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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예루살렘(New Jerusalem): 이것은 하나님께서 건축하고 만드신 도시 곧 기초들이 있는 도시로서(히11:10) 지극히 높으신 이의 장막들이 있는 거룩한 처소이며(시46:4) 신구약 성도들이 가기를 바란 천국이다. 만물의 회복 선도 참조(94). 새 예루살렘은 네모반듯하게 놓여 있으며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만 이천 스타디온으로 같다(계21:16). 지금의 척도를 따르면 이 도시는 대략적으로 길이, 높이, 너비가 각각 약 2,240킬로미터 정도 된다. 여기에는 (1) 아버지 하나님(계4:2-3; 단7:9), (2) 아들 하나님(계5:6), (3) 성령님(계1:4; 4:5; 22:17), (4) 거룩하고 선택받은 천사들(히12:22; 계5:11), (5) 스물네 명의 장로들(계4:4), (6) 교회(히12:22-23; 계19:1, 7-8; 21:1, 9-11), (7) 구원받은 이스라엘(히11:16) 등이 거한다. 이 도시의 성벽은 열두 개의 기초석 위에 놓여 있고 거기에는 신약시대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다(계21:14).새 예루살렘 성벽의 높이는 약 65미터이며 벽옥으로 되어 있다(계21:17-18). 물론 이 성벽은 방어를 위한 것이 아니고 아름다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약 2,240킬로미터 높이의 도시에 약 65미터 높이의 성벽을 쌓는 것은 마치 63빌딩에 2센티미터 높이의 담을 친 것이나 같다.
2009-05-02 15:46:36 | 관리자
진화론 교육 금지 美 캔사스주, 교과과정 삭제 결정  / 과학계 "시대착오적 발상" 반발 美 캔사스주에서는 교육위원회가 진화론을 교과과정에서 삭제키로 결정, 종교계와 과학계간 뜨거운 논쟁이 한창이다. 캔사스주 10인 교육위원회는 11일 생물학은 물론 다른 과학분야에서도 기본원리로 인정되고 있는 진화론을 교과과정에서 제외시키자는 새로운 지침을 6대4로 채택했다고 뉴욕타임스 등 미 언론들이 12일 일제히 보도했다. 캔자스주에서는 앞으로 새로운 종(種)의 출현에 대해 영장류가 인류로 진화했다는 식으로 설명했던 영국 과학자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학교에서는 가르칠 수 없다는 결정이다. 종교계는 즉각 환영하고 나섰다. 진화론은 생명의 기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이므로 창조과학(창조론)으로 대체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들이나 실험실에서 물고기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은 뻔한 이치 아닌가. 학교에서 입증되지 않은 진화론을 가르쳐선 안 된다." 한 종교지도자의 말이다. 그러나, 캔자스주내 6개 공립대학 총장을 비롯한 교육계와 과학계는 "위원회의 결정은 캔자스주의 과학수준을 1백년 전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일부 교사들은 "캔자스주에서는 더 이상 진실을 가르칠 수 없게 됐다"며 "다른 분야로 전업하거나 다른 주로 이동하겠다"고 반발하고 있다. 미국 내에는 현재 캔자스주 이외에도 애리조나·앨라배마 등 6개 주가 진화론 폐기여부로 논란을 벌이고 있어 이번 결정은 이들 주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1999년 8월 13일 중앙일보)    
2009-05-02 15:45:33 | 관리자
전자: 전자는 원자의 핵 주변을 도는 아주 가벼운 입자로서 음 전하를 띄고 있고 핵 주변의 궤도에 배열되어 있다. 핵으로부터 전자까지의 거리는 핵 지름의 10,000배 정도 된다.   양성자: 양성자는 핵에서 발견되는 두 종류의 입자 중 하나이며 전자보다 2,000배 정도 무겁고 양 전하를 띄고 있다.   중성자: 중성자는 핵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입자로서 양성자보다 조금 더 무거우며 전하를 갖지 않아 중성이다. 중성자는 대체로 같은 수의 양성자와 함께 원자핵을 구성하며 중성자와 양성자는 핵력(核力)에 의해서 굳게 결합되어 있다. 원자핵 내의 양성자수는 원자의 원자번호와 같다.   원자는 화학 원소로서의 특성을 잃지 않는 범위에서 도달할 수 있는 물질의 기본적인 최소입자를 말하는데 각각의 원자는 전기적으로 완전하게 균형을 유지한다. 양 전하를 띈 양성자의 숫자와 음 전하를 띈 전자의 숫자가 같기 때문이다. 원자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은 핵에서 발견되는 핵력이라는 응집력이다. 원자의 핵에서 우리는 자연의 법칙을 위배하는 놀라운 현상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야 말로 창조의 기적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기초 물리에서 배우듯이 같은 전하를 띈 입자들이 서로 가까이 있으면 서로가 서로를 밀어낸다. 그런데 원자의 핵에서 창조주께서는 전혀 다른 법으로 이 같은 현상을 억제하고 계신다. 다시 말해 같은 전하를 가진 양성자들이 핵에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알 수 없는 신비의 엄청난 응집력에 의해 굳게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원자에 대한 가장 신비한 사실 중 하나로서 ‘우주의 근본적인 신비’라 불린다. 만일 이런 현상이 없다면 온 세상 만물은 다 해체될 수밖에 없다.   “온 우주를 지탱하는 시멘트 같은 힘은 중력이다. 원자를 함께 모으는 것은 전자기적인 견인력이다. 그러나 원자의 핵을 다 같이 모으는 힘은 현존하는 물질 세상의 경험과 지식을 모두 무시하는 신비의 힘이다. 이 힘은 지금까지 사람이 이해한 다른 모든 힘과 다르므로 제대로 그것을 묘사할 방법이 없다”(Robert E. Marshak, "PIONS", American Scientific Magazine).   창조주의 큰 손에 의해 마치 큰 스프링처럼 둘둘 말려 압축되어 있는 이 엄청난 에너지는 보통 핵 에너지라 불리며 이 에너지는 위력이 대단해서 원자 폭탄 하나가 수천 톤의 TNT에 해당하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전자 현미경으로 겨우 관찰할 수 있는 이 작은 원자에 이 같은 신비가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과연 모든 것이 우연히 생겼다는 진화론의 우화를 믿을 수 있을까? 누구라도 원자의 핵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 안에 엄청난 지적 설계가 들어 있고 창조주의 놀라운 힘이 들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처음에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무에서 유로 창조하신 분이시다(창1:1).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자신의 권능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떠받들고 있기에(히1:3) 원소들이 붕괴되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처음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듯이 주님의 날이 임하면 원소들이 뜨거운 열에 녹으며 그 안에 있는 일들도 불타서 만물이 해체될 것이다(벧후3:10-11). 우리 주님은 자신의 재림 약속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디지 아니하시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벧후3:9). 창조주의 참으심의 끝이 이르기 전에 오늘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이다.
2009-05-02 15:44:13 | 관리자
He's got the whole world in His hands,He's got the whole world in His hands,He's got the whole world in His hands,He's got the whole world in His hands. He's got my brothers and my sisters in His hands,He's got my brothers and my sisters in His hands,He's got my brothers and my sisters in His hands,He's got the whole world in His hands. He's got the sun and the rain in His hands,He's got the moon and the stars in His hands,He's got the wind and the clouds in His hands,He's got the whole world in His hands. He's got the rivers and the mountains in His hands,He's got the oceans and the seas in His hands,He's got you and he's got me in His hands,He's got the whole world in His hands. He's got everybody here in His hands,He's got everybody there in His hands,He's got everybody everywhere in His hands,He's got the whole world in His hands.
2009-05-02 15:37:29 | 관리자
Chorus:Kumbaya Lord. Kumbaya. Kumbaya, oh-oh-oh-oh-oh.Kumbaya Lord. Kumbaya. Kumbaya.Somebody needs you Lord Kumbaya. Kumbaya, oh-oh-oh-oh-oh.Somebody needs you Lord Kumbaya. Kumbaya.Somebody's praying Lord Kumbaya. Kumbaya, oh-oh-oh-oh-oh.Somebody's praying Lord Kumbaya. Kumbaya.Oh-oh-oh-oh. Oh, Lord. Oh, Lord. Oh, Lord Kumbaya.Oh, Lord. Lord Kumbaya. I need a blessing Lord. Kumbaya. Kumbaya, oh-oh-oh-oh-oh.I need a blessing Lord. Kumbaya. Kumbaya.I need a miracle Kumbaya. Kumbaya, oh-oh-oh-oh-oh.I need a miracle Kumbaya. Kumbaya.Oh-oh-oh-oh. Oh, Lord. Oh, Lord.Oh, Lord Kumbaya.Oh, Lord. Lord Kumbaya.Bridge:Shower down on me. Shower down on me.I need You to shower down on me.Lord I'm down here praying.Lord I need a blessing.
2009-05-02 15:33:39 | 관리자
This is the dayThis is the dayThat the Lord has madeThat the Lord has madeWe will rejoiceWe will rejoiceAnd be glad in itAnd be glad in itThis is the day that the Lord has made We will rejoice and be glad in itThis is the dayThis is the dayThat the Lord has made.
2009-05-02 15:30:01 | 관리자
We thank Thee   We thank Thee each morning for a newborn day where we may work the fields of new mown hay We thank Thee for the sunshine and the air that we breathe Oh Lord we thank Thee We thank Thee for the rivers that run all day we thank Thee for the little birds that sing away we thank Thee for the trees and the deep blue sea Oh Lord we thank Thee Oh yes we thank Thee Lord for every flower that blooms birds that sing, fish that swim and the light of the moon. We thank Thee every day as we kneel and pray that we were born with eyes to see these things. We thank Thee for the fields where the clovers grow we thank Thee for the pastures where the cattle may roam We thank Thee for Thy love so pure and free Oh Lord we thank Thee. Oh yes we thank Thee Lord for every flower that blooms birds that sing, fish that swim and the light of the moon. We thank Thee every day as we kneel and pray that we were born with eyes to see these things. We thank Thee for the fields where the clovers grow we thank Thee for the pastures where the cattle may roam We thank Thee for Thy love so pure and so free Oh Lord we thank Thee.  
2009-05-02 15:20:23 | 관리자
교리의 중요성과 성경적 의미의 사랑 A: "그래 당신은 환난전 휴거와 후천년 종말론과 네안다르타르 인종을 주장하는 진화론을 믿으며 우리와 교제하지 않는 사람들이 휴거를 받았다가 다시 떨어진다고 말하는 겁니까? 정말이에요? 도대체 당신과 같이 엉터리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하고는 사귈 수가 없습니다." B: "도대체 누구에게 화를 냅니까? 그래 당신은 흐릿한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고 환란후 휴거와 환란후 짐승의 출현을 믿으며 환란전 휴거를 단지 상징으로만 받아들이지요. 그래요. 당신은 자유주의자군요. 아니 새 예루살렘 성이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생긴다고요. 이단 교리가 아닙니까? 제발 내게 다가오지 마십시오. "서로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십시오" (위의 글은 미국의 CCC가 1972년 5월에 발행한 "Worldwide Impact"지에 서로 삿대질하는 삽화와 함께 실린 것으로 허가를 받고 인용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종종 믿음 안에서 상대방을 경건히 세워주기 보다 다툼만을 일으키는 어리석은 논쟁에 휩싸이는 잘못을 범하곤 합니다(딤전 1:4; 6:3-4; 딤후 2:23; 딛 3:9; 빌 2:14). 사실 우리는 항상 주님 안에 있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일으키고 세워주는 일을 해야 하고 또 사모해야 합니다(고전 14:26; 8:1 등). 반면에 위에 나와 있는 삽화의 글은 은연중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서로 사랑하기만 한다면 믿음의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이 삽화가 실린 동일 발행물(Worldwide 1972년 5월자)은 다음과 같은 인용문구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를 갈라놓는 첨예한 관심사(즉 교리 문제)를 내려놓아야 합니다......우리의 참된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며 비록 신학이나 철학(혹은 교리)이 일치하지 않더라도 서로를 사랑해야 함을 상기합시다. 저는 이 사랑의 원리를 가지고 모든 그리스도인 친구들을 받아들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참된 관심사가 되도록 힘씁시다.(여기서 볼드체나 괄호는 제가 덧붙인 것입니다.) 아마 이같은 철학을 다시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말이 될 것입니다. "교리나 교회(혹은 교단) 이슈를 가지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분리되는 것은 지상의 그리스도의 몸을 갈라놓는 행위이므로 죄입니다. 정통의 진위는 교리가 아닌 사랑으로 판가름납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를 갈라놓는 교리나 규례들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차이점은 묻어두고 긍정적인 방향에서 복음의 핵심만을 부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같은 철학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명해 보겠습니다(살전 5:21). 교리의 중요성과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개념 1. 마태 28:19-20에 나오는 지상명령에서 주님은 가르침(교리)에 어느 정도 비중을 두셨습니까? 제자들의 가르치는 내용은 정확히 무엇과 일치해야 합니까? 그때의 가르침이 "본질적"인 것에 국한되었을까요? 2. 초대교회가 연합하여 강건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행 2:42)? 그들은 교리를 중요시했습니까? 유념하십시오. 진리 없는 연합이란 있을 수 없으며 있어서도 안됩니다. 3. 사도바울은 자신의 사역에서 모든 교리를 전파하였습니까(행 20:26-31), 아니면 "실족케 하는" 교리는 생략했습니까? 4. 다음의 진술에서 어떤 점이 잘못되었는지 보십시오: "우리를 분열케 하는 비본절적인 문제는 접어두어야 합니다." 성경에 어디 비본질적인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사소한 교리라는 것이 존재합니까? 하나님의 말씀 중 어떤 부분은 복음 선포시 제외시켜야 합니까(행20:27)?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맞추어야 합니다. 과연 우리에게 모든 성경 말씀의 경중을 판단할 자격이 있습니까? 딤후3:16-17을 보십시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믿는 이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유익한지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5. 다시 처음에 나오는 삽화의 글로 돌아가 봅시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사이에는 교회의 휴거와 진노의 날(대환란 기간)에 대한 혼란이 있었습니다(살전4:13; 5:1-2; 살후 2:1-5). 이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면 왜 주님께서 바울에게 이 서신들을 기록하게 했을까요? 왜 "비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바울은 시간과 지면을 할애해 가며 이러한 교리를 가르쳤을까요(살후 2:3-5, 특히 5절)? 과연 바울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실제로 그들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 무지하길 바울이 원했습니까(살전 4:13)? 6. 과연 우리 주님은 부활에 대해 전혀 다른 교리를 가지고 있는 사두개인들을 그냥 내버려두셨습니까(마 22:23-33, 특히 29절)? 군중들을 놀라게 한 건 무엇이었습니까(마 22:33; 비교. 마 7:28,29)? 7. 참된 제자 됨의 표시가 무엇입니까(요 8:31-32)? 믿는 이들이 진리를 따라 서로 조화를 이룰 때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됩니까(요 13:35; 17:23)? 8.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습니까(요 14:21-24; 15:9-10; 요일 2:3-6; 5:2-3 등)? 어떤 목사가 자기 주님에 대한 자신의 진실한 사랑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습니까(요21:15-17; 벧전 5:2; 행 20:28)? 9. 과연 하나님은 순결한 교리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까(딛 2:7; 딤전 1:3)?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에서 이탈할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딤전 6:3-5; 딤후 2:16-18)? "거슬려 말하는 자들을 어떻게 깨우치라고" 나와있습니까(딛1:9)? 어떤 사람들은 엄히 꾸짖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딛 1:13)?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말해야 합니까(딛2:1)?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안의 거짓 교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계 2:14-16)? 10. 그리스도께서 지역 교회에 은사를 가진 사람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엡4;11-12)? 엡4:11-16에 따르면, 어떻게 참된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이루고 누릴 수 있습니까(비교. 4:1-6)? 교리를 무시할 때 발생하는 위험이 무엇입니까(엡 4:14)? 진리와 사랑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엡 4:15)? 요17:22에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 '믿는 이들의 연합'이 어떤 것인지 잘 살펴보십시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사이에 교리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까? 11. 우리가 참으로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에게 거짓 교리나 거짓 교사에 대해 경고할 것입니다(행 20:29-31; 빌 3:2; 골 1:28; 그리스도의 본보기를 참조하기 바람 - 마 7:15-20; 16:6-12; 24:4-5; 눅 12:1,15). 정말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적절한 권징을 시행하지 않겠습니까(히 12:6; 계 3:19; 살후 3:5-6; 14-15)? 12. 우리 주님이 보여주신 본에 따르자면 진정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그에게 필요한 것을 말해주어야 합니다(비록 그것이 상대방에게 상처나 실족거리가 될 수 있지만)(막 10:21)? 사랑과 증오가 동시에 공존할 수 있습니까(히 1:9)? 갈1:8-9에서 바울은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사랑은 무엇을 기뻐합니까(고전13:6)? 우리의 사랑이 넘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빌1:9-10)? 13. 진정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을 꾸짖고 경책하는 것이 불가능하겠습니까? 사람들이 거짓 교사들에게로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딤후4:3). 진리를 거절한 후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딤후 4:4)? 14. 사랑의 사도 요한은 진리와 교리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습니까(요이1-9)? 요한은 가이오를 얼마나 사랑했습니까(요삼1)? 요한의 가장 큰 기쁨이 무엇이었습니까(요삼3-4)? 우리는 무엇을 위해 힘써 싸워야 합니까(유3)? 우리는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요일 3:18)? 15. 계22:18-19를 읽어보고 신4:2; 12:32, 그리고 잠 30:6 등과 비교해 보십시오. 과연 교리는 중요한 것인가요? 이 글을 위해 필요한 소재를 제공해 주신 은혜 신학교 위콤(John C. Whitcomb) 박사님께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그분의 "종교 철학"(Philosophy of Religion) 요강 pp. 8-14를 보십시오. 결론 교리는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성경적인 사랑은 결코 성경적인 교리의 중요성을 축소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의 모든 하나님의 진리를 일점 일획도 무시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우리의 바램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진리 없이 참된 연합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 신자들이 진리에 따라 서로 조화를 이루며 자기 직분을 다할 때에야 비로소 참된 연합이 구현될 수 있습니다(엡 4:11-16).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초석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같은 이해와 순종"인 것입니다. 실제 그리스도인의 하나됨을 가로막는 요인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믿고 순종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교리에 관심을 둔다면 진리가 승리할 것입니다! 이쯤 되면 당신은 앞에 나왔던 삽화의 내용을 성경적으로 검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한 것을 굳게 붙들라"(살전 5:21).
2009-05-02 09:55:57 | 관리자
신복음주의(Neo-evangelism) 지도자들은 "우리들의 주요 목표는 교리적 차이를 제거하고, 스스로 믿는 자임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서 연합(unity)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복음주의 철학의 기본 개념 중 하나는 사랑이 진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에큐메니칼 복음주의자들은 "사랑은 하나를 만드는 반면에 교리는 나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과연 신약성경에서 사랑이 진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 사실인가? 고린도전서 13장 즉 "사랑" 장(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즉 이제 믿음, 소망, 사랑 이 셋은 항상 있으나 이것들 중의 가장 큰 것은 사랑이라." 어떤 이는 "이 구절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사랑은 최고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장(章)을 보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진리(truth)도 언급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6절에서 성경은 말씀하기를 "진리를 기뻐하며"라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믿음, 소망, 사랑은 미덕(virtues)이지만, 진리는 전혀 다른 위치를 갖는 것이다. 진리는 기준 틀(frame of reference)이며 기초(foundation)이다. 진리는 우리가 숨쉬는 공기와 같은 것으로 사랑과 같은 미덕은 이 것 없이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사랑은 진리 안에서 기뻐한다. 왜 그런가? 이는 진리 없이 사랑을 정의하고, 사랑을 해석하고, 사랑을 보호하고, 사랑을 인도하고, 사랑을 흘려 보낼 때, 그 사랑은 결국 파국을 가져오는 재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리를 미덕과 같은 수준에 놓으려는 것이 아니다. 미덕은, 그것이 진리를 위한 것이 아닐 경우, 시들어 죽게 될 것이다. 이 지구라는 행성 위에서 물이 없는 생명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적절한 수로(channel)와 수관(canal)과 수도관 안에 있는 한, 물은 생명체에게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물을 제어할 수 없을 때, 물은 이 행성에서 불 다음으로 대참사를 유발시킨다. 한편으로 물은 절대적인 축복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파국적 재앙이 될 수 있다. 사랑도 그와 같은 것이다.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Definition) 신성한 제한(Divine Definition)(곧, 그 안에서만 물이 흐르도록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수로)이 없는 사랑은 이 땅에서 가장 끔직한 것이 된다. 그것은 수백 만의 사람을 파괴할 수 있고 사탄의 감상주의로 떨어뜨릴 수 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정의하신 바에 의하면, 어떠한 희생이 따를지라도 영원의 빛 안에서 어떤 사람을 위하여 최고의 것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의하신 사랑이다. 아무튼 사랑이 세계 복음주의에 나타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정의를 잊어버리고 감상주의에 빠졌다. 사랑과 진리 사이의 차이를 조명하는 몇 가지 핵심적인 성경 말씀을 생각해 보자. (역자 주(註) : "definition(정의)"에는 '한정(限定)'의 뜻도 있습니다. 곧 참과 거짓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구별하는 것입니다.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섞여있는 세상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온 참된 것을 구별함으로써 진리와 순결을 지킬 수 있으며, 이것이 영적 순결을 지켜야 할 우리의 태도입니다. 어떤 특정한 것을 가리키는 정관사(the)를 영어로 definite article 이라고 합니다. 세상 가운데서 구별된 하나님께 속한 것은 특정한 것입니다. 성경이 "The Book"으로 시작하는 것은 세상의 허다한 책 중에서 성경만이 유일한 그 책(the Book)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은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들이니, 너희가 진리를 알 것이요, 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 궁극적인 자유는 오직 전적인 복종 - 진리에 대한 무조건 항복 - 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진리에 복종한다(Love obeys the truth)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사랑에 대해 열렬하게 말한다. 요한복음 14:15, 21, 23, 24 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에 대한 복종이 사랑의 최고 형태임을 강조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명령들을 지키라."(15) "나의 명령들을 가지고 지키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21)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우리의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23)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24) 어떤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느냐? - 이것이 소위 사랑에 관한 산성 시험(acid test)인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복종하지 않는다면, 사랑에 관해 아무리 많이 이야기할지라도 효과가 없다. 실로 계수(計數)되는 것은 복종이지 말이 아니다. 사랑 없는 복종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복종 없는 사랑은 불가능하다. 복종 없는 사랑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비되는 사탄의 대용품이다. 사랑은 진리를 가르친다. 요한복음 21장에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여러 번 말했던 한 사람의 예가 나온다. 그러나 정작 복종해야 할 때에 이르자, 그는 복종하지 않았다. 어려움이 닥치자, 그의 결의는 무너졌고, 주님을 부인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주님께서는 다정스럽게, 그러나 진리 안에서 베드로와 대면하셨다. "그들이 식사를 한 후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말씀드리되, 예, 주님, 제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되,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말씀하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말씀드리되, 예, 주님, 제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되, 내 양들을 먹이라, 하시고,"(15, 16) 어떻게 이 만남에서 주신 가르침을 따라 주 예수님께 사랑을 표현할 것인가? 우리는 그분의 양을 먹임으로,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은 무엇이든 다 가르쳐 준수하게 하라 "는 위대한 사명을 명령하신 하나님의 모든 계획안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킴으로 그분께 대한 사랑을 나타내어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 20 장에는 그 위임에 복종했던 사람에 관한 좋은 예가 있다. 그는 에베소인들에게 사랑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가 보여주어야 최고의 사랑을 에베소인들에게 나타냈다. 그가 어떻게 했는가?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라고 말했는가? 사도행전 20:26-27이 그 답을 준다.  "그러므로 내가 이 날 너희로 하여금 증거하게 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로부터 내가 깨끗하니라. 이는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너희에게 회피함이 없이 밝히 말하였음이라."  사랑은 아무 것도 버려 두지 않는다 위의 말씀대로 행한 결과, 아시아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 곧 유다인과 그리스인 모두가 주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복음주의의 기초를 건전한 교리적 가르침에 두었다. 이것이 세계 복음주의에 대한 하나님의 열쇠이다. 갈라디아서 1:6의 바울의 증거는, 갈라디아서 4 장에서와 같이,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는 무뚝뚝하지만, 없어서는 안될 필연의 것이었다. 에베소서 4 장은 우리에게 어떻게 완전한 균형을 이룰 수 있는가를 말해 준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섬김과 사역을 위하여 참된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에게 주셨던 은사들을 주목하라. "그분께서 얼마는 사도로, 얼마는 대언자로, 얼마는 복음 전도자로, 얼마는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 4:11) 인격의 형체로 주어진 이 은사들은 모두 교리적 인격(doctrinal person)을 보여준다. 이들은 모두 진리 안에 포함된다. 이들 은사는 전적으로 계시된 진리의 빛 안에서 복음의 선포와 가르치는 것과 훈련을 포함한다. 신약성경에는 사랑이 교리나 진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어떠한 가르침도 없다. 사랑에 관해 에베소서 4:15 에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라고 언급하고 있다. 사랑은 진리를 말하는 태도와 방법이다. 사랑은 진리의 종이다. 사랑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흡수하고, 소화하기 쉽게 한다. 그러나 결코 사랑이 진리를 가리거나 무시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진리는 결코 바뀔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인간이라는 전달자의 수중에 있을 때는 매우 연약하며 깨지기 쉽다.  사랑은 독(毒)을 물리친다 과학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모든 살아있는 조직은 독(毒)으로부터 스스로를 정결케 하는 복잡하고 정교한 내부 조직을 가지고 있어서, 끊임없이 이 해독하는 조직을 사용하며 생존한다고 한다. 이는 하나님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유독한 것으로부터 자신을 정결케 하는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떠한 조직도 생존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고도로 오염된 환경 가운데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탄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사탄은 그의 타락한 본성을 통하여 끊임없이 모든 하나님의 종들에게 접근한다.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제외한 채 어떻게 사역의 성공을 상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 성공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과연 누가 결정할 수 있겠는가? 사랑은 양떼를 보호한다. 주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을 격려하시며, 그 당시의 다른 종교지도자들의 소리를 공감하여 들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던가? 그분의 대답이 마태복음 7:15에 있다. "거짓 대언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먹이를 찾는 이리들이라." 오늘날 신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 대학교나 또는 자유주의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분열(division)보다 나쁜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타협에 의한 평화'이다. 진리는 세상의 거짓 연합(unity)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사랑은 오류를 교정한다 어째서 그런가?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때로는 가족들조차 적개심을 가지고 나뉘어지지만, 적어도 그 중 한 사람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지키기 때문이다. 로마서 16:17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리에 역행하여 분열을 일으키며 실족케 하는 자들을 지목하고 그들을 피하라." 만약 우리가 주 예수님을 공경하고 사랑한다면, 그분의 진리를 파괴할지 모르는 것들을 주시해야 한다. 또한 그렇게 하는 자들을 피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에서 배운 교리에 반대되는 것들을 구분하고 분별할 수 있었고, 그것들을 피했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 종교 전체를 추방해버렸다. 선한 생명의 길이나 선한 교리는 항상 나쁜 환경이나 나쁜 교제에 의해 오염된다. 선한 자가 단순히 악한 자와 교제하는 것으로는 결코 나쁜 것을 더 좋게 만들지 못한다. 좋은 것은 나빠지지만, 나쁜 것은 개선되지 않는다. 통에 있는 썩은 사과가 좋은 예다. 나쁜 것은 결코 좋아지지 않으나, 좋은 것은 점점 썩어 간다(고전 15:33). 세속적인 교회 연합을 위하여 교리적 순결을 물 속에 잠그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이는 분명히 성경을 통한 성령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2009-05-02 09:54:48 | 관리자
그리스도인의 삶은 한 마디로 요약된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이다"(갈2:20) 당신은 이러한 사실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까? 믿음으로 사는 삶(갈2:20) 1. 믿음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열어주는 열쇠가 됩니다(요일 5:4-5). 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요1:12). 또한 그렇게 주님과 함께 걸으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골2:5-6; 고후5:7). 이런 삶은 육신적인 노력이나 투쟁이 아닌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안에 이루신 일입니다(히4:10; 빌2:13; 히13:21). 2.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일어나셨음을 믿고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고전15:1-4). 나는 그분께서 완성하신 일을 의지하였습니다(요19:30; 롬4:5). 나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롬6:6; 6:3; 골2:20; 갈2:20) 그리스도가 나의 생명이 되심(골3:1-4; 갈2:20; 빌1:21; 롬6:11; 고전15:22 등)을 믿음으로 죄의 권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구원받은 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일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 안에서 안식을 누립니다(히4:9-11). 의롭게 되려면(칭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음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처럼 거룩함 가운데 살려면(성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3.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와 있는 사실에 근거해야 합니다. 먼저 믿는 이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일어났다는 사실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롬6:3 -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롬6:6 - "우리가 알거니와"). 둘째로 믿는 이는 이 일이 실제 자기에게 일어났다고 여겨야 합니다(롬6:11 - "여기다"라는 단어는 믿음을 나타냅니다. 즉,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하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에 나와있는 사실에 기초하며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경우에는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4.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신분(지위)과 실제 내 상태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나의 신분은 완전하고, 영원한데(골2:10: 고후5:17; 롬8:1) 이는 내가 완전하신 구주 안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고전1:30).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나의 모습입니다(엡1:6; 고후5:21). 내 상태라고 함은 매일의 삶에서 드러나는 나의 모습입니다. 나는 롬6:6을 통해 내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실로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신분을 보여 준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실제 삶에서 내 옛사람이 건재해 있는 경우를 많이 경험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목표는 바로 이 신분과 상태를 동일선상에 놓는 것입니다. 이 일은 성령님께서 하십니다(고후3:18). 그러나 내가 맡은 부분도 있습니다. 자신을 롬6:6이나 6:11; 갈2:20과 같은 말씀에 있는 존재로 여기면 여길수록 그 말씀의 실현을 실제 삶에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신분과 실제 상태와의 괴리는 이와 같이 믿음으로 극복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실패할 때 느낌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완전한 신분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를 보시는 것처럼 자신들을 보아야 합니다.   "내가 아니다"  왜 더 이상 내가 아닌가? "오직 그리스도이다"  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시는가? "내 속에(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롬7:18-2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나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 같다."(사64:6)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게서 나사 지혜와 의가 되셨도다."(고전1:30) "죄가 내 안에 거한다."(롬7:20)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갈2:20) "내 자신을 위한 삶."(고후5:15) "나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한 삶."(고후5:15) "육신의 행위는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음란과 우상 숭배와 마법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분노와 다툼과 폭동과 파당과 시기와 살인과 술취함과 흥청댐......""(갈5:19-21)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이다."(갈5:22-23).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8:8). "나는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나니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거주한다."(롬8:9). "나는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렸다."(골3:9) "나는 새 사람을 입었으니 곧 그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이 새로워진 사람이다."(골3:10) "내 옛 사람은 속임으로 가득한 정욕들에 따라 부패했다."(엡4:22) "내 새 사람은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피조되었다."(엡4:24). "내 옛 사람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롬6:6) "내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골3:3)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골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났다."(골3:1) "나는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았다."(갈2:20) "나는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어졌다."(롬6:5)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갈2:20) "지금 내가 사는 삶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갈2:20) "옛 것들은 지나갔다."(고후5:17).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물이다."(고후5:17) "나는 죄에 대해 죽었다."(롬6:11) "나는 하나님께 대해 살아있다."(롬6:11) "나는 첫 아담 안에서 죽었다."(고전15:22)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다."(고전15:22). "나는 한 때 죄의 종이었다."(롬6:17;20).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다."(롬6:18-22). 5.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 나는 먼저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를 보아야 했습니다. 즉 길 잃고 소망이 없으며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한 죄인으로서 말입니다(롬3:10-23 등).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일에 기초하여 구원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또 죄의 지배와 권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나는 하나님의 관점에 내 자신을 보아야 했습니다. 이번엔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새로운 신분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묻히고 일어나고 하늘의 처소들에 앉은 자로서 말입니다(엡2:5-6; 골3:1-4). 나의 초점은 자아나, 내 자신의 노력, 형편없는 모습이 아니라 그리스도, 곧 그분의 영광, 그분께서 완성하신 일, 그분의 완전한 대속, 그분 안에 있는 나의 새로운 생명에 맞추어져 있습니다(고후3:18; 5:17). 나는 그분 안에 있는 나의 신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따라 성령님께서 장차 나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 영광에서 영광에(그리스도와 같은 모습) 이르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고후3:18; 벧후3:18). 6. 성경을 보면 볼수록 나는 그리스도안에서 내가 소유한 부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엡1:3; 고후8:9). 그리고 믿음으로 이 부유함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미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영적인 억만장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사실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나는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이미 내가 도달한 것을 또한 추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이므로(엡5:8) 빛 가운데 걸어야 합니다(엡5:8). 성도이므로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엡4:1; 살전4:1-7). 7. 복음을 한 마디로 압축해 놓은 구절이 요3:16이라고 한다면 갈2:20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한 마디로 압축해 놓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내용을 몇 가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열쇠는 믿음이다; 2) 그리스도인의 삶은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일에 있다; 3) 동일시됨이 강조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고 내 안에 사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4)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것이지만, 실제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만 역사 한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이 사실이 아닌 것처럼 살고 있다; 5) 갈 2:20은 위의 표에 계속해서 설명되어 있다. 
2009-05-02 09:53:02 | 관리자
성경교리문답(Fundamental Catechism)   천주교인들은 "교리문답"(Catechism)을 비성경적인 의미로 사용하지만 근본적 성경 신자들은 이것을 사전적 의미로 즉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정리된 성경 교리"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다음에 나오는 성경 교리 목록은 크리스천들이 신뢰할 수 있는 성경적 교리문답 가운데 가장 필수적인 성경의 원리들을 모은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아이들에게 이 같은 성경의 교리들을 가르치고 외우게 하는 일이 중요할 줄로 생각합니다. 1. 누가 당신을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습니다(창1:27; 욥33:4). 2. 하나님께서는 사람 외에 또 어떤 것을 만드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만드셨습니다(창1:1-31; 신10:14; 느9:6; 요1:3). 3. 하나님께서는 왜 당신과 모든 만물을 만드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저와 모든 만물을 만드셨습니다(대상16:28; 롬11:36; 고전6:20; 10:31). 4.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아무도 하나님을 만들지 않았습니다(시90:2). 5. 하나님에게 시작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항상 계신 분입니다(시90:2; 93:2; 계4:8). 6. 하나님도 언젠가는 죽으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사시는 분입니다(시90:2). 7.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까?     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행함으로 그분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미6:8; 요15:8; 요일5:3). 8. 당신은 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저를 만드셨으며 항상 저를 돌보아 주시기 때문에 저는 마땅히 그분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시117:1-2; 146:5-10). 9. 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존재합니까?    아닙니다. 오직 한 하나님만 존재합니다(사45:6, 18, 21-22; 딤전2:5). 10. 이 한 하나님은 몇 분으로 존재하십니까?      한 하나님은 세 분으로 존재하며 이것을 가리켜 삼위일체라고 합니다(마3:16-17; 28:19; 고후13:14). 11. 한 하나님의 세 분은 누구입니까?     한 하나님의 세 분은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님입니다(마28:19). 12.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영으로서 사람처럼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으신 분입니다(요4:24). 13.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무한하고 영원하며 변함이 없는 분이십니다(시90:2; 139:7-10; 말3:6). 14.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모든 곳에 계시며 또한 천국에서 왕좌에 앉아 계십니다(대하2:6; 시139:7-12; 잠15:3). 15. 당신은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항상 저를 보고 계십니다(렘23:23-24; 요1:18). 16.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욥34:21; 겔11:1). 17.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뜻에 따라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마19:26). 18.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법을 어디서 배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법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신:30:11-16; 수1:8). 19. 누가 성경을 기록하였습니까?     성령님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은 거룩한 사람들이 성경을 기록하였습니다(벧후1:21). 20. 우리의 첫 번째 조상들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첫 번째 조상들은 아담과 이브입니다(창2:7, 18-22; 3:20). 2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첫 번째 조상들을 언제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부터 약 6,000년 전에 땅의 흙으로부터 아담을 만드셨고 아담의 몸으로부터 이브를 만드셨습니다(창2:7, 21-22). 22.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육체 외에 무엇을 주었습니까?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결코 죽을 수 없는 혼과 영을 주셨습니다(창2:7). 23. 당신은 육체뿐만 아니라 혼과 영도 가지고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저는 결코 죽을 수 없는 혼과 영도 가지고 있습니다(전:12:7; 막8:36; 살전5:23). 24. 당신이 혼과 영을 가지고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魂)이 되니라."라는 창세기 2장 7절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25.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어떠한 상태로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거룩하고 행복하게 만드셨습니다(창1:27-31). 26. 언약이란 무엇입니까?      언약은 둘 혹은 그 이상의 인격체 사이에 맺는 약속입니다(창9:11-17; 시105:8-11). 27. 하나님과 아담의 언약에서 아담이 에덴 동산에 머물기 위해 지켜야 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아담은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해야 했습니다(창2:15-17). 28. 그러면 아담은 하나님께 순종했습니까?     아닙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창3:6). 29. 아담의 죄는 아담 자신에게만 영향을 주었습니까?     아닙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를 갖지 못하게 되었고 죄성을 지닌 채 태어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었습니다(롬5:14; 6:23: 엡2:3). 30.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불순종을 보시고 어떻게 처벌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육체적 죽음과 하나님과의 분리라는 처벌을 내리셨습니다(창3:17-24; 롬5:12). 31. 죄는 무엇입니까?      죄는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것입니다(요일3:4). 32. 죄를 범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죄를 범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행하지 않는 것과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행하는 것"을 뜻합니다(대상10:13; 시25:6-7; 마15:3-6). 33. 사탄은 누구입니까?      사탄은 악한 영으로서 하나님과 모든 그리스도인의 대적자이며 믿지 않는 자들의 아버지입니다(마13:39; 눅22:3; 요8:44; 벧전5:8). 34. 사탄도 한때 선한 적이 있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사탄도 아주 오래 전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영적 존재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사14:12-15). 35. 사탄이 하나님의 선한 영적 존재였을 때 그의 이름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당시 사탄의 이름은 루시퍼였습니다(사14:12). 36. 그러면 오늘날에는 왜 루시퍼가 하나님의 선한 종이 아닙니까?     루시퍼는 하나님을 시기하고 하나님같이 위대해지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하늘에서 내쫓으셨습니다(사14:12-15; 계12:7-9). 37. 오늘날 루시퍼는 무엇이라 불립니까?     오늘날 루시퍼는 사탄 또는 마귀라고 불립니다(눅10:18; 요일3:8; 계12:9). 38. 하나님과 사탄 중에 누가 더 강합니까?     하나님이 훨씬 더 강합니다(요일3:8; 4:4). 39. 사탄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까?     아닙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들을 사람들이 항상 행하지 않기를 원합니다(대상21:1; 요8:44; 엡6:11-12, 16). 40. 우리의 첫 번째 조상들의 죄는 무엇입니까?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창2:17; 3:6). 41. 아담과 이브로 하여금 그런 죄를 짓도록 유혹한 자는 누구입니까?      사탄이 이브를 유혹하였고 이브가 아담에게 선악과를 주었습니다(창3:1-6). 42. 우리의 첫 번째 조상들이 죄를 지었을 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들은 더 이상 거룩하고 행복한 존재가 되지 못하고 죄가 있고 비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창3:8-24). 43. 아담의 죄는 모든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하게 되었고 죄성을 받게 되었으며 악을 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롬5:12). 44.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성을 무엇이라 합니까?     우리의 타락한 죄성은 원죄라 합니다(시51:5; 롬5:12). 45. 모든 죄의 대가는 무엇입니까?     모든 죄의 대가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입니다(창2:17; 시89:30-32; 갈3:10). 46. 누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친히 사람이 되셨으며 그리하여 한 인격체 안에 하나님과 사람의 두 본성을 가지셨던 분입니다(요14:6; 행4:12). 47. 사람이 천국에 가려 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가 회심하기를 요구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마음의 변화가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요3:3, 16; 5:24; 14:6; 행4:12). 48. 회심 즉 마음이 변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마음이 변한다는 것은 곧 다시 태어나는 것을 뜻합니다(겔36:26-27; 딛3:5-6). 49. 그러면 누가 죄인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성령님께서 죄인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딛3:5). 50. 당신의 마음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저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보여 주신 놀라운 은혜로 인해 성령님에 의하여 변화되었습니다(딛3:4-7). 51. 은혜란 무엇입니까?     은혜란 우리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친절입니다(신7:6-9; 롬3:22-24; 5:1-8, 19-21; 엡2:8-9). 52.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키고 우리의 죄로 인한 형벌을 받으시는 것이었습니다(고후5:21; 빌3:10; 히5:8-9; 9:11-14; 10:11-22). 53.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갈2:16; 엡2:8-9; 딛3:4-7). 54. 예수님께서 죄를 지으신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거룩하고 죄가 없으시며 순결한 분이십니다(사53:9; 고후5:21; 히4:15; 7:26; 벧전2:21-23). 55.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께서는 친히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본성을 가지고 순종하며 고난을 당하셨습니다(롬5:1-21; 빌2:7-8; 3:10; 히2:9; 5:8-9). 56. 속죄란 무엇입니까?     속죄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고 죽으셔서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를 이루신 것을 말합니다(롬5:8-11). 57.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의롭다 하시며 거룩히 구별하십니다(고전6:11; 갈2:16; 딛3:5-7; 히2:9-11). 58. 칭의 즉 의롭다고 칭하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칭의란 하나님께서 저를 용서하셔서 마치 죄를 전혀 짓지 않은 사람처럼 대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롬3:24-25; 8:1; 고후5:19,21). 59. 당신은 어떻게 칭의를 얻을 수 있습니까?     저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믿음으로 그분의 의로 인해 칭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행13:34; 롬3:25-28; 갈2:16). 60. 성화 즉 거룩히 구별되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성화란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과 행위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고전6:11, 19-20; 엡1:3-4; 4:22-24; 살전5:23; 딤후2:19-21; 히13:12,21). 61. 성화의 두 가지 요소는 무엇입니까?     성화의 두 가지 요소는 죄에 대하여 죽는 것과 의에 대하여 사는 것입니다(롬8:13; 갈2:20; 골3:5). 62.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하여 순종하시고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하여 순종하시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롬5:8). 63.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죽음을 당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눅23:33-38; 갈3:13; 빌2:8). 64. 누가 구원을 받습니까?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습니다(사55:7; 눅13:3; 24:47; 요3:16; 6:47). 65. 회개란 무엇을 뜻합니까?     회개란 죄가 하나님을 분노하게 하기 때문에 죄를 후회하고 미워하고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대하7:14; 고후7:9).   66.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원받기 위해 오직 예수님만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롬3:22-25; 갈2:16; 빌3:9; 히12:2). 67. 당신 자신의 힘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요3:5-6; 16:7-11; 고전2:9-12; 딛3:5). 68.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왕국이 이런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9. 예수님께서는 언제 이 땅에 오셔서 얼마 동안 사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지금부터 약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33년 반 동안 사셨습니다. 70.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 당시 사람들은 주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창15:6). 71.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자기들의 믿음을 나타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드림으로 자기들의 믿음을 나타냈습니다(히11:4). 72. 그런 희생 제물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까?     그런 희생 제물은 죄인들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요1:29, 36; 히9:11-14). 73. 예수님께서는 몇 가지 직분을 가지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직분을 가지셨습니다(행3:22; 히5:5-6; 계19:16). 74. 예수님의 직분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직분은 대언자와 제사장과 왕입니다(사9:6-7; 눅4:18; 행3:22; 히4:14-15; 5:5-6; 계19:16). 75.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대언자이십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십니다(눅4:18; 요15:15). 76.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제사장이십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롬3:26; 히7:25-27; 9:14, 28). 77.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왕이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통치하시고 보호하시며 궁극적으로 이 땅에 자신의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시27:1-5; 사33:22; 고전15:25). 78.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몇 가지 명령을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명령을 주셨습니다(출20:1-17). 79. 그 십계명은 때때로 무엇이라 불립니까?     그것은 모세의 기본 법규라 불립니다. 80. 십계명 가운데 처음의 네 가지 명령은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처음의 네 가지 명령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가르쳐 줍니다(출20:1-11; 마22:37-38). 81. 나머지 여섯 가지 명령은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나머지 여섯 가지 명령은 사람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가르쳐 줍니다(출20:12-17; 마22:39). 82. 십계명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십계명의 핵심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마22:37-40). 83. 누가 당신의 이웃입니까?     모든 사람이 저의 이웃입니다(눅10:25-37; 갈6:10). 84.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들을 기뻐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잠언 8장 1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내가 사랑하나니 일찍 나를 찾는 자들이 나를 만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85.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시편 7편 11절은 "하나님은 의로운 자를 심판하시며 하나님은 사악한 자를 향하여 날마다 분노하신다"고 말씀합니다. 86. 그러면 십계명의 첫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 명령은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취하지 말라."입니다(출20:3). 87. 첫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첫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출34:14; 신26:17; 마4:10) 88. 두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두 번째 명령은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이는 나 곧 주 네 하나님이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니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명령들을 지키는 수천의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푸느니라."입니다(출20:4-6). 89. 두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두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적절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경배할 것과 우상을 가까이 하지 말 것을 가르쳐 줍니다(출20:23; 신6:13-18; 12:30-32). 90. 세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세 번째 명령은 "너는 주 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지 말라. 이는 주가 자신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할 것임이라."입니다(출20:7). 91. 세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세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행하신 일을 경외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시29:2; 107:21-22; 138:2; 계15:3-4). 92. 네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네 번째 명령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네가 수고하고 네 모든 일을 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주 네 하나님의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거하는 나그네나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입니다(출20:8-11). 93. 네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네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일 주일 중 하루는 하나님의 특별한 날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레19:30; 신5:12). 94. 그리스도인들은 일 주일 중 어느 날에 하나님께 경배를 드립니까?     신약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시대의 안식일이라 하는 일곱째 날 즉 토요일이 아니라 주일이라 하는 첫째 날 즉 일요일에 하나님께 경배를 드립니다(요20:19-26; 행20:7; 고전16:1-2). 95. 왜 그 날을 주일이라 부르며 그 날 주님께 예배를 드립니까?     우리 주 예수님께서 주의 첫 날인 일요일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마28:1-6; 막16:1-6; 눅24:1-6; 요20:1-9). 96. 주일은 어떻게 보내야 합니까?     주일에는 마땅히 기도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으며 복음을 선포하고 또 이웃에게 선을 행함으로 보내야 합니다(레23:3; 시92:1-2; 사58:13; 눅13:10-13; 행15:21; 16:13; 17:2). 97. 다섯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다섯 번째 명령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주 네 하나님이 네게 주는 땅에서 네 날들이 길리라."입니다(출20:12). 98. 다섯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다섯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부모님을 사랑하고 그분들에게 순종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롬13:1; 엡6:1-3). 99. 여섯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여섯 번째 명령은 "너는 살인하지 말라."입니다(출20:13). 100. 여섯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여섯 번째 명령은 다른 사람을 죽이지 말 것과 해를 끼치지 말 것을 가르쳐 줍니다(창9:6; 마5:22; 갈5:15; 요일3:15). 101. 일곱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일곱 번째 명령은 "너는 간음하지 말라."입니다(출20:14). 102. 일곱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일곱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간음하지 말 것과 마음과 언어와 행위에 있어서 순결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고전7:2; 엡4:29; 5:3-4). 103. 여덟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여덟 번째 명령은 "너는 도둑질하지 말라."입니다(출20:15). 104. 여덟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여덟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도둑질하지 말 것과 다른 사람의 재산을 존중할 것과 정직하고 근면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105. 아홉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아홉 번째 명령은 "너는 네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입니다(출20:16). 106. 아홉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아홉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고 진실만을 말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잠14:5; 슥8:16; 벧전3:16). 107. 열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열 번째 명령은 "너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소유 중 아무것도 탐내지 말라."입니다(출20:17). 108. 열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열 번째 명령은 우리에게 탐내지 말 것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고전13:4; 갈5:26; 빌4:11; 히13:5). 109. 십계명은 우리에게 어떠한 소용이 있습니까?       십계명은 우리에게 우리의 의무를 가르쳐 주고 또 구원자가 필요함을 보여 줍니다(신29:29; 수1:7-8; 갈3:21-26; 약2:10). 110.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해 감사드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들을 간구하는 것입니다(시10:17; 요16:23; 빌4:6; 요일5:14). 111. 우리는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를 해야 합니까?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요16:23). 112.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지침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주셨는데 이것은 타종교에서 주문을 외우듯이 외우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그 안의 내용대로 합당하게 기도를 드리라고 모범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마6:9-13). 113. 주기도문을 암송해 보십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日用)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는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임이니이다. 아멘."(마6:9-13). 114. 주기도문에는 몇 가지 청원이 들어 있습니까?       주기도문에는 여섯 가지 청원이 들어 있습니다(마6:9-13). 115. 첫 번째 청원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 청원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마6:9). 116. 첫 번째 청원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와 모든 사람들에 의해 영화롭게 되기를 위해 기도합니다(시67:1-3; 145:1-13; 사64:1-2; 롬11:36; 살후3:1).   117. 두 번째 청원은 무엇입니까?       두 번째 청원은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시옵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마6:10). 118. 두 번째 청원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우리는 복음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믿고 순종할 것과 하나님의 왕국이 이 땅에 세워질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시67:1-3; 68:1; 롬10:1; 살후3:1; 계22:20). 119. 세 번째 청원은 무엇입니까?       세 번째 청원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옵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마6:10). 120. 세 번째 청원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우리는 천국에서 천사들이 하나님을 섬기듯이 이 땅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길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시103:20-22; 119:34-36; 행21:14). 121. 네 번째 청원은 무엇입니까?       네 번째 청원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마6:11). 122. 네 번째 청원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과 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잠10:22; 30:8; 딤전4:4-5). 123. 다섯 번째 청원은 무엇입니까?       다섯 번째 청원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마6:12). 124. 다섯 번째 청원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 죄를 용서하신 것에 감사를 드리며 우리에게 해를 가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시51:1; 마6:14-15; 18:21-22,35; 눅11:4; 롬3:24-25). 125. 여섯 번째 청원은 무엇입니까?       여섯 번째 청원은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마6:13). 126. 여섯 번째 청원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합니까?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고 시험 들었을 때에 죄를 짓지 않도록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시19:13; 51:10, 12; 마26:41; 고전10:13). 127. 규례란 무엇입니까?       규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는 수단입니다(롬6:3-10; 고전11:23-26). 128. 성경에는 몇 가지 규례가 있습니까?       성경에는 두 가지 규례가 있습니다(마28:19; 고전11:23-26). 129. 그 두 가지 규례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 규례는 침례와 주의 만찬입니다(마26:26-28; 28:19). 130. 누가 이 규례들을 정하였습니까?       주 예수님께서 그것들을 정하셨습니다(마26:26-28; 28:18-19). 131. 왜 주님께서는 이 두 가지 규례를 정하셨습니까?       주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이 세상과 구별되도록 하기 위해 또 그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기 위해 이 규례들을 정하셨습니다(행2:38-41; 롬6:4). 132. 침례에서는 어떤 표적이 어떤 방식으로 사용됩니까?       침례에서는 물이 표적으로 사용되며 우리는 완전히 물 속에 잠겼다가 일어나서 예수님의 죽음과 매장과 부활을 외적으로 드러내어 보입니다(마3:6,11,14-17). 133. 침례는 무엇을 뜻합니까?       침례는 우리가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과 그분을 따르겠다는 것을 외적으로 드러내어 보여 주는 표적입니다(롬6:3-11; 갈3:27). 134. 우리는 누구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습니까?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습니다(마28:19). 135. 주의 만찬은 무엇입니까?        주의 만찬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고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마26:26-28; 막14:22-25; 눅22:17-20; 고전11:23-26). 136. 주의 만찬에는 누가 참여합니까?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의지하며 그분을 위해 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고전11:28-29). 137. 주의 만찬에 사용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의 만찬에 사용되는 것은 누룩이 들지 않은 빵과 포도즙입니다(마26:26-28; 막14:22-25).   138. 주의 만찬에서 사용되는 빵과 포도즙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빵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며 포도즙은 우리를 위해 흘려 주신 예수님의 피를 상징합니다(마26:26-28; 막14:22-25; 눅22:17-20). 139.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무덤에 그대로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으신 뒤 사흘만에 무덤에서 몸을 입고 부활하셨습니다(마16:21; 28:1-6; 롬6:4; 고전15:3-4). 140.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예수님은 지금 천국에 계시며 우리를 위해 중재하고 계십니다(행1:9; 엡1:19-21; 히4:14-16; 7:25). 141.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데려다가 자신과 함께 있도록 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요14:1-3; 행1:11). 142. 예수님은 언제 다시 오십니까?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릅니다(마24:42, 50; 25:15). 143. 재림의 두 단계는 무엇입니까?       재림은 성도들의 휴거를 위한 공중 강림과 왕국을 세우시기 위한 지상 강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고전15:51-52; 계19:11-16). 144. 휴거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휴거 때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은 그리스도인들을 다 살리시고 또 살아 있는 자들을 변화시키며 그들에게 썩지 않는 육체를 주십니다(고전15:51-52; 살전4:15-17). 145.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지상에 강림하실 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에 강림하셔서 모든 악한 자들을 멸하시고 자신의 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살후1:7-10; 계19:11-16). 146.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혼은 곧바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갑니다(창3:19; 롬6:23). 147. 심판 날에 사악한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사악한 자들은 죽어서 곧바로 지옥에 가고 최종적으로 영원토록 불못에 던져집니다(시9:17; 계20:11-15). 148.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지옥은 무시무시하고 영원한 고통이 있는 곳입니다(마25:41, 46; 막9:43; 눅16:19-26; 계20:10, 13-15). 149. 그러면 의로운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의로운 자들은 죽어서 곧바로 천국에 가고 최종적으로 영원토록 새 예루살렘에 거합니다(마5:11-12; 25:46; 요10:28; 14:1-3; 골3:4).150.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천국은 영광스럽고 행복한 곳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거하는 곳입니다(요14:1-3; 살전4:17; 계7:15-17; 21:3-4, 22-27; 22:1-5).
2009-05-02 09:48:43 | 관리자
크리스마스에 대한 바른 이해 *  이 글은 레이시 박사의 "아이들의 천국"(도서출판 말씀과 만남)의 부록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신들이 아닌 것들을 섬겼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께서 너희를 아시거늘 어찌하여 약하고 천한 초등원리로 돌아가 다시 거기에 속박되기를 바라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때와 해를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8-11). "그러므로 누구든지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나 성일이나 월삭이나 안식일들을 인하여 너희를 판단치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이나, 실체는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 크리스마스는 비단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세간의 모든 사람들이 가장 성대하고 화려하게 치르는 축제입니다. 이 날을 통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기억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의 기원과 유래, 그리고 이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조명해 본다면,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이 글을 쓰는 필자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하지만 성경대로 믿는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진리의 말씀에 기초하여 이 글을 씁니다. 결코 어떤 개인이나 특정 교회나 단체를 정죄하거나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크리스마스에 대한 성경적이고 올바른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에서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부디 이 점을 이해하시고, 끝까지 주의 깊게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크리스마스'라는 용어의 뜻 '크리스마스'는 성탄절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만, 이 단어의 정확한 어원과 뜻을 살펴본다면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결코 유쾌하지 않은 용어가 될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어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크리스마스 = 그리스도 + 미사 Christmas = Christ + Mass   쉽게 말해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뜻입니다. '미사'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제사'를 일컫는 말입니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미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단지 요한복음 4장 24, 25절에 있는 말씀대로,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경배를 드릴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크리스마스'라는 용어를 쓰지 말아야 합니다. 부득이 불러야 한다면 차라리 '성탄절'(聖誕節)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어원을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것이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비롯되었음을 금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크리스마스의 기원과 유래, 그리고 그것의 비성경적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그냥 교회의 가장 중요한 행사로 지키고 있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날'(day)의 문제에 있어서, 어떤 한 날을 다른 날보다 중히 여겨 매번 정기적으로 지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모든 날을 같게 여기므로 특별한 날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한 음식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도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을 만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채소만 먹는 연약한 사람도 있습니다(롬14:1-5). 따라서 어떤 특정한 날을 지정하여 지키는 문제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고 안 먹고 하는 문제는 각자 자기 마음에 확정한 대로 행하는 믿음과 확신의 문제입니다(롬14:5).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명확한 성경적 원칙과 기준을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원칙과 기준을 반드시 제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영적 규칙과 질서는 파괴되고, 판관(사사) 시대와 같이 사람들이 각기 자기 소견의 옳은 대로 행하게 될지라도 수수방관만 하는 영적 무방비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며, 심지어는 영적 탈선과 타락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경기하는 자가 규칙에 따라 적법하게 경기를 해야 하듯이(딤후 2:5), 믿는 사람들도 각자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 신앙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실 때 반드시 말씀에 따라 심판하실 것입니다(요12:48). 처음에 제시한 갈라디아서 4:9,10 말씀은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날'과 '달'과 '때'와 '해'를 지킴으로 '약하고 천한 초등원리'로 되돌아가 거기에 다시 속박되는 문제에 대해 아주 강력하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경을 통해 자신의 교회에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규례는 '밥티스마'(침례)와 '주님의 만찬' 두 가지뿐입니다. 그 외의 모든 행사나 절기들은 아무리 좋은 의미로 가장되고 장식된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바와는 동떨어진 것들입니다. 크리스마스 축제가 이교도 국가인 바빌론의 풍습에서 유래되었음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의 기원과 유래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에 대해 먼저 성경적으로 살펴본 후에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 성경은 그리스도의 탄생일이나 그분의 탄생연도에 관해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에 대해서 우리가 알기를 원치 아니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분의 탄생은 이 대속을 위한 과정입니다. 더 중요한 구심점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그분의 재림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탄생을 기억하는 것도 그분의 구속의 과정을 되새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제시하지 않은 사실을 우리가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신 바를 따라 행해야 합니다. 꼭 그분의 탄생 시기에 대해서 알아야겠다고 한다면 알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그 시기는 지금 우리가 지키고 있는 것처럼 12월 25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이 12월 25일이라는 설은 고대 바빌론 종교에서 유래되었고,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 이교적 풍습을 받아들여 기독교와 접목시켰으며, 오늘날 프로테스탄트 교회에까지 흘러 들어온 것입니다. 우선 팔레스타인의 지리적 특성과 유다인들의 관습, 그리고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가 12월 25일이 아님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들판에 있던 양떼들이... 우리는 누가복음 2:8에서 천사가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그분의 탄생을 알려주었던 때에, 목자들이 넓은 들판에서 밤까지 양떼들에게 풀을 먹였으며, 밤에 들에 묵으면서 양떼들을 지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겨울은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상당히 추우며 비가 오는 계절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10월 말 이후에 목자들이 들판에서 자신들의 양떼들을 먹이고 지키는 것은 그들의 관습이 아닐 뿐 아니라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3월 하순이나 4월 초순경부터 양떼들을 들판에 방목하다가 10월경 첫비가 내릴 때쯤에는 추위로 인해 모든 양떼를 집으로 몰고 돌아와서는 우리 안에서 겨울을 나게 했습니다. 에스라 10:9-13을 보면,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모았을 때인 아홉째 달 이십일 경(유다 월력-우리 월력으로는 11월 중순경 이후임)에 비로 인해 떨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 사실로부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늦어도 10월말 또는 11월초 이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베들레헴에 있는 여관에 그들이 있을 방이 없어... 유다인들은 일년에 세 차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에 그분을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출 23:14-17, 참고 - 출 34:24; 시 50:5). 9월 중순에서 10월 중순까지는 유다인의 7대 절기 중에서 나팔절, 속죄절, 장막절을 지키러 가는 시기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던 그 시기에 예루살렘 근교에는 각처에서 올라온 많은 순례자들이 일시적으로 증가하여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던 날 저녁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서조차도 거할 장소가 없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즉, 마리아와 요셉이 아우구스투스의 칙령에 의해 호적을 등록하려했을 뿐 만 아니라 이 유다인의 절기 중 하나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상경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로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예루살렘의 총독을 통해 유다인들의 이러한 풍습이 있음을 듣고 이 시기에 맞춰 호적등록을 하라고 칙령을 내렸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의 위력은 정치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리스도의 탄생일에 대한 명확한 성경적인 근거는 없지만 성도 요한의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묘사하면서 '거하시니'(tabernacled, 장막을 치시니)라는 예상외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시니"(요1:14) 위 구절에 나오는 "거하시니" 라는 말은 영어로는 "dwelt"이고 그리스어로는 "tabernacled"로서, 이 "tabernacl"이라는 단어가 바로 장막절을 나타냅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분께서 장막절에 출생하셨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유다인의 장막절은 지금의 월력으로는 대략 9월 중순에서 10월 중순경에 해당합니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정상적인 수태기간이 사십 주임을 고려해 볼 때 정확하게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태양력의 12월 25일에 예수님을 잉태하셨습니다. 참으로 신비하지 않습니까?   3. 만삭된 여인이 한겨울에 여행을 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에 모든 여인과 아이들도 자기들이 속한 도시에 조세등록을 하러 가야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주 길고 오랜 여행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한겨울에 여인들과 아이들이 여행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만삭의 몸인 여인이 여행을 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 지방의 겨울이 그렇게 혹독하게 춥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마태복음 24장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유다인들)의 도피하는 일이 겨울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겨울이 유다인들에게 있어 도망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계절이라면, 아이들이나 여인들이, 특히 아기를 밴 여인이 여행을 한다거나 목자들이 밤에 들판에 묵으면서 양떼들을 지키는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위의 고찰들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가 12월 25일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으며, 아무도 이를 반증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키는 것이 어떻게 유래된 것일까요?   크리스마스는 어디서, 어떻게 유래되었는가? 초대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였지만, 탄생을 기념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1:26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대영백과사전」도 "크리스마스는 초기 교회의 축제들 중에는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카톨릭 백과사전」(1911년판)도 "크리스마스는 교회의 가장 초기에 있었던 초기 축제일에 들어 있었던 축제가 아니라... 그 축제의 기원은 이집트이다... 이레니우스와 터둘리안은 축제일 목록에서 크리스마스를 삭제하고 있다." 라고 말합니다. 로마 교회는 4세기 후반에 고대 로마의 태양신 솔(Sol)의 탄생일인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지정하여 지키기 시작하였고, 5세기에 이르러서는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영구히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대영백과사전」도 그 기원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에 기념하는 이유는 불확실하지만, 초기 기독교들이 '정복당하지 않는 태양의 탄생일'(Natal is Solis Invicti)이라는 로마의 이교 축제와 같은 날에 기념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 이교 축제는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고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동지를 기념한 것이었다. 따라서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전통 관습들은 이교도들이 한겨울에 벌이던 농신제 및 태양 의식들과 그리스도의 탄생을 한데 합쳐서 생기게 된 것이다. 로마 세계에서는 농경신 사투른을 기념하는 축일 '사투르날리아'(12월 17일)에 흥겹게 지내며, 서로 선물을 교환했다. 또한 이란 사람들은 12월 25일을 신비로운 신, 미트라(정의의 태양)의 탄생일로 여긴다. 로마력 설날(1월 1일)에 사람들은 자기 집을 푸른 나무와 등불로 장식했고, 자녀들과 가난한 사람에게 선물을 주었다. 튜튼족이 갈리아, 브리튼, 중앙 유럽으로 침입해 들어오면서 게르만족과 켈트족의 크리스마스 축제 의식들이 이러한 관습들에 융합되었다. 음식과 교제, 크리스마스 이브에 벽난로에 때는 장작과 크리스마스 케이크, 푸른 나무들과 전나무들, 선물과 인사 등이 이 축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되었다. 이교도에게나 기독교도에게나 겨울 축제일은 언제나 따뜻함과 꺼지지 않는 생명을 상징하는 불, 등불들과 관련되었다." 「카톨릭 백과사전」 또한 이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며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12월 25일에 지켜 온 잘 알려진 나탈리스 인빅티의 태양 축제(즉, 정복되지 않은 태양의 탄생)는 우리가 12월 25일에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것에 대한 좋은 근거가 된다"(제3권, p. 727, Christmas). 이러한 이교적 태양신 숭배의 관습이 로마에서 '기독교화' 되었을 때 큰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 몇몇 사람들은 예수님이 태양신인 '솔'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터툴리안은 솔(Sol)은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어거스틴조차도 그리스도를 솔과 동일시하는 것을 이단이라고 탄핵했던 것입니다. 고대의 동계 축제는 대단히 인기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인기로 인해 로마 교회는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때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크리스마스의 관습 중 많은 것들이 로마의 농신제(Saturnalia)의 영향을 받은 것들입니다. 베일리라는 저술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크리스마스 기간과 관련된 여러 가지, 즉 휴일들, 선물 교환, 겨울나무 등이 이교주의의 유물인 로마의 겨울 농신 축제가 계승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알렉산더 히슬롭 목사도 그의 저서 「두 개의 바빌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기원이 이교도의 축제일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을 지킨 날짜와 그 때 행하는 의식이 그 날의 기원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하늘의 여왕을 이시스(Isis)라고 불렀는데, 그녀의 아들이 '동지'인 바로 이 때에 태어났다. 우리들이 크리스마스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인 '율 데이'(Yule day)는 이 날이 바로 이교도 국가인 바빌론에서 유래되었음을 밝혀 준다. 여기서 '율'(Yule)은 '어린 아이'를 뜻하는 칼대아 말이다. 12월 25일은 기독교가 들어서기 훨씬 전에 이교도 앵글로색슨 조상들이 '율 데이', 또는 '아이의 날'이라 불렀으며, 그 전날 밤은 '어머니의 밤'이라 불렀다는 것은 그 날의 본질을 충분히 드러내 주는 것이다... 이 탄생일은 이교도 국가 도처에서 지켜졌다."   크리스마스의 뿌리는 바빌론 신비 종교 만리 홀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따르면 고대 바빌론 왕국을 건설했던 니므롯 이전부터 카인의 후예들은 모든 생명의 근원을 태양으로 믿어 숭배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풍습이 바빌론의 니므롯 시대로 흘러 들어와 바벨탑을 쌓았던 니므롯이 죽은 후에 그의 아내이자 어머니였던 세미라미스가 니므롯을 당시 백성들에게 태양신으로 숭배하게 하였고, 자신은 그의 아내로서 '하늘의 여왕'으로 격상시켜 달을 상징하는 여신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그 태양신이 이집트에서는 '오시리스' (Osiris), 또는 '라'(Ra) 등으로, 카나안 땅에서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오염시켰던 '바알'(Baal)로 바뀐 것입니다.   이러한 태양신 숭배 풍습이 로마에서는 '사투르날리아'(Saturnalia)라는 축제를 하면서 12월 25일을 '나트리스 솔리스 인빅티'(Natlis Solis Invicti)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정복할 수 없는 태양의 탄생일'이라는 의미입니다. 태양신 '솔'은 바로 여기서 유래된 것입니다. 로마에서는 12월 22일 동짓날이 해가 가장 짧은 날이므로 이 날은 태양이 죽은 날로 믿었으며, 12월 24일은 해가 다시 길어져 태양이 살아나는 것으로 믿어 12월 25일을 해가 다시 살아난 날, 태양의 탄생일로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크리스마스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바빌론에서 세미라미스에 의해 태양신으로 숭배되었던 니므롯의 죽음과 재탄생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위의 증거들을 통해 크리스마스라는 절기가 이교도들의 풍습에서 유래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모든 교회와 온 세상이 크리스마스를 지키는데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도 세상 밖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 세상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탄생이 없었다면 그분의 십자가 사건이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일년에 하루를 떼어(혹은 일년에 한 주일을 떼어) 성탄절로 혹은 성탄주일로 지키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12월 25일에 예수님이 태어났다.", 혹은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준다." 등과 같은 거짓말을 하지는 말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크리스마스가 연말에 있고 휴일이므로, 멀리 떨어진 가족들이 함께 모여 즐거워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따라서 크리스마스 자체를 정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아이들에게도 성탄절의 의미와 또 무엇이 잘 못된 것인가 등을 가르치면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믿습니다.   한편 어떤 이들은 이 모든 것이 이교도들의 풍습에서 나왔으므로, 나와 내 가족은 크리스마스를 지키지 않겠다고 결심할 것입니다. 저는 이 것 역시 각 자의 마음에 따라 주를 위해 하는 것이므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제가 타협한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단지, 이 날을 지키는 사람도 주(主) 안에서 양심에 따라 거짓 없이 지키고, 지키지 않는 사람도 주(主) 안에서 양심을 따라 지키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날에 대해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며, 즐겁게 휴일로 지키면서 가족과 함께 주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음미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2009-05-02 09:47:07 | 관리자
부활절(Easter)에 대한 바른 이해   지난번에 우리는 크리스마스의 배경과 그 이교적인 유래에 대해 살펴보았으며, 이제부터는 부활절이 과연 주님께서 명하신 주님의 절기인지, 아니면 사람이 만든 전통에 따른 사람의 절기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부활절(Easter)의 기원   부활절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요? 과연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절 달걀에 색칠을 했을까요? 부활절을 언제부터 지켰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근거가 없습니다. 다만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서머나의 감독인 폴리갑과 로마의 감독 안티케투스가 서로 주고받은 서신에 "부활절 논쟁"이 있었다는 불확실한 기록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나 기타 문서에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절 축제를 지켰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습니다. 더욱이 부활절을 축제의 날로 잡아 기념하라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대영백과사전」초판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약성경이나 사도적 교부들의 저술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절을 지켰다는 암시는 없다. 특정한 날을 거룩히 여기는 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도 이 축제일이나 기타 다른 어떤 축제일도 지키라고 명한 바가 없다." 뿐만 아니라 3세기경, 교회에서 지킨 부활 축일은 오늘날 '이스터'(Easter)란 이름으로 지켜지는 부활절과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또 이 기념일은 그 당시에 '이스터'란 이름으로 불리지도 않았습니다. 이 기념일은 파스카 즉 유월절로 불렸고, 이 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한 것으로 전해질 따름입니다(히슬롭, 「두 개의 바빌론」). 그런데 이 '파스카'를 '이스터'라 불러 '춘분 뒤에 오는 만월(滿月) 직후의 일요일'에 축일로 지키기 시작한 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였습니다. 주후 325년 그리스 동방 정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교회가 니케아 공회에서 부활절을 정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카톨릭 백과사전」, p. 505). 오늘날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도 로마 카톨릭주의에서 나온 '이스터'(부활절)를 '춘분 뒤에 오는 만월 직후 일요일'에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점은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키는 단어는 'Resurrection' (성경에서 총 41회 언급)인데, 왜 '이스터'(Easter)를 부활절이라고 부르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은 유다인들의 유월절 주간(유월절은 니산월 14일에 있었으며 이것은 유다 민력으로 7월에 해당하며 우리 달력으로는 3-4월에 해당하고, 그 주간에 무교절, 초실절 등이 동시에 있음)에 있었는데, 왜 부활절을 '춘분 뒤에 오는 만월 직후 일요일'에 지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의문점을 풀기 위해 우리는 먼저 몇 가지 영어사전과 신학사전에서 '이스터'(Easter) 항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웹스터의 신국제 사전 제3판」(Webster's 3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1. 고대 이교도들의 봄 축제, 2.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축제일로서 3월 21일 춘분이 지난 뒤에 오는 만월을 기준으로 해서 그 다음에 오는 일요일에 거행된다. 부활절은 춘분과 음력이 연결된 일자이기 때문에, 그 날짜는 매해 달라진다. 「펑크와 와그날의 대학표준사전」(Funk & Wagnalls's The College Standard Dictionary) 1.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독교 축제, 혹은 부활제가 거행되는 날 「시사 엘리트 사전, 1987년판」 "부활절(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축제일, 3월21일 이후의 만월 다음의 첫 일요일) 「현대 영한 사전, 1994년판」 "그리스도의 부활절, 춘분(春分) 3월 21일의 만월. 그 날이 만월이 아니면, 그 뒤의 만월 후 최초의 일요일이며 그 날짜는 정해진 것이 아님. 이 날을 '부활절'(Easter Day)라고 말하며 기독교 국가에서는 크리스마스 다음 가는 중요한 축제일임. 원래는 봄의 여신 '에오스트레'(Eostre)의 제일(祭日)임." 「성서대백과, 정인찬 편, 기독지혜사 1979」 "이스터라는 명칭의 어원은 불확실하다. 그러나 비드(Bede)에 의하면, 이 명칭은 고대 튜우튼 족이 4월에 희생제물을 바쳤던 봄의 여신 '이스터'(Eastre)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크리스천 의식은 아마도 이 이교도 축제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고대 바빌론에서는 사탄을 숭배하는 신비 종교들이 극도로 성행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태양신 숭배' 혹은 '바알 숭배' 그리고 '월신 숭배' 등이었습니다. 태양신(솔, 호루스)은 최초의 적그리스도이자 바빌론 왕국을 세운 '니므롯'을 상징하는 것입니다(창10:8,9). 그의 이름은 '담무스'(Tammuz)라고도 하는데(겔 8:14) 그는 원래 니므롯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니므롯의 아내였던 세미라미스는 자기 남편 니므롯이 죽자, 그 니므롯이 환생하여 담무스가 되었다고 사람들을 속였던 것입니다. 이 담무스는 바알이라고도 불리며(렘 19:5), 마르둑, 벨, 오시리스, 쥬피터, 오리온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담무스의 어미이면서 그의 아내가 된 세미라미스는 월신으로 알려졌고 '하늘의 여왕'(queen of heaven, 렘 7:18; 44:17-25)이라 불렸으며, 여러 고대 국가에서 에오스트레(Eostre), 오스테라(Ostera), 아스다롯(삿 2:13), 아스타르테, 다이아나(아데미, 행 19:24), 시벨레, 비너스, 마리아, 이쉬타르(Ishtar) 등으로도 불렸습니다. 특히 고대 영국의 색슨족은 이 '이쉬타르'란 이름을 취해 이스터(Easter, 빛과 봄의 여신)라고 불렀습니다. 다시 말해, '이스터'(Easter)는 에오스트레, 오스테라, 아스타르테, 또는 이쉬타르 등을 현대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부활절 풍습: 부활절 계란, 부활절 토끼, 사순절 등 원래의 이스터는 하늘의 여왕을 기념하는 이교도들의 축제일로서, 이것을 상징하는 심벌로는 플레이보이지의 심벌인 '토끼'와 하늘의 여왕인 비너스 혹은 이스터의 탄생을 상징하는 달걀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스터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부활절 기간 중에 행해지는 관습들 역시 이교도들의 신비주의 종교에서 비롯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자면, 부활절 달걀을 삶아 색칠하여 먹는 것 등은 비기독교적인 이교도의 관습입니다. 어떤 이들은 병아리가 달걀에서 나오듯 그리스도께서 무덤으로부터 나오셨다는 의미로 부활절 달걀의 의미를 재해석하여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관습은 결코 성경이나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유래된 것이 아닙니다. 고대 바빌론 신화에는 하늘로부터 유프라테스 강에 떨어진 것으로 알려진 굉장히 큰 전설상의 달걀이 등장하는데, 바로 그 달걀에서 여신 아스타르테가 부화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러므로 고대 바빌론 사람들 사이에서 달걀은 거룩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여신 아스타르테(혹은 이스터)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고대 영국의 드루이드 교도들은 달걀을 자기들 종교의 거룩한 상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아테네에서는 바카스의 제전이나 디오니시아카의 제전 때 알을 성별하여 바치는 종교행사가 거행되었습니다. 한편 힌두교도들은 금빛을 띤 창조의 알을 숭배했으며 중국인들은 종교축제 때에 염색하거나 색칠한 달걀을 사용하였고, 고대 이집트인들과 그리스인들은 종교의식에서 알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비밀스런 목적을 위해 자기들의 사원에 알의 형상을 만들어 비치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로마에서는 풍작의 여신 케레스를 섬기는 행렬이 지나갈 때 계란을 앞세워 갔으며, 일본에서는 거룩한 달걀을 봄의 여신의 상징으로 색칠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이집트인들에게는 달걀이 태양 즉, '황금달걀'과 관련되어 있었고, 그들은 염색한 달걀을 거룩한 제물로서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전 세계적인 바빌론의 알 숭배 사상의 자취는 우리 나라에도 유입되어 '박혁거세 신화'에서도 발견됩니다. 「대영백과사전」은 달걀을 채색하여 먹는 이런 '알 숭배 사상'의 기원을 고대 이집트인과 페르시아인까지로 소급하여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런 이교도들의 관습이 기독교와 연관을 맺게 되었을까요? 「카톨릭백과사전」에 나오는 다음 인용문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사순절 기간에 달걀 사용이 금지된 까닭에 사람들은 부활절 날 부활의 기쁨을 상징하는 붉게 칠한 달걀을 상에 가져 왔다. … 이 관습은 그 기원을 이교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봄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경축하는 많은 이교 관습들이 부활절과 접목되었기 때문이다"(「카톨릭백과사전」제5권 p. 227, '부활절' 항목). 부활절과 관련되어 이교로부터 유입된 부활절 관습에는 부활절 달걀 외에도 부활절 초, 부활절 토끼, 부활절 백합 등이 있으며, 대표적인 예로 부활절 토끼의 경우를 들어보면, 「대영백과사전」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부활절 달걀과 마찬가지로, 부활절 토끼도 고대 이교로부터 기독교화 된 것이다. 토끼는 고대 이집트의 전설에서나 그 밖의 다른 지역에서 달과 관련되어 있다. 토끼에 해당되는 이집트 말 'um'이 '열린'(open)이란 의미와 '기간'(period)을 의미하고 있으므로, 이 토끼는 어떤 주기성 사상과 관련을 갖게 되었다. 즉 달과 인간에게, 그리고 젊은 청춘 남녀에게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으로 다산과 새로운 삶의 상징이 되었다. 이와 같이 토끼는 부활절 … 달걀과 관련되어 있다."  위에서 인용한 「카톨릭백과사전」은 "토끼가 이교의 상징으로 항상 다산의 상징이 되어왔다"고 말하며, 「그림으로 보는 세계 문화 상징 사전, 진쿠퍼 지음, 이윤기 옮김, 까치」은 부활절 달걀과 부활절 토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가 생기기 이전에, 부활절 달걀 혹은 토끼는 춘분에 즈음하여 생명의 새로운 탄생과 갱생을 가져다주는 상징이었다. 야생토끼나 집토끼는 게르만의 여신 오스타라(중세 영국의 에오스트레)를 나타내는 것이다. 아마도 이 여신의 이름이 이스터의 어원일 것이다." 부활절 기간에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일출예배에 참석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부활절 일요일 아침, 태양이 떠오르는 때에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셨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여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의 부활은 태양이 떠오를 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무덤이 이미 비어있는 것을 보았을 때는 아직 어두울 때였습니다. 한편 이 일출 예배의 모형은 해돋이 때 해맞이를 하던 고대 태양 숭배의 일부분이었습니다. 물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해가 뜰 때 부활예배를 드리는 것이 결코 태양을 숭배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런 관습은 성경에 없는 것이며 이교에서 비롯된 혼합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대언자 에스겔 시대에 참 하나님을 아는 자들도 태양숭배에 빠졌고, 그것을 자기들 종교의 일부분으로 삼았습니다.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주의 집 안뜰로 들어가기로, 보니, 주의 전 문 앞 현관과 희생단 사이에서 약 스물 다섯 명이 주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 경배하더라"(겔 8:16). 백성들이 동쪽을 향하여 태양을 경배했다는 사실은 그것이 곧 해돋이 때의 의식임을 보여줍니다. 대언자 엘리야 시대에 바알의 선지자들이 바라보았던 곳도 역시 동쪽이었습니다. 바알은 태양신도 되고 불의 신도 됩니다. 엘리야가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 바로 그분이 참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바알 선지자들에게 도전했을 때, 그는 단도 직입적으로 바알 숭배와 맞섰던 것입니다. 이 바알의 선지자들이 바알을 부르기 시작한 때가 하루 중 어느 때였습니까? 그것은 바알, 즉 태양이 그 첫 모습을 동쪽 지평선 위로 나타낼 때였습니다. 그 시간은 '아침'(왕상 18:25,26) 즉, '동틀 때'였습니다(「로마 카톨릭의 어제와 오늘」, 랄프 E. 우드로우, 기독교문서선교회)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관련한 의식들은 여러 형태로 많은 고대 국가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집트의 스핑크스는 동쪽을 바라보도록 위치를 자리잡고 있습니다. 일본의 후지산에서는 떠오르는 태양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순례자들은 산기슭을 오르는 동안 떠오르는 태양에 기도를 한다.... 종종 흰 예복을 입은 수백 명의 신토 순례자들이 그들의 거처에서 나와 떠오르는 태양에 시를 읊는 것을 볼 수 있다"(도빈스,「 세계 예배 이야기」). 고대 로마의 미트라 교도들도 태양신을 경배하기 위해 동틀 녘에 함께 만났습니다. 이스터란 이름에서 비롯된 봄의 여신은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심지어 'East-er'(동쪽-사람)이란 단어 자체도 이를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동쪽에서 태양이 솟아오르는 것과 부활절이란 이름 그리고 봄이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대 전설에 따르면, 담무스는 죽임을 당한 뒤 지하세계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이쉬타르(세미라미스)가 애곡함으로 인하여 그는 봄에 신비하게 소생하였다고 합니다. "이쉬타르의 슬픔을 통한 담무스의 부활은 농작물의 다수확과 사람들의 다산을 보증하기 위해 매년마다 극적으로 재현되었다. 해마다 사람들은 이쉬타르의 은총과 은전을 얻기 위해 이쉬타르와 함께 담무스의 죽음을 슬퍼하고 이 신의 귀환을 축하해야 했다"(스미스,「인간과 그의 신들」). 새로운 식물이 움트고 나올 때, 고대인들은 그들의 '구세주'가 지하세계로부터 나와 겨울을 끝내고 새롭게 봄을 가져오는 것으로 믿었습니다(우르딘,「축제와 성일과 성인의 날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해마다 이교도의 봄축제 의식과 교리들을 받아드렸는데, 이에 대해 에스겔 대언자는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겔8:14)고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이는 단순히 자연계의 소생이나 또는 봄에 새로운 식물이 소생하는 것과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일년 중 봄에 있었다는 사실로 인하여, 믿음에서 떠나 세상과 결탁한 4세기의 교회가 이교도들의 봄축제를 받아들여 기독교와 혼합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영백과사전」은 이같은 혼합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는 …기독교의 큰 축제일을 기념하는 데에 있어서 이교도들의 많은 의식과 관습을 통합시켰다."(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기독교는 천주교를 말하는 것임) 이제 사순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주후 5세기에 그 당시 교회와 초대 교회를 비교하는 글을 쓰면서 마르세이유 수도원의 수사였던 카시아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순수함이 변질되기까지는 사순절을 지킨 적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사순절 행사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사순절에 사십일 간 금식하는 관행 역시 바빌론 여신을 섬기는 자들로부터 유래된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담무스가 마흔 살이 되었을 때, 그는 멧돼지에게 받혀 죽었다고 합니다. 히슬롭은 이 사순절의 '40'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 40일의 하루는 담무스가 지상에서 살았던 한 해를 말하며 '담무스를 위해 애곡하는 날'로 정해 놓은 날이다." 고대에는 40일이라는 기간을 우는 날로, 금식하는 날로, 자신을 채찍질하는 날로 여겼습니다. 이는 담무스의 은총을 얻어 지하세계로부터 나와 봄을 맞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습의 준수는 바빌론에서뿐만 아니라 페니키아인, 이집트인, 멕시코인, 그리고 한동안은 이스라엘 백성에게조차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히슬롭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교도들에게 이 사순절은 담무스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연례 대축제에 없어서는 아니 될 예비기간이 되었던 것 같다"(「두 개의 바빌론」, 도서출판 안티오크). 쿠르드족 중 사탄 숭배자들은 지금도 매년 봄에 40일 동안 금식을 합니다. 쿠르드족은 이같은 관행을 일찍이 그들을 지배했던 바빌로니아인들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멕시코인들도 봄에 40일간 계속되는 축제를 엽니다. 멕시코의 이런 관습에 대해 험볼트는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합니다. "춘분이 지난 지 삼일 후부터 태양신을 위한 40일 간의 종교적인 금식이 시작된다." 이집트에서도 오시리스를 위해 40일간의 금식을 행했는데, 이것은 윌킨슨의 책「이집트인들」을 참고하면 알 수 있습니다. 봄축제와 관련된 이교도들의 여러 가지 관습이 이미 카톨릭 교회 안에 유입된 고로, 이 축제에 앞서 행해지던 이교도의 "금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단계로의 발전일 뿐이었습니다.「카톨릭백과사전」은 아주 솔직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4세기의 저술가들은 확실히 그렇다고 여길만한 주장이 없는 이 사도적 제도에 관하여 많은 관행들(예를 들면 사순절의 40일간의 금식)을 기술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교황이 공식적으로 고기나 그 밖의 다른 몇 가지 음식들을 먹지 않는 기간, 즉 "거룩한 금식기간"이라고 부르는 사순절을 준수할 것을 명령한 것은 6세기경이었습니다. 카톨릭 학자들은 이교주의로부터 받아들인 관습들이 교회 내에 잔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또 이를 시인하고 있습니다(「카톨릭 백과사전」, 제11권, p.390. '이교주의' 항목). 그러나 그들은 비록 이교도의 기원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많은 것들을 기독교화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믿지 않는 어떤 이교도가 이교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40일간 금식을 했다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자 이와 같은 동일한 방법을 취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비록 이교도들이 동쪽을 향하여 태양을 경배하였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 역시 해 뜰 때 예배를 드릴 수 있지 않은가?" "비록 이교도들이 달걀을 사용했지만 무덤 앞에 놓인 큰돌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지 않은가?" "비록 이교도들이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이런 것들을 사용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이런 것들을 사용한다해도 무슨 상관이 있단 밀인가?" 이 모든 주장이 합리적인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성경은 이에 대해 안전한 지침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너는 스스로 조심하여 그들이 네 앞에서 멸망한 뒤에 그들을 따라감으로 올무에 걸려들지 말며 또 그들의 신들을 좇으며 물어 말하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섬겼는고? 나도 그와 같이 하리라, 하지 말라. 너는 주 네 하나님께 그와 같이 행하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주께서 미워하시는 일 곧 그분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자기 신들에게 행하되 심지어 자기 아들딸들을 불살라 그 신들에게 드렸음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거기에 더하거나 빼지 말지니라."(신12:30-32). 끝맺음의 말 부활절 문제 역시 크리스마스 문제와 비슷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결코 제 아이들에게 계란을 만들게 하거나 부활절 토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고, 물론 사순절이니, 재 수요일이니 하는 카톨릭 전통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아이들에게 '이 날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주간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해 보고 아이들에게 그 의미를 가르쳐 줄 것입니다. 물론 미국과 같은 경우는 이 날이 휴일이므로 집에서 쉬면서 몸과 마음에 재충전을 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크리스천의 마음의 태도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이후로는, 이 세상이 나에 대해 그리고 내가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세상이 무어라 하든지, 이제는 내 마음에서 정한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 기쁘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런 명절들의 유래에 대해 살펴본 것입니다. 이제 이런 것을 알게 된 독자께서는 자신과 하나님께 부끄럽지 않게 행하면 됩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의 탄생과 예수님의 부활의 기쁜 소식이 일년 내내 독자 여러분의 가정에 넘쳐나기를 기도 드립니다. 오직 이것만이 성탄절과 부활절의 참된 의미인 것입니다.  
2009-05-02 09:45:56 | 관리자
성령의 열매- 성령의 열매 개관- 사랑 1      갈라디아서 5장 22절 말씀은 성령의 열매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온전히 포기하고 주님께 내어드릴 때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서 맺으시는 열매로, 이것은 여러분과 제가 아무리 애쓰고 어떤 수단을 동원한다 할지라도 맺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예배와 기도회를 아무리 열심히 참석하고, 아무리 열심을 내도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지 않는 한 맺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말씀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고 계신지요. 아니면 성령께서 여러분을 통제하시도록 온전히 허락하셨나요? 여러분의 인생은 주어진 환경과 상관없이 기쁨이 넘치십니까? 아니면 환경이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고 있나요? 여러분은 지속적으로 마음에 평안을 지니고 계시나요?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을 허락하시든 상관없이 오래 참고 계십니까? ‘선함’에 대해선 어떠하신가요? 혹시 상황에 따라 여러분의 행동이 바뀌지는 않습니까? 믿음에 대해서는 어떠하신가요? 주님을 항상 신뢰하십니까, 아니면 종교적 열심만 내고 계십니까? 온유에 대해서는 어떠하신가요? 주님께 공손히 복종하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어떤 위치에 두시든지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나요? 또한 항상 성령님의 통제하에 자신을 두고 계십니까? 다시 말해서 절제하고 계시나요? 아마 이 아홉 가지를 열거하는 동안 여러분과 저는 우리하고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성령의 열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면서 여러분과 제가 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우리가 할 수 없는 이것을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공부의 목적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더 해 보겠다는 결심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바 그것을 하시도록 삶에서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고자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감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주님을 위한 우리의 열심과 수고에 대한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며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허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성령의 열매를 맺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요즘 수적으로 성장을 해 왔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무척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단지 인간적인 노력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 일이 우리의 노력이나 열심이 아닌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라는 증거는 새로 늘어난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잘 정착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수적으로는 늘어났는데 영적으로 성장하지 아니한다면 그 결과는 불보듯 끔찍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즉 죄인이 구원받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영적 소경을 영적으로 눈 뜨게 할 수 없고, 교만한 자를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죄인을 거듭나게 하사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난 성도의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요? 갈라디아서 3장 3절입니다. 너희가 그렇게 어리석으냐? 너희가 성령 안에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완전해지고자 하느냐? 이 말씀에 의하면 구원받은 성도라도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처럼 어리석게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곧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어쩌면 이 말을 듣고 오해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는 그리스도인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놀라시겠지만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는 거짓말에 능한 자도 있는데 눈 깜짝도 안 하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해댑니다. 설마 하실지 모르지만, 구원받은 사람이 아내를 학대하기도 합니다. 구원받은 여자 중에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남편에 대한 순종을 무시하는 사람이 허다합니다. 구원받은 사람 중에는 담배와 술에 중독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이 모든 일이 왜 일어날까요? 이는 그들이 구원받은 것이 전부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구원받은 후 그저 휴거만 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는 구원과 휴거 사이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오로지 구원과 휴거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작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는 결코 이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은 우리를 단지 하늘나라에 데려 가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까? 그 이유를 말씀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입니다. 구원을 받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맞는 말이며 성경이 주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목적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구원받은 결과 중 하나일 뿐입니다. 즉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구원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람들은 종종 이 말씀 중 일부만 뽑아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왜곡하여 인용하지만 본문은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대상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께서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구원받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우리로 그분의 아들처럼 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받은 그 시점부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되도록 만들어 간다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따르면 구원받은 것이 성령님의 역사요 작품이듯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드시는 것도 역시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주님의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구원받은 후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고 자신의 상황에 자족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신 목적을 잊고 있는 자요, 성령님의 역사에 저항하고 있는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현실에 만족하여 더 이상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는 성령을 억누르고 있는 셈입니다. 만약 주위에 있는 형제, 자매들이 사랑으로 권면하고 때론 책망할 때 그것을 우리가 거부한다면, 그 역시 성령을 억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그리스도처럼 만들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들인데 이런 것들을 거절한 채 “나도 구원받았다구. 나도 성경을 읽고 교회도 다니고 주님을 섬긴다니까?” 이렇게 자신을 내세우기만 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육신을 동원하여 성령의 열매는 결코 맺을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을 보시면 “그러나(But) 성령의 열매는”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라는 말이 등장하는 이유는 19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여러분 간음이 무엇입니까? 간음은 결혼생활의 실패를 뜻합니다. 모든 간음 행위는 당사자의 결혼 실패의 증거가 됩니다. 육신의 행위의 첫 번째가 간음이라면(19절), 성령의 열매의 첫 번째는 사랑입니다.(22절) 왜 남편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같이 눕는 것일까요? 이는 그들이 성령 안에서 걷지 아니하고 육신 가운데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적인 행위는 구원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19절을 계속 보십시오.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육신의 행위는 숨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을 보면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이 등장합니다. 셋 모두 성적 부도덕에 관한 것들입니다. 창녀짓이든, 자위행위든, 동성애든, 음란물이든, 비디오 혹은 잡지든지 간에 다 성적으로 타락한 것들이요, 육신의 행위인 것입니다. 반면 성령의 열매를 보면 이와 대조적으로 기쁨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성적인 쾌락을 찾아다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의 삶에 참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돈이나 고급 승용차라든지 그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적인 욕망을 육신적인 노력으로 끊어보려고 애쓰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이런 육신적 욕망은 오직 성령께 우리 자신을 순종하여 내어드릴 때 성령께서 제어하실 수 있을 뿐입니다. 즉 성령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면 성령께서는 성령의 열매를 맺으심으로 육신이 일할 기회를 차단하십니다. 우리는 얼마 동안은 담배를 끊을 수 있고, 욕지거리를 중단 할 수 있고, 성질을 참을 수 있으며, 우울증을 이겨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처럼 육신의 행위들을 육신적 노력으로 이겨내려는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육은 무익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육신적, 성적 부도덕은 오직 성령의 열매인 기쁨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 극복될 수 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우상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emulation)과…” 여기서 경쟁이란 말은 원래 이런 의미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비참하고 형편없음을 보고 실망해서 다른 사람처럼 되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 사람들이 다른 사람처럼 옷을 입고 다른 사람처럼 따라서 행동하려고 할까요? 그것은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파당 등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세 번째 열매인 “화평”과 대조를 이룹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허락하신 참 화평을 누린다면, 이런 것들과는 쉬이 결별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구원받은 사람 중에는 이 화평이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 모든 것들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다 육신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오래 참음, 부드러움, 선함, 믿음, 온유, 절제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오지 않습니다. 이 열매는 오직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성령께 복종시켜 우리 자신을 성령의 통제하에 내어 맡길 때만 맺힙니다. 문제는 이것을 오늘날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등 주님의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주위를 돌아보면 이런 일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더 열심히 합니다. 여러분도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 없이 혼자서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없이 많은 사람이 이런 일들을 잘 해 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니까, 혹은 내가 보기에 옳다고 생각되니까… 이러한 동기로 한다면 우리는 이 모든 일을 하나님과 상관없이 우리 힘으로 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5장 22절과 23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그 어떤 노력을 한다 할지라도 우리 힘으로는 만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열매가 우리 삶에서 맺히려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열매는 가지의 영광입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영광도 없고 가지의 존재 의미도 없습니다. 열매는 가지가 맺긴 하나 자기를 위해 맺는 것이 아니고 자기 주인을 위해 맺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나서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실상 나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전 세계를 돌며 복음을 전해 그리스도께 많은 사람들을 인도했다고 한들 그 일들이 내적인 열매없이 이루어졌다면 그 사람은 그저 자신의 목표만 달성한 것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잃어버린 혼을 진정으로 “사랑”해서 복음을 전파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입니다. 열매는 가지에 달리기는 하나 따서 다른 사람들이 먹고 즐기기 위한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가지는 열매를 맺지만 그 열매가 가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열매 맺기를 원치 않는 줄 아십니까? 열매는 자기에게 전혀 이익이 없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기에 그렇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오늘은 교회에 가고 싶지 않아.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라고 한다면 명심하십시오. 당신은 육신적인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가 봐야 뭐 별로 재미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데 뭐.” 이렇게 생각한다면 여전히 육신적인 상태입니다. “내가 거리설교 안 한다고 뭐 달라질게 있겠나…” 이런 생각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육신 가운데서 행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들의 범위 정도를 스스로 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육신의 행위입니다. 사과나무가 사과를 맺으면 그 열매를 맺은 가지가 먹는 것이 아니고 그 주인이 그 열매를 따서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이 이치입니다. 그것이 바로 열매입니다. 기계도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살아있는 것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행위를 강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만이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합니다. 열매란 조용히, 차분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맺혀지는 것으로 우리의 내적 생명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무가 열매 맺으려고 애쓰거나, 수고하거나, 땀 흘리는 것 보셨나요?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일하시도록 나무는 자신을 내어드려 자연스럽게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정원사는 나무에 거름도 주고, 가지도 치고, 온갖 정성을 다해 가꿀 수는 있지만 열매를 맺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열매는 나무 자체가 맺습니다. 정원사는 나무가 건강하게 자라도록 도울 수 있으나 열매는 나무가 맺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절을 유의해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의 열매”라는 표현에 유의하십시오. 누구의 열매입니까?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은 누구십니까?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로마서 5장과 누가복음 6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주제에 대해 분명한 무언가를 보여줄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도다. 2 또 우리가 그분을 통해 지금 서 있는 이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하느니라. 3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끝부분에 주목하십시오. 환난도 기뻐한다, 정말입니까?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저는 환난을 통과해 본 적이 있어 그 결과로 적절한 유익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환난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가요? 앞에 보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가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해 우리는 기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구원 이후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기뻐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휴거 때까지 여전히 우리 자신을 통제하고 싶어 합니다. 계속해서 로마서 5장 3절에서 5절을 보겠습니다. 3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이루는 줄 우리가 아노라.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넓게 부어졌기 때문이니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같은 죄인을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그분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 여기 보면 “아직”이라는 말이 눈에 띕니다. 즉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께 반역하고 원수노릇을 하고 있던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이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같은 자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반역하고 죄를 짓고 있는 바로 그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이 사실이 실로 놀랍지 않습니까? 할렐루야!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바로 그 사랑을 우리에게 넓게 부어주셨다는 것입니다.(shed : 뿌리다. 눈물, 피 흘리다)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동일한 사랑이 네 안에서 역사하기를 원하노라.” 즉 우리가 죄 짓고 반역하고 있는 그 순간에 우리를 대신해 피 흘려 죽으신 바로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넘쳐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행실과 언어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는다면, 우리는 영 안에서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신적으로 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얼마나 자주 이런 모습을 보이는지 우리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이런 고귀한 사랑이 우리 마음 안에 부어졌으니 그 사랑이 성령님에 의해(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사방으로 넓게 퍼져나가는 그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원치도 않으며 심지어는 그런 기도조차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이 이루어지려면 내 육신은 “환난”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통 없는 사랑을 보셨습니까?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라면, 누군가가 나에게 죄를 짓는 상황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내가 그런 사랑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6장을 보십시오. 이 시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천연적으로, 즉 본성에 따라 저절로 할 수 없는 어떤 것, 즉 우리 안에서 초자연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6장 31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그와 같이 하라. 만약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행한 것을 그대로 되받아친다면, 즉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욕했을 때 여러분의 첫 번째 반응이 욕하는 것이거나,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때릴 때 여러분도 동일하게 그 사람을 때린다면, 여러분은 육신 가운데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잘 대해 주면, 여러분도 잘 대해 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여전히 육신적인 행동입니다. 반대로 누가 내게 어떤 식으로 대하든 간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대로, 혹은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대하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가 행동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형성되어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나의 행동원칙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식으로 대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대해 주셨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의롭지 못하던 때에도 햇빛과 비를 내려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을 믿고 의롭게 된 지금도 여전히 햇빛과 비를 내려 주십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일관성 있게, 변함없이 저를 선하게 대하고 계십니다. 이에 비추어 내가 다른 사람에게 꾸준히 선하게 대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영적이지 못한 상태, 즉 육신적인 상태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자, 누가복음 6장 3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면 무슨 감사를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느니라. 이 말씀을 주의깊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내가 내게 잘 대해 주는 그 사람에게 잘 대해 준다면 이것은 내가 거듭나기 전 하나님을 모를 때에도 할 수 있었던 일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에게 신사적으로 대하는 사람을 내가 신사적으로 대한다는 사실이 나의 거듭난 생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왜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까요? 이는 내가 그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친절하지 않고 호의롭지 않은 자들에게 친절히 대하고 호의를 베푸는 일이 그처럼 어렵게 느껴지는 것 역시 내가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육신입니다. 거듭나기 전, 즉 주님을 알기 전 가지고 있던 본성이 그대로 표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났다고 해서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다 이 말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께서 우리의 자아로 인해 이 육신을 처리하지 못하심으로 우리의 육신적인 모습이 불쑥 튀어나오니 이처럼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33절과 34절을 보겠습니다. 33 너희가 너희에게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면 무슨 감사를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 34 너희가 어떤 자들에게 받기를 바라며 빌려주면 무슨 감사를 받겠느냐? 죄인들도 준만큼 받으려고 죄인들에게 빌려주느니라. 누가복음 6장 32절, 33절, 34절 모두가 자아에 근거해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아는 이런 식으로 반응합니다. 즉 “네가 나에게 잘해 줘. 좋아, 그렇다면 나도 잘해 주지.”, “네가 나를 사랑해? 좋아, 나도 사랑해 주지.”, “네가 나에게 밥을 산다고? 좋아, 나도 밥 한 끼 살게.” 이런 방식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세상적인 유치한 원리입니다. 그러나 35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주라. 그리하면 너희 보상이 클 것이요, 또 너희가 가장 높으신 이의 자녀가 되리니 그분께서는 감사하지 아니하는 자와 악한 자에게 친절하시니라. 로마서 8장 29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많은 형제들 가운데 처음 나신 분이 되도록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예정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에 보니 우리가 가장 높으신 이의 자녀가 되는 때가 있으니 다름 아닌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선을 행할 때라고 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기 시작했다는 증거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들이 행한 그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대해 주신 그 방식대로 그들을 대하기 시작할 때라는 것입니다. 이해하기에는 쉽지만 문제는 아무도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기적인 생명으로 태어났기에 그렇습니다. 35절 끝부분과 36절을 보십시오. 35 그분께서는 감사하지 아니하는 자와 악한 자에게 친절하시니라. 36 그러므로 너희 아버지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것같이 너희도 긍휼을 베풀라. 이 말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만약 죄를 범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시기를 바라십니까? 당연히 긍휼을 베푸시기를 바랄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나 어떤 형제가 나에게 잘못을 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형제를 벌 주시고 징계하시고 바로잡아 주시기를 바랄 때가 많지 않습니까? 진실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로 하여금 육신으로 할 수 있는 그 차원을 넘어서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주님의 온전한 통제하에 놓이도록 이끄십니다. 우리가 어떤 교회에 다닌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교회는 설교도 뛰어나고 성경공부도 뛰어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많은 것들을 배워 나갑니다. 주일 낮, 수요일 저녁, 토요일도 빠지지 않고 나갑니다. 놀라운 지식도 얻고 난해 구절들에 대한 해석도 할 수 있습니다. 즉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얻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얼마 후 점점 지겨워지고 지루한 순간들이 닥쳐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이 모든 과정 동안 여러분 자신은 하나님께 내어드리지 않은 채 온갖 지식만 채웠기 때문입니다. 많이 배우고 보니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부족한 것들이 눈에 띄고 결국 비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내가 예배와 성경공부와 기도회와 거리설교와 기타 모든 모임에 참석하고 봉사와 섬김에 있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셔서 좋은 열매를 맺도록 했다면, 결코 지루함이나 지겨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많은 열매를 맺고 더 많은 형제 자매들에게 유익이 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이런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들이 무궁무진합니다. 허나 이 모든 일을 지루하게 느끼셨다면 여러분은 육신적인 것입니다. 교회생활이 지겨우신가요? 못마땅한 면만 자꾸 눈에 들어옵니까? 그렇다면 여지없이 여러분은 육신적인 상태입니다. 여러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도무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실은 내 교회 형제, 자매도 그렇게 사랑하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더 많은 설교를 들어야 하고, 더 많은 성경공부,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오해와 더 많은 비방, 그리고 더 많은 박해도 여전히 필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육신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도 형제 자매들을 여전히 사랑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하는 일이 힘들고 지칠 때는 우리는 육신적인 상태입니다. 전도지를 나누어 주다보면 받는 사람이 별로 없을 뿐더러 흘깃 쳐다보거나 비켜가거나 심지어 이런저런 말을 던지기도 합니다. 반응이야 어떻든 간에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 일이 내 마음을 흥분시키고 기쁨과 감사가 마음 안에 있다면 당신은 영적인 상태입니다. 그 순간만큼은 당신은 당신의 “자아”를 위해서 전도하거나, 실적이나 의무감에서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 주고 싶은 뜨거운 마음에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렸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8장 10절입니다. 그때에 느헤미야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기름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며 아무것도 예비하지 못한 자들에게 일부를 보내라. 이 날은 우리 주께 거룩한 날이니라. 너희는 또한 슬퍼하지 말라. 주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끝부분을 주목하십시오. “주의 기쁨(the joy of the LORD)”이 너희의 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앞서 우리는 로마서 5장 5절에서 하나님의 사랑(Love of the God)이라는 표현을 보았습니다. 여기에서는 “주의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절에서는 성령의 열매(fruit of the Spirit)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육신적인 노력으로 기쁨을 얻으려 하는 것을 바라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얻어낸 인위적인 기쁨을 원하지 아니하십니다. 이런 것들은 상황이 바뀌면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제가 어떤 상황에 처할지라도, 즉 슬픈 일이 닥치거나 원수들이 조롱하더라도, 좋은 환경이든 나쁜 환경이든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육신 가운데 있다는 증거입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기뻐하다가 나쁜 일이 생기면 슬퍼하고, 대접 잘 받으면 기뻐하다가 누가 조금이라도 섭섭하게 대하면 화를 내는 건 다 육신적인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기쁨이 나를 통해 표현되어지면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괴롭고 힘들 때 우리는 기도할 수 있고, 사역이 힘들 때도 간구할 수 있으며, 병이 들었을 때도 주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 있으면 그런 와중에도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기뻐하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심과 그분의 은혜를 기뻐하고 사랑으로 돌보심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육신이 결코 해낼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의 기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코 우리의 기쁨이 아닙니다. 시편 18편 34절, 35절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을 주목하십시오. 사실 다윗은 용맹스러운 사람으로 사자를 죽였고, 적장을 단숨에 물리쳤던 전쟁의 사람이었습니다. 나발과 아비가일 사건을 잘 알고 계시지요? 다윗은 나발이 자기 부하들의 요청을 거절하자 즉시 칼을 차고 나발과 그에게 속한 자들을 죽이려고 떠납니다. 육신 가운데 있는 다윗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반면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영적으로 올바른 상태에 있었습니다. 아비가일은 자기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비가일은 영 안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다윗은 육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윗의 다듬어지지 않은 육신적인 성질이 그대로 표출되어지는 장면이라 하겠습니다. 시편 18편 34절, 35절로 가겠습니다. 34 내 손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나니 그러므로 내 팔이 강철로 된 활도 부수었도다. 35 또 주께서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부드러움(gentleness)이 나를 크게 만들었사오며 전쟁을 배우고 활도 부수며, 사자도 죽이고 곰도 찢어 죽이고, 골리앗도 죽이고…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윗을 크게(위대하게) 만든 것은 이러한 용맹이 아니었습니다. 35절 끝부분에 주의 부드러움(thy gentleness)이 다윗을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말씀합니다. 누구의 부드러움입니까? 다윗의 부드러움이 아니고 주님의 부드러움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용맹을 보이며 힘을 과시한다고 해서 위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통제하셔서 역사하실 그때에 우리가 위대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열매, 하나님의 사랑, 주의 기쁨, 주의 부드러움….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자신의 성품을 내 안에서 재생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려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내 보이실 때 여러분과 저는 그분과 같이 닮아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기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세상이 주는 것과 달리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나의 평안 즉 예수님의 평안에 주목하십시오. 성령의 열매 중 하나가 화평 곧 평안입니다. 여기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냥 화평(peace)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 평안(my peace) 즉 주님의 화평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식의 죽음을 통보받는 순간, 아니면 건강검진 후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또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 발생했을 때 두려움과 불안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통제하고 있는 사람은 그분의 화평으로 인해 평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들이 주어질 때 우리가 노력한다고 평정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김으로 그분이 우리를 장악하고 계실 때만 우리는 평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5절, 26절을 보십시오.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으며 이것들을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26 위로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분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였든지 너희가 그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신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랑할지도 모르고, 우리는 어떻게 평안을 가져야 할지도 모르며 또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온유하게 대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가르치시겠다고 하십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어떠한 요구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신다고 착각을 합니다. 교회의 회원도 늘어나고, 헌금도 늘어나고, 구령도 잘 되고, 한마디로 하나님께 구하기만 하면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기대하고 계신다면 당신은 육신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 그분의 성품 즉 성령의 열매를 우리를 통해 재생산하셔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도 사랑하고 괴로운 상황에 쳐해도 기뻐하며 거칠게 구는 자들에게도 부드럽게 대해 주고 슬픈 일이 닥쳐도 화평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부탁을 하고자 합니다. 이번 주제에 대해 공부하는 동안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 보겠다든지 죄를 끊어 보겠다든지 새롭게 변화를 시도해 보겠다는 이런 결심이나 기도는 하지 마십시오. 단 한가지, 오직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장악하시고 통제해 주시도록만 기도하십시다. 그것이 이루어지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이것저것 다 내려놓고 오직 한 가지만 기도하십시다. “주님 저를 장악하셔서 주의 통제하에 두시고 저를 통해 주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바 그것을 이루소서.” 오직 이 한 가지 기도드리시기 바랍니다. 아멘.  
2009-05-01 18:28:56 | 관리자
책 소개: 성령의 열매(제임스 낙스 저, 김영균 역)      성도들의 삶에 유익을 줄 책을 소개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안다고 하는 이들 중에 삶의 변화가 없어 어려움을 겪는 분이 많습니다. 이번에 낙스 목사님이 지은 성령의 열매를 소개하며 또 앞으로 기회가 되는 대로 본 사이트에서 전문을 올리려 합니다. 게재를 허락해 주신 김영균 목사님과 진리침례교회가 운영하는 도서출판 킹제임스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출판물을 인쇄하는 데는 재정이 많이 들어갑니다. 독자들께서 이런 책들을 구매해 주셔야 사역이 유지될 수 있으니 출판사로 연락해서 구입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도서명 : 성령의 열매 / 출판사 : 도서출판 킹제임스* 가   격 : 12,000원 / 판    형 : 신국판 변형(150x220)* 지은이 : 제임스 낙스(James W. Knox) / 번   역 : 김영균 형제* 교제구입 문의 : 02-856-1997 [주소는 아래 사이트 참조] ◈ 지은이 : 제임스 낙스(James W. Knox) ............................................................... 제임스 낙스 형제는 1958년 2월 26일 루이지애나의 배턴루지에서 태어나 줄곧 플로리다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플로리다 주립대학에서 영어와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제임스 형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1976년 12월 17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구세주로 영접하였고 이듬해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제임스 형제는 1987년 미국 플로리다의 디랜드에 성경침례교회를 세운 목회자이다. 그는 109개 나라에 성경공부 자료와 설교테이프 자료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전세계의 형제 자매들에게 보급하고 있으며 1988년부터 지금까지 백 30만 개의 자료들을 보급해왔다. 제임스 형제는 테이프사역과 출판문서사역을 통해 세계 곳곳의 지체들에게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자료들을 보냄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이 가능하도록 올바른 지침을 마련하고 지금도 그들에게 아낌없는 격려를 보내고 있다. ▣ 제임스 낙스 홈페이지 : http://www.jamesknox.com 역자의 말 진리침례교회 창립 10주년을 맞이해서 제임스 낙스(James W. Knox) 형제님(현 미국 플로리다 딜랜드 소재 성경침례교회 목사이며 딜랜드 성경 신학원 원장)의 설교집 성령의 열매를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 메시지를 듣고 번역하면서(아직은 책자로 출간되지 않고 다만 테이프로만 제작되어 있으므로 들으면서 청중에게 알아듣기 쉽게 통역해 주는 마음으로 구어체 그대로 쉽게 번역하였으며 필요시 약간의 의역과 보충설명이 있음을 양해바랍니다.) 제 자신이 얼마나 큰 축복과 깨달음과 도전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었는지 뭐라 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간 메시지 하나하나를 소책자 형태로 배포해 왔는데 예외 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큰 유익을 얻었음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 권의 책자 형태로 만들어 더 많은 형제, 자매들의 영적 생활을 부요하게 할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감사와 아울러 읽는 독자 모두의 마음에 역사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981년 거듭난 이래 지금껏 늘 마음속에 박혀 있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나니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구원받은 후 내 삶의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계4:1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요15:8)임을 알면서 매번 로마서 7장의 악순환을 거듭하던 경험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워치만니), “진정한 영적 생활”(프란시스 쉐퍼),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L. E. 맥스웰)에 이어 마음을 시원케 해주는 답을 제시해 준 것이 바로 이번 책 “성령의 열매”였음을 고백합니다. 그간 성령의 열매에 관한 메세지를 여럿 접해 보았으나 이번만큼 명쾌하고 확실하게 깨달은 적은 없었습니다. 아마 제 주변의 사랑하는 지체들뿐 아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러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이 책을 통해 주의 자녀들에게 복을 주셔서 많은 열매를 맺게하사 영광을 받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 2007년 6월 3일 역자 김 영 균  
2009-05-01 18:28:04 | 관리자
성령의 열매: 성령님께 온전히 내어드림/사랑 2   우리는 성경이 성령의 열매라고 칭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재생산해 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라고 간단히 정의를 내렸습니다. 이 성품들과 속성들은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에 의해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달성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렌지 나무를 심은 후 물을 주고 비료도 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오렌지를 생산해 낼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수도 있고 기도를 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을 위해 수고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며 섬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령의 열매를 생산해 낼 수는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란 그 칭호 그대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생산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서 21절을 보면,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우상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성령님대신 육신에게 자신의 삶의 통제권을 넘긴 사람이 외적으로 드러내는 모습들입니다. 반면 22절 말씀을 보면 이것들과는 대조적인 것들이 나와 있습니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24절, 25절을 잘 주목하십시오. 사실 대다수의 구원받은 거듭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내어 맡기질 않습니다. 이들은 구세주께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늘나라로 데려가 주실 것을 부탁하였으며, 지금 현재 구원의 보장 속에서 하늘의 소망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기뻐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문제는 이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 주님을 부른 그 시점부터 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인도될 그 사이 동안(즉 이 세상의 삶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삶을 통제하시도록 거의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19절에서 21절까지에 열거된 죄들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서조차 여전히 발견된다는 사실로 보아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간음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속한 삶을 살고 있는 여자는 음행에 연루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불화의 창시자가 아니시며, 다툼과 이단 파당의 창시자도 아니십니다. 위에 언급된 모든 것들은 육신의 일들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는 자들 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슬프게도 이런 육신의 일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도 눈에 띈다는 것을 우리 각자도 때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비록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성령님의 통제하에서 걷기보다는 육신의 명령에 따라 걷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말씀드릴 것은 여러분의 구원이 다름 아닌 죄에 대한 확신과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엄청난 사실을 깨닫게 됨과 구원을 얻기 위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써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이 단지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난 신자들의 매일의 삶에서 매순간 일어나야 하는 경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매일 매일의 나의 삶 속에서 나의 육신의 죄들에 대해 인정하고 나로서는 그것들을 이겨낼 수 없음을 확신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을 얻고자 그분께 겸손하게 다가갔던 것과 똑같이 그분께서는 내가 육신에 대해 승리하기 위해서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나의 능력으로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나는 주님께 나아왔고 그분께서 구원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까? 나로서는 안 됩니다. 나는 구세주께 나아왔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령님께 나아와 그분께 온전히 의지하여 내 자신을 내어드릴 때 그분께서 내 안에 그분의 열매를 생산해 내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을 놓치지 마십시오. 잠시 후 그 구절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 29절을 보십시오.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 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그분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께서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약 여러분 가운데 지난번 이 구절을 표시해 두지 않으셨다면 지금 표시해 두십시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구원받은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여러분을 하늘나라로 데려가시기 위해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늘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언젠가 휴거되어 다가오는 진노만을 피하라고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도 우리가 얻게 될 유익 중 하나이기는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목적은 나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내 안에서 자신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재생산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저와 상호반응을 보이기를 원하시며, 그분께서는 저로 하여금 그 상호반응 시 올바로 반응해서 사랑이 생산되기를 원하십니다. 잠깐 주목하십시오. 만약 사랑이 성령님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사랑은 간단하고 가벼운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 사랑은 육신에 의해 생산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이 잘 되어가기 때문에 생기는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기쁨은 육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그런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필요없습니다. 우리는 끔찍한 환경 속에서도 유지될 수 있는 화평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랜 고통을 수반하는 그런 인내를 말하고 있으며, 또한 성질을 낼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서 유지되는 절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상황이 좋지 못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선을 이루게 됩니다. 잘 보십시오. 우리는 일이 잘 되어 가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도우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일이 잘 안 되면 그것은 마귀의 방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바대로 나를 대해 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람들이 나를 잘 대해 주지 않으면 그것은 마귀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잘 되든 못 되든 비록 하나님께서 직접 명령하시지는 않았을지라도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허락하에 발생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드리게 됩니다. “저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저의 마음속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갈망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로마서 5장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언급되어 있고, 요한복음 14장에는 하나님의 화평이, 느헤미야 8장에는 주님의 기쁨이, 시편 18편에는 하나님의 부드러움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열매가 나오는데 우리, 즉 우리 육신은 무엇을 원합니까? 육신은 자기가 다룰 수 없는 상황이나 환경을 원치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가도록 그렇게 우리를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이끄셔서 우리 육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깨닫도록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십니다. 이로써 우리는 자신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와 구원을 받게 되며 또한 우리의 인생을 성령님께서 통제해 주시도록 내어 맡기게 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불친절할 때, 내 육신은 즉시로 맞받아칩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입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친절한지 아니한지가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불친절하게 대하는 그 사람에게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통제하에서 친절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만약 이런 경우에 내가 친절할 수 없다면 그 상황에서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3절을 보겠습니다. 우리를 부르사 영광과 덕에 이르게 하신 분을 아는 것을 통해 그분의 신성한 권능이 생명과 하나님의 성품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도다 이 말씀에 따르면 내가 구원받았을 때, 나는 단지 영생만 받은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순간부터 그리스도처럼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생명에 속한 것 뿐 아니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디도서 역시 동일한 취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도서 2장 11절, 12절 말씀입니다. 11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12 우리를 가르치시되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우리가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구원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구원과 함께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르침, 즉 지침도 주셨다고 합니다. 다시 베드로후서 1장 3절에 따르면 그분에 대한 지식을 통해 우리를 영광과 덕에 이르도록 하신다고 합니다. 단지 하늘나라에 이른다고 하지 않은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영생을 주시고, 하늘에 저택도 주시고, 영광스러운 몸과 황금으로 된 거리가 있는 새 예루살렘도 주시고, 지옥으로부터 벗어나는 축복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을 받았고 받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그분의 덕(virtue)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베드로후서 1장 4절을 보십시오. 그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나니 이것은 너희가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것을 원할 수 있는 그런 성품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담의 죄악된 성품에서 해방시켜, 자신의 신성한 성품을 우리에게 매일 나누어 주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늘나라에 가는 것만을 구원으로 생각한다면,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하늘나라에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곳에 이르기 전에 자신의 성품과 마음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의 삶을 통해 그 성품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4절에서 이 세상은 부패한 곳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 부패한 세상에서 부패되지 않고 승리할 방도는 무엇입니까? 이 세상 안에 있는 부패는 육신의 욕망으로 인해 생긴 것으로 이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 자신을 부인함으로 육신을 동결시키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통제하시게 되면 정욕(욕심)으로 인해 세상에 있는 썩을 것(부패)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승리의 길을 가는 대신 세상에 대해 불평하면서 이 세상을 깨끗케 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하시고 우리의 생각을 깨끗케 하시면 이 세상이 아무리 더럽다손 치더라도 결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5절을 보십시오. 이것과 더불어 열심을 다하여 너희의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이것과 더불어”라는 말은 3절과 4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외에”라는 뜻입니다. 8절을 한 번 더 보겠습니다. 이것들이 너희 안에 있어 풍성하면 그것들이 너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 빈약하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려니와 여기서 주목할 말은 MAKE(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열매 맺게 “할 수(MAKE) 없고” 5절, 6절, 7절에 나와 있는 것들이(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 우리를 열매 맺게 “한다”(MAKE)는 것입니다. 비록 당신이 모든 예언을 꿰뚫고 세대주의에 정통하여 환난, 휴거, 그리스도의 심판석, 천년왕국 등에 대한 온갖 지식을 다 습득하였다고 할지라도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당신을 내어드려 헌신하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지식은 당신의 삶에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각 성경의 개요를 다 알고 주제를 다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다한들 그것이 당신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과 평안이 있음을 입증해 줄 수는 없습니다. 지식이 있다고 해서 당신 안에 절제(temperance)가 있음을 알 수 없습니다. 비록 그 지식이 주님에 관한 지식이라 할지라도 지식이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고, 구령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그의 삶에 갈라디아서 5장 22절, 23절에 나오는 그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엄청난 “영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육신적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공부를 많이 하고 설교도 많이 듣고 신학교를 나왔다 할지라도 자아를 부인하고 육신의 욕심을 성령의 통제하에 내려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구원도 받았고 성경에도 능통한 사람이 자기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지식이 아무리 풍성할지라도 지식이 열매를 맺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듭났지만 남편에게 전혀 축복이 되지 못하는 자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자매는 이웃을 주님께 인도도 하고 성경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지식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좌절하진 마십시오. 우리의 영적 성장은 점진적인 과정이지 단 한 순간에 달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후서 1장 5절을 보시면 “열심을 다하여”가 첫 단계임을 보여줍니다. 사실 우리가 거듭난 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아는 것부터 열심을 내라고 하십니다. 주께서 우리의 원함(열심)을 보시면 첫 단계에서 둘째 단계로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의 열심(Diligence)을 하나님께서는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처럼 거룩하게 되기를 진정으로 원하는지 그렇지 아니한지를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다윗의 간음과 살인은 육신의 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다윗은 또한 거짓말도 하고 속임수도 썼습니다. 이 모두 다 육신의 일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다윗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자”라고 합니다. 비록 온갖 육신적 죄를 지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 언젠가는 나도 거룩하게 될 날이 있으리라.”고 갈망했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보십시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주님의 마음을 따르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 중 우두머리를 사용하심은 그가 첫 출발로부터 부지런히 더 나아가고자 하는 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베드로후서 1장 5절로 가겠습니다. “열심을 다하여 너희의 믿음에 덕을 더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받은 당신은 성경공부가 만족스럽고 즐거우신가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덕을 갖춘 남자, 혹은 덕스러운 여인으로 만들어 주기를 원하십니까? 저는 덕스러운 여인이 어떤 여인인지 성경을 펴서 인용할 줄 아는 아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덕을 갖춘 아내를 원합니다. 내 아이들은 아이들을 키우는 방법을 성경에서 모두 인용할 수 있는 아버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그런 방법대로 아이들을 키우는 아버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지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형제보다 실제로 형제를 사랑하는 형제들이 필요합니다. 보십시오.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덕(virtue)입니다. 즉 하나님의 덕스러운 성품이 우리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보니 “덕에 지식을 더하라.”고 말씀합니다. 무엇 때문에 지식이 필요합니까? 여호와의 증인을 이기기 위해선가요? 아니면 은사주의가 틀린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까? 잊지 마십시오. 성경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들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물론 성경 지식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복음도 전하고 거리설교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기록은 대부분이 여러분과 저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들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그 다음 6절에 보시면 “지식에 절제(temperance)를 더하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성서들은 이 단어를 “자기통제”(self-control)라고 고쳤습니다만, 자기가 자기를 통제하면 즉시로 실패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절제란 우리가 아닌 성령께서 우리를 통제하심을 의미합니다. 그래야 절제가 이루어집니다. 그 다음에는 인내가, 그 다음에는 경건이 나와 있고, 17절에는 형제우애(brotherly kindness)가 나와 있습니다. 순서에 주의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시기 전, 즉 우리가 경건(godly)에 이르기까지는 결코 우리는 형제에게 친절하게 대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은 사랑(charity)입니다. 이 단어는 형제를 향한 마음으로부터의 사랑을 뜻합니다. 사랑을 보이기 전에 우리는 그 사람에게 먼저 친절히 대해야 합니다. 기록된 순서가 중요한 이유는 이 구절들이 점진적 성장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아직은 완성품이 아닐지라도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면 낙심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즉 구원받은 후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이 단계를 하나둘 씩 밟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첫 단계부터 한 단계 한 단계 밟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첫 단계가 바로 열심(diligence)을 품는 것입니다. 원하는 마음(willing mind)입니다. 그때부터 주님의 인도가 시작됩니다. 고린도전서 3장으로 가서 지식에 관한 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결혼하기 전 아내도 아이도 없었던 젊은 청년 시절,  목사도 되기 전에 거리에서 열심히 전도하던 시절, 저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성경공부를 했었습니다. 그때 저는 유대인과 이방인과 하나님의 교회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을 영적인 어린 아이로 여겼습니다. 성경 말씀으로 세대를 올바르게 구분할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실로 갓난아이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정말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그렇다면 성경을 통해 영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영에 속한 자에게 말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에게 말하는 것같이 하였노라 “육신에 속한”(carnal)이란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그 단어의 의미는 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하였도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너희가 육신에 속하여 사람들처럼 걷지 아니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육신적이란 것은 성경을 많이 아느냐 모르느냐 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육신적이란 당신이 성경을 많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원받기 전처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육신 안에서 지옥을 향해 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의 내 모습은 육신 안에서 하늘나라를 향해 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에 관한 한 나는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결코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제대로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면 휴거 시 변화받을 것은 단지 우리 몸이 유일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4절을 보십시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나는 바울에게 속하였다, 하고 다른 이는 말하기를, 나는 아볼로에게 속하였다, 하니 너희가 육신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냐?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육신적일 경우, 우리는 톰(Tom)과는 친하게 지내지만 빌(Bill)과는 친하게 지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톰은 나와 의견이 같지만 빌은 나와 의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윗(David)은 나와 동일한 취미를 갖고 있으므로 친하지만 요한(John)은 취미도 틀리고 이웃도 아니어서 친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제 문제의 핵심을 아시겠습니까? 즉 자기 육신이 어울리기에 알맞은 사람들과만 교제할 때 바로 그 사람은 육신적인 상태에 있다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그 단계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38절로 가겠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혹시 여러분이 세대주의에 입각해서 이 시대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여 다른 사람들을 올바르게 대하지 않으려 하신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는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마태복음 5장 38절입니다. 그들이 말한 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한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것은 사람의 법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네가 내게 해준 대로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만을 위해 나는 기도하겠다, 그가 나를 사랑하니 나도 그를 사랑하겠다, 그야말로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살던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 없이도 가능합니다. 계속해서 39절에서 42절을 보겠습니다.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악에게 맞서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그에게 다른 뺨도 돌려대며 40 또 누가 너를 법에 고소하여 네 덧옷을 빼앗으려하거든 겉옷까지 가지게 하고 41 또 누구든지 너로 하여금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와 함께 십 리를 가며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고 네게 빌리고자 하는 자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 이 구절들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구절들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만약 내가 뺨을 맞고 고소를 당하고 옷을 빼앗겼을 경우, 과연 나는 예수님께서 뺨을 맞으시고, 예수님께서 고소당하시고, 예수님께서 옷을 빼앗긴 것으로 간주하고...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한 자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목숨을 내어주신 것처럼 주님께서 나를 통해 그렇게 행하시도록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사람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저지른 일만을 보지만 영적인 사람은 비록 이들이 내게 한 짓은 잘못됐지만 하나님께서 그로 인해 내 생애 안에 이루시고자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주목한다는 것입니다. 4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말한 바, 너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한 것을 들었으나 끝부분에 “들었으나”에 주목하십시오. 주님께서 “배웠다고” 안 하시고 “들었다고” 하신 것에 주목하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많은 말씀을 듣기는 하나 배우지는 못합니다. 그 증거는 그들이 말씀을 실행에 옮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실 저도 제 인생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 말씀들을 엄청나게 들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설교를 들었지만 그 중 제 행실을 바꾼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듣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44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악의를 품고 너희를 다루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아마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렇게 응수하실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오, 노(No)! 불가능해!”,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니… 오, 노(No)!”,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라니, 말도 안 돼! 불가능하다니까!” 아마 누구나 다 그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저를 사랑하고 저를 좋아하며 좋은 교제를 갖는 분들입니다. 그러니 이 설교하는 데는 아무런 힘도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도움도 필요 없고 매주 늘 하던 대로 그냥 즐기면서 즐겁게 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이 끝난 후 은혜로운 설교였어, 참 좋았다고 하면서 응수하실 것입니다. 서로 좋은 관계에 있는 사람들끼리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 삶에 나의 원수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 나를 괴롭히기로 마음먹은 사람, 내게 못된 짓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왜냐고요? 그것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능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이루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과 또한 환경을 이용해서 나로 하여금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나아오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시지만 저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축복하라고 하시지만 저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잘 해 주라고 하시지만 저는 못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육신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우리를 잘못 대하는 자들에 대해 점점 더 큰 앙심을 품게 되고 미움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고쳐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배우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44절 끝부분을 보십시오. 44절 전체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여기서 “위하여”(for)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그들에 대해(at), 그들에 대하여(about)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존(John)이 나에게 못되게 굴었다고 합시다. 속으로는 못마땅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가서 “반갑습니다. 존” 이렇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안 보고 있는데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아버지, 존 형제를 축복하시고 그에게 좋은 날을 주시며 그의 가족과 가정을 축복해 주십시오.”라고 진정으로 기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으라, 바라바를 우리에게 내달라.”고 외치는 군중을 향해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하신 주님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주님으로 하여금 이번에는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못되게 행동하는 그들을 용서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 중 제가 용서한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확실히 저는 그들을 용서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는 순간 내 속에 있는 무엇인가가 다시 꿈틀거립니다. 아직도 내 안에는 그들이 내게 저지른 그대로 그들도 당하기를 바라는 뭔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용서가 안 되었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든, 무슨 말을 했든, 어떻게 우리를 대했든지 간에 우리가 진정으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4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하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되리니” 이 말씀은 로마서 8장 29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가 아들이라면 당연히 아버지와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당신은 “그렇습니다. 저는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답변하겠지요. 그때 상대방이 “그럴 줄 알았습니다. 당신은 당신 아버지와 많이 닮았으니까요.”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제 인생에 있어 훌륭한 성경교사를 여럿 보았습니다. 훌륭한 전도자, 사역자들도 많이 보았습니다만 하나님 아버지 같은 아들은 사실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경건한(godly)사람은 보기가 드뭅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아버지 같은(like) 아들이 드문 것입니까? “그리하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되리니 이는 그분께서 자신의 해를 악한 자와 선한 자 위에 떠오르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자나 불의한 자 위에 내려 주시기 때문이라.” 여기서 “자신의 해”라고 했습니다.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럼에도 악한 자에게도 비추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잘해 주는 사람, 우리에게 호감가는 사람, 그럴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사랑을 보이며 선하게 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악한 자라도 선하게 대해 주십니다. 이분이 바로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이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주님은 단지 우리 안에서 살기만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일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억누르고 슬프게 합니다. 성령님께서 어떤 것을 말씀하시려면 “내버려두세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라고 하면서 묵살해 버립니다. 오늘 집에 가서 마리화나 봉지를 꺼내 쓰레기통에 내던져 보십시오. 그렇게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바꾸지 아니하시면 다음 날 또 찾게 됩니다. 육신은 그대로 육신이기 때문입니다. 집에 가서 술병을 내던져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바꾸지 아니하시면 다음 날 또 술을 찾습니다. 수백 번을 회개하고 자백기도를 할지라도 개가 토한 것으로 되돌아가듯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바꾸셔서 우리로 더 이상 이 세상의 행로와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께서 우리의 인생을 통제하기를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46절은 “만약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한다면 무슨 보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리하지 않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를 선대하는 사람에게 선하게 대해 주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47절, 48절 말씀입니다.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행하는 것이 무엇이냐? 세리들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여기서 완전이라는 말은 “죄 없다”(sinless)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 그 어디에도 그런 뜻으로 쓰이지 않습니다. 완전(perfect)이란 말은 성경에서 '완성된', '끝이 난'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영접할 때, 그분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죄가 용서되어 깨끗게 된다는 진리는 이 세상에서나 또 영원에서도 변하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그것으로 내가 완성품이 된 것은 아닙니다. 만약 내가 이미 완성되었다면 어째서 신약성경은 내가 구원받은 후 해야 할 것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일이 더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내 안에서 무언가를 하시고자 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제가 숨을 쉬는 그 순간부터 그리고 첫 번째 죄를 지은 그 순간부터 구원하실 준비가 다 되어 있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그렇다고 말씀합니다. 저에겐 이 진리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는 이미 먼 길까지 나가 있었습니다. 탕자를 안아 주려고 말입니다. 당신은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당신이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구원하시려고 준비하셨을 때가 아니고 당신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을 구원하시라고 허락하는 그 순간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도 하나님께서 준비되신 때가 아니고 여러분과 제가 우리 자신의 육신의 죄들을 내버리고 돌이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려 그분께서 저와 여러분을 통제하시도록 허락하는 그 순간이란 말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그저 성경 지식만 머릿속에 잔뜩 집어넣은 모습에서 열매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는 모습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더 이상 변명을 하거나 둘러대는 짓을 그만두고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내어드리는 것 말입니다. 구원을 받았을 때도 우리가 주님께 구원하시도록 요청할 때까지 기다리셨듯이 성령의 열매 맺는 일 역시 우리가 주님께 그렇게 주시도록 요청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환경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돈의 부족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육신 안에 사는 것을 몹시 만족해 하고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모습이 잘못되었다고 말씀드리고, 이것을 바로잡아 보려고 수백 번 노력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회개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내어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백이 진실된 것인지 아닌지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이 진정 담배를 끊고 싶은 그 순간 담배를 끊을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신이 정말 원하는 순간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진정으로 원하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의 연약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신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수준에 도저히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돕고 계십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오늘 말씀이 끝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시면서 “오늘 목사님이 성령의 열매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지식으로는 열매를 못 맺는다고 하셨는데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간단 말씀이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받으실 때 어떻게 기도해야 구원받는 줄 알고 계셨습니까? 그저 하나님께 나아갔더니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셨잖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성령의 열매를 맺을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저 그분께로 가서 “하나님의 성령이시여 저를 붙드소서.”라고 하면 됩니다. 26절 말씀에 여러분과 저는 무슨 기도를 해야 할지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 모른다고 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살피고 계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진실된 마음으로 “주여, 저는 선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오래 참고 싶습니다. 저는 부드럽고 온유하게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시는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진짜라고 판단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보시고 그제서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는 작업을 하십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마음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면 성령님께서는 그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로마서 8장 27절입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시기 때문이니라. 여러분과 제가 이 말씀을 듣고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할 때, 성장할 때 사랑받지 못해서 사랑이 없다고 말씀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에서부터 가인을 비롯해 그 누구도 사랑을 지닌 채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다. “하나님, 저로 하여금 당신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방식 그대로 사람들을 사랑하게 도와주십시오.” 이 기도가 진정이라면 성령께서 아바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 사람 기도가 진정인 것 같습니다. 내일 그 사람에게 못된 짓을 할 사람을 세 명 보내주시지요.” 이건 정말입니다. 다음 날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면 우리는 육신 안에서 “하나님, 어제 제가 사람들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렇게 기도할 것이고,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거야. 너에게 잘해 주는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나에게 기도한 건 아닐 테지. 그거야 기도 안 해도 사랑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기도응답으로 네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보냈다. 자! 내가 도울 테니 사랑하거라.” 오늘 이 시간 여러분과 저는 우리가 마음먹는 만큼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제하시도록 우리가 지금 결정하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우리 모습 그대로 남게 됩니다. 한 가지 잊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구원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간에 육신 안에 살고 있기에 우리를 언젠가는 힘들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누구도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그날, 모두가 우리를 잘 대해 주는 그날을 이 세상에서는 결코 맛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들을 바꾸시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복의 근원으로서 사셨듯이 저와 여러분도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을 가져다주는 삶을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모든 지식을 갖추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지식은 열매를 맺지 못할 수 있습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지식은 육신만을 강화시킵니다. 최악의 경우가 있다면 육신적인 사람이 성경구절을 척척 들이대면서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이보다 끔찍한 일은 없습니다. 지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계속해서 성령의 열매에 대해 공부해 가실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 마음 안에서 역사하셔서 단지 설교를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 설교가 우리 마음에 자리 잡아 우리를 변화시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도우소서! 아멘.  
2009-05-01 18:26:43 | 관리자
성령의 열매: 열매에 대한 정의/두 성품의 내면적 갈등   우리는 현재 성령의 열매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 성령님은 신격의 제 3위이신 분이십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하늘 왕좌에 앉아 계신 아버지 하나님과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던 아들 하나님(그런데 이 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자들 안에 내주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성령 하나님, 이렇게 삼위일체이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 안에 내주하시는 목적은 여러 가지이나 우리는 이번 성경공부를 통해 오직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재생산하시기 위한 그 목적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아들을 십자가로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신 아들 하나님이 성령의 모습으로 성도 안에 살기 위해 들어오신 바 그 목적은, 그분을 십자가로 가게 하여 우리의 죄들로 인해 죽게 했던 그 뜨거운 사랑이 여러분과 제 안에서 넘쳐나도록 역사하셔서 우리로 다른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만큼 되도록 하시고자 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성경은 성령의 열매들(fruits)이 아닌 단수(singular) 즉 열매(fruit)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아홉 가지는 성령의 열매들이 아니라 한 열매의 아홉 가지 특성인 셈입니다. 성령께서는 한 가지 열매만 생산하시는데 그 특징이 아홉 가지인 셈입니다. 성령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첫째 사랑, 둘째 기쁨, 셋째 화평 등등 이런 식으로 아홉 가지 열매를 맺으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한 인격을 내 안에서 만드시고자 합니다. 성령님께서 이것을 달성하시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갖추고 있는 아홉 가지 특성 전체가 자동적으로 우리 안에서 생겨나게 됩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28절까지 보겠습니다. 26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形象)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가축과 온 땅과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을 지배하게 하자, 하시고 27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 28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에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하시니라. 우선 여러분과 제가 오늘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아버지 안에, 그리고 할아버지, 또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이렇게 이어 올라간다면 결국 노아, 그리고 아담, 즉 최초의 남자인 아담 안에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게 해 주는, 즉 생식이 가능한 씨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다 아담으로부터 육체의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에게는 동일한 성경이 필요하고, 동일한 구원 계획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동일한 죄가 모두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모든 남녀노소에게 필요한 것은 동일한 죄로부터 해방 받아 동일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한 사람으로부터 나왔기에 그렇습니다. 창세기 1장 11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자기 종류대로 열매 맺는 과일 나무 곧 열매 속에 씨가 있는 과일 나무를 땅 위에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이 말씀에 따르면 과일은 자체로 번식능력이 있는 씨를 갖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12절 말씀입니다. 땅이 풀과 자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자기 종류대로 열매 맺는 나무 곧 열매 속에 씨가 있는 나무를 내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말씀에 의하면 과일은 그 안에 씨를 갖고 있다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성령의 열매(fruit)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그분께서는 자신을 재생산 즉 번식시킬 수 있도록 우리 몸 안에 씨를 가지고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A)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누가복음 8장 5절을 보면 씨 뿌리는 자가 자기 씨를 뿌리러 나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이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베드로전서로 가겠습니다. 1장 23절입니다.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born again)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 저는 과거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지옥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구원받고 싶습니다.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을 인하여 저를 구원해 주소서.”라고 말씀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저에게 새로운 출생 즉 거듭남(다시 태어남)이라는 두 번째 출생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제가 첫 번째 출생했을 때는 단지 인간의 형상을 따라 인간으로서 태어났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다시 태어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출생, 두 번째 출생, 영적 출생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지금 읽은 베드로전서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여러분과 저는 인간의 씨로부터 얻은 육신의 몸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썩을 씨이기에 부패될 그날을 향해 하루하루 전진해 가고 있으며 결국 육신은 완전히 썩어질 날을 맞게 됩니다. 이것을 막을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쩌면 의학기술을 동원하거나 잘 관리하여 썩음을 미루어 볼 수는 있겠으나 완전히 멈추게 할 도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 육체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태어난 또 다른 나가 들어 있고, 이는 새사람이라 불리며 썩지 않을 씨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에서는 겉사람(육신)은 날마다 쇠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매 순간 새로워진다고 합니다. 나는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는 ‘나’를 내 안에 지니고 있는 반면 내 겉사람은 이 새사람과 하루도 같이 지내기 힘든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이 둘은 전혀 공통점이 없으니까요. 요한일서 3장 9절의 “하나님께로 난 자”는 여러분이 쳐다보고 있는 나의 겉사람에 대한 언급이 아닙니다. 나의 겉사람은 하나님께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나의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나는 겉사람인 동시에 속사람 그러니까 둘인 셈입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두 사람입니다. 이 둘은 서로 논쟁을 벌이고 다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한일서 3장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분의 씨가 그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 그는 하나님에게서 났으므로 죄를 지을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장 5절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또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여기서 물에서 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과 저의 겉사람 즉 볼 수 있는 육신에 대한 것이고, 또 성령에게서 난다고 한 것은 속사람에 대해 언급한 것입니다. 말씀에 의하면 두 번의 출생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3장 6절에 “육신에서 난 것은 육이요”라고 하셨는데 여러분이 보고 계신 저는 제가 거듭난 20년 전의 육신과 똑같은 육신입니다. 이 육신은 제가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육신이며 여전히 죄로 가득하고, 여전히 천하고 반역적이며 처음부터 그랬듯이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모양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육신은 여전히 육신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난 것은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는 그것이 썩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구원받지 못하여 지옥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면,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당신은 죽을 때 하늘나라로 가게 될 것입니다. 놀라운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문제는 구원받은 때부터 하늘나라 가기까지 그 사이에 어떤 모습을 띄게 되느냐입니다. 이 둘 사이에 우리에게는 가족, 직업, 교회, 이웃, 사회 등등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놓여 있습니다. 이 기간을 살아가는 동안 구원받은 우리는 육신과 영 사이에 투쟁을 벌이게 됩니다. 그 둘 사이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육신대신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과 제 안에는 아담의 씨가 들어 있기에 따라서 아담의 생식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즉 아담의 열매를 맺으며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반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씨가 내 안에 거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재생산하는 생식능력을 갖추고 있는 셈입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제가 하나님이라든가 여러분이 하나님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실 때 보여주시는 속성을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보여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생산하시고자 하는 열매를 생산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맡길 때 가능한 일입니다. 창세기 1장으로 다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 종류대로 열매 맺는 과일나무 곧 열매 속에 씨가 있는 과일나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오렌지는 오렌지 씨앗에서 나오고 멜론은 멜론 씨앗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는 아담을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재생산해 낼 수 있는 능력이 다 들어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중 어떤 것이든 생산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디도서 2장 11절을 보면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 11절 말씀은 구원받기 전 우리의 모습에서 구원으로 넘어오는 단계를 보여줍니다. 그 다음으로 13절을 보십시오. “저 복된 소망과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늘로 가게 될 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는 구원도 못 받았던 내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고, 13절에서는 이제 구원받은 내가 주님께서 나를 하늘로 데려가실 때를 기다리고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12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를 가르치시되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우리가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이 구절에 따르면 여러분과 저는 이 현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은혜로 구원하시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사 우리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육신이 아닌 영 안에서 살아가도록 가르치고 계십니다. 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세상적인 일들에 관해 왈가왈부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그것은 그들이 비록 구원은 받았으나 여전히 육신을 따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구원은 받았습니다. 그러나 불경건한 것들을 부인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즉시 비판합니다. “도대체 어째서 저런 짓을 하는 건가? 저렇게 세상적이고 육신적이며 속될 수가... 상종하기가 힘들겠구만.”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이런 식의 비판 역시 육신적일 뿐입니다. 우리 안에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 안에서 역사하셨던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시고 주님께서 이 땅에서 사신 것처럼 우리가 살도록 가르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7장을 보십시오. 이 말씀에 우리는 몇점이나 나오는지 스스로를 평가해 봅시다. 7장 16절부터 보겠습니다. 16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니 사람들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두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썩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또 썩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육신의 일들”은 드러나게 마련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영적인 체 해 보아도 당신이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육신적인 일들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다는 말씀에 따르면 씨앗을 심을 때 그것이 무슨 나무인지 몰라도 나중에 가지가 나오고 열매를 맺게 될 때 결국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는 다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성령께 내어드리지 않는다면,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쳐서 바르게 살도록 해 주시지 않으면 결국 우리의 열매는 나쁜 열매로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분께서 역사하시면 우리의 열매 역시 좋은 열매가 맺히기 시작합니다.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야고보서 3장 6절에서 10절입니다. 6 혀는 불이요 불법의 세계라. 이와 같이 혀는 우리의 지체들 가운데 하나로 온 몸을 더럽히고 본성의 행로에 불을 붙이며 자기도 지옥불 위에 놓여 있느니라. 7 모든 종류의 짐승과 새와 뱀과 바다에 있는 것들은 길들일 수 있고 또 사람이 길들여 왔으나 8 혀는 아무도 능히 길들이지 못하나니 그것은 다스릴 수 없는 악이요 죽이는 독으로 가득한 것이니라. 9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곧 아버지를 찬송하며 또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어진 사람들을 저주하느니라. 10 같은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니, 내 형제들아, 이런 것들이 결코 그래서는 아니 되느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미스터 아담과 미시즈 아담 즉 아담의 후손은 그 누구도 혀를 길들일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9절에 보면 혀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동시에 혀는 또 사람을 저주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끔찍합니까? 동일한 혀가 때로는 아담의 본성을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의 본성을 표현합니다. 우리는 동일한 혀로 하나님을 찬송하기도 하고 때로는 가족들에게 “나는 정말 네가 미워!”라고 쏘아대기도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형제를 보고서 “반갑습니다! 형제님, 잘 지내시죠? 형제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때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때론 “형제가 내게 그런 식으로 하면, 두고보라고 나도 똑같이 해 줄 테니까!” 이런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똑같은 혀로 어쩌면 이렇게 달리 사용할까요? 금방 상냥하게 말하다가 순식간에 독설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혀란 말씀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것은 두 명의 ‘나’가 존재하고 있으며 둘이 동일한 혀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도 내 안에서 이 혀를 사용하려고 하고,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도 이 혀를 사용하시려 하니 내가 누구에게 혀를 내어주느냐에 따라 즉 우리 인생의 주인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순간에 저는 목소리를 높여 단상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오,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주께로 나와 그분의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화를 내며 내게로 와서 침을 뱉으면 내 혀는 당장 “당신 같은 자는 지옥에나 가야 돼! 그렇구 말고!” 이렇게 쏘아댑니다. 통제가 안 되는 것이 혀라는 하나님 말씀이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이미 이런 경험들을 했을 겁니다. 계속해서 야고보서 3장 11절과 12절을 보십시오. 11 샘이 같은 곳에서 단물과 쓴물을 내느냐? 12 내 형제들아, 무화과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느냐? 혹은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을 수 있겠느냐? 그와 같이 어떤 샘도 짠물과 민물 둘을 낼 수 없느니라. 인간은 참 묘한 존재입니다. 단물이 내 입에서 나오는가 하면 쓴물도 내 입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재능을 발휘해 하나님과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동시에 우리의 능력을 발휘해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입니다. 육신과 영, 아담과 하나님, 옛사람과 새사람이 하는 갈등의 모습을 방금 읽은 야고보서 말씀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2절에서 16절로 가겠습니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의 죽을 몸 안에서 군림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정욕 안에서 죄에게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내주지 말며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 자로서 하나님께 드리고 너희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리라. 15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를 지으리요?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누구에게 종으로 내주어 순종하게 하면 너희가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2절 “못하게 하라”, 13절 “내주지 말라”, 14절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할 것임이라” 이 말씀들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권능(power)을 주셨고, 능력(ability)을 주셨으며, 결정할 “기회”도 주셨습니다. 우리 안의 “아담”은 우리를 강요해서 죄를 짓게 하지 못하며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올바르게 살도록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담을 좇아 죄를 택할 것인지 성령을 좇아 주님을 택할 것인지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서 있는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 중간 지점에서 육신의 길이 아닌 성령의 길을 택하고 우리 자신을 성령님의 통제에 내어맡기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통해 우리를 의의 병기로 만드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대 방향을 택하여 육신 쪽으로 기울면 성령께서 슬퍼하시게 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육신이 우리를 지배하거나 능력을 행사하여 우리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내가 육신 쪽을 택할 뿐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시므로 슬퍼하십니다. 에베소서 4장 30절에도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께서 나의 아담의 성품에 통제권을 넘기시는데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일지라도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처럼 무슨 짓이든 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을 주님께 드려 주님께서 우리를 통제하여 올바르게 살 수도 있고 반대로 통제권을 육신에게 내어주어 육신의 일들을 할 수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문제의 초점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사랑, 화평, 믿음… 이 모든 성령의 열매를 내가 맺을 수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내가 맺기를 원하는가의 문제입니다. 내가 진정 이것을 원한다면 그분께 내 자신을 내어드릴 것이고 그리하면 성령께서 내 안에서 열매를 맺으십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 이것이 관건입니다. 자,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서 23절을 읽겠습니다.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19절에 보니 간음, 음행, 부정함과 색욕이 등장하는데 이것들은 성적인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로마서 6장) 이러한 죄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그러한 죄를 짓게 강요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즉 내가 원하지 않으면 간음은 저지를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 인터넷 포르노에 눈길을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분야에서 승리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의(義)의 방향으로 향하게 할 것이요, 그리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이런 죄들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즉 주님께서 우리의 의지를 확인하시면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20절에 보면 우상숭배와 마술이 등장하는데 이것들은 영적인 죄들입니다. 이런 죄들은 우리를 강요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상숭배나 마술 등을 실행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자주 보지만 제가 원하지만 않으면 그들의 함정에 빠져들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 역시 원하는 사람에게만 올무가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증오, 불화, 경쟁, 진노, 다툼, 폭동, 이단파당, 시기, 살인, 술 취함 등이 등장하는데 이것들은 개인적인 죄들로 이 모든 것들 역시 자신이 그 죄를 택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증오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당신에게 행한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당신이 그를 미워하기를 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스스로 증오를 택한 셈입니다. 이단파당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할 때 거짓교리와 연관시키지만 실은 이단파당(Heresy)이란 교회 안에서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파당을 만들려는 시도를 말합니다. 주님의 몸의 분열을 획책하는 것입니다. 이 역시 그 누구도 당신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원하면 얼마든지 그런 짓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죄들은 인간관계와 관련된 죄들로 만약 우리가 우리를 성령께 내어만 드리면 누가 나에게 무슨 짓을 했든, 무슨 말을 했든, 어떻게 대했든 전혀 상관없이 이 모든 죄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담은 결코 이것들을 사용해 나로 하여금 죄 가운데로 데려갈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등장하는 죄는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은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술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술의 문제가 아니고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약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약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마음이 마약을 원하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술을 권하거나 마약을 권할 때 당신이 “안 돼!”라고 말하고 당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면 하나님의 영께서 승리를 가져다주십니다. 그러나 당신이 술과 마약이 가져다주는 쾌락에 마음을 빼앗겨 당신의 몸을 그쪽으로 내어주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막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반대쪽을 살펴보겠습니다. 22절에 보면 “사랑과 기쁨”이 나옵니다. 흥미로운 것은 앞서 살펴본 간음과 음행의 반대가 곧 사랑이라고 하나님께서 대비해 놓으신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셔서 영원토록 당신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루나 한 주 혹은 한 달이나 일 년 정도 지속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육신은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을 추구하나 성령께서는 사랑과 기쁨을 추구하십니다. 세상은 온통 더러운 것들과 색욕에 대해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갖고 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게는 영원한 기쁨과 사랑과 화평이 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은 우상숭배와 마술과 증오를 가져다주지만 나는 그보다 훨씬 좋은 화평이 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종교인들이 섬기는 신은 종교인들을 죽음으로 협박하고 위협하여 강제로 자기를 경배하고 섬기게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모든 것을 자신의 몸에 지시고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두려움이 아닌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육신의 일들 중 불화, 경쟁, 진노, 다툼 등과 대비됩니다. 아담은 자기가 잘못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을 그만두지 못하고 또 다시 잘못을 저지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오래 참으시고 하나님께 잘못 행하는 자들에게도 선하시고 부드러우신 분입니다. 만약 제가 하나님께 저지른 잘못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다 보응하셨다면 저는 이미 오래 전에 흙으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다음 성령의 열매는 믿음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것들은 어떤 것들과 대비될까요? 여러분 알코올을 반대하는 단체에서 사용하는 표어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절제”(temperance)입니다. 왜냐하면 술과 마약은 사람들을 제정신에서 벗어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올바른 정신을 허락하셔서 “절제”하도록 해 주십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시점부터 하늘나라에 가는 시점까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육신의 통제하에서 마치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처럼 살 수도 있고 반대로 성령님의 통제하에서 아무리 이 세상이 부패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23절도 보면 “이 같은 것을 반대할(대적할) 법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성적인 죄들을 금하는 수많은 명령들이 있고, 성적인 죄들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여주는 많은 실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내 삶을 통제하셔서 내가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나는 그 어떤 명령도 경고도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하게 되면 당신의 아내를 취하거나 당신의 딸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에게 이런 명령(계명)이 필요없음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성령께서 그것은 제가 할 짓이 아님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아담의 성품은 너무 부패해서 제약을 가하고, 재갈을 물려 봉쇄를 해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아담들”에게 자유를 주시고자 속박에서 해방시키고자 오셨습니다. 만약 오래 참음이 늘 나와 함께하고 온유함이 내 마음을 장악하고 있다면 나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그 어떤 규범이나 명령도 필요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을 잘 대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1절에서 15절로 가겠습니다. 11 아무도 이미 놓은 기초 외에 능히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나니 이 기초는 곧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12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건초나 짚을 세우면 13 각 사람의 일이 드러날 터인데 그날이 그것을 밝히 드러내리니 이는 그것이 불에 의해 드러나고 그 불이 각 사람의 일이 어떤 종류인지 시험할 것이기 때문이라. 14 어떤 사람이 그 기초 위에 세운 일이 남아 있으면 그는 보상을 받고 15 어떤 사람의 일이 불타면 그는 보상의 손실을 당하리라. 여기 보면 그 일이 얼마나 많으냐가 포상의 기준이 아니고 그 일이 어떤 종류이냐, 즉 양이 아닌 질이 포상의 기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구원받았으므로 하늘로 가게 될 터이나 그곳에 가게 되면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출두하여 이 세상에서 내가 행한 일들이 어떤 종류의 일인가를 판정받게 될 것입니다. 아담 즉 옛사람에 의해 행해진 것은 그 무엇이든지 간에 다 타버릴 것이요,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신 것들은 그대로 남게 되어 그에 대해 나는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왜 하늘나라에서는 오직 주님만 찬양을 받으시는 줄 아십니까? 그것은 오직 주님께서 내 안에서 행하신 것들만 보상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 그분께서 하신 것이기에 당연히 그분께만 찬양이 돌아갑니다. 성경을 읽고,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전도지도 나누어주고 그 밖의 많은 봉사들을 다 하십시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다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그것들 중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진 일만이 보상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셔서 우리 안에서 자신이 직접 일하심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에게 사랑과 기쁨과 화평을 만들어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의 마음과 삶을 취하셔서 자신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자,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과 제 안에는 우리를 죄로 사로잡아 가는 그 무언가가 들어 있어서 우리가 그 죄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얼마 안 있어 즉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그쪽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결국 죄가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바울의 고백 아니었습니까? 내 지체 안에서 다른 한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보기 때문이라. 결국 이런 상태에서는 절망감이 엄습하고 바울의 절규가 터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악순환이야말로 아담이 빠져든 함정이요 평생의 올무인 것입니다. 단지 아담이 한 것이라곤 죄에 기댄 것뿐인데 그 놈의 죄가 아담을 포로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아담이 승리의 방향으로 기울여 기대는 순간 동일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사로잡아 성령의 통제하에 두시고 우리가 원하기는 하나 할 수 없는 그것을 할 수 있도록 능하게(enabling)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과 저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어느 방향으로 기대실 건가요? 무엇을 원하십니까? 여러분과 저는 하늘나라에 가기까지 아담처럼 죄의 법 아래에서 살 수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의존하려고 마음 먹으신다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뜻이니까요. 그것이 그분께서 갈망하시는 바입니다. 주여, 저희를 도우소서. 아멘.  
2009-05-01 18:25:52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