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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의 목적을 점검한다 교회에 다니며 목사들로 인해 고통받는 성도들이 너무 많아 안타깝다. 곳곳에서 목사로 인한 불평이 터져 나온다. 물론 거기에 100%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그런 불만의 대부분이 목사의 자질과 인격 때문에 발생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나도 개인적으로 목사 안수를 받아 한때 목사 직을 수행했지만 과거를 돌이켜보면 부끄럽기 한량 없다. 목사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열정 때문에, 교리 때문에, 필요 때문에 그 직분을 수행하다가 스스로 좌절을 겪고 성도들을 낙심시킨 것을 볼 때 주님 앞에서 또 사람들 앞에서 송구스럽기 한량이 없다. 왜 목회를 하는가? 성도들에게 무엇을 주려고 목회를 하는가? 정말로 성도들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은혜를 받는지 그렇지 않은지 파악하고 있는가?   교리로 교회를 세울 수 없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세울 수 없다. 목사가 먼저 자기 자신과 가족을 제대로 목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목양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주님의 은혜를 받아 성도들에게 그 은혜를 진솔하게 나누어야 한다. 교회는 목사만 문제가 없으면 문제가 없다는 말에 100% 동의한다.   최근에 옆에 있는 크리스천 동료 교수가 자기 교회 목사로 인해 고통을 받으면서 천안대학교 교회사 교수인 장동민 박사의 "목회의 목적을 점검한다"라는 제목의 글을 소개해 주었다. 이것은 2006년 11월 "목회와 신학"에 실린 기사이다. 목사든 성도든 누구나 곁에 두고 자주 읽어야 할 글이라 생각되어 여기에 올린다. 답답함을 느낄 때 방향 설정이 바르게 되었는지 점검하고 싶을 때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주님께서 좋은 목사들을 한국 교회에 주실 것을 기도한다.
2009-05-08 13:56:21 | 관리자
목회의 목적을 점검한다 교회에 다니며 목사들로 인해 고통받는 성도들이 너무 많아 안타깝다. 곳곳에서 목사로 인한 불평이 터져 나온다. 물론 거기에 100%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그런 불만의 대부분이 목사의 자질과 인격 때문에 발생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나도 개인적으로 목사 안수를 받아 한때 목사 직을 수행했지만 과거를 돌이켜보면 부끄럽기 한량 없다. 목사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열정 때문에, 교리 때문에, 필요 때문에 그 직분을 수행하다가 스스로 좌절을 겪고 성도들을 낙심시킨 것을 볼 때 주님 앞에서 또 사람들 앞에서 송구스럽기 한량이 없다. 왜 목회를 하는가? 성도들에게 무엇을 주려고 목회를 하는가? 정말로 성도들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은혜를 받는지 그렇지 않은지 파악하고 있는가?   교리로 교회를 세울 수 없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세울 수 없다. 목사가 먼저 자기 자신과 가족을 제대로 목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목양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주님의 은혜를 받아 성도들에게 그 은혜를 진솔하게 나누어야 한다. 교회는 목사만 문제가 없으면 문제가 없다는 말에 100% 동의한다.   최근에 옆에 있는 크리스천 동료 교수가 자기 교회 목사로 인해 고통을 받으면서 천안대학교 교회사 교수인 장동민 박사의 "목회의 목적을 점검한다"라는 제목의 글을 소개해 주었다. 이것은 2006년 11월 "목회와 신학"에 실린 기사이다. 목사든 성도든 누구나 곁에 두고 자주 읽어야 할 글이라 생각되어 여기에 올린다. 답답함을 느낄 때 방향 설정이 바르게 되었는지 점검하고 싶을 때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주님께서 좋은 목사들을 한국 교회에 주실 것을 기도한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3-04-03 11:56:19 성경교리에서 복사 됨]
2009-05-08 13:56:21 | 관리자
주기도문 ● 정동수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주일마다 예배 때에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또 소그룹 모임 등에서도 모임을 끝맺을 때에 거의 대부분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그런데 침례교회가 주류인 미국에서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절대로 외우지 않습니다. 한국의 경우 이단을 감별(?)해 주는 연구소들이 몇 있는데 어떤 단체가 이단인가 아닌가를 감별하기 위해 이들이 내세우는 몇 가지 감별 방법 중의 하나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외우는가, 외우지 않는가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지몽매한 일로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하늘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한국의 전통이 이단 판별의 기준이 된다면 주님의 말씀은 어디로 갔을까요? 한 번은 이런 단체의 소장이 미국에(호주에) 가서 이것을 주장하다가 그곳의 교민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고 잘못을 시인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민자들 가운데는 미국 사회의 영향으로 침례교회를 다니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국내에서도 최근에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하지 않는 교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기들만이 진리를 알므로 그것을 외우는 형제자매들을 불쌍한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외우고 안 외우고가 교만의 문제로 비쳐지고 안 외우는 교회만이 참 교회라고 주장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주기도문의 유래와 특징 등을 살펴봅시다. <개역성경의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흠정역 성경의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날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빵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우리를 건지시옵소서.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흠정역). 1. 주기도문의 이름과 유래 주기도문은 실제로 주님이 기도하신 기도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기도에 대해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5 또 너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보상을 받았느니라. 6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7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너희는 이교도들과 같이 되지 말라. 너희가 너희 아버지께 구하기 전에 그분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시느니라. 이 부분이 끝난 뒤에 너희는 이처럼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기도해야 할 샘플 기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의 제목은 ‘제자들의 기도’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 주님은 결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항상 ‘하늘에 게신 내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2. 주기도문의 오용 근본적으로 이교도들은 8절 말씀에 있듯이 말을 많이 하면 신이 기도를 듣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중, 신부, 수녀 등이 묵주를 들고 똑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교도들의 특징이며 그 당시 유대인들도 이런 관행에 빠져 있었으므로 주님은 이렇게 하지 말라고 이 기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모임에서든지 끝날 때에 반복적으로 이 기도를 외우는 것은 주님의 의도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또 어려움을 겪을 때 주기도문을 많이 외우면 문제가 풀린다는 주장도 이교도들의 생각과 같습니다. 즉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목석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런 쓸데없는 반복 기도를 지겨워하십니다. 3. 미국의 침례교인들은 왜 주기도문을 하지 않는가? 이 기도에는 신약 시대 구원의 교리와 상반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엄밀한 의미에서 이 구절은 율법의 요약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면 그 대가로 주님이 무엇을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1차적으로 율법 하에서 율법의 의무를 지닌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의미 없이 외우다가는 연약한 지체들이 구원의 은혜를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부분이 더러 나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시편 51편을 사랑하여 외운다고 합시다. 밧세바와 간음한 이후에 책망을 받은 다윗이 자신의 참회의 심경을 여기에 적었습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내용이지만 다음 부분은 우리가 따를 수 없습니다. 11절에는 “나를 주의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거룩한 영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개역성경은 이것을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말라고 기록합니다. 국내에는 이런 부분을 그대로 담은 복음성가가 유행하므로 사람들이 이런 노래를 통해 주님께서 성령을 거두어가는 일이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구약시대에나 가능하지 신약시대에서는 불가능합니다. 한 번 구원 받으면 신자 내에 성령님이 영원히 내주합니다. 이것은 마치 “한 번 해병대면 영원히 해병대다”라는 구호와 비슷합니다, 아마도 해병대가 성경에서 이런 구호를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 ‘한 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습니다!’ 절대로 성령님이 신자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여전히 구약 시대에 사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도 이 경우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 이후에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주님의 은혜로 값없이 용서를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대로 믿고자 하는 미국 침례성도들은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습니다. 4. 천주교 주기도문과 개신교 주기도문의 차이 천주교인들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구절이 없는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그 이유는 카톨릭 성경 번역의 본문인 바티칸 사본이 신약시대 다수 성도들이 사용한 본문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개역성경의 마태복음 6장 13절에 보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은 고대 사본에 없는 구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각주 참조). 그 고대 사본이 바로 바티칸 사본입니다. 그러므로 카톨릭 신자들은 이 부분을 외우지 않습니다. 그들의 원본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이럴 수 도 없고 저럴 수도 없으므로 그냥 괄호를 쳐서 중간 지점에 머물고 있습니다. 5. 주기도문에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에서 <대개>는 무엇을 뜻합니까? 한국 기독교(개혁신교)에서는 과거에 <대개>를 넣기도 하고 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이 부분에서 어떤 사람은 <대개>를 붙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빼기도 합니다. 그럼 넣어야 맞을까요, 아니면 빼야 맞을까요? 이에 앞서서 더 큰 문제는 그 뜻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호티'라는 헬라어 접속사(영어로는 for)가 사용되었는데 그 의미는 '왜냐하면'입니다. 즉, 우리가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은 “그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대개>로 번역을 했을까요? 그것은 우리말로 번역을 할 때(1930년대) '중국어 성경'을 참조했기 때문입니다. 초기 중국어 성서에서 <大槪, 大蓋>로 번역한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대개는 "대체적으로" "대략적으로" 그런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중국의 성경도 <以, 또는 因爲>로 번역하여 바로 잡았습니다. 우리 한글 번역본에서 1936, 1933년 신약성경 번역본에 <대개>로 썼다가 그 뒤, 그 번역이 원문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대체로"라는 뜻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아예 생략하여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사용하고 있는 주기도문에는 아직도 "대개"가 들어가 있습니다. 6. 그냥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의 왕국이 임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일러 준 기도의 핵심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땅에 임하는 ‘하늘의 왕국’이 이 기도의 핵심 주제입니다. 이 하늘의 왕국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닙니다. 추후에 왕국이나 천년왕국 부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주기도문을 외우시는 분들이 이런 내용을 이해하고 바르게 행하면 좋겠습니다. 즉 의미 없이 예배나 모임의 끝에 붙이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외우지 않는 분들도 외우지 않기 때문에 극도의 자만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라는 구절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들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또 마땅히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또 구원받은 성도로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라는 구절의 의미를 잘 이해하면 남을 배려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 자체를 천년왕국의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주장하며 용서와 긍휼을 베풀라는 주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오히려 알기 때문에 더 큰 정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알면 아는 것 이상의 것을 행해야 합니다. 낮은 처지의 형제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2009-05-08 13:53:45 | 관리자
    사도신경   사도신경(Apostles creed)   I Believe in God, the Father almighty, Creator of heaven and earth.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Ghos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ied and was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the third day He a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sitteth at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I believe in the Holy Ghost, the holy Catholic Church, the communion of Saints, the forgiveness of sin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and life everlasting. Amen.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시며,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사도신경은 대부분의 개신교회에서 주일마다 암송하는 신앙고백문입니다. 현재 국내에서도 사도신경은 개혁 교회와 근본주의 침례교회 등에서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혹은 천주교 산물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의 주류 교회인 침례교회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전혀 암송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런 것들을 예배 시에 암송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이단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시각이 있으므로 이 문제는 조금 신중히 다루어야 할 문제입니다.   사도신경은 주 예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시고 처녀 마리아에게서 성령님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심과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수난, 부활, 심판을 고백하는 것이므로 이것 자체가 무슨 문제가 된디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암송하는 사람도 주를 위해서 하고 암송하지 않는 사람도 중언부언으로 생각하여 하지 않음으로 역시 주를 위해서 안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가지고 이단이냐 아니냐를 나누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사도신경의 몇몇 문제와 용어을 설명하려 합니다. 다음은 영어 사도신경과 카톨릭 사도신경, 개긴교회의 사도신경을 비교해서 보여 줍니다.       (1) 동정녀에 대하여    영어 원문에 보면 동정여가 'Virgin'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시면 알지만 신성을 나타내는 하나님(God), 그리스도(Christ), 성령님(Holy Ghost) 등만 해당 단어의 첫 글자가 대문자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마리아는 한 처녀(a virgin)이지 결코 하나님의 어머니인 평생 동정녀(the Virgin)이 아닙니다. 이 부분은 천주교회의 잘못된 믿음에서 나왔으므로 암송하더라도 뜻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2) 그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삭제됨   영어와 원어에는 `He descended into hell`이 있지만 개신교 사도신경에는 이 부분을 삭제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그분이 저승에 갔다고 버젓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원래 표현대로라면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된 사흘 동안 지옥에 다녀오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말로 그대로 번역하면 소위 카톨릭주의에서 말하는 연옥설과 림보설 등과 연관되기 때문에 아마도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고 교회의 교리에 따라 해석하려고 해서 생긴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12장 40절에 보면 주님은 요나와 같이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고 이에 대해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 27절에서 시편 16편 8-11절을 인용하며 "주께서 내 혼을(예수님의 혼) 지옥에 남겨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하시리라"고 말하면서 우리 주님(엄밀하게는 그분의 혼)이 지옥에 갔다가 부활했음을 보여 줍니다. 물론 우리말 성경은 이런 부분의 지옥을 모두 '음부'라고 번역해서 바른 뜻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의 강도에게 약속하신 대로 낙원에 즉 지하세계의 지옥 부분에 내려갔다가 올라오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에베소서 4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8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k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아 이끄시고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주셨도다, 하시느니라.9 (이제 그분께서 올라가셨은즉 그것은 곧 그분께서 또한 먼저 땅의 더 낮은 부분으로 내려가신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10  내려가신 그분께서 또한 모든 하늘들보다 훨씬 위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시니 이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3) Holy catholic church    영문에는"거룩한 카톨릭 교회" 혹은 "거룩한 우주적/보편적 교회"로 되어 있으나 한글번역에는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나 "거룩한 공회"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공회는 "공적인 일을 위한 모임"(assembly)이나 종교 회의의 의미이지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church" 의 의미는 아니기 때문에 이런 해석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에 사는 2세 교포 아이들(영어만 할 줄 아는 아이들)에게는 이것이 더 치명적입니다. 부모를 따라 장로교회에 가는데 주일마다 예배 때에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해야 하니 이 아이들의 영적 고통이 심각하지요. 그래서 똑똑한 아이들은 부모나 교회에게 묻습니다.     5세기의 [로마 교회 구 신조]에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거룩한 교회(the Holy Church)를 믿사오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8세기 개정 신조에는 거기에 "카톨릭을 첨가하여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믿사오며"로 표현했습니다. "카톨릭"(catholic) 의 뜻은 본래 "보편적" 혹은 "세계적"(universal) 이란 뜻이어서 일반적으로 쓸 경우에는 반드시 로마 카톨릭(Catholic) 교회를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중세 카톨릭 교회의 권위를 높히기 위해 인위적으로 삽입한 흔적이 보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공회"를 예수님의 지체되는 "거룩한 교회"로 고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교회가 거룩할까요?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고 말 그대로 죄 가운데 있는 인생들의 모임입니다. 이것이 과연 거룩할까요? 물론 재림 이후에 주님 앞에 설 때에는 거룩하겠지요.   (4)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성인의 통공)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성도들이 서로 영적으로 함께 교제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받아들인 모든 사람을 성도(聖徒.saints)라고 합니다(고전1:2).그러나 카톨릭교회에서는 죽은 카톨릭의 신앙적 영웅을 성인(saint)으로 만들어서 일반적인 의미의 성도(saint)를 신성시 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도들의 "교제"를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죽은 성도들에게까지 확대하여 성인숭배와 죽은 사람에게 기도하는 교리적 근거로 오용하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성인은 죽은 지 오랜 세월이 경과한 후에야 특별 심의를 거쳐서 서품(敍品)되는 비성경적인 개념이고 죽은 자와 교통하는 일은 사탄의 속임수로서 성경은 이것을 엄격히 금합니다. 천주교회에서는 이런 성인들이 공덕을 넘치도록 쌓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인들의 통공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절과 위의 Holy catholic church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 진영이 동상이몽으로 해각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5) 저리로서   참고로 저는 중학교 때에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에서 `저리로서`가 무엇인지 몰라 선생님에게 질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지금도 사도신경을 매주 외우연서도 이 표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저리로서`라는 말은 "그곳"이라는 옛 말에다가 조사 "-으로부터"에 해당되는 옛 표현입니다. 이 말은 바로 그 위의 구절 즉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 것을 가리키며 바로 거기로부터 다시 땅에 재림하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저리로서"를 "하늘로부터"로 바꾸어 이해하면 됩니다. 결론적으로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잘 표현한 훌륭한 신앙고백서지만 몇몇 부분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 고특히 카톨릭주의가 많이 가미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도신경을 외우는 사람들을 무조건 수준 낮은 사람으로 평가절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모르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뜻을 바로 알려주고 각자가 주님 앞에서 판단할 수 있도록 권면해야 할 것입니다.
2009-05-08 13:53:08 | 관리자
교회   교회(Church): 교회로 번역된 그리스말 에클레시아는 신약성경에서 모두 117회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종교적 모임 혹은 일반 모임을 뜻하였고 그래서 행19:32, 39 등에서는 그렇게 번역되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교회는 대개 종교적 예배자들의 모임을 뜻하였고 그래서 심지어 구약시대 유대인들의 모임도 광야의 교회라 불렸지만(행7:38) 물론 이것은 우리 주 예수님이 세우신 신약 교회가 아니다(마16:18; 고전6:4). 교회와 왕국 선도 참조(85).대부분의 신약성경 용례에서 교회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세워진 신약 교회를 뜻한다. 또 신약 교회의 의미로 쓰인 교회의 경우 대부분 한 지역에서 믿음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인 ‘눈에 보이는 지역 교회’를 뜻하였고 로마, 고린도, 에베소, 빌립보 교회 등 사도 바울이 서신을 보낸 교회가 다 지역 교회였다. 한편 ‘눈에 보이지 않는 전 우주적인 교회’ 즉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을 뜻하는 교회도 몇 군데 발견된다(히12:23). “또 모든 것을 그분의 발아래 두시며 그분을 모든 것 위에 머리가 되게 하사 교회를 위해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분의 몸이니 곧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이니라.”(엡1:22-23)는 말씀에서 드러난 교회 역시 후자의 교회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전 우주적인 교회를 강조하다 보면 지역 교회의 모임과 제도를 모두 무시하는 폐단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우리 주님께서 분명히 “이 반석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으므로 교회가 마태복음 16장 이후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교회가 선택 받은 자들의 모임이므로 아담 때부터 존재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여러 구약 주석들도 이스라엘을 모두 교회로 해석하곤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침례자 요한 때부터 교회라고 주장하고 사도행전 13장 혹은 사도행전 28장 이후부터 교회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약 교회는 유기체로서 예수님 당시에 수태되어 오순절 날 성령님의 침례 사역과 더불어 권능 있게 밖으로 드러났으며 휴거 때까지 이 땅에 존재한다.어떤 이들은 마태복음 16장 이후에 신약 교회가 세워졌으므로 오순절 전에 다락방에 머물며 아버지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던 120명의 성도들이 최초의 신약 교회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사도행전의 기록자 누가는 먼저 오순절 날 베드로의 말을 들은 3,000명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더해졌다고 기록하고(행2:41)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백성들에게 호감을 얻으니 주님께서 구원받을 자들을 날마다 교회에게 더하셨다고 기록한다(행2:47). 따라서 누가의 기록으로는 120명의 성도들이 이미 신약 교회였는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그들이 신약 교회의 핵이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또한 그들이 변천기에 산 사람들임을 감안하고 또 마18:17의 교회 치리를 고려하면 비록 그들이 아직 모든 것이 갖추어지지는 않았으나 목자장이신 예수님에게 직접 배운 최초의 원시 신약 교회라고 하는 데에 큰 문제가 없다. 오순절 이후의 교회 시대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나 모두 한 성령에 의하여 침례를 받아 한 몸 즉 교회 안으로 들어온다(고전12:13, 27-28; 참조 엡1:22-23; 5:30-32; 골1:18). 그러므로 교회의 출생에는 반드시 성령 침례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침례자 요한에 의해 처음 예언되었다(마3:11; 막1:8; 눅3:16; 요1:33). 그는 자신은 물 침례를 주지만 주님은 성령 침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하며 성령 침례가 미래에 있을 것을 말하였다. 그 뒤 주님은 마16:18에서 ‘내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미래의 일을 말씀하셨고 부활한 뒤 승천하기 바로 전인 행1:5에서도 여전히 성령 침례가 미래의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이때까지는 변천기에 있던 120명을 제외하고 아무도 그분의 몸에 들어가지 않았다(고전12:13). 이때에 주님은 며칠 지나면 그 일이 이루어진다고 했고 실제로 10일 후 오순절에 그 일이 발생하였지만 사도행전 2장은 성령 침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후에 베드로는 사도행전 11장에서 고넬료가 성령 침례를 받았으며 그와 동일한 일이 오순절에 발생했음을 보여 준다(행11:15-16).한편 엡1:19-23은 교회의 출생이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만 가능함을 보여 준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주셨는데 이것은 그분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분의 몸인 교회가 머리가 있기 전에 생길 수는 없다(요7:39). 지역 교회는 침례를 받은 신자들로 구성되며 믿음의 약속과 복음의 교제로 이루어진 조직으로서 그리스도의 규례를 준수하고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하며 말씀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영적 선물(은사)이나 특권을 발휘한다(고전11:2; 행2:41-42; 20:17-28). 교회의 참된 사명은 단체 사회 활동이 아니라 기회가 닿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다(롬15:26). 지역 교회는 어떤 개인이나 단체의 계급 체계를 거부하며 완전히 독립된 자치권을 갖는다. 교회의 유일무이한 감독자는 성령님을 통해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인은 세속 법정에서 서로를 소송해서는 안 된다(고전6:1). 성경이 말하는 참 교회는 믿음의 수호와 복음의 진보를 위해 서로 돕고 협력하며 이런 협력의 분량이나 방법은 각 지역 교회의 권한에 맡겨진다. 그리고 회원문제, 정책문제, 행정, 양육, 자선 등도 각 지역 교회가 사정에 맞게 결정할 수 있다.구원받아 지역 교회의 회원이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정하심을 따라 이 세상에 대해 나그네요 순례자요 대사요 증인이 된다(고후5:18-20; 벧전1:17). 그리고 그들의 삶의 첫 번째 목적은 선교를 통해 세상에 그리스도를 알리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마28:18-19; 막16:15; 요17:18; 행1:8).지역 교회의 직분에는 목사와 집사가 있으며 그들의 자격이나 요건 그리고 의무는 성경에 명확히 명시되어 있다(딤전3:1-13; 딛1:5-11). 목사, 집사 참조. 또한 교회에는 침례와 주의 만찬이라는 두 가지 규례만 있을 뿐이다. 침례, 주의 만찬 참조.
2009-05-08 13:52:12 | 관리자
주의 만찬에 대하여 주의 만찬은 침례와 더불어 우리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규례(ordinance)입니다. 규례란 쉽게 이야기해서 법규입니다. 보통 소방 법규, 공공기관의 조례 등을 나타낼 때 'ordinance'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그분의 재림 때까지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주의 만찬을 명령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의 만찬에 대해 오해가 있으므로 이것을 성경적으로 밝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간단히 글을 적습니다. ● 주의 만찬의 제정 시기 주의 만찬은 신약 성경의 첫 세 복음서 - 공관 복음서 - 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마26:26-30; 막14:22-26; 눅22:17-20). 이 규례는 우리 주님께서 배반당하시던 저녁에 친히 제정하신 것입니다. 고전11 장에서 사도 바울은 주의 만찬의 의미를 잘 설명해 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해 준 것은 또한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시던 바로 그 밤에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신 뒤에 그것을 나누시고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부서진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하시고 저녁 식사 뒤에 또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잔을 집으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니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하셨느니라. 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라(고전11:23-26). 천주교나 개신 교회에서는 주의 만찬을 행하면서 요한복음 6장의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을 읽고 그것을 주의 만찬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하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은 주님께서 배반당하던 날 밤에 정하신 것이므로 그보다 훨씬 이전에 있던 사건을 기록한 요한복음 6장은 주의 만찬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천주교회에서는 요한복음 6장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화체설 교리 즉 빵과 포도즙이 사제의 축도로 예수님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한다는 거짓 교리를 주장하지만 이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성경대로 믿는 신자들은 단 한번도 요한복음 6장을 사용해서 주의 만찬을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조만간 출간될 「마틴 로이드 존스의 천주교 사상 평가」에서 아이언사이드는 "천주교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에서 이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므로 관심 있는 독자들은 2003년 1월에 출간되는 그 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주의 만찬의 배경 주의 만찬은 구약 시대의 유월절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드신 음식은 다름 아닌 유월절 음식이었습니다. 유월절은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을 미리 보여 주었고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행하신 일을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5장에서 이 점을 요약해서 잘 보여 줍니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를 뜨게 함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逾越節)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의와 악독의 누룩으로도 말며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빵으로 하자(고전5:6-8).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만찬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을 크리스천들이 지켜야 할 규례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그것을 행하라고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들이 그것을 실행했기 때문입니다. 주(週)의 첫날에 제자들이 빵을 나누려고 함께 나오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며 계속해서 한밤중까지 말을 하니라(행20:7). 형제들아, 너희가 모든 일에서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규례(規例)들을 전해 준 대로 그것들을 지키므로 이제 내가 너희를 칭찬하노라......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라(고전11:2, 26). ● 주의 만찬이라는 용어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주의 만찬이라는 성경 용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성만찬'이라는 천주교 용어를 사용합니다.  천주교에는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 행해야 하는 일곱 가지 성례 혹은 성사(sacraments)가 있으며 그 중 하나가 바로 성체 성사 즉 '성만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그 기원이 천주교의 성체 성사 제사인 미사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믿는 신자들은 이런 천주교 용어를 버리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의 만찬(Lord's supper)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 주의 만찬의 의미 주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이 많은 것을 곧 잊어버리므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뜻으로 주의 만찬이라는 시청각 교육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화체설이라는 마귀의 교리를 가지고 예수님의 단순한 복음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미사가 '피 없이 반복해서 드리는 제사'라고 분명히 말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단 한 번 영원한 속죄를 이루셔서 더 이상 죄로 인해 우리가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의 성직자들은 제사장(priest) 혹은 사제라 불리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아직도 구약의 제사장 체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제가 미사를 드릴 때 빵 조각(host)을 진짜 예수님의 몸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 빵 조각(성체)을 먹는 자는 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것이라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또한 그 빵 조각 안에 무슨 신비한 요소가 있으므로 그것을 먹지 않는 사람은 은혜에서 떨어져나간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개신교회 안에서도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그 빵을 먹이려고 예배 시간에 애들을 찾고 부산을 떱니다. 그러나 이것은 천주교인들은 교회와 사제의 권위 아래 묶어 두려는 마귀의 계략이며 성경은 그 빵 조각 안에 아무런 신비적인 요소도 들어 있지 않으며 단지 이 만찬을 통해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 주의 만찬의 참석자격 이 규례의 이름이 "주의 만찬"이므로 누구든지 구원받은 사람은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들이 구원받지도 못한 아이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먹이느라 애쓰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이것은 주의 만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마치 천주교의 미사에서처럼 그 안에 무슨 신비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범하는 큰 실수인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기 의지를 가지고 선과 악을 구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에 이르기까지는 하나님 앞에서 회계보고할 의무가 없습니다. 즉 회계보고할 수 있는 나이에 다다라야만 이런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론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지만 지역 교회의 특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대부분 주의 만찬은 교회에서 이루어지므로 지역 교회가 정한 내규에 따라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구원받았어도 지역 교회의 내규 - 예를 들자면 침례를 받은 자만이 참여한다는 것 - 를 지키지 못해서 참여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결코 불평이나 시비의 요소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이 일은 어디까지나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므로 각 교회의 필요에 따라 질서 있게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전 11장에 있는 문제들이 교회에서 발생할 수 있습니다. ● 주의 만찬의 빈도 주님의 승천 이후의 첫 오순절이 지난 뒤에 예루살렘에서는 믿음을 고백하는 군중들을 위해 가정 예배나 모임이 있었으므로 매일 주의 만찬을 행했습니다. 또 날마다 한 마음이 되어 성전에 거하고 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며 빵을 나누면서 단일(單一)한 마음으로 즐겁게 자기들의 음식을 먹으며(행2:46). 주의 만찬은 보통 '빵을 나눈다'(breaking of bread)는 말로 표현되는데 사실 초대교회의 초반기에는 매일같이 빵을 나누는 일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것을 굳이 '빵을 부순다'로 해야 한다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관용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위의 성경 구절이 이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빵을 나누는 일'이 곧 '음식을 먹으며'로 해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초대 교회에서는 매일 모여 주의 만찬을 나누고 음식을 먹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44절에 있는 대로 그들이 모든 물건을 공통으로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100% 유대인이었으며 - 이방인이 구원받는 것은 행10장의 고넬료 사건이 처음임 - 이들은 말라기 3장 말씀에 따라 언제라도 자신의 주님이 성전에 돌아오리라는 기대감에 차 있었으므로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성전에 모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스데반 사건을 통해 다른 곳으로 흩어버릴 때까지 성전에 머물렀으며 심지어 사도들은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성전에 머물렀습니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使者)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주(主)가 갑자기 자신의 성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가 기뻐하는 언약의 사자라. 보라, 그가 임하리로다. 그러나 그가 임하는 날을 참고 기다리는 자가 누구리요? 그가 나타나는 때에 설 자가 누구리요? 이는 그가 정련(精鍊)하는 자의 불과 같고 세탁하는 자의 비누와 같기 때문이라(말3:1-2). 따라서 이런 구절을 들어 교회에 모든 것을 바치라고 주장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다른 시대에 속한 것을 이방인 교회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15-20년이 지나서는 매주 만찬을 행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주(週)의 첫날에 제자들이 빵을 나누려고 함께 나오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며 계속해서 한밤중까지 말을 하니라(행20:7). 여기서도 그들이 단순히 주의 만찬만을 나눈 것이 아니고 음식을 먹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11절 참조). 그런데 그 이후에는 회수에 대한 언급이 없고 단지 고전 11:26에 마지막으로 만찬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라(고전11:26). 어떤 이들은 "이 빵을 먹을 때마다"(as often as ye eat this bread...)라는 표현에서 'often'이라는 단어가 '자주'를 의미하므로 이것을 가지고 '모일 때마다'로 해석하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as often as'가 단 두 번 나옵니다. 이곳 말고는 계11:6에 나옵니다.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자기들이 대언하는 날들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들을 피로 변하게 하며 언제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모든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계11:6). These have power to shut heaven, that it rain not in the days of their prophecy: and have power over waters to turn them to blood, and to smite the earth with all plagues, as often as they will. 여기서 알 수 있듯이 'as often as'의 'often'은 일차적으로 '자주'라는 뜻으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as often as'는 '매번 할 때마다'의 뜻입니다. 물론 고전 11장을 보면 고린도 교회에서도 주의 만찬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에 주의 만찬을 의미 있게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 회수가 중요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그룹에서는 주의 만찬이 없으면 예배가 아니며 예배의 꽃이 주의 만찬이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합니다. 그러면서 'often'이라는 단어가 '자주'를 의미하므로 예배 때마다 주의 만찬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여기의 'often'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저희는 만찬이 없으면 예배가 아니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배(worship 혹은 service)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예배에는 찬양도 있고 말씀도 있고 기도도 있고 헌금을 드리는 것도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이 영혼 구령임을 감안할 때 예배에 참석한 자들 가운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위한 구령의 메시지와 성도들을 위한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말씀 선포를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전담 사역자가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 많은 시간을 들여 선포할 말씀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물론 필요에 따라 시청각 교육을 위해 주의 만찬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찬 자체가 예배라는 주장은 성경에 없는 사람의 전통입니다. 그러면 이런 전통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이것을 주장하는 ○○ 교회는 다비가 창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비는 성공회 교인이었으며 거듭난 뒤에 성경을 연구하고 많은 업적을 남긴 위대한 크리스천입니다. 하지만 그는 천주교와 비슷한 성공회의 관습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 천주교회나 성공회에서 하듯이 모일 때마다 미사를 드리는 것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주장하며 모일 때마다 주의 만찬을 하게 했고 그 결과 만찬이 없으면 예배가 아니라는 주장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미사가 없으면 예배가 아니라는 천주교나 성공회의 주장과 동일한 것입니다. 물론 천주교회에서는 미사를 드릴 때 여자들이 너울을 써야 하므로 ○○ 교회에서도 같은 규례를 만들어 그렇게 행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다비의 용기와 지혜와 명철을 존경하지만 성경에 어긋나는 가르침은 배격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종종 사람의 전통을 교리로 만드는 일을 했으며 다비 역시 이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인간 창시자가 있는 교단이나 교파는 어쩔 수 없이 그 창시자의 사상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루터교, 감리교, 장로교 등은 인간 창시자가 있으므로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 침례교인들은 예수님 외에 다른 창시자가 없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오직 성경만을 따르므로 과감하게 '성경신자'(Bible believer)라 부르는 것입니다. 오직 감리교인, 장로교인 등은 성경에 없는 말입니다. 오직 침례성도 즉 'Baptist'라는 말만 성경에 14회 나옵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용어요, 자랑스런 용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역 교회가 주의 만찬의 회수를 정해서 성도들이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잊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 성경적인 교회들이 평균 일년에 4-6 회 정도 주의 만찬을 지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주의 만찬의 요소 주님께서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결코 자기의 진짜 살을 먹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주의 만찬의 요소들 즉 빵과 포도즙은 그분의 부서진 몸과 그분의 흘린 피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떡 같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빵을 사용하면서 그것을 떡이라고 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고쳐야 합니다.    (1) 누룩없는 빵 유대인들의 유월절 기간에는 반드시 일 주일 동안 모든 집에서 누룩을 제거해야만 했습니다.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을 것이요, 그 첫째 날에 너희 집에서 누룩을 제거할지니 이는 누구든지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누룩 있는 빵을 먹는 혼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임이라(출12:15). 이렇게 한 이유는 성경에서 대부분 누룩이 죄의 상징으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逾越節)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의와 악독의 누룩으로도 말며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빵으로 하자(고전5:7-8). 그러므로 죄 없으신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나타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지 못하고 많은 교회들이 카스테라나 누룩이 들은 일반 빵을 사서 주의 만찬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주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인 것입니다. 또 천주교회에서 쓰는 성병(성체)을 대량으로 사서 쓰는 경우도 있는데 어떻게 우상 숭배용 빵 조각을 기독교인들이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의미만 알고 그분을 기억하면 되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징물이 바른 것을 나타내지 않으면 그 안의 의미를 알 수 없으며 알면서도 이렇게 행하면 위선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요즘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서 신자들을 앞으로 하나 하나 나오게 하고는 빵 조각을 친히 입에 넣어 주는 목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천주교 사제나 하는 일이지 기독교 목사가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가증한 행위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2) 누룩없는 포도즙 빵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순수한 피를 상징하는 포도즙 역시 누룩이 들지 않은 순수 포도 주스여야 합니다. 포도주는 이미 누룩이 들어가서 포도즙이 발효된 것이므로 순수한 그리스도의 피를 나타낼 수 없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성경대로 믿는 무리들이 이런 이유로 포도주스를 사용합니다. 단지 천주교의 영향을 받은 프로테스탄트 교단들만이 전통을 따라 포도주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큰 실수입니다. 또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마지막 만찬에서 사용된 음료가 "포도 열매에서 난 것"이라고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마26:29; 막14:25; 눅22:18).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왕국에서 너희와 함께 새롭게 마시는 그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26:29). 천주교에서는 포도주를 쓰면서 신자들에게는 그것을 주지 않고 사제들이 다 마십니다. 이것이 어찌 바르게 주의 만찬을 지키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몇몇 그룹에서는 한 잔에서 마셔야 한다는 주장 하에 큰 그릇이나 잔에 포도주를 담고는 남녀가 함께 마시면서 입 자국을 지우느라 분주합니다. 이렇게 혼란을 야기시키는 것은 마귀가 하는 일이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D. L. 무디의 말대로 크리스천들은 상식의 침례를 먼저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상식 수준에서 질서를 지키며 의미 있게 주의 만찬 규례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 주의 만찬 시 주의사항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 빵과 이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오직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뒤에야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고전11:27-28). 어떤 사람들은 여기 나오는 "합당하게"라는 단어를 너무나 극단적으로 해석합니다. 사실 주의 만찬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크리스천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 나오는 표현은 그 당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죄 문제와 상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에 앞서서 크리스천은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는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그것들을 고백하고 버려야 합니다. 그 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무슨 일을 행하셨는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주의 만찬에 참여해야 합니다. 주의 만찬이 엄숙한 시간이기는 하지만 너무 딱딱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그 시간은 큰 기쁨의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의 만찬의 유효기간 주의 만찬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만 행하는 잠정적인 규례입니다. 그 이후에는 어린양의 혼인 만찬이 우리 믿는 성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009-05-08 13:49:55 | 관리자
목사와 집사 용어의 구분 (1) 장로(elder) - 충분히 나이 들고 연륜이 있는 사람; 영적으로 성숙하여 하나님의 일에 대해 분별력이 있고 경험이 많은 사람; 한 마디로 영적인 영역에서의 "백전 노장" (2) 감독(bishop) - 감독자, 관리와 감독을 맡은 사람; 특히 양무리를 지키는 자(행 20:29; 벧전5:1-4). 장로가 사람 자체에 대한 것이라면 감독은 그 사람의 일(직무)을 설명해 준다. 딛1:5,7을 보면 장로와 감독이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같은 직무이므로). 딤전3:1에서 "사모한다(desire)"라는 말은 "자신을 내어놓는다, 열망한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 사람은 기꺼이 자신이 이 직무에 적합한 자가 되기 위하여 공부하고 섬기며 희생한다. 1. 장로의 자격 딤전 3:2 책망 받을 것이 없으며(blameless) - 나무랄 데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아들을 비난하지 않는;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잡히지 않는"(마치 젖은 비누처럼)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지 이 사람의 삶에서 흠잡을 곳이 없는가 찾고 있다고 하자. 커다란 쇄 프라이팬을 생각해보라. 사람들이 이것을 집어서 어떤 사람의 머리를 내려치려 하고 있다. 그런데 책망 받을 것이 없다는 것은 사람들이 프라이팬을 쥐려고 할 때 거기에 손잡이가 없다는 것과 같다. 손잡이가 없으니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단6:4-5) 한 아내의 남편 - 그의 결혼 상대에게 충실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결혼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그는 반드시 "한 여자의 남자"이어야 하며 이혼 경력이 있어서는 안 된다. 물론 여자는 더더욱 안되지 않겠는가? 깨어 있고 - 절제하고 냉철하며 방심하지 않는 상태. 단련된 마음으로 자신의 재능을 십분 활용할 수 있다. 냉철하며 - 건전한 마음, 상식이 있고 진지한 "제 정신"(막 5:15)으로 무엇이든 진지하게 임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균형이 필요하다. 일단 그는 항상 농담이나 하고 사람들을 웃기는 사람으로 찍혀서는 안 된다(엡 5:4). 그렇다고 가는 곳마다 무겁고 우울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사람이어서도 안 된다. 진지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높이는 건전한 유머감각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의바르며(of good behaviour) - 정돈되고 질서와 균형이 잡인 생활("혼돈"의 반대)을 하며 시간 활용을 잘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의 삶에는 선한 계획과 목적이 분명하다. 손님대접에 힘쓰며 - 나그네를 사랑하는 자를 말한다. 사람들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관심을 가진 자로서 형제들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보여준다. 다른 이들의 필요를 채우는 일을 위하여 그 집의 문은 마음과 함께 늘 열려있다. 가르치기를 잘하며 - 기꺼이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나누고자 하며 이 일에 유능하고 숙련되어 있다. 딛 1:9에는 그가 "신실한 말씀을 굳게 붙잡으며" 건전한 교리로 능히 권면하고 깨우칠 수 있어야 한다고 나와 있다. 이는 강단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다. 남을 돕고 꾸짖고 훈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사용하고 나누는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 딤전3:3 자신을 술에 내어 주지 아니하며 - 문자적으로 "술을 안고 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애주가여서는 안 된다. 음주나 건전치 못한 술문화에 찌들리고 더렵혀진 이 사회에서 술을 피하고 문제가 될만한 자리에 같이 하지 않는 것이 장로가 되려는 사람에겐 유일한 선택의 길이다. 구타하지 아니하며 - 쉽게 화내거나 싸움에 휘말리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싸움꾼이 되어서는 안 된다(불끈 쥔 주먹). 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아니하며 - 개인적인 이득이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재산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책망 받을 것 없이 깨끗하다. 욕심이 없다. 인내하며 - 부드럽고, 관용적인(빌 4:5) 사람을 말한다. 온화하고 남의 감정을 고려할 줄 안다. 이 사람은 양보할 줄 알며 무엇이든 자기 방식을 고집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용인할 준비가 되어있다. 다만 진리에 대해서만은 타협하지 않는다. 말다툼하지 아니하며 - 싸우지 않는다(문자적으로 "전쟁이 없는"이란 뜻). 늘 육신적인 논쟁이나 다툼에 빠지는 사람은 안 된다. 화평한 사람(롬 12:8)을 말한다. 탐욕스럽지 아니하며 - 말 그대로 하면 "돈을 사랑하지 않는"(히 13:5)이란 뜻이다. 삶의 목적이 돈이나 소유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인 사람을 말한다. 딤전 3:4-5 자기 집을 잘 다스리고 - 가족들을 충실히 돌보며 순종하고 공손하며 예의바른(규칙을 지키는) 자녀를 둔 사람이어야 한다. 딛 1:6과 비교하기 바란다. 자녀를 부모의 적절한 통제하에 두어 방탕하다거나 제멋대로라는 비방을 받지 아니하여야 한다. 거칠고 무질서하며 반항적인 자녀를 두어서는 안 된다. 딤전 3:6 초신자는 아니되나니 - 처음 믿은 자나 새신자, 즉 최근에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안 된다. 충분히 연륜이 있고 믿음 안에서 성숙한 자라야 한다(세월의 시련을 겪은 자). 딤전 3:7 좋은 평판 - 믿지 않는 자나 믿는 자 사이에서 선한 간증을 보이는 자라야 한다.(주: 딛 1:5-9에도 감독(장로)의 자격을 다루고 있는데 내용은 딤전 3:1-7과 크게 다를 바 없다.) 2. 집사의 자격 "집사"라는 단어는 "종"을 의미하며 겸손히 지역 모임을 섬기는 자로 특별히 회중의 재정이나 물질적인 필요를 맡는 사람이다. 집사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목양의 책임을 맡은 자들은 온전히 자신을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드릴 수 있다(행 6:1-7). 초세기 "집사"들은 영적인 사람들이었고, 이는 스데반과 빌립이 집사였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행 6:5). 빌립은 집사의 직분과(행 6:5) 함께 복음전도의 은사를 받았다(행 21:8; 엡 4:12와 비교) 행 6:3 너희 가운데 - 집사는 반드시 믿는 자, 즉 구원받은 사람이어야 한다. 정직하다는 평판이 있고 - 선한 평판과 간증을 보인 자라야 한다. 성령님으로 충만한 - 영적인 사람,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자라야 한다(갈5:22-6:1; 엡 5:18). 지혜로 충만한 - 지식과 경험으로 올바르게 판단을 내리고 때마다 건전한 조치를 취하는 능력을 가진 자라는 말이다. 지혜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 삶과 현안 문제들에 적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로 하여금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게 하라 - 유능한 사람 혹은 직무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딤전 3:8 신중하고 - 점잖고 진지하고 훌륭하며 본이 되고 간증이 좋으며 바른 인격을 갖춘 존경할 만한 사람을 말한다. 일구이언하지 아니하며 - "말과 그 저의가 일치하는"이란 뜻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식으로 말해놓고 다른 사람에게는 또 다르게 말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자신의 의도와 겉으로 드러난 말이 일치하며, 그 말을 신뢰할 수 있고 동기가 순수하며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을 말한다. 많은 술에 내어 주지 아니하며 - 술 중독자는 안 된다. 음주가 일으키는 여러 문제 때문에 집사는 알코올 음료를 입에 대지 말아야 한다. 특히 롬14:21에 나오는 대로 남을 실족시키지 않기 위해서 더더욱 그래야만 한다. 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아니하며 - 말 그대로 "부끄러운 이익"을 챙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딤전 3:3에서 언급하였다. 충분히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자신의 돈을 맡겨야 한다. 딤전 3:9 순수한 양심에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자 - 믿음의 신비라 함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말한다. "믿음"은 우리가 믿는 진리의 본체이다(유3). "믿음의 신비"는 그 중에서도 특별히 교회의 진리(딤전 3:14-16과 비교)와 관련된 믿음을 강조한다. 집사는 지역 교회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지역 교회를 바라보아야 한다(즉, 머리되신 그리스도 주님의 통치하에 유기적으로 결합된 몸). 딤전 3:10 시험된 사람 - 시험을 거쳐 인정된 사람. 일단을 시간을 두고 집사의 자격이 있는지를 지켜보아야 한다. 그 동안에 이 사람은 신실하게 행함으로 자신이 집사로 적합함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원칙은 장로를 세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딤전 3:6 - "초신자는 아니되나니"라는 말씀대로). 책망할 것이 없다 - 고소할 것이 없다. 일관성 있고 성실하게 살기 때문에 무슨 문제될 만한 모습이나 행동으로 교회 앞에 불려나갈 일이 없다. 딤전 3:12 한 아내의 남편 - 앞서 나온 딤전 3:2의 내용을 보라. 여자는 될 수 없다고 분명히 성경은 말한다.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릴지니라 - 딤전 3:4-5의 내용을 참고할 것
2009-05-08 13:49:19 | 관리자
  주일과 안식일 (Sunday or Sabbath) 신실한 안식교인들(제 칠일 안식일 재림파)에게 권하는 성경적 답변 by  John R. Rice 많은 신실한 성도들이 안식일 문제에 대하여 매우 혼돈하고 있다. 다른 교리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어려움은 문제해결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 대신 인간의 지도력과 교회의 전통을 따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안식교는 안식일이 한 주간의 일곱 번째 날이며 모든 크리스천들은 휴식과 예배의 날로 제 칠일을 지켜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구원이 구약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의하여 결정되며 계시록에 언급된 '짐승의 표'는 휴식과 예배의 날로 토요일 대신 일요일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이와는 다른 견해를 가진 부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로 안식일은 제 칠일에서 첫 번째 날로 바뀌었으며 이제 모든 크리스천들은 휴식과 예배의 날로 일요일을 지켜야 한다고 논박한다. 그들은 주일을 '기독교 안식일'로, 주일학교를 '안식일학교'로 부르며, 안식일, 즉 주간의 제 칠일인 토요일에 대해 구약에 있는 모든 명령을 주간의 첫날인 일요일에 적용시켜야만 한다고 믿는다. 여러분은 곧 이러한 양쪽의 견해가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이해할 때 성경은 이러한 안식일 문제에 관하여 우리에게 아주 명확한 가르침을 줄 것이다. 아울러서 이러한 문제와 함께 다른 중요한 성경의 교리들과 크리스천의 실행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은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안식일을 지켜야만 한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코 일요일을 지키는 것이 짐승의 표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또한 성경은 일요일을 '기독교 안식일' 이라든가 다른 어떤 종류의 안식일로 부르지 않는다. 1. 구약의 안식일은 제 칠일이다. 출애굽기 20:10은 "일곱째 날은 주 네 하나님의 안식일인즉" 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이것에 관하여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없다. 어떤 언어에서는 안식일에 대한 단어가 일곱 번째를 의미한다. 휴식의 안식일은 노동을 위한 육 일 뒤에 왔으며, 주간의 마지막 날로 간주되었다. 즉, 토요일이 구약의 안식일인 것이다. 2. 안식일은 구약의 계명이지 신약의 계명은 아니다.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성경연구가들이 이러한 사실을 간과해 왔다. 안식일은 모세율법의 한 부분이며,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 이외의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주어지지 않았다. 크리스천 성도들에게 할례에 관한 계명을 지키도록 권고하거나 혹은 돼지고기나 메기 등을 금할 것을 권고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는 많은 설교자들이 진지하게 성도들에게 이렇게 설교를 한다 "안식일을 기억하고 그것을 거룩하게 지키십시오." 그러한 설교가 의미하는 것은 "주일을 기억하고 그것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이며, 주일을 안식일이라 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돼지고기나 메기를 삼가고 할례를 받으라는 명령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제시하는 성경적 증거들을 주의 깊게 읽는다면 당신의 마음 속에서 이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먼저, 신약 어디에서도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십계명은 안식일에 관한 조항만을 제외하고는 신약에서 반복적으로(어떤 것은 매우 자주) 되풀이된다. 신약에 언급된 많은 죄들 중에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결코 한 번도 죄로 언급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시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한 번도 대중들에게 안식일을 지킬 것을 요구하시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요한복음 5:18에서 엄격한 안식일 신봉자들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이 이로 인하여 더욱더 그분을 죽이고자 하니 이는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길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하심이더라."  유대인들은 예수님 자신이 유대의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을 증오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낱알을 먹기 위하여 이삭을 모았을 때(마 12:1∼8) 유대인들의 비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꾸짖으며 그들에게 성경을 주목하도록 하였다. "나는 긍휼을 원하고 희생을 원치 아니하노니…"(호 6:6). 그리고 만약 그들이 그 성경을 이해했었다면 무죄한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안식일은 제사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었던 의식적 율법의 한 부분임을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안식일을 지키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다. 이러한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사도들 역시 신약시대 교회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예루살렘 교회 회의에서 이방 개종자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쓴 편지에서 안식일은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흩어진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 히브리서와 야고보서도 역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바울은 교회들에 보내는 서신들에서 안식일을 크리스천들이 지켜야만 하는 것으로 단 한 번도 암시하지 않았다! 안식일은 구약의 것이지 신약의 것이 아니다. 이것을 명심하고 다음의 사실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3. 안식일은 모세율법이며 율법 아래 있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다. 신약성경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없을 뿐 아니라 구약에도 시내 산 이전에는 그러한 명령이 없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창세기 2:1∼3에 보면 하나님께서 창조를 끝마치시고 제 칠일에 쉬셨으며 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나 그 이후 시내 산에 이르기까지 그 날에 관한 명령은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아담이나 에녹, 노아나 아브라함 그 어느 누구에게도 안식일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는 기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 누구도 시내 산 이전에 안식일을 지켰다든지 그것에 대하여 들었다는 기록이 없다. 창세기 2:1∼3은 모세가 시내 산 이후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으로 이들 다섯 권의 성경을 쓸 때까지는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성경에서 안식일이라는 단어가 첫 번째 사용된 시기는 출애굽기 16:23에서였고. 그 때 이후에 비로소 사람들은 그 단어를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들이 이미 시간의 단위로 한 주간을 가졌었다는 것을 기억할 때 더욱더 확실해진다.(창8:10∼12: 29:27)  출애굽기 16:23∼36에 나타난 사건을 보면 안식일의 개념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상하고도 새로운 가르침이었다는 것과, 그들이 이전에는 안식일을 결코 지키지 않았었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느헤미야 9:13∼14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또 시내 산에 강림하시고 하늘에서부터 그들과 말씀하사 바른 법도와 참된 율법과 선한 법규와 명령들을 그들에게 주시고 또 주의 거룩한 안식일을 그들에게 알려 주시며 주의 종 모세의 손으로 훈계와 법규와 율법을 그들에게 명령하시고"  애굽에서의 핍박과 흥해를 건넜던 사건을 다시 언급한 후에, 성경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내려오셔서 그의 거룩한 안식을 백성에게 "알려 주셨다"고 말씀하신다. 안식일은 모세율법의 한 부분이었다. 그것은 결혼, 십일조 그리고 할례처럼 모세 율법에 속한 명령이었다. 그것은 시내 산에서 '알려진' 것이었다!  지구상의 그 누구도 그 이전에는 안식일의 개념을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안식일이 시내 산에서 처음으로 주어졌고 알려졌다는 이와 같은 가르침은 에스겔 20:10∼12에 다시 나타난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나오게 하여 광야로 데리고 가서 사람이 행하면 그 가운데서 살게 될 내 법규를 그들에게 주며 내 법도를 보여주었고 또 그들에게 내 안식일도 주어 나와 그들 사이에 표적이 되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내가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는 주인 줄 알게 하려 함이었노라."  주님께서 친히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것을 주의 깊게 보기 바란다.  "그들에게 내 안식일도 주어 나와 그들 사이에 표적이 되게 하였나니" 출애굽기 16:23∼36에서 안식일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지기 전까지는 어떤 사람도 안식일에 대하여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4. 안식일은 특별한 표적으로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문제를 명확하게 이해했다. 시내 산에서 주님께서는 이 명령이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맺어진 하나의 특별한 언약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임을 모세에게 계시하셨다.  출애굽기 31:12∼13, 16∼17에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로 내 안식일을 지킬지니라.  이것은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있을 표적이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내가 너희를 거룩히 구별하는 주인 줄 알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킬지니 대대로 안식일을 지켜 영속하는 언약으로 삼을 것이니라.  안식일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있을 영원한 표적이니 이는 주가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며 상쾌하게 되었음이니라, 하라." 에스겔 20:12은 안식일의 의미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이었다는 설명을 되풀이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진 분명하고 반복적인 가르침을 볼 때 안식일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특별한 표적, 즉 언약으로서 모세의 율법 아래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명령이었으며, 어떤 율법시대에서도 이방인들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안식일을 이야기할 때에 그것은 유대인에게 주어진 구약의 의식적 율법으로 제 칠일 즉 토요일을 말하는 것이다. 5. 신약의 크리스천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에 대해서 경고했다. 이제 다시 신약으로 눈을 돌리면,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 대신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골로새서 2:14을 보면 손으로 쓴 규례들을 지우시고 그것들을 길에서 취하여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으셨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그 규례들이 우리를 대적하고 반대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6∼17절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명령하고 있다.  "그러므로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나 거룩한 날이나 월삭이나 안식일로 인하여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그 몸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노라." 안식일로 인하여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존재하는 그림자였으며, 이제 그가 오셨고 그림자는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제 칠일 안식일 재림주의자나 유대인이나 누구도 안식일로 인하여 어떠한 크리스천에 대해 판결을 내릴 권한을 갖고 있지 못하다.  안식일에 대한 명령은 부정한 고기들에 대한 명령 및 다른 의식적 율법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하나님은 크리스천들이 유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갈라디아서 4:8∼11에서 바울은 명확하게 그와 같은 사실을 언급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유대주의에 빠져 있었다. 바울이 이 편지에서 그들에게 유대주의의 옛 속박인 '약하고 천한 초등원리' 즉 구약의 의식율법에 '종노릇하는 것'을 깨뜨릴 것을 촉구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4:10∼11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가 날과 달과 때와 해를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염려하노라."  여기에서 언급된 '날들'은 유대인들을 위한 구약의 의식율법의 한 부분인 안식일이었다. 바울은 신약의 크리스천들이 구약의 안식일이나 의식적 율법의 또 다른 날과 달과 절기와 해에 구속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6. 주일은 '기독교 안식일'이 아니다. 당신은 이제 "주일이 기독교 안식일이며, 안식일이 주간의 첫 번째 날로 바뀌어졌다"고 말하는 설교자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주마다 특정한 하나의 날로서 규칙적인 안식일을 말하는 'Sabbath'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될 때 그것은 항상 주간의 제 칠일인 토요일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안식일이 토요일에서 주일로 바뀌었다는 기록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 토요일을 지키지 않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그러한 주장을 사용하는 설교자들은 성경에 의하여 그 주장을 증명하지 못할 때 매우 큰 혼란에 빠진 자신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신도들은 제 칠일 안식일 재림주의자의 모세율법에 대한 가르침에 의해 자주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7. 카톨릭은 첫째 날 예배를 시작하지 않았다. 안식교는 카톨릭이 안식일을 제 칠일에서 주간의 첫날로 바꾸어 놓았다고 주장한다. 우스운 점은 어떤 카톨릭 저술가들은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는 점이다! 그러나 안식교 교사들이 알아야 할 것은, 카톨릭이 말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베드로가 첫 교황이었고 신약시대 사도들에 의해 안식일이 바뀌었으므로 카톨릭 교회에 의해 안식일이 바뀌었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카톨릭 교회가 주일을 휴식의 날로 시행하는 시민법을 지지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카톨릭 교황들과 주권자들은 주일의 의식을 마치 구약의 안식일처럼 형식적이고 의식적으로 만듦으로써 시민법에 의해서 그것을 시행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예배의 날로 첫날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사도행전 20:7은 신약시대에 이러한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그 주(週)의 첫날에 제자들이 빵을 나누려고 함께 나오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며 계속해서 한밤중까지 말을 하니라."  신약의 제자들이 그 주의 첫날에 만났다는 사실은 명백하며, 이들은 아마도 주의 만찬을 위해서 이 날에 정기적으로 모였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6장 2절을 보면 주간의 첫 날이 신약의 크리스천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녔으며 주일이 종교적인 날로서 로마 카톨릭의 창안품이나 안식교의 주장처럼 '짐승의 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간의 첫 날이 성경에서 '안식일'이라고 불린 적이 결코 없다는 점과, 따라서 우리 역시 일요일을 안식일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점이다. 8. 신약의 예배일로서의 주(週)의 첫 날 신약에는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유대인들을 만났으며 또한 그들에게 설교를 했다는 많은 기록들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 설교자들이 군중들을 모을 수 있는 시간에, 그리고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과 똑같은 예이다. 설교자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서 설교해야 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제자들이 예배를 위해 모였을 때 안식일을 그 날로 사용했다는 기사는 한 번도 발견되지 않는다.  반면에 사도행전 20:7에 보면 제자들이 주간의 첫 날에 만났다는 것과, 문맥상 이 모임이 주의 만찬을 위해 규칙적인 시간에 행해졌던 규칙적인 예배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고린도전서 16장 2절은 '주(週)의 첫날'이 신약의 크리스천들에게 종교적 중요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고린도 교인들은 주님의 일을 위하여 그들의 선물을 그 주의 첫 날에 모으도록 명령받았다.  어느 곳에서도 성경은 '주님의 날'을 안식일 즉 제 칠일이라고 가르치는 곳은 없다. 심지어 성경은 첫 날 이외의 다른 날을 예배의 날로 사용하였다는 암시조차 하지 않는다.  신약의 크리스천들은 휴식을 위한 특별한 한 날을 명령받은 적이 없다. 다만 그들은 안식일이 아닌 주(週)의 첫날을 예배의 날로 사용했다. 9. 유대의 안식일은 예배의 날이 아니다. 구약의 안식일 즉 토요일은 오로지 신체적 휴식을 위한 날일 뿐 예배의 날은 아니었다. 우리가 다시 안식일에 대한 구약의 명령들을 읽어보면 안식일이 결코 예배의 날로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일곱째 날은 주 네 하나님의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거하는 나그네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20:10)  히브리어에서 'Sabbath'라는 단어는 '중지' 즉'휴식' 을 의미한다. 우리는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는 기간 동안에 안식일에 회당에서 종교적 모임의 관습이 생겨났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회당이나 회당 예배 관한 명령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모세율법의 안식일은 전적으로 휴식의 날이었지 예배를 위한 날이나 혹은 교회 가는 날이 아니었다. 우리는 인간과 짐승을 위해서 칠일 중에 하루를 쉬게 하는 원리는 좋은 원리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근거로 크리스천들은 일주일의 하루를 휴식의 날로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시민법을 여러 번에 걸쳐서 주창했었다.  그럴 때 선택된 날은 주로 일요일이었고, 크리스천들은 그 날을 예배를 위하여 사용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의 크리스천들은 어느 특정한 날에 노동을 삼가라는 명령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적이 없으며, 주간의 어떤 정해진 날에 예배를 위해서 모이라는 명령도 받지 않았다. 그것은 크리스천을 위한 은혜의 문제이며 자발적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10. 그러면 크리스천들은 주일(일요일)을 지켜야만 하는가? 크리스천들은 안식일을 지키도록 되어있는 구약의 계명에 의해 속박되지 않으므로 토요일 대신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정당한 일인가?  우리는 주일(일요일)을 형식적 안식일, 즉 의식적 율법의 한 부분으로 지켜서는 안 된다.  다만 예배의 날로 자발적으로 그 날에 모일 수 있다.  "우리의 함께 모이는 일을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히 10:25).  우리는 예배를 위해 모일 것을 명령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박한다.  "만약 여러분이 일요일에 예배를 드린다면 당신은 태양에게 바쳐진 날을 지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요일은 태양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토요일이 로마신화에서 농업의 신인 Saturn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  모든 날들은 하나님의 날들이며 그 날들이 어떻게 이름지어졌든지 간에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한 날을 일요일이라 부르든 주(週)의 첫날이라 부르든, 또는 다른 한 날을 토요일이라 부르든 주(週)의 제 칠일이라 부르든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신약의 크리스천들은 주(週)의 첫 날이 일요일이라고 불리기 전에 그 날 만났었고 유대인들은 토요일이라는 명칭이 생기기도 전에 휴식의 날로서 토요일을 지켰었다. 크리스천들은 가능한 한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주일(일요일)에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주일에 회사를 쉬게 하는 고용주들은 직공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충분한 휴식의 시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유대주의 율법을 근거로 해서 그러한 일을 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오직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우리가 대접받기 원하는 대로 우리의 동료들을 대접하는 크리스천들로서, 은혜를 근거로 하여 그렇게 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자유를 육신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된다.(갈 5:13)  크리스천들은 주님의 날에 관한 그들의 자유를 그릇된 것을 행할 수 있는 허가증으로 오용해서는 안 된다.  분명히 크리스천들은 이날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날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헌신하는 날로 사용해야만 한다. 11. 주(週) 첫날의 영적 의미 성경에서 6은 인간의 숫자이며 7은 신적이며 완전의 숫자이다. 휴식의 안식일 다음에 이어지는 노동의 6일간은 율법 아래서 완전한 삶을 영위하려고 애쓰면서 제 칠일이 상징하는 휴식과 완전함과 구원을 획득하려는 인간을 묘사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율법 아래서 실패했고 누구도 지금까지 율법을 지킬 수 없었다.(행 15:10: 롬 3:20; 길3:11) 그러나 주(週)의 첫 날 하나님께 예배하는 신약의 크리스천은 이미 그가 어떠한 수고도 하기 전에 값없는 선물로서 구원을 소유하게 된 것이며 구원받은 크리스천은 그의 남은 생애를 그가 사랑하는 구세주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히브리서 4:9∼10을 읽어 보라! 마가복음 16:2, 9로부터 예수님께서 주(週)의 첫날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명백히 나타난다. 요한복음 20장에서는 마리아와 다른 몇몇 사람들이 주(週)의 첫날 아직도 어두웠던 매우 이른 시간에 예수님의 무덤에 왔을 때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내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그것은 주(週)의 첫 날에 해당하는 그 날 밤 어느 시각에 구세주께서 무덤으로부터 나오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여기에 우리를 위한 위대한 은혜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의롭다함을 위하여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롬 4:25) 우리의 어떠한 수고와 율법의 행위도 없이 우리가 의롭게 여김을 받았으며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4:1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는 그분의 안식에 이미 들어간 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들을 그치신 것같이 이미 자기 일들을 그쳤음이라."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 안에서 십자가를 의지하는 크리스천은 은혜를 입은 것이다!   히브리서 4:9∼11을 보면 두 종류의 휴식 즉 '안식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히브리서 4:9에 있는 휴식이란 단어는 헬라어에서의 안식(Sabbath)이란 단어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모든 유대인에게 잘 알려진 가르침이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 즉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가장 큰 축제일 중 하나인 유월절은 두 가지 측면에서 휴식의 개념을 나타내는데, 하나는 구원 당시에 이루어지는 휴식이며, 다른 하나는 부활 이후에 이루어지는 휴식이다. 유월절 만찬에 이어지는 무교절은 출애굽기 12:15∼16에서 주어진 대로 7일 동안 계속된다. 이 일주일은 구원받은 이후의 크리스천의 삶의 완벽한 순환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 회심은 그 축제 초기의 유월절 양에 의해 묘사된다. 고런도전서 5:6∼8을 보라.  누룩 없는 빵을 먹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친교를 나누는 것을 나타낸다.  그 친교 즉 평화는 이스라엘이 유월절 양과 함께 누룩 없는 빵을 먹을 때 하나님께 회심하는 것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천의 삶의 평화와 기쁨은 그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을 때 즉각적으로 시작된다. 무교절 첫 날은 일을 해서는 안 되는 휴식의 날이었다. 그것은 크리스천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게 되었을 때 그 자신의 일로부터 쉬게 되는 것을 묘사한다.  그리고 주말에 또 하나의 휴식의 날이 있었다. 인생 여정의 끝에 크리스천들은 완전한 휴식으로 들어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한 안식이 남아 있나니"(히4:9)라고 성경이 말씀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스라엘이 율법 아래서 유월절 만찬과 무교절을 지켰던 것처럼 안식일을 지켜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유월절 만찬이나 무교절이나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그림자들과 예표와 의식율법의 완성인 바로 그 분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유대 안식일(토요일)은 행위에 따라 얻어지는 휴식의 상이다. 율법 아래서 만약 누군가가 그의 모든 삶이 완벽하고 율법의 모든 명령들을 이행했다면 그는 천국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이외의 어느 누구도 완전하지 못했고 그 누구도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은 율법에 의해 구원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선한 일에 의해 구원을 이루어나가는 것을 묘사하는 유대 안식일이 은혜의 시대에는 전혀 적합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은혜로 구원받았으며 율법의 행위 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수고 없이 얻은 평화와 휴식을 상징하는 주(週)의 첫날에 예배를 드린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유대 안식일, 즉 토요일은 의식에 따른 율법이며 은혜의 시대에는 부적합한 것이다.  주(週)의 첫날이 모든 크리스천에게 적합한 것이다. 12. 안식일과 주일(일요일)의 중대한 차이점들 (1) 안식일은 오직 모세의 율법 아래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것이었고, 주일은 은혜 아래 있는 신약의 크리스천들을 위한 것이다. (2) 안식일은 죽음의 형벌로 인해 강제로 시행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율법'이었지만,(민 15:32∼36) 주(週)의 첫날인 주일은 명령이나 형벌 없이 크리스천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지켜지는 '은혜'에 속한 것이다. (3) 안식일은 신체적 휴식의 날이었으나,(출 20:10) 주일은 예배의 날이다.(행 20:7; 계 1:10) (4) 안식일은 인간의 공로에 의한 구원을 예표하나, 주일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예표한다. 13. 크리스천들은 율법 아래 있지 않다.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우리의 안식교 형제들은 우리를 모세의 율법의 속박으로 끌어가려고 애써왔다. 안식교인들의 대부분은 구원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에 달려있다고 가르치고 또한 그렇게 믿는다. 그들은 구약의 안식일을 가르치는데서 그치지 않고, 종종 어떤 종류의 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는 구약의 율법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들은 또한 십일조를 구원받는 방법으로, 또는 구원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가르친다.  사실 그들은 유대의 의식에 관한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그 의식율법은 분명히 완성되었고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골로새서2:14∼17과 디모데전서 4:3∼5을 통하여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고기를 먹지 말라는 어떤 명령은 크리스천들에게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거부할 것이 없나니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그것이 거룩히 구별됨이니라." (딤전 4:4) 할례에 관해서도 신약의 크리스천들은 분명하게 명령받았다.  "무할례 상태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으냐? 할례를 받지 말라."(고전 7:18)  또한 안식일에 대해서도 그에 따른 명령은 십자가에 못 박혔고 다른 의식 율법과 함께 말살되었다. 골로새서 2:16∼17에서 주님은 특별히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나 거룩한 날이나 월삭(月朔)이나 안식일로 인하여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그 몸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노라." 만약 크리스천이 안식일에 관한 율법 아래 있다면 그는 민수기 15:32∼36에 있는 하나님의 명령처럼 토요일에 나무를 했다는 이유로 돌에 맞아 죽어야 할 것이다. 그는 심지어 출애굽기 35:3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명령대로 토요일에 집에서 불을 피우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한 의식율법의 무거운 짐이 우리에게 놓여 있지 않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라!   거짓말과 도둑질과 간음과 살인 등의 도덕율법은 신약에 와서도 계속해서 되풀이된다.  이러한 율법은 본래 나쁜 것이며 모세의 율법이 생기기 이전이나 이후, 혹은 가인이 아벨을 살해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그릇된 것이었다. 크리스천들은 도덕율법을 지켜야 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그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사람들은 결코 그렇게 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의식율법이나 도덕율법을 지키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며 오로지 그것을 근거로 영생을 소유하는 것이다. 다음의 성경구절을 다시 한번 읽고 여러분이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음을 당신의 마음 속에 영원히 간직하기 바란다.  "너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이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엡 2:8∼9).  디도서 3:5은 또한 인간이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거나 그 구원을 유지할 수 없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로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자신의 긍휼에 따라 새로 남의 씻음과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고" 그밖에 다음의 성경구절들을 살펴보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그 안에 굳게 서고 다시는 속박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대속(代贖)하셨으니"(갈 3:13)  "그러므로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나 거룩한 날이나 월삭(月朔)이나 안식일로 인하여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그 몸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노라."(골 2: 16∼17) 14. 안식일이 오직 유대인을 위한 의식율법이었으며 결코 신약의 크리스천에게 주신 명령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보다 확실한 증거들 (1) 성경이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다시 한번 골로새서 2:13∼17을 읽어보자. "또 너희의 죄들과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너희의 모든 범법을 용서하시고 손으로 쓴 규례들 곧 우리를 대적하고 반대하는 규례들을 지우시고 그것들을 길에서 취하여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들과 권능들을 노략하사 십자가에서 그들을 이기시고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느니라. 그러므로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나 거룩한 날이나 월삭(月朔)이나 안식일로 인하여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그 몸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노라." 위의 성경은 예수님께서 죽었을 때 완성되었고 폐지되었던 유대의 의식율법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이방인들은 '무할례' 상태에 있었고 유대인들의 '손으로 슨 규례들'은 그들을 대적한다고 하신다. 그러나 할례 받지 못한 사람들을 대적했던 이 '손으로 쓴 규례들'을 하나님께서 지워버리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으셨다.' 분명히 그것은 모세의 의식율법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도덕율법도 폐지되었는가?  인간은 이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와 같은 명령에 대한 의무로부터 자유로운가? 여러분은 우리가 그러한 문제에 관하여 올바르게 행해야 할 의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도덕율법은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삭제되거나 폐지되지 않았다.  도덕율법은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지워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능력을 상실한 것은 의식율법이었고, 그것이 그 능력을 상실한 이유는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을 이러한 의식율법에 대하여 누구도 판단 받을 수 없다고 16절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나 거룩한 날이나 월삭(月朔)이나 안식일로 인하여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레위기 11장은 의식율법에 관해서 말하면서 돼지고기나 혹은 양쪽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물고기와 같이 유대인들이 먹을 수 없는 많은 동물들을 지적했다. 그리고 의식율법에 의하면 만일 부정한 도마뱀, 달팽이, 두더지 또는 다른 동물들이 토기에 떨어졌을 때는 그릇 안에 담겨 있는 물은 마찬가지로 부정한 것이 되고 그 토기를 깨뜨려야만 한다. 그리고 레위기 11:34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먹는 모든 음식 중에서 그런 물이 스며든 것은 부정할 것이요, 그런 그릇으로 마시는 모든 음료도 부정할 것이며" 그러나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한 그 의식율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혔고 따라서 우리는 먹고 마시는 음식의 규례로 인하여 판단 받지 않는다고  골로새서 2:16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천들은 "거룩한 날이나 월삭이나 안식일로 인하여 "판단 받지" 않는다. 이러한 의식은 십자가에 못 박혔고 제거되어졌다!  크리스천은 이들 의식율법에 의해 자신을 판단하도륵 허용해서는 결코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음으로 그러한 것들을 완벽하게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게다가 17절에서 이러한 모든 의식은 '앞으로 이루어질 것들의 그림자'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의식율법들이 하나의 그림자나 상징이나 모양이나 본보기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그것들의 실체가 왔던 것이며 이전 것들은 그것의 그림자일 뿐이었다. 이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의식율법 모두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완성시키셨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은 유대인의 의식인 안식일에 의해서 판단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이 분명히 그렇게 명령하고 있다. (2) 유대의 안식일인 토요일이 의식율법의 한 부분이며 결코 신약의 크리스천들에게 명령했던 것이 아니라는 두 번째 증거는 성경이 안식일을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맺은 특별한 표적이었다고 분명히 말한다는 사실이다. 출애굽기 31:12∼13에서 이것은 명백한 진술이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로 내 안식일을 지킬지니라. 이것은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있을 표적이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내가 너희를 거룩히 구별하는 주인 줄 알게 하려 함이니라."  13절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지를 다시 한 번 잘 살펴보라. "너희는 진실로 내 안식일을 지킬지니라. 이것은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있을 표적이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내가 너희를 거룩히 구별하는 주인 줄 알게 하려 함이니라."  '거룩하게 하다'라는 단어는 '구별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들로부터 구별되는 것이다. 이방인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구별하는 표적 이 안식일이다.  이제 16절과 17절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킬지니 ‥‥ 안식일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있을 영원한 표적이니" 에스겔 20:12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또 그들에게 내 안식일도 주어 나와 그들 사이에 표적이 되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내가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는 주인 줄 알게 하려 함이었노라." 그러므로 우리는 또다시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특별한 표적이라는 것과, 안식일은 그들이 하나님의 택함 받은 민족이며 다른 민족들로부터 구별된다는 표적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따라서 모든 의식율법은 다른 나라들에 대한 것이 아닌 바로 이스라엘을 향한 특별한 명령이었다. 할례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한 표적이었다. 그래서 유대의 음식물에 대한 규정과 제사와 레위족의 제사장직이 있었다. 의식율법은 오로지 유대인들을 위한 율법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식율법은 도덕율법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은 전 세계에 대한 명령이다.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 역시 전 세계에 대한 것이고, "도둑질하지 말라"는 명령 또한 모든 인류에 대한 것이다. 세계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짓말과 도적질과 살인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백성이다. 그것은 우리 국가와 하나님 사이에 맺은 특별한 표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민족이나 국가는 결코 없다. 아무도 도덕율법이 어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주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범위에 있어서 세계 보편적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의식율법에 대하여는 유대인들이 "우리는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임을 나타내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한 표적인 할례를 준수한다.  또한 우리는 제사와 절기와 유대의 음식물 금기법을 지키며 이러한 것들은 선택받은 백성인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표적들이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과 똑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는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령받았다.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표적이다. 그 표적은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이며 상징인 의식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민족으로 구별하셨던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대 안식일인 토요일은 분명히 의식율법의 일부였다. (3) 유대 안식일인 토요일 엄수는 명백히 의식율법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류의 마음에 보편적으로 새겨진 도덕율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덕율법은 세계 보편적이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마음에 새겨 놓으셨다. 로마서 2:14∼1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율법을 소유하지 않은 이방인들이 본성으로 율법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행할 때에 이런 사람들은 율법을 소유하지 않아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사람들은 그들의 양심이 증거하며 그들의 생각들이 서로 고소하고 변명하는 가운데 그들의 마음 속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 보이느니라. 이렇게 심판 받는 일은 하나님께서 나의 복음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실 그 날에 이루어지리라." 당신은 이방인들이 비록 율법이나 성경이나 복음전파를 전혀 듣지 못했을지라도 그들 안에서 증거하는 양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한 아프리카의 흑인도 살인, 거짓말, 도둑질 그리고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것이 잘못임을 안다.  그는 선과 악에 대한 선천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  그것이 어느 곳에 있는 이방인이라도 그들이 죄인임을 알게 하는 이유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에 도덕율법을 새겨 놓으셨고, 그들이 이 율법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심판의 날에 그들을 불리하게 하는 증거가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런데 아프리카의 흑인이나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복음을 전혀 듣지 못했던 어떤 야만인이 살인이나 도둑질이 나쁜 짓임을 안다고 해서 그러한 이방의 야만인이 보편적으로 인류의 마음에 새겨진 어떤 것에 의해 자기 부족의 남자아이들이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 성경을 전혀 알지 못하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에 관한 문제도 들어보지 못한 그 사람의 양심이 쇠고기나 양고기를 먹는 것은 옳은 것이며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그에게 말해줄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의식율법은 오로지 유대인에 대한 것이지 도덕율법의 경우처럼 사람들 마음에 보편적으로 새겨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똑같은 방식으로 안식일이 의식율법임이 분명하다. 사람들의 양심은 7일 가운데 한 날을 안식일로 지켜야만 하고 이 휴식의 날은 토요일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전혀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누군가 이방인에게 안식일에 관하여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그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거나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죄를 지었다거나 하는 인식을 결코 느낄 수 없다. 양심은 분명히 그에게 그러한 사실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대 안식일인 토요일은 인류의 마음에 새겨진 도덕율법이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율법아래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 의도된 의식율법이다. (4) 유대 안식일이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적합했지만 특히 추운 겨울의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출애굽기 35:3에 이스라엘 자손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분명한 명령이 있다.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을 피우지 말지니라."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안식일에 그들의 집에 불을 전혀 피울 수 없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들에게는 불을 피우지 않는 것이 곤란한 문제가 아니었지만 미국의 북부지역이나 캐나다 그리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다른 지역에서 그것은 엄청난 시련이 될 것이다.  안식교인들 뿐 아니라 유대의 안식일을 지켜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사람들은 매주 이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민수기 15:32∼36은 안식일에 나무를 했던 한 남자가 의식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죄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어떻게 돌에 맞아 죽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만약 우리가 구약과 똑같은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령받았다면 토요일날 삽으로 화덕에 석탄을 퍼 넣는 안식교인들은 틀림없이 유죄이다.  사실상 토요일에 어떤 종류의 불이든 켜는 사람은 이 의식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난로에 불을 붙이는 것과 모닥불에 점화하는 것에는 어떤 도덕적 차이점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흑은 손잡이를 돌려서 가스 레인지에 불을 점화하는 것과 다른 방법으로 불을 점화하는 것 사이에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어떤 차이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성경은 안식일 명령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명령하고 있다.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을 피우지 말지니라."  분명히 그것은 의식율법이며 구세주께서 죽으시기 전에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의도된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유대인들 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팔레스타인이 아닌 어떤 나라에도 결코 명령하지 않으셨다. (5)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의식율법이며 크리스천들에 대한 명령이 아니었다는 다섯 번째 증거는 안식일이 자전하는 세계에 동시적으로 올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날짜는 지구의 자전에 의해 결정된다. 지구 표면 위의 어떤 지점이 자전하여 똑같은 태양 빛을 받는 매 순간은 또 다른 날이 된다. 그리고 우리가 하루를 자정에 시작하든 일몰 때에 시작하든 그 하루는 지구의 원주 위에 있는 모든 점에서 각각 다른 시각에 시작된다.  예를 들면 뉴욕에서는 자정일 때 시카고에서는 오후 11시, 덴버에서는 오후 10시,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오후 9시가 된다.  그리고 지구의 반대편은 12시간이 늦거나 빠르게 된다. 어떤 사람이 서쪽으로 지구를 한바퀴 일주하면, 일주하는 날들 동안의 그 사람의 하루는 보통의 하루보다 길어지지만, 일주가 끝났을 때 그는 완전한 하루를 잃어버린다. 즉 그는 집에 머물러 있던 사람보다 하루를 적게 갖는 것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동쪽으로 지구를 한바퀴 일주하면, 일주하는 날들 동안의 그 사람이 경험하는 하루의 길이는 보통의 하루보다 더 짧아지지만, 일주가 끝났을 때 그는 한 번 더 태양을 지나치게 된다. 그리고 집에 머물렀던 사람보다는 하루를, 서쪽으로 세계일주를 한 사람보다는 이틀을 더 갖게 된다. 집에 머물렀던 사람은 일정한 횟수만큼 태양을 지나쳤고, 서쪽을 향해 태양과 함께 일주했던 사람은 태양을 지나쳐 가는 한 번의 기회를 놓쳤으며, 태양을 향하여 동쪽으로 갔던 사람은 태양을 한 번 더 지나쳤다.   이제 문제는 이것이다.  만약 세 사람이 모두 안식일로서 제 칠일을 지키려고 애쓴다면 집에 머물렀던 사람이 토요일을 지키게 될 때 서쪽으로 간 사람은 일요일을, 동쪽으로 간 사람은 금요일을 지키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항상 제 칠일을 엄수하기 위해 동일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편의상, 국제 날짜변경선은 태평양 지도상에 고정되어 있다. 어떤 배가 서쪽 방향으로 항해하고 있을 때 금요일 저녁 자정 무렵에 그들이 국제 날짜변경선에 접근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때는 안식일을 지키기 시작해야 할 시간이다. 아니 여러분이 만일 원한다면 유대인들이 그들의 안식일을 일몰 때에 시작했던 것처럼 금요일 일몰 시로 그 시기를 정할 수도 있다.  어쨌든 그 배가 국제 날짜변경선에 다가와서 그 선을 건넜을 때 시간은 갑자기 금요일에서 일요일로 변해버린다.  토요일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럴 때에 당신은 어떻게 안식일을 지킬 것인가? 그 동일한 배가 다음 주에 금요일이 막 끝나갈 무렵에 국제 날짜변경선 쪽으로 유대의 안식일을 시작할 준비를 갖추고 반대방향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이 동쪽 방향으로 계속 진행하다가 날짜변경선을 건너는 순간 시간은 갑자기 금요일에서 목요일로 변하게 된다. 토요일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금요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국제 날짜 변경선을 동쪽 방향으로 지나치는 사람들은 동일한 날을 두 번 가지며, 서쪽 방향으로 지나치는 사람들은 완전히 하루를 잃어버리게 된다.
2009-05-08 13:48:31 | 관리자
"기독교의 중심은 성경이고, 성경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십자가의 중심은 하나님이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공의를 이루기 위해 아들을 죄로 삼아 내버리는 하나님의 찢어지는 마음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십자가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게는 그것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의 권능이 된다(고전1:18). 다음은 간단하게 십자가의 목적을 정리한 것이다. 이것이 뼈에 사무치도록 음미하고 마음 속에 그 의미를 넣으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입을 맞춘 유일한 십자가 사건이 좀 더 확실하게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목적 1. 십자가는 거룩한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한다. 무한한 분의 무한한 가치의 피와 생명에 의해 하나님의 무한한 공의가 무한하게 만족되었다(골2:14-15 ; 엡2:13)2. 십자가는 사랑과 희생을 선포한다. 십자가는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희생을 나타낸다(요3:16; 엡5:2). 우리 주님은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다(마20:28).3. 십자가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선포한다(롬5:1; 고후5:19).4. 십자가는 구약과 신약을 통합시킨다. 유대인과 이방이 하나가 되게 되었다(엡2:14-15). 교회라는 유기체가 생기게 되었다. 5. 십자가는 마귀의 일을 멸한다(요일3:8).6. 십자가는 마귀의 무기인 사망을 폐하고 부활을 가져온다(히2:14-18).7. 십자가는 세상에서 멸시받는 자들에게 구원과 권능을 준다(고전1:18).8.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이다(고전1:30). a.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단 한 번에 영원히 제거하는 수단(히9:15; 10:10)b.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수단c. 영적인 존재들에게 하나님의 의와 지혜를 드러내는 수단(골2:15-16)d. 창세 전에 세운 계획을 시간 속에서 이루는 수단(행2:23; 계13:8)
2009-05-08 13:47:26 | 관리자
구원의 지식과 확신(Safety, Certainty, and Enjoyment by George Cutting, 두 번째 부분 Certainty)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이미 영생을 혹은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을까요? 요한일서 5장 13절은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저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조금 바꾸어서 제시하려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런 느낌들을 준 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하고 또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라.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들을 쓴 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하고 또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라. 위의 구절과 아래 구절을 대조해서 어떻게 서로 다른가를 보십시오. 이 두 개를 비교하면서 다윗의 고백도 들어 보기 바랍니다. 내가 허탄한 생각들은 미워하나 주의 법은 사랑하나이다(시119:113). 첫 번째 유월절 밤 곧 이집트 땅에서 태어난 처음 난 것들에게 하나님께서 큰 재앙을 내리시던 밤에 이스라엘의 자손의 맏아들들은 어떻게 자신의 생명이 안전함을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출애굽기 12장 참조)? 이제 그 당시 이스라엘의 두 가정을 찾아가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첫째 집 사람들은 두려움과 불안에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처럼 죽을 지경이 되어 불안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그 집의 맏아들에게 이유를 묻자 그가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오늘 밤에 파멸시키는 천사가 우리 집을 지나갈 것입니다. 처음 난 것은 다 죽는다고 했으므로 제 생사가 어떻게 될지 몰라 온 가족이 안절부절못하고 떨고 있습니다. 정말 무섭습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행히 파멸시키는 천사가 우리 집을 그냥 넘어가고 새벽이 온다면 그때는 제가 안심할 수 있지만 그때까지는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지 않습니까? 옆집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전하다고 장담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것은 억측인 것 같습니다. 지금 저는 그저 일이 잘 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이 길고 무서운 밤이 지나가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우리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께서 이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주지 않았던가요?” 그는 대답합니다. “물론이지요. 우리는 이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1년 된 어린양을 잡고 우슬초에 그 피를 적셔서 문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것이 우리를 안전하게 하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번에는 불안에 떨고 있는 첫째 집을 떠나 그 옆집으로 가 봅시다. 언뜻 보기에도 그 집의 분위기는 첫째 집의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다릅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평안이 있었고 그들은 허리에 띠를 띠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서서 구운 고기를 먹으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찌된 일입니까? 이처럼 엄숙한 밤에 이 같은 평안이 있다니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그들은 말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금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하는 명령을 내리실 것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풀려나고 작업반장의 잔인한 채찍에서 벗어나서 자유의 몸이 될 것입니다.” “잠깐만요. 오늘 밤이 이집트를 심판하는 밤이라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 맏아들은 안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대로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뿌렸거든요.” “바로 옆집도 그렇게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불안해하던데요?” “아 그래요! 그런데 우리는 피를 뿌린 것보다 더 큰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고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출12:13). 우리 하나님은 밖에서 그 피로 인해 만족하실 것이고 우리는 안에서 그 말씀으로 인해 안전할 것입니다” 문에 뿌려진 피가 우리를 안전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우리를 확신하게 만듭니다. 문에 뿌려진 이 피보다 우리를 더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 있을까요? 그분의 입에서 나온 말씀보다 더 확실한 것이 있을까요? 이제 저는 여러분에 묻겠습니다. “이 두 집 중에서 어느 집 맏아들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두 평안히 거하고 있는 두 번째 집이라고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틀렸습니다. 두 집 모두 안전합니다. 그들의 안전은 하나님께서 밖에 뿌려진 피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지 안에 있는 그들의 느낌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구원의 확신의 복을 누리려면 당신의 속에서 나오는,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변하는 감정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고 절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느니라(요6:47). 이제 저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예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시골에서 한 농부가 자기의 가축을 위해 좋은 초장을 얻으려고 물색하던 차에 자기 집 근처에 좋은 초장을 세놓는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사용을 허가해 달라고 주인에게 신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주인에게서는 아무 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웃 사람이 찾아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분명히 그 초장을 임대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느끼고 있습니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에 주인이 당신에게 선물을 푸짐하게 보내왔고 지난번에는 그분이 마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당신을 보고는 손을 흔들기도 했지 않았습니까?” 그 이야기를 듣자 농부의 마음은 희망에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농부는 다른 이웃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이번에 당신이 그 목초지 사용 승낙을 받지 못할 것 같습니다. 실은 주인과 친한 사람이 그 목초지 임대 신청을 했다는데 요즈음 그 사람은 문턱이 닳도록 주인 집을 드나든다고 합디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농부의 희망은 산산조각 났고 한 때 희망으로 부풀었던 가슴은 이제 절망으로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어제는 희망으로 인해 기뻐서 날아갈 듯 했는데 오늘은 온통 걱정과 의심 밖에 남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집배원이 편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주인에게서 온 편지를 뜯으면서 그는 주인의 글씨가 분명함을 보고는 얼른 펴서 읽어 내려갔습니다. 몇 줄을 읽어 내려가는 농부의 얼굴에는 미소가 넘쳤습니다. 농부는 그것을 읽고 또 읽고 환호성을 올리며 아내를 불렀습니다. “여보, 이젠 됐어! 이젠 안심해도 돼. 이 편지를 보라고! 주인이 내가 필요한 대로 그곳을 마음대로 쓰라고 했고 임대 조건도 아주 유리하게 해 주었어. 이제 됐어. 끝이야. 다른 사람이 무어라 말하든 아무 상관없어!” 잠깐 생각해 봅시다. 수많은 영혼들이 가련하게도 이 농부와 같이 불안해하며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의견이나 자기의 마음속에서 생기는 허탄한 생각으로 인해 초조해하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의심과 초조함을 물리치고 확신 가운데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의 확신이 옵니다. 불신자에게 멸망을 선포하신 말씀이든, 성도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말씀이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거기에는 100% 확실함이 있습니다. 시편 119편 8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 주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정착되었나이다. 민수기 23장 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는도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은즉 그것을 행하지 아니하시리요? 그분께서 이르셨은즉 그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시리요? “나는 어떤 다른 논쟁도 논리도 필요 없습니다. 나는 또 다른 방법으로 청원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나를 위해 죽었습니다.“ 성도들은 여기에다 다음을 붙이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해 저도 당신에게 물어 보겠습니다. “당신은 오직 올바르신 분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만을 믿고 그분만을 신뢰하십니까?” 올바른 믿음이란 얼마나 잘 믿느냐 하는 양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과연 믿을 만한 분을 믿느냐 하는데 즉 질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물에 빠져 익사 직전에 있는 사람처럼 그분을 꽉 부여잡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간신히 그분의 옷단을 살짝 붙잡습니다. 둘 중에 어떤 사람이 더 안전할까요? 한 사람이 더 안전하거나 더 불안하지 않습니다. 앞에 있는 사람처럼 꽉 붙잡았다고 해서 더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둘 다 같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음을 알았고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만을 믿으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완전히 이루어 놓으신 구속의 공로만 유일한 구원의 근거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느니라(요6:47). 이제 확실히 아셔야 될 것이 있습니다. 당신이 선한 행위를 하거나 엄격한 종교 생활 혹은 종교 의식을 잘 지키거나 경건해졌다고 느끼거나 혹은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어려서부터 훌륭하게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당신이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확신을 갖게 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엄청나게 큰 확신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런 확신은 당신을 영원한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좋은 것을 신뢰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주 연약할지라도 바로 그 믿음이 여러분과 저를 영원토록 구원합니다. 이 외의 인간의 어떤 다른 선한 일도 우리를 구하지 못하며 그것은 다 마귀가 가져다주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착각이요, 자기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마3:17). 그래서 그분은 우리가 100% 확신을 갖고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촉구합니다. 어느 날 어떤 여인이 울상이 돼서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확실히 예수님을 제 구원자로 믿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누가 다가와서 저보고 구원받았느냐고 물으면 저는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두렵습니다. 혹시 구원받지도 못했으면서 받았다고 하면 거짓말이 될까 봐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의 아버지는 미드랜드에서 도살장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화창한 날에 시장이 열렸고 그녀의 아버지는 아직 시장에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의 아버지가 집에 올 때에 당신이 아버지에게 “아빠, 몇 마리나 사오셨어요?”라고 묻는다고 합시다. 또 그때에 아버지가 “열 마리를 사왔다.”고 말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얼마 후에 이웃 사람이 와서 “당신 아버지가 양을 몇 마리나 사오셨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무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글쎄요. 아빠가 말씀해 주셨지만 그게 거짓말이 될까 봐 말씀드리고 싶지 않네요.”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옆에 있는 어머니가 분노하면서 “그것은 네 아버지를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야”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독자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여러분은 여기 이 젊은 여인처럼 실제로 그리스도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며 그분께서는 분명히 내가 영존하는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혹시 내가 거짓말하는 것은 아닐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믿어 보려고 무던히 노력을 해 왔지만 모두가 허사였어요. 내 자신을 드려다 볼수록 확신은 고사하고 내가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었어요. 내 믿음을 보면 볼수록 나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독자여! 지금 당신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스스로 믿으려고 무척 애르 쓴다는 것이 이미 잘못된 것입니다. 제 말에 잠깐 귀를 기울이십시오. 다른 예를 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저녁 당신이 집에서 조용히 쉬고 있는데 이웃 사람이 찾아와서 역장이 철도 사고로 죽었다고 말했다 합시다. 그런데 지금 찾아와 이 소식을 전해 준 그 사람은 인근에 소문이 자자한 거짓말쟁이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겠지요? 믿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 제가 “당신은 그 사람 말을 믿으십니까? 아니면 믿으려고 노력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당신은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아 그래요. 그러면 왜 그 사람 말을 믿을 수 없습니까?”라고 반문한다면 이렇게 말하겠지요. “그 사람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누가 그런 사기꾼의 말을 믿어 줍니까?” 이로 보건대 어떤 사람의 말을 믿는 것은 우리 속의 우리 믿음이나 감정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실을 전해 준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그 말이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를 판단합니다. 그런데 조금 뒤에 또 다른 이웃이 찾아와서 역장이 화물 열차에 치어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다시 전해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래도 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서 아마도 당신은 그것이 정말이라고 믿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시 한 번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그 사람 말을 조금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신 내부의 믿음이나 감정 때문입니까?” 그러자 그는 “아닙니다. 나는 그것을 알려준 사람에 의해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가자마자 아주 절친한 친구가 찾아와서 같은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당신은 “자네 말이라면 여부가 있겠나? 딱하게도 역장이 교통사고로 희생을 당했군!”하고 말할 것입니다. 이제 제가 묻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 친구의 말을 고스란히 믿으십니까?” 그러면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거짓말을 한다거나 저를 속인 적이 없습니다.” 결국 당신은 사건 현장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또는 당신의 맘속에 그럴 듯하게 보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내게 복음을 전해 주는 그분 즉 그리스도 예수님으로 인해 그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내 감정이나 내 속의 믿음 때문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언은 더 크도다. 이것은 하나님의 증언이니 곧 그분께서 자신의 아들에 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이 증언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그분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었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 관하여 주신 증언을 그가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라(요일5:9-10). 아브라함은 사람의 증언이 아니라 자기가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증언을 받았을 때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 기록이 무어라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하느니라.(롬4:3). 구원의 확신을 갈망하는 한 불쌍한 영혼이 그리스도의 종에게 나와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선생님, 도무지 믿어지질 않으니 어쩌면 좋죠?” 그때 상담을 하던 설교자는 조용하고도 슬기롭게 반문했습니다. “그러세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그분이 누구시지요?” 이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 사람은 이 악순환의 사슬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 자기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주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의 공로를 바라보고 믿는 대신 그리고 이에 대하여 증언하는 성경 말씀을 신뢰하는 대신 - 즉 자기 밖에서 이루어진 일에 대한 믿음이 없이 - 자꾸 자기 자신이 자기 속에서 무언가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기 속에서 증거를 찾고자 했던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밖에서 일어난 일이 우리의 안에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태양을 등지면 그림자가 앞을 어둡게 하지만 태양을 바라보면 그림자가 등 뒤에서 보이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내 자신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에 볼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계신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와 자기 자신을 동시에 보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려는 사람은 이 일에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우리 밖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볼 때 생기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단번에 완성하신 구속 사업을 통해 이미 독자와 저를 영원토록 안전하게 해 주셨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영원토록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구원의 방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성취하신 일 안에서 찾을 수 있고 구원의 확신과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 속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2009-05-08 13:46:44 | 관리자
구원 받은 이후에 마귀는 종종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심하게 합니다. 의심이 생기는 것은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의심 자체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의심이 생기는 좋은 징조입니다. 이때에 결코 우리의 감정에 의지하지 마십시오. 저도 나이가 이렇게 들었지만 어떤 때는 의심이 듭니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별로 발전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때 구원의 확신에 의심이 듭니다. 여기에 대한 해결책은 다른 것 없습니다. 성경을 믿어야 합니다. 내 감정이 아니라 성경 그 자체가 우리에게 확신을 줄 것입니다. 의심이 들 때마다 다음의 글을 읽고 성경 말씀만을 신뢰하기 바랍니다. 두 사람이 갑판 위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나는 자네와 몹시 대화를 나누고 싶었네. 자네는 구원받은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고 하던데….” “예, 저는 구원받은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구원받은 것보다 더 분명한 사실은 없을 것입니다.”“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좀 교만한 말이 아닌가? 사실 나도 한 때는 성실하게 교회에 다녔네. 하지만 내가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어. 왜냐하면 나는 진정 그리스도인이 아니거든.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지만 사실 위선자가 많아. 그래서 나는 교회에 나가는 일을 그만 두었지. 모든 것이 가짜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야. 하지만 나는 가끔 기독교에 어떤 진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곤 하지.” “저는 그 말씀에 전혀 놀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원받았다는 말과 구원받은 것을 안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반장님, 이 배수구의 둘레는 얼마입니까?” “배수구의 둘레는 48센티미터가 아닌가! 그런데 왜 그것을 묻지?” “반장님은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이 책에 의거하여 확신할 수 있지. 이 책은 본사에서 보내온 것으로 이 배에 대한 설명서가 아닌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구원받은 것을 아는 방법과 같습니다. 저는 성경말씀에 의해서 구원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은 하늘의 본부에서 보내 온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경말씀 안에서 제가 정죄받은 죄인이라는 것과(롬3:23) 지옥의 불 호수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계21:8). 하지만 저는 또 하나님께서 죄인인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과(롬5:8) 그래서 자신의 유일한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저를 대신하여 죽게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벧전2:24). 저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그는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요5:24). 이 말씀대로 저는 지금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으며 장차 있을 심판에 이르지 않으며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저는 제가 구원받았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교만이겠습니까?”
2009-05-08 13:46:01 | 관리자
율법은 모세를 통해 왔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다(요1:17). 율법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졌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안식일에 관한 법이다. 안식일은 결코 이방인들에게 준 것이 아니며 모세와의 언약의 표적으로 준 것이다(출20:12; 19-21).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하기 위해 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행함으로 그분 앞에서 의롭게 될 육체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롬3:20; 갈2:16). 율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려고 준 것이다(롬3:20). 유대인들의 일곱 명절이나 번제 헌물과 같은 의식법의 모든 예식과 의식은 예표로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님이 오셔서 완전하게 율법을 이루셨으므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롬10:4; 갈2:19). 반면에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긍휼이다(엡2:8-9). 은혜의 유일한 통로는 그리스도이며(딛2:11) 은혜를 입기 위한 유일한 도구는 믿음이다(엡2:8). 율법: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신6:5). 은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셨나니 여기에 사랑이 있느니라(요일4:10).   율법 은혜 종(히3:5) 네 신을 벗어라(출3:3-5)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레18:5). 거룩함을 요구함 양이 목자를 위해 죽음 여러 번의 수많은 짐승 희생물 아들(히3:6) 네 신을 신어라(눅15:22) 살라. 그리고 행하라(엡2:8-10). 거룩함을 줌 목자가 양을 위해 죽음 단 한 번의 영원한 희생물
2009-05-08 13:45:26 | 관리자
다음 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요1:29). 하나님은 눈이 심히 정결하시므로 악을 보지 못하신다(합1:13). 그러므로 누구라도 죄가 있는 존재는 그분 앞에 설 수 없다. 성경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그분께서 죄 없는 짐승을 잡아서 그의 수치를 가리도록 옷을 만들어 주신 이후로(창3:21)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서려면 죄 없는 희생물을 대신 죽이고 피를 흘려서 속죄를 이루어야만 함을 보여 준다. 특별히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이 점을 시청각 교육으로 잘 보여 주셨다. 이스라엘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는 소나 양 등의 짐승을 끌고 성막 앞의 제사장에게로 간다(레1:2-9). 제사장은 그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여 죄인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키고 죄인에게 칼을 주며 짐승의 목을 따라고 한다. 그가 칼을 양의 목에 꽂는 순간 양은 비명을 지르고 피가 튀겨 나온다. 이로써 죄인은 죄가 있으면 반드시 피를 흘리는 희생물이 있어야만 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는 이 제물을 여러 조각 내서 번제 헌물 제단에 던져 태워야 한다. 이것을 통해 죄인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이후에 뜨거운 지옥 불의 정죄가 있어서 고통을 받아야 함을 깨닫는다. 이런 일은 또 유월절(출12)과 속죄일(레23:27-32)에서도 이루어져서 죽음을 막기 위해 흠 없는 어린양이나 소가 피를 흘리고 죽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짐승의 희생은 죄를 제거하지 못하고 잠시 덮는 역할을 하며 예표의 기능을 했을 뿐이다(히10:4).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피조 세상 외부에 계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스스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완전한 희생물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지옥의 고통을 다 담당해서 영원한 대신 속죄를 이루셨다(히9:12). 구약시대에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제사장이라는 중보자가 있었으나 주님께서 죽으실 때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지면서 사람이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다(마27:51; 히6:19-20). 그분께서 단번에 세상의 죄를 영원토록 다 제거하셨으므로 더 이상 다른 희생물이나 제사장이 필요 없다(히10:18).
2009-05-08 13:43:49 | 관리자
● 필요성: 모든 물건에는 그것들을 만든 존재 즉 메이커가 있습니다. 주변을 보십시오. 펜, 의자, 자동차, 책 등이 모두 메이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모든 메이커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물건을 판단하여 폐기 처분합니다. 이와 마찬 가지로 사람에게도 메이커가 있습니다. 물건도 메이커가 있는데 하물며 물건을 설계하는 고등 존재인 사람이 흙에서 그냥 생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을 만든 메이커가 그 사람이 자신의 목적에 부합되는 삶을 살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때가 있습니다(행17:31; 히9:27). 이 같은 심판에서 부적격자로 드러난 사람은 메이커가 폐기시킵니다. 성경은 이 같은 메이커를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폐기 처분되는 것을 ‘유황 불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계20:10). 그러므로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내게 메이커가 있는가, 없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 방해물: 사람과 물건의 차이는 사람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부적격자로 판정내리는 근거가 죄라고 말하는데 근본적으로 죄란 ‘목표에서 벗어난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사람을 만드시며 사람이 자신의 영광에 이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유 의지를 이용하여 고의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는 그분의 목적에서 벗어나 그분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롬3:23). 첫 사람 아담에게서 시작된 이 죄라는 독은 사람의 핏줄을 타고 전 인류에게 퍼졌습니다(창5:3; 롬3:10).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에 따라 그 이후 모든 사람에게 육체적인 사망이 임했고(롬6:23)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모든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과 떨어져서 지옥 불속에서 지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눈이 정결하셔서 티끌만큼의 죄도 차마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합1:13). 그러므로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과연 나는 죄인인가, 아닌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 계획: 설사 펜 공장에서 나오는 펜이 자기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해도 자기 자신이 혹은 그 옆의 펜이 그 펜을 고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죄의 병은 똑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 즉 공자, 석가모니, 마호메트, 소크라테스 등이 고칠 수 없습니다. 펜을 설계한 메이커가 펜을 고칠 수 있듯이 사람의 설계자인 하나님 즉 사람과 차원이 다른 외부의 존재만이 사람의 죄의 독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행4:12). ● 방법: 사람의 죄의 병을 고치기 위해 하나님은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처녀 탄생을 통해 죄 없이 이 땅에 내려와서 죄 없는 삶을 사시고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완전한 희생 예물이 되어 단 한 번에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습니다(마1:23; 고후5:21; 히9:26).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죄가 되셔서 하나님의 뜨거운 지옥 불의 심판을 다 담당한 뒤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몸으로 부활하셔서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공기나 햇빛같이 사람에게 필수불가결한 모든 것을 거저 주십니다. 이런 것은 너무 귀하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 선행이나 노력으로 구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원한 생명 역시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은혜로 주어집니다(롬5: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속죄 사역을 믿기만 하면 행위와 상관없이 은혜로, 선물로 구원을 받습니다(엡2:8-9).  ● 확신: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말을 믿습니까? 그 사람의 신실함에 근거해서 믿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 곧 온 천하 만물을 만드신 분께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사람의 말을 신뢰하지 말기 바랍니다. 구원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창조주 그분이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기에 우리는 그것이 진리임을 믿습니다(요14:6).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한 영원한 생명이니라”(롬6:23). ● 초청: 인생은 마치 달리는 기차역을 향해 달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단 몇 시간을 아끼려고 열차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역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원이라는 무궁한 시간을 아끼려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은 언제 닥칠지 모릅니다(히3:13). 나이와 직업과 성별과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오늘 그 시간이 닥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이 베푸시는 방법을 그대로 믿고 수용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에게 다시 태어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벧전1:23).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십시오. 그분께서 약속하신 대로 누구나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값없이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2009-05-08 13:43:10 | 관리자
속죄(Atonement):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죄로 인해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 것. 이 대신 속죄의 죽음으로 인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화해하고 죄의 형벌에서 벗어나며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복음의 위대한 특징이며 신구약성경에서 여러 가지 용어와 실례로 묘사되었다. 구속, 희생물 참조.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은 둘이 되어 서로 간격이 벌어진 채 분리되었는데 속죄의 목적은 이 둘을 합쳐 다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법을 어긴 것에 대한 형벌은 법을 어긴 사람이나 혹은 대리자나 보증인에게 내려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법은 아무 효력도 없게 된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 법이 아니라 그것의 형벌이다. 속죄란 행정부에 존재하는 예비규정으로 법률 위반에 따른 형벌로부터 범법자를 사면하기 위해 공의롭고 안전하며 받아들일 만한 근거 위에 마련한 법률 규정이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해 법을 만드셨고 그것을 어길 경우의 형벌을 제정하셨다(창2:16-17). 그런데 아담과 이브는 금지된 열매를 먹어 그분의 법을 어기고 그로 인해 죽게 되었으며 이제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말씀을 어기지 않고서는 죽음의 형벌을 철회할 수 없게 되었다. 또 그분께서 자신이 말씀하신 것을 지키지 않을 경우 아담과 하와는 미래에도 계속해서 그분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의심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로 인한 형벌은 피조물인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를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누군가에게 형벌을 내려야만 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사랑과 공의로 마련하여 인류를 대신해서 속죄하게 만든 존재 즉 대속자는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 곧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대신 속죄 선도 참조(89).그러나 이러한 대속 사역은 즉시로 준비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아담의 불순종에 대한 형벌을 실제로 받으신 것은 그로부터 약 4000년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그 4000년 동안 수소나 염소 또는 흠 없는 어린양이 히브리 사람들의 제단 위에서 타면서 연기를 냈는데 이는 피 흘림이 없이는 죄들의 사면이 없음을 시청각적으로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또한 유월절마다 어린양의 피를 뿌린 것은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셔야 했던 분을 암시하였다(요1:29). 드디어 참된 희생물을 드릴 충만한 때가 이르자(갈4:4)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율법과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켰고 하나님께서는 이때에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사 자신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는 이가 되셨다(롬3:26).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 특별한 희생 체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속죄를 얻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만이 인류를 위한 유일한 죄 헌물이요, 하나님의 어린양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분께서 자신의 몸을 단 한 번 영원하게 드려 세상의 모든 죄를 제거했으므로 그분 이후에는 더 이상 짐승의 희생 예물이 필요 없다(요1:29; 고전5:7; 엡1:7; 히9:26).한편 그리스도의 속죄는 단순히 대속만을 의미하지 않고 서로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연합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충족시키기 위해 가차 없이 자신의 아들에게서 죄의 대가를 거둘 정도로 공정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믿는 자로서 우리 자신을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겨야 한다(롬7:4).어떤 이들은 선택 받은 자들에게만 예수님의 속죄가 적용된다는 ‘제한 속죄’ 이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몇몇 사람만을 구원하시려고 돌아가시지 않고 아담의 불순종에 대한 형벌을 치르기 위해 돌아가셨다. 그 죽음의 형벌로 인해 그분께서는 죄의 저주로부터 인류를 구속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위치에 두셨다. “그분은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 우리의 죄들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라”(요일2:2). 그러므로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을 제한시키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누구든지 그분의 피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선택, 예정 참조.한편 화해라는 말은 화목하게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긍휼로 온 세상을 대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롬5:10).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화평을 이루사 모든 것 곧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다(골1:20). 비록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속죄가 온 인류를 위한 것이지만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는 않으므로 이것은 결코 보편적 구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의 조건 곧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성하신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2009-05-08 13:42:20 | 관리자
구속(Redemption): 속죄(Atonement)와 구속은 동일한 의미를 가진 것처럼 이해된다. 속죄 참조. 이 두 용어는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완성하신 사역의 결과이지만 조금 차이가 있다. 구속이란 현재는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으나 합법적으로 자신의 소유인 것을 되찾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말에서는 ‘무르다’ 혹은 ‘속량하다’로도 표현되었다. 그런데 소유물을 되찾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의 법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이 영께서는 값 주고 사신 그 소유물이 구속을 받기까지 우리의 상속 유업의 보증이 되사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시느니라.”(엡1:14)는 말씀에 나오는바 구속받아야 할 소유물은 바로 바울이 롬8:22-23에서 말하는 양자 삼으심의 대상인 우리 몸이다.   아담은 죄를 범했을 때 몸의 영원성과 땅의 상속권을 상실했으며 그 후 아담의 씨가 받아야 할 모든 상속물이 사탄의 수하에 들어가고 말았다(눅4:6). 아담은 스스로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지만 성경은 소유주의 가까운 친족이 소유주가 잃어버린 소유물을 되찾을 수 있다고 규정하며(레25:23-24)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친족으로 예비하셨다. 친족이 되기 위해 먼저 그분은 사람으로 태어나셔야만 했고 하나님은 처녀 탄생으로 이 일을 성취하셨다. 처녀 탄생: 예수님의 계보 선도 참조(63).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를 구속의 값으로 지불하셨다(벧전 1:18-20).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원자로 영접하는 순간 그의 영과 혼은 구속되지만 그의 몸은 그분께서 오실 때에 부활하며 완전히 구속된다(빌3:20-21). 또한 주님은 마귀에게 넘어가서 신음하는 피조 세계를 천년왕국 때에 구속하여 원래의 모습으로 바꾸시고 궁극적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로 완전한 구속을 이루신다. 만물의 회복 선도 참조(94).
2009-05-08 13:41:45 | 관리자
구원(Salvation): 이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구출하는 것을 뜻하며 그래서 종종 잠정적인 구출을 뜻하는 데도 쓰였다(창14:13; 삼상14:45). 그러나 우리의 구속자 주님을 통해 죄와 죽음에서 영적으로 구출되는 것(마1:21)이야 말로 이보다 훨씬 더 큰 구원이며 그래서 구원은 대개 이와 같은 영적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 구원은 구출뿐만 아니라 구출의 결과 즉 우리 주님의 왕국에서의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뜻하기도 한다(고후7:10; 엡1:13). 그래서 구원은 ‘이 큰 구원’이라고 합당하게 묘사되어 있다(히2:3). 구원의 원리 선도 참조(88).히브리 사람들은 구체적인 용어보다 추상적인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구원하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구원의 소리, 구원의 소식, 구원의 반석, 구원의 방패, 구원의 뿔은 구출을 선포하는 목소리, 큰 위험에서 빠져나올 때의 기쁨, 피신하여 안전히 거할 수 있는 바위,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방패, 영광과 기쁨의 뿔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서 큰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은 “다가오는 큰 위험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였다.”는 뜻이다. 구원의 옷은 명절 등에 입는 화려한 옷을 말하며(사61:10) 이는 상징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호의를 입는 것 즉 큰 위험에서 구출 받는 것을 뜻한다. 끝으로 딤전2:15의 “여자가 해산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은 여자가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가운데 거하면서 이브로 말미암은 해산의 저주의 고통을 느끼며 자신을 낮추면 이브가 당했던 속임수에서 구출되는 것을 말한다.
2009-05-08 13:41:05 | 관리자
1. 들머리 제 10회차 로또 복권 추첨 하루 전인 지난 2월 7일, 한 직장 동료의 안내로 로또 복권을 구입하러 병원 근처의 어느 조그만 편의점을 방문하였다. 점심시간이어서 인지 많은 사람들이 로또 복권을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나도 그 행렬에 잠시 끼어 복권을 구입한 뒤 동료와 함께 돌아오는데 복권 영수증을 넣어둔 안주머니로부터 가느다란 한 줄기 신기루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번에 일등 당첨금이 800억 원도 넘어설 거라고 하던데 만약 일등에 당첨이 된다면 …. 복권판매점마다 복권용지가 부족해 영화표 끊는 것보다 복권 사는 것이 더 힘들 정도로 전국을 들끓게 하고 있는 ‘로또 광풍’의 현장 속에 들어가 ‘성경으로 세상보기’ 칼럼을 써야겠다는 미명 하에 복권을 사고 났지만 정말 추첨기계의 실수로 일등에 당첨이 된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 정답은 전액 기부이지. 그렇지만 조금은 아쉽기도 하겠지. 그리고 또 얼마나 귀찮은 일들이 많이 생길까. 적지 않은 오해를 받기도 하겠고 특히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지인들이 여러 충고와 부탁을 할 때에 그걸 잘 극복하기도 쉽지 않겠지…. ‘한 날의 악은 그 날에 족하다’(마6:34하)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그 다음 날 추첨이 있던 시간까지 점차 확대되어 가는 망상을 주체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딸아이를 시켜 인터넷으로 당첨번호를 조회해 본 결과, 감사하게도 신청하였던 두 장 모두가 다 꽝으로 나오고 말았다. 2. 로또 복권 무려 판매액이 2,600억 원이었다고 하는 이 ‘로또 광풍’으로 인해 한반도의 핵 문제나 정부가 현대를 통해 북한에 불법으로 송금한 수억 달러 진상규명 등 민족적, 국가적 관심사들은 이미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다. 그리고 복권 판매대 옆에서 도움을 청하는 화상 환자도 못 본 척 그냥 지나쳐 버리면서 빠른 발걸음으로 복권을 사기 위한 긴 행렬에 합류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자화상이 되어버렸다. 정말 사회전반에 깔려있는 배금주의와 한탕주의가 위험수위를 넘어선 것 같다. 근로자들의 근로의욕을 떨어뜨리고 국가 경쟁력을 좀먹는 이 같은 놀음문화를 정부가 앞장서서 공익사업을 위한 재원 마련이라는 미명 하에 주도하고 있는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로또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천만 불 이상 당첨된 사람들을 조사해 보니 10년 후 정상적인 생활을 한 경우는 거의 없고 이혼, 마약복용, 파산, 정신병자, 심지어 자살 등 비참한 여생을 살았던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고 보도되고 있는데 이는 곧 우리의 내일의 모습에 대한 예고편이라 여겨지기에 더욱 씁쓸함과 허망함이 솟구침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 성경은 말씀한다. “이는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기 때문이니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잘못하고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딤전6:10, 이하 흠정역) “누구든지 일하지 아니하거든 먹지도 말라 하였으니”(살후3:10하) 3. 복(福) 로또 복권뿐 아니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종류의 복권이 발행되고 있는 이유는 복권수입으로 공익에 투자해 많은 국민이 복을 누릴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 하나요, 또 극히 일부의 구매자들에게 많은 물질의 복을 선사해 ‘인생역전’을 이루게 해준다는 미명이 또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포털 사이트 다음(www.daum.net)이 네티즌 2만8천여 명을 대상으로 로또 복권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결과 ‘희망과 재미를 주는 레저행위’라며 찬성한 응답이 41.9%나 나온 사실로 볼 때에 앞서 언급된 복권발행의 정당성(?)에 호응하여 복을 얻고자 하는 열망은 날로 지속되리라 전망이 된다. 그렇다면 역사 이래 인구에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는 복(福)이 무엇이길래 그러한가라는 원초적 물음이 이 시점에서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한자어 복(福)이 어떻게 해서 ‘보일 시(示)’ 변(邊)에 ‘한 일(一)’, ‘입 구(口)’, ‘밭 전(田)’으로 구성되었는지, 그래서 복(福)이란 그 쉽지 않은 추상적 개념을 나타내고 있는지 강(C. H. Kang)과 넬슨(Ethel R. Nelson)이 분석한 상형문자의 특성을 살펴보면서 복(福)을 정의해 보도록 하자. ‘示(시)’자는 원래 제단의 모양(示)을 본뜬 글자로서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고 계시를 베푸신다는 뜻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의미하는 부수가 되었다. 아울러 가운데 획 ‘一’의 위쪽은 ‘한(一) 하나님’(one God)을 의미하며 가운데 획 ‘一’의 아래는 우리에게 ‘세(小) 분’(three persons)으로 드러나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요일5:7). ‘一(일)’자는 하나(one)라는 뜻이며 ‘口(구)’자는 입을 가진 말하는 존재 곧 사람(man)을 나타낸다. 그리고 ‘田(전)’자는 한 곳에서 발원하여 ‘네 강’(十)이 흐르는 지역(口)을 의미한다. 곧 비손, 기혼, 힛데겔, 유프라테스 등 네 강이 흐르던 에덴 동산을 의미한다(창2:10-14). 그렇다면 복(福)이란 하나님(示)께서 첫(一) 사람(口) 아담을 에덴 동산(田)에 두신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후 아직 죄와 사망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 그 창조의 클라이막스로 만드신 인간에게 에덴 동산에서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신 유토피아를 나타내는 개념이다(창1:28, 2:15).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매우 좋았더라.”(창1:31상) 4. 복(blessing) 또한 복(福)을 영어로 블레싱(blessing)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서구 유러피안들이 bless(복주다)를 정의해 왔는지 최신판 웹스터 영어 백과 사전(Webster's Encyclopedic Unabridged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1996)과 노아 웹스터(Noah Webster) 초판 영어 사전(American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1828)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bless’는 고대 영어(Old English)에서 ‘bletsian’이나 ‘bledsian’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피(blood)로써 신성하게 한다(consecrate)는 의미가 있다. 또 이보다 앞서 고대 프레즈랜드(Friesland)어(Old Frisian)나 고대 색슨어(Old Saxon)에서는 ‘blÕdisÕnian'으로 쓰였는데 여기에서 ‘blÕd'는 명백히 blood(피)라는 의미이다. 즉 피(blood)가 복(bless)이 되었다는 말인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타락한 직후 그 허물을 가려주시기 위해 짐승의 피를 흘려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주셨다(창3:21). 그래서 아벨은 하나님의 방식인 피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히11:4). 그리고 나서 지금까지 피흘림은 죄인인 우리가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되었다(히9:22). “피흘림이 없은즉 사면(赦免)이 없느니라.”(히9:22하)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무죄한 피(the innocent blood, 마27:4)를 우리를 위해 흘려주시게 된 것이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따라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혈로 자기의 모든 죄가 영원히 단 번에 씻어진 사실을 믿는 사람보다 더 복된 자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히10:10; 롬4:7,8).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일으켜 세우시고 너희에게 복을 주시려고 그분을 먼저 보내사 너희 각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불법들에서 돌아서게 하셨느니라.”(행3:26) “자기 불법들을 용서받고 자기 죄들이 가려진 자들은 복이 있으며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4:7,8) 5. 선택(選擇, free will) 우리나라보다 앞서 올해 초 로또 복권을 도입한 대만의 경우, 1,000억 대만달러(약 4조 원)의 매출을 예상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세계 복권 시장은 온라인 복권이 60.7%를 점유하고 있는데, 이 중 로또가 43%로 가장 많이 판매되는 게임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왜 이처럼 로또 복권이 전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일까? 필자도 경험한 바이지만 기존의 복권과 달리 로또 복권은 구매자가 능동적으로 여섯 숫자를 선택할 수 있는 게임 방식이 가장 매력적인 요소로 생각된다. 자기 자신이 팔백 만여 경우를 다 헤아려보고 나서 직접 여섯 숫자를 기입한 것이 복권(福券)이 되어 수십 억 또는 수백 억의 복을 선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인기가 올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로또 게임을 하는 것과 똑 같이 ‘선택(選擇, free will)’이라는 방식으로 우리는 영원한 복 곧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앞에서 설명된 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실 영생의 복을 이미 다 마련해 놓으셨다. 이제는 우리의 차례이다. 예수님께서 내미신 손을 믿음을 갖고 능동적으로 붙잡는 우리의 선택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분(Jesus)을 영접한 자 곧 그분의 이름(he sha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으니”(요1:12) “그러므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것을 네 마음 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니라.”(롬10:9,10) 6. 복된 소망(Blessed hope) 복권 판매점에 나붙은 갖가지 선전문구 가운데 ‘인생역전’만큼 가장 함축적으로 ‘복된 소망’을 나타내 주는 말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이들이 평소 이뤄보길 소망했던 바를 성취해 보려고 복권 판매점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게 되는 것이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미 영생의 복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 곧 영원한 불못을 향해 가던 삶으로부터 인생역전을 한 자들은 이제 남은 짧은 나그네 인생길에서 다른 것에 소망을 둘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시기에 우리는 주님만을 신뢰하고 주님께만 소망을 두면 되기 때문이다(마6:32; 렘17:7). “주를 신뢰하며 주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가 물가에 심은 나무 같아서 그 뿌리를 강가에 뻗치고 더위가 오는 때를 보지 아니하며 그 잎이 푸르르고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으며 열매맺는 일을 그치지 아니할 것임이라.”(렘17:7) 그리고 주님 다시 오실 때가 가까운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정말로 복된 소망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때 예수님의 보혈을 받아들인 자들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다(살전4:16,17).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들로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를 세워주며 주님의 영광스런 재림을 기다리는 자 곧 ‘복된 소망’을 소유한 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살전4:18; 5:11; 딛2:13). “저 복된 소망과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음이라.”(딛2:13) 7. 마무리 제6회 로또 복권에 당첨돼 당첨금 65억7천만 원을 받은 1등 당첨자 J씨가 SBS 「생방송! 세븐 데이즈」에 출연하여 모자이크 처리된 얼굴과 변조된 음성으로 당첨금 수령이후의 심경을 얘기했다. 40대 가장인 J씨는 “생활에 변화가 있었는가?”라는 물음에 “살이 5㎏이나 빠졌고 돈이 생기니까 생각할 게 많아졌으며 누가 와서 괴롭힐 것이라고 주변에서 많이 얘기들을 한다.”고 토로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고 회복될 에덴동산의 시민권을 얻은 자들 곧 영생의 복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내일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마6:34; 요14:1). 왜냐하면 언제 어떠한 모양으로 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주님 까닭에 우리는 영원한 본향으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요14:2,3). 그리고 곧 주님께서 다시 오실 터인데 그 때까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또 복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눅11:28하; 계1:3). “이제부터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14:13상) “이 대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들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때가 가깝기 때문이라.”(계1:3)
2009-05-08 13:39:41 | 관리자
1. 게이트로 들어가며 "새해에는 더 이상 게이트란 말을 듣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2002년 1월 1일 MBC TV 9시 뉴스 시간, 새해의 소망을 묻는 기자에게 답한 어느 시민의 소박한 바램이다. 진승현 게이트·정현준 게이트·이용호 게이트·윤태식 게이트 등등 이름도 다 기억할 수 없는 많은 게이트들로 신문 지면이 도배되고 있는 요즈음 우리는 소위 '게이트 공화국'이라는 새로운 국적을 지니고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울러 워싱턴 포스트의 두 젊은 기자가 끈질긴 추적으로 폭로한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따온 말로 '권력형 비리'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신조어 '게이트'는 원조인 미국에서나 체인점인 한국에서나 이제는 다른 말로 대치하기가 불가능한 단어로 그 입지를 확실히 굳히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게이트들을 목도하면서 비록 동음이의어로 사용되었지만 성경에 나타난 게이트(gate)들을 살펴보며 게이트로 표현되는 우리의 본성과 또 그로 인한 우리 인생의 결국이 어떠한지 분별할 수 있었으면 한다. 2. 워터게이트(watergate) 최근의 여론조사에서 아직도 대다수 미국인들은 30년 전 리차드 마일러스 닉슨(1913-1994)의 행동은 "사임해야 마땅한 것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현재 일반적인 미국인들의 기억 속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의 세세한 내용들은 잊혀져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필자는 오래 전 어느 미국 어린이가 워터게이트 사건을 닉슨 대통령이 물탱크의 문을 잘못 다뤄서 큰 난리가 나게 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보도를 접했던 기억이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1972년 닉슨이 재선을 위해 뛰고 있을 무렵, 암암리에 야당을 정찰하고 야당의 명예를 실추시키려는 활동의 일환으로 워싱턴에 있는 워터게이트 빌딩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하여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된 사건을 말한다. 그 빌딩의 이름이 왜 워터게이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미국 역사 속에서 물저장고의 문이 있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론을 해보게 되는데 성경 속에도 워터게이트(water gate)란 말이 5번 언급이 되고 있으며(느3:26; 8:1,3,16; 12:37) 이 중 워터게이트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이 느헤미야 8장에 기술이 되어 있어서 이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온 백성이 한 사람처럼 물 문(water gate) 앞 거리에 함께 모여 서기관 에스라에게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 책을 가져 오라 말하매 일곱째 날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 책을 가져다가 남녀 회중과 지각이 있어 들을 수 있는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물 문(water gate) 앞 거리에서 남자와 여자와 깨달을 수 있는 사람들 앞에서 읽으매 온 백성이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더라."(느8:1-3, 이하 킹제임스 흠정역) "에스라가 주 곧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매 온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머리를 숙여 얼굴을 땅에 대고 주께 경배하였느니라."(느8:6) "그 때에 온 백성이 율법의 말씀들을 듣고 울므로 디르사다인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서기관인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온 백성에게 이르기를, 이 날은 주 너희 하나님께 거룩한 날이니 애곡하지 말며 슬피 울지 말라, 하고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기름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아무것도 예비하지 못한 자들에게 일부를 보낼지니 그 까닭은 이 날이 우리 주께 거룩한 날이기 때문이니라. 너희는 또한 근심하지 말지니 이는 주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 힘이기 때문이니라, 하고 레위 사람들도 온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기를, 오늘은 거룩한 날이니 조용히 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매 온 백성이 가서 먹고 마시며 일부를 보내고 크게 기뻐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자기들에게 밝히 증거된 그 말씀들을 깨달음이었더라."(느8:9-12) 그렇다. AD 1972년의 워터게이트 사건은 불법을 행하고도 회개하지 않아 온갖 수치와 고통을 겪게 되었던 저주스러운 사건이었지만, BC 444년에 일어났던 워터게이트 사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회개하여 커다란 기쁨을 맛볼 수 있었던 복된 사건이었다.   3. 법의 게이트 워터게이트 사건에서는 다수의 백악관과 정보기관의 인물 및 법무장관 리차드 클레인디엔스트가 워터게이트 침입과 그에 이은 은폐에 연루되어 사직하였고 닉슨 자신도 자신이 임명한 특별 검사 아키발드 콕스에 의해 은폐에 가담하였음이 밝혀져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또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게이트들에도 대통령의 아들을 비롯한 여권 실세들뿐 아니라 검찰과 국가정보원의 고위 간부 등의 이름이 2중·3중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한 나라의 통치의 기준이 되는 법을 세우고 집행하는 이들이 게이트의 주인공이 됨은 앞서 언급된 게이트란 단어의 정의를 볼 때 필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성경에서는 법의 집행이 게이트(성문)에서 이뤄졌음을 보여주고 있고(신16:18; 삼하15:2; 잠22:22,23) 특별히 신명기에서는 어떻게 법이 집행되어야 함을 잘 제시해 주고 있다.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주시는 네 모든 성문(gate) 안에서 너는 네 모든 지파에 두루 재판관과 관원들을 둘 것이요, 그들은 의로운 재판으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고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이는 뇌물이 지혜로운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기 때문이니라. 너는 전적으로 의로운 것만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상속하리라."(신16:18-20) 4. 사업의 게이트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들이 연루된 무슨 무슨 '게이트'가 터져 나올 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벤처기업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진승현 게이트와 MCI코리아, 이용호 게이트와 G&G, 윤태식 게이트와 패스21 등등. 따라서 벤처, 코스닥과 관련된 제4, 제5의 게이트가 연속으로 터질 것이란 소문이 무성한 것이 작금의 상황이다. 게이트의 속성 상 정치자금 및 뇌물로 들어갈 돈이 필요한데 그러자면 자연히 부정한 사업(business)과 그에 따른 부정한 산물(product)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아니할 수 없겠다. 그런데 성경에 쓰여져 있는 게이트의 용례 가운데에도 사업과 거래의 장소로 언급된 경우들이 있는데(창23:10; 34:20; 왕하7:1,18), 이 중 정말로 우리가 소망하는 사업 방식 곧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로 인한 거래가 열왕기하 7장에 잘 기술되어 있다. "이에 (시리아 사람들이 사마리아를 에워쌌는 데다가 사마리아의 기근으로 인해 여인들이 자기 아이들을 먹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왕이 사람을 보내어 엘리사를 죽이려고 할 때) 엘리사가 이르되, 너희는 주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gate)에서 고운 밀가루 일 세아가 일 세겔에 팔리고 보리 이 세아가 일 세겔에 팔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니"(왕하7:1) "그들이 시리아 사람들의 뒤를 따라 요르단에 이른즉, 보라, 시리아 사람들이 급한 김에 내어버린 의복과 기구들이 온 길에 가득하였더라. 사자들이 돌아와서 왕에게 고하매 백성이 나가서 시리아 사람들의 진영을 노략하니라. 이에 고운 밀가루 일 세아가 일 세겔에 팔리고 보리 이 세아가 일 세겔에 팔리니 주의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왕하7:15,16) 5. 우상숭배의 게이트 현재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게이트들의 대체적인 공통점은 호남출신의 정·관계 실력자와 사업가, 그리고 조폭 등이 형님·아우 관계로 얽혀있다는 점인데 윤태식 게이트가 불거지기 전인 구랍 20일 한나라당 이재오 원내총무는 "대략 5,000억 원대의 뭉칫돈이 진승현·정현준·이용호 게이트를 통해 만들어졌다"며 "이 돈 중 얼마가 로비에 쓰였고, 얼마가 재투자됐는지, 또 부정한 뒷돈으로 만들어진 것이 얼마인지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게이트에 연루된 이들의 배경이 어떠하든 이들의 가치관은 오직 돈(mammon)뿐이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돈을 더욱 사랑하고 감히 숭배도 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대에 가장 위대한 우상인 돈(mammon)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 6:10)고 가르쳤던 사도 바울은 루스드라의 게이트(성문)에서 머큐리 신(god)으로 경배받게 되었을 때 이러한 우상숭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질책하였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런 헛된 일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분 곧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 함이라."(행14:15)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다. "한 종이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이는 그가 이 주인을 미워하고 저 주인을 사랑하거나 혹은 이 주인을 떠받들고 저 주인을 업신여길 것임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맘몬(mammon)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13) 6. 지옥의 게이트 게이트들에 연루된 인사들 중 김재환 전 MCI코리아 회장처럼 미국으로 도피한 경우도 있고 또 불법을 저질렀지만 혐의가 없다고 인정되어 풀려날 사람도 있을 터인데 비록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한 법의 집행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없어지게 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심지어 구속되어 형을 언도받고 옥살이를 하고 나오게 될 사람들이나 또 이들을 정죄하였던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또다른 드러나지 않은 죄들이 드러나지 않았음으로 인해 그들이 결코 죄인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즉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시51:5; 롬3:4,10,12,23). 그런데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신다. 즉 죄인은 죽어 지옥에 가며(히9:27; 시9:17; 마14:49,50) 궁극적으로는 둘째 사망에 이르게 되어 영원히 불못에 던져지게 된다(계20:14; 21:8). 그리고 일단 지옥에 가면 세상의 게이트와 달리 지옥의 게이트(마16:18)는 다시 통과해서 빠져 나올 수가 없다(마23:33; 눅16:26). 그러나 우리에겐 한 가지 복된 소식이 있다. 곧 지옥과 사망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예수님(계1:18)께서 이미 우리의 구원을 다 이루어 놓으셨다고 하는 사실이다(요19:30). 따라서 이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모셔들이게 된다면 지옥의 게이트는 결코 그를 이기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마16:18). 7. 게이트를 나오며 앞으로 더 이상 게이트란 말을 듣지 않고 살았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계신 독자 여러분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개인의 인격적인 구주로 영접하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다음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이 시간 제가 죄인임을 알게 되었으며 이 사실을 고백합니다. 부디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저를 도와 주셔서 이 죄들을 미워하여 완전히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구원받기를 원하나 저의 노력이나 방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저의 죄를 제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분께서 저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신 뒤 사흘만에 부활하셨으니 하나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저는 이 예수님을 신뢰하며 그분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으며 저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모셔들입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다른 이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저를 구원해 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이 모든 것을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09-05-08 13:39:04 | 관리자
가장 큰 비극 지진이나, 홍수, 비행기 충돌사고 등의 재난의 소식을 접하게 될 때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고 굉장히 놀라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가장 큰 비극은 구원받을 수 있는 선한 사람들이 멸망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라는 사악한 도시들을 심판하신 것은 아주 무서운 사건이었습니다. 그 도시들 안의 거주민들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과 유황에 의해서 모두 멸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 안에 감추어진 가장 큰 비극은 그 사람들이 멸망을 당했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9장 14절은 롯이 자기의 사위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경고를 했는데 그의 사위들이 그것을 “농담으로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 죽었습니다. 구약 시대 노아의 대홍수는 전 세계적인 재난이었습니다. 창세기 7장 11-12절을 읽어 보면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일 동안 밤낮으로 비가 땅에 쏟아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홍수 속에서 얼마나 황급해하며 허우적거렸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복음서에서 “홍수가 시작되어 모든 사람들을 휩쓸어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가장 큰 비극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더 큰 비극은 홍수가 시작되기 전에 그들에게 120년간이라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그것을 몰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약 성경 로마서 3장 10절은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기록합니다. 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자신의 그 큰 사랑으로 인해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과 저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룩하셨습니다. 로마서 4장 25절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범죄로 인하여 죽으셨고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친히 부활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가장 큰 비극을 피할 수 있습니다. 지나간 약 2000년 동안 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 세상에 퍼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5장 20절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게 주신 가장 큰 사명은 이제 곧 끝이 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은 정확하게 예언의 말씀들을 이루고 있으며, 아주 단순한 사람들조차도 우리가 말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여쭙고 싶은 것은 “당신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였는가?”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죄로 인해 피를 흘리신 성자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 - 을 당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이셨습니까? 당신은 영생을 얻었습니까? 아마 당신은 “아니오.” 혹은 “잘 모릅니다.”라고 대답하실 지도 모릅니다. 만일 당신이 그렇게 대답하신다면 확실히 당신에게 가장 큰 비극이 닥칠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고요? 당신은 영원히 멸망당할 것입니다. 이 큰 비극을 초래하지 말고 오늘 이 시간 ‘우리 구원자’ 예수님께로 나오십시오. 구약성경 이사야서 55장 6절에는 “너희는 주를 만날 만할 때에 그분을 찾으라. 그분께서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부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 마음에 어두움이 있거나, 당신의 과거의 죄로 말미암아 당신이 고통을 당하거나 혹은 양심의 가책을 당하고 있다면, 이제 예수님 안에서 완전한 용서와 영광스런 구원을 받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 37절에서 “내게 오는 자를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경을 읽고 이것이 당신에게 의미하는 바를 알게 되었다면, 이 전도지를 옆으로 밀어놓으시고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께 간구하십시오. 예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며 “구원자 예수님, 지금 당신을 나의 구원자로, 주님으로 모셔 들입니다.”라고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해서 당신은 당신 생애에서 가장 큰 비극 - 즉 구원을 받을 수 있었는데 영원히 멸망당하는 것 - 을 피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몰랐다’고 했고 롯 당시의 사람들은 그것을 ‘농담으로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당신은 똑같은 하나님의 경고에 대해 무어라고 응답하시겠습니까?
2009-05-08 13:37:38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