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검색
  • 전체게시글 검색

검색결과

  • 사이트검색
검색결과 약12155개
조나단 에드워즈의 옹호론자는 아니지만 그의 관한 일화를 보면 그는 성경책을 볼 때 페이지 마다 종이를 끼워 다시 묶은 다음 종이 중간에 선을 그어 그 안에 성경을 읽고 자신이 묵상하고 연구한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는 작업을 여러 번 했다고 합니다. 저도 언젠가 이런 방법으로 성경책을 만들어 활용해야 겠다고 생각만 하고 실천하지 못한 적이 있답니다. 사람들은 가끔 성경을 함부로 다루어선 안된다며 실수로 밝기라도 하거나 함부로 그 안에 낙서를 하거나 아무데나 놔두기라도 하면 큰 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고이 모셔두기는 하면서도 정작 그 말씀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상고하기 위해 늘 가까이 대하는 일에는 열심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가죽 케이스에 금테두리로 된 값 비싼 성경이라도 그 안에 기록된 말씀을 날마다 먹고 소화하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소용없지 않을까요? 그래서 말이지만 집에서 잠자고 있는 성경책이 한두 권 있다면 에드워즈가 한 방법대로 자신만의 묵상성경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2009-08-12 16:14:53 | 김경민
율법주의를 부수는 것은 결코 무법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 교회에 대한 확신과 신약시대에 성행하는 율법주의로 인한 페단 등을 몸으로 체험하면서 우리의 과거와 율법주의를 부수자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고 글도 쓰고 책들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저 사람이 혹시 완전히 무정부주의자 혹은 세상이 말하는 자유주의자가 된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스러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작용과 반작용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자유는 결코 무정부 상태나 무법주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른 것을 가르쳐 주면 꼭 반작용으로 무정부 상태나 무법주의가 생겨납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신정 정치 하에서의 십일조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가르치면 꼭 헌금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 따서 말을 전하거나 퍼뜨립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목사들이 성도들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으므로 우리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개의치 않고 노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증거 구절로 내민 것은 이사야서 54장 9-10절이었습니다. 9 이것이 내게는 노아의 물들과 같으니라. 내가 다시는 노아의 물들이 땅을 덮지 못하게 할 것을 맹세한 것 같이 네게 노하지 아니하며 너를 꾸짖지도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나니 10 산들이 떠나가고 작은 산들이 움직일지라도 내 친절이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내 화평의 언약도 움직이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주}가 말하노라. 구원받으면 우리가 죄를 져도 하나님이 근심하지도 않고 노하지도 않는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이것은 극도의 방종으로 사람을 몰아넣는 마귀의 교묘한 가르침입니다.   자, 지금 하나님이 누구에게 이 말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너는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앞뒤 문맥을 보면 신약시대가 지나 주의 날이 이르러(즉 재림이 이르러) 이스라엘이 완전히 회복된 시점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이스라엘이 천년왕국 속으로 들어가는 내용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비록 과거의 오래 기간에 이스라엘이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했지만 이제 온 민족이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인 뒤에는 더 이상 그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구절을 인용해서 구원받은 사람은(교회는) 죄를 지어도 더 이상 하나님이 근심하거나 노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지 모릅니다. 신약과 구약을 바로 나누어야 한다고 열렬히 외치는 자들이 이렇게 성경을 오용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봉인되었느니라(엡4:30).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이런 말씀을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어도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영이 슬퍼하고 근심합니다. 이것은 부모의 심정과도 같은 것입니다.   왜 성도들이 이런 것을 가르치는 협잡꾼들에게 넘어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율법주의를 배격합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것들은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1. 구체적인 하나님의 명령들에 순종하는 것(요일2:3-4). 십계명의 대부분(안식일 제외)2. 주님을 섬기기 위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살전4:3, 7), 술, 담배 안하고 청결하게 사는 것 등3.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분리하고 세상의 풍조에 따르지 않는 것(롬12:2), 록 음악, 옷, 세상 문화4. 지역 교회에서 성령님의 인도 하에 지도자들이 정한 규례를 따르는 것(행15:29), 방언 안하고 교회에 깨끗하게 옷입고 가는 것 등 5. 형제를 위해 내 권리를 포기하는 것(롬14:21)6. 인륜을 지키는 것   구원받았으니 규칙도 없고, 헌금도 없고, 인륜도 없고, 교회 모임도 없고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속히 그들에게서 멀리 떠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방종에 이르도록 우리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물을 흐려놓으니 예수님 안에서의 참 자유를 이야기해도 다 이상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곧 교회니 "교회에 가자"는 말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교회에 가자"고 할 때의 교회는 교회 모임을 말하지 "예수님의 몸"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 같은 말의 유희를 가지고 사람을 속이려 드는 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신약 성경의 자유는 결코 무법주의가 아닙니다. 자유하기 때문에 오히려 금하고 가릴 것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바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성장합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릅시다. 이런 협잡꾼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합시다. 
2009-08-12 12:08:06 | 관리자
예수님이 곧 오실 징조들   지금으로부터 꼭 1천년전인 1009년, 이집트를 중심으로 하는 당시의 이슬람권을 지배하고 있던 파티마 왕조의 괴짜 왕(칼리프) 알 하킴은 느닷없이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에 있는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er)와 그 부속 건물들의 파괴를 명한다. 성묘교회는 그로부터 30년 후 복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훗날 약 2백년간 지속된 십자군 원정의 빌미가 된다.   지난 6월 12일 이란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가히 부정선거의 백미였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이 선거 아닌 선거의 후폭풍으로 테헤란을 비롯한 이란의 곳곳에서는 수백만의 인파가 거리로 몰려나가 연일 시위를 벌였고, 극심한 유혈사태로까지 치달았다. 1979년, 친미 절대군주였던 팔레비를 쫓아내고 백발의 종교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를 최고지도자로 옹립했던 이슬람 혁명 이래 최대의 민중봉기였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지난 30년간 지구 위에 가져온 변화는 돌이켜보면 정말 커다란 것이었다. 무슬림들은 모하메드 사망 직후부터 거의 천년 동안이나 유럽을 압도하는 세계적인 패권과 찬란한 문화를 누렸던 과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서는 서구의 식민통치 아래서 기를 펴지 못한 채 지내왔다. 그 결과로 오늘날 많은 비이슬람권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슬람의 이미지는 ‘미개한 아랍 유목민들의 종교’ 정도로 격하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그런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미국을 몰아내고 수백년 만에 외세의 도움이 없이 순수한 이슬람만의 이름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한 이란의 이슬람 혁명은 어떤 영향을 미쳤겠는가? 아마도 전 세계 10억 무슬림들에게 신선한 충격 그 자체이자, 집단 카타르시스 이상의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이란에서 일어났던 그 해 말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소련군 역시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자헤딘이라는 이슬람 전사들에게 끊임없이 시달리다가 결국은 10년 만에 피눈물을 머금고 철수를 하였고, 이는 간접적으로 구소련의 붕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후 아프가니스탄에도 이란의 신정체제 못지않은 이슬람 근본주의 정부인 탈레반 정권이 들어섰음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바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한 줌도 안 되는 이슬람 전사 무자헤딘에 의해 막강한 무력을 자랑하던 소련군이 쫓겨나고 급기야는 무신론을 신봉하던 소련제국이 통째로 무너지는 계기가 된 이 사건은 앞서 이란의 이슬람 혁명보다 더 큰 반향을 전 세계 무슬림들의 영혼 속에 불러왔다. 우리가 잘 아는 알 카에다나 오사마 빈라덴은 바로 이 사건이 빚어낸 부산물들이다. 결국 이 두 사건을 축으로 하여 지난 30년간 세계는 미·소간의 냉전체제에서 기독교 혹은 서구문명과 이슬람 문명 간의 충돌로 패러다임이 바뀌어버렸다. 지난 수백년간 깊은 잠을 자고 있던 이슬람이 드디어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이에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는 오일로 벌어들이는 막대한 돈을 전 세계적으로 뿌리며 수없이 많은 마드라사 신학교를 세계 방방곡곡의 가난한 무슬림 지역에 지어주고 있다. 이 마드라사 신학교에서는 일반 교양과정은 거의 가르치지 않고, 대신 가장 보수적인 이슬람 교리 가운데 하나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즘을 어릴 적부터 집중적으로 주입시킨다. 이러한 추세는 그 추구하는 이상으로 볼 때 와하비즘의 행동부대라고 할 수 있는 알 카에다와 오사마 빈라덴의 등장으로 지난 20년간 더욱 가속화되어왔다.   그 덕에 오늘날 이슬람은 외형적으로 가장 빨리 성장하는 종교일 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가장 강력하게 결속되고 있는 집단이 되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그 성숙도마저 무르익어 이슬람 혁명 후에 태어난 30세 이하 인구가 70퍼센트에 달한다는 이란에서는 그 이슬람 신정체제를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보다 많은 자유를 갈망하는 욕구가 하루에 2백만이나 되는 인파를 테헤란 거리로 내보내게까지 된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성급한 서방 언론에서는 풀뿌리 차원의 민주화 운동이 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보다 더 현실적인 시각은 아마도 이슬람 혁명 30년 만에 보수와 개혁으로 분리된 두 대표 세력 간의 내부투쟁이 본격화된 것으로 보는 ‘이란 이슬람 혁명의 제2 단계론’일 것이다.   어떤 시각이 더 정확한 것인지는 몰라도 이 사건으로 분명해진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그동안 보수·강경화 일변도로만 치닫던 이슬람 문명의 확장 가도에 앞으로 큰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음을 이번에 이란의 젊은 무슬림들이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와하비즘과 알 카에다로 상징되는 폭력적, 퇴행성 이슬람주의에 맞서 이슬람 안에서도 폭넓은 자유와 공의를 추구하고자 하는 진취적인 기운이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싹트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서구인들이 이슬람에 대해 거의 무지한 것에 비하면 오늘날 중동의 많은 젊은이들은 할리우드에 푹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서구지향적인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중동판 베이비부머라고 할 수 있는 30세 혹은 25세 이하의 젊은 층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상 때문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강퍅해진 사람들의 마음 밭을 갈아 옥토로 만들기 위한 준비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순수한 이슬람 신앙심마저 퇴색해가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슬람 문명과 기독교 문명 간의 충돌이 오늘날의 역사현실을 대변해 주는 화두라면 이슬람을 아는 일이야말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당면한 숙제 중의 숙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막상 이슬람에 대해 너무도 아는 바가 없다. 이슬람과 기독교 간에 다른 점들을 열거하기에 앞서 공통된 부분들을 먼저 열거해보면 이슬람은 놀라울 정도로 우리와 가까운 영적 집단이다. 이 때문에 초기에는 이슬람을 기독교의 이단 교파 정도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우선 그들은 아브라함(이브라힘―이하 괄호 안은 기독교 용어의 코란식 표기)을 믿음의 조상으로 알고 있으며, 아담(아담), 이브(하와), 노아(누후), 욥(아윱), 야곱(야쿱), 모세(무사), 아론(하룬), 다윗(다웃), 솔로몬(술레이만), 요나(유누스), 엘리야(일리야스), 엘리사(알야사), 스가랴(자카라), 에스겔(둘키플), 세례요한(야히야), 예수(이사) 등 모든 신·구약 인물들을 인정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로 기록된 5가지 거룩한 책을 인정하는데 유실된 아브라함서, 구약(토우라), 시편(자불), 신약(인질), 그리고 천사 가브리엘(지브릴)을 통해 하나님이 모하메드에게 암송하도록 명한 코란이 그것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유대교, 기독교와 더불어 유일신을 믿는 종교인 이슬람에서 말하는 알라는 하나님, 즉 God이라는 뜻의 아랍어로 히브리어의 엘, 엘로힘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그가 메시야(마식)이자 하나님의 말씀이셨음, 동정녀 탄생, 복음서의 기적들, 승천하셨음과 지금은 하나님 곁에 계심을 믿는다.   그러나 물론 이슬람에는 기독교와 크게 다른 점들이 있다. 철저한 유일신 신앙인 이슬람이 기독교에 대해 가장 크게 반발하는 부분은 삼위일체론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신격화하게 되면 유일신 신앙을 저버리는 결과가 된다는 논리에서이다. 이를 두고 어떤 기독교 학자들은 모하메드가 살아있을 당시 존재했던 ‘성부, 성모, 성자의 삼위일체론’에서 유래된 이단의 오류가 코란에 반영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즉 예수님을 하나님과 마리아가 육체적인 관계를 맺어 태어난 아들로 보는 관점이 삼위일체론으로 오해된 채 이슬람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독교 학자들의 주장이지 이슬람권에서도 인정받는 이론은 아니다. 그러나 코란에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이시자, 하나님의 영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라고는 한다.   또 한 가지 크게 다른 점은 코란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그런 것처럼 보인 것일 뿐이며, 실제로는 결코 사람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시지 않았다고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그 후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셨고 하나님 가까이에 계시다가 다시 이 세상에 오신다고 되어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이슬람이 인간의 원죄와 죄사함의 필요성을 교리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음과 일맥상통한다. 이슬람에서는 아담과 이브가 하늘나라의 낙원에서 사탄(이블리스)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짓고 난 후 하나님께 자복하고 용서를 받은 다음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이 땅 위에 보내심을 받아 내려왔다고 믿는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에 절대 복종함으로써 평화를 누리고, 사탄을 따라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 날 인류 전체에 대한 심판이 있을 때에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이슬람의 구원론이다.   여기에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함께 믿고 기다리는바 궁극적인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슬람에서도 마지막 날 심판이 있을 것이며, 그 때에 예수님이 심판주로 재림하실 것을 굳게 믿는다는 점이다.   우리 주변에는 지난 2~3년간 예수님이 곧 오실 징조들이 부쩍 많이 눈에 띄고 있다. 유대인들은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자신들이 지었던 죄를 애통해 할 것으로 성경은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이 신약성경의 완성 이후에 생겨난 종교인만큼 무슬림들이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성경에 언급이 되어있지 않다. 과연 무슬림들은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어떤 마음을 가질까? 그때 우리는 그 무슬림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무엇보다 중요하기로는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 무슬림과 우리들을 각각 어떻게 보실까? 곧 오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면서 한번쯤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들이다.    (필자는 최근 방글라데시에 다녀왔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무슬림에게 보내심을 받고 이슬람권으로 나가기 위해 애쓰고 있다.)
2009-08-12 12:01:26 | 관리자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성경 말씀을 주신 것은 검증과 분석을 위해서가 아니라, 믿고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킹제임스성경을 알고 나서 깨달은 점들과 다른 번역본과 차이점을 비교하면서 분석하는 것 역시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고, 그 분의 뜻대로 순종하기 위함이랍니다.
2009-08-08 21:48:18 | 김문수
이전에는 개인적으로 성경공부할 때, Parallel Bible을 사용했답니다. KJV, NIV, Living Bible, RSV를 한 페이지에서 대조해 볼 수 있게 한 성경이지요. 지금은 박사성경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지털바이블 "내 사랑하는 책", "베들레헴 성경" 등의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편리하게 여러 번역본들을 비교해 볼 수 있답니다.
2009-08-08 21:41:14 | 김문수
네 ... 영어를 모르는 아니 겨우 알파벳만 아는 꼼꼼한 어린아이에게 찾아보라하면 찾을 것 같지 않아요? 이 실험은 우리가 안다고 하면서 놓치는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내 자신에 대해 반성하게 만드네요. 그런데 그렇다고 모든 일에 의기소침하고 자신감없이 우유부단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 참 어려운 세상이네요.^*^
2009-08-08 17:06:36 | 정혜미
킹제임스 흠정역 한영대역 성경처럼   흠정역과 개역성경을 합본한 성경을 만들면 어떨까요?   한줄은 흠정역 다른 한줄은 개역개정   미국에는 그런 성경이 많거든요. NIV, NASB등 보통 4가지 성경을 한꺼번에 넣어서 번역을 한눈에 비교할수 있답니다..   그러면 성경을 이해하기도 쉽고 차이점도 금방 알수 있을 테니까요..   또한가지 흠정역 성경은 번역자체가 개역과는 많이 달라서 오히려 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개역과 함께 있다면 이해도 빠르고 어느게 더 정확한지 차이점도 금방 알수 있겠지요..   전향적으로 검토해 보심이 어떨까 합니다..   그럼 이만..            
2009-08-08 16:41:02 | 김은식
우연히 남편의 책상에서 이 책을 보고 읽게 되었는데, 제 자신을 돌아보며 많은 부분 자극을 받게 되었습니다. 신앙과 삶의 일치를 추구하는데 있어 조나단 에드워즈의 일생은 많은 부분 도전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무더운 여름을 이기시는데 있어서 한 번 쯤 읽어 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되어 올려봅니다.
2009-08-08 13:44:22 | 김경민
    에드워즈는 자신의 64번째 결심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시편 기자가 시편   119장 20절에서 말하는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하는 마음' 이 내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있는 힘을 다하여 이것   들을 향상시키도록 하자. 또한, 나의 소원을 아뢰기 위해 간절히 노력하는 것이 약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그러한 열심을   반복적으로 내는 것이 약해지지 않도록 하자."   말하자면, 애드워즈는 하나님에대한 지식을 계발하는 만큼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정을 개발하는 것에 힘을 기울   였습니다. 에드워즈는 진리만이 아니라 더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 자신의 있는 힘을 다했습니다. 결심문 30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난 주보다 신앙과 은혜를 실천하는 삶이 더 나아지도록 매주 노력하자."    그리고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이러한 진보는 아주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에드워즈는 성도들에게 자신이 추구했던 바   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수갈채를 받거나 다른 사람과의 논쟁 능력을 기르기 위해 지식의 성장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반대로 여러분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 그리고 실천......   여러분이 가진 지식에 맞게 실천하기 위해 추구하십시오. 시편 119장 100절에 의하면 이것이 더욱 지식을 얻는 방법입니   다.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 위의 글은 존 파이퍼의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심 & 조나단 에드워즈의 하나님의 천지창조 목적 - 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출판사 부흥과 개혁사)[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8 18:08:22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08-08 13:34:39 | 김경민
이런 의견의 주석도 있어 소개합니다. 2 Samuel 1:17-27. David's public expression of grief over the deaths of Saul and Jonathan has been preserved in a poem, "The Song of the Bow" (vv.19-27). This in turn is part of a now-lost longer composition referred to by the historian as the Book of Jasher (cf. Josh. 10:13). The same epic contained the short quatrain sung by Joshua on the occasion of the defeat of the Amorite league (Josh. 10:12-13). in David's song, which opens and clothes with the refrain, How the mighty have fallen! (2 Sam. 1:19, 27; cf. 1:25). David warned against telling of the tragedy in Philistia lest the Philistine maidens rejoice (v. 20) just as the Israelite maidens had sung of the triumphs of Saul and David years before (1 Sam. 18:7). David then cursed the mountains of Gilboa for having been the stage of Saul and Jonathan's heroic but fruitless defense against the enemy (2 Sam. 1:21-22). The undying loyalty of Jonathan comes in for special praise as David viewed father and son knit together in life... and in death (v. 23). Even though Saul had oppressed the poople at times, he had also, David said, brought them luxury and bounty (v. 24). But it was Jonathan whom David celebrated with special pathos. All the years of their unbroken friendship are captured in his stirring tribute, Thy love to me was wonderful, passing the love of women. (from An Exposition of the Scriptures by Dallas Seminary Faculty)
2009-08-06 17:49:11 | 양경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