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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The Rock)위에 세워진 결혼   설교_버드 칼버트(Fairfax Baptist Temple 담임목사)/ 번역 김희섭 박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도 저마다 개별적으로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를 사랑하듯 하고아내도 주의하여 자기 남편을 존경할지니라.” 에베소서 5장 33절 성경은 예수님께서 신부인 교회를 위하여 돌아오실 준비를 하신다고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곧 신부를 위하여 재림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 크리스천이 휴거가 되어 예수님과 영원히 같이 있게 될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영광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지구상에는 혼돈과 동요가 있을 겁니다. 미움과 전쟁이 있을 겁니다. 휴거시의 징조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만 대환난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의 징조가 지금 이 시대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재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더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도록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원관을 진흙탕처럼 만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는 지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이 헷갈리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인의 상당수는 모든 종교가 천국으로 안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서로 조금씩 상이하나 궁극적으로는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전 성경에서 함께 보았듯이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말씀만이 천국에 가게 합니다. 어떤 종교는 자기들만의 성경을 가지고 있고 어떤 종교는 자기들의 전통을 중요시 여기고 그것이 마치 하나님에게서 온 것처럼 말 합니다. 그러나 한 성경, 한 구세주, 한 가지 구원의 길 , 한 하나님, 한 천국이 있을 뿐입니다. 이대로 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매우 종교적이고 형식적이며 신실하더라도 예수님 외에 천국에 가는 길은 없습니다. 사탄은 또한 교회를 하나님의 의로부터 떨어지게 합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굳건히 서 있던 교회가 세상과 점점 같이 하고, 세상에 좀더 다가가려고 하나님의 의를 버리고 세상 것을 받아들여 이 세상과 같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는 하나님의 일이 성취될 수 없습니다. 사탄은 또한 결혼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확실히 안정된 결혼생활을 하는 가정도 요즈음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길 건너에 아버지가 가정을 버리고 떠난 한 가정이 유일한 이혼가정이었을 정도로 이혼한 가정을 찾아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마귀가 전보다 더 힘이 세진건가요? 물론 아닙니다. 인간이 더욱 나약해 진 것인가요? 그것은 약간은 맞을 수 있겠습니다. 사탄은 계속해서 나와 여러분의 결혼을 파괴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고 행복한 결혼을 하면 사탄은 더욱더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것이 사탄의 본능입니다. 지난 호에서 결혼을 파괴시키는 네 가지 원인 간통, 무관심, 결별, 학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예수님(Rock)위에 기초한 결혼, 즉 결혼의 기본조건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시편127편 1절에서는 주님 위에 집을 세우지 않으면 세우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다고 했습니다. 교회건 가정이건 주님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오랫동안 결혼하는 것을 보면 대단하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크리스천도 힘들기 때문입니다. 특히 무관심한 배우자가 있으면 상대방이 구원 받은 사람이라도 참으로 힘이 듭니다. 저는 이런 경우를 우리 교회에서도 종종 봅니다. 저는 오늘 성경에 나와 있는 많은 결혼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헌신에 대한 성실도입니다. 우리는 좋으나 싫으나 아프나 건강하나 죽기까지 상대방에게 헌신해야 합니다. 38년이란 세월을 살아오면서 저희 부부가 이혼한 부부와 다른 점을 살펴보았을 때 결혼할 때 맹세한 것을 그대로 행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희 부부에게도 많은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저희 부부는 해결을 위하여 서로 노력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같이 있게 하시는데 사람이 천둥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결혼에 천둥을 놓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저 자신입니다. 어느 교회에나 이혼하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결혼생활이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임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느 조사 결과에 의하면 첫 번째 배우자와 이혼율은 50%, 두 번째는 60%, 세 번째는 70%, 네 번째는 80%라고 합니다. 첫 번째 여자와 같이 있을 확률이 제일 많다는, 즉 갈수록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나빠진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결혼이란 것은 한명의 이성을 제외한 다른 어떤 이성에게도 감정이나 육체적 접촉이 없을 것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한명에게만 맹세한다는 것은 다른 30억 인구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혼의 맹세입니다. 맹세했으면 노력하십시오. 두 번째는 우리의 성경적인 역할에 진지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남자들도 마땅히 자기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느니라. 이는 지금까지 아무도 자기 육체를 미워한 적이 없고 오히려 양육하고 소중히 여기기를 주께서 교회에게 하신 것같이 하기 때문이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도 저마다 개별적으로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를 사랑하듯 하고 아내도 주의하여 자기 남편을 존경할지니라”(엡5:28,29,33). 남편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신과나 심리학을 전공하는 사람들 중에는 부인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성경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미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방법을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을 사랑하는데 있어서는 전문가입니다. 보너스가 나오면 어떻게 돈을 써야 할지 압니다. 나의 최대의 문제점은 이 세상이나 마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인 것입니다. 내 자신이 영적으로 계속해서 확고하지 못하고, 죄를 지으며,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저의 집사람에게 Good morning이라고 하기도 전에 저의 외모를 가다듬느라 샤워도 하고 넥타이도 곧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벌써 저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이 헝크러져 있어도 자신을 사랑하기에 왜 세상은 이렇게 잘못되어 가고 있는지 원망하며 자신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합니다. 아내가 헝클어져 있어도 우리는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아내가 매우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25절에는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즉 2개의 원칙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후에 갖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사악함, 부도덕, 죄를 예수님이 갖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내가 심한 죄를 짓고 악하게 행하더라도 우리는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아내들아, 너희 자신을 낮추어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과 같이 때문이니 그분은 그 몸의 구원자시니라 :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도 저마다 개별적으로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를 사랑하듯 하고 아내도 주의하여 자기 남편을 존경할지니라” (엡5:22,24,33) 이와 같이 아내는 모든 일에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여자가 결혼할 때는 남편의 동반자요, 돕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고 아이에게만 관심을 갖는 것이 결혼이 아닙니다. 남녀동등 사회에서는 성경의 원칙에 호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세워주고 존경해야 하며 절대 깎아내려서는 안 됩니다. 존 필립은 아내가 주의하여 남편을 존경하지 않으면 남편을 지배하게 되고 남편은 아내에게 분노를 가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11절에서 “이는 이미 놓은 기초 외에 능히 다른 기초를 놓을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니 이 기초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외에 기초를 둔 결혼은 제대로 될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서로 즐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된 까닭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주께서 증인이 되셨음이라. 그녀는 네 짝이요, 네 언약의 아내로되 네가 그녀를 대적하며 배신하였느니라.”(말2:14) 아내는 동반자입니다. 결혼은 2개의 수입, 2개의 계획, 하나의 가정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내를 부수입을 얻게 하기 위해 결혼을 만든 것이 아니라 둘이 하나가 되라고 한 것입니다. 둘이 하나가 되어 같이 즐기고 살라는 것입니다. 피크닉, 박물관, 연주회 등 모든 것을 같이 즐기고 전도지를 돌릴 때도 같이 다녀야 합니다. 그런데 같이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 저와 집사람은 벽지를 바르는 것 때문에 헤어지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이런 것은 같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열고 솔직한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너희 자신을 낮추어 다른 이에게 복종하라.”(엡5:21) 매일 부부가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의견을 들어주면 그 자체로 부부의 문제를 해결하게 됩니다. 성경은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문제를 가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매일 풀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부부생활의 핵심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며느리 베카가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남편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어떤 문제도 가지고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다고요. 결혼에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문제를 그때 그때 즉시 해결하십시오. 마지막으로 같이 즐거워해야 합니다. 인생은 매우 힘이 듭니다. 일도 매우 힘이 듭니다. 결혼도 매우 힘이 듭니다. 이 가운데에서도 웃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집에 있는 긴장을 풀어야 합니다. “즐거운 마음은 약같이 좋으나 상한 영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 웃음은 결혼의 매일 생활에서 요구되는 것입니다. 커밍은 ‘최고로 낭비하는 날은 웃음이 없는 날이다.’ 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시온의 포로 된 것을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자 같았도다.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노래가 가득하였도다. 그때에 이교도들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들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들을 행하셨으니 이로 인하여 우리가 즐겁도다.”(시126:1~3) 즐거움을 같이 하십시오. “고난받는 자의 날은 다 악하거니와 마음이 즐거운 자는 계속해서 잔치하느니라.”(잠15:15) 마음이 즐거우면 뷔페, 즉 고기와 생선이 항상 앞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헨리 비처는 웃음이 없는 결혼은 쿠션이 없는 차가 자갈길을 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행복한 결혼을 위해서는 결혼식 때 서약한 것에 충실하고 성경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며 서로 같이 즐기도록 노력해야 하며 마음을 열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며 같이 웃으면서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결혼에 심한 문제와 어려움이 있더라도 결혼 생활을 지속해야 합니다. 배우자가 어떻건 오늘 다시 배우자에게 충실하겠다 맹세하십시오. 배우자에게서 멀리 떨어지려고 하거나 배우자와의 관계가 어려워서 상태가 비참하면 상담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결혼에 대한 해결책을 나누십시오. 예수님만이 우리 결혼의 기초입니다. 그분이 없이는 우리는 실패합니다. 예수님의 기초위에 결혼을 세우는 데는 두 사람이 필요합니다. 세상에 기초한 결혼을 하는 데는 한 사람만이 필요합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그런 분이 있어서 결혼에 문제를 일으키면 예수님께 용서를 구하고 배우자와의 관계를 개선시키십시오.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시킬 수 있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게 하십니다.
2009-05-02 17:19:11 | 관리자
하나님, 당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설교_버드 칼버트(Fairfax Baptist Temple 담임목사)/ 번역 김희섭 박사   “오 주여, 주는 내 등불이시오니 주께서 내 어둠을 밝히시리이다. 이는 내가 주를 힘입어 군대 사이를 달려가며 내 하나님을 힘입어 담을 뛰어넘었음이니이다. 하나님으로 말하건대 그분의 길은 완전하고 주의 말씀은 단련되어 순수하니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가 되시는도다. 주 외에 누가 하나님이리요?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리요? 하나님은 내 능력과 권능이시며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고” (삼하22:29-33) 다윗은 본문에서 하나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는 말씀을 위시하여 성경은 ‘주를 사랑하라(love the LORD/Lord)’고 17번이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 알지도 못하는 분을 어떻게 사랑할 수가 있을까요? 누군가를 잘 알려면 그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함께 사귀고 교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2장 19절에는 ‘마귀도 믿고 떤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지식 그 이상의 깊이가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단지 하나님을 알며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안다는 것만으로는 구원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기 힘듭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권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하여’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구원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깊이 아는 것이 필수적이고 구원받는 사람에게는 그분과 같게 되려고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즉 예수님께 완전한 신뢰를 두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어떠한 일을 하실 수 있는지 알아야 하며,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더욱 알아 그분과 같이 되고자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있고 우리는 어디서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 알 수 있는 2가지 방법을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 안에서 진리를 억누르는 자들의 온갖 불경건과 불의를 대적하여 하늘로부터 계시되었음이니 그 까닭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분명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보이셨나니 이는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은 창세로부터 분명히 보이며 그 만드신 것들로 깨달아 알 수 있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나니”(롬1:18-20)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자기에게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알 수 있는 기회도 없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늘에는 분명히 그것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진화를 믿을 수 있습니까? 우리 신체를 보십시오. 각 기관이 조화롭게 일을 하고 어린이가 체계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면 성경에 있는 것처럼 변명을 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자신을 보이는 것은 특별한 계시를 통해서입니다. 그것은 66편의 책을 말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성경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는 ‘성경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즉, 우리가 성경이라 부르는 이 책에 하나님이 누구인가가 담겨져 있습니다. 저는 이제 이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영원(永遠)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즉 하나님의 본질은 완벽함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완전하지 못한 형상을 가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십니다. 또한 영원하다는 것은 시작과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로선 이해하기 힘들지만 하나님께는 어떤 원인과 그에 따른 결과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존재케 하는 그 어떤 원인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계셨고, 저를 창조했으며 여러분도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시작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산들이 생기기 전 주께서 땅과 세상을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90:2) 전능하신 하나님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계속 계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전지(全知)하신 분입니다. 전지하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하나님의 지능은 완벽하고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실험실의 용기에 넣고 시험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도, 알 수도, 그리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의 시작은 “처음에 하나님께서”로 시작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받아들일 뿐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영(靈)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가 반드시 영과 진리로 경배할지니라.”(요4:24)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영을 정의할 수 없습니다. 목사의 아들인 한 소년이 자기 아버지에게 설교에 무엇이라 써야 할지를 어떻게 아냐고 물었습니다. 목사인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여 주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그러면 설교 원고에 썼다가 지우는 것이 왜 그렇게 많이 있나요?”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수를 범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을 때는 지울 필요도 없고, 뜯어낼 필요도 없습니다. 실질적인 면에서 나는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눈앞에서 드러나지 아니하는 피조물이 하나도 없고 오직 모든 것이 우리와 상관하시는 그분의 눈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3) 혹 부도덕한 일, 담배, 술, 마약 등을 하거나 시험을 치르면서 컨닝을 할 때 주위를 보지 말고 위를 보십시오. 한 분이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태도, 행동, 생각, 나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거듭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관장하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전능(全能)하신 분입니다. “아 슬프나이다. 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주의 크신 권능과 펴신 팔로 하늘과 땅을 만드셨사오니 주께는 너무 어려운 일이 없나이다.”(렘32:17) 권능에 대해서는 성경에 56번 나와 있는데 모두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외에는 전능하신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제한적인 권능이 있고, 어떤 일도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죄인들이여, 당신들은 죄 속에서 버려져 있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고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짐이 너무 무겁거나 구원받지 못한 가족이 있거나 직장, 재정 등의 문제가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넷째로 하나님은 항상 내가 있는 곳에 계십니다. 즉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한 순간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나의 어떤 상황에서도 같이 계시므로 위안을 받습니다. 또 하나님은 불변(不變)하십니다.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이 위에서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분께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느니라.”(약1:17)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거룩(聖)하신 분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모든 죄와 더러운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 불법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분의 얼굴을 돌려 너희에게 숨겼으므로 그분께서 듣고자 하지 아니하시느니라.”(사59:2) 즉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격리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대로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 없고 거룩하고 완벽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2가지 선택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음 하나는 죽은 다음에 지옥에서 불경건한 자기의 죄 값을 치르는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매우 쉬운 선택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을 단지 위대한 대언자라고 하는 종파가 있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비록 어떤 잘못된 종파의 교리를 따르지만 정말 그 가운데에는 선하고 훌륭한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분도 계시겠죠. 그러나 미안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교리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성경이 말씀하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오늘 지금 무릎을 꿇지 않으면 너무 늦게 무릎을 꿇게 될 겁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구원을 받으십시오.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 멸망당하지 말고, 지금 구원을 받으십시오.
2009-05-02 17:18:23 | 관리자
내가 구원받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설교_버드 칼버트(Fairfax Baptist Temple 담임목사)/ 번역 김희섭 박사   “또 그 증거는 이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분의 아들 안에 있는 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들을 쓴 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너희로 하여금 알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게 하려 함이라.”(요한일서 5장 11-13절) 오늘 저는 성도의 기본요건에 대한 설교를 하려 합니다. 성경읽기, 기도, 헌금, 주일 성경학교, 예배참석, 서로 사랑하기 등 이 모든 것은 성도의 생활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거듭난 성도인가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마지막 날에 내가 천국에 간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레미야 17장 9절에는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심히 사악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라 말씀하십니다. 간단히 말해 내가 마귀에게 속임을 당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니고 성경공부에 참가하고 교회 캠프도 다니고 성가대에서 찬양도 하고 어린이 성경공부도 가르쳤지만 천국에 정말 가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마귀는 속임수의 천재입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과 23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 이 구절은 기독교인으로 종교적인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크리스천이라고 불리워지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우며 성경공부도 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훌륭한 일도 한 사람들이었는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였노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에게 매우 의미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했거나 구원받은 분도 어쩌면 잘 못 알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의 사도 요한처럼 우리는 자신이 분명히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구원의 확신이 있기만 하면 옳은 것인가요? 이제부터 구원의 확신에 대한 것을 요한일서에서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순종의 삶을 통해서입니다. “그분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자는 그분께서 걸으신 것같이 자기도 그렇게 걸어야 할지니라.”(요일2:6). 하나님은 분명히 자신이 구원받은 자인지 알려면 명령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마19:17; 요14:15; 15:10,14; 딤전6:14; 요일2:3; 3:22; 5:2,3). 하나님은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하셨습니다(출20:3). 하나님은 자신 외에 어떤 것에도 경배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출20:5). 자신의 즐거움이나 직업 등을 하나님보다 우선시 하면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출20:7). 저 자신이 말할 때에도 그렇지만 저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는 것에도 관심을 가집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출20:8). 그러나 안식일은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안식일은 일곱째 날 즉 토요일을 말하는데 하나님은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행15:20,29; 21:25).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요일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막16:9; 요20:19; 행20:7; 고전16:2). 그리고 부모님을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출20:12). 여러분은 부모님을 존경하십니까? 여러분은 부모님을 따르십니까? 하나님은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출20:13). 신약에서는 형제를 미워해도 살인이라고 합니다(요일3:15). 성경은 간음하지 말라고 합니다(출20:14). 결혼 전과 혼외 성관계는 법률을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도둑질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출20:15). 좋은 집, 차, 물건 등 어떤 것도 탐욕해서는 안 됩니다. 세금을 비롯한 어떤 것도 도둑질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의 것을 탐욕해도 안 됩니다(출20:17).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십계명을 지켜야만 천국에 간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디도서 3장 5절에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로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자신의 긍휼에 따라 다시 태어남의 씻음과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행함으로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아무도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율법을 지킨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야고보서 2장 10절에는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 한 조목(條目)이라도 어기면 모든 것에서 유죄가 되나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과 몸을 다해 사랑하지 않으면 살인, 부모 불경, 간음 등의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을 보면 “이는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요즈음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교회에 나오면서 착하게 살고 주위 사람을 잘 보살피라고 하며 또 교회가 돈에는 관심이 없지만 교인들이 헌금을 많이 하면 천국에 갈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틀렸습니다. 매일 월급을 헌금함에 넣고 지옥으로 직행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 받았으니까 지키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의를 행하는 삶을 통해서입니다. “그분께서 의로우신 줄을 너희가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분에게서 난 줄을 아느니라.”(요일2:29) 복음은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문입니다.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거듭났으면 자동적으로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더 이상 세상의 쾌락을 좇아 살기를 원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내 죄를 전부 용서하셨는데 왜 옛 삶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생활의 기준이요, 지침이 되십니다. 구원받고 성도가 되었다면 의로운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나는 어렸을 때 구원받았는데 하나님을 위해 살지는 않으나 구원 받은 것은 확실합니다.’ 라고 하시는 분은 구원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자신을 속이고 있는지 모릅니다. 세 번째는 새로운 삶을 사는 것으로 구원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이는 마귀가 처음부터 죄를 짓기 때문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이니 곧 그분께서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는 것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분의 씨가 그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요, 죄를 지을 수도 없나니 그 까닭은 그가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이라. 이로써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누구든지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이 소식을 너희가 처음부터 들었음이라.”(요일3:8-11) 이것은 구원받는 순간 성도가 받는 새로운 인성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계속해서 옛 삶의 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말하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느니라.”(요일1:8) 자기가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면 자신을 속이고 진리가 자신 안에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9절과 10절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저는 두 가지 다 옳다고 생각합니다. “났다(is born)”라는 것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있었던 것으로서 그 이후로는 변화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간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계속해서 전과 같이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과 같이 계속 죄를 짓는다는 것은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 신앙이 있는 것처럼 사는 것일 뿐이며 구원을 소유한 사람의 삶은 십중팔구 아닐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7) 완전히 새로운 삶입니다. 새 인성은 죄를 지을 수 없으나 옛 인성은 죄를 짓고자 합니다. 그러나 옛 몸은 사라지고 우리가 완전히 새 몸을 입을 때가 올 것입니다. 네 번째는 사랑의 삶입니다.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간 줄을 알거니와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 안에 거하느니라.”(요일3:14)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요일4:7-8). 만약 자기 주위 사람은 사랑하고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싫어한다면 자신이 크리스천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저는 많은 크리스천과 동의하지 않는 것이 있으나 그렇다고 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교리적인 면에서 세상과 타협을 하는데 저는 그들과 같이 행동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에큐메니컬 교회가 아닙니다. 저는 그런 교회에서 매주 초청장을 받지만 (어떤 때는 우리 지역 정부가 후원을 하기도 하는데) 그런 곳에는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는 구분이 되고자 합니다. 사랑은 때로는 어렵습니다. 나의 적을 사랑하는 것은 힘이 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다섯 번째는 영적인 삶입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영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4:13) “그러나 너희 안에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나니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롬8:9). 구원 받은 후에 영적인 복을 따로 받아야 성령님이 오신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에게 오십니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안에 게신 성령님의 전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 이는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음이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성령님이 계신지 모르는 사람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영적인 삶을 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님이 자신 안에 계시면 삶으로 표현이 됩니다. 그런데 저는 자기 배우자를 떠나는 사람이 크리스천이라고 하면 정말 그가 구원 받은 사람인가 의심을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섯 번째는 믿음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난 자니 또한 낳으신 그분을 사랑하는 자마다 그분에게서 난 자도 사랑하느니라.”(요일5:1)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완전히 신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승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구원받았다면 이 세상에 대해 승리하고 이 세상과 분리하게 됩니다. 세상적인 삶을 살면서 구원 받았다고 한다면 그 구원은 의심스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예전과 같이 일하던 사람과 같은 삶을 살게 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셔서 새 힘과 희망과 에너지를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구원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7가지를 기억하십시오. 자신을 돌아보아 한 가지라도 그렇지 않다고 느끼신다면 여러분이 누구이든지, 교회에서 어떤 직책을 가지고 있든지 지금 바로 주님 앞에 나와 구원을 확실하게 하십시오. 손톱만큼의 의심이라도 있으면 확실히 하십시오. 자신의 의로운 삶, 새로운 생활태도, 다양한 정신적 치료, 교회출석, 성경공부, 선행 등은 조금 느낌이 좋아지게 할 수 있으나 저나 여러분의 본성 자체를 제거하지는 못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피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여러분 중에 ‘나는 믿는데요’ 라고 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성경은 ‘마귀도 믿고 떤다’고 말씀합니다. 전에는 크리스천의 삶을 살았으나 현재는 그렇지 않은 분은 자신의 구원을 의심해 봐야 합니다. 여러분은 믿는 자입니까? 7가지의 내용이 자기 삶에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지금이 바로 구원받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2009-05-02 17:17:42 | 관리자
성경은 동성애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   설교_버드 칼버트(Fairfax Baptist Temple 담임목사)/ 번역 김희섭 박사   오늘 본문은 디모데후서 3장 12~17절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다 핍박을 받을 터이나 악한 자들과 미혹하는 자들은 점점 더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 그러나 너는 배워서 확신하게 된 것들 안에 거하라. 이는 네가 이것들을 누구에게서 배운 줄 알며 또 어린아이 때부터 네가 성경 기록들을 알았기 때문이니 그것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기도 :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다시 하나님 집에서 예배하고, 찬송하고 설교하며 서로 교제를 나누게 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바로 하나님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듣는 날입니다.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오늘이 구원의 날이 되게 하여 주시고 구원받은 크리스천은 믿음 위에서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서 확실한 교리를 가지게 해 주십시오. 저희들과 우리나라를 축복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저는 오늘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물어 보고 싶습니다. 제가 살던 시대에는 물론 얼마 안 되었지만 동성애자를 감옥에 보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 사람은 감옥에 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군대와 의회 그리고 성직자에도 동성애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동성애자가 불미스러운 병보다 더 나쁘게 여겨지던 시대에서 완전히 정상으로 생각되는 시대에 와 있습니다. 게이결혼을 축하하는 지경에까지 왔습니다. 저는 말하기도 싫지만 국회에서는 게이를 장애자와 같은 소수의 사람으로 취급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소수의 장애자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변질된 성도착자들입니다. 그들의 권위를 소수의 소외된 사람으로 취급해선 안됩니다. 저는 미국이 앞으로 세계 사람들이 보기에 United States of America가 아니라 United States of ...(United States of Gay로 목사님이 말씀하시려고 하다 차마 말씀하지 않았음) 도대체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우리나라 미국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정부에서 일하는 분은 사회통념에 대한 감각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동료가 이런 소수사람들에 대한 결정을 하기 때문입니다. 소외 받은 소수사람들에게 정책편의가 주어져야지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보도매체들은 다음 뉴햄프셔 성공회 주교가 누가 될 것인지를 보도했습니다. 그는 뉴햄프셔의 모든 성공회 교회의 주교가 될 것입니다. CNN은 성공회 주교들의 모임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동성애자인 진 로빈슨을 뉴햄프셔 주교로 임명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소식을 알 것입니다. 진 로빈슨은 투표 후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것은 꿈만 같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아직 로빈슨의 말을 다 인용하지 않았지만 저는 이런 잡스러운 것에 하나님을 끼어 넣는 것에 대해 매우 분개하고 개탄합니다. 개탄스럽고 말할 정도로 저는 감정이 솟구칩니다. 성령님이 주교 투표에 같이 했다고 하는데 성령님은 이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로빈슨은 주교가 되는 것이 매우 흥분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설교를 계속하기 전에 2가지 전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저는 동성애에 대해 설교하는 것에 대해 여러분이 듣기 싫어하는 것처럼 싫습니다. 보도매체가 보도를 해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성경이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쓰여 있는지에 대해 하나님이 저에게 설교를 하라는 강한 권유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저는 전혀 게이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게이에 대해 관대한 생각을 가진 분이나 이웃 또는 친구를 가진 분의 기분을 나쁘게 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제가 말하려고 하는 바가 아닙니다. 설교를 끝까지 들으시면 충분히 아실 겁니다. 오히려 저는 그들에게 성경이 전하는 복된 소식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들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게이들은 즐거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영어로 Gay는 동성연애자 외에 즐겁다는 뜻이 있다) 그들은 가엽고 사악한 사람들로서 게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가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게이 운동에 대해 100% 완전히 그리고 완강하게 반대하지만 그들도 구원을 받아 이 잡스러운 것이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절대로 그들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동안 호모와 양성기능을 가진 사람에게 상담을 해 왔습니다. 제가 누구와 상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분명 제가 그들의 영혼을 사랑한다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마지막 날들에는 악한 자들과 미혹하는 자들은 점점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 했습니다. 잠깐 더 설교를 진행하기 전에 펜과 종이가 있으면 꺼내 주십시오. 성공회 주교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경이 게이를 인정한다고 말하므로 주위 사람들이 이에 대해 물어 볼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유신학교수들은 어떤 문제에 대해 성경은 반대인 것 같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성스러운 성경을 주셨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에는 모든 성경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이라 했습니다. 영감이란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숨격 즉 입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옳은 지 아닌 지를 알고 바로잡음과 교육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구요. 17절에 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옳은 지 그른 지는 이 성경책으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공회 주교와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변개시켰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동성애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는 로빈슨을 옹호하는 많은 기사를 읽었습니다. 성경공부를 하기로 합시다. 창세기 1장 26절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2개의 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남성 다른 하나는 여성입니다. 최근 UN 회의에서는 5개의 성이 있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남성, 남성동성애자, 여성, 여성동성애자, 양성애자가 있다고 합니다. 저희 교회는 성경을 최종권위로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 18절, 21~2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보시기에 남자가 맛있는 음식을 잘 만들지 못하고 버터 샌드위치를 혼자 하는 것보다 협력자가 있는 것이 좋기에 남자를 위해 여자를, 분명 여자를 남자를 위해 만들었습니다. 우리 다시 한 번 상기합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입니다. 남자를 위해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처음 동성애에 대한 것은 창세기 19장 5~8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롯을 부르며 그에게 이르되, 이 밤에 네게 온 남자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을 우리에게로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알리라, 하니 롯이 문에 있는 그들에게로 나아가 뒤로 문을 닫고 이르되, 원하건대 형제들아, 이같이 악하게 행하지 말라. 이제, 보라, 내게 남자를 알지 않은 두 딸이 있노라. 원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남자들은 내 지붕 그늘 아래로 들어왔은즉 그들에게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하매" "알리라(Know)"한 것은 그들과 성적관계를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동성애자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그들을 접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롯은 어리석게도 이에 대해 8절에서 처녀인 두 딸이 있으니 그들을 데려가고 이 남자를 놔두라고 합니다. 유다서 7절을 보십시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변 도시들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음행에 내어 주고 낯선 육체를 추구하다가 영원한 불로 보복을 당하여 본보기가 되었느니라" 여기에 음행은 동성애를 말합니다. 성경은 음행을 결혼 외의 모든 성관계를 말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있었던 것은 접대에 대한 것이 아니고 음행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법률은 동성애를 금지했습니다. 레위기 18:22을 보십시오. "너는 여자와 함께 눕는 것같이 남자와 함께 눕지 말라. 이것은 가증한 것이니라" 이것은 생생하게 묘사적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성령님께서 성경에 쓴 것입니다. 이것으로 동성애에 대한 것은 확실한 것 아닌가요? 하나님은 이것을 가증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법은 우리에게 적용되는 법입니다. 레위기 20장 13절을 보십시오. "또 남자가 여자와 함께 눕듯이 남자와 함께 누우면 둘 다 가증한 짓을 행하였은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의 피가 그들에게 돌아가리라" 하나님은 동성애에 대해 별로 참으심이 없습니다. 남자가 남자와 누우면 반드시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으로 확실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다루는 동성애에 대한 무서운 법입니다. 신약을 봅시다. 로마서 1장 24~27절을 보십시오. 또 2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은 그들 마음의 정욕대로 부정함에 내어 주사 자기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경배하고 섬겼음이라.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받으실 분이시로다. 아멘. 이러한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수치스런 애정에 내어 주셨으니 이는 심지어 그들의 여자들도 본래대로 쓸 것을 본성에 어긋나는 것으로 바꾸었으며 남자들도 이와 같이 본래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를 향해 욕정이 불 일 듯하여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보기 흉한 짓을 행하여 자기 잘못에 합당한 보응을 자기 속에 받았음이니라."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그대로 내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려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인간에게 노력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하면 하나님은 그래 마음대로 하라, 나는 포기하겠다고 합니다. 가증하고 더러운 정욕에 내어 준다면 그렇게 하라고 내버려둡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것입니다. 한가지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동성애는 선택한 것입니다. 아무도, 아무도 동성애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도 이것은 유전적 성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의학잡지에는 그렇지 않다는 분이 있겠지요. 여러분! 저는 제가 말하는 것이 확실히 맞다는 유일한 의학잡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경책입니다. 누구도, 어느 누구도 게이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악한 어른들이 어린아이를 동성애적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어린이 성학대자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남자나 여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릴 때 하나님은 단념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질문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아침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것도 멀리 떨어지는 것이 있습니까? 고전 6장 9~10절을 보십시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속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여성화된 남자나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욕되게 하는 남자나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욕하는 자나 착취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신약에서 두 번째 동성애에 대한 구절입니다. 주교 로빈슨이 뭐라 해도 동성애자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 받지 못합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선언입니다. 기쁜 소식은 11절에 있습니다. "전에는 너희 가운데 이 같은 자들이 더러 있었으나 이제는 너희가 우리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씻김을 받고 거룩히 구별되어 의롭게 되었느니라." 고린도 교인들도 일부는 동성애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너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씻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에수님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동성애자들은 이것이 동성애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를 남용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고 합니다. 커비 앤더슨은 도덕의 딜레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은 금기보다 절제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 해석을 받아들입시다. 성경은 항상 일관성이 있어야 하므로 같은 문맥으로 이해되야 합니다. 그렇다면 고전 6장 9절에서 음행과 우상숭배, 간음도 절제하면서 하면 된다는 겁니까? 술은 주말에는 괜찮고 매일 하면 안된다는 겁니까? 조절의 문제입니까? 저는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결혼 외에 어떠한 성관계도 금지하셨습니다. 맞습니까? 여러분중 10대나 기혼자, 미혼자 등 누구나 결혼 외 어떠한 성관계를 한다면 오늘 아침 제가 설교하는 동성애자와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정확히 같은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구원이 없다면 여러분의 최종도착지는 지옥이라는 곳이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8~1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가 아노라. 이것을 알지니 곧 주께서 율법을 만드신 것은 의로운 사람 때문이아니요, 오직 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와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속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사람을 죽이는 자와 음행을 일삼는 자와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는 자와 사람을 납치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위증하는 자와 그밖에 무엇이든지 건전한 교리를 거스르는 것 때문이니" 법은 분명히 어떤 동성애도 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금지하셨지 관용을 베푼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른 선택의 삶이 아닙니다. 그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라고 말할 분이 있겠지만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그것은 성변태자로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올바른 결정을 하기 위해 진리를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라고 하실 분이 있겠지요. 진리는 외모, 문화, 법, 유전자, 법원, 의사, 과학자 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교회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교파의 교리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Thus says the Lord"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책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나올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진리입니다. 나는 성경책을 가지고 있고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말씀에 인간이 의문을 달지 마십시오. 성공회는 틀렸습니다. 그들은 틀린 결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교파도 같은 잘못된 것을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청소년 목사였다가 저번 주에 시애틀에서 목회를 시작한 쥬레이 목사에게 전자우편이 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가 다니던 교회를 떠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 교회에서 게이를 수용할지 오늘 투표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교회는 미국침례교회입니다. 미국침례교회는 하나의 교파입니다. 그들은 지독히 악취 나는 자유주의 교회입니다. 저는 어느 교회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그러지도 않았고 그러지도 않을겁니다. 저는 독립침례인입니다. 로빈슨은 그를 주교로 뽑은 사람과 함께 성공회의 치욕입니다. 행음을 하는 사람은 어떤 종류의 영적지도자 또는 일반지도자도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여러 곳에서 확실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목회의 자격이 없습니다. 특히 로빈슨처럼 부인과 이혼하고 두 딸은 다른 남자에게 맡기고 성공회의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은 그런 값어치가 없습니다. 칼리 토마스는 로빈슨의 지지자들이 그를 성인이라고 하나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했는데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겠냐고 하면서 그것은 아마 한순간에 한한 것이 아니겠냐고 했습니다. 동성애 전에 두 가지가 선행하는 경우가 많다고 대부분의 상담자가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엄마가 집을 주관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수동적인 아빠와 너무 바빠서 가족과 같이 시간을 못 보내는 아버지입니다. 아빠들이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가족과 시간을 같이 보내십시오. 여러분의 귀중한 자녀를 위해서요. 사람들이 나 같은 목사는 호모공포증에 걸린 사람이라고 하고 그게 문제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습니다. 저는 호모가 무서워 죽을 정도입니다. 그들의 생활방식이 우리 사회에 받아들여져 오염시켜 우리사회가 죄로 물들까 염려됩니다. 미국이 USA가 USGay가 될까 염려됩니다. 전 미국 대통령 클린턴과 그의 지지다들은 이런 게이 문제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그것은 그들이 하는 행음과 간음에 대해 반대 받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 좋은 대로 할 테니 너희도 하고 서로 반대하지 말자는 거죠. 문을 닫고 하고 싶은 대로 하자는 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문을 닫아도 다 보십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을 공개적이던 비밀이던 다 아십니다. 제가 정말로 호모공포증을 가지고 있고 오늘 이 설교를 하게 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이 무시무시한 영향이 우리들의 아이들에게 갈까 두려워서입니다. 저를 신경과민하게 만들고 무섭게 만듭니다. 공립학교에서는 이 모든 것이 괜찮고 옳다고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이 사악한 무리들은 그들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교실에서 TV에서 선전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에 관용을 가지라고 가르침을 받는데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저는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동성애에 대해 죽을 때까지 반대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학교에서 어린이건 어른이건 동성애가 발견되면 즉시 퇴교입니다. 어떠한 예외도 있을 수 없습니다. 부모 여러분, 자녀와 같이 시간을 보내세요. 그들에게 헌신하십시오. 그들의 지도자가 되고 모범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의 본보기가 되십시오. 에베소서 2장 1~9절을 보십시오. 다시 한번 상기하십시다. 여러분이 아는 어떠한 훌륭한 어머니도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동성애와 같은 범죄자 보다 더 나쁘지도 좋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어떠한 훌륭한 아빠도 영생에 관한한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동성애자와 같은 사악한 범죄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이 답입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아직 구원을 못 받았다면 오늘 구원을 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지은 어떠한 죄도 용서해 주십니다.
2009-05-02 17:17:02 | 관리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설교_버드 칼버트(Fairfax Baptist Temple 담임목사)/ 번역 김희섭 박사   “이제 성령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셨으니 이들은 위선으로 거짓말을 하며 자기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진 자들이라. 이들이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삼가라 명령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니 진리를 믿고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임이니라. 이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거부할 것이 없기 때문이요, 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그것이 거룩히 구별되기 때문이라. 네가 형제들에게 이것들을 기억하게 하면 네가 도달한 믿음의 말씀들과 선한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사역자가 되리라.”(디모데전서 4:1-6) 사도 바울은 젊은 사역자인 디모데에게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되는 것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배교하게 되는 많은 사람에게 주의를 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접어두고 마귀들의 교리와 자기 자신의 생각을 가르치는 교회에 대해 경고하는 것을 다시 기억시키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언급되는 신학적인 내용들은 성경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교회를 떠나야 합니다. 만약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Thus saith the Lord)"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사람의 견해일 뿐입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 자기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그런 것을 듣고 싶으면 집에서 아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됩니다. 공정해야 하므로 남편의 말을 들어도 됩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는 성경이라는 최종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에서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딤후 4:2b)고 했고, “모든 성경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6~17)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면도 가르치라고 하면서 또한 우리 자신은 곧바르게 하라고 합니다. 교회에서 천국의 영광만을 듣고 무시무시한 지옥에 대해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쌍한 겁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기쁜 것이지만 성경은 또한 지옥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는 예언이라든가 거짓 교리같이 딱딱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6절에 있는 것처럼 “네가 형제들에게 이것들을 기억하게 하면”, 즉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것이지만 다시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내용에 대한 설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항상 주의 깊게 상기해야 되는 것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6절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것들을 기억하게 하면 그리스도의 선한 사역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디모데는 목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탐구해 왔으며 선한 교리로 양육 받았습니다. 이것은 목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사람은 목회하기 전에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 안에서 자라왔으므로 이제 형제들에게 중요한 교리들을 기억나게 하라고 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14절을 보십시오. “너는 그들로 하여금 이것들을 기억하게 하며 말들로 인하여 다투지 말라고 주 앞에서 엄히 명하라. 그것은 아무 유익도 끼치지 못하고 오히려 듣는 자들을 멸망시키느니라.” 모든 목사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교리를 교인에게 전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발견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성경을 통해 주십니다. 즉 무엇이 진리인지 아닌지 무엇이 옳은지 아닌지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디모데는 성경을 탐구했고 그러기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하게 할 것을 전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다시 꼭 기억해야 할 일을 제가 말하는 것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하나님. 이러한 것들을 저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시고 항상 생각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물론 저는 이러한 것들을 결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에 있으면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난 1년 동안에 우리는 새 교회당으로 옮겼고 새 대통령을 선출했으며 또한 그전에 없던 테러를 경험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오사마 빈 라덴,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지하드, 공항안전, 탄저병 등 새로운 것을 1년간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1년간 지내면서 저에게 꼭 기억나게 하고 싶고 여러분에게도 기억하게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저는 단지 여러분에게 꼭 기억해야 할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지난 1년간의 삶, 저희 교회, 미국, 제가 해온 일 등을 생각하며 여러분에게 꼭 하고 싶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여러분의 가정의 중요성입니다. 모든 것이 다 잘되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가족은 어떻습니까? 여기에 가정불화가 있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저의 말에는 동감하실 겁니다. 여호수아는 24장 15절에서 “나와 내 집으로 말하건대 우리는 주를 섬기겠노라”라고 했습니다. 남편들이여,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사 교회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주신 것 같이 말입니다. 이 명령은 우리가 자주 잊어버리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 생명을 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한 것 같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저는 아내를 위해 죽을 필요는 없으나 필요하면 죽기라도 해야 합니다. 저는 저의 아내가 저 외에 어떤 사람에게도 받지 못할 사랑을 해야 합니다. 항상 아내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부인들이여, 성경은 너희 자신을 낮추어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엡 5:22). 당신은 남자니까 그렇게 쉽게 말한다고 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그렇게 해야 합니다. 또 만약 남편이 모자라면 어떻게 하냐고 하실 분도 계시겠지요. 그런데 얼마나 모자라면 그런 남편과 결혼했습니까? 저는 각자의 상황은 모르나 성경을 압니다. 남편이여,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부인이여, 남편에게 복종하십시오. 어떤 남편은 부인이 영리하지 못하다든가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할 겁니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해야 하고 부인은 남편에게 모든 것에 대해 복종해야 합니다. 또한 자녀들은 부모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하시겠지요. 그런데 전혀 동의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훌륭한 점입니다. 부모에게 동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복종하면 됩니다. 집에서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만 하면 됩니다. 정말로 쉽습니다. 자신의 사견은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핵심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너희 자신을 낮추어 다른 이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엡 5:21). 9.11 테러로 가족 없이 연말을 보내는 남편, 부인, 자녀를 위해 기도합시다. 그리고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합시다. 가족을 직장, 오락, 취미들보다 위에 놓으십시오. 남편 또는 부인, 자녀, 부모와 사이가 좋으면 여러분은 모든 것을 가진 것입니다. 집에 불이 나서 다 탔다고 합시다.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다시 집은 지을 수 있습니다. 차를 잃어버렸다고 합시다.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며칠간 불편할 수 있으나 가족이 있지 않습니까. 새해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가족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문제가 있으면 매일 그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화를 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엡 4:26). 저는 이것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교훈 중의 하나라고 확신합니다. 만약 큰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실 분이 계실 겁니다. 시간을 내어서 그 딱딱한 돌을 다 부술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문제가 계속 쌓이게 하지 마십시오. 저는 이렇게 해서 생긴 문제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반복하여 보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을 듣지 않으면 내년에는 상담이 필요하시게 될 겁니다. 가정에서는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매일 일어나는 문제를 접어두고 해결하지 않고 옷장에 쌓아 두고 잊어버리면 언젠가 그 옷장을 열어보고 자신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도대체 왜 우리 결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라고 할 겁니다. 제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작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시간을 내어 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생길 때 상대방의 의견이 나와는 다르니까 하며 애써 그 문제를 무시하려고 하면서 ‘며칠 지나면 다 잊어버리겠지’ 라고 생각하였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말합니다. 그 문제는 잊어버려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자기 죄들을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려니와"라고 말합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하겠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는 풀려고 노력하지 않겠다.”라고 하면 절대 번창할 수 없습니다. 젊은 사람에게 말합니다. 자기의 배우자가 될 만한 사람을 만났으면 그 사람이 어떻게 문제를 푸는지 잘 보십시오. 문제가 없으면 문제를 만드세요. 만약 그 상대가 문제를 잘 풀지 못하면 그 결혼은 정말 불행하게 될 겁니다. 그 상대가 미스 아메리카 또는 미스터 아메리카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와! 나는 이 세상에 가장 훌륭한 피조물과 결혼하는구나.” 하겠지만 그가 문제를 잘 풀지 못하면 언젠가 함께 하지 못하는 순간이 올 겁니다. 아버지, 어머니들이여, 자녀가 부모에게 불순종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자녀에게도 죄요, 부모에게도 역시 죄입니다. 그들의 죄에 대해 상관하기 싫어할 수 있습니다. 십대가 되면 그들도 이제 성인이니 문제에 대해 관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와 함께 집에 있으면 딱 한 가지 법을 따르면 됩니다. 그것은 부모가 말하는 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으로 푸는 것입니다. 성경에 없으면 자유로이 문제를 푸십시오. 그러나 성경에 있으면 그 방법대로 하십시오. 사람들과 의견이 다를 수 있겠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의견이 다른 것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관계, 애정문제, 대화문제, 노여움 등이 있으면 해결하십시오. 그것이 작은 돌일 수 있습니다. 콘크리트는 작은 것이 모여 만들어집니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려는 것은 매우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문제를 해결할 때는 분명히 성경이 문제해결에 최종권위가 돼야 합니다. 성경이 최종권위이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성령 안에서 걸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이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내가 가장 좋은 남편 또는 아버지가 되려면 성령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좋은 교인이 되려면 성령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자기 육체를 죽이고 자신의 몸과 인생을 예수님께 완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즉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에 완전히 따르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처럼 간단합니다. 왜 우리에게 시련이 오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자기가 하는 일에 성경은 접어두고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보다는 자기가 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그 일이 중요하면 성경으로 돌아가십시오. 문제는 성경에 뭐라고 쓰여 있건 내 생각대로 하는 데서 옵니다. “자기 죄들을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려니와"(잠 28:13). 절대 그런 식으로는 성공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성공을 원하십니까. 갈라디아서 5장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아주 쉽습니다. 제가 쉽다는 것은 해답을 쉽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매우 어렵습니다. 자기 자신을 죽이고 의로 걸으며 거룩하게 살고, TV를 꺼야 할 시간을 알며, 인터넷의 음란물을 피하려면 성령 안에서 걸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십시오. 인생은 너무 짧고 불확실합니다. 내년부터 잘 하겠다는 분도 계시겠지요. 그러나 내년에 살아 있을지는 모릅니다. 물론 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바로 오늘 아침부터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생각지 않은 시간에 오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오늘일지 내일일지 모릅니다. 단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분노, 노여움, 비통, 죄 등을 없애야겠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것 등을 빨리 고쳐야겠습니다. 구원받지 않은 친구들이여!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인간에게 노력하지는 않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기회입니다. ?
2009-05-02 17:16:23 | 관리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사회생활을 해야 하나?   설교_버드 칼버트(Fairfax Baptist Temple 담임목사)/ 번역 김희섭 박사   오늘 본문은 골로새서 3장 17-25절입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위에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 아내들아, 너희 자신을 낮추어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것이 주 안에서 합당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모질게 대하지 말라.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은 주를 매우 기쁘시게 하는 것이니라. 아버지들아,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낙담할까 염려함이라. 종들아, 모든 일에 육체를 따라 너희의 주인 된 자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단일(單一)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너희가 상속의 보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이는 너희가 주 그리스도를 섬기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부당하게 행하는 자는 자기가 행한 부당한 일로 인하여 보응을 받으리니 여기에는 사람을 외모로 취함이 없느니라. 기도: 아버지. 오늘 이 본문을 우리가 우리의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여기 있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오늘 성경말씀을 마음에 간직해 좀 더 낳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오늘 본문은 살아가는 동안 만나는 다양한 인간관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행하는 행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실제적으로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권위가 있습니다. 문제는 누구의 권위에 내가 따라가고 복종해야 하는가 입니다. 누구의 권위에 복종하느냐가 나의 행동을 결정짓습니다. 저는 궁극적으로 우리는 매일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피고용인이 고용주에게 명령을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관계가 아닙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쓰레기를 치우라는 것도 역시 그렇게 될 수 없는 일입니다. 학생이 선생님에게 시험은 안 보고 단지 수업만 즐기겠다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주부가 남편의 지도력에 반항하며 맘대로 하겠다는 것도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남편이 아내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랑하지 않는 것도 틀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행위에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 곧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 그리스도인 즉 삶의 언젠가 죄를 회개한 후 모든 믿음과 신뢰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두는 거듭난 사람은 무슨 일을 행하든지 예수님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 즉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모든 것을 하나님만을 위해서 하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행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라는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다. “아내들아, 너희 자신을 낮추어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것이 주 안에서 합당하니라.” 간단히 말해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그 위치가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그 위치를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것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에 아버지 하나님께 복종을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아버지보다 못한 하나님이 아니셨습니다. 단지 이 땅에서만은 그렇게 위치가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일을 행하러 왔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19절에서는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하고 모질게 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에서 남편들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헌신적인 사랑을 아내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아내가 향기 있는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언제든지 커피를 타 주어야 합니다. 남편은 항상 부인을 즐겁게 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내 생명을 줄 수 있는 것 같이 내 아내에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자녀들의 경우 모든 일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즉 남편은 하나님께 복종하고 부인은 남편에게 복종하고 자녀들은 부모에게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입니다. 22절에서 종들은 모든 일에서 주인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이것을 현재의 시대에 맞게 말하면 모든 일에서 고용주가 무엇이라고 하든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 무엇이라고 하든지 내가 사는 곳 즉 집이나 직장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관계의 복종을 순종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능력이 같다면 더욱 더 뛰어나게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치대로 있으면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23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마음을 다하여(heartily)는 문자적으로 내 영혼으로부터(out of your soul)라는 의미입니다. 즉 자신의 진정한 영혼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일을 할 때 마음을 다해 해야 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 교회에서 찬양할 때 등등 모두 다 마음을 다하여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기쁘게 해 드릴 수가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너무 즐거이 예배를 드리는 반면 어떤 사람은 그저 자리나 차지해서 교회에 왔다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같이 어떻게 해야 우리 자신이 100%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메모해 두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100%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 드려야 합니다. 그분 때문에 나는 최선을 다하고 싶고 경배를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구원받은 후 즉 내 죄가 예수님의 피 때문에 하나의 죄도 심판 받지 않고 천국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안 후 “와, 이럴 수가” 하면서 “와”의 모든 것을 바치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1965년 6월 4일 예수님을 제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래, 버드야, 대신 내가 너한테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매우 괜찮은 흥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다시 부활하신 분을 위해 제가 최소한 할 수 있는 일은 저의 최선을 그분께 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내 자녀가 지금 이렇게 타락한 사회에서 하나님께 온전하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게 하려면 자녀에게 대한 교육을 마음을 다해서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녀들이 우리 교회에 다니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르게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오 귀여운 자녀들아, 너희 부모가 페어팩스 뱁티스트 템플에 다니니 너희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거야.” 라고 다른 사람들이 혹시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여러분의 자녀가 올바르게 성장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실제로는 영적으로 이 교회에 나오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마귀가 이 교회에도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 말씀대로 하지 않는 교회는 더 할 거구요. 그러기에 성경을 가지고 자녀를 교육시켜야 합니다. 여러분 마음에 결정을 내려 여러분 각자가 최고의 아빠, 엄마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힘든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4절을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복음을 위탁받은 대로 우리가 말하노니 이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오늘 본문 23절과 같은 내용이라고 봅니다. 즉 우리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된 것이 기쁘고 감사하며 내 자신을 100% 드리게 된 것을 좋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나타내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제가 구원받기 전 저의 집사람 메어리와 데이트할 때의 일입니다. 저희는 피자집에 가서 피자를 시키고 저는 메어리가 먼저 먹기를 기다렸는데 도대체 먹지를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속으로 ‘피자가 식는단 말이야, 빨리 먹어!’ 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피자가 식고 난 후 메어리가 저에게 기도 안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때 죽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문제 많은 사람이었는데 아마 제가 기도하였다면 워싱턴 지역이 다 숨을 죽이고 제 기도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구원받은 후는 다릅니다. 저는 일부러 음식점에서 크게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하든 마음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여.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그러면 어른이 된 후 많은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시험과 유혹을 당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인지 모르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 또 다른 이유는 우리에게는 한 번의 인생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저는 시골의 경치를 매우 좋아하고 그런 곳에 가기를 즐겨하였습니다. 어렸을 때는 말을 타는 것을 좋아했고 스포츠도 취미로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기 전에는 정치 강의를 들으면 정치에도 입문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고 나니까 정치가와 그리스도인은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웃음) 그저 농담입니다. 우리의 것을 희생해서라도 우리의 최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즐거움을 포기할 때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열정과 시간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나의 행위가 내 마음으로부터 나왔는지 아니면 내가 해야 되는 의무감 또는 내가 그렇게 하기를 다른 사람이 기대하니까 했던 것인지 다 밝혀질 것입니다. 헌금도 내가 해야 하니까 하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으로부터 하는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제가 이 교회에서 임무를 한 것에 대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물론 죄에 대해서는 심판이 없지만 구원받고 난 후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는 심판이 있고 또한 보상이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상속의 보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이는 너희가 주 그리스도를 섬기기 때문이니라.” 우리가 주께 마음을 다하여 행하면 보상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2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부당하게 행하는 자는 자기가 행한 부당한 일로 인하여 보응을 받으리니 여기에는 사람을 외모로 취함이 없느니라.” 여기 있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지은 모든 죄를 지옥에서 다 물어내야 합니다. 영원토록 지옥에서 즉 불이 꺼지지 않는 곳에서 죽어야 합니다. 영원토록 죽지 않기 때문에 영원토록 지옥의 고통에서 살 것입니다. 왜냐고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예수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고 나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께 죄를 사해 달라고 간청하면 주님께서는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실 겁니다. 바로 이 순간이 그 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여. 당신의 모든 것을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기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오늘이 구원의 날이 되게 해 주시고 구원받은 사람은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기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2009-05-02 17:15:43 | 관리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나?(2)   설교_버드 칼버트(Fairfax Baptist Temple 담임목사)/ 번역 김희섭 박사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9장 18-26절입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기도하실 때에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과 함께하더라. 그분께서 그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니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침례자 요한이라, 하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며 다른 이들은, 옛 대언자들 중의 하나가 다시 일어났다. 하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니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엄히 명하사 아무에게도 그것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장로들과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받아 죽임을 당하고 셋째 날 일어나니라, 하시니라. 또 예수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는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로되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자기 생명을 잃고자 하면 구원할 것임이라. 사람이 만일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버림을 받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는 누구든지 나와 내 말들을 부끄러워하며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자기 아버지의 영광과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 중에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임이라.” 기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과 같은 하나님의 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것을 옆에 두고 우리의 왕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게 해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금 읽은 본문에 집중시켜 우리가 배울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은 성경이 우리가 배우기 위해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통해 필요한 것을 알고 도움을 받으며 위로를 받아 그리스도인으로의 삶을 살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교회의 핵심은 일요일 저녁예배와 수요일 저녁예배에 모인 사람들이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교회에 대해 알고 싶으면 수요예배에 가보면 됩니다. 물론 일요일저녁 예배에 가셔도 그 교회가 어떠한지 알 수 있습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이처럼 일요일저녁에 모였습니다. 즉 우리가 교회나 교제나 성경말씀 등의 값어치를 알고 나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자주 험난한 파도가 우리의 일상 속에서 나타나곤 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이 ‘헌신’이라는 것 때문에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요?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정해진 법칙 속에 있는 것인가요? 무엇이 좋고 나쁜지 따져보듯 우리의 삶을 평가해 본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건가요? 내가 다른 그리스도인에 비교해서 비교적 낫다든지 55-60% 그리스도인보다는 내가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건가요? 사도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 7장 15절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인정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미워하는 것을 행하기 때문이라.” ‘그렇지, 나도 바울의 느낌과 같아, 교회에 가서 참되게 살려고 작정하고 사회에 나가면 죄를 짓는단 말이야.’ 모두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결심을 하는 것은 또 내 인생을 멍들게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10장 12-13절을 보십시오. “이제 이스라엘아,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오직 주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분의 모든 길로 걷고 그분을 사랑하며 또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섬기며 내가 이 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령하는 주의 명령과 그분의 법규를 지키는 것이 아니냐?” 저는 오늘 아침 설교를 되풀이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 설교의 기본으로 하려고 합니다. 12절에 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 합니다. 바너라는 기독교 연구 기관에서 조사를 한 결과를 작년에 발표한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 성인 4,000명을 대상으로 했는데 기독교인이 비기독교인보다 약간 더 이혼을 한다고 했고, 27%의 거듭난 기독교인(이것은 자기가 거듭났다고 한 것임)이 24%의 다른 기독교인 보다 이혼율이 높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새로이 진화한 “헌신”의 기준입니까? 제가 목회한 33년간을 되돌아볼 때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내어놓았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교인들도 많았습니다. 매년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의 일에 참가했지만 헌신하지 않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도대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참가에서 헌신으로 갈 수 있을까요? 펜이 있으면 메모해 두십시오. 저는 어떻게 해야 우리가 헌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선교사가 되는 것을 보면서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께 헌신하는구나 하며 찬사를 보내지만 또한 이것은 동시에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가장 강력한 표현중의 하나는 자신의 삶을 헌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난 후에는 그렇게 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침예배에는 완전히 헌신을 했다가 저녁때에는 그렇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하지만 내일은 안하고 지난주는 했지만 다음주는 안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며 겪는 어려움입 니다. 저는 헌신적인 기독교인의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질문에 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18절에서 너희 생각에는 내가 누구냐고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위대한 예언자, 지도자, 우리가 따라야 하는 완벽한 도덕선생, 아니면 훌륭한 설교자 중에 하나인가요? 19절에 보면 사람들은 침례자 요한이라 하고, 어떤 이는 엘리야가 왔다고 하며, 옛 대언자가 다시 일어났다고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20절에서 그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대답했습니다. 즉 우리가 기다리던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단순히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 존경, 두려움, 경의, 복종을 해야 합니다. 동의하십니까? 즉 야고보서에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을 통해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욕망을 가져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면 우리가 경배 드리는 것에 대해 주의해야 합니다. 나의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을 활용해서 하나님께 경배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 몰몬교인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전도를 합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모하메드, 모세, 아브라함 등과 같은 선지자 정도로 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2년 동안이나 가정들을 방문해 전도를 합니다. 성경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인지도 모르고요. 그들은 그렇지만 나는 성경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압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도대체 그분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둘째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면 우리 자신을 부정해야 합니다. 23절에 보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이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침체되는 것은 자신이 길을 막기 때문입니다. 나는 무엇이 옳은지를 알고 행하고 싶지만 자신이 그것을 가로챕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부정해야 합니다. 어제 저는 하루 종일 설교준비를 하고 늦게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항상 양보운전을 하는데 어제 두 개의 차선이 한 개로 되면서 한 차씩 양쪽 줄에서 가는데 갑자기 어떤 차가 밀고 들어왔습니다. 그때 제가 어떻게 했는 줄 아세요? 안 비켜주었죠. 그때 저는 즉흥적으로 오늘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설교를 준비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양보하기 싫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부정 못하는 거지요. 나를 부정하고 그 차를 가게 해야죠.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을 신약사전에서는 자기 자신에서 자유로워지고 모든 자신의 안전을 포기함으로 얻어지는데 이것은 자신을 하나님께 아무 조건 없이 드릴 때만 가능하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또 조건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삶을 모두 드리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그만 두는지 아세요. 자신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싫다든가, 찬양이 싫다든가, 설교내용이 싫다든가, 성경교사가 가르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든가 등등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판단합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3년간 전도지를 돌려봤고 예수님에 대해 증언도 해봤지만 한 사람도 전도 못했는데 해서 무엇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러나 우리의 전도는 하나님께 대해 헌신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전도가 되고 안 되고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 사람이 구원받건 안 받건 그건 예수님의 일입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 못한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의 1주 168시간을 계획하십니까? 왜 어떤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목회하는 것을 싫어하는지 아시는지요? 우리에게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늦게까지 일하는데 왜 성가연습, 일요일 성경공부에는 늦게 오는지 아세요? 토요일 전도지 돌리기에 3~4시간을 할애하지 않는 이유를 아십니까? 자신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누구보다도 바쁜 버지니아 북쪽에 있는 여러분 중 일부는 항상 시간에 맞추어 교회에 옵니다. 바울은 얼마나 자주 죽는다고 했습니까? 매일입니다. 어제도 나는 부족했기에 오늘 또 죽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부정할 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왜 젊은 자녀가 부모에게 복종 안 하는지 아십니까?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 반항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적은 세상 마귀가 아니라. 나 자신인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는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자신을 내어주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자기를 죽이는 것은 즐거운 일만은 아닙니다. 세 번째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몸과 인생을 성령님께서 사용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규칙이고 기준이면 그렇게 따라야 합니다. 저한테는 웃지 못할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축구, 골프, 미식 축구 등을 할 때에는 어떻게 옷을 입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지요. 그런 규칙은 잘 따르면서 교회에 나올 때의 복장에 대해서는 자신의 의견과 다르다며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규칙과 법률을 잘 모르기도 하고 또 그것에 수긍할 수 있을지라도 모른다고 하면서 직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있나니 이제는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갈2:20) 이것이 여러분의 간증입니까? 오늘 본문을 생각해 봅시다. 22절에 예수님은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며 부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계속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면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23절은 완전히 헌신한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께서는 모든 거듭난 사람에게 23절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원받았다고 말하고 싶습니까? 예수님은 그러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매일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면 옛날의 저편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라야 구원받고 좋은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구원받았습니까?” “구원받았습니다!”라고 하는데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지옥에 가지 않게 해 주신 것을 정말로 믿는다면 자기 자신의 인생이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즈음 구도운동(역자 주: 열린 예배)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의 삶을 방해하지 않게 찬양하며 KJV 등과 같은 것을 버리고 모든 사람이 다 참여하도록 하는 예배운동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말씀하신 것은 십자가는 한 가지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손에는 세상, 육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십자가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는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로되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자기 생명을 잃고자 하면 구원할 것임이라.” 성경이 나의 삶의 지침이 되고 좁은 길을 가는 것보다 내 친구와 많은 사람이 가는 좋아 보이는 길, 즉 넓고 쉬운 길을 가겠다고 하면 자기 생명을 잃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겁니다. “사람이 만일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버림을 받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오늘 성경본문은 우리가 구원받은 후 가야 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완전히 바뀐 모습으로 되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9장 6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어떤 사람이 열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다가 이제는 그렇지 않는다는 분도 있을 겁니다. 아마 그 사람은 다시 태어나지(중생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요성경공부도 가르치고 성가대도 했는데요…’ 하겠지만 달라질 것 없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주님을 따르면 됩니다. 세상, 이웃, 직장, 육, 마귀, 자신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인생계획, 경력 등을 하나님보다 위에 두었다면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에 대해 착각하고 있으며 지옥으로 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죠나단 에드워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나의 권리, 의지, 감정에 어떤 권한도 없고 나의 몸 즉 혀, 손, 발, 귀, 눈에 어떤 권리도 없습니다. 나의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복종의 법칙이 되십니다. 세상, 육, 마귀는 내가 죽을 때까지 적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하건 간에 나는 그것을 하겠습니다. 나의 모든 길은 하나님의 영광 외에는 쓰지 않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가 빼먹는 것이 없게 하겠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간증입니까! 우리의 헌신을 다시 생각합시다. 세상에 내가 어떻게 보이기를 바라고 자기 존재가 세상에 나타내지게 되는 것을 바라면 잘못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곳에 있습니까? 자신을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회개하십시오.
2009-05-02 17:14:57 | 관리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나?(1)   설교_버드 칼버트(Fairfax Baptist Temple 담임목사)/ 번역 김희섭 박사 오늘 본문은 신명기 10장 10-22절입니다. 봉독하는 동안 일어서 주시겠습니까? “내가 처음과 같이 밤낮 사십 일을 산에 거하였더니 그때에도 주께서 내 말을 들으사 너를 멸하려 하지 아니하시고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백성보다 앞서 나아가라.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주리라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에 들어가 그것을 소유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제 이스라엘아,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오직 주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분의 모든 길로 걷고 그분을 사랑하며 또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섬기며 내가 이 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령하는 주의 명령과 그분의 법규를 지키는 것이 아니냐? 보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도 주 네 하나님께 속하였으되 오직 주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뒤를 이을 씨 곧 너희를 모든 백성들보다 높이 택하셨음이 이 날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의 포피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말지니 이는 주 너희 하나님이 신들의 신이시요, 주들의 주시요 위대하시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니라. 그분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대가를 받지 아니하시고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를 위해 재판을 집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이는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로 지냈음이니라. 너는 주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분을 섬기며 그분을 굳게 붙들고 그분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그분은 네 찬양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므로 네가 눈으로 본바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들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이집트에 내려간 네 조상들이 칠십 명이었으나 이제는 주 네 하나님께서 너를 하늘의 별들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한 대학교에 무관심 클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무관심 클럽에서 강연을 한다고 대대적인 선전과 홍보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를 않았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사람들이 너무 무관심해서 무관심 강연에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웃기는 이야기 같지만 그리스도인의 임무와 일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이것은 웃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선교회의, 부흥회 등을 할 때 우리의 마음은 그것을 들을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전에서 무관심은 감정이나 느낌이 없고 흥미나 관심이 없다고 정의합니다. 이 이야기를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해 본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가 만족하거나 아니면 하나님께 헌신하는 두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여기 모인 분이 모두 거듭났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거듭나신 분에게는 이 두 가지 중 하나가 적용될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사느냐 아니면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드리느냐입니다. 저는 보통 크리스천은 대부분 전능하신 하나님께 반항하며 산다고 확신합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 즉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은 사람은 대 놓고 하나님께 반항하며 사는 것입니다.그들은 위험천만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라고 말하는 분께 관심을 갖고 설교를 하고자 합니다. 그 중에서도 저희 교회에 다니는 모든 분에 대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구세주라고 입으로써 시인한 분들에게 묻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나요? 주인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을 알고 계시나요? 만약 예수님께서 여러분 자신의 주인이라면 왜 주일 성경공부나 전도를 하지 않습니까? 또 왜 어제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까? 왜 지난주에 전도지를 나누어주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로 믿지 않는 사람을 인도한 지 얼마나 됐습니까? 아니 성경을 펼쳐서 천국에 가는 길에 대해 증언한 지 얼마나 됐습니까? 왜 우리는 미친 듯이 하나님과 사랑을 하지 않습니까? 남편들이여, 부인을 열광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여러분은 타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임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교회에 출석하고 계십니까? 그저 예배에 오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저는 여기 계시는 모두 분들께 분명히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만약 여러분 자신의 모든 일에 있어서 예수님이 주인이 아니시라면 예수님은 전혀 여러분의 주인이 아니신 것입니다. 일요일에는 주인이시지만 나머지 요일 중에나 또 하루 24시간 중 어떤 시간에는 주인이 아니시라면 예수님은 전혀 여러분의 주인이 아니십니다. 불행하게도 오늘 날 많은 기독교인은 70년대, 80년대에 교회에서 말하는 성경의 지침에 대해 더 이상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니 10년 전에 하던 것도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원하지 누구도 성경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얼마 전 어떤 여자가 목사님이 자신에게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가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기 싫어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40세가 됐는데도 옷을 어떻게 입어야 되는지에 대해 들어야 하냐는 거죠. 바로 그것이 오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나타내 준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시인했는데 계속해서 항상 그분에게 매달려 있어야 하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항상 열성적일 수는 없지 않느냐는 거죠. 휴식을 달라는 겁니다. 성경을 읽지 않아도, 매주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옷을 그렇게 입지 않아도, 기도를 하지 않아도 훌륭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자신도 성경을 가르치는 이에 못지않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즉 나는 나의 구원과 자유를 만끽하겠다는 겁니다. 자유 즉 죄책감 없이 살겠다는 것이 요즈음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도대체 왜 내가 이 세상의 많은 교회 중에 이 교회를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하실 분이 있을 겁니다. 다들 불편하게 죄책감에 빠지게 하는 교회에 나오다니요. 우리가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조금 술도 마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성경말씀대로 따르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결과적으로 사랑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그런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면 이 성경에 있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하나님을 여러분은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규칙이나 섬겨야 할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자유가 됐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구원을 받을 때 저는 죄의 사슬에서 자유가 됐고, 예수님께 저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을 때 용서받았으며 전혀 자격이 없는 사람이지만 의롭게 되었습니다. 1967년 6월 4일에 이 일이 있고 난 후 “제 인생은 변했습니다.” 어떤 분은 나는 목사니까 그렇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그때 저는 목사가 아니었고, 어떤 희망도 없는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저희 교회에 나오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시인하고 전혀 인생의 변화가 없다면 아마 당신은 구원받지 못했을 겁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점검해 보십시오. 분명히 저는 이 세상에 예수님을 부르면서 자신의 마음에 영접하지 않은 수백, 수천, 수억의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들은 지옥행입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이여, 주의하십시오. 주의하십시오.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시며 또 여러분은 그분께 모든 것을 헌신하십니까? 오늘 본문은 모세가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이 씌어진 돌을 부순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모세가 가져온 돌에 십계명을 써 주시고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리니 그 땅을 점령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전하는 부분입니다. 이것을 현재의 상황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저희 교회 페어팩스 뱁티스트 템플은 우리가 사는 미국 버지니아 북쪽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것이 더 큰 명령으로 생각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신의 죄 때문에 지옥에서 영원히 불타면서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한 우리 교회의 임무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이 일을 할 것입니까? 자, 내가 구원받았으니 나에게 이러저러한 재능이 있어 이 일을 해야겠구나 하겠지요. 나의 친구들이여. 그런 식으로는 어떤 일도 못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성경 가르치는 매우 훌륭한 재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어떤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중에 심판석에서 계산이 안 될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일을 하나님 안에서 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을까요? 물론 여기 모인 분 중 99.9%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사랑한다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동의할 것입니다. 골프 치러 갈 수 있고 커피를 마시며 도넛도 먹을 수 있으나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물론 저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최선의 준비를 할 수 있을까요? 잘 들으십시오. 이것은 목사나 집사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께 대한 ‘전적인 헌신’(Total Committment to Him)입니다. 오늘 본문 12-13절을 보십시오. 이 구절은 간단히 말해서 ‘전적인 헌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그 생을 통해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를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생을 통해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는 구원을 받았고 침례도 받았으며 지옥에 가지 않으니 꼭 그렇게 헌신을 해야 하느냐는 얘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에는 너무 바쁘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부(All)를 원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 인생의 주(Lord)가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다른 예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나의 재능, 기술, 학식, 철학이 나의 주인이었으나 내가 구원받는 그 순간 예수님이 나의 주인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이것을 하지 않았으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제가 침례를 주었으니 괜찮다고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나 세계 어느 목사라도 구원받은 것 같지만 지옥으로 직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갖느냐에 따라 영혼은 결판이 납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인생의 ‘주인인가’ 아니면 ‘아닌가’ 입니다. 매우 간단합니다. 인생의 주인이 아니기에 수도 없이 많은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일상적으로 가볍게 여깁니다. 어떤 분은 그러한 성경 구절만을 끄집어내서 구원을 너무 엄격히 정의하는데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시겠지요. 육적인 재미, 세상적 쾌락, 영적인 즐거움도 가질 수 있고 동시에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구원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면 인생은 완전히 바꾸어집니다. 요즈음 너무나 많은 쓰레기 같은 신학으로 가르치는 신학교나 교회에서는 나의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신앙이라고 하는데, 제가 여러분께 분명히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여기 성경에 있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두렵고 성스럽고 고귀하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수긍하는 것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것에서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즉 모든 주의 명령과 그분의 법규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도 행위가 없으면 그것만으로는 죽은 것이니라.”(약2:17), “이는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위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기 때문이라.”(약2:26)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말하기는 쉽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완전히 바꾸어진 인생이 어디 있냐는 것입니까? 여기 계시는 많은 분들이 크리스천의 삶에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어려운 삶을 사는 것은 아직 크리스천이 아닐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최선을 다하나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쉽게 포기하는 것을 계속 보아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시인하지만 전혀 크리스천의 삶을 살지 않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주인이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는 일, 가는 곳, 행동, 생각 등 모든 것이 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교회, TV설교, 라디오 설교 등 쉽게 믿는 믿음을 봅니다. 여기서 길만 건너면 음주를 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예수님에 대해 어떤 사람에게 증언하였는데 즉시 그 사람은 ‘맞습니다’ 하고 담배연기를 뿜어냈습니다. 그것은 제가 믿는 하나님과 달랐습니다. 내 몸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도대체 그런 크리스천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10:32-33) 여러분은 예수님을 시인하십니까? 즉 예수님을 삶으로 나타내보이십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도 시인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께서도 부인하실 것입니다. “내가 땅에 화평을 보내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나는 화평이 아니라 검을 보내러 왔노라. 이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딸이 자기 어머니를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를 대적하여 불화하게 하려고 내가 왔기 때문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사람들이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내 뒤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10:34-38) 이제 알아들으셨습니까? 어느 누구도 예수님보다 더 높이면 예수님께 합당한 자가 아닙니다. 구원을 받으면 세상 것을 미워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욕망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가까이 오시리라. 죄인들아, 너희 손을 정결하게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순결하게 하라.”(약4:8) 여러분은 대부분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페어팩스 지방세도 잘 내시구요. 잘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매일 늦는다든지, 말도 안하고 직장에 나오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기침을 해서 직장에 안나왔다든가 하는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사람 때문에 여러분 중에는 더 일을 하신 분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언제까지 직장에 근무하게 하시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직장에서 쫓아낼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헌신은 어떻습니까? 저는 제 아내와 37년 전에 결혼할 때 죽기까지 같이 살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37년 간 아내에게 헌신해 왔고 앞으로 37년 간 죽을 때까지 저의 아내에게 헌신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 봅시다. 남자가 1년 365일 중 364일간 누구보다도 자기의 여자를 사랑하고 일년에 하루는 다른 여자를 생각하겠다고 하면 결혼이 성사되겠습니까? 그런 것에는 참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이런 것에 참으셔야 합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일주일 중 6일은 부모 말을 잘 듣고 집에 들어오는데 하루는 외박을 한다면 여러분은 그런 자녀가 자랑스럽겠습니까? 사탄은 제가 지금 말하는 것이 보수적인 근본주의자가 말하는 것이라고 할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도 이런 삶을 살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저도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제 설교를 들으시고 성경을 보시면서 여러분은 어떤 크리스천 삶을 살고 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단지 여러분 스스로가 생각하는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전적인 헌신의 삶을 살고 계십니까? 아직 크리스천이 아닌 분들은 한 가지 꼭 알아두십시오.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은 천국에 1cm도 가까이 가게 할 수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매우 위대한 삶을 살고 지옥에 직행하게 됩니다. 우리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의해서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사악하고, 죄로 가득하며, 비참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그보다는 좋은 사람이라고 하시겠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의는 더러운 누더기 같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는 그 자체가 죄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자기의 모든 죄를 뒤로 버리고 하나님을 주(Lord)로 삼고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마이어라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위대한 목사가 그의 목회의 아주 중대한 전환기에 쓴 것이 있습니다. 그의 목회가 열매를 못 맺고 자신이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행하지 못할 때였습니다. 그가 설교를 준비하는데 갑자기 예수님이 뒤에서 네 인생의 키를 내가 가져야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본 것은 아니었으나 현실적으로 느껴져 주머니에 있는 키를 집어 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것 외에 더 없느냐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아주 작은 키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의 모든 키를 다 주지 않으면 나는 너의 주인이 되지 않겠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여! 예수님이 여러분의 인생의 모든 키를 가지고 계십니까?
2009-05-02 17:14:12 | 관리자
예수는 정말로 하나님인가?   설교_버드 칼버트(Fairfax Baptist Temple 담임목사)/ 번역 김희섭 박사 오늘의 본문은 마태복음 22장 41-46절입니다. 봉독하는 동안 일어서 주시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누구의 자손이냐? 하시매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하니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면 어찌하여 다윗이 영(靈) 안에서 그리스도를 주라 부르며 이르되,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불렀은즉 어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 이후로는 감히 그분께 질문하는 자도 없더라.” 기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성경의 확실한 말씀으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저의 설교에 복을 주셔서 그리스도인은 이미 자기가 알고 있는 성경기록이 확실한 것을 알고 증거하게 하시고 아직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즉 아들이신 하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여 구원받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여러분의 인생 중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될 수 있는 것이 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그것은 “정말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신가?”라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는 전능하신 하나님인가? 즉 이 세상의 창조자인가, 아니면 단지 여러 신 중의 하나인가? 단순히 훌륭한 예언자인가?… 이 세상에서는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해 실로 다양한 견해가 있어 왔습니다. 철학시간에 논쟁의 제목이 되어 왔고 종교강의 시간에서도 논의되어 왔으며 인류학적으로도 여러 의견이 있어 왔습니다. 어떤 위대한 지식인은 이 질문에 “예” 라고 했고 또 다른 위대한 지식인은 “아니오”라고 했습니다. 어떤 종교 지도자는 확실히 그렇다고 했고 잘 알려진 종교 지도자는 부정하기도 했습니다. 유명한 시인 에머슨은 에수님을 이 지구상에 있었던 사람 중 가장 완벽한 분이라고 했습니다. 폴리온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람을 아는데 그 사람은 실제 사람이 아니었다’라고 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소설가 H. G. 웰즈는 ‘이 지구상에 지금까지 영원토록 가장 인상 깊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나사렛 예수라고 할 겁니다. 예수가 제일 먼저라는 데 저는 동의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도 예수라고 불리는 이 사람은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훌륭한 편견 밑에는 예수님이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은 선생이라든가 아니면 대단한 예언가라는 생각과 함께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의심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의심하는 자나 험담하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많은 종교가나 이단들은 훌륭한 예수님이 인본적으로 올바르고 인정이 많으며 특별한 재능을 가진 선생이지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즉 유일한 하나님, 전능한 하나님, 완벽하고 죄 없는 하나님이 아니라 좋고 올바른 사람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좋은 본보기가 되는 사람에 불과할 뿐이며 진정한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그는 지상 최대의 사기꾼이자 위선자일 것이며 따라서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이면 여기 모인 모든 사람 개개인은 누구나 개인적으로 여기 이 지상의 인생에서나 아니면 앞으로 다가올 인생에서 예수님과 계산(account)을 해야 할 것입니다. 즉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예수님 앞에 놓인 두 개의 심판석 중 한 곳에 서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심판석(judgement seat of Christ) 앞에 서게 될 것이며 구원받지 못한 사람 즉 예수님의 하나님되심(神性)을 의심한 사람은 크고 흰 왕좌 심판(great white throne judgement) 시에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전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주 그랬듯이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대언자의 옆에서 장사꾼들이 예배드리러 오는 사람에게 돈을 벌려고 성전에 탁자를 벌려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탁자와 의자를 뒤집어엎으시면서 마태복음 21장 13절에 기록된 것처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가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내쫓고 눈먼 자들과 다리 저는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후 베다니에 가셔서 하루 이틀 묶으신 후 다시 이 무리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각기 다른 네 가지 질문을 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질문을 마치자 예수님이 그들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41절과 42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누구의 자손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즉 와야 할 메시야가 누구냐고 그들에게 물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유대인의 혈통을 가진 그리스도를 아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곧 이사야가 말한 메시야는 누구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 대답을 알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즉시 대답을 했습니다. 메시야는 다윗의 혈통으로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러면 다윗이 왜 그리스도를 주라 불렀는가’라고 물으셨습니다. 잠깐 같이 생각해봅시다. 여기에 아들이 있는 분이 계실 겁니다. 아들에게 ‘주님, 저녁 식사시간입니다, 식사하시죠.’ 또는 ‘주님, 교회에 갈 시간이 됐습니다.’라고 말하시겠습니까? 즉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아들이라면 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겠느냐’라는 것입니다. 나는 내 아들 트로이에게 주님이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할 계획도 물론 없습니다.(웃음) 같이 시편 110편 1절을 보실까요.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처음의 주(LORD)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가르치며 하나님께서 메시야 곧 그리스도인 주(Lord)께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LORD)는 다 대문자로 그리스도(Lord)는 첫 글자만 대문자로 성경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는 것은 동등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다윗이 자기의 아들에게 주라고 말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미 밖에는 없게 됩니다. 그것은 주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시편 110편 1절은 예수님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지상에서 인간이었으며 또한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토론 후의 결과를 보면 46절에 있듯이 바리새인들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진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대하기가 두려워졌기 때문입니다. 즉 의사에게 나쁜 진단을 받을까봐 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인가 아니면 우리는 다른 메시야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십시다. 예수님은 다윗 왕의 혈통으로부터 오나 육신의 아버지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잉태하셨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처음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의 증인이 어떻게 잘못 가르침을 받는지 정확히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God) 앞에 부정관사 ‘a’를 더해 성경말씀을 변개시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여러 신(gods)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어에는 ‘a’ 같은 부정관사가 있다고 말하나 그리스어에는 부정관사는 없습니다. 정관사인 ‘the’를 쓰든지 아니면 본질을 말할 때는 요한복음 1장 1절과 같이 그냥 내버려둡니다. 여호와의 증인과 몰몬 그리고 다른 이단들은 예수님을 하나의 신(god)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말씀(Word)의 첫 글자(W)를 대문자로 한 것은 예수님을 뜻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이 세상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이라고 말합니다. 크리스마스 때 우리가 주로 이런 것을 이야기하죠. 그리고 15-18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같이 계시다가 그분을 드러내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2-28절을 보십시다. ‘나의 양은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야 곧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다’고 했고 ‘그들이 받아들이면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고 했습니다. 30-38 절을 봅시다. 30절에서 나와 내 아버지는 무엇이라고요? “하나(one)” 우리는 하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이십니다. 37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기 힘들면 내가 행한 일 즉 기적을 보고 믿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를 믿고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을 보십시오. 저는 단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에 대한 일부의 성경구절만 인용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3장 16절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디모데전서와 후서가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겁니다.(웃음)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신 것입니다(God was manifest in the flesh). 요점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장 1-8절을 보십시오. 히브리서는 한 권이므로 틀릴 수가 없겠네요.(웃음) 2절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3절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며 그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정확한 형상(express image)은 그리스어로는 한 단어입니다.? 이것은 ‘캐릭터’라고 발음하는데 즉 같은 품성, 같은 물질, 같은 영을 뜻합니다. 8절에는 “이 아들에게는 이르시기를, 오 하나님이여, 주의 왕좌는 영원무궁하오며 주의 왕국의 홀(忽)은 의의 홀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으면 어떤 인간이었을까요? 성스럽고, 말씀이 지금까지 최고이며, 인간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초자연적인 일을 하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낼 것이라고 추측하게 되는데 여태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 중에 예수님만이 이 조건을 만족시킵니다. 히브리서 4장 14-15절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위대하신 대제사장이 계시니 하늘들 안으로 지나가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시라.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을 굳게 붙들지어다. 이는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이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라.”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사람 중 죄 없는 분이 있습니까? 내가 죄 없다고 하면 바로 그것이 죄를 짓는 것입니다. 누구도 죄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밖에는요. 그리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해서 말씀하는데 하나님은 세 분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 아들, 성령님으로 구분합니다. 이 세 분을 성경은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3-17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매…”하나님 즉 신(神)이라고 하려면 어떤 조건을 가져야 할까요? 우선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오 아버지여, 세상이 있기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그 영광으로 이제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5)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둘 셋이 모여 있으면 그 사이에 같이 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이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29절에서 우물가의 여인에 대해 아신 것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모든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물위를 걸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죄를 사해주십니다. 우리 죄를 영원히 사해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우리에게 영적인 생명을 주십니다. 빌립보서 2장 5-7절을 보십시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을지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마음이라.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스스로 무명(無名)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예수님을 주(主)라고 시인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때는 너무 늦어 하나님과 영원히 떨어질 것입니다.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니라, 하였더라.”(행4: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능을 내게 주셨느니라.”(마28:18) 그리스도인이여, 오늘 아침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계십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구세주라는 것을 고백했으면 그분을 위해서 살고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그분을 증거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직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으신 분들이여,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면 그분과 영원토록 같이 삽니다. 기도합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예수님에 대해 확실한 성경기록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옵고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겐 오늘이 구원의 날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2009-05-02 17:13:29 | 관리자
무엇이 진리인가?   설교_버드 칼버트(Fairfax Baptist Temple 담임목사)/ 번역 김희섭 박사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18장 37-38절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그분께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냐? 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하는도다. 내가 이런 목적으로 태어났으며 이런 까닭으로 세상에 왔나니 이것은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고자 함이로다. 진리에 속한 자마다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시매 빌라도가 그분께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그가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로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지 못하였노라.” 기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시간 우리가 진리를 알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여기 모인 남녀노소 누구든 아직 확실한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찾게 해 주십시오. 오늘 본문을 같이 살펴볼 때 도와주시기를 바라며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진리를 완전히 알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도했습니다. 아멘. 오늘 본문은 17장에서 예수님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아버지께 간곡한 기도를 드리시고 난 후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밖의 겟세마네 동산에 나가셨는데 이 때 유다가 와서 예수님의 볼에 입맞춤을 하며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에게 누가 메시아인지를 말해 주었습니다. 수제사장들(chief priests)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그 무리는 예수님을 잡아서 재판에 넘겼습니다. 그리고 몇 번의 공판 후에는 유대를 통치하는 빌라도가 살고 있는 법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왜냐하면 이 종교 지도자들은 죄를 심판할 수 있었지만 형벌은 줄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빌라도는 그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에게 데리고 왔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29절에 보면 빌라도는 그들에게 무슨 일로 예수 그리스도를 고소하느냐고 물었는데 30절에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범죄자가 아니었더라면 당신에게 넘겨주지 않았을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31절에서 그들에게 예수님을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우리가 사람을 사형시키는 것은 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로마의 통치하에 있던 유대인들이 사람의 죄를 판결할 수는 있으나 사형은 시킬 수 없었고 형벌은 오직 로마법에 의해서만 가능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33절에서 빌라도가 다시 법정에 들어가 예수님을 불러, 네가 유대인들의 왕이냐? 하고 물으니 34절에서 예수님은 이것은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라고 되물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정말로 네가 왕이라는 것을 의심해서 묻는 것이냐, 아니면 남이 말하는 것을 확인하려는 것이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빌라도는 35-36절에서 내가 유대인이냐? 네 민족과 수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겨주었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를 유대인들에게 넘겨주지 아니하였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37절에는 제가 여러분에게 나누어 드린 유인물에 있는 것처럼 중요한 질문이 던져집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그분께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냐? 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하는도다. 내가 이런 목적으로 태어났으며 이런 까닭으로 세상에 왔나니 이것은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고자 함이로다. 진리에 속한 자마다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시매” 여기서 예수님은 두 가지 답변을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목적은 진리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며 진리에 속한 자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실로 이 세상에는 우리가 듣고 있는 다양한 소리가 있습니다. 각각 자기가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 울부짖고 있습니다. 제가 구원받기 전에 다닌 대학교에서 심리학과 교수님이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해 학생들에게 강의하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 분은 무엇이 옳은 것이고 틀린 것인지 즉 진리가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주려고 했습니다. 저는 그 교수님과 개인적으로 말할 기회가 있었는데 저는 그 분이 옳지 않은 방향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즈음에는 학생들이 교수들의 철학적인 강의를 들으며 토론하고 거기서 얻은 것을 옳은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지, 그게 진리로구나 하고요. 학생들은 교수나 학교 선생님, 목사나 종교 지도자 또는 잡지 등이 말하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가 예복을 입고 말하면서 자신이 말하는 것이 거짓말이라고 할까요?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이 매일 미국과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수많은 설교자들이 진리인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진리란 무엇인가요? 38절에 보면 빌라도도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 줄 수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군중들에게 너희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잠깐 여러분께 질문이 있습니다. 모든 철학 또는 종교가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까? 제가 아는 한 어떤 종교도 진리가 아닌 거짓을 말하려고 하는 데는 없습니다. 저희 교회에도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페어팩스 침례교회에서 어느 누구도 ‘우리 목사님은 거짓말만 합니다.’라고 얘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저의 책장에는 대학교 때의 철학 책이 그대로 있습니다. 여러분은 철학 책에서 모두가 진리를 발견하려고 하고 있고 실제가 무엇인지 알려고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종교 중에도 서로가 진리라며 경쟁이 있다는 사실도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려고 신학교에 다닐 때 저의 여동생 마지와 매제인 가이는 푸에르토리코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푸에르토리코에서 교대근무가 끝나고 스탠포드에서 석사를 하려고 가는 도중에 저의 여동생 부부가 제가 있었던 그린빌에 오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의 여동생은 구원받지 못한 자유주의자였습니다. 저와 제 처인 메어리가 하는 말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공항에 마중을 나갔는데 저는 가방을 날랐고 제 여동생은 7-8권의 책을 직접 가지고 갔습니다. 제가 살던 트레일러(역자 주:자동차가 끄는 이동주택, 주로 가난한 사람이 사용)에 도착했을 때 저는 여동생에게 그 책이 무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제 동생은 이 책들은 철학 책인데 자기는 이 철학 책에서 가장 좋은 철학적 관점을 골라내어 자신의 종교적인 철학관을 만들어 자신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왜 내 여동생이 이렇게 되어서 내 집에 와야 했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제 동생이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이었습니다. 제 동생은 그런 철학 책을 읽고 그 내용을 받아들이며 따르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와 며칠 동안 토론을 하고난 후 마침내 그 철학 책 모두를 옆에 치워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밥 존스 대학에서 영어교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변화였습니다. 빌라도는 진리를 발견하려고 했었고 진리가 바로 자기 앞에 있었으나 거부했습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진리란 무엇입니까? 어떻게 사람이 천국, 지옥, 죄, 구원, 인간성, 영원에 대해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 길이 진리라고 합니다. 저는 이 질문에 대해 제가 매주 일요일, 수요일에 하는 것처럼 성경 말씀으로 대답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진리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끌려가서 못 박히기 하루 전에 예수님은 성경에서 제일 긴 기도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이 그 기도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특별한 간구를 합니다. 14절에서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니이다.? 내가 기도하옵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악으로부터 지켜 주시라고 하는 것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내가 이 성경을 내 손에 가지고 있으면 나는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압니다. 성경의 이 페이지에 있는 것은 옳지만 다른 페이지에 있는 것은 틀리지 않았나 하거나, 성경에 있는 이야기가 사실인지 모르겠다거나, 기적이 실제로 있었던 것인가 하는 등등의 의심은 전혀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하루에 만들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우리 모두가 길고 긴 시간에 걸쳐 진화하여 바다 생물에서 진화하고 육지로 올라와 꼬리가 없어지고 지금 우리가 있는 것을 배워서 알고 있지 않은가 라고 사람들은 말할 겁니다. 정말 그런가요? 아니면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여자는 아담의 갈비를 취해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할까요? 저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서 말씀드립니다. 인간이 길고 긴 세월에 걸쳐 진화했다는 것이 태초에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보다 더 많은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경 아무 곳이나 펴놓고 이것도 저것도 모두 믿습니다. 왜냐하면 17절에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손에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절대적 진리인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인생의 성공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향하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 즉 천국, 구원, 거룩한 것 등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실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2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대속(代贖) 받은 것은 금이나 은같이 썩을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참으로 그분께서는 창세 전에 미리 정하여졌으되 이 마지막 때에 너희를 위하여 드러나셨으며 너희는 그분을 의지하여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은 너희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성령을 통해 진리에 순종함으로 너희 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없이 형제들을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 이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기 때문이라.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지속되나니 복음으로 너희에게 선포한 말씀이 곧 이 말씀이니라.” 성도 여러분!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고 우리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에 순종하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3일만에 부활하셨으며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는 것을 믿고 예수님께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여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확실하지 않으며 성경도 상대적이라고 합니다. 그럴까요? 시편 138편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마음을 다하여 주를 찬양하며 신(神)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 내가 주의 거룩한 전(殿)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와 주의 진리로 인하여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더욱 크게 하셨음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주의 이름보다 성경이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종교 책이 있으나 성경만이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탐구하며, 암기하고, 묵상하며 성경 속에서 걸어가야 합니다. 성경에는 영생, 인생의 삶, 구원, 삼위일체 하나님, 자녀 교육, 결혼 등 모든 진리가 있습니다. 이 진리는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천주교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만 모든 진리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저택들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너희가 알고 또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어찌 그 길을 알겠나이까? 하니” 도마는 예수님이 떠나면 어떻게 우리가 진리를 알겠냐고 불안해하면서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 자신이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고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진리인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놀랍게도 지금도 이 구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분명히 예수님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많은 종교 지도자와 주된 종교 교파에서는 아직도 성경의 진리에 대해 의심을 하며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눈먼 사람을 안내하는 눈먼 인도자가 너무 많습니다. 진리의 토대가 없으면 상상만이 남게 되어 추측만 계속하게 됩니다. 요즘에도 금요일 신문을 보면 종교 지도자들이 영원, 부도덕한 삶, 동성애, 여성의 인권에 기초한 낙태 등에 대해 논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으면 요즘 사회 문제에 대한 답이 나옵니다. 성경은 몇 천 년 전에 쓰여졌지만 오늘날에도 확실하게 적용이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 곳에 관해서는 저와 같은 설교자나 교회, 교파, 부모님 등이 말하는 것보다 더 확실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분명 성경에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진리는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4장 21절에 있는 것을 그냥 인용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0-32, 36절을 보아주십시오. “이 말씀들을 하시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믿더라. 이에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롭게 되리라.” 진리를 알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예수님을 알면 예수님이 여러분을 자유롭게 합니다. 제가 감옥소에서 전도할 때 죄수들에게 이 말을 하니까 죄수들이 금방이라도 풀려날 것 같아 흥분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여기서 자유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없이 잃어버린 상태란 마귀가 여러분을 완전히 동여맨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순간 마치 천사가 와서 자신을 감고 있던 쇠사슬을 풀어주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나는 전과 같이 죄의 노예가 아니라 완전히 자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진리이며 예수님이 진리입니다. 예수님만이 죄와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방법으로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종교적 방법, 교회 방법, 교파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 방법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 페어팩스 침례교회는 모든 행함에 있어 성경이 최종권위입니다. 저를 포함한 어떤 설교자도 성경 외의 것을 말하면 그것을 믿지 말고 성경을 믿으십시오. 그러나 실로 놀랍게도 오늘날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진리는 외면한 채 자기 교회의 교리를 굳게 붙들고 충성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34절을 보십시오. “이에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진실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부자, 가난한 사람, 학식이 많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아니면 그 중간 등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에 일어날 성경의 예언은 휴거입니다. 즉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7년의 대환난 전에 하늘로 들려 올라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8-12절을 보십시오. “그 뒤에 저 사악한 자가 드러나리니 주께서 자신의 입의 영으로 그를 소멸하시고 친히 오실 때의 광채로 그를 멸하시리라. 저 사악한 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권능과 표적과 거짓 이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수로 멸망하는 자들에게로 오는 것이니 그 까닭은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강한 미혹을 보내사 거짓말을 믿게 하시리니 이것은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 불의를 기뻐한 모든 자들로 하여금 정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앞으로 영원한 시간 동안 처참한 지옥에서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는데요.’ 하실 분이 있을 겁니다. 천만에요. 여러분은 얼마 동안의 시간을 가질지 모릅니다. 오늘 일요일 완벽한 건강을 가지고 있다가 우리가 수요일에 당신의 장례식을 치를 수 있습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진리요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 우리에게는 성경 외에 어떤 것도 진리, 구원, 영생을 가르쳐주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손에 들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계속해서 진리에 대해 논하고, 편집하고, 희석하고, 그것에 속아 넘어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서 지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진리가 아니라 승리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틀렸습니다. 진리가 중요합니다.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의 진리에 있습니다. 영원은 매우 긴 시간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기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안에 거하기를 기도합니다.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간절히 바라옵나니, 오늘이 그들에게 구원의 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이 오늘 다시 태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2009-05-02 17:12:50 | 관리자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설교_버드 칼버트(Fairfax Baptist Temple 담임목사)/ 번역 김희섭 박사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 16장 16-32절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러 가다가 점치는 영에게 사로잡힌 소녀를 만나니 이 소녀는 점치는 것으로 자기 주인들에게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는 자더라. 그 소녀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 주는 사람들이라, 하며 여러 날을 이같이 하거늘 바울이 근심하여 몸을 돌이켜 그 영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령하노니 그녀에게서 나오라, 하매 그가 즉시 나오니라. 그녀의 주인들은 자기들의 이득의 소망이 사라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에 있는 치리자들에게 끌고 갔다가 행정관들에게 데리고 가서 이르되,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인데 우리 도시를 심히 어지럽게 하며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아들이거나 준수하기에 합당하지 않은 풍습들을 가르친다, 하거늘 무리가 다 같이 일어나 그들을 대적하니 행정관들이 그들의 옷을 찢어 벗기고 때리라고 명령하여 많이 채찍질한 뒤에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그들을 단단히 지키라 하매 간수가 이러한 분부를 받아 그들을 안에 있는 감옥에 가두고 그들의 발을 차꼬에 단단히 채우니라.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께 찬양의 노래를 부르니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감옥의 기초가 흔들리고 즉시 문이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결박이 풀리니라. 간수가 잠에서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로 생각하여 칼을 빼어 자결하려하거늘 바울이 큰 소리로 외치며 이르되, 네 몸을 해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이에 간수가 등불을 달라 하며 뛰어 들어가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와서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그들이 이르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와 그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하니라.” 기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 저희들이 성경에서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지를 알고자 합니다. 특히 여기 모인 사람 중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해 그리스천이 아니거나 본인은 그리스천이라고 생각하나 마음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고 지옥에 거의 가 있는 사람에게 말씀하여 주셔서 구원을 받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제가 어려서 버지니아 알링톤(역자 주: 미국 국군묘지가 있는 곳)에서 살 때 저의 집 뒷마당은 바로 침례교회에 다니는 집의 뒷마당과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어머님은 저희 남매들을 데리고 뒷집 사람들과 같이 그 침례교회에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옆집은 루터교회에 다녔는데 저는 가끔 그 옆집 아이하고 같이 루터교회에도 갔었습니다. 또 길 너머에 있는 집은 로마 카톨릭 교도였습니다. 우리들은 그 길 건너 편 집이 다니는 성당을 특별히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당에는 제일 큰 주차장이 있어 자전거를 타기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당시 자연스럽게 종교다원주의적인 환경 가운데 있게 되었는데 아마도 여러분 중 많은 분들도 현재 그와 같은 환경에 처해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때 어린 나이이지만 ‘도대체 이 많은 교회들 가운데 누가 옳은 것인가?’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교회는 주유소와 같아 궁극적으로 같은 생산물을 내는 곳인가? 이름은 다르지만 어느 휘발유든 넣으면 차가 원하는 곳에 가게 되는 것처럼 교회도 단지 이름만 다른 것인가? 따라서 교회도 이와 같이 이름이 다르더라도 어디에 나가서든지 진심으로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않는가? … 저는 솔직히 여기에 계실지 모르는 몇몇 분들처럼 각 종교의 차이점을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관심도 없었습니다. 저는 저의 어머님과 달리 성경읽기와 같은 영적인 것보다 다른 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의 "구원(save)"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바다에서 구출해주었다(saved) 할 때는 rescue, 돈을 많이 벌어 놓았다(saved)할 때는 preservation, 사고의 위험으로부터 막아주었다(saved) 할 때는 deliverance 등의 의미로 saves(구원)를 쓰게 됩니다. 성경에서 오늘 본문처럼 쓰일 때는 우리를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지옥에 가는 것으로부터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엄청난 혜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이미 약속된 것으로서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완전히 종결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지옥이라는 영원토록 불타는 곳에 가지 않으며 천국에 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전적으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동료 신학생과 함께 거리에 나가 전도를 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주며 관심이 있을 천국에 대해 말하고는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는지를 알렸습니다. 10살쯤 보이는 소년에게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가는지 말하여 준 뒤 천국에 가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그 소년은 아주 싫다는 투로 “아니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계속해서 소년에게 권유하며 구원받기를 간청하며 한 번 더 물었습니다. 구원을 받고 언젠가 죽을 때 천국에 가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소년은 “물론이죠, 그렇게 하고 싶고 말고요, 저는 천국에 지금 가고 싶으냐고 물어보는 줄 알았죠.” 라고 대답했습니다.(웃음) 여러분, 천국은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또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그냥 우리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교회도 있으며,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살면 된다는 곳도 있고, 침례 받으면 된다는 교회도 있으며, 무언가 하면은 된다는 곳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맞을까요?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침례교, 감리교, 장로교, 카톨릭, 몰몬교, 펜타코스타교,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등 각각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넣는 것처럼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간은 달라도 어떤 종류든 휘발유만 있으면 되는 겁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의 길인가요? 본문에서 16절에 보면 그 소녀는 주인에게 사람들의 점을 보아주고 돈을 벌어주는 점치는 영에게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이 소녀 점쟁이는 내일은 비가 온다든가, 이렇게 해야 사업이 잘된다든가, 직장을 잃어버린다든가, 배우자와 싸울 것이라든가 등등 앞날에 일어날 일을 말해주고 주인에게 돈을 벌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녀는 며칠간 바울과 실라를 좇아다녔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 소녀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 주는 사람들이라, 하며” 즉 구원을 보여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소녀는 말하고 있습니다. 20-22절을 보십시오. “행정관들에게 데리고 가서 이르되,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인데 우리 도시를 심히 어지럽게 하며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아들이거나 준수하기에 합당하지 않은 풍습들을 가르친다, 하거늘 무리가 다 같이 일어나 그들을 대적하니 행정관들이 그들의 옷을 찢어 벗기고 때리라고 명령하여” 이들은 이방인들로서 유대인에게 인종 차별적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그 소녀에게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적은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감옥에 가거나 매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전에도 옥살이를 했고 40대를 맞아야 하는 매를 5번씩이나 맞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25절에 보면 그들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가두어졌지만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을 했습니다. 죄수들은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부르는 찬양소리에 깨어나 그들이 부르는 찬양을 듣고 있었습니다. 26절에는 거기 있던 모든 사람이 쇠사슬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7절을 보십시다. “간수가 잠에서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로 생각하여 칼을 빼어 자결하려하거늘” 즉 그 때는 로마의 법으로 간수가 죄인을 도망가게 하면 목숨을 잃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간수는 옥문이 열려 있어 죄수들이 도망가 자신도 사형에 처하게 될 줄로 알고 자결하려 했었습니다. 그러자 28절에서 “바울이 큰 소리로 외치며 이르되, 네 몸을 해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였습니다. 그 후 간수는 30절에서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라고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얻겠냐는 것입니다. 간수는 구원에 대해 갈망했습니다. 간수는 바울 일행이 종교적인 목적으로 이 곳에 왔고 점치는 영에게 사로잡힌 소녀에게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지를 말했기에 감옥에 왔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겠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구원이란 지옥을 면하는 것 즉 나의 죄의 형벌을 내가 물어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오늘 아침 우리가 종교적 또는 영적인 것에 대해 물을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답은 하나님께로 와야지 사람에게서 오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려면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라고 하면, “잠깐만, 성경 어디에 그런 구절이 있습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려면 어린이에게 영아세례를 주어야 합니다.”고 하면 “잠깐만, 성경 어디에 그런 구절이 있습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나오면 모든 게 잘 되고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 “잠깐만, 성경 어디에 그런 구절이 있습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31절에 보면 “그들이 이르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되어있습니다. 매우 간단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누군가 또는 어떤 것에 전적인 믿음과 신뢰를 두는 것입니다. 구원은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에 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새 의자가 있는데 견고하고 단단한 의자이므로 앉아도 될 겁니다. 어떤 이가 와서 의자를 보면서 의심이 있어 이 의자가 단단해 보이나 완전히 신뢰하지 못해 앉기를 주저할 수 있습니다. 즉 의자에 앉아도 나를 완전히 받쳐준다는 믿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원은 여러분이 무엇에 신뢰와 믿음을 두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간단하게 말하였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너무 간단해 사람들이 자주 복잡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훈련 즉 교회의 안내자, 성가대원, 주차요원, 주일교사 등과 같은 것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 대해 어떤 믿음을 가졌냐가 우리 모두의 삶과 죽음을 나눌 것입니다. 단지 지금 우리가 있는 시간뿐만이 아니라 영원한 삶과 죽음을 나눌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은 영원한 삶과 죽음 가운데 하나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 의거해 자신이 천국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며 어떤 이는 이것을 모르지만 우리는 그들이 지옥으로 직행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연옥도 있지 않습니까?”라는 분이 계시겠지만 그런 것은 성경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심장이 멎는 순간 천국으로 직행하든지 지옥으로 직행합니다. 시간은 끝나고 영원만이 남게 됩니다. 어디서 여러분들은 영원을 보낼 것입니까? 어떤 분은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30년간 제가 목회를 하면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사람들이 신뢰하는 것 중 하나가 그들의 목사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 모든 목사가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는지 가르쳐 준다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몇 년간 성경을 공부했으니 성경을 가르칠 수 있을 거야.”라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저 같은 목사나 가운을 입은 다른 목사나 모든 남자 목사들은 - 그런데 어떤 곳은 여자 목사도 있습니다. - 진심으로 여러분의 영혼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교회에 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매우 나쁜 가정입니다. 저와 같이 목회 하는 사람 중 마귀의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거짓 대언자(false prophet)”라고 합니다. 성경구절 중 눈먼 안내자가 눈먼 사람을 인도한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인본적인 사랑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나 성경말씀의 권위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경기록을 이해하고 있지 않고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위해 성경구절을 고릅니다. 거기에는 어떤 소망도 없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을 보아 왔고 그런 사람과 교제하지 않습니다. 목사라고 해서 성경대로 한다는 가정을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반드시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교회에 믿음을 둔다는 것입니다. 내가 다니는 교회가 나를 방황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 겁니다. 그럴까요? 여러분! 제가 확신있게 말씀드립니다. 이 나라 미국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가 - 외국에 있는 것은 제외하고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사람들을 방황하게 할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틀린 것인데요, 우리는 여태까지 이런 방식으로 잘 해왔다고 하면서 그것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목사님이 말씀하는 것과 우리 교회 방식을 잘 알며 또한 만족하고 있으므로 다른 교리 등의 문제에 끌어넣지 말라고 합니다. 또 다른 문제는 이성입니다. 합리적인 사람은 합리적인 하나님을 원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꼭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이성에 따라 행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이성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여러분의 이성이 하라는 대로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인간의 이성으로 항상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몸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구원은 여러분에게 이치에 안 맞는 것일지 몰라도 성경에 있는 사실임을 기억하십시오. 다른 하나는 가족의 전통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던 방식이므로 계속 그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직 아무도 진정으로 천국에 가는 구원을 받은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천국에 못 갈 것입니다. 제가 이태리에서 군복무하다가 제대하기 몇 달 전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해서 오늘 본문 31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도 믿고 아브라함 링컨, 토마스 제퍼슨, 모세 등도 믿었습니다. 그들이 존재하는 것도 믿으며 저와 우리 집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고 친구에게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을 보십시오. “네가 한 하나님이 계시는 줄 믿으니 잘하는도다. 마귀들도 믿고 떠느니라.” 어떤 분은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믿습니다. 마귀도 천국에 가냐고 묻는 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에 대해 대답하실 분 있습니까?(웃음) 우리 모두가 마귀가 지옥에 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귀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또한 그분을 더욱 알기에 떨고 있습니다. 마귀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러기에 구원은 머리로 믿는 것보다 더한 것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의자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다고 앉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전적으로 주님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그것이 구원인데 이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로마서 10장 9-1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것을 네 마음 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니라.” 즉 우리 죄를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어 구원에 이릅니다. 왜 구세주가 필요하냐고요? 죄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3장 22절, 에스겔 18장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두었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하심이라.” “그의 아버지로 말하건대 그가 잔인하게 학대하고 자기 형제를 폭력으로 노략하며 자기 백성 가운데서 선하지 아니한 일을 행하였으니, 보라. 그가 자기 불법 가운데서 죽으리라.”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어떤 분은 “십계명만 잘 지키면 될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실 겁니다. 여러분 중에 십계명을 지키고 사는 분이 계십니까? 제가 그 질문에 대한 답에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오늘 여기 계신 분 중 십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고요? 아무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법이 있는 것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죄인이고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침례(세례)를 받으면 죄가 씻어져서 괜찮다고 할지 모르나 이것도 정답이 아닙니다. 오직 성경이 최종권위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을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간수는 구원받은 즉시 가족에게 복음을 증거했는데 온 가족이 구원받았으며 그 후 함께 침례를 받았습니다. 침례는 구원받고 하는 것입니다. 침례는 천국 가는 것과는 무관하고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족에게 예수님을 증거하셨습니까?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가는지 말씀하셨습니까? 간수가 그랬다면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자기 가족의 영혼을 걱정한다는 것은 본인이 구원받았다는 좋은 증거입니다. 성경은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19절, 디모데전서 2장 4절, 사도행전 4장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아니하거니와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이미 정죄를 받았느니라.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니라, 하였더라.” 제가 말씀드리려는 핵심은 성경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간수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냐고 했을 때 그 대답은 아주 확실하고 명료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는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죄의 용서를 구하고 그러면서 예수님만이 나를 지옥에서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다가 침례나 내가 다니는 교회 또는 목사, 신앙고백 등 아무 것도 더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거기에 더할 수도 뺄 수도 없습니다. 많은 교회와 교파가 자기의 교리를 더하나 저는 오늘 아침 확실하게 성경에 의해 구원은 한 가지 길 밖에 없다고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성경에 의한 예수님만을 통해서입니다. 다같이 기도합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간수에게 사도 바울이 확실한 답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오늘 아침 우리 모두에게 각자 천국에 자기가 가는 건지 아닌지를 깨우쳐 주시고 아니면 천국을 소망하게 하여 주십시오. … 고개를 숙이고 옆 사람을 보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 자기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했고 자신이 천국에 가는 것을 가족, 친구 등이 알며 전혀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한 분은 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내려 주십시오. 손을 들지 못한 분, 구원받고 싶으십니까? 하나님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면 그 순간 용서를 해 주십니다. 오늘 아침 자기 인생을 생각하십시오.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고 싶은 분 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제가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구원받지 못했고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다. … 하나님, 여기 오늘 구원받지 못한 분들을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십시오. 구원받은 분은 우리에게 시간이 있을 때 주위사람에게 전도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2009-05-02 17:12:06 | 관리자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나요?   설교_버드 칼버트(Fairfax Baptist Temple 담임목사)/ 번역 김희섭 박사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8장 18-30절입니다. 어떤 치리자가 그분께 여쭈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으리이까? 하니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명령들을 아나니 곧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그가 이르되, 이 모든 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지켰나이다, 하매 이때에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예수님께서 그가 심히 근심하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이는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기 때문이니라, 하시니 이 말씀을 들은 자들이 이르되,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이까? 하매 그분께서 이르시되,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들이 하나님께는 가능하니라, 하시니라. 그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왕국을 위하여 집이나 부모나 형제나 아내나 자녀를 버린 자 중에서 이 현 시대에서 여러 배를 받고 또 오는 세상에서 영존하는 생명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기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 본문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여기 모인 사람 모두 하나님께 마음의 문을 열어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지 알게 해 주시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특히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오늘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구원의 날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지난 주에 주식이 약간 올라서 “내가 천국에 가기에는 너무 부자인가?”를 설교하기에는 지금이 아주 적절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여기 계신 여러분 중 돈이 너무 많은 분들에게 이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이 시간을 기다려 왔습니다. 여기 계시는 여러분처럼 돈이 많은 경우 돈을 어떻게 저축하고 어디에 써야 하는지, 즉 그 돈을 인생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돈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을 싫어하시겠지요. 그러나 세계의 기준으로 볼 때 우리들이 받는 봉급은 많으며 우리는 부자입니다. 저는 어떤 부자 동네에 있는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이 부자라고 말씀드립니다. 버지니아 북쪽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복을 받았고 부자인 것이지요.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하는 것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앞집 차고에는 차가 두세 대 들어가는데 우리 집 차고에는 겨우 한 대만 들어간다든가, 집이 자기 집이 아니라든가, 골프클럽이 유명상표가 아니라든가, 차가 중고차라든가, 돈이 적다든가 해서 상대적으로 빈곤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부자입니다. 그런데 부자라는 사실이 천국에 가는 것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이 만약 전세계 대부분의 사람이 살고 있는 곳 소위 제 3세계에 가보시면 여기서 작은 아파트에 살아도 부자라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가기에는 내가 너무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인가요? 잠깐 빌 게이츠를 생각해 봅시다.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490억불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옥에는 너무 돈이 많아 온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그 중의 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잠깐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버지니아 북쪽 곧 매우 발달되었고 복잡한 장소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에서 매우 교육수준이 높은 곳에 살고 있으며 자원, 기술, 권력 등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도시(역자주: 미국의 수도 워싱톤) 옆에 살고 있는데 아마 여러분 중 일부는 그런 권력의 자리에 앉아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미국의 어떤 곳보다도 가족당 수입이 제일 높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곳에 도달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이른 것입니까? 이것은 마치 길을 잃은 비행기 조종사가 착륙했지만 그 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오늘 연관된 성경기록들을 살펴보면서 “내가 천국에 가기에는 너무 부자인가?”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얻고자 합니다. 본문에서 젊은 치리자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물위를 걸으셨고 빵 몇 조각으로 수천 명을 먹이신 것을 알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역시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 대한 지식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그는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요즈음 많은 사람들처럼 예수님에 대해 들었으나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 관심을 표명했는데 그 마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19절에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라고 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믿지 않는다면 나를 선한 선생님이라 부르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울러 ‘나는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생명은 영원합니다. 즉 천국에서 영원하든지 아니면 지옥에서 영원합니다. 요한복음 5장 28, 29절을 보십시오. “이 말에 놀라지 말라. 이는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다 그분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기 때문이니 선을 행한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악을 행한 자들은 영벌(永罰)의 부활로 나오리라.” 구원받은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오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불못에서 영원히, 영원히 탈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문제는 ‘이 영원한 시간을 어디서 보내느냐’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주제입니다. 누가복음 16장 19~24절을 보십시오. 이 부자는 자기와 같은 부자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는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어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지내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하는 어떤 거지는 헌데 투성이로 부자의 대문 앞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고자 하더니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 의해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겨지고 그 부자도 죽어 묻히게 되었더라. 그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이는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기 때문이니이다, 하거늘” 네! 영원한 삶은 벌써 완성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 부자와 같을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성취했습니다. 주식에서 돈을 벌었고 돈을 잘 투자하며 직장에서도 잘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영생을 천국에서 보낼 수 있습니까? 어디서 영원히 살 것이라 생각합니까? 여러분은 이 예수라는 사람과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또 성경과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 누가복음의 말씀은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가 받는 정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젊은 치리자는 ‘내가 무엇을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많은 버지니아 북쪽에 사는 사람들도 같은 생각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냐고 할 것입니다. 혹은 나는 천국에 가기 위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대개 사람들은 영생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의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가 낫다고 착각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지요.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한 일 중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재어서 좋은 것이 많으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들은 “어쨌든 나는 교회나 자선기관 또는 가난한 사람에게 많이 기부를 했으니까요. 그래서 보상이 있겠지요.”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20절에 있는 것처럼 “네가 명령들을 아나니 곧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 치리자는 나는 이런 것들을 어려서부터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신다는 겁니다. 저도 여러분의 마음을 모르고 여러분도 저의 마음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저의 어제, 오늘, 내일 제가 무엇을 할지 아십니다. 이 젊은 치리자는 세상의 것에 마음을 두고 있었으며 그의 영혼은 예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보다 세상의 물질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양쪽을 다 가지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도 쉽게 이 치리자처럼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비교적 좋은 사람으로서 가난한 사람과 자선기관에도 돈을 준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 ‘나는 내가 목적한 바를 이루었고 나는 내 기준으로 성취한 사람이다’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죽을 때 여러분이 어떠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후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선택은 살아 있을 때에라야 가능합니다. 곧 지금이 선택의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질투심이 많은 분이시기에 여러분과 같이 왕좌를 공유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갖고 있던 재물과 지위를 공유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왜냐구요?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나의 재물도 섬겨 돈을 더 많이 벌고 더 높은 지위도 얻자’는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결코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크리스천 가정에서 자라난 젊은이들조차도 학교를 졸업하면 돈을 얼마나 벌지에만 관심을 보이는데 스포츠 스타처럼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든가 고기술로 돈을 많이 벌겠다고 하는 모습을 볼 때 정말로 슬퍼집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이라면 여러분은 100% 인생의 실패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인생을 그런 식으로 즐기면서 행복하겠다면 그 인생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21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는 육신은 성령을 거슬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거스르기 때문이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色慾)과 우상 숭배와 마법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미리 말하노니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로마서 3장 19~20을 보십시오. “이제 우리가 알거니와 무엇이든지 율법이 말하는 바는 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모든 입을 막아 온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유죄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육체가 없나니 이는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기 때문이니라.” 율법으로는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습니다. 구약의 법은 우리가 죄인임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구약에는 수백 개의 율법이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훈육선생이 되어 우리가 죄인임을 알게 해 줍니다. 율법은 지켜서 천국에 가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에 이르기에 얼마나 부족한지 알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율법을 통해서 얻을 수 없습니다. 단 티끌만한 죄가 있어도 모두 율법의 죄인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영혼멸절설(annihilation)은 거짓말입니다. 죽는 순간 천국 아니면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본문 22, 23절을 봅시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예수님은 그 치리자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네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서 나를 따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딱 한 가지만을 더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치리자는 예수가 내 재산을 다 망쳐놓겠다는 생각을 하여 예수님의 요구에 불응했습니다. ‘나는 조금은 내놓을 수 있으나 전부는 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가 가진 것을 다 팔고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는 걸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치리자의 마음을 꿰뚫으셔서 그 재산이 그에게는 전부였다는 것을 아시고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이는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기 때문이니라, 하시니” 우리들 자신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인간적으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힘든지요. 저는 부자는 쉽게 자기 재산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가진 것으로 인해 이 세상과 더불어 장님이 되는 거지요.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한 가지 조건은 그 치리자로 하여금 영생을 얻을 때 자기가 가진 것을 다 팔아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다 아시므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요즈음 사람들이 딱 한 가지에 집착하고 매달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 놀라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를 천국에 가도록 하시기 위해 딱 한 가지 요구를 하시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돈이 많지 않은데요.”라고 하시는 분이 계실 겁니다. 네, 돈은 없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예수님께서 현재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한 가지만을 요구하셨을 때 우리가 그것을 거절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딱 한 가지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모셔 들일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어떤 사람에겐 이 한 가지가 자기의 자존심(pride)일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내가 무엇 때문에 굴복하냐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에겐 그 한 가지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적 배경에 대한 충성심이 될 수 있습니다. 침례교라는 타이틀이나 어떤 신앙고백, 또는 막연히 자기가 속한 교파에 대한 애착심이나 자기 부모가 속한 종교에 대한 애정 등으로 자신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은 종교 형식이나 침례/세례 행위, 또는 감리교, 카톨릭, 장로교 등등의 교파와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오직 구원은 예수님과 어떤 관계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인생을 결정짓게 될 것입니다. 또 어떤 이에게는 그 한 가지가 돈이 될 수 있습니다. “내 돈이 나를 떠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는 고백을 하는 이들이 분명 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5절을 보십시오. 돈이 많은 사람에 대한 경고인데 저희 같이 버지니아 북쪽에 사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자 이제, 너희 부자들아, 앞으로 너희에게 임할 비참한 일들로 인하여 슬피 울며 울부짖으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부식되었으니 이 녹이 너희를 대적하여 증거하며 불과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마지막 날들을 위하여 재물을 모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서 곡식을 거둔 품꾼들의 품삯 곧 너희가 사기(詐欺)쳐서 감추어 둔 품삯이 소리를 지르며 곡식을 거둔 자들의 울부짖음이 만군의 주의 귀에 들리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쾌락 가운데 살며 방탕함에 빠져 살육하는 날에서와 같이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부자가 쾌락과 방탕함에 빠져 살육하는 날에서와 같이 그들의 마음을 살찌게 했다는 겁니다. 저는 겁주려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깨어 있고 경고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돈을 더 벌려고 일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구원을 받았는데요.’라고 하실 분이 계시겠지요. 그런데 돈이 여러분에게 어떤 가치가 있습니까? 왜 일을 하십니까? 야고보서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어떤 이에게 그 한 가지는 특별한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죄를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 중 제가 볼 때에 제일 바보스러운 그 한 가지는 거짓교리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참된 구원의 길을 듣고 나서도 그런 것이 구원이라면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라면 그런 거짓교리를 믿는 사람이 오히려 저더러 바보라고 해도 구원을 받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 하든지 상관없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그리스도인이고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들은 자들이 이르되,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이까? 하매” 구원이란 우리가 우리의 죄의 형벌로부터 받는 구원을 말합니다. 가난한 것을 저주라고 하는데 가난은 불편할 수 있으나 저주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때 유대인들은 가난을 저주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가난한 사람은 구원 못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부자도 구원을 못 받는다고 했으므로 그러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받겠냐고 한 것입니다. 인간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나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이르시되,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들이 하나님께는 가능하니라, 하시니라.” 누구도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권능,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자신은 마음으로 결정했다고 하나 마귀에 속아 구원을 받지 못하였는데도 구원받았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서 “천국에 들어가고 싶은데요.”라고 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였노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제가 믿기로 작정한 것을 모르시나요?” 라고 하겠지요. 저는 그때 예수님을 믿겠다고 결정한 사람이지만 구원받지 못하게 될 사람이 수백만은 족히 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구원을 받겠다며 자신의 죄를 고백했지만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하나님께 드리지는 않았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마음을 모릅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믿음과 신뢰를 두었는지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1년 전에 그런 결정을 했는데요.’ 하실 분이 계시겠죠. 저는 그 결정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후 여러분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냐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인생이 바뀌지 않았다면 아마 여러분은 구원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맞습니까? 새로운 피조물로서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만약 모든 것이 바뀌지 않았다면 아마 구원이 아닌 다른 결정을 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를 믿겠다고 결정했다든가, 자기의 재산을 전부 기부하였다든가, 고등학교나 대학교 때 기독교 계통의 학교를 다녔다든가, 정해진 기도를 반복한다든가 하는 것들은 전혀 구원과 무관합니다. 천국에 가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이 여러분의 인생에 임할 때에만 가능해집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은 예수님이 갈보리에서 끝낸 사역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려면 구세주가 절대 필요한 것을 인정하고서 우리의 부도덕하고 사악한 죄에 대해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능을 주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모든 것을 바꿉니다. 머리에서 마음 곧 심장으로 30cm를 가서 “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믿습니다. 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믿습니다. 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묻히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살아 계시며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을 믿습니다. 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며 저의 유일한 소망이심을 믿습니다. 만일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데도 자기 삶 속에 변화의 증거가 없다면 아마 여러분은 구원을 받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돈을 모으고 권력을 가지고 인생을 즐기면서 자기가 생각하기에 바르게 살면 된다는 분도 계시겠지요. 그렇지만 그러한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이 젊은 치리자처럼 자기 영혼을 이 세상의 쾌락에 파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구원받기 전에는 죽은 영혼입니다. 죽은 사람은 일어나서 구원받고 싶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권능으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얕잡아 볼 것 같아 구원받은 체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영양가가 전혀 없습니다. 어렸을 때나 혹은 성인이 되어서 결신(決信)을 했다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그것도 당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의 선한 삶을 살아간다면 언젠가 영원이 당신을 찾아 왔을 때 영원히 천국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확실한 성경기록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여기에는 젊은 치리자처럼 구원의 길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을 오늘 구원해 주시옵소서. … 다 같이 머리를 숙이고 옆 사람을 보지 말아 주십시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인 후 삶이 변화되어 확실히 구원받았다는 것을 확신하는 분 손을 들어 주시겠습니까. 내려주십시오. 여러분 중 일부는 손을 들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여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싶은 분 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제가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손을 든 한 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오늘이 그의 구원의 날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자신의 자존심과 종교적 신념을 버리고 구원받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2009-05-02 17:11:21 | 관리자
우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을 수 있는가?   설교_버드 칼버트(Fairfax Baptist Temple 담임목사)/ 번역 이경선 자매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을 수 있을까요? 비를 멈추거나 혹은 내려 달라고 기도했는데 응답 받지 못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제가 가장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은 “목사님, 제 휴가 중에 날씨가 쾌청할 수 있게 기도해주세요.”라는 기도 부탁입니다. 제발 이런 기도 부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 휴가 중에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왜 여러분의 휴가 중에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런 기도들이 응답 받지 못했을 때, 마치 제가 영적으로 깊이가 없는 것처럼 비춰지기 때문에 그런 기도 부탁은 멀리하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말씀은 욥기21장 7-16절입니다. “어찌하여 사악한 자가 살아남고 늙도록 지내며 게다가 권세도 강하냐? 그들의 씨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그들의 후손도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러하구나. 그들의 집은 두려움에서 벗어나 안전하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황소는 새끼를 낳되 실패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암소는 새끼를 낳되 유산하지 아니하는구나. 그들은 자기의 어린것들을 양떼처럼 내보내고 그들의 자녀들은 춤을 추는구나. 그들은 작은북과 하프를 들고 오르간 소리에 기뻐하며 자기의 날들을 풍요롭게 보내다가 한 순간에 무덤으로 내려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께 이르되, 우리를 떠나소서. 이는 우리가 주의 길들 알기를 원치 아니하기 때문이니이다. 전능자가 무엇이기에 우리가 그분을 섬겨야 하리이까? 우리가 그분께 기도한들 무슨 유익을 얻겠나이까? 하는구나. 보라, 그들의 선함이 그들의 손 안에 있지 아니하니 사악한 자의 계략은 내게서 매우 멀리 있도다." 기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 저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기를 원합니다. 기도로부터 커다란 유익을 얻게 하시고, 여기 모인 사람들의 마음에 깨달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만약 이 중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오늘 구원받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은 기도의 중요성과 유익함을 깨닫게 하시고 그것이 그들에게 격려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희에게 복을 내려주시기를 바라오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아마 여러분께서는 욥이 신실한 사람이었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존경했었고 거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욥은 부자였으며, 양 칠천 마리, 낙타 오천 마리, 소 오백 마리, 당나귀 오백 마리와 종들을 소유했었고 그 마을의 누구보다 더 많은 재산을 소유했었습니다. 그는 슬하에 7남3녀를 두었었고, 무엇보다 더 그에게 가장 소중했던 것은 자녀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남부러울 것이 없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소유하지 않은 게 있었더라도 그가 원하면 언제라도 구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재앙들이 닥쳤습니다. 사탄이 과연 욥이 신실한 자인가를 시험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도적과 살인자 무리들이 그의 종들을 칼날로 전부 몰살시켰습니다. 그런가하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양떼와 종들을 태워 버리고 낙타들을 끌어갔습니다. 욥이 겪은 재앙들을 월(Wall) 증권가의 주가 하락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사면초가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의 자녀들이 맏아들의 집에 모여 흥겹게 연회를 즐기던 중에 거센 바람이 불어와 집이 그들 위에 덮치고 폭풍에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그를 위로하기 위해 황급히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위로는 자신들의 견해에 기준한 것이었으며, 그들은 형편없는 위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난국에 직면한 상처받은 친구를 전혀 배려하지 않았으며,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도리어 비난자가 되어 이런 재앙들이 닥친 것은 욥의 삶 속에 있는 온갖 사악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손대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욥기를 통해서 우리는 욥의 친구들의 비난과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어떤 이들에게 재앙이 닥치면 그들이 사악하고 죄악에 물든 삶을 영위했기 때문이고 그들 안에 내재한 죄들은 하나님만이 아시고 결국 그분께서 그들 삶에 개입하셔서 보응하신다고 짐작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악함과 불경건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진노를 퍼부으신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욥의 친구들은 그를 이런 식으로 처우했습니다. 그들은 욥에게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고 오히려 왜 이런 일이 야기되었는지와 욥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지적했습니다. 그러자 욥은 본문에서 보시다시피 그들로부터 신랄하게 비난을 받은 후에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을 방어하고자 했습니다. 제가 이미 말씀 드렸듯이, 욥의 친구들의 이론이란 이런 끔찍한 일들이 야기된 것은 틀림없이 욥의 삶 속에 있는 죄들 때문이고 모든 게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생각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욥기 20장 5절에 잘 함축되어 있습니다. “사악한 자의 승리는 잠시뿐이요, 위선자의 기쁨은 잠깐뿐이니라.” 다시 말하자면, 소발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네를 잘 알고 있네. 자네는 부유했고 어마어마한 외양간과 온갖 가축들을 소유했었으며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지만 하나님께서 자네 삶에 손을 대신 것을 우리가 목격했네. 자네의 모든 재산을 걷어 가셨고 무너뜨리셨으며 전부 빼앗아 가신 거라네. 자네에게 잠시 성공이 있었으나 사악한 자의 성공은 잠깐이요, 위선자의 기쁨은 잠시뿐이라네. 욥, 모든 게 다 끝났네. 자, 이제 깨끗이 자백하는 게 어떤가? 자네의 죄들을 말해 보게.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바로잡게나.” 본문에서 욥은 그들의 이론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반박합니다. 재앙이 닥친 것은 욥의 삶 속에 만연되어 있는 죄 때문이라고 하는 친구들의 주장에 대하여 욥은 수많은 사악한 자들이 사악함 속에서도 번성한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사악한 자가 살아남고 늙도록 지내며 게다가 권세도 강하냐?’ 즉 욥은 다음과 같이 응답하는 것입니다. “보게나! 내가 알고 있는 수많은 사악한 자들이 형통하고 권세를 누리다가 늙어 죽는다네. 그들의 씨가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또한 그 씨의 후손 역시 그렇다네. 그들은 자녀도 많고 또한 그 자녀들이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네.” 9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집은 두려움에서 벗어나 안전하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에게 임하지 아니하며” 그들이 평안한 삶을 누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이 말합니다. “보게나! 내가 알고 있는 수많은 사악한 자들이 불경건한 삶을 영위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재앙도 닥치지 않는다네. 그들이 사악하나 바람이 그 집을 덮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매도 임하지 않는다네. 사악한 자의 성공과 위선자의 기쁨은 잠시라고 자네가 말했지만, 이번만은 자명한 이치와 걸맞지 않네. 그 이치가 맞을 때도 있지만 항상 맞는 것은 아니라네.” 13절을 보십시오. “자기의 날들을 풍요롭게 보내다가 한순간에 무덤으로 내려가느니라.” 욥은 많은 사람이 늙으면 죽음이 임박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아프고 병들어 오랫동안 병석에서 고생하지 않더라도 때가 되어서 죽고 삶을 마감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비록 사악한 자들이었을지라도 죽는 것은 측은한 일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께 이르되, 우리를 떠나소서. 이는 우리가 주의 길들 알기를 원치 아니하기 때문이니이다.” 즉 사악한 자들은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없소. 남들처럼 잘 살고 있는데 하나님이 왜 필요하겠소?”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전능자가 무엇이기에 우리가 그분을 섬겨야 하리이까? 우리가 그분께 기도한들 무슨 유익을 얻겠나이까? 하는구나.” 여러분 성경 15절에 밑줄이 쳐 있지 않다면 줄을 치시기 바랍니다. 욥은 말합니다. “사악한 자는 이렇게 말하고 그것이 바로 그들이 삶을 영위하는 방식이라네.” 다시 말해 사악한 자는 “ 당신이 섬기는 하나님이 누구요? 왜 내가 하나님을 섬기며 시간을 낭비해야하오? 나는 보다 큰 일,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하오. 이봐요! 기도가 뭐 그리 대수로운 거요? 왜 기도를 해야 하오?” 라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내가 옆의 사람만큼 혹은 그보다 더 많은 부(wealth)를 축적했고, 늘 기도하고 주일성수 잘하는 저 그리스도인 못지않게 아름다운 저택도 지니고 남들 가진 만큼 나도 가졌는데 도대체 기도해서 얻는 게 뭐야? 하나님께 기도해서 얻는 게 무엇이기에 굳이 기도를 해야 하지?” 방금 우리가 읽은 구절에서 보셨듯이 실제로 이런 사람들은 기도를 경시하는데 어떤 때는 우리도 이들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기도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무시하고 기도하지도 않으면서 기도를 경시합니다. 과연 기도가 유익한가요? 그렇다면 왜 우리의 기도가 어떤 때는 응답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저는 오늘 여러분께 기도의 장애에 관해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오늘의 주제인 기도에 관해서 설교하는 이 시간 만약 여러분께서 정직한 분이라면 마음에 가책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제 생각에는 오늘의 주제는 마치 ‘하나님을 사랑하기’라는 주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에 완벽하게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믿음으로 더 채워져야 하고 더 열심히 기도생활을 해서 우리 자신을 채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월남 전쟁에서 간절히 기도한 의미가 무엇일까요? 아마 여러분께서는 월남전에서 많은 병사들이 참호 안에서 기도를 했다는 말을 들으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전사했거나 포로가 되었고 어떤 이들은 생존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봅시다. 누군가 돈이 필요해서 기도했다면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다 필요가 채워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기도해야 하나요? 그리고 왜 응답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기도의 여러 가지 장애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것에 관해 언급하고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장 2-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욕심을 내도 갖지 못하고 죽여서 갖고자 해도 얻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워도 갖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했기 때문이라.”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잘못 기도했고, 또 우리의 정욕에 쓰려고 구했으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동기를 아십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는 응답을 받고자 하는 바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마음의 동기를 아시고 기도하는 이유를 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기도가 아닌 잘못된 방법으로 구하거나 바른 마음과 동기로 기도하지 못하고 이기적으로 기도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가장 권능있는 기도는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입니다. 자신보다는 남을 위한 기도들이 최상의 기도입니다. 잠깐 주제를 벗어나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혹시 제 말씀으로 인해서 화가 나더라도 강대상에 물건을 집어던지지 말아 주십시오.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서적이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분들이 그 책을 읽으셨을 것입니다. 이 책의 문제점은 자기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게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기도할 때 제 자신에게 초점을 두지 않습니다. 여러분, 저 역시 제게 복을 주십사고 기도할 수 있으나 저는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 문제, 고민들을 해결해야 하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중요한 계약권을 따게 해달라든가 혹은 지난 주 증권 시장의 주식 하락을 만회할 수 있게 이번 주는 주가가 오를게 해달라는 등등, 주님께 이런 기도는 하지 맙시다. 제 말씀은 우리의 욕구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여야 합니다. 둘째로 기도의 장애는 연약한 믿음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1장 2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야고보서 4장 2절에 여러분이 갖지 못함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부족합니다. 또 우리는 간혹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거지?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신다는 건가? 퇴직금과 전 재산이 다 날아갔는데 무슨 뾰족한 방도가 있다는 건가?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신 일을 보라구!”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갖고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월 스트리이트(Wall Street)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건 나하고는 무관한 일이야. 나는 오직 예수님만 신뢰할 거야. 다 잘될 거야.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의 어려움을 방관하시지 않는다고 약속하셨으니까…“ 바로 이것이 하나님 말씀에 있는 약속입니다. 지금 당장 부유하지 못하고 언젠가 부유하게 살고 싶겠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기도하면 될 텐데 왜 근심하는가?” 아니면 ”그렇게 전전긍긍하면서 기도는 왜 하는가?”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삼가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하는 장애 요소는 가정 안의 문제들 때문입니다. 베드로 전서 3장 7절을 보십시오. “남편들아, 이와 같이 너희도 지식에 따라 아내와 동거하고 그녀를 더 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을 자로 여기고 존중하라. 그리하여야 너희 기도가 방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교회에 오시는 길에 아내를 화나게 했거나 무례하게 대했습니까?? 혹은 아내에게 무관심했거나 아내에게 용기를 주지 않고 세워주지 못했으면 여러분의 기도가 응답 받으리라고 추호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저와 제 아내는 교회 오는 길에 다툰 적이 없습니다. 물론 각자 자기 승용차를 타고 왔지만 그런 연유로 따로 오는 것은 아니고 실상 교회 오는 길에 다툰 적이 없습니다. 우리들의 가정에 문제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내와 아이들에게 집안 일로 짜증내고 고함치면서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했다면 그 기도는 방해 받게 될 뿐더러 절대로 응답 받을 수 없습니다. 가정의 문제들을 은폐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모든 게 잘되리라는 착각은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문제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넷째는 하나님께 자백하지 않은 죄들 때문입니다. 이사야 59장 2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 불법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분의 얼굴을 돌려 너희에게 숨겼으므로 그분께서 듣고자 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러분의 죄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게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지 않게 됩니다.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했는데 응답 받지 못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자백하지 않은 죄들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마음을 찌르시고 흔드십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출석해서 성경을 펴고 기도하고 다른 교인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도 물론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선 여러분의 모든 죄를 전능하신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여러분께서 죄들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죄들로 인하여 여러분을 징계하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죄 안에도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가 전혀 응답 받지 못한다고 생각해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제가 언급했던 네 가지 이유를 주목하십시오. 그 네 가지 이유들이 성경이 열거하는 것들이고 바로 그 일이 당신의 삶에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면 거듭나지 못한 여러분의 이웃들 또는 친구들과 그리스도인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우리들의 기도가 과연 힘이 있을까요? 아니면 우리의 힘으로 해결해 보려는 무익한 시도를 할 것인가요? 욥기 1장 말씀이 제 첫째 답변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내일을 살아가는 데 용기를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용기를 주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요? 욥기 1장 19절을 보십시오.? “보소서, 광야로부터 큰바람이 와서 그 집의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집이 그 젊은이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하더라.” 욥은 폭풍에 자녀들을 모두 잃었고 그가 소유했던 것들과 재산도 모두 잃었지만 그는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말하기를 ”주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욥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어떤 것인가를 그때 배운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갖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 깨달은 것도 아닙니다. 욥과 하나님의 관계는 절대 가볍지 않았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명확하게 알고 있었고 믿음과 용기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기도하는 생활이 그런 와중에도 그를 기도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저는 어떻게 그런 상황에 기도할 수 있었을까 상상이 안됩니다. 바로 이런 생각이 저의 연약한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겠죠. 저는 욥처럼 어려움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과연 여러분께서는 그런 상황에서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중에도 그런 어려운 상황에 처해 너무 고통스럽고 다 포기하고 싶은 심정인 분들이 있다면 욥이 용기가 될 것입니다. 이런 끔찍한 일들을 겪은 후에도 욥을 기억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또 요셉은 어땠습니까? 그가 겪은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는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기도는 그가 원한 대로 즉시 응답 받지 않았습니다. 여하튼 우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는 때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기도 하죠. “주님, 제게 인내가 필요한데 지금 당장 주세요.” 그러나 이런 기도는 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주님, 제 삶에 직면한 문제가 잘 풀리게 해주세요. 제가 모든 상황들이 잘 해결될 수 있기를 기도해 왔습니다. 저는 주님을 신뢰합니다. 제게 무엇이 최선인지 주님은 아십니다.”라는 기도를 하십시오. 이런 기도는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두살박이 아이가 부엌에서 노는데 예리한 칼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아이가 그것이 새로운 장난감인 줄 알고 신나서 칼을 집어들고 놀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아마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아이의 손에서 칼을 빼앗을 것입니다. 칼을 빼앗긴 아이는 목을 놓아 울면서 엄마를 원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엄마는 아이에게 무엇이 최선인 줄을 알았기에 그렇게 하였던 것이죠. 하늘에 계신 아버지 역시 우리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아신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중에 역경과 고난을 겪고 계신 분들이 있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심오한 기도 생활을 해보십시오. 왜냐하면 기도가 여러분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기도가 나라를 용서받게 하고 백성들을 용서받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역대기하 7장 14절을 보십시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자기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자기를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 땅을 고치리라.” 만약 미국 국민들이 이 나라가 번영하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로 회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기를 온 나라, 온 국민이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이 나라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여러분이 고대하는 특정한 정부가 아니라 바로 영적 부흥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남녀노소가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를 수호할 거야. 나 혼자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힘입은 나이기에 예수님을 증언하는 삶을 살아야 해”라고 말해야 합니다. 온갖 낙태, 범죄, 간음, 이기심, 부도덕과 불경건함 또 많은 불법들이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들을 멸망시킨 것같이 이 나라를 망하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까지 우리의 죄를 관망만 하시지 않고 손수 개입하셔서 부수어서라도 우리를 멈추시고 그분께 회심시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용서를 받게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더욱 강도 있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 권능이 있나요? 그렇고 말고요. 만약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권능이 임하기를 원한다면 기도하십시오. 마가복음 9장 29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런 종류는 오직 기도와 금식으로만 나가느니라.” 만약 여러분이 그저 평범한 삶에 만족한다면 기도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만일 최상의 삶을 원하시면 기도하십시오. 만약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구하신다면 끊임없이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시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제가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신실하시고 늘 기도하시던 제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제 아버님이 구원받았던 것 역시 기도 덕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예배당을 갖게 된 것도, 제 며느리가 건강하게 살아 숨쉬는 것도 모두 기도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셔서 주일학교 교사로 가르치는 것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일입니다. 물론 누구나 성경공부를 인도할 수 있고, 설교할 수 있고, 찬양할 수 있으나 만약 여러분께서 당신의 삶과 사역을 바꾸기를 원한다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권능을 받으셔야 합니다. 오직 기도만이 전능하시고 영원무궁하신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에게 임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우리의 모든 것들이 땔나무, 건초, 그루터기처럼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 근본주의 독립 침례교도들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어떤 은사나 능력이나 재능 등이 부족하다고 염려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곳 버지니아 페어 팩스에 사시는 여러분들은 이미 지도층이고 실력도 있으며 교육수준도 높은 지식인이고 모든 재능과 능력을 겸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일하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부(Wealth)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우리 삶 안에 하나님의 권능이 있는지 그 점만 염려하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만 남은 염려를 해결하는 것은 내가 분발한다고,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혹은 내 능력으로 충분하니까 기도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능력, 은사, 재능을 가졌다고 자만에 빠지셔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권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31년 전 9월 7일, 저, 제 아내와 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쓰임 받기를 열망하고 기도하면서 페어 팩스로 왔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성장하고 부흥한 것을 보고 그 당시 저희 교회 버스 사역에 나왔던 작은아이가 장성하여 얼마 전 제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와,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화답했죠. “주님께서 이루어 주셔서 너무 기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여러분 삶에 여러분이 이룩한 공적이 있다면 주님만이 공로와 영광을 홀로 받으실 수 있도록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것은 바로 기도를 통해서 얻은 것이라고 말하십시오. 마태복음 7장 7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들과 같이 헛된 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이는 그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기 때문이라.” 1973년 저는 처음으로 올바른 기도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제 가정 예배를 통해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가족은 성경을 읽은 뒤에 돌아가며 각자 구하는 기도를 하기로 했습니다. 제 아들은 그네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제 아내는 특정한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했으며 저는 양복 한 벌이 필요했기에 그 기도들을 매일 저녁 가정 예배 때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똑같은 기도를 날마다 반복하면서 하나님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그것들을 구입하는 데 얼마가 필요한가를 기도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문뜩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계산을 해보니 450불이 필요했는데 그때부터 저희 가족은 이 금액을 작정해놓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달쯤 지나서 어떤 분이 제게 다가와 500불짜리 수표를 제 손에 쥐어주고는 가버렸습니다. 그때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수표를 받아 본 경험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것을 받은 순간 제가 무슨 생각했는지 아십니까? 제가 기도한 액수는 450불이었지 500불이 아니었기 때문에 솔직히 50불을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웃음) 그런데 갑자기 제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500불의 십일조가 얼마입니까? 그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던 겁니다. 저는 이 기억을 평생 잊을 수가 없기에 여러분께 지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어언 30년 전 일입니다. 기도의 유익함이 무엇일까요? 만일 여러분께서 구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기도의 경로를 통해서 응답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그래서 우리는 그분께 구해야 합니다. 또한 기도는 강한 적들도 이기게 합니다. 아사의 군대는 삼십팔만 명이었고 백만 명의 군대와 병거 삼백 대를 거느린 적의 군대를 대항해서 싸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역대기하 14장 11절을 보십시오. “아사가 주 자기 하나님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여, 많은 사람들로 돕든지 능력이 없는 자들로 돕든지 주께는 문제가 되지 아니하나이다.? 오 주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이는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으로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음이니이다. 오 주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그분께서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두 배나 되는 그들의 적들을 무찌르셨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그분께서 사도행전 4장에서 역사하신 것과 같이 교회를 변화시킵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 사람들이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 기도에 응답하시고 담대하게 하셔서 주님을 증언하는 데 쓰임을 받게 하셨습니다. 자, 이제 기도에 도움이 되는 몇 가지 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모두 충분한 시간을 갖고 기도하는 게 필요합니다. 첫째,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십시오. 저는 아침에 일정한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기도하다가 산책도 나가고 산책하면서 기도하기도 합니다. 저녁에 기도하시는 분들, 점심시간 짬을 내서 하시는 분들 등등 누구나 자신만의 특별한 시간에 기도를 하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운전 중에는 하지 마십시오. 너무 산란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십시오. 그리고 늘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아뢰고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단 일정한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십시오. 둘째, 일정한 장소를 물색해서 기도하십시오. 셋째, 기도할 때 진실한 믿음을 갖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우리가 기도할 때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이 역사하시게끔 허용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하십시오. 죄 사함과 능력 받기를 위해서 뿐 아니라 여러분이 찬양하려는 곡에 대해서도 기도하십시오. 에베소서 5장 19절 말씀처럼 영적인 음악은 우리의 영적인 삶에 활력소가 됩니다. 여러분의 가족들, 친구들, 재정, 직장, 전도의 기회, 하나님과의 동행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는 것은 매우 중대합니다- 을 간구하십시오. "주님,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님과 가까이 동행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하십시오. 교회를 위해, 자녀를 위해 기도하시면 우리의 믿음에 도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개인이 숨쉬는 공기에 의존하듯이 기도에 의존하기를 원하십니다. 불신자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또한 여러분의 기도에도 응답하시는 데 그때는 구원받기를 구하실 때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10장 13절에 "이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임이라."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당신의 완악한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만약 아직도 당신이 거듭나지 못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오늘 당신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하느냐구요? 교회에 등록하는 것, 침례 받는 것, 교회에 돈을 기부하는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또한 성경을 읽어서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당신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한다면,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돌아가신 사실을 믿고, 여러분의 믿음을 오로지 예수님 안에 두고 그분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여러분의 죄들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원해 주십니다. 구원받는 것은 이렇게 쉬운데 우리는 종종 걸려 넘어집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을 너무 사랑하시기에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면 영접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구원받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하십시오. 오직 그 기도만이 하나님께서 거듭나지 못한 자들에게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신 기도입니다. 그 기도 하나뿐입니다. 그 기도를 제외한 나머지 기도들은 제가 오늘 아침 설교했듯이 구원받은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응답하시는 기도는 영접기도 밖에는 유효하지 않습니다. 이 중에 아직 구원받지 못한 분이 있다면 오늘이 바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구원받으시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연 우리의 기도가 유익할까요? 그렇고 말고요! 기도: 하나님 아버지, 여기 계신 많은 분들이 구원받았고 그 중에는 제가 목회를 시작하기 이전에 구원받으신 분들도 계심으로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저희 모두가 기도가 유익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아버지, 기도와 믿음이 부족한 저희들을 용서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전보다 더 주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기도에 열심을 내고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늘 길 잃은 죄인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고 구원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2009-05-02 17:10:40 | 관리자
여름은 끝났습니다.   설교_버드 칼버트(Fairfax Baptist Temple 담임목사)/ 번역 김희섭 박사 예레미야서 8장 20절을 펴 주시기 바랍니다. 바깥은 매우 좋은 날씨인데 이제 여름이 끝나가는 시기입니다. 오늘 설교는 이와 관련된 것을 하고자 합니다. 봉독할 동안 일어서 주시겠습니까? 예레미야는 매우 위대한 하나님의 예언가로서 그의 민족에게 진리와 교훈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봉독: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끝났으나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도다.”(이하 흠정역) 기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주셔서 우리가 따르며 인생의 안내자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길과 뜻에 대한 지식을 알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오늘 아침 여기 있는 분들 중 이미 주님의 가족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보다 많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여 주시고 또 아직 구원받지 못한 남녀노소 모두에게는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어 오늘 그들도 구원에 이를 수 있게 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설교할 때 능력을 주시고 여기 있는 모든 사람에게도 들을 수 있는 힘을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저는 공식적으로 여름이 끝나는 것은 9월 21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 저에게는 여름이 정말로 끝나는 시기는 여름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가는 때였습니다. 더 이상 많이 자지 못하고 바깥에서 놀지 못하고 저녁에 공부 때문에 재미있게 지내지 못하게 되는 그 때에 저는 여름이 끝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약 600년 전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본문의 말씀을 말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잠깐 이 때의 시대적 상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부족은 10지파가 되는데 이들은 남쪽에 있는 유다 부족과 떨어져 예루살렘 북쪽에 자리를 잡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오늘 본문이 쓰여진 기원전 약 600년보다 122년 전에 즉 기원전 약 722년에 시리아가 쳐들어 와서 이들을 붙잡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남쪽에 자리 잡았던 유다인들은 북쪽의 동포들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서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불복종과 사악함을 회개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을까요?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 바는 아무것도 역사에서 배운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저 해오던 방식을 바꾸어가며 계속 그들의 길로 가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대언자인 예레미야는 남쪽 예루살렘 지역에 있는 부족에 가서 그들도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않으면 북쪽 부족들과 같이 다른 나라 군대에 의해 포로로 붙잡혀 가 혹독한 생활을 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느부갓네살 왕의 바빌론 군대에 의해 침략당할 것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듣지 않고 거부했습니다.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이고 신앙심이 깊었습니다. 모든 일이 잘 될 것으로 믿었고 절대 침략당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윗의 도시에 있었으며 그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메시야(예수님)가 오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가 벌써 몇 년 전에 포로로 잡혀가기도 했고 어떤 이는 성벽 뒤로 숨기도 하는 등 방황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관여해서 쳐들어오는 바빌론 군대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주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처럼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끝났으나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도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지 않았다. 우리를 돌보지 않고 포로와 노예로 끌려가게 놔두었다”라고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왜 그들이 그렇게 됐는지 조금 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리에게도 여름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중에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처럼 여름이 지나갔지만 나는 아직 하나님의 가족에 속해 있지 않다고 말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자, 이제 모두 주목해 봅시다. 오늘 여기 모인 사람들은 이처럼 교회에 와서 함께 자리에 앉아 있는데 서로 비슷한 용모를 갖고 있으며 또 이질적이지 않고 서로 잘 어울리는 것 같으며 예배를 마치면서 아멘하고는 올 때와 똑같이 차를 타고 집에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각 개인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지는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고 천국에 갈 수 있는 성경적 지식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스스로 매우 종교적이고 신앙심이 깊다고 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나 오늘 분문에서의 이스라엘 민족도 매우 종교적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사실도 잊지 말으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여러분 중 일부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부하고 지옥으로 향하고 있으며 또 여러분이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성경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정말로 많은 사람을 혼란시켜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데 아주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재물, 오락, 스포츠, 그리고 종교라는 것들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신의 영적상태에 관해 무지하고 무관심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분이나 구원받지 못한 분 모두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이스라엘 부족을 잘 살펴보게 된다면 우리들도 그들과 너무나도 똑같은 이유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7장 23절을 펴 주십시오. 23절에 보면 “너희는 내 음성에 순종하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길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잘 되리라 하였으나”라고 하였지만, 24절에는 “그들이 듣지도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기들의 악한 마음이 꾀하고 상상하는 대로 걸으며”라고 했습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은 너무 두껍고 어려운 것이 많고 명령 또한 너무 많으며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고 합니다. 여러분, 잠깐 다음의 명령들을 실행해 보십시오. “너는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2:15).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뜻대로 걷지 말라”(시 1:1).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신6:5).” 이 명령들을 이해하십니까. 솔직히 우리가 성경을 이해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는 성경구절에 대해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본문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말씀에 복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자녀들이 부모에게 복종 안하고 또 우리 부모들은 교통법규에 복종 안하는 이유와 마찬가지의 이유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누군가가 명령하는 것을 싫어하며 아울러 우리 위에 어떤 권위도 두길 싫어합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성경이 올바른 말씀으로 알고는 있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은 귀찮을 뿐이죠.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 두 번째 이유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8장 5절과 6절에는 “그들이 속임수를 굳게 붙들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는도다. 내가 귀를 기울여 들었거니와 그들은 바르게 말하지 아니하며 아무도 자기의 사악함을 뉘우치면서 내가 무슨 짓을 하였던가? 말하지 아니하고 싸움터로 달려가는 말같이 저마다 자기 길로 돌아서는도다”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죄를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음주, 반항, 부도덕적 생활을 아무 거리낌 없이 지속적으로 하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구원은 이 거룩한 성경책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영혼이 죄에서부터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 성경책에 의하면 구원이란 예수님과 같이 되고 싶은 욕망과 의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결과적으로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여러분 중 과거를 생각해서 이런 변화가 없으면 그것은 구원을 받지 못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몇 주간 정도 변화가 있다가 다시 원래상태로 돌아온 이들은 아직도 구원받지 못하고 하나님을 그 안에 모셔들이지 못하여 영적으로 길 잃어버린 상태일 겁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성경은 분명히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따라서 구원받은 자라면 삶에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미국인들은 교회에 대해서도 삶의 스타일처럼 변화를 추구합니다. 오늘 아침 신문에는 텍사스주 달라스에 동성연애 교회가 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나에게 맞는 것을 찾아 내가 해오던 대로 계속하고자 합니다. 나에게 죄를 설교하지 말고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이기에 이렇게 말하는가?”라며 저를 힐문합니다. 저요?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성경책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성경은 우리 삶의 거울입니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얼굴과 몸이 잘 정돈되어 있는지 매일 시간을 보내는 것과 같이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사랑해야 할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았고 죄를 지었으며 주위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았고 아침에 커피와 도넛을 즐기려고 성경공부에 참가하지 않았군” 하며 우리 생활을 반성하고 나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지” 라며 다짐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계속해서 부도덕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구원을 받지 못했든지 아니면 완전히 하나님과 떨어진 그릇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많은 교회가 믿으면 천국 간다고 하나 제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책에서는 믿으면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고 말씀합니다. 세 번째로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8장 9절을 보십시오. “지혜로운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놀라며 붙잡히는도다. 보라, 그들이 주의 말을 거절하였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겠느냐?” 많은 사람이 자신이 명하는 대로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여기에 대한 지혜가 있습니다. 지식이란 성경의 말씀을 아는 것이고 지혜는 이 성경적 지식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시키느냐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내포합니다. 지혜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교육기관에 자녀들을 보내기가 무섭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면 어떤 지혜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지혜와 달리 성경은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처럼 예수님 외에는 구원이 없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믿는 것이 무엇이든 진실 되게 믿으면 된다고 하나 이것은 성경말씀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 성경책은 좁은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종교나 신이 개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8장 10절에 이들이 탐욕적이라고 했는데 이곳 버지니아주 페어팩스군(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곳임)에는 물질적이고 탐욕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평균적으로 전세계인들보다 더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같이 나누어야 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지혜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구원은 육체적 구원 즉 바빌론 군대로부터의 보호를 말하나 신약성경의 구원은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을 말합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에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우리 교회만이 올바르고 천국에 갈 수 있는 곳이다”라고 말하거나 또는 “여기에 메시야가 있다” 하거나 혹은 “이 종교 지도자를 따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의 길, 하나의 진리, 하나의 생명이라 하지 않고 유일한 길, 유일한 진리, 유일한 생명이라 하셨고 예수님 자신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너무나도 좁은 길이지만 이것 역시 성경말씀 곧 진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관용에 대한 개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 또 여러분이 꼭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하고 사악한 세상에 대해서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 여덟 사람만 빼고 이 세상을 모두 멸망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죄에 대해 관용하시지 않습니다. 침례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천국에 한 발자국이라도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아멘”했습니까?(웃음) 여러분, 어느 누구나 버지니아 북쪽에 있는 침례교인이 될 수 있으며 또한 동시에 곧바로 지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어떤 교회도 천국에 가게 할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노파심에서 잠깐 말씀드리자면, 마리아도 우리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마리아도 구세주를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눅 1:48~49). 죄인들은 누구나 구세주를 필요로 합니다. 로마서 5장 8~10절, 3장 23~25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구원시킬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좋은 일을 많이 했으니 고려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네, 물론이죠. 마귀가 인정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귀와 영원히 살아야 하니까요. 우리가 한 어떤 행위도 우리를 천국에 한 발자국도 가까이 가게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고 슬픈 사실은 요즈음 많은 교회와 종교기관들이 성경책은 옆에 제쳐 놓고 사람이 만든 교리를 신봉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 성경책과 비교하여 나를 포함해서 어떤 사람이라도 틀리면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여기 있는 여러분 중에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분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이 저를 너무나도 애통하게 만듭니다. 아직도 계속해서 여름이 가게 내버려두고 구원을 안 받고자 하십니까? 한 가지 예를 들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건강검진을 받으러 어떤 의사에게 가서 진찰받은 결과 건강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다른 의견도 듣고 싶어 다른 의사에게 가 정밀 검사를 받아보니 암이 내 몸 속에서 빠르게 번지고 있는데 내일이라도 수술 받으면 완쾌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내일 가서 수술을 받고 완쾌되어야겠지요. 그런데 다시 첫 번째 의사한테 가서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고 안심하시겠습니까? 이 얼마나 바보스러운 일입니까! 구원을 받기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는 교회에는 절대로 발을 들여놓지 마십시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은 이제 이웃들에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아울러 아직 구원받지 못한 분은 오늘 꼭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여름이 지나갔으나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그들의 영혼을 구원해 주시고 새로운 인생을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09-05-02 17:10:00 | 관리자
성경이 최종 권위입니다   설교_버드 칼버트(Fairfax Baptist Temple 담임목사)/ 번역 김희섭 박사 오늘 본문은 시편 19편 7절에서 14절입니다. 제가 읽을 동안 일어서 주시겠습니까? “주의 율법은 완전하여 혼을 회심시키고 주의 증거는 확실하여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주의 법규들은 정당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의 명령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하는도다. 주의 두려우심은 깨끗하여 영원토록 지속되고 주의 판단들은 진실하고 다 의로우니 참으로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또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주의 종이 또한 이것들로 경고를 받나니 이것들을 지킬 때에 큰 보상이 있나이다. 자기 잘못들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주여, 은밀한 허물에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을 지키사 고의로 죄를 짓는 죄들로부터 떠나게 하시고 그 죄들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곧바르게 되어 큰 범죄들에서 벗어나 무죄하리이다. 오 나의 능력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주여,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이 주의 눈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우리에게 이 거룩한 성경을 주셔서 감사드리고 오늘 고귀한 시편 본문을 주심을 또한 감사드립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 이 성경을 다시 사모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1963년에 저는 해발 약 2,500미터 되는 북쪽 이태리 어느 알프스에 있었습니다. 저는 1100 공군부대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절벽 등반 훈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매일 저녁 헬리콥터가 와서 우편을 전해주어 우리는 그 헬리콥터가 오는 것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하루는 저에게 어머니로부터 온 소포가 전달되었습니다. 주위 친구도 무언지 궁금해 하고 있었는데 저는 그 속에 쵸코렛, 과자 등 여러 가지 맛있는 것들이 들어 있으리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열어보니 그 안에는 바로 이 성경책이 있었습니다.(청중: 아멘) 말할 것도 없이 저는 매우 당황했습니다. 저는 곧바로 소포를 싸고 성경책을 숨겼습니다. 제가 연약함으로 성경이 필요해 어머니가 성경을 보내주어야 한다고 다른 사람이 생각할까 두려웠습니다. 이것은 남자의 자존심에 관한 것이었죠. 그런데 그 때 당시 큐바 미사일 문제가 생겨 우리는 비상사태에 들어갔고 짐은 하나밖에 가지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짐 위에 성경을 놓았죠. 혹시 무슨 일이 벌어지면 이 성경책이 혹시 보호해 줄까 해서 그랬습니다. 그래서인지 큐바 문제는 잘 해결되었고 저는 이 성경책에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제가 역사에 대해 알고 있는 바로는, 몇 천 년 전에 우리에겐 도넛, 허쉬 쵸코렛 등과 같은 단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0절에서 보면 성경은 꿀과 송이꿀보다도 더 단, 즉 이 세상 어느 것보다도 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저는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단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주신 성경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 가지고 계시는 성경책을 잠시 들어주시겠습니까? 만약 여기에 미국에 있는 모든 금을 한 쪽에 두고 한 권의 성경책을 다른 쪽에 두고 이들 중 하나를 여러분에게 준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먼저 금을 갖고서 다 쓴 후에 죄를 회개하고 성경책을 가지면 되겠지요. 그러나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성경말씀이 모든 금보다도 중요하며 훨씬 값어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 성경말씀은 하나님이 약 40명의 사람을 택해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한 글자 한 글자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성경저자들로 하여금 그대로 쓰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미래, 행복, 기쁨, 지식, 지혜, 용서, 자유, 승리, 충만함, 목적 그리고 성공의 열쇠입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성경에 대해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성경은 유일한 기록(solo scripture)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성경에 대해 오늘 본문처럼 여러 가지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7절의 주의 율법, 주의 증거, 8절의 주의 법규, 주의 명령, 그리고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9절의 주의 두려우심도 성경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7절과 8절에서처럼 완전하고 정당하고 순수하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다른 것이 필요 없습니다. 디모데후서3장 16-17절과 베드로후서1장 21절을 같이 보실까요.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이는 대언이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감동을 받아 말하였음이라.” 즉 모든 성경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주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영감이란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바깥의 날씨가 맑지만 춥기 때문에 밖을 내다보며 커피를 마시면서 느끼게 되는 매우 좋은 기분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한 글자 한 글자에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저자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썼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영감된 성경기록을 여러분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 성경이 모든 것에 대한 최종 권위입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교회, 종교기관, 목사 등 어떤 것도 성경의 권위와 같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어떠한 것도 추가할 수 없습니다. 코란, 몰몬경 등은 성경과 무관합니다. 시편 119편 128절을 잠깐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모든 것에 관한 주의 훈계들을 바르게 여기며 모든 거짓된 길을 미워하나이다.” 저는 매년 많은 사람들이 신학적으로 이렇게 해야 천국에 간다든가 이렇게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듣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은 것에 관해서는 각자의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는 토론이 더 이상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이 성경에 써 놓으셨습니다. 두 번째는 확실성입니다. 오늘 본문 7절에는 주의 율법은 완전하여 혼을 회심시키고 주의 증거는 확실하여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확실하며 또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 8절을 보실까요. “너는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밤낮으로 그 안에서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이는 그리하면 네가 네 길을 형통하게 하며 또한 크게 성공할 것임이라.” 인생의 성공의 길은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학교에서 성경책을 배제하고 성경으로부터 어떤 영향도 받지 않으려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교육기관뿐 아니라 가정, 직장,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성경책을 내버려 둔 채 성경에 전혀 권위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시편119편 130절, 133절을 보실까요. “주의 말씀들이 들어오면 빛을 주며 이 빛이 미련한 자에게 명철을 주나이다. … 내 발걸음을 명하사 주의 말씀 안에 있게 하시고 어떤 불법도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소서.” 당신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물론 저와 여러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저에게 명령을 주십니다. 세 번째는 법규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주의 법규들은 정당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의 명령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하는도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보상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렇지만 슬프게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복종한다고 하면서 성경을 그저 가지고 다니며 키스하고 나서는 “안녕” 해버립니다. 이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있는 것처럼 성경은 우리의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고 더욱 기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을 즐기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옵니다. 제가 한 가지 분명히 자신 있게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여기에 술, 담배. 마약, 음란한 성생활을 하면서 인생을 즐기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는 사람은 매일 밤 가책을 받으며 잠자리에 들게 될 것입니다. 배우자나 부모가 모르는데 어떠냐고 할지 모르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의 인생의 지침서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올바른지 그른지 알려고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모든 문제 즉 육(肉)과 영(靈)과 의(義)에 대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내 삶 속에서 역사하게만 하면 내 속에 권능과 복과 삶의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삶을 즐기고 계십니까? 삶에 대해 열정적이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계십니까? 아니면 죄 속에서 지내십니까? 오래 전 복음주의자인 무디는 이 성경이 죄로부터 지켜주든지 아니면 죄가 성경책을 멀리하게 하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다음은 성경기록을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서 언급되었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금을 찾는 것보다 더 사모하며 읽어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3-4절을 보실까요. “우리를 부르사 영광과 덕에 이르게 하신 분을 아는 것을 통하여 그분의 신성한 권능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나니 곧 주께서 이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사 너희로 하여금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신생아가 젖을 원하는 것처럼 우리는 성경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탐구해야 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주의 종이 또한 이것들로 경고를 받나니 이것들을 지킬 때에 큰 보상이 있나이다.” 성경을 읽고 탐구하며 그래서 경고를 받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보상을 받는 즐거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공부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어머님의 성경책인데 어느 쪽을 보나 메모가 적혀 있고 거의 헤어져 있습니다. 저는 이런 어머님의 유산을 가진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은 엄마가 성경공부를 하는 유산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버지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은 아빠가 성경공부를 하는 유산을 가지고 있습니까? 저는 구원받고 나서 몇 년 후에 제가 구원받은 날을 기준으로 매년 한 번씩 성경을 읽기로 했습니다. 지금까지 50번 성경을 읽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50번 읽기 전보다 지금은 더 잘 알게 되었는데 이제 51번 읽고 나면 더욱 잘 이해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 성경입니다. 전혀 옛 것을 또 읽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성경을 사모하십니까? 성경이 삶의 일부분이 되어 있습니까? 이제 성경을 공부하는 5가지 방법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메모하여 두시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첫 번째는 로마서 10장 17절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즉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에 있는 것처럼 매일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디모데후서 2장 15절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는 사람은 누군가가 성경에 대해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문제에 대해 성경으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32년간 목회를 하면서 실로 수없이 많은 상담을 해왔습니다. 그 때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상담하러 오신 분은 모두가 성경을 탐구하며 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성경을 암기하는 것입니다(시편 119편 11절). 저의 경험으로는 성경을 암기하는 것은 크리스천 생활에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성경을 어떻게 공부하는지를 배운 다음 지금 약 1,000개의 절을 암기하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는 묵상하는 것입니다. 목사니까 성경에 대해 잘 알아야 하니까 탐구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경에는 전혀 그런 말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는 우리 모두에게 다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에 대해 성경을 근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 7절에는 성경말씀이 우리 혼을 회심시킨다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을 보십시오. “성경기록들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 구원은 성경말씀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훌륭한 신학자나 성경에 대해 도통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근거를 어디에 두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어떤 식으로 성경공부를 하건 일년에 한 번은 성경을 꼭 읽으십시오. 그러나 매년 시도는 하지만 안 된다는 분도 계시겠죠. 그러면 되게 하십시오!!! 내년에 밥을 먹을 거죠? 3끼 아니 2끼는 먹을 것이 아닙니까? 성경은 그보다 중요합니다(욥기23장 12절). 여기서 음식은 식도락의 대상이 아니라 즉 맛을 즐기는 그런 것이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음식을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성경이 음식보다 중요합니까? 이것이 삶을 즐겨야 하는데 즐기지 못하는 이유입니까? 이것이 여러분의 자녀가 올바르지 못한 이유입니까? 이것이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유입니까? 이것이 삶이 행복하지 않는 이유입니까? 성경을 읽으시는 데 도움이 될 두 권의 성경주석을 추천합니다. 첫 째는 Scofield가 쓴 것이고 두 번째는 Life Application Bible입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이 성경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책으로 우리가 자라나게 하여 주십시오.… 머리를 숙이고 옆 사람을 보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두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확실히 아시는 분, 즉 삶의 언젠가 옛 죄된 몸을 버리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신 분,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가는 것에 대해 손톱만큼도 의심이 없는 분은 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내려 주십시오. 영생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 구원의 확신이 없으신 분 중에 언젠가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가고 싶은 분 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제가 기도시간에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직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09-05-02 17:09:12 | 관리자
영혼 구령(Soul winning)   설교_버드 칼버트(Fairfax Baptist Temple 담임목사)/ 번역 김희섭 박사 오늘 성경 말씀은 누가복음 10장 1-3절입니다. 봉독하는 동안 일어서 주십시오. “이 일들 후에 또 주께서 다른 칠십 명도 세우사 친히 가시고자 하는 각 도시와 각 지역으로 둘씩 둘씩 앞서 보내시니라. 이러므로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추수하시는 주께 기도하여 그분께서 자신의 추수 밭에 일꾼을 보내 주시도록 하라. 갈지어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어린양을 이리들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도다.” 아버지 하나님, 이렇게 좋은날, 일요일, 그리고 주님의 날에 주님의 집에 와서 우리의 존재이유를 알게 해주시고 또 부활이신 구세주 예수님을 예배하게 해주시어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밝은 지혜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여기 모인 사람에게 오늘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즐기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새해가 된 지 5일이 지났는데 이미 새해 목표를 지키지 못한 분이 계실 겁니다. 저는 여러분 중에서 다이어트를 한다고 결심했으나 남이 보지 않는 사이 몰래 쵸콜렛을 먹은 분이 계실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분은 아마도 몸무게가 줄기는커녕 늘어났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또 어떤 분은 자신의 태도를 올바르게 하겠다고 새해목표를 설정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예배 중에 눈이 이렇게 많이 오는구나 하고 기분이 불쾌한 분도 계실 겁니다.(역자 주 - 예배 시작 후 눈이 많이 내리고 있었음.) 오늘 교회에 나온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울 겁니다. 올해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주일 예배에 참석하겠다고 결심한 분은 그 목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첫 번째 주일에 교회에 나오고 새해 목표를 지켰습니다. 와! 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오늘로 그만두시지 말고 계속 그 목표를 지키시기를 바랍니다.(웃음)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가족, 직장 등에 대한 새해 목표를 정했을 겁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여러분께 드릴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새해 여러분의 영적인 목표는 무엇입니까? 앞으로 12개월 후의 여러분의 영적 상태는 어떻게 될 것입니까? 여러분의 하나님과의 관계, 천국, 구원, 영원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은 70명의 제자들에게 주위에 있는 도시로 들어가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도시에 들어가 구원에 대해 준비하라며 예수님이 곧 오시는 것을 알리는 임무를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시기 전에 미리 제자를 보내어 구세주가 온다는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잘 들어보십시오. 이 제자들에게 명령을 주신 것처럼 주님이 우리 교회에 주신 명령을 같이 들어봅시다. “이는 사람의 아들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음이니라.”(눅19:10) “이에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멘.”(마28:19,20) “또 회개와 죄들의 사면이 그의 이름으로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들 가운데 선포되어야 하리니 너희는 이 일들의 증인이라.”(눅24:27,28) 이것을 우리 교회에 적용하자면 페어팩스에서 시작해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아침 여러분 개인 개인에게 드리고자 하는 질문은 2003년 새해에 하나님을 위해서 곧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영혼 구령을 위해 어떻게 하시고자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성경책에 의하면 제가 조금 전에 읽은 구절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하나하나 개개인에게 주어진 임무입니다. 여러분은 2002년에 이 일을 하셨습니까? 여러분으로 인해 침례를 받으면서 나는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 분이 있었습니까? 2002년 전에는 어떻습니까? 우리들이 증거할 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분은 전에 예수님에 대해 한 번 증거해 보았는데 상대방이 매우 화를 내서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러면 현재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가족, 친구, 사랑하는 사람, 직장 동료에게 복음을 전하십니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 정도로 그들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전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죄 많고, 사악하고, 비참하고(wretched), 부도덕하며 지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5절을 보면 1절에는 우리가 죄 때문에 죽었고 5절에는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했습니다. 즉 죄가 우리 몸 구석구석에 있어 죽을 수밖에 없는 진노의 자녀 즉 전혀 선한 것이 없이 하나님과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태였으나 예수님에 의해 우리가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아버지,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시며 돌아가셨는데 그 이유는 우리 죄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이 같은 운명이라고 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천국에 가는 사람도 있고 지옥에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은 구세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로 나오기까지는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명하시는데 이것은 저의 책임이요 또한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의 일부처럼 성경에 나와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곧바로 지옥에 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 일생을 통해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의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이 세상은 모두 지옥으로 직행할 수밖에 없었으나, 물론 저도 지옥으로 향하고 있었구요, 예수님에 의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 버지니아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빡빡한 일정에 쫓겨 생활이 너무 바쁜 나머지 우리가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지 모르고 지냅니다. 나는 여러분께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지옥에서 영원한 죽음을 영원토록 겪어야 합니다. 다음은 우리가 전도해야 할 장소입니다. 우리는 1절에서 나와 있는 것처럼 모든 도시와 장소에서 예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디에서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주유소, 소매점, 음식점과 집집을 다니며 전도하고 또한 저의 집에 초대도 하고 비행기를 탈 때 등, 제가 있는 어디서나 전도를 합니다. 저는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구세주를 알고 구원을 받기 원하며 예수님에 대한 빛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는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4장 16절과 21-23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성대한 만찬을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더니 … 종이 와서 주인에게 이 일들을 알리매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자기 종에게 이르되, 빨리 도시의 거리와 골목길로 나가서 가난한 자와 불구자와 다리 저는 자와 눈먼 자들을 여기로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령하신 대로 하였으되 여전히 자리가 있나이다, 하니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큰길과 산울타리로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여기서 만찬은 구원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은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임무는 이 세상 사람에게 가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긴박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병원에 가 보십시오. 하루에도 많은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우리도 누군가 복음을 전해주지 않았다면 구원받지 못했을 것처럼 많은 사람이 지옥에 갈 것입니다. 어떤 이는 직장에서는 복음을 전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저는 직장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점심시간, 근무 후에 전할 수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 너무 쉽게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서 이 일을 게을리 하기 쉬운데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은 분위기상 이야기하는 것이 좋지 않다든가, 아마 복음을 듣기 싫어할 거야, 또는 전에 복음을 들었을 거야 하는 핑계를 댑니다. 맞습니다. 그 전에 복음을 들었겠지요. 그렇지만 어떤 이는 백 번 이상 듣고 나서야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 왔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냐고 물었지요.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 11절에서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것은 우리가 이미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 것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은 그 순간부터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았습니다. 성경교육도 못 받아 할 수 없다는 분도 있고 자신이 모르는 질문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 것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도 모르는 것을 질문 받을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자존심이 상할 수 있으나 우리는 결과에 대한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증거를 계속해야 합니다. 제가 어떻게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예수님을 증거하는지 그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종교관은 어떠합니까?”하고 상대방에게 물은 뒤 그가 이야기하는 것을 다 들어줍니다. 침례교, 천주교, 장로교, 감리교, 또는 무교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후 본인의 증거를 말하시고 “실례가 안 되면 성경을 보며 천국에 가는 길을 말하여도 괜찮겠습니까?”라고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은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 뭐라구요? 침례교인이 아니라구요?” 이렇게 말하시면 안 됩니다.(웃음) 침례교인 중에 거듭나지 않아 지옥 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저도 침례교인이었으나 지옥으로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증거할 때 이렇게 합니다. “저는 침례교회에서 자라고 침례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제 마음속에 예수님이 와 닿은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문제아였고 예배시간에 맨 뒤에 앉아서 떠들기만 했습니다. 그 당시 저를 제일 앞자리에 앉히려면 아마도 총을 제 머리에 갖다 대야 했을 겁니다. 한 번은 예배시간에 10대들이 뒤 쪽 의자에서 너무 떠들어 목사님이 그날 예배를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 저는 ‘아니, 목사님도, 우리같이 10대들이 떠드는 것도 모르나? 나도 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단 말이야.’하면서 죄의식은 손톱만큼도 갖질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람을 알게 되어 그의 인도로 교회 집회에 갔는데 그 날 설교가 저의 인생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데 기껏해야 2분 정도입니다. 그저 자기가 아는 것을 말하면 됩니다. 또는 상대방의 종교적 배경에 대해 들어준 뒤 “지금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왜 내가 너를 천국에 들어 보내주어야 하냐고 물으시면 무엇이라고 답하겠습니까?”라고 물으세요. 그리고 상대방의 영적 상태를 파악한 뒤 “괜찮으시면 어떻게 천국에 가는지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을 설명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하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동의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성경을 가지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가지고 다니십시오. 성경을 가지고 다닐 수 없으면 전도지를 가지고 다니세요. 전도지에 어떻게 천국에 가는지 적혀 있습니다. 여러분! 전도지를 주는 데 어느 정도 노력이 필요한지 아세요? 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저의 경험으로는 대부분 잘 받아줍니다. 가끔 받는 즉시 땅바닥에 떨어뜨리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금방 다시 줍지요. 그거 별 것 아닙니다. 전도지를 주면서 저희 교회에 초대하십시오. 저희 교회와 같은 교회에 나오는 성도의 약 85%는 누군가가 초대해서 나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지난 해에 몇 백 장의 전도지를 나누어 주셨습니까? 아니 하나라도 나누어 주셨습니까?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란 구원받은 후 매 주일 교회에 나와 앉아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4장에 있는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후 도시에 들어가 예수님을 증거한 후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녀가 얼마 동안 그리스도인이었는지 아십니까? 하루도 안 되요! 부도덕하고 사악했던 그녀는 어려운 신학이나 교리 등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딱 한 가지를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곧 그분이 자기 죄를 용서해준 후 자기 인생이 바뀌었다는 것을요.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있습니까? 있으면 예수님을 증거하십시오. 그렇지 않고 아직 인생의 변화가 없으면 구세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구원받은 지 하루도 안 되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을 자주 보게 됩니다. 구원받은 지 하루 이틀 된 분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 할 것이 많습니다. 다시 오늘 본문 3절을 보십시오. 누가복음 9장 23절, 14장 33절도 같이 보겠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33) 예수님에 대한 증거는 어떤 논제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비겁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명령은 힘들고 무거운 것입니다. 이것은 나와 여러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만 가능합니다. 영혼구령은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영혼구령에 우선을 두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아직 부름을 받지 않았다고 할지 모르지만 모르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부름을 받았습니다. 제가 설교 시작할 때 물어보았죠. 여러분의 12개월 후의 영혼구령 목표는 무엇입니까? 적어도 12개월 후에 한 명을 전도하십시오. 그리고 아직 구원받지 못한 친구들이여!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고 부활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의 죄 때문에 당신이 지옥으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희망입니다.(그런데 그것은 사실입니다.) 당신도 역시 하나님의 가족에 오늘 지금 속하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께 제가 빕니다. 처음에는 떨리지만 전도지를 나누어주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십시오. 잃어버린 영혼은 우리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2009-05-02 17:06:22 | 관리자
교회에 다녀도 지옥에 갈 수 있습니다   설교_버드 칼버트(Fairfax Baptist Temple 담임목사)/ 번역 김희섭 박사 오늘 성경말씀은 마태복음 23장 23-36절입니다. 봉독하는 동안 일어서 주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 이는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되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인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하였음이라. 너희가 마땅히 이것들을 행하였어야 하거니와 저것도 행하지 않은 채 버려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 너희 눈먼 안내자들이여, 너희가 모기에는 긴장하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 이는 너희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속은 착취와 월권으로 가득하게 하기 때문이라. 너 눈먼 바리새인아, 먼저 잔과 대접의 속을 깨끗하게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 이는 너희가 마치 회칠한 돌무덤 같기 때문이니 그 겉은 참으로 아름답게 보이나 그 속은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부정한 것으로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되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 이는 너희가 대언자들의 묘를 만들고 의로운 자들의 돌무덤을 수리하며 이르되, 우리가 만일 우리 조상들 시대에 있었더라면 그들이 대언자들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너희가 대언자들을 죽인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거하는도다. 그런즉 너희가 너희 조상들의 분량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들의 세대여, 어찌 너희가 지옥의 정죄를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희에게 대언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리니 너희가 그 중에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박으며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다니며 핍박하리라. 그리하여 의로운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가랴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모든 것이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기도: 아버지 하나님, 오늘 이 성경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생활 속에 적용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와 오늘 아침 여기 모인 분들 모두의 마음 문을 열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오늘 여기 계신 분들 중 아직 구원받지 못한 분에게는 오늘이 구원의 날이 되기를 주님께 기도합니다. 또한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 없이 지옥으로 향하는 잃어버린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는 마음을 갖도록 다시 일깨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제가 읽은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행하셨던 설교였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위선적인 종교적 지도자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물론 예수님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도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가 많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심하게 꾸짖으심과 동시에 그 때의 사람들에게 동정과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아니한 것에 대해 매우 슬퍼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진리를 두고 거부했기 때문이죠. 그들은 쉽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거부했고 예수님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들의 교리와 어려서부터 배운 종교적 지식만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자신들의 진리 외에 다른 것을 따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오늘의 본문 33절에 나와 있듯이 그들에게 행하신 말씀의 말미에 “뱀들아, 독사들의 세대여, 어찌 너희가 지옥의 정죄를 피하겠느냐?” 라고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든 성경기록 중에서 저와 여러분이 대답을 해야만 하는 지상 최대의 질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지옥의 정죄를 피하겠느냐?” 하는 것이 성경 기록 중 어느 것보다도 우리에게 던져지는 최고의 질문입니다. 어떤 분은 그런 것을 가지고 나를 겁주지 말라고 하겠지요. 전에 그런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나는 쉽게 겁먹지 않는다고 할 겁니다. 다른 분은 나는 침례도 받고 해서 문제없다고 하겠지요. 어떤 분은 개인적으로 목사가 무어라 떠들든지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옥이라는 곳에 보낼 리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성경기록에 있는 것처럼 제가 설교 끝에 여러분과 같이 성경에서 살펴볼 답을 말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지옥이라고 하는 곳은 어떤 장소입니까? 한마디로 지옥은 장난이 아닙니다. 이 곳은 재미있거나 귀엽거나 웃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이 곳은 실재하며 정확히 정의가 내려진 장소입니다. 사람들이 욕을 할 때에 지옥이라는 소리를 대부분 듣지만(God damn) 이것은 마귀가 지옥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한 속임수일 뿐이고 지옥은 성경에 의하면 실존하는 장소입니다. 지옥을 그저 욕하는 데에 사용하는 사람은 언젠가 지옥이 실제 있다고 믿고서 구원 받은 사람이 있는 천국에 있고 싶어 할 때가 올 겁니다. 오늘 우리가 지옥에 대해 살펴 볼 부분을 기록해 집에 가서 지옥이란 어떤 곳인지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은 나는 종교적이며 교회도 다니고 헌금도 내며 일요일 성경공부도 가르치고 성가대도 하며 교회에서 안내도 함으로 괜찮다고 말할 겁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 모인 개인 개인 모든 사람이 이 시간을 통해 영적으로 깨우쳐서 절대로 지옥에는 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잠깐만 목사님, 저는 이 교회의 교인인데요.” 하는 분 중 일부분은 세계에 있는 모든 교회의 일부분과 마찬가지로 언젠가 영원히 지옥에서 지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교인이라고 해서 천국에 가는 티켓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침례를 받았다거나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시편 18장 5절을 보십시오. “지옥의 고통이 나를 에워싸고 사망의 올가미들이 나를 앞질러 갔도다.” 첫 번째, 지옥이란 고통의 장소라는 겁니다. 고통이 나를 에워싸고 사망의 올가미들이 있는 곳입니다. 잠언 27장 20절을 보아주십시오. “지옥과 멸망이 결코 가득 차지 아니하는 것같이 사람의 눈도 결코 만족하지 아니하느니라.” 지옥은 결코 가득 차지 않습니다. 지옥은 지금도 하나라도 더 이곳에 보내주기를 울부짖고 있습니다. 지옥은 어떤 이건 오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인들은 구원 받았다고 안심할 수 있으나 마귀는 오늘도 이 세계 방방곳곳을 다니며 그들의 천사나 마귀를 통해서 사람을 장려하든지 낙담시키든지 해서 천국을 등한시하게 하고 지옥에 가게 합니다. 오늘 일요일 아침에 많은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하나님께서 교인들을 지옥에 보내는 일은 없고 지옥이라는 엄포를 놓는 사람들보다 우선해서 여러분을 보호할 것이라고 설교를 할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정확하게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마태복음 5장 29-30절을 보아주십시오.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일부분입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이는 네 지체 중의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네게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만일 네 오른손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이는 네 지체 중의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네게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지옥이란 온 몸이 전부 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만약에 천국에 못 가고 지옥에 가는 유일한 이유가 눈에 욕망이 있어서라면 그 눈을 빼버리고 천국에 가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손이 문제라서 죄를 짓거든 그 손을 잘라내 버리고 천국에 가는 것이 손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지옥은 정말로 존재하는 곳이고 온 몸이 가는 곳입니다. 어떤 이는 지옥이란 영만 가는 곳이라고 하는데 성경은 분명히 온 몸이 가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지옥은 온 몸이 영원토록 고통을 받는 곳입니다. 마가복음 9장 43-47절을 보아주십시오. “만일 네 손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가 불구가 되어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곧 결코 꺼지지 않을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 거기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가 절뚝거리며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곧 결코 꺼지지 않을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 거기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가 한 눈으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 성경은 지옥에 대해 많은 것을 기록해 놓았으나 저는 오늘 일부분만을 말씀드립니다. 성경은 지옥이란 불이 꺼지지 않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영원히, 영원히 말입니다. 저는 3주 전에 정원에서 뒤로 가다가 차의 머플러에 다리를 화상 입었습니다. 그것은 잠깐 동안의 뜨거운 일이었습니다만 아주 끔찍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니 영원히 지옥이란 곳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서 지낸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분은 “목사님, 그런 것을 믿습니까?” 라고 하시겠지만 저의 대답은 확실히 “예”입니다. 물론이죠. 제가 믿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겁을 주기 위한 것일 수 있지만 또한 우리에게 경고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저를 꺼지지 않는 불에서 건지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또 지옥은 고통의 장소입니다. 누가복음 16장 23절을 보십시오. “그가 지옥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고통이 내적인지 외적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지옥이란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는 곳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8-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타오르는 불로 징벌하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눈앞과 그분의 권능의 영광에서 떠나 영존하는 파멸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지옥은 영원히 파멸을 당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 곳은 어떤 종교집단이 말하는 것처럼 잠깐 뜨겁다가 마는 그런 곳(annihilation)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성경에 있지 않습니다. 지옥은 불이 꺼지지 않는 곳이며 고통과 영원한 파멸이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절대 그치지 않는 장소입니다. 그러나 제 소견으로 지옥이 가장 무서운 것은 예수님이 안 계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것이 지옥을 지옥으로 만들 것입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긍휼이 없는 곳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상황을 빗대어 지금 이 지구 위의 세상이 지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입니다. 곧 이 지구 위에 펼쳐질 대환난 중에 있을 21개의 각각 다른 심판도 수많은 사람들이 가야 하는 영원한 지옥의 정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옥은 웃거나, 재미있거나, 욕하거나, 농담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지옥에 가나요? 몇 가지 생각이 떠오르는데, 우선 너무 가슴 아픈 것은 사람들이 지옥을 그저 가볍게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마귀는 매우 교활하게 6,000년 동안 지옥에 대해 사람들을 속이고 지옥에 대한 생각을 희석시켜 왔습니다. 극도로 사악하고 최고의 사기꾼인 사탄이 오늘 여기 저희 페어팩스 뱁티스트 템플 예배당에 않아 계신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을 희생제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마음을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사실 저도 여러분의 마음을 모르고 여러분도 저의 마음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시죠.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속임을 당했는지 회계보고를 할 때가 올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귀가 속이는 몇 가지 방법을 보겠습니다. 물론 다른 여러 곳에서도 나와 있습니다. 13-15절을 봅시다. 서기관들은 구약성경을 다시 써서 보관하며 사람들 앞에서 성경을 읽는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고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지도자로서 긴 가운을 입고 다니고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것을 하라고 하며 손을 씻고 종교예식을 주관하는 사람들입니다. 13절에 보면 종교적인 지도자는 천국에 들어가게 안내해 주는 사람이 아니고 오리려 못 들어가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사탄이 항상 사용하는 것은 종교(religion)입니다. 마귀는 종교를 가지라고 하면서 자기에게 맞는 교회를 찾아다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사탄의 말입니다. 여러분은 버지니아 북쪽에 있는 어느 교회의 교인이 될 수 있으며 천국에 단 한 발자국도 가까이 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어떤 교회의 목사에게 침례 받을 수도 있지만 천국에 절대 못 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티끌만치도 천국에 가까이 가게 할 수 없습니다. 종교란 여러 시대에 거처 오늘 본문 15절처럼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며 각고의 노력 끝에 개종자를 만들어 두 배나 더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항상 속임수를 진리로 꾸밉니다. 약간의 진리에 거짓을 붙여서 듣기 좋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신앙적인 성실성(sincerity)입니다. 본문 16-22절을 보십시오. 즉 자기가 드리는 예물이 중요하지 제단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드리는 예물 즉 금이나 희생물 등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드리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을 하고 희생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믿는 종교에 매우 열심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리새인처럼 신앙적으로 열심인 만큼 완전히 틀렸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돈(money)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돈을 드림으로 하나님 앞에서 좀더 헌신했다고 생각하는데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돈은 위신, 사회적 지위, 인기, 그리고 정치적 영향을 줄 수 있으나 구원에는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티끌만치도 도움이 안 됩니다. 네 번째는 행위(code of conduct)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잔과 대접의 바깥은 깨끗하나 안은 착취와 월권으로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21년간 천국에 가는 것은 내가 행한 행위에서 옳은 것과 잘못된 것을 내가 죽은 후에 하나님이 달아보아 옳은 행위가 많으면 천국에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섯 번째는 외모(outward conformity)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행위는 우리가 행하는 행위를 뜻하는 것이고 외모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냐는 것을 말합니다. 사탄은 속임수의 왕입니다. 종교, 부모, 직업, 돈, 신앙심, 그리고 훌륭한 삶 등을 통해 우리를 속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지옥에 갈까요? 제가 오늘 나누어 드린 설교 인쇄용지는 공백으로 비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옥에 가기 위해선 아무것도 안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영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지옥으로 직행합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방법들, 예를 들어 교리, 교회, 이단, 행위, 침례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여러분이 꼭 기억하셔야 할 성경구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언 16장 25절을 보십시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 사람에게는 올바르게 보이나 그 끝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요? 우선 구원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에스겔 18장 20절을 보십시오. “범죄하는 그 혼은 죽을지니라. 아들이 아버지의 불법을 담당하지 아니하며 아버지가 아들의 불법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로운 자의 의가 그 의로운 자 위에 임하겠고 사악한 자의 악이 그 사악한 자 위에 임하리로다.” 그렇습니다. 죄를 범하면 반드시 죽습니다. 또 이사야 64장 6절에는 ‘우리의 의(義)는 다 더러운 누더기 같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3장 10, 19, 26절과 5장 12절을 봅시다. “이것은 기록된바, 의로운 사람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 … 이제 우리가 알거니와 무엇이든지 율법이 말하는 바는 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모든 입을 막아 온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유죄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 내가 말하거니와 이 때에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사 자신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님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는 이가 되려 하심이라. …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못 알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씀드립니다. 자기의 부모나, 교회, 또는 교회 목사 등은 구원과 무관합니다. 제가 다른 사람보다 나아서 천국 간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이 건물에 있는 누구 못지 않게 나쁜 사람입니다. 단지 저는 용서를 받았고 여러분 중 일부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일한 차이입니다. 저는 천국에 갑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지옥에 갑니다. 그것이 차이입니다. 죄를 적게 지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구원 받기 위해서 첫 번째로 우리는 우리 입으로 우리가 죄인이고 지옥 가기에 합당한 자라는 것을 시인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로마서 3장 24-25절, 베드로전서 1장 18-19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대속(代贖)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화해 헌물로 제시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과거의 죄들을 사면하사 자신의 의를 밝히 드러내려 하심이요, …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대속(代贖) 받은 것은 금이나 은같이 썩을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오로지 그 분의 피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마치신 보혈(寶血)의 역사(役事)에 의해서만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마쳐놓으신 것을 다시 하실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한 번의 희생으로 모든 것을 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it is 후에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청중은 “finished”라고 대답) “내가 다 이루었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단 한번 사역에 빼거나 더 할 것이 없습니다. 끝(period)입니다. 이제 구원받기 위해 해야 할 3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믿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3절, 사도행전 16장 31절, 로마서 10장 9절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 그들이 이르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 그러므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것을 네 마음 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천국에 가려면 예수님께서 나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었고 부활하셨으며 천국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입니다. 둘째. 회개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3장 3절, 사도행전 3장 19절에서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그와 같이 멸망하리라. … 그런즉 너희는 회개하고 회심하라. 그리하면 새롭게 하는 때가 주의 눈앞으로부터 이를 때에 너희 죄들이 말소될 것이요.” 셋째. 기도해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13절을 보십시오. “이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임이라.” 예수님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고 나의 영혼을 구원해 달라고 하면 예수님은 당신을 용서해 주시고 천국으로 맞아들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오늘 이 메시지를 듣고 구원받지 못한 배우자, 부모, 자녀, 친구들, 직장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하십시오. 구원받지 못한 친구들이여! 지옥은 영원합니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지옥만은 면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모든 일이 잘 될거야 하고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실히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이 순간이 여러분의 구원의 때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 성경기록과 천국에 갈 수 있는 명확한 길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옥에 대한 기록으로 우리에게 경고를 주신 것 또한 감사합니다. … 모두 눈을 감고 머리를 숙여 주십시오. 제가 두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언제인가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것이 실제 사실이고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간다는 것이 확실한 분은 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내려 주십시오.? 여러분 중에 일부는 손을 못 들었습니다. 그 정직성에 감사드립니다. 본인이 그리스도인은 아니나 지옥에 가고 싶지 않고 구원받기 원하는 분들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제가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앞의 분 감사합니다. 뒤쪽에서 손을 들으신 분 감사합니다. 또 안 계십니까? … 하나님 아버지, 여기 모인 사람들 중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이 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아침 구원을 받기 원하여 손을 든 여자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오늘이 그녀의 구원의 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2009-05-02 17:05:12 | 관리자
주여, 살려 주시옵소서!   설교·옥한흠 | 사랑의 교회 원로 목사.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 협의회 대표회장.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요한계시록 3: 1~3)   할렐루야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모처럼 한국교회가 하나 되어서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을 기념하는 뜻 깊은 날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예배에 저와 같이 자격 없는 사람이 설교를 맡게 된 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은혜를 가로막는 악한 종이 되지 않도록 특별히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100년 전 한국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인 지 불과 반세기가 되지 않았습니다. 믿는 사람도 3, 4만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나약한 한국교회를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찾아오셔서 성령의 불을 부어주셨습니다. 원산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성령의 불길은 평양에서 절정을 이루었고, 그 후에 연이어 한반도 곳곳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수년 사이에 수십만 명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로 돌아오는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 나라가 기울자, 교회는 사경회라든지, 삼일운동이라던지, 사회계몽에 앞장서면서 절망에 빠진 백성들을 끌어 안아 줄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는 순교의 피를 흘려 한국교회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세계가 주목하는 오늘의 한국교회를 가능케 하는 뿌리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평양 대부흥이라고 확신합니다.이런 전무후무한 은혜를 100년 전 이 땅에 허락하신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평양 대부흥을 돌아보면서, 무엇보다 특별히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함께 강력한 회개의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러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죄를 자복하도록 몰아 붙이지 아니하시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회개였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무시무시한 죄의 공포가 우리 위에 임하였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아무도 그것을 피하여 도망할 수 없었다고 하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장대현 교회에 모였던 선교사들과 교인들은 밤새도록 가슴을 치며 통곡하며 숨은 죄를 토해 놓았습니다. 이런 초자연적인 회개를 경험하면서 한국교회는 세상 앞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왜 백 년 전의 부흥을 다시 사모하며 기다리는 것입니까. 가장 절박한 이유는 한국 교회가 다시 살아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 다시 살아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가 사는 길은 백 년 전과 같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교회 안에 있는 악한 것들, 우리 안에 있든 더러운 것들을 다 쓸어내는 회개 밖에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한국 교회, 이래서는 안된다는 탄식을 오래 전부터 들어왔습니다.오늘 이 시간 백 년 전과 같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이 하늘을 가르시고 우리 중에 임하셔서 성령의 불, 통회하고 자복하게 하시는 회개의 영(靈)을 한국 교회에 다시 한 번 부어 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소망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데 교회는 오늘의 한국 교회의 실상을 들어다볼 수 있는 거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저는 이 말씀을 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선 제가 너무 부담스러운 말씀이고, 듣기에 거북한 말씀이고, 기분이 좋지 않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전하고 싶지 않아서 꽤 고집을 피웠습니다마는 주님은 밤낮 이 말씀에만 매달리도록 종을 몰아 붙였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전하고 싶어서 전하는 말씀이 아님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오른 손에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국 교회를 위해 주시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사데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었느니라.” 이름이 살았다는 것으로 보아 사데교회는 평판이 꽤 좋았던 것 같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은 “아! 그 교회 대단하지” 하면서 인정을 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사데교회가 한 때 놀라운 부흥을 경험한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그들은 오랫동안 그 후광을 즐기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보기에는 살아 움직이는 교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열심도 뜨겁고, 봉사도 많이 하고, 예배도 감동적이고 뭐 하나 흠을 잡을 데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허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눈에는 불행하게도 그 교회는 행위가 죽어 있었습니다. 행위에서 온전한 것을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위가 무엇입니까?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위가 무엇입니까?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사데교회 안에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사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데 교회를 보면서 오늘날의 한국 교회를 보는 것 같다는 불안을 감출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70년 동안 기적 같은 부흥을 경험한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것을 자랑합니다. 5만의 교회, 천만의 성도, 세계 최대의 교회, 새벽을 깨우는 제단의 열심, 남에게 뒤지지 않는 헌신, 1만여 명의 선교사, 많은 헌금, 큰 교회당 등 자랑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세계를 다녀 보십시오. 한국 교회에서 왔다고 하면 다시 한 번 우리를 쳐다봅니다. 겉으로 보면 한국 교회는 절대로 죽은 교회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한국교회에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충성하는 목회자가 참 많습니다.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목사보다 더 헌신하는 평신도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한국교회의 자존심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만일 누가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보고 행위가 죽었다고 하면 저는 그 말을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저의 이러한 확신을 흔들어 놓는 심각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회가 한국교회를 너무 불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목사의 신뢰도는 오래전부터 하위권입니다. 교회에 들어왔다가 실망하고 등을 돌리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전도를 해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무종교자들에게는 기독교가 제일 인기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우리를 이중인격자로 보는 것 같습니다. 말하고 행동하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랑, 사랑 하면서 교회에서 왜 그렇게 잘 싸우느냐고 비아냥거립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자기들보다 더 정직한 데가 어디 있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데는 자기들하고 똑같다고 봅니다. 사회의 각종 스캔들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끼어도 이제는 놀라지도 않습니다. 한마디로 자기들과 다를 바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게도 우리는 이러한 비난을 받으면서 한마디 변명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예수 믿는 우리들의 도덕성, 가치관, 처세관을 놓고 보면 세상 돌아가는 쪽으로 더 많이 기울고 있다는 것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는 세속주의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짠 맛을 잃으면, 우리보다 더 악한 세상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도록 내 던지는 것이 주님의 징계요 심판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러한 끔찍한 상황에 놓여 있지 않는지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금 주님께서 한국교회를 보시고 뭐라고 하실까요? 이름은 살았으나 행위가 죽었다고 책망하지 않으실까요? 누가 ‘아니요‘라고 변명할 목사가 있습니까? 아니라고 변명할 장로가 있습니까? 평양 백주년의 진정한 기념은 이런 우리의 영적인 비참함을 직시하고 가슴을 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사데교회를 보면서 제가 두려워 하는 것이 또 있습니다. 일곱 별을 손에 쥐신 예수님께서 행위가 죽은 교회의 책임을 지도자에게 묻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데교회 사자에게 편지하라’ 사자는 교회의 지도자요, 목회자를 가리킵니다. 저는 왜 주님께서 목회자에게 책임을 물으시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수십 년 목회를 하면서 목사의 입장에 서면 이름은 요란하지만 행위가 죽은 교회를 만드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는 것을 저는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궁금하십니까? 이렇게 하면 됩니다. 목사가 설교를 하거나 말씀을 가르치면서 복음을 조금씩 변질시키면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복음이 얼마나 변질되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둔감해지면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이름은 살아도 행위는 죽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복음이란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에는 진리의 양면성이 들어 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그 믿음의 진가는 순종하는 행위로 검증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구원의 절대적인 요소라고 한다면 행위는 구원의 필연적인 요소가 됩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위는 따로 놓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을 가리켜서 좋은 나무와 좋은 열매로 비유하셨습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믿음과 순종을 똑같이 가르쳐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로마서를 설교하였다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도 진지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청중은 원래 귀에 듣기 좋은 말씀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면 모두가 ‘아멘’ 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받는다고 하면 ‘할렐루야’ 하고 열광합니다. 그러나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요, 구원도 확신할 수 없다고 하면 얼굴이 금방 굳어져 버립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를 지적하거나 책망하면 예배 분위기가 금방 싸늘해져 버립니다. 듣기가 싫고 몹시 거북스럽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교회에서 사역할 때 저는 비슷한 반응을 가끔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청중의 반응에 예민해지면서 저도 모르게 그들이 좋아하는 말씀을 일부러 골라서 설교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신 죄라든지, 회개라든지, 순종이라든지, 거룩이라든지 하는 듣기 피곤한 말씀은 할 수 있으면 피하거나, 꼭 말을 해야 한다면 부드럽게 달래듯이 말하고 싶어하는 유혹에 끌려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의 이런 모습은 예수님이 절대 바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절대 원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러한 일이 강단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그 결과 저도 모르는 사이에 복음을 조금씩 변질시켜가는 설교자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말씀대로 순종하는 행위에는 관심이 없고, 믿음만 가지고 떠드는 값싼 은혜에 안주하는 무리들이 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를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고 하는 놀라운 복음을 발견한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의로운 행위는 아무런 공로가 되지 못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비텐부르크에서 34년간 4000번 이상을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루터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의 메시지를 곡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순종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데 죄 좀 지었다고 그게 뭐가 대단한거냐면서 자신의 욕심대로 사는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도시는 믿음의 방종이 난무하는 타락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기막힌 상황을 보면서 루터는 자기의 설교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 동안 설교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탄식했다고 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목사라면, 설교하기 보다는 차라리 수레를 끌고 돌을 운반하는 것이 났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루터가 우리에게 주는 귀중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지도자가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면서 믿음만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그 열매가 되는 행위를 등한시 하거나 무시하면 입만 살고 행위가 죽어버리는 사데교회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0절을 보면 바울은, 유익한 말씀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 없이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를 비롯하여 한국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은 바울처럼 무엇이든지 거리낌 없이 전하는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단 것은 먹이고 쓴 것은 가능하면 먹이지 않으려는 나쁜 설교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설교자는 청중에게 인기가 있어서 사람을 많이 끌어 모으는 데는 성공할지 모르나 행위가 죽은 교회를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 지도자 여러분! 복음을 변질시켰다는 주님의 질책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에 몇 명이나 됩니까? 입만 살았고 행위가 죽은 교회를 만든 책임은 너에게 있다고 질책하신다면 나는 아니라고 발을 뺄 수 있는 목회자가 몇이나 됩니까? 평양 대부흥의 진정한 기념은, 복음을 변질 시킨 죄를 놓고 가슴을 치는 목회자들의 회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간절한 소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행위가 죽은 사데교회를 향해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 회개만이 살 길이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향해서도 똑같은 명령을 하고 계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답답한 일은 우리의 힘으로 회개가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입으로 잘못했다는 말은 수없이 할 수 있으나, 죄를 끊어버리고 단호하게 돌아서는 거룩한 결단은 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백 년 전, 하디 선교사가 하던 회개, 길선주 장로가 하던 회개, 무명의 성도들이 밤새도록 추운 겨울 밤 찬 마룻바닥에 엎드려 땅을 치며 통곡하던 그 회개를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에 비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죄를 짓고 사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회개는 한국교회에서 형식적인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생명을 서서히 죽이는 암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회개를 하고, 세상 앞에 새 옷을 갈아입으려면, 성령께서 회개할 힘을 우리에게 주셔야 합니다. 통회하고 자복하고 버리는 결단을 할 수 있도록 성령이 우리를 도와 주셔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능(能)으로도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힘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성전 된 우리를 깨끗하게 청소하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백 년 전과 같이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이 땅에 강림하셔서 아낌없이 부어주셨던 성령의 불, 회개의 영을 다시 부어달라고 힘을 다해 부르짖어야 할 것입니다. 부르짖고 문을 두드리면 주님께서 응답하실 줄을 믿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으로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죽은 행위를 벗어버리면 아직도 죽음의 권세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이 백성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온전한 복음을 다시 회복하면, 온갖 더러운 죄로부터 그 죄에서 나는 악취로부터 이 사회를 치료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성령의 능력을 다시 입으면, 북한의 무너진 교회를 우리 모두 다시 일으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성령의 거룩한 불이 타오르는 용광로가 되면, 주님께서 21세기 세계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에 우리 한국교회, 불러주실 줄 믿습니다. 믿습니다. 주여, 한국교회를 살려 주시옵소서!! 한국교회를 살려 주시옵소서!!! 머리 숙여 기도합니다. 거룩하신 주여, 이놈이 죄인입니다. 이놈이 한국교회의 입만 살았다고 떠들고 행위가 죽어버린 한국교회를 만드는 장본인입니다. 주여, 이것이 감히 설교할 자격이 없는데도, 주님이 말씀을 전하라고 이 비천한 것을 몰아붙였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겉모양은 요란하지만, 내면에는 죄악이 쌓여 있는 이 한국교회를 주여, 불쌍히 여기고 성령을 부어주시되, 통회하고 자복하는 영을 부어주셔서 이 한국교회를 깨끗하게 하옵소서. 깨끗하게 하옵소서. 깨끗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민족에게 소망을 주게 하시고, 이 나라를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시고, 주의 거룩한 영광이 이 땅에서 경배를 받으시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09-05-02 17:03:05 | 관리자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귀납적 방법인가 연역적 방법인가?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때 보통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한 방법은 사람을 이단적이고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하고 다른 방법은 온전한 진리에 이르게 한다. 전자는 인간의 사악한 불신앙과 교만을 부추기고, 후자는 겸손히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리가 가지는 권위 앞에 순복한다. 1. 귀납적 방법 귀납법은 과학분야에서 널리 쓰이는 방법으로 흔히 과학적 방법으로도 불린다. 즉, 어떤 특정한 문제를 두고 '검증과 관찰'이라는 과정을 거쳐 결론에 이르는 방법이다. 예를 들자면, 한 과학자가 땅에 떨어지는 두 물체를 관찰한 뒤 충분한 실험을 거쳐 '중력의 법칙'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 방법은 자연 과학에서 적용되어 수많은 결과들을 산출해 내었다. 그런데 위험한 일은 사람들이 신학의 영역에서까지 이 과학적 방법을 적용하려는데 있다. 2. 연역적 방법 연역법은 신학적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과정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하나의 전제(전부터 진리라고 알려진 것)가 주어진다. 그리고 이 전제를 통해 모든 문제를 관찰하는 것이다. 연역법은 종종 수학 분야에서 사용된다. 다음 문제를 보자: 2a + 4 = ? 이 문제를 풀려면 반드시 전제가 있어야 한다. 가령 한 사람이 a를 3으로 했다고 하자, 그러면 답은 바로 10이 될 것이다. 자, 이제 앞에 나온 두 가지 방법이 신학 분야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살펴보자. 우리는 여섯 가지 중요한 질문을 통해 이를 알아볼 것이다. 1)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는가? 이 물음에 대해 귀납법으로 답하자면 복음서의 사건들을 면밀히 연구하여 예수님께서 죄를 지으셨는지 어떤지를 알아보아야만 한다. 즉 그리스도의 생애에 나오는 사건 하나 하나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과 행동 모든 것을 고려해야만 한다. 주님께서 모세의 법을 어기시지는 않았는가? 안식일을 어기시지는 않았는가?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시지는 않았는가? 분에 못 이겨 화를 내신 적은 없는가?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은 그분의 잘못이 아니던가? 어떤 여자가 죽었는데도 "죽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거짓말하신 것이 아닌가? 귀납법으로 나올 수 있는 결론이 무엇이겠는가? 바리새인들과 유다교 지도자들도 이 귀납법을 사용하여 예수님을 정죄하고 죽이려 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시작할 때부터 어떤 하나의 전제를 갖고 시작한다.(벧전 2:22를 보기 바란다) 따라서 그는 복음서의 기사들을 읽을 때 그리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절대적으로 옳은 전제를 통해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을 이해해야 한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2) 사람은 죄로 가득한 사악한 존재인가? 어떤 사람이 이 문제를 검증하기 위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연구를 시도한다고 해보자. 시작부터 그는 사람의 사악함을 보여주는 많은 증거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도둑질, 살인, 증오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결혼이 깨어지고 이혼율은 급증하고 부도덕과 부패가 없는 곳이 없다. 신문지상에 나타난 여러 사건들은 인간의 타락상을 좀더 극명히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연구를 지속하다가 그는 이와 반대되는 몇 가지 행동 양상을 보게 된다. 동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어떤 병사, 전 생애를 아프리카에서 봉사하며 보냈던 슈바이처 박사, 어린 아기를 위해 사랑을 붓고 끝내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쏟아 붓는 어머니, 그 외에도 인간이 보여주는 친절과 관심과 자선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자, 이제 그는 어떤 결론을 내릴까? 아마도 그는 다음과 같은 이단 사상을 결론으로 내릴 것이다: "사람에게는 선과 악의 두 경향이 있다. 각 사람에게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절대적 전제(렘17:9)로부터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결론은 절대 잘못된 것이다. 사람의 죄성을 결정하는 문제에 있어 과학적인 방법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과학적 방법은 오로지 관찰에 기초하기 때문인데,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관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는 오직 한 분뿐이다(삼상 16:7; 렘 17:10). 3)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정당하고 의로운가? 이번에도 귀납적 방법을 사용한다면 전혀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의인이 고통받고 악인이 번성하는 예를 쉽사리 볼 수 있다. 게다가 세상은 죄와 질병으로 가득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기들이 죽고 이방인들은 우상 숭배로 멸망한다. 불평등과 부조리가 난무하는 세상이다. 이런 것들을 관찰할 때 하나님이 결코 정의로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전제를 주셨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롬9:14) 하나님께 불의가 있다는 생각은 아예 접어 두라. 바로 이같은 접근만이 이런 질문을 하는 영혼들에게 참된 위로와 확신을 가져다 줄 것이다. 4) 오늘날에도 방언의 은사가 있는가? 이 질문을 누가 과학적으로 조사한다고 해보자. 즉, 오늘날의 방언 체험이 유효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는 실제 방언이 행해지는지 알아보기 위해 현장을 답사한다. 어떤 교회에서는 전혀 그런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교회나 모임에서는 방언 현상(성경의 방언이 아님)을 실제로 볼 수 있다. 결국 그는 타언어(방언)의 은사가 오늘날에도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그릇된 결론 역시 인간이 하나님의 전제를 무시할 때 생겨난다. 타언어(방언)에 대한 근본 전제는 고전13:8에 나와있다: "타언어(방언)도 있다 해도 그칠 것이며...." 전후 문맥과 하나님께서 타언어(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을 고려한다면 이제 안전한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5) 사후의 삶이 있는가? 이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과학적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어리석은 짓이다. 죽음 뒤에 무엇이 있다는 것을 관찰한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 사후의 삶, 혹은 내세에 대한 과학적인 증거를 보여준다는 책자들(그것도 소위 "복음적"이라는 저자들이 쓴)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 특징까지도 묘사하고 있다. 즉 임사 상태(임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 들어간 사람이 다시 살아서 자신의 체험담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내린 결론의 대부분은 성경이 말하는 사후 삶에 대한 전제와 전혀 반대된다. 죽고 난 뒤 그런 종류의 책들이 틀렸고 하나님이 옳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게 될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6) 성경에는 오류가 없는가? 이 이슈는 오늘날 소위 "복음주의" 진영에서 뜨거운 논쟁거리로 부각되고 있다.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귀납적인 방법을 기초로 삼는다. 귀납법으로 성경의 구절 구절들을 조사하며 어떤 실수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성경의 오류를 찾는 일에 착수한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과학적인 진술들, 창세기의 첫 부분, 가계, 연대기, 역사 기록 등 오류나 모순으로 발견될 수 있는 모든 영역을 면밀히 검토한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명확한 전제를 의지한다(요 17:17; 딤후 3:16; 벧후 1:20-21). 그는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확실한 전제하에 소위 성경의 모순이라고 알려진 모든 구절들을 본다. 이 외에도 독자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명백히 말하는 전제와 진술을 믿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인간의 오류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배하는 규칙에 대해 말 한 바를 기억하자: "이는 우리가 믿음(연역법: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약속과 전제들을 믿는 것)으로 걷고, 보는 것(귀납법: 사람의 경험과 관찰, 느낌에 기초에 그릇된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걷지 아니함이라"(고후 5:7).
2009-05-02 17:01:52 | 관리자
성경 - 이 얼마나 견고한 기초인가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 요 17:17 "성경은 폐하지 못할진대" -- 요 10:35 "성경기록들을 성취하려 함이니라" -- 막 14:49 "기록된 모든 것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리라" -- 눅 24:44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 마 24:35   우리가 알아야 할 몇 가지 용어들은 다음과 같으며, 이들은 모두 성경이 완전히 영감을 받았고 절대적인 진리이며 온전히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 무오한(inerrant) 이 말은 어떤 종류(역사, 연대, 계통, 과학 등의 모든 분야에서)의 오류도 없는 것을 뜻한다. 절대적으로 바르고 실수나 결함, 모순, 부정확, 불일치, 불완전함, 속임수, 거짓말(딛 1:2; 히 6:8)등을 완전히 배제한 ... 어떤 오해나 거짓된 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진리 그 자체이며 전부가 진리라는 것이다(요17:17; 시 119:160). 2. 무오류한(infallible) 오류가 있을 수 없는("무오한"의 유의어), 틀림없고 정확하며 신뢰할 만하고 절대 확실한. 이 단어는 이따금 사람에게도 사용된다. 예를 들어 로마카톨릭주의는 스스로 자신이 무오류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황이든 사제든 목사이든 간에 무오류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만이 무오류하다(요 10:35). 사람은 실수할 수 있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다(마 22:29). 3. 권위 있는(authoritative) 성경은 내게 절대적인 권위(권능, 주권, 통치, 지배권)를 가지므로 나는 말씀의 권위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한다(사66:2; 슥9:4; 삼상3:9-10). 거기에는 어떤 의심도 논쟁도 의문도(창3:1) 반박도(창3:4)도 있을 수 없으며, 더욱이 그 말씀에 대한 불신, 변개(더하거나 빼는 것)(계 22:18-19), 이의(가령 "과학은 안 그런데요" "하지만 너무 성경은 너무 낡았어요" "이 구절은 마음에 안 들어요") 등은 있을 수 없다. 뱀(사탄 마귀)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절대, 명확, 분명함)할 수 없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믿기를 원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며 "하지만 그건 당신 해석이지."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기록된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는 성도는 성경이 확실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주의 입이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창3:1과 비교) 4. 영감을 받은(inspired) 이 단어는 딤후3:6에 잘 정의되어 있다. 여기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테오프뉴스토스'(theopneustos)는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신" (God-breathed)이란 뜻이다. 따라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통해 주신 것이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성경 전체의 말씀들을 숨을 불어넣으신 것같이 말씀하셨다는 것을 뜻한다. 기술적으로는 "inspiration(들숨)"보다 "expiration(날숨)"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따라서 히브리 대구법에 따라 시33:6의 "그분의 입의 숨"이란 표현은 "주님의 말씀"이라는 표현에 해당된다. 우리는 말할 때 단어들을 내쉰다. 이것은 곧 '단어들을 내쉰다'(breathing out)는 것을 말함을 또 달리 표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기록을 내쉬셨고,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모든 성경기록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구절에 대해 우리는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다. "주님의 입이 말씀하셨다." 따라서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다가 실수를 범하셨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 얼마나 신성모독적인 발언인가! 5. 총체적 영감(plenary inspiration) 이 말은 성경이 어떤 특정 부분(혹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만 영감받은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즉 완전하고도 속속들이 영감받았다는 것을 말한다(딤후3:16 - "모든 성경"). 이것은 창세기 1-11장에 나오는 모든 역사기록과 숫자 연대기, 가계 등도 모두 성경의 일부라는 말이다. 어떤 "계시적인" 성격을 지닌 기록만 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여기서 "계시"의 기록이란 흔히 구원의 메시지(즉 사람을 구원에 이르도록 지혜롭게 하는)와 삶의 지침(성경의 교리적 가르침과 믿음과 실행에 관련된 모든 사항)을 가리킨다. 그러나 딤후3:16-17은 분명 "모든 성경이 교리(가르침)에... 유익하다"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성경의 모든 내용이 믿음과 실행에 연관되어있다는 것이며, 바로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성경은 "계시적인" 성격을 지니며 무오류하다. 누가 감히 성경 어떤 부분의 진위를 판가름할 수 있단 말인가? 일개 사람이 받아들일 부분과 버려야 할 부분을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러나 성경 전부를 하나님의 진리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는 참으로 지혜로운 자이다. 6. 축자 영감(verbal inspiration) 이 말은 성경기자들이 기록한 자필 원본에 기록된 대로 단어 하나 하나(단순히 어떤 사상이나 줄거리가 아니라)가 영감을 받았다는 뜻이다(시12:6; 잠30:6). 비록 지금 우리에게 자필 원본은 없지만,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본들만으로도 성경 원문의 정확성을 충분히 알 수 있다. 7. 점, 그리고 획 영감(jot and tittle inspiration) 점은 히브리 알파벳에서 가장 작은 문자이며 획은 비슷해 보이는 두 히브리 문자를 구분해 주는 표시이다. 성경의 모든 점과 획은 영감을 받았고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마5:18; 눅 16:17). 영어로 말하자면, "i"의 점과 "t"의 획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감의 범위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님을 통해 감동되어 말했을 때(혹은 기록했을 때)"(벧후 1:21) 그들에게 주신 성경 기록의 극히 미세한 부분에까지 미친다. 다음은 "점과 획" 영감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몇 가지 예이다. 1) 마22:44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다윗이 말한 바 "나의 주"에 기초한다. 여기서 우리는 대답을 할 수 없는 질문을 하나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어떻게 다윗의 아들(David's Son)이 다윗의 주(David's Lord)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참고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롬1:3-4에 나와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시110:1에 나오는 "나의"(my)라는 단어가 히브리어에서는 따로 분리된 단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단지 "주"라는 단어에 붙은 접미사에 불과하다. 이를 통해 이처럼 작은 "점"하나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주님의 말씀도 이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2) 갈3:16 말씀은 복수냐 단수냐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s"라는 단어 하나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3) 히브리서를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실 것을 믿었다고 한다(히11:17-19). 어떻게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알 수 있었을까? 열쇠는 바로 창22:5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말에 있다. "우리가 너희에게 다시 오리니"(풀어 말하자면 "비록 내가 이삭을 희생물로 드리려 가나 우리 둘 다 살아서 돌아오리라"). 그런데 "우리가 오리라"와 "내가 오리라"(아브라함만 돌아온다는 뜻)의 차이는 히브리어의 한 문자에 달려있다. 물론 영어 성경에는 우리 대신에 '나와 아이가'라는 표현이 주어로 되어 있어 '우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4) 마태22:32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느니라(I was the God of Abraham)"이 아니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I am the God of Abraham)"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있다(출3:6 참조). 이 구절의 전반적인 문맥과 심지어 동사의 시제조차도 주님의 말씀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따라서 "점과 획의 영감"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본문의 세세한 부분(동사의 시제, 인칭 대명사, 단수 복수, 간과하기 쉬운 작은 단어들, 단어를 이루는 문자 하나하나)까지 유의하며 성경을 공부해야 할 것이다. "오 주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정착되어 있나이다"(시 119:89)!
2009-05-02 17:01:02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