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카톨릭 체제하에서 국가 교회가 1200년 이상 진행되고 유대인들이 거의 다 말살되자 심지어 프로테스탄트들마저도 교회가 땅을 다스리는 왕국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루터의 루터교, 칼빈의 장로교, 영국의 성공회(국교회) 등 천주교회에서 나온 이런 시스템들은 한결같이 국가 교회를 지향했습니다. 국가 교회란 사람의 자유 의지를 박탈하고 국가가 정해 준 교회만 인정하고 따라야 하는 시스템입니다. AD300년경부터 시작된 국가 교회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잃고 종교에 매여 종노릇햇습니다.
장로교의 경우 이스라엘의 신정 체제를 표방하면서 구약 이스라엘의 장로 시스템을 도입하였고 이스라엘은 완전히 소멸되었으므로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한다는 신학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칼빈주의의 골자입니다. 그런데 실로 이것은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에서 천주교의 지상 왕국 건립을 위해 마련한 규범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칼빈주의에서는 공공연히 칼빈을 이야기하다가 끝에 가서는 어거스틴을 붙잡고 맙니다. 사도 바울의 은총론이 모자라서 우리가 천주교 토대를 놓은 어거스틴의 은총론을 따라야 합니까? 그가 성경의 은총론을 알았다면 어떻게 연옥 교리를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받지만 그 이후에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이들은 주장하고 그래서 장로교는 구원받은 이후에 자기의 의를 통해 성화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시스템이 되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마틴로이드 존스 등도 동일한 교리를 고수합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믿음의 확신,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하는 사례가 너무 많습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보십시오. 청교도 신앙을 대표하는 이 책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한 채 끝까지 자기의 의를 통해 신앙을 고수할 때에 의롭게 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 바로 청교도들과 칼빈의 한계입니다.
따라서 이제 신약 교회는 이런 것을 완전히 벗어버려야 합니다.
구원도 그 이후의 성화도 완전히 그리스도의 은혜로 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이런 것을 모두 이룹니다. 다시는 구약 시스템을 적당히 신약에 가미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 교회 문제의 대부분이 여기에 있습니다.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뒤에 율법으로 거룩해지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조장하는 것이 바로 칼빈주의 신학입니다. 왜냐하면 그 신학은 국가 교회를 하기 위한 규범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우신 신약 교회는 결코 이런 데 얽매이면 안 됩니다. 헌신과 봉사와 전도와 선교가 모두 신약 성경에 기록된 대로 십자가 사건 이후에 된 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밝혀 주시기 원합니다.
사도 바울의 애타는 호소를 들어 보십시오.
너희가 그렇게 어리석으냐? 너희가 성령 안에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완전해지고자 하느냐(갈3:3)
2009-07-22 11:49:06 | 관리자
종교개혁을 한 사람들은 로마가톨릭의 박해를 받아 고난을 당한 줄로만 알았는데, 오히려 또다른 종교권력자가 되어 사람들을 박해하는 자가 되었군요. 독선적인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는 점을 잊지 말고, 항상 주님의 시야로 저와 다른 사람들을 보아야겠습니다.
2009-07-22 10:28:25 | 김문수
성경으로 세상보기 2
뉴에이지 시대에 살면서 뉴에이지가 무엇인지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의 친근한 형제인 차한 박사님께서 성경으로 세상보기 2라는 책을 통해 뉴에이지의 실상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경으로 세상보기에 이어 두 번째 나온 이 책은 자녀들을 두신 부모님들에게 더욱 유용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자녀들) 앞에 닥칠 일들을 준비하며 한 번 읽어 보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http://www.lifebook.co.kr/final/bookjumun.asp?gs_product=aa01070073428&detail=yes
성서 건강학
스트레스가 많은 현대 문명 속에서 어떻게 건강을 유지하며 살지 고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차한 박사님의 성서건강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면에서 많은 통찰력을 줍니다. 여름에 시간을 내서 읽어 보기 바랍니다.
http://www.lifebook.co.kr/final/bookjumun.asp?gs_product=aa01070073511&detail=yes
2009-07-22 10:09:15 | 관리자
한국창조과학회에 한번 문의 해보시지요.
2009-07-21 18:01:57 | 허광무
칼빈이 이렇게 끔찍한 일을... 처음 알았습니다.
2009-07-21 17:49:38 | 허광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경 읽기 방법'
“우리 근본주의자들(혹은 보수 주의자들)은 신앙과 행위의 모든 문제에서 성경을 최종권위로 받아들인다”고 많은 크리스천들은 주장합니다. 저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위의 주장을 글자 그대로 행할 것을 제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오는 그 말씀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절대로 그것들을 향상시키려 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위대한 설교자는 “성경은 다시 기록될 필요가 없고 다시 읽혀질 필요만 있다”라고 말했는데, 저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거듭난 크리스천들은 모두 ‘성경 신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큰 목소리로 확실히 믿는다고 주장하는 그 책을 우리가 읽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전쟁터에 가 있는 병사가 고향에서 온 긴 편지를 받고는 3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할까요? 과연 그가 3페이지를 넘기고, 4페이지는 빨리 읽고, 5페이지는 대충 넘기고, 6페이지는 반만 읽을까요? 그가 나머지 페이지를 이해하기 위해 첫 번째 페이지로 다시 돌아갈까요? 우습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성경 읽는 습관입니다. 사랑하는 고향과 그 편지를 쓴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의 병사는 분명히 그 편지의 모든 단어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뚫어져라 쳐다보고 다시 읽고 또 읽을 것입니다 - 그 안의 모든 단어들을.
하나님께서는 고향을 사모하는, 자신의 군사들인 우리에게 ‘고향으로부터의 편지’를 보내셨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그것을 읽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보고 시편만 읽으라고 성경책 전체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사도행전 그리고 로마서뿐 아니라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도 읽어야 합니다. 고린도전후서에 영감을 주셨던 저자께서 역대기상하에도 똑 같은 영감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계시록뿐만 아니라 말라기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의 모든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시작해서 모든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계시록 22장 21절까지 다 읽은 뒤 우리는 마치 우리의 임무가 끝난 양 성경을 옆으로 조용히 치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새로운 마음으로 창세기 1장 1절부터 다시 읽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오직 두 가지 사건만이 우리로 하여금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을 계속해서 읽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단 두 가지만 있습니다: 죽음과 휴거. 이것들 외의 다른 이유들은 정말로 나약한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만 합니다!
많은 이들이 외칩니다. “그러나 난 이해할 수가 없어요! 거기에는 깊고도 어려운 뜻을 가진 부분들이 있어요.” 어려운 구절을 발견하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답을 주시도록 약 5분 정도를 드리고는 그 다음엔 답을 찾기 위해 ‘좀 더 나은 번역’ 혹은 성경 주석서를 찾아봅니다. 그들은 마치 차를 몰기 원하는 네 살짜리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는 정말로 차를 몰기 원합니다. 운전하기 원하는 그의 동기는 순수할지 모릅니다. 그는 자신이 그 일을 잘할 수 있다고 믿고 당장에 답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차를 운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지 않으며 심지어 두발 자전거 타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상 그는 세발자전거보다 더 큰 어떤 것도 운전할 수 없습니다. 성장해서야 비로소 그는 더 크고 복잡한 것을 ‘운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도 적용되는 사실입니다. 처음으로 그것을 읽으면서도 우리은 네 번 혹은 다섯 번 혹은 여섯 번 정도 읽어야 알 수 있는 답을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물론 우리는 진지하게 그 답을 원합니다. 우리의 동기는 순수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 답을 다룰 수 있다고 믿고 당장에 그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열 번째 혹은 열한 번째 성경을 읽을 때에 우리에게 주시기로 준비해 두신 것을 처음 읽을 때에 우리에게 보여 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장해야만 하며 거기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성경 주석서들과 다른 번역서들로 가득 찬 선반은 지름길로 가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그것들은 허사가 될 것입니다. 결코 저는 성경 주석서들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그들이 성경을 중요시하지 않으며, 우리의 오직 한 분 선생님이신 성령님을 대체하려는 것을 반대할 뿐입니다. 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최종 권위인 성경을 읽는 시간을 늘리자고 주장합니다.
사무엘 깁 저, “성경의 뿌리와 역사”에서
2009-07-21 16:28:09 | 관리자
칼빈주의를 경계하며
국내에는 장로교 세력이 워낙 커서 그들이 지지하는 교리 체계 이외의 것은 쉽게 이단이 되어 버립니다.
어려서부터 그런 교회에서 자라 신학교 교육도 철저히 칼빈 중심으로 받다 보니 목사들의 가슴 속에는
늘 '칼빈은 나의 목자시요, 칼빈이 가라사대..."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역사를 역사로 보지 않는 데서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칼빈이라는 사람의 교리를 살펴보기 전에 제네바 시에서 신정국가의 수반으로 교황 노릇을 하며
많은 사람들을 죽인 칼빈의 역사를 바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과연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기와 다른 믿음을 가졌다고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요?
이런 식의 일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 신정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칼빈의 사상은 바로 구약시대 신정정치 하의 이스라엘을 다시 복원해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체제하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율법과 적당히 혼합하는 일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칼빈의 사상은 어거스틴에게서 나옵니다. 어거스틴 역시 교황 중심의 신정국가 체계를 놓으려고 한 사람입니다.
또 천주교의 연옥 교리를 만든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의 거짓 신학을 물려받아 무력으로 정통 기독교 신정정치 국가 체계를 세우려고 한 사람이 칼빈입니다.
그 체계의 기본이 바로 칼빈주의입니다.
다음은 '장로교인(칼빈주의)들의 인간사냥의 역사'(심상용 목사, 도서출판 예랑원)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누구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시스템을 만든 사람의 역사를 바로 보고
거기서 바른 교리가 나올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고 글을 올립니다.
참조하기 바랍니다. (끝으로 이것은 심상용 목사의 일방적인 글이 아니고 유럽의 역사가들의 증언입니다).
인간 지도자를 두고 그 사람을 하나님으로 대체하는 시스템에는 하나님의 참된 복이 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칼빈주의 틀에 갇힌 무고한 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볼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기 원합니다.
칼빈의 인간사냥에 대한 역사적 증언
때가 되므로 하나님께서는 신앙역사의 진실을 오늘날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백일하에 드러나게 하시고 참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셨다.
백일하에 드러나는 칼빈의 거짓 교리와 사상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은혜의 시대요 사랑의 시대라고 하는 신약시대에 와서조차 수많은 살상을 당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저들의 거짓 교리와 사상에서 빠져나와 참 하나님을 찾아서 구원을 얻어야 할 것이다.
1. 4년 동안 제네바시를 통치하며 58명의 사람을 학살시킨 칼빈
칼빈이 불과 1만3천명에 불과한 제네바시를 4년 동안 통치하며 그 자신은 물론 그가 장악한 종교국을 통해 종교개혁을 빙자하여 살인한 공식적인 숫자만 해도 58명에 이르며 추방시킨 숫자도 76명에 달한다고 한다.
칼빈과 그의 종교적 후예들인 청교도들에 의해 자행한 인간사냥은 신교 가운데서도 가장 잔혹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역사는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역사는 칼빈이 자행한 인간사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는데 “칼빈 역시 사회통제를 위해 당시 대중적이던 마녀사냥에 집착했다.”고 확인해 주고 있다.
이러한 실상들을 한 줄의 말로 축약시켜버리기에는 그 인간사냥의 규모가 적지 않으며 이에 수반된 수많은 고문과 가혹한 만행들이 종교개혁이라는 이름하에 덮어 버리는 것은 천 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이에 대한 모든 행위와 역사를 바로 규명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자행한 수많은 살상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졌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그들의 거짓교리가 성경을 말하는 정통으로 숭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칼빈 주의자들에도 권력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칼빈과 같은 살상적 행위를 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칼빈이 자신이 세운 그와 같은 교리에 의하여 잔인무도한 행위를 자행했기 때문에 그의 후예들 또한 그것이 그리스도의 신앙인 줄 알고 그 같은 일을 행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제 본격적으로 칼빈과 그의 후예들(칼빈 주의자)이 자행한 사악한 행위를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참고문헌: 조찬선 op. cit, p.94.
(문화사) 이혜령외 7인, 한국방송대학출판부 p.431.
2.재임기간 4년 동안 58명 중 35명을 불태워 죽인 칼빈
칼빈의 참혹한 통치는 그가 스위스의 제네바시에 재임했던 4년여 동안에 불과 1만3천 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소도시에서 불에 태워서 죽인 사람만도 35명이나 되었다. 이와 같은 살상을 앞세운 종교개혁이라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빙자한 살상행위들인 것이었다.
이와 같은 잔인한 피의 숙청은 칼빈의 잔인성과 폭력성이 어떠했느냐를 여실히 증명해주는 것이며, 칼빈의 성경적 교리가 예수님의 사랑이 근간이 되지 않은 사단의 멸망의 교리였다는 것을 분명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
칼빈이 재임하던 기간 동안 화형 외에도 10명을 목을 잘라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또한 재임기간 중 13명을 교수대에 목을 매달아 죽였다고 한다. 칼빈주의에서 인간의 생명이나 인권 따위는 한낱 거룩함을 가장하기 위한 위장이라는 것은 칼빈의 행위를 통해서 여실히 증명되는 것이다.
우리가 냉정한 시각을 가지고 주시해야하는 것은 이러한 만행이 하나님의 이름이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철저하고 교활하게 이용하는 칼빈의 위장된 사상과 교리의 적용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Ibid p.128
3.자신에게 반대한 반대당을 모두 처형한 칼빈
칼빈은 종교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자신의 독선적인 지배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는 반대당의 모든 사람들까지도 거침없이 제거하였다고 한다. 카스텔리오라는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제네바에서 일어난 한 조그만 사건이 끔찍한 반역행위로 부풀려져서 ‘칼빈에게 조금이라도 반대했던 사람들은 모두 처형했다. 단 하룻밤 만에 제네바에는 칼빈당 외에는 어떠한 당파도 남지 않았다.’ 라고 하였다.
따라서 앞서 종교개혁을 이유로 죽인 사람들 외에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처형한 사람들이 더 많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4. 칼빈이 사람들을 처형시킨 이유들
1) 칼빈의 교리인 예정설을 비난하고 반대했다고 사형시켰다.
칼빈의 예정설을 비난하고 반대했다는 어떤 남자가 ‘도시의 교차로에서 피가 터질 때까지 채찍질을 당하고 난 뒤에 화형 당했다.’Ibid. p.82.
칼빈의 교리인 예정설이 설령 성경에 맞는다고 하더라도 그 교리를 비난했다 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신약시대에 있어서는 성경과 맞지 않는 것이다.
2) 칼빈을 위선자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사형시킨 칼빈
‘지크 그뤼에라는 사람은 칼빈을 위선자라고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고문을 받고 사형을 당했다.’ Ibid. p.82.
3) 아이들에게 세례 주는 것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처형했다.
‘칼빈과 그의 종교국은 80세 된 노인과 그녀의 딸을 데려다가 사형을 시켰다. 그 이 유는 아이들에게 세례주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80세의 노파와 그녀의 딸이 처형장으로 함께 끌려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 딸은 여섯 아이의 어머니였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세례 주는 것을 거부한 것 외에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4) 부모를 구타했다고 소녀를 목 잘라 처형시켰다.
칼빈과 그의 종교국은 ‘어떤 소녀가 부모를 구타했다고 목 잘라 처형했다.’
조찬선 op. cit.p.91.
5) 칼빈 자신과 생각이 같지 않은 자유사상가이면 화형에 처해 죽였다.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칼빈이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가차 없이 죽였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역사학자인 네루는 말하기를 ‘자신을 신의 손과 발로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에 위배 되는 일체의 것을 불허하여 자기와 의견이 맞지 않는 자유사상가라는 이유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화형에 처했다.’ 고 증언해주고 있다.
Glimpses of World History (Jawaharlal Nehru, 장명국 역. 석탑. p.71)
6)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한 짓을 하는 사람들을 사형시켰다.
7) 귀신 들린(?) 마법사를 사형시켰다.
8 )어느 출판업자가 칼빈을 비난했다고 불에 단 쇠꼬챙이로 혀를 잘라버렸다.
9) 자기 의견에 맞니 않으면 화형시켰다.
10) 자신의 신학이론에 반대하는 자들을 국사범으로 취급하여 처형했다.
11)두 명의 뱃사공이 서로 싸웠다고 두 사람을 모두 사형 시켰다.
12) 칼빈이 기타 처형시킨 사람들의 처벌이유들
역사가들은 칼빈이 사람들을 처형시킨 유형들을 공통적으로 동일하게 증언하고 있다.
‘칼빈의 예정설, 성서 권위의 문제, 삼위일체설, 유아세례, 성만찬 등의 해석에서 칼빈과 의견을 달리했기 때문이었다’ 조 찬선 op.cit. p.91
자신의 교리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서 사람들을 죽인 것은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범죄행위인 것이다.
5. 칼빈과 그의 종교국은 어떻게 사람들을 고문했나?
1) 엄지손가락을 조이고 발바닥을 불로 지지고 밧줄로 잡아당기는 참혹한 고문.
2) 창자가 튀어 나오도록 꼬챙이로 쑤시는 고문.
3)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고문.
4) 가죽 벗긴 사람을 소금으로 문지르는 고문.
5) 칼로 살갗을 찢어서 고문.
6) 불에 그을려서 고문하고 죽이다.
7) 사람의 몸을 절단 내는 고문.
8) 사람을 물에 빠뜨려 고문하여 익사시키다.
9) 해충들이 사람의 살을 뜯어 먹도록 방치하는 고문.
10) 사람들 중에는 고문받기 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1) 자살하지 못하도록 밤낮으로 박수를 치게 했다.
ibid. p. 193. 151. Stefan Zweig. op. cit. p.193
또한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영국을 떠나 아메리카 신대륙을 찾았던 청교도들도 굶주림과 각종 어려움에 속에서 원주민이었던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고 삶의 터전을 잡았으나 결국 칼빈의 사상과 교리를 따랐던 그들은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인디언 수백만명 이상을 칼빈의 잘못된 사상과 교리로써 무참하게 학살하고 오늘날의 미국이라는 나라를 건설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청교도들이 중심이 된 칼빈의 잘못된 사상과 교리를 근간으로하는 미국과 유럽 등의 교회와 교단들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더 엄청난 자료들이 많이 있으나 이것만으로도 칼빈과 그의 사상과 교리가 어떤 것인지를 누구나 능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오늘날도 그 사악한 칼빈의 교리는 그대로 전승되어 오면서 신앙세계에 수많은 해악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칼빈의 교리를 숭상하고 있는 교단의 목자들 중에는 온갖 부정행위를 일삼고 심지어는 여 성도들과 간통을 하면서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강대상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고 하면서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서 거짓말들만 늘어놓고 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종을 저주하거나 대항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엄포를 성도들에게 놓아서 성도들로 하여금 목자들의 불의를 보고도 못 본 것처럼 하게하고, 입이 있어도 감히 입을 못 열게 하는 참으로 현대판 칼빈의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저들은 온갖 부정과 불의를 저지르면서도 저들이 숭상하는 칼빈의 살인사상과 교리에 맞지 않는 교회나 교단을 가차없이 저 중세 때의 인간사냥을 하듯이 마구잡이식으로 이단으로 정죄하여 매장을 하여 영적 살인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며 빛이신 하나님이신데 그러한 하나님께서 불의하고 거짓된 목사들을 자신의 종으로 삼으시겠으며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주시겠는 지를...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하나님은 선이시며 참이신데 불의를 용납하는 하나님이시라면 그 하나님은 거짓 하나님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날의 참 성도들이라면 목사 보려고 교회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려고 교회 간다는 변명 아닌 변명만을 늘어놓지 말고, 자신이 소속한 교회의 목사들이 그러한 불의를 저지르면 과감하게 응징해야 하며 하나님의 진리만을 증거 하는 참 목자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면서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버린 불의한 목자들의 눈을 감기고 머리를 덮어 버리심으로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사29:9-13)
그들은 그 결과 눈이 멀어 버린 소경인도자가 되어서 소경인 성도들을 인도하고 있으니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음부, 지옥)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마15:14)
이제 오늘날의 똑똑한 신앙인들은 거짓 목사들의 거짓말에 더 이상 속지 말고 진리의 말씀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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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1 14:00:29 | 관리자
근래에 보기 드문 유익한 책들을 읽었습니다.
은혜와 율법에 대한 책들이 더러 있지만 실질적으로 은혜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제시하는 책은 거의 없습니다. 길햄 박사가 지은 다음의 두 책들은 가히 한 영혼의 믿음의 행로를 완전히 뒤집어놓을 수 있는 혁명적인 책들입니다. 저자의 말대로 이런 종류의 책들이 있었어더라면 저자는 또 다시 이런 책들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간을 내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몇 번은 더 정독하려고 합니다. 율법주의 틀에 매인 채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을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필독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보장된 삶
하나님이 원하시는 크리스천
2009-07-20 09:14:50 | 관리자
고대의 잉크는 진하고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어 마치 현 시대에 인쇄소에서 쓰는 잉크와 비슷했다(렘36:18).
보통은 분말 숯과 흑색 상아 그리고 나무 수지 등을 배합하여 잉크를 만들었고 또 검은 색 물질을 내는 물고기에서 추출한 물질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기록하는 사람들은 허리 띠 안에 혹은 밑에 잉크통을 차고 다녔다(겔9:2).
2009-07-20 02:09:01 | 관리자
야곱과 레아 사이의 아들(창30:18).
그는 야곱의 아홉째 아들이었으며 그의 성격과 후손에 대해서는 야곱과 모세가 예언하였다(창49:14-15; 신33:18-19). 잇사갈 지파에 속한 사람들은 광야에서 54,400명이었으며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는 세 번째로 수가 많았다(민1:28; 26:25). 그들의 상속 지역은 동쪽으로 요르단, 서쪽으로 므낫세, 북쪽으로 스불론, 남쪽으로 에브라임 지파를 경계로 두었으며 아주 비옥한 곳이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잇사갈 지파 지도 참조(19,21). 그들은 농작에 능한 사람들이었으며 특히 용맹심과 애국심이 많은 것으로 칭찬을 받았다(삿5:15; 대상7:1-5; 12:32).
2009-07-20 02:08:26 | 관리자
유다의 대언자.
그는 여로보람을 대적하여 대언하고 르호보암과 아비야의 역사를 기록하였다(대하9:29; 12:15; 13:22). 여러 사람들은 바로 이 사람이 여로보암에게 갔다가 사자에게 죽임을 당한 대언자라고 생각한다(왕상13:1-32).
성경에는 이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몇 명 더 있다(대상27:21; 스6:14; 슥1:1).
2009-07-20 02:07:55 | 관리자
입술을 연다는 것은 말을 시작하는 것이며(욥11:5; 32:20) 입술을 억제하는 것은 침묵하는 것이다(시40:9; 잠10:19).
입술의 열매는 찬양, 감사를 뜻한다(호14:2; 히13:15). 타국인의 입술은 말이나 방언을 뜻하며(고전14:21) 거짓말하는 입술은 거짓, 거짓말, 사악함을 뜻한다(잠10:18; 17:7; 시120:2). 불타는 입술은 격렬히 말하는 것을 뜻하며(잠26:23) 입술을 내미는 것은 조롱을 뜻한다(시22:7). 둔한 입술, 부정한 입술은 하나님의 것을 수행하기에 부적절함을 뜻한다(출4:10; 사6:5; 렘1:6).
2009-07-20 02:07:29 | 관리자
이스라엘의 열 번째 재판관. 그는 베들레헴에서 났으며 7년 동안 재판하였고 가족이 많은 것으로 유명했다(삿12:8).
2009-07-20 02:07:01 | 관리자
동방에서 입을 맞추며 문안하는 것은 사랑과 존경의 표시였다(창29:13; 룻1:14; 행20:37).
어떤 때에는 수염에 입을 맞추기도 하며(삼하20:9) 겸손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발에 입을 맞추기도 하고(눅7:38) 우상들을 숭배할 때에도 형상들에게 입을 맞추기도 하였다(왕상19:18; 욥31:27; 호13:2). “아들에게 입 맞추라.”(시2:12)는 말은 사울 왕이 사무엘에게서 연합의 입맞춤을 받는 것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삼상10:1). 이런 문안 법은 남자와 남자 사이에서도 흔하였으며 초대 교회에도 그리스도인들의 평강과 사랑을 표시하는 약속의 입맞춤이 있었다(롬16:16; 벧전5:14).
2009-07-20 02:06:38 | 관리자
길르앗의 아들.
그는 야일의 뒤를 이은 이스라엘의 재판관이었으며 그의 이야기는 삿11:1-40; 12:1-15에 나온다. 그는 성급하게 자기 하나님께 맹세하였으며 그 결과 그의 딸은 결혼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 11장에서 입다를 믿음의 영웅들 가운데 하나로 언급하였다(히11:32).
2009-07-20 02:06:10 | 관리자
성경에서 입은 종종 말하는 사람을 뜻한다(출4:16; 렘15:19).
하나님은 모세와 입을 마주 대하여 말씀하셨는데(민12:8) 이는 곧 자신을 드러내며 명확하게 말한 것을 뜻한다. 한편 율법은 히브리 사람들의 입에 있어야 했고 그들은 늘 그것을 반복하고 이야기하여야 했다(출13:9). 한편 그의 입의 막대기(사11:4)와 그의 입의 예리한 검(계1:16) 등은 확증시키고 규제하고 판단하는 그리스도의 말의 능력을 뜻한다(사49:2; 히4:12 비교). 한편 입을 가리키는 히브리말은 종종 명령으로 번역되었고(창45:21; 욥39:27; 전8:2) 용의 입에서 나온 영들(계16:14)은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들을 뜻한다.
2009-07-20 02:05:40 | 관리자
이 말은 원래 ‘윗사람이 아랫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다’는 뜻이지만 하나님의 복, 심판, 재앙 등이 이를 때에도 ‘임하다’로 번역된 경우가 많다.
2009-07-20 02:05:15 | 관리자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진 복합 히브리말.
이것은 신성과 인성을 지닌 채 사람들과 함께 거하려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즉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에게 적용되었다(사7:14; 8:8; 마1:23). 이 말은 결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상태를 나타내지 않고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와 함께 거하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
2009-07-20 02:04:36 | 관리자
날마다 쓸 것.
2009-07-20 02:04:04 | 관리자
아드리아 바다 동쪽에 있는 유럽의 한 지역.
이곳은 마케도니아의 서쪽에 있었으며 바울은 여기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이 지역을 통과하였다
(롬15:19).
2009-07-20 02:03:48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