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인가, 음부인가?
– 지옥의 실체를 숨기려는 번역의 덫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지옥이라는 단어에 점점 둔감해지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지옥의 실체는 너무나도 분명하지만, 번역의 잘못은 이 중요한 진리를 가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특히 한국의 대표적인 현대 역본인 개역성경은 ‘지옥’을 ‘음부’나 ‘스올’로 대체하면서 독자들의 이해를 어렵게 만들었고, 그 결과 지옥 교리에 심각한 왜곡이 생겨났다.
1. 예수님은 ‘지옥’을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표적인 구절을 보자:
흠정역 (막 9:45):
“지옥에, 결코 꺼지지 않을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 네게 더 나으니…”
흠정역 (막 9:44, 46, 48):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아니하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이처럼 지옥은 불이 꺼지지 않고, 벌레도 죽지 않는, 영원한 고통의 장소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동일한 구절을 세 번이나 반복하시며 그 심각성을 경고하셨다. 그러나 개역성경은 막 9:44, 46을 아예 생략해버렸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부분을 번역자가 스스로 판단해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2. 개역성경은 왜 ‘지옥’을 숨겼는가?
성경에 ‘지옥’(hell)이라는 단어는 총 54회 등장한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구약에 등장하는 31회의 ‘지옥’ → 모두 ‘스올’로 번역
신약의 23회 중 13회만 ‘지옥’으로 번역, 나머지는 ‘음부’로 대체
결과적으로, ‘지옥’이라는 명확한 단어는 대부분 제거되었고, 대신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음부’나 ‘스올’이라는 애매한 단어가 채워졌다. 이는 번역자들의 샤머니즘적 세계관과 종교 혼합주의의 흔적이며, 불교 개념인 ‘저승’, ‘구천’, ‘유명’ 같은 개념과도 쉽게 연결된다.
예를 들면:
개역 (잠 15:11): “음부와 유명도 여호와 앞에 드러나거든…”
흠정역: “지옥과 멸망이 주 앞에 있거든…”
개역 (잠 27:20):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흠정역: “지옥과 멸망이 결코 가득 차지 아니하는 것같이…”
이처럼 ‘지옥’과 ‘멸망’이라는 강력하고 분명한 개념을 ‘음부’와 ‘유명’이라는 이교적 이미지로 바꿔 버린 것이다.
3. 예수님도 지옥에 가셨다?
믿기 어렵겠지만,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기록한다.
사도행전 2:31 (흠정역):
“그의 혼이 지옥에 남겨지지 아니하였고…”
그러나 개역성경은 ‘지옥’을 ‘음부’로 번역하여, 이 중요한 사실을 흐려 놓았다.
개역: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예수님께서 지옥에 가셨다는 사실은 사도신경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He descended into hell.
“그는 지옥에 내려가셨으며…”
하지만 한국어 사도신경에는 이 문장이 빠져 있다. 번역자들이 이 구절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제거했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는 주문처럼 신조를 외우지 않지만, 지옥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 문장의 중요성은 무시할 수 없다.
4. 예수님의 죽음 이후, 죽은 자의 행방은?
예수님 부활 이전에는 죽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품’(낙원)과 지옥으로 나뉘어 갔다(눅 16:19–31). 예수님의 부활 이후, 낙원은 천국으로 옮겨졌고, 지금은 죽는 즉시 천국 혹은 지옥으로 간다(엡 4:8–10; 고후 5:8; 히 11:40).
따라서 ‘스올’, ‘음부’, 혹은 ‘유명’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며, 지옥과 천국이라는 두 장소만이 남아 있다.
5. 지옥은 어디에 있는가?
성경은 지옥이 ‘땅의 중심부’에 있다고 말한다.
마태복음 12:40 (흠정역):
“사람의 아들도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으리라.”
행 2:31 (흠정역):
“그의 혼이 지옥에 남겨지지 아니하였고…”
‘지옥(hell)’이라는 영어 단어도 ‘감추다’, ‘덮다’는 의미를 가진 앵글로색슨어에서 유래되었다. 즉, ‘지하에 감춰진 장소’라는 개념이 내포된 것이다. 이에 비해 한자 ‘지옥’(地獄)은 ‘땅의 감옥’, 성경적 의미를 정확히 반영한 놀라운 표현이다.
6. 최후의 심판 후, 영원한 형벌의 장소는?
성경은 지옥은 최종적인 장소가 아니며, 궁극적으로 ‘불 호수(lake of fire)’로 던져질 것이라고 말한다.
계시록 20:14:
“사망과 지옥이 불 호수에 던져졌더라.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
이 불 호수가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들이 영원히 고통받게 될 장소다. 그 위치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지옥보다 더 무서운 곳임은 분명하다.
결론: 지옥은 실재하며, 그것을 흐리는 번역은 심각한 문제다
지옥은 영원한 불의 형벌의 장소다.
예수님은 지옥에 대해 반복하여 말씀하셨다.
개역성경은 지옥을 ‘음부’, ‘스올’ 등으로 바꾸어 그 실체를 가렸다.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만이 정확히 ‘지옥(hell)’이라는 표현을 유지하고 있다.
지옥은 상징도 아니고 비유도 아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영원히 떨어질 실제 장소다. 그러므로 이 진리를 왜곡하거나 흐리는 번역은 성도들의 영혼에 치명적인 피해를 준다.
2025-05-06 15:16:43 | 관리자
마귀인가, 귀신인가?
– 성경은 ‘귀신’을 말하는가, 아니면 ‘마귀’를 말하는가?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은 ‘귀신’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할아버지 귀신, 처녀 귀신, 혹은 억울하게 죽어 이 땅을 떠도는 존재들 말이다. 그러나 과연 성경이 말하는 '귀신'은 이러한 존재들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개념인가?
1. 개역성경의 혼란스러운 번역 – 귀신은 누구인가? 고린도전서 10장 20절을 보자
개역성경: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이 구절만 보면, 조상귀신에게 제사하는 한국적 전통이 성경적으로도 정당화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 조상신을 불러 기일에 제사를 지내는 전통과 이 표현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하지만 정말 성경이 그런 귀신의 존재를 인정한단 말인가?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
“아니라. 오히려 나는 이것을 말하노라. 즉 이방인들은 자기들이 희생물로 드리는 것들을 하나님께 희생물로 드리지 아니하고 마귀들에게 드리느니라. 나는 너희가 마귀들과 교제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라.”
핵심은 ‘귀신’이 아니라 ‘마귀(devils)’다. 성경에서 말하는 제사는 단순한 헌금이나 예배가 아니라, 구약적 개념의 희생물(sacrifice)을 뜻한다. 조상신을 섬기기 위해 드리는 제사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구약의 번제, 소제, 화목제 등은 단순한 제사가 아니라 철저히 희생을 동반한 헌물(offering)이었다.
2. 죽은 자의 혼, 즉 귀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죽은 자는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간다.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나 ‘이승에 머무는 원혼’은 성경적 개념이 아니다.
누가복음 16장: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죽은 자의 행방이 뚜렷이 천국과 지옥으로 나뉨을 보여준다.
누가복음 9장: 변화산 위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나타났을 때, 이들이 결코 구천에 떠도는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성경에는 ‘죽은 사람의 혼’이 이 땅을 떠돈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
3. ‘귀신(demon)’과 ‘마귀(devil)’의 명확한 차이
웹스터 사전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귀신(demon): 고대 이교도들이 말하던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간 존재. 선한 귀신과 악한 귀신이 있으며, 죽은 자의 혼이 귀신이 된다고 믿음.
마귀(devil): 기독교에서 말하는 타락한 천사들. 하나님께 대적하여 하늘에서 쫓겨난 존재이며, 그 우두머리는 ‘the devil’, 즉 사탄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지혜를 인도하는 귀신(demon)’이 있다고 말했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귀신이 반신반인이라 믿었다. 이런 이방의 개념이 오늘날에도 ‘귀신’이라는 단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4. 원어 논쟁의 오류 –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문제
일부 원어 옹호자들은 "신약에서 ‘다이모니온’(δαιμόνιον)은 ‘demon’이고, ‘디아볼로스’(διάβολος)는 ‘devil’이므로 둘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같은 논리를 구약에 적용하면 모순이 생긴다.
레위기 17:7, 신명기 32:17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shed’(7700)과 ‘sair’(8163)는 NASB 등의 현대 역본들에서 모두 그냥 ‘demon’(귀신)으로 번역되었다.
즉, 구약과 신약,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논리를 바꾸는 것은 정직한 성경 해석이 아니다. 원어는 해석의 도구이지 권위가 아니다.
5. ‘사신에게 제사’? – 이해하기 어려운 개역성경
개역성경 (시편 106:37):
“저희가 그 자녀로 사신에게 제사하였도다”
‘사신’이 누구인가? 이 단어로는 현대 독자들이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
흠정역:
“참으로 그들이 자기 아들딸들을 마귀들에게 희생물로 바쳤으며”
어떤 번역이 더 명확하고 성경적인가? 개역성경은 시대를 지나며 고어와 불명확한 표현들로 인해 오히려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심지어 같은 히브리어 단어(shed)를 시편에서는 ‘사신’으로, 신명기에서는 ‘마귀’로 번역한 것도 일관성 결여를 보여준다.
6. 복수 개념의 중요성 – '들'로 번역하라
개역 (신명기 32: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흠정역:
“그들이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지 아니하고 마귀들에게 드렸으니…”
복수형을 단수로 번역하면 오해가 생긴다. 성경은 ‘많은 마귀들(devils)’이 있다고 말한다. 유일한 사탄(the devil) 외에도 수많은 타락한 영들이 존재한다.
7. 정리하며 – 귀신은 없다, 마귀는 있다
성경은 죽은 자의 혼이 이 세상을 떠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귀신(demon)이 아니라 마귀(devil) 혹은 타락한 영들(evil spirits)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개역성경은 불명확한 번역과 시대착오적 표현으로 인해 오히려 이방 사상과 뒤섞인 해석을 낳고 있다.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은 단어 하나까지 정확하며, 성경의 교리를 바르게 전달하는 유일한 기준이 된다.
2025-05-06 15:09:20 | 관리자
성경적 삼위일체: “세 인격, 하나이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
삼위일체(Trinity)는 성경이 계시한 하나님의 본질이며, 구원의 복음을 바로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교리다. 한국 교회에서는 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무지로 인해 양태론(모달리즘)과 같은 이단 사상이 자주 등장하였고, 심지어 복음적인 교단 내부에서도 잘못된 비유나 설명이 통용되곤 한다.
양태론의 위험성
양태론이란 하나님께서 시대나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나타나신다고 가르치는 이단 교리다.
예를 들어:
“나는 아이에게는 아버지고, 아내에게는 남편이며, 교회에선 목사다”
“물은 얼음, 물, 수증기 세 가지 모습이 있다”
이런 설명은 표면상 이해를 돕는 듯 보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삼위일체가 아닌 ‘하나님 한 분이 세 역할을 번갈아 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명백히 양태론이다.
성경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 동시에 구별되는 인격체로 존재하시며, 서로 교제하시는 세 위격,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증거한다.
성경이 계시하는 삼위일체의 핵심 진리
삼위일체 교리는 다음 세 가지 명제를 모두 포함한다:
1.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한 주(one LORD)시니…”
(신명기 6:4, 킹제임스 흠정역)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라 하나이시다.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하나(one)'는 본질적 단일성을 말한다. 하나님은 본질상 하나이시며, 동일한 신성을 아버지, 아들, 성령님의 세 인격체가 공유하신다.
2. 성부, 성자, 성령님은 각각 하나님이시다
성부: 고린도전서 8:6
성자: 요한복음 1:1, 요한일서 5:20
성령님: 사도행전 5:3–4
3. 이 세 위격은 서로 구별된다
예: 예수님이 침례받으실 때(마 3:16–17) — 아버지는 하늘에서 말씀하시고, 성령은 비둘기처럼 임하시며, 예수님은 물속에서 올라오셨다.
자연계에 반영된 삼위일체의 그림자
하나님께서는 창조물 속에 삼위일체의 흔적을 두셨다:
1. 시간
과거, 현재, 미래: 서로 구별되지만 함께 시간이라는 하나의 본질을 이룸.
어느 하나만 있어도 시간은 온전하지 않음.
2. 공간
길이(x), 너비(y), 높이(z): 이 셋은 모두 물체의 실재성을 구성함.
이 중 하나라도 없으면 존재할 수 없음.
이 예들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본질—구별되면서도 결코 나뉘지 않는 단일성—을 제한적으로 반영한다.
바른 삼위일체 신앙을 위하여
삼위일체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이지만, 믿음으로 받아야 할 계시의 진리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삼위일체를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모든 사상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또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사 우리가 진실하신 분을 알게 하셨음을 우리가 알고 또 우리가 진실하신 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아노니 이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시니라.”
— 요한일서 5:20
정리: 성경적 삼위일체 교리
하나님은 하나이시다 (신명기 6:4)
→ 이는 수적 개념이 아니라 본질의 단일성(one in essence)을 의미한다.
세 위격이 존재하신다
→ 아버지, 아들, 성령은 서로 구별되는 인격이시며, 각각 참 하나님이시다.
세 분이 함께 한 하나님을 이루신다
→ 세 인격은 동시에 존재하며, 동일한 신성을 공유하시며, 분리되지 않고, 혼동되지 않으며, 하나의 하나님(one God)을 이루신다.
양태론은 이 진리를 부정하는 이단이다
→ 하나님을 한 인격의 세 역할로만 보는 주장은 성경적 계시를 부정한다.
2025-05-06 11:44:44 | 관리자
신령과 진정이 아니라 영과 진리입니다
― 요한복음 4장 24절과 바른 예배의 기준
우리는 종종 예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요한복음 4장 24절을 인용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하지만 과연 이 표현이 성경 원문에 충실한 번역일까요?
그리고 이 표현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방향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요?
답은 아니오입니다.
사실 이 구절은 정확히 번역하면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가 맞습니다.
개역성경과 킹제임스 성경의 차이
과거 개역성경은 요한복음 4:24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하지만 개정판(개역개정)에서는 다음과 같이 수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그리고 킹제임스 성경(KJV)은 처음부터 이렇게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God is a Spirit: and they that worship him must worship him in spirit and in truth.”
왜 “신령과 진정”은 잘못된 번역인가?
원문 헬라어는 “en pneumati kai aletheiai(ἐν πνεύματι καὶ ἀληθείᾳ)” 입니다.
이것은 직역하면 “영(spirit)과 진리(truth) 안에서”입니다.
그러나 개역성경의 “신령과 진정”은 그 의미를 크게 왜곡시켰습니다.
“신령(神靈)”은 ‘영적인’이라는 뜻보다는 신비롭고 신기한 느낌을 주며,
마치 영묘하고 환상적인 체험을 의미하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습니다.
“진정(眞情)”은 원래의 ‘진리(truth)’가 아닌 감정적 진심이나 정성 정도로 느껴집니다.
이렇게 되면 예배는 ‘신기한 느낌이 있는 예배’ 혹은 ‘감정이 진실한 예배’로 축소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참된 예배의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잘못된 예배의 위험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예배를 감정적 체험 중심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눈물, 전율, 방언, 쓰러짐, 환상 등 외적인 반응이 곧 “신령한 예배”라고 오해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르쳐 주신 예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배에 대해 말씀하시며 장소, 의식, 느낌이 아닌 본질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들이 반드시 영과 진리로 그분께 경배할지니라, 하시니라.” (요 4:24, KJV)
즉, 예배는 거듭난 자의 영으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따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바른 이유
킹제임스 성경은 이 구절을 원문 그대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in spirit and in truth”는 외적인 느낌이나 태도가 아니라,
내적인 새 영과 진리의 말씀에 입각한 예배를 강조합니다.
또한 영어 성경들 중에서도 KJV를 포함한 모든 전통 역본들은 예외 없이 “spirit and truth”를 사용합니다.
대문자 Spirit이 아닌 소문자 spirit으로 기록한 이유는 이것이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거듭난 후에 하나님과 교제하는 그 영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예배는 감정이 아니라 진리 위에 서야 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진정성 있게’ 예배드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진정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도,
그 예배가 진리에서 벗어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십니다.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감정, 분위기, 감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정확한 예배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결론내릴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옳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예배는 오직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며,
그것을 가장 정확히 가르쳐주는 성경은 바로 KJV이다.”
2025-05-05 16:21:10 | 관리자
마태복음 1장 6절: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는 왜 중요한가?
성경은 단어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의도와 진리를 담고 있는 거룩한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번역에서 단어 하나의 차이가 교리적으로도 큰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 대표적인 예로 마태복음 1장 6절을 살펴보며, 왜 킹제임스 성경(KJV)이 옳은 성경인지, 그리고 개역성경이나 NIV와 같은 현대역본들이 왜 문제가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
먼저 킹제임스 성경(KJV)의 마태복음 1장 6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And Jesse begat David the king; and David the king begat Solomon of her that had been the wife of Urias.”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새는 다윗 왕을 낳고, 다윗 왕은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이 구절의 핵심은 바로 “her that had been the wife of Urias”라는 표현입니다. 단순히 “우리야의 아내”가 아니라, “한때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라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다윗의 죄와 하나님의 용서를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바세바와 간음을 저질렀고, 그 결과 남편인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명백한 죄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회개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셨으며, 그 관계를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여인은 이후 다윗의 정식 아내가 되었고, 그 관계 안에서 솔로몬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다윗의 합법적인 아들입니다.
KJV는 이 여인을 단지 “우리야의 아내”라고 하지 않고, “그 전에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라고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회복의 은혜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개역성경과 현대역본: “우리야의 아내”라고만 기록함
하지만 개역성경, NIV 등 현대역본들은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요?
개역성경: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NIV: “David was the father of Solomon, whose mother had been Uriah’s wife”
겉으로 보기엔 큰 차이가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야의 아내”라는 표현은 마치 지금도 그 여인이 우리야의 아내인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즉, 하나님의 눈에는 여전히 간음 관계가 계속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와 용서를 무시하고, 다윗의 죄가 끝나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다는 왜곡된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다윗은 분명히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회개를 받으시고, 그 여인과의 관계를 정식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야의 아내”가 아니라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가 맞는 표현입니다.
이런 번역은 솔로몬을 다윗의 불법적인 아들로 만들고 맙니다.
하나님의 시각을 올바로 반영한 성경은 KJV
이처럼 KJV는 하나님의 눈으로 본 사실과 구속의 역사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죄의 관계로 시작했지만, 회개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다윗의 정식 아내가 되었고, 그 아들 솔로몬을 통해 메시아의 계보가 이어지게 됩니다.
반면, 개역성경이나 현대역본들은 단어를 단순화하거나 의미를 흐려, 독자들로 하여금 성경 속의 회개와 용서, 구속의 흐름을 놓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결론: 단어 하나가 교리를 바꾼다
성경에서 단어 하나는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장 6절의 “her that had been the wife of Urias”는 단지 과거형 표현 하나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공의, 다윗의 회개, 하나님의 은혜, 구속의 역사가 다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온전히 보존하고 있습니다. 현대역본들이 놓치고 있는 진리의 핵심을, 우리는 KJV를 통해 다시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옳다. 하나님은 그 말씀을 지금도 보존하고 계신다.”
2025-05-05 14:50:10 | 관리자
마태복음 1장 25절 “firstborn”의 삭제는 왜곡이다
1. 서론: 성경 말씀 한 단어의 중요성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단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시며, 시대를 초월하여 보존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시편 12편 6~7절에 기록된 말씀대로,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약속의 성취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보존하고 있는 영어 성경이다.
특히 마태복음 1장 25절에서 “her firstborn son(그녀의 맏아들)”이라는 표현은 교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이 단어가 사라지면, 예수님의 형제들이 존재할 수 없게 되고, 결국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였다는 천주교의 비성경적인 교리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2. 본문 분석: KJV와 현대 역본의 차이
마태복음 1:25 (킹제임스 흠정역): “그녀가 그녀의 맏아들을 낳을 때까지 그녀를 알지 아니하다가 낳으매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KJV: “And knew her not till she had brought forth her firstborn son: and he called his name JESUS.”
개역개정: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나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개역개정, NIV, NRSV 등 현대역본들 다수는 이 구절에서 “firstborn”이라는 단어를 삭제하였다.
이 차이는 단순한 문체 차이가 아니다. 교리의 기초가 되는 단어를 없앤 심각한 훼손이다. “firstborn”이라는 단어는 예수님이 마리아의 첫 번째 아들임을 명백히 선언한다. 만약 예수님이 유일한 아들이었다면, 성령께서 굳이 ‘첫 번째 아들’이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3. 천주교 교리와 사본 왜곡의 의도
천주교는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Virgin Mary)였다고 주장한다. 이 교리는 예수님 이후에도 마리아가 요셉과 동침하지 않았고 자녀도 낳지 않았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는 예수님의 형제들과 자매들이 여럿 있었다고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마13:55-56, 막6:3).
“이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와 요세와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니냐? 그의 누이들은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그분으로 인해 걸려 넘어지니라.”(막6:3)
하지만 천주교는 이를 사촌 형제 또는 요셉의 전처의 자녀 등으로 억지 해석한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1:25의 firstborn이라는 단어가 남아있으면, 그들의 교리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주교에서 사용하던 바티칸 사본(B), 시내 사본(ℵ) 등 소수 사본에서는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생략하였다. 이로 인해 그 사본을 기반으로 만든 현대역본들도 이 단어를 제거하였다.
만약 예수님이 유일한 아들이었다면, 성경은 "her only son"이라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복음 2:7과 마태복음 1:25은 모두 예수님이 첫 번째 아들이라고 기록함으로써, 이후 자녀들도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다.
4. KJV는 하나님의 완전한 보존된 말씀
우리는 성경을 선택할 때 감정이나 전통, 편의성으로 선택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은 사람이 살기 위해 필요한 양식이다(마 4:4). KJV는 다수 사본(Textus Receptus, 공인본문)을 바탕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 번역된 유일무이한 영어 성경이다. KJV에는 “firstborn”이 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반영하고 있으며, 교리적으로도 왜곡이 없다.
현대 역본들은 오류 가득한 알렉산드리아 계열 소수 사본을 기반으로 하여, 중요한 단어들을 빼거나 바꾸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마태복음 1:25의 “firstborn”이다. 이 단어 하나의 삭제로 인해 마리아의 평생 동정녀 교리가 힘을 얻고, 일반 성도들은 성경의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된다.
5. 결론: 한 단어의 삭제가 진리를 무너뜨린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어 하나까지 중요하다. 마태복음 1장 25절에서 “firstborn”이라는 단어가 빠지면, 예수님이 첫째 아들이었음을 부정하게 되고, 이는 마리아가 다른 자녀가 없었다는 천주교의 교리를 옹호하게 만든다. 이는 명백한 교리적 왜곡이며, 사본의 조작을 통해 진리를 훼손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을 붙들어야 한다. 그것이 유일하게 보존된 하나님의 영어 말씀이며, 모든 교리와 구절이 온전하게 들어 있는 성경이다. 성도들이 KJV를 버릴 때, 진리를 잃어버리고 사람의 전통에 빠지게 된다. “firstborn”은 단어 하나지만, 진리의 기둥을 세우는 핵심이다.
2025-05-05 14:35:41 | 관리자
열왕기하 6장 33절의 그는 누구인가요?
성경을 읽다 보면 대명사가 많이 나오고 어떤 경우에는 그 대명사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쉽게 알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왕하6:33의 그가 이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아직 그들과 이야기할 때에, 보라, 그 사자가 엘리사에게 내려왔는데 그가 이르기를, 보라, 이 해악이 주에게서 나왔으니 어찌 내가 주를 더 기다려야 하겠느냐? 하였더라.
KJV: And while he yet talked with them, behold, the messenger came down unto him: and he said, Behold, this evil is of the LORD; what should I wait for the LORD any longer?
대다수 주석들은 여기의 he가 왕이 보낸 사자나 왕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존 길(John Gill)은 다음과 같이 주석했습니다.
he said; either the messenger in the king's name, or rather the king, who was at his heels, and came to the door before the messenger was let in, who was detained; and therefore it is most probable the king went in first; for that was the intention of Elisha in holding the messenger, not to save his own life, but that the king, who was following, might hear what he had to say; and whom he advised to wait for the Lord, and his appearance, for deliverance: in answer to which he said:
길 주석
여기의 그는 왕의 이름으로 온 사자이거나 혹은 그의 뒤를 따라와서 먼저 들어간 왕일 가능성이 높다. 앞 구절을 보면 그 사자는 문에서 붙잡혀 있었다. 따라서 왕이 먼저 들어갔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엘리사가 사자를 붙잡은 이유는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뒤따라오는 왕이 그의 말을 듣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왕에게 주님을 기다리라고 조언했고 그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왕은 “이 해악이 주에게서 나왔으니 어찌 내가 주를 더 기다려야 하겠느냐?”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32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32 한편 엘리사는 자기 집에 앉아 있었고 장로들도 그와 함께 앉아 있었는데 왕이 자기 앞에 선 자들 중에서 한 사람을 보내니 그 사자가 엘리사에게 오기 전에 엘리사가 장로들에게 이르되, 살인자의 이 아들이 내 머리를 취하려고 사람을 보낸 것을 너희가 보느냐? 보라, 사자가 오거든 문을 닫고 그를 문에서 굳게 잡아 두라. 그의 주인의 발소리가 그의 뒤에서 나지 아니하느냐? 하고
33 아직 그들과 이야기할 때에, 보라, 그 사자가 엘리사에게 내려왔는데 그가 이르기를, 보라, 이 해악이 주에게서 나왔으니 어찌 내가 주를 더 기다려야 하겠느냐? 하였더라.
여기서 사악한 왕은 여호람입니다. 그는 위기를 맞이하자 31절에서 엘리사를 위협했지만, 곧 회개하고 사자의 뒤를 따라가서 33절에서와 같이 말하며 회개한 것으로 보입니다.
31절: 그때에 그가 이르되, 이날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그에게 붙어 있으면 하나님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그 뒤에 7장에서는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 여호람을 돕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의 ‘그’를 사자로 보든지 왕으로 보든지, 앞뒤 문맥을 살펴 성도 여러분께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샬롬
2025-05-02 14:00:18 | 관리자
개역성경 사사기 1-2장의 명백한 오역: 안 하다와 못하다
■ 서론: 본문의 문제의식
사사기 1장과 2장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은 사건을 다룬다. 개역 성경과 흠정역 성경을 비교하면, ‘쫓아내지 못하였다’(무능)와 ‘쫓아내지 아니하였다’(불순종)라는 번역의 차이가 존재한다. 겉보기에는 유사해 보이지만, 이 차이는 하나님의 책망 이유와 이스라엘의 책임 수준을 결정짓는 중대한 의미 차이를 담고 있다.
■ 본론
1. 번역의 차이: “못하였다” vs “아니하였다”
개역 성경은 대부분의 구절에서 “쫓아내지 못하였다”라고 번역하며, 이스라엘의 무능을 강조한다(삿 1:21, 27, 30, 32 등).
반면에 흠정역 성경은 일관되게 “쫓아내지 아니하였다”라고 번역하며,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드러낸다.
개역 성경도 사사기 1:28에서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다”라고 하여 의지적 불순종을 시인하고 있다.
2. 역사적 맥락과 성경적 분석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족속을 철저히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으며(삿 2:2), 공물이나 노역을 조건으로 남겨 두라고 하신 적이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을 완전히 쫓아내는 대신, 공물을 받으며 함께 거주했고(삿 1:28, 30, 33), 이는 명백한 불순종이다.
사사기 2장 2절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내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다”라고 명확히 지적하셨다. 이것은 단순한 무능이 아닌, 의지적 거부였다.
3. 전쟁의 논리로 본 해석
만약 이스라엘이 진정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려 했지만 실패했다면, 역공을 받아 쫓겨났어야 한다. 이는 삿1:34에서 단 지파가 아모리 족속에게 쫓겨난 사례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과 동맹을 맺고, 공존했으며, 심지어 통혼과 우상 숭배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쫓아내지 못했다”라는 표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상황이며, 불순종이라는 설명만이 전체 맥락을 일관되게 해석할 수 있게 한다.
4. 신학적 함의: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
하나님은 단순한 무능을 책망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무능할 때 도우시는 분이다.
그러나 명백한 명령 앞에서 의지적으로 순종하지 않은 행위는 심판의 대상이다.
이스라엘이 '쫓아내지 못했다'면 하나님의 분노는 부당한 책망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쫓아내지 아니한 불순종이었기에 하나님의 정의로운 책망이 정당하게 성립된다.
■ 결론
‘쫓아내지 못한 것’은 무능이지만, ‘쫓아내지 아니한 것’은 불순종이다. 하나님은 무능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지만, 불순종한 자는 엄히 책망하신다. 사사기 1장과 2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책망하신 이유는 그들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사기 본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기록한 것이며,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합리화 없이,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2025-05-02 10:36:19 | 관리자
일천 번제 미신을 타파해야 한다
■ 서론: 일천 번제의 유행과 문제 제기
한국 교회 일부에서는 ‘일천 번제’라는 이름의 헌금이나 종교 의식이 오랫동안 시행되어 왔다. 이는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린 뒤 지혜를 얻었다는 구절(왕상 3:4-12)을 근거로 하여, 신자들이 천 번의 헌금이나 예배, 기도 등을 드리면 하나님이 감동하여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 행위가 성경적 근거가 있는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 본론
1. ‘일천 번제’의 성경적 의미는 무엇인가?
‘일천 번제’란 ‘천 마리의 번제 희생물을 한 번에 드린 것’이지, ‘천 번의 제사’를 의미하지 않는다.
열왕기상 3:4의 원문과 영어 KJV(“a thousand burnt offerings”)는 ‘천 번의 제사’가 아닌 ‘한 번에 천 마리의 제물’을 뜻함.
역대기하 1:6 역시 같은 표현을 사용하며, 반복 횟수가 아닌 제물의 수량임을 분명히 함.
따라서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말하는 ‘1,000번 헌금 또는 예배’를 성경에 적용하는 것은 왜곡된 해석이다.
2. 솔로몬은 ‘일천 번제’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일천 번제가 하나님의 감동을 불러와 솔로몬이 지혜를 얻었다고 주장하나,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바친 희생 헌물에 감동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다윗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백성을 잘 다스릴 지혜를 구한 기도에 기뻐하셨다(왕상 3:9-10).
성경은 솔로몬이 ‘최상의 것’을 드렸다고 말씀하지 않으며, 솔로몬의 재력과 비교할 때 천 마리 제물은 적은 규모였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찾아오신 이유는 다윗에게 하신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지, 제물의 감동 때문이 아니다.
3. 신약 성경은 구약의 번제를 폐지했다
히브리서 10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린 희생으로 구약의 제사 제도를 폐지하셨음을 강조한다.
번제 헌물이나 외적 행위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수단이 아니다.
따라서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구약의 제사 의식을 반복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는 시도는 신학적으로 오류이다.
4. 기도 응답은 제물이나 헌금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른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고 말씀한다(요일 5:14, 롬 12:2).
응답받는 기도는 정성의 크기나 헌금의 횟수에 달린 것이 아니라, 기도의 내용과 동기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가에 달려 있다.
일천 번제는 하나님을 ‘거래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잘못된 신앙 태도를 조장한다.
5. 왜 일천 번제가 한국 교회에서 유행하는가?
경제적 유익: 교회 수입을 안정적으로 올릴 수 있는 수단이 되어 버림.
미신적 신앙 구조: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동양적 기복사상과 융합됨.
자기 의의 강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고 싶어 함.
기복 신앙의 영향: 헌금을 복받는 수단으로 왜곡하는 교리가 만연해 있음.
■ 결론: 성경적 기도와 예배로 돌아가야
‘일천 번제’는 성경적 근거가 없음에도, 교회 내에서 기복 신앙과 자기 의를 조장하며, 헌금을 거래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하나님은 인간의 헌금이나 외적 행위에 감동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에 응답하신다.
복은 인간의 정성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부터 나온다.
모든 신자는 일천 번제와 같은 인간 중심의 의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신앙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 적용: 바른 신앙을 위한 제언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기도하라(롬 12:2).
외적 행위보다 마음의 순종을 우선하라(삼상 15:22).
복은 헌금의 양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다(약 1:17).
성경은 기도의 조건으로 정성이나 금액을 제시하지 않는다. 기도는 은혜의 왕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다(히 4:16).
2025-05-02 10:28:12 | 관리자
입다의 딸은 번제 헌물로 죽었는가?
1. 사사기에서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
사사기에는 도덕적, 영적 타락이 심했던 사사 시대의 혼란상이 여실히 드러난다. 우상 숭배, 첩을 둠, 동성애, 살인 등 극악한 일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입다가 자기 딸을 ‘번제로 드렸다’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개역 성경을 읽으며 입다의 서원을 본 크리스천들은, 입다의 경솔함과 무자비함만을 비판하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셨다는 사실 자체에 혼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킹제임스 성경(KJV)과 흠정역으로 비교해 보면,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입다의 딸은 번제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헌물’로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것이다.
2. 번역의 문제: 오해를 낳은 개역 성경
(1) 서원의 표현: ‘그는’ vs ‘그것을’
개역 성경 (삿 11:31): “나를 영접하는 그는...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KJV: “Whatsoever cometh forth... I will offer it up for a burnt offering.”
KJV와 흠정역은 모두 ‘whatsoever(무엇이든지)’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입다가 짐승이든 물건이든 하나님의 것으로 삼겠다는 의미이며, 사람이 나올 것이라 예상하지 않았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개역은 ‘그는’, ‘그를’이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입다가 애초에 사람을 번제로 바치려 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2) 제사냐, 헌물이냐?
흠정역과 KJV은 '번제 헌물'로 표현하지만, 개역은 단순히 ‘번제’라고 번역함으로써 짐승을 죽이고 불에 태우는 종교적 제사 의식을 강조한다. 하지만 원문의 의도는 ‘제물’보다는 ‘헌물’에 가깝다. 이는 하나님께 소유로 드리는 행위이지, 반드시 죽음을 수반하는 제사는 아니다.
(3) ‘처녀로 죽음’이라는 말은 원문에 없다
개역 성경: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KJV: “bewail my virginity”
개역 성경은 원문에 없는 ‘죽음’을 삽입해 독자들이 입다의 딸이 처녀로 죽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virginity는 결혼하지 않고 처녀로 살아가는 상태를 말하며, 딸은 결혼 없이 평생 주님께 헌신하게 됨을 슬퍼한 것이다.
3. 입다의 서원은 어떻게 이행되었는가?
입다는 전쟁에서 돌아온 후, 자신을 맞이한 딸을 보고 충격을 받지만 자신의 서원을 "되돌릴 수 없노라"라고 하며 지키겠다고 한다. 딸도 "아버지 입에서 나온 것대로 내게 행하소서"라고 순종한다.
(1) 하나님은 사람을 번제로 받으시는가?
레18:21, 신12:31, 렘7:31: 하나님은 인신 제사를 가증하게 여기시며 명하지도 않으셨다.
아브라함-이삭 사건도 시험이었으며, 실제로는 양이 제물로 바쳐짐.
(2) 번제 헌물로 드리는 다양한 방식
여리고 성 전체를 불태우며 바침 (수 6:24)
레위인들은 살아 있는 헌물로 바쳐져 하나님을 섬김 (민 8:11)
사람은 죽여서 바칠 수 없으므로 입다의 딸 역시 살아 있는 헌물로 하나님께 드려졌고, 주의 집에서 헌신된 삶을 살았을 것이다.
4. 입다의 딸이 된 살아 있는 헌물
딸은 두 달간 친구들과 산에 올라가 자신의 처녀 생활(virginity)을 애곡하며 결혼하지 않고 살아야 할 삶에 대한 아쉬움을 나눈다. 이후 돌아와 아버지의 서원을 따라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하나님의 소유로 구별되어 살게 된다. 이는 민수기 30장에 따라 유효한 서원이며, 그에 따라 지켜졌다.
5. 신약 시대의 적용: 우리도 살아 있는 헌물로
롬12:1: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히13:15: 찬양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자.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자들이 자신을 온전히 헌신된 삶으로 드리길 원하신다. 입다의 딸처럼, 죽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삶 전체를 통해 주님을 섬기는 것이 참된 헌물이다.
6. 결론: 오해에서 바른 해석으로
입다와 그의 딸, 그리고 하나님은 잘못 해석되어 왔다. 번역의 오류와 제사 개념의 오해로 인해 입다의 딸은 불태워진 희생자로 여겨졌으나, 킹제임스 성경에 비추어 보면 그녀는 살아 있는 헌물로 하나님께 드려졌고, 평생을 주님께 헌신한 믿음의 여인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우리 자신도 날마다 거룩하게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함을 배운다.
2025-05-02 10:17:15 | 관리자
<개역, 개역개정 등 어떻게 이런 번역이 가능할까?> 누가복음 10장 42절(눅10:42)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개역성경과 함께하며 살았다.
개역성경을 읽고 그것으로 선포되는 설교를 듣고 구원을 받고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25년의 삶을 보냈다.
그 뒤 미국에서 박사 공부를 하며 성경이 한 종류가 아니라 두 종류이고, 이런 일이 발생한 원인은 성경 번역에 사용되는 본문이 한 종류가 아니라 두 종류이기 때문임을 알았다.
하나는 개역 성경, NIV 등 현대 역본 성경들의 반역 대본인 천주교 소수 본문이다.
다른 하나는 루터 성경, 킹제임스 성경, 제네바 성경 등 카톨릭교회에 대항하면 종교개혁을 이룬 종교개혁자들이 지지하고 사용한 프로테스탄트 다수 본문이다.
요즘 존 맥아더 목사님의 <예배>(아가페 출판사)라는 책을 다시 세세히 읽고 있다.
어젯밤에는 너무나 놀라운 것을 발견해서 잠시 적는다.
맥아더 목사님은 2장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에서 예배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함을 설명한다. 그러면서 누가복음 10장 41-42절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다에 대한 이야기를 예로 든다.
그런데 번역된 글과 거기에 인용된 개정개역 성경이 문맥상 너무 맞지 않아 심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 부분의 글은 다음과 같다.
손님을 대접하느라 여러 가지 일들로 마음이 분주하고 힘들어하는 마르다에게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10:41-42)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많은 일들로 마음이 분주하고 힘들어하는 마르다에게 주님께서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라고 하셨을까?
이 성경 구절의 문맥은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오직 그것 하나만이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몇 가지만 하라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처음에 내 눈을 의심하다가 성경 앱을 열고 보았더니 인용된 개역 개정 성경 구절이 맞았다.
맥아더 목사님은 KJV가 아니라 NSAB를 사용하므로 NASB로 10장 42절을 보았더니 다음과 같았다.
“but only one thing is necessary,”
이것을 번역하면 “오직 한 가지가 필요하니라.”가 된다.
이렇게 되어야 맥아더 목사님이 말하고자 하는 바 즉 말씀을 듣고 경청하는 것이 예배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고 그런 예배야 말로 오직 단 하나의 예배라는 포인트가 살아난다.
사실 약 40년 동안 킹제임스 성경을 읽고 번역하기도 한 나로서는 이것이 너무나 당연한 의미이고 해석이기에 내 눈을 의심하였던 것이다.
킹제임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에 대해 염려하고 근심하나 한 가지 일이 필요하니라. 마리아는 그 좋은 부분을 택하였으니 그것을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앞에 많은 일(many things)이 나오므로 그 뒤에는 대조적으로 한 가지 일(One thing)이 나와야만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런 식으로 미국 저자의 책이 번역되고 개역 개정 성경을 인용 구절로 적어 놓으면 저자의 의도, 특별히 예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되고 만다.
하도 이상해서 NIV를 보았더니 KJV, NASB와 비슷하였다.
“but only one thing is needed.”
그런데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이 구절에는 다음과 같은 각주가 붙어 있었다.
“몇몇 사본들은 몇 가지(few things)가 필요하든지 혹은 한 가지가 필요하다로 되어 있음”
즉 개역성경은 이런 천주교 소수 사본들에 근거하여 42절을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라고 번역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올바른 성경 강해를 가로막고 있다.
이런 데가 한두 군데이겠는가?
사실 장로 교인들이 청교도들의 책들을 좋아하고 그래서 17세기 청교도들의 글이 번역되어 책으로 나오곤 한다. 그 책들은 다 킹제임스 성경이 기초해서 말씀을 전개해 나가는데 개역성경으로 구절을 인용을 하고 개역 성경의 문맥으로 해석을 하다 보면 저자들의 글과 상충되는 부분이 심히 많다.
한 가지 사례를 보도록 하자.
행26:28 KJV, 그때에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설득하여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도다, 하매
개역개정: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KJV처럼 28절에서 ‘거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번역이 나와야 그 다음 구절인 29절의 ‘전적으로 나와 같은 사람’과 맞지 않겠는가?
행26:29, 바울이 이르되, 각하뿐만 아니라 이날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도 이렇게 결박된 것을 빼고는 거의 나와 같이 되고 전적으로 나와 같이 되기를 내가 하나님께 간청하나이다, 하니라.
즉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거의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이 되면 안 되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의 서고 쓰러짐이, 영원한 운명이 하나님의 귀중한 말씀인 성경에 달려 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이들 그리고 손자 손녀들의 영원한 삶을 위해 바른 성경을 택하기 바란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시12:6-7).
2025-02-04 14:17:37 | 관리자
어떤 분이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 왔습니다.
"시편 104편 5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Who laid the foundations of the earth, that it should not be removed for ever.
흠정역: 땅의 기초들을 놓으사 그것이 영원히 이동되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be removed라고 쓰였는데 여기의 remove는 ‘제거하다 치우다’의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땅이 영원히 제거되지 않게 하셨나이다’로 하면 더 이해가 잘 되는데요."
답변:
어떤 단어가 나오면 늘 기초적인 뜻이 무엇인지 보아야 합니다.
옥스퍼드 사전에서 remove를 찾아보면 1차 뜻이 다음과 같습니다.
I.1.a To move or shift from or out of the place occupied; to lift or push aside; to lift up and take away; to take off.
즉 어떤 것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서 움직이는 것이 remove의 1차 뜻입니다.
또 다른 뜻이 ‘제거되다’입니다.
우리말 영한사전도 동일합니다.
한컴 사전 re·move [rimúːv] vt.
① 《~+⊡/+⊡+⊡+⊡》 …을 옮기다, 움직이다, 이전〔이동〕시키다
┈┈• ~ one’s eyes from the painting 그림에서 눈을 돌리다
┈┈• ~ oneself from the room 방을 떠나다
┈┈• ~ MOUNTAINS.
② 《~+⊡/+⊡+⊡+⊡》 …을 제거하다; 치우다; 벗다, 벗(기)다
┈┈• ~ one’s coat 코트를 벗다
┈┈• ~ the causes of poverty 빈곤의 원인을 제거하다
┈┈• ~ a name from a list 명부에서 이름을 빼다.
③ 《~+⊡/+⊡+⊡+⊡》 내어쫓다, 해임〔면직, 해고〕하다
┈┈• He was ~d (from office). 그는 (공직에서) 해임됐다.
성경은 땅 즉 지구가 영원히 제 자리에 있을 것을 이야기합니다.
샬롬
2024-07-15 11:37:53 | 관리자
안녕하세요?
대구 화평침례교회 심재범 목사님께서 재창조 이론의 모순을 보여 주는 책을 번역하여 허락을 받고 공유합니다.
책의 제목은 <곁길로 빠진 재창조>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은 재창조 이론(갭 이론)을 말하지 않나요? 티모티 모튼 <곁길로 빠진 재창조>
위의 링크 기사에서 설명 드렸듯이 이 책은 럭크만 박사의 신봉자였다가 성경을 보고 갭 이론을 버린 티모티 모튼(Timothy S. Morton)의 책을 번역한 것입니다.
영어 원서로 89쪽짜리 책의 제목은 <곁길로 빠진 재창조>(The Genesis Gap Sidetrack: Is There a "Gap" Between Genesis 1:1 and 1:2?)이고 여기서 저자는 재창조가 왜 안 되는지를 역사와 사전과 성경의 구절들을 근거로 조목조목 이야기합니다.
이번에 번역된 이 책이 올바른 교리 정립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패스터
2024-04-30 09:12:53 | 관리자
정상문과 도치문의 번역
영어에 다음과 같은 두 개의 문장이 있습니다.
A is B.
B is A.
이러면 둘 중 하나는 정상 문장이고 다른 하나는 도치문입니다.
국어사전에 도치문은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도치문: 정상적인 어순을 뒤바꾸어 놓은 문장. 흔히 문장 성분의 강조를 위하여 쓰는데, ‘보고 싶어요, 나의 어머니가.’ 따위이다.
1611년 킹제임스 성경은 마침표, 쉼표, 느낌표, 물음표 등을 빼고는 심지어 인용 부호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원어 성경도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강조할 때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괄호나 도치문을 사용하였습니다.
괄호 사용의 예: 고후5:5-8
5:6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확신에 차 있으며 우리가 몸 안에서 집에 거하는 동안에는 주로부터 떨어져 있는 줄을 아노니
5:7 (우리는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노라.)
5:8 내가 말하노니 우리는 확신에 차 있으며 오히려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괄호를 사용하면 7절이 강조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도치문은 수도 없이 발견됩니다.
애가 3장 22-23절
주의 긍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지 아니하였으니 그분의 동정심은 끝이 없도다. 그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신실하심은 크시니이다.
…They are new every morning: great is thy faithfulness.
끝 문장 great is thy faithfulness는 원래 thy faithfulness is great으로 쓰는 것이 정상이지만 강조를 위해 도치문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을 영어 그대로 번역한다고 ‘크시니이다, 주의 신실하심은’으로 하면 매우 이상함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15:28에도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great is thy faith.
영어 성경대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크도다, 네 믿음이’로 번역하면 말이 안 될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David the King이라는 말이 14번 나옵니다. 이것은 다윗 왕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리고 King David은 32번 나옵니다. 이것도 도치를 그대로 살리려면 왕 다윗으로 해야 하지만 그렇게 번역한 성경은 없습니다. 이것도 역시 위의 David the King처럼 다 다윗 왕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말에서는 왕 다윗으로 쓰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를 통해 우리는 영어의 도치문을 그대로 살리면 우리말 번역이 심히 부자연스러운 데가 많으므로 수천 군데의 도치문이 우리말에서는 정상적인 문장으로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에는 A is B, B is A, 이 두 문장이 5절과 6절에 연달아 나옵니다. 영어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5절: Perverse disputings of men of corrupt minds, and destitute of the truth, supposing that gain is godliness: from such withdraw thyself.
6절 But godliness with contentment is great gain.
5절과 6절에서 이런 저런 것을 따 빼면 핵심 문장은 다음과 같이 짧게 축약이 됩니다.
5절: gain is godliness.
6절: godliness is gain.
이 둘은 전형적인 A is B, B is A 형태의 두 문장입니다.
따라서 둘 중 하는 정상 문장이고 다른 하나는 강조를 위한 도치 문장입니다.
영어를 볼 줄 아는 분이라면 곧장 눈치 챘겠지만 여기서는 6절의 godliness is gain이 정상 문장입니다.
그래서 6절은 흠정역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습니다.
6절: 그러나 만족하면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큰 이득이다. 즉 godliness is gain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이득이다로 번역되었습니다.
자, 그런데 5절이 문제가 됩니다.
5절은 도치문이니까 도치를 살리면 gain is godliness.가 ‘이득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다’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자, 우리말에서 이런 식으로 쓴 글을 보셨나요? 이득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라는 말은 우리말에서 사용되는 형식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런 말은 번역을 할 때 위에서 했듯이 도치문을 정상 문장을 바꾸어서 해야 합니다. 그러면 6절처럼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이득이다로 나옵니다. 이러면 5절, 6절이 동일한 것을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살려서 5절 전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가 없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뚤어진 언쟁이 생기나니 너는 그러한 자들로부터 떠나라.
여기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란 믿음 생활을 하면 - 즉 예수님만 믿으면 - 만사가 형통한다는 기복 신앙인들을 말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런 자들에게서 떠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이득인가요? 이것 하나만 두고 보면 대부분의 경우 답이 Yes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면 당연히 천국에 가서 영원한 삶을 사니 이득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문맥이 아닙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거룩하게 살면 모든 일이 잘된다고 주장하는 악한 자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런 자들에게서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6절에서 바울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조금 못 살아도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면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큰 이득이 된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2구절이 보여 주려는 핵심입니다.
심지어 개역, 공동 번역 등도 이런 취지로 이해하고 바르게 번역하였습니다.
개역: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물론 경건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 혹은 믿음 생활하는 것이 옳은 말입니다.
경건은 명사가 아니라 경건하다의 어근이므로 경건 자체를 명사로 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역을 조금 바꾸면 흠정역과 같은 뜻으로 이해가 됩니다.
개역: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했다는 것들을 보면 5절이 참으로 이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킹: 이익이 경건이다.
표킹: 이득이 경건이다.
근킹: 이득이 경건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런 표현은 우리말에 없습니다. 또한 경건은 명사가 아닙니다.
도치를 살려야 한다고 이렇게 이상하게 번역하고는 오히려 올바로 번역한 흠정역 성경을 비방하고 나무라는 사람들이 있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영어의 도치문을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대개의 경우 문장이 이상하거나 뜻이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말에는 그런 도치문의 용레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성경들이 영어나 원어를 번역역할 때 도치문이라 해도 정장적인 문잘으로 번역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뜻이 통하고 우리말 용례에 맞기 때문입니다.
도치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의 번역을 보기 바랍니다. 아마 그들도 수천 군데에서 도치를 정상으로 해서 번역했을 것입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할 때 우리는 우리나라 말의 문법과 용례에 맞게 번역해야 합니다.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의 말을 들어보기 바랍니다.
“번역이란 창문을 열어 빛이 들어오게 하는 작업이다. 번역은 껍질을 까서 우리가 열매를 먹도록 해 주며 휘장을 젖혀서 우리가 지성소를 들여다보게 해 준다. 번역은 우물의 뚜껑을 열어 우리가 물로 나가게 해 준다. 참으로 보통 사람들의 말로 [성경이] 번역 되지 않는다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두레박 없이 깊은 우물 옆에 서 있는 아이들과 같다.”
이런 것을 무시히고 "나는 한 소년입니다.", "비둘기가 날자 그녀(비둘기)의 발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제단으로 가서 그(제단)의 발들을 닦으라", "저기 있는 한 꽃을 가져와라" 식으로 번역하고는 그것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한 것이라고 주장하면 한마디로 어처구니가 없는 것입니다.
참고로 어처구니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어처구니라는 말이 원래 맷돌의 손잡이를 일컫는 말이라는 설이 있다. 즉, 흔히 난감한 상황에서 쓰는 관용 표현 '어처구니가 없다.'라는 말은, 맷돌의 손잡이가 없어 문제가 생겼을 때 사용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손잡이가 없으니 어떻게 맷돌을 돌리겠습니까?
어처구니
샬롬
패스터
2024-04-26 16:00:00 | 관리자
디모데전서 3장 16절의 godliness는 경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이 경건인가?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godly, ungodly 같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이것들은 참으로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 중 하나입니다.
godly는 15회(시4:3-요삼6), godliness도 15회(딤전2:2-벧후3:11), 총 30회
ungodly는 27회(삼하22:5-유18), ungodliness는 4회(롬1:18-딛2:12), 총31회
이렇게 이 단어들은 형용사나 명사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총 61회 나옵니다.
기존 성경(개역 등)에는 이것들이 경건하다, 불경건하다, 악인 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들에 god이 들어 있으므로 우리는 이것들이 하나님의 성품 혹은 속성과 관계가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존 성경에는 몇 군데에만 하나님의 뜻대로 등으로 바르게 번역하였습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OED)에서 godly를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Of or pertaining to God; coming from God; divine; spiritual. Obs. exc. arch.
(하나님에게 속한, 하나님에게서 오는, 신적인...)
한영사전은 이 말을 '신을 공경하는, 고어: 하나님에게 속한, 신성한' 등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원래대로 하면 godly는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흠정역 성경은 이미 61회의 반 수 이상을 그렇게 번역하였고 개역성경도 몇 군데 그렇게 하였습니다.
고후7:10은 그 예를 보여 줍니다.
For godly sorrow worketh repentance to salvation not to be repented of: but the sorrow of the world worketh death.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거니와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느니라.
개역성경도 마찬가지로 번역하였습니다.
자, 그런데 진짜 문제는 딤전3:16에서 발생합니다.
KJB: And without controversy great is the mystery of godliness: God was manifest in the flesh, justified in the Spirit, seen of angels, preached unto the Gentiles, believed on in the world, received up into glory.
킹제임스 흠정역: 논쟁의 여지가 없이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사람들이 믿는 분이 되시고 들려서 영광으로 들어가셨느니라.
개역: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가 모든 것을 마치고 승천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이 모든 일을 한 마디로 ‘the mystery of godliness’라고 말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여기서 the mystery of godliness를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라고 바르게 번역하였습니다. 성품이란 됨됨이를 뜻합니다.
즉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의 이런 됨됨이가 큰 신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개역 성경은 이것을 경건의 비밀이 크다고 번역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말에서 경건은 경건하다의 어근이지 경건 자체가 명사가 아닙니다.
거룩하다의 거룩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분들이 거룩이 명사인 줄로 착각하고 하나님의 거룩을 추구하라고 외칩니다.
이게 한국 교회의 슬픈 현실입니다. 문법이나 한국어 용례도 모르는 목사들이 수두룩합니다.
거룩은 거룩하다의 어근이지 거룩 자체가 명사가 아닙니다.
자, 여러분은 경건(혹은 경건함)이 무엇을 뜻한다고 생각합니까? 경건하다는 말은 국어사전에 '공경하며 삼가고 엄숙하다'를 뜻하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엄숙함이 위대한 신비일까요?
대체 무엇이 엄숙하다는 말인가요?
이렇게 말이 안 되는 번역을 가지고 100년 이상 지내다 보니 이 위대한 말씀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한국에는 많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성육신, 십자가 처형, 구원자와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것, 승천하신 것 등을 총괄하는 말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 말이 바로 godliness입니다. 즉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됨됨이입니다.
이 중요한 말을 경건으로 번역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개역성경은 그렇다 쳐도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했다는 성경들은 바르게 이것을 번역해야 하지 않을까요?
한킹: 경건의 신비
표킹: 경건의 신비
근킹: 경건의 신비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했다는 것들이 어쩌면 다 개역성경을 그대로 복사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표킹은 고후7:10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아니라 ‘경건한 슬픔’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사람이 경건하게 슬퍼하면 구원을 받을까요?
이런 데는 godly를 하나님을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번역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뒤의 세상 근심과 대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sorrow는 슬픔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옥스퍼드 사전을 가서 그 뜻을 보면 다양합니다.
고통
고통의 원인
근심
슬픔
우리는 godly를 바르게 번역해야 합니다.
시편1:1을 보도록 합시다.
Blessed is the man that walketh not in the counsel of the ungodly, nor standeth in the way of sinners, nor sitteth in the seat of the scornful.
킹제임스 흠정역: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의 계획대로 걷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조롱하는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여기의 ungodly를 단순히 악인, 불경건한 자들로 번역하면 안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도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의 계획대로 걷지 아니하는 사람만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가능한 한 영어의 뉘앙스를 살려서 번역하지 않으면 godly, ungodly의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또한 딤전6:5를 보면 gain is godliness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딤전6:6에 나오는 동일한 표현 즉 godliness is gain을 도치문으로 적은 것입니다.
여하튼 이런 데서도 이득이 경건이라고 적으면 말이 안 됩니다.
이득이 경건이라는 말이 우리말에 있나요? 이런 말을 평생에 한 번이라도 들은 적이 있나요?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은 따르는 것이 이득이라고 주장하는(즉 예수님 믿으면 무조건 잘 산다고 주장하는) 악한 자들이 있는데 이런 자들을 피하라는 말합니다.
‘이득이 경건이라고 주장하는 악한 자들’이 있는데 이런 자들을 피하라고 하면 말이 되나요?
이득이 경건이라는 말은 일단 경건이라는 명사가 우리말에 없으니 틀린 말이고 그런 표현 자체는 우리말에서 한 번도 쓰이지도, 발견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써 놓고 영어 킹제임스 성경대로 번역했다고 하면 누가 거기에 동조할까요? 미국 사람, 영국 사람이 다 그렇게 보지 않는데요.
그들은 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이득이라고 주장하는 악한 자들이 있는데 이런 자들을 피해야 한다고 이해합니다. 이런 데 나오는 godliness는 그런 뜻이고 여기의 문장은 도치문입니다.
샬롬
패스터
2024-04-26 14:48:23 | 관리자
안녕하세요?
30-40년 전에 럭크만(Peter Ruckman)이라는 사람이 뿌려놓은 잡초 가라지 씨들이 자라서 여기저기서 독소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원어 성경을 정확히 번역한 것이지 원어를 교정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3절은 부활의 순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각 사람이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시요, 그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분께 속한 자들이니라.
But every man in his own order: Christ the firstfruits; afterward they that are Christ's at his coming.
이미 20절도 동일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But now is Christ risen from the dead, and become the firstfruits of them that slept.
이런데 보면 영어로는 firstfruits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복수가 아니라 영어와 원어에서 단수입니다.
이것을 복수로 번역하면 오역이며 이로 인해 잘못된 교리가 생겨납니다.
이런 것을 복수로 번역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무식해서
2. 럭크만의 교리를 세우려고
늘 이야기하듯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단수 복수 등을 구분하기 어려운 데가 더러 있습니다. 영어로는 당연히 맞지만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단수 복수 구분을 위해 반드시 원어를 참조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 수 없이 나오는 'the + 형용사'는 단수 복수 구분을 위해 원어를 보아야 할 때가 매우 많습니다.
예를 들어 the wicked가 단수이면 사탄 마귀가 될 가능성이 높고 복수이면 악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오늘 나온 firstfruits가 바로 그런 사례 중의 하나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firstfruits가 총 7회 나옵니다.
이 단어는 스트롱 번호가 536이고 원어 사전에 가면 정확하게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즉 이것은 단수 명사입니다.
이것이 단수임은 23절이 잘 보여 줍니다.
첫 열매인 그리스도시요
Christ the firstfruits;
영어를 보시면 알겠지만 Christ와 the firstfruits은 동격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단수이므로 당연히 the firstfruits은 단수여야만 합니다.
20절도 동일합니다. 그리스도가 단수이고 당연히 the firstfruits은 단수입니다.
그런데 럭크만 등은 원어를 무시하고 이것을 복수로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즉 영어로 원어를 교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엄밀히 말하면 이단 교리입니다. 잠시 후에 여기서 나오는 이상한 교리를 보여 드릴 것입니다.
그래서 말보의 한킹은 이것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각자 자기의 서열대로 되리니 그리스도가 첫 열매들이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 분께 속한 사람들이라.
이것은 동격을 나타내지 그리스도가 첫 열매들이라는 서술문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이것을 서술문으로 번역한 것은 말보 한킹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 단수가 복수로 바뀝니다.
한킹 20절도 동일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셔서 잠들었던 자들의 첫 열매들이 되셨느니라.
역시 단수 그리스도가 복수 첫열매들이 됩니다.
표킹이라는 것도 첫열매들로 하였습니다. 말보에서 나왔으므로 럭크만의 교리를 따르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다만 23절은 '첫멸매들인 그리스도시요'로 해서 서술문을 피하였고 20절은 그리스도를 첫열매들로 썼습니다.
표킹은 평서문을 도치문으로 번역하면 안 된다고 극렬히 주장하는데 그런 주장이라면 여기도 '그리스도 첫멸매들이시요'로 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표킹도 수많은 데서 평서문을 도치문으로 번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하튼 말보와 럭크만의 영향으로 단수 그리스도를 복수 첫열매들로 바꾸고 난 뒤 그 영향이 약 30년 뒤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박진영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첫열매들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자기들끼리 예배를 드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박진영씨는 머리인 그리스도와 몸인 첫열매들 즉 성도들이 합쳐져서 그리스도가 된다는 해괴망측한 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박진영의 다른 복음 - 교회론
한번 살펴보기 바랍니다.
박진영씨의 주장:
1.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 이 머리와 몸이 합쳐진 거대한 사람 역시 그리스도 혹은 그리스도 예수이다.
2. 바울은 예수님이 혼이고 교회가 몸이라는 신비를 가르쳤고 우리가 온전해지려면 '첫열매들 그리스도'의 지식이 필요하다.
3. 이 첫 열매들이 새 사람이다.
박진영씨의 이런 모든 가르침이 말보와 럭크만의 '그리스도 첫열매들'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오역이 비성경적인 교리를 만들어내는 한 예입니다.
위의 블로그에는 박진영씨에 대한 다른 글들도 있으니 참조하기 바랍니다.
결론:
영어로 원어의 단복수를 교정할 수 없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영어로 원어의 단복수를 교정하는 것은 이단 교리입니다. 원어대로 단복수를 번역해야 올바른 번역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본문이 영감을 받았고 향상된 계시라는 '럭크만의 이중 염감론' 같은 허구에서 빨리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첫열매이지 결코 첫열매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성경과 주석이 다 그렇게 말하며 영어 firstfruits는 자체가 단수입니다.
샬롬
패스터
2024-04-23 19:18:51 | 관리자
에스라기 1장에는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자기 왕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내리는 칙령이 있습니다.
1 한편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제일년에 주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주의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영을 움직이시매 그가 자기의 온 왕국 전역에 선포하고 그것을 글로도 기록하여 이르되,
2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라. 주 하늘의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왕국들을 내게 주시고 내게 명하사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에 자신을 위해 집을 건축하게 하셨나니
3 그분의 모든 백성 중에서 너희 가운데 있는 자가 누구냐? 그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니 그는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집을 건축할지니라. (그분은 하나님이시요,) 그분의 집은 예루살렘에 있느니라.
3절을 보면 '그분의 모든 백성 중에서 너희 가운데 있는 자가 누구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분의 모든 백성은 1차적으로 당연히 포로로 잡혀간 유다(베냐민) 지파 사람들을 말합니다(스2:2; 3:1; 6:16, 17; 7:13; 8:29, 35 등을 보면 북왕국 이스라엘의 10지파에서도 돌아온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다수는 남왕국 유다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다음의 너희는 누구일까요? 여기의 너희는 고레스 왕의 통치하에 있는 그의 온 백성을 말합니다.
1절에는 "그가 자기의 온 왕국 전역에 선포하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3절은 포로로 잡혀간 하나님의 모든 백성 중에서 페르시아에 살고 있는 자를 뜻합니다. 그 사람은 누구든지 마음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하나님의 집을 지어도 좋다고 고레스는 칙령을 내립니다.
동일한 것이 대하36:22-23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22 한편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제일년에 주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주의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영을 움직이시매 그가 자기의 온 왕국 전역에 선포하고 그것을 글로도 기록하여 이르되,
23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라. 주 하늘의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왕국들을 내게 주시고 내게 명하사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에 자신을 위해 집을 건축하게 하셨나니 그분의 모든 백성 중에서 너희 가운데 있는 자가 누구냐? 주 그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니 그는 올라갈지니라, 하였더라.
대다수가 알고 있듯이 역대기상하는 열왕기상하와 달리 바빌론 포로 생활 이후에 기록되었습니다. 물론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기도 모두 바빌론 포로 생활 이후에 기록되었습니다.
명확하게 알고자 하는 분들이 있어서 잠시 적었습니다.
샬롬
2024-01-13 16:36:27 | 관리자
안녕하세요?
오늘은 히브리서 2장 9절이 나오는 이유에 대해 잠시 설명하려 합니다.
히브리서 2장 5절 이하의 문맥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보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2장 5절 이하 문맥
5 그분께서는 다가오는 세상 곧 우리가 말하는 그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시키지 아니하셨느니라.
6 그러나 한 사람이 어떤 곳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마음에 두시나이까?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찾아오시나이까?
7 주께서 그를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만드시고 그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그를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들 위에 세우시고
8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두어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하였으니 그분께서 모든 것을 그의 아래 두어 복종하게 하셨으므로 그의 아래 놓이지 않은 것은 하나도 남겨 두지 아니하셨으나 지금 우리는 아직 모든 것이 그의 아래 놓인 것을 보지 못하며
9 오히려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노라. 그분께서 이렇게 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반즈의 설명이 이해에 큰 도움이 됩니다.
반즈 설명
히2:6-8절에 인용된 시편 8편에서 기자는 사람이 모든 창조물을 지배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사람이 모든 것을 지배하지 못합니다(8절 후반부).
그러고 나서 갑자기 9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예수님을 본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시편 8편 기자가 8편에서 말한 확장된 통치권을 가지고 있음을 보지 못합니다.
대신에 우리는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시고 천사보다 더 높은 권세를 받으신 예수님에게서 그 일이 성취되는 것을 봅니다.
요점은 그분이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셨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에 대한 “보상으로” 그분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으며, 그리하여 다윗이 시편 8:1-9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영예에 관해 말한 모든 것을 성취하셨습니다.
사도의 목적은 그분께서 "높여졌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그는 그 이유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 죽음을 겪으셨기 때문입니다(비교 빌2:8-9).
다시 말해 사도는 예수님이 시편 8편을 성취하신 분이심을 보여 주려고 9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샬롬
2024-01-01 16:49:36 | 관리자
디모데전서 5장 24-25절의 의미
22 아무에게나 선뜻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죄들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며 너 자신을 순결하게 지키라.
23 더 이상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잦은 병을 위해 포도즙을 조금 쓰라.
24 어떤 사람들의 죄들은 미리 드러나 먼저 심판으로 가고 어떤 사람들의 경우는 죄들이 그 뒤를 따르나니
25 이와 같이 어떤 사람들의 선한 행위들도 먼저 밝히 드러나며 그렇지 아니한 것들도 숨겨질 수 없느니라.
왜 갑자기 24-25절이 나오는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있어 잠시 앨버트 반즈의 주석을 소개하려 합니다.
반즈 주석
성경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맥입니다. 여기도 문맥이 24-25절의 뜻을 결정합니다.
어떤 사람들의 죄들은 미리 드러나 있다(24절)는 선언은 일반적인 형식을 취하기는 하지만 사람들을 사역자가 되게 하는 주제를 다루는 딤전5:22와 관련해서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딤전5:23은 괄호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즉 22절 다음에 곧바로 24-25절이 온다고 보면 해석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사도는 디모데에게 딤전5:22에서 그가 사역자로 임명할 사람들의 성격에 관해 당부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어떤 사람들의 품성이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변장이란 없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두에게 분명했고, 그것에 관한 한 실수할 위험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모두에게 명백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한 순간도 주저해서는 안 되며, 그들의 재능이나 학식, 공동체에서의 지위가 어떻든 간에 그는 그들을 사역에 임명하는 일에 결코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심판으로 간다는 말의 의미: 그들의 성격은 잘 이해됩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심판의 날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그들이 심판정에 출석하기 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들이 거기에 도착하기 전에 기록과 판결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심지어 재판의 형식도 거의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그러한 사람들의 성격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따라서 디모데는 그들이 사역의 직분을 맡는 데 보조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는 죄들이 그 뒤를 따르나니의 의미: 그들의 성격은 여기서(이 세상에서) 완전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숨깁니다. 그들은 속임수를 씁니다. 그들은 실제와 다르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의 인격은 결국 드러날 것이며 그들은 그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이 처벌받지 않고 탈출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그들이 자기들의 악한 행위를 숨기려고 애썼을지라도 그런 행위들(죄들)은 그들을 따라 재판정까지 따라가서 거기서 그들을 만날 것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사역의 직분을 맡을 사람의 자격을 판단하는 데 우리가 신중해야 한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단번에 호감이 가는 외모나 약간의 친분만으로 그들이 그 직책을 맡을 자격이 있다고 추론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의 성격이 현재 숨겨져 있거나 오해를 받고 있지만 최종 심판에서 그들의 성격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25절: 이와 같이 어떤 사람들의 선한 행위들도 먼저 밝히 드러나며 그렇지 아니한 것들도 숨겨질 수 없느니라.
그들의 행위를 보면 그들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결정하기 위해 심판의 날을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여기서 그들을 선한 사람으로 대하고 선한 사람만이 채울 수 있는 직분을 그들에게 줄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의 아이디어는 그들의 성격이 매우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으므로 그들을 사역의 직분에 성별하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숨길 수 없습니다. 즉, 궁극적으로 숨기거나 오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부에는 각 사람의 성격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의 표현은 선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모든 사람에게 성격이 다 잘 알려진 좋은 남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가 그들 주위에 영광을 나타내어 아무도 그들이 누구인지 착각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품성을 널리 알리는 면에서 디모데전서 5장 24절에 언급된 “죄가 미리 드러나” 있는 사람들과 일치합니다. 한 사람의 선행은 다른 사람의 죄만큼이나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겸손하고, 눈에 띄지 않으며,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명 속에 살 수도 있습니다. 선을 행할 수단이 빈약할 수도 있습니다. 체질적으로 너무 자신이 없어서 공개 행동 무대에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세상으로부터 숨겨져 있습니다. 이들은 홍보와 관련하여 디모데전서 5장 24절에 언급된 “그들의 죄들(악한 행위)이 그 뒤를 따르느니라”는 말씀이 언급하는 사람들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것들이 항상 숨겨질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의 성격을 드러내기 위한 계획이 있으며,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24절과 25절을 살펴보면 교회나 목회자가 어떤 사람을 사역자로 추천해야 하고 추천해서는 안 되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문맥을 잘 살펴보고 구절들을 해석해야 합니다.
샬롬
2023-12-28 21:51:04 | 관리자
민수기 3장 39절의 22,000명은 오류가 아닌가요?
답변: 아닙니다. 그것은 정확한 숫자입니다.
민수기 3장에는 계수된 레위 사람의 수가 나옵니다. 그 수는 22,300명일까요, 아니면 22,000명일까요?
둘 다 됩니다. 이 두 숫자는 완벽하고 오류가 없습니다.
민수기 3:5-13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레위 지파를 가까이로 데려다가 제사장 아론에게 주어 그를 섬기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5-6절 참조). 그들은 다른 모든 지파의 처음난 자(장자)를 대신하여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져 성막에서 섬기는 일을 하게 될 것이었습니다(7-13절 참조).
민수기 3장 14~15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레위 자손 중 태어난 지 한 달 이상 된 모든 남자를 계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3:16-39에서 그는 바로 그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한 후에 그는 레위 사람들의 가족별로 그들을 계수합니다. 그는 실제로 그들을 세 주요 가문, 즉 게르손, 고핫, 므라리 가문에서 분리합니다. 그런 다음 가계도를 통해 이들을 분리합니다.
민수기 3장 21~22절을 보면 게르손 가족은 립니 가족과 시므 가족으로 이루어져 모두 7,500명입니다. 민수기 3:23-26에서 그는 그들이 어디에 진을 쳐야 하는지 그들의 임무와 그들의 우두머리를 알려 줍니다.
민수기 3장 27~28절에 보면 고핫 가족은 아므람 가족, 이스할 가족, 헤브론 가족, 웃시엘 가족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수는 8,600명이었습니다. 참고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아므람 족속의 수에 포함됩니다. 왜냐하면 아므람은 아론의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출애굽기 6:18-20 참조). 민수기 3:29-32에서 그는 그들이 진칠 곳과 그들의 임무와 그들의 우두머리를 알려 줍니다.
민수기 3장 33~34절에 보면 므라리 가족은 말리 가족과 무시 가족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수는 6,200명이라고 합니다. 민수기 3:35-37에서 그는 그들이 진칠 곳과 그들의 임무와 그들의 우두머리를 알려 줍니다.
모세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포함하여 한 달 이상 된 모든 레위 사람을 다 합하면 22,300명입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3장 39절에 있습니다.
민수기 3장 39절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모세와 아론에 의해 계수된 자가 22,000명이라고 말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주의 명령대로 계수하되 레위 사람들 중에서 두루 그들의 가족별로 계수한 모든 자 곧 난 지 한 달 이상 된 모든 남자들이 이만 이천 명이더라(39절).
따라서 위의 22,300명과 22,000명은 300명의 차이를 보이는 셈입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대다수의 불신자(학자 목사 등)들은 성경 사본 전수 과정에 오류가 있어 두 숫자가 다르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경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완전히 보존해 주셨음을 믿기에 이런 불신의 행위를 수용하지 않습니다.
답은 무엇일까요?
22,300명과 22,000명은 둘 다 맞는 수치입니다.
그러나 성막 앞에서 동쪽을 향해 곧 회중의 성막 앞에서 동쪽으로 진을 치는 자들은 모세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되리니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책무를 대신하여 성소에 관한 책무를 지킬 것이며 가까이 오는 낯선 자는 죽일지니라(민3:38).
But those that encamp before the tabernacle toward the east, even before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eastward, shall be Moses, and Aaron and his sons, keeping the charge of the sanctuary for the charge of the children of Israel; and the stranger that cometh nigh shall be put to death.
위에서 보듯이 민수기 3장 38절은 “그러나”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모세는 이제 22,300명이라는 숫자에 대한 몇 가지 예외를 말하려고 합니다. 이 구절에서 그는 한 무리를 나머지 무리와 구별하고 성막 앞에 동쪽에 진을 치라고 말하는데 이 무리는 모세와 아론과 그 아들들입니다.
(*) 애석하게도 개역성경을 포함한 대다수의 우리말 역본들은 ‘그러나’를 삭제하고 있습니다.
개역 38절: 성막 앞 동쪽 곧 회막 앞 해 돋는 쪽에는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진을 치고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위하여 성소의 직무를 수행할 것이며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일지니라
그가 그들을 구별한 이유는 그들이 다른 모든 레위 사람들의 섬김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자,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들은 27-28절에서 아므람을 포한하는 고핫 족속에 속한 사람들의 수의 일부였습니다(위의 설명을 보세요).
그러나 이제 모세는 제사장의 혈통인 그들을 그 총수에서 제외합니다.
민수기 3장 39절은 주의 명령에 따라 모세와 아론에 의해 계수된 자가 이만 이천 명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이 숫자를 주목하세요. 이전 숫자 즉 22,300명은 모세가 홀로 계수한 숫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세와 아론이 숫자를 세며 이때에는 제사장들의 수가 전체 레위 사람들의 수에서 빠집니다.
레위 사람들의 수는 몇 명입니까? 22,300명일까요, 22,000명일까요? 대답은 둘 다입니다!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포함하여 모든 레위인 중에서 22,300명을 계수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손자들과 증손자들을 제외한 모든 레위 사람들을 계수했습니다. 그 숫자는 22,000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아들, 손자들 등을 의미함)의 수는 300명으로 보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 수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처음난 자들이 이들을 섬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스라엘의 처음난 자들을 대신할 레위 사람들의 수에 포함될 수 없었습니다.
결론: 두 숫자 모두 정확합니다. 22,300명은 모세가 계수한 레위인들의 수였고 22,000명은 모세와 아론이 계수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외한 모든 레위인의 수입니다. 두 계산 모두 주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계수는 모세가 했고, 마지막 계수는 모세와 아론이 했습니다.
참조
2023-12-28 15:34:53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