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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 개역개정 등 어떻게 이런 번역이 가능할까?>  누가복음 10장 42절(눅10:42)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개역성경과 함께하며 살았다. 개역성경을 읽고 그것으로 선포되는 설교를 듣고 구원을 받고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25년의 삶을 보냈다. 그 뒤 미국에서 박사 공부를 하며 성경이 한 종류가 아니라 두 종류이고, 이런 일이 발생한 원인은 성경 번역에 사용되는 본문이 한 종류가 아니라 두 종류이기 때문임을 알았다. 하나는 개역 성경, NIV 등 현대 역본 성경들의 반역 대본인 천주교 소수 본문이다. 다른 하나는 루터 성경, 킹제임스 성경, 제네바 성경 등 카톨릭교회에 대항하면 종교개혁을 이룬 종교개혁자들이 지지하고 사용한 프로테스탄트 다수 본문이다. 요즘 존 맥아더 목사님의 <예배>(아가페 출판사)라는 책을 다시 세세히 읽고 있다.     어젯밤에는 너무나 놀라운 것을 발견해서 잠시 적는다. 맥아더 목사님은 2장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에서 예배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함을 설명한다. 그러면서 누가복음 10장 41-42절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다에 대한 이야기를 예로 든다. 그런데 번역된 글과 거기에 인용된 개정개역 성경이 문맥상 너무 맞지 않아 심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 부분의 글은 다음과 같다. 손님을 대접하느라 여러 가지 일들로 마음이 분주하고 힘들어하는 마르다에게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10:41-42)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많은 일들로 마음이 분주하고 힘들어하는 마르다에게 주님께서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라고 하셨을까? 이 성경 구절의 문맥은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오직 그것 하나만이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몇 가지만 하라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처음에 내 눈을 의심하다가 성경 앱을 열고 보았더니 인용된 개역 개정 성경 구절이 맞았다. 맥아더 목사님은 KJV가 아니라 NSAB를 사용하므로 NASB로 10장 42절을 보았더니 다음과 같았다. “but only one thing is necessary,” 이것을 번역하면 “오직 한 가지가 필요하니라.”가 된다. 이렇게 되어야 맥아더 목사님이 말하고자 하는 바 즉 말씀을 듣고 경청하는 것이 예배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고 그런 예배야 말로 오직 단 하나의 예배라는 포인트가 살아난다.  사실 약 40년 동안 킹제임스 성경을 읽고 번역하기도 한 나로서는 이것이 너무나 당연한 의미이고 해석이기에 내 눈을 의심하였던 것이다. 킹제임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에 대해 염려하고 근심하나 한 가지 일이 필요하니라. 마리아는 그 좋은 부분을 택하였으니 그것을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앞에 많은 일(many things)이 나오므로 그 뒤에는 대조적으로 한 가지 일(One thing)이 나와야만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런 식으로 미국 저자의 책이 번역되고 개역 개정 성경을 인용 구절로 적어 놓으면 저자의 의도, 특별히 예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되고 만다. 하도 이상해서 NIV를 보았더니 KJV, NASB와 비슷하였다. “but only one thing is needed.” 그런데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이 구절에는 다음과 같은 각주가 붙어 있었다. “몇몇 사본들은 몇 가지(few things)가 필요하든지 혹은 한 가지가 필요하다로 되어 있음” 즉 개역성경은 이런 천주교 소수 사본들에 근거하여 42절을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라고 번역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올바른 성경 강해를 가로막고 있다. 이런 데가 한두 군데이겠는가? 사실 장로 교인들이 청교도들의 책들을 좋아하고 그래서 17세기 청교도들의 글이 번역되어 책으로 나오곤 한다. 그 책들은 다 킹제임스 성경이 기초해서 말씀을 전개해 나가는데 개역성경으로 구절을 인용을 하고 개역 성경의 문맥으로 해석을 하다 보면 저자들의 글과 상충되는 부분이 심히 많다. 한 가지 사례를 보도록 하자. 행26:28 KJV, 그때에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설득하여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도다, 하매 개역개정: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KJV처럼 28절에서 ‘거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번역이 나와야 그 다음 구절인 29절의 ‘전적으로 나와 같은 사람’과 맞지 않겠는가? 행26:29, 바울이 이르되, 각하뿐만 아니라 이날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도 이렇게 결박된 것을 빼고는 거의 나와 같이 되고 전적으로 나와 같이 되기를 내가 하나님께 간청하나이다, 하니라. 즉 바울은 아그립바에게 ‘거의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이 되면 안 되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의 서고 쓰러짐이, 영원한 운명이 하나님의 귀중한 말씀인 성경에 달려 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이들 그리고 손자 손녀들의 영원한 삶을 위해 바른 성경을 택하기 바란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시12:6-7).
2025-02-04 14:17:37 | 관리자
어떤 분이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 왔습니다. "시편 104편 5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Who laid the foundations of the earth, that it should not be removed for ever. 흠정역: 땅의 기초들을 놓으사 그것이 영원히 이동되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be removed라고 쓰였는데 여기의 remove는 ‘제거하다 치우다’의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땅이 영원히 제거되지 않게 하셨나이다’로 하면 더 이해가 잘 되는데요."   답변:   어떤 단어가 나오면 늘 기초적인 뜻이 무엇인지 보아야 합니다. 옥스퍼드 사전에서 remove를 찾아보면 1차 뜻이 다음과 같습니다. I.1.a To move or shift from or out of the place occupied; to lift or push aside; to lift up and take away; to take off. 즉 어떤 것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서 움직이는 것이 remove의 1차 뜻입니다.   또 다른 뜻이 ‘제거되다’입니다. 우리말 영한사전도 동일합니다. 한컴 사전 re·move [rimúːv] vt.   ① 《~+⊡/+⊡+⊡+⊡》 …을 옮기다, 움직이다, 이전〔이동〕시키다 ┈┈• ~ one’s eyes from the painting 그림에서 눈을 돌리다 ┈┈• ~ oneself from the room 방을 떠나다 ┈┈• ~ MOUNTAINS.   ② 《~+⊡/+⊡+⊡+⊡》 …을 제거하다; 치우다; 벗다, 벗(기)다 ┈┈• ~ one’s coat 코트를 벗다 ┈┈• ~ the causes of poverty 빈곤의 원인을 제거하다 ┈┈• ~ a name from a list 명부에서 이름을 빼다.   ③ 《~+⊡/+⊡+⊡+⊡》 내어쫓다, 해임〔면직, 해고〕하다 ┈┈• He was ~d (from office). 그는 (공직에서) 해임됐다. 성경은 땅 즉 지구가 영원히 제 자리에 있을 것을 이야기합니다.   샬롬  
2024-07-15 11:37:53 | 관리자
안녕하세요? 대구 화평침례교회 심재범 목사님께서 재창조 이론의 모순을 보여 주는 책을 번역하여 허락을 받고 공유합니다. 책의 제목은 <곁길로 빠진 재창조>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은 재창조 이론(갭 이론)을 말하지 않나요? 티모티 모튼 <곁길로 빠진 재창조> 위의 링크 기사에서 설명 드렸듯이 이 책은 럭크만 박사의 신봉자였다가 성경을 보고 갭 이론을 버린 티모티 모튼(Timothy S. Morton)의 책을 번역한 것입니다. 영어 원서로 89쪽짜리 책의 제목은 <곁길로 빠진 재창조>(The Genesis Gap Sidetrack: Is There a "Gap" Between Genesis 1:1 and 1:2?)이고 여기서 저자는 재창조가 왜 안 되는지를 역사와 사전과 성경의 구절들을 근거로 조목조목 이야기합니다. 이번에 번역된 이 책이 올바른 교리 정립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패스터
2024-04-30 09:12:53 | 관리자
정상문과 도치문의 번역 영어에 다음과 같은 두 개의 문장이 있습니다. A is B. B is A. 이러면 둘 중 하나는 정상 문장이고 다른 하나는 도치문입니다. 국어사전에 도치문은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도치문: 정상적인 어순을 뒤바꾸어 놓은 문장. 흔히 문장 성분의 강조를 위하여 쓰는데, ‘보고 싶어요, 나의 어머니가.’ 따위이다. 1611년 킹제임스 성경은 마침표, 쉼표, 느낌표, 물음표 등을 빼고는 심지어 인용 부호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원어 성경도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강조할 때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괄호나 도치문을 사용하였습니다. 괄호 사용의 예: 고후5:5-8 5:6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확신에 차 있으며 우리가 몸 안에서 집에 거하는 동안에는 주로부터 떨어져 있는 줄을 아노니 5:7 (우리는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노라.) 5:8 내가 말하노니 우리는 확신에 차 있으며 오히려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괄호를 사용하면 7절이 강조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도치문은 수도 없이 발견됩니다. 애가 3장 22-23절 주의 긍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지 아니하였으니 그분의 동정심은 끝이 없도다. 그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신실하심은 크시니이다. …They are new every morning: great is thy faithfulness. 끝 문장 great is thy faithfulness는 원래 thy faithfulness is great으로 쓰는 것이 정상이지만 강조를 위해 도치문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을 영어 그대로 번역한다고 ‘크시니이다, 주의 신실하심은’으로 하면 매우 이상함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15:28에도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great is thy faith. 영어 성경대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크도다, 네 믿음이’로 번역하면 말이 안 될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David the King이라는 말이 14번 나옵니다. 이것은 다윗 왕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리고 King David은 32번 나옵니다. 이것도 도치를 그대로 살리려면 왕 다윗으로 해야 하지만 그렇게 번역한 성경은 없습니다. 이것도 역시 위의 David the King처럼 다 다윗 왕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말에서는 왕 다윗으로 쓰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를 통해 우리는 영어의 도치문을 그대로 살리면 우리말 번역이 심히 부자연스러운 데가 많으므로 수천 군데의 도치문이 우리말에서는 정상적인 문장으로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에는 A is B, B is A, 이 두 문장이 5절과 6절에 연달아 나옵니다. 영어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5절: Perverse disputings of men of corrupt minds, and destitute of the truth, supposing that gain is godliness: from such withdraw thyself. 6절 But godliness with contentment is great gain. 5절과 6절에서 이런 저런 것을 따 빼면 핵심 문장은 다음과 같이 짧게 축약이 됩니다. 5절: gain is godliness. 6절: godliness is gain. 이 둘은 전형적인 A is B, B is A 형태의 두 문장입니다.    따라서 둘 중 하는 정상 문장이고 다른 하나는 강조를 위한 도치 문장입니다. 영어를 볼 줄 아는 분이라면 곧장 눈치 챘겠지만 여기서는 6절의 godliness is gain이 정상 문장입니다. 그래서 6절은 흠정역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습니다. 6절: 그러나 만족하면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큰 이득이다. 즉 godliness is gain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이득이다로 번역되었습니다. 자, 그런데 5절이 문제가 됩니다.    5절은 도치문이니까 도치를 살리면 gain is godliness.가 ‘이득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다’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자, 우리말에서 이런 식으로 쓴 글을 보셨나요? 이득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라는 말은 우리말에서 사용되는 형식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런 말은 번역을 할 때 위에서 했듯이 도치문을 정상 문장을 바꾸어서 해야 합니다. 그러면 6절처럼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이득이다로 나옵니다. 이러면 5절, 6절이 동일한 것을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살려서 5절 전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가 없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비뚤어진 언쟁이 생기나니 너는 그러한 자들로부터 떠나라. 여기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란 믿음 생활을 하면 - 즉 예수님만 믿으면 - 만사가 형통한다는 기복 신앙인들을 말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런 자들에게서 떠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이득인가요? 이것 하나만 두고 보면 대부분의 경우 답이 Yes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면 당연히 천국에 가서 영원한 삶을 사니 이득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문맥이 아닙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거룩하게 살면 모든 일이 잘된다고 주장하는 악한 자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런 자들에게서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6절에서 바울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조금 못 살아도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면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큰 이득이 된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2구절이 보여 주려는 핵심입니다. 심지어 개역, 공동 번역 등도 이런 취지로 이해하고 바르게 번역하였습니다. 개역: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물론 경건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 혹은 믿음 생활하는 것이 옳은 말입니다. 경건은 명사가 아니라 경건하다의 어근이므로 경건 자체를 명사로 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역을 조금 바꾸면 흠정역과 같은 뜻으로 이해가 됩니다. 개역: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했다는 것들을 보면 5절이 참으로 이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킹: 이익이 경건이다. 표킹: 이득이 경건이다. 근킹: 이득이 경건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런 표현은 우리말에 없습니다. 또한 경건은 명사가 아닙니다.    도치를 살려야 한다고 이렇게 이상하게 번역하고는 오히려 올바로 번역한 흠정역 성경을 비방하고 나무라는 사람들이 있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영어의 도치문을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대개의 경우 문장이 이상하거나 뜻이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말에는 그런 도치문의 용레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성경들이 영어나 원어를 번역역할 때 도치문이라 해도 정장적인 문잘으로 번역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뜻이 통하고 우리말 용례에 맞기 때문입니다. 도치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의 번역을 보기 바랍니다. 아마 그들도 수천 군데에서 도치를 정상으로 해서 번역했을 것입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할 때 우리는 우리나라 말의 문법과 용례에 맞게 번역해야 합니다.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의 말을 들어보기 바랍니다. “번역이란 창문을 열어 빛이 들어오게 하는 작업이다. 번역은 껍질을 까서 우리가 열매를 먹도록 해 주며 휘장을 젖혀서 우리가 지성소를 들여다보게 해 준다. 번역은 우물의 뚜껑을 열어 우리가 물로 나가게 해 준다. 참으로 보통 사람들의 말로 [성경이] 번역 되지 않는다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두레박 없이 깊은 우물 옆에 서 있는 아이들과 같다.”   이런 것을 무시히고 "나는 한 소년입니다.", "비둘기가 날자 그녀(비둘기)의 발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제단으로 가서 그(제단)의 발들을 닦으라", "저기 있는 한 꽃을 가져와라" 식으로 번역하고는 그것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한 것이라고 주장하면 한마디로 어처구니가 없는 것입니다.   참고로 어처구니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어처구니라는 말이 원래 맷돌의 손잡이를 일컫는 말이라는 설이 있다. 즉, 흔히 난감한 상황에서 쓰는 관용 표현 '어처구니가 없다.'라는 말은, 맷돌의 손잡이가 없어 문제가 생겼을 때 사용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손잡이가 없으니 어떻게 맷돌을 돌리겠습니까?   어처구니   샬롬   패스터
2024-04-26 16:00:00 | 관리자
디모데전서 3장 16절의 godliness는 경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이 경건인가?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godly, ungodly 같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이것들은 참으로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 중 하나입니다. godly는 15회(시4:3-요삼6), godliness도 15회(딤전2:2-벧후3:11), 총 30회 ungodly는 27회(삼하22:5-유18), ungodliness는 4회(롬1:18-딛2:12), 총31회 이렇게 이 단어들은 형용사나 명사로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총 61회 나옵니다. 기존 성경(개역 등)에는 이것들이 경건하다, 불경건하다, 악인 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들에 god이 들어 있으므로 우리는 이것들이 하나님의 성품 혹은 속성과 관계가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존 성경에는 몇 군데에만 하나님의 뜻대로 등으로 바르게 번역하였습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OED)에서 godly를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Of or pertaining to God; coming from God; divine; spiritual. Obs. exc. arch. (하나님에게 속한, 하나님에게서 오는, 신적인...) 한영사전은 이 말을 '신을 공경하는, 고어: 하나님에게 속한, 신성한' 등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원래대로 하면 godly는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흠정역 성경은 이미 61회의 반 수 이상을 그렇게 번역하였고 개역성경도 몇 군데 그렇게 하였습니다. 고후7:10은 그 예를 보여 줍니다. For godly sorrow worketh repentance to salvation not to be repented of: but the sorrow of the world worketh death.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이루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거니와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느니라. 개역성경도 마찬가지로 번역하였습니다. 자, 그런데 진짜 문제는 딤전3:16에서 발생합니다. KJB: And without controversy great is the mystery of godliness: God was manifest in the flesh, justified in the Spirit, seen of angels, preached unto the Gentiles, believed on in the world, received up into glory. 킹제임스 흠정역: 논쟁의 여지가 없이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사람들이 믿는 분이 되시고 들려서 영광으로 들어가셨느니라. 개역: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가 모든 것을 마치고 승천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이 모든 일을 한 마디로 ‘the mystery of godliness’라고 말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여기서 the mystery of godliness를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라고 바르게 번역하였습니다. 성품이란  됨됨이를 뜻합니다. 즉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의 이런 됨됨이가 큰 신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개역 성경은 이것을 경건의 비밀이 크다고 번역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말에서 경건은 경건하다의 어근이지 경건 자체가 명사가 아닙니다. 거룩하다의 거룩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분들이 거룩이 명사인 줄로 착각하고 하나님의 거룩을 추구하라고 외칩니다. 이게 한국 교회의 슬픈 현실입니다. 문법이나 한국어 용례도 모르는 목사들이 수두룩합니다.  거룩은 거룩하다의 어근이지 거룩 자체가 명사가 아닙니다. 자, 여러분은 경건(혹은 경건함)이 무엇을 뜻한다고 생각합니까? 경건하다는 말은 국어사전에 '공경하며 삼가고 엄숙하다'를 뜻하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엄숙함이 위대한 신비일까요? 대체 무엇이 엄숙하다는 말인가요? 이렇게 말이 안 되는 번역을 가지고 100년 이상 지내다 보니 이 위대한 말씀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한국에는 많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성육신, 십자가 처형, 구원자와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것, 승천하신 것 등을 총괄하는 말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 말이 바로 godliness입니다. 즉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됨됨이입니다. 이 중요한 말을 경건으로 번역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개역성경은 그렇다 쳐도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했다는 성경들은 바르게 이것을 번역해야 하지 않을까요? 한킹: 경건의 신비 표킹: 경건의 신비 근킹: 경건의 신비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했다는 것들이 어쩌면 다 개역성경을 그대로 복사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표킹은 고후7:10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아니라 ‘경건한 슬픔’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사람이 경건하게 슬퍼하면 구원을 받을까요? 이런 데는 godly를 하나님을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번역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뒤의 세상 근심과 대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sorrow는 슬픔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옥스퍼드 사전을 가서 그 뜻을 보면 다양합니다. 고통 고통의 원인 근심 슬픔 우리는 godly를 바르게 번역해야 합니다. 시편1:1을 보도록 합시다. Blessed is the man that walketh not in the counsel of the ungodly, nor standeth in the way of sinners, nor sitteth in the seat of the scornful. 킹제임스 흠정역: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의 계획대로 걷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조롱하는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여기의 ungodly를 단순히 악인, 불경건한 자들로 번역하면 안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도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의 계획대로 걷지 아니하는 사람만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가능한 한 영어의 뉘앙스를 살려서 번역하지 않으면 godly, ungodly의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또한 딤전6:5를 보면 gain is godliness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딤전6:6에 나오는 동일한 표현 즉 godliness is gain을 도치문으로 적은 것입니다. 여하튼 이런 데서도 이득이 경건이라고 적으면 말이 안 됩니다. 이득이 경건이라는 말이 우리말에 있나요? 이런 말을 평생에 한 번이라도 들은 적이 있나요?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은 따르는 것이 이득이라고 주장하는(즉 예수님 믿으면 무조건 잘 산다고 주장하는) 악한 자들이 있는데 이런 자들을 피하라는 말합니다. ‘이득이 경건이라고 주장하는 악한 자들’이 있는데 이런 자들을 피하라고 하면 말이 되나요?   이득이 경건이라는 말은 일단 경건이라는 명사가 우리말에 없으니 틀린 말이고 그런 표현 자체는 우리말에서 한 번도 쓰이지도, 발견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써 놓고 영어 킹제임스 성경대로 번역했다고 하면 누가 거기에 동조할까요? 미국 사람, 영국 사람이 다 그렇게 보지 않는데요. 그들은 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이득이라고 주장하는 악한 자들이 있는데 이런 자들을 피해야 한다고 이해합니다. 이런 데 나오는 godliness는 그런 뜻이고 여기의 문장은 도치문입니다. 샬롬 패스터
2024-04-26 14:48:23 | 관리자
안녕하세요?   30-40년 전에 럭크만(Peter Ruckman)이라는 사람이 뿌려놓은 잡초 가라지 씨들이 자라서 여기저기서 독소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원어 성경을 정확히 번역한 것이지 원어를 교정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3절은 부활의 순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각 사람이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시요, 그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분께 속한 자들이니라. But every man in his own order: Christ the firstfruits; afterward they that are Christ's at his coming.   이미 20절도 동일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But now is Christ risen from the dead, and become the firstfruits of them that slept.   이런데 보면 영어로는 firstfruits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복수가 아니라 영어와 원어에서 단수입니다.   이것을 복수로 번역하면 오역이며 이로 인해 잘못된 교리가 생겨납니다.   이런 것을 복수로 번역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무식해서   2. 럭크만의 교리를 세우려고   늘 이야기하듯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단수 복수 등을 구분하기 어려운 데가 더러 있습니다. 영어로는 당연히 맞지만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단수 복수 구분을 위해 반드시 원어를 참조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 수 없이 나오는 'the + 형용사'는 단수 복수 구분을 위해 원어를 보아야 할 때가 매우 많습니다.   예를 들어 the wicked가 단수이면 사탄 마귀가 될 가능성이 높고 복수이면 악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오늘 나온 firstfruits가 바로 그런 사례 중의 하나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firstfruits가 총 7회 나옵니다.     이 단어는 스트롱 번호가 536이고 원어 사전에 가면 정확하게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즉 이것은 단수 명사입니다.   이것이 단수임은 23절이 잘 보여 줍니다.   첫 열매인 그리스도시요   Christ the firstfruits;    영어를 보시면 알겠지만 Christ와 the firstfruits은 동격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단수이므로 당연히 the firstfruits은 단수여야만 합니다.   20절도 동일합니다. 그리스도가 단수이고 당연히 the firstfruits은 단수입니다.   그런데 럭크만 등은 원어를 무시하고 이것을 복수로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즉 영어로 원어를 교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엄밀히 말하면 이단 교리입니다. 잠시 후에 여기서 나오는 이상한 교리를 보여 드릴 것입니다.   그래서 말보의 한킹은 이것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각자 자기의 서열대로 되리니 그리스도가 첫 열매들이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 분께 속한 사람들이라.   이것은 동격을 나타내지 그리스도가 첫 열매들이라는 서술문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이것을 서술문으로 번역한 것은 말보 한킹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 단수가 복수로 바뀝니다.   한킹 20절도 동일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셔서 잠들었던 자들의 첫 열매들이 되셨느니라.   역시 단수 그리스도가 복수 첫열매들이 됩니다.   표킹이라는 것도 첫열매들로 하였습니다. 말보에서 나왔으므로 럭크만의 교리를 따르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다만 23절은 '첫멸매들인 그리스도시요'로 해서 서술문을 피하였고 20절은 그리스도를 첫열매들로 썼습니다.   표킹은 평서문을 도치문으로 번역하면 안 된다고 극렬히 주장하는데 그런 주장이라면 여기도 '그리스도 첫멸매들이시요'로 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표킹도 수많은 데서 평서문을 도치문으로 번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하튼 말보와 럭크만의 영향으로 단수 그리스도를 복수 첫열매들로 바꾸고 난 뒤 그 영향이 약 30년 뒤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박진영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첫열매들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자기들끼리 예배를 드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박진영씨는 머리인 그리스도와 몸인 첫열매들 즉 성도들이 합쳐져서 그리스도가 된다는 해괴망측한 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박진영의 다른 복음 - 교회론   한번 살펴보기 바랍니다.   박진영씨의 주장:    1.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 이 머리와 몸이 합쳐진 거대한 사람 역시 그리스도 혹은 그리스도 예수이다. 2. 바울은 예수님이 혼이고 교회가 몸이라는 신비를 가르쳤고 우리가 온전해지려면 '첫열매들 그리스도'의 지식이 필요하다. 3. 이 첫 열매들이 새 사람이다.   박진영씨의 이런 모든 가르침이 말보와 럭크만의 '그리스도 첫열매들'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오역이 비성경적인 교리를 만들어내는 한 예입니다.   위의 블로그에는 박진영씨에 대한 다른 글들도 있으니 참조하기 바랍니다.   결론:   영어로 원어의 단복수를 교정할 수 없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영어로 원어의 단복수를 교정하는 것은 이단 교리입니다. 원어대로 단복수를 번역해야 올바른 번역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본문이 영감을 받았고 향상된 계시라는 '럭크만의 이중 염감론' 같은 허구에서 빨리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첫열매이지 결코 첫열매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성경과 주석이 다 그렇게 말하며 영어 firstfruits는 자체가 단수입니다.   샬롬   패스터 
2024-04-23 19:18:51 | 관리자
에스라기 1장에는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자기 왕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내리는 칙령이 있습니다.   1 한편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제일년에 주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주의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영을 움직이시매 그가 자기의 온 왕국 전역에 선포하고 그것을 글로도 기록하여 이르되,   2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라. 주 하늘의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왕국들을 내게 주시고 내게 명하사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에 자신을 위해 집을 건축하게 하셨나니   3 그분의 모든 백성 중에서 너희 가운데 있는 자가 누구냐? 그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니 그는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집을 건축할지니라. (그분은 하나님이시요,) 그분의 집은 예루살렘에 있느니라.   3절을 보면 '그분의 모든 백성 중에서 너희 가운데 있는 자가 누구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분의 모든 백성은 1차적으로 당연히 포로로 잡혀간 유다(베냐민) 지파 사람들을 말합니다(스2:2; 3:1; 6:16, 17; 7:13; 8:29, 35 등을 보면 북왕국 이스라엘의 10지파에서도 돌아온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다수는 남왕국 유다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다음의 너희는 누구일까요? 여기의 너희는 고레스 왕의 통치하에 있는 그의 온 백성을 말합니다.    1절에는 "그가 자기의 온 왕국 전역에 선포하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3절은 포로로 잡혀간 하나님의 모든 백성 중에서 페르시아에 살고 있는 자를 뜻합니다. 그 사람은 누구든지 마음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하나님의 집을 지어도 좋다고 고레스는 칙령을 내립니다.   동일한 것이 대하36:22-23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22 한편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제일년에 주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주의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영을 움직이시매 그가 자기의 온 왕국 전역에 선포하고 그것을 글로도 기록하여 이르되,   23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라. 주 하늘의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왕국들을 내게 주시고 내게 명하사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에 자신을 위해 집을 건축하게 하셨나니 그분의 모든 백성 중에서 너희 가운데 있는 자가 누구냐? 주 그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니 그는 올라갈지니라, 하였더라.   대다수가 알고 있듯이 역대기상하는 열왕기상하와 달리 바빌론 포로 생활 이후에 기록되었습니다. 물론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기도 모두 바빌론 포로 생활 이후에 기록되었습니다.   명확하게 알고자 하는 분들이 있어서 잠시 적었습니다.   샬롬
2024-01-13 16:36:27 | 관리자
안녕하세요?   오늘은 히브리서 2장 9절이 나오는 이유에 대해 잠시 설명하려 합니다.   히브리서 2장 5절 이하의 문맥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보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2장 5절 이하 문맥    5 그분께서는 다가오는 세상 곧 우리가 말하는 그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시키지 아니하셨느니라. 6 그러나 한 사람이 어떤 곳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마음에 두시나이까?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찾아오시나이까? 7 주께서 그를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만드시고 그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그를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들 위에 세우시고 8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두어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하였으니 그분께서 모든 것을 그의 아래 두어 복종하게 하셨으므로 그의 아래 놓이지 않은 것은 하나도 남겨 두지 아니하셨으나 지금 우리는 아직 모든 것이 그의 아래 놓인 것을 보지 못하며 9 오히려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노라. 그분께서 이렇게 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반즈의 설명이 이해에 큰 도움이 됩니다.   반즈 설명   히2:6-8절에 인용된 시편 8편에서 기자는 사람이 모든 창조물을 지배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사람이 모든 것을 지배하지 못합니다(8절 후반부). 그러고 나서 갑자기 9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예수님을 본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시편 8편 기자가 8편에서 말한 확장된 통치권을 가지고 있음을 보지 못합니다.  대신에 우리는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시고 천사보다 더 높은 권세를 받으신 예수님에게서 그 일이 성취되는 것을 봅니다.  요점은 그분이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셨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에 대한 “보상으로” 그분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으며, 그리하여 다윗이 시편 8:1-9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영예에 관해 말한 모든 것을 성취하셨습니다. 사도의 목적은 그분께서 "높여졌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그는 그 이유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 죽음을 겪으셨기 때문입니다(비교 빌2:8-9). 다시 말해 사도는 예수님이 시편 8편을 성취하신 분이심을 보여 주려고 9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샬롬      
2024-01-01 16:49:36 | 관리자
디모데전서 5장 24-25절의 의미 22 아무에게나 선뜻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죄들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며 너 자신을 순결하게 지키라. 23 더 이상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잦은 병을 위해 포도즙을 조금 쓰라. 24 어떤 사람들의 죄들은 미리 드러나 먼저 심판으로 가고 어떤 사람들의 경우는 죄들이 그 뒤를 따르나니 25 이와 같이 어떤 사람들의 선한 행위들도 먼저 밝히 드러나며 그렇지 아니한 것들도 숨겨질 수 없느니라. 왜 갑자기 24-25절이 나오는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있어 잠시 앨버트 반즈의 주석을 소개하려 합니다.   반즈 주석 성경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맥입니다. 여기도 문맥이 24-25절의 뜻을 결정합니다. 어떤 사람들의 죄들은 미리 드러나 있다(24절)는 선언은 일반적인 형식을 취하기는 하지만 사람들을 사역자가 되게 하는 주제를 다루는 딤전5:22와 관련해서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딤전5:23은 괄호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즉 22절 다음에 곧바로 24-25절이 온다고 보면 해석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사도는 디모데에게 딤전5:22에서 그가 사역자로 임명할 사람들의 성격에 관해 당부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어떤 사람들의 품성이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변장이란 없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두에게 분명했고, 그것에 관한 한 실수할 위험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모두에게 명백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한 순간도 주저해서는 안 되며, 그들의 재능이나 학식, 공동체에서의 지위가 어떻든 간에 그는 그들을 사역에 임명하는 일에 결코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심판으로 간다는 말의 의미: 그들의 성격은 잘 이해됩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심판의 날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그들이 심판정에 출석하기 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들이 거기에 도착하기 전에 기록과 판결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심지어 재판의 형식도 거의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그러한 사람들의 성격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따라서 디모데는 그들이 사역의 직분을 맡는 데 보조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는 죄들이 그 뒤를 따르나니의 의미: 그들의 성격은 여기서(이 세상에서) 완전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숨깁니다. 그들은 속임수를 씁니다. 그들은 실제와 다르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의 인격은 결국 드러날 것이며 그들은 그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이 처벌받지 않고 탈출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그들이 자기들의 악한 행위를 숨기려고 애썼을지라도 그런 행위들(죄들)은 그들을 따라 재판정까지 따라가서 거기서 그들을 만날 것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사역의 직분을 맡을 사람의 자격을 판단하는 데 우리가 신중해야 한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단번에 호감이 가는 외모나 약간의 친분만으로 그들이 그 직책을 맡을 자격이 있다고 추론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의 성격이 현재 숨겨져 있거나 오해를 받고 있지만 최종 심판에서 그들의 성격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25절: 이와 같이 어떤 사람들의 선한 행위들도 먼저 밝히 드러나며 그렇지 아니한 것들도 숨겨질 수 없느니라. 그들의 행위를 보면 그들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결정하기 위해 심판의 날을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여기서 그들을 선한 사람으로 대하고 선한 사람만이 채울 수 있는 직분을 그들에게 줄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의 아이디어는 그들의 성격이 매우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으므로 그들을 사역의 직분에 성별하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숨길 수 없습니다. 즉, 궁극적으로 숨기거나 오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부에는 각 사람의 성격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의 표현은 선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모든 사람에게 성격이 다 잘 알려진 좋은 남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가 그들 주위에 영광을 나타내어 아무도 그들이 누구인지 착각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품성을 널리 알리는 면에서 디모데전서 5장 24절에 언급된 “죄가 미리 드러나” 있는 사람들과 일치합니다. 한 사람의 선행은 다른 사람의 죄만큼이나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겸손하고, 눈에 띄지 않으며,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명 속에 살 수도 있습니다. 선을 행할 수단이 빈약할 수도 있습니다. 체질적으로 너무 자신이 없어서 공개 행동 무대에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세상으로부터 숨겨져 있습니다. 이들은 홍보와 관련하여 디모데전서 5장 24절에 언급된 “그들의 죄들(악한 행위)이 그 뒤를 따르느니라”는 말씀이 언급하는 사람들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것들이 항상 숨겨질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의 성격을 드러내기 위한 계획이 있으며,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24절과 25절을 살펴보면 교회나 목회자가 어떤 사람을 사역자로 추천해야 하고 추천해서는 안 되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문맥을 잘 살펴보고 구절들을 해석해야 합니다. 샬롬
2023-12-28 21:51:04 | 관리자
민수기 3장 39절의 22,000명은 오류가 아닌가요? 답변: 아닙니다. 그것은 정확한 숫자입니다. 민수기 3장에는 계수된 레위 사람의 수가 나옵니다. 그 수는 22,300명일까요, 아니면 22,000명일까요? 둘 다 됩니다. 이 두 숫자는 완벽하고 오류가 없습니다. 민수기 3:5-13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레위 지파를 가까이로 데려다가 제사장 아론에게 주어 그를 섬기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5-6절 참조). 그들은 다른 모든 지파의 처음난 자(장자)를 대신하여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져 성막에서 섬기는 일을 하게 될 것이었습니다(7-13절 참조). 민수기 3장 14~15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레위 자손 중 태어난 지 한 달 이상 된 모든 남자를 계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3:16-39에서 그는 바로 그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한 후에 그는 레위 사람들의 가족별로 그들을 계수합니다. 그는 실제로 그들을 세 주요 가문, 즉 게르손, 고핫, 므라리 가문에서 분리합니다. 그런 다음 가계도를 통해 이들을 분리합니다. 민수기 3장 21~22절을 보면 게르손 가족은 립니 가족과 시므 가족으로 이루어져 모두 7,500명입니다. 민수기 3:23-26에서 그는 그들이 어디에 진을 쳐야 하는지 그들의 임무와 그들의 우두머리를 알려 줍니다. 민수기 3장 27~28절에 보면 고핫 가족은 아므람 가족, 이스할 가족, 헤브론 가족, 웃시엘 가족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수는 8,600명이었습니다. 참고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아므람 족속의 수에 포함됩니다. 왜냐하면 아므람은 아론의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출애굽기 6:18-20 참조). 민수기 3:29-32에서 그는 그들이 진칠 곳과 그들의 임무와 그들의 우두머리를 알려 줍니다. 민수기 3장 33~34절에 보면 므라리 가족은 말리 가족과 무시 가족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수는 6,200명이라고 합니다. 민수기 3:35-37에서 그는 그들이 진칠 곳과 그들의 임무와 그들의 우두머리를 알려 줍니다. 모세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포함하여 한 달 이상 된 모든 레위 사람을 다 합하면 22,300명입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3장 39절에 있습니다. 민수기 3장 39절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모세와 아론에 의해 계수된 자가 22,000명이라고 말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주의 명령대로 계수하되 레위 사람들 중에서 두루 그들의 가족별로 계수한 모든 자 곧 난 지 한 달 이상 된 모든 남자들이 이만 이천 명이더라(39절). 따라서 위의 22,300명과 22,000명은 300명의 차이를 보이는 셈입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대다수의 불신자(학자 목사 등)들은 성경 사본 전수 과정에 오류가 있어 두 숫자가 다르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경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완전히 보존해 주셨음을 믿기에 이런 불신의 행위를 수용하지 않습니다. 답은 무엇일까요? 22,300명과 22,000명은 둘 다 맞는 수치입니다. 그러나 성막 앞에서 동쪽을 향해 곧 회중의 성막 앞에서 동쪽으로 진을 치는 자들은 모세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되리니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책무를 대신하여 성소에 관한 책무를 지킬 것이며 가까이 오는 낯선 자는 죽일지니라(민3:38). But those that encamp before the tabernacle toward the east, even before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eastward, shall be Moses, and Aaron and his sons, keeping the charge of the sanctuary for the charge of the children of Israel; and the stranger that cometh nigh shall be put to death. 위에서 보듯이 민수기 3장 38절은 “그러나”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모세는 이제 22,300명이라는 숫자에 대한 몇 가지 예외를 말하려고 합니다. 이 구절에서 그는 한 무리를 나머지 무리와 구별하고 성막 앞에 동쪽에 진을 치라고 말하는데 이 무리는 모세와 아론과 그 아들들입니다.  (*) 애석하게도 개역성경을 포함한 대다수의 우리말 역본들은 ‘그러나’를 삭제하고 있습니다. 개역 38절: 성막 앞 동쪽 곧 회막 앞 해 돋는 쪽에는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진을 치고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위하여 성소의 직무를 수행할 것이며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일지니라 그가 그들을 구별한 이유는 그들이 다른 모든 레위 사람들의 섬김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자,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들은 27-28절에서 아므람을 포한하는 고핫 족속에 속한 사람들의 수의 일부였습니다(위의 설명을 보세요).    그러나 이제 모세는 제사장의 혈통인 그들을 그 총수에서 제외합니다. 민수기 3장 39절은 주의 명령에 따라 모세와 아론에 의해 계수된 자가 이만 이천 명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이 숫자를 주목하세요. 이전 숫자 즉 22,300명은 모세가 홀로 계수한 숫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세와 아론이 숫자를 세며 이때에는 제사장들의 수가 전체 레위 사람들의 수에서 빠집니다. 레위 사람들의 수는 몇 명입니까? 22,300명일까요, 22,000명일까요? 대답은 둘 다입니다!    모세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포함하여 모든 레위인 중에서 22,300명을 계수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손자들과 증손자들을 제외한 모든 레위 사람들을 계수했습니다. 그 숫자는 22,000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아들, 손자들 등을 의미함)의 수는 300명으로 보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 수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처음난 자들이 이들을 섬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스라엘의 처음난 자들을 대신할 레위 사람들의 수에 포함될 수 없었습니다. 결론: 두 숫자 모두 정확합니다. 22,300명은 모세가 계수한 레위인들의 수였고 22,000명은 모세와 아론이 계수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외한 모든 레위인의 수입니다. 두 계산 모두 주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계수는 모세가 했고, 마지막 계수는 모세와 아론이 했습니다. 참조
2023-12-28 15:34:53 | 관리자
안녕하세요? 한 분이 재창조 관련 글(밑에 있음)을 보내서 답을 주기 위해 한때 럭크만 박사의 신봉자였다가 성경을 보고 갭 이론을 버린 티모티 모튼(Timothy S. Morton)의 책을 소개하였습니다. 89쪽짜리 책의 제목은 <곁길로 빠진 재창조>(The Genesis Gap Sidetrack: Is There a "Gap" Between Genesis 1:1 and 1:2?)이고 여기서 저자는 재창조가 왜 안 되는지를 역사와 사전과 성경의 구절들을 근거로 조목조목 이야기합니다. 혹시 이에 대해 의문이 있는 분들은 아마존에서 책이나 킨들 파일을 구매해서 한번 읽어보기 바랍니다. <곁길로 빠진 재창조(모튼)> 재창조가 왜 안 되는지 모튼이 말하는 명백한 이유 한 가지만 이야기드립니다. 계시록 21장에 보면 천년 왕국이 끝나고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는 기사가 나옵니다. 계시록 21장 1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 saw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for the first heaven and the first earth were passed away; and there was no more sea.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으니 이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졌고 바다도 다시는 있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 여기서 보듯이 지금 존재하고 있는 하늘과 땅은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the first heaven and the first earth)입니다. 다음 그림이 보여 주듯이 만일 재창조가 맞는다면 지금 존재하고 있는 하늘과 땅은 ‘두 번째 하늘과 두 번째 땅’(the second heaven and the second earth)이 되어야만 합니다.     <라킨의 재창조 도표: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 재창조 이후 지금 존재하는 두 번째 하늘과 두 번째 땅>   모튼은 이런 것을 스스로 성경을 찾아서 발견하고 럭크만과 그의 재창조를 과감히 버렸습니다.   어느 것이 옳은지는 독자들이 판단하기 바랍니다.  지금 미국에서 근본주의자들(신학교) 가운데 재창조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여하튼 모튼의 책은 이런 저런 증거들을 가지고 곁길로 나간 재창조 이론(가정)의 잘못된 점들을 보여 주고 있으니 참조하기 바랍니다. 샬롬 -------- 이메일 ------- 안녕하세요. 마제스티에디션 KJV흠정역과 KJV영어성경을 같이 보면서 성경을 읽고 있는데 창세기1장 28절 말씀이 번역이 잘못된 것 같아 문의드립니다. KJV Genesis 1 28.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moveth upon the earth.  ㅡ and replenish the earth 이 부분은 "땅을 다시 채우라." 이렇게 번역하는게 맞는 것 같은데 마제스티에디션 성경에는 이 분분을 "땅을 가득 채우라."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혹시 오타가 있는 게 아닌가 해서요. 감사합니다!  ----------
2023-12-09 14:46:20 | 관리자
안녕하세요? 한 분이 왕하23;29의 ‘아시리아 왕’에 대해 질문하셔서 답을 적습니다. 그(요시야)의 시대에 이집트 왕 파라오느고가 ‘아시리아 왕’을 대적하러 유프라테스 강으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이집트 왕을 대적하러 나가니 그가 요시야를 본 뒤에 므깃도에서 그를 죽이니라(왕하23;29). In his days Pharaohnechoh king of Egypt went up against ‘the king of Assyria’ to the river Euphrates: and king Josiah went against him; and he slew him at Megiddo, when he had seen him. 질문의 요지는 요시야를 죽인 이집트 왕 파라오느고가 싸우려고 한 대상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 KJV, NIV, 개역 성경 등 모든 성경에는 그 왕이 ‘아시리아 왕’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것은 본문의 문제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아시리아는 이 시대에 이미 바빌론에 의해 멸절되어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아시리아 왕이 나오느냐갸 질문의 요지입니다. 병행 구절이 대하35:20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이 모든 일 뒤에 즉 요시야가 성전을 정비한 뒤에 이집트 왕 느고가 유프라테스 옆의 갈그미스와 싸우러 올라오므로 요시야가 그를 대적하러 나갔으나(대하35;20) 여기에는 파라오느고가 갈그미스와 싸우러 올라왔다고 되어 있는데 갈그미스는 유프라테스 강변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여기의 ‘아시리아 왕’은 대다수 사람들이 인정하듯이 느부갓네살의 아버지인 나보폴라살로 보입니다. 반즈 등의 주석가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기서 ‘아시리아 왕’이란 말은 니느웨가 아직 함락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니느웨와 바빌론에서 번갈아 가며 궁정을 관리했던 아시리아 왕들에게 익숙한 유대인들(왕하19:36; 대하33:11)은 처음에는 이러한 변화를 단순한 왕조의 변화로 간주하고 이전 종주국 군주에게 부여했던 칭호인 ‘아시리아 왕’을 그대로 나보폴라살이라는 새로운 왕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나중에 그의 아들 느부갓네살이 남 왕국 유다를 침공했을 때 유대인들은 그가 자신을 ‘아시리아 왕’이라고 부르지 않고 ‘바빌론 왕’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 칭호가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시야가 죽자마자 그의 삶을 기록하고 열왕기의 저자가 복사한 연대기는 덜 정확하기는 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더 친숙한 명칭인 ‘아시리아 왕’을 자연스럽게 사용했습니다. 즉 유대인들은 나보폴라살을 아시리아 제국의 상속자로 여겼고 그래서 그를 ‘아시리아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사례는 스6:22에도 있습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스6:22에 있듯이 바빌론의 뒤를 이은 페르시아 왕도 ‘아시리아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레 동안 기쁘게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주께서 그들을 기쁘게 하셨으며 또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집을 짓는 일에 그들의 손을 강하게 하시려고 ‘아시리아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리셨기 때문이더라(스6:22). 스6:22의 ‘아시리아 왕’은 페르시아의 다리오 왕입니다. 이 모든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두 경우의 ‘아시리아 왕’은 고대 아시리아 제국의 영토를 차지한 바빌론 왕이나 그 뒤를 이은 페르시아 왕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것은 부정확한 것이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이 더 알아듣기 쉽고 자연스러운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이 그렇게 이야기하므로 우리는 당시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성경이 말하는 바를 그대로 수용하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성경 신자들의 믿음입니다. 샬롬 
2023-11-02 14:28:01 | 관리자
다니엘은 콩을 먹었나, 채소를 먹었나? (다니엘서 1장 12절)   안녕하세요? 한 분이 다니엘서 1장에서 히브리 아이들이 채소를 먹었는데 왜 킹제임스 성경은 콩을 먹었다고 하는지 알고 싶다고 하여 글을 씁니다. 단1:12, 간청하건대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사 그들이 우리에게 콩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뒤에 KJV: Prove thy servants, I beseech thee, ten days; and let them give us pulse to eat, and water to drink. 단1:16, 그런 까닭에 멜살이 그들의 배정 음식과 그들이 마실 포도주를 거두어 가고 그들에게 콩을 주니라. 개역 단1:12,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NIV: Please test your servants for ten days: Give us nothing but vegetables to eat and water to drink. 개역 단1;16, 이러므로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분정된 진미와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 간단하게 킹제임스 성경과 개역 성경 그리고 NIV를 비교해 보면 킹제임스 성경은 콩(pulse)으로 되어 있고 개역이나 NIV 등은 채소(vegetable)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어에서 pulse는 콩과의 식물을 말합니다. OED: The edible seeds of leguminous plants cultivated for food, as peas, beans, lentils, etc.  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제로아(스트롱 번호 2235)는 다니엘서 1장 12, 16절에만 나옵니다. 반즈 주석, 길 주석 등에는 이것이 분명히 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배도한 히브리 학자 독일 사람 겐세니우스는 이것을 채소로 바꾸었고 그 뒤로는 현대 역본들이 이것을 채소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소년들은 단순히 채식을 한 것이 아니라 콩을 먹었기에 피부가 윤택하고 다른 아이들에 비해 건강이 좋았습니다. 콩 단백질이 좋다는 것은 지금 모든 사람이 아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콩을 먹을 수 있게 허락하셨고 그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뛰어났습니다. 17 이 네 아이들에 대해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식을 주시고 모든 학문과 지혜에 능숙함을 주셨는데 다니엘은 모든 환상 계시와 꿈을 깨달아 알더라.  18 한편 그가 그들을 데리고 들어와야 한다고 왕이 말한 날들이 끝나매 그때에 내시들의 통치자가 그들을 느부갓네살 앞으로 데리고 들어오니 19 왕이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 모두 가운데서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 같은 자를 찾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이 왕 앞에 섰는데 20 왕이 지혜와 명철에 대한 모든 문제에 관하여 그들에게 묻고는 그들이 자기의 온 영토 안의 모든 마술사들과 별을 살피는 자들보다 열 배나 나은 것을 발견하니라(단1:17-20).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인 킹제임스 성경에 확신을 두면 늘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 것입니다.   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은 깊도다! 그분의 판단들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들은 찾아내지 못하리로다!(롬11:33) 샬롬 패스터
2023-09-28 09:29:29 | 관리자
마가복음 1장 4절의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는 올바른 번역이 아니지 않습니까? 요즘 어떤 분들이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의 마가복음 1장 4절의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가 오역이라고 하면서 문제를 제기하기에 간략히 답을 씁니다.   대답: 아닙니다. 지금 그대로가 정확한 번역이며 혹시 오해하는 분이 있으면 목사나 교사가 침례에 대해 잘 설명해 주면 됩니다.    마가복음 1장 4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John did baptize in the wilderness, and preach the baptism of repentance for the remission of sins. 요한이 광야에서 침례를 주고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선포하매 위에서 보듯이 문제로 부각된 이 구문의 영어 원문은 ‘baptism of repentance for the remission of sins’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총 2번 나오며(막1:4; 눅3;3) 침례자 요한과 관련되어 단순히 ‘회개의 침례’(baptism of repentance)라고 기록된 곳 또한 두 군데 있습니다(행13:24; 행19:4). 침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혜성처럼 나타나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그 당시에 침례자 요한이 와서 유대 광야에서 선포하여 이르되, 너희는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마3:1-2). 그의 메시지는 전체가 회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눅3:1-18). 그때에 그가 자기에게 침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오 독사들의 세대야, 누가 너희에게 경고하여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게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너희 속으로, 우리에게는 아브라함이 우리 아버지로 있다, 하고 말하기 시작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에게 자손들을 일으키실 수 있느니라(눅3:7-8). 침례자 요한이 회개의 침례를 선포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회개의 침례란 회개의 징표로 그가 침례를 주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구문의 ‘for’라는 단어 때문에 번역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실 ‘for’도 ‘of’ 만큼이나 간단하면서도 번역이 어려운 단어입니다. 여기서 ‘for’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eis’로 이 단어는 주로 장소를 가리키는 ‘to’ 혹은 ‘into’ 등으로 번역되었으며 마10:10 등에서 ‘너희의 여행을 위하여’(for your journey) 등에서는 목적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지금처럼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기 위하여(혹은 위한)’으로 번역하는 것은 앞뒤 문맥으로 보아 당연합니다.   그런데 주로 피터 러크만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여기의 ‘for’를 ‘때문에 혹은 인하여’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처럼 번역하면 “침례를 통해 죄들의 사면이 이루어지며 따라서 침례 중생 교리가 생긴다.”는 것이 지금의 번역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 구절에서 고의로 ‘회개의’를 빼고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는 침례'라고 읽으면서 마치 흠정역 성경이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는 침례를 가르친다(즉 침례 중생 교리를 가르친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을 오도합니다. 요한이 광야에서 침례를 주고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는 OOO 침례를 선포하매 또 흠정역 성경이 개역성경처럼 침례 중생을 가르친다고 말하면서 개역성경을 인용합니다. 개역: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개역성경은 이 구절을 매우 잘 번역하였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개역성경이 바르게 번역한 것은 바르다고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러크만의 이상한 교리를 지지하기 위해 말씀보존학회처럼 번역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킹: 요한이 광야에서 침례를 주고,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 문제는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영어의 ‘for’는 ‘repentance’를 수식하지 ‘baptism’을 수식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는 것은 회개이지 침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길게 풀어서 쓰면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는 회개로 말미암은(혹은 회개에 기초한) 침례’가 됩니다. 따라서 성경을 바꾸지 않고도 얼마든지 바르게 교리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주석들도 동일한 것을 말합니다. 매튜 풀: 회개가 그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였으며 회개의 징표가 바로 침례였다. 존 길: 침례를 받기 전에 먼저 회개가 있어야 했다. 회개가 있어야 침례를 주었다. 마가복음 1장 4절 주석 물론 여기서 또 러크만의 기발한 교리를 들고 나와 구약 시대의 짐승 희생물로 인해 죄들이 사면되었으므로 여기를 ‘죄들의 사면으로 인하여’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앞뒤 문맥은 그런 것을 지지하지 않으며 또한 성경의 용례 또한 그것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8절에 보면 ‘for the remission of sins’의 용례가 나오며 여기의 ‘for’도 같은 그리스말입니다. 이것은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 언약(New Testament)의 피니라.여기를 ‘죄들의 사면으로 인하여’로 번역하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피로 인한 죄들의 사면이 가려지지 않습니까?    저희는 러크만의 비상한 생각을 이해할 만한 능력이 없어서 그냥 평범하게 문맥에 따라 이렇게 번역하고 이해할 뿐이며 대부분의 사람들도 저희와 같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는 회개의 침례’는 바른 번역이며 이 구절이 ‘침례 중생’ 교리를 가르치지 않음은 설명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사와 목사가 있습니다.   끝으로 옥스퍼드 사전에서 unto의 용례를 보면 '무엇을 위하여'가 있으며 사전에는 구체적으로 1582년 신약 성경의 마가복음 1장 4절을 예로 듭니다.  OED Unto의 용례 b.A.III.8.b With a view to; for the purpose of; for.  1582 N. T. (Rhem.) Mark i. 4 Preaching the baptisme of penance vnto remission of sinnes. 여기의 unto가 바로 킹제임스 성경의 for와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는 회개'로 번역되어야지 '죄들의 사면으로 인한 회개'로 번역되면 안 됩니다. 끝으로 개역성경과 대부분의 현대역본들은 주님의 만찬을 보여 주는 마26:28 등에서 ‘새’(New)라는 중요 단어를 삭제했습니다. 즉 이들은 아직도 신약 시대가 열리지 않았고 여전히 구약 즉 ‘Old Testament’ 시대가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천주교에서는 여전히 제사를 드리고 제사장이 있으므로 이런 시스템이 없는 신약 시대의 도래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기관들을 동원하여 예수님께서 친히 선언하신 신약(새 상속 언약)시대를 부인합니다.
2023-09-25 11:35:08 | 관리자
시편 68편 14절의 그것은 무엇인가?   안녕하세요?   한 분이 시편 68편 14절에 대해 물어서 간단히 답을 합니다.   먼저 시편을 연구하기 위한 준비로 '드보라의 노래'(삿5장)를 읽고 평행점을 비교하면 좋을 것입니다(시68:4/삿5:3,7-8).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시온 산에 거하기로 결정하신 강력한 행동에 초점이 놓여 있습니다. 엘로힘(23회), 여호와(Jehovah), 야(할렐루야, 엘리야 등의 약자), 아도나이(6회), 샤다이 등 여러 하나님의 이름이 이 시편에 사용되었습니다. 이 시편은 메시아 시편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엡4:8에서 이 시편의 18절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승천에 적용합니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하나님을 통한 네 가지 승리의 표현을 표현하는 찬송입니다. 시68:14는 다음과 같습니다. When the Almighty scattered kings in it, it was white as snow in Salmon. 전능자께서 왕들을 그것 안에서 흩으실 때에 그것은 마치 살몬의 눈처럼 흰색을 띠었도다. 여기에는 2개의 그것(it)이 나옵니다. 처음 나오는 그것은 가나안 땅으로 보입니다. 10절 등 전체 문맥\잭이 이런 해석을 지지하고 다수의 주석들도 동일하게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 그것은 하나님께서 왕들을 흩으시는 그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일은 살몬 산에서 눈이 흩날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죽은 자들의 뼈가 눈처럼 하얗게 땅을 덮었다고도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다음 주석들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68편 14절 주석   샬롬  
2023-09-25 10:49:18 | 관리자
레위기 18장 23절 혼동, 혼돈, 혼란 confusion 영어 성경을 번역할 때 가능하면 같은 단어를 우리말로 같게 번역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늘, 땅, 왕국 등은 각각의 단어의 어원이 같으므로 처음부터 동일하게 하늘, 땅, 왕국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런데 영어에는 다른 어원에서 왔지만 영어로는 한 단어로 표기된 것들도 매우 많습니다. confusion이라는 단어가 그중 하나입니다.    성경에는 confusion이라는 말이 구약에 23회, 신약에 3번 나옵니다. 영한사전에서 confusion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정의가 되어 있습니다. ① 혼동《with; between》. ② 혼란 (상태), 분규; 착잡. ③ 당황, 얼떨떨함. ⟨관련어⟩ confuse v.   ♣ be in 〔throw ... into〕 ~ 당황하다〔하게 하다〕; 혼란되어 있다〔시키다〕. ♣ Confusion! 《구어》 제기랄, 야단났군! ♣ ~ worse confounded 혼란에 또 혼란. ♣ covered with ~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하여. ♣ drink ~ to …을 저주하여 잔을 들다.   일이 꼬이고 정신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즉 당황할 때 우리는 I am confused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confusion에는 성질이 다른 두 개가 합쳐져서 하나가 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con과 fusion이 합쳐진 것입니다. 여기서 con은 함께의 뜻이고 fusion은 합쳐지다는 말입니다. 옥스퍼드 사전에 가서 confusion을 보면 일곱 번째 용례가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7.7 Mixture in which the distinction of the elements is lost by fusion, blending, or intimate intermingling.  †b.7.b Fusion together. Obs. rare.  1828년판 웹스터 사전의 일곱 번째 정의는 성질이 다른 것들을 수치스럽게 하나로 혼합한 것이라고 말하며 레위기 18장 23절과 20장 12절을 구체적인 예로 들고 있습니다. 7. A shameful blending of natures, a shocking crime. Leviticus 18:23, 20:12. 레18:23 Neither shalt thou lie with any beast to defile thyself therewith: neither shall any woman stand before a beast to lie down thereto: it is confusion. 너는 어떤 짐승과 함께 누워 그 일로 너 자신을 더럽히지 말며 어떤 여자도 짐승 앞에 서서 그것을 향해 눕지 말라. 그것은 혼동(混同)이니라.   사람과 짐승은 본성이 다르므로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면 안 되는데 수간은 그렇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confusion이라고 말합니다.  레20:12 And if a man lie with his daughter in law, both of them shall surely be put to death: they have wrought confusion; their blood shall be upon them. 남자가 자기 며느리와 함께 눕거든 그들을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그들이 혼동(混同)을 일으켰으므로 그들의 피가 그들에게 돌아가리라   위와 비슷하게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면 안 됩니다.     우리말 혼동(混同)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1. 구별하지 못하고 뒤섞어서 생각함. 2. 서로 뒤섞이어 하나가 됨. 대개 우리는 첫번째 의미의 혼동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 두 번째 의미의 혼동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confusion입니다.    confusion은 참으로 어려운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confusion에는 당황하다, 패배를 당하다, 치욕을 당하다는 뜻도 있고 위의 두 구절처럼 혼동으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으며 무질서 상태의 혼돈을 뜻하는 경우도 있고 뒤죽박죽이 되어 어지럽고 질서가 없음을 뜻하는 혼란도 있습니다. 다만 가마우지와 해오라기가 그곳을 차지할 것이며 또한 올빼미와 까마귀가 그 안에 거하리라. 그분께서 그 위에 혼돈(confusion)의 줄과 공허의 돌들을 팽팽히 드리우시리니(사34:11) 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하나님은 혼란(confusion)의 창시자가 아니요, 화평의 창시자시니라(고전14:33). 레위기 18장과 20장의 confusion을 혼돈이나 혼란이라고 이해해도(번역해도) 사실 큰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그 경우 성질이 다른 두 개가 하나가 되어 무질서를 일으킨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 경우의 confusion이 원래 ‘con+fusion’이고 이런 confusion은 보통의 confusion 즉 당황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 혼란스럽다, 무질서하다 등의 confusion과는 어원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면 좋을 것입니다.   샬롬   패스터
2023-09-22 09:09:33 | 관리자
예레미야 48장 27절 의미 예레미야 48장은 전체가 모압에 대한 심판을 기록합니다. 27절은 모압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갈 때 그들을 조롱하고 모욕한 일을 기록합니다. 27 이스라엘이 네게 조롱거리가 아니었느냐? 그가 도둑들 가운데서 발견되었느냐? 네가 그에 대하여 말한 이후로 기뻐 뛰었느니라. . 첫 부분: 이스라엘이 네게 조롱거리가 아니었느냐? 모압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갈 때 긍휼을 베풀지 않고 오히려 조롱하였습니다. 중간 부분: 그가 도둑들 가운데서 발견되었느냐? 이 부분은 일종의 속담입니다. 사람이 도둑질을 하다 걸리면 큰 조롱을 받는데 이스라엘(유다)이 그런 적이 있느냐고 하나님은 묻습니다. 마지막 부분: 네가 그에 대하여 말한 이후로 기뻐 뛰었느니라.   그런 적이 없는데도 모압 사람들은 이스라엘(유다)이 도둑질을 하다가 걸린 것처럼 그들이 포로로 잡혀갈 때 손뼉을 치고 기뻐서 뛰놀았습니다. 모압의 악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48장에 47절에 걸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돕고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 너를 사랑하는 자들은 번영하리로다(시122:6).
2023-09-20 14:04:33 | 관리자
예레미야 33장 2절의 그것은 무엇을 뜻하나요? 성경에는 지시 대명사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레미야 33장 2절의 그것이 바로 이런 사례 중 하나입니다. Thus saith the LORD the maker thereof, the LORD that formed it, to establish it; the LORD is his name; 그것을 만든 자 주, 그것을 형성하여 굳게 세운 주가 이같이 말하노니 주가 그의 이름이니라. 그것을 만든 자 주,에 해당하는 영어는 the LORD the maker thereof입니다. 영어 thereof는 보통 앞에서 언급된 것의 소유격으로 종종 ‘그것의’, ‘그것에 속한’ 등으로 번역됩니다. 바로 다음에는 그것을 형성하여 굳게 세운 주 즉 the LORD that formed it이라는 말이 나오며 앞의 thereof와 it이 같은 것을 가리킴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it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일단 it은 앞에 있는 무엇을 말하는데 33장 1절에는 그것이 없으므로 32장에서 그것의 정체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32장 17절의 땅입니다.    아, 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주의 큰 권능과 뻗은 팔로 하늘과 땅을 만드셨으니 주께는 너무 어려운 일이 없나이다. 또 다른 하나는 32장 36절의 이 도시 즉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주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 도시 즉 너희가 말하기를, 칼과 기근과 역병으로 말미암아 바빌론 왕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는 이 도시에 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또 다른 하나는 32장 43절의 이 땅입니다. 너희가 이 땅에 관하여 말하기를, 이 땅이 사람이나 짐승이 없는 황폐한 곳이 되었고 갈대아 사람들의 손에 넘어갔도다, 할지라도 사람들이 이 땅에서 밭들을 사리라. 그런데 33장을 가서 보면 4절, 5절, 6절, 9절 등에 계속해서 에루살렘이라는 도시가 등장합니다. 이런 것을 종합해 볼 때 여기의 ‘그것’은 앞뒤 문맥상 예루살렘 도시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지금 바빌론 군대가 공성퇴로 무너뜨리려 하는 이 도시 예루살렘은 내가 만들었다. 비록 너희 유다 백성이 갖은 수를 동원해서 막으려 해도 이 도시는 망한다(5). 그런데 내가 다시 그것을 복원한다.”(6, 10-11, 16). 물론 다른 뜻으로 보는 것도 성도의 자유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주석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여러 사람들이 예루살렘 도시나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33장 2절 주석 모음 성령 하나님의 조명이 성경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충만히 임하기를 원합니다. 샬롬  
2023-09-20 10:14:59 | 관리자
디모데전서 5장 12-15절, 구원이 취소되는가? 한 분의 문의:   12. 그들은 자기들의 처음 믿음을 내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 15. 이는 어떤 자들이 이미 사탄을 따라 돌아섰기 때문이라. 이 말씀에서 "처음 믿음을 내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 라는 말씀과 "이미 사탄을 따라 돌아섰기 때문이라."는 말씀은 영원한 속죄, 영원히 완전하게 하셨다는 말씀과 대치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부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안녕하세요? 성도의 구원은 영원토록 안전합니다, 즉 영원토록 안전 보장이 되어 있어서 아무도 그것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그분에 의해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봉인되었느니라(엡4:30). 그럼에도 육체를 가지고 사는 동안 성도가 심하게 죄를 지으면 - 즉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을 슬프게 하면 -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기도 하고 병들게도 하십니다. 디모데전서 5장의 이 부분도 동일한 것을 말합니다. 이 구절들은 성도들의 구원이 취소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1. 구원받고도 몸에 정죄를 받을 수 있고 2. 사탄을 따라 그의 일을 도울 수도 있으며 3. 심지어 하나님의 심판으로 저주를 받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1의 사례: 고전11:27-30 2의 사례: 딤전1:19-20 3의 사례: 행5:1-11, 요일5:16-17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다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자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육체를 멸하도록 판단하였으니 이것은 영이 주 예수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전5:5). 고린도전서 5장을 잘 읽어 보시면 디모데전서 5장에 대한 답이 나올 것입니다. 사랑침례교회유튜브 채널에서 구원의 영원한 안전 보장에 대한 설교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구원 시리즈 설교 9-12 감사합니다. 
2023-09-15 09:43:33 | 관리자
영어가 안 되는데 왜 영어 성경을 읽으려고 할까? 안녕하세요? 며칠 전에 어떤 분이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여쭤볼 말씀이 있어서요 히브리서2:4 원문 물음표는 어떻게 해석이 되는 것입니까? 평서문인지 의문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히2:4, God also bearing them witness, both with signs and wonders, and with divers miracles, and gifts of the Holy Ghost, according to his own will? 평안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답을 드렸습니다. 네 물음표는 2장 3절에 있습니다. 영어는 3, 4절이 길게 한 문장이지만 우리말은 그렇게 못해요. 3 How shall we escape, if we neglect so great salvation; which at the first began to be spoken by the Lord, and was confirmed unto us by them that heard him; 4 God also bearing them witness, both with signs and wonders, and with divers miracles, and gifts of the Holy Ghost, according to his own will? 3 우리가 이렇게 큰 구원을 소홀히 여기면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이 구원은 처음에 주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신 것이요 그분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것인데 4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뜻에 따라 표적들과 이적들과 다양한 기적들과 성령님의 선물들로 그들에 대하여 증언하셨느니라. 설명: 보시다시피 영어에는 4절 끝에 물음표가 있고 우리말 번역에는 3절 초반에 물음표가 있습니다. 영어를 보면 3절 중간에 if 문장이 있고 그 끝에 구원에 대한 설명이 which부터 시작되어 4절까지 쭉 이어집니다. 물론 우리말에서는 3절에서 문장을 나누고 설명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말과 영어의 구조가 심히 많이 다르므로 번역할 때는 종종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을 읽으면 이 구절들을 이해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데 왜 영어를 보면서 4절에 물음표가 없다고 하는지 궁금해서 간단하게 물었습니다.   나: 이제는 이런 것 신경 쓰지 않고  읽어도 되지 않나요? 그랬더니 그분이 이렇게 담을 보내 왔습니다. 그분: 신경을 쓰는 게 아니라 워낙 영어를 모르니 답답해서요.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습니다. 나: 그러면 한국말만 읽으세요. 영어가 안 되는데 왜 영어를 보려 하나요. 감사합니다. 나는 결코 그분을 폄하하거나 조롱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어가 안 되는데 왜 굳이 영어를 보려 하는지 사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영어 그대로!'를 주장하는 사람들(특히 목사들)에게 세뇌되어 이런 일이 생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번역의 정의와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 성도들의 99.9퍼센트는 영어를 전혀 보지 않고 한국어 성경만을 읽습니다.  저도 30년 전에는 거의 영어 성경을 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우리말로만 성경을 읽습니다. 영어와 대조해서 읽으면 성경이 제대로 읽히지 않습니다. 물론 번역과 교정을 할 때에는 당연히 영어를 보아야 하지만 일상생활을 하면서 묵상과 경건 생활을 위해서는 우리말 성경만 읽습니다. 사실 이렇게 해야 정상입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읽으면서 그것이 확실하지 아닌지 알기 위해 그리스어 공인 본문을 옆에 두고 대조해서 읽는 사람은 미국에서도 거의 없습니다.  우리말로 주어진 성경을 우리말로 마음껏 읽을 수 읽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영어를 모르면서도 영어와 대조해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시간 낭비이고 불필요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이 땅에 킹제임스 성경이 들어온 지 30년이 지났고 많은 교정을 거쳐 우리말로 번역된 킹제임스 성경이 나왔습니다. 마음껏 쭉쭉 읽기 바랍니다. 그래야 성경이 제 기능을 발휘합니다. 오늘은 영어에 함몰되어 시간을 낭비하는 분들이 있을까 봐 간단히 적었습니다.   고후2;17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는 많은 사람들 같지 아니하고 도리어 순전함에서 난 자같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같이 하나님의 눈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2023-09-15 09:22:35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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