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이 성공회의 유아 세례 주는 자들과 한 패거리였다는 게 사실입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49>
대답: 아닙니다. 잘못 알고 계신 것입니다.
흠정역 성경을 번역한 모임의 사람들은 성공회와 청교도 교회 출신의 성경 신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들의 인품과 능력은 이미 위에서 증명한 바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성공회의 유아세례를 주는 자들과 한 패거리였다.”는 말은 애석하게도 사실무근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인신공격이며 궁극적으로는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킹제임스 성경의 권위를 빼앗아가려는 바람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이쯤에서 저는 최소한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다음과 같은 사람들은 아니었음을 언급하려 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기록한 다윗처럼 간음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기록한 모세와 다윗처럼 살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열왕기상 11장에 나오는 솔로몬 - 또 다른 성경 기록자 - 처럼 자기 자녀를 그모스와 몰록에게 제물로 바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기록한 베드로처럼 주님을 격렬히 부인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위에서 언급한 성경 기자들에게 무례히 행하려고 그들의 이 같은 단점들을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는 하나님께서 사용하기로 선택하신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좀 더 은혜로워야겠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예를 들었습니다.
2009-05-11 14:47:07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이라고 믿는 것은 제 모교의 입장과 상반됩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50>
대답: 여러분은 ‘충성의 우선순위’를 결정할 때 여러분의 출신 학교보다 당연히 우위에 두어야 할 하나님을 가장 우선순위에 놓아야 합니다.
먼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해서 여러분은 ‘모교’(Alma Mater)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모교’라는 단어는 ‘처녀’라는 뜻의 히브리어 ‘almah’와 ‘어머니’라는 뜻의 그리스어 ‘meter’의 조합어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Alma Mater’라고 하면 그것은 ‘처녀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며 이 용어는 명백히 말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에게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처녀 어머니’(Virgin Mother)를 가졌다고 외치며 다니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다녔던 대학’ 혹은 ‘나의 출신 학교’라는 좀 더 긴 표현을 쓰는 편이 예수 그리스도께 더 많은 존경심을 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학교가 여러분을 교육시키기 위해 투자한 시간과 겪었을 노고와 노력에 감사해야 합니다. 교육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에 여러분을 위해서 그들이 한 일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모교에 대한 감사를 고려한다 해도 여러분의 혼이 예수 그리스도께 은혜를 입은 것만큼 그 대학에 은혜를 입은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일단 졸업한 뒤에도 자신의 확신에 통제를 받을 정도의 굴욕적인 태도로 학교에 대해 ‘영원토록 감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위협하여 자기네 학교 방침대로 끌고 가려고 압력을 가하기 위해 마련된 편지 즉 모교의 학장으로부터 온 ‘친애하는 청년 목회자에게’라는 편지에 대해 3종 우편물 이상의 비중을 두어선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지속적으로 여러분에게 ‘우리가 너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려 하는 학교는 여러분의 자유가 아니라 구속에 관심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의 요구나 주장하는 바를 정중히 무시해 버리는 데 대해 전혀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여러분이 학비, 방과 후 식사비, 그리고 교육에 관련된 다른 경비들을 자비로 지불하며 학교에 다녔다면, 소위 여러분 학교에 대한 ‘빚’으로부터 사실상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학교와 지도자들의 ‘희생, 선견지명, 헌신 등등’에 전심으로 감사할 수는 있겠으나 여러분의 빚은 여러분이 마지막 학비를 냈을 때 끝났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학위는 그들이 자선을 베풀기 위한 선물로서 거저 여러분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희생, 선견지명, 그리고 헌신’은 말할 것도 없고 여러분의 학구적인 노력에 의해 얻어진 것이며 현금으로 지불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학교는 학위를 수여하는 일이 ‘멋진’ 행위가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학위를 수여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거부할 수 없었기에 여러분에게 학위를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원했던 요구 조건들을 채워 주면서 그것을 벌어들였습니다. 여러분이 현금 지폐를 지불한 것을 포함해서(어떤 경우에는 이자까지 더하여) 말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모교가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완전한 성경을 찾았지만 여러분의 학교나 ‘동창생’ - 그리스어로는 ‘alumni’인데 이는 ‘조명을 받은 사람들’(?)을 뜻함 - 과 불화하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면,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께 진 ‘빚’은 진짜이지만 모교에 진 ‘빚’은 단지 상상에 지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느 쪽과 불화하는 게 더 좋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모교입니까? 여러분의 모교가 그릇된 것을 요구한다면 여러분이 예수님과 모교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는 없지 않습니까?
2009-05-11 14:45:37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을 원본보다 더 신뢰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진보적 계시’가 아닙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51>
대답: 아닙니다.
‘진보적 계시’(Progressive revelation)란 용어는 성경 비평 학자들이 성경 신자들을 위협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성경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에서 나온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영감은 자필 원본에서 끝이 났다. 따라서 단순한 역본이 자필 원본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새로운’ 계시 즉 ‘진보적 계시’를 믿는 것이다.
과연 ‘진보적 계시’라는 것이 있습니까? 물론 우리는 편견, 견해 혹은 신념의 비중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최종 권위만이 사람이 믿기에 적당한 것이 무엇이고 적당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공적으로 명령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명백한 질문은 이렇습니다.
성경에 ‘진보적 계시’에 대한 예가 있습니까? 최소한 두 군데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 줄 것을 요구하기 위해 파라오 앞으로 갑니다. 그는 자기가 정말로 하나님을 대표하고 있음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표적과 기적을 행합니다. 경쟁의 초기에는 파라오의 마술사들도 모세와 ‘기적 대 기적’으로 겨루기 위해 노력합니다(출7:11,12,22 ; 8:7). 우리는 파라오의 주요한 두 명의 술객들이 얀네와 얌브레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명의 이름은 출애굽기의 마흔여덟 장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구약 성경의 서른아홉 권 중 어디에도 그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실 그들의 이름은 그로부터 1400년이 지난 후에야 계시됩니다(딤후3:8). 그러면 우리가 이것을 ‘진보적 계시’라고 부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음은 열왕기상 17장 1절을 보도록 합시다. 구약 성경의 이 구절에서 우리는 엘리야 대언자가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이슬이나 비가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열왕기상 18장 41절에 보면 ‘자기의 말에 따라’ 엘리야는 이스라엘에서 삼 년 반 동안의 가뭄을 거두었습니다. 잠깐만요. 제가 ‘삼 년 반’의 가뭄이라고 했습니까? 그런데 열왕기상에는 어느 곳에서도 그 가뭄의 기간에 대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4장 25절에서 ‘삼 년 육 개월’이라고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엘리야의 가뭄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삼 년 육 개월’이란 이 정보는 야고보서 5장 17절에서도 반복됩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한 사건의 일부가 구약에 기록되고 그 나머지가 수 세기가 지난 후 신약에서 계시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소 ‘진보적’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성경 비평 학자들의 이번 주장만큼은 참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바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이 난 김에 만일 여러분이 출애굽기 17장 6절에서 모세가 내리친 반석이 어떤 종류인지 알고 싶다면 출애굽기에서 답을 찾지 말고 시편 114편을 읽으십시오.
(*) 저자의 의도는 성경에 ‘진보적 계시’가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지 결코 킹제임스 성경이 원본보다 더 많은 영감을 받았다거나 ‘향상된 계시’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논제들을 부주의하게 사용하면 오히려 반대 진영에게 킹제임스 성경을 반대할 빌미를 제공하게 되므로 이런 논제는 이런 것이 있다 정도로 가볍게 넘어가는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으로 원어 성경을 교졍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원어는 처음부터 완전하므로 교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그 원어 단어들이 지금까지 보존되었습니다.
2009-05-11 14:43:57 | 관리자
질문: 저는 킹제임스 성경을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이라고 믿는 것이 ‘역사에 근거를 둔 입장’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52>
대답: ‘역사에 근거를 둔’ 견해는 성경을 절대무오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것을 변개시키려는 자를 보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자신들만이 ‘진정한 교회’라고 주장하는 데 사용하는 논의들 중 하나는 ‘전통’에 대한 권위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전통을 성경과 동일시합니다. 이것은 1545년에 열린 트렌트 공회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되어 로마 카톨릭 교회의 중요 교리가 되었습니다. 이 공회에서 전통은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갖는 것으로 승격되었습니다. 그리고 트렌트 공회는 이런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공식적으로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근본주의’ 성경 정정가들은 전통의 권위에 의지하려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너무나 이상하게도 그들은 똑같은 이유 즉 성경으로부터 권위를 빼앗으려는 이유로 그러한 일을 합니다. 물론 근본주의 성경 정정가는 자기가 설교단에서 ‘전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 회중들의 머리속에 ‘경종’이 울릴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통’이라고 말하는 대신 ‘역사에 바탕을 둔 근본주의적 견해란…’이라고 말하여 청중들을 완전히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도대체 ‘역사적 견해’가 무엇입니까? 물론 그것은 전통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누군가가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이라고 믿는 것은 역사에 바탕을 둔 근본주의적 견해가 아닙니다.”라는 연약한 논조로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될 때 경계하십시오! 여러분은 영적으로 로마 카톨릭 주의 성향을 띤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것을 믿을 수 없다면 여러분이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때 그가 여러분을 저주하지는 않는지 살펴보십시오.
2009-05-11 14:41:33 | 관리자
질문: 할 일이 많은 이 시점에서 과연 우리가 역본 문제를 거론해야만 합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53>
대답: 여러분이 이 문제에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는다면 거론해야 합니다.
설교를 통해 정말로 완전한 성경이 존재하는지 여부에 대하여 듣게 될 때 많은 크리스천들은 “난 역본 문제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라고 말하면서 뒤로 숨고는 경건한 척하며 이 문제를 회피하려 합니다.
여러분이 시종일관 여러분의 견해를 똑같이 유지한다면 이런 입장을 취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즉 완전한 성경의 존재 여부에 관한 문제가 여러분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분에게는 다음의 어떤 사항도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사7:14)
2.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요일5:5)
3.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롬5:8)
4.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고전15:4)
5. 행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은혜로 얻는 구원(엡2:8,9)
6.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이전의 재림(살전4)
7. 문자 그대로의 천국의 존재(요3:13)
8. 문자 그대로의 지옥의 존재(마9:42-44)
9. 진화론이 아닌 창조론 인정(창1:1)
이것은 결코 자칭 ‘근본주의자’라 하는 사람들이 붙들고 있는 확신들을 정리한 목록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성경으로부터 취한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사려 깊고 이성적인 사람이 성경으로부터 도출된 이런 것들은 문제 삼으면서 이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 되는 성경의 완전성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도 삼지 않을 수’ 있습니까? 만약 성경이 그 안에 오류를 지니고 있다면 우리의 확신의 바탕이 되는 이런 구절들이 옳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혹자는 “나는 정확하게 번역된 성경이라면 인정한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좋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몰몬 교도들도 다 믿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번역된 성경’이 어디에 있는지 판결을 내릴 자가 누구입니까?
성경 자체에 대해선 ‘문제 삼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성경으로부터 나온 교리를 ‘문제삼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근본적으로 그러한 입장을 취하게 됨으로 발생하는 결과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친구, 가족, 그리고 동료들의 거부 반응을 두려워합니다.
진리를 위해 여러분은 얼마만큼이나 담대하십니까?
2009-05-11 14:39:50 | 관리자
질문: 성경 문제로 인한 혼란의 배후에는 마귀의 역사가 있는 게 아닐까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43>
대답: 물론입니다. 하나님은 화평의 창시자이시므로 마귀야말로 이 혼란을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많은 성경 비평 학자들은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전투의 배후에 마귀가 숨어 있다고 다소 분개하여 외치는데 이것은 대단히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배후에 마귀가 숨어 있다는 그들의 말은 옳지만 성경에 대한 완전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마귀에 의해 지시를 받고 있다는 그들의 추측은 어떻습니까? 이것이 옳은 추측일까요? 성경 전쟁의 역사를 되돌아봅시다.
1611년 초판이 인쇄된 이후 킹제임스 성경의 인기는 상승해 왔습니다. 제임스 왕이 영국의 교회들에게 그것을 사용하도록 강제적인 법령을 선포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수년 내에 이전에 번역된 모든 역본들을 대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더욱이 그것은 작금의 역본들처럼 뉴욕 매디슨가의 타락한 방식으로 과대 선전되지도 않았지만 이내 영국 국민들과 영국의 식민지 시민들의 손과 마음으로부터 다른 모든 역본들을 쓸어내 버렸습니다.
대영제국을 정복한 후 그 성경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습니다. 이곳에 도착한 그 성경은 스페인과 프랑스의 깃발 아래 이미 확고히 심겨진 로마 카톨릭 교회의 거점을 뒤엎어버렸으며 그 후 자신의 이상대로 나이 어린 미국의 숨결 속에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성경의 진리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교육 체계 즉 성경에 기초한 교육 체계의 설립을 유도했으며 종교와 출판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 주었습니다. 그 당시 그러한 사상들을 헌법에 포함시키는 것은 너무도 낯선 것이어서 단지 정부의 ‘실험’으로밖에 묘사될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 성경은 의로운 설교자들을 임명했고 그들은 도보로 그리고 말을 타고 광야를 개척하며 어느 곳이든 복음과 올바른 삶의 진리를 전파했습니다. 그 결과는 바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민족’이라는 표현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일이 완수되자 그 성경은 이방 세계 정복에 올랐으며 프린스턴, 하버드, 예일 등의 신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선교 단체가 만들어지고 열정을 가진 젊은 선교사들이 오직 킹제임스 성경과 하나님의 성령님만을 의지하며 전 세계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들이 사탄의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사역자들 그리고 그 능력을 성공적으로 모방했던 그가 하나님의 성경이 도전 받지 않은 채 세계를 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둘 리가 없었습니다. 사탄은 웨스트코트(Brook Foss Westcott)와 호르트(Fenton John Anthony Hort) 같은 자기의 하수인을 통해 1884년에 자신의 변개된 역본인 「영어개역성경」(Revised Version, RV)을 출간했습니다(신약 성경은 1881년에 출판되었음). 1611년과 1884년 사이에 산발적으로 사적인 역본들이 나오긴 했어도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받은 성경을 대체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는 개역성경(RV)이라 불린 이 새 역본이 첫 번째였습니다. 비록 그 개역성경이 하나님의 성경을 대체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것을 지지하는 자들의 주장은 지난 400년 간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과 관련하여 치러진 전쟁 중 적군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심장을 향해 쏜 첫 총탄이었습니다.
1901년에는 후에 미국표준역(American Standard Version, ASV)이라 불리게 된 「미국개역성경」(American Revised Version, ARV)이란 총탄이 다시 쏘아 올려졌습니다. 사실 ASV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표준’(standard)이 될 수 없기에 그 명칭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비판하기 좋아하는 미국 신학자들의 총아였던 이 역본은 23년 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적으로 거부하게 되어 그 판권이 팔려나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처럼 들리십니까?
ASV는 더 개정을 거친 후 1954년에 개역표준역(Revised Standard Version, RSV)으로 재 출판되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무수히 반복되어 왔는데 몇몇 이름만 말하자면 1960년에는 신미국표준역(NASV)이, 1967년에는 뉴스코필드역(New Scofield Version, NSV)이, 1978년에는 신국제역(NIV)이, 그리고 1979년에는 뉴킹제임스역(NKJV) 등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향해 발사된 이 모든 총탄들 즉 새 역본들은 단 하나의 예외 없이 성경이 완전하다는 대전제를 부인하는 알렉산드리아 철학의 산물이며 결국 사탄의 것입니다. 더욱이 그것들의 상당량은 개악된 알렉산드리아 필사본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순수한 안디옥 필사본들로부터 번역된 것도 소수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 역시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에 의해 오염되었습니다.
이것은 출판 분야에서 나타난 사탄과의 전쟁이며 사실 그것만이 그의 공격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특기인 ‘전후방을 동시에 공격하는’ 전략을 이용했습니다. 자기의 알렉산드리아 필사본들이 출판물을 통해서 대중화되는 사이에 그는 신학교 안에서 그리고 신학교를 통해서 자기의 알렉산드리아 철학을 조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근본주의 신학교에 입학한 진지하며 젊고 순수한 신학생들은 교실에서 성경의 무오성에 도전을 주는 강의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예배 시간에는 성경의 완전성에 대해 극도의 찬양을 듣습니다. 이처럼 동일한 연사들은 영어 성경의 권위를 평가 절하시키며 심지어 비웃기까지 하면서도 자기 학생들에게는 자기들이 자필 원본의 무오류성을 믿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도 ‘근대주의자’도 아니라는 확신을 언제나 심어 줍니다. 모든 배도자들은 자기들의 불신앙을 감추기 위해 지금 존재하지 않고 구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신비한 존재인 자필 원본을 들고나옵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난 후 한 때 성경의 완전성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던 순수한 신학생은 이제 자신의 ‘모교’(Alma Mater)에 전적으로 충성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받은 교육에 의해 의기소침하게 되고 무장해제 된 젊은 신학교 졸업생들은 미국 곳곳의 설교단 위에 서서 자기 교수들에게서 배운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고약한 비평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게 됩니다. 사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 철학의 인쇄기로부터 갓 찍혀 나온 새 역본들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만일 어떤 크리스천이 “이 성경 즉 예전에 소실된 고대 유물이 아니라 현재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한 권의 성경인 킹제임스 성경이 완전한 말씀이다.”라고 주장하며 그들에게 다가가면 - 사실 그들도 교육을 받기 전에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교육의 혜택으로 인해 이를 빼앗겼음 - 그들은 큰 위협을 느끼고 그를 ‘광신자’나 ‘이단 교도’로 몰아서 쫓아내려 합니다.
진지한 눈빛을 하면서 그들은 성경의 완전성을 믿는 믿음으로 가득 찬 크리스천에게 최종적으로 의문을 제기합니다.
“당신은 마귀가 이 성경 논쟁을 이용해서 크리스천들을 분열시키고 주님의 뜻을 훼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물론이죠.”라는 답변을 한 뒤 그는 “그러나 결코 내 동료들이 마귀에게 이용당하고 있지 않음을 나는 확신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부언:
아직 좀 더 생각해 볼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우리가 우리 방식을 따른다면 목회자는 설교단에 서서 성경을 읽고 앉아 있는 다른 이들도 그와 동일한 성경을 읽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일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성경을 수정하고자 하는 자들의 말을 따르게 되면 모두가 각기 다른 성경을 읽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큰 혼란입니다. 그렇다면 혼란을 일으키는 장본인은 누구겠습니까?(고전 14:33).
그것은 바로 마귀입니다.
2009-05-11 14:38:04 | 관리자
질문: 성경 문제를 다룰 때 늘 언급되는 웨스트코트와 호르트는 누구입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44>
대답: 그들은 열렬한 마리아 숭배자요, 구원받지 못한 성경 비평 학자들입니다.
웨스트코트(Brook Foss Westcott, 1825-1903)와 호르트(Fenton John Anthony Hort, 1828-1892)는 거듭나지 않은 성공회 목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성경도 완전하지 않다.”는 알렉산드리아 철학에 완전히 심취되어 킹제임스 성경과 안디옥 계열의 그리스어 본문인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에 대해 악의와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불신앙에 대해서는 본인의 저서 「킹제임스 성경의 역사」에서 여러 문서들의 증거를 들어 충분히 논의한 바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은 행위로든 믿음으로든 사람은 천국에 이를 수 없다고 믿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천국이 사람의 마음속에만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웨스트코트는 공산주의를 신봉했기에 그 체제를 실행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가 ‘코에노비움’이라고 불렀던 대학 캠퍼스의 공동체 생활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죽은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자기들 스스로 조직하여 ‘유령 길드’라고 이름 붙인 단체를 통해 그런 일을 많이 시도했습니다.
웨스트코트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인정하고 장려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아내의 이름을 사라에서 ‘마리아’로 바꾸기까지 했습니다. 호르트는 다윈과 진화론의 숭배자요, 옹호자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다 열렬한 마리아 숭배자였습니다.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더라도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의 안디옥 본문을 버리고 마귀의 알렉산드리아 주술에 빠지게 되었고 또 어떻게 마귀에 의해 1871-1881년의 영어 성경 개정 위원회를 지도하기에 적합한 인물로 선정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을 가지고 자신들의 그리스어 본문을 편집한 다음 - 이 본문은 출판되지도 않았고 사실 ‘공인 본문’보다 훨씬 열등한 것이었음 - 성경 개정 위원회를 통해 그 내용을 비밀리에 조금씩 조금씩 반영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흠정역 성경을 개정한 개역성경이 출현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영어 성경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학자들은 사본 역사에 관한 그들의 불안정한 이론들을 검토하고 그들의 논리가 설득력이 없음을 인정했습니다.
참으로 슬프게도 이 두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여 구원받지 못했고 하늘의 기쁨과 평화를 맛보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2009-05-11 14:35:32 | 관리자
질문: 그리스 태생의 학자라면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으므로 영어 성경을 고칠 수 있는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45>
대답: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성경을 고칠 수 없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발견되는 그리스어와 현재 그리스에서 통용되고 있는 현대 그리스어 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서 서로 호환되지 않습니다. 어떤 이가 ‘그리스 사람’이기 때문에 영어 성경을 정정하기에 적합할 것이라는 그릇된 추측은 좋게 말하면 유머가 넘치는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교만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 사람이든 미국 사람이든 누구든 간에 하나님께로부터 성경을 고치라는 영감을 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광고업자가 “그리스 사람이 그리스어로 무엇을 가르치니까 믿을 만 하다.”라는 주장은 그 그리스 사람의 책을 팔아 주어 그를 부자가 되게 할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에는 큰 효과가 없습니다.
2009-05-11 14:29:52 | 관리자
질문: 그리스어 사본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금 덩어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47>
대답: 금광 전체를 소유할 수 있는데도 왜 고작 ‘금 덩어리’만으로 만족하려 하십니까?
목회자들이 그리스어나 히브리어 같은 원어에서 찾아내려 하는 ‘금 덩어리’의 대부분은 사실 그들의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먼저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임을 믿는 사람은 자신이 성경을 개선할 수 있다고 감히 생각조차 못합니다. ‘금덩어리’를 찾아내려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 동안 그리스어에서 아무도 찾아낸 적이 없는 대단한 것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만 보여 주시리라고 믿는 매우 오만한 믿음의 소유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금덩어리’를 찾아낸 뒤 자기들만이 가진 매우 놀랄 만한 그리스어 ‘실력’으로 동료 목회자나 성도들을 감화시키려고 합니다.
비록 그들이 설교단에 서서 성경을 들고는 “이 성경은 완전합니다.”라고 외치지만 사실 그들은 영어 성경이든 그리스어 성경이든 세상에 있는 성경은 어떤 것도 완전하지 않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을 읽을 때에 그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갈망하면서 읽는 적이 별로 없습니다. 대신 그들은 그분께서 그리스어를 좀 더 낫게 번역할 방법을 자신들에게 보여 주시기를 위해 기도할 뿐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으시기에 그들은 대개 학교에서 배운 ‘그리스어 게임’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 게임은 그리스어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저는 ‘그리스어 게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보여 드리겠습니다.
거짓 학자나 우쭐대려는 설교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란 단순히 「스트롱의 성구용어색인」(Strong's Concordance)이나 혹은 「영의 성구용어색인」(Young's Concordance) 등을 구입하는 일입니다. 이런 ‘성구용어색인’의 뒤에는 성경에서 사용된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목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 단어의 아래에는 그 단어가 킹제임스 성경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번역된 예와 목록이 있습니다. 이제 원어에서 ‘금 덩어리’를 캐려고 열심을 내는 학자나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이란 단지 거기에서 번역된 영어 용례를 서로 바꾸어 놓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하플로테스’(haplotes)라는 그리스어를 하나 택합시다. 이 단어는 흠정역 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방식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리스어 ‘하플로테스’(haplotes)의 번역 용례
그리스어 ‘하플로테스’(haplotes)의 번역 용례
구절
번역 예
1
고후9:11
Bountifulness(풍부함)
2
고후9:13
Liberal(너그러운)
3
고후8:2
Liberality(너그러움)
4
롬12:8, 고후1:12
Simplicity(단순함)
5
엡6:5, 골3:22
Singleness(단일함)
자, 이제 우리의 열심 있는 학자가 자신의 뛰어난 지성을 과시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하플로테스’가 번역된 다른 구절을 찾는 일입니다. 예를 들기 위해 먼저 에베소서 6장 5절을 택하겠습니다(위 표의 5번 용례).
종들아, 육체를 따라 너희의 주인 된 자들에게 두려워하고 떨며 단일한 마음(in singleness of heart)으로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엡6:5).
그는 설교 시간에 자신이 미리 준비한 ‘희생물’ 즉 위의 구절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이 이 구절을 서투르게 번역했다고 몇 마디 혹평을 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달리 번역될 수 있는 단어들 중 하나를 취해 - 예를 들어 위 표의 3번이나 혹은 4번 - 그 구절에 집어넣습니다. 물론 그런 과정 속에서 그는 게거품을 물고 흠정역 성경역자들이 원어를 매우 서투르게 번역했다고 여러 차례나 지적하면서 자기가 선택한 단어에 대한 장점들을 장장 10-15분에 걸쳐 상세히 설명합니다. 물론 그가 나중에 로마서 12장 8절의 말씀을 설명할 때는 즉 같은 그리스어가 위 표의 4번처럼 ‘단순함’(Simplicity)으로 번역된 곳에서는 역으로 5번 용례를 택하고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장점에 대해 설명할 것입니다.
권면하는 자는 권면하는 일로 섬기며, 주는 자는 단순함으로(simplicity) 그 일을 하고,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12:8).
물론 이때에도 그는 다시 한 번 하나님 말씀의 번역자들이 이 구절을 서투르게 번역했다고 혹독하게 그들을 비난합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모른 채 그의 말을 듣는 청중들은 이 일이 이처럼 손쉽게 이루어진 줄도 모르고 그의 지성과 그리스어에 대한 놀라운 이해력으로 인해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를 우러러 쳐다봅니다. 또한 그들은 성경의 오류를 지적해 줄 재능 있는 목회자나 교수를 만난 것이 천만 다행이라고 느낍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얄팍한 ‘그리스어 게임’의 속임수에 걸려 넘어가게 되고 결국은 자신들같이 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설교자가 소유한 그리스어에 관련된 도구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존경받을 만한 스승만큼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 시나리오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가 직접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자칭 성경학자라 하는 사람이 설교하는 것을 들으면서 저는 그가 너무도 쉽게 청중을 속이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는 로마서 8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한 절을 읽으며 그는 어떤 특별한 단어에 이르자 거기서 멈추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여기에 나오는 그리스어를 잘못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선택한 단어의 장점에 대해 10-12분 동안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 청중들은 어리석게도 이 사람의 ‘원어 실력’으로 인해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실 저는 ‘설교 경연대회’에서 14살짜리 소년이 그 같은 일을 하는 것을 본 적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런 일은 사실 15달러짜리 ‘성구용어색인’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저는 우연히 라디오에서 또 다른 사람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열심 있는 설교자 역시 로마서 8장에 대해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도 같은 절을 읽고는, 그 전 날 다른 전문가가 끄집어냈던 똑같은 단어에 다다르자 잠시 멈추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슬프게도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를 적절하게 번역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가 전 날 저녁에 제가 들은 적이 있는 그 설명을 재탕하는가 보려고 재빨리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똑같지는 않더군요. 이 유별난 학자는 문제시되는 단어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번역되어야만 한다고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후에 그는 전 날 저녁의 판매원처럼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이 선택한 단어나 혹은 전 날 저녁 제가 들은 적이 있는 그 전문가가 선택한 단어보다 자신이 선택한 단어가 갖는 장점들에 대해 장황히 설명했습니다. 저는 참으로 놀랐습니다! 두 명의 서로 다른 사람들이 전혀 다른 두 개의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이 유일하게 일치한 점은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이 오역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존경받는 견해를 재빨리 학문 쓰레기 더미 위로 내던져 버리고 하나님께서 1611년에 선택하사 자신의 책에 기록하신 단어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원어에서 ‘금 덩어리’를 찾는 두 번째 방법은 그리스어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이 위와 같은 일을 할 때 줄곧 사용하곤 하는 방법인데 이 경우에 그들은 ‘성구용어색인’ 대신 ‘그리스어 사전’에서 단어를 선택합니다. 이 경우에도 결과는 항상 동일하여 킹제임스 성경은 오역 투성이로 매도당하고 청중들은 설교자의 원어 실력과 지성의 깊이에 압도당합니다. 그들은 성경 교사들의 그리스어 실력과 겨루어 보려고 하지도 않고 자신들의 성경에 대한 이해력이 그보다 훨씬 못하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세 번째 형태의 ‘금 덩어리’는 원어 성경학자들이 만들어낸 완전 허위 진술에서 발견됩니다. 그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예로 그리스어 ‘아가페’(agape)와 ‘필레오’(phileo)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두 단어는 킹제임스 성경 요한복음 21장 15-17절에서 모두 ‘사랑’(love)으로 번역되었습니다.
15 이처럼 그들이 식사를 한 뒤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 하시고
16 다시 두 번째 그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양들을 먹이라, 하시고
17 세 번째 그에게 이르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분께서 자기에게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말씀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며 그분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 양들을 먹이라.
웬만큼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이라면 아마도 거짓 학자들이 이 구절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을 한두 번쯤은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어에서 ‘아가페’(agape)라는 단어가 ‘깊고 은밀하며 자기를 돌보지 않는 사랑’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필레오’(phileo)라는 단어는 ‘일상적인 친구 사이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뒤 우리의 설교자는 영어 단어(혹은 한국어 단어)의 제한된 표현에 대해 거의 눈물을 자아낼 정도로 한탄을 하며 자기의 주장을 폅니다. 다시 말해 영어로는 이 구절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주님께서 사실은 이렇게 물어 보신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베드로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아가페’(agape, 즉 깊고 은밀하며 자기를 돌보지 않는 사랑)로 사랑하느냐?
이에 대해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이들은 주장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필레오’(phileo, 즉 일상적인 친구간의 사랑)로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그 뒤 원어 성경 추종자들은 주님께서 원하시던 대답을 듣지 못하셨기에 베드로에게 다시 물어 보셨다고 말합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아가페’(agape)로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그런 깊은 관계에 자신을 맡기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다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필레오’(phileo)로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이제 이쯤에서 우리의 성경 교정자는 큰 슬픔에 잠기신 주님께서 베드로의 헌신이 부족함을 이해하시고 ‘아가페’ 대신 ‘필레오’라는 그리스어 단어로 질문을 바꾸셨다고 말합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필레오’(phileo)로 사랑하느냐?
그러자 이같이 갑작스런 변화에 베드로는 깜짝 놀라 자신이 주님께 영적으로 성실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설교자는 자신 있게 설명합니다. 그래서 슬픔에 잠긴 베드로가 마침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주님을 ‘필레오’(phileo)로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우리의 거짓 교사는 의미가 빈약한 영어나 한국어를 사용해서는 이 구절의 깊은 뜻을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다고 확신 있게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또 다시 저 신뢰할 만한 ‘그리스어’는 영어나 한국어가 전달해 줄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설명해 준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됩니다!
참으로 위의 예는 ‘원어 찬양’을 하는 데는 매우 효과적이지만 그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하나의 큰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단점이란 다름이 아니라 ‘아가페’와 ‘필레오’에 대한 위의 정의가 사실과 다르다는 점입니다.
이제부터 저는 저의 선입견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해들은 견해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아가페’와 ‘필레오’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 성경 기자들이 신앙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서 우리의 최종 권위가 되는 성경에서 사용한 ‘아가페’와 ‘필레오’에 대한 세밀하고 정직한 연구에 근거하여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야기인즉 이렇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아가페’와 ‘필레오’에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 성경 기자들은 이 두 단어를 늘 바꾸어가며 사용했습니다. 그리스어 문법책이나 그리스어 교사들 그리고 그리스어 설교자들이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속한 신학 대학의 교수나 혹은 목사가 ‘아가페’와 ‘필레오’에 대해 잘못 가르쳐서 이 같은 속임수에 빠지게 되었다면 여러분은 즉시 여러분의 선입견을 가지고 저의 주장을 반박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한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그렇게 경건하고 지식이 많은 교수들이 틀릴 수 있겠는가?”
저는 이 사실을 입증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겠습니다. 모든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 바울,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제가 대조를 위해 택할 수 있었던 신약 성경의 다른 기자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결코 그들만이 저를 지지하는 최후의 증인들은 아닙니다. 최종적이고도 가장 확실하게 이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분은 바로 독자 여러분입니다.
수년 동안 저는 제가 말씀을 전하는 성경 사경회에서 ‘아가페’와 ‘필레오’에 대한 거짓 가르침에 관하여 성도들에게 한 가지 시험을 치르게 했습니다. 그 시험지는 다음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용기가 있다면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과 자신에게 정직할 수 있다면 자유롭게 그 시험 문제에 대답을 해 보십시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이제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1부에서는 신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가페’와 ‘필레오’를 사용하신 용례를 적어 놓았습니다. 「그리스어 신약 성경」이나 「스트롱의 성구용어색인」혹은 다른 어떤 도움에 의지하지 마시고 단지 영어 성경 비평 학자들이 제시한 ‘아가페’와 ‘필레오’에 대한 정의를 사용하십시오.
자, 이제 인용문을 읽으십시오. 그 뒤 예수님께서 그 구절에서 ‘아가페’를 말씀하셨을지 혹은 ‘필레오’를 말씀하셨을지 깊이 생각해 보시고 결정을 내리십시오. 그런 다음 ‘아가페’라고 생각되면 ‘A’를, ‘필레오’라고 생각되면 ‘P’를 인용 구절 옆에 있는 공란에 적어 넣으십시오.
제2부도 제1부와 동일한데 단지 신약 성경의 다른 기자들이 기록한 용례들을 사용했다는 것만 다릅니다. 제1부와 마찬가지로 ‘아가페’에 해당되면 ‘A’를, ‘필레오’에 해당되면 ‘P’를 적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단지 원어 성경학자들이 이 단어에 내린 정의를 사용해서 시험을 치러야만 합니다. 결코 추측으로나 예감으로도 하지 말고 그들의 정의를 따라 시험 문제에 정직하게 답을 적으시기 바랍니다. 시험을 끝마쳤으면 이 글의 뒤에 있는 해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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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1 14:11:27 | 관리자
질문: 공인 본문은 1633년에 가서야 등장했는데 어떻게 1611년에 번역된 킹제임스 성경이 그것으로부터 번역될 수 있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48>
대답: 잘못 알고 계신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번역에 사용된 그리스어 본문은 역사를 통해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수년 간 신약 성경의 그리스어 본문은 상당수의 서로 다른 편집자들에 의해 조합되었습니다. 이들 중 유명한 사람들은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베자(Theodore Beza), 스테파누스(Robert Stephanus), 엘지버 형제(Elzevir Brothers), 아브라함과 보나벤쳐(Abraham and Bonaventure) 등입니다.
에라스무스는 다섯 가지 판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출판했습니다. 1516년의 첫 판에 이어 마르틴 루터가 그의 역사적이고도 매우 중요한 독일어 번역에 사용했던 1519년 판이 나왔습니다. 그의 세 번째, 네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 판은 1522년, 1527년 그리고 1535년에 나왔습니다. 에라스무스의 작품은 훌륭했고 지금까지 수 세기 동안 모범이 되었습니다.
스테파누스는 1546년, 1549년, 1550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1551년에 네 개의 판을 내었습니다. 베자도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여러 판 출판했으며 1565년, 1582년, 1588년, 그리고 1598년에 각각 하나씩 모두 네 개의 판을 출판했습니다. 이것들은 2절판으로 인쇄되었는데 이는 종이 한 장을 접어 4페이지 분을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또한 1565년, 1567년, 1580년, 1590년, 그리고 1604년에 다섯 개의 8절판 책을 출판했습니다. ‘8절판’이란 종이 한 장이 여덟 개의 페이지를 갖도록 인쇄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식으로 인쇄된 책들은 2절판 책보다 지면의 크기가 더 작아지는 경향이 있었으나 두 권 혹은 그 이상의 권수로 작품을 인쇄해야 하는 경우에 사용되었습니다.
1598년의 베자 판과 1550년, 1551년의 스테파누스 판은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에 의해 가장 중요한 번역 원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뒤 몇 년 후에 엘지버 형제가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1624년, 1633년, 그리고 1641년에 출판했습니다.
그들은 에라스무스의 표준을 따랐던 베자의 판을 충실히 따랐으며 1633년 판 서문에다 그때까지 나온 본문들을 다 수용하는 유명한 문구를 새겨 넣었습니다. 그 문구는 라틴어로 “textum ergo habes, nunc ab omnibus receptum…”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사람들에 의해 공통적으로 수용된 책으로부터 입수한 본문에 따르면…”이라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공인 본문’(영어로 Received Text 혹은 그리스어로 Textus Receptus)이라는 호칭이 제목이 탄생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공인 본문’이라는 호칭이 비록 흠정역 성경이 번역된 지 22년 후에 만들어졌지만 그렇게 불린 본문이 안디옥에 기원을 둔 ‘참된 그리스어 본문’을 지칭하는 이름이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이 ‘공인 본문’에서 나왔다고 하는 말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성경 본문 명칭
안디옥 계열
알렉산드리아 계열
안디옥 본문(Antiochian Text)
비잔틴 본문(Byzantine Text)
시리아 본문(Syrian Text)
다수 본문(Majority Text)
보편적 본문(Universal Text)
종교개혁 본문(Reformation Text)
황제 본문(Imperial Text)
전통본문(Traditional Text)
공인 본문(Textus Receptus)
알렉산드리아 본문(Alexandrian Text)
이집트 본문(Egyptian Text)
국지적 본문(Local Text)
헤시키안 본문(Hesychian Text)
소수 본문(Minority Text)
2009-05-11 14:04:41 | 관리자
질문: 뉴킹제임스역은 안디옥 사본들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킹제임스 성경보다 개선된 것이라고 하던데 그것이 사실인가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38>
대답: 그렇지 않습니다. 뉴킹제임스역은 킹제임스 성경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뉴킹제임스역(NKJV)과 영어 성경과의 관계는 알렉산드리아 필사본들과 그리스어 성경과의 관계와 같습니다. 뉴킹제임스역은 “성경이 완전할 리가 없다.”는 개탄스런 교리 - 그들이 설교할 때 뭐라고 말하든 상관이 없음 - 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과 무기력한 지성인들이 순수한 본문을 변개하고 개정해서 만든 것입니다.
다른 현대 역본들과는 달리 뉴킹제임스역은 개악된 알렉산드리아 필사본들이 아닌 ‘정확한 안디옥 필사본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번역 작업을 실행한 사람들은 성경이 완전하지 않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직업이 그것에 달려 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는 이 같은 혐의를 맹렬히 부인하지만 사실 그들은 어떤 성경도 완전하다고 믿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직접 만든 뉴킹제임스역 조차도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 성경은 이미 소실된 것이며 - 하늘나라에 ‘안치된’ 것이며 - 따라서 그들은 성경의 ‘말씀들’이 아니라 ‘사상들’이 잊히는 것을 막기 위한 유일한 희망이 바로 학자들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번역 위원회에 소속된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훌륭한 설교자요 목사일지는 모르지만 그 같은 사실이 그들에게 성경을 정정할 권한을 부여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정직함이 완전함을 향상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장하듯이 ‘좋은 것(즉 KJV)을 더 좋게 만드는(NKJV로)’ 대신에 그들은 단지 가까스로 많은 애를 써서 ‘완전한 것을 더럽혀 놓았을 뿐입니다.’
우리는 ‘현대판’ 성경 번역 위원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상당한 명성을 가져다준다(마23:5-7)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문제가 돈 때문에 생깁니다.
2009-05-11 14:02:24 | 관리자
질문: 최근에 나온 뉴스코필드 성경도 킹제임스 성경인가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39>
대답: 뉴스코필드 성경은 킹제임스 성경이 아닐 뿐만 아니라 스코필드 성경도 아닙니다.
뉴스코필드 성경이 스코필드 성경과 모든 면에서 차이가 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한 마디로 스코필드 박사(Dr. C. I. Scofield)는 뉴스코필드 성경을 편집하지 않았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1921년에 작고했으므로 매우 ‘특별한 섭리에 의해’ 부활하지 않고서는 1921년에 죽은 사람이 1967년에 책을 편집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출판업자는 이 새로운 ‘판’을 내면서 스코필드 주석 성경도 스코필드 박사가 1909년에 처음 판을 출간한 후 1917년에 자료를 보충해서 다른 판을 출간했다는 점을 들어 자기들이 새 판을 낸 것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자가 자신의 작품을 직접 고친 것이므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다른 이에게 그것도 자기가 죽은 지 45년 후에 자기 이름을 사용해서 자기의 작품을 자유롭게 고칠 수 있도록 백지 수표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일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드’의 끝 부분을 고치고서 셰익스피어의 허락을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정직하지 못한 행위일 것입니다.
두 번째로 뉴스코필드 성경 편집자들은 스코필드 박사가 상당한 중요성을 부여하며 편찬 작업에 포함시켰던 스코필드 주석의 특성들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이 부정직한 작품 즉 1967년판 뉴스코필드 성경 서문에서 이러한 변화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뉴스코필드성경:
이 개정판에서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개선 향상되었습니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한 본문상의 주요 단어 변화(따로 음성표기를 하지 않고); 철자에 악센트 부호나 발음기호를 직접 표시하는 방식을 새롭게 편집한 것; 저자, 주제, 그리고 연대의 명시 외에 소제목 등을 포함한 성경 각 권의 도입 부분들의 개정; 각주들에 대한 해설, 몇몇 각주들의 삭제 그리고 많은 새로운 각주들의 추가; 난외주들의 보강; 전체적으로 새로운 연대표 제시 ; 새로운 색인; 이 판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용어 색인; 새 지도들; 그리고 더욱 읽기 쉬운 인쇄체.
그들은 자기 입으로 자기들이 스코필드 박사가 사용한 본문 즉 킹제임스 성경과 성경 각 권의 도입 부분 그리고 주석, 난외 주, 연대기 및 그밖에 다른 많은 특성들을 개정했음을 인정했습니다. 과연 스코필드 박사가 이러한 개정들을 승인해 주었습니까?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엔돌의 무당이 사무엘을 불러 올렸던 것처럼 그 위원회의 9명의 위원들이 스코필드를 불러올릴 수 있었다면 혹시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사실 그 출판사는 개정 위원들이 자의로 그런 변화들을 선택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견해는 전체 위원회의 신념이나 사고를 반영한다.
이러한 속임수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한 가지 예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침례(Baptism)에 대한 사도행전 8장 12절의 주석을 뉴스코필드 성경에서 살펴봅시다.
침례는 사도 시대 이래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공동체 안에 소속된 주요 그룹들 사이에서 실행되어 왔으며 주의 만찬과 더불어 두 가지 규례로 알려져 있다. 교회 역사의 초창기에는 침례의 세 가지 다른 유형이 사용되었는데 성수살포(sprinkling, 뿌리기), 관수례(pouring, 붓기), 그리고 침수(immersion, 담그기)가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9명의 개역자들이 - 스코필드 박사가 아님 -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고 이들을 분리했다는 점입니다. 제가 한 가지 물어 보아도 되겠습니까? 어느 한 그룹을 ‘프로테스탄트’라고 정의한다면 나머지 한 그룹은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요? 당연히 로마 카톨릭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로마 카톨릭 교회가 참 그리스도의 교회란 말입니까?
두 번째로, 이 9명의 배도한 개역자들은 - 스코필드 박사가 아님 - 성경적인 증거도 없이 크리스천들이 침례뿐만 아니라 물을 뿌리거나 붓는 것 즉 세례를 받을 수도 있다고 거짓 주장을 합니다. 이러한 주석이 1967년도 뉴스코필드 성경 안에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 책은 먼저 표지에서 이미 고인(故人)이 된 사람 즉 스코필드 박사가 편집에 참여했다고 거짓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그러면 1917년에 나온 진짜 스코필드 성경에서 사도행전 8장 12절에 대해 그 책의 편집자인 스코필드 박사는 뭐라고 했을까요? 아무런 주석도 없습니다. 그런 주석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뉴스코필드 성경은 스코필드 박사 본인이 자기의 생애에서 단 한 번도 승인한 적이 없는 주석들 즉 후에 임의로 추가된 ‘스코필드’ 주석들과 본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이것이 정직한 것인지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뉴스코필드 성경이 킹제임스 성경이 아니라는 증거는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KJV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말하는 난외주가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뉴스코필드 성경은 킹제임스 성경이 아니며 더더욱 스코필드 성경도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최근에 뉴스코필드 성경의 크기나 형태가 「스코필드 성경」과 더욱 비슷하도록 바뀌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진짜 스코필드 성경을 원하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실수로 뉴스코필드 성경을 구입하기 때문입니다. 실로 ‘성경’ 판매는 수지맞는 사업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2009-05-11 13:36:58 | 관리자
질문: 최근에 가장 많이 팔린다고 하는 신국제역(NIV)은 믿을 만합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40>
대답: 아닙니다. 신국제역은 신학과 교리에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국제역(NIV)은 네슬레(Eberhard Nestle)가 1979년에 출간한 「그리스어 성경 제26판」에 기초한 역본으로 1969년에 출간된 「네슬레의 제23판」에 기초를 둔 신미국표준역(NASV)과 더불어 이집트 사본 계열에 속합니다. 이것들과 대부분의 현대 역본들(뉴킹제임스역과 뉴스코필드 성경을 제외한 나머지. 이 둘은 이 책에서 개별적으로 다루었음)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오리겐에 의해 더럽혀진 필사본들의 산물입니다.
NIV와 NASV에서 발견되는 몇몇 개악들(corruptions)에 대해서는 근본주의 교리들에 대해 다룬 이전 질문들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 책은 이러한 실수투성이 역본들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을 빠짐없이 연구한 책이 아님에 유의하기 바랍니다. 그런 것을 다 논의하자면 두꺼운 책 한 권은 써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썩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또 썩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마7:17-18).
2009-05-11 13:34:38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얻을 수 없었던 필사본들이 1611년 이래로 상당수 발견되었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본들은 킹제임스 성경에게 강점이 됩니까? 약점이 됩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41>
대답: 그것들은 킹제임스 성경을 뒷받침해 주는 강점이 됩니다.
1611년 이래로 많은 사본들이 발견되었으나 그것들이 새로운 본문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수많은 비평 학자들은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소유하지 못했던 ‘새로운 증거’를 들어가며 킹제임스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현대 비평 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독본들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1611년 이후에 발견된 사본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시내 사본’이며 이것은 심각한 결점을 가지고 있는 사본입니다. 이 증거물은 1841년 티센도르프(Constantine Tischendorf)가 시내산 기슭의 성캐더린 수도원의 - 천주교 사원임을 기억하십시오 - 쓰레기 더미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시내 사본’이 역시 변개된 천주교 필사본인 ‘바티칸 사본’의 자매 사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둘 다 매우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시내 사본’이 흠정역 성경이 번역된 지 200년이 지난 후에 발견되었을지라도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에게는 이미 1481년에 발견된 ‘바티칸 사본’과 1582년에 출간된 영어 성경 즉 예수회 성경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이러한 종류의 본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에게는 없었으며 단지 현대 역본 역자들에게만 있는 ‘유용한 본문’(?)이란 단 하나도 없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2009-05-11 13:32:40 | 관리자
질문: 현대 역본들이 킹제임스 성경보다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42>
대답: 아닙니다. 어떤 것들이 읽기에는 쉬울지 모르나 그 어느 것도 말씀 자체를 이해하기에 쉽지는 않습니다.
현대 역본들을 판매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는 광고 전략 중 하나는 장래의 고객들에게 그것들이 이해하기 쉽게 번역되었다고 선전하는 것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일단 고객이 된 사람들은 아마도 자신이 ‘고어로 된’ 킹제임스 성경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감사한 마음으로 현대 역본 영어 성경을 구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부지불식간에 “이제부터 성경에 관한 한 나는 무지의 삶을 살겠습니다.”라고 자기 자신에게 선고해 버린 것입니다. 현대 영어 역본들은 읽기엔 쉬울지 모르나 이해하기엔 용이하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만일 킹제임스 성경의 ‘고어’와 ‘thee’ 그리고 ‘thou’가 성령님께서 크리스천들에게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시는 데 정말로 거침이 된다면, 지금 성경 판매 시장에 나와 있는 현대 역본들도 분명히 성령님의 사역에 거침이 될 것입니다. 한 번 그런가 안 그런가 살펴보도록 합시다.
1. 신미국표준역(NASV), 신국제역(NIV), 뉴킹제임스역(NKJV)과 현대인의 영어성경(TEV) 같은 현대 역본들이 킹제임스 성경보다 더 이해하기 쉽다면 그것들을 읽을 때 성령님의 메시지가 크리스천들에게 보다 더 자유롭게 흘러넘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 속에 보다 훌륭한 영적 승리들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음은 명백합니다.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이 19세기나 심지어 20세기 초의 킹제임스 성경을 읽고 그것으로 양육 받았던 크리스천들보다 더욱더 세속적이며 예수 그리스도께 덜 헌신적이라는 사실은 객관적인 관측자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분명한 것입니다. 현대 역본들이 정말로 ‘이해하기 쉬운’ 성경이었다면 죄와 세상 그리고 육욕과의 전투에서 놀랄만한 성공을 거두었어야 했지만 이런 일은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2. 두 번째로 만약 현대 역본들이 정말로 이해하기에 더 쉽다면 하나님께서 그 중에 최소한 하나라도 사용하셔서 이 나라에 큰 부흥을 일으키시고 이로써 그것들에 대해 감사를 표하셨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예스러운 고어체’로 적힌 킹제임스 성경이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사역에 거침돌이 되어왔다면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자신의 백성들이 이해하기에 더 쉬운 다른 역본을 사용하려 하셨을 것이며 또 그와 동시에 그런 역본들에게 큰 복을 주셨어야 한다는 것은 유년주일학교 학생이라도 다 아는 일일 겁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거니와 오늘날의 현대 역본들 중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종류의 영적 각성 - 오순절 은사운동 등의 비성경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 도 일어나지 않았음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오늘날의 현대 역본들은 심지어 크리스천 학교에서조차도 부흥을 일으킬 수 없었습니다.
사실, 1901년의 미국표준역(ASV)을 시작으로 해서 현대 영어 역본들이 등장한 이래로 미국에서는
1. 하나님과 기도가 공립학교로부터 배척을 당했고
2. 낙태가 합법화되었으며
3. 전국적으로 동성연애가 ‘사람의 기호에 따른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일반인들에게 받아들여졌고
4. TV와 VCR을 통한 도색 문화의 가정 침투와
5. 아동 유괴, 만연된 호색 문학의 득세와
6. 마약의 유행과
7. 사탄숭배의 기세가 드높아졌습니다.
이것을 ‘부흥’으로 간주한다면 오히려 그러한 일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킹제임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실상 새 역본이 성공했음을 주장하는 데 사용되는 단 하나의 기준은 그것이 얼마나 잘 팔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뉴욕 매디슨가 (출판사 거리)의 타락한 판매 방식 즉 이윤 추구만을 위해 과대광고도 마다하지 않는 방식은 크리스천들에게 마땅히 경종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도 TV에 현혹된 사람들은 그런 광고에 순종이나 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합니다. “그건 유익한 것임에 틀림없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사고 있잖아?”
그러면 현대 역본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단 하나도 없단 말입니까? 있긴 합니다. 확실히 출판사들은 수백만 부의 성경을 찍어내고 있으며 그로 인해 그들만 이익(?)을 취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한국도) 크리스천들은 영적으로 곤핍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성경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좋아하는 ‘성경 심리학자’(Bible psychologist)에게로 갑니다. 미국은(한국도) 매춘부처럼 되어 소돔과 고모라 같이 도덕적으로 부패했습니다(겔16:49).
‘보다 이해하기 쉬운 것’이 가져온 영적 도움과 희망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희망은커녕 바로 그러한 역본들로 인해 우리는 이처럼 절망적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2009-05-11 13:31:04 | 관리자
질문: 로마서 8장 26절에서 ‘성령님’을 ‘그것’이라고 부른 것은 오역이 아닙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33>
대답: 로마서 8장 26절에서 그리스어 ‘프뉴마’(pneuma)를 ‘그것’이라고 번역한 것은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완전성을 대적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 주장은 실로 미약한 주장에 불과하며 이러한 주장은 다음의 세 가지를 통해서 쉽게 논박할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어와 성경 비평 학자들의 위선적 행위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으로 이것을 간단하게 논박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신앙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서 우리의 최종 권위이기 때문에 주님의 증언은 상당한 영향력을 갖습니다.
먼저 로마서 8장 26절을 봅시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느니라.
Likewise the Spirit also helpeth our infirmities: for we know not what we should pray for as we ought: but the Spirit itself maketh intercession for us with groanings which cannot be uttered.
이 구절에서 중간에 ‘그것’(itself)으로 번역된 단어는 ‘영’(spirit)이라는 의미의 ‘프뉴마’(pneuma)입니다. 실로 ‘영’은 공기와 같기 때문에(창1:7; 요3:8) 우리는 공기의 작용에 의한 어떤 장치 혹은 작업 등을 설명하기 위해 ‘공기에 의해 움직이는’(pneumatic)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모든 그리스어는 각각 뚜렷한 성(性)이 있어서 남성, 여성 혹은 중성을 갖습니다. 남성은 관사 ‘o’로, 여성은 ‘a’로, 중성은 ‘to’로 표시됩니다. ‘영’(spirit)이란 단어인 ‘pneuma’는 중성이며 이 사실은 심지어 그리스어를 공부하는 1학년생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많은 열등한 역본들에서 ‘pneuma’를 ‘그분 자신’(himself)으로 번역한 것은 문법적으로 틀린 것이고 킹제임스 성경이 ‘pneuma’를 ‘그것’(itself)으로 번역한 것은 정확하게 원본을 옮긴 것입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을 비판하는 학자들은 그것이 마치 그리스어를 ‘오역한 것’인양 킹제임스 성경을 비웃기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어를 알맞게 번역한 이것을 그들이 비평하는 것은 정말로 위선입니다. 그들은 킹제임스 성경을 모욕할 뿐 아니라 무지하게도 ‘pneuma’를 ‘그분 자신’(himself)으로 부적절하게 번역한 NASV, NIV 그리고 NKJV 같은 다른 역본들을 찬양합니다.
두 번째로, 킹제임스 성경 로마서 8장에서 성령님을 ‘그것’이라 한 것에 대해 분개하는 비평 학자들은 자기들의 위선과 하나님의 성경에 대한 경멸적 태도를 더욱더 드러내기 위하여 사도행전 17장 23절에서 하나님을 비인격체인 것처럼 ‘What’으로 부른 NASV와 NIV 같은 역본들을 적극 장려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흠정역 성경은 하나님을 인격체로 ‘Whom’이라고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는 요한복음 4장에서 우물가의 여인에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20세기 성경 비평 학자들의 위협을 전혀 개의치 않는 예수님께서는 22절에서 여인에게 주저 없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에게 경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경배하는 것을 아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기 때문이라.
Ye worship ye know not what: we know what we worship: for salvation is of the Jews.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what’ 즉 ‘알지 못하는 것’이란 누구 혹은 무엇입니까? 그 다음절에서 그분의 말씀이 더욱더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참되게 경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그렇게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니라.
But the hour cometh, and is, when the true worshipers shall worship the father in spirit and in truth: for the Father seeketh such to worship him.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의 아버지를 가리켜 중성인 ‘what’으로 칭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들의 학식을 뻐기면서 롬8:26에서 킹제임스 성경이 오류를 범했다고 주장하는 21세기의 일류 학자들 집단은 NIV, NASV, NKJV 등을 번역하면서 요4:22에서 하나같이 중성인 ‘what’, ‘which’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큰 위선입니다. 그들은 한 군데서는 그리스어에 있는 대로 중성으로 정직하게 번역하지 않고 다른 데서는 있는 대로 중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그랬듯이 우리의 킹제임스 성경에 단 한 점의 오류도 없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어느 것을 따르시렵니까?
2009-05-11 13:29:09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에도 처음엔 외경이 포함되지 않았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34>
대답: 실리긴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으로 실리지 않았고 참고자료로 실렸습니다.
흠정역 성경을 향한 공격 중 또 다른 하나는 흠정역 성경의 초기판들이 구약과 신약사이에 외경들을 포함했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변호하기 위해서 우리는 흠정역 성경 번역자들이 그런 외경들을 영감 받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 일곱 가지 이유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외경이라고 번역된 ‘어포크라이퍼’(apocrypha)라는 말은 원래 ‘숨겨진’이라는 뜻을 갖고 있었으나 주후 450년경부터는 구약 시대의 ‘정경이 아닌 책들’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외경 문제의 핵심은 로마 카톨릭 성경 안에 포함된 몇 가지 책이 과연 성경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1. 외경의 성격
외경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 사이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던 약 400년간의 기간 즉 침묵기라 하는 기간에 기록된 15개의 ‘유대인들의 문학 작품’입니다. 그 중 어떤 것들은 역사적 가치가 있긴 하지만 그것들의 대부분은 비논리적이고 그 저자를 알 수 없으며 또 그 안에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이나 권위를 받았다는 주장이 없습니다. 또 어떤 것들은 그 내용이 전설적이며 공상 만화 같기도 합니다. 이 책들 중 몇 개는 바빌론 포로 생활 이후에 유대인들의 우상 숭배를 금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현존하는 외경은 다 그리스어로 기록되었습니다.
2. 외경의 책들
다음은 15 개의 외경 책들 명단입니다. 그 이름은 대한성서공회에서 발간한 「한글공동번역」에서 취했습니다.
외경 명단
외경 이름
연대
내용
1
솔로몬의 지혜서
주전 30년
교훈
2
집회서
주전 132년
교훈
3
토비트
주전 200년
종교 소설
4
에스드라상(*)
주전 150년
역사, 전설
5
마카베오상
주전 110년
역사
6
마카베오하
주전 100년
역사, 전설
7
유딧
주전 150년
로망스 소설
8
바룩
주후 100년
예언
9
예레미야의 편지
주전 200년
예언
10
에스드라하(*)
주후 100년
예언
11
에스델
주전 130년
전설
12
아사랴의 기도
(혹은 세 아이의 모래)
주전 100년
전설
13
수산나
주전 100년
전설
14
벨과 뱀(원래는 벨과 용)
주전 100년
전설
15
므낫세의 기도(*)
주전 150년
전설
(*) 천주교에서도 이 책은 외경으로 인정하지 않음.
3. 외경의 수용
1. 유대인들은 결코 외경을 자기들의 구약 성경에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2. 프로테스탄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외경이 삶의 예와 예의 범절 등을 위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으로 여깁니다.
3. 로마 카톨릭 교회는 위의 표에서 ‘에스드라상하서’와 ‘므낫세의 기도’를 뺀 나머지 12권을 정경으로 인정하며 따라서 구약 성경이 39권이 아니고 51권이라고 주장합니다.
4. 외경을 포함하는 사본들
1. 「70인역」 : ‘에스드라하서’를 제외한 나머지 책들 포함
2. ‘알렉산드리아 사본’(A 코덱스) : 위의 외경들 외에도 ‘마카베오 3서 및 4서’ 포함
3. ‘바티칸 사본’(B 코덱스) : ‘마카베오상하서’ 및 ‘므낫세의 기도’를 제외한 나머지 포함
4. ‘시내 사본’(알레프): 여러 권 포함
5. ‘체스터 비티의 파피루스’ : ‘집회서’ 일부분 포함
6. ‘사해 사본’ : 그리스어로 쓰인 몇몇 외경 포함
5. 트렌트 공회
외경은 1546년 4월 8일 로마 카톨릭 교회의 트렌트 공회에서 공식적으로 ‘카톨릭 교회의 성경’으로 채택되었습니다. 트렌트 공회란 주후 1545-1563년 사이에 연속적으로 세 번 열린 카톨릭 교회의 공회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 공회가 열리기 28년 전인 1517년에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을 뒤엎으려는 ‘반종교개혁’의 중심 기구가 바로 트렌트 공회였으며 주로 예수회(Jesuits, 제수이트)가 이 모임을 주도했습니다. 이 공회에서 교황은 다음의 세 가지를 정하여 공포하였습니다.
1. 카톨릭 교리의 정의
2. 카톨릭 교리의 개혁
3. 이단 말살
그 당시 종교 개혁자들이 내세운 표어 중 하나는 ‘오직 성경으로’(Sola-Scripture)였는데 카톨릭 교회 역시 이와 똑같은 구호를 외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거짓 교리를 증명해 줄 수 있는 성경적 근거가 필요했으며 이를 위해 구약 성경에다 외경을 추가했습니다. 그리고 트렌트 공회는 다음과 같이 선포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위에서 언급한 책들을, 카톨릭 교회에서 해왔던 것처럼, 모두 성경의 정경으로 받아드리고 읽지 않으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외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비성경적 카톨릭 교리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1. 연옥: 마카베오하서 12장 39-45절
2. 구제(즉 자선 행위)에 의한 구원: 집회서 3장 30절
이외에도 외경에는 자살을 인정한다든지(마카베오하서 14장 43-46절), 비참한 노예제도를 인정한다든지(집회서 33장 24-28절), 윤회(솔로몬의 지혜서 8장 19,20절)를 인정하는 구절이 있으며,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몰래 죽이거나 마술을 통해 신비주의를 행하는 것 등을 인정하는 구절들이 있어 우리 프로테스탄트들이 믿는 성경과 상치됩니다.
트렌트 공회 이후 1582년에 로마 카톨릭 교회가 펴낸 「두에랭스 역본」은 원래의 구약 성경 39권에다 위 표의 15개 외경 중 12개를 포함시켰습니다. 그런데 트렌트 공회는 매우 교묘하게 외경을 포함시키는 일을 진행하여 외경 15권 모두를 포함시키지 않고 특히 에스드라하서를 뺐습니다. 왜냐하면 그 책의 7장 105절은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금하기 때문입니다.
6. 초기 영어 성경에 외경이 포함된 이유
초기 영어 성경에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대개 외경이 포함되었습니다. 그 이유 중 첫째는 중세 시대에는 많은 이들이 대개 외경을 가치 있는 책으로 수용했기 때문이었고 킹제임스 성경과 같은 경우에는 성경 분석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외경을 넣었든지 간에 영어 성경에서 외경은 부록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정경이 아님을 밝히는 분명한 글과 함께 성경책에 포함되었습니다.
1. 「틴데일 성경」(주후 1525년)은 외경들만을 따로 떼내어 그것들이 ‘영감 받지 않은 책들’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2. 「커버데일 성경」(주후 1535년)도 「틴데일 성경」과 마찬가지로 했으며 아예 다음과 같은 설명을 곁들였습니다.
외경 : 고대 교부들이 성경의 다른 책처럼 권위를 부여받은 것으로 간주하지 않은 책들이며 또한 히브리인들의 정경에도 포함되지 않은 책들이다.
3. 「마태 성경」(주후 1537년)과 「태버너 성경」(주후 1539년)은 외경을 구약과 신약 성경 사이에 부록으로 넣었습니다.
4. 킹제임스 성경(주후 1611년)은 「비숍 성경」 (주후 1568년)과 마찬가지로 외경을 부록에 넣었으나 1629년부터는 아예 외경을 빼기 시작하여 1827년부터는 부록에서도 완전히 삭제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성경 안에 외경을 부록으로 넣었다.”는 것과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하여 성경에 넣었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혼동에 빠져 있습니다. 다음의 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우선 “성경 안에 외경을 부록으로 넣었다.”는 것은 신구약 성경이 모두 66권으로 구성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며 이 경우 외경은 던지 성경 안에 들어 있는 지도책과 같이 참조 자료라는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비롯한 초기 영어 성경들의 경우가 거의 다 이러합니다.
반면에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하여 성경에 넣었다.”는 것은 신구약 성경이 모두 78권으로 구성되었음을 말하며 이 경우에는 책의 목차에 아예 외경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외경이 모두 구약 성경 정경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발간하는 성경은 모두 후자로 되어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참고로 「Catholic Study Bible」이나 「New American Bible」 등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외경을 부록으로 넣은 경우와 정경으로 인정한 경우의 차이점
외경을 부록으로 넣은 경우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한 경우
구약 성경 39권
구약 성경 51권
외경(부록)
신약 성경 27권
신약 성경 27권
부록이 없음.
외경은 성경이 아니라고 분명히 못 박았음.
부록이 없고 대신에 외경이 구약 성경 중 일부분으로 들어가서 구약 성경이 총 51권으로 구성됨.
7.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
1. 이 책들은 전이나 지금이나 유대인들이 정경으로 인정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분명히 이 책들을 구약 성경에서 제외시켰다.
․주전 20년에서 주후 50년까지 살았던 필로 역시 이것들을 언급하거나 인용한 적이 없다.
2.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 중 어느 누구도 외경을 인용한 적이 없다.
․어떤 이들은 히브리서 11장 35절이 마카베오하서 7장과 12장을 인용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이 구절은 왕상17:22와 왕하4:35를 인용한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유다서 14절이 외경인 에녹 서신을 인용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구절은 에녹의 말을 인용할 따름이며 분명히 우리 성령님께서는 에녹이 한 말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에녹 서신을 인용하지 않고서도 아무 문제없이 그의 말을 기록하실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딤후3:8이 외경을 인용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성령님께서는 자신이 원하실 때에 과거에 있었던 이집트 마술사의 이름을 언제든지 기록하실 수 있으므로 이 구절 역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3. 야브네 공회에 모인 유대인 학자들은 외경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4. 대부분의 교부들이 외경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5. 외경의 어느 책도 스스로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6. 외경의 많은 책들이 역사적, 지리적, 연대기적 실수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7. 외경의 많은 책이 성경 말씀과 모순을 일으킵니다.
8. 외경의 형식은 전설적이며 공상 만화 같으며 어떤 이야기들은 매우 괴기적이며 마귀와 연관이 있습니다.
9. 외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권위와 같은 뚜렷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모두 그리스어로 기록된 외경들은 - 라틴어로 존재하는 단 한 가지만을 빼놓고 - 동양의 예의범절, 언어, 견해와 역사 등에 대해 설명을 주는 ‘고대 문서’로서의 가치만을 지닐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이 외경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단지 부록으로 넣었음을 알게 됩니다. 마치 여러분 성경에 있는 지도 같이 말입니다.
2009-05-11 13:26:56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이 아닌 다른 성경을 사용해서도 사람들을 구원시킬 수 있을까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35>
대답: 네,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구원의 단순성을 둘러싼 사실들은 현대 역본들이 가장 많이 왜곡시킨 부분에서조차도 많이 손상되지 않은 채 발견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이 크리스천의 무기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12절 과 디모데후서 3장 16절을 보십시오. 또한 그것은 새로운 크리스천을 적절히 자랄 수 있게 하는 양식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2장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히4:12)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벧전2:2).
이런 면에서 새 번역 성경들은 취약점을 드러냅니다. 사실 위에서 언급된 구절들이 많은 새로운 역본들에서는 변개되어 성경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역본들로 구원을 얻는 것은 가능하지만 구원받은 사람이 그런 성경으로 바르게 성장하여 마귀를 대적하기는 미흡합니다.
2009-05-11 13:20:53 | 관리자
질문: 사해 사본이 킹제임스 성경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36>
대답: 아닙니다. 오히려 사해 사본은 킹제임스 성경을 지지합니다.
‘사해 사본 두루마리’(Dead Sea Scrolls)는 1947년에 여리고 근처의 쿰란 동굴에서 아랍인 양치기 소년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있는 본문은 사실 킹제임스 성경과 일치합니다. 이 사실은 완전한 성경을 던져 버리고 싶어 하는 학자들에게는 그리 매력적인 것이 못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이 얄궂게 발견되었다는 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 외에는 대개 그것을 무시합니다.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이미 ‘사해 사본 두루마리’와 일치하는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필요 없었습니다.
2009-05-11 13:19:05 | 관리자
질문: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읽을 때 ‘thee’와 ‘thou’ 같은 고어들로 인해 곤란을 겪게 되면 어쩝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37>
대답: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고기를 주시나 그것을 잘라서 먹여 주시지는 않을 것이다.” 다음의 사실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심혈을 기울여 영감을 통해 완전한 원본을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구약과 신약 성경을 조합하시고 그것의 신빙성을 문서로 입증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로마 카톨릭 압제자들과 알렉산드리아 철학자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 보존하셨습니다. 이 과정은 그분 자신의 가장 충성스런 종들의 생명과 가정과 가족들의 희생을 요구했습니다. 그분께서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학자들을 모으시고 그들에게 전 세계적 공통어인 영어로 완전하고도 순전하게 그것을 번역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thee’와 ‘thou’ 등이 고어라고 하며 불평하고 있습니다. 제발 그런 불평을 그치고 고기를 잘라서 먹는 수고는 여러분이 감당하십시오!
2009-05-11 13:17:39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