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예로부터 거짓말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는 자들이 많았으며 그들은 다 거짓 대언자라 불린다(행13:6; 벧후2:1; 요일4:1). 특별히 신약성경은 말세에 이런 자들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을 거짓으로 인도할 것을 잘 보여 준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나아오나 속으로는 약탈하는 이리이며(마7:15) 큰 표적과 이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마24:11, 24).
한편 성경은 7년 환난기에 사탄 마귀와 그의 아들 적그리스도와 함께 ‘사탄의 삼위일체’를 구성하여 수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이끌 거짓 대언자에 대해 말한다. 사탄의 삼위일체 선도 참조(71). 요한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보고 그것을 묘사한 후 다시 땅속에서 올라오는 다른 짐승을 보았다(계13:11-17). 그것은 양처럼 생긴 짐승이었으며 용처럼 말을 한다. 이 두 번째 짐승의 호칭이 바로 거짓 대언자이다(계16:13; 19:20; 20:10). 사탄과 적그리스도가 인격체인 것처럼 거짓 대언자도 인격체이다. 그가 거짓 대언자라고 불린 것으로 보아 그는 적그리스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마24:24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대언자를 구분하셨기 때문이다.
용과 짐승 그리고 거짓 대언자는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흉내 낸 ‘사탄의 삼위일체’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용은 아버지 곧 사탄이고 짐승은 ‘멸망의 아들’인 적그리스도이며 거짓 대언자는 ‘용-아버지’와 ‘용-아들’에게서 나와 용처럼 말하는 ‘대적하는 영’이다. 용은 대적하는 신이고 짐승은 대적하는 그리스도이며 거짓 대언자는 대적하는 영으로서 이 셋이 모두 불 호수에 산채로 던져진다는 사실(계20:10)은 그들이 ‘사탄의 삼위일체’를 형성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거짓 대언자는 왕이 아니며 그는 자기 자신을 높이지 않고 첫 번째 짐승인 적그리스도를 높인다. 그와 첫 번째 짐승과의 관계는 성령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동일하다. 그는 땅과 그 안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첫 번째 짐승을 숭배하게 하며 생명을 주는 권능을 가지고 성령님을 흉내 낼 것이다. 거짓 대언자는 또한 이적을 행할 것이며 그의 이적 가운데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거짓 대언자에게 이 같은 능력을 부여하는 사탄이 이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욥1:16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또한 거짓 대언자는 짐승의 형상을 만들도록 사람들에게 명령하고 그 뒤 그 짐승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그 짐승으로 하여금 말을 하게 만들며 그 형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죽이도록 할 것이다. 거짓 대언자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이 표나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의 이름의 숫자를 지닌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물건을 사거나 팔 수 없게 할 것이다(계13:16-17).
그러나 7년 환난기의 끝에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강림이 있고 이때에 사탄인 용은 끝없이 깊은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며(계20:1-3) 짐승인 적그리스도와 거짓 대언자는 산채로 불 호수에 던져짐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마감할 것이다(계19:20).
2009-06-06 03:05:17 | 관리자
우리의 구원자는 나중에 거짓 메시아가 올 것을 예언했으며(마24:24) 그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지금도 대부분 이단 종파의 주동자들은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라고 한다. 그리스도, 적그리스도 참조.
2009-06-06 03:04:35 | 관리자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한 말. 대부분의 거짓말의 동기는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거나(창3:1-13) 두려움 혹은 교만으로 인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마26:69-75; 행5:1-11). 성경은 거짓말하는 것을 강조해서 정죄한다(출20:16; 엡4:25). 거짓말은 하나님의 본성에 위배되므로 옳지 않으며(딛1:2; 히6:18)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으므로 잘못된 것이다(롬1:25; 요일1:6). 사람이 진리를 말하면서도 남에게 해를 끼칠 수 있으므로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고 권면한다(엡4:25).
예수님은 마귀가 처음부터 살인자요,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라고 규정하셨다(요8:44).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거짓말하는 자이며(요일2:22) 또 하나님과 사귄다 하고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면서 어두운 가운데 걸으며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가 거짓말하는 자라고 말한다(요일1:6; 2:4). 구약의 아간과 신약의 아나니야와 삽비라는 성령 하나님께 거짓말했다가 죽임을 당했으며 이것은 모든 성도들을 위한 경고의 본보기이다(수7:22-26; 행5:1-11).
2009-06-06 03:04:08 | 관리자
구약성경은 자기를 주인으로 여기고 주 하나님께 교만한 마음을 가지는 것을 근본적인 거짓으로 표현한다(사28:15).
이 경우 거짓은 그 사람의 말뿐만 아니라 그 사람 전체를 포함한다. 이처럼 거짓에 매여 사는 사람은 거짓으로 말미암아 잘못을 범하고(암2:4) 부어 만든 우상을 섬기며(렘10:14) 거짓 꿈을 꾼다(슥10:2). 이들은 또한 자기들의 이득을 위해 주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은 것을 거짓으로 말하며 두 마음을 품고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므로 성경은 그들을 거짓 대언자라 부른다(시12:2; 렘29:9). 다시 태어나지 않은 자연인은 본질상 마귀의 자녀로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주보다 창조물을 더 경배하며 섬긴다(롬1:25). 헛된 것 참조.
2009-06-06 03:02:55 | 관리자
들어 올리는 헌물. 희생물 참조.
2009-06-06 03:02:23 | 관리자
노아 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들과 사람들의 딸들의 불법적인 결합에 의하여 거인들이 생겼으며(창6:1-4) 홍수 이후에도 가나안 땅에 거인들이 있었는데(창14:5; 수17:15) 그들은 모압과 암몬 족속의 땅에 정착해서 살았다(신2:10, 11, 20). 바산 왕 옥 역시 거인 종족이었다(신3:11, 13). 사해의 서쪽 헤브론 근처에는 아낙 족속이라는 거인들이 살았으며(민13:33; 수11:21-22) 후대에는 골리앗과 그의 종족들이 여기에서 나왔다(삼상17:4; 대상20:4-8). 아낙 족속, 골리앗, 천사, 하나님의 아들들 참조.
2009-06-06 03:01:59 | 관리자
물건을 비치기 위한 금속.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놋, 금, 은 등을 연마해서 거울로 썼으며 이집트 탈출 때에 이스라엘 여인들은 이런 거울을 가지고 나왔다. 유리 거울은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 개발되었다. 성막에서 제사장들이 손을 씻던 물두멍은 놋 거울로 만들었다(출38:8). 이처럼 잘 연마된 금속 표면은 아주 좋은 거울이었으나 표면이 완전하지 않았으므로 조금은 찌그러진 상을 만들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우리가 지금은 희미하게 본다.”고 말했을지 모른다(고전13:12). 욥37:18은 거울을 하늘에 비하고 있지만 금속 거울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상이 뚜렷하지 않았다(약1:23).
2009-06-06 03:01:32 | 관리자
히브리말에서 반역 혹은 거역은 죄, 불법과 함께 세 가지 주요 사악함 가운데 하나였다(사1:2-4).
특별히 대언서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거역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인격적 관계가 단절되고 질투하는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심판하신다(겔2:3; 20:8). 구약성경의 이스라엘의 예를 통해 사람이 얼마나 쉽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는 악한 존재인지 알 수 있다.
2009-06-06 03:01:02 | 관리자
욥은 사악한 자들의 소망을 연약한 거미줄에 비교하고(욥8:14) 이사야는 죄인들의 일이 그들을 보호해 주지 못하는 거미줄이라고 말한다(사59:5-6). 한편 잠30:28에는 왕궁에 거하는 거미가 지혜로운 것으로 나온다.
2009-06-06 03:00:32 | 관리자
고대 팔레스타인의 마을이나 도시의 거리들은 평평하지 않고 또 바퀴 달린 도구나 운송 수단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매우 좁았으며 대개 성문 근처의 큰 공공 부지에서 끝이 났다(느8:1). 이 같은 거리들은 대개 지금처럼 이름이 붙여져 있었고(행9:11) 같은 종류의 상점이 같은 곳에 모여 있어서 그 지역의 이름이 되기도 하였다(느3:31-32; 렘37:21). 사람들은 거리의 모퉁이나 튀어나온 곳에 카펫을 깔고 앉기를 좋아하였으며(삼상4:13; 욥29:7) 기도 시간에 거기서 기도하곤 하였다(마6:5).
2009-06-06 02:59:56 | 관리자
돛 없는 작은 배(행27:16, 30, 32). 배 참조.
2009-06-06 02:59:21 | 관리자
이 말은 히브리말과 그리스말 모두 ‘분리하다’를 뜻하며 그래서 대개 ‘거룩히 구별하다’로 번역되었고 성경에서는 주로 하나님을 위해 구별하는 것을 뜻한다(창2:3; 출19:23). 구약성경에서 성별은 주로 의례를 통해 사람이나 물건을 하나님께 구별하는 것을 뜻하며 이런 차원에서 히브리 사람들은 의식과 속죄를 통하여 주님께 거룩히 구별된 언약 백성이었다(출31:13). 또한 유대인들의 성막과 제단과 제사장 등은 다 주님을 위해 특별히 구별되었다(레8:10-12). 유대인들은 주님께 경배하며 그분의 임재 앞에 서기 위해 스스로를 거룩히 구별하였고(출19:10-11; 민11:18) 금식과 기도를 위해 한 날을 거룩히 구별하기도 하였으며(욜1:14) 안식일도 주님을 위해 거룩한 날로 구별하였다(신5:12). 모세의 정결례도 이것과 연관이 있지만(민6:11; 레22:16, 32; 히9:13) 영적인 본성의 성화와는 상관이 없었으며 단지 유대인들에게 영적 성화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을 뿐이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우슬초로 자기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과 더불어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사 자기 속에 영을 새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시51:7-10).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증언하면서 사람이 그분 앞에 설 때에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함을 보여 준다.
신약성경의 교리 면에서 성별은 전에 더러워졌던 것을 완전하게 깨끗하게 거룩하게 만드는 것을 뜻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의롭게 된 혼을 거룩하게 만드는 은혜의 과정이다. 거룩함, 성화, 분리 참조.
2009-06-06 02:58:55 | 관리자
거룩함은 종종 밖으로 나타난 깨끗함을 표현하고 어떤 때는 내적인 순수함과 성결함을 나타낸다.
참된 거룩함은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과 마음의 생각과 의도에 특징을 부여한다. 거룩함은 내적인 원리이므로 단순히 정직함이나 자비 등과 같은 도덕적으로 뛰어난 것을 뜻하지 않고 모든 선한 것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을 뜻한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하고 무한대로 완전한 방법으로 거룩한 존재이시다(사1:4; 6:3). 메시아 역시 거룩한 분이었고(시16:10; 눅4:34; 행3:14) 물론 성령님 역시 거룩한 영이시다. 하나님은 거룩함과 무죄함과 성결함의 근원이시다. 사람은 첫 사람 아담의 타락 때에 이 모든 거룩함을 상실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신자들이 자신의 거룩함에 점진적으로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며 궁극적으로 그들은 천국에서 영원토록 성결한 존재가 될 것이다. 이 일을 보증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라고 생각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 선도 참조(60).
성경은 거룩하다는 말을 2차적인 의미로 하나님께 속한 것을 지칭하는 데 사용한다. 그래서 천국과 그분의 성전과 그 안의 기구들과 그 안에서 행하는 일과 그분의 날과 그분의 사역자들과 제사장들과 대언자들과 사도들이 거룩하다. 성경은 또한 유대인들을 가리켜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께 거룩히 구분된 사람들이며 이와 비슷하게 그리스도인들도 거룩한데 그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께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 거룩하다고 말하면 그것은 곧 그 사람이 내적인 순수함과 긍휼과 깨끗함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현대 교회는 거룩함을 잃고 있고 그것을 사랑과 혼동하고 있다. ‘거룩하다’는 말은 성경에 611회 나오며 사랑은 488회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사랑보다 거룩함에 대해 더 강조하고 있음을 본다. 하나님의 근본 속성은 거룩함이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사랑이 아니라 거룩함이므로 우리는 반드시 영과 진리 안에서 그분께 거룩하게 경배하여야 한다(출15:11; 대하20:21; 사6:2-3; 계4:8). “주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분께 드리며 거룩함의 아름다움으로 주께 경배할지어다”(시29:2).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함 사이에는 중요한 관계가 있다. 실로 사람은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손상시켰으며 그 결과 그분의 거룩함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분의 사랑이 사람에게 나타나게 되었다. 참으로 거룩함은 하나님의 다른 모든 성품을 조절하는 근본 속성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속죄는 사랑에서 왔으나 그 사랑을 요구한 것은 그분의 손상된 거룩함이었다. 모든 사랑은 기준이 있어야 바른 사랑이 될 수 있는데 그 기준이 바로 거룩함이다. 사랑이라는 엔진이 아무데나 굴러가면 무절제의 도구가 되는데 그분의 거룩함이 사랑의 엔진을 조절하여 바른 곳으로 인도하므로 그것은 사랑보다 높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죽어야 하는 근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함에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희생 예물이 되어야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함이 만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을 가진 사람도 도덕적인 측면에서 그분과 같이 거룩해야 하며 성경은 분명하게 그것을 요구한다(레20:26; 벧전1:15-16).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하나님, 거룩한 아드님, 거룩한 영, 거룩한 성경을 믿으며 성도 즉 거룩한 무리라 불린다.
현대자유주의자들은 거룩함보다 사랑을 더 중요시 하며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거룩함을 찾기 어렵고 각 사람이 자기 보기에 선한 대로 하나님께 나오려 한다. 그러나 사랑은 반드시 거룩함이라는 궤도 위에서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교회 안에 각종 어려움이 발생한다. 사랑으로 해야 한다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교회가 수용하면 하나님의 거룩함이 훼손되며 그런 식의 거룩하지 못한 경배는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신다(잠28:9). 그러므로 기준과 표준을 요구하지 않는 기독교는 바른 기독교가 아니다. 세상과 분리되어야 하나님의 거룩함을 만족시킬 수 있으므로 세상의 것을 버리고 야곱과 같이 벧엘로 올라가야 거기에 부흥이 있다(창35:1-5). 따라서 교회 안에서 사랑과 거룩함이 갈등을 일으킬 때 반드시 거룩함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교회가 살 수 있는 또 존재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근거이다.
2009-06-06 02:58:21 | 관리자
하나님의 신성을 강조한 호칭(왕하19:22; 시71:22; 사1:4; 5:19; 60:9).
특히 대언자 이사야는 하나님을 가리켜 무려 25번이나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 부르는데 아마도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여 준 환상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사6:3). 따라서 이 말은 이사야서의 중심 사상을 나타내는 중요한 말이다. 예레미야는 이 말을 2회 썼다(렘50:29; 51:5).
2009-06-06 02:57:31 | 관리자
가다라 참조.
2009-06-06 02:57:01 | 관리자
다시 태어남 참조.
2009-06-06 02:56:35 | 관리자
히9:10에 나오는 구절로 9절에 있는 현재 곧 이때와 대비되는 때를 뜻한다.
참고로 여기 나오는 reformation이라는 단어는 중세암흑시대를 벗어나게 해 준 종교개혁(Reformation)과 같은 단어이다.
2009-06-06 02:56:09 | 관리자
감사 합니다 퍼가도 될까요?
2009-06-05 18:24:50 | 이신흥
숫염소들인가, 마귀들인가?
성경을 번역할 때에는 문맥을 고려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레위기 17장 7절을 흠정역 성경과 개역성경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흠정역: 또 그들이 전에 마귀들을 따라 음행의 길로 갔으나 다시는 그 마귀들에게 희생물을 드리지 말지니 이것은 그들의 대대로 그들에게 영원한 법규가 될지니라, 하라.
개역: 그들은 전에 음란히 섬기던 숫염소에게 다시 제사하지 말 것이니라. 이는 그들이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흠정역은 마귀들이라고 번역하였고 개역은 숫염소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과연 어느 것이 더 잘 맞을까요?
다음은 히브리어 학자인 김경래 교수(전주 대학교)의 글입니다.
레위기 17:7에 “그들은 전에 음란히 섬기던 숫염소에게 다시 제사하지 말 것이니라. 이는 그들이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라는 지시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 ‘숫염소’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낱말(‘쎄이림’ = ‘싸이르’의 복수형)은 문자적으로 ‘숫염소’를 뜻한다. ‘음란히 섬긴다’는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우상 숭배’에 대한 묘사로서 무수히 등장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에 ‘숫염소들’을 음란히 섬겼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틀림없이 레17:7의 ‘싸이르’는 단순히 동물로서의 ‘수염소’가 아니라 우상 내지는 귀신의 일종임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은 ‘싸이르’ 숭배를 이집트에서부터 배워온 듯 하다. ‘싸이르’는 일반적으로 황량한 지역에서 거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사13:21; 34:14).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 거하는 동안 이미 그들은 ‘싸이르’를 섬기기 시작하였다(수24:14; 겔20:7; 23:3, 8, 19, 21, 27). 후에 북왕국 이스라엘의 첫 왕이 된 여로보암 역시 숫염소 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여로보암이 여러 산당과 숫염소 우상과 자기가 만든 송아지 우상을 위하여 스스로 제사장들을 세움이라” (대하11:15).
숫염소, 마귀 둘 다 틀린 번역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숫염소라고 하면 이해하기 힘들지만 마귀라고 하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컬트 세상에서 잘 알려진 대로 마귀들의 왕 루시퍼의 상징은 두 뿔이 달린 염소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들 역시 비슷한 상징으로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2009-06-04 11:08:10 | 관리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영접 기도 복음이 아니다
● 정동수
요즘 심각하게 느끼는 일 중에 하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질까 하는 것입니다. 사영리 책자를 읽고 간단히 설명한 뒤 예수님을 영접하라고 가르치는 곳이 많습니다. 설교를 들은 뒤 손을 들고 나오면 목사가 기도해 주겠다고 하는 데도 있습니다. 어린아이처람 순수한 심정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받지요. 그런데 복음을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하면 너무 쉽게 Easy believism에 빠져서 또 압력에 견디지 못해 영접 기도를 하게 되는 사례가 많습니다.
그러나 손을 들든지 안 들든지, 영접 기도를 하든지 안 하든지 이미 마음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들어갔으면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이 사실은 이미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눈에 드러나는 외적 행동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는다, 안 믿는다 판단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손을 들라고 하고 앞으로 나오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위선자(혹은 가짜) 그리스도인을 양산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일단 교회나 집회에서 손든 사람의 수를 세면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과거에 저도 한때 그런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몰랐기 때문이고 또 순순한 의도로 그렇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폴 워셔 목사의 글입니다. 조금이라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복음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기독교가 이 세상과 친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이 세상을 향한 구원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세상에게 기독교를 받아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무엇을 해야 될까요?
이렇게 많은 사람앞에 말할 기회가 오직 한번 뿐일 때 제가 하던 것을 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여러분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우리는 벌써 복음이 무엇인지 압니다. 아니요, 모릅니다.
당신이 아는 것은 그저 사영리와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 할 5가지의 사실들 뿐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은 하나님이 그곳에 있지도 않는데도 그저 다른 사람들의 결심을 도와주는 것과 그들이 구원받았음을 확인시켜주는 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에 대해 잘 알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저 설교들과 신앙고백하는 법 그리고 교회성장등을 가르치는 것만 보아도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한 일을 보십시오.
우리는 어떤 이에게 다가가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죄인인 것을 아십니까?"
"그렇다"라고 대답하면, 우리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천국가길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라고 대답하면, 또 다시 질문을 합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기도를 하시겠습니까?"
그가 그렇다라고 진지하게 대답을 하며 기도하면, 우리는 그를 진정으로 거듭난 자라 일컫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닙니다.
이러한 방법의 전도는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이단사상보다 더 많은 피해를 주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은 정작 변하지도 않으면서, 그들 자신을 거듭난 기독교인이라 일컬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젠 그저 5분밖에 걸리지 않는 간단한 결정으로 축소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럼, 당신이 죄인인 것을 아십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렇다"라고 하면 무슨 뜻입니까? 그 대답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사탄에게 물어보십시오. 사탄도 그가 죄인인 것을 압니다. 그것도 죄인중에 죄인으로 말이죠.
질문은 "당신이 죄인인 것을 아십니까"가 아니라, 복음을 깊이 들은 이후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 속에서 일하셔서 그동안 사랑해 왔던 죄악을 이젠 진심으로 싫어하냐라는 것입니다.
질문은 "천국가고 싶습니까?"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천국을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천국에 하나님이 없길 원하죠.
"당신은 천국가기 원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할 것이 아닙니다.
질문은 복음이 당신에게 전해진 이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 속에서 주권적이며 이해할 수 없는 역사하심을 통해 그동안 싫고 무시해왔던 하나님을 이젠 당신이 간절히 원하며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한 하나님으로 받아드리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라고 기도하시겠습니까?"라는 기도에 대해 그를 뒷받침 해 주는 성경구절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성경에선 그를 영접하라고 했는데요?"라고 질문을 한다면, 당신은 성경이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 단지 사영리에 나오는 기도를 중얼거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말씀은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저 그를 당신 인생의 악세서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를 생명의 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속에서 당신의 인생을 더 좋게 만드는 분이 아니고, 그리스도는 당신의 삶이 되십니다.
그가 당신의 삶입니다.
마가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드디어 때가 왔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 누가 자신의 마음속에 와달라고 나에게 기도할 것인가?"
대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어라!"
절대 잊지 마십시오.
신약과 구약을 통틀어 회개는 삶의 열매에 의해 증거가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역사하심과 구원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자신의 결심을 더 의지한 채 구원을 받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구원받았습니까?"
"네"
"어떻게 아시죠?"
"3년전에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기도를 드렸거든요"
"정말로요?"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와 같이 했습니까?
구원의 증거, 회개의 증거, 믿음의 증거는 변화되었고 변화하고 있는 삶입니다.
예전에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하였는지 어떻게 아냐고요?
그 이유는 오늘도 그 회개를 지속해서 해왔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 믿을 수 있냐고요?
왜냐하면 오늘도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었다고 말할 수 있나요?
그것은 오늘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성화를 통해 그는 당신의 인생을 바꾸셨을 뿐만아니라 지속해서 당신의 인생을 바꾸십니다.
오늘날 선포되는 복음은 많이 흐려졌습니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설교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도 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일하시고 계십니다.
이 복음은 많은 메시지 중에 하나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의 메시지이며 기독교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슬픈 것은 이 복음이 오늘날 교회의 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증명할 수 있습니다.
주위에 있는 서점에 가 보십시오.
200년 전, 또는 300년 전만 하더라도 기독교 서적들은 대부분 복음에 대해서였습니다.
스펄전이나 청교도나 에드워즈가 쓴 책들은 복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하면 복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하면 복음을 설교할 수 있을까?
어떤 것이 진실된 회심인가?
어떻게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거듭난 것을 알 수 있을까?
오늘 주위에 있는 서점에 가 보셔서, 그러한 복음에 대해 기록된 책들을 찾아보십시요.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책들은 "어떻게하면...열가지 순서들"뿐일 것입니다.
오늘날 왜 이렇게 힘이 없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복음을 모르고, 진정한 회심을 모르고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신, 그러한 것들을 예배속에서 어떠한 미디어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제작된 찬양방식이나 하나님보다도 더 원하는 우리의 좋은 인생을 원하기에 우리가 듣길 원하는 설교만을 전하는 화려한 연설자들로 대체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잃었기에 힘이 없는 것입니다.
복음을 회복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남자, 여자 그리고 자녀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저 꾸밈없는 순전한 복음말입니다.
2009-06-04 10:32:22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