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안 하는가? (주기도문)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날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빵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우리를 건지시옵소서.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마6:9-13).
Lord's prayer
Our Father which art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 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forgive our debtor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한국의 개신교회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경우에 주기도문을 암송합니다.
(1) 목사가 없는 교회에서 - 또는 목사가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 예배를 마칠 때(목사가 있는 교회의 예배는 목사의 축도로 마침) (2) 수요 예배나 금요 기도회 등 기도회 성격의 예배를 마칠 때 (3) 전도사나 교육 전도사 등 목사 안수를 받지 못한 교역자가 지도하는 교회 학교의 예배를 마칠 때(전도사나 교육 전도사가 지도하는 교회 학교의 예배라도 마치는 시간에 목사가 와서 축도를 하는 경우도 있음) (4) 가정 예배를 마칠 때 (5) 교회의 각 기관에서 회의를 마칠 때(6) 기타 주로 공예배 외의 예배나 집회 또는 모임을 마칠 때
이처럼 주기도문은 주로 예배를 마칠 때 많이 암송하고 있습니다. 또 주기도문은 목사가 없을 때 축도 대신 암송하기도 하며 목사가 있어도 예배의 성격에 따라 주기도문 암송으로 예배를 마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목사가 참여하지 않은 예배를 끝날 때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이유를 물으면 많은 분들이 주기도문에 축도와 비슷한 영적/물적 축복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개신교회와 달리 자유교회에서는 예배에서 주기도문을 암송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그 이유와 주기도문 암송에 따른 문제들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주기도문의 배경
‘주님의 기도’(Lord's prayer)는 실제로 주님이 하신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가르쳐 준 대로 형식에 가득한 위선적인 기도를 늘 반복해서 암송하였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에서 유대인들의 이런 잘못된 기도 관행을 고쳐주시기 위해 이 샘플 기도를 주셨습니다.
5또 너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들의 보상을 받았느니라. 6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7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반복의 말을 사용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 8그러므로 너희는 그들과 같이 되지 말라. 너희가 너희 아버지께 구하기 전에 그분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시느니라(마6:5-8).
이 말씀이 끝난 뒤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처럼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기도해야 할 샘플 기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의 제목은 ‘제자들의 기도’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 주님은 결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항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주기도문의 오용
근본적으로 이교도들은 7절에 있듯이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면 자기들의 신이 기도를 잘 들어줄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오늘날에도 기독교를 제외한 이방 종교의 중, 신부, 수녀 등이 묵주를 들고 똑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교도들의 특징이며 그 당시 유대인들도 이런 관행에 빠져 있었으므로 주님은 이렇게 하지 말라고 이 기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모임에서든지 끝날 때에 반복적으로 이 기도를 외우는 것은 주님의 의도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또 어려움을 겪을 때 주기도문을 많이 외우면 문제가 풀린다는 주장도 이교도들의 생각과 같습니다. 즉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목석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런 쓸데없는 반복 기도를 지겨워하십니다.
이처럼 주기도문이 주어진 명백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 신자들은 여전히 주기도문을 글자 그대로 따라서 기도해야 한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기도문이 무슨 특별한 영향력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고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외웁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 정반대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더욱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붓지 단순히 암기한 말들을 암송하지 않습니다(빌4:6-7).미국의 교회들 중에 주기도문을 시도 때도 없이 암송하는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아마도 복음을 받아들인 뒤 어느 시점에 누군가가 주기도문 암송을 강요한 것이 지금까지 교회의 규례로 남아 있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기도문 암송 관행은 먼저 천주교회를 통해 중국에 전달되었고 그 뒤에 한국의 개신교회에도 전달되었으리라 여겨집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기도
천주교회는 기도에 대해 무어라 말할까요? 그들의 말을 직접 들어 봅시다.
기도는 내적인 충동이 자연발생적으로 분출되어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곧 기도하자면 먼저 기도하려는 원의가 있어야 한다. 성서가 기도에 대해서 알려 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니 기도하는 방식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살아 있는 전승인 성전(聖傳)을 통해서 ‘믿고 기도하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신다. [카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서, 제4편 p.903 #2650]
카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서 인용문에서 우리는 심각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두 가지 진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교리 문답서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기도는 내적인 충동이 자연발생적으로 분출되어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그 반대입니다! 성경에는 자연발생적으로 분출한 기도의 예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기도를 들으십니다.
내가 내 목소리로 주께 부르짖으매 그분께서 자신의 거룩한 산에서 내 말을 들으셨도다. 셀라(시3:4).
오 주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나를 고치셨나이다(시30:2).
백성들아, 너희는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으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피난처시로다. 셀라(시62:8).
로마 카톨릭주의의 기도는 자발적으로 자연스럽게 마음을 쏟아 놓는 것이 아니라 기도문에 쓰여 있는 단어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이교도들이 하는 행습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러한 기도 방법을 금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반복의 말을 사용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마6:7).
둘째, 카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서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성서가 기도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니 기도하는 방식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살아 있는 전승인 성전(聖傳)을 통해서 ‘믿고 기도하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신다.
여기서 교리 문답서는 성경이 성도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성도들에게 반드시 카톨릭 교회가 있어야만 함을 뜻합니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가 있기 오래 전에도 사람들은 기도했고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그의 여종들을 치료하사 그들이 자녀들을 낳게 하셨으니(창20:17).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주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민11:2).
성경의 성도들은 카톨릭 교회의 도움 없이도 자발적으로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이렇게 초청하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들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고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연 발생적인 감정의 표현을 인정하실 뿐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장려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에 박힌 듯이 주기도문 같은 것을 암송할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울려나오는 진심어린 기도를 우리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주기도문의 교리적 문제
1. 율법적 구문
주기도문에는 신약시대 구원의 교리와 상반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엄밀한 의미에서 이 구절은 율법의 요약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면 그 대가로 주님이 무엇을 해 주신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1차적으로 율법 하에서 율법의 의무를 지닌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의미 없이 외우다가는 연약한 지체들이 구원의 은혜를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부분이 더러 나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시편 51편을 사랑하여 외운다고 합시다. 밧세바와 간음한 이후에 책망을 받은 다윗이 자신의 참회의 심경을 여기에 적었습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내용이지만 11절은 우리가 따를 수 없습니다.
나를 주의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거룩한 영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개역성경은 이것을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말라’고 기록합니다. 국내에는 이 부분을 그대로 담은 복음성가가 유행하므로 사람들이 이런 노래를 통해 주님께서 성령님을 거두어가는 일이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구약시대에나 가능하지 신약시대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신약시대에는 한 번 구원 받으면 신자 내에 성령님이 영원히 내주합니다. 이것은 마치 “한번 해병대면 영원히 해병대다!”라는 구호와 비슷합니다. 아마도 해병대가 성경에서 이런 구호를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습니다!”
성령님은 절대로 신자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여전히 구약시대에 살면서 헤매게 됩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소서.”라는 구절도 사실 이 경우에 해당합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사는 우리는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주님의 은혜로 값없이 모든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대로 믿고자 하는 미국 침례 교회 성도들과 자유교회 성도들은 결코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습니다.
2. 천주교 주기도문과 개신교 주기도문의 차이
천주교인들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구절이 없는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그 이유는 카톨릭 성경을 번역할 때 사용된 바티칸 사본의 본문이 신약시대 다수 성도들이 사용한 본문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개역성경도 마태복음 6장 13절에 각주를 달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은 고대 사본에 없다고 표시하였습니다. 개역성경이 말하는 그 고대 사본이 바로 천주교회의 바티칸 사본입니다. 그러므로 카톨릭 신자들은 이 부분을 외우지 않습니다. 그들의 성경 원본에 이 부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으므로 그냥 괄호를 쳐서 중간 지점에 머물고 있습니다.
성경은 교리를 확립하기 위해 주어진 책입니다.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시는 메시아 왕국의 중요성을 말씀하시기 위해 맨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주신 것입니다.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
3. ‘대개’의 문제
한국의 개신교회에서는 주기도문을 암송하면서 ‘대개’라는 말을 넣기도 하고 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인들은 이 부분에서 ‘대개’를 넣어 암송하기도 하고 어떤 교인들은 뺀 채 암송합니다.
그럼 ‘대개’를 넣어야 맞을까요, 아니면 빼야 맞을까요? 이에 앞서서 더 큰 문제는 그 뜻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호티’라는 그리스어 접속사 - 영어로는 for - 가 사용되었는데 그 의미는 ‘왜냐하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기도문의 앞부분에 있는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는 이유는 [메시아]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대개’로 번역했을까요? 그것은 1930년대에 우리말로 성경을 번역하던 때에 ‘중국어 성경’을 참조했기 때문입니다. 초기 중국어 성경에서 ‘大槪’ 혹은 ‘大蓋’로 번역한 것을 우리말 번역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대개’는 ‘대체적으로’ 혹은 ‘대략적으로’라는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중국 성경도 ‘以’ 또는 ‘因爲’로 번역하여 바로 잡았습니다.
우리나라 성경의 경우 1936년 신약성경에는 ‘대개’로 썼다가 그 뒤 그 번역이 원문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대체로’라는 뜻으로 오해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아예 생략하여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사용하고 있는 주기도문에는 아직도 ‘대개’가 들어가 있습니다.
4.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의 왕국’이 임한다
그냥 ‘나라’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의 왕국’이 땅에 임하는 것이 주기도문의 핵심 주제입니다.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하늘의 왕국’(Kingdom of heaven)은 성도가 죽어서 가는 ‘천국’(Heaven)이 아닙니다. 신자가 죽어서 가는 천국은 성경에서 ‘하늘’(Heaven)로 번역되었습니다. 기존의 우리말 성경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4:17) 등에 나오는 천국은 원래 ‘하늘의 왕국’이며 이것은 결코 신자가 죽어서 가는 천국 즉 하늘나라가 아닙니다.
중국어 성경을 참조하여 우리말 성경을 번역한 분들이 땅에 임하는 하늘의 왕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중국어 번역처럼 ‘천국’으로 번역하여 교리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켜 왔습니다.
신구약성경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진 왕국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는 것이며(엡1:6; 12; 14) 그래서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왕국에 대한 개념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 동방에서 온 지혜자들이 “유대인들의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 계시냐?”라고 물었으며(마2:2) 그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도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하셨습니다(마4:17). 또 그분께서 돌아가실 때 십자가 위의 명패에도 ‘이 사람은 유대인들의 왕 예수’라는 글이 붙었습니다(마27:37).
예수님은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의 왕으로 즉 그들의 메시아로 오셔서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메시아 왕국을 그들에게 제시하셨으나 배척당하시고 결국 그들의 왕으로 돌아가시면서 새 상속 언약 즉 신약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왕국을 잘 이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의 시작부터 하나님의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였으며(막1:1, 14) 그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구절에서 사용된 그리스어 ‘바실레이아’는 왕국이며 예수님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문자 그대로 실제로 땅에 임하게 하사 그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왕국 즉 ‘하늘의 왕국’을 제시하셨습니다(마4:17).
하늘의 왕국은 대언자 다니엘을 통하여 이미 오래 전에 예언된 왕국으로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세우시는 왕국입니다.
이 왕들의 시대에 [마지막 때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한 왕국을 세우실 터인데 그것은 결코 멸망하지 아니하리이다(단2:44).
예수님은 바로 이 왕국을 유대인들에게 제시하시고 침례자 요한의 사역과 각종 기적과 이적과 표적을 통해 자신이 메시아임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도적으로 그분을 거부했고(마23:37-39) 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전달되었습니다(롬11:30-31).
한편 예수님의 재림 전에 선포될 복음도 천국 복음이 아니라 왕국의 복음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곧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 왕국의 이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언되기 위해 온 세상에 선포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3-14).
여기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목숨을 내걸고 주님께 헌신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이 끝나는 때까지 견디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1차적으로 유대인들 가운데 믿음으로 7년 환난기를 통과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그들은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른 뒤에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이 성취될 때에 구원받는 자들입니다(롬11:26). 그래서 7년 환난기에는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다.”는 왕국의 복음이 전 세계에 퍼지고 그 이후에 우리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셔서 이 땅에 문자 그대로 1,000년 동안 메시아로서 철장 권세를 가지고 천년왕국을 세워 통치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신실한 성도들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랐고(눅2:30-34; 38) 그래서 처음부터 그들에게는 왕국의 도래가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구속이 사라진 것으로 생각하고 실망에 잠겼지만(눅24:21) 그분의 부활 소식을 듣고는 그분이 승천하기 전에 무엇보다 먼저 왕국의 회복에 대해 물었습니다.
주여, 주께서 이때에 그 왕국을 이스라엘에게 다시 회복시켜 주고자 하시나이까?(행1:6)
이때에 그분께서는 왕국의 회복이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으므로 너희는 나가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셨고(행1:7) 이에 그들은 왕국의 회복을 바라며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강하게 권면했습니다(행3:19-26).
복음의 초기에는 이렇게 왕국의 회복과 관련해서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이 선포되었으며 이방인들의 구원은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나서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유대인들의 회개가 거의 불가능함을 보여 준 사건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복음 사역은 유대인 중심에서 이방인 중심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주후 70년에 로마의 티투스가 예루살렘과 성전을 훼파시키고 유대인들을 추방하여 왕국의 회복은 이방인들 중심의 교회 시대 이후로 미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구약의 대언자들이 말하고 예수님이 초림 때에 세우려 했던 하늘의 왕국은 그분의 재림 이후에 천년왕국에서 문자 그대로 위엄 있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기존의 우리말 성경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모든 성경에서 왕국으로 번역된 ‘kingdom’은 성경에 342회 나오며 이것은 원래 ‘왕권’(kingship)을 의미했으나 후에는 주로 왕이 다스리는 통치 체제 즉 왕국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단어를 ‘나라’나 ‘천국’ 등으로 일관성 없게 번역하면 성경의 핵심 주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 결과 인본주의자들은 누가복음 17장 20-21절 등을 인용하며 천국이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고 주장합니다.
기존 우리말 성경의 ‘나라’는 원래 왕국입니다. ‘왕국’을 ‘천국’ 혹은 ‘나라’로 바꾸는 것은 성경 전체의 핵심 주제를 완전히 가려 성도들의 성경 이해를 가로막는 심각한 폐해를 낳으며 그 결과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다는 이스라엘 대체신학이 주류를 이루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주기도문은 바로 이 ‘하늘의 왕국’이 유대인들에게 속히 임하여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유대인들이 간구해야 함을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말 성경은 이런 기본적인 교리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게 용어가 변경되어 있습니다.
주기도문에 대한 결론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가르쳐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하나의 모범 기도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며 기도에 포함되어야 할 것들을 알려줍니다. 또한 주기도문은 결정적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기도드릴 대상이 하나님 아버지임을 가르쳐줍니다. “그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이심으로 인해 그분을 찬양할 것을 가르칩니다. 이 외에도 주기도문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실 것, 죄를 극복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 사악한 자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실 것 등의 간구가 들어 있습니다.
이런 좋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주기도문은 반복해서 외우는 것을 금하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 유대인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샘플 기도입니다.
그러면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이 잘못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주기도문을 하나님께 그대로 암송해 드리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어떤 성도가 진심으로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시는 것은 그분과 교통하는 것이며 또 우리 마음에서 진심으로 흘러나오는 말이지 우리가 암송하는 특정한 형태의 말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개신교회에서 주기도문을 외우시는 분들도 이런 내용을 이해하고 바르게 행하면 좋겠습니다. 즉 의미 없이 예배나 모임의 끝에 주기도문을 붙이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외우지 않는 분들도 외우지 않기 때문에 극도의 자만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소서.”라는 구절이 교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들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사실 구원받은 성도로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소서.”라는 구절의 의미를 잘 이해하면 남을 배려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 자체를 천년왕국의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주장하며 용서와 긍휼을 베풀라는 주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오히려 알기 때문에 더 큰 정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알면 아는 것 이상의 것을 행해야 합니다. 잘 모르는 처지의 형제들을 이해해고 진리로 잘 인도해야 합니다.
신약 교회의 초기부터 자유교회 성도들은 주기도문의 정신을 살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에게 경배하며 그분의 왕국이 이 땅에 속히 임할 것을 기도하고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기도해 왔습니다. 다만 예배 때마다 끝에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일은 반복하는 말로 암송 기도를 하지 말라는 주기도문 제정의 목적에 전적으로 위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에서는 암송하지 않습니다.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반복의 말을 사용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과 같이 되지 말라. 너희가 너희 아버지께 구하기 전에 그분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시느니라(마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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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성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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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8 10:19:43 | 관리자
왜 안 하는가?(사도신경)
사도신경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시며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혹은 공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Apostles creed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Ghos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Ghos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the life everlasting. Amen.
사도신경은 대부분의 개신교회에서 주일마다 암송하는 신앙고백문으로 다음과 같은 경우에 암송하는 것으로 공공연히 알려져 있습니다.
(1) 주일 낮 예배를 드릴 때 (2) 교회 학교에서 주일 예배를 드릴 때 (3) 새벽 기도회를 시작할 때(반드시 그런 것은 아님) (4) 특별한 성격의 예배를 드릴 때(예: 총회나 노회 등의 개회 예배) (5) 기타 예배 시 그 필요성이 인정될 때 (6) 또한 예배 인도자의 재량이나 예배의 성격에 따라서는 그 외의 예배 순서에 포함되는 경우도 많다. 예배를 마칠 때 주로 암송하는 주기도문과는 달리 사도신경은 예배 순서의 앞부분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현재 국내의 근본주의 침례교회 같은 자유교회는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 주로 천주교 산물이라는 이유로 - 사도신경을 암송하지 않습니다. 물론 미국의 주류 교회인 침례교회들도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전혀 암송하지 않습니다. 다만 국내에서는 사도신경을 예배에서 암송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이단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이상한 전통이 있으므로 이것은 조금 신중히 다루어야 할 문제입니다.
사도신경은 주 예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시고, 성령님에 의해 처녀 마리아에게서 수태되어 탄생하시고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수난, 부활, 심판 교리가 담겨 있으므로 이것 자체가 무슨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암송하는 사람도 주를 위해서 하고 암송하지 않는 사람도 주를 위해서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가지고 이단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것 자체가 사실 큰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우선 사도신경의 적합성에 대해 알아보기 위하여 사도신경의 정체를 역사적으로 추적해 보려 합니다.
사도신경의 정체
● 사도신경은 천주교회의 작품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설에 의하면, 주후 55년에 12 사도가 기독교의 요점을 요약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이때에 성령님의 감동에 의해 베드로가 사도신경의 처음 한 구절을 기록하자 나머지 사도들이 차례차례 한 구절씩 더하여 오늘의 사도신경이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어떤 이들은 사도신경이 사도들에 의해 제정되지는 않았지만 사도들의 신앙이 요약되었기 때문에 지금도 사도신경이라고 부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사실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입니다.
사도신경은 주후 300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초기 신약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신약 교회가 생긴 이래로 주후 100년경까지는 사도들이 살아 있었으므로 사도신경 같은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과 주님을 눈으로 목격한 이들이 다 떠나고 사도들의 제자인 속사도 또는 교부들의 시대가 이르자 침례 문답 때 간단한 문답서 같은 안내서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주후 100-125년경에 간단한 교리 문답서로 <신앙의 규율>(Rules of Faith)이란 것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록 어떤 이들은 주후 170-180년경에 현재와 비슷한 형태의 사도신경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며 증명된 적이 없습니다.
주후 325년의 니케아 신조,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결의, 431년의 에베소 결의, 451년의 칼케돈 신조 등은 역사적으로 교회 회의에서 사도신경을 제정했다거나 합의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음을 보여 줍니다.
정직한 역사가의 증언에 의하면, 주후 400년경에 활약한 암브로스 등이 사도신경은 사도들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뒤 주후 650년경에 사도신경에 ‘거룩한 카톨릭 교회’란 말이 삽입되었고 또 650년 이후에 ‘성도가 교통하는 것’이란 말이 다시 삽입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날의 사도신경이 주후 750년경에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 완성된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어떤 이들이 주후 381년경에 사도신경이 완성됐다고 주장하지만 그 당시 교회의 회의 자료는 사도신경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도신경은 결코 사도들의 작품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로마 카톨릭 교회가 많은 세월 동안 조금씩 발전시키고 보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사도신경의 교리적 문제
자유교회에서는 이런 신조를 기계적으로 암송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예배 시간에 암송하지 않습니다. 또한 사도신경에는 몇 가지 중대한 문제가 숨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우선 이것들을 설명하려 합니다. 다음 페이지의 표는 카톨릭 사도신경과 개신교회의 사도신경을 비교한 것입니다.
<천주교 사도신경과 개신교 사도신경 비교>
카톨릭교회의 사도신경
개신교회의 사도신경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저승(고성소)에 가시어(내리시어) 사흘 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심을 믿나이다.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으며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거룩한 공회(혹은 공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의 사함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삶을 믿나이다. 아멘.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1. 동정녀에 대하여
영어 사도신경을 보면 동정녀가 ‘Virgin’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 신성을 나타내는 명사 즉 ‘하나님’(God), ‘그리스도’(Christ), ‘성령님’(Holy Ghost) 등은 단어의 첫 글자가 대문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마리아는 ‘한 처녀’(a virgin)이지 결코 ‘그 동정녀’(The Virgin)가 아닙니다. 이것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치켜세워 신성화시킨 카톨릭 교회에서 나온 심각한 오류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천주교회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뒤에 평생을 동정녀로 살았다고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남녀 동생들은 그분의 사촌들이라고 주장합니다(마13:55-56; 막6:3; 요7:3; 갈1:19). 그리해야만 마리아가 하늘의 여왕 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친절한 중보자로 들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의 동정녀 또한 천주교회의 이런 사상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처럼 ‘a virgin’을 ‘동정녀’가 아니라 ‘처녀’로 바르게 번역해서 읽고 그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 부분은 명백하게 천주교회의 잘못된 믿음에서 나왔으므로 암송하더라도 뜻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2. ‘그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삭제됨
영어와 원어 그리고 카톨릭 교회의 사도신경에는 ‘He descended into hell’이 있지만 개신교 사도신경에는 이 부분이 삭제되어 없습니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그분께서 저승에 갔다고 버젓이 신성모독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묻히시고 지옥에 다녀오셨다.”고 번역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말로 그대로 번역하면 카톨릭주의에서 주장하는 연옥 - 카톨릭 교리에서 연옥은 천국으로 가기에는 자격이 부족하지만 지옥으로 갈 정도의 큰 죄를 짓지 않은 죽은 자들의 영혼이 머무르는 곳이다. 영혼들은 연옥에서 보내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해 이승에서의 죄를 씻고 정화한다. 연옥이 정죄계(淨罪界, 깨끗함과 죄 사이의 경계)나 정화소(淨化所, 깨끗해지는 장소)로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화의 방법으로는 ‘정화하는 불(purgatorius ignis)’이 알려져 있는데, 이는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는 ‘심판의 날에 내려질 불’에 근거하고 있다(두산백과사전). - 과 림보 - 카톨릭 교회가 말하는 지옥의 변방: 지옥과 천국 사이에 있으며 그리스도교를 믿을 기회를 얻지 못했던 착한 사람 또는 세례를 받지 못한 어린이·백치 등의 영혼이 머무는 곳을 가리킨다(네이버 영어 사전). - 등의 개념과 연관되기 때문에 아마도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것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고 교회의 교리에 따라 해석하려고 해서 생긴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12장 40절에 보면 예수님은 요나와 같이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중심부)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 27절에서 시편 16편 8-11절을 인용하며 “주께서 내 혼을 [예수님의 혼을] 지옥에 남겨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하시리라.”고 말하면서 우리 주님 - 엄밀하게는 그분의 혼 - 이 지옥에 갔다가 부활했음을 보여 줍니다. 물론 우리말 성경은 이런 부분의 지옥을 모두 불교 용어인 ‘음부’라고 번역해서 바른 뜻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약속하신 대로 낙원에 즉 지하세계의 지옥 부분에 내려갔다가 올라오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에베소서 4장 8-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8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잡힌 자들을 포로로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주셨도다, 하시느니라. 9(이제 그분께서 올라가셨은즉 그것은 곧 그분께서 또한 먼저 땅의 더 낮은 부분들로 내려가신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내려가신 그분께서 또한 모든 하늘들보다 훨씬 위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시니 이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자,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사실을 천주교회에서 굳이 밝히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개신교회에서는 이것을 막으려고 할까요? 천주교회에는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관례가 있고 실제로 천주교인들은 땅에 있는 사람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면 그들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천주교회는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사실과 벧전3:18-20을 묶고는 그분께서 죽은 자들에게 다시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주장합니다.
18…이것은 그분께서 육체 안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되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나셔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가려 하심이라. 19그분께서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사 선포하셨는데 20이 영들은 노아의 날들에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 곧 하나님께서 한 번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불순종하던 자들이라.
이 구절에 대해 논의하기 전에 먼저 과연 사람이 죽은 뒤에 또 다시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는지 여부를 살펴봅시다. 히브리서 9장 27절은 이에 대해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
성경은 명백하게 사람이 죽은 뒤에는 심판이 있고 다시는 구원의 기회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벧전3:19는 무엇을 뜻할까요?
먼저 ‘감옥에 있는 영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이 영들은 분명히 노아 시대에 불순종하던 자들입니다. 창세기 6장에는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 불순종한 세 부류의 존재가 나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표현된 천사들입니다. 벧후2:4와 유6은 이 천사들이 자기들의 처음 신분을 버리고 죄를 지어 지옥에서 영존하는 사슬에 묶여 어둠 속에 거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둘째는 노아 당시에 죄를 지어 대홍수로 멸망 받은 모든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천사들과 사람들 사이에 태어난 하이브리드 거인 종족입니다(창6:4). 물론 이들도 대홍수에 휩쓸려 다 멸절되었습니다. 이 세 부류가 벧전3:19에 있는 ‘감옥에 있는 영들’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영은 가지고 있지만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영이라 불린 적이 없으므로 여기의 영들은 천사들과 그들이 낳은 하이브리드 거인 종족을 뜻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다시 복음을 선포해서 구원의 기회를 주셨을까요? 여기에서 ‘선포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복음을 선포하다는 의미의 ‘유앙겔리조’가 아니라 선언하셨다는 의미의 ‘케륏소’입니다. 그러므로 벧전3:19는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힘입어 그들에게 가셔서 일방적으로 ‘자신의 승리’와 ‘그들의 정죄’를 선언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사람에게는 죽음 이후에 심판 외에 다른 것이 없으며 복음을 듣고 회개할 기회는 결코 다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을 가지고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또 다시 선포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교도들의 비성경적인 믿음입니다.그런데 안타깝게도 최근 들어 개신교회 안에서도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도신경의 이 부분을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이런 무의미한 논쟁을 보면서 뿌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절감합니다.
3. 거룩한 공회
영어 사도신경에는 분명히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고 되어 있으나 천주교나 개신교 신경에서는 ‘거룩하고 공번된 - 혹은 보편된 - 교회’나 ‘거룩한 공회’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공회는 ‘공적인 일을 위한 모임’이나 종교 회의를 뜻하므로 ‘교회’라는 의미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런 해석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에 사는 교포 2세 아이들 즉 영어만 할 줄 아는 아이들에게는 이것이 더 치명적입니다. 부모를 따라 장로교회에 가는데 주일마다 예배 때에 “나는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해야 하니 이 아이들의 영적 고통이 얼마나 심각하겠습니까? 그래서 똑똑한 아이들은 부모나 교회에게 왜 우리가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5세기의 <로마 교회 구 신조>에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거룩한 교회(The Holy Church)를 믿사오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8세기의 <개정 신조>에는 거기에 ‘카톨릭’이라는 단어를 첨가하여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사오며’로 되어 있습니다. ‘카톨릭’이라는 말이 ‘소문자’(catholic)로 쓰인 경우 원래의 사전적 의미는 ‘보편적인’ 혹은 ‘전 우주적인’(Universal)이므로 ‘카톨릭 교회’라는 말 자체가 반드시 ‘로마 카톨릭 교회’를 가리킨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영어 사도신경에서처럼 ‘카톨릭’이라는 말이 ‘대문자’(Catholic)로 쓰이면 사전적 의미를 벗어나 로마 카톨릭 교회를 가리키므로 예배 시에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은 사실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카톨릭’이라는 말은 중세 카톨릭 교회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삽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공회’를 예수님의 몸인 ‘거룩한 교회’로 고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교회가 거룩할까요? 지상의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고 말 그대로 죄 가운데 있는 인생들의 모임입니다. 이것이 과연 거룩할까요? 물론 재림 이후에 주님 앞에 설 때에는 거룩하겠지만 신조를 암송하는 당사자는 현재 자신이 속한 교회가 거룩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으므로 이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새로 나온 사도신경에는 ‘카톨릭’을 반영하여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고 되어 있으나 이것은 사실 천주교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불과합니다.
4.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성인들의 통공)
개신교의 사도신경의 표현인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성도들이 서로 영적으로 함께 나누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원자로 받아들인 모든 사람을 ‘성도’(聖徒) 즉 ‘세인트’(saints)라고 합니다(고전1:2 등).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saints)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엡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빌립보에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saints)과 또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빌1:1)
성경의 정의와는 달리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미 죽은 카톨릭 교회의 특정 인물을 신앙적 영웅인 ‘성인’(saint)으로 만들었고 이로써 성경적 의미의 참 세인트 즉 ‘성도’(saint)를 배격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어떤 신자들을 시성함으로써 즉 그 신자들이 영웅적으로 덕행의 길을 닦고 하느님의 은총에 충실히 살았음을 장엄하게 선언함으로써 교회 안에 강력히 작용하는 성령의 힘을 인정하고 그 신자들을 다른 신자들에게 모범과 전구자로 세워 줌으로써 그들의 희망을 북돋아 준다. [카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교회헌장 40;48-51항, 제1편 p.322 #828]
사탄이 로마 종교를 이용하여 성취한 가장 악독한 일 중 하나는 기독교의 성도 말살입니다. 종교는 금욕주의, 고행 등을 통해 도를 닦음으로써 자기 구속을 시도합니다. 로마 종교의 성자들의 전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성자 개념이란 결국 모두가 엘리트 의식으로 가득한 인간 중심 주의와 남이 엄두도 못 낼 일들을 해 낸 인간 자랑입니다. 사탄은 로마 종교를 통해 수많은 인간 성자(?)들을 양산해 놓고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흐리게 해 왔습니다.
사탄은 모조품 로마 종교의 당위성을 주장해 왔고 인류를 속이기 위해 벨기에의 ‘제수이트들’ ― 예수회 사제들 ― 인 볼란디스트 파를 동원하여 17-20세기에 이르는 약 3백 년 동안 로마 카톨릭 교회 성자들의 이야기를 집대성한 <악타 쌍토룸>(Acta Sanctourum)을 편찬하였습니다. 전 유럽에서 일어난 제수이트 추방령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작업은 벨기에의 앤트워프, 브뤼셀 등지에서 계속되었고 오늘날 이 책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순교사로 읽혀지고 있습니다. 사실 현 시대 기독교 목사들이 강대상에서 인용하는 로마 카톨릭 종교 성자들 - 어거스틴, 프란시스 등 - 의 전기란 거의 모두가 이 책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한편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도들의 교통’을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죽은 성도들에게까지 확대하여 성인 숭배와 죽은 사람에게 기도하는 교리적 근거로 오용하고 있습니다.
죽은 이들과의 일치.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 전체의 이 같은 교류를 명백히 인식한 지상 여정의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초기부터 대단한 신심으로 ‘죽은 이들을 기억하였다’, ‘죽은 이들이 죄의 사함을 받도록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은 장하고도 경건한 생각이었기’ 때문이다(교회헌장 50항). 그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는 그들을 도울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한 그들의 전구(intercession, 중보)를 효과 있게 할 수도 있다. [카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서, 제1편 p.364 #958]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인은 죽은 지 오랜 세월이 경과한 후에야 특별 심의를 거쳐서 서품 되는 비성경적인 개념입니다. 그리고 죽은 자와 교통하는 일은 사탄의 속임수로서 성경은 이것을 엄격히 금합니다. 천주교회에서는 이런 성인들이 공덕을 넘치도록 쌓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믿는 ‘성인들의 통공’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과 위의 ‘거룩한 카톨릭 교회’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 진영이 동상이몽으로 생각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5. 저리로서
사도신경을 매주 외우면서도 ‘저리로서’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 말은 ‘그곳’을 가리키는 ‘저리’에다 ‘으로부터’를 뜻하는 조사 ‘로서’가 붙어서 이루어진 옛 표현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올라가신 그 하늘 바로 거기로부터 다시 땅에 오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6. 사도신경은 충분하지 못하다
사도신경은 위에 있는 것처럼 교리적인 문제들을 많이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반드시 언급해야 할 중요 교리들을 누락하기도 합니다. 사도신경에는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교회론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고 또 성령님을 통해 구원받은 성도가 어떻게 성장하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도신경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엄이 강조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이 요약되어 있으나 성령님의 능력과 사역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사실 사도신경은 성도들로 하여금 구약시대 율법에 틀에 갇혀 있는 전통적 카톨릭 교회 유산에 얌전히 순복할 것을 요구할 뿐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교회에서 사도신경을 함께 암송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와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가 마치 다 동일한 성도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사도신경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수없이 많이 암송한다 할지라도 정확한 복음의 말씀을 듣고 성령님에 의해 다시 태어나 삶 속에 성령님의 열매가 드러나지 않는 한 그 사람의 이런 모든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걸레와 같습니다. 외적인 신조의 암송은 결코 한 사람을 하나님의 성도의 반열에 넣을 수 없습니다.
7. 종교연합의 매개체
최근 들어 카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WCC 등을 통해 교회 연합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추세에 맞추어 우리나라에서도 천주교와 개신교가 함께 쓰기 위한 공동 번역 성경이 나왔고 또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공동으로 만들기 위한 일도 추구하고 있습니다. 천주교회의 차동엽 신부는 사도신경이 천주교와 개신교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사도신경으로 인하여 가히 수천만이 피를 흘렸고 그 덕에 오늘의 우리가 살고 있다. 그것은 지금 내가 존재하고 있는 이유이며, 내가 살도록 해 주는 힘이며, 내게 설렘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희망이다. 나는 그것을 외울 줄 알았지만 몰랐다. 명색이 공인된 신학도인 내가 그랬으니 신자들은 오죽하랴. 그래서 글을 쓰는 내내 깨달음이며 회개였다.
사도신경은 그리스도교 문화의 보물이다. 여기에는 교파도 없고 천주교와 개신교의 구별도 없다. 그리스도교에 속한 모든 이들은 적어도 세 가지 보물을 공유한다. 그 첫째가 ‘성경’, 둘째가 ‘주기도문’, 셋째가 바로 ‘사도신경’이다. 사도신경 속에 금맥이 있다. 어떤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떤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기가 막힌 좋은 것들을 주님께서 사도신경에 감춰놓으셨다.
또한 인천교구장인 최기산 주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신경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젖줄이다. 이것으로 많은 이들의 신앙이 잉태되고 성장되고 유지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신경은 하늘 밥이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사도신경이 천주교회와 개신교회의 연합을 위한 매개체임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지 않는 천주교회와 인위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믿지 않으며 사도신경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천주교회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원치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문을 외우듯이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외우지 않습니다.
사도신경에 대한 결론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기본 교리의 일부를 짧게 표현한 신앙고백문이지만 몇몇 부분에서 치명적인 로마 카톨릭주의의 비성경적 교리가 많이 가미되었으므로 주 예수님의 신약 교회 성도들에게는 암송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말세를 맞아 천주교를 중심으로 종교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고 사도신경이 이를 위한 매개체로 쓰이고 있음을 감안하면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이 여기에 어떤 가치를 둘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개신교회들이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암송함으로써 신앙의 동질성을 확인하려 한다면 이 같은 행위 자체가 전혀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아무리 많이 암송한다 해도 성령님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일이 생기고 인격에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그것은 백해무익하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 덕분에 믿음이 자랐다는 사람은 우리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신경이 성령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사도신경을 외우는 사람들을 무조건 수준 낮은 사람으로 평가절하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모르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의 의미를 바로 알려주고 각자가 주님 앞에서 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권면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든 기관이든 뿌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한국의 대부분 개신교회는 뿌리가 천주교회이므로 언젠가는 종교 통합의 미명 하에 다시 천주교회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이들에게 천주교회의 실체를 바로 알려줌으로써 이들이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신 교회, 사도 바울과 여러 성도들이 직접 순교하면서 몸으로 세운 교회, 바로 이 기독교회로 돌아올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해 진리를 알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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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종류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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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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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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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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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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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성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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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8 10:11:55 | 관리자
왜 안 하는가? (사도신경, 주기도문, 축도, 새벽기도, 통성 기도)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는 주일 대예배 때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외우고 끝에는 목사가 두 손을 들어 축도를 합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가장 큰 교세를 갖고 있는 침례교회나 한국의 독립침례교회 - 앞으로 이 책에서는 이런 교회들을 자유교회 혹은 독립교회라 하겠음. - 등에서는 예배 순서에 이런 것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이와 같은 교회를 방문하면서 이 교회가 이상한 게 아닌가 하고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이단 감별의 시금석으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암송 여부를 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 순서에 이런 것들이 없는 교회에 들어서면 일단 이 교회가 이단이 아닌가 하고 의아한 눈으로 보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기존 교회와 달리 자유교회에서는 새벽기도나 통성기도를 하지 않고 또 자매들이 공적인 기도를 하거나 가르치지 않습니다.
기존 교회와 자유교회는 겉모습만 살펴봐도 무언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기존 교회에서는 대개 목사가 가운을 입고 시간이 되면 ‘땡땡땡’ 하고 종을 친 뒤 예배 의식을 집행하며 이런 의식의 일환으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암송합니다. 또 기존 교회는 예배당을 가리켜 성전이라 부르며 많은 경우 축도를 하는 목사는 축복권 및 저주권을 가진 구약시대 제사장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자유 교회에서는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왜 이러한 차이가 발생할까요?
이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알아야 궁극적으로 어느 것이 신약 교회의 예배 형식으로 더 적합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자에서는 왜 이런 차이가 생겼는지를 추적하고, 사도신경 및 주기도문 암송, 축도, 새벽기도, 통성기도 등이 성경적인 예배 절차라 할 수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책자를 통해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하는 성도들이 불어나기를 원합니다. 이런 성도들에게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에게 경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경배하는 것을 아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기 때문이라. 그러나 참되게 경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그렇게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들이 반드시 영과 진리로 그분께 경배할지니라, 하시니라(요4:22-24).
두 종류의 교회
한국에는 개신교회가 주류이므로 역사적으로 두 종류의 교회가 존재해 왔음을 아는 분이 많지 않습니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예배 형식의 큰 차이는 교회에 대한 인식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므로 먼저 교회의 종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내 교회’‘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I will build my church, 마16:18)라는 웅대한 선언을 통해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교회라는 기관을 세우실 것을 천명하셨습니다. 이 획기적인 선언 속에는 신약 교회의 소유주가 예수님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란 무엇일까요? 많은 이들이 예배당을 교회로 알고 있지만 사실 교회 곧 ‘에클레시아’(Ecclesia)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뜻합니다. 즉, 구원받아 천국 백성이 된 성도들 자체가 교회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과 달리 신약 교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구원받은 성도라면 누구나 다 제사장이 된다는 것입니다(벧전2:5, 9).
그러나 주후 1세기가 지나가기도 전에 구약의 제사장 계급 체제로 돌아가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는 무리가 교회 안에 생기기 시작했고 이들은 예수님의 신약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계2:15). 그 이후의 교회 역사는 창조주시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독교’와 창조물인 교회를 따르는 ‘교회교’ 사이의 심한 갈등과 반목의 역사입니다. 즉, 교회 역사는 ‘국가교회’(State church)인 ‘교회교’가 ‘자유교회’(Free church)인 ‘기독교’를 심히 핍박하고 박해해 온 역사입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참된 교회와 바른 교회사에 근거하여 ‘성도들의 피 흘린 발자취’를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있을 말세의 배도가 바로 교회라 불리는 곳에서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큰 오해
많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가 천주교에서 나온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천주교가 아니라 유대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하여 구약 성도들, 열두 사도들, 첫 순교자 스데반, 첫 선교사 바울 등 대부분의 초대 교회 성도들은 천주교인이 아니라 유대인이었으며 성경의 대부분이 유대인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천주교에서 초대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베드로 역시 유대인이었으며 사실 베드로나 바울 같은 사도들은 천주교를 알지도 못했습니다. 신약의 복음 또한 로마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시작되고 확산되어 땅 끝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시작부터 천주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가 천주교에서 나왔다는 거짓말을 믿게 된 이유는 단 한 가지 때문입니다. 기독교회사가 필립 샤프 같은 자유주의자 즉 천주교의 영향을 받은 교회사가들에 의해 철저히 왜곡되었고 또 ‘천주교에서 나왔으나 천주교와 같은 뿌리를 갖고 있는 프로테스탄트들’이 이처럼 ‘왜곡된 교회사’ 즉 엄밀한 의미에서 천주교회사를 자기들의 교회와 신학교에서 여과 없이 가르쳐 왔기 때문입니다.
고귀한 무리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시민으로 국가의 법에 순응하였으나 그 당시 로마 제국의 카이사르(가이사)가 자기를 주 하나님으로 선언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자기를 신이라 부르면서 자기에게 경배와 희생을 드릴 것을 요구했으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단호히 거부하였으며 이에 따라 그들에 대한 무서운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도덕이나 가치관뿐 아니라 심지어 황제의 법도 주 하나님의 법에 우선할 수 없다고 믿었고 결국 자기를 신으로 선언한 황제의 눈 밖에 나게 되었습니다.
한편 카이사르는 기독교와 바빌론 신비 종교를 혼합해서 자신을 우두머리로 하는 국가교회인 천주교를 구축하기 시작했고 많은 교인들이 천주교라는 배도의 넓은 길을 따라갔습니다. 한편 이것을 거부하는 참 성도들은 맹렬한 핍박을 받으며 맹수들의 밥이 되면서도 결코 국가교회의 일원이 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고귀한 무리들은 자기들 안에 영원토록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로 신앙 양심을 따라 국가교회가 아닌 자유교회를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냐, 카이사르냐?
주후 313년, 대음모자 콘스탄틴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기독교를 로마의 국가 종교로 공인했습니다. 그 이후로 이 타락한 국가교회는 이교도들의 풍습에 근거한 마리아 숭배, 성인 숭배, 각종 우상 숭배, 제사장 체계, 교황, 추기경, 교부, 연옥, 면죄부, 유아 세례 등 도저히 성경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가증한 것들을 강제로 교회에 부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국가교회는 자기들의 범주 안에 거하려 하지 않는 자유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참 성도들을 화형이나 수장 등 각종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했습니다. 이단이란 말은 참으로 무서운 말입니다. 중세암흑시대에 천주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 받으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피 흘린 발자취
예루살렘 교회에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교회는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로 퍼져나가 1세기 후반에는 그 당시의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또 국가교회의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짊어지고 도시를 떠나 산지에서 계곡에서 유랑하며 꾸준히 순례의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주후 2세기에는 처음으로 소아시아에서 몬타니스트들이 사도 교회의 순수성을 외치면서 믿는 성도만이 교회의 회원이 됨을 주장했으며, 스스로 믿음을 고백할 수 없는 어린아이들에게 베푸는 유아세례는 전적으로 비성경적임을 선언하고 재침례를 행했습니다.
주후 3세기에는 전 로마제국에서 노바티안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들 역시 유아세례의 죄악을 폭로하며 교회의 순수성을 외쳤습니다. 이들은 그 순수성으로 인해 후에 ‘순수한 자들’이라는 뜻을 지닌 카타리들이 되었습니다. 그 뒤 4세기 초에는 아프리카에서 도나티스트들이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외치며 일어났습니다. 또한 7세기경에는 타우루스 산지에서 폴리시안들이 초대 자유교회의 맥을 이으며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선교하기 시작했는데 이들 역시 구원받은 성도들만의 침례와 그런 성도들만의 교회 회원권을 주장했습니다.
그 뒤 자유교회는 12세기경의 왈덴시스(왈덴시안)들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알프스 계곡에서 바른 성경을 붙들고 오직 성경만이 최종 권위임을 외치면서 천주교회와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불가리아와 보스니아에서는 보고밀이라는 이름의 자유교회가 천주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받으면서 급속히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는 폴리시안의 뒤를 이은 알비겐시스들이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들고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주후 1517년 천주교회의 사제였던 마틴 루터는 교황과 천주교회에 대항하며 ‘항거자’ 즉 프로테스탄트가 되어 개신교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약성경의 자유교회에서 출발하지 않았기에 천주교회에서 완전히 분리되는 것보다는 그 안에 남아 있으면서 개혁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루터교회는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핵심 교리를 제외하고는 천주교회의 악습과 전통을 거의 그대로 물려받아 생명이 없는 국가교회로 전락하고 말았고 결국 1998년 6월에 미국의 루터교회는 다시 천주교회와 하나가 되기로 공식적으로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장로교회의 아버지 칼빈 역시 유아세례 등의 악습을 타파하지 못하고 제네바에서 구약시대 장로들의 신정정치 국가교회를 구축하면서 재침례교도 같은 자유교회 무리들을 핍박하였습니다.
천주교회에서 나온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들 - 개신교회들 - 은 교회가 다스리는 세상이 곧 그리스도의 왕국이라는 천주교회의 신념을 그대로 수용하여 한결같이 무천년주의나 후천년주의를 따랐고, 성경 말씀 준수 측면에서 볼 때 많은 교리에서 자유교회와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근대 자유교회
한편 종교개혁 시대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교회는 재침례성도, 메노나이트 등의 이름으로 온 유럽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회중 통치를 가르치며 믿는 자들만의 교회 회원권, 전 성도 제사장 직분, 국가와 교회의 분리, 양심의 자유 등을 외치기 시작했고 급기야 이민의 물결을 따라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17, 18세기 영국과 미국에서는 자유교회의 전통을 이어 받은 침례교인들(Baptists)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고 존 번연, 찰스 스펄전, 윌리엄 캐리, 아도니람 저드슨 같은 걸출한 인재들이 나왔습니다.
미국에서도 처음에는 국가교회를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침례교인들이 이를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결국 이들로 인해 국가와 교회의 분리,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이 헌법에 명시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누구든지 양심에 따라 종교를 택할 수 있게 되었고 수많은 영혼들이 국가교회의 탄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현대 국가들의 대부분이 미국 헌법을 기초로 하여 이러한 자유들을 허락함으로써 결국 전 세계 시민들이 자유교회의 투쟁으로 인한 인권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말세의 배도
지금 온 세상은 정치와 경제와 종교의 통합을 원하고 있습니다. 정치는 UN 주도 하에, 경제는 WTO 등을 통해 이미 통합이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종교는 1960년대의 제2차 바티칸 공회 이후 천주교회의 주도 하에 급속도로 통합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WCC, NCC, 오순절/은사주의, 뉴에이지 운동, 록음악, NIV, Living Bible 등의 타락한 성경, ‘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복음주의자와 천주교도의 연합, ECT) 등이 모두 천주교회의 통제를 받으며 기독교의 근간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천주교회가 주축이 된 사상 최대의 국가교회가 우리 앞에 출현하여 다시 한 번 성도들을 핍박하게 될 것입니다.
이 같은 말세의 배도에 대하여는 이미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서신서들에 여러 차례 기록해 놓았습니다! ‘어떻게 루터로부터 출발한 프로테스탄트 루터교회가 천주교회와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뿌리를 성경에 두지 않으면 누구나 배도의 길로 들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뿌리는 종교개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당신은 지금 어느 길에 서 있습니까? 배도한 교회와 철저히 분리된 사람들이 성경을 따라 피를 흘리며 남겨 준 발자취를 따를 때에만 배도의 거센 물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에서는 아합 왕의 극심한 우상 숭배 속에서도 칠천 명의 남은 자들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당신도 그런 남은 자 중에 있습니까? 성경대로 믿는 자가 구원을 받고 후에 주님께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크기를 보지 말고 내가 속한 무리가 순결한 자들인가 살펴보기 바랍니다. 부디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내가 과연 맹목적으로 ‘교회교’의 전통을 따르고 있지는 않은가 점검하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지금 당신은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시겠다고 선언하신 그분의 ‘내 교회’에 속해 있습니까?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예배 형식 차이의 원인
자, 이제 기독교와 개신교 그리고 천주교가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는지 알았으면 대부분의 개신교회와 자유교회의 예배 형식이 왜 차이를 보이고 있는지 곧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천주교회는 아직도 구약의 제사장 체계를 유지하면서 구약시대의 성전 예배와 비슷한 형식의 ‘의식 예배’(Ritual service)를 드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임 장소를 성전 대신 성당이라고 부르고 사제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 세워 평신도와 다른 부류로 취급하며 예배 안에 각종 형식을 집어넣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은 이런 형식과 의식을 보면서 천주교 예배는 대단히 장엄하다고 말합니다.
천주교회에서 나온 개신교회도 태생의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므로 대부분 천주교회와 유사한 형태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국내의 개신교회는 대개 예배당을 성전이라 부르며 목사가 거의 구약시대 제사장 수준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평신도와 확연히 구분되고 있습니다.
약 2,000년 전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고 이때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내리면서 예표였던 구약시대가 사라지고 실체인 신약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므로 마태, 마가, 누가가 모두 이것을 기록하였습니다(마27:51; 막15:38; 눅23:45). 이를 확증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죽기 전날 밤 유월절 관례를 주의 만찬으로 바꾸시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26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집으사 축복하시고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또 잔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다 그것을 마시라. 28이것은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 언약의 피니라(마26:26-28). - 마26:28의 ‘새 상속 언약’은 영어로 ‘New Testament’이며 짧게 ‘신약’이라고 한다. 그런데 천주교 사본에서 나온 개역성경(개정개역 포함)은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인 ‘새’(New)를 제거하여 새 언약의 신약시대가 열린 것을 성도들이 보지 못하게 한다. -
예수님의 완전한 대속 희생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신약시대가 열렸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구약시대의 형식과 계급체제 등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이를 확실히 인식한 자유교회 성도들은 십자가 사건 이후부터 구약시대의 형식에 갇힌 예배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드려왔고 이것은 ‘의식 예배’가 아니라 ‘비의식 예배’(Non-ritual service)로 구체화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 사건 이전까지 신약시대의 초기 10년 동안에는 그리스도인이 모조리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이 자연스럽게 예배 장소로 쓰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10년이 지나서 이방인 고넬료의 회심이 있은 이래로 사도 바울에 의해 곳곳에 이방인 교회들이 세워지면서 형식으로 가득한 구약시대의 의식 예배는 완전히 폐지되고 간결한 형태의 비의식 예배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사도 바울이 교회를 세우면서 제사장처럼 가운을 입고 예배를 집례했을까요? 예배당을 성전 혹은 성당이라고 불렀을까요? 구약시대의 의식 예배를 집행했을까요?
이 모든 것은 사도 베드로의 표현대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며 유대인 조상들이나 심지어 유대인 사도들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입니다(행15:10). 이에 예루살렘 회의에서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성령님과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성도들에게 우상숭배, 부정한 음식, 음행을 금지하는 규정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짐도 지우지 아니하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유교회 성도들의 예배에는 시와 찬송가와 영적 노래와 대언(설교)만 있었습니다(엡5:19; 고전14:26-33). 또한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성도들이 예배 모임에서 회중이 정하는 대로 원하는 때에 주의 만찬을 행하였습니다(마26:26-30; 고전11:23-34). 이것이 자유교회 예배의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예배에는 천주교 예배의 일부인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암송이나 목사의 축도 등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인식한 뒤 사도신경, 주기도문, 축도, 새벽기도, 통성기도 등에 대한 분석을 읽으면 더 확실히 진리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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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종류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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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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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4
축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5
새벽기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6
통성기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7
2013-05-08 10:03:47 | 관리자
안녕하세요?
이번에 "방언과 은사"라는 제목으로
방언, 신유, 축사 등의 은사들을 설명한 비매품 책자를
미디어 선교의 일환으로 사랑침례교회에서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 PDF 파일은 누구나 마음대로 배포하거나 인쇄해서 써도 됩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샬롬
2013-05-08 09:51:12 | 관리자
안녕하세요?
이번에 "구원의 기쁨과 확신"이라는 제목으로 구원의 방법, 지식, 기쁨, 안전 보장에 대한 비매품 책자를 미디어 선교의 일환으로 사랑침례교회에서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10권 이상 주문해서 나누어 주시기 원하면 인천 사랑침례교회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032-66-1611).
이 PDF 파일은 누구나 마음대로 배포하거나 인쇄해서 써도 됩니다.
샬롬
2013-05-08 09:50:07 | 관리자
성경에서 원래의 단어를 보존하는 것은 말씀의 변개를 막는 중요한 기능과 함께 그 말씀이 기록될 당시의 사람들과 교감하는 기능도 있다고 봅니다. 저는 고어의 옛스러운 표현들을 통해서 그 시대 사람들의 사물에 대한 인식이나 관점, 감정들을 느낄 수 있어서 좋습니다.
2013-05-08 01:30:25 | 류인선
제 믿음도 항상 작동할 수 있도록 동태보존에 힘써야겠습니다.^^
2013-05-08 01:22:49 | 류인선
저도 잘 읽었습니다. 김 형제님의 필력은 정평이 있지요.
유다와 다말에 관한 기사처럼, 만약 유대인들이 구약을 하나님의 영감 없이 자의적으로기록했다면 분명히 삭제했을만한 내용들이 가감없이 기록된 것만 보아도 성경은 "진실의 책"임이 분명합니다.
2013-05-08 01:18:34 | 류인선
우리 딸 별명이 "토마스"인데
만화영화에서 그냥 기차를 의인화해서 그런줄 알았는데
원래 기관차에 이름을 붙여서 그랬군요^^*
두 집안 성경의 계보를 공부하다 보니 역사 문화 등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던데
철도도 비슷하네요.
2013-05-07 09:12:26 | 김선희
감사합니다, 목사님! 제목이나 질문 내용 이나 같은 것입니다. 수정하다가 실수로 삭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목사님의 섬세한 글에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이태성 형제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제가 신학대에서. 너무 많이 듣고 세뇌 되다시피 배우게 되다 보니 이런 질문을 올린 것입니다.
2013-05-07 07:52:15 | 조양호
답글 달려고 보니 게시물의 본문이 사라져 버렸네요.
저는 칼빈주의자도 아니고, 세대주의자도 아닙니다. 단순히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는 성경 신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질문하신 분께서 어느 신학에서 어떤 주장을 하는지가 궁금하시면, 이 곳 게시판에 질문하지 마시고, 차라리 그 시간에 해당 신학교나 신학자들의 책을 직접 읽어보시는 것이 낫습니다. 예정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의 말을 믿지 말고 성경에 기록된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곧 우리가 사랑 안에서 자신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세상의 창건 이전에 그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으며 자신의 크게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아이로 입양하심으로써(엡1:4-5)
이 말씀을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사람들을 예정하사" 라고 읽으면 칼빈주의 예정론이 됩니다. 사람들의 자유 의지와 선택과는 무관하게 하나님께서 그분 마음대로 누가 천국에 갈 지, 누가 지옥에 갈 지 결정해 놓았다는 뜻이 되지요.
그런데 성경은 "그분 안에서" 라고 말씀하고 있고, "우리를 택하셨으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구원을 위한 선택(예정)은 언제나 믿는 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즉 이것은 사람들 가운데 누구를 천국에 가게 하고, 누구를 지옥에 가게 할 지를 결정하는 그런 예정이 아닙니다.
또한 "그분 안에서"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 때 하나님께서는 누구는 방주에 들어가고, 누구는 방주에 들어가지 말라고 예정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하여 방주를 예비하셨고 누구든지 방주 안에 있으면 홍수 심판으로부터 구출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방주 안에 있으면 살고, 방주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죽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세상에 들어오실 때에 이르시되, 희생물과 헌물은 주께서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나이다(히10:5).
하나님께서는 방주를 예비하시고 방주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신 것과 같이,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시고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구원받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분 안에서" 선택된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창세 전에"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세상을 창건하시기 이전에 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물론 이렇게 창세 전에 예정을 하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미리 아심이 전제가 되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롬8:29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13-05-07 01:48:39 | 김문수
에스겔 48장에는 천년왕국에서 이스라엘 각 지파가 차지하게 될 몫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그 때에는 누가 어느 지파인지 구별이 가능하다고 봐야겠지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다시 나게 하는 때 곧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의 왕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왕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재판하리라.(마 19:28)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재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이 말씀이 이루어지려면 누가 어느 지파 출신인지 구별이 되어야 할 겁니다.
비록 사람들은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 어느 지파 소속인지 알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시편 139편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얼마나 세세하게 잘 아시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천사가 이스라엘 사람들 14만 4천명을 봉인할 때, 그들 각각이 어느 지파에 속한 사람들인지 분명히 구별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2013-05-07 01:26:10 | 김문수
레일 위에 놓인 기차 사진을 보니 불현듯 라일락과 아카시아 향내가 부딪치는 차창 밖으로 바람 세수를 하며
기차와 함께 내어 달리고 픈 마음이 샘물처럼 솟아오릅니다.
그런데 현역병 시절은 구경도 못해 본 마치 새총 같은 카빈소총을 예비군 훈련을 받으며 실제로 쏘아보니
제법 총 구실을 하긴 하더군요.^^ 지나고 나니 예비군 훈련을 받던 시기는 내가 지금보다 조금은 더 젊고
활기 넘쳤던 호시절이구나 하며 그리워지기까지 합니다.
지금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교회가 대단원을 맞이하는 참으로 영광스럽고 주요한 시기입니다.
그러나 영적 현실은 진리를 외쳐도 귀담아듣지 않고 바른 교회를 하자고 해도 웬만해서는 호응하는
신자를 찾기가 어려운 처참한 상황입니다. 그래도 이 시대가 지나고 나면 그때야 비로소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이나
주님 밖에 있는 사람이나 그 얼마나 엄중하고 위대하며 절실한 시대였는가 하는 것을 제대로 알게 되겠지요.
다만 정상적이고 건전한 사회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며 나 자신과 내 가족과 친지와 친구들의 영적 상태부터 챙기는
이 시대에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문제에 집중할 줄 아는, 지금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에 힘쓸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항상 지식과 지혜 속에서 추억과 건강한 낭만을 떠올리게 해주시는 귀한 글에 감사합니다.
2013-05-06 21:23:21 | 김대용
본인은 처음에 새마을호에서 시작되었던 철도 관심사가 KTX, 전기 기관차를 거쳐 요즘은 증기 기관차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옛날에는 기관차의 이름을 지금처럼 0000호대라는 번호로 붙인 게 아니라 미카, 파시, 마터, 허기 등의 이름으로 붙였구나. 고 김재현 기관사가 몰았던 증기 기관차(미카)와, 경의선 장단역에 방치되어 있던 녹슨 증기 기관차(마터)는 차종이 다른 것이었구나.” 같은 식이다.
증기 기관차까지 마스터해야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철도를 연계하여 다 꿰뚫은 진정한 철덕이 될 수 있다는 걸 이제야 깨우치는 중이다. 이렇듯, 한번 철도의 맛을 접한 철덕은 차량, 시설, 지리, 역사 등 분야별로 철도 안에서 계속 골고루 자라야 한다. 그 성장이라는 게 금방 빨리 되는 게 아니다.
그나저나 증기 기관차의 보존 상태를 보다가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용어를 접했다.
정태보존: 어떤 물건이나 시설을 이제 동작은 못 하지만 그냥 외형만 멀쩡해 보이는 상태로 보존동태보존: 언제라도 다시 가동을 할 수 있는 상태로 관리하면서 보존
쉽게 말해서 예비군 훈련 중에 아저씨들에게 그냥 폼으로 지급되는 낡은 소총은 '정태보존'만 된 카빈/M16 소총이다.하지만 현역 군인은 자기들이 받은 소총이나 차량(운전병의 경우)을 '동태보존' 잘 하고 있어야 하며, 예비군이라도 실탄 사격 훈련은 동태보존된 별도의 총을 써서 한다.
퇴역한 식빵 모양의 서울 지하철 1호선 초기 저항 전동차, 서울시 노면 전차, 철도 박물관에 있는 증기 기관차들도 모두 정태보존된 차량들이다. 이들은 이제 상당한 수준의 재정비와 청소, 부품 교체, 보수를 하지 않으면 레일 위를 스스로 달릴 수 없다.
동태보존이 정태보존보다 비용이 훨씬 더 많이 들고 어려운 일인 건 당연지사다.
이 두 개념은 실생활에서 적용 가능한 분야가 많은 것 같다. 성경론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필 원본이 소실된 이후로 가장 오래 된 바티칸/시내 사본 같은 데 짱박힌 채로 '정태보존' 되어 왔다고 생각하는 계보가 있는 반면, (변개와 삭제 같은 이슈는 이 글에서 일단 논외로 한다)
공인 본문 이래로 순교자의 피를 흘리면서 필사본들이 잡초처럼 끈질기게 생기고 읽히고 없어지길 반복하다가, KJV에 이르기까지 '동태보존' 되어 왔다고 생각하는 계보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기 때문이다. (히 4:12)
그냥 말씀의 보존만 믿는 걸로는 불충분하다. 문제는 어떤 방식, 어떤 상태로 보존되어 왔느냐이다.여기에 대한 관념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심지어 KJV의 언어가 그저 읽기 힘든 '사어, 고어'이냐 아니면 “현대 영어보다 언어적 우월성을 갖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언어”가 되느냐도 응당 갈릴 것이다.
이렇듯, 철도 차량의 보존에 대해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보존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었다.
2013-05-06 17:48:14 | 김용묵
안녕하세요..형제님
진리를 접하게 되면 많은 의문점이 증폭하게 되는점 심히 공감합니다.
여기 킵바이블 사이트에는 대부분의 질문하시고 싶으신 내용에 대한 답이 있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가 수년간 축적되어 있어서 궁금하신 내용이나 단어를 전체검색 또는 구글검색을 이용하시면 답을 찾으실수 있습니다. 질문하시기 전에 두가지 방법으로 먼저 검색해보시면 대부분의 궁금점은 해소하실수 있도록 방대한 자료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예정론은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1689
링크를 참고하셔도 되며 상단의 전체게시글이나 구글검색을 통해 검색해보셔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2013-05-06 13:24:21 | 이태성
2013-05-05 23:24:44 | 조양호
요한계시록 강해 입니다
1~42회 강해가 있습니다
http://www.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sermon2&cate_name=%EC%9A%94%ED%95%9C%EA%B3%84%EC%8B%9C%EB%A1%9D&page=3
mms://vod.cbck.org/dsjung/keepbible/RevVideo/Rev-01.wmv
2013-05-05 22:23:29 | 고동현
삼위일체
유튜브동영상 바로보기 => http://youtu.be/Xt0mA10mAuE
2013-05-05 22:13:32 | 고동현
대체신학주의 에서는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하였기에 교회로만을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특히 계시록 7장에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숫자 144,000 명을 교회시대의 모든 성도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대체신학이 주장한 것중에 현재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있지만 계시록에 나오는 12지파는
있지않으며, 또 구분되지고 않고 다만 세파르딤과 아쉬케나지 유대인으로만 구분 한다고 합니다.
혹시 12지파를 아직도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좋은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2013-05-05 00:46:06 | 조양호
안녕하세요?
IT 업계에 종사하시면서 저희 교회 설교를 듣고 있는 귀한 형제님께서
구원과 성장이라는 앱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안에는 구원 바로 알기 CD와 시리즈 말씀 설교 CD의 MP3 파일들이 60개 정도 들어 있습니다.
구원과 성장에 관한 말씀들만 있으니 초신자들이나 불신자들에게 알려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안드로이드 폰의 구글 플레이나 아이튠즈 앱스토어에 가서 구원과 성장 혹은 제 이름을 치면 무료 앱을 설치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정동수
2013-05-03 11:19:12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