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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결과 약12153개
2010년에는 명함보다 즈금 크게 캘린더 광고지를 만들려고 합니다. 남자들 뒷주머니에 넣는 지갑에 딱 들어가는 사이즈입니다(9.0*6.5 센티미터). 두꺼운 아트지에 양면 코팅을 해서 만들므로 보기에 좋을 것입니다.   안에 달력이 있으니 받는 사람도 도움이 되고 주는 사람도 큰 광고물보다 나을 것 같습니다.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이트에 들어와 보겠지요.   최소 수량이 16000장이라고 하니 이것을 내년에는 같이 소화합시다. 주변에 교회 다니는 분에게 주면 됩니다.   아파트에도 꼽고.   어떻게 할까 미리 생각해 보세요.   한 묶음에 100매가 있습니다. 묶음 단위로 보내겠습니다. 원하는 수량을 주소, 핸드폰과 함께 webmaster@KeepBible.com으로 알려 주세요.  무료로 보내니 받으시면 꼭 소화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 수요일경부터 발송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2-07-19 11:23:21 자유게시판에서 이동 됨]
2009-12-24 16:42:12 | 관리자
2010년에는 명함보다 즈금 크게 캘린더 광고지를 만들려고 합니다. 남자들 뒷주머니에 넣는 지갑에 딱 들어가는 사이즈입니다(9.0*6.5 센티미터). 두꺼운 아트지에 양면 코팅을 해서 만들므로 보기에 좋을 것입니다.   안에 달력이 있으니 받는 사람도 도움이 되고 주는 사람도 큰 광고물보다 나을 것 같습니다.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이트에 들어와 보겠지요.   최소 수량이 16000장이라고 하니 이것을 내년에는 같이 소화합시다. 주변에 교회 다니는 분에게 주면 됩니다.   아파트에도 꼽고.   어떻게 할까 미리 생각해 보세요.   감사합니다.
2009-12-24 16:36:50 | 관리자
    1. 성경 낭독 오디오 MP3 CD   킹제임스 흠정역 신약 성경과 잠언을 성우가 녹음한 MP3 CD입니다. CD 1장에 마태복음부터 계시록까지 그리고 잠언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가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세트만을 구입할 때 5,000원한 세트 이상 구입할 때 두 번째 세트부터는 2,000원다른 책이나 CD와 함께 구입할 때에도 한 세트에 2,000원   2. 정동수 목사 설교(상한 갈대의 외침 1,2) 2008, 2009년 설교 CD   2008년과 2009년에 정동수 목사가 설교한 것들 가운데 몇 편을 정리하여 녹음한 MP3 CD입니다. 상한 갈대의 외침 1, 2008년(26편)상한 갈대의 외침 2, 2009년(26편) 가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세트만을 구입할 때 5,000원한 세트 이상 구입할 때 두 번째 세트부터는 2,000원다른 책이나 CD와 함께 구입할 때에도 한 세트에 2,000원 상한 갈대의 외침  설교 2008년 1. 상한 갈대2. 연기 나는 심지3. 거룩한 두려움4. 성령님의 신음 소리5. 주여, 말씀하소서6. 거의 그리스도인7. 호사다마 8. 큰 기쁨의 좋은 소식9. 하나님의 말씀의 욕구10. 크리스천 메달리스트11. 메시아가 오신 이유12. 그리스도의 부활13. 오늘 너희가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14. 요르단을 건너자15. 어떻게 새 일을 할 수 있을까?16. 예배의 본질17. 바른 예배의 요소18. 합당한 예배19. 배도한 예배20. 에벤에셀의 하나님21. 복음의 권능22. 기초들이 무너지면23. 주를 찬송하라24. 모든 것이 합력한다 25. 낙담한 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26. 역전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상한 갈대의 외침  설교 2009년1. 다시 태어나야 한다2. 천국 티켓3. 믿음으로 걷기4. 그리스도인5.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6. 인생을 허비하는가?7. 예수님 나라의 법칙8. 자유를 주시는 예수님9. 은혜의 법칙10. 주님의 영으로 된다11. 큰일들을 구하지 말라12. 하나님의 법칙13. 그리스도인의 평강14. 마음이 문제다15. 마음 부수기16. 율법주의 부수기17. 과거 부수기18. 성령 충만의 증거19. 답답해서 죽고 싶을 때20. 넓혀 주시는 하나님21. 신랑이 임한다22. 휴거의 징조: 종교통합23. 마지막 때의 징조24. 노아의 때25. 귀머거리와 남은 자26. 민족의 회개   이 CD들은 크리스마스 이후에 배송됩니다.  감사합니다.   (*) 위의 MP3 CD는 마음대로 복사해서 배포해도 됩니다.
2009-12-24 12:47:07 | 관리자
1. 성경 낭독 오디오 MP3 CD   킹제임스 흠정역 신약 성경과 잠언을 성우가 녹음한 MP3 CD입니다. 1장에 신약과 잠언이 모두 둘어 있습니다. 2. 정동수 목사 설교(상한 갈대의 외침 1,2) MP3 CD   2008년과 2009년에 정동수 목사가 설교한 것들 가운데 몇 편을 정리하여 녹음한 MP3 CD입니다.CD1: 상한 갈대의 외침 1, 2008년(26편)CD2: 상한 갈대의 외침 2, 2009년(26편) 상한 갈대의 외침  설교 CD1 2008년 1. 상한 갈대2. 연기 나는 심지3. 거룩한 두려움4. 성령님의 신음 소리5. 주여, 말씀하소서6. 거의 그리스도인7. 호사다마 8. 큰 기쁨의 좋은 소식9. 하나님의 말씀의 욕구10. 크리스천 메달리스트11. 메시아가 오신 이유12. 그리스도의 부활13. 오늘 너희가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14. 요르단을 건너자15. 어떻게 새 일을 할 수 있을까?16. 예배의 본질17. 바른 예배의 요소18. 합당한 예배19. 배도한 예배20. 에벤에셀의 하나님21. 복음의 권능22. 기초들이 무너지면23. 주를 찬송하라24. 모든 것이 합력한다 25. 낙담한 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26. 역전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상한 갈대의 외침  설교 CD2 2009년1. 다시 태어나야 한다2. 천국 티켓3. 믿음으로 걷기4. 그리스도인5.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6. 인생을 허비하는가?7. 예수님 나라의 법칙8. 자유를 주시는 예수님9. 은혜의 법칙10. 주님의 영으로 된다11. 큰일들을 구하지 말라12. 하나님의 법칙13. 그리스도인의 평강14. 마음이 문제다15. 마음 부수기16. 율법주의 부수기17. 과거 부수기18. 성령 충만의 증거19. 답답해서 죽고 싶을 때20. 넓혀 주시는 하나님21. 신랑이 임한다22. 휴거의 징조: 종교통합23. 마지막 때의 징조24. 노아의 때25. 귀머거리와 남은 자26. 민족의 회개   감사합니다.   (*) 위의 MP3 CD 두 세트는 마음대로 복사해서 배포해도 됩니다.
2009-12-24 12:40:22 | 관리자
각 교회마다 처한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헌금에 대하여 어떤 획일화된 규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아래 사진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한국 교회에는 헌금의 종류가 너무 많습니다. 십일조, 감사헌금, 생일헌금, 주일헌금, 각 소속기관별 헌금, 성탄헌금, 추수감사절 헌금, 고난주간 헌금, 부활절 헌금, 맥추절 헌금, 신년감사헌금, 송구영신 감사헌금, 성전건축헌금, 장학헌금, 목양헌금, 선교헌금, 일천번제 헌금 등... 그리고 그 중에서는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헌금봉투도 있습니다.   물론 각각의 교회마다 특별한 사정이나 추구하는 목표가 있어서 일시적으로 어떤 목적을 위한 헌금을 드리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게 꼬박꼬박 의무적으로 납부해야 하는 세금도 아닌데 "이번 주에 헌금을 냈느냐, 안 냈느냐?" 확인 도장을 받게 하고, 심지어 헌금봉투에 성도들의 사진을 인쇄해서 넣고, 은행 적금처럼 다달이 얼마씩 분할 납부를 하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약정서를 작성하게 하는 것은(만약 약속대로 못 내면 하나님 앞에 맹세를 한 그 성도는 얼마나 마음에 부담감과 죄책감을 느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9-12-23 19:25:50 | 관리자
                처녀와 영원한 동정녀   어제 KBS에서 방영한 다큐 프로그램 <인도전통 결혼식과 오남축제>를 시청했습니다. 방송 중 인도의 여신들을 그린 벽화가 화면에 잠시 나타났는데, 어린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여신의 모습이 눈에 띄네요. 그 장면을 보다가 아내가 "저건 분명히 힌두교의 여신인데 왜 카톨릭의 마리아와 비슷한 모습일까?"라고 묻습니다. 히슬롭이 지은 <두 개의 바빌론>이라는 책에서 읽었던 전세계에 퍼져있는 여신숭배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부부간 대화가 이사야 7:14로까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탄절이 다가오면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설교를 자주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설교 중에서 자주 인용하는 말씀 중 하나가 이사야 7:14 말씀이지요. 그런데 수많은 현대 역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예수님께서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신 것을 부인합니다. 또한 로마카톨릭 역본들은 이 말씀을 변개하여 "한 처녀(a virgin)"를 그들의 용어인 "성모, 영원한 동정녀"(The virgin)로 바꾸어 놓고, 이를 마리아 숭배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흠정역: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한 표적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보라,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개역: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공동번역: 그런즉,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주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 ㉠"젊은 여인"이라고 옮길 수도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가톨릭역: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언자 이사야에게 분명히 "처녀"라는 단어를 사용하도록 하셨는데, 예수께서 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신 것을 믿지 않는 인본주의 신학자들이나 원어성경주의자들은 히브리어 "알마"가 "젊은 여자"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며 "처녀" 대신 "젊은 여인"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젊은 여인을 영어로는 레이디(lady)라고도 부릅니다. 구글 검색창에 our lady 라는 단어를 입력해서 찾아보시면, 이것이 로마카톨릭에서 그들이 섬기는 "하늘의 여왕 성모 마리아"를 부르는 호칭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겁니다.   한글에서는 관사라는 것이 없어서 그냥 "처녀"라고 번역되었지만, virgin에 부정관사 a 를 붙이느냐 정관사 the 를 붙이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최근에 나오는 영어 역본들이 1611년 킹제임스 성경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KJV: Therefore the Lord himself shall give you a sign; Behold, a virgin shall conceive, and bear a son, and shall call his name Immanuel.(사 7:14)   NKJV: "Therefore the Lord Himself will give you a sign: Behold, the virgin shall conceive and bear a Son, and shall call His name Immanuel.   NIV: Therefore the Lord himself will give you a sign: The virgin will be with child and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will call him Immanuel.   NRSV: Therefore the Lord himself will give you a sign. Look, the young woman is with child and shall bear a son, and shall name him Immanuel. 현대 영어역본들은 KJV의 "a virgin"을 "The virgin"이나 "the young woman"으로 바꾸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정관사 the 의 용법은 참 다양합니다. ① 앞서 나온 명사를 되풀이할 때 ② 서로 잘 알고 있는 사물을 가리킬 때 ③ 뒤에 수식어가 올 때 ④ 종류 전체를 대표할 때 ⑤ 유일한 것, 천체, 방향, 계절 등 ⑥ 최상급 ⑦ 서수 앞에서 ⑧ 계량 단위를 나타낼 때 등. 그런데 이사야 7:14 말씀의 앞부분에는 한 번도 처녀나 여인을 의미하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정관사 the 를 붙인 것은 여기서의 the 가 앞서 나온 어떤 명사를 한정하여 가리키는 "그, 그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a virgin은 한 처녀를 의미하지만, the virgin은 영원토록 처녀로 있는 존재, 영원한 동정녀를 의미합니다. 즉 이교도들이 숭배하는 동정녀 아스타르테, 세미라미스, 베스타, 다이아나, 키벨레 등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로마카톨릭 역본들에서는 그들이 하늘의 여왕으로 섬기고 있는 마리아에 대한 숭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런 KJV의 "처녀"(a virgin)를 "영원한 동정녀"(The virgin)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역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고 구원자를 필요로 하는 존재였음을 보여줍니다.   내 영이 하나님 곧 내 구원자를 기뻐하였나니(눅 1:47)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한 처녀(a virgin)였지, "성모"(the virgin)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녀는 맏아들인 예수님 이외에도 여러 형제 자매를 낳았기 때문에 영원한 동정녀가 아닙니다(막 6:3).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세와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니냐? 그의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그분으로 인해 실족하니라(막 6:3).   로마카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신격화시키고자 the virgin 이라고 하지만, 유일한 것을 나타내는 정관사 the 는 그런 유한한 인간에게는 쓸 수 없고, 요한복음 14:6 말씀과 같이 유일한 길, 유일한 진리, 유일한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만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the way)이요 진리(the truth)요 생명(the life)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요 14:6).
2009-12-23 19:24:40 | 관리자
질문   성경강해(요한계시록, 창세기) 동영상으로 잘 경청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창세기 강해 26과를 공부하면서 제가 알고 있는 것 하고는 좀 상이해서 그런데요.... (창9:28-29)을 설명하면서 노아 사망후 2년 뒤에 아브라함이 출생했다고 하는데 제가 계산한바로는 40년간을 같이 생활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노아할아버지께 영향을 많은 영향을 받아 믿음의 사람이 되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위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노아의 나이를 기준으로 해서 그 후손들의 출생년도를 계산해 보겠습니다.     1. 노아의 홍수는 노아 600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창 7:6,11).   (창 7:6, 킹흠정) 땅 위에 물들의 홍수가 임할 때에 노아가 육백 세더라.     2. 아르박삿은 홍수 후 2년에 태어났습니다(창 11:10).   (창 11:10, 킹흠정) 셈의 세대들은 이러하니라. 셈은 백 세에 곧 홍수 뒤 이 년이 지났을 때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그러니까 노아 나이 602년일 때 태어난 것입니다. 그 후의 자손들의 출생년도를 노아 나이 OO세로 환산해 보겠습니다.일일이 적어서 덧셈식 쓰기 귀찮아서 엑셀파일로 시뮬레이션한 자료를 첨부합니다.           노아나이 기준             첫자녀출산          출생년도   아르박삿 602 35 살라 637 30 에벨 667 34 벨렉 701 30 르우 731 32 스룩 763 30 나훌 793 29 데라 822 70 데라 장남 892         데라사망 1027   =아브라함 나이 75   아브라함 출생 952   노아 사망 950             3. 데라는 노아 나이 822세에 태어났고 그가 장남을 낳은 것이 노아 나이 892세입니다. 여기서부터 주의하셔야 됩니다. 데라는 칠십세 이후부터 아브람, 나홀, 하란을 낳았는데 도대체 누구를 가장 먼저 낳았을까요?   (창 11:26, 킹흠정) 데라는 칠십 년을 살며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우리는 은연 중 아브라함이 장남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데라의 나이 70세에 태어난 사람을 아브라함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성경을 "장자권 계승의 역사"로 보는 소설가 김성일씨의 [성경과의 만남] 등의 책이 영향을 미친 바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 성경은 장남의 역사가 아니라, 두번째 사람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 에서와 야곱, 므낫세와 에브라임, 그리고 아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등에서 보는 바와 같습니다.   다시 원래 족보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데라의 가족은 갈대아우르에서  출발하여 가나안을 향해 가다가 하란에서 머물렀습니다. 데라는 하란에서 205세에 죽었습니다(창 11:32).   (창 11:32, 킹흠정) 데라의 생애는 이백오 년이었으며 데라가 하란에서 죽으니라.   데라의 출생년도는 노아 나이 822세인데 그가 205세까지 살았으므로, 데라가 죽은 해는 노아 나이 1027년(물론 이 시기라면 노아는 이미 죽었지만 노아력으로 계산하고 있음)이 됩니다. 데라가 죽고 나자 하란에 머물러 있던 아브라함이 가족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출발합니다(행 7:4).   (행 7:4, 킹흠정) 이에 그가 갈대아 사람들의 땅에서 나와 하란에 거하였고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그분께서 그를 거기에서 지금 너희가 거하고 있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하란을 떠날 때의 나이가 75세입니다.   (창 12:4, 킹흠정) 이처럼 아브람이 주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떠나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자, 그럼 계산을 해 볼까요?  데라가 사망한 해 = 노아 나이 1027세(이미 죽었지만 노아력으로 하자면) =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아브라함이 태어난 해는 1027 - 75 = 노아 952세 되는 해   즉, 노아 나이 952세에 아브라함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노아가 950세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창 9:29, 킹흠정) 노아의 전 생애가 구백오십 년이었으며 그가 죽으니라.   그러니까 노아가 죽은 지 2년 뒤에 아브라함이 출생한 것이 맞습니다.더불어 데라가 첫 아들을 낳은 것은 노아 나이 892세이고, 아브라함을 낳은 것은 노아 나이 952세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아브라함이 장남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예수안에>출판사에서 발간한 [성경바로보기] 책 422쪽에 성경 연대기 표가 나옵니다.계산하기 귀찮은 분들은 그 도표를 참고로 하셔도 됩니다.
2009-12-23 19:10:54 | 관리자
                영상 문화 시대에 필요한 청각 교육   비디오 세대와 시각 우위의 사회   흔히들 요즈음 젊은 세대를 가리켜서 비디오 세대, 영상 세대라고 부릅니다. 요즈음 청소년들은 책을 읽기보다는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보는 것을 더 좋아하고, 직접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휴대폰 문자메시지나 메신저를 이용한 채팅을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이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과 새로운 매체의 보급으로 인한 사회 환경의 변화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상대방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수동적으로 듣기보다는, 능동적 감각 기관인 눈을 사용하여 적극적으로 정보를 추적하고 자기 눈으로 확인하며 시각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을 더 선호하는 현대 문화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리는 공기 중에서 짧은 시간 동안 진동하다가 곧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보존이 어렵고, 말하는 이의 발음 상태나 듣는 이의 주의집중 정도에 따라 메시지가 잘못 전달될 수도 있습니다. 반면 시각을 통해서 전달되는 정보는 종이, 돌, 자기매체 등에 저장이 되어 동일한 내용을 여러번 반복하여 열람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또한 문자나 도형으로 표시된 정보는 소리에 비해 객관적이며 메시지의 왜곡이 적은 편입니다.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청각 정보보다는 시각 정보를 더 우월한 것으로 간주해 왔습니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있는데, 사람 셋이 모여서 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없는 호랑이도 있는 것처럼 만들 수 있다는 뜻입니다. 거짓말도 여러 사람이 반복적으로 하면 진실처럼 들리기도 한다는 뜻인데, 이는 청각 메시지는 조작과 왜곡이 쉽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불완전한 청각 정보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볼 것을 권유하는 "백문이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또한 "말하기와 듣기"는 대부분의 사람이 갖추고 있는 능력이지만, 글을 해독하고 쓸 수 있는 능력은 교육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평민의 "말"보다는 지식인의 "글"을 우대하는 유교 문화도 이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이러다보니 우리 말 자체에는 듣기와 관련된 표현들보다 보기에 관련된 표현들이 훨씬 많고 종류도 다양합니다. 듣기에 대해서는 "듣다, 엿듣다, 귀를 기울이다, 귀담아 듣다"와 같은 몇 가지 표현들이 있지만, 보기에 대해서는 "보다, 엿보다, 째려보다, 노려보다, 쏘아보다, 쳐다보다, 내려보다, 돌아보다, 살펴보다, 깔보다, 얕보다, 넘보다, 돌보다, 봐 주다, 본때를 보여주다" 등 다양한 언어표현들이 발달해 있으며, 심지어는 시각으로 확인할 수 없는 맛이나 냄새도 "간을 보다, 맛을 보다, 맡아보다"로 표현할 정도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전통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문들이 편집 방향을 "읽는 신문"에서 "보는 신문"으로 바꾸었고, 인터넷 게시물에도 사진이 없으면 "시각적 증거"(사진)를 요구하는 댓글들이 달립니다. 개인 블로그나 인터넷 카페에서도 사진이 있어야 조회 수가 높아지고, 사진이 있어야 사람들이 믿어줍니다. 사진 없이는 글을 쓸 수 없는 게시판도 있으며, 이런 게시판에 글을 쓰기 위해서 "짤방용"(게시물 짤림방지용, 사진이 없어 게시물이 삭제 당하는 것을 방지하는 수단) 사진을 억지로 올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누군가가 자기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는, 자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무언가를 보여주기를 바라는 현대인들의 시각 편향 현상을 나타내는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듣기에 대한 오래된 기억   제가 어렸을 때에는 일상 생활에서 가장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매체가 라디오였습니다. 그 때만 해도 텔레비전은 아직 널리 보급되지 않았고, 신문에는 한자를 비롯하여 어려운 단어들이 너무 많아서 쉽게 읽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지요. 제가 어릴 때 듣던 라디오는 어린 아이 주먹만한 건전지 8개를 직렬로 연결하여 넣어야만 진공관에 불이 켜지면서 한참 뒤에 소리가 들리는 큰 가방만한 것이었습니다. 조금 지나서 손바닥만한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등장했고, 그 다음에는 집적회로를 사용한 소형 라디오가 시중에 보급되었습니다.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라디오는 참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매체였습니다. 초창기 라디오가 귀하던 시절, 라디오는 마치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람하듯이 많은 사람들이 집단으로 청취하는 매체였습니다. 시골에서는 이장님 댁에 있는 라디오에 스피커를 연결하여 동네 느티나무에 올려두고 여러 사람들이 함께 라디오 방송을 공유하며 들었습니다. (그래서 맥루한 같은 학자는 라디오가 고대 부족사회의 전통으로 돌아가게 하는 매체라고 합니다. 모닥불을 둘러싸고 모여서 족장의 말씀에 모든 부족민들이 귀를 기울이던 고대사회를 재현한 것이라고 하지요. 히틀러가 라디오를 이용하여 독일 국민들을 하나로 결집시킨 것도 바로 이런 라디오의 특성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라디오가 소형화되고, 가격이 내려가고, 매체 내부에서 스피커와 같이 무거운 부분을 빼고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연결하여 듣게 하면서부터 점차 이것이 혼자서 듣는 사적인 매체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저희 집에서도 그 당시에는 온 가족이 함께 라디오 앞에 모여서 뉴스를 듣고, 라디오 연속극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일곱 살 때, 저희 동네에서는 처음으로 저희 집에 텔레비전이 들어왔습니다. 저희 집이 다른 집보다 형편이 넉넉했던 건 아니고, 친척 중 한 분이 미군부대 근처에 살면서 미군들이 가져온 물건들을 한국 돈으로 바꾸어 주던 일을 하고 있었기에, 그 당시로서는 구하기 힘든 텔레비전을 한 대 얻게 된 것이지요. 당시 저녁 시간만 되면 어린이 만화영화를 보려고 동네 아이들이 다 저희 집으로 몰려올 정도로 텔레비전의 인기는 대단했답니다.   (혹시, 요괴인간, 서부소년 차돌이, 해치의 모험, 이겨라 승리호, 날아라 태극호, 달려라 번개호, 타이거마스크, 마징가 제트, 그레이트 마징가, 그랜다이저, 그로이저 엑스, 짱가, 마린보이, 우주소년 아톰, 달려라 009, 독수리 5형제, 공룡수색대, 정의의 소년 캐산, 닐스의 모험, 밀림의 왕자 레오, 요술공주 샐리, 요술공주 밍키, 빨강머리 앤, 쾌걸 조로, 철인 28호, 이상한 나라의 삐삐 등을 즐겨보신 분이 있다면 저와 거의 비슷한 세대일 겁니다.)   그런데 볼 때에는 아무런 생각없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텔레비전 화면만 멍하니 보면서 웃고, 울고, 긴장하고, 환호하고 하다가 막상 그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면 마치 꿈에서 깬 것처럼 언제나 뭔가 아쉽고 허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텔레비전을 볼 때에는 즐겁고 재미있지만, 실제로 그런 텔레비전을 보면서 스스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런 아쉬움이 들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반면, 라디오는 제게 언제나 흥미있는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오후 5시에 시작하는 어린이 프로그램 <무지개동산>과 라디오극 <마루치 아라치>는 제가 즐겨듣는 방송이었고, 저녁시간의 뉴스나 라디오 연속극도 재미가 있었습니다. 화려한 화면도 움직이는 영상도 없는 라디오가 제 관심을 끌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라디오라는 청각 매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장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청각 매체 시대에서 시각 매체 시대로   원래 인간이 처음에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은 시각 매체인 문자가 아니라, 청각 매체인 목소리였습니다. 역사학자나 문화인류학자들은 소리로만 의사소통을 하던 미개한 사람들이 문자가 발명된 이후 지식과 정보를 축적하는 능력이 향상되어 문명이 발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이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아담은 결코 돌도끼를 휘두르며 짐승을 사냥하던 원시인이 아니라, 높은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고래는 제외하고)의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그가 아주 뛰어난 두뇌와 지성을 소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에 처음으로 시각적인 문자가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신 "표(a mark)"로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자는 인간이 범죄한 이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에 등장했습니다. 문자 기록이 널리 보급된 것도 노아 홍수 이후의 일입니다. 노아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아주 오래 살았고, 기억력도 뛰어났기 때문에 모든 정보를 암기하여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말로써 전달하여 물려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문자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땅에 내리신 홍수 심판이 있은 후로, 인간의 수명이 점점 짧아지고, 사람들이 지녔던 우수한 능력이 점점 사라지면서 그로 인해 나타나는 지식과 정보의 단절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문자를 널리 사용하게 된 겁니다.   옛날 음유시인들은 호머의 <일리아드>나 <오딧세이>같은 장편 대서사시를 모두 암송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그 정도의 기억력을 갖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문자가 발명되고 널리 보급된 이후, 사람들은 점점 하나님께서 주신 암기력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우리들 중 대부분은 그런 좋은 능력들을 자신도 모르게 점차 잃어가고 있습니다. 제 경우만 하더라도 이전에는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웠고, 1번부터 70번까지의 반 친구들 이름을 순서대로 다 외웠고, 주요 기관과 친구들의 전화번호도 모두 다 외웠는데, 지금은 전화번호부나 수첩을 찾기도 귀찮아서, 휴대폰에 등록된 전화번호를 검색해서 통화 연결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게다가 문자가 발명되고 인쇄술의 발달로 신문이나 책 등이 대량으로 복제되어 전파된 후로는 사람들이 점점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고, 스승에게 묻고 배우며,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기보다는, 책을 읽으면서 저자나 주인공과 상호작용을 하고, 책을 스승으로 삼고, 신문을 읽으면서 마음 속으로 현실을 비판하고 혼자 마음 속으로 토론하는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점을 들어 학자들은 인쇄술의 발명이 개인주의와 민주주의를 촉진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책은 스스로 읽으며 생각할 기회라도 제공하지만, 텔레비전이나 영화와 같은 영상물은 미리 정보를 가득 채워서, 완전히 만들어진 내용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때문에 정보의 수용자들로 하여금 더 이상 그것을 수용하는 과정에 참여하게 하거나, 제공되는 내용에 자신의 독창적인 상상력을 덧붙일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마샬 맥루한(캐나다 출신의 문명비평가, 매체사학자)의 미디어 이론에 의하면, 라디오가 제공하는 청각 정보는 영화나 텔레비전과 같은 시청각 정보에 비해, 정보의 정세도(definition, TV의 해상도와 같이 정보의 조밀한 정도)가 떨어진다고 합니다. 예컨대 사진에 비해, 캐리캐쳐나 만화는 정세도가 낮으며, HDTV에 비해 흑백 아날로그 TV가 정세도가 떨어지며, 600만 화소의 디지털카메라에 비해 30만 화소의 휴대폰 내장 카메라는 정세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정세도가 떨어지는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의 경우, 그 정보를 제대로 수용하기 위해서 수용자는 정보의 빈 여백을 메우고자 그 정보에 자발적으로 참여(invlovement)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영화의 경우에는 잘 짜여진 이야기 구조, 카메라의 움직임과 영상 효과를 통한 자연스러운 장면 처리, 현실세계와 유사한 살아 움직이는 이미지(사실은 24분의 1초 단위의 불연속 프레임의 나열이지만)를 통해서 아주 정세도가 높은 정보를 제공합니다. 여기에는 정보의 수용을 위해서 영화의 관객이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보면서 즐기면 됩니다. 그런데, 동일한 내용을 만화책으로 만들면, 만화의 한 컷과 다음 컷은 불연속적인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 컷들 사이에는 많은 벌어진 틈(동작과 동작 사이, 장면과 장면 사이의 생략된 부분)이 존재합니다. 만화책을 보는 사람은 그 사이의 여백에 해당하는 부분을 자신의 머리 속으로 상상하여 그 내용을 재구성해야만 의미를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동일한 내용을 이야기로 꾸며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서 전달하게 되면 정보의 정세도는 더욱 떨어지게 됩니다. 정보의 정세도가 떨어지는 대신 수용자는 주어진 정보를 토대로 하여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머리 속에서 재구성하여 이해합니다. 정보가 조밀하게 꽉 차 있는 "토끼와 호랑이" 비디오를 보여주거나 그보다는 약간 정세도가 낮은 그림책을 보여주면 아이들은 그 내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아이들은 호랑이의 모습에 대해서 화면이나 그림책에 나온 그 모습으로만 지각하지, 머리 속으로 다른 모습의 호랑이는 상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옛날에 토끼 한 마리가 호랑이를 만났는데..." 라고 음성으로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떤 아이의 머리 속에는 바위에 기대누워 있는 호랑이가 그려지고, 다른 아이의 마음 속에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호랑이가 토끼를 위협하는 장면이 떠오르고, 또 다른 아이의 상상 속에서는 토끼와 호랑이가 모두 옷을 입고 두 발로 서서 이야기하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합니다. 즉, 정보의 정세도가 낮을 경우 수용자는 정보 수용과정에 자발적으로 개입하고 참여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참여 과정을 통하여, 수용자는 자신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활용하여 능동적으로 정보를 수용하게 됩니다. 또한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독자는 그 매체에 몰입하게 됩니다. 학생들이 라디오 음악방송을 들으면서 방송진행자(DJ)에게 빠져드는 것이나, 히틀러의 라디오 연설에 독일 국민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하며 그에 동조한 것이나, 루스벨트 대통령이 노변정담 프로그램이라는 대국민 라디오 연설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라디오라는 청각 매체가 가지고 있는 이런 특징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단위 시간 내에 전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나 정보의 정세도, 이용의 편의성 등을 따진다면 단연 시각 매체, 그 중에서도 시청각 정보를 제공하는 영상 매체가 청각 매체보다 더 우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각 매체는 시각 매체가 갖고 있지 않은 장점들, 즉 수용자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며, 창의적인 사고를 촉진시키며, 수용자의 몰입을 유도한다는 좋은 점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들으라, 이스라엘아!   성경 말씀은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경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은 우리의 혼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벧후 2:8).   (벧후 2:8, 킹흠정) (이는 저 의로운 사람이 그들 가운데 거하며 그들의 불법 행위를 보고 들으면서 날마다 자기의 의로운 혼을 괴롭게 하였기 때문이니라.)   물론, 보는 것과 듣는 것을 모두 조심해야 하겠지만, 우리는 그 중에서 특히 "보는 것"을 더 조심해야 합니다. 이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눈으로 "보는 것" 때문에 죄를 범하였습니다(창 3:6). 아간은 여리고 성에서 노략한 물건들을 "보고" 탐심을 일으켜 죄를 범하였습니다(수 7:21). 다윗은 지붕 위를 걷다가 이웃집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여인이 "보기에" 아름다우므로 죄를 범하였습니다(삼하 11:2).   (창 3:6, 킹흠정) 여자가 보니 그 나무가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이므로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한 자기 남편에게도 주매 그가 먹으니라.   (수 7:21, 킹흠정) 내가 노략한 물건들 중에서 바빌로니아에서 만든 좋은 옷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나가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그것들을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것들을 내 장막 한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고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니라.   (삼하 11:2, 킹흠정) 저녁때에 다윗이 자기 침상에서 일어나 왕의 집 지붕 위에서 걷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지붕에서 보았는데 그 여인이 보기에 매우 아름다우므로   이교도들은 자기들이 믿는 신들을 섬기기 위하여 여러 가지 종류의 형상들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기묘한 문양이 들어간 부적을 만듭니다. 중세 로마카톨릭에서도 믿는 자들이 성경을 소유하거나 읽는 것을 금하고, 그 대신 성당 벽화를 그려서 성경 내용을 보여주고, 마리아 상, 성인들의 상을 만들어서 그것을 섬기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교도들이 만들어서 섬기는 그림, 부적, 형상들과 같은 시각 자료들을 다 파괴하도록 하셨고(민 33:52),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것들을 만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출 20:4).   (민 33:52, 킹흠정) 그 땅의 모든 거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며 그들의 그림과 부어 만든 형상을 다 멸하고 그들의 산당을 다 허물며   (출 20:4, 킹흠정)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언의 "말을" 믿지 않고,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아야만" 믿겠다는 도마에 대해 주님께서는 책망하시며, 보지 않고도 믿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요 20:29, 킹흠정)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도마야,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었으나 보지 않고도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세상 왕국들과 그것들의 영광을 보여주며 예수님을 시험했던 마귀는(마 4:8), 지금도 성도들을 "안목의 정욕"으로 유혹합니다(요일 2:1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가 눈에 보이는 세상에 관심을 두지 말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하셨으며(고후 4:18), 보는 것으로 걷지 말고 믿음으로 걸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고후 5:7).   (요일 2:16, 킹흠정)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은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나느니라.   (고후 4:18, 킹흠정) 우리는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바라보나니 보이는 것들은 잠깐 있을 뿐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은 영원하니라.   (고후 5:7, 킹흠정) (우리는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하노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눈으로 들어오는 시각 정보에 대해서 주의할 것을 거듭 강조하셨고, 그 분께서 자기 백성들을 가르치실 때에는 주로 청각 매체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그 분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기를 원하시며(신 6:4), 또한 자녀들에게 "말하여" 말씀을 가르치도록 하셨습니다(신 11:19).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기관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고 강론하는 것을 듣고 울며 회개하였습니다(느 8:8-9).   (신 6:4, 킹흠정) 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한 주시니   (신 11:19, 킹흠정) 또 그것들을 너희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네가 네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서 걸을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그것들에 관하여 말하라.   (느 8:8-9, 킹흠정) 이와 같이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에서 책에서 명료하게 낭독하고 의미를 알려 주어 그들로 하여금 그 낭독하는 것을 깨닫게 하니라. 온 백성이 율법의 말씀들을 듣고 울므로 디르사다인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서기관인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친 레위 사람들이 온 백성에게 이르기를, 이 날은 주 너희 하나님께 거룩한 날이니 애곡하지 말며 슬피 울지 말라, 하고   이처럼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고 교육한 방법은 시각 정보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부분 청각 정보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 시대에 시각 매체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천지창조의 장엄한 광경을 환상으로 보여주실 수도 있었고, 그들에게 앞으로 세상에 오실 메시야의 초상화를 그려서 집집마다 붙여놓게 하실 수도 있었으며, 지금도 그 분께서 원하시면 밤하늘의 별자리 배치를 바꾸어서 하늘에 요한복음 3:16 말씀을 새겨 놓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백성들에게, 또한 우리 믿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 귀에 말하는 법규와 법도를 들으라"(신 5:1), "평생토록 자기 곁에 두고 그 안의 것을 읽으라"(신 17:19), "주의 말씀을 외치라"(사 40:6),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행 5:20)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청각을 통한 교육을 중요하게 여기셨다고 생각합니다.   영상 문화 시대의 청각 교육   제게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둘 있습니다. 이 아들들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제 목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저는 아내가 임신을 했을 때, 엄마 배 속에 있는 아들에게 동화도 들려주고, 찬송도 불러주고, 편지를 써서 읽어주기도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제 목소리를 들으면 배 속의 아이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며 태동을 하곤 했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아들들은 제 목소리를 듣고, 저를 잘 따릅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말을 할 수 있게 된 후로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든 후에 직접 목소리로 성경 말씀을 이야기로 꾸며서 들려주고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자란 아들들이 유치원에 다니면서부터는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신 성경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글을 배우기 전부터 아들들에게 성경 구절을 한 마디씩 나누어서 들려주고 그것을 외우도록 했는데 지금도 어른들 못지 않게 암송을 잘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로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친구들의 영향을 받아 유희왕 카드, 만화책, 컴퓨터 게임 등의 시각 문화에 빠져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기독교 서점에 데려가도 글자가 많은 책은 안 읽고, 성경 만화만 보려고 해서 큰 일입니다. 이제는 만화와 컴퓨터 대신 제 목소리로 더 많이 아들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아들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겠습니다.   비록 각종 그림과 영상물이 넘쳐나는 영상 문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래도 저희 가정에서는 지속적으로 청각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 읽기입니다. 매일 아침 가족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다들 한 자리에 모여서 성경 말씀을 한 절씩 돌아가면서 읽고, 제가 성경 말씀을 강론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읽고 들은 말씀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에 대하여 찬양과 감사의 기도를 하거나, "내가 주께로 돌이켜야 할 것이 있는가?"를 생각하며 자백하는 기도를 하거나, "이 말씀에서 오늘 내가 순종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내가 믿어야 할 약속이 있는가?" 등에 대해 기도를 합니다. 밤에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들들이 성경책을 들고 제게로 와서 함께 성경 말씀을 읽습니다. 날마다 꾸준히 읽었더니 어느 덧 구약성경 중 시편과 잠언을 다 읽었고, 이제 며칠 후면 신약성경 읽기를 마치게 됩니다. 제 아들들은 아침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에는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저희 가정에서 시행하고 있는 자녀 교육의 특징은 청각 매체를 통한 말씀 교육, 즉 성경 강론과 성경 읽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들들을 부지런히 말로 가르치면서, 저 역시 청각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 읽기"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경을 소리내어 읽기"입니다. 저는 집에서 성경을 읽을 때에는 눈으로 성경을 보지 않고, 서재에 들어가서 크게 소리를 내어서 성경을 읽으면서 제 입으로 그 말씀을 제 귀에 들려줍니다. 이렇게 소리를 내어 성경을 읽으면 눈으로 보면서 귀로도 말씀을 듣게 되기 때문에 말씀을 두 배로 섭취할 수 있게 되며, 성경을 읽는 도중 머리 속에 다른 생각이 떠오를 틈이 없으며, 성경 말씀에 보다 더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혹시 성경을 눈으로만 보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이제부터는 한 번 말씀을 소리내어 읽어 보십시오. 그 차이점은 직접 해 보신 분들만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화려한 그래픽, 현란한 동영상,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들,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이 우리의 시선을 끌고 유혹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세상 영광에 현혹되지 않으려면,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에 속지 않으려면,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에 관심을 두고, 주님 앞에서 그 분의 말씀을 읽으며 잠잠히 그 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영상 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계 1:3, 킹흠정) 이 대언의 말씀들을 읽는 자와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그것들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때가 가깝기 때문이라.      
2009-12-23 18:37:46 | 관리자
                전능자를 두려워하지 않는자는 누구인가? (욥 6:14)     (욥 6:14, 개역)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   (욥 6:14, 킹흠정) 고난 받는 자를 그의 친구가 불쌍히 여길 것이로되 그가 전능자 두려워하기를 저버리는도다.   (욥 6:14, KJV) To him that is afflicted pity should be shewed from his friend; but he forsaketh the fear of the Almighty.   욥기 6:14을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욥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개역성경에 의하면,욥은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사람이었는데, 욥은 그런 자기의 모습(전능자 두려워하기를 저버린 모습)을 그의 벗이 불쌍히 여겨주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이건 좀 이상하네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는 책망을 해야지 왜 불쌍히 여겨야 한다고 할까요? 그러나 킹제임스성경에 의하면, 욥은 고난을 받고 있었는데 그런 욥을 친구들이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욥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으니 이것은 곧 그의 친구가 전능자 두려워하기를 저버린 것이라고 합니다.   등장인물들의 대결 구도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개역: (욥 = 피곤한 자 =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  vs  (그의 벗)킹제임스흠정역: (욥 = 고난 받는 자) vs (그의 친구 = 전능자 두려워하기를 저버리는 자)   욥기 6장은 데만사람 엘리바스의 말(욥기 4, 5장)에 대한 욥의 답변입니다.   (욥 4:1, 킹흠정) 그때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응답하여 이르되,(욥 6:1, 킹흠정) 그러나 욥이 응답하여 이르되,   따라서 욥기 6:14은 욥이 그의 친구 엘리바스에게 하는 말인데, 이 구절에서 "고난 받는 자"(개역에는 피곤한 자)는 욥이고, 그의 친구는 엘리바스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전능자 두려워하기를 저버린 자(개역,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는 누구일까요?   개역성경은 고난 받는 욥이 곧 전능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개역,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개역의 주장과는 달리 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욥 1:1).   (욥 1:1, 킹흠정) 우스 땅에 욥이라는 이름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더라.   하나님께서도 욥을 가리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라고 하셨고(욥 1:8, 2:3), 사탄도 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욥 1:9).   (욥 1:8, 킹흠정) 주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깊이 살펴보았느냐? 그와 같이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가 땅에 없느니라, 하시니라.   (욥 2:3, 킹흠정) 주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깊이 살펴보았느냐? 그와 같이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가 땅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움직여 그를 치게 하고 까닭 없이 그를 멸하게 하려 하였으되 그가 여전히 자기의 순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도다, 하시매   (욥 1:9, 킹흠정) 이에 사탄이 주께 응답하여 이르되,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나이까?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는 "전능자 두려워하기를 저버린 자"가 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전능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누구일까요? 그것은 바로 욥의 고난을 보면서도 그를 불쌍히 여길 줄 모르는 그의 친구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어떤 자인지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레 19:14, 킹흠정)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고 눈먼 자 앞에 걸림돌을 놓지 말며 오직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나는 주니라.   (레 25:17, 킹흠정) 그런즉 너희는 서로를 학대하지 말고 오직 너희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   (레 25:36, 킹흠정) 너는 그에게서 이자나 이득을 취하지 말며 오직 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네 형제가 너와 함께 살도록 하라.   (레 25:43, 킹흠정) 너는 그를 엄하게 다스리지 말고 오직 네 하나님을 두려워할지니라.   (신 8:6, 킹흠정) 그러므로 너는 주 네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켜 그분의 길로 걷고 그분을 두려워할지니라.   (잠 14:31, 킹흠정)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만드신 분을 모욕하되 그분을 존경하는 자는 가난한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위 말씀들에서 보는 것처럼, 약한 자를 괴롭히는 자, 이웃을 학대하는 자, 형제의 어려움을 악용하는 자, 종에게 인정을 베풀지 않고 엄하게 다루는 자, 주의 명령들에 불순종하는 자,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 이런 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입니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란, 주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서도 그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정죄하고 책망하며 그를 노리고 구덩이를 팠습니다(욥 6:25, 27).   (욥 6:25, 킹흠정) 바른 말들은 참으로 얼마나 위력이 있는가! 그런데 너희의 주장은 무엇을 책망하느냐?(욥 6:27, 킹흠정) 참으로 너희는 아버지 없는 자를 기죽게 만들며 너희 친구를 노리고 구덩이를 파는도다.   그래서 욥은 그들을 가리켜 "형편없는 위로자", "쓸모없는 의사들"이라고 했습니다.   (욥 16:2, 킹흠정) 그런 것들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형편없는 위로자로다.(욥 13:4, 킹흠정) 그러나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없는 의사들이니라.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분명히 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욥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지 않고 그를 정죄한 그의 친구들은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욥기 6:14을 개역의 번역대로 읽다 보면, 우리는 욥의 세 친구들처럼 "욥이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라고 정죄하며, 그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게 됩니다. 하지만, 욥기 6:14은 욥이 자기 친구 엘리바스에게 하는 말로서, "내가 고난 받는 것을 보면 너희가 친구로서 마땅히 나를 불쌍히 여겨야 할텐데, 너희는 그렇게 하지 않으니 너희의 행동은 전능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행동이다"라고 항변하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개역과 같이 욥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로 몰아부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욥기 6:14에서 전능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욥이 아니라, 고난받는 욥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욥의 친구들을 말합니다.
2009-12-23 17:07:15 | 관리자
                여호와를 주(LORD)라고 불러야 하는가?                이종훈님의 글에 대해 정동수 목사님께서 이미 답변을 해 주셨는데, 제가 그것과 연관하여 빠진 부분을조금 보충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종훈님의 글에 나타난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여호와라는 이름은 종된 이스라엘 자손에게만 한정적으로 주어진 이름이다.   2. 그들은 종이기 때문에 여호와를 주로 섬기지만, 우리는 그 분의 자녀이므로  (주종 관계가 아니므로), 여호와를 주로 부를 필요가 없지 않는가?  즉, 구원받은 이들에게는 여호와가 주가 될 수 없으므로 그대로 여호와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3.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 아버지의 이름은?   이제 각 질문 혹은 주장에 대해 한 가지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민족에게만 주어진 이름인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창세기 32:28에서 처음 등장하며,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등장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후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전에, 이스라엘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셨습니다. (킹제임스성경은 여호와를 주로 옮겼으므로 이해를 돕기 위해서개역을 함께 제시하겠습니다.)   (창 2:4,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창 2:4, 킹흠정) 땅과 하늘들이 창조된 때 곧 주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만들고 땅에 사람들이 번성하기 시작할 때부터 이미 사람들은 주(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창 4:26, 개역)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킹흠정) 셋에게도 아들이 태어나매 셋이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더라. 이런 기록으로 볼 때,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민족 신 개념이 아니며, 또 그 분의 이름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만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신이며, 이스라엘 영토에 한정된 신이라면, 다른 지역에서는 힘을발휘하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세상 중의 여호와", "땅의 한 가운데 있는 주"가 되심을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출 8:22, 개역) 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출 8:22, 킹흠정) 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이 거하는 고센 땅을 분리시켜 거기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것은 내가 땅의 한가운데 있는 주인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함이라.   물론, 사람들 중에는 주(여호와)를 이스라엘의 토속 신으로 이해한 사람들도 있습니다.시리아 사람들은 주(여호와)는 산의 신이기 때문에 평지에서 싸우면 자기네들이 이길 줄로 알았습니다.   (왕상 20:28, 개역)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붙이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왕상 20:28, 킹흠정) 하나님의 사람이 거기로 나아와 이스라엘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시리아 사람들이 말하기를, 주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무리를 다 네 손에 넘겨주리니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니라.   요나는 자기가 이스라엘 밖으로 달아나면 주(여호와)의 낯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욘 1:3, 개역)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욘 1:3, 킹흠정) 그러나 요나가 주의 앞을 떠나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일어나 욥바로 내려가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매 이에 그가 주의 앞을 떠나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뱃삯을 내고 안으로 들어가니라.   그 결과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시리아 군대는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서 패했고, 요나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바람과 바다와 고래까지도 다스리시는 주(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해 뜨는 곳에서와 서쪽에서 온 자들 모두에게 주(여호와)가 되시며, 주(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사 45:6, 개역)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6, 킹흠정) 이것은 해 뜨는 곳에서와 서쪽에서 온 자들이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라. 나는 주니라.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느니라.   (렘 32:27, 개역)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렘 32:27, 킹흠정) 보라, 나는 주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니라. 내게 너무 어려운 일이 있느냐?   이것은 주(여호와)를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도그 분을 주(여호와)라고 불렀고, 그 분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위로 하늘에서와 아래로 땅에서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수 2:11, 개역)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수 2:11, 킹흠정) 우리가 이 일들에 관하여 들을 때에 곧 우리 마음이 녹았고 또 너희로 인하여 어떤                 사람에게도 더 이상 용기가 남지 아니하였나니 주 너희 하나님 즉 그분은 위로 하늘에서와                 아래로 땅에서 하나님이시니라.   2.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주(여호와)는 주가 되시는가?   이종훈님은 하나님과 본질적 주종(主從)관계를 벗어나서 부자(父子)관계를 맺은 우리에게도 여호와가주(主)가 될 수 있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구세주이시니 당연히 주님이 되신다는 것은 이미 알고 계시리라고생각합니다. 지금 이종훈님의 마음 속에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은 "우리는 그 분의 자녀이며 종이 아닌데 여호와를 주(主)라고 불러야 하는가?" 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아마도 LORD와 Lord, lord 를 혼동한 데서 빚어진 의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출 3:15, 개역)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 3:15, 킹흠정) 하나님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너희 조상들의                 주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느니라,                 하라. 이것은 영원토록 나의 이름이요, 이것은 모든 세대에 이르는 나의 기념물이니라.(출 3:15, KJV) And God said moreover unto Moses, Thus shalt thou say unto the children of Israel,                 the LORD God of your fathers,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hath sent me unto you: this is my name for ever, and this is my memorial unto all generations.   "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이신 여호와는 킹제임스성경에서 LORD 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이 이름을 사람들이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하고 "아도나이"(主)라고 불렀기 때문에 영어성경에서도 LORD라고 적되, 모두 대문자로 표기합니다. 한글 번역은 "주"라고 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18:3에 나오는 "내 주여"는 "여호와여"가 아닙니다. 이것은 히브리어로 "아도나이"(主)라고 하며,킹제임스성경은 Lord 라고 첫 글자를 대문자로 표기합니다. 한글 번역은 역시 "주"라고 합니다.   (창 18:3, 개역)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창 18:3, 킹흠정) 이르되, 내 주여, 이제 내가 주의 눈앞에서 은총을 입었으면 원하건대 주의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고(창 18:3, KJV) And said, My Lord, if now I have found favour in thy sight, pass not away, I pray thee, from thy servant:   일반 사람들 사이에도 "주"라는 호칭이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헷 사람 에브론은 아브라함에게 "내 주여"라고했는데, 이것은 히브리어로 "아돈"이며, 킹제임스성경은 lord 라고 모두 소문자로 표기합니다. 한글 번역은"주"라고 합니다.   (창 23:15, 개역) 내 주여 내게 들으소서 땅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나와 당신 사이에 어찌 교계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창 23:15, 킹흠정) 내 주여, 내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그 땅 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그것이 나와 당신                 사이에 무엇이니이까? 그러므로 당신의 죽은 자를 묻으소서, 하니라.(창 23:15, KJV) My lord, hearken unto me: the land is worth four hundred shekels of silver; what is                 that betwixt me and thee? bury therefore thy dead.   이종훈님께서 말씀하시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나타낼 때에는 바로 이 "아돈"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이해를 돕기 위해 주인과 종이 나오는 구절을 예로 들겠습니다.   (창 24:9, 개역) 종이 이에 주인 아브라함의 환도뼈 아래 손을 넣고 이 일에 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더라(창 24:9, 킹흠정) 그 종이 자기 주인 아브라함의 넓적다리 밑에 자기 손을 넣고 그 일에 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더라.(창 24:9, KJV) And the servant put his hand under the thigh of Abraham his master, and sware to him                 concerning that matter.   여기서 주종 관계에서 "주인"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아돈"이며, 킹제임스성경은 이를 master 라고 옮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LORD)를 주(主)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그 분의 노예(종)이고 그 분이 우리의 주인(master)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호와(LORD)를 주(主)라고 할 때, 그 주(主)는 노예의 주인이라는뜻이 아니라,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스스로 계시는 분, 상천하지의 하나님, 모든 육체의 하나님,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 그 분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주(LORD)시며, 이방인들에게도 주(LORD)가 되시며,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도 주(LORD)가 되시며,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주(LORD)가 되십니다.   3.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 아버지의 이름은?   베뢰아의 김기동 목사는 삼위일체를 믿지 않고, 그것을 양태론으로 해석합니다. 양태론이란 하나의 존재가때와 장소에 따라서 상태만 바뀐다는 주장입니다. 즉, 어떤 한 사람이 있는데, 직장에 가면 "과장님"이 되고,집에 와서 아내에게는 "남편"이 되고, 아이들에게는 "아버지"가 된다는 식의 설명입니다. TV 부흥사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장경동 목사 역시 이런 식의 양태론을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베뢰아에서는 하나님은 한 분인데, 상태만 바뀐다고 합니다. 그 분이 하늘에 계실 때에는 하나님,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시면 예수님, 성도들 안에 들어가시면 성령님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하나님께서 육체를 입고 예수님의 모습으로 오셨을 때에는 하늘나라에서 성부 하나님의보좌는 공석으로 비워두었다는 이야깁니다.   (마 3:17, 킹흠정)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아마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는 하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미리 녹음해 둔 음성이었나 봅니다. 왜냐하면 베뢰아 주장대로라면, 하나님은 지금 예수님의 모습으로 트랜스폼한 상태라 하늘에는 안 계시거든요.   그리고, 막 14:36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께서 기도하신 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막 14:36, 킹흠정) 이르시되,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는   베뢰아 주장대로라면 성경에도 없는 성부 고난설과 성부 사망설이라는 교리가 나오게 됩니다.   (막 15:37, 킹흠정)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시니라.   막 15:37의 예수는 하나님이 사람 모습으로 변신하신 것이므로, 안타깝게도 성부 하나님께서 사망하신 게되어 버립니다. 온 우주만물을 조화와 질서 가운데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사망하셨으니 정말 큰 일입니다.그런데 누가 이 죽어버린 하나님을 살릴 수 있나요?   (행 3:15, 킹흠정) 생명의 통치자를 죽였도다. 그러나 그분을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셨으며                 우리는 그 일에 증인이니라.   행 3:15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리셨다고 합니다.베뢰아 주장대로라면, 십자가에서 죽은 그 예수는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이 사망하신 겁니다. 하나님이죽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다시 살리십니까? 이처럼 베뢰아의 양태론을 믿으면 이런 모순들에 빠지게 됩니다.   베뢰아의 양태론은 요약하자면, 하나님 = 예수님 = 성령님이라는 겁니다. 이런 잘못된 교리는 어디에서온 것일까요? 교리는 성경 말씀에서 나오는데(딤후 3:16), 잘못된 성경을 사용하면 잘못된 교리가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딤전 2:5, 개역)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킹흠정)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딤전 2:5, KJV) For there is one God, and one mediator between God and men, the man Christ Jesus;   개역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을 그대로 따르면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 계신 것이아니라, 오직 한 분만 계신 게 되어 버립니다. 성자 예수님이나 성령님은 그 하나님이 모습을 바꾸어나타나신 것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딤전 2:5을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한 하나님이 계신다"라고 해야 합니다.   베뢰아에서 하나님 = 예수님 = 성령님이시니, 하나님의 이름이나 예수님의 이름은 같다고 합니다.하나님 = 예수님 = 성령님  =>  하나님의 이름 = 예수님의 이름 = 성령님의 이름.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잘못 번역된 "개역 요한복음 17:11"입니다.   (요 17:11, 개역)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11, 킹흠정) 이제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이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키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11, KJV) And now I am no more in the world, but these are in the world, and I come to thee.                 Holy Father, keep through thine own name those whom thou hast given me,                 that they may be one, as we are.   개역은 요한복음 17:11을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개역의 번역대로 풀어보면,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이름을 주었는데("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을 주었다고 합니다.성자 예수님은 "예수"라는 이름을 쓰고 계신데, 이것이 아버지께서 주신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겁니다.그렇다면 성부 하나님의 이름도 "예수"라는 겁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7:11 말씀은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가 아니라,"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키사"입니다.   아직은 개역성경의 번역에 익숙하기 때문에 킹제임스성경의 표현이 어색하거나 낯설게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하지만, 바르게 번역된 킹제임스성경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시다보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참된 진리를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레아 사람들처럼 주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성경기록들을 탐구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많은 깨달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행 17:10-11, 킹흠정) [10] 밤에 형제들이 바울과 실라를 즉시 베레아로 보내니 그들이 그곳에 이르러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이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던 사람들보다 더 고귀하여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예수인가?"에 대해서는 아래 링크에 있는 게시물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예수인가?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02_02&write_id=193    
2009-12-23 16:50:13 | 관리자
      --------------------------------------------------------------------------------'神의 아들 → 神의 아이' 성차별 단어 퇴출되나 서울신문 원문 기사전송 2009-09-03 04:11   [서울신문]‘신의 아들’이냐, ‘신의 아이’냐.   영어권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성경책이 개정 25년 만에 재개정된다. 1일 AP통신에 따르면 NIV(New In ternational Version 뉴 인터내셔널 버전) 성경에 대한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비블리카’는 NIV성경 개정작업을 내년말까지 완료한 뒤 2011년 개정판을 인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번 개정 작업에서는 그동안 논란이 됐던 성차별적 단어들의 사용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이뤄진다.   비블리카는 앞서 1984년 NIV 성경의 첫 번째 개정판을 선보였으며, 2000년대 초반에는 젊은 세대를 겨냥해 단어들을 보다 ‘양성평등적’인 단어로 대체한 별도의 번역본 ‘투데이스 뉴 인터내셔널 버전(TNIV)’을 출간한 바 있다. TNIV에서는 ‘신의 아들들(sons of God)’이라는 문구가 ‘신의 아이들(children of God)’로, ‘형제들(brothers)’은 ‘형제 자매들(brothers and sisters)’로 바뀌었다.   그러나 보수파 신학자들은 성경 문구를 바꾸면 성경의 원뜻을 왜곡할 수 있다는 이유로 TNIV 출간을 강력히 비판해 왔다. 비블리카는 이를 의식, 이번 개정 작업에는 더 많은 신학자와 독자들을 참여시켜 개정 절차를 보다 투명하게 진행시킨다는 계획이다. 특히 보수파 성경학자들이 1965년 설립한 단체인 ‘성경번역위원회(CBT)’에 감수를 맡기기로 해, ‘신의 아들’이란 표현이 유지될 가능성이 있다. NIV 성경은 1978년 처음 발간된 뒤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3억부가 넘게 팔려 나갔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http://news.nate.com/view/20090903n01148--------------------------------------------------------------------------------   성경이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는 남성과 여성에 대한 표현을 "양성평등"이라는 허울좋은 핑계 하에 성별을알아볼 수 없는 모호한 표현으로 바꾸고자 하는 NIV 번역자들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처음에는 저렇게 양성평등을 한다면서 "아들들"을 "아이들"로 바꾸다가 그 다음에는 man 을 person이나 human being으로 바꾸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성차별을 없앤다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부르지 않고, "아버지 어머니 하나님", "어머니 하나님"으로 변개하게 될 겁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아마도 조만간 이단 안상홍 교회에서처럼 하나님을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하는 성경이나 찬송도 나오게 될 겁니다.   연합감리교단에서 만든 찬송가에는 이미 "어머니처럼 돌보시는 그리스도", "생명의 모태", "강한 어머니 하나님" 등과 같이 하나님을 여성으로 표현한 찬송가가 수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한인연합감리교회 홈페이지에는 하나님의 어머니로서의 속성, 즉 하나님의 여성성을 인정하고 가르쳐야 한다는주장이 공식적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성경에 나타난 남성과 여성에 대한 표현들을 왜곡, 변개시키는 배후에는 로마카톨릭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카톨릭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인데, 예수님을 마리아가 낳았으니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라고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교리에는 "마리아 숭배"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그 로마카톨릭의 마리아숭배가 본래 고대 바빌론의 여신숭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이제 로마카톨릭은 NIV 성경번역자들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여성성을 부각시키고, "하나님 아버지" 대신에 "하나님 어머니"라는 용어를 만들어내게 될 겁니다. 그리고,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의 여왕"(렘 7:18)을 섬겼던 것처럼,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지 못한 자들을 미혹하여 그들이 만들어낸 "하늘의 여왕"을 섬기도록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지, 어머니라고 부르신 적이 없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은언제나 대명사로는 he 로 표현했으며, 하나님을 she로 표현한 예가 없습니다.   로마카톨릭의 사주를 받은 NIV 번역위원들을 중심으로 성경말씀을 변개하는 작업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더 진리의 말씀에 견고하게 서서 바른 말씀을 선포해야겠습니다.  
2009-12-23 16:30:34 | 관리자
전 그 동안 즐겨찾기 주소를 자유게시판으로 연결해 놓아서 별 불편함을 몰랐는데, 외부에서 메인주소를 입력하면 시간이 지체되었던 게 그 때문이었군요. 이제는 확실히 접속 속도가 빨라진 것이 느껴집니다.
2009-12-23 16:26:21 | 김문수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메인 페이지가 조금 변경되었습니다. 가운데 있던 "인기 순위 글"을 "나누고 싶은 글"로 바꾸었습니다. 이전에는 인기 순위를 매기기 위해 접속할 때마다 글들의 접속 건수를 세다 보니 접속이 늦어졌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으로는 이런 방식으로 글을 올리려고 합니다. 접속 시간이 많이 단축된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09-12-23 15:43:13 | 관리자
신실한 한 형제님께서 좋은 글을 주셔서 킹제임스 성경 입문서에 넣었습니다. 이 글을 PDF 파일로 만들어 올립니다.   보시고 다른 분들에게 파일을 보내 주세요.   감사합니다.   저는 킹제임스 흠정역을 약 3년 전에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나름대로 흠정역 성경을 알리는 일에 힘쓰며 이 사역에 적게나마 합력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오시는 분들은 이미 저와 같이 흠정역을 쓰시는 분들이겠지만, 흠정역이 무엇인지 찾아보다가 오시게 되는 분들도 있는 줄 압니다. 이곳에는 흠정역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있지만 개인 사용자 입장에서 느낀 점을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다음 글은 처음 흠정역을 쓰고 나서 정리한 것으로, 홍보를 위해 개인 홈페이지에 실었던 것을 최근에 추가, 수정한 것입니다. 이 사이트에 있는 내용들과 덜 중복되는 내용 위주로 올립니다. 예전의 저처럼 흠정역에 대해 관심이 있거나 사용을 고려중인 분들께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어, 목적어, 단수, 복수가 명확한 성경 킹 제임스 영어성경을 번역한 한글판은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고 현재 국내에서는 두 세곳에서 나오고 있는데, 이미 많은 번역상의 실수를 드러낸 <한글 킹제임스>(말씀보존학회)는 공신력 면에서 믿을 수가 없고, 또 한 곳은 번역의 완성도 문제로 판매를 중지한 후 개정작업을 거치고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안에'에서 발행한 <킹제임스 흠정역>만이 믿을 수 있는 번역을 하고 있다. 이렇게 누군가 바른 번역을 하고 있으면 합력해서 그것을 사용하면 되는데, 굳이 자기의 이름을 건 자기식의 번역을 위해 많은 비용과 힘을 낭비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이 성경을 보면 반복되는 소유격이나 주어 등을 있는 그대로 나오는 횟수만큼 다 번역하고 복수와 단수를 명확히 하며, 의미전달상 어쩔 수 없이 추가된 단어까지 구분해 놓고 있다. 또한 권위 있는 표현이나 기존의 표현을 최대한 살리지만 어려운 말은 모두 쉬운 말로 교체했다. 그러나 기존 성경에 익은 독자들의 혼돈을 우려하여 대부분의 고유명사와 인물의 이름을 그대로 적용했다. 우리가 쓰는 한글 개역개정판 성경은 축약과 한자어가 많아 문장이 그리 길지는 않은데, 한글로 번역된 킹 제임스 흠정역은 축약된 부분을 복원시키고, 단어 대 단어로 모두 번역했기 때문에 개역개정판보다는 약간 길어진 듯한 느낌이다. 개역성경은 간결함의 장점 이전에 정확성을 먼저 염두에 두었어야 했다. 오래전에 번역됐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무튼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획득한 '간결함'이다. 그러나 어떤 장점도 명확함과 바꿀 수는 없다. 말을 줄이다 보니 한자가 등장하고. 많은 어려운 말들이 나온다. 어린 아이들은 뜻도 모르면서 무작정 외워 암송대회를 하기도 한다. 물론 그렇게 외워 놓으면 다 도움이 되고 마음밭에 새겨지기도 하겠지만, 말씀은 그 외형을 아는 것보다 거기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우선 아닐까. 개역성경과 현대역본들이 변개한 내용들 예수님이 마시지 않겠다던 것을 마셨다? :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 이 포도나무에서 난 것(포도즙)을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새롭게 마시는 그날까지 마시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복음서를 계속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에게 해융(스펀지 같은 것)에 적신 '신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고 나온다. 어떤 해설성경에서는 이것을 신 포도주와 계란과 물을 섞은 로마병정의 음료라고도 했고, 어떤 영어 성경에서는 이것을 '값싼 포도주'로도 번역하고 있는데, NIV에서는 wine vinegar, 즉 '포도 식초'나 '신 포도주'로 번역할 수 있는 말로 표현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어기고 돌아가시기 전에 포도주를 마셨다는 말씀인가? 이들은 단어를 추가해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있다. KJV에 보면 이것을 그냥 '식초(vinegar)'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KJV 번역자들이 말을 맞추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부분에서 그렇게 조율할 수도 없다. 변개되지 않는 본문에서 단어 그대로 번역하면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진다는 뜻이다. 오히려 왜곡을 위해 천주교 역본이 손질된 것이다.또 성경에는 예수님이 맛 보시고 거절하신 일종의 진통제인 '쓸개 탄 포도즙'도 나오는데, 이것도 '식초'로 같은 단어이다. 마가복음 15장 23절에서도 예수님은 몰약을 섞은 포도즙을 거절하신다.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제대로 된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도 포도주를 드신 것이 아니라 포도즙을 드신 것임을 알게 된다. 예수님이 어디에도 '와인'을 드셨다는 말이 나오지 않으려니와, 당시의 언어로 '와인'은 포도주와 포도즙에 동시에 쓰인 단어이므로 문맥을 분간해서 번역해야 한다고 한다.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을 먹는 유월절에 누룩이 든 술을 마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또한 예수님 자신이 유월절의 흠없이 완전한 희생양이 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 : 개역성경의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원래는 '요한'이 아닌 '요나'의 아들이다. 이것은 단순히 고유명사가 틀린 것이므로 치명적인 부분이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유대인들에게 아버지는 매우 중요한 의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자 바리새인들이 '그가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한다'며 분노했던 것이다. 성경의 인물을 구분할 때 그의 아비를 자주 소개하는 것은 동명이인의 구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16장 17절에 보면 개역개정에서도 '바요나 시몬아'라고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데, 바요나의 '바'란 '아들'이라는 의미이므로 '요나의 아들'을 뜻하는 것이다. 복음성가 중에 즐겨 부르곤 했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는 곡이 있는데 여태껏 잘못 불렀다니... 왜 이런 단순한 실수가 있는지 더더욱 개역성경을 신뢰하지 못하는 계기가 된다.   역자가 이해 못하는 단어의 변경 : 성경에는 우리의 이성이나 과학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말도 나온다. 예컨대 유니콘이라든지 용(dragon, 공룡)에 대한 언급은, 유니콘이 전설의 동물이라는 잘못된 지식과 사람이 살던 시대에 공룡이 안 살았다는 진화론적 선입견을 바탕으로, 유니콘은 들소로, 용은 뱀이나 시랑 등으로 독자를 위해(?) 알아서 변경했다. 이로 인해 독자들은 더욱 모호하게 되고 진화론에 대해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동물에게 영이 있다는 부분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혼'으로 바꾸는 등 많은 부분에서 변개를 통한 의미의 왜곡을 가져왔다.  종교성과 미신주의의 차이 :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아덴(아테네) 사람들에게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종교심)이 많도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NIV 등의 영어성경이 religious로 쓰고 있기 때문에 '종교성'이 된 것 같다. KJV에서는 superstitious, 즉 '미신적'이라는 말로 쓰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전체를 번역하고 있다. "내가 알고 보니 너희가 모든 것에서 지나치게 미신에 사로잡혀 있도다." 이 에피소드가 시작되는 부분에서 바울은 그들의 우상숭배 실태를 알고 영이 격동했다고 나온다. 또한 위의 미신적이라는 책망 뒤에 이어지는 바울의 이야기를 보면 우상숭배에 관한 이야기와 훈계가 계속 나오므로 더욱 확실한 증거라 하겠다. 그런데도 일부 목사들은 이 말씀을 들어서, 사람들을 훈계할 때는 우선 그들을 칭찬해야 한다면서 바울의 말을 그들에게 종교심이 많아서 하나님도 잘 섬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로 치켜 세우고 있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이래서 번역은 작은 실수 때문에 큰 개념이나 교리의 오해까지 불러올 수 있는 것 같다.   뜻이 모호하고 어려운 단어와 고유명사들이 개정된 예   개역성경 킹제임스 흠정역 (그리스도 예수안에 刊) 성경위치 구스 에티오피아 창세기 2:13 들소 (오역) 유니콘 민수기 23:22 등 시랑과 타조 용들과 올빼미들 이사야 23:20 발등상 발받침 이사야 66:1 기묘자 놀라우신 이 이사야 9:6 모사 계획자 이사야 9:6 묘성 플레이아데스 별무리 욥기 38:31 삼성 오리온 별자리 욥기 38:31 룻(나라 이름) 루디아(Lydia : 나오미의 며느리 '룻'은 Luth임) 에스겔 27:10 복술자 점쟁이 사무엘상 6:2 방백 통치자 에스더 1:21 감람 올리브 마태복음 24:3 분봉왕 사분(四分)영주 마태복음 14:1 참람한 말 신성모독하는 말 마태복음 26:65 쓰스 주피터 사도행전 14:12 허메 머큐리 사도행전 14:12 자주 장사 자주색 옷감 장수 사도행전 16:14 에비구레오 에피쿠루스 학파 사도행전 17:18 스도이고 스토아 학파 사도행전 17:18 아덴 아테네 사도행전 17:16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른 히브리서 5:10 진설병 보여 주는 빵 히브리서 9:2 양심에 화인 맞은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진 디모데전서 4:2 구리장색 구리 세공업자 디모데후서 4:14 무저갱 바닥없는 구덩이 요한계시록 9:1 황충 메뚜기 요한계시록 9:2    국어 표현상의 문제점을 보완 성경을 읽으면서 뜻을 여러번 생각하다가 결국 그냥 넘어간다든지, 다른 뜻으로 오해한다든지, 사전이나 쉬운 성경을 찾아본다든지 하는 일이 있는데, 킹제임스 흠정역을 보면 그럴 필요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경의 말씀과 거기서 다루는 이야기들이 나와는 관계가 먼 옛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고 가슴에 와 닿는다는 것이다. 내용이 더 많이 이해되기 때문.한 예로, 다음의 베드로 전서 2장 13~15절 말씀을 보자. 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14...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이 문장들의 의미를 단번에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다음은 같은 부분의 흠정역이다. 13... 너희는 주를 위해 사람의 모든 규례에 복종하되 왕에게는 최고 권위자에게 하듯 하고14... 총독들에게는 악을 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잘 행하는 자를 칭찬하기 위해 그분께서 보내신 자들에게 하듯 하라.15... 그리함이 하나님의 뜻이니 이것은 너희가 잘 행함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무식한 말을 잠잠하게 하려 함이라. 좀 길긴 하지만 훨씬 쉽다. 아니, 이제야 말이 된다. 흠정역으로 읽으면 뜻이 이해가 되고 마음에 더 와닿기 때문에 신앙에 대한 태도가 바뀐다. 모호한 표현이 모호한 개념을 낳고 모호한 개념이 어중띤 신앙자세와 미신적 신념 등을 가져오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잘못된 번역은 잘못된 신앙관을 가져온다 읽기 어렵고 뜻이 변질된 성경을 고수할 것인가? 지금까지 그 성경을 보고도 성령님은 역사하셨고 한국교회는 부흥했는데, 이제 와서 그것들이 다 무효라는 말이냐고 묻는 이들도 있다. 물론 우리가 지금까지 헛일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개역성경은 오랜 세월 보존된 성경의 권위를 잘 표현했고 또 간결하면서 복음도 담겨 있어서 한국교회의 발전과 신앙인들의 영적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단지 우리는 완전치 못한 것을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작은 실수들이 세월이 지날수록 거대한 오류의 개념들과 신앙행태를 낳고 점점 커져가는 모습을 보고 있다. 개역 한글판 성경은 애초부터 천주교에서 쓰는 (공인 본문이 아닌) 이집트 본문을 기초로 한 미국표준역에서 번역되었고, NIV 등의 일반적 현대역본들을 참고하여 수정되어 왔다. 예가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이것은 마치 박정희 시대에 발표된 김민기의 음반에 '아침이슬' 같은 중요한 곡들이 빠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저항을 위한 노래로 만든 중요한 의미를 지닌 노래들이 빠진 김민기의 음반은 그 나름으로 역할이 있고 감동이 있다지만 그의 핵심사상은 빠져 있다. 평론가들은 그 음반이 난도질 당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원본이 들어있는 음반을 찾는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 말하려면 원래의 음반을 빼놓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이야기들은 본래 연극 대본이므로 독서용으로는 마땅치 않아 영국의 찰스 램 남매에 의해 소설로 재구성된 것들이다. 어떤 번역서는 아예 저자를 '램'이라고 명기한 세익스피어의 책들도 있을 정도로 완전히 재창조된 것이 셰익스피어의 소설이지만 원래는 모두 희곡들이다. 그러나 세익스피어를 연구하려면 그의 희곡을 읽어야지, 재구성된 소설만을 읽어서는 안 되는 것이 당연하다. 일개 가수의 음반과 작가의 책도 이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원래의 것을 찾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고 또 마땅한 일 아닌가. 우리는 또한 일본이 역사교과서를 왜곡했다며 흥분한다. 그런 교과서는 많은 부분이 변조됐지만 아마도 성경이 변개된 양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또한 동북공정의 음모가 담긴 중국의 역사책은 어떤가. 그런데 이런 책들은 아무리 폐기하고 또 새롭게 바꾸는 노력이 있어도 어딘가에서 읽히고 있다. 독도가 일본땅이며 동해가 일본해라는 표기는 아무리 오류라고 목청껏 외쳐도 어딘가에서 변질되어 계속 책으로 발행되며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오고 있다. 그런 것처럼 변질된 성경도 계속 어딘가에서 영향을 미치며 그야말로 그들만의 진화를 거듭하여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역성경은 많은 중대 오류와 자잘한 실수의 원인이 되고 있기도 하다. 흠정역에서 뜻이 올바로 전달되는 예 삼위일체에 관한 명확한 번역 : 디모데전서 2장 5절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것을 여호와의 증인들은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자신들의 교리를 지지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There is one God'을 잘못 번역한 것인데, "한 하나님이 계시느니라"고 하는 것이 맞다. 그게 그 말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한 하나님'은 '(세 분이 모여) 하나이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마치 세 명이 모인 '한 가족'이 한 사람이 아니듯이 말이다. one을 1로만 받아들이면 이런 결과를 낳는다. '영'에 관한 무속적 표현의 정정 : '하나님의 신' 또는 '여호와의 신', '내가 주의 신을 떠나' 등에서 쓰인 신(神 : god)이라는 용어도 '신내림' 등으로 쓰이듯 무속적인 개념의 번역이므로 적절치 않다. Spirit of God은 '하나님의 영'으로 해야 한다. 정확한 성별 표기로 오해를 없앰 : 성경에는 성별을 명확히 번역해 놓아야 신학적, 교리적 오해가 싹트지 않는다. 성경의 천사는 모두 남자로 man이다. 이것을 '사람'으로 번역하면 천주교와 뉴 에이지에서 말하는 아기천사와 여자천사 등을 모두 인정하게 된다. 또한 디모데전서 3장 1절의 감독(목사)직의 요건에 대한 말씀에 나오는 man도 '사람'이 아닌 '남자'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 뒤에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고 나오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뉴 에이지 역본들이 한 '아들'을 주셨다는 말씀을 한 '아이'로 바꾸기도 하는데 작은 차이 같으나 큰 변질이다. 천사의 소속 : 개역성경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주의 천사'와 타락한 루시퍼의 명령을 따르는 '마귀의 천사'를 구분하지 않아 혼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으나 흠정역은 원문 그대로 표기함으로써 읽는 이들이 가질 수 있는 오해를 없앴다. 형통하게 하는 뇌물이 아니라 '선물' : 개역개정의 잠언에도 엉뚱한 번역이 많다. 그 일례로 잠언 17장 8절을 보면 "뇌물은 그 임자가 보기에 보석 같은즉 그가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게 하느니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뇌물을 이용하라는 것인가? 아무리 봐도 이상한 가르침이다. 동류라고 할 수 있는 NIV를 보면 분명히 bribe(뇌물, 미끼, 유혹물)을 쓰고 있다. 그러나 킹제임스 흠정역을 보면 "선물은 그것을 가진 자의 눈에 보석 같은즉 그것이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게 하느니라."로 나온다. 영어 킹제임스도 bribe가 아닌 gift를 쓰고 있다. 이것은 NIV 번역자들의 특성인 자의적으로 다시 해석하는 습관에 따라, 누군가에게 주어 일을 성사시키는 선물이므로 뇌물로 본 것이다. 개역개정은 이런 성경들을 참고로 하기 때문에 같은 과오를 저지른다. 그러나 순수한 마음으로 준 선물이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고 이는 반드시 대가성의 뇌물이 아닐 수 있다.  열두 '영'은 열두 '군단'이다 : 개역개정판에는 예수님이 순순히 잡히실 때 제자 중 하나가 분노하여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르는 경솔한 행동을 하자 꾸짖으시며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태복음 26장 53절)고 하셨다고 되어 있다. 틀렸다는 것은 아니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것인데, 내가 성경 지식이 없어서인지 해설을 보기 전에는 '열두 영'의 영(營)이 그냥 영(靈)인 줄만 알았지, 로마 병영(兵營)의 군단 편제를 뜻하는 것인 줄 몰랐다. 천사는 영적인 존재니까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말은 KJV에서 legion인데, '열두 군단'으로 번역해야 한다. 만일 나처럼 오해한다면 '열두 군단'과 '열두 영(靈)'은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를 논할 때 큰 차이이다. 사탄의 말 바꾸기 수법, 흠정역으로만 알 수 있다 마귀는 에덴동산에서부터 말 바꾸기를 했다. 하나님은 분명히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지만 마귀는 '반드시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또 그것을 먹으면 눈이 열리고, ('하나님과 같이'가 아닌)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고 속였다. 그 열매를 먹고 싶은 인간 이브의 욕심은 사탄의 질문에 들은 대로 답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가 죽을까 염려하노라'라고 했다고 말을 바꾸어 전한다. 왜곡과 변질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사탄은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교묘히 성경을 이용했다. 그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며 그는 시편 91편 11~12절을 써 먹는다. 개역개정으로 마태복음과 시편을 비교해 보자.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4장 6절, 사탄이 시편 91편 11~12절을 인용한 부분. 개역개정)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시 91:11~12, 개역개정) 배열만 좀 다를뿐 같은 내용이다. 이번엔 흠정역으로 두 곳을 비교해 본다. "그분께서 자신의 천사들에게 너에 관한 책무를 주시리니 그들이 자기 손으로 너를 받들어 언제라도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마태복음 4장 6절, 사탄이 시편 91편 11~12절을 인용한 부분. 흠정역) "그분께서 자신의 천사들에게 너에 관한 책무를 주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그들이 자기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시편 91편 11~12절, 흠정역) 어디가 다른지 언더라인이 보이는가? 시편 91편을 살펴보면 피난처 되시는 주 하나님의 날개 아래를 네 거처로 삼으면 이런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다가 만난 모든 길에서 피하게 해 주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마귀는 여기에 한 마디를 살짝 끼워 넣었다. 바로 시편에 없는 말 '언제라도(any time)'이다.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든지 말든지 모든 길에 천사가 '언제라도' 너를 보호한다고 교묘히 바꾼 것이다. 이 부분은 KJV에는 명확히 차이가 드러나 있지만 가장 많은 변개와 삭제를 한 NIV나 NASB 의 두 영어성경을 찾아 보면 이 차이가 없다. 시편의 말을 마귀가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옮기고 있다. 성경을 그대로 인용하는 '대언자(?) 마귀'라니.....!!  인간의 논리 전개를 위해 다양한 역본을 참조?  현대의 많은 영적 지도자들은 이 여러 가지의 변개된 성경을 인용하여 가르치고 있다. 심지어 여러 성경의 번역들을 예시하면서 자신들의 설득력을 더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개탄스럽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인데, 여기저기 다양하게 번역된 예를 들어 부연설명을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미국의 유명한 사역자 T의 책을 예로 들어 보자. T가 자기 메시지의 신빙성을 주장하기 위해 여러 역본들을 인용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 왜냐하면 말씀은 한 가지이고 사실도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목회자들도 이런 영향을 받아 한 구절로도 한 편의 설교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세세한 정황을 상상해 내는데 이것은 위험한 일이라 생각한다.다음은 T의 책에서 옮긴 내용으로 다윗과 골리앗의 에피소드에 관한 것이다. "특이하게도 앰플리파이드 성경에서는 다윗이 돌을 도시락 주머니에 넣었다고 말씀한다! 다윗은 싸우러 나가는 것이 아니라, 소풍을 가는 중이었다. 골리앗은 "내가 네 도시락을 먹겠다"고 허풍을 떨었지만, 정작 그는 다윗의 도시락 주머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몰랐다. 다윗은 자신을 하나님의 영광에 맡겼고, 기적이 일어났다(어떤 면에서, 다윗은 '록앤롤'의 선구자(?)였다. 그가 골리앗에게 돌을 던지자 거인이 넘어져 굴렀기 때문이다). 이건 그가 인정한 대로 '특이한' 소설이다. 다윗은 도시락이 아닌 양치기의 자루에 물맷돌을 가져갔고, 골리앗은 다윗의 도시락을 본인이 먹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너(다윗)의 살을 날짐승과 들짐승에게 주겠다!"고 했다. 또한 다윗은 도시락을 싸서 소풍을 간 것도, 소풍을 가는 마음 자세로 임한 것도 사실무근이다. 그는 왜 앰플리파이드 성경을 인용했을까? 이것은 의역성경이다. 말하자면, 벌써 노인이 됐을 다니엘이 사자굴에 빠진 이야기를 아이들용이라 해서 어이없이 꼬마 소년으로 삽화를 그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성경이야기'에 가깝다. 그가 조크로 덧붙인 '록앤롤'에 관한 이야기도 뜬금없다. '바위(물맷돌)'와 '구르다'라는 뜻의 Rock and roll을 말한 것인데, 20세기 중반에 디제이 알란 프리드에 의해 처음 사용된 이 말은 퇴폐적이고 강렬한 음악을 이르는 말로 남성의 성기와 차의 바퀴를 뜻하는 것으로, 카섹스를 의미하는 비속어라고 한다. 자신이 의도한 결론이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여러 성경을 인용하는 것은 그것들을 주장과 목적에 따라 선택적으로 골라 쓰고 싶은 유혹을 받기 쉽기 때문에 위험하다. 이는 양심없는 과학자들이 잘 쓰는 수법으로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이에 합치되지 않는 결과들은 모두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성경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들을 말씀에 비추어, 그리고 다른 성경적 정황이나 예표 등을 통해 유추해 내는 통찰력과 다른 내용으로 발전할 위험이 있는 소설적인 전개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T는 계속 써내려 간다. 예수님께서 배로 가다라(거라사) 지방에 내리셨을 때, 부정한 영 들린 자가 멀리서 보고 달려와 경배했다는 말씀이 있는데, 그를 지배하고 있던 2천 마리의 마귀들은 그의 찬양(경배)을 막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전에 예수님을 본 적도 없었지만 '무언가가 그를 주님께로 끌어당겼고', '필사적으로 주님을 찾았으며', '필시 1마일은 달렸을 것'이라고 전혀 성경에 없는 말들을 써 놓았다. 이런 상상이 과연 필요한 것일까. 책의 페이지를 늘이거나 1년 내내 해야 하는 설교 시간을 늘이기 위함일까? 그는 부정한 영 들린 광인(狂人)이 2천의 마귀들로 꽉 차 있었음에도 찬양할 수 있었고, 마귀들도 한 사람의 찬양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찬양의 힘은 위대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광인이 와서 '경배하고 부르짖으며' 예수님께 자기들을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는 대화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과 마귀들의 대화로 보이며 2천의 더러운 영들이 굴복한 것은 광인의 찬양 때문이라기 보다 예수님의 나오라는 '명령' 때문이었다고 성경은 정확히 말씀하고 있다. 귀신들이 돼지 떼로 옮겨간 것도 예수님의 허락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전적으로 예수님의 능력이었다. 그분의 권한과 능력을 간과하거나 축소해서는 안 된다. 물론 T를 포함한 유명한 사역자들의 가르침에는 훌륭한 부분도 있고 위대한 통찰력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말씀을 멋대로 부풀리거나 편리한 대로 추측하여 연결시키면 안 될 것이다. 이는 마치 있지도 않은 수만 년 전(?)의 말 뼈다귀나 원시인의 진화 체계를 맞추기 위해 엉뚱한 시대의 것을 끼워 넣거나 원숭이뼈를 깎고 색칠까지 하는 일처럼 자칫 큰 실수로 이어질 수도 있다.아무리 위대한 사역자라도 말씀에 비추어서 판단해야 한다. 이 책에 국내의 인기있는 저명한 사역자들이 극찬의 추천사를 한 것은 주목할 일이다. 이밖에도 릭 워렌 등 많은 이들이 여러 역본을 인용하며 자기 논리를 펴나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성경 하나로 이단 교리부터 모든 논리를 전개할 수 있음을 고려할 때 매우 위험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말씀을 다루는 일, 두려움으로 임해야 지금의 성경이 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대부분 기존 교단의 사람들이다. 더구나 더욱 개악된 새 성경을 기존 성경의 저작권 만료시점이 오기 전에 억지로 배포하여 의무 사용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들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기득권층이었던 사제들처럼 이젠 교단이라는 이름 때문에 바른 성경에 대한 자기 소신이 있다 해도 이제와서 바꿀 수가 없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목사가 천국 가기 어렵다는 우스갯소리도 이래서 나오는 것 같다. 교단 조직이란 곧 밥줄이며 하나님보다 무서운 것이 되었다. 바로 이런 때 바른 소리를 할 수 없다면 진리에서 떠나겠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왜곡된 역사교과서로도 어느 정도 역사를 알 수 있다. 일본이 한국을 점령한 사실도 나와 있다. 그런데 그런 침략이 근대화에 도움을 주고 문호개방에 순기능을 했다는 주장이 황당한 것 아닌가. 지금의 성경도 모든 부분이 드러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말씀에 대한 정확한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성경은, 읽으면서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 듣는 통로가 돼야 한다. 왜 하나님은 그토록 철저히 말씀을 보존하고 전해오셨는지, 왜 그토록 작은 부분의 차이를 명확히 하라고 하셨는지 알아야 한다. 요한계시록 끝에는 "이 대언의 말씀에 더하면 하나님께서 거기 기록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고, 빼면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몫을 빼시리라' 고 했다. 계시록뿐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은 지켜져야 하고 누구라도 마음대로 고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사탄을 본받는 짓이다. 결론적으로 기존 성경의 문제점은 약간의 물을 섞으면서 전체적으로 흐려지는 문제 정도가 아니라, 소량의 독을 타 넣음으로써 습관적으로 마시는 동안은 모르지만 그 독, 즉 함정적인 메시지에 면역이 된다는 것이다.   글이 좀 길었죠? ^^     감사합니다.  
2009-12-23 15:35:13 | 관리자
원본을 가져오다 보니 좀 보기 어렵습니다.  <런던타임즈 제10강> 아홉 번 째 글자 ‘복(福)’ 자를 보겠습니다. 備 (비) 也 (야) 。  ‘福’은 무슨 뜻일까요? 복(福)은 '비야(備也)'라고 했습니다. 복이라는 것은 '갖추었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은 바로 '오복(五福)을 갖춘 것'이었겠죠. 그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 '복' 자는 하나님이 나오고(示) 첫 번째(一) 만든 사람(口)이 나오고 에덴동산(田)이 등장함을 알 수 있습니다. 허신은 '부(富)' 자마저도 ‘복야(福也)’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자의 개념, 돈이 많은 줄 알았더니 돈이 많은 것이 참된 복이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1907년 전의 허신 선생은 『설문해자(說文解字)』를 통해 참된 복은 부(富)요, 부(富)는 곧 복(福)이라 하였으니, 이 ‘부(富)’자를 파자(破字)해 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집을 뜻하는 글자[宀]에 즉 하나님께서 위에서 아래로 통[丨]하셔서 천지를 덮으시고[冖] 창조하신 후에 한[一] 사람[口]을 에덴동산[田]에 두었다는 글과 똑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참된 부자는 재물의 많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겠습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어쩌면 허신은 당시 기독교가 중국에 전파되지도 않았는데 창세기 내용을 이렇게 한문으로 풀이하고 있었을까요? 누가 가르쳐서가 아니고 허신은 고대인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허신은 이렇게 한자 한 자 한 자에 대한 풀이를 해 나간 끝에 설문해자라는 보물을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고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가 신화와 사실이 혼합된 상태라면 우리의 역사는 과연 그들의 것과 동일 내지는 유사한가 아니면 전혀 별개의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씨는 단연 ‘김(金)씨’입니다.  그러나 김씨가 왜 김씨인가를 생각해 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김씨의 김은 곧 금(金)을 뜻하는 것으로, 金을 자신들의 성(姓)으로 삼은 것은 이들이 금을 숭배한 집단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금관이나 금동관이 출토되는 곳이 옛 신라 지역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금을 자신들의 성씨로 삼은 집단은 특이하게도 신라의 지배층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원뿌리를 찾으면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만주 북부에 존재했던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세력으로,  이들이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중앙아시아와 옛 고조선에서 갈라져 나온 세력으로, 이들이 바로 신라를 건국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일연의 『삼국사기』에서는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祖王)을 주몽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다시 말해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세력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의 시조 혁거세(赫居世)는 알에서 나온 아이이며,  이 난생의 아이가 여섯 부족 족장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된다는 특이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추대된 왕의 성은 박(朴)씨 입니다.  이것은 진한 12개국 가운데 경주 평야에 자리 잡은 사로국(斯盧國)의 군장이 박혁거세이며,  그가 진한연맹의 맹주에 오른 사실을 반영하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이 사로국이 점차로 이웃의 여러 소국들을 정복하면서 신라라는 초기 국가를 형성했던 것입니다. 신라는 진한연맹의 맹주이므로 신라인이 누구인지 알려면 먼저 진한인이 누구인지를 추적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수(陳壽)의 『삼국지』위서 동이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한은 마한 동쪽에 있다.  그 나라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 진(秦)나라의 괴로운 부역을 피하여 도망 온 사람들이 한(韓)나라로 오자 마한은 동쪽 국경 지역의 땅을 베어서 그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서로 부르기를 동무처럼 불렀으며,  진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았다." 진한 사람들은 진나라에서 왔으므로 마한 사람들과 언어가 달랐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신라인들은 고구려와 백제인들과는 다른 계통을 가진 사람들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호남과 영남 지역의 억양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진은 중국 서북부의 황하 상류 지역에서 일어난 나라로,  주변 환경이 농업에 부적합 하였기에 유목이 생업이었던 유목민들이 세운 나라였습니다. 물론 이들이 경주 지역으로 이주하기 전부터 이 지역에는 토착 농경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과 진나라 출신의 유목민들이 뒤섞여 살게 된 것이다. 이밖에도 옛 고조선의 유민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해 살고 있었습니다. 제가 중국의 임금을 소개할 때, 황(皇)과 제(帝), 왕(王)과 군(君)이라고 하였습니다. 중국의 역사책에는 임금은 같은 임금일지라도 서로 다른 격을 두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왕과 군은 제후국의 수준이었고, 황과 제는 천하를 호령하는 거국적인 인물을 지칭했습니다. 제후 중에서도 영토가 제법 규모가 있고 문화를 잘 소유한 그런 제후는 왕이라고 칭하였고, 농토가 좁고 군사력이 약한 제후는 군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시조인 단군을 군이라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봅시다. 방금 말씀드린 중국 임금 호칭의 격을 상기해 보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조상을 군(君)으로 격하시키지는 않았나 자문해볼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만난 사학자 한분은 우리 스스로 단군이라고 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단제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단군신화가 갖는 의미를 우리 2세들에게 전할 때 하나의 신화 정도로만 치부해 버린다면 우리의 찬란한 고대 역사는 한낱 이야기 거리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단기에서 서기로 바꿀 때 2333년을 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단군이 단 한사람이라면 어떻게 한사람이 2333년이나 살았다는 말이냐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세종대왕 훈민정음 서문에 옛 전자 모양을 모방했다는 대목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즉, 훈민정음을 창제하실 때 훈민정음의 모양을 옛 고전(古篆)의 모양에서 본떴다 하는 대목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전자(篆字)모양이 한자의 서체 중에 진시황제의 명을 받은 이사가 통일한 바로 그 전서체였다기 보다는 『환단고기1)』에 실린 가림토의 생김새는 한글 특히 훈민정음 창제 대 판본체의 한글과 비슷하기 때문에 ‘고전을 모방하였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을 훈민정음은 가림토를 본 떠 만든 것이라고 풀이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림토 문자2)는 단군 중에서도 세 번째 단군이 만든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단군을 단제로 승격함과 동시에 단제 개념이 황제처럼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의 개념으로 재정립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진시황제가 있었고 2, 3세 황제가 있었듯이, 우리도 1대 단제가 있었고, 2, 3대 단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단군신화는 신화가 아닌 엄연히 살아있는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제가 성경이 만든 한자와 우리의 건국신화를 결부 짓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민족은 조상 대대로 한 영토 속에서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에 동학(東學)이라고 하는 학문운동을 펼쳐 인내천 사상을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인내천이 무슨 뜻입니까. 사람 인(人)자, 이에 내(乃)자, 하늘 천(天)자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 하는 사상입니다. 제가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이, 창세기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셨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처럼 지어졌다는 사실이 여기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한국과 중국 일련의 고대사를 비교해 볼 때 동양의 문화는 둘이 아닌 하나의 문화로서 동양의 문화는 꽃피워졌을 것이고, 한자를 만들고 사용하는 데에도 그들은 둘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를 저는 ‘복 복(福)’ 자에서 다시 보거니와, ‘福’은 비(備)하다, 그리고 ‘현자지제야(賢者之祭也)’ 라고 하였습니다. 즉, ‘어진 사람이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 이 비(備)라고 하는 것은 ‘백순지명야(百順之名也)’라, 즉 ‘모든 순리대로 이루어진 것의 이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복 복(福)’ 자는 단순히 로또복권에서 이루어지는 재물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루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그리고 땅을 정복하라 는 말씀이 축약된 글자로 풀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示)께서 밭(田)을 주시되 한(一) 사람(口)을 창조하여 그에게 전권을 주셨다. 라는 복이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 시간에 ‘볼 시(示)’ 자는 ‘하나님 시(示’) 자요, ‘귀신 신(神)’ 자는 ‘하나님 신(神)’ 자로 바꿔 읽어야만 되는 까닭을 창세기의 말씀과 비교하면서 설명드렸습니다. 1) 환단고기(桓檀古記) 또는 한단고기는 1979년 출간된 한국의 고대역사서이며, 이른바 동이족에 대한 자부심과 그 위대함을 서술한 것이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진위 논란이 있으나, 남·북한 학계 모두 그 내용이 왜곡된 위서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2) 가림토(加臨土) 또는 가림다(加臨多)는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기원전 22세기에 고조선에서 만들어졌다는 문자이다.《환단고기》 중 〈단군세기〉에 따르면 3세 단군인 가륵 단군 재위 2년(기원전 2181년)에 단군이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게 했다고 한다. 역사학계와 언어학계에서는 가림토가 다른 문헌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점과, 편리한 문자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역사를 통틀어 가림토가 쓰였던 기록이 없고, 가림토가 씌여지거나 새겨진 유적 또한 없으며, 진위 논란이 있는 《환단고기》에 처음 등장한다는 이유로 가림토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는다. 1994년 12월 문화일보는 '잃어버린 고대문자' 가림토 문자 비석이 만주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면서 높이 2m, 너비 32cm의 탁본 한 점을 공개했다. 이는 사회학자였던 이상백(서울대학교)이 학생 시절이었던 1930년대에 만주 지역에서 직접 탁본한 것인데 정도화(진주 경상대학교)가 보관하다가 발표한 것이다.     성경이 만든 한자 제11강 <있을 재(在)>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박재성   <런던타임즈 제11강> 열 번 째 글자 ‘재(在)’ 자를 보겠습니다. 存 (존) 也 (야) 。 여기에서 또 하나의 글자를 소개하려 합니다. 그 글자는 있을 재(在)자입니다. 이 있을 재(在)자의 전서체를 보면 와 같은데, 사람을 뜻하는 자는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하여 하와를 만들었으니 사람 인(人)자가 되었다고 설명 드린 바 있습니다. 이 글자를 보시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어 땅 위에 두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에 대하여 허신은 ‘있을 재(在)’ 자는 ‘존야(存也)’라고 하였습니다. 있다는 뜻입니다. ‘있을 존(存)’ 자 역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는데 남자(子)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정확합니다. 오죽하면 단옥재도 이 在와 存자의 본뜻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음을 안타까워 한 나머지 이 부분을 다음의 해석을 곁들이고 있을까요? ‘금인(今人) 어재존자(於在存字) 개부득기본의(皆不得其本義)’라. 이것을 풀이해보면 ‘지금 사람이, 있을 재(在) 자와 있을 존(存) 자에 있어서 모두 그 본뜻을 얻지 못하였다’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본뜻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원래 있을 재(在) 자와 있을 존(存)자는 창세기 2장 7절의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합니다.  원래 ‘있을 재(在)’ 자는 ‘휼문야(恤問也)’ 라고 하였습니다. ‘恤’자는 불쌍한 사람을 찾아 구원하는 구휼할 휼(恤) 자이고, ‘問’ 자는 ‘물을 문(問)’ 자입니다. 또는 ‘찾을 문(問)’ 자입니다. 방문하다 할 때는 찾을 문(問) 자로 쓰입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 숨어버린 아담과 하와를 너 어디 있느냐 하고 찾아 물었습니다. 허신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있을 재(在)’나 ‘있을 존(存)’은 ‘있다, 없다’의 개념이 아닙니다. 놀라운 창세기의 비밀을 가지고 있으며, 청나라 중기의 고문학자인 단옥재도 허신으로부터 수백 년이 흐른 이제야 그 원뜻을 찾아내어서 밝힌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재(在)와 존(存) 자에 있어서 모두 다 그 본뜻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어서 에덴동산에 있게 한 사실을 이 있을 재(在) 자가 정확히 표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뜻을 잊은 채 한자를 전수하고 있으니, 우리는 그 잃어버린 한자를 다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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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2 13:23:45 | 허광무
개역의 번역 때문에 많은 교회에서 천국, 하나님의 나라 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는다는 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마음의 상태"나 사람들이 평화롭게 화합하며 사는 살기좋은 세상 정도로 생각하고, 오히려 여호와의 증인 교인들은 "왕국회관"을 만들고 자기들이 "왕국의 메시지"를 전한다고 하니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2009-12-22 12:40:50 | 김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