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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8:13, 요.16:13)말씀과 연결시켜, 마지막때에는 육체를 가진 사람을 구원시키기위해 해돋는 한국땅(계.7:1)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보내주신다고 하신 진리의 성령을 육체를 입게하시고 택하신자들을 인도하는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의일꾼인 추수꾼 천사로 오신다는 말씀을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이 없던 1970년~ 때에는 진리의 말씀으로 믿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네생물에게 각각 여섯날개가 있으니 일곱천사중에 한천사가 일하면 여섯이 날개가 되어 도운다는 말씀을 옳다고 믿게 되었던 겄입니다. 개역성경에 변개된 말씀들을 참진리로 믿고있는 분들은 지금도 휴거를 믿지않고 죽을육체, 썩을 몸이 변화되어 천년왕국에 들어가 영생할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말씀 계.20:4~6절 까지의 말씀을 통해 영혼과, 짐승의 표를 받지않은 자들은 동일인임을 알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말씀이 개역성경으로 잘못된 해석과 믿음을 가진 분들이 속히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말씀을 보고 바른 신앙 하시기를 바랍니다.
2013-05-29 21:31:23 | 김창수
개역성경을 통해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마.13:34 절 말씀에서 개역성경은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다고 기록되었고,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에는 비유가 없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개역성경은 마치 성경말씀이 비유로 기록되었기에(특히 예언의 말씀) 진리의 성령(요.16:13)이 마지막때에 오셔서 장래일을 알려주신다는 말씀을 참진리로 굳게 믿고 신앙하게 되는것이지요. 흠정역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비유가 없이는 말씀하지 아니하셨고 하늘의 왕국의 신비를 아는것이 허락된 제자들(마.13:36)에게는 가라지 비유를 밝히 말씀 해 주셨습니다. 저는 계.15:5절에 하늘의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일곱천사(추수꾼)가 성전으로 부터 나와서 택하신자 들을 하늘 이끝에서 사방에서 모으리라는 개역성경의 말씀을 믿고 20여년을 신앙했습니다. 이만희 씨는 제가 과천에 들어가기 4개월전에 3년6개월이 지났는되도 이루어 지지 않음으로 이미 탈퇴하고 장막성전에서 나간 상태였지요. 계.4:6절에 네짐승에 대해 첫째짐승 사자, 둘째 짐승 송아지, 셋째짐승은 사람의 얼굴을 가졌고, 넷째짐승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더라. 는 말씀을 사.34:16절에 기록된 말씀 빠진것이없고 짝이 없는것이 없다는 말씀을 증거 하면서 사자= 사명자(렘.4:7), 송아지=일꾼(고전.9:9), 사람=육체(창.6:3), 독수리=성령
2013-05-29 21:04:42 | 김창수
예수님을 영접한 저의 친언니는 더욱 사랑이 많아졌습니다.(언니가 읽고있는 성경은 킹제임스 흠정역성경이 아닙니다) 워낙 이기적인 저도 흠정역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언니와 안부전화 속에서...구원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언니를 볼때 언니가 성경말씀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잘못되어진 말씀부분으로 불안해하는구나 ..느껴져 그냥 슬퍼질때가 있습니다. 내 언니가 삶이 힘들게 느껴질 때가 있을지언정 불안해하며 생활하지 않길 바랍니다.
2013-05-29 16:43:15 | 목영주
제귀에는 정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것이나 워셔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것이나 형제님들께서 말씀하시는것이나 그의도는 다 같은 말씀들을 하고 있는것이라 여겨지고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며 코끼리는 이렇게생겼어 아니야 저렇게 생겼어하고 논쟁을 하는것으로 생각되어집니다 다같은 코끼리를 만지면서요 진리에 어긋나는것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했고 무조건 사랑을 말하는것이 아니라했는대 또역시 그부분만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는것은 각개인의 생각의 폭이라 어쩔수 없는것 같읍니다 주님은 이런것으로 논쟁을 하는것을 기뻐하시지 않음으로 이부분에대해선 다시 글을 올리지 않겠읍니다 제가 말하고자하는것은 원칙적인것을 말하는것입니다 보시는분들의 판단에 맡기겠읍니다 진정한 진리와 진정한사랑은 본질상같은것입니다
2013-05-29 15:24:08 | 호소연
주신 의견에 감사합니다.진리와 사랑 사이에서 늘 고민이 많습니다.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그런데 너무 사랑을 강조하다 보면, 구원만 받으면 됐지, 더 이상 복잡하게 따질 필요가 없다는 식이 됩니다.그런 생각 때문에 오늘날 교회들이 무너지고 진리가 어지러운 상태가 되었으므로 진리를 바로 세울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진리를 너무 중요시하다 보면 성도간의 교제나 스스로를 성찰하고 성장하는 일에 소홀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그렇다고 진리를 양보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분의 말씀이 훼손되는 것을 막는 일입니다.그래서 성경지킴이 킵바이블의 정체성은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고, 그에 따른 실천과 적용은 각자의 몫입니다.그러므로 주신 의견은 감사하나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하는 일까지 지적하시면 곤란합니다.특히 어떤 것이 진짜 성경이냐가 중요하지 않다면 성경지킴이의 존재 이유도 없을 것이며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도 별 의미가 없으므로 우리 믿음의 이유 자체가 다른 종교인들처럼 착하게 서로 사랑하며사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 유연성이 종교다원화로 가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본 사이트의 취지를 잘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감사합니다.
2013-05-29 14:17:14 | 관리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함께함을 믿으며, 제 개인적 견해를 남기고자 합니다. 자매님의 상심이 글 중간에 나오는 폴워셔 목사님으로 인한 거라 생각하여 쓴 글이니 오해가 있을 수도 있으니, 너그러이 여겨주세요. 저는 정동수 목사님께서 폴워셔 목사님이 이단이다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가 전하는 대부분의 설교의 중심주제가 Lordship salvation(믿음+행위=구원)이라는 것이 성경의 지지와 근거를 찾을수 없는 이단교리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이것은 행위에서 나지 않았음을 믿습니다. 분명 성경에서도 믿음의 행위를 말씀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죄인이라는 자각을 하고 예수그리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 예수님의 믿음으로 성도의 삶을 살아가며, 이것이 구원받기 전의 삶과는 변화된 삶들이 믿음을 통해(근거根據로) 행위로 나타나 자연스러운 것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로 행위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의 판단 기준은 성경말씀의 기준으로 본인이 스스로 찾고 판단할 문제지 어떤 누구 그가 아무리 훌륭하고 성경지식이 뛰어나고 사람들의 많은 지지와 권위를 가진자가 판단과 정의를 내릴수 없는 문제입니다. 믿음의 행위는 성도의 삶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구원을 얻기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폴워셔목사님이나 다른 훌륭한 믿음이 선배들과 사역자분들은 소중하고 믿는 이들에게 본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말들이라해도 그것이 성경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동의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글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건 제가 미숙하고 미흡함으로 인한 것이니, 긍휼이 여기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신(시 138:2) 우리말로 번역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절대 기준으로 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 믿습니다.
2013-05-29 12:44:49 | 윤대원
저는  이홈페이지를  참  사랑하고  정동수 목사님  말씀을  경청하며  은혜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구석엔가슴  아프기도  합니다 우리  영혼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과  우리를  죄가운데서  구속하시기 위해 이땅에  보내주신  그의   외아들이신   진리가  되시는  예수그리도의  가르침외에  그어떤것을 가지고  옳으니  그르니 이것이  원어니  저것이  원어니 이것이  이단이니 저것이  이단이니  우리가  분별해야  하는것은 주님 은  무엇을  더  기뻐하실까  원어로 더  정확하게  올바르게  해석하는것을  더  기뻐하실까? 정말   잘못된  해석으로  주님이 말씀을  통해   의도하시는   뜻이  변개가  된다던가 성도들의  신앙삶에  치명적인  독소가  되서  잘못된길로  빠져버리게될  소지가  있는것외에는 바울선생이 말한것처럼 생각이  달라도  서로  용납하고.....삼일을  삼년이라  한들  삼년을  삼일이라한들 ....야고보서의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  했으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살아움직이는  행동하는 믿음을  믿음이라하는구나하고  그의도  한바를 같은  마음을  가지고  나누면되는것을 그렇게  말씀  전하시는  목사를  비판하고 그런   모임을 이단과  같이  취급해서  싸잡아  비판하고  부패한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바른말로  책망을  하시는 폴워셔  목사님  같은  귀한 분을  비판하는것은  그자체만으로도  진리를  분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것이라 생각됩니다  창세기에는  아담이  범죄한  그죄가  어떤것인지 우리의삶속에 어떻게 적용되어져있는지 묵상해  볼필요가  있읍니다     창세기에는"보아라  사람이  우리중  하나와 같이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 우리는  자동적으로  우리의   생각이  기준이 되어  판단하고  사고하는  인간이  되었읍니다    그래서 성경도   제각각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거리  해석하기  나름이고  니가  맞니  내가맞니 하고  논쟁을  하는것이지요  가장  정확한   해석은  주님만  아시고   주님은  정확한  해석보다   주안에서 서로 용납하고 주안에서 서로  사랑하라는것이지요 이렇게  말함 사랑하라는  말만 가지고  무조건  분별하지  못하고 사랑하라고  한다고  말하면  안되는것이지요  분명히  주안에서입니다  거듭난  형제들끼리는  생각과  의견이  달라도  서로 용납해야  한다는것이지요 아무곳에다  니골라당이니  하는말을  붙여  말하는것이  아니라  니골라당은  어떤짓을했기에니골라당이라하는지을  빚대어  비교해  말해야  하는것이고  신천지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정확히  알려주고    신천지와  같은  맥락에서  말해야  하는것이지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니까   바알세불을  힘입어  병고친다고하는것이나 바울을  향해  이단  괴수라하는것은 성령이  하시는일을  인간이  하나님의 뜻은  생각지않고   자 기  잣대로  판단해서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듯이 오늘날 목회자들의   말  한마디는   성령의  사역을 마귀의  사역이라고 할수도  있고 성령의사람을  마귀의  앞잡이라고도  할수  있는  그래서 성도들로  하여금 같은 오류를  범하게하는  그야말로 어떤것이  진짜성경이냐 보다  중요한  문제들을  놓치고  주님앞에가  책망  받을수있다는것을  명심 해야할것 같읍니다 사랑하는것보다  더  어려운것이  있다면   겸손해지는것이라  생각됩니다 겸손은 주님보다   앞서가지  않는것이고  주님은  어찌  생각하실까 돌다리  둘들겨보듯이   생각과  말을 주님을  의식하며 조심하는것입니다
2013-05-29 10:15:54 | 호소연
이스라엘 최근 뉴스를 몇개 모아 봤습니다. 에스겔서 38장 West Bank(서안지구)와 곡(러시아)과 이스라엘 전쟁에 대한 뉴스를 몇개 모아봤습니다.   Syria fighting rages, more chemical attacks reported http://www.reuters.com/article/2013/05/27/us-syria-crisis-idUSBRE94Q07D20130527   US Senate demands support for Israeli strike on Iran http://www.israeltoday.co.il/NewsItem/tabid/178/nid/23869/Default.aspx#.UaRaXIGCsmw.facebook   Putin: I know when world will end, not afraid of apocalypse http://youtu.be/DO14Hb5ra_c     Russia: "Attacking Iran would be a grave mistake" http://youtu.be/oF4zyZ56vdA     Russia Warns USA On Attacking Iran http://youtu.be/q8ffAeeDC2o     Russia ready to use military intervention to defend Iran and Syria from Israeli,  http://youtu.be/sxep6sF8M0c   이스라엘, 서안지구 '유대인 정착촌' 주택 296채 건설 승인 http://news1.kr/articles/1126891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이스라엘人 칼부림에 사망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3050110495421750&outlink=1  
2013-05-28 19:16:32 | 최호준
성경에 있는 단순하고 명확한 진리에 무엇이 부족해서 칼빈의 독선적 가르침을 따른단 말입니까? 신학을 10년이 넘게 공부하며 바다를 건너가 박사과정까지 마치고도 이 위대한 편집광이자 천재적 이론가에게 진리를 양보한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허다합니다. 위의 글을 읽고 그 집요한 가르침의 족쇄를 풀고 나오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늘어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광명한 태양처럼 빛나는 진리가 담긴 귀한 글을 이 아침에 만나게 해 주심에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3-05-28 08:15:35 | 김대용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하나님은 단 한명만이 하나님을 섬기게 될지라도 국가에서 종교를 강요하는 것을 원치 않으실겁니다. 그래서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가 보장이 되어야 합니다.
2013-05-27 22:58:28 | 길준남
다음의 글은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http://www.keepbible.com/Pds1-5/View/3oZ?stype=snc&keyword=%EB%8B%A4%EB%A5%B8%20%EC%9D%98%EA%B2%AC%EC%9D%84%20%EA%B0%80%EC%A7%88%20%EA%B6%8C%EB%A6%AC   중세 카톨릭 교회의 독재를 벗어나고자 했던 제네바 사람들은 칼빈이라는, 천주교 교황보다 더 완고하고 무서운 사람의 독재 아래서 신음하고 죽어가야 했습니다. 칼빈은 이 모든 흉악한 일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시행하였으며 이런 신정국가 독재주의의 근본 원리를 <기독교 강요>라는 책에 고스란히 담아 놓았습니다.   다음은 <기독교 강요>의 일부입니다.   “교회의 설교자들이 가져야 할 권한을 여기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관리하고 알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든 일을 감행할 권한이 있고, 이 세계의 위인이나 모든 권력자를 강요하여 하나님의 권위 앞에 머리 숙여 자기에게 봉사하도록 만들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명령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법령을 세울 수 있고, 사탄의 왕국을 쳐부술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양들을 보살피고 늑대를 절멸시켜야 하며, 복종하는 자들을 격려하고 가르치고, 반항하는 자들을 고소하고 절멸시킬 권한을 가진다. 그들은 결합할 수도 해체할 수도 있으며, 번개와 천둥을 내리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과거에 제네바에서 일어난 일들이 지금 이 시간 한국의 교회들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목사의 말 한마디에 벌벌 떠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심지어 국내외에서 킹제임스 성경을 쓰는 교회에서도 칼빈과 같은 독재자가 종종 생깁니다. 이런 목사들은 모두 성도들을 위해 그들의 자유를 억압할 수밖에 없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영혼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라면 교회에서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킹제임스 성경이 옳고 우리의 교리가 옳아도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을 욕하고 감옥에 집어넣고 죽이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합당치 않습니다. 예수님도 그리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런 일을 미워하셨습니다.   목사들이 베드로의 권면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혹시라도 성도들을 압제하는 일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1 너희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권면하노니 나 역시 장로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또한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고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해 하지 말고 오직 준비된 마음으로 하며 3 [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군림하지 말고 오직 양 떼에게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가 사라지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받으리라(벧전5:1-4).   다음은 칼빈에 대한 그 당시 인문주의자 카스텔리오의 평입니다. 아무도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토를 달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청교도 신앙이니 개혁주의니 하는 것을 잘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칼빈이라는 무서운 독재자의 사상을 그대로 지키려는 자들이 그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회보다 더 무서웠던 칼빈의 제네바 철권통치의 실상이 국내 성도들에게 자세히 알려지기를 원합니다. 다시는 이런 만행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진리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독재는 실로 그 어떤 것보다 더 무서운 것임을 역사는 잘 보여 줍니다.   샬롬   ---------------칼빈은 타고난 질서의 인간이었다. 불규칙한 것, 체계 없는 것은 수학적으로 정확한 그의 천성에 모두 어긋나는 것이었다. 사람들을 새로운 신앙에 알맞도록 훈련시키려고 한다면, 우선 그들에게 무엇을 믿고 고백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그들은 무엇이 허용된 것이고 무엇이 금지된 것인지 정확하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지상의 왕국처럼 모든 정신의 왕국도 눈에 보이는 경계선과 법칙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칼빈은 석 달이 지나자 벌써 <교리문답서>를 시의회에 제출했다. 그것은 개신교의 기본 원칙들을 21개 조항으로 정확하게 요약한 것이었다. 이 <교리문답서>―어느 정도는 개신교의 십계명으로서―는 시의회로부터 원칙적인 동의를 받았다.   그러나 칼빈은 단순한 동의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단 한 점도 벗어남이 없는 완전한 복종을 요구했다. 교리를 형식화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를 따를 것인지, 그리고 어느 정도나 따를 것인지 하는 자유가 여전히 개인에게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교리문제와 생활에서 한 치의 자유도 허락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정신적․종교적인 문제에서 개인의 내적인 확신을 위해 단 한 줌의 여지도 남겨둘 생각이 없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교회는 모든 인간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할 권리뿐 아니라 의무를 가지며, 단순히 열의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벌을 내려야만 했다.   “다른 사람들은 달리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 직무가 설교를 마친 뒤에는 자기 의무를 다한 것처럼 편안하게 무릎 위에 손을 놓고 있어도 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교리문답서>는 단순히 신앙의 노선만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국가법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제네바 시민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공개적으로 이 교리문답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따르기로 맹세하는 일을 직권으로 강요해달라고 시의회에 요구했다. 시민들은 초등학생처럼 열 명씩 ‘장로’(長老)의 안내를 받아 교회에 가서는 오른손을 들고 장관이 낭독하는 맹세를 같이 해야만 했다. 이 맹세를 거부하는 사람은 곧바로 도시를 떠나라는 강제명령을 받았다. 이 요구는 매우 단호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종교문제에 관한 한 칼빈의 요구와 견해에서 머리카락만큼만 벗어나도 제네바 성벽 안에서 살 수 없다는 뜻이었다.   루터가 요구한 “기독교인의 자유”는 제네바에서 끝이 났으며, 종교가 개인의 양심의 문제라는 생각도 종말을 고했다. 논리가 윤리를 지배하게 되었고, 문자가 종교개혁의 정신 위에 놓이게 되었다. 칼빈이 이 도시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제네바에서는 어떤 형태의 자유도 끝나고 말았다. 이제 단 하나의 의지 [칼빈의 의지]가 모든 사람의 의지 위에 놓이게 되었다.   모든 독재는 폭력 없이는 생각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다. 권력을 유지하려는 사람은 권력의 수단을 쥘 필요가 있다. 명령하는 사람은 형벌을 줄 권리도 함께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칼빈의 임용조건에 따르면, 그에게는 교회의 위반사례에 대해서 추방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었다. 시의원들은 신자들에게 성서를 해석해주는 ‘성서 강사’를 초빙했을 뿐이었다. 즉 설교를 함으로써 신자들을 올바른 신앙으로 이끌 설교자를 초빙한 것이었다.   시의원들은 시민들의 법적․도덕적인 태도에 대해 형벌을 내릴 권한은 자신들의 재판권에 속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루터도 츠빙글리도 다른 어떤 개혁지도자들도 그때까지 시 당국에 이러한 권한이나 권력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천성이 권위적인 칼빈은 시 당국을 자신의 명령과 지시를 실천하는 기관으로 격하시키기 위해 초인적인 의지를 쏟아 부었다. 법적으로 그런 권한이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는 제명이라는 수단을 도입해서 그런 권한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만찬이라는 종교적 신비를 천재적으로 이용해서 그것을 개인적인 권력과 압제의 수단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칼빈파 설교자는 평소 도덕적인 태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만을 ‘주님의 만찬’에 와도 좋다고 허용했다. 그러나 설교자의 만찬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바로 여기에 이 무기의 힘이 실려 있다―은 시민으로서도 끝장이 나버린다. 아무도 그와 이야기하거나 물건을 팔거나 사서는 안 되었다. 그럼으로써 종교적 관청이 이용하는 순전히 종교적인 조치가 곧바로 사회적인 조치로 바뀌고 사업상의 보이콧으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추방된 사람이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설교자가 요구하는 공적인 참회를 거부하면 칼빈은 그에게 추방을 명령했다. 칼빈의 적대자는 비록 가장 존경받는 시민일지라도 제네바에서는 계속 살 수 없었다. 종교적으로 불만을 가진 사람은, 그때부터 시민으로서의 생존에도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이 번개를 손에 든 칼빈은 자기에게 저항하는 모든 사람들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단 한 번 대담하게 움켜쥐는 행동으로 그는 번개와 천둥을 손에 쥐게 되었다. 전에는 도시의 주교도 감히 가져보지 못한 무기였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끝없는 심급 과정을 거쳐야만 교인 한 명의 추방을 결정할 수 있었다. 카톨릭 교회의 파문은 초개인적인 행동으로, 어떤 개인의 독단적 판단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권력의지를 추구하는 경우에는 대단히 합목적적이고 냉혹했던 칼빈은, 그러나 이러한 추방권을 일상적인 일처럼 설교자들과 종교국에 넘겨주었다. 이 무시무시한 위협을 거의 규칙적인 형벌로 만들고, 테러의 효과를 잘 계산하는 심리전문가로서 이 형벌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서 자신의 개인적인 권한을 무한정 높였다.   제네바 시 당국은 아주 애를 써서 간신히 칼빈이 요구한 대로 만찬을 한 달에 한 번이 아니라 일 년에 네 번으로 제한했다. 그러나 칼빈은 이 강력한 무기를 다시는 자기 손에서 내놓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가진 뒤에 그는 비로소 진짜 싸움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총체적인 권력을 얻기 위한 싸움이었다.   대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한 국민은 독재체제의 일시적인 이점들, 그 엄격한 규율과 강화된 집단적 작용력이 언제나 개인의 권리들을 희생시키며, 모든 새로운 법칙은 예외 없이 과거의 자유를 대가로 지불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제네바에서도 이제 서서히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시민들은 정직한 마음으로 종교개혁에 동의를 표시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중앙 광장에 모여들어서 독자적인 인간으로서 손을 높이 쳐들고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제는 형리의 감독 아래 있는 포로들처럼 열 명씩 짝을 지어 도시를 가로질러가서 교회에서 칼빈의 21개 조항에 대해 맹세해야 한다는 사실에 공화주의적인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단지 한 잔의 포도주를 마시면서 즐겁게 노래했거나, 아니면 칼빈이나 파렐의 눈에 너무 울긋불긋해 보이는 옷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새로 온 설교자로부터 추방의 위협을 받으려고 엄격한 관습개혁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도대체 이토록 건방지게 구는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고 시민들은 스스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네바 시민인가? 이전부터 이곳에 정착해 살면서 이 도시의 위대함과 부를 함께 만들어온 사람들인가? 입증된 애국자인가? 수백 년 전부터 최고 가문의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방금 흘러들어온 망명자들에 불과했다. 그들을 친절하게 맞아들여서 방과 거처를 제공해주고 좋은 일자리도 마련해주었다. 그런데 이웃나라에서 온 관세징수인의 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형제와 친척들을 이 따뜻한 보금자리로 불러들이더니, 이제는 이 땅에 뿌리박고 살아온 시민들에게 수치를 안겨주고 책망을 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고용한 이 망명자가 이제 와서 누구는 제네바에서 살아도 되고 누구는 안 되는지를 경정하고 있다니!   독재 초기에 자유로운 사람들이 아직 완전히 억압되지 않고, 독립적인 사람들이 모두 쫓겨나기 전까지는 언제나 저항이 어느 정도 뿌리를 가지는 법이다. 제네바에서 공화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마치 거리의 도둑처럼’ 야단맞을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공공연히 떠들었다. 몇몇 거리, 특히 알레망 거리에서는 맹세를 거부하자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자신은 맹세도 하지 않을 것이고, 이 떠돌이 프랑스 가난뱅이들의 명령에 따라 고향을 떠나지도 않겠노라고 투덜거렸다.   칼빈은 자기에게 헌신적인 ‘작은 시의회’를 이용해서 실제로 맹세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추방령을 내릴 수는 있었지만, 이 인기 없는 조치를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리고 새로운 선거의 결과가 드러나자 시 당국이 칼빈의 독선을 거부하리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무조건 그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은 1538년 시의회에서 열세가 되었다. 제네바에서 민주주의 칼빈의 권위적인 요구에 맞서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 
2013-05-27 17:30:47 | 관리자
사람은 심지어 지옥마저도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물론 그 선택에 대한 대가는 본인이 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무력으로 자유를 꺾어버리는 것은 목사나 교회가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순히 가르치고 알리고 전할 뿐입니다. 그 이후의 선택은 모두 개개인이 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나 칼빈처럼 듣지 않는다고 무력으로 사람을 제압하는 일을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선하고 바른 교리와 좋은 인격을 선택하는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샬롬
2013-05-23 14:12:07 | 관리자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 오해하는 분이 많습니다.   제임스 왕이 동성애자이기에 킹제임스 성경은 좋지 않다고 하는 자들도 있고제임스 왕이 프리 메이슨(Free mason)이라 킹제임스 성경은 좋지 않다고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런 시도는 다 허수아비를 때려서 실체를 죽이려는 것으로서 역사의 증언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허수아비를 쳐도 실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역사 부록에 실린 ‘제임스 왕’에 대한 글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킹제임스 성경만큼 동성애를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정죄하는 성경은 없습니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2170   그런데도 제임스 왕이 동성애자라고 하는 것을 보면 어이가 없습니다.   제임스 왕이 프리 메이슨이라는 말은 아마 그의 복장 등을 보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영국이나 미국의 왕궁이나 의사당 빌딩, 왕의 제복 등에는 프리 메이슨 상징들이 더러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과 제임스 왕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제임스 왕이 번역한 성경이 아닙니다.그는 국가의 통치를 위해 그 성경을 번역하라고 지시했을 뿐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킹제임스 성경」 본문의 정확성에 대한 권위는 1611년 판 「킹제임스 성경」의 초판 인쇄본에 있지도 않고, 제임스 1세의 인품에 놓여 있지도 않으며, 엘리자베스 시대 영국 문학의 뛰어난 업적에 있지도 않고 심지어 그리스어 「공인본문」에 있지도 않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KJV)이라는 절대 무오한 말씀의 권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겠다고 하신 약속과 그분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시12:6-7).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이 시간에 그분의 말씀이 손 안에 있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2013-05-23 14:02:41 | 관리자
개혁주의(칼빈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도의 권위도 부여받은 적이 없는 칼빈의 신학에 틀린 점이 있다는 것, 더 나아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가정조차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대로 1948년 이스라엘의 부활로 그들의 신학은 벼락을 맞아 밑동부터 통째로 잘려 쓰려져 버린 죽은 나무처럼 되었는데 아직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 부분만 보면 그들이 그토록 저주하는 로마 카톨릭의 오류와 과연 무엇이 다를까요? 나를 구원으로 인도한 전도자이든, 혹은 소위 영적 멘토라 여길만한 사람이든 그 누구든 나 자신이 믿는바 성경대로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 발견되면 언제든 그 모든 것을 한 줌의 배설물로 여기고 바로 돌아설 수 있는 용기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따돌림당하여 박쥐 신세가 되어도 내 안에 성경의 진리를 타협하지 않을 수 있는 이 장중한 복락을 절대 양보하지 않고 인생의 결승점까지 뛰어가기만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유태인 탄압을 피해 헤매는 고단한 삶과 극심한 우울증 속에서도 지성의 불꽃을 태워 생산한 역작을 자살한 사람의 가치 없는 책정도로 깎아내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없길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예리한 통찰력을 펜 끝에 집중해 이토록 위대하고 고결한 권리와 자유를 역설한 명작을 소개해 주심에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3-05-23 13:47:46 | 김대용
안녕하세요?   5월 17일에 행한 "재림의 징조: 뉴에이지" 세미나 동영상 3개가 편집되어 우측 상단의 웹하드에 있으므로 누구나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세미나의 모든 자료가 다 편집되어 들어가 있고 HD 고화질로 되어 있으므로 집에서 TV를 통해 아니면 큰 모니터 컴퓨터를 통해 보시면 세미나에 오신 것처럼 보실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 등에서도 다운받아 같이 볼 수 있습니다.   마음대로 배포해도 됩니다.   곧 유튜브와 사이트에도 올릴 것입니다.   그래도 자료가 필요한 분은 다음에서 다운받기 바랍니다.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3&write_id=112   감사합니다.   샬롬
2013-05-23 12:33:49 | 관리자
오늘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서 기다리는 중에 "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동안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던 회개에 대한 설명이 잘 되어 있어서, 시간상 건강상 습관상 책을 읽지 못하는 분들에게 제가 읽은 내용의 일부분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가끔 저희 교회 홈피와 유튜브를 통한 말씀에 감명 받아 교회를 찾아온 분들 중에는 특히 설교에서 선포하는 죄와 회개 부분에 공감하고 찾아온 분들이 있었습니다.처음에 와서는 너무나 감동되고 감화되어 이전 교회에서 하던 봉사를 스스로 해야겠다고 예배당 청소를 자청하는 모습에 저희는 몸 둘 바를 몰랐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강조하는 부분은 회개였습니다.회개가 있는 믿음.정말로 너무나 안이하고 습관적인 신앙생활에 젖기 쉬운 생활 속에서 그러한 생각은 나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왠지 그분들은 충분히 채워지지 않는 말씀과 회개의 외침 때문인지 얼마 후 떠났습니다.그리고 가끔 믿음이 무언지 고민하는 분들과 전화 통화를 하다 보면 회개에 대해 혼란 때문에 믿음의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느꼈습니다.이에 대해 딱히 설명할 재주가 없었는데 오늘은 이 책을 읽으며 회개에 대한 부분이 있어 발췌해서 적습니다. 4장 율법적 회개인가, 복음적 회개인가? 중에서 믿는 자들을 다 싸잡아서 개독이라 부르는 시대를 살며 “왜 이렇게 되었나, 무엇이 잘못 되었나, 정말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인가?” 라며 반성의 부담을 느끼는 우리들에게 강력한 회개의 메신저로 다가온 자들은 신사도 운동의 선구자들이었다. 신사도 운동 교회들의 강한 회개의 외침은 이런 상황과 잘 맞아 마치 천상으로 호출되어 진노의 하나님을 대변하고 곧 세상에 보내어진 선지자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교회만 다니면 구원받습니까?예수를 영접한다고 기도만 하면 다 구원받습니까?죄를 짓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까?회개하지 않고 어떻게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습니까?회개하세요. 회개하지 않으면 믿는 자도 지옥에 갑니다. 신사도 운동은 복음을 왜곡하면서 회개에 대한 강박 관념만 가지게 한다.사람들은 그들의 설교를 듣고 금세 회개 병에 동화된다.회개해야 해! 회개해야 해! 회개해야 해! 라며 쉽게 노래하는 사람들이 되면서 그런 이상한 회개의 열기를 전파하는 선지자들로 변해 버린다.그럴수록 십자가의 진리와는 점점 더 멀어지는 확실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신사도 운동가들이 전하는 회개는 복음적이지 않고 율법적이다.율법적으로 회개한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보내실 형벌을 예상하고서 그 형벌로 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회개하는 것을 의미한다.회개하게 만드는 원인은 하나님의 진노이고 신자가 회개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진노 아래 떨어지지 않고 현재의 행복과 번영을 유지하려는 것이다(중략). 회개의 개념과 중요성을 강조하고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겸비해져야 한다고 하니 사실 여간 혼란스럽지가 않다.그러나 그런 회개는 절대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회개가 아니다 그런 말을 듣고 아무리 회개를 많이 해도 마음에 평안이 오지 않고 영혼이 행복하지 않다(중략). 율법적인 회개에 세뇌당하면 계속 이러한 진노와 회개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영원한 구원으로 인한 성도의 행복과 기쁨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확실한 은혜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 성도에게 주신 자유 등 기독교 신앙의 중심 기둥들이 부러지고 만다. 그래서 사탄은 시의 적절하게 회개 사상을 퍼트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해야 할 회개는 복음적 회개이다. [구원 받은 이후] 복음적 회개의 원인은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이 아니고 이미 경험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이다.심판을 피하기 위해 억지로 하는 회개가 아니고 십자가를 통하여 그분께서 보내신 성령의 감동을 입어 변화된 마음으로 인한 자발적인 회개다.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고 그 말씀에서 벗어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됨으로 회개하게 된다.그러므로 회개가 많아지고 깊을수록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다,회개하는 영혼은 더욱 행복해지고 자유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두려움이 없어진다,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성도의 복음적 회개다. 여기서 재미있는 예화 하나를 들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각각 크고 작은 다양한 죄를 짓고 사는 죄인들이다. 그래서 누가 강하게 회개해야 한다고 외치면 대부분의 사람은 마음이 찔려서 고개를 숙인다.아무 사람에게나 무작정 “당신의 죄가 드러났습니다!” 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은 두려워하게 되어 있다 오래전에 영국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유명 정치인 10여 명에게 아무런 보충 설명을 달지 않고 “다 들통 났습니다!” 라는 문장의 전보를 보냈다 그러자 전보를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대로 사라져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다양한 종류의 죄를 항상 짓고 산다.성도들에게도 죄가 있기는 마찬가지다.죽은 사람들에게만 죄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성도는 마음이 순수하고 여리다. 그래서 믿는 자들이 더 신사도 운동의 회개에 쉽게 속아서 휩쓸리는 것이다. 회개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없어진 자리에 뜻 없는 열심과 기도 회개 봉사 충성 순종 찬양 기적 입신 방언 등이 들어선다. 이상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중에서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117558  
2013-05-22 22:14:45 | 관리자
안녕하세요?   앞으로 시간이 주어지면 칼빈주의의 문제를 다루는 소책자를 내려고 합니다.   칼빈주의(개혁신앙)의 5대강령(TULIP)에 대해서는 들어본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비성경적인 독재 교리가 나왔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오늘 전주에 있는 한 형제님으로부터 칼빈(칼뱅)의 만행을 자세히 설명한 책을 소개받았습니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42807X&start=slayer   신정 정치로 인간의 기본 자유를 말살시키려 했던 칼빈과 그 시대의 정신을 읽으면 왜 칼빈주의가 비성경적인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1948년 5월 이스라엘의 부활을 기점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했을 칼빈주의가 청교도 신앙과 개혁주의라는 기치를 걸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을 속이고 있습니다.   특히 칼빈주의 산물인 Lordship salvation은 여러 사람을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http://keepbible.com/Study5/View/3MF?page=4   시간을 내서 위의 책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샬롬
2013-05-22 14:14:47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