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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장 13절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 ever. Amen(영어 킹제임스 성경).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우리를 건지시옵소서.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킹제임스 흠정역). 의심의 초점이 되는 이 구절은 일반적으로 주기도문으로 알려진 구절의 결론이다. 원래 이 주기도문은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이라는 송영과 함께 끝난다. 이 구절은 대다수의 그리스어 사본과 그리스어 공인 본문 그리고 다수 본문에서 발견되며 초기 영어 역본들과 킹제임스 성경 그리고 뉴킹제임스 역본(NKJV)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이 부분은 비평 본문이나 대부분의 현재 역본들의 주요 본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역자 주: 혹은 대부분의 한글 성경에서처럼 괄호를 치고 각주에서 ‘이 부분은 더 좋은 사본에는 없음’이라고 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이 누가복음 11장 2-4절에서 나타나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사실 그 구절에서는 동일한 송영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사복음서에서 다양한 구절을 조화시키는 데 취미를 가진 서기관들이 두 개의 주기도문을 맞추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제안한다. 두 개의 구절은 내용에서 유사하지만 그것들이 동일한 기도라는 것은 사실 의심스럽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유명한 산상수훈을 설교하실 때 쓰신 마태복음의 그 구절은 많은 대중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구절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물었던 주님의 제자들에게만 특별하게 준 것이다. 유사하다는 것이 동일함을 의미하지는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기도 혹은 이 형태의 기도가 한 번 이상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은 사실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마태복음에 있는 기도가 원래 전통 본문에서 발견된 종결 구절을 포함했는가?” 그리스어 엉셜 사본 중에서 그 부분은 W(5세기). L(8세기), 0233(8세기), K(9세기), Δ(9세기), Θ(9세기), 그리고 Π(10세기)에서 발견된다. 또한 28, 33, 565, 700, 892, 1009, 1010, 1071, 1079, 1195, 1216, 1230, 1241, 1242, 1365, 1546, 1646, 2174와 같은 그리스어 소문자 사본들의 대다수에서도 이것이 발견된다(9세기부터 12세기까지에 속한). 마태복음에 있는 이 기도의 뒷부분은 또한 현존하는 모든 그리스어 성구집의 대다수에서 발견된다. 그러므로 그리스어 사본들의 증거는 마태복음에 있는 기도의 끝 부분이 성경에 포함되어야 함을 보이면서 찬성의 결론을 내린다. 마태복음의 그 부분은 또한 구 라틴 사본들과 구 시리아 역본 및 몇몇 콥트 역본과 같은 고대 역본들에서도 발견된다. 시리아 페시타(주후 2세기/3세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And bring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 ever and ever: Amen.”(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우리를 건지시옵소서.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 이것은 킹제임스 성경과 전통 본문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지리적으로 여러 곳에서 나온 역본들의 지지를 받을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아주 오래 되었다는 증거도 가지고 있다. 마태복음의 이 부분은 또한 교부들의 지지를 받는다. 4세기의 저명한 정통파 교부인 크리소스톰은 이 구절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위에 계신 왕을 기억하게 하고 그분이 모든 것보다 권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6장을 포함하는 모든 그리스어 사본들보다 먼저 나온 증거는 보통 ‘12사도의 가르침’으로 알려진 ‘디다케’(Didache)이다. 이 고대 교리문답서는 2세기 초기 즉 주후 100년이 조금 지났을 때의 주기도문의 형태를 포함한다. 위선으로 금식하지 말라. 그들은 한 주의 둘째 날과 다섯째 날 금식하지만 너희는 넷째 날과 예비일(금요일)에 금식하라. 위선으로 기도하지 말고 다만 주님께서 자신의 복음서에서 가르쳐 준 것처럼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빵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우리를 건지시옵소서.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그러므로 매일 이렇게 세 번 기도하라. 마지막으로 고대 파피루스에 대한 연구에서 밀리간은 마태복음 6장 13절의 기도와 부합하는 6세기의 기도를 포함시켰다. 이 파피루스는 매우 낡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의심을 받고 있는 이 구절을 분명히 포함하고 있다. 이 구절의 전통 본문에 대한 본문의 증거는 아주 오래되었고 또 대단히 많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영어 역본 안에 반드시 그것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2009-05-11 17:18:22 | 관리자
마가복음 1장 2절 As it is written in the prophets, Behold, I send my messenger before thy face, which shall prepare thy way before thee(영어 킹제임스 성경). 대언자들의 글에(in the prophets)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얼굴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킹제임스 흠정역). 전통 본문은 여기에서 “대언자들의 글에 기록된 바”라고 기록하고 바로 그 다음에 말라기 3장 1절과 이사야서 40장 3절을 인용한다. 한편 다른 본문은 말라기와 이사야서를 인용하기 전에 “선지자(대언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된 바”라고 기록한다. 여기서도 전통 본문의 구절은 상당한 지지를 받는다. 전통 본문의 구절은 많은 그리스어 엉셜 사본(A, K, P, W, Π), 대다수의 그리스어 소문자 사본(28, 1009, 1010, 1079, 1195, 1216, 1230, 1242, 1252, 1344, 1365, 1546, 1646, 2148) 그리고 대다수의 그리스어 성구집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4세기 이전의 그리스어 사본들이 이 구절을 지지한다. 게다가 우리는 또한 시리아의 하클레안 역본(주후 616년)과 아르메니아 역본(주후 4세기/5세기) 그리고 6세기의 이디오피아 역본에서도 동일한 구절을 발견한다. 전통 본문의 구절은 또한 이레네우스의 라틴 기록(주후 202년)과 포티우스(주후 895년) 그리고 테오필랙트(주후 1077년) 같은 많은 교부들의 글로부터 지지를 받는다. 문맥적으로 볼 때 비평 본문에서 발견된 구절에는 문제가 있다. 그 구절은 분명히 대언자 말라기(3:1)와 대언자 이사야(40:3) 모두를 인용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선지자(대언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된 바”라고 기록한 것은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이사야가 큰 대언자였으므로 그가 말라기에 비교해서 우위를 차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점을 예증하기 위해 학자들은 종종 마태복음 27장 9절에 주의를 돌리게 한다. 그들은 이 구절이 실제로 예레미야서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라 스가랴서 11장 12절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큰 대언자이므로 스가랴에 비교해서 우위를 갖는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 점은 쉽게 논박될 수 있다. 마태복음 27장 9절은 마가복음처럼 “기록된바”(As it is written)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마태복음의 본문은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 성취되었다.”고 진술한다. 성경 기록의 저자인 하나님은 누가 무엇을 기록하고 누가 무엇을 말했는지 알고 계신다. 간단히 말해 스가랴가 그 구절을 기록했다는 것은 결코 예레미야가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스가랴는 이전의 대언자들이 말한 것에 주목하라고 이스라엘에 경고했다(슥7:7). 고대 유대인들은 “예레미야의 영이 스가랴 안에 있었다.”고 말했다. 스가랴가 받았던 많은 것은 실제로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고 또 스가랴 이전의 대언자인 예레미야로부터 받은 것이다. 어떤 이들은 가능한 실수로 인지된 것이 실제로는 추측에서 나왔음을 수정하기 위해 어떤 필사자가 마가복음 1장 2절에서 ‘대언자 이사야’ 대신 ‘대언자들’이라고 변경해서 그 뒤의 두 개의 인용 구절과 일치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역자 주: 이 경우 그들은 최초의 영감 받은 원본에 실수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량한 사람이 그것을 보고 고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편에 속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구약성경 대언자들에 대해 매우 친근하지 않은 이집트의 어떤 필사자가 거기에 나오는 이사야서의 인용 구절을 보고는 자기 생각에 더 명료한 구절이 되도록 그런 변화를 일으켰다고 쉽게 제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양쪽 모두 각자의 입장에 대해 본문상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또한 우리는 킬패트릭이 언급한 것처럼 이런 본문 이문들의 대부분의 유형이 2세기 전에 사본들 안에 도입되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한 본문은 다른 본문과 본문 면에서 볼 때 거의 같다. 다만 차이점은 문맥적인 것이다. 두 명의 대언자를 인용할 때는 ‘대언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따라서 전통 본문의 구절은 문자적으로 합당하며 문맥적으로도 정확하다.
2009-05-11 17:15:50 | 관리자
누가복음 2장 22절 And when the days of her purification according to the law of Moses were accomplished, they brought him to Jerusalem, to present him to the Lord;(영어 킹제임스 성경) 또 모세의 율법에 따라 그녀를 정결하게 하는 날들을 채우매 그들이 아이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가니(킹제임스 흠정역) 여기에서 이문은 작지만 차이점은 깊이가 있다. 흠정역 성경과 공인 본문(베자의 판과 엘제비어 판)은 ‘그녀를 정결하게 하는 일’(katharismou autes)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한편 현대 역본들과 비평 본문은 ‘그들을 정결하게 하는 일’(katharismou auton)이라고 기록한다. 문맥적으로 여기의 본문은 킹제임스 성경에 반영된 것처럼 되어야만 한다. 레위기에 적힌 율법에 따라 여인은 출산 후 정결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며 그래서 그녀를 정결하게 하는 일이 필요했다. 레위기 12장 2-4절에 있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여인이 씨를 수태하여 사내아이를 낳으면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곧 분리하는 날들과 같이 그녀가 자기의 연약함으로 인해 부정할 것이며 여덟째 날에는 그 아이의 포피 살을 베어 할례를 행할 것이요, 그 뒤에 그 여인은 삼십삼 일 동안 자기를 정결하게 하는 피 안에 머무를 것이며 자기를 정결하게 하는 날들을 채울 때까지는 거룩한 것을 만지지도 말고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지니라(킹제임스 흠정역). 인용문은 아주 명백하다. 이것은 ‘그녀를 정결하게 하는 것’이지 어머니와 아들 모두를 정결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흠정역 성경과 그리스어 공인 본문은 레위기의 율법에 동의한다. 이 점을 상쇄시키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여기 나오는 ‘그들’이라는 단어가 마리아와 요셉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제안한다. 그 논점은 요셉과 마리아가 16절과 22절 하반절에 나왔기 때문에 여기에 나오는 ‘그들’은 결혼한 부부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과 관련된 명확한 교리상의 문제는 레위기 12장에 있는 모세의 율법 하에서 여자는 출산 후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필요로 했지만 남편은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문맥에 따른 최고의 본문은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에 동의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구약성경의 율법과 누가복음에서 나타나는 행동 모두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현재 공인 본문에서 발견된 이 구절을 지지하는 그리스어 사본들이 아주 형편없이 적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본문은 그리스어 소문자 사본 76과 몇 개의 다른 소문자 사본들 안에서만 발견된다. 그리스어 사본들 안에는 부가적인 본문 이문이 있다. 본문 학자들 사이에서 크게 인정을 받는 코덱스 사본 D05(6세기)는 ‘autou’(그것) 라는 본문을 가지고 있다. 공인 본문의 단어인 ‘autns’(그녀)가 선호되지만 이 두 개의 단어는 소유격 단수로서 비평 본문의 ‘auton’(그들)처럼 복수가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2174와 D05 사본을 지지하는 시내 시리아 역본(Sinaitic Syriac)과 사히드어 콥트 역본(Sahidic Coptic)을 가지고 있다. ‘그녀를 정결하게 하는 일’이라는 본문은 라틴 증거들 사이에서 본문상의 큰 지지를 받고 있다. 대다수의 라틴 사본들은 ‘et postquam impleti sunt dies purgationis eius secundum legem mosi’ 즉 ‘그리고 모세의 율법에 따라 그녀를 정결하게 하는 날들 이후에’라고 기록되어 있다. 라틴 단어 ‘eius’(또는 ejus)는 ‘그녀’(her)를 의미하며 여성 소유격 단수이므로 ‘그녀의’라는 뜻이다. 이 부분을 ‘그들을 정결하게 하는 것’ 즉 ‘of them’으로 번역하려 하였다면 라틴 본문들은 그것 대신 ‘eorum’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 현존하는 라틴 사본들의 연대와 수를 고려할 때 우리는 그 본문이 연대가 오래 되었다는 사실과 구체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본문이 위조된 ‘모조 마태복음’(아마 3세기 것으로 추정됨)에서도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라틴어로 기록된 이 문서는 우리로 하여금 누가복음 2장 22절에서 말한 ‘그 정결하게 하는 일’이 마리아를 가리킴을 알도록 한다. ‘모조 마태복음’은 다음과 같다. “이제 모세의 법률에 따라 마리아를 정결하게 한 날들이 성취된 이후에 요셉은 주님의 성전으로 아이를 데리고 갔다”(15:1). 흠정역 성경 번역자들은 이 구절에 관한 본문상의 차이점을 잘 인식했다. 제네바 성경과 비숍 성경은 ‘그녀를 정결하게 하는 날들’이라고 기록했지만 틴데일의 신약성경과 그레이트 성경은 ‘그들을 정결하게 하는 때’라고 기록했다.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이 주로 베자(Theodore Beza)의 그리스어 신약성경(1589년 판과 1598년 판)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베자는 자기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리스어) 코덱스 사본들의 대다수는 ‘그들의’라 기록하고 마찬가지로 오리겐도 그렇게 기록하며 불행하게도 에라스무스도 그렇게 기록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실제로 율법이 어머니의 정결례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리스어로 된 오래된 판들은 선호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성경 기록의 진실을 왜곡했으며 어떤 면에서 마리아의 순결함에 이미지를 경시했다. 베자의 주석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그녀의’라는 본문에 대해 베자가 현존하는 그리스어 사본들을 연구한 것에 기초하여 어떤 본문상의 증거를 가지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게다가 베자는 이것이 모세의 율법과 일치하는 본문이라는 점을 인식했다. 베자의 그리스어 번역과 라틴 벌게이트 사이에 놓여 있는 베자 자신의 라틴어 번역에서 그는 ‘dies purationis Mariae’(마리아를 정결하게 하는 날)라고 그 구절을 명확하게 표현했다. 이것은 마리아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넣었다는 점에서 ‘모조 마태복음’과 일치한다.
2009-05-11 17:14:20 | 관리자
마가복음 16장 9-20절 이 12구절은 보통 ‘마가복음의 긴 결말’이라고 불린다. 많은 본문 비평가들은 마가복음의 ‘긴 결말’의 확실성을 의심하며 마가복음의 그 부분이 2세기에 첨가되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현대 역본에서 마가의 ‘긴 결말’은 확실성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보통 각주와 더불어 괄호로 표시된다. 많은 본문 학자들은 마가의 본문이 갑자기 8절 이후에 끝난다고 믿는다. 이 ‘긴 결말’ 말고 ‘짧은 결말’이라는 것도 있는데 그들은 이 ‘짧은 결말’도 2세기에 도입되었다고 생각한다. ‘짧은 결말’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그들은 베드로와 그와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정말로 담대했다고 짤막하게 보고했다. 이 후에 예수님은 친히 그들을 통해 동쪽부터 서쪽까지 신성하고 영원한 구원을 보내셨다. 아멘.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가복음의 원래 결말이 손실되었다고 믿는다. 만일 이것이 진실이라면 성경 기록의 말씀들(단어들)이 영원토록 보존된다는 개념은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주님의 말씀들은 동시에 보존되고 손실될 수 없다. 그렇지만 본문 학자들의 대다수는 비록 자기들의 ‘긴 결말’에 대해 의심하지만 그래도 그 부분을 마가복음의 끝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한다. 메츠거는 ‘더 짧은 본문을 선호한다’(Brevior lectio potior)는 현대 본문 비평가들의 격언을 버리고 비록 자기가 확실히 그 12구절이 진짜라고 간주하지는 않더라도 ‘긴 결말’을 지지한다. 메츠거는 그 부분이 기독교계 전체에게 전통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에 그것이 합법적으로 마가복음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 구절은 알렉산드리아 본문, 소문자 사본 2386, 시내 시리아 역본 및 몇몇 다른 역본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본들에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 12구절은 5세기와 9세기 사이의 것으로 인정되는 그리스어 엉셜 사본들의 대부분(A, C, D05, K, Ξ, Δ, Θ 및 Π)에 있다. 그 12구절은 또한 더 나중의 것인 그리스어 소문자 사본들(137, 138, 1110, 1210, 1215, 1216, 1217, 1221, 그리고 1582와 같은)에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그 12구절은 콥트 역본과 다른 초기 역본들뿐만 아니라 구 라틴 본문의 대다수에서 발견되는 본문이다. 마지막으로 그 12구절은 저스틴(주후 165년), 터툴리안(주후 220년), 히폴리투스(주후 235년), 암브로스(주후 397년) 그리고 어거스틴(주후 430년)과 같은 많은 초기 교부들에 의해 (적어도 부분적으로) 인용되었다. 주후 177년에 이레네우스는 이단에 대항하는 글을 썼다. 그 글에서 그는 마가복음 16장 19절을 인용했는데 이것은 마가의 긴 결말이 그 당시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며 적어도 이레네우스가 그것을 정경으로 생각했음을 보여 준다. 또한 마가복음서의 결론에서 마가는 말한다. “이렇게 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뒤에 하늘로 올려져서 영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시니라.” 이것은 대언자들이 대언한 것을 확증한다.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따라서 하나님과 아버지는 진실로 한 분이시며 동일하시다. 대언자들이 선포한 그분은 진실한 복음에 의해 전해졌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경배하고 전심으로 사랑하는 그분은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그 안의 모든 만물을 만드신 분이시다(3:10:5). 여기서 차이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이 12구절이 확실하지 않다고 결론 내린다면 우리는 마가복음의 원래 결론에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 한다. 복음서가 이곳에서 그렇게 갑자기 끝난다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다. 어떤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복음서가 결코 끝이 나지 않았다는 것도 성경의 영감에 의문을 불러일으키므로 결코 논리적이지 않다. 자유주의 학자든 보수주의 학자든 간에 대부분의 본문 학자들이 내린 결론 즉 원래의 결말이 손실되었다는 것은 성경 보존 교리를 확실히 부인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영감 받은 성경 기록의 한 구절이 성경의 이 부분으로부터 손실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다른 구절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어떻게 금할 수 있겠는가? 본문의 어떤 차이나 모든 차이를 언급하는 것은 분명히 학문적 연구의 영역 안에 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이 구절이나 저 구절이 소실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연다면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성경적인 약속들보다 사람들의 이해를 더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의 증거를 받아들이고 성경 보존의 약속을 붙잡는 것이 확실히 더 낫다.
2009-05-11 17:12:42 | 관리자
사도행전 9장 5-6절 5 And he said, Who art thou, Lord? And the Lord said, I am Jesus whom thou persecutest: it is hard for thee to kick against the pricks. 6 And he trembling and astonished said, Lord, what wilt thou have me to do? And the Lord said unto him, Arise, and go into the city, and it shall be told thee what thou must do(영어 킹제임스 성경). 5 그가 이르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가시 채를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 하시거늘 6 그가 떨며 심히 놀라 이르되, 주여,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나이까? 하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도시로 들어가라. 그러면 네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듣게 되리라, 하시니(킹제임스 흠정역). [역자 주: 개역성경에는 이 구절들이 들어 있으나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그리스어 본문에는 삭제되어 있음.] “가시 채를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는 5절의 내용은 구 라틴 사본들과 약간의 벌게이트 사본들에 들어 있다. 이 구절은 또한 페시타와 그리스어 코덱스 사본 E, 그리스어 사본 431에 있지만 지금처럼 5절에 있지 않고 4절에 있다. 6절 말씀 즉 “그가 떨고 심히 놀라 이르되, 주여,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나이까? 하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는 구 라틴 성경, 라틴 벌게이트 그리고 몇몇 고대 시리아 역본과 콥트 역본에 있다. 그렇지만 이 구절들은 대다수의 그리스어 사본들에서 발견되지 않으며 또한 비평 본문이나 다수 본문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에 이 구절들은 공인 본문에 포함된다. 표면적으로 볼 때 본문상의 증거는 약하게 보인다. 그러면 왜 우리가 이 시점에서 대다수의 그리스어 증거들을 물리치고 공인 본문을 수용해야만 하는가? 그 이유는 이 구절들이 다른 언어들에서 보존되어 있고 내적 증거 역시 사실상 바울의 개종 당시에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들을 하신 것이 확실함을 보여 주므로 이 구절들은 확실한 것이다. 사도행전 9장은 바울의 회심이 이루어진 것을 보여 주는 유일한 성경 기록이 아니다. 사도행전 22장 10절과 26장 14절에서 우리는 사도 자신의 증언을 볼 수 있다. 거기에서는 모든 그리스어 본문에서 문제의 그 구절들이 나타난다. 사도행전 22장 10절 (킹제임스 흠정역) 내가 이르되, 주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하리이까? 하매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다마스커스로 들어가라. 그러면 네가 하도록 정해 놓은 모든 일을 거기서 듣게 되리라, 하시니 사도행전 26장 14절 (킹제임스 흠정역) 우리가 다 땅에 쓰러지니 내게 말씀하시는 한 음성이 있어 내가 들으매 히브리말로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채를 걷어차기가 네게 고생이라, 하시니 사도 바울은 자신의 회심을 이야기하면서 문제의 그 말씀들을 분명히 인용했다. 성령님께서 사도행전 9장 5-6절에 이 말씀들이 포함되도록 영감을 주셨음이 확실하다. 우리는 이 말씀들이 그 사건이 원래 발생했을 때 바울에게 주어졌다고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 그 말씀들이 대부분의 그리스어 사본들의 사도행전 9장 6절에 보존되어 있지 않지만 그것들은 다른 역본들(그루지아, 슬라브, 이디오피아 역본 등)뿐만 아니라 라틴 사본들(ar, c, h, l, p, ph, t)에도 보존되어져 있다. 모든 본문 비평가들 중에 가장 위대한 본문 비평가는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은 그 말씀을 사도행전 22장 10절과 26장 14절에 포함시킴으로써 그것들의 확실성에 대한 증거를 낳으셨다. 이와 유사한 예가 마태복음 19장 17절에서도 좀 더 강한 본문의 증거와 함께 언급된다. 킹제임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다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거든 명령들을 지키라, 하시니” 그런데 현대 역본들의 본문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를 “네가 어찌하여 선한 일에 대하여 내게 묻느냐?”라고 표현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답변인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를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니라”라고 표현한다. [역자 주: 대부분의 한글 성경들도 이와 같다.] 킹제임스 성경이 보여 주는 이 구절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훌륭하게 확립한다. 만약 오직 하나님만이 선하시며 그리스도가 선한 이로 불린다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되어야만 한다. 전통 본문에 제시된 것처럼 킹제임스 성경 본문에 대한 그리스어 사본들의 지지는 상당하다. 엉셜 사본들 중에 이 구절은 C와 W(5세기), K와 Δ(9세기) 그리고 몇몇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이 구절은 대다수의 그리스어 소문자 사본과 성구집의 본문이다. 또한 초기 구 라틴 성경, 구 시리아 역본 그리고 콥트 역본 및 다른 초기 역본들의 본문이다. 이 본문의 증거는 사도행전 9장 5-6절의 증거보다 훨씬 더 강하다. 또 사도행전과 마찬가지로 이 구절에는 원래 본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부가적인 참조 자료가 있다. 다시 성령님께서는 이 사건이 인용된 두 개의 다른 곳을 우리에게 제공하면서 이 본문 문제를 정리하신다. 이 두 경우 모두 논쟁이 되는 마태복음 구절을 지지하는 구절에 본문의 이문이 없다. 마가복음 10장 18절 (킹제임스 흠정역)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누가복음 18장 19절 (킹제임스 흠정역)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위의 두 구절 중 어떤 구절에서도 주님은 “네가 어찌하여 선한 일에 대하여 내게 묻느냐?”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또 두 구절 모두에서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명사를 발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태복음 19장 17절의 본문이 옳은지 그른지 사람들에게 물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옳은 독본인 부가적인 구절들에서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동일한 원리가 사도행전 9장 5-6절에도 적용될 수 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들에 대해 친히 증언하신다.
2009-05-11 17:01:12 | 관리자
사도행전 8장 37절 And Philip said, If thou believest with all thine heart, thou mayest. And he answered and said, I believe that Jesus Christ is the Son of God(영어 킹제임스 성경). 빌립이 이르되, 만일 그대가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받을 수 있느니라, 하니 내시가 응답하여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노라, 하니라(킹제임스 흠정역). 여기에 나오는 이 신실하고 사랑스런 아프리카 이디오피아 내시의 증언은 비평 본문에 나타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이 원본이 아닌데 그 이유는 이 구절이 단지 소수의 후대 사본들에서만 발견되며 에라스무스가 라틴 벌게이트로부터 그리스어 본문에 삽입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구절이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에 나타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구절은 또한 다른 많은 구 라틴 사본들(l, m, e, r, ar, ph 및 gig 등)에서도 나타난다. 이 구절은 또한 그리스어 코덱스 사본 E(주후 8세기)와 몇몇 그리스어 사본들(36, 88, 97, 103, 104, 242, 257, 307, 322, 323, 385, 429, 453, 464, 467, 610, 629, 630, 913, 945, 1522, 1678, 1739, 1765, 1877, 1891 및 다른 사본들)에서도 발견된다. 이런 본문들 중에서도 정확한 단어들의 차이점이 있지만 이 구절이 어떻게 다른 사본들로부터 삭제되었는지에 대한 증언의 본질은 여전히 남아 있다. 게다가 이레네우스(주후 202년), 키프리안(주후 258년), 암브로시아스터(주후 4세기), 파시안(주후 392년), 암브로스(주후 397년), 어거스틴(주후 430년) 그리고 테오필랙트(주후 1077년) 등은 모두 사도행전 8장 37절을 인용했다. 본문 학자들 앞에 놓인 자연적인 질문은 바로 이렇다. 만약 그 본문이 진짜라면 무슨 이유로 어떤 서기관은 그것을 삭제하기를 원했는가? 사도행전에 대한 주석에서 알렉산더는 가능한 대답을 제공한다. 3세기말까지는 기독교 개종자들의 침례를 연기하는 것이 일반적인 습관이 되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진실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속을 이해했는지 그리고 그 당시에 널리 퍼진 다양한 이단 신념들 중의 하나를 가지고 있지는 않는지를 확실히 알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침례가 회심 이후에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 어떤 서기관이 본문으로부터 이 구절을 삭제했을 것이다. 사실 이것은 그 뒤를 이은 많은 그리스어 사본들에서 이 구절이 삭제된 이유를 설명할지도 모른다. 확실히 이런 추측은 이 본문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제공하는 다양한 설명만큼 가능하다. [역자 주: 신약성경을 보면(행16:14-15, 33 등) 모든 경우에 어떤 사람이 회심하고 믿음의 고백을 하면 그 즉시 침례를 주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보존 때문에 이 본문은 구 라틴 사본들에서 뿐만 아니라 몇몇 그리스어 사본들에도 남아 있다. 명백히 그 본문은 어떤 학자들이 제안한 것처럼 6세기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이레네우스는 “믿음을 가진 내시 자신이 즉각적으로 침례받기를 요청했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라고 말했다.”고 언급했다. 마찬가지로 키프리안은 자신의 글에서 그 구절의 상반절을 인용한다. “사도행전에서, ‘자, 여기 물이 있으니 내가 침례 받는 것을 방해할 것이 무엇인가? 그러자 빌립이 말했다. 만약 그대가 전심으로 믿는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사도행전 8장 37절을 명확하게 인용하는 이들의 진술문은 2세기 말과 3세기 초반에 나타난다. 우리는 이 구절이 현존하는 그리스어 사본들이 필사되기 전부터 이미 오래전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그 자체가 그것의 확실성과 성경 보존을 입증하는 것이다. [역자 주: 아마도 말도 못하는 아이에게 믿음의 고백도 없이 유아세례를 주려면 이와 같은 구절이 치명적이었으므로 유아세례를 주는 단체나 개인이 이 구절을 삭제했을 가능성도 있다.]
2009-05-11 16:57:00 | 관리자
요한복음 7장 53절~8장 11절 이 구절은 보통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의 기사’(Pericope De Adultera)로 표시된다. 여기의 12구절들은 D05, G, H, K, M, U 및 Г와 같은 많은 엉셜 사본에 포함되어 있다. 또 소문자 사본들 중에서 28, 700, 892, 1009, 1010, 1071, 1079, 1195, 1216, 1344, 1365, 1546, 1646, 2148 및 2174 안에도 들어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어 사본들은 이 구절들을 포함한다. 이 구절들은 또한 보하이르어 콥트 역본(Bohairic Coptic), 시리아 팔레스타인 역본(Syriac Palestinian) 그리고 이디오피아 역본과 같은 초기 역본들 안에도 들어 있는데 이것들은 다 주후 2세기부터 6세기까지의 것으로 인정된다. 이 구절들은 분명히 구 라틴 사본들의 대다수와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의 본문이다. 또 이 구절들은 교부인 디다스칼리아(주후 3세기), 암브로시아스터(주후 4세기), 암브로스(주후 4세기), 사도들의 헌장(Apostolic Constitutions, 주후 380년경에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나온 예배 의식의 가장 큰 본문 수집물), 제롬(주후 420년) 그리고 어거스틴(주후 430년)의 지지를 받는다. 대부분의 본문 학자들은 이 구절들을 반대하는 증거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으로 생각하며 그래서 이 본문이 원본에 있었음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이 구절들은 여전히 대다수의 현대 번역본들의 본문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거절 이유가 각주로 한정된 요한복음 5장 4절과는 달리 이 12구절은 본문에는 들어 있지만 주로 괄호로(마가복음 16장 9-20절과 같이) 구분된다. 만약 이 12구절을 반대하는 증거가 매우 압도적이고 이 본문이 원본의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이 모든 구절은 비평 본문과 현대 역본들의 다른 짧은 구절들처럼 본문 자체에서 제거되어야 함이 마땅하지 않는가? 만약 누군가가 작은 부분들을 제거한다면 그것들과 비교해서 본문의 증거가 동일하거나 더 큰 경우 더 많은 부분 역시 일관성 있게 제거해야 함이 마땅하지 않는가? 그들이 본문에서 이 12구절을 제거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수용의 문제일 것이다. 성경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 구절들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들은 도저히 본문으로부터 이것들을 제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공인 본문과 다수 본문의 지지자들은 이 구절의 확실성을 건전하게 지켜왔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리스어 사본들의 대부분은 이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이 구절들은 명확하게 전통 본문의 일부이다. 게다가 내적 증거는 이 구절들이 원본에 있었음을 증명한다. 만약 우리가 그 구절들을 제거한다면 본문에 대해 매우 엉뚱한 비약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왜 이 구절들이 어떤 사본에서 삭제된 적이 있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답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그 해답을 발견한다. 어거스틴은 이 구절의 확실성에 관한 놀라운 진술을 한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리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간음 죄 용서 구절을 인용한 후에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렇지만 이 같은 용서의 행위는 어떤 나약한 신자들이나 불신자들과 기독교 신앙의 적들의 마음에 충격을 준다. (내 생각에) 자기 아내에게 [간음] 죄로 인한 형벌을 주지 않은 뒤에 그들은 자기들이 소유한 그 복음서 사본으로부터 우리 주님이 간음을 행한 그 여인을 용서하셨다는 부분을 떼어 냈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주께서 말씀하신 것은 사실 죄를 지으라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어거스틴은 이 12구절이 성경에 포함되면 결국 여인들이 간음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어떤 서기관들이 이 구절들을 삭제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 논점은 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도 일치한다. 그런 논리는 이 구절이 영감은 고사하고 구전 전통의 일부로 첨가되었다는 현대 학자들의 관점과 거의 비슷하다.
2009-05-11 15:25:52 | 관리자
요한복음 5장 4절 For an angel went down at a certain season into the pool, and troubled the water: whosoever then first after the troubling of the water stepped in was made whole of whatsoever disease he had(영어 킹제임스 성경). 이는 어떤 때에 천사가 연못에 내려와 물을 휘젓는데 물을 휘저은 뒤에 누구든지 먼저 들어가는 자는 무슨 병에 걸렸든지 온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더라(킹제임스 흠정역). [역자 주: 개역성경과 개역개정판은 여기에 괄호를 하고 각주에서 ‘어떤 사본에는 이 괄호 내 구절이 없음’이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대부분의 현대 영어 역본들에서 주석이 달려 있으며,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베데스다의 치유하는 연못에 관한 전통적인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어떤 서기관이 이 부분을 첨가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본문을 전통이라는 꾸며낸 이야기로 여기는 것은 억측이다. 이 구절은 진짜로 여겨야만 한다. 이것은 그리스어 공인 본문, 대다수의 현존하는 모든 그리스어 사본, 모든 초기 영어 역본, 흠정역 성경 및 뉴킹제임스역에서 나타난다. 만약 우리가 사본들의 넓은 지역적 분포에 기초한 구절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이 구절이 지역적 분포에서 가장 많은 사본을 가지고 있고 또 오래된 본문의 지지를 받고 있으므로 마땅히 이 구절을 수용해야만 한다. 이것은 코덱스 사본 A, E, F, G, H, I, K, L, Δ, Θ, Π와 C의 세 번째 교정본에서 발견된다. 이 구절을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그리스어 소문자 사본들은 28, 565, 700, 892, 1009, 1010, 1071, 1195, 1216, 1230, 1241, 1242, 1253, 1344, 1365, 1546, 1646 및 2148 등이다. 이것은 또한 구 라틴 사본들과 초기 역본들의 대다수에 포함된다. 이 구절은 콥트 사본 헌팅턴(Huntington) 17로부터 편집된 구 콥트 역본에서도 발견되며 다음과 같이 영어로 번역된다. 그 연못에 시간마다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게 하는 한 천사가 있었다. 그 물이 움직인 후 처음으로 들어간 자는 누구든지 그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나을 것이다. 이것은 구 시리아 역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페시타로부터 머독이 번역한 것은 다음과 같다. 때때로 한 천사가 침례탕으로 내려갔고 그 물을 움직였다. 그 물이 움직인 후에 그 안에 먼저 들어간 자는 그가 어떤 병을 가지고 있든지 상관없이 치료를 받았다. 이 구절은 또한 교부들도 인용했으며 주후 2세기의 ‘디아테싸론’에서도 발견된다. 터툴리안(주후 200년)은 “천사가 간섭하여 베데스다 연못을 휘젓는 습관이 있었다.”라고 언급한다. 이 구절은 또한 암부로스(주후 397년), 디디무스(주후 398년), 크리소스톰 (407년) 그리고 키릴(주후 444년)에 의해 인용되었는데 이 사실은 그리스 교부들과 라틴 교부들 모두가 이 본문을 정경으로 수용했음을 증명한다.
2009-05-11 15:24:11 | 관리자
요한계시록 22장 19절 And if any man shall take away from the words of the book of this prophecy, God shall take away his part out of the book of life, and out of the holy city, and from the things which are written in this book(영어 킹제임스 성경).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몫을 빼시리라(킹제임스 흠정역). 이 구절의 초점이 ‘생명나무’가 아니라 ‘생명책’이라는 점을 다루지만 사실 여기의 문제는 그 이상으로 크다.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만들면서 사용한 코덱스 사본 1r은 요한계시록 22장의 마지막 6구절을 놓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에라스무스가 라틴 벌게이트를 취하여 거기서 이 구절들을 다시 그리스어로 번역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가정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 첫째, 만약 에라스무스가 이 마지막 6구절을 공급하기 위해 라틴 벌게이트를 사용했다면 과연 라틴 성경의 사용이 여기의 본문을 부패시켰는가? 둘째, 코덱스 사본 1r이 정말로 이 구절을 위해 에라스무스가 사용한 유일한 그리스어 사본이었는가? 확실히 라틴 벌게이트와 그리스어 공인 본문은 이 마지막 6절에 있어서 유사하다. 물론 이것은 라틴 벌게이트의 기초가 공인 본문과 일치하는 초기 그리스어 사본들이었다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우리는 2세기와 3세기 그리고 4세기의 그리스어 사본들의 대다수가 시간이 지나면서 살아남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만 사실 라틴 벌게이트와 공인 본문은 정확하게 같지 않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22장 20절의 결론을 보면 공인 본문은 ‘Amen. Nai, erchou, Kurie Iesou’(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라고 하지만 라틴 벌게이트는 ‘amen veni Domine Iesu’(아멘 주 예수님이여 오시옵소서)라고 한다. 공인 본문은 부가적인 확증의 말 즉 ‘nai’(과연 그와 같이)를 포함하지만 비평 본문이나 라틴 벌게이트는 이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만약 에라스무스가 라틴 본문을 그리스어로 재번역했다면 그는 정말로 매우 놀라운 일을 한 것이다. 이 여섯 구절은 공인 본문에서 136개의 그리스어 단어로 구성되며 비평 본문에서는 132개의 그리스어 단어로 구성된다. 이 두 개의 본문을 비교할 때 이 구절들 안에는 단지 18개의 이문만 발견된다. 이 정도의 이문들은 개수와 특성 면에서 볼 때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 이 두 개의 그리스어 본문 사이에서 늘 발견되는 수준이다. 예를 들어 바로 그 앞의 요한계시록 22장 10-15절은 동일한 특성을 가진 14개의 본문 이문을 가지고 있으며 요한계시록 21장 3-8절에는 20개 이하의 본문 이문이 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만약 에라스무스가 라틴어를 그리스어로 다시 번역했다면 훨씬 더 많은 이문을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그 두 개의 본문은 매우 유사하다. 심지어 에라스무스가 라틴어를 그리스어로 재번역했다 해도 그것은 성경의 보존이라는 교리에 아무 관계도 없다. 성경 보존이란 하나님께서 [인간 기록자들을 통해] 자신의 말씀들을 만든 그 순간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그 이후 세대에까지 내내 그 말씀들을 유지하고 보존하신다는 것을 요구한다. 또한 성경 보존은 결코 이런 단어들이 단지 원본의 언어로만 보존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제 이것은 우리를 두 번째 질문으로 인도한다. 에라스무스가 정말 라틴어를 그리스어로 다시 번역했을까? 본문 학자인 호스키어는 에라스무스가 그 일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대신에 그는 에라스무스가 2049(호스키어가 141이라고 부른 사본)와 같은 다른 그리스어 사본들을 사용했다고 말하며 사실 증거들은 이 입장을 지지하는 것 같다. 사본 2049는 공인 본문에서 발견된 본문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 22장 19절의 본문 이문도 포함한다. 이것 외에도 우리는 또한 그리스어 사본 296의 증거와 2067 사본의 난외 증거를 들 수 있다. 또한 부가적으로 요한계시록 22장 16-21절에서 에라스무스가 필사한 그리스어 본문은 공인 본문의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것과 일관성을 반영한다. 이것은 그 구절들이 다른 그리스어 사본들로부터 필사되었으며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재번역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요한계시록 22장 16절의 공인 본문은 비평 본문의 ‘dauid’(David)과 달리 ‘tou dabid’(the David)라고 기록한다. 영어는 이 두 개를 동일하게 다윗으로 번역할 수밖에 없지만 [역자 주: 한국어도 마찬가지임] 그리스어 본문은 분명히 다르다. 흥미롭게도 요한계시록 3장 7절에도 동일한 것이 나온다. 이 구절에서 공인 본문은 요한계시록 22장 16절과 마찬가지로 다윗의 이름 전에 정관사를 사용했지만 비평 본문은 다윗의 이름 전에 정관사를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요한계시록 22장 16-21절에서 에라스무스의 본문에는 몇 개의 특이한 철자들이 있다. 예를 들어 거기에는 정상적인 그리스어 ‘erchou’(오다) 대신에 ‘elthe’(오다)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에라스무스가 그리스어 사본을 필사하였으며 그 구절을 라틴 사본에서 그리스어로 재번역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우리는 에라스무스가 그 당시 가장 위대한 학자들과 사상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에라스무스는 그리스어와 몇몇 다른 언어들에 유창했다. 그는 ‘오다’에 대한 평범한 신약성경 그리스어 단어가 ‘elthe’가 아니라 ‘erchou’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에라스무스는 요한계시록 22장 7절과 12절 그리고 심지어 20절에서 ‘오다’를 뜻하는 ‘erchou’를 사용했다. 에라스무스가 이처럼 평범한 단어 형태를 멀리하고 22장 17절에서 특별히 ‘elthe’라고 기록한 것에 대해서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더욱이 22장 17절에서 ‘오다’에 대한 라틴어는 22장 20절에서 사용된 ‘veni’와 동일한 라틴어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에라스무스가 실제로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코덱스 사본 1r’이 아닌 다른 그리스어 사본을 사용했음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 22장 19절에서 ‘생명나무’가 아니라 ‘생명책’이 맞는 단어임을 보여 주는 본문들의 증거가 많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 본문은 소수의 그리스어 사본들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라틴 증거들 사이에서 독점적인 본문이다. ‘생명책’이라는 구절은 또한 구 보하이르어 역본(Bohairic)의 본문이었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암브로스(주후 379년), 바키리우스(주후 4세기 말), 프리마시우스(주후 552년) 그리고 하이모(주후 9세기)의 저서에서도 발견된다. 이제 우리는 또한 내적 증거를 생각해야 한다. 생명나무라는 구절은 구약성경에 7번 나타나고 신약성경에 3번 나타난다.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이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으며 에덴동산에 있던 이 나무가 영원 속에서 다시 나타날 것을 알게 된다. 이것들을 종합해 볼 때 “그들이 생명나무로부터 자신들의 몫(혹은 부분을) 빼앗긴다.”는 생각은 성경 기록과 합치되지 않는 것 같다. [역자 주: 성경의 용례로 볼 때 생명나무는 보상의 개념을 가진다.] 한편 생명책이라는 구절은 신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7번 나타난다(빌4:3; 계3:5; 13:8; 17:8; 20:12, 15; 21:27). 각각의 경우에 우리는 생명책이 이름을 포함하거나 이름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며 또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몫을 빼시리라.”는 구절은 성경적인 본문과 매우 일치한다. [역자 주: 성경의 용례로 볼 때 생명책은 보상보다 더 원천적인 것 즉 생명 자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거룩한 도시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을 뜻하며 이것은 곧 생명책에서 이름이 빠지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여기의 문맥은 생명책이 옳음을 보여 준다.] 이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 경고는 매우 불길하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을 요한계시록에만 적용하지만 사실 이것은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서 볼 수 있듯이 성경 기록 전체에 해당된다(신4:2; 잠30:6). 이 구절을 이 장에서 논의된 구절들에 적용해 볼 때 우리는 사본의 전달 과정에서 누군가가 본문의 어딘가에 더하거나 거기서 삭제했음이 확실하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그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학문은 숭고하고 고귀한 것이다. 그렇지만 학문이 주 하나님의 권위를 침범하려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숭고하지도 않고 고귀하지도 않다. 결국 성경을 향한 우리의 태도는 우리의 최종 학자인 하나님에게 달려 있지 인간 학자들에게 달려 있지 않다.
2009-05-11 15:22:07 | 관리자
요한일서 5장 7절 For there are three that bear record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are one(영어 킹제임스 성경).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킹제임스 흠정역). [역자 주: 개역성경은 원래의 6절을 둘로 나누어 마치 6절과 7절이 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거기에는 흠정역 성경의 7절이 없다.] 이 구절은 보통 ‘요한의 콤마’(Johannine Comma)라 불리며 대다수의 그리스어 사본들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구절은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성에 대한 훌륭한 증거이며 우리의 성경에서 반드시 유지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이 구절의 교리적 중요성 때문만이 아니라 이 구절의 확실성을 증명하는 외적 증거와 내적 증거 때문이다. 외적 증거는 다음과 같다. 비록 대부분의 그리스어 사본들에서 발견되지 않지만 요한의 콤마는 몇몇 증거들에서 발견된다. 요한의 콤마는 629(주후 14세기), 61(주후 16세기), 918(주후 16세기), 2473(주후 17세기) 그리고 2318(주후 18세기)에 들어 있다. 또한 221(주후 10세기), 635(주후 11세기), 88(주후 12세기), 429(주후 14세기) 및 636(주후 15세기)의 난외에 들어 있다. 현존하는 요한일서 5장의 사본들 중에서 이 콤마를 포함하지 않은 것이 500여 개나 된다. 그러므로 공인 본문에서 발견되는 본문이 그리스어 사본들의 증거 면에서 후대 사본들의 지지를 받는 소수의 본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본문을 가진다는 사실이 그 구절이 원본의 본문이 아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비평 본문은 ‘Iesou’(예수의)라는 단어가 공인 본문 요한일서 1장 7절에 있는 ‘Iesou Christou’(예수 그리스도의)를 대신하는 진짜 본문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Iesou’(예수의)를 지지하는 사본은 24개에 불과하며 따라서 이것은 소수의 본문이다. 반면에 공인 본문에서 발견되는 ‘Iesou Christou’(예수 그리스도의)라는 본문은 무려 477개 사본들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일서 2장 20절에서 ‘pantes’(모든)라는 본문은 단지 12개 사본의 소수 지지를 받지만 ‘panta’(모든 것)라는 본문은 491개 사본들의 다수 지지를 받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비평 본문은 그 구절에서 다수의 본문이 아니라 소수의 본문을 선호한다. 이런 현상은 요한일서뿐만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에서 생기는 공통 현상이다. 그러므로 간단하게 어떤 본문이 소수의 사본들에 있기 때문에 원본의 본문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비록 그리스어 본문의 증거는 약하지만 요한의 콤마에 대한 라틴어 본문 증거는 매우 강하다. 요한의 콤마는 그리스어 사본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라틴 사본들의 대다수에 들어 있다. 비록 어떤 사람들은 요한의 콤마가 제롬의 원본 라틴 벌게이트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만 외적 증거는 그것이 분명히 그 성경의 일부분임을 보여 준다. 제롬은 구 라틴 역본들이 삼위일체를 지지하는 요한일서 5장 7절을 포함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제롬의 인용문은 그리스어 공인 본문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처럼 구 라틴 본문 역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라는 진술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다른 교부들도 요한의 콤마를 인용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비록 어떤 사람들이 키프리안(주후 258년)이 그 콤마를 알았을지 의문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용문은 확실하게 그가 이것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키프리안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주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마찬가지 사실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에 대해서도 ‘이 세 분이 하나이다’라는 기록으로 확증된다.” 또한 프리스킬리안(주후 385년)이 이 콤마를 인용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요한은 ‘땅에서는 물과 육체와 피 이 셋이 증언을 하며 이 셋은 하나이다. 하늘에서는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 증언하시며 이 세 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다.’라고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삼위일체를 반대한 아리우스에 대항하기 위해 무명의 작가가 수집한 ‘바시마둠’(Vasimadum, 주후 380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복음전도자 요한은 ‘하늘에서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 증언하시며 이 세 분은 하나이다’라고 말했다.” 게다가 카씨안(주후 435년), 카씨오도루스(주후 580년) 그리고 그 다음 세대에 등장한 아프리카와 서방 지역의 다른 감독들 다수가 요한의 콤마를 인용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이 그리스어 증거를 제외한 다량의 고대 본문들의 지지를 받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내적 증거는 다음과 같다. 요한의 콤마 구조는 양식 면에서 확실히 사도 요한의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언급한다. 만약 요한일서 5장 7절이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8절의 해석이라면 우리는 그 구절이 ‘말씀’ 대신 ‘아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이라고 기대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구절은 그리스어 ‘logos’를 사용하는데 로고스는 독특하게 요한의 양식에만 있으며 이 구절이 참으로 요한의 것이라는 증거를 제공한다. 또한 우리는 요한이 하나님의 삼위와 그 세 분이 증언하는 것 즉 요한일서 4장 13-14절을 연결하려 함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세 개로 된 그룹들 - 이 중 하나는 하늘에 있고(7절) 다른 하나는 땅에 있다(8절) - 을 포함하는 증거들이 병행해서 나오는 것 자체가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가장 강력한 증거는 그리스어 본문 자체에서 발견된다. 요한일서 5장 8절을 보면 그리스어로 중성의 세 명사 즉 ‘영과 물과 피’가 있다. 그렇지만 이 단어들 뒤에 남성인 분사가 따라온다. 여기서 그리스어 구절은 ‘oi marturountes’(who bare witness, 증언하는 자)이다. 그리스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만약 그 자체로만 남는다면 형편없는 문법이 된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심지어 더 확실한 것은 6절은 동일한 분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중성으로 되어 있다(그리스어로는 ‘to marturoun’임). 어떤 이유로 이 세 개의 중성 명사가 남성 분사의 지지를 받는가? 7절을 보면 그 대답을 발견할 수 있다. 7절에서 우리는 두 개의 남성 명사(아버지와 아들) 뒤에 한 개의 중성 명사(성령)가 오는 것을 본다. 이 구절은 또한 그리스어 남성 분사인 ‘oi marturountes’를 가지고 있다. 8절을 소개하고 있는 이 절과 함께 7절에 있는 남성 명사들로 인해 8절의 분사가 남성이 되는 것은 매우 적합하다. 그러나 만약 7절이 없다면 그리스어 문법 면에서 부적합할 것이다. 비록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주후 390년)가 요한의 콤마의 확실성에 대해 증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요한의 콤마의 부재로 인해 발생하는 문법의 결함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신학적 성향」(Theological Orientations)이라는 글에서 요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그는 자신의 용어들에 있어서 (일관성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셋’(three)이라는 단어를 남성으로 표현한 뒤에 당신이나 혹은 당신의 문법책 규칙과 정의와 반대되는 중성의 세 단어를 넣는다. 처음에 ‘셋’이라는 단어는 남성으로 표현하고 그 뒤에 중성으로 한 단어 한 단어 한 단어를 더하는 것과 먼저 한 단어 한 단어 한 단어를 남성으로 표현하고 그 뒤에 남성이 아닌 중성으로 ‘셋’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어떤 차이를 가져올까? 하나님을 나타내는 데 이런 일이 가능할까? [역자 주: 그레고리는 7절이 빠지면 그리스어가 부적합하게 됨을 지적한다. 그런데 7절이 들어가면 아버지와 말씀이 남성이므로 그리스어 문법에 아무 문제가 없다. 다시 말해 연합성서공회의 그리스어 본문에 있는 대로 요한일서 5장이 되려면 그리스어 문법에 따라 ‘셋’(three)과 ‘하나’(one)라는 단어가 중성이어야 한다. 그런데 ‘셋’(three)과 ‘하나’(one)가 남성이라는 사실은 무언가가 그 그리스어 본문에서 빠졌음을 뜻한다. 그것이 바로 공인 본문의 요한의 콤마이다.] 만약 우리 모두에게 7절이 없이 단지 6절과 8절만 있다면 그레고리가 여기서 그리스어 문법과의 불일치를 인식했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사실 다른 학자들도 동일한 것을 인식했다. 이것은 「The Doctrinal Various Reading of the New Testament Greek」(1891)이라는 논문에서 연합신학대학원(Union Theological Seminary)의 다브니(Robert Dabney)가 주장한 바이다. 미들톤 감독은 「Doctrine of the Greek Article」이라는 저서에서 7절이 이 구문의 그리스어 구절에 따라 반드시 그 본문의 일부가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매튜 헨리의 유명한 주석서에는 우리가 만약 8절에서 적합한 그리스어를 가지려면 반드시 7절이 있어야만 한다는 진술이 있다. 외적 증거가 요한의 콤마의 진실성을 지지하며 내적 증거도 그것을 매우 가능하게 한다. 종교 개혁 때에 하나님께서 전통 본문과 함께하시고 오직 그 본문만을 사용하셨다는 생각할 때 우리는 요한의 콤마가 믿을 만하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2009-05-11 15:18:13 | 관리자
로마서 8장 1절 There is therefore now no condemnation to them which are in Christ Jesus, who walk not after the flesh, but after the Spirit(영어 킹제임스 성경).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킹제임스 흠정역).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라는 말씀은 1절과 4절에 나타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중복오사라고 불리는 필기상의 특별한 오류 유형으로 생각한다. 중복오사란 한 글자나 음절 혹은 단어나 구가 중복 기록되는 것을 말한다. 이 생각은 한 서기관이 우연히 4절의 말씀을 1절로 필사했으며 그 뒤로 본문의 그 오류가 나중의 사본들에서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필사 오류는 본문들의 증거 안에 드러난 많은 양의 이문들이 증명하는 것처럼 분명히 일어난다. 그렇지만 단지 한 단어나 구가 반복되었다는 것이 필사 오류가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스어 구절 ‘me kata srka peripatousin alla kata penuma’(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는 대다수의 그리스어 사본들이 지지한다. 그것들 중에는 33, 88, 104, 181, 326, 330, 451, 614, 630, 1241, 1877, 1962, 1984, 1985, 2492 및 2495가 있다. 그것들은 11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것으로 인정된다. 이 구절은 또한 코덱스 사본 K(9세기)와 사본 P(9세기)에도 포함되며 시내 사본의 난외에도 있다. 이 구절은 또한 대다수의 그리스어 성구집의 본문이다. 이 구절을 담고 있는 초기 역본들은 약간의 구 라틴 사본들(ar, o 등), 시리아의 하클레안 역본 그리고 그루지아 역본 등이다. 이 구절의 일부를 담고 있는 또 다른 이문은 ‘me kata sarka peripatousin’(육체를 따라 걷지 않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구절은 A, D06, Ψ 및 몇몇 소문자들(81, 256, 263, 365, 629, 1319, 1573, 1852 및 2127 등)에서 발견되는 본문이다. 이 구절은 또한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주후 4세기)와 페시타의 본문이다. 일부분에서 또는 전체적으로 이 본문은 광범위하게 고대 본문의 지지를 받는다. 또한 테오도렛(Theodoret, 주후 466년), 외큐메니우스(Ps-Oecumenius, 주후 10세기) 그리고 테오필랙트(주후 1077년) 등은 문제가 되는 부분과 함께 1절 전체를 인용한다. 우리는 또한 바실(주후 379년)이 이 구절을 부분적으로 인용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 바실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죄의 권세 하에 있는 사람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더 충분히 발전시킨 후에 그는 [바울] 그러한 압제적인 지배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신 분이 누구인지를 말씀 안에 확실하게 진술한다.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 줄까?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더 나아가 그는 덧붙였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그들은 육체를 따라 걷지 아니한다.” 여기서 이 부분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어떤 면에서 교리적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자에게는 어떤 종류의 정죄함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전체 성경 기록을 간과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비록 영원한 정죄는 아니지만 어떤 다른 정죄로 고통 받는 것이 가능하다고 듣는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 육신을 따라 걷는 그리스도인은 나무나 풀 그리고 지푸라기의 행위(일)를 낳는다(고전3:12). 모든 성도들의 행위는 불에 의해 시험을 받을 것이다. 이때에 육신의 행위(일)는 불태워지고 성령님을 따른 행위(일)는 견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일이 불타면 그는 보상의 손실을 당하리라. 그러나 그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에 의해 받는 것 같이 받으리라.”(고전3:15)는 말씀을 듣는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정도의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정죄’(Condemnation)라는 단어가 단지 심판의 의미뿐만 아니라 승인받지 못하는 것의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요한은 자신의 ‘어린 자녀들’에게 성도들의 마음이 그들의 크리스천 삶에서의 잘못된 점을 정죄하거나 승인하지 않으며 하나님도 그렇게 하신다고 말한다(요일3:20-21). 후에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성도를 향한 심판이 있을 뿐만 아니라(고전3:12-15; 고후5:9-10) 만일 그들이 계속해서 죄 안에 거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명을 요구하는 심판을 이 땅에서 집행할 수 있다(행5:1-10; 요일5:16). 성경적으로 말해서 성령님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육체를 따라 걷는 신자들에게는 정죄가 있다. 따라서 로마서 8장 1절의 끝 부분은 신학적으로 매우 건전하며 확실하다.
2009-05-11 15:13:43 | 관리자
질문: 설명하기 어려운 내용이나 모순처럼 보이는 내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60> 대답: 믿음으로 킹제임스 성경의 완전함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입니다. 여러 해 전 부엌에서 전화벨이 울려 받아 보니 근처에 있는 신학교에서 내가 가르치던 학급의 학생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교회 목사님이 킹제임스 성경에도 모순이 있음을 보여 주셨다고 말했습니다(굉장한 ‘믿음의 사람’이겠군요.). 그는 내가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그 모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할 때 그 논쟁에 대해 익히 알고 있던 나는 이야기 도중에 말을 끊었습니다. “아, 선생님께서는 거기에 대해 알고 계시군요?” 그가 물었습니다. “물론이지요.” 나는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그 답이 무엇입니까?” 그는 기대에 차서 재촉해 물었습니다. “나도 모릅니다.” 나는 그가 나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잘 알면서도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참으로 그는 나를 많이 신뢰했습니다. 나는 지금 그 청년에게 들려주었던 나의 답변을 여러분에게도 들려드리려 합니다. 모든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로, 만약 저나 흠정역 성경을 믿는 다른 신자가 성경 질문에 대한 답을 다 알고 있다면 스스로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유한한 창조물 사이에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많은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할 수 있고 또 어떤 소수의 사람들은 그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지라도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둘째로, 만약 우리가 성경 문제에 관한 질문의 답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면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으로 인해 행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히11:6; 고후5:7). 저는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질문들이 항상 존재하리라 믿습니다. 성경의 절대무오성에 관한 최종 판결은 우리가 좋아하는 ‘믿음의 방어자들’의 지적 능력이나 학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편 12편 6, 7절과 마태복음 24장 35절 등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결론이 내려지리라 믿습니다. 물론 흠정역 성경을 지지하는 사람은 이러한 결론이 약간 불리한 것으로 느낄 것입니다. 우리의 적들은 그것을 알고 우리가 입은 갑옷의 구멍난 부분으로 생각되는 부분을 재빨리 이용하려 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최후 방어 수단으로 ‘믿음’을 의지하는 것은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떠오르는 생각처럼 그렇게 모순되거나 불안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운 구절들에 대해 ‘답을 찾기 위해’ 인간의 능력을 믿기보다는 신구약 시대의 많은 성도들이 보여 주었던 대로 설명할 수 없는 일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 안에 믿음을 두기를 원하실 것이기에 이렇게 하는 데는 전혀 모순이 없습니다. 또한 그렇게 하는 일은 결코 우리 자신을 우리의 고집스러운 적들의 처분에 내맡기는 것이 아니므로 분명히 불안정한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성경의 완전성을 믿는 것이 이미 소실된 원본들의 완전성을 믿는 것처럼 나약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비평 학자들이 원본의 절대무오성에 대해 그렇게 충성을 보이는 이유는 어느 누구도 절대로 원본을 출판할 수 없다는 것과 따라서 자기들의 믿음이 시험을 받거나 나쁘게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스스로 우쭐대는 우리의 형제들’로부터 모욕을 당할지라도 보이지 않는 원본보다는 우리 만질 수 있는 성경에 대한 합당한 믿음을 가지고 답변에 임할 것입니다. 우리는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2009-05-11 15:11:15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에 정말로 오류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61> 대답: 당신이 할 일은 성경을 펴서 시편 12편 6-7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마태복음 24장 35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확인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1960년대에 커다란 교훈을 하나 얻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폭력적인 히피족들이 아메리카 은행 사무실을 불사르는 것이 보도되었고 다른 폭도들은 그 지역 전체를 “불태워라, 아가야, 불태워라!”하는 외침과 함께 철저히 파괴시켰습니다. 히피족들의 주장은 그 마을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고 새 마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배웠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히피족들이 건물을 불태웠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그들이 어떤 건물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냉엄한 진리는 당신이 권위에 반항하게 될 때 당신도 히피족들과 마찬가지로 파괴 예술의 대가가 된다는 것입니다(벧후2:9-15). 파괴하는 일에 푹 빠져 있는 삶은 돌이키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히피족들은 다른 사람들이 지어 놓은 건물은 파괴할 수 있어도 자기들이 파괴했던 것보다 더 향상된 건물은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권위에 대한 이러한 반항적인 증오는 또한 자칭 학자라고 하는 자들이 성경에 대해 맹렬하게 공격하는 데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책을 파괴시키기 위해 맹렬히 비평하는 데는 능숙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학생들과 교회 회원들의 심령 속에서 그것을 파괴시켜 재가 되게 만들 수는 있지만 자기들이 그토록 혹독하게 비평했던 거룩한 작품과 견줄 만한 - 더 낫지는 못할지언정 - 그 어떤 것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영적 히피족들 - 비평 학자들 - 의 속임수에 넘어가 킹제임스 성경은 오류가 있다고 믿게 되었다면 그들에게 그것을 대체할 만한 완전한 성경을 보여 줄 수 있는지 물어 보십시오. 그들은 NIV 혹은 NASV 혹은 NKJV 같은 소위 ‘더 나은 역본들’이라 하는 잡동사니를 추천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역본들 중 그 어느 것도 시편 12편 6-7절이나 마태복음 24장 35절에 기록된 성경 즉 완전히 보존된 성경이라고는 아무도 감히 주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이 만일 이 문제에 대해 계속 추궁하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어 본문’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주장 즉 가시덩굴처럼 뾰족한 주장으로 당신을 찌르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원어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매우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사실 히브리어 혹은 그리스어를 읽고 연구하며 가르칠 실력이 없습니다. 비록 그들이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이나 알렉산드리아의 이집트 국지 본문의 일부분을 글자 그대로 번역할 수 있다 해도 그들은 거기에도 오류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내용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과 닮은꼴인 1960년대 말의 히피족들처럼 자기들이 헛간조차 다시 지을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임을 깨달은 채 연기 나는 폐허더미 위에 자기들이 서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 의해 킹제임스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면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 없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그 성경 대적자에게 여러분이 충성과 사랑을 보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 비평 학자가 여러분의 아버지, 형제, 목사, 교장, 대학 교수 혹은 여러분이 너무도 사랑하는 어떤 분이기에 여러분은 완전한 성경 문제에 대해 반대하거나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에 의해 흠정역 성경에도 오류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면 여러분의 킹제임스 성경을 NIV, NASV, NKJV와 그리스어 본문들을 담고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려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 사람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손가락의 반지에 입을 맞추며 말하십시오. “오 주여,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나 이 한 가지를 꼭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하나님은 반역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분이십니다.
2009-05-11 15:09:25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무오한 말씀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62> 대답: 믿음대로 행하십시오. 참으로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무오하고 완전한 말씀임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먼저 그것을 읽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될 만한 변명거리를 가지고 있는 크리스천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께서 왜 그것을 여러분에게 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역본들과 모든 주석서, 여러분의 ‘연구를 돕는’ 모든 책을 일단 뒷전으로 치우고 단순히 하나님의 책을 읽으십시오. 그 책의 저자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셔서(고전6:19-20) 여러분이 그 책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실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요한복음부터 읽기 시작해서 신약의 끝까지 읽으십시오. 적어도 하루에 10페이지는 읽으십시오. 이것은 결코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손에 성경을 주시기까지는 수많은 난관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기기 위해 약간의 곤란을 겪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계시록까지 읽기를 마친 뒤에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요한복음까지 또 읽으십시오. 자, 한 번을 읽으셨습니까? 자 이제 다시 시작합시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때까지 여러분이 살아 있는 동안 쉬지 말고 성경을 읽으십시오. 경계하십시오! 성경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는 느낌을 갖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역대상의 처음 아홉 장과 같이 그 본문이 ‘무미건조한’것으로 여겨지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독히 바쁜 날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단락 전체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들 가운데 어떤 것도 성경 읽기를 중단할 타당한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만약 위에서 언급된 상황 속에서도 매일 10페이지씩 읽기를 계속한다면 여러분은 우리 사람에게 알려진 인격 테스트 중 가장 큰 것 하나를 통과한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무미건조한 날들 외에도 그 책이 여러분의 심령에 부드럽게 다가오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새로운 진리들을 깨닫는 날을 맞이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매우 개인적인 방법으로 여러분의 하나님과 구원자를 알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두 번째로, 여러분은 킹제임스 성경을 믿지 않는 여러분의 친구들과 교사들 혹은 설교자들을 적대시하거나 그들에 대해 지나치게 흥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은 그들이 제기하는 대부분의 비난들에 대해 은혜 안에서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이 책 말고 또 신뢰할 만한 다른 책을 찾아내길 원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완전성을 그들이 최종적으로 수용하느냐 하지 않느냐 여부는 그들이 혹은 여러분이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책을 완전한 것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힘든 결정임에 틀림이 없으며 사실상 누구를 위해 충성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자기들의 구원자 하나님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들의 친구와 모교인가? 여러분이 만약 설교자라면 완전하지 않은 그리스어 본문으로부터 소위 ‘금 덩어리’라고 불리는 것들을 제거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양떼에게 하나님의 완전한 성경에 대한 확신을 심어 줄 수 있으며 성경을 읽도록 격려하는 것이 여러분과 그들 모두에게 풍성한 만족을 주는 일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성경 안에’ 거하고 성경을 읽는 무리들은 ‘성경 안에’ 거하며 그것을 읽는 목회자에게 절대로 위협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사랑하고 너무도 존경하는 친구가 다른 역본을 사용하는 교수나 목회자라면 계속해서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하십시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책을 공격하거나 ‘고치려’ 한다면 그들의 메시지로부터 단지 그 부분만을 가려내십시오. 혹자는 여러분을 거부할지도 모릅니다. 또한 어떤 이는 여러분에게 압력을 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오래 동안 내가 잘못을 범했구나!”라고 인정하는 것이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끝까지 그 성경을 거부한다면 그들은 결국 여러분까지 거부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계속해서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당신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가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더럽히도록 허락하지는 마십시오.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보다도 그분 곧 하나님에게 가장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자, 완전한 성경을 부지런히 읽으십시오!
2009-05-11 15:07:18 | 관리자
질문: ‘공인 본문’의 편집자 에라스무스는 ‘충실한’ 로마 카톨릭 교도였나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57>   대답: 후에 ‘공인 본문’으로 알려진 그리스어 본문을 편집했던 에라스무스는 교황을 당혹하게 만든 인물이었고 ‘충실한’ 로마 카톨릭 교도이기에는 너무도 형편없는 본보기였습니다.   성경의 본문이나 사본 등에 대해 논의하게 되면 언제나 에라스무스라는 이름을 접하게 되며 그때마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가 인본주의자였다.” 혹은 “그는 전형적인 로마 카톨릭 교도였다.”라는 주장을 하곤 합니다. 한 마디로 이 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의 요점은 ‘인본주의자’나 ‘카톨릭 교도’가 만든 성경 본문에 기초를 둔 킹제임스 성경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 필라델피아 제십장로교회의 유명한 목사이자 성경 무오성에 관한 국제 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보이스(James M. Boice) 목사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공인 본문’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대해 공공연하게 나쁘게 말하며 ‘공인 본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 중 하나가 바로 “에라스무스가 인본주의자였다.”는 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을 정확히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공인 본문’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킹제임스 성경의 기초가 된 「그리스어 신약 성경」 본문을 만든 에라스무스가 실제로 인본주의자였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지난 400년 간 온 땅에 퍼져 복음의 빛을 발한 킹제임스 성경 본문의 중요성을 감소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위와 같은 주장을 펼쳐왔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근본주의 대학인 밥존스 대학의 커스터(Stewart Custer) 교수 역시 「킹제임스 성경 논쟁에 대한 진실」이라는 글에서 에라스무스에 대해 동일한 견해를 펼칩니다.   「공인 본문」은 1516년에 로마 카톨릭 인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그리스어 신약 성경」과 함께 시작되었다.   비난을 받았지만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난 다른 훌륭한 사람들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에라스무스에 대한 이러한 견해 역시 아무런 증거가 없습니다. 언뜻 보면 에라스무스에 대한 이런 견해가 이미 역사적으로 정립된 사실처럼 보이지만 실제의 수많은 증거들은 에라스무스란 인물이 ‘로마 카톨릭 인본주의자’를 능가하는 매우 비범한 사람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들처럼 에라스무스에 대한 이해에도 어떤 불확실성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증거들이 완전하지 못하고 또 충분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450년이라는 긴 역사의 시간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현존하는 기록들은 여러 각도에서 해석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역사가나 기록자의 편견에 따라 한 쪽으로만 해석되곤 합니다.   우리는 결코 에라스무스가 영적으로 혹은 지적으로 완전한 사람이라고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역시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문제들 - 심지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다윗 왕과 같은 완전한 사람도 지니고 있던 문제들 - 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 변명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근본주의적 크리스천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에라스무스에게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완전치 못한 점이 많이 있었습니다. 성경 말씀에 따라 자신이 보고 있는 분명한 잘못으로부터 분리하지 않은 것, 이교도들의 학식을 열렬히 동경한 것, 각종 성사, 교황제도, 사제 제도 등을 포함한 여러 가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명백한 잘못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것 등등.   그러나 이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를 “로마카톨릭 인본주의자요, 부주의한 성경본문 편집자”로 낙인찍는 것은 참으로 잘못임을 보여 주는 증거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에라스무스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내리기 위해 그의 생애와 신학에 대한 서적들을 찾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두 개의 중요한 책들을 찾아냈습니다. 첫 번째 책은 저명한 역사학자 베인튼(Roland H. Baiton)이 저술한 「기독교계의 에라스무스」(Erasmus of Christendom)이고 다른 책은 1894년에 출간되어 지금은 절판된 프로드(J. A. Froude)의 「에라스무스의 생애와 서신」(Life and Letters of Erasmus)입니다.   우리는 이외에도 여러 가지 역사적 기록들을 검토했으며 그 결과 소위 복음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에라스무스를 부정적인 인물로 내모는 것이 매우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에라스무스에 대해 그처럼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자신들이 신뢰하지 않는 「그리스어 공인 본문」과 관련해서 에라스무스가 처음으로 「그리스어 신약 성경」 본문을 내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그의 생애와 서신을 통해 그가 결코 비난받을 만한 사람이 아님을 보여 주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다음의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 사람 아담이 창조된 후 약 6,000년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완전치 못한 사람들을 자신의 도구로 쓰셨습니다. 어떤 사람의 최종 종착지가 어디인가, 즉 천국인가 지옥인가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는 일에서 에라스무스를 선택했는가 선택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논의할 때도, 과연 에라스무스가 구원받은 사람이었는지 혹은 영적인 사람이었는지 하는 것 자체가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구약 성경의 발람, 삼손, 솔로몬의 경우를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이 중에서 발람은 구약 성경 보존의 임무를 맡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며, 삼손과 솔로몬은 하나님의 말씀에 직접적으로 불순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사용하셨으며 특히 발람과 솔로몬의 경우에는 이들을 통해 영감된 성경기록을 이 세상에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통로로 쓰였습니다.   또한 이사야서 44, 45장을 보면 하나님의 종이라 불림을 받은 페르시아(바사)의 고레스 왕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그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재건을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가 이교도들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내 목자라. 그가 나의 기뻐하는 것을 다 행하리라, 하고 예루살렘에게는 이르기를, 너는 세워지리라, 하며 성전에게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놓이리라, 하는 자니라(사44:28).   주가 자신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민족들을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또 왕들의 허리를 풀어 문짝이 두 개인 성문들을 그 앞에 열게 하고 그 성문들을 닫지 못하게 하리라(사45:1).   이사야서 45장 4절을 보면 고레스가 구원받지 못한 인물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고레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의 종 야곱 곧 나의 선택한 자 이스라엘을 위하여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이름을 주었노라.   우리가 말씀드리려는 바는 비록 에라스무스가 하나님 앞에서 여러 가지 옳지 못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사실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경 보존을 위한 통로가 될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자료를 통해 독자들께서도 확신하게 되겠지만 우리는 역사적 기록들을 통해 에라스무스가 구원받은 사람이요, 매우 영적인 사람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에라스무스가 인본주의자였다.”라는 주장에 대해 우리는 먼저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밝히고 넘어가려 합니다. 즉, 오늘날 우리가 어떤 사람을 ‘인본주의자’라고 정의 내리는 관점에서 볼 때 에라스무스는 결코 ‘인본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인본주의자’라 하면 사람을 하나님 위에 놓으며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인본주의자들은 무신론자요, 진화론자들입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결코 그런 범주에 들지 않습니다. 사실 ‘인본주의자’라는 말은 16세기 이후로 그 뜻이 크게 변했습니다. 16세기 이전의 ‘인본주의자’라는 말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 점에 대해 영국 ‘트리니태리안 성경협회’(Trinitarian Bible Society)의 브라운(Andrew Brown)은 이렇게 말합니다.   에라스무스는 젊어서부터 죽을 때까지 철저한 ‘크리스천 인본주의자’였다. 르네상스 시대와 종교개혁 시대에는 ‘인본주의자’라는 말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무신론적 진화론자’를 의미하지 않았다. 중세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우민정책’으로 인해 말 그대로 암흑시대였기 때문에 그 당시의 ‘인본주의자들은’ 고대문학, 문화, 교육 등에 큰 관심을 갖고서 좀 더 높은 수준의 시민 생활을 추구하려고 애를 썼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스테파누스, 베자, 칼빈 등이 모두 인본주의자였으며 이 같은 인본주의자들의 이상이 기독교의 복음과 합쳐져서 암흑시대를 벗어난 16세기 이후의 서구 문명을 형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분명히 에라스무스는 로마 카톨릭 교도였지만 동시에 개혁자였다. 그는 카톨릭 교회의 권리 남용과 심각한 부패에 대해 크게 비판했으나 카톨릭 교회를 내부에서 개혁해야 하며 거기에서 분리되어 나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분명히 프로테스탄트들과 카톨릭교도들 모두에게 칭송을 받았다. 그의 작품들 중 몇몇은 비록 그 안에 가끔씩 옳지 못한 교리가 있기는 하지만 참으로 영적인 것이었다. 특히 그가 지은 「크리스천 군사를 위한 안내서」는 너무나 유익한 책이어서 영어 신약 성경을 출간한 틴데일이 영어로 옮길 정도였다.   사실 1997년도에 출간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펴 보면 틴데일같이 성경을 연구하고 번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일반 평민들의 손에 쥐어 준 프로테스탄트 학자도 ‘휴머니스트’ 즉 ‘인본주의자’로 분류되어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 유명한 백과사전 편집자들 역시 그 당시에 고전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사람들을 ‘인본주의자’로 분류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에라스무스의 행적을 조사하여 과연 그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인본주의자’였으며 동시에 복음을 깨닫지 못한 ‘로마 카톨릭 교도’였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는 1466년(혹은 1469년)에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태어났고 1536년에 일흔 살의 나이로 죽었으며 16세기 경 유럽에서 최고의 학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시적 의학술과 함께 전염병이 사람의 평균 수명을 대략 30-40년으로 제한하던 그 당시 그가 그처럼 장수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에라스무스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전염병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그와 그의 형은 삼촌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되었지만 양육비 부담을 회피하고자 하는 삼촌이 그들을 수도원으로 보냈습니다.   청년시절 에라스무스는 데벤터라는 도시에서 그 당시 최고의 학문을 전수 받게 되었고 그가 지닌 매력과 예의범절 그리고 재치 있는 지혜로 말미암아 큰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그는 확실히 비범한 지능의 소유자였으며 수많은 책을 저술한 작가였습니다. 그는 보통 사람이 열 시간 걸려서 하는 일을 단 한 시간에 끝낼 수 있었습니다. 대영 박물관내 도서관의 많은 부분이 에라스무스 개인이 저술하거나 편집한 책으로 쌓여 있을 정도로 그는 많은 작품을 저술했습니다.   에라스무스를 논하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성경의 기초를 쌓았다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부터 에라스무스는 성경을 매우 존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형제들 -Brethren of the Common Life - 사이에서 자라났으며…. 그의 평생동안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했다(라이온의 「기독교의 역사」(History of Christianity), p.359).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라이온이 지은 「기독교의 역사」라는 책이 「그리스어 공인 본문」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온은 에라스무스가 성경을 믿는 크리스천들 안에서 양육을 받아 평생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처럼 성경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 종교개혁 이전이나 이후에 로마 카톨릭 교도들에게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특징이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에라스무스의 믿음과 영은 천주교보다 성경에 더 가까이 있었습니다.   자, 그럼 ‘인본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아온 에라스무스의 성경관이 어떠했는가를 그 자신의 말을 통해 살펴봅시다.   나는 매우 연약한 여인이라도 복음서와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스스로 읽고 깨닫기를 바라며…그런 말씀들이 모든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사람뿐만 아니라 터키 사람이나 이슬람 사람들이 읽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나는 또한 쟁기질하는 소년이 쟁기질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하고, 옷을 짜는 사람이 옷 짜는 기계소리에 맞추어 이 말씀들을 흥얼거리며, 여행하는 사람이 이 말씀들을 통해 여행의 무료함을 달랠 수 있기를 바란다…우리는 다른 공부를 한 것으로 인해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올 때 성경 말씀을 읽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이 귀한 말씀은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죽으셨다 다시 일어나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여 주며, 그분이 바로 우리 옆에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Famine in the Lord」, Norman Ward, p.38)   이와 같은 진술문은 결코 16세기에 살았던 ‘천주교 인본주의자’의 확신이 아닙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성경 말씀을 전해 주려는 매우 고귀한 생각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에라스무스의 가장 훌륭한 점은 보통 사람들을 향한 그의 태도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엄격히 ‘계급화 된 사회’에서 그는 일반인들의 손에 성경을 쥐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신념의 사람이었습니다.   「제롬의 라틴어 역본」이 로마 제국이라는 철저한 계급 조직의 명령에 의해 번역된 데 반해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라틴어 역본」 과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그 당시 일반인들의 손에 쥐어 주고자 하는 순수한 의도로 번역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성경이 단지 향기를 내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내가 번역한 성경을 집에서 읽는 자마다 그것으로 인해 큰 유익을 얻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농부, 재단사, 여행자, 그리고 심지어 회교도들조차’ 손에 성경을 잡고 읽는 것을 보기를 오랫동안 갈망해 왔다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후에 그는 자신의 상급 동료들이 놀라 자빠지도록 심지어 ‘석공과 매춘부와 포주들’까지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장성한 후에 그는 카톨릭 교회의 어거스틴파 사람들이 가장 좋은 장서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 파에 속하게 되었으며, 1492년에는 공식적으로 카톨릭 교회의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어거스틴파 교도들의 기준에 따르자면 참으로 유별난 데가 많았습니다. 그는 교회 축제일 전야의 철야 기도를 지키기를 거부했고, 금요일에 고기 먹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았으며 사제로 임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제로서의 역할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비록 로마 카톨릭 교회가 그의 몸을 구속하고 있었으나 그의 영과 혼은 그런 틀에서부터 벗어나 언제나 자유로웠습니다.   에라스무스는 많은 작품을 썼으며 그 안에서 자기가 속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조리와 무분별한 행동에 대해 반기를 들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교황의 권력과 사제단, 그리고 수도승들의 허랑 방탕함을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수도승들이 돈을 만지지는 않지만 술과 여자에 대해 성실하지 못함을 성토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성직자들의 내연 관계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소위 ‘이교도’라 부르는 자들을 다루는 잔악성에 대해 공격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공연한 사악함에 대항하여 저술한 「야만인들에 대하여」(Against the Barbarians)라는 제목의 소책자는 실제로 이런 것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그의 많은 작품들 중 하나입니다.   한편 그는 율리우스 교황을 비롯한 여러 교황의 독재를 계속해서 비난했습니다. 그는 종종 교황 율리우스가 이끄는 ‘성전’(聖戰)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전쟁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율리우스’(교황)가 율리우스(카이사르) 역을 얼마나 잘해내고 있는가!”란 유명한 말 역시 그가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게다가 그는 ‘로마 교황의 이 같은 독재는 기독교를 좀먹는 해충’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는 교회에서 교황좌(座)를 제거해 버릴 것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교황이 지옥에 간 것으로 묘사한 신랄한 풍자의 글이 익명으로 배포되었을 때 그 글을 지은 사람이 에라스무스라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비난을 잠재울 양으로 천주교 지도자들은 그에게 추기경직을 수여하려 했지만 그는 그 같은 노골적인 뇌물을 거절했습니다.   온 유럽은 수도승들의 무지와 사제들의 미신 등을 적나라하게 밝혀 놓은 에라스무스의 저서들로 인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요동했다…이에 교황은 그에게 추기경 자리를 주어 그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으나, 자신의 양심과 타협할 수 없었기에 그는 이 같은 제안을 계속해서 거부했다.   그가 이 같은 교황의 제안을 계속해서 거부했다는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며 여러 가지 기록들은 그가 자유롭게 남아서 성경을 연구하고 기록하고 번역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런 제안을 거부했음을 보여 줍니다.   에라스무스는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나 학자나 인쇄공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유를 버리려 하지 않았다(「 기독교계의 에라스무스」, p.103),   완숙한 지경에 다다른 학자 에라스무스는 그 시대의 별이었으며 그 명성으로 인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유복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국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의 삶을 마무리 짓기로 결정했다.   한편 에라스무스는 천주교에서 오랫동안 사용해온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이 천주교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라틴어 신약 성경」은 카톨릭 교회의 「라틴 벌게이트」와 너무나 달라서 사람들은 에라스무스의 「라틴어 신약 성경」이 로마 카톨릭 교회의 「라틴 벌게이트」를 드러내 놓고 공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번역이 옮음을 보여 주는 각주들을 만들었으며 이런 각주에는 부패한 카톨릭 사제들을 겨냥한 뾰족한 가시들이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에라스무스가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를 사용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의 작품들을 비난했습니다. 그가 제롬의 역본을 반대한 것은 두 가지 중요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어 사본이 4세기경에 오리겐 등에 의해 개악(改惡)되었음을 간파했고 제롬의 역본이 4세기초에 기록된 알렉산드리아 필사본인 ‘바티칸 사본’에 기초를 둔 것임을 알았습니다.   한편 그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위를 주장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성경 구절들을 제롬과 달리 번역했습니다. 예를 들어 제롬은 마태복음 4장 17절 말씀을 “고해성사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번역했는데 반해 에라스무스는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으므로 회개하라.”고 달리 번역했습니다. 어느 번역이 맞는지는 독자 여러분께서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에라스무스는 또한 성경 비평 학자들과 인본주의 학자들이 그 신빙성을 의심해온 마가복음 16장 9-20절과 요한복음 8장 1-12절 말씀을 충실히 옹호한 사람이었습니다.   밀러(Andrew Miller)라는 역사학자는 그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라틴 벌게이트」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는지 잘 보여 줍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통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 밑에서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모든 지적 능력을 동원하여 참으로 힘든 연구를 수행함으로써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편집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16년 스위스의 바젤에서 「라틴어 신약 성경」과 함께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났는데 그가 만든 「라틴어 신약 성경」에는 카톨릭 교회의 「라틴 벌게이트」의 오류들이 수정되어 있었다.   사실 이 같은 작업은 그 당시에 아무라도 감히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출간되자 사방에서 그의 작품을 공격하는 글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도대체 왜 그는 종파분쟁을 일으키는 그리스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하여 신성하고 전통적인 라틴어를 간섭하려 하는가?’라고 많은 사람들이 흥분하여 말하였다. ‘도대체 누가 카톨릭 교회의 「라틴 벌게이트」 에 수정을 가하여 그것을 향상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 당시에 카톨릭 교회의 「라틴 벌게이트」 역본에 대해 의심을 갖는다는 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매우 큰 범죄로 여기는 것들 중 하나였다 (「Miller's Church History」, Andrew Miller, Bible Truth Publishers, 1980, p.696).   한편 에라스무스의 성경 주석 역시 카톨릭 교회의 왜곡된 모습에 대일격을 가했습니다. 에라스무스라는 사람을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에라스무스가 일하던 시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의 저서들과 「그리스어 신약 성경」 출간은 곧장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이라는 폭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사람입니다. 이 같은 그의 업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며 더더구나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인본주의자’나 ‘로마 카톨릭 교도’가 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개혁’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종교개혁’으로 인해 로마 카톨릭 교회가 힘을 잃게 되었고 그 결과 지난 400년 간 온 세상에 선교사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또한 이 같은 놀라운 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에라스무스라는 사람을 일으켜 「그리스어 신약 성경」 본문을 편집하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다섯 판에 걸쳐 출판했습니다. 그것들은 주후 1516년, 1519년, 1522년, 1527년, 그리고 1535년에 연속해서 나왔습니다. 첫째 판의 번역 및 출간 작업은 1515년 3월 15일에 시작되었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516년 3월 1일에 출간되었습니다.   그 당시 바젤에는 프로벤이라는 인쇄업자가 있었는데 그는 스페인 학자 스투니카가 저술하여 1514년에 시메네스 추기경에 의해 처음으로 인쇄되었으나 1522년에 가서야 공식적으로 출간된 「컴플루텐시안 폴리글롯」이라는 최초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이 출간되기에 앞서 자신이 처음으로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출간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에라스무스를 고용하여 그 일을 하게 했고 결국 자신이 의도했던 대로 「컴플루텐시안 폴리글롯」보다 먼저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출간된 첫 번째 판은 그리스어 본문과 라틴어 역본이 동시에 들어간 두 가지 언어로 구성된 성경 즉 ‘디아글롯’이었습니다.   한편 두 번째 판은 첫 번째 판을 조금 개정한 것으로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성경」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판은 소위 ‘사도 요한의 쉼표’라 불리는 요한일서 5장 7절의 말씀을 삽입시킨 것으로 인해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요한일서 5장 7절은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라는 것으로 이 구절은 모든 알렉산드리아 본문에서 삭제되었고 오직 킹제임스 성경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삼위일체에 대한 가장 명백한 구절입니다.   비록 자신이 수집해서 소장하고 있던, 주후 15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다량의 비(非) 그리스어 자료들에서는 요한일서 5장 7절의 본문이 들어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첫 번째 판과 두 번째 판에는 요한일서 5장 7절 말씀을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신약 성경 본문에 이 구절을 포함시켜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권위를 입증해 줄 만한 최소한의 그리스어 필사본도 없이 이 일을 했다가는 큰 반대에 부딪치게 될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첫 번째 판에서와 같이 자신의 두 번째 판을 출판할 때 요한일서 5장 7절을 포함하는 그리스어 필사본이 하나라도 발견되면 그 다음 판에 이 구절을 반드시 포함시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사실 그가 편집한 첫 번째 판과 두 번째 판 「그리스어 신약 성경」이 나오자 카톨릭 교회에서는 요한일서 5장 7절이 들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를 맹렬하게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 그는 15세기경의 사본을 찾아내게 되었고 자기가 약속한 대로 이 구절을 신약 성경에 포함시켰으며 그 뒤 이 구절은 영원히 「그리스어 공인 본문」에 들어가게 되었고 결국 킹제임스 성경에 남아 보존되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구 라틴 벌게이트」에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 외에도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와 고대 ‘왈덴시안들의 성경’, ‘테플 성경’ 등 10 여 개의 증거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증거들의 특징은 이들이 한결같이 비잔틴 계열이 아니라 라틴 계열이라는 점입니다. 영지주의 즉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 분파의 철학에  심취한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이 저술한 알렉산드리아 본문에는 이 구절이 빠져 있으나 삼위일체를 인정하여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확증한 니케아 종교회의의 결과를 따른 라틴 계열의 기독교계는 처음부터 「구 라틴 벌게이트」를 사용하면서 이 구절을 지지했습니다. 결국 영지주의자들과 아리안주의자들이 성경 본문을 맹렬하게 공격해서 요한일서 5장 7절의 말씀을 없애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섭리를 통해 비잔틴 계열이 아니고 라틴 계열의 사본 및 역본들을 통해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셨습니다.   오늘날 킹제임스 성경의 이 구절을 반대하는 소위 ‘근본주의 학자’라 하는 사람들은 에라스무스가 새로 발견한, 요한일서 5장 7절을 포함하고 있는 두 개의 필사본이 에라스무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것이라고 그릇되게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비난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서 지금도 확인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에라스무스 당시에도 옹호를 받지도 못했습니다.   에라스무스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또한 그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이 너무나 짧은 기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부실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가 보통사람이 아니며 16세기 최고의 그리스어 학자였다는 점을 이해하면 이 같은 비난은 사실 그 근거를 잃게 됩니다. 또한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가 기원이 오래 되지 않은 몇 개의 사본들에 근거해서 성경 본문을 만들었으므로 그의 작품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다음의 표는 그가 사용한 사본들을 보여 줍니다.   에라스무스가 사용한 사본들       사본 번호   사본 시기   신약 성경 부분   비고   1   11세기   사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비교용   2   15세기   사복음서   본문으로 채택          2ap 12/14세기   사도행전, 서신서   본문으로 채택         4ap 15세기   사도행전, 서신서   비교용          1r 12세기   계시록   계시록만       맞습니다. 그는 주로 두 개의 사본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중요한 것은 사본의 개수나 시기가 아니라 그 사본이 어느 계열에 속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온 유럽을 여행하면서 많은 사본들을 수집하여 자세히 살펴보았으며 더욱이 카톨릭 교회의 사제였으므로 카톨릭 교회가 수집한 수많은 사본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바티칸 도서관에 ‘바티칸 사본’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본은 이미 1481년에 바티칸 도서관에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신약 성경 사본에 두 종류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고 따라서 모든 사본을 ‘바티칸 사본’과 일치하는 사본과 비잔틴 계열의 사본으로 분류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윌켄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에라스무스는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또한 얼마든지 ‘바티칸 사본’을 참조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은 그가 로마에 있는 봄바시우스라는 교수와 계속해서 서신을 교환했기 때문이었다. 그 교수는 에라스무스가 원하는 부분의 본문을 보내 주었다. 한편 1533년에 에라스무스에게  ‘바티칸 사본’의 여러 부분을 보내 주면서  ‘바티칸 사본’이 ‘공인 본문’보다 더 우수하다는 것을 입증하려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다름이 아니고 카톨릭 교도인 세풀베다였으며 그는 ‘바티칸 사본’ 본문을 그에게 보내 주었다.   그런데 에라스무스는 ‘바티칸 사본’이 위 표의 1번 사본과 같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무시해 버렸습니다. 따라서 에라스무스가 ‘바티칸 사본’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존시켜 주신 본문이 어떤 것인가를 확신했으며 그 같은 확신에 따라 자신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편집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프로드가 지은 「에라스무스의 생애와 서신」을 통해 에라스무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에라스무스는 온 세상 사람들이 원어로 된 신약 성경 즉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자신의 새로운 라틴어 역본과 함께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일을 시작했으며 지성인들을 일깨워 성경 말씀이 실제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풍금이 내는 소리같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려 했다.   마침내 이 작업은 끝이 났고 「그리스어 신약 성경」 본문과 라틴어 역본이 인쇄되었으며 기독교가 전하는 생생한 사실들과 그리스도와 사도들, 그들의 역사, 생애, 가르침 등이 온 세상에 밝히 드러나게 되었고 온 세상이 이로 인해 크게 놀라게 되었다. 이제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 신도들은 온 세상을 변화시킨 성경의 기독교와 교황, 추기경, 종교재판, 각종 거짓신화로 가득한 천주교를 서로 대조 비교하여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 일은 영적으로 볼 때 엄청난 지진이 발생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스스로를 고자로 만드는 사람들에 관한 마태복음 19장 12절에 대하여 :  많은 사람들이 평생 동안 독신 생활을 하겠다는 서약을 하려는 유혹을 받거나 혹은 그런 서약을 하도록 위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런 서약을 한 사제들은 창녀에게 갈 수 있는 허가를 받게 되며 단지 아내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에 얽매이게 될 뿐이다. 또한 그들은 첩을 둔 채로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결혼을 해서 아내를 두게 되면 화형에 처해진다. 따라서 자기 자녀들을 독신 사제로 만들려는 부모들은 그들이 어릴 때에 거세를 시켜서 탐욕의 늪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성경기록관과 바리새인들에 관한 마태복음 23장에 대하여 : 만일 동정녀 마리아의 우유가 돈을 벌기 위해 전시된 것을 성자 제롬이 본다면 무어라고 말할까? 어떤 이들은 ‘여기에 성 프란시스의 모자가 있다.’고 하며, ‘저기에 동정녀 마리아의 겉옷이 있다.’고 말하며, 혹은 ‘성자 앤의 빗이나 캔터베리의 성자 토마스의 신발이 있다.’고 말한다. 사제들과 수도승들의 침묵과 위선을 통하여, 또한 일반 백성들의 무지를 통하여 이런 일들이 -즉 회칠한 무덤같이 겉만 번지르르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심지어 주교들조차도 이런 멋있는 쇼에 일조를 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포고령을 통해 이런 불법들을 승인하고 있다.   ‘여기에 그리스도가 있다, 저기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마태복음 24:23의 말씀에 대하여 : 나는 직접 내 눈으로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볼로냐에 있다가 로마로 간 것을 보았다. 그는 행렬의 맨 앞에서 마치 그리스도처럼 당당하게 행진해 갔다. 과연 베드로가 믿음으로 온 세상을 정복했던가? 아니면 무기나 군대나 혹은 다른 전쟁하는 기계들을 사용하여 온 세상을 정복했던가?   고린도전서 14장 19절에 있는 ‘알지 못하는 언어’에 대하여 : 그들(사제들 및 수도승들)은 현재 우리 교회에서 ‘알지 못하는 언어’로(즉 라틴어로) 찬트를 부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지난 여섯 달 동안 사람들이 그 생활을 바꾸어야 한다는 설교를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단 한 차례도 전한 적이 없다. 다시 말해 마땅히 자신들의 죄를 회개해야할 사람들이 그 목구멍에서 이상한 소리를 냄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헛된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1장 6절의 헛된 논쟁에 대하여 : 신학자들은 죄의 형태에 대해 논하는 일에 전혀 피곤해 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이 죄가 영혼을 좀먹는 것인가? 아니면 영혼에 흠이 되는 것인가? 등을 논한다. 도대체 한 마디로 죄를 미워하라고 단순히 말하면 되지 않는가? 유명하다는 신학자들이 겨우 이런 일에 대해 논의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다루는 주제들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다. 기독교를 가르친다고 공언하는 이 신학자들은 실제로 자신들의 삶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감독이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디모데전서 3장 2절 말씀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감독의 직무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자격을 나열했다. 그런데 지금은 결혼을 하지 말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것도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고 있다. 살인, 근친살인, 근친상간, 해적행위, 동성연애, 도둑질 같은 것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결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지금 수많은 사제들이 있지만 그들 중 동정인자들은 거의 없다. 수많은 사제들이 욕심에 빠져 심지어 근친상간 등을 행한다. 따라서 욕정을 참을 수 없는 자들은 합법적으로 아내를 얻어서 살 수 있게 하여 이처럼 더러운 오염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위에서 살펴본 것들은 그 당시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원리 등에 대해 숙고한 뒤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의 각주에 적은 기록들입니다. 이것들 중 어떤 것들은 신약 성경 첫 판부터 기록되었으며 나머지는 판이 갱신되면서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위의 글은 결코 만평이나 논쟁거리를 담은 소책자에 실린 글이 아닙니다. 이런 기록들은 신약 성경 본문과 함께 기록된 것으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친 기독교와 이 같은 기독교를 대신한 로마 카톨릭 주의의 미신을 비교하고 비난하려는 목적으로 그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적은 것입니다.   그는 천주교의 의식과 예식, 신학, 철학, 사제들의 인격 등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수세기 만에 처음으로 그들의 참상을 온 세상에 밝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주교와 신부와 수도승들은 심판대로 끌려와 교황이 출간을 허락하지 않은 책 즉 모든 책 중에 가장 거룩한 책을 통해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그의 책처럼 열광적으로 팔린 책은 없었습니다. 프랑스에서만 순식간에 수 만 부가 팔렸을 정도였습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의 여우에 불을 붙이자 불이 순식간에 번져 나간 것처럼 에라스무스가 일으킨 경각심의 불은 온 유럽으로 번져나갔습니다.   후에  ‘공인 본문’으로 알려지게 된 그리스어 본문의 기초가 된 본문을 편집했던 에라스무스는 교황을 당혹하게 만든 인물이었고 ‘충실한’ 로마 카톨릭 교도이기에는 너무나도 형편없는 본보기였습니다.   에라스무스가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해 가장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카톨릭 교회가 가르치는바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와 더불어 그 교회의 신조들이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구원은 각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개인적 문제이며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구원에 대한 로마 카톨릭 주의의 방식에 대해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교회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판을 치니 복음을 설명할 시간조차 없을 지경이다.   그러면 에라스무스가 말하고자 했던 복음이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 자신의 설명을 들어보도록 합시다.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의 긍휼과 그리스도의 은혜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그분의 피가 우리의 구원을 인치셨습니다.   그는 교회의 어떤 의식도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그는 회개한 강도가 간 길이 바로 “낙원에 이르는 길”이며 단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세상이 내게 대하여, 내가 세상에 대해 못 박혔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 길로 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과연 현시대의 ‘인본주의자들’이 에라스무스의 글과 같은 것을 쓸 수 있는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현시대의 ‘인본주의자들’은 그 무엇보다도 성경 자체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에라스무스는 결코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인본주의자들’의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현대 역본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그를 ‘인본주의자’로 매도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그는 결코 오늘날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인본주의자’도 아니며 또한 무지에 갇힌 로마 카톨릭 교도도 아니었습니다.   당신들은 베드로나 바울을 기쁘게 하려 하는가?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본받으라. 그렇게 하는 것이 로마에 열 번 순례 여행을 다녀오는 것 보다 더 나을 것이다. 당신들은 나무나 돌로 만든 그리스도의 형상을 존중히 여긴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복음서에 기록해 주신 것을 통해 그분의 마음을 알고 그것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일이다. 당신들은 소위 예수 그리스도의 겉옷이나 수건이라 불리는 것들에 대해서는 크게 흥분하면서도 그분의 말씀에 대해서는 꾸벅꾸벅 졸고 있지는 않은가? 나무 십자가를 집에다 갖다 놓고 기뻐하는 것보다는 그분을 믿는 것이 훨씬 더 나음을 잊지 말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자기 입술을 예수님의 입에 댄 가룟 유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그리스도의 유품 등은 결코 당신의 구원과 상관이 없다. 한마디로 당신들의 소유와 관심과 염려를 모두 그리스도를 닮는 것에 두어야 한다. 그분은 자기를 위해 태어나지 않았고 자기를 위해 살거나 죽지 않았으며 우리를 위해 이 모든 일을 행하셨다.   리는 죽음과 육신과 세상과 사탄에 대해 승리할 것을 확신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들의 사면과 이생에서의 백 배의 결실 그리고 그 이후의 영생을 약속하셨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인가? 우리의 선한 공로와 행위 때문인가? 결코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은혜로 인함이다. 그분께서 우리의 의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안전하다. 그분께서는 우선 아담의 타락을 이겨내시고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자신의 피로 우리의 구원을 인치셨으니 이 모든 것은 대언자들과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증거에 의해 확증된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 같은 확신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성령님의 인치심을 주셨다. 벌레만도 못한 우리가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칭의가 되시며, 승리가 되시고, 소망이 되시며, 안전이 되신다. ‘우리에게 한 아이가 났으니…’ 라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태어나신 것이다. 바로 그분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의 병을 고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신다. 바로 이분께서 우리를 위해 배고픔과 목마름의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의 고통을 당하시고, 피를 흘리시고, 죽었다가 부활해서 승리하신 것이다. 또한 그분은 지금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   이 같은 역사적 고증들을 통해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도가 아닌 프로테스탄트로서의 에라스무스의 마음과 영혼을 보고 듣게 되며 또한 하나님을 배격하는 ‘인본주의자’가 아닌 크리스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로서 우리는 에라스무스가 비록 로마 카톨릭 주의의 범주 안에 남아 있기는 했지만 성경을 믿은 신자요, 개혁자였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그 시대의 가장 성경적인 무리로 여겨진 ‘재침례교도들’(Anabaptists)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는 이미 1523년경에 그들을 ‘재침례교도’라 불렀고 심지어 그 스스로도 종종 ‘16세기의 유일한 재침례교도’라고 불리기까지 했습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에라스무스가 ‘근본주의’(fundamental)란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끝으로 에라스무스가 프로테스탄트였음을 증명하는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는 1535년 바젤로 다시 돌아가서 프로테스탄트 친구들과 함께 거하며 로마 카톨릭 교회와는 아무런 연관도 맺지 않고 지내다가 그 다음 해에 죽었습니다. 특히 카톨릭 신자라면 죽을 때 반드시 받아야 하는 ‘종부성사’도 거절한 채 “나의 사랑하는 하나님!”(Dear My God!)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죽었으며 바젤의 프로테스탄트 형제들이 선구자 에라스무스의 시신을 프로테스탄트 교회 안에 안치하였고 그 역사는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에라스무스는 1536년 7월 11일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결코 ‘충실한 카톨릭 교도’의 삶과는 동떨어진 프로테스탄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의 프로테스탄트 성향 및 기질로 인해 그가 받게 된 가장 큰 찬사는 그가 죽은 지 23년 후인 1559년에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교황 바오로 4세가 에라스무스의 저작물을 모두 금서 목록에 올려놓은 일이었습니다.   성경이 평범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손에 들려 읽혀지기를 원했던 그의 순수한 소망을 아신 하나님께서 일반인들을 염두에 두고 번역된 영어 성경 즉 킹제임스 성경의 기초로서 에라스무스가 저술한 「그리스어 신약 성경」 본문을 사용하셨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흔히들 “에라스무스가 품은 알을 루터가 부화시켰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이 말에는 무심코 지나칠 수 없는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개혁자들은 에라스무스의 성경, 그의 저서들, 그리고 로마 카톨릭  주의의 협박에 저항하는 그의 태도로 무장하였기 때문입니다. 루터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나의 운명이 그의 운명과 연관된다 하더라도 나는 할 수 있는 한 루터의 편입니다.” 그는 루터를 위해 여러 편의 글을 썼으며 구원은 전적으로 행위가 아닌 은혜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그의 의견에 전심으로 동의했습니다. 또한 그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로부터 루터를 이교도로 선포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나 거절했습니다. 만약 당대 최고의 석학인 에라스무스가 루터를 공격하기 위해 그의 펜의 힘을 사용했더라면 교황과 그의 하수인들이 할 수 있었던 힘없는 압력보다도 더 치명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믿음의 확신에 따라 그들을 옹호했고 단지 루터의 예정설을 믿지 않았기에 이 점에 대해서는 펜과 잉크로 종교 개혁자들을 비난했습니다.   한편 에라스무스가 만든 「그리스어 신약 성경」 본문을 개정한 편집자들 역시 프로테스탄트 성경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리스어 신약 성경」판을 만들어 내는 일에서 에라스무스의 뒤를 따른 사람들은 에라스무스와는 달리 완전히 카톨릭 교회와 결별한 철저한 성경 신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들이 박해를 받으며 카톨릭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왔을 때에야 비로소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이 완전히 개정되어 ‘공인 본문’이 나오게 되었고 이 ‘공인 본문’을 기초로 해서 -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 본문이 아니고 - 킹제임스 성경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에라스무스를 ‘인본주의자’니 혹은 ‘로마 카톨릭 교도’니 하며 근거 없이 비난하는 것은 결국 에라스무스를 통한 마르틴 루터, 요한 칼빈 등의 ‘종교 개혁’을 무너뜨리려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요한 웨슬리, D.L. 무디, 요나단 에드워드 등 프로테스탄트 부흥을 가져온 이들이 다 틀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고증을 통해 이제 우리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그리스어 신약성경]본문을 편집하는 동안 에라스무스는 그 본문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같은 확신 뒤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고대 및 중세를 통해 신약성경 본문을 안전하게 보존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본문을 인쇄해서 중세 이후의 사람들에게 주려 하실 때에도 결코 실수를 범하지 않으셨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을 믿는 성도들을 올바른 곳으로 인도할 확신인 것이다. 우리는 결코 에라스무스나 베자나 틴데일이나 혹은 제임스 왕이 완전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처음에 완전한 성경을 주신 그 하나님께서 그 성경을 완전히 보존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을 뿐이다.
2009-05-11 15:05:31 | 관리자
질문: 성경 문제를 논할 때 박사들의 학식을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54> 그들이 그들의 학위에 걸맞은 교육을 받았다면 그래야겠지요. 오늘날 교회는 ‘박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박사들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이 편찮으시다.”라는 농담이 들립니다. 박사 학위에는 단 두 종류가 있습니다. 취득 학위와 명예 학위가 그것입니다. 취득 학위는 교육상의 학위입니다. 그것은 단과대학 혹은 종합대학에서 그러한 학위를 따기 위해 학교의 요구 사항을 다 채운 졸업자에게 수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특정한 학문 분야의 성취를 뜻하며 그 졸업자가 그 지식의 폭넓은 분야에 정통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취득 학위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M.D.  Doctor of Medicine(의학박사) Ph.D.  Doctor of Philosophy(철학박사) Th.D.  Doctor of Theology(신학박사) Ed.D.  Doctor of Education(교육학 박사) 명예 학위는 말 그대로 대학에 대해 봉사 활동이나 혹은 괄목할 기여를 한 남녀에게 그 명예를 기리기 위한 방도로 수여하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명예 학위가 즉석으로 그 학위 수여자를 그 분야의 전문가로 만드는 것이 아님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명예 학위를 받은 사람이 받기 전보다 성경 사본들에 관해 더 많이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명예일 뿐이지 학구적인 학위는 아닙니다. ‘명예 학위’를 가진 외과 의사에게 수술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 문제들에 관한 명예 학위 소유자들의 의견은 취득 학위를 가진 사람의 연구 결과를 능가하지 못할 것입니다. 혹은 학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 중에 유용한 증거들을 다 모아 철저히 연구한 이들도 있습니다. 학문적으로 말하자면 명예 학위는 태권도의 ‘명예 검정 띠’와도 같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집안에서 띠고 다닐 수는 있지만 실제로 도둑과 싸우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죽게 될는지도 모르지요. 다음은 몇 개의 명예학위 명단입니다. D.D.  Doctor of Divinity(신학박사) D.Mus  Doctor of Music(음악박사) D.Sc.  Doctor of Science(이학박사) L.H.D.  Doctor of Human Letters(인문학박사) Lit.D.  Doctor of Literature (or D.Lit)(문학박사) L.L.D.  Doctor of Laws(법학박사) Litt.D.  Doctor of Letters(문학박사) 이상과 같은 두 가지 형태의 학위는 제각기 중요성을 지닙니다. 명예 학위는 공훈의 상징이며 따라서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나 학교를 위해 수행한 가치 있는 행적에 대해 개인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취득 학위는 학자를 부르는 학계의 칭호이며 실질적인 교육 업적에 의거한 것입니다.
2009-05-11 14:57:24 | 관리자
질문: 성경 역본들을 놓고 다투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강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55> 대답: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을 다해 지키는 것 이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을 강조할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두 가지 방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여러분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1. 여러분 생각에 성실하고 타당하다고 여기는 방법을 이용해서(레 10:1-3을 보십시오) 2.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경적 권고들을 가능한 한 엄격히 지키려고 노력함으로써 그분께 사랑을 보일 수 있으며 이것은 평생에 걸쳐 이루게 될 수고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을 보면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을 구분 짓는 표시가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들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우리의 거처가 그와 함께 있게 하리라. 그분을 사랑하는 표시는 곧 ‘그분의 말들’(words)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하라고 말씀하신 것들(sayings)을 지키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요한복음 8장 51, 52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결코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이에 유대인들이 그분께 이르되, 이제는 네가 마귀 들린 줄을 우리가 아노라. 아브라함과 대언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말하기를,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이와 같이 사랑은 ‘그분께서 하라고 말씀하신 것들’(sayings)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들’(words)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또 다시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그건 단지 그리스어 원문의 말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호 애재라! 이런 말은 단지 여러분을 더 깊고 더 치명적인 함정으로 유인할 뿐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성경의 예가 이를 잘 설명할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 도망가는 도중 ‘큰 물고기’에게 삼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욘1:17). 마태복음 12장 40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큰 물고기’가 ‘고래’라고 밝히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현재 유전학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의 가치에 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바로 이 성경 구절에 이르면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그분의 입술로부터 나온 말씀을 훔칩니다. 모든 새 역본들은 예수님의 말씀인 ‘고래’를 한결같이 ‘물고기’로 고칩니다. 이 일은 그들이 중학교 생물학 시간에 “고래는 물고기가 아니다.”라고 배웠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보기에 모순을 가진 것 같은 성경 - 그런데 이들의 모순은 그들의 중학교 생물학 교사가 불어넣어 준 지식과 모순이 되는 것이지 성경 자체와 모순이 되는 것은 아님 - 과 “고래는 물고기가 아니다.”라는 것도 모를 만큼 지식도 없고 배우지도 못한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과 직면하고는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여 쩔쩔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곧장 마태복음 12장 40절로 달려가서는 성경 즉 신앙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자기의 최종 권위가 되는 책과 예수님 곧 자기의 ‘주님’이시요, 구원자이신 그분의 입술에서 나온 ‘고래’라는 단어를 빼 버립니다.   마태복음 12장 40절에 나오는 ‘고래’에 해당되는 그리스어는 ‘ketos’이며 ‘물고기’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ichthus’입니다. 물론 이것들은 같지 않지요.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10절, 17장 28절 같은 곳에서 ‘ichthus’라는 그리스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만약 원하셨다면 그분께서는 분명히 마태복음 12장 40절에서도 그것을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근본주의자로서 ‘성경을 강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여기서 두 개의 중요한 성경적 진리들을 간과합니다. 첫째로, 그는 요나가 하나님께서 특별히 예비해 두신 ‘큰 물고기’에 의해 삼켜졌음을 간과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담이 단 하나의 생물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생물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창세기 2장 19, 20절에서 나머지 창조물에게 이름을 주기 전에 이미 창세기 1장 21절에서 고래에게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고래들과 물들이 풍성히 낸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피조물 을 그것들의 종류대로, 날개 달린 모든 날짐승을 그것들의 종류대로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사실은 고래가 창세로부터 이미 ‘예정’(창1:21; 욘1:17)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런 중요한 사실은 성경 교정가들조차도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사실이지요. 하나님을 돕겠다는 작은 ‘원조자’가 무시하는 두 번째 진실은, 마태복음 12장 40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고래’에서 ‘물고기’로 바꾼 것으로서, 이는 요한복음 14장 23절의 “내 말들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권고를 깨뜨리는 것이며 실로 심각한 죄에 해당됩니다. 성경을 ‘정정하는 것’은 마치 흐르는 모래를 밟는 것과 같습니다. 헤치고 나오려고 발길질을 심하게 하면 할수록 그 속으로 더 빨리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따라서 NASV, NIV, NKJV와 나머지 새 역본들의 편집자들은 ‘ketos’를 번역하는 일에서도 틀렸을 뿐 아니라 요한복음 14장 23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명령 또한 무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 즉 고래를 말씀하시고 여러분의 목사, 부모, 혹은 교수가 다른 것 즉 물고기를 말할 때 여러분은 단호하게 사람의 견해를 거부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감싸고 옹호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 전적으로 사로잡혀야 합니다.
2009-05-11 14:55:28 | 관리자
질문: 성경과 그리스어 사전이 모순을 일으킬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56> 대답: 성경 말씀을 신뢰하고 과감히 사전을 던져 버리십시오. 종종 하나님의 성경을 비평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있는 단어가 잘못 번역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권위 있는 그리스어 문법책이나 사전을 예로 들 것입니다. 이것은 다소 어리석은 것으로서 신앙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서 성경을 최종 권위로 받아들인다는 그들의 소문난 주장과 직접적으로 충돌을 일으키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사전이라든가 오류가 없는 그리스어 문법책을 주시겠다고 하신 적이 없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분께서는 단지 우리에게 완전한 성경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신앙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서 우리의 최종 권위로 받아들이겠다는 각오 하에 우리 모두는 그리스어에 대한 성경의 입장을 그리스어 참고서들을 만든 오류투성이 인간 저자들의 견해보다 훨씬 더 권위 있고 정확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2009-05-11 14:53:29 | 관리자
질문: 저는 저의 동료집단 내에서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제가 킹제임스 성경을 지지한다면 미래 승진에 손해가 될 것입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59> 대답: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성경의 입장에 서서 그분께서 당신의 앞날을 도우시리라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의 정직함을 내다 팔고는 개가 뼈다귀를 바라며 유순히 행동하듯이 동료들 앞에서 그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다른 모든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 대한 선택도 전적으로 당신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2009-05-11 14:48:33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