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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 사람들은 손님 접대를 잘했으며 그래서 손님이 오거나 갈 때에 잔치를 베풀었다(창19:3; 31:27; 삿6:19; 삼하3:20; 왕하6:23). 탕자가 돌아올 때에 그의 아버지는 연회를 베풀었다(눅15:23). 여러 가지 기쁜 날에도 연회를 베풀었다: 생일 등의 기쁜 날(창21:8; 40:20; 욥1:4; 마14:6), 결혼(창29:22; 삿14:10; 요2:1-10), 양털 깎는 일과 수확하는 일(삿9:27; 삼상25:2, 36; 삼하13:23). 장례식에도 연회가 있었으며(삼하3:35; 렘16:7) 또 희생물과 헌물을 성전에 가져온 사람들도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기뻐하며 자기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신12:6-7; 삼상16:5; 삼하6:19). 그들은 이때에 궁핍한 사람들을 초대하여 함께 즐거워했으며(신16:11)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기도 했는데(신12:17-19; 14:29; 26:12-15) 우리 주님은 이 같은 관습을 칭찬했다(눅14:12-14). 잔치를 여는 방법은 초기에 매우 간단했지만 그리스도의 때에는 로마 사람들의 관례가 도입되어 조금 복잡해졌다. 연회 혹은 만찬은 오후 5시나 6시에 시작되어 밤늦게까지 진행되었다. 손님들은 미리 초대를 받았으며 승낙한 손님들에게는 종들 편으로 언제 오라는 통보가 갔다(마22:4-8; 눅14:16-24).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은 문에서 저지를 당했으며 최종적으로 집의 주인이 문을 닫았다(마25:10; 눅13:25). 어떤 때에는 초대받은 손님이 매우 많았고(에1:3, 5; 눅14:16-24) 사회적 신분, 자격, 성품 등을 고려하여 가장 적합한 사람을 선정해서 연회를 주관하게 했으며(요2:8) 손님들은 각 사람의 명예에 걸맞게 배치되었다(창43:33; 삼상9:22; 잠25:6-7; 마23:6; 눅14:7). 어떤 때에는 주인이 무리들에게 가벼운 옷을 제공하기도 했으며 이때에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큰 실례가 되었다(전9:8; 마22:11; 계3:4-5). 손님들은 상 주변에 둘러앉았고 그들에게 물과 향수 등이 제공되었다(막7:2-3; 눅7:44-46). 그들은 먹은 뒤에 다시 손을 씻었으며 이때에 종들이 물을 부어 주었다. 식사 시간에 혹은 그 이후에 여러 가지 즐거운 행사가 있었고 수수께끼를 내거나(삿14:12) 동방의 이야기들을 말하고 음악을 듣곤 했으며 술을 많이 마시는 경우도 있었다(사5:12; 24:7-9; 암6:6).  
2009-04-22 17:14:09 | 관리자
  잔은 대개 문자 그대로의 의미와 비유적 의미로 쓰였다. 문자적 의미의 잔은 보통 식사 때나 예식을 거행할 때 쓰였으며 귀중한 금속으로 만들기도 했다(창40:13; 44:2; 왕상7:26). 이것은 또한 유월절 같은 엄숙한 종교 의식을 행할 때도 쓰였는데 아버지가 잔을 축복하고 그 안의 것을 맛본 뒤에 자기 가족에게 돌리면 그들이 차례로 잔에 참여해서 음료를 마셨다(고전10:16). 비유적인 의미의 잔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어떤 이에게 주어진 것을 채우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시11:6; 16:5) 생명과 은혜와도 관련이 있고(시23:5) 또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출29:40; 시116:13). 이것은 또한 우상숭배 연회의 음료와도 상관이 있고(고전10:21; 계17:4) 심한 고통과도 상관이 있으며(시75:8; 사51:17) 죽음의 쓴 맛을 나타내기도 하는데(시75:8) 이는 독이나 독 당근 같은 것을 사용해서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다(마26:39; 눅22:42; 요18:11 등 참조).      
2009-04-22 17:13:03 | 관리자
  초기부터 성경에 자주 나오는 악기(창31:27; 욥21:12). 히브리 사람들은 기쁠 때에 작은북을 사용하였으며(출15:20; 사24:8) 주로 여인들이 사용하였다. 입다의 딸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자기 아버지를 맞으면서 작은북을 사용하였다(삿11:34). 춤 참조.  
2009-04-22 16:09:28 | 관리자
  옥스퍼드 사전은 작은 숲에 대해 ‘작은 나무: 자연적으로 생성되거나 특별 목적으로 심겨져서 그늘을 제공하거나 가로수 길이나 산책로로 형성된 숲’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작은 숲은 처음에 하나님께 경배 드리기 위한 수단으로 쓰였으며(창21:33)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을 위한 전(殿)의 역할을 했고 그런 목적에 맞았다. 그런데 모방의 천재인 마귀를 섬기던 이교도들도 자기들의 신들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혹은 우상들을 접대하고자 경배의 장소로 사용할 목적으로 관목 같은 작은 나무들을 아름답게 배치함으로 만들어지는 작은 숲의 정원과 같은 것을 만들었다. 그래서 grove나 groves는 항상 ‘(나무를) 심다’라는 의미를 가진 plant라는 동사와 함께 쓰이며(창21:33; 신16:21) 또 이 작은 숲들은 언제나 그 안의 우상들하고는 별개로 분리되어 있다(왕상14:23; 왕하17:10, 16; 18:4; 23:14; 대하14:3; 24:18; 31:1; 사17:8; 27:9). 시간이 흐르면서 이교도들의 영향을 받아 우상을 숭배하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작은 숲을 사용했고 그래서 작은 숲의 나무들이 있는 높은 장소들이 경배의 장소로 적합했다. “그들이 산꼭대기에서 희생물을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상수리나무와 포플러나무와 느릅나무 밑에서 하나니 이는 그것들의 그늘이 좋기 때문이라”(호4:13). 높은 장소들(산당들)은 처음에 주님께 경배 드리기 위하여 사용되었지만(왕상3:3-4) 엄격한 의미에서 이것은 좀 비정상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모세의 율법이 모든 희생물을 성소의 제단에 가져올 것을 명하기 때문이다(레17:8-9; 신12:13, 16). 이런 연유로 작은 숲이 있는 산당들은 곧장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의 근거지가 되었다(왕하23:15). 산당 참조. 아브라함도 작은 숲을 심고 거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지만(창21:33) 이것은 성경과 배치되지 않는다. 신16:21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은 제단을 쌓고 우상숭배를 하면서 그 주변에 작은 숲을 심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우상숭배를 위한 제단을 쌓지 않았고 단지 작은 숲을 심었을 뿐이다. 성경은 작은 숲을 심는 것 자체를 금하지 않으며 다만 작은 숲에게 경배를 드리거나 작은 숲 안에 제단을 세우고 우상숭배 하는 것을 금한다. 현대 역본들의 역자들은 출34:13 등에 나오는 ‘작은 숲’이 오역이며 아세라 혹은 형상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히브리말에서 형상과 작은 숲을 의미하는 단어는 다르다. 사27:9를 보면 형상과 작은 숲이 동시에 나오므로 작은 숲과 형상은 같을 수 없고 왕하18:4; 23:14도 동일한 사실을 보여 준다(신16:21 참조). 기존의 우리말 성경 역시 다른 현대 역본들을 따라 groves를 작은 숲이라 번역하지 않고 아세라라 하였는데 이는 그 성경의 번역 대본을 만든 편집자들이 아세라가 곧 이방 여신 아스다롯을 뜻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고대 이방 민족들이 섬기던 많은 신들의 이름이 알려져 왔지만 아세라라는 이름의 여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실 1800년대 이전에는 아세라가 여신의 이름이라고 알려진 적도 없고 공식 문서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작은 숲 안에 우상이나 형상이 세워지므로(왕상15:13; 대하15:16)  groves로 번역된 히브리말은 우상숭배를 위해 심겨진 작은 숲을 뜻하며 결코 아세라 여신을 가리키지 않는다.  
2009-04-22 16:08:57 | 관리자
  고대의 왕들이 선호한 색깔. 모세 시절에 이미 자주색 염료가 있어서 옷감이나 실에 쓰였다(출26:1, 4, 31, 36; 28:31; 민4:6-12; 15:38).고대에는 조개로부터 자주색을 얻었으므로 왕이나 통치자가 입는 고급 자주색 옷은 매우 비쌌으며 네로 같은 사람은 자주색 옷을 입으면 사형에 처하라고 할 정도로 자주색을 귀하게 여겼다. 주님은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호칭에 맞게 조롱을 받기 위해 자주색 왕복을 입었다(요19:2, 5, 삿8:26; 에8:15; 잠31:22; 단5:7; 눅16:19 참조). 이집트 탈출 뒤에 모세는 성막을 지으면서 또 대제사장의 옷을 만들면서 주홍색과 자주색을 많이 사용했다(출25:4; 26:1, 31, 36; 39:1; 대하3:14). 바빌론 사람들 역시 자기들의 우상에게 자주색과 하늘색 옷을 입혔다(렘10:9; 겔23:15; 27:7, 16). 한편 행16:14에는 두아디라 시 출신의 자주색 옷감장수 루디아가 나오는데 그녀는 바울의 인도로 주님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접대하였다. 계시록 17장에는 음녀 바빌론이 나오는데 이 음녀 역시 자주색과 주홍색 옷을 차려입었다(계17:4).  
2009-04-22 16:08:00 | 관리자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셔서 취사선택할 수 있게 했으며 그 결과 첫 사람 아담은 자신의 선택대로 죄를 짓고 타락하였다. 의지는 선택하는 능력이며 이것은 스스로 생기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정신이 아니며 단지 사람이 취할 행로를 결정하는 기구이다. 마음이 사람을 다스리므로 마음이 악하면 의지도 악하고 마음이 선하면 의지도 선하다. 그런데 본성에 속한 사람에게는 선이 하나도 없으며 마음은 계속해서 악한 일을 꾀하려 한다.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렘17:9) 그러므로 만일 사람의 의지가 마음의 자연적 성향을 거슬러 행동하려면 사람밖에 있는 어떤 힘에 의해 조절을 받아야 하며 성경은 이 힘이 성령님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성령님의 힘 아래에서 자기의 의지를 쳐서 복종시킬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다. 죄의 지배 하에 있는 본성은 스스로 거룩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요6:44)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무능함을 보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이 사실이 사람에게 변명의 기회를 주어 구원을 찾지 못하게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위의 말씀을 주신 예수님께서 곧 바로 “나 곧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리라.”(요12:32)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빛에 따라 구원받아야겠다고 느끼며 또 그것이 자기 밖에 있는 힘에 의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사람은 어디에서 어떻게 그 힘을 찾을지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참 빛으로 세상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주시므로(요1:9) 아무도 변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롬1:19-23).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왜냐하면 이 복음이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롬1:16). 그런데 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난다(롬10:17). 따라서 사람이 무엇을 믿을지 알지 못한다면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다.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그 사람 안에 새 본성을 만들어 내기 위해 성령님께서 사용하는 도구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요3:5). 결론적으로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의 지배를 받는 의지에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님의 간구를 거부하고 자신을 멸망으로 이끌고 간다(행7:51). 이처럼 성령님의 사역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그들이 자기 의지에 역행하면서 구원받을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선택, 미리 아심 참조.  
2009-04-22 16:07:28 | 관리자
  이 단어는 대개 자녀 혹은 자손으로 번역하였으나 명백히 아들들만을 가리키는 몇 군데는 아들들로 번역했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할 때에도 children이 쓰이지만 이 경우 대개는 상속권이 있는 아들들을 의미한다. 자녀 참조.  
2009-04-22 16:05:36 | 관리자
  구약에서 아이를 많이 둔 것은 복을 많이 받은 것으로 간주되었으며(시127:3-5) 그래서 아이가 없는 부인들은 불임의 수치를 없애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유대인들은 새로 결혼한 부부에게 애를 많이 낳으라는 축복의 말을 하곤 했다(룻4:11). 성경에서 해산의 고통은 굉장히 아프고 갑작스레 임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사도 바울은 이 같은 고통이 아담과 이브의 타락의 열매요 또 여자가 먼저 범법해서 죄를 가져오게 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말하고 여자들이 맑은 정신으로 사랑과 거룩함 가운데 거하며 남편에게 순종하면 해산의 고통을 통해 마귀의 궤계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창3:16, 딤전2:11-15). 수태하지 못함 참조. 고대에는 새로 태어난 아이를 씻어서 소금으로 문지르고 포대기에 쌌다(겔16:4; 눅2:7-11). 남자 아이는 여드레 되는 날 할례를 받았으며 젖을 떼는 날에는 연회가 열렸다(창21:8). 여자 아이의 유모는 평생 동안 그녀의 시중을 들기도 하였다(창24:59; 35:8). 유대인들은 아이들에게 부지런할 것과 모든 일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가르쳤고(신6:20-25) 또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의 말에 순종할 것을 가르쳤으며 특히 그들은 모든 일에서 아버지의 제재를 받으며 성장했다(민30:5). 한편 부모가 빚을 진 경우 잠정적으로 아이를 팔기도 했다(레25:39-41; 왕하4:1; 마18:25). 아버지의 재산을 나눌 때 맏아들은 다른 아이들이 동등하게 받는 것의 두 배를 받았고 첩의 아들들 역시 예물을 받거나 다른 아들들과 함께 동일한 상속물을 얻기도 했다(창21:8-21; 25:1-6; 49:1-27; 삿11:1-7). 장자권 참조. 그러나 딸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아무 유산도 받지 못했다(민27:1-11). 히브리 식 표현에서 아이 혹은 자녀는 여러 가지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좋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 빛의 자녀, 왕국의 자녀로 표현되었고 악한 자들은 마귀의 자녀, 진노의 자녀, 불순종의 자녀 등으로 표현되었다. 또 강한 사람은 강력의 아들, 추잡한 자는 벨리알의 아들, 화살은 활의 아들, 가지는 나무의 아들 등으로 표현되었으며 아들이나 딸은 다음 세대의 자녀만을 뜻하지 않고 손자, 손녀 혹은 몇 세대 이후의 후손을 가리키기도 했다.  
2009-04-22 16:04:38 | 관리자
  꿩과에 속하는 구대륙 원산의 작은 수렵조류. 이것은 메추라기 종류보다 크며 부리와 발이 강하고 암수가 비슷한 생김새를 하고 있으며 낟가리나 울타리에 지은 둥우리에 약 15개의 알을 낳는다. 사울이 다윗을 추격하는 것은 마치 자고새 사냥을 하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묘사되었다(삼상26:20). 렘17:11은 알들을 품되 부화는 못시키는 자고새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2009-04-22 16:04:05 | 관리자
  다윗과 솔로몬 밑에서 공세를 거둔 사람. 그는 목재를 만들기 위해 레바논에 보낸 30,000명을 지휘하였으며(왕상5:14) 다른 곳에서는 짧게 아도람(삼하20:24; 왕상12:18) 혹은 하도람이라고도 불렸다(대하10:18). 그는 르호보암 왕의 명령으로 반역을 일으킨 열 지파에게 갔다가 돌을 맞아 죽임을 당했다.  
2009-04-22 16:02:09 | 관리자
  바울과 함께 일한 신실한 사역자(딛3:12). 바울은 신실한 그가 디도를 대신해서 크레테에 있어도 될 것으로 생각했고 그러면 디도가 니코폴리스로 와서 자기와 함께 겨울을 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2009-04-22 16:01:34 | 관리자
  가나안 족속. 야곱을 장사지내기 위해 이집트에서 헤브론으로 가는 동안 그의 타작마당에서 큰 애곡이 있었다(창50:10-11). 아벨 미스라임 참조.
2009-04-22 16:01:01 | 관리자
  I. 인류의 조상, 대표 수장. 창조주께서는 땅의 흙으로 그를 짓고 숨을 넣어 살아 있는 혼이 되게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창조의 마지막 작품이고 땅의 모든 것을 지배하라는 위임을 받았다. 그가 혼자 있는 것을 막기 위해 하나님은 그를 위한 협력자로 이브를 만들어 그에게 아내로 주셨다. 그러므로 결혼은 하나님이 정하신 첫 번째 제도로서 인류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고 복된 일이다. 아담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 능력에서 완전한 존재로 창조되어 에덴동산에 거하면서 거룩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으나 죄를 지을 가능성도 있었다. 여기서 그는 사탄의 유혹과 이브의 권유를 통해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을 어기고 타락했으며 그 결과 자기와 온 인류에게 저주를 가져왔다. 이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하고 구원자가 드러나면서 전면적인 저주가 잠시 유보되었지만 아담은 에덴동산과 생명나무에서 쫓겨나서 엄청난 수고와 노동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는 또한 후손들에게 자기의 타락으로 인한 열매들을 증언함으로써 쓴맛을 더욱 느끼며 살아야 했고 행복을 잊었다. 그의 맏아들 가인과 둘째 아벨은 타락한 부모들의 모습을 따라 태어났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는 죽임을 당하고 하나는 도망자가 되었다. 그들에게는 이들 말고도 여러 아들과 딸이 있었지만 성경에는 셋만 그 이름이 나와 있다. 아담은 930년을 살았으며 자기의 후손들로 땅이 급속하게 채워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당시 땅에서는 사람들의 사악함이 매우 컸다. 그가 죽을 때에 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56세였는데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의 계보에 속한 자로서 참회하는 아담의 이야기를 통해 인류의 최초 역사를 충분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사람에게 떨어진 저주는 황폐한 땅에서의 수고와 노동 그리고 육체적 소모뿐만 아니라 사람의 혼이 영존하는 죽음에 노출되는 것도 포함되었다. 타락하던 날 그는 자기의 창조자의 형상을 잃었고 육체적 죽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와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는데 후자는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죽음을 가리키며 실로 모든 인류에게 이런 운명이 떨어졌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이것을 그렇게 보았다. 그는 모든 곳에서 아담을 통해 세상에 들어온 사망과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가 얻게 된 생명을 대조해서 보여 준다(롬5:1-21). 그리스도로 인한 생명은 영적인 생명이며 아담으로 인한 최고 수준의 사망 역시 영적 죽음 즉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이다. 죄의 대가가 잠정적이요 육체적이라는 점에서는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영적이며 영원한 형벌을 제거하기 위해 죽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분께 나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둘째 사망을 피할 수 있고 몸과 혼의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 있다. 두 아담 선도 참조(66).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이라 불리는데(고전15:45) 그 이유는 아담이 그의 모든 씨에게 죄와 사망과 슬픔의 근원이 된 것처럼 그분께서 자신의 모든 영적 씨의 우두머리가 되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의와 생명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이다. II. 디베랴 바다 쪽에 있는 요르단의 도시.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요르단의 물들이 무더기를 이루어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들이 젖지 않고 마른 땅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갔다(수3:16).  
2009-04-22 16:00:27 | 관리자
  이스라엘의 오므리의 손녀(대하22:2). 그녀는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었는데(왕하11:1) 이상하게도 유다의 경건한 왕 여호사밧의 아들인 여호람의 아내가 되었다. 그녀로 인해 그녀의 남편과 아들 아하시야에게 우상숭배와 죄악이 들어가게 되었다(대하21:6; 22:3). 그들이 일찍 죽자 그녀는 유다 왕실의 모든 씨를 죽이고 왕좌를 차지하려 했지만 그녀의 손자 요아스는 그의 고모 여호세바의 손에 의해 구출을 받고 6년 후에 피난처에서 나와 용감한 여호야다 제사장의 인도로 왕이 되었고 이때에 여호야다는 피를 흘린 아달랴를 죽였다(왕하11:1-21; 대하23:1-21).  
2009-04-22 15:59:26 | 관리자
  유대인들의 종교력에서 열두 번째 달. 이 달은 지금의 3월에 해당되며 이 달에 부림절을 지켰다. 유대인들은 음력을 사용했으므로 양력에 비해 1년에 11일이 짧았다. 그래서 매 3년이 지난 뒤에 열세 번째 달을 첨가했는데 이것은 베아달 즉 두 번째 아달을 뜻한다. 달 참조. 유대인들의 달력 선도 참조(67).  
2009-04-22 15:58:52 | 관리자
  위대한 왕. 이것은 페르시아의 여러 왕의 호칭 혹은 이름을 가리킨다. I. 스4:7-24에 나오는 이 왕은 고대 페르시아의 마기승족에 속한 스메르디스를 가리킨다. 그는 주전 522년경 캄비세스가 죽은 뒤에 왕위를 빼앗았고 캄비세스가 죽인 고레스의 아들 스메르디스처럼 행세하려 했다. 그는 8개월간 통치한 뒤 살해당했고 그를 이어 다리오가 통치하였다. II. 스7:1-28에 나오는 이 왕은 아닥사스다 롱기마누스일 것이다. 그는 크세륵세스의 아들로서 주전 425년경에 즉위하여 39년 동안 통치하였다. 그의 통치 제7년에 에스라는 유대인 포로들을 데리고 두 번째로 예루살렘에 돌아갔고 그의 통치 제20년에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보내어졌다(느2:1; 5:14).  
2009-04-22 15:58:25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