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퍼인가, 계명성인가?
21세기 뉴에이지 시대에 하나님을 내버리고 인본주의를 삶의 모토로 삼은 새로운 세대는 새로운 신 마귀에게 새로운 일거리가 생겼다고 흥얼거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흠정역: 그들이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지 아니하고 마귀들에게 드렸으니 곧 자기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너희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신들, 새로이 일어난 새로운 신들에게 드렸도다(신32:17).
사탄은 이 세대 속으로 침투하여 많은 영혼들을 제물로 삼기 위해 온갖 힘을 쏟으면서 이제는 노래를 통해 ‘메탈 음악 시장’으로부터 평범한 ‘중류 음악 시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손아귀에 넣었고 심지어 CCM이라는 신복음성가 장르를 만들어 마귀를 찬양하는 리듬과 가사를 유행시키고 있다. 이제 반(反) 문화의 창시자들이 최근에 나온 새 역본들 안에까지 신비주의 지하 조직의 철학들을 집어넣음으로써 반(反) 문화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우리 눈앞에서 기독교회의 전체적인 배교가 일어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 영향은 우레와 같이 엄청난 것이다.
흠정역: 12 오 아침의 아들 루시퍼야, 네가 어찌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민족들을 약하게 만든 자야, 네가 어찌 끊어져 땅으로 떨어졌는가! 13 네가 네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내가 하늘로 올라가 내가 하나님의 별들 위로 내 왕좌를 높이리라. 또 내가 북쪽의 옆면들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 내가 구름들이 있는 높은 곳 위로 올라가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이 되리라, 하였도다. 15 그러나 너는 끌려가 지옥으로 곧 그 구덩이의 옆면들로 내려가리로다. 16 너를 보는 자들이 너를 자세히 살펴보고 너에 대해 깊이 생각하여 이르기를, 이 자는 땅을 떨게 하고 왕국들을 흔들며 17 세상을 광야같이 만들고 거기의 도시들을 멸망시키며 자기 죄수들의 집을 열지 아니한 자가 아니냐? 하리로다(사14:12-17).
루시퍼의 자만에 찬 외침 즉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이 되리라는 외침 속에는 단어 단어마다 그의 불만이 무겁게 깔려 있다. ‘기름 부음 받은 그룹’(Cherub)인 루시퍼는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변경하기를 원했다. 그는 모든 창조물이 지극히 높으신 분이 아니라 자기에게 경배를 드리기를 갈망했다. 마태복음 4장 9절에 기록된 대로 그가 예수 그리스도께 “네가 내 앞에 엎드려 경배하면…”이라고 말한 것을 보아도 그의 욕망이 경배 받는 것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계시록 13장 4절이 사람들이 용에게 경배했다고 기록하듯이 불행하게도 그의 야망은 곧 성취될 것이며 바로 그 환난기가 뉴에이지의 절정기가 될 것이다.
계시록 12장 9절은 ‘큰 용이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자’라고 분명히 기록하면서 우리에게 그의 정체를 밝히 보여 주고 있다. 21세기의 일반 대중이 사탄에 대해 느끼는 나쁜 이미지를 바꾸어 경배 받기에 합당한 좋은 이미지로 바꾸기 위해 대중 매체는 그럴듯한 선전을 동원하고 있다. 그 내용은 가히 놀랄 만한데 그 핵심은 그의 정체를 바꾸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사야서 14장은 성경에 기록된 루시퍼에 대한 유일한 일대기로서 이곳이야말로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불법의 신비’(살후2:7)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우리는 12절에서 루시퍼가 하늘에 있음을 알 수 있고 15절에서 그가 지옥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늘에서 지옥으로 가는 동안 그는 무려 다섯 번이나 “내가…하리니”(I will…)라고 외치면서 하나님과 같게 되려는 욕망을 표출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외침 하나 하나는 루시퍼를 하늘에서 지옥으로 이끌고 가는 계단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성도들은 이 구절을 통해 마귀의 자만심의 본질이 무엇인지 바르게 볼 수 있다.
위의 성경 구절은 사탄의 종착지가 어디인지 확실히 보여 주므로 지금까지 사탄의 증오의 대상이자 저항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 구절들은 그의 오만(13-14절), 세상의 불행에 대한 그의 책임(17절), 그리고 그의 파멸(15-16절)을 한 점 의혹도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마귀의 일대기는 에스겔서 28장에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나 거기에서 그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고 그는 다만 ‘기름 부음을 받은 그룹’이라고 언급되어 있다(겔28:14).
루시퍼의 야망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이 되는 것’인데 이 구절은 그의 정체를 훤히 드러내 줌으로써 그의 꿈을 산산조각 내고 있다. 사탄에게 아부하지 않는 정결한 말씀으로부터 ‘루시퍼’라는 단어가 확실히 제거되어 그를 ‘지극히 높은 자’로 만드는 말씀 속으로 삽입될 때까지 그가 자신의 이름 ‘루시퍼’에 대해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이다. 사실상 이 묘한 속임수는 개역성경을 비롯한 현대 역본들에서 이미 완성되었고 오직 킹제임스 성경만이 부패되지 않은 채 말씀의 순수성을 유지하며 루시퍼의 일대기를 보여 주고 있다.
개역: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사14:12)
NIV: How you have fallen from heaven, O morning star, son of the dawn! You have been cast down to the earth, you who once laid low the nations!
현대 역본들은 한결같이 ‘루시퍼’란 이름을 제거했고 이로써 성경 전체에서 유일하게 타락 전 사탄의 이름을 보여 주는 부분은 본문에서 삭제되어 성도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결과 ‘루시퍼’라는 단어는 이제 시인들과 신화 작가들의 영역으로 넘어가 버렸고 그는 더 이상 성경에서 유래되어 확인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 신화적 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성경을 변개시킴으로써 루시퍼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갖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가리켜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성경이 변개되었으므로 사탄은 자신이 원하는 어떠한 특성도 스스로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개역성경을 비롯한 현대 역본들에 나타난 이 같은 변화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고찰해 보면 ‘루시퍼’란 단어 대신 ‘계명성’ 혹은 ‘새벽별’(morning star)을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누구나 쉽게 깨달아 알 수 있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는 ‘halel, ben, shachar’로서 이것을 정확히 번역하면 개역성경처럼 ‘계명성’이 아니라 킹제임스 성경처럼 ‘아침의 아들 루시퍼’가 된다. 그런데 NIV와 NASB 등의 새 역본들과 개역성경은 마치 이 구절이 히브리 원본에 ‘shachar, kokab, ben, shachar’ 즉 ‘아침의 아들, 새벽별’이라고 쓰여 있는 것처럼 번역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별’(kokab)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으며 또 ‘아침’ 혹은 ‘새벽’이란 단어도 개역성경을 비롯한 현대 역본들에 있듯이 두 번 나오지 않고 킹제임스 성경에 있듯이 한 번만 나온다.
개역성경이나 NIV의 역자들은 ‘kokab’(스트롱 번호 3556)이라는 히브리어를 다른 곳에서는 수십 번씩이나 ‘별’로 번역했으며(창1:16부터 나3:16까지 약 40번) ‘아침’ 혹은 ‘새벽’이란 단어도 마찬가지다. 또한 개역성경의 편집자들은 ‘새벽별’(boger kokab)이 욥기 38장 7절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흠정역: 어느 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고 하나님의 모든 아들들이 기뻐 소리를 질렀느냐?(욥38:7)
따라서 만일 하나님께서 ‘루시퍼’라는 단어를 ‘새벽별’ 혹은 ‘계명성’으로 전달하고자 하셨다면 욥기에 나오는 동일한 단어를 이사야서에서도 반복해서 사용하셨을 것이다. 킹제임스 성경에서 이곳을 제외하고는 ‘루시퍼’란 단어가 나오지 않듯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halel’이란 단어 즉 ‘루시퍼’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도 이곳 말고는 히브리어 구약성경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진정한 새벽별은 누구인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개역성경 번역자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본과 역본을 따라 이사야서 14장에 등장하는 ‘루시퍼’ 대신 ‘새벽별’ 혹은 ‘계명성’을 삽입함으로써 예수님께 대한 가장 결정적인 신성모독을 범하고 말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후서 1장 19절, 계시록 22장 16절 등에서 ‘새벽별’이라 불린다.
흠정역: 나 예수는 내 천사를 보내어 교회들 안에서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요 빛나는 새벽별이라, 하시더라(계22:16).
그러나 사탄은 서기관들을 이용해서 조용히 자리를 떠나 교활하게 무대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리고 그는 이사야서 14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비난의 대상 혹은 타락의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고소하는 자’(계12:10)라는 호칭에 걸맞게 행동하고 있다. 참고로 NASB 같은 현대 역본은 이사야서 14장 12절 옆에 “벧후1:19를 보라.”는 관주를 붙임으로써 이 구절이 ‘루시퍼의 타락’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타락’을 지칭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
현세대 신학자들의 변절과 배교가 있기 전에는 믿는 성도들 모두가 오직 그리스도만이 ‘새벽별’이요, ‘계명성’이요, ‘샛별’이라는 데 동의했다. 이미 오래 전에 재미슨(Robert Jamieson)은 그의 저서 ‘주석: 구약 비평과 설명’에서 뉴에이지 시대에 그리스도에 대한 이름 놀이가 있을 것을 예고했다.
샛별: 진실로 그리스도께 속한 칭호로서 장차 적그리스도가 이 명칭을 사칭할 것으로 사료됨.
1913년도에 발행된 저 유명한 스펜스(H.D. M. Spence)의 ‘풀핏 주석’ 이사야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샛별(새벽별)이란 칭호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칭호이지만 후에 적그리스도가 이것을 찬탈할 것이다. 그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바빌론의 실체이며 신약성경의 신비 바빌론의 선두주자이다. 후에 사탄은 이 칭호를 마치 자신의 것으로 주장할 것인데…. 그는 이방 세상 권세 바빌론에게 활기를 주고 있으며 현재는 배교의 길을 걷고 있는 교회를 부추기고 있고 결국에는 세속적인 적그리스도와 … 그리고 그의 챔피언인 거짓 선지자를 선동하게 될 영이다.
사탄 마귀는 계시록12장에서 그 정체가 용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성경에는 용이 35회 등장하는데 개역성경은 용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여러 구절을 뱀(신32:33), 이리(욥30:29), 시랑(시44:19) 등으로 처리해 버렸다.
흠정역: 그들의 포도주는 용들의 독이요, 독사들의 지독한 독이라(신32:33).
개역: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악독이라
사탄 마귀를 나타내는 ‘리워야단’(Leviathan, 스트롱 번호 3882)은 성경에 다섯 차례 나온다(욥41:1; 시74:14; 104:26; 사27:1에 두 차례). 그런데 개역성경은 이사야서를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그를 악어로 번역해서 그 뜻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흠정역: 네가 낚시 바늘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혹은 늘어뜨리는 줄로 그의 혀를 끌어낼 수 있겠느냐?(욥41:1)
개역: 네가 능히 낚시로 악어를 낚을 수 있겠느냐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겠느냐
참고로 성경의 용(dragon)은 중국 사람이나 한국 사람이 상상하는 용과 다르다. 예를 들어 에스겔서 29장 3절의 용은 강 한 가운데 누워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고 계시록 12장의 용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다시 말해 성경의 용은 보통 우리가 ‘공룡’이라 하는 짐승과 비슷하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영어에서 용의 용례를 찾아봐야 한다. 영어에서 용은 공룡과 같은 큰 괴물을 지칭하는 데 쓰였다.
dragon: a mythical monster, represented as a huge and terrible reptile, usually combining ophidian and crocodilian structure, with strong claws, like a beast or bird of prey, and a scaly skin; it is generally represented with wings, and sometimes as breathing out fire. The heraldic dragon combines reptilian and mammalian form with the addition of wings(옥스퍼드영어사전).
우리가 공룡을 지칭할 때 쓰는 ‘dinosaur’라는 단어는 1841년에 처음으로 문헌에 나오며 그 전에는 그런 괴물을 모두 ‘용’으로 불렀다.
dinosaur: A member of an extinct race of Mesozoic Saurian reptiles (group Dinosauria, typical genus Dinosaurus), some of which were of gigantic size; the remains point to an organism resembling in some respects that of birds, in others that of mammals(옥스퍼드영어사전).
그래서 영국의 전래 동화 등에서 나오는 용은 대개 모습이 ‘공룡’ 혹은 ‘공룡의 새끼’처럼 생긴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성경에 나오는 ‘용’을 우리가 알고 있는 ‘공룡’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2009-05-13 13:43:50 | 관리자
주인가, 여호와인가?
한국 성도들에게는 ‘여호와’라는 단어가 매우 친숙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4자음문자’(Tetragrammaton)라고 널리 알려진 히브리어 ‘JHVH’에서 왔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의 종살이를 끝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처음으로 이 이름을 계시해 주셨다(출3:13-16; 6:2-8). 또한 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다음과 같이 엄중히 명령하셨다(출20:7).
흠정역: 너는 주 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지 말라. 주가 자신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이 명령을 매우 두렵게 생각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에서 그분의 두려운 이름 ‘JHVH’를 대할 때마다 눈으로 그 이름을 확인하고 정작 읽을 때는 주(主)를 의미하는 ‘아도나이’(Adonai)로 읽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영어의 ‘Jehovah’는 히브리어 4자음문자 ‘JHVH’에 ‘아도나이’의 모음을 넣어 만든 ‘YaHoVaH’를 음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그들의 영향을 받은 현대주의자들은 ‘여호와’가 아니라 ‘야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전통 마소라 본문은 모음 부호를 통해 그분의 이름이 ‘여호와’임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 한편 개역성경의 ‘여호와’는 영어의 ‘Jehovah’를 우리말로 음역한 것이다. 사실 대한성서공회 역시 이 점을 인정하고 있다.
이처럼 구약의 마소라 본문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네 글자를 ‘주’(아도나이)라 표기했고 신약의 사도들이 신약을 기록할 때도 그 이름을 ‘주’(큐리오스)라고 기록했으며 루터의 독일어 성경도 이 이름을 ‘주’(헤르)로, 그리고 대부분의 영어 성경도 이 이름을 ‘주’(로드)라 번역했고 개역성경 신약도 이 거룩한 이름 네 글자를 ‘주’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는 대한성서공회가 개역성경의 구약을 번역함에 있어 신약을 번역할 때와는 달리 주님의 거룩한 이름 ‘여호와’를 그대로 음역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약을 읽으면서 무려 6,400회 이상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함부로 취하게 해 놓았다는 점이다. 그 결과 많은 성도들이 마땅히 경외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할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아무 때나 아무 의미 없이 취함으로써 그 이름의 위엄과 존엄성을 떨어뜨리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기도할 때 심각하게 나타난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게 된 주요 원인은 개역성경의 구약이 영어 성경 중 유일하게 ‘JHVH’를 ‘주’(LORD, 전체 대문자)로 표기하지 않고 ‘여호와’로 표기한 미국표준역(ASV, 1901)에 근거하여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이 미국표준역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신세계역과 마찬가지로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로마 카톨릭 소수본문에서 나온 것으로 20세기 초반에 여호와의 증인들이 자기들의 교리를 확증하기 위해 가장 선호하고 애용한 성경이다. 참고로 이런 문제가 발생하자 그 이후에 나온 신미국표준역(NASB, 1971)은 급히 이것을 수정하고 다시 원래의 성경 전통으로 돌아가 ‘여호와’ 대신 ‘주’(LORD)를 쓰고 있다. 참고로 NIV, NKJV, RSV 등 대부분의 영어 성경과 주요 유럽어 성경이 모두 ‘여호와’를 ‘주’로 번역하고 있다. 다음은 구체적인 예를 보여 준다.
흠정역: 땅과 하늘들이 창조된 때 곧 주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만들고…(창2:4)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KJV: These are the generation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they were created, in the day that the LORD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ASV: These are the generation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they were created, in the day that Jehovah God made earth and heaven.
개역성경은 킹제임스 성경에서 ‘LORD’로 번역한 단어(스트롱 번호 3068)를 다 여호와로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그 단어의 변형인 ‘여호비’(스트롱 번호 3069)도 대개 여호와로 번역했는데 이것 역시 미국표준역(ASV)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이 단어는 특히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 등에 많이 나오며 킹제임스 성경은 이것을 다 대문자 ‘GOD’로 표현해서 사람이 무의식중에라도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할 수 없게 만들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흠정역: 그들은 뻔뻔하고 마음이 뻣뻣한 자손들이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하라(겔2:4).
개역: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KJV: For they are impudent children and stiffhearted. I do send thee unto them; and thou shalt say unto them, Thus saith the Lord GOD.
ASV: And the children are impudent and stiffhearted: I do sent thee unto them; and thou shalt say unto them, Thus saith the Lord Jehovah(ASV).
유대인들은 이런 경우에 ‘여호비’를 ‘엘로힘’으로 읽었는데 그 이유는 ‘여호비’ 앞에 대개 ‘주’를 의미하는 ‘아도나이’가 오므로 ‘여호비’를 다시 ‘아도나이’로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유대인들의 전통대로 ‘여호비’를 피하기 위하여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조심스레 이것을 대문자 ‘GOD’로 표현했는데 이렇게 표현된 ‘GOD’은 성경에 309번 나온다. 이런 것을 통해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성경을 바르게 번역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며 그래서 유대인들의 구약성경이 주는 의미와 맛을 표현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의도가 ‘여호와’를 ‘주’로 번역하라는 것은 다음의 용례를 통해 명백히 드러난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주’(그리스어 큐리오스)라고 번역해야 함을 친히 보여 주신다.
흠정역: 주(LORD, 그리스어 큐리오스)께서 내 주(Lord, 그리스어 큐리오스)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마22:44)
개역: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이 구절은 다윗이 기록한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한 것이다.
흠정역: 주(LORD, 히브리어 여호와)께서 내 주(Lord, 히브리어 아도나이)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110:1).
개역: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말로 신약성경을 주시면서 구약성경의 ‘여호와’를 ‘주’로 번역하라고 이런 용례를 남기셨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여호와’를 ‘큐리오스’ 즉 ‘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분께서는 ‘여호와’라는 자신의 신성한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이 구절은 성경에 여러 군데 나오는 중요한 구절로서 우리 주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구절인데 개역성경은 여기서 ‘여호와’를 ‘주’라 번역하지 않아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없게 했다. 또한 마태복음과 시편 구절을 동일하게 번역하지 않았고 또 ‘발받침’(footstool)을 그냥 ‘발’로 바꾸었으며 ‘원수들’이라는 복수를 ‘단수’로 바꾸었다. 이렇게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면 성경의 신뢰가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문제는 또한 교리적으로도 중요한 차이를 가져온다. 구약의 ‘주’(LORD)를 ‘여호와’로 표현하면 성경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주의 날’ 즉 재림에 관한 개념이 변하게 된다. 다시 말해 동일한 날을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날’로 하고 신약에서는 ‘주의 날’로 하면 그것들이 동일한 날을 가리키고 있음을 독자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예로 사도행전 2장 20절을 살펴볼 수 있다.
흠정역: 저 크고 주목할 만한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둠이 되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려니와
개역: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이것은 성도 누가가 요엘서 2장 31절을 인용한 것이다.
흠정역: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둠이 되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려니와
개역: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개역성경을 본문으로 한 관주 성경을 보면 사도행전 2장 20절의 관주가 분명히 요엘서 2장 31절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 가서 보면 ‘주의 날’이 아니라 ‘여호와의 날’로 되어 있으므로 독자는 이런 구절을 잘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영어 성경에는 모두 ‘주의 날’로 되어 있으므로 관주가 제대로 관주 역할을 한다. 그래서 한국 성도들에게는 대언자 이사야의 글로부터 줄기차게 언급되고 있는 ‘크고 두려운 주의 날’ 즉 이스라엘 백성을 연단하기 위한 ‘야곱의 고난의 때’(렘30:7)에 대한 개념이 없으며 따라서 교회의 환난 전 휴거와 우리 주님의 전천년 재림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다. 이런 개념이 제대로 있으면 행2:20, 살전5:2, 벧후3:10 등에 나오는 ‘주의 날’이 유대인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구약의 ‘주의 날’ 즉 다니엘의 70 이레의 마지막 한 이레인 7년 환난기를 가리킴을 금방 알 수 있고 따라서 교회가 환난을 통과한다는 자기 학대의 믿음과 행위 중시 믿음에서 떠나 복된 소망인 환난 전 휴거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 13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기록했다. 여기서 그가 언급한 주는 분명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런데 사실 이 구절은 구약의 대언자 요엘이 기록한 말씀과 같다.
흠정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출을 받으리니(욜2:32)
개역: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를 통해 바울 사도는 신약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곧 구약의 주 하나님임을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요엘서의 ‘주의 이름’을 개역성경처럼 ‘여호와의 이름’이라고 하면 성경의 일관성이 깨지면서 성령님께서 요엘과 바울 두 사람의 기록을 통해 주의 깊게 의도하셨던 바를 독자들이 전혀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최근에 출간된 표준새번역은 개역성경과는 달리 전 세계 대부분의 성경처럼 바른 전통을 따라 구약에서 ‘JHVH’를 ‘주’로 옮겼는데 이는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있다.
2009-05-13 13:39:56 | 관리자
대언인가, 예언인가?
성도들이 성경을 성경으로 풀려면 성경 번역시 중요 용어를 반드시 일관성 있게 번역해서 용어색인(concordance) 기능이 되게 해야 한다. 미국의 성도들이 성경대로 믿으며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에게 스트롱(Strong)이나 영(Young)이 만든 용어색인이 있어 누구라도 제대로 성경을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어떤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는가를 살펴보려면 용어색인을 이용하여 그 단어의 용례를 처음부터 살펴보면 된다.
그런데 불행히 개역성경은 이러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 예로 ‘prophecy’ 혹은 ‘prophet’이라는 단어를 들 수 있다. 이 단어들은 성경에 500회 이상 나오며 성경 기록 그 자체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현대 영어사전을 살펴보면 이 단어의 주된 의미가 ‘예언하다’이므로 개역성경의 번역자들은 이것들을 앞날을 예견하는 ‘예언’, ‘선지자’ 등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남의 말을 대신 전한다’는 ‘대언’(代言)이며 성경의 용례 역시 전적으로 이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심지어 개역성경도 출애굽기 7장 1절, 에스겔 37장 4절, 계시록 19장 10절 등 10 구절에서는 부득이 대언으로 바르게 번역했다.
개역: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출7:1-2)
개역: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겔37:4)
개역: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계19:10)
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신다.
흠정역: 이로써 창세로부터 흘린 모든 대언자들의 피를 이 세대에게 요구하리니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은 사가랴의 피까지라(눅11:50-51).
예수님께서는 아벨을 가리켜 최초의 대언자라고 하신다. 다시 말해 아벨은 하나님의 말씀을 최초로 대언한 자라는 말이다. 그러면 그가 누구에게 대언했는가? 그는 가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고 그 결과 박해를 받아 죽게 되었다. 이런 구절에서 개역성경처럼 아벨을 ‘선지자’라고 하면 말이 되겠는가?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창세기 20장에는 처음으로 ‘대언자’라는 단어가 나온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취하고자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런 말씀을 주신다.
흠정역: 그러므로 이제 그 남자(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가 대언자이므로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만일 네가 그녀를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모든 것이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창20:7).
여기에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대언자’가 되어 아비멜렉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내용이 나온다. 앞날을 예견한다는 의미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사실 구약시대의 대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임할 때에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라는 선언과 함께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그들이 이런 선언을 할 때에는 평상시 입에 올리기 어려운 ‘여호와’(영어의 LORD)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까지 자기들의 메시지가 주님의 말씀임을 확증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주’(LORD)의 이름으로 대언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대언자를 죽이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흠정역: 만일 대언자가 주의 이름으로 말하는데 그 일이 뒤따라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성취되지도 아니하면 그것은 주께서 말씀하지 아니하신 것이요, 오직 그 대언자가 자기 뜻대로 그것을 말하였나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신18:22).
이와 같이 대언자의 책무는 엄청났으며 특히 구약시대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의 패망에는 거짓 대언자들의 역할이 지대했다.
한편 성경 기록 자체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대언자들이 받은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다음 말씀처럼 성경 기록은 대언인 것이다.
흠정역: 성경 기록의 대언 중 어떤 것도 사적인 해석에서 나지 아니하였나니 대언은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말하였느니라(벧후1:20-21).
이처럼 성경은 분명히 성경 기록 그 자체가 대언임을 보여 주지만 개역성경으로는 도저히 이것을 알 길이 없다.
개역: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여기서 개역성경이 ‘예언’으로 번역한 단어 역시 앞날을 예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대언으로 주신 말씀을 뜻한다. 앞 뒤 문맥이 분명하지 않은가?
이처럼 중요한 단어를 ‘선지자’나 ‘예언’ 등으로 번역했기 때문에 한국 교회 내에서도 고린도 교회의 은사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하여 많은 교인들이 입시, 입사, 이사 때마다 예언기도 받으러 기도원의 점쟁이들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신약시대에도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대언자들을 사용하셔서 말씀을 전해주셨는데 그것은 대언의 말씀이지 결코 예언의 말씀이 아니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고전12-14장의 대언, 대언자를 다 예언, 선지자로 번역하여 기복무속신앙을 부추기고 있다. 구약의 대언자들의 말씀 중 여러 부분이 미래를 다루므로 대언에 예언의 의미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언이라는 말은 이미 그 의미도 다 포함하고 있다.
사실 구약시대에도 이런 문제가 있어서 처음에는 ‘선견자’(seer)라는 호칭이 있었으나 후에는 ‘대언자’로 바뀌었다.
흠정역: (예전에 이스라엘에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여쭈려 할 때에 이같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선견자(seer)에게로 가자, 하였더니 지금 대언자(prophet)라 부르는 사람을 예전에는 선견자라 불렀더라)(삼상9:9).
여기 나오는 선견자야말로 ‘앞날을 내다보는 사람’으로 ‘선지자’와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에서 대언자를 ‘선지자’로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게 된다.
2009-05-13 13:31:27 | 관리자
살아 있는 혼인가, 살아 있는 영인가?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역시 영, 혼, 몸으로 구성된 삼위일체이다.
흠정역: 평강의 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하게 거룩히 구별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흠 없이 보존해 주시기를 구하노라(살전5:23).
사람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음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구절이 바로 창세기 2장 7절인데 개역성경은 여기에서도 전 세계 모든 성경과 달리 특이하게 번역을 하여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흠정역: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
성경이 보여 주고자 하는 바는 사람이 몸(흙)과 영(생명의 숨)이 합쳐진 혼이라는 것인데 개역성경은 이것을 부인하며 그 결과 영이 없는 사람(창세기 1장)이 있고 영이 있는 사람(창세기 2장)이 있다는 한 이단의 ‘이중 아담론’을 확립해 주고 말았다. 사람이 ‘산 영’(living spirit)이면 죽지 않는데 그러면 도대체 무슨 부활이 필요하며 ‘살려 주는 영’(quickening spirit)이 필요하단 말인가?
개역: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15:45)
흠정역: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
성경에는 혼이라는 단어가 535회 나오는데 혼을 믿지 않는 개역성경의 번역자들은 히브리서 4장 12절 같이 꼭 혼이 나와야만 말이 되는 구절에서만 혼을 혼으로 번역했다.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그리고 개역성경은 이런 곳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혼을 영혼이나 자(者) 등으로 바꾸어버렸다.
개역: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출12:15)
흠정역: 누구든지 누룩 있는 빵을 먹는 혼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개역: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욥7:11)
흠정역: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이 번민 중에 말하며 내 혼이 고통 중에 불평하리이다.
위의 욥기를 보면 영과 혼이 명백히 구분되어 있지만 개역성경은 이것을 전혀 구분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영혼’으로 처리해 버렸다. 이렇게 정확성이 떨어지므로 개역성경으로는 바른 교리를 정립하기가 어려우며 영어로 쓰인 기독교 관련 서적을 번역할 때 저자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 자기 교회로 사람을 데려오는 것을 전도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미국 사람들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전도로 생각한다. 이것이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진짜 전도이다. 이 경우에 그들은 ‘혼을 구원한다’는 뜻을 가진 ‘soul winning’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나가서 사람의 혼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은 사도행전에서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에 하나님께서 많은 혼을 구원한 사실을 잘 보여 주지만 개역성경은 전혀 이런 것을 반영하지 못한다.
흠정역: 그때에 그의 말을 기쁘게 받아들인 사람들이 침례를 받으매 바로 그 날에 삼천 혼 가량이 그들에게 더해지니라(행2:41).
개역: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2009-05-13 13:28:46 | 관리자
짐승의 영인가, 혼인가?
과연 성경은 짐승에 대하여 무어라 말하는가? 성도들의 믿음과 실행의 표준이요, 최종 권위인 성경 말씀을 살펴보자.
개역: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3:21)
흠정역: 누가 위로 올라가는 사람의 영과 땅으로 내려가는 짐승의 영을 아느냐?
개역성경은 본문에 ‘짐승의 혼’이라고 적었으나 밑의 난외주를 보면 “여기의 혼은 원래 히브리어로 영임.”이라고 되어 있다. 도대체 히브리어가 ‘영’이면 본문에 있는 그대로 ‘영’으로 해야지 왜 ‘혼’이라 했을까? 그 이유는 번역자들의 토착 샤머니즘 사상 때문이었다. 그들은 도저히 짐승에게도 영이 있음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그래서 자기들의 사상대로 ‘영’을 ‘혼’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 구절의 영은 히브리어 ‘루아흐’를 번역한 것으로 ‘루아흐’는 영, 바람을 의미하며 여기서는 사람, 짐승과 관계가 있으므로 마땅히 영이 되어야 한다. 성경은 전도서 3장 19절에 있듯이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같이 숨을 가졌고 영을 가졌음을 분명히 보여 주며 노아의 대홍수 때에도 사람과 짐승 등 코에 생명의 숨을 가진 육체만 죽임을 당했다(창2:7; 6:17; 7:15; 7:22).
흠정역: 보라, 나 곧 내가 땅 위에 물들의 홍수를 일으켜 속에 생명의 숨이 있는 모든 육체를 하늘 아래에서부터 멸하리니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죽으리라(창6:17).
한편 하나님께서는 짐승도 영을 가졌으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말을 할 수 있음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민수기 22장에서 단 한 번 나귀가 말하는 기사를 영감으로 기록하셨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자 영을 가진 나귀는 곧바로 천사를 알아보고 말을 하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런 구절을 통해 짐승도 영이 있으므로 구원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그러나 전도서 3장 21절이 의미하듯이 짐승의 영은 죽어서 소멸되고 만다. 그러므로 짐승은 영을 가졌으나 천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는 상관없이 죽으면 그 영이 땅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지금 ‘루아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전도서의 번역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전도서에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그러면서 전도자 솔로몬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다.
흠정역: 내가 해 아래에서 이루어진 모든 일을 보았노니, 보라, 모든 것이 헛되며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로다(전1:14).
킹제임스 성경은 분명하게 “모든 것이 헛되어 영을 괴롭게 한다.”(vexation of spirit)고 전도서에서 무려 10번이나 말하고 있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이것을 전혀 달리 표현하고 있다.
개역: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영을 괴롭게 하는 것’과 ‘바람을 잡는 것’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루아흐’는 ‘바람’으로도 번역이 되고 ‘영’으로도 번역이 된다. 원어가 동일하므로 이 같은 차이가 생긴데 대해 원어를 탓할 수는 없다. 이 예를 통해 우리는 성경 번역자가 같은 단어를 문맥에 따라 어떻게 번역하는가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알 수 있다.
자, 그러면 전도서의 문맥상 어느 번역이 맞을까? 우리는 전도서 기자가 말하려는 요점이,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이 번역한 대로,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헛되어 우리의 영을 괴롭게 하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결국 전도서 기자는 마무리를 하면서 12장 13절에서 ‘사람의 본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즉, 이 모든 것이 영의 문제지 결코 뜬구름 잡는 것 같이 바람을 붙잡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번역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의미를 제대로 전달해 주는 번역이라고 믿으며 이런 의미에서 킹제임스 성경이 우리의 최종 권위라고 담대히 말하는 것이다.
2009-05-13 13:26:06 | 관리자
마귀인가, 귀신인가?
개역성경의 귀신은 어떤 존재인가? 소위 원한을 품고 구천을 떠돌아다니는 할아버지 귀신, 할머니 귀신, 처녀 귀신인가?
개역: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고전10:20)
귀신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이 구절을 보면 무릎을 치지 않겠는가? 믿지 않은 사람들이 기일이 되면 상을 차려 놓고 조상귀신들을 불러오는 것이 참으로 이 구절과 잘 맞지 않는가! 과연 성경이 조상귀신을 가르친단 말인가?
흠정역: 그러나 내가 말하건대 이방인들은 자기들이 희생물로 드리는 것들을 하나님께 희생물로 드리지 아니하고 마귀들에게 드리나니
개역성경이 ‘제사하는 것’이라 번역한 단어는 ‘sacrifice’인데 이 단어는 우리 조상들이 조상귀신을 부르는 제사와는 전혀 다른 개념의 용어로 ‘희생물을 드림’을 뜻한다. 그래서 구약의 소제, 화목제 등도 제사가 아니라 ‘음식 헌물’, ‘화평 헌물’을 드린다고 해야 맞으며 모든 영어 성경이 ‘번제 헌물’(burnt offering) 혹은 ‘번제 희생물’(burnt sacrifice)이라 번역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조상들이 무지할 때에 조상신을 섬기려고 드린 제사는 성경에서의 희생 헌물을 드린다는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성경은 죽은 자가 가는 곳이 천국 아니면 지옥이고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구천이니 음부니 하는 허구의 장소는 없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누가복음 9, 16장 참조). 즉 죽은 사람의 넋인 귀신은 성경에 없다는 말이다.
웹스터 영어사전은 ‘마귀’와 ‘귀신’이라는 두 단어를 예리하게 구별하고 있다.
귀신(demon): 고대 이교도들의 신과 사람 사이의 중간 존재. 고대 사람들은 악한 귀신과 착한 귀신이 있어서 이들이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준다고 믿었고 그래서 귀신들을 숭배했으며 또한 사람이 죽으면 그 영이 귀신이 된다고 믿음(A spirit, or immaterial being, holding a middle place between men and the celestial deities of the Pagans. The ancients believed that there were good and evil demons, which had influence over the minds of men,…Hence demons became the objects of worship. It was supposed also that human spirits, after their departure from the body, became demons, and that the souls of virtuous men, if highly purified, were exalted from demons into gods).
마귀(devil): 1. 기독교 신학에서 악한 영 혹은 하늘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쫓겨난 타락한 천사들을 가리키며 또 이런 타락한 천사들의 우두머리를 가리킴(In Christian theology, an evil spirit or being; a fallen angel, expelled from heaven for rebellion against God; the chief of the apostate angels).
사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지혜의 길로 이끌어 준 어떤 영적 존재인 ‘귀신’(demon)을 자신이 소유하고 있다고 말했으며 그리스 사람들은 ‘귀신’이 ‘반신반인’이라고 생각했다. 성경적인 기독교와 유대교를 제외한 전 세계의 모든 종교는 성경이 ‘악한 영들’(evil spirits)이라고 부르는 존재를 존경과 위로를 받기에 합당한 ‘반신반인’ 혹은 ‘귀신’이라고 믿는다.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들먹이는 사람들은 그리스어 ‘디아볼로스’(diabolos)와 ‘다이모니움’(daemonium)이 서로 다르며 전자는 사탄을 후자는 마귀들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같이 두 개의 서로 다른 그리스어를 하나의 영어 단어로 번역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원본주의자들은 큰 낭패를 보게 된다. 그 이유는 NASB 같은 현대 역본들이 두 개의 서로 다른 히브리어 ‘shed’(스트롱 번호 7700)와 ‘sair’(스트롱 번호 8163)를 다 ‘귀신’(demon)으로 번역해 놓았기 때문이다(레17:7; 신32:17 등). 깨지기 쉬운 유리 집에 살고 있는 학자들은 “원어는 원래 이런 뜻이다.”라고 말하면서 스스로에게 원어의 돌을 집어던지는 행위를 삼가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원어를 무시하지 않는다. 다만 학자인체 하며 이중 잣대를 사용하는 것을 반대한다.
도대체 다음과 같은 표현을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개역: 저희가 그 자녀로 사신에게 제사하였도다(시106:37)
여기의 ‘사신’은 무엇을 뜻하는가? 너무 쉬운 말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었으므로 개역성경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킹제임스 성경은 얼마나 단순하고 정확한가?
흠정역: 참으로 그들이 자기 아들딸들을 마귀들에게 희생물로 바쳤으며
한편 개역성경은 시편 106편 37절에서 ‘사신’으로 번역된 동일한 히브리어(스트롱 번호 7700)를 신명기에서는 ‘마귀’라고 멋있게 번역하였다.
개역: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 일어난 새 신,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신32:17)
다만 아쉬운 것은 여기 나오는 마귀, 신 등이 모두 복수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흠정역: 그들이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지 아니하고 마귀들에게 드렸으니 곧 자기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너희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신들, 새로이 일어난 새로운 신들에게 드렸도다.
많은 신(gods)이 있고 유일한 하나님(God)이 있으며 많은 아들(sons)이 있고 유일한 아들(the Son)이 있으며 많은 마귀(devils)가 있고 유일한 마귀(the devil)가 있다는 것이 바른 성경의 가르침이다.
2009-05-13 13:23:55 | 관리자
그리스도의 고난이 부족한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에 충분한가, 아니면 부족하므로 우리가 공을 들여 채워야 하는가?
개역: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도대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어느 면에서 부족하기에 그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워야 한단 말인가? NIV는 아예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부족한 것을 내 육체에 채운다고 말한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흠정역: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해 고난 당하는 것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고난들 뒤에 있는 것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해 내 육체 안에 채우노라.
킹제임스 성경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있은 뒤에 이제 성도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면서 고난 받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 주님께는 남은 고난이 하나도 없다. 우리를 위해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창에 찔리고 육체가 완전히 부서져서 그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는데 도대체 무슨 고난이 더 남아 있단 말인가?
흠정역: 그의 얼굴이 누구보다도 더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의 아들들보다 더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너를 보고 놀랐느니라(사52:14).
이렇게 예수님의 고난을 무시하는 개역성경은 다음의 구절에서도 중요한 단어를 삭제했다. 예수님의 몸이 우리를 위해 찢긴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개역: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고전11:24)
흠정역: 감사를 드리신 뒤에 그것을 떼시고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찢긴(broken)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
2009-05-13 13:21:31 | 관리자
여자 감독과 집사
초대 교회부터 성경에는 이름 없이 주님을 섬긴 많은 여인들이 있다. 특별히 한국 교회에는 여자들의 활동이 아주 왕성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너무 보기에 좋은 일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창조의 질서가 지켜지길 원하신다.
흠정역: 여자는 전적으로 복종하며 조용히 배울지니라. 오직 나는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다만 조용할지니라(딤전2:11-12).
그래서 디모데전서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영감을 주사 교회의 두 직분인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하셨다.
흠정역: 그러므로 감독은 반드시 책망 받을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며 깨어 있으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행실이 바르며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며 가르치는 재능이 있으며(딤전3:2)
흠정역: 이와 같이 그들의 아내들도 반드시 신중하며 헐뜯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일에 신실한 자라야 할지니라.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릴지니라(딤전3:11-12).
여기서 말하는 감독은 교단의 감독을 뜻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교단이 나오지 않으며 성경의 교회는 모두 독립/자치 교회이다. 여기서 감독으로 번역된 단어는 영어로 ‘bishop’인데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것을 주교로 부르고 있다. 현대 교단들의 감독 체제는 바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교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감독은 한 지역 교회의 감독을 말한다.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한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될 것이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교회의 직분은 목사와 집사뿐이 없으며 이들은 반드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 즉 여자는 이런 직분을 맡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것이 창조 질서를 위배하기 때문이다. 개역성경도 디모데전서 3장 2절과 12절은 잘 번역했으나 11절에서 큰 실수를 범하고 있다.
개역: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딤전3:11)
개역성경은 이곳을 ‘여자들도’라고 번역함으로써 마치 여자들도 집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번역했다. 그러나 심지어 NIV 같은 현대 번역본들도 킹제임스 성경과 마찬가지로 이곳을 ‘그들의 아내들도’ 즉 ‘집사들의 아내들도’라고 정확히 번역하고 있다. 아마도 여자 집사를 인정하기 위해 이런 번역을 한 것으로 사료된다.
흠정역: 이와 같이 그들의 아내들도 반드시 신중하며 헐뜯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일에 신실한 자라야 할지니라.
2009-05-13 13:19:27 | 관리자
그리스도 안과 밖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 논리적으로 교리적으로 역사적으로 과학적으로 오류가 없다. 그런데 개역성경에서는 자꾸 오류가 발견된다.
개역: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갈6:15)
흠정역: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효력이 없고 오직 새로운 창조물만 있느니라.
그리스도 밖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로마서 3장). 할례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히 허락하신 복은 무할례자들이 결코 뺏을 수 없는 복이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즉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는 교회 안에서는 이런 것이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천주교 성향의 서기관들이 천주교의 이스라엘 대체 신학 즉 교회가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거짓말을 지지하기 위해 이것을 삭제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육체적으로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친 자손들이 있으며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자기들의 땅에서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여 천년왕국을 소유하려 하고 있다. 아브라함에게 무조건적으로 허락하신 저 팔레스타인 땅은 누가 뭐라고 해도 영원토록 유대인들의 땅이다(창세기 12, 15장).
2009-05-13 13:17:31 | 관리자
아라바의 동쪽 세일 산 근처에 있는 원추형의 산. 이것은 비정상적으로 잘려나간 원추형의 산으로 여기에는 아주 거친 세 개의 봉우리가 있다(민20:22-29). 대제사장 아론은 이 산에 올라가서 죽었다(민33:38).
2009-05-12 16:30:04 | 관리자
출3:1; 17:6; 33:6; 신1:2, 6, 19; 왕상8:9; 19:8; 대하5:10; 시106:19; 말4:4 등에 나오는 산. 어떤 이들은 이곳이 시내 산의 낮은 부분 혹은 봉우리라고 생각하며 다른 이들은 시내 산이 위치한 지역이라고 생각한다.
2009-05-12 16:29:38 | 관리자
성경에서는 여러 용례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먼저는 같은 부모에게서 난 아들을 뜻했고(마1:2; 눅6:14; 요7:3; 행1:15) 사촌이나 가까운 친족(창13:8; 14:16), 같은 줄기나 지역에서 난 사람(마5:47; 행3:22; 히7:5), 동료나 같은 연배의 사람(마5:23; 7:3), 사랑하는 사람(삼하1:26),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인들(행9:30; 11:29)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되었다. 마12:46-50; 13:55-56; 막3:31-35에는 그리스도의 형제들이 그의 어머니와 누이들과 함께 언급되는데 그들은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난 자녀들이었다.
2009-05-12 16:29:10 | 관리자
어떤 것을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본 뜬 것. 이런 차원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고후4:4; 골1:15; 히1:3) 이는 곧 그분께서 본질이나 특성에서 하나님과 같음을 뜻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창1:27) 영적, 지적, 도덕적인 면에서 그리고 의와 거룩함에서 그분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음을 뜻한다. 그러나 죄를 지은 이후에 아담의 후손들은 타락한 상태의 아담의 형상대로 태어났다(창5:3). 모든 사람은 죄 많은 아담의 형상을 받고 태어났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하늘에 속한 사람 그리스도의 도덕적인 형상으로 빚어져야만 한다(고전15:47-49; 고후3:18).
욥4:16에 나오는 형상은 꿈꾸는 자에게 마치 실체처럼 보였다. 형상이라는 말은 종종 진짜 물체를 뜻하기도 하며(시73:20; 히10:1) 종종 거짓 신을 나타내기도 한다(단3:1-30). 하나님은 모든 종교적 경배에서 어떤 종류의 형상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셨다(출20:4-5; 신16:22; 행17:16; 롬1:23). 처음으로 기독교에 형상들이 들어온 것은 4세기 후반이며 그때에도 반대가 많았다. 현재 천주교회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형상을 많이 만들고 그것들에게 경배하면서 십계명의 두 번째 명령을 어기고 있다(출20:4-5; 32:4-5; 신4:15; 사40:18-31; 요4:23-24; 계22:8-9). ‘형상을 둔 방’(겔8:7-12)에는 이집트 신전의 벽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각종 우상숭배 그림이 벽에 그려져 있었다.
2009-05-12 16:28:46 | 관리자
고대의 형벌은 민족과 시대에 따라 또 범죄에 따라 크게 달랐다. 살인자를 사형시키는 것은 인류의 시작부터 영원토록 정착된 제도였으나 다만 가인의 경우는 하나님의 간섭으로 인해 사형이 면제 되었다(창4:14-15). 한편 홍수 이후에 사형 제도는 다시 확고히 세워졌고(창9:5-6) 광야에서도 확인되었으며(민35:9-34) 인류 사회 구석구석에서 널리 인정되었다.
히브리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흔한 사형 방법은 돌을 던져 죽이는 것이었으나(신13:9-10; 17:5; 요8:7) 주변의 다른 민족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목을 베는 방법(왕하10:6-8; 마14:8-12), 절벽의 바위에서 떨어뜨리는 방법(대하25:12; 눅4:29), 목을 매는 방법(수8:29; 에7:10), 불로 태우는 방법(단3:1-30), 몸을 찢어서 죽이는 방법(단2:5; 3:29; 히11:37), 바퀴가 달린 구조물에서 때려서 죽이는 방법(히11:35), 들짐승에게 내어주는 방법(단6:1-28; 고전15:32), 익사시키는 방법(마18:6), 십자가에서 죽이는 방법(요19:18) 등도 도입되었다. 가벼운 형벌에는 채찍질(레19:20; 고후11:24), 배상(출21:23-25; 신19:19), 투옥(대하16:10; 마4:12), 차꼬(행16:24), 유배(계1:9), 개인적인 고문(대하18:26; 사50:6; 마18:30; 히11:37) 등이 있다.
2009-05-12 16:28:16 | 관리자
피가 나오는 병(마9:20).
2009-05-12 16:27:44 | 관리자
혀는 문자적 의미뿐만 아니라 말이나 방언을 가리키고(신28:49; 행1:19) 공통 언어를 가진 민족을 가리키기도 한다(사66:18; 계11:9). 상징적으로 혀는 칼처럼 혹은 뱀처럼 날카롭게 만들 수 있다(시64:3; 140:3). 활처럼 혀는 거짓을 쏠 수 있으며(렘9:3) 속임수로 가득하다(렘9:8). 혀는 공격용 무기로 쓰일 수 있으며(렘18:18) 날카로운 칼처럼 상처를 낼 수 있다(시57:4). 혀는 아첨하는 데 쓰이고(시5:9; 잠28:23) 비방(시15:3; 잠25:23), 속임(시50:19), 거짓(시109:2; 잠26:28), 논쟁(시31:20), 저주(호7:16)에도 쓰인다. 혀에는 재갈을 물려야 한다(약1:26). 혀는 사람의 영의 지표로서 사람 속에 있는 것을 나타낸다(마12:33-37; 15:18; 눅6:43-45).
2009-05-12 16:27:21 | 관리자
가나안의 아들인 헷의 후손들(창10:15). 그들은 아브라함 당시 헤브론 근처에 살던 가나안 족속이었으며(창15:20-21) 후에 이스라엘 자손에 의해 정복되었지만(출3:8; 수3:10) 완전히 멸절되지는 않았다.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는 헷 족속이었다(삼하11:3). 솔로몬은 그들에게 일을 시켰고(왕상10:29; 왕하7:6) 그들은 유대인들이 바빌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에야 비로소 하나의 백성/민족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게 되었다(스9:1). 가나안 족속 참조.
2009-05-12 16:26:44 | 관리자
므낫세 왕의 어머니(왕하21:1). 이것은 또한 영광을 얻을 유대 민족을 가리키기도 한다(사62:4).
2009-05-12 16:26:18 | 관리자
포도와 포도즙으로 유명한 시리아 혹은 레바논의 도시(겔27:18). 이곳의 포도즙은 다마스커스 주변에서 만들어져서 두로에 보내졌으며 품질의 우수성과 향기 면에서 레바논의 포도즙과 비슷했다(호14:7). 포도즙 참조.
2009-05-12 16:24:58 | 관리자
기브온 근처의 장소.
여기서 다윗과 이스보셋의 군사들이 요압과 아브넬의 인도를 받아 싸움을 벌이다가 여러 사람이 죽었다(삼하2:16).
2009-05-12 16:24:30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