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당사자 사이에서 중재하는 것.
이 말은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의 변호자로서 하늘에 있는 왕좌 앞에 나타나 자신이 갈보리에서 완수하신 일을 내보이며 그들의 기도를 들어 줄 것을 아버지께 간구하는 일을 가리킨다(사53:12; 롬8:34; 히7:25; 9:24; 요일2:1). 그분은 유일한 중재자로 죄인들을 위해 간구하기 위해 순수하고 완전한 일을 하셨다. 그러므로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성자나 마리아나 천사들의 도움 혹은 중보는 있을 수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 또한 성도들의 가슴 속에 있는 성령님은 그들의 입에 바른 말을 주시며 거룩한 것들을 그들의 생각 속에 넣어 주시면서 그들을 위해 중보하신다(롬8:26). 성령님의 중보가 없이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여 그분을 기쁘게 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2009-06-14 00:50:27 | 관리자
유백색의 반투명한 부분과 다른 빛깔이 서로 띠 모양을 이룬 마노 보석.
원래 이 이름은 손톱이나 줄무늬 사이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었다(창2:12; 대상29:2). 이것은 대제사장의 흉패에 쓰인 열한 번째 보석이다(출28:20).
2009-06-14 00:49:59 | 관리자
규례, 명령, 규칙들을 좇아서 지킴.
2009-06-14 00:49:33 | 관리자
오직 하나님에게만 절대적으로 죽지 아니함이 있으며 창조물의 경우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 성경은 사람이 죽지 않는 일이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분께서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을 통해 생명과 죽지 아니함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딤후1:10). 그리스도인들이 영원히 죽지 않는 복에는 몸의 부활도 포함되는데 이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에만 가능하다(요14:19). 한편 죄인들은 의인들이 영원히 복락을 누리며 사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영원토록 불과 유황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산다(마25:46). 지옥, 불 호수, 영혼멸절설 참조.
2009-06-14 00:49:08 | 관리자
성경에서 죽음 혹은 사망은 일차적으로 분리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먼저 육체의 죽음은 몸과 혼이 분리되는 것이며(창35:18)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어 그분의 진노를 받는 것도 죽음으로 표현되어 있다(요일3:14). 특별히 영원한 저주를 받아 하나님 앞을 떠나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한다(계20:14-15; 유12). 사망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부가된 형벌이며(창2:17; 3:19) 그의 모든 후손은 범죄자이고 따라서 그에게 부과된 저주를 공유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므로 그분을 믿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그분의 생명을 공유한다. 부활 때에 마지막으로 정복되어 발밑에 깔릴 원수는 사망이다(롬5:12-21; 고전15:1-58).
육체적으로 죽는 것은 ‘숨을 내어 주다’(우리말 성경은 ‘숨을 거두다’로 되어 있음)로 표현되거나(시104:29) ‘땅으로 돌아가는 것’(창3:19; 전12:7), ‘혼이 몸을 떠나는 것 혹은 입는 것’(고후5:3-4) 또는 ‘몸이 거하던 장막을 떠나는 것’(고후5:1; 벧후1:13-14) 등으로 표현되었다. 신자들의 죽음은 ‘떠나서 집으로 가는 것’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것’(빌1:23; 마26:24; 요11:11; 살전4:13) 등으로 표현되었다.
사망 혹은 죽음이라는 말은 큰 재난 혹은 생명을 위협하는 임박한 위험 등을 가리키는 데도 사용되었다(고후1:10). ‘사망의 문들’(욥38:17)은 몸을 떠난 영들이 거하는 ‘보이지 않는 세상’을 가리킨다. 또한 죽음 혹은 사망은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죄 많은 세상의 유혹에 현혹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골3:3). 둘째 사망 참조.
2009-06-14 00:48:42 | 관리자
에돔 참조.
2009-06-14 00:48:13 | 관리자
고대 사람들이 귀중하게 여기던 색깔(출25:4; 26:1, 31, 36).
이것은 이스라엘의 딸들에게 주홍색 옷을 입힌 사울의 은혜를 표현한 색깔이었다(삼하1:24). 또한 부지런하고 덕이 많은 여인은 자기 집안사람들에게 주홍색 옷을 입혔다(잠31:21).이 색깔의 강함과 깊이는 사1:18에 잘 나타나 있다. 주홍색은 또한 부유함의 상징이었다(계17:3-4). 이 색깔은 상수리나무의 한 종류에서 자라는 작은 곤충에서 얻었으며 고대 사람들은 이것으로 진홍과 주홍색을 만들었다. 자주 참조.
2009-06-14 00:47:52 | 관리자
이교도 그리스와 로마의 신.
그는 새턴과 오프스의 아들로 불리며 크레테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이교도들의 신화에 나오는 주피터는 악하고 추잡하며 짐승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상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나바를 가리켜 주피터라 하였다(행14:12-13; 19:35).
2009-06-14 00:47:09 | 관리자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과 달리 토요일을 안식일로 삼지 않고 대개 일요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데 이 날은 결코 율법에서 말하는 안식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온 우주 만물을 엿새 만에 창조하시고 하루를 쉬셨으므로 몸과 정신의 건강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께 한 날을 거룩히 구별하여 경배 드린다는 안식일의 원리를 살리기 위해 세상일을 접고 쉰다. 더욱이 이 날은 우리 주님께서 인류를 구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날이므로 기독교 신앙의 소망인 부활을 기념하고 기대하면서 세상일을 제쳐 두고 이 날을 예배드리는 날로 구분하여 지키고 있다.
쉬는 날이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뀐 것은 주님의 부활 이후에 즉각 실시되었으며 우리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바로 이 날 즉 주의 첫 날에 그분께서는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또 한 주일이 지나서 같은 날에 도마를 포함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고전11:20; 14:23, 40 등은 초대 교회의 제자들이 주의 첫 날에 모여서 경배하고 주의 만찬을 기념한 것을 보여 준다(고전16:1-2). 또한 행20:6-11은 드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첫 날에 모여 만찬을 기념하고 말씀을 들었음을 보여 준다. 요한은 아주 엄숙하게 이 날을 지켰으며 그 날을 주의 날 즉 주일이라고 불렀다(계1:10). 요한의 계시록 이후부터 이 날은 주일이라고 불렸다.
복음의 초기에 유대인 제자들은 유대인들의 안식일도 지켰지만 결코 유대인들의 안식일이나 명절을 이방인이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다(골2:16). 초기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주일을 경배 드리는 날로 따로 떼어 지켰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에 모여 경배하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였으므로 그들을 박해하던 사람들은 “네가 오늘 주일을 지켰느냐?”고 물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그리스도인이므로 이 날을 지키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안식, 안식일 참조.
2009-06-14 00:46:33 | 관리자
이것은 여호와의 천사를 뜻하며 대부분의 성경 주석가들은 이 존재가 구약시대에 성육신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으로 본다(창16:7-13; 22:11-18; 31:11-13; 32:24-30; 출3:2-6; 23:20; 삿2:1-23; 13:16-22; 행7:30-38 등 비교). 그리스도는 주의 천사로 즉 여호와로 구약과 신약시대 초반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을 계시하고 자신의 백성을 위한 구원의 큰 계획을 수행하였다(사63:9).
2009-06-14 00:45:59 | 관리자
주의 만찬은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마26:26-30; 막14:22-26; 눅22:17-20).
이 규례는 우리 주님께서 배반당하던 저녁에 친히 제정하신 것이며 고전11:23-26은 그것의 의미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6장의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을 주의 만찬에 적용하는 것은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하는 것이다.
주의 만찬은 구약의 유월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유월절은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을 미리 보여 주었고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행하신 일을 되돌아보는 것이다(고전5:6-8).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주의 만찬을 행하라고 명령하셨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규례로 삼아 지킨다(행20:7; 고전11:2, 26).
대부분의 교회는 주의 만찬이라는 성경 용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성만찬이라는 천주교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천주교의 일곱 가지 성례 중 하나인 ‘성체 성사’ 즉 미사를 가리키는 용어이므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 미사 참조. 이 규례의 이름이 주의 만찬이므로 누구든지 구원받았으면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지만 구원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 안에는 천주교의 미사에서처럼 무슨 신비적인 요소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의 승천 이후 첫 오순절이 지난 뒤에 예루살렘에서는 믿음을 고백하는 군중들을 위해 가정 예배나 모임이 있었으므로 매일 주의 만찬을 행했으며 이것은 보통 ‘빵을 떼거나 빵을 나눈다’는 말로 표현되었다(행2:46). 초대 교회 초반기에는 빵을 떼는 일이 거의 매일 있었으며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행2:44에 있는 대로 그들이 모든 물건을 공통으로 소유했기 때문이다. 즉 처음에 초대 교회 성도들은 100% 유대인이나 유대인 개종자였으며 - 이방인으로 처음 구원받은 고넬료는 오순절 사건 이후 10여년의 시간이 지난 뒤에 사도행전 10장에서 등장함 - 그들은 말라기 대언자의 말씀에 따라 언제라도 자신들의 주님이 성전에 돌아오리라는 기대감에 차 있었으므로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성전에 모였다(말3:1).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스데반 사건을 통해 강권적으로 다른 곳으로 흩어버릴 때까지 성전에 머물렀으며 심지어 사도들은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성전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로부터 15-20년이 지나서는 매주 만찬을 행하는 것이 보인다(행20:7). 여기서도 그들은 단순히 주의 만찬만 행하지 않고 음식도 먹었다(11절 참조). 이 이후에는 회수나 빈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단지 고전11:26에 마지막으로 주의 만찬 자체에 대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의미 있게 주의 만찬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며 회수가 중요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천주교회처럼 주의 만찬(혹은 미사)이 없으면 예배가 아니라는 주장을 펴는 곳도 있지만 성경은 결코 이것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각 지역 교회가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만찬의 빈도를 정하여 바르게 행하면 된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것이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결코 자기의 진짜 살을 먹으라고 하지 않았다. 주의 만찬의 요소인 빵과 포도즙은 그분의 찢겨진 몸과 그분의 흘린 피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유월절 기간에는 반드시 일주일 동안 모든 집에서 죄의 상징인 누룩을 제거해야만 했다(출12:15; 고전5:7-8). 누룩 참조. 그러므로 죄 없는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나타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을 사용해야 한다. 빵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순수한 피를 상징하는 포도즙 역시 누룩이 들지 않은 순수 포도 주스여야 한다. 포도주는 이미 누룩이 들어가서 포도즙이 발효된 것이므로 순수한 그리스도의 피를 나타낼 수 없다. 전 세계적으로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이 이런 이유로 모두 포도 주스를 사용한다.
주의 만찬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분과 맺은 언약과 또 은혜에서 은혜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을 다시 되새기게 된다(고후1:21-22; 엡4:13-16). 한편 주의하지 않고 여기에 참여하는 자들은 죄를 지으며 따라서 징계를 받을 수 있다(고전11:20-34). 주의 만찬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만 행하는 잠정적인 규례이며 그 이후에는 어린양의 혼인 만찬이 성도들을 기다리고 있다.
끝으로 주의 만찬에서의 빵과 포도즙이 실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화체설 교리는 성경과 상식에서 벗어난 이단 교리이다. 미사 참조.
2009-06-14 00:45:21 | 관리자
이 개념은 특별히 구약성경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 날은 하나님의 왕국이 완전히 서는 날이며 이 날부터는 다시 그분의 왕국을 공격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사2:12; 13:6, 9; 34:8; 겔13:5; 30:3; 욜1:15; 2:11; 암5:18; 습1:14; 슥14:1). 이 날은 또한 징벌하는 날(사10:3)이고 주님의 진노의 날이며(겔7:19) 주님의 큰 날이다(습1:14). 이 날은 구약에서 어둡고 무섭고 두려운 것으로 표현되었지만 신약에서는 소망과 기쁨과 승리의 날로 묘사되곤 하였다. 예언의 날들 선도 참조(75).
신약성경에서 이 날은 그리스도의 날 즉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아버지의 영광과 함께 오는 날을 뜻하며 사람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바로 이 날을 가리킨다.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아버지께서) 그에게 또한 심판을 집행할 권위를 주셨느니라”(요5:27; 비교 마24:27, 30; 눅12:8). 한편 신약성경은 밝은 그림과 함께 어두운 배경을 제시하는데 그 이유는 이 날이 여전히 진노의 날이요(롬2:5-6), 큰 날이며(유6; 계6:17), 하나님의 날이고(벧후3:12), 심판의 날(마10:15; 롬2:16; 벧후3:7)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 이 날은 단순히 ‘그 날’(that day 혹은 the day)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런 표현은 마치 이 날만이 역사에서 계수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날임을 암시하는 것이다(마7:22; 살전5:4; 딤후4:8; 고전3:13). 이 날이 불신자에게는 공포의 날이지만 신자에게는 기쁨의 날이다. 이 날은 그리스도의 공중 강림에서부터 시작하여 7년 환난기와 천년왕국을 포함하는 긴 역사의 시간이다. 그래서 먼저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그로부터 1000년이 지난 뒤에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들이 일어난다(살전4:13-17; 계20:1-5). 이 날에 그분께서 자신의 소유물에게 오시므로(마16:27) 이 날은 우리 주 예수의 날이며(고전1:8; 5:5)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다(빌1:6, 10). 사도 바울의 서신에는 특히 그리스도가 영화롭게 나타나는 이 날에 대한 개념이 가득 배어 있다. 그러므로 이 날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그분의 영원한 왕국이 설립되는 날이며 그래서 이 날 이후로는 더 이상 온 우주에 죄와 갈등이 존재하지 않고 하늘들과 땅은 불로 정화되며 새 하늘과 새 땅이 이것들을 대체한다(사65:17-19; 66:22; 살후2:2; 벧후3:13; 계21:1).
2009-06-14 00:44:33 | 관리자
주일 참조.
2009-06-14 00:43:57 | 관리자
자세히 살피려고 눈을 모아서 봄.
2009-06-14 00:43:35 | 관리자
공기 중에서 잘 변하지 않으므로 철, 강철, 구리 등의 표면을 도금하는 데 쓰이는 금속.
이것은 초기부터 알려진 금속이며(민31:22) 두로와 다시스 사람들이 이것을 가져왔다(겔27:12). 사1:25에서 이 말은 은을 제련할 때 생기는 납 합금 등을 의미하였다.
2009-06-14 00:43:10 | 관리자
아비 사람 참조.
2009-06-14 00:41:52 | 관리자
므낫세의 증손자(민26:29-30).
그는 재판관 기드온이 속한 가족의 창시자이다(수17:2; 삿6:34; 8:2). 삿8:2에서 ‘아비에셀의 포도 수확’이라는 말은 아비에셀 사람들이 주축이 된 300명이 미디안 사람들을 처음에 멸절시킨 것을 의미하며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 줍기’는 에브라임 사람들이 오렙과 스엡을 잡고 크게 승리한 것을 의미한다.
2009-06-14 00:41:29 | 관리자
신약의 Abia(어바야).
I. 아론의 후손 중 한 가족의 창시자(눅1:5).
다윗은 성전에서의 섬김을 위해 제사장들을 24계열로 나누었고 그 중 여덟 번째 계열이 이 사람의 이름을 따라 아비야 계열이라 불렸다(대상24:10). 물론 침례자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이 계열에 속했다. 제사장 참조.
II. 북 왕국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여로보암의 아들.
주님을 향한 선한 마음이 있었으므로 젊어서 죽었을 때에 그는 많은 사람의 사랑과 애도를 받았다(왕상14:1-18).
III. 남 왕국 유다의 첫 번째 왕 르호보암의 아들.
그는 아비얌이라 불리기도 했으며(왕상15:1-8) 주전 958년경에 왕좌에 올라 3년 동안 통치하였다. 그는 여로보암과 전쟁을 해서 큰 승리를 얻었지만(대하13:1-22) 자기 아버지의 악한 본보기를 따르고 말았다. 그의 어머니 마아가 혹은 미가야는 압살롬의 손녀였을 것이다(왕상15:2; 대하11:20; 13:2).
IV. 히스기야 왕의 어머니(대하29:1).
2009-06-14 00:40:46 | 관리자
사무엘의 둘째 아들.
사무엘은 그와 그의 형을 이스라엘의 재판관으로 임명했으나 그들의 부패와 부정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왕을 요구하게 되었다(삼상8:1-5).
2009-06-14 00:39:57 | 관리자
아히멜렉의 아들이며 유대인들의 열 번째 대제사장.
사울이 자신의 군사들을 놉에 보내어 모든 제사장을 멸하려 했을 때 청년 아비아달은 광야의 다윗에게로 피신하였으며(삼상22:11-23) 그와 함께 제사장의 일을 수행하였다(삼상23:9; 30:7). 그 뒤 다윗이 왕좌에 오르자 그는 대제사장 직분을 수행하게 되었고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올려오는 일을 도왔으며(대상15:11-12) 압살롬의 반역 때에 다윗의 편에 있었으나(삼하15:35) 그 뒤에 아도니야를 추종하면서 나이가 들어 자기의 친구 다윗을 배신했다. 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은 그의 제사장 직분을 박탈하고 그를 아나돗으로 쫓아냈으며(왕상2:26-27) 이로써 150년 전에 엘리에게 주어진 예언을 성취하였다(삼상2:27-36). 사울은 사독에게 대제사장 직분을 수여함으로써 엘리가 속한 이다말 계열로부터 엘르아살의 계열로 대제사장 직분을 옮긴 듯하며 이로써 그 당시에 이스라엘에는 대제사장이 둘 즉 다윗과 함께한 아비아달과 사울과 함께한 사독이 있었던 것 같다. 이 같은 대제사장 체계는 아히멜렉의 죽음 이후부터 솔로몬의 통치 때까지 이어졌으며 그 이후에는 사독과 그의 후손들만이 대제사장 직분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아비아달과 관련해서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아비아달이 솔로몬에 의해 제사장 직분을 박탈당했다고 기록된 반면(왕상2:27) 다른 곳에서는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이 사독과 함께 대제사장이라고 기록된 것이다(삼하8:17; 대상18:16; 24:3, 6, 31). 아마도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아히멜렉과 아비아달이라는 두 이름을 지닌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사실 그 당시에 이런 관습은 유대인들에게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다. 아비가일 참조. 이렇게 하면 아비아달이 다윗에게 보여 주는 빵을 주었다는 말씀과(막2:26) 아히멜렉이 주었다는 말씀(삼상21:1-6)이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
2009-06-14 00:39:25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