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자료를 공유해 주셔서ㅕ 감사합니다.
앞으로 좋은 글도 많이 남겨 주세요.
샬롬
2013-05-14 09:29:48 | 관리자
안녕하십니까? 첨부의 파일은 2012년 초에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성경에 관한 특강을 했을 때 사용한 자료로서, 스트라우스 박사님의 <성경론> 교재를 주 Reference로 해서 기타 관련 자료와 책을 참고하여 작성한 ppt 자료입니다. 미약하지만, 혹 성경의 진리를 소개하는데 조금이나마 유익이 되기를 소망하며 공유하고자 합니다. 내용 중 수정할 사항이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13-05-13 14:26:36 | 임재영
안녕하십니까? 첨부의 파일은 2012년 초에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성경에 관한 특강을 했을 때 사용한 자료로서, 스트라우스 박사님의 <성경론> 교재를 주 Reference로 해서 기타 관련 자료와 책을 참고하여 작성한 ppt 자료입니다. 미약하지만, 혹 성경의 진리를 소개하는데 조금이나마 유익이 되기를 소망하며 공유하고자 합니다. 내용 중 수정할 사항이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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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3 14:26:36 | 임재영
마태복음 11장 12절 전,후 문맥
침례요한이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를 하면서 메시아가 오시는 길을 예비하며 이스라엘에 외치던 중에 그가 감옥에 갇힙니다. (물론 갇힌 이유 중에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12절 전후 문맥을 보면 침례를 주던 요한까지 대언자로 언급되며 침례자 요한의 이야기가 언급됩니다.
마태복음 11장12절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 [침례자] 요한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하늘의 왕국은 폭력을 당하며 폭력배들이 강제로 그것을 빼앗느니라.
개역성경 :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핵심 포인트
침례자 요한이 선포를 시작한 시점부터 감옥에 갇혀있는 침례자 요한과 침례자 요한이 자기의 제자 2명을 예수님께 보내어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당신입니까? 물어보는 말에 예수님이 대답하시던 그 시점까지 킹제임스 흠정역성경은 하늘의 왕국은 폭력을 당했다고 기록 되었으며 개역성경도 천국은 침노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만을 본다면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다른 것이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질문 1 : 천국과 하늘의 왕국은 같은가?
차이점
개역성경에서 천국은 대부분 죽어서 가는 천국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흠정역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메시아 즉 구세주, 왕으로 오셨기에 하늘로 부터 이스라엘 땅에 실제적으로 세워지는 가시적인 하나님의 왕국을 하늘의 왕국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질문 2 : 폭력배는 누구인가? 피해자는 누구인가?
차이점
개역성경에서는 천국을 침노하는 당사자가 누구인지 언급이 없는데 이 구절만 딱 떼어서 좋게 해석하면 천국은 열심히 노력하는 자가 차지할 수 있다가 됩니다. 비슷한 말로 사랑은 쟁취하는 거야! 라고 이해가 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이 구절을 사실 그렇게 영해해서 좋은 말 많이 했지요???????????
반면 킹제임스흠정역성경은 하늘의 왕국이 폭력을 당했는데 폭력을 행사한 당사자들이 폭력배라고 말하며 강제로 빼앗는데 누구에게서 빼앗았는가! 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말씀가운데 이들에 대한 언급(몽타쥐)들을 말하셨는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은 39절까지 있는데 23장 전체에 걸쳐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 등등 종교지도자들을 저주하십니다.
그 중에서도 마태복음 11장 12절의 폭력배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명확한 구절이 있는데 마태복음 23장 13절입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사람들에게 하늘의 왕국을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아니하며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자들도 허락하지 아니하는도다. (마 23:13)
침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며 메시아의 표적인 병 고침과 마귀 들린 자들을 자유케하며 많은 기적들과 이적들 행하시면서 메시아 왕국인 하늘의 왕국을 선포하고 다니시는데 이것을 막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름 아닌 종교 지도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저주하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위선자들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실질적으로 세우시려는 하늘로 부터 오는 하늘의 왕국을 닫아 버리고 자신들도 안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막는다고 화를 내시며 저주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어떤 씩으로 폭력을 행사했는지 구체적인 근거가 있느냐? 묻는다면 많지만 하나를 예로 제시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듣고 이르되, 이자가 마귀들의 통치자 바알세붑을 힘입지 않고서는 마귀들을 내쫓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마 12:24)
예수님이 직접 메시아 표적들을 보이면서 하늘의 왕국을 선포하시는데 이 종교지도자들은 마귀의 힘을 빌어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고 떠들고 다녔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종국에 가서는 백성들을 선동해 죄수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지 않습니까 (마 27장 15절~26절)
폭력배 :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을 비롯한 종교지도자 (임의적 권력자들)
피해자1 : 메시아를 고대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피해자2 : 침례자 요한, 예수님
*예수님은 메시아로 오셨고 왕으로 마땅히 이 땅에 실제적인 가시적인 하늘로 부터 오는 하늘의 왕국을 세우려 하셨는데 마태복음 23장 39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말하기를,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이제부터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라는 말씀과 같이 이 예언의 말씀이 성취 될 때까지 연기가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지금은 은혜의 시대, 이방인의 충만함이 이르고 있는 때,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눈멀어 있는 때, 교회의 시대라 말하며 이때가 끝나면 다시금 예언의 성취가 이루어지는 일이 문자 그대로 일어날 것입니다.
결론 도출
마태복음 11장 12절 전후 문맥과 더불과 12절을 보면 침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하늘의 왕국을 선포하고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을 조롱하며 거짓을 꾸미며 가시적으로 이 세상에 메시아 왕국을 세우려 하는 것을 막는 세력들이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과 권력자들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세력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던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막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부터 예수님이 주시려 했던 하늘의 왕국을 빼앗아 자기들도 안 들어가고 백성들도 못 들어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12절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 [침례자] 요한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하늘의 왕국은 폭력을 당하며 폭력배들이 강제로 그것을 빼앗느니라.
개역성경 :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개역성경의 번역이 잘못되어서 많은 그릇된 것들이 파생되었고 말씀의 왜곡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마귀 입장에서 본다면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가져 오시려 했던 하늘의 왕국을 1차적으로는 막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던 그 왕국을 백성으로 부터 빼앗으니까요!
마태복은 11장 12절은 킹제임스흠정역 성경의 번역의 우수성과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2013-05-13 00:34:22 | 노영기
저도 답변을 준비했는데 자료로 사용하려고 폰트 조절과 색깔을 사용하였기에 따로 글로 올립니다. ^^
2013-05-13 00:31:33 | 노영기
뉴에이지는 한 마디로 예수님 재림의 징조라 할 수 있습니다.
부모들과 중학교 이상의 아이들이 같이 들으면 좋을 것입니다.
참고로 3시간 세미나 뒤에 간단하게 교제의 시간이 있습니다.
샬롬
2013-05-12 23:57:55 | 관리자
앞에 있는 19절과 같이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종은 말들만으로 바로잡지 못하리니 그가 깨달아도 대답하려 하지 아니하느니라.
종과 아들은 위치가 서로 다른데 종이 자기 위치를 깨닫지 못하도록 내버려두면 결국 종이 방종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흠정역은 있는 그대로 주인을 주어로 해서 끝까지 직역으로 번역했고(영어 KJB도 마찬가지),
개역이나 NIV는 앞부분은 주인을 주어로 했고 뒷부분은 주어를 종으로 바꾸어서 조금 의역하였습니다.
번역상의 차이이므로 이해하는 데는 둘 다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2013-05-11 13:11:22 | 관리자
번역자의 의도 문제 같습니다. 그대로 옮기지 않고 자기 견해를 담은 것이지요.
이런 경우는 교리적인 것부터 이처럼 사소한 것까지 매우매우 많습니다.
잠언 17장 8절에는 gift(선물)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NIV에는 bribe(뇌물, 미끼)로 바뀌어 있습니다. 그래서 개역개정도 '뇌물'입니다.
선물은 그것을 가진 자의 눈에 보석 같은즉 그것이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게 하느니라.(흠)
뇌물은 그 임자가 보기에 보석 같은즉 그가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게 하느니라 (개)
그런데 뇌물은 다른 곳에서 모두 안 좋게 나옵니다. 하나님은 뇌물을 받지 말라 하셨고,
그것이 재판을 공정치 못하게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러다 보면 성경이 한 입으로 두 말 하는책이 돼버립니다.
이렇게 맘대로 번역하면 뜻은 완전히 바뀌지요. 질문하신 29장 21절도 비슷한 시각인 것 같습니다.
마치 "see you again"을 "두고 보자!"로 이해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ㅎㅎ
이런 의도로 전체 성경을 번역했다고 생각해 본다면, 그것이 구원의 교리와 하나님의 신성과 미래의 예언들까지 훼손했다면
변개된 성경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 수 있겠지요.
2013-05-11 10:44:24 | 김재욱
안녕하세요?
물어볼 데가 있습니다~!!
위에 오른쪽 구글검색 보이시죠?
거기서 "천국은 침노를..." 이런 식으로 검색을 해보세요. 많은 글이 나옵니다.
다음 글을 보시고요, 하늘의 왕국 관련 글, 마태복음 강해 등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큰 개념이 뒤틀려서 생긴 문제이니 한두 가지 답변보다는 흠정역을 통해 폭넓게 공부해 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qna&write_id=1666
2013-05-11 10:29:24 | 관리자
안녕하세요?
킹제임스 성경 읽다가 궁금점이 생겨서 질문하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에
"침례자 요한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하늘의 왕국은 폭력을 당하며 폭력배들이 강제로 그것을 빼앗느니라"
이렇게 씌어 있고 개역개정에는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렇게 씌어있습니다.
흠정역은 안좋은 이미지이고 개역개정은 간절히 바라는 자가 천국을 얻기때문에 빼앗는 심정으로
열심과 간절함으로 천국을 바라보라는 말같아서 좋은 이미지가 드네요.
이부분은 어떻게 다른 것이고 그이유는 무엇인지 알수있을까요?
아니면 어떻게 보든지 상관없는 구절인가요?
정말 궁금한데 어디 물어볼 데가 마땅치 않아서 문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3-05-11 09:40:05 | 관리자
안녕하세요?
킹제임스 읽다가 궁금점이 생겨서 질문하려고합니다.
잠언 29장 21절에 '자기 종을 아이 때부터 자상하게 키우는 자는 마침내 그를 자기 아들같이 되게 하리라'
이렇게 씌어있는데 개역개정에는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 체하리라'
이렇게 씌어 있어요.
둘이 다른 의미 같은데 이 부분은 번역상의 오류인가요?
아니면 안좋은 의도로 변개된 구절 중 하나인가요?
그렇다면 변개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말 궁금한데 어디 물어볼 데가 마땅치 않아서 문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3-05-11 09:38:48 | 관리자
사사기 14:10-17
10 이처럼 삼손의 아버지가 그 여자에게로 내려가매 삼손이 거기서 잔치를 베풀었으니 젊은이들이 그리하곤 하였더라.
11 그들이 삼손을 보고 서른 명의 동무를 데려다가 그와 함께하게 하니라.
12 ¶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내리니 잔치하는 이레 동안에 너희가 능히 수수께끼를 알아내어 확실히 내게 밝히 보이면 내가 얇은 옷 서른 벌과 겉옷 서른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
13 그러나 너희가 그것을 능히 내게 밝히 보이지 못하면 너희가 내게 얇은 옷 서른 벌과 겉옷 서른 벌을 줄지니라, 하니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수수께끼를 내어 우리가 듣게 하라, 하매
14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사흘이 지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더라.
15 일곱째 날에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이르되, 네 남편을 꾀어 그가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밝히 보이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가 너와 네 아버지 집을 불태우리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취하려고 우리를 청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냐? 하매
16 삼손의 아내가 그 앞에서 울며 이르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하지 아니하는도다. 당신이 내 백성의 아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고는 그것을 내게 알려 주지 아니하였도다, 하니 삼손이 그녀에게 이르되, 보라, 내가 그것을 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도 알려 주지 아니하였거늘 어찌 그대에게 알려 주리요? 하였으나
17 그들이 잔치할 때에 그의 아내가 이레 동안 그 앞에서 울며 그를 몹시 괴롭게 하므로 일곱째 날에 그가 자기 아내에게 알려 주매 그의 아내가 수수께끼를 자기 백성의 아이들에게 알려 주었더라.
질문의 요지는 15절에서 삼손의 아내가 일곱째 날에 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왜 17절은 그의 아내가 잔치하는 이레 동안 울었느냐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그냥 풀리는 것 같습니다.
삼손의 아내는 삼손이 잔치를 시작하면서 수수께끼를 냈는데 아무도 그것을 풀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처음부터 그에게 울면서, 이레 동안 내내 울면서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15절에 있는 대로 블레셋 사람들이 그녀의 집을 불사르고 죽일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급해지니까 이레 째 되는 날 그녀에게 와서 15절처럼 확실하게 위협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삼손 앞에서 또 울었습니다.
큰 문제가 안 되는 이런 부분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잠시 생각하면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기와 자기 아버지 집의 생명이 위협을 받자 처음부터 이레 동안 내내 운 것으로 보면 됩니다.
샬롬
(*) 참고로 다음에 질문을 올릴 때에는 차분하게 요점을 잘 적어서 올리면 좋겠습니다.
글을 잘 쓰면 보기에도 좋고 답하는 사람도 요점을 알고 잘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13-05-10 10:15:56 | 관리자
2013년 5월 9일 오후 10시 30분에
맞춤법이 틀린 몇 군데를 고쳐서 수정판을 올렸으니 참조하세요.
샬롬
2013-05-09 22:36:21 | 관리자
삿 14장 15절에 일곱째 날에 라고 되어 있습니다. 삼손이 동무들에게 수수께끼를 낸 기간이 잔치 기간 이레인데 14절에 그들이 사흘이 지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더라. 라고 되어있고 15절에는 일곱째 날에 그들이라고 되어있습니다. 17절에 그들이 잔치할 때에 그의 아내가 이레 동안 이라 되어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사흘이 지나서 하면 4일 남았는데 17절에 이레 동안 이라하면 날짜가 안 맞는거 같은데 제가 이해할 수 있도록 알려주시면 감사합니다. 전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제가 이해가 부족하니 너그러운 아량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3-05-10 10:16:5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3-05-09 16:22:00 | 김기덕
성경구절 하나 더 추가합니다.
레위기 20장 13절
금지 단어가 포함되어 있어서 글이 올려지지 않으니 직접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2013-05-09 08:26:32 | 최문선
성경구절 하나 더 추가합니다.
레위기 20장 13절
금지 단어가 포함되어 있어서 글이 올려지지 않으니 직접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2013-05-09 08:25:34 | 최문선
창조에 도전하는 사람들= 명을 재촉하는 사람들
2013-05-08 18:19:26 | 류인선
왜 안 하는가? (통성기도) 05
통성기도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대예배 시간을 제외하고는 새벽기도나 금요기도회 그리고 기도원에서 ‘주여 삼창’과 함께 목청이 떠나가라고 앞 다투어 큰소리로 통성기도를 합니다. 사실 새벽기도와 마찬가지로 통성기도도 전 세계 교회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으며 믿음의 어떤 위인들도 이런 식으로 기도했다는 사례가 없습니다. 저희 교회 같은 자유교회를 방문하는 분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왜 이 교회는 이런 식으로 열심을 내서 기도하지 않는가?”라고 의아해 하므로 이에 대해 잠시 설명하려고 합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니 통성기도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살펴보면 우리나라 성도들이 통성기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기에 일단 살펴보겠습니다.
한국 성도들의 통성기도 인식
질문 1: 통성기도 꼭 해야 되나요?
저는 통성기도를 못 하겠어요. 저희 교회에서는 자꾸 통성기도를 하라고 하는데 저한테는 스트레스로 다가옵니다. 제가 병적으로 내성적이고 사람들을 의식하거든요. 그리고 저는 말하는 게 많이 어색하므로 제 기도를 누가 옆에서 들을까 봐 걱정이 됩니다.
또 저는 “~옵소서. ~주시고, ~합니다.” 등등 이런 말들을 잘 못해요. 그래서 그냥 대화하듯이 기도하는데 혹시 어떤 사람이 듣고 “아 유치해. 무슨 기도가 그래.”라고 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아직 믿음도 없고, 교회에 간 목적이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찔리기도 하고요. 그래서 어떤 때는 “내가 기도해도 되나?”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성경에 보면 기도 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고백해야 된다고 나와 있다던데 그렇게 하지 않고 혼자 마음속으로 하면 죄가 되나요? 저는 마음속으로 혼자 조용히 하나님께 대화하는 식으로 기도하는 게 많이 편하거든요.
수련회 때도 날마다 기도회를 하잖아요? 처음 갔는데 사실 엄청 신경이 쓰였어요. 한 30분 하다가 그냥 나와서 숙소에 가고 그랬거든요. 옆 사람들은 다 소리 내서 고백하고 눈물 흘리고 그렇게 기도하는데 저는 뻘쭘하게 그냥 앉아서 눈 감고 마음속으로 몇 마디 한 것밖에 없어요.
내일 새벽기도를 처음으로 가는데 두 시간 동안 사실 할 말이 없어요. 미칠 듯이 힘든 일도 없고, 한두 마디 하고 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거든요.
기도회 하다가 먼저 나와도 되나요?기도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죠?아는 언니 오빠들은 기도할 때 술술술 말을 하는데 저는 한 마디 하고 생각하고 한 마디 하고 생각하고 그러거든요.
대답 1: 통성기도 꼭 해야 되나요?
처음 교회 나오신 분들에게 통성기도는 만만치 않은 장애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훈련으로서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훈련하지 않으면 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유창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개인적인 기도의 시간을 고정적으로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처음엔 단 5분이라도 좋습니다. 매일 꾸준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차츰 기도 시간을 늘려 가시면 됩니다.통성기도는 그러한 장애물을 순식간에 뛰어넘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성령께서 도우시면 얼마든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통성기도 할 때 남을 의식하면 절대로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의 기도 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집중해서 기도하면 어느 순간 기도의 줄이 잡히면서 유창한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성령께서 방언이나 다른 은사들을 주실 수 있습니다.
통성기도는 울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간절히 바라면 눈물을 흘리며 큰소리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소리 지르지 않아도 우리가 너무 힘들어 어떤 말로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에도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을 아신다고 하셨어요.
그러니 기도를 유창하게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듯한 어투로 경건해 보이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하는 기도이므로 욕을 쓰거나 속어나 비어를 사용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합니다.
기도는 처음에 남들 앞에서 하기 어렵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어떤 말을 해야 하나 막막했답니다. 혹시 다른 사람 앞에서 기도를 하게 될 기회가 있다면 연습을 해 보시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기도를 서투르게 한다고 웃긴 건 아니에요.
질문 2: 통성기도에 관해서
저희 집에서는 엄마만 교회에 다니시고요. 저도 엄마 따라 몇 번 교회 가다가 대학 들어오면서 한번 제대로 하나님 믿어 보고 싶어서 큰맘 먹고 CCC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채플도 열심히 하고 수련회도 열심히 가고 했습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저는 수련회랑 그런 데 분위기가 참 저랑 안 맞는다는 것을 느꼈어요. 간사님이나 선배님들한테 그렇다고 말하면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거다.”라는 인상을 줄 것 같아서 아무한테도 말 못하고, 티를 내지 않고 2년 정도 다녔습니다.
일단 수련회 같은 데 가면 기도 제목 말하면서 “자, 큰소리로 통성으로 기도합시다!”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옆 사람들은 눈물 흘리고 땅 치고 소리 지르면서 기도하는데 저는 눈 감고 기도하려고 해도 딴 사람들 기도 소리 때문에 집중도 안 되고 한두 마디 하면 기도도 안 나오고 똑같은 말만 계속한다거나 아니면 그냥 멍하게 눈감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사실, 솔직하게 말하면 통성기도에 거부감도 드는 게 사실이에요. 그래서 자꾸 수련회도 가고 싶지 않고요. 어떻게 하면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추신: 아, 그리고 수련회 가면 ‘은혜 받는다’고 하는데 ‘은혜 받는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알려주세요.
대답 2: 통성기도에 관해서
제가 예전에 느꼈던 것과 같은 증상입니다. 교회 사람들 착하잖아요? 친절하고. 그래서 친해지기 쉽고. 교회 활동도 열심히 하다 보면 교회에서 중요한 직책도 맡게 되고. 그런데 왜 이렇게 기도가 안 나오는지.
교회 다닌 지도 어느 정도 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믿음이 깊은 줄 알고 있고. 나 자신이 생각해 봐도 믿음은 있는데 기도를 못하니 이것 참~ 허허~~ ^^.
기도하는 뜨거운 분위기를 타고 “주여 삼창!”하고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싶은데 “주여 삼창!” 끝나는 동시에 손발이 오그라듭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니 같은 말만 계속하고.
이거는요. 쉽게 말해 기도를 안 해봐서 그래요. 또 자기 자신을 안 드러내서 그렇기도 하고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두 손 모아 기도드리는 것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지 소리 지르며 울부짖으며 꼭 그렇게 기도해야 믿음이 충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통성으로 기도하시는 분들이야 말로 믿음이 강하신 분들이죠.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세요. 기도가 중요한 것이지 통성이 중요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남들 의식하지 말고 하고 싶은 방식대로 기도하세요. 꾸밈 없이요. 저도 그 통성기도를 잘하고 싶어서 철야 예배 때 교회 본당 맨 꼭대기 아무도 안 보이는 가장자리에서 기도한 적도 있었는데요. 1년 만에 되더라고요.
‘은혜 받는다’는 것은 솔직히 글로는 설명 못 하겠어요. ‘성령을 영접한다’라고도 하는데 이건 때가 없어요. 찬양하다 기도하다 말씀 듣는 중에 제각각 다르니까요. 뭔가 확~~~ 소름이 돋는 기분인데 흠. 뭐라 설명해야 할지. 귀하도 나중에 느껴 보실 거예요. 성령만 영접한다면야~~!!
통성기도에 대한 오해
평범한 성도들이 겪고 있는 이런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한국 교회에서 기도 및 통성기도가 얼마나 잘못 인식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질문자들은 사실 순수한 분들이고 이들이 하는 기도야말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옆의 사람들이 통성기도를 크게 하자 이들은 크게 위축되고 무언가 자기가 잘못을 범하고 있는 줄 알고는 질문해서 답을 얻으려고 하는데 답변자들의 글을 보면 어느 부분은 맞고 어느 부분은 틀려서 오히려 질문자를 더 혼동으로 이끌고 갈 수도 있습니다. 답변자들의 글에서 잘못된 것들을 찾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초신자에게 통성기도는 만만치 않은 장애물이지만 기도의 훈련으로서 좋은 방법이다.2. 통성기도를 통해 기도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다.3. 통성기도 할 때 남을 의식하면 절대로 기도가 되지 않으므로 큰소리를 내서 자기의 기도 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4. 이렇게 집중해서 기도하면 성령께서 방언이나 다른 은사들을 주실 수도 있다.5. 통성기도는 울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6. 통성으로 기도하는 분들은 믿음이 강한 분들이다.7. 통성기도는 열심히 한 1년 연습하면 된다.8. ‘은혜 받는다’는 것은 찬양하거나 기도하다가 혹은 말씀을 듣다가 소름이 돋으면서 성령을 영접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요약하면 통성기도도 새벽기도와 마찬가지로 “지성이면 감천이다.”를 구체적으로 실현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통성기도의 유래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통성기도의 유래
한국에서 길선주 목사의 새벽기도와 함께 초기 부흥 운동에 나타난 특징 중 다른 한 가지는 회중이 동시에 소리 내어 기도를 드리는 통성기도였습니다. 선교사들은 조선 사람들이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뜨겁게 부르짖는 통성기도를 신비로운 충격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맥큔 선교사는 자신의 선교 보고서에 통성기도와 회개 운동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예배당 안은 “기도합시다.”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소리들로 가득 찼다. 예배당 안에 있는 교인들은 거의 모두가 큰소리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어떤 이는 울고 있었고, 어떤 이는 하나님께 자신의 죄목을 나열해 가며 용서를 빌고 있었다. 모두가 성령 충만을 간구하고 있었다. 많은 소리가 있었음에도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다. 모두가 일사불란했고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다.…통성기도의 음성은 신비로운 조화와 여운을 가지고 있었으며, 통회의 울음은 성령의 임재에 압도되는 영혼의 넘치는 찬양의 물결 같았다.
이처럼 새벽기도와 통성기도는 길선주 목사와 장대현 교회에서 비롯되었음이 확실합니다. 비록 선교사들이 이에 대하여 좋게 평가를 하였지만 이런 현상은 이교도들의 모임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등에서도 통성기도를 하면서 무아지경에 빠지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마7:16, 20; 눅6:44). 길선주 목사 등이 주축이 된 평양 부흥 성회 이후 100년이 지난 지금 한국 교회의 현실을 살펴보면 새벽기도와 통성기도 등의 비성경적인 요소들이 얼마나 많은 성도들을 무지와 암흑으로 몰았는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의 열매는 1906년에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아주사 거리에서 시작된 오순절/은사운동의 열매와 동일합니다.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마귀의 거짓 영은 ‘아주사 부흥’을 기점으로 해서 전 세계 교회에 무지와 흑암의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무질서와 혼동과 무지와 부정함의 근원인 신사도 운동 등을 포함하는 이런 은사 운동은 현재 천주교회와 개신교회의 연합의 매개체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런 거짓 영의 활동 중 하나가 바로 한국에서 시작된 통성기도입니다. 오순절/은사주의의 거짓 영은 예배 음악 및 질서의 파괴와 기복 신앙을 조장하면서 전 세계 모든 교회를 파멸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런데 쓰이는 마귀의 도구 중 하나가 통성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어떤 일에 대해서 사람이 무슨 견해를 피력하고 어떤 결과를 개인적으로 경험했느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 고장에서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사건들이 왜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고 있고 또 그것들이 기독교 식 샤머니즘 내지 자기 열심과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 땅에서 종교 지도자들의 기도 행위는 큰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위선으로 크게 기도를 드리곤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 예수님께서는 명확히 요점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5또 너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들의 보상을 받았느니라. 6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마6:5-6).
마태복음 6장에는 예수님 당시 종교인들의 기도와 금식 문제가 자세히 분석되어 있습니다. 또 7장 21절부터는 그 당시 마귀들을 내쫓고 “주여, 주여, 주여” 하고 큰소리로 기도하는 자들의 문제와 예수님의 정죄가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해 주신 기도의 요점은 골방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성도들은 교회에 와서도 사람들이 보는 데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사도행전에서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한 몇 가지 사례를 들면서 통성기도를 합리화 하려고 합니다. 다음은 사도행전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기도한 사례들입니다.
이들이 다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이 되어 기도와 간구를 계속하더라(행1:14). 그들이 흔들리지 아니하며 사도들의 교리와 교제 안에 머물고 빵을 떼며 기도하더라(행2:42).
그들이 기도하기를 마치매 그들이 함께 모인 곳이 흔들리더니 그들이 다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니라(행4:31).
그러므로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으나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더라.…그 일을 깊이 생각한 뒤에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는데 거기에 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행12:5, 12).
그들이 금식하며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한 뒤 그들을 보내니라(행13:3).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 제자들과 성도들은 한마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성령 강림 후에 그들은 교리를 배우며 기도하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핍박이 있자 그들은 함께 모여 기도하였습니다. 또 후에 야고보가 순교하고 베드로가 옥에 갇혀 순교하게 되자 함께 모여 기도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위해 모여서 기도하고 선교 여행을 하도록 보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교회가 모여서 기도한 사례들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례들은 결코 그들이 통성으로 기도했음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한마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한마음으로 기도한 것은 통성기도가 아닙니다. 왁자지껄 대며 기도하는 것은 사실 이교도들의 풍습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을 보면 엘리야가 바알의 대언자들과 대결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6그들이 자기들에게 넘겨진 수소를 취하여 예비하고 아침부터 정오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오 바알이여, 우리 말을 들으소서, 하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만들어 놓은 제단 위에서 껑충 껑충 뛰더라.…28그들이 큰소리로 부르고 자기들의 관례에 따라 몸에서 피가 철철 흐를 때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찢었더라(왕상18:26, 28).
이교도들은 소리를 지르고 말을 많이 해야만 자기들의 신이 듣는 줄 알고 북 치고 장구 치며 큰소리로 통성으로 기도하였지만 그들의 신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고린도 교회는 이교도들의 산물이 많아서 교회가 혼잡하였습니다. 특히 이교도들의 방언이 교회에까지 영향을 미쳐 기도하는 질서를 무너뜨리게 되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3그러므로 온 교회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여 모두 타언어들로 말하면 배우지 못한 자나 믿지 않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가 미쳤다고 하지 아니하겠느냐?… 32대언자들의 영은 대언자들에게 통제를 받나니 33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처럼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요, 화평의 창시자시니라. 34너희의 여자들은 교회들 안에서 잠잠할지니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허락되지 아니하였고 또 율법도 말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순종하도록 명령을 받았느니라(고전14:23, 32-34).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지금 통성기도 하는 집회에 믿지 않는 사람이 들어오면 그들이 모두 미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통성기도 하는 그 모임 자체가 혼동의 도가니가 아닙니까? 더욱이 교회에서 자매들이 소리를 내어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은 성경이 그 자체를 아예 금하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 여자들은 소리 내어 기도하거나 남자들 위에 서서 남자들을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딤전2:11-15). 그래서 성경은 목사와 집사는 반드시 한 아내의 남편으로 남자만 될 수 있다고 명시하였습니다(딤전3:2, 12).
성경의 기도
기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 혼의 소원과 감정을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기도는 성령님의 도움을 힘입어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알리고 대화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기도가 혼의 생명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욥21:15; 시10:4).
모든 세대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성도들의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구약시대의 경건한 사람들은 하루에 세 번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였고(시55:17; 단6:10) 성경의 모든 성도들은 공적으로 사적으로 가족별로 기도하였으며 일반 업무를 하면서도 짧게 기도하였습니다(느2:4).
기도의 자세는 특별하게 규정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서서 손을 들고 기도하거나(왕상8:22) 머리를 숙이거나(창24:26) 무릎을 꿇거나(눅22:41) 땅바닥에 엎드려서 기도하였습니다(마26:39).
기도는 항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자세로 열렬히, 인내하며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또한 기도에는 죄의 고백과 감사와 다른 사람을 위한 간구가 포함됩니다. 우리는 바른 이성과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습관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마음으로 무신론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경배하기를 원하시므로(겔36:37; 마7:7-11; 빌4:6; 딤전2:1-3; 약1:5) 이런 의무를 게을리 하는 것은 변명할 수 없는 죄입니다.
어떤 이들은 통성기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인용합니다.
네가 부르짖는 소리에 그분께서 네게 크게 은혜를 베푸시며 그 소리를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사30:19).
이 가엾은 자가 부르짖으매 주께서 그의 말을 들으시고 그의 모든 고난에서 그를 구원하셨도다(시34:6).
사실 이런 구절들은 다 개인이 하나님과 홀로 기도하는 것을 묘사하지 교회가 통성으로 소리 질러 기도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개역성경의 렘33:3을 인용하며 통성기도를 합리화 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개역성경)
그러나 이것은 개역성경의 명백한 오역입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물론 NIV, NASB, NKJV, RSV 등도 하나같이 이 부
분을 “Call unto me.” 즉 “나를 부르라.”로 번역하였습니다.
나를 부르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응답하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능력 있는 일들을 네게 보이리라(흠정역).
크게 소리를 지른다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이 구절도 실은 개인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기도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여러 사람이, 오랫동안 열심을 다해 기도한다 해도 기도의 응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지식은 오직 성경에서 오므로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심지어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십니다(잠28:9). 그래서 어떤 분은 이런 습관을 ‘백독일도’(百讀一禱) 즉 “백 번 말씀을 읽고 한 번 기도한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통성기도에 대한 결론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당연함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성경의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통성기도같이 성도들이 예배 때에 어디서나 동일하게 ‘주여 삼창’을 하면서 남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귀가 찢어지도록 소리를 지르며 기도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이교도들의 관례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진정으로 전체 회중이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없습니다. 물론 개인기도 시간에 부르짖으며 간구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무방하지만 이것도 스스로 잘 통제하면서 질서 있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혼동의 하나님이 아니고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제부터는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권면이 우리나라 교회들에서도 지켜지면 좋겠습니다.
32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처럼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요, 화평의 창시자시니라.…40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할지니라(고전14:32,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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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트에서 관련 기사를 보려면 다음의 링크를 누르기 바랍니다.
두 종류의 교회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2
사도신경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3
주기도문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4
축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5
새벽기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6
통성기도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3_05&write_id=5637
2013-05-08 10:35:36 | 관리자
왜 안 하는가? (새벽기도) 04
새벽기도
1년 365일, 성도들이 날마다 새벽기도회로 모이고 합심하여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 교회만의 자랑거리입니다. 그래서 개신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새벽기도는 반드시 교회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심지어 다른 나라에 선교하러 가서도 새벽기도를 정착시키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자유교회 성도들은 한 번도 이런 것을 시행한 적이 없으므로 과연 새벽기도는 어디에서 나왔고 성경적인지 아닌지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새벽기도의 유래
교회 역사가들은 길선주 목사가 목사 안수를 받기 전 평양 장대현 교회 장로로 시무하던 때 그분을 중심으로 1905년경부터 새벽기도회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길선주 목사는 하나님을 믿기 전 친구로부터 <천로역정>과 몇 권의 책을 받아 읽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분은 “무엇이 참 도인가?”를 알기 위해 번민하며 기도했습니다. 자기가 섬기던 신에게 빌어보았지만 응답을 받지 못하자 그분은 기도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분은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고는, 중국 사람들이 하나님을 ‘상제님’이라고 부르듯이 ‘상제님’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한 시쯤 하늘에서부터 사방이 진동하는 듯한 큰소리가 나면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하고 부르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순간 길선주 목사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여, 나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나를 살려주옵소서!”하며 방성대곡하는 가운데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더욱 힘써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체험 때문에 그분은 새벽 미명을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장 좋은 시간으로 여기고 새벽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여자들은 남편과 자식의 운명을 위해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다음에는 기도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바꾸어 경건하고 간절하고 신비로운 새벽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 새벽기도는 1907년 평양 부흥 운동과 함께 전국 교회로 확산되었습니다.
사실 길선주 목사가 새벽기도회를 시작한 것은 그의 종교 편력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길선주 목사는 구원받기 전에 병을 얻게 되어, 병도 고치고 도(道)도 닦을 겸 한국 무교 종파 중 하나인 관성교(關聖敎) - 삼국지의 관우를 섬기는 도교의 일종 - 에 심취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어떤 영적 만족도 얻을 수 없게 되자 21세부터 선도(仙道) 수련에 몰두하였습니다. 전통 무교에서 새벽에 수련시간을 갖던 것에 익숙하였던 그는 기독교로 귀의한 이후에도 새벽에 일찍 일어나 기도하였고 이런 관습을 교인들에게 강제하였습니다.
불교에서는 새벽 3시 반에 수행이 시작되고 승려들은 새벽 예불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불교는 수행을 중시했고 그중에서도 새벽 예불을 수행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이교도들의 샤머니즘 정서와 한국 민족의 특유한 종교성이 결합되어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새벽기도 전통이 만들어졌음을 누구라도 쉽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새벽기도의 창시자인가?
어떤 이들은 새벽기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새벽기도의 기원을 예수님에게서 찾으려 하며 그래서 예수님께서 새벽 미명에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심으로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복음서 기록을 그 근거로 내밉니다(막1:35).
그러나 이것은 새벽기도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매일 새벽에 기도하신 것도 아니고, 그분이 한 것처럼 우리가 해야 한다면 우리도 믿음 생활 시작하면서 다 40일 금식 기도를 해야 하고 그분께서 겟세마네에서 하신 것처럼 매일 밤 땀을 피처럼 흘리면서 기도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장 35절이 새벽기도의 확실한 근거라면 왜 지금까지 근 2,000년 동안 다른 나라의 성도들은 한 번도 새벽기도회로 모이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믿음의 위인들 즉, 루터, 칼빈, 에드워즈, 스펄전, 휫필드, 웨슬리, 무디, 로이든 존스 같은 분들은 새벽기도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믿음의 선진들이 개인적으로 새벽에 일어나 기도했을지는 몰라도 한국 교회가 강조하고 있는 365일 새벽기도는 전 세계 어떤 교회도 알지 못하던 관행입니다.
어떤 이들은 한국 교회 부흥의 비결 중 하나가 ‘새벽기도’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나라 교회에서도 한국의 새벽기도를 배워 시행하는 곳이 있고 한국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 역시 선교지에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있기 때문에 새벽기도는 더 이상 한국 교회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자랑합니다.
하나님이 교회 역사를 통해 한국 교회를 가장 사랑하시고 기뻐하시기 때문에 다른 나라 성도들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새벽기도라는 큰 은혜를 특별히 한국 교회에만 베풀어 주셨을까요? 그런데 이처럼 큰 은혜를 받아 새벽기도를 자랑하는 한국 교회는 왜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대상이 되었을까요?
구원받은 성도라면 누구나 하나님께 의지하며 기도합니다. 더욱이 하루를 시작하며 첫 시간에 기도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개신교회에서는 많은 경우 새벽기도가 한 사람의 믿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의 눈에 들어 장로나 집사의 직무를 얻기 위해 혹은 자기만족과 열심 - 이것을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함 - 을 표출하기 위해 새벽기도에 나오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기도에 대해서는 오해하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서 새벽기도를 명령하셨으므로 이것이 큰 구속력을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또 기도는 반드시 교회에서 새벽이나 밤에 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샤머니즘의 도가니 속에서 바로 이 같은 무지에 의해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새벽기도라는 것이 한국에서만 생기게 되었습니다.
새벽기도의 폐해
새벽 5시에 예배를 드리려면 적어도 4시에는 깨어야 합니다. 한국에서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8시까지 출근해야 하므로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 곧바로 회사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동료들과 함께 일하며 저녁 8시 이후에 퇴근합니다. 새벽 4시에 깨려면 적어도 10시에는 자야 합니다. 한 집의 가장이 이러면 집안은 누가 돌봅니까? 어쩌다 한 번 이렇게 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매일 이런 일을 하려면 온전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이룰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목사는 새벽기도 이후에 잠을 충분히 더 자고 하루 생활을 시작할 수 있지만 직장을 다니는 이들은 그리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우리 몸은 구원 받은 이후에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전이 됩니다. 그러므로 몸을 피곤하지 않게 잘 가꾸는 것도 성도의 의무입니다. 또한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위해서는 적어도 하루에 몇 시간을 가족들과 같이 지내야 합니다. 성경도 읽고 책도 읽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정상인에게는 새벽기도가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미국이나 영국의 어느 목사나 성도도 이런 식의 새벽기도를 한 적이 없습니다. 한국에서 믿음은 대개 새벽기도회나 매일 교회 가서 일하는 것 같이 몸으로 때우는 행위로 나타납니다. 이런 것이 믿음의 척도로 사용되기 때문에 한국 성도들에게는 성경의 진리를 알려는 열망이 없고 산 기도나 새벽기도를 통해 하늘에서 직통으로 무언가를 받으려는 생각이 팽배할 뿐입니다. 머리를 써서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기능들은 대부분의 성도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러다보니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인 일이 교회 안에 팽배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새벽기도 등이 영성과 충성의 잣대로 인식되고 있으므로 큰 교회의 장로가 되려면 반드시 주차장 봉사와 새벽기도 참석 등이 요구됩니다. 특히 이단들은 새벽기도를 크게 강조하며 새벽기도를 안 하는 것은 큰 죄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새벽기도에서 하나님이 출석을 부른다는 말이나 천사가 참석자 명단을 작성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과거에 다미 선교회 회원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맞는다고 흰 세마포 옷으로 갈아입고 밤 12시 정각에 예배드리던 것과 비슷하게 지금까지 새벽기도는 성도의 열심을 측정하는 잣대로 알게 모르게 사용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특별새벽기도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는 특별새벽기도(특새?)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느 특정한 교회의 특별새벽기도에 참석하면 말 그대로 모든 소원이 성취된다는 소문이 돌면서 심지어 부산에서도 KTX를 타고 서울의 OO 교회 특별새벽기도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용한 것으로 알려진 그런 교회의 목사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자기 교회의 특별새벽기도에 참석하는 사람이 많다고 너스레를 떨곤 합니다. 특별새벽기도로 유명한 OO 교회에서는 최근에 ‘2013 새벽기도 목회자 국제 콘퍼런스’가 열렸는데 강사인 그 교회 담임 목사의 말을 들으려고 자그마치 5,000명이 몰렸다고 합니다.
또한 이 교회에서는 2013년에만 50만 명이 새벽기도에 참석하며 새벽기도를 하니 교회가 부흥된다고 광고하자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미국, 중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에서도 300명의 목회자와 신학생이 그 콘퍼런스에 참석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새벽기도 예찬론을 펴며 교회 성장론을 가르치는 이 교회 목사가 바로 2013년 부산에서 열리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를 준비한 분입니다. 과연 이분은 예수님만이 진리요,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새벽기도회에서 외칠까요? 과연 그렇게 진리를 외치는 목사가 WCC 개최지 확정을 위해 그리고 WCC 총회를 잘 운영하기 위해 무지한 성도들을 모아놓고 특별새벽기도를 주관하며 종교 올림픽을 우리나라에서 개최하게 되어 너무 기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는 10월 하나님 섭리 아래 세계적인 대회가 한국에서 열린다. WCC 부산 총회는 분명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WCC는 세계 140개국 349개 교단이 연합한 단체다. 세계에 유엔이 있다면 기독교에는 WCC가 있다. WCC에는 약 5억 9000만 명의 성도들이 참여하고 있다. WCC 총회는 7년 만에 한 번씩 열린다. 한국에서 WCC 총회를 개최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명성교회 김삼환 목사, 국민일보 쿠키뉴스 2013년 1월 29일).
이런 교회에서 특별하고도 특별한 ‘특새’가 주로 언제 열리는지 아십니까? 수능 시험 전입니다. 이때가 되면 온 나라의 교회들이 특별새벽기도를 하고 절과 암자에서도 중들과 신도들이 지성을 다해 특별새벽기도를 합니다. 지성으로 빌어서 자식을 대학에 보내겠다는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기독교는 이러한 샤머니즘의 한 형태가 아닙니다. 이런 식의 특별새벽기도와 무당이나 점쟁이에게 복채 주고 복을 빌어달라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한국의 특별새벽기도는 오순절/은사주의 기복 신앙의 분출구입니다. 종교 통합을 강조하고 신비주의를 조장하며 과거에 유대인들이 행한 것처럼 무지 속에서 성도들을 파멸로 몰아가면서까지 교회 성장을 위해 성공하려는 목사들의 전유물이 바로 특별새벽기도입니다. 이런 무지의 결과에 대해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경고하였습니다.
1형제들아, 이스라엘을 위한 내 마음의 소원과 하나님을 향한 기도는 곧 그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니라. 2내가 그들에 대해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으나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니라. 3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여 자기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다니면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가 되시기 위하여 율법의 끝마침이 되시느니라(롬10:1-4).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런 무지 속으로 성도들을 집어넣는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매우 엄중한 정죄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21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는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마7:21-23).
새벽기도에 대한 결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한국의 새벽기도는 무속 신앙에서 나왔음이 확실합니다. 한국 교회 사가들도 이에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결코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려는 순수한 마음을 지닌 모든 분들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기원 자체는 바르지 않지만 거기에 참여하는 순수한 성도들이 있으므로 새벽기도 자체를 정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믿습니다.
교회의 전통과 지도자들의 무지와 허영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새벽에 일어나 교회에 가서 국가를 위해 자식을 위해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순진한 성도들이 있음도 사실입니다. 이런 성도들의 기도로 인해 이 나라 체제가 유지되고 경제가 부흥한 것도 일정 부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저희 교회 성도들 중에서 새벽기도를 원하는 분들은 다른 교회에 가셔서 얼마든지 하셔도 됩니다.
다만 기도가 무엇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 목사들이 바르게 알고 바르게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모르는 가운데 새벽기도가 기복 신앙 종교 생활의 일환으로 전락하면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모두 성도들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벗어난 기도를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는 성경의 경고를 우리 모두 귀담아 들어보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자기 귀를 돌이켜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조차 가증한 것이 되리로다(잠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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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종류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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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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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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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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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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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성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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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8 10:29:56 | 관리자
왜 안 하는가? (축도) 03
축 도
한국 교회에서는 예배의 맨 끝에 예배 의식을 집행하는 목사가 두 손을 들고 성도들을 향해 복을 기원하는 축도를 합니다. 보통 축도는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을 기초로 해서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한 십자가 대속의 은혜와 성부 하나님의 형언키 어려운 영원무궁하고도 오묘한 구원의 섭리 및 주관하심과 우리 가운데 늘 역사하시어 슬프고 힘들 때 위로하시고 약하여 쓰러질 때 도와 일으키시며 우리의 구원과 행복과 축복의 성취를 위하여 동행하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고 세계만방에 복음을 펼치기 위하여 마음을 모아 계획하고 기도하며 나아가 충성하고자 하는 주님의 모든 종들에게, 진리 안에서 참된 복으로 영원히 있을지어다! 아멘, 아멘!
개신교회에서 축도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하다 보니 심지어 설교는 듣지 못해도 축도는 꼭 받아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축도 역시 천주교회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회만의 특징이며 자유교회에서는 처음부터 이런 형태의 기도를 목사가 예배 때에 한 적이 없습니다.
축도의 유래
장로교회의 신학자인 정장복 교수는 축도는 복을 비는 게 아니라 선포하는 행위이며 목회자의 고유 권한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축도의 유래와 행위자 그리고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개신교 예배 순서의 끝 부분에는 목사가 교인들을 위해 하나님이 복 내려 주심을 선언하는 강복 선언(降福 宣言-축도)이라는 순서가 있다.
축도의 유래를 보면, 구약시대에 축도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예전에 대한 제반 법규를 준 후 제사장 아론과 그 계열에게만 허락하신 사역이다(민6:24-26). 이 축도는 루터나 칼빈과 같은 개혁가들이 가장 활발히 사용하였으며 지금도 네덜란드의 개혁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유럽의 교회들이 사용하고 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창조물에게 주는 선물’이란 의미를 가진 단어를 사용해서 단순한 개인의 바람이나 기도가 아닌, 하나님의 복이 함께 하는 사실을 알리는 것으로 본다. 실제 예수님은 어린이에게 손을 올려 복을 주시고(막10:16) 승천하시기 전에 손을 들어 제자들에게 축복하셨다(눅24:50).
사도들에게 이르러서는 축도의 내용을 일반 기도와 달리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으로 구체화하여 사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는 고후13:14; 롬15:5-6; 엡6:23-24; 살전5:23; 살후3:16, 18; 히13:20-21 등이다. 교회의 역사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축도는 사도적 전승을 받은 교회의 감독과 교부들이 사용하였으며 이는 사도적 전통으로 예배의 결론 부분에서 사용되었다.
주후 363년의 라오디게아 회의에서는 이단들의 축도 행위를 엄격히 규제하면서 예배 순서로서의 축도를 존엄한 사건으로 규정하였으며, 후기의 신학자들은 축도를 하나님이 주시는 소중한 은사로 이해하였다.
축도의 자세는 역사적으로 두 형태를 들 수 있는데 하나는 두 손을 드는 것과 다른 하나는 십자가를 긋는 것이었다.
중세의 교회를 비롯하여 현재의 구교(천주교)에서는 축도를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사제의 고유한 사역으로 이해하고 강복 선언이라 칭하면서 예배에서 실천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예전의 상징적인 행위보다 말씀 중심의 교회를 강조하였기에 축도를 더욱 소중한 부분으로 간주하였고, 그 정신은 현대의 세계 개혁교회에서 계승되어 목사의 고유한 사역으로 이어지고 있다.
장 교수가 잘 정리해 주었듯이 개신교회의 축도는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축복한 것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천주교 사제의 강복 선언으로 이어졌고 개신교회를 세운 루터, 칼빈 등이 개신교회 안에 이것을 들여왔습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와 상관없는 자유교회에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축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천주교 사제들과 개신교 목회자들만 축도를 합니다.
개신교 축도의 용어 문제
이렇게 구약시대 제사장의 전통을 물려받아 축도를 하다 보니 요즘에는 목사들의 축도 용어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말이 많습니다. 특히 축도 끝의 ‘있을지어다’에 대해서는 개신교회 안에서도 많은 반발이 있습니다.
현재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축도는 고후13:14의 말씀을 근거로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후속사이며 문안의 말씀이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바울 사도가 보낸 서신마다 기록되었으며 다른 사도들의 편지에서도 볼 수 있는 내용이다. ‘
있을지어다’라는 말은 오직 예수님 자신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인 목사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실수이므로 수정되어야 한다.
현재의 ‘있을지어다’로 축도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근대적이요, 내면에서는 권위 의식이 가득 찬 발상이다. 현 사회에서는 대통령에게도 ‘각하’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계층 간의 간격을 해소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교회가 이 간격을 더 조성하여 목사와 신도들 간의 위화감을 조장하는 발상을 하는 것은 신도들에게 ‘있을지어다’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게 할 뿐이다.
고후13:14 본문대로 목사가 주문 외우듯 한다면 축복 기도의 참 의미가 없어진다. 여기서 분별하여야 할 것은 고후13:14는 어디까지나 축복문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축도문을 목사만 전용한다면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 것 같이 그 본문도 목사의 ‘축도 전용문’이므로 성도들은 성경에서 그것을 빼놓고 읽어야 한다는 이론이나 또는 그 본문을 이용하여 신도 누구나 축도를 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현실적으로 가장 심각한 것은 일부 목사들(특히 젊은층)의 권위 의식의 문제이다. 목사의 권위는 제도적인 것에 치중하기보다는 진정 하나님의 소명을 가진 자로서, 진정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희생과 봉사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권위를 소유할 때 해결이 된다. 축도를 ‘축원하옵나이다’ 또는 ‘빕니다’로 한다고 해서 목사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100년의 한국장로교회의 전통에 이미 토착된 목사의 축도의 말미어는 국문학적으로 손색이 없고 이미 공동번역이나 새 번역에도 사용된 ‘빕니다’로 하여야 한다. ‘빕니다’는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간절히 청하는 뜻이라고 국문학적으로 해석된 단어이다. 또한 청소년과 앞으로의 세대를 위해서 ‘빕니다’로 함이 가하다고 할 것이다.
축도의 실제 문제
개신교 목사들이 축도를 자신들만의 고유한 권리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목사의 ‘축복권’과 ‘저주권’이라는 개념이 은밀히 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신학교 교육과 목회 사역을 통해 구약시대 제사장들이 일반 백성을 축복하거나 저주한 기록들을 근거로 자기들도 성도들에게 복을 빌 수 있고 또 목사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내릴 수 있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시대 목사의 직무를 구약시대 제사장의 직무로 혼동함으로써 생기는 오류입니다. 신약시대의 목사에게는 결코 하나님께 명령해서 성도들에게 복을 주게 하는 능력도 권위도 없으며 마찬가지로 저주할 수 있는 특권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의 말씀을 살펴보면 이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우리는 너희의 믿음을 지배하는 자가 되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하나니 너희는 믿음으로 서느니라(고후1:24).
1너희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권면하노니 나 역시 장로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또한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고 감독하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진해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해 하지 말고 오직 준비된 마음으로 하며 3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주인처럼 군림하지 말고 오직 양 떼에게 본이 되라. 4그리하면 목자장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가 사라지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받으리라(벧전5:1-4).
기독교의 목사(Pastor)는 천주교의 사제(Priest)나 구약시대 유대교의 제사장(Priest)이 아닙니다. 목사는 성도들과 동등한 형제로서 다만 양 떼를 이끄는 목양자의 직무를 수행할 뿐입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제사장 노릇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일입니다. 초대 교회가 설립된 지 채 60년이 지나기도 전에 이미 교회 안에서 제사장 노릇을 하려는 니골라당이 생겨났고 계시록은 이에 대해 우리 주 예수님의 엄중한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네게 이것이 있으니 곧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그것을 미워하노라(계2:6).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리를 붙잡는 자들이 있거니와 내가 그것을 미워하노라(계2:15).
그리스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니골라당은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는 자들로서 구약시대의 제사장처럼 성도들을 통치하려는 자들입니다. 신약 교회가 생기자마자 이런 무리가 생겼으며 이에 대해 예수님은 자신이 이런 자들의 교리를 미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 교회는 아직도 구약시대의 종교로 남아 자기들의 성직자를 제사장(Priest)이라 부르고 있고 성직자 계급주의를 철저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이제는 제사장이 아니라 목사(Pastor)가 감독이나 장로로 교회를 치리함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목사가 제사장 노릇을 하려는 경향은 개신교회 안에 늘 있어 왔고 그래서 이들은 목사(Pastor)라는 호칭을 지존자(Reverend)라는 호칭으로 바꾸었습니다.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목사들이 사용하는 ‘레버런드’(Reverend)라는 호칭은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호칭입니다. 이 호칭은 성경에 단 한 번 나타납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구속함을 보내시며 자신의 언약을 영원히 명령하셨으니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시111:9).‘
지존자’ 즉 ‘레버런드’란 단어는 라틴어 ‘레베르’(revere)에서 온 것으로 15세기에 처음으로 존경의 호칭으로 영국의 성직자들에게 적용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이 호칭에서 변형된 호칭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The Reverend’, ‘The Very Reverend’, ‘The Most Reverend’, 그리고 ‘The Right Reverend’ 등.
이 호칭들은 다 ‘가장 지존하신 분’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이러한 호칭들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런던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C. H. Spurgeon)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단순히 하나님의 종으로 알려지기를 원한다. 그리고 나는 나의 모든 언행이 정말로 내가 그분이 종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길 원한다. 만일 하나님의 종인 내가 나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존경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결코 내 이름 앞에 하나님의 지존하신 호칭 즉 ‘Reverend’를 도둑질해서 붙이거나 천주교 사제의 로만 칼라를 하거나 성직자처럼 보이는 가운을 입는 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행하는 일로 인해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아첨의 호칭들을 반대하시면서 제자들끼리 겸손하게 평등하게 행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 백성 위에 주인처럼 군림하려는’ 자세를 취하는 고위 성직자들의 가식적인 권위를 마땅히 단호하게 거절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스스로 영광을 받는 대신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게 모르게 종교 통합을 주도하며 사람들을 마귀의 제물로 만드는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카톨릭 교회의 사악한 제도를 다시 세우려고 시도하는 자들을 향해 설교의 왕자요 은혜의 복음을 전파했던 스펄전 목사는 “일어나 이 도시 여리고를 건축하는 자는 주 앞에서 저주를 받으리라.”(수6:26)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여리고 성을 건축한 자가 저주를 받았으니 우리 가운데 로마 카톨릭 교회를 재건하려고 애쓰는 자에게는 큰 저주가 있으리라. 우리 선조 시대에 로마 카톨릭 교회의 거대한 벽이 믿음의 힘으로, 노력의 인내로 그리고 복음의 나팔로 무너졌다. 그런데 지금 그 옛 터전 위에 그처럼 저주받은 제도를 재건하려는 자들이 있다.
우리는 로마 교회의 죄악에 동조하는 자들에게 사려 깊게 그러나 담대하게 경고해야만 한다.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고 선조 때에 로마 교회가 저지른 죄악의 진상을 이야기해 주어야만 한다. 사제들이 올빼미처럼 햇빛을 싫어하므로 우리는 좀 더 철저하게 온 땅에 빛을 전파해야만 한다.
로마 교회에 독과 해가 되는 성경을 반포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건전한 복음 책자들을 해외에 보내고 있는가? 한때 루터는 “마귀는 거위 깃털 펜을 싫어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사실 그는 성령님의 복으로 기록된 책들이 마귀의 왕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에 대해 확실하고도 충분한 체험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이리들이 교훈을 받지 못한 양 무리들을 약탈하고 있으니 올바른 가르침만이 우리들 속에 들어와 종횡무진하고 있는 이단들로부터 양떼들을 보호하는 최선의 길이다.
어느 목사님의 진솔한 고백
다음의 글은 어느 목사님의 진솔한 고백입니다. 목사의 축복권과 저주권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분의 마음을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용기 있게 이런 글을 쓰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지금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멸시하고 손가락질 하는데 그 이유의 대부분은 목사들로 인한 반발 심리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뒤집어 본다면 목사들이 오히려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의 직무란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것인지 천사도 흠모할 만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귀하고 아름다운 직무에는 그것에 합당한 더 엄격하고 분명한 윤리와 도덕이 있어야 합니다. 목사의 직무가 존귀하다고 하여 목사가 도덕과 윤리를 초월해서 살아도 되거나 그럴 만한 권한을 부여받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개신교 내에 이상한 바람이 불면서 목사들이 스스로 높아지려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목사가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 또 그런 의식에 근거한 행동을 하면서 약한 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을 자신에게 예속시키려 하는 것 등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복이 임한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을 막으면 모든 것이 막힌다고 여깁니다. 노회나 목사들의 조직에서 다른 목사들을 심판하고 책벌할 때에도 진리보다는 힘의 논리에 의해 이런 일이 생김을 종종 봅니다.
내가 아는 한, 목사는 상대가 죄인이든지 자기를 반대하는 자든지, 힘이 있든지 없든지, 내게 유익을 주든지 불이익을 주든지 상관없이 사람을 살려내는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목사의 직무는 교회를 살리고 사람을 살리고 약하고 병들고 상한 영혼을 살리는 것이지 저주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의 저주는 특히 같이 믿음 생활을 하던 성도가 교회를 떠날 때 자주 발생합니다. 한 성도가 은혜로운 믿음 생활을 하지 못하고 고심하다가 교회를 떠난다면 이것을 누구의 잘못이라고 여겨야 합니까? 물론 성도가 잘못을 하거나 오해를 하거나 문제를 일으켜서 떠나는 경우도 있지만 목사는 항상 자신부터 돌아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럴 때 떠나는 성도를 향해 저주의 말을 퍼붓는 것은 바람직한 지도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마음은 편치 아니할지라도 목사로서 편안하게 대해 준다면 떠난 성도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 설령 돌아오지 않아도 다른 교회에서 믿음 생활을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섬기는 교회를 떠난다고 성도를 저주한다면 근본적으로 목사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를 자신의 소유로 보는 데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목사의 소유도 아니고 교회의 소유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이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21장 15-17절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면서 양들이 자신의 소유임을 분명히 강조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목사는 그리스도의 소유인 양들을 잠시 맡아서 양육하고 꼴을 먹이고 돌보는 직무를 수행할 뿐이지 결코 그 양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이 문제가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으면 교회관에 문제가 발생하며 목사의 윤리가 무너지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목사가 축복권도 있고 저주권도 있다는 의식을 보이기 시작하면 약한 성도들은 심지어 공포감을 느끼고 마음이 아프고 상하여 고통당하기도 합니다.
목사는 양들이 살아나서 기뻐하고 춤을 추며 젖을 짜고 생육하고 번성함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 하지 아니하고 목사가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하면 양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수밖에 없습니다. 이 죽음은 육적 죽음이 아니라 영적으로 메말라서 상한 채 죽는 것을 말합니다.
제대로 된 말씀의 양식과 지식과 사랑과 영적 능력을 통하여 양들을 먹이지 못하면서 오히려 그들을 자신에게 예속된 소유물로 본다면 이것은 무서운 착각입니다. 바로 이런 목사들로 인하여 기독교가 욕을 먹고 많은 성도들이 영적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죽어 가게 됩니다. 사실 이것은 그가 목사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와 직무와 사명을 저버린 것입니다.자신이 지켜야 할 윤리와 도덕을 갖추고, 신앙의 담력을 얻은 목사라야 이 시대를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교인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축도에 대한 결론
축도 역시 교회관의 차이에서 발생한 부산물입니다. 신약시대 목사를 구약시대 제사장의 연장으로 보는 교회에서는 목사가 축복권과 저주권을 휘두를 수 있지만 자유 독립교회에서는 이런 일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개신교회에서 축도를 하는 목사나 목사의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최소한 이 의식의 기원과 의미를 깨닫고 바르게 하면 좋을 것입니다.
17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취하라.… 20이것들을 증언하시는 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 하시는도다.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 2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22:1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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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8 10:25:36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