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4 장 십자가와 세상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는 옛 고대 세계가 십자가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었는지를 이렇게 요약하였다. “십자가를 로마 시민 앞에 보이지 않도록 하고 그들의 생각과 눈과, 귀로부터 그 이름이 들리지 않도록 하라”. 이처럼 2000년 전에는 십자가에 관하여 아무런 영광의 후광도, 아름다운 역사적 연관서도, 영웅적 희생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어떠한가? 아무나 십자가를 들먹거리는 세상이 아닌가! 심지어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 “십자가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고상한 그 무엇을 의미한다”. 그러나 역사의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20세기말을 맞이한 오늘날도 십자가는 멸시의 대상일 뿐이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극심한 수치와 경멸의 장소가 되기를 그만두자마자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화시키는 셈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그 당시에는 제자들은 범죄자들, 살인자들 및 반역자들이 십자가를 지고 형틀로 행렬을 벌이며 가는 것을 자주 바라다보았을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처형)은 너무도 악명 높고, 수치스럽고, 저주스러운 것이기에 옛 시대에 십자가에 대한 보편적이고 깊은 혐오감은 달리 표현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이 모든 것에 더하여 성경은 십자가에 대해 결정적인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나무에 매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은 자라”(갈3:13). 이 말씀은 십자가가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에 대해 가차없이 극에 달한 증오심을 표현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 바로 십자가였다. 십자가에서 이 교만한 세상은 단번에 그들의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었다. 한마디로 십자가는 이세상이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완벽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세상이여, 그리스도에 대해 너희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내놓아 보거라! 이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외쳐댔다. “··· 처단하소서, 처단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소서”(요19:15). 친구여, 속지 말라. 비록 비수가 이 세상의 옷 밑에 숨겨져 있기는 하지만 비수는 여전히 있다. 결코 없어진 것이 아니다. “한 시대 혹은 한 영혼 혹은 한 그룹의 영성을 참으로 측정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그들이 ‘세상’이란 단어에 대해 얼마만한 혐오감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있다”(D.M. Panton)는 이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리이다.
“세상”이란 단어를 정의 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성경은 “세상의 통치자”(요12:31)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이 세상의 풍조(course)”(엡2:2)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세상의 신”(고후4:4)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 세상의 영”은 하나님의 영과 반대(원수)되고(고전2:12), 이 “세상의 형체”(fashion)는 사라져간다. 또한 이 세상의 지혜는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전2:8).
따라서 하나님께서 “세상도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요일2:15)고 말씀하신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겠다. 세상은 이때 자연인의 삶과 전 과정을 말한다. 이 마지막 표현 즉 “세상에 있는 것들”(things)이라는 말에 주목하라. 이 책을 읽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세상적이지 않은 것은 사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혹시 단 한 가지라도 세상적인 것을 붙들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세상의 물건은 무엇인가? 당신은 아마 젊은이들이 춤과 쇼와, 연극을 사랑하는 것을 비난할지 모른다. 사실 그것은 옳다. 그러나 당신은 어떠한가? 정치, 예술, 과학, 돈, 야망, 사회적 인정, 혹은 사업에서의 영향력 등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은가? 세상은 젊은이, 중년, 그리고 노년에 따라서 그 내용이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모두에게 치명적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를 죽였고 하나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야망, 열정, 자랑, 인기, 쾌락 그 밖의 수많은 유혹거리들이 십자가와 모순되며 “아버지의 사랑”을 배제한다. 사도 요한은 “세상을 너무 사랑하지 말라” 라든가 “세상을 지나치게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대신 단순히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라고 선포했다.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이 세상의 세 가지 뿌리를 정의내리고 있으며 이 세 가지는 전설에 등장하는 세 개의 금사과 이야기처럼 우리를 미혹한다(아틀란타는 이에 미혹되어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이요 아버지께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요일 2:16). 이기적인 사람은 이 세 가지 형태의 욕망(정욕)으로 인해 만족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 가지 모두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십자가에서 내려와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그 육신을 애정과 정욕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하였느니라”(갈5:24).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를 지배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분을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는, 그러한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정과 욕심들이 얼마나 우리 주위에 많은지! 그러나 이 세상의 영이 어찌나 교활하고 속임수에 뛰어난지 자연적인 타고난 지성으로는 그것을 포착해 낼 수가 없다. 그것은 너무도 유혹적인 마술 같고, 마법같이, 우리마음을 쉽게 사로잡는다. 이 세상적 사고방식은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의 종교생활의 체질 깊숙이 그 암세포의 뿌리를 심어놓았다. 그것은 마치 치명적인 문둥병이면서도 고통을 동반하지 않아 알아차리지 못하는 동안 뼈를 갉아먹는다.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집의 뼈대를 먹어 치워버릴 하얀 개미와 같다. 그것은 바로 지성숭배주의의 온상이요, 현대주의의 시녀이다. 그것은 속에서부터 도려 나오는 스파이로서 십자가의 영을 쫒아 내버려 사라지게 만든 장본인이다.
J. Gregory Mantle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몇 년 전에 천연 자석인 한 산에 대해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산은 엄청난 흡인력을 가지고서 그 영향력 범위 내에 들어오는 모든 쇳조각을 엄청난 힘으로 끌어당겼습니다. 그 지역의 연안을 항해하는 배들은 닻과 체인 그리고 쇠로된 막대기들이 이끌리는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들이 산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거의 감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약간 기울어짐을 느끼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더니 그 흡인력은 점점 더 커져서 결국 엄청난 속도의 증가로 배는 점점 더 산 쪽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 배의 모든 볼트와 못이 배의 기둥과 갑판에서 빠져나가 산에 달라붙고 말았고 결국 배는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 파선하고 말았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를 바위로 이끌고 가서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간증을 파괴시키는 교묘한 형태의 세상적인 것들 몇 가지를 제시해 보도록 하자. 세상적인 사람들의 얼굴과 그들의 찡그린 모습에 대한 두려움, 반면에 세상 사람들의 호의와 아첨은 얼마나 달콤한지! “시간을 사서 얻는” 대신 보잘것없는 취미에 허비해 버리는 부당한 사간들! 우리는 때로 이것을 휴식이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상당히 세상적인 것들이 들어 있을지 모른다. 잃어버린 사람에게 “복음”을 줄 수도 있는 그때에 세상뉴스에 느슨한 마음을 지닌 채로 동참하는 우리의 느긋함. 사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들로서 고난을 견뎌내기를 거부하고 있다. 우리의 부드럽고 작은 “세상”이 우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저녁 늦게 야식을 먹으며 허영에 찬 농담을 늘어놓고 싶은 욕구, 이것 때문에 우리는 다음날 아침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데 필요한 시간을 낭비해버린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전신갑주를 입지 못한 채로 세상을 만나러 나갈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비밀스러운 내적인 세속성 때문이다.
-우리가 좋아하고, 싫어하며, 개인의 선택으로 결정해 버리는 많은 것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성경적 원칙이 아닌 대중의 의견, 혹은 어쩌면 종교적 의견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는지!
-우리는 얼마나 쉽게 이것 저것을 용납해 버리는지!(비록 그것이 악의가 없거나 혹은 사랑스러운 것일지라도) 그렇게 되면 세상이 쉽게 틈을 탈 수가 있게 된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위해 수치를 당하는 것을 얼마나 적게 특전으로 여기는지!
-어떤 세상적인 편안함들로부터 오는 커다란 만족감을 얼마나 우리는 기대하고 있는지!
-우리는 좋은 것들과 화려한 것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기 위하여 그러한 것들을 포기하기를 우리는 얼마나 꺼려하는지!
-우리는 괴짜로 보이기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우리는 얼마나 쉽게 유행에 무릎을 꿇는지! 그 스타일이 합리적이거나 옳거나 혹은 품위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유행이기 때문에 따르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그런데 종종 유행은 비합리적이고 품위가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너무도 세상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다르게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품위 없이 보이기를 원한다. 욕망이라는 옛 임금이 “그것을 하라”고 말하자 많은 사람들이 로마의 백부장의 종이 채찍이 무서워 순종하듯이 순종하고 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우리자신을 처리할 때까지는 거짓교리, 현대주의적인 사역, 가련한 교회치리, 혹은 교회 안에서의 부패한 실행들에 대해 놀랄 필요가 없다. 우리가 파산하는 모든 뿌리는 세상적인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William Law는 이렇게 잘 표현하였다. “이단들 중의 이단은 세상적인 영이다. 오늘날 기독교회들의 타락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나는 그 모든 것을 세상적인 영에서 비롯된다고 말해야만 할 것같다.”
2009-05-01 17:56:12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5 장 십자가와 세상
나는 한때 이 세상 깊은 곳에 빠져 정죄 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그분께서 위로부터 구세주를 보내셔서 나를 이끌어 많은 물들로부터 나를 끄집어 내셨다.” 구세주께서는 이 세상 속으로 깊이 가라 앉으사 -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내위에 넘쳤나이다.”(욘2:3) - 우리를 악한 현 세상(갈1:4)에서 “구출(구원, 구조)하셨다”. 우리의 구원은 이처럼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원에 덧붙여 더 큰 승리를 얻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로부터 그 바다를 떨어 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승리는 구조된 자들이 다른 멸망해가고 있는 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다. 즉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승리를 쟁취한 후, 그리고 이 어두운 세상의 불결한 요소들을 떨쳐버리는 승리를 쟁취한 후에는 이 세상의 구렁에서 멸망해 가고 있는 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그 세상으로 다시 보내심을 받는 놀라운 승리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이번 승리야말로 상급을 얻을 수 있는 승리이다.
그러나 이 악한 세상으로 다시 들어가는 데 있어서는 세상과 우리와의 관계가 수정처럼 맑아야함이 전제된다. 위로부터 태어난 우리는 우리의 시민권을 하늘에 가지고 있다. 우리는 “영적으로는 이 세상으로부터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간단히 말씀하셨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또한 우리에게 못 박혔다. 십자가에 못 박힌 제자와 십자가에 못 박힌 세상 사이에는 얼마나 도덕적으로 거리가 먼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하늘 보좌가 지옥의 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듯이 늑대들의 무리 속에 있는 양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 우리는 이 비뚤어지고 사악한 세대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담대하게 굳게 서서 이 세상에서 빛을 발하는 자들이 반드시 되어야만 한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진”(6절) 것으로 말씀하셨고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들”이며(14절), “세상의 악으로부터 보호받고 있지만”(15절) 그러나 이 세상에 남겨져 있으며(11절), “이 세상에 말씀을 전파하도록 보내졌고”(18,20절), 그 결과 “세상에 의해 미움을 받으며”(14절) 살고 있는 자들로 말씀하셨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이 십자가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이 마지막 사항 즉 “세상에 의해 미움을 받는”이란 이 표현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오 그리스도인들이여 이 사실을 마음에 새기라.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세상은 “너희”(당신과 나를)를 미워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진리를 향한 증오심을 축소시키지 말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은 당신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의 것들은 당신을 심하게 다룰 것이다. 그리스도의 수치가 사방에서 당신에게 떨어질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그것이야말로 참된 제자의 도의 표시이다. “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하는 모든 사람은 박해를 받을 것이라”(딤후3:12). 우리를 “박해에 대해 병적인 욕망”을 지닌 자들이라든가 “스스로 만들어 낸” 순교를 지지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우리는 결코 그런 위선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몇몇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의 넘어지게 하는 것이 중단된 것은 분명히 그들의 삶이 너무도 세상과 쉽게 타협적이 되었기에 그들의 생활이나 증거에 대해 이 세상이 더 이상 책망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와 세상은 삼손과 들릴라처럼 부정하고 더러운 관계에 있을 뿐이다.
교회에 속한 자들, 그리고 세상에 속한 자들서로 손에 손잡고 가까이서 살아가네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외에 그 누구도이 둘을 구별할 수 없다네.
구세주의 입술에서 나온 말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징책하는 표현중의 하나는 그의 믿지 않는 형제들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그것은 “세상은 너희를 미워할 수 없으나”(요7:7)이다. 만약 내가 이 세상과 너무도 가까이 하나가 되고, 이 세상의 영과 분위기를 너무도 쉽게 포용하여 더 이상 세상을 책망하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세상의 증오와 그리스도에 대한 적의를 불러일으킬 수 없게 된다면 다시 말해 이 세상이 내 안에서 나를 미워하여 그들의 무리에서 나를 쫒아버릴 구실을 찾을 수 없다면 그렇다면 나는 이미 그리스도를 배반한 것이요. 그분의 친구들의 집에서 그분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그분을 나무에 못 박은 세상에 그처럼 밀접하게 다가섰다는 말이다. 이런 일은 생각조차 말아야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이 세상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 외에는 달리 쓸모가 없다고 여겨야한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저주받아 못 박혀서 죽어가는 범죄자로부터 미소를 기대하고 찾아내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이 세상의 호의를 더 이상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친구들의 비밀결사에 입회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우리가 이 세상의 재판정 앞에 그분과 함께 서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그분과 함께 조롱을 당하고, 세상의 권력, 종교, 문화로부터 오해를 받게 된다. 이것들은 이 세상이 실재(Reality)를 정죄하기위해 그 기준으로 세운 인위적인 고안물들이다. 우리가 세상은 우리에게 그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왕국을 줄 수 없다고 선언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환심을 내던지고 세상의 상식을 저버리게 된다. 세상은 우리 가운데 있는 반역자는 지혜롭게 다루고 바보들은 용납해 준다. 그렇게 되면 무지, 게으름, 비겁함이 우리를 ‘느긋하게’ 정죄하게 된다.”(S.M. Zwemer가 The Glory of the Cross에서 James Cordilier로부터 인용한 것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지니고 있었던 지난 세대의 영적 스승들 중 한 분인 Dr. A.J. Gordon씨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로마제국을 그리스도 앞에 승리의 제물로 바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세계로부터 온 침입자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 귀화하기를 절대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이웃들을 당혹감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이세상의 삶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반면 양심에는 신경을 곤두세웠으며 그들 자신의 피에 대해 괘념치 않았고 어린양의 피가 갖고 있는 능력을 철저히 신뢰하였으며 그들이 기거하고 있는 나라의 풍속에 동화되지 않았고 그들이 귀화한 그 하늘나라의 생활방식을 고수하였다. 그들은 이 세상의 도움, 통치자들의 성원, 세상으로부터의 빚, 세상적인 방법의 사용 등을 철저히 거부하였다. 이는 그런 것들을 용납하게 되면 그들의 왕 되신 그리스도를 배반할까 함이었다. 이 “침입자들”은 보이지 않는 기지로부터 병참 지원을 받았고, 로마제국이 제공하는 도움보다는 보이지 않는 대장의 지도력을 훨씬 더 신뢰하였다. 이 사실은 이방인(이교도)들을 너무나 화나고 불쾌하게 만들었다(사실 이들은 그들의 잡신들을 버리지 않은 채 그리스도인들과 친구가 되기를 원하였던 자들이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시대야말로 기독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를 구가했던 시대라고 하는 사실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
H.B. Norkman교수는 로마제국하의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기독교 초기시대 약 200년 동안은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많은 것의 포기를 뜻하였고 멸시받고 박해받는 이단 종파에의 가입을 의미했으며 인기 있는 세상물결을 거슬러 수영하는 것을 의미하였고, 로마제국의 금기사항이었고, 어느 순간이든지 투옥과 죽음이 가혹한 방식으로 다가오는 것을 의미하였다.”
초기 200년 동안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가를 치러야 했고 그것도 자신의 자유와 생명으로 치러야만 했다. 처음 200년 동안은 기독교신앙을 고백하는 것 자체가 범죄였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말은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을 향해 선포되는 말이었고 그 선언 하나면 정죄받기에 족했다. 그 선언이 내려진 사람은 변명의 기회나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기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터툴리안에 따르면 대중의 증오는 단 한가지만을 요구하였는데 그것은 범죄에 대한 책임여부의 조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고백이었다.
이처럼 사나운 이리들의 증오심에그리스도인이라는 죄목으로 숨을 헐떡이며몸을 움츠린 양들이 희생 제물로 바쳐졌도다.
로마인, 헬라인, 혹은 이방인들은 다같이 “첫 번째 종족”이라고 불린 반면 유대인들은 이와는 달리 “두 번째 종족”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특별나게도 “이 세상으로부터 모든 것을 박탈당한 채”, 이 세상의 영과 분위기에 철저히 무관심하고, 이 세상과는 너무도 대조적이고 비세속적인 모습으로 살았기에 “제삼의 종족”이라고 낙인이 찍혔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칭호를 기꺼이 수용하였다. 죄보다 더 나쁜 것은 없기 때문이었다. 이교도들이여, 마음껏 떠들라!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세상에 속해 있도다. 그들은 “온 세상에 대해 죽었고” 이 모든 세상과는 끊어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더 이 제삼의 종족을 내버려두어야 하겠는가?” 라고 외쳐댔던 것이다.(카르타고의 한 서커스의 대사를 인용하였음)
이러한 승리의 간증(비타협에 의해 쟁취한 것임)이 가져올 결과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오늘날 교회는 저 순교자들의 화형 때 타오르는 불길을 견딜 수가 없다. “그 빛나고 불타는 불빛”은 오늘날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분명히 보여 준다. 오, 인기에 영합하는 크리스천이여! 오, 세상적으로 똑똑한 설교자들이여! 이 세상을 얻기 위해 얼마나 이 세상과 함께 멀리까지 나아갔는지 잘 확인해보라. 교회는 이 세상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어찌해서 그처럼 이 세상에 영향을 주려고 애쓰는가?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채 다시 그 가라앉은 로마제국 안으로 뛰어들어 그 제국을 뿌리째 뽑아내서 세계사의 흐름을 뒤바꿔 놓았다. 당시의 표현대로 하자면 터툴리안의 기록 그대로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그 생명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 사람들로서 이러한 투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2009-05-01 17:55:08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6 장 십자가와 헌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빛을 보여 주신 주시니 끈으로 희생 제물을 제단 뿔들에 맬지니라”(시 118:27).
본서의 저자는 한 젊은 사역자를 잘 알고 있었는데 그는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려 했지만 계속해서 실패를 하고 있었다. 그는 진지하게 헌신을 하고자 했으나 계속해서 실패하였고 비참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그런 젊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드디어 그는 자신에게 헌신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것이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구약의 제사장들을 하나님께서 “성결하게” 하시는 방법을 통해 조명을 받게 되었다. 제사장들의 귀, 엄지손가락, 엄지발가락에 발려진 피를 보았을 때 그리고 제사장이 온통 피 뿌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았을 때 그는 “죄가 되신 그리스도”와 자신과의 연합을 이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는 자신이 온통 죽음으로 뒤덮여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는 갈보리 사건이 그에게 가져다 준 엄청난 운명과 죽음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음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과 하나된 자신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와 죽음과 삶을 통한 연합을 이루게 된 사실을 깨달은 그는 그리스도께 자신을 드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갖게 되었고 성공적이고 지속적인 헌신의 삶을 위한 기초를 다질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체험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드문 일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속뜻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상당히 훌륭한 교회들에서 로마서 5장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칭의를 가르친 후 곧바로 로마서 12장 1,2절에 제시된 헌신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을 잘못되었다거나 이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로마서 6-8장 사이에 제시된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관한 놀라운 가르침을 간과한다는 것은 헌신에 대한 올바른 접근 방식은 아니다. 이 중요한 진리들을 간과함으로써 앞서 언급한 젊은 사역자들은 많은 세월을 비참하게 보내게 되었다. 그는 죄성으로 가득한 자아에 대한 승리의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제단위에 자기의 모든 것을 올려놓으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합을 통해 그가 이미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 즉 그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일어났으며 “죄에 대해서는 죽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는 살아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확고한 근거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그는 성공의 비결을 찾아내었고 실로 큰 축복을 받게 된 것이다. 좀 더 부연 설명을 해보도록 하자.
아브라함 링컨은 1863년 11월 19일 게티스버그에서 전사자 묘지를 봉헌하며 행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들의 생명을 바친 분들의 영원한 안식처로서 이 들판의 일부를 바치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는 우리는 이 땅을 봉헌할 수도 없고, 성별할 수도 없고 거룩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싸웠던 용감한 분들, 이분들 중에서 살아 계신 분도 있고 이미 고인이 된 분도 있을 터 인데, 바로 이분들이 이 땅을 이미 성결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 이제는 오히려 우리 살아 있는 사람들이 남겨진 과업을 온 힘을 다해 완성해야할 것이며 그분들이 다 이루지 못한 그 일에 우리 자신을 헌신해야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의 헌신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더 깊은 의미로 보자면 우리는 이미 구속된 생명이므로 “이 땅을 봉헌하거나, 성별하거나 거룩케 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께서 자신이 내놓으신 그 생명 안에서 이미 우리를 봉헌하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더하거나 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께로 고정시키십시다. 우리가 그와 함께 죽었다면 또한 그와 함께 살 것을 믿도록 합시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축복된 진리들은 로마서 6장부터 8장에 제시되어 있으며 성공적인 헌신에 대한 근거를 제공한다. 이 근거위에서 우리는 로마서 12장 1,2절에 제시된 헌신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완전히 구속되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분 안에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무한하고 풍성하신 자비로 우리에게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하고 합당한 산 제물로 바치라고 권고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신성한 번제물 되신 그분 위에 우리의 손을 얹을 때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께 달콤한 향기가 되는 것이다. 이는 완전한 순종, 완전한 헌신, 그리고 완전한 희생제사의 달콤한 향기이며 “우리로서는 이에 무엇을 더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다”. 이 얼마나 놀라운 능력이며 얼마나 놀라운 확신이며, 이 얼마나 놀라운 평화인가! 그분은 불에 의해 드려지는, 달콤한 향기가 나는 제물로서 하나님을 완전히 만족시키는 번제물이며 우리는 그분을 위해 불태워지는 달콤한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이런 분을 우리가 신뢰할 수 없단 말인가? 그분께서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우리를 이끄시도록 내맡겨야 되지 않겠는가? 오 주저하는 성도들이여, 어서 와서 우리의 권리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나머지 여생동안 그분께 내맡겨 드리자. 어서 와 그분께 모든 걸 드리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도다”. 주님께서는 기꺼이 바치는 사람을 사랑하신다. 고난의 시기에 난관을 헤쳐 가는 자들은 위대한 왕이신 그분께 자신을 내어맡겨야 한다. “주여, 당신의 명령대로 당신을 섬기오니 받아 주소서” 죠지 휫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위해 십자가위에 매달린 그분을 위해 순교자가 되기 위해 나는 내 자신을 포기하노라. 나는 무조건적으로 내 자신을 드려서 그분의 전능하신 손에 나를 완전히 위탁하노라.”
한국의 안이숙 여사는 일본 국회에 가서 일본의 신도교 우상들에게 절하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그 나라에 경고를 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두고 무려 7년간을 하나님과 논쟁하였으나 결국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복종하기로 마음을 먹고 모든 것을 팔아 일본행 편도 배표를 하나 사고 죽을 각오로 일본을 향해 떠났었다. 우리는 헌신은 “봉사 혹은 희생”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 이 안 여사에게는 두 가지 모두 해당된 셈이다. 그녀의 일본행은 죽음으로의 여행이었다. 그녀는 돌아올 생각을 안했기에 편도로 배표를 산 것이다. 그녀는 주님의 사랑에 의해 순종하기로 마음먹었고 가서 그분의 뜻을 행하고 필요하다면 죽음을 각오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갈보리 십자가의 강력한 힘에 이끌려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분의 사랑의 손길에 내어 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위대한 희생 제물에 대한 식욕으로 가득 찬 죽음으로 이끌린 것이다. 아! 바로 이것이야말로 참된 인생이며, 풍성한 인생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진 그 생명인 것이다. “나를 먹는 그 사람은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헌신에 관한 너무도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더 언급하고자 한다. 프란세스 리들리 하버갈(Frances Ridley Havergal)은 이렇게 말했다. “완전한 헌신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 순간의 행위일지 모르지만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평생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헌신이 실제적이 되려면 완전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적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항상 완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한순간의 결정이지만 지속적인 진행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헌신이 단번에 끝났다고 생각하면 속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주 시편기자처럼 고백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빛을 보여 주시니(회심), 끈으로 희생제물을 제단 뿔에다 맬지라(헌신).’ 이 헌신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요구하며 우리는 이와 같은 헌신된 생각으로 온전히 모든 것을 드려야한다. 우리가 번제드릴 불과 제물을 잡을 칼을 보고 무서워할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외쳐야만 할 것이다. ‘오 복되신 구주시여 저를 제물로서 묶으소서. 제가 제 인생여정을 수치스럽게 마치지 않도록 당신의 강력한 사랑의 줄에 저를 묶으소서. 제가 육신을 위해서는 그 어떤 기회도 제공치 말도록 하시며 계속 타오르는 온전한 번제물로 남게 하소서. 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도록 하소서. 저를 당신 자신의 끈으로 갈보리에다 묶으소서, 저를 꽉 묶어서 계속해서 타오르는 제물이 되게 하소서??
한 선교사가 선교지로 돌아가면서 배안에서 신선한 기름부음을 받고자 애를 쓰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께서는 내가 그분보다 다른 어떤 것에 더 마음이 끌리는지를 보시기 위해 내 마음과 내 소유를 살피셨습니다. 그분이 ‘네가 나를 이것들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분은 내 아내와 자식을 염두에 두고 계셨습니다. 나는 주저했습니다. 나는 그분께서 사형 집행서를 내 앞에 내밀고서 내 서명을 기다리고 계신 것처럼 느꼈습니다. 내 마음에는 심한 갈등이 생겼습니다. 주님께 항복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였습니다. 오랜 갈등 끝에 나는 그분의 은혜로 그분께 항복했고 나는 이때 내 결정은 곧 내 아내와 아이의 지상생명의 종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 있는 작은 집으로 혼자서 돌아가고 있을 때 몇 주 후 나에게는 ‘아이가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아이는 내가 집을 떠나올 때 괜찮았었습니다. 그는 건강히 잘 있었습니다. 내가 집에 도착하자 아내가 마중을 하고서는 ‘고든이 아파요’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알고 있었소, 드디어 그 일이 닥쳤구려”라고 대답했습니다. ‘네가 네 아이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고통스러운 갈등이 드디어 코앞에 닥친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승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아이에게로 가서 작별을 고했습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의 작고 하얀 얼굴은 심하게 병든 모습으로 베게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참된 순종은 죽음에까지 순종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실로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이 가장 좋습니다. 저를 이제부터 이 지상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붙들겠습니다’라고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때 나에게는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였을 때 그에게 일어났던 동일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이 그리고 나의 아이인 내 자식을 되돌려 주신 것입니다.”
“끈으로 희생제물을 제단 뿔들에 맬지라”.
2009-05-01 17:54:12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7 장 십자가와 십자가에 못 박힌 자
어느 가정에 항상 불화가 있었다. 한 젊은이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그들 부부가 보트를 타다가 남편의 실수로 배가 뒤집혔고 부인이 익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사법당국에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 집행이 있기 바로 전날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그와 함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그 다음날 사법당국은 그 아들을 사형에 처했다. 잠시 후 마음이 심히 상한 그의 아버지는 이미 생명이 떠나버린 불쌍한 아들의 시신 앞에서 이렇게 절규했다. “오! 내 아들아, 내가 내 생명을 너에게 나누어 줄 수만 있다면---. 내가 너에게 생명을 넣어 주어 네가 내가 원했던 그러한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바로 그렇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대신하여 풍성하고 충만한 생명을 갖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내가 그분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기를 갈망하고 계신 것이다. 이는 나로 그분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함이다. 바로 이를 위해 그분께서는 천사들의 본성을 취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씨로서 나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그분은 나와 동일한 육신을 입고서 인간이 되셔서 나를 그분과 함께 사형 틀로 데리고 가신 것이다. 그렇다. 그분께서는 나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분의 죽음 안에서 나는 죄로부터 해방을 받았다. 이를 두고 바울은 “죄로부터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했다. 나는 그리스도의 죽은 몸에서 죄의 요구와 능력이 다 소진해 버렸음을 보게 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제 “죽음이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죄가 너를 주관하지 못할 것”이라는 약속을 주신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죽었다. 또한 나는 다시 일어나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였다. 그러나 그분은 모든 죽음의 표시를 부활 안으로 지니고 가셨다. 그분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그분은 부활하실 수가 없었다. 그분은 이제 자신의 전능한 죽음의 능력과 효력을 제공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으로 살고 계신다. 그리고 나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그분께 접붙여져서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가 되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첫 번째 아담은 나와 그의 생명의 연합에 의해(유전) 그의 불순종으로 야기된 치명적인 결과들은 나에게 전달해 주었다. 마찬가지로 나와 그분의 생명의 연합에 의해, 그분께서 죽기까지 보이신 그 순종의 위대한 결과들은 나에게 자동으로 전달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인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죄에게 죽으셨다. 그분은 죽음으로 죄가 지니고 있던 그 권능의 마지막 흔적마저 깨끗이 지워 버리셨다. 십자가의 조명하에서는 죄는 “더 이상” 군림할 수가 없다. 나는 그분과 연합되어 있음을 생생히 인식하면서 죄의 유혹에 대해 “아니오”라고 해야만 한다. 이 “아니오” 속에는 부활하신 주님의 내적인 임재로부터 나오는 능력이 담겨 있다. 주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상한 그 어떤 아버지보다도 자신의 생명 즉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한 그 생명을 나누어 주시기를 갈망하신다. 이 생명은 심한 유혹과 시험 속에서도 죽기까지 순종했던 그 생명이다.
로마의 법에 따르면 어떤 종류의 살인죄에 대해서는 혐오스러운 방식으로 사형을 집행한다고 한다. 이 사형수는 자기가 살해한 자의 시체 얼굴을 마주본 채로 묶여 죽어간다고 한다. 그가 그 시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죽는 길 뿐이었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께서도 나를 죽음보다 더 강력한 사랑의 줄로 그에게 묶으셔서 십자가로 데려가셨다. 나는 이 십자가에서 그분과 “함께 못 박힌 것이다.” 펜 루이스(Penn-Lewis)여사는 한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는 너무도 충격적인 꿈을 꾸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꿈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피를 흘리는 구원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도 추한 어떤 것이었는데 너무도 역겹고 너무도 추잡해서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를 이처럼 혐오스럽게 했던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얼마 후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다는 메시지를 듣게 되었는데 바로 그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던 그 추한 것이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성령께서 그가 꿈에 본 그 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계시해 주신 것이다”(F.J.Huegel in Bone of His Bone).
그러나 우리는 죽음과 부활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이 진리를 단지 입술로 고백하거나 확고히 인정한다고 해서 체험할 수 있지는 않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실행에 옮겨보겠다는 결심으로 흉내 내거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삶은 그 어떤 모방으로도 살아낼 수가 없다. 오직 성령께서 내가 자아에 대해 죽었음을 깨닫게 해 주시는 살아 있는 방식으로 역사하셔야만 이 삶은 가능하다. 그분의 죽음 안에서 그분과 새롭고도 확고한 교제가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고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생명을 내 것으로 할 수는 없다. 내가 십자가에서 옛사람을 부인하는 만큼 나는 새로운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분의 죽음의 능력에 온전히 내 자신을 항복시킬 때 나는 “그의 부활의 모양” 안에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있다고 상상하거나 십자가에 있기 위해 일하고, 애쓰고, 노력하기는 쉽다. 우리는 자아를 동원하여 우리의 육신에 십자가가 못 박힌 것처럼 상상하고서는 그분의 죽음의 효력이 우리에게 나타날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육신의 어리석음이요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십자가는 프로테스탄트에게나 카톨릭에게나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무시한 채 그분께서 사셨던 것처럼 살아 보려고 애를 쓰며, 그분의 본을 따라 “예수님처럼” 행하고 말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 역시 그분과의 진정한 연합을 가져올 수 없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한다. 우리는 오직 그분의 죽음 안에서 그리고 죽음을 통해서 그분과 연합될 수 있다.
그리스도 없는 십자가 내게 피난처 될 수 없었고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 내게 구세주 될 수 없었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당신 안에 안식하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이요, 기쁨이며, 모든 것 되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할 수 있게 되기에 앞서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는 일에 기꺼이 동의하기 전에 자신과의 싸움, 실망, 패배등과 같은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경험하게 된다. 자아를 내버리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죄의 사망에 이르도록 아플 때까지 자신을 죄에게 죽은 자로 여기려는 많은 노력을 하게 된다. 우리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보려고 온갖 방법을 써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게 된다. 자아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드디어 자아라는 “시체”에 사로잡히게 된 우리는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외치게 된다. 바로 그때에야 비로소 주 예수께서는 몸을 굽히시고 “내 아들아, 나의 부활의 생명의 영을 너에게 넣어주노니 이는, 네가 ‘진정한 자유를’ 즉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받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제는 내가 네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던 그러한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분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그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에 의하여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것은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죽음 안에서 그리고 부활안에서 연합되는 것으로 이것만이 그리스도인이 승리의 삶을 사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 삶이야말로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이요, 그분의 능력 있는 죽음이 실제가 되는 삶이다.
한 그리스도인 부호에게 매우 사랑하는 외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은 아주 품위 있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이 부자는 자기 아들의 미래와 성공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어렸을 때부터 죄 된 삶을 살던 한 소년이 집에 침입해와 그 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며칠 동안 그 아들은 살아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의식을 회복했고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되었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 했던 소년의 모습을 보고서는 그 앳된 모습에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이 아들은 이 소년을 죄악 된 삶에서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결국 아버지는 그 죄 많은 소년을 집으로 데려오자는 아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소년을 양자로 맞아들여 아들의 형제로 삼기로 했다. 그는 때가 되면 상속을 받게 될 신분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소년은 이들의 진지한 제안을 받아들이는데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다.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가 갖고 있던 악한 습관들은 너무도 뿌리가 깊었는지 그는 계속해서 악한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결국 아버지는 더 이상 그를 도울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친 아들은 큰 실망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애를 썼고 그 소년에게 아낌없이 복을 베풀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너무도 실망한 나머지 그 소년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는 거기서 자기 아들의 그림을 보게 되었다. 그는 그 그림을 집어들고 살펴보았다. 그 그림에는 누가 만진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 뒤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 형님, 저는 형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형은 나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해 주었으니까요. 그러나 나는 결코 착한 아이가 될 수 없는 것 같아요”. 이 글을 읽은 아버지의 마음에는 희망이 샘솟기 시작했다. 한때 죄인이었던 자가 “선한 사람”이 되었을 때 그의 노력은 결국 보상받게 되었던 것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열망한 적이 있는가? “오, 주님, 저는 당신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저에게 너무도 큰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저는 결코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은 주님께 이렇게 고백해 본 적이 있는가?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과 부활을 거쳤음을 믿기 바란다. 당신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실을 순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감정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오직 단호한 믿음의 행위로 다가서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그분과 생명의 연합 관계에 놓으셨으며 그 연합이 실재로 체험되도록 하실 것을 신뢰하하. 당신의 생명을 그분의 생명 안에 던지시고 그분께서 당신의 생명, 당신의 빛, 당신의 승리, 당신의 모든 것이 되도록 하라.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지금도 살아 계신, 당신의 머리되신 분께서 하늘에 계심을 기억하라. 머리와 지체는 한 몸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와 여러분은 “그분의 뼈 중의 뼈”이다. 이 놀라운 연합을 온전히 붙들라. 당신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수학의 법칙이 무너지고 만다. 일반적으로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하나 더하기 하나가 하나이다. “그들 둘이 한 육체가 되리라”. 이 신비를 바울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런 까닭에 남자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것은 위대한 신비라. 다만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1,3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그 한 몸의 모든 지체가 많아도 한 몸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또한 그러하시니라”(고전12:12). “온전한 그리스도는 머리와 몸 둘 다를 포함한다”(어거스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나 자신을 둘로 여기는 순간 나는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실제로 관심과 섬김과 관점에 있어 즉 모든 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과 하나 되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두 개의 심장을 갖고 있으나 하나의 심장처럼” 박동하는 것이다.
A.T.피어슨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나이 드신 경건한 어머니를 얼마 전에 잃은 한 경건한 부인을 위로하기 위해 그녀를 찾아갔는데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난 40년간 저의 어머님의 마음은 늘 하늘에 가 있으셨어요.’ 그 순간 나는 골드 스미스의 아름다운 시구를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
무서운 모습으로 치솟은 높다란 절벽처럼
계곡에서 떠오르다 도중에 폭풍우를 내려놓고
구름은 그 가슴을 돌아 퍼져가지만
영원한 햇빛은 그 머리위에 내려쬐네 ”
지상에 있는 우리의 거주지는 찔레와 가시가운데 놓여 있고 우리의 하늘은 구름으로 덮여 있을지라도 우리의 믿음은 “영원한 햇빛이 우리의 머리 위에 비추고 있다”는 사실로 자라난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숨겨져 있다”. 그분과 나는 하나이며 “그분의 어떠하심같이(저쪽 영광가운데 계심)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다”(요일4:17)
우리학교 졸업생이 보낸 편지에는 이 놀라운 진리가 잘 예시되어 있다. 여기에 그 일부를 인용한다.
“나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이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완성된 그 은혜에 의해 내 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저는 늘 오르락내리락 하지 않는 그런 신앙수준에 도달하고자 오랫동안 애써왔습니다. 저는 승리하는 삶을 간절히 원했지만 내가 애를 쓰면 쓸수록 나는 더욱 비참해졌습니다. 저는 기도와 순종과 결단과 서원을 통해 그와 같은 삶을 달성하고자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허사였습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저의 행위로 죄의 능력으로부터 구원을 받고자 애를 썼던 것이지요. 왜 그처럼 어리석게 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받아들일 때 오직 믿음을 통해 죄의 능력으로부터 해방된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지요. 금년 1월에 와서야 내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하나 되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저는 다음과 같은 바울의 고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분에 의해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달려 있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나는 십자가로 인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속박을 결코 털어버릴 수 없다는 절망 속에서 내가 십자가를 통해 죄의 능력을 물리치고 일어섰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것도 소용없었을 때 죽음이 나를 해방시켰던 것입니다.”
2009-05-01 17:53:14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8 장
십자가와 자아
교계에는 수많은 교사, 사역자, 성도, 전도자, 선교사 등이 일하고 있고 성령의 은사들이 이들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록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복이 전달되는 것이 사실이긴 하나 “좀 더 가까이서 살펴보면” 이러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자아로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을지도” 모르며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님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드러나지 않은 개인의 삶에는 자아라고 하는 어둡고 불길한 세력이 웅크리고 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어째서 자신들이 상처받은 자존심, 까다로운 성미, 탐욕, 사랑스럽지 못함과 같은 것들을 극복하지 못하는지, 어째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수의 강”을 체험하지 못하는지 의아스럽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비밀은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은 그들이 비밀리에 그리고 습관적으로 “사당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섬기는 사당은 다름 아닌 자아라고 하는 사당이다. 그들은 이 사당에서 매일 절을 하며 예를 올린다. 바로 이것이 모든 문제의 근본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를 자랑할지 모르나 내적으로는 다른 신을 경배하고 있다. 그들은 동정을 받고 싶고, 응석을 부리고 싶으며, 제멋대로 하고 싶은 자아를 숭배하고 있다. 외적인 십자가, 죄의 형벌에 대한 대가 지불, 대속자의 죽으심 다시 말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이 십자가가 갖고 있는 놀라운 신비가 지닌 꿈에도 생각지 못할 깊은 의미에 대해서는 모른다. 이 십자가가 그리스도인의 내적인 삶에 적용될 때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는 전혀 모른다. 우리는 외적 십자가는 물론 ‘내적 십자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서 내적인 십자가로 역사하셔서 당신을 자아도취로 부터 벗어나게 하사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연합을 이루기까지는 그 어떤 ‘신령한 것’들도 당신에게 참 평안을 줄 수 없다.(F.J. Huegel in Cross of Christ).
하나님께서 내 자아를 거슬러 나를 단련하시니
내 자아는 병든 목소리를 지닌 비겁자로서
평안, 안식, 기쁨만을 열망한다네.
자아, 내 자신을 가장 잘 배반하는 자.
나의 가장 힘 있는 친구요, 치명적인 대적,
내가 어디로 가든지 나를 방해하는 자.
그러나 나의 자아를 억제할 수 있는 분이 계시니
그분은 나를 억누르는 무거운 짐을 벗기실 수 있으며,
멍에를 부수시고 나를 해방시키신다네. - Christina Rossetti-
인간은 하나님 안에 원래의 집과 거처를 갖고 있었으나 그분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아라고 하는 먼 나라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빛과 생명이 되셨고 그의 호흡을 제공하셨으며 모든 것의 중심이 되셨지만 그 놀라운 곳에서 빠져나온 인간은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소외된 자가 되고 만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내버렸고 자아가 인간의 왕좌를 차지하고 말았다. 결코 자리를 내놓으려하지 않는 권위와 찬탈자 바로 그가 자아인 것이다. 이제 자아는 인간에게 새로운 그러나 거짓된 중심이 되고 만 것이다. 자아는 해아래 그 어떤 것보다 자신을 사랑한다. 인간의 가장 훌륭한 행위마저도 숨겨진 자아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더러운 걸레 같은 것으로 다만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나타날 뿐이다. 그는 자기의 오른손으로 뭔가를 행할 때 자기의 자아 만족이라고 하는 왼손을 의식한다. 윌리암 로(William Law)는 이렇게 말했다. “자아는 타락한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악의 뿌리요, 가지요, 나무이다.”
이와 같은 막강한 자아가 전능하신 하나님(El Shaddai)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말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 그분께서는 그 무엇으로도 충격을 받으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분께서는 이 비극 중의 비극을 어떻게 해결하셨을까? 하나님께서는 더럽고 거짓된 자아의 충만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시기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하나님은 결코 인간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발적인 경배에 의해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원칙과 목적을 무너뜨리고 행동하시겠는가? 실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지혜를 펼쳐 보이셨다. 십자가는 실로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이다”. 갈보리는 최초의 인류의 뿌리를 내리친 도끼였다. 여기서 옛사람 아담은 끝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아담이 보좌에 오르게 되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인류의 새로운 머리로서 세상에 오셨다. 그분께서는 자발적으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셨다. 그분께서는 자아가 완전히 배제된 사랑의 끈으로 우리를 자신에게 묶으셨고 우리를 죽음의 깊은 곳으로 그분과 함께 데리고 가셨다. 이 모든 것은 죄의 형벌을 척결하고 우리로 자아 대신 하나님을 선택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분께서 죽음을 택하신 것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은, 다시 말해 우리의 죽음을 죽으신 것은 우리를 죄악 된 자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오 성도 여러분이여, 사람의 아들께서 죄가 되셨고, 저주가 되셔서 놋 뱀처럼 높이 들리셨다. 십자가 아래에 서 있었던 그의 어머니와 함께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자: “실로 칼이 네 자신의 혼도 찔러 꿰뚫으리라. 이는 많은 자의 마음의 생각(그렇다. 바로 당신과 나의 생각을)을 드러내려 함이라” 어떤 사람은 “어째서 꼭 뱀이어야 하는가? 왜 백합이나 장미는 될 수 없는가?”라고 물을지 모른다. 왕과 그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하는 것이라면 왜 더 사랑스러운 다른 것이 될 수는 없었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묘사하시고자 했던 것은 죄악 된 자아생명(self-life)의 저주받은 모습이고 보면 그분께서는 가장 적합한 것을 택하신 것이다. 오직 뱀만이 이 진리를 상징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나에게 무서운 빛을 비추었다. 나는 이 빛 앞에 내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이 빛은 나의 죄악들만 비춘 것이 아니고 내 자신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내가 행하는 행동(what I did)은 내 자신(what I am)으로 부터 나온다. 분명한 사실은 모든 문제의 근원이 나 즉 바로 자아라고 하는 사실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십자가를 응시해보자.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받아들이도록 하자.
나는 빌라도의 뜰에 모인 군중을 보네.
나는 그들의 분노에 찬 모습을 확인하네;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그들의 외침소리
신성모독과 함께 소름을 끼치게 하네.
그 외쳐대는 군중 속에서
나도 그 중 하나임을 느낀다네;
그 거칠고 떠들썩한 음성 중에서
나는 내 음성을 확인한다네.
그 신성한 피를 흘리게 한 자는 바로 나였네,
내가 그분을 나무에 못 박았다네,
내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네,
내가 바로 그분을 조롱한 자였네.
나는 십자가 주변에서 군중들을 보고 있네
고통당하는 분의 신음소리를 조롱하는 소리;
그 역시 나의 음성처럼 들려오니
마치 나 혼자서 조롱하고 있는 것 같다네. -Horatius Bonar-
당신은 이와 같은 고백이 두려운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가? 이와 같은 자아를 떨쳐버리고 싶은가? 그러나 내가 이와 같은 자아의 모습을 인정하기까지는 자아를 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높이 들린 십자가의 보좌로부터 나는 자아를 먼저 인정하고 그리고 나서 그 자아를 내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제 자아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그치고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나는 가지만 쳐진 것이 아니고 완전히 몸통이 베어져 넘어진 것이다. 즉 나는 저주를 받은 것이다. 이제 나는 나의 모든 과거와 단절되었고 자아 자체와도 단절되었다. 나는 완전히 저주받기로 정해진 자다. 그리하여 어떤 다른 분께서 나를 대신하여 합법적인 처형을 당하셨을 때 나도 처형을 당한 것이다. 나는 그분과 함께 완전히 끝났으며 수치스러운 종말을 맞이했다.
나는 이와 같은 법적인 사형 집행을 진실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나는 내가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집행서류에 서명을 해야 한다. 내가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일은 너무도 무서운 일로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음에 이미 넘겨졌다.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을 받아들여 사형 집행서에 서명을 해야만 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일에 동의해야 하며 그분의 죽음의 능력으로 자아에서 내려와 자아를 부인해야 한다. 실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 죽음에 연합될 때에만 그 능력을 발휘한다. 나는 이 신성한 죽음이 나에게 행동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와 같은 자아 부인은 한두 가지 악한 행동을 근절하는 것 뿐 아니라 자아라고 하는 나무의 그 뿌리에 십자가의 도끼를 갖다 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아의 가지만을 치신 것이 아니고 나무 밑동을 완전히 잘라 버리신다. 모든 자기의 자기존중, 자기옹호, 자기영광, 치명적인 자기연민 이밖에 수없이 많은 자아의 표출은 자아라고 하는 나무의 깊이 박힌 뿌리에서 뻗어 나온 육신적 가지들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가지들만 친다는 것은 자아라는 생명이 더욱 추한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도록 만들뿐이다. 하나의 가지가 잘려 나갔지만 더 추한 바리새인적 가지가 더 왕성하게 자라나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겉으로는 멋있게 보일 수 있고 사람들 간에도 높이 평가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뒤 안에서 보자면 그의 주변 사람들은 자아라는 나무에서 맺힌 쓰디쓴 열매들을 증언하게 된다.
그러나 나에게는 풍성한 소망이 있다. 이는 내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안으로 접붙여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신성한 성품에 동참자가 된 것이다. 나에게 부여된 새 생명은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이며 자아에게 죽은 생명이다. 자아는 자아를 극복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되었으니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께 복종하기만 하면 그분의 전능하신 죽음이 내 안에서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실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께서 나를 더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나는 자아에 대해 더욱더 완전히 죽게 된다.
누군가가 조지 뮬러에게 그의 사역의 비밀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에게는 내가 죽은 날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말을 하면서 거의 바닥에 닿기까지 고개를 숙였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날은 내가 조지 뮬러, 그의 의견, 선호, 취향, 의지에 대해 죽은 날이요, 세상과 세상의 인정 혹은 비난에 대해서 죽은 날입니다. 나는 심지어 나의 형제들 혹은 친구들의 인정과 비난에 대해서도 죽었습니다. 그때로부터 나는 오직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꾼으로 드러나기 위해 공부했습니다.”
비록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는 기뻐한다네.
당신의 신성한 완전함 안에서,
또한 절대적인 순복에서 나오는
깊고, 신비로운 기쁨을 맛본다네.
나는 비록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는 즐거워하네
나의 모든 것을 당신안에서 발견하므로: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라, 영원토록 그리하리:
아멘! 그렇게 되기를 바라옵니다! -Lucy A. Bennett-
2009-05-01 17:52:00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10 장 십자가와 두 가지 본성
D.M 팬튼(Panton)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사나운 사람일지라도 수용소에서 혼자서 지낸다면 부드럽고, 온순하고, 조용하며 합리적이고 신사처럼 행동한다. 그는 그 수용소 안에서 자기의 뜻에 따라 자기 방식으로 마음대로 살면서 평안하게 지낸다. 그러나 그 수용소에 훌륭한 신사를 한 사람 들여보내 보라. 그러면 이 사나운 사람의 얼굴빛은 변할 것이고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어느 순간에는 그 침입자에게 대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두 사람은 치열한 갈등을 겪게 될 것이다.”
나와 친한 한 동역자가 이렇게 말했다. “구원받기 전에 나는 내가 성질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이 여자 동역자는 늘 자기 방식대로 살면서 아무런 성질을 내지 않으면서 자신의 뜻에 따라 절제 있는 삶을 살아갔었다. 그녀는 결코 내적 갈등을 가져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자 그녀는 타락한 아담으로 부터 물려받은 이기심이 독버섯처럼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라” 그렇다. 육신은 결코 영적인 영역 안에 들어갈 수가 없다. 육신은 회심이 불가능하고, 치료가 불가능하며, 갱생이 불가능한 존재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직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는 옛 사람(육신)과 새 사람(거듭난 영)이 존재하게 된다. “첫째 사람” “자연인” 그리고 “정욕에 따른 썩어진 옛 사람”이라는 성경적 표현들은 “아담”안에 있는 우리 즉 우리가 육으로 태어난 때 물려받은 자아를 말한다.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거듭난 사람은 “새 사람”을 옷 입은 것이다.
믿는 성도로서 나는 “내 안에 (즉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육신적 생각은 사망이며 “하나님의 법에 복종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실로 할 수도 없다”(롬8:7). 육신적 생각은 성령의 일들을 철저히 배척한다. 육신은 단순한 대적이 아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화해가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신은 “하나님께 대한 대적”이므로 화해가 있을 수 없다. 이에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육신은 성령을 거슬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할 수가 없느니라.” 그러나 나에게 있어 실로 엄청난 충격은 “내가 육신적이서 죄 아래 팔린 것과 동시에 속사람을 따라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이중적인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거의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느 때인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간에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부르짖을 것이다.
성경말씀과 우리의 체험에 따르면 이 전쟁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전쟁이요 지독한 내란인 셈이다. 이 전쟁은 외부의 적과 벌이는 전쟁이 아니다. 이 전쟁은 인간의 내부에 숨어 있는 “간첩”과의 싸움인 것이다. 따라서 이 치열한 전쟁이 그 어느 쪽도 이길 수 없는 교착상태에 빠져 버린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또한 패배주의적인 입장을 택한 채 자신들의 매일의 실패를 “옛 사람”에게만 탓을 돌리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은 아마 일부 성경 교사들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두 인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옛 사람과 새 사람이라고 하는 두 개의 개체가 완전히 분리되어 독립된 개체로 존재한다. 새 사람은 선한 천사처럼 완벽하고 온전한 반면 옛 사람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악한 자이다.”(H. Bonar).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오직 하나의 개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의지에 따라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은 두 개의 독립된 서로 다른 인격이 아니다. 다만 단 하나의 인격 안에 존재하는 두 가지 측면인 것이다. 모울 주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몸은 결코 독립된 존재 즉 별도의 인격이 아니다. 만약 우리의 몸이 ‘음모를 꾸민다면’ 그것은 독립된 외부인의 죄가 아닌 나의 죄인 것이다.”
앞서 우리는 ‘독일인-미국인’이 요청한 알현을 윌리암 황제가 거부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었다. 그 알현이 거부된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독일에서 태어났으나 미국에 귀화한 사람은 미국인이 되었다.” 황제는 이렇게 답변했던 것이다. “짐은 미국인도 알고 독일인도 알지만 ‘독일인-미국인’은 알지 못하노라” 나는 한 개체로서 한때 “아담 안에” 있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오해하지 말라. 나는 “아담 안에”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동시에 있을 수 없다. 내가 아담 안에 있었을 때 나는 “육신 안에” 있었으며 저주 받고 멸망 받은 상태에 있었다. 그때 나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아담으로부터 베어졌고 십자가에서 생명의 연합으로 인해 그리스도께로 연합하였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왜 못 박힐 수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치유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함으로써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즉 거듭난 사람들은 이제 ‘아담-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약 내가 이와 같은 신분이라면 나의 왕께서는 결코 알현을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다. 구약 성경에 보면 어떤 죄인들은 율법을 피하기 위해 “주의 장막으로 피신하여 제단의 뿔들을 붙들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정당한 보음을 받았다. “너는 그를 나의 제단에서 끌어내어 죽일지니라”(출21:4). 마찬가지로 모든 육신은 저주아래 있다. 우리의 옛 사람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더 정확히 말하면 못 박혀 있다. I am crucified라고 되어 있는 권위역본의 번역이 얼마나 정확한가?- 역자 주).
우리는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왕께서 알현하실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두 가지 본성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다가 갈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육신에게는 더 이상 자비가 있을 수 없다.
육신은 성소에 다가설 수가 없다. 만약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그를 나의 제단에서 끌어내어 죽일지니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우리가 그분께 다가설 때 육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상태로 다가서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왕을 알현할 수가 없다. 십자가는 우리와 옛 사람 사이의 영원한 분리를 선포한 것이다. 오직 이와 같은 자세로 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그분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예를 한 번 들어 보도록 하자. 유대인과 힌두교도가 기독교로 개종하면 그들의 친척들은 이들을 파문시키기 위해 그들의 장례식을 거행한다고 한다. 그들을 완전히 축출해 버렸다는 것을 공포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장례식이후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된다. 우리는 개종한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부터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다. 이 장례식이 끝나자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마지막 작별 키스를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를 가로막고 서서 “당신은 저 죽은 개 같은 녀석에게 키스하려고 하세요?” 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오셨을 때 그분께서는 나를 자신에게 붙들어 매시고 나를 저주받은 나무로 데려 가시고 무덤에다 내려 놓으셨다. 이로써 그분께서는 나와 나의 “옛 사람”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키신 것이다. 만약 내가 그 “죽은 개”에게 키스하기 위해 되돌아간다면 내 영혼의 신랑에게 얼마나 모욕을 드리며 실망시키는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제는 나의 사형 선고문에 엄숙하게 서명을 하고 영원한 장례식을 지낼 때이다!
얼마 전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설교했을 때 이 설교를 들은 한 멋쟁이 친구가 이렇게 평을 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아니 그렇게 못됐단 말이야!!” 이에 대해 한 성도는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질투나 공허감이나 교만 같은 것으로 괴로워한 적이 없단 말이오?”(이와 같은 것들은 누구나 다 갖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적이 있지요” “그렇다면 이런 일을 당할 때 당신은 어떻게 합니까?” 이에 대해 그는 “오! 그거야 주님의 보혈이 담당하는거지요.” 라고 너무도 쉽게 대답하였다. 그러니까 이 가련하고 자기 만족에 물든 청년에게는 죄가 아직은 “심히 죄된 상태가 아닌 것이다.” 그에게는 주 예수께서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편리한 도피처이며 그분의 보혈은 피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든 책임을 면케해 주는 만병통치약인 셈이다.
자, 이제 로마서 5장에서 다루는 칭의와 로마서 6장에서 다루는 성화와의 밀접한 관계를 면밀히 주목하기 바란다.
로마서 5장이 신앙 생활의 기초라고 한다면 로마서 6장은 그 후에 이어진 신앙 생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죄가 넘친 곳에 은혜가 더욱더 넘쳤나니”(롬5:2). 그러나 로마서 6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죄안에 거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떻게 더 이상 그 가운데 살겠느냐?”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의 죽으심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므로” 우리와 아담 그리고 우리와 죄와의 모든 관계는 영원히 끝났다고 선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죽으심으로 나의 옛 사람과 새 사람 사이에 “갈보리의 죽음”이라고 하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음을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이룬 나로서는 그 십자가의 죽음에 완전히 연합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나의 법적인 위치이다. 바로 이 사실에 근거해서 나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되었고 하나님과는 하나 됨을 누리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Huegel). 이것이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에 얻게 된 나의 지위인 것이다.
의롭게 된 성도가 회심 직후부터 자신은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 수 있는 성경적 근거는 충분하지만 실제로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자기 안에(즉 자기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배울 때까지는 광야 길에서 헤매게 된다(로마서 7장). 그러나 우리가 진정 절망과 좌절 가운데서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고백을 하게 될 때면 비로소 우리는 열매 맺을 수 있는 순종의 삶이라고 하는 축복된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로마서 8장에도 아직 싸움은 남아 있다. 그러나 로마서 7장에서처럼 가련하고 비참한 싸움이 아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가장 비극적인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이곳에는 “나”와 “자아”로 가득 차 있다. 반면 로마서 8장의 영적 싸움은 바울의 승리의 모습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이 그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두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육신을 따라가는” 길이 있다. 반면 다른 쪽에는 “성령을 따르는 길”이 놓여 있다. 가장 승리를 잘 하는 그리스도인 역시 항상 이 두 가지 길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에 따르면 성령의 법에 따라 해방 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제 “성령을 따를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선택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선택을 하는 주체는 우리 각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빚진 것이 아니니 육신을 좇아 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이야말로 커다란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졌던 옛 채무는 이미 청산되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3절에서 경고와 더불어 격려를 덧붙이고 있다.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은 것으로 처리하면 살리라.” “너희가 죽을 것이나”라는 표현은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즉 “죽게 된 것이다.” “죽음의 길에 서 있는 것이다” 혹은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리라” 등이 그것이다. 정욕에 이끌려 사는 자들에게 경고하면서 야고보가 말했던바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리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육신을 따라” 행하는 자들에 대한 강력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메튜 헨리는 이렇게 말했다. “한마디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에 처해 있다. 즉 육체를 불쾌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영혼을 파멸로 몰고 가야 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셋과 브라운은 그 유명한 주석에서 “만약 우리가 죄를 죽이지 않으면 죄가 우리를 죽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육신과 전쟁은 교착상태에서 지속되는 전쟁이 아니라 그 누군가가 상대방의 생명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결투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간 후(이 사건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상징한다) 그들은 열매로 가득한 땅으로 들어갔을 뿐 아니라 치열한 전투의 땅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들 앞에 놓인 딜레마는 “만약 너희가 가나안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그들이 너희를 죽이고 말 것이다”였던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은 육신과 성령과의 전쟁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엄연한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권면의 말씀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자 한다.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죽이면 이란 단어는 죽음에 처한다는 것이요 몸의 행실이란 저주받은 가나안적인 육체를 뜻한다.
2009-05-01 17:49:59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9 장 십자가 - 본성과는 반대됨
스펄젼은 총을 수리하기 위해 대장장이에게 갔던 한 시골 농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대장장이는 농부가 가져온 총을 검사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총은 매우 낡았고 다 망가졌으며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상태입니다. 이 총을 어떻게 수리해 드릴까요?” 이에 대해 농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총의 모든 부분이 다 낡았다면 전부 새로 만들어야겠군요” 그러자 대장장이는 “뭐 하러 전부 뜯어고칩니까, 아예 새 총을 하나 사시는 것이 낳을 겁니다”. 이에 농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 미처 그 생각을 못했군요. 바로 그것이 내가 원하던 바입니다. 내가 총의 모든 부분을 수리하라고 한 것은 새 총을 갖고 싶다는 뜻이었지요. 나는 새로운 총을 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련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의도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즉 “완전히 새로운 사람을 만드셔서 인간으로 새로운 본성을 갖게 하시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농부가 매우 어리석은 것 같지만 사실 우리의 영적 분별력에 비하면 매우 분별력이 많은 셈이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를 수리하려는 것이 아니고 옛 인류 전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다. 하나님께서는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지혜로 아담에 속한 인류에 대한 완벽한 처방으로 십자가를 선택하셨다. “그리하여 어떤 육체도 그분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리라” 십자가는 우리의 뜻과는 어긋난다. 그리스도께서는 “내 뜻이 아니옵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씀하셨다. 십자가는 또한 우리의 지혜와는 반대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지혜는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정과도 반대된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육신과 함께 그 애착 정욕을 십자가에 달아 버렸느니라” 십자가는 또한 우리의 자긍심과도 모순된다. 우리는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 즉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던 그 생각을 가져야만 한다. 십자가는 우리의 자아에 반대된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산 자들이 이제 부터는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후 5:14, 15). 이처럼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본성과 모순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따라야 할 확고하고도 변함없는 원칙은 이러하다: “사람이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목숨마저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가셨을 때 “도끼는 이미 뿌리에 놓였다.” 옛 아담이라는 나무줄기는 완전히 잘려 나가고 만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 옛 사람이 완전히 파산하였음을 보여 주며 아담에 속한 옛 사람은 사망하였음을 선언한다. 십자가는 인간의 자연적인 생명(즉 육으로 난 것)을 제거하는 방법이며 이로써 초자연적인 새 생명이 대신 자리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우리를 “강화”시켜주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다듬기 위해서가 아니라 베어 버리시려고 오신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행하도록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행함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십자가는 모든 육신적인 행동에 반대하며 하나님의 방식으로 죽은 것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포도주를 옛 부대에 담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새 천을 낡은 옷에 대고 깁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옛 사람의 누더기를 완전히 벗겨 버리기 위해 오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계명은 우리가 아담으로 부터 물려받은 모든 도덕적 영적인 유산을 완전히 청산해 버리는 것이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핵심적인 본질이다. “우리의 자아야말로 타락한 인간이 지닌 모든 악의 요소들의 뿌리이며 나무요 가지들인 것이다”(율법).
자아 부인이란 그저 이런 저런 방종을 절제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A.T. 피어슨 박사가 말한 대로 모든 방종 -크고 작은 여러 종류- 이라는 가지들의 뿌리인 자아에 도끼를 대는 것이다. 자기 의, 자기 심리, 자아 추구, 자기 만족, 자기 의지, 자기 방어, 자기 영광 등. 이 뿌리에서 자라나온 수천 개의 가지들 중 그저 몇 개의 가지만을 제거한다 할지라도 또 다른 가지들이 더욱 왕성하게 뻗어 나간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따라서 도끼가 자아의 뿌리에 놓일 때까지 그리하여 우리의 자연적인 생명이 성령의 생명에게 자리를 양보할 때까지는 “우리의 모든 미덕은 그저 썩은 뿌리에 접붙여진 그럴싸하게 보이는 가짜 가지들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린 이후에도 옛 자아의 뿌리와 샘물로부터 가끔씩은 옛 모습이 들어나는 것은 어쩐 일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능력을 배워야할 때가 바로 이 순간인 것이다. 자 예를 들어보자 예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옛 아담의 줄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로서 “야생포도”를 맺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에게 참여한 자로서 그분께로 접붙여진 것이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으로 믿음을 통해 들어가게 되었을 때 나는 아담의 줄기로부터 차단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살아 계신 포도나무인 그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진 것이다. E. J. 페이스(Pace)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얼마 전 내 고향인 플로리다에서 감귤 농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농장 주인에게 과일을 어떻게 접붙이는지를 보여 달라고 청했다. 그는 나를 묘목원으로 인도했다. 그는 끝에 갓 나온 싹이 난 작은 가지를 묘목에서 조심스럽게 잘라냈다. 그는 근처에 있던 다른 나무쪽으로 가서는 그 위에 칼로 십자가 모양을 파고서 그 안에다 그 어린가지를 능숙하게 집어넣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옛 줄기에서 베어져서 십자가에서 영원한 신성 안으로 접붙여진 것이다. 이제는 믿음으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상속자이다”라는 사실을 붙들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동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접붙임은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접붙이는 방식은 이러하다. 즉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가지를 이보다 못한 줄기에다가 접을 붙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자연의 법칙과는 반대로 죽은 나무에다 접붙여졌다. 참 포도나무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 구속주의 찢겨진 옆구리에 우리는 접붙여진 것이다. 즉 나쁜 열매 맺는 자가 좋은 열매 맺는 분께 접붙여진 것이다. 이외에도 너무도 중요한 “본성을 거스르는” 또 한 가지 요소가 있다. 자연에 있어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연합이 이루어지면 가지는 여전히 “종류대로” 즉 원래 가지고 있던 그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 보자면 나는 아담 안에서 죽었다. 나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생명으로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 따라서 “하나님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이 자연적인 생명은 죽어야하고 “숨”을 거두어야만 한다. 십자가의 형을 받게 된 나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이제는 본성에 따라 살기에는 적합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십자가는 이 사실을 보여 주며 나는 이에 동의해야만 한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심을 인정해야 한다. 이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의 생명이 접붙여진 가지인 나를 통해 표출되어야 하며 나의 본성과는 너무도 어긋나는 의로운 생명의 열매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그분의 본성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에 이르도록 표출되어야 하는 것이다.
에이미 카미카엔씨는 코힐라(Kohila)라는 간호사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 안에 있는 뭔가와 맞닥뜨렸다. 그것은 우리가 난탄(Nan than)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난(Nan)은 나(I)를 뜻하고 탄(than)은 이 대명사를 강조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자아를 포기한 사람을 통해 주님께서 이루시지 못할 일은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난탄(Nan than)은 무척이나 자신에 대해 염려를 한다. 코힐라는 그녀의 탄을 포기하였고 이에 다른 사람을 돕는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시게 되면 그분은 그 생명을 전적으로 장악하셔야 한다. 그분은 “나의 자아”를 완전히 몰아내실 때까지 끝까지 “연좌 농성”을 벌이실 것이다. 십자가는 “내가 아니고.....”라는 고백이 나올 때까지 나를 궁지로 몰고 갈 것이다. 자연에 따른 접붙이기와 열매 맺기의 법칙에는 반대되는 방식으로 “너희가 내 안에”라는 고백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먼저 이루어지고 나서야 “내가 너희 안에”가 이루어져 합당한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길은 자연의 의지를
가로질러 뻗어 있고;
예수님의 발은 육신이
지배하지 않는 곳을 밟는다네
노예의 족쇄를 뒤로 하니
복된 일이로다.
우리의 자아를 뒤로하니
수의와 무덤만이 남아있네!
-Ter Steeegen-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근거하여 접붙여진 어린 가지의 고백을 들어보자. “저는 저의 혈통에서 잘려졌습니다. 저는 이전의 모든 관계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저는 옛 가문으로부터 철저히 축출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옛 것들에 대해 죽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살고 있으며 - 저는 여전히 작은 야생가지일 뿐입니다- 여전히 내 자신일 뿐입니다. 저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살고 있는 것은 제가 아닙니다. 제 안에서 다른 분의 생명이 살고 있기에 제가 맺은 모든 아름다운 열매는 제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다른 분의 생명이 맺은 열매이며 이 생명은 계속해서 저의 옛 생명을 거슬러 위대한 농부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고귀한 열매를 저를 통해 맺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이와 같은 원칙들을 끊임없이 거스르게 됩니다. 이에 대해 F.J. Huegel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아에 매여 있고 뒤덮여 있고 얽혀 있고 충만해 있어서 우리의 영적인 본성이 하나님 안에 중심을 두려면 우리의 옛 성품을 완전히 거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깊은 사랑의 연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인 것이다. 십자가는 부패한 인간의 본성을 거칠게 대한다. 즉 옛 생명을 죽여 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죄가 우리를 씻긴다거나 옛 성품을 뿌리 뽑는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종종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자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종종 간과한다. 프랜시스 데 살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기성복처럼 이미 만들어진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또한 아무런 어려움도 가져다주지 않는 거룩함을 얻는다는 것도 환상이다. 이와 같은 피상적인 거룩함은 인간의 본성과 매우 잘 어울릴 것이다. 우리는 성결에 이르는 비결만 발견한다면 쉽고 빠르게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우리 인생동안 십자가가 놓여야할 옛 모습이 우리의 본성 안에 얼마나 남아 있는지 계속해서 찾아내야만 한다. 만약 독자 여러분께서 자아와 죄에 대해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자아의 부산물을 발견하고 있지 못하다면 여러분의 취향, 선택, 선호하는 것 등에 분명한 갈보리 십자가의 표시가 찍혀야만 할 것이다. 자연적으로 타고난 모든 요소에 십자가의 죽음의 표시가 찍혀 있어야만 한다. 자, 우리 모두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자연적인 선택위에 그분의 십자가를 표시하시도록 기도하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여
오 당신의 거룩한 십자가를 표시하소서.
자아가 엿보이는 그 모든 요소위에
당신의 상실의 표식을 찍으소서
우리가 보기에는 가장 고귀한 것 위에
죽음의 표시가 이곳저곳에 놓이게 될 때
우리 모두 기이히 여기지 않고 이것이
기도의 응답임을 인정하리이다.
-Army Carmichael-
그러나 “내가 아니고”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일생 내내 장례를 치르는 사람처럼 우울한 삶을 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결코 그럴 수가 없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는 자는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광스럽고 영원하신 분, 만물의 창조자,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그분”께서 나를 자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그분의 성전을 삼으시고는 내가 살아 있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사신다”는 고백을 실제로 할 수 있게 하신다는 이 사실보다 더 놀라운 일이 이 세상 그 어디에 있겠는가? 그분께서는 “내가 사니 너도 살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라는 신비한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인 것이다. 가지는 포도나무 안에 있는 것이다. 실로 생명과 사랑과 자유의 영광스러운 연합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그분과 함께 살아났고 그분과 함께 일으켜 졌으며 그분과 함께 앉혀졌다. 나는 영원하신 분 안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다시 말해 나의 생명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진 것”이다. J Gregory Mantle은 이렇게 말했다.
“퍼트셔 골짜기에는 작은 개울의 바위 위에서 자라고 있던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곳에는 뿌리를 뻗은 흙도 없었고 영양분을 흡수할 흙도 없었다. 이 나무는 오랫동안 성장을 방해받았고 건강하게 자라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식물이 갖고 있는 놀라운 본성에 의해 근처에 있던 좁은 다리를 통해 수염뿌리를 건너 쪽으로 보냈다. 그리고서 실개천 건너 쪽 둑에 있는 옥토위에 뿌리를 박았다. 나무는 수액과 자양분을 빨아들여 급속히 건강하게 성장했다. 이 작은 다리가 나무에게 생명을 제공했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믿는 자에게는 생명의 원천인 것이다.”
만약 우리의 생명의 뿌리가 부활하신 주님께 놓여있기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 안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열매를 맺어 보려고 노력해 본 적이 없는가? 그리하여 쓰라린 체험을 맛본 적은 없는가? 우리는 열매를 맺기 위해 애써 봤고, 노력해 보았고 기도해 보았고, 애통해 보았다. 그러나 이 모두가 허사였다. 우리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명의 흐름은 불순물과 뒤섞여 우리의 거룩하지 못한 동기들을 통해 혼탁해지고 만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풍성한 충만함이 있음을 알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이것을 얻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허드슨 테일러가 고백했듯이 우리도 이렇게 고백하게 된다. “나는 뿌리 안에 풍성한 충만함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나의 보잘 것 없는 가지를 뿌리에 박을 수 있는 지가 문제이다.” 이와 같은 절망의 극에 달할 때 결국 우리는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감사드리는 것은 완전히 신성하고 능력 있는 생명이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참된 살아있는 힘을 찾으려면 나와 나의 생명에서는 하지 말라.
이는 자아는 자신만을 사랑하며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함이라
씨가 뿌려진 땅에서 열매를 구하듯이
살아있는 생명을 찾되 죽임당한 생명으로부터 구하라
그리고 나서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서둘러 그 생명에 치명타를 가하라.
그리하면 상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던 것에서 무한한 보물을 발견케 되리니
씨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어디서 새로운 부활의 싹이 발견되겠는가?
-T.C. Upham
2009-05-01 17:47:44 | 관리자
지금까지 저는 킹제임스 성경을 쓴다고 하면서 또 근본주의를 한다고 하면서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한때 저 자신도 비난받을 일들을 많이 한 사람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이제 우리가 - 저와 우리 근본주의 성도들이 - 바르게 행하자는 취지의 글을 몇 번 썼습니다. 그랬더니 맹비난이 들어오더군요. 한 마디로 너나 잘하라는 것입니다. 너나 교만 떨지 말고 남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라는 댓글을 받고 참으로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좀 더 사랑을 담아 글을 쓰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제 모습이 그랬음을 시인하고 지금도 그런 면이 있음을 시인합니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날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고 나아지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근본적인 믿음을 갖기로 작정해서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식 독립침례교회 혹은 장로교 개력주의 교회 등만을 유일한 근본주의 틀로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거기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근본적인 것을 이야기할 때는 성경에 있는 것을 따르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도 한때 침례교 목사였고 앞으로 기회가 주어지면 분명히 다시 '제대로 된 목사' - 과거에는 잘 몰라서 형편 없는 목사였음 - 의 길을 갈 것입니다. 시간이 가면서 많이 느끼는 것은 제가 생각하거나 알던 것 이상으로 근본주의가 폭이 넓고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결코 타협하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을 그렇게 편협한 존재, 획일화된 존재로 만들지 않았으므로 폭 넓게 사고하고 바르게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독자께서는 앞으로 본 사이트에서 제가 근본주의라고 할 때는 성경에 있는 것을 따르자는 것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름도 남기지 않고 악성 댓글을 올리면 마음이 후련해지는 분이 여럿 있는 것 같습니다. 이름은 없어도 접속하는 순간 이미 IP Address가 기록됩니다. 그러므로 제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누가 이런 악한 일을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댓글을 쓰도록 한 것은 성도들 간의 대화를 유도하고자 함인데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사이트에 들어와서 항상 욕을 하고 악성 댓글을 남기는 것은 신사가 할 일이 아니지요. 더욱이 여기의 제 글을 수시로 모니터링해서 상부에 보고하는 분들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참 제가 이렇게 유명하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인 줄은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아무 힘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저를 무서워하지 말기 바랍니다. 할 말이 있고 정말로 그것이 마음에 걸리고 저를 사랑해서 충고하고 싶으면 전화나 e-mail을 주면 안 될까요? 이미 저를 거쳐간 사람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데 그러면 더더욱 신사가 아니지요. 우리 모두 Gentlemen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어쨌든지 도전을 주고 교만하지 말라고 충고를 주어서 감사합니다. 깊이 새기겠습니다. 내 편이든 반대 편이든 내게 도전이 되는 글을 주었으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 아닙니까?
부탁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우리 모두가 성경대로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고 가끔씩 이런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틀렸으면 알려주십시오. 바른 의견이면 고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제와 오늘 많이 묵상한 찬송가입니다.
인자한 말을 가지고 사람을 감화시키며갈 길을 잃은 무리를 잘 인도하게 하소서.
이것을 책상 앞에 붙여 놓고 매일 되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이런 사람이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09-05-01 17:39:28 | 관리자
저는 이번 겨울에 미국 노쓰캐롤라이나주에 있는 앰배서더 칼리지를 방문했습니다. 지금 거기서 공부하고 있는 한 젊은이와 그분의 멘토이신 존스턴 목사님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존스턴 목사님은 한국에서 10년 이상 침례교 선교사로 일했고 캐나다 뱅쿠버에서 몇 년 동안 한인 목회를 했는데 놀랍게도 로버트 할리 수준으로 한국말을 유창하게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 명의 미국 선교사들을 봤지만 한국에 선교를 하러 왔다고 하는 이들의 주장이 무색할 정도로 이들은 거의 한국말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너무 놀랍게도 우리말을 유창하게 했습니다. 현재 그곳에서 선교학 교수를 하면서 주변의 한인 교회에서 목회를 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좋은 만남이었습니다.
그 날 그 학교 총장님께서 제게 아침에 10여 분 정도 학생들 앞에서 간증할 기회를 주어서 킹제임스 성경 사역을 알리고 왔습니다. 그 후에 한 연세드신 교수님이 나와서 학생들에게 마음을 잘 지켜야 한다고 충고를 주는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70세 먹은 노인이 20세 아이들에게 자기의 인생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성경으로 우리의 마음을 풀어 주는데 너무 말씀이 달았습니다.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 나 주는 마음을 살피며 속 중심을 시험하여 각 사람의 길들과 그 사람의 행위의 열매대로 그 사람에게 주느니라(렘17:9,10).
우리의 모든 것이 마음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까? 좋은 것, 싫은 것, 믿고 싶은 것, 믿고 싶지 않은 것, 비난하는 것, 칭찬하는 것, 주님 밑에서 순종하려는 것, 내 뜻을 세우려는 것, 결혼하는 것, 이혼하는 것, 말을 곱게 하는 것, 말을 막하는 것 등 우리의 모든 삶이 마음에 의해 결정됩니다. 한 번 가만히 앉아서 그런가 안그런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이런 차원에서 잠언을 기록한 솔로몬의 마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열심을 다하여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서 나오느니라(잠4:23).
우리의 믿음 생활 특히 성화 과정은 단적으로 한 마디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바른 것과 그른 것이 종잇장처럼 얇은 마음의 생각 하나에 의해 결정됩니다. 부부 관계, 연인 관계도 그렇지 않습니까? 다윗의 큰 아들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겁탈한 이후에 그의 마음 속에는 이전의 사랑이 다 없어지고 순식간에 미움이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 미움의 정도는 그가 품었던 사람보다 훨씬 강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삼하13:15 참조). 이게 사람의 마음이지요.
그러므로 이제 킹제임스 성경을 읽는 저와 여러분은 더더욱 마음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마음의 묵상이 필요합니다. 깊이 생각하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여기서 성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2009-05-01 17:36:55 | 관리자
독신생활
지난 달 통계청이 발표한 ‘2005∼2030년 장래가구 추계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총 가구 수는 독신가구의 증가에 힘입어 2030년에는 올해보다 300만여 가구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이 된다. 이는 독신주의자들의 증가와 함께 만혼 및 이혼율의 증가, 그리고 기러기 아빠처럼 가족과 떨어져 혼자서 살아가는 가장들이 급격히 늘어가고 있는 세태를 확인해 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혼자 살아가는 것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요즈음, 오히려 독신을 부추기기까지 하는 교계 안팎의 주장들도 제법 듣게 된다. 그러나 독신생활은 우리의 육적, 영적 건강에 모두 해가 됨을 알아야 한다(창2:18; 딤전4:3; 5:14).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합당한 협력자를 만들리라, 하시니라.”(창2:18)
최근 독신생활이 흡연보다 더 건강에 나쁠 수 있다는 영국 워릭대학교의 연구결과를 비롯하여 독신생활이 우리의 몸에 갖가지 이상을 초래한다는 많은 연구보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왜냐하면 기혼자의 경우 사회적 지지자로서 배우자가 스트레스를 덜어주고, 건강한 생활습관을 갖는 데 도움을 주는 반면 독신자는 상대적으로 나쁜 생활습관에 물들기가 쉽기 때문이다(전4:9-12).
보통 독신생활을 하게 될 경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불규칙한 생활과 장기간 혼자 지내면서 생기는 외로움이다.
독신 남성들의 경우 먼저 식생활이 불규칙해지기 쉬운데 단순히 식사를 한 끼 때운다는 생각으로 지내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양섭취의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 그리고 인스턴트식품을 많이 먹다보면 비만을 비롯한 고혈압, 당뇨병 등 각종 성인병의 위험도 높아지게 되고 또 불규칙한 식사로 인해 위염, 위궤양 등 소화기 질환도 잘 발생할 수 있다.
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렇지 않겠지만 혼자라는 이유로 잦은 술자리를 가질 개연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필요이상으로 칼로리 섭취량을 높여 비만이 될 수 있으며, 알코올로 인해 간질환 등 건강을 쉽게 해칠 수 있다.
아울러 혼자라는 심리적 소외감과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면 심한 경우 우울증을 유발하며, 극단의 경우에는 자살까지 이어지게 된다.
미국 워싱턴 대학의 토머스 홈스 박사와 리처드 라헤 박사가 고안한 ‘스트레스 지수’(life change scale; stress scale)에 따르면 43개의 스트레스 항목 중 어느 것보다도 강도가 높은 세 가지가 ‘독신’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즉 배우자의 죽음(100), 이혼(73), 별거(65) 등 독신생활에 대한 항목들이 수감(63), 근친 사망(63), 실직(47) 등 우리가 심한 스트레스라 생각하는 다른 항목들에 비해 높은 스트레스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러한 스트레스 점수가 높을수록 병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지고,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독신생활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신체적 건강에까지 문제를 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결혼 후 마누라의 잔소리가 독신자의 자유보다 낫다’는 말이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 여겨진다. 아울러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홀로 있기보다는 넘어질 때 일으켜주고 차가운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동료를 두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전도자의 고백이 시대를 초월한 진리임을 다시 한번 확인케 된다(전4:10,11).
“누구든지 아내를 얻는 자는 좋은 것을 얻고 주의 은총을 얻느니라.”(잠18:22)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자기들의 수고로 인하여 좋은 보상을 소유할 것이기 때문이라.”(전4:9)
2009-05-01 17:34:24 | 관리자
채식주의
날로 건강에 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는 오늘날,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채식을 하여야 진정한 건강을 누릴 수 있다는 주장을 심심치 않게 접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최초로 허락한 음식은 과일과 곡식과 견과류의 채식 식단이었다(창1:29). 그래서 최근 들어 과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는 채식 식단의 우수성은 이미 성경적 창조원리에 의한 것이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이것은 또한 다니엘과 세 친구의 예에서도 입증이 된다(단1:1-21). 즉 열흘 동안 물과 콩으로만 식사를 한 다니엘과 세 친구의 얼굴은 왕이 정해 준 음식을 먹은 모든 아이들보다 더욱 아름답고 살이 기름지게 보였다(단1:15). 그리고 삼년 뒤에 채식만 한 이 네 소년은 느부갓네살의 시험을 받았는데 바벨론의 모든 지혜로운 자들보다 열배나 더 총명하였다.
따라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우리의 신체구조나 유전정보와 별 차이가 없는 다니엘과 세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채식을 하게 되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가공된 인스턴트식품의 범람과 육식위주의 식생활문화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채식이 웰빙식일 뿐 아니라 이처럼 성경적이라고까지 하는 얘기를 들으면 더욱 귀가 솔깃하게 된다.
그러면 이와 같은 성경적(?) 채식예찬론자들의 주장은 정말 성경적인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 후 우리에게 육식을 허락하셨다. 즉 지구 전체에 대격변이 일어나 이전과 달라진 자연환경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육식이 필요함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먹을 것이 될 것이요, 푸른 채소와 같이 내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었노라.”(창9:3)
그리고 다니엘과 세 친구는 채식이 창조원리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채식을 택한 것이 아니었다. 즉 왕이 주는 음식은 먼저 우상에게 드려진 것이며 또 왕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버금가는 충성을 왕에게 바친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거절한 것이다. 아울러 다니엘이 평소 육식도 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단10:3).
만일 쇠고기가 해롭다면 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두 천사와 함께 방문하셨을 때 그분을 위해 쇠고기를 준비하였으며 또 왜 하나님께서는 그 고기를 드셨을까(창18:1-8)? 그리고 육식이 잘못된 것이라면 예수님께서는 빵만으로도 수많은 이들을 먹이실 수 있었을 터인데 왜 빵과 물고기로써 따르는 이들을 먹이셨으며(마14:13-21; 15:32-39) 부활하신 후에도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먹으라고 하셨을까(요21:1-14)?
우리가 구약성경을 자세히 공부해보면 하나님께서 영적 전쟁을 치루는 전사들로 레위 자손들을 세우신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들의 식사는 기름진 양과 쇠고기가 대부분이었다(레7:6-34; 신18:3-5).
또 구약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바알의 대언자들을 대면하기 바로 전에 주님께서 그를 위해 마련하신 식단에는 물론 고기가 포함되어 있었다(왕상17:1-7).
“까마귀들이 아침에 빵과 고기를 그에게 가져오고 저녁에 빵과 고기를 가져왔으며 그가 시냇물을 마셨더니”(왕상17:6)
우리가 영적 전쟁에 들어가면 엄청난 단백질 소모가 있음이 최근 여러 사역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그래서 만약 사탄이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고기를 못 먹게 한다면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르는 동안 우리 몸의 면역기능이 급속히 떨어져 사역을 중단해야 되는 일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힌두교인들이나 뉴에이저들은 채식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요가를 하는 이들은 고기로부터의 진동(vibration)은 유해하며 영적 감도를 감소시킨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능력을 받기 위해서 몸 안에 아카사(akasa)라고 불리는 물질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채식을 하고 성욕을 금함으로써 고갈되지 않게 된다고 그들이 믿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고기는 건강에 좋지 않으며 채식 위주의 식사가 콜레스테롤수치를 낮추고 심장병, 암, 고혈압, 당뇨병 등 성인병의 발병 위험을 줄여준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기름이 많지 않은 양질의 (붉은) 고기 자체가 건강에 직접 해를 준다는 보고는 없다.
오히려 극단적인 채식주의는 영양학적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건강에 해가 될 수 있다. 식단에서 동물성 식품이 배제되면 철, 칼슘 같은 무기질, 비타민 B12, 비타민 D, 엽산 등의 공급이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적혈구 생산에 관여하는 비타민 B12는 동물성 식품에만 존재하므로 채식을 할 경우에는 비타민 B12 첨가 두유, 시리얼 등 비타민 첨가식품을 따로 먹어야 한다.
이제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자.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셨으니 이들은 위선으로 거짓말을 하며 자기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진 자들이라. 이들이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삼가라고 명령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사 진리를 믿고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은 선하고 감사함으로 받으면 거부할 것이 전혀 없나니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히 구별되었느니라.”(딤전4:1-5)
2009-05-01 17:33:44 | 관리자
오캄의 면도날(Ockham's Razor)
중세 철학의 일반적인 원리인 ‘오캄의 면도날’은 오늘날까지 인문학뿐 아니라 과학 분야에서도 주요한 논리적 잣대가 되어 왔다. 즉 ‘복잡한 의견을 불필요로 하는 원리’(the principle of unnecessary plurality), ‘절약의 원리’(the principle of parsimony), ‘단순성의 원리’(the principle of simplicity) 등으로도 불려지는 이 ‘오캄의 면도날’은 사실 의학적 판단을 비롯한 모든 이성적 사고의 영역에서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사용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마이코플라즈마 폐렴의 경우를 보자. 이 폐렴에서는 다형홍반, 간염, 용혈 빈혈, 수막뇌염 등 호흡기 이외의 장기들에도 합병증이 잘 생길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여러 가지 다른 원인들에 의해서 이와 같이 다양한 질환들이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단지 마이코플라즈마 균 하나에 의해 다양한 합병증이 생겼다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논리적이다.
다시 말해 동일한 현상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면 그 중 가장 간단한 가설이 가장 진리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 ‘오캄의 면도날’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개념은 모든 질병의 원인을 찾는데도 적용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현대의학에서는 우리가 겪는 온갖 유형의 질병에 대해 환원론적인 이해만 있을 뿐 그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고찰은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왜 질병을 앓게 된 것인지 그 근본이유에 대해 명쾌히 설명을 하고 있다(창3:17-19). 즉 아담의 범죄,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로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냄과 동시에 인간에게 유해한 마이코플라즈마 같은 균들이 창궐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각종 질병에 걸리게 됨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창조의 질서가 깨지면서 무질서도(entropy)가 증가하는 열역학 제2법칙이 이 지구상에 시작됨으로 인해 우리 몸도 쇠퇴하기 시작하여 건강을 잃게 됨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해하게 된다.
원인을 알면 치료가 쉬워진다. 우리가 온전한 건강을 얻으려면 먼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한다(롬3:23; 6:23; 10:9,10). 그렇게 되면 우리가 언제 어떠한 모양으로 이 세상을 떠나가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며 어떠한 질병도 존재하지 않는 천국에서 건강한 삶을 영원토록 누릴 수 있다(계21:4; 22:3,4).
아울러 우리는 구원받은 후 주님께서 허락하신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갈 때에 아담의 불순종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앞으로 이 성서건강학 칼럼들을 통해서 계속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게 건강한 삶을 보장받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에게 진정한 치유자가 되어주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출15:26; 23:25).
“이르시되, 네가 주 네 하나님의 음성에 부지런히 귀를 기울이고 그의 눈앞에서 옳은 것을 행하며 그의 명령들을 귀담아 듣고 그의 모든 법규를 지키면 내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내린 이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를 치유하는 주니라, 하시니라.”(출15:26)
2009-05-01 16:31:12 | 관리자
광우병
광우병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 미국 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한 언론매체의 보도로 촉발된 이번 사태는 촛불집회와 인터넷 서명운동 등을 통해 순식간에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되어버렸다. 또한 연일 각 매스컴에서 쏟아지는 광우병 관련 뉴스들은 단지 건강에 관한 논쟁의 영역을 벗어나 정치, 경제, 사회 등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광우병의 기저에 놓여 있는 영적인 문제점들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간과해버리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광우병은 잘 알려졌다시피 양의 시체를 먹은 소에게서 처음으로 발견이 되었는데, 이 광우병 걸린 소를 인간이 먹으면 광우병을 일으키는 변형된 단백질 ‘프리온’이 인간에게 들어와 치명적인 인간광우병(vCJD)을 일으키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온 우주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해 주셨다(창1:28). 그리고 노아의 홍수 이후 육식을 허락하시면서 동물이나 식물이나 어떠한 사물이든지 ‘섞지 말라’고 명령하셨다(창9:3; 레19:19).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정한 창조의 질서를 무시하면서 초식동물인 소에게 육식을 시킨 결과 이처럼 광우병이란 새로운 역병의 심판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된 것이다(출9:15; 시78:50; 렘21:6; 합3:5; 히12:23).
특히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공장형 집단사육을 하면서 잘못된 사료를 준 것은 창조주 하나님 대신 맘몬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다름이 아니다(마6:24; 롬16:18).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많은 인수 공통 전염병 중 특별히 소의 역병을 통해 우상숭배의 죄악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라 여겨진다. 왜냐하면 고대로부터 소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주로 섬기던 대상이며, 또 타락한 루시퍼의 얼굴도 소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출32:1-6; 왕상12:25-33; 겔1:10; 10:14; 28:14).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독교문화권의 대표 지역으로서 시간, 공간, 언어 등의 절대적 기준이 있는 영국에서 광우병이 처음 발견되도록 하신 사실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광우병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갖지 못함을 꾸짖는 것이라 생각된다(롬3:11,12; 눅18:8).
그렇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작금의 광우병 파동을 목도하고 있는 우리에게 우리가 위치한 이 시대의 좌표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셨다고 생각한다(마24:7; 눅21:11).
이제 우리는 광우병의 공포에 사로잡혀 이에 대한 갖가지 대책을 강구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영혼의 건강 상태를 철저히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 그리할 때 우리는 이 두렵기 짝이 없는 광우병의 시대를 진정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의 심판자이시며 우리의 진정한 치료자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히12:23; 마9:10-13).
“몸은 죽여도 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혼과 몸을 능히 지옥에서 멸하시는 분을 두려워하라.”(마10:28).
국민일보 5월9일자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22:41 | 관리자
회춘
계절의 여왕 5월이 왔다. 곳곳에서 봄기운이 넘쳐나고 있다. 왕성한 수정활동을 보이는 자연계뿐 아니라 황금연휴 기간 성형을 통해 젊음을 되찾아보려는 회춘족에게서도 완연한 봄을 느낄 수 있다.
최근 들어 웰빙과 건강이 행복의 기본조건으로 떠오르면서 이와 같이 적극적으로 회춘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단순히 몸매와 피부관리 등을 통해 젊음을 유지하려던 과거와 달리 회춘은 현대의학의 발달과 함께 놀랄 만큼 구체적인 성과를 구가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노화는 생리적 자연현상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질병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의학적 기술들과 약제들이 중요한 회춘법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이 중 가장 선두주자격인 회춘법은 '비아그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비아그라는 원래 협심증 치료제로 개발된 것이었으나 임상실험 과정에서 발기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져 발기부전 치료제로 쓰이게 되었다.
이후 비아그라의 폭발적인 인기에 편승하여 시알리스, 레비트라, 자이데나, 야일라, 엠빅스 등등의 발기부전 치료제가 국내외에서 개발되어 회춘을 열망하는 많은 이들에게 애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약제는 심혈관계와 시력 등에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으며 심지어 사망에까지 이르렀던 경우도 보고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의사와 상담한 후 복용하여야 한다.
그런데 성경 속에서는 비아그라의 효과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완벽하기 이를 데 없는 한 회춘의 사건이 소개되고 있다(창 18:9∼15; 21:1∼8). 아브라함과 사라는 연로하여 아이를 낳을 수가 없었다. 사라는 여인들의 관례에 따른 것이 멈춘 상태였다(창 18:1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폐경이 된 사라의 난소에서 다시금 배란이 되게 하셔서 이삭이 태어나도록 하셨다(창 21:1∼3).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137세에 사라와 사별한 후 재혼을 하여 아들을 무려 6명이나 더 낳을 수 있도록 아브라함에게도 회춘을 허락하셨다(창 17:17; 23:1; 25:1∼4).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와 같은 초자연적인 회춘을 허락하신 것일까? 그 까닭은 세상의 방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 생명의 열매가 맺혀질 수 있음을 그들에게, 또한 그들과 동일한 믿음을 소유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롬 4:16∼25; 갈3:5∼9).
아울러 아브라함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날마다 회춘하는 놀라운 복을 덤으로 주시기 위함이었다(롬 4:23,24; 고후4:16; 갈3:14). 이제 우리도 이와 같은 믿음을 소유하여 매일매일 회춘의 복을 누리는 건강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자.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썩어 없어져도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고후 4:16)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22:08 | 관리자
불임
불임이란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1년간 있었는 데도 임신이 되지 않거나 아기를 이미 낳은 뒤로 2년 이상 임신을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최근 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2007년 현재 우리나라에서 불임부부들의 수는 8만7000쌍이 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자녀를 두지 않고 맞벌이를 하며 돈과 출세를 인생의 목표로 삼는 딩크(DINK)족과 달리 아기를 갖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는 불임부부들의 애환은 상상을 초월하기도 한다.
이것은 성경 속에 나타난 불임부부들의 사례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아브라함과 사라, 야곱과 라헬, 엘가나와 한나가 겪었던 불임의 시련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창16:1∼6; 18:9∼15; 25:19∼23; 30:1∼13, 22∼24; 삿13:2∼5; 삼상1:4∼18; 눅1:5∼7).
그들은 결혼 후에 당연히 찾아올 태의 열매를 오랜 기다림과 기도 끝에 힘겹게 얻어야 했다.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권리를 하나님께 온전히 내드리기 위한 뼈저린 훈련을 체험해야 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불임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시며, 그렇게 되는 데는 그분께서 정하신 시간과 방법이 있음을 배울 수 있었다(전3:1).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적 출생을 주관하실 뿐 아니라 '영적 출생'(거듭남)을 관할하시는 만유의 주인이시라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다(롬11:36; 엡4:6).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불임부부들에게도 이와 같은 영적인 접근이 반드시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불임클리닉을 찾아가 최첨단 의학기술로 불임 문제를 해결 받는 것도 좋겠지만,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불임의 해결책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경 말씀을 통해 고민해볼 수 있었으면 한다.
성경은 혈연 중심으로 가족을 말하지 않는다(마12:46∼50). 대신 사랑의 관계를 중심으로 가족을 말하고 있다(요일3:14). 즉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음을 성경은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다(롬8:15;23; 갈4:5; 엡1:5).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감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끔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어 '하나님의 가족'이 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롬8:15; 엡2:19).
아울러 우리는 시험관 아기, 배아 이식, 정자 직접 주입술, 착상 전 유전진단 등 여러 불임 치료법을 고려하기에 앞서 이미 태어난 소중한 아기들을 입양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할 때 하나님의 창조 질서는 확연히 드러날 것이며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진정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보라, 자식들은 주의 유산이요, 태의 열매는 그분의 보상이로다"(시127:3).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21:34 | 관리자
웃음
'일소일소(一笑一少) 일노일로(一怒一老)'라는 말이 있다.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지고, 한 번 성내면 한 번 늙는다'는 뜻이다. 또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라는 말도 있다. 그 뜻은 '웃는 문으로 만복이 찾아온다' 곧 '웃으면 복이 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웃음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나 웃음이 건강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가 객관적으로 입증이 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로마린다 의과대학의 리 버크 교수는 1996년 심리신경면역학 연구학회에서 웃으면 면역기능이 강화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해 전 세계 의학계의 관심을 모았다. 그는 폭소 비디오를 보고 난 뒤 혈액 속에 강력한 면역조절물질인 감마 인터페론의 양이 200배 늘어났음을 밝혀냈다.
또한 백혈구와 면역글로불린이 많아지고 면역을 억제하는 코르티솔과 에피네프린이 줄어드는 현상을 발견했다. 또 2001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리 버크 박사팀은 암을 잡아먹는 NK세포가 웃음에 의해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증명했다.
이 외에도 웃음이 건강에 효과가 있다는 많은 연구결과들이 보고가 되어 왔는데, 대표적으로 뇌하수체에서 엔도르핀 같은 천연 진통제가 생성된다는 것이다. 또 부신에서 통증과 신경통 같은 염증을 낫게 하는 화학물질이 나오고, 동맥이 이완돼 혈액순환과 혈압이 낮아지며, 암 환자의 통증을 경감시키고, 심장박동 수를 높여 혈액순환을 돕는 것 등이 잘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사실들을 바탕으로 하여 웃음을 통해 건강을 증진시키려는 다양한 시도가 진행되고 있는데, 특히 스태그플레이션의 상황 속에서 활력을 잃고 웃음을 찾기가 쉽지 않은 요즈음 '웃음치료'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러나 웃음을 통해 건강을 도모하는 모든 방법이 다 성경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목적한 것에는 때가 있는데 웃음도 이에 해당된다(전3:4).
사실 힌두교, 아프리카 토속종교, 중국의 기공, 최면요법 등 다양한 영적 배경을 가진 집단에서 한결같이 강조되고 있는 웃음이 다 우리에게 참된 건강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게다가 한때의 유행처럼 지나가긴 했지만 소위 '거룩한 웃음'이라는 것도 성령의 역사가 아님을 인식하여야 한다.
물론 하나님은 완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웃음을 채워주시는 분이다(욥8:20, 21). 그리고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 예수님의 예표로서 으뜸가는 인물인 '이삭'의 뜻이 '웃음'이라고 하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웃으며 기뻐하길 원하고 계신다(창21:6; 눅15:3,7).
이제 하나님의 선물인 '웃음'을 통해 영육간에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복을 누리도록 하자.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한 영원한 생명이니라."(롬6:23) "즐거운 마음은 약같이 좋으나 상한 영은 뼈를 말리느니라."(잠17:22).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20:58 | 관리자
어느 분이 옥성호 형제님의 글을 또 보내 주셨습니다. 목사들에게 해당되는 글이지만 내용은 인간의 내면에 들어 있는 탐욕에 대한 것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솔직함이 결여되면 위선자가 됩니다. 특히 목사나 교회의 리더들이 이 점을 명심해야할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 옥성호 형제의 글 ****************************
제가 요즘 저의 상황을 보면서 한 가지 배우는 점이 있습니다. 책이 출판되고 또 이런 지면을 통해서 글을 올리다 보니까 제 의도와 전혀 관계없이 사람들이 저에 대해서 어떤 ‘정형화된 이미지’를 가지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느낌과 함께 행여나 저를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시시각각으로 저를 위협합니다.
저의 이런 우려에 대해서 모범답안으로 대답한다면, “집사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할 필요 없어요.”라고 말할 수 있지만 세상이 그렇게 모범답안과 같이 간단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사람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반드시 심각할 실망으로 이어집니다. 그 확율은 100%라고 저는 장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행여나 사람들이 저를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습니다. 행여나 나부터 나 자신에 대해서 착각하지 않고 항상 ‘내 주제 파악’을 바로 할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한다라는 경각심입니다.
그런데 이런 점을 생각하다가 다른 한 가지 사실에 문득 생각이 미쳤습니다.
바로 목회자의 고독과 관련된 점입니다. 더불어 목회자의 불륜과 관련한 힌트입니다.
어떻게 보면 결국 목회자는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매주 강단에서 ‘바른 소리’를 외쳐야 하는 처지이니까요. 그리고 사람들은 목회자가 외치는 강단에서의 ‘바른 소리’가 그 사람의 실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기대치’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기 마련입니다. 오죽하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가 아닙니까? 그만큼 사람은 사람들의 기대치에 맞추어 행동하려고 애를 쓰기 마련입니다.
나 자신의 실체와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 자신에 대한 모습 사이에 너무도 큰 차이가 있는 경우에 그 차이는 당사자에게 심각한 스트레스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는 ‘고독’이라는 이름으로 목회자를 공격합니다. 나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대상들이 별로 없는 목회자들이 겪는 값비싼 댓가입니다. 더 유명해지고 더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으로 알려지면 질수록 이 고독은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고독이 깊어지고 자신을 허상 속에 고립시키는 실수가 잣아지는 목회자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그 누군가를 만날 때 자기도 모르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자신을 ‘목사’가 아닌 ‘한 남자’로 대하는 여자에게 자신을 내 던지게 됩니다. 또한 그 여자는 그 여자대로 강단에서는 힘 있는 외치는 저 목사의 얼굴 뒤에 숨은 고독을 바라보며 ‘연민의 정 또는 모성애’를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제가 볼 때 목사와 불륜에 빠지는 여자의 경우 그 ‘헌신도 내지 충성도’가 일반 불륜보다 더 깊지 않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우리 주변에는 할 말 못할 말을 못 가리는 ‘주책 바가지’ 목회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도무지 ‘고독’을 느낄 틈이 없는 바쁜 사람들이지요. 함께 어울려 놀기에도 정신이 없으니까요. 그런 분들은 상대적으로 이성과 관련한 유혹에서 좀 더 안전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위험이 있더라도 고독한 목회자가 안전한 ‘주책 바가지’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고독이 초래할 수 있는 불륜과 관련해 제가 생각하는 대안은 두 가지입니다.
가장 먼저 목회자의 아내가 자신의 역할을 바로 찾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는 자기 남편을 ‘여보’라고 부르지 않고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이상한 여인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런 호칭은 이 부부간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점은 시사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매들은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할 때도 이런 식으로 얘기합니다.
“김 집사님, 어제 우리 목사님이 식사를 하시면서 그러던데….”
제대로 된 문장은 다음과 같아야 합니다.
“김 집사님, 어제 우리 남편이 식사를 하면서 그러던데….”
회사에서 부장의 부인이 과장의 부인에게 이렇게 얘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철수 엄마, 글쎄 어제 우리 부장님이 나한테 이번 달 월급이 올랐다고 그러면서….”
말이 안 되지요….아내가 회사의 직원입니까? 왜 자기 남편을 부장이라고 부릅니까? 왜 이런 말도 안되는 호칭이 교회에서는 가능할까요?
남편을 남편이 아니라 목사로 바라보는 아내는 남편을 고립시킵니다. 남편을 남자가 아닌 목사로 인식하는 아내는 남편을 어떤 의미에서 ‘거세’하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남편은 목사가 아니라 ‘남자’여야 합니다.
두번째는 목회자에게도 친구가 필요합니다.
서로간에 ‘무슨 무슨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이 친구를 만드는 데에는 어떻게 보면 좀 더 신중함이 요구됩니다. 왜냐하면 뒷통수 치지 않을 사람을 잘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TV 뉴스 진행자 중에 오라일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쓴 책 중에 ‘오라일리 팩터스’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서 가장 중요한 친구의 조건 1위는 단연 ‘뒷통수 치지 않는 친구’입니다.
뒷통수 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다. 둘 사이에 한 얘기를 딴 데 가서 나불거리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런 사람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들은 정말로 사생활과 관련한 힘든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가서 ‘기도 제목’으로 발설하는 사람말입니다.
“집사님, 정말로 어려운 얘기인데요. 그래도 꼭 기도해 주셨으면 하고요. 저기 최 집사님 있잖아요? 그 분에게 이렇고 저런 일이 있데요. 참 안타까워요. 사실 말하면 안 되는데…그래도 집사님이 기도해 주셨으면 하고 얘기를 하는 거니까 딴 사람한테는 가서 말하지 마시고 그냥 최 집사를 위해 조용히 기도만 해 주세요.”
이런 사람은 둘 중의 하나지요.
대단한 바보이거나 상상을 초월하는 위선자이거나….
뒷통수치지 않는 친구를 만난다면….그건 정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다윗에게 요나단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목사의 은밀한 얘기를 당회에 가서 ‘기도제목’으로 내어 놓거나 주보에 기도 제목으로 싣는 친구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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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인간 ‘아담’에게서도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점을 찾으셨습니다. 아담에게는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에게는 하와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같은 인간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는 함께 웃고 함께 울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가장 흔히 듣는 말들 중에 하나가 목사님을 개인적으로 깊이 알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알게 되면 실망하니까 아예 가까이 하지 말고 멀리서 설교만 들으라는 충고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귀로 들리는 목사의 잘못에 대해서도 아예 눈을 감곤 합니다. 그런 경우 그가 막은 눈과 귀는 목사에 대한 애정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 반응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비겁한 자기 보호의 한 방법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개인적으로 깊이 알아도 여전히 좋아하고 존경할 수 있는 목회자입니다. 목회자가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허상을 조금씩 걷어내고 자신뿐 아니라 남에게도 좀 더 솔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런 목회자들을 아주 많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목회자의 가정과 친구 관계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2009-05-01 16:17:55 | 관리자
성경의 와인(Wine)
1. ‘와인’은 성경에서 알코올이 없는 포도 주스 혹은 알코올이 있는 포도주 혹은 술을 가리킨다. 다음의 구절은 와인이 알코올이 없는 포도 주스임을 보여 준다: 신11:14; 대하31:5; 느13:15; 잠3:10; 사16:10; 65:8; 딤전5:23.
2. ‘와인’이 알코올이 있는 포도주 혹은 술을 가리킬 때는 문맥이 그것을 보여 준다. 이 경우 하나님은 와인의 악영향을 지적하신다. 창세기 9장의 노아의 경우가 이렇다. 잠언 20장 1절도 이것을 보여 준다. 포도주는 항상 사람을 속이고 조롱하게 만든다. 잠언 23장 30-31절도 포도주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와인’이 쓰인 문맥에서 우리는 항상 그것이 포도 주스인지 포도주인지 조심스레 구분해야 한다.
3. 성경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경고한다. 구약과 신약 모두 그렇다. 잠언 23장 32-35절과 잠언 31:4-5절을 보기 바란다. 재미있는 것은 잠31:6-7절 말씀이다. 여기서 포도주는 진통제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사용해도 됨을 보여 준다. 아무나 이것을 마실 수 없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진통제가 없었으므로 보통 사람이 구할 수 있는 것은 독한 술이었고 이처럼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이것을 사용하는 것이 예외적으로 허락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사람은 살리라는 소망이 없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또한 지금 이 시대에는 다른 진통제가 있으므로 이런 경우에도 굳이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된다. 이사야서 5장 11-14절 역시 술 먹는 자들에 대해 경고한다. 13-14절은 술 먹는 것으로 인해 지옥이 확장됨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포로로 잡혀갔으며 그들의 존귀한 자들은 굶주리고 그들의 무리는 갈증으로 목마르도다. 그러므로 지옥이 자기를 확장하고 한량없이 자기 입을 벌렸은즉 그들의 영광과 그들의 큰 무리와 그들의 영화와 또 기뻐하는 자가 거기로 내려가리로다.”
사실 지옥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한 곳이다(마25:41). 그러나 알코올에 의해 지옥은 지금도 스스로를 확장시키고 있다. 이사야서 28장 7-8절도 술의 악함에 대해 경고한다.
4. 술을 만드는 것은 자연적인 과정이 아니다. 우리는 보통 주스를 오래 두면 술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은 술을 만들려면 시간 외에 다른 조건들이 맞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자연적으로 주스가 술이 되게 했으므로 술은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술은 하나님이 만들지 않았다. 사람이 자기의 기술로 술 만드는 법을 만들어 냈다. 양조 공장 주인들은 술을 만들려면 물, 온도, 설탕 등이 모두 맞아야 함을 알고 있다. 주스를 냉장고에만 넣어도 결코 술이 되지 않는다. 또한 뜨거운 열대 지방에서도 주스는 발효되지 않으며 술이 되지 않는다. 고대 사람들은 주스를 끓여서 잼처럼 만들었고 필요할 때 여기에 물을 타서 마셨다. 발효가 자연적으로 일어나려면 조건이 맞아야 하는데 사람이 이 조건을 조절하지 않으면 거의 술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술은 사람이 발명한 것이다.
5.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술(포도주)을 만들거나 마시지 않았다.
(1) 첫째 이유는 그분의 거룩한 본성 때문이다. 히7:26은 그분께서 거룩하고 해가 없으시고 더럽지 않으면 죄인들로부터 분리된 분이라고 말한다. 그 당시 어느 누구라도 성육신 하신 하나님인 그분의 거룩함을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그분을 붙잡으러 갔던 사람들도 그분처럼 말한 사람은 없었다고 증언한다(요7:46). 그분께서 거룩하시므로 성경이 사람을 조롱하게 하는 것, 사람을 속여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부르는 포도주를 마시거나 만들 수는 없다. 그분의 본성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장 17-18에서 주님은 율법과 대언자들을 폐하러 오지 않고 성취하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하박국 2장 15절은 자기 이웃에게 술을 주는 자에게 화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리스도께서 만일 술을 마시거나 만들었다면 스스로 이런 말씀을 폐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분은 결코 자신의 본성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 않는다.
(2) 둘째 이유는 레위기 10:9-11절에 있는 제사장의 규례 때문이다. 제사장은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의 차이를 가르쳐야 하므로 술을 마실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긍휼 많고 실실하신 대제사장이시다(히2:17). 그러므로 그분은 결코 술을 마시거나 만들 수 없다.
(3) 셋째 이유는 위에서 살펴본 잠언 31-45절에 있다. 왕들은 술을 마시지 말라고 성경은 권고한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왕들의 왕이시므로 그분의 본성 상 술을 만들거나 마실 수 없다(계19:16; 마27:11; 슥9:9).
(4) 그리스도께서는 백성을 조롱하거나 속이러 오지 않았다. 그런데 잠언 20장 1절은 포도주가 그 일을 한다고 말한다.
(5)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지옥에 보내지 않으려고 오셨다. 그런데 술은 지옥을 확장시키는 일을 한다(사5:11-14).
(6)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그분은 포도주를 만들지 않았다(요2). 많은 사람들이 10절을 근거로 잔치 때 포도주를 마시고 기뻐했을 거리고 추측한다.
“그에게 이르되, 모든 사람이 처음에 좋은 포도즙을 내고 사람들이 충분히 마신 뒤에 덜 좋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즙을 남겨 두었도다, 하니라.”(10절)
즉 술에 취한 그 사람들이 나중에 나온 포도주를 맛보고 그것이 처음 것보다 더 좋다고 했으니 그것은 분명히 술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술에 잔뜩 취한 사람들이 어떻게 나중에 나온 술이 처음 것보다 좋은 것을 맛보고 알 수 있을까? 정신이 온전하지 않으면 그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오히려 그들이 포도 주스를 마시고 정신이 온전했기에 나중에 나온 것이 더 좋음을 그들이 증언했음을 보여 준다.
(7) 11절에 그 다음 이유가 있다. 이것을 계기로 그분께서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셨다고 11절은 말한다.
“예수님께서 기적들 중의 이 처음 기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사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을 믿으니라.”(11절)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것이 과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일까? 그런 일은 오히려 그분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8) 11절에는 그분의 제자들이 이 기적을 보고 그분을 믿었다고 말한다. 즉 그 일이 그들의 믿음을 증대시켰다. 사람들이 취해서 비틀거리게 만든 그 기적이 과연 그들의 믿음을 강화시켰을까?
어떤 이들은 딤전5:23을 근거로 포도주를 마셔도 된다고 주장한다. 즉 술을 약으로 마시는 것은 괜찮다고 그들은 말한다. 알다시피 디모데는 위장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과연 어떤 의사가 위장병 환자에게 술을 권할까? 지금도 모든 의사가 위장병에는 술을 먹으면 안 된다고 경고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물 대신 포도 주스를 마시라고 권고한 것이다.
2009-05-01 16:10:13 | 관리자
자살
요즈음 한 탤런트의 자살 사건이 매스컴에 연일 보도가 되고 있다. 원래 밝은 이미지의 연예인이었고 또 인기 있는 동료 연예인과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잉꼬부부였기에 그의 자살 소식은 많은 시민들을 깊은 충격에 빠지게 하였다.
특히 이들 부부는 신앙간증을 공개적으로 할 정도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느끼는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사건처럼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안타깝기 짝이 없는 경우들을 방지해보고자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자살에 대한 연구를 해왔지만 뚜렷한 성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두 달 전 캐나다의 한 생리학 교수가 자살자의 뇌에서 불안과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특정 유전자에 영향을 미치는 단백질이 과도하게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발표하여 마치 자살 유전자를 찾아낸 것처럼 보도한 언론도 있었지만, 아직까지 의학적으로 자살을 확실히 방지하는 약제의 개발은 요원한 상태이다.
왜냐하면 자살은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고뇌와 절망에 의한 것으로서 자살에는 너무도 많은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으므로 일정한 형태나 모두에게 적용되는 규칙성 등이 발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자살에는 영적인 요소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엡6:12; 벧전5:8).
우리가 영적으로 심히 곤고하게 되면 자살의 충동이 생길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구약을 대표하는 자로서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 인정받은 모세도 자살을 생각하였었다(민11:15; 12:3; 요1:17). 또 성도들에게 인내의 본이 되는 자로서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였던 욥도 자살을 원하였었다(욥1:1; 7:15,16; 약5:11). 그리고 메시야가 오기 전에 보냄을 받아야 하는 자로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하였던 엘리야도 자살을 구하였었다(왕상19:4; 왕하2:11; 말4:5).
또한 자살하면 반드시 지옥에 갈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삿16:21-31; 히11:32; 삼상28:19; 31:1-6). 진실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죽음을 맞더라도 천국에 가는 것이 사실이다(요1:12; 롬10:9,10).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살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들은 너무도 확고하다.
첫째, 하나님께서 살인을 금하시기 때문이다(출20:13; 요일3:15). 둘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창1:26,27; 9:6). 셋째,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창2:7; 욥33:4; 시21:4; 36:9; 행17:15). 넷째, 생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신32:39; 삼상2:6,7; 욥1:21; 시68:20). 다섯째, 그리스도인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이다(행20:28; 고전6:19,20; 엡5:29,30; 벧전2:9). 여섯째, 복음이 훼손되기 때문이다(요3:16; 10:10). 일곱째,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창1:28; 마18:19,29; 갈2:20).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04:15 | 관리자
멜라민
최근 중국발 멜라민 공포가 온 세계를 휩쓸고 있다. 중국에서 멜라민이 함유된 분유를 먹고 4명의 어린이가 사망을 했으며 또 4만 명이 치료를 받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후 국내에서도 중국산 분유를 원료로 한 제품들에서 멜라민이 검출되었고, 심지어는 뉴질랜드산 우유단백질 락토페린에서도 미미한 양이기는 하지만 멜라민이 발견되어 뉴질랜드 당국이 수출을 중단하였다고 보도되었다.
멜라민은 주로 플라스틱, 접착제, 주방용조리대, 접시류, 화이트보드, 화학비료 등에 사용되는 공업용 화학물질이다. 그런데 질소함량이 풍부한 흰 결정체이기 때문에 우유에 물과 함께 섞을 경우 검사시 단백질 농도가 진짜 우유처럼 나타나게 된다.
멜라민이 함유된 우유나 유제품을 섭취하여 멜라민에 중독이 되면 소변이 거의 나오지 않거나 혈변 및 불안감을 보일 수 있으며, 심하면 방광결석, 요도결석, 신장염 등이 발생하면서 고혈압도 유발할 수 있다.
특히 수유를 하여야 하는 영아들의 경우 상대적으로 신장기능이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멜라민이 함유된 분유를 매일 먹게 되면 농도가 소량이어도 체내에 지속적으로 축적돼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다.
일단 멜라민 중독으로 인해 신장질환이 발생하면 소변을 알칼리화 시키며 전해질 이상을 교정해야 한다. 또 혈액투석이나 복막투석을 할 수도 있는데 심한 경우 신장결석에 대한 수술을 시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던 엘리사가 길갈에서 죽에 들어 있던 독을 없앴던 것처럼 멜라민 중독을 완전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 의학의 현주소이다(왕하4:38-41). 그러므로 유제품 외에 멜라민이 주로 사용되는 합성수지 식기 등에 대한 주의가 요구된다.
아울러 차제에 국가적 차원에서 원산지표시제와 식품성분표시제 등을 비롯한 수많은 식품관련 행정사항들도 철저히 점검하여 식품안전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번 멜라민 파동을 통해 드러난 이 시대의 사조에 휩쓸리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공의의 하나님 대신에 맘몬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지 않도록 늘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마6:24; 롬16:18; 벧전5:8).
특별히 일상생활 속에서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정직하게 상거래를 하며 하나님의 질서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레19:35; 신25:13-16; 잠11:1; 16:11; 암5:24; 미6:11). 그리할 때 공의의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실 것이다. “거짓된 저울은 주께 가증한 것이나 공정한 추는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니라.”(잠11:1)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02:43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