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공부하기 위한 영적 조건
1 성경은 무엇인가?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하게 된 것들 안에 머무르라. 네가 누구에게서 이것들을 배운 줄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거룩한 성경을 알았나니, 이 성경은 능히 너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철저히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4-17)
"너희가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탐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니라."(요5:39)
2 구원을 받아야함.
"사람의 것들을 사람의 속에 있는 사람의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것들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우리가 이것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니 영에 속한 것은 영에 속한 것으로 비교하느니라.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요,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이는 이러한 것들이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1-14)
"그분께서 허물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지나간 때에는 너희가 그 가운데서 이 세상의 행로를 따라 걸으며 공중의 권세 잡은 군주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이라. 지나간 때에는 우리도 다 그들 가운데서 우리 육신의 욕심대로 행하였으며 육신과 생각의 욕망을 채워 다른 이들과 같이 본래 진노의 자녀들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 죄들 가운데서 죽어 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2:1-5)
√ 성경을 이해할 수 없으면 먼저 자기의 마음을 검사해야 함.
1. 성경에 순종하려는가?(요일2:3-5)
2.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가?(요일3:14)
3. 이 세상을 이기고 있는가?(요일5:4)
4.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있는가?(고후5:17)
5.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르는가?(요10:27)
"그분을 모셔들이는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들이니라"(요1:12, 13).
"형제들아, 또한 내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을 너희에게 밝히 알게 하노니, 너희 역시 이 복음을 받았으며 그 가운데 서 있느니라. 너희가 만일 내가 선포한 것을 기억하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또한 그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느니라. 나도 역시 받은 것을 무엇보다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성경대로 셋째 날에 다시 일어나사......"(고전15:1-4)
3 육신에 속한 크리스천은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형제들아, 내가 영에 속한 자에게 말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갓난아이들에게 말하는 것 같이 하였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단단한 음식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지금까지 너희가 그것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함이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어찌 너희가 육신에 속하여 사람들과 같이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 속하였다, 하고, 다른 이는 말하되, 나는 아폴로에게 속하였다, 하니, 어찌 너희가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리요?"(고전3:1-4)
√ 이기심: 눅9:23, 질투, 시기: 눅12:15; 롬12:10
4 배운 것을 사용하라.
"시간으로 보건대 너희가 마땅히 가르치는 자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원리가 되는 것을 또 다시 남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자가 되었으니,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자가 되었도다. 젖을 사용하는 자는 다 갓난아이인 고로 의의 말씀에 능숙하지 못한 자니라. 오직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의 것이니, 그들은 곧 자기의 감각들을 사용하여 단련시킴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2-14)
√연습이 필요함. 기도:시55:17, 예배:눅4:16, 매주 헌금을 드림(고전16:2) 등
5 믿음을 가져라.
"믿음을 통해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깨닫나니,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자신을 열심히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3, 6)
√ 믿으면 깨달을 수 있다. 전기의 사용으로 혜택을 누리나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지 못함.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를 가지라. 숫자가 다른 이유.... 등
6 훈련하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자기가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의 모든 서신에서도 이것들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깨닫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배우지 못하여 흔들리는 자들이 다른 성경기록들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파멸에 이르느니라."(벧후3:15,16)
"내 아들아, 주와 왕을 두려워하고 변하는 것에 빠지는 자들과 상관하지 말라. 그들을 치는 재앙이 갑자기 생기리니 그 둘의 멸망을 누가 알리요?"(잠24:21-22)
√ 성경을 왜곡하면 파멸에 이른다.
7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
"사람이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인지 알리라."(요7:17)
√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았거든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너희는 위에 있는 것들에 애착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애착을 두지 말지니,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음이라."(골3:1,2)
8 사람의 한계를 인정하라.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분의 상담자가 되었느뇨? 누가 그분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께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분께 영원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롬11:33-36)
9 성령님의 지도를 받으라.
"그러나 너희에게는 그분에게서 받은 바 기름부음이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 기름부음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며 또 진리요 거짓이 아니니, 그 기름부음이 너희를 가르친 대로 너희가 그분 안에 거할지니라."(요일2:27)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자는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께서는 그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힘입어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24)
"그분께서 자신의 영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4:13)
√ 여기의 "기름부음"은 성령님을 의미함.
"너희는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알기 때문이요, 또 어떤 거짓말도 진리에서 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요일2:19, 20)
√ 엡4:12, 고전12:28 등은 교사의 필요성을 보여줌.
√ 성령님은 사람들을 사용하여 가르치시는데 언제나 성경 말씀을 통해 그리하신다(고전2:13)
√ 성령님께 의존하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곧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의 깨닫는 눈을 밝히사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 있는 그분의 상속의 영광의 풍부함이 무엇이며, 그분의 강력한 권능의 활동을 통하여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권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지 너희로 하여금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7-19)
10 지속하라.
"만일 우리가 계속해서 주를 알고자 하면 비로소 우리가 알게 되리라. 그분의 나아오심은 아침 같이 마련되어 있으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비처럼 곧 땅에 내리는 늦은비와 이른비 같이 오시리라, 하리라."(호6:3)
2009-05-02 17:00:23 | 관리자
많은 종류의 현대어 번역 성경들을 구입할 수 있는 요즈음 우리는 흠정역 킹제임스 성경을 버려야 할까요?
요즘에는 너무나 많은 이들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성경의 권위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현대 영어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들로 성경을 새로 번역해야 한다고 계속해서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성경이 여전히 활기 있게 살아서 움직이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현재 성경의 전부 또는 일부가 1,200종류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으며 - 이 숫자는 1920년에 비해 2배임. - 이런 추세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위클리프 성경 번역 단체의 경우 현재 선교 언어학자들이 거의 500 여 부족들 가운데서 일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은 각 부족 고유의 언어로 성경을 기록하기 위해 예전에는 문자로 기록할 수 없었던 언어를 문자로 기록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영어로는 적어도 25개 이상 되는 중요한 현대 번역본과 풀어쓰기 형태의 의역 성경들이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이 성경들은 "The King James Authorized Version"(우리말로는 흔히 권위역 킹제임스 성경이라 불리며, 영어의 약자로는 KJV나 AV로 기록됨)의 고색 창연한 16세기 영어로 기록되지 않고 소위 "현대 영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현대어 번역본들이 왜 그처럼 많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새로운 현대어 번역 성경을 만들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금전상의 이익을 제외하고는) 명백한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현대어 번역본이 영어로 거의 매년마다 출판되고 있습니다.
물론 현대어 번역본들이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어떤 좋은 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원어성경이 그 당시 사람들의 일상 용어로 쓰였으며, 하나님께서 제사장들과 학자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이 성경을 이해하고 사용하기를 원하셨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된 성경을 접해야 한다는 것은 그 당시처럼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현대어 번역본 중에서 어떤 것들은 어떤 이유로 인해 권위역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 왔다는 사실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위역 킹제임스 성경을 영어성경의 기본으로 간주해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권위역 킹제임스 성경은 무려 350년이 넘도록 범세계적인 인정(認定) 시험에서 합격을 했지만 현대어 번역성경들 중에서 이와 같은 인정을 받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각각 특별한 주장과 성격을 띠고 있는 새 번역성경들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것, 그 자체가 오히려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한 때 존중을 받고, 매우 가치 있는 것으로 여김을 받던 성경구절 암송이 지금은 거의 잊혀져 가는 습관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분명한 이유 중 하나는 현대어 번역성경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성경 암송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의 권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조차도 어떤 특정 성경구절에 동의하지 않는데 과연 누가 그 구절을 암송하려고 애쓰겠습니까?
게다가 성경을 현대어로 번역한 번역자들 중에는 성경의 완전한 축자영감(the full verbal inspiration of the Bible)을 온전히 믿지 않는 사람이 매우 많이 있었습니다. 원어나 성경 사본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성경의 무오성과 명확성을 무시하는 그들의 관점은 어쩔 수 없이 번역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며, 그 결과 그들은 어느 정도 부정확하며 주관적인 번역을 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계시를 부패시킬 것입니다.
반면에 권위역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은 현대의 어느 누구 못지 않게 훌륭한 학자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을 지극히 신성한 것으로 간주하여 원문에 있는 모든 단어를 하나님이 원래 주신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원문에 대한 이와 같은 존경심이 헬라어 원어 성경과 히브리어 원어 성경을 번역할 때에 그대로 충실하게 반영되었으며, 바로 이것이 권위역 킹제임스 성경의 특징이 된 것입니다. 이런 것은 또한 그들이 번역을 할 때 이탤릭체 글자를 사용하는 일에도 반영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헬라어 원어 성경과 히브리어 원어 성경에 나오지 않는 단어들을 번역 성경에 첨가해야만 그 의미를 전달하 수 있다고 판단될 때 그들은 그때 그때마다 그것을 이탤릭체로 표시하여 다른 글자들과 구별했는데 이것은 현대어 번역본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훌륭한 관습이었습니다.
더욱이 권위역 킹제임스 성경을 비평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킹제임스 성경은 그렇게 오래된 낱말들 즉 고어로 이루어져 있지 않으며 이해하기에 어렵지도 않습니다. 사실상, 그것은 거의 대부분의 현대어 번역본보다도 일반적으로 훨씬 단순한 어휘로 기록되었으며 현대어 번역들에 비해 하나 내지 두 음절로 이루어진 단어의 비율이 더 높습니다. 따라서 외우고 읽기에 매우 좋습니다. 정직한 독자라면 적어도 권위역 킹제임스 성경이 다른 어떤 번역 못지 않게 이해하기 쉽다는 것을 금방 발견하실 것입니다. 사실 권위역 킹제임스 성경에 나오는 언어는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영어의 아름다움과 힘을 여전히 보유하면서 동시에 최근 식민지 시대의 어휘 특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권위역 킹제임스 성경은 영문학의 모든 걸작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것으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권위역 킹제임스 성경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영어라는 언어를 상당한 정도의 수준으로 높이는 일을 해왔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은 거의 모든 영어권 사람들에 의해 무려 12세대 이상 동안이나 널리 읽히고 사용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영어 문학의 유산 가운데서 권위역 킹제임스 성경의 아름답고도 장엄한 문체와 비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그 문체는 오늘날 우리의 일상 회화와 문서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고어와 고문체라고 일컬음을 받는 것들조차도 우리에게 어떠한 가르침을 줍니다. 어떤 동사들 끝에 붙어 있는 "th" 철자 및 "thee"와 "thou"라는 대명사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것들은 어떤 타당한 이유 때문에 그 당시 셰익스피어 당시의 영어에서도 다 사용되었습니다. 사실 이런 것들로 인해 그 당시 영어는 인칭이나 시제, 그 외 다른 문법적인 정확성에 있어서 쇠퇴기에 접어든 현대영어보다 훨씬 더 정확한 구별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셰익스피어의 연극이나 글을 읽으면서 이와 같은 고어가 나오는 것에 대해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장중함과 우아함에 감탄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든 사람들이 그보다 더 멋있고 훌륭한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불평을 한다면 과연 말이 됩니까?
마지막으로 모든 영어 성경 중에서도 단지 권위역 킹제임스 신약성경만이 '텍스투스 리셉투스'(Textus Receptus)라고 알려진 그리스어 원문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 기간 중 영적인 각성이 일어날 때에 사용된 그리스어 신약성경 입니다. 물론 인쇄기가 발명되기 전에는 성경이 손으로 복사되어 유통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던 사본들은 널리 사용되기 마련이고 따라서 꽤 빨리 닳아 없어지게 되었으므로 새로운 종이나 양피지 위에 끊임없이 다시 복사해야만 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수많은 사본들이 유통되었기 때문에 복사하는 이들의 누적되는 실수로부터 원문을 보호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많은 사본들을 비교하고 점검하는 과정이 끊임없이 계속되었습니다. '텍스투스 리셉투스'(모두 공통적으로 인정했다는 의미의 "공인 본문"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음)로 알려진 그리스어 신약성경이 편집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연유 때문이었습니다. 현존하는 그리스어 사본의 대다수는 소위 "비잔틴 본문"(Byzantine text)이라고도 불리는 다수사본이라는 데는 어느 누구라도 다 동의합니다. 이 사본은 그리스어를 말하던 교회들에 의해 기독교의 초기 몇 세기 동안 보존되었습니다.
부주의에 의해서든 아니면 고의에 의해서든 심각한 실수나 개정 사함을 포함하는 사본이 만들어질 때 사람들이 그 성격을 알게 되면 자연히 그것을 버리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고의로 그것을 없애지 않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런 사본들은 다른 사본들보다 더 오래 보존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시내 사본이나 바티칸 사본이라고 불리는 천주교 사보들과 기타 다른 소수 사본들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사본들은 19세기에 발견되었으며 아직까지 보존되고 있는 공인 본문 사본보다 더 오래된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본들은, 명백히 부주의한 잘못이라고 보이는 것들과 아마도 고의적으로 변경한 것처럼 보이는 사항들을 놀랍게도 매우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스트코트(Westcott)나 호르트(Hort) 혹은 네슬레(Nestle) 같은 학자들은 이 소수 사본들을 자기들이 19세기에 출판한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근거로 삼았으며, 이것들은 또 그 후에 현대 영어로 번역된 모든 성경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권위역 킹제임스 성경이 지금도 여전히 가장 정확하면서도 신뢰할 만한 성경이라고 믿는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사항들과 기타 다른 사항들을 살펴볼 때 권위역 킹제임스 성경을 어떤 다른 현대어 번역 성경으로 대치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2009-05-02 16:59:36 | 관리자
어떻게 성경을 읽을 것인가
"이 대언의 말씀들을 읽는 자 ......복이 있나니...."(계1:3)
성경을 읽을 때 도움이 될만한 몇 가지 실제적인 제안을 드립니다.
1. 규칙적으로 읽는다
신체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보통 하루에 세끼를 먹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자주 먹을까요?(벧전2:2; 마4:4; 욥23:12) 우리는 이런 말을 늘 듣곤 합니다. "오늘 너무 바빠서 밥 먹을 시간이 없어."
아마도 당신은 매일 성경을 읽기에는 시간이 없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위대한 복음전도자인 무디에게 이같은 변명을 늘어놓았더니 무디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친구여, 당신이 매일 성경을 읽지 못할 만큼 바쁘다면 전능하신 하나님보다 더 바쁜 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정해 놓으셨지요. 그러니 몇 가지 다른 일을 뒤로하고서라도 성경 읽을 시간을 확보해 두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기 위해 하루 중 특정한 시간을 할애해 놓는 것이 좋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침을 가장 좋은 시간대로 꼽는데, 이는 하루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은 저녁시간이나 하루 중 조용한 시간에 성경을 읽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아침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후 성경 읽을 시간을 갖습니다. 어쨌든 각자에게 가장 알맞은 시간대를 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2. 천천히 읽는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 얼마가 당신의 마음에 들어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 장을 읽고서 그 내용이 무엇인지 잊어버리는 것보다 한 절을 읽어도 제대로 기억하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즉, 읽는 양이 조금이더라도 이해하면서 읽는 것이 서둘러 읽는 것보다 좋다는 것입니다. 고전14:19의 말씀을 준 사도 바울 역시 수천 단어를 읽고도 아무런 얻는 것이 없는 것보다 다섯 마디를 읽어도 제대로 이해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보며 보내는 35분의 시간보다 느긋하게 보내는 5분의 짧은 시간에 주님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3. 체계적으로 읽는다
성경을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 지 막막해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론 "아무 데나 걸리는 대로 읽는"방법을 쓰기도 합니다. "주님, 오늘 읽어야 할 곳을 보여주세요" 그리고 나서 마음대로 성경을 펼치고서 아무 데나 읽기 시작합니다. 물론 주님께서 이런 방법을 통해 역사하실 수도 있지만 대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되지 못합니다.
여기 "아무 데나 읽는" 방법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한 가지 예화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이 방법을 사용한 한 사람의 얘기입니다. 이 사람이 성경을 펼쳐들자 먼저 잡힌 곳은 마태27:5인데, 여기에는 가룟 유다가 "떠나가서 목을 매단" 사건이 있었습니다. 과연 이것을 자기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은 이 남자는 성경을 닫고 다시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누가10:37에는 예수님께서 "너도 가서 그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신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에 그는 매우 당황해 했습니다. 어떻게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다시 성경을 열어보았습니다. 이제 그의 손가락은 막 떨립니다. 그런데 이번에 펼친 요한13:27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네가 하려는 것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방법은 독자로 하여금 문맥과 전혀 상관없이 성경을 읽게 만들므로 성경을 이상하게 이해하도록 합니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보통 처음부터 읽기 시작하여 결말에 이릅니다. 저자가 그런 순서로 썼기에 읽을 때도 그렇게 읽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편지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라고 예외가 되지는 않습니다. 성경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쓴 사도 바울은 처음에 13장을 쓰고 그 다음 8장을 쓰고 하는 순으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1장부터 시작하여 2장, 3장 차례대로 기록하였습니다. 기록이 이렇다면 읽는 것도 이런 순으로 이루어져야하지 않을까요?
성경 통독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많은 믿는 이들이 성경 통독에서 오는 커다란 축복을 누렸습니다. 성경 통독을 돕기 위해 '성경 읽기표'라는 것이 나와있습니다. 하루에 30분씩 1년이면 대부분 성경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 읽기표'는 하루에 얼마를 읽어야 할 지 보여줍니다.
3. 유심히 읽는다.
단어 하나 하나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냥 슬쩍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중요한 것을 찾고 있는 탐정처럼 되십시오. 종종 우리는 눈앞에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놓쳐버리곤 합니다. 그리고 눈은 성경에 가 있지만 마음은 딴 곳으로 흐르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늘 이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면 어떨까요? "방금 내가 뭘 읽었지?"
4. 탐구정신을 갖고 읽는다
성경을 읽을 때 늘 이같은 질문을 품고 계십시오. 누구의 기록(말)인가? 대상은 누구인가? 주제는 무엇인가? 각 대명사("그" "그녀" "그들" "그것" "너희"등)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외에도 구절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순종해야할 명령이 있는가?
믿음을 요하는 약속이 있는가?
따를 만한 모범이 있는가?
피해야할 죄가 있는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배웠는가?
사람에 대해 무엇을 배웠는가?
하나님께 감사할 제목은 없는가?
이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짐으로 말씀이 실제적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마티슨(J.G. Mathieson)은 주일마다 복음의 말씀을 듣는 한 소년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에 그 소년이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자기 방에 가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어머니는 위층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고 자기 아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너무 조용하다 싶어 어머니는 아이가 무슨 엉뚱한 장난을 치고 있지 않나 해서 소년을 불렀습니다. "뭐하고 있니?" 그러나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는 장면을 보고 있어요!"
소년은 요한복음 11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읽기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마치 자신이 그 기적의 현장에 있는 것처럼 느꼈던 것입니다. 말씀이 모두 그에게는 실제와 같았습니다.
5. 사랑하는 마음으로 읽는다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약혼한 몸으로 그 약혼자는 지금 수마일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약혼자가 보낸 편지를 받아보는 순간 그녀가 어떻게 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편함에 편지가 도착하자마자 얼른 뜯어 열어봅니다. 그리고 단 숨에 편지를 읽어 내려갑니다. 그리고 또 읽습니다. 이번엔 아주 천천히. 단어 하나 하나를 떠올리며, 그가 쓴 문장들을 되씹어 봅니다. "그이가 왜 이 말을 썼을까?" 편지를 다 읽은 다음에도 그녀는 편지의 대부분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온 종일 그 편지를 생각할 것입니다.
성경도 이같이 읽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은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가 아닙니까?(요일 4장을 읽어보십시오.)
6.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는다.
당신을 가르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십시오. 읽기 전에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시편 119:18은 그런 기도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그것은 지각을 주시는 분이 바로 주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딤후2:7).
성경을 읽는 것은 영적인 연습의 시작입니다. 이제 나가서 읽은 진리대로 실천하는 것만이 남았습니다. 챕만(J. Wilbur Chapman)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장 좋은 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을 몇 가지로 요약해 놓았습니다.
꾸준히 공부하라 - 성경 한 구절을 읽고 익힌 다음 하루를 시작하라.
마음판에 새기도록 기도하라 - 공부한 말씀이 당신의 일부가 되기 전에는 성경을 놓지 말라
써놓아라 -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내용을 성경의 여백이나 공책에 적으라.
실천하라 - 아침마다 받은 진리에 따라 살라.
전하라 - 배운 것을 다른 사람에게 부지런히 말해주어라.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 늘 당신의 마음에 기쁨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2009-05-02 16:58:50 | 관리자
성경 해석의 황금률
다음은 성경 공부를 위해 제가 직접 정리한 것입니다.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1 성경은 성경으로
√ Concordance, The treasury of scripture knowledge 등을 이용하여 성경 자체가 정의하는 대로 어떤 단어를 정의하도록 한다.
√ 첫 번째 언급의 법칙: 어떤 단어나 구절이 성경에서 처음 나오는 곳을 유의하여 보고 그 곳에서 하나님이 그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살펴보아야 한다.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창세기 2:7)
바로 여기에 사람의 '혼'이 무엇인가가 처음으로 정의되어 있다. 즉 흙(몸)과 생명의 호흡(영)이 결합된 존재를 성경은 '혼'이라고 정의한다. 여러분과 나의 사상이 어떻든 간에 이것이 바로 '혼'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이며, 또한 사람의 삼위일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개역 성경은 이를 '사람이 산 영이 되니라'로 해석하여 성락교회 등에서 지지하는 '이중 아담론' 등의 이단 교리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오직 성경으로!
2 문자적 해석
"성경 구절의 평범한 의미가 상식적인 의미일 때는 더 이상 다른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말라. 그러므로 앞 뒤 문맥이나 관련 구절이나 근본 진리 등이 분명하게 다른 의미를 주지 않는다면, 성경의 모든 단어를 평범하게 문자적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계시하시면서 독자가 혼동에 빠지게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신의 자녀들이 깨달을 수 있기를 원하신다." - 작자 미상
"When the PLAIN SENSE of Scriptures makes COMMON SENSE, SEEK NO OTHER SENSE. Therefore, take EVERY WORD at its primary, ordinary, usual, literal meaning, UNLESS the facts of the immediate context, studied in the light of related passages, and axiomatic and fundamental truths, indicate CLEARLY otherwise. God, in revealing His Word, neither intends nor permits the reader to be confused. He wants His children to understand." - Author Unknown.
3 시대를 바르게 나누는 해석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2:15)
"예수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방인들의 길로도 들어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어떤 도시로도 들어가지 말며, 오직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가라. 가면서 선포하여 이르되,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다, 하라."(마10:5-7)
이와 같이 이방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지 말아야 하는 시대가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지금 시대에 적용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는가?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취하지 않고 상징적인 것이라고 얼버무린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유다인 제자들에게 주실 때에는 분명하게 그렇게 하라고 하셨고 그 제다들은 그대로 했다.
"보라,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이까? 하니,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거든 명령들을 지키라, 하시니, 그가 그분께 이르되, 어느 명령이니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너는 살인하지 말라, 너는 간음하지 말라, 너는 도둑질하지 말라, 너는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또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이에 그 청년이 그분께 이르되, 이 모든 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지켰사오니 아직도 내게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완전하게 되려거든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 청년이 많은 재산을 가졌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19:16)
"너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이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엡2:8,9)
위의 두 구절은 명백히 상반된다. 하나는 분명히 행위를 강조하며 하나는 오직 은혜로 됨을 말한다. 자 어떻게 하겠는가? 예수님이 바울보다 나으니 그분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면 행위 구원이 되지 않는가? 과연 예수님은 어느 시대에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인가? 이것을 이해하면 문제가 간단해진다. 대부분의 이단교리는 변천기의 책에서 나온다. 즉 마태 복음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 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으며, 사도 행전은 유다인 크리스천에서 이방인 크리스천으로 변천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 모든 말씀이 우리 이방인 크리스천 교회를 향해 주신 것이나 우리에게 다 교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지역 교회의 치리, 행정 등에 대한 교리는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보아야 한다.
4 주어진 대상을 바르게 나누는 해석
"볼지어다,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계3:20)
이 구절을 들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 문을 열라고 전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구절의 문맥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이미 믿는 사람에게 이 구절을 주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 하며 다른 많은 구절들도 이런 식으로 문맥을 보고 잘 해석해야 한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모든 십일조를 가져다가 창고에 들여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고 이제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너희를 위해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쏟아 붓되 받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자 너무나도 유명한 이 구절의 '너희'가 누구인지 판단해 보기 바란다. 이쯤이면 분명히 판단해 내리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5 문맥을 보고 바르게 나누는 해석
"내가 택한 금식은 이것이 아니겠느냐? 곧 사악함의 결박을 풀어주며 무거운 짐을 벗겨주며 학대 당한 자를 놓아 자유로이 가게 하여 너희가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
"오직 이런 종류는 기도와 금식이 없이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마17:21)
금식을 이야기하니까 이사야서의 구절을 인용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금식인가? 이사야서 말씀을 마태복음에 대입하면 말이 되겠는가? 이사야서의 경우 앞뒤를 읽어보면 그것이 영적 금식임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느껴지지 않으면 맑은 정신을 달라고 간구하기 바란다, 금식은 말 그대로 굶는 것이다. 그런 의미가 아닐 때는 앞 뒤 문맥이 그렇게 이야기 할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바란다.
2009-05-02 16:57:49 | 관리자
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합당한 방법은 성경을 전혀 해석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순종하라고 기록된 것이므로 정보와 교훈을 담고 있는 다른 책들처럼 그대로 읽으면 됩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이시라면 그분은 자신이 뜻하는 바를 그대로 말씀하셨음에 틀림없으며, 사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늘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성경은 암호로 쓰여진 어떤 비밀 책이 아니라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평범한 글로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분은 성경의 각 권을 기록하기 위해 군인, 목자, 어부, 의사, 세리, 왕, 제사장 등 여러 배경의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배경의 사람들 곧 부자와 가난한 자, 교육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 노인과 어린이, 모든 인종과 모든 국적의 사람들이 다른 어떤 책보다도 더 성경을 많이 읽고 사랑하며 믿으며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이 필요에 따라 상징적인 말이나 시적인 표현을 쓰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비유, 우화(寓話), 환상, 상징 등이 성경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데 이것은 다른 책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책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책을 지은 저자들은 그와 같은 비유들을 강조와 도해(圖解)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며 사람들을 혼동시킬 목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의 저자가 비유적인 표현 또는 시적인 표현을 사용할 때는 언제든지 앞 뒤 문맥 안에서 이를 분명하게 해 놓았으며, 비유로 전달해야 할 진리도 문맥 안에서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해놓았습니다. 상징들이 사용된 경우에도 그것들은 바로 그 문맥 안에 또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 나오는 관련 단락 안에서 정의되거나 설명되어 있습니다. 성경 해석시 최선의 법칙은 문맥이 명백히 상징적인 의미를 요구하지 않는 한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전자에 해당되는 경우에도 상징이 주는 의미를 성경 자체에서 찾아야만 하며 현대 과학이나 자신의 상상 또는 특별히 은사를 받은 "해석자들" 또는 다른 근거에 따라 찾아서는 안됩니다. 이 말은 결코 수박 겉핥기 식으로 성경을 대충 훑어보는 것으로 성경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절대로 오류가 없는,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 깊이가 한량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그 어느 누구도 완전히 탐구할 수 없는 풍부한 진리와 완전한 지혜를 담고 있는 무한한 광산과도 같습니다. 어떤 단락을 공부하고 믿는 사람이 그 안의 기본적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음은 물론이며 그 동일한 단락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의 새로운 보물을 산출할 것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주로 세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이와 같습니다. 성경을 잘 이해하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선행조건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1) 믿음, (2) 순종, (3) 연구
성경을 참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접근해야 합니다. 그 타당성과 확실성에 대해 판결을 내리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를 판단해야지 우리가 성경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자신을 열심히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 :6) 만일 누가 열린 마음으로 관심을 갖고 성경을 조사하기만 한다면 그 사람을 만족시키고도 남을 만큼의 충분한 증거 즉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누가 성경의 메시지를 참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면 먼저 적어도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을 수천 번 읽는다 해도 그것이 그에게는 닫혀진 책과 같습니다.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요,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이는 이러한 것들이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둘째로, 성경을 더 잘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가 이해하고 있는 바에 대해 먼저 순종해야 합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이 중에서도 먼저 순종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명령은 물론 회개와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서서 그분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탐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나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는 생명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9∼ 40)
마지막으로 성경 전체를 연구하기 시작하고 또 이 일을 날마다, 해마다, 일생동안 계속해야 합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나도록 연구하라."(딤후2:15). 성경을 더 많이 연구할수록(물론 더 많이 믿고 더 많이 순종할수록) 성경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성경이 점점 더 귀중해지고 확실해질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철저히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성경은 그 안의 여러 가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그 모든 인성(人性)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모든 부분은 다른 부분에 빛을 던져 주고 있으므로 부분적으로 조금씩 이해하는 것이 결국에 가서는 성경 전체를 이해하게 만들 것입니다. 때문에 성경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성경을 공부하는 일은 끝이 없습니다. 하지만 진지한 성경 공부의 모든 순간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이해력을 줄 것이며 도한 영원한 이익 배당도 가져다 줄 것입니다.
2009-05-02 16:56:29 | 관리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책은 수백 종류나 되며 그 외의 증거들도 무척 많고 다양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책들을 읽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 자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사람도 그리 많지 않으며, 이것은 크리스천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은 오류들로 가득하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과학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는 성경이 더 이상 합당하지 않은 책이라고 주장하는 속임수 곧 인기 있는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성경에 오류가 전혀 없으며 가장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라고 반복해서 주장했습니다. 사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모두 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만일 40여 명의 성경 기록자들이 이 점에서 모두 잘못 되었다면 그들은 하나같이 거짓말쟁이였든지 아니면 미치광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느 책보다도 가장 훌륭한 문학 서적이요, 가장 완전한 도덕 법전이며 또한 전 시대에 걸쳐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쳐온 가장 위대한 책인 성경이 사람을 속이는 광신자들에 의해 쓰여졌다면, 이 세상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일은 참으로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가지 증거들을 진지한 마음으로 자세히 조사해 보기만 한다면 누구나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라는 성경 기록자들의 주장이 지극히 합당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성경 기록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들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이모저모로 무려 3,000번이 넘게 언급했습니다. 성경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놀라운 증거들 가운데 하나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수많은 성경의 예언들이 상세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성취되어 오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예언을 했던 저자가 세상을 떠난 지 매우 오랜 후에 그의 예언이 성취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주전 538년경에 대언자(선지자) 다니엘은 페르시아 왕이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483년이 지나면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약속된 구세주로 왕으로 오실 것을 예언한 바 있는데(단 9:24-27), 이것은 수 백년이 지난 후에 문자 그대로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또 다른 예언들(겔 37:22, 사 11:11, 눅 21:24, 기타 다른 많은 예언들)은 마지막 때가 되면 유다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 자신만의 국가를 회복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것은 거의 1,500년 동안 전혀 불가능하게 보였었지만 지금 우리는 그 예언들이 우리 세대에서 성취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 중동 땅에 서 있는 이스라엘이 바로 그 예언의 일부가 성취된 것이며, 앞으로 더 많은 부분이 상세하게 다 성취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나라와 도시들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광범위하게 예언되어 있으며, 이 모든 예언들 역시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300가지가 넘는 예언들이 그리스도의 초림 시에 그분 자신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다른 예언들은 전 세계로 기독교가 퍼져나가는 것 등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거짓 종교들을 포함한 많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동서고금을 통해 성경과 같은 책은 세상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딕슨(Jeane Dixon)이나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 케이스(Edgar Cayce) 등의 거짓 예언자들은 애매모호하며 허점투성이인 예언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결코 성경과 같은 범주에 속할 수 없는 것들이며, 코란이나 논어 및 기타 비슷한 종교서적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이처럼 놀라운 예언의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 그 규모가 어찌나 엄청난지 성경이 하나님께서 직접 드러내 주신 계시라고 말하는 것 밖에는 그 어떠한 설명도 불가능합니다. 성경의 역사적 정확성도 이집트나 아시리아 그리고 그 외 다른 고대 국가들의 기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뛰어납니다. 참으로 지난 한 세기 동안에 성경의 기록이 고고학적으로 확증된 것만도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이스라엘의 고고학에 관하여 아마도 가장 위대한 권위자라 할 수 있는 글루에크(Nelson Glueck)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견이 성경과 일치하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찾아낸 수십 가지의 고고학적 발굴들은 성경의 역사 기록들을 개괄적으로나 세부적으로나 아주 정확하게 확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부분을 자세히 파악함으로써 종종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를 들자면, 과학자들이 현대 과학의 많은 법칙들을 실험적으로 확증하기 오래 전부터 성경에는 이미 이런 것들이 자연에서 발견되는 사실로서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한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사 40:22), 거의 무한대로 큰 우주(사 55:9), 질량 에너지 보존 법칙(벧후 3:7), 물의 순환(전 1:7), 엄청나게 많은 별(렘 33:22), 물질과 에너지의 동등성(히 1:3),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시 102:25-27), 생명체의 활동에 있어서 피가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레 17:11), 대기의 순환(전 1:6), 중력장(욥 26:7) 등등. 물론 이와 같은 것들은 현대 과학의 전문 용어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우리 사람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은 현대 과학에서 가장 최근에 발견한 사실들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성경이나 과학이나 역사나 기타 다른 어떤 분야에 속한 문제에 있어서 성경의 내용이 정말로 잘못되었음을 증명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그럴 듯하게 보이는 오류들을 지적하긴 했지만 보수적인 성경학자들은 이 모든 지적 사항들에 대해 언제나 합당한 해결책을 제시해 왔습니다. 성경의 구조 역시 매우 놀라운 것으로 마땅히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거의 2천 년의 기간에 걸쳐 각기 다른 40명 남짓한 사람들이 기록한 책으로, 모두 66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완전한 통일성과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 한 권의 책입니다. 각각의 성경 기록자들은 성경을 기록하면서도 자신들의 메시지가 결국에 가서 한 권의 책으로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사람의 메시지는 완벽하게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 각각의 독특한 목적을 달성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우연이나 공모로는 성경의 놀라운 구조를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되며, 그 안에서 놀랍도록 조직적이고 수학적인 구조와 대칭성과 복잡 미묘함 등을 끊임없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장엄하게 전개되는 성경의 일괄된 주제는 하나님의 행하신 일 즉 하나님의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만물의 창조와 구속(救贖)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 사람과 여러 국가의 역사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 볼 때에도 성경은 전례 없는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의 심장과 마음을 끄는 공전(空前)의 베스트 셀러이며, 빈부귀천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성경을 전해 받은 모든 인종과 국가와 부족의 사람들에게 큰사랑을 받은 책입니다. 사실 이처럼 범세계적인 매력을 지니고 이처럼 많은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책은 성경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국가 전체의 삶에서 성경을 존중하는 나라는 하나님께서 중히 여기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은 나라의 예를 들자면 특별히 영국과 미국을 들 수 있는데, 현시대에서 전 세계의 성경 창고라 할 수 있는 이 나라들로부터 대부분의 성경과 선교사와 설교자가 전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근에 들어서 영국은 지난 수 십 년간 배교와 불신의 늪으로 빠졌고 그 결과 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잃은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현재 미국 역시 점차 이와 동일한 길로 빠져들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의 사실성을 증명하는 마지막 증거는 이 말씀을 믿은 사람들의 간증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재와 과거를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바는 성경의 약속이 사실이라는 것이며, 성경의 교훈은 건전하며, 성경의 명령과 권고는 지혜로우며, 성경의 놀라운 구원의 메시지는 시간과 영원에 대한 사람의 모든 필요를 채워준다는 것입니다.
2009-05-02 16:55:46 | 관리자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靈感)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습니까?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기록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성경, 특히 구약 성경에는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말씀하시되......" 등과 같은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서나 예레미야서와 같은 대언서에는 위와 같은 표현이 무려 1,300번 이상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기상하와 같은 역사서에는 이와 같은 표현들이 400번 이상이나 나오며, 모세 5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는 거의 700번이나 나옵니다. 출애굽기의 경우 거의 절반 이상이 하나님 자신의 음성으로부터 직접 인용한 글이나 지시사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상을 모두 합친다면 구약성경에서만 하나님이 성경을 영감으로 주셨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주장이 무려 2, 600번 이상이나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의 유다 백성들은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었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했으며, 사실 구약 성경은 그들의 모든 생각과 삶의 기초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진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구약성경으로부터 약 320번 이상이나 직접 인용했고, 이 외에도 수 백 번씩이나 간접적으로 구약성경을 인용함으로써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임을 매우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창세기에서 만도 무려 60번 이상이나 인용하고 있는데, 이 인용 구절들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권위로 여김을 받았으며 그 결과 그들이 다루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척도가 되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구약성경을 높이 평가한 것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 그분은 "성경은 폐하지 못할진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35) 그분은 구약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인용하셨는데, 여기에는 현대의 회의주의자들이 크게 조롱하는 사항들이 특별히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오는 사람의 창조에 관한 기사를 마태복음 19:4에서 인용함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노아의 대홍수를 범세계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셨고 또 언급하셨으며(마 24:37-39), 소돔의 멸망과 엘리야의 기적들을 역사적 사실로 인용하셨습니다.(눅 17:26-32, 눅 4:25-27)
그분은 모세5경이 모세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문자 그대로 믿으셨으며(요 5:46-47, 눅20:37-38), 이사야가 이사야서의 두 부분을 다 기록한 것으로 믿으셨습니다.(마 4:14-16, 12:17) 사실 그분은 나중에 20세기의 비평가들이 이것을 부인하리라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그분은 다니엘의 기록들을 참된 예언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마 24:15)
영감의 본질에 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해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히 1:1)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주실 때 볼 수 있는 것처럼) 때때로 자신의 대언자(선지자)에게 직접 받아쓰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분은 또 환상이나 꿈을 통하여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들보다 더 흔히 사용하신 방법은 대언자(선지자) 자신의 배경과 교육, 경험, 연구 등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점은 하나님이 어떻게 영감을 주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셨으며 또 기록자 자신의 특별한 문체와 재능을 종종 사용하시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이 모든 과정을 지도하심으로써 그 최종적인 결과가 전혀 오류가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입니다. "이는 대언이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님을 통해 감동을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게다가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성경의 모든 단어들조차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었는데, 이것은 아주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16에서 자기가 인용하는 단어가 복수 형태가 아닌 단수 형태(즉, "씨들"이 아니라 "씨")로 되어 있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논증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2:32에서 구약의 한 단락 가운데 나오는 어떤 단 하나의 단어 즉, "…이었느니라"는 '과거 시제의 'was'가 아니라 "…이니라"는 현재 시제의 'am'으로부터 부활에 관한 멋진 결론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실로 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모두 성취되리라."(마 5:18).
따라서 성경에서 소위 오류라고 하는 것을 찾는 일에서 큰 기쁨을 얻고 있는 현대의 목사들과 신학교수들은 사실상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관계되는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그들이 저마다 맡은 바 성경을 기록할 때가 오면 그들이 성령님으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 14:26, 16:13-14) 그들도 역시 자기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다고 빈번히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오직 내가 너희에게 확실히 알게 하노니 내가 선포한 복음은 사람을 따라 난 것이 아니니라. 이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1:11-12)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마지막으로 기록된 부분은 마지막 사도인 요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계시하신 '요한계시록'이라는 놀라운 책입니다.(계 1:1) 이 책이 완성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에다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계 22:18) 그 다음에 그분은 더욱 엄숙한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하셨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께서 생명 책과 거룩한 도시에서 그리고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몫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9)
이것은 매우 엄중한 말씀이며 몹시 조심해야 할 사항입니다. 성경의 영감성에 관한 참된 교훈은 사도 바울이 기록한 디모데후서 3:16에서 다음과 같이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이 말은 성경의 일부분만이 아니라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뜻입니다. 또한 생각뿐만 아니라 "성경"이 곧 실제로 기록된 말씀들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영감을 받은 사람들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감으로 주신 것입니다." ('given by inspiration of God.' - 우리 말 성경에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로 나와 있음- 역자 주)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모든 믿음과 생명과 삶을 위해 꼭 필요한 안내자이며 동시에 충분한 안내자입니다.
2009-05-02 16:55:05 | 관리자
성경은 종교 문제에 있어서만 권위를 지닙니까? 아니면 역사나 과학의 문제에 있어서도 권위를 지닙니까?
오늘날의 세상에 널리 퍼져있는 견해는, 성경이 참으로 믿음의 책이요, 종교적 통찰력을 지닌 위대한 책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이것 역시 종종 오류를 포함하는 인간의 기록의 틀 안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과의 "실존적 만남"의 수단으로 사용될 때는 타당한 의미와 권위를 가질 지도 모르지만 성경에 나오는 역사적 이야기와 자연 현상들에 관한 묘사는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일 가치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세상과 타협하면서 성경에 접근하려는 방식은 지난 두 세대 동안 자유주의 및 "신정통주의"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의 옹호를 받아왔으며, 현재도 대부분의 큰 교파 신학교들은 물론 주일학교 문서에 이르기까지 널리 세력을 떨치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공립학교의 교과 과정 및 교과서들은 대개 무신론을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일은 조심스럽게 피하면서도, 성경을 하나의 종교 서적이라고 말하면서 역사적 사실의 문제에 있어서는 성경이 아무런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 다시 말해서 만약 우리가 과학과 역사의 문제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이것들은 우리의 관찰과 경험을 통해 입증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과학적 관찰과 실험의 영역 밖에 있는 구원, 천국, 영적인 세계, 영생 등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그 말씀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성경의 과학적 권위를 배척할 뿐만 아니라 성경의 종교적, 도덕적 권위 및 교회와 학교와 가정과 기타 모든 것의 권위를 배척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각 사람은 스스로 결정한 진리와 도덕의 기준을 이용하여 자기가 자신에게 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적당하지 못한 존재임을 예민하게 느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절대적 좌표와 권위에 대한 절실한 필요도 예민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 사람은 자신의 삶을 바칠 수 있는 어떤 절대 무오한 기반을 찾아 이리저리 필사적으로 헤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과학"이나 "공산주의" 혹은 "인본주의" 등과 같은 데서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그들은 과학자들도 보통 사람처럼 편견을 가졌다는 것과 또 틀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기적이며 본래 사악한 존재라는 것을 이내 발견하게 되며 또한 공산주의자나 인본주의자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과학적 방법과 마르크스주의적 철학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며,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도 어쩔 수 없이 부적당하며 또 자기 모순에 빠지는 부조리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것 - 물리학적 계(界), 생물학적 조직, 사회학적 단위, 심지어 개인의 영혼까지 - 은 소위 성경이 말하는 "썩음의 속박"에 묶여 있습니다.(롬8:21) 이 원칙은 과학적으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으로 공식화되어 있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죄로 인해 인간의 통치 영역 위에 내리신 하나님의 저주로 인한 결과입니다. 세상과 개개의 영혼들은 구원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지만 인간의 철학적 고안물 또는 과학적 고안물은 결코 그것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이것에 대한 유일하고도 참된 해결책은 완전무결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며 사실 이것은 사도들과 대부분의 우리 선조들(미국)의 특징이었습니다. "과학" 자체는 성경 말씀에 결코 반기를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성경을 거부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창조주이시자 장래의 심판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굴복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결코 두 부류의 구절들, 곧 믿는 자에게 기본이 되는 구절들과 내버려도 상관이 없는 구절들로 분류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식으로 취사선택하여 구별을 하는데 이용할 수 있는 어떤 객관적 표준도 물론 없습니다. 성경은 결코 이런 식으로 그 안의 구절들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자기 스스로를 전체와 각 부분이 믿음과 실행에 있어서 온전히 신뢰할 만하며 전혀 오류 없이 영감을 받았으며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시합니다. 인간의 판단과 견해가 주관적이며 늘 변한다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이 생물학적으로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본보기와 가르침이 지니는 영적 가치에 합당치 않다고 판결할 것입니다.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에게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기적이 가능한 일이므로 처녀 탄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죄 없는 인성(人性)을 나타내는 당연한 결과라고 올바르게 판결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이 종교적으로 합당치 않다고 판단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자신의 믿음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은 창세기 1장이 실제의 창조 사건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창조주이신 것만을 말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창세기 1장 1절이 우리에게 바로 창조에 대한 정보를 준다는 것과 만약에 전자의 사람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창세기 1장의 나머지 부분은 그저 합당치 않은 추가 정보 즉 사람을 그릇된 곳으로 인도하는 추가물에 불과하게 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와 함께 그는, 나중에 성경 기록자들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창세기를 진실한 실제의 역사로 받아들였다는 것에 대해 언급할 것이며 동시에 만약에 그분들이 믿음과 실행에 기초가 되는 이 창조 계시에 관하여 잘못을 범했다면 그 밖의 다른 것에 관하여 과연 어떻게 우리가 그분들을 믿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이 실존적 통찰력을 주는 정도의 집합체나 상대론의 입장에서 부적절한 것을 담고 있는 잡동사니 집합체로 전락하고 만다면 우리는 정직한 마음으로 성경 말씀 전체를 다 버려야합니다! 그러나 완전무결하고 명백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믿고 회개하는 믿음으로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과학이나 역사의 참된 사실들에 의해 잘못으로 입증된 성경 말씀은 지금까지 단 한 구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는 사람의 믿음과 증거를 귀히 여기시고 복을 주실 것입니다.
2009-05-02 16:54:11 | 관리자
성경 전쟁 - 성경의 무오성
정동수
1976년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은 린젤의 「성경전쟁」(The Battle for the Bible)이라는 책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당시 잘 나간다고 하던 풀러 신학교의 창립 멤버로 일하던 린젤 박사는 이 책에서 풀러 신학교를 비롯한 신복음주의 진영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급진적 사상 즉 '성경이 처음부터 오류를 담고 있다는 사상'의 위험성에 대해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독자들을 경고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성경의 토대가 무너지면서 풀러 신학교는 각종 인본주의 사상으로 가득한 사람들을 - 피터 와그너 등 - 교수로 채용하여 궁극적으로 빈야드 운동과 같은 비성경적 운동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하는 인본주의 신학교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성경의 무오성은 번역본의 무오성이 아니다. 지금의 인본주의자들은 성경 원본 자체가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의 초자연적 영감을 부인하고 있다. 본서는 특별히 미국의 루터 교회의 배도 현황, 남침례교회의 성경 무오성 부인, 풀러 신학교의 성경 무오성 부인 등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보여 주고 있다. 특히 풀러 신학교의 사례를 유심히 살펴보기 바란다. 린젤의 결론은 성경의 무오성이 무너지면 교회들이 배도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글을 통해 과연 앞으로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맞이할 세상이 얼마나 무신론적이며 인본주의적인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이야기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미 성경 무오성의 교리를 버렸기 때문에 확실한 성경에 대한 진리 탐구를 하려 하지 않는다.
베스트셀러였던 이 책은 다행히 기독교문서선교회에서 「교회와 성경 무오성」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했다. 상당히 중요한 책이니 한 권씩 소장하고 틈틈이 읽어 보기 바란다. 성경의 무오성이 파괴되면 기독교의 근간이 무너지는 것이다. 독자는 이런 교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교회와 성경 무오성」의 소개의 글
(기독교문서선교회 책에서)
개신교의 복음주의적 분파가 움트는 이러한 때에 린젤(Dr. Lindsell)의 저서 『교회와 성경무오성』(The Battle for the Bible)을 출간할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된다. 마틴 마르티(Dr. Martin Marty)가 제안한 것처럼 만약에 복음주의가 역사적인 주류를 이루는 19세기의 개신교 정통을 계승하려고 노력한다면 바로 성경 무오성에 관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복음주의적 역사가가 그 문제를 밝혀야 할 때이다.
복음주의가 성장함에 따라 분열의 전조가 점점 더 위협을 가하고 있다. 성경의 영감에 관한 복잡한 의문이 복음주의 운동의 통일성을 위태롭게 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두드러진 두 견해가 있다. 두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각자 그들의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성경에 호소하고 있다.
첫번째 견해는 역사적, 지리학적, 과학적 가르침을 포함한 성경의 모든 것은 영감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며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두번째 견해는 구속사와 구속 교리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만이 진리라고 주장한다. 즉, 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대해서만 권위를 갖는다는 것이다. 후자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사람 중에 어떤 이들은 성경은 완전하게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으나 하나님은 기자들의 제한된 지식을 사용하셨기 때문에 기자들이 계시받지 못한 진술을 기록할 때에는 오류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중요한 신학적인 차이를 평가함에 있어서 린젤은 정확하고 솔직하며 평화 지향적으로 또한 객관적이고도 공평한 입장에서 글을 썼다. 비록 그가 개개인들의 견해를 인용할지라도 그는 인신공격을 하지 않으면서 견해의 차이점을 밝히려고 했다. 본질적으로 정통적인 성경관을 버림으로써 파생된 신앙과 행위에 대한 위험의 전조를 복음주의적으로 경고할 때가 온 것이다. 린젤과 나는 모두 지난 수 십 년 동안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수많은 논쟁에 연루되어 왔으며 서로 다른 상황들 가운데서 논쟁점이 일어났었다. 이 모든 것은 성경의 무오성이라는 이 주제의 중요성이 갈수록 증가하고 이 용어를 정의해야 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1920년 나는 슬론(Dr. Harold Paul Sloan)이 편집한 잡지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생활」(Christian Faith and Life)에서, 감리교에서 일어난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논쟁에 관하여 기사를 썼다. 20년 후에 무오성에 관한 문제는 미국 장로교 내에서 근본주의자와 현대주의자(Fundamentalist-Modernist)들의 성경 무오성에 관한 논쟁에서 나타나서, 1929년 프린스톤 신학교의 궁극적인 분열로 표면화되었다. 그 해 프린스톤에서 공부한 학생이었던 우리 그룹은 메이첸(Dr. J. Gresham Machen), 윌슨(Dr. Robert Dick Wilson), 앨리스(Dr. Oswald T. Allis), 밴틸(Dr. Cornelius Van Til), 그리고 스톤하우스(Dr. Ned Stonehouse)를 따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설립에 참가했다.
1942년 성경의 권위에 대해 내려진 거부 영향으로 교회연방회의(the Federal Council of Churches)의 4개의 신교 교파 안에서 우리는 민족복음주의협의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를 세인트루이스에서 설립하게 되었다. 민족복음주의협회는 성경적 권위, 신뢰성, 진실성의 회복을 강조하고 무오한 성경에서 나온 신학적 입장으로 복귀할 것을 강조하였다. 국제복음주의협회가 구성된 초창기에 보수주의에 속했던 많은 목사들은 이 연방회의에 속한 교파의 구성원이 되기를 거부했고 국제복음주의협의회에 연합했다.
나는 1944년과 1945년의 여름에 매사츄세츠주 마노메트포인트에서 복음주의적 원리와 특히 무오한 성경에 기초한 새로운 복음주의적 저술의 필요성을 토론하기 위해 신학자들과 함께 모였다. 비록 복음주의적 운동이 성장하기 시작했을지라도 그것은 이전 세대의 문헌에 의존한 것이었다. 이 모임의 결과로 복음주의적 학자들이 배출되었고 복음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1947년에 풀러(Charles E. Fuller)는 선교와 복음전도를 목적으로 풀러 신학교를 창설하면서 나를 초청했다. 당시에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12 명의 멤버가 파크스트리트 교회에 있었는데 그들은 프린스톤에서는 성경의 권위를 가르치지 않으며 그로 인해 자신들의 신앙에까지도 위험을 느낀다고 보고했다. 이에 우리는 성경의 무오함에 근거하여 보다 수준 높은 신학 교육기관을 세워야 할 필요를 느꼈다. 함께 토론과 기도를 한 후에 풀러가 기금을 만들고 내가 그 학교에 학장으로 일한다는 의견을 합의했다. 이 신학교 창립 멤버로서 유능한 린젤은 성경의 무오성에 근거를 둔 풀러 신학교의 신학적 신조를 표명했다.
세계복음주의단체(The WORLD Evangelical Fellowship) 모임에서 복음주의자들 사이에도 두 가지 성경관이 있음이 드러났다. 1966년 6월 20일에서 29일까지 매사츄세츠주의 웬함의 고든 대학(Gordon College)에서 성경의 영감과 권위의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모인 국제복음주의 학자회의가 이러한 분기점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50명이 넘는 신학자들이 이 논의를 위해 세계 여러 지역에서 왔다. 회의 결과 복음주의의 명백한 입장을 밝히지는 못하고 오히려 분열된 파벌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1955년 빌리 그래함의 제안에 따라 매사츄세츠주의 바스룩과 뉴욕에서 만난 우리 그룹은 지적인 차원에서 복음주의적 신앙을 변호할 잡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성경을 무오하다고 보는 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전제이다. 「Christian Today」라는 잡지는 처음에 린젤이 편집자였는데 이러한 성경 무오관에 충실하여 복음주의적 신학의 부흥에 공헌했다.
신복음주의라는 말은 1948년 파사데나 시민회관에서 있었던 집회의 연설에서 탄생했다. 이 집회는 근본주의의 신학관을 재천명하면서도 근본주의의 분리주의적인 교회론과 사회론을 거부했다. 분리주의에 대한 반대와 사회참여의 명령은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다. 해롤드 린젤, 칼 헨리(Carl F. H. Henry), 에드워드 카넬(Edward Carnel), 글리슨 아쳐(Gleason Archer)와 같은 인기 있는 신학자들이나 대표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우리는 어떤 운동을 일으킬 의도는 없었다. 그러나 그 강조점이 폭 넓은 지지를 받고 있으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또 신복음주의는 성경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지만 그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신정통주의와는 다르고, 또한 신복음주의는 이 세상에서 분리하려고 하지 않고 그 시대의 신학적인 대화에 참여한다는 면에서 근본주의와도 달랐다. 신복음주의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삶의 전반 영역에 복음을 적용할 것을 새롭게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신복음주의는 시대의 요청에 따른 기독교 신학을 재진술 하는 데 강조점을 두고 있다. 즉, 신학적 논쟁의 참여, 교파적 지도력의 회복, 그리고 인류의 고대성, 홍수설의 보편성, 하나님의 창조 방법 등과 같은 신학적 문제들의 재검토 등이다.
신복음주의는 개개인이 기치를 올릴 수 없고 또 개인에 의해서 신학이나 명확한 입장을 발전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젊은 복음주의자들이 그 운동에 가담해서 복음주의라는 복음을 내세웠지만 정통교리적인 입장을 고백하지는 않았다. 이것 때문에 신복음주의가 자주 비난을 받았으며 급기야는 부당하게도 이러한 비난이 신복음주의의 초기지도자들에게로 쏟아졌다.
린젤은 성경의 무오성을 인정하느냐, 아니면 부정하느냐 하는 문제가 현대 신학 논쟁의 분수령이라고 말한다. 성경을 신뢰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이후의 우리의 입장을 결정하며 신앙뿐만 아니라 행위까지도 결정한다는 그의 주장은 옳은 것이다. 성경 무오성의 교리를 포기한 사람들이 불가피하게 정통주의로부터 빗나간다는 증거는 반박할 여지가 없다. 권위 있고 신뢰할 수 있는 그리고 신빙성 있고 진실하고 무오한 성경을 포기한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복음주의"라는 이름을 사용할 권리를 포기한 것이 분명하다. 린젤이 이 책을 씀으로 해서 교회에 특별히 복음주의적 교회에 크게 공헌을 하였다.
해롤드 옥켄가고든 콘웰 신학교 교장
「교회와 성경 무오성」의 결론부 : 최후의 호소
(기독교문서선교회 책에서)
성경 무오성을 더 이상 주장하지 않은 많은 복음주의자들도 아직은 상대적으로 볼 때는 여전히 복음주의자임을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무오성을 한번 버린 사람이 복음주의자임을 주장한다면 나는 그런 것을 한 순간도 인정하지 않는다. '복음주의자'라는 이름은 전통적으로 일련의 교리적 확신들을 상징하는 사람을 뜻하며 그 중에 하나가 성경의 무오성이었다. 분명하게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또는 그분의 속죄는 대속적인 것이 아니라거나, 처녀 탄생은 일어나지 않았다거나, 예수님은 다시 오시지 않는다거나, 예수님이 죽은 자들로부터 육체적으로 부활하시지 않았다는 주장이 '복음주의'라는 입장을 부인하는 이유가 된다면 성경 무오성의 교리 즉 다른 교리들이 진리임을 확신시켜 주는 유일한 보증의 교리를 부정하는 자도 진실로 복음주의자가 될 수 없다.
이 순간에 성경의 무오성에서 떠났거나 떠나고 있는 복음주의자들에게 호소하는 바는 역사적인 자료들에 비추어서 그 상황을 분명하게 숙고해 보고 기독교의 근본진리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리로 되돌아오라는 것이다. 성경의 무오성을 포기하게 되면 구원의 본질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있을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무오성을 믿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내리막길은 그런 부정에 이르게 하는 심각한 함정으로 맞닿아 있음도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세대가 성경의 무오성만을 부정하고 얼마 간은 복음주의에 머무를 수 있다고 할지라도, 역사는 이 세대 이후에 오는 사람들은 우리가 멈춘 자리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줄 것이다. 우리는 우리 다음의 사람들에 대하여 책임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성경의 무오성을 여전히 주장하고 있는 복음주의자들에게도 또한 당부한다. 한번 사도들에게 물려받은 신앙을 열정적으로 굳게 지킬 것을 호소한다. 또 그 울타리 위에 앉아서 항복하고 있는 복음주의자들과 대화할 것을 촉구한다. 이런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확실히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행동은 무엇이든지 시도해 보기를 당부한다. 여러분은 역사상 신앙이 두터운 사람들은 진보된 신학적 훈련이 없이 성경에 접했던 사람들이며, 가장 엄한 신학적 훈련을 겪은 많은 사람들 보다 더 훌륭한 해석가들이었고 영적 지도자들이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또한 여러분은 복음주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사랑으로 하는 부드러운 한 마디 권고가 대학과 신학교 교수들을 성경에 충실하며 신뢰하는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촉매제가 될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소위 성경 상의 모순들이라고 불리는 문제들이 현재 학자들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된다. 이것들은 수년 전 성경비평주의자들에 의하여 알려졌으며 다양한 묘책들이 그 동안 제시되어 왔다. 성경 무오성의 경우 사실상 지난 수 백 년 동안 해답들이 효과적인 방법으로 다루어져 왔다.
만일 복음주의자들이 서로 협력하여 성경의 무오성과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교리들 위에 굳게 선다면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며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할 것임을 굳게 믿는다. 그렇게 되는 날 성령의 능력이 새롭게 역사하고 세계를 복음화하려는 사역에 새로운 진보가 전개되며,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세계 전역에 교회가 설립되어, 참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거룩한 능력으로 나타나게 될 것을 나는 예견할 수 있다. 주여, 속히 그 날이 오게 하소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나는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이 성경의 무오성이나 기독교 신앙의 주요 교리들을 전부 믿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천사들이 마지막 날 추수 일을 하기 시작할 때까지 항상 곡식과 가라지는 함께 자라나는 것이다. 시간이 끝날 때까지 진리는 영원히 반석 위에 설 것이며 오류는 영원히 가시밭에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대가를 지불하시고라도 성경 말씀이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말씀에 대한 순전한 신앙으로 충성을 다하는 자기 백성들을 불러모으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 믿음은 밝히 드러날 것이며, 현재는 희미해서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모든 것을 그때는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의 모든 신비들이 풀릴 때 우리는 늘 믿고 지켜왔던 것 즉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떠한 오류도 없으며 모든 성경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 보며 알게 될 것이다.
2009-05-02 16:53:19 | 관리자
어떤 성경 구절의 평범한 의미가 상식 수준의 의미일 때는 더 이상 다른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말라. 다시 말해 그 구절의 앞뒤 문맥이나 관련 구절이나 근본 진리 등이 분명하게 다른 의미를 주지 않는다면 그 구절의 모든 단어를 평범하게 문자적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계시하시면서 독자가 혼동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으며 자신의 자녀들이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기를 원하신다.
2009-05-02 16:52:03 | 관리자
성경은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상태와 구원의 방법과 죄인의 운명과 신자의 행복을 담고 있다.
성경의 교리들은 거룩하고 그 훈계들은 구속력이 있으며 그 역사들은 진실하고 그 결정 사항들은 바꿀 수 없다. 성경을 읽어 지혜롭게 되고 성경을 믿어 안전을 얻으며 성경의 내용을 실천하여 거룩한 자가 되라. 성경은 너를 인도할 빛과 너를 지탱할 음식과 너를 기쁘게 할 위로를 포함하고 있다. 성경은 여행자의 지도요, 순례자의 지팡이요, 항해사의 나침반이요, 군사의 칼이요, 그리스도인의 헌장이다.
성경 안에서 낙원이 회복되고 하늘이 열리며 지옥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주인공이요, 우리의 행복이 성경의 계획이요, 하나님의 영광이 성경의 목적이다. 자주 그리고 천천히 기도하는 심정으로 성경을 읽으라. 성경이 네 기억 속에 박히게 하고 마음을 지배하게 하며 발걸음을 인도하게 하라. 성경은 부의 보고요, 영광의 낙원이요, 기쁨의 강이다. 네가 살아 있을 때에 주께서 이 성경을 주셨으니 또한 심판 때에 이것을 펴시고 영원토록 너를 기억하실 것이다. 성경은 최고의 책임을 요구하여 수고에 대해서는 최고의 보상을 주되 그 안의 거룩한 내용들을 무시하는 자는 다 지옥 불로 정죄할 것이다.
구약성경은 모두 39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구약을 율법서, 대언서, 기록서 즉 거룩한 기록서로 구분하였다. 율법서는 모세오경을 뜻하며 이것은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서 회당에서 1년에 한 차례씩 읽을 수 있게 했다. 대언서는 여호수아기,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로 구성된 역사서들 즉 ‘초기 대언서’와 다니엘을 제외한 다른 대언서들로 구성된 ‘후기 대언서’로 구성된다. 후기 대언서들은 이사야, 예레미야(애가는 포함되지 않음), 에스겔 같은 큰 대언서와 열두 개의 작은 대언서로 구성되는데 회당에서는 초기와 후기 대언서의 일부와 율법서를 읽었다. 끝으로 기록서는 그 외의 다른 책들 즉 시편, 잠언, 욥기, 아가서, 룻기, 애가, 전도서, 에스더,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를 포함하였다. 한편 현대 성경에서는 모세오경을 포함한 역사서가 앞부분에 그리고 시가서가 중간에 그리고 대언서가 맨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서기관 에스라가 바빌론 포로 생활 이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구약의 정경을 수집하고 확정지은 것으로 생각한다. 한편 신약성경은 27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책은 사도들의 손으로 기록되어 후대에 한 권의 정경으로 정착되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행적을 담은 복음서, 사도들의 행적을 담은 사도행전, 교회를 위한 서신서, 그리고 앞날을 보여 주는 계시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의 장절 구분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도입되었으며 장은 1240년경에, 구약의 절은 1450년경에, 그리고 신약의 절은 1551년경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경목록, 신약성경목록 선도 참조(8-10).처음으로 세상에 잘 알려진 영어 신약성경은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인 1370년경에 나온 위클리프 성경이다. 그 뒤 인쇄술이 발명되고 1526년에 처음으로 틴데일의 신약성경이 인쇄되어 나왔고 1535년에 커버데일은 처음으로 신구약을 포함한 성경전서를 발간하였다. 그 뒤 커버데일과 다른 사람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매리 여왕의 압제를 피해 제네바에 거하면서 1560년에 제네바 성경을 출간하였고 그 후 1611년에 제임스 왕에 의해 일반 사람들을 위한 킹제임스 성경이 출간되어 지난 400여 년간 온 세상에 복음을 알리는 표준 성경이 되었다. 킹제임스 성경은 영어가 최고조에 이른 때에 당대의 석학 50여 명이 원어에서 충실하게 번역한 성경으로 단 한 번의 수정 없이, 단 하나의 오류 없이 당당하게 세월의 풍파를 거스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으며 문학적으로도 영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성경의 보존 선도 참조(91). 킹제임스 성경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 히브리어 전통 마소라 본문과 그리스어 공인 본문을 축자적으로 완벽하게 번역하여 전 세계 공통어인 영어로 표현하여 말 그대로 모든 성경의 표준이 되었다는 데 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NIV, NASB 같은 현대 역본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이것들은 한결같이 부패된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과 그리스어 비평 본문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수천 군데에 오류를 담고 있고 특히 축자적, 형식적 일치 번역이 아닌 동적 일치 번역이므로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계시, 영감, 보존, 정경, 마소라, 사본, 킹제임스 성경 참조.
2009-05-02 16:51:15 | 관리자
성도 여러분, 평안히 지내셨습니까?
저희 성경은 2000년 8월에 초판이 나온 이래로 계속해서 교정을 거쳤습니다. 2006년 4월에는 한영대역성경 3판(스터디 성경 1판)을 내면서 초판 이후에 발견된 수정 사항들의 대부분 - 빠진 곳,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곳, 우리말 읽힘성이 좋지 못한 곳 등 - 을 바르게 잡았습니다.
그러면서 당분간은 더 이상 교정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으나 그 이후 2년이 지나면서 우리말 문법, 읽힘성, 용례 등의 취약점이 지적되면서 어쩔 수 없이 부분적인 교정을 하게 되어 이번 9월에 한영대역관주성경 1판과 스터디 바이블 2판, 그리고 큰글자 성경 2판을 내게 되었습니다. 이번 판에서 바뀐 부분은 번역 자체가 아니라 대부분 우리말을 매끄럽게 만든 ‘우리말 바루기 교정’과 명백하게 삭제된 부분을 바로 잡은 것입니다. 다음은 몇 가지 예입니다.
(1) 피조물을 모두 창조물로: 롬8:21, 22 모두 creation, creature인데 피조물과 창조물로 둘로 쓰면 콩코던스가 안됩니다. 또 고후5:17도 창조물이 되어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라는 창조의 개념이 들어옵니다. 국립국어연구원에 의뢰하니 우리나라 어휘에서 피조물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고 합니다.(2) 마11:29, 너희 위에 내 멍에를 매고, 명백하게 ‘너희 위에’가 빠져 있어서 넣었습니다.(3) 마1:20, 데려오기를 대신 ‘데려오는 것을’로, 국립국어연구원에 따르면 데려오기를 같은 표현은 거의 안 쓴다고 합니다.(4) 마5:9, 하나님의 아이들로(여기의 children은 명백히 남성 명사이므로 자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은 이것을 아들들로 했습니다. 이러 부분을 그대로 두면 학자들의 공격의 대상이 됩니다). 원어는 아이들 혹은 아들들이 다 되는데 영어에서 이것을 children으로 번역했으므로 아들들로 번역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여자가 들어 있지 않은 아이들로 했습니다. (5) 마6:34, 그 날에게 대신 그 날에로, 국립국어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말 용례로는 그 날에가 맞다고 합니다(마10:12, 그 집에로, 마찬가지 이유).(6) 마11:5, 일으켜지며로, 국립국어연구원에 따르면 raised up은 우리말로 간단하게 ‘일으키다’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up을 살리기 위해 ‘일으켜 세우다’로 하면 줄줄 늘어지고 수준이 낮은 번역이 된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번 판의 변화는 90% 이상이 우리말 표현을 다듬은 것입니다.
여러 성도들이 가지고 다니기 좋게 책의 크기를 줄이고 글씨는 크게 다시 편집해서 큰글자 성경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특히 교회의 어르신들에게는 이런 성경이 매우 필요하므로 반드시 인쇄해 달라는 요청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큰글자 성경을 동시에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크기를 비교한 것입니다. PDF 샘플 파일을 올리니 인쇄해서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영대역관주성경 낱장 크기(152mm*222mm), 가격 39,000원(색인), 37,000원(무색인)스터디 바이블 낱장 크기(152mm*222mm), 가격 39,000원(색인), 37,000원(무색인)큰글자 성경 낱장 크기(144mm*206mm), 가격 33,000원(색인), 31,000원(무색인)
참고로 한영대역관주성경의 관주와 소제목은 모두 스터디 바이블의 것들과 동일합니다. 또 활자를 이전의 한영대역보다 진하게 해서 가독성을 좋게 했습니다. 앞으로 이전 판과 같은 한영대역성경은 더 이상 출간하지 않을 것입니다.
끝으로 이번에는 한영대영관주성경과 스터디바이블의 경우 기존의 개방형 가죽 장정과 지퍼형(검은색, 고동색) 장정이 나왔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고르면 됩니다. 한편 큰글자 성경은 100% 지퍼형(검은색, 고동색) 장정만 있습니다. 다음은 큰글자 지퍼 성경의 사진들입니다. 한영대역관주성경과 스터디 바이블 지퍼의 경우도 동일한 색과 지퍼로 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지퍼의 고리와 단추에는 KJB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성경 본문을 고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되어 지난 8년 간 교정을 했습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본문이 정착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께서 성경의 보급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널리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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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2 16:12:38 | 관리자
성도 여러분, 평안히 지내셨습니까?
저희 성경은 2000년 8월에 초판이 나온 이래로 계속해서 교정을 거쳤습니다. 2006년 4월에는 한영대역성경 3판(스터디 성경 1판)을 내면서 초판 이후에 발견된 수정 사항들의 대부분 - 빠진 곳,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곳, 우리말 읽힘성이 좋지 못한 곳 등 - 을 바르게 잡았습니다.
그러면서 당분간은 더 이상 교정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으나 그 이후 2년이 지나면서 우리말 문법, 읽힘성, 용례 등의 취약점이 지적되면서 어쩔 수 없이 부분적인 교정을 하게 되어 이번 9월에 한영대역관주성경 1판과 스터디 바이블 2판, 그리고 큰글자 성경 2판을 내게 되었습니다. 이번 판에서 바뀐 부분은 번역 자체가 아니라 대부분 우리말을 매끄럽게 만든 ‘우리말 바루기 교정’과 명백하게 삭제된 부분을 바로 잡은 것입니다. 다음은 몇 가지 예입니다.
(1) 피조물을 모두 창조물로: 롬8:21, 22 모두 creation, creature인데 피조물과 창조물로 둘로 쓰면 콩코던스가 안됩니다. 또 고후5:17도 창조물이 되어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라는 창조의 개념이 들어옵니다. 국립국어연구원에 의뢰하니 우리나라 어휘에서 피조물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고 합니다.(2) 마11:29, 너희 위에 내 멍에를 매고, 명백하게 ‘너희 위에’가 빠져 있어서 넣었습니다.(3) 마1:20, 데려오기를 대신 ‘데려오는 것을’로, 국립국어연구원에 따르면 데려오기를 같은 표현은 거의 안 쓴다고 합니다.(4) 마5:9, 하나님의 아이들로(여기의 children은 명백히 남성 명사이므로 자녀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은 이것을 아들들로 했습니다. 이러 부분을 그대로 두면 학자들의 공격의 대상이 됩니다). 원어는 아이들 혹은 아들들이 다 되는데 영어에서 이것을 children으로 번역했으므로 아들들로 번역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여자가 들어 있지 않은 아이들로 했습니다. (5) 마6:34, 그 날에게 대신 그 날에로, 국립국어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말 용례로는 그 날에가 맞다고 합니다(마10:12, 그 집에로, 마찬가지 이유).(6) 마11:5, 일으켜지며로, 국립국어연구원에 따르면 raised up은 우리말로 간단하게 ‘일으키다’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up을 살리기 위해 ‘일으켜 세우다’로 하면 줄줄 늘어지고 수준이 낮은 번역이 된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번 판의 변화는 90% 이상이 우리말 표현을 다듬은 것입니다.
여러 성도들이 가지고 다니기 좋게 책의 크기를 줄이고 글씨는 크게 다시 편집해서 큰글자 성경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특히 교회의 어르신들에게는 이런 성경이 매우 필요하므로 반드시 인쇄해 달라는 요청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큰글자 성경을 동시에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크기를 비교한 것입니다. PDF 샘플 파일을 올리니 인쇄해서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영대역관주성경 낱장 크기(152mm*222mm), 가격 39,000원(색인), 37,000원(무색인)스터디 바이블 낱장 크기(152mm*222mm), 가격 39,000원(색인), 37,000원(무색인)큰글자 성경 낱장 크기(144mm*206mm), 가격 33,000원(색인), 31,000원(무색인)
참고로 한영대역관주성경의 관주와 소제목은 모두 스터디 바이블의 것들과 동일합니다. 또 활자를 이전의 한영대역보다 진하게 해서 가독성을 좋게 했습니다. 앞으로 이전 판과 같은 한영대역성경은 더 이상 출간하지 않을 것입니다.
끝으로 이번에는 한영대영관주성경과 스터디바이블의 경우 기존의 개방형 가죽 장정과 지퍼형(검은색, 고동색) 장정이 나왔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고르면 됩니다. 한편 큰글자 성경은 100% 지퍼형(검은색, 고동색) 장정만 있습니다. 다음은 큰글자 지퍼 성경의 사진들입니다. 한영대역관주성경과 스터디 바이블 지퍼의 경우도 동일한 색과 지퍼로 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지퍼의 고리와 단추에는 KJB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성경 본문을 고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되어 지난 8년 간 교정을 했습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본문이 정착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께서 성경의 보급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널리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9-05-02 16:12:38 | 관리자
안녕하십니까?
4월 12일(주일)부터 사랑침례교회는 장소를 이전해서 예배를 드립니다. 새 예배당은 지난 번 장소에서 아주 가까운 데 있습니다. 지하철 1호선 송래역에서 내리셔서 남부광장으로 나와 곧장 큰길을 따라 200미터 오시면 오른쪽에 쌍용자동차 영업소 빌딩이 나옵니다. 예배당은 이 건물의 5층에 있습니다. 이제 아이들을 위한 주일학교도 엽니다.
또 미국의 펜사콜라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김형훈 형제님이 4월부터 교육 목사로 와서 같이 일합니다.
4월 14일부터는 디모데 스쿨도 화요일 저녁 7시 30분에 새 예배당에서 모입니다. 참조하십시오.
또한 사랑침례교회의 사이트를 새로 개설하였습니다. 주소는 http://cbck.org입니다. 구 사이트는 더 이상 업데이트 되지 않습니다. 교회의 새 사이트에 약도가 있으니 참조하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9-05-02 16:09:21 | 관리자
2년 전에 저희는 스터디 바이블과 에스라 성경 사전을 출간했습니다. 그 이후로 여러 사람들이 스터디 바이블 혹은 에스라 성경 사전 내의 사전에 대해 질문해 오시고 그것을 사용할 수 없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저희는 390쪽짜리 성경사전을 무료로 다운로드할 수 있게 오늘부터 사이트에 올립니다. 누구든지 마음대로 사용하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셔도 됩니다. pdf 파일이므로 검색 기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성경사전 뒤에 있는 100쪽의 컬러 지도와 선도 등은 성경공부의 지도/선도 메뉴에서 다운 받기 바랍니다. 특히 외국에 계신 분들에게 이것은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실은 며칠 전에 중국 동포에게 이 파일을 보내 주었습니다. 모든 것이 통제된 상황에서 이런 사전이 유용하게 사용될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북한에도 이런 파일이 들어갈지 누가 알겠습니까? 책을 가지고 가는 것은 어려워도 이런 파일의 유입은 가능하겠지요. 더 좋은 제안이 있으면 언제라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9-05-02 16:06:39 | 관리자
죄(Sin): 하나님의 법에 위배되거나 그것과 비교하여 부족한 것으로 드러나는 생각, 말, 욕망, 행동. 성경에서 죄는 불법, 범죄, 허물, 빚, 불순종, 반역, 거역, 실족, 완고, 무지, 위선 등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거룩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말에서는 죄가 ‘과녁을 벗어난 것’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롬3:23)고 말함으로써 죄가 곧 하나님의 영광에서 벗어난 것임을 보여 준다.
기독교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종교는 선행을 통해 죄를 덮거나 죄 값을 낮추려 하지만 성경의 기준에 따르면 아무리 선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이다. 이것은 기차 출발 시간이 오후 5시이면 그로부터 1분 지나서 온 사람이나 1시간 지나서 온 사람이나 다 기차를 놓치는 것으로 비유될 수 있다. 세상의 종교는 기준 혹은 과녁에서 얼마나 가깝게 갈 수 있는가를 보여 주지만 기독교는 기준 혹은 과녁 자체를 맞추어야 구원 받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런 차원에서 성경의 죄는 세상이 정한 죄와 다른데 그 이유는 후자가 사람들의 법규나 기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김으로 이 땅에 죄가 들어왔음을 확실하게 보여 준다. 죄의 형벌과 권능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죄 없이 사탄의 가장 큰 무기인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신뢰하는 길뿐이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와서 온 인류를 오염시킨 것과 죄의 본성, 형태, 효과 등에 대해서는 창6:5; 시51:5; 마15:19; 롬5:12; 약1:14-15 등을 참조하기 바란다.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을 사랑하며 섬기는 것과 비교해서 죄는 ‘경건하지 못한 것’(ungodliness)으로 불릴 수 있다. 우리말에서 종종 경건으로 번역된 말은 원래 ‘하나님을 닮는 것’을 뜻하므로 죄는 하나님과 정반대를 닮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다는 측면에서 죄는 범법이라 불리며 영원한 정직성에서 벗어난다는 뜻으로 불법 혹은 불의라 불린다. 또 죄는 모든 범법의 사악한 원천으로서 우리의 첫 조상으로부터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는 부패이므로 원죄라 불리기도 한다. 성경은 죄를 가리켜 육 혹은 육신, 죄와 사망의 법 등이라 한다(롬8:1-2; 요일3:4; 5:17). 죄의 형벌은 사망이며 하나님은 분명히 아담이 죄를 지으면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2:17). 그래서 죄를 짓는 혼은 반드시 죽는다. 단 하나의 죄라도 사람의 혼을 완전히 멸절시키는데 이것은 마치 전기 줄의 한 부분이라도 끊어지면 전기가 흐르지 않는 것과 같다. 죄의 사악함은 죄로 인해 손상된 하나님의 법의 거룩함과 공정함과 선함 등에 의해 또 죄로 인해 놓치는 영원과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필요한 희생 예물의 위대함 등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죄를 알지도 못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속죄 제물이 되신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셨다고 기록한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죄인 참조.
2009-05-02 15:58:21 | 관리자
지옥(Hell): 이것은 ‘스올’이라는 히브리말과 ‘하데스’라는 그리스말을 번역한 것으로 성경에 총 54회 나온다(시16:10; 사14:9; 겔31:16; 눅16:23). 이 경우는 지옥이란 단어가 실제로 쓰인 경우이고 이 외에도 성경에는 영원한 불, 영원한 멸망, 바깥 어두운 곳, 불 호수, 바닥없는 구덩이 등과 같이 지옥을 묘사하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이런 구절들은 지옥이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분명한 장소임을 보여 준다. 지하 세계 선도 참조(81).영어의 지옥 즉 hell은 ‘감추다’ 또는 ‘덮다’라는 뜻의 앵글로색슨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1차적으로는 ‘죽은 사람들이 가는 지하 세계’를 뜻하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지하 세계에서 악한 사람들이 고통 받는 곳’을 뜻한다. 그러므로 한자의 ‘지옥’ 즉 ‘땅의 감옥’이란 표현은 아주 적절하다. 바벨탑에서 언어가 혼잡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말 성경에 아주 근사한 용어를 허락해 주셨다.
성경은 지옥이 땅의 심장부에 있다고 말한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대언자 요나의 표적 외에는 아무 표적도 그 세대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고래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사람의 아들도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으리라”(마12:39-40). 예수님은 이 말씀대로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가셨고(행2:31) 아브라함의 품에 있던 구약 성도들을 하늘로 옮기셨다(엡4:9-10). 낙원 참조. “몸은 죽여도 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혼과 몸을 능히 지옥에서 멸하시는 분을 두려워하라.”(마10:28)에 나오는 지옥은 그리스어 ‘게헨나’를 번역한 것으로 신약에서 열두 번 사용되었는데 이 중 열한 번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 게헨나는 ‘결코 끝이 없는 불, 사람이 끌 수 없는 불이 타는 곳’을 의미하며 ‘힌놈의 골짜기’를 뜻하는 ‘게힌놈’이라는 히브리어에서 파생되었다. 이 골짜기는 예루살렘 도시의 쓰레기를 버리는 곳으로 유대인들은 대대로 계속해서 불타는 이 골짜기에다 쓰레기, 죽은 짐승, 범죄자의 시체 등을 내다 버렸다. 힌놈 참조. 게헨나는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을 표현하는 기술적인 용어였으며 단 한 번도 무덤을 뜻한 적이 없다.지옥을 만드신 창조주는 지옥의 소름끼치는 본질을 강조하시면서 그곳을 어둠의 장소라고 말씀하셨다(마8:12; 22:13; 25:30). 사도 베드로 역시 지옥의 어둠에 대해 기록했고(벧후2:4) 사도 유다도 짧지만 권능 있는 자신의 글에서 지옥의 끔찍한 어둠에 대해 기록했다(유13). 지옥의 특성 중 또 하나는 그것이 깊고 넓다는 것이다. 계시록에는 지옥이 밑바닥 없는 구덩이 즉 무저갱으로 일곱 번 언급된다(계11:7, 17:8, 20:1, 3 등). 지옥으로 가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거기에는 그들을 수용할 충분한 공간이 있고 그래서 그 길이 좁아지기 시작하면 지옥은 스스로를 키운다(사5:14). 또 지옥은 절망의 장소이다(계14:11). 지옥에는 희망이 없으며 지옥에 있는 자들은 산 채로 불 호수에 던져져서 영원히 산 채로 남아 있어야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지옥의 본질이다(계19:20). 예수 믿지 않은 악인들이 궁극적으로 영원토록 살 불 호수 즉 불로 가득한 호수의 위치는 정확히 언급되어 있지 않다(계19:20; 20:14). 불 호수 참조.끝으로 기존의 우리말 성경들은 54회의 지옥 중 반 이상을 ‘스올’로 음역해서 구약에서는 지옥을 완전히 제거하였으며 신약에서도 몇 차례만 지옥으로 번역하고 나머지는 음부로 번역했다. 음부는 저승과 같은 말로서 ‘죽은 혼령이 가서 사는 세상’으로 구천, 유명이라고 말한다. 이런 이교도 사상이 기존의 우리말 성경에 그대로 반영되어 교리와 신학에 참으로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개역성경 잠15:11; 27:20 참조).
2009-05-02 15:55:43 | 관리자
천국(Heaven): 신자가 죽어서 가는 천국은 성경에서 하늘로 번역되었다. 하늘, 새 예루살렘 참조. 기존의 우리말 성경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4:17) 등에 나오는 천국은 원래 ‘하늘의 왕국’이며 이것은 결코 신자가 죽어서 가는 천국 즉 하늘나라가 아니다. 신자가 죽어서 가는 천국은 딤후4:18에 하늘 왕국(Heavenly kingdom)으로 되어 있다. 하늘의 왕국 참조. 성경의 하늘들 선도 참조(80).
2009-05-02 15:54:55 | 관리자
하늘(Heaven): 성경은 세 개의 하늘이 있음을 보여 준다. 성경의 하늘들 선도 참조(80). I. 첫째 하늘 - 새들과 구름이 거하는 곳. “내가 본즉, 보라, 사람이 없으며 하늘들의 새들이 다 도망갔고”(렘4:25; 단4:12; 마6:26; 8:20 비교). 첫째 하늘은 아름다운 곳이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이 영원히 거할 처소는 아니다. II. 둘째 하늘 - 해와 달과 별이 있는 곳.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복을 주며 또 네 씨를 하늘의 별들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니 네 씨가 자기 원수들의 문을 소유하리라”(창22:17, 시19:1 비교).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처음으로 첫째 하늘을 가로질러 둘째 하늘로 가는 우주선을 만들었다. 비록 둘째 하늘이 광대하고 아름답다 해도 첫째 하늘처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원히 거하는 처소는 아니다.
III. 셋째 하늘 -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았노니 그 사람은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 (몸 안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며 몸 밖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12:2, 왕상8:27, 30 비교). 바로 이곳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실제의 셋째 하늘이다. 수 천 년의 노력 끝에 사람들은 첫째 하늘에서 둘째 하늘로 갈 수 있었지만 아무리 우주 공학이 발달해도 둘째 하늘에서 셋째 하늘로 사람을 데려다 줄 우주 왕복선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여행은 ‘뇌’에 의해 가능하지 않고 오직 ‘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이런 하늘에 들어갈 수 없고 심지어 볼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 하늘은 셋째 하늘, 하늘의 하늘, 가장 높은 하늘 등으로 불리며 하나님뿐만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이 여기에 거한다(마6: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하늘에 가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며 자신의 백성이 와서 영원히 거하게 될 처소를 준비하고 계신다(엡4:10; 히8:1; 9:24-28). 한편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들은 모두 죽는 순간 바로 이 셋째 하늘에 간다. “내가 말하노니 우리가 확신에 차서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5:8; 빌1:23). 여기서 ‘몸을 떠난다는 것’은 육체적 죽음을 가리키며 우리 성도들은 죽으면 곧바로 주님과 함께 셋째 하늘에 있게 된다. 중간 대기소나 연옥 같은 장소로 간다는 것은 성경과는 동떨어진 미신이다.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이 셋째 하늘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거할 도시가 있으며 신구약 성도들은 바로 이 도시를 바라보았다. “이는 그가 기초들이 있는 한 도시를 바랐기 때문이라. 그것의 건축자와 만드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히11:10; 참조 시46:4; 87:3; 요14:2-3). 그런데 이 도시 즉 새 예루살렘은 영원히 셋째 하늘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인류 구속 계획이 끝나면 하늘에서 새 땅으로 내려온다(계21:2). 바로 이 도시 새 예루살렘이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원히 거할 천국이다. 새 예루살렘 참조. 만물의 회복 선도 참조(94).
2009-05-02 15:54:18 | 관리자
Across The Bridge
I have lived a life of sin, in this world I'm living in
I have done forbidden things I shouldn't do
I ask a beggar along the way if he could tell me where to stay
Where I could find real happiness and love that's true
Across the bridge there's no more sorrow
across the bridge there's no more pain
The sun will shine across the river
and you'll never be unhappy again
[ organ ]
Follow the footsteps of the King, till you hear the voices ring
They'll be singing out the glory of the Land
The river Jordan will be new,and the sound of trumpet you will hear
And you'll behold the most precious place never known to man
Across the bridge there's no more sorrow...
Across the bridge there's no more sorrow...
2009-05-02 15:53:16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