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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내용이네요. 그런데 누군가 수용하고 성경에 충실하려 한다 해도 성경조차 이상하니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한 가지를 바로잡으려면 100가지를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힘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2010-08-20 10:13:38 | 김재욱
제가 전에 활동하던 레마선교회 이명범 여자목사님도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목회를 시작 하였다고 간증하셨지요 그것이 진짜 하나님의 음성인지는 음성을 직접들었다는 본인과 음성을 들려준 존재(?)만이 알겠지요 귀한글 감사합니다. 그리고 바른성경인 킹제임스 성경과 바른진리를 알게 해주시고 바른교회로 인도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2010-08-20 10:08:05 | 송재근
상기 주제에 대해서 이승구 교수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이 쓰신 글을 오늘 아침에 읽었습니다.제대로 설명해주신것 같아, 형제/자매님들께서 한 번 읽어보시라고 글을 올립니다.신학교에서 이상한 것도 많이 가르치지만, 이렇게 바르게 가르치시는 분이 계시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아직도 직통계시, 환상, 꿈에 천국을 보고 왔다는둥 이상한 소리를 하시는 분들에게 보여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삶의 방향 전환을 이루었거나 하나님의 음성에 근거하여 인생길의 여러 가지 판단을 해 나간다고 말한다. 성경 계시 시대에 그러한 것이 있었기에 많은 그리스도인은 별 생각 없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현상이 있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또한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한 이들은 자신들이 일류(一流)가 못되는 이류(二流)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오해에 근거한 불안감에 사로잡히는 일이 많이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태도를 취하고 나아가야 할 것인가? 먼저 이 문제에 대해서 ‘세 가지의 각기 다른 사유 방식과 태도’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 유형의 사유 방식과 태도는 ‘세 가지 다른 유형의 종교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자신들이 과연 어떤 유형의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첫 번째 유형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음성을 들려주셔서 놀라운 계시를 주시거나 인생의 방향을 이끌어 나가는 일이 계속해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마치 성경 시대에 하나님께서 때때로 그의 백성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삶을 인도하셨던 것과 같이 오늘날에도 주님께서는 동일하게 그의 계시의 도구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렇게 하여 인간들을 인도해 가신다고 하는 것이다. 이를 ‘직통 계시파’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 이런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성경 계시와 우리 시대에 주시는 계시를 별로 구별하지 않고, 그 관계를 연속적으로 보려고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때로는 음성으로, 때로는 꿈이나 환상으로, 또 때로는 내면적 깨달음으로 그의 뜻을 드러내어 주시는 계시적 활동을 지속하시므로 우리는 그렇게 계속되는 계시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결국 각각 다른 계시 주장을 하는 이들이 주관주의적 대립에로 나아가고 말거나, 아니면 우리들로 하여금 몇몇 종교적 엘리트에 의존하여 신앙생활을 하여 가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각자에게 주어지는 계시가 서로 대립하는 상황에 빠지지 않으려면, 몇몇 사람이 받았다고 하는 새로운 계시에 의존해 가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직통 계시파’는 결국 성경 계시에 새로운 계시를 덧붙여 나가는 일을 하지 말라는 성경의 금령을 깨고 지속적인 계시 수납을 시도하는 이단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이 첫째 유형은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에 속하지 않은 이단의 주장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 이들은 대개 이런 유형에 가깝게 가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두 번째 유형은 ‘좀 온건한 직통 계시파’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중 대다수는 논리적으로 철저하지 않은 입장을 보인다. 즉, 이 온건한 직통 계시의 주장은 한편에서는 성경 계시의 독특성과 종결성을 인정한다. 성경 계시와 같이 우리들의 구원에 대해 필수적인 계시는 이미 다 주어진 것이므로 그런 계시는 이제 더 이상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이들은 구원에 필수적인 성경 계시의 종결성을 인정하면서도, 오늘날에도 성도의 삶을 인도하시고 교회를 인도해 가시기 위해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가 지속된다고 자신들의 종교 경험에 근거한 주장을 한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우리들은 구원을 위해서는 성경 계시로 만족해야 하지만, 지금도 우리의 삶을 인도해 나가시기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개인적 계시가 있으므로, 우리는 그런 개인적 계시를 기다리면서 그런 계시로 주시는 바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고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일부 인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나가실 때 일상적으로는 (다음에 생각할) 세 번째 유형과 같이 하시나, 때때로 아주 특수한 경우에 주께서 직접적인 계시를 주시기도 한다고 주장한다.세 번째 유형은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임을 주장하는 유형의 입장이다. 이는 성령님께서 성경의 계시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들에 바르게 적용하게 하시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께 순종하여 성경 전반의 뜻을 파악하여, 그것에 비추어서 주께서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성령님께서 성경 말씀을 사용하셔서 은혜를 베푸시며 우리의 삶을 인도해 가신다”는 주장이 된다. 그러므로 이런 입장은 성경 계시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노아에게,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또한 선지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경우도 있었고, 그런 계시의 도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해 주시기도 했으나, 성경 계시가 마쳐진 후에는 이 말씀 외에 더하거나 빼지 말라는 말씀을(계 22: 18, 19) 계시적인 뜻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제 성경 계시가 종결된 상황에서는 주께서 음성으로나 꿈으로나 이상(vision)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이미 주셔서 성문화하신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성령님의 조명을 따라서 자신들의 구체적인 정황 가운데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가는 것인지를 깨닫게 하신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님께서 말씀을 사용하셔서 은혜를 베푸시며 성도를 통치해 가신다”는 유형의 사유에 의하면 이제 성경 계시가 종결된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음성으로 들려오는 일은 우리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는 그쳐진 것이다. 이것은 메마른 기독교의 주장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성경 말씀을 사용하셔서”(cum verbo) 우리를 통치하시며 인도하시며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가장 성경적으로 바르게 주장하는 기독교의 주장이며, 가장 건전한 성령파 기독교의 주장인 것이다. 사실 이와 같이 가장 성경적이고, 가장 성령적인 입장이 고래(古來)로부터 가장 건강하고 건전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 온 입장이었다.예를 들어, 17세기 영국에 살던 청교도들이 자신들의 신앙으로 고백하였으며, 한국의 가장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신앙 고백서로 받아들이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 가운데서 제 1장, 1항 마지막에 있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해 주시던 과거의 방식들은 이제 중지되어 버렸다”는 진술과 6항 중에 진술된 “이 성경에다 성령의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든 아니면 인간들의 전통에 의해서이든 아무 것도 어느 때를 막론하고 더 첨가할 수가 없다”는 말을 생각해 보라. (1) 이와 같은 노선에서 성경적인 신학자들은 아주 온건한 형태의 예언 인정의 논의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박하여 왔다.(2) 좋은 개혁신학자의 한 사람인 로버트 레이몬드 교수의 이런 문제에 대한 강한 입장을 들어 보라: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예언자들과 방언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고 믿는 것은 그만큼 그가 성경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으로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오직 성경의 위대한 종교 개혁적 원리를 버려 버린 것이다.”(3) 그는 다른 개혁 신학자들과 함께 “신약 선지자들의 영감은 그쳐졌으므로, 선지자직도 그쳐졌고,” “선지자적 직임은 가르치는 직임 속으로 편입되어졌다”고 한다.(4) 한마디로 개혁파 신학에서는 오늘날에는 선지자(예언자)가 없고 성경에 의존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여 온 것이다.(5) 그러므로 이런 입장에서는 오늘날 음성으로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이 개개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① 모든 점에서, 즉 신앙과 생활에 속한 모든 점에서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개연성이나 우리의 경험에 의존하지 말고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다. ② 그리고 또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적용하게 하시는 말씀의 원리에 따라 매일 매일 매순간순간의 결단을 주의 백성답게 하여 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성경을 존중해 가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건전하고 바른 방식으로 성령님께 의존하며 순종해 가지 않고서 이상하고 기괴한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자신들이 과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 나간다고 주장하는 일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게 된다. 또 그런 주장자들로 인해서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정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나가는 바를 모른 채 결국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 가게 되는 것을 더 안타깝게 여긴다. 또한 많은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바르지 못한 주장으로 말미암아 예수 믿는 바른 도리에서 멀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게 된다.부디 우리네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주변에서 난무하는 비정상적인 주장에서 벗어나서 성경이 가르쳐 왔고 과거에 가장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 온 바와 같이 성령님께서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며 통치하시는 대로 살아 갈 수 있기를 바란다.[각주]1.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I. 1, 1 & I. 1, 6.2. Cf. Richard B. Gaffin, Jr., Perspectives on Pentecost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and Reformed, 1979), 65-67; R. Fowler White, "Richard Gaffin and Wayne Grudem on I Cor. 13:10: A Comparison of Cessationist and Nocessationist Argumentation,"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35, no. 2 (1992): 173-81; idem, "Gaffin and Grudem on Ephesians 2L20: In Defense of Gaffin's Cessationist Exegesis,"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54 (Fall 1993): 303-20; O. Palmer Robertson, The Final Word (Carlislie, Pa.: Banner of Truth, 1993), 85-126; Edmund P. Clowney, The Church (Downers Grove, Ill.: IVP, 1995), 257-68.3. Robert L. Reymond, A New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ian Faith (Nashville, Tennessee: Thomas Nelson Publishers, 1998), 59.4. Reymond, 84. Cf. David Clyde Jones, "The Gift of Prophecy Today," The Presbyterian Guardian (December 1974), 163-64.5. John Murray, Collected Writings, 1:19-22. [출처]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 |작성자 향기나무 향나아빠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2:45:20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8-20 10:01:28 | 김학준
예전에 은사운동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지 않았습니다. 최근에서야 조금 보이는 것 같습니다. 정목사님께 예전에 간략하게 메일을 보낸적 있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은사주의 바로알기 책을 정독하라고 권하셨습니다. 책을 이것 저것 두서없이 읽다 은사주의 바로알기 책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 왠지 잘 진도가 안나가는것입니다. 그래도 띄엄띄엄 계속 읽고 있지요 그책을 접하고 다시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정리가 안되어 머리속 한켠에 처박아 두었던 여러가지 것들 말입니다. 그런데 알아갈수록 탄식이랄까 무거움과 슬픔?, 비애? 뭐 이런것들이 계속 교차하는 것을 느낍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존중은 말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깊은 공감을 가집니다. 감사합니다
2010-08-20 00:57:59 | 노영기
참 좋은 발견을 하신것입니다. 아마도 조금씩 더 많은 오류가운데 바른 진실을 발견하리라 생각됩니다. 제소견을 말하자면 저도 현대의학 용어로 라식수술받아서 이제 눈이 잘 보이게 된 사례라 할수 있답니다. 아는것으로 끝나지 않고 삶에 묻어나길 바라는 '바램'또한 적어봅니다.
2010-08-20 00:36:48 | 노영기
武 굳셀 무 자 인가요? 我 나 아 자가 아니고? 저는 그 동안 아 자로 알고 있었는데 양 아래 내가 있으면 의롭다는 의미인줄로 알고 신기해 했었던 적이 있었거든요 ㅎㅎ 늘 수고 많으십니다. 감사합니다.
2010-08-19 23:44:55 | 변경진
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5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36 (없음) (개역한글) 개역성경을 보면 이부분에서 "데려감을 당하고" "버려둠을 당하고" 라고 씌여져 있습니다. 당연히 개역한글판 성경을 읽는 성도들은 "데려감을 당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선택된 사람이고 "버려둠을 당하"는 사람이 마치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따라서 당연히 이것이 휴거를 뜻하는 구절이라고 여기게 되구요. 예전에 많은 성도님들과 심지어 목사님들까지도 이부분을 환난기 "포도즙 틀"심판과 연관 짓지 않았습니다. 상당수 사람들이 이부분을 휴거를 말하는거라 여겼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37절 말씀을 읽을때 왜 갑자기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는 전혀 문맥이 맞지 않는 구절이 나왔을가 많이 의아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문제점들이 해결되엇습니다. 한글 KJV 성경을 읽고 또 사이트에서 여러분의 도움이 큽니다.
2010-08-19 18:05:41 | 이광희
아래의 기사는 오늘 날짜에 중앙일보에 보도된 내용입니다. 인간은 죄때문에 죽는데(창2:17)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대속적으로 죽으신 하나님의 의를 덧입는 방법(칭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덧입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님에 유의)뿐인데 믿음의 대상은 그분(우리 예수님)의 피입니다. 피를 볼때에 죽음이 넘어가고(출12:13)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하고(레17:11) 피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습니다 (히9:22)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느니라.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자에게 미치고 믿는 모든 자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의니 거기에는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사람이 죄를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 그분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한 화해 헌물로 제시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참으심을 통해 과거의 죄들을 사면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려 하심이요(롬 3:20~25)          추천도서 1, 미션하우스:한자에 담긴 창세기의 발견 2, 그리스도 예수안에 : 예수님의 피 바로알기 (알 레이시 저)   [한자로 보는 세상] 한자로 보는 세상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널리 읽히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칸트 등에 이르기까지 ‘정의(justice)’에 대한 서양 사유 방식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동양에서의 ‘정의’란 무엇인가? ‘義’는 羊(양)과 무(武)가 결합된 단어다. 양은 고대 중국의 희생(犧牲·동물의 피를 신령에게 바침) 의식에서 제물(祭物)로 쓰인 동물이다. 제단에 오른 양을 칼(武)로 잡으려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이를 두고 중국의 유명 문화학자인 이중톈(易中天) 교수는 “글자 ‘義’에서는 피 냄새가 난다”고 했다. 고대 자전 『설문(說文)』은 ‘엄숙한 용모와 장중 있는 태도(威儀)’라고 의를 설명한다. ‘의’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BC384~BC322)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맹자(BC372~BC289)다. 그는 공자의 핵심 사상인 인(仁)에 ‘의’를 더해 ‘인의(仁義)’를 근간으로 한 유가 사상의 깊이를 더했다. ‘인’은 사랑이다.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이다. 그러나 사랑만으로 복잡하게 얽힌 사회 문제를 모두 해결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맹자는 ‘자기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도 가져야 한다고 말했으니, 그게 바로 ‘의’다. 나뿐만 아니라 타인의 잘못에도 분개하고, 기꺼이 칼을 뽑아들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맹자는 『孟子』 ‘고자(告子)상편’에서 ‘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생명은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의’ 역시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양자가 함께 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면 나는 목숨을 버리고 ‘의’를 선택할 것이다(生,亦我所欲也.義亦我所欲也.二者不可得兼,舍生而取義者也.) 나를 버려서라도 선택해야 하는 것, 그게 바로 ‘의’인 것이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 세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공동 선(善)을 고민하고, 시민자치에 참여하고, 공동체의 운명을 걱정하도록 이끄는 게 정치의 목적’이라고 했다(‘정의란 무엇인가’). 공동선을 위한 헌신이 곧 그의 정의였다. 맹자가 말한 ‘의’와 서로 통한다. 2300여 년 전 동시대를 산 이들 동·서양 철학자가 본 ‘정의’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2:45:20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8-19 14:34:54 | 한기만
답글 감사합니다. 이 사이트의 내용을 짬짬이 시간 내서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석구석 모든걸 다 알수는 없는거 같습니다. 궁금증이 심해져서 질문을 올리면 관리자분께서는 좀 짜증나시겠지만 저와 같이 여기를 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형제자매들에게는 도움이 되겠습니다. 단번에 자기가 필요한 자료출처도 알수 있고 해서 많은 양해 바랍니다.
2010-08-19 12:15:25 | 이광희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이면 번역이 잘 된 것입니다. 참 감사하네요.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 중의 일부가 포로로 잡혀가서 죽는 것을 뜻합니다. 누가복음 17장 37을 보기 바랍니다. 거기에 그들이 잡혀가서 죽는 게 나오지요. 물론 그들 중의 나머지는 구원을 받아 천년왕국에 들어가지요. 이광희 군에게 제안하는데 부디 앞으로는 이 사이트의 내용을 좀 공부하고 질문을 올리기 바랍니다. 이것은 교회의 휴거 구절이 아닙니다. 교회는 이미 휴거가 되어 땅에 없습니다.
2010-08-19 11:42:12 | 관리자
그렇다면 "붙잡혀 간" 자들은 "진노의 큰 포도즙 틀"에 들어간다는 뜻인데 즉 환난기의 심판에 들어간단 말이겠죠? 그러면 남겨진 자는 구원 받은 자란 말인가요? 환난기가 시작하기전에 구원 받은 성도들이 휴거 받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모순 됩니다.
2010-08-19 11:41:11 | 이광희
누가복음을 읽다가 한글로 번역 한 부분에 의문이 있어서 글을 올립니다. 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을 터인데 하나는       붙잡혀 가고 다른 하나는 남겨질 것이요,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을 터인데 하나는 붙잡혀 가고 다른 하나는 남겨질      것이며 36  두 남자가 들에 있을 터인데 하나는 붙잡혀 가고 다른 하나는 남겨지리라, 하시니라.      (한글 KJV) 34  I tell you, in that night there shall be two [men] in one bed; the one shall be taken,      and the other shall be left. 35  Two [women] shall be grinding together; the one shall be taken, and the other left. 36  Two [men] shall be in the field; the one shall be taken, and the other left.      (KJV) 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5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36  (없음) 여기서 KJV의 "shall be taken" 을 "붙잡혀 가고"로 번역했는데 합당하지 않다는 새각이 듭니다. 마치 결박 당하여 어디로 끌려가는 듯한 부정적인 단어로 쓰이는데 사실 이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려는 말씀의 뜻은 한 사람은 휴거를 받고 한 사람은 남겨진다는 뜻이 아닐가요? 혹시 제가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곳이 있는건지? 만약 이 부분에서 휴거를 말씀 하는 것이라면 저의 생각엔 "데려가고" 혹은 "취하여지고" 가 더 합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20 12:48:41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10-08-19 10:51:02 | 이광희
어느것 하나를 딱 짚어내기 어렵고 복합적이기도 하겠지요. F급 가정(?)에서 태어나 A가정을 만들려면 어렵기도 하고요... 배부른 소리 하는 자녀들은 믿는 부모를 만난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크면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2010-08-19 09:44:00 | 김재욱
지당한 말씀입니다. 요즘 책상머리에 앉아 가끔 생각합니다. 어떻게 이럴수가 있지? 같은 예수님을 믿는데 많은 목사, 장로들과,그밖의 많은 직분자들이 어쩌면 그것을 당연시 여기면서 열심을 내는지... 그것도 진지하게... 양쪽으로 나누어 서있는것을 느낌입니다. 어떻게 생각이라는 이렇게 다를수가 있을까? 회상해 봅니다. 이것이 제마음도 아프게한 '비슷한 다른것' 입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2010-08-19 00:27:38 | 노영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