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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러 성경에서 요7:53-8:11을 보면 다음과 같은 각주가 달려 있습니다.   "어떤 사본에는 요7:53-8:11까지 없음"   그런데 요7:53-8:11의 기사는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을 우리 주님께서 용서해 주시는 매우 귀한 내용입니다. 이렇게 귀한 이야기가 원래 성경에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게 어찐 된 일일까요? 사본들의 증거는 무어라 말할까요?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천주교 알렉산드리아 소수 사본들만 이 말씀을 삭제하였고 다수의 사본들은 이 이야기를 다 담고 있습니다.   다음은 20세기 최고의 본문 비평학자로 알려진 장로교 출신의 에드워드 힐즈의 설명입니다. 참고로 힐즈 박사의 약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에드워드 힐즈 박사는 ‘라틴 피 베타 카파’라는 특별 명예를 인정받고 예일 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에서 신학사 학위(Th.B.)를 받았고 컬럼비아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 학위(Th.B.)를 받았다. 그는 시카고 대학에서 신약 성경 본문비평 분야의 박사 과정을 수료한 뒤 하버드 대학에서 최종적으로 그 프로그램을 마쳐 이 분야에서 신학박사(Th.D.)가 되었다. 그는 또한 「믿음의 성경 연구」(Believing Bible Study)를 저술했다.   주님의 평안이 넘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   4.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요7:53-8:11)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 - 이것은 보통 ‘Pericope de adultera’라고 불린다 - 는 현대 영어 역본들에서 상당히 가혹한 취급을 받아 왔다. RV와 ASV는 이것을 괄호로 묶었고 RSV는 각주로 내려 보냈으며 NEB는 웨스트코트와 호르트를 따라 원래의 자리에서 모두 들어내어 기원을 알 수 없는 독립된 단편 조각으로 취급하며 요한복음의 맨 마지막에 두어 출판했다. 심지어 NEB는 이 기사에 ‘성전에서의 한 사건’이라는 새로운 이름까지 붙여 주었다. 하지만 버건이 오래 전에 우리에게 상기시켰던 것처럼 이들이 이 귀중한 구절들을 이렇게 일반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a)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에 대한 역사적인 증거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는 과거에도 문제 거리였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본문으로 인해 곤란을 겪었다. 그리스도께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신 것은 간음에 대한 처벌이 매우 엄해야 한다는 그들의 신념과 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암브로스(374)가 밀라노의 주교로 있던 바로 그 시기에도 요한복음의 이 부분에 대해 여전히 그러한 의심을 느꼈던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었다. 이것은 암브로스가 다윗의 죄에 대해 설교한 내용을 살펴보면 분명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읽은 복음서의 가르침은 순진한 사람들을 적지 않게 화나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복음서에서 여러분은 간음한 여인이 예수님께 끌려왔다가 정죄 받지 않고 돌아간 것을 봅니다…그리스도께서 공정하게 재판을 하지 않은 과오를 범한 것입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Vienna, vol. xxxii, pp. 359-360).   어거스틴(c. 400)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일부 신약 성경 사본이 이 본문을 생략하는 이유는 바로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에 대한 이러한 도덕주의적인 혐오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 같은 용서의 행위는 어떤 나약한 신자들이나 불신자들과 기독교 신앙의 적들의 마음에 충격을 준다. (내 생각에) 자기 아내에게 [간음] 죄로 인한 형벌을 주지 않은 뒤에 그들은 자기들이 소유한 그 복음서 사본으로부터 우리 주님이 간음을 행한 그 여인을 용서하셨다는 부분을 떼어 냈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주께서 말씀하신 것은 사실 죄를 지으라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Vienna, vol. xxxxi, p. 387).   또한 10세기의 니콘이라는 그리스 사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해롭다는 이유로…간음한 여인이 예수님께 어떻게 끌려왔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그 기사를 빼버린” 아르메니아 교도들을 비난했다(S. S. Patrum . . . J. B. Cotelerius, Antwerp, 1698, vol. i, p. 235).   초기 그리스어 사본들이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를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은 5세기의 그리스어 사본인 D에 그것이 있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구 라틴 코덱스 b와 e에 그것이 실제로 나타난다는 것은 초기 라틴어 사본들 또한 그것을 포함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 결론 모두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기록된 많은 사본들의 요한복음에는 고소당해 주님 앞에 끌려온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다.”는 제롬(c. 415)의 진술에 의해 확증된다(MPL, vol. 23, col. 579.).   제롬의 진술의 정확성을 의심할 이유는 전혀 없다. 특히 마가복음의 종결 부분에 어떤 첨가가 이루어졌다는 제롬의 진술은 W 사본에서 첨가된 부분이 실제로 발견됨으로써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롬이 개인적으로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를 참 본문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라틴 벌게이트에 그것을 포함시켰다는 사실로서도 알 수 있다. 초기 그리스어 사본들의 요한복음에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가 있었다는 또 다른 증거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뜻하는 디다스칼리아와 또 이 디다스칼리아의 기초가 된 ‘사도들의 헌장’에 이것이 인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죄를 범한 여인을 처리하신 것처럼 하리라.…장로들이 그녀를 주님 앞에 데려와 주님의 손에 심판을 맡기고 떠나가니 마음을 감찰하시는 주님께서 물어 이르시되, ‘딸아, 장로들이 너를 정죄했느냐?’ 하시니 여인이 그분에게 이르되, ‘아닙니다. 주님’, 하매 주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가거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라.’”(Didascalia Apostolorum, trans. by R. Hugh Connolly, Oxford: Clarendon Press, 1929, p. 76. Funk, Didascalia et Constitutiones Apostolorum, vol. 1, p. 92).   (각각 3세기와 4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두 개의 문서에서 감독들은 회개하는 죄인에게 용서를 베풀도록 권유를 받고 있다. 이러한 청원을 강조하기 위해 많은 성경 구절이 인용된 후 하나님의 긍휼의 최상의 모범 즉 그리스도께서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에게 보여 주신 동정심에 이르러 절정에 다다른다. 티센도르프는 이 인용문이 요한복음으로부터 나왔음을 인정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비록 ‘사도들의 헌장’이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의 기록자가 요한이라고 실제로 거론하지는 않지만 누구든지 이 이야기의 유래를 다른 출처에서 찾으려 한다면 헛수고를 하게 될 것이다.”(Tischendorf, N. T. Graece, vol. 1, p. 829).   코놀리(1929) Didascalia Apost., p. li.)와 그 밖의 다른 최근의 비평가들은 이 부분이 정경인 요한복음이 아니라 위경인 ‘히브리 복음’(Gospel according to the Hebrews)에서 인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사실 거의 믿을 수 없는 것 같다. 논의의 전 과정 동안 신약과 구약의 정경 구절들만 증거로 제시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과연 이 두 책의 기록자들이 회개하는 사람을 용서해 달라는 청원의 절정부에 이르러서는 결국 정경 성경을 버리고 어떤 위경서나 뒤적거릴 거라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에 관한 또 다른 중요한 증거로서 유세비우스(c. 324)의 증언이 있다. 유세비우스는 자신의 「교회사」에서 히에라폴리스의 감독인 파피아스(150) 가 쓴 ‘주님의 말씀 해석’이란 제목의 옛 논문에서 발췌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유세비우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파피아스의 기록들에 대한 자신의 논의를 끝맺는다.   “그 동일한 기록자는 요한일서와 또 베드로의 서신에서 나오는 인용문들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는 ‘히브리 복음’에 들어 있는 이야기 즉 여러 가지 죄로 인해 주님 앞에서 고소당한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도 상세히 설명했다.”(LCL, Ecclesiastical History, Eusebius, vol. 1, p. 298.)   유세비우스의 이러한 진술을 근거로 자연주의적 비평가들은 유세비우스가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를 파피아스의 글과 ‘히브리 복음’에만 나오는 한 가지 이야기로 알고 있었지 그것이 정경인 요한복음의 일부분인 것은 알지 못했다고 추론했다. 그러나 반드시 이러한 결론이 나올 필요는 없다. 유세비우스는 도덕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와 파피아스의 관련성 때문에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에 적대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유세비우스는 파피아스나 그의 글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의 책들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그는[파피아스] 지성적인 사람이 아니다.”라고 유세비우스는 주장한다(동일 저자, vol. 1, p. 296).   파피아스를 경멸했기 때문에 유세비우스는 파피아스의 이야기가 요한복음을 담고 있는 일부 사본들에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기를 주저했다. 어찌됐든 유세비우스의 글에 기초해서 요한복음 7장 53절~8장 11절이 가짜라고 주장하는 것은 단지 그가 그 부분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에 근거한 ‘침묵의 주장’이며 사실 이런 침묵의 주장은 늘 설득력이 없다. 유세비우스의 침묵 부분을 강조하기보다는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가 사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매우 오래된 이야기라는 그의 긍정적인 증언을 강조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일 것이다. 또한 스페인 교부인 파시안(370)은 지나치게 혹독한 징벌에 반대하는 항의를 할 때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에 호소했다. 그는 물었다. “복음서에서 주님도 죄를 자백한 여인 즉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셨다는 것을 그리고 어떤 사람도 그녀를 정죄하지 않았다는 것을 읽어 보지 않겠습니까?”(MPL, vol. 13, col. 1077).   (b) 역사적 사실들의 증거 역사 기록들은 일반적으로 초기 기독교의 몇 세기동안 모든 교회가 간음을 설사 용서받는다 해도 혹독한 고행 후에만 용서받을 수 있는 그런 심각한 죄로 간주했음을 보여 준다. 예를 들어 키프리안(250)은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자기 이전의 어떤 감독들은 간음한 자들은 다시 깨끗하게 될 수 없으며 혼인 상태의 부부가 부정을 저지를 경우 결코 회개의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Vienna, vol. iii, p. 638). 따라서 간음하다가 붙잡혀서 그리스도께로 끌려온 여인의 이야기는 분노를 자아냈다. 너무 쉽게 용서를 받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할 때 초기 기독교회의 금욕적인 견해와 크게 충돌을 일으키는 이 이야기가 정경이 아닌 다른 출처에서 나와 요한복음에 첨가된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보다는 지나치게 열성적인 금욕주의자들이 이 이야기를 요한복음에서 삭제했다고 믿는 것이 분명히 더 합리적이다. 이것을 삭제하고자 하는 어떤 강한 동기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것을 첨가하고자 하는 동기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기사에 대한 적대적인 편견은 이것이 복음서에 삽입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을 것이다. 보수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명확한 사고력을 지닌 급진적인 학자들 역시 역사적인 증거를 살펴볼 때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가 요한복음에 첨가되었다기보다는 삭제되었다고 믿는 것이 맞는다고 인식했다. 힐겐펠드(1875)는 “초기에 특히 동방 교회에서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복음서를 과감하게 제시한 것은 틀림없이 매우 불쾌한 것으로 비춰졌을 것이다.”라고 말한다(Einleitung, p. 782). 따라서 힐겐펠드는 그 본문이 너무 세심한 서기관들에 의해 삭제되었다는 어거스틴의 진술을 ‘불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스텍(1893)은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가 요한복음이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전에 이미 요한복음 본문에 있었다고 제안했다. “그것이 후에 도덕적인 정숙함에 밀려 삭제되었다는 것은 쉽게 이해된다.”라고 결론짓는다(T Z aus der Schweiz, vol. 4, p. 98).   해리스(1891)는 2세기에 번창했던 금욕주의 기독교의 한 종파인 몬타니스트들이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를 잘 알고 있었다고 확신했다. “몬타니스트들의 교회들은 이것이 본문에 더해졌다는 것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거나 아니면 이것을 삭제했다. 그러나 동시에 서방에서도 사람들이 이 구절을 더할 나위 없이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사도행전의 라틴어 주해자가 사도행전 5장 18절의 한 부분에서 몇 단어를 차용했기 때문이다.”(Codex Bezae, TS, vol. 2 (1891), p. 195). 사도행전 5장 18절은 “[지도자들이] 사도들에게 손을 대어 붙잡아다가 일반 감옥에 가두었다.”로 되어 있다. 이 구절에 대한 D 사본의 라틴어 부분에는 “이에 그들이 각각 자기 집으로 떠났다.”라는 구절이 첨가되어 있다. 해리스의 주장처럼 명백히 이 첨가 부분은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해산하는 모습을 기술한 요한복음 7장 53절에서 가져온 것이다. 만일 몬타니스트들이 사도행전 5장 18절에 이 말을 첨가했다면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는 틀림없이 원래 요한복음의 일부였을 것이다. 요한복음 7장 53절~8장 11절이 그 복음서 본문에 첨가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연주의 학자들은 많은 사실들을 무시함으로써 즉 고대의 기록자들이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에 대해 말한 것들은 무시하고 단지 다른 고대 기록자들이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만을 강조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장을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호르트가 자신의 「본문비평개론」(1881)에서 행한 일이다. 이 책에서 그는 암브로스와 어거스틴의 증언을 거의 언급하지 않으며 아르메니아 사람들에 대한 니콘의 진술은 단지 잘못 인용된 것으로 간단히 처리해 버린다(N. T. In The Original Greek, vol. 2, Appendix, p. 82). 실제 증거와는 상충되게 호르트는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가 초기 교회에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고대에 몬타니스트들과 노바티안들을 제외하고는 이 부분을 고민거리로 여긴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동일 저자, p. 86). 그러나 호르트의 이런 대략적인 진술이 함축하고 있는 바에 대해 해리스는 동의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분명히 호르트 박사는 몬타니스트들에 의해 본문이 많이 변경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그들의 본문 변개는 매우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Codex Bezae, TS, vol. 2 (1891), p. 195.) 오늘날 대부분의 자연주의 학자들은 요한복음 7장 53절~8장 11절이 원래 본문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어서 이 문제를 더 논의해 봤자 얻을 것이 없다고 여긴다. 그들은 (아직도 이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반 성도들을 위해) 이 문제를 다룰 때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노선을 따른다. 그들은 이 구절에 대한 고대의 증언은 모순된 것으로 던져버리고 ‘침묵의 주장’에만 의존한다. 그러므로 콜웰(1952)은 어거스틴이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가 삭제된 것에 대해 설명한 것을 조소했다.   그는 단언했다. “초기 그리스어 사본들의 출처들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생략’은 이런 방식으로 거의 설명될 수 없다. 일부 그리스 서기관들은 틀림없이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요한복음에서 이 이야기를 삭제한 서기관들이 누가복음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큰 동정심을 유발시킬 수 있는 기사는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남겨 놓았다는 증거를 두고 판단할 때 어거스틴의 주장을 지지할 수 없다.”(What Is The Best New Testament? By E. C. Colwell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opy1952 by the University of Chicago, p. 82.)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콜웰이 어거스틴을 비난한 것은 타당성이 없다.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와 ‘주님의 발에 기름을 붓고 죄 사함을 받은 여인의 이야기’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에서는 그 여인의 회개와 믿음이 강조되고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이 뚜렷하게 언급되지 않는다.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외견상 하나님의 율법이 파기된다. 또한 누가복음에서는 죄를 지은 여인이 창녀였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여인은 간음한 여인이었다. 따라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에 대한 반대 의견들을 누가복음의 창녀 이야기에 적용시킬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또 예를 들어 터툴리안이 누가복음의 이야기는 언급하면서도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말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충분한 이유가 있다. (c) 현대 번역본들의 잘못된 각주들 요한복음 7장 53절~8장 11절에 대한 현대 역본들의 각주들은 완전히 사람들을 오도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개역표준역(RSV)은 각주에서 “대부분의 고대의 권위 있는 사본들은 7장 53절~8장 11절을 생략하거나 이것을 요한복음 7장 52절 다음에 혹은 요한복음의 맨 끝에 또는 누가복음 21장 38절 뒤에 변화된 본문의 형태로 삽입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신영국성경(NEB) 역시 고대의 권위 있는 사본을 언급하며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가 고대 신약 성경 사본들에서는 고정된 자리에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러한 각주들은 원래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가 독립된 이야기로 여러 가지 형태로 유포되었고 나중에 서기관들이 신약 성경에 첨가하려고 할 때 이것을 넣어야 할 자리에 대해 자기들끼리도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어 어떤 서기관은 이곳에 또 다른 서기관은 저곳에 삽입하였음을 암시한다. 폰 소덴(1902)은 오래 전에 이러한 각주들이 암시하는 견해가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보여 주었다. 비록 그가 요한복음 7장 53절~8장 11절이 참 본문이라는 것을 부인했지만 그럼에도 이 본문에 대한 자신의 기념비적인 연구에서 그는 사실들을 제시할 때 뛰어난 공정성을 보여 주었다. 폰 소덴은 이 부분이 때로는 요한복음의 마지막에서 발견되며 때로는 요한복음 7장 52절 근처의 여백에 있거나 어떤 사본 군(群)에서는(Ferrar group) 누가복음 21장 38절 뒤에 삽입되어 있다고 말한 후 연이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본들에서는 이 본문이 7장 52절과 8장 12절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주시할 점은 이런 사본들 가운데 적어도 절반 정도에서 난외에 이 본문에 대한 삭제 기호가 있었다는 점이다.”(Die Schriften des Neuen Testaments, von Soden, Goe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 Teil, 1. Abt., p. 486). 따라서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는 통상적으로 요한복음 7장 52절과 8장 12절에 위치했다. 그러므로 다른 부분에 이 본문이 놓인 사본들은 이 같은 규칙을 벗어난 예외의 경우이다. 메츠거(1964)는 말한다.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는 명백히 서방 교회의 어떤 지역에서 유포되었던 한편의 구전이다. 그 후에 그것은 여러 곳에서 여러 사본들 속에 삽입되었다.”(Text Of The New Testament, Metzger, p. 224).   그러나 폰 소덴이 오래 전에 자신의 조심스러운 학문적 연구를 통해 논증했던 것처럼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메츠거의 해석은 틀린 것이다. 폰 소덴은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의 통상적인 위치가 신약 성경 본문에서 이 구절들의 원래 위치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때로 이 본문이 다른 자리에 있거나 그 안에 이상스러울 정도로 많은 다른 이문이 포함된 것은 이것이 신약 성경의 일부가 된 후에 전개된 일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많은 형태의 본문 이문에도 불구하고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가 여러 곳에서 혹은 다양한 형태로 사복음서에 억지로 끼어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게 입증되었다. 그런 가설은 이 본문이 이미 확고하게 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에 의해 반박되었다. 소위 ‘페라 군’(Ferrar group)이라 불리는 것들의 공통 조상 사본의 입장이 예외이지만 그것은 사실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그런 가설과는 반대로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가 분명한 시기에 명확한 곳에서 맨 처음 사복음서의 본문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온갖 반대 공격에 연승을 거둠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야 한다.”(Die Schriften des Neuen Testaments, 1. Teil, 1 Abt., p. 500).   그리고 그 뒤에 폰 소덴은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의 본문 형태를 재구성하여 제시하는데 이것은 실질적으로 공인 본문과 킹제임스 성경에 있는 형태와 다르지 않다.   또한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의 시작을 알리는 구절들(요7:53-8:2)은 신약 성경에서의 이 기사의 원래 위치가 요한복음 7장 52절과 8장 12절 사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러한 서론 구절들이 문맥에 가장 잘 들어맞는 위치가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들 가운데 첫 구절(요7:53)은 바로 이전에 논쟁을 벌였던 사람들의 해산을 묘사하고 있다. 다음의 두 구절(요8:1-2)은 예수님께서 그 동안에 그리고 그 이후에 무엇을 하셨는지를 말해 준다. 이 후에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로 전환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신영국성경(NEB)이 제시하는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의 위치에서는 이 같은 서론 구절들이 전혀 뜻이 통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런 것을 제공하는 사본들에서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의 위치가 잘못되었음을 입증한다. 오래 전에 딘 버건은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의 위치가 잘못되어 있는 이러한 사본들이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 것들인가를 지적했다.   “비평가들은 4개의 초서체 복사본들(페라 군)에서 문제의 이 구절들이 누가복음 21장의 끝에 덧붙여져 있다는 것을 열심히 지적한다. 그런데 그들은 ‘이 4개의 코덱스들이 공통의 원형에서 유래되었고’ 따라서 하나의 동일한 조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한 마디 더 덧붙인다면 그 조상이 부패한 복사본이라는 것을 잊었단 말인가? 나는 그 비평가들에게 동일한 4개의 그 코덱스들에서 ‘그리스도의 고뇌와 피땀’(눅22:43-44) 기사가 마태복음에 삽입되어 26장 39-40절 사이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싶다. 가드에 살던 어떤 사람이 손가락과 발가락을 하나씩 더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사람의 손은 어떤 손이나 손가락이 다섯 개며 발가락 또한 다섯 개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복음서들 가운데 발견되는 단 한 개의 파격적인 예가 이 구절들이나 혹은 다른 구절들의 올바른 위치에 영향을 줄 수 없다.”(The Causes Of The Corruption Of The Traditional Text, Burgon, p. 250). (d) 그리스 교부들의 침묵 설명 요한복음 7장 53절~8장 11절의 순수성에 반대하는 자연주의 비평가들의 주장은 주로 과거에 아무도 이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는 것 즉 침묵에 근거한 주장이며 이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은 그리스 교부들이 이것에 대해 침묵했다는 것이다. 메츠거(1964)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를 언급하신 후 1000년 동안 그리스 교부들 중에 오리겐, 크리소스톰, 논누스(운율을 맞춘 자신의 의역에서)처럼 한 구절 한 구절 전 복음서를 다뤘던 사람들을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더욱 중요하다. 12세기 초반에 살았던 지가베누스는 그 구절들에 대해 논평을 한 최초의 그리스 저자이다. 심지어 그는 복음서의 정확한 복사본들이 그 구절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단언한다.”(Text Of The New Testament, Metzger, p. 223).   그러나 메츠거의 이 주장은 자신이 의도했던 것만큼 그렇게 설득력이 없다. 첫째로, 버건이 오래 전에 지적했던 것처럼 우리는 메츠거가 그토록 불길하게 말하는 1000년이란 기간에서 적어도 300년은 빼버려야 한다. 티센도르프가 그 구절들의 통상적인 위치에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를 포함하고 있는 9세기의 사본 9개와 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본 1개를 사본들의 목록에 싣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000년의 이 기간 중에서 마지막 300년 동안 그리스 교부들이 침묵한 것은 그들이 다수의 신약 성경 사본들에서 지금의 위치에 기록되어 있는 요한복음 7장 53절~8장 11절을 포함하고 있는 사본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리가 없다. 후대의 그리스 교부들이 이 구절들에 대해 논평을 하지 않았던 것은 초기의 그리스 교부들이 그랬기 때문이었다. 또 오리겐(c. 230)과 크리소스톰(c. 400) 그리고 논누스(400) 같은 초기 그리스 교부들의 침묵 역시 이러한 고대 성경학자들이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가 요한복음의 일부분이었음을 알지 못했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언급했던 도덕적 편견이나 자기들에게 알려진 사본들 중에 일부가 그것을 생략하고 있다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버건은 초기의 이 교부들이 이 부분에 대해 강해를 하지 않은 또 다른 매우 합당한 이유를 언급하고 있다. 그들의 논평은 주로 그들의 설교와 관련된 것이었고 그들의 설교는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가 교회의 옛 오순절 성경 일과에서 생략되어 있다는 사실에 의해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처음으로 크리소스톰과 키릴이 요한복음을 대중들에게 강해하면서 7장 52절에서 곧바로 8장 12절로 넘어갔는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물론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했다. 회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낭송되지도 않는 부분을 왜 그들이 강해해야 하는가? - 어떻게 할 수가 있었겠는가? 아폴리나리우스와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르가 (유명한 주석 ‘Scholium’에서) 그랬던 것도 마찬가지다. 오리겐 역시 그랬든 안 그랬든 상관없지만 - 비록 반대 입장의 비평가들이 요한복음의 그 부분에 대한 그의 주석이 빠진 것을 알고 그 설명을 요구할 권리는 없지만 - 어찌되었든지 오리겐의 이름도 역시 동일하게 그렇게 한 사람들의 명단에 첨가될 수 있다.”(The Causes Of The Corruption Of The Traditional Text, p. 257). 초기에는 오순절 날에 온 교회가 요한복음 7장 37절~8장 12절을 낭송하는 것이 관례였었다. 이 성경 일과는 성령 강림을 기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대명절에 매우 잘 어울리는 구절인 요한복음 7장 37-39절부터 시작했다.   37 마지막 날 곧 명절의 그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 기록이 말한 것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 39 (그러나 이것은 그분께서 자기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더라.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하셨으므로 아직 성령님께서 주어지지 아니하였더라.)(요7:37-39).   그런 후에 이 성경 일과는 요한복음 7장 52절까지 계속되며 요한복음 7장 53절~8장 11절을 생략하고 요한복음 8장 12절로 끝을 맺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시니라(요8:12).   따라서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가 오순절 날에 공개적으로 낭송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초기의 그리스 교부들이 이것에 대해 강해하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였다.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가 왜 오순절의 성경 일과에서 생략되었을까? 분명히 그 부분이 오순절의 중심 사상과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평가들의 설명은 다르다. 그들은 그 본문이 오순절의 성경 일과가 선정될 당시에 요한복음의 일부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버건이 지적한 것처럼 이렇게 주장하면 이 본문이 요한복음 7장 52절 다음에 놓이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진다. 어떤 서기관이 무슨 이유로 오순절의 성경 일과의 한가운데에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를 소개하려 했을까?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생각이 났을까? 비록 그리스 교부들이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만 교회는 침묵하지 않았다. 요한복음 8장 3-11절이 매년 10월 8일, 성 펠라기아의 날에 공개적으로 낭송되는 성경 일과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이 이것을 입증한다. 버건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동방 교회는 큰 목소리로 이 주제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한다. 모든 동방 교회의 교직(敎職)에서 교회의 관례에 관한 문서 기록들을 추적해 올라가면 - 그것들은 이 구절들에 대한 교부들의 침묵이 문제를 난감하게 만든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교부들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 동방 교회들은 10월 8일을 위한 특별 성경 일과로 이 12구절 중에서 9구절을 선정했다.”(동일 저자, pp. 259-260).   (e) 내적 증거 자연주의적인 비평가들은 내적 증거라는 근거를 들어 요한복음 7장 53절~8장 11절의 순수성에 반대하는 주장을 힘차게 펼쳐왔다. 예를 들어 콜웰(1952)은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는 문맥에 어울리지 않고 거기에 사용된 어휘와 어조는 요한복음의 나머지 부분과 다르다고 주장한다(What Is The Best New Testament?, p. 81). 그러나 이렇게 주장함으로써 비평가들은 단지 자기들에게 새로운 어려움을 만들 뿐이다. 그 이유는 만일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가 삽입된 것이고 그것이 문맥과 그리고 요한복음의 나머지 부분과 그렇게 뚜렷하게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왜 그것이 현재의 그 위치에 지금껏 자리를 잡고 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다. 이것은 오래 전에 스텍(1893)이 물은 질문인데 지금까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전혀 없었다(T. Z. aus der Schweiz, p. 98.) 그러나 사실 이러한 비난에는 실속이 하나도 없다. 문체를 트집 잡아 그런 것을 주장하는 것은 나약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문체를 트집 잡는 것은 온갖 것들을 입증하기 위해 사용됐다. 오래 전에 버건은 이 본문에서 요한복음의 독특한 표현들을 지적했다. “우리는 8장 6절의 작은 설명 부분 즉 ‘그들이 그분을 시험하며 이렇게 말한 것은 그분을 고소하려 함이더라’에서 요한의 문체가 어떻게 온전히 드러나는지 주목한다. 게다가 우리는 6절과 8절에서 그분께서 쓰셨다는 사실이 강조된 것 - 이것은 요한복음의 기록자의 다른 부분과 일치한다 - 에 의해 놀라게 된다.”(The Causes Of The Corruption Of The Traditional Text, p. 241).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 버건은 사실은 전혀 그 반대임을 보여 준다.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가 생략되면 그것은 즉시 고칠 수 없는, 크게 벌어진 상처를 남긴다. “수수께끼 같은 B 사본과 알레프 사본에서는 7장 52절의 ‘갈릴리에서는 대언자가 나오지 못한다’는 말씀이 8장 12절의 ‘그러므로 다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로 바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순수성에 대해 반대 의견을 갖고 있는 모든 비평가들은 그 복음서 기자의 영감 받은 자필 원본에 그 부분이 그렇게 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그렇게 믿어야 한다고 억지를 부리며 유혹한다.”   “그러나 그것은 믿을 수 없다. 7장 37절과 52절 사이에 포함되어 있는 말씀을 다시 살펴보고 다음에 주목하라. (a) 서로 적대적인 두 무리가 성전 안뜰에 운집했다(40-42절). (b) 일부는 우리 주님을 폭력을 써서라도 잡아오는 것에 찬성을 했다(44절). (c) 논쟁에 참석한 산헤드린은 죄인인 주님을 잡아오지 못한 것에 대해 관원들을 비난하고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다(45-52절). 이러한 상황에서 복음서 기자가 어떻게 ‘그러므로 다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계속해서 기록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요한이 그 말을 기록했을 때 그의 의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동일 저자, pp. 237-238).   분명히 버건은 제대로 핵심을 집었다. 요한복음 7장 53절~8장 11절을 거부하면 7장과 8장 사이의 연결이 빠져버려 아주 이상해진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독자는 산헤드린 공회의 회의장에서의 논쟁의 한 복판에 서 있다가 단 한 마디 설명도 없이 성전에 계신 예수님께로 이끌려간다. 이와 같은 인상적인 기록은 기교를 많이 부린 현대의 일부 책들에서는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신성한 성경책에서는 그런 기교가 통할 수 없다.   (f) 사본들과 역본들의 부정적인 증거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가 파피루스 66과 75, 알레프(시내 사본), B(바티칸 사본), W, L 등에서 생략되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못된다. 그 이유는 이 모든 사본들이 습관적으로 생략하기를 좋아했던 알렉산드리아 전통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몬타니스트들이나 혹은 어떤 다른 극단적인 집단이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를 자기들의 요한복음 복사본들에서 제거하기 시작하자 초기 교회의 금욕적인 경향들과 맞물려 그러한 관행은 빠르게 퍼져 나갔고 특히 이집트에서 그랬다. 그 결과 우리가 그리스어 사본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바로 그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최근에 발견된 보드머 파피루스 Ⅲ을 포함하여 많은 콥트어(이집트어) 역본들의 사본들이 같은 이유로 이 본문을 생략한다. 시리아 역본과 아르메니아 역본 또한 그렇다. 이것은 이런 모든 역본들이 거슬리는 구절을 생략해 버리는 경향을 반영한다. 그리고 그 부분이 대단히 광범위하게 생략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후대의 서기관들은 비평가 노릇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현존하는 사본들에서 이 구절에 대한 엄청난 수의 다른 형태의 본문이 생성되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많은 서기관들은 이 부분의 난외에 삭제 기호를 표시했다. 이런 현상들 중 어느 것도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가 참 본문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다. 단지 이 본문에 대한 편견이 초기 교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뿐이다. 이러한 편견이 있는 상황에서 이런 편견 때문에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의 기사’가 요한복음의 본문에 첨가되었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요한복음의 본문에서 생략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그것을 첨가하고자 하는 동기보다는 생략하고자 하는 어떤 더 큰 동기가 있었을 것이다.    ------------ 이 글은 에드워드 힐즈의 <킹제임스 성경 변호> 149-158쪽에 있음 <킹제임스 성경 변호>는 다음에서 무료 PDF를 다운받을 수 있음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280 
2017-11-02 17:55:13 | 관리자
천주교 소수 본문의 문제: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지금까지 사본학적 근거를 가지고 킹제임스 성경의 우수성을 알려드렸습니다.   다음 기사에서 보듯이 그리스어 신약 성경 사본의 99%는 킹제임스 성경을 지지합니다.   <사본들의 압도적인 증거: 99%가 전통 다수 본문 지지>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manus&write_id=123   이런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천주교 소수 사본이 좋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일(2017년 10월 31일)은 종교 개혁 500주년 되는 날입니다. 정확히 500년 전에 마르틴 루터는 천주교의 부패를 온 천하에 알리며 종교 개혁의 불길을 당겼습니다. 루터가 한 일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천주교 소수 본문을 버리고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다수 본문에 근거하여 보통 사람들을 위한 성경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 이후에 틴데일 성경, 제네바 성경, 킹제임스 성경, 올리베땅 성경, 디오다티 성경 등 유럽 모든 국가의 성경이 다수 본문에서 번역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영광스러운 빛을 비쳐 주었습니다. 이런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천주교 사본이 옳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역사적/사본학적 사실을 보지 않으려고 스스로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보면 볼수록 자기들의 위선을 감추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천주교 소수 사본과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알려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소수 사본 지지자들이 추앙하는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은 자기들끼리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수두룩합니다. 다음은 위키 백과 기사입니다.   <바타칸 사본과 시내 사본의 차이> https://en.wikipedia.org/wiki/Comparison_of_codices_Sinaiticus_and_Vaticanus   위키 백과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듯이, 이 두 사본은 사복음서에서만 무려 3,036개나 서로 다릅니다(마태복음 656개, 마가복음 57개, 누가복음 791개, 요한복음 1022개). 물론 이것 역시 이미 사본 학계에 공공연하게 다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러니 소수 사본 중 어떤 것이 맞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도대체 어떤 사본을 신뢰해야 한단 말입니까? 누가 본문 재판관으로 앉아야 합니까? 또한 시내 사본은 특히 여러 곳에서 조작된 부분이 명백히 드러나 있습니다. 시내 사본 조작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시내 사본 조작>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668   반면에 40여 개의 소수 본문을 제외한 99%의 안디옥 계열 사본들(다수 사본, 종교개혁 사본, 보편적 사본, 비잔틴 사본, 전통 사본)은 어느 것을 보아도 본문이 일정합니다. 바로 여기서 킹제임스 성경과 루터 성경 등이 나왔고 이러한 다수 사본 성경들이 전 세계의 신학과 교리와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루터와 칼빈 등의 종교 개혁을 통해 진리의 빛을 온 세상에 보내 주신 우리 주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의 말씀들이 들어오면 빛을 주며 이 빛이 단순한 자에게 명철을 주나이다(시119:130).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따라 우리 손에 완전히 보존된 성경을 주셨습니다. 6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7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시12:6-7).   우리는 이 성경이 1611년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라고 믿습니다. 다음은 리건 박사가 지은 「1611년 킹제임스 성경, 초기 개정 신화」(The King James Version of 1611, The Myth of Early Revisions)의 결론입니다. https://www.biblebelievers.com/Reagan_myth-early.html   "여러분은 이제 확신을 가져도 된다. 오늘 이 시간 우리 손에 있는 ‘킹제임스 성경’은 결코 ‘개정된 것’이 아니라 ‘정화된 것’이다. 우리 손에 들려 있는 이 성경이 우리를 위해 ‘영어로 보존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전혀 없다. ‘킹제임스 성경’ 본문의 정확성에 대한 권위는 1611년 판 ‘킹제임스 성경’의 초판 인쇄본에 있지도 않고 제임스 1세의 인품에 놓여 있지도 않으며, 엘리자베스 시대 영국 문학의 뛰어난 업적에 있지도 않고 심지어 그리스어 ‘공인 본문’에 있지도 않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KJV)이라는 절대 무오한 말씀의 권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겠다고 하신 약속과 그분의 능력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신 분이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 우리 손에는 그분의 완전한 말씀이 있다."   루터와 칼빈 등의 종교 개혁을 통해 귀한 성경을 보통 사람들의 손에 쥐여 주신 우리 주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샬롬   패스터
2017-10-30 17:14:55 | 관리자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 (딤후2:15). 대구 스데반침례교회 김정미자매입니다. 감사드립니다.
2017-10-30 14:52:15 | 김정미
안녕하세요?   매년 9월에는 국내 여러 교단들이 정기 총회에서 종종 이단성 조사 결과를 발표합니다. 2017년에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합동)는 102차 총회에서 몇몇 목사에 대한 이단성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크리스챤투데이: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04197노컷뉴스: http://www.nocutnews.co.kr/news/4851149   그런데 발표 뒤에는 발표 결과를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고 의견이 분분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2016년 8월 19일, 한국교회 주요 8개 교단 이대위원장들이 교단마다 다른 이단 관련 용어와 개념을 통일하기로 하고 서초구 예장 고신총회본부에서 연석회의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날 ‘이단 관련 구분에 따른 용어 및 결의에 따른 제제 단계 통일안’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대한 기사는 기독교 연합신문에 나와 있습니다.   <어디부터 이단이고 어디부터가 사이비인가>http://www.igood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50501   이처럼 주요 교단 이대위원장들의 협의를 거쳐 통일된 안이 나와 있음에도 이런 사실을 모르는 분들이 많아 여전히 의견이 난립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이들이 결론 내린 이단, 이단성, 사이비 정의 및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이단성   성경과 기독교 정통 교리의 가르침 안에 있으나 부분적으로 이단적 요소를 소극적으로 지니고 있는 주장이나 단체, 사람에 대해서는 ‘이단성’으로 구분하기로 했다.   2. 이단   ‘이단성’을 넘어 성경과 기독교 정통 교리에서 벗어나 파당을 이뤄 기독교 신앙의 기본교리이자 일치의 공통분모인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 삼위일체, 성경, 교회, 구원에 대한 신앙 중 어느 하나라도 부인하거나 현저히 왜곡하여 가르치는 주장이나 단체, 사람에 대해 ‘이단’으로 명명키로 했다.   3. 사이비   기독교의 이름으로 존재하고 활동하지만, 부분적으로 탈기독교적 반사회적인 모습을 소극적으로 보이는 주장이나 단체, 사람을 ‘사이비성’으로, 해석의 차이나 견해의 차이가 아니라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여 기독교의 이름으로 존재하고 활동하지만 탈기독교적 반사회적인 주장이나 단체, 사람을 ‘사이비’로 규정했다.   4. 이단 옹호   이밖에 이단 및 사이비를 옹호하는 주장이나 기관, 단체, 사람에 대해서는 ‘이단옹호’로 구분했다.   ------------   자, 그런데 대분의 성도들이 혼동하는 것은 '이단'과 '이단성'의 구분입니다. 이단 연구를 많이 했다는 분들 중에서도 다수가 '이단성'이 곧 '이단'이라고 말하여 혼동을 가중시킵니다.   가장 최근에 한국교회 주요 8개 교단 이대위원장들이 합의하여 만든 ‘이단 관련 구분에 따른 용어 및 결의에 따른 제제 단계 통일안’에는 이단과 이단성은 그 개념이 완전히 다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단은 말 그대로 정통 기독교의 교리에서 떠난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이단성은 기독교 정통 교리 안에 있으나 부분적으로 이단적 요소를 소극적으로 지니고 있는 주장이나 단체, 사람에 대한 규정입니다.   한 기관이나 개인이 이단으로 판정되면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되므로 모든 교단들은 이단이라고 판정할 때에 심히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이단의 경우에는 판결문에 분명하게 “OOO는 무슨 무슨 교리에서 어떤 이유로 이단이다”라고 기록합니다.   반면에 이단은 아니지만, 각 교단의 믿음에서 부분적으로 떠나 소극적으로 그 교단의 믿음에 어긋나는 주장을 하는 경우 이들은 ‘경계-예의주시-참여교류금지’의 세 단계 제재가 있다고 정리하였습니다.   1. ‘경계’란 “제보 혹은 관찰 중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조사 및 연구 결과가 시작 전이거나 혹은 불충분할 때 발동하는 것으로, 발동이 되면 자원하여 관계를 유의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2. 2단계에 속하는 ‘예의 주시’에 대해서는 “문제의 사람, 혹은 단체가 지적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할 때 조사 및 연구가 더 요구될 때 발동하는 것으로, 동참자는 총회의 결과가 있을 때까지 교류 및 관계를 절제한다”고 정리했다.   3. 마지막 세 번째 단계인 ‘참여교류금지’는 “문제의 주장, 사람, 단체에 대해 일체의 참여 및 교류를 금지”하는 사실상 최고 수준의 제제 단계에 해당한다.   ------------   이 경우 판결문에는 “OOO는 이단이다”, “OOO는 이단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없고 제재 이유와 내용만 “OOO는 이런 저런 이유로 예의 주시 혹은 집회 참여 금지” 등으로 기록됩니다.   예를 들어 위에 있는 노컷뉴스를 보시면, 분명하게 2017년에 예장 합동 소환 조사를 받은 5명의 목사들과 스베덴보리 사상은 이단성으로 규정되었고 거기에 합당한 제재(예의 주시, 집회 참여 금지, 교류 금지 등)가 나와 있습니다.   이런 차이를 모르는 분들은 이단성이 곧 이단이라고 생각하기 쉽고 또 어떤 분들은 악의적으로 이단성을 무조건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 다르고 어 다른 경우입니다.   이단성이 있어 예의 주시 등으로 판정된 경우 대개 당사자는 판정 이유를 살펴보고 반성하며 언행을 조심하여 덕을 끼치도록 노력하게 됩니다.   2016년 8월 19일에 한국교회 주요 8개 교단 이대위원장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이단 관련 구분에 따른 용어 및 결의에 따른 제제 단계 통일안’을 참조하면 “이단과 이단성 그리고 사이비의 정의와 차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샬롬   패스터   (*) 동영상 참조하세요. <이단, 이단성, 사이비의 정의 및 차이>https://youtu.be/s2Jna_l-OlI    
2017-10-30 09:20:41 | 관리자
대구에 있는 독립침례교회입니다.   # 교회 위치: 대구광역시 북구 칠곡중앙대로 459(관음동1386-14) 5층 # 인터넷 카페 http://cafe.daum.net/KJB16111 # 연락처: 053 -323 - 1611 (대구, 최재영 형제) # 주차 : 건물 뒤 이면 도로
2017-10-26 10:45:37 | 관리자
두분의 훌륭하신 답변 감사드립니다. 만약 저 규율이 악용이 되어 어떤 남자가 자신을 만나주지 않거나 하는 여자를 강제로 겁 탈해서 아내로 삼고자 한다면 이 것에 대한 처벌은 재판관들을 통해 공의롭게 재판이 되어 질 수는 없는 걸까요? 과부와 아버지 없는 아이들을 향한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조치를 조금은 해 두시지 않으셨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2017-10-24 20:54:45 | 이은미
자매님 반갑습니다. 신명기의 기록 시기를 보면 BC 1500년경으로 지금으로부터 3500년전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 전달하는 신정정치의 시대였지요. 사람의 수에도 여자와 아이는 계수되지 않았던 때였기에 여성에 대한 상대적 권리를 찾는다는 건 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자매님께서 안타깝고 답답하게 여기시는 게, 현 시대를 기준으로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시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지금도 이슬람 사회에서는 강간당한 여성을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 하여 그녀의 형제나 아버지가 생매장하거나 돌로 쳐 죽이는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지요.) 성경 기록 당시는 그랬구나 이해하시고 지금 은혜 시대에 태어나 대한민국이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에 감사하는 것이 좀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같아요~
2017-10-24 20:36:17 | 정진철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님의 답변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사실 좀 실망스럽습니다. 강간을 당한 남자를 여자가 같이 살만하다고 생각하면 모를까 여자는 자신을 강간한 남자와 평생 결혼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글쎄요, 저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민수기에 아버지가 완강하게 거부할 경우 지참금을 주라는 말은 있는데 여자는 스스로 의사결정 권한이 업는 건지,, 마음이 왠지 씁쓸합니다.
2017-10-24 18:18:32 | 이은미
자매님 안녕하세요. 성경이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은 사항에 대하여는 어떻게 설명드릴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자매님의 질문은 정혼하지 않은 처녀가 강간을 당한 경우 그남자의 처벌문제인 것 같은데 제 소견으로는 다음의 성경기록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신 22:28, 킹흠정) ¶ 만일 어떤 남자가 정혼하지 아니한 젊은 여자를 만나서 그녀를 붙들고 그녀와 함께 누웠는데 그들이 발견되거든 (신 22:29, 킹흠정) 그녀와 함께 누운 남자는 그 젊은 여자의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겔을 주고 그녀를 아내로 삼을 것이니라. 그가 그녀를 비천하게 하였은즉 평생토록 그녀를 버리지 못하리라. 그 예로 다윗의 아들 암논이 다말을 겁탈한 후에 계명에 따라 그녀를 아내로 취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더 미워함으로 암논의 악이 다른 악보다 더 크다고 말하는 다말의 대답을 참고하면 어떨까요 (삼하 13:12, 킹흠정) 그녀가 그에게 응답하되, 아니니이다. 내 오라버니여, 나를 강제로 욕보이지 마소서. 이스라엘 안에서 이런 일을 해서는 아니 되오니 오라버니는 이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마소서. (삼하 13:13, 킹흠정) 나 곧 내가 내 수치를 어디로 가게 하겠나이까? 오라버니로 말하건대 오라버니는 이스라엘 안에서 어리석은 자들 중의 하나같이 되리이다. 그러므로 이제 원하건대 왕께 말하소서. 그분께서 나를 오라버니에게 주기를 거절하지 아니하시리이다, 하되 (삼하 13:14, 킹흠정) 그가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그녀보다 힘이 세므로 그녀를 강제로 욕보여 그녀와 함께 누우니라. (삼하 13:15, 킹흠정) ¶ 그리하고는 암논이 그녀를 심히 미워하였으니 이처럼 그가 그녀를 미워한 그 미움이 전에 그가 그녀를 사랑하던 그 사랑보다 더 컸더라. 암논이 그녀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하매 (삼하 13:16, 킹흠정) 그녀가 그에게 이르되, 이유가 없나이다. 나를 쫓아 보내는 이 악은 오라버니가 내게 행한 다른 악보다 더 크나이다, 하되 그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2017-10-24 13:16:38 | 김영익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는가?   (*) 이 글은 한마음 미션의 고정인 자매님께서 번역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속박에서 구출하기 위해 파라오를 방문한 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곧 해방될 것이라고 모세에게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주}니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 곧 [전능자]의 이름으로는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나를 알리지 아니하였느니라.”(출6:2-3)   성경학자들뿐만 아니라 대다수 성도들이 이 구절을 읽으면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대다수 역본들에서 주(LORD)로 번역된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이 창세기에 이미 160번이나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여호와’ 즉 ‘주’(LORD)라는 이름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가족을 주로 다룬 창세기 12-50장에서 100번 이상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희생 제물을 바칠 수 있도록 양을 미리 준비하셨고 이에 대해 창세기 22장 14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이 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주}의 산에서 그것을 보리라, 하느니라."   수년 뒤, 이삭은 축복을 받기 위해 자기를 속인 자기 아들 야곱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그것을 이같이 속히 찾았느냐? 하거늘 그가 이르되, {주} 아버지의 [하나님]께서 그것을 내게 보내 주셨나이다, 하니”(창27:20)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이 여호와 즉 ‘주’(LORD)라는 이름을 잘 알고 있었고 심지어 일상적인 대화에서 스스럼없이 사용했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모세에게 “내가 나의 이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나를 알리지 아니하였느니라.”(출6:3)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거짓말쟁이신가요? 성경은 이 점에 대해 모순을 보이나요? 합리적인 대답은 무엇인가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창15:7; 22:14; 24:35, 40, 42, 48, 50, 51, 56; 26:22; 27:20; 49:18 등 참조).   성경 비평가들과 불신자들이 이런 구절을 두고 시비를 걸 수 있지만 우리는 성경에 의거하여 논리적인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여호와(주)라는 이름을 아는 것(To know the name of the LORD’ 혹은 단순히 ‘여호와(주)를 아는 것’(To know the LORD)이라는 표현은 종종 그분의 이름과 존재에 대해 단순히 아는 것 혹은 인식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어 ‘야다’(yada)에서 유래된 ‘알다’(To know)라는 말은 종종 경험으로 확실히 습득하여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무엘이 소년이었을 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가 {주} 앞에서……{주}를 섬겼더라.”(삼삼2:18; 3:1) “그가 {주}와 사람들에게 호의를 입었더라.”(2:26)   그런데 바로 다음 중에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무엘은 아직 {주}를 알지 못하였고 {주}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계시되지 아니하였더라.”(삼상3:7).   어떤 의미에서 사무엘은 인생에서 매우 일찍 여호와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무엘기상 3장 7절에서부터 전격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시점부터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기 시작했습니다(참조 삼상3:11-14; 8:7-10, 22; 9:15-17; 16:1-3 등). 이 사건 전에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가 그분에 대해 알았던 것을 이 시간 이후에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 및 그가 그분에 대해 알게 된 것과 비교하면서 사무엘기상의 저자는 이 사건 전에는 “사무엘이 아직 {주}를 알지 못하였다.”(3:7)라고 합리적으로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아처(Gleason Archer)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주라는 것을 알다’(to know that I am the LORD)나 또는 ‘주라는 이름을 안다’(to know the name of LORD)는 표현은 구약에서 적어도 26번 나타나며 이 모든 경우에 이 표현은 실제 경험에 의해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깨달아 알게 된 것을 의미한다.”(하단 참조 문헌, Archer 1982, pp. 66-67)   데이비스(John Davis)는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출애굽기에만 ‘알다’(야다)라는 표현이 주(여호와)와 관련하여 5번 나타나는데 이 “모든 경우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암시한다. 이 모든 경우에 여호와(혹은 여호와라는 이름)를 아는 것은 그분의 인격과 능력을 나타내는 여호와의 어떤 행위나 행동과 관련이 있다.”(하단 참조 문헌, Davis, 4[1]:39).   예를 들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취하여 내게 한 백성으로 삼고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이 되리니 내가 이집트 사람들의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는 {주}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출6:7)   나중에 하나님께서 이미 이집트 사람들에게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고(출7:4~12:30), 홍해를 가르셨으며(출14), 기적으로 쓴 물을 달콤하게 만드셨습니다(출15:22-25). 그 이후에 그분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이 불평하는 것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저녁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빵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주}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출16:11-12)   몇 주가 지난 뒤에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려고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온 {주} 그들의 [하나님]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나는 {주} 그들의 [하나님]이니라.”(출29:46)   이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서 누구신지 알지 못했나요?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은 그분이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그들은 구원자로서의 여호와 하나님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제 그들은 그분이 자기들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모세 시대 이후 수백 년이 지난 뒤 이사야가 대언했던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주}가 말하노라. 내 백성이 아무것도 받지 아니하고 잡혀갔으니 여기서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이냐? {주}가 말하노라. 그들을 다스리는 자들이 그들로 하여금 울부짖게 하며 날마다 계속해서 내 이름을 모독하는도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내 이름을 알리로다.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을 알리니, 보라, 그것이 곧 나니라.”(사52:5-6)   이 예언이 있은 지 100년도 더 지난 뒤에 유다가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게 되면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대언자를 통해 그들이 유다 땅으로 돌아갈 것을 예언하시고 이렇게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보라, 내가 이번에 그들에게 알리리니 곧 내가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리리라. 그리하면 내 이름이 {주}인 줄 그들이 알리라.”(렘16:21)   이러한 진술들은 다 무엇을 말할까요? 이스라엘과 유다가 그들의 역사에서 이 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이름 즉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말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주 즉 여호와라는 이름을 안다’(to know the name of Jehovah)는 표현은 단순히 아는 것 이상의 무언가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그것은 히브리어 관용어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다루실 때에 드러나는 특정한 행위나 속성에 대해 아는 것을 나타냅니다.” (Davis, 4[1]:40).   현시대에서도 누군가가 사람을 정말로 ‘알지’ 않고서도 (또는 그 사람의 직업 혹은 특징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고서도) 그 사람의 이름이나 직업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농구 선수 마이클 ‘에어’ 조던(Michael ‘Air’ Jordan)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외국인들이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그들이 그가 미국프로농구(NBA)에서 은퇴한 지 몇 년 뒤 어떤 대회에서 그를 만났다고 상상해 봅시다. 이 경우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조던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의 이름 마이클 ‘에어’ 조던으로 그를 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와 함께 경기장에 가서 그가 자유투 라인에서 덩크슛을 넣거나 혹은 공기(에어)처럼 가볍게 날아서 슛을 넣는 것을 보고 - 그래서 그의 가운데 이름인 Jeffrey 대신 공기처럼 가볍게 몸을 놀린다는 의미의 에어(Air)가 붙었음을 알고 - 그가 나이키 신발회사에서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오리지널 ‘에어 조던’ 신발은 신은 것을 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 외국인들은 ‘에어 조단’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알고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아 그래서 그의 이름이 ‘에어’ 조던이구나!”   언뜻 보기에 출애굽기 6장 3절은, 창세기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족장의 지식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다’(특히 이름을 ‘안다’)라는 히브리어 관용구가 단순히 사람을 인식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 문제는 더 이상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이 우주의 주권자이자 창조주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몇 백 년 뒤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속박에서 구출함으로써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을 성취하셨을 때,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지키시는 분 여호와라는 이름의 온전한 의미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 다음 2구절을 통해 안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창4:1,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매 그녀가 수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주}로부터 남자를 얻었다, 하니라. 아담은 그 전에 이브를 몰랐을까요?  2. 요17:3,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는 것일까요? 개인적으로 습득해서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서 아는 것입니다.   참고 문헌:   Archer, Gleason L. (1982), An Encyclopedia of Bible Difficulties (Grand Rapids, MI: Zondervan).   Davis, John J. (1963), “The Patriarchs’ Knowledge of Jehovah: A Critical Monograph on Exodus 6:3,” Grace Theological Journal, 4[1]:29-43, Winter.   출처: http://apologeticspress.org/apcontent.aspx?category=6&article=1051  
2017-10-24 10:16:31 | 관리자
  남자가 유부녀와 함께 누운경우   둘다 죽이라고 되어 있고   처녀인 젊은 여자가 남편과 정혼한 뒤에  둘이 같이 누운경우  둘다 죽이라고 되어 있으며   처녀인 젊은 여자가 남편과 정혼한 뒤에 강간을 당하면 남자만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남자가 정혼하지 아니한 젊은 여자를 만나서 그녀를 붙들고 그녀와 함께 누웠는데 그들이 발견되거든    그녀를 아내로 삼고 평생 그녀를 버리지 못하리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2장 13절~21절 에는 아내에게 처녀의 표가 없을 경우  그녀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자가 처녀이면서 강간을 당했을 경우 정혼하지 않았을 경우 강간한 남자는 돌로 쳐서 죽이는게 맞습니까?   여자에게 처녀의 표가 없는 것이 이토록 중요한 일이면 그 처녀의 표를 빼앗은 남자는 당연히 죽여야 할텐데    처녀인 젊은 여자가 강간을 당하면 그 남자는 돌려 쳐서 죽이라는 구절은 없어서 질문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7-10-23 15:43:03 | 이은미
저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신ᆞ구약 전체 다 듣고 싶습니다. 흠정역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진짜 큰 일 하시는 분들 이십니다. 주님이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saturn84@naver.com 기다릴께요.감사합니다.
2017-10-23 00:19:39 | 이현정
3억 원짜리 성경책 보러 오세요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포구는 1816년 한반도에 처음으로 성경이 전래한 역사적인 장소다. 서천군은 성경 전래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지난해 9월 마량포구에 기념관을 개관했다. 이 기념관에는 3억 원짜리 성경책도 있다. 기념관에는 주말이면 하루 100여명이 찾는다.  서천군이 80억원을 들여 지은 기념관은 지하 1층~지상 4층(연면적 1374㎡) 규모다. 1, 2층 전시관에는 한국 최초로 성경이 전래한 당시 상황과 영국 함선 알세스트호의 선실을 재현한 전시물이 있다. 이곳에 전시된 성경책은 1611년 발간된 최초의 영어 완역판 ‘킹 제임스 성경’ 가운데 한 권이다. 두툼한 가죽 표지의 킹 제임스 성경은 영국의 제임스 1세가 왕위 즉위 후 최고의 성서학자 54명을 임명해 필사본을 모아 7년 만에 펴냈다. 성경전래지 기념관장인 이병무 목사는 “성경 역사에서도 가장 의미가 있는 책 가운데 한 권”이라고 소개했다.  4층 다목적실에서 만난 이상주(49)씨는 “기념관은 기독교 신자는 물론 일반 관람객도 우리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의미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이곳에 성경이 전해진 것은 1816년 9월 4일이다. 영국 함대 소속 배 두 척이 마량포구에 닿았다. 맥스웰, 바실 홀 등 두 선장은 조선의 수군의 대장 격인 마량첨사조대복, 비인 현감 이승렬을 만났다. 이 때 조대복과 이승렬이 선장실에 꽂혀 있던 책에 관심을 보였고 이를 본 바실 홀은 책을 선물했다. 홀이 선물한 책은 조선 땅에 최초로 전해진 성경이었다. 홀은 귀국 뒤 조선항해 경험을 『한국 서해안 항해기』에 남겼다. 지금 기념관에 있는 성경책이 당시 바실 홀이 준 것과 똑 같은 판본이다. 서천군은 2015년 1611년판 킹 제임스 성경 찾기에 나섰다. 이 판본은 초기 300여 권이 발간됐으며 세계적으로 30권 정도가 남아있다. 그 중에 거래되는 것은 5∼6권에 불과했다. 수소문 끝에 미국 애리조나 주의 피닉스 고(古)성경박물관에 이 책이 소장중인 사실을 확인하고 구입했다.  김방현 기자 kim.banghyun@joongang.co.kr http://news.joins.com/article/21952142 [출처: 중앙일보] 3억 원짜리 성경책 보러 오세요
2017-10-21 09:27:09 | 관리자
안녕하세요?   사랑침례교회는 매해 미디어 자료를 할 수 있는 한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2017년도에는 다른 해와 마찬가지로 국내에 계신 분들에게 미디어 선교 자료를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참고: 2016년 미디어 선교 무료 책자 CD 배송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news&write_id=1857   이번에 새로 만든 자료는 4장의 CD입니다.   1. 2016년 누가복음 CD: 2015년의 1편(1-39번)에 이은 2편으로 누가복음 24장까지의 강해 설교   40. 성도는 하나님의 대사요 군사다, 41. 예수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들, 42. 너도 가서 그와 같이 하라, 43. 한 가지가 필요하다, 44. 예수님 편이냐, 마귀 편이냐?...77. 수탉의 울음소리와 베드로의 회개, 78. 만신창이가 되신 예수님, 79. 십자가 고통의 의미, 80. 십자가 죽음의 의미, 81. 그분은 부활하셨느니라, 82. 닫힌 마음의 해결책_엠마오, 83. 부활의 확증과 사명   2. 2016년 성경 맥잡기 CD:  여호수아기부터 사무엘기상하까지의 맥잡기와 <취약함의 아름다움> 시리즈 설교 5편   여호수아-사무엘기 맥잡기 시리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 이후 가나안 땅 정복을 다루는 여호수아기와 가나안 땅에 정착해 살면서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이스라엘의 삶을 그린 사사기와 룻기 그리고 이스라엘 왕정 시대를 연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의 핵심을 보여 준다.   <취약함의 아름다움> 시리즈1. 하나님도, 사람도 취약한 사람을 좋아한다.2. 취약함의 표준 모델 삭개오3. 취약한 자의 특권_간절한 기도4. 취약함을 모르는 부자의 패망5. 절망적으로 취약해야 근성의 사람이 된다   3. 주님의 교회 계획/하나님의 일꾼과 섬김/하나님의 뜻과 인도 바로 알기 CD 왜 우리 교회에 오는가? 교회란 무엇인가? 지역 교회의 기능, 교회의 골격, 교회의 장기, 교회의 근육, 교회의 머리, 교회 리더십의 필요, 목사와 집사의 자격과 직무, 예배란 무엇인가? 참 예배와 헛 예배 등   섬김 사역의 정의, 사역자는 무엇 하는 사람인가?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역, 섬김 사역의 기초는 인격이다, 섬김 사역의 척도는 희생이다, 섬김 사역의 특권은 성장이다, 섬김 사역의 모델은 예수님이다 등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나? 좋은 결정 내리기, 하나님은 이메일이나 카톡을 보내지 않으신다, 느낌은 하나님의 인도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성경, 바이블 코드와 하나님의 뜻, 결혼과 목회를 위한 의사 결정 등   4. 마제스티 찬송가 CD: 교회에서 녹음한 100여 곡의 찬송가들이 수록됨 1.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284장), 2. 완전한 사랑(216장), 3. 내게 오라(520장), 4. 주가 나의 맘에 기쁨 주시네(523장), 5. 빛 가운데서(524장)...96. 참새 돌보시는 주님C(465장), 97.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154장), 98. 오 베들레헴 작은 골(90장), 공중에는 노래(467장), 99. 훗날에(566장) 저희가 무료로 같이 보낼 수 있는 책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죽음의 공포 극복하기>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notice&write_id=717 2. <이슬람교 바로 알기>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notice&write_id=716  3. <성경의 역사: 어둠속의 등불>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notice&write_id=650 이 외에도 한두 권 더 있습니다.   올해의 CD들과 책들을 무료로 받기 원하시는 분들은 다음으로 주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미디어로 선교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한 사람이 5세트를 받아서 주변의 관심 있는 분들에게 꼭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미리 누구에게 줄지 고민하시고 5세트를 채울 수 있으면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죽음의 공포 극복 하기>, ‘구원 바로 알기’ CD는 불신자들에게 주면 유용할 것이고,<이슬람교 바로 알기>, <성경의 역사: 어둠 속의 등불> 등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확고한 진리를 추구하려는 신자들에게 주면 유용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들므로 이런 자료들이 불필요한 곳에 전달되거나 방치되어 썩지 않도록 대상을 미리 생각하고 기도한 뒤 주문해서 가져다주시기 바랍니다. 선착순으로 주문하는 1,000분(각 사람에게 5세트)에게 보내드리면 이 행사는 끝납니다. 가능하면 전국의 여러 지역에서 주문이 있기를 원합니다. 주문하실 때는 다음 정보를 반드시 순서대로 쓰셔서 다음 이메일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주소, 성명, 우편번호, 전화번호의 명목은 생략하고 그 내용만을 예문처럼 기록함> (예) 서울시 동작구 논고개로 77 사랑아파트 123동 1910호/홍길동/12345/010-1234-5678.   이메일 주문 보내실 주소: okhapjks@naver.com 반드시 이 순서로 보내주셔야 나중에 라벨을 만들어 쉽게 보낼 수 있습니다. 부탁드리지만 반드시 우편번호도 적어 주셔야 합니다.    발송은 11월 말경에 이루어질 것이고 추후에 정확한 날짜를 공지하겠습니다. 참고로 이메일로만 주문을 받습니다. 의문 사항이 있으면 역시 위의 이메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패스터 정동수 드림   (*) 이것은 미디어로 선교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한 사람이 5세트를 받아서 주변의 관심 있는 분들에게 꼭 나누어 주어야 함을 기억하시고 주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2017-10-20 16:21:28 | 관리자
번제 제물은 반드시 흠없는 수컷이어야 했고 동물이어야 했습니다. 더욱이 그 시기에는 번제를 집행할 제단이나 제사장도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실제 사람을 태울수는 없는 것이었다고 봅니다. 아마도 입다는 집에서 키우던 가축이 반기기를 바랐나 봅니다. 왜냐하면 입다는 이미 아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017-10-17 14:09:43 | 장영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