두 들러리 강도는 십자가에 잠깐 폼으로 매달려 있다가 나중에 다리까지 꺾인 채 더욱 비참하게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혼자만 사형에 처하기에는 좀 뭔가 허했나 보죠?) 십자가형 집행으로 사형수가 죽기까지는 원래 며칠 정도 걸린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사형 집행을 계속할 수 없는 바로 전날 집행을 강행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이라는 의미를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것조차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입니다. 악한 무리들의 음모들조차도 다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는 성경 예언을 이루는 도구로 전락했을 뿐입니다.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고전 2:8)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가 예수님 명령에 즉시 살아난 것처럼, 온 몸이 채찍질에 만신창이가 되어 죽으신 예수님도 문자 그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때 무덤 안에서는 일이 일어났을까요? 예수님의 몸은 나사로와는 달리 썩지도 않았겠죠. 시체에서 갑자기 상처가 사라지고 피부가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예수님이 눈을 뜨고 일어나고, 게다가 옷까지 짠하고 다시 생겼을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절대 밀어낼 수 없다던 돌문은 그냥 통과했을지도 모릅니다. 돌문 개방은 예수님의 무덤 탈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부활을 증명하는 전시용으로 하신 거겠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가시면류관을 쓴 얼굴의 상처와 다른 채찍을 맞은 상처들은 다 사라졌지만 못자국과 옆구리의 상처만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요 20:27) 이 역시 참으로 상징적인 의미가 큽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그분이 당한 상처로 인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영원히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찬송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크리스천이 두고두고 묵상하고 감동 받고 영적으로 도전 받아야 할 주제입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41:55 자유게시판에서 복사 됨]
2010-02-22 15:45:10 | 김용묵
궁금합니다. 늘 보고듣는 용어중에 Q.T(Quiet Time)가 말씀에 대한 명상/묵상정도의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 같은데 이것이 원래 영어적 어원을 제대로 갖고 있는건지 아니면 교회전통으로 쓰다보니 사용되온것인지요 혹시 한국사람들만이 쓰는 토속영어(콩글리쉬)는 아닌지요 검색해보면 1800년대에 누가 최초로 사용했느니등등의 정보가 보이지만 만족한 용어설명은 아닌듯합니다. 진정 올바른 역사를 가진 표현이 아니라면 많은사람들이 쓰고있고 써왔다는 이유만으로 사용되서는 안될텐데요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40:30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2-10 08:26:54 | 김규태
http://blog.naver.com/attltb/150045579497   최근의 진화론 연구결과에 의해 창조론의 주장을 아주 철저히 무시하고 논박하고 있는 페이지인데요. 시간이 되시면 적절한 반론이 될만한 글을 올려주시면 제게도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믿음은 과학적 사고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무조건 도외시할 수도 없더군요.[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38: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2-06 06:41:16 | 박종철
1.   성경을 전서도 아닌 일부만을 구해다 좀 읽으려고 해도, 필사가 끝날 때까지 며칠을 기다리고 인건비도 지금 우리 시세로 수십만원을 줘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기독교가 박해 받는 곳에서는 마을 사람 전체가 목숨을 걸고 한데 모여 한 권뿐인 성경책을 읽으며 영적 생활의 명맥을 유지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풍요 그 자체이다. 널린 게 성경책이고, 인터넷으로 위치만 입력하면 몇 초만에 원하는 성구를 바로 볼 수 있고, 단어 검색도 되고, 그것도 모자라 열몇 종류의 역본들을 줄줄이 꿰어서 한 눈에 볼 수도 있는 시대가 됐다. 성경에 접근하는 방법이 그렇게 바뀌었을진대, 지금은 성경을 두고 하나님과 마귀 사이의 영적 싸움의 양상도 180도 변했다.   그렇다. 마귀는 과거에는 성경을 보는 대로 몰수하고 불태우는 식으로 공격했으나, 성경을 무식하게 없애 버리는 게 불가능해진 지금은, 숫제 가짜 짝퉁 성경들을 마구 만들어 내서 진짜 성경을 매장시키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맹공격을 퍼붓고 있다! 이는 역정보 유포라는 대단한 첩보 전략이다.   본인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성경이라는 타이틀을 쓰고 나온 역본들이 내용과 의미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질서와 혼돈의 창시자가 아니며, 따라서 이런 여러 성경을 모두 인정하실 리는 전무하다. 이는 기독교의 보안과 근간, 정체성이 걸린 대단히 심각한 문제이다.   크리스천이 자신이 읽는 성경의 진위 여부를 판단한 후, 가짜 성경을 단호하게 버리고 진짜 성경을 손에 쥐어야만 하는 이유는 수없이 많다. 다음은 그 몇 가지 예이다. 오로지 진짜 성경에만 ‘없음’ 처리되어 삭제된 구절이 없다. (마 18:11, 마 23:14, 행 8:37 등) 오로지 진짜 성경에서만 사탄 마귀의 옛 이름이 루시퍼(사 14:12)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로지 진짜 성경에서만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장소 이름인 갈보리(눅 23:33)를 찾을 수 있다. 오로지 진짜 성경에서만 사티로스, 유니콘, 용 등 초자연적인 영적 존재에 대한 조명을 얻을 수 있다. 오로지 진짜 성경에만 구약 성경에 지옥(hell)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천국, 하늘은 있는 그대로 번역하는 사람이 유독 지옥만은 음부, 무덤, 스올, 하데스 따위로 정체를 가리려 애쓰고 있다. 그리고, 오로지 진짜 성경만이 판권이 없으며, 판권을 따내기 위해 다른 역본들과는 다른 어렵고 장황한 단어와 표현을 일부러 찾아 애쓴 흔적이 없다. 이렇듯, 진짜 성경의 특성만 열거해도 책을 한 권 쓸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그 이유들 중 좀 색다르고 어찌 보면 매우 심각한 주제를 두고 진짜 성경과 가짜 성경을 판단하고자 한다. 이제 여러분은 ‘킹 제임스 성경보다 읽기도 편하고 뜻도 정확하다는’ 소위 현대 역본(영어 성경) 번역자들이 기를 쓰고서 조장하는 표현, 그리고 한편으로는 필사적으로 혐오· 기피· 거부하는 표현이 있다는 것을 보고, 그들의 비양심적인 태도와 현 시국의 심각성에 경악하게 될 것이다. 성경을 믿는 크리스천의 지성과 양심을 자극하는 명확한 증거들을 보게 될 것이고, 그 증거의 열매는 당신의 결단과 행동 변화로 나타날 것이다.   2.   성경은 인간의 끔찍하고 추악한 죄, 그리고 인간의 가장 은밀한 면모에 대해 다룰 때, 이를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자들에게 불필요한 상상과 자극도 일으키지 않게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특히 성에 대해서는 얼마나 완곡하고 조심스럽게 언급하나 모른다.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매” (창 4:1), “교접의 씨” (레 15:16), “여인들의 관례.” (창 18:11) 음란한 단어는 말할 것도 없고, 어지간한 성 교육 시간에 다 배울 법한 단어조차도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성을 만드신 분이다. 그래서 성경이 성인물처럼 취급되지 않게끔, 표현 하나하나에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생각이 가미되지 않고 지극히 ‘순수하다’(시 12:6, 시 119:140)고 성경이 스스로 규정하고 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뿐만 아니라 이는 분명, 하나님께서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린이에 대해서까지 성경의 접근성을 고려하신 것이 틀림없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라.” (눅 18:16 중간)   그렇다. 하나님은 어린이를 사랑하신다. 사람이 모름지기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읽고(딤후 3:15) 영적으로 자라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킹 제임스 성경이야말로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쉽고 간결한 성경이며, 어린이를 향한 하나님의 따스한 배려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고마운 성경이다. 폭력물로 분류되는 바람에, 정작 예수님을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대인 어린이가 볼 수 없게 되어 버린 <그리스도의 수난> 같은 영화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요즘 나오는 성경들에서는 하나님의 그러한 배려를 찾을 수 없다. 앞에서 예를 든 세 구절만 해도 킹 제임스 이외의 성경은 그렇게 기록돼 있지 않다. 하나님은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에게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매”라고 영감을 주셨지, “이브와 동침하매”라고 말을 안 하셨다. “여인의 관례에 따른 것을 멈추매”라고 말하셨지 “폐경기가 지나매”라고 말을 안 하셨다. “짐승과 함께 눕는 자”라고 했지 “짐승과 성관계를 갖는 자”라고 안 했다. “이삭이 자기 아내 리브가와 즐겁게 논다”(창 26:8 sport)고만 했지, 서로 껴안고 있었다고 표현 안 했다. “자기 쾌락에 빠져 바람을 맡으며 킁킁대는 암나귀”(렘 2:24)라고 말씀하셨지 “발정 나서 헐떡대는 암나귀”라고 하신 적은 없다! 이래도 성경이 뜻만 통하면 괜찮은 책인가? 성경 번역에서 동적 일치 기법이 얼마나 사탄적인 생각인지 부디 경각심을 가지기 바란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라는 바이블은, 통계에 따르면 ‘주 lord’라는 단어가 71번밖에 안 나오고(킹 제임스는 8000여 번), 마치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한 번도 주님이라고 호칭하지 않은 저질이다. 그런데 sex라는 단어는 199번이나 나온다. 특히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행음에다 비유한 예레미야, 호세아서를 이 역본으로 보면 가히 섹스 성경이라는 말밖에 안 나온다. 이게 바로 지금 우리나라를 포함, 전세계적으로 읽기 쉽고 잘 와 닿는다고 격찬을 받고 있는 <메시지> 바이블의 정체이다. (☞ 관련 링크)   NIV는 킹 제임스 성경에서 ‘알다(know)’, 개역성경도 ‘상관하다’라고 옮긴 단어를 ‘have sex with’ (창 19:5, 삿 19:22)라고 친절하게 진짜 의미를 써 놨다. 성령님의 가르침과 조명을 받으며 경건하게 묵상해야 할 성경에 이 무슨 난장판인가? 하나님이 정녕 성경을 그렇게 기록하셨단 말인가? 그 중 단연 압권인 예를 보이겠으니 놀라지 마시라. NIV에 따르면,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다.   “신약 시대가 됐는데도 아직도 할례를 가지고 장난을 치면서, 너희를 혼동시키고 어지럽히는 자들이 있다고 들었다. 정말 그런 문제아들은 아예 자기 X을 짤라 버렸으면(emasculate) 좋겠다.” (갈 5:12)   정말이다. 직접 책이나 인터넷으로 확인해 보시길.     기가 차지도 않는다. 게다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킹 제임스 이외의 모든 성경들은 결국 저런 뜻이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도로, 신약 역사상 성령으로 가장 충만했을 거라고 회자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성경에 음담패설을 기록한 사람이 되었다. 저게 도무지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부패한 대화는 절대로 입 밖에 꺼내지도 말라”(엡 4:27, 29)고 권면한 사람이, 그것도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지껄일 소리인가?   사도 바울은 그런 문제아들이 제발 교회에서 끊어지고(be cut off)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뿐이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그걸, 불온사상을 지닌 성경 번역자들이 cut을 능동으로 변개한 것이다. 이 정도면 성경 번역자가 아니라 성경 “반역자”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3.   성에 탐닉하고 있는 현대 역본들의 추태에 대해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그야말로 맛만 좀 본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제부터는 지금까지 예를 든 것보다 더욱 치명적인 독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만큼 성 범죄, 성 문란, 비정상적인 성관계에 대해 단호하게 엄금하고 정죄하는 책은 없다. 결혼한 남녀의 1:1 부부 관계 외의 모든 성적 접촉은 음행이고, 성 정체성이 문란해 지는 것도 중죄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성경은, 그런 죄 자체를 혐오하는 게 아니라, 그런 죄를 그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것”을 혐오하고 있다! 하나님이 정말로 있는 그대로 폭로하고 정죄하고 있는 성 범죄에 대한 언급은 표현을 희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동성애이다. 아무리 인간이 의학, 심리학으로 동성애를 합리화하려고 한들 소용없다. 하나님이 그건 죄에 대한 심판의 결과라고(롬 1:24-27) 못을 박아 버렸다면 그런 것이다. 그게 정말 맞는지는 동성애자 본인이 잘 알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동성애자는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동성애자’라고 중립적으로 불러 주기에도 너무나 가증스러운 존재였다. 그래서 꼭 ‘남색하는 자’, ‘남자와 더불어 자기를 더럽히고 욕되게 하는 자’라고 길고도 적나라하게 일컬으셨다. 영어로는 죄악의 온상 소돔의 이름을 딴 sodomite.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선한 왕들은 부임할 때마다 그들을 이스라엘 땅에서 추방했지만 이런 자들은 없어지지 않았다. (왕상 14:24, 15:12, 22:46, 왕하 23:7)   그런데 구약 성경에 다섯 번 나오는 sodomite가 킹 제임스 이외의 성경에서는 사라졌다. 미동(꽃미남 같은 남자), 내시, 남창 등으로 바꿔서 그냥 선천적으로 나긋나긋하고 남자 구실 못 하는 남자, 또 성매매를 하긴 해도 그렇게 변태 같은 느낌은 안 드는 표현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아까와 같은 과감하던 문체는 어디로 사라졌나?   가나안 이방 종교에는 남창· 내시가 있었다고 아무리 신학자, 고고학자들이 변명하더라도 소용없다. 하나님이 동성연애자라고 말씀하셨다면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동성연애자, 아니 남색하는 자가 맞는 것이다!   한편으로 신약 성경에서 로마서 1장과 더불어 성 문란 행위에 일침을 가하는 구절은 단연 고전 6:9이다. 그런데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욕되게 하는 남자’가 언급되는 이 구절이 킹 제임스 성경만치 확실하고 단호하게 번역되어 있는 성경 역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표현은 너무나 명백해서 동성애자 이외의 핑계가 틈탈 여지가 도저히 없으니, 변개된 성경들도 어쩔 수 없이 동성애를 뜻하는 단어로 번역을 했다. 하지만 abuser 같은 단어도 빼고 마지못해, 아주 중립적이고 그다지 도덕적인 느낌이 없는 단어인 homosexual을 삽입한 것에 그쳤다. 비유를 들자면, 하나님은 아주 직설적이고 민망하기까지 한 토박이말로 성과 관련된 죄를 폭로하셨는데, 잘 와 닿지 않고 좀 중립적인 느낌이 드는 한자어로 바꿨다는 뜻이다.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이렇다. 지옥에 간 부자를 다루는 눅 16:23은 상황이 너무 명백하니까 어쩔 수 없이 hell을 인정했지만, “지옥의 문”들이 교회를 능히 이기지 못할 거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응당 음부, 하데스라는 뿌연 말로 바꿔 버린 고약한 센스이다. 지옥의 입구에는 문이 있고, 주님께서는 그 열쇠(계 1:18)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데, “음부 권세”(마 16:18. 개역)는 도대체 뭘 뜻하는가?   그나마 NIV는 그 동성연애자에다가도 “homosexual offenders”이라고 단어를 또 바꾸어, 모든 동성애가 다 나쁘지는 않다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얼마나 치떨리고 교묘한 변개인가!   고전 6:9에 역시 존재하는 effeminate, 즉, 하리수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천성을 버리고 여자가 되어 버린 남자도 킹 제임스 이외의 성경에서는 남아나지를 못해 있다. 전부 구약의 sodomite와 마찬가지로 남창으로 단어를 변개했다.   끝으로, fornication(음행)이라는 직설적인 단어도 요즘 성경에서는 좀체 찾을 수 없다. fornication은 주님께서 인정하신 이혼 사유 중의 하나이다. (마 5:32, 19:9) 이 단어도 구약 성경에서는 대부분 창녀짓으로 바뀌었다. (대하 21:11, 사 23:17, 겔 16:29) 창녀짓은 킹 제임스 성경에도 따로 언급되어 있다. (겔 16:15) 즉, 다른 의미이다. 그런데 왜 기를 쓰고 음행이란 단어를 안 쓰려는 것일까?   신약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성적 부도덕함(sexual immorality)으로 바뀌었고, 어떤 데서는 그냥 sexual이라는 단어까지 빼서 의미를 훨씬 약화시켰다. 음행을 책망하는 고린도전서의 취지가 무색할 정도이다. 그리고 롬 1:29와 갈 5:19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죄의 목록 가운데 간음(adultery)만 남기고 음행은 아예 삭제해 버리기도 했다. 이렇게 음행에 대한 정죄가 희석되고 약화된 성경들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나 종교 개혁자들, 그리고 바른 믿음의 선조들이 손에 쥐었던 그 성경이 결코 아니다!   4.   독자들이여, 이 모든 예가 결국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 현대 역본 번역자들은 독자에게 하나님이 의도하지 않은 음란한 생각을 조장하는 한편으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추하고 역겹고 죄스러운 성 범죄의 실체를 가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어떤 영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들의 사상은 어떠할까? 문자적으로 지옥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만치 동성애나 음행을 혐오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 사람이 당신이 읽는 성경을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말을 굉장히 돌려서 번역하거나, 아예 변개· 삭제까지 한 것이다.   이것은 마귀의 세력의 음모이다! 어떻게 성경을 만드는 일에 마귀가 개입하겠냐는 바보 같은 질문은 하지 말라. 성경은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이고, 응당 돈이 되는 책장사이다. 지금이 성경을 목숨을 걸고 읽어야 하는 시대가 아닌 이상, 성경으로 이익 챙기고, 덩달아 성경을 부패시키고 그 속에 독약을 타려는 음모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AND와 OR의 차이를 기억하기 바란다. 선은 오로지 AND이다. 지극히 작은 말씀 하나만 부패시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절대적인 선하고 순수함은 깨져 버린다. 마귀는 성경의 무오성과 일관성을 깨뜨리고 성경에 대한 자그마한 의심을 심으려고 노력 중일 뿐이지, 성경에 “너는 사탄을 숭배할지니라”란 멍청한 구절을 넣으려고 투쟁 중인 게 결코 아니다.   근래에 영어권에서는 성별· 인종을 차별하지 않고, 특정 계층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지 않는 중립적인 용어만을 공식 석상에서 사용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이제 죄까지 덮어 주는 제도로 오래 전부터 변질되었다. 오늘날이 얼마나 죄로 넘쳐나는 음란한 세상인가? sodomite가 gay가 되고, drunkard가 alcoholic이 되고, fornication이 free love나 pre-mature sex로 미화되는 것 말이다. 성경은 악을 악이라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는 자에게 화를 선포하고(사 5:20), 이런 거짓된 입술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말한다(잠 17:4). 그런데 이런 사상의 영향을 받아 성경 자체가 죄를 미화하는 단어로 물갈이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저런 저질 성경을 읽고서 참 성경의 저자인 성령님의 조명을 어떻게 받겠으며, 제정신 박힌 크리스천이 어떻게 양성되겠는가? “읽기 쉬운 우리 시대 길거리 말투”라는 광고 문구는 그 자체가 저질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 데에 현혹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하다”란 성구로 유혹을 이겨라. 킹 제임스 성경의 언어는 한낱 인간의 고대 영어가 아니라, 지극히 절제되고 연단된 하나님의 언어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이 증거하시는 언어라서 처음에 좀 생소할 수는 있어도, 결코 죽은 고어일 수는 없다.   킹 제임스 성경은 어중이떠중이가 다 자기 권리 따지고 외치는 말세의 라오디게아 교회 기간 대신,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필라델피아 교회 기간에 탄생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카톨릭을 대적하던 올곧은 왕, 그것도 리처드, 찰스 같은 이름도 아니요 성경의 인물과 이름이 일치하는 제임스라는 왕의 명령에 의해 질서 있게 번역되었다. 왕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저작권, 돈 같은 문제가 개입할 여지도 전혀 없었다.   번역자들은 TV, 인터넷처럼 인간을 타락으로 이끄는 매체가 없던 보수적이고 건전한 시절에 살았으며, 어려서부터 원어 성경을 술술 외우고 성경의 원어는 물론 인접 국가들의 고대 언어들까지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던 당대 최고의 엘리트 수재였다. 덕과 지식을 고루 갖추었으며, 더구나 성경이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임을 진심으로 믿고 두려워한 신앙의 위인이었다. 소설 쓰듯이 제멋대로 번역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원어와 문자적 일치가 이루어지게끔 하나님의 의도를 살려 번역하였고, 심지어 부득이하게 원어와 대응이 안 되는 단어를 추가할 때는 두려워서 이탤릭체 처리를 하는 정직함까지 보였다. 한 마디로 사상이 건전하고 올발랐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쓰셔서 신구약 성경을 걸출한 영어 합본으로 완성한 것이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미디어(책, 신문기사, 영화, TV, 게임, 인터넷 등)를 영적으로 시험하고(prove), 저자나 번역자가 무슨 믿음과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이것을 만들었는지 따져 보자. 성경도 예외가 아니며, 성경이라고 다 받아들이지 말자. 개역성경, NIV를 끝까지 고집하는 사람과, 올바른 성경인 킹 제임스 성경을 받아들인 사람은 서로 사상이 다르고, 믿는 영이 다르다.   지구와 온 우주가 불로 소멸된 뒤에도, 구원받은 성도들은 셋째 하늘에 영원히 정착되어 있는 성경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그때 하늘에 적혀 있을 말씀은 도대체 어느 역본 말씀일까? 우리의 자녀들을 음란물로부터 보호해야 하듯이, 크리스천 부모들은 자기 자녀를 음란한 성경으로부터 보호하자![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38:3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2-03 10:30:55 | 김용묵
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todo=view&atidx=0000031767 과연 이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다. 이것은 프랑스 파리 근교의 한 건물의 지하 깊숙한 곳에 매우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 전쟁이 일어나 폭탄이 떨어져도 어떤 손상을 입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이것에 대한 보안은 이게 다가 아니다. 이것은 먼지조차도 접근을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를 둘러싼 공기의 습도와 온도 역시 철저하게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되어 있다. 이를 위해 이것은 높이와 너비가 39.17밀리미터가 되는, 끝이 둥근 원형 유리관 속에 또 다른 작은 원형 유리관 여러 개에 겹겹이 둘러싸여 있다. 이것은 세상과 공기도 섞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격리되어 있는 것이다.지난 120년 동안 이것이 저장실 밖으로 나온 것은 고작 3번뿐. 이것을 실제로 본 사람은 극소수로, 일반인은 그 누구도 이것에 접근할 수 없다. * * * * * 국제 킬로그램 원기는 이 세상의 모든 1킬로그램의 어머니와 같다. 세상의 모든 1킬로그램은 바로 이 원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물질이 질량이 얼마나 나가는지는 바로 이 국제 킬로그램 원기에 의해 정해진다. 정확하게 1킬로그램이란 게 얼마나 되는 거냐는 질문의 답은 바로 이 국제 킬로그램 원기인 것이다. * * * * * 겨우 1킬로그램짜리 쇳덩어리가, 거의 반도체 공장 이상의 우주 철통 보안을 받으며 애지중지 보관되는 과학계의 최고 보물인 이유는, 이게 정확하게 1kg, 아니 1kg을 정의하는 "최종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질량은 비행기, 인터넷, 우주선을 만들어 낸 인류의 21세기 과학 지식으로도 아직 원시적인 인공 구조물에 의존하여 정의하고 있는 유일한 단위입니다. 옛날, 그러니까 18세기쯤에는 길이의 단위도 미터 원기가 최종 권위였습니다. 그러다가 기술이 발전하면서 더 절대불변인 기준으로, 가령 "빛이 진공에서 1/xxxxx 초 동안 진행한 거리"와 같은 식으로 수 차례 정의가 바뀌었죠.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1초의 정의도 "무슨 원자가 절대 온도 0도에서 xxxxx 번 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 이런 식으로 절대불변이면서, 현대 과학 기술로 측정 가능한 기준으로 바뀌었지요. 옛날에는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의 1/86400 이런 식으로 더 부정확했었습니다. 그러나 킬로그램의 정의만은 19세기에 제정된 정의를 아직까지도 업데이트하지 못했습니다. 질량은 시간, 길이와 더불어 시공간과 물질을 기술하는 한 축으로써, 과학에서 기본 중의 기본 개념입니다. 중력이라는 개념이 가미된 무게야 디지털 저울로도 측정하지만, 지구에서나 달에서나 동일한 절대 질량을 측정하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원시적인 양팔 저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5kg 추 얹고, 1kg 추 얹고.. 마치 돈 내듯이. * * * * * 그래서 국제 킬로그램 원기는 표준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겐 일종의 수치이다. 최첨단 과학기술의 시대에도 여전히 1킬로그램이 얼마인지는 전적으로 이 구닥다리 물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언제 없어지거나 손상될지도 모를 이런 물건이 바로 질량이라는 건 과학을 비웃음거리로 만들기에 딱 좋은 예다. 독일의 한 표준 과학자는 “킬로그램은 측정과학계에서 하얀 재킷에 묻어 있는 얼룩과도 같다”고 말했다. * * * * * 세계 각국에는 이 킬로그램 원기를 정교하게 복제한 사본이 국가별로 표준 과학 연구소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몇 년마다 정기적으로 총회를 열어 복사본들의 질량을 서로 측정하여 오차가 생기지는 않았나 대조합니다. 이게 어긋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밀리그램 단위로 무게를 측정하는 금이나 귀금속 거래를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1세기가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원기와 복사본, 또는 복사본과 복사본 사이의 오차가 점차 커지고 있고(물론 그래 봤자 마이크로그램 단위이긴 하지만) 그 원인 및 해결 방안을 과학계가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해 고민이라고 합니다. 이 짬밥을 너무 오래 먹은 구닥다리 킬로그램 원기를 궁극적으로 퇴출시킬 목적으로, kg의 새로운 정의를 만들기 위해 세계 각국이 애쓰고 있습니다. 국제 표준으로 채택되는 정의를 만들어 낸 국가 내지 학교, 연구소는 돈과 명예를 한몸에 거머쥐는 스타가 되겠죠. 그 방법은 절대적으로 엄밀하면서도 너무 어렵지 않게 어디서나 재연이 가능해야 하는데, 아직 이렇다할 뾰족한 대안은 나오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에는 히브리/그리스어가 쓰였고 큐빗, 므나, 바스, 드라크마 같은 길이, 화폐, 부피, 무게 등의 단위가 쓰였습니다. 그 반면 지금 이 마지막 시대에는 영어가 세계 공용어이고 미터법이 학계에서 통용되고 있으며, 달러나 유로 같은 화폐가 꽤 널리 통용되는 편입니다. 세계의 공용 언어라든가 단위는, 국제 정세 및 영적 동향과도 무척 큰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단위의 최종 권위 관념은, 하나님의 말씀의 최종 권위에 대해서 눈을 뜨고 있는 bible believer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척 크다고 생각됩니다. 세계 각국에 샘플로 전달되어 있는 킬로그램 원기의 복사본은 성경의 필사본하고 정확하게 같은 개념이지요! 그 약점과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딱히 대안이 없어서 너무 오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국제 킬로그램 원기는, 우리나라 교계에다 비유하자면 개역성경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또한 성경을 읽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의 변개, 삭제에 대해서도 모르고 관심이 없는 신자는, 마치 과학자라고 하면서 킬로그램 원기가 어긋나고 있는 것에 대한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고 새로운 정의의 필요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정확하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면 과학자라고 할 수가 없죠 -_-) 과학자들은 "언제 없어지거나 손상될지도 모를 이런 물건"에 견주어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측량하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불안해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늘과 땅이 없어질지라도 절대 없어지지 않을 절대무오한 말씀"에 맞춰 나의 마음과 행실을 교정만 하면 됩니다. 이 얼마나 극단적인 대조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무슨 성경 자필 원본이나 KJV 1611년판 원본을 교황청 도서관 지하의 반도체 제조실 같은 벙커에다 kg 원기처럼 고이 짱박아 놓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님의 변모하심을 직접 눈으로 본 당사자의 체험보다도 더 확실하고(벧후 1:19) kg 원기보다 더 정확하고 무오한 최종 권위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며(KJV 1611), 그 말씀의 순수성과 절대불변 보존에 대한 약속까지 주어져 있습니다. 이 정도는 돼야 기독교가 존재 가능하지 않겠나요?[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36:18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31 23:33:02 | 김용묵
어제는 어느 미국 목사가 적은 다음의 글을 읽고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남태평양의 나병 요양소를 방문했다. 본인과 가족을 위해서 격리를 자청한 사람들 - 몸이 흉하게 일그러진 사람들 - 과 인사하며 나는 눈길을 돌리고 싶었다. 그 고통이란 차마 보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눈길을 돌리면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거기에 간 것은 잠시나마 그들의 병을 잊게 해 주기 위해서였는데 말이다.   그들의 몸은 갈 수록 더 인간처럼 보이거나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눈에 집중하면 그들과 소통할 수 있음을 나는 배웠다.  일단 내면의 인간을 만나고 나니 그 뭉그러져 쇠해가는 몸을 가장 인간다운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나아가 끌어안을 수 있었다.   그때 눈길을 돌리지 않기를 잘했다.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광경이었지만 남태평양 작은 섬 북단에 파묻혀 격리되어 살아가던 그 사람들이 내 삶을 바꾸어 놓았다.   나병 요양소는 내게 교회의 한 은유가 되었다. 타락의 일그러진 피해자들 - 아직도 죄의 오물에 물들어 있는 - 이 회중석을 채우고 지도자가 되고 감히 다른 사람들 앞에 서서 가르치고 강단에 서서 설교까지 하는 곳이 교회다. 그래서 나는 사역을 계속한다.   나의 추한 모습으로 인해 목회를 그만 두어야겠다고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성도들 가운데도 이런 체험을 가진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러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의인은 그분 앞에 설 자리가 없습니다. 나 자신의 합리화가 아니라 진정으로 나병같은 죄를 가진 한 인간이 가정을 이끌고 교회를 이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새삼 새겨봅니다. 죄로 인해 고민할 때, 그래서 목회를 그만두어야겠다고 느낄 때 손을 놓기 전에 한 번 읽어 보려고 여기에 올립니다. 샬롬.
2010-01-26 22:00:23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