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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자매님이 토저의 부흥과 회복을 위한 기도를 읽고 글을 주셨습니다. 앞으로 사이트에서 이런 글이 쉽게 올라 올 수 있게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침에 깊바이블에 올려진 새로운 글 - 토저의 부흥과 회복을 위한 기도 - 을 읽었습니다. 요즘 기도할 제목들이 많아 기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던 터라 마음에 시원히 흐르는 물처럼 쏙쏙 스며드는 느낌이었습니다. 우린 기도해야 할 부분이 많지만 점검해 보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데 익숙하지요. 어떤 때 저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과 나의 기도가 다른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입을 다물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25~34절의 말씀(공중의 날짐승..)을 잊고 요한복음 14장 14절의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그것을 행하리라" 이 말씀만을 의지했던 것 같습니다.그 전 구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그것을 행하리니 이것은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함이라" 는 말씀도 있는데도 말입니다. 나이를 들어가며 사람은 철저히 육신의 정욕에 대단한 열망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인생의 자랑 이 세가지 종목을 피해서 기도를 해야할 부분이 있다면 우리마음은 그리 조급해 하거나 답답해 하지 않고 성숙한 인내심과 초연함이 발휘될 것 같습니다. 기도와 하나님의 뜻가운데 사는 법에 대해 자꾸 상고하고 점검하는 일이 우리 가운데 활발하게 이야기 되었음 좋겠습니다. 짧게 소감만 쓰려다 길어졌네요. 
2009-05-08 14:11:40 | 관리자
이번에 다시 한 번 토저의 "불타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라"를 읽었습니다. 대부분의 내용이 진국입니다. 거기서 한 챕터가 제 맘을 크게 사로잡았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과연 바른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게 했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가도 깊이 생각해 보게 했습니다. 왜 기도합니까? 이런 글을 통해 깊은 영적 성숙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회복을 위해 간구하는 방법 너희 잘못들을 서로 고백하고 너희가 병 고침을 받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 의로운 자의 효력 있고 뜨거운 기도는 많은 유익이 있느니라(약5:16).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그것을 너희의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3)사람들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 주시려고 그분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눅18:1-2) 위에 인용한 세 구절에 주목하라. 첫 번째 구절은, 기도의 강력한 영향력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것이 “많은 유익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내용은 구약과 신약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고 또 실제로 입증되고 있다. 두 번째 구절은, 기도가 이렇게 영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르게 구하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번째 구절은 약간 다르다. 이 구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도해야 하며 어떠한 장애물이 있더라도 기도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스페인의 위대한 순교자이며 신비주의자인 몰리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기도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을 초월해 계신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이 그분을 뵙거나 그분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든 창조물 위로 자신을 들어 올려야 한다.”나는 기도에 대한 이 정의에 공감하며 잠시 이 문제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요즘은 많은 기도가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다. 내가 보기에 과거 어느 때보다 복음주의 교회 안팎에서 많은 기도가 드려지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기도 목록을 적어 놓고 그분께 이런저런 잡다한 것들을 이루어 달라고 간청한다. 그 많은 일들을 그분께서 이루어주시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차라리 기도하며 시간 빼앗기지 말고 산책을 가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온갖 종류의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을 들어달라는 압력을 받고 계시다. 내가 보기에 기도는 이미 로비 차원으로 전락해 버렸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대신에 로비한다. 비성경적이고 세속적이며 심지어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는 일에까지 그분께서 복 주시기를 강요한다. 게다가 빈곤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들은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생활비를 벌기를 원하며 그러한 저급한 프로젝트에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시기를 간구한다. 아니면 다른 사람의 비용으로 여행할 기회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버스나 화물선이 아닌 호화 유람선으로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라디오나 편지로 기도를 요청하며 때로는 철야기도를 하기도 한다. 이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셨으면 좋겠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 ‘적은’ 대가를 지불하고자 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기도에 절대로 응답하지 않으신다. 마치 갈멜 산에서 바알 신이 응답하지 않았듯이 말이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밤새면서 졸리는 눈을 비벼가며 분노를 발산하고, 스스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했다고 착각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방관하실 뿐이다. 시간을 빼앗는 기도 제목도 있다 공식적인 기도 모임에서는 절대로 기도 부탁을 해서는 안 될 사적인 문제들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하나님과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는 안 될 종류의 문제들 말이다. 이러한 기도 제목은 듣는 이들을 난처하게 하며 참석자들의 시간을 빼앗을 뿐이다. 내가 젊은 시절 목회할 때 어떤 기도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리더가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보았다.“아무개 자매가 기도를 부탁해 왔습니다. 그녀의 눈꺼풀에 경련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모두 그녀를 위해 기도합시다.”그러자 온 회중이 엄숙하게 무릎을 끓고 눈꺼풀을 위해 기도했다. 미소를 띠거나 큰 소리로 웃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눈꺼풀을 문지르라고 권면하고 싶었다. 나 같으면 그렇게 하리라. 문지르기만 하면 멈출 테니까.이러 사적인 문제를 기도 모임에 끌어들여 교회 공동체에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합심 기도’ 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이것은 교인들이 한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이다.이미 알고 있겠지만 성경 말씀에 따르면 합심기도는 영향력이 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거기에 그들의 한가운데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서 기도 모임을 지속적으로 운영해 나가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그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기도해야 한다. 기도할 때 반드시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단지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나 산만하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 기도의 최우선순위 말씀 속에서 기도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이 시간 나는 기도의 두 가지 목표에 대해 살펴보기를 원한다. 여러분 중 몇 사람은 내가 먼저 선교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놀랄지도 모른다. 이 두 가지 목표는 반드시 여러분의 기도 제목 맨 위에 와야 할 것이다. 이제 순서대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것들은 우리가 활을 쏠 때 조준하는 과녁과 같다. 마치 기도의 불도저로 밀어붙여야 하는 산처럼 우리 앞에 떡 버티고 있어야 한다. 감히 단언하기는 이 두 가지가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하다.이 두 가지 목표가 개인 기도든 합심 기도든 기도의 열정을 자극해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스스로 이 사실을 알아야 하고 또 구체적으로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반복이나 갈망 또 훈련이나 자기희생에서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열렬하게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기도 형태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마치 군대에서 전략가가 사용 가능한 온갖 종류의 무기를 사용하듯이 말이다. 첫 번째 목표,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의 회복 이 나라 이 교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제 내 말에 귀를 기울여 보라. 내가 여러분에게 지금 전달하는 메시지는 꾸며낸 말이 아니다. 건전한 신학 사상에 근거한 말이기 때문에 점검하거나 테스트해 봐도 좋다. 다른 어떤 일보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회복하는 일이다.이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나약한 존재이다. 그분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 친구로 교제하다가도 피해 달아날 수 있는, 보잘것없고 천박하며 무능한 신으로 전락하였다. 그분은 단지 ‘위층’에 사시는 분이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와서 도와주며, 어려움이 없을 때에는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으시는 분이다.오늘날, 복음주의 단체에서는 박제가 된 신을 믿고 있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 원하는 소원을 가지고 언제나 나아가 간구할 수 있는 신 말이다. 라디오 프로에 한 개그맨이 출연하여 “이제 다 같이 기도를 드리겠습니다.”라는 익살로 말문을 열 수도 있다. 아니면 반쯤 개종한 카우보이가 얼간이 복장을 하고 나와 숫자 카드를 튕긴 후에, “이제 제가 ‘거룩한 숫자’(holy number)를 몸으로 보여 드리지요”라고 말하고는 저급한 노래를 부를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종류의 하나님 같으면 누구나 다가갈 수 있기에,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과거에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믿었던 때가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다. 알미니안주의자들 역시 자신들이 의식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칼빈주의자들보다 더 확고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다.성경에서 말하는 위대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면전에 나아갈 때 경외심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분이다. 테니스 복장으로 운동하다 말고 냅다 뛰어 들어가 하나님과 밀담을 나눈 후에 빠져나갈 수 는 없다. 시카고에 크리스천 남성 사업가들로 구성된 위원회 모임이 있었다. 지금은 이런 위원회뿐 아니라 다른 모임도 많이 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일하며 여러 차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어느 특별한 모임이 열리고 있었는데 위원회의 임원중 한 사람이 갑자기 뛰어나와 연단에 올라서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저는 지금 막 하나님과 밀담을 나누었어요. 하나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그러자 이 말을 듣고 있던 뉴잉글랜드에서 온 한 멋진 노신사가 일어서더니 “의장!” 하고 외치는 것이었다. 의장이 그를 보며 “좋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죠?”라고 물었다. 노신사는 이렇게 대답했다.“저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뉴잉글랜드에서부터 이곳 시카고까지 먼 거리를 달려왔습니다. 저는 이 모임에 참석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경건하게 예배하는 분위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쓸데없는 말이나 들어야 하다니요. 이 자리에 지금 방금 하나님과 밀담을 나눈 사람이 있다니요.”곤경에 처한 의장은 사태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하지만 노신사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사실 하나님과 밀담을 나누었다고 주장하는 그 사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즉 전능하신 여호와, 성부 하나님과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께 제일 가까이 나아가 대화를 나누었던 이사야 대언자는 지존하신 그분을 뵙고 목소리를 높여 “오 하나님, 하나님, 저는 부정한 사람입니다”라며 울부짖었다. 다니엘은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자 엎어져 마치 돌처럼 굳어 그분께서 일으켜 주셔야만 했다. 요한은 예수님을 뵈었을 때 얼굴을 바닥에 대고 납작 엎드렸다.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간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언제나 엎드려져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저는 티끌이고 재입니다. 부정한 사람이며 감히 주님의 이름을 부를 자격도 없습니다.”형제자매들이여, 우리가 회복해야 할 하나님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중략... 지금 많은 이들이 믿는 하나님은 자기들이 손으로 만든 값싼 하나님이다. 다양한 신학적 사상과 성가대의 노래 또 설교자들이 들려 주는 이야기들로 구성된 ‘혼합물’이 된 셈이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일은 제일 중요한 명령이며 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이 회복될 때 더 많은 영혼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다. 상황이 이렇다면 이제 주저할 필요가 없다. 이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성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희생시켜가며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시도는 그분이 받으실 영광을 사취하는 행위이며 결국 어떤 영혼도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한다. 이 경우는 오직 그리스도인이 아닌 다른 이상한 형태의 변절자를 양산하게 할 뿐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첫 번째 기도 즉 첫 번째 공동체 기도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다른 어떤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첫째로’ 그분의 영광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이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하나님이 제일 먼저이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제 대부분의 분야에서 인본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복음주의가 타락하여 무늬만 성경적일 뿐 인본주의와 다름없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인본주의자를 원하지 않는다. 성경적인 기독교를 원한다. 기독교는 결코 인간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먼저 하나님을 찾고, 그 다음 인간에게 관심을 돌린다. 그러나 휴머니즘 즉 인본주의는 인간을 먼저 찾고 시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 관심을 돌린다. 우리는 기독교 본래의 자리를 회복해야한다.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인간에게 쏠려 있다. 그래서 인간의 생각과 말, 인간들을 위한 행동에 빠져 있다. 그러나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제일 우선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오시며”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한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나타나도록 말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놀랍고 영광스러운 임재가 그토록 압도적으로 나타나, 인간의 모든 교만을 꺾고 잘못된 것을 뒤엎으며 인간의 쓸데없는 우스갯소리와 자만심을 사라지게 하리라. 그때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 “거룩, 거룩,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짖게 되리라. 이제, 기억하라. 당신이 원하는 모든 계획을 수립할 수 있고, 광고업자들의 도움과 최신 기계들을 활용해 일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끝냈을 때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그분이 제일 먼저 영광을 받지 못한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두 번째 목표, 바벨론 포로에서 교회가 석방되는 것 반드시, 두 번째로 기도해야 할 목표는 교회가 바벨론 포로에서 석방되는 것이다. 오늘의 모든 복음주의 교회는 총체적으로 바벨론 포로 상태에 빠져 있다. 오순절교회, 근본주의 교회, 기독교 연합선교회 등 모든 교회가 포로 상태에 놓여 있다. 당신이 속한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뜻을 어겼을 뿐이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있지 못하고 다른 지역에 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 주셔서 마침내 회복시키실 때까지, 그들은 원래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장소에 있지 못했고, 멀리 떨어진 이국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조차 체대로 부르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 즉 다시 태어난 복음주의 교회들 역시 바벨론 포로 상태에 놓여 있다. 우리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틈에서 살고 있다. 거기서 그들의 생활 방식과 도덕관을 배우고 익히며 점차 그들이 파놓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교회가 이 세상과 더불어 수치스러운 영적 간음죄를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형제자매들이여, 이제 이 작업이 완결되어 교회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교회가 원래 있던 거룩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 보좌에 앉으신 거룩한 여호와의 영광을 구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하고 신약 시대의 삶의 표준을 되찾아야 한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복음주의가 아무리 진보한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바벨론에서 더 많은 자녀들을 낳는 꼴밖에 안 된다. 개혁과 회복을 통해 우리가 약속의 땅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장엄한 영광이 우리 위에 다시 임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는 한 태어나는 모든 자녀들은 바벨론에서 태어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복음주의 교회가 아무리 성공한다 해도 바벨론에서 더 많은 유대인을 생산하고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을 양산하는 셈이 된다. 기억하라! 우리가 회복되고 교회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지 못하면 선교 사업조차 결실을 맺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노력이 결국은 ‘열등한’ 기독교를 해외의 토양에 이식하는 행위가 될 테니까 말이다. 선교사들이여 명심하라! 당신은 당신 자신보다 더 뛰어난 어떤 인물을 결코 키워낼 수 없다. 성경에서도 “각각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해 ‘싸구려’ 신앙을 가지고 있는 선교사를 택해 선교지로 보내 보라. 그의 머리는 온통 천박한 음악으로 가득 차 자신을 닮은 기독교인들을 양산할 것이다. 선교사가 하는 일은 고작해야 변질된 기독교를 그 나라에 이식하는 것이리라. 선교 차원을 넘어 전 세계에서 교회 회복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더 많은 선교사들이 양성되고 그들의 질적 수준 또한 높아져 결과적으로 ‘양질의’ 그리스도인이 탄생하게 된다. 아마 어떤 사람은 “토저 목사님, 저는 그런 말을 처음 듣는데요. 그리스도인이면 다 똑같지 않은가요?” 라고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다 같지 않다. 어떤 사람은 30배, 어떤 사람은 60배, 또 어떤 사람은 100배를 거두는 법이다.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보라. 큰 별이 있는가 하면 작은 별도 있고 또 어떤 별은 망원경으로라야 볼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너희 중 어떤 이는 육신에 속한 자이고 어떤 이는 영적인 자이다”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기자도 이렇게 말한다. “시간으로 보건대 너희가 마땅히 가르치는 자가 되었어야 할 터이나 하나님의 말씀의 첫째 기초 원리들을 남에게 다시 배워야 할 필요가 너희에게 있나니 너희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자가 되었도다”(히5:12)  기독교 신앙은 고급 수준에 머물 수도 있고 적당하거나 평범한 수준 또 낮은 차원에 머물 수도 있다. 오늘 이 시대에 모든 성경학교나 크리스천 대학, 기독교 잡지, 성경연구 모임, 세미나 등을 살펴보라. 거기서 주창하는 기독교 신앙은 삼류 즉 타락한 기독교 신앙이다. 우리 선조들이 알고 있었고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간직했던 그런 신앙이 아니다.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을 체험한 고급스럽고 거룩한 신앙, 하나님을 의식하는 겸손하고 은혜로우며 사랑이 넘치는 신앙 말이다. 명심하라! 우리가 개혁을 완수하기 전에 양산되는 모든 책들과 잡지 또 학교들은 부패한 교회에서 우글거리는 박테리아들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기독교 연합선교회에서 출간하는 ‘연합회 증언’이라는 잡지는 책을 발간하는 사람들의 영적, 도덕적 수준을 넘지 못한다. 그런데 편집장과 부편집장을 비롯한 모든 편집위원들이 타락한 이류급 기독교인들이라면 그 잡지는 이류급 잡지가 될 것이 뻔하고 또 실제로 그렇다. 만약 우리 모두가 원상태를 회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다면, 라디오나 텔레비전, 스포츠, 신문 잡지, 예를 들어 ‘라이프 잡지’나 ‘타임지’와 같은 매체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면, 말씀의 정확한 의미대로 성경적 삶을 살아간다면, 여러분과 나를 포함한 모든 교회와 잡지, 선교사들 또 이 모든 것들이 새롭게 되어 타락한 환경 속에서 일대 변혁이 일어나게 되리라 생각한다. 어떤 아이들은 태어날 때 미숙아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산소를 공급받으며 생명을 유지한다. 또 어떤 아이들은 4.5kg의 몸무게로 마치 저항이라도 하듯 울부짖으며 세상으로 뛰쳐나온다. 아무튼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일을 떠맡게 된다. 그리스도인도 이와 같다. 태어날 때 울음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당신이 하나님 나라에서 태어날 때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만 하는 아이로 태어날 수도 있고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태어나 나기도 전에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있다. 각자 필요한 단계를 거치게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나타나도록, 사람들이 하나님을 노리갯감으로 여기지 않도록, 하나님을 불경스럽게 생각하지 않도록, 모든 그리스도인이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 앞에 머리를 조아리도록, 그분께서 마땅히 전능자가 되시도록, 그렇게 됨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교회가 신약 교회의 패턴으로 회복되도록 말이다.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위의 두 가지 목표를 최우선순위에 두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영광인가. 사람의 인정인가? 사람들이 기도하는 동산 정원에는 뱀이 있게 마련이다. 바로 ‘자아’(self)라는 뱀이다.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나무 근처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가 독을 발하여 기도를 망쳐 놓는다. 야고보서 4장 3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그것을 너희의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나의 형제자매들이여, 이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그 일을 하시기를 원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하겠는가?가령, 내가 무릎을 꿇고 금식까지 해가며 하나님께 “오, 하나님! 주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고 치자. 그런데 나는 이렇게 기도하며 그분께서 나를 사용하셔서 그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한다.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을 점검해 보았는가? 이런 식의 기도는 하나님께 그분의 영광의 일부를 달라고 간구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이것은 그분이 받으실 영광의 일정 부분을 요구하는 행위이다. 그러니 응답될 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바벨론 포로에서 석방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그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기도하지 않는 편이 좋다.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느헤미야가 되기를 원하는 일이 가능하다. 바알의 대언자들이 패배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엘리야가 되어 많은 무리 앞에서 불을 내려오게 하는 주인공이 되기를 은근히 열망하는 일이 가능하다. 잘못된 것이 개혁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루터가 되어 “하나님이여,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이제 도우소서”라고 요청하게 되기를 간구하는 일도 가능하다. 하나님의 군대가 승리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지휘관이 되어 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위 행렬 맨 앞에 서서 행진하게 되기를 원하는 것도 가능하다. 교회가 사탄을 물리치기를 기도하며 정작 승리했을 때 우리가 열심히 싸운 덕분에 승리했다고 자랑하기를 좋아할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교회학교가 성장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탁월한 주일학교 교사로 인정받아 “저분이 부장이셨을 때 숫자가 25명에서 39명으로 늘었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형제자매들이여, 이제 부탁하건데, 수준을 높여 다음과 같이 기도하기를 바란다.“오,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하소서. 나를 통해서든 아니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든 그 일이 이루어지게 하소서.”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기적인 기도가 되기 때문이다. 진정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꼭 ‘우리’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메노파 교도’(Mennonite, 16세기에 창시된 기독교 신교의 한 분파)를 사용해 영광을 받으시기로 결정하셨다 해도 우리는 마치 내가 속한 단체가 쓰이는 것처럼 그렇게 열심히 또 진지하게 기도해야만 한다.내 생각에 아마 여러분 중 몇몇 사람은 이런 관점을 절대로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심장마비에 걸려 운동장에 나자빠질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돼도 좋다.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 테니까. 만약 당신이 “오, 하나님! 내가 속한 기독교 연합 선교회를 통해서만 영광을 받아주옵소서”라고 기도한다면 차라리 ‘메리의 어린 양(Mart's little Lamb)노래의 가사를 거꾸로 부르는 편이 좋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절대로 응답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생각을 바꿔 어떤 단체도 하나님의 도구로 쓰일 수 있고 또 그분께서 누군가를 사용해 일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시면 반드시 하신다는 생각을 갖게 될 때까지는 말이다. 영성인가. 게으름인가? 여러분 중 약간 세련되었다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가? 그들은 자신이 사는 도시로 부흥의 물결이 밀려오고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성도를 통해 그 일을 수행하실 때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가 자신들보다 영성이 부족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는 미리 짜놓은 계획에 맞춰 예배를 드리지만 자신들은 지난 수년 동안 최고의 예배를 구상하며 여러 가지 시도와 시행착오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러한 행위를 ‘영성’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영성이 아니다. 단지 게으름일 뿐이다. 누군가 예배에 대해 미리 계획을 세우지도 않고 설교 준비를 하지도 않으면서 성령님께 의지한다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요 그 속에 진리가 있지 않다. 나는 북미대륙에서 큰 교회 중 한 곳에서 설교했던 적이 있다. 교회 이름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혹시 누가 와서 묻는다 해도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의 추측에 맡기고 싶다. 아무튼 그 교회의 주일 아침예배가 어떠했는지 아는가? 노상 집회였다. 약 3,500명이 운집한 길거리 모임이었다. 그 후로 나는 그 교회를 좋게 여기지 않는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마음으로 나와서 성경책 페이지를 홱 넘겨가면서, 그것도 차에 광택을 내거나 긴 낚시 여행을 마음껏 즐긴 후에 예배를 드린다고 나와서 최고의 예배가 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이것을 ‘영성’ 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영성이 아니다. 오히려 수치스럽게 여겨야 할 나태와 무례함이다. 우리는 마땅히 교회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다른 교파, 성공회나 루터교 성직자를 통해 그 일을 수행하게 하신다 해도 만족해야 한다. 게다가 교회의 회복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자신은 무시당해도 좋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이기심에서 벗어나게 된다.제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 전도자가 어떤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집회가 시작되기 며칠 전 그 교회의 목사님으로부터 전보가 왔다.“기쁜 소식입니다. 이 지역에서 부흥 운동이 시작되고 있어요.”그러자 전도자는 급히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고 한다.“제가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만 그 운동을 잠시 중단시키시오.”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러나 실상 이것은 비극이다. 복음 전도자가 받을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소중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도자는 많은 영혼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수 있다. 당신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게 뭐가 잘못되었단 말이오? 어쨌든 영혼을 구원했지 않소?”그렇다. 그 전도자는 바벨론에서 인큐베이터 아기들을 태어나게 했다. 만약 그가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알았더라면 그는 인큐베이터에 들어갈 필요조차 없는 몸무게 4.5kg의 건강한 아기들을 태어나게 했을 것이고 그 아이들은 본래 태어났어야 할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차이가 중요하다. 어떻게 해서든 기독교로 개종만 하게 하면 된다는 식의 생각은 버리자.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오, 하나님! 제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응답해 주소서. 우리 가운데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소서. 선교사들을 파송해 주소서. 만약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서 파송하는 선교사 숫자보다 다른 교회에서 파송하는 선교사 숫자가 더 많게 하신다 해도 저는 만족합니다. 주님, 교회를 회복시켜 주소서. 주님께서 우리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를 축복하신다 해도 괜찮습니다.”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하기도 하고 다른 교회에 먼저 복을 주셔서 우리가 그 흐름에 따라가게 하기도 한다. 우리는 기꺼이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오, 주님!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면 제가 벽돌 한 장을 놓게 하소서. 저는 그 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겠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소서. 주님께서 저를 도구로 쓰시면 좋고, 쓰지 않으신다 해도 주님께서 쓰시는 자를 적극 후원하겠나이다. 그를 사랑하고 질투하지 않으며 그를 위해 기도하겠나이다. 저는 무대 뒤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하겠습니다. 비록 그 일이 무미건조한 일이라 해도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해야 한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이렇게 기도할 자신이 있는가?“오, 하나님! 어떻게 해서든 교회를 부흥시켜 주소서. 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제가 걷어차여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교회를 부흥시켜 주소서.” 신약성경의 표준대로 자신이 속한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며, 몇몇 사람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교회가 있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정말 몸서리칠 일이다. “오, 하나님!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해도 우리 교회에 복을 내려 주소서.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해도 우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소서.”교회 집사들이여, 진정 진심으로 그렇게 기도한다면 아마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날 것이다, 혹시 당신이 다른 도시로 이사가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 기도에 ‘정가표’를 붙이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어떻게 해서라도 교회를 회복시켜 사도행전에 나타난 능력을 체험하게 하시고 신약성경의 표준대로 살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쓰신다 해도 불평하지 않으리라.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몰리노스(1640-1697. 스페인의 신비주의자)가 한 말을 기억하라.“기도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기도하여 응답을 받지 못한다. 비록 사탄과 인간의 정욕이 방해한다 해도 낙심치 말고 기도해야 한다. 잘못된 태도를 바로 잡으며 위축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내가 품고 있는 몇 가지 영적 소신을 제시하였다. 나는 이렇게 믿고 선포한다. 기독교 연합선교회뿐 아니라 장로교회, 침례교회, 메노파교회, 독립교회 어디를 가든 감히 이렇게 외친다. 첫째,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은 소멸되었다!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싸구려 신이 되어버렸고 무릎 꿇을 만한 가치도 없는 신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옷자락으로 예배당을 가득 채우고 계신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바르게 경배하고 예배할 필요가 있다. 둘째, 교회는 신약 시대의 패턴으로 돌아가야 한다!이 문제는 여러분께 맡기고 싶다. 만일 내가 속한 기독교 연합 선교회가 계속해서 세속적인 교회를 모방하고 복음주의 교회를 타락케 하며 청년 운동이나 주도한다면 또 이 단체가 세속적인 교회를 따라가면서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얼마 안 있어 타락한 준(準)자유주의자 계열에 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누군가를 통해 우리가 위임받은 명령을 수행하도록 하게 하리라.여러분에게 기탄없이 말하지만 나는 이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나는 21세 때부터 지금까지 기독교 연합 선교회를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앞으로 이 단체를 떠날 생각도 없다. 만약 떠나 있다면 결코 잘못을 지적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소속되어 활동하기 때문에 잘못을 지적한다. 나도 잘 모르겠다. 이 단체가 ‘세속적’인 도구와 방법, 철학 또 관점에 완전히 빠져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좀 더 참아야 할지 혹시 내가 너무 인간적인 견지에서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를 말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고 교회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한다. 만약 그분께서 우리 단체가 아닌 다른 단체를 통해 이 일을 수행하신다 해도 나는 “오 하나님! 어쨌든 그렇게 되게 해주소서. 되게 해주소서!”라고 간구하리라.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속한 기독교 연합 선교회가 성령의 불이 내려올 때 불을 받고, 복이 임할 때 복을 받고, 회복의 역사가 시작될 때 회복되며, 에스라나 느헤미야와 같은 대언자가 무리를 약속의 땅으로 이끌 때 우리가 그 대상자 중에 포함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열망하며 또 그렇게 되기를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리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영광에 굶주린 세대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 회복시켜 주실지 나는 모른다. 아직 그럴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이 시대의 훌륭한 종교 지도자들 중에 그런 인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대언자를 보내실 것이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 왔다. 아마 머리카락이 붉고 얼굴에 주근깨가 있으며 마치 택시의 문을 열어놓은 것처럼 큰 귀가 삐죽 튀어나온 사람일지도 모른다. 예상 외로 소년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어딘가에 자신이 택한 사람을 예비시켜 놓았다가 그를 일으켜 회복 운동을 일으키시리라. 수십억이 드나드는 대규모 전도 집회를 열지 않고서도 부흥과 회복을 일으키시리라. “오 하나님! 택한 자들을 보내 주소서. 보내 주소서. 보내 주소서. 쓰시기로 예비한 자들을 보내 주소서. 오, 하나님! 그리고 가능하다면 제가 속한 기독교 연합 선교회를 복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또 저로 하여금 그 일부분이라도 감당하게 하소서. 그러나 하나님! 혹시 다른 사람을 통해 하시기로 결정하셨다 해도 좋습니다. 그렇게 해 주소서. 오직 회복시켜 주소서.”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지 못한, 하나님의 영광에 굶주린 세대이다. 20,30대 많은 젊은이들이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고 성경을 배우고 있다. 하지만 그분의 영광을 목도한 적은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 강하고 두렵게 나타나 참석자들이 말도 크게 못하는 그런 예배에 참석해 본 경험이 전혀 없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너무나 존귀하고 높으신 분이라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침묵을 지키고 말하기조차 두려워해야 하는 그런 분으로 들은 적이 전혀 없다. 기독교 연합 선교회의 창시자인 심슨 목사가 뉴욕 주의 버팔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 설교한 적이 있다. 이때 설교가 끝나고 모임을 마쳤지만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참석자들 모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경외감을 느껴 일어나지도 걷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 성장하는 젊은 세대들은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오, 하나님! 주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자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소서.”
2009-05-08 14:10:58 | 관리자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옥성호 형제의 글을 올립니다.   저는 이 형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이분이 극히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건전한 크리스천이라고 확신합니다. 요즘 비정상적인 크리스천들을 많이 보면서 정상적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깊이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부흥과 개혁사의 홈페이지로 들어가서 옥성호 형제님의 글을 많이 읽어 보기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어떻게 침례 교인이 장로 교인의 글을 읽느냐고 핀잔을 줍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교단에 가입하지 않은 독립 침례교회만이 예수님의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하면서 장로교인의 글을 읽거나 추천하면 그 일은 배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바로 이것이 비정상적인 사고요,크리스천들이 배격해야 할 분파주의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독립침례교회 성도들만을 위해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십자가 공로만을 의지하고 오직 그분만을 자신의 유일하고도 완벽한 구원자로 믿으며 그분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면 다 그분의 몸의 지체요, 그분 교회의 일원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주어이고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등은 모두 형용사입니다. 주어가 중요하며 형용사는 꾸며 주는 것으로서 다 부족한 데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독립 침례교회가 성경에서 제시하는 교회에 가장 가깝다고 믿고 있으며, 기회가 오면 이런 교회의 목회자로 살다가 주님께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이 땅의 모든 지역 교회는 다 부족한 데가 있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항상 나와 주님과의 관계가 어떤지 살펴보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가 믿는 바를 고치며 생활을 고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자기의 의지를 가지고 구원 받기를 선택하고 지역 교회를 선택합니다. 여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어느 지역 교회에 있느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생사를 가르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생활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뒤에 어느 교회가 성경을 따라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생활하는지 판단하고 거기에 나가서 말씀으로 양육을 받고 교제하고 섬기게 됩니다.   주변의 어떤 사람이 자기 교회만이 유일한 교회- 혹은 성경적으로 하는 교회 - 라고 주장하면 그런 사람과 그런 교회를 주목하고 피하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과의 교제는 무익합니다. 무엇이든지 믿는 것은 자유지만 이런 믿음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역행하는 것입니다. 카톨릭 교회를 보십시오. 여호와의 증인들을 보십시오. 통일교를 보십시오. 이단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자기 교회만이 유일한 교회  - 혹은 유일하게 성경적인 교회 -  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정상적인 교회치고 어느 교회도 자기 교회만 유일한 교회라고 믿거나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말씀보존학회(이송오 씨 담임)는 자기들의 교회가 한국에서 세워진 최초의 신약 교회라고 주장했습니다. 얼마나 엄청난 주장입니까? 그런데 바로 이런 주장은 이단으로 가는 첩경이며 그리스도의 교회와 킹제임스 성경을 경멸과 조롱의 대상으로 만드는 사악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한국 보수 장로교 청교도 목사들도 이런 사상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다만 대부분 세련된 사람들이라 겉으로 이것을 드러내지 않을 뿐입니다. 형제 교회, 지방 교회, 구원파 교회 등도 거의 이렇게 생각하지요. 이런 데서는 대부분 자기들이 믿는 것만이 유일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또 어떤 분은 킹제임스 성경을 쓰는 교회만이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사람들이 모인 지상의 교회는 모두 완벽하지 않습니다.   내 교회만이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하지 마십시오. 내게 무엇이 부족한지 늘 살펴보고 주님의 말씀으로 귀환하기 바랍니다. 마음을 열고 내게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언제라도 고치겠다는 부드러운 자세로 믿음 생활을 할 때 주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저와 형제/자매님의 생활에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옥성호 형제의 글, 어느 자매가 추천하며 보내 주어서 올립니다. 원래 글은 부흥과 개혁사의 옥성호 형제 컬럼에 있다고 합니다. 직접 가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메릴 스트립에게 오스카 여우 주연상을 안긴 소피의 선택(Sophie's Choice)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 포로 수용소에 감금된 소피라는 여자에게 독일 장교는 어쩌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선택을 강요합니다. 그녀의 아이 두 명 중 살아남을 한 명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선택하지 않으면 둘 다 죽이겠다고 합니다. 소피는 이 절대 절명의 순간에 한 명의 자녀를 선택합니다. 아마도 둘 다 죽는 것보다는 한 명이라도 살리는 것이 낫겠지라고 그녀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선택되지 못한 아이는 엄마를 울부짖으며 독일 군인들에 의해 끌려갑니다. 엄마, 엄마를 울부짖는 그 아이의 음성에서 소피는 평생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녀는 마침내 자살로 인생을 마감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봅시다. 과연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소피에게 원하시는 당신의 선한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소피에게 만약 이 상황을 놓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그녀는 어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을까요? 소피가 40일 금식기도를 했다면 무슨 뾰족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오늘날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처럼 마구 남용되는 말이 없는 듯합니다. 도대체 사람들은 어떤 확신으로 그토록 담대(?)하게 하나님의 뜻을 내세울까요? 저는 너무도 쉽게 하나님의 뜻을 언급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한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특히 수많은 목회자들에 의해 남용되는 이 말은 더 큰 위험요소를 가지고 듣는 사람들을 압박합니다. 왜 분명 나름의 확실한 ‘하나님의 뜻’에 의해 개척된 교회들이 매년 한국에서만 수천 개씩 문을 닫습니까? 교회가 세워졌다가 망하는 것이 애초에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중간에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바뀌기 때문인가요? 성적이 안 되어 어쩔 수 없이 성적에 맞는 신학교를 가야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요? 신학교를 나오면 반드시 목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요? 여건이 갖춰져서 개척교회를 시작할 자금이 모이면 꼭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요?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가의 여부입니다. 좀 더 풀어서 말한다면 내가 정말로 팔복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의를 위해 굶주림과 목마름이 있는가의 여부입니다. 그 사랑이 있다면,,,그 목마름이 있다면 행동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훨씬 더 쉽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언급하기 전에 나의 결정 속에 내 욕심이 얼마나 있는지를 스스로 정직하게 물어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겠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식사를 하면서 내가 돈을 낼까 말까를 놓고 망설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돈이 아깝지 않으니까요. 만약 식사비가 신경 쓰인다면....그 사람은 정말로 앞에 있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겠지요. 제가 앞의 어떤 글에서도 썼듯이.....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을 변호하고 남을 이용하는 데에 골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도한 결과 이 기도원을 구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라는 말 대신.... “우리 교회가 좀 더 성장하려면 기도원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마침 좋은 물건이 싸게 나왔어요. 이거 정말 놓치기 아깝습니다. 이번에 삽시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자매님, 기도한 결과 자매님과 만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아요.”라는 점잖은 말 대신.... “나 사실 너가 좀 지겨워졌어...미안하다. 그만 만나자.”라고 솔직하게 말하세요. “나는 솔직하게 이것을 원한다.”라고 왜 말 못합니까? 기독교 정당이 만들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글쎄요.... “교회를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정치인이 없으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이거 영 열 받아서....이번에 국회의원 뽑아서 한번 확실하게 뭔가를 보여줘야지. 이주일 선생께서 타계하신 이후 이 사회 속에 진정한 ‘뭔가’를 보여주는 사람이 너무도 없어. 이번에 우리 교회가 한번 확실히 보여주겠어.”   또한 어떤 상황을 놓고 많은 경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듣습니다. “좀 더 기도해 봅시다....하나님의 뜻을 찾아야지요.....” 물론 맞습니다. 기도해야지요. 그러나 적지 않은 경우에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이미 속으로 결론은 다 내려놓고 시간을 벌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신앙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약한 상대를 압박하려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은 많은 경우에 질문하지 않고 자신을 내던지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물론 세상일이 다 그럴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한 각종 메커니즘 내지 방법론에 의존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냥 나를 내던질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남들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되지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결정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사랑했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닌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념으로 개척교회를 시작했지만 3년 만에 문을 닫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반드시 실패일까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열심히 된장찌개를 끊인 신혼의 남편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된장찌개보다 김치찌개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된장찌개가 실패인가요? 물론 아닙니다. 굳이 문제라면 남편이 아직까지 아내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았다는 점이겠지요. 차차 알아 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기 전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를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이 바른 순서인 것 같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내린 결정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너무도 자의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야”라고 말하기 전에 “잘 몰라...이게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하지만 난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이렇게 하고 싶어.”라고 말하는 것이 어떨까요? 분명 자식 둘을 다 사랑했던 소피는 어떤 선택을 내렸어야 했을까요? 한 명을 선택했던 소피의 선택이 바른 선택이었을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선택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라는 점입니다. 자식을 사랑하지만 선택은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 되게 사랑한다면 같은 상황에 대한 결정들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2 더하기 2는 4와 같은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이 정해져 있는 것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결정에 의해 아무리 겉으로 나타난 결과가 뛰어나다고 해도 그 이면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모두가 부러워하는 결과라도 하더라도 결국 아무것도 아니겠지요.   “나는 사랑합니까? 사랑해서 내린 결정입니까?” 이것이 내가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2009-05-08 14:10:17 | 관리자
"성장한다는 교회들은 많은데 왜 사회가 이처럼 소돔과 고모라같이 변하고 있는가?" "바르게 하려는 교회들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을 두고 오랫동안 고민하며 결국 '기도의 부족' 혹은 '기도 없음'(혹은 바른 기도가 전무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느겼습니다. 이런 가운데 "부흥의 세대여, 통곡하라"(레오나드 레이븐힐)를 접하고 너무나 큰 감격이 밀려왔습니다. 현재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생명의 말씀사에서는 품절 상태입니다. 하지만 갓피플 몰 같은 기독교 전문 서적 사이트나  교보문고 등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레이븐힐의 대부흥 시리즈 2, 3탄(무릎 부흥, 하나님의 방법으로 부흥하라)은 생명의 말씀사에서도 구할 수 있습니다. 규장 출판사에서 간행하였습니다. 서문만 발췌하여 올립니다. 많이 읽고 뜨겁게 바른 기도를 드립시다.   지금 부흥이 지체되고 있다... 당신 때문에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1. 독일의 신학자 이자 역사가)은 기독교를 이렇게 정의(定議)했다. “기독교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아주 숭고한 것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하나님의 도움에 의지하여 시간 속에서 영원을 위해 사는 것이 기독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영원을 의식하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며 살아간다면, 언제나 심판대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서 행동한다면, 기도할 때마다 심판대를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십일조를 드린다면, 그리스도인들이 한 눈으로는 심판대를 바라보고 다른 한 눈으로는 저주받은 인류를 바라보며 복음을 전한다면….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 성령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부흥이 일어나 온 세상을 진동시키고 무수한 영혼들을 죄에서 해방시킬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세 가지 부류로 분류된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둘째, 아무 생각 없이 살기 때문에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다.   셋째, 성경을 아는 사람이다.   소돔은 성경과 설교자, 전도 책자, 기도회 그리고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멸망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가? 오늘날 우리 가운데는 성경과 교회와 목사가 넘쳐난다. 그런데도 돼 그토록 죄악이 만연한가? 건축가들이 교회 건물을 짓지만 그 교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인쇄업자들이 성경을 인쇄하지만 그것을 읽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만 그분이 구주라고 믿지는 않는다. 그들은 어쩌다가 예배에 참석하여 찬송가를 부르지만 그것을 곧 잊어버린다.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될 때 어떤 결과가 나아올는지 나는 심히 두렵다.   “우리의 죄와 세속성(世俗性)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다”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거짓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요한계시록 2장에 나오는 에베소교회처럼 우리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계 2:4 참고). 우리는 죄를 대적하지 않고 죄와 타협한다. 차갑게 식어버린, 세속적이고 비판하기 좋아하고 근심 찌든 교회는 음란하고 방종한 이 시대를 결코 그리스도에게 이끌 수 없다.   교회는 희생양을 찾아서는 안 된다. 도덕이 땅에 떨어진 것은 대중문화 때문에 아니다. 개인적, 국가적, 국제적 차원에서 도덕적 타락의 궁극적인 원인은 교회의 잘못 때문이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가 아니다. 그러나 과거의 교회는 세상에게 가시였다. 평균 이하의 도덕적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도덕적 기준을 세상에 전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 부흥을 가로막는 상업주의   왜 부흥이 지체되는가? 그 대답은 지극히 간단하다. 기독교가 상업주의에 물들었기 때문에 부흥이 지체되고 있다. 많은 사역자들이 과부와 가난한 자들에게서 십일조를 받아 호사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그들은 부흥회나 전도 집회에 많은 청중을 끌어 모은다. 시장(市長)과 같이 높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기도 한다. 그들의 명성은 하늘을 찌른다. 순진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동기로 성의를 다해 자신의 물질을 바친다. 하지만 그들이 바친 물질은, 명성은 높지만 속이 좁은 사역자들이 대중문화의 스타처럼 호화롭게 생활하는 데 사용되어버린다.   호화저택도 있고 호숫가에 별장도 있고 은행에 거액의 예금이 있는 사역자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물질을 추구한다. 이렇게 자기 배만 불리는 불의(不義)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부흥의 열쇠를 맡기실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들은 하루에도 두세 번씩 양복을 갈아입기 때문에 겉모습이 번지르르하다. 그들은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님을 전하면서 자신들은 고급 호텔을 전전한다. 그들은 설교 예화를 위해 데나리온 한 닢까지 다른 사람에게 빌려야만 했던 분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청중에게 돈을 짜낸다. 볼품없는 옷을 입었던 분을 기리기 위해 일류 스타들처럼 옷을 입는다. 광야에서 홀로 금식하신 분을 기억한다면서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산해진미를 즐긴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의 거액의 사례비를 받을 자격이 있으며, 자기들의 은행 예금이 매달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심판날’이 그들에게 얼마나 두려운 날이 될지 생각하라!  ○ 싸구려 복음과 게으른 사역자가 부흥을 가로막는다.   부흥이 지체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복음을 ‘싸구려 복음’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 방송에서, 기독교 음반에서, 심지어 교회에서조차 찬송가를 ‘부기우기’ (템포가 빠른 재즈풍의 댄스 음악) 템포에 맞춰 부른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찬양하는 노래를 향락적 댄스 곡조로 만들어 부르는 것이다. 교회의 설교단은 엔터테이너들의 쇼 무대가 되어버렸다. 초청을 받고 교회를 방문하여 이 일 저 일을 하는 소위 ‘사역팀’을 보고 있으면 마치 마네킹들의 행렬을 보는 것 같다.   당신은 이 시대의 프로 간증꾼들이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충만하여 청중에게 거룩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를 기대하는가? 그렇다면 차라리 개구리가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연주하기를 기대하라. 돈에 팔려 다니는 일부 만담꾼 부흥사들을 보라. 십자가를 걸러낸 저들의 처세술 강론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쉽게 죄를 짓고 쉽게 회개해도 괜찮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들은 제달을 타락시켰다. 제단은 ‘싸구려 복음’을 거래하는 시장(市場)이 아니다. 제단은 우리가 죽어야 하는 곳이다. 죽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제단을 떠나야 한다.   부흥이 지체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제단에서 무릎 꿇는 시간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 가운데 ‘영적 노숙자’가 봇물 터지듯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두려움 때문에 부흥이 지체된다.   부흥이 지체되는 또 다른 이유는 두려움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의 유일성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는다. 그들은 바알 선지자들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포용력 없는 독선적인 종교인’이라는 비난을 들을까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니라”(행 4:12)라고 분명히 말씀한다. 아, 슬프다! 이 말씀이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편협한 독선으로 들리는가보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을 비웃으며 그들의 무능을 경멸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리스도 없는 이단들과 기타 다양한 종교가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우후죽순처럼 일어나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런 현상을 보고 어지 진노하시지 않겠는가? 이 시대에 누가 경고의 나팔을 불 것인가? 우리는 더 이상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 '프로테스탄트'는 본래 ‘저항하는 사람’ 이라는 뜻으로 가톨릭에 저항한 ‘개신교 신자’를 가리킨다.)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에 대하여, 누구에게 저항하는가? 우리는 현대 자본주의의 신(神)에게 아부하지 않으면 죽는 줄로 생각한다. 하나님 신앙은 초개와 같이 버리면서도 세상의 향락적 풍조에는 발정난 망아지처럼 달려간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뜨겁다고 생각하지만 만일 우리가 생각하는 것의 절반만큼만 뜨겁다면, 우리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만일 우리가 생각하는 것의 십분의 일만큼만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물과 불의 세례뿐만 아니라 피(血)의 세례까지 받을 것이다.   영국 국교회는 존 웨슬리 (John Wesley, 1703~1791. 영국의 열정적인 전도자로서 감리교의 창시자) 앞에서 문을 닫고 그를 배척했다. 심지어 로우랜드 힐 (Rowland Hill, 1744~1833. 영국의 대중설교가) 은 “존 웨슬리는 부랑자, 넝마주이, 마부, 굴뚝청소부 같은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독초를 먹이고 있다.” 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사람이나 마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조지 휫필드 (George Whitefield, 1714~1770.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로서 18세기 신앙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도 몹시 조롱당했으며,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 또한 온갖 수모를 당하고 돌에 맞았다. 그렇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악한 본성은 여전한데, 어찌하여 오늘의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조롱당하지 않으며 돌에 맞지 않는가? 어찌하여 지금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모든 면에서 똑같은가?  ○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부흥이 지체된다.   부흥이 지체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어떤 유명한 목사가 부흥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 이 부흥회에 임하면서 나는 우리 모두가 간절히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꼈습니다. 나와 함께 간절히 기도하실 분들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우리 중에 손을 들고도 기도하지 않는 위선자가 없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그러나 부흥회 주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심야기도회가 열렸는데, 정작 이 목사가 기도회에 참석하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자신이 한 말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 목사! 이러고도 부흥을 기대하는가?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부흥이 왜 지체되는가?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기도라는 해산(解産)의 고통 없이 부흥을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는 해산의 고통 없이 기획과 홍보를 통해 복음을 전하려고 한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야고보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약 5:17,18).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간절히 기도한즉”과 “다시 기도한즉”이다. 우리는 대개 엘리야가 선지자로 활동했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사실 더욱 강조해야 할 것은 그가 ‘기도하는 사람’ 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아직 피 흘리며 기도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말했듯이, 우리는 “피는커녕 땀도 나지 않는다.” 우리는 “되면 되고 안 되면 말지”라는 태도로 기도한다. 기도하기 위해 다른 것을 눈곱만큼도 희생하려고 하지 않는다. 줄기차게 기도하지 못한다. 기도한다 할지라도 그 기도가 오래 가지 못한다.   우리는 기도의 능력에 대해 책을 많이 쓰지만 기도의 싸움을 싸우지는 않는다. 기도에 관한 한, 오늘의 교회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가 바로 우리가 기도의 싸움을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씨름 선수가 땀을 뻘뻘 흘리며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듯 기도의 씨름을 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 문제의 본질이다. 우리는 영적 능력이든 일반적인 능력이든 우리의 능력을 자랑하는 데 관심이 많다. 우리는 정치적인 문제나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우리의 견해를 피력하느라 핏대를 세운다. 우리는 형제의 잘못된 교리적 견해를 바로잡기 위해 설교하거나 책을 쓰는 일에 아주 탁월하다. 그러나 이런 것으로는 사탄의 요새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사탄의 요새를 쳐부술 것인가? 누가 사탄에게 “노”(No)라고 말할 것인가? 좋은 음식, 재미있는 친구들, 꿀맛 같은 휴식을 거부하고 ‘기도’라는 고투(苦鬪)에 몰두할 사람은 누구인가? 만일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귀신들을 제압하고, 포로 된 자들을 자유케 하며, 지옥에 떨어질 자들을 구해내고, 수많은 영혼들을 어린양의 보혈의 강(江)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기 때문에 부흥이 지체된다.   마지막으로, 부흥이 지체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말씀을 하셨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1,44).   설교단에서 사람들에게 아첨하는 말을 늘어놓지 마라.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어 무엇을 얻어내려고 하지마라. ‘나의’ 교회, ‘나의’ 교인, ‘나의’ 건물, ‘나의’ 책, ‘나의’ 방송프로그램의 높여서 영광을 받으려는 생각을 버려라. 지금 많은 교회의 설교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설교단에서 사회자가 강사를 소개할 때 그의 학벌이 어떻다느니, 그가 무슨 조직의 대표라느니, 심지어 그가 구각조찬기도회에 참석했다는 말까지 한다. 이런 거창한 소개는 결국 그 강사의 육신적인 부분을 자랑하는 것이다. 사회자의 번지르르한 소개가 끝나고 등장하는 강사도 그런 소개가 만족스럽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설교 한다. 그러나 그가 설교를 끝마쳤을 때 청중은 그의 화려한 학력과 경력에 비해 그의 설교가 너무 빈약하다고 느낀다. 만일 사회자의 거창한 소개가 없었다면 청중은 그 강사라 그토록 유명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거창한 소개의 뒤를 잇는 빈약한 설교! 이것이 얼마나 사람들을 맥 빠지게 하는지 아는가?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목회자나 교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자신들이 가로채는 것이다. 교인들이 말씀으로 각성되어 있다면 목회자들이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교인들이 인기나 학벌을 선호하기 때문에 목회자들도 교인들의 기호에 아부느라 그런 언행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풍조를 목회자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다.   우리 모두는 사람들의 칭찬을 좋아한다. 우리는 실패했다. 우리는 더럽다 우리는 우리의 유익을 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하여 고치지 않으면, 하나님은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 3:16) 라는 무서운 말씀을 실행에 옮기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라.   “오, 하나님! 썩어 문드러진 우리를 치료하소서. 완전히 잘못 된 생활방식에서 우리를 건지소서. 우리가 깨어지는 복을 주소서. 우리가 먼저 심판대 앞에 서게 하소서.”
2009-05-08 14:08:38 | 관리자
기도(Prayer):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 혼의 소원과 감정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 이것은 성령님의 도움을 힘입어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알리고 대화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기도가 혼의 생명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기도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욥21:15; 시10:4). 모든 세대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성도들의 기도를 기뻐하셨다. 율법의 시작 이후로 유대인들은 성막이나 성전에서의 경배를 멈추지 않았으며 여기에는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헌물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의 기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제사장들은 개개인을 위하여 희생물과 향과 헌물과 첫 열매를 드렸으며 처음 난 자를 구속하여 오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의식을 수행하였고 한 마디로 각처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엄숙한 날 뿐만 아니라 일반 날에도 몰려와서 자기들의 서원을 실행하였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는 반드시 기도가 수반되었다(대상23:30; 느11:17; 눅1:10). 왕상8:22와 성전 예배를 위한 다윗의 시편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경건한 사람들은 하루에 세 번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였고(시55:17; 단6:10) 성경의 모든 성도들은 공적으로 사적으로 가족 별로 기도하였으며 일반 업무를 하면서도 짧게 기도하였다(느2:4). 기도의 자세는 특별하게 규정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성도들은 서서 손을 들고 기도하거나(왕상8:22) 머리를 숙이거나(창24:26) 무릎을 꿇거나(눅22:41) 땅바닥에 엎드려서 기도하였다(마26:39). 기도는 항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자세로 열렬히, 인내하며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또한 기도에는 죄의 고백과 감사와 다른 사람을 위한 간구가 포함된다. 우리는 바른 이성과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습관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마음으로 무신론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경배하기를 원하시므로(겔36:37; 마7:7-11; 빌4:6; 딤전2:1-3; 약1:5) 이런 의무를 게을리 하는 것은 변명할 수 없는 죄이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목적을 바꾸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분의 뛰어난 섭리는 우리의 모든 기도를 포함하며 또한 우리가 받을 응답도 포함한다. 또 어떤 이들은 기도해도 이미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시므로 소용이 없고 주시려고 한 것은 기도를 하지 않아도 주실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의 기도에 그분께서 후하게 응답하신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으면 그런 복을 받을 수 없다. “네가 부르짖는 소리에 그분께서 네게 크게 은혜를 베푸시며 그 소리를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사30:19). 다윗의 기도에 주의를 기울이기 바란다. “이 가엾은 자가 부르짖으매 주께서 그의 말을 들으시고 그의 모든 고난에서 그를 구원하셨도다”(시34:6).거짓 종교 추종자들이나 이교도들은 헛된 반복이나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좋은 기도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위선자들은 사람들의 칭찬을 듣기 위하여 반복해서 헛된 말로 기도하였다. 이에 우리 주님은 마6:5-15에서 이런 자들을 책망하면서 소위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기도의 모범을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이것을 오해하고 기도 후에나 혹은 모임을 마칠 때에 마치 주문처럼 외우고 있다. 이것은 실로 주님이 기도하신 ‘주기도문’이 아니고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그런 형식으로 기도하라고 본을 보여 주신 기도의 예이다. 따라서 그 의미를 모르고 헛되이 그 기도문 자체를 반복해서 외우는 것은 이교도들의 행위와 같은 것이다. 반복 참조.엡6:18; 살전5:17; 딤전2:8에서 바울은 신자들이 모든 곳에서 언제든지 손을 하늘로 들고 모든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라고 가르쳤고 그래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게 하라고 말하였다(고전10:31). 한 마디로 우리 주님은 쉬지 말고 기도할 것을 우리에게 권고하신다(눅18:1; 21:36). 끝으로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신다(잠28:9).
2009-05-08 14:07:37 | 관리자
사랑침례교회 창립, 문제는 없는가?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사랑침례교회 창립을 축하하기 위해 오신 여러 성도님께 몇 가지 질문을 드리며 함께 사랑침례교회 창립에 문제는 없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마 오늘 처음 이 사랑침례교회를 방문하신 분들은 ‘송내역’이라는 랜드마크를 통해 이곳에 오셨으리라 생각되는데요, 제가 첫 번째로 드리고 싶은 질문은 “왜 송내역 근처에 교회가 또 세워져야 하나?”입니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서 검색해 보면 무려 50여 개의 교회가 이미 송내역 주변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교회를 이곳에 세워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2005년 통계청 자료를 보면 서울지하철 1호선 역들 가운데 유동인구가 2위인 곳이 송내역입니다. 하루 20만 명 이상이 유입되는 곳이 바로 이 지역입니다. 그리고 종교별 인구통계를 보면 지난 10년간 우리나라 기독교인은 1.4% 감소하여 861만6천 명으로 나타난 반면, 천주교를 비롯한 타종교인들은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수많은 영혼들이 왕래하는 길목인 송내역 주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는 교회가 또 세워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장로교회나 감리교회 등 일반인들에게 익숙한 교파가 아니라 침례교회, 그것도 ‘독침’이란 약어로 회자되는 독립침례교회가 세워져야 합니까? 제가 지난 2월 1일 이 사랑침례교회 주일오전 예배 때 설교하면서 종교다원주의의 아이콘이 된 오바마에 대한 얘기를 잠시 하였습니다만, 이제는 기독교인이라 해도 성경을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 곧 절대진리로 믿지 않는 경향이 전 세계적으로 점차 농후해지고 있습니다. 어제가 석가탄신일이었는데요, 우리나라에서 석탄일을 맞아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를 절에 가서 108배를 하는 것으로 대체하거나 또는 부처님 탄생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내보내고 있는 기독교회도 점차 증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문자 그대로 최종권위로 믿는 독립침례교회가 창립되는 것은 매우 환영받아야 할 사건입니다. 마지막으로, 왜 ‘사랑’이란 타이틀을 내건 교회가 세워져야 합니까? ‘사랑’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매우 진부한 느낌이 들지는 않습니까? 특히 세상과의 분리를 주장하는 거룩한(?) 성경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랑’은 자칫 세상과의 타협을 암암리에 묵인하는 누룩과 같은 위험한 개념이 아닌가요? 물론 성경에 ‘거룩하다’는 말은 611회 나오고 ‘사랑’은 488회 나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성경은 사랑보다는 거룩함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교회 안에서 거룩함과 사랑이 갈등을 일으킨다면 반드시 거룩함을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도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모든 것을 성취하는 것은 사랑입니다(마22:34-40; 롬13:8-10).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시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금석이 사랑이기도 합니다(요13:35; 요일3:14). 실천신학적인 면에서 본다면 진정한 사랑을 행하기 위해서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가 소요될 수 있습니다(고전13:4-7; 벧후1:3-6). 제 좁은 소견으로는 ‘독침’의 약점이 상대적으로 사랑과 구제의 부족이지 않을까 하는데, 이처럼 과감하게 ‘사랑’이란 타이틀을 내건 독립침례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그야 말로 신선한 충격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모쪼록 이 사랑침례교회를 통해 수많은 잃어버린 영혼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가운데 올바로 서서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아름다운 주님의 교회를 이뤄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벧전4:8). 감사합니다.
2009-05-08 14:06:50 | 관리자
  헌금과 십일조의 원리 이 주제는 참으로 다루기가 민감한 주제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상처를 입을 목사들와 성도들이 있을 터이므로 고민을 하다가 성경을 보고 얻은 저의 의견을 적습니다. 이것은 제가 맡고 있는 사랑침례교회의 헌금의 원칙이므로 다른 교회에는 일차적으로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아전인수식으로 이런 글을 가지고 사사로운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생기기 않을까 걱정이 되어 한두 자 적습니다. 하나님께서 글과 설교를 접하는 모든 이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헌금과 십일조의 원리 6 다만 내가 말하려는 바는 이것이니 곧 인색하게 뿌리는 자는 또한 인색하게 거둘 것이요, 후하게 뿌리는 자는 또한 후하게 거두리라는 것이라. 7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 대로 낼 것이요,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6-7). 십일조(Tithe, 십분의 일) 사람의 수입의 십분의 일을 거룩한 용도로 드리는 것(창14:20; 28:22). A. 구약시대 이것은 모세의 율법에 명시되어 있었다. 모세의 율법은 두세 종류의 십일조를 이스라엘에게 부과하였다. I. 첫 번째 것은 각 사람이 자기 밭과 나무와 짐승 등의 소출의 십분의 일을 유대인들의 왕이요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레27:30-32). 이것은 신정국가의 백성이 내는 세금으로 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일을 전담하는 레위 사람들을 먹이는 데 사용되었고(민18:21-24) 또 왕의 통치를 위해서도 사용되었으며(삼상8:15, 17)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가의 오분의 일을 더해서 돈으로 이 세금을 낼 수 있었다(레27:31). 레위 사람들은 자기들이 받은 것의 십분의 일을 제사장들에게 바쳤고(민18:26-28) 이로써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의식주 걱정 없이 마음 놓고 일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한 것이다. 10.0%II. 두 번째 것은 신12:17-19; 14:22-27에 나오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소출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이 지정하신 곳 즉 예루살렘으로 가져가서 자기와 자기 가족과 레위 사람들을 위해 즐겁게 먹어야 했고 거리가 멀면 물건으로 바꾸어서 가져가기도 하였다. 나와 내 가족이 먹는 것이다. 10.0%III. 세 번째 것은 신14:28-29에 나오는데 이것은 3년 마다 레위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십분의 일을 내는 것이었다. 3.3%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신정 정치 하에서 매해 평균적으로 수입의 23.3%를 주님께 바쳤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신정 정치이므로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율법이 부과하는 형벌을 받아야 했다. 이런 십일조 제도는 바빌론 포로 생활 이전과 이후에 갱신되었다(대하31:5-6, 12; 느10:37-39; 12:44; 13:5).그러나 유대인들은 특히 포로 생활 이후에 십일조를 정기적으로 내지 않아서 주님의 일을 하는 레위 사람들이 도망가기도 하고(느13:10) 하나님의 복이 내리지 않았다(말3:8-12). 구약의 끝 부분에 이르러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조그만 것의 십일조를 드리는 데는 혈안이 되어 있었으나 십일조의 원리 즉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무시하다가 주님께 책망을 받았다(마23:23). 신약과 구약 설명IV. 이 외에 구약에는 율법 시대 이전에 창14:20에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노획물의 십분의 일을 바침. 또 창28:22에서 야곱이 벧엘에서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약속함. B. 신약시대신정 정치 하에서 운영되던 율법의 십일조는 신약의 도래와 함께 분명히 사라졌다.사도행전부터 계시록에서 십일조는 단 한 군데 즉 히7:4-10에만 나온다. 여기서는 제사장 체계가 변했다는 것과 멜기세덱의 체계가 레위의 체계보다 월등함을 강조하기 위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을 언급함(레위도 드린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시대 성도들이 십일조를 바쳐야 함을 보여 주기 위한 구절이 아니다. C. 헌금의 원리헌금의 정신과 원리 즉 복음의 사역자들과 복음 사역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들 수입의 일정 부분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원칙은 지금 이 시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교회는 유기체(organism)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조직(organization)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희생과 수고가 있어야 한다.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둘씩 보내면서 그들에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시고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다(마10:9-14; 눅10:4-8, 16). 사도 바울 역시 그와 동일한 것을 말한다(고전9:13-14; 갈6:6). 그는 성도들을 위한 기부 헌금으로 주님께서 형통하게 해 주신 대로 각 사람이 수입에 비례하게 주의 첫 날에 즉 주일에 헌금을 드리라고 하였다(고전16:2). 그러므로 교회에서 헌금 드리는 것을 비난하는 일은 비성경적이며 크리스천이라면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자기 수입에 비례하게 하나님께 헌금을 드려서 주님의 사역자들과 교회 사역을 유지해야 한다(고후9:7). D. 십일조는 그림자이다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이다.동일한 하나님의 일: 이스라엘과 교회, 제사장과 사역자, 성전과 교회 등   신약성경에 수입의 얼마를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가에 대한 규정은 없지만 성경 전체를 볼 때 수입의 십분의 일 이상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나가기에 합당한 것으로 보인다.따라서 신약시대의 성도가 수입의 십분의 일을 떼서 십일조로 드리는 것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다만 교회에서 이런 헌금을 율법의 십일조로, 강제 규정으로 세금을 걷듯 걷는 것은 신약시대의 헌금의 원리(고후9:6-7; 갈6:7)와 배치되므로 경계해야 한다.십일조를 하는 성도들의 두 부류: 하나님의 두려움으로, 맹신으로십일조를 안 하는 성도들의 두 부류: 방종에 빠진다, 감사 헌금으로 대체 구체적인 예;사랑침례교회: 한 달 최소한 400만원, 교인들 한 달 수입이 4000만원, 20가정으로 환산하면 약 가정 당 월 평균 수입 200만원이다. 이것이 있어야 우리의 믿음을 지킬 수 있다.목사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헌금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와 우리 가정의 신앙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E. 결론너희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마6:19-21).돈 지갑의 회개가 있어야 바른 회개이다. 가장 아끼는 것을 드리는 것이 헌금의 원리이다. F. 의논 사항헌금의 용도: 사역자 지원, 교회 유지, 구제와 선교(특별히 현대 교회는 구제가 없음).기명, 무기명십일조라고 써서 드려야 하는가? 감사헌금으로 하는가?십일조 말고 헌금을 또 따로 드려야만 하는가?(말3:8)교회 헌금의 종류는 몇 가지인가?
2009-05-08 14:06:10 | 관리자
교회 직분의 계급화 ● 최상준 교수 (Concordia University) 이 계급화 현상은 중세시대의 성직 매매와 같이 위험하다. 교회의 직분이 마치 군대의 계급이나 사회의 연봉 서열처럼 되었고 직분의 고귀함이나 권위가 사라져 버렸다. 목사, 장로, 집사, 권사, 부서장, 교구장, 구역장 등등 숱한 직분과 직책이 계급처럼 되어버렸고 “주의 종”이라는 목사가 제일 높고 나머지는 “평신도”로 분류하여 “주의 종”을 받들고 섬겨야 하는 이중 구조를 만들어 놓았다. 말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이며 우리는 서로 섬기는 관계일 뿐이라고 하나 진실로 그러한지 자문해 보면 곧 해답이 나온다. 단어의 왜곡이 심한 곳 중의 한 곳이 교회이기에 말 그대로 믿고자 하는 순진한 자들은 시험(?)을 받을 수밖에 없다. 교회 내의 직책이 중세시대의 영주가 충성하는 기사들이나 농장주들에게 나누어 주던 봉토(fief)처럼 하사되고 있다. 직분을 계급장이나 훈장처럼 달아주는 관례가 통념화 되어 있다. 따라서 연말이면 그 해 신앙의 결산을 군이나 회사의 진급 심사와 같은 긴장과 조바심 가운데 치르고 있다. 장로 투표, 안수 집사 선출, 부서장 임명 등 직책 임명이 목사와의 거리로 결정된다. 신앙 세계에는 성화의 단계와 수준이 개인마다 차이점이 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성화의 정도를 직분으로 표시할 수 있으며 직분에 따라 성화를 평가받고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까지 나가는 것은 잘못이다. 직분은 시작도 끝도 하나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해 잠시 우리가 사용하도록 허락된 시한부 운전면허증과 같다. 운전면허증을 암행어사 마패쓰듯 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름부음을 받은” 목사가 “기름부음 받지 못한” 평신도보다 더 위라는 생각이 통용되고 있다. 제도상의 기름부음이 구원함을 입은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보다 계급적으로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더 돋보이며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전인수적 착각이다. 최상준 교수 (Concordia University)
2009-05-08 14:05:35 | 관리자
목사의 타락 요즘 목사가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설교를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한 주일을 보내면서 지금까지 평생을 설교하면서 일생을 보낸 목사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인내하며 목사의 길을 가는 많은 형제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최근에 한 성도가 적은 한국 교회의 칠거지악이란 신문 기사를 읽었습니다. 물론 그분은 잘못된 목사에 대해 지적을 많이 했습니다만 나는 거기서 중간에 있는 한 부분에 눈이 고정되었습니다. 그런 목사가 되기를 갈구하면서 전체의 글을 올립니다. 오늘도 양들에게 바른 꼴을 주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목사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목사의 타락 영적 지도자로서의 고결한 신앙 인격이 말씀과 함께 외쳐질 때 목회자로서의 진정한 권위가 저절로 드러날 터임에도 “더러운 이를 취하며(벧전5:2)”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며(딤전6:5)” “군림(주장)하는 자세(벧전5:3)”가 되어 버렸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고후4:1,2)”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의 자신의 고귀한 직분을 밝혔다. 이 말씀에서 주목할 것은 “혼잡케 한다”는 말인데, 이 말은 마치 포도주에 물을 타서 포도주를 변질시킨다는 의미를 뜻한다. 또한 그는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지 말고 곧 순전함을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7)”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거듭하고 있다. 여기서 혼잡이란 뜻은 값싼 물품이나 위조품 등을 교묘한 꾀와 속임수로 진짜처럼 팔러 다니는 엉터리 잡상인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나왔는데,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면서 자신의 이권을 취하기 위해 진리의 복음과 인간의 영혼을 담보 잡아 사사로운 잇속과 명예를 챙기는 불의한자들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사는 자신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절망하나 순종의 걸음을 통해서는 소망의 출구를 향해 힘차게 걸어 나갈 수 있음을 성도들에게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목사는 골방에서 하나님과의 외로운 씨름을 하며 그분의 말씀과 대면하며 처절해져야 한다. 그래야 목사는 강단에서 산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듯한 고독과의 싸움이 싫어질수록 강대상에서는 분칠한 설교가 나오게 마련이며 사람들의 구미에나 맞추는 백화점 식 설교가 나올 수밖에 없다. 사람 만나기를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일(행6:4)보다 더 선호할 때 타락은 저절로 찾아오기 마련이다. 무엇 때문에 바빠야 하는지, 바빠야 할 이유와 순위가 문제다. 잃어버린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강조하는 만큼 그 영혼에 대한 사랑을 근사한 식당에서 대접받는 것이나 심방 가서 만나주는 것으로 표현하려 해서는 안된다. 예수님도 “마음이 가난한 것”을 강조하셨다며 스스로를 위로하나 마음과 물질 모두로부터의 가난과 그 가난을 기쁨으로 감내하겠다는 실천의지는 너무나 약하다. 목사는 인간적이고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성도들에게 전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해지도록 격려하는 일에 더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으로 실천하는 것보다 더 고상한 일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부득이한 (벧전5:2) 의무로 변질시켜 버릴 위험성도 다분히 있다는 것도 직시해야 한다. 고귀한 의무감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의무감이 먼저 떠오를 때 목사는 타락의 길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목사의 영적 타락이 윤리적 타락보다 더 심각하며 영적 책무의 망각이 자신뿐 아니라 교회 전체의 기반을 흔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상준 교수 (Concordia University)
2009-05-08 14:04:57 | 관리자
자기 성찰 ● 정동수 청교도 목사들의 지침서 중 하나는 리처드 백스터의 참목자상(Reformed pastor)입니다. 목사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고전입니다. 다음은 그 책의 일부입니다. 목사 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 모두에게 적용되는 글이므로 깊이 묵상하며 은혜를 받기 바랍니다. 참목자상(리처드 백스터, 최치남 옮김, 생명의 말씀사) 1. 자아 성찰의 내용 1) 구원의 은혜의 역사가 자신의 영혼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고 있는지 보라. 가장 성결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일을 가장 충실히 배우는 사람이며, 성결한 사람만이 그 일을 온전히 배우고 익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위대하며, 그 안에 있는 즐거움을 아는 모든 사람은 이를 열심히 추구합니다. 그들의 추구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만드신 창조주를 위해서입니다. 신학의 핵심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철학의 어리석음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2) 자신이 은혜의 상태에 있음에 만족하지 말고, 그 은혜가 활기차고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는지 보라. 무엇보다 그대는 은밀한 가운데 기도와 묵상에 힘쓰십시오. 하늘의 불을 받아 희생의 불꽃을 피우십시오. 3) 행동이 자신의 가르침과 배치되지 않는지 보라. 자신의 혀로 한 말을 그 생활로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여기는 사람은 자기가 말한 대로 행동합니다. 저들은 설교는 정확하게 하려고 애쓰면서 삶은 정확하게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대가 강단 위에서만 목회의 목적을 찾으려 한다면, 강단을 떠나 있을 때는 목회자임을 포기하는 셈이 됩니다. 설교 잘하는 목회자 뿐만 아니라, 행동 잘하는 목회자가 됩시다. 첫째, 아무 흠 없이 행하여 그대의 순전함을 유지하십시오. 적어도 사람들의 편견을 없애는 일에 있어서는, 그대가 겸손과 온유와 자기 부인의 덕스러운 본을 보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대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몸을 낮추어 겸손히 대하십시오. 둘째, 자선 사업을 풍성히 하십시오. 미누키우스 펠릭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심이 없는 자가 주님께 기도합니다. 사람을 위험에서 건져내는 자가 풍성한 희생 제물을 제공합니다. 이들을 우리의 희생 제물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합니다. 이처럼 우리 가운데 가장 독실한 자는 자신을 부인하는 자입니다." 4) 다른 사람의 죄는 지적하면서 자신은 혹시 그런 죄에 빠져 있지 않는지 보라. 그대는 스스로 조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매일 그대가 경고하고 비난하는 죄에 자신이 빠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말로는 죄를 굴복시키고 실제로는 죄를 굴복당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5) 자신의 사역에 필요한 자격 요건을 갖추기 꺼려하지는 않는지 보라. 그대는 구원을 얻는데 필요한 신비로운 일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하므로, 지식에 대해 어린 아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양들에게 부지런할 것들을 가르치듯이, 우리 역시 부지런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공부하고, 기도하고, 모여서 토의하고, 실천하십시오. 나태함으로 인해 연약해지지 않도록 늘 조심하십시오. 그대의 연약함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십시오.
2009-05-08 14:04:19 | 관리자
영혼을 인도하는 이들에게 주는 글 서문 ● 정동수 목사가 되어 가장 크게 도전을 받은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영혼을 인도하는 이들에게 주는 글이다. 매일 묵상을 하고 죽을 때까지 묵상해도 좋은 크리스천 클래식이다. 물론 성도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은 그 책의 서문이다.   영혼을 인도하는 이들에게 주는 글-서문    호라티우스 보나 지음 / 안보헌 옮김(생명의 말씀사) 우선 기독교 사역의 보물급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을 소개할 수 있게 된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 호라티우스 보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로, 1808년 12월 19일 에든버러에서 태어났으며, 1889년 7월 31일 이 세상을 하직했다. 이처럼 그는 지나간 세대에 속한 사람이지만, 그의 책은 시간을 초월하여 지금도 널리 애독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책이 1866년 켈소 교구와 그 후의 에든버러의 필요에 적절했던 만큼 오늘날의 필요에도 적절하기 때문이다. 그는 위대한 설교자요 우리가 애송하는 찬송가도 몇 곡 작사한 사람이지만, 무엇보다도 전도자(winners of souls : '구령자'라고 번역함이 옳으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전도자'로 옮김-역자 주)였다. 그는 후에 자기 교단의 총회장이 된다.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방법에 대해 쓰여진 이 책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그가 지은 많은 찬송가 중에 특별히 세 곡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 첫번째 곡은 "나 주의 음성을 들었네"라는 찬송가로, 그 자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기에 그런 가사로 시작되는 찬송가를 지을 수 있었다(한국 찬송가 467장, "내게로 와서 쉬어라 너 곤한 이들아 내 품에 와서 안기라 주 말씀하셨네").두번째 곡은 성찬식 때 부르는 "오 나의 주님 친히 뵈오니"라는 찬송가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통해 예수님께 인도되었으며 또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과의 첫사랑을 생각하며 새로운 헌신을 다짐했는지 모른다! 전도자들에게 주는 그의 충고는 아주 영적이요 신령하며 엄중할 뿐 아니라, 그 일이 몹시 시급함을 촉구하고 있다. 이 사실은 그의 세번째 곡 "가서 일하라, 온 힘을 다해"(Go Labor On, Spend and Be Spent, 한국 찬송가에는 수록되지 않음-역자 주)라는 찬송가에 잘 나타나 있다. 목사라면 누구나 다 이 찬송가의 3절을 표어로 만들어 책상에 붙여 놓아야 할 것이다. 어둔 밤 쉬 오리니 낮에 일하라 부지런히 일하고 놀지 말아라 놀면서 영혼을 구할 수는 없다. 이 책은 허송 세월을 보내는 사람이나 주님의 게으른 종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전도자들을 위한 책이다. 또한 우리의 마음을 조사해 보게 만드는 책이요, 매일의 임무를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새로운 용기를 주는 책이다. 지금은 허송 세월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인생은 짧고 죄는 문 앞에 엎드려 있는데 우리의 연수(年數)는 한 잎의 낙엽이나 눈물 방울만큼 짧으니, 농이나 하며 허송 세월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마음을 가다듬어 주님에 대한 헌신을 재다짐해야 할 것이다. 그 짧은 인생이나마 여러 번 사는 것도 아니요 단 한번 살 뿐이다. 오직 한번. 그러니 얼마나 거룩하게 살아야 할까! 매순간 단축되고 있는 그 짧은 일생을 우리의 복된 수고로 가득 채워야 할 것이다!
2009-05-08 14:03:44 | 관리자
교회에서 질문을 할 수 없다고요? ● 송인규 교수 다음은 어느 독자가 보내 준 송인규 교수님의 글입니다. 우리들 교회의 현실을 보여 주고 있지요. 읽고 많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질문을 할 수 없다고요 질문이란 단순히 어떤 사안에 대한 궁금증이나 호기심을 푸는 수단 정도가 아닙니다. 질문은 질문하는 당사자의 생각과 입장을 확실히 정리하도록 돕는가 하면, 또 자신의 질문 내용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바를 투명하게 볼 수 있게 자극하고, 때로 질문자의 숨은 의도를 여지없이 보이기도 합니다.   질문은 이렇게 당사자에게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질문은 그 대상인 답변자에게 궁극적인 자극과 반성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질문으로 자신이 주장하는 바는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고, 나의 의견이 상대방에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점검할 수 있습니다. 또 앞으로 전개해 나갈 논의의 타당성과 적실성을 빠르게 타진하게 되며 만약 질문자와 답변자가 함께 청중들을 대하고 있는 경우라면, 청중들도 그와 같은 효과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질문’이 어려운 교회 이토록 질문의 유익이 많음에도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질문’은 그다지 친근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 이유를 기독교 안팎에서 찾아보면, 우선, 교회 외적으로 한국 특유의 문화적 분위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한국의 교육 분위기는 질문(및 답변)이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학습 태도가 아닌 것으로 말합니다. 우리의 교육은 교사와 학생의 수직 구조에서 수행되는 강의, 필기, 암기의 반복일 뿐 교사와 학생, 또는 학생 간 상호 교류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바람직한 교육이라면 마땅히 질의와 응답이라는 교육적 수단을 포함해야 함에도 시간과 공간의 문제, 과밀한 학생 수, 그에 비해 열악한 교사 수 등의 현실과 타협했던 것입니다.   둘째, 학습장을 감싸고 있는 심리적 압박이 질문과 대답을 편안하게 유도하기 못합니다. 많은 교사들은(특히 나이가 든 옛 세대일수록) 학생들의 질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학생이 질문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문화는 그것을 상급자에 대한 도전이나 공격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질문자에 대해서도 다른 학생 편에서 “짜식! 혼자 되게 잘난 척하네.”라고 반응하곤 합니다. 물론 질문자중에는 예의조차 갖추지 않고 시건방진 태도로 질문하는 이도 있고, 자기 과시를 위해 질문하는 경우도 적잖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교육 환경은 질문과 대답이라는 학습 수단을 인정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교회 내적 요인 또한 자유로운 질문의 풍토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신앙의 강조점 믿음에의 독려와 권면은 자연히 질문을 경시하게 만들었습니다. 누군가가 믿음을 강조하면 할수록 자연히 질문(및 답변)에 대해서는 부정적 시각을 형성하게 됩니다. 의문점의 제기는 곧 불신, 불순종, 반역 등과 동일시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 나라의 교회 모임은 질의 및 응답이라는 교육 방식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허락지 않았습니다. 소그룹 활성화가 목회와 연관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 정도일까......그 전까지는 모든 모임이 주로 예배와 같은 대그룹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예배나 기도회에서는―그것이 크든 작든―성경의 가르침이나 설교 내용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가 없습니다. 목회자가 주도하는 소그룹 제자 모임도 아직은 모든 교회에 보편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질문과 응답의 학습 방식이 공동체의 삶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질의와 응답에 대한 성경의 예시 성경은 질문(및 답변)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이 질문과 관련하여 무슨 명령을 내린다든지(“너희는 궁금할 때마다 질문을 하라.”), 아니면 무슨 약속을 제시한다든지(“질문을 하면 주께서 깨닫게 하시리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구약에 나타나 있는 여러 가지 전례와 모범은 질문(및 답변)의 중요성을 말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을 깨우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다름 아닌 질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담에 대해서건(창 3: 9, 11), 하와에 대해서건(창 3: 13), 아니면 가인에 대해서건(창 4: 6, 7, 9, 10)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지자들도 종종 질문의 형태를 빌려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곤 했습니다. 이 점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지혜를 전할 때든지(사 40: 12~14), 예레미야를 통해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 활동을 경고할 때든지(렘 23: 33~34), 에스겔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돌이켜 회개하기를 호소할 때든지(겔 18: 2, 10-13, 19, 24, 25, 29, 31) 한결같이 나타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역시 많은 경우 질의와 응답의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12세에 지혜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할 때에 바로 질의와 답변을 사용하였습니다(눅 2: 46~47). 공생애 내내 질문의 형식을 통해서 제자들이나 듣는 이들을 가르치셨습니다(마 16: 15; 막 10: 9; 눅 10: 36; 요 8: 46). 또 사람들의 수많은 질문들에 일일이 대답하심으로 그들을 깨우쳤습니다(마 11: 2~6; 19: 16~22; 21: 23~27; 22: 15~22; 23~33; 막 2: 16~28; 8: 27~38; 9: 10~13; 10: 1~12; 13: 3~37; 눅 10: 25~36; 12: 41~48; 요 3: 4~15; 4: 10~15; 6: 28~65; 8: 1~11; 9: 1~7; 13: 36~14: 7).   사도들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도 질의와 응답의 형식으로 사명―복음 전도, 변증, 양육, 교육 등―을 감당했습니다. 베드로는 비신자에 대한 책임과 관련해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벧전 3: 15)고 권면했습니다. 그는 과거 산헤드린 앞에서 심문받을 때 이런 식의 답변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행 4: 7~12). 사도 바울의 복음 전도도 재판 과정 중 자신이 기소 당한 이유를 답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행 22: 1; 26: 1). 특히 로마서를 통한 이신칭의의 진리는 수없이 많은 질문과 답변의 형식으로 전달되었습니다(롬 2: 4~5, 21~23, 26~27; 3: 1, 3, 5, 6, 7~8, 9; 6: 1, 2, 3, 15, 16, 21; 8: 24, 31, 32, 33, 34, 35; 11: 34, 35).   질문 풍토 개선의 길 이처럼 중요한 ‘질문(및 답변)’이 한국 교회 내에 굳건히 자리 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먼저 열린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목회자들이 먼저 질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교우들을 깨우칠 필요가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솔선수범하여 질문을 던지고 교우들로부터 답변을 유도해야 합니다. 신앙의 교육과 훈련 과정 중에 질의와 응답의 방식을 적절히 사용해야 합니다. 교우들이 신앙의 주제와 관련하여 질문을 하거나 의문을 품을 때 정죄하거나 냉소로 반응하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고(때로 질문자의 태도나 내용에 문제가 있을지라도), 정성껏 답해야 합니다. 질문이 어려워 당장 답변하기 힘들 때에는 그렇다고 시인해야 하며, 후에 답변을 해 주겠다고 약속한 뒤 꼭 지켜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성경을 다시 살피고 관련 서적을 읽으며 해당 주제를 끊임없이 연구해야 합니다.   둘째, 질문과 답변이 필요하고 가능한 형태의 모임들은 공동체에서 개발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미 각종 리더 모임과 제자 훈련을 위한 소그룹을 갖고 있다면, 그것을 충분히 활용하십시오. 일방적인 강의만 하지 말고, 질의․응답 시간을 의도적으로 두십시오. 또 질의․응답을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모임들―세미나, 강좌 등―을 만들어 내십시오. 이런 모임들을 활성화시켜 질의와 응답이라는 학습 수단을 그리스도인 각자와 공동체에 귀중한 자원으로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공동체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 체질 개선의 의지가 깨어난다면 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2009-05-08 14:03:03 | 관리자
내일(5월 4일)부터 주일마다 설교를 하게 됩니다. 예전에 2년 가량 목회를 했고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설교를 했지만 이제 고난 당한 뒤에 다시 설교를 하면서 먼저 자세를 바로 잡고 싶어서 하나님이 평생 쓰신 사람(도서출판 규장)이라는 제목의 토저 일대기 중에 그가 목사 안수를 받은 뒤 홀로 한적한 광야로 가서 하나님께 드린 서약 기도를 읽었습니다. 나는 토저 같은 사람이 못되지만 그래도 토저 이상의 결심을 해야겠다고 느끼고 이렇게 그의 글을 올립니다. 내가 섬기는 교회가 나의 영적 수준에 의해 저울질 되는 것을 두렵게 느끼면서 내가 전하는 복음이 먼저 내 안에서 내 것이 된 뒤 내 온 몸을 돌아서 내 입을 통해 나와 교회 성도들과 인터넷으로 청취하는 세계 각국의 성도들에게 전달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토저의 서약 기도  오 주님!저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웠습니다.중차대한 위기의 때에 주님은 저에게 거룩한 일을 맡기려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흔들릴 수 없는 것들만 남도록 만국(萬國)과 온 땅과 하늘을 뒤흔드실 것입니다. 오 주님! 나의 주님! 주님은 스스로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어 저를 주님의 종으로 세우셨습니다.아론처럼 하나님에게 부름 받은 자들이 아니고서는 주님의 종이 되는 영광을 스스로 취할 수 없습니다.주님이 저에게 안수를 허락하신 것은 마음이 완악하고 듣는 것이 더딘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주인 되시는 주님을 거부했으므로 종이 된 저 역시 거부할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저는 저의 연약함과 무능력을 한탄하느라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책임을 지시는 분은 제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내가 너를 알았고, 너를 구별하여 세웠고, 너를 거룩하게 하였다”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그에게 갈지어다. 그리고 내가 네게 명한 것을 모두 말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누구관대 주님과 논쟁을 벌이겠습니까?제가 누구관대 주님의 주권적 선택을 문제 삼을 수 있겠습니까?결정을 내리시는 분은 제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주여, 주님이 결정하소서. 제 뜻대로 마시고 주님 뜻대로 하소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하나님이시여!제가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께서 저를 높이실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자비하신 하나님,제가 이 엄숙한 서약을 평생의 사역 동안 지켜서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순풍에 돛을 달든 역풍에 힘들어 하든, 살든지 죽든지 생명이 붙어 있는 한이 서약을 지키게 하소서. 오, 하나님!이제 하나님이 일하실 때가 되었습니다.원수가 하나님의 초장에 들어가 양들을 찢고 흩어버렸나이다.그렇지만 양들이 위험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거짓 목자들이 너무 많습니다.그들은 하나님의 양떼에게 닥치는 위험을 무시합니다.이런 삯군들에게 속은 양들은 가엾게도 그들을 열심히 따르지만, 그러는 동안 늑대가 양들을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다가옵니다. 하나님이시여! 구하오니 제가 원수의 접근을 감지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제가 본 것을 성실하게 전하도록 제게 용기를 주소서.저의 음성이 주님의 음성을 닮게 하소서.그러하시면, 심지어 병든 양들도 저를 통해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주 예수님주께 나아오니 저를 영적으로 준비시키소서.저에게 손을 얹으소서.신약의 선지자의 기름으로 저에게 기름 부으소서.제가 종교적 서기관이 되지 않게 하소서.제자 저의 선지자적 사명을 망각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지켜주소서.현대의 성직자들의 얼굴에서 웬지 모르게 느껴지는 저주의 씨앗들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제가 타협하고 다른 사람들을 모방하고직업적 타성에 빠지는 저주스런 행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교회의 규모, 교회의 인지도, 그리고 교회의 연간 헌금 액수를 기준으로교회를 판단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도록 도우소서.제가 흥행주(興行主)나 종교적 관리자가 아니라선지자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소서. 제가 선지자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제가 잔뜩 모여 웅성거리는 대중의 종이 되지 않게 하소서.저의 육신적 야망을 고쳐주소서.인기를 얻어야 직성이 풀리는 명예욕에서 저를 건지소서.또한 제가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소서.집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빈둥거리면서 세월을 낭비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오 하나님이여!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소서!그리하시면 제가 기도의 장소를 찾아가서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싸울 것입니다.제가 과식하지 않도록, 늦잠 자지 않도록 도우소서.제가 제 자신을 훈련하여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가 되게 하소서. 저는 이 세상에서 수고를 많이 하고 보답을 적게 받는 편을 택하겠습니다.저는 편한 자리를 구하지 않습니다.제 삶을 더 편하게 만들 수도 있는 비열한 방법들을 거부할 것입니다.다른 사람들이 편한 길을 추구한다 할지라도,저는 그들을 가혹하게 판단하지 않고제 자신이 힘든 길을 택할 것입니다. 저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생길 테지만,그런 경우에도 차분히 대응할 것입니다.주님의 친절한 백성들이 주님의 종들에게 흔히 그러하듯이저에게도 감사의 예물을 억지로 주려고 할 때저를 붙드셔서 제가 실족하지 않게 도우소서.저에게 무엇이 주어지든지 그것을 선용할 줄 아는 지혜를 주소서. 그리하시면 그것 때문에 저의 영혼이 해를 입지 않을 것이고그것 때문에 저의 영적 능력이 줄어들지도 않을 것입니다.만일 주님께서 깊은 섭리 가운데 저로 하여금주님의 교회에서 영예를 얻게 하신다 할지라도제가 두 가지를 꼭 기억하게 하소서.첫째, 제가 주님의 가장 작은 은혜조차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기억하게 하소서.둘째, 사람들이 저의 진짜 모습을 안다면 저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거나그 영예를 저보다 더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돌릴 것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여!저의 남은 날들을 성별(聖別)하여 주님께 드립니다.주님의 뜻에 따라 그 날들을 짧게도 하시고 길게도 하소서.주님의 뜻이라면 제가 높은 사람들 앞에 서도록 하소서.그러나 또 주님의 뜻이라면제가 낮고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 섬기게 하소서. 선택권은 저의 것이 아닙니다. 만일 제게 선택권이 있다 할지라도그 선택권을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저는 주님의 뜻을 행하는 종일 뿐입니다.지위와 재물과 명예보다 주님의 뜻이 제게는 더 소중합니다.하늘과 땅의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의 뜻을 선택할 것입니다.주님이 저를 택하시고거룩하고 높은 소명을 받는 영광을 저에게 허락하셨습니다.하지만 제가 재와 먼지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시고,제가 인류를 괴롭히는 선천적 결점과격정(激情)들을 타고난 인간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그러하오니 나의 주, 나의 구원자시여!저를 제 자신에게서 건지소서.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된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중에 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게 하소서.저를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케 하소서.그리하시면 제가 주님의 능력 안에서 행하고주님의 의(義)를 선포할 것입니다.저는 저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주님의 구속(救贖)의 사랑의 메시지를 널리 전할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사랑의 주님!제가 늙고 지쳐서 더 일할 수 없을 때하늘에 저의 처소를 마련하시고제가 영원한 영광 중에 거하는 주님의 성도들 중 하나가 되게 하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이 평생 쓰신 사람<제임스 스나이더> 중에서 ---
2009-05-08 14:02:17 | 관리자
여전히 한 군데가 있다 ● 정동수 교회로 인해 답답한 심정을 가진 채 몸부림치고 있는 지금,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보내온 글이 내 마음에 위로를 주기에 약간 다듬어서 올립니다. 아마도 저의 심정과 비슷한 심정을 가진 분들이 있다면 동감이 갈 것입니다. 2008년도에는 우리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응답을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전히 한 군데가 있다. 나는 마음에 큰 부담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사실 부담이 너무 커서 어디부터 기도해야 할지 나도 잘 몰랐습니다. 나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나는 오늘 정말로 주님이 필요합니다. 부디 내가 갈 수 있는 교회를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바른 것을 행하기 위해 권능을 가지고 굳게 서 있는 교회 말입니다. 율법적인 교리와 사람의 전통이 그리스도를 앞서지 않는 교회, 성경 말씀과 자기 성찰을 통해 스스로의 모습을 살펴서 고치고 바른 것을 추구하려고 부단히 애쓰는 교회, 기도와 말씀이라는 펀더멘탈이 강한 교회, 한 마디로 그리스도는 흥하고 사람은 쇠하는 교회, 그런 교회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위해 굳게 서서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님이 필요합니다. 말씀 선포에서 열정이 느껴지고 인간을 인해하려고 애쓰는 인간적인 목사님 말입니다. 또한 인생 여정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내게 격려와 위로를 줄 수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는 교회를 원합니다. 육신의 형제자매보다 더 친근하게 내 것을 허물없이 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랑의 동기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인간이 된 사람들, 로봇이 아니라 살아서 숨 쉬는 평범한 인간들로 구성된 교회 말입니다. 주님, 지금까지 여기 저기 가까운데 먼데 다 찾아보았으나 아직까지 그런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런 교회를 찾기가 이렇게 어려운가요? 내 요구가 너무나 큰 줄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잠시 기도를 멈추고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주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말로 할 수 없는 평안과 위로가 임하면서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지금까지 마음고생하며 많이 기다렸지만 이제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런 곳을 찾기가 쉽지는 않지만 여전히 한 군데가 있단다. 자유의 영으로 마음 놓고 그리스도를 추구할 수 있는 곳 말이다. 혼을 다해 나를 의식하려고 애쓰는 목사와 성도들이 있는 교회 말이다. 영과 진리로 내게 경배할 수 있는 곳 말이다. 내가 준비해 놓았다.
2009-05-08 14:01:37 | 관리자
진실 속이는 이에게 어찌 신앙 묻겠는가 ‘부실 학력’ 목회자에도 경고 메시지… 한국교회언론회 자정 촉구 김한수 기자 hansu@chosun.com  인터넷판 조선일보 입력 : 2007.08.21 00:20 ‘허위학력’ 불똥이 종교계로까지 튀었다. 20여년 만에 신도 25만명을 자랑하는 한국 최대의 도시사찰로 떠오른 서울 포이동 능인선원 원장 지광(智光·57·속명 이정섭) 스님이 지난 18일 자신의 ‘서울대 공대 중퇴’ 학력이 거짓이라고 고백한 것이 계기가 됐다. 정직과 신뢰가 생명인 종교인 까지 허위학력 파문에 휩싸이면서 종교계 내에서도 ‘학력’이나 ‘경력’에 관한 ‘허위’와 ‘과장’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요점은 ‘이제는 종교도 성역이 아니며,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쪽이다.  종교계는 지금까지 사회에서의 학력, 경력보다는 성직을 맡은 이후의 능력을 우선시해 왔다. 불교계는 일단 출가한 이후에는 은사(恩師)와 수계(受戒) 여부, 그리고 교계 내의 경력만 묻고, 출가 전의 일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최근에는 동국대와 중앙승가대 등 교육기관에서 수학하는 스님들이 많아졌지만 아직도 유년 시절 절에 맡겨져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출가하는 ‘동진(童進) 출가’ 관행이 살아있는 불교계에서 50대 후반의 지광 스님은 특이한 경우였다. 지광 스님 본인은 지난 18일 기자회견에서 “출가할 때 포교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허위학력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지만 일반 신도 입장에서 볼 때 1980~1990년대 당시 지광 스님의 ‘서울대 중퇴’ 학력은 눈에 띄었을 가능성이 있다. 조계종측은 난감해 하는 분위기이다. 조계종 총무원의 한 관계자는 “출가 전의 학력, 경력을 이야기하지 않는 풍토에서 이런 일이 생겨 당혹스럽다”며 “아직 종단 차원의 어떤 결정을 내린 바 없다”고 말했다. 개신교계도 ‘부실학력’에 대한 자성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다. 개신교계의 대(對)언론관계 창구역할을 하는 한국교회언론회(대표 박봉상 목사)는 지광 스님의 고백이 있기 전인 지난 17일 보도자료를 통해 “이제라도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며, 객관적이고 공인된 학교에서 받지 아니한 학력이나 학위에 대해서는 내세우지 말아야 하며, 이를 통하여 얻은 혜택이나 명예가 있다면 정직하게 버리거나 자리를 떠나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교회언론회는 이 자료에서 “기독교계도 ‘단기간에 학위 받기’ ‘외국에 나가지 않고 학위 받기’ ‘논문도 제대로 써보지 않고 학위 받기’ 등의 사례가 있다”고 지적했다. 개신교계의 경우, ‘우체통 신학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교단과 신학교가 난립하면서 ‘부실학력’ 목회자의 불안요소를 늘 안고 있었다. 개신교계는 현재 목사를 양성하는 신학교가 100여 개에 이르며 연간 4000~6000명의 목사가 배출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60여 개 교단이 가입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한 관계자도 “20여 교단이 운영하는 신학교만 교육인적자원부가 인가한 경우이고 나머지는 실태파악이 잘 안 된다”고 말할 정도이다. 문제는 비인가 신학교의 경우도 대부분 소속 교단은 학력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경우엔 목사 안수 때 교단과 교회 내부적으로 학위가 문제 되지 않는다. 또 “학위가 성직자로서 영성과 리더십을 대신할 수 있느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조재국 교수는 “비인가이지만 교단은 인정하는 신학교를 나와서라도 목회만 한다면 문제가 적다. 교회가 커지고 목회자가 사회적인 위치를 얻으려 하면서 외국의 비인가 신학교에서 석·박사학위를 받고 이를 통해 최종학력을 세탁하는 행위, 그리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문제”라고 말했다. 한국교회언론회 관계자는 “자료를 낸 것은 자정(自淨)을 위한 일종의 경고 메시지”라며 “필요할 경우, 사례 신고를 받는 것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중견 목회자는 “교회와 사회의 기준을 똑같이 적용하기는 어렵다”면서도 “그렇지만 언젠가는 교육과정에 대해 사회와 교회의 접점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2009-05-08 14:00:52 | 관리자
바른 목사/설교자들의 필요성 다음은 김남준 목사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다음 세기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다음 세기의 사람들은 더더욱 기독교신앙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신앙을 일고자하는 자들일수록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을 필요성을 점점 덜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회복함으로써 예배 속에서 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의 예배가 “영과 진리”안에서 드리는 예배로 회복되어야 한다. 필자는 조국교회가 이러한 예배를 회복하기를 갈망하며 죤 길리즈(John Gillies)와 함께 다음과 같은 회고에 그리움을 담아 이 글을 맺는다.   그들의 설교에는 장엄함과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과 생각에는 타오르는 불과 힘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우리는 그 설교자들이 힘의 사람들이었음을 느낍니다. 그들의 증언은 나팔이 되었고 그 나팔은 성자에게나 죄인에게나 교회에 대해서나 세상에 대해서나 결코 희미하거나 애매한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말씀을 증언함에 있어 주춤거림이나 입 발린 소리를 하는 것이나 겉치레의 말로 대언을 대신하는 것 같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죄를 멸하신 십자가 위에서 죄의 종지부를 찍으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역사하게 된 큰 기쁨의 소식을 선언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율법과 형벌들은 선포하는 데 더욱더 탁월하였습니다. 그들은 구도자들을 십자가에서 완성된 바로 그 구속의 성취로 곧장 이끌어 내어 복음을 즐거워하도록 만들어 주는 일보다 먼저 그들에게 자신들의 행위가 무엇이고 무엇을 느껴야 하고 믿어야 하는지를 심어 주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시간에는 또한 구주가 누구신지를 완전히 드러내 주었으며 주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에 대해 자유롭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의 설교는 엄청난 능력으로 청중들에게 던져진 가장 용맹스럽고 담대한 종류의 선포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격렬하지도 않았고 사납지도 않았으며 시끄럽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경건하여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것은 경박하지도 아니하였으며 무게도 있었고 날카로웠으며 사람의 심령을 깨뜨리는 힘이 있었으며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였습니다. 그들이 휘둘렀던 말씀의 무기들은 잘 담금질되어 있었고, 반짝반짝하게 닦여 있었으며, 예리하고 날카로웠습니다. 그들은 결코 빈약하거나 훈련되지 않은 무기를 휘두르는 법이 없었습니다.
2009-05-08 14:00:04 | 관리자
바른 목사(성도)의 자세 조지 위필드 목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지키기로 주님과 약속하고 매일 이것을 점검하며 일생을 살았습니다. 이 글은 특히 목사들에게 꼭 필요한 글입니다. 내 자신을 쳐서 낮추는 작업이 매일 이루어져야 합니다. 끝없이 성화의 노력을 기울여 봅시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한 번 이런 약속들을 지켜봅시다. 책상에 붙여 놓고 매일 보기 바랍니다. 첫째, 개인 기도에 열렬하였는가? 둘째, 작정해 놓은 기도시간에 기도하였는가? 셋째, 매시간 부르짖었는가? 넷째, 대화하거나 행동하기 전이나 후에 나 자신이 행하려는 것이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 돌릴 수 있을지에 심사숙고하였는가? 다섯째, 기쁜 일이 있을 때 즉시 하나님께 감사하였는가? 여섯째, 하루의 일과를 미리 계획하는 일을 잊지 않고 했는가? 일곱째, 모든 일에서 순수했는가, 또한 반성해 보았는가? 여덟째, 내가 행할 수 있는 선한 일을 감당하거나 행할 때 뜨거운 열심히 있었는가? 아홉째, 말하거나 행할 때 온유하고 명랑하고 붙임성 있는 태도를 견지하였는가? 열 번째, 다른 이들에 대하여 교만하거나 허탄하게 굴거나 참지 못하거나 투기하지는 않았는가? 열한 번째, 먹고 마실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며 감사한 마음을 가졌는가? 또 잠자는 일에서 절제가 있었는가? 열두 번째, 윌리엄 로(William Law)의 규칙을 따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에 시간을 드렸는가? 열세 번째, 연구하는 일에 부지런하였는가? 열네 번째,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불친절하게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았는가? 열다섯 번째, 나의 모든 죄를 고백하였는가?
2009-05-08 13:59:24 | 관리자
목사는 무엇하는 사람인가? 교회는 목사만 문제가 없으면 문제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는 교회의 리더입니다. 리더가 제대로 이끌지 못하면 어떤 단체든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주에는 평촌에 있는 어느 유명한 교회를 가서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담임 목사님은 아프셔서 못 나오시고 부목사가 대신 설교를 했습니다. 부목사는 마치 TV에 나오는 젊은 코미디언처럼 설교를 했습니다. 적어도 500명은 거기 앉아 있었는데 1시간 설교를 했으니 500시간을 빼앗은 것입니다. 목사의 수준이 저 정도니 성도들은 어떨까, 담임 목사가 그렇게 유명한데 그 밑의 부목사 수준이 어째 저 정도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왔습니다. 목사가 잘 해야 교회가 부흥합니다. 다른 이론이 필요없습니다. 청중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허공 대고 이야기하는 목사나 아무 열정이 없이 설교하는 목사를 보면 우리의 현실이 암담합니다. 목사가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만 하면서 안타까운 마음만 듭니다. 요즘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해야 하는지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김남준 목사님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 취한 글입니다. 이 글을 통해 설교자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 목사들이 조금이라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성도들이 고통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좋은 목사들을 한국 교회에게 주실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설교자의 소명 설교자는 성도들에게 매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매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에게 매였기 때문에 교회에 매인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부르심 때문에 성도들과 만난 사람입니다. 예배 중에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과 사랑을 알고 그 부르심에 붙잡힌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배가 예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전하도록 거역할 수 없는 소명에 붙잡힌 사람, 의와 공평을 따라 살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받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설교자입니다. 이러한 소명 때문에 설교하는 사람, 그가 바로 설교자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요구를 전하기 위하여 사람들과의 관계를 등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고난은 바로 이러한 호명에 충실한 생애를 살다가 겪은 고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의와 공평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삶을 살지 않을 때 임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러한 뜻을 전하였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당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 때문에 그들은 자기 백성들에게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설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신령한 예배에 관한 다른 모든 논의는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설교자는 자신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에 보람을 느낄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양떼들이 그렇게 살아서 주님께 영광 돌릴 날들을 꿈꾸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러한 직무를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사도들을 통해서 이루시고 오늘날에는 설교자들을 통해서 이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목사의 가장 중요한 직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실로 엄청나게 많은 직무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기도, 상담, 심방, 교육, 구제, 선교, 행정, 교회정치, 사회봉사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일들에 종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우선적인 사명은 설교와 기도입니다. 기도는 개인적인 사역이고 설교는 공적인 사역입니다. 목사,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보이고 기도를 통해서 성도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고하는 일이야 말로 목사의 우선적인 직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을 잘하면 그는 거의 모든 것을 잘하는 것이고 이것으로 섬기는 일이 만족스럽지 아니하면 그는 모든 것을 행해도 거의 소명대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가장 우선적인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예배 가운데서 자신이 선포하는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일입니다. 따라서 강력한 말씀에 사로잡힌 설교자가 없는 교회가 다른 요인들로써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게 된다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실제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배다운 예배를 위하여 아름다운 예배당보다 신령한 설교자가 더욱 필요합니다.  
2009-05-08 13:58:13 | 관리자
가정 같은 교회? 예배에서 내가 감격하면 좋은 예배를 드린 것일까요? 요즘 교제 중심의 예배를 드린다는 말을 듣고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감격하고 모인 사람들이 교제를 통해 은혜를 받으면 그 예배가 바른 예배일까요? 예배는 worship이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이것은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내 자신을 낮추어 그분의 뜻대로 따른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요즘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해야 하는지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김남준 목사님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 취한 글입니다. 예배에서 죄에 대한 자각과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람의 무능함,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통한 회복이 없으면 그 예배는 죽은 예배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제 중심의 예배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마음이 무겁습니다. 헛다리를 집고 있는 이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예배에 대한 세미나를 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성도들이 알아야 이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회개합시다. 가정 같은 교회? 제가 아는 어느 목회자가 마음이 맞는 교우들과 힘을 합쳐서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보기로 하고 열심히 목회하였습니다. 비록 수는 적지만 전 교우들이 헌신적으로 힘을 합쳐서 예배 처소까지 분양을 받았습니다. 그는 제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개척해서 6년간 목회하는 동안 날마다 교회 오는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개척교회를 세울 뜻이 없는 제 친구들이 저를 보고 개척을 시작할 정도였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교인들과 별 갈등 없이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교회를 돌보며 지냈습니다. 주일이면 온 교인이 교회당에서 보냈습니다. 오전에는 열심히 예배드리고 오후에는 다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테니스를 치고 볼링도 하고 배드민턴 치고 배구도 하다가 저녁때는 씻고 같이 모여서 저녁 먹고 예배도 드리는, 가정 같은(?) 교회를 꾸려가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꿈꾸시는 교회라고 자부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련을 ‘불꽃시리즈’를 읽으면서 이 목회자의 심령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깊이 각성하게 되면서 상상할 수도 없는 확신이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불행히도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가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목회자가 변화를 받으면서 설교다운 설교를 하기 시작하자 그 돈독했던 교우들과의 인간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변화된 모습으로 기도하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는 제가 이렇게 술회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있지만, 알고 보니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교회생활, 재미있는 교회프로그램, 심지어는 친구, 친척, 동기생들과의 인간관계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모이고 있었지만 예배 중심에 회심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목회현장이나 예배 속에서 느끼는 만족이라는 것이 반드시 옳다는 보증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만족을 위하여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드리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이상적인 교회는 가정 같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나라 같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설교자들은 이 일을 위하여 설교해야 합니다.
2009-05-08 13:57:36 | 관리자
어떤 자세로 예배를 드립니까? ● 정동수 요즘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해야 하는지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기대를 갖고 교회의 공적 예배에 갑니까? 예배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습니까? 예배를 통해 무슨 유익을 얻습니까? 예배가 무엇인지 교회가 보여 주지 못하고 가르치지 아니하므로 공적 예배가 무너지고 있으며 다음 세대에까지 교회가 제대로 존속될지 의문이 듭니다. 성도와 목사의 수준 이상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두 주님께 바르게 예배드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다음은 김남준 목사님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에서 취한 글입니다. 지금의 세태를 잘 반영한 글입니다. 회개합시다. 저는 김목사님을 뵌 적이 없으나 그분의 글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청교도 신앙에 대해 눈을 열어 준 분입니다. 읽어 보기 바랍니다. "장로교 목사의 글을 왜 읽어?"라고 반문하는 고고한 분들도 있습니다. 장로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으로 인해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장로교 안에도 구원받아 예수님의 교회의 지체가 된 분들이 매우 많습니다. 교회는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교회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청교도들의 신앙에서 배울 것은 많이 배워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 그분의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합니다. 김 목사님의 책들을 많이 읽어 보기 바랍니다. 요금 내고 집에 가 주일날 아침 어느 한 가족이 바쁜 걸음으로 교회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가까이 다가왔을 때 양쪽에 엄마 아빠 손을 잡은 어린아이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 오늘은 예배시간에 졸지 마. 나 창피하단 말이야. 알았지?” 또렷한 목소리로 호소하듯이 말하는 어린아이에게 깜짝 놀란 듯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엄마는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윽박지르듯 아이에게 눈짓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의 간절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두 부부에게는 그날도 지난 주일과 다름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잰 걸음으로 교회에 도착한 것은 이미 성가대의 송영이 끝나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윗몸을 숙이고 빈자리를 찾아 간신히 자리를 잡았을 때에는 벌써 예배가 시작된 지 오분 이상 지난 후였습니다. 그날도 주일예배는 지난주와 다름없이 저해진 순서를 따라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주보에 적힌 별 모양의 표시를 따라 일어났다 앉았다 하면서 예배순서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교독문을 따라 읽고 오늘따라 길게만 느껴지는 장로님의 대표기도에 이어 성경봉독과 성가대의 찬양도 경청했습니다. 이윽고 설교시간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강단에 올라 설교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날따라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설교를 한쪽 귀로 들으며 눈으로는 주보를 군데 군데 훑어보았습니다. 교회소식을 낱낱이 읽고 주보의 오자를 잡아내며 교정까지 끝냈지만, 설교는 그때까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설교가 시작된 지 십오 분쯤 지났을 때 두 부부의 몸이 좌우로 약간씩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주간의 피로가 엄습하는 것을 느끼며 무거운 몸으로 간간이 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설교자의 어조가 상승할 때에는 졸음에 겨운 눈을 치켜뜨기 위해 애를 써보지만 눈꺼풀에 무거운 추가 달린 것처럼 잠시 눈을 떴다가는 다시 이전보다 더 큰 무게를 느끼며 눈을 감았습니다. 졸음을 쫓기 위해 가끔 고개를 흔들어보고 졸다가 떨어뜨린 성경책이나 주보를 다시 주워보기도 하지만 설교를 듣는다기보다는 졸음과의 싸움이 힘겹게만 느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어린아이는 지루한지 이따금 몸을 좌우로 흔들며 심하게 조는 엄마의 옆구리를 고사리 같은 손으로 툭 쳐보기도 하고 주보로 비행기를 접어보기도 하지만, 두 부부는 지긋이 고개를 숙인 채 묵상에 잠긴 듯 졸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에 이 어린아이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칭얼대며 부모에게 졸랐습니다. “엄마, 아빠. 졸지 말고 빨리 요금 내고 집에 가자.”  아마 이 아이는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을 요금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2009-05-08 13:57:00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