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치사 for의 용례
전치사 for는 대개 ‘~을 위하여’, ‘~로 인하여’, ‘~을 대신하여’의 의미를 갖는다. 마26:28의 ‘for the remission of sins’는 죄들의 사면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졌음을 보여 준다. 막1:4; 눅3:3의 ‘baptism of repentance for the remission of sins’는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을 잘못 이해하여 침례가 죄들의 사면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baptism of repentance which is for the remission of sins’로 보아야 한다. 즉 죄들의 사면을 주는 것은 회개이다.
한편 갈1:4의 “Who gave himself for our sins.”는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자신을 주셨다.”로 번역하며 이 경우 ‘죄들을 위하여’로 번역하면 맞지 않는다. 계16:10의 “They gnawed their tongues for pain.”도 “그들이 아픔으로 인해 혀를 깨물었다.”로 번역한다. 한편 욥2:4의 ‘skin for skin’은 “가죽으로 가죽을 대신하다.”는 뜻이며 요1:16의 ‘grace for grace’ 역시 ‘은혜를 대체하는 은혜’ 즉 구약시대의 율법의 은혜보다 더 큰 그리스도의 은혜를 뜻한다. 끝으로 고전15:29의 “Why are they baptized for the dead?”는 ‘순교하며 죽은 자들을 대체해서 계속해서 믿음을 고백하고 침례를 받는 자들’을 뜻하기도 하고 죽은 자들을 대신해서 침례를 받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후자는 몰몬 교도들의 주장인데 과거에 바울 당시에도 이런 관습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몰몬 교도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모든 나라에서 포고하면서 족보를 찾아 과거 조상들을 위해 대신 침례를 주며 이것이 조상을 위하는 한국 사람들의 정서에 잘 맞으므로 어느 정도 선교의 열매가 있다.
2009-05-11 11:37:51 | 관리자
질문: 1611년 킹제임스 성경이 나오기 전에는 참 성경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13>
대답: 그 이전에는 안디옥 계열 필사본들에 속한 성경이 있었습니다.
성경의 완전성을 공격하는 비평 학자들은 이 질문이 성경 신자들을 ‘어리벙벙하게’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유사 이래 현존하는 성경 사본들의 절대 다수는 줄곧 안디옥에서 발견된 본문들이었습니다. 이것들은 몇 가지 형태 즉 원래의 그리스어 사본 혹은 주후 150년경의 「구 라틴 벌게이트」(Old Latin Vulgate) - 개악된 「제롬의 벌게이트」(Jerome's Latin Vulgate)와 혼동하지 마십시오 - , 혹은 주후 157년경에 번역된 시리아의 페시타 역본(Peshetta) 등으로 그 당시까지 존재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자료를 한데 모아 일반인들의 손에 쥐어 준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런 자료들을 한데 모아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하시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신뢰할 만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2009-05-11 11:33:57 | 관리자
질문: 영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영적 거장들) 중에 다른 역본을 사용한 사람은 없었나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12>
대답: 있었습니다만 그들도 모두 완전한 성경에 굴복하고 있습니다.
공개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성경이 완전하다는 생각을 경멸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위대하다’는 평을 듣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늘 성경을 정정하면서 성경의 절대무오성을 믿는 자들을 공개적으로 공격합니다. 또한 소위 킹제임스 성경의 ‘실수들’이란 것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는 크리스천 단과대학이나 종합대학들도 상당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이런 위대한 사람들과 기관들이 틀릴 수 있으며 또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런 자들/기관들에게 여전히 복을 주시는가?”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해답 역시 신앙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서 우리의 최종 권위가 되는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17장에서 우리는 비참한 상태에 처한 이스라엘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아시리아에게 정복당하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왕하17:23). 아시리아 왕은 이방인들을 이스라엘 땅에 정착시켰습니다(왕하17:24). 그런데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므로 그분께서는 사자들(lions)을 그들 가운데 보내사 그들을 죽게 하셨습니다(25절). 그 결과 그들은 유대 제사장들을 불러 ‘그 땅의 하나님’을 어떻게 두려워해야 하는지 자기들에게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왕하17:26-28). 그 결과는 32절과 41절에서 발견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그들이 주도 두려워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민족들을 사로잡아 왔든지 그 민족들의 풍속대로 자기 신들도 섬겼더라.”(왕하17:3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현상은 우리의 근본주의 목회자들과 대학들 가운데서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근본주의 목회자들이 실제로는 성경의 무오성을 믿지 않으면서도 감히 믿지 않는다고 시인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주님을 두려워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강단에 서서 성경을 들고 허공에 대고 외칩니다. “이 책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입니다.” 라고. 그러나 강단을 내려서면 그들은 ‘자기 신들을 섬기면서’ 성경에서 실수라고 생각되는 점들을 개인적으로 지적하며 자기들이 막 강단에서 말했던 것을 진실로 믿는 사람들을 비웃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위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얼굴을 가진 것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결코 강단에 서서 성경의 완전성을 믿노라고 말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만일 누군가가 자기들이 정말로 믿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경우 자기들이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여러분과 저는 그들이 강단에 서서 “저는 이 책이 불완전하게 번역되었고 실수가 많다고 믿으며 이 지구상에는 완전한 역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자기들이 그런 정직한 고백을 한다면 곧 ‘끝장날’ 것임을 누구보다도 그들이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들’(lions)은 그들을 완전한 성경 앞에 무릎 꿇게 만듭니다. 물론 그들이 단지 입술로만 주님을 인정할지라도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크리스천 단과대학이나 종합대학들도 “우리 학교에 오면 완전한 성경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은 파괴될 것이며 성경이 오류로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자기의 신들을 섬기게 되면’ 자기들의 캠퍼스 정문 앞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들’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는 성경의 절대적 권위에 대해 확신합니다.”,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만을 사용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자기 학교를 선전할 정도로만 “주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일단 들어온 후에는 즉 학생들이 그 학교에 자신을 위탁한 후에는 그들은 완전한 성경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교묘히 파괴시키고 “오래되고 좋은 유익한 킹제임스 성경이 오류로 가득 찼다.”고 그들을 세뇌시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너무나 겁이 나서 ‘그 땅의 하나님’과 그분의 완전한 책인 킹제임스 성경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시며 실로 그들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2009-05-11 11:32:27 | 관리자
질문: 저는 킹제임스 성경의 이탤릭체로 기록된 부분이 역자들에 의해 첨가된 것이므로 삭제되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들을 정말로 삭제해야만 합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11>
대답: 우리가 만일 킹제임스 성경의 이탤릭체 부분들 중에 어느 하나라도 삭제해야 한다면 그것들 모두를 삭제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들 모두를 성경기록으로 받아들여야만 할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에서 이탤릭체들을 삭제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1. 어떤 글을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새 언어의 문장 구조를 완성하기 위해 단어들을 보충해야만 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모든 번역자들이 성경을 번역하면서 이러한 일을 했습니다. 다만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정직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자기들이 보충한 단어들을 이탤릭체로 표시하였습니다.
보기 #1 :
킹제임스 성경의 시23:1은 “주는 나의 목자시니”(The LORD is my shepherd.)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 있는 ‘is’ 는 역자들이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보충한 것입니다.
신국제역(NIV)의 시23:1도 “주는 나의 목자시니”(The LORD is my shepherd.)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양 쪽 번역자들이 똑같이 문장을 완성하려고 같은 단어를 보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것이 보충되었음을 알려 주기 위해 이탤릭체로 표기하였습니다.
보기 #2 :
킹제임스 성경의 요1:8은 “그는 그 빛이 아니요 그 빛에 대해 증언하도록 보내어진 자더라”(He was not that Light, but was sent to bear witness of that Light.)로 되어 있습니다.
뉴킹제임스역(NKJV)의 요1:8도 “그는 그 빛이 아니요, 그 빛에 대해 증언하도록 보내어진 받은 자더라”(He was not that Light, but was sent to bear witness of that Light.)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양 역본의 번역자들은 뜻을 통하게 하기 위해 자기들의 번역에 ‘was sent’라는 구를 보충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역시 그 보충 부분을 명시해서 이탤릭체로 기록한 쪽은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현대의 ‘자칭’ 학자라 하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는 속임수 혹은 부정직함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자기들이 보충한 부분을 이탤릭체로 넣은 정직성과 도덕성으로 인해 오히려 칭찬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2. 성경 비평 학자들은 - 근본주의자든 그렇지 않든 간에 - 이탤릭체 로 쓰인 부분을 제거할 수 있으나 다 제거할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 대개 그들은 고린도전서 14장에 있는 ‘unknown’(알지 못하는) 같은 단어가 있는 구절을 보면 난처해합니다. 그들은 이런 구절의 이탤릭체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위와 같은 말을 내뱉으면서 문제의 단어를 제거해 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상황을 더욱 복잡하고 어렵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 이탤릭체 단어가 본문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단지 그 이탤릭체 단어만을 성경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이탤릭체 단어 모두를 성경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이탤릭체 단어가 모두 삭제된다면 뜻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이탤릭체는 삭제하고 다른 것들은 그대로 두는 일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감’(Divine inspiration) 즉 어떤 단어들은 없애고 어떤 단어들은 남겨야만 하는지를 알려줄 수 있는 ‘하나님의 영감’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자나 영혼 구령자 혹은 학자라 할지라도 자기가 성경에서 어떤 단어들을 거부해야 하고 또 어떤 단어들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하나님의 거룩한 영감’을 통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우리보고 자기들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너무나 어리석어서 그런 방식으로 한 사람의 의견을 숭배해야 한다면 과연 누구를 숭배해야 하지요?
사실 이 시간에도 ‘거룩하게 영감을 받아 공인 성경 교정자’(Official Divinely Inspired Bible Corrector)가 되려고 수백 명의 성경 비평 학자들이 경합을 벌이고 있습니다. 과연 누가 행운의 사람이 될까요? 우리는 그를 어떻게 뽑아야 할까요? 그리고 모든 크리스천들이 그의 선언에 한 마디 불평 없이 따를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할 사람은 누구일까요? 어쨌든 그의 선언이 없다면 어떤 이탤릭체들이 성경에 속하고 또 어떤 것들이 빠져야 하는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즉 문제되는 구절들을 극복하기 위해 골칫덩이 단어들을 조심성 없이 제거해 버릴 게 아니라 오히려 기도하며 성경 읽기를 해야 할 것입니다.
3. 사무엘기하 21장 19절은 이탤릭체가 그대로 보존되어야 할 필요성을 옹호해 주는 전형적인 예들 중에 하나입니다.
다시 곱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움이 있더니 거기서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의 동생을 죽였는데 그의 창 자루는 베틀 채 같았더라.
And there was again a battle in Gob with the Philistines, where Elhanan the son of Jaare-oregim, a Beth-lehemite, slew the brother of Goliath the Gittite, the staff of whose spear was like a weaver's beam.
여기에서 만일 이탤릭체인 ‘the brother’를 생략해 버린다면 엘하난이 골리앗을 죽인 것이 됩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은 사무엘기상 17장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탤릭체를 제거함으로써 타락한 모든 사람들이 으쓱대며 “성경에 모순이 있다.”고 즐겨 말하게 될 그런 성경을 갖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거룩한 영감을 받은 성경 교정자’는 아마 삼하21:19의 이탤릭체는 삭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어떤 단어를 삭제하고 또 어떤 단어를 보존해야 하는지 도대체 누가 안단 말입니까?
4.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경을 보존하시기 위해 선택하신 단어들을 손대지 말아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으로부터 비롯됩니다. 먼저 성경 - 물론 킹제임스 성경이지요 - 을 집어 시16:8을 읽어 보십시오.
내가 주를 항상 내 앞에 모셨나니 그분께서 내 오른편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I have set the LORD always before me: because he is at my right hand, I shall not be moved.
아마도 여기에서 여러분은 “그분께서 계시다.”(he is)라는 두 낱말이 이탤릭체라는 사실을 금방 보셨을 것입니다. 자, 그런데 사도 베드로가 신약 성경 사도행전 2장 25절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그분에 관하여 말하되, 내가 항상 내 얼굴 앞에 계신 주를 미리 보았나니 그분께서 내 오른편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For David speaketh concerning him, I foresaw the Lord always before my face, for he is on my right hand, that I should not be moved:
여기서 우리는 사도 베드로가 시16:8에 나오는 이탤릭 부분과 나머지 부분 전체를 다 인용하고 있음을 봅니다! 즉 시16:6의 이탤릭체 ‘he is’가 행2:25에서는 이탤릭체가 아닌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이탤릭체를 그대로 두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이들은 베드로는 신학 교육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학문 없고 무식한 사람(행4:13)이었기에 맹목적으로 성경(킹제임스 성경?)을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받아들였다고 지적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도 우리는 똑 같은 현상을 발견합니다.
신약 성경의 또 다른 저자였던 바울은 종종 자기의 글 속에서 구약 성경을 인용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다른 이들이 직접 히브리어 본문에서 인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구약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인용 구절들 중에 몇몇은 히브리어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는 단어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20절에서 바울은 이사야서 65장 1절을 인용합니다.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이르기를,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들이 나를 발견하였나니 내게 묻지 아니하던 자들에게 내가 나타났노라, 하되
But Esaias is very bold, and saith, I was found of them that sought me not; I was made manifest unto them that asked not after me.
한편 이사야서 65장 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들이 나를 찾아내었고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들이 나를 발견하였나니…
I am sought of them that asked not for me; I am found of them that sought me not:…
바울이 이사야서 65장 1절에 있는 것처럼 인용했던 ‘자들에게’(them that)라는 단어는 킹제임스 성경에서만 이탤릭체로 존재합니다.
‘are’ 라는 단어를 번역자들이 보충한 시편 94편 11절 말씀을 인용한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 3장 20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는 사람의 생각들을 아시며 그것들이 헛된 줄 아시느니라(시94:11).
The LORD knoweth the thoughts of man, that they are vanity.
또 다시, 주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의 생각들을 아시며 그것들이 헛된 줄 아시느니라, 하였느니라(고전3:20).
And again, The Lord knoweth the thoughts of the wise, that they are vanity.
그런데 참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 9절에서 신명기 25장 4절을 인용한 부분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너는 곡식을 밟는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 기록되었나니 하나님께서 소들을 위해 염려하시느냐?(고전9:9).
For it is written in the law of Moses, Thou shalt not muzzle the mouth of the ox that treadeth out the corn. Doth God take care of oxen?
너는 소가 곡식을 밟을 때에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신25:4).
Thou shalt not muzzle the ox when he treadeth out the corn.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단지 흠정역 성경에서만 이탤릭체로 발견되는 ‘the corn’이란 단어를 마치 히브리어 원문에 있었던 것같이 인용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히브리어 원문을 번역한 것이라 추정되는 가상적인 「70인역」을 인용했다고 감히 누가 주장한다면 우리의 딜레마는 더 커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난감하게 만드는 두 가지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입니다.
첫째, 만일 그런 그리스어 역본이 존재했다면(역사 문헌으로 입증된 적이 없다!) 도대체 어떤 권위로 번역자들이 이 단어들을 삽입할 수 있었단 말인가?
둘째, 만약 그것들이 번역자들에 의해 첨가된 것이라면 바울의 인용 자체가 그것들이 영감된 것임을 확증해 준단 말인가?
여러분이 이런 중요한 문제를 놓고 심사숙고하시는 동안 저는 예수님께서도 킹제임스 성경으로 보이는 성경으로부터 구약을 인용하셨다는 것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자필 원본에 들어 있지 않은 단어를 인용하셨음을 보게 되는데 사실 그것은 킹제임스 성경의 이탤릭체에서만 발견되는 단어입니다. 다음의 신명기 8장 3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께서 너를 낮추시며 주리게 하시고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아니하고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And he humbled thee, and suffered thee to hunger, and fed thee with manna, which thou knewest not, neither did thy fathers know; that he might make thee know that man doth not live by bread only, but by every word that proceedeth out of the mouth of the LORD doth man live.
여러분은 이탤릭체로 된 ‘word’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원문에 있지 않다는 데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어 원문 신명기 8장 3절을 검토해 보아도 ‘word’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dabar’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탄과 싸우실 때 신명기 8장 3절 말씀을 마태복음 4장 4절에서 인용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But he answered and said, It is written, Man shall not live by bread alone, but by every word that proceedeth out of the mouth of God.
신명기 8장 3절을 인용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킹제임스 성경이 이탤릭체로 표시한 단어를 포함한 구절 전체를 인용하고 계십니다! 아멘! 어떤 아마추어 학자라도 그리스어 신약 성경에서 ‘word’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단어 ‘rama’의 한 형태인 ‘ramati’를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 비평 학자들이 “글쎄 킹제임스 성경을 사도 바울이 인정한다면 나도 인정하지요.”라고 농담 삼아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것처럼, 진정한 성경신자라면 “물론이지요. 킹제임스 성경을 사도 베드로와 바울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신 이상 저도 당연히 인정할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성경의 이탤릭체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1) 그것들 모두를 삭제해라.
(2) 근본주의 성경 비평가들 중 한 명을 ‘하나님의 거룩한 영감을 받은 공인 성경 교정자’로 임명하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드려야 할 충성과 사랑과 헌신을 다 그에게 주어라.
(3) 우리의 거룩하게 영감 받은 성경에만 있는 모든 단어들을 있는 그대로 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틀림없이 정확하실 것이라고 신뢰하라.
이제 우리는 이 셋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2009-05-11 11:30:38 | 관리자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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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1 11:16:48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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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1 11:16:48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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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1 11:07:3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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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1 11:07:33 | 관리자
질문: 처음의 자필 원본에서 복사된 성경 사본들의 출처는 어디인가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8>
대답: 현존하는 성경 사본의 대부분은 두 개의 계열 혹은 군(群)으로 나뉩니다. 이 계열들은 일반적으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의 안디옥이라는 도시들에 의해 대표됩니다.
이 세상에는 단지 두 개의 성경 즉 하나님의 성경과 마귀가 변개시킨 성경이 존재합니다. 성경에 대한 견해도 단지 두 가지뿐입니다. 전적으로 완전하다는 견해든지 혹은 불완전하다는 견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사본들의 형태와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볼 때 이 두 성경은 중동 지역의 매우 다른 장소들에서 나오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의 안디옥이 그 두 장소입니다.
어떤 장소가 우리에게 완전한 성경과 정확한 이데올로기를 주며 또 어떤 장소가 우리에게 마귀의 성경과 부정확한 이데올로기를 주는가를 식별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실 이러한 연구는 성경이라는 한 가지 원천 때문에 아주 쉽게 이루어집니다.
이미 여러 번 언급했지만 우리는 신앙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서 성경을 우리의 최종 권위로 받아들입니다. 그러하기에 누구나 먼저 해야 할 일은 성경을 연구하여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어떻게 생각하시며 시리아의 안디옥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발견해 내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할 때 우리가 따라야 할 기본 규칙은 보통 ‘첫 번째 언급의 법칙’이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대체로 어떤 사람이나 장소 혹은 단어가 성경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부분의 문맥이 그 사람이나 장소 혹은 단어에 대한 성경의 관점을 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에 관한 우리의 연구에 있어서 우리는 이집트에 대해 성경이 취하는 태도를 결코 무시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집트(애굽, Egypt)
(1) 성경에서 이집트는 창12:10-12에서 제일 먼저 언급됩니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이집트로 내려가 거기 머물려 하더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이집트에 가까이 이르러 들어가려 할 때에 자기 아내 사래에게 이르되, 이제, 보라, 당신은 보기에 아름다운 여인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이집트 사람들이 당신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 여인은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되 당신은 살려 두리니
창12:1-3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소위 ‘아브라함의 언약’이라고 알려진 언약이 주어짐을 봅니다. 문자 그대로 그 언약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이 세상을 그들의 소유로서 양도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창12:10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고국에 있던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12절에는 이집트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자기의 아내 사래를 강탈할지도 모른다는 아브라함의 두려움이 나타납니다. 분명히 긍정적인 문맥이 아니지요? 우리는 성경이 이집트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 매우 부정적임을 봅니다.
(2) 출1:11-14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였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작업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주어 그들을 괴롭게 하더니 그들이 파라오를 위하여 저장 도시 곧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니라. 그러나 그들이 그들을 괴롭게 할수록 그들이 더욱 번성하고 증가하므로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인하여 근심하니라. 이에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더 엄격히 섬기게 하고 고된 노예생활로 회반죽 이기는 일과 벽돌 굽는 일과 들에서의 온갖 섬기는 일에서 그들의 삶을 괴롭게 하니라.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섬기게 한 일이 다 엄격하였더라.
사실상 이집트의 통치자였던 파라오(바로)는 15-16절에서 유대의 모든 남자 아기들을 죽이라고 포고합니다.
이집트 왕이 히브리 산파들에게 말하더니 그들 중 하나의 이름은 십브라요, 다른 하나의 이름은 부아더라. 그가 이르되, 너희가 히브리 여인들을 위하여 산파의 직무를 행할 때에 해산대 위의 여인들을 살펴보아 그것이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릴지니라, 하였으나
이 구절도 명백히 이집트에 대해 부정적인 것을 암시하지 않습니까?
(3) 이집트 땅에서 자신의 자녀들을 인도하여 내신 후 출애굽기 20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이 이집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말씀하십니다. 2절에서 그분께서는 이집트를 ‘속박의 집’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곧 속박의 집에서 데리고 나온 주 네 하나님이라.
이것 역시 이집트에 대한 또 한 번의 부정적인 언급인데 이번에는 이것이 직접 하나님의 입에서 나왔음에 주의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4) 신4:20에서 모세는 이집트를 ‘쇠 용광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너희를 취하시고 너희를 쇠 용광로 곧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사 이 날의 너희와 같이 자신을 위하여 상속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5) 신17:16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미래에 이스라엘이 왕을 갖게 될 때 그 왕이 이집트와 상업적인 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위해 말을 많이 늘리지 말며 말을 많이 늘리려고 백성을 이집트로 돌아가게 하지 말지니 주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후로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 하셨느니라.
(6)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11:8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비난하시면서 그곳을 소돔과 이집트에 비유하십니다.
그들의 죽은 몸이 그 큰 도시의 거리에 놓이리니 그 도시는 영적으로 소돔과 이집트라고 하며 그곳은 또한 우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이상과 같은 간략한 연구는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살펴 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성경이 이집트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우리는 성경에서 알렉산드리아가 단지 네 번 언급되며 네 번 모두 나쁜 의미로 언급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1) 알렉산드리아는 행6:9에서 처음으로 언급됩니다.
그때에 리베르티 사람과 구레네 사람과 알렉산드리아 사람과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자들의 회당이라 하는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논쟁을 벌이더니
스데반과 변론하며 실제 그를 죽였던 무리들 가운데는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2)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두 번째 언급은 행18:24에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아볼로라 하는 어떤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그는 말을 잘하고 성경 기록들에 능통하더라.
여기서 우리는 영적으로 매우 열심이 있었으나 복음에 관해 잘못 알고 있었던 아볼로라는 이름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을 알지 못한 채 그는 에베소에서 침례자 요한의 침례에 대해서만 가르쳤습니다(행18:25, 19:3). 아볼로는 그때까지도 [신약시대의] 구원을 받지 못했으며 그가 개종시킨 자들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후에 아볼로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 의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되었으며(26절) 그 이후에야 비로소 그의 메시지가 완전해졌습니다(28절). 그러나 이처럼 두 번째 언급된 곳에서도 알렉산드리아는 여전히 ‘잘못된 성경 가르침’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3)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세 번째와 네 번째 언급 역시 매우 비슷합니다. 사도행전 21장에서 체포되고 카이사르에게 변론을 요구한 후 바울은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로마로 보내집니다(행27:6).
거기서 백부장이 이탈리아로 항해 중인 알렉산드리아의 배를 만나 우리를 거기에 태우니라.
(4) 로마로 항해하는 도중 바울이 탄 배는 폭풍우로 인해 가라앉게 됩니다. 멜리데라 하는 섬에서 석 달을 보낸 후 그는 또 다른 배를 타고 죽음을 향한 길로 보내집니다. 바울을 죽음으로 몰고 갈 이 두 번째 배는 어디서 왔을까요?
석 달 뒤에 우리가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의 배를 타고 떠나니 그 배의 기호는 카스토르와 폴룩스더라(행28:11).
위에서 우리는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언급하고 있는 성경의 네 군데가 다 알렉산드리아에 대해 부정적임을 알았습니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성경의 판결이 좋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100년경에 아테네로부터 철학과 교육을 받아 들였고(행17:16) 그 이후에 세상 철학과 학문의 중심지로 알려졌음에 주목해야 합니다(골2:8). 거기에는 철학자 판테누스(Pantaenus)가 설립한 성경 학교가 있었습니다. 판테누스는 성경을 모두 철학적으로 그리고 알레고리 즉 비유로 해석했습니다. 철학적이라 함은 그가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 진리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또한 성경을 알레고리(비유)적으로 봄으로써 그는 아담, 노아, 모세, 다윗 같은 사람들은 단지 유대인들의 시(詩)에나 존재하는 인물이고 실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와 후에 오리겐(Origen)에 의해 그 학파의 우두머리로 칭송받게 되었습니다.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그의 회의론을 공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의 ‘순수한 복사본들’을 받는 즉시 자기의 뒤틀린 사상과 병행하도록 성경 사본을 개조한 사람은 교육과 철학이라는 두 개의 마취제에 미혹된 오리겐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성경 비평 학자들의 아버지이며 눅24:40, 행8:37과 요일5:7 같은 구절들을 삭제해 버린 필사본들을 만든 장본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경은 완전하며 오류가 없다.”고 단숨에 말한 뒤에 곧바로 “성경에는 실수들과 오역들이 있다.”고 진술하는 알렉산드리아 철학 즉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근본주의 학자들이 앵무새처럼 되풀이되는 부패된 철학의 창시자이기도 합니다.
부패한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에다 맨 처음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 바로 이 실성한 이데올로기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경 신자들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이 부패되었으므로 마땅히 폐기처분시켜야 하며 또 “성경에 오류가 있으므로 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알렉산드리아 철학 역시 매우 교활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인본주의 산물이므로 마땅히 배격해야 합니다.
안디옥(Antioch)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 안디옥은 알렉산드리아가 처음 언급되는 사도행전 6장에서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알렉산드리아와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나타납니다.
(1) 사도들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집사’(deacons)로 알고 있는 ‘사역을 돕는 자들’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고 어떤 사람들이 그 직분을 맡아야 하는가에 대해 3절에서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는 너희 가운데서 정직하다는 평판이 있고 성령님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오직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념하리라, 하니라.
그 뒤 행6:5에서 일곱 사람이 선택됩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쁘게 여기고 믿음과 성령님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안디옥 출신의 유대교 개종자 니골라를 택하여
첫 번째 집사들 가운데 한 명인 니골라가 안디옥 사람이었음에 주목하십시오. 이것이 단순한 일치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집사들 가운데 유일하게 니골라만 그 고향이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또한 안디옥이 성경에서 처음 언급된 곳에 알렉산드리아가 언급된 것도 절대로 우연이 아닙니다. 그리고 같은 구절에서 안디옥은 긍정적인 견지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며 알렉산드리아는 부정적인 견지에서 처음 언급되었음을 아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안디옥에 대한 몇 개의 적절한 보기들은 하나님께서 신약 교회의 중심지로 안디옥을 선택하셨음을 증거해 주는데 이것들은 물방울 같은 증언으로 시작해서 대홍수 같은 증언으로 그 끝을 맺습니다.
(2) 안디옥은 행11:19-21에 나타납니다.
이제 스데반으로 인하여 일어난 핍박으로 말미암아 널리 흩어진 자들이 멀리 베니게와 키프러스와 안디옥까지 여행하며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선포하더니 그들 가운데 키프러스와 구레네 출신의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그리스말 하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주 예수님을 선포하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므로 많은 수의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오더라.
여기에서 우리는 핍박을 피해 도피한 크리스천들 중 한 무리가 자기들이 도피한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모습을 봅니다. 안디옥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사도행전 10장의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문을 연 사건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리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21절은 하나님의 영께서 안디옥에서 힘있게 일하셔서 상당수가 구원받았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최초의 이방인 대각성 운동이 바로 안디옥에서 일어났음을 보게 됩니다.
(3) 행11:22-24에서 우리는 ‘위로의 아들’인 바나바(행4:36)가 안디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아보기 위해 안디옥에 파견됨을 보게 됩니다.
그때에 이 일들에 관한 소식이 예루살렘에 있던 교회의 귀에 들어가매 그들이 바나바를 보내며 그가 멀리 안디옥까지 가게 하니라.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즐거워하며 모든 사람에게 권면하여 그들이 마음에 작정을 하고 주께 붙어 있으라고 하니라. 바나바는 선한 사람이요, 성령님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더라. 많은 사람들이 주께 더해지더라.
(4) 행11:25-26에서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때에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떠나서 그를 만나매 안디옥으로 그를 데려오니라. 그들이 만 일 년 동안 그 교회와 함께 모이며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더니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니라.
첫 번째로 우리는 바나바가 젊은 개심자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는 것을 발견합니다. 행9:26-27에서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바울의 개종을 변호해 주었던 이가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는 열심 있는 한 젊은 개종자가 다소에 가서(행9:30)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가는 것을 보고 슬퍼하였습니다. 사울을 찾아낸 뒤 바나바는 그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데려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알렉산드리아로 데려간 것도 아닙니다. 그는 신약 교회의 영적 수도인 안디옥으로 그를 데려갔습니다. 사실 바울이 위대한 바울이 된 것은 다 이 경건한 노성도의 친절한 행동 덕분이었습니다.
(5) 행11:26에서 우리는 거듭난 신자들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크리스천’이라 불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믿는 자들이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 부를 때마다 안디옥의 우리 영적 선조들과 영적인 연대감을 갖게 됩니다. 안디옥과 크리스천의 관계는 플리머스록과 미국인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6) 27-28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대언자들을 북쪽에 있는 안디옥으로 보내시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무렵에 대언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렀는데 그 중의 한 사람 곧 아가보라 하는 사람이 일어나 성령을 통해 온 세상에 두루 큰 흉년이 들 것을 표적으로 보여 주더니 카이사르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그 일이 이루어지니라.
유대인들의 중심지 예루살렘은 이제 영적으로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이 있기 몇 해 전에 행1:8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고향인 그곳을 떠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7) 행11:29-30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안디옥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흉년을 당하게 한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보내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에 제자들이 저마다 자기 능력대로 유대에 거하던 형제들에게 구호금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또 그것을 실행하여 구호금을 바나바와 사울의 손에 맡겨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그러나 이 구절이 하나님의 신약 교회의 본거지에 대해 성경이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곳은 아닙니다.
(8) 복음 선포를 위해 온 세계로 선교사를 파송하고자 결심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셨습니다(물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예루살렘 대신 안디옥에서 자신의 충성스런 종들을 찾으셨습니다.
이제 안디옥에 있던 교회에 어떤 대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의 루기오와 사분영주 헤롯과 함께 양육받은 마나엔과 사울이라. 그들이 주를 섬기며 금식할 때에 성령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서 시킬 일을 위해 그들을 내게로 구별하라, 하시니 그들이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한 뒤 그들을 보내니라(행13:1-3).
따라서 ‘크리스천’이라는 명칭이 안디옥에서 유래된 것같이 성경에 언급된 첫 번째 전도 여행 또한 안디옥에서 나왔음이 명백합니다. 이 위대한 임무를 완수하고 나서 어느 누구도 예루살렘에 보고서를 보내거나 그 도시를 관광하는 것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안디옥으로 되돌아왔을 뿐입니다.
[그들이] 말씀을 버가에서 선포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을 향해 떠나니 이곳은 그들이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그들을 맡겼던 곳이더라. 그들이 도착하여 교회를 함께 모아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또 그분께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되풀이하여 말하고 거기서 제자들과 함께 오랫동안 머무니라(행14:25-28).
안디옥에 대한 성경의 마지막 두 번의 언급을 살펴보면 안디옥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하는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9) 행15:23-27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은 이방인 신자들에 관한 결정 사항을 통지하기 위해 두 명의 대표를 안디옥에 보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들 편에 이같이 편지하니라. 사도들과 장로들과 형제들은 안디옥과 시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들에 속한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우리가 들은즉 우리에게서 나간 어떤 자들이 말로 너희를 혼란에 빠뜨리고 너희 혼을 뒤엎으며 이르되, 너희가 반드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 하나 우리는 그들에게 그런 명령을 준 적이 없으므로 한 마음으로 모여서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택한 사람들을 너희에게로 보내는 것을 좋게 여겼나니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자들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유다와 실라를 보내었으니 그들도 너희에게 같은 것들을 입으로 전하리라(행15:23-27).
임무를 마친 후에 유다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성경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라는 안디옥에 남기로 하였고 바울의 두 번째 전도여행의 선교 동역자로서 성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10) 물론 두 번째 전도여행도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행15:40이 설명해 주는 대로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던 안디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안디옥의 어떤 매력적인 점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신약 교회의 중심부로 그곳을 선택하셨을까요? 안디옥은 로마, 아테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처럼 문화의 중심지였지만 그 스스로를 이방종교, 이방학문과 이방철학에 빠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안디옥이 위에서 언급된 도시들이나 심지어 예루살렘과도 달리 그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던 세계의 거의 정확한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고 동서 무역로의 교차 지점에 세워졌다는 점에도 비중이 주어졌을 것입니다. 심지어 안디옥은 오론테스 강을 경유한 항구도시임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기독교의 본거지로서의 활발한 기능을 위해 매우 중요한 속성들입니다. 아마도 바울 서신들의 자필 원본들의 대부분이 안디옥에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2세기에 루시안(Lucian)이라는 한 제자가 안디옥에서 성경학교를 세웠습니다. 루시안은 이교도 철학을 불신하기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그의 학파는 성경의 신성과 권위를 찬미했으며 성경을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들이 가르쳤던 것처럼 상징적 비유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므로 안디옥은 성경 필사본의 바른 계열의 기원 도시일 뿐 아니라 성경을 문자 그대로 그리고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이데올로기의 근원지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마음은 선하나 ‘알렉산드리아식’ 교육을 받은 수많은 목회자들이 안디옥 성경인 킹제임스 성경을 높이고는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성경이 완전할 수 없다.”는 알렉산드리아식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상 이러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식 확신 때문에 그들은 시편 12:6-7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에 완전한 성경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옳지 못한 태도로 옳은 책(성경)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들의 이집트 선조들이 행했던 것과 똑같은 실수들과 개악들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도록 예정되었음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누가 성경의 충고를 무시하고도 실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사람 솔로몬은 이집트를 멀리하고 말(horse)을 늘리려고 이집트에 내려가지 말라(신17:16)는 성경의 충고를 무시했습니다. 왕상3:1에서 그는 이집트 왕 파라오의 딸과 혼인했습니다. 왕상10:28에서 그는 이집트에서 말을 사왔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왕상11:3-4에서 우리는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으로부터 돌아섬을 보게 됩니다. 5-8절에서 그는 다른 신들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9-43절에서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이 말을 사기 위해 이집트에 내려가기를 원치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찌 감히 그곳에 내려갈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솔로몬도 이집트에 대한 성경의 관점을 무시하고서는 일들을 잘 해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이 솔로몬보다 더 지혜롭습니까?
2009-05-09 16:17:58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을 사도 바울이 인정한다면 나도 인정할 수 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10>
대답: 이 말은 성경 신자들의 믿음을 비꼬아서 그들을 당혹스럽게 하려는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쓰는 말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사도 바울이 인정했다는 것은 정확한 사실입니다(다음 번 질문을 보십시오). 그러나 저는 여기에서 성도 누가가 사용했을 단 하나의 성경도 킹제임스 성경이었음을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먼저 사도행전을 살펴봅시다. 행1:1-2에서 누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 데오빌로여,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기 시작하신 모든 일에 관하여 내가 작성한 이전 보고서는 그분께서 친히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님을 통해 명령들을 주신 뒤에 들려 올라가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한 것이라.
‘내가 작성한 이전 보고서’란 물론 누가가 데오빌로라는 이름의 신자에게 썼던 누가복음을 말합니다. 여기 나오는 데오빌로는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을 개인적으로 만나 본 적이 없는 초기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그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수령인이었음을 감안해 볼 때 확실히 그는 주님에 관한 기사에 가장 정통한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장 2절에서 누가는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은 구절을 가지고 저 악명 높은 「네슬레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과 신미국표준역(NASV)에 사형선고를 내리고 있습니다.
누가는 자기가 ‘먼저 쓴 이전 보고서’가 무릇 예수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기 시작하신 때로부터 ‘그분께서 승천하신 날까지’의 전모를 기록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최초 행적은 누가복음 2:41-52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이 예수님께서 요셉과 그분의 모친이 예루살렘에서 나사렛으로 되돌아올 때 예루살렘에 뒤쳐져 남아 있었던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1장 1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4복음서 중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책은 누가복음밖에 없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기사는 24장 51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승천’을 마지막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1장 2절의 ‘들려 올라가신 날까지’라는 말씀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자기의 복음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맨 처음 행하신 일로부터 시작해서 승천하심까지 다루고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행적을 다루는 이 같은 기사들을 삭제한 그리스어 필사본들은 그 기록 연대에 관계없이 그 신뢰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네슬레의 그리스어 본문 제23판」에는 “Kai anepheroto eis ton huranon”라는 구절 즉 그분께서 “올라가 하늘로 들어가셨다.”라는 누가복음 24장 51절 구절이 눈에 띄지 않습니다.
성경 비평 학자들의 놀이 기구인 ‘비평 장치’(critical apparatus)의 주석은 이 구절을 삭제해 버린 근거가 다름 아닌 ‘시내 사본’, ‘D 사본’, ‘52번으로 알려진 하나의 대문자 사본’과 5세기경 산물로 추정되는 단 한 개의 ‘팔림섹트’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올라가 하늘로 들어가셨다.”는 구절은 B, C, E, F, G, H, L, S, T, V, Y, Z, Delta, Theta, Psi 사본들과 파피루스 75와 Omega 사본 그리고 대부분의 잔존하는 증거들에서 모두 발견됩니다. 그런데도 단 두 개의 사본 즉 저 악명 높은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에 근거해서 베일에 가려진 로크맨 재단은 신미국표준역(NASV)에서 누가복음 24장 51절을 삭제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NASV는 실로 믿을만한 번역이 못됩니다. 사실 대부분의 현대 역본들 가운데 자칭 ‘보수주의’ 학자들이 번역했다고 하는 NASV만이 유일하게 ‘자유주의’ 학자들의 개역표준역(RSV)과 더불어 그 구절을 삭제하는 데 의견을 같이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RSV를 지지하는 공산주의/자유주의자들과 NASV를 지지하는 신근본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을 가지고 승천하지 않으셨다는 데 완전히 의견 일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만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기자인 누가가 신미국표준역과 킹제임스 성경을 검토해 볼 수만 있다면 필경 신미국표준역은 거짓임을 선언하고 즉시 킹제임스 성경만을 신뢰할 만한 성경으로 선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직히 누가가 킹제임스 성경을 인정한 이상 저도 인정할 것입니다.
2009-05-09 16:12:24 | 관리자
질문: 학자들이나 목사들이 자주 언급하는 「70인역」이란 무엇입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9>
대답: 「70인역」은 보통 주 예수님 탄생 이전에 72명의 유대 학자들이 그리스어로 번역한 구약 성경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누군가가 상상 속에서 꾸며낸 책입니다.
먼저 「70인역」에 대한 기존의 추측부터 정의해 보도록 합시다. 히브리어 성경(구약, Old Testament)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공식적인 그리스어 역본을 만들고자 한 계획이 「아리스테아스의 편지」(Letter of Aristeas)라 불리는 한 고문서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 편지에 따르면 이 그리스어 역본이 유대인들의 공식 성경으로 받아들여지고 히브리어 성경을 대체할 만큼 권위를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이 번역 작업에 참여한 72명의 유대인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에서 각각 6명씩 선별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작업이 행해진 가상의 장소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이며 번역은 주전 250년경인데 이 시기는 구약 성경의 마감 시기인 주전 397년과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인 주전 4년 경 사이에 있었던 약 400년간의 침묵기간 중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70인역」이 무엇인가에 대해 일반적인 사항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역본은 「셉튜아진트」(Septuagint) 혹은 ‘70인 장로들의 번역’으로 알려져 왔는데 보통 영어로는 LXX로 표기되며 여기서 로마 사람들의 숫자 개념에 따라 L은 50, X는 10을 뜻하므로 이 숫자들을 합하면 70이라는 값이 나옵니다. 그런데 72명이 번역했다는 그 가상 속의 역본을 왜 ‘72인역’(LXXII)이라 부르지 않고 ‘70인역’이라고 부르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소위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라 불리는 이 서신이 이 불가사의한 문서 즉 「70인역」의 존재를 입증하는 유일한 증거물인데 그 이유는 주전 250년 혹은 그 전후로 구약 전체를 번역한 그리스어 필사본은 현재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유다 역사의 어디를 보아도 그런 일을 고려했다거나 진행시켰다는 기록은 전무합니다.
이런 전설적인 문서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대라는 압력을 받게 되자 학자들은 급히 주후 200년 경 오리겐이 지은 「헥사플라」(Hexapla)를 그 증거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70인역」(LXX)이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때보다 거의 450년이나 지나서 기록된 것이며 신약 성경이 완성된 후 100년도 훨씬 지나서 기록된 것입니다. 성경 역사에서 오리겐이라는 사람이 끼친 해악이 지대하므로 일단 오리겐과 그와 관련된 역사를 먼저 알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소수 본문’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들어진 ‘국지적 본문’(A local text)이었고 거기에서 유세비우스는 대음모자 콘스탄틴 황제의 요청을 수행하기 위해 50개의 성경 복사본을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유세비우스는 참된 크리스천들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인 순수한 본문을 사용하기 위해 안디옥으로 가지 않았고, 대신에 이집트에 있는 교육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거기에서 ‘학자들의 수정판’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유세비우스는 안디옥 대신에 알렉산드리아를 선택했을까요? 그 주된 이유는 그가 이집트 학자인 오리겐을 열렬히 추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리겐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아드만티우스 오리게네스(주후185~254년)는 성경 본문 부패의 장본인입니다. 현재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회사 자체가 로마 카톨릭 교회사이므로 대부분의 신학교 교과서나 참고서들은 오리겐을 가리켜 ‘위대한 크리스천 학자요, 고대 교회의 가장 뛰어나고 영향력 있던 신학자’라고 잘못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리겐은 한때 그리스 아테네 철학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함으로써 이단자로서 판명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예수님께서 ‘창조된 하나님’이었다는 이단 교리를 퍼뜨렸습니다. 이 같은 오리겐의 믿음에 대해 「뉴스탠다드 백과사전」(New Standard Encyclopedia) 제9권은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오리겐의 사상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그의 ‘로고스(Logos) 교리’였다. 이 사상은 요한복음 1장 1-5절과 다른 기독교 저술 안에도 나타나 있는데 특히 오리겐은 이 문제를 철저히 다루었다. 그리스 철학에서 로고스란 창조의 신적 원리와 이성 세계의 질서에 대한 이름이었는데 오리겐은 이 원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적용시켰다. 그는 아들을 아버지에게 종속된 존재로 만듦으로써 그리스도를 세상에 이성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로고스’로 취급하였다. 그리하여 오리겐은 실제로 이 땅에서 사시며 가르치시기도 하셨던 사람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특성을 무시하였다. 이 같은 교리는 4세기경의 이단 그룹인 아리우스파의 교리 정립을 위한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
다시 말해 오리겐은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았고 ‘하나의 창조된 신(神)’으로 믿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예수님께서 육체로 땅에 거하셨다는 사실조차 믿지 않았습니다! 오리겐의 저술에는 많은 모순이 있는데 바로 이 같은 사실은 부패한 사본들 속에 들어 있는 모순들을 설명해 주는 열쇠가 됩니다. 간혹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다가도 이내 돌아서서는 그것을 부인하곤 했습니다.
사실 오리겐은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을 변개하고는 “말씀(the word)은 한 신(a god)이었다.”고 말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말씀’과 ‘신’을 소문자로 쓴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 같은 믿음은 참으로 우리 세대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고수하는 그릇된 교리에서 나온 믿음과 동일합니다. 사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같은 자신들의 교리를 부패한 알렉산드리아 사본의 요한복음 1장 1-5절과 3장 13절에서 취하고 있는데, 바로 이 오리겐이라는 인물이 자기 자신의 이단교리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보편적 본문’을 변개시켜 여호와의 증인들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오리겐이라는 인물이 성경 사본의 변개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므로 우리는 그의 생애와 작품 그리고 철학 및 성경 변개 등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려 합니다.
A 오리겐의 삶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부유하게 살던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젊은 나이에 교사로서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의 삶은 세르베루스 황제의 박해가 있었던 주후 202년경에 극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순교했고 그의 가정은 가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 뒤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도망갈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고 결국 오리겐은 18세의 젊은 나이에 클레멘트가 창설한 알렉산드리아 교리 학교의 교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천재였으며 수많은 책들을 모으고 읽고 저술했으며 또한 영지주의자였던 암브로스의 책들을 소장했습니다. 그는 또한 이교도로서 신플라톤주의를 창설한 사카스 밑에서 공부했고 매우 금욕적인 삶을 살았는데 그 예로 신발도 신지 않고 맨 땅에서 잤으며 스스로 거세(去勢)했던 매우 특이한 인물이었습니다. 로마 황제의 박해를 당하면서도 그는 개인적으로 매우 용감했고 인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주후 213년에 로마를 방문했으며 그 뒤 알렉산드리아를 떠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어 주후 215-219년 사이에는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로 이주했습니다. 후에 알렉산드리아로 되돌아온 그는 주후 231년까지 거기에 거하다가 알렉산드리아의 지도부와의 마찰로 인해 출회되어 영구히 그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232년에 그는 가이사랴에 알렉산드리아 교리 학교에 버금가는 학교를 세웠고 데시우스트라얀 황제의 모진 박해로 인해 가이사랴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B 오리겐의 믿음
비록 오리겐이 초기의 위대한 교부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를 추앙하는 사람들마저도 그가 교리적으로는 정통이 아니었음을 인정합니다.
1. 그는 영지주의적 신념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2. 그는 플라톤 철학에 심취했습니다.
3. 그는 종종 구약 성경을 신비적으로 해석했고 신약 성경과 마찬가지로 비유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이에 대해 저명한 학자 피커링은 마쉬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배운 철학에 비추어 볼 때 문자 그대로 해석한 것이 불합리하거나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면 오리겐은 곧바로 문자적 해석을 버리고 비유 해석을 택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성경이란 기록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겐 거의 쓸모가 없다.’ 이 말은 곧 자기가 느끼는 바가 바로 성경이 의미하는 바라고 오리겐이 생각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피커링, 「신약 성경본문의 정체」(The Identity of the New Testament Text), 1977, pp. 140, 192).
4. 그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기록을 부인했고 오히려 영혼이란 영원 전부터 계속해서 존재해온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5. 그는 또한 죽음 이후에 사람의 혼이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 좀 더 고차원의 혹은 저차원의 생명으로 바뀐다는 윤회 사상을 믿었습니다.
6. 그는 또한 보편적 구원을 믿었으며 악한 자들도 형벌을 받은 후에는 즉 연옥에서 고통을 받은 후에는 구원받는다고 믿었습니다.
7. 그는 또한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 별이나 달도 혼을 갖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8. 그는 결국에는 마귀들도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9. 그는 목사를 제사장(혹은 신부)으로 부른 사람들 중 하나이며 주교들이 큰 죄를 용서하는데 한 몫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10. 대부분의 교부들이 성경대로 ‘전천년주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교회가 세력을 확장해서 평화를 가져온다는 ‘후천년주의’를 신봉했습니다.
C 오리겐의 작품
오리겐은 자신의 저서들을 통해 온 기독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는 평생에 6,000 여 권의 책을 저술했고 초기 교부들이 신약 성경에서 인용한 글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의 50% 정도가 그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니케아 종교회의 이전의 7명의 중요한 교부들이 신약 성경을 인용한 것 중에서 오리겐의 것이 약 18,000개나 될 정도로 그는 왕성한 저술 활동을 했습니다.
1. 오리겐의 대규모 작품
a. 그는 성경의 거의 모든 책에 대한 주석서를 썼다.
b. 그가 저술한 「제1 원리에 관하여」(De Principiis)라는 책은 조직신학 책이다.
c. 그가 지은 「셀수스에 반대하여」(Against Celsus)는 변증학 책이다.
d.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헥사플라」(Hexapla)이다.
2. 「헥사플라」 : 구약 성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
「헥사플라」(혹은 ‘6난 성경’)는 여섯 개 난에 여러 가지 언어로 기록된 성경 즉 ‘폴리글롯’으로 오직 구약 성경만을 담고 있습니다. 이 여섯 개의 난마다 각각 다른 구약 역본이 들어 있습니다. 시가서 같은 경우에 그는 서너 개의 다른 번역을 더 추가하여 ‘8난 성경’ 혹은 ‘9난 성경’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헥사플라」는 ‘벨과 용’(Bel and the Dragon), ‘유디스서’(Judith), ‘토비트서(Tobit)와 같은 위조된 책들과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유일하게 권위를 인정하는 다른 외경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a. 「헥사플라」는 50개로 구성된 매우 큰 폴리오 책으로 그 분량만도 자그마치 6,500쪽이나 된다.
b. 이 책은 주후 250년경에 완성되었다.
c. 그는 7명의 속기사들과 7명의 필사하는 사람과 함께 일했다.
d. 첫째 난은 히브리 본문으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소라 본문과 거의 같다.
e. 둘째 난은 히브리어 본문을 그리스어로 음역한 것을 담고 있다. ‘음역’이라 함은 다른 말의 문자를 사용하여 원어 단어의 소리대로 적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 ‘샬롬’(Shalom)과 그리스어 ‘뱁타이즈’(baptize)는 음역한 것이며 만일 이것들을 번역하면 ‘평화’(peace)와 ‘푹 담근다’(dip)가 된다.
f. 셋째 난은 아퀼라가 번역한 그리스어 역본을 담고 있다.
g. 넷째 난은 시마쿠스가 번역한 그리스어 역본을 담고 있다.
h. 다섯째 난은 오리겐의 작품으로 현재 「70인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i. 여섯째 난에는 테오도티온의 그리스어 역본이 있다.
j. 「헥사플라」는 주후 638년까지 가이사랴의 도서관에 있었으나 그 뒤 모슬렘들의 침략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k. 「헥사플라」는 단지 그 일부분만 복사되었고 특히 「헥사플라」의 다섯째 난은 ‘바티칸 사본’(B 사본), ‘시내 사본’(알레프 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A 사본), ‘에프레미 사본’(C 사본) 등에 남아 있다.
D 신약 성경 본문에 미친 오리겐의 영향
오리겐은 성경본문 비평가들이 소위 ‘가정하여 수정하는 기법’이라 부르는 기법을 사용하여 종종 신약 성경 사본을 자기 마음대로 뜯어 고쳤습니다. 이 기법은 한 마디로 당신이 원하는 대로 본문을 고치라는 것입니다. 오리겐이 플라톤 철학의 관점에서 일했으므로 그의 작품은 참으로 신약 성경 본문을 망가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신실한 성경학자였던 버건은 다음과 같이 오리겐의 신약 성경 본문 비평의 멋있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를 기록한 마태복음 19장 17-21절에 대한 주석에서 오리겐은 예수님이 그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지켰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 명령이 포괄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포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왜냐하면 부자 청년이 ‘이 모든 명령은 제가 어려서부터 지켰습니다.’라고 대답했으며 또한 분명히 예수님께서도 부자 청년의 말을 그대로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그 부자 청년이 자기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했다면 그는 완전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율법 전체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한 마디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자 청년의 대답을 들은 예수님은 ‘네가 완전하게 되려거든…’이라고 대답하시면서 그 부자 청년이 아직 완전하지 못함을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오리겐은 사실 예수님이 그 부자 청년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이 말씀이 원래의 마태복음에는 없었던 것이라고 추정했다. 다시 말해 그는 후대의 어떤 서기관이 이 구절을 집어넣었다고 믿은 것이다.
위의 예를 통해서 우리는 저 유명한 오리겐이라는 본문 비평가가 자기가 받은 본문에 만족해하지 않고 스스로 무엇인가를 상상해서는 자기 마음대로 본문에 가감을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그 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오리겐보다 더 자유롭게 본문을 수정한 학자들이 많이 있었으며 로 이런 사람들의 영향으로 부패한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 등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70인역」의 허상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오리겐이 「헥사플라」의 다섯 번째 난에다 스스로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해서 넣은 것이 아니라 단지 「70인역」을 복사했을 뿐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이 주장이 정당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 주장이 옳다면 빈틈없는 유다 학자 72명이 외경들을 - 심지어 그것들이 쓰이기도 전에 - 자기들의 작품 속에 첨가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유다 학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때는 오리겐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이러한 위조된 글들을 제멋대로 첨가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계22:18). 이렇게 조금만 주의해서 살펴보면 「헥사플라」의 다섯 번째 난이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오리겐의 사역본(私譯本)으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는 유세비우스(Eucebius)와 필로(Philo), 이 두 사람이 그리스어 모세 오경(Greek Pentateuch)을 예로 들면서 이처럼 전설 같은 책의 존재를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들마저도 그것을 구약 성경 전체나 혹은 공식적으로 수용된 어떤 역본으로 언급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엔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필사본이 하나도 없습니까? 있긴 합니다. 하나의 작은 파편에 불과한 「라일랜드의 파피루스 458번」(Ryland's Papyrus, #458)인데 이것은 주전 15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신명기 23-28장의 내용을 담고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부서진 채 발견된 이 파편들의 존재로 인해 유세비우스와 필로는 “모세오경 전체가 어떤 서기관에 의해 번역되었으며 그 목적은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의 역사를 알리기 위함이었다.”라는 망언을 한 것 같습니다. 이 파편들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구약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공식적인 그리스어 역본으로서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더더구나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주전 250년경 그 번역 작업을 위해 선발된 72명의 유다 학자들은 주전 150년에는 실력 없는 미숙한 학자들로 판명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실은 「70인역」이 번역된 지 100년 후에는 쓸모없게 되어 다시 새로운 역본이 나와야만 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오리겐의 「헥사플라」, 「라일랜드의 파피루스 458번」 그리고 ‘유세비우스와 필로의 주장’ 등은 변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들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더욱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 첫 번째 모순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자체에서 발견됩니다. 한 가지 아이러니컬한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그 편지가 아리스테아스라는 이름의 사람이 썼다는 것을 믿지 않을 뿐더러 아예 어떤 이들은 그 편지의 저자가 사실 필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그 편지의 저작 연대가 ‘기원 전’이 아니라 사실은 ‘기원 후’라는 것을 뜻하며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편지를 쓰게 된 속셈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오리겐의 헥사플라 다섯 번째 난을 「70인역」의 복사본으로 믿게 하도록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 용의주도한 계획은 외견상으로 볼 때 확실히 성취되었습니다.
만약 아리스테아스가 실존 인물이라면 그는 극복할 수 없는 두 가지 난관에 부딪혔을 것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첫 번째 난제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서 대표적인 학자 6명씩을 선발하기 위해 어떻게 그가 열두 지파의 위치를 알아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러 차례의 전쟁 패배와 포로생활을 통해 뿔뿔이 흩어져 살아왔기 때문에 12지파의 경계선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이스라엘의 12지파를 하나하나 구별할 수는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 만일 그가 12지파를 식별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 72명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런 번역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 모든 유대인들은 성경기록을 취급하는 공식 책임자가 신17:18; 31:24-26과 말2:7에서 입증되듯이 레위 지파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나머지 11지파의 어느 지파도 감히 하나님께서 금하신 그런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2) 성경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대인들이 그들 주위의 이방 민족들과 거룩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 안식일 성수, 깨끗케 하는 세세한 율법 조항들과 고유의 여러 가지 법들을 고유한 전통으로 삼아 왔습니다.
이와 더불어 히브리인들이 자기들의 언어를 계승하는 일에 열심을 낸 점을 감안하면 그들이 이방 민족들과 자기들을 구별되고자 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오늘날 중국이나 인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여전히 자기 자녀들에게 히브리어 외에 다른 언어를 가르치는 것을 거부하고 있고 이디오피아의 팔라샤 유대인들(Falasha Jews)은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유대인들의 언어를 이어받았다는 증거로 히브리어를 간직하고자 힘쓰고 있으며 그 때문에 그 나라의 여타 부족들과 구별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유대인들 즉 이방인을 개처럼 여기는 민족이 자기들의 유산인 히브리어를 버리면서까지 지극히 거룩한 재산인 성경을 이방인의 언어인 그리스어로 기꺼이 번역하려 했다.”는 학자들의 이러한 모순된 이야기를 믿을 만큼 순진하십니까? 그런 가정은 지극히 불합리하며 우스꽝스런 것입니다.
그러면 누군가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에 나오는 많은 구약 인용 구절들이 「70인역」과 일치하는데 그것은 어떻게 된 거죠?
그들이 알고 있는 「70인역」이란 바로 오리겐의 「헥사플라」의 다섯 번째 난을 가리킬 뿐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신약 성경의 인용 구절들은 절대로 「70인역」혹은 「헥사플라」에서 인용한 것이 아닙니다. 신약에 있는 구약 성경 인용 구절들은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께서 자신이 원하는 모든 방식을 통해 구약으로부터 자유롭게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그분께서 누군가 꾸며낸 「70인역」에서 단 한 구절도 인용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해결해야 할 의문이 하나 더 남아있습니다.
왜 학자들은 「70인역」의 존재를 부정하는 반박할 수 없는 이러한 진실에 대항하면서 이 거짓된 「70인역」의 존재는 그처럼 쉽게 받아들이는 걸까요?
그 대답은 슬프지만 단순합니다.
히브리어를 배우는 것이 대단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에 대한 간단한 지식을 습득하는 데만도 수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될 뿐더러 학문연구 수단으로 충분히 정통하기까지는 더 많은 세월을 필요로 합니다. 이와 비교할 때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은 보다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만일 그리스어로 된 구약 성경의 공식 역본이 존재했다면 성경 비평가들은 히브리어로 성경을 연구해야 하는 고충을 겪지 않아도 되고 단번에 성경 비평학 분야에서 그 영향력을 세 배로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그런 얄팍한 근거를 토대로 「70인역」의 존재를 수용하는 것은 단지 교만과 탐욕에 기초를 둔 행위일 뿐입니다.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비평가들은 「70인역」 같은 위조문서가 실제로 존재했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총애하는 「70인역」이 히브리어 본문과 동등한 권위를 갖는 역본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왜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서는 “어떤 역본도 원어와 같은 권위를 갖지는 못한다.”라는 이유로 그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걸까요?
이러한 학자들의 일구이언을 통해 우리는 ‘원어들을 학습한 적이 없는 사람들’ 즉 그리스어나 히브리어를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 위에서 자신들의 학자적 위치를 고수하고 스스로 권위를 지키고자 하는 교만한 학자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만일 여러분이 그런 논리를 받아들이려 한다면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2009-05-09 16:09:46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에는 고어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그것들을 제거한 현대 역본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4>
대답: 처음 질문에는 “그렇습니다.”이고 두 번째 질문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고어들이 있지만 우리들은 그것들을 삭제한 현대 역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고어가 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입니다. 고어란 더 이상 일상 회화에서 사용되지 않고 다른 것으로 대체된 말을 뜻합니다. 고어의 좋은 예는 고전10:25에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고기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해 묻지 말고 먹으라.
Whatsoever is sold in the shambles, that eat, asking no question for conscience sake.
여기에 나오는 ‘shambles’란 단어는 고어로서 옛날에 가축을 도살하여 즉석에서 고기를 파는 시장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현대의 일상회화에서 ‘시장’(market place)이란 단어로 대체되었지만 실제로 우리는 ‘shambles’가 고대의 시장 및 오늘날에도 세계 도처에 있는 고기 시장을 더욱 정확히 묘사하는 표현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는 오늘날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고 우리가 ‘shambles’를 제거해 버리고 이보다 더 흔히 쓰이는 ‘시장’ 즉 ‘market place’를 삽입한 새 역본을 출판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믿음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서 우리의 최종 권위가 되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과연 성경이 실제로 이 고어들에 관해 무엇이라 말하는지 살펴보는 일일 것입니다. 완전한 성경을 믿는 우리는 이 고어들에 관해서도 성경이 무어라 말하는지 그대로 따르기를 원합니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삼상9:1-11에서 실제로 성경이 고어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 보게 됩니다.
1 이제 기스라는 이름의 베냐민 사람이 있더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사대손으로 베냐민 족속이요, 능력이 많은 용사더라.
2 기스에게 사울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더니 그는 준수한 젊은이로 잘생겼더라.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그보다 더 잘생긴 자가 없고 또 그는 백성 중의 어떤 사람보다 자기 어깨로부터 위만큼 키가 더 크더라.
3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나귀들을 잃어버리매 자기 아들 사울에게 이르되, 이제 종 하나를 데리고 일어나 가서 나귀들을 찾으라, 하니
다음에는 사울이 자기 아버지의 나귀들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자기 아버지 기스가 나귀들보다 자기와 및 자기의 종을 염려할까 하여 나귀들 찾는 것을 포기하고 되돌아가기로 결심한 이후의 상황이 나옵니다.
6 그가 그에게 이르되, 이제 보소서, 이 도시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그는 존귀한 사람이니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반드시 다 이루어지니 이제 우리가 거기로 가사이다. 혹시 그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보여 줄까 하나이다, 하므로
7 그때에 사울이 자기 종에게 이르되, 보라, 우리가 가면 그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가겠느냐? 우리 그릇에 있는 빵을 다 썼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져갈 예물이 없도다. 우리에게 무엇이 있느냐? 하매
8 그 종이 사울에게 다시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내게 여기 내 손에 은 일 세겔의 사분의 일이 있으니 내가 그것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리고 우리의 길을 우리에게 알려 달라 하겠나이다, 하니라.
자, 이제 다음 구절에 ‘고어’가 그 모습을 드러낼 터이니 주의하여 보도록 합시다.
9 (예전에 이스라엘에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여쭈려 할 때에 이같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더니 지금 대언자라 부르는 사람을 예전에는 선견자라 불렀더라.)
10 그때에 사울이 자기 종에게 이르되, 잘 말하였도다. 오라, 우리가 가자, 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있던 도시로 가니라.
11 그들이 도시를 향한 작은 산으로 올라가다가 물 길러 나오는 어린 소녀들을 만나 그들에게 이르되, 선견자가 여기 있느냐? 하니
사무엘기상 9장 말씀 속에서 우리는 고어뿐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성경의 관례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사울과 그 아버지의 종들 가운데 한 명이 도망간 나귀들을 찾고 있음을 봅니다(삼상19:1-5). 그들은 선견자(Seer) 사무엘을 찾아가 나귀들을 찾는 일에서 그의 도움을 얻고자 결심합니다(6-8절). 11절에서 드디어 우리는 고어와 마주치게 됩니다. 그러나 11절에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하여 설명부 즉 9절을 괄호 속에 넣어 두셨습니다. “지금 대언자(Prophet)라 부르는 사람을 예전에는 선견자(Seer)라 불렀다.”라고 말하는 9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따라서 우리는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와 이 사건이 거룩하게 기록된 시기 사이에 ‘선견자’(Seer)라는 단어가 점차 사용되지 않다가 결국은 ‘대언자’(Prophet)로 대체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선견자’(Seer)라는 단어는 고어였습니다. 그러나 고어가 나타나는 11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들이 도시를 향한 작은 산으로 올라가다가 물 길러 나오는 어린 소녀들을 만나 그들에게 이르되, 선견자(seer)가 여기 있느냐? 하니
11절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단어인 ‘선견자’(Seer)가 그대로 보존된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11절은 분명히 “대언자(Prophet)가 여기 있느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리 고어를 설명하시기 위하여 성령님의 거룩한 영감을 통해 친히 9절을 기록하셨으며 그 뒤 고어를 그대로 유지한 채 자신의 거룩한 본문을 바꾸지 않으셨음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고전10:25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상황들을 올바로 다루기 위해서는 목회자 또는 성경 공부 인도자가 설교하면서 혹은 성경을 가르치면서 회중들에게 “이것은 고어이니 틀렸습니다. 새 역본을 보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에는 ‘고기시장’(shambles)이라 불리던 것이 지금은 ‘시장’(market place)으로 불립니다.”라고 뜻을 설명해 주는 것이 성경적인 방법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성경에서 고어들을 제거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일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고어들을 다루는 일에 있어서 우리 죄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하신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을 제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질문에 대한 대답은 “킹제임스 성경이 고어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것들을 삭제한 현대 역본은 필요 없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현대말로 고어를 대체하지 않으심으로 자신의 책을 바꾸지 않으셨으며 우리 역시 분명히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2009-05-09 16:03:22 | 관리자
박사 성경 서문
‘박사 성경’이라는 특이한 제목으로 인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박사 성경은 영국의 웨스트코트(B. F. Westcott)와 호르트(F. J. H. Hort)라는 유명한 그리스어 박사들이 행한 일에서 유래되었습니다. 1881년에 이 두 사람은 영국개역성경(English Revised Version, ERV 혹은 RV)을 출간하면서 신약성경의 본문을 수천 군데 변개시켰습니다. 물론 이 두 사람 전에도 영어 성경을 개정하는 사례가 있었지만 그 모든 작업은 이미 번역된 영어 성경의 본문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이었지 번역의 대본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작업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소수 본문인 바티칸 사본(B)과 시내 사본(א)을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1800년 동안 전통적으로 사용해 오던 다수 공인본문을 변개시켰습니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사본들이 바티칸 사본(B)과 시내 사본(א)을 전혀 지지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1881년의 영국개역성경에 수천 군데의 변개된 단어들을 집어넣었습니다.
물론 바티칸 사본(B)과 시내 사본(א)이 오래된 사본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이 둘은 내용 면에서 부패하여 박물관에 보관될 가치밖에 없는 사본들입니다. 이것은 사본들의 증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본문 수용을 통해 명백히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신뢰할 만한 사본에서 계속해서 사본을 만들어서 전 세계에 배포했으며 그 결과 신뢰할 만한 사본은 곧 닳아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오래 된 사본에 신경을 쓰지 않고 항상 신뢰할 수 있는 사본에 신경을 썼습니다. 그래서 바티칸 사본(B)과 시내 사본(א) 같은 부패한 사본은 바티칸 도서관이나 시내 산 수도원에 파묻혀 몇몇 사제나 수도승의 눈길을 끈 것 외에는 결코 교회 성도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습니다. 만일 이것들이 신뢰할 만한 사본이었다면 하나님의 영이 있는 성도들이 금방 진가를 알아보고 여기서 수없이 필사를 해서 곧 닳아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본은 필사되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서기관들에 의해 수정이 가해졌습니다.
예를 들어 바티칸 사본(B)은 원래의 기록자 외에 두 명의 서기관들이 난외에 혹은 줄과 줄 사이에 글자들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다른 서기관이 후대에 흐릿해진 글자를 잘 보이게 하려고 다시 덮어 쓰는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덮어 쓰는 작업을 했기에 원래의 글자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시내 사본(א) 역시 주후 4-12세기에 걸쳐 적어도 10명의 서기관들이 수정 작업을 했습니다. 이 사본이 정말로 ‘가장 오래 되고 가장 좋은 사본’이라면 10명이 넘는 서기관들이 후대에 거기에 수정을 가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누가 언제 어떻게 수정을 했는지 알 수가 없는 사본들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심지어 호르트 박사도 시내 사본(א)을 필사한 사람이 부정확하고 부주의하게 필사를 했다고 시인했습니다. 또한 그는 시내 사본(א)이 모든 면에서 바티칸 사본(B)보다 열등하다고 시인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발언은 실제로 이 사본들의 신뢰성을 변호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바티칸 사본(B)이나 시내 사본(א)의 여러 가지 다른 본문들이 99%의 다른 사본들에 의해 지지를 받지 못하는데 어떻게 호르트 박사가 거기서 서기관들의 실수와 참 본문을 구분할 수 있었겠습니까?
버건(J. W. Burgon)은 이 두 사본이 지금까지 존재한 사본들 중에서 가장 열등한 사본임을 밝히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개정을 개정한다’(Revision Revised)에서 바티칸 사본(B)의 복음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사용해 온 공인본문을 비교하면서 복음서에서만 바티칸 사본(B)이 2,877개 이상의 단어를 삭제하고 536 단어를 첨가하며 935 단어를 바꾸고 2,098 단어의 위치를 바꾸고 1,132 단어를 수정하여 총 7,578 단어의 변화를 가져왔음을 보였습니다. 버건은 또한 시내 사본(א)도 비교했는데 이것은 3,455개 이상의 단어를 삭제하고 839 단어를 첨가하며 1,114 단어를 바꾸고 2,299 단어의 위치를 바꾸고 1,265 단어를 수정하여 총 8,972 단어의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이 흠모하는 이 두 개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좋은 사본들’은 공인본문과 이처럼 많이 다를 뿐만 아니라 자기들끼리도 매우 많이 다릅니다. 버건은 이 둘을 서로 비교하였고 “이 두 개의 사본에서 연속되는 두 줄이 서로 같은 것을 찾기보다는 서로 다른 것을 찾는 것이 훨씬 더 쉽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호스키어(H. Hoskier)는 ‘바티칸 사본과 그것을 지지하는 사본들’(Codex B and its Allies)라는 책에서 “복음서에서만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은 3,000 군데 이상에서 서로 다르다.”고 보고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복음서에서의 차이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비율로 사도행전 이후부터 계시록까지의 모든 변화를 고려한다면 바티칸 사본(B)은 전체 신약성경에서 15,156 군데에서 공인본문과 다르고 바티칸 사본(B)과 시내 사본(א)은 6,000 군데에서 서로 다를 것으로 추정됩니다.
누군가가 분명히 죄를 범한 경우 그를 재판정에 데리고 가서 유죄 판결을 받게 하려면 어느 정도의 증거가 있어야 하겠습니까? 아마 두세 증인의 증거만 있으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티칸 사본(B)과 시내 사본(א)은 적어도 15,000 군데 이상 공인본문과 다른 것으로 증명되었습니다.
독자가 웨스트코트와 호르트가 바티칸 사본(B)과 시내 사본(א)을 신뢰했다는 것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간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역사의 증거로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전적으로 신뢰하며 사용해 오던 전통 공인본문에 바티칸 사본(B)과 시내 사본(א)의 여러 가지 다른 본문을 섞었습니다. ‘박사 성경’의 저술 목적은 이처럼 웨스트코트와 호르트가 바꾸어 놓은 부분들을 누구나 쉽게 우리말로 보고 원래의 공인본문과 비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본 ‘박사 성경’에서 표기된 잘못된 부분들의 원래 출처는 스크리브너의 ‘주석이 달린 그리스어 신약성경’(Annotated Greek New Testament)입니다. 스크리브너 역시 영국개역성경 위원회의 일원으로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와 함께 일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신약성경이 출간된 1881년도에 킹제임스 성경과 정확히 일치하는 자신의 공인본문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간하였고 여기서 영어개역성경의 잘못된 부분을 모두 각주로 표기하였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전체 신약 성경을 살펴보면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수정/비평 그리스어 신약성경 본문은 5,604 군데가 그리스어 공인본문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2003년도에 웨이트(D. A. Waite, Jr.)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스크리브너가 찾아 놓은 부분들을 모두 표기해서 변개된 부분들은 영어로 쉽게 볼 수 있게 ‘박사신약성경’(The Doctored New Testament)을 출간하였습니다.
우리말 박사 성경 역시 동일한 필요에 의해 출간되었습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온 지 100년이 넘었으나 아직도 우리말 성경은 부실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1986년에 송종섭은 이 같이 안타까운 국내 형편을 직시하고 ‘헬 ․ 한대조 신약성경’을 출간하면서 한국 교회에 바른 성경이 없어서 성경의 올바른 이해와 성경적인 생활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년 동안 개역성경과 전통 그리스어 공인본문을 비교하여 개역성경에서 빠지거나 잘못된 부분들을 많이 정리하여 책에 표시하였습니다. 이 책에서는 이와 같은 자료들과 또 여러 목사님들이 목회하는 가운데 발견한 것들을 정리하여 전통 그리스어 본문에서 번역된 우리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본문에 표시하였습니다. 개역성경을 구절 구절 비교하면 틀리거나 차이가 나는 부분이 워낙 많으므로 그것들을 일일이 적을 수는 없고 다만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들과 교리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만을 표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교리의 정립을 위해 성도들에게 성경을 선물로 주셨습니다(딤후3:16).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 사탄과 마귀들, 사람의 구원과 멸망, 천국과 지옥, 올바른 교회 등 크리스천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 성경 안에 들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크리스천들의 믿음과 실행을 지도할 교과서입니다. 그런데 이같이 중요한 크리스천의 표준이 시간에 따라 바뀌며 그 안의 내용이 편집하는 사람에 의해 삭제되고 변개된다면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장로교인들이 존중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이나 침례교인들의 런던 신앙 고백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영감을 통해 성경을 기적적으로 우리에게 주셨으며 그 이후에도 섭리를 통해 지금 이 시간까지 성경을 보존해 주심을 믿는다고 선언합니다. 즉 지금 이 시간에도 변개되지 않아 절대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있다고 이 고백들은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나온 본문 비평(Textual criticism)이라는 거짓 과학을 통해 자연주의적/인본주의적 시각으로 성경을 대해야 하며 성경도 다른 고대 문서와 마찬가지로 시간의 흐름 속에 원래 것이 소멸되었으므로 학자들의 손을 빌려 원래의 성경을 회복해야 한다고 사람들을 속여 왔습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는 먼저 독일의 이성주의 신학자들을 사용했고 결국 영국에서 1881년에 웨스트코트와 호르트라는 불신자 학자들의 손을 통해 ‘수정된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간했습니다. 이렇게 로마 카톨릭 교회를 통한 마귀의 프로테스탄트 침투 작전이 대성공을 거둔 이래로 현대 성경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을 보존해 주셨음을 믿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원본을 복구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 미로를 헤매고 있습니다.
성경 문제에 관한 한 한국도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우리나라의 독보적 성경으로 자리를 굳힌 개역성경은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신약성경 본문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처음부터 많은 구절이 삭제되고 변개되어 있습니다. 혹시 독자께서는 개역성경을 읽으면서 ‘없음’이라는 단어로 인해 의아해 본 적이 없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4:4). 여기의 모든 말씀은 ‘every word’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지금 이 시간 우리 손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숨을 불어넣어 주신 모든 단어가 없으면 사람이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생각이나 사상만을 보존하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모든 말씀들을 보존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들을 보존하시려 하는 것만큼이나 마귀도 자신의 사람들을 사용하여 자기 뜻에 맞게 성경을 변개하려 하고 있습니다. 성경 역사를 살펴보면 사도 바울의 안디옥 교회에서 나온 성경 신자들이 목숨을 걸고 보존해 준 ‘프로테스탄트 성경’이 있고 알렉산드리아의 인본주의 철학에 따라 성경을 비유로 해석하며 성경 신자들을 핍박한 사람들이 만든 ‘로마 카톨릭 성경’이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경학자들과 신학자들은 학교에서 세뇌를 당해 로마 카톨릭 교회의 바티칸 사본(B)과 시내 사본(א)을 추앙하며 믿음의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보존해 준 다수 사본 즉 종교 개혁을 일으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미신을 타파하고 킹제임스 성경의 모체가 된 사본들을 배격하고 있습니다.
박사 성경의 부록에서는 성경 번역을 위한 대본 선정과 번역자들의 사상이 어떻게 개역성경에 영향을 미쳤는가를 자세히 비교하여 객관적인 사실을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 부분에서는 개역성경을 비교하고 분석하였고 두 번째 부분에서는 킹제임스 성경의 역사와 우수성을 제시하였습니다.
성경 문제,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위해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는 개역성경의 문제점만을 분석했지만 사실 개역성경이나 개역 개정판, 표준새번역, 공동번역, NIV, NASB, Living Bible 등이 한결같이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로마 카톨릭 사본에서 나왔으므로 이 책자의 분석 내용은 모든 현대 역본에 적용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디 마음을 열고 하나 하나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성도들이 별다른 대안이 없으므로 개역성경을 애용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도들의 신앙생활과 교리의 정립과 신약교회의 설립과 운영에 충분히 부응할 수 있는 대안 성경이 나왔으므로 한 번 마음을 열고 비교해 볼 것을 권합니다. 진리의 영께서 저자의 속 중심과 그 안의 무거운 부담을 아시기에 이 책을 대하는 독자가 바른 길로 들어서게 해 주실 줄로 확신합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하늘의 하나님의 복이 함께 하기를 바라며 이 책을 통해서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길 원합니다.
2009-05-09 15:59:30 | 관리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출간하면서 독자들에게 드리는 글
인간의 생사화복과 우주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그분과 그분의 계획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계시(啓示)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리를 사람에게 전달하시는 것을 뜻하며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일반 계시는 모든 사람을 향한 것으로서 사람의 양심이나 해, 달, 별 등과 같은 자연 만물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시19:1-6; 롬1:18-32). 사람이 일반 계시를 통해 창조자 하나님께서 계심을 알 수 있지만 이런 계시는 사람을 구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특별 계시에는 하나님의 말씀, 기적, 우림과 둠밈, 천사, 예수 그리스도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객관적인 형태로 하나님을 계시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으며 그 외의 것은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과 그분의 크고 온전하신 뜻을 이해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이 우리에게 전달되어 온 과정에는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주전(主前) 1500년부터 주후(主後) 100년까지 약 1,600년의 기간에 40여 명의 거룩한 사람들을 예비하셨으며 이 과정 속에는 왕, 정치가, 제사장, 세리, 어부, 의사, 목자, 사도 등 다양한 직업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결코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손 밑에서 완전한 성경을 기록하였으며 우리는 이를 ‘예비’(豫備)의 단계라 부릅니다.
이처럼 기록자들을 예비하신 뒤에 하나님께서는 적당한 시기에 ‘영감’(靈感)이라는 단계를 통해 이들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분명하게 “모든 성경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3:16)고 말합니다. 여기서 영감이란 말은 ‘숨을 불어넣는 것’을 의미하며 이에 대해 성경은 “대언은 옛적에 사람의 뜻에 의해 나오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자기들을 움직이시는 대로 말하였다”(벧후1:21)고 확실하게 정의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한 단어 한 단어에 숨을 불어넣으신 책이며 우리는 이것을 ‘총체적 축자 영감’(Verbal plenary inspiration)이라 부릅니다. 이렇게 해서 소위 자필 원본(自筆 原本)이라 불리는 최초의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으로 주어졌습니다.
그 뒤에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보존’(保存)이라는 단계를 통해 자신의 말씀을 순수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어마다 친히 숨을 불어넣으셔서 완전하게 만드시고는 그 말씀을 전체적으로 완전하게 보존하지 않으신다면 영감의 단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완전한 보존’이 없는 ‘완전한 영감’이란 의미가 없으며 하나님의 속성 역시 이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감이라는 기적을 통해 기록된 말씀을 자신의 섭리에 따라 보존하셨습니다.
말씀의 보존에 대하여 성경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서리라”(사40:8)고 확언하며 예수님께서도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고 말씀하심으로써 말씀의 보존을 확증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사용하셔서 대부분의 구약 성경을 히브리어로 기록하고 보존하게 하셨으며,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을 사용하셔서 신약 성경 전체를 그 당시 세계의 공통어이던 그리스어로 기록하고 보존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보존의 단계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사용하여 완전한 일을 행하셨고 바로 이 단계를 통해 21세기에 사는 우리에게까지 성경이 전달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되어 온 경로에서 그다음 단계는 ‘번역’(飜譯)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후 100년 이후에 복음이 온 세상에 퍼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각 나라의 말로 번역할 필요가 생겼고 그 결과 수많은 역본(譯本)이 출현하였습니다. 성경의 영감과 보존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지만 번역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이 넓은 세상 곳곳에 사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은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로 기록된 자필 원본 성경이 아니라 각 나라의 말로 번역된 성경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 이방인들에게는 번역의 단계 역시 영감이나 보존의 단계 못지않게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성경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번역을 위한 대본(臺本)입니다. 자필 원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을 필사(筆寫)한 사본(寫本)들도 많이 있기는 하지만 어느 것도 신구약 성경 전체를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현존하는 사본들을 정리하여 번역을 위한 대본을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며 이렇게 정리된 대본을 우리는 본문(本文)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큰 틀에서 볼 때 성경 번역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번역을 위한 본문이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라는 점입니다. 어떤 제품을 만들든지 그것을 찍어 내는 틀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산되는 제품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 역본 역시 본문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 내용이 필연적으로 달라집니다.
구약 성경의 경우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소명 의식을 가진 유대인들이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벤 카임 마소라 본문’(Ben Chayyim Masoretic Text)이라 하는 ‘전통 마소라 본문’을 보존하였기 때문에 20세기 초까지 이 본문에 대한 비판은 거의 없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King James Version, KJV)의 구약은 바로 이 본문에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1906년에 키텔(Rudolph Kittel)은 ‘벤 카임 마소라 본문’을 사용하여 「비블리아 헤브라이카」(Biblia Hebraica Kittel, BHK)라는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편찬하면서 비평 장치라 불리는 각주들을 이용해 ‘전통 마소라 본문’을 페이지마다 15~20 군데씩 수정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각주들은 신실한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벤 아세르 마소라 본문’(Ben Asher Masoretic Text)에 근거한 것들입니다.
1929년에 키텔이 죽은 뒤 칼레(Paul. E. Kahle)는 키텔의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본문을 전격적으로 ‘벤 아세르 마소라 본문’으로 바꾸고는 키텔의 이름을 붙여서 1937년에 「비블리아 헤브라이카」 3판을 출간하였습니다. 키텔의 작품이 아님에도 보통 키텔의 「비블리아 헤브라이카」(BHK) 3판으로 불리는 이 히브리어 구약 성경은 마침내 1967/1977년판 「슈투트가르트 비블리아 헤브라이카」(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BHS)로 개정 출간되었습니다. 이 같은 본문 교체는 구약 성경에서 약 20,000 군데가 수정된 것을 뜻합니다. 또한 ‘신국제역’(New International Version, NIV)과 ‘신미국표준역’(New American Standard Version, NASB) 등 거의 모든 현대 역본들의 구약 성경 본문이 「BHS」이기 때문에 이러한 본문 교체 영향이 그 안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즉 마소라 본문이라 해도 다 동일하지 않으므로 어느 마소라 본문을 사용했느냐에 따라 구약 성경의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약 성경의 경우 ‘킹제임스 성경’의 근간이 된 본문은 그리스어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인데 이 본문의 특징은 신약 교회가 거의 1,900년간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해 왔다는 것이며 그 내용이 전혀 변화가 없이 한결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다수 사본에 근거했기에 ‘다수 본문’이라고도 하고, 가장 널리 사용되었기에 ‘보편적 본문’이라고도 하며,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서방 본문’과 대비되어 ‘비잔틴 (혹은 동방) 본문’이라고 하고, 루터와 칼빈 등 종교 개혁자들이 하나같이 이 본문만을 사용했기 때문에 ‘종교개혁 본문’이라고도 합니다.
프로테스탄트들과 침례교인들이 한결같이 ‘공인 본문’만을 사용해 온 것과는 달리 로마 카톨릭 교회는 처음부터 ‘소수 본문’만을 고집해 오고 있습니다. ‘소수 본문’이라는 호칭이 의미하듯이 이 본문을 지지하는 사본은 소수이며 그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및 신성, 대신 속죄, 삼위일체 등에 대한 오류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사본들 중 가장 유명한 것들로는 로마 교황청 도서관에 보존되어 온 ‘바티칸 사본’과 시내산 수도원에서 발견된 ‘시내 사본’이 있습니다. 이 두 사본에 근거해서 1881년에 영국의 웨스트코트(Brooke F. Westcott)와 호르트(Fenton J. Hort)는 ‘공인 본문’을 5,604 군데나 수정하여 ‘비평 본문’(Critical text)을 만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들이 ‘공인 본문’에서 삭제하거나 추가하거나 바꾼 단어는 9,970개이며 이것은 신약 성경 본문에 나오는 140,521개 그리스 단어의 7%에 해당합니다.
1898년에 독일의 네슬레(Eberhard Nestle)는 웨스트코트와 호르트, 티센도르프(Constantin von Tischendorf) 그리고 위마우스(Richard F. Weymouth)의 그리스어 본문을 조합하여 「네슬레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출간하였습니다. 그 뒤 네슬레의 본문은 27회 개정을 거쳐 현재는 「네슬레/알란드 그리스어 신약 성경」(28판, 2012년)으로 출간되고 있습니다. 한편 독일의 알란드(K. Aland)는 1952년부터 네슬레의 본문(21판)을 수정하기 시작했고 1975년에 연합 성서 공회(United Bible Society)는 알란드가 제출한 네슬레의 본문을 「그리스어 신약 성경」(3판)으로 채택하였으며 2014년에는 5판을 출간하였습니다. 대다수 현대 역본들의 신약 성경은 예외 없이 천주교 소수 본문에서 나온 네슬레의 그리스어 본문에 근거하여 번역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킹제임스 성경’과 현대 역본들은 번역의 대본인 본문이 상이하기 때문에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새로운 역본으로 인한 새로운 기독교와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수백 가지 역본이 출현하면서 이제 사람들은 물건을 고르듯 자기 뜻에 맞는 역본을 선정하고 여러 역본을 비치한 뒤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이 구절은 이 역본이 좋고 저 구절은 저 역본이 좋다고 판단합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는 자신의 말씀의 보존과 전파를 위해 공통 언어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속성과 현시대의 특성을 들 수 있습니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군에 의해 무참히 패배를 당한 뒤 보잘것없던 섬나라 영국은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국과 미국이라는 두 국가를 통해 두 가지 일 즉 자신의 선민인 유대인들을 보호하는 일과 자신의 말씀을 세상에 전파하는 일을 수행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영국을 통해 구약과 신약이 하나로 합쳐진 성경전서가 출간되었고,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 지배하의 암흑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복음의 빛이 나오게 되었으며, 산업 혁명 등을 통해 인류의 복지 증진도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영어 중심의 세계 판도는 해를 거듭할수록 확대되어 이제는 영어가 세계 공통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하나님의 심오한 계획 속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셔서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거저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지난 400년간, 세계 공통어가 된 영어를 사용하여 전 세계에 말씀을 전파해 오셨고 이를 위해 영어로 기록된 ‘킹제임스 성경’을 말씀의 표준 척도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1611년 ‘킹제임스 성경’이 나오기 이전이나 이후에도 여러 개의 영어 성경이 있었지만 보통 사람들이 읽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권위를 부여해 주신 ‘권위역’(Authorized Version, AV)이라는 호칭을 부여받은 킹제임스 성경만이 영미권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수많은 민족들이 사용하는 수백 개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18, 19세기 미국 및 영국의 부흥과 세계 복음 전파에 독점적으로 사용되어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였으며 모든 책 중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성경’(The Holy Bible)이라 하면 ‘킹제임스 성경’을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우수성에 대해 「톰슨대역 한영성경」 편찬 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성경의 내용 번역은 물론 신학 용어 번역에 있어 만인이 수긍할 수 있는 기본 역본이 없다면 상당한 혼돈과 분파를 초래할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킹제임스 역본'이라는 걸출한 역본이 있어서 1611년 이래 수백 년 동안 성경 역본과 신학의 기본 용어를 제공하며 만인이 수긍하고 공인하는 기본 자료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여 왔는바 이 점에 있어서 '킹제임스 역본'의 공헌은 잊히지 아니할 것이다. 상술하면 '킹제임스 역본'은 영어는 물론 세계 각 나라 언어로 성경이 번역될 때 참고가 되는 제1의 통일 자료로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영어의 세계적 발흥과 아울러 '킹제임스 역본'의 내적 우수성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이다(톰슨대역 한영성경, 기독지혜사, 부록 1, 4쪽, 1989).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고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으며 누구든지 그분을 믿기만 하면 행위와 무관하게 영원한 생명을 얻어 천국에서 살게 된다고 믿을 터인데 사실 이 같은 믿음의 근거는 단 하나 즉 ‘기록된 성경 말씀’밖에 없습니다. 이 ‘기록된 말씀’ 곧 성경이야말로 우리의 영과 육에 속한 모든 활동의 표준 척도이며 따라서 이런 표준 척도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결코 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현재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참 성경이 지금 우리에게 있는가?”라는 논쟁이 크리스천들 간에 뜨겁게 진행되고 있으며 수백 종이 넘는 책들이 ‘성경’이란 이름으로 팔리고 있습니다. 더욱이 1993년 말에 미국성서공회는 「새 시대를 위한 좋은 소식」(Good News For A New Age)이라는 뉴에이지 성경마저 출판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상대적 윤리와 철학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에 지난 400년 이상 한 번의 개정도 없이 성도들의 믿음과 실행의 표준으로 자리 잡은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하여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와 거룩함 그리고 사랑을 널리 알려야 할 당위성이 대두되었습니다.
본 성경의 초판 번역에는 총 8년이 소요되었고 목사, 신학자, 경영인, 영어 교사, 국어 교사, 의사, 엔지니어, 변호사, 과학자, 사업가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번역과 교정 작업에 참여하였으며 아낌없는 형제 사랑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조언하였습니다. 이런 성도들의 값진 노고가 없었다면 본 성경의 출간이 불가능했을 것이며 이에 대하여 영광의 주님께서 하늘의 보상으로 충만히 갚아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또한 성경의 출간을 위해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신 많은 형제자매들에게도 주님께서 동일한 은혜로 채워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이 성경을 통해 우리 민족 가운데 아직도 복음을 접하지 못한 이들이 구원을 받기 원하며 특히 70년 이상 복음이 가려진 북녘땅에도 복음의 불길이 타오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울러 이미 믿은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섭리로 보존된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갖고 더욱 담대하게 이 세상을 이기며 죽어 가는 자들을 영생의 길로 인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긴 작업 과정에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히 허락하신 모든 긍휼의 아버지와 친히 십자가의 모진 고초를 당하시고 피를 흘려 우리에게 영생을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영원히 성도들 안에 거하시면서 지혜와 판단으로 모든 일을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 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권능과 위엄이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합니다.
(*) ‘마제스티 에디션’은 초판 발행 이후 21년 동안 세밀한 교정 작업을 거쳐 출간되었음
2009-05-09 14:31:53 | 관리자
전도자를 위한 신약성경을 출간하면서 독자들에게 드리는 글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는 선언과 함께 자신의 지상 사역 기간에 구약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유기체 즉 교회라는 유기체를 만드셨습니다(마16:18). 그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사 귀중한 피를 흘리시고 무덤에 묻혔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뒤 40일 간을 이 세상에 계시면서 절대 확실한 증거로 자신의 부활을 확증해 주신 뒤 승천하시면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대위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막16:15)
이런 대위임을 맡은 제자들은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산 증인이 된 그들은 담대하게 “예수 구원하신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들고 전 삶을 주를 위해 바치면서 심지어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이들의 수고를 통해 복음이 온 세상을 한 바퀴 돌면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에도 이르게 되었으며 이 복음을 통해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고전15:1-2).
교회의 존립 목적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 구원’(Soul winning) 즉 구령이며 따라서 구령/전도가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교회의 머리되시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혼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친히 물으시면서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마16:26; 9:13). 또한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의 눈앞에서 기쁨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눅15:10). 구령/전도의 산 증인인 바울 사도도 죽기 전에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간곡한 부탁을 했습니다.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긴급히 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딤후4:2)
구약성경 또한 영혼을 얻는 일이 매우 값진 것임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혜의 대왕 솔로몬은 혼들을 얻는 자는 지혜로운 자라고 기록했으며(잠11:30)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했던 대언자 다니엘도 많은 사람들을 의로 돌아서게 하는 자들은 별들과 같이 영원무궁토록 빛나리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단12:3).
그렇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알지 못한 채 지옥으로 향하고 있는 죄인들을 구원시키는 일은 매우 중요하며 긴급한 일입니다. 특별히 우리 주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이 시점에서는 영혼 구령이 그 어느 때보다도 긴급을 요하는 사안인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구령/전도자(Soul winner)가 늘 가지고 다니면서 언제라도 필요할 때에 복음을 제시할 수 있는 신약성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이런 신약성경의 부록에 ‘영혼 구령 가이드’를 수록하여 구령/전도 때에 접하게 되는 여러 가지 질문들을 성경으로 답변하게 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 미국 크리스천들이 이런 종류의 신약성경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언제든지 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때가 되면 한국 크리스천들을 위해서도 이런 신약성경을 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출간하는 「전도자를 위한 신약성경」은 바로 이런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특별히 만든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창세기는 사람과 죄와 사망의 기원을 보여 주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기초를 제공하는 책입니다. 특히 진화론이 득세하는 이 세대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시하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를 자주 읽고 이 모든 것을 확고하게 제시하는 것이 필요할 줄로 생각하여 창세기를 넣었습니다. 한편 시편, 잠언, 전도서는 구령/전도하다가 지치거나 지혜를 필요로 할 때에 묵상하면서 위로를 얻을 수 있도록 넣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부록의 ‘구령/전도 가이드’는 여러 책자와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식으로 구령/전도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느낀 것을 요약한 것입니다. 이것을 참조하셔서 독자 스스로 자신의 방법을 개발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전도의 대상이 다양하고 그들의 사정이 다 다르기 때문에 구령/전도에는 왕도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과 성령님의 도우심이 결합될 때 비록 우리는 약하지만 하나님께서 열매를 주십니다.
이 세상 물고기를 낚는 데도 기술과 장비와 노력이 필요하듯이 사람을 낚는 데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들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평생토록 쓸 수 있는 ‘영혼구원기술’을 몸으로 터득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이번에 출간하는 「전도자를 위한 신약성경」이 우리 한국 성도들의 구령/전도 사역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신약성경을 사용하여 열매를 얻으신 분은 출판사로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에게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호소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
우리 모두 담대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싸움터로 나갑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
영혼 구원/전도의 싸움터로 나가는 형제/자매님에게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용기와 지혜와 위로와 승리를 허락해 주실 줄로 확신합니다. 샬롬.
2009-05-09 14:18:29 | 관리자
킹제임스 스터디 바이블을 출간하면서
독자들에게 드리는 글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창조자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시면 어떤 창조물도 그분과 그분의 계획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양심과 자연 세계라는 일반 계시를 주셨고(시19:1-6; 롬1:18-32) 자신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객관적인 형태로 말을 사용하여 성경이라는 특별 계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감이라는 과정을 통해 성경의 모든 단어에 숨을 불어넣어 주셨으므로 성경은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딤후3:16). 자필 원본을 주신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지금까지 자신의 말씀을 순수하게 보존해 주셨습니다(시12:6-7; 사40:8; 마24:35).
주후 100년 이후에 복음이 온 세상에 퍼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각 나라 말로 번역해야 할 필요가 생겼고 그 결과 역본들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이 세상 곳곳에 사는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로 기록된 자필 원본/사본이 아니고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된 역본들입니다. 성경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번역을 위한 대본입니다. 처음부터 신약 교회는 유대인들이 순수하게 보존한 히브리어 ‘전통 마소라 본문’(Ben Chayyim Masoretic Text)과 신약 성도들이 목숨을 걸고 보존한 그리스어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을 각각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대본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14세기 이후로 영어 시대가 열리면서 1382년경에 최초로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이 하나로 묶인 위클리프 성경이 출간되었고 그 뒤 230년이 지나서 1611년에 ‘킹제임스 성경’(King James Bible)이 출간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400여 년 동안 ‘킹제임스 성경’은 단 한 번의 개정도 없이 온 세상에 창조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밝히 드러내는 횃불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1970년대 이후로 로마 카톨릭 소수 본문에 근거한 NIV, NASB, Living Bible 등의 현대 역본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프로테스탄트/침례 성도들의 종교 개혁 성경인 ‘킹제임스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리려 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말씀의 단맛을 아는 성도들에 의해 세상 풍조나 철학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강력하게 복음의 위력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8년간의 번역 과정을 거쳐 2000년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출간되었고 그 이후 20년간의 세밀한 교정 작업을 통해 2021년에는 좀 더 원문에 가깝고 낭독하기에 좋으며 우리말 문법에 맞는 ‘마제스티 에디션’이 출간되었습니다.
편집자는 35년 전에 ‘킹제임스 성경’을 처음 접한 이후로 영미권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연구를 위해 ‘용어 색인 사전’, ‘낱말 풀이 사전’, 각종 관주/주석 성경 등을 사용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도구들을 통해 성도들의 믿음이 강하게 뿌리를 내려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맺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국내에도 여러 종류의 참조/관주 성경들이 나왔지만 성경을 진지하게 공부하려는 보통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책은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편집자는 성경 번역 이후에 성경을 알고자 하는 평범한 성도들의 선한 욕구를 채워 줄 성경을 제작할 것을 결심하였고 그 결과 성경의 매 페이지 중간에 세로로 관주를 넣고 뒷부분에 성경 사전과 컬러 지도와 선도를 넣은 본 성경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주석 성경과 달리 본 성경 본문에는 문단이나 장의 제목을 제외하고는 개인의 주석을 넣지 않았고 대신 부록으로 사전을 넣어 성도들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편집자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선도와 지도의 필요성을 많이 느꼈으므로 본 성경에서는 성경을 공부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연대기, 지도, 지형 선도, 교리 이해 선도 등을 제작/첨부하였습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들을 듣지 못하는 기근이 생기면(암8:11) 그분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어서 망하게 됩니다(호4:6; 6:6).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은 죽은 책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해서 몇 가지 예가 나옵니다. 느헤미야기에는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서 레위 사람들이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책의 말씀들을 명료하게 낭독하고 의미를 알려 주어 백성이 그 낭독한 것을 이해하게 하니라”(느8:8). ‘킹제임스 스터디 바이블’이 바로 이와 같은 일을 할 것입니다. 본 성경을 읽는 이들이 스스로 읽은 것을 이해하여 삶에 적용하는 것이 본 성경 출간의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신약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난 빌립은 그에게 달려가 그가 대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을 듣고 “그대가 읽는 것을 이해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내시는 “누가 나를 지도해 주지 않으면 어찌 내가 이해할 수 있느냐?”라고 응답했습니다(행8:30-31). 본 성경의 관주와 사전은 빌립과 같은 안내자의 역할을 하여 독자께서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성경을 풀어 주는 것의 중요성을 몸소 예로 남겨 주셨습니다. 비록 그분의 제자들이 구약 성경을 잘 알고 있었지만 주님께서 그것들을 정리하여 풀어 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눅24:32).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 원하는 성도들은 성경이 제시하는 일꾼의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너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2:15). 성도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어떤 일을 감당하든지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이해하고 진리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이 많아도 진리가 없으면 하나님의 계획과 일에 방해물이 될 수 있습니다(롬10:2-3). 바른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때에 바른 구원과 교리와 실행이 나오고 바른 교회가 설립됩니다. 본 성경의 바른 본문과 성경 공부 도구들을 통해 독자들께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귀한 일꾼이 되기를 원합니다.
본 성경이 나오기까지 성경을 대조해서 읽고 관주와 사전을 일일이 검토하며 지도와 선도를 만들어 준 모든 성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긴 작업 과정 속에서1)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히 허락하신 모든 긍휼의 아버지 하나님과 친히 십자가의 모진 고초를 당하시고 피를 흘려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고 영원히 성도들 안에 거하시면서 지혜와 판단으로 모든 일을 형통하게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 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권능과 위엄이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바랍니다.
(*) ‘마제스티 에디션’은 초판 발행 이후 21년 동안 세밀한 교정 작업을 거쳐 출간되었음
2009-05-09 14:17:02 | 관리자
킹제임스 스터디 바이블을 출간하면서 독자들에게 드리는 글
우주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면 어떤 피조물도 그분과 그분의 계획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양심과 자연 만물이라는 일반 계시를 주셨고(시19:1-6; 롬1:18-32) 자신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객관적인 형태로 말을 사용하여 성경이라는 특별 계시를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영감이라는 과정을 통해 성경의 모든 단어에 자신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으므로 모든 성경 기록은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딤후3:16). 자필 원본을 주신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지금까지 자신의 말씀을 순수하게 보존해 주셨습니다(사40:8; 마24:35).
주후 100년 이후에 복음이 온 세상에 퍼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각 나라 말로 번역해야 할 필요가 생겼고 그 결과 역본들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이 세상 곳곳에 사는 많은 사람을 구원시키는 것은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로 기록된 자필 원본/사본이 아니고 각 나라 말로 번역된 역본들입니다. 성경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번역을 위한 대본입니다. 처음부터 신약 교회는 유대인들이 순수하게 보존한 히브리어 「전통 마소라 본문」(Ben Chayyim Masoretic Text)과 신약 성도들이 목숨을 걸고 보존한 그리스어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을 각각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대본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14-15세기 이후로 영어 시대가 열리면서 최초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하나로 묶인 영어 성경전서가 출간되기 시작했고 1382년도에 위클리프 성경이 출간된 이후에 약 230년이 지나서 1611년에 「킹제임스 성경」(King James Version)이 출간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400여년 동안 「킹제임스 성경」은 단 한 번의 개정도 없이 온 세상에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밝히 드러내는 횃불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1970년대 이후로 로마 카톨릭 소수 본문에 근거한 NIV, NASB, Living Bible 등의 현대 역본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프로테스탄트/침례 성도들의 종교 개혁 성경인 「킹제임스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리려 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말씀의 단 맛을 아는 성도들에 의해 세상 풍조나 철학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력하게 복음의 위력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도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완역/출간되었고 그 이후 약 6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2006년도에는 좀 더 원문에 가깝고 낭독하기에 좋으며 우리말 문법에 맞는 개정판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편집자는 20년 전에 「킹제임스 성경」을 처음 접한 이후로 영미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을 제대로 공부할 수 있게 해 주는 ‘용어 색인 사전’, ‘낱말 풀이 사전’, 각종 관주/주석 성경 등이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러한 도구들을 통해 성도들의 믿음이 강하게 뿌리를 내려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맺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 국내에도 여러 종류의 참조/관주 성경들이 나왔지만 성경을 진지하게 공부하려는 보통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는 책은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번역한 이후에 평범한 성도들의 성경을 알고자 하는 선한 욕구를 채워 줄 성경을 제작할 것을 결심하였고 그 결과 성경의 매 페이지 중간에 세로로 관주를 넣고 뒤 부분에 성경 사전과 컬러 지도와 선도를 넣은 본 성경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주석 성경과 달리 본 성경의 본문에는 문단이나 장의 제목을 제외하고는 개인의 주석을 넣지 않았고 대신 부록으로 사전을 넣어 성도들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편집자 본인이 성경을 공부하면서 선도와 지도의 필요성을 많이 느꼈으므로 본 성경에서는 성경을 공부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연대기, 지도, 지형 선도, 교리 이해 선도 등을 제작/첨부하였습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들을 듣지 못하는 기근이 생기면(암8:11) 그분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어서 망하게 됩니다(호4:6; 6:6).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은 죽은 책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해서 몇 가지 예가 나옵니다. 느헤미야기에는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서 레위 사람들이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에서 책에서 명료하게 낭독하고 의미를 알려 주어 그들로 하여금 그 낭독하는 것을 깨닫게 하니라”(느8:8). 킹제임스 스터디 바이블이 바로 이와 같은 일을 할 것입니다. 본 성경을 읽는 이들이 그 의미를 알고 읽는 것을 깨달아 삶에 적용하는 것이 본 성경 출간의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신약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이디오피아 내시를 만난 빌립은 그에게로 달려가 그가 대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을 듣고 “그대가 읽는 것을 깨닫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내시는 “누가 나를 지도해 주지 않으면 어찌 내가 깨달을 수 있으리요?”라고 응답했습니다(행8:30-31). 본 성경의 관주와 사전은 빌립과 같은 안내자의 역할을 하여 독자가 읽는 것을 깨닫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도 성경을 풀어 주는 것의 중요성을 몸소 예로 남겨 주셨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이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었지만 주님께서 그것들을 정리하여 풀어 주실 때에 비로소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눅24:32).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 원하는 성도들은 성경이 제시하는 일꾼의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2:15). 성도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어떤 일을 감당하든지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이해하고 진리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이 많아도 진리가 없으면 하나님의 계획과 일의 방해물이 될 수 있습니다(롬10:2-3). 바른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때에 바른 구원과 교리와 실행이 나오고 바른 교회가 설립됩니다. 부디 본 성경의 바른 본문과 성경 공부 도구들을 통해 독자들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꾼이 되기를 원합니다.
본 성경이 나오기까지 성경을 대조해서 읽고 관주와 사전을 일일이 검토하며 지도와 선도를 만들어 준 모든 성도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리며 긴 작업 과정 속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히 허락하신 모든 긍휼의 아버지 하나님과 친히 십자가의 모진 고초를 당하시고 피를 흘려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고 영원히 성도들 안에 거하시면서 지혜와 판단으로 모든 일을 형통하게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 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가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바랍니다.
2009-05-09 14:14:30 | 관리자
질문 : 전치사 in에 대한 번역이 「킹제임스 흠정역」과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답변 : 「킹제임스 흠정역」은 관용구를 정확하게 번역했으나 말씀보존학회의 성경은 오역을 했습니다.
얼마 전에 미국에 갔다가 한 분이 어떤 이상한 교리를 말하면서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을 인용하기에 그 부분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기본 영어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영어 성경을 접하는 분들이 쉽게 실수할 수 있는 것이므로 오늘은 간단하게 영어 'in'의 용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눅3:22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성령님께서 비둘기같이 몸의 형태로 그분 위에 내려오시고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킹제임스 흠정역).
And the Holy Ghost descended in a bodily shape like a dove upon him, and a voice came from heaven, which said, Thou art my beloved Son; in thee I am well pleased.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pleased in"입니다. 개역 성경이나 기타 다른 모든 성경 - 전 세계 모든 성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님 - 이 다 '너를 기뻐한다'로 번역한 반면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유독 다음과 같이 멋있게 번역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네 안에서 내가 기뻐하노라"(한글킹제임스).
이런 번역상의 차이는 그냥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것입니다. 영어 성경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런 것에서 미끄러지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발생합니다. 또 잘 모르는 분들은 후자가 맞는 줄로 오해합니다.
영어에서 '기뻐하다', '즐거워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동사/형용사는 'delight', 'rejoice', 'joy', 'pleased', 'joyful', 'glad' 등이 있으며 여러분이 이미 중고등학교에서 문법 시간에 배웠듯이 이런 동사/형용사는 목적어를 취하면서 대개 'in'을 수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7장 22절을 봅시다. 영어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For I delight in the law of God after the inward man:
이 경우의 'in'을 '안에서'로 번역하면 오역이 됩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내가 속사람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흠정역)
'joyful'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시편 35편 9절을 봅시다.
And my soul shall be joyful in the LORD: it shall rejoice in his salvation.
이런 경우 "내 혼이 주 안에서 기뻐하고"로 하면 오역이며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맞습니다.
그러면 내 혼이 주를 기뻐하고 그분의 구원을 즐거워하리이다(흠정역).
'rejoice'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위의 시편35:9에'rejoice'가 있는데 여기서 '내 혼이 그분의 구원 안에서 즐거워하되'로 하면 오역입니다.
'glad'와 'rejoice'가 같이 나오는 아가서 1:4를 보시기 바랍니다.
Draw me, we will run after thee: the king hath brought me into his chambers: we will be glad and rejoice in thee, we will remember thy love more than wine: the upright love thee.
여기도 "우리가 당신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로 해야지 "당신 안에서"로 하면 우스운 번역이 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This is the day" 복음 찬송도 보시기 바랍니다(시118:24).
This is the day which the LORD hath made; we will rejoice and be glad in it.
여기도 우리가 이 날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지 '그 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joy'를 보기 바랍니다(사9:17).
Therefore the Lord shall have no joy in their young men, neither shall have mercy on their fatherless and widows:
여기도 "주께서는 그들의 젊은이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번역하는 것이 맞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기쁘다', '즐거워하다'는 의미의 단어는 대개 목적어를 취하면서 'in을 수반합니다.
그러면 'pleased'는 어떠할까요? 'pleased'가 'in'과 붙어서 나오는 용례는 신약 성경에서 몇 군데 발견됩니다(마3:17, 마12:18, 막1:11, 눅3:22, 벧후1:17 등).
이런 부분에서 'in'을 '....안에서'로 번역하면 아주 졸작이 되고 맙니다. 전 세계 모든 성경이 다 '..을 기뻐하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어의 관용적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2장 18절을 봅시다.
Behold my servant, whom I have chosen; my beloved, in whom my soul is well pleased(KJV)
"Behold, My Servant whom I have chosen; My Beloved in whom My soul is well-pleased; (NASB)
"Here is my servant whom I have chosen, the one I love, in whom I delight; (NIV)
"Look at my Servant. See my Chosen One. He is my Beloved, in whom my soul delights.(TLB)
보수적으로 번역한 KJV와 NASB는 'pleased in'을 썼으며 좀더 현대체로 쓴 NIV와 TLB는 'delight in'을 썼습니다. 영어에서는 'pleased in'과 'delight in'의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우리말에서는 그런 차이를 둘 수 없으므로 그냥 '...를 기뻐하다'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혼이 매우 기뻐하는 자'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제 말이 의심스러우면 여러분의 한영 사전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끝으로 1828년도 Webster 사전을 보시면 정확하게 마태복음 3장 17절의 'pleased in'의 용례가 나와 있습니다.
To be pleased in or with, to approve; to have complacency in. Matt.3.
이것은 곧 즉 '그를 기뻐하며 승인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안에서 기뻐한다'는 결코 맞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한글개역성경은 너무 멋있게 번역을 했습니다. 즉 우리말의 용례와 우리 정서에 맞게 잘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무시하고 "내가 그 안에서 기뻐한다"고 번역하는 것은 졸역이며 심지어 오역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끝으로 'glory'도 목적어를 취할 때 'in'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레미야 9:23-24를 보기 바랍니다.
Thus saith the LORD, Let not the wise man glory in his wisdom, neither let the mighty man glory in his might, let not the rich man glory in his riches: But let him that glorieth glory in this, that he understandeth and knoweth me,
이런 경우의 'glory in'도 다 '지혜를 자랑하지 말고' 등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지혜 안에서'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6장 13도 마찬가지입니다.
For neither they themselves who are circumcised keep the law; but desire to have you circumcised, that they may glory in your flesh.
여기도 육신을 자랑한다고 번역해야 합니다.
2009-05-09 14:12:06 | 관리자
킹제임스 성경 역시 ‘최고’
미주중앙일보, 뉴욕중앙일보. May. 24 2001, 07:14 EST
미국인 가정 54% 보유…다음은 새국제역
갤럽,성서공회 공동조사
미국 가정의 93%가 성경을 소지하고 있으며 미국인 과반수가 킹 제임스 역 성경을 선호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갤럽연구소와 미국성서공회의 공동조사에 의하면, 성경은 미국인들이 정기적으로 가장 자주 읽는 도서중 하나다.
미국인들이 가장 존중하는 영역본은 킹 제임스 원역(1611년). 미국 가정의 54%는 킹 제임스역을 보유하고 있다. 킹 제임스는 지난 1950년대까지 개신교인들이 사용하던 유일한 번역판이었으나 그 후 다양한 현대 번역판들이 선을 보였다.
그러나 성경이 보다 더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도록 번역돼야 한다는 미국인의 불만은 여전하다. 킹제임스 이외의 현대역들 중 가장 선호되는 번역판은 NIV(새국제역). 그러나 정작 NIV 보유자는 평균 15%에 그쳐 KJV 선호도를 훨씬 밑돌고 있다. 그밖에 뉴킹제임스판(NKJ), 새미국표준역(NASB), 가톨릭 역본(NAB)들, 신개정표준역(NRS) 등도 모두 킹제임스에 비해서는 월등히 낮은 보급률을 보이고 있다.
"킹 제임스 원역판(KJV, 1611년)이 내겐 우수도서 중에서도 최고다!" 이것은 목회자의 말이 아니라 ‘보스턴글로브’에 실린 알렉스 빔씨의 말이다. 그의 이 말은 단지 취향을 뜻한 것일 뿐 성경의 권위를 말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미국인들의 고전적 킹제임스 편애성은 이유가 없지 않다. 칼럼니스트 앤디 크라우치(크리스차니티투데이)는 “라이프 스타일 지향의 최신 성경 번역판들은 원어 원문을 게재했더라도 평소 읽기 지루하고 답답한 부분들을 더욱 매력 없이 만들어 놓고 있다"고 지적. 크라우치는 나아가 “읽기 쉬운 부분들만 요란한 학습노트와 참고 힌트, 생생하고 컬러풀한 그래픽으로 장식해놨다”고 개탄했다. 빔은 한술 더 떠 구체적인 지적까지 했다. 즉 새국제역(NIV)을 펴낸 존더밴 출판사가 인터넷매거진 ‘유스스페셜티’와 ‘캠퍼스라이프’지와 공동발행한 청소년 큐티용 성경(TYB)은 본문 곁에 ‘무대뒷길’, ‘급진신앙’, ‘여기 새로운 게 있다면?’식의 현대식 주해를 달아 오히려 본문 흐름을 막고 있다는 것.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사울 왕이 하루는 다윗을 오케이 가이로 생각했다가 그 다음날은 창을 던져 시시커밥(꼬치요리)을 만들려 했다.” "아담은 한동안 ‘나홀로’ 신사였지만(드럼 울려주세요) 하나님이 완벽한 짝패를 만들어주셨다.”
이와 관련, 빔 씨는 월간 ‘하퍼즈’를 통해서도 TYB가 “10대를 위한 ‘브리트니 스피어즈 바이블’로 놀림감이 됐다”고 말하기도. 더욱이 빔은 존더밴사의 사주가 ‘언론군주’의 하나인 루퍼트 머독 임을 들어 시대조류에 더 맞다고 빗대기도.
존더밴사의 존 소여 마케팅 담당 부사장은 이러한 킹 제임스 선호 성향에 관해 “현대신학조류가 현대 성서 번역자들에게 영향을 끼쳐 성경메시지를 현대문화에 맞게 변경하는 시도가 입맛에 안 맞을 수 있다”고 말했다.
KJV는 이미 고전도서여서 판권이 없는 데다 값이 싸 발행 및 구매가 용이한 점도 선호원인으로 꼽힌다. 서점가 일각에서는 킹제임스 신약성서 1권이 불과 2달러 이하에 팔리며 읽기 쉬운 대형 글자판도 20달러 안팎에 구입이 가능하다.
아울러 인터넷상에 흔한 성경구절 탐색기도 KJV는 저작권 따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무한정 사용할 수 있도록 돼 있으므로 선호도가 높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7869
2009-05-09 14:07:42 | 관리자
현대인의 문제
마틴 로이드 존스
사람들이 자기들의 믿음을 어떤 특별한 방식에 고착시키고 있는 태도를 보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입니까?
이 방식 중 하나가 새로운 번역 성경이 나오는 것을 아주 대단한 일로 여기며 흥분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교회 밖에 있으며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흠정역(Authorized Version)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행동입니다. 엘리자베드 여왕 시대의 언어 즉 칭의나 성화같은 전문적인 용어를 현대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이 현대인에겐 아무런 의미를 가져오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현대인이 원하는 것은 현대어로 된 성경, 현대의 속어나 현대의 관용구로 된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것이며 그리고 나면 사람들은 "이것이 기독교로구나!"하고 말하면서 기독교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새로 번역된 성경들이 앞 다투어 선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 누구나 다 그 성경들을 삽니다. 그들의 주장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단지 최근의 언어로 된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극이 아닙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것 - 흠정역 성경 - 때문입니까? 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오늘날의 사람들보다 칭의나 성화에 대해서 무엇인가 더 많은 것을 알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과연 그 말들이 천 년 전에 평상적으로 쓰였던 언어들이었읍니까? 그것이 문제의 핵심입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의 마음, 사람 속에 있는 악이문제입니다. 언어의 문제나 용어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문제에 우리의 믿음을 귀착시킵니다.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현대어로 된 번역이 어느 정도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도만큼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라도 말입니다. 흠정역 성경을 보완시키려면 한참 걸릴 것입니다.
현대 번역 성경들에 대해서 극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오도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현대 번역 성경들이 가치가 있다고 할지라도 사람의 난제 - 여기서는 영적 부흥 문제 - 를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 마틴 로이즈 존스의 부흥(Revival)에서 발췌. (생명의 말씀사, 28쪽, 서문 강 옮김,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점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2009-05-09 14:05:04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