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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머리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아주 더운 여름 날, 한 할머니가 힙겹게 들고 오던 수박을 내려놓는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갑자기 수박을 드리블한다. 이것은 최근 등장하는 어느 광고의 한 장면이다.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런 컨셉이 초를 다투며 방영되는 광고에 사용된다고 하는 사실 하나로써도 우리는 월드컵의 후폭풍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가 있다. 이처럼 월드컵이 끝난 지 2개월이나 지났지만 월드컵의 열기는 우리 사회 곳곳에 놀라우리 만치 깊숙이 침투되어 그 여운과 감동이 그치지 않고 있다. 기업은 기업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또 개인은 개인대로 부지불식간에 포스트월드컵(Post World Cup)이라는 새로운 상황 속에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포스트월드컵이라고 새롭게 정의되는 이 시대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또 이를 통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지 포스트월드컵의 시대를 가능케 한 몇 가지 키워드를 통해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2. 히딩크 네덜란드인이자 대한민국 시민인 거스 히딩크(Guus Hiddink).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스타이다. 만약 그가 한국 축구대표팀의 감독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포스트월드컵이라는 거대한 민족적 변화를 맛볼 수 없었을 것이라는 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2000년 11월, 깊은 위기에 빠져 있었던 한국 축구계의 삼고초려에 의해 히딩크는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하여 1년 6개월 뒤 소위 ‘2.5류 밖에 안되는 선수들’로 월드컵 4강의 위업을 이루어 내었다. 한 때는 ‘오대영’이란 별명까지 얻었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는 리더십과 과학적 분석 및 시스템적 접근, 경쟁을 통한 다기능 선수 육성, 글로벌 스탠더드의 적용 등을 통하여 ‘히딩크식 리더십’이라는 새로운 표준 아이콘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그런데 ‘히딩크 500일의 기록’, ‘CEO 히딩크-게임의 지배’ 등 히딩크에 대한 책들이나 또 그를 심층취재한 매스 미디어 등에서 분석하고 있는 그의 성공 비법들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기초를 철저히 다지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미 한국 지도자들도 알고 있었으나 실천하지 못한 축구의 기본과 표준을 우리 현실에 접목하고 실천한 것이 ‘히딩크식 리더십’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북중미 골드컵 경기 전날 밤까지도 체력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대표팀 훈련을 몰고 갔던 것이 좋은 예가 될 것인데 이처럼 기초를 탄탄히 하는 담금질을 한 후 여기에 기술과 전술을 입혀 대표팀은 어느 날 아침 강철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 이러한 히딩크식 ‘기초 세우기’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영광스러운 신분을 얻는 데에도 적용이 된다. 즉 말씀으로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멸망에 처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말씀이신 예수님을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게 하신 후 부활승천 시키시고 또 다시 우리를 영접하러 보내실 것을 믿는 그 믿음과 아울러 이러한 우주역사의 시종(始終)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라는 기초가 세워져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새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라. 오직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지속되나니 복음으로 너희에게 선포한 말씀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3,25, 이하 흠정역) 그리고 히딩크의 훈련프로그램에 따라 다져진 기초 위에 기술과 전술이 덧붙여져 수준높은 경기를 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섭취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 원리인 것들을 다시 배워야 할 필요가 없는 장성한 자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벧전2:2; 히5:12-14).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리의 초보 상태를 떠나 죽은 행위로부터의 회개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침례들에 관한 교리와 안수와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 등의 기초를 다시 놓지 말고 완전함으로 나아갈지니라.”(히6:1,2) 3. 태극전사 “지금이야 하는 말이지만 한국팀의 첫인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전력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한국 선수들의 열정을 말하는 것이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의지다. 그런 점에서 한국 선수들은 세계 어느 나라 선수들보다 우월하다. 그런 한국 축구의 기본 잠재력은 일찍이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으며, 나 스스로를 더 채찍질하는 계기가 되었다. … 나는 한국 선수들을 대단히 사랑한다. 그들의 순수함은 나를 들뜨게 한다.” 네덜란드 유력지 ‘텔레그라프’에 실린 이와 같은 히딩크 감독의 인터뷰 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태극전사라 칭해지는 23명의 대표선수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월드컵의 감격을 이처럼 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이 태극전사들 중 상당수가 과거의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오늘의 영광을 이루어내었기에 우리는 그들의 삶을 전해 들으면서 월드컵의 감격을 더욱 오래도록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이영표, 송종국, 최태욱, 안정환, 이운재, 이천수, 현영민, 유상철, 차두리, 김태영 등 10명의 그리스도인이 포함되었음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월드컵 경기를 더욱 성원하게 되었고 또 지금도 이들의 플레이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올려지길 기도하며 K 리그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물론 이들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라운드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과 인터뷰 때마다 주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심지어 월드컵 기간 중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방문하였던 서울 강남의 C교회에서 홀대를 당했어도 오히려 그 교회의 덕을 세워주는 아름다운 모습과 또 그들로 인해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들이게 되었다거나 하나님과의 소원했던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다는 간증들을 접하면서 이들이야말로 태극전사 이전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군사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 우리도 이들처럼 우리 삶의 그라운드에서 그리스도의 향내가 아름답게 확산되기 위해 애쓰며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도록 하자. “그러므로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고난을 견디어 내라. 전쟁을 치르는 자는 아무도 이 세상 삶의 일에 얽매이지 아니하나니 이것은 자기를 군사로 택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2:3,4) 4. 붉은 악마 아침 6시 텔레비전 방송의 시작과 함께 나오는 애국가 4절의 마지막은 ‘붉은 악마’가 대형 태극기를 관중석에 덮는 장면이다. 월드컵을 치루고 나서 이와 같이 ‘붉은 악마’는 어느덧 대한민국의 자긍심과 애국심을 나타내는 민족적 심벌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포스트월드컵의 시대를 열게 된 세 번째 요인으로서 ‘붉은 악마’로 대표되는 온 국민들의 열화 같은 성원을 꼽지 않을 수 없다. 1983년 멕시코에서 열렸던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에서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한국대표팀이 붉은 옷을 입고 무서운 힘을 발휘해 4강에 오르자 그곳 언론들이 '붉은 악마(Red Furies)'라고 불렀다는 데에서 유래한 한국 축구 응원단의 이름이 이제는 공식적으로 '붉은 악마(Red Devils)'로 굳어져 버렸다. 그런데 이 이름을 놓고 교계에서 개명하라는 요구문을 국내외에 발송하였다가 외국으로부터는 망신만 당하고 국내적으로는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만 양산한 결과를 낳았는데 이와 달리 사회적으로는 소위 ‘레드 콤플렉스(Red Complex)’를 일순간 제거해 주었고 또 각 계층 간의 위화감도 해소시켜 주어서 이제 멀지 않아 통일의 때가 오지 않겠는가 하는 긍정적 느낌도 가져볼 수 있게 되었다. “한국 축구를 현장에서 사랑하는 자는 모두 ‘붉은 악마’이며 우리의 응원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즐기고 함께 나누는 가운데 선수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 ‘붉은 악마’ 관계자의 말대로 이번 월드컵 기간을 통해서 우리 국민들은 붉은 티셔츠를 입었든 안 입었든 모두 한 마음이 되어 우리 한국 대표팀을 열정적으로 응원하며 이전에 별로 가져보지 못했던 희열을 6월 한 달 내내 맛볼 수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너무나도 소중한 2002년 6월을 기쁨의 순간들로 계속 기억할 수 있는 복을 받았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우리는 하나님보다 월드컵이라는 ‘새로이 일어난 새로운 신들(new gods that came newly up)’을 더 섬겼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들이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리지 아니하고 마귀들에게 드렸으니 곧 자기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너희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신들, 새로이 일어난 새로운 신들에게 드렸노라. 너를 낳은 반석은 네가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너를 지으신 하나님은 네가 잊었도다.”(신32:17,18)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기쁨의 기간은 한 달 또는 길어야 수십 년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누렸던 월드컵의 희열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기쁨이 이제 곧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영원토록 지속될 수 있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찬양과 존귀를 올려드리자. “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그분께 존귀를 돌릴지니 이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이르렀고 그분의 아내가 자신을 예비하였음이라.”(계19:7) “내 입이 주의 찬양을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원무궁토록 찬송할지로다.”(시145:21) 5. 마무리 김대중 대통령은 최근 2002년 상반기 정부업무평가 보고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이번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로 높아진 우리경제의 위상과 국가이미지를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포스트월드컵 대책추진에도 역량을 모아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의 선언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정말 우리는 그가 말한 내용대로 이번 월드컵을 통해 번데기가 나비로 변하는 것과 같은 놀라운 국가적, 민족적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4년 전 일본과 공동으로 월드컵이 개최된다고 했을 때 내심 단독개최가 아닌 데 대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경제선진국이요 국가 브랜드의 위상이 훨씬 높은 일본과 공동개최함으로써 월드컵 4강이 더욱 시너지효과를 발휘케 되어 코리아 브랜드가 급상승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CU@K리그’ 라는 염원에 부응하듯 K 리그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뜨거워진 것에서부터 사회문화 개혁이나 민족정체성 찾기 등 여러 다양한 방면에서의 포스트월드컵 논의가 국내적으로 이뤄지는 것과 함께 코리아가 세계적인 브랜드로 격상하게 된 것은 두고두고 생각해 보아도 가슴 벅찬 일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아시아, 중남미, 유럽 등 세계 곳곳의 선교현장에서 코리아 브랜드로 인해 사역이 도움받고 있다는 선교사들의 감격어린 목소리는 포스트월드컵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기록된바, 화평의 복음을 선포하며 좋은 일들의 반가운 소식을 가져오는 자들의 발(feet)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함과 같으니라.”(롬10:15하) “주께 노래하고 그분의 이름을 찬송하며 그분의 구원을 날마다 나타낼지어다.”(시96:2)
2009-05-08 13:36:49 | 관리자
주 예수님의 지상명령이 아닌 것들   오늘날의 교회는 다른 것에 분주하다! "또 말씀하시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막16:15) 주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위의 명령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복음을 선포하라"입니다. 여기서 "선포하다"는 것은 메시지를 전한다는 뜻입니다. 같은 말이 딤후4:2에도 나옵니다 - "말씀을 선포하라." 고대에는 중요한 전갈을 포고자(herald)가 전달했습니다. 왕의 직속 전령(메신저)은 왕의 메시지를 소리 높이 외쳤고 마을의 백성들은 함께 모여 최근 소식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선포자는 자신의 말이나 견해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이 받은 그 말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전갈의 내용을 해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전갈의 내용이 자기 마음에 들든 들진 않던 선포자는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달해야 했습니다. 그는 무슨 토론이나 논쟁 없이 왕의 전갈만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necessity is laid upon me; yea, woe is unto me, if I preach not the gospel.) 따라서 저 역시도 기쁜 소식을 담고 있는 왕의 전갈을 충실히 전달하지 못한다면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이렇게 주님께서 선포하라고 하신 바로 그 일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일에만 열성적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대신에 우리 자신의 프로그램이 자리잡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우리의 복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선 하나님께서 주신 지상명령이 아닌 것을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1 사회 복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주린 자들을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며, 가난한 자들을 위해 집을 지으며 병든 자를 돌보아 주어라." 물론 우리는 세상에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같은 사회 복음이 주님이 주신 명령은 아닌 것입니다. 각 성도들이 테레사 수녀같이 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배는 부르게 할 수 있지만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육체의 질병을 고친다해도 불치의 영혼의 병은 어떡합니까?(렘17:9) 잠시동안 가난을 면한다 해도(현 세상) 영원한 가난뱅이(영원)는 어떻게 손쓸 수 있습니까? 우리가 헐벗은 자들을 가장 좋은 옷으로 입힌다 해도 죽을 때 그리스도의 의를 입지 못한 채 죽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좋은 집에 살아도 하늘에 영원한 집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도움이 이생에만 한정되어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도움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오늘날의 구세군은 영혼 구령보다는 사회복음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있는 단체입니다. "저(해리 아이언사이드)는 구세군의 초대 대장인 윌리엄 부스의 말을 생각해봅니다. 그는 "암울한 영국"을 향한 자신의 계획에서 그 첫째 목적이 단순한 사회 제도상의 개선이 아니라 영혼들이 구원받도록 회개로 이끄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의 눈은 빛났고 풍채는 당당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서 누더기를 벗겨내고 근사한 옷을 입히십시오. 악취가 코를 찌르는 도시의 빈민촌에 사는 사람들에게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시골의 깨끗하고 작은 집을 제공하십시오. 스스로 자신과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을 때까지 도와주십시오. 그런데 그 뒤에 그가 구원받지 못한 채 죄 가운데 죽도록 내버려둔다면 그는 결국에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모든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저는 결코 누구를 위해서도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해리 아이언 사이드의 "너희가 회개치 아니하면(Except ye repent)"이라는 글에서 인용: p. 181-182)  하이드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사회악이 척결되고 정의가 구현된다고 할지라도 사람에게 여전히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남아있으니 곧 그리스도이다!"(J. W. Hyde) 2. 정치 및 경제 복음(복 복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현재 우리에게 닥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 성경적인 기준을 사회에 적용하기 위해 정치적, 경제적인 분야에 늘 적극적인 자세로 임해야 한다" 과연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까? 초대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주로 무엇을 추진했습니까? 그들의 활동은 주로 무엇이었습니까? 사도행전에는 어떻게 나와있습니까? 이교도들이 신전에서 매춘행위를 하곤 했으므로 그들이 성전에서의 매춘 금지운동을 벌이고 있었습니까? 보수주의 성향의 사람들이 로마 원로원으로 선출되도록 노력하고 있었습니까? 로마의 비인간적인 검투 시합에 반대하여 가두시위를 벌였습니까? 과연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당시 이혼이나 노예학대, 낙태, 유아살해(사실 헤롯은 여기서 한 가지 이상의 죄를 진 사람임) 등의 사회악에 대한 반대 운동에 나섰을까요? 물론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초기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런 것을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명령을 행하기에도 바빴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널리 흩어진 자들이 각 처에서 말씀을 선포하니라."(Therefore they that were scattered abroad went every where preaching the word)(행 8:4). 그들이 과연 다음과 같은 대화를 했다고 상상하십니까? "현재 부도덕한 이 사회 모든 부조리를 반대하고 척결하는데 함께 하지 않겠소?" 사실 항의하는 사람들은 단지 항의하는 사람에 지날 뿐이며 그 결과는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저는 만왕의 왕께서 주신 메시지를 반드시 전해야 합니다. 아무리 시급한 현안이 있다 할지라도 현재 제겐 왕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다음은 데이브 헌트의 글입니다. "경건치 못한 이 사회에 기독교 행동 양식을 심고자하는 놀라운 목적의 소위 "행동파"(정치, 사회활동)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Operation Rescue" 즉 "구조 협회"가 그 한 예인데, 그 설립자인 랜덜 테리는 자기들의 목적이 사회 여론을 부추겨 정부에게 낙태법을 바꾸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기특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성경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그런 정치적, 사회적 "행동주의"를 찾아볼 수 없고, 하나님의 백성이 그렇게 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시민법을 어긴 예는 성경에 자주 나옵니다(이집트에 살던 히브리 산파들, 바빌론의 다니엘과 세 친구들 등).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회로 하여금 억지로 성경의 원칙을 따르도록 한 예는 없습니다. "크리스천 행동주의"의 뜻은 가상하지만 큰 규모의 집회를 구상하고 동성연애자와 낙태주의자, 도색잡지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보다 더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 사회에 "그리스도의 원리"를 뿌리내리게 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시도입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 억지로 성도처럼 살도록 강요하기보다는, 그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스스로 하나님을 위해 온전히 살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입니다. 우리는 죄를 배격하고 회개를 앞세우며 권능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동성애와 아동 학대, 포르노그라피, 낙태 등으로부터 돌이켜 회개하라고 외쳐야합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반역하고 그리스도를 거절한데서 돌이켜 회개하라고 외쳐야 합니다. 교회는 "사회적 관심"의 부재로 인한 비난보다 이단을 허용하고 진리를 선포하지 않는데 대한 비난에 더욱 더 귀를 기울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이 거짓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눈감아 주고 오히려 존경하는 교회가 세상의 죄를 반대하고 배격한다는 것은 위선입니다. 우리는 항거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을 회개로 초대하는 말씀의 선포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겐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심판을 경고했던 에녹이나(유14-15), 의를 선포하며 다가올 심판에 대해 경고했던 노아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벧후2:5) "크리스쳔 행동주의"는 결코 그리스도인 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 앞에서 걸어야 할 길 즉 바른 길을 돌아서 가는 것입니다. "크리스쳔 행동주의"는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르게 만들며 타협과 불경건한 연합을 부추기며 그로 인해 복음 전파에 드렸으면 더욱 좋았을 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데이브 헌트) 믿는 이가 주님이 하라고 하시는 대로 행하면 놀랍게도 사회 전반에 그 영향이 있게 됩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을 보십시오. "불과 몇 세대 동안 그들은 성경의 교리로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성전에는 이방인들의 신들이 사라졌으며 우상숭배는 시들해져 마치 좌초된 배처럼 되었다. 그들은 세상에 사람과 사람사이의 보다 높은 도덕률을 가지고 왔다. 여자의 인격과 신분이 바로 섰다. 순결, 예의 범절에 대한 기준도 바뀌었다. 많은 격투 시합 같은 많은 잔인한 관행들이 폐지되었다. 이것이 모두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영향이었다 "(J. C. 라일) 3. 세상 변화 복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을 변화시켜라." 몇 해전 CCC 설립자인 빌 브라잇은 이와 같은 제목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와서 세상을 변화시키게 우리를 도우라." 그 서언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이 글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CCC(Campus Crusade for Christ)의 역사와 비전의 초기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변화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이 세대에 지상 명령을 성취하는데 헌신한 20세기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거기 있습니다." 동일한 책에서 빌 브라잇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그들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체험하는 500만 명의 제자들이 능히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개인적인 기부, 종신 재산, 유언장, 그리고 여타 재정적인 투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197, 193 페이지). 500만 명의 제자들이라! 우리 주님의 제자들은 불과 11명에 불과했는데 그들이 성령님의 권능으로 이룬 일은 놀랄만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숫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최근에 후천년 재건주의자로 알려진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회에 구약의 법 체제(모세의 율법과 이 형벌을 다시 제정한다는 것)를 적용시킨다면 세상이 변화되고 왕국이 임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각 개인도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전 사회가 어찌 그같은 기준에 도달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100만년이 지난다해도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보고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체제는 병들어 치유불능 상태에 있고 멸망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각 개인("모든 피조물에게")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이었고, 사람이 복음의 메시지에 반응할 때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됩니다. 세상은 마치 침몰하는 타이타닉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상은 지옥과 멸망으로 들어가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그 안에 있는 많은 이들이 멸망할 것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생명줄을 던지는 것"이며 복음을 전함으로 "멸망하는 자를 구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사회 변화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무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회심시키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말이 많이 있는데 사실 그런 슬로건을 뒷받침 해줄 만한 성경의 가르침이나 예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데이브 헌트) 4. 교회 지상주의 복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사람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자신의 왕국을 세우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새 세상을 가져오는 건 결코 교회가 아닙니다.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그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는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And He said unto them, Go ye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spel to every creature"(막16:15).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이 말은 결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이끌어 복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가서... 모든 피조물을 교회로 초청하라" 반대로 우리가 "온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가지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궁전 뜰로 초청하여 왕의 메시지를 들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곧장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달려가 거기서 왕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와는 다르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을 복음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온다는 것은 철학적인 발상입니다. 그들은 지역 교회를 하나의 선교 기지로 보고 그곳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데리고 옵니다. 버스로 데리고 오건 꾀어서 데리고 오건 어쨌든 복음을 듣게 합니다. 과연 지역 교회의 첫째 목적이 구령의 기지가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영혼을 세우는 곳이 되는 것일까요? 세상 가운데서는 우리가 복음전도를 강조해야겠지만, 교회에서는 가르침을 우선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그들에게 찾아가지만 교회에서는 그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성도들은 교회에서 바른 교리로 가르침으로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가르침을 받은 성도가 세상에서 복음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배 시간에 믿지 않는 사람을 구원의 길로 초청하는 것이나 그들을 성도의 회중이 되도록 이끄는 일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이것 이상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들이 신자들의 지역 모임에 참석하여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일로 인해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선포되고 성경이 신약 성경의 패턴을 따라 가르쳐진다면 그 안에서 분명히 반복되는 주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님의 은혜, 칭의, 하나님의 큰 구원 등일 것입니다. 말씀이 충실히 선포되는데 어찌 거기에 복음(구원의 메시지)이 빠지겠습니까? 문제는 교회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사역의 우선 순위를 둘 때 늘 발생합니다. 양떼들을 먹이고 성도들을 바르게 양육하는 대신 간단한 구원의 메시지나 요한복음 3:16 말씀만을 제시합니다. 물론 요한복음 3:16은 복음의 메시지를 놀랍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요한복음 3:16 이상입니다. 성도들에게 필요한 건 성경 전체입니다.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학교에서 입문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 흥미로운 사실이 있는데 이단들은 선교 센터를 세우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신 양육이나 교육 센터를 세워 배우는 각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거짓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항상 답할 것을 준비하게 합니다. 마귀는 어떤 체계가 효과적인가를 압니다. 다만 그들의 문제는 가르침의 내용이 진리가 아닌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지역 교회가 하나님의 방식대로 성도들의 양육 센터로서 제 역할을 다 할 때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도 지역 모임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 대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나 배우지 못한 자가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받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게 되나니, 그리하여 자기 마음의 비밀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얼굴을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께서 참으로 너희 안에 계신다 고하리라"(고전14:24-25) 참으로 우리 모두의 모임이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생명을 드러내는 그런 귀중한 모임이 되길 바랍니다. 참으로 어렵고 또 추수할 일꾼이 부족한 이 시대 우리가 충실히 왕께서 맡기신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게 하소서. "Now then we are ambassadors for Christ, as though God did beseech you by us: we pray you in Christ's stead, be ye reconciled to God"(고후 5:12)
2009-05-08 13:36:09 | 관리자
젊은 시절에 비해 문상을 가거나 장례식에 참석하는 일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아울러 의사로서 수많은 환자들의 임종을 목격하고 또 친지들의 부음을 전해 들으면서 우리 인생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수증기(약4:14)라는 사실을 계속 확인하게 된다. 죽는 순간 영혼(soul)은 곧바로 천국(heaven) 아니면 지옥(hell)으로 가게 되고(히9:27) 육신(body)은 아직 이 세상에 남아 부패의 과정을 겪으며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창3:19)이 하나님의 섭리이지만 우리는 장례라는 형식을 빌어 죽은 자의 인생을 공식적으로 마감하면서 인간적 소망을 실어 이미 떠나간 자를 위해 복을 빌어주기도 한다. 즉 장례식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죽은 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자를 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장례 절차는 불교식 또는 전통적인 경우가 제일 많고 그 다음 빈도로 기독교식 장례이며 세 번째로는 최근 들어 급증하고 있는 천주교식 장례로 대별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떠나간 혼(魂, soul)이 윤회(輪廻)하느냐, 곧바로 천국(heaven)에 가느냐, 연옥(煉獄, purgatory)에 가느냐 하는 내세관에 따라 장례식이 이처럼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중 한 가지 형식으로 장례가 치러지게 되는 것이 일반인 것은 누구나가 수긍하는 바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고 육영수 여사의 장례 때에 주요 종교 지도자들이 모두 자기들의 방식으로 공식적인 장례의 예식을 거행했던 것을 새삼 기억나게 하는 두 번의 임종과 그에 따른 두 가지 장례를 직접 경험하였기에 간략히 소개해 보고자 한다. 필자가 서울 적십자병원에 근무할 때였다. 퇴근 시간을 넘어선 어느 날 저녁 응급실에서 환자를 본 후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한 간호조무사가 황급히 승강기를 나서면서 나를 보자 무척 반가워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선생님이 어디 계신가 하여 찾아 다녔어요. 방에 가보니까 아직 퇴근하신 것 같지 않아서 이쪽으로 선생님을 뵈러 오던 참이었어요." 그 자매의 말인즉 자기 아버지가 원자력병원에서 후두암으로 3년간 수술과 항암치료 등을 다 받아보았지만 이제 의학적으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임종 준비 차 딸인 자기가 근무하는 이 병원으로 모셔오게 되었는데 이제 아버지의 영혼을 구원해야겠으니 나보고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 자매의 아버지가 투병 중이며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전부터 알고 있었고 또 미력하나마 그 영혼을 위해 기도는 해오고 있었지만 막상 일면식도 없었고 또 임종을 눈앞에 둔 천주교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것도 내가 인도하는 성경공부 시간을 통해 복음을 바로 전해 듣고 예수님을 만난 자매가 간절히 원하는 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엄청난 영적 부담이 중력에 반하여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의 속도를 더욱 더디게 만드는 것 같았다. 일단 내 방에 들어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간절히 기도한 후 그 자매의 아버지가 입원한 병실로 찾아갔다. 먼저 내 소개를 하고 그분을 위해 기도해 왔었다는 말씀을 드린 후 예수님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한 선생님의 병을 고쳐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로 선생님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서 '무죄한 피'(the innocent blood, 마27:4)를 흘리셨습니다." 이어서 잭 하일즈(Jack Hyles) 목사님의 저서 '전도하러 갑시다(Let's go soul winning)'에 나와 있는 순서를 근간으로 하여 성경구절들을 인용하면서 복음을 구체적으로 전하기 시작했다. "의로운 사람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롬3:10), "모든 사람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그렇습니다. 한 선생님께서는 교장 선생님으로 지금까지 누구보다 훌륭한 삶을 사셨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죄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라야 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을 보십시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롬5:12) "아담 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음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아담의 후손인 우리들 모두가 죄 가운데 태어나기 때문에 죄인인데 죄의 대가는 사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도 같은 설명이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이 말씀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을 때 그는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육신적으로 죽는다면 그 사람은 불못(계21:8)이라고 불리는 둘째 사망의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즉 죄인인 사람은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지옥의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없습니다. 한 번 지옥에 가면 영원토록 그곳에 머물며 고통 가운데 있게 됩니다(눅16:19-31). 그런데 아주 놀랍고도 복된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죄 값을 다 치르셨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죄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단번에 다 해결하셨습니다(히10:10)."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롬5:8)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선생님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받아야 할 지옥 고통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이제 이모든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들이기만 하면 한 선생님은 영생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언제 이 세상을 떠나가시든지 연옥이나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신 천국에 바로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마1:21; 요1:12; 3:16). 이제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들이시겠습니까?" 한 선생님은 말씀을 하시지 못하고 고개만 끄떡이셨다. 왜냐하면 기관절개술(tracheostomy)을 받아 목 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어서 말을 하더라도 그 구멍을 통해 퍽퍽거리는 소리만 나올 뿐이기 때문이었다. "한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것을 네 마음 속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니라.'(롬10:9,10) 고 적혀 있습니다. 말이 나오지 않겠지만 직접 입으로 구주 예수님을 시인하는 영접기도를 하시면 좋겠는데요." 그러자 한 선생님은 침상에서 무릎을 꿇고 내가 일러주는 영접기도를 정성을 다해 퍽퍽거리면서 하기 시작하셨다. (당시 영접기도문은 오래 전 KoenigsWort 출판사 사장인 리처드 노이마이에르(Richard Neumeier) 형제에게서 받은 명함에 적혀 있는 것을 사용하였다. "Lord Jesus, be merciful to me a sinner. I don't want go to Hell when I die. Now I do receive you as my personal Saviour. Thank you for dying for my sins on the cross. 주 예수님,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저는 죽어서 지옥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저의 인격적인 구원자로 모셔들입니다. 십자가에서 저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한 선생님의 영접기도가 시작되면서 곧 이어 내 귀에는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한 선생님의 퍽퍽거리는 소리와 함께 또렷한 여자 목소리가 스테레오로 들려왔다. 병실 한쪽 구석에서 내 얘기를 계속 듣고 계시던 한 선생님 사모님께서 함께 무릎을 꿇고 영접기도를 따라하신 것이었다. 나는 한 선생님과 사모님께서 구원받은 다음 날부터 조그만 칠판(white board)과 성경책을 그 병실에 갖다 놓고 점심 시간이나 일과 후에 찾아가 창세기 1-3장, 고린도전서 15장, 요한계시록 21, 22장 등을 주로 읽어드리며 하나님의 역사와 하늘나라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드렸다. 그리고 2주쯤 지나 한 선생님은 주님의 품에 안기셨다. "아버님이 지금 막 돌아가셨어요."라는 자매의 전갈을 받고서 병실로 바로 달려갔다. 병실에 들어서니 아들, 사위 등 적지 않은 가족들이 한 선생님이 숨을 거두고 누워 계시는 병상 주위에 모여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그 자매가 기도부탁을 하였다. 이제 한 선생님의 장례는 오래 전부터 출석해온 천주교 성당에서 준비해온 대로 거행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아버님의 하늘나라 가셨음을 선포하는 예식을 나의 기도를 통해 잠깐이라도 갖고자 하는 자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는 한 선생님의 가슴에 손을 얹고 소리내어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아버지, 한00 형님의 영혼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가족들도 모두 다 한00 형님처럼 진리를 알고 믿음으로 영생을 소유토록 복을 베풀어 주옵소서.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이년 전 첫눈이 내리던 날로 기억이 된다. 강남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임종을 앞두고 있던 고등학교 동기동창을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방문하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고 또 집도 방향이 비슷해서 비교적 친하게 지냈던 친구였는데 대학 졸업 후 바로 유학을 간 뒤 20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였다. 다른 동기들에게 전해들은 바로는 그 친구가 미국에서 결혼하고 정착하여 경영 컨설턴트로 일해오고 있었는데 최근 열이 나서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결과 암으로 진단되어 항암치료를 계속 받아왔지만 효험이 없어 점을 보러 갔는데 그 용하다고 하는 점쟁이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살 수 있다고 해서 두 달 전 귀국한 것이라고 하였다. 고등학교 신우회 멤버 중 그와 잘 아는 이 박사와 신 목사가 그 친구의 안타까운 소식을 먼저 듣고 나에게 그 친구의 영혼 구원을 위해 함께 찾아가자고 하여 셋이 그 친구를 방문하게 되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 침상에 누워 있는 그 친구를 보니 정말 영락없는 말기 암환자의 모습이었다. 얼굴은 옛 모습이 남아 있었지만 살이 빠져 앙상하였고 온 몸의 피부는 누렇게 침착이 되어 있었으며 다리는 부종이 심해 마치 코끼리 다리 같이 부어 있었다. 통증이 워낙 심하여서 24시간 내내 마약진통제가 투여되고 있었고 의식은 있긴 하지만 아주 또렷하진 않은 듯하였다. 이 박사와 신 목사가 먼저 그 친구에게 인사를 하였고 이어서 내가 그에게 말을 건넸다. "00아, 오랜만이다. 나 차 한이다. 알아보겠니?" 잠시 눈을 뜨고 쳐다보더니 아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다행이었다. 우리는 돌아가며 그 친구에게 위로의 말을 몇 마디씩 하였다. 그리고 신 목사가 침상 곁에 앉아 그 친구의 오른 쪽 귓가에 대고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 "00아, 하나님께서는 너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외아들 예수님이 너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하셨어. 이제 네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너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단다. 예수님을 영접하겠니?" 묵묵부답이었다. 그러자 이 박사가 00의 영혼을 위해 대표로 기도하였고 이어서 내가 신 목사와 자리를 바꿔 앉고 다시금 00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야고보서 4장 14절(LIFE IS SHORT), 히브리서 9장 27절(DEATH IS SURE), 로마서 5장 12절(SIN THE CAUSE), 로마서 10장 13절(CHRIST THE CURE)의 순서대로 00에게 말하며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롬10:13)는 말씀에 따라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들일 것을 권했다. "00아, 영접기도 하면 좋겠다. 내가 하는 말대로 따라 하면 되는 것이야. 자, 주 예수님∼" "…주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지옥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 I don't need it(난 필요 없어)."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설혹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이해하였다 하더라도 심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왜 하필이면 이천 년 전에 지구 반대편에 태어나 십자가형으로 생을 마감한 유대 청년만이 나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곤 한다. 00도 당시 그러한 상태였었던 것 같았다. 다시 우리는 그 친구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하였다. 이어서 이 박사가 바톤을 이어받았다. "00아, 우리 영어로 하자." "Lord Jesus!∼" "… Lord Jesus!" "I am a sinner.∼" "… I am a sinner." "Please come into my heart!∼" "… Please come into my heart!" "Praise the Lord!∼" "… Praise the Lord!" 정말 할렐루야였다. 00은 톤을 높여 "Praise the Lord!"라고 외쳤다. 우리는 2시간 가까운 전도를 통해 생명의 열매를 허락하여 주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00과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병실을 나왔다. 그리고 이틀 뒤 00은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부음을 전해 듣고 바로 달려갔던 신 목사는 00이가 편안하게 잠든 모습을 보고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였다. 00의 가족들은 대개 신앙이 없으신 분들이셨기에 그의 장례는 노제(路祭)를 포함하여 전통적인 형태로 치러지게 되었지만 우리 신우회원들은 발인하는 날 아침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따로 기독교식 예배를 신 목사의 인도로 드리며 고인의 천국입성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어떠한 우주관과 신앙을 가졌든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죽어서 우리의 몸과 결별한 혼(魂, soul)은 소멸되거나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천국(heaven) 아니면 지옥/불못(hell, lake of fire)으로 가게 된다. 아무리 국가장이나 사회장으로 화려하게 장례가 치러졌다 하더라도, 또는 수많은 이들의 애도 속에 이 세상을 떠나갔다 하더라도, 심지어 기독교식으로 무척 은혜롭고도 거룩한 장례식이었다 하더라도 진실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못한 사람은 마귀와 함께 영원한 고통의 장소에 갈 수밖에 없다(시9:17; 마13:49,50; 계20:10; 21:8). 그러나 기독교식으로 장례가 치러지지 않았더라도 혹은 아예 장례식을 하지 못했더라도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들인 사람은 언제 이 세상을 어떠한 사인(死因)에 의해서 떠나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천국(heaven)에 가게 된다(요1:12; 14:2,3; 고후5:1; 계7:15-17). 그런데 우리가 언제 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오직 그 죽음의 때는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다(전3:1,2).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바로 지금 이 순간 영생(eternal life)을 선물(gift)로 받지 않으시렵니까? "보라, 지금이 받아주시는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하)
2009-05-08 13:35:30 | 관리자
1. 들머리  빛이 없는 세상을 생각할 수가 있을까? 어둠을 걷어가는 한 줄기 햇살이나 어두운 밤 구름이 걷히면서 내리쬐는 달빛을 예찬한 시인들의 노랫말을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기본적 인식과 판단이 빛에 의해서라야 그 기능이 가능해짐을 잘 알고 있다. 즉 모든 물질의 존재는 바로 빛에 의해서 그 의미와 가치가 부여되고 특히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보존하는 데 빛이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물리학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로부터 최첨단 과학시대인 21세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이 빛에 대한 관심은 끊이지 않아 왔다. 다시 말해서 빛의 조명을 통해서 우리의 인식세계가 가능하게 되므로 빛의 근원적 탐구로써 철학적 명제도 풀어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인류에게는 늘 있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간이 빛을 추구하고 탐구하며 발견하였던 수많은 데이터들은 그 자체로써 우리를 ‘참 빛’(the true Light)으로 인도해 주지 못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참 빛’을 먼저 받은 이들은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비추일 때 (물론 다른 어떤 아이템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진리가 더욱 명확히 드러나게 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빛에 대하여 일반적인 물리학적 고찰을 하고난 후 또한 이를 성경적인 관점으로 해석해봄으로써 아직 ‘참 빛’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이 깨닫고 ‘참 빛’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한다(딤후3:16; 요1:9; 요일2:8). 아울러 이미 ‘참 빛’을 소유한 이들도 빛의 과학적 고찰을 통해 매일의 삶 속에서 빛의 진정한 가치와 존재를 느끼며 더욱 굳건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한다. 2. 빛(light) 빛은 본래 파장이 0.4∼0.75μm인 가시광선(visible rays)을 말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자외선(ultraviolet rays)과 적외선(infrared rays)도 포함한다.  전파속도는 진공 중에서 초속 약 30만km(299,790.2±0.9km/s)에 달하며 물질 중에서는 물질의 굴절률에 반비례하게 된다. 그리고 음파나 무선용 전파에 비하여 파장이 짧아 균일한 매질 내에서는 거의 직진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빛을 광선(光線)이라 하고, 이에 반하여 빛을 파동으로 고찰하는 경우에는 광파(光波)라 한다. 또한 일정한 파장의 빛은 각각의 파장에 대응하는 색감(色感)을 주게 되므로 파장이 모두 같은 빛을 단색광(單色光), 단색광이 혼합된 보통 빛을 복합광(複合光)이라 한다. 복합광은 프리즘이나 회절격자를 통해 단색광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이렇게 나누어 배열한 것을 이 빛의 스펙트럼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 땅에서 느끼는 빛의 근원은 우주에서 오는 복사에 의한 소량의 빛과 지구에 도달하는 소량의 별빛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구가 속한 태양계의 중심인 태양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빛에 대하여 보다 깊은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햇빛을 내보내는 태양에 대한 기본적인 물리적 자료들부터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3. 태양(sun) 태양은 태양계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존재로서 태양계의 약 98%에 해당하는 질량을 차지하는 거대한 천체이다. 그 직경은 140만km로서 지구의 109배에 상당하고 부피는 130만 배에 달한다. 그러나 밀도의 차이 때문에 태양의 무게는 지구 무게의 33만 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또 1회 자전하는 데 25일이 걸리므로 태양의 하루는 지구의 25일에 해당된다.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평균 거리는 1억5천만km로서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의 400배나 된다. 즉 지구에서 태양까지는 걸어서 4,000년, 비행기로 20년, 초속 7km 속도의 우주선으로 250일, 빛으로는 8분 19초가 걸리게 된다. 관찰할 수 있는 가장 외층을 광구(photosphere)라 부르는데 그 온도는 섭씨 6천도나 되며 여기저기서 에너지의 분출이 일어나기 때문에 태양의 표면은 얼룩덜룩하게 보인다. 태양 에너지는 태양의 깊숙한 곳에 있는 핵으로부터 생성되는데 이 곳에서는 온도(섭씨 1,500만도)와 압력(지구의 해수면 대기압의 3,400억 배)이 매우 높아 핵반응이 일어날 정도이다. 태양은 너무나 밝기 때문에 지구상의 물체를 기준으로 해서 그것의 밝기를 표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우리 눈과 태양 사이에 아무리 밝은 전등을 놓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흰 원반 위의 검은 점같이 보일 것이다. 태양 표면의 일 평방미터는 계속해서 10만 마력의 에너지를 생산해 낼 수 있는 열을 복사하고 있다. 그래서 태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지구가 받고 있는 태양열의 복사는 고작해야 태양이 방출하는 빛과 열의 22억 2천 2백만 분의 1에 불과할 뿐이지만 지구에 전달되는 태양열은 매년 30m 정도 두께의 얼음을 녹여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4. 지적 설계자(the intelligent Designer) 그런데 만약 이와 같은 태양의 질량, 직경, 밀도 및 방출하는 빛과 에너지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많거나 적다면, 또는 태양이 지구에 조금이라도 가깝거나 멀다면, 또는 태양주위를 도는 지구의 궤도(orbit)가 원형이지 않고 다른 행성들처럼 타원(ellipse)이라면 우리가 현재 살아오고 있는 이 지구는 너무 뜨겁거나 추워서 생명체가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생물이 특별한 문제없이 화학적으로 반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온도의 범위는 매우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태양과 빛에 연관된 물리적 지표들이 우연이나 확률 또는 오랜 시간의 산물일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 지면관계상 수많은 과학적 데이터들을 다 언급할 수 없지만 물리학, 화학, 생물학, 천문학, 지질학 등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모든 과학적 지표들은 (앞서 간단히 빛과 태양에 대해 살펴본 바와 마찬가지로) 이 우주에는 ‘지적 설계자’(intelligent designer)가 존재함을 너무나도 잘 드러내주고 있다. 그렇다, 성경은 바로 이 우주의 지적 설계자(the intelligent Designer)이신 하나님을 당당히 선포한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창1:1, 이하 흠정역) 또한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빛과 태양을 창조하심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니 좋았더라.”(창1:3-4상)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체(光體)들이 있어서 낮과 밤을 나누고 표적과 계절과 일자(日字)와 연한(年限)을 나타내는 표가 되라. … 하나님께서 커다란 두 광체를 만드사 큰 광체로 하여금 낮을 다스리게 하시고 작은 광체로 하여금 밤을 다스리게 하시며 또 별들도 만드시고”(창1:14,16) 5. 빛이신 하나님(God is light)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빛과 모든 생명의 근원이 태양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태양이 창조되기 이전에 빛이 존재하도록 하셨다. “그런즉 우리가 그분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밝히 드러내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요’(God is light),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이라.”(요일1:5) 그렇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그분 안에는 어두움이 조금도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불빛도 태양의 밝기와 비교해볼 때에는 검은 점에 불과한 것처럼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위대해 보이는 인간의 어떠한 업적과 노력 등도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단순히 검은 점들에 불과할 뿐이다. 다른 말로 해서 성경은 그것을 ‘더러운 누더기’(filthy rags)라고 부른다(사64:6; 비교 슥3:3,4).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의해, 자신의 노력과 자신의 수고에 의해 의롭게 되려고 애쓰는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며 어리석은 것인가? 부연컨대 인간의 모든 업적과 노력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에 비교해 볼 때 하나의 검은 점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잠시 언급하였듯이 햇빛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느끼거나 볼 수도 없는’ 화학선(chemical/ultraviolet rays)과 ‘눈에는 보이지만 감지될 수는 없는’ (가시)광선(light/visible rays) 및 ‘감지될 수는 있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열선(heat/infrared rays) 등 세 가지 종류의 광선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께서 또한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 triune God, 요일5:7)이시라는 사실을 묵상하면서 햇빛의 화학선은 어느 누구도 본 적이 없고 느끼거나 볼 수도 없는 아버지 하나님에 해당됨을 이해하게 된다. 또한 (가시)광선은 우리가 볼 수는 있지만 감지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의 빛(요8:12; 9:5)이신 아들 예수님에 해당되며, 열선은 믿는 자들의 삶 속에서 감지되지만 결코 눈에 보이지는 않는 성령님에 해당됨을 알 수 있게 된다. 6. 완전하신 하나님(His way is perfect) 아울러 이러한 사도 요한의 빛에 대한 가르침을 ‘태양 광선의 분광(分光)’(the solar spectrum)과 연결시켜 보면 완전하신 하나님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삼하22:31상; 시18:30상).  무지개 속에서나 혹은 잘 깎여진 다이아몬드나 유리의 번쩍임 속에 드러나는 태양 광선은 스펙트럼(分光)을 형성하며 일곱 개의 색깔로 구성되어 있음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즉 햇빛이 프리즘을 통과하여 자기 길로 나아가게 될 때 각각의 색깔을 가진 빛들이 서로 다른 각도로 굴절되어 일곱 가지 색깔로 보이게 되는데 그 스펙트럼의 맨 위쪽은 보라색, 맨 아래는 빨간색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보라색 위에 있는 자외선은 화학선으로서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며 빨간색 밑에 있는 적외선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가시광선이 보라색에서 붉은색에 이르는 일곱 가지의 기본 색깔들로 나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신성(神性)의 완전하심을 말해 주는데, 왜냐하면 ‘일곱’이라는 숫자는 주지하다시피 완전함을 나타내며 하나님께서는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양 광선의 스펙트럼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성의 일곱 가지 기본적 영역들도 말해 준다. 성막에서도 드러나듯이 붉은색은 그분의 희생을, 푸른색은 그분의 하늘에 속한 속성을, 자주색은 그분의 왕으로서의 인격을 나타내 주며 그 외의 다른 색깔들도 역시 하나님의 속성들을 보여준다(출25:4; 26:1).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속성과 은혜와 역사하심에 있어 완전하신 분이시다(삼하22:31상; 시18:30상). “하나님으로 말하건대 그분의 길은 완전하고”(삼하22:31상; 시18:30상) 7. 하나님의 속성(two basic attributes of God) 태양으로부터 복사되어 나오는 광선들은 생물체에 이로운가 유해한가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곧 태양 광선들 가운데 생물체에 치명적인 것들과 생물체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들이 함께 섞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이 지상에서 계속해서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 치명적인 광선들을 차단하고 생명을 주는 광선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끔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를 통해 조치를 취해주셨다. 공기는 빛을 굴절시키는 능력이 매우 크기 때문에 어떤 광선이 공기에 부딪치게 되면 빛들은 반사되어 굴절된다. 햇빛 속에 있는 치명적인 광선들은 굴절률이 매우 크므로 그들이 이런 공기층에 부딪치게 되면 굴절 현상에 의해 현저하게 꺾여져서 대부분은 지구를 지나쳐 흘러가 버리며 또 이와는 반대로 생명을 주는 광선들은 쉽게 굴절되지 않고 지구로 곧장 들어오게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관점에서 빛이신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종류의 광선으로 구성된 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은 ‘공의(公義)의 광선’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완전한 보상과 자신의 거룩하신 법을 거역한 자들에게 무한한 형벌을 요구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이 광선은 죄에 물든 모든 피조물들에게 파멸과 저주를 불러온다(롬6:23상).  둘째로 하나님은 ‘사랑의 광선’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으신 피조물들의 구원과 기쁨과 구속(redemption)을 갈망하시는 분이시다(롬6:23하; 요3:16).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속성들을 모두 갖고 계신다. 즉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며 동시에 사랑 그 자체이시다(시7:9; 사45:21; 요일4:8,16). 따라서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의 광선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분의 공의가 충분히 만족되어 걸러짐과 동시에 그분의 사랑이 그분이 지으신 피조물들의 삶 속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어떤 방법이 반드시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8. 방패되신 그리스도(the shield of Christ)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조치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마련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처럼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으며, 갈보리에서 하나님의 법의 정당한 요구를 만족시키셨고,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바를 성취하셨으며, 하나님의 심판 속에 담긴 진노가 자신에게 쏟아지게 하셨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죽기까지 사랑하신 모든 사람들의 생명에 하나님의 ‘공의의 광선’이 굴절되어 비켜가도록 하신 것이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권과 같이 되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보호막(방패, shield)이 되어주시며 또한 자신의 완전하신 사랑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가 되어주시는 것이다(시84:11상; 갈3:20; 딤전2:5; 히12:24). “이는 주 하나님께서 해(sun)와 방패(shield)가 되시기 때문이니이다.”(시84:11상) 그렇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방패가 되어주실 수 없는 한 결코 우리의 태양도 되실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방패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 되시고, 은혜를 주시는 주님과 구원자가 되시는 것이다. 최첨단 암치료기법 중의 하나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치료방사선’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암세포는 라디움(radium)에서 방출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빛에 의해 죽게 되는데 만약 납이라고 하는 보호막(방패, shield)이 없다면 정상세포도 같이 죽게 되어 라디움 광선은 우리에겐 치명적인 광선밖에는 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편재하는(ubiquotous) 가장 평범한 물질인 납(lead)으로써 정상세포에게 내리쬐는 라디움 광선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제 그 광선은 납이 있는 한 이전에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줄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 자신의 희생을 통해 누구든지(ubiquotous) 그분을 믿기만 하면 멸망치 않고 다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다(요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9. 반석이신 그리스도(that Rock was Christ) 구약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요1:17)가 주님의 영광을 보길 간구하자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함을 네 앞에 지나가게 하고 주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할 것이요, 또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풀리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을 터이므로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주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 옆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반석 위에 설지니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그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가는 동안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내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뒷부분은 보되 내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출33:19-23)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어떤 반석의 틈 안에 모세를 숨기시고 나서 그 곁으로 지나가셨는데 바로 그 때 모세는 주님을 보게 되었지만 반석으로 말미암아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으려면 오직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모세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였느니라(that Rock was Christ).”, 고전10:4하). 다시 말해서 모세는 원래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죄인이었지만 ‘만세 반석’(the Rock of ages)이신 그리스도 안에 숨겨져서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이는 반석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공의의 광선’을 걸러 내고 오직 그 영원하신 분의 ‘사랑의 광선’만이 통과할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10. 빛의 천사(an angel of light) 그래서 누구든지 모세처럼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그분 안에 거하게 되면, 곧 예수님을 구원자와 주님으로 마음에 모셔 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영생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롬10:9,10,13; 요1:12; 3:16). 그러나 사탄은 한 영혼이라도 더 자기와 함께 지옥/불 호수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이러한 믿음(faith)과 은혜(grace)의 복음(gospel)을 행위(work)와 율법(law)의 종교(religion)로 교묘히 바꿔치기를 해오고 있다(롬1:17; 11:6; 갈1:6; 2:21; 엡2:8,9). 일례로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기초를 ‘반석’(petra, the solid immovable bed-rock; a great mass like a cliff, 마16:16-18)이 아니라 ‘돌’(petros, a single stone; Cephas, 요1:42하)로 대치하면서 뭇 영혼들을 수천 년 동안 멸망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사실 이러한 사탄의 전략은 반석 위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기 훨씬 전, 인류의 태동과 더불어 전개되어 왔던 것인데 특히 ‘참 빛’(the true Light)되신 창조주 하나님 대신에 피조물에 불과한 태양(a light)을 숭배하게 하면서 수많은 영혼들이 영원히 하나님과 격리되도록 하였다(욥31:26,27). 그리하여 심지어는 선택 받은 이스라엘조차도 하나님께로부터 태양 숭배에 대해 경고를 받았지만(신4:19; 17:3) 그들은 버젓이 하나님 대신 태양을 신으로 숭배하기도 하였던 것이다(왕하23:3-14; 렘19:13). 원래 사탄은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the anointed cherub that covereth, 겔28:14)이었고 또 타락하기 전 이름이 루시퍼(Lucifer, helel, light bringer, 사14:12)라 불릴 정도였기 때문에 언제든 ‘빛의 천사’(an angel of light)로 가장할 수 있어서 마치 참 빛(the true Light)되신 하나님인양 하며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다(고후11:13-15). “그러한 자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며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그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니 이는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an angel of light)로 가장하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사역자들 또한 의의 사역자로 가장한다 하여도 그것은 결코 큰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들의 행위대로 되리라.”(고후11:13-15) 11. 참 빛(the true Light) 그러나 빛의 천사로 가장하던 사탄은 ‘참 빛’(the true Light, 요1:9; 요일2:8)이 비추일 때, 곧 의(義)의 해(the Sun of righteousness, 삼하23:4; 시67:1; 84:11; 말4:2; 계1:16)가 떠올라 사탄의 빛이 어둠으로 밝혀질 때 최종심판을 받고 불 호수에 던져지게 된다(계20:10). “또 그들을 속인 마귀가 불과 유황 호수에 곧 그 짐승과 거짓 대언자가 있는 곳에 던져져서 영원무궁토록 밤낮으로 고통을 받으리라.”(계20:10) 그리하고 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고 하늘로부터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게 되는데 구원받은 자들은 밤이 없고 해와 달이 빛을 비출 필요가 없는 그 도시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계21:1,2,23-25). “그 도시는 해와 달이 안에서 빛을 비출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시를 밝혀 주고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광체(光體)이시기 때문이라. 구원받은 자들의 민족들이 그 도시의 빛 가운데서 다니겠고 땅의 왕들이 자기들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거기에는 밤이 없을 터이므로 낮에 그 도시의 문들을 결코 닫지 아니하리라.”(계21:23-25)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는 아무나 다 입주할 수가 없다. 그 도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곧 ‘참 빛’(the true Light)되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어린양의 생명책’(the Lamb's book of life)에 이름이 기록되어야만 하는 것이다(계13:8; 21:27) “더럽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며 또 무엇이든지 가증한 것을 이루게 하거나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도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the Lamb's book of life)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21:27) 12. 마무리 우리 모두는 언젠가 ‘참 빛’(the true Light)되신 하나님 앞에 반드시 서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에 보호막이 없다면 ‘참 빛’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공의의 광선’에 의해 멸망당하여 영원한 지옥/불 호수에 던져질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방패(shield)와 반석(Rock)이 되어주시는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있다면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공의의 광선’을 대신 담당해주시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광선’만이 우리에게 들어오도록 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 여러분,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호하심을 받고 있습니까? 당신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당신은 진실로 예수님을 당신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영접하였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다음의 말씀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그는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요5:24). “그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시니라.”(요8:12)
2009-05-08 13:34:44 | 관리자
1. 들머리 며칠 전 고등학교 동기동창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짧은 이메일을 받았다. “월간조선 10월호에 유영철 스토리 참고하시기를… 바이! 샬롬!” 얼핏 보면 뜬금없는 내용이랄 수도 있겠지만 평소 하나님의 말씀을 뜨겁게 사랑하는 귀한 형제의 메시지인지라 퇴근한 후 곧 딸아이를 시켜 동네서점에서 월간조선 10월호를 사오게 하였다. 잡지 표지에는 여러 가지 화제의 기사들을 소개하는 각종 문구들이 굵디굵은 활자체로 빼곡히 도배되어 있는 가운데 ‘〔특종〕 살인범 유영철이 이은영 기자에게 보내온 세 통의 편지(전문)’이란 타이틀이 클로즈업 되었다. 그런데 그 밑에는 ‘나의 어린 시절을 나쁘게만 보지 않아 감사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골라 반젤리스의 음악을 틀어놓고 살인했습니다.’란 부제가 붙어 있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골라 살인을 하였다니…’ 너무도 충격적인 내용인지라 밤이 늦었음에도, 그래서 오늘의 피로가 증폭되어 내일은 더욱 힘든 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본문을 당장 펼쳐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유영철은 살인대상자들과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를 파악한 후, 즉 상대의 영적 백그라운드도 확인한 후 살인을 결행한 것인데 이미 범죄심리 전문가들이 유영철의 살인 동기 중에는 종교와 기득권층에 대한 원초적이고 극단적인 반발 심리가 내재되어 있다고 분석했던 대로 그는 기독교 곧 성경의 하나님을 부정하는 관점에서 살인을 하였음을 자필 편지에서 고백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영철이 주장하는 신앙 논리는 정말로 그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는 것인지 성경적으로 한 번 판단해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유영철 자신도 그렇지만 이 공개된 편지를 읽게 될 수많은 영혼들이 그의 일방적인 신앙 논리를 통해 영적인 혼동에 빠질 우려가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글에서는 먼저 유영철의 편지 중에서 기독교 신앙과 연관된 부분을 발췌하여 소개한 후 몇 가지 중요한 논점에 대해 언급하여 보고자 한다. 2. 세 통의 편지 “… 한때 절실히 신앙생활을 했던 제가 이렇게까지 악마의 길을 걷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나이 서른이 되면서부터 제게 남은 건 증오와 분노심만 가득했습니다. ‘생사화복’을 주관한다는 신을 부정하듯 인간이 인간을 그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 인간을 초월한 신의 존재를 신앙으로 삼는 종교를 경멸이라도 하듯 많은 교회 주변사람들을 대상으로 삼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오히려 나중엔 인본주의 종교, 자각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불교 쪽으로 의지가 많이 되더군요. 그래서 범죄를 할 때마다 법당을 찾아 이 행각을 멈춰달라고 예원하는 이중성도 보이곤 했던 못난 놈입니다. …”(첫 번째 편지 중)   “… 사람들은 나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라 합니다. 기독교 잣대로 보면 전 무조건 지옥으로 가야죠. 저라고 왜 양심이 없겠습니까.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이 못난 인간 너무나 부끄럽고 죄스러워 뭐라 형용할 수 없을 뿐입니다. …”(두 번째 편지 중)   “… 교인들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나 의아해 하셨죠? 사실 전 많은 시간 성경책을 끼고 살았을 정도로 기독교를 많이 의지했었습니다. 저의 옛날 스케치 그림들을 보더라도 유난히 기도하는 모습들이 많은 것도 그런 점을 많이 나타내는 거겠죠. 제가 첫 징역을 받을 때 저는 경미하다고 생각되어 나올 줄 알았습니다. 기타 살 돈이 없어 옆집 누나의 기타를 훔쳤지만 나중에 돌려주고 용서도 받았습니다. 법정에 섰을 때 손에 조그마한 木(목)십자가를 하나 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 나오지 못했습니다. 木(목)십자가를 부러뜨리며 하나님을 등지게 되었고, 2000年 10月 강제이혼을 당하면서 『신은 죽었다』고 했던 니체의 말처럼 「저도 죽었다」고 마음먹었고 만물을 창조했다는 유일신을 부정하듯 평화로워야 할 교회 주변사람들을 그랬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전 하나님에게 저의 희망을 구걸하지 않았고 진리를 찾아달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배나 기도 같은 건 자연히 멀어졌고 전 결국 오랜 세월 믿고 의지했던 기독교를 떠났던 것입니다. …“(세 번째 편지 중) 3.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구원받는다? ‘한때 절실히 신앙생활을 했던 제가’ ‘많은 시간 성경책을 끼고 살았을 정도로 기독교를 많이 의지했었습니다.’란 유영철의 말을 들으면 마치 유영철이 과거 어느 순간에는 크리스천이었던 것처럼 세상 사람들은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의 열매와 현재의 신앙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유영철은 결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마7:15-20; 12:31-37). 따라서 유영철의 경우에서 보듯 아무리 교회를 오랜 기간 열심히 출석하였다 해도 또는 성경책을 끼고 살 정도로 열심히 성경을 읽었다 해도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결코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롬1:17; 고전15:1-4)! 그렇다면 구원은 어떻게 해야 받을 수 있는 것일까?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성경 말씀대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여야 한다. “기록된바, 의로운 사람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길에서 벗어나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롬3:10-12, 이하 흠정역)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그리고 죄로 인한 형벌은 성경 말씀대로 영원한 죽음 곧 지옥에 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상)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을 자기 몫으로 받으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 아울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신 사실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롬5:8)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따라서 이제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곧 구원자와 주님으로) 모셔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것을 네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 그러므로 진실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기도를 한다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주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시고, 장사지낸 바 되셨다가,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이제 제 마음에 들어오셔서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지금 저는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저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영접합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아멘.” 4. 구원은 잃어버릴 수 있다? 혹자는 ‘한때 절실히 신앙생활을 했던’ 유영철이 ‘결국 오랜 세월 믿고 의지했던 기독교를 떠나’ 하나님을 부정하고 연쇄살인까지 한 것으로 보아 그가 한때는 구원을 받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나중에는 구원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이란 한 번 받으면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첫 번째로 구원받은 사람이 다시 잃어버려지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민23:19; 딛1:2; 요6:39). 두 번째로 영원한 생명은 말 그대로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요3:16; 10:28). 만약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영원한’ 생명이 어떤 이유에서건 중간에 끝나고 만다면 그것은 애초부터 영원한 생명이 아닌 것이다. 세 번째로 구원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은 것으로서 이미 천국에 예약되어 있기 때문이다(벧전1:4,23). 네 번째로 구원은 성령님에 의해서 구속의 날까지(unto the day of redemption) 봉인되어 있으며 성령님께서는 영원히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엡1:13; 4:30; 요14:16-17). 다섯 번째로 구원받은 자는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기에 태어나지 않은 상태(unborn)로 되돌아갈 수 없으며 또한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기에 창조되지 않은 상태(uncreated)로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요1:12-13; 고후5:17; 엡2:10). 여섯 번째로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호하심을 입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그의 안전을 위해서 기도하셨기 때문이다(벧전1:5; 유24; 요17:11). 일곱 번째로 구원은 은혜에 의한 것이기에 행위가 그것에 영향을 미칠 수 없으며(롬3:28; 11:6) 또한 아무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구원받은 자를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롬8:38-39). 미래에 지을 어떤 죄로 인해서 구원을 잃게 될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 또 사탄, 혹은 심지어 우리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 자신을 끊어버리게 될까봐 걱정할 필요도 없다. 육적인 것이건 영적인 것이건, 생각이건 행동이건 간에, 우주에 있는 어떤 것도 우리가 한 번 얻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 여덟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자는 정죄에 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예수님께서도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요5:24; 10:27-28). 아홉 번째로 구원받은 자는 결코 쫓겨나지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손 안에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손 안에 감싸여 있기 때문이다(요6:37; 10:28-30). 열 번째로 구원은 취소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구원받은 자는 전가된 의(imputed righteousness)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롬6:23; 11:29; 엡2:8-9; 롬4:6-7). 열한 번째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때 그 모든 죄들은 미래의 죄였으며 구원받은 자는 죄에 대해서 죽어 있는 것이고 또한 모든 죄들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요10:16; 롬6:2,7; 시103:12; 미7:19; 사38:17; 44:22; 히10:17) 열두 번째로 구원받은 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으며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골3:3,4) 5. 배교하면 용서받을 수 없다? ‘한때 절실히 신앙생활을 했던’ 유영철이 ‘생사회복을 주관한다는 신을 부정하듯’ ‘인간을 초월한 신의 존재를 신앙으로 삼는 종교를 경멸이라도 하듯 많은 교회 주변사람들을 대상으로’ 연쇄살인을 범하였는데 그는 자기 말대로 ‘기독교 잣대로 보면 무조건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특히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님께 참여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권능을 맛본 자들이 만일 ‘떨어져 나가’(背敎, fall away)면 다시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에 이르게 함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니”(히6:4-6)라는 말씀에 비추어 유영철의 영혼(soul)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대로 진실로 구원받은 자는 일시적으로 타락할 수는 있지만 유영철처럼 믿음의 근본 교리를 뒤엎거나 주님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할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유영철과 같은 배교자(?)에게는 더 이상 회개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을 수 있겠다. 그렇다면 유영철의 구원가능성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 전에 먼저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배교한’ 사람들의 신앙 정체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물론 이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성령님의 권능을 몸소 체험했던 유대인들일 수도 있겠고 또 사도 바울로부터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해 듣고 떨었던 ‘벨릭스’나 사도 바울의 복음을 듣고 “네가 나를 설득하여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도다.”(행26:28)라고 했던 ‘아그립바’ 왕 같은 사람도 해당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3년 동안이나 같이 활동하면서 주님께서 주신 놀라운 권능을 몸소 체험하고 (왕국의) 복음도 전파했던 ‘가룟 유다’가 이 말씀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히브리서 6장 4절의 “성령님께 참여했다”는 것은 성령을 받았다는 뜻보다는 성령의 권능아래, 또는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던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 비교적 올바른 해석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배교자는 영적인 리더십에 속하여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접했으면서도, 또한 지각으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의(義)의 길을 알았으면서도 의지적으로 주님을 거부하여 결국 주님을 십자가에 또다시 못 박는 행위를 한 자이므로 두 번 다시 구원의 기회를 얻을 수 없는 자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영철은 진정한 배교자라 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하늘의 선물을 맛보거나 성령님께 참여하여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권능을 맛보거나 하지 못하였으며 단지 영이 가난하였지만 구원받지 못한 교인이었기 때문이다(마5:3). 따라서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하)는 주님의 말씀은 여전히 유영철에게도 유효한 것이다. 6. 기독교인들은 살해되어야 한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골라 반젤리스의 음악을 틀어놓고 살인했습니다.’란 유영철의 증언에서 보듯 기독교인이 이제는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대상으로 점차 부각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1999년 4월 미국의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는 ‘에릭’과 ‘딜런’이란 두 학생이 900여 발의 총알을 발사해 학생 12명과 교사 1명을 죽이고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발생 2주전 개봉됐던 ‘매트릭스’의 마니아였던 이들은 검은색 가죽과 트렌치코트로 대표되는 ‘매트릭스 패션’으로 인해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해 보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무차별 사살과 더불어 표적 살인을 병행하였는데 그 타깃이 되었던 이들 중에는 물론 크리스천이 포함되었다. 총기가 난사되는 소리를 듣고 겁에 질려 도서관 바닥에 엎드려 있던 수많은 학생 가운데 그 살인자들이 먼저 살인의 대상으로 지목한 사람은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알려진 ‘캐시 버넬’이었다. 그들이 캐시의 머리에 총부리를 갖다대고 “Do you believe in God?”(하나님을 믿느냐?)라고 묻자 캐시는 담대하게 “Yes.”라 답하였고 이어 쌍욕과 함께 방아쇠가 당겨져 캐시는 즉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탈북자 이순옥씨의 증언을 통해 또 다른 예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들은 사람의 무리 같지 않았습니다. 1,500도 이상 시뻘겋게 타오르는 용광로의 고열 노동 작업장이었는데 머리에 머리카락이 붙어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얼굴은 해골 같고 이빨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키가 다 줄어들어서 120센티 30센티 요렇게 땅에 딱 붙은 난쟁이들만 움직였습니다. 잡혀 올 때는 정상인들이 잡혀 왔는데 거기 와서 하루 열여섯 시간, 열여덟 시간씩 먹지도 못하고 그 고열 노동 속에서 일을 하다 보니 그 사람들은 척추가 녹아 내려서 뒷잔등에 혹이 되어 있었고 몸이 다 휘어져서 앞가슴하고 배가 마주 붙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한결같이 모두 그렇게 육체가 망가져 기형이 되어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말로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소가죽 채찍을 윙윙 휘두르고 다니면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예수를 믿는 그 사람들의 몸에는 옷이 입혀져 있지 않습니다. 저는 처음에 멀리서 그 사람들을 보았을 때 모두 다 꺼먼 옷을 입고 있는가 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서 찬찬히 보니 그 사람들은 맨 살가죽에다 앞에 시커먼 고무 앞치마 하나만 걸치고 있었습니다. 용광로의 뜨거운 불꽃이 앙상하게 말라붙은 살가죽에 튀고 또 튀어 딱지가 앉고 그 자리에 쇳물이 또 떨어지고, 타버리고 해서 그 사람들의 피부는 한 곳도 성한 곳이 없었고 마치 짐승의 가죽과 같았습니다. 어느 날 오후, 제가 공장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공장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작업장 한 가운데 수백 명의 그 죄수 아닌 죄수를 모아놓고 담당 교도관 두 명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미친 듯이 고함을 치며 날뛰고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수령님을 믿지 않고 ‘하늘’을 믿는 미친 정신병자 놈들이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그 사람들을 차고, 때리고 하면서 인간이하의 취급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너희들 가운데서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대열 앞에 나서라. ‘하늘’을 믿지 않고 수령님을 믿겠다고 하면 자유세상으로 내보내서 잘 살 수 있게 만들어 주겠다.”하면서 그 사람들을 윽박지르며 ‘하늘’을 거부하라고 그렇게 채찍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너무나도 이상했습니다. 수백 명의 그 사람들은 왜 그런지 아무 대답도 없이 그렇게 매를 맞으면서도 침묵으로 맞섰습니다. 그 때 독이 오른 교도관이 그 사람들에게 달려가서 닥치는 대로 아무나 여덟 명을 끌어내다가 땅바닥에 엎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구둣발로 내리밟고 짓이겼습니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고 허리며 팔 다리 뼈가 부러졌습니다. 그 사람들은 고통 중에서도 몸을 뒤틀면서, 짓밟힐 때마다 신음소리를 냈는데 그 신음소리가 너무나도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저는 그때 주님이 누군지, 하나님이 누군지도 전혀 몰랐습니다. 뒤에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이 구둣발로 짓밟혀 뼈가 부러지고 머리통이 부서져 나가면서 신음소리처럼 애타게 불렀던 것은 바로 주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당했던 고통의 천만 분의 일도 제대로 여러분에게 전해 줄 수가 없습니다. 미쳐 날 뛰던 교도관 두 명은 “수령님과 당을 믿는 우리가 사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너희가 사는가 보자”면서 달려가더니 용광로의 펄펄 끓는 쇳물통을 끌어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쇳물을 피투성이가 된 그 신자들 위에 부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순식간에 살이 녹고 뼈가 타면서 숯덩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주께서 오시는 때의 표적과 세상 끝의 표적이 무엇이리이까?”(마24:3하)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셨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넘겨주어 핍박받게 하겠고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으로 인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으리라.”(마24:9) 7. 마무리 몇 달 전 스웨덴 법정에서는 자기 교회에서 동성애가 죄라는 설교를 한 에이크 그린(Ake Green) 목사에게 징역 1개월이 선고되었다. 이른바 ‘증오언론 금지법(Hate Speech Law)’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선포한 목사에게 실형이라는 철퇴가 내려진 것이었다. 이제 구원받아야 될 제2, 제3의 유영철에 의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더욱더 위기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분명히 드러난 ‘그리스도의 편지’(the epistle of Christ)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자 할 때에는 더욱 순교자적인 각오가 요구될 것이다(고후3:2,3). 따라서 이제 우리는 말세지말(末世之末)의 이 세대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더욱 귀를 기울이도록 하자. “너는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왕관을 네게 주리라.”(계2:10하) “몸은 죽여도 혼(soul)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혼과 몸을 능히 지옥에서 멸하시는 분을 두려워하라.”(마10:28)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 하시는도다.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계22:20) * 저자의 단행본 ‘성경으로 세상보기’는 ‘생명의 말씀사’에서 온라인으로도 구매할 수 있습니다.
2009-05-08 13:33:31 | 관리자
1. 들머리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이동호 부장검사)는 작년 9월부터 올해 7월까지 서울 시내에서 모두 17차례에 걸쳐 21명의 노인과 부녀자를 연쇄 살해한 혐의와 방화, 사체 유기 등 모두 11개 혐의로 8월 13일 유영철(34)을 구속 기소했다. 그런데 유영철은 경찰수사에서 확인된 21명 외에 5명을 더 살해했으며 시체 4구의 장기 일부를 먹었고 만약 검거되지 않았으면 100명도 더 살해했을 것이라는 진술을 하였다고 검찰은 밝히고 있다. 살인적인 불볕더위의 와중에 접하게 되는 이와 같은 한 연쇄살인범에 대한 뉴스는 분명 납량특집용으로 검찰이 내놓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온갖 세상사에 좀처럼 반응하지 않던 우리의 오감과 이성을 일순간에 얼어붙게 하고 말았다. 문자 그대로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은 연계고리가 없는 부유층 노인과 출장마사지사 등을 거푸 살해하면서 불특정 다수를 향한 맹목적인 증오심을 표출하였는데 사실 이와 비슷한 연쇄살인은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도 적지 않게 발생되어 왔다. 즉 1975년 17명을 살해한 김대두 사건을 위시하여 1986년부터 1991년까지 화성일대에서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 1994년 지존파 사건, 1994년 온보현 사건, 1996년 막가파 영웅파 사건, 2000년 정두영 사건, 2002년 용인 연쇄살인 사건 등 그야말로 끔찍하기 짝이 없는 연쇄살인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발생되어 왔다. 그리고 이제 모든 과거의 연쇄살인에 대한 기록들을 삽시간에 갈아치우면서 새롭게 등장한 유영철 사건은 우리를 더욱 커다란 충격과 공포와 비탄 속에 몰아넣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성에 대한 최소한의 바램마저도 짓뭉개 버리고 마는 이러한 연쇄살인 사건은  왜 일어나는 것이며 또 그 궁극적인 실체는 무엇인지 정신의학적 관점과 성경적 관점에서 살펴보면서 함께 영적인 유익을 구해보도록 하자. 2. 정의(definition) ‘연쇄살인’이라는 용어는 1970년대 FBI 요원으로서 요원들을 훈련하는 과정에서 범죄 프로파일링(profiling)을 가르치고 있었던 레슬러(Robert Ressler)에 의해 처음으로 만들어졌는데 이후로도 여러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정의가 제시되어 왔다. 예를 들어 에거(Steven Egger, 1984)는 강박감이나 만족감이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이 서너 명의 낯선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라고 한 반면, 노리스(Joel Norris, 1988)는 한 개인이 최소한 두 명의 희생자를 한 달이나 그 이상의 기간을 두고 살해하는 경우라고 했으며, 홈즈(Holmes, R. & S. Holmes, 1994)도 최소한 한 달 이상의 기간동안 최소한 3명을 살해하는 것을 연쇄살인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최근 들어 미(美) 법무부(Department of Justice) 내의 법무통계국(Bureau of Justice Statistics)에서는 공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연쇄살인을 정의하고 있다. “연쇄살인은 세 번 이상의 독립된 사건에서 여러 명을 살해하는 것을 말하며 대개 희생자를 유혹하여 살해하는 경향이 있다. 종종 극단적인 가학적 충동에 의해 일어나는데 연쇄살인자는 사회적인 면에서 병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감정이입(感情移入)을 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많은 경우에 연쇄살인자는 정신이상자이기 때문에 죄가 없는 것이라고 변호되기도 하지만 미국에서 이러한 변론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일련의 정의들을 요약해 볼 때, 연쇄살인이란 ‘한 살인자’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시간적 간격(interval)’을 두고 살인을 하여 ‘복수(複數)의 희생자’가 나오는 경우를 다 포함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반사회성 인격장애(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 유영철은 강간죄로 교도소 수감 중이던 지난 2000년 6월 모 월간지에 보도된 ‘정두영 연쇄 살인 사건’을 읽고 범행을 계획했으며, 작년 9월 출소 후 흉기를 준비한 뒤 작년 9월24일 첫 범행을 앞두고 개를 상대로 사전 연습까지 했다고 검찰은 전했다. 아울러 검찰은 그가 어린 시절 동경하였던 어느 정원이 딸린 부유한 집에 대한 좌절감이 부유층에 대한 적개심으로 변질되었으며 또 사귀던 여성이 변심하자 복수심이 생겨 연쇄살인을 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대부분의 정신과 전문의들은 유영철이 심각한 정신질환의 일종인 ‘반사회성 인격장애(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를 갖고 있기에 이러한 엽기적인 연쇄살인을 저질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반사회성 인격장애’는 성장기의 문제로 인해 ‘초자아(超自我, superego)’나 ‘양심’이 형성되지 않아 발생하는 것으로 (검찰의 브리핑에서 보듯) 알려져 있지만, 성염색체에 변이가 있는 경우 유전적으로 잔인해질 수 있으며 뇌 속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이 급격히 저하된 경우도 이 같은 연쇄살인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 ‘유전적 취약성’도 중요한 발생기전으로 간주된다. 즉 ‘위험한 환경요소’들이 정신질환에 관해 타고난 ‘유전적 취약성’과 결합하였을 때 ‘반사회성 인격장애’와 같은 정신질환이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이 질환은 극도로 자기중심적이며 의미 있는 대인관계를 형성하거나 지속해 나가는 능력이 없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좌절되면 극단적인 공격성을 보이며 몇 주 또는 몇 달은 주변의 인정을 받으며 착실하게 보내지만 주기적이고 발작적으로 반사회적 행동을 하는 등의 특징을 보이는데 이를 확실히 진단하기 위해서는 몇몇 다른 주요 정신질환들과의 감별이 필요하다. 곧 우울증, 정신분열증, ‘측두엽 간질’ 등에서도 공격성과 충동성을 억제하지 못해 이유 없이 타인을 살해할 수 있지만 대부분 우발적이고 일회적이며 죄책감이 있는 점들로 인해 ‘반사회성 인격장애’에서의 치밀하게 계획된 연쇄살인과는 구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경계성 인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인 경우도 간헐적으로 반사회적 행동을 하지만 사회규범을 크게 해치지 않으며 죄의식이 있고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는 점에서 ‘반사회성 인격장애’와 차이가 난다. 4. 공공의 적(public enemies) 엽기적인 살인행각이 벌어진 장소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깔끔한 유영철의 원룸에는 예사롭지 않은 세 편의 범죄영화 DVD가 있었다고 한다. 유영철은 마치 자신의 범죄상을 말해 주듯 설경구와 이성재가 열연한 ‘공공의 적’, 카메론 디아즈의 ‘베리 배드 씽(very bad things)’, 그리고 애슐리 쥬드의 ‘크라임 라이프(normal life)’ DVD를 PC 책상 서랍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이 중 유독 케이스가 닳아 보였다고 하는 ‘공공의 적’은 잔인한 성격의 주인공 조규환(이성재 분)이 엽기적 살인을 한 뒤 치밀하게 사건을 은폐하는 연쇄살인에 대한 영화로서 이번 유영철 사건과 여러 모로 유사한 측면이 있어 그가 이 영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즉 주인공 규환이 밤에 자신의 집에 들어가 연로한 친부모를 살해하는 패륜 장면은 유영철이 부유층 노인을 집중 타깃으로 삼은 것과 일맥상통한다. 또 유영철의 노트에는 라이선스지 등에 실린 외제 나이프 세트와 고가의 손전등 소개기사도 스크랩되어 있었고 책상 서랍에서는 손전등 두 개가 발견되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모두 ‘공공의 적’에서 규환이 애용하던 ‘소도구’들이다. 그리고 유영철이 경찰조사에서 IQ가 140이 넘는다고 떠벌린 것도 어찌 보면 이 영화 속에서 똑똑하고 말끔하며 냄새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던 연쇄살인범 조규환과 자신을 동일시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 이제 ‘공공의 적’의 영향으로 대한민국에서 ‘공공(公共)의 적(敵)’이 되어버린 유영철과 같이 세상에 속한 자들에게는 단지 눈으로 보는 것은 만족이 될 수 없으므로 그들은 쉽사리 ‘안목(眼目)의 정욕(the lust of the eyes)’을 구체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전1:8; 요일2:16). 그러나 성경은 또한 말씀한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삼가라.”(살전5:22, 이하 흠정역) “악한 것을 몹시 싫어하고 선한 것에 붙어 있어라.”(롬12:9) 따라서 우리는 ‘공공의 적’에서뿐 아니라 우리 삶 전체에서 우리의 망막을 자극하는 모든 요소들을 잘 분별하여 악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몸 전체가 빛으로 가득할 수도 있고 또 어둠으로 가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마6:22,23; 눅11:34,35). 5. 역사 속 연쇄살인(serial killings in history) 유영철 연쇄살인 사건이 알려진 후 언론에서는 이와 비슷한 국내외의 몇몇 연쇄살인 사건들이 보도되었지만 역사적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연쇄살인 사건들이 끊임없이 존재해 왔다. 가까이로는 수백만 명의 북한 인민들이 장군님에 의해 아사(餓死)와 압제로 연쇄살인을 당하여오고 있고 또 사담 후세인과 같은 독재자들에 의해서도 그들의 뜻을 따르지 않는 수많은 인명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연쇄적으로 살해되고 있는 것이 21세기의 지구촌 현실이다. 그리고 1975년-1979년 캄보디아에서 폴 포트가 크메르 루즈와 더불어 자국민의 약 1/4인 이백만 명을 죽였고, 1966년-1976년 중국에서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통해 수천만 명의 인민을 학살하였으며, 이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가 전쟁과는 상관없이 유태인을 육백만 명 살해하였고, 1929년-1939년 러시아에서 스탈린이 이천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과 정적들을 학살한 것 등은 20세기에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의 중요한 계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천 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유대 땅 베들레헴과 그 주변 땅에서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이 헤롯 왕에 의해 연쇄살인을 당하였다(마2:16). 또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 기원전 약 1500년경 이집트에서 히브리인 노예들이 번성하자 파라오는 히브리인 중 사내아이가 태어나거든 강에 버려 죽이는 연쇄살인을 거행하였다(출1:22-2:4). 그런데 이와 같이 역사 속의 수많은 크고 작은 연쇄살인 사건들, 곧 앞서 정의한 대로 한 살인자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살인을 하여 복수(複數)의 희생자가 나오게 되는 경우 중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연쇄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데 이 사건은 바로 인류의 시작과 더불어 시작이 되고 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께서 아시느니라, 하니 여자가 본즉 그 나무가 먹음직도 하고 눈으로 보기에도 좋으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이므로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자기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으니라.”(창3:4-6) 6. 연쇄살인범(the serial killer) 그리하여 이 세상에는 죄와 죽음이 들어오게 되어 아담의 모든 후손들 곧 ‘역사 이래 존재하였던 모든 인간들’은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요일3:8상; 롬5:12). 그래서 우리 모두가 이 옛 뱀(Satan, Devil)에 의해 연쇄적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으므로 주님께서는 이 지상 최대의 살인자인 마귀(魔鬼, Devil)가 또한 ‘처음부터 살인한 자(a murderer from the beginning)’라고 하시는 것이다(계12:9; 요8:44). 그런데 이 지상 최초 및 최대의 연쇄살인범 마귀는 에덴동산에서 그랬듯이 항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거짓말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는 유영철이 “이 일을 계기로 여성들이 몸을 함부로 놀리지 않고 부유층도 각성했으면 한다”고 주장하는 범행동기의 거짓된 논리에서도 발견이 되며 또한 장군님에 의해 지상낙원에서 자행되는 연쇄살인을 비롯한 역사상의 모든 연쇄살인의 기전에서도 확인이 된다. 그렇다. 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자기 속에 진리가 없으므로 진리 안에 거하지 아니하고 거짓말을 할 때에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라.”(요8:44) 또한 이 역사상 전무후무한 연쇄살인범 마귀는 현재 이 세상의 군주요, 신으로서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이지만 자기의 때가 조금만 남은 줄 알므로 더욱 기승을 부리며 우리들을 미혹하여 이 세상에서 연쇄살인과 같은 죄악들이 더욱 창궐하게 만들고 있다(요12:31; 14:30; 고후4:4; 엡2:2; 계12:12; 요일3:8상). 그렇지만 마귀는 곧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한 천사에 의해 붙잡혀서 천 년 동안 바닥없는 구덩이(bottomless pit; 무저갱)에 갇히게 될 것이며 그 후 잠깐 풀려나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을 속이면서 다시 연쇄살인을 부추기려 하다가 또다시 잡혀 불못(lake of fire)에 던져져 영원무궁토록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계20:1-10). 7. 마무리 유영철 연쇄살인 사건이 보도된 후 구치소에 수감된 사형수들이 공포에 떨고 있다고 한다. 사형수들은 노무현 정권에서는 사형이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으나 유영철 사건이 터진 이후 사회기강을 바로잡고 범죄를 엄단한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사형수들의 사형이 집행될까봐 괴로워하고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이번에는 워낙 여론이 좋지 않기 때문에 사회 경종을 울리는 차원에서 동종 범죄를 저지른 사형수와 유영철의 집행이 먼저 이루어질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많은 국민들은 유영철이 사형되더라도 그가 저지른 끔찍하기 짝이 없는 연쇄살인의 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므로 (사후세계가 있다면) 유영철은 죽어서 결코 천국에 갈 수 없을 것이라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유족들에겐 죄송하지만) 성경은 유영철의 죄를 포함한 우리의 ‘어떠한 죄들’이라도 다 용서받을 수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하고 있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1:7)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다 사형에 해당하는 갖가지 죄를 지은 사형수요, 특히 마음으로 살인을 끊임없이 행해온 연쇄살인범이다(롬1:29-32; 요일3:15).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본래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자백하고 회개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값을 십자가에서 다 치르셨다는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모셔들인다면 분명 구원해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다(히9:27; 시9:17; 마13:49,50; 요일1:9; 요1:12; 마1:21; 롬10:9,10,13; 히10:10,14,19). 유영철 사건 이전까지 17명이라는 우리나라 최대의 연쇄살인 기록을 갖고 있던 살인마 김대두는 옥중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뒤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누가 저에게 어느 대회사 사장 자리를 줄 테니 예수님을 버리고 오라 하면 저는 확실하게 대답할 것입니다. 사형의 날을 기다리며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기쁨을 기대하는 지금이 내게는 더욱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 감옥에서 300명을 주님께로 인도하였다. 그렇다. 비단 김대두뿐이겠는가. 연쇄살인범 유영철이나 혹은 그보다 더 큰 죄를 진 ‘누구라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만 한다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갈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Jesus Christ)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 저자의 단행본 ‘성경으로 세상보기’는 ‘생명의 말씀사’에서 온라인으로도 구매할 수 있습니다.
2009-05-08 13:32:54 | 관리자
복음(Gospel): 복된 소식.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요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주신 계시요 경륜이다. 성경은 ‘왕국의 복음’(마24:14),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행20:24), ‘그리스도의 복음’, ‘화평의 복음’(롬1:16; 10:15) 등을 제시한다. 한편 그리스도의 복음은 영광스런 복음이기도 한데(딤전1:11) 우리 주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 이 복음이 우리에게 선포되었다. 우리 주님의 삶과 기적과 죽음과 부활과 교리 등을 자세히 보여 주는 책들을 보통 복음서라고 하며 여기에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복음서가 있다. 모든 사람이 이것들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복음의 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이것들이 예수님의 교리와 행적을 담은 표준 책으로 받아들였다. 정경 참조.   성경에는 몇 가지 복음이 나와 있다. I. 왕국의 복음 마24:14에 나오는 이 복음은 눅1:32-33에 예언된 것으로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통치하실 지상 왕국을 하나님께서 건설하려 하신다는 것을 알리는 좋은 소식이다. 성경에서 이 복음은 두 번 선포되었다. 처음에 침례자 요한의 사역과 함께 왕국의 복음이 선포되기 시작했고 후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이 이 복음을 선포했지만 유대인들이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기 때문에 끝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교회가 공중으로 들려진 이후에 이 왕국의 복음은 다시 선포될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마24:14에 있는 예언 즉 “왕국의 이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거가 되기 위해 온 세상에 선포되리니 그제야 끝(세상의 끝)이 오리라.”는 말씀의 성취이다. 이 말씀은 현재 각 민족에게 전파되고 있는 은혜의 복음에 대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시간에 전파되고 있는 것은 구원의 복음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지 하늘의 왕국의 복음이 아니다. 하늘의 왕국의 복음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증거를 위한 것으로 왕국을 건설할 때가 임박했음을 통보하는 것이다. 하늘의 왕국의 복음은 7년 환난기에 선두주자 엘리야와(말4:5-6) 다윗의 왕좌에 앉으실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모든 민족에게 전할 것을 위임받은 다른 사람들 - 계시록 7장과 14장의 십사만 사천 명 - 이 선포할 것이며 그것의 목적 중 하나는 온 땅에 흩어진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다시 모으는 것이다. 하늘의 왕국 참조.II.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행20:24에 나오는 이 복음은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사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좋은 소식이다. 이 복음은 다양한 방법으로 묘사되어 있다. 롬1:1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 복음의 원천이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요3:16). 이 복음의 성격은 은혜이고(행20:24) 주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며(롬1:16; 고후10:14)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또 이 복음은 화평의 복음이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화목하게 하고 우리 혼에 화평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엡6:15). 한편 이것은 영광스런 복음이라고도 하는데(고후4:4; 딤전1:11) 이 복음 역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으로서 특별히 영광 중에 계시고 영화롭게 되셨으며 많은 아들들에게 영광을 가져다주실 주 예수님에 대해 언급하는 복음이다(히2:10). 이 복음은 그분의 재림과 관계가 있으며 특별히 그분의 영광스런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준다. 종교와 복음 선도 참조(86).III. 영존하는 복음계14:6에 나오는 이 복음은 계시록에서 일곱 대접의 심판이 있기 바로 전에 한 천사가 선포하는 복음이다. 이것은 천사에게 맡겨진 유일한 복음으로 하늘의 왕국의 복음도, 은혜의 복음도 아니다. 이 복음의 목적은 구원이 아니라 심판이다(계14:7). 이 복음은 7년 환난기의 심판의 시간을 통과하는 이스라엘과 이방인 신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될 터인데 그 까닭은 적그리스도와 그의 추종자들의 심판과 멸망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고통이 곧 끝날 것을 이 복음이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 복음은 사람들에게 구원자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창조주로서의 하나님께 경배할 것을 요구한다. 족장들과 대언자들이 에덴동산 이후로부터 계속해서 이 복음을 선포해 왔다. 이 복음은 영생을 주기 위해 사람들을 모두 구원한다는 의미에서의 영원한 복음이 아니다. 또한 이 복음의 핵심은 “회개하라.” 혹은 “이것을 하라.” 또는 “저것을 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단지 이 복음은 하나님의 심판의 시각이 이르렀으니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며 경배하라는 것이다.IV. 다른 복음갈1:6-12; 고후11:4는 위의 복음들 이외의 다른 형태의 복음이 있음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참된 복음을 왜곡시킨 것으로 여러 가지 미혹하는 형태를 취하며 주로 믿음만으로 구원에 이르기에 부족하고 선한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거짓 복음이다(골2:18-23; 히6:2). 그러나 이 가르침은 비성경적인 것으로 사도 바울은 갈1:8-9에서 이것을 가르치는 설교자들과 교사들을 강하게 저주하였다.
2009-05-08 13:32:13 | 관리자
우리는 진정 복음을 알고 있는가? (Do We Really Know the Gospel?) by Manfred Kober, Th.D. 구원론을 가르치면서 매년 나는 학생들이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테스트하기 위해서 질문을 던진다.  나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상상해 보라고 말한다.  "여러분은 지금 죽음의 문턱에 놓여 있는 불신자를 방문하기 위해서 병원에 있다. 여러분이 그 사람에게 복음을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스물 다섯 단어를 말할 시간 밖에 없다.  스물 다섯 번째 단어가 끝나면 그 환자는 죽게 된다. 여러분은 그 상황에서 어떻게 복음을 설명할 것인가?" 과연 학생들은 복음을 그토록 간결하게 표현함으로써 숨이 끊어져가는 그 사람이 올바로 반응만 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학생들은 복음을 온전히 이해해서 그렇게 짧은 몇 마디 안에 구원의 메시지를 담을 수 있을까?  이제 우리도 학생들이 풀어야 했던 그 퀴즈로 돌아가서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리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막16:15)  그렇다면 이제 다음의 세 가지 사항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첫째, 무엇이 복음이 아닌가? 둘째, 그렇다면 복음은 무엇인가?  셋째, 우리가 어떻게 그 복음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가? Ⅰ 복음이 아닌 것들 1. 세계교회협의회(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WCC)는 나이로비(Nairobi)에서의 제5차 회의에서 선언하기를. 복음은 "언제나…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투쟁에 참여할 책임을 포함하며, 인간의 전체성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고발할 의무를 포함한다."고 했다. - 「Christianity Today」 1972년 1월 2일, p.12.  과연 이것이 복음인가? 수년 전 복음전도자인 레이톤 포드(Leighton Ford)가 데모인(Des Moines)에서 전도집회를 가졌다.  그는 청중들에게 "두 발의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라고 소개되었다.  포드가 전하는 복음은 WCC의 입장과 흡사한 것으로, 복음은 개인의 구원 뿐 아니라 사회의 구원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복음인가? 2.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의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는 역설하기를, "그리스도의 복음은 수치에서 영광으로, 자기 회의와 자기 정죄로부터 자기 확신과 자기 긍정으로의 구원으로 선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슐러는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기존중의 신학으로 선포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자기존중: 새로운 종교개혁」(Self-Esteem: The New Reformation) p.161,47.  과연 이것이 복음인가? 3. 존 맥아더(John MacArthur)는 자신의 논쟁적인 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Jesus)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갈보리로의 초청은 그것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대로 인지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 하에서의 제자도(discipleship)로의 초청이다…"(p.21.)  "예수께서 선포하셨던 복음은 제자도로의 부르심이었다…"(p.21.)  "구원얻는 믿음의 본질은… 자아의 철저한 포기와 절대적인 복종이다…"(p.153.)   과연 이것이 복음인가? Ⅱ 복음은 무엇인가? '복음'(Gospel)으로 번역된 헬라어 '유앙겔리온'(euangelion)은 '좋은 소식'(good news)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에는 다음과 같은 물음이 뒤따른다. "무엇에 관한 좋은 소식인가?"  신약성경은 복음이라는 용어를 몇 가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1. 복음은 사람들에 관한 좋은 소식일 수 있다.  살전 3:6에서 바울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들의 흔들림 없는 믿음에 대한 좋은 소식, 글자 그대로 가스펠(gospel)을 가져왔다고 적고 있다.   2. 신약성경은 더 나아가서 왕국의 복음(the Gospel of the kingdom)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주로 '왕국의 복음'으로 사용되었다.(마3:1-2, 4:17, 10:5-7)  이것은 메시야가 오셔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자신의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좋은 소식이다.  그리스도의 초림 시에 이스라엘 민족은 그 왕국에 대한 그분의 참된 제안을 공적으로 거절해 버렸다.  하지만 왕국의 복음은 천년왕국, 곧 다윗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직전, 대환란 기간 동안에 다시 한 번 선포될 것이다.(마24:14) 3. '유앙겔리온'이라는 용어의 세 번째 용례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the gospel of the grace of God)"이다.(행20:24)  이 복음은 서신서들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지만 고전15:3-4에서 바울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나 역시 전해받은 것을 무엇보다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곧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성경대로 셋째 날에 다시 일어나시고"  바울이 선포했고 모든 신자들이 선포해야 할 복음은 무엇인가?  어느 저자가 간결하게 표현했듯이 "좋은 소식이란 그리스도께서 죄들로 인해 죽으시고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셨다는 것"이다. - 「코코리스의 복음전도: 성경적 접근」( Cocoris, "Evangelism: A Biblical Approach") p.60. 라이리(Ryrie)는 고전15:3-4의 복음의 요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유익한 분석을 했다.  "복음(the Gospel)이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좋은 소식이다.  그분께서 죽으셨고 그분께서 살아나셨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내용이다. 그리스도께서 매장되신 사실은 그분의 죽음이 사실임을 입증한다… 그분께서는 실제로 죽으셨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들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다… 증인들의 목록은 그분의 부활의 사실성을 입증한다." - 「그토록 큰 구원」(So Great Salvation) p.39. 그렇다면 복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좋은 소식,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고 그분께서 다시 일어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Gospel of the grace of God)이며 그 복음에서 그분께서는 죄인들에게 영생의 선물을 제안하시는 것이다. 죄인은 단순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행16:31) 그러면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과 그에 속한 모든 복을 허락해 주시는 것이다.(엡1:3) Ⅲ 어떻게 복음을 소개할 것인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핵심은 복음이다.  죄인의 구원에 있어서 복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우리는 WCC나 레잉톤 포드(Leighton Ford)가 그렇게 하듯이 복음을 '죄인을 대속하는 구원의 복음'과 '사회를 개혁하는 사회복음'으로 나눠서는 안된다.  우리는 슐러(Schuller)가 그렇게 하듯이 복음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죽음을 요구하는 인간의 죄에 대한 개념을 제거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우리는 맥아더(MacArthur)가 그렇게 하듯이 구원(salvation)과 성화(sanctification)를 혼돈하고 그리스도의 주되심(the Lordship of Christ)에 복종하는 것을 구원을 위한 전제조건(sine quanon of saving faith, p.135)으로 만들어서도 안된다. 이제 내가 학생들에게 제시했던 신학적 물음으로 다시 한 번 돌아가 보자.(이 질문은 라이리 박사(Dr. Ryrie)의 신학과목에서 시작된 것이다.)  똑똑한 몇몇 학생들은 보통 제한된 스물 다섯 단어에 들어가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인용할 것이다.  하지만 이 대답에는 점수를 줄 수가 없다.  학생들에게 주어진 질문은 자신의 말로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학생들은 보통 다음과 같은 답을 제출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당신이 그분을 당신의 구세주로 모셔들이면 그분께서 당신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대답은 좋은 대답이긴 하지만 썩 훌륭한 대답은 아니다. 이 대답에서 부족한 것은 명확한 복음제시에서 필요한 요소들 중 첫 번째 요소이다.   완전하면서도 간결한 복음제시의 세 가지 요소들은 첫째, 인간의 문제(the human problem), 둘째, 하나님의 예비(the divine provision), 셋째, 개인적인 취득(the personal procurement)이다.  인간의 문제에 대한 자각 없이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잃어버려진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다음으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예비하신 것에 대해서 들어야 한다. 나쁜 소식(the bad news)은 사람은 잃어버려진 상태에 있고 자신의 공로로는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소식(the good news)은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예비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로 인한 형벌을 짊어진 죄인들의 대속물이시다.  마지막으로 구원받지 못한 개개인은 구원에 있어서의 개인의 취득에 대해서 들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음을 맛보셨음을 아는 것은 좋은 것이다.(히2:9)  하지만 구세주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이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구원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죄인은 개인적으로 이 구원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각 사람은 믿거나 신뢰해야 한다.  그는 모두에게 값없이 제시된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 제시에 있어서의 세 가지 기본 요소에 비추어서 학생들의 답안지를 분석한 후에 나는 어떻게 '인간의 문제'와 '하나님의 예비'와 '개인적인 취득'을 모두 포함해서 스물 다섯 단어 이하로 복음을 제시할 수 있는지를 학생들에게 보여준다. "친구여, 당신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오직 그분만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을 영원히 구원하실 것입니다.  지금 그분을 신뢰하기 바랍니다."(Friend: You have sinned. But Christ died for sinners and rose again.  Trust Him alone and He will save you eternally. Do it now!" 간략하지만 이것은 정확하고 효과적인 복음제시이다. 이것은 어떤 복음제시도 마땅히 포함해야 할 내용(information)과 초청(invitation)을 포함하고 있다.  죄인은 왜 구원받아야 하는지, 누가 그를 구원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진정 복음을 알고 있는가?  명확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복음을 제시하기 위해서 신학교육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로버트 앤더슨 경(Sir Robert Anderson)은 복음 증거자가 되려는 사람들의 자격요건에 대해서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하나님께서 믿고 복음 사역을 맡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바는 그들이 세련되고 잘 교육받은 신사들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천박하거나 무식한 촌뜨기이어야 한다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들이 신학 교리에 능통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교리에 무지해야 한다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재기 넘치는 사람이거나 웅변에 뛰어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예 소질이 없거나 지루하고 따분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분께서 찾는 사람은 단지 그리스도의 권능을 담을 수 있는 적당한 도구, 곧 그분께서 값으로 측량할 수 없는 자신의 보화를 채워 넣을 수 있는 빈 질그릇이다." - 「복음과 복음사역」(The Gosple and Its Ministry), p.6-7. 우리의 책임은 모든 피조물에게 구세주를 선포하고 죄용서와 평화를 외치는 일이다. 우리 모두가 이 일을 할 수 있고, 또 이 일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 일을 날마다 더욱 열심히 해야만 한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신실할 때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권능을 부어주실 것과 전능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번영케 하실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2009-05-08 13:31:24 | 관리자
침례성도(BAPTISTS)로서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B IBLICAL AUTHORITY (성경의 권위) 딤후3:16-17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초기부터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임을 믿었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기록하였기에 그것이 절대적으로 무오함을 믿었다. 또한 동일한 하나님께서 완전한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을 섭리로 완전하게 보존해 주심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개개인의 신앙 양심을 따라 처음부터 자유 교회는 교리와 실행에 있어 성경만이 유일한 최종 권위임을 믿었으며 교회나 공회나 전통이나 사람의 어떤 기관도 성경을 대체할 수 없음을 믿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이 같은 믿음은 감옥이나 불이나 칼이나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결코 쇠퇴하지 않았다. A UTONOMY OF THE LOCAL CHURCH (지역교회의 자치권) 마18:15-17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지역교회가 어느 누구에게도 귀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몸으로 오직 우리 주 예수님께만 충성을 맹세하는 독립 기관임을 믿었다. 따라서 이 땅의 어떤 사람이나 기관도 독립/자유/지역교회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할 수 없다. 그러므로 로마카톨릭교회처럼 주교, 추기경, 감독 등이 지역교회를 관할하는 것은 성경적 신약 교회가 아님을 믿는다. P RIESTHOOD OF ALL BELIEVERS (모든 신자들이 제사장임) 벧전2:5-9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예수님의 신약 교회에 속한 모든 신자들은 어떤 인간 중보자의 도움도 없이 우리의 유일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믿었다. 따라서 우리 자유 교회는 로마카톨릭교회와 같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인간 중보자 제사장을 두는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가 아님을 굳건히 믿는다. T WO ORDINANCES IN THE LOCAL CHURCH (지역교회의 두 가지 규례) 행2:41-47, 고전11:23-32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침례와 주의 만찬만이 지역교회가 실행해야 할 두 개의 규례임을 믿었다. 침례는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매장과 부활을 상징하며 반드시 온 몸이 물 속에 잠겼다가 일으켜지는 침수례여야만 한다. 주의 만찬 역시 주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규례로 로마카톨릭교회의 화체설, 즉 주의 만찬의 빵과 포도즙이 예수님의 실제 몸과 피가 된다는 교리는 명백한 오류임을 믿는다. I NDIVIDUAL SOUL LIBERTY (개인의 자유) 롬14:5-12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각 개인이 자기의 양심이나 속사람의 명령에 따라 자신이 믿는 바를 결정할 수 있음을 믿었다.  진정한 크리스천들은 단 한번도 남에게 자기의 믿음을 받아들이도록 무력으로 강요하지 않았으며 자기의 믿음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어느 누구도 자기 의사에 반하여 자기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어떤 것을 믿도록 강요받을 수 없음을 믿는다. S AVED, BAPTIZED, CHURCH MEMBERSHIP (구원받고 침례 받은 자가 교회의 지체가 됨) 행2:41-47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구원받은 신자만이 지역 교회의 회원이 됨을 믿었다. 중세암흑시대에 로마카톨릭교회는 믿음이 없는 아기도 유아세례를 통해 교회의 회원으로 만들어 영원히 신앙의 자유를 빼앗았으며 유아 세례를 거부하면 사회에서 매장시키거나 퇴출시켰다. 우리는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침례를 받을 때 지역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있음을 믿는다. T WO OFFICES IN THE CHURCH (교회에 주신 두 개의 직분) 딤전3:1-13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성경 말씀에 따라 지역 교회 내에 오직 두 가지 직분, 즉 목사와 집사의 직분만 있음을 믿었으며, 그러한 직분들을 담당하는 자는 반드시 남자이어야 함을 믿었다. 자유/독립/지역교회는 결코 로마카톨릭교회와 같은 성직자 계급 체제가 아니며 직분은 성도들 간의 기능의 차이일 뿐 결코 계급이 아님을 믿는다. S 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교회와 국가의 분리) 마22:15-22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교회와 국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분리되어야 하며 한 기관이 다른 기관을 통제할 수 없음을 믿었다. 중세 암흑 시대의 사악한 종교 독재 행위는 바로 교회와 국가의 일치로 인해 발생한 것이며 역사를 통해서 우리 자유 교회는 교회와 국가가 하나가 된 국가 교회에 항거하여 피를 흘려왔다. 그 결과 미국의 헌법에 종교와 양심의 자유가 명문화되고 대부분의 국가들에도 파급되어 현대 시민들이 이런 자유를 향유하게 된 것이다
2009-05-08 13:30:04 | 관리자
1. 프롤로그(Prologue) ‘말아톤’의 열풍이 불고 있다. 지난 1월 27일 개봉된 후 52일 만에 전국관객 500만 명을 돌파한 ‘말아톤’의 열기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방화사상 유래가 없었던 가족영화 ‘집으로…’의 기록을 이미 돌파한 데 이어 아마 이 추세대로라면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에도 버금갈 기록을 남기지 않을까 예상이 된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자폐증 청년 배형진(22)군에 관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말아톤’은 편견 많은 우리 사회에서 자폐증 환자 본인과 그 가족들의 고달픈 삶과, 자폐증 아들을 보통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게 하려는 어머니의 애환, 그리고 자폐증 환자가 어려움을 딛고 마라토너로 성장하는 과정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려내고 있다. “경기 불황기에는 가족이 유일한 희망이죠. ‘말아톤’에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애정과 기대가 잘 녹아 있습니다. 또 순수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 역경을 이겨내는 장애인을 보면서 갖는 관객들의 자기반성 등이 흥행 요인으로 작용한 듯싶습니다.”라는 제작자의 말 맞다나 이 ‘말아톤’은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을 자극하여 흥행에 성공했다는 것이 영화평론가들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휴머니즘의 관점이외에 이 영화 속에서 제시되는 몇 가지 주요한 의학적 및 성경적 논제들(theses)을 분석해보면서 함께 영적인 유익을 더해보았으면 한다.    2. 시놉시스(Synopsis) 얼룩말과 초코파이를 좋아하는, 겉보기엔 또래 아이들과 다른 것 하나 없는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한 초원(조승우 분). 어느 날 초원은 자폐증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게 되고 엄마 경숙(김미숙 분)은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앞에 좌절한다. 그러나 경숙은 초원이가 달리기에만큼은 정상인보다도 월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고, 달릴 때만큼은 남들과 다르지 않은 아들의 모습에 희망을 갖고 꾸준히 훈련시킨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20살 청년이 된 초원. 그러나 지능은 여전히 5살 수준에 머물고 있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방귀를 뀌어대고, 동생 중원에겐 마치 선생님 대하듯 깍듯이 존댓말을 쓰고, 음악만 나오면 아무데서나 특유의 막춤을 선보이기 일쑤이니 어딜 가든 초원이가 있는 곳은 시끄러워지기 마련이다. 하는 짓이나 말투는 영락없는 5살 어린애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해온 달리기 실력만큼은 여전히 최고인 초원. 경숙은 자신의 목표를 초원이가 마라톤에서 ‘서브쓰리’(subthree, 3시간 이내에 완주하는 것)를 달성하는 것으로 정하고 아들의 훈련에만 매달린다. 어느 날 세계대회에서 1등을 한 전력도 있는 전직 유명 마라토너 정욱이 음주운전으로 사회봉사 명령을 받고 초원의 학교로 오게 된다. 경숙은 애원하다시피 해서 기어이 정욱에게 아들의 코치 역할을 떠맡긴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초원을 성가시게만 생각했던 정욱. 하지만 초원과 함께 시간을 보낼수록 그는 아이같이 순수하고 솔직한 초원에게 조금씩 동화되어 가고, 초원도 정욱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정욱은 매번 속도조절에 실패해 지쳐 쓰러지기는 하지만 지구력이 남다른 초원에게서 마라톤 서브쓰리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본격적으로 훈련에 들어간다. 한편 불성실하게만 보이는 정욱이 도통 미덥지 않은 경숙은 어느 날 정욱과 말다툼을 벌이게 된다. “자식 사랑과 집착을 착각하지 말라”는 정욱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는 경숙. 경숙은 정욱의 말대로 이제껏 ‘좋다’, ‘싫다’는 의사 표현도 할 줄 모르는 아이를 자신의 욕심 때문에 혹사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이제껏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듯한 기분의 경숙. 그녀는 이제 마라톤도, 서브쓰리도 모두 포기하기로 마음먹고는 초원의 마라톤 출전을 포기하지만 경기 당일 초원은 혼자 경기장으로 향한다. 뒤늦게 경숙은 초원의 그림일기에서 ‘내일 해야 할 일’에 ‘말아톤’이라고 쓰여진 것을 보고는 경기장으로 중원 및 정욱과 함께 달려가 초원을 격려하고 초원은 마침내 완주에 성공한다. 3. 자폐증세(Symptoms of Autism) 이 영화 속에서 주인공 윤초원 역의 조승우가 완벽하게 표현한 ‘자폐증’(自閉症, autism)은 1943년 미국 존스홉킨스아동정신병원 레오 캐너(Leo Kanner) 박사가 독특한 특징을 보이는 11명의 어린이 환자의 사례를 보고한 논문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는데 ‘자폐’(自閉, 스스로 문을 걸어 닫는다) 증세가 있다고 말하려면 세 가지 범주에서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여야 한다. 첫째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장애’(failure to use eye contact, facial expression or gestures to regulate social interaction)다. “초원아, 거울을 보고 엄마처럼 해봐.”라며 엄마는 아들 초원이 웃는 표정을 짓게 만들려고 거울을 앞에 놓고 열심히 가르치지만 초원이는 무덤덤한 표정이다. 이처럼 자폐아는 눈을 맞추기를 피하고 타인과의 관계에 필수적인 얼굴 표정이나 제스처를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둘째는 ‘커뮤니케이션의 장애’(impairment of communication)이다. “초원이 다리는?”(엄마) “백만불짜리∼.”(초원) “몸매는?”(엄마) “끝내줘요∼.”(초원) 라며 달리기를 하기 전에 엄마는 묻고 초원은 답하지만 이를 대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자폐아는 말을 배우는 것도 느리지만 진짜 심각한 문제는 매사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며 ‘속임수’ 또는 ‘연극’을 할 줄 모르는 것이다. 셋째는 ‘제한되고 반복적인 관심과 행동’(restricted and repetitive interests and behaviors)이다. 교내 식당에서 여교사와 함께 식사하던 코치는 식판을 들고 오는 초원을 보고 손을 흔들며 옆자리를 가리키지만 초원은 본체만체 건너편 식탁의 자리에 앉는다. 또 얼룩말 무늬만 눈에 들어오는 초원은 얼룩말 무늬 치마를 입은 여자를 보고 다가가 치마를 쓰다듬다가 옆에 있던 여자의 애인에게 두들겨 맞는다. 이처럼 자폐아는 늘 가던 길을 고집하고 특정한 의자에만 앉으려고 하며 특정한 대상에 관심이 쏠려 있는 등 행동패턴이 고정되어 있다. 간혹 특정한 일에서는 정상인보다 우수한 능력을 보이는 경우(idiot savants)도 매우 드물게 있지만 자폐증 환자의 3분의 2는 정신지체 수준의 지능을 나타내며, 나머지 3분의 1도 대개 평균 이하의 지능을 나타낸다. 4. 자폐증의 원인(Etiology of Autism) 자폐아 초원의 마라톤 완주를 통한 인간승리와 깨어졌던 인간관계의 회복을 젖은 눈으로 지켜보던 관객들은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화면에 자막으로 소개되는 자폐증에 대한 설명을 읽으며 더욱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 아동 1만 명당 2~12명에게 나타나는 매우 흔한 질병인 자폐증은 이 첨단과학 시대에 아직도 그 원인조차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선천적인 유전자 이상, 출생 전후의 뇌손상 또는 감염, 뇌의 구조적 이상 또는 생화학적 이상 등이 원인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어느 것도 자폐증 모두를 설명할 수는 없다. 환자마다 소견이 다르고 치료의 효과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폐증의 실체는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지난 수년 동안 자폐증의 원인을 규명하는 연구가 상당히 진척됐기 때문이다. 먼저 의사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정신적 충격이나 부모의 학대, 무관심 등에 의해 자폐아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자폐증이 후천적인 질병이 아님을 시사하는 연구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자폐아의 가계를 조사함으로써 자폐증은 유전적 요소가 확실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자폐증에는 여러 유전자와 환경의 영향이 복합적으로 관여하는 것으로 추측이 되고 있다. 특히 1960년대 기형아 출산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던 입덧 완화제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에 노출되어 기형이 된 사람을 추적한 1994년의 한 연구 결과 이들 가운데 약 5%가 자폐증을 보여 평균값의 30배에 달했는데 이들은 임신 후 20일에서 24일 사이에 약물에 노출돼 자폐증이 생긴 것으로 밝혀졌다(Developmental Medicine and Child Neurology 36: 351-356, 1994). 이 연구 결과에 흥미를 느낀 미국 로체스터대 산부인과 패트리시아 로디어(Patricia Rodier) 교수는 자폐증 환자의 뇌간(brain stem)을 자세히 살펴본 후 “모두는 아닐지라도 자폐증의 많은 경우는 임신 초기에 시작되는데 자폐아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 즉 얼굴 표정이 부족하고 접촉이나 소리에 지나치게 민감하고 잠을 잘 못자는 증상도 뇌간의 이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뇌간의 이상은 언어능력처럼 고차원적인 기능을 관장하는 다른 뇌 영역이 발달하는 데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 그 결과 자폐아에서 보이는 여러 행동장애가 유발됐을 것”이라고 하였다(The Early Origins of Autism Scientific American, February 2000 p. 56-63). 5. 자폐증의 치료(Management of Autism) 자폐증을 연구하고 있는 의학자들은 현재까지 HOXA1, WTN2, ENGRAILED2 등 10여 개의 유전자가 자폐증에 관여하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데 이를 모두 규명하면 치료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아무튼 임신 초기 신경계 발달에 관여하는 유전자들의 이상이 자폐증을 유발한다면 탈리도마이드처럼 이 시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약물을 피해서 자폐증의 발생을 막아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아직까지는 자폐증의 원인을 미리 제거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므로 이미 자폐아로 드러난 경우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들을 도와줄 수 있을지 모색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에서 흉터가 심한 초원의 손등이 클로즈업되는 장면이 있다. “마라톤을 하기 전에 초원이는 자기 손등을 물어뜯었어요. 그런데 달리기를 하고 난 뒤론 그런 증상이 없어졌죠.” ‘엄마가 시켜서 뛰는 거지 초원이가 정말 좋아서 마라톤을 하는 거냐’는 코치의 빈정거림에 대한 엄마의 이 대답에서 자폐증 치료에 대한 한 줄기 빛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늘리고 관심을 가질 대상을 만들어 활동을 하게 하는 등 행동치료를 하면 증상이 많이 나아질 수 있다. 또한 주위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태도도 어느 정도 개선이 가능하다. 초원은 코치와 함께 달린 뒤 물을 마실 때도 옆에서 헐떡대는 코치는 아랑곳 않고 혼자 병을 비웠었다. 그러나 어느 날 한강변을 달린 뒤 초원은 자신이 마시던 물병을 코치에게 건네며 남을 배려할 수 있게까지 되었다. 그러나 자폐증 환자의 뇌는 구조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약물치료나 행동치료로 증상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따라서 이들이 혼자 세상을 살아가기란 거의 불가능하지만 어린 시절 적절한 행동치료는 커서 좀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데 도움이 되며 또한 지속적인 관심과 교육을 통해 증상들이 개선될 여지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6. 장애(Disability) 자폐증과 같은 장애는 당사자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장애아의 어머니나 때로는 아버지, 또는 두 부모의 헌신적 노력이 다른 가족의 큰 희생과 고통을 초래하기도 한다. ‘말아톤’에서도 초원의 아빠가 동생 중원에게 ‘아빠와 따로 살면 어떨까’를 물어본다. 어쩔 수 없이 강요된 다른 가족의 희생과 어머니로부터의 상대적 방임이 견디기 힘들어 별거나 이혼을 고려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200시간이 아니라 20년을 벌 받으며 사는 기분을 알아요?”라며 초원의 엄마가 마라톤 코치에게 울분을 터뜨리며 내뱉는 말에서도 장애인은 온 집안의 고통이 되고 자주 가족붕괴의 위기까지도 제공하는 요소가 될 수 있음을 충분히 헤아리게 된다. 그렇다면 ‘사랑의 하나님’(요일4:8,16)께서는 왜 이처럼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장애를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일까? 이것은 ‘말아톤’의 실제 주인공 박미경(46)씨도 배형진 군이 4살 무렵 자폐증(2급 정신장애) 진단을 받고 난 후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이런 아이를 낳았나?”라고 자문했던 물음이며 또한 이미 이천 년 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예수님께 여쭈었던, 인류의 원초적인 질문 가운데 하나이다(요9:1-3).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에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시매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여쭈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누가 죄를 지었기에 이 사람이 눈먼 자로 태어났나이까? 이 사람이니이까, 그의 부모이니이까? 하니”(요9:1,2, 이하 흠정역) 7. 하나님의 일들(Works of God)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기 위해 자신이 직접 장애인을 만드셨다고 대답하신다(요1:1-3; 출4:11; 시139:13,15,16; 요9:3).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만들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자나 귀먹은 자나 보는 자나 눈먼 자를 만들었느냐? 나 주가 아니냐?”(출4:11) “이는 주께서 내 콩팥을 소유하시며 내 모태에서 나를 덮으셨음이니이다. … 내가 은밀한 중에 만들어지고 땅의 가장 낮은 부분에서 묘하게 꾸밈을 받았을 때에 나의 실체가 주께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 나의 실체가 아직 불완전할 때에도 주의 눈이 보셨으며 계속해서 형성되는 나의 모든 지체들이 주의 책에 기록되었사오니 곧 그 지체들 중에 아직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을 때에니이다.”(시139:13,15,16).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나 죄를 짓지 아니 하였으며 다만 이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고자 함이니라.”(요9:3) 그렇다. 장애인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하나님의 일들’(욥37:14; 시66:5; 요6:27,28; 행2:11)을 나타내고자 만드신 존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로 만드신 장애인을 통한 ‘하나님의 일들’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들을 하리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6:28,29) 8. 구령(救靈, Soul Winning) 그렇다. 하나님의 일은 첫째로 영혼(soul)을 구원하는 일이다(요6:28,29; 9:4-7,25,35-38; 고전9:1). “그분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 눈먼 사람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가서 실로암 못에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그러므로 그가 가서 씻고 보게 되어 왔더라. … 그가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그분께 경배하니라.”(요9:6-7,38) 예수님께서 창조의 방법론(창1:2)을 다시 사용하셔서 눈먼 자의 눈을 고치신 것(요9:4-7)은 궁극적으로 그 육체적 장애인이 창조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그 혼(soul)이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둘째로 장애인은 들러리가 아닌 복음의 주빈(主賓, the guest of honor)임을 선포하여 우리들의 영적 장애를 깨닫게 하는 일이다(겔12:2; 눅14:1-24). “사람의 아들아, 네가 반역하는 집의 한가운데 거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나니 이는 그들이 반역하는 집이기 때문이니라.”(겔12:2) “네가 잔치를 베풀거든 가난한 자와 불구자와 다리 저는 자와 눈먼 자를 부르라. … 빨리 도시의 거리와 골목길로 나가서 가난한 자와 불구자와 다리 저는 자와 눈먼 자들을 여기로 데려오라, 하니라.”(눅14:13,21)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구원으로 초청하시지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한다. 여기에는 다른 어떤 조건도 필요 없고 단지 초청에 응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거부하자 잔치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과 장애인들 곧 초청 받고 감사의 예물을 준비하지 못할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주빈으로 부르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베푸시는 은혜의 성격에 꼭 맞는 것이다. 그렇다. 오늘 우리의 비극은 신체의 장애보다 영혼의 장애가 더 심각하다는 데 있는 것이다. 9. 하나님의 도구(Tools of God) 셋째로 능력이 중시되는 경쟁사회에서 지혜로운 자들과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는 자들을 쓸모없게 하는 일이다(고전1:27-2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시며 하나님께서 있는 것들을 쓸모없게 하시려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시고 참으로 없는 것들을 택하셨나니 이것은 어떤 육체도 하나님의 눈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29) 상대가치의 세계관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한 채 욕망의 노예요 경쟁의 투사가 되어 살아가는 영적 장애인들에게 육신적 장애는 분명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이다. 넷째로 믿음의 훈련을 시키는 일이다(시119:71; 잠3:11,12; 애3:32,33)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하오니 이로써 내가 주의 법규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이는 그분께서 고의로 사람들의 자녀들을 괴롭게 하거나 슬프게 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라.”(애3:33)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당신의 자녀들을 훈련시키신다. 사람의 능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장애와 같은 한계상황에 이르렀다면 그것은 곧 한계상황을 두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뜻이다. 다섯째로 장애인이 나의 이웃임을 알려주는 일이다(눅10:30-37).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나의 이웃이 누구인가”라고 묻기보다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즉 우리들이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구원받은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위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기 때문이라.”(약2:26)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순수하고 더럽지 않은 신앙심이 요구되는데 이것은 곧 고난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자기를 지켜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다(약1:27). 장애인도 고아와 과부처럼 도움을 줘야 할 우리의 이웃임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10. 복(福, Blessing)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시기 위해 장애를 사용하신다. 그런데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 장애는 오히려 복(福)이 된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 된 배경에는 인간의 힘으로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사라의 장애(disability)가 있었다(창12:1-3, 18:9-15). 이 장애(infertility)는 성경에 언급된 최초의 장애인데 아브라함은 이를 고쳐주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므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으며 결국 하나님의 은혜(ability)로 이삭이 출생(fertility)하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이 가능하게 되었다(창21:1-5, 22:1-19; 마1:1; 롬4:16-25; 히11:11).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형 에서를 만나기 전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다 넓적다리의 뼈가 위골이 되어 지체장애인이 되었는데 바로 이때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새로 받게 되었으며 또한 얼굴을 마주 대하여 하나님을 보았으나 자기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복을 받게 되었다(창32:13-32). 이밖에 이방신 다곤을 예배하던 블레셋 사람 삼천 명 이상을 한 번에 죽였던 이스라엘의 사사인 시각장애인 삼손(삿16:21-31), 여로보암 시대에 시각장애를 가지고 대언자의 역할을 잘 감당했던 아히야(왕상14:4), 탈모증(alopecia)의 장애를 극복하고 멋있게 쓰임 받았던 엘리사(왕하2:23) 등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이나 또 ‘육체의 가시’로 인해 평생 고통을 겪었지만 평생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순종했던 사도 바울(고후12:7)도 장애가 있었음으로 인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복을 얻을 수 있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놀라운 치유의 능력을 소유하였지만 정작 본인의 ‘육체의 가시’는 고칠 수 없었는데 오히려 이러한 장애가 복인 것을 깨닫고 그의 장애를 크게 기뻐하고 자랑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고후12:7-10)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나의 강한 능력이 약한 데서 완전해지기 때문이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연약한 것들과 치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강하기 때문이라.”(고후12:9,10)   11. 천국(Heaven) ‘말아톤’의 막이 내리고 뭉클한 감동에 젖어 자리를 떠나려던 관객들은 화면에 자막으로 소개되는 ‘말아톤’의 실제 모델의 놀라운 기록들(마라톤에서 풀코스를 2시간57분7초에 뛰어 ‘서브쓰리’ 달성, 철인삼종경기에서 15시간06분32초 만에 최연소기록으로 완주 등)을 보면서 더욱 기쁨을 얻게 되며 또한 그를 더욱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혹시 구령의 열정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초원이가 저보다 하루 먼저 죽는 게 소원이에요.”라며 잡지사 기자의 질문에 엄마가 대답하였던 장면을 떠올리면서 초원과 같은 5살 지능의 정신지체장애의 경우나 또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해도 이해하지 못할 어린이의 경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죽는다면 그의 영혼은 천국에 갈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여 안타까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직접 이런 어린아이들에게 하신 말씀을 살펴보자.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왕국이 이런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니라.”(막10:14) “너희가 회심하여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 즉 어린이는 그 상태로서는 하나님의 왕국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헬라어 상으로 볼 때 성경에서 어린아이인 ‘파이디온’이 자라서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때를 ‘파이다리온’(소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파이디온’이 ‘파이다리온’으로 변하는 때는 ‘아이가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질 수 있을 때’이다.   신명기 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않음으로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대해 죄를 지었을 때,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던 어른들은 모두 요르단 강 저 편에서 죽어 그 약속의 땅을 소유하지 못했지만 선과 악을 알지 못하던 아이들은 그것을 소유할 수 있었다(신1:34-39).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책임질 수 있는 나이를 알고 계셨고 또한 어린아이들은 그 죄악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보신 것이다. 그렇다. 심지어 주님이신 예수님조차도 이 땅에 계셨을 때는 선과 악의 차이를 알 수 있을 때까지 성숙한 상태로 자라나셔야만 했다(사7:14-16). 물론 그분께서 선을 택하시고 악을 거부하실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우선 그렇게 될 때까지 자라나셔야만 했다. 예수님께서 전혀 죄를 지은 바가 없다는 점에서 우리와 다르지만 선과 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나이까지 자라나셨다는 점에서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고 있음을 깨닫게 될 때까지 그것에 대해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시는 것이다. 12. 에필로그(Epilogue) 영화 ‘말아톤’의 제작을 후원한 스포츠화 브랜드 뉴발란스가 영화의 흥행성공으로 인해 매출이 급상승했다고 한다. 또한 이 ‘말아톤’을 보고나서 마라톤에 관심을 갖고 달리기를 시작한 사람들도 무척 많아졌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초원이와 그를 좋아하는 우리 이웃들처럼 자기 몸 관리를 위해 열심히 달리기를 하며 아울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있는 영적인 마라토너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자.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붙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다만 이 한 가지 일을 행하나니 곧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노라.”(빌3:13,14) “경주할 때에 달리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리라.”(고전9:24) * 저자의 단행본 ‘성경으로 세상보기’는 ‘생명의 말씀사’에서 온라인으로도 구매할 수 있습니다.
2009-05-08 13:28:29 | 관리자
1. 들머리 “전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 26년 동안 흘린 땀이 한순간에 날아갔습니다.” 26년 동안 환경미화원으로 일해 온 박모(62)씨는 굿모닝시티 4층을 분양 받기 위해 퇴직금 8,700만원 중 7,000만원을 투자했지만 지난 달 30일 굿모닝시티의 부도로 돈을 모두 날려버렸다. 사기를 당한 충격으로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기도 했었던 그는 “5만원이 아까워 아들놈 학원 한 번 못 보낸 것이 한이 된다”며 눈물을 훔쳤다. 이와 같은 ‘굿모닝시티’ 관련 피해자의 애처로운 사연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40년 간 교직생활을 한 후 받은 퇴직금을 부은 사람, 40년 넘게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해 모은 돈을 몽땅 잃어 실신한 노인, 아내의 암 수술비까지 빼 마련한 돈을 날린 영세상인, 군부대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아들 보상금에 빚까지 보태 투자했다는 할머니, 명퇴당한 남편의 퇴직금 1억여 원을 남편 몰래 투자한 주부 등등 우리의 수많은 어려운 이웃이 ‘굿모닝시티’로 인해 한없는 절망과 비탄에 빠져 있다. 그러나 그들의 돈 3,400억 원을 사기수법으로 거둔 윤창렬씨는 한 때 입지전적 인물로 세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지만 이제는 모든 국민들로부터 원성을 받는 자가 되어 버렸는데 아직도 굿모닝시티의 경영권을 놓을 수 없다는 옥중선언을 하고 있으며 또 윤씨로부터 4억2천만 원을 받았다고 실토한 여당 당수는 이 돈이 “대선 자금”이었다고 하면서 이 상식을 넘는 돈이 “대가성이 없는 돈”이었다는 옹색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그렇다면 아직도 해결의 실마리가 요원해 보이는 이 ‘굿모닝시티 분양사기 사건’ 즉 자본금도 납입하지 않은 껍데기 회사를 만든 후 부지도 없이 설계도면 몇 장만으로 상가를 분양, 분양계약금과 조폭(組暴) 등으로부터 유입한 자금을 제멋대로 빼돌려 정치계, 행정부처, 금융권 등의 로비에 사용하거나 개인적으로 유용하기도 하고 또 부실 사업 확장 등에 흥청망청 써버린 전형적인 저질 사기 사건에 대해 성경적 관점에서 정리를 해보는 것이 날로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마지막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유익하리라 여겨지기에 몇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그 메커니즘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사기꾼 전북 익산에서 가난한 소작농 집안의 1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난 윤창렬씨는 13세 되던 해 목수 일을 배우기 위해 홀로 집을 떠난 후 너무 사는 것이 힘들어 14세 때 처음으로 자살을 시도하였고 이후 20세가 될 때까지 모두 3번이나 죽고자 했다고 한다. 그러나 25세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검정고시를 본 후 30세에 연세대학교 중어중문과(83학번)에 진학했다. 1987년 결혼하여 남대문 시장에서 블라우스 도매상을 하던 아내(현재 이혼)를 도와 일하면서 그 때부터 혁신적인 유통 사업을 구상하였고 동시에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는 등 부동산 쪽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건설업에 뛰어 들어 처음에는 실패를 거듭했지만 1996년 한동토건이라는 회사를 인수해 2001년 회사 이름을 ‘굿모닝시티’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사업에 나섰다. 1조원 대의 굿모닝시티 상가 사업을 착수할 때 수중에 든 돈은 사채업자로부터 빌린 7억원이 전부였지만 건물 부지 한 평 확보하지 않은 채 고객 4천 명을 끌어들였고, 또 2002년 이후에는 자회사를 잇달아 세우고 회장 행세를 하였다. 이어 2002년 말 자산가치 2,650억원에 이르는 한양을 집어삼키고 난 후 굿모닝라이프, 굿모닝나노콤, 굿모닝키즈, 굿모닝건설 등 자회사를 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교인 연세대 최고경영자 과정을 마친 뒤 학교에 총 150억원을 기탁하겠다고 약속하여 실제로 2억원을 학교에 기부하기도 했다. 또 정치인들에게 거액을 주고 상대방이 놀라서 굽실거리는 것을 보며 즐기는 스타일이었다는 얘기도 들리며 수억 원씩을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술집 접대부들에게 수천만 원씩을 뿌리기도 해 조폭들조차 그의 행태를 걱정했다고도 한다. 아울러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을 불러 모아 대규모 행사를 벌였는데 행사장에는 유명 연예인들이 항상 등장하였으며 또 그 자신이 직접 연예인을 키우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한 사기꾼의 행각에 대해 정확한 판결을 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들을 미리 알고 이에 순종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해악을 행하는 것이 어리석은 자에게는 오락과 같고”(잠10:23상, 이하 흠정역) “교만이 오면 수치도 오거니와”(잠11:2상) “범죄자들은 자기의 무례함으로 인하여 붙잡히느니라.”(잠11:6하)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도 다 이러하여 그 이익이 그 소유자의 생명을 앗아가느니라.”(잠1:19) “네 눈으로 보기에 지혜롭게 되지 말지어다. 주를 두려워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3:7) 3. 로비 굿모닝시티 윤 회장의 전방위 로비의 실체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현재 검찰은 4천 명에 가까운 굿모닝시티 분양계약자 명단을 입수해 특혜분양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중에는 현직 검찰, 경찰, 공무원과 언론인, 세무사, 연예인 등이 본인이나 가족 명의로 계약한 경우가 상당수 포함돼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 탁병오 국무총리 비서실장, 서울경제신문사장의 부인 윤모씨, 서울지검 파견 경관 등 이미 구속된 주요 인물들 외에 윤 회장이 청와대, 국세청, 보안사, 경찰, 언론사, 관계 구청장, 심지어 소방서까지 각종 수단을 동원해 접촉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있다. 아울러 구청 일용직, 정보기관 하급 기능직, 하급 세무관리 등 ‘굿모닝시티 게이트’의 로비스트로 검찰에 구속되거나 구설에 오르는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내세울 만한 사회적 지위나 경력은 물론이고 로비스트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능력과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어서 마구잡이식 ‘굿모닝 로비’였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조폭 출신들까지 버젓이 임원으로 있으면서 같은 조폭들에 대한 ‘로비스트’ 역할을 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데 특히 굿모닝시티의 자금 동원과 분양, 회사운영, 로비 등에는 거의 모두 조폭이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굿모닝시티 계약자 협의회측은 “사업 진행 과정에서 정,관계와 금융권에 대한 로비 자금으로만 최대 100억 원이 사용됐다는 의혹이 있다”며 “이와 관련해 검찰총장과 각 정당 대표들에게 면담을 요청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로비(lobby)는 ‘압력을 가하여 (의안을) 억지로 통과시키려 하는 운동’이란 사전적 정의에서도 드러나듯이 그 속성상 뇌물(gift, bribe)이 개입될 여지가 다분한 것이며 특히 경제적 이득을 목표로 하는 경우에는 뇌물이란 방법론이 우선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성경은 뇌물을 “눈을 어둡게 하는 것”(삼상12:3)이라 정의하면서 이 굿모닝시티 로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사람들이 의인을 괴롭히며 뇌물(bribe)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외면하여 그들의 정당함을 묵살하느니라.”(암5:12하) “사악한 자는 사람의 품에서 뇌물(gift)을 받고 재판의 길들을 굽게 하느니라.”(잠17:23)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뇌물(로비)을 미워하며 이를 받지 않을 때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오직 의롭게 걷는 자, 올바르게 말하는 자, 학대하여 얻은 재물을 멸시하는 자, 손을 저어 뇌물(bribes)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바위로 된 요새가 그를 보호하는 처소가 되며 그는 빵 공급을 받고 물을 확보하리라.”(사33:15,16) “이익을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괴롭게 하나 뇌물(gifts)을 미워하는 자는 살게 되리라.”(잠15:27) 4. 굿모닝(Good morning, 安寧, peace) 굿모닝이 전세계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보편적인 인사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 말로 번역하자면 ‘안녕(安寧)’인 이 굿모닝(安寧, peace)을 소망하며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말에 속아 굿모닝시티에 투자하였다가 공중에 붕 떠버린 남은 계약자들은 “윤씨만 믿고 분양 꿈에 부풀어 밤잠도 설쳤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군부대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아들 보상금에 빚까지 보태 투자했다는 오모씨는 “작은 가게라도 마련해 아들이 죽을 때까지 큰 걱정 없이 살게 하고 싶었다”고 했고, 또 명퇴당한 남편의 퇴직금 1억여 원을 남편 몰래 투자한 신모씨는 “앞으로 아이들 대학 보낼 일이 막막해 작은 점포라도 꾸려 부모 구실은 하고 살려고 했는데…”라며 넋을 잃었고, 수잔씨는 “서울에서 노후를 편안히 지내려고 미국 이민 가서 20년 넘게 죽도록 고생해서 번 전 재산을 몽땅 쏟아 부었다”고도 하였다. 또한 7년 전 서른 살에 남편을 잃은 3남매의 어머니 가장인 한 분양계약자는 “남편이 하늘나라 떠나고 남긴 돈, 목숨과 바꾼 그 돈을 애들 용돈도 제대로 안 주고 아끼면서 2004년 내 점포 하나 가질 날의 작은 소망의 꿈을 키우며 희망을 가졌는데…”라며 깊은 절망과 회한에 빠져 있다. 안녕(安寧, peace)이란 인사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우리와 같은 셈족인 유대인의 인사(shalom)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구약 성경 곳곳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들이 잘 확인이 되고 있다(창26:26-33; 출4:18; 왕하5:19; 9:17-22). 즉 안녕(安寧, peace)을 바라는 것은 분양계약을 하였던 굿모닝시티 계약자들뿐 아니라 역사 이래 온 인류의 바램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에서 참된 안녕(安寧, peace)을 소망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 성경은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라 영원토록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확실한 소망이심’을 선포한다(히6:19,20) “이는 이 멜기세덱(Melchisedec)이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기 때문이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첫째로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또한 살렘(Salem) 왕이니 곧 화평(安寧, peace)의 왕이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혈통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오직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되어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7:1상,2하,3)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평강(安寧)이 있을지어다(Peace be unto you).”(눅24:36; 요20:19,21,26) 5. 시티(city, 都市) 굿모닝시티는 서울 을지로 6가의 대지 2,370평에 지하 7층, 지상 16층으로 연건평 2만9천 평에 5,200여 개의 점포가 입주할 예정이었던 초대형 복합 쇼핑몰로 분양대금 총액이 9,800억 원에 달한다. 2001년 9월 분양을 시작, 지하철 3개 노선이 지나는 환승역과 가깝다는 입지조건으로 100% 분양됐으며 이미 4,000여 명의 투자자가 계약금과 중도금으로 3,476억원을 입금한 상태이다. 2004년 준공 예정이지만 윤씨의 횡령 등으로 자금난에 봉착, 착공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난달 30일 부도가 났다. 결국 굿모닝시티는 경제적 활동을 목표로 기획된 것이 정치적 게이트로 변질되면서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초래케 되었는데 이는 ‘도시’가 ‘촌락과 더불어 인간의 2대 거주형태이며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활동의 중심이 되는 장소’라는 사전적 정의에 너무나도 걸맞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성경에서 도시가 최초로 세워지게 된 것은 가인에 의해서였는데 그는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의 눈앞을 떠나 자기 아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 도시를 건설하였다(창4:16,17). “가인이 주의 눈앞을 떠나 에덴의 동쪽 놋 땅에 거하더라. 가인이 자기 아내를 알았더니 그녀가 수태하여 에녹을 낳으매 가인이 한 도시를 세우고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라 그 도시의 이름을 에녹이라 부르니라.”(창4:16,17) 또 노아의 홍수 후 이 세상에 최초로 건설된 도시 바벨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함이었다(창11:1-9).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도시와 탑을 세우고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이름을 내자(Go to, let us build us a city and a tower, and let us make us a name).”(창11:4) 따라서 이러한  도시 건설의 영적 속성이 주님 다시 오실 때에 더욱 더 확연히 드러나게 됨은 당연한 것이리라. 특히 사람들이 먹고(eat) 마시고(drink) 사고(buy) 팔(sell) 수 있는 초대형 복합 쇼핑몰 ‘굿모닝시티’를 기획(plant)하며 이를 짓고자(build)한 것은 바로 이 세대가 성경적으로 어떠한 시점에 와 있는지를 보여주는 너무나도 놀라운 표적이다. “마찬가지로 롯의 날들에 이루어진 것과도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건축하되(they did eat, they drank, they bought, they sold, they planted, they builded)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바로 그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내려 그들을 다 멸하였느니라.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같으리라.”(눅17:28-30) 6.굿모닝시티 정대철 민주당 대표는 자신에게 4억2천만 원을 줬다고 진술한 굿모닝시티 대표 윤창렬씨가 다니던 서울 강남구 논현동 ‘물가에 심어진 교회’의 일요 예배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윤씨의 담임 목사였던 윤성호 목사가 정 대표를 직접 초청하여 ‘두려움을 극복하려면’을 주제로 설교를 했는데 정 대표는 윤 목사의 설교와 교인들의 기도 도중 여러 차례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눈물을 닦았고 부인의 눈가도 몹시 붉어졌다고 한다. 이로써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굿모닝시티 게이트’의 두 주역인 윤창렬씨와 정대철 대표가 모두 (리얼 크리스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언론의 평가인데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대언자 아모스를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회개하여야 할 것이다.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니라.”(암5:15상) “너희가 비록 나를 위하여 번제 헌물과 너희의 음식 헌물을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짐승으로 드리는 화평 헌물도 내가 중히 여기지 아니하리라.”(암5:22) “오직 공의를 물같이, 의를 힘찬 물줄기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5:24) 그리고 또한 우리가 진정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가 사모해야 할 것은 이 세상의 굿모닝시티(安寧의 都市)가 아니라 영원한 안녕(peace)의 도시 새 예루살렘(Good Morning City)인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나 요한이 보매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데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 그 도시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빛이 지극히 귀중한 보석 같고 벽옥 같으며 수정 같이 맑더라. … 그 도시의 성벽 건물은 벽옥으로 되어 있고 그 도시는 순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도시의 성벽 기초석들은 온갖 보석으로 장식하였는데 …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그 도시의 거리는 순금인데 투명한 유리 같더라. 그 도시에는 해와 달이 빛을 비출 필요가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시를 밝혀 주고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광체이시기 때문이라.”(계21:2,11,18,19,21,23) 7. 마무리 그동안 크고 작은 부정부패의 스캔들이 있었지만 이 굿모닝시티 분양사기만큼 그 양상과 정치적 파문이 큰 사건은 없을 것 같다. 돼지저금통으로 상징되는 깨끗한 선거를 강조했던 현 정부의 이미지가 크게 손상된 것은 물론 대학 총장까지도 ’장물아비’로 치부되는 등 이제 이 사건을 통해 대한민국은 총체적으로 거짓과 부패의 공화국임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정부는 굿모닝시티 사기분양 사건과 같은 부동산 사전분양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 개선에 착수하기 시작하였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는데 어찌 되었거나 이 굿모닝시티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으면 현 참여정부가 임기를 맞추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조심스런 전망도 나오고 있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다. 오늘 이 절망과 비탄의 도시에서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혼이 안식을 찾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 하시니라.”(마11:28-30)
2009-05-08 13:27:25 | 관리자
2000년 12월 기고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식이 이번 달 10일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열리게 된다. 지난 10월 13일 김 대통령이 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온 국민이 환호하며 축하하던 열기는 비교적 가라앉은 상태이지만 이제 세 번째 밀레니엄의 첫 해를 보내는 길목이 상을 받는다는 것으로 정리됨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 아니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올해 노벨 평화상은 모두 115명의 개인과 35개 단체가 후보에 올라 1901년 노벨 평화상이 생긴 이래 최고의 경쟁률을 기록했었는데다 한국인으로 노벨상을 받는 것은 김 대통령이 처음이니 사실 그 감격은 오랜 기간 지속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김 대통령은 평화상 수상자로 최종 선정되기까지 중동 평화협상에 노력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을 주선한 조지 미첼 전 미 상원의원, 발칸 평화에 기여한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전 러시아 총리, 기독교단체인 구세군, 코소보 난민을 받아들인 알바니아 북부도시 쿠커스 등과 치열한 경쟁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수상자 선정이 발표되기 전 후보자 명단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빠져 있기 때문에 남북화해에 대한 공로로 수상이 된다면 관례적으로 공동수상일 터이니 김 대통령이 수상하지 못하리라 예상하였던 이들도 적지 않았었다. 이는 수상발표 후 10월 24일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김 대통령 자신이 "김정일 위원장과 공동으로 수상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며 "김 위원장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도 생각한다."고 말한 내용에서 확인되기도 한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1987년 민주화 투쟁에 공감하던 미국 독일 등지의 의원들과 외국 교수들이 처음으로 평화상 후보로 추천한 뒤 지금까지 계속해서 모두 14번 후보에 올랐는데 올해에는 김 대통령이 총재로 있는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김 대통령을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였다고 하며 추천 사유는 아시아 국가간 관계 발전 공로인 것으로 알려졌다. 어찌되었든 노벨상을 받는 것은 받는 개인에게나 국가에게나 영광스러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왜 세상 사람들은 이처럼 노벨상에 가장 커다란 권위를 부여하는 것일까? 김 대통령은 이번 수상으로 금메달 및 상장과 함께 10억원 가량의 상금을 받게 된다. 이 금액은 지금도 대단하지만 1901년 당시 상금이 파격적으로 큰 액수였던 것이 하나의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노벨상이 세계 최초의 국제적인 상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모든 국가들의 학술상에 대한 시상 방식이 국내적으로 처리되었던 것에 비하면 매우 신선하고 획기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수상후보자 및 수상자의 선정 방법이 매우 조직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을 취하기 때문에 선정 결과에 대한 신뢰성이 매우 높았고 정치적인 중립국인 '스웨덴'이라는 국가에서 실시되었기 때문에 더욱 세계적인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초등학교 시절 필자는 노벨상을 받아야지 하는 망상(?)을 잠시 가져본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전술한 바와 같이 '세계 최고의 상'이니 받으면 나와 가족과 우리 국민 전체가 기뻐할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40대 중반에 이른 지금도 여전히 '최고의 상'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초등학교 때와 달라진 것은 그 상의 타이틀이다. 즉 노벨상이 아니라 '하늘의 상'이 필자의 현재의 목표이다. 그런데 노벨상은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알고 있지만 이 '하늘의 상'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이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로 김정일 위원장이 노벨상 후보에 들지 못했기 때문에 수상을 기대할 수 없었던 것처럼 '하늘의 상'을 받으려면 먼저 그 후보군에 들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 후보군에 들어가는 방법은 너무나 간단하다. 노벨상에서처럼 타인의 추천 또는 자신의 노력이나 업적 등은 전혀 필요가 없다. 단지 믿기만 하면 된다. 물론 믿음의 내용이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 즉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모셔들여야 한다. 가난이나 질병 또는 정치적 압제나 무지와 같은 문제들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죄(sin)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분으로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마1:21; 요1:12). 둘째로 강대국의 입김이나 언어장벽, 인종적 편견 등이 노벨상 수상자의 선발에 작용한다는 일부의 비난도 있었고 노벨상을 받았던 살충제 DDT가 인체에 발암성 물질을 축적시키고 돌연변이를 유발할 수 있으며 독성이 오래 남아 생태계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주는 것으로 뒤늦게 밝혀진 적도 있었던 것과 달리 이 '하늘의 상'은 너무나 공평하고 아무도 그 결과에 불만을 가질 수 없는 영원한 나라의 완벽한 상이다(롬14:12; 계21:5~7). 셋째로 매년 12월 10일 스칸디나비안 반도에서 노벨상이 시상되는 것과 달리 '하늘의 상' 시상식은 교회가 들림 받은 후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이루어진다(고전4:5; 살전4:17). 이는 불에 의해 땅이 정화되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죽은 자들이 불못에 던져지기 전에 받게 되는 '크고 흰 왕좌 심판'과는 구별이 된다(계20:11~15). 넷째로 이 '하늘의 상'은 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고 난 다음의 행위를 살펴보고 주는 상이다(고전3:11~15). 노벨상이 다섯 가지로 구분되듯이 신약 성경은 성도들이 받게 될 다섯 가지 왕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즉 생명의 왕관(계2:10), 영광의 왕관(벧전5:2~4), 기쁨의 왕관(살전2:19,20; 빌4:1), 의의 왕관(딤후4:8), 썩지 않을 왕관(고전9:25~27) 등이 '하늘의 상'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후보군에는 들었지만 상을 받지 못할 성도도 적지 않을 터인데 그들은 물론 벌을 받거나 내어쫓김을 당하지는 않지만 마치 불로써 구원 받는 것(고전3:15) 같거나 벌거벗은 수치가 드러나는 것과 같은 구원(계3:18)을 받게 된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붙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다만 이 한 가지 일을 행하나니 곧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노라"(빌3:13,14, 흠정역).
2009-05-08 13:26:22 | 관리자
1. 프롤로그 영화 '집으로…'의 열풍이 불고 있다. 조폭영화가 아닌데도 개봉된 지 10주째인 현재 극장 관람객 수가 400만 명을 돌파했으며 또 상우로 나오는 아역배우 유승호를 제외하곤 외할머니역을 맡은 김을분 할머니를 비롯한 모든 출연자들이 아마추어임에도 얼마 전 열린 제39회 대종상영화제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 각본상, 기획상 등을 받아 한국영화사에 놀라운 이정표를 세워나가고 있다. 극히 일부 평론에서 영화적 완성도가 부족하다며 이 '집으로…'에 대한 폄하의 시선이 있지만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이란 영화 '천국의 아이들'에 대해 가졌던 콤플렉스를 일소에 해소해 준 영화이며, 감성이 메말라 있지 않다면 꼭 보아야 할 영화로 강력히 추천하고 있다. 아울러 최근 정부의 한 관계자의 말을 빌면 북한에 영화 '집으로…'가 들어갔는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관람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그리고 튜브엔터테인먼트의 발표에 의하면 '집으로…'는 미국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파라마운트사)에 한국영화 최초로 판권료 23만 달러를 받고 팔렸다고 한다. 튜브측은 '9.11 테러 사건' 이후 미 전역에서 가족애를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확산된 데다 '집으로…'가 동양적인 분위기가 물씬 배어나는 따뜻하고 감동적인 영화라는 점에서 미국인들에게도 호응을 얻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하였다. 얼핏 보더라도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으며 지구상에서 극과 극이라 할 수 있는 북한과 미국 두 나라에서도 '집으로…'가 상영된다는 사실은 이데올로기와 문화를 뛰어넘어 온 세계인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놀라운 사건으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 '집으로…'에서 온 세계인들에게 알려져야 할 복음(福音, 요3:16; 고전15:1-5))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집으로…'에 드리워져 있는 '구원(救援)의 서정(抒情)'을 간략하게나마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2. 사랑 집안형편이 어려워진 일곱 살 소년 상우는 말도 못하고 글도 못 읽는 외할머니가 혼자 살고 계신 시골 외딴 집에 잠시 동안 남겨지게 된다. 전자 오락기와 롤러 블레이드가 있는 세상에서 살아온 아이답게 배터리도 팔지 않는 시골가게, 사방에 돌 투성이인 시골집 마당, 깜깜한 뒷간은 상우에겐 너무나도 커다란 시련이다. 상우는 영악하게도 자신의 욕구불만을 외할머니에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하는 할머니의 손을 더럽다고 하며, 할머니의 귀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병신'이라고 한다. 오강을 깨고 할머니의 고무신을 버린다. 돈을 찾기 위해 온 집안을 뒤지고 낮잠을 자고 있는 할머니에게서 은비녀를 몰래 빼내 게임기 배터리를 사러 나간다. 양말을 꿰매는 외할머니 옆에서 방구들이 꺼져라 하고 롤러 블레이드를 타기도 한다. 자장면을 혼자 먹는데 하나만 시켜 손자가 먹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는 할머니에게 미안한 마음도 없다. 그리고 좋아하는 여자 애 앞에서 창피한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할머니 소쿠리를 버리거나 떠맡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외할머니가 그렇듯 짓궂은 상우를 할머니는 단 한 번도 나무라지 않는다. 마치 종처럼 언제나 상우를 섬기는 외할머니의 일방적인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멸망에 처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며(요일4:19)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우리에게 오셨다(빌2:6-8).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Jesus)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이하 흠정역) "그분(Jesus)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빌2:6-8)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Jesus)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2:4,5) 3. 회개 외할머니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으면서 상우는 조금씩 변화한다. 비를 맞아 몸살 걸린 할머니의 이불을 덮어 준다던가, 식사를 차려 내오거나 빨래를 걷는 등 할머니에 대한 마음이 조금씩 열리게 된다. 그러던 중 상우가 내리막길에서 넘어져 무릎과 정강이에 피가 나고 미친 소에게 받힐 뻔하는 시련을 겪던 차에 할머니가 배터리 값으로 준 이천 원을 보며 진정으로 할머니의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여 외할머니를 향하게 된다. 곧 상우와 외할머니 사이에 진정한 혈연관계가 회복된다. 그리고 나서 멀지 않아 할머니와 이별해야 하는 것을 알고는 눈이 어두운 할머니를 위해 바늘귀마다 실을 길게 꿰어 놓는다. 또 할머니와의 통신수단을 궁리하던 상우는 로봇 그림엽서에 글을 모르는 할머니를 위해 그림을 그려 이 엽서를 보내면 자기가 꼭 오겠다고 약속한다. '보고 십다'(상우식 표현)는 웃는 얼굴로 나타내고, '아프다'는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채 누워 있는 할머니를 그려서 표현하며 우표를 붙이는 곳에는 '상우가 드려요'라고 써놓는다. 그렇다. 우리도 죄로 말미암아 깨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여야만 한다. 즉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들일 때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하여 하나님 아버지와의 아름다운 교제가 시작이 되는 것이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으라."(막1:15) "그런즉 너희는 회개하고 회심하라. 그리하면 새롭게 하는 때가 주의 눈앞으로부터 이를 때에 너희 죄들이 말소될 것이요."(행3:19) "그분(Jesus)을 영접한 자 곧 그분의 이름(he sha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으니"(요1:12) 4. 집으로… 이제 상우에게 어머니를 따라가야 될 시간이 다가왔다. 버스를 타고 떠나는 상우는 연신 손으로 가슴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할머니에게 수화로 이별을 한다.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떠난 상우를 배웅한 후 외할머니는 굽은 등을 하고 지팡이를 짚고 집으로 돌아온다. 외할머니와의 관계가 회복된 상우에게는 어쩌면 외할머니가 사시는 시골집이 상우 자신의 집으로 여겨지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어찌되었거나 우리 모두는 상우가 경험했던 것처럼 집을 떠나 짧은 순간 이 세상에서 살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 돌아갈 집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저택들(mansions)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그러나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 5. 에필로그 아마도 영화 '집으로…'의 열풍은 좀처럼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다. 비디오로 출시가 된 이후에도 그렇고 또 남북통일이 된 후에라도 많은 사람들이 감상하며 감동을 느끼게 되리라 기대가 된다. 그러할 때 이 '집으로…'를 통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후 가야 할 집에 대한 올바른 안내가 이뤄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천국과 지옥은 결코 사이버 공간이 아니라 영원히 실재하는 곳(눅16:23,24; 계20:10; 21:2-23)이라는 사실과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것(벧후3:9)을 우리 모두가 깨달았으면 한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자신의 죄가 다 씻음 받았다는 것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 돌아갈 멋진 집이 있음으로 인해 기뻐하자. "나 요한이 보매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데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 그 도시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빛이 지극히 귀중한 보석 같고 벽옥 같으며 수정 같이 맑더라. … 그 도시의 성벽 건물은 벽옥으로 되어 있고 그 도시는 순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도시의 성벽 기초석들은 온갖 보석으로 장식하였는데 …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그 도시의 거리는 순금인데 투명한 유리 같더라. 그 도시에는 해와 달이 빛을 비출 필요가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시를 밝혀 주고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광체이시기 때문이라."(계21:2,11,18,19,21,23)
2009-05-08 13:25:18 | 관리자
차한 지음 그간 국민적 관심을 끌며 KBS에서 인기리에 방영이 되었던 '도올의 논어이야기'가 도올 자신에 의해 갑자기 중단되었다. 이 시대 최고의 인기 스타 도올 김용옥은 왜 인기의 절정에서 일방적으로 방송중단이라는 수를 두게 된 것일까? 그 배경을 놓고 많은 얘기들이 나돌고 있지만 도올은 '국민 여러분께 아룁니다'란 제하의 사퇴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는 나의 지식의 한계나 신체적 능력의 한계를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식은 무한하며, 또 그 지식의 재미도 무한하며, 또 그 재미의 공감방식도 무한합니다. 나는 그러한 무한성과 다양성을 공자의 '仁', 그리고 공자의 '째즈'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나의 강의 방식이나 그 분위기는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나에게 주어지는 하등의 압박감이나 부자연스러움이 부재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국민 여러분께서 매주 이어지는 저의 강의 속에서 삶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고 계시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저를 못 견디게 만들고 있는 중요한 사실은 저 자신이 제 강의로 인하여 권력화되어가고 있으며, 이러한 권력구조 속에서 도올 김용옥이라는 인간이 소외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학문은 진리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권력을 거부합니다. 저 자신의 실존 속에 온축되어가고 있는 권력을 부정하는 길만이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이라는 엄숙한 양심의 명령 앞에 나는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이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 모두가 살기 위해서' 이러한 결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옳은 이야기다. 정말 우리가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그의 강의는 중단이 되어야 마땅하다. 아니 아예 강의가 시도되지 않았더라면 그야말로 죽지 않고 살아날 영혼들이 많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동안 도올의 강의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참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지 못하고 대신 영원한 죽음과 멸망의 길로 인도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최근 한 네티즌이 인터넷상에 올린 다음과 같은 '도올의 출사표' 내용에서도 확인이 되고 있다. "지금이요! 천하 13 종교 가운데 기독교는 이미 3대를 거쳐 국민종교로 자리매김 하였소! 지금 이를 치지 못하면 우리 유교는 자멸하고 말 것이요! 나는 이걸 치기 위해서는 유교의 재해석에 달려 있다 생각하고 82년 귀국이래 고전번역 작업에 몰두하였소! 이는 내 필생의 과업이며 내가 동양철학에 들어갈 때부터의 계획이었소! 이 사태를 바꾸지 못하면 내가 태어난 보람은 없는 것이오!" 물론 이 말이 도올의 직접화법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강의시 보여준 여러 면면들을 볼 때 수긍이 가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도올은 복음을 훼손하며 뭇 심령들을 오도하였는데 이번에 그가 저지른 방송사퇴는 어찌 보면 소기의 목적을 다 이룬 후 즉 복음의 변질을 극대화시킨 후 결행된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논어 이야기' 중 가장 완벽한 '다른 복음' 곧 '공자의 인간관과 그리스도의 인간관'이 이미 방영되고 난 후 사퇴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자 이제 복음에 대해 결정적 카운터블로(counterblow)인 '공자의 인간관과 그리스도의 인간관'을 현장 중계하여 보자. 오래 전 장성 천주교 성당에서 로마노 신부와 2시간 토론하였던 얘기를 화두로 도올은 천주교와 유학을 아우르며 십분여의 시그날을 담당한다. 이어 '진정한 복음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 모셨다며 김수한 추기경을 청중들에게 소개한다. 그러자 화면 하단에는 사제 50년째, 우리나라의 정신적 구심점이며 뭇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왔다는 자막이 비춰진다. 청중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 등장하는 김 추기경. 도올을 이기라며 개신교 신자로부터 '한자가 창세기에서 나왔다는' 책을 선물 받았다는 얘기와 재미 유교신자가 도올을 야단쳐 달라고 편지한 사실을 공개하며 아울러 정신적 양식을 준다며 도올의 강좌를 칭찬한다. 이어 본격적인 공자의 인간론이 추기경에 의해 설파된다. 공자는 이 세상에서 인간을 가장 의미있다고 하였다.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상태가 인간이 추구해야 될 최고의 상태이다. 인간의 자유는 선택의 자유로서 인간은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데 죄지을수록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여러 철학과 학문을 통해 인간탐구를 많이 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몸과 원자에 대한 연구도 끝나지 않았다. 즉 미시적 세계(microcosmos)와 거시적 세계(macrocosmos)는 끝이 없다. 인간 그 자체가 신비이다. 고로 인간은 존엄하다(Man is divine).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존엄하다. 인간의 존엄성은 과학적으로 증명 못한다. 신앙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추기경은 생명의 기원에 대한 진화론의 주장을 반박하는 듯 생명이 참으로 우연히 시작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때 자막에는 추기경이 진화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한 방편으로 진화론을 생각한다는 친절한 보충설명이 두 번씩이나 제시된다. (필자 주: 이것이 소위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인데 이에 대해서는 '건강과 생명' 1992년 1, 2월호에 게재된 필자의 글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한 소고'를 참조하기 바란다.) 추기경은 아인슈타인과 정다산 등의 믿음도 언급한 후 결국 공자의 인간관과 그리스도의 인간관은 같다고 한다. 인간의 목표는 '하느님'과 같이 영원히 살고 '하느님'의 영광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 끝까지 지켜야 될 가치는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아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도 사랑하며 서로도 사랑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인(仁)'이다. 곧 '仁'의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이다. 추기경의 강론이 끝나자 도올의 고백과 질문이 이어진다. 신학대학 나올 때 어느 종교에도 소속되지 않는 신앙인으로 남아 있겠다고 하였다. 문제는 기독교인 중 배타적 복음주의, 전도주의이다. 천당, 지옥 등은 잡스런 것이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우리에게 하나님이 있었는가? 추기경은 어떻게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가? 추기경은 답한다. 인간으로서 참되게 사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다 구원해 주신다! 잠시 후 청중의 뜨거운 갈채 속에 도올과 추기경은 무대 밖으로 사라진다. 천주교의 구원관과 기독교의 구원관이 같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던 이들 중 진정 거듭 난 신앙인(real, born again Christian)이라면 '모든 종교에 다 구원이 있다. 참되게 살기만 하면 다 구원받는다.'는 추기경의 발언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러한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가 김 추기경 개인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천주교의 공식적 구원관이라는 사실이다. 로마 카톨릭의 마지막 공의회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서는 이미 공식적으로 타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 구원론을 선포한 바가 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정통적인 기독교의 모습을 하고 있는 로마 카톨릭이 종교다원주의라는 누룩을 품으면서 그 어떤 종교나 철학이나 이데올로기보다도 복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하늘의 왕국은 마치 어떤 여자가 가져다가 굵은 가루 서 말 속에 숨겨 넣어 전부를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13:33, 흠정역: Another parable spake he unto them;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unto leaven, which a woman took, and hid in three measures of meal, till the whole was leavened.) 그러면 어떻게 로마 카톨릭에 이러한 누룩이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 뿌리를 살펴보도록 하자. 노아의 홍수 바로 직후 사람들은 동방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창11:2) 바로 이 비옥한 메소포타미아 땅에 사람들이 바벨론 도성을 세웠고 야수로부터 그들의 안전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참조: 출23:29,30) 힘있는 자 니므롯(Nimrod)을 지도자로 삼게 되었다(창10:8,9). 니므롯은 경건하지 않은 통치자로서 역사이래 처음으로 자신의 왕국 곧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는 인본주의 왕국인 바벨론 왕국을 세웠다(창10:10; 11:4). 그리고 알렉산더 히슬롭(Alexander Hislop)에 따르면 니므롯이 죽었을 때 그의 몸은 여러 조각으로 갈라져 태워졌고 또 다양한 지역으로 보내졌다(참조: 삿19:29; 삼상11:7). 그러나 니므롯은 아내 세미라미스(Semiramis)에 의해 태양신으로 추앙받게 되었고 아들 담무스(Tammuz)는 니므롯이 환생한 것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즉 본격적으로 바벨론 백성들이 태양신을 숭배하며 신비스러운 예배들을 거행하는 바벨론 종교가 구축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이 바벨론 종교는 사람들이 땅의 온 지면으로 흩어지면서 함께 세계 여러 나라들로 확산되었다(창11:9). 따라서 도올이 표현한 대로 천하 13개 종교 중 유대교와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들은 같은 뿌리를 가지게 된 것이다. 초기 기독교는 로마제국 내에 파고 들어온 이러한 바벨론 이교주의에 직면하게 되었다(살후2:3,7; 딤전4:2). 순수한 신앙을 가진 많은 그리스도인이 바벨론의 관습과 종교다원주의를 거부하여 박해를 받고 순교를 당했다. 그러나 기독교가 국가교회로 전락하면서 이교주의와 많은 타협들이 이루어져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거룩하여지기보다는 이 세상 제도의 한 부분이 되어갔다. 그리고 이교주의가 교묘한 방법으로 기독교와 혼합했기 때문에 바벨론의 영향은 '바벨론 신비종교'로 숨겨지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적과 아군을 분간하지 못하고, 다 똑같은 양인 줄 알고 이리와 함께 한 울타리에서 지낼 수 있는 것이다(마7:15). 지난 2,000년 간 자신의 백성을 바벨론의 속박으로부터 부르셨던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내 백성아, 그녀에게서 나와 그녀의 죄들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고 그녀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18:4, 흠정역) 우리는 두 뿌리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종교다원주의인가 아니면 오직 예수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道)이요 진리(眞理)요 생명(生命)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
2009-05-08 13:24:32 | 관리자
4. 처녀 탄생(The Virgin Birth)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니라.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였을 때에 그들이 함께 오기 전에 그녀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아이를 밴 것이 드러났더니 그때에 그녀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므로 그녀를 공개적인 본보기로 삼기를 원치 아니하여 은밀히 그녀를 버리려고 마음먹었으나 그가 이 일들을 생각할 때에, 보라, 주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 이르되, 너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녀 안에 수태된 이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았느니라”(마1:18-20). “이제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에 관하여 대언자(代言者)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번역하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라”(마1:22-23). 이렇게 분명한 기록을 보고도 어떤 이가 성경이 처녀 탄생을 가르치고 있음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사람들이 성경 기록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성경이 처녀 탄생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처녀였던 유대인 어머니의 뱃속에서 잉태되었음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이는 어떤 육적인 아버지에게서 받은 생식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성경이 이 점을 너무도 분명히 가르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어떤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말씀을 주의 깊이 그리고 신중하게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결코 이 문제에 대해 잘못된 해석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Jesus Sinless) 그 외에도 성경은 예수님께서 죄 없는 인간이셨음을 가르친다. 아담으로부터 오늘날까지 태어난 모든 인류는 아담의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며 따라서 저주와 영원한 죽음에 무릎 꿇어야만 하지만 참 사람 예수님(The Man Jesus)께서는 죄가 없으셨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그 자신 위에 돌리시고 그들의 죽음을 대신하시기 전까지는 결코 죽을 수 없는 분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족속을 한 피에서 만드셨다. 그러므로 비록 예수님께서 죄성을 갖고 있는 인간으로부터 육신을 받았다 해도 죄성을 띤 피가 그분의 몸에 있지 않는 한 그분께서는 여전히 죄가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죄성을 띤 인간의 피를 갖지 않은 채 육신적으로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준비하셨다.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이다. 피의 기원( Origin of the Blood)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동맥과 정맥에 흐르는 피는 산모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태아의 몸에서 생긴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피의 형성은 정자가 난자 속으로 들어가서 태아가 형성되기 시작한 후에 이루어진다. 이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매우 간단한 예로서 달걀의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수정되지 않은 달걀은 인간의 난자를 크게 만들어 놓은 것과 똑같다. 당신이 수정되지 않은 달걀을 부화시키려 한다면 곧 실패할 것이다. 부화시키기 위해 그것을 따뜻한 곳에 두면 그것은 완전히 말라붙어 결코 병아리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달걀을 수컷의 정자로 수정시켜 보자. 그 후에 따뜻한 곳에서 부화시키면 태아 속에 있는 생명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몇 시간 후에는 그 생명이 눈에 띄게 성장한다. 또 조금 후에는 ‘피’가 있음을 보여 주는 빨간 줄무늬가 생긴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모세가 성경에서 말한 대로 생명이 피에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이는 피가 모든 육체의 생명이기 때문에 육체의 피는 그 생명을 위해 있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어떤 종류의 육체의 피도 먹지 말라.”(레 17:14) 산모의 피는 태아의 피와 상관없음(Mother's Blood Separate) 산모의 자궁에서 자라나고 있는 태아는 산모로부터 단 한 방울의 피도 받을 필요가 없다. 과학자들도 분명히 그렇다고 말한다. 산모는 자기의 자궁 내에서 점점 자라나고 있는 태아가 몸을 제대로 형성할 수 있도록 영양분을 공급하지만 태아에게 있는 모든 피는 태아 자신에게서 생성된 것이다. 수태될 때부터 태아의 출생 때까지 단 한 방울의 피도 산모로부터 태아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후산물로 더 잘 알려진 임시의 조직 덩어리인 태반은 산모와 태아 사이를 서로 연결해 준다. 그것은 모든 수용성의 영양분들 - 단백질, 지방분, 탄수화물, 염류, 무기질, 항체조차도 - 이 산모에게서 태아로 자유롭게 전달되고 태아의 신진 대사 작용으로 생긴 노폐물이 산모의 혈액으로 되돌아오게 한다. 그러나 그 안에서는 정상적인 경우에 실제로 단 한 방울의 피도 서로 교환되지 않는다. 태아가 가진 모든 피는 태아 자체에서 생성된 것이다. 산모는 그 피에 전혀 어떤 기여도 하지 않는다. 과학의 증거(Testimony of Science) 위의 설명에 대해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는 독자를 위하여 나는 몇 가지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려 한다. 호웰(Howell)의 『생리학 교과서』 제2판 885 페이지와 886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태반의 전반적인 기능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태반이 본래 산모의 탈락막에 있는 큰 혈액의 공간에 잠겨 있는 태아의 혈관성 융모돌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태아의 피와 산모의 피는 실제로 접촉되지 않는다. 그들은 태아의 혈관벽과 융모돌기의 상피 세포층에 의하여 서로 분리되어 있다.” 윌리암스(Williams)의『산과학의 실제』제3판, 133페이지를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융모돌기의 혈관 안에 있는 태아의 피는 융모상피의 이중으로 된 세포층에 의하여 산모의 피와 분리됨으로써 융모 사이의 공간에 있는 산모의 피와 한 번도 접촉할 수 없다.” 다시 같은 책의 136페이지를 인용하여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정상적인 경우에는 태아의 피와 산모의 피가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 다음에는 간호사들에게 잘 알려진 책에서 인용하여 보겠다. 즉 간호사 자브리스키(Louise Zabriskie)가 지은 『간호사를 위한 산과학』제5판, 75페이지를 인용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태아의 혈액 순환이 시작되면 그것은 산모의 혈액 순환과는 분리되며 그것과는 전혀 다르게 된다. 산모와 태아 사이에 서로 교환되는 모든 영양분과 노폐물은 혈관 벽을 통하여 모체의 혈액 순환에서 태아의 혈액 순환으로 전달된다.” 그리고 위의 책의 82페이지를 인용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태아는 태반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산모의 피로부터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받는다. 태아의 심장은 탯줄의 동맥을 통하여 태반의 혈관으로 피를 내 보낸다. 이 태반의 혈관은 자궁 조직의 안과 밖을 감싸고 있고 자궁의 혈관과 매우 밀접하게 놓여 있어서 그 혈관 벽을 통하여 태아로부터 산모에게로는 노폐물이, 산모로부터 태아에게로는 영양분과 산소가 확산되도록 한다. 이미 말한 대로 이런 상호 교환 작용은 삼투 현상에 의해 이루어지며 두 혈액간의 직접적인 혼합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실제로 산모의 피는 태아에게로 흘러들어 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태아의 피도 산모에게로 흘러들어 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준비(God's Wonderful Provision)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의 처녀 탄생을 위해 얼마나 놀랍게 준비하셨던가! 여자를 창조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피가 여자로부터 여자의 후손에게 흘러가지 않도록 하셨다. 아담의 자손이면서도 죄 없는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육신은 아담으로부터 나왔지만 피는 다른 근원에서 나오는 방법을 준비하셨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여자에게서 태어났는데 죄가 없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특히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마리아가 죄 없는 처녀’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셨다는 질문의 해답이 아니다. 마리아도 그녀의 아버지가 죄인이므로 분명히 죄를 입고 태어난 죄인이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기는 하셨지만 아담의 피는 공유하지 않았음을 가르치고 있다. 히브리서 2장 14절은 말한다. “그런즉 자녀들은 살과 피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의 일부를 취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자녀 즉 인간의 자녀들은 육과 피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며, 예수님 자신도 그와 비슷하게 우리와 같은 것의 일부 즉 몸을 취하셨음을 주목하라. 그러나 그리스도께 적용된 ‘took part’라는 말은 자녀들에게 적용된 ‘partakers’와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 ‘took part’로 번역된 말은 자기 자신의 본성을 벗어나서 어떤 일에 참여함을 암시한다. 그러나 ‘Partakers’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코이노네호’(koynoneho)이며 이 단어는 ‘완전히 함께 공유하다’를 의미한다. 그래서 아담의 모든 자녀들은 아담의 혈육을 모두 완전하게 공유한다. “예수님께서 마찬가지로 같은 것의 일부를 취하셨다”는 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메테코’(metecho)인데 이 단어는 ‘전부가 아닌 일부분만 참여하다’를 의미한다. 즉 인간의 자녀들은 아담의 혈육을 모두 가졌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한 부분, 즉 육신만을 공유할 뿐이다. 그분의 피는 초자연적인 수태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적으로 완전하신 인간이셨다. 육신적으로는 그분께서 다윗의 씨였지만 그분의 피는 거룩하게 만들어졌다. 인간이 창조될 때 아담의 육신은 땅의 흙으로 만들어졌고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 넣으셨다.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그 일 후에 아담의 몸에서 피가 생겨났다. 그러나 첫 아담의 피는 죄로 인해 부패되었고 하나님께서 모든 족속을 한 피로 만드셨으므로 모든 인류에게는 죄가 있다. 마지막 아담 속에서 새롭고 거룩하며 죄 없는 피가 생성되었고 결국 거룩한 피가 나왔다. 하나님의 피(Divine Blood) 처녀 탄생이 성취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령님에 의한 수태뿐이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몸에 영양분을 주었고 그래서 그분께서는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것은 죄 없는 피요, 거룩한 피며 고귀한 피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피는 지금까지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무죄한 피(Innocent Blood)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지었도다.” 가룟 유다는 마태복음 27장 4절에서 이처럼 고백했다. 진실로 우리 주님께서는 무죄하셨다. 주님께서는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에서 우리와 같이 되셨다. 그분께서 인간인 아버지에 의해서 수태되지 않고 ‘거룩하신 아버지’에 의해 수태되셨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우리와 같이 되셨다. 그 결과 생물학적으로 주님께서는 거룩한 피, 즉 죄 없는 피를 갖고 계셨다. 또 그 피에는 죄가 없으므로 그 피는 결코 썩을 수가 없다. 썩지 않는 피(Incorruptible Blood)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피는 썩게 되었다. 사람은 죽자마자 곧 썩기 시작하며 부패는 먼저 피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바로 고기에서 피를 모두 짜내는 이유이다. 또 그것이 부식 방지 처리를 하는 사람들이 방부제 약을 피 속에 넣는 이유이다. 다윗은 “예수님의 몸이 썩음을 보지 않으리라”고 했다. 비록 주님께서 사흘 밤낮 동안 죽은 상태로 있었지만 그분의 몸은 썩지 않았다. 주님께는 죄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분을 영원히 죽도록 할 수가 없었고 그분께서는 다시 생명을 취하기 위해서 스스로 자기 생명을 버리셨다. 사망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권세를 휘둘렀지만 주님께 대해서는 그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자신의 권능으로 부활하셨다. 모든 인류의 죄 값을 지불하셨을 때 - 사망은 자기의 먹이를 붙들 수 없었네 예수님, 나의 구원자여 주님께서 지옥의 장벽을 부수셨네 예수님, 나의 주여; 무덤에서 솟아올라 부활하사 권능으로 원수를 누르고 승리를 거두셨도다. 죄인이여, 당신은 이처럼 능력 있는 구원자를 영접하여 그분의 고귀하신 피로써 씻겨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아직도 죽음이라는 저주와 무서운 선고 아래 있다. 오늘 그분을 영접하고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은즉 더욱더 그분을 통해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으리니”(롬5:8-9). 피의 거룩함(The Sanctity of Blood) “그러나 너희는 고기를 그것의 생명과 함께 곧 그거의 피와 함께 먹지 말지니라”(창9:4). 이 말씀은 노아의 대홍수라는 무서운 심판이 있은 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명령의 일부이다. 노아 홍수 이전에 사람들의 악이 점점 증가되어 최고 절정에 이르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완전히 부패되어 멸망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큰 홍수를 보내어 단 한 가정만 남겨 두고 모든 사람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때 유일하게 남게 된 노아의 가족은 하나님의 은혜로 ‘당시의 세대들 가운데 완전하게’ 남아 있었다. 홍수 이후 깨끗하고 청결하게 된 이 땅 위에서 주님께서는 이 새로운 가정을 통해 인간 역사의 새로운 장을 시작하셨다. 그러나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다른 심판이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그들이 취해야 할 행동들에 대해서 몇 가지 지시를 내리셨다. 그 명령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노아가 새로운 땅 위에 맨 처음 발을 디뎠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셨던 말씀이 바로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음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이 명령은 대 홍수가 일어나게 된 부분적인 요인이 인간들이 ‘피의 신성함’을 무시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홍수 전에 이 세상이 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인간이 타락한 후에 범해진 최초의 죄는 가인이 아벨의 무죄한 피를 흘린 것이다. 그 피는 땅에서 복수를 해 달라고 부르짖고 있었다. 그 무죄한 피의 호소에 대한 부르짖음이 노아의 홍수를 초래케 했다면 하물며 말세의 폭력으로 말미암아 죽어가고 있는 의인들의 피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원수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겠는가? 오늘날 팽배하고 있는 악과 폭력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사실이 조금도 어김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노아의 날들에 이루어진 것같이 사람의 아들의 날들에도 그러하리라”(눅17:26). 그렇다. 이렇게 악이 만연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어느 날 갑자기 주님께서는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지상에서 횡행하고 있는 무서운 통치에 끝을 내고 말 것이다. 노아의 홍수를 통해 예표로 보여진 대환난의 심판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다시 새롭게 되고 정결하게 된 이 땅 위에 평화의 왕국 즉 천년 왕국을 문자 그대로 이룩하실 것이다. 피는 신성하다(Blood Is Sacred) 하나님의 피조물의 생명이 육체에 있지 않고 피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육체를 먹되 오직 피 없이 먹으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점을 계속해서 강조하신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음식과 규정과 규례들을 줄 때에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9장 4절의 금지 사항을 다시 반복해서 명령하고 계신다. “또한 너희는 너희의 모든 거처에서 날짐승의  피나  짐승의 피나 무슨 피든지 먹지 말지니라. 어떤 혼이든지 무슨 피라도 먹으면  그 혼은 자기 백성에게서 끊어지리라”(레7:26-27). 그와 동일한 명령이 레위기 17장에서 보다 더 많이 반복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피든지 먹는 것은 죄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죄는 너무도 심각해서 그 죄를 범한 자는 자기의 백성들에게서 끊어짐을 당할 것(즉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했다. 피를 철저하게 빼지 않은 고기는 음식으로 적당하지 않으며 목매어 죽인 것도 무엇이든지 먹기에 적당치 않다. 오늘날 적어도 정통 유대인들은 아직도 이 금지 사항을 기억하고 오직 코셔(kosher) 고기만 먹는다. 그것은 율법에 있는 대로 죽여서 피를 완전히 빼낸 고기를 뜻한다. 따라서 모든 코셔 고기나 다른 코셔 음식들은 피의 신성함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우리는 은혜 아래 있다(We Are Under Grace) 이제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 아래 있으며 그 명령은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반대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율법 아래 있지 않았던 노아에게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노아는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기 1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보다 더욱 의미가 있는 사실은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은혜의 시대가 시작된 후에도 하나님께서 아직도 이 법칙이 유효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다는 점이다. 그래서 지금도 “피를 먹지 말라” 하는 명령은 유효하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첫 번째 공회에 대한 기록을 보게 된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안디옥 교회 내에서는 상당히 골치를 앓게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초대 교회의 유대인들이 그곳에 와서 이방인 신자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가 보다 심각한 쟁점으로 일어나게 되자, 급기야는 예루살렘에서 회의가 소집되었고 거기에서 이 문제를 결정하기로 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안디옥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내려 왔다. 그리고 많은 논쟁과 토의를 벌인 끝에 마침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달문을 가지고 이들은 다시 안디옥의 이방인 교회로 돌아갔다. “우리가 들은즉 우리에게서 나간 어떤 자들이 말로 너희를 혼란에 빠뜨리고 너희 혼을 뒤엎으며 이르되, 너희가 반드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 하나 우리는 그들에게 그런 명령을 준 적이 없으므로”(행15:24). 여기서 사도들이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보기를 바란다. “우리가 시키지도 않았다”라고 그들은 말했다. 사도들은 교회가 율법 아래 있다거나 이방인 신자들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것을 가르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 이후 19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많은 교회가 아직도 우리들을 유대인들로 만들려는 율법주의자들로 인해 골치를 앓고 있다. 그러나 사도들은 말하기를 “아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크리스천들은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율법에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 사도들이 한 말을 더 읽어 보자. “성령님과 우리는 이 필요한 것들 외에 다른 큰 짐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을 좋게 여겼나니 곧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너희가 멀리할지니라. 너희가 이것들을 스스로 삼가면 잘하리로다. 평안할지어다, 하였더라.”(행15:28-29). 비록 우리 크리스천들이 율법 아래 있지는 않으나 아직까지도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규제를 받고 있으며 그 이유는 그들이 율법 아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육체의 생명인 피가 신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있기 1000년 전에 즉 은혜 시대에 벌써 노아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 그리고 그 원리는 율법 시대에도 효과를 발생했고 율법의 시대가 지난 지금의 은혜 시대에도 계속해서 준행되고 있다. 지금은 왜 피를 금하는가?(Why No Blood Now?) 하나님의 명령은 절대로 임의적인 것이 아니며 언제나 시대를 초월해서 정당한 논리를 지니고 있으며 합리적이다. 피를 먹지 못하게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먼저 우리는 건강과 위생상의 이유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 외에도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첫째로는, 생명이 피에 있으며 생명은 신성하기 때문이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이며 그분의 숨을 불어 넣으신 결과로 생긴 것이다. 모세는 창세기에서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창2:7). 이제부터 성경이 주장하는 논리들을 자세히 살펴보자.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에 피가 없으면 모든 육체는 생명이 없다. 처음에 흙으로 만들어진 아담이 존재했다. 그 아담은 한낱 흙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코에다 숨결을 불어 넣으시자 그는 살아 있는 인간이 되었다.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써 그 몸에다 부여해 주신 것은 다름 아닌 피이다. 아담의 몸은 흙으로 만들어졌지만 그가 가지고 있던 피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사실을 존중할 것을 요구하고 계시는데 그 이유는 피와 함께 그 육체를 채우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숨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를 먹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다. 고귀한 피(The Precious Blood) 두 번째로 중요한 이유를 하나 더 제시해 보겠다. 피는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대가였다.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무엇인가 좋지 않은 것이 피 안에 생기게 되었다. 그 이유는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었다. 아담의 피는 절대로 부패하지 않고 죽음이 없는 피로 존재하지 못했고 죄로 말미암아 부패하게 되었으며 결국 아담은 죽음에 의해 굴복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죽은 죄인을 구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명이 다시 그 속에 심겨져야만 했다. 즉 사망을 치료하는 유일한 방법은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생명이 바로 피 안에 있다. 그래서 반드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죄 없고 절대로 부패하지 않은 피’가 흘려져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담 계열의 인종 가운데서는 아무도 이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첫 아담 안에서 그의 모든 후손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천사들도 그 피를 공급할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순전히 영적 존재들이어서 육체도 없고 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피를 공급해 주실 유일한 한 분이 계셨으니 그분은 바로 처녀에게서 탄생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그분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의 형상으로 내려 오셨으나 전혀 죄가 없는 초자연적인 피를 지니고 계신 분이셨다. 그분은 바로 성령님으로 잉태된 분이신 것이다. 윗부분에서 우리는 태아의 몸속의 피는 어머니의 피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스스로 그 안에서 형성되며 어머니의 난자로부터 그 작은 태아의 몸이 시작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예수님의 몸은 마리아에게서 왔고 그분의 피는 성령님으로부터 왔다. 이처럼 죄 없고 초자연적인 피만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구속을 위해 용인하실 수 있는 대가가 될 수 있었다. 죽음은 오직 생명에 의해서만 사라질 수 있으며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수혈이 필요하다. 수혈(Blood Transfusions) 오늘날 우리는 수혈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수혈에 의해 목숨을 구해 왔다. 수혈이란 출혈이나 갖가지 피와 관련된 질환의 경우에, 건강한 사람으로부터 얻은 피를 고통당하고 있는 환자에게 넣어 줌으로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모든 수혈 중에 가장 위대한 수혈은 허물과 죄로 죽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바로 그 순간 그분의 피에 의해 구원이 이루어질 때 행해진다. 여기에 필요한 단 한 가지 조건은 바로 대속의 피를 그 사람이 믿는 것이다. 혈액 은행(Blood Bank)  요즈음 우리는 혈액 은행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다. 혈액 은행은 부상당하거나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해 주기 위해 미래에 사용될 목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에게서 취해진 피를 저장하는 창고이다. 건강한 사람들에게서 채취한 피에는 어떤 보존제들이 첨가되어지고 그렇게 처리된 피는 무균 용기 안에서 미래에 사용되기 위해 보존될 수 있다. 이때 사용되는 보존제는 피의 모든 기능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으므로 그 피는 어느 때든지 사용될 수 있다. 종종 우리는 이러한 피를 기증하기 위하여 병원이나 보건소로 와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거기에서 피가 채취되고 처리된 뒤 저장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어떤 응급 환자의 경우에도 수혈에 필요한 피가 항상 충분히 있게 된다. 과학자들의 이러한 발견들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오늘 당신은 한 달 후에 수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있는 어떤 낯선 이의 생명을 구하게 될지도 모르는 당신의 피를 기증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혈액 은행(God's Blood Bank)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20세기 전에 행하신 그 일의 백만분의 일도 되지 못한다. 그때에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는 자신의 죄 없는 피 전부를 남김없이 쏟아 주신 분이 계셨다. 바로 그곳에서 혈액 은행이 개설되었고, 주 예수님의 피가 그 은행을 채웠다. 그 피는 A형이든 B형이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합하고 유효하며 성령님에 의한 그 피의 수혈을 받으려는 모든 이들에게 거저 주어진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믿음으로 그것을 얻기 위한 신청을 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피를 보존하기 위해 혈액 은행에 있는 피에다 반드시 보존제들을 첨가하여야만 하고 그리함에도 불구하고 그 피는 결국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변질된다. 그러나 그분의 피에는 어떤 보존제도 첨가되어질 필요가 없는데 그 이유는 그 피가 썩을 수 없으며 죄 없는 피이기 때문이다. 그 피 중 단 한 방울도 손실되었거나 소모된 적이 없다. 그 피는 썩을 수 없는 피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너희의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구속받은 것은 금이나 은같이 썩을 것들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그 피로 인해 우리 주님께 찬양을 드리자! 독자들이여, 당신들은 이 피가 옛날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신선하며 앞으로도 항상 그러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 피는 결코 소멸될 수 없다 다음과 같은 가사의 찬송가가 있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의 피가 쏟아졌고 그것은 우리의 죄악과 허물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 가사는 사실이 아니다. 예수님의 피는 쏟아지지 않았다. 쏟아지는 것은 어떤 사고로 인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결코 사고가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내어 놓으셨고 우리가 살 수 있도록 자발적으로 자신의 귀중한 피를 흘려 주셨다. 오 죄인이여, 당신은 바로 지금 그 귀중한 피를 차지하지 않겠는가! 죄의 능력과 정죄됨으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씻겨 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귀중한 피 외에 아무것도 없다. 오늘 그 피를 받아 곧 구원을 받으라. 자기의 죄로 인하여 슬퍼하는 성도들이여, 다음을 기억하라.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 1:9). “바로 지금 그분을 신뢰하라.”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이 샘에 피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2009-05-08 13:22:28 | 관리자
3. 오직 피만이(Only The Blood)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이시므로 손으로 만든 전들에 거하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사람들의 손을 통해 경배를 받지 아니하시니나 이는 그분께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기 때문이라. 또 그분께서 사람들의 모든 민족들을 한 피로 만드사 온 지면에 거하게 하시고 미리 작정하신 때와 그들을 위한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으니”(행17:24-26).   이 구절 가운데는 우리가 특히 관심을 기울일 말씀이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신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를 서로 서로에게 연결시켜 주는 것은 다름이 아니고 우리의 혈관 속에 흐르고 있는 피다. 인류는 한 피에서 나왔고 그 피는 첫 인간이며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피였다. 성경은 생명이 피에 있고 죄의 값은 사망이므로 죄는 아담의 피에 영향을 끼쳐서 궁극적으로 그에게 죽음을 가져왔다고 기록한다. 모든 인류의 피가 아담의 피를 공유하기 때문에 오직 죄가 없는 피만이 그것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피는 바로 영혼의 속죄를 이루는 피이다.   첫 아담의 죄가 전 인류의 피를 부패시켰으므로 마지막 아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하고 죄가 없는 피만이 온 세상의 죄를 속죄할 수 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죄들의 사면이 없다. 영혼의 속죄를 이루는 것이 바로 피이다.” 비록 이브가 아담보다 먼저 죄를 지었지만 이브의 죄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전 인류는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전 인류에게 죽음을 초래한 것은 바로 ‘아담의 죄’이다.   성경에서는 오직 예수님만을 여자의 씨(The Seed of the Woman, 창3:15)라 부르는데 이는 그분만이 여자에게서 태어났으며 따라서 ‘그분의 피’에는 아담의 죄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역자 주:마태복음 1장을 펴고 2절부터 읽어 보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성경은 모두 남자가 남자를 낳는 것으로 기록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시는 관점이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남자가 남자를 낳는 것에는 ‘beget’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리아로부터 ‘태어나신 것’(was born)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그분께서는 여인에게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오직 예수님만이 여인에게서 나온 사람이다. 더 많은 정보를 원하시는 분은 도서출판 예향의 『말씀의 비밀을 찾아서』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비록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몸을 입으셨지만 성령님에 의해 잉태되어 여자에게서 태어나셨으므로 당신이나 나 같은 죄인이 아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단 한 가지 해결책은 ‘죄 없는 피’뿐이며 오직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만이 우리에게 그 피를 줄 수 있다.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우리는 이 속죄하는 피에 대한 기사를 읽게 된다. 그 예로, 구약 성경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피 흘리는 희생 제사를 통해 죽임 당한 양과 염소의 피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어린양께서 오시기 훨씬 전에 주님께서는 구약 성경에서 여러 가지 예표들을 통해서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셨다. 피가 없이는 속죄가 이루어질 수 없으며 피가 드려지기 전까지 하나님의 거룩하신 법은 죄인에 대해 공의와 죽음을 요구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의 두 돌판을 주셨을 때 - 긍휼이 아니고 공의를 요구하는 율법, ‘그것을 범한 혼은 죽으리라’고 말한 율법 - 그 율법은 ‘완전함’ 이 아니면 죽음을 요구했다.   그분께서는 또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성막의 형태를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은 모두 피 위에 지어진 것이며 그 안에서의 모든 의식 역시 피 속에서 거행되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하여 반드시 죽을 것을 아셨으므로 은혜 가운데 율법에 의해 정죄된 범죄자가 안식을 주는 피를 통하여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성막과 희생단과 피를 주셨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양(God's Perfect Lamb) 송아지와 염소와 양의 피는 죄인을 완전하게 속죄할 수 없으며 그것은 단지 자신을 직접 희생하심으로써 구약 시대의 끝에 죄를 없애려고 오신 그분을 가리킬 뿐이다. 마침내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여인에게서 나게 하셨고, 마지막에 그분께서는 자기의 고귀하고 영원한 피를 온 세상을 위해 ‘단 한 번’ 영원히 흘리셨다. 그 후로는 더 이상 속죄를 위한 어떤 희생 제사도 필요 없게 되었다. 구약 시대에 희생된 짐승의 피는 부패하기 쉽고 썩어서 빨리 없어지지만 예수님께서 갈보리에서 흘리신 피는 결코 없어질 수 없는 피이다. 그래서 그것은 결코 부패할 수 없는 것으로 불린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구속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썩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주 예수님의 피는 죄 없는 피요, 죄가 없으므로 그 피는 썩을 수가 없다. 죄는 부패를 초래하지만 죄가 없는 곳에는 부패가 있을 수 없다. 본서의 다른 부분에서도 나는 예수님의 몸에 흘렀던 피가 왜 죄 없는가를 지적할 것이다. 예수님의 몸속을 흘렀던 핏방울은 지금까지 살아 있으며 마치 그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상처받은 이마와 손과 발과 옆구리에서 흘러 나왔던 그 피처럼 여전히 신선하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찢어지지 않은 피부를 타고 흘러내렸던 피, 채찍질하는 자가 그분을 채찍질했을 때 무거운 가죽 끈이 그분의 몸을 찢어 놓았을 때 그분의 등으로 흘러내렸던 피, 가시관 밑에서 스며 나와 그분의 손, 머리, 발로 흘러내렸던 피는 썩지 않는 피였으므로 결코 파괴되지 않았다. 다윗이 시편 16장에서 주님을 가리켜 말했던 것을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에서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남겨 두지 아니하시고 주의 거룩한 자가 썩음을 보지 아나히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니이다”(행2:27).   비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죽음 속에서 세 밤과 세 낮 동안 무덤 속에 있었으나 썩지 않는 피를 지녔기 때문에 그 몸은 부패되지 않았다. 나사로의 누이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은 악취가 난다고 말하였지만 그분의 육신에는 부패의 유일한 원인인 ‘죄성을 띤 피’가 없었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썩음을 보지 않았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 피의 한 방울까지도 지금까지 생생히 살아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위대하신 대제사장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을 때 그분께서는 옛날의 대제사장처럼 하늘에 있는 긍휼의 자리 위에 피를 뿌리기 위해 지성소 안으로 즉 하나님의 존전으로 가셨다. 구약 시대의 성막에 있던 눈에 보이는 긍휼의 자리와 언약궤는 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러므로 하늘들에 있는 것들의 모형들은 이런 것들로 깨끗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의 것들 그 자체는 이런 것들보다 더 나은 희생물로 하여야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손으로 만든 거룩한 처소들 곧 참된 것의 모형들 안으로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하늘 그 자체 안으로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느니라. 또 그분께서는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들의 피를 가지고 거룩한 곳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신을 드려야 할 필요가 없으시니 그랬더라면 그분께서 반드시 창세 이래로 자주 고난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라. 그러나 이제 세상 끝에 그분께서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느니라”(히9:23-26).   속죄를 이루신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무덤에서 일어나사 영원하신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서 계시는 지성소에 피를 드리기 위해 하늘로 올라 가셨다. 그 피는 오늘도 그곳에 있어서 우리를 위해 호소하며 우리를 위해 승리를 주고 있다. 구약 시대의 성막에 있던 제사장은 한 마디 말도 못하고 다만 피를 드렸을 뿐이며 그때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였다. 2000년 전이나 똑같이 지금도 순결하고 능력 있고 신선한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는 한 방울도 남김없이 하늘나라에 있는 금잔 속에 담겨져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있었던 성막의 제사장은 반복해서 피를 뿌려야 했다. 성막의 모든 가구들 중에 의자가 없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준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성막 내에 있었던 희생 제단, 분향 제단, 등잔대, 주님의 언약궤 등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성막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한 가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이스라엘의 성막에는 의자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희생 동물의 피를 뿌렸던 이 땅에 속한 제사장의 일이 결코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는 앉을 수가 없었다. 그는 결코 일을 끝마치지 못했다. 그러나 고귀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오직 이 사람은 죄들로 인해 한 희생물을 영원히 드리신 뒤에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사 그 이후부터 자기 원수들이 자기 발받침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느니라. 그분께서는 거룩히 구별된 자들을 단 한 번의 헌물로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셨느니라”(히10:12-14).   썩지 않고 영원하며 신성하고 죄 없으며 모든 것을 이긴 고귀한 피는 이미 흘러내렸다. 그 피는 그 당시에도 유용했으며 지금도 유용하며 세세 무궁토록 그 능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이런 모든 이유 때문에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 형용사로써 그리스도의 피를 표현하고 있다. 베드로는 그 피가 고귀하다고 했으며 다윗은 썩지 않는다고 했다. 요한은 계시록에서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언의 말로 그(마귀)를 이겼다.”고 말하며 그것이 ‘모든 것을 이기는 피’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탄이 피를 증오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의 피의 권능을 없애기 위해서 어떤 일이라도 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구약 시대와 마찬가지로 피 없이는 결코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오늘날에도 율법은 그 성격을 바꾸지 않았고 피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율법은 여전히 죽음을 집행하고 있다(고후3:7).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정의는 아직도 진리이다. 율법의 행위로부터 난 사람들은 저주 아래 있다. 율법 자구는 사람을 살리지 않고 죽이기 때문이다(고후3:6).   오직 피만이(Only the Blood)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내가 너희를 넘어가리라.”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내가 너의 선행, 도덕 행위, 열렬한 종교심, 십계명 혹은 도덕의 황금률을 진정으로 지키려고 하는 점을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 여러분이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단순히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고 하셨다. 당신은 내가 피에 대해 너무 많이 말했다고 생각하는가? 즉 피의 중요성을 너무 강조하였다고 생각하는가? 들어보라,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성경은 적어도 칠백 번이나 피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계시록에서 묘사된 하늘에 있는 구속된 무리들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들이 자기의 선행이나 율법을 지키는 데 충실했음을 노래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노래함을 보게 된다.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자들 중에서 처음 나신 분이시며 땅의 왕들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씻으시고”(계1:5).
2009-05-08 13:21:37 | 관리자
2. 우리의 공급원 그리스도(Christ Our Supply) “황소와 염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육체를 거룩히 구별하고 정결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해 자신을 점 없이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죽은 행위로부터 너희 양심을 얼마나 더 많이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겠느냐?”(히9:13-14). 인류 구속의 전체 계획은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 안에 존재한다. 우리는 위에서 피가 몸 안에서 제한 없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조직임을 살펴보았다. 근육, 뼈, 신경, 지방 조직과 피부 등 대부분의 다른 조직들은 고정되어 있다. 오직 피만이 고정되어 있지 않은 조직으로서 전신을 돌며 살아 있는 모든 세포에 다다르게 된다. 사람의 몸 안에는 침이나 위액, 눈물, 담즙 등의 여러 가지 액체가 존재하지만 이것들은 조직이 아니며 분비물이고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신체로부터 생성되는 물질들일 뿐이다. 오직 피만이 몸 안의 모든 세포에 도달할 수 있는 액체 조직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지체들을 머리와 그 외 다른 지체들과 연결시켜 줄 수 있다. 신비한 구조(Mysterious Structure) 현미경의 발명과 혈액 화학의 발전으로 인해 이제 사람들은 피에 대하여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많은 부분이 신비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지금 피의 물리적 구조에 대하여 상당히 많이 이해하고 있다. 약 5리터 정도의 피를 갖고 있는 정상적인 사람의 몸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전적으로 피의 순환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육체의 생명이 피 안에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피는 혈장(Plasma)이라 하는 무색의 액체와 그 액체 안에 들어 있는 다양한 세포 성분들과 수없이 많은 화학 물질들로 구성되어 있다. 피의 고형 성분은 주로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등 세 종류의 세포들로 이루어진다. 1 세제곱 밀리미터 당 약 500만 개 정도의 밀도를 갖고 있는 적혈구들은 복합 산소의 형태로 조직들에게 연료를 공급해 주며 피를 빨갛게 만드는 세포들이다. 백혈구라 불리는 세포들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것들은 주로 세균 감염을 물리치기 위한 몸의 방어와 관계가 있다. 혈소판은 매우 얇고 투명한 세포로서 부족하게 되면 출혈이 생기게 된다. 이 외에 피 안에는 피를 응고시키는 역할을 하는 인자들과 질병을 예방해 주는 항체 등의 여러 성분이 존재한다. 적혈구(The Erythrocytes) 적혈구와 백혈구는 쉽게 연구할 수 있으므로 이것들에 대해서는 이미 알려진 바가 많다. 적혈구는 헤모글로빈이라 불리는 신비한 물질을 포함하고 있는 미세한 원반형의 세포인데 헤모글로빈은 철분 복합체로서 신체의 연료가 되는 산소에 대한 친화력을 지니고 있다. 폐를 통해 이 적혈구들은 우리가 들여 마시는 공기 중의 산소와 접촉하게 되고 산화 헤모글로빈을 형성하기 위해 산소와 느슨하게 결합한다. 이런 형태로 적혈구들은 세포들 사이를 움직여 가면서 그 속에 담긴 아주 작은 운반물을 각 세포에게 내주게 되어  연소와 열을 위한 필수적인 산소가 몸속의 각 세포에 공급된다. 그러면서 피는 우리가 ‘세포 쓰레기’라고 부를 수 있는 조직의 노폐 물질, 이산화탄소 그리고 조직의 신진 대사에서 나온 찌꺼기를 취해서 이것들을 콩팥, 피부, 내장, 폐등을 통해 내버리면서 동시에 귀중한 산소를 채우고는 다시 같은 과정을 되풀이한다.  이렇게 피가 한 번 순환되는 데는 약 23초가 소요된다. 이처럼 피에 의해서 자양분이 조직에 공급되고 동일한 운반체 안에서 ‘쓰레기’가 수거되는데 위대하신 창조주께서는 그런 과정 속에 절대로 오염이 생기지 않도록 완벽하게 우리를 창조하셨다. 오늘날 도시의 청과상들이 매일 우리에게 줄 음식을 포장도 하지 않은 채로 날라 오고는 바로 그 트럭에 쓰레기들을 운반해 간다고 한번 상상해 보라! 피의 이 같은 성질은 우리의 청소 담당 보건소 직원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공급원 그리스도(Christ Our Supply) 우리의 몸에 피가 필수적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필수적이다. 그 피 역시 액체이기 때문에 비록 그 몸의 지체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그 몸의 모든 지체에게 도달할 수 있다. 피가 양분과 생명의 유지를 위해 영양 요소들을 공급해 주며 노폐물들과 세포의 신진대사에 의한 독소들을 날라 가는 것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유일하신 생명의 근원이시요, 생명을 지지해 주며 유지시키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매일같이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씻기시므로 우리의 생명은 참으로 영구히 지속될 수 있다. 당신은 깨끗케 하시는 능력을 위해 예수님께로 가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그 양의 피로 씻겨졌는가? 당신의 옷은 흠이 없는가? 그리고 그것은 눈처럼 흰가? 당신은 그 양의 피로 씻겨졌는가?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화학의 놀라움이 있다! 계시록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그 어린양(예수님)의 피로 자신들의 옷을 깨끗케 했음을 읽게 된다. 피로 씻어 희게 된다는 사실을 한 번 생각해 보라. 당신의 옷을 사람의 피로 씻게 될 때 그것이 어떤 색으로 변하게 될는지 한 번 생각해 보라. 사람의 붉은 피로 옷을 하얗게 빠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에 관한 화학 실험실에는 모든 더러움과 얼룩들을 완전히 빨아 없앨 수 있는 방법이 마련되어 있다. 그 방법은 몰랍게도 바로 그 어린양의 피로 죄를 씻는 것이다. 오직 그분의 죄 없으시고 초자연적인 그 피만이 그런 것을 할 수 있다. 백혈구(The Leucocytes)   우리는 위에서 적혈구 외에 백혈구라고 불리는 세포들이 혈장 안에 있음을 언급했다. 이것들이 ‘백혈구’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것들이 적혈구와는 달리 외형적으로 볼 때 아주 엷은 색 혹은 흰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백혈구들은 적혈구보다 조금 크지만 개수로는 적혈구보다 훨씬 적다. 적혈구들이 대개 1 세제곱 밀리미터당 400-500만개 정도 있는데 비해 백혈구들은 고작해야 4,000개에서 7,000개 정도 들어 있다. 그러나 백혈구의 수는 위급한 경우에 매우 신속하게 증가될 수 있다. 평상시 1세제곱 밀리미터당 7,000개라는 숫자는 혈액 속의 정규적인 ‘상비군’에 해당된다. 그러나 적군인 ‘세균 군대’의 공격을 받아 몸의 어느 곳에 감염이 생기면 이 소식은 즉각적으로 백혈구를 생산하는 ‘군인 부대’로 들어가며 그 부대는 신속하게 많은 수의 백혈구들을 만들어 감염이 생긴 곳으로 급파한다. 우리는 이 같은 현상을 위급한 때에 동원되는 ‘하얀 군대의 모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백혈구들이 몸을 지키는 ‘군인들’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백혈구의 숫자는 두 배 혹은 세 배로 증가한다. 그것들은 병원체를 죽이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을 잡아 먹는다. 그래서 당신의 손가락 끝이 벌레에 쏘이거나 가시에 찔려 거기에 감염이 생길 때에 당신은 곧 그 상처 부위가 부어오르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조그만 ‘군인들’인 백혈구 세포들을 급히 실어 나르기 위해 피가 급파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백혈구들은 그 감염 장소를 완전히 감싸며 감염을 일으키는 박테리아를 포위하게 된다. 이 전쟁에서 수많은 ‘군인들’이 죽게 되고 한 군데로 모이게 되는데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우리가 보통 ‘고름’이라고 부르는 것을 형성한다. 자, 이제 전쟁은 역전되기 시작하며 처음에는 붉은 색을 띠고 매우 아프며 부어올랐던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며 전쟁은 막바지에 다다르게 된다. 그 상처는 성공적으로 포위되고 마침내 그 중심 부위가 터지면서 고름이 나오게 된다. 고름은 혈청과 몸을 위한 전쟁에서 죽은 수많은 ‘백혈구 군인들의 시체’와 백혈구들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분해된 병원균들로 이루어져 있다. 고름의 형태로 ‘죽은’ 것들이 배출되고 모든 것이 아물어 결국 상처 딱지만 남게 될 때까지 피와 다른 백혈구들이 모여들어 ‘전쟁터’를 깨끗이 치우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게 된다. 전쟁 기간에 백혈구 ‘군인들’의 숫자는 급격히 늘어났지만 이제 전쟁이 끝나게 되었고 따라서 그들은 다시 평화 시기의 정상 숫자로 되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의사들이 당신의 몸 어느 곳엔가 감염이 생긴 것 같다고 판단할 때 백혈구의 수를 세어 보기 위해 당신의 손가락 끝에서 피를 채취하여 검사하는 이유인 것이다. 맹장염인지 아닌지 의심되는 경우에도 한 방울의 피를 채취하여 그것을 검사한다. 만일 백혈구들이 굉장히 증가되었고 이 작고 ‘흰 군인들’의 증가로 인해 ‘군대’가 모병 작업을 시작했음이 확인될 때 의사는 신체의 어느 곳에선가 감염에 의한 공격이 진행 중임을 거의 확신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서, 우리는 “내가 두렵고도 놀랍게 만들어졌도다”라고 고백한 다윗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시139:14). 피에 의해 승리함(Overcoming by the Blood) 우리 몸의 피가 각종 위험과 공격으로부터 우리 몸을 보호하는  것과 똑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도 모든 믿는 자를 위해 일한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요한계시록 12장을 인용하려 한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구원과 힘과 우리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그리스도의 권능이 임하였도다. 우리 형제들을 고소하는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그들을 고소하던 자가 쫓겨났도다.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언의 말로 그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계 12:10-11). 그들은 어린양의 피로 사탄을 이겼다. 위의 말씀은 교리적으로 볼 때 말세의 7년 환난기 중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적용되기는 하지만 영적으로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역시 적용된다. 사탄은 형제들을 참소하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 대해 많은 참소를 한다. 그러나 사탄이 우리를 참소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왔을 때 거기에는 우리의 위대하신 대제사장 곧 하나님의 어린양이 계시며 그분께서 하셔야 할 일은 단지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를 가리키는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사탄의 비방을 이겨내기에 충분하다. 때때로 사탄은 우리를 참소하며 우리의 범죄와 실패를 지적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육신의 죄와 단점을 본다. 그때 사탄은 “당신은 그리스도인인가? 구원받았는가? 아무래도 그리스도인 같지가 않은데?”라고 말한다. 그 결과 우리는 종종 쓰러지기도 하며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죄를 보게 될 때 패배 당하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의심하기도 하며 우리의 구속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우리가 어떻게 이 적을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마귀에 의한 감염에 대항할 것인가? 거기에는 오직 한 가지 해답만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어린 양의 피로 사탄을 이겼다.” 나는 내 안에 아무런 선(善이) 없음을 안다. 나는 내 안에 아무런 소망도 없으며 육신 안에 어떤 신뢰할 수 있는 것도 없음을 안다. 바로 그럴 때에 나는 피에 호소한다. 내가 갈보리를 보고, 나를 위해 돌아가시고 나를 위해 피를 흘려 주신 주님을 보면 주님의 빛이 내게 나타나게 된다. 나는 이렇게 승리할 수 있는 것이 나의 선이나 너무나 많은 범죄에 있지 않고 오직 주님의 피에 달려 있음을 깨닫는다. 그 피는 나를 위해 싸운다. 적을 도망가게 만드는 것은 다름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피 안에 있는 ‘백혈구 군대’이다. 나는 나의 죄를 인정하며 부인하지 않는다. 바로 그때에 나는 다음의 약속을 내 것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1:9). “그러나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만일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교제하고 또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1:7).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언의 말로 그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죄에 대한 면역(Immunity to Sin) 우리는 이제 피에 있는 몇 개의 다른 성분들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려 한다. 피 속에는 위에서 언급된 세포들과 응고 인자들뿐만 아니라 ‘항체’ 혹은 ‘항독소’라는 성분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과학자들은 발견하였다. 이것들은 ‘감염을 방지하는 성분들’이다. 백혈구는 염증이 생길 때 염증과 싸우지만 ‘항체’는 처음부터 감염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비록 그 작용은 충분히 이해되지 않고 있지만 만약 이같이 질병을 방지하는 요소가 없다면 인간은 곧 죽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항체들이 감염에 대한 반응으로 생성된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이다. 즉, 질병을 막는 이 항체가 피 속에 없다 하더라도 ‘일단 사람이 어떤 질병에 걸리게 되면’ 항체가 대량으로 생산되어 같은 질병에 다시 걸리지 않게 된다. 천연두, 성홍열 등으로 인해 생긴 항체들은 평생 동안 있게 된다. 그 외의 다른 항체들은 짧은 기간에만 면역을 지니고 있어서 일시적인 효과를 보이므로 그 기간이 지나면 다시 같은 질병에 걸리기도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한 번 질병에 걸린 몸은 면역을 형성하므로 다시 그 질병에 걸리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면역이 피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피(The Blood of Christ) 우리가 이런 사실을 그리스도의 피에 적용시키면 우리는 큰 교훈을 얻게 된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세상과 육신과 마귀의 공격을 받게 된다. 거듭난 후에도 우리 모두는 너무나 자주 유혹의 희생물이 된 채 굴복되기도 한다. 실수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피의 정결하게 하는 능력을 찾으며 그 후 그리스도의 피에 호소하고 한 때 그를 넘어지게 한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자신을 방어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같은 죄로 넘어지지 않게 되는데 그 이유는 경험으로 인하여 그 범죄에 대한 면역이 생겼기 때문이다. 성도와 죄인의 차이점은 성도는 자기 죄를 ‘미워하고’ 그리스도의 피에 호소하지만 죄인은 자기 죄를 사랑하고 죄 속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성도는 마치 양과 같다. 양은 진흙 구덩이 속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곳에서는 평안하지 못하기 때문에 목자가 건져 올려 줄 때까지 울고 있다. 그 후 양은 많은 징계를 통해 진흙 구덩이를 피하게 된다. 반면에 죄인은 돼지와 같다. 돼지는 더러운 곳을 찾아서 돌아다니다가 찾으면 기쁨의 환호를 지르며 어느새 빠져 들어가 당신이 거기에서 그를 끌어내려고 하면 맹렬한 반대를 하면서 항의한다. 설사 끌어낸다 해도 돼지는 다시 더러운 곳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성도도 죄 가운데 떨어지지만 그는 결코 거기에 그냥 남아 있지 않으며 죄 안에 거하게 될 때 늘 불안해한다. 오, 그리스도인이여, 실수했더라도 절망하지 말라. 당신을 위해 죽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우리의 고귀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이 실패할 것도 알고 계셨다. 그분께서는 주님의 은혜와는 원수가 되는 이 옛 세상에서 성도들이 깨끗한 채로 남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고 계셨다. 주님께서는 인생길의 구덩이들과 육체의 속임수를 아셨다. 그러므로 당신을 위해 돌아 가셨을 때 그분께서는 당신을 깨끗케 하기 위하여 자신의 피를 흘리셨다. “만일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우리가 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며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 1:8-9). 나의 친구여, 당신의 죄를 부인하는 것은 결코 당신에게 아무런 이득을 주지 못한다. 만약 당신이 죄를 부인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이 당신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당신의 유일한 희망은 당신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데 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보혈 속에 있는 ‘백혈구 군대’를 보내실 것이다.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 죄로부터 당신을 보호하시도록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 보혈 속에는 싸워서 정결케 하는 ‘백혈구’ 외에도 후에 죄를 짓지 못하게 하는 ‘항체’가 포함되어 있다. 오늘 당신이 어떻게 실패했는가를 생각해 보며 절망하지 말고, 당신을 구원하고 정결케 하며 돌보시기 위해서 자신의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주님께로 피신하라.
2009-05-08 13:20:32 | 관리자
제 1 장 피의 화학적 성질 (The Chemistry of the Blood) 1. 그리스도의 피(The Blood of Christ) “또한 너희는 너희의 모든 거처에서 날짐승의 피나 짐승의 피나 무슨 피든지 먹지 말지니라. 어떤 혼이든지 무슨 피라도 먹으면 그 혼은  자기 백성에게서 끊어지리라 하시니라”(레7:26-27). 성경은 피에 관한 책이며 피로 젖어 있는 책이다. 우리가 피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비난을 받게 될 때 우리는 그러한 비난 자체가 틀린 것이 아님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단 한 가지 사실만이 우리의 가르침에 생명을 주며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을 부여하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야말로 복음의 생명이며 능력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은 ‘살아 있는 책’ 즉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살아 있는 책이라고 스스로 선포하고 있다. 성경은 또한 마음을 다하여 그것이 가르치는 바를 믿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준다. 히브리서 4장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히4:12). 이 성경 구절에서‘살아 있고’(quick)로 번역된 단어는 ‘살아 있는’(living) 혹은 ‘생생하여 활동하는’(alive)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살아 있는 말씀으로서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모든 다른 책들과 전적으로 구별되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그 책이 구절마다, 각 장마다 순환되고 있는 피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의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생명 그 자체를 부여해 주는 피가 흐름을 본다. 만일 피가 없다면 성경도 다른 책과 전혀 다를 바가 없으며 아무런 가치도 갖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책이 생명은 피 안에 있다는 사실을 평범하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우리는 성경 안에서 발견되는 한 가지 기본 원리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기본 원리는 레위기 17장에 주어졌으며 다음과 같다.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니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 뿌려 너희 혼을 속죄하게 하였나니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하느니라.”(레17:11) 이처럼 영감을 받은 원리는 14절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이는 피가 모든 육체의 생명이기 때문에 육체의 피는 그 생명을 위해 있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어떤 종류의 육체의 피도 먹지 말라.”(레 17:14) 과학자들이 지금까지 결코 정의를 내리거나 파헤쳐 볼 수 없었던 그 신비한 것, 즉 생명(life)이란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바로 육체의 피 속에 있다. 그러므로 피 없는 생명이란 있을 수가 없다. 비록 이것이 모든 생명체에 해당되는 진리이긴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주로 사람의 피와 특히 사람이셨던 그리스도 예수님(The Man Christ Jesus)의 피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려 한다. 왜냐하면 그분의 피 속에는 우리가 흔히 육신적인 의미로 생각할 때의 생명뿐만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피의 생리학(The Physiology of Blood) 인간의 몸속에는 여러 가지 조직이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근육, 신경, 지방, 내분비선, 뼈 결합 조직 등으로 정의한다. 그런데 이같은 조직들은 다음과 같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즉 그것들은 고정되어 있는 세포들로서 매우 미세하며 어떤 특정하고도 제한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같이 고정된 조직들과는 달리 피는 유동성이 있어 몸 안을 돌아다니는 조직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몸의 한 부분에만 제한되어 있지 않고 자유롭게 몸 전체를 돌아다니며 고정된 세포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해 주며고 세포의 활동으로부터 나오는 ‘재와 쓰레기들’을 갖고 간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신진 대사(Metabolism)라고 부른다. 정상적인 사람의 몸에는 약 5리터 가량의 피가 있고 이 피는 심장에서 뿜어져 나와 23초마다 전신을 돌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신체의 모든 세포들은 끊임없이 영양분을 공급받고 노폐물을 제거 받으며 그와 동시에 신체 안의 다른 세포들과 꾸준하게 연락을 취하게 된다. 피는 모든 조직 가운데 가장 신비한 것으로서, 수많은 원소들과 복합체들과 아직까지도 기능이 밝혀지지 않은 특별한 화학 물질들로 구성되어 있다. 어찌됐든 이 모든 것들은 생명이라는 신비와 연관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피가 신체의 다른 부위에 있는 세포들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면 어떤 생명체든지 곧장 죽게 된다. 즉 피의 순환이 완전히 멈추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죽지 않는데 그 이유는 생명이 바로 피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피(The Blood of Christ)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육적인 몸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훨씬 더 크고 깊은 영적인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분의 몸으로 불리며 우리는 그분의 몸의 지체들이며 우리끼리도 서로서로 지체들이다. 이 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머리가 되시며 모든 믿는 사람들은 지체들이 된다. 이 지체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진다. 각 지체의 생명은 그분의 피로 인함이며 생명뿐 아니라 영양분과 정화와 성장을 위해 오로지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생명이 피 안에 있기 때문이다. 거듭난 모든 신자들은 그 몸의 지체이며 다른 지체들과 함께 공동의 삶을 살아간다. 다시 말해서 이들을 연합시켜 주며 ‘형제와 친척’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피다. 이 지체들은 몸 안에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또한 그들은 전혀 다른 색을 띄고 있을 수도 있으며 기능이나 구조면에서 서로 다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는 한 몸의 지체들이며 한 가지 조직에 의해 연합되는데 그 조직은 바로 모든 부위에 있는 각 지체들에게 다다르는 피다. 이것은 심지어 그리스도의 몸인 참된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지체들은 피부색이 서로 다를 수도 있으며 따라서 백인이거나 흑인이거나 혹은 황색 인종일 수도 있다. 에스키모인으로부터 남아프리카의 보어인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사는 곳은 서로 많이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그들은 거듭난 은사주의자일 수도 있고 근본주의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몸의 머리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끝내 놓으신 일’(The finished work)을 신뢰하는 모든 거듭난 성도들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왕이든 농부든 또는 교파가 무엇이든 전혀 다를 바가 없으며 모두 피에 의한 형제들이며 한 가족이며 같은 몸의 일원이다. 이 모든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하나가 되었다. 피에 의해 모두 하나 됨(All One by the Blood) 하나님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어떤 구분이나 집단 등에 대해 전혀 상관하지 않으신다. 또한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기 위해 사소한 것을 따지기 좋아하는 종교적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형식이라든가 조직들에 전혀 관심을 두시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임을 우리 스스로 깨닫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여러 교파를 세우고 사람들을 어떤 믿음으로부터 다른 믿음으로 바꾸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가 반드시 거듭나야만 한다”라는 사실과 “그리스도의 귀중한 피로 씻겨지지 않는 한 어떤 교회에 출석하든지 간에 멸망 받고 만다.”는 사실을 전파하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사람들을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교회의 교인 수를 늘리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사람들은 그분 안에서 우리 모두를 하나로 만드는 그 피의 ‘하나 되게 하며 정결케 하는 능력’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사실 그들은 어떤 형식이나 의식 혹은 예배의 형태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주 예수님을 높이며 우리가 서로 사랑하려는 공통적인 관심사를 통해서 우리가 한 몸이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많은 이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교리들과 교파주의적 견해를 변호하며 자기 교회의 교인 수를 늘리기에 너무 바빠서 실제로 한 영혼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못하고 있다. 모두가 피로 인해 관계를 맺음(All Related by Blood) 모든 사람들은 죄성으로 가득 차 있고 오염되어 있으며 범죄와 죄들로 인해 죽은 아담의 피에 의해 상호 연결되어 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또 그분(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모든 민족들을 한 피로 만드사 온 지면에 거하게 하시고 미리 작정하신 때와 그들을 위한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으니”(행17:26).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서 ‘공통된’ 기원을 갖는다. 사람들은 백인이든 흑인이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이교도든 문명인이든 상관없이 모두 아담의 피에 의한 친척들이다. 그들의 피는 지금까지도 아담의 죄로 인한 사형 선고를 전하고 있으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모든 사람이 (심지어 아기들까지도) 단 하나의 예외 없이 공통적인 죽음을 당하게 된다. 생명이 피 안에 있음을 기억하라. 만일 사람이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피 안에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사람이 그것을 먹음으로 인해 ‘피의 중독 현상’이 생겼고 결과적으로 죽음이 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창2:17). 그때 생긴 독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그 일 이후 약 6,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자연적 출산에 의해 아담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여전히 어떤 방식으로인가 핏속에 담겨져 내려오는 이 죄의 독에 의해 굴복 당하고 결국 죽고 있다. 아담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면 그 진리가 더욱 더 명확해 질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부터 사람을 형성하셨다고 배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담은 생명이 없는 진흙 덩어리에 불과했다. 원료로 볼 때에 그는 단지 흙에 지나지 않았으며 사람의 모습으로 빚어졌을 뿐 아직까지 그 안에 생명은 없었다. 다시 말해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허수아비 인형에 불과했다. 그 뒤 성경의 기록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창2:7). 하나님의 숨은 그를 살아서 움직이게 만든 그 무엇인가를 그 안에 넣어 주었다. 그때 그에게 들어갔던 것이 바로 피였다. 그러했음이 분명하다. 그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위에서 살펴본 대로 육체의 생명은 피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명이 하나님의 숨에 의해 아담에게 주어졌을 때 그분께서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 진흙 덩어리에게 피를 더해 주셨으며 그래서 사람은 ‘살아 있는 혼’(a living soul)이 되었다(*역자주 - 개역성경은 이것을 ‘산 영’(a living spirit)이라고 크게 오역했다. 그러나 전 세계모든 성경은 이것을 ‘살아 있는 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담의 몸은 흙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그의 피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또 다른 선물이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바로 생명(Life)이시며 모든 생명의 창시자이시기 때문이다. 죄와 죽음(Sin and Death) 처음에 창조된 뒤 사람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는 죄를 범하게 되었고 결국 죽게 되었다. 먼저 영적으로 죽었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육체적으로 죽게 되었다. 생명이 피 안에 있기 때문에 사람이 죽었을 때 어떤 일이 그 피 안에 일어났다. 죄는 간접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인간의 피에 영향을 미쳤지 몸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피에 의해서 영양분 등이 몸에 공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체가 단순히 ‘죄성을 띤 육체’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것은 사람의 몸이 죄성을 띤 피에 의하여 영양을 공급받고 채워지며 유지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한 피로 모든 민족을 만드셨기 때문에 죄는 아담의 자손 모두에게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성경 기록대로 한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모든 사람이 죄를 짓게 되었다. 처녀 탄생(The Virgin Birth) 죄가 사람의 피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의 자손이면서도 죄가 없는 사람이셔야만 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본질적으로 죄성을 갖고 있지 않은 아담의 육체는 취하실 수 있었지만 완전히 죄성을 띤 아담의 피는 취하실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구속을 위해 남자로부터가 아니라 여자로부터 나신 예수님께서 완전한 인간이 되실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다. 그분께서는 혈관 안에 단 한 방울의 아담의 피도 갖고 계시지 않았으므로 아담의 죄를 나누어 갖지 않으셨다. 우리는 이 책의 뒤에서 처녀 탄생 문제를 다룰 것이며 여기에서는 인간의 피가 죄로 가득 차 있으며 따라서 인류 구속에 대한 전체적 계획이 이 피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처녀 탄생의 문제를 잠깐 언급하고 있다.
2009-05-08 13:19:40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