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기증
지난 주 서울대병원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사망한 사람의 간을 떼어내 이식하는 수술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간은 혈액공급에 쉽게 영향을 받는 장기이므로 생체이식만 가능했었다. 그런데 이번 수술은 장기 기증자가 턱없이 부족한 현실에서 모자라는 장기를 대체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지난 한 해 국내에서 신장이나 간을 이식받은 환자는 천사백여 명이지만 여전히 이만여 명의 환자들이 장기이식을 기다리고 있다. 또 지난 한해 국내에서 장기를 기증한 뇌사자는 148명으로서 이는 뇌사자 100만 명에 3.1명꼴로 장기이식이 이뤄지는 것으로, 장기기증이 활성화된 스페인의 30명, 미국의 25명과 비교하면 너무나 부족한 실정이다.
우리나라에서 장기기증이나 시신기증이 잘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신체 훼손을 금기시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부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믿음에 기인하는 바도 있다. 즉 신체가 온전한 상태로 매장되지 않을 경우 부활에는 적절치 않을 것이라고 우려하는 시각도 있기 때문이다(전6:3; 렘8:2,3; 단12:2).
그러나 장기기증이나 장애로 신체가 일부 훼손되었거나 또는 화장으로 신체가 완전히 소실된 채 이 세상을 떠나갔다 하더라도 부활 때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살전4;17; 계21:4; 22:3).
오히려 성경은 자신의 몸을 희생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자신을 버리며 이웃을 사랑할 것을 강권하고 있다(요15:12-15; 요일3:16).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으므로 우리가 이로써 그분의 사랑을 깨닫나니 우리가 형제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특히 병들어 고통 가운데 있는 이웃을 섬길 의무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마10:8). “병든 자들을 고쳐주고 나병 환자들을 정결하게 하며 죽은 자들을 살리고 마귀들을 내쫓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10:8).
아울러 이웃을 섬기되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섬길 것을 명령하고 있다(레19:18; 마22:39; 눅10:27). “너는 원수를 갚지 말고 네 백성의 자녀들에게 원망하기 말며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주니라.”(레19:18)
이제 영생을 얻게 되는 우리에게 육체는 이 땅에 있는 동안만 필요한 것임을 인식하도록 하자(계21:4). 그리하여 장기기증이나 시신기증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있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자.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요일4:8)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00:00 | 관리자
비만
며칠 전 전직 대통령 중의 한 분이 ‘하루 두 끼 먹기’ 운동을 제안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유가 폭등과 곡가의 상승으로 경제가 어려운 지금 하루 두 끼만 먹으면 상당히 절약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게다가 자기 혼자 안 먹고 싶어도 옆에서 먹으면 먹어야 되는데 이 운동을 하면 비만인 사람이나 여성들도 매우 좋아할 것이라고 하였다.
사실 이러한 사견에 대해 정치적 해석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바는 어느덧 비만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는 현실이다.
이미 비만은 세계보건기구(WHO)에서 하나의 질병으로 분류되고 있는데 그 유병률이 지난 10여년 사이에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성인 인구의 약 60%가 과체중이고 30% 이상이 비만증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40세 이상 성인 인구의 약 30% 이상이 과체중 혹은 비만 인구이다.
또한 소아 및 청소년의 비만도 현저히 증가하고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비만은 더욱더 심각한 사회적 위협이 될 것으로 예측이 된다.
왜냐하면 제2형 당뇨병, 고혈압, 고지혈증, 심근경색, 협심증, 뇌경색, 뇌출혈 등과 같은 성인병뿐 아니라 역류성 식도염이나 정신질환들도 비만에 의해 유발될 수 있으므로 비만의 증가는 향후 막대한 사회적 손실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만의 원인으로 유전적 소인, 환경, 발달과정 등 여러 요인이 복잡하게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데 특별히 스트레스가 많은 경우 뇌에서 식용중추가 잘못 자극되어 살이 찌게 될 수 있다.
비만의 치료는 생활과 행동습관, 음식을 섭취하는 습관을 건강한 방식으로 바꾸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이상적으로는 스트레스 요인을 없애고 지방과 열량 섭취를 줄이며 유산소 운동과 체력단련 운동을 병행하도록 해야 한다.
성경에서도 비만에 대한 치료지침이 잘 나와 있다.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식사량을 줄이라는 것(잠23:2,3,21; 눅21:34)과 몸을 많이 움직이라는 것(창3:19상; 시128:2; 살후3:10하)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제 비만을 잘 치료하고 예방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자(고전3:16).
“네가 만일 식욕에 빠진 자이거든 네 목에 칼을 둘지니라. 그의 맛있는 음식들은 속이는 것들이니 그것들을 바라지 말라.”(잠23:2,3)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창3:19상) “누구든지 일하려 하지 아니하거든 먹지도 말라.”(살후3:10하)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5:59:23 | 관리자
근친혼
얼마 전 호주의 한 남성이 자신의 딸과 7년 넘게 근친상간 관계를 유지해 온 것으로 드러나 호주 사회는 물론 전 세계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같은 사실은 이 남성이 무장 강도 혐의로 법정에서 심문을 받던 도중 밝혀졌는데 이들 사이에는 현재 한 살 난 딸이 있으며 2001년에 태어난 첫아이는 출생 후 며칠 만에 선천성 심장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원은 이들의 근친상간을 불법으로 판결내리고 앞으로 성관계를 하지 못하도록 3년 동안 감시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어떤 사회에서나 근친자의 통혼은 금기로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유전학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사람도 유전병과 관계가 있는 해로운 열성 유전자를 4-8개 가지고 있다. 비록 해로운 열성 유전자가 있어도 대부분 보인자이기 때문에 건강하게 살 수 있지만, 근친결혼을 하면 보인자인 부모에게 감춰져 있던 해로운 열성 유전자가 그 자손에서 동형이 되어 표현형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아울러 한 개체군에서 동종교배가 20세대 동안 계속되면 각 개체는 유전적으로 모두 동일하게 되어 그 개체군의 적응 능력은 매우 낮아진다. 따라서 그 개체군은 환경 조건에서 변화가 일어나면 적응하는 데 탄력성을 잃어버리게 되어 교배개체군들 간에 자연도태가 잘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에 근친혼을 허락하셨을까?
가인도 분명 아담이 낳은 많은 누이들 가운데 한 명과 결혼을 하였을 것이고, 아브라함은 자신의 배다른 동생인 사라를 아내로 삼았으며, 이삭은 삼촌 나홀의 손녀인 리브가 즉 오촌하고 결혼을 하였고, 야곱도 외삼촌 라반의 딸인 라헬과 레아 즉 사촌 두 명과 동시에 결혼을 하였다(창4:17; 5:4,5; 20:12; 24:15,24; 창29:12,23,28).
그렇지만 이 같은 근친혼은 어느 정도 인류가 번성하여 자리를 잡기까지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불가피한 방법이었다(창1:28; 9:1).
그리고 근친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줄어들다가 모세의 때에 율법으로 금지되는데, 이는 사회적인 안정을 얻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근친혼을 통한 유전적인 위험성도 상당히 커졌기 때문이다(레18:6-10; 20:10-21; 신27:20-23).
왜냐하면 노아홍수 이후 궁창 위의 물이 제거됨으로써 몸에 해로운 우주복사선이 증가하여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잘 일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돌연변이는 다음 세대에 전달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축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수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즉 유전자 돌연변이가 덜 축적되었던 족장시대까지는 한동안 가까운 친척과의 결혼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제 ‘올드 보이’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이도록 하자.
“너희 가운데 아무도 가까운 친족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라. 나는 주니라.”(레18:6)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5:58:44 | 관리자
동성애
여성으로 살다 성전환수술을 거쳐 법적으로 남자가 된 34세의 한 미국인이 지난 주 여아를 출산했다.
동성애 전문 잡지 ‘디 애드버킷’(옹호자)에 ‘사랑의 출산’이란 제목으로 기고를 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한 이 임신한 남자(?)는 오프라 윈프리의 토크쇼에 출연하여 “아이를 갖는 것은 남자나 여자의 소망이 아니라 인간의 욕구이기 때문에 나의 생물학적 아이를 가질 권리가 있다”고 말한 대로 자신의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이제까지 동성애에 대해 알려져 왔던 다양한 스펙트럼을 총정리하는 듯한 이번 사건을 보면서 정말 동성애는 이 출산한 남자를 비롯해 동성애인권운동가들이 주장하는 대로 정상적이고 건강한 것인지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동성애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동성애 유전자에 대한 어떤 발견도 이루어진 바 없으며, 일란성 쌍둥이에서의 연구결과도 마찬가지이다. (또 동성애가 선천적이라면 절대 치유가 일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당수가 정신과 상담 또는 신앙의 힘으로 치유되고 있다.)
알프레드 킨제이 등에 의해 세워진 성연구원의 공식 간행물의 보고에 의하면 대부분의 동성애자들은, 특히 게이들은 수많은 섹스파트너를 갖고 난교(亂交)를 즐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학적으로는 동성애자들에서 예견되는 성행위로 인해 구강, 폐, 전립선, 남자성기, 쓸개. 항문, 직장, 결장, 여자성기, 자궁, 골반, 뇌, 피부, 혈액, 면역시스템 등 여러 신체시스템에 갖가지 질병이 발생하게 된다.
동성애가 에이즈에 매우 취약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감염자의 살을 파먹는 메티실린 내성 황색포도상구균(MRSA)의 새로운 변종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보스턴의 게이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동성애는 이처럼 신체적 이상들을 잘 일으키는 것뿐 아니라 영적으로 심각한 침해를 일으키기 때문에 더욱 더 문제가 됨을 알아야 한다.
동성애자들이나 동성애 옹호론자들은 하나님(God)이라는 단어를 적절히 인용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배격한다(창1:27). 대신 그들은 대부분 진화론을 동성애의 토대로 삼는다(딤전6:20).
또한 성경이 동성애가 가증스런 죄악임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인한다(레18:22; 20:13; 왕상14:24; 롬1:26,27; 고전6:9; 딤전1:10; 유다1:7). 결국 죄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다(요일1:8).
아울러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를 부정한다(엡5:22-33). 그래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지 못하게 한다(딛2:13; 계19:7,8; 22:20).
이제 동성애가 영육 간에 치명적임을 잘 인식하여 동성애의 영향력 하에 있는 이들을 참 건강의 길로 인도하도록 하자(약5:19,20).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잠16:25)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5:57:44 | 관리자
성폭행
요즈음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연일 성폭행 뉴스가 매스컴을 달구고 있다. 특히 어린 초등학생에서부터 연로한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무차별로 성폭행을 당하고 있고 집단적이며 조직적인 성폭행까지 만연한 것을 보면 정말 역사의 수레바퀴가 멈출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된다(딤후3:1-5).
성폭행은 남녀 모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압에 의해 성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경우를 말하는데 만일 성폭행의 희생자가 된다면 경찰에 신고하는 즉시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야 한다.
목욕은 물론 양치질도 하지 말고 옷도 갈아입지 말고 바로 진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옷이나 몸에서 떨어진 체모나 가해자의 피부가 남아 있을 수 있는 손톱 등이 조사대상이 되기 때문이며 또한 조기 진료를 통해 신체적, 정신적 안정을 빨리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폭행을 당하게 되면 출혈, 외상, 성병 등과 같은 신체적인 문제뿐 아니라 전쟁이나 자연재해를 직접 경험할 때 받는 것과 같은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이 생기게 된다.
집중력 장애, 학업 부진, 불면증, 악몽에 시달림, 식욕 감퇴 등의 행동장애가 나타날 수 있고 불안감, 수치심, 혹은 심한 자책감과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흔히 편두통이나 신체 하부통증, 피부병과 같은 정신신체 증상을 나타내기도 하며 때로는 분노와 증오심을 자신에게 돌려 자신의 신체를 학대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성폭행은 다른 행동의 유발원인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상태가 ‘폭력’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 것에 불과하다(잠23:7상). 사실 인간은 누구나 다 폭력적 성향을 갖고 있으며 스스로는 결코 선을 행할 수 없는 존재이다(렘17:9; 막7:20-23; 롬3:10-12). 그래서 성폭행을 포함한 인간문화의 모든 폭력적인 모습은 인간의 본성 곧 폭력적 성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도 이와 같이 잘못된 마음으로부터 연유한 성폭행들이 소개되고 있다. 소돔에서 시도된 집단 동성애적 성폭행을 위시하여 롯의 두 딸이 롯에게 행한 성폭행, 야곱의 딸 디나가 당한 성폭행, 벨리알의 아들들이 레위 사람의 첩에게 행한 성폭행, 다윗의 맏아들 암논이 이복누이 다말에게 행한 성폭행과 이후 압살롬이 서모들에게 행한 성폭행 등이 언급되고 있다(창19:4-11,30-38; 34:1-5; 삿19:22-28; 삼하13:6-14; 16:20-2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성폭행들을 철저히 심판하셨으며 또한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명령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신22:25-27; 창19:23-25; 습2:9; 창34:25-31; 삿20:12-48; 삼하13:28,29; 18:9-17; 살전5:22).
따라서 우리는 성폭행에 대해 엄정한 법집행을 해야 하며 아울러 성폭행을 부추기는 안방까지 침투한 갖가지 음란문화들을 빠짐없이 제거해야 한다. 그리할 때 진정 성폭행으로부터 해방된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가 이뤄지게 될 것이다.
“결혼은 모든 것 가운데 존귀한 것이요 잠자리는 더럽히지 말아야 하거니와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라.”(히13:4) “악의 모든 모양을 삼가라.”(살전5:22)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5:57:07 | 관리자
잔소리
잔소리의 사전적 정의는 ‘듣기 싫게 늘어놓는 잔말’이다. 특히 아내가 남편하게 하는 잔소리는 바가지라고 표현이 된다.
아담과 이브가 한 몸을 이룬 후 그들 간에 잔소리가 오간 적이 있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아마도 아담이 930년을 사는 동안 이브로부터 바가지를 긁힌 적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창5:5).
그 후 많은 인물들이 성경에 등장하고 있는데 잔소리가 처음으로 성경에 언급된 것은 창세기 16장에서이다. 즉 사래가 아브람에게 하갈로 인하여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바가지를 긁는 장면이 나타나고 있다(창16:1-6).
그러나 아쉽게도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인간적 방법으로 후손을 얻으려 했던 사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우를 범하였다(창16:2). 그리고는 또 사래가 수태한 하갈로부터 멸시를 받고 아브람에게 바가지를 긁자 사래의 뜻대로 하갈을 다루도록 하는 잘못을 범하였다(창16:6).
믿음의 조상 아브람이 이처럼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된 이유는 사실 정신의학적 측면에서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다.
잔소리를 계속 듣게 되면 만성적인 스트레스가 되어 정신적인 불안, 우울, 가슴앓이, 오해, 망상, 그리고 사고장애가 나타날 수 있다. 아마도 사래의 잔소리는 일회성이지 않았을 것인데 사래의 지속적인 잔소리에 어느 순간 아브람의 판단력에 문제가 생겨 아브람도 믿음에서 나지 아니한 결정을 하게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잔소리에 의한 스트레스는 정신건강뿐 아니라 여러 가지 신체적 병까지 일으킬 수 있다. 불면, 고혈압, 심장병, 뇌졸중, 위궤양, 당뇨병, 성기능 장애, 심지어는 암까지도 유발될 수 있다. 그래서 잔소리는, 특히 바가지는 다른 스트레스처럼 만병의 근원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죽하면 역사상 가장 지혜가 출중하였던 솔로몬이 “다투는 여자와 함께 넓은 집에서 사는 것보다 지붕 모퉁이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21:9) “다투며 성내는 여자와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21:19) 등과 같은 고백을 하였겠는가(왕상4:29-34).
그리고 비단 잔소리는 부부관계에서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뇌의 전두엽이 한창 성숙될 시기인 10대 자녀에게 잔소리를 해대면 새로운 신경 세포망이 정비되지 못해 인내심과 책임감이 있는 성인으로 자라나기가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스트레스로 인해 증가하는 ‘노르에피네프린’이 전두엽과 인지 기능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성급하게 잔소리를 하는 대신에 인내하며 나누는 부드러운 대화를 통해 우리 가족의 건강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는 오히려 어리석은 자에게 더 소망이 있느니라.”(잠29:20) “오래 참음을 통해 통치자도 설득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잠25:15)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5:56:07 | 관리자
최진실법
지난 주 온 국민을 경악케 한 최진실씨의 자살은 악성루머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그녀의 죽음을 계기로 인터넷상의 악성 댓글을 뿌리 뽑기 위해 일명 ‘최진실법’의 제정이 추진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아울러 경찰은 인터넷을 통한 허위사실 유포자와 악질적, 상습적 ‘악플러’를 구속수사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집중단속에 착수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익명성을 이용해 인터넷상에서 타인을 비방하여 심적 고통을 주고 그로 인해 우울증을 유발시켜 자살하도록 만드는 행위를 법으로 엄하게 다스리겠다는 것은 올바른 처사라 생각된다.
또한 최근 보건복지가족부가 우울증 조기 검진을 위해 현재 초․중․고생 10만 명을 대상으로 시범실시 중인 정신건강 검진을 성인으로 확대하기로 한 것도 국민건강을 위해서는 매우 바람직한 방침이라 여겨진다.
우리가 무심코 뱉는 말 한마디가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사실은 정신신체의학이 발달하기 수십 세기 전에 살았던,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인물인 솔로몬이 잘 표현하고 있다(잠12:18; 16:24).
“칼로 찌르듯이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건강하게 하느니라.”(잠12:18)
“즐거운 말들은 벌집 같아서 혼에게 달고 뼈에게 건강을 주느니라.”(잠16:24).
또한 솔로몬은 최진실씨의 자살원인이 된 악성루머가 얼마나 건강에 해악을 끼치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잠18:8; 26:22).
“소문을 퍼뜨리는 자의 말들은 상처들과 같아서 배 속의 가장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18:8)
그런데 최진실법의 형량이 어떻게 정해질지 알 수 없지만 성경적으로는 수군수군하거나 뒤에서 헐뜯을 경우 ‘사형’에 해당이 된다(롬1:29-32).
그렇다면 최진실법에는 걸리지 않을지라도 성경적 기준으로 사형을 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는 ‘악플’을 구상하는 갖가지 더럽고 악한 생각들이 늘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마15:10-20; 롬3:10,12,23).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예수님으로 인해 말로 지은 죄뿐 아니라 어떠한 죄악도 다 용서받고 영원한 죽음의 형벌에 이르지 않을 수 있음을 감사하자(롬5:8-10; 6:23).
그리고 이제는 비방과 허위와 악플이 아니라 따뜻한 말과 웃음과 칭찬으로 이웃을 세워주도록 하자(롬14:19; 살전5:11).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 최진실법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사랑은 자기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5:55:22 | 관리자
말(言語)
하나님께서는 단지 말씀하심으로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창1:3,6,9,11,14,20,24). 또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권능의 말씀에 의해 그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히1:3).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는 견줄 수 없겠지만, 우리가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말(言語)에도 그 나름대로의 능력이 있다(막11:23). 즉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 우리 삶과 건강에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기까지 하다.
최근 들어 정신신체의학의 발달을 통해 말이 우리의 건강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음이 잘 밝혀지고 있다. 일례를 들어 보자. 어느 학자가 같은 종류의 식물을 같은 장소에 두고 같은 양의 영양을 공급해 주면서 한 식물에게는 매일 사랑의 말을 들려주고 한 식물에게는 나쁜 말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몇 주 후 두 식물을 비교해 보니 사랑의 말을 들려준 식물은 건강하게 잘 자라났지만 나쁜 말을 들려준 식물은 시들어 죽어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이 담긴 긍정적인 말은 사람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건강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선천성 관절병이 치료된 바네사의 간증’에서처럼 어떤 말을 하더라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건강에 이로운 것이다(잠16:24).
그러나 반대로 부정적인 말은 우리의 건강을 해치기 쉽다. 예를 들어 ‘죽겠다, 죽고 싶다, 안 된다’ 등의 표현은 거의가 절망적으로 또는 자기비하로 쓰이기 때문에 스트레스 호르몬의 과다분비를 가져와 우리 몸에 이상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말들은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마7:7,8; 살전5:16-18).
아울러 말을 빨리 반복하여 건강하게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만트라’(mantras) 기법 또한 영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마6:7; 딤후2:16).
만트라 기법은 힌두교나 불교에서 뿐 아니라 스트레스 증상 관리와 관련하여 이용되기도 하는데, 명상의 생리적 효과에 대한 연구를 해온 허버트 벤슨은 이완반응이란 논문에서 말을 빨리 반복하는 동안에 깊은 이완상태가 나타남을 보고하고 있다. 즉 실험대상자들의 산소 소모가 감소되고, 심장박동수는 느려지고, 전기피부저항은 증가하고, 혈압은 낮아졌다.
그러나 비록 말을 빨리 반복함으로 여러 건강수치가 일시적으로 좋아질 수는 있지만 만트라를 하게 되면 영적으로 침해가 올 수 있기 때문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를 행하지 말아야 한다(살전5:22).
이처럼 말은 우리의 육적, 영적 건강에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방식을 따라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따라 말을 하며 우리의 건강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칼로 찌르듯이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건강하게 하느니라.”(잠12:18)
“즐거운 말들은 벌집 같아서 혼에게 달고 뼈에게 건강을 주느니라.”(잠16:24).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5:54:29 | 관리자
23. ‘순간’에 현혹되지 말고 ‘영원’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에게는 ‘영원’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덧없이 지나가는 세상의 이 ‘순간’을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잠깐 있다가 영원히 사라질 가치들로 우리를 현혹하는 사탄의 은밀한 접근을 차단해야 한다. 이 ‘순간’의 것들이 아무리 오래 지속되는 것 같아도 언젠가는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영원’이 아니면 만족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잠깐이라도 양지 바른 곳을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세상은 우리의 쓴웃음을 자아낸다.
이제 교회는 다시 ‘영원’을 바라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교회에게 허락하신 무한한 복은 바로 ‘영원’ 속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길게 보아야 한다. 현재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숫자나 세는 짓을 중단하고, 자신이 지금 어떤 기초 위에서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교회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을 위해 동분서주하지 말고, 영원히 남는 것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영원’의 도장을 찍어 놓으신 것들에 주목해야 한다. 현재의 유행을 좇는 인기 있는 교회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얕은 시냇물에 비유될 수 있다. 반면 ‘영원’을 생각하는 교회는 깊은 대양과 같다. 시냇물은 최근의 소나기에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 대양이 너무 조용하고 재미없다고 불평할 것이다. 하지만 ‘영원’의 큰 배를 띄울 수 있는 곳은 대양뿐이다.
주님! 제가 늘 영원을 의식하며 살 수 있게 도우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토저의 ‘이것이 성공이다’(규장 출판사)에서
2009-05-01 15:52:15 | 관리자
22. 하나님은 인기 사냥꾼 대신 조용한 영웅을 찾으신다
이 시대에 영웅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실상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들인지 알고 싶다면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라. 그들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밀어붙여서 혹은 운이 아주 좋아서 현재의 자리에 오른 자들이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눈길을 돌린 다음 심히 낙심이 되어 “인류가 배출한 영웅이란 자들이 고작 이 꼴인가?”라고 한탄할 것이다. 그러나 계속 낙심하지는 말라. 우리가 알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머리에 떠올릴 때 이런 한탄은 아침 안개처럼 사라질 것이다. 누구도 이런 평범한 사람들의 도래를 알리지 않고 그들을 기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이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는 허풍선이들보다 훨씬 고결한 성품을 갖고 있다.
교회도 사이비 영웅들 때문에 아주 피곤하다. 목소리 큰 자들과 얼굴이 많이 알려진 자들이 가장 훌륭한 교인으로 통하는 상황이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조차 ‘인기 있는 교인’을 ‘신앙 좋은 교인’으로 착각하는 잘못을 범한다. 신자들은 온유한자들보다는 주제넘게 나서기를 좋아하는 자들을, 애통하는 자들보다는 의기양양한 자들을 더 높이 평가한다. 마음이 깨끗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자들보다는 ‘인기 사냥꾼’이 되어 신문의 1면 머리 기사를 장식하는 자들이 교회에서 더 대접받고 있다.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명심하라. 하나님은 조용한 영웅들을 찾으신다는 것을!
주여! 무명의 충성스러운 성도들에 대해 감사합니다.
‘조용한 영웅들’과 그들의 숨은 봉사로 인해 감사합니다.
오늘 그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힘을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토저의 ‘이것이 성공이다’(규장 출판사)에서
2009-05-01 15:51:33 | 관리자
21. 하나님은 일의 결과보다 동기를 보신다
생각이 깊은 그리스도인은 때때로 “내가 과연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라고 자신에게 물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때때로 “나의 수고가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인생을 헛사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과 두려움에 빠질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여러 봉사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이다”라고 규정해 왔는데, 대부분의 경우 교회의 견해가 옳았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다. 어떤 일이 진정한 봉사가 되도록 만드는 것은 일의 종류나 양(量)이 아니라 질(質)이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숫자나 규모에 대한 이야기는 쏙 들어갈 것이다. 그분 앞에서는 오직 도덕적 질(質)이 문제가 될 것이다.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과 수고에 대해 하나님이 어떤 평가를 내리시는지를 안다면 우리는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무엇보다도 우리의 봉사의 질을 문제 삼으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더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봉사가 원하는 바의 목적을 달성하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이 우리의 봉사를 받지 않으실 수도 있다. 그분이 보시는 것은 인간들이 보는 것과 다르다.
신앙적 봉사에서는 ‘봉사를 하는 동기(動機)’가 전부이다. 동기에 따라 어떤 봉사는 ‘죽은 봉사’가 되고, 또 어떤 봉사는 ‘산 봉사’가 된다.
주여!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숫자나 규모에 대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고,
오직 도덕적 질(質)에 대한 이야기만 나올 것이다”라는 말씀을
제가 잊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토저의 ‘이것이 성공이다’(규장 출판사)에서
2009-05-01 15:50:52 | 관리자
20. ‘숫자’는 결코 영혼의 가치를 판단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 단체들은 양(量)을 강조하면서 질(質)을 희생시키는 것 같다. 야망으로 가득한 교회들은 양적으로 급성장하는 교회를 노골적으로 부러워하면서 모방하려고 애쓴다.
오늘날 기독교에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닮은 사람들이 넘친다. ‘숫자’라는 여신(女神)을 열렬히 숭배하는 그들은 교회와 관련된 모든 것을 이 여신 앞으로 끌어다가 심판을 받게 한다. 이 여신의 구약은 재정보고서이고 신약은 교인 명부이다. 그녀는 누가 무슨 문제를 제기하든 그녀의 신구약을 들이대면서 끝까지 우긴다. 그녀는 재정보고서와 교인 명부가 교회의 영적 성장을 재는 잣대라고 주장한다. 교회의 모든 계획과 노력의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는 척도 역시 그녀의 신구약이다.
‘숫자’라는 여신을 숭배하는 것은 일종의 이단이다. 숫자는 결코 영적인 것을 판단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 숫자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외형주의(外形主義)에 굴복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육체의 가치보다 영혼의 가치를 더 높이신 주님의 깊은 뜻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목회자와 평신도들 모두 날마다 숫자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는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현상이 아주 위험하고 잘못된 것임을 깨닫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 우리 주여! 우리가 잘못을 깨닫게 하소서.
우리를 용서하소서. 그리고 우리를 구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토저의 ‘이것이 성공이다’(규장 출판사)에서
2009-05-01 15:50:13 | 관리자
19. 경쟁하지 말고 협력하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경쟁자가 아니라 동역자이다. 성령님이 내주(內住)하시는 교회가 경쟁심을 품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떤 교회가 다른 교회와 경쟁한다면 그 순간부터 그 교회는 하나님의 참교회가 아니다. 그 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저급한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다. 이런 교회에는 성령님이 계시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교회의 활동은 성령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단지 인간들의 활동일 뿐이다.
성령님은 교회의 지체들 안에서 일하신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몸은 경쟁 때문에 분열되지 않는다. 다양한 지체들의 야망은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죽어야 한다. 지체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열렬히 받아들여야 한다.
지체들은 서로 간의 경쟁심을 죽이고 협동심을 길러야 한다.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함께 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동일한 한 몸의 지체들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선한 세력을 분열시키려는 원수의 모든 간계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주여! 남과 경쟁하고 남과 비교한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우리 마음에서 경쟁심을 없애 주시고 대신 협동심을 심어 주소서.
우리 모두는 동역자입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이 오직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만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토저의 ‘이것이 성공이다’(규장 출판사)에서
2009-05-01 15:49:34 | 관리자
18. 하나님 말씀은 ‘양’을 부정하고 ‘질’을 강조한다.
현대 문명의 최대의 약점은 질(質)보다 양(量)을 추구하는 것이다. 지금 나의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시간이 흐르면 이해하게 될 것이다.
현재 기독교는 타락한 가치관의 어두운 그림자 아래에서 살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남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목을 받으려는 그리스도인들, 뜬 구름처럼 흘러가는 인기를 붙잡으려고 발버둥치는 신자들 그리고 연예계나 스포츠계의 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목회자들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런 현상은 성경의 교훈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사랑한다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세상의 썩은 가치관에 물들어 살아가는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크기와 양(量)을 철저히 부정하고 오직 질(質)만을 강조한다. 예수님 당시 수많은 무리가 그분을 따랐지만 그분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신 다음에는 조용히 그들에게서 돌아서 소수의 선택받은 제자들에게 그분의 영원한 진리를 심어 주셨다.
성공지상주의(成功至上主義 )가 난무하는 현대사회에서 교회들은 끊임없이 유혹에 시달린다. 그 유혹이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외형적으로 교회를 크게 만들려는 유혹이다. 또한 정상적인 성장을 통해 얻을 수 없는 것을 뻥튀기를 통해 얻으려는 유혹이다 그런 유혹을 과감히 물리쳐야 한다.
오, 주여! 우리의 눈을 열어
주님의 성공의 기준과 주님의 실패의 기준을 보게 하소서.
주님의 눈으로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여 용기를 얻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토저의 ‘이것이 성공이다’(규장 출판사)에서
2009-05-01 15:48:47 | 관리자
신앙은 제한된 소수의 사람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덕이 아니다.
신앙은 검은 것은 희다고 믿도록 우리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정말로 간절히 원하면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도록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능력이 아니다.
신앙은 우리의 마음을 진리와 일치시키는 것이다.
신앙은 온 땅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이 거짓말 하실 수 없다는 것을 온전히 믿으면서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다 (중략)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래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대로 바꾸지 않으신다.
그분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3:14)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알고 우리의 모든 것을 그 거룩한 지식에 조화 되도록 변화시킬 때 우리는 견고한 반석 위에 선다.
- 토저의 나는 가짜인가 진짜인가 중에서 -
2009-05-01 15:48:07 | 관리자
시간 문제가 아니라 변화
시간에 대한 우리의 오해 중에서 가장 유해한 것은 인간성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신비로운 힘이 시간에게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혜롭지 못한 젊은이를 볼 때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 저 사람이 지혜로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새로 믿은 그리스도인이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행동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세월이 흐르면 그가 성숙하게 변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실상을 말하자면 공간이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 힘을 갖고 있지 않듯이 시간도 그렇게 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고 있다.
실로 시간은 우리가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허구에 불과하다.
바보를 현인으로 죄인을 성인으로 만드는 것은 시간이 아니고 변화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변화를 일으키시기 때문에
그들이 변하는 것이다.
- 토저의 나는 가짜인가 진짜인가 중에서 -
2009-05-01 15:46:50 | 관리자
17.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어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그분은 질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신다. 크기와 질이 충돌할 때 크기는 아무것도 아니고 질이 전부이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눈이 흐려지고 생각이 혼미해졌기 때문에 망상에 빠지기 쉽다. 이 사실을 보여 주는 증거들 중 하나는 인간의 가치관이 거꾸로 되어 질보다 크기를 더 높이 평가하는 불치병에 빠진 것이다. 이것은 가치의 전도(顚倒)이다! 가치관이 뒤집어진 것이다. 뒤집어진 가치관을 다시 뒤집는 것이 기독교다. 하지만 딱하게도 현재 심지어 그리스도 인들조차 타락한 아담의 가치관에 따라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얼마나 크냐? 얼마나 많으냐?” 그리스도인들조차 기독교와 관련된 것들을 평가할 때 이런 질문들을 너무나 자주 던진다.
기독교는 정말 중요한 것에 집중하는 종교이다. 중요한 것은 질이다! 우리는 크기에 현혹되어 판단을 흐리는 일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주여! ‘외형적 성공’ 과 ‘크기’에서
세상의 가치 기준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때문에
낙심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토저의 ‘이것이 성공이다’(규장 출판사)에서
2009-05-01 15:46:11 | 관리자
16. 감히 실패할 수 있는 믿음을 기대하라.
하나님은, 성공하지 못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한 사람에게 성공을 허락하신다. 성공하면 우쭐하고 실패하면 낙심하는 사람은 아직도 육신적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열매를 맺는다 해도 그 열매 안에는 벌레가 들어 있을 것이다.
성공했다고 해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스럽고 귀중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배운 사람에게 하나님은 성공을 허락하실 것이다. 우리가 많은 청중을 끌어 모으고 결신자를 만들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성경을 보급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을 얻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도움 없이 단지 인간적인 노력으로 이런 일들을 해 낼 수도 있다.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도 자기의 인격을 도야하고 인간의 본성을 잘 파악하면 종교 지도자로서 크게 성공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다 보면 세상적으로는 실패할 수도 있다. 믿음은 감히 실패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누가 성공하고 누가 실패하느냐가 아니다. 진정한 성공과 진정한 실패는 부활 후 심판 때에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기다릴 수 있다. 믿음이 있는 자는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
아버지시여! 오늘도 제가 아버지께 충성하게 하소서.
제가 세상 사람들의 눈에 성공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도 좋습니다.
저는 심판 날까지 기다릴 것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토저의 ‘이것이 성공이다’(규장 출판사)에서
2009-05-01 15:45:30 | 관리자
15. 실패할 각오를 하지 않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
겉으로 보기에 우리 주님은 실패자로 죽으신 것처럼 보인다. 당시 기성 종교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불신했고 세상 사람들은 그분을 거부했으며 그분의 친구들은 그분을 버렸다. 이런 상태에서 돌아가신 것이 그분을 실패자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빌라도에게는 승리를, 그리스도에게는 패배를 의미하는 듯했다. 이런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의 부활뿐이었다. 결국 그분은 영광스러운 승리자로, 빌라도는 비극적인 패배자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역사의 교훈이 자명하건만 현대 교회는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아직도 사람들이 보는 것만을 보고 그들이 판단하는 대로 판단한다. 사람들이 교회 일을 아주 열심히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경우가 너무나 많다. 사람들이 오랜 시간 기도하지만 인간에게 영광을 돌리는 데 초점을 맞춘 사업 위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간구한다. 사람들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간절히 도움을 청하지만 그렇게 해서 모인 돈이 인간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낭비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모든 것에서 돌아서야 한다. 특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한다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떤 동기에서 일하는지를 깊이 살펴야 한다. 실패할 각오를 하지 않은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 성공의 영광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만이 성공을 거둘 자격이 있다.
주여! 간절히 구하오니 우리를 교만에서 구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토저의 ‘이것이 성공이다’(규장 출판사)에서
2009-05-01 15:44:50 | 관리자
14. 실패의 학교에서 배우라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무한한 능력이 주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별로 고상하게 행동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의 이런 부끄러운 과거를 ‘실패의 학교’를 통해 바꾸어주실 수 있다. 성령님이 주시는 지혜를 통해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실패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죄에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가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앞으로는 더욱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과거의 어리석음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회개는 철저해야 한다. 페넬롱이 말했듯이 최고의 회개는 과거의 잘못을 다시 범하지 않는 것이다.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 1611~1691. 파리의 갈멜회에 평수사로 가입하여 식당 일을 하였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 이라는 평을 받았다)는 “나는 실수하여 넘어지면 즉시 하나님께 돌아가 ‘오, 주여! 저를 그냥 내버려두시면 이렇게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도덕적 지혜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기도한 후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그분께 감사하고 자신의 죄에 대해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 주여!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실패의 학교’에서 학위를 받고 졸업했습니다.
우리의 실패로부터 배우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전진하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승리를 허락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토저의 ‘이것이 성공이다’(규장 출판사)에서
2009-05-01 15:44:07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