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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결과 약452개
지금까지 저는 킹제임스 성경을 쓴다고 하면서 또 근본주의를 한다고 하면서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한때 저 자신도 비난받을 일들을 많이 한 사람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이제 우리가 - 저와 우리 근본주의 성도들이 - 바르게 행하자는 취지의 글을 몇 번 썼습니다. 그랬더니 맹비난이 들어오더군요. 한 마디로 너나 잘하라는 것입니다. 너나 교만 떨지 말고 남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라는 댓글을 받고 참으로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좀 더 사랑을 담아 글을 쓰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제 모습이 그랬음을 시인하고 지금도 그런 면이 있음을 시인합니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날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고 나아지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근본적인 믿음을 갖기로 작정해서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식 독립침례교회 혹은 장로교 개력주의 교회 등만을 유일한 근본주의 틀로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거기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근본적인 것을 이야기할 때는 성경에 있는 것을 따르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도 한때 침례교 목사였고 앞으로 기회가 주어지면 분명히 다시 '제대로 된 목사' - 과거에는 잘 몰라서 형편 없는 목사였음 - 의 길을 갈 것입니다. 시간이 가면서 많이 느끼는 것은 제가 생각하거나 알던 것 이상으로 근본주의가 폭이 넓고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결코 타협하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을 그렇게 편협한 존재, 획일화된 존재로 만들지 않았으므로 폭 넓게 사고하고 바르게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독자께서는 앞으로 본 사이트에서 제가 근본주의라고 할 때는 성경에 있는 것을 따르자는 것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름도 남기지 않고 악성 댓글을 올리면 마음이 후련해지는 분이 여럿 있는 것 같습니다. 이름은 없어도 접속하는 순간 이미 IP Address가 기록됩니다. 그러므로 제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누가 이런 악한 일을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댓글을 쓰도록 한 것은 성도들 간의 대화를 유도하고자 함인데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사이트에 들어와서 항상 욕을 하고 악성 댓글을 남기는 것은 신사가 할 일이 아니지요. 더욱이 여기의 제 글을 수시로 모니터링해서 상부에 보고하는 분들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참 제가 이렇게 유명하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인 줄은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아무 힘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저를 무서워하지 말기 바랍니다. 할 말이 있고 정말로 그것이 마음에 걸리고 저를 사랑해서 충고하고 싶으면 전화나 e-mail을 주면 안 될까요? 이미 저를 거쳐간 사람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데 그러면 더더욱 신사가 아니지요. 우리 모두 Gentlemen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어쨌든지 도전을 주고 교만하지 말라고 충고를 주어서 감사합니다. 깊이 새기겠습니다. 내 편이든 반대 편이든 내게 도전이 되는 글을 주었으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 아닙니까?   부탁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우리 모두가 성경대로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고 가끔씩 이런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틀렸으면 알려주십시오. 바른 의견이면 고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제와 오늘 많이 묵상한 찬송가입니다.   인자한 말을 가지고 사람을 감화시키며갈 길을 잃은 무리를 잘 인도하게 하소서.   이것을 책상 앞에 붙여 놓고 매일 되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이런 사람이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09-05-01 17:39:28 | 관리자
저는 이번 겨울에 미국 노쓰캐롤라이나주에 있는 앰배서더 칼리지를 방문했습니다. 지금 거기서 공부하고 있는 한 젊은이와 그분의 멘토이신 존스턴 목사님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존스턴 목사님은 한국에서 10년 이상 침례교 선교사로 일했고 캐나다 뱅쿠버에서 몇 년 동안 한인 목회를 했는데 놀랍게도 로버트 할리 수준으로 한국말을 유창하게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 명의 미국 선교사들을 봤지만 한국에 선교를 하러 왔다고 하는 이들의 주장이 무색할 정도로 이들은 거의 한국말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너무 놀랍게도 우리말을 유창하게 했습니다. 현재 그곳에서 선교학 교수를 하면서 주변의 한인 교회에서 목회를 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좋은 만남이었습니다.   그 날 그 학교 총장님께서 제게 아침에 10여 분 정도 학생들 앞에서 간증할 기회를 주어서 킹제임스 성경 사역을 알리고 왔습니다. 그 후에 한 연세드신 교수님이 나와서 학생들에게 마음을 잘 지켜야 한다고 충고를 주는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70세 먹은 노인이 20세 아이들에게 자기의 인생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성경으로 우리의 마음을 풀어 주는데 너무 말씀이 달았습니다.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 나 주는 마음을 살피며 속 중심을 시험하여 각 사람의 길들과 그 사람의 행위의 열매대로 그 사람에게 주느니라(렘17:9,10).   우리의 모든 것이 마음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까? 좋은 것, 싫은 것, 믿고 싶은 것, 믿고 싶지 않은 것, 비난하는 것, 칭찬하는 것, 주님 밑에서 순종하려는 것, 내 뜻을 세우려는 것, 결혼하는 것, 이혼하는 것, 말을 곱게 하는 것, 말을 막하는 것 등 우리의 모든 삶이 마음에 의해 결정됩니다. 한 번 가만히 앉아서 그런가 안그런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이런 차원에서 잠언을 기록한 솔로몬의 마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열심을 다하여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서 나오느니라(잠4:23).   우리의 믿음 생활 특히 성화 과정은 단적으로 한 마디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바른 것과 그른 것이 종잇장처럼 얇은 마음의 생각 하나에 의해 결정됩니다. 부부 관계, 연인 관계도 그렇지 않습니까? 다윗의 큰 아들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겁탈한 이후에 그의 마음 속에는 이전의 사랑이 다 없어지고 순식간에 미움이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 미움의 정도는 그가 품었던 사람보다 훨씬 강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삼하13:15 참조). 이게 사람의 마음이지요.   그러므로 이제 킹제임스 성경을 읽는 저와 여러분은 더더욱 마음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마음의 묵상이 필요합니다. 깊이 생각하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여기서 성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2009-05-01 17:36:55 | 관리자
독신생활   지난 달 통계청이 발표한 ‘2005∼2030년 장래가구 추계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총 가구 수는 독신가구의 증가에 힘입어 2030년에는 올해보다 300만여 가구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이 된다. 이는 독신주의자들의 증가와 함께 만혼 및 이혼율의 증가, 그리고 기러기 아빠처럼 가족과 떨어져 혼자서 살아가는 가장들이 급격히 늘어가고 있는 세태를 확인해 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혼자 살아가는 것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요즈음, 오히려 독신을 부추기기까지 하는 교계 안팎의 주장들도 제법 듣게 된다. 그러나 독신생활은 우리의 육적, 영적 건강에 모두 해가 됨을 알아야 한다(창2:18; 딤전4:3; 5:14).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합당한 협력자를 만들리라, 하시니라.”(창2:18) 최근 독신생활이 흡연보다 더 건강에 나쁠 수 있다는 영국 워릭대학교의 연구결과를 비롯하여 독신생활이 우리의 몸에 갖가지 이상을 초래한다는 많은 연구보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왜냐하면 기혼자의 경우 사회적 지지자로서 배우자가 스트레스를 덜어주고, 건강한 생활습관을 갖는 데 도움을 주는 반면 독신자는 상대적으로 나쁜 생활습관에 물들기가 쉽기 때문이다(전4:9-12). 보통 독신생활을 하게 될 경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불규칙한 생활과 장기간 혼자 지내면서 생기는 외로움이다. 독신 남성들의 경우 먼저 식생활이 불규칙해지기 쉬운데 단순히 식사를 한 끼 때운다는 생각으로 지내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양섭취의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 그리고 인스턴트식품을 많이 먹다보면 비만을 비롯한 고혈압, 당뇨병 등 각종 성인병의 위험도 높아지게 되고 또 불규칙한 식사로 인해 위염, 위궤양 등 소화기 질환도 잘 발생할 수 있다. 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렇지 않겠지만 혼자라는 이유로 잦은 술자리를 가질 개연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필요이상으로 칼로리 섭취량을 높여 비만이 될 수 있으며, 알코올로 인해 간질환 등 건강을 쉽게 해칠 수 있다. 아울러 혼자라는 심리적 소외감과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면 심한 경우 우울증을 유발하며, 극단의 경우에는 자살까지 이어지게 된다. 미국 워싱턴 대학의 토머스 홈스 박사와 리처드 라헤 박사가 고안한 ‘스트레스 지수’(life change scale; stress scale)에 따르면 43개의 스트레스 항목 중 어느 것보다도 강도가 높은 세 가지가 ‘독신’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즉 배우자의 죽음(100), 이혼(73), 별거(65) 등 독신생활에 대한 항목들이 수감(63), 근친 사망(63), 실직(47) 등 우리가 심한 스트레스라 생각하는 다른 항목들에 비해 높은 스트레스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러한 스트레스 점수가 높을수록 병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지고,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독신생활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신체적 건강에까지 문제를 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결혼 후 마누라의 잔소리가 독신자의 자유보다 낫다’는 말이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 여겨진다. 아울러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홀로 있기보다는 넘어질 때 일으켜주고 차가운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동료를 두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전도자의 고백이 시대를 초월한 진리임을 다시 한번 확인케 된다(전4:10,11). “누구든지 아내를 얻는 자는 좋은 것을 얻고 주의 은총을 얻느니라.”(잠18:22)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자기들의 수고로 인하여 좋은 보상을 소유할 것이기 때문이라.”(전4:9)          
2009-05-01 17:34:24 | 관리자
채식주의 날로 건강에 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는 오늘날,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채식을 하여야 진정한 건강을 누릴 수 있다는 주장을 심심치 않게 접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최초로 허락한 음식은 과일과 곡식과 견과류의 채식 식단이었다(창1:29). 그래서 최근 들어 과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는 채식 식단의 우수성은 이미 성경적 창조원리에 의한 것이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이것은 또한 다니엘과 세 친구의 예에서도 입증이 된다(단1:1-21). 즉 열흘 동안 물과 콩으로만 식사를 한 다니엘과 세 친구의 얼굴은 왕이 정해 준 음식을 먹은 모든 아이들보다 더욱 아름답고 살이 기름지게 보였다(단1:15). 그리고 삼년 뒤에 채식만 한 이 네 소년은 느부갓네살의 시험을 받았는데 바벨론의 모든 지혜로운 자들보다 열배나 더 총명하였다. 따라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우리의 신체구조나 유전정보와 별 차이가 없는 다니엘과 세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채식을 하게 되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가공된 인스턴트식품의 범람과 육식위주의 식생활문화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채식이 웰빙식일 뿐 아니라 이처럼 성경적이라고까지 하는 얘기를 들으면 더욱 귀가 솔깃하게 된다. 그러면 이와 같은 성경적(?) 채식예찬론자들의 주장은 정말 성경적인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 후 우리에게 육식을 허락하셨다. 즉 지구 전체에 대격변이 일어나 이전과 달라진 자연환경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육식이 필요함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먹을 것이 될 것이요, 푸른 채소와 같이 내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었노라.”(창9:3) 그리고 다니엘과 세 친구는 채식이 창조원리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채식을 택한 것이 아니었다. 즉 왕이 주는 음식은 먼저 우상에게 드려진 것이며 또 왕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버금가는 충성을 왕에게 바친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거절한 것이다. 아울러 다니엘이 평소 육식도 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단10:3). 만일 쇠고기가 해롭다면 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두 천사와 함께 방문하셨을 때 그분을 위해 쇠고기를 준비하였으며 또 왜 하나님께서는 그 고기를 드셨을까(창18:1-8)? 그리고 육식이 잘못된 것이라면 예수님께서는 빵만으로도 수많은 이들을 먹이실 수 있었을 터인데 왜 빵과 물고기로써 따르는 이들을 먹이셨으며(마14:13-21; 15:32-39) 부활하신 후에도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먹으라고 하셨을까(요21:1-14)? 우리가 구약성경을 자세히 공부해보면 하나님께서 영적 전쟁을 치루는 전사들로 레위 자손들을 세우신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들의 식사는 기름진 양과 쇠고기가 대부분이었다(레7:6-34; 신18:3-5). 또 구약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바알의 대언자들을 대면하기 바로 전에 주님께서 그를 위해 마련하신 식단에는 물론 고기가 포함되어 있었다(왕상17:1-7). “까마귀들이 아침에 빵과 고기를 그에게 가져오고 저녁에 빵과 고기를 가져왔으며 그가 시냇물을 마셨더니”(왕상17:6) 우리가 영적 전쟁에 들어가면 엄청난 단백질 소모가 있음이 최근 여러 사역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그래서 만약 사탄이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고기를 못 먹게 한다면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르는 동안 우리 몸의 면역기능이 급속히 떨어져 사역을 중단해야 되는 일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힌두교인들이나 뉴에이저들은 채식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요가를 하는 이들은 고기로부터의 진동(vibration)은 유해하며 영적 감도를 감소시킨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능력을 받기 위해서 몸 안에 아카사(akasa)라고 불리는 물질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채식을 하고 성욕을 금함으로써 고갈되지 않게 된다고 그들이 믿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고기는 건강에 좋지 않으며 채식 위주의 식사가 콜레스테롤수치를 낮추고 심장병, 암, 고혈압, 당뇨병 등 성인병의 발병 위험을 줄여준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기름이 많지 않은 양질의 (붉은) 고기 자체가 건강에 직접 해를 준다는 보고는 없다. 오히려 극단적인 채식주의는 영양학적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건강에 해가 될 수 있다. 식단에서 동물성 식품이 배제되면 철, 칼슘 같은 무기질, 비타민 B12, 비타민 D, 엽산 등의 공급이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적혈구 생산에 관여하는 비타민 B12는 동물성 식품에만 존재하므로 채식을 할 경우에는 비타민 B12 첨가 두유, 시리얼 등 비타민 첨가식품을 따로 먹어야 한다. 이제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자.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셨으니 이들은 위선으로 거짓말을 하며 자기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진 자들이라. 이들이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삼가라고 명령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사 진리를 믿고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은 선하고 감사함으로 받으면 거부할 것이 전혀 없나니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히 구별되었느니라.”(딤전4:1-5)
2009-05-01 17:33:44 | 관리자
오캄의 면도날(Ockham's Razor)   중세 철학의 일반적인 원리인 ‘오캄의 면도날’은 오늘날까지 인문학뿐 아니라 과학 분야에서도 주요한 논리적 잣대가 되어 왔다. 즉 ‘복잡한 의견을 불필요로 하는 원리’(the principle of unnecessary plurality), ‘절약의 원리’(the principle of parsimony), ‘단순성의 원리’(the principle of simplicity) 등으로도 불려지는 이 ‘오캄의 면도날’은 사실 의학적 판단을 비롯한 모든 이성적 사고의 영역에서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사용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마이코플라즈마 폐렴의 경우를 보자. 이 폐렴에서는 다형홍반, 간염, 용혈 빈혈, 수막뇌염 등 호흡기 이외의 장기들에도 합병증이 잘 생길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여러 가지 다른 원인들에 의해서 이와 같이 다양한 질환들이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단지 마이코플라즈마 균 하나에 의해 다양한 합병증이 생겼다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논리적이다. 다시 말해 동일한 현상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면 그 중 가장 간단한 가설이 가장 진리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 ‘오캄의 면도날’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개념은 모든 질병의 원인을 찾는데도 적용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현대의학에서는 우리가 겪는 온갖 유형의 질병에 대해 환원론적인 이해만 있을 뿐 그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고찰은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왜 질병을 앓게 된 것인지 그 근본이유에 대해 명쾌히 설명을 하고 있다(창3:17-19). 즉 아담의 범죄,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로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냄과 동시에 인간에게 유해한 마이코플라즈마 같은 균들이 창궐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각종 질병에 걸리게 됨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창조의 질서가 깨지면서 무질서도(entropy)가 증가하는 열역학 제2법칙이 이 지구상에 시작됨으로 인해 우리 몸도 쇠퇴하기 시작하여 건강을 잃게 됨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해하게 된다. 원인을 알면 치료가 쉬워진다. 우리가 온전한 건강을 얻으려면 먼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한다(롬3:23; 6:23; 10:9,10). 그렇게 되면 우리가 언제 어떠한 모양으로 이 세상을 떠나가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며 어떠한 질병도 존재하지 않는 천국에서 건강한 삶을 영원토록 누릴 수 있다(계21:4; 22:3,4). 아울러 우리는 구원받은 후 주님께서 허락하신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갈 때에 아담의 불순종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앞으로 이 성서건강학 칼럼들을 통해서 계속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게 건강한 삶을 보장받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에게 진정한 치유자가 되어주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출15:26; 23:25). “이르시되, 네가 주 네 하나님의 음성에 부지런히 귀를 기울이고 그의 눈앞에서 옳은 것을 행하며 그의 명령들을 귀담아 듣고 그의 모든 법규를 지키면 내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내린 이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를 치유하는 주니라, 하시니라.”(출15:26)
2009-05-01 16:31:12 | 관리자
광우병   광우병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 미국 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한 언론매체의 보도로 촉발된 이번 사태는 촛불집회와 인터넷 서명운동 등을 통해 순식간에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되어버렸다. 또한 연일 각 매스컴에서 쏟아지는 광우병 관련 뉴스들은 단지 건강에 관한 논쟁의 영역을 벗어나 정치, 경제, 사회 등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광우병의 기저에 놓여 있는 영적인 문제점들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간과해버리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광우병은 잘 알려졌다시피 양의 시체를 먹은 소에게서 처음으로 발견이 되었는데, 이 광우병 걸린 소를 인간이 먹으면 광우병을 일으키는 변형된 단백질 ‘프리온’이 인간에게 들어와 치명적인 인간광우병(vCJD)을 일으키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온 우주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해 주셨다(창1:28). 그리고 노아의 홍수 이후 육식을 허락하시면서 동물이나 식물이나 어떠한 사물이든지 ‘섞지 말라’고 명령하셨다(창9:3; 레19:19).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정한 창조의 질서를 무시하면서 초식동물인 소에게 육식을 시킨 결과 이처럼 광우병이란 새로운 역병의 심판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된 것이다(출9:15; 시78:50; 렘21:6; 합3:5; 히12:23). 특히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공장형 집단사육을 하면서 잘못된 사료를 준 것은 창조주 하나님 대신 맘몬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다름이 아니다(마6:24; 롬16:18).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많은 인수 공통 전염병 중 특별히 소의 역병을 통해 우상숭배의 죄악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라 여겨진다. 왜냐하면 고대로부터 소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주로 섬기던 대상이며, 또 타락한 루시퍼의 얼굴도 소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출32:1-6; 왕상12:25-33; 겔1:10; 10:14; 28:14).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독교문화권의 대표 지역으로서 시간, 공간, 언어 등의 절대적 기준이 있는 영국에서 광우병이 처음 발견되도록 하신 사실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광우병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갖지 못함을 꾸짖는 것이라 생각된다(롬3:11,12; 눅18:8). 그렇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작금의 광우병 파동을 목도하고 있는 우리에게 우리가 위치한 이 시대의 좌표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셨다고 생각한다(마24:7; 눅21:11). 이제 우리는 광우병의 공포에 사로잡혀 이에 대한 갖가지 대책을 강구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영혼의 건강 상태를 철저히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 그리할 때 우리는 이 두렵기 짝이 없는 광우병의 시대를 진정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의 심판자이시며 우리의 진정한 치료자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히12:23; 마9:10-13). “몸은 죽여도 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혼과 몸을 능히 지옥에서 멸하시는 분을 두려워하라.”(마10:28).   국민일보 5월9일자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22:41 | 관리자
회춘    계절의 여왕 5월이 왔다. 곳곳에서 봄기운이 넘쳐나고 있다. 왕성한 수정활동을 보이는 자연계뿐 아니라 황금연휴 기간 성형을 통해 젊음을 되찾아보려는 회춘족에게서도 완연한 봄을 느낄 수 있다. 최근 들어 웰빙과 건강이 행복의 기본조건으로 떠오르면서 이와 같이 적극적으로 회춘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단순히 몸매와 피부관리 등을 통해 젊음을 유지하려던 과거와 달리 회춘은 현대의학의 발달과 함께 놀랄 만큼 구체적인 성과를 구가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노화는 생리적 자연현상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질병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의학적 기술들과 약제들이 중요한 회춘법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이 중 가장 선두주자격인 회춘법은 '비아그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비아그라는 원래 협심증 치료제로 개발된 것이었으나 임상실험 과정에서 발기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져 발기부전 치료제로 쓰이게 되었다. 이후 비아그라의 폭발적인 인기에 편승하여 시알리스, 레비트라, 자이데나, 야일라, 엠빅스 등등의 발기부전 치료제가 국내외에서 개발되어 회춘을 열망하는 많은 이들에게 애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약제는 심혈관계와 시력 등에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으며 심지어 사망에까지 이르렀던 경우도 보고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의사와 상담한 후 복용하여야 한다. 그런데 성경 속에서는 비아그라의 효과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완벽하기 이를 데 없는 한 회춘의 사건이 소개되고 있다(창 18:9∼15; 21:1∼8). 아브라함과 사라는 연로하여 아이를 낳을 수가 없었다. 사라는 여인들의 관례에 따른 것이 멈춘 상태였다(창 18:1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폐경이 된 사라의 난소에서 다시금 배란이 되게 하셔서 이삭이 태어나도록 하셨다(창 21:1∼3).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137세에 사라와 사별한 후 재혼을 하여 아들을 무려 6명이나 더 낳을 수 있도록 아브라함에게도 회춘을 허락하셨다(창 17:17; 23:1; 25:1∼4).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와 같은 초자연적인 회춘을 허락하신 것일까? 그 까닭은 세상의 방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 생명의 열매가 맺혀질 수 있음을 그들에게, 또한 그들과 동일한 믿음을 소유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롬 4:16∼25; 갈3:5∼9). 아울러 아브라함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날마다 회춘하는 놀라운 복을 덤으로 주시기 위함이었다(롬 4:23,24; 고후4:16; 갈3:14). 이제 우리도 이와 같은 믿음을 소유하여 매일매일 회춘의 복을 누리는 건강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자.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썩어 없어져도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고후 4:16)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22:08 | 관리자
불임    불임이란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1년간 있었는 데도 임신이 되지 않거나 아기를 이미 낳은 뒤로 2년 이상 임신을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최근 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2007년 현재 우리나라에서 불임부부들의 수는 8만7000쌍이 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자녀를 두지 않고 맞벌이를 하며 돈과 출세를 인생의 목표로 삼는 딩크(DINK)족과 달리 아기를 갖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는 불임부부들의 애환은 상상을 초월하기도 한다. 이것은 성경 속에 나타난 불임부부들의 사례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아브라함과 사라, 야곱과 라헬, 엘가나와 한나가 겪었던 불임의 시련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창16:1∼6; 18:9∼15; 25:19∼23; 30:1∼13, 22∼24; 삿13:2∼5; 삼상1:4∼18; 눅1:5∼7). 그들은 결혼 후에 당연히 찾아올 태의 열매를 오랜 기다림과 기도 끝에 힘겹게 얻어야 했다.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권리를 하나님께 온전히 내드리기 위한 뼈저린 훈련을 체험해야 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불임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시며, 그렇게 되는 데는 그분께서 정하신 시간과 방법이 있음을 배울 수 있었다(전3:1).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적 출생을 주관하실 뿐 아니라 '영적 출생'(거듭남)을 관할하시는 만유의 주인이시라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다(롬11:36; 엡4:6).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불임부부들에게도 이와 같은 영적인 접근이 반드시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불임클리닉을 찾아가 최첨단 의학기술로 불임 문제를 해결 받는 것도 좋겠지만,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불임의 해결책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경 말씀을 통해 고민해볼 수 있었으면 한다. 성경은 혈연 중심으로 가족을 말하지 않는다(마12:46∼50). 대신 사랑의 관계를 중심으로 가족을 말하고 있다(요일3:14). 즉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음을 성경은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다(롬8:15;23; 갈4:5; 엡1:5).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감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끔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어 '하나님의 가족'이 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롬8:15; 엡2:19). 아울러 우리는 시험관 아기, 배아 이식, 정자 직접 주입술, 착상 전 유전진단 등 여러 불임 치료법을 고려하기에 앞서 이미 태어난 소중한 아기들을 입양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할 때 하나님의 창조 질서는 확연히 드러날 것이며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진정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보라, 자식들은 주의 유산이요, 태의 열매는 그분의 보상이로다"(시127:3).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21:34 | 관리자
웃음    '일소일소(一笑一少) 일노일로(一怒一老)'라는 말이 있다.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지고, 한 번 성내면 한 번 늙는다'는 뜻이다. 또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라는 말도 있다. 그 뜻은 '웃는 문으로 만복이 찾아온다' 곧 '웃으면 복이 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웃음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나 웃음이 건강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가 객관적으로 입증이 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로마린다 의과대학의 리 버크 교수는 1996년 심리신경면역학 연구학회에서 웃으면 면역기능이 강화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해 전 세계 의학계의 관심을 모았다. 그는 폭소 비디오를 보고 난 뒤 혈액 속에 강력한 면역조절물질인 감마 인터페론의 양이 200배 늘어났음을 밝혀냈다. 또한 백혈구와 면역글로불린이 많아지고 면역을 억제하는 코르티솔과 에피네프린이 줄어드는 현상을 발견했다. 또 2001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리 버크 박사팀은 암을 잡아먹는 NK세포가 웃음에 의해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증명했다. 이 외에도 웃음이 건강에 효과가 있다는 많은 연구결과들이 보고가 되어 왔는데, 대표적으로 뇌하수체에서 엔도르핀 같은 천연 진통제가 생성된다는 것이다. 또 부신에서 통증과 신경통 같은 염증을 낫게 하는 화학물질이 나오고, 동맥이 이완돼 혈액순환과 혈압이 낮아지며, 암 환자의 통증을 경감시키고, 심장박동 수를 높여 혈액순환을 돕는 것 등이 잘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사실들을 바탕으로 하여 웃음을 통해 건강을 증진시키려는 다양한 시도가 진행되고 있는데, 특히 스태그플레이션의 상황 속에서 활력을 잃고 웃음을 찾기가 쉽지 않은 요즈음 '웃음치료'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러나 웃음을 통해 건강을 도모하는 모든 방법이 다 성경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목적한 것에는 때가 있는데 웃음도 이에 해당된다(전3:4). 사실 힌두교, 아프리카 토속종교, 중국의 기공, 최면요법 등 다양한 영적 배경을 가진 집단에서 한결같이 강조되고 있는 웃음이 다 우리에게 참된 건강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게다가 한때의 유행처럼 지나가긴 했지만 소위 '거룩한 웃음'이라는 것도 성령의 역사가 아님을 인식하여야 한다. 물론 하나님은 완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웃음을 채워주시는 분이다(욥8:20, 21). 그리고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 예수님의 예표로서 으뜸가는 인물인 '이삭'의 뜻이 '웃음'이라고 하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웃으며 기뻐하길 원하고 계신다(창21:6; 눅15:3,7). 이제 하나님의 선물인 '웃음'을 통해 영육간에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복을 누리도록 하자.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한 영원한 생명이니라."(롬6:23) "즐거운 마음은 약같이 좋으나 상한 영은 뼈를 말리느니라."(잠17:22).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20:58 | 관리자
어느 분이 옥성호 형제님의 글을 또 보내 주셨습니다. 목사들에게 해당되는 글이지만 내용은 인간의 내면에 들어 있는 탐욕에 대한 것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솔직함이 결여되면 위선자가 됩니다. 특히 목사나 교회의 리더들이 이 점을 명심해야할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 옥성호 형제의 글 ****************************    제가 요즘 저의 상황을 보면서 한 가지 배우는 점이 있습니다. 책이 출판되고 또 이런 지면을 통해서 글을 올리다 보니까 제 의도와 전혀 관계없이 사람들이 저에 대해서 어떤 ‘정형화된 이미지’를 가지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느낌과 함께 행여나 저를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시시각각으로 저를 위협합니다. 저의 이런 우려에 대해서 모범답안으로 대답한다면, “집사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할 필요 없어요.”라고 말할 수 있지만 세상이 그렇게 모범답안과 같이 간단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사람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반드시 심각할 실망으로 이어집니다. 그 확율은 100%라고 저는 장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행여나 사람들이 저를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습니다. 행여나 나부터 나 자신에 대해서 착각하지 않고 항상 ‘내 주제 파악’을 바로 할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한다라는 경각심입니다. 그런데 이런 점을 생각하다가 다른 한 가지 사실에 문득 생각이 미쳤습니다. 바로 목회자의 고독과 관련된 점입니다. 더불어 목회자의 불륜과 관련한 힌트입니다. 어떻게 보면 결국 목회자는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매주 강단에서 ‘바른 소리’를 외쳐야 하는 처지이니까요. 그리고 사람들은 목회자가 외치는 강단에서의 ‘바른 소리’가 그 사람의 실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기대치’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기 마련입니다. 오죽하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가 아닙니까? 그만큼 사람은 사람들의 기대치에 맞추어 행동하려고 애를 쓰기 마련입니다. 나 자신의 실체와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 자신에 대한 모습 사이에 너무도 큰 차이가 있는 경우에 그 차이는 당사자에게 심각한 스트레스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는 ‘고독’이라는 이름으로 목회자를 공격합니다. 나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대상들이 별로 없는 목회자들이 겪는 값비싼 댓가입니다. 더 유명해지고 더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으로 알려지면 질수록 이 고독은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고독이 깊어지고 자신을 허상 속에 고립시키는 실수가 잣아지는 목회자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그 누군가를 만날 때 자기도 모르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자신을 ‘목사’가 아닌 ‘한 남자’로 대하는 여자에게 자신을 내 던지게 됩니다. 또한 그 여자는 그 여자대로 강단에서는 힘 있는 외치는 저 목사의 얼굴 뒤에 숨은 고독을 바라보며 ‘연민의 정 또는 모성애’를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제가 볼 때 목사와 불륜에 빠지는 여자의 경우 그 ‘헌신도 내지 충성도’가 일반 불륜보다 더 깊지 않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우리 주변에는 할 말 못할 말을 못 가리는 ‘주책 바가지’ 목회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도무지 ‘고독’을 느낄 틈이 없는 바쁜 사람들이지요. 함께 어울려 놀기에도 정신이 없으니까요. 그런 분들은 상대적으로 이성과 관련한 유혹에서 좀 더 안전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위험이 있더라도 고독한 목회자가 안전한 ‘주책 바가지’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고독이 초래할 수 있는 불륜과 관련해 제가 생각하는 대안은 두 가지입니다. 가장 먼저 목회자의 아내가 자신의 역할을 바로 찾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는 자기 남편을 ‘여보’라고 부르지 않고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이상한 여인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런 호칭은 이 부부간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점은 시사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매들은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할 때도 이런 식으로 얘기합니다. “김 집사님, 어제 우리 목사님이 식사를 하시면서 그러던데….” 제대로 된 문장은 다음과 같아야 합니다. “김 집사님, 어제 우리 남편이 식사를 하면서 그러던데….” 회사에서 부장의 부인이 과장의 부인에게 이렇게 얘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철수 엄마, 글쎄 어제 우리 부장님이 나한테 이번 달 월급이 올랐다고 그러면서….” 말이 안 되지요….아내가 회사의 직원입니까? 왜 자기 남편을 부장이라고 부릅니까? 왜 이런 말도 안되는 호칭이 교회에서는 가능할까요? 남편을 남편이 아니라 목사로 바라보는 아내는 남편을 고립시킵니다. 남편을 남자가 아닌 목사로 인식하는 아내는 남편을 어떤 의미에서 ‘거세’하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남편은 목사가 아니라 ‘남자’여야 합니다. 두번째는 목회자에게도 친구가 필요합니다. 서로간에 ‘무슨 무슨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이 친구를 만드는 데에는 어떻게 보면 좀 더 신중함이 요구됩니다. 왜냐하면 뒷통수 치지 않을 사람을 잘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TV 뉴스 진행자 중에 오라일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쓴 책 중에 ‘오라일리 팩터스’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서 가장 중요한 친구의 조건 1위는 단연 ‘뒷통수 치지 않는 친구’입니다. 뒷통수 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다. 둘 사이에 한 얘기를 딴 데 가서 나불거리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런 사람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들은 정말로 사생활과 관련한 힘든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가서 ‘기도 제목’으로 발설하는 사람말입니다. “집사님, 정말로 어려운 얘기인데요. 그래도 꼭 기도해 주셨으면 하고요. 저기 최 집사님 있잖아요? 그 분에게 이렇고 저런 일이 있데요. 참 안타까워요. 사실 말하면 안 되는데…그래도 집사님이 기도해 주셨으면 하고 얘기를 하는 거니까 딴 사람한테는 가서 말하지 마시고 그냥 최 집사를 위해 조용히 기도만 해 주세요.” 이런 사람은 둘 중의 하나지요. 대단한 바보이거나 상상을 초월하는 위선자이거나…. 뒷통수치지 않는 친구를 만난다면….그건 정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다윗에게 요나단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목사의 은밀한 얘기를 당회에 가서 ‘기도제목’으로 내어 놓거나 주보에 기도 제목으로 싣는 친구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 완전한 인간 ‘아담’에게서도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점을 찾으셨습니다. 아담에게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에게는 하와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같은 인간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는 함께 웃고 함께 울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가장 흔히 듣는 말들 중에 하나가 목사님을 개인적으로 깊이 알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알게 되면 실망하니까 아예 가까이 하지 말고 멀리서 설교만 들으라는 충고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귀로 들리는 목사의 잘못에 대해서도 아예 눈을 감곤 합니다. 그런 경우 그가 막은 눈과 귀는 목사에 대한 애정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 반응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비겁한 자기 보호의 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개인적으로 깊이 알아도 여전히 좋아하고 존경할 수 있는 목회자입니다. 목회자가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허상을 조금씩 걷어내고 자신뿐 아니라 남에게도 좀 더 솔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런 목회자들을 아주 많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목회자의 가정과 친구 관계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2009-05-01 16:17:55 | 관리자
성경의 와인(Wine)   1. ‘와인’은 성경에서 알코올이 없는 포도 주스 혹은 알코올이 있는 포도주 혹은 술을 가리킨다. 다음의 구절은 와인이 알코올이 없는 포도 주스임을 보여 준다: 신11:14; 대하31:5; 느13:15; 잠3:10; 사16:10; 65:8; 딤전5:23.   2. ‘와인’이 알코올이 있는 포도주 혹은 술을 가리킬 때는 문맥이 그것을 보여 준다. 이 경우 하나님은 와인의 악영향을 지적하신다. 창세기 9장의 노아의 경우가 이렇다. 잠언 20장 1절도 이것을 보여 준다. 포도주는 항상 사람을 속이고 조롱하게 만든다. 잠언 23장 30-31절도 포도주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와인’이 쓰인 문맥에서 우리는 항상 그것이 포도 주스인지 포도주인지 조심스레 구분해야 한다.   3. 성경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경고한다. 구약과 신약 모두 그렇다. 잠언 23장 32-35절과 잠언 31:4-5절을 보기 바란다. 재미있는 것은 잠31:6-7절 말씀이다. 여기서 포도주는 진통제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사용해도 됨을 보여 준다. 아무나 이것을 마실 수 없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진통제가 없었으므로 보통 사람이 구할 수 있는 것은 독한 술이었고 이처럼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이것을 사용하는 것이 예외적으로 허락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사람은 살리라는 소망이 없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또한 지금 이 시대에는 다른 진통제가 있으므로 이런 경우에도 굳이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된다. 이사야서 5장 11-14절 역시 술 먹는 자들에 대해 경고한다. 13-14절은 술 먹는 것으로 인해 지옥이 확장됨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포로로 잡혀갔으며 그들의 존귀한 자들은 굶주리고 그들의 무리는 갈증으로 목마르도다. 그러므로 지옥이 자기를 확장하고 한량없이 자기 입을 벌렸은즉 그들의 영광과 그들의 큰 무리와 그들의 영화와 또 기뻐하는 자가 거기로 내려가리로다.” 사실 지옥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한 곳이다(마25:41). 그러나 알코올에 의해 지옥은 지금도 스스로를 확장시키고 있다. 이사야서 28장 7-8절도 술의 악함에 대해 경고한다.   4. 술을 만드는 것은 자연적인 과정이 아니다. 우리는 보통 주스를 오래 두면 술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은 술을 만들려면 시간 외에 다른 조건들이 맞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자연적으로 주스가 술이 되게 했으므로 술은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술은 하나님이 만들지 않았다. 사람이 자기의 기술로 술 만드는 법을 만들어 냈다. 양조 공장 주인들은 술을 만들려면 물, 온도, 설탕 등이 모두 맞아야 함을 알고 있다. 주스를 냉장고에만 넣어도 결코 술이 되지 않는다. 또한 뜨거운 열대 지방에서도 주스는 발효되지 않으며 술이 되지 않는다. 고대 사람들은 주스를 끓여서 잼처럼 만들었고 필요할 때 여기에 물을 타서 마셨다. 발효가 자연적으로 일어나려면 조건이 맞아야 하는데 사람이 이 조건을 조절하지 않으면 거의 술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술은 사람이 발명한 것이다.   5.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술(포도주)을 만들거나 마시지 않았다. (1) 첫째 이유는 그분의 거룩한 본성 때문이다. 히7:26은 그분께서 거룩하고 해가 없으시고 더럽지 않으면 죄인들로부터 분리된 분이라고 말한다. 그 당시 어느 누구라도 성육신 하신 하나님인 그분의 거룩함을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그분을 붙잡으러 갔던 사람들도 그분처럼 말한 사람은 없었다고 증언한다(요7:46). 그분께서 거룩하시므로 성경이 사람을 조롱하게 하는 것, 사람을 속여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부르는 포도주를 마시거나 만들 수는 없다. 그분의 본성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장 17-18에서 주님은 율법과 대언자들을 폐하러 오지 않고 성취하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하박국 2장 15절은 자기 이웃에게 술을 주는 자에게 화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리스도께서 만일 술을 마시거나 만들었다면 스스로 이런 말씀을 폐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분은 결코 자신의 본성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 않는다.   (2) 둘째 이유는 레위기 10:9-11절에 있는 제사장의 규례 때문이다. 제사장은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의 차이를 가르쳐야 하므로 술을 마실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긍휼 많고 실실하신 대제사장이시다(히2:17). 그러므로 그분은 결코 술을 마시거나 만들 수 없다.   (3) 셋째 이유는 위에서 살펴본 잠언 31-45절에 있다. 왕들은 술을 마시지 말라고 성경은 권고한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왕들의 왕이시므로 그분의 본성 상 술을 만들거나 마실 수 없다(계19:16; 마27:11; 슥9:9).   (4) 그리스도께서는 백성을 조롱하거나 속이러 오지 않았다. 그런데 잠언 20장 1절은 포도주가 그 일을 한다고 말한다.   (5)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지옥에 보내지 않으려고 오셨다. 그런데 술은 지옥을 확장시키는 일을 한다(사5:11-14).   (6)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그분은 포도주를 만들지 않았다(요2). 많은 사람들이 10절을 근거로 잔치 때 포도주를 마시고 기뻐했을 거리고 추측한다. “그에게 이르되, 모든 사람이 처음에 좋은 포도즙을 내고 사람들이 충분히 마신 뒤에 덜 좋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즙을 남겨 두었도다, 하니라.”(10절) 즉 술에 취한 그 사람들이 나중에 나온 포도주를 맛보고 그것이 처음 것보다 더 좋다고 했으니 그것은 분명히 술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술에 잔뜩 취한 사람들이 어떻게 나중에 나온 술이 처음 것보다 좋은 것을 맛보고 알 수 있을까? 정신이 온전하지 않으면 그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오히려 그들이 포도 주스를 마시고 정신이 온전했기에 나중에 나온 것이 더 좋음을 그들이 증언했음을 보여 준다.   (7) 11절에 그 다음 이유가 있다. 이것을 계기로 그분께서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셨다고 11절은 말한다. “예수님께서 기적들 중의 이 처음 기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사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을 믿으니라.”(11절)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것이 과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일까? 그런 일은 오히려 그분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8) 11절에는 그분의 제자들이 이 기적을 보고 그분을 믿었다고 말한다. 즉 그 일이 그들의 믿음을 증대시켰다. 사람들이 취해서 비틀거리게 만든 그 기적이 과연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켰을까? 어떤 이들은 딤전5:23을 근거로 포도주를 마셔도 된다고 주장한다. 즉 술을 약으로 마시는 것은 괜찮다고 그들은 말한다. 알다시피 디모데는 위장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과연 어떤 의사가 위장병 환자에게 술을 권할까? 지금도 모든 의사가 위장병에는 술을 먹으면 안 된다고 경고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물 대신 포도 주스를 마시라고 권고한 것이다.
2009-05-01 16:10:13 | 관리자
자살   요즈음 한 탤런트의 자살 사건이 매스컴에 연일 보도가 되고 있다. 원래 밝은 이미지의 연예인이었고 또 인기 있는 동료 연예인과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잉꼬부부였기에 그의 자살 소식은 많은 시민들을 깊은 충격에 빠지게 하였다. 특히 이들 부부는 신앙간증을 공개적으로 할 정도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느끼는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사건처럼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안타깝기 짝이 없는 경우들을 방지해보고자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자살에 대한 연구를 해왔지만 뚜렷한 성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두 달 전 캐나다의 한 생리학 교수가 자살자의 뇌에서 불안과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특정 유전자에 영향을 미치는 단백질이 과도하게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발표하여 마치 자살 유전자를 찾아낸 것처럼 보도한 언론도 있었지만, 아직까지 의학적으로 자살을 확실히 방지하는 약제의 개발은 요원한 상태이다. 왜냐하면 자살은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고뇌와 절망에 의한 것으로서 자살에는 너무도 많은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으므로 일정한 형태나 모두에게 적용되는 규칙성 등이 발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자살에는 영적인 요소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엡6:12; 벧전5:8). 우리가 영적으로 심히 곤고하게 되면 자살의 충동이 생길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구약을 대표하는 자로서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 인정받은 모세도 자살을 생각하였었다(민11:15; 12:3; 요1:17). 또 성도들에게 인내의 본이 되는 자로서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였던 욥도 자살을 원하였었다(욥1:1; 7:15,16; 약5:11). 그리고 메시야가 오기 전에 보냄을 받아야 하는 자로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하였던 엘리야도 자살을 구하였었다(왕상19:4; 왕하2:11; 말4:5). 또한 자살하면 반드시 지옥에 갈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삿16:21-31; 히11:32; 삼상28:19; 31:1-6). 진실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죽음을 맞더라도 천국에 가는 것이 사실이다(요1:12; 롬10:9,10).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살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들은 너무도 확고하다. 첫째, 하나님께서 살인을 금하시기 때문이다(출20:13; 요일3:15). 둘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창1:26,27; 9:6). 셋째,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창2:7; 욥33:4; 시21:4; 36:9; 행17:15). 넷째, 생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신32:39; 삼상2:6,7; 욥1:21; 시68:20). 다섯째, 그리스도인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이다(행20:28; 고전6:19,20; 엡5:29,30; 벧전2:9). 여섯째, 복음이 훼손되기 때문이다(요3:16; 10:10). 일곱째,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창1:28; 마18:19,29; 갈2:20).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04:15 | 관리자
멜라민   최근 중국발 멜라민 공포가 온 세계를 휩쓸고 있다. 중국에서 멜라민이 함유된 분유를 먹고 4명의 어린이가 사망을 했으며 또 4만 명이 치료를 받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후 국내에서도 중국산 분유를 원료로 한 제품들에서 멜라민이 검출되었고, 심지어는 뉴질랜드산 우유단백질 락토페린에서도 미미한 양이기는 하지만 멜라민이 발견되어 뉴질랜드 당국이 수출을 중단하였다고 보도되었다. 멜라민은 주로 플라스틱, 접착제, 주방용조리대, 접시류, 화이트보드, 화학비료 등에 사용되는 공업용 화학물질이다. 그런데 질소함량이 풍부한 흰 결정체이기 때문에 우유에 물과 함께 섞을 경우 검사시 단백질 농도가 진짜 우유처럼 나타나게 된다. 멜라민이 함유된 우유나 유제품을 섭취하여 멜라민에 중독이 되면 소변이 거의 나오지 않거나 혈변 및 불안감을 보일 수 있으며, 심하면 방광결석, 요도결석, 신장염 등이 발생하면서 고혈압도 유발할 수 있다. 특히 수유를 하여야 하는 영아들의 경우 상대적으로 신장기능이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멜라민이 함유된 분유를 매일 먹게 되면 농도가 소량이어도 체내에 지속적으로 축적돼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다. 일단 멜라민 중독으로 인해 신장질환이 발생하면 소변을 알칼리화 시키며 전해질 이상을 교정해야 한다. 또 혈액투석이나 복막투석을 할 수도 있는데 심한 경우 신장결석에 대한 수술을 시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던 엘리사가 길갈에서 죽에 들어 있던 독을 없앴던 것처럼 멜라민 중독을 완전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 의학의 현주소이다(왕하4:38-41). 그러므로 유제품 외에 멜라민이 주로 사용되는 합성수지 식기 등에 대한 주의가 요구된다. 아울러 차제에 국가적 차원에서 원산지표시제와 식품성분표시제 등을 비롯한 수많은 식품관련 행정사항들도 철저히 점검하여 식품안전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번 멜라민 파동을 통해 드러난 이 시대의 사조에 휩쓸리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공의의 하나님 대신에 맘몬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지 않도록 늘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마6:24; 롬16:18; 벧전5:8). 특별히 일상생활 속에서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정직하게 상거래를 하며 하나님의 질서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레19:35; 신25:13-16; 잠11:1; 16:11; 암5:24; 미6:11). 그리할 때 공의의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실 것이다. “거짓된 저울은 주께 가증한 것이나 공정한 추는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니라.”(잠11:1)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02:43 | 관리자
아동학대   최근 발간된 ‘2007년도 전국 아동학대 현황보고서’를 보면 아동학대 신고 건수는 9,478건으로 전년대비 6.5% 증가했고 학대아동 보호건수도 5,581건으로 7.3% 늘었다. 또 아동학대 열 중 여덟이 가정에서, 그것도 부모에 의해 자행되고 있으며 구타에 정서적 학대까지 일삼는 가해자의 절반이 친아버지고 피해아동의 절반이 거의 매일 학대를 당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아동학대에 대한 신고율이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낮은 사실을 감안하면 실상은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동학대가 문제가 되는 것 중에 하나는 학대에 따른 상처가 학대받는 당시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은 어른이 되서도 쉽게 털어버리지 못한다. 주지하다시피 학대받은 사람이 되레 남을 학대할 확률이 높다. 또한 맥길대 연구팀이 ‘플로스 원’지에 발표한 대로 자살을 시도하게 하는 위험인자가 아동기 학대에 의해 유발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아동학대는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발본색원을 해야 할 의학적, 사회적 아젠다인 것이다. 그래서 지난 달 LA에서 훈육을 목적으로 아들에게 회초리를 든 30대 한인 부부가 아동학대 혐의로 체포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자녀에게 매를 들면 아동학대가 된다는 주장이 점점 일반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나 성경은 아이를 이해하고 배려하고 자신감을 키워주고 사랑으로 감싸는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오히려 ‘회초리’를 소개하고 있다(잠10:13; 13:24; 19:29; 20:30; 22:15; 23:13,14; 29:15). 필자는 두 자녀를 키우면서 회초리를 무척 많이 들었다. 아이들이 잘못하였을 때 성경(특히 잠언)을 읽고 회초리로 징계한 후 같이 기도하고 마무리를 하곤 하였다. 욕을 하거나 직접 손발을 이용한 체벌을 한 적은 없었다. 그 이유는 성경이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이었다(잠22:6; 29:17). 그런데 사랑의 매와는 상관없는 신체적 학대나 성적 학대, 비기질적 성장 장애 등이 발생하면 먼저 그 학대받은 아동을 보호해야 한다.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없는 연약한 사람들을 보호할 책임이 언제나 사회에 주어졌음을 기억하고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돌보아야 한다(출22:21-27; 마25:31-46). 그리고 가해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한다(엡5:11; 딤전5:20; 눅17:3). 이때 가해자는 자기가 지은 죄를 확실히 뉘우치고 회개해야 한다. 왜냐하면 회개를 통해서만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겔18:31,32). 그러나 예방보다 좋은 치료는 없다. 아동학대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경적 가족관계를 이루어야 한다(엡5:22-25,28; 6:1-4). 남편에게 복종하는 아내,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남편,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 성경말씀대로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가 될 때 아동학대와 같은 가정폭력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 너희 아버지들아,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육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01:55 | 관리자
안락사   며칠 전 안락사를 요청하는 소송에 대한 현장검증이 서울 소재 한 대학병원에서 실시되었다. 식물인간 상태가 된 환자의 자녀들이 어머니에게서 인공호흡기를 뗄 수 있게 해 달라며 낸 소송과 관련해 재판부가 환자의 상태를 직접 보기 위해 비공개 현장검증에 나선 것이다. 재판부는 아직 안락사 문제에 대해 충분히 공론의 장(場)이 형성된 적이 없었기에 이 소송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안락사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법원이 최선을 다하기 위해 현장검증까지 실시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소송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안락사에 대한 법리적 규정이 어떻게 바뀔지 예측할 수 없지만 안락사는 단지 죽음을 인공적으로 연장하는 의료장비를 제거하는 ‘소극적’ 방임뿐 아니라 약물 등 치명적인 수단에 의해 환자를 죽이는 ‘적극적’ 행위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안락사는 공동의 이해 속에서 ‘존엄한 죽음’이라는 미명하에 합법적으로 살인을 하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안락사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먼저 성경에 나온 안락사의 예들을 살펴보자.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의해 두개골이 깨진 아비멜렉이 수치스런 죽음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병기 드는 청년의 칼에 죽은 사건과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죽게 된 사울이 고통을 줄이기 위해 아말렉 사람에게 부탁하여 최후를 맞은 경우는 전형적인 안락사라 할 수 있다(삿9:53,54; 삼하1:6-10). 그런데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도와주었던 행위를 자비로운 것이라고 칭찬하지 않았다. 다윗은 오히려 그 아말렉 사람이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죽이라고 명령하였다(삼하1:13-16).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창1:26,27; 9:6). 그래서 살인을 한 경우 외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생명을 거두실 권한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창9:6). 즉 안락사가 허용되어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창2:7; 시21:4; 36:9; 행17:25).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 스스로 죽음의 순간을 결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신32:39; 삼상 2:6,7; 시68:20).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의 몸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신 것이기 때문에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안락사는 결코 허용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행20:28; 고전6:19,20; 7:23; 벧전2:9).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느니라.”(고전6:19,20)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01:17 | 관리자
한센병(Hansen's disease)   지난 9월 3일 한국한센복지협회의 창립 6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한때 문둥병 또는 나병이라고도 불렸던 한센병이 현재 인구 십만 명 당 0.12명으로 발생율이 낮춰진 것은 무엇보다 이 한국한센복지협회의 지속적인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한센병 환우들에게 의료적, 사회적 재활뿐 아니라 체계적인 의료복지 시스템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한 명이라도 국가에서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시스템이 추진되어야 한다. 특히 환우들이 차별과 박해를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인격보호와 복지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일본처럼 국가에서 모든 것을 관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센병에 대한 편견과 오해는 잘못된 성경적 해석과 적용 때문에 생길 수도 있다. 성경에는 한센병(leprosy)을 진단하고 정결하게 하는 법을 소개한 레위기 13장과 14장외에도 수많은 곳에서 한센병이 언급되고 있다(출4:7,8; 레22:4; 민5:1-4; 12:1-13; 신24:8; 삼하3:28,29; 왕하5:1-27; 15:1-7; 대하26:16-23; 마8:1-4; 26:6; 막1:40-45; 14:3; 눅4:27; 5:12-15; 17:11-19). 그렇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한센병들이 모두 1874년 한센이 명명한 레프라 간균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성경에서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의 피부질환으로 한센병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성경에서 한센병은 전염이 잘되는 부정한 질병으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항생제가 개발되기 수천 년 전의 상황임을 인식하여야 한다(레13:45,46; 민5:1-4; 신24:8; 왕하15:1-7). 오늘날 한센병은 발병하더라도 약을 먹으면 다른 사람에게 병을 옮기지 않으며, 성적인 접촉이나 임신을 통해서도 감염되지 않는다. 아직까지 한센병은 제3군 법정 전염병으로 지정되었지만 격리가 필요한 질환이 아니며, 병형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꾸준히 약을 먹으면 완치도 가능하다. 더더욱 한센병은 유전병이 아니다. 성경에서는 한센병이 저주의 상징으로 언급되기도 하고 영적으로 죄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 유전병으로 착각하기도 하는데 한센병은 단지 균이 체내에 들어와 발생하는 감염성 질환일 뿐이다(레13:13; 삼하3:28,29; 롬5:12). 이제 한센병 환우의 집에 계시기도 하셨으며 많은 한센병 환우들을 고쳐주셨던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자(마8:1-4; 26:6; 막1:40-45; 14:3; 눅5:12-15; 17:11-19). “내가 새 명령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00:38 | 관리자
장기기증   지난 주 서울대병원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사망한 사람의 간을 떼어내 이식하는 수술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간은 혈액공급에 쉽게 영향을 받는 장기이므로 생체이식만 가능했었다. 그런데 이번 수술은 장기 기증자가 턱없이 부족한 현실에서 모자라는 장기를 대체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지난 한 해 국내에서 신장이나 간을 이식받은 환자는 천사백여 명이지만 여전히 이만여 명의 환자들이 장기이식을 기다리고 있다. 또 지난 한해 국내에서 장기를 기증한 뇌사자는 148명으로서 이는 뇌사자 100만 명에 3.1명꼴로 장기이식이 이뤄지는 것으로, 장기기증이 활성화된 스페인의 30명, 미국의 25명과 비교하면 너무나 부족한 실정이다. 우리나라에서 장기기증이나 시신기증이 잘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신체 훼손을 금기시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부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믿음에 기인하는 바도 있다. 즉 신체가 온전한 상태로 매장되지 않을 경우 부활에는 적절치 않을 것이라고 우려하는 시각도 있기 때문이다(전6:3; 렘8:2,3; 단12:2). 그러나 장기기증이나 장애로 신체가 일부 훼손되었거나 또는 화장으로 신체가 완전히 소실된 채 이 세상을 떠나갔다 하더라도 부활 때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살전4;17; 계21:4; 22:3). 오히려 성경은 자신의 몸을 희생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자신을 버리며 이웃을 사랑할 것을 강권하고 있다(요15:12-15; 요일3:16).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으므로 우리가 이로써 그분의 사랑을 깨닫나니 우리가 형제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특히 병들어 고통 가운데 있는 이웃을 섬길 의무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마10:8). “병든 자들을 고쳐주고 나병 환자들을 정결하게 하며 죽은 자들을 살리고 마귀들을 내쫓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10:8). 아울러 이웃을 섬기되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섬길 것을 명령하고 있다(레19:18; 마22:39; 눅10:27). “너는 원수를 갚지 말고 네 백성의 자녀들에게 원망하기 말며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주니라.”(레19:18) 이제 영생을 얻게 되는 우리에게 육체는 이 땅에 있는 동안만 필요한 것임을 인식하도록 하자(계21:4). 그리하여 장기기증이나 시신기증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있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자.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요일4:8)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00:00 | 관리자
비만   며칠 전 전직 대통령 중의 한 분이 ‘하루 두 끼 먹기’ 운동을 제안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유가 폭등과 곡가의 상승으로 경제가 어려운 지금 하루 두 끼만 먹으면 상당히 절약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게다가 자기 혼자 안 먹고 싶어도 옆에서 먹으면 먹어야 되는데 이 운동을 하면 비만인 사람이나 여성들도 매우 좋아할 것이라고 하였다. 사실 이러한 사견에 대해 정치적 해석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바는 어느덧 비만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는 현실이다. 이미 비만은 세계보건기구(WHO)에서 하나의 질병으로 분류되고 있는데 그 유병률이 지난 10여년 사이에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성인 인구의 약 60%가 과체중이고 30% 이상이 비만증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40세 이상 성인 인구의 약 30% 이상이 과체중 혹은 비만 인구이다. 또한 소아 및 청소년의 비만도 현저히 증가하고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비만은 더욱더 심각한 사회적 위협이 될 것으로 예측이 된다. 왜냐하면 제2형 당뇨병, 고혈압, 고지혈증, 심근경색, 협심증, 뇌경색, 뇌출혈 등과 같은 성인병뿐 아니라 역류성 식도염이나 정신질환들도 비만에 의해 유발될 수 있으므로 비만의 증가는 향후 막대한 사회적 손실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만의 원인으로 유전적 소인, 환경, 발달과정 등 여러 요인이 복잡하게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데 특별히 스트레스가 많은 경우 뇌에서 식용중추가 잘못 자극되어 살이 찌게 될 수 있다. 비만의 치료는 생활과 행동습관, 음식을 섭취하는 습관을 건강한 방식으로 바꾸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이상적으로는 스트레스 요인을 없애고 지방과 열량 섭취를 줄이며 유산소 운동과 체력단련 운동을 병행하도록 해야 한다. 성경에서도 비만에 대한 치료지침이 잘 나와 있다.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식사량을 줄이라는 것(잠23:2,3,21; 눅21:34)과 몸을 많이 움직이라는 것(창3:19상; 시128:2; 살후3:10하)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제 비만을 잘 치료하고 예방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자(고전3:16). “네가 만일 식욕에 빠진 자이거든 네 목에 칼을 둘지니라. 그의 맛있는 음식들은 속이는 것들이니 그것들을 바라지 말라.”(잠23:2,3)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창3:19상) “누구든지 일하려 하지 아니하거든 먹지도 말라.”(살후3:10하)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5:59:23 | 관리자
근친혼   얼마 전 호주의 한 남성이 자신의 딸과 7년 넘게 근친상간 관계를 유지해 온 것으로 드러나 호주 사회는 물론 전 세계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같은 사실은 이 남성이 무장 강도 혐의로 법정에서 심문을 받던 도중 밝혀졌는데 이들 사이에는 현재 한 살 난 딸이 있으며 2001년에 태어난 첫아이는 출생 후 며칠 만에 선천성 심장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원은 이들의 근친상간을 불법으로 판결내리고 앞으로 성관계를 하지 못하도록 3년 동안 감시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어떤 사회에서나 근친자의 통혼은 금기로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유전학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사람도 유전병과 관계가 있는 해로운 열성 유전자를 4-8개 가지고 있다. 비록 해로운 열성 유전자가 있어도 대부분 보인자이기 때문에 건강하게 살 수 있지만, 근친결혼을 하면 보인자인 부모에게 감춰져 있던 해로운 열성 유전자가 그 자손에서 동형이 되어 표현형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아울러 한 개체군에서 동종교배가 20세대 동안 계속되면 각 개체는 유전적으로 모두 동일하게 되어 그 개체군의 적응 능력은 매우 낮아진다. 따라서 그 개체군은 환경 조건에서 변화가 일어나면 적응하는 데 탄력성을 잃어버리게 되어 교배개체군들 간에 자연도태가 잘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에 근친혼을 허락하셨을까? 가인도 분명 아담이 낳은 많은 누이들 가운데 한 명과 결혼을 하였을 것이고, 아브라함은 자신의 배다른 동생인 사라를 아내로 삼았으며, 이삭은 삼촌 나홀의 손녀인 리브가 즉 오촌하고 결혼을 하였고, 야곱도 외삼촌 라반의 딸인 라헬과 레아 즉 사촌 두 명과 동시에 결혼을 하였다(창4:17; 5:4,5; 20:12; 24:15,24; 창29:12,23,28). 그렇지만 이 같은 근친혼은 어느 정도 인류가 번성하여 자리를 잡기까지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불가피한 방법이었다(창1:28; 9:1). 그리고 근친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줄어들다가 모세의 때에 율법으로 금지되는데, 이는 사회적인 안정을 얻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근친혼을 통한 유전적인 위험성도 상당히 커졌기 때문이다(레18:6-10; 20:10-21; 신27:20-23). 왜냐하면 노아홍수 이후 궁창 위의 물이 제거됨으로써 몸에 해로운 우주복사선이 증가하여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잘 일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돌연변이는 다음 세대에 전달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축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수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즉 유전자 돌연변이가 덜 축적되었던 족장시대까지는 한동안 가까운 친척과의 결혼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제 ‘올드 보이’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이도록 하자. “너희 가운데 아무도 가까운 친족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라. 나는 주니라.”(레18:6)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5:58:44 | 관리자
동성애   여성으로 살다 성전환수술을 거쳐 법적으로 남자가 된 34세의 한 미국인이 지난 주 여아를 출산했다. 동성애 전문 잡지 ‘디 애드버킷’(옹호자)에 ‘사랑의 출산’이란 제목으로 기고를 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한 이 임신한 남자(?)는 오프라 윈프리의 토크쇼에 출연하여 “아이를 갖는 것은 남자나 여자의 소망이 아니라 인간의 욕구이기 때문에 나의 생물학적 아이를 가질 권리가 있다”고 말한 대로 자신의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이제까지 동성애에 대해 알려져 왔던 다양한 스펙트럼을 총정리하는 듯한 이번 사건을 보면서 정말 동성애는 이 출산한 남자를 비롯해 동성애인권운동가들이 주장하는 대로 정상적이고 건강한 것인지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동성애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동성애 유전자에 대한 어떤 발견도 이루어진 바 없으며, 일란성 쌍둥이에서의 연구결과도 마찬가지이다. (또 동성애가 선천적이라면 절대 치유가 일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당수가 정신과 상담 또는 신앙의 힘으로 치유되고 있다.) 알프레드 킨제이 등에 의해 세워진 성연구원의 공식 간행물의 보고에 의하면 대부분의 동성애자들은, 특히 게이들은 수많은 섹스파트너를 갖고 난교(亂交)를 즐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학적으로는 동성애자들에서 예견되는 성행위로 인해 구강, 폐, 전립선, 남자성기, 쓸개. 항문, 직장, 결장, 여자성기, 자궁, 골반, 뇌, 피부, 혈액, 면역시스템 등 여러 신체시스템에 갖가지 질병이 발생하게 된다. 동성애가 에이즈에 매우 취약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감염자의 살을 파먹는 메티실린 내성 황색포도상구균(MRSA)의 새로운 변종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보스턴의 게이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동성애는 이처럼 신체적 이상들을 잘 일으키는 것뿐 아니라 영적으로 심각한 침해를 일으키기 때문에 더욱 더 문제가 됨을 알아야 한다. 동성애자들이나 동성애 옹호론자들은 하나님(God)이라는 단어를 적절히 인용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배격한다(창1:27). 대신 그들은 대부분 진화론을 동성애의 토대로 삼는다(딤전6:20). 또한 성경이 동성애가 가증스런 죄악임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인한다(레18:22; 20:13; 왕상14:24; 롬1:26,27; 고전6:9; 딤전1:10; 유다1:7). 결국 죄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다(요일1:8). 아울러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를 부정한다(엡5:22-33). 그래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지 못하게 한다(딛2:13; 계19:7,8; 22:20). 이제 동성애가 영육 간에 치명적임을 잘 인식하여 동성애의 영향력 하에 있는 이들을 참 건강의 길로 인도하도록 하자(약5:19,20).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옳으나 그 끝은 사망의 길들이니라.”(잠16:25)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5:57:44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