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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3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靖國) 신사(神社) 참배를 전격적으로 거행하였다. 패전 기념일을 피하였고 또 신도 의식을 비켜갔지만 그의 신사참배는 19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당시 총리이후 무려 16년만에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세계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다. 독일의 빌리 브란트 수상이 유대인 기념비 앞에서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사죄했던 것과 같은 모습을 일본 총리에게 요구하거나 기대하는 이들은 없겠지만 적어도 소위 대동아전쟁의 전범국 총리로서 신사참배를 한 것에 대해서는 모든 세계인이 한 목소리로 질타를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고이즈미 총리가 신사참배를 하던 날 서울 독립문 앞에서 충우회 소속 회원들로 이루어진 구국결사대가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 반대를 외치며 집단으로 손가락을 자르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전쟁이 끝난 지 두 세대도 넘어선 오늘날, 왜 남의 나라 총리가 자기 나라에서 잠깐 치르는 하나의 의식에 이처럼 격렬히 반대하는 여론이 형성되는 것일까? 이미 매스컴에서도 나름대로 충분히 논의된 내용들이지만 우리는 다시 한 번 신사참배의 맥을 짚어보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지녀야 될 민족관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역사관을 올바로 다져나갔으면 한다. 1. 군국주의(軍國主義)의 서막(序幕) 일본 전역에는 8만여 개에 달하는 신사(神社)가 있다고 한다. 전설 속의 신(神)을 모시는 신사도 있고 역사상의 실존인물을 신(神)으로 모시는 신사도 있다. 그 많은 신사들 중의 신사로 불리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는 도쿄 중심가 황궁 옆의 99,000 m2㎢ 광대한 부지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도쿄 돔 야구장의 2배 크기인데 1869년 메이지 일왕의 지시로 황군의 혼령을 달래기 위한 국가신사로 세워졌고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진 무진전쟁 이후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11개 전쟁의 전몰자 총 246만여 명이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명치유신 이후엔 전몰장병을 모두 신(神)으로 모셨는데 야스쿠니 신사도 전몰장병을 모시는 신사이다. 물론 그곳엔 2차대전의 전범들도 신(神)으로 모셔져 있다. 총리 겸 육군대신을 지낸 도조 히데키를 비롯하여 전쟁의 핵심 책임자들 14명의 위패가 1970년대 후반 슬그머니 야스쿠니에 합사되었다. 따라서 일본에 침략을 당한 적이 있었던 아시아 국가들이나 일본과 교전하였던 미국 등은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통해 전범들이 확연히 신(神)으로 추앙됨으로써 군국주의가 부활되어 다시금 커다란 전쟁의 폭풍우가 불어닥치는 것은 아닌가 우려하게 되는 것이다. 힘 있는 자는 힘 자랑을 하고 싶어한다. 칼을 가진 자는 칼을 쓰고 싶어한다. 그것이 인간의 부패된 본성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26:52, 이하 흠정역)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땅에 가득한 폭력으로 인해 물로 심판을 하신 후 새 출발을 하게 되는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누구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사람에 의해 자기 피를 흘리게 된다(창9:6)"고 경고하셨으며 마지막 환난기의 세대를 향해서도 "칼로 죽이는 자는 반드시 칼로 죽임을 당하리라(계13:10)"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였던 일본은 그 말씀(잠13:13)대로 멸망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더더욱 재물과 기술과 지식 등 유형무형의 엄청난 자산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교만과 거만한 영에 사로잡혀(잠16:18) 또 다시 칼을 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언제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인가? 아마도 대환난기 중 동방의 왕들의 길이 예비될 때(계16:12)에 일본이 한 몫을 크게 담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리나라보다도 훨씬 먼저 복음이 전파되었지만 지금까지 생명의 열매가 제대로 맺혀지지 못한 일본은 아마겟돈으로 모여 전능자의 저 큰 날에 있을 전쟁(계16:14,16)에 쉽게 참여하게 되리라. 그렇게 된다면 복음이 뿌려지고 자라기에 척박했던 땅 일본의 모든 섬은 사라지고 산들도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계16:20). 2.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추구(追求) 일본의 국교(國敎)는 신도(神道)이고 그 제주(祭主)는 역대 천황이다. 또 신사는 신도의 사당이다. 신도의 기원은 고대 일본인의 '가미'(神)에 대한 신앙과 이에 대한 제사의식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가미'라는 말은 신격 혹은 영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일본의 고유어로 대단히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고대인들의 공통 신앙 형태였던 자연숭배와 조상숭배에서 나온 다신교적인 개념을 갖고 있는 것이 신도이다. 명치유신을 맞아 제정일치가 부활되면서 천황은 일본의 통치자이자 '살아 있는 신'의 지위에 나섰지만 2차 대전에 패한 이후엔 신도의 제주 자리만 계속 지키고 있을 뿐 상징적 국가원수의 자리를 물러났다. 그러나 일본국민의 천황에 대한 경배심은 아직도 대단하며 신사에 참배하는 사람도 여전히 많은데 매년 8월 15일이 되면 천황제 이데올로기 형성에 기여한 강력한 수단이었던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보수 우파의 순례성지로 변하곤 한다. 고이즈미 총리가 신사참배를 발표하자 일본의 '신(新) 일본종교단체연합회'는 "총리의 공식참배는 헌법 제20조의 종교와 정치 분리원칙에 위배된다"는 의견서를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관방장관에게 제출하기도 했었다. 즉 고이즈미의 신사참배의 목적 내지 결과 중의 하나가 제정일치의 추구에 있음을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것이다. 현 일본 헌법뿐 아니라 세계 대부분의 민주국가법에서 제정분리는 기본이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우아하게 제정일치를 이루고 있는 바티칸(계17:4-6,9,18)도 있고 비공식적으로 아버지(마23:9), 지도자(마23:10), 주체사상(계13:11-14)의 삼위일체를 통해 제정일치를 시행하고 있는 지상낙원도 존재하고 있으며 헌법조문과 상관없이 단군상 건립을 정부가 주도하며 이웃나라를 좇아 제정일치의 해괴한 퍼포먼스를 수준 낮게 연출하고 있는 민주국가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스펙트럼 가운데 일본이 서 있는 것이다. 시민정부(civil government)는 인간 사회의 공익과 질서를 위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것(출18:21-22)인데 우리는 위에 있는 권세에 순종하고 정부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존경해야 한다(삼하23:3, 롬13:1-7, 행23:5). 그러나 주님의 뜻에 위배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단3:17,18; 행4:19,20; 5:29).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땅을 친히 성도들과 함께 다스리시는 신정(theocracy) 왕국(롬8:17; 딤후2:12; 계5:10; 20:4,6)을 이루시기까지 이 땅에는 온전한 제정일치가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아담이 타락한 이후 이 땅의 통치권은 사탄에게로 넘어가 사탄의 다스림(satanocracy) 하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요12:31; 14:30; 16:11; 고후4:4; 엡2:2). 따라서 주님의 재림 전 정치와 종교가 일치한다면 그 표방하는 바가 무엇이든지 다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시는 것 곧 적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로서 주민등록증과 천국시민권(빌3:20)이라는 결코 일치할 수 없는 두 가지 신분증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런즉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22:21) 3. 역사(歷史) 속의 신사참배(神社參拜) 일본 정부는 1882년 신도를 '국가의 제사'로서 일반 종교로부터 분리시킨다고 하면서 제사와 종교의 분리조치를 취하여 교묘히 타종교를 지배, 통제하였고 또 이를 통해 침략정책을 수행하거나 식민지 지배를 효과적으로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를 집어삼킨 뒤 일제가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직접적인 제재를 가한 것은 1935년 11월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사건'이었다. 이후 일본은 회유와 강압의 악랄한 수단을 동원하여 1938년 9월에 장로회 총회를 최후로 신사에 굴복케 함으로써 한국교회를 완전히 유린하게 되었다. 당시 교회지도자들을 네 가지로 분석할 수 있는데 첫째는 신앙을 지키며 일선에서 목숨을 걸고 반대 투쟁하는 노선이며, 둘째는 신앙을 지켜야 함을 알고 있으나 용기가 약하여서 공직을 사임하고 초야에 묻혀 개인 신앙지조나 지키겠다는 노선이고, 셋째 마지못해 신사참배를 승인하고 따라가는 노선이며, 넷째 신사참배는 국가양식이라고 하여 신앙양심의 가책없이 하나님의 명령도, 신앙정조도, 민족의 체면도 망각해 버리고 일제 앞에 아부한 지도자들의 노선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반대와 타락의 노선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무렵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투옥의 수난을 겪은 지도자가 70명이요 옥고로 순교 당한 자가 50명, 사경에서 살아 나온 자가 20여 명이다. 1945년까지 이로 인해 투옥된 자가 2,000여 명에 달하고 200여 개의 교회가 폐쇄되었다. 신사참배 반대에 주도적인 인물들은 평북에 이기선 목사, 평남에 주기철 목사, 경남에 한상동 목사, 전남에 손양원 목사, 만주에 한부선 선교사 등이었다. 역사는 반복된다(전1:9). 신사참배는 흘러간 옛 이야기만이 아니다. 이제 주님 다시 오실 때가 가까워오고 있는데 배교하는 일이 조직적으로 일어나고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자기를 경배하라고 요구하게 될 것이다(살후2:3,4). 그럴 때 당신은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참배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다 죽게 될 터인데(계13:15) 말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복된 소망(딛2:13)이 있다. 예수님의 보혈을 받아들여 이미 죄가 깨끗이 씻어졌다면(요일1:7) 예수님 재림시에 공중들림(살전4:16,17)을 받아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대환난(마24:21; 계2:22) 가운데 들어가지 않게 된다!  물론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피흘리며 죽어간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의 발자취를 따라 오늘도 순교자적인 각오로 우리를 유혹하는 우상들을 제거하고 믿음을 지키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구원을 완수해야 할 것이다(빌2:12).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 아직도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들이지 못한 분들이 있는가?  하루 속히 예수님을 영접하시기 바란다.  만약 영접치 아니하고 지체하다가 대환난 가운데 남게 되더라도 성경 말씀(계20:4)을 기억하고 적그리스도에게 경배하지 말며 또 그가 준다고 하는 표를 받지 않도록 하라. 그리 하면 첫째 부활(계20:5,6)에 참여하여 뒤늦게 나마 구원을 받고 불못(계20:15; 21:8)에 던져지지 않게 될 것이다. 신사참배는 단지 전주곡일 뿐이다!   "이제 너는 젊은 시절에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재난의 날들이 이르기 전에 혹은 네가 말하기를, 나는 아무 낙이 없다, 하는 해들이 가까이 이르기 전에"(전12:1)
2009-05-08 15:55:40 | 관리자
불교의 세계를 좀더 알리기 위하여 저들 스스로 본체를 밝힌 문건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오니 명심 숙지하여 소경 된 지도자들의 인도 받아 종교통합의 물에 빠져 죽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 말에 속지 마라 - 1993년 11월 4일 처음 출가한 그 방 퇴설당에서 열반에 들다." 그러나 큰스님은 삼십 년 남짓 한결같이 다니던 가야산 포행길을 언제부터인지 힘겨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야산 호랑이도 한 자락 가사 밑에 어느덧 80대의 노구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스님, 한 말씀만 여쭈겠습니다."           "뭐를?"           "일천삼백만 불자가 있는데 그 불자들에게 한 말씀만."           "한 말씀만? 내 말에 속지 마라. 자신의 말에 속지 마라."           "내 말...?"           "내 말 말이여. 내 말한테 속지 말어. 나는 늘 거짓말만 하니까."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내 말에 속지 마라, 그 말이여." 1993년 9월에 당신의 저서인 '성철스님 법어집' 11권과 선종의 종지를 담은 '선림고경총서' 37권이 완간되는 것을 보고 나서 두 달만인 그 해 11월 4일 아침에 성철 큰스님은 열반하였습니다. "내 말에 속지 마라"는 말을 던져주고는 영영 우리 곁을 떠난 것입니다. 그 날 새벽, 해인사 퇴설당에서 제자들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큰스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참선 잘하라!" 그 한 말씀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제자 어깨에 몸을 기대었습니다. 처음 출가한 그 방에서 마지막 열반의 길에 드니, 행운유수行雲游水의 사문의 길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법랍 59년, 세수82세로 큰스님은 열반 게송을 남기고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다음 괄호안의 질문은 이해를 돕기위해 만들어 넣었음)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일생동안 무엇했는가?)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그 무엇을 어느 정도 쌓았는가?)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죽으면 소멸하여 없어지고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가?죽은 다음 흙이 되어 아무것도 없지않는가?사후의 세계는 정말 존재하는가? 그 결과 어디에 떨어져 있는가?당신도 불교 믿다가 그곳에 같이 가고 싶은가? 아니면 어디에 가고 싶은가? 그러면 살아있을 때 먼저 어디에서 나와 무엇을 믿어야 되겠는가? 당신은 불자들에게 무엇이든지 잘 믿기만 하면 된다고 전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위의 말은 누구의 말입니까?세계의 유명한 종교 지도자들의 말에 유의하십시오.구원의 길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까?)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그래서 지금 그곳에서의 심정은 어느 정도인가? 당신도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까?이 말은 결국 부처를 믿으면 어디에 간다는 결론인가?)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마침내 생사를 벗어나 적멸에 든 큰스님은 입적한지 이레째 날 평생을 주석한 해인사 퇴설당을 떠나서 일주문 밖에 마련된 연화대로 향하였습니다. 그 날, 퇴설당 위로는 일시에 새떼가 날고,다비장에서는 때늦은 낙엽들이 무수히 쏟아져 내렸습니다. 스님 떠나던 그 날도 그러더니, 백련암 뒷산 하늘에서는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환한 빛이 피어 올랐습니다. 이는 드물게 보는 방광이었습니다. 그리고 서른 시간이 넘게 걸린 다비는 일백여 과에 이르는 영롱한 사리를 남겼습니다. 다비식에서 사십구재에 이르는 동안 큰스님의 떠남을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뭇 대중의 발길은 해인사 앞뜰을 가득 메우며 끊일 줄 몰랐습니다. -(불교 자체의 성철 종정 포교 기사에서 인용함)-   자신들이 스스로 밝힌 불교의 정체를 당신은 스스로 부정하려고 애쓰지 말고, 분명히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의 진리 안에 서십시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2009-05-08 15:55:04 | 관리자
"우리 서로 부처로 섬기면 이 세상이 극락" 이 글은 1987년 4월 23일자 조선 일보 기사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뉴에이지의 본질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이에 대처해야 할 것이다. 이성철 종정 석탄절 법어: 불교 조계종 이성철 종정은 22일 불기 2531년 부처님 오신날 법어를 발표했다. 성철 종정은 이 법어에서「중생은 모두 부처」라고 강조하고「이 같은 본래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새로운 진리를 찾는 것은 물 속에서 물을 찾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성철 종정은 이 법어의 서두에서「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로 거룩한 부처님입니다」라고 상식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법문을 하고 본래의 근원에서 보면「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 뿐 본 모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다」고 설파했다. 성철 종정은 또「당신을 부처로 바로 볼 때 인생의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된다」고 지적하고「모든 사람들이 서로 부처님을 알고 그렇게 세상을 보게 되면 이 세상이 바로 극락」이라고 강조했다. 성철종정은「선과 악으로 모든 것을 상대할 때 거기에서 지옥이 불타게 된다」면서「선-악의 대립이 사라지고 선-악이 융화 상통할 때 온 세상의 참모습을 보게 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성철종정의 법어는 온갖 생명 있는 무리에는 반드시 성불할 수 있는 불성이 있다는 불교의 생명 경외-평등 사상과 우주의 종국적 실재는 마음뿐이라는 유심사상을 설파한 것으로 풀이된다. 성철 종정의 사월초파일(5월5일) 법어는 다음과 같다. <초파일 법어 전문>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로 거룩한 부처님입니다. 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뿐 본 모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미워하고 싫어하지만, 그것은 당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부처인줄 알 때에 착한 생각 악한 생각 미운 마음 고운 마음 모두 사라지고 거룩한 부처의 모습만 뚜렷이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악마와 성인을 다같이 부처로 스승으로 부모로 섬기게 됩니다. 여기에서는 모든 대립과 갈등은 다 없어지고, 이 세계는 본래로 가장 안락하고 행복한 세계임을 알게 됩니다. 일체의 불행과 불안은 본래 없으니 오로지 우리의 생각에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나아갈 가장 근본적인 길은 거룩한 부처인 당신의 본 모습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당신을 부처로 바로 볼 때에 온 세계는 본래 부처로 충만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더러운 뻘밭 속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가득 피어 있으니 참으로 장관입니다. 아! 이 얼마나 거룩한 진리입니까? 이 진리를 두고 어디에서 따로 진리를 구하겠습니까? 이 밖에서 진리를 찾으면 물 속에서 물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을 부처로 바로 볼 때 인생의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됩니다. 선과 악으로 모든 것을 상대할 때 거기에서 지옥이 불타게 됩니다. 선-악의 대립이 사라지고 선-악의 융화 상통할 때에 시방세계에 가득히 피어 있는 연꽃을 바라보게 됩니다. 연꽃마다 부처요 극락세계 아님이 없으니 이는 사탄의 거룩한 본 모습을 바로 볼 때입니다. 울긋불긋 아름다운 꽂동산에 앉아서 무엇을 그다지도 슬퍼하는가. 범 나비 춤을 추니 함께 같이 노래하며 춤을 추세. 불기 2531년 4월 일 종정 성철
2009-05-08 15:54:26 | 관리자
1. 들머리 반미 시위가 극에 달해 있던 지난 연말, 한 미군 병사가 희귀혈액형을 가진 한국인 신생아의 생명을 구하였다. 2003년 1월 7일 KBS 박재홍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전주의 한 종합병원 소아과에서 RH마이너스 AB형의 혈액을 급히 수소문하자 미 군의관이 군산 미군기지 정비단 장병들을 상대로 지원자를 찾아 나섰는데 3,000여 명의 부대원 가운데 이 혈액형을 지닌 사람은 전투기 항법장치의 안전점검을 담당하던 조나단 전트 병장과 대니엘 크레인 일병뿐이었다. 신생아에 대한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뒤 헌혈에 흔쾌히 응하여 신생아에게 마지막 희망이 될 수 있었던 전트 병장은 그 때의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연락받고 전주로 갔는데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굉장히 흥분되고 기뻤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 2003년 2월 28일, 적어도 일주일 분량은 있어야 되는 혈액 재고분이 이틀 치밖에 없었는데다 대구 지하철 참사까지 겹쳐 대한적십자사는 실로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낮 12시, 만성적인 혈액 부족 사태가 이번 대구 지하철 참사까지 겹쳐 더 어렵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점심도 거르고 달려온 주한미군들에 의해 올 들어 거의 텅텅 비다시피 한 헌혈의 집이 모처럼 사랑의 열기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 날 하루에도 백 명이 넘는 미군 병사들이 헌혈을 하러 몰려왔는데 이 중 마틴 세이온 상사는 다음과 같이 소감을 얘기하였다. “대구 지하철 참사로 고생하는 분들을 헌혈로라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 싶습니다. 헌혈을 위해 까다로운 국내 심사를 거쳐야 되지만 꺼져가는 생명을 건지고 특히 한미 관계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기대에 배고픔도 잊었습니다.” 2. 수혈 거부 이처럼 수혈과 헌혈은 생명을 살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소중한 행위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소위 ‘여호와의 증인들’은 수혈이 비성경적이라고 하면서 수혈은 어떠한 경우에도 받아서는 안된다는 교리를 강조하고 있다. 필자도 병원생활하며 목격한 바이지만 심지어 독실한 신자들은 자기의 어린 자식이 수혈 받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혈을 거부한다. "갑은 11세의 딸 을이 전격성 간염으로 인한 장내출혈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시켰다. 의사 병은 갑에게 을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수혈이 불가피함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갑은 자신이 믿는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였다. 을도 병에게 자신을 치료하여 살려달라고 말했으나 엄마의 영향을 받아 수혈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혔다. 병은 수혈이외에 할 수 있는 응급조치는 다 취했으나 갑과 을의 수혈거부 의사로 수혈을 하지 않았고, 을은 결국 장내 출혈에 따른 실혈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이 경우에 갑과 병의 형사책임은?” (갑은 판례에 의해 ‘유기치사죄’가 성립된다.)  위의 예는 모 법과대학의 학기말고사 기출문제이지만 이와 같은 일들이 세계 어느 곳에서나 발생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그렇다면 정말 수혈은 ‘여호와의 증인’의 가르침대로 성경에서 금하고 있는 것이며 또 목숨을 내놓으면서도 지켜야 하는 것인지 한 번 판단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여호와의 증인들은 어떻게 해서 이러한 교리를 주장하는 것인지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궁극적 의미와 실체도 함께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을 먼저 기술한 후 그들이 주장하는 수혈거부에 대해 자세히 언급해 보고자 한다. 3. 여호와의 증인 여호와의 증인의 교주 찰스 러셀(Charles Taze Russell)은 1852년 2월 16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알레거니 지방의 장로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상당히 기독교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는데 지옥의 영원한 형벌에 대한 교리와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가지고 재림하신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갖게 되면서 그가 속해 있던 회중 교회(Congregationalist)에서도 이탈하였다. 여기서부터 러셀은 자신의 생각을 가르치면서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뉴욕주의 로체스터에서 같은 이유로 안식교를 이탈한 바버(N. H. Barbour)와 연합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성경공부와 잡지와 서적을 출판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다. 1884년 이 모임은 ‘시온의 파수대 전도지 협회’(Zion's Watch Tower Tract Society)라는 이름으로 펜실바니아주에 등록되었으며 후에 ‘파수대 및 전도지 협회’(Watchtower Bible and Tract Society)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들은 아담의 둘째 아들인 아벨이 최초의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하며, 그 후 이 땅에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또 그들은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지옥의 실체, 죽은 후에 인간의 의식 등을 부인하면서 기성교인들은 암흑 속에 있고 자기들만이 진리 속에 있다고 한다. 게다가 이들은 몰몬교, 안식교, 크리스천 사이언스, 통일교, 전도관 등 다른 이단 종파들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종말론을 주장하여 많은 영혼들을 미혹해 오고 있다. 이와 같이 여호와의 증인들이 가르치는 내용에는 수많은 거짓말이 들어 있는데 이 글에서는 지면 관계상 중요한 세 가지만 반증해 보고자 한다. 4. 증인들의 거짓말 - 하나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다. “… 그는 신이셨으나 전능하신 하나님, 즉 여호와는 아니다.”(Let God Be True, p33,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 1952) 여호와의 증인들은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신격(Godhead) 안에 세 인격(Person)이 계시다는 삼위일체(Trinity, Triune)를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가축과 온 땅과 땅에서 기는 모든 것을 지배하게 하자."(창1:26)라고 말씀하신 창세기부터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까지 삼위일체에 대한 증거 구절은 수없이 많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獨生)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14, 이하 흠정역)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신격(Godhead)의 모든 충만이 몸으로 거하고”(골2:9)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the Father)와 말씀(the Word)과 성령님(the Holy Ghost)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these three are one).”(요일5:7) 5. 증인들의 거짓말 - 둘 여호와의 증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부활하신 것을 부인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영적 존재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피조물로 부활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된 몸을 입고 부활했다고 가르친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신이 몸으로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셨다(요2:19,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성전을 헐라. 사흘 안에 내가 그것을 일으켜 세우리라, 하시니 … 그러나 그분께서는 성전인 자기 몸을 가리켜 말씀하셨더라.”(요2:19,21) 예수님은 자신의 예언대로 몸으로 부활하신 후에 사십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수백 명에게 자신을 보이셨다(고전15:3-6). “내가 또한 받은 것을 무엇보다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그것은 곧 성경 기록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성경 기록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시고 게바에게 보이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보이셨다는 것이라. 그 뒤에 그분께서 오백여 형제에게 한 번에 보이셨나니 그 중의 대다수가 지금까지 남아 있으나 어떤 사람들은 잠들었느니라”(고전15:3-6)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과 함께 음식도 드셨다(눅24:39-43). “내 손과 내 발을 보라. 바로 나니라. 나를 만지고 또 보아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 그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과 벌집 한 조각을 그분께 드리매 그분께서 그것을 받으사 그들 앞에서 잡수시더라.”(눅 24:39,41,42) 6. 증인들의 거짓말 - 셋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경의 지옥은 사람들의 무덤’이라고 가르치며 지옥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영원한 형벌과 고통과 멸망의 장소에 대해서 수없이 언급이 되고 있다. 특히 누가복음 16장은 지옥에 간 부자의 절규를 통해 지옥이 어떠한 곳인지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 의해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겨지고 그 부자도 죽어 묻히게 되었더라. 그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가 자기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도록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나이다, 하거늘 … 이에 그가 이르되, 그러므로, 아버지여, 간구하건대 아버지께서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소서. 내게 다섯 형제가 있사오니 그가 그들에게 증언하여 그들 또한 이 고통 받는 장소로 오지 않게 하소서, 하거늘”(눅16:22-24,27,28) 그리고 마가복음 9장에는 예수님께서 친히 지옥의 영원한 형벌에 대해 세 번이나 연속해서 경고하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내버리라. 불구가 되어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곧 결코 꺼지지 않을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네게 더 나으니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내버리라. 절뚝거리며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곧 결코 꺼지지 않을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 네게 더 나으니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 네게 더 나으니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9:43-48) 7. 수혈에 대한 증인들의 주장 성경(창9:3,4; 레17:14; 행15:28,29)에서 “피를 멀리하라”고 하는 교훈을 확대 해석한 여호와의 증인들은 입이나 혈관을 통해서 몸에 피를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의 법에 위배된다며 ‘수혈거부법’이란 율법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는 피가 없어 죽어가는 신도들에게 죽어도 다시 부활될 테니 안심하고 수혈을 거부하라고 강요함으로써 안타깝게도 수많은 신도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또한 이 수혈거부협회는 환자가 무의식 상태에서는 수혈을 거부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전 세계 신도들에게 ‘수혈거부카드’를 발급해 주어 대리인이 거부할 수 있도록 항상 이 카드를 휴대할 것을 지시하면서 완전한 공개자살체제를 세워놓고 있다. 실례로 1980년 12월 21일자 주간 중앙을 보면 1977년 부산에서 김경숙 양(12세)이 피가 없어 죽어가는데 협회가 수혈거부를 요구하여 사망했고, 1980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김정심 씨(23세)가 수혈거부로 사망한 사건 외에도 한국이 낳은 원로가수 백년설 씨도 1980년 미국에서 수혈거부로 사망하는 등 협회의 광신적 교육에 수많은 신도들이 죽어가고 있음을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1990년 발간한 ‘피-어떻게 생명을 구할 수 있는가?(How can blood save your life?)’란 책자를 통해 세계적으로 유수한 의학잡지에 실린 논문들을 인용하여 수혈의 의학적 위험성과 또 수혈을 하지 않고서도 개심술 같은 수술까지도 성공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신도들을 호도하며 수혈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그르치게 하고 있다. 8. 수혈거부에 대한 의학적 입장 그렇다면 위 책자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삼십여 편의 의학논문들 곧 수혈은 매우 위험하며 수혈하지 않고도 수술이 가능하다는 의학적 주장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먼저 이들이 ‘여호와의 증인의 경우를 통해 성공을 경험한 후 대부분의 소아 심장 수술을 수혈 없이 실시하고 있다’고 소개한 논문(1984년 9월호 Circulation) 등은 정말로 훌륭한 내용이다. 이처럼 실제로 여호와의 증인들의 수혈거부로 인해 무혈 수술법, 최소출혈 수술법 등 크고 작은 의학상의 여러 가지 발전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지구상에서 행해지는 수많은 수술들 중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반드시 수혈을 하여야 할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또한 수혈은 수술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예로 들었던 RH 부적합(Incompatibility) 같은 수많은 비외과적(非外科的) 질환(疾患)에서도 수혈이외의 다른 치료법을 생각할 수가 없는 경우가 그야 말로 부지기수(不知其數)이다. 아울러 AIDS 같은, 복권 일등 당첨될 확률쯤 되는 수혈의 부작용이 무서워 꼭 필요한 수혈을 못해서 궁극적으로 생명을 잃는다면 마치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이 될 것이다. 그리고 증인들은 전혈(whole blood)은 물론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혈장 등의 성분 수혈도 받아들이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똑 같은 혈액 성분인 알부민과 면역 글로불린, 혈우병 약제 등의 사용은 금하지 않고 있는바(The Watchtower 1978;99(June 15):29-31) 그렇다면 증인들이 정의하는 혈액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될 수밖에 없다. 9. 수혈에 대한 성경의 판정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 이후 인간이 모든 동물을 먹을 수 있도록 하셨지만(창9:3,4) 피가 있는 그대로 먹지는 말라고 하셨다(레3:17; 7:26,27; 17:10-14; 19:26; 신12:14, 23-25; 15:23; 행15:28,29).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구절들에서 언급된 피가 ‘인간의 피가 아니라 동물의 피’인 사실을 간과하고 있으며 또 ‘피를 먹는 것과 수혈하는 것이 다르다’고 하는 사실도 망각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동물의 피를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 첫째는 하나님의 선민들로 하여금 이방 종교의 나쁜 관습에 물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다윗의 믹담이라고 불리는 시편 16편에서 다윗이 다른 신들을 예배하는 자들에 관하여 하고 있는 말을 보면 잘 알 수가 있다. “서둘러 다른 신을 따르는 자들은 고통이 더욱 많으리로다. 나는 그들의 헌물 곧 피의 음료 헌물을 드리지 아니하며 그들의 이름도 내 입술에 올리지 아니하리로다.”(시16:4) 즉 하나님께서는 이방 종교의 제사를 언급하면서 피를 마시거나 먹는 일을 금하셨던 것이다. 이방인들은 자기 신들에게 희생 제물로 드린 동물의 피를 취하여 마셨는데 여호와의 증인의 지도자들은 이 구절을 수혈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매년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죽어가게 만들고 있다. 이 구절은 결코 수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 신들에게 희생 제물로 드린 동물의 피를 언급하는 것이다. 둘째로는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피가 특별히 존중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니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 뿌려 너희 혼을 위해 속죄하게 하였나니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하느니라.”(레17:11) 즉 하나님 앞에서 흘려진 피는 제단에 뿌려져 죄를 속하는 데 사용되어야 했으므로 결코 사람들의 식탁에 올려질 수는 없었던 것이다. 10. 율법이냐 은혜냐? 여호와의 증인에서 소위 선행은 구원을 얻기 위한 선결조건인데 1983년 2월 15일자 파수대를 보면 네 가지 범주의 선행이 요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첫째로 파수대의 지도를 통하여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것, 둘째로 하나님의 법 곧 ‘수혈금지’, 생일 및 경축일 금지 등 파수대가 제정한 모든 규칙들에 순종할 것, 셋째로 하나님의 통로인 파수대 조직과 연합할 것, 넷째로 여호와의 증인의 전도 사역에 참여할 것 등이다. 그러나 ‘수혈거부’라는 선행(?)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비성경적인 문자적 의미와 끔찍한 실행의 결과는 차치하고서라도 은혜로부터 떠나 율법으로 돌아간다는 ‘다른 복음(another gospel)’에 다름이 아니다(갈1:6-9). 구원은 선물이다(엡2:4-10).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으로 그것을 받는 것뿐이다(요3:16,17).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위해 우리가 수고를 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자기모순이다. 선행으로써 은혜를 얻어야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헛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롬11:6; 갈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義)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그 안에 굳게 서고 다시는 속박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11. 왜 하필 수혈거부인가? 인류의 조상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죄를 짓고 나자 “정녕 죽으리라”(창2:17)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뤄지게 되었다. 그 결과 아담의 부패된 피를 통해 ‘죄의 유전자’가 온 인류에게 예외 없이 전달되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레17;11; 행17:12; 롬3:23, 5:12). 다시 말해서 만약 ‘죄의 유전자’를 치료받지 못한다면 아무도 사망 곧 영원한 지옥형벌(계20:10-15)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어버렸다(이 ‘죄의 유전자’에 대해 좀 더 알기를 원하면 ‘건강과 생명’ 1998년 3월호에 필자가 쓴 ‘죄의 유전자’를 참조하기 바람). 그러자 완전한 하나님이시요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무죄한 피(the innocent blood) 곧 SIN마이너스 혈액형인 피를 흘려 그 피로 모든 사람의 죄 값을 지불하셨다. 따라서 이제 죄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 우리가 곧 SIN플러스 혈액형을 갖고 있는 모든 인간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오직 SIN마이너스 혈액형인 예수님의 피를 수혈 받는 방법밖에는 다른 수가 없게 되었다(롬5:8,9; 히9:13,14; 요일1:7-9; 계12:10,11). 이것은 마치 RH 부적합(Incompatibility)으로 사경을 헤매었던 전주의 한 신생아가 RH마이너스형의 혈액을 수혈 받고 생명을 찾게 된 사실과 매우 흡사한 이치이다. 그런데 사탄은 이러한 유일한 구원의 방도요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사람들이 거부하도록 ‘수혈거부’라고 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교리 곧 ‘다른 복음’을 퍼뜨리고 있는 것이다. 12. 마무리 사탄은 매우 효과적으로 세상 사람들을 영원한 저주로 몰아넣기 위해 ‘여호와의 증인’을 비롯한 수많은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모두 다 행위구원이요 인내천(人乃天)을 이루고자 하는 인본주의요 또한 영원한 지옥 불 호수를 향해 가는 길일뿐이다. 그리고 조나단 전트 병장과 마틴 세이온 상사처럼 헌혈을 하며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더라도 그 행위로써는 결코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가 없다(롬3:10,12). 왜냐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의(義)는 다 더러운 누더기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사64:6). 따라서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서 갈보리에서 흘려주신 무죄한 피로 자기 자신을 덮지 않는다면 결단코 영벌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하는 우리의 선택만이 남아 있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1:7)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한 영원한 생명이니라.”(롬6:2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  
2009-05-08 15:53:53 | 관리자
"핼로우인데이"의 기원 대부분의 우리 미국 사람들은 "핼로우인데이"가 유럽에서 지킨 바 있는 "모든 성인들의 날"(All Saints Day) 곧 마녀들과 유령들이 이리 저리 돌아다닌 것으로 알려진 날 저녁에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래서 옥수수 껍데기, 호박 얼굴, 사이더, 도넛, "트릭 오아 트릿"(Trick or Treat) 등으로 널리 알려진 이 가을 축제를 아무 거리낌없이 지켜 오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축제는 켈트족의 사탄주의 드루이드 문화에서 나온 것이다. "핼로우인데이"- 마귀의 생일 현재 사탄 숭배가 점점 더 공개적으로 널리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탄 숭배의 실체를 간과하고 넘어가려 할 때가 많다. 그런데 이런 의식에는 실제로 마녀가 있고, 주술이 있으며, 예식이 있다. 마녀나 혹은 "핼로우인데이"의 상징이 들어 있는 카드 등을 살 때, 과연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같은 마귀 숭배 의식을 승인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런 일을 하는 것 자체가 곧 사악한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믿는다. "핼로우인데이"에 마녀들은 집회를 열어 연례 제사를 드리며 사탄 마귀에게 피로 희생을 드린다. 연중 다른 때에는 사탄주의자들이 고양이, 개, 기타 다른 짐승의 희생을 드리지만, 이 날에는 특별히 자기 자녀들 중에서 택하여 인신 제물을 드린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닌가! 사실 이 날은 사탄 마귀의 생일인 것이다! 따라서 "핼로우인데이"라 하기보다는 "헬-오-윈데이"(Hell-O-Ween-Day) 즉 "지옥을 기대하는 날"이라 하는 것이 더 마땅할 것이다. 드루이드의 영향 고대 켈트족의 왕국은 프랑스, 영국, 아일랜드에까지 뻗어나갔으며, 그 당시 드루이드들은 켈트족의 제사장이었다. 켈트족과 드루이드들은 10월 31일을 자기들의 새해 저녁으로 선택했다. "그들은 이 날을 선택하여 악한 것이나 죽은 모든 것을 기념하는 날로 삼았다. 이 날을 기념하면서 그들은 자기들 지역 내의 큰 횃불 주변으로 모여 짐승이나 곡식 혹은 사람을 제물로 드렸다......로마 사람들이 켈트족을 정복한 후에도 이같은 축제는 계속되었다(주후 43년)."「월드북 백과사전」(World Book Encyclopedia) 당신은 드루이드 제사장들이 밤 12시와 낮 12시를 신성한 것으로 여긴 것에 대해 알고 있는가? 드루이드는 '드루이데스'(druides)라는 프랑스 말로서 "떡갈나무에 대해 아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지닌 '드루-비데스'(dru-vides)에서 나왔다. 그들은 떡갈나무와 미쓸토 의식(mistletoe) 역시 신성한 것으로 여겼다. 드루이드들은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거나 혹은 희생 짐승의 내장이나 간 등을 살펴보고 앞날을 점치곤 했다. 초기 아일랜드의 전설에 따르면, 드루이드들은 인신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었다고 한다. 「미국 백과사전」(Encyclopedia Americana)에 따르면 지금도 널리 퍼져 있는 드루이드들의 주요 교리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혼이 없어지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간다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려고 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사탄주의 관습이다. 이 시간에도 많은 이들이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혼이 다른 사람 혹은 짐승 등에게 이동한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TV 인터뷰나 TV 쇼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들이 전생에 다른 존재였다고 말한다(즉 그들은 사람의 윤회를 믿는 것이다.) 드루이드들의 예배와 이교도 관습의 중심에는 사탄주의가 자리를 잡고 있다. "핼로우인데이"는 바로 이 드루이드들의 명절로서, 우리 미국인들은 사탄주의의 이교도 관습에서 이것을 받아들여 지키고 있는 것이다. 주후 700년경에 로마카톨릭교회는 이 관습을 받아들여 그 안에 푹 빠져 버렸다. 그 결과 그 이름도 "모든 성인들의 날"을 의미하는 "올 핼로우즈데이"(All Hallows Day)로 바뀌게 되었는데, 그 날은 11월 1일이었다. 따라서 "핼로우즈데이" 전날 저녁은 "핼로우즈이브"(Hallow's Eve) 즉 "핼로우이브닝" (Hallow Eveining)이 되었고, 이것을 더 줄여 "핼로우인"(Hallowe'en)이 된 것이다. "핼로우인데이"의 큰 횃불 당신은 "큰 횃불"에 대해 의아해본 적이 있는가? 이 "큰 횃불" 역시 이교도들의 풍습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캠프파이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어쨌든지 이 큰 횃불은 떡갈나무 밑에서 드루이드들이 제사를 드리는 것과 상관이 있었다. 사실 드루이드들에게는 떡갈나무가 매우 중요한 신성의 상징이었으며, 따라서 떡갈나무와 미쓸토 등을 숭배하는 그들의 의식에서 이 나무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핼로우인데이"와 사망의 주(主) "핼로우인데이"와 관련이 있는 드루이드 제사장들의 악한 풍습 중 하나는 "삼하인"(Samhain)이라는 축제와 상관이 있다. 「월드북 백과사전」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드루이드들은 여름의 끝을 기념하는 '삼하인'이라는 가을 축제를 기념했다. 이 날은 여름에 자란 모든 곡식을 먹는 날이었으며, 나뭇잎, 호박, 옥수수 껍데기 등을 '핼로우인데이'의 장식물로 사용하는 관습은 바로 이 드루이드들에게서 유래된 것이다. 초기 유럽에 살았던 사람들 역시 드루이드들의 명절과 비슷한 축제를 지켰다." "드루이드 제사장들은 '핼로우인데이'에 '사망의 주' 곧 '삼하인'이 지난 열두 달 동안에 죽은 악한 영(혼)을 모두 불러모아 짐승의 몸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다." 이교주의와 "트릭 오아 트릿" 「전설의 명절」(Holidays of Legend)을 지은 아써(Mildred Arthur)는 "크리스천도 '핼로우인데이'를 지켜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트릭 오아 트릿'의 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판 '트릭 오아 트릿' 풍습의 기원은 수백년전으로 올라간다. 한 떼의 농부들이 '핼로우인데이' 축제 때에 마을에 필요한 음식을 구걸하러 이 집 저 집을 다녔다."(p.87) 즉 "트릭 오아 트릿" 관습은 고대 이교도들의 관습으로써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이며, 그 당시 사람들은 "핼로우인데이"에 밖으로 나와서 자기들을 따라 다니는 것으로 알려진 악한 영들을 달랠 목적으로 음식을 준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들에게 음식을 주면 이들이 자기들을 놀라게 하거나 무섭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핼로우인데이"와 "잭-오-랜턴" 호박으로 만든 "잭-오-랜턴"(Jack-O-Lantern)의 얼굴이 그리 나쁘게 보이지는 않지만, 이것 역시 미신과 관련이 있다. 「월드북 백과사전」은 "잭-오-랜턴"의 역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정보를 제공한다. "이것은 천국이나 지옥에 갈 수 없었던 잭(Jack)이라는 사람에게서 유래된 것인데, 그는 심판 날까지 랜턴을 가지고 어두움 속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주장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피를 흘려주신 주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맞아들이고 그분을 신뢰하면, 곧 바로 구원을 받고 영원토록 안전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심판 날까지 방황할 필요도 없고 그 날에 대해 의아해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이들은 육신을 좇아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좇아 걷는 자들이니라."(롬8:1) "잭-오-랜턴"은 정죄 받은 혼을 나타내는 고대의 상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핼로우인 계절에 다른 물건들과 더불어 이 랜턴을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핼로우인데이"와 마귀의 색깔 「오락을 잘 꾸려가게 하는 책」(The Good Housekeeping Book of Entertainment)의 168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오렌지색, 검은색, 뻘간색은 마귀의 색깔로 '핼로우인데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가능한 한 이렇게 칠해야 한다." 사실 이 책은 사람들로 하여금 "핼로우인데이"에 자기들의 집을 어떻게 장식하는 것이 가장 좋은가를 보여주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데, "오렌지색, 검은색, 뻘간색이 마귀의 색깔"이라고 가르쳐주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핼로우인데이"와 성경 말씀 에베소서 5:11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에 참여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들을 책망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22 "악은 어떤 모양이든 다 멀리하라." 신명기 18:9-12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것들을 따라 행하는 것을 배우지 말지니, 자기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을 치는 자나, 때를 관측하는 자나, 요술을 하는 자나, 무당이나, 마법사나, 부리는 영에게 묻는 자나, 박수나, 강신술사를 너희 가운데 있게 하지 말지니라. 무릇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는 주께 가증한 자들이 되나니, 이런 가증한 일들로 인하여 주 네 하나님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신명기 18장에 나오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 주변에 있는 가나안 족속의 사탄주의 관습에 절대로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며, 우리 역시 이같은 성경의 원칙을 지켜야만 할 것이다. 레위기 19:31 "부리는 영을 지닌 자들을 인정하지 말고, 마술사들을 추종하여 그들로 말미암아 더럽힘을 당하지 말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 사도행전 19:18,19 "이에 믿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백하여 자기가 행한 일들을 털어놓고, 신기한 술수를 쓰던 많은 사람들도 자기 책들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값을 계산한즉 은화로 오만 개나 되더라." 결    론 참으로 거듭나서 성경을 사랑하는 크리스천들은 결코 사탄과 관련이 있는 그 어떤 사악한 일에도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우리는 "핼로우인데이"가 마귀의 생일임을 인식해야만 한다. 바로 이 "핼로우인데이" 즉 10월 31일에 마녀들과 사탄 숭배자들은 아이를 죽여 인신 제사를 드린다. 우리는 이제 "핼로우인데이"가 마귀에게서 나온 사탄주의 풍습임을 널리 알려야 할 것이며, 바로 이 쪽지의 목적도 그런 것이다.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원하면 다음으로 연락하기 바란다.     The Bible For Today, Inc.     900 Park Avenue, Collingswood, NJ 08108     Phone:609-854-4452; FAX: 609-854-2464     E-mail: YSWaite@BibleForToday.org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다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게나 아무에게도 걸림이 되지 말고, 나와 같이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며, 모든 일에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0:31-33)
2009-05-08 15:53:10 | 관리자
유니테리언주의(Unitarianism): 대체로 하나님이 한 위(位)로만 존재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한다. 하나님의 단일성과 예수의 인성(人性)에 대한 신학적 기반은 2~3세기의 단일신론과 아리우스 및 그 추종자들(아리우스파)의 가르침에서 발견된다. 후에 교회는 이 두 분파의 교리를 모두 이단으로 선언했다. 유니테리언주의의 현대적 뿌리는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당시 자유주의적이고 급진적이며 이성주의적인 개혁자들은 플라톤이 강조했던 이성과 하나님의 단일성을 부활시켰다. 이들 사상가 중 많은 사람이 종교재판 때 이탈리아를 떠났다. 주도적인 신플라톤주의적 유니테리언주의자였던 세르베투스는 결국 제네바로 도망쳤으나 그곳에서 칼뱅주의자들에 의해 화형에 처해졌다. 폴란드에 은신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 망명자 중 주요인물인 파우스투스 소키누스는 1579년 크라쿠프에 도착했다. 소키누스의 신학은 예수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했으며 대부분의 유니테리언주의자들과 만인구원론자들은 지금도 이 교리를 견지하고 있다. 트란실바니아에서 활동한 초기의 주요인물은 페렌츠 다비드였는데, 예수는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에 예수에게 기도할 수 없다고 가르쳐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다비드는 1579년에 옥사했는데 그가 세운 교회는 현재 남아 있는 유니테리언 교회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브리태니커 백과사전).
2009-05-08 15:52:35 | 관리자
영지주의(Gnosticism) 주후 1-4세기경 그리스, 로마, 유대, 소아시아, 이집트 등 근동의 여러 지역에서 유행한 이단 사상. 이것은 신의 세계와 물질세계의 극단적인 이원론을 주장하면서 역사적 예수님/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부정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상이다. ‘그노시스’(Gnosis)라는 말은 지식에서 나왔으며 영지주의자들은 영적 지식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신의 세계와 물질세계 그리고 그 사이에 천사, 인간, 마귀가 있고 인간은 물질세계에서 포로가 됨을 피하여 신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금욕해야 하며 또 물질세계에서의 해방을 방해하는 마귀를 극복하기 위해 최고의 완전한 ‘신지’(혹은 영지) 즉 신에 대한 지식인 ‘그노시스’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사상은 철저하게 영육의 이원론을 펴며 영의 청순성과 신비성을 강조하고 육체적인 면을 타락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그들은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의미를 설명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바로 이 사상의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그들은 이처럼 역사적 예수를 부정했을 뿐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최고의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마침내 구약성경까지 거부하게 되었다. 이들의 믿음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신약의 복음서를 믿는 정통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영원한 심연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영지주의자들은 이를 부인한다. 그들은 자신을 깨닫는 것이 곧 하나님을 깨닫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자아와 하나님의 신성(神性)은 동일하다고 믿는다. 이는 힌두교에서 말하는 아트만과 브라만의 합일을 방불케 하는 가르침이다. (2) 영지주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와는 달리 죄와 회개가 아니라 불교의 제행무상 즉 “우주의 모든 사물은 늘 돌고 변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아니한다.”는 사상과 제법무아 즉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인연으로 생겼으며 변하지 않는 참다운 자아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과 비슷한 교리를 말하고 또 깨달음에 대해서 말한다. 즉, 영지주의자들은 현대판 동양의 구루와 비슷한 예수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3) 정통파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기에 예수 또한 인간과는 건널 수 없는 간격을 가진 존재로 믿지만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또한 인간들과 같은 근원에서 왔다고 말한다. (4) 기독교인들은 구약의 여호와를 사랑의 하나님으로 생각하지만 영지주의자들은 전쟁을 좋아하며 살육을 즐기는 구약의 신이야말로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세계를 만든 악마로 본다. (5) 영지주의자들은 윤회를 인정하며 또한 위대한 어머니(태모)에 대한 숭배를 이야기한다(현대 영지주의자들은 과거 영지주의 시대와 대승불교 시대가 같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예수가 인도로 가서 힌두교 사상을 배웠다고 주장함). 한편 영지주의자들 가운데는 자기들이 신의 지식을 가졌으므로 무엇이나 자유롭게 행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진 자가 많았으며 그래서 거기 속한 많은 사람들이 육체적 방종에 빠져 죄 가운데 살았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같은 태도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오며 구원받은 자는 죄에서 해방되어 거룩함에 이르러야 함을 강조했다(롬6:1-11). 사도 요한 역시 구원 받은 자들이 계속해서 죄 가운데 거하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요일3:4-10).
2009-05-08 15:51:54 | 관리자
영혼멸절설(Soul annihilation) 지옥의 불이 영원토록 지속되는 진짜 불 즉 이 세상에서 우리가 뜨겁게 느끼는 그런 불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불 곧 상징적인 불이며 또 하나님이 사랑이시므로 자신의 피조물을 진짜 불 속에 영원토록 던져 넣는 잔인한 분이 아니기에 불신자의 혼은 죽어서 소멸된다는 가르침. 이런 주장을 펴기 위해 안식교인이나 여호와의 증인들이 사용하는 단어는 eternal이다. 이 말은 원래 ‘시작과 끝이 없는 것’을 나타낼 때 혹은 천상의 것의 우수함이나 고매함 등을 지상의 것과 비교할 때 즉 질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말이다(마19:16). 반면에 영어에서 양을 강조하면서 영원토록 지속되는 것을 나타낼 때는 ‘영존하는’이란 뜻의 everlasting을 사용하며 마18:8은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존하는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고 말해 지옥의 불이 영원토록 지속됨을 보여 준다. 이렇게 하나님은 치밀하게 everlasting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영혼멸절설’ 같은 이단 교리가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셨다. 사악한 자들은 영원토록 계속해서 지옥 불 속에서 고통을 받으므로 영혼은 멸절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생명은 질적으로 우수한 ‘영원한 생명’인 동시에 양적으로도 영원토록 계속되는 ‘영존하는 생명’이고 불신자에게 주시는 생명도 질적으로 양적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이다. 혼, 지옥 참조
2009-05-08 15:51:19 | 관리자
지금은 가짜들이 진짜로 행세하는 시대입니다. 베니 힌, 조엘 오스틴, 로버트 슐러 같은 가짜들이 진짜처럼 양들을 유린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이제는 거짓말을 크게 하는 사람이 진짜로 대접을 받습니다. 복음 면에서 이단과 같은 이런 사람들이 국내에 무분별하게 수입되고 있으니 유명하다는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국내판 가짜들도 수두룩하지요. 우리와 아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우리 안에 영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바른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있는 교회로 가기 바랍니다. 인간의 정은 잠시 있다 없어집니다. 정보다 진리를 추구하기 바랍니다. 말세에는 이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정에 얽매이다가는 내 혼이 메말라 비틀어집니다. 영 분별을 위해 기도하십시다. 조엘 오스틴 - 몰몬교는 진정한 기독교  베스트셀러 <긍정의 힘> 저자로 한국 교회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잘 알려진 조엘 오스틴 목사(레이크우드교회·사진)가 한 방송사 인터뷰에서 몰몬교도 진정한 기독교라고 발언해 논란이 되고 있다. 오스틴 목사는 지난 2007년 12월 23일 <폭스뉴스 선데이>(FOX News Sunday)에 출연해 몰몬교도인 미트 롬니 공화당 대통령 후보는 물론 몰몬교도 진정한 기독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진행자 크리스 월리스(Chris Wallace)가 미국 대선과 관련해 종교와 정치에 대해 질문하던 중, "미트 롬니 의원은(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리고 이번 대선을 떠나 몰몬교가 진정한 기독교라고 볼 수 있는가?"란 질문에서 나왔다. 오스틴 목사는 "미트 롬니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라고 말했고, 나도 그렇다. 나는 자질구레한 것까지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몰몬교도 진정한 기독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미트 롬니 의원은 품성도 좋고 청렴해 보인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진행자 월리스는 몰몬 교주 조셉 스미스나 몰몬교의 이단성을 대표하는 황금판(몰몬경), 하나님과 사람은 같은 형상이라는 등의 신학적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별로 개의치 않으며 신학적 문제는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이라고 답했다. 오스틴 목사는 "(신학적 문제는) 깊이 공부한 적이 없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개의치 않는다. 심판은 하나님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미트 롬니 의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한 것을 들었을 때 공감대를 느꼈다"고 말했다. 조엘 오스틴에 대해 자세히 알기 원하는 독자는 다음의 네이버 블로그를 보기 바랍니다. 조엘 오스틴
2009-05-08 15:50:36 | 관리자
1. 들머리 “차라리 고아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차라리 거리의 풀 한 포기로 태어났으면 좋으련만…차라리 바람에 휘날리는 모래 한 줌으로 태어났으면 좋으련만….” “나는 아버지가 안 계신 소녀가장이다. 고등학교 입학금조차 없는 가난한 집의 둘째 딸. 이런 나에게 미래가 있을까… 사랑하는 엄마, 죽는 생각 자체가 불효라는 것 알아. 하지만 내가 없어지는 것이 돈이 덜 나가 다행일지도 몰라.” 아버지가 6년전 객사한 뒤 뇌종양으로 투병중인 엄마와 두 동생을 돌보던 15세 소녀가장 정(鄭)모(15. 평택 H중 3년)양은 지난 달 22일 오후 자신의 6평 남짓한 작은 슬레이트 집에서 가난을 이기지 못해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IMF때보다도 더 어렵다는 경제 불황으로 인해 최근 생활고에 몰린 부모가 어린 자녀를 숨지게 하거나 동반자살하는 ‘가족잔혹사’가 잇따르고 있던 중 가난을 견디지 못한 한 소녀 가장의 충격적 죽음은 정말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병약한 것인지를 너무도 잘 웅변해 주고 있다. 아울러 지역간, 세대간, 계층간의 정치적 갈등과 분열도 날이 갈수록 그 골이 깊어지고 있는 가운데 외환위기 이후 부모로부터 버림받는 아이들은 해마다 1만 명이고 이혼율은 47.4%로서 이제 우리나라는 ‘자살 공화국’과 ‘갈등 공화국’에 이어 조만간 51%인 미국의 이혼율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이혼 천국’도 될 전망이다. 그런데 이처럼 곳곳이 병들어 희망이 보이지 않는 우리 사회를 치유할 수 있다며 그 놀라운 치유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한 권의 단행본과 또 동명의 월간지가 요즈음 많은 이들에게 소개가 되고 있다. 2. 힐링 소사이어티(Healing Society) 즉 몇 해 전 미국에서 출간된 이승헌씨(현대단학 창시자, 새천년평화재단 총재)의 ‘힐링 소사이어티’가 바로 화제의 책인데 이 책은 인터넷서점 아마존에서 ‘해리 포터’ 시리즈를 제치고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기도 했었다. ‘힐링 소사이어티’가 1위 자리를 지킨 것은 며칠에 불과했지만 미국 독자들이 이 책에 준 점수는 최고 평점인 별 다섯 개였으며 아마존 편집진도 102쪽에 불과한 이 짧은 책에 대해 “지극히 현실적이며 통쾌할 정도로 정직하게 쓴, 짧지만 대단한 작품”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이러한 미국인들의 놀라운 평가에 대해 저자인 이승헌씨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서구사회는 ‘솔 러시’(Soul Rush)라고 할 만큼 영적 탐구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영적인 스승이라 불리며 활동하는 이들만 해도 수천 명이 넘습니다. 그런데 동양의 지혜와 문화는 중국이나 인도, 일본에서 오는 것이라고 알았던 미국인들 앞에 어느 날 갑자기 한국 사람이 나타나 명쾌하게 깨달음을 이야기하니까 놀란 것이지요. 아무리 명상을 해도 깨달음은 만져지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아 답답해하던 차에 깨달음은 그리 특별한 성취가 아니다, 깨달음은 추구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데 의미가 있다, 혼자서 명상만 하지 말고 치유(Healing)를 하자는 말을 하니까 미국사람들의 반응이 대단하더군요.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한 도구로서 깨달음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도움이 안 된다면 깨달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죽을 때나 필요하다면…. 중요한 것은 당장 살면서 필요하고 현재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죠.” “‘힐링 소사이어티’라는 제목이 무슨 의미인지 묻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우리의 문화유산인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를 영어로 옮겨놓은 말에 불과해요. 우리가 깨닫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바른 삶을 살기 위한 것이고, 깨닫고 나면 제대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힐링할 것인지 킬링할 것인지의 선택입니다. 나 자신의 힐링도 중요하지만 사회를 힐링하는 게 바로 홍익 아닙니까.” 그렇다면 온 세계인을 열광시키고 있는 이승헌씨의 ‘힐링 소사이어티’란 방법론에 의해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치유될 수 있을 것인지, 또 그 이면에 숨겨진 메시지와 이 시대적 표적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성경적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3. 깨달음(Enlightenment) ‘힐링 소사이어티’에서 이승헌씨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지구 곳곳에 있는) 어둠의 기운을 걷어내기 위해서는 ‘깨달음에 이른 사회’(Enlightened Society)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물론 이런 사회는 한두 사람의 깨달음만으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깨달음이 전세계적이고도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 될 때라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인류 대다수가 집단적인 깨달음에 이르러 우리의 행동과 문화가 실질적으로 달라질 때만 얻을 수 있는 세계이다. 깨달음이 이 세상을 휩쓰는 사회운동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진정한 나’를 찾는 것이다. 고치를 뚫고 아름다운 나비가 탄생하듯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아름답고 신성한 본성이 있다.” “우리는 왜 깨달아야 하는가? 우리 가슴 안에 있는 참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몸속에 예수의 피, 부처의 피, 그리고 다른 고귀한 예언자와 성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자신이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 … 당신에게는 몸과 마음보다 더 높은 신성이라는 존재가 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참된 자아이다. … 인류 역사를 통틀어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많았다. 예수와 부처, 마호메트, 이름을 남기지 않은 수천 명의 성인과 현인들, 그리고 선견지명이 있는 예언자들 모두가 우리가 하나라는 진리를 깨달은 자들이다.” 4. 복음(Gospel)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선한 존재가 아니라 죄인일 뿐이다(롬3:10,23). 아담의 타락 이후 아담의 후손들은 죄로 부패된 아담의 형상을 따라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육체를 지니고 태어나게 되었다(창5:3).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 왔으며 또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되었다(롬5:12; 계20:14; 21:8).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인간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한 구원자’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다(창3:15). 가인이 태어나기도 전에 선포된 원형복음 곧 여자의 씨(the woman's seed)를 구원자로 보내주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후에도 계속 대언자들을 통해 선포되었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그 약속의 말씀은 성취되었다(마5:17).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무죄(無罪)한 피를 흘려 돌아가셨다(마1:21; 27:4; 눅23:33,46; 요19:34; 요일1:7). 그리고 정확히 삼일만에 예수님께서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눅24:1-12).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만 있게 되면 누구든지 부활하여 영생의 복을 받게 된다(고전15:12-22). 다시 말해 자신의 입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것을 마음 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롬10:9). 즉 진정한 깨달음(得道, enlightenment)이란 이 복음(Gospel)을 듣고 참 길(道, the Way)이시며 빛(the Light)되신 예수님을 개인의 인격적인 구원자로 영접하여 지옥불못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다(요14:6; 사35:8; 요1:4,5,7; 8:12; 9:5; 12:36; 고후4:4,6; 요일1:5; 계21:23,24).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가 곧 길(道, the Way)이요 진리(眞理, the Truth)요 생명(生命, the Life)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이하 흠정역) 5. 뇌호흡(Brain Respiration) 그런데 ‘힐링 소사이어티’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깨달음은 우리의 뇌를 이용해 도달할 수 있는 생리적인 현상이다. 일상생활에 충실하면서도 과학적이고 실천적인 단계를 꾸준히 밟아간다면 누구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뇌호흡은 이완과 명상을 통해 몸 전체에 흐르는 기를 느끼고 우리 몸에서 가장 강력한 에너지 저장고인 뇌 속을 자극하는 두뇌혁명이다. 그럼으로써 무한한 잠재력을 담고 있는 자신의 뇌를 깨어나게 하는 방법이다. 진정한 합일의 경험을 원하는 사람은 그냥 말로만 소망하지 말고 자신의 뇌를 활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의 조각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정보의 조합물이다.… 뇌호흡은 정보의 선택과 처리 과정을 더욱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창안한 프로그램이다. 뇌호흡을 통해 경험적인 정보를 판단하고 선택하면, 정보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활용하는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 뇌호흡의 궁극적인 목표는 의식의 각성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즉 ‘힐링 소사이어티’를 이루기 위한 깨달음의 핵심적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뇌호흡’이다. 이승헌씨는 “뇌호흡을 개발한 것도 깨달음에 덧입혀진 신비주의적인 환상을 벗겨내고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깨달음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였다.”고 하면서 “뇌호흡을 통해 누구든지 깨달을 수 있으며 그 깨달음을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그는 신경생리학적으로 보면 뇌의 3층 구조(신피질, 구피질, 뇌간)를 재통합해서 그 기능을 마음껏 활용하는 상태가 적절한 훈련(뇌호흡)을 통해 누구에게나 이뤄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뇌간에 잠재된 능력을 끌어낼 수만 있다면 초인적인 힘이나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하게 된다고 하면서 동시에 다음과 같은 놀라운 언급을 하고 있다. “뇌간과 만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정녕 창조주와의 만남이다. 뇌호흡은 바로 이 뇌간에 있는 창조주와의 만남을 가능케 한다. 이렇게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뇌간을 개개인의 의식의 성장을 위해 그리고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쓸 수 있다면 인류 전체의식에 비약적인 진보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6. 모든 것을 보게 되는 눈(All-Seeing Eye) 그 간 뇌호흡에 대해 국내 매스컴에서 많은 보도가 있어 왔는데 그 중 한국기공사(氣功師)연합회가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뇌호흡 훈련을 받은 초등학생 3명이 눈을 완전히 가리고도 책을 읽어 보이는 능력을 시범해 보였다는 뉴스가 텔레비전과 일간지 등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된 적이 있었다. 세 어린이들은 기공관계자들과 뇌연구 학자들, 언론사 보도진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시범에서 두꺼운 종이카드 뒷면에 그려진 숫자나 도면 알아맞히기, 눈가리고 책읽기 등을 해보였다고 하며 시범이 끝난 뒤 기자들이 재차 확인을 위해 건네준 과학잡지 등의 글도 쉽게 읽어버리는 놀라운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 사건이 사실일진대 공부해야 하는 학생들에게는 물론 자녀가 공부 잘하기를 바라고 있는 이 땅의 모든 부모들에게는 그 어떠한 것보다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시범을 지켜본 한국뇌학회 회장께서 “뇌훈련으로 모든 사람이 초능력을 발휘할 순 없다고 하더라도 집중력이 놀랄 만큼 향상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그 뒤 뇌호흡 훈련을 받으려는 학생들이 엄청나게 증가하였을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라 하겠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뇌호흡과 같은 특별한 훈련과 이로 인한 능력향상은 (이미 ‘깨달음’의 반성경적인 내용에서도 확인이 된 바와 같이) 미혹의 함정이요, 단지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교묘한 덫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여야 한다. 이것은 시범 후 초등학교 3학년인 한 아이가 “뇌호흡을 하면 이마에서 빛이 나와 가지고 화면으로 다 보여요.”라고 한 말에서도 그 실마리를 풀어 볼 수 있다. 티베트에 살던 고대의 라마들은 대단히 흥미로운 이상한 수술을 행했는데 그것은 뇌 중앙에 있는 솔방울 모양의 내분비기관인 송과선(pineal gland)을 잘라내는 것이었다. 진정한 라마가 되기를 원하는 초심자에게 달라이 라마(대승)와 동료들이 그의 이마에다 금속핀을 꽂고 송과선 근처에다 대나무 가시를 집어넣게 되면 그는 이마의 중간에 세 번째 눈 곧 ‘모든 것을 보게 되는 눈’(All-seeing eye)을 갖게 된다고 한다. 이 수술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그 사람은 자기가 만나거나 이야기하는 사람의 머리나 몸에서 색깔이 있는 오로라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다고 주장한다. 멜라토닌(melatonin)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하는 기관으로 잘 알려져 있는 송과선은 최근의 연구 결과들에 의하면 멜라토닌에 의해 생체 리듬에 영향을 줄 뿐 아니라 여러 내분비 기관들에 대해서 직접적인 조절작용(switch-off button)도 하며 더 나아가 피놀린(pinoline)이라는 물질 등을 만들어 정신력을 조절할 수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송과선은 물론 수많은 신체기관의 해부생리에 대해 잘 모르던 고대인들이 미혹의 영에 이끌려 송과선을 인위적으로 조작하여서 모든 것을 보고자 하는 세 번째 눈을 가지려 한 사실은 동양에 널려 있는 불상에서 잘 볼 수 있으며 또 이름은 조금씩 다르지만 북미의 행운의 동전(good luck coin)이나 고대 이집트의 호루스의 눈(eye of Horus) 또는 남유럽, 북아프리카, 중동, 인도, 멕시코 등의 갖가지 부적들에서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현대판 바알(Baal) 숭배집단인 프리메이슨(Freemasons)의 중요한 심벌이 ‘모든 것을 보게 되는 눈’(All-seeing eye; single human eye)인 것도 바로 같은 이치인 것이다. 7. 명상(Meditation) ‘힐링 소사이어티’에서 이승헌씨는 뇌호흡을 잘 하기 위해서는 신피질(대뇌피질)을 잠시 쉬게 하면서 뇌간을 조절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앞에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그는 우리의 의식을 깨어 있게 하면서 신피질만 잠들게 하는 방법이 바로 ‘명상’인데 이 명상을 통해 뇌호흡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뇌호흡뿐 아니라 모든 기(氣) 건강법들은 한결같이 훈련과정에서 ‘마음을 비우기 위한’ 명상을 필요로 한다. 초월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 선명상(Zen meditation), 촛불명상(candle meditation) 등등 너무나 많은 종류의 명상들이 있지만 이들에는 기본적인 원리가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즉 ‘자기실현’과 ‘고차원적 의식’에 도달하는 것이 명상의 최종 목표이다. 그런데 ‘자기실현’이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영을 조절할 수 있는 단계를 이루는 것이며 ‘고차원적 의식’은 그 사람이 여러 마귀들과 대화함으로써 성취되어진다. 즉 이것을 행하는 사람들은 종종 ‘안내자’나 ‘상담자’로 불려지는 특정한 마귀를 소유하게 된다. 일례로 이십육 년 전에 필자가 이수한 적이 있었던 실바 마인드 컨트롤에서 피훈련자들은 명상을 통해 ‘상담자’ 혹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영의 안내자’들에게 안내되어졌는데 자기만의 지하공간에 알파뇌파 상태로 내려가면 이런 ‘상담자’를 만날 수 있다. 우스꽝스러운 것은 이들과 주기도문을 함께 할 수도 있는 것인데 - 이것은 마인드 컨트롤 센터마다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다 - 이럼으로써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고 더 잘 속일 수 있게 된다. 또 예수님을 상담자 중의 하나로 격하시켜서 예수님의 창조주되심과 구속주되심과 유일한 중보자되심을 송두리째 부정하도록 세뇌시킨다(고후4:4). 독일의 다름슈타트에서 가나안 공동체 원장으로 사역하고 있는 바실레아 슐링크(Basilea Schlink)는 명상의 결과로 생기는 최후의 고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밀교의 가르침의 영향으로 감정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하는 청년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데 특별히 초월명상과 같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개인적으로 명상에 빠져들고 구루(guru; 힌두교의 지도자)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어서 감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도착상태가 되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 또한 부부가 모두 명상을 하게 될 경우 이혼율이 특별히 높다. 명상을 할 때의 그 무아지경과 현실로 돌아왔을 때 일상의 스트레스나 욕구불만 사이의 괴리감은 너무 큰 것이어서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기가 불가능하다.” 성경은 여러 차례 명상에 대해 언급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명상은 사탄의 것과 현저히 다르다. “너는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밤낮으로 그 안에서 묵상(meditation)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이는 그리하면 네가 네 길을 형통하게 하며 또한 크게 성공할 것임이라.”(수1:8) 이 구절에서 나오는 명상(meditation)은 하나님의 말씀을 능동적으로 읽고 배우고 암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믿음의 선배들도 이와 같은 명상을 하였다. 사탄의 명상은 항상 수동적이지만 성경에서 나오는 명상은 절대로 수동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분명히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비우지 말고 제어해야 함을 보여준다. 8. 알파파(Alpha Wave) 계속해서 ‘힐링 소사이어티’에서 이승헌씨가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자. “명상 중일 때는 잠이 든 때와 비슷한 알파파 상태이다.” “이미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신성함을 일깨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답은 에너지에 있다. 동양적인 말로 바꾸면 기(氣)이다. 지금의 종교와 정신적 전통에서 가장 결핍되어 있는 부분이다.” 이승헌씨뿐 아니라 기(氣)를 이용한 건강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뇌파의 종류에 따라서 사람의 능력상태가 달라진다고 하여 베타(β)파(뇌파 중 가장 높은 파장으로서 보통 깨어 있는 상태를 말하며 대부분 기본적인 오관의 수준에서 기능을 함)에서 알파(α)파(낮고 좀 더 안정된 파장으로서 깊은 이완과 명상의 상태이고 몸의 재생이 이 상태에서 일어난다고 함)로 접근하게 되면 깊은 안정감과 행복한 기분을 맛보게 되며 나아가서 각종 초능력들, 곧 보이지 않는 물체를 알아 맞추고 병 고치고 여러 위험상태로부터 구출됨 등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알파파라는 과학적 용어를 사용하여 비가시적 존재인 기(氣)를 캐무플라즈 하려는 건강법들에서 내세우는 목적은 보다 나은 인간이 되도록 돕기 위해 보다 안정적인 알파 뇌파를 조절하도록 훈련하는 것이라 한다. 필자도 의과대학 재학 시절 한 선배의 권유로 마인드 컨트롤 강습을 받을 때 알파파 얘기가 나오니까 학교에서 들었던 것과 같은 하나의 과학적 건강법인 줄 생각되어 안심하고 그 바쁜 본과 생활 중에서도 시간을 내어 끝까지 코스를 마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어떤 환자의 이름과 나이, 성, 거주지만을 알려준 뒤 지금 무슨 병을 앓고 있는지 알아맞히는 마지막 자격시험을 치를 때에도 역시 알파파의 상태로 내려가 그 병명을 알아맞혔었다. 그러나 어떠한 과학적 용어로 포장이 되었든 인간이 자기 스스로 영을 조절하여 마귀들과 교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의 대적(對敵)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오 디모데야, 속되고 헛된 말장난과 거짓으로 과학이라 불리는 것의 반론들을 피하며 네게 맡긴 것들을 지키라.”(딤전6:20) 9. 에너지(Energy) 알파파와 함께 비가시적인 기(氣)에 과학적인 뉘앙스를 입히는 표현은 ‘에너지’이다. 일례로 뇌호흡과 같은 뉴에이지기법 중 하나인 ‘치료적 접촉’(therapeutic touch)에서 시술자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서 미세하게 느껴지는 저리거나 뜨거운 감각을 찾아낸 후 과도한 에너지가 발견될 때에는 손을 사용하여 그 에너지를 ‘쓸어 내버려야’ 하고 만족할 만한 에너지 상태의 정신적 이미지(mental image)를 창조하게 되면 이 영상을 환자에게 손을 통해 전달할 수 있다고 한다(창6:5). 그런데 이 ‘치료적 접촉’의 주창자 크리거(D. Krieger) 교수의 저서를 읽어보면 동양의 신비주의와 힌두교 개념인 우주에너지 프라나(prana)가 치료의 초석이 됨을 알 수 있다. “모든 요가들은 최종적으로 같은 목표 즉 ‘브라만’(Brahman; 힌두교의 기본교리 중 형태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으며 보이지 않는 비인격적인 힘으로서 우주의 모든 것을 지칭함) 곧 신(神)과의 연합을 이루기 위함이다. 이 참된 지혜를 얻기 원한다면 이 요가들의 여러 방법들이 종합적으로 행해져야만 한다.”고 루시 리델(Lucy Lidell)의 요가 교과서는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여러 종류의 요가 기법들은 오직 브라만과 연합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무의식의 황홀경으로 쉽게 빠지도록 하려고 만들어진 것에 다름 아니다. 요가를 수행함으로써 마음이 비워지고 ‘프라나’의 흐름이 용이하게 된다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에너지는 사실 영(spirit)을 의미하며 엄밀히 말하면 마귀의 영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기(氣)라는 에너지를 표방하며 마귀가 들어와 공중투시 같은 영계에서의 여러 가지 경험들을 선물로 주면서 동시에 그 사람의 혼과 영을 ‘함께 묶는’(yoga) 고리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뇌호흡이나 다른 건강기법에서 ‘비가시적인 에너지(invisible energy)’를 통해 형성하고자 하는 모든 불법 고리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잘라버려야 한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imaginations)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거슬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고후10:5) 10. 마무리 각 개인이 ‘뇌호흡’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고 난 후 깨달은 개인이 모여 ‘뉴휴먼공동체’를 이루는 식으로 10년 안에 1억 명의 깨달은 자가 생겨난다면 병든 지구를 치유할 수 있다고 ‘힐링 소사이어티’에서 주장한 이승헌씨는 얼마 전 유엔에서 열린 ‘밀레니엄 종교 및 영성 세계평화 정상회의’에서 아시아 영성지도자를 대표해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였다. “이제 종교의 이름으로 가해진 모든 상처들에 대해 인류 앞에 사죄함으로써 그 상처를 치유합시다. 이제 모든 이기주의와 경쟁에서 벗어날 것을, 그래서 신 안에서 하나로 만날 것을 서로에게 약속합시다.” 그렇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창3:6) 이후 무질서도(entropy)가 증가하게 되는 열역학 제2 법칙(창3:17-19)이 태동하게 된 이래로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날로 깊이 병들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 더욱 세련된 형태로 ‘뉴에이지 운동(new age movement)’이 확산되면서 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치유하기 위해 궁극적으로 세계의 모든 종교가 하나로 되어야 한다는 컨센서스가 점차 확고하게 지구촌 곳곳에서 형성되고 있다(살후2:3,4; 계13:8). 그렇다면 우리도 이 사회를 치유하기 위해서 ‘힐링 소사이어티’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거대한 물결에 합류해야 하는 것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들에게는 ‘복된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딛2:13). 곧 우리의 진정한 ‘치유자’이신 예수님(출15:26; 마9:12; 막2:17; 눅5:31)께서 구원을 완성하시고 찬양을 받으시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우리는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고 이 세상은 완전히 치유될 것이기 때문이다(롬8:17,21).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넓어 거기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좁아 찾는 자가 적기 때문이니라.”(마7:13,14) “이는 내가 너를 치유하시는 주이기 때문이라, 하시니라.”(출15:26하, for I am the LORD that healeth thee.) * 저자의 단행본 ‘성경으로 세상보기’는 ‘생명의 말씀사’에서 온라인으로도 구매할 수 있습니다.
2009-05-08 15:48:56 | 관리자
'트랜스젠더(transgender)' 하리수. 펴면 안 나오는 신문과 잡지가 없고 틀면 안 나오는 방송이 없을 정도로 요사이 유명세를 얻고 있는 대한민국의 성전환 스타이다. CF 모델, 영화배우, 가수, VJ(위성방송 채널 V 코리아의 간판 프로그램인 'V스타일'의 비디오자키) 등 만능 엔터테이너로서 온 국민의 시선을 받으며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는 공인(公人) 하리수의 등장으로 트랜스젠더란 말 자체가 이제는 어렵지 않은 우리말이 되어 버렸다. 아울러 트랜스젠더에 대한 거부감을 지나 이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늘고 있는데 최근 민주당 김중권 대표는 하리수의 법적인 성전환 문제에 관해 "이미 성전환 수술을 통해 여성이 돼버린 것을 굳이 남성으로 남아 있으라면서 주민등록번호를 고쳐주지 않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하였고 심지어 이들과의 결혼에 대해서도 관대함을 보이는 남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나왔다. 이처럼 뜨겁게 불어닥치는 하리수라는 이 시대의 열풍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시대의 표적들을 분별하고 때를 살피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일진대 (마16:2,3; 24:32,33) 이 글에서는 하리수 열풍의 압력과 온도와 풍속 등 드러난 객관적 데이터들을 통해 성경적 관점에서 이 시대의 신드롬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첫째, 하리수 신드롬의 대전제가 되는 것은 '외모'이다. 현재 국내에는 약 3만명의 성전환증 환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 중 성전환 수술을 받은 사람은 약 2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들 중 하리수가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주요한 이유는 바로 '여자보다 예쁜’트랜스젠더 연예인 1호라는 사실 때문이다. 얼마 전 한국갤럽에서 전국(제주도 제외)의 만 20세 이상 성인남녀 1,52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성전환에 관한 국민의식 조사' 결과 중 하리수에 대해 '매력이 느껴진다'라고 말한 경우가 남성은 34.5%였고 여성은 49.2%로 나타났는데 가구방문을 통한 개별면접 방식인 점을 감안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데이터로써 그(?)의 출중한 외모는 충분히 입증이 되는 셈이다. 또 방송프로그램 가이드 및 연예정보 전문사이트인 이피지(www.epg.co.kr)가 최근 네티즌들을 대상으로 '하리수가 남자냐 여자냐'에 대해 투표를 실시하여 843명의 참가자 대부분이 당연히 여자로 봐야 한다고 응답한 결과를 보더라도 그녀(?)의 외모는 매우 뛰어난 것임을 객관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프로 스포츠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외국 용병들 중 야구선수 호세나 축구선수 샤샤 등도 하리수에게 깊은 매력을 느낀다고 공개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예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익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 시대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이 삶의 법칙인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비단 얼굴뿐이겠는가 학벌, 명예, 권력, 건강, 재물 등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대접하는 것이 이 시대의 당연하고도 보편적인 룰이지 않는가. 그러나 성경은 말씀한다.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너희가 성경에 따라,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이루면 잘 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의 외모에 관심을 두면 죄를 범하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확정하리라."(약2:1,8,9, 이하 흠정역)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심이라.(For there is no respect of persons with God.)"(롬2:11) 둘째, 하리수 신드롬의 주요한 목적은 그 '상품성'에 있다. KBS2 TV 휴먼다큐멘터리 '인간극장'(월-금 오후 8시 50분)이 '하리수 효과'를 톡톡히 봤다고 한다. 즉 '인간극장' 시청률은 7% 안팎을 기록하면 괜찮은 수준인데 하리수를 다룬 '인간극장-그 여자 하리수'가 방송된 후 시청률이 쑥쑥 상승하여 한 자리 시청률에서 두 자리로 올라서더니 최고 시청률 17.1%를 기록하기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이미 돈이 된다는 사실은 하리수와 동시대인들이 모두 공감하고 있는 바가 아닌가. 이것은 이미 하리수를 처음 대중에게 알리게 된 CF를 내보낸 화장품 회사에서 그 효과로 엄청난 수입을 올렸다는 사실로써도 증명이 되고 있다. 하리수를 통해서든 아니면 다른 어떠한 컨셉을 통해서든 돈을 벌고자 하는 것 역시 이 시대의 정당한 경제원리와 삶의 목표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이는 그가 이 주인을 미워하고 저 주인을 사랑하거나 혹은 이 주인을 굳게 붙들고 저 주인을 업신여기겠음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Ye cannot serve God and mammon.)"(마6:24) 아울러 상품이 되기만 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고 그것이 이 시대의 선이라고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false teachers)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그들이 탐욕으로 말미암아 거짓된 말을 가지고 너희를 상품 취급하리니 그들에 대한 심판은 오래 되어 이제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이 받을 영벌은 잠자지 아니하느니라."(벧후2:3) 셋째로, 하리수 신드롬은 성(sex)이 화두가 되는 이 시대의 스펙트럼 가운데 하나이다. 이성애(heterosexual), 동성애(homosexual), 양성애(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 남자로 태어났건만 스스로 여성이라고 여기는 사람), 트랜스섹슈얼(transexual; 성전환수술로 여성이 된 경우) 등등 개인의 성 취향은 다양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형태를 따르건 간에 문제될 것이 없다는 이 시대의 가치관을 더욱 굳건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하리수 신드롬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계관하에서는 순결이란 무의미하게 되며 음행과 간음은 더 이상 죄라 불려질 수 없고, 전통적이고 성경적인 성관계는 유치한 삶의 한 방편으로 인식될 뿐이다. 나아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고백하며 지켜야 하는 영적인 순결도 곰팡내가 물씬 나는 근본주의자의 낡아빠진 교리로 전락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여대언자(prophetess)라 하며 사람들을 가르치고 꾀어 음행(fornication)하게 만드는 이세벨(Jezebel)에 대해 다음과 같이 책망하신다. "내가 그녀에게 그녀의 음행을 회개할 여지를 주었으나 그녀가 회개하지 아니하였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녀를 침상에 던질 것이요, 그녀와 함께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 행실을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속에 던져 넣을 것이며 또 내가 사망으로 그녀의 자녀들을 죽이리니 그리하면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속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계2:21-23) 넷째로, 하리수 신드롬은 트랜스(trans: across, beyond, through)의 철학이 가능함을 우리에게 심어주고 있다. 앞서 언급된 한국갤럽의 '성전환에 관한 국민의식 조사' 결과 중 성전환에 대한 견해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로 해서는 안된다'가 39.5%였는 데 비해 '개인적인 사정에 따른 것으로 할 수 있다'는 51.3%로 나왔으며 또한 '성전환자를 변화된 성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견해도 전체의 53.0%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별히 이러한 견해는 연령이 어릴수록 또 고학력자일수록 두드러졌다고 하는데 이로써 우리의 미래가 어떠할 것이지 충분히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러나 땅의 기초들을 놓으시고 그 치수들을 정하시며 그 위에 측량줄을 팽팽히 치신 하나님의 창조섭리(욥38:4-6)를 거스르는(trans) 경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함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천사들이 영계의 질서를 거슬러 성육신(incarnation)한 후 사람들의 딸들과 그들의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자기들이 택한 모든 자를 아내로 삼은 결과 이 세상에는 물 심판 곧 노아의 홍수가 오게 되지 않았던가(창6:1-8).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의 질서가 걷잡을 수 없이 파괴되어 가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불 심판이 임박했음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리라.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큰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원소들이 뜨거운 열에 녹으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도 불살라지리라."(벧후3:10)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트랜스젠더(transgender)에겐 결코 소망이 없는 것일까? 신약성경의 첫 장을 읽어내려 가다 보면 성(gender)의 파격적인 전환(trans)이 눈에 들어온다. 즉 구약의 족보는 창세기 5장, 10장, 11장 등에서 확인되듯이 남성의 계보이고 또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의 총수를 성인 남자로만 계수하라고 하셨다(민26:1,2). 그런데 마태복음 1장에는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까지 40 세대가 기록되는 가운데 남성들의 족보 사이로 다섯 명의 여성이 감히 남성인양 끼어들고 있다. 즉 다말(3절), 라합(5절), 룻(5절),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6절), 그리고 마리아(16절)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계보를 설명하는 데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해서 쌍둥이를 낳았고(창38:12-30), 라합은 여리고의 창녀였고(수2:1), 룻은 롯이 자기 맏딸과 관계하여 낳은 모압(창19:36,37)의 후손 곧 모압 여인인데 과부였고(룻1:4,5),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는 밧세바로서 다윗과 간통한 여인이었고(삼하11:2-5), 마리아는 처녀인데 성령님에 의해 아이를 배었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돌로 쳐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여인이었다(신22:20,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믿음으로(히11:31)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고 감히 메시야가 오시는 중요한 통로로 사용됨을 받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트랜스젠더에게도 소망은 여전히 존재한다. 곧 '예수(Jesus)'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이름(마1:21)인 것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다면 누구든지 영생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2009-05-08 15:48:10 | 관리자
1. 들머리 2004년 2월 서울대 황우석 교수와 문신용 교수 팀이 사람의 체세포와 난자를 이용해 ‘인간배아 줄기세포’(Pluripotent Human Embryonic Stem Cell Line)를 만들어내었다는 발표가 있은 이래 ‘인간 복제’에 대한 우려와 논쟁이 날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특히 황 교수의 ‘인간배아 복제’ 성공으로 말미암아 세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소멸되는 퇴행성 질환 환자에게 줄기세포를 이식하면 손상된 세포를 정상세포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증폭되던 가운데 몇 달 전 알츠하이머병을 앓아온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과 영화 ‘슈퍼맨’의 주인공으로 말을 타다 떨어져 전신마비가 됐던 크리스토퍼 리브가 사망하자 줄기세포 연구 문제는 본격적인 정치적 이슈로도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지난 2004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였던 존 케리 상원의원은 TV 토론회에서 리브의 이름을 거론하며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연방정부의 재정지원을 제한하기로 한 부시 대통령의 결정이 파킨슨병이나 연소성 당뇨병 및 알츠하이머병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치료법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 과정을 방해하는 것이라며 신랄히 비난을 하기도 했었다. 물론 미국인들이 일단은 케리를 선택하지 않았기에 줄기세포 연구에 관한 한 가장 보수적이 되어버린 미국에서는 향후 4년간 표면적으로 인간배아 복제가 금지될 전망이지만 성인세포에서 추출한 줄기세포를 이용하는 연구나 새로운 배아줄기세포주를 이용하는 민간 지원 연구는 이 같은 제한 정책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인간 복제’를 향한 카운트 다운이 잠시라도 멈추어졌다고 볼 수 없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불원한 장래에 이루어질 것으로 충분히 예상(?)되는 ‘인간 복제’에 대해 성경적 조명을 해봄으로써 함께 이 시대를 분별하는 영적인 유익을 구해보고자 한다. 2. 생명(Life) 인간 복제를 포함한 생명 복제를 논하려면 먼저 생명에 대한 성경적 정의를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이다. 생물학에서 말하는 바와 달리 하나님께서는 일차적으로 ‘움직이는 피조물’(the moving creature) 곧 동물(動物)에서 생명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신다(창1:20,30).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창조하시면서 인간에게 생명을 주셨는데 말씀으로 동물을 창조하셨던 것과 달리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breath of life)을 그 코에 불어넣으셔서 사람이 ‘살아 있는 혼’(living soul)이 되게 하셨다(창1:26; 2:7). 그래서 아담 이후 역사상 존재하였던 모든 인간들의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게 되었다(눅3:38). 그러나 아담과 달리 그 후손들은 아담의 타락에 의해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비록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흔적은 갖고 있지만 타락한 아담의 모양과 형상에 따라 유한한 생명(life under death)을 소유하게 되었다(창9:6; 약3:9; 창5:3).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 인간을 위해 사랑과 은혜에 근거한 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곧 영적으로 죽은 인간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기쁜 뜻을 뱀(that old serpent)에게 내리신 형벌의 말을 통해 나타내보이시고 인간들로 하여금 이 구원의 기쁜 소식(gospel)을 받아들이도록 하셨다(계12:9; 창3:15).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적대감을 두리니 여자의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이하 흠정역) 이 말씀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자의 씨(seed)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 따라서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모셔들이는 자는 누구든지 ‘부활 생명’(resurrection life) 곧 ‘영원한 생명’(everlasting life)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마1:21; 요1:12; 3:16). 3. 인본주의(Humanism)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 하지 않고 자신들의 방법으로 영생을 끊임없이 추구해 왔다. 곧 복음(gospel, 天乃人)이 아니라 종교(religion, 人乃天)를 통해 ‘결코 죽지 않으려는’ 시도를 행해온 것이다(창3:4; 갈1:11-14). 오늘날 기독교와 유대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의 기원이 되고 있는 바빌론(Babylon)에서 바벨탑을 세우게 된 과정을 보면 확실히 이 인내천(人乃天)의 인본주의(humanism)는 하나님의 방법과는 정반대였음을 알 수 있다. 즉 노아의 홍수 후 사람들이 동쪽에서부터 이동하다가 시날 땅에 있는 평야를 만나 거기에 거하게 되자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온 지면에 널리 흩어짐을 면하려고 바벨이라는 도시와 탑을 세우게 되었다(창1:28; 9:1; 11:2,4,9). 아울러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돌 대신 그들의 진보된 기술로 만든 벽돌로써 도시와 탑을 세워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자 하였다(창11:3,4; 고전10:31). 그런데 이러한 바빌론의 방법론은 언어가 혼잡하게 되어 사람들이 온 땅에 흩어지면서 함께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창11:8,9; 행11:26). 그리하여 ‘하나님의 신격’(Godhead)이 ‘사람의 기술이나 고안’(art and man's device)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의식이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류에게 팽배해지게 되었다(행17:29). 그리고 21세기 생명공학의 디지털 시대를 맞아 이러한 인본주의의 종교적 방법론은 질병 치료용(therapeutic cloning)이라는 미명을 지닌 ‘인간(배아) 복제’로 대치되어 ‘결코 죽지 않으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창3:4). 이는 황우석 교수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불교의 윤회(輪廻) 사상이 나의 연구의 철학적 배경이 아닌가 싶다”고 하면서 “여성의 난자를 이용해 복제 배아를 만들고, 이것으로 다른 환자의 난치병을 완치시킨다는 것이 생명을 이어가는 윤회의 완성일 수 있다”고 주장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4. 복제(Duplication) 즉 인간 복제란 영(靈), 혼(魂), 육(肉)으로 구성된 인간에서 단순히 육(肉)만을 복제한다고 하는 개념이 아니다(살전5:23; 히4:12). 이것은 이미 살펴본 대로 너무나도 ‘종교적’이며 ‘영적’인 문제이다. 특히 같은 생명 복제이면서도 동물의 복제와 인간의 복제가 같을 수 없음은, 즉 인간 복제가 영(靈)적인 문제임은 주님께서 욥(Job)의 나중을 처음보다 더 복되게 하신 구체적 내용들에서 잘 알 수가 있다. 욥기 42장을 보면 주님께서 욥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시고 욥이 이전에 소유했던 것의 ‘두 배를 주셨다’(duplicate)고 기록되어 있는데 양은 칠천에서 만 사천 마리로, 낙타는 삼천에서 육천 마리로, 소는 오백에서 천 겨리로, 암나귀는 오백에서 천 마리로 정확히 두 배가 되었지만 아들은 일곱, 딸은 셋으로 이전과 똑같은 수였다(욥1:2,3; 42:10,12,13). 즉 동물은 영혼(soul)이 없기 때문에 육(肉)이 죽으면 끝이지만 인간은 영혼(soul)을 소유한 존재이므로 욥의 고난 중 육(肉)이 죽었던 자녀들은 그 혼(魂, soul)이 살아서 낙원(paradise)에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고난 후에 이전과 같은 수의 자녀를 주심으로써 자녀 수에 있어서도 완벽하게 ‘두 배’(duplicate)의 복을 베풀어 주셨던 것이다. 그렇다. (생물학적 측면에서 완전한 인간일 수 있는) 인간 복제는 복제양 돌리의 경우처럼 결코 단순히 육(肉)만의 복제로 그칠 수 없다. 왜냐 하면 영혼(soul)과 육체를 나눌 수 없는 ‘전인적 존재’(holistic person) 곧 ‘영혼과 몸이 같이 있는 단일체’(psychosomatic unity)로서 인간이 복제되는 것이므로 복제의 대상이 된 세포를 공여(供與)한 사람의 혼(魂, soul)과는 또 다른 혼(魂, soul)이 복제된 육(肉)에 함께 내재될 수 있기 때문이다. 5. 생명 나무(the Tree of Life) 그렇다면 인간 복제가 이루어질 때 하나님께서는 그저 ‘인간의 기술과 고안’(art and man's device)에 이끌려 복제된 인간의 육(肉)에다 영혼(soul)을 허락하실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창세기의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 하나님과 인간과의 상호 반응(interaction)을 살펴봄이 좋으리라 생각된다. “주 하나님께서 동쪽으로 에덴에 동산을 세우시고 자신이 지은 사람을 거기 두셨으며 또 주 하나님께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모든 나무를 그 땅에서 내어 자라게 하시니 그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2:8,9) 왜 하나님께서는 동산 한가운데에 이처럼 특별히 두 나무를 두셨다고 언급을 하시는 것일까? 아마도 아담과 이브가 동산 어디에 있어도 이 두 나무는 동산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인데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창조주인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차이를 이 두 나무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셨던 것이리라. 즉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선과 악의 판단도 오로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간에게 제시하고자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의 조경(造景)을 그렇게 하셨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는 인간에게 ‘자유의지’(freewill, 레22:18,21,23; 22:23; 23:38; 민15:3; 29:39; 신12:6;17; 16:10; 23:23; 대하31:14; 스1:4; 3:5; 7:13,16; 8:28; 시119:108)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반드시 ‘죽을 것’임을 선포하셨다(창2:17). 그래서 만약 아담과 이브가 말씀에 순종하여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생명 나무’에로 초청을 하셨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불순종하자 하나님께서는 ‘생명 나무’에로 접근을 금(禁)하시게 되었던 것이다(창3:22-24, 참조: the Discovery of Genesis by C. H. Kang & Ethel R. Nelson) 6. 심판(Judgment)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 아담과 이브에겐 ‘고통’(sorrow)의 삶이 시작되었으며 이 세상에는 ‘열역학 제이법칙’(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태동하게 되었다(창3:16-19). 그리고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창3:19하). 그리하여 먼저 영(靈)적으로 죽은 아담은 930세를 고통 가운데 살면서 많은 자손을 낳은 후 그 육(肉)도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즉 아담이 타락하자마자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시고 또한 구원의 방법론을 곧바로 행해보이셨지만 또한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심판’하셔서 930년(추정)의 간격을 두고 영(靈)과 육(肉)이 죽게 하셨으며 그 사이에는 고통의 순간들을 허락하셨던 것이다(창3:15,21; 고전15:45; 창5:5). 그렇다면 이제 수정란(受精卵, fertilized ovum)부터 영(靈), 혼(魂), 육(肉)을 지닌 하나의 인간이라고 간주하는 보편적 관점에서 볼 때 이미 황우석 교수에 의해 인간 복제는 시작이 된 것이고 따라서 ‘생명 나무’에로의 접근이 이루어진 것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어떠한 형태로든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 황 교수의 인간배아 복제는 착상(着床, implantation) 전의 상태로서 마치 ‘생명 나무’에서 나는 것을 따서 막 입에 넣고 있는 순간에 비유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아직은 먹어서 소화흡수를 시켰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준비된 하나님의 심판이 아직까진 유보가 된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고 난 이후 초래된 하나님의 심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기술과 고안’(art and man's device)에 의해 복제된 인간의 육(肉)에다 영혼(soul)이 허락되어서 그 복제된 인간이 선(善)과 악(惡)을 분별할 수 있게까지 될 경우 하나님께서는 방관치 아니하시고 곧바로 가시적인 심판을 행하실 것임은 자명한 이치이다(신1:39; 사7:15,16). 7. 대환난(the Great Tribulation) 그런데 앞으로 곧 다가올 단일세계정부(One World Government) 하에서 ‘인간 복제’와 같은 바이오산업은 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적그리스도는 게놈프로젝트 등을 통해 밝혀진 인간의 ‘유전 정보’(image)를 조작한 후 여기에 ‘생명’(life)을 부여하는 인간 복제 기술을 적용시켜 마치 전능자로서 사람들로부터 경배를 받고자 할 것이다(계13:15). “또 그가 그 짐승의 형상(image)에게 생명(life)을 줄 권능이 있어 그 짐승의 형상으로 하여금 말도 하게 하고 그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하고자 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다 죽이게도 하더라.”(계13:15)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심판이 곧바로 이 세상에 임할 것을 말씀하신다. “이는 그 때에 큰 환난(great tribulation)이 있을 것임이니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이 때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이후에도 없으리라. 주께서 그 날들을 짧게 하지 아니하시면 어떤 육체도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로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짧게 하시리라.”(마24:21,22) 주 예수님께서 ‘인간 복제’와 같은 악(惡)을 행하는 자들을 자신의 임재 가운데서 영존하는 파멸로 징벌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터인데 우리는 바로 그 때가 임박했음을 성경에 제시된 여러 표적들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세태들을 보면서도 깨닫게 된다(살후1:7-9; 마13:39-43; 단12:4; 나2:3,4; 마24:7,12; 딤전4:1-4; 딤후3:1-5; 약5:3; 벧후3:3,4). 그런데 대환난 기간 중 심지어는 5개월 동안 메뚜기에 의해 고통을 받더라도 사람은 죽지 않는다(계9:3-6). 아마도 역설적으로 인간 복제 기술과 같은 바이오테크놀로지의 결과로 인해서겠지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연속 속에서 차라리 죽음을 갈망한다 해도 죽을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되는 것이다. 죽음이 멈춰진 때보다 최악의 고통의 시대가 또 있을까? 이것은 마치 죄인들이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일 것이다. 8. 마무리 서울대 황우석 교수 팀의 인간배아 복제 연구가 미국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의 ‘올해 10대 연구’ 중 3위로 선정됐다. 사이언스 2004년 12월 17일자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 화성탐사 로봇의 생명탐사 업적’을 올해 최고의 연구 성과로 소개하고 ‘인도네시아에서 발견한 소형 인류 화석’에 이어 세 번째로 황 교수팀의 업적을 선정했는데 이 주목받는 세 가지 연구 모두의 기저에는 성경과 하나님을 부인하는 진화론과 인본주의가 깊이 뿌리박혀 있다. 그렇다. 비단 사이언스의 평가뿐이랴. 구원받지 못한 인간들에 의한 모든 인본주의의 행위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행해진 이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 심판에 처해지게 됨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눅6:26; 창3:6,19; 11:4-9). 이미 생명 나무에서 나는 것을 따기 시작하여 대환난의 카운트 다운에 들어간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자. 아울러 대환난 기간 중 영존하는 복음을 지닌 천사가 외치는 소리에 미리 아멘으로 화답토록 하자.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 이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들을 만드신 분께 경배하라, 하더라.”(계14:7) * 저자의 단행본 ‘성경으로 세상보기’는 ‘생명의 말씀사’에서 온라인으로도 구매할 수 있습니다.
2009-05-08 15:47:35 | 관리자
1. 들머리 2005년 3월 2일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됨으로써 조선시대 이전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우리 삶 속에 녹아 있던 호주제는 2년여의 유예기간을 거쳐 2008년 1월 1일부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 개정된 민법은 호주제 관련 규정을 삭제하는 한편 15세 미만의 양자를 입양할 경우 호적에 친생자(親生子)로 기재해 법률상 친자와 똑같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친양자제도’도 새로 도입하였고, 부부가 합의할 경우 자녀가 어머니의 성(姓)과 본(本)을 승계할 수 있게 하는 규정도 마련하였다. 그러자 이 개정 민법안이 통과된 지 이틀 만에 전북 정읍에 사는 서모씨가 우편을 통해 자녀가 어머니 성씨(姓氏)를 따를 수 있도록 한 민법 개정법률안 제781조 1항에 대한 위헌확인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는데 서씨는 “어머니 성을 따를 수 있게 한 것은 우리나라 특성상 부적절하고 성씨의 정통성과 순수성, 일괄성이 괴멸돼 위헌 소지가 다분하다”고 주장하였다. 비단 이처럼 적극적으로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한 시민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대다수의 국민들이 (그 이유는 나름대로 천양지차(天壤之差)가 있겠지만) 호주제 폐지에 대해 반대를 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의 목소리는 호주제 폐지론자들의 승리의 함성에 묻혀서 역시 호주제와 함께 페이드 아웃(fade out) 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회생(回生)할 가망이 없어 보이는 이 호주제가 폐지됨으로 인해 우리에겐 사회적으로 어떠한 문제가 야기될 것인지, 또한 어떠한 영적(靈的)인 침해(侵害)가 초래될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2. 성본(姓本)의 파괴 이번에 호주제를 폐지하도록 민법개정이 이루어진 것은 지난 2월 3일 헌재의 헌법불합치 판결(憲法不合致 判決)이 선행되었기 때문인데 당시 윤영철 재판장이 결정문 주문(主文)에서 밝힌 바대로,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은 민법 규정은 다음과 같은 ‘3개 조항’에 한정된 것이었다. 제778조(호주의 정의) : “일가(一家)의 계통을 계승한 자, 분가(分家)한 자 또는 일가를 창립(創立)하거나 부흥(復興)한 자는 호주가 된다.” 제781조 1항 후단 : “자(子)는 부가(父家)에 입적(入籍)한다.” 제826조 3항(부부간의 의무) : “처(妻)는 부(夫)의 가에 입적한다.” 즉 부성원칙을 규정한 781조 1항 전단부분<자(子)는 부(父)의 성(姓)과 본(本)을 따르고>은 헌재에서는 심의한 바가 없었다. 그렇지만 헌재의 판결이 마치 그동안 호주제 폐지론자들이 요구한 모든 주장에 손을 들어준 것처럼 호도되어 결국은 부성원칙의 파괴가 가능한 개정 민법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사실 1989년 가족법 개정시에 “얻어낼 것은 다 얻어내었다”고 스스로 말했던 여성계가 그 이후 다시 호주제 폐지를 들고 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계성씨원칙’이 씨줄이 되고 세대를 연결시켜 주는 최소단위로서의 공동체인 ‘가(家)’라는 개념이 날줄이 되어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가족제도’는 이제 사라지게 된 것이다. 덧붙여 여성계의 주장대로 일인일적제(一人一籍制)가 도입이 될 터인데 그렇게 된다면 성본(姓本) 파괴와 함께 가족(家族)의 개념도 근본적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가족의 해체(解體) 그래서 앞으로는 점점 해체하려고 해도 해체할 가족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호적에서 가족 구성원의 범위와 그 구성원간의 관계를 표시하기 위한 기준자(基準者, index person)로서 호주를 두었던 것인데 이제 일인일적제상에서 호주가 제거됨으로 ‘공식적으로’ 규정된 가족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일인일적제상에서 가족이라는 집단은 국민들 개개인의 판단에 맡겨지는 매우 가변적이고 불안정한 ‘비공식적 집단’으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인일적제를 이미 시행하고 있는 구미에서와 달리 가족성(family name)도 강제되지 않는 우리 상황에서는 더욱 가족해체의 속도가 빨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가족의 개념이 변해도 부부관계는 당연히 법적 규제(중혼 금지, 간통죄, 위자료청구 등)가 따르는 ‘공식적인’ 관계로 남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미 가족관계가 공식적인 규제로부터 탈피된 상황에서 스스로 부부관계라는 강제된 관계를 기피하는 풍조가 생기게 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이치이다. 아울러 부모로서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하고 교육시킬 책임과 의무를 계속 가져야 하는 ‘공식적인’ 부모 자식관계도 부담이 되어 출산과 육아를 기피하게 되는 경향이 증가하게 될 것도 너무도 확실한 사안이다. 이것은 이미 일인일적제를 실시한 서구국가들이 그대로 답습한 과정이다. 결혼의 기피, 안정된 가정의 부재, 출산의 기피, 인구의 감소, 인구의 노령화, 경제활동인구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타파하고자 국가에서는 출산장려책을 펼치겠지만 현실적으로 만족할 만큼의 결과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4. 불평등(不平等)의 사회 따라서 다음 세대들은 증가된 피부양인구로 인해 상대적으로 경제적 부담을 느끼며 불평등한 사회의 구조를 탓하게 될 것이다. 사실 호주제 폐지에 앞장섰던 일부 여성 단체에서는 여성 스스로를 노예, 짐승, 가축 등으로 묘사하면서까지 양성평등(兩性平等)이라는 기치를 높이 들고 투쟁한 결과 그 목적을 달성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성(性)에 관하여서도 진정한 평등의 사회는 도래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남성과 여성은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유전적, 생리적, 정서적, 신체적 및 사회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양성평등을 이 시대의 절대적 가치로 인식하여 호주제 폐지와 함께 추진하였던 군가산점제 폐지, 성매매특별법 등을 통해 역차별을 받게 된 이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직접 목도하였기 때문이다. 앞으로 양성평등의 질서아래 양계성(兩系性)을 쓰면 마치 평등세상이 바로 오는 것인 양 호도하는 이들의 주장대로 될 경우 혈통의 혼란과 근친혼의 위험이 높아져 우생학적인 문제라는 또 하나의 불평등이 궁극적으로 야기될 것이다. 그리고 호주제에서와 달리 일인일적제에서는 가족의 범주 안에 그동안 불평등한 대우를 받았던 동성(同性, homosexual)가족이 포함될 것이라고 하는데 만약 그렇게 될 경우 결혼과 출산을 통해 사회의 가장 중요한 인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책임과 의무를 다해오고 있는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에게는 불평등한 사회가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5. 역사왜곡(歷史歪曲) 아울러 호주제 폐지로 인해 그간 호폐론자들이 주장해왔던 “호주제는 일제 식민지 시대의 잔재일 뿐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이 아니다.”는 왜곡된 역사인식이 기정사실화 될 것이다. 그러나 호주제도는 우리의 오랜 관습으로부터 제도화, 명문화되어 온 것으로서 성종조의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이미 완비되어 있었던 것이고, 결코 일본제국주의의 잔재가 아니다. 일본정부가 우리나라를 통치하기 위해 오늘날의 민법에 해당하는 조선민사령을 제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조선민사령 제11조에는 ‘친족 상속에 대해서는 조선의 관습에 따른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것은 친족상속법 즉 가족법의 영역인 호주제도는 일제가 들여온 것이 아닌, 예전부터 우리나라에 존재했던 가족제도의 형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호주(戶主)라는 용어는 15세기 이전엔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주호(主戶)라는 용어와 더불어 자주 등장하며, 조선후기부터는 점차 사용빈도가 줄어들었으나 호수(戶數) 등의 용어와도 함께 간간이 사용되어 왔다(김건태, 조선후기 호의 구조와 호정운영 -단성호적을 중심으로, <단성호적대장연구>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2.6). 또한 조선후기 들어 가(家)의 범위와 구성이 분명한 제도로 정착되고, 관혼상제 등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가의 구성과 존속의 관념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호주 상속의 원리도 종법(宗法)에 상응하여 이루어지는 등 조선조 호주제도가 이미 종법적 가계 계승의 원리를 담고 있었다(이재룡, 호주제도, 그 역사적?법철학적 당부(當否), <오늘의 동양사상> 제10호, 예문동양사상연구원, 2004.3.1). 그리하여 일제 시대에 들어와 이러한 조선의 관습법이 법제화되어 부계적 성격을 띤 호적제가 시작된 것이다. 6. 과거로의 회귀(回歸) 그러함에도 여성부나 호주제 폐지를 주장하는 일부 여성단체에서는 역사를 왜곡하여 우리의 전통적 호주제 자체가 마치 일제의 창조물인양 허위 선전함으로써 국민의 반일(反日)감정을 자극시켜 결국 소기의 목적을 성취하고야 말았다. 오히려 호주제 폐지로 인해 자녀의 성을 합의하에 마음대로 부계, 모계로 결정하거나 성씨를 변경하게 된 것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일본의 제도였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만약 호주제 폐지론자들의 주장처럼 우리나라의 호주제가 일제에 의해 창안된 것이라고 했을 때 호주제 폐지론자들이라면 말뜻 그대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일본강점 이전 조선시대의 철저한 부계혈통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어찌되었거나 이제 호주제 폐지로 더욱 입지를 굳힌 ‘일제청산’ 또는 ‘친일청산’이라는 도구가 정치,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사용될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방법론이 얼마나 거짓되고 위험한 것인가를 직시하여야 한다. 일례로 일제청산을 훌륭히 해내었다고 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경우를 보자. 이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민주주의가 아니라 수령과 지도자동지에 의한 전제주의의 나라이며 인민공화국이 아니라 김씨왕조에 의한 봉건국가이다. 즉 1910년 일제강점 이전의 전제주의 봉건국가로 완벽하게 회귀(回歸)한 것이 일제청산인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호주제 폐지와 함께 새롭게 세력을 얻은 이 일제(친일)청산이란 민족적 아젠다로 인해 우리의 의식(意識)의 지평(地平)이 우리 삶의 곳곳에서 과거로 회귀하게 되는 암울한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7. 페미니즘(feminism) 그런데 과거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호주제 폐지와 같은 사건이 이미 인류의 태동과 함께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창3:1-7). “이때에 뱀은 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들의 어떤 짐승보다 간교(奸巧)하더라. …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께서 아시느니라, 하니 여자가 본즉 그 나무가 먹음직도 하고 눈으로 보기에도 좋으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이므로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자기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으니라. 이에 이 두 사람의 눈이 열리매 그들이 자기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고는 무화과나무 잎을 함께 엮어 자기들을 위해 앞치마를 만들었더라.”(창3:1,4-7, 이하 흠정역) 즉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아담(창2:16,17)이 아니라 아담의 협력자(an help meet for him, 창2:18)이며 아담보다 더 약한 그릇(the weaker vessel, 벧전3:7)인 이브에게 다가가 ‘그녀가 마치 억압된 상태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도록’(창3:1하,5) 미혹하여 하나님의 질서(창2:16,17)가 파괴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완전한 유토피아(福) 곧 기존의 질서(창2:16,17)가 파괴되자 이 세상에는 무질서도(entropy)가 증가하는 ‘열역학 제2법칙’이 생기게 되었다(창3:16-19). 그렇다. 하나님을 대항하였던 이러한 사탄의 방법론은 역사 이래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적용되어 왔는데 특별히 페미니즘(feminism)이란 틀을 통해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효과적으로 차단해오고 있다. 다시 말하면 페미니즘을 부추기는 방법을 사용하여 이브의 실패를 이끌어내는 데 재미를 본 사탄은 이브의 모든 후손들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여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He is our God, 수24:18; 시95:7)이신 그분(He)을 대항하도록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8. 여신(女神, goddess) 특별히 노아의 홍수 후 니므롯(Nimrod, 창10:8-14)에 의해 최초로 바빌론 왕국이 건설되었을 때 페미니즘은 당대의 절세미인이면서도 가장 음란하고 사악한 여자인 세미라미스(Semiramis)에 의해 만개되어 우주의 질서를 또 다시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즉 그녀는 자기 아들 니므롯과 결혼하여 바빌론 군주의 어미이자 왕후가 되었는데 니므롯이 셈(Shem, 창10:1,21)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자 자신의 입지가 위태해짐을 느낀 그녀는 재빨리 자기가 낳은 아들 담무스(Tammuz, ‘생명의 아들’, 겔8:14)를 죽은 니므롯이 환생한 것이라고 전파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이 아들이 초자연적으로 잉태되었으며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약속된 씨(seed, 구세주)라고 주장하면서 담무스를 태양신(sun-god)으로 신격화하여 ‘바알’(Baal, 주인)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하루아침에 ‘신의 어머니’가 된 그녀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바알티’(Baalti, 여주인) 혹은 ‘레아’(Rhea, 위대한 ‘어머니’ 여신)라 하여 ‘월신’(moon-god) 곧 ‘하늘의 여왕’(queen of heaven, 렘7:18; 44:17-19,25)으로 숭배하게 하면서 하나님(He is God, 신4:35,39; 7:9; 수2:11; 시10:3; 살후2:4)이신 그분(He)을 본격적으로 대적하였다. 이집트에서 세미라미스는 ‘이시스’(Isis)로, 니므롯은 아기 ‘호루스’(Horus)이자 어른이 된 ‘오시리스’(Osiris)로 둔갑했다. 그리고 이 바빌론의 여왕인 세미라미스는 각 민족의 역사 가운데 아프로디테(Aphrodite), 비너스(Venus), 아스타르테(Astarte), 아스다롯(Ashtaroth, 삿2:13), 다이아나(Diana, 행19:24,27,28,34,35) 등 다양한 여신(女神, goddess)의 이름으로 퍼져나갔다. 그래서 A.D.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공인이라는 사탄의 음모가 있었을 때 이 ‘세미라미스와 니므롯(담무스)’은 로마 교회 안으로 들어와 ‘마리아와 아기 예수’로 재포장이 되었다. 그리고 A.D. 431년에 사탄은 에베소공회를 통해 피조물에 불과한 마리아에게 창조주의 어미가 되는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라는 신성모독의 칭호를 씌웠다. 아울러 오리겐 이후로 떼오토코스는 헬라의 교부들에 의해 사용되어 ‘처녀’(동정녀, the Virgin)로 불려졌다. 즉 ‘위대한 여신 다이아나’(the great goddess Diana, 행19:24,27,28,34,35)에 대한 에베소 사람들의 열정과 이들에 대한 바울의 권유가 있은 지 400년이 지난 후, 에베소 공회는 마리아로 둔갑한 이 음녀(goddess)에게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가증한 칭호를 선사하게 되었고 이후 이 칭호는 카톨릭의 핵심 교리로까지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9. 성경 속 여성지도자(女性指導者) 이처럼 호주제 폐지로부터 여신운동(女神運動, goddess movement)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페미니즘은 최근 들어 여성목사 안수를 통해 우리 기독교계에까지 파고들어 왔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말씀한다. “너희의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잠잠할지니 이는 주께서 그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고 또 율법도 말하는 바와 같이 여자들은 순종하도록 명령을 받았음이라. 만일 여자들이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이는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이 수치스런 일이기 때문이니라.”(고전14:34,35) “여자는 온전히 순종하며 조용히 배울지니라. 오직 나는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다만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그 뒤에 이브가 지음을 받았으며 또한 아담이 속지 아니하고 여자가 속아 범죄 가운데 있었음이라.”(딤전2:11-14)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드보라(Deborah, 삿4:4-9)나 빌립의 네 딸(행21:8,9)의 경우를 들면서 여성목사 안수를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성경의 문맥을 무시한 주장일 뿐이다. 즉 드보라의 경우는 영적으로 배도한 시기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남자들에게서 영적 권위를 제거’(암2:14-16)하셨던 결과로 된 일이며 빌립의 네 딸의 경우도 보면 바울의 일행이 그들의 집에 머물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른 도시로부터 한 남자(Agabus)를 보내셔서 대언을 하게 하실 정도로 그들의 영적 권위를 허락하지 않으셨던 것이다(행21:10,11).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34절에서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잠잠할 것’을 주문하고 나서는 이어서 이 말씀이 ‘주님의 명령’인 것을 확실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고전14:37). 10. 성경의 권위(權威) 이와 같이 성경은 일관되게 남성에 대한 여성의 영적 권위를 불허하고 있지만 페미니즘의 반성경적인 시류에 편승하는 신학자들은 고등비평이라는 인본주의의 칼을 들고서 그들이 싫어하는 성경구절들을 잘라내는 작업을 서슴지 않고 있다. 가족의 기준자(基準者, index person)인 호주를 제거했던 것처럼 그들은 우리 삶의 기준서(基準書, final authority)인 성경을 제멋대로 난도질하여 우리 삶의 무질서도(entropy)가 날로 증가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66권의 신구약 책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이며 완전한 축자 영감으로 기록되어 무오하며(딤후3:16,17; 벧후1:21; 살전2:13; 요17:17) 창조, 과학, 지리학, 연대학, 그리고 역사학적인 측면에서도 전혀 오류가 없는 진리의 말씀이다. 성경에 따르면 ‘영감 과정’ 즉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시는 과정’은 인간 저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요, 그들이 적은 기록에 있다(딤후3:16,17; 고전2:13). 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로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벧후1:21; 행1:16) 기록하였으므로 이 기록은 초자연적이고 완전하고 무오하며 축어적으로 영감된 말씀이 되었다. 이런 사례는 지금까지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 어떤 기록에서도 발견될 수 없을 것이다(딤후3:16,17). 그리고 성경내의 모든 기록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및 그분의 초림과 재림에 맞추어져 있다. 또한 모든 성경은 우리의 실생활의 지침이 되며(막12:26,36; 딤후3:16,17),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되는 일에 구심점 역할을 하고(요17:17), 사람의 온갖 행실과 신조와 견해들을 시험할 최종적인 표준이 된다(고후5:10; 계20:12). 또한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자신의 말씀(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로 주신 원본 성경)을 순수하게 보존(시12:6,7; 78:1-8; 119:89,111,152,160; 사30:8; 40:6-8; 전3:14; 마4:4; 5:17,18; 24:35; 28:20; 요10:35; 골1:17; 벧전1:23-25; 요이2 등등)하셔서 모든 세대에 전해지도록 하셨다. 11. 독생자(獨生子, the only begotten Son) 그래서 120년 전 우리나라에도 성경말씀이 전해져서 이후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고 또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요1:12; 롬8:15; 갈4:6; 엡5:23-32; 계21:9). 그런데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까지 42세대가 모두 남성(男性)들로 이어지고 있으며(마1:1-17) 또한 하나님 아버지(父)께서는 친히 아들(子) 예수님을 낳으신 것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요1:14,18; 3:16,18; 행13:33; 히1:5; 5:5; 요일4:9).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과 동시에 선포한 원형복음(原型福音, 창3:15)에 따라 메시아의 혈통을 친히 보존하시며 또한 독생자(獨生子, the only begotten Son) 예수님을 메시아로 친히 이 땅에 보내주시는 하나님의 신묘막측(神妙莫測)한 마스터플랜이다(요1:14,18; 3:16,18; 요일4:9). 그렇다면 이것은 이번에 호주제 폐지 전의 민법 제781조 1항 곧 “자(子)는 부(父)의 성(姓)과 본(本)을 따르고 자(子)는 부가(父家)에 입적(入籍)한다.”라는 관점으로 볼 때 더욱 이해가 잘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어린양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우리가 영원의 시간을 보낼 때에 우리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his name)이 주어지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엡5:23-32; 계21:9; 22:4). 그렇다면 이것 또한 호주제 폐지 전의 민법 제826조 3항 곧 “처(妻)는 부(夫)의 가에 입적한다.”는 관점으로 볼 때 더욱 쉽게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2. 마무리 1950년 이스라엘 국회에서 통과되어 그 후 개정된 ‘귀환법’을 보면 이스라엘은 이제 ‘모계사회’이다. 즉 성은 아버지의 성을 따르지만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는다. 성경과 달리 아버지가 유대인일지라도 엄마가 이방인이면 그는 유대인이 아니다. 반대로 아버지가 이방인일지라도 엄마가 유대인이면 그 자녀는 아무런 문제없이 유대인이다. 정말 어느 때보다도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워야 할 시점이다(마24:32,33). 인류 역사의 바로미터인 이스라엘이 이러할진대 호주제가 폐지되는 것이나 ‘다빈치 코드’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베스트셀러로 등장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 따라서 이처럼 페미니즘의 파고가 지구촌 곳곳에서 날로 높아져가는 이 시간, 우리는 인간을 미혹하였던 옛 뱀의 방법론 곧 범신론(汎神論,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리라, 창3:5), 윤회론(輪回論, 너희가 정녕 죽지 아니하리라, 창3:4), 상대론(相對論, 너희가 선악을 알리라, 창3:5), 밀교주의(密敎主義, 너희의 눈이 밝아지리라, 창3:5) 등이 또 어떻게 새롭게 포장이 되어 우리에게 접근해오는지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어라. 너의 대적(對敵)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그런즉 이와 같이 너희가 이 모든 일을 볼 때에 그때가 가까이 곧 문들 앞에 이른 줄을 아느니라.”(마24:33) * 저자의 단행본 ‘성경으로 세상보기’는 ‘생명의 말씀사’에서 온라인으로도 구매할 수 있습니다.
2009-05-08 15:47:02 | 관리자
1. 들머리 웰빙의 열풍이 불고 있다. 수많은 문화적 컨셉 중에서 아마도 요즈음 그 주가가 가장 급상승한 것이 ‘웰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웰빙 와인, 웰빙 농산품, 웰빙 화장품, 웰빙 가전제품, 웰빙 아파트 등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말이 되어버렸고 웰빙의 대표적인 코드인 요가나 명상도 크게 유행하고 있다. 또 서울의 강남에는 상류층의 웰빙을 위하여 스파와 경락마사지, 발마사지, 피트니스 센터가 성업 중이며 보디라인 및 체형관리 등도 붐을 이루고 있는데 먹거리와 마사지, 체형관리 등이 포함된 ‘웰빙 패키지’의 경우 80만 원에 이르는 상품까지 나와 있을 정도이다. 이처럼 최근 들어 어느 틈엔가 우리 삶 곳곳에 깊이 확산되어버린 ‘웰빙’은 말 그대로 건강한(well, 안락한ㆍ만족한) 인생(being)을 살자는 뜻으로서 쉽게 생각하면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인데 무엇보다도 건강과 관계된 모든 것이 다 웰빙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이미 1949년에 설립된 세계보건기구(WHO)의 창립 헌장에서 건강에 대한 정의가 ‘웰빙’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즉 WHO에서는 질병에만 관심을 갖고 있던 시절에 곧 질병이 없으면 건강하다고 하는 초기 개념밖에 없던 시절에 ‘건강이란 단지 질병이 없거나 쇠약함이 없는 상태뿐만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사회적 안녕(well-being)까지를 포함하는 완전한 상태’(Health is a complete state of physical, mental and social well-being not merely absence of disease or infirmity.)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1998년에는 WHO 집행이사회가 건강의 정의에 ‘영적(靈的, spiritual) 요소’를 추가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건강이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웰빙’(spiritual well-being)인 상태’라고 정의하는 것이 이제 보편적이며 세계적인 기준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맞고 있는 웰빙의 열풍을 논할 때 그 영적인 면을 간과한다면 웰빙의 궁극적인 실체는 정확히 드러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웰빙으로 인류에게 다가왔던 몇몇 주요한 영적 사건들을 역사적 순서에 따라 고찰하면서 함께 이 시대를 진단해보도록 하겠다. 2. 옛 뱀(that Old Serpent, 계12:9; 20:2)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창조의 클라이막스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창1:27). 아울러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다산(多産)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다(창1:28).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 ‘매우 좋았다(it was very good)’고 말씀하셨다(창1:31). 즉 하나님께서는 엿새간의 창조를 통해 완전한 웰빙(well-being)의 상태를 아담과 이브에게 허락해주셨다. 그런데 뱀(Satan)은 이브에게 다가와 에덴 동산 한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결코 죽지 아니할 뿐더러 눈이 열리고, 신들과 같이 되며, 또한 선악을 알게 된다고 속삭였다(창3:1-5). 즉 뱀은 하나님께서 이미 마련해주신 기존의 절대적인 웰빙을 부정하면서 이전에 몰랐던 ‘새로운 웰빙의 시대’(New Age of well-being)가 올 수 있다고 이브를 미혹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브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눈으로 보기에도 좋으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이므로 그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 아담에게도 주어 부부가 함께 하나님이 금하신 열매를 먹게 되었다(창3:6). 그러자 이브에게는 고통과 수태가 크게 더하여졌고 아담은 평생토록 고통 중에 땅의 소산을 먹게 되었으며 땅도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게 되었고 결국 아담과 이브와 그 후손들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창3:16-19).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인간을 내보내신 후 이 세상에 생명나무가 존재하는 동안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cherubims)과 사방으로 도는 불타는 칼을 두어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3:24). 이처럼 인류역사상 최초로 시도된 인본주의 웰빙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새 시대는 끔찍한 저주 그 자체일 뿐이었다. 그러나 인간을 미혹하였던 옛 뱀의 방법론 곧 범신론(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리라, 창3:5), 윤회론(너희가 정녕 죽지 아니하리라, 창3:4), 상대론(너희가 선악을 알리라, 창3:5), 밀교주의(너희의 눈이 밝아지리라, 창3:5) 등 ‘새 시대’(New Age)를 열어준다고 하는 교리는 인류 역사의 각 시대마다 변하지 않고 웰빙의 새 시대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계속해서 사용되어져 왔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나 있으며 구원받지 못한 인간이 추구하는 웰빙이란 항상 죄와 불의의 길로 향할 뿐이기 때문이었다(약1:15; 롬3:10-18). 3. 실낙원(失樂園, Paradise Lost)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아담의 장남인 가인은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이란 도시를 세웠다(창4:17).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후손들이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두사엘을 낳았고 므두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다른 하나의 이름은 실라더라.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는 자들과 가축을 치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동생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하프와 오르간을 다루는 모든 자들의 조상이 되었더라. 실라도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놋과 쇠로 된 것을 만드는 자들을 가르치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더라.”(창4:18-22, 이하 흠정역) 가인의 후손들이 급속도로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되자 도시가 생겼고 건축, 음악, 미술, 금속 등의 문명과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가인부터 시작하여 여섯 번째 세대인 라멕(Lamech)은 ‘정복자’란 뜻을 갖고 있는데 역사상 최초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부일처(一夫一妻)를 거슬린 자이다. 아울러 두 부인과 딸의 이름들(Adah = 쾌락, 장식; Zillah = 그늘; Naamah = 귀여움)에서 유추해 보건대 라멕의 문화는 육적이며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즉 실낙원(失樂園)의 불행(ill-being)을 만회해보려고 인간들이 추구하였던 웰빙(well-being)은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더욱 멀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사람들이 지면에 번성하기 시작하면서 사람의 사악함이 땅에서 커지고 또 그 마음에서 생각하여 상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임을 하나님께서 보시게 되었다(창6:1,5). 아울러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웰빙’을 추구하던 그 때에 땅도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폭력이 땅에 가득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홍수로써 인류를 땅과 함께 멸하게 되신 것이었다(마24:38; 눅17:27; 창6:11-13). 4. 노아의 홍수(Noah's Flood) 노아의 홍수로 말미암아 지구의 환경이 사람들이 살기에 더욱 나빠진(ill-being, 창8:22) 가운데 시간이 흘러 사람들은 동방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이 동쪽에서부터 이동하다가 시날 땅에 있는 평야를 만나 거기 거하니라.”(창11:2) 바로 이 비옥한 메소포타미아 땅에 사람들이 바빌론 도시를 세웠고 야수로부터 그들의 안전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참조: 출23:29,30) 강력한 자 니므롯(Nimrod)을 지도자로 삼게 되었다(창10:8,9). 즉 니므롯은 사람들에게 홍수로 인해 초래된 갖가지 불행(ill-being)을 극복하고 그들의 웰빙(well-being, 안녕)을 보장해준다며 역사 이래 처음으로 자신의 왕국 곧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는 인본주의 왕국인 바빌론 왕국을 세우게 된 것이다(창10:10; 11:4). 그런데 알렉산더 히슬롭(Alexander Hislop) 등에 의하면 본래 사냥꾼(창10:9)인 니므롯이 천하를 장악한 후에 제일 먼저 했던 일은 백성들의 기억 속에서 주 하나님을 없애버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신앙의 자유를 선포하고 새로운 신화들을 만들어서 보급하였다. 즉 성경 전체를 대표하고 진리의 근본이 되며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근원인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창1:1)는 말씀을 없애버리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모든 일에 ‘시작’과 ‘끝’이 있다는 (곧 성경의 뼈대인) ‘창조론’과 ‘종말론’을 없애기 위해 니므롯의 신분은 홍수 이전의 인물인 가인의 환생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가인을 아담의 후손이라고 하면 그 위에서 다시 하나님과 만나게 되므로 창세기의 이야기에 ‘태양의 신’을 삽입하고 그 빛의 신(Lucifer)이 이브와 동침해서 낳은 아들이 가인이라고 꾸미게 되었다. 아울러 그 다음 단계로 ‘천지가 늘 그대로 있다’고 하는 또 다른 윤회설의 기반도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힌두교와 불교의 바탕이 되었고 다윈의 진화론을 만들어낸 씨앗이 되었다. 즉 환생설이란 토대 위에 단일론과 범신론 등이 혼합되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새 시대 운동’(New Age Movement)은 니므롯의 시대에 들어 비로소 체계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사람들은 바빌론의 왕 니므롯이 ‘웰빙’으로 포장해 놓은 이러한 거짓말에 속아서 살아간다. 5. 국가교회(National Church) 초기 기독교는 로마제국 내에 파고 들어온 이러한 바빌론 이교주의에 직면하게 되었다(살후2:3,7; 딤전4:2). 순수한 신앙을 가진 많은 그리스도인이 바빌론의 관습과 새 시대(New Age)의 교리들을 거부하여 박해를 받고 순교를 당했다. 그러나 A.D. 313년 고난(ill-being) 가운데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웰빙(well-being)의 새로운 시대(new age)가 열려지는 듯 하였다. 즉 콘스탄틴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어 누구든 자유롭게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주님으로 고백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기독교가 국가교회로 전락하면서 이교주의와 많은 타협들이 이루어져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거룩하여지기보다는 이 세상 제도의 한 부분이 되어갔다. 즉 A.D. 313 년 이후 기독교 안에 들어온 이교도들은 콘스탄틴 황제의 허락하에 로마의 운송수단을 이용하여 그 당시 이교도들의 중심적인 순례지였던 이집트에 있는 ‘제왕(諸王)들의 무덤의 계곡’을 순례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틴 가문의 전통적인 예배는 불멸의 태양신(Sol Invictus/ the Invincible Sun God) 숭배로서, 콘스탄틴 황제는 여전히 태양신 숭배자였다. 성경 교리나 예배의식 같은 것은 콘스탄틴에게는 아무런 흥밋거리가 되지 않았다. A.D. 325년 리시니우스(Licinius)를 패배시킨 후에 동방의 영토에 사는 국민들에게 보낸 공문에 의하면 기독교는 단순히 일상생활을 규정한 법률이었다. 콘스탄틴은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공적으로 선포한 적도 없었다.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그는 막시밀리안 황제의 딸이며 그의 두 번째 왕비였던 파우스타를 처형하였고, 그의 세 아들은 권력쟁탈전을 벌여 막내는 맏형을 죽였고 나중에는 둘째만 남게 되었다.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이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까닭은 그가 기독교를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믿었던 것을 기독교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이데올로기의 위력’을 나타내고 있다. 즉 영적인 웰빙(well-being)을 표방하는 국가교회의 방법으로 이교주의가 교묘하게 기독교와 혼합했기 때문에 바빌론의 영향은 ‘바빌론 신비종교’로 숨겨지게 되었으며 동시에 국가교회는 더욱 영적으로 타락(ill-being)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6. 세계대전(World Wars) 양차 세계대전이란 인류역사상 가장 끔찍한 시기를 보내고 난 후 1948년, 하나님의 선민이 말세에 옛 땅에 심겨지리란 예언대로 이스라엘이 독립하였다(겔38:8). 나찌(Nazi)에 의해 대학살이 감행되고 있을 때만 해도 이들이 나라를 세우는 것은 고사하고 살아남을 가능성조차 없어 보였지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 같은 이스라엘은 다시 역사의 중심에 자리잡기 시작하였다(마24:32; 막13:28). 그리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전후하여 세계대전이란 악몽(ill-being)을 떨쳐버리고 온 인류의 웰빙(well-being)을 추구하기 위해 세 가지 역사적인 대 사건의 씨가 세상에 뿌려지게 되었다. 첫째, 종교적 웰빙을 위하여 (인류역사상 가장 무서운 단일종교가 될) 에큐메니즘 종교의 모체의 하나인 세계교회협의회(WCC)가 1948년 8월 23일 화란의 암스테르담에서 그 뿌리를 내렸다. 둘째, 정치적 웰빙을 위하여 (적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세계단일정부 구성을 도울) 국제연맹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결성되어 1946년 국제연합(UN)으로 업무가 이양되었고, ‘새 세계 질서’(New World Order) 구호 아래 국제연합이 세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셋째, 로마 교황 비오 12세는 유럽을 제3의 세력으로 간주하여 통일유럽을 이루기 위해 1948년 4월 제수이트를 동원하여 유럽을 구하기 위한 ‘성(聖)십자군’ 안에 뭉칠 것을 호소하였다. 이 계획은 1946년 9월 이후로 ‘합스부르크’가(家)의 본산지인 스위스의 중부 루째른 호반의 소읍 헤르텐슈타인(Hertenstein)에서 추진되어, 1948년 5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유럽심의회’에서 정식 통과되어 유럽의 무대에 올려졌다. 1958년 브뤼셀에서 ‘세계만국박람회’가 개최되었을 때 경제적 웰빙을 위한 유럽공동체(EC)의 회원국은 6개국에 불과했지만 이제 정치적 웰빙까지도 추구하는 유럽연합(EU)회원국은 25개국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이스라엘 독립을 즈음하여 나오기 시작한 컴퓨터가 이 엄청난 유럽통합 작업을 가속화시켜왔는데 이제는 전세계인의 웰빙(well-being)을 위하여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컴퓨터가 인간의 두뇌로서는 불가능한 작업들을 다 처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머지않아 적그리스도가 통치하고 경배받는 단일세계정부와 단일세계종교가 이루어질 터인데 바로 그때 갑작스런 파멸(ill-being)이 그들 위에 임하게 될 것이다(살전5:1-3; 단2:31-35,43-45). 7. 마무리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well-being)이다. 그래서 웰빙의 열풍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울러 웰빙의 추구는 인류의 인간성 회복과 참된 평화와 참된 행복이 실현되는 새로운 시대를 이룩하려는 뉴에이지(New Age) 사상과 필연적으로 일맥상통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뉴에이저들은 전쟁, 식량, 기근, 에너지, 인구, 핵무기, 환경 등과 같은 세계 공통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로 된 세계정부’가 있어야 된다고 주장하고 인종과 국경을 무너뜨려 지구촌 공동체를 건설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뉴에이저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계단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또 이를 위하여 세계 경제를 하나로 묶는 ‘단일경제체제’와 세계의 정신과 이념을 하나로 묶는 ‘단일종교체제’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 사탄은 지금 자신의 시대(New Age)를 열기 위해 웰빙이라는 새로운 옷을 입고 어느새 우리 곁에 다정히 다가와 미소짓고 있다(고후11:14). 그러나 이 웰빙으로 새롭게 표현되는 뉴에이지 운동의 궁극적 목표가 이 땅에서는 예수없는(without Jesus) 유토피아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죽음 이후에는 영혼을 지옥(地獄)으로 보내는 것임을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 웰빙과 뉴에이지의 커넥션이 날로 증대되는 이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어라. 너의 대적(對敵)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이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대언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이적을 보여 할 수만 있으면 그 택하신 자들까지도 속일 것임이라.”(마24:24) “그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니 그 까닭은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angel of light)로 가장하기 때문이라.”(고후11:14) “그러므로 너희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가까이 오시리라. 죄인들아, 너희 손을 정결하게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순결하게 하라.”(약4:7-8) * 저자의 단행본 ‘성경으로 세상보기’는 ‘생명의 말씀사’에서 온라인으로도 구매할 수 있습니다.
2009-05-08 15:46:31 | 관리자
1. 매트릭스로 들어가며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올해 초 “2003년은 매트릭스의 해가 될 것”이라고 장담했던 대로 6월 ‘매트릭스2: 리로디드(Reloaded)’의 개봉에 이어 11월 5일 전세계에서 ‘매트릭스3: 레볼루션(Matrix Revolution)’이 동시 개봉되었다. ‘시작이 있는 모든 것엔 끝이 있다’라는 거창한 명제를 태그라인으로 달고 개봉된 이 ‘매트릭스3’는 우리나라에서는 11월 5일 밤 11시에 전국 364관(100,250석)에서 개봉되어 역대 최다 스크린수와 최다 좌석수를 기록하였다. 이로써 기존의 액션 영화를 넘어서는 철학적인 주제와 이전 어느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독창적인 액션 씬, 특히 날아오는 총알을 낙엽처럼 떨어뜨리는 장면으로 1999년 ‘매트릭스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SF 블록버스터 ‘매트릭스’가 4년만에 완결을 보게 되었다. 그 동안 이 매트릭스 시리즈와 관련된 수많은 진기록과 다양한 의견들이 있어 왔는데 특히 성경과 연계된 여러 요소들이 이 영화의 키워드로 되어 있고 또한 영화의 메시지가 기독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일반적인 평가가 있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정말 매트릭스는 2003년도를 매트릭스의 해로 기억하며 또 한 해를 맞이하고자 할 전세계인들에게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그대로 전달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간략한 스토리 소개와 함께 매트릭스 속에 등장하는 성경적 용어들을 먼저 살펴보고 이어서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한 워쇼스키 형제가 의도했던 메시지를 찾아보고자 한다. 2. 매트릭스(Matrix) 서기 2199년. 인공지능을 가진 컴퓨터(AI: Artificial Intelligence)가 지배하는 세계. 인간들은 태어나자마자 AI가 만들어낸 인공 자궁 안에 갇혀 AI의 생명 연장을 위한 에너지로 사용되고 있으며 또 AI에 의해 뇌세포에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을 입력 당하고 있다. 인간들은 매트릭스의 프로그램에 따라 평생 1999년의 가상현실을 살아간다. 매트릭스 밖. 가상현실의 꿈에서 깨어난 인간들은 광케이블을 통해 매트릭스에 침투하고 매트릭스 프로그램을 응용해 자신들의 뇌 세포에 각종 데이터를 입력한다. 그들은 AI통제 요원들의 삼엄한 검색망을 뚫고 매트릭스 안에 들어가 인류를 구원할 영웅 네오를 찾아낸다. 지구상에 남은 인류 최후의 보루인 시온이 컴퓨터 군단에게 장악될 위기에 처하면서, 네오와 트리니티는 모피어스와 함께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시스템에 맞서기 위해 매트릭스로 돌아간다. 그리고 수소문 끝에 매트릭스의 심장부로 들어간 네오는 이 매트릭스 시스템을 창조한 아키텍트를 만나게 된다. 한편, 에이전트 스미스는 네오에 대한 불타는 복수심으로 시스템에 불복종하게 되고, 한때 자신이 그토록 경멸했던 인간성을 어느새 자기 자신도 갖게 되어 복수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더욱 더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면서 스미스는 기계들의 통제권까지 벗어나 현실 세계와 매트릭스는 물론 기계도시까지 말살할 야욕을 불태운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의 운명을 건 필사의 전투가 시작된다. 기계들이 인간말살을 목적으로 인류 최후의 보루 시온으로 침공해오자 인간들은 인류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전투를 벌인다. 그러자 네오는 어느 인간도 가본 적이 없는 기계 도시의 심장부로 잠입하여 기계 세상의 절대 권력자를 만나 파멸 직전의 인류를 구원키 위한 최후의 카드를 던지게 된다. 3. 아키텍트(Architect) “꿈을 꿔본 적 있나, 네오? 너무 생생해서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꿈. 그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어떻겠나? 그때 꿈과 현실을 어떻게 구별하지?” 라며 모피어스가 던진 질문이나 또 예언자 오라클이 네오에게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은 프로그램의 지배를 받아. 새도, 나무도, 바람도…” 라고 한 말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진 매트릭스의 가상세계는 현실과 구별이 어렵다. 그런데 이러한 매트릭스는 인공지능 컴퓨터(AI)에 의해 인간이 생태계를 파괴하는 바이러스로 단죄되었기 때문에 생기게 된 것이다. 즉 인간의 사악함으로 인해 AI가 만들 수밖에 없게 된 것이 매트릭스인데 네오는 매트릭스 심장부로 가서 매트릭스의 창조자 아키텍트를 만난다. 아키텍트는 네오에게 “인간은 항상 희망(hope)에 기만당한다”고 말하면서 또한 “네오에 앞서 이미 5명의 네오가 있었다”는 충격적 비밀을 네오에게 들려준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인지하는 현실이 매트릭스라고 가정해 볼 때 이 아키텍트는 과연 성경적인 창조주의 모습일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 오늘의 현실에 선행된 인간의 죄악이 원초적으로 존재하며 이 세계가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는 설정은 같지만 그 내용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와는 완전히 다르다. 즉 인간의 원죄란 인간을 위해 피조된 세계를 인간이 어떻게 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 자체이며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이 세상을 창조해놓으셨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영원한 멸망에 처할 인류를 위해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소망(hope)으로 주셨는데 이 그리스도는 절대불변하는(immutable) 약속인 것이며 또한 오직 예수님만이 진정한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이다(딤전1:1; 히6:18; 요14;6; 행4:12). 4. 네오(Neo) 유능한 컴퓨터 프로그래머 토머스 앤더슨(Thomas Anderson).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가지만 밤마다 ‘네오’라는 이름으로 컴퓨터 해킹에 나서는 ‘그’는 어느 날 모피어스를 만나 빨간 알약을 선택하여 먹고는 꿈에서 깨어나 AI에게 양육되고 있는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확인하고서 매트릭스를 탈출한다. 그리고는 인류를 구원해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 위험을 무릅쓰고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를 구하려다 에이전트 스미스에 의해 죽게 되었지만 트리니티의 사랑의 힘으로 다시 살아난다. 매트릭스의 내부 구조로 깊이 들어갈수록, 그리고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자신의 역할에 눈 떠 갈수록, 네오는 더 큰 저항과 더 무서운 진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네오는 결국 파멸 직전의 인류를 구원키 위해 기계 세상의 절대 권력자를 만나 자신을 던져 매트릭스의 통제를 벗어난 스미스를 처치해주는 대가로 시온의 평화를 약속받게 된다. 그렇다면 네오는 성경적인 메시야로서의 모습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람의 아들(Ander + son: son of man)로서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고 최후의 결전을 치루기 위해 십자가에 달린 듯한 자세로 매트릭스에 접속하여 자신을 던져 시온을 구원하는 것 등은 일면 그리스도의 모본이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들(시80:17; 다7:13; 마8:20 … 계14:14)이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마2:15 … 요11:27; 행9:20; 히10:29; 요일4:14)로서 그 자신이 구원주(빌3:20)일 뿐 아니라 창조주(요1:3)와 심판주(롬14:12)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네오처럼 기계 세상의 절대권력자와 타협하며 구원을 이룬다고 하는 것은 결코 창조주와 심판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그러한 구원 자체도 진정한 구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5. 트리니티(Trinity) 매트릭스를 ‘기독교적 우화’라고 보는 관점 곧 키아누 리브스가 열연한 네오는 예수, 카리스마 넘치는 저항군 지도자 모피어스는 뱁티스트 요한, 매트릭스의 설계자는 창조주, 트리니티는 막달라 마리아 등으로 대입시키는 주장이 일반인들의 공감을 상당히 얻고 있다. 아마 이것은 워쇼스키 형제가 의도한 바와 틀리지 않다고 생각이 드는데 왜 하필이면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로 보이는 배역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뜻하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을까? 네오가 죽을 때 그와 함께 있었고 또 네오가 부활하였을 때 처음으로 그를 보았으며 매트릭스로부터 네오가 돌아왔을 때 반갑게 얼싸안았고 네오가 부상당하였을 때 자기 옷을 찢어 치료한 것들은 분명 트리니티가 막달라 마리아로 여겨질 수 있는 대목들이다. 그러나 강렬한 사랑의 입맞춤으로 죽은 네오를 부활시켰고 시온에서 네오와 잠자리를 함께 하였으며 실명한 네오를 도와 기계 도시의 심장부로 들어가 자신은 죽고 네오가 기계 세계의 절대권력자를 만나 궁극적으로 시온을 구원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은 결코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이 아니다. 그렇다면 트리니티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로는 네오의 연인이라는 것을 통해 예수님을 더욱 더 ‘인간미 넘치게’(?)  만들어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과 같이 예수님을 ‘스스로 그리스도라 여기는’ 수많은 ‘사람의 아들들’ 중의 하나로 격하시키는 역할이다. 둘째로는 네오를 비록 참된 메시야는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메시야 되게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메시야의 여인인 트리니티는 메시야 이상의 존재 곧 그 이름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부각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미 구약의 대언자 예레미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삼위일체 하나님(LORD) 대신 하늘의 여왕(queen of heaven)을 섬겼던 사실(렘7:18, 44:17-19, 25)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계시록 17장에 나오는 큰 음녀(the great whore)의 SF 버전이라 할 수 있겠다. 6. 시온(Zion, Sion) 매트릭스로부터 벗어난 인간들이 마지막으로 은신하며 지낼 수 있는 곳 시온. 그곳은 기계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도록 땅 속 깊이 위치해 있는 인간의 마지막 도시이다. 여기에는 인큐베이터에서 태어나지 않은 정상적인 인간들과 또 간혹 네오처럼 매트릭스에서 탈출한 인간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이 인간 최후의 도시 시온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언제 기계들의 공격을 받을지 몰라 불안한 가운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리하여 이들이 벌이는 축제댄스는 몽환적이며 동시에 퇴폐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결국 시온의 위치를 알아낸 기계들 곧 25만개의 센티넬이 오징어떼처럼 몰려와 마지막 남은 인류와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인간들이 사력을 다해 기계들의 공격을 막아보려 했지만 시온은 엄청나게 파괴되어 인류의 멸망이 거의 임박해졌을 때 네오의 살신성인으로 기계들의 공격이 멈추어져 시온에는 평화(?)가 도래하게 된다. 그렇다면 매트릭스의 시온은 성경에 나오는 시온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을까? 시온이 약속된 땅이며 그것이 메시야에 의해 이루어지리라는 가정은 비슷하다. “그분의 장막은 살렘에도 있으며 그분의 거처는 시온(Zion)에 있도다.”(시76:2, 이하 흠정역) 그러나 신약적 의미로서 시온(Sion)은 하나님의 교회(히12:22)를 뜻하며 동시에 하늘의 도시(계14:1) 곧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계21:2)을 의미하고 있다. 즉 성경에 약속된 시온에는 처음부터 불안이나 슬픔이나 울부짖음이나 아픔 들이 존재할 수가 없으며 다시는 저주가 있을 수 없다(계21;4, 22:3). 따라서 매트릭스의 시온은 성경과 전혀 상반된 상태이다. 또한 땅 속 중심부에 존재한다는 사실로 보아서는 매트릭스의 시온은 오히려 지옥(地獄, inferno, hell)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마12:40; 엡4:9; 눅23:43; 눅16:23-28). 7. 가상현실(Virtual Reality) 네오가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 그는 장 보드리야르의 책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의 속을 파내 자신의 해킹 프로그램을 보관하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이 장면 하나로써 매트릭스 시리즈가 시물라시옹(simulation)의 터 위에서 가상현실을 주제로 하여 전개되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시물라시옹에 네 가지 단계가 있다고 한다. 그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이미지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현실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순수한 시물라시옹이라고 정의된다고 한다. 그리고 SF 백과사전에서는 가상현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인간 뇌와 인공지능 사이의 직접적이고도 전기적인 인터페이스를 일컫는다. 접속된 사람에게 현실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듯한 환상을 준다. 이 환상 현실의 현장은 인공지능을 넘어 인공지능이 소속된 데이터 네트워크 전체로까지 뻗어간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가상현실의 관점에서 보면 기억이란 뇌에 새겨진 외부의 전기 신호에 불과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혹시 우리는 매트릭스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우문 아닌 우문도 해볼 수 있겠다. 따라서 테크놀러지 사회가 완전한 실현을 이룬다면 현실과 가상현실을 완벽히 구별할 수 있을 것인지, 또 만약 구별이 된다면 그 기준은 무엇이 될 것인지 궁금해진다. 정답은 (곧 가상현실을 구별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권능이 있어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나누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니 그분의 눈앞에서 드러나지 아니하는 피조물이 하나도 없고 오직 모든 것이 우리와 상관하시는 그분의 눈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그러므로 우리는 모피어스를 통해 “매트릭스는 어디에나 있다”고 하는 말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시는 바를 알려주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너희에게 거짓 환상(false vision)과 점술과 허무한 것(thing of nought)과 자기 마음의 속임수(deceit)를 대언하는도다.”(렘14:14하) 8. 진화(Evolution) 에이전트 스미스는 말한다. “진화야, 모피어스. 진화라고. 공룡들처럼 말이야. 창 밖을 봐. 너희 시대는 지났어. 미래는 우리 세상이야, 모피어스. 미래는 우리 시대라고.” 비단 이 대사뿐이랴.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의 기저에는 진화라고 하는 이데올로기가 깊이 뿌리박혀 있다. 또한 웹사이트를 최초로 만든 SF 작가인 로버트 소여(Robert J. Sawyer)도 다음과 같은 말로써 매트릭스에 나타난 진화론을 극구 칭송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우리의 몰락이 아니라 운명이라면 인간의 의식을 빠르고 강하고 불멸의 존재인 기계와 결합시킨다는 발상은 정말로 진화의 다음 단계 곧 최종단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확실하게 다음과 같이 창조를 선포한다.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창1:1). 창조 시작 엿새째 되던 날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클라이막스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또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셨다(창1:27).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다산(多産)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다(창1:28). 그리고 자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 ‘매우 좋았다(it was very good)’고 말씀하셨다(창1:31). 또한 창조주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좋은 나무가 악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썩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마7:18)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나타난 진화론의 열매를 보면 진화론이 어떠한 나무인지 금방 이해가 갈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진화론은 히틀러의 나치즘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지지하기 위한 지적, 철학적 근거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지금 우리 사회에 암처럼 널리 퍼져있는 상대주의윤리를 위한 기초를 확립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배도, 무신론, 세속적 인본주의, 그리고 성도덕상의 자유주의를 촉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실로 인류의 일반적 복지와 정신문화는 이러한 자연주의 및 인본주의 철학이 생산한 결과로 인해 큰 피해를 받아 왔던 것이다. 9. 열매(Fruits) 그렇다면 이제 매트릭스로 인한 열매들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감독인 래리와 앤디 워쇼스키 형제 가운데 래리에게 변화가 생겼다고 한다. ‘매트릭스2’ 시사회장에 나타난 래리의 모습은 지난 1999년 매트릭스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4년전에는 수염을 기른 남자 모습이었는데 이번에는 귀걸이까지 한 곱상한 모습이었다. 측근의 말을 빌면 래리는 지난 해 시카고의 부모 앞에서 자신이 게이임을 밝히는 ‘커밍아웃’을 했으며 여성이 되고 싶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최근 래리는 정기적으로 여성 호르몬 주사를 맞고 있어 얼굴이 점차 여성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길게 기른 머리를 모자로 감추고 있는데 내년쯤이면 래리가 완전히 여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한다. 1999년 4월 미국의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는 학생 2명이 900여 발의 총알을 발사해 학생 12명과 교사 1명을 죽이고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발생 2주전 개봉됐던 ‘매트릭스’의 마니아였던 이들은 검은색 가죽과 트렌치코트로 대표되는 ‘매트릭스 패션’으로 인해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해 보복했다는 것이다. 2002년 10월 양아버지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워싱턴 일대에서 10명의 무고한 시민들을 저격살해, 세계를 경악케 했던 리 말보(18) 역시 영화 매트릭스의 환상에 빠져 있었다. 그는 법정에서도 전혀 죄책감을 보이지 않았으며, 증언대에 서서도 희생자들을 살해하던 당시를 회상하며 즐거운 듯 웃기도 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는 체포되기 전 경찰에 전화를 걸어 “나는 신이다. 경찰은 도대체 누구를 상대해야 하는지 모르는가”라는 녹음을 남겼다. 지금은 감방 벽에 “매트릭스에서 너 자신을 구제하라”는 메모를 붙여놓고 있다고 ABC방송은 전했다. 2003년 2월 버지니아주에서 부모를 총으로 쏴 죽인 19세 청소년은 법정에서 자신이 영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도 범행 당시 영화 주인공이 쓰는 것과 비슷한 총을 사용했으며, 트렌치코트를 즐겨 입었다. 또 자신의 방에 영화 매트릭스 포스터를 붙여놓고, 스스로 영화 속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고 변호사들은 전했다. 2003년 7월 6일 필라델피아에서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처럼 검은색 옷차림을 한 3명의 청소년들이 총과 검으로 무장한 채 차량을 강탈하려다 체포됐다. 이들은 친구 세 명을 살해하고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 난사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중 가장 연장자인 매튜 로벳(18)은 언어장애가 있는 동생을 놀린 아이들을 응징하려 했으며, 초등학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 ‘적들의 명부’를 작성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로벳은 평소에도 네오의 옷차림과 머리모양을 흉내내고 다녔으며 스스로를 네오라고 칭하는 등 매트릭스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AP는 보도했다. 10. 뉴에이지(New Age) 성경에 따르면 사람은 책임 있는 피조물이다. 앞으로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 동기에 대하여 창조주 앞에서 답변을 해야만 할 것이다(롬14:12). 그러나 우리가 현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가상현실에서 살아간다고 믿거나 사람을 아무런 목적도 없는 진화 과정에 의해 생긴 생산물로 간주하게 되면 사람에겐 어떠한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추궁할 수 없게 된다. 이 경우에 사람은 그저 꿈을 꾸는 상태이거나 아니면 단순히 자연에서 우연히 생겨난 한 생산물에 불과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악한 행동이 실제로는 일어날 것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랬다거나 아니면 그가 예전에 동물이었으므로 아직도 그 속성이 조금 남아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기게 된 것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온 인류가 계속해서 이러한 논리로 치닫는다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자신의 환경을 변화시키고 제어할 수 있는 능력 곧 그 자신만이 소유한 유일한 능력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가상현실과 진화론은 자신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고자 시도하는 뉴에이지의 핵심사상과 필연적으로 맞아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즉 뉴에이지 운동의 핵심교리인 범신론(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리라, 창3:5), 윤회론(너희가 정녕 죽지 아니하리라, 창3:4), 상대론(너희가 선악을 알리라, 창3:5), 밀교주의(너희의 눈이 밝아지리라, 창3:5) 등이 매트릭스 속에 가득 차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이는 “누구든지 그노시스파, 버클리의 형이상학, 불교, 피타고라스의 수학적 우주론, 신플라톤주의, 그리고 다른 많은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매트릭스’에 관한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라고 논평한 폴 폰태너(Paul Fontana)의 말이나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매트릭스의 신화적인 요소를 분명히 밝힌 워쇼스키 형제들의 말에서도 확증이 된다. 11. 인간과 기계(Man vs. Machine) 방화건 외화건, 단편영화건 블록버스터건 간에 우리가 요즈음 접할 수 있는 영화들은 거의 다 뉴에이지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수없이 쏟아져 나왔던 뉴에이지 영화들 가운데 유독 매트릭스가 튀게 되는 요인이 있다면 바로 인간과 기계와의 합일을 매우 유려하고 깊이가 있게 다뤘다고 하는 점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매트릭스가 보여주는 바대로 인간과 기계와의 합일은 정말 가능한 일일 것인가? 베스트셀러인 ‘영적 기계들의 시대(The age of spiritual machines)’의 저자 레이 커즈윌(Ray Kurzweil)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의 생물학적 사고 작용은 의외로 단조롭다. 인류는 대략 초당 1,026번의 연산을 수행한다.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숫자는 증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생물학적 지능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내 계산에 따르면 교차점은 2030년대가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특이점(singularity)이라 부른다." 또 선마이크로시스템즈를 설립하여 현재 이 회사의 수석과학자와 대표로 있으며 ‘인터넷계의 에디슨’이라 불리는 빌 조이(Bill Joy)는 다음과 같이 예견하고 있다.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가진 로봇을 얼마나 빨리 만들 수 있을까? 컴퓨터 기술의 발전 속도를 볼 때 2030년까지는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능을 가진 로봇이 일단 나타나게 되면 스스로 복제를 통해 진화를 할 수 있는 로봇의 출현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 엄청난 사건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다니엘의 말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오 왕이여, 왕이 보셨으되 곧 큰 형상을 보셨나이다. 이 큰 형상이 왕 앞에 섰는데 그 광채가 찬란하며 그 형태가 두려우니 이 형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그의 가슴과 두 팔은 은이요, 그의 배와 두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의 두 다리는 쇠요, 그의 두 발은 얼마는 쇠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왕이 이것을 보시더니 마침내 손을 대지 아니하고 깎아낸 돌이 이 형상을 치되 쇠와 진흙으로 된 두 발을 쳐서 그것들을 산산조각 내매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금과 은이 다 산산조각 나서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쓸려가 그들의 자리가 없어졌고 이 형상을 친 돌은 큰 산이 되어 온 땅에 가득하였나이다.”(단2:31-35)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꾼 이 금속 형상에 관한 꿈은 형상의 머리부터 발까지 순서대로 세상 왕국이 일어날 것이라는 내용이다(단2:36-45). 그런데 다섯 번째 왕국 곧 쇠(iron)와 진흙(clay)으로 된 두 발에 대한 이해를 보다 잘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나’의 편집자 글렌 예페스(Glenn Yeffeth)의 어휘정리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예페스는 인공지능을 ‘단순히 인간에 의해 프로그램된 것을 넘어 사고하고 창조할 수 있는 기계’라 정의하면서 이것이 인간과 똑같이 사고할 수 있는 지능적 기계라고 할 때 인간과의 차이는 생리학적 육체뿐이라고 설명한다. 즉 인간은 ‘유기체’이고 인공지능은 ‘금속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탄소, 수소, 산소 등으로 구성된 유기체는 곧 흙(Adam)이며 금속체는 쇠(iron)로 대표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세상의 마지막 때는 바로 인간과 인공지능인 기계와의 합일을 도모하는 시점인  것이다. 그리고 이 인간과 기계가 서로 완전히 결합될 것 같은 순간에 ‘손을 대지 않고 깎아낸 돌’ 곧 주 예수님이 재림하심으로 인해 세상왕국은 멸망하고 주님의 왕국이 영원히 서게 될 것이다(단2:43-45). 12. 매트릭스에서 나가며 최근 미국의 존스 홉킨즈 대학에서 맹인의 눈에 인공망막칩을 이식해 시신경에 영상신호를 전달해 보였다는 발표가 있었다. 아직까지는 간단한 문자나 기호를 겨우 전달하는 수준이지만 정교한 망막칩이 개발되고 신경의 신호 전달 방식을 더 연구하면 인공적 시각을 만드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한다. 아울러 나노기술 등의 빠른 발전 속도를 감안하면 뇌 공학이 가상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시간은 점차 단축될 것으로 예상이 되고 있다. 따라서 이제 매트릭스가 담고 있는 모든 메시지들이 과학이란 이름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더욱 더 효과적으로 전달이 될 것이다. 동시에 매트릭스 즉 뉴에이지의 철학 속에서 긍정(cons.)과 부정(pros.)으로 혼합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무수한 영혼들이 더욱 더 진리의 길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이제 성령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셨으니”(딤전4:1) “이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선생들을 쌓아 두고 또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낸 이야기들을 따를 것임이라.”(딤후4:3,4)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어라. 너의 대적(對敵)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오 디모데야, 속되고 헛된 말장난과 거짓되이 과학이라 불리는 것의 반론들을 피하며 네게 맡긴 것들을 지키라.”(딤전6:20)
2009-05-08 15:45:58 | 관리자
1. 프롤로그(Prologue) 구랍 17일 개봉된 ‘반지의 제왕’ 3편 ‘왕의 귀환’은 2004년 새해에 들어서도 그 위력이 꺾일 줄 모르고 지속되고 있다. 아마 이런 추세대로라면 조만간 국내외 영화사의 각종 신기록을 갈아 치울 것으로 예상이 된다. 그리고 원작 소설 또한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더욱 판매부수가 늘어날 것임은 명약관화하다고 하겠다. 잘 알려진 대로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은 이미 30여 개 언어로 번역돼 1억 부 이상 팔렸고 현재 영문학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히고 있는데 피터 잭슨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3부작 시리즈 영화는 원작 소설에 담긴 작가의 의도를 훼손시키지 않고 매혹적인 환상의 세계를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또한 ‘탁월한 테크놀로지는 그 자체로 뛰어난 예술’임을 증명한 걸작으로도 평가되고 있다. 영국의 일간 선(The Sun)지는 ‘반지의 제왕’을 세계영화사에 남을 10편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선정하였고, 통상 예술 및 독립 영화에 상을 주던 뉴욕 영화비평가협회(FCC)에서조차 2003년을 결산하면서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을 최우수 작품상 수상작으로 선정할 정도였으니 이 ‘반지의 제왕’의 위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의 평판에 부응하여 우리 기독교계에서도 ‘반지의 제왕’에 대한 찬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커트 부루너와 짐 웨어가 함께 집필한 ‘이 반지가 왜 내게 왔을까(Finding God in the Lord of the Rings)’를 필두로 하여 수많은 기독교 매체들이 앞다투어 이 ‘반지의 제왕’을 훌륭한 기독교적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허구인 판타지를 통해서도 인생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라든가 심지어 판타지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훌륭한 선물이자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매우 효과적인 도구라는 등의 극찬도 여과되지 않고 쏟아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정말 신, 불신을 떠나 세계인 모두가 이 ‘반지의 제왕’에 열광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며 또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 살펴보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될 일일진대 이 글에서는 ‘반지의 제왕’이 표방하는 몇 가지 주요한 점들에 대해 성경적 조명을 해 봄으로써 함께 이 시대를 진단해 보고자 한다(마16:2,3). 2. 시놉시스(Synopsis) 요즈음 세상 사람들을 새롭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즉 ‘반지의 제왕’을 이미 소설이나 영화로 감상한 자들과 앞으로 감상하게 될 자들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하는데 후자에 속하는 독자들을 위해 먼저 ‘반지의 제왕’의 줄거리를 간략히 소개한 후 성경적 관점에서 이를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사우론의 암흑군대에 맞서 싸우던 인간과 엘프 연합군은 패전 직전 사우론의 힘의 원천인 절대반지를 빼앗아 세상(중간계)을 구한다. 하지만 탐욕에 눈이 먼 이실두르에 의해 반지는 파괴되지 않고 남겨진다. 이실두르가 살해당한 뒤 세월은 흘러 반지는 골룸과 호빗인 빌보의 손을 거쳐 빌보의 조카 프로도의 손에 전수된다. 사우론은 암흑탑에 은거하면서 반지를 찾기 위해 암흑기사들을 호빗의 땅으로 보내고, 프로도는 이를 피해 친구인 샘과 함께 리벤델로 간다. 그러나 엘프의 땅 리벤델 역시 반지를 지킬 힘이 없다. 사우론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반지가 만들어진 운명의 산 불구덩이에 반지를 던져버리는 것. 프로도와 샘을 비롯한 피핀, 메리, 마법사 간달프, 기사 아라곤, 곤도르의 전사 보르미르, 요정(Elf) 레골라스, 난장이(Dwarf) 김리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반지원정대를 결성하고, 사우론의 군대는 반지를 빼앗기 위해 위협을 가해온다. 그리하여 반지원정대의 길고 긴 여정이 시작되는데 이후 수많은 우여곡절과 반전이 거듭되면서 마침내 절대반지는 파괴되고 중간계에는 평화가 도래하게 된다. 3.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 1892∼1973) 예술적인 노력이 다 그렇듯이 톨킨이 믿는 바가 그대로 그의 작품 속에 드러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이다(마12:34,35). 그런데 앞서 언급하였던 ‘이 반지가 왜 내게 왔을까’의 공저자이며 ‘포커스 온 더 패밀리(Focus on the family)’의 부총재인 커트 부루너는 톨킨이 C. S. 루이스가 신앙을 갖도록 도와줄 정도로 신실한 기독교 신앙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반지의 제왕’에는 기독교 세계관이 훌륭하게 표현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공상소설 작가인 스티븐 로헤드도 그 두꺼운 ‘반지의 제왕’ 속에서 그리스도를 인유(引喩)하는 문장을 찾아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며 톨킨의 신앙심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톨킨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였던 것인지, 또는 올바른 성경적 교리를 믿고 거듭 난 리얼 크리스천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해야 진정한 성령의 열매를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며 아울러 이러한 단초(端初)에 의해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반지의 제왕’에 대한 영적 판단의 방향이 올바로 세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이클 화이트가 쓴 ‘톨킨-판타지의 제왕(Tolkien: a biography)'이나 조세프 피어스가 쓴 ‘톨킨-인간과 신화(Tolkien-Man and Myth)’를 보면 톨킨은 자신이 독실한 카톨릭 신자임을 고백한다. 톨킨의 장남으로서 사제 서품을 받은 존 톨킨도 카톨릭 신앙이 아버지의 사고와 모든 요소에 스며들어 있었으며 아버지가 철저한 천주교인임을 강조한다. 톨킨은 영국국교회(성공회)를 증오하였다. 그래서 영국국교회에 다니고 있었던 사랑하는 연인인 에디스 브랫이 기독교의 신앙을 버리고 카톨릭으로 개종하도록 강요하였는데 결국 그녀가 완전히 천주교로 개종한 이후에야 약혼을 발표할 정도였다. 또 1931년 가을 톨킨은 자기와 긴 신앙적 토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C. S. 루이스가  단순한 유신론자에서 회심하여 자기가 바라던 천주교인이 아니라 아일랜드 기독교도로 돌아간 것을 알게 되자 루이스를 ‘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이후 둘 사이의 우정도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하였다. 4. 카톨릭(Catholic)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우리는 장로교인이 침례교인이 되었다거나 감리교인이 성결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개종’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천주교인이 되거나 또는 이와 반대의 경우 우리는 정확히 ‘개종’이라고 표현하게 된다. 왜냐하면 천주교는 기독교와 완전히 다른 종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세 가지의 오직(Three Solas)’ 곧 ‘성경’과 ‘은혜’와 ‘믿음’만을 주장하는 기독교의 구원론은 이미 16세기 개혁자들이 주장하기 전 초대교회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성경신자들에 의해 일관되게 고백된 내용이었다. 그러나 바빌론의 신비주의에 뿌리를 둔 카톨릭의 교리는 성경의 최종권위를 부정하면서 그들의 전통을 따를 것을 가르치며 행위에 의한 구원을 선포하고 있다. 마틴 로이드 존스의 표현대로 ‘저주받을 더하기’로써 무려 삼백 가지도 넘는 비성경적인 교리를 종교개혁 이후에도 계속해서 지금까지 만들어 오고 있는 것이 바로 로마 카톨릭인 것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어 구원을 받을 수 있다(합2:4, 롬1:17, 갈3:11, 히10:38). 그리고 이 믿음의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요14:6, 행4:12). 그런데 믿음(faith)은 그 정의상 ‘행위와 상관이 없어야(without work)’ 믿음인 것이며(롬3:28) 또한 그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인 예수님(Jesus)을 개인의 인격적인 구주로 모셔 들여 ‘영원히 단번에(once for all)’ 구원 받는다고 믿어야만 참된 믿음인 것이다(히10:10-14; 12:2). 그러나 톨킨은 이러한 성경적인 믿음을 소유하지 못했다. 머레이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톨킨은 반지에 유혹되지도 않으며 드러나지 않게 프로도를 도와주는 로스로리엔의 여왕 갈라드리엘을 묘사할 때 마리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포함하였다고 인정하였듯이 그는 마리아를 중보자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그는 고해성사를 계속함으로써 죄사함을 받는다고 믿었고 또 그의 자전적 성격이 가장 분명한 작품인 ‘니글 옆의 이파리’를 통해 자신이 연옥의 존재를 확실히 믿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면 1973년 작고한 그의 영혼(soul)은 현재 어디에 가 있는지 진정 거듭난 독자들께서는 아실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원래 고대 점성술 용어인 ‘카톨릭’의 의미가 ‘하늘 제신(諸神)들의 집합체’인 사실을 보더라도 독실한 근본주의 카톨릭 신자인 톨킨이 ‘반지의 제왕’에서 표현하게 될 세계에 이교적인 사상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음은 쉽게 예측될 수 있을 것이다. 5. 판타지(Fantasy) 오늘날 가장 판매량이 많고 가장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문학 장르는 판타지이다. 대부분의 판타지 작가들은 판타지 장르가 이처럼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데는 톨킨의 역할이 아주 컸다는 점을 인정한다. 특히 ‘반지의 제왕’을 ‘판타지 소설의 제왕’이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판타지란 원래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악상이 떠오르는 대로 자유로이 작곡한 작품’을 일컫는 말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상상(imagination)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될 수 있다고 하겠다. 물론 사실주의(realism) 예술에서도 상상력이 필요하지만 판타지는 초현실적인 내용 곧 이 세계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를 다룬다고 하는 점에서 사실주의와 구별이 되는 동시에 그럼으로써 더욱 상상이 강조되는 장르라 할 수 있겠다. 또 츠베탕 토도로프를 위시해 수많은 이들이 나름대로 판타지에 대한 정의를 다양하게 내리고 있지만 어찌되었든 판타지의 기본 메커니즘은 ‘상상’이며 그 구성은 마법사와 요정 등이 등장하는 초현실적인 내용이 될 수밖에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러한 판타지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님께서 사람의 사악함이 땅에서 커지고 또 그 마음에서 생각하여 상상(imagination)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6:5, 이하 흠정역) 그렇다. 하나님을 떠나 있으며 구원받지 못한 인간의 상상이란 항상 악할 뿐이다. 비록 사랑이나 평화나 각종 미사여구로 포장을 하여도 인본주의의 결국은 의로운 것이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다(롬3:10-18). 톨킨은 ‘판타지란 가장 높고 순수한 형태며 예술과 신학과 인간의 기본 욕망이 만나고 교차하는 장’이라고 말한다. 그 말대로 인간의 기본 욕망이 분출되는 판타지는 결코 생명의 길로 향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약1:15).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우리의 모든 헛된 상상을 버리라고 말씀한다(렘23:16-18, 고후10:5) “우리는 상상하는 것(imaginations)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거슬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고후10:5) 6. 마법(Magic) ‘반지의 제왕’을 여러 각도에서 음미할 수 있겠지만 어떤 경우라도 이 소설(영화)의 가장 중요한 플롯 중 하나가 바로 간달프와 사루만이라고 하는 두 마법사의 대결 구도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앞서 정의한 대로 판타지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을 다루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법은 실제로 우리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 마법을 신봉하며 또 그 마법의 능력을 체험하며 사는 사람들이 이 21세기 첨단과학 시대에도 존재하고 있다. 인터넷 검색엔진을 사용해 조사해 보면 마법과 연관된 수십만 개의 사이트를 발견할 수 있고 아마존에서도 수천 종의 마법에 대한 책이 팔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1999년 클린턴이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있을 때 미국 군대 내에서 마법은 하나의 합법적인 종교로서 인정되어 그들만의 종교활동이 공식적으로 가능하게 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마법의 종교성은 받아들이지만 마법에는 실제적인 능력이 없다고 하면서 마법을 우습게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법에 연루된 자들의 주장과 하나님의 말씀 두 가지를 다 부인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마법에 능력이 있다고 인정하는 경우라면 마법사들이 얘기하듯 마법은 악한 것이 아니라고 하든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사탄으로부터 오는 악한 능력이 모든 마법(white magic & black magic)에 있다고 동의하여야 할 것이다(신18:9하-11, 사8:19, 47:12-14상, 갈5:19-21, 계9:21; 21:8). 하나님께서는 어떤 형태의 마법도 엄격하게 금하시며 마법사들은 둘째 사망의 심판을 받고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영원히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하신다(계21:8).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부리는 영들을 지닌 자들과 슬쩍 엿보고 중얼거리는 마술사들에게 구하라, 할 때에 백성이 마땅히 자기들의 하나님께 구하여야 하지 아니하겠느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사8: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 우상숭배와 마법과 …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갈5:19-21) 7. 신화(Myth) 톨킨이 신화가 없는 영국인들을 달래려고 창작했다는 이 ‘반지의 제왕’은 21세기 들어 3부작 영화의 성공적 개봉으로 말미암아 이미 ‘21세기 위대한 신화’로 전세계인들의 평가를 받고 있다. 10여개 언어의 구조와 문법 그리고 이와 관련된 고대 북유럽 신화에 정통했던 톨킨은 자신의 이론적 입장을 밝힌 ‘동화에 관하여’라는 글의 결론에서 ‘진실의 신화’인 그리스도 신앙이 모든 하위신화를 진실에 일치하게끔 이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성경에 씌어진 복음서는 한 편의 동화이며 모든 동화의 총화가 한꺼번에 들어있다고 생각했다. 톨킨은 물론 하위신화가 성경의 신화처럼 완벽할 수 없지만 하위신화는 본래의 신화로부터 흘러나온 위대한 진실을 언뜻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위대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톨킨의 신화에 대한 견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다. 즉 신화(神話)의 일반적 정의상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일정한 구조를 지닌 꾸며낸 이야기의 한 가지’란 면에서 그가 기독교 신앙을 하나의 신화로 표현한 것은 틀린 말이다(딤전1:4; 4:7, 딛1:14, 벧후1:16). 그러나 각 민족의 여러 신화들이 위대한 진실을 어느 정도 보여줄 수 있다고 한 점은 옳은 표현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 지역 신화와 서양 3대 신화(북유럽 신화, 그리스 신화, 켈트 신화) 및 우리 민족의 근원 신화들 간에는 분명 유사성이 있으며 이들의 원형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있다는 사실이 여러 문헌들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톨킨이 ‘반지의 제왕’에 차용한 북유럽 신화는 ‘해리 포터’나 각종 판타지 문학과 게임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여기서 이를 잠깐 소개한 후에 다음 장에서 신화의 원형에 대한 성경적 접근을 해보고자 한다. 북유럽 신화는 정교하게 짜인 아홉 세상에서 지내는 신들과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거인족의 대립과 갈등이 주요 내용이다. 신들은 ‘악의 축’인 거인족에 맞서 세상을 지켜낸다. 특히 신들의 지혜와 용기, 모험, 희망, 열정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모든 신과 인간을 다스리는 지혜의 신 오딘과 그의 여전사 발퀴리, 사랑과 미의 여신 프레이야, 벼락망치를 휘두르는 천둥신 토르, 신과 인간들을 괴롭히는 데 앞장서는 사고뭉치 로키 등 수많은 신과 거인, 요정이 등장해 아찔아찔한 모험을 벌인다. 급기야 신들과 거인은 서로의 죽음을 예고하며 최후의 전쟁을 치르게 되고, 세상은 완전히 파멸한다. 마지막 살아남은 남녀 한 쌍. 이들이 인류의 후손을 남기며 지금의 세상을 이룬다. 8. 거인(Giants) 톨킨이 ‘전설과 신화는 대개 진실로 만들어졌다’고 했듯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각 신화들에는 중요한 성경적 진실이 숨어 있다. 노아의 홍수가 국지적인 천재지변이 아니라 지구 전체를 뒤엎었던 대홍수였다는 사실이 각 민족의 고대 문헌들 속에서 드러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아의 홍수를 유발시켰던 타락한 천사들에 대한 이야기도 여러 민족의 신화나 기록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즉 이미 소개된 북유럽 신화나 그리스 로마 신화, 우리나라의 단군신화, 박혁거세 신화 및 대부분의 고대국가들의 신화 속에서 인간을 아내로 취해서 반신반수의 괴물이나 혹은 거인들을 낳은 신들에 대해 언급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대수롭지 않은 전설 정도로 여기지만 성경은 그것에 대해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사무엘상 17장에는 골리앗의 키가 정확히 여섯 큐빗 한 뼘(six cubits and one span)으로 적혀 있다. 1큐빗이 대략 45-50 cm이고 한 뼘이 반 큐빗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골리앗은 그 키가 3 미터가 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신명기 3장에는 바산왕 옥이 길이가 아홉 큐빗 넓이가 네 큐빗이나 되는 침대 위에서 잠을 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바산왕의 키와 그의 침대를 비례적으로 생각해서 그의 키를 계산해 보면 적어도 4 미터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키가 3-4 미터씩이나 되는 거인들은 어떻게 생기게 된 것인지 그 실마리를 풀어 나가기 위해 성경에 처음으로 거인(giant)이 기록된 창세기 6장부터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사람들이 지면에 번성하기 시작하고 그들에게 딸들이 태어나매 하나님의 아들들(the sons of God)이 사람의 딸들(the daughters of men)과 또 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자기들이 택한 모든 자를 아내로 삼으니라. 주께서 이르시되, 내 영이 항상 사람과 다투지는 아니하리니 이는 그도 육체이기 때문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날들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는 거인들(giants)이 있었고 그 뒤에도 있었으니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사람들의 딸들이 그들에게 아이들을 낳았을 때더라. 바로 이들이 옛적의 강력한 자들(mighty men)이요, 명성 있는 자들(men of renown)이더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사악함이 땅에서 커지고 또 그 마음에서 생각하여 상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6:1-5) 9. 반신반인(Demigods)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성적 관계를 맺음으로 거인들이 태어났고 또 그들은 골리앗과 같이 힘세며 사악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정상적인 인간, 예를 들어 경건한 셋의 후손일 수가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계실 신실한 크리스천도 많을 줄 생각된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를 좀더 자세히 이해하길 원하신다면 졸저 ‘성경으로 세상보기’ 중 ‘성경에 나타난 성장이상’을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바로 타락한 천사들이다(벧후2:4-6, 유5-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불법적인 결혼에 의해 출산된 자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노아의 대홍수를 내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다(창6:11-14). 그리고 거인들은 그들의 힘과 명성으로 인해 인간들에게는 신적인 존재(gods)로 여겨지게 되었을 터인데 이들의 정체에 대해 시편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창6:4, 시82:1,5-7). “하나님께서 강한 자들의 회중 안에 서시며 신들(gods) 가운데서 심판하시는도다. …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달으려 하지도 아니하며 어둠 속에 다니니 땅의 모든 기초가 궤도를 벗어났도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gods)이라. 너희는 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자녀들이라, 하였으나 너희는 사람들같이 죽을 것이요, 통치자들 중의 하나같이 넘어지리로다.”(시82:1,5-7) 만일 이 신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처럼 죽게 된다면 그들은 분명히 사람들이 아니다. 또 이들은 창세기 6장의 ‘타락한 천사들’도 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성경이 분명하게 천사들은 죽을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눅20:34-36). 따라서 이 신들은 타락한 천사들의 자손이며 비록 창세기 6장에서 사람들이라 불리고 있지만 단지 반쪽만이 사람이고 다른 반쪽은 신들(타락한 천사들)인 존재 곧 반신반인(半神半人, demigods)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신들이 땅의 모든 기초가 흔들렸을 때 즉 노아의 대홍수시에 사람들처럼 죽었다고 시편 기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홍수 이전 세상을 주름잡던 이 반신반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골리앗과 바산왕 옥의 경우에서 보듯 홍수 이후에도 거인은 잠시 존재하였지만) 홍수 이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부터 야벳, 셈, 함 등 노아의 후손들이 각 민족들을 이루어 세상 곳곳으로 퍼져나가면서 함께 신화의 형태로 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10. 창조물(Creatures) 이러한 반신반인인 거인에 대한 이야기는 ‘반지의 제왕’에서도 차용이 되고 있다. 즉 반은 인간이고 반은 나무인 거인족 ‘엔트’들이 악의 지도자 사우론에 의해 숲이 황폐화되는 데 분노해 악의 소굴 아이센가드로 몰려가 공격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는 곧 인간의 생태계 파괴에 대한 강력한 ‘자연의 경고’를 담은 메시지일 수밖에 없는데 톨킨은 원래 기술문명을 싫어하여 텔레비전도 집에 들여놓지 않았고 라디오도 가끔 들을 정도로 생태학적 신념이 철저하였기 때문에 이런 캐릭터를 등장시켰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또 하나 ‘반지의 제왕’에서 차용한 거인의 예로서 (키가 1 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호빗족인 주인공 프로도의 관점에서 본 타종족들(우르크하이 등)을 들 수 있겠다. 근육질도 미남형도 아니며 가장 약한 종족인 호빗족의 프로도가 반지원정대와 함께 하면서 자기보다 키가 두 배나 큰 인간, 엘프, 마법사 등 다양한 종족들과 도움을 주고받는 모습에서 우리는 영화촬영기법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거인이란 신화적 요소를 전달받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반지의 제왕’ 속에서 엔트나 호빗, 엘프, 드워프, 오르크, 마법사 등과 함께 대화하고 인격적인 교제와 삶을 나누는 인간은, 곧 여러 종족 중 욕심 많은 평범한 한 종족에 불과한 인간은 과연 성경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은 존재일까?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인간 외에 다른 어떤 변형된 종족도 이 세상에 두지 않으셨다. 모든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지는 영혼(soul)을 소유하였으며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께 위임받아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존재일 뿐이다(창2:7, 롬14:12, 창1:26-28). 오히려 이처럼 인류가 아닌 다른 생명체와의 인격적 만남이 있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적 존재들과의 교제가 있다고 하는 설정은 가이아(Gaia) 가설이나 힌두이즘 또는 UFO과학 등을 포함하는 뉴에이지 사상에 다름이 아니다. 11. 선과 악(Good and Evil)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캐릭터들은 ‘반지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주인공 프로도도 최종적으로 실패한 인물이며, 절대반지가 파괴되는 것은 악한 골룸 때문이라는 것을 독자들께서도 잘 아실 것이다. 따라서 ‘반지의 제왕’은 이자벨 스마쟈(‘반지의 제왕, 혹은 악의 유혹’의 저자)가 잘 지적했듯이 선과 악이 교차하는 단순한 이분법을 구사하는 판타지가 아니다. 처음에는 선의를 따랐지만 반지의 힘을 탐낸 ‘반지원정대’ 보르미르의 행동이나 악한 마법사로 변신한 사루만의 배신 등에서도 엿볼 수 있듯 선과 악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미 G 포노(‘판타지 문학에 나타난 광기’의 저자)가 ‘판타지 문학의 작가들은 연관된 두 가지 애매한 의미들을 능수능란하고 교활하게 다루고 있다’고 말한 대로 일반적인 판타지 문학에 내재하는 완전한 ‘모호함의 전략’이 ‘반지의 제왕’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선악의 구분이 모호하게 처리됨으로써 궁극적으로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으며 선과 악은 상황에 따라 또 자기의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뉴에이지의 메시지를 암묵적으로 던져주고 있는 것이 바로 ‘반지의 제왕’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화 있을진저,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고 어둠으로 빛을 삼으며 빛으로 어둠을 삼고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이여! 화 있을진저, 자기 눈에 지혜로운 자들과 자기가 보기에 분별 있는 자들이여!”(사5:20,21)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라며 선악과를 따서 먹으라고 에덴동산에서 이브에게 유혹하였던 사탄은 오늘날도 계속해서 빛의 천사로 우리에게 나타나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있다고 ‘반지의 제왕’을 통해서도 속삭이고 있는 것이다(창3:5; 고후11:14). 12. 죽음(Death) 성경에 의하면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은 결과 이 세상에는 죽음이 초래되었다(창2:17; 3:6,19). 그러나 ‘반지의 제왕’에서는 인간의 죽음은 타락에 의한 형벌이 아니라 ‘에루’라는 존재의 선물로 묘사되기도 한다. 또한 헬름 협곡의 혈전이나 펠렌노르 전투에서의 수많은 죽음을 비롯한 인간들의 죽음에 대한 영적인 해석이 없고 오히려 복음으로 말미암지 않은 영생이 소개되고 있다. 게다가 아르곤의 요청에 의해 연합군에게 최종적인 승리를 가져다주는 ‘육신이 없는 강력한 사자(死者)들’까지도 등장하고 있다. 즉 앞서 언급하였던 완전한 ‘모호함의 전략’이 ‘죽음’에 대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명제 곧 죽음이후 영원한 시간을 어디서 보내게 될 것이냐에 대한 성경적 접근이 완전히 차단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반지의 제왕’의 세계관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며 죄로 인한 형벌은 영원한 죽음 곧 지옥불못임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롬3:10-12,23; 6:23; 계20-22장). 또한 죽음 이후에는 바로 심판이 있고 그 이후에는 구원의 기회가 없음을 명확히 선포하고 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가 단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만 하면 영생을 (은혜로) 받을 수 있다고 약속을 하셨다(롬6:23, 벧후3:9, 롬5:8, 요3:16, 롬10:9-10).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그러므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것을 네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니라.”(롬10:9-10) 13. 절대반지(The One Ring) 프로도의 집에 찾아온 마법사 간달프가 반지를 불 속에 내던졌는데도 반지는 뜨거워지지도 않고 녹지도 않는다. 다만 다음과 같이 새겨진 불의 글자가 드러난다. ‘모든 반지를 지배하고 모든 반지를 발견하는 것은 절대반지. 모든 반지를 불러 모아 암흑에 가두는 것은 절대 반지.’ 그렇다. 이 시구(詩句)대로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진정한 주인공은 ‘반지’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반지의 힘을 거부하지 못하는 존재들은 반지의 사슬에 묶이고 만다. 이는 모든 사건의 발단인 반지가 절대 권력의 상징이기 때문이다(비교: 창41:42, 에3:10,12; 8:2,8,10). 그런데 이러한 절대 반지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지배를 받아야 할 자들에 의해 결국 파괴가 되고 만다. 이는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양면성의 중심에 있다’는 철학자 바슐라르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절대반지가 죽음과 불멸, 권력과 복종, 선과 악의 이항대립 위에 놓여 있는 진정한 ‘양면성’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영국하면 왠지 음습한 느낌이 들지만 온도와 시간과 위치의 절대 기준이 있는 곳이 바로 영국이다. 즉 온도는 켈빈 경(William Thomson Kelvin)에 의한 절대온도 K(-273.16℃), 시간은 영국의 그리니치 세계 표준시, 경도 기준인 본초자오선도 그리니치를 기준으로 하고 있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절대의 기준들이 있는 나라 영국을 누구보다도 사랑하여 신화가 없는 영국인을 위해 ‘반지의 제왕’을 창작한 톨킨은 영국인을 위한 이 신화에서 결국 ‘절대’를 없애 버리고 말았다. 즉 절대자 하나님은 톨킨에게는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는도다.”(시14:1상) “참으로 사람은 최선의 상태에서도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 참으로 모든 사람은 헛된 모습 속에서 걷나니 참으로 그들은 헛되이 소동하나이다.”(시39:5하,6상) 14. 제왕(The Lord) ‘반지의 제왕’에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의 모습이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의견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그들은 회색의 마법사 간달프가 다리에서 발록과 싸우다 죽었지만 다시 백색의 마법사로 부활한 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미 살펴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마법을 금하신 장본인이시며 간달프와 달리 우리의 구원주(빌3:20)일 뿐 아니라 창조주(요1:3)와 심판주(롬14:12)로서 우리가 경배를 드려야 할 하나님이시다. 둘째로, 그들은 호빗인 프로도가 반지의 유혹과 싸우며 선을 행하는 것이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의 유혹에 대해 싸운 것과 같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완전히 틀린 이야기다. 프로도는 샘의 진실된 충언도 받아들이지 못했고 반지를 불구덩이에 던지기 직전 욕망의 포로가 되었던 죄인일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능히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고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셨다(마4:1-11, 히4:15). 셋째로, 그들은 기사 아라곤이 절대반지가 파괴되어 세상의 평화가 도래한 뒤 왕의 신분으로 돌아와 아르웬과 결혼하며 곤도르를 다스리는 것이 예수님의 재림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주님의 재림을 말씀하지 않는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무질서도가 날로 증가하는 ‘열역학 제2법칙’이 시작(창3:16-19)되면서 이 세상은 사탄의 다스림(satanocracy) 하에 놓이게 되었다(요12:31; 14:30; 16:11, 고후4:4, 엡2:2). 그래서 세상은 날로 악이 창궐하게 되지만 성도들은 대환난이 있기 전 공중들림을 받아 주님의 신부로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살전4:16,17, 계19:7-9). 그리고 나서 주님은 성도들과 함께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사탄을 내어 쫓으시고 이 땅을 회복시키시며 친히 성도들과 함께 다스리시는 신정(theocracy) 왕국을 이루시게 된다(롬8:17, 딤후2:12, 계5:10; 20:4,6). 15. 에필로그(Epilogue) 영국인들의 창의력(?)은 세계를 흔든다. 비틀스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적으로 선풍을 일으킨 TV 유아프로그램 ‘텔레토비’와 ‘트위니스’도 영국이 만들어냈다. 또 최근 출판계의 각종 기록을 갈아 치우고 있는 ‘해리 포터’도 영국의 여류 작가 조앤 롤링의 상상력이 빚어냈다. 그러나 이들 모두에 앞서 영국에는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이 있다. 톨킨이 ‘반지의 제왕’을 ‘신앙 여행에서 자란,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작품’이라고 고백했듯이 이제 ‘반지의 제왕’은 영국인을 위한 신화의 차원을 넘어서 21세기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전세계인들에게 하나의 ‘종교(Religion)’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자신을 드러낼 수 있고 인간의 관점에서 더 멋있게 보이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였지만 가인의 예배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했다(창4:3,5). 왜냐하면 가인의 예배는 아벨처럼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드리는 ‘믿음의 제사’가 아니라 죽은 ‘종교적 제사’였기 때문이다(히11:4; 히9:22; 요1:29). 사탄은 한 영혼이라도 더 지옥불못에 자기와 함께 들어가길 원하고 있다(마24:24, 25:41). 따라서 ‘믿음’을 변질시키기 위해 사탄은 ‘종교’라고 하는 인내천(人乃天)의 길들(many ways)을 우리에게 제시하며 무수한 영혼들을 믿음의 창시자(Author)요 완성자(Finisher)이시며 또한 길(Way)과 진리(Truth)와 생명(Life)되신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제 전세계인들이 ‘반지의 제왕’이란 ‘꾸며낸 이야기(fables)’에 열광하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이제 성령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셨으니”(딤전4:1)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어라. 너의 대적(對敵)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이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선생들을 쌓아 두고 또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낸 이야기들(fables)을 따를 것임이라.”(딤후4:3,4)
2009-05-08 15:45:25 | 관리자
1. 들머리 세계적인 과학전문지 사이언스(Science)는 2004년 2월 12일 인터넷판을 통해 서울대 황우석 교수와 문신용 교수 등 한국의 과학자들이 사람의 체세포와 난자를 이용해 인간배아 줄기세포를 만들어냈다고 보도했다(논제: Evidence of a Pluripotent Human Embryonic Stem Cell Line Derived from a Cloned Blastocyst). 이후 미국 뉴욕타임스, 영국 BBC, 프랑스 르 몽드 등 세계 주요 언론들도 우리나라 과학자들의 ‘인간 배아 복제’ 성공 소식을 앞다퉈 크게 보도했으며 아울러 외신들은 이 연구 결과에 대해 놀라운 과학적 업적이라는 찬사와 함께 인간 복제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면서 윤리적 논쟁이 가열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런데 오명 과기부 장관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황 교수의 인간 배아줄기세포 복제 성공은 노벨 과학상에 근접한 세계적인 업적”이라면서 “과학기술 한림원 등 학계를 중심으로 의견수렴을 거쳐 (황 교수가) 지원 대상자로 선정되면 ‘황우석 후원회’를 결성해, 별도로 후원금을 조성해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하였다.   그러자 참여연대, 한국여성민우회, 환경정의시민연대 등 10개 시민단체들은 성명서를 내고 “과학기술부는 황우석 교수를 노벨상 후보로 추천하기 위한 추진위원회 구성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과기부가 윤리적 논란이 많은 연구를 수행한 사람을 노벨상 후보로 추진하겠다는 것에 우려를 금할 수 없다”고 하였다. 즉 이들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인간 배아 복제를 금지하고 있으며 엄격한 제한 하에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노벨상 추진위를 구성한다는 것은 국제적 흐름에 어긋나므로 먼저 생명공학 연구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순서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국내외적으로 핫이슈가 되고 있는 ‘인간 배아 복제’는 어떠한 목적과 방법에 의해 진행된 것인지 또 어떠한 문제점들이 내재되어 있는지 제한된 지면을 통해 간략하게나마 살펴봄으로써 함께 이 시대를 진단해보도록 하자. 2. 왜 복제하려 하는가? 70년대와 80년대의 인기영화 ‘수퍼맨’의 주인공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화배우 크리스토퍼 리브는 이제 날기는커녕 걷지도 못하고 있다. 그러나 1995년 불의의 승마사고로 척추를 다쳐 숨조차 쉴 수 없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전신마비에 빠져 사경을 헤매던 그가 피눈물 나는 투병 생활을 한 지 7년 만에 오른쪽 팔목 및 왼쪽 손가락과 발가락을 기적적으로 움직이게 되었고 또 거의 몸 전체에서 따끔하게 찌르는 충격을 감지할 수도 있게 되었는데 최근에는 호흡기 없이 숨을 쉴 수 있도록 횡경막에 전극을 이식 받고나서 언젠가는 반드시 걸을 수 있을 것이란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한다. 즉 그는 ‘줄기세포’(stem cell)로 만든 신경세포를 이식함으로써 자신의 손상된 척추신경이  재생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인데 이제 한국 과학자들의 인간 배아줄기세포 복제 성공으로 말미암아 그의 꿈은 조만간 현실로 이뤄질 수 있으리라 전망이 된다. 1998년 10월 미국 위스콘신대 제임스 톰슨 박사와 존스 홉킨스대 존 기어하트 박사가 인간의 배아로부터 줄기세포를 배양하여 신경세포, 심장근육세포 등 다양한 종류의 세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이후 ‘이식의학’(transplantation medicine)이라는 새로운 질병치료 개념이 생겨났다. 즉 당뇨병, 파킨슨씨병, 골관절염 등과 같이 세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소멸되는 퇴행성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줄기세포를 이식하면 손상된 세포를 정상세포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질병 치료용 줄기세포를 얻기 위한 배아 복제는 인간 복제와 구별해 ‘치료용 복제’(therapeutic cloning)라 부르기도 한다. 이는 황우석 교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불교의 윤회(輪廻) 사상이 나의 연구의 철학적 배경이 아닌가 싶다”고 하면서 “여성의 난자를 이용해 복제 배아를 만들고, 이것으로 다른 환자의 난치병을 완치시킨다는 것이 생명을 이어가는 윤회의 완성일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인간 배아 복제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합목적성을 주장하고 있다. 3. 어떻게 복제하는가? 현재까지 줄기세포를 얻는 방법으로 냉동배아 줄기세포, 배아 생식세포, 성체 줄기세포, 그리고 복제 배아 줄기세포 등 크게 네 가지 방법이 시도되어 왔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불임 치료에서 남은 냉동 배아를 이용하는 것인데 이것은 해동과정에서 손상을 입을 수 있는데다 줄기세포를 이식하면 유전자가 맞지 않아 거부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점이 문제가 되어 왔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황 교수팀에서 했던 것과 같이 환자 자신의 체세포를 복제해 줄기세포를 얻는 방법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렇게 하면 배아가 환자 자신의 체세포로 만들어 졌기 때문에 여기서 얻은 줄기세포를 자신에게 이식하여도 면역거부 반응이 없어지게 된다. 황 교수팀이 시행한 배아 복제는 기본적으로 복제양 돌리를 만든 것과 동일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연구팀은 자원하는 여성 16명에게 난자가 배아 복제와 줄기세포 연구에 사용된다는 데 동의하는 서약서를 받고 호르몬을 주사해 보통 때보다 많은 난자를 생산하게 했다. 한 명당 한두 번씩 난자를 채취해 모두 242개의 난자를 얻은 후 이 난자에 체세포인 난구세포를 삽입하고 전기 충격을 가해 세포융합을 일으켰다. 연구팀은 세포융합이 완결된 배아 가운데 30개를 줄기세포를 얻을 수 있는 배반포기까지 배양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나서 줄기세포를 뽑아낼 만한 20개의 내부 세포 덩어리를 확보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한 개의 내부 세포 덩어리에서만 성공적으로 ‘줄기세포주(株)’를 확립했다. 즉 (세포주란 몇 차례 분열하면 죽는 보통의 세포와 달리 특수한 처리를 하여서 다른 세포로 분화되지 않고 영원히 분열하도록 만든 세포를 말하는데) 황 교수팀은 세계 최초로 복제 배아에서 줄기세포주를 확립했지만 이처럼 성공률은 매우 낮았던 것이다. 4. 무엇이 문제인가? 다시 말해 한 개의 줄기세포주를 얻기 위해 무려 242개의 난자가 파괴되고 소모되었던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16명의 여성들이 난자를 기증하기 위해서 자신의 난소가 가늘고 긴 바늘에 찔리는 고통뿐 아니라 갖가지 부작용을 당했을 수도 있었는데 이러한 사실이 언론에 잘 보도되지 않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전술한 바와 같이 난자를 많이 확보하기 위해 호르몬을 과다하게 투여할 수밖에 없는데 이로 인해 여성의 몸에는 많은 후유증이 발생할 수 있다. 즉 심할 경우에는 신속한 진전을 특징으로 하는 ‘난소과자극증후군’(Ovarian Hyperstimulation Syndrome)이 나타나 혈관 투과성이 증가되어 복강, 흉곽, 심낭막 등에서의 체액 삼출이 유발될 수 있다. 초기증상으로 중증의 골반통, 오심, 구토, 체중증가 등이 생기며 진전이 되면서 복통, 복부팽창, 구역, 구토, 설사 등의 소화기계 장애, 심한 난소 비대, 체중증가, 호흡곤란, 핍뇨, 혈액량 감소, 혈액농축, 전해질 불균형, 복수, 혈복강, 흉수, 급성 폐장애, 혈전증 등이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 배아 복제는 하나의 생명체일 수도 있는 배아를 파괴해야 한다는 문제도 있고 궁극적으로는 인간 복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엄청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선진국들에서는 인간의 난자를 이용한 연구를 기피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이에 대한 사회적 함의나 제도적 장치가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라엘리언마저도 기술력은 높지만 법률은 미비한 우리나라를 최적의 인간 복제 연구지역으로 손꼽기도 했다지 않는가. 아울러 황 교수가 지난 해 시민단체와 보건복지부 그리고 과학기술부가 8년간의 협의 끝에 탄생시키기로 한 생명윤리 기본법을 끝까지 거부했던 이유도 이제 그가 이번에 발표한 연구 성과를 보면 충분히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렇지만 스타 과학자임에도 너무나도 겸손하고 청빈한 황 교수는 2004년 3월호 과학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생명윤리법이 제정되던 상황에서 배아 복제를 시도한 데 대한 비판은 겸허하게 받겠다”고 하면서 “인간 복제에 대한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며 앞으로 일년 정도 모든 연구를 중단하고 사회 각계의 의견을 진지하게 청취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5. 복제 인간은 출현할 수 있는가? 엄밀히 말하면 ‘인간 배아 복제’는 ‘인간 복제’와 동의어이다. 왜냐하면 복제된 인간 배아를 여성의 자궁에 착상시키기만 하면 복제 아기가 탄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황 교수의 연구 성과가 나온 이후 복제 인간의 출현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질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물론 이번에 확립된 줄기세포는 남성의 체세포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여성용’이란 제한점이 있고 또 배반포기까지의 배아 복제 성공률은 높은 반면 줄기세포주를 확립한 비율이 낮은 점 등 더욱 연구가 필요한 부분도 있지만 인간 복제에 대한 기술적인 한계를 더 이상 거론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만약 세계 모든 나라에서 인간 배아 복제에 대한 연구가 사회적으로 또한 법적으로 완전히 금지된다고 하더라도 이를 어기고 복제를 시도해볼 과학자들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아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아울러 앞으로는 인간 복제의 우려를 씻기 위해 윤리적 논란이 큰 인간의 난자 대신에 인공 세포질을 만들어 체세포를 복제하려는 프로젝트도 황 교수에 의해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만약 그 프로젝트가 성공하여 난자 사용에 대한 윤리적 논쟁은 사라진다고 하여도 인간 복제 가능성마저 다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언젠가는 체세포의 유전자를 발생 초기로 돌려서 체세포 자체를 수정란 상태로 만들어 줄기 세포를 얻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는데 만약 이렇게 세포를 역분화(逆分化)시킬 정도로 생명공학이 발전될 경우에는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자궁내 성장 대신 인큐베이터를 이용하는 이차적인 인간 복제도 가능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나 있으며 구원받지 못한 인간의 욕망이란 항상 죄와 불의의 길로 향할 뿐이기 때문이다(약1:15; 롬3:10-18). 따라서 인간 복제에 대한 욕망 곧 인간의 영생에의 집착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생명나무가 존재하는 동안 에덴의 동산 동쪽에 그룹들(cherubims)과 사방으로 도는 불타는 칼을 두어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던 것이리라(창3:24). 6. 복제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언젠가 혹시라도 복제 인간이 우리 곁에 등장하였을 때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 것인가? 비록 인간 복제라는 비윤리적이며 또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거스르는 반성경적인 방법에 의해 태어난 복제 인간이지만 그들이 영혼(soul)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것인지 질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 하면 복제양 돌리가 괴물이 아니고 (새끼까지 낳을 정도로) 양이 분명했던 것처럼 복제 인간도 생물학적 측면에서 완전한 인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살아 있을 동안에는 결코 영혼(soul)과 육체를 나눌 수 없는 ‘전인적 존재’(holistic person)이므로 복제 인간도 혼(soul)적인 존재가 됨(becoming)이 예측될 수 있기 때문이다(창2:7). “사람이 살아 있는 혼(魂)이 되니라.”(and man became a living soul, 창2:7하, 이하 흠정역) 다시 말해 복제 인간이란 ‘무성생식의 방법으로 원본 인간과 동일한 유전자를 지닌 존재가 신생아의 상태로 태어난 것’으로서 쉽게 말하자면 ‘수십 년의 시간차를 두고 태어나는 일란성 쌍둥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제 인간은 원본 인간과 유전자만 같을 뿐 별개의 영혼(soul)을 소유한 별개의 인격(person)으로 성장할 것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복제 인간(soul)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인가? 물론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인간이 태어나게 된 과정의 정당성과 그 태어난 인간 자체에 대한 관계하심을 별개의 문제로 다루고 계신다. 하나님이 원치 않으셨던 인본적인 방법에 의해 태어난 이스마엘에게 하나님께서는 큰 민족을 이루도록 복을 주셨고 또한 할례의 언약에도 동참할 수 있도록 하셨다(창16:1-4,15; 17:20,23-26). 아울러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과 근친상간하여 태어나게 된 베레스나 다윗이 간통하고 남편인 우리야를 죽인 후 아내로 삼았던 밧세바와에게서 태어난 솔로몬의 경우에서 보듯 하나님께서는 출생과정과 상관없이 한 영혼(soul)과 관계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창3812-30; 마1:3; 삼하11:2-27; 12:24,25; 마1:6). 그렇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요3:6)이며 또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는”(요6:63) 것이다. 따라서 복제 인간도 복음을 올바로 전해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다면 구원을 받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마1:21; 요1:12; 요3:16; 롬10:13; 고전15:1-4). 왜냐 하면 그리스도의 보혈은 복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인간(soul)을 위해 흘려졌기 때문이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1:7하) 7. 마무리 구원받지 못한 모든 인간들에게 있어서 지고(至高)의 선(善)은 어떤 분야에서건 그들이 부인하는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하는 일일 것이다. 특히 창조의 클라이막스로 하나님께서 만드셨던 인간을 복제하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매력적인 아이템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설혹 인간을 복제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물질(세포)로부터 만들어진 간접적인 창조(mediate creation; 요2:1-11; 요6:5-14; 요9:1-41; 막7:31-37; 요5:1-9; 시51:10,17)에 불과할 뿐이다. 인간 복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인간을 ‘무(無)에서’(ex nihilo; out of nothing) 만들어내신 직접적인 창조(immediate creation; 창1:1; 요1:1,3; 골1:16; 창1:2)에는 결코 비견될 수 없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행해지는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모든 행위들이 궁극적으로 심판으로 이어짐을 인류 역사의 태동에서부터 계속 확인할 수 있다(창3:6,19; 11:4-9). 따라서 이제 ‘인간 배아 복제’를 통해 창조자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하는 생명공학의 결국이 어떠할 것인지 우리는 확실히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전체 일의 결론을 들을지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그 까닭은 이것이 사람의 온전한 의무이기 때문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은밀한 일과 더불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모든 일을 심판하실 것임이라.”(전12:13,14) “보라,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시느니라.”(약5:9하)
2009-05-08 15:44:40 | 관리자
1. 들머리 “다수의 유력한 보험회사와 항공회사들이 비행기 추락사고 예방에 점성술을 활용하는 방법을 비밀리에 연구 중인 것을 알고 계십니까? 천체 관측 자료를 활용하여 프로그램을 입력해 넣은 컴퓨터를 통해 수 개월, 심지어는 수 년 앞서 지진을 예보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러한 일들은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는 점성술 분야에서 두 개의 중요한 개척 분야에 불과합니다만 당신은 그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도 모르고 계시지는 않나요?” “왜 그렇습니까? 전통적인 신념들에 매인 어떤 ‘과학’ 이론들은 아직도 점성술을 ‘헛소리’가 아닌 그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점성술이 전적으로 이성적이며, 확실한 사실에 기초하고 있고, 인간이 알고 있는 다른 어떤 과학만큼이나 명확하다는, 점성술의 타당성에 관한 증거-이제는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 설득력을 갖게 된 증거-를 무시합니다. 전통적인 신념들에 질문을 던지고 그것들을 점검하며 다시 생각해 보지 않으시렵니까?" 이상은 점성술, 주술, 예언 등에 관한 온갖 종류의 책들을 팔고 있는 미국의 ‘유니버스 북 클럽’ 광고의 문구들이다. 그런데 연세대학교에서는 올해 2학기부터 신설된 ‘교양통계학’ 강의에서 통계학과 이학배 교수에 의해 사주, 복권 등 여러 흥미로운 아이템들과 함께 점성술이 강의될 예정이라고 하니 앞서 소개된 점성술 광고 문구 속에 들어 있는 진술들에는 오늘을 살아가는 미국인들뿐 아니라 반미를 외치는 한국의 젊은이들을 포함한 온 세계인의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첨단 테크놀러지의 21세기에 들어서도 이처럼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점성술에 대해 그 진위를 가려보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본분일 것이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점성술의 유래와 이에 대한 뉴에이저들의 견해를 먼저 기술한 후 과학적 관점에서와 성경적 관점에서 이를 비평하고 이어서 점성술의 기본이 되는 열두 별자리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러브 스토리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2. 별자리와 점성술의 유래는? 동양의 고대 별자리는 서양의 것과는 계통을 달리한다고 하지만 동양이나 서양을 막론하고 지금의 점성술이나 별점 등은 고대 바빌론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즉 최초로 하늘을 열둘로 나누어서 체계적으로 12궁좌와 신점을 발전시킨 것은 고대의 바빌로니아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고대에는 천문학적 관점에서 하늘을 관측하고 주기나 계절을 파악하는 미래학적인 측면에서 점성학이 발달하였지만 점점 자신의 미래에 벌어질 일이나 신탁을 받는 일과 관련해서 왕과 귀족 등에게 점성술이 널리 퍼지면서 일반인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별자리는 본래 약 5,000년 전 바빌로니아 지역에 해당하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살던 사람들이 양떼를 지키면서 밤하늘의 별들의 형태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BC 3000년경에 만든 이 지역의 표석에는 양(Aries), 황소(Taurus), 쌍둥이(Gemini), 게(Cancer), 사자(Leo), 처녀(Virgo), 천칭(Libra), 전갈(Scorpio), 궁수(Sagittarius), 염소(Capricorn), 물병(Aquarius), 물고기(Pisces) 자리 등 태양과 행성이 지나는 길목인 황도(黃道)를 따라 배치된 12개의 별자리 즉 황도 12궁을 포함한 20여 개의 별자리가 기록되어 있다. 그 후 바빌론과 이집트의 천문학은 그리스로 전해져서 별자리 이름에 그리스 신화 속의 신과 영웅, 동물들의 이름이 더해졌다. 케페우스, 카시오페이아, 안드로메다, 페르세우스, 큰 곰, 작은 곰 등의 별자리가 그러한 것들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는 별자리 이름이 곳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고 그 경계도 학자마다 달라서 자주 혼동이 생기고 불편한 일이 많았다. 그래서 1922년 국제천문연맹(IAU) 총회는 하늘 전체를 88개의 별자리로 나누고 황도를 따라서 12개, 북반구 하늘에 28개, 남반구 하늘에 48개의 별자리를 각각 확정하고, 종래 알려진 별자리의 주요 별이 바뀌지 않는 범위에서 천구상의 적경(赤經)과 적위(赤緯)에 평행인 선으로 경계를 정하였다. 이것이 현재 쓰이고 있는 별자리이다. 3. 뉴에이저들의 견해는? 현재 서양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점성술은 ‘호로스코프(horoscope)’라 하는데 이것은 ‘모든 시간을 반영하는 하늘의 거울’이라는 뜻이며 천재와 국가적 현상을 알아내는 ‘천변 점성술’과 달리 개인의 운세를 점치는 숙명 점성술이다. 즉 사람이 태어난 날짜와 시간을 12개로 나누어서 태양, 달, 5혹성의 위치 관계를 적용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일례로 캐롤 라이터(Carrol Righter)가 정리한 12좌 중 필자의 출생일에 해당하는 궁수좌(Sagittarius)의 성격은 “모든 것이 그들에게 흥미를 준다. 호기심이 많다. 참을성이 적고 배우는 데 열심이다. 야외 활동, 스포츠 등을 즐기고 변호사나 작가가 적격이다. 어울리는 좌는 산양좌, 사자좌이다.”로 표현되고 있다. 이처럼 어느 ‘자리’에 해당되는 날에 태어났는가 하는 것이 개인이 갖고 있는 성격의 특질과 인품을 설명해 준다고 하기 때문에 미국에서만도 매일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단지 자신의 별자리 운세를 읽어 보기 위해 신문을 산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다수가 별자리 운세에서 제공하는 예측과 조언에 따라 하루 활동을 계획하고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아울러 뉴에이저(New Ager) 점성술사들은 21세기는 시대적 관점에서 볼 때 ‘물병자리 시대(Age of Aquarius)’로서 표현과 자유의 시기 또는 사랑과 평화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이들은 신구약 성경 이외에 기독교 진리의 정수를 전하고 있는 제3의 경전으로 ‘보병궁(寶甁宮, Aquarius) 복음서’를 제시하기도 한다. 즉 우리의 태양계는 멀리 떨어져 있는 또 다른 중심 태양의 주위를 회전하고 있는데 그 회전 궤도인 황도대(黃道帶)는 12궁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태양계가 12궁의 한 자리를 지나가는 데에는 2,100년이 조금 넘게 걸린다고 한다. 이러한 시대 구분에 따르면 6,000년 전 아담이 살던 시대는 태양이 금우궁(金牛宮, Taurus)에 들어갔을 때이며, 4,000여 년 전의 아브라함의 시대는 백양궁(白羊宮, Aries) 시대이고, 예수님이 탄생한 때는 쌍어궁(雙魚宮, Pisces) 시대이며, 지금은 쌍어궁 시대를 마감하고 보병궁(寶甁宮, Aquarius) 시대로 들어가려고 하는 대전환기라고 한다. 그래서 ‘보병궁 복음서’는 미래 보병궁 시대의 복음서라는 뜻이며 이에 반해 구약과 신약 성서는 과거 시대(금우궁 및 쌍어궁 시대)의 복음서라는 것이다. 이 보병궁 복음서는 천상 영계의 기록인 ‘아카샤(Akasha)-우주심(宇宙心) 기록’을 계시받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라고 하며 성경에 빠져 있는 예수님의 12세부터 30세까지의 성장과정과 구도과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예수님이 전하신 ‘가르침의 진수(?)’를 알 수 있다고 한다. 4. 점성술은 과학적인가? 그러나 점성술은 결코 과학적이지 않다. 천문학은 태양계와 기타 천체들과 그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학문으로서 분명 과학의 범주에 속하지만 이에 반해 점성술은 태양이나 다른 천체에 신성을 부여하는 미신 신앙일 뿐이다. 그 몇 가지 이유 중 첫 번째는 현재의 과학인 천문학이 태양 중심설(Heliocentric theory)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지구 중심설(Geocentric theory)에 근거한 점성술은 그 정의상 천문학적인 의미가 부여될 수 없다. 그리고 최근 들어 뉴에이저들이 영적으로 업그레이드(?) 시킨 반성경적인 ‘보병궁(寶甁宮, Aquarius)의 새 시대(New Age)’ 주장은 고전적인 점성술과 달리 태양 중심설을 표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도 객관적으로는 전혀 입증이 되지 않은 내용일 뿐이다. 물론 성경적으로는 지구 중심설(Geocentric theory)이 타당하며 또 이에 대한 과학적 모델도 제시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를 유보하고자 한다. (지구 중심설에 대한 성경적이며 과학적인 견해에 대해 알고 싶으면 천문학자 바우(Gerardus D. Bouw) 박사의 책 ‘Geocentricity'를 참조하기 바란다.) 둘째, 쌍둥이의 출생 문제이다. 쌍둥이는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그들의 별자리는 같다. 그렇다면 점성가들의 논리대로 동일한 운명을 타고나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동일한 시간에 태어난 두 사람의 삶과 운명이 전혀 다름을 많이 보고 듣고 경험한다. 셋째,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 위치상의 문제이다. 점성술은 적도 부근에 위치한 지역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12궁이 나타나지 않는 위도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지 못했다. 위도 66도 이상에 사는 사람들은 별자리에 의해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 이 사실을 점성가들은 고려하지 못했다. 넷째, 과학적 검증의 부재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과학적 가치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출생 시기는 365일 골고루 분포되어 있고 그들의 출생 장소도 여러 도처에 분포되어 있다. 12궁이 불리하게도 유리하게도 작용하지 않는다. 또 비과학적이라는 것은 별자리 변화에서 나타난다. 하늘에서 별자리가 동일한 형태로 반복되는 법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이미 알려져 있다. 따라서 점성술의 해석 즉 별자리를 가지고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은 허망하기 짝이 없는 발상일 뿐이다. 5. 성경에 나타난 점성술은? 마법과 점성술이 바빌론 사람들의 무지로 인해 성행될 때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제 너는 젊어서부터 힘써 행하던 마법과 수많은 마술을 가지고 맞서 보라. 혹시라도 네가 유익을 얻을 수 있거든 혹시라도 네가 이길 수 있거든 그리 할지니라. 네가 수많은 계략으로 인하여 피곤하게 되었도다. 이제 별을 살피는 자들과 별을 바라보는 자들과 달마다 예언하는 자들로 하여금 일어나서 네게 임할 이 일들로부터 너를 구원하게 하여 보라. 보라, 그들은 지푸라기같이 되어 불에 타리니 그 불꽃의 위력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지 못하리라. 그런즉 옆에서 몸을 따뜻하게 할 숯불도 남지 아니하고 앞에 앉을 만한 불도 남지 아니하니라.” (사47:12-14, 이하 흠정역) 또한 유대인들이 점성술과 우상숭배로 타락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진노하셨다. “또 그들이 주 자기들의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들을 위하여 부어 만든 형상들 곧 송아지 두 마리를 만들고 또 작은 숲을 만들고 하늘의 모든 천체에게 경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자기 아들딸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점치는 일과 마술을 행하고 자기 자신을 팔아 주의 눈 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분의 분노를 일으키니라.” (왕하17:16,17)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점성술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게 될까 염려하고 계신다. “또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해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곧 하늘의 모든 천체를 보고 끌려가 그것들에게 경배하며 섬길까 하나니”(신4:19상) 아울러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점성술은 결코 놀랄 만한 것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이교도들의 길을 배우지 말며 하늘의 표적들에 놀라지 말라. 이는 이교도들이 그것들에 놀라기 때문이니라.” (렘10:2) 그렇지만 점성술에 빠져서 자신들의 운명이 별을 만드신 하나님보다도 그 별 자체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들도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고 계신다(딤전2:4).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된 소식을 창세로부터 분명히 보이시며 그 만드신 것들을 통해 곧 별자리로써도 복음을 깨달아 알 수 있도록 해 놓으셨다(시147:4; 롬1:19,20). 6. 하나님이 별자리에 써 놓으신 것은? 1) 구원자 ★ 처녀자리: 처녀자리(Virgo)는 코마자리(Coma,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 바라던 자), 켄타우로스자리(Centaurus, 반은 인간 반은 말), 목동자리(Bootes, 목동 또는 추수꾼) 등과 연관되어 있다. 여자의 후손(Virgo, 창3:15; 사7:14; 마1:20,21)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본성(Centaurus)을 지니신 바라던 자(Coma, 학2:7)이시다. 그는 사람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시다(Centaurus). 그는 목동이자 추수하는 자(Bootes, 사40:11; 요10:14, 벧전2:25; 계14:14,15)이시다. ★ 천칭자리: 천칭자리(Libra, 저울)는 남십자성자리(Crux, 십자가), 빅팀자리(Victima, 죽은 동물), 북쪽 왕관자리(Corona, 면류관) 등과 연관되어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값을 지불하셨다. 그는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Victim, 요1:29; 히9:22)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Crux, 사53:8; 단9:26) 부활 승천하셔서 존귀의 왕관(Corona, 계19:12)을 쓰고 계신다. 그러자 무슨 일이 생겼는가? 한 때 부족한 값이었던 공의의 저울(Libra, 단5:27)이 우리의 죄를 가리는 값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았다. ★ 전갈자리: 전갈자리(Scorpio, 사탄의 상징)는 오피우쿠스자리(Ophiuchus, 뱀을 잡은 자), 헤라클레스자리(Hercules, 강한 사람), 뱀자리(Serpens) 등과 연관되어 있다. 십자가 위에서 사탄(Scorpio, 창3:15; 고전2:8)은 죄의 독으로 예수님을 쏘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Ophiuchus, 고전15:54-57)께서는 그(Serpens, 히2:14,15)를 깔아뭉개시고 우리를 위하여 승리하셨다(Hercules, 시91:13; 마28:18). 이제 우리는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영원히 사망의 쏘는 것을 체험할 필요가 결코 없다. ★ 사수자리: 사수자리(Sagittarius, 반은 인간 반은 말)는 수금자리(Lyra), 아라자리(Ara, 장례식 화장용 장작더미), 용자리(Draco) 등과 연관되어 있다. 사람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난 사수(Sagittarius, 계6:2)는 자기 백성들을 자기의 것으로 요구하기 위하여 또 다시 이 땅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의 신부인 교회를 데려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Lyra, 시22:3) 때 나타나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크리스천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영원한 불못(Ara, 계20:10)에 던져질 용(Draco, 사27:1)의 비참한 미래를 본다. 2) 백성들 ★ 염소자리: 염소자리(Capricornus)는 화살자리(Sagitta), 독수리자리(Aquila), 돌고래자리(Delphinus) 등과 연관되어 있다. 예수님의 대속(Capricornus, 레9:3; 10:16; 16:7-10)은 새로운 교회를 낳는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과 구별되어 온 나라에 대한 제사장으로서 빛을 발한다. 하나님의 말씀(Sagitta, 왕하13:14-17)을 고수할 때 크리스천들에게 구원과 승리가 주어진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Aquila, 사53:10)가 사탄의 권세를 이기셨다. 따라서 크리스천들은 진실로 그의 풍성한 생명(Delphinus, 계1:5,6)을 체험한다. ★ 물병자리: 물병자리(Aquaris, 물을 쏟아 붓는 사람)는 피시스 아우스트랄리스자리(Piscis Australis, 남쪽의 물고기, 목마른 물고기), 페가수스자리(Pegasus, 날개 달린 말, 되돌아오는 자), 백조자리(Cygnus) 등과 연관되어 있다. 예수님(Aquaris, 요4:13,14; 7:38, 고전10:1-4)께서 아버지에게로 승천하신 후에 위로자 즉 자신의 성령을 우리들(Piscis Australis, 요7:37-39)에게 보내 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이 ‘부어 주심’ 가운데 나타나시며 곧 자신의 교회를 모으실 것이다(Pegasus, Cygnus, 고전15:51). 성령을 마시고 권능으로 충만해진 크리스천들은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이기는 자가 된다. ★ 물고기자리: 물고기자리(Pisces, 두 마리의 물고기)는 케페우스자리(Cepheus, 왕), 안드로메다자리(Andromeda, 여인, 쇠사슬에 묶인 자), 띠(Band) 등과 연관되어 있다. 어린 양(Cepheus, 욥19:25; 시19:14; 사44:6)은 그 손에 두 개의 교회들(Pisces, 마13:52)을 잡고(Band, 사41:10; 요15:5) 있다. 즉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이다. 여기서 신약 교회는 전통과 속박에서 벗어나 성령 안에서 행한다. 비록 세상에게는 인기가 없을지라도 마귀는 교회(Andromeda, 마16:17,18)를 억압할 수 없다. ★ 양자리: 양자리(Aries, 수양)는 카시오페아자리(Cassiopeia, 여인), 고래자리(Cetus, 바다괴물), 페르세우스자리(Perseus, 전사, 영웅) 등과 연관되어 있다. 파괴하는 자(Perseus)로 묘사되어진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고 사탄(Cetus)의 권세를 깨뜨리기 위하여 오셨다(사27:1; 눅10:19). 오랫동안 기다리던 그분의 재림 뒤에는 어린 양(Aries)과 그 신부(Cassiopeia)의 혼인 잔치가 뒤따른다(계9:7). 3)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획 ★ 황소자리: 황소자리(Taurus)는 오리온자리(Orion, 사냥꾼, 빛으로 나아오는 자), 에리다누스자리(Eridanus, 강), 아우리가자리(Auriga, 목자) 등과 연관되어 있다. 예수님(Taurus, 시92:10; 민32:22; Orion, 마24:27)께서는 성도들과 함께 영광 중에 재림하셔서 사탄에게 하나님의 진노(Eridanus, 유황불 시내, 사31:33; 단7:10)를 퍼부으신다.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자기 양떼를 보호하시고 돌보아 주시는 선한 목자(Auriga, 요10:14)이시다. ★ 쌍둥이자리: 쌍둥이자리(Gemini)는 토끼자리(Lepus, 오는 자의 적), 큰 개자리(Canis Major, 왕), 작은 개자리(Canis Minor) 등과 연관되어 있다. 예수님과 교회가 하나(Gemini, 계3:21)로 나타나고 사탄(Lepus)은 도망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Canis Major, 사9:6)과 또 그 몸의 모든 지체들(Canis Minor, 계14:4)이 결합되어졌을 때 생기게 되는 권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게자리: 게자리(Cancer, 안식이 확보됨)는 작은 곰자리(Ursa Minor, 양의 우리), 큰 곰자리(Ursa Major, 양떼 쉼터), 아르고 내이비스자리(Argo Navis, 배) 등과 연관되어 있다.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처럼 되기 위하여 자기의 육적인 것을 벗어버리는 갑각류(Cancer)로 상징된다. 그들은 배(Argo Navis, 벧전3:20,21)를 타고 예수님 안에서 안식(Cancer, 히4:3-5)할 수 있는 안전한 항구(Ursa Minor, Ursa Major, 요14:1-3)로 인도된다. 또한 유대인들도 양무리로 되돌아온다(엡2:14). ★ 사자자리: 사자자리(Leo)는 물뱀자리(Hydra), 컵자리(Crater), 까마귀자리(Corvus) 등과 연관되어 있다. 예수님은 수천 년 전에 예언되어진 유다 지파의 사자(Leo, 창49:8,9; 호13:7,8; 계5:5)를 상징한다. 하나님의 진노(Crater, 시11:6; 75:8)가 사탄(Hydra, 시91:13)에게 쏟아질 준비를 하고 있다. 하나님의 징벌의 새(Corvus, 잠30:17; 삼상17:46; 계19:17,18)가 그 일을 완수할 준비를 하고 있다. 7. 마무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자신의 완전한 사랑 이야기를 창세전부터 별들 가운데 기록해 두셨다(시147:4; 계13:8). 그러나 사탄은 별들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알지 못하도록 점성술을 사용하여 복음을 가려오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탄과의 게임에서 이길 수 있다. 특히 하늘을 쳐다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진리를 거듭 확인하면서 더욱 힘을 얻을 수 있다. 이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별들을 하늘의 징조로 새겨 두셨는데 그 별들은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 주고 있다.” 는 그 복된 러브 스토리를 전해 주도록 하자.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2009-05-08 15:44:04 | 관리자
1.들머리 지난달 대구에서 열렸던 2003년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200명의 북한선수단과 함께 310명의 ‘미녀 응원단’이 참가했었다. 지난해 부산아시안게임 때 화제를 모았던 미녀 응원단에 이어 이번에도 이 미녀 응원단의 활약상(?)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부산 아시안게임 당시 북한의 미녀 응원단은 자연미 넘치는 아름다움으로 인기를 독차지하면서 전국에 북한 신드롬을 일으켰었는데 이번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도 북의 미녀 응원단은 무엇보다도 젊음과 빼어난 미모를 앞세워 경기장마다 '구름관중'을 몰고 다녔다. 북한 선수들이 출전하는 경기장에는 이 미녀 응원단을 성원하는 시민들의 함성이 끊이지 않았고 인터넷에는 미녀 응원단에 대한 팬클럽이 수십 개 생겨날 정도로 이 여인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러나 폐막을 사흘 앞둔 8월 28일 이들은 도로변에 설치된 김정일 사진이 새겨진 플래카드가 비에 적셔진 것을 발견하고는 운전기사의 발을 밟아 차를 세우도록 한 후 플래카드를 떼어내면서 눈물까지 흘렸고 또 이를 취재하던 지방기자의 카메라까지 빼앗는 소동도 벌였다. 그리고 9월 1일 이들은 12박 13일의 대구체류를 마감하고 그들이 갈망하는 장군님 품으로 돌아가 버렸다. 174개국 7,000여명이 참가해 사상 최대규모로 치러진 이번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우리나라는 금메달 25개, 은메달 11개, 동메달 15개를 따내 역대 최고성적인 3위를 기록했는데 이러한 경기결과에 대해 대부분의 국민들은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쉬이 잊어버리겠지만 이 미녀 응원단의 활약상은 오랜 기간 인구에 회자되면서 우리네 정서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남북뿐 아니라 남남의 갈등도 점점 심화되면서 날로 한반도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오히려 이처럼 민족적 스타로 급부상하게 된 이 미녀 응원단에 대해 성경적 조명을 해봄으로 영적 각성의 유익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 이제 그들이 지니고 있는 몇 가지 속성들을 중심으로 그 작용기전과 실체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미녀 2003년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첫 날 북한이 남자배구에서 덴마크와 대전을 할 때 등장한 ‘미녀 응원단’은 응원 구호들과 함께 노래도 섞어가며 대구체육관 7,000명을 압도하는 응원모습을 보였다. 그 가운데서 리더 역을 보여준 김은복(金恩福)씨(20세)는 중고생들에게 '예쁜 누나'로 어필되어 하룻밤 사이에 싸인 공세에 시달리는 스타가 되었다. 국내 유명한 포털사이트에 개설된 30여개의 북한응원단 관련 인터넷 카페 중 20여개가 북한응원단의 사진과 동영상, 정보 등을 올려놓은 팬클럽 카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북한 미녀 응원단 카페’의 경우 개설 사흘만에 회원수 200명을 넘어서기도 했었다고 한다. 이십대의 한 남성 네티즌은 “응원단 지휘자 김은복씨의 주소라도 알 수 있을까 해서 가입했다”며 “극성팬들은 자기가 찍은 사진을 직접 올리기도 한다”고 말했고 아이디가 ‘새벽’이라는 한 네티즌은 “가능하다면 매일같이 응원단 언니들 어깨도 주물러주고 도시락도 싸주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었다. 이처럼 미녀 응원단의 신선한 몸동작과 구호는 ‘남남북녀’를 그리는 뭇 총각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등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만일 이 북한 응원단이 평범한 외모의 여성들로만 구성이 되었었다면 우리들의 관심이 과연 어떠했을지 한 번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이제 우리는 미녀 응원단을 통해 드러난 우리의 외모지상주의적 취향과 평가기준에 대해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너희가 은밀히 사람들을 외모로 취할진대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를 책망하시리니”(욥13:10, 이하 흠정역)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너희가 성경에 따라,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이루면 잘 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의 외모에 관심을 두면 죄를 범하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확정하리라.”(약2:1,8,9)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심이라.(For there is no respect of persons with God.)”(롬2:11) 3. 언론 이 미녀 응원단이 이처럼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참가한 어떠한 유명 선수들보다 열광적 환호를 받게 된 이유는 누가 무어라 해도 우리나라 언론의 공(功)임을 부인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톡톡히 재미를 봤던 북한이 올해에도 잘 훈련된 미인 여성들만을 뽑아 응원단을 파견한 것은 그렇다 치고 우리 언론들은 이들을 ‘북한 응원단’ 내지는 ‘여성응원단’ 정도로만 칭하여도 될 것을 앞 다투어 ‘미녀 응원단’ 이란 타이틀을 공식적(?)으로 계속 사용하면서 대회 기간 내내 그 중심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미인이라고 칭찬하는 것이, 그래서 북에서 온 손님들의 기분을 좋게 해준다는 것이 남북화해에 기여할 수 있다는 해괴한 논리를 제외하면 이러한 언론의 보도자세는 앞서 언급된 외모지상주의 또는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세계관에 다름이 아니다. 오죽하면 외신들이 북한 응원단만 주최국 언론의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다른 나라 선수들은 외면을 받고 있다며 우리 언론의 비이성적 보도행태를 비판하기까지 하였을까. 또한 다친 몸으로 목발을 짚고서 그저 북한 어린이들의 사진을 들고 있었을 뿐이었던 플러첸씨를 갑자기 각목으로 쳐서 쓰러트린 북한 기자(?)나 그 일방적 폭력을 ‘몸싸움’이라고 보도하는 한국 기자들이나 가치중립적이며 진실만을 보도하여야 할 언론 본래의 사명을 잃어버리기는 매 한 가지였다. 이처럼 언론으로부터 물리적 폭력까지도 당한 후 플러첸씨가 한 다음과 같은 일갈은 우리 언론의 현주소가 어떠한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당신은 북한의 ‘미녀 응원단’의 흐트러짐 없는 행동과 그 미소를 보았는가? 나는 나치하 독일에서 열렸던 베를린올림픽을 떠올렸다. 지금 이 시간에도 굶고 학대받는 북한 어린이들이 죽어나가고 있는데, 한국 언론들과 한국인들은 모두 저 작위적인 웃음의 응원단에만 집중하고 박수를 보내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 이제 우리 언론들은 인간적 약점도 있고 실수도 할 수 있는 어느 인권운동가의 말도 들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회개하여야 할 것이다. “너는 거짓 소문(false report)을 퍼뜨리지 말며 사악한 자와 손을 잡고 불의한 증인(unrighteous witness)이 되지 말라.”(출23:1) “거짓 증인(false witness)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잠19:5) 4. 기쁨조 18세에서 20세 사이의 여대생으로 구성된 북한의 미녀 응원단들은 대회경기장에서 떨어진 은행의 연수원에 사실상 격리된 상태로 일반 한국인과는 접촉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들에게는 '보안요원' 36명이 동행하였고 또 경찰관들도 70명이 배치되어 일반인들과의 만남이 거의 불가능하였는데 심지어 숙소 로비와 방에 설치돼 있던 TV도 철거되어서 한국의 진짜 모습은 경험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들 미녀 응원단은 대회폐막 3일전 중앙고속도로 예천 나들목 진입로 부근을 지나가다 김정일 사진이 새겨진 플래카드가 지상에서 너무 낮게 걸려 있는데다 비를 맞도록 방치돼 있는 것을 보자 운전기사의 발을 밟아 차를 세우도록 했다. 그리고 일단의 북녀 응원단은 플래카드를 떼어내면서 눈물까지 흘렸으며 이를 취재하던 지방기자의 카메라까지 빼앗는 소동도 벌였다. 이는 북한 주민들이 평소 매일 암송해야 하는 ‘유일사상 10대 원칙’ 중 ‘경애하는 수령의 초상화, 초상화를 모신 출판물…들을 정중히 모시고 다루며 철저히 보위해야 한다’는 규정에 의해 조건반사처럼 튀어나오게 된 행동이었을 것이다. 또 북한이 폐막 하루 전 여자 하프마라톤에서 아깝게 금메달을 놓치자 북측 응원단은 모두 일어서서 선수들과 함께 '불후의 고전적 명작'이라고 평하는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이라는 노래를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북두칠성 저 멀리 별은 밝은데 / 아버지 장군님은 어데 계실까 / 창문가에 불이 밝은 최고사령부 / 장군님 계신 곳은 그 어데일까 / 따사로운 그 품이 그립습니다” 그리고는 9월 1일, 이들은 이 노랫말처럼 “장군님의 품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습네다”라고 말하며 북한으로 돌아갔다. 그렇다. 이제 이 미녀 응원단의 실체는 분명해졌다. 이들은 오직 장군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존재함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 ‘기쁨조’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쁨조는  페르시아(Persia)와 메대(Media)라는 대제국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구약성경에서도 발견이 된다. 인도에서부터 이디오피아에 이르기까지 백스물일곱 지방을 통치한 아하수에로(Ahasuerus) 왕은 왕을 기쁘게 하는 처녀를 택하시라는 신하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왕국의 모든 지방에서 아리따운 처녀들을 다 수산 궁으로 함께 모으고 여인들의 집으로 데려다가 열두 달 동안 몸을 정결하게 한 후 자기에게 나아오게 하였었다(에1:1, 2:2-4, 12-14). 즉 이처럼 시대를 초월하여 세상의 권력자는 늘 우리에게 자기들을 위한 기쁨조가 되기를 요구해 오고 있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이제 곧 나타날 이 세상 최후의 권세자 적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모든 자들에게 역사 이래 가장 철저한 기쁨조가 되기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계13:8). 그러할 때 당신은 스물네 장로가 자기들의 왕관을 하나님의 왕좌 앞에 던지며 고백하였던 진리의 말씀을 꼭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오 주여, 주는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시오니 이는 주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음이요, 또 모든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음이니이다.”(계4:11) 5. 비밀병기 8월 23일 일본 산께이신문은 “북한 응원단 의혹의 미소로 한국을 뒤흔든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고 미국의 뉴욕타임스도 같은 날 보도에서 북한측이 응원단을 핵문제와 대남카드에 대한 신무기로 활용하고 있다(North Korea Unleashes a New Weapon: Cheerleaders)고 지적하면서 우리가 북한의 전략에 말려들고 있다는 뉘앙스를 시사했다. 다음은 뉴욕타임스 기사를 발췌 요약한 것이다. <한국이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에 관하여 미국과 어깨를 맞대고 회담을 하기 바로 며칠 전인 지금, 북한 선수들과 응원단들이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참가하면서 한국의 텔레비전은 북한열풍에 빠져 있다. “우리는 하나다, 우리는 하나다” 라며 한 텔레비전 방송은 수백 명의 북한과 한국의 선수들이 하얀 ‘통일기’를 흔들며 함께 행진하는 것을 보도하였다. 북한의 응원단은 정치적으로 미소를 짓는다(The cheerleaders dispense their smiles politically). 목요일 밤의 개회식에서 그들은 미국과 일본 선수들이 도착하자 환호하던 것을 멈추었다. 북한의 미인계는 북한이 한국,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과 수요일 베이징에서 핵무기프로그램에 대한 회담을 준비하면서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인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에 맞추어, 수요일 북한과 한국의 올림픽 고위관리들은 2004 아테네 하계 올림픽에 단일팀을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의 메시지는 북한과 한국이 하나라는 것”이라고 한국계 미국인 인권운동가인 신동철 목사는 말했다. “북한이 암시하는 것은, ‘우리는 우리가 개발하는 핵무기로 한국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렇다. 북한은 결코 적화통일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단지 미녀 응원단과 같은 미인계를 써서 그 감춰진 발톱을 숨기려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이제 미녀 응원단이든 들릴라(Delilah, 삿16장)든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파괴시킬 수 있는 사탄의 비밀병기 곧 미인계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해보도록 하자. “이는 낯선 여자의 입술이 벌집같이 꿀을 떨어뜨리며 그녀의 입이 기름보다 미끄럽기 때문이라. 그러나 그녀의 마지막은 쑥같이 쓰고 양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그녀의 발은 사망으로 내려가고 그녀의 걸음은 지옥에 굳게 서 있느니라. 그녀의 길들은 움직이므로 네가 생명의 행로를 곰곰이 생각할 수 없나니 그러므로 네가 능히 그 길들을 알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오 자녀들아, 너희는 이제 내 말을 듣고 내 입의 말들에서 떠나지 말라. 네 길을 그녀에게서 멀리 옮기라. 그녀의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잠5:3-8)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희 대적(對敵)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하라.”(벧전5:8,9상) 6. 응원 지난해 부산 아시안 게임이나 이번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 모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응원구호는 ‘우리는 하나다’였다. 경기장마다 남북이 외치는 ‘우리는 하나다’라는 함성이 가득했는데 북의 미녀 응원단이 ‘우리는’을 선창하면 관중들은 ‘하나다’를 함께 연호하였다. 북측이 ‘우리 민족끼리’ 하면 ‘조국통일’이라는 화답이 뒤따랐다. 그런데 분단의 비애와 통일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는 이 ‘우리는 하나다’라는 구호 속에는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도대체 누구와 손잡고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를 자문해 보면 답이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곧 세계 최악의 불량국가 김정일 정권이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평화시임에도 삼백만 이상의 인민을 굶겨 죽이고, 세계 도처에서 마약을 판매하거나 위조지폐를 만들며, 각종 무기류를 테러조직들에게 판매하는 이런 상대를 단지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감싸 안고 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미녀 응원단의 ‘우리는 하나다’란 응원 구호는 너무나도 친숙하게 우리 국민 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그리하여 이 구호가 계속 우리의 청신경을 자극하게 된다면 2004년 아테네올림픽 남북단일팀 참가도 성사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도 보인다. 남과 북을 비교할 수 있는 많은 항목들이 있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의 자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런 제약 없이 예수님을 자유롭게 경배할 수 있는 남과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신앙을 지킬 수 없는 북이 어찌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이 ‘우리는 하나다’란 미녀 응원단의 응원 구호는 결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수 없는 프로파간다일 뿐이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공평하지 못한 멍에를 메지 말라. 의와 불의가 어찌 사귀겠으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친교를 나누겠으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일치하겠으며 혹은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어찌 한 몫을 나누겠으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들이 어찌 조화를 이루겠느냐?”(고후6:14-16) 7. 마무리 곡절 많던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막을 내리면서 미녀응원단을 앞세웠던 북한대표단은 ‘민족공조를 지켜낸 정치적 금메달을 목에 걸고’ 장군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지난해 아시안게임 때 왔다간 응원단들이 그랬듯이 얼마 전 북으로 돌아간 이 미녀응원단들도 자본주의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두뇌세탁(brainwashing)’ 작업을 받은 뒤 북한 전역을 돌며 ‘장군님을 칭송하는 남조선 인민들’에 대해 선전하고 다닐 것이다. 그러나 미녀 응원단이 빠져나간 남쪽의 우리 사회는 현재 김정일의 소원대로 남남갈등이라는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민족이 치유되고 자유와 평화를 누리기는 요원한 일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가 민족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며 자신의 백성에게 복 주시는 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한 이 민족에게도 분명 소망이 존재한다(욥12:23; 시29:11). “민족들을 흥하게도 하시고 다시 망하게도 하시며 민족들을 크게도 하시고 다시 작게도 하시며”(욥12:23) “주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힘을 주시리니 주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화평으로 복을 주시리로다.”(시29:11)
2009-05-08 15:43:03 | 관리자
급변하는 세계 정세와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의 건강에 대한 관심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필자가 병원에서 많은 환자들을 대하며 느끼는 바도 그렇지만 요즈음 매스컴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건강과 관련된 정보들의 내용과 그 분량은 의사인 필자가 다 따라가기에도 벅찬 것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런데 이러한 수많은 의학정보의 홍수 속에서 객관성과 재현성이 입증되지도 않았는데 우수한 치료법 내지는 획기적인 비술로 포장되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건강법들도 우후죽순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비단 건강에 좋다고 하면 쉽게 현혹되고 마는 귀가 얇은 우리 한국인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위 대체의학(alternative medicine) 또는 보완의학(complementary medicine)이라는 개념하에 구미 각국에서도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수많은 건강법들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시행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건강과 생명' 1998년 10월호 특집 '대체의학이란 무엇인가?'를 참조하기 바람) 그리고 새롭게 제시되는 건강법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볼 때 대부분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아직까지 현대 과학으로는 그 기전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방식 곧 비가시적인 에너지(invisible energy)에 의해서 치료가 되며 건강이 증진된다고 하는 것이다. 즉 표현은 다르지만 각기 나름대로의 기(氣)가 있어서 효과를 보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氣)가 우리의 건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며 또한 이 세대의 어떠한 표적(sign)이 되는지 몇 가지 건강법들을 표본 추출하여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1. 기(氣)를 이용한 건강법들 1) 치료적 접촉(Therapeutic touch) 최근 간호학계에서 '치료적 접촉'(therapeutic touch)이란 건강기법이 각광을 받고 있다. 1975년 뉴욕대학의 크리거(Dolores Krieger) 교수에 의해 소개된 이래 현재 미국에서만 수십 개의 대학과 병원들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치료적 접촉은 인간 내부에서부터 발산되어지는 '비가시적 에너지'를 활용하여 환자를 고친다고 하는 요법이다. 이를 수행할 때에는 명상상태에 들어가 환자 피부로부터 5cm정도 떨어져서 손을 움직이며 비가시적 에너지를 보낸다고 하는데 만족할 만한 에너지 상태의 정신적 이미지(mental image)를 창조한 후 이 이미지를 손을 통해 환자에게 보내어 치료한다고 한다. 몇 년 전 워싱턴대학의 간호대학 교수가 우리나라에 와서 치료적 접촉에 대한 강의를 하여 수많은 간호사들의 호응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교수는 강의 중 실제로 치료적 접촉을 시연하였으나 실패하였는데 그는 정신을 집중하여 명상에 들어가 충분한 에너지를 얻은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2) 명상(Meditation) 스트레스 연구에 대해 세계적인 권위자인 존 메이슨(L. John Mason)은 '스트레스 감소의 길잡이'(guide to stress reduction)란 책에서 명상을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떠나 단순한 이완요법으로 간주한다고 말하고 있다. 더 나아가 명상에 따라 마음의 상태가 달라진다고 믿으며 어떤 명상 상태에서는 신체에서 자유로운 기(氣; energy flow)를 추구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기'들은 서구과학이 명상에 따른 마음의 미묘한 변화를 정량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과학적 측정으로 밝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어쨌든 명상으로써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상태의 균형이 맞추어져서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특별히 스트레스, 통증, 고혈압, 심장질환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초월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 선명상(Zen meditation), 촛불명상(candle meditation) 등등 너무나 많은 종류의 명상들이 있지만 이들에는 기본적인 원리가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즉 '자기실현'과 '고차원적 의식'에 도달하는 것이 명상의 최종 목표이다. 3) 요가(Yoga) 인도에서 고대로부터 시행되어온 삶의 지침 중에는 아유르베다, 탄트라, 요가가 있는데 요가는 신성(神性) 즉 진리와의 결합을 가르치는 것이다. 요가라는 단어의 의미는 '함께 묶는다'(union)라는 것으로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 에너지의 복합체를 의미한다. 전세계적으로 가장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는 건강체계라 할 수 있는 이 요가요법은 자세와 호흡, 그리고 명상을 통하여 마음이 비워지고 '프라나'(prana; 몸안에 흘러야만 하는 중요한 에너지)의 흐름이 용이하게 되어 스트레스 및 혈압강하 효과, 심장박동을 고르게 하는 효과, 노쇠를 막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구미에서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서적들을 통해 마치 과학인 것처럼 인식되어 소개되고 있는 요가의 형태들로는 신체훈련을 위한 것인 하싸 요가(Hatha yoga), 몸과 마음의 치료를 위한다고 하는 쿤달리니 요가(Kundalini yoga), 또 의학계뿐 아니라 큰 회사들에서 경영수단으로까지 사용되어지는 탄트라 요가(Tantra yoga) 등이 있다. 4) 기공(Qigong) 잘 알려진 수십 가지 대체의학 기법들 가운데 향기요법을 제외하고 기(氣)라는 말이 제목에 들어간 유일한 건강기법이 기공요법이다. 2002년 1월호 '건강과 생명'에서 자세히 언급이 되었지만 기공은 오랜 기간 동양문화권에서 주로 사용해 오던 건강법인데 호흡조절과 정신집중과 유체운동을 어떤 형식에 따라 반복함으로써 기혈(氣血)을 고르게 하고 몸을 튼튼하게 하고 병도 낫게 하는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혈액순환을 향상시키고 면역기능을 증가시킨다고 한다. '건강과 생명'과의 인터뷰에서 김미나 교수는 명상을 하면서 마음을 차분히 안정시키면 몸에 '알파파' 즉 '엔돌핀'이 많이 생성되면서 몸 안에 정화를 일으키게 되고 그럼으로써 마음과 육체를 다스리는 데 이로운 '기공'의 효과를 얻게 된다고 하였다. 특히 체력이 약하다거나 체질적으로 허약하거나 혹은 어떤 질병이 있거나 하는 사람들은 움직임이 있는 체조에 명상을 결합하게 되는데 그러면 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확보하는 보건상의 기공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2. 미혹의 덫 1) 명상 앞서 살펴보았듯이 모든 기(氣) 건강법들은 훈련과정에서 마음을 비우기 위한 '명상'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최종 목표인 '자기실현'과 '고차원적인 의식'에 도달하려고 한다. 그런데 '자기실현'이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영을 조절할 수 있는 단계를 이루는 것이며 '고차원적 의식'은 그 사람이 여러 마귀들과 대화함으로써 성취되어진다. 즉 이것을 행하는 사람들은 종종 '안내자'나 '상담자'로 불리워지는 특정한 마귀를 소유하게 된다. 일례로 이십여 년 전에 필자가 이수한 적이 있었던 실바 마인드 콘트롤에서 피훈련자들은 명상을 통해 '상담자' 혹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는 '영의 안내자'들에게 안내되어졌는데 자기만의 지하공간에 알파뇌파 상태로 내려가면 이런 '상담자'를 만날 수 있다. 우스꽝스러운 것은 이들과 주기도문을 함께 할 수도 있는 것인데 - 이것은 마인드 콘트롤 센터마다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다 - 이럼으로써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고 더 잘 속일 수 있게 된다. 또 예수님을 상담자 중의 하나로 격하시켜서 예수님의 창조주되심과 구속주되심과 유일한 중보자되심을 송두리째 부정하도록 세뇌시킨다(고후4:4). 독일의 다름슈타트에서 가나안 공동체 원장으로 사역하고 있는 바실레아 슐링크(Basilea Schlink)는 명상의 결과로 생기는 최후의 고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밀교의 가르침의 영향으로 감정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하는 청년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데 특별히 초월명상과 같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개인적으로 명상에 빠져들고 구루(guru; 힌두교의 지도자)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어서 감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도착상태가 되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 또한 부부가 모두 명상을 하게 될 경우 이혼율이 특별히 높다. 명상을 할 때의 그 무아지경과 현실로 돌아왔을 때 일상의 스트레스나 욕구불만 사이의 괴리감은 너무 큰 것이어서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기가 불가능하다." 성경은 여러 차례 명상에 대해 언급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명상은 사탄의 것과 현저히 다르다. "너는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밤낮으로 그 안에서 묵상(meditation)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이는 그리하면 네가 네 길을 평탄하게 하며 또한 크게 성공할 것임이라."(수1:8, 흠정역) 이 구절에서 나오는 명상(meditation)은 하나님의 말씀을 능동적으로 읽고 배우고 암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믿음의 선배들도 이와 같은 명상을 하였다. 사탄의 명상은 항상 수동적이지만 성경에서 나오는 명상은 절대로 수동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분명히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비우지 말고 제어해야 함을 보여준다. 2) 알파(α)파와 에너지 기(氣)를 이용한 건강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뇌파의 종류에 따라서 사람의 능력상태가 달라진다고 하여 베타(β)파(뇌파 중 가장 높은 파장으로서 보통 깨어 있는 상태를 말하며 대부분 기본적인 오관의 수준에서 기능을 함)에서 알파(α)파(낮고 좀 더 안정된 파장으로서 깊은 이완과 명상의 상태이고 몸의 재생이 이 상태에서 일어난다고 함)로 접근하게 되면 깊은 안정감과 행복한 기분을 맛보게 되며 나아가서 각종 초능력들, 곧 보이지 않는 물체를 알아 맞추고 병 고치고 여러 위험상태로부터 구출됨 등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알파파라는 과학적 용어를 사용하여 비가시적 존재인 기(氣)를 캐무플라즈하려는 건강법들에서 내세우는 목적은 보다 나은 인간이 되도록 돕기 위해 보다 안정적인 알파 뇌파를 조절하도록 훈련하는 것이라 한다. 필자도 의과대학 재학 시절 한 선배의 권유로 마인드 콘트롤 강습을 받을 때 알파파 얘기가 나오니까 학교에서 들었던 것과 같은 하나의 과학적 건강법인 줄 생각되어 안심하고 그 바쁜 본과 생활 중에서도 시간을 내어 끝까지 코스를 마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어떤 환자의 이름과 나이, 성, 거주지만을 알려준 뒤 지금 무슨 병을 앓고 있는지 알아맞히는 마지막 자격 시험을 치를 때에도 역시 알파파의 상태로 내려가 그 병명을 알아맞혔었다. 그러나 어떠한 과학적 용어로 포장이 되었든 인간이 자기 스스로 영을 조절하여 마귀들과 교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오 디모데야, 속되고 헛된 말장난과 거짓되이 과학이라 불리는 것의 반론들을 피하며 네게 맡긴 것들을 지키라."(딤전6:20) 알파파와 함께 비가시적인 기(氣)에 과학적인 뉘앙스를 입히는 표현은 '에너지'(energy)이다. 일례로 '치료적 접촉'(therapeutic touch)에서 시술자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서 미세하게 느껴지는 저리거나 뜨거운 감각을 찾아낸 후 과도한 에너지가 발견될 때에는 손을 사용하여 그 에너지를 '쓸어 내버려야' 하고 만족할 만한 에너지 상태의 정신적 이미지(mental image)를 창조하게 되면 이 영상을 환자에게 손을 통해 전달할 수 있다고 한다(창6:5). 그런데 이 '치료적 접촉'의 주창자 크리거(D. Krieger) 교수의 저서를 읽어보면 동양의 신비주의와 힌두교 개념인 우주에너지 프라나(prana)가 치료의 초석이 됨을 알 수 있다. "모든 요가들은 최종적으로 같은 목표 즉 '브라만'(Brahman; 힌두교의 기본교리 중 형태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으며 보이지 않는 비인격적인 힘으로서 우주의 모든 것을 지칭함) 곧 신(神)과의 연합을 이루기 위함이다. 이 참된 지혜를 얻기 원한다면 이 요가들의 여러 방법들이 종합적으로 행해져야만 한다" 고 루시 리델(Lucy Lidell)의 요가 교과서는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여러 종류의 요가 기법들은 오직 브라만과 연합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무의식의 황홀경으로 쉽게 빠지도록 하려고 만들어진 것에 다름 아니다. 요가를 수행함으로써 마음이 비워지고 '프라나'의 흐름이 용이하게 된다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에너지는 사실 영(spirit)을 의미하며 엄밀히 말하면 마귀의 영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기(氣)라는 에너지를 표방하며 마귀가 들어와 공중투시 같은 영계에서의 여러 가지 경험들을 선물로 주면서 동시에 그 사람의 혼과 영을 '함께 묶는'(yoga) 고리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불법 고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잘라버려야 한다. "우리는 상상하는 것(imaginations)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거슬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고후10:5) 3. 뉴에이지 커넥션(New age connection) 루쩌와 드브리스(E.W. Lutzer & J.F. Devries)에 의하면 뉴에이지 운동의 핵심교리는 범신론(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리라, 창3:5), 윤회론(너희가 정녕 죽지 아니하리라, 창3:4), 상대론(너희가 선악을 알리라, 창3:5), 밀교주의(너희의 눈이 밝아지리라, 창3:5)로 정리되어질 수 있는데 이 뉴에이지 운동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스트레스와 질병에 억눌려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기(氣) 치료법 내지 건강 증진법이라는 또 다른 양의 탈을 쓰고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뉴에이지 건강기법들을 통해서 효과가 나타나 일시적으로 여러 신체 계측치들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고 통증도 소실될 수 있지만 그 이면에 가려진 영적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어서(잠14:12)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복음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며 또한 그리스도인의 영적 보호막에도 구멍이 뚫려 영적 분별력을 갖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결국 뉴에이지 운동으로 말미암아 무수한 영혼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임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사실 뉴에이지 운동의 범위를 정확하게 다 얘기할 수는 없겠지만 기(氣)를 사용하는 건강기법들을 포함해서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퍼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곧 대중음악, 텔레비젼, 영화, 점성술, 강신술, 건강식품, 스포츠와 체력단련 프로그램, 동기유도 훈련, 잠재력 개발, 심리치료, 뇌호흡('건강과 생명' 1998년 7월호에 기고한 필자의 글을 참조바람) 등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뉴에이지의 사고를 주입시키는 매체로 이용되고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이 뉴에이지 운동의 궁극적 목표가 이 땅에서는 예수없는(without Jesus) 유토피아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죽음 이후에는 영혼을 지옥(地獄)으로 보내는 것임을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 뉴에이지 커넥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어라. 너의 대적(對敵)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이하 흠정역) "이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대언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signs)과 이적(wonders)을 보여 할 수만 있으면 그 택하신 자들까지도 속일 것임이라."(마24:24)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가까이 오시리라. 죄인들아, 너희 손을 정결하게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순결하게 하라."(약4:7-8)
2009-05-08 15:42:16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