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번역도 하나님의 영감을 받을 수 있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29>
대답: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번역에도 여러 차례 영감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42-45장은 요셉이 자기 형제들과 재회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요셉이 구사한 말은 히브리어가 아니라 이집트어입니다. 이것은 창42:23에서 보듯이 명백한 사실입니다.
요셉이 통역자를 통해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자기들의 말을 알아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창42:23).
어떤 글을 ‘한 낱말 한 낱말 완벽하게’(word perfect) 축자적으로 번역할 수는 없음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요셉이 이집트어로 말했던 그 내용이 구약 필사본에 기록될 때는 히브리어로 번역되었다.”는 것과 ‘그 번역이 단어 대 단어의 완전한 일 대 일 대응의 축자적 번역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영감을 주셨습니까? 이집트어로 말했던 요셉입니까? 아니면 이집트 사람 통역관의 구두 번역이었습니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우리가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에서 보는 대로 모세가 기록했던 번역에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셨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영감을 주셨다면 요셉의 ‘원래 진술’은 그의 이집트 사람 통역관에 의해 혹은 모세의 번역에 의해 훼손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영감을 주사 ‘영감된 번역’을 기록하도록 하신 걸까요? 후자의 경우라면 ‘진보적인 영감’(progressive inspiration)을 비난하는 많은 근본주의자들은 큰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이와 동일한 질문이 모세가 파라오(바로))와 대결하는 장면에서도(출애굽기 4-14장) 제기됩니다. 하나님을 대변해 모세가 이집트 왕과 말할 때는 왕이 쓰던 이집트어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록할 때는 자신의 말이나 파라오의 말을 모두 히브리어로 번역해서 기록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느 것에 영감을 주셨습니까? 지구상에 어느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은 모세의 이집트어 구두 진술 복사본인가요? 아니면 모세의 히브리어 번역인가요?
“번역에도 영감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됩니다.
사도행전 22장을 보면 바울은 자기를 박해하는 유대인들에게 히브리어로 말합니다(행21:40; 22:2). 1절부터 21절까지의 증언은 바울이 모두 히브리어로 말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말을 히브리어로 기록한 사도행전 22장의 필사본은 이 시간 하나도 없습니다. 누가는 이 모든 것을 그리스어로 기록했습니다. 자, 하나님께서 어느 것에 영감을 주셨습니까? 바울의 말(히브리어)인가요? 아니면 누가의 ‘진보된 영감’ 즉 히브리어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인가요?
그 대답은 간단하며 딤후3:16에 있습니다.
모든 성경 기록(All scripture)은 하나님의 영감 - 숨을 불어넣으심 - 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 구절에 나오는 ‘scripture’라는 단어의 어근은 ‘script’인데 이것은 ‘기록된’(written)이란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에 포함된 여러 개의 번역 - 제가 지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 도 하나님의 영감 된 말씀임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어떤 근본주의자가 이 같이 영감 받은 번역을 고의적으로 믿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와 같은 명백한 성경의 관행에 역행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 여기서 독자들이 유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저자인 사무엘 깁은 "킹제임스 성경은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보존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번역도 영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 혹시 킹제임스 성경도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닌지 의아해 하실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것은 성경에서 한 말에서 다른 말로 번역(통역)된 부분도 그것이 기록될 때는 영감을 받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중영감설’ 즉 “킹제임스 성경도 자필원본과 마찬가지로 영감을 받았다.”는 이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섭리로 보존해 주신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전혀 오류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담고 있다고 믿을 뿐입니다.
2009-05-11 13:16:18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은 그리스어를 영어로 옮긴 일개 역본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옮긴 것이 원래의 것만큼이나 좋다고 할 수 있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30>
대답: 옮긴 것이 원래의 것만큼 좋을뿐더러 훨씬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옮김’(translations)에 관해 세 가지 사례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 세 경우 모두 옮긴 것이 원래의 것보다 개선되었습니다. 성경이 믿음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서 우리의 최종 권위이므로 우리는 단순히 ‘사람’의 어떤 의견보다 성경의 ‘관행’을 상위 권위로 인정해야 합니다.
1. 첫 번째 ‘옮김’(translation)은 삼하3:7-10에서 발견됩니다.
사울에게 첩이 있었더니 그녀의 이름은 아이야의 딸 리스바더라.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에게로 들어갔느냐? 하니 그때에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로 인해 심히 노하여 이르되, 내가 개의 머리냐? 내가 유다를 대적하고 이 날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당신을 다윗의 손에 넘겨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 대한 허물로 나를 비난하는도다. 주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그에게 행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넬에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노니 그 맹세는 곧 왕국을 사울의 집에서부터 옮기고 - To translate the kingdom -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과 유다 위에 다윗의 왕좌를 세우는 것이라, 하매
사무엘기상 31장을 보면 사울이 죽은 후 사울의 군대 사령관이었던 아브넬이 다윗 대신 이스보셋을 왕으로 추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삼하2:8-9). 그런데 이스보셋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아브넬은 심히 노하여 이스라엘이 이스보셋에게서 다윗에게로 ‘옮겨질 것’(translate)에 대해 말합니다.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아 열 두 지파 모두를 다스리게 하시려는 주님의 의도는 사무엘하 3장 9절에 나오는 아브넬의 말을 볼 때 아주 명백합니다. 이스라엘 왕국이 다윗에게로 ‘옮겨진 것’(translation)은 한 민족이 두 왕국으로 나뉘어서 한 쪽은 다윗이 바르게 통치하고 다른 한 쪽은 이스보셋이 바르지 않게 통치하던 ‘원래 상태’보다 더 나아졌습니다(첫 번째 언급의 법칙을 기억하십시오).
2. 두 번째 ‘옮김’(translation)은 골로새서 1장 13절에서 발견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능에서 건져 내사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왕국으로 옮기셨으니 - hath translated us.
여기서의 ‘옮김’(translation)은 잃어버린바 되었던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 안으로 전환된 것을 말합니다. 편견 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보게 되면 누구라도 이러한 ‘옮김’(translation)이 ‘원래 상태’보다 엄청나게 향상된 것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3. 세 번째 ‘옮김’(translation)은 히브리서 11장 5절에 나타납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옮겨졌으니 -Enoch was translated -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셨으므로 - God had translated - 그들이 찾지 못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before his translation -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라는 증언을 가졌느니라.
‘translate’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단지 다섯 번 쓰였습니다. 사무엘기하에 한 번, 골로새서에 한 번, 여기 히브리서 11장 5절에서 나머지 세 번이 나옵니다.
아무리 성경 지식이 부족한 크리스천이라도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에녹에 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에녹은 대언자요,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죽음을 경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셨으므로 에녹은 육신을 입고 죽지 않은 채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이러한 에녹 개인의 경험은 고린도전서 15장, 데살로니가전서 4장, 디도서 2장과 성경의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으며 이는 소위 크리스천들이 ‘휴거’(Rapture)라고 말하는 것의 축소판입니다. 성경은 ‘휴거’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미래 현상에 대해서는 성경에 나오는 대로 즉 디도서의 ‘복스러운 소망’(Blessed hope) 혹은 데살로니가전서의 ‘끌어올림’(Catching up) 혹은 히브리서의 ‘옮기는 것’(Translation) 등을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에녹을 옮기신 일(Translation)이 ‘원래 상태’보다 향상된 것이 분명하므로 우리는 모든 문제에서 우리의 최종 권위가 되는 성경이 언급하는 모든 ‘옮김’(translation)이 원래의 것보다 향상된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순수하게 성경을 믿는다면 이것을 받아들이는 데 별 무리가 없을 것이지만, 만일 여러분이 학문에 최고 가치를 두거나 혹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한다면 지금까지 여러분이 동의할 수 없었던 성경의 사실들을 다 거부했던 것처럼 성경의 이 사실 또한 거부할 것입니다.
우리는 신미국표준역(NASV)과 신국제역(NIV) 번역자들이 자신들의 선입견으로 인해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었을 때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위에서 언급한 그 어느 구절에서도 ‘옮기다’(translation)란 단어를 쓸 수 없었다는 점에 주목해야겠습니다. 즉 그들은 ‘translation’이란 단어를 빼고 대신 다른 단어를 썼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어느 쪽을 따르시렵니까? 성경입니까, 아니면 사람의 말입니까?
(*) 독자들은 여기서 저자의 의도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저자는 성경에서 translate라는 단어의 용례를 보여 주면서 그것이 이전보다 좋은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의 translate는 성경 번역의 trabslate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쓰였습니다. 우리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완전하다고 믿으며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단어들(원어들)이 바르게 영어로 번역되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그 안에 보존되었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영어가 원어를 대체한다거나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원어를 교정한다(correct)는 주장 혹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도 영감을 받았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근원적으로 볼 때 영감은 오직 원어에만 주어졌으며 원어의 단어들은 완벽하므로 그것들을 교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원어로 주신 성경을 올바르게 가감하지 않고 번역하여 원어 이후의 사람들이 최종 권위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든 역본입니다. 물론 그 안에는 단 하나의 오류도 없습니다.
2009-05-11 13:14:27 | 관리자
질문: 다른 성경에는 근본적인 교리들이 없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다른 성경들을 나쁘다고 말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31>
대답: 다른 역본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기본 교리가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더욱 더 명쾌하게 그리고 더욱 더 빈번히 드러납니다. 그러기에 킹제임스 성경이 이 분야에서 최고입니다.
다른 역본들에서도 근본적인 교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기들이 그런데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 교리가 원래 킹제임스 성경으로부터 나왔음을 잊고 있습니다. 다음의 교리들은 다른 역본들에서도 발견되나 삭제나 변개 등으로 인해 킹제임스 성경에서보다 그 의미가 약화된 것들입니다.
1.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는 신미국표준역(NASV), 신국제역(NIV), 뉴킹제임스역(NKJV) 등이 사도행전 3장 13절, 26절 그리고 4장 27절, 30절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종’이라 부름으로써 크게 희석되었습니다.
2. 지옥 교리는 누가복음 16장 23절에서 희석되어 NKJV와 NASV에서는 ‘지옥’(hell)이 아니라 ‘음부’(hades)로 음역되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음부가 어디 있는지 혹은 어떤 곳인지 아는 분이 계십니까?
3. 사도행전 8장 37절의 본문이 삭제되어 NIV와 NASV에는 이디오피아 내시의 구원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4. NASV의 누가복음 24장 51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5. NIV와 NASV에서는 예수님의 처녀 탄생이 부인되고 있고 누가복음 2장 33절에서는 요셉이 예수님의 아버지라 불립니다. 이 같은 신성모독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6. 삼위일체 교리가 요한일서 5장 7절에서 제거되거나 문제시됩니다. NIV와 NASV는 그 구절을 삭제하고 6절을 나누어 엉터리로 7절을 만들어 냈고 NKJV는 그 구절의 신빙성이 의심스럽다는 주석을 달아 놓았습니다.
이것들은 오늘날 현대 역본들의 본문에 들어 있는 단지 몇 개의 변개 사항들입니다. 모든 목록을 남김없이 기재한 것이 아님에 유의하기 바랍니다. 혹자는 다른 성경들에 대한 이러한 비평을 두고 “별것 아닌 것을 문제 삼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현대 역본들에서 어떤 특별한 교리를 200번 발견했다면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그와 똑같은 교리를 그보다 더욱 많이 발견하게 될 것이고 결국 킹제임스 성경이 교리 면에서도 현대 역본들보다 훨씬 더 권위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2009-05-11 13:10:14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이 정말 완전하다면 그렇게 많은 목회자들과 학자들이 다 틀렸단 말입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32>
대답: 지금까지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개 다수는 언제나 틀렸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1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위대한 성경의 진리 즉 다수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넓어 거기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좁아 그것을 찾는 자가 적으니라.
이 구절은 지구상의 대다수 사람들이 그릇 되게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지옥에 갈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대강 살펴볼지라도 대개 다수는 항상 틀림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노아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대홍수 때에 죽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멸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다수가 출애굽기 32장에서 아론의 송아지를 숭배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다수가 예레미야 같은 대언자들의 직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사역 기간 동안 그분을 부인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삽니다.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겸손한 마음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진리를 인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학자들’과 목회자들의 다수가 킹제임스 성경을 부인하는 사실은 전적으로 성경적인 사실인데 다만 그것이 매우 잘못된 사실임이 유감일 뿐입니다.
2009-05-11 13:08:48 | 관리자
질문: ‘공인 본문 주의자’와 ‘킹제임스 성경 주의자’는 어떻게 다릅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25>
대답: ‘공인 본문 주의자’(TR 주의자)는 안디옥으로부터 필사본을, 이집트로부터 철학을 따온 사람입니다.
우리는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에 관한 연구(질문8)에서 이 지역들로부터 두 가지 사실을 끌어낼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지역성을 통해 우리는 필사본들을 유도해냈고 그런 필사본들을 판단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도출해 냈습니다. 사람들은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오리겐의 비평의 손길에 의해 더렵혀진 ‘변개된 사본들’을 얻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곳으로부터 “성경은 거룩하나 완전하지는 않으며 실수가 있다.”는 그릇된 이데올로기를 얻습니다.
한편 안디옥으로부터 우리는 ‘공인 본문’(Textus Receptus, TR)으로 승화되어 최고조에 이른 순수한 사본들의 노선을 얻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곳으로부터 “성경은 거룩할 뿐 아니라 완전하며 실수가 없다.”는 이데올로기를 얻습니다.
1. 대부분의 성경 비평 학자들은 성경이 완전하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알렉산드리아의 이데올로기). 또한 그들은 대개 안디옥 사본보다 알렉산드리아 사본이 더 우수하다고 주장합니다.
2. 킹제임스 성경 신자는 안디옥의 사본들 혹은 ‘공인 본문’을 알렉산드리아 사본보다 훨씬 더 우수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또한 그들은 성경을 절대무오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 안에 어떠한 실수나 오역도 없으며 따라서 더 이상 개선될 수 없다는 안디옥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입니다.
3. ‘TR 주의자’ 또한 안디옥 사본들이나 ‘공인 본문’을 알렉산드리아 사본보다 더 우수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TR 주의자’는 안디옥 사본들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알렉산드리아의 이데올로기를 취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어떤 역본도 ‘실수가 없는 완전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대개 그는 킹제임스 성경이 가장 좋은 역본이지만 그것도 개선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그는 사도행전 12장 4절에 부딪히게 되고 그것이 오역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러한 자가당착은 부정직하고 좋지 못한 마음의 결과라기보다는 그릇된 교육의 결과입니다. 대부분의 ‘TR 주의자들’은 알렉산드리아의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중에 받아들이도록 속임을 당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교육을 받아 왔습니다.
아래 편지는 역자가 과거 미국의 펜사콜라 성경침례교회의 도너반 목사에게 공인 본문 주의와 킹제임스 성경주의의 차이점에 대해 질문했을 때 받은 답변 편지로서 독자 여러분의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사료되어 번역 게재한 것입니다.
형제님께 !
저는 그리스어 ‘공인 본문’(TR)과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차이를 묻는 형제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우리 펜사콜라 성경침례교회(피터 럭크맨 목사 시무)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TR주의’를 따르지 않는데 본 편지에서는 그 중 몇 가지 이유만을 설명 드리려 합니다.
최근 들어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알렉산드리아 본문이 전적으로 부패되었음이 분명하게 입증되면서 TR을 표준으로 삼으려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타협적인 입장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이 같은 입장은 최종 권위의 문제를 성경이 아닌 사람에게 두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일 어떤 이가 ‘TR 주의’를 취한다면 그는 킹제임스 성경이 올바른 본문으로부터 나왔으므로 역본 중에서 가장 좋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주장은 강조점과 최종 권위를 그 특정한 그리스어 본문에 두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그렇게 하게 되면 사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에 있느냐?”는 원초적인 질문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TR 안에 있다면 도대체 누가 어떤 특정한 그리스어 단어를 무엇으로 번역할지 결정한단 말입니까? 예를 들어 그리스어 ‘하데스’(Hades)는 신약 성경에서 11번 쓰였는데 KJV에서는 그 중 10번이 ‘지옥’(Hell)으로 그리고 나머지 한 번은 ‘무덤’(Grave)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우리는 KJV이 최종 권위라는 사실과 KJV이 이미 그 단어가 어떻게 번역되어야만 하는가를 결론지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가 TR 주의자라면 그는 ‘하데스’를 자기 마음대로 번역할 것입니다. 즉 그 사람 자신이 성경의 최종 권위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KJV 역자들이 올바른 그리스어 본문을 사용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작업 속에서 그것 외에도 라틴어역, 시리아역, 기존의 영어역 등도 사용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여러 종류의 TR간에 서로 차이나는 부분을 다 모은다면 그것들이 1611년 이후에 재쇄된 킹제임스 성경들의 차이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많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완전한 성경인 킹제임스 성경을 보존하는 과정에서 그리스어 절충 본문을 사용하셨다고 믿습니다. 또한 우리가 ‘TR’을 완전한 성경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신약 성경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TR’은 여러 종류의 그리스어 사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핫지스(Hodges), 버건(Burgon)과 같은 사람들은 TR 주의를 취하지만 우리는 KJV 영어성경주의를 취합니다. 앞으로 영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TR 등으로부터 나오게 될 한국의 성경은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그들의 작업 속에서 행했던 것과 비슷하게 되리라 사료되며 나는 그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으로 TR과 KJV의 차이점에 대한 설명을 대신하려 합니다.
1994년 4월 7일
미국 펜사콜라 성경 침례교회
브라이언 도너반(Brian Donovan)
2009-05-11 13:05:43 | 관리자
질문: 신학 교육이 작금의 성경 논쟁을 종식시키는 데 도움이 될까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26>
대답: 아닙니다. 거의 틀림없이 - 99%의 확률 - 신학 교육은 한 학생이 완전한 성경이 있다고 믿는 믿음을 흔들리게 하거나 파괴시킬 것입니다.
신학 교육에는 많은 혜택이 있습니다. 신학생은 사역하는 것과 교회를 세우는 것 등에 대해 매우 귀중한 수업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리에 약한 학생은 믿음 안에 든든히 설 수 있습니다. 신학교 시절의 우정과 경험들은 종종 지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하나님께서 완전한 성경을 주셨다.”는 믿음은 종종 신학 교육으로 인한 은혜가 되기보다는 그런 교육으로 인한 희생물이 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대부분의 신학교에는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지만 알렉산드리아식 교육을 받아 그 희생자가 된 선량한 사람들이 교수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정확한 사본 계열에 대해서는 옳게 판단을 했지만 알렉산드리아 이데올로기에 의해 무의식중에 성경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수중에 있는 단 한 권의 성경이 정말로 완전하다는 믿음을 결코 이성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종종 킹제임스 성경만 혹은 ‘공인 본문’만 가르친다고 선전하는 신학교들조차도 여전히 이러한 만성병으로 시달림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학생들은 성경의 완전성을 주장하는 신학교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자기의 성경을 자주 정정해야만 한다는 모순되는 소리를 들으며 혼동에 빠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더욱 빈번하게 그는 그 통렬한 비난의 말에 굴복하고는 자기 스스로 성경의 완전성을 비판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만약 학교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대개 그는 ‘광신자’로 낙인찍히거나 배척받거나 심지어는 퇴학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신학 교육이 유익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 교육이 성경의 완전성에 대한 학생의 믿음을 거의 강화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2009-05-11 13:03:55 | 관리자
질문: 다른 역본들을 사용하는 크리스천들이나 목회자들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일까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27>
대답: 혹자는 ‘하나의 성경’에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을 싫어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저의 대답입니다.
마가복음 9장 38-41절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자기들을 ‘따르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물들로부터 사랑과 경배를 받기 원하십니다. 신학교 학생들이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 잘못 인도된 것처럼 많은 목회자들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무척 사랑할지 모르지만 다만 무지해서 혹은 속아서 잘못된 성경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지만 그릇된 성경을 사용하는 그 사람도 언젠가는 성경 문제에 직면해서 시비를 가리고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옳은 것’을 선택한다면 그들의 믿음은 더욱더 강건해질 것이며 그들은 다른 성경 사용하는 것을 중단하고 설교하는 도중에 성경을 ‘정정하려는’ 시도를 대개 그만 둘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이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러 자기들의 ‘출신 신학교’(Alma-Mater)가 틀렸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게 되고 결국 성경이 잘못된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한 설교자가 “저는 킹제임스 성경이 완전하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이지만 제 출신 신학교가 그 입장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지지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저는 들은 적이 있습니다.
때때로 그들은 동료들 사이에 서서 자신들의 명성에 미칠 손해를 먼저 저울질해 보고 하나님의 완전한 성경을 지지할 수가 없다고 느낍니다. 어떤 이는 대학 교수로서 알렉산드리아 계통의 신학교에서 안디옥 입장을 취했을 때 경험할지도 모를 재정적인 손해를 상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여러분은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이유에서건 킹제임스 성경이 완전하다는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적대시하게 됩니다. 대개 이 같은 경멸은 지적인 확신보다는 방어 수단으로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물론 이것이 여러분에게 알려지지 않게 하려 할 것입니다.
어떤 크리스천이 자기가 단순히 한 권의 책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복종하기를 거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그는 그의 인생에서 성경의 권위를 거부한 것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그 시대의 학자들과 같지 않고 권위를 가지신 분(마7:29)으로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분을 싫어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2009-05-11 13:02:28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은 영감된 것인가요, 아니면 보존된 것인가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28>
대답: 자필 원본들은 물론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킹제임스 성경은 그 자필 원본들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성경입니다.
성경의 ‘영감’(Inspiration)과 ‘보존’(Preservation)을 명료하게 설명하는 최선의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감이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시켜서 파피루스나 양피지 같은 백지 한 장에 자신의 말씀을 적게 하신 것입니다. 반면에 보존이란 하나님께서 이미 기록된 말씀들을 사람들로 하여금 오늘날까지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이 두 행동 모두 거룩하며 시편 12편 6,7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보증하신 것입니다.
6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7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시12:6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원본이 완전함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십니다. 비록 그것들이 살인(모세와 다윗), 간음(다윗), 우상숭배(솔로몬) 그리고 주를 부인한 것(베드로) 등과 같은 가증한 죄들로 인해 잘못을 범하기 쉬운 사람들에 의해 씌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그 기록자들의 죄로 인해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원본 전부가 영감을 받아 완전하다는 것은 오늘날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전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근본주의자들은 단지 자필 원본만이 완전한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는 사본들 혹은 사본들의 역본 외에는 가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단순한 역본’을 원본의 완전한 사본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생각에 분개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사본들과 역본들은 영감을 받지 않은 사람들의 산물이며 따라서 모두 실수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이러한 잘못된 신조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그릇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어리석음은 다음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영감 받은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도록 죄인들을 사용하셨다고 믿으면서 동일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기 위해 죄인들을 사용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은 상당히 모순되고 설명하기 힘든 것입니다. 틀림없이 자신의 말씀에 완전한 영감을 주실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것들을 완전하게 보존하실 만큼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는 그런 능력을 상실하셨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매우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2. 왜 하나님께서는 영감을 통해 완전한 자필 원본들을 만드시고는 얼마 지난 뒤 그것들을 잃어버리셨을까요? 우리가 아니라 아주 오래 전에 살았던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그리고 기타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완전한 성경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주님을 직접 보았으며 들었으며 만졌습니다(요일1:1).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누군가 완전한 성경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구원자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거의 2000년이란 세월이 흐른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완전한 자필 원본을 보존하려고 계획하지 않으셨다면 왜 그것에 영감을 주셨겠습니까? 혹자는 하나님께서 오늘날의 성경 안에 여러 군데의 잘못된 것들을 허락하셨다고 믿는데 그렇다면 그 하나님께서 자필 원본에도 그런 실수들을 허락하신 것이 아닐까요? 혹은 하나님의 완전한 성경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사본들에 실수가 생기는 것을 막으실 수 없었다고 믿는 것입니까? 이 같은 생각들은 결국 하나님을 이것은 하실 수 있고 저것은 하실 수 없는 반쪽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3. 이런 것은 검증될 수 없는 ‘임기응변식’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소실된 원본들을 완전하다고 믿는 편이 덜 손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이미 상실되었으므로 그들이 그런 믿음을 갖는다고 해도 그들에게 실제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얄팍한 이유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틀리다고 증명하기에 필요한 증거물 즉 원본이 상실되었으므로 결코 아무도 자기들이 틀리다고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안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오늘날 누구나 쉽게 입수할 수 있는 성경도 원본과 마찬가지로 완전하다고 믿는다면 자기들이 그런 믿음을 수호하다가 결국 피투성이가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아무도 보지 못한 원본 이야기만 늘어놓습니다. 결론적으로 완전한 영어 성경을 믿지 않으면서 단지 완전한 원본만을 믿는다는 것은 사실상 아무 것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4. 완전한 성경이 보존되었다는 교리를 대적하려는 그들의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몸소 대답하실(행1:8) 만큼이나 성경에 의해 보증을 받고 있습니다. 시편 12편 7절은 명백하게 말합니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Thou shalt keep them, O LORD, thou shalt preserve them from this generation for ever!
따라서 우리는 친히 영감을 주셨던 완전한 말씀들을 그대로 완전히 보존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능자께는 실로 그것이 별로 큰 어려운 일이 못됩니다.
이런 논제에 겁을 먹은 근본주의자들은 시12:7에서 발견되는 성경적 가르침에 대해 두 가지 공격을 가합니다.
1. 그들은 7절의 ‘그것들’(them)은 말씀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후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시12:7에서 그 단어를 그렇게 번역한 역본들을 부리나케 출간합니다. 신국제역(NIV)에서 이 구절을 봅시다.
오 주여, 주께서 우리를 안전히 지키사 그런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영원히 보호하시리이다.
O LORD, you will keep us safe and protect us from such people forever.
이것은 참으로 무책임하고 부정직한 번역입니다. 여기에서 ‘지킨다’로 번역된 ‘to keep’에 상응하는 히브리어는 ‘shamar’인데 신국제역(NIV) 번역자들은 2인칭 단수 미래로 나타나 있는 “thou shalt keep them”을 “you will keep us”로 번역했으며 3인칭 복수인 ‘them’을 1인칭 복수 ‘us’로 번역해 버렸으니 이것이야말로 오역의 본보기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원본의 본문을 정확하게 보존한 하나님의 완전한 성경은 신뢰할 수 없는 신국제역(NIV)이 아니라 킹제임스 성경임을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시12:7의 말씀은 성경 여러 곳에서 자주 발견되는 약속 즉 유대인들의 보존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신의 말씀들을 보존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직접적인 언급은 시12:6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2. 종종 믿음이 너무나 연약해서 시12:6-7을 문자 그대로 진리로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크리스천은 경건하게 시119:89를 인용할 것입니다.
오 주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정착되었사오며
For ever, O LORD, thy word is settled in heaven.
그 뒤 그들은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자신의 완전한 성경을 보존하신 곳은 땅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밀짚더미 속에 숨어 버리는 모습이란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필 원본을 하늘로 가져가시려고 이 땅에서 영감을 통해 완전한 원본을 만드셨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분께서 원본을 쓰신 이유가 하늘로 가져가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대답은 너무도 간단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고 사람들을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낼 완전한 성경을 기록하신 후에 그들이 그러한 완전한 성경으로 인한 유익을 누리지 못하도록 하늘나라 도서관에 그것을 보관하시지 않았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만일 그 완전한 책이 우리 손이 닿지 않는 하늘나라에 감금되어 있다면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두 번째로, 시편 12편 6절은 땅에 있는 그분의 말씀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땅이 아닌 다른 곳에 그것들을 보존하시는 것은 전혀 보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본에 완전하게 영감을 주셨고 수 세기가 흘러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같은 말씀들을 보존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그것들 즉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들은 흠정역 성경에서 발견됩니다.
2009-05-11 13:00:49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숭배’하고 있는 것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성경 숭배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 원본들을 파괴하신 것이 아닐까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21>
대답: 그들은 결코 성경책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 또한 “아니요.”입니다.
최근 몇 년 간 완전한 성경을 비평해 온 비평 학자들은 크게 좌절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킹제임스 성경에 대항하기 위한 자기들의 모든 논의가 역사적 사실에 의해 체계적으로 붕괴되었을 뿐 아니라 자기들의 학자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 그리고 성령님께서 킹제임스 성경을 변함없이 복 주신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입니다. 이에 그들은 성경 신자들을 ‘비방하려는’ 절망적인 시도로 두 가지 질문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은 성경책을 숭배합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하는 것처럼 그 책에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킹제임스 성경이 구원한다.”고 설교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구원하신다.”고 설교합니다. 그들은 성경 전체에다 마크를 하기도 하고 참조가 되는 주석이나 짤막한 글을 적어 넣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감히 예수 그리스도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이 성경을 숭배한다는 그릇된 오해를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누명은 불행히도 정직함에서 나오지 않고 악의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이 성경을 숭배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자필 원본을 파괴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과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자필 원본의 유일한 가치는 그 안의 말씀들이었기에 그분께서는 그 원본이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을 허락하셨으며 그 말씀들은 곧장 사본으로 보존하셨습니다. 자필 원본은 그 목적을 수행하자마자 곧 필사되었으며 하나님이나 그분의 백성들은 더 이상 원본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오늘날 자필 원본이 어떻게 해서 ‘기적적으로’ 나타난다 해도 성경 신자들은 그것에 별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에 큰 관심을 끌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책을 숭배하는 자들이 있다면 아마도 원본에 대단한 비중을 두고 있는 오늘날의 성경 비평 학자들일 것입니다.
2009-05-11 12:57:07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이단 종파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22>
대답: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을 이단 종파에 속한 자들로 누명을 씌우는 것은 그들이 성경을 숭배한다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성경 비평 학자들의 좌절감과 악의에서 파생된 동일한 결과입니다. 슬프게도 그들이 사실을 가지고 자신들의 정당성을 입증하지 못하는 경우 자연히 이들의 비난은 인신공격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이단 종파가 두 가지의 명백하고도 중요한 특성을 지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단 종파를 정의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첫 번째로 이단 종파의 특성은 모든 신도들에게 결정 사항을 지시하는 중앙 본부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은 매우 독립적이며 심지어는 자기들끼리도 성경 외에 여타의 교리들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이지 못합니다. 그들의 중앙 권위는 오로지 성경뿐이며 결코 어떤 특정한 단과대학이나 종합대학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 대부분의 이단 종파는 자기들의 신도들이 반대편 신앙을 연구하여 그것으로 개종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교리와 일치하지 않는 재료나 책들을 금지하는 엄격한 규칙을 만듭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모든 진실과 사실들이 흠정역 성경의 편이기에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비평 연구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실상 이 책도 성경 비평 학자들의 모든 비난에 정정당당히 맞서기 위해 씌었습니다.
자, 이제 우리가 정말 주목해야 할 점은 오늘날 여러 신학대학과 종합대학들이 하나님의 완전한 킹제임스 성경을 지지하는 모든 책을 제거하기 위해 종합/연합 정책을 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 책도 언젠가는 그들의 목록에 오르겠지요. 이러한 사실은 실제로 누가 ‘이단 종파’이고 누가 아닌가를 보여 주는 깜짝 놀랄 만한 증거입니다.
(*) 이런 일은 미국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국내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개신교 신학교에서는 신학생들이 킹제임스 성경을 접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교육을 시키고 있으며 기타 킹제임스 성경 관련 책들을 금서 목록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바른 것을 가르쳐야 할 신학교들이 자기들의 선조인 로마 카톨릭 교회의 방법을 동원하여 성경을 막는 것을 볼 때 참으로 그들이 얼마나 킹제임스 성경을 무서워하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킹제임스 성경을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무식하고 교양 없는 자들이 흙탕물을 튀기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2009-05-11 12:54:54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을 완전한 성경으로 믿는 것은 ‘이단’이 아닙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23>대답: 아닙니다. 그들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완전한 성경이 있음을 믿고 그대로 행하는 것뿐입니다.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킹제임스 성경신자들이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는 것은 재미있긴 하지만 소름끼치는 일입니다. 웹스터 사전에 의하면 ‘이단’(Heresy)이란 ‘진리 혹은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신앙에 반하는 교리나 견해’를 말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사실입니다. 저는 종종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저는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무오한 말씀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저는 단지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무오한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 성경책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다면 저는 킹제임스 성경을 보여줄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비평 학자들도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무오한 말씀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들에게 가서 그들이 ‘믿는’ 절대무오한 성경책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면 그들은 “절대무오한 성경은 지구상에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실로 우리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은 그들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믿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그들로부터 ‘이단’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단’이라는 딱지는 험담가들의 느낌을 정직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젊은 신자들에게 겁을 주어 그들이 절대무오한 성경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입니다. 성경 비평 학자들의 의도는 열심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이단’의 딱지가 붙으리라는 두려움을 줌으로써 성경 비평 학자들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을 실제로 믿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성경은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사실이 근본주의자들 가운데 널리 인정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 비평 학자들는 여러분이 제시하는 모든 성경에서 오류를 찾아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과연 누가 정말로 이단일까요?
2009-05-11 12:52:29 | 관리자
질문: “전통 공인 본문”의 수호자로 알려진 딘 버건은 어떤 인물입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24>대답: 그는 19세기말 영국에서 성경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반대편에 속한 학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든 탁월한 성경학자였습니다.버건(John William Burgon, 주후 1813-1888)은 학문에 있어서 앤드류스(Lancelot Andrews, 주후 1555-1626)와 윌슨(Robert Dick Wilson, 주후 1856-1930) 같은 탁월한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굉장한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영국 치체스터 대학의 학장(Dean)으로 있었는데 그것으로 인해 그 이후로 보통 ‘딘 버건’(Dean Burgon)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버건 박사는 알렉산드리아 본문을 채택하여 「영어개역성경」(Revised Version)을 펴낸 웨스트코트(Westcott)와 호르트(Hort)와 동시대인이었습니다. 그는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의 지지자였고 그것을 반대하는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무기력한 논의를 과감하게 응징한 사람이었습니다.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와는 달리 그는 이론이라는 모래 위보다는 사실이라는 탄탄한 기초 위에서 얻은 모든 결론을 믿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탐구하는 데는 돌멩이 하나도 남기지 않았으며 진리를 옹호하는 데 있어서는 잠시도 쉬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중한 학자였으며 재치 있는 위트와 신랄한 혀로 웨스트코트와 호르트 그리고 다른 모든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을 전쟁터에서 몰아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본문에 대한 반대 논의, 마가복음의 마지막 12절(16:9-20), 기타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이 문제시하는 부분들에 대한 그의 반박 논문들은 현대 학자들이 그와 동시대에 살았다 하더라도 결코 반박할 수 없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힐스(Hills), 풀러(Fuller) 그리고 럭크맨(Ruckman) 등과 같이 킹제임스 성경 옹호자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흠정역 성경을 대변하는 무적의 용사로 알려졌을 뿐 아니라 그의 작품들은 정직하고 객관적이며 진정한 학자가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범을 보여 줍니다.
2009-05-11 12:51:20 | 관리자
질문: “내가 킹제임스 성경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말이 맞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18>
대답: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에 의해 그 완전성이 결정되거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성경은 어떠한 죄인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으며 항상 오류가 없고 완벽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영생을 주시지만 성경은 우리에게서 아무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물론 다른 역본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어떤 사람이 「현대인을 위한 복음」(Good News For Modern Man)을 사용하여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했으므로 그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무오한 말씀이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은 틀린 말입니다! 그가 「현대인을 위한 복음」이란 책을 통해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 역본 안에 들어 있는 수많은 오류들 중 하나도 정정해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 친구 중에 킹제임스 성경이 오류가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리빙 바이블」(Living Bible)을 사용하는 어떤 사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되었습니다. 그가 믿었던 그 순간 「리빙 바이블」이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 성경은 완전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만약 「리빙 바이블」을 통해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성경이 완전해졌다면 그가 후에 킹제임스 성경을 선택하게 되면 그 완전함을 잃게 되는 걸까요?
따라서 어떤 사람이 여러분이나 저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 어떤 성경을 사용했느냐에 관계없이 킹제임스 성경은 절대무오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전혀 구원을 얻지 못했다 할지라도 킹제임스 성경은 여전히 완전하고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09-05-11 12:49:57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들’입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19>
대답: 그렇지 않습니다. 완전한 성경을 믿는 자들이 아마도 분열시킬 수 있는 유일한 교회는 성경이 완전하다고 믿지 않는 교회들뿐일 것입니다.
때때로 오해로 인해 잘못된 고발이 생기곤 합니다. 때로는 새빨간 거짓말에 근거한 경우도 있습니다. 완전한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들’이라는 불합리한 논리는 불행히도 전적으로 악의에 찬 거짓말에 근거한 것입니다. 슬프게도 교회 분열의 충격적 경험을 겪은 크리스천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모든 교회의 분열이 킹제임스 성경이 완전하다고 믿는 사람들 때문에 일어난 것처럼 가장하여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 분열은 돈 문제로부터 새 강대상에 어떤 색을 칠할 것인지에 이르기까지 어떤 이유에서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문제의 실상은 크리스천들이 슬프게도 로마서 14장과 누가복음 17장 1-5절에서 발견되는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분열은 킹제임스 성경과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려 드는 것은 전혀 정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2009-05-11 12:05:24 | 관리자
질문: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자들은 모두가 이름을 들어가면서 남을 헐뜯는 ‘험담가들’이 아닌가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20>
대답: 그렇지 않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완전성을 믿는 사람들 중에 유별난 사람들도 있지만 대개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최근 몇 년 간 완전한 성경에 대한 논의가 피터 럭크맨 박사(Dr. Peter S. Ruckman)에 의해 전문적으로 다루어졌습니다. 럭크맨 박사는 고등교육을 받은 성경 교사이자 목회자이며 안디옥 사본들이 가장 신뢰할 만한 것으로 믿는 분입니다. 그는 성경의 완전성을 받아들이는 안디옥 이데올로기로 성경을 보는 분입니다.
럭크맨 박사의 스타일은 성경의 권위에 관한 한 한 치의 양보도 없으며 따라서 성경 비평 학자들에 대한 그의 태도 역시 매우 단호합니다. 반면에 대부분의 성경 논의들에 대한 그의 접근 방법은 은혜의 방법인데 사실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그런 은혜가 부족합니다.
성경의 권위라는 단 하나의 논의를 대할 때 그의 접근 방법은 사도 바울(고후10:10)이나 위대한 영국의 성경 학자 버건(John William Burgon)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럭크맨 박사와 같은 학자적 자질을 갖추지 못한 채 완전한 성경을 주장하고 지지하던 소수의 무리들은 우선 킹제임스 성경반대자들을 공격하는 그의 신랄한 스타일을 닮아 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은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은 럭크맨 박사의 스타일이 자기들의 본래 스타일이 아니므로 무턱대고 럭크맨 박사의 스타일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 참고로 국내에도 이런 무리들이 있어 큰 골칫거리입니다. 제대로 자격을 갖추지도 못한 채, 비이성적으로 입에 거품을 물고 욕을 해가면서 킹제임스 성경의 최종 권위를 주장하지만 사실 이들은 자기들이 마귀의 종노릇을 하고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마귀가 그들의 눈을 가렸으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실제로 마귀의 일을 합니다.
2009-05-11 12:02:22 | 관리자
질문: 제임스 왕이 킹제임스 성경을 교회들이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번역을 허가하지 않았다면 그 성경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번역된 것입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17>
대답: 킹제임스 성경은 처음부터 평민들을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성경의 완전성 여부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어왔지만 이런 논쟁에서 간과된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성경이 있어야 하는 첫째가는 이유가 다름 아닌 평민을 위해 성경이 있어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만약 평민들이 없었다면 성경이 굳이 평민의 언어로 존재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교회 - 이 경우에는 여하한 종교단체라도 포함하여 - 는 항상 성경을 접해 왔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교회가 성경을 갖게 됨으로써 일반적으로 성직 계급자들의 자존심만 커졌고 또 성경 자체가 양떼들을 ‘주관하기’ 위한 용도로 잘못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민들의 손에 성경을 쥐어 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말 등에 거지를 태우면 전속력으로 질주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는 완전한 성경이 주어졌을 때 평민들의 반응을 매우 잘 묘사한 말입니다.
평민은 세계를 움직이는 -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 힘입니다. 평민은 군대로부터 교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의 필요를 충원하는 데 필수적 존재입니다. 그는 소비자인데 사실 소비자 없이 생존할 수 없는 식료품점이나 주유소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누가 자신의 인생을 지배하는가에 거의 관심이 없이 그저 정부의 말에 고분고분 따릅니다. 그의 에너지는 자기를 통제하는 사람들의 이득을 위해 활용됩니다. 그러나 그에게 정부의 권력이 주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비록 통치할 자들을 선택하기 위한 투표를 하도록 허락은 받지만 그 자신은 정부 체제 밖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 같은 일은 교회 생활 영역에서도 사실입니다. 그는 자기 교회 목사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인생에 대한 창조주의 뜻을 그가 알지 못하도록 막을 수 없습니다. 이 분야에 있어서 수세기 동안 가장 큰 폭력을 휘둘러 온 것은 역시 로마 카톨릭 교회였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오랜 세월 동안 카톨릭 교도와 다른 사람들을 성경에 대한 무지 속에 감금해 왔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일반적으로 사제들로부터 “평신도들은 스스로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는 그릇된 가르침을 받습니다. 만일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인 하나가 자신의 언어로 된 성경을 가지고서 그것을 자신이 스스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되면 그 교회의 신부(神父)가 그에게 얼마나 크게 노할 것인지 여러분은 가히 짐작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경과의 전쟁은 주로 두 가지 방법으로 수행되어 왔습니다.
1. 사람들이 성경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여 그들을 무지 속에 감금해 두라.
2. 하나님의 성경을 카톨릭 성경들 중 하나로 대체시켜라.
성경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방법도 두 가지입니다. 첫째, 평민(평신도)은 성경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사제나 사제의 개인적 해석에 복종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이 쓰일 수 없는 비카톨릭 국가에서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정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단체로 정착시킨 후 물리적으로 성경의 모든 사본을 몰수해서 파괴해 버립니다. 반대자들은 물론 죽임을 당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수세기 동안 대단히 성공리에 이 방법으로 평민들이 성경에 접근하는 것을 막아 왔습니다.
성경을 제거하기 위한 두 번째 방법은 바른 성경을 로마 카톨릭 교회가 만든 다른 것으로 대체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참된 성경을 몰수함으로 생긴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해 자주 사용되곤 합니다.
역사상 이 방법은 여러 차례 수행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서기 150년경에 안디옥에서 번역된 「구 라틴 벌게이트」 - 그냥 「벌게이트」(Vulgate)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공통의’, ‘평민의’라는 의미의 라틴어 ‘vulgar’에서 나온 말임 - 의 인기와 위협을 보았을 때 그들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변개된 사본으로부터 번역한 자기들 자신의 라틴어 성경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작업은 이 일을 별로 내켜하지 않던 로마 카톨릭 학자 제롬에게 억지로 떠맡겨졌으며 신속하고도 파렴치하게 「구 라틴 벌게이트」와 똑 같은 「벌게이트」라는 이름으로 주후 380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이 무가치한 책은 근 800년 동안 참 성도들로부터 외면을 당해 왔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원래의 바른 성경인 「구 라틴 벌게이트」를 다 불태워 버림으로 ‘자기들의 경쟁자를 완전히 제거해 버릴 때’까지 말입니다. 물론 「구 라틴어 성경」을 제거한 결과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전권을 휘두르던 중세 암흑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오늘날 주후 150년경에 만들어진 「구 라틴 벌게이트」에 대한 좋은 평을 듣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마치 주후 380년에 만들어진 로마 카톨릭 교회의 「라틴 벌게이트」 즉 제롬이 개조한 것인 줄 착각합니다.
현재 우리가 입수할 수 있는 대부분의 현대 영어 역본들 - 한국의 대부분의 성경들도 - 도 이같이 변개된 로마 카톨릭 필사본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에게 이 성경들은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제임스 왕은, 그가 그것을 알았든지 몰랐든지 간에, 보통 사람들에게 가장 가치 있는 소유물이 된 ‘영어로 된 참 성경’을 되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로마 카톨릭 교회는 1582년 프랑스의 랭스(Rheims)에서 킹제임스 성경에 대항할 자기들 자신의 영어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가치가 없었습니다. 제임스 왕과 그의 번역 위원회는 자신들의 번역이 영국을 벗어나서 세상 끝까지 가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평범한 사람들은 그 성경이 전 세계를 휩쓸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음을 보았습니다.
오늘날 일반인들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완전한 성경을 빼앗길 심상치 않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방법으로 수행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시도는 물리적으로 킹제임스 성경을 로마 카톨릭 사본에서 번역한 성경들로 대체시키는 것이며 이것은 거의 지난 100년 동안 진행되어 오고 있습니다. 이런 책들은 힘도 없고 가치도 없으나 참 성경을 대체시키는 일에는 적격입니다.
슬프게도, 킹제임스 성경은 많은 구원받은 근본주의 성경교사들과 목회자들로부터도 공격을 받았는데 그들은 성경을 ‘정정’할 수 있다는 권위의식 즉 로마 카톨릭 교황과 같은 권위의식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중요한 변화는 교회와 신학교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첫 단계는 ‘진압 단계’로서 그 희생자는 킹제임스 성경을 반대하는 수많은 선전으로 인해 완전한 참 성경을 받아들일 경우 정신적인 압박을 받게 됩니다. 이 방법 때문에 비록 자기 손에 바른 성경을 소유했을지라도 그의 머리속에는 더 이상 참된 성경이 존재하지 못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아직까지 자기의 성경을 물리적으로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두뇌로부터는 이미 도둑맞았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세뇌 단계’입니다. 이것은 목회자들, 성경교사들, 그리고 특별히 ‘크리스천 매체들’에 의해 수행됩니다. 크리스천 라디오 방송국들은 거의 보편적으로 킹제임스 성경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경 낭송’, 매일의 암송구절, 그리고 심지어 누가복음 2장의 크리스마스 이야기까지도 킹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다른 성경들에서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듣는 이들의 잠재의식으로부터 참 성경을 빼앗는 일입니다.
참 성경을 버린 수많은 목회자들이 새로운 역본을 가지고 설교할 때 종종 ‘배우지 못하고 무식한’(행4:13) 교인들과 충돌하는 모습을 여러분도 보셨을 것입니다. 비록 그 교인은 새 역본에 대한 목회자의 판매 전술을 이론적으로 논박하진 못해도 “도대체 그것은 성경 같지가 않군요!”라는 말로 목사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이젠 라디오나 TV 혹은 신학교에서조차 끊임없이 다른 역본 성경들만을 들려줌으로써 젊은 크리스천 세대들은 ‘참 성경’이 어떤 것인지를 잠재적으로나마 아는 혜택조차 누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근본주의자들 사이에 발견되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체주의 영’(totalitarian spirit) 즉 사탄의 진정한 적은 단지 성경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로 마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평민들의 손에 쥐어진 성경과 평민들 그 자체입니다. 사실 평민들이야말로 마귀가 가장 혐오하며 지옥으로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손에서 성경을 도둑맞았습니까? 여러분의 두뇌로부터는 어떻습니까?
2009-05-11 11:52:12 | 관리자
질문: 듀에랭스 성경은 어떤 성경입니까?
대답: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거의 파산 지경에 이른 카톨릭 교회는 자기들도 성경 중심으로 믿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성경 번역에 들어갔고 듀에랭스 성경은 카톨릭 교인들을 위한 최초의 영어 성경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창3:15의 ‘여자의 씨’를 ‘여자’로 바꾸어서 마치 마리아가 인류를 구속하는 것으로 만든 악명 높은 성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2009-05-11 11:49:14 | 관리자
질문: 제임스 왕은 영국에 있는 교회들이 사용하도록 자신이 번역을 위임한 킹제임스 성경의 권위를 인가해 주었습니까?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16>
대답: 아닙니다. 번역 자체는 인가했으나 번역 성경의 사용에 대해서는 인가한 적이 없습니다.
20세기의 사람이 특히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 거의 400년 전의 상황을 추측하기는 어렵습니다. 지금은 크리스천들이 통상 자기 나라말로 된 성경을 한 가지 이상 가지고 있고 성경 이외에도 성구사전이나 다양한 주석 그리고 갖가지 ‘크리스천’ 서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16세기와 17세기 초의 세계는 지금과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당시 영국의 일반인들에겐 성경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볼 수 있는 유일한 성경은 교회 제단에 묶여 있었습니다. 1536년에 틴데일(William Tyndale)은 평민의 언어인 영어로 성경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화형을 당했습니다. 제임스 왕이 영어 성경 번역을 위해 1603년에 54명의 번역자를 발탁했을 때 그는 곧 출간될 그 역본을 교회들이 사용해야 한다고 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성경이 사실상 교회를 위해서 번역된 것이 아니었다면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용도는 단 하나만 남게 됩니다. 그 용도는 다름 아닌 평민들에게 그 성경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손에 ‘보통 성경’을 든 ‘보통 사람’보다 더 위대한 세력이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2009-05-11 11:43:07 | 관리자
질문: 오늘날의 학자들이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보다 더 나은 번역 능력을 구비하지 않았을까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15>
대답: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의 학식과 인품은 현대 학자들이 따라갈 수 없습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닙니다.”라고 단호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로,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했던 사람들의 학식은 글자 그대로 오늘날의 학자들이 능가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잘 설명해 주는 유용한 책 두 권이 있습니다. 이 주제에 관해 진지하게 연구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들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마라나타 출판사의 맥클루어(Alexander McClure)가 쓴 「부활한 번역자들」(Translators Revived)와 베이커 북하우스(Baker Book House)의 페인(Gustavus Paine)이 쓴 「킹제임스 역본 배후에 있는 사람들」(The Men Behind the King James Version) 등이 그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번역 위원들은 전무후무한 능력을 갖춘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지적 능력에 대한 약간의 소개가 바로 앞 질문의 답변에 있습니다.
두 번째로, 오늘날의 학자들이 흠정역 성경의 학자들과 동등하다거나 그들을 능가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모순이며 어리석은 일입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세상이 타락한다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열역학 제2 법칙에 의해 도덕성도 1611년 이래로 계속 타락했습니다. 심지어 사람이 숨 쉬는 대기마저도 악화되고 있는데 교육만큼은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고 믿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육을 숭배하는 자들이나 그런 동화 혹은 신화를 믿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체제와 함께 교육도 타락해 왔으며 따라서 지금 이 시간에 400년 전의 걸출한 학자들에 필적할 만한 학자들을 배출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2009-05-11 11:41:38 | 관리자
전치사 of의 용례(Usage of preposition ‘of’)
전치사 of는 다음과 같이 여러 용도로 사용된다.
I. 소유 - 성도들의 인내(patience of the saints, 계14:12); 믿음의 방패(shield of faith, 엡6:16); 성령의 검(sword of the Spirit, 엡6:17).
II. 기원 - 믿음의 의(righteousness of the faith, 롬4:11); 물들의 위험(perils of waters, 고후11:26); 성령의 열매(fruit of the Spirit, 갈5:22).
III. 동격 - 할례의 표적(sign of circumcision, 롬4:11); 장막 집(house of tabernacle, 고후5:1); 주의 이름(name of the Lord, 롬10:13).
IV. 재료 - 고펠나무로 만든 방주(ark of gopher wood, 창6:14); 쇠막대기(철장)(rod of iron, 시2:9); 금머리, 금으로 된 머리(head of gold, 단2:38).
V. 목적격 :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fear of the LORD, 잠1:7); 영을 괴롭게 하는 것(vexation of spirit, 전1:14); 돈을 사랑하는 것(love of money, 딤전6:10).
이처럼 of의 용례가 다양하므로 of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강조점이 조금 변하게 되며 신학적인 문제들도 해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갈2:16을 보면 ‘works of the law’와 ‘faith of Jesus Christ’가 서로 대비되며 나온다. 이 경우 ‘율법의 행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번역한다. 우리말에서는 ‘그리스도의 믿음’이 혼동을 가져올 소지가 있지만 여기의 of는 기원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면 된다. 즉 율법에서 나오는 행위와 믿음의 창시자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믿음(히12:2)을 대비해서 이해하면 된다. 혹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믿음’으로 보아도 된다. 그러나 이것을 그리스도 자체의 믿음으로 보면 문제가 생길 요소가 크다.
목적격의 of 역시 많은 혼동을 가져올 수 있다. 예를 들어 창2:9의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을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라 하면 초등 번역이 된다. 이런 경우의 of는 목적격으로 쓰여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해야 맞는다. 즉 fear, love, know, vex 등과 같이 목적어를 필요로 하는 타동사의 명사형이 of와 함께 쓰일 때는 많은 경우 목적격으로 해석해야 한다.
계3:14의 ‘하나님의 창조를 시작한 자’(beginning of the creation of God)의 경우 여호와의 증인들은 of를 소유격으로 보아 예수님이 ‘창조의 시작’ 즉 ‘피조물 중에서 처음 지어진 존재’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의 begin 역시 타동사이므로 ‘하나님의 창조를 시작한 분’으로 보면 예수님이 창조주가 된다. 사실 성경의 전체 구조를 보면 후자가 타당하다(요1:1-3). 골1:15에도 예수님을 가리켜 ‘모든 창조물의 처음 난 자’(firstborn of every creature)라 하므로 여호와의 증인들이 여기의 of 역시 소유격으로 해석하려 하지만 bear도 타동사이므로 ‘모든 창조물을 처음 나게 하신 분’으로 볼 수 있으며 이 경우 예수님은 창조주가 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바로 다음 절에서 15절에 나오는 of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잘 보여 준다. 즉 그는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함으로써 후자의 용례가 맞음을 확증한다.
끝으로 느헤미야 8장 10절에 보면 '주의 기쁨이 너희의 힘이니라'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영어로는 'The joy of the LORD is your strength.'이다. 이것은 무너진 성벽이 재건된고 율법을 낭독할 때에 바빌론에서 귀환한 백성이 너무 기뻐서 울므로 느헤미야가 울지 말고 기뻐하라고 백성에게 권면하면서 준 말씀이다. 영어로는 '주의 기쁨'으로 볼 수 있으므로 이렇게 번역해도 된다. 이런 주장에는 합당한 근거가 있으며 결코 틀린 것이 아니다. 이 경우 of를 소유격으로 보아서 '주님의 기쁨'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of를 기원으로 보면 '주님에게서 오는 기쁨'으로 볼 수도 있다. '주의 기쁨'으로 보는 사람들은 대개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의 성령의 열매에 나오는 기쁨(희락)이 바로 이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여기에도 일리가 있다.
한편 주님을 기뻐하는 것은 of를 목적격으로 본 것이다. "너희는 슬퍼하지 말라. 주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다."라고 번역한 것이다. 주석들도 다양하며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다. 주님께서 히브리말과 영어에서 이렇게 다양한 뜻을 갖도록 of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 역시 오역의 문제가 아니라 이역의 문제임을 인정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여러 뜻을 알려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2009-05-11 11:39:48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