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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todo=view&atidx=0000031767 과연 이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다. 이것은 프랑스 파리 근교의 한 건물의 지하 깊숙한 곳에 매우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 전쟁이 일어나 폭탄이 떨어져도 어떤 손상을 입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이것에 대한 보안은 이게 다가 아니다. 이것은 먼지조차도 접근을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를 둘러싼 공기의 습도와 온도 역시 철저하게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되어 있다. 이를 위해 이것은 높이와 너비가 39.17밀리미터가 되는, 끝이 둥근 원형 유리관 속에 또 다른 작은 원형 유리관 여러 개에 겹겹이 둘러싸여 있다. 이것은 세상과 공기도 섞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격리되어 있는 것이다.지난 120년 동안 이것이 저장실 밖으로 나온 것은 고작 3번뿐. 이것을 실제로 본 사람은 극소수로, 일반인은 그 누구도 이것에 접근할 수 없다. * * * * * 국제 킬로그램 원기는 이 세상의 모든 1킬로그램의 어머니와 같다. 세상의 모든 1킬로그램은 바로 이 원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물질이 질량이 얼마나 나가는지는 바로 이 국제 킬로그램 원기에 의해 정해진다. 정확하게 1킬로그램이란 게 얼마나 되는 거냐는 질문의 답은 바로 이 국제 킬로그램 원기인 것이다. * * * * * 겨우 1킬로그램짜리 쇳덩어리가, 거의 반도체 공장 이상의 우주 철통 보안을 받으며 애지중지 보관되는 과학계의 최고 보물인 이유는, 이게 정확하게 1kg, 아니 1kg을 정의하는 "최종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질량은 비행기, 인터넷, 우주선을 만들어 낸 인류의 21세기 과학 지식으로도 아직 원시적인 인공 구조물에 의존하여 정의하고 있는 유일한 단위입니다. 옛날, 그러니까 18세기쯤에는 길이의 단위도 미터 원기가 최종 권위였습니다. 그러다가 기술이 발전하면서 더 절대불변인 기준으로, 가령 "빛이 진공에서 1/xxxxx 초 동안 진행한 거리"와 같은 식으로 수 차례 정의가 바뀌었죠.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1초의 정의도 "무슨 원자가 절대 온도 0도에서 xxxxx 번 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 이런 식으로 절대불변이면서, 현대 과학 기술로 측정 가능한 기준으로 바뀌었지요. 옛날에는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의 1/86400 이런 식으로 더 부정확했었습니다. 그러나 킬로그램의 정의만은 19세기에 제정된 정의를 아직까지도 업데이트하지 못했습니다. 질량은 시간, 길이와 더불어 시공간과 물질을 기술하는 한 축으로써, 과학에서 기본 중의 기본 개념입니다. 중력이라는 개념이 가미된 무게야 디지털 저울로도 측정하지만, 지구에서나 달에서나 동일한 절대 질량을 측정하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원시적인 양팔 저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5kg 추 얹고, 1kg 추 얹고.. 마치 돈 내듯이. * * * * * 그래서 국제 킬로그램 원기는 표준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겐 일종의 수치이다. 최첨단 과학기술의 시대에도 여전히 1킬로그램이 얼마인지는 전적으로 이 구닥다리 물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언제 없어지거나 손상될지도 모를 이런 물건이 바로 질량이라는 건 과학을 비웃음거리로 만들기에 딱 좋은 예다. 독일의 한 표준 과학자는 “킬로그램은 측정과학계에서 하얀 재킷에 묻어 있는 얼룩과도 같다”고 말했다. * * * * * 세계 각국에는 이 킬로그램 원기를 정교하게 복제한 사본이 국가별로 표준 과학 연구소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몇 년마다 정기적으로 총회를 열어 복사본들의 질량을 서로 측정하여 오차가 생기지는 않았나 대조합니다. 이게 어긋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밀리그램 단위로 무게를 측정하는 금이나 귀금속 거래를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1세기가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원기와 복사본, 또는 복사본과 복사본 사이의 오차가 점차 커지고 있고(물론 그래 봤자 마이크로그램 단위이긴 하지만) 그 원인 및 해결 방안을 과학계가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해 고민이라고 합니다. 이 짬밥을 너무 오래 먹은 구닥다리 킬로그램 원기를 궁극적으로 퇴출시킬 목적으로, kg의 새로운 정의를 만들기 위해 세계 각국이 애쓰고 있습니다. 국제 표준으로 채택되는 정의를 만들어 낸 국가 내지 학교, 연구소는 돈과 명예를 한몸에 거머쥐는 스타가 되겠죠. 그 방법은 절대적으로 엄밀하면서도 너무 어렵지 않게 어디서나 재연이 가능해야 하는데, 아직 이렇다할 뾰족한 대안은 나오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에는 히브리/그리스어가 쓰였고 큐빗, 므나, 바스, 드라크마 같은 길이, 화폐, 부피, 무게 등의 단위가 쓰였습니다. 그 반면 지금 이 마지막 시대에는 영어가 세계 공용어이고 미터법이 학계에서 통용되고 있으며, 달러나 유로 같은 화폐가 꽤 널리 통용되는 편입니다. 세계의 공용 언어라든가 단위는, 국제 정세 및 영적 동향과도 무척 큰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단위의 최종 권위 관념은, 하나님의 말씀의 최종 권위에 대해서 눈을 뜨고 있는 bible believer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척 크다고 생각됩니다. 세계 각국에 샘플로 전달되어 있는 킬로그램 원기의 복사본은 성경의 필사본하고 정확하게 같은 개념이지요! 그 약점과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딱히 대안이 없어서 너무 오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국제 킬로그램 원기는, 우리나라 교계에다 비유하자면 개역성경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또한 성경을 읽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의 변개, 삭제에 대해서도 모르고 관심이 없는 신자는, 마치 과학자라고 하면서 킬로그램 원기가 어긋나고 있는 것에 대한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고 새로운 정의의 필요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정확하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면 과학자라고 할 수가 없죠 -_-) 과학자들은 "언제 없어지거나 손상될지도 모를 이런 물건"에 견주어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측량하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불안해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늘과 땅이 없어질지라도 절대 없어지지 않을 절대무오한 말씀"에 맞춰 나의 마음과 행실을 교정만 하면 됩니다. 이 얼마나 극단적인 대조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무슨 성경 자필 원본이나 KJV 1611년판 원본을 교황청 도서관 지하의 반도체 제조실 같은 벙커에다 kg 원기처럼 고이 짱박아 놓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님의 변모하심을 직접 눈으로 본 당사자의 체험보다도 더 확실하고(벧후 1:19) kg 원기보다 더 정확하고 무오한 최종 권위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며(KJV 1611), 그 말씀의 순수성과 절대불변 보존에 대한 약속까지 주어져 있습니다. 이 정도는 돼야 기독교가 존재 가능하지 않겠나요?[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36:18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31 23:33:02 | 김용묵
어제는 어느 미국 목사가 적은 다음의 글을 읽고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남태평양의 나병 요양소를 방문했다. 본인과 가족을 위해서 격리를 자청한 사람들 - 몸이 흉하게 일그러진 사람들 - 과 인사하며 나는 눈길을 돌리고 싶었다. 그 고통이란 차마 보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눈길을 돌리면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거기에 간 것은 잠시나마 그들의 병을 잊게 해 주기 위해서였는데 말이다.   그들의 몸은 갈 수록 더 인간처럼 보이거나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눈에 집중하면 그들과 소통할 수 있음을 나는 배웠다.  일단 내면의 인간을 만나고 나니 그 뭉그러져 쇠해가는 몸을 가장 인간다운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나아가 끌어안을 수 있었다.   그때 눈길을 돌리지 않기를 잘했다.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광경이었지만 남태평양 작은 섬 북단에 파묻혀 격리되어 살아가던 그 사람들이 내 삶을 바꾸어 놓았다.   나병 요양소는 내게 교회의 한 은유가 되었다. 타락의 일그러진 피해자들 - 아직도 죄의 오물에 물들어 있는 - 이 회중석을 채우고 지도자가 되고 감히 다른 사람들 앞에 서서 가르치고 강단에 서서 설교까지 하는 곳이 교회다. 그래서 나는 사역을 계속한다.   나의 추한 모습으로 인해 목회를 그만 두어야겠다고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성도들 가운데도 이런 체험을 가진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러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의인은 그분 앞에 설 자리가 없습니다. 나 자신의 합리화가 아니라 진정으로 나병같은 죄를 가진 한 인간이 가정을 이끌고 교회를 이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새삼 새겨봅니다. 죄로 인해 고민할 때, 그래서 목회를 그만두어야겠다고 느낄 때 손을 놓기 전에 한 번 읽어 보려고 여기에 올립니다. 샬롬.
2010-01-26 22:00:23 | 관리자
우리는 성경 본문 내에서 충분히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은 룻기 3:9에 먼저 나옵니다. 그러므로 룻기 3:16을 읽으실 때, 그 앞에 있는 룻기 3:9과 함께 읽으시면 쉽게 이해가 될 겁니다. 그가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매 그녀가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그러므로 당신의 옷자락으로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당신은 가까운 친족이니이다, 하매(룻 3:9) And he said, Who art thou? And she answered, I am Ruth thine handmaid: spread therefore thy skirt over thine handmaid; for thou art a near kinsman. 9절에서 보아스가 룻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물을 때, 룻은 "당신은 가까운 친족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룻의 이 말은 "보아스 당신은 우리의 상속재산을 회복시킬 책임이 있는 자이고, 나는 당신의 도움으로 엘리멜렉의 상속재산을 회복하고 그의 씨가 끊어지지 않게 할 여인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16절에서 나오미가 룻에게 던지는 질문과 룻의 답변도 이와 동일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2010-01-23 22:05:28 | 김문수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1) 새벽에 한 여인이 갑자기 집으로 들어오므로 놀라서 '너는 누구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딸은 나이가 든 사람이 나이가 적은 사람을 부를 때 쓰는 말입니다(룻3:10 참조). 물론 아들도 내 아들이 아니라도 나이가 적은 사람을 가리킬 때 씁니다. 이것은 히브리, 그리스, 영어 권에서 동일합니다. (2) 나오미가 룻인 것을 알고 그녀의 상태를 물을 수 있습니다. 즉 "아직도 너는 모압 여인 룻이냐? 아니면 보아스의 아내가 될 사람이냐? 네 신분은 이제 무엇이냐?" 나오미는 보아스가 그녀를 신부로 맞으려고 마음의 준비를 했는지 묻고 있습니다. 앞뒤 문맥상 후자가 더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2010-01-23 20:34:19 | 관리자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우리는 정말 측량할 수 없이 소중한 것들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얻은 자들입니다. 세상을 부러워하지 말고, 비판과 질시로 스스로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나아갑시다.
2010-01-23 18:59:05 | 김문수
저도 모두 공감합니다. 오래 교회를 다녀도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었지요. 불가지론자처럼 끝내 정답은 없다는 생각이 실제로 해결되는 지점이 있다는 것, 죽어봐야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2010-01-23 14:12:02 | 김재욱
룻기 3:16절에 시어머니가 룻에게  내 딸아, 너는 누구냐? 라고 묻습니다. 이해가 잘 안돼서요. 설명 좀 해 주세요.[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32:59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23 08:34:10 | 이정순
100% 공감가는 글입니다. 이렇게 글로 보니 정말 많은 변화와 차이가 있구나 하고 새삼 느껴집니다. 내 안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지 알수 있게 정리해 주시니 더욱 감사하고 정말 셀 수 없는 많은 복을 받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확실히 이러한 교제는 많은 유익을 줍니다. 글이나 말로 소통한다는 것 (나만 알고 있지 않고 )이 힘이 됩니다.
2010-01-23 06:51:27 | 정혜미
성경을 안 덕분에, 예수님을 믿은 덕분에,   나는 내가 왜 태어났고 왜 이런 세상을 살며, 죽고 나면 어떻게 될지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죽는 그 과정과 고통은 인간적으로 두려울지 모르나, 죽음 그 자체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소망이 생겼습니다.죄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쓸데없는 비관/좌절/피해 의식이 없어졌습니다. (우리나라 교육 제도, 정치인, 재벌, 강대국 헐뜯기 등 -_-;;) 이 세상이 무슨 운석 충돌이나 지구 온난화 따위로 망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으며, 일제도 북한도 무너뜨리지 못한 이 나라 역시 결국 죄와 욕심과 불의 때문에 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문제의 본질인 죄를 볼 줄 알기 때문에, 겨우 죄가 초래한 최말단의 그 나쁜 ‘결과’만 어떻게든 척결하려 애쓰고 우왕좌왕하는 인본주의적인 사회/정치 단체, 각종 모임 등에 별로 관심이 없어졌습니다.특히, 죄를 근절하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한 ‘필요악’이 나쁘다고 없애자고 드는 정말 무지몽매하고 어리석은 생각에 결코 동조하지 않게 됐습니다. (체벌, 사형 제도, 군 복무, 공권력 등) 귀신, 초능력, 불가사의, 이상한 공상 과학 내지 음모론 쪽 얘기를 들어도 현혹될 일이 없어졌으며, 온갖 미신적인 관행들에 관심이 싹 사라졌습니다.남이 안 알아 주고, 남처럼 안 했다간 나만 바보 되고 손해 보는 상황에서도 선행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가 마련됐습니다. (이걸 알면, 예수만 안 믿고 착하게 산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걸 깨닫게 됨) 우리를 창조한 절대자의 성품을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라는 말씀이 그냥 기독교 경전이니까 상투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문구가 아니라 진짜 객관적으로 맞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예수님이 겨우 입에 발린 탁상공론으로 종교놀이나 하러 이 땅에 오신 게 절대 아님을 알게 됐습니다.   이런 식으로 쓸 거리는 얼마든지 더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이 가치관이 딱 잡힘으로써 제가 얻은 영적, 물질적 복과 정신 건강상의 이득,그리고 그 덕분에 다른 쓸데없는 이상한 이념이나 사상, 집단, 이단 종파, 혹은 연예/오락 쪽에 심취하지 않고 사고 안 쳐서 절약된 돈과 시간은 제겐 정말 추정조차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걸 모르고 매주 꼬박꼬박 교회 가는 데 드는 돈과 시간만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제가 보기엔 정말 바보입니다.[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33:3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23 01:57:06 | 김용묵
킹제임스 성경을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핍박과 조롱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어느 목사가 지은 예수님의 일대기 책만을 들고 왔다. 그분의 삶을 조명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가 주는 글이 있다. 짧지만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위로가 되기를 원한다.   2010년 1월 24일 미국의 고향 볼티모어에서   진실(진리)을 말하는 사람들을 위한 네 가지 영원한 교훈   악과 싸우는 무기 중에 진리의 검에 견줄 만한 것은 없다. 누구든지 용감한 사람은 언제라도 이 검을 쥘 수 있지만 그런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럴 만도 하다. 이처럼 강력한 도구를 휘두르는 특권에는 다른 사람들의 오해, 거짓 고소, 관계의 단절, 외로움, 좌절 등 큰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더욱이 옳은 편에 서면 무서운 자기 회의와 심지어 자괴감이 자주 도진다. 진실의 손잡이를 잡기로 선택하면 영광스런 승리를 맛볼 때도 있지만 악의 역공이 놀랍도록 흉포하게 찾아와 오랜 파괴를 남길 때가 많다.   진리의 검을 들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의 모본에서 찾을 수 있는 네 가지 교훈을 나누고 싶다.   첫째, 자신의 사명을 알면 계속 목표에 집중할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명확히 아셨고 인기나 성공이나 박해나 위협이나 심지어 측근들의 불화 때문에 곁길로 빠지지 않으셨다. 그분은 주변 사람들을 적절히 돌보시면서도 올곧게 그 사명에 집중하셨다. 그분은 진리를 밝히려 노력하셨고 진리를 받아들이라는 초대를 되풀이하셨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실패 때문에 궤도를 벗어나시는 일은 절대 없었다.   둘째, 악을 상대하려면 싸워야 한다. 싸움을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지만 진실 편에 서서 악에 맞서려면 싸움이 불가피하다. 때로는 꼭 해야 할 말인데, 말하기도 어렵고 상대방 쪽에서 듣기도 어렵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심한 질책이 필요한 싸움은 극히 드물다. 어쩌면 평생에 한 번일 것이다. 악이 클수록 싸움도 강해야 한다. 대체로 이렇게 권하고 싶다. 친절한 접근이 무책임해지지 않는 한 친절로 대하되 솔직한 발언을 희생한 친절은 절대로 안 된다. 진실을 솔직히 말할 각오를 하라.   셋째, 고결한 싸움에서 담대함은 가치 있는 모험이다. 진리 편에 서려면 담대해야 한다. 반감을 품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므로 방식에 대해 비난이 가해질 것을 예상하라. 상대방은 내용에 흠잡을 게 없으면 방식이라도 문제 삼는다. 나아가 담대하려면 강한 발언에 뒤따르는 강한 행동이 요구될 수 있다. 당신은 직장을 그만 두거나, 관계를 끝내거나, 강적과 대결하거나 두려움을 수습하거나 위협에 대항하거나 심지어 어떤 패배에 직면해야 할 수도 있다. 물러서지 말라. 당신이 진리 위에 서 있다면 소심함은 나중에 후회가 되어도 담대함은 절대로 후회되지 않을 것이다.   넷째, 진실(진리)을 말한다고 승리가 보장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의 법대로 움직이는 곳이 아니다. 현 세상 제체는 선행을 벌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상을 준다. 제임스 로웰의 말로, “진실은 영원히 단두대에 있고 악은 영원히 왕좌에 있다.” 불행히도 진실(진리)을 말하는 사람들은 가장 잔인무도한 학대를 당하게 될 때가 많다. 그러니 현실에 눈을 뜨라. 용기를 내라. 당신이 진실 편에 섰음에도 아마 그 정당성은 조만간 혹은 당신의 평생 동안 입증되지 않을 것이다. 로웰의 말은 이렇게 끝난다. “그러나 그 단두대가 미래를 지배하며 흐릿한 미지의 세계 저편에 하나님이 그늘 속에 서서 자기 사람들을 지키신다.”   희생이 따를지라도 진리의 검을 두 손으로 꼭 붙들면 큰 상이 따른다. 진실(진리)은 죄책감과 수치심에 자유를 가져다준다. 진실(진리)은 만족감을 낳고 확신을 심어 주며 창의력을 자극하고 친밀함을 길러 주며 정직을 장려하고 용기를 불어넣으며 사람들을 해방시킨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하게 진실(진리)은 우리를 하나님 편에 서게 한다. 진실(진리)을 위한 모든 희생에 하나님이 후히 상 주신다는 약속이 우리에게 있다. 이생에서는 혹 아닐지라도 다음 생에서는 틀림없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33:35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23 00:40:25 | 관리자
이 제목은 한참 찾아야 될 만큼 뒤로 쳐져 있었지만 제 마음속에 늘 숙제로 남아 있었습니다. 장문의 간증이 될 것 같기도 하고 해서 어디부터 어떻게 쓸 까 마음한구석에서 떠나고 있지 않았지요. 그리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상황도 궁금하게 여겨지는 제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킹제임스를 읽고 인정했었는데 어느 새 킹제임스를 부인..아니 성경의 무오함과 보존을 도외시하는 교회로 옮겨 아무 갈등없이 (?) 교회생활을 하는 것이 의아하게 여겨졌기때문이지요. 그러니까 그 분들은 아직도 킹제임스 성경을 믿고 있는지...아님 아예 처음부터 의심을 가졌었는지 제게는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 있어서 교회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경에 대한 믿음이 급선무가 아닐까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이만 간략하고 저 같은 경우엔 시편12편 7절의 말씀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을 믿고 많은 분들이 같은 말과 태도를 갖듯이 일단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내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구원받기전에는 성경에 대한 상식이 별로 없었기에 갈등을 일으킬만큼 가진 지식도 없었고요. 어쨌든 저는 요즘 많은 분들의 수고와 용기와 헌신으로 더욱 성경의 무오함과 보존을 밝혀주셔서 감사할 따름인데 혹시라도 킹제임스성경은 믿는데 좀 더 정확한 근거와 이유를 몰라 나중에라도 교회안의 갈등으로 인해 킹제임스성경까지도 부인하는 사태가 생기지 않도록 좀더 교회들이 킹제임스성경에 대한 자세한 가르침이 있었음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2010-01-21 13:07:20 | 정혜미
일명 관리자님은 말씀을 위해 시간을 아끼지 않는 형제자매님들을 위해 잠깐이라도 휴식을 취하시라고 이런 일을 하셨나봅니다. 화질이 굉장히 좋군요, 저는 돋보기를 끼고 보니 더욱 현미경으로 보듯 선명하게 보이네요.ㅎㅎ 낼은 킵바이블에 들어 오던 형제가 마침 이곳 볼티모어에 산다기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인터넷으로 인해 이렇게 신기한 만남과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감사하지요. 미국, 일본 ,한국이 그리 멀지 않게 느껴집니다. 모두들 사랑합니다.....
2010-01-21 12:29:00 | 정혜미
하나님께서 만든 자연은 그분의 신비를 잘 보여 줍니다. 우리 집의 개(보스턴 테리어)를 보면 얼마나 창조의 신비가 대단한지 알 수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서 이 비디오를 한 번 보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정동수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48:26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21 05:26:19 | 관리자
샬롬~!! 목사님 말씀잘듣고 있는 청년입니다. 말씀을 듣다가 이런생각이 들어서 질문드립니다.   은사주의 은동 바로알기에서..베니힌이라든가 여라 오순절 은사운동주의에 대해서 저도 목사님말씀처럼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자웃음소리,장풍등등 저도 동의하는바입니다. 현재 한국교회에 이런문제점이 많이 있다고 한다는것입니다. 교회에서 쓰러지고 머 이런건 많이 볼수있죠.   이런 은사운동이 마귀적인것을 알고있습니다 제가 궁굼한것은.. 그런데 이런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끼고 회계하고 돌아오는 형제자매도 있을것입니다.   다른 이교도들도 또한 여러 중복적인 기도라던가(만트라) 이런경험으로 인해서 자기들의 신에게 다가가고 있다는것을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기독교에서 베니힌 목사 은사운동에서 회계하고 구원의 감격으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있을것입니다.   또한 이단중에 이초석목사의 집회에서 회계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린사람도 있을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불법을 행하는자라고 하시겠지요.   그럼 베니힌 목사님도 불법을 행하는자(이단)라 해야하나요?       제가왜 이런질문을 하냐면..   저또한 어려서 그런 체험을 경험했었습니다.   제가 어렷을때 부흥회 설교말씀듣고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구원에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목사님께서 사람들을 나오라고 하시더니  쓰러트리고,또한 방언(반복해서 할렐루야를 빨리해라 이런식)을 시키는것이었지요   10여년전 당시에 경험이 생각나서 이렇게 목사님 설교말씀듣는중에 궁굼해서 글을 씁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고,혼돈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신걸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수있습니다.     각자각자의 주관적으로 느껴지는,확신받았던 그경험과 하나님을 아실것입니다.   한목사가 지나가면 성도들이 쭉넘어지고, 장풍을 하면 넘어지는 현상은 전 성령님의 역사라 생각지 않습니다.   이런사람들은 (그 마귀적인 상황)속에서 넘어지고 울부짖는 그 사람,    그상황속에서 구원에 확신이 드는 사람, 예수님을 영접한사람,결심한사람. 하나님을 만났다고하고, 하나님께로 눈물로 회계하고 돌아오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꼇다고 사람들에게 간증 하고,하나님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겠다고 결심을 한다면,   아니야 아니야  그상황과 경험은 모두 마귀은 장난이야 이렇게 얘기해아할까요?? 어떻게해야할까요?     두서없이 적었습니다. 자세한 답변부탁드릴께요.[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26:44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1-20 11:18:56 | 허형규
독립영화인 관계로 상영 장소는 매우 제한돼 있습니다. 현재는 명동 씨너스(명동역 6-7번 출구 사이에 바로)가 유일하고요. 서울에서 관객이 많아야 지방 상영도 유력해진다고 하니, 많이 관람해 주세요. ^^ http://www.restorationthemovie.com/ 에서 영화 시놉시스, 상영 정보 등을 볼 수 있습니다.
2010-01-20 09:35:27 | 김용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