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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우리의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   빌립보서 3장과 로마서 8장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일곱 번의 메시지를 통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성령의 열매란 믿는 성도가 자신의 노력과 수고를 통해 맺어 보려고 하는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믿는 자 안에서 생산해 내시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아무리 의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의 성품을 우리 삶에서 표현해 보려고 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불가능함을 그간의 우리의 체험이 입증해 줍니다. 이는 우리의 지체 안에 성령님의 뜻과 목적을 대적하는 또 다른 본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죄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성경에는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명칭이 있습니다. 아담, 죄, 죄의 활동, 혹은 단순히 육신이라고도 합니다. 이 본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지니게 된 것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죄성은 우리가 거듭나서 갖게 되는 신성한 본성을 대적합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거듭난 성도의 삶에서 그 성도를 통제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에 일치하도록 이끄실 때 안에서 영적인 전투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육신은 성령님과는 반대로 거듭난 성도로 하여금 세상적인 것들을 추구하도록 만듭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영적 전쟁입니다. 만약 여러분들 중 아직도 이 전쟁에 대해 모르고 있다든가 여러분 안에 그런 전쟁을 겪어보지 못 했다면 그것은 당신이 구원받지 못했으며 지옥을 향해 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당신이 아무런 영적 갈등을 느끼지 못하거나 이 세상의 죄에 참여코자 할 때 아무런 저항도 못 느낀다면 그것은 당신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시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난 성도는 당연히 육신과 성령 간의 갈등을 알고 있고, 성령께서는 육신적 활동에 대해 안에서 항의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죄를 짓는데 있어 아무런 갈등도 없다면 그것은 당신이 진노의 자녀요, 마귀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의 최종 목적지는 불행하게도 지옥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면 그 사람 안에는 거듭난 영적인 사람, 즉 옛사람이 아닌 새사람이 생기게 됩니다. 새사람은 그 사람 안에서 구세주를 따르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비록 자주 실패를 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주님을 따르려고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르고자 할 때 우리 안에 그 길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로마서 8장 28절을 보십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 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 보니 모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 다음은 “목적”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목적이 무엇인지는 29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분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께서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29절을 보면 예정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예정에 대해 잘못 알고 계신 분이 있을 것 같아서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정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네 구절을 잘 읽어 보면 예정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와 관계있는 것이지 구원받지 않은 죄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죄인이 하늘나라로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가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말은 성경에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예정이란 구원받은 사람의 최종 모습이 어떻게 될 것인지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늘나라로 갈 것인지 지옥으로 갈 것인지는 전혀 예정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신학 사상은 그렇게 주장할지 모르나 성경은 그런 예정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정이란 내가 구원받은 후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모습으로 변화되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빌립보서 3장을 통해 나의 인생이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될 것인지 아니면 짐이 될 것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나의 인생이 기쁨이 될 것인지 슬픔이 될 것인지는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세워놓으신 목적에 내가 동의하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나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드시려고 일하고 계신다면, 이 목적에 따라 내 자신을 주님께 복종시키기 위한 나의 모든 행동, 생각과 결정은 인생을 훨씬 더 단순하고 즐겁게 해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나는 성령님과 동의하에 올바른 교제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모든 생각, 행동, 결정 등이 육신이나 자아나 세상을 향하게 되면 나는 즉시로 갈등과 고통, 그리고 문제에 둘러싸이게 될 것입니다. 이유는 내가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성령님의 역사를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 자녀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데 있어 부모들의 의무와 책임에 대해 배운 적이 있었습니다.[성령의 열매 6번] 올바른 부모를 가진 사람이라면 부모님께서 시키신 일은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명령을 기쁨으로 즐겁게 수행할 수도 있고 때론 억지로 괴로운 마음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숙제가 되었든 심부름이 되었든 반드시 해야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가 거듭난 사람이라면 우리의 최종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복종시켜 협력하면서 기쁨으로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도 있고 반대로 하나님을 거역하여 협력도 안하면서 저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라도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그는 결국은 목표를 달성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이루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이든 목적지에는 도달할 것이고 목표는 달성될 것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는 것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뜻이니까요. 이 시간에는 어쩌면 여러분과 상당히 비슷한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을 성경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회교도나 불교도나 힌두교도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여러분 대부분은 술주정뱅이 집안 출신도 아닙니다. 지금 보니 여러분들 중 상당수가 어려서부터 주일학교를 다녔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이방종교나 죄악으로 얼룩진 과거가 없는 사람이다 보니 주님께 와서 구원받고 나서도 “없애버려야 할” 옛 생활이 별로 없겠지요. 어려서부터 교회생활을 해 왔을 테니까요. 마약중독에 빠진 적도, 알콜중독에 빠진 적도, 간음이나 음행을 저지른 적도, 우상 숭배를 해 본 적도 없이 비교적 깨끗한 과거를 등에 업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빌립보서 3장을 보니 여러분처럼 종교적 분위기에서 비교적 깨끗하게 살았던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좋은 과거마저도 육신에 속한 것이라면 육신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을 믿기 전에 좋은 종교적 배경을 가졌다거나 그런 연유로 우상을 섬긴 적도 없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적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나쁜 배경을 지녔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보다 영적으로 우월하거나 뛰어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나쁜” 육신이든 “좋은” 육신이든 육신은 육신에 불과합니다. 불교적 육신, 도교적 육신, 이슬람적 육신이나 장로교적 육신, 침례교적 육신이나 똑같은 육신일 뿐이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 저희를 가르치사 주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그것이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알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빌립보서 3장 3절을 보겠습니다. 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뻐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자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 구원받은 사람은 세 가지를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첫째요,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뻐하는 것이 둘째입니다. 참으로 선한 것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세 번째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10살 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해서 13살 때 이미 주정뱅이가 되어 18세까지 술독에 빠져 지내다가 요양시설에서 22세에 구원받은 사람이 “육체를 신뢰하지 말라”는 말씀을 읽게 되면 그는 당연히 그 말씀에 수긍하게 됩니다. “맞습니다. 나는 주님께서 나를 찾아주셔서 구원받기 전에는 실로 형편 없었습니다. 저는 제 육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회복의 절실함을 느낀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을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번도 술을 입에 대본 적도 없는 사람, 태어나면서부터 교회에서 자란 사람, 평생 기독교의 테두리 안에서 지내온 사람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술 마시고 죄 짓는 육신이 나쁘다는 것은 인정하겠지만 교회 다니고 종교생활을 하는 육신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 짓는 나쁜 육신이든 “선행”을 하는 좋은 육신이든 모두 다 육신의 일이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기 전 못된 삶을 살았었기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합니다. 반면 어떤 그리스도인은 착한 삶을 살다가 구원받았으므로 오만합니다. 술주정뱅이가 구원받으면 그는 더 이상 술주정뱅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자라난 교만한 사람은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교만합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둘째는 그리스도를 기뻐하고, 셋째는 육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육신이 선한 것이나 좋은 것을 하더라도 신뢰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성전에 가서 기도하던 두 사람이 기억나십니까? 한 사람은 고개도 못 든 채 “하나님, 긍휼을 베푸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했지만 또 한 사람은 고개를 쳐들고 “나는 저 사람처럼 죄인이 아닙니다.”라고 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 사람을 보시고 저 사람은 겸손하니 내가 사용할 수 있으나 두 번째 사람은 자기가 잘못한 게 없다하니 잘못된 사람이므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어 4절을 보겠습니다. 여기 나오는 것은 “선한” 혹은 “좋은” 육신입니다. 나 역시 육체를 신뢰할 수도 있지만 그리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어떤 사람이 육체를 신뢰할 만한 것이 자기에게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여기 보니 여러분과 비슷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육체를 신뢰할 만한 사람, 엄마 뱃속에서부터 교회 다닌 사람들, 어려서부터 엄마가 들려주는 성경을 듣고 자라난 사람들, 학교도 가기 전에 요한복음 3장 16절을 줄줄 외던 사람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크신 축복입니다. 늘 교회에 다녔고 술집에는 한 번도 안 갔던 사람들 역시 하나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결혼 전에 순결을 지켰고, 댄스홀에는 얼씬도 안 해 본 것, 이 모든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중에는 다소 출신 사울보다 더 종교적이거나 더 헌신했던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하신 성령님께서는 이 사울이라는 사람보다 더 자기 자신의 육신을 신뢰할 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은 없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견해가 아니라 성경을 기록하신 분의 의견입니다. 즉 육신을 신뢰하고자 한다면 바울만큼 자격을 갖춘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의 육신은 훌륭한 육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5절에 보니 팔일만에 할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할례는 하나님과 유대 민족 간의 특별한 언약의 징표입니다. 그는 그 징표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줄기에 속한 자며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축복을 지닌 사람입니다. 게다가 베냐민 지파에 속했다고 합니다. 다른 지파들이 배교했을 때 진리를 고수하던 지파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 함은 모든 히브리인들 중 최고의 히브리인이란 뜻입니다. 누가 가장 뛰어난 사람인가? 회당에 가서 한번 물어보십시오. 바울입니다. 누가 가장 뛰어난 성경 지식을 갖춘 사람인가? 랍비에게 물어보십시오. 대답은 바울입니다. 마치 미국 역사상 누가 가장 뛰어난 웨스트 포인트맨인가 물으면 누구나 주저 없이 남북전쟁의 영웅이었던 “로버트 리” 장군이라고 하듯이 이스라엘의 모든 회당에 가서, 누가 가장 뛰어난 성경학도인가 라고 물으면 주저 없이 “다소 출신의 사울”이라고 대답합니다. 계속해서 5절을 보니 율법에 관하여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에 있는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이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전부 사실입니다. 율법에 관해 전혀 흠이 없는 사람, 참으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여러분과 저를 포함해 그 누가 아무리 어려서부터 주일학교에서 자라났다고 할지라도, 신약성경에 관한 한 흠이 없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겁니다. 구약성경은 신약성경보다 더 엄격합니다. 그 구약성경에 있는 모든 사항을 다 지킨 사람이라면 정말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사울의 가족, 친구, 지인, 선생님, 이웃, 동료 그 누구에게 물어볼지라도 한결같은 답변을 얻게 됩니다. 흠 없는 사람이란 답변 말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육신입니다. 그러나 육신은 육신일 뿐입니다. 7절을 주목하십시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이득이 되던 것들을 곧 그것들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손실로 여겼으며 이 말씀에 따르면 바울의 인생에 있어 사울에서 바울로 되었던 그날, 즉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던 그날 이래로 그의 모든 것, 그중에서도 굉장했던 과거도 다 내려놓아야 했던 시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높이 평가해 주었고 율법 앞에서도 훌륭한 것들이었으나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님과 비교해 보니 항상 최고로 화려했던 자신의 과거가 예수님과는 비교가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죄인이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같이 가장 종교적이었던 사람이요, 흠 없는 사람이라고 불렸던 사람이 그러하다면 여러분과 제가 아무리 좋은 종교적 배경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우리 역시 동일한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성경구절을 척척 갖다대는 사람일지라도 예수님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당신이 아무리 십계명을 다 지켰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될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까지를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령의 열매에 관해 공부하고 있는데 8절에서 12절까지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유하고 계신 네 가지가 나옵니다. 이 네 가지는 나의 소유도 아니요, 당신의 소유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8절입니다. 참으로 확실히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 여기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과는 다릅니다.(전치사 of 와 about의 차이) 우리의 지식은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 놓으셨다는 사실, 즉 그분에 관한 것들을 알고 있을 뿐 주님께서 소유하고 계신 지식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시련과 유혹과 고통을 견디시면서도 마음속에 평강과 기쁨을 유지하고 계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과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은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구원받아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셔서 당신이 예수님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들을 당신의 삶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저 그분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그 일을 행하셨는지를 아는 수준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빌립보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에 손실을 입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여기 보니 바울이 잃어버리겠다고 선언한 것은 실은 바울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던 좋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입니다. 율법에서 난 내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소유한 채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여기서도 중요한 부분을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We have faith in Christ). 물론 우리의 믿음도 소중하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사용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믿음(faith of Christ)에 이르도록 이끄십니다. 좀 더 쉽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시련과 문제가 닥칠 때, 어려움과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절망과 두려움 가운데, 고뇌와 염려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우상이나 다른 인간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고개를 숙이는 것보다 훨씬 훌륭한 일입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기도 응답으로 주님께서는 당신을 도우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당신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 그분께서는 그 기도 가운데 절망, 고뇌, 염려, 두려움 등을 없애시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들을 견디게 하셔서 결국은 올바른 결말이 나올 것임을 확신하게 만드십니다. 이 확신은 여러분과 제가 기도하고자 할 때 지니고 있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faith in Christ)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소유하고 계신 그분의 믿음(faith of Christ)입니다. 이 믿음은 주님께서 물 위를 거니셨을 때, 폭풍을 잠잠케 하셨을 때, 지옥에 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을 때, 소유하고 계셨던 그 믿음입니다. 즉 우리의 연약한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완전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고 모든 일이 잘될 거라고 바랐지만 여전히 내면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는 했어도 나의 믿음 가지고는 여전히 걱정하고, 여전히 두려워하고, 여전히 불안해 합니다. 물론 믿음이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나의 연약한 그런 믿음으로는 최종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셔서 성령의 열매인 믿음, 즉 나의 믿음보다 훨씬 더 큰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내 안에서 열매로 맺어주십니다. 빌립보서 3장 10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내가 그분의 죽으심과 일치하게 되어 그분과 그분의 부활의 권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함이요, 부활, 권능, 죽음 그 다음에 보니 고난의 교제(고난에 참여하는 것)란 표현이 나옵니다. 요한일서 3장으로 잠깐 가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채찍질하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막대기가 다름 아닌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며 이는 우리로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형상을 닮기 위함임을 공부했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때론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우리가 아끼는 사람들이 우리를 마음 아프게 하는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우리로 단련되고 성숙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진리를 알고 있고 이 원칙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형제나 자매가 나를 모욕하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임을 인정하고 그 모욕을 감당코자 합니다. 다음에 또 그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에게 미소짓고 친절하게 대해 주고 잘 대해 주려고 마음을 먹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바요, 그것은 올바른 것이니까요. 그렇습니다. 물론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화를 내거나 쓴뿌리를 내는 것보다는 뛰어납니다. 그와 교제를 단절하고 끝내는 것보다도 훨씬 훌륭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내”가 나서서 하나님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해 보고자 하는 “육신”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나의 이 좋은 “육신”은 얼마 후 용량 부족이 될 것이고 시험의 때가 실제로 닥치면 견뎌내지 못하게 됩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으므로 우리가 이로써 그분의 사랑을 깨닫나니 우리가 형제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말씀은 우리와 주님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만약 어떤 형제가 나로 하여금 고통을 겪게 할 때, 혹은 하나님께서 내게 고통을 허락하실 때 만약 내가 진정 올바른 삶을 살고자 한다면 그 모든 고통을 수용하고 견뎌내고자 할 것입니다. 약간의 불만과 분노와 절망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 그래도 나를 힘들게 한 그 사람을 잘 대해 주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하라고 명하셨으니까요. 그러나 주님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주님과의 고난의 교제란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에 당신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기 원하며 당신과 내가 서로 교제하려면 내가 당신의 손에 고통을 당해야만 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그 고통을 받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다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나를 사랑하셨기에 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고자 원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로서 우리를 해치는 사람들에게 잘 대해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사용하셔서 우리로 그런 사람들을 잘 대해 주려고 “노력”하는 것 이상으로 잘 대해 주기를 “원하는” 자로, 그리고 그로 인해 기뻐할 수 있는 자로 만드시려고 하십니다.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고난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관련 성경구절을 찾아서 고난과 고통에 대한 설교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하나님께서 고통당하신 그 방식을 나로 하여금 배우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결코 그리할 수 없습니다. 육신은 고통을 받아들이고 견딜지는 모르지만 그 고통을 부드러움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으로 대응할 수는 없습니다. 빌립보서 3장 11절과 12절을 보겠습니다. 11 어찌하든지 내가 죽은 자들의 부활에 도달하려 함이라. 12 나는 내가 이미 도달한 것처럼 여기지 아니하며 이미 완전한 것처럼 여기지도 아니하고 다만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나를 붙잡아 이루시고자 하신 그것을 붙잡으려고 뒤따라 가노라. 이 구절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구원받은 그날부터 목적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그분은 곧바로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은 부활 이후의 나의 모습을 이미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지를 알고 계십니다. 실로 놀랍지 않습니까?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그 목표를 붙잡기 위해, 그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삶을 살고 있도다.” 즉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 끊임없이 일하시고 계심은 이는 우리로 하여금 저 세상에서 갖추게 될 그 모습을 이 세상에서 갖추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면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죄인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어 만들어 내신 덕분에 자연적으로 올바르게 살아가는 의인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 일을 현재 주님께서 나와 여러분 안에서 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보니 바로 네 가지가 주님께 속한 것이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셔서 그것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현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선 8절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지식”이 첫째이고, 둘째는 9절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믿음”이고, 셋째는 10절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교제”이며 넷째는 12절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붙잡으심”입니다. 계속해서 빌립보서 3장 13절과 14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13 형제들아, 나는 내가 이미 붙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다만 이 한 가지 일을 행하나니 곧 뒤에 있는 그것들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그것들을 잡으려고 나아가 1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밀치며 나아가노라. 바울은 다 잊고 오직 한 가지만을 했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생각, 그의 비전, 그의 친구들, 그가 했던 모든 일들을 제껴두고 좁은 길을 따라 딱 한 곳에 이르도록 밀고 나아갔습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입니다. 만약 우리가 바울처럼 그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전진해 간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죄들에 관한 설교를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그 죄들을 쫓아다닐 시간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죄들을 추구하느라 빗나가는 법도 없을 테니 육신의 유혹에 관한 설교를 들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오직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육신과 마귀에 의해 시험을 당하고 미혹을 당하는 것은 우리가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기를 원하시는 그 한 가지를 우리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그것이 되기를 결단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댄스홀과 바에 대해, 혹은 매춘과 마약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들을 얼마나 알아야만 할까요? 만약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달려간다면 그 어떤 구절에 대해 알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푯대를 향해 가고 있다면 나쁜 친구들에 관한 성경구절은 하나도 몰라도 됩니다. 이 달리기에 관해 한 구절 더 살펴보십시다. 히브리서 12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큰 구름 같은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너무 쉽게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우리가 떨쳐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경마에 출전시킬 명마를 얻기 위해 수백만 달러를 들여 60여 년간 교배 끝에 드디어 명마를 얻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그 말을 출전시켜 우승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드디어 시합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들고 나온 안장은 다른 안장보다 5배나 큽니다. 그 안장에는 물병과 도시락과 비디오카메라와 CD 플레이어와 휴대전화가 얹혀 있습니다. 여러분은 즉시 아무리 명마라도 그러한 것을 지고 달리면 우승할 수 없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 말씀처럼 우리는 모든 무거운 것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가장 작은 안장을 얹어 오직 기수만이 앉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큰 안장도 잘못이 아니고 덩치가 큰 기수도 잘못이 아니며 멋진 아내와 함께 시합에 나오는 것도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시합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부모님들과 벌이는 논쟁, 남편과 벌이는 논쟁, 아내와 벌이는 논쟁마저도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소의 사울이 행했던 것들도 다 좋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경주자가 목적지에 다다르는 데 방해가 되었던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무엇에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돈을 버는 일일까요? 그 일에 올인(all-in)하고 계신지요. 물론 그것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의 경주에는 방해가 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만약 사람이나 장소, 어떤 일이나 혹은 물건이든지 당신의 눈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떼어 놓는다면, 당신의 관심을 푯대로부터 떼어 놓는다면 이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당신은 그것들로 인해 성령님과 대적하게 될 것이고 기쁨도 빼앗기며 행복도 빼앗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육신과 성령 간의 갈등을 가져올 것이고 이 갈등으로부터 모든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인생을 즐기는(enjoy)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그들을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인생을 즐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것들을 즐기고 누리며 향유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 낚시, 여행, 원예, 야구, 테니스, 집 가꾸기, 그 외 그 어떤 것들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A) 그러나 그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정해 주신 그 코스를 벗어나게 하도록 하지는 마십시오. 우리는 일해야 먹고 삽니다. 잘못된 것 없습니다. 그러나 직장이든 사업이든 재정적인 것이든 그 어떤 결정도 여러분을 교회 생활과 하나님의 것들로부터 멀어지도록 하지는 마십시오. 그 어떤 것도 믿음의 경주에 방해가 된다면 내려놓으시라는 것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은 내려놓고 달려야 합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일, 인생, 즐길 것 등 모든 것들이 다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여러분과 저를 푯대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눈을 떼게 해서는 안 됩니다. 눈을 떼는 순간 우리 안에서는 갈등이 시작됩니다. 그 갈등은 동료와의 갈등이 아니고 교회와의 갈등도 아니며 설교자와의 갈등도 아닙니다. 그 갈등은 여러분과 저를 푯대를 향해 한 방향으로 이끄시려는 성령님과 반대 방향으로 이끌고 가려는 육신 간에 일어나는 영적 전쟁입니다. 아침에 직장에 나가시겠지요? 가십시오. 그러나 푯대에서 눈을 떼지는 마십시오. 학교에 공부하러 가십니까? 가십시오. 그러나 푯대에서 눈을 떼지는 마십시오. 가족과 휴가를 가십니까? 가십시오. 그러나 푯대에서 눈을 떼지는 마십시오. 돈을 벌기 위해 가십니까?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로 푯대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눈을 떼지 마십시오. 아멘.    
2009-05-01 18:21:15 | 관리자
성령의 열매: 사랑/신약시대 성령의 사역   우리는 지난 여덟 번의 메시지를 통해서 기초를 놓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열매가 지니고 있는 아홉 가지 특성들을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서 25절입니다. 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말하노니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기도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오늘 이 모임을 인해 감사드립니다. 진심으로 기도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간직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며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빚으셔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모습들이 되어지도록 도와주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은 먼저 20세기 초에 모로코에서 무슬림(이슬람교인, 회교도)들에게 마을마다 일일이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던 한 선교사의 간증을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을을 방문해 이슬람 신자들을 모아놓고 그들을 주님께로 회심시키고자 했던 이 선교사의 간증을 한번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복음을 전했을 때는 끼어들거나 방해하는 자는 없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반응은 항의와 적대감과 그들 종교에 대한 광신적 옹호였지요. 저는 그들에게 로마서 8장을 읽어주고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성경적 기독교와 도덕성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증거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슬람교는 도덕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설교가 진행되자 휘파람을 불거나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저의 설교에 대해 할 말이 있거나 질문이 있으면 하시라고 말했지요. 그러자 그들 중 한 사람이 나서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을 한 필 사려고 말의 이빨부터 점검하기 시작했소. 잘 살펴보니 이빨은 건강하고 만족스러웠지요. 그러나 이빨이 건강하다고 다리까지 건강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요. 그 말이 다리가 신통치 않다면 그 말은 쓸모없다고 볼 수 없지만 그래도 말의 가치는 줄어들 수밖에 없소. 그럼 제 얘기를 들어보시오. 나는 이슬람교도로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고 금식을 비롯한 모든 종교적 의무를 다하고 있소. 그런데 당신이 와서 나의 도덕이 잘못됐다고 해서 내 종교 전체가 쓸모없다고 하니 그것은 마치 말이 다리가 좀 나쁘다고 그 말 자체가 쓸모없다고 하는 것과 같단 말이오. 아시겠소? 나는 한 인간으로 본능에 따라 살아갈 자유가 있소. 그러니까 내 육체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지요. 이것과 나의 종교와는 무관하단 말이요. 나는 여전히 알라신께 경배를 드리니까요. 알라가 내게 요구하는 것은 기도, 금식, 계명 및 몇 가지 규례를 지키는 것이지 나의 육체를 만족시키는 일과는 상관없지요. 그 일은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것이요.” 나는 이 말을 듣고 그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 부인이 몇 명 있습니까?” “다섯이었지만 네 명은 이혼시켜 지금은 하나입니다.” “왜 이혼하셨지요?” “그거야 간단하지요. 저는 올해 나귀 두 마리를 내다 팔았지요. 그것은 늙은 나귀를 젊은 나귀로 바꾸기 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늙은 여자 대신 젊은 아내를 맞이하려고 이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혼당한 네 여자는 어떻게 되나요?” “그거야, 나보다 가난한 사람이 그 여자들을 싸게 샀겠지요.” “그렇다면 당신의 젊은 아내가 당신이 늙었으니 새 남편으로 갈겠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녀는 내가 새로 산 나귀와 같은 대접을 받게 됩니다. 때를 쓰면서 말을 안 듣고 멍에를 쓰기 싫다고 버티면 채찍으로 때려잡아야지요.” 저는 이 사람의 논리에 대한 적당한 답변을 생각하면서 복음을 상세히 전했습니다. 복음 증거가 끝났을 때 저는 이 이슬람교도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세상을 사랑합니다. 이 사람은 발끝에서부터 위장이 있는 곳까지 회개했고 입술에서부터 목젖이 있는 곳까지는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주여, 이 자의 회개는 마음(심장)이 있는 곳에는 결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오늘 이 짧은 간증이 여러분께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기독교 신앙과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 주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끔찍한 종교가 다 있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기도, 금식, 예배 같은 형식적인 종교의식은 의무적으로 다 하면서도 마음과 삶은 전혀 변화되지 못 했다면 도대체 그 종교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불교가 되었든 이슬람이 되었든 기독교가 되었든지 간에 마음이 변화되지 못한 종교는 쓸모가 없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 중에도 마음과 삶의 변화없이 그저 종교로서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주님께서 역사하시도록 하지 않고 겉치레로 종교생활만 하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세상사람들이 보기에는 기독교 역시 또 하나의 종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면 우리들이 일요일에 교회당에 가서 몇 가지 종교 의식을 치루고 몇 가지 활동을 하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를 별로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하지요. 만약 우리 안에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나 태도가 올바르게 바뀌지 않는다면 기독교도 그저 종교에 불과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그저 ‘종교인’으로 살아가다가 죽어서야 참된 ‘그리스도인’임을 보여줄 뿐입니다. 요한일서 4장과 5장을 보겠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 첫 번째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없다면, 이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면 비록 우리가 무슬림과는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방법으로 기도하고, 다른 날을 지키더라도 내 직장 동료들이 보기에 그리스도인인 나와 무슬림인 다른 사람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나도 그 자도 아내를 무시하고 막 대하는 건 똑같다면 말입니다. 서로 자기 종교가 옳다고 주장해 봐야 제 삼자가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이 하늘 아버지의 성품을 삶에서 드러내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본인은 하늘나라로 가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언행을 보고 다른 죄인들도 믿고 하늘나라에 같이 오기를 바라신다는 겁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을 보십시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 조심하십시오. ‘사랑은 하나님이시라.’가 아니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입니다. 하나님은 계명(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교리가 아닙니다. 규례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일 뿐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사랑이십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으므로 우리가 이로써 그분의 사랑을 깨닫나니 우리가 형제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기 보니 사랑은 전혀 느낌(feeling)이 아닙니다. 사랑은 감정(emotion)이 아닙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유익과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 하나님은 자기를 희생하셨습니다. 자신의 유익이 아닌 우리 죄인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신 이 하나님이 곧 사랑이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7절입니다. 하늘에 증언하는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만약 당신이 킹제임스성경을 갖고 계시지 않다면 이 구절은 없을 겁니다.A) 우리 모두는 성령께서 거듭난 성도들 안에 들어오셔서 내주하고 계신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확실히 배워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성령께서 하나님이시라면,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거듭난 우리들 안에 내주하시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어떤 분은 “저는 그렇게 사랑이 많은 편이 못 됩니다.”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변명하지 마시고(하나님의 사랑이 거듭난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시니) 회개하시는 것이 더 나으실 겁니다. “저는 사실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해서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할 게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드리십시오. “저는 원래 무뚝뚝하거든요.” 이렇게 변명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그 성격을 뛰어넘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이시라면(성경은 그러하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렇다면 ‘성령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사랑이 내 안에 거하고 있음도 분명합니다. 이제 내 안에는 내 자신의 유익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희생하는 거룩한 사랑이 내주하고 있고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그 사랑이 가능합니다. 만약 당신이 구원받은 성도라면 당신도 동일한 사랑과 그 사랑을 행사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뜻 깊은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저기, 낙스(Knox) 목사님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러자 그가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테이프를 통해 좋은 설교를 듣고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젊을 때 구원받았는데요, 지난 9년 동안 저는 하나님과 멀리 지냈습니다. 사람들이 왜 교회를 가지 않느냐고 하면 저는 늘 ‘저는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니 그냥 놔두세요. 알아서 할게요.’ 이런 식으로 응수하곤 했었습니다.(우리가 자주 언급하던 그런 그리스도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구원받은 후 주님께서 데리러 오시는 휴거 때까지 자기 맘대로 사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 말입니다.) 어느 날 일터에서 상사 한 분이 당신의 설교 테이프 몇 개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 중 세 번째 테이프를 듣는 순간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타이타닉 영화에 대해 그것은 죄인의 반역과 음행과 권위에 대한 도전을 다루고 있는 영화로 그 영화 속의 두 젊은이는 마귀에게 혼을 팔아버린 자들이라고 했지요. 사실 저는 그 영화가 사랑 이야기(love story)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니 저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세상적이었나 짐작이 가실 겁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듣는 순간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내리치고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인 제가 포르노에 가까운 영화를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니요. 저는 그 순간 하나님께 회개하고 주님 품으로 돌아와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전화를 건 이 형제가 사랑은 섹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음행도 아니고 육체적 쾌락도 아닙니다. 사랑은 자신을 희생하여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 형제가 하나님의 책망을 수용하고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다시 주님을 향한 삶을 살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그 형제는 비록 구원은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삶을 살지 않고 있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자 돌이킨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무슬림들처럼 사는 종교 행위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육신이 원하는 쾌락을 좇아 사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여러분과 제가 우리 자신을 희생하고 내어드릴 때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아내가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때에도 아내를 사랑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남편이 신사답지 못하고 존경스럽지 못한 때에도 남편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아무도 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지 않으려 할 때에도 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도록 해 주는 사랑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당신으로 하여금 저의 ‘모든 것’에 대해 다 알게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저를 위해 희생적으로 사랑을 하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때론 성령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육신적인 태도를 자주 취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지요? “성령께서 나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셨단 말입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유익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나의 위로자이십니다. 나의 고난 가운데 도우셨지요.” 이렇게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은 ‘나’에게 유익을 가져온 것입니다. ‘나’가 아닌 ‘너’에게, ‘다른 사람(남)’에게 유익을 가져다주신 성령님 이야기는 왜 없는 것일까요? “성령께서는 나의 구원의 보증이 되시고 나를 인치셔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을 보장하셨습니다.” 훌륭한 신앙고백이고 역시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역시 ‘나’에게 유익을 가져온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고 할 때 우리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령님과의 관계에서 마저 ‘우리 자신’의 유익에 관해서만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를 통해 성령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실 유익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의 영을 주지 아니하시고 권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을 주셨느니라. 여기 보니 사랑의 영을 주께서 주셨다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영(spirit)은 대문자가 아닙니다. 즉 성령님을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오순절날(사도행전 2장) 두려움 많고 나약한 자들 위에 임하셔서 그들을 능력있는 자들로 만드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는 건전한 생각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건전치 못한 생각과 사고방식을 갖고 살아가던 우리들이 거듭나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의 영을 통제하시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생각이 건전하게 바뀌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우리의 영을 통제하시면 그처럼 무뚝뚝하고 무심하던 자도 사랑이 넘치는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로마서 5장 5절을 보십시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넓게 부어졌기 때문이니 여기 보니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 사랑을 넓게 부으셨나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요구하신 것이 아니고 사랑을 넓게 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남들’을 사랑하도록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내어드리면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과 역대기하 24장, 그리고 사도행전 7장을 보십시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에 관해 공부해 오면서 우리 자신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할 수 있도록 만드시는 것에 관해 배웠습니다. 이제부터 그것들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6장 27절과  28절, 그리고 35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듣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악의를 품고 너희를 다루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눅 6:27, 28) 오직 너희는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려 주라. 그리하면 너희 보상이 클 것이요, 또 너희가 가장 높으신 이의 자녀가 되리니 그분께서는 감사하지 아니하는 자와 악한 자에게 친절하시니라.(눅 6:35) 여기 보니 하나님께서는 감사하지 아니하는 자와 악한 자에게 인자하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는 가끔 참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글쎄, 여러분들은 어떠신지 모르겠는데요, 저는 어떤 경우에는 정말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할인마트나 주유소에 갔을 때, 돈을 내고 거스름돈을 받을 때, 제가 손을 내밀고 있는데도 제 손 위에 얹어주지 않고 테이블 위에다 올려놓고 가져가라고 할 때, 이럴 때면 저는 정말 참지 못합니다. 몹시 화가 납니다. 손 위에 얹어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저의 육신은 그 사람에게 결코 친절하게 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이처럼 자그마한 일에도 “참질” 못합니다. 여러분을 화나게 만드는 일들도 여러 가지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일들이 발생하게 되면 결국 우리도 그런 사람들에게 똑같이 “거칠게” 대해 버린다는 것이지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무슬림이나 불교 신자나 다른 그 어떤 종교를 가진 자들과 다를 게 무엇입니까? 거듭난 그리스도인 안에는 성령님께서 내주하고 계시다가 그런 일이 발생하는 순간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내어만 드리면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그런 자들에게도 인자하고 친절하고 사랑스럽게 대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과 종교인들과의 다른 점입니다. 물론 거듭나도 “육신적”이면 종교인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역대기하 24장 20절에서 22절을 보겠습니다. 20 하나님의 영께서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에게 임하시매 그가 백성 위에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주의 명령을 범함으로 형통하지 못하느냐? 하시나니 너희가 주를 버렸으므로 그분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니 21 그들이 그를 대적하여 음모를 꾸미고 왕의 명령을 따라 주의 집 뜰 안에서 그를 돌로 쳐서 죽였더라. 22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베푼 친절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을 죽이니 그가 죽을 때에 이르되, 주께서 그것을 보시고 그것으로 인하여 벌을 주시옵소서, 하니라. 이 말씀의 끝부분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보시고 이 일로 벌을 주시옵소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의 이 저주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입니다.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요. 누가 이를 두고 뭐라 할 수 있겠습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손에는 손, 그러므로 “나를 죽이는 자를 죽여 주시옵소서”라는 저주는 지극히 인간적인 응수에 불과합니다.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상대방이 우리에게 행한 대로 응수하면서 살지 않습니까? 반면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성령께서 그 안에 내주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해 있던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죽여 주소서, 주여.” 이런 식으로 응수하지 않고 “주여, 이 죄를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반응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1절에서 53절입니다. 51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않은 자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역하되 너희 조상들이 행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행하는도다. 52 대언자들 중에서 너희 조상들이 핍박하지 아니한 자가 누구였느냐? 그들은 의로우신 분의 오심을 미리 보여 준 자들을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분을 배반하여 넘긴 자요, 살인한 자가 되었나니 53 너희가 천사들을 통하여 제정하신 율법을 받고도 그것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이 내용을 보니 앞서 본 역대하 24장과 같습니다. 즉 살인죄를 저지른 자를 다루고 있지요. 계속해서 54절에서 60절입니다. 54 그들이 이것들을 듣고 마음이 상하여 그를 향해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똑바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고 56 이르되, 보라, 하늘들이 열리고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내가 보노라, 하매 57 이에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자기들의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도시 밖으로 그를 내던지며 돌로 치니라. 또 증인들이 자기들의 옷을 사울이라 하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그가 하나님을 부르며 이르되, 주 예수님이여, 내 영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주여, 이 죄를 저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마옵소서, 하더라. 이 말을 하고 그가 잠드니라. 앞서 살펴본 스가랴나 지금 살펴본 스데반 두 사람 다 하나님을 섬겼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또한 두 사람 다 진리를 선포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스가랴는 성령께서 내주하지 않은 채로 죽으면서 그의 원수를 저주한 반면에 스데반은 내주하신 성령으로 충만하여 자신의 원수들을 용서해 달라며 기도하면서 죽어갔습니다. 이 두 부분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가져왔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기질의 차이도, 성격의 차이도 아닙니다. 두 사람 다 단호하게, 목숨을 걸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중 한 사람의 영은 성령님에 의해 통제를 받아 자신에게 이를 갈며 저주하고 죽이려는 자들에게 저주가 아닌 용서로 대응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히브리서 12장 2절에 나와 있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고 오직 결승점(Finish line)에 서 계신 주님을 푯대로 해서 달려갔던 것입니다. 이에 그를 통제하고 계셨던 성령께서는 스데반을 통해 스데반을 부당하게 대하고 있던 자들에게 선하게 대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스데반보다 더 담대하게 행동할 수 있을까요? 스데반은 당대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당당하게 제시했습니다. 남자 중의 남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담대하고 용감한 행동 속에서도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어져 있었고 성령께서는 그의 영을 온전히 통제하고 계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스테반은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죽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스데반이 높은 부르심의 푯대를 붙잡은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열왕기하 1장과 누가복음 9장입니다. 한번 솔직히 생각해 보십시다. 당신은 스가랴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스데반의 모습입니까? 아마 저나 여러분이나 아담의 피를 물려받은 이상 당연히 스가랴의 방식으로 행동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육신 안에는 당연히 그런 기질이 들어 있습니다. 그대로 맞대응 해 주어야 속이 시원할 것입니다. 열왕기하 1장에도 우리의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이 나옵니다. 사실 저는 이 사건 기록을 너무도 “흐뭇해” 하면서 읽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아마 지나치게 이 사건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열왕기하 1장 1절에서 12절을 보십시오. 1 그때에 아합이 죽은 뒤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니라. 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던 자기의 다락방 격자창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使者)들을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내가 이 병에서 나을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어보라, 하니라. 3 그러나 주의 천사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4 그러므로 이제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요,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라. 엘리야가 떠나가니라. 5 사자들이 왕에게 돌아오매 왕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지금 돌아왔느냐? 하니 6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한 사람이 올라와서 우리를 만나 우리에게 말하기를, 가서 너희를 보낸 왕에게 돌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사람을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요,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라, 하더이다. 7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를 만나려고 올라와 이 말을 너희에게 고한 그 사람이 어떻게 생긴 사람이더냐? 하니 8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더이다, 하매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하니라. 9 그때에 왕이 오십인대장과 그의 부하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매 오십인대장이 엘리야에게로 올라가더니, 보라, 엘리야가 산꼭대기에 앉았으므로 그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께서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하니 10 엘리야가 오십인대장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네 부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부하 오십 명을 살랐더라. 11 왕이 또 다시 다른 오십인대장과 그의 부하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매 그가 엘리야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께서 속히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하니 12 엘리야가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네 부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부하 오십 명을 살랐더라. 원수들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물리치는 모습이 시원하지 않습니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오십 명의 군인과 장교를 불살라 버리는 장면… 오! 너무나도 너무나도 통쾌하지 않습니까? 저도 그래보았으면 정말로 좋겠습니다. 그럴 대상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요. 여기저기에 세워져 있는 우상들을 보면서 다 엎어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몬타나에 있는 마리아 동상을 무너뜨리면 얼마 동안이나 감옥에 가야할지까지도 생각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온갖 이단 종파들도 하나님께서 통쾌하게 심판해 주셨으면 한 적도 많았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마음이 여러 번 들더라는 것입니다. 두 번 씩이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으니 102명을 화장시킨 셈이지요. 엘리야는 하나님의 심판에 얼마나 통쾌해 했을까요? 13절과 14절을 보면 드디어 세 번째로 찾아온 자들이 벌벌 떨면서 무릎 꿇고 간청을 합니다. 13 왕이 다시 세번째 오십인대장과 그의 부하 오십 명을 보내므로 세번째 오십인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 앞에 이르러 무릎을 꿇고 엎드려 그에게 간청하여 이르되, 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하건대 내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명의 생명을 당신의 눈앞에서 귀히 여기소서. 14 보소서,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지난번의 오십인대장 두 명과 그들의 부하 오십 명씩을 태웠사오니 그런즉 이제 내 생명을 당신의 눈앞에서 귀히 여기소서, 하매 이 말을 들은 엘리야는 얼마나 흐뭇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에서 54절을 보겠습니다. 51 그분께서 위로 올려져서 영접 받으실 때가 이르매 친히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얼굴을 고정하시고 52 자기 얼굴 앞에 사자(使者)들을 보내시니 그들이 가서 그분을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로 들어가니라. 53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듯한 얼굴이므로 그들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매 54 그분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이르되, 주여, 엘리야가 행한 것같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저들을 멸하도록 우리가 명령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거늘 여기 보니 야고보와 요한은 구약성경의 엘리야 사건을 상기시키며 주님께 자신들도 그렇게 해 보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답변하셨습니까? 55절과 56절입니다. 55 그분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56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생명을 멸하러 오지 아니하고, 구원하러 왔느니라, 하시니라. 그들이 다른 마을로 가니라. 답변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생명을 멸하려는 것은 주님의 영으로부터 나온 행동이 아닙니다. 주님의 영은 오히려 자신을 희생시켜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영께서 여러분과 제 안에 들어오셔서 하고자 하시는 그것입니다. 희생을 동반한 사랑, 이 사랑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세워주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야고보와 요한처럼 우리를 방해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을 “엘리야의 불”로 심판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제는 더 이상 그리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불살라 버리고 싶었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주님께서 구원시키고자 원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제자들은 불살라 멸하려 했으나 주님은 그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어 그들로 영생의 축복을 받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시편 55편과 누가복음 23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번 메시지를 통해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들고 계신 “사랑의 막대기”가 다름 아닌 우리 주변의 사람들임을 깨달은 바 있습니다. 다윗은 구약성경의 인물 중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인정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시편 55편을 보니 다윗 역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시편 55편 1절부터 보겠습니다. 1 오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의 간구하는 것에서 떠나 숨지 마소서. 2 내게 주목하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원망하는 중에 애곡하며 소리를 지르오니 3 이는 원수의 목소리와 사악한 자의 학대로 인함이니이다. 그들이 불법을 내 위로 던지며 진노하여 나를 미워하나이다. 4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프며 사망의 두려움들이 나를 엄습하였나이다. 5 무서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눌렀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오 내게 비둘기같이 날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내가 멀리 날아가 안식하리로다. 7 보라, 그때에 내가 저 멀리 다니다가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8 내가 빨리 도망하여 거센 폭풍과 태풍에서 벗어나리로다, 하였나이다. 9 내가 도시 안에서 폭력과 분쟁을 보았사오니, 오 주여, 그들의 혀를 멸하시고 찢으소서. 10 그들이 밤낮으로 성벽 위에서 도시를 두루 다니니 도시 한가운데 해악과 슬픔이 있으며 11 사악함이 그것의 한가운데 있고 속임과 간교함이 그것의 거리를 떠나지 아니하나이다. 12 나를 모욕한 자가 원수가 아니었으니 원수였더라면 내가 참을 수 있었으리로다. 나를 향하여 자기를 높인 자가 나를 미워한 자가 아니니 나를 미워한 자였더라면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로다. 13 오직 그것은 곧 너니 나와 동등한 자요, 나의 안내자요, 내가 아는 자로다. 14 우리가 서로 다정히 의논하고 무리를 지어 하나님의 집으로 걸어갔도다. 15 사망이 그들을 붙들어서 그들이 산 채로 지옥에 내려가게 할지니 사악함이 그들의 거처들에 있으며 그들 가운데 있도다. 16 나로 말하건대 나는 하나님을 부르리니 주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9절과 15절, 그리고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은 주님을 부르고 구원받아 하늘나라에 갈 것이나 악인들, 원수들은 다 지옥으로 보내시라고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 인간의 이 마음을 우리 중 그 누가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복음 23장입니다. 가롯 유다를 기억하시지요. 친구이셨던 예수님을 배반한 자입니다. 베드로도 친구이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심지어는 맹세하여 저주까지 했습니다. 요한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다 버렸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부인당하고 배반당하신 예수님은 어떠셨나요? 33절부터 읽겠습니다. 33 그들이 갈보리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 범죄자들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오른편에 다른 하나는 왼편에 있더라. 34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분의 옷을 나누어 제비를 뽑고 여기 보니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기도와는 사뭇 다른 기도를 원수들을 위해서 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말씀하신 그대로 행하고 계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앙심을 품고 너희를 대하며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여러분과 저는 거듭나 구원받았고 하늘나라에 갑니다. 우리는 스가랴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훌륭한 종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엘리야, 다윗처럼 하나님의 훌륭한 일꾼으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은 다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 사람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는 구약성경에 입증되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여러분과 제 안에는 하나님의 영이 내주해 계시고 이로써 우리는 스가랴, 엘리야, 다윗보다도 더 위대한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넓게 부어지지 못했으나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성령님에 의해 그 사랑이 부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나요? 저와 여러분의 사랑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요, 성령께서는 하나님이시며 그 성령께서 여러분과 제 안에 거하고 계시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내놓을 만큼 큰 사랑을 지닌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통해 그 사랑을 보이심으로 여러분과 저를 스가랴보다도, 엘리야보다도, 다윗보다도 더 나은 자들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배운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을 기억해 보십시오. 실로 “높은” 부르심이지요. 여러분 중에는 “저는 그런 수준에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안 되겠는데요.”라고 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그 용서의 기도가 다름 아닌 스데반의 입술에서 어떻게 흘러나올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하신 성품과 사랑이 스데반을 통해 표출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이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도 표출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쓴 뿌리와 원망과 불평과 억울함과 분노, 이 모든 것들을 내던지고 오직 우리의 마음을 그분께 내어드리면 우리 마음을 통해 그분의 사랑이 흘러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마음을 내어드리면 하실 수 있습니다. 아멘.  
2009-05-01 18:20:22 | 관리자
성령의 열매: 기쁨/주님의 기쁨 · 즐거이 소리치라   오늘은 갈라디아서 5장과 시편 그리고 기타 성경구절들을 통해 기쁨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 아홉 번의 메시지를 통해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생산해 내기를 원하시는 것, 즉 성령의 열매에 대해 공부해 오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주님께 내어 맡긴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서 주님께서 만들어 내실 수 있는 열매를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 23절을 다시 보십시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지난 주 성령의 열매의 첫 번째 특성인 사랑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번 시간에는 두 번째 특성인 기쁨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길 기도합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 시간 진심으로 기도하오니 주께서 저희 안에서 행하시고자 하는 것을 보여주시고 그 주님의 뜻에 순종할 마음을 주셔서 저희를 통해 뜻을 이루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시편 88편을 보십시다. 우선 성경 말씀으로 무엇이 기쁨인지부터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른 구절들을 더 살펴보도록 하지요. 기쁨이란 단지 행복한 상태, 기분이 좋은 느낌, 혹은 잘 될 거라는 긍정적인 느낌 이상의 무엇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구절들을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기쁨은 행복의 표현이며, 감사의 표현이고 어떤 특정한 상황에 대한 우리의 감격의 표현입니다. 몇 구절만 찾아보겠습니다. 모든 땅이여, 너희는 하나님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시 66:1) 오 오라, 우리가 주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해 즐거이 소리치자. 우리가 감사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고 시를 지어 그분을 향해 즐거이 소리치자.(시95:1~2)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께 큰 소리로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시를 읊으며 작은북을 여기로 가져오고 흥겨운 하프를 비파와 함께 가져올지어다.(시 81:1~3) 모든 땅들아, 너희는 주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시 100:1) 여기서 반복되고 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 즐거이 소리치라(make a joyful noise) “즐거운 소리(joyful noise)”로 번역된 이 표현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기쁨을 소리(시끄러움)와 연관시키고 계십니다. 기쁨은 크게 소리 지르는 것과 관련되어 있음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마치 미식축구에서 터치다운을 할 때, 또는 야구에서 홈런을 칠 때 광적인 팬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운동이나 경마, 아니면 음악이 되었건 간에 그것에 몰입해 있던 사람들이 그 상황에 압도되어 외쳐대는 것, 그것이 희락(기쁨)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랑을 말씀하시면 “저는 사랑스럽게 사람을 대할 줄 몰라요. 좀 무뚝뚝한 성격이라서요.”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우리의 성격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무엇을 행하실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장악하시면 이 세상 사람들이 운동이나 오락에 그처럼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생각을 지닌 자들과 한패가 되어 운동이든 오락이든 함께 빠져드는 반면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같은 생각을 품은 다른 형제, 자매들과 함께 교제하기를 꺼려하는 것 같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은사주의자”라고 불릴까봐 두려워서 기쁨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기쁨에 관해 말씀하는 곳에는 소리(시끄러움)가 동반됩니다. 시편 35편 27절 “나의 의로운 사정을 지지하는 자들이 기뻐 외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참으로 그들이 계속해서 이르기를, 자기 종의 형통함을 기뻐하시는 주를 크게 높일지어다, 하게 하소서.” 외치라는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시편 132편 9절 “주의 제사장들은 의로 옷 입고 주의 성도들은 기뻐 외칠지어다.”를 보십시오.(이외에도 많은 구절이 있습니다. 한번 찾아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시 132편 9절을 보니 주의 제사장이 나오는데 여러분과 제가 제사장들이 되었다고 베드로전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성도들이란 표현 역시 저와 여러분에게 당연히 해당되지요. 정리해 보면, 성경 말씀에 기쁨이란 반드시 소리, 외침, 시끄러움 등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이애미 돌핀즈 팀의 팬들은 모자도 티셔츠도 자켓도 모조리 돌핀즈 마크가 달린 것만 입고, 자동차 번호판에도 범퍼에도 온통 돌핀즈 스티커 투성이입니다. 그리고 일요일 오후 게임이 있는 날이면 운동장에 가서 실컷 소리를 질러댑니다. 혼자 하는 것보다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 더 큰 기쁨을 얻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보혈로 씻음 받고 거듭나서 하늘나라로 가고 있는 사람들, 같은 영생을 공유하고 있는 우리들이 예수님 마크나 이름이 쓰인 티셔츠를 입고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습니까? 그러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광신자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혹은 아직 영적으로 어리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육신적이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쑥스러워서 사람들의 눈치를 봅니다. 그렇지만 이 점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흥분하여도 큰 소리로 찬양도 못하고, 구원의 기쁨을 이기지 못해 할렐루야를 외치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육신의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께 우리 자신을 내어 드려 그분께서 우리를 통제하신다면 우리는 지금보다는 더 많은 찬양을 할 것이고 주님 안에서 더 큰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건전한 교리를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주님 안에서 기뻐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 건전한 교리에 맞게 질서 있고 품위 있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것들에 마음이 압도되어 흥분하고 소리치며 기뻐할 때 역시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스포츠팬들이 소리를 질러대며 열광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생각과 마음이 다른 모든 일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온전히 자기 팀에 몰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때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진정한 “흥분”이 없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께 몰입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령께서 우리를 통제하시기만 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고 이 기쁨은 “소리”로 표현될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에서 기쁨에 관해 가장 많이 언급이 되어 있는 책이 이사야서입니다. 이사야서는 66장 전체에 걸쳐 기쁨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눈여겨 둘 점이 있다면 그 기쁨은 항상 슬픔과 눈물과 더불어 묘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슬픔, 눈물 그리고 이어 기쁨이 등장합니다. 또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은 사무엘상 18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이란 단어가 사무엘상 18장 이전에는 성경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무엘상 18장 5절에서 7절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기쁨이 무엇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5 사울이 다윗을 보내는 곳마다 그가 가서 지혜롭게 행동하매 사울이 그를 세워 군사들을 다스리게 하였더니 온 백성의 눈앞에서와 사울의 신하들의 눈앞에서 그가 인정을 받으니라. 6 그들이 돌아올 때 곧 다윗이 그 블레셋 사람을 살육하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도시에서 나아와 노래하고 춤추며 작은북과 악기를 가지고 기뻐하며 사울 왕을 맞이하는데 7 여인들이 놀며 서로 화답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이요, 다윗은 수만이로다, 하니라. 이곳에 보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적들로부터 구출해 주심을 기뻐하며 소리 높여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에스라서 3장 10절에서 13절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0 건축자들이 주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자기들의 옷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의 아들들 레위 사람들은 심벌즈를 들고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주를 찬양하되 11 그들이 돌아가면서 주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며 함께 노래하였으니 이는 그분께서 선하시며 이스라엘을 향한 그분의 긍휼이 영원하기 때문이더라. 주의 집의 기초가 놓였으므로 온 백성이 주를 찬송하며 매우 큰 소리로 소리를 내었더라. 12 그러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아버지들의 우두머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 곧 첫 번째 집을 보았던 노인들은 자기들의 눈앞에 이 집의 기초가 놓인 것을 보고 크게 통곡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기뻐서 크게 소리를 내니 13 이에 기뻐서 내는 소리와 백성의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이 구분하지 못하였더라, 백성이 크게 외치는 그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더라. 여기를 보아도 기쁨이 넘쳐 소리를 지릅니다. 여기저기서 시끌벅적거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우리 마을(플로리다, 딜랜드 시)에서는 언제 그런 시끄러운 소리나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홈팀이 터치다운을 할 때 엄청난 굉음이 들려오지 않습니까? 에스라 3장의 굉음은 하나님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간 곳에서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와 성전을 완성하고 기뻐 외치는 소리입니다. 느헤미야 12장 43절을 보겠습니다. 또한 그날에 그들이 큰 희생물을 드리고 기뻐하였으니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크게 기뻐하게 하셨더라. 아내들과 아이들도 기뻐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기뻐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더라. 여기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기뻐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고 합니다. 이 모습이 결코 육신적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기쁨을 넘치게 주신 결과일 뿐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교회”들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육신적인 시끄러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너무도 크게 감동시키셨기에 마음속의 기쁨이 입으로 터져 나온 것뿐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는 성경 말씀처럼 때로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흘러 넘쳐 우리의 입으로 그 기쁨이 터져 나올 때가 있습니다. 43절에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크게 기뻐하게 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멀리 멀리까지 들리도록 시끌벅적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응원하는 마이애미 돌핀스 팀이 상대팀 진영에 터치다운시키는 모습을 보면,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쳐대며 기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주님을 찬양하고 기뻐하는 모임을 갖고 있을 때, 마귀의 팀에 속한 사람들은 그 기쁜 모습을 싫어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을 14절부터 23절까지입니다. 14 하늘의 왕국은 마치 먼 나라로 여행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그들에게 자기 재산을 맡기는 어떤 사람과 같으니 15 그가 하나에게는 오 달란트를, 다른 하나에게는 이 달란트를, 다른 하나에게는 일 달란트를 주되 각 사람에게 그의 개별적인 능력에 따라 주고 곧 여행길을 떠나니라. 16  이에 오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오 달란트를 더 만들고 17  이 달란트 받은 자도 그와 같이 하여 이 달란트를 더 벌되 18  일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자기 주인의 돈을 감추었더라. 19  오랜 뒤에 그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계산하니 20  이에 오 달란트 받았던 자는 오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주께서 내게 오 달란트를 맡기셨는데, 보소서, 내가 그것들 외에 오 달란트를 더 벌었나이다, 하매 21 그의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것에 신실하였은즉 내가 너를 많은 것을 다스릴 치리자로 삼으리니 너는 네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라, 하니라. 22 이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주께서 내게 이 달란트를 맡기셨는데, 보소서, 내가 그것들 외에 이 달란트를 더 벌었나이다, 하매 23 그의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것에 신실하였은즉 내가 너를 많은 것을 다스릴 치리자로 삼으리니 너는 네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라, 하니라. 앞서 말씀드린 것들을 상기해 보십시다. 성경에서 최초로 기쁨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원수인 거인(골리앗)과 그의 졸개들을 대항하여 단 한 사람을 통해 승리를 안겨 주셨을 때였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원수들을 물리친 것이었지요. 두 번째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서 등장하는데 이때는 하나님의 백성이 포로로부터 해방되어 고국으로 안전하게 되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했을 때로 “주의 기쁨(the joy of the Lord)”이란 용어가 느헤미야서에서 두 번이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읽은 마태복음 25장에는 이스라엘의 왕께서 재림하실 때A) 다시 “주의 기쁨”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 세 가지를 종합해 보니 기쁨이란(성경적 의미에서) 주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원수들을 물리치시고 이 땅에 평강의 왕국을 재건하시게 될 때 왕과 백성이 마음으로 느끼게 될 감정을 말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주의 기쁨”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원하시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주의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주님께서 이 땅에 돌아오셔서 자기 왕국을 세우실 때 주의 백성들이 누리게 될 동일한 그 기쁨을 매일 매일의 삶 가운데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도록 주시기 원하십니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이미 하나님의 왕국 안에 놓으셨습니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이미 하늘의 처소에 그분과 함께 앉아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물리적인 영역에서 실제로 누렸던 모든 것들을 여러분과 저는 영적인 영역에서 오늘 이 순간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리하고자 하는 마음과 생각을 갖고 있기만 하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오실 때 유대 백성이 왜 크게 소리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들의 모든 원수들이 패배 당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원수들도 이미 패배 당했습니다. 왜 유대 백성이 소리치고 있습니까? 이는 곧 이 땅에 평화가 정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 안에 이미 평강이 임해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 주님은 그들에게 모든 약속의 성취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기뻐 소리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하신 약속들을 성취하지 않으셔났요? 그들은 자신들의 소망이 실현되었기에 소리를 지르며 기뻐합니다. 우리 역시 소망을 성취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을 보니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천상에 있는 영적인 복들로 이미 우리에게 복을 주셨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자신의 왕국을 세우실 때 주님과 그분의 백성이 느끼는 뜨거운 감격, 그것이 주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성령께서는 여러분과 저의 마음 안에 매 순간마다 열매로 생산해 내시고자 일하고 계십니다. 성경을 보니 주님께서 이 땅에 돌아오실 때 “외치는 소리”(shout)와 함께 오신다고 합니다. 얼마나 기쁘시면 그리하시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극히 일부)은 휴거를 생각하면 흥분이 되곤 합니다. 그러나 피값으로 우리를 사신 그분의 흥분은 어떠하실까요? 보통 결혼식 때 보면 신부는 조금 긴장해 있는 게 보통인 반면 신랑은 기쁨에 들떠 흥분되어 있습니다. 상당수 그리스도인들은 휴거나 그리스도의 심판석이 그리 흥분된 일이 아닌 모양입니다만 신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너무도 큰 기쁨에 몹시 흥분하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에 그 기쁨을 보고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참으셨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그 기쁨을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아십니까? 주님께서는 그분이 돌아오셔서 그분과 그분의 백성이 새로 세워지는 왕국을 보고 흥분하게 될 그날처럼 여러분과 제가 매일 아침 그렇게 흥분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의 한 가지 특성인 기쁨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하루하루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천년왕국을 상속받을 그때의 기쁨과 흥분을 맛보는 날들이 되기를 주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의 첫 번째 특성인 사랑에 대해 살펴보면서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기쁨에 대해 살펴보니 아직 ‘게임’은 시작도 안 했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한번 우리 모두 솔직해 보십시다.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은 것으로 인해 너무도 감격스러워 하며 흥분했던 마지막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글쎄요, 저는 사실 구원으로 인해 매일 기쁜데요...” 이렇게 대답하겠지요. 얼마만큼 기쁜지 솔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체할 수 없는 감격으로 온몸이 전율될 만큼 기쁘신가요? 사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 푹 빠져 지내다보면 하나님만 빼고 모든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기 일쑤입니다. 물론 최후의 보루는 여전히 남아있지요. “나는 구원받았다.” 맞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구원 받았으니 하늘나라로 갑니다. 문제는 그 구원이 현재의 삶에 무슨 유익을 주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매일의 삶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통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과 제가 매일 아침에 일어날 때도 히브리인들이 그들의 왕이신 주님이 동문을 통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게 될 때 기뻐하는 만큼이나 우리의 구원으로 인해 흥분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요한복음으로 가서 한번 확인해 보십시다. 16장 13절입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분은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무엇이든지 자기가 들을 것만을 말씀하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희에게 보이시리라. 여기 보면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영께서 구원받은 우리 모두 안에 이미 와 계신 것은 잘 알고 계십니다. 그 다음에 보니 그분께서는 “다가올 일들”에 대해 보여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들이 아니고 미래의 일들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6장 14절에서 16절을 보십시오. 매우 중요합니다. 14 그분께서 나를 영화롭게 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내게서 받아 그것을 너희에게 보이실 것이기 때문이라. 15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분께서 내게서 가져다가 그것을 너희에게 보이시리라, 하였노라.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다시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라, 하시니라. 이 구절을 읽고 우리는 이것이 주님의 재림에 관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께로 가셨다가 다시 돌아오신다”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는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분과 함께 3년 반을 같이 동거동락하고 살았던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어떻게 여러분과 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과 제가 너무 똑똑해서 그런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앞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앞으로 있게 될 것들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뿐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슬피 울며 애통할 터이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또 너희는 근심할 터이나 너희 근심이 기쁨으로 변하리라. 여기 보니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분께서 다시 돌아오실 때는 기쁨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산고를 겪으면 자기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거니와 아이를 낳으면 곧바로 세상에 사람이 난 기쁨으로 인해 다시는 그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여기 보니 “산고”란 말이 나오는데 구약성경 그 어디를 봐도 여인의 산고가 언급된 곳은 전부 “유대인의 환란(고난)”에 대한 것입니다. 계시록 12장에 보니 드디어 아이가 태어납니다. 22절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너희에게 근심이 있으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아무도 너희에게서 너희 기쁨을 빼앗지 못하리라. 그러니까 이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환란 기간 중 극도로 고통을 겪고 슬픔을 당하다가 드디어 구출되어 영광 중에 오시는 왕을 만나게 될 터인데 그 때에는 모든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큰 기쁨일지 상상이 가십니까? 그런데 그런 기쁨을 오늘 이 순간 여러분과 제가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구원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데리러 오실 때 저도 그런 기쁨을 맛볼 것을 확신합니다.” 이렇게 말하실지 모르지만 그게 아니고 그런 기쁨을 오늘 이 순간 성령께서 여러분과 제 안에 갖게 해 주시고자 한단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은 “형제님, 형제님은 제가 사람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고 사는지 모르시죠? 아시면 기뻐하란 말씀은 못하실 겁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겪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요한복음 16장 22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너희에게서 너희 기쁨을 빼앗지 못하리라.” 이 기쁨을 주신 분이 주님이시라면 그 기쁨을 빼앗길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 이스라엘 백성이 기뻐할 그런 큰 기쁨을 성령께서 제 안에 열매로 맺어주시면 사람들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짓을 하든, 어떻게 대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기쁨은 결코 빼앗길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1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기쁨”이란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여기 보니 “나의 기쁨”(즉 주님의 기쁨) 이 우리 안에 머무르면 우리의 기쁨(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누구의 기쁨입니까? 주의 기쁨입니다. 그것이 누구 안에 머무르게 됩니까? “너희” 안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기쁨은 소위 “긍정적” 사고방식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기쁨과는 전혀 다릅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신나는 음악과 더불어 일어나 멋진 상상들을 하면서 “오늘은 놀라운 날이 될 거야. 오늘은 하루 종일 행복할 거야. 하하하... 아멘, 할렐루야!” 그래 놓고는 출근하려고 차에 올라 시동을 걸려는 순간, 밧데리가 다 나가버린 걸 알자 기쁨이고 행복이고 모두가 다 같이 날아가 버리는… 그런 기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기쁨은 조금만 상황이 나쁘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여러분과 저도 이런 “기쁨”을 누리다가 순식간에 기쁨이 사라진 경험을 여러번 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여러분과 저의 마음속에 주님의 기쁨이 머물러 있다면 어떻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게 영원한 생명을 주었노라. 그 누구도 너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노라. 네가 비록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으나 그때까지의 모든 것은 내가 책임을 지겠노라. 내가 네게 나의 기쁨을 주노니 아무도 그 기쁨을 빼앗을 수 없노라…” 그렇습니다. 이 기쁨을 당신이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내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나이다. 내가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니이다. 13절엔 “이제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것들을 말하옵는 것은 그들이 내 기쁨을 자기들 안에서 성취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기쁨을 제자들 안에서 성취(fulfilled)하게 함이라고 되어 있군요. 성취란 단어는 “가득(fully) 채워 주신다”(filled)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가 땅으로 재림하실 때 갖게 될 기쁨만큼이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그 정도의 기쁨과 흥분으로 가득 차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이와 같은 중보를 하고 계십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다(충만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전적으로 성령의 통제하에 놓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분께서 해 주신 것들에 대해 흥분하고 감격하여 소리치며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육신적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A)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완전히 통제하실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입니다. 어떤 분은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 시대는 영적 환경이 너무도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기뻐할 수 있을까요?”이렇게 생각이 든다면 성경 한 구절을 더 찾아보십시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에서 7절 말씀입니다. 5 이는 우리의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고 권능과 성령님과 큰 확신(確信)으로 이르렀기 때문이니 우리가 너희를 위해 너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는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고난 속에서 성령님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따르는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서 믿는 모든 자에게 본이 되었느니라. 여기 보니 많은 고난 속에 놓여 있는 성도들이 성령님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다고(6절) 되어 있습니다. 많은 고난 속에 놓여 있었으나 이 고난에 점령당하지 않고 오히려 성령님의 기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에 의해 점령된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께 제안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제껏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스포츠축제(월드시리즈, 월드컵 등)나 록 콘서트(마이클 잭슨, 마돈나 등)에서 “광분”하는 모습에 대해 비판하거나 조롱해 본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우상과 영웅들로 인해 흥분하고 광적으로 소리를 질러대는 모습을 다음에 보게 될 때는 비판이나 조롱대신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내가 구원받은 그것으로 인해,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의 복으로 복 받은 그것으로 인해 나도 그들처럼 “미친 듯”이 감격하고 흥분하여 소리를 질러댈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이 시간 그런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세상 사람들도 그들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그렇게도 기뻐할 수 있건만(우리는 그것들이 얼마나 헛된 것인 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영생과 축복과 소망으로 인해 더욱더 기뻐 날뛰고 소리쳐 기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께서 꼭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도록 다 같이 기도합시다. “하늘 아버지시여! 제 삶에는 행복한 순간도, 기분이 괜찮은 때도, 그리고 좋은 느낌으로 가득 찬 순간들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주님, 그런 것들은 육신적인 것들로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아버지시여, 내게 필요한 것은 당신의 기쁨입니다. 넘쳐 흘러 주체할 수 없는 감격과 흥분과 외침이 가득한 기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행하신 것들과 행하고 계신 것들과 행하실 것들로 인해 기뻐하게 하소서. 이 일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09-05-01 18:19:33 | 관리자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구원과 성숙을 위한 기다림   오늘 설교는 상당히 꺼림칙한 상태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4시간 전에 오늘 설교 제목인 “오래 참음”에 있어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실패한 내용을 가지고 설교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허나 이미 앞서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저도 여전히 갈 길이 멉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제 안에서 계속 역사(work)하셔서 결국은 이 열매도 맺히시기를 바랍니다. 성경 말씀에 따르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부드러움, 선함, 믿음, 온유, 절제”라고 합니다. 오늘은 “오래 참음”에 대해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아마 오늘 말씀은 듣고 놀라실 분이 많으실 겁니다. 솔직히 저도 매우 놀랐으니까요. 사실 오늘 이 메시지를 전할 때까지도 저는 이 내용을 인식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오래 참음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성경구절들과 그 앞뒤 문맥을 다 찾아 읽어 가다보니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반역을 한 이 세상의 죄인들에 대해 취하시고 계신 태도가 다름 아닌 오래 참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종종 봅니다. 성경의 어떤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분명히 알지 못하다가 성경구절들을 비교하며 문맥을 살피다 그 정확한 의미가 드러나는 경우 말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오래 참음”에 대해 생각해 보니,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과 저의 그 어떤 죄악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을 철회하시도록 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축복과 용서를 취소하시도록 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이 “오래 참음”이 부족합니다. 물론, 저는 최선을 다해 주님의 증인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어떻게든 죄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는 정말이지 “더 이상은 못 하겠다.”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제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죄인들이 있더란 말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오후 제가 전화를 한 통화 받았는데 누군가가 저한테 전화하면 성경에 관해 답변해 줄 수 있다고 해서 전화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아는 대로 도와드릴 수 있겠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성경에서 삼위일체를 믿을 만한 근거 구절이 있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이렇게 제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럼요. 여러 가지 각도에서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우선 당신께서 킹제임스성경을 갖고 계신다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좀 힘들지요. 상당한 구절들이 다르거든요.” 그랬더니 “좋습니다. 말씀해 주세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요한일서 5장 7절을 보세요.”라고 했더니 “그 구절은 시내사본과 바티칸사본에는 없는 구절인데요.”라고 즉각적인 대답을 주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이 사람은 진리를 알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논쟁하고자 하는 사람인 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에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는 말씀을 했더니 ‘하나의 무엇’이란 말입니까?”라고 대꾸하더군요. 그래서 다시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는 말씀을 인용했더니, “디모데전서 6장에 보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invisible)이신데 어떻게 보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으니 보일 수 있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즉시 엉터리 성경을 인용하면서 육신을 입고 나타난 하나님이 아니고 단지 그분일 뿐이라고 하더군요. 결국 20분이 넘게 인내심을 갖고 공손하게, 그리고 친절한 어조로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애를 썼으나 결국 그는 킹제임스의 오류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돌아섰습니다. 알고 보니 여호와의 증인 중에서 좀 “날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처음부터 “저는 여호와의 증인인데 당신과 성경에 대해 논쟁을 좀 하려 합니다.” 이렇게 말했더라면 저도 기꺼이 그 논쟁에 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저를 속이고서는 마치 성경에 대해 문의를 하는 것처럼 했지요. 결국 저는 성질을 못 참고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메시지를 실패 가운데 전하고 있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저는 이 사건으로 인해 마음이 몹시 상했습니다. 우선은 그 사람이 진리를 알고자 하지 않고 제가 인용하는 성경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아서 그랬고, 또한 제가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으니 마음이 상했지요. 그러나 정말 제 마음이 상한 것은 제가 그 사람에게 끌려가 결국은 육신적으로 행동을 해 버린 것입니다.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자였고 저는 구원받은 사람이었는데도 누군가가 그 사건을 주시하고 결말을 지켜보았다면 제가 오히려 더 나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라는 점이 더욱 속상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 사람보다 더 나아야 하거늘 결과는 그렇지 못했으니 이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 세상 사람 하나를 그저 30분 정도 대하면서도 못 참고 말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수백만이 넘는 자들을 매순간마다 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래 참음”이라는 주제를 대하면서 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에 전혀 근접하고 있지 못한 저를 바라보게 됩니다. 저는 거리설교를 좋아합니다. 한 30분 정도 “열”을 내서 외쳐대고 나면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 제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왜 저들을 땅을 갈라 산채로 집어던지지 않으시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아직도 멀었습니다. 제가 76년에 구원받았으니 만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75년에 끝나버렸다면 저는 지금 지옥에 가 있겠지요. 이중에는 “91년에 하나님의 인내가 끝났다면 나는 지옥행이었을 텐데.” 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아직도 다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참으로 감사하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 저희에게 아버지께서 어떠하신 분이신지, 아버지의 성품은 어떠하신지 보여주시기를 간구드립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드시기를 원하시며 이를 통해 우리가 아버지를 어떻게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베드로후서 3장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러 구절들을 살펴보면서 오래 참음(longsuffering)이란 하나님께서 경건치 않은 자들 즉 악한 자들에 대해 취하시는 자세, 혹은 태도라는 사실을 분명히 배우고자 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4절부터 15절까지 보십시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나니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화평 중에 그분께 발견되기를 힘쓰라.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인 줄로 여기라. 심지어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자기가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여기서 주목할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인 줄로 여기라.”는 말씀 말입니다. 어떤 분은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이 구원인데 어찌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인가 하고 의아해 하시는 분도 계실 텐데요, 그러나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없었더라면 우리에겐 복음을 들을 기회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인데요.”라고 말씀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없었더라면 여러분과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엄격함을 감안한다면(‘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 생각나시지요!) 아마 13세 이전에 우리 중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혹시 13세 이전에 구원받으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지만, 그것이야말로 예외적인 경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13세가 넘어 20세, 30세가 되어서야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들의 소행을 참아 오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로써 우리에게 복음을 들을 기회를 주시어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이 엄청난 축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없었더라면 일찌감치 처벌 받아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나의 태도, 나의 언어, 나의 교만, 나의 불순종뿐만 아니라 온갖 소행 등을 다 참아내시고 결국 제가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구원받을 때까지 기다려주셨던 것입니다.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인 줄로 여기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우선 창세기 6장 5절에서 7절까지 보겠습니다. 5 하나님께서 사람의 사악함이 땅에서 커지고 또 그의 마음에서 생각하여 상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주께서 땅 위에 사람을 만드신 것으로 인해 슬퍼하시며 또 그것으로 인해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멸하되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날짐승까지 다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으로 인해 슬퍼하기 때문이라, 하시니라. 그리고 베드로전서 3장 20절입니다. 이 영들은 노아의 날들에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 곧 하나님께서 한 번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불순종하던 자들이라. 방주 안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가 몇 안 되니 곧 여덟 혼이라. 창세기 5장을 보면 에녹이 휴거된 사건이 나옵니다. 그리고 열왕기하 2장을 보면 엘리야가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또 하나의 휴거가 나옵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창세기 6장 5절에서 7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의 소행을 오랫동안 참고 계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노아가 방주를 다 완성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그 사악한 자들에게 의인 노아를 통해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오랜 기간을 오래 참고 계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그토록 오래 참으심... 이것이 곧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 열매는 여러분과 저의 인격이나 수양이나 본성이나 기질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이 오래 참음은 오직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실 수 있을 뿐입니다. “저는 어떻게든 죄인들이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말씀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동성연애자들이 퍼레이드를 벌이는 곳에 가서 전도지를 나누어줄 때, 분노를 터뜨리지 않고 성질내지 않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럴 수 있다고 확신하시나요?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것들이 노아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창세기 6장 5절에 이르기를 사람의 사악함이 커지고 모든 생각과 상상이 악하므로 하나님께서 슬퍼하시고 근심하셨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들 악한 자들 모두에게 언제든 방주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오래 동안 참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마음만 돌이켰더라면 언제든지 방주 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요즘 낙태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일부 “그리스도인”이란 사람들이 낙태를 시술하는 의사들에게 총을 쏘는 일이 있었는데 이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오래 참음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3절부터 보겠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라, 곧 마지막 날들에 비웃는 자들이 와서 자기들의 정욕을 따라 걸으며 여기 보니 비웃는 자들이 등장하는군요. 저는 사실 이런 자들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이 사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고 또 땅이 물에서 나와 물 가운데 서 있는 것을 일부러 알려 하지 아니하느니라. 이들은 일부러 알려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정말 저는 참을 수 없습니다. “진리를 들려주는데 왜, 왜, 왜 거부 하는거냐? 이 못된 자들아! 속히 회개하고 진리를 받아들이거라!”며 목이 터지도록 외쳐대고 싶은 심정입니다. 물론 이런 태도가 옳지 않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적어도 저는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찌되었든 지옥에는 가지 않고 하늘나라에 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 같으면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런 분은 그 어떤 식으로든 누구에게도 아무 말을 안 할 겁니다. “이봐요, 어째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은 거의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속히 영적으로 성숙해서 올바른 태도로 전도하는 것이 최상입니다만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상책은 아닙니다. 지금은 좀 육신적인 모습이지만 그 언젠가 성령께서 온전히 통제하실 때 올바른 자세로 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7절부터 보십시오.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은 주께서 같은 말씀으로 보관하사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사르기 위해 예비해 두셨느니라. 말씀을 보니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 결국은 불로 심판받게 되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9절을 보십시오. 주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디지 아니하시며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주님의 오래 참으심을 주목하십시오. 저는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복음을 거부하는 자가 나타나면 “그래, 나는 내 할 일을 했으니 주님을 거부한 자여! 그대 갈 길로 영원한 지옥불로 가거라!”는 식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모양이야 어떻든 제가 해야 할 의무 중 증언(witnessing)은 한 셈이니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와 같은 방식으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에스겔서를 보니 하나님께서 사악한 자가 죽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위와 같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우리의 조급함을 비교해 보세요.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발로 먼지를 털며, “오, 그래? 우리 각자 제 갈 길로 가는 거야.” 하고 끝내 버리기가 일쑤 아닙니까? 이 순간 저와 여러분은 성령님의 통제하에 놓여 있지 않고 육신 안에서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다르십니다. 그분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신다고 합니다. 어째서 지난주에 하늘과 땅이 불타지 않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이번 주에도 몇 사람이 구원받도록 주님께서 오래 참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 왜 지구가 불살라지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오늘 오후에 그 누군가가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사악함을 말끔히 정결케 하시고자 불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이전에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고 계십니다. 출애굽기 34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곳은 당연히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의 타락사건 때입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으나 실은 아담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아담대신 어린양이 죽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아담에 대해 오래 참으셨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장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살인하지 말라”라는 명령을 기록해 놓으셨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가인이 첫 번째로 살인을 저질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보존하셨습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인의 생명을 빼앗지 말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노아 시대에도 앞서 본 바대로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셨습니다. 이번에는 출애굽기 34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10계명을 받아가지고 내려옵니다. 두 개의 돌판 위에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10계명입니다. 32장에 모세가 내려오는데 멀리서 보니 아론이 이상한 “경배”를 드리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보니 사람들이 금송아지에게 경배하며 벌거벗고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이 흉측한 모습을 본 모세는 크게 분노하여 두 돌판을 내던져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금송아지를 빻아 가루로 만들어 강물에 풀어 모두가 마시도록 했습니다. 3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다시 산으로 부르십니다. 34장 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처음 것과 같은 돌 판 두 개를 깎으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들에 있던 말들을 내가 이 판들 위에 쓰리니 여기 보니 금송아지 만들어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 아니라 모세가 10계명이 들어있는 돌판을 깨뜨렸다고 합니다. “주님, 금송아지 만든 자들이 계명을 깨뜨린 것 아닙니까?” 이렇게 항변했을지도 모르지요. “모세야, 네가 깨뜨린 처음 판들에 있던 말들을 다시 쓰겠으니 꼭 같은 판을 두 개 만들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시고 계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2 아침에 예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거기서 산꼭대기에서 네 자신을 내게 보이되 3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게 하며 온 산에서 아무도 보이지 않게 하고 양 떼나 소 떼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4 모세가 처음 것과 같은 돌 판 두 개를 깎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주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돌 판 두 개를 손에 들고 시내 산에 올라가니 5 주께서 구름 가운데 내려오사 그와 함께 거기서서 주의 이름을 선포하시니라. 6 주께서 그 앞으로 지나가시며 선포하시되, 주로다. 긍휼이 많고 은혜롭고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주 하나님이로다. 7 내가 긍휼을 수천에게 베풀며 불법과 범죄와 죄를 용서하되 그것이 결코 죄 있는 자를 깨끗하게 하지는 아니하리라. 내가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녀들과 자녀들의 자녀들에게 벌하여 삼대와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 8 모세가 급히 땅을 향해 머리를 숙이고 경배하며 6절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고 계십니다. 그중에서 오래 참으시는 분이심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보호하시고 먹이시고 돌보셔서 시내산까지 인도하셨으나 이들은 그 모든 은혜에도 불구하고 우상을 만들어 경배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모세는 참을 수 없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참으셨을 뿐 아니라 이들에게 다시 십계명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계명들이 그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집트에서 보이신 열 번의 재앙, 유월절 사건, 홍해를 건넌 기적, 이와 같은 엄청난 역사를 보고도 금송아지를 만들었을까 싶지만 사실입니다. 표적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계심을 알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짓을 저질렀습니다. 이런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참아내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수용할 때까지 하나님은 오래 참고 계셨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런 짓을 하고 있는 모습을 여러분과 제가 보았다면 우리는 우상숭배와 심판, 정의, 지옥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들을 쭉 열거하면서 정죄를 선포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리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거부하겠단 말이지. 그렇다면 좋소. 당신은 영원한 불못에서 영원히 불타오르며 고통을 당할 것이지요. 꼴좋게 됐군요.” 혹시 이것이 여러분과 제 입에서 나올 법한 말들은 아닌가요? 그러나 이런 행동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처음 서너 번이 지나고 계속해서 고집불통으로 복음을 거부하고 조롱하는 경우, 어쩌면 여러분과 저는 그런 식으로 분노를 터뜨릴지도 모릅니다. 물론 지옥과 심판에 대해서는 정확히 선포하고 설교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죄인들이 지옥가기를 바란다는 식의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민수기 14장 17절입니다. 17 이제 간청 하옵나니 이미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 주의 권능을 크게 나타내옵소서. 이르시기를, 18 주는 오래 참고 긍휼이 많아 불법과 범죄를 용서하나 결코 죄 있는 자들의 죄를 깨끗이 치우지 아니하며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느니라, 하셨나이다. 여기 보니 모세가 앞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계시하신 말씀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모세는 주는 오래 참으시는 분이심(18절)을 제일 먼저 기억하고 있습니다. 금송아지 사건을 기억해 볼 때 모세의 마음에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 이것을 기억해 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자주 복음을 다시 듣는 것이 유익한 이유는 우리가 아차하면 과거에 우리가 구원받기 전의 일들을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까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고, 또 참고 기다리셨는지를 상기하는 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오, 놀랍도다.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여! 과연 그렇습니다. 주님이 오래 참아 주셨기에 드디어 여러분과 저에게 기회가 찾아왔고 구원이 성취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오래 참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는 벌써 끝장이 났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주님의 이 오래 참으심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주변의 죄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해 주신 만큼의 충분한 시간을 주려고 하지 않고 조급하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우리로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지요. 로마서 2장으로 가기 전에 로마서 1장 28절부터 보겠습니다. 28 또한 그들이 자기 지식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버림받은 생각에 내주사 합당하지 못한 일들을 행하게 하셨으니 29 그들은 곧 모든 불의와 음행과 사악함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하며 시기와 살인과 논쟁과 속임수와 적개심으로 가득하고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뒤에서 헐뜯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업신여기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한 일들을 꾸미는 자요,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자요, 31 지각이 없는 자요, 언약을 어기는 자요, 본성의 애정이 없는 자요, 화해하기 어려운 자요, 긍휼이 없는 자라. 32 그들이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도 같은 일들을 행할 뿐 아니라 그런 일들 행하는 자들을 기뻐하느니라. 그리고 로마서 2장 1절에서 3절입니다. 1 그러므로 오 판단하는 사람아, 네가 누구이든 변명할 수 없나니 이는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들을 행하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에서 네 자신을 정죄하기 때문이라. 2 그러나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확신하노라. 3 오 그런 일들 행하는 자들을 판단하고도 같은 일들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여기 보니 온갖 죄를 지은 자들의 목록이 나오고 결국 32절에서 이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2장 1절에서 3절에서는 그런 짓을 행하는 자들을 판단해 놓고도 같은 일을 하는 자들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제 4절을 보십시오. 혹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함을 알지 못한 채 네가 그분의 선하심과 관대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로마서 1장 29절에 불의한 자가 나오는데 32절에 따르면 죽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로마서 2장 4절을 보니 그런 사람들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고 계십니다. 주님의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이해하시겠습니까? 29절에 음행하는 자가 나오고 32절에 죽어 마땅함이 나오는데 2장 4절에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들에게도 오래 참으십니다. 여기 나와 있는 죄의 목록 중 여러분과 제가 저질렀던 죄들도 있습니다. 이 죄로 인해 우리는 죽어 마땅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아 주셨습니다. 이 점은 여러분도 스스로 인정하실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9절부터 31절까지 나오는 모든 죄들 하나하나가 다 죽어 마땅하다는 판결이 났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죄들을 지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보여주셨습니다. 로마서 2장 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선하심, 관대하심, 그리고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이 없었더라면 여러분과 저는 회개할 기회를 결코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았습니다.” 물론 당연히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대답한다고 해서 여러분은 처음부터 복음을 믿으셨나요? 아니면 그전에 여러 번 거절하거나 무시하고 조롱하지 아니하셨나요? 아마 우리 대다수는 회개하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오래 참아주시지 않았더라면 벌써 지옥불에 던져졌을 겁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이처럼 소중한 것인 줄 알고 계셨습니까? 로마서 9장으로 가 보십시다. 22절입니다. 22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노를 보이고 자신의 권능을 알리기 위해 파멸하기에 합당한 진노의 그릇들에게 심히 오래 참으심으로 인내하시고 23 이로써 영광에 이르도록 미리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들에게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리려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4 이 긍휼의 그릇들은 우리니 곧 그분께서 유대인들 중에서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중에서도 부르신 자들이니라.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을 심히 학대했던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자를 하나님께서는 살려두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을 통해 참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그런 자에게까지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합은 사악한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가 열다섯 살 때에 죽이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른 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자를 매일 아침, 그 어느 때고 죽이실 생각만 있으셨다면 그렇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가 저지른 죄악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상숭배, 이세벨 사건, 나발 사건, 선지자들을 학대함 등등 셀 수 없는 죄악들에도 불구하고 이 자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엘리야를 보내셔서 참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그런 자에게도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성경은 실로 놀라운 책입니다. 느브갓네살은 이방제국의 독재자입니다.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우상숭배를 강요한 자요, 거부하는 자들을 풀무 불에 내던진 자입니다.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거룩한 성전의 기물들을 가져다가 파티용 그릇으로 사용했던 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고 그 중 일부를 내시로 삼고 노예로 삼는 등 실로 엄청난 짓을 저지른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어느 때고 죽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를 살려두셨다가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통해 참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 자신이 누구신지를 계시해 주셨습니다. 제게 만일 전능한 권능이 있었다면 저는 아마도 파라오, 아합, 느부갓네살도 결코 오래 살도록 내버려 두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 모두를 오래 참으심으로 대하셔서 이들이 참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느브갓네살이 다니엘서 4장에서 다니엘의 하나님이야말로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장면말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는 저런 못된 사람을, 못된 우상숭배자들을 그냥 내버려 두실까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오래 참으심으로 이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연장시켜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하고 나쁜 자들마저도 지옥에 내던져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런 자들이 구원받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러한 오래 참음이 어떻게 가능하다고 생각되십니까? 제 서재에는 엄청난 양의 선교사의 전기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책들을 읽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이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고문당하는 이야기를 읽어 보시기 권합니다.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고문을 당했습니다. 결코 들으려하지 않는 고위 관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으나 오히려 고문을 당하는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악하고 못된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즉시 죽이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구원받도록 기회를 주시려고 오래 참으십니다. 솔직히 말씀드립니다만 저에게는 이러한 오래 참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구원받은 자녀이고 성령께서 제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그처럼 오래 참을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래 참을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서는 여러 선교사들에게 주셨습니다. 아도니람 저드슨 같은 선교사들 말입니다. 어떻게 이들 선교사들은 모든 것을 참아낼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능할까요? 그렇습니다! 오,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우리는 히틀러 같은 자가 죽기를 바라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도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모택동 같은 자가 죽기를 바라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도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카스트로도 호치민도 지옥에 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좀더 살펴보십시다. 예레미야 15장과 디모데후서 3장을 통해 이 주제와 관련해 조금만 더 보십시다. 예레미야 15장 15절을 보십시오. 오 주여, 주께서 아시오니 나를 기억하고 돌아 보사 나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복수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시는 중에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주를 위하여 내가 책망 당하는 줄 아시옵소서. 내용인즉 예레미야는 주를 섬기는 자기를 너무도 고통스럽게 하는 자들을 당장 “박살”내 달라고 하는군요. 하나님께서 그 누구에게든 오래 참으셔도 상관없으나(예를 들면 아담, 가인 등) 자기를 괴롭히는 자들만은 결코 용서할 수 없으니 당장 복수해 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는 오래 참으시는 중에 버리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주님을 위해 당하는 박해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원수를 하나님께서 당장 갚아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으로 가 보십시다. 10절에서 14절입니다. 10 그러나 너는 나의 교리와 삶의 방식과 목적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11 안디옥과 이고니움과 루스드라에서 내게 닥친 핍박과 고난을 잘 알았으며 내가 어떠한 핍박을 견디어 냈는지 잘 알았느니라. 그러나 주께서 그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져내셨느니라. 12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모든 자는 핍박을 받을 터이나 13 악한 자들과 미혹하는 자들은 점점 더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 14 그러나 너는 배워서 확신하게 된 것들 안에 거하라. 네가 그것들을 누구에게서 배운 줄 알며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의 영적 자녀 디모데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명합니다. 내용인즉 그가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하나님의 성품대로(godly) 살다가 얼마나 박해와 핍박과 고난을 당했는지를 잘 기억하고, 혹시 그런 일들을 당할지라도 본 그대로 참아내고 이겨내라고 합니다. “디모데, 너는 나와 함께 다니며 우리가 받은 핍박과 그 핍박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잘 알고 있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자에게는 늘 그런 일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네가 배운 대로 계속해서 그리하라.” 이것이 바울이 그의 유언 같은 디모데후서에서 남긴 말입니다. “배운 대로 계속하라(continue)!”, “배운 대로 계속하라(continue)!” 바울은 그가 잘못된 대우를 받았을 때도, 비방과 핍박을 받았을 때도, 능욕을 당했을 때도, 감옥에 갇혔을 때도, 그 어느 때든지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 오래 참음으로 세상의 악한 행실을 이겨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들에게로 돌아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경험을 통해 그가 얻은 교훈을 자신의 후계자 디모데에게 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네가 보고 배운 그대로 계속하라. 왜냐하면 그럴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울의 결론입니다. 저라면 어떠했을까요? 제가 복음 전하다가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갇힌다면 복음 증거를 중단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제게 없다면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오래 참음 때문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누어 주셔서 바울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는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에게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으로 가 봅시다. 4장 1절도 같은 문맥입니다. 1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 앞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곧 친히 나타나실 때에 자신의 왕국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 앞에서 네게 명하노니 2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긴급히 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 여기 보니 2절에 말씀을 선포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3장 17절에 그 말씀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다시 4장 2절에 보니 때가 맞든지 아니하든지 긴급히 하라고 하십니다.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만 있다면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디모데후서 3장 16절 말씀대로 교리를 가르칠 수 있고, 책망할 수도 있고, 바로잡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3장 17절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throughly) 갖추어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철저히”란 단어를 보십시오. 모든 과정을 다 통과하여 철저히 준비된다는 뜻입니다. 3장 17절이 없다면 4장 2절의 나의 책무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입니다. 아침에 저는 전화 걸어온 사람에게 교리, 책망, 바로잡음, 의로 교육하는 일에는 능숙했는지 모르지만 제 자신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오래 참지 못했습니다. 오늘 아침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멋지게 수행하여 내가 옳고 그가 틀리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지만, 3장 17절을 지키지 못해 결국 제게 잘못된 행동을 하는 그 사람에게 올바르게 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선포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교리를 말하고 책망도 하고 권면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하나님 없이 혼자서 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했다면 그분의 오래 참음이 함께 했을 테지요. 즉 주님의 일을 하더라도 주님께서 자신의 모든 오래 참음으로 저를 통제하고 돕지 아니하신다면 주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으로 교리도 전하고, 책망도 전하고, 바로잡아 주고 의로 교육하고 권면도 해야 합니다. 당연히 성도로서 해야 할 마땅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이때 주님이 우리를 통제하지 아니하시면 결국 우리는 성령님대신 우리 육신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그 결과는 몹시 추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일 뿐임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두 구절을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디모데전서 1장을 보십시다. 12절부터입니다.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를 드림은 그분께서 나를 신실한 자로 여기사 내게 사역을 맡기셨기 때문이라. 13 내가 전에는 신성모독하는 자요, 핍박하는 자요, 해를 끼치는 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얻게 됨은 내가 믿지 아니하는 중에 알지 못하고 그렇게 행하였기 때문이라. 여기 보니 바울은 전에 신성모독자요, 핍박하는 자요, 해를 끼치는 자였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복음 전하러 가면 이런 자들을 종종 만납니다. 잊지 마십시오. 이런 자들 중에서 바울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핍박과 고문을 받으며 때론 화형에 처해지면서까지 그런 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분들은 이런 자들 중에서도 복음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바울 같은 위대한 그리스도인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14절부터 이어 읽겠습니다.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이 말은 신실한 말이요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말이로다. 죄인들 중에 내가 우두머리니라. 16 그러나 먼저 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이후에 자신을 믿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될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셨으니 이런 까닭으로 내가 긍휼을 얻었느니라. 16절을 주목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모든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바울 같은 신성모독자요, 핍박하는 자요, 해를 끼치는 자가 긍휼을 얻어 구원받아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오직 주님께서 바울의 모든 소행을 견디셨기 때문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주님은 이렇게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나는 너의 온갖 소행을 오랫동안 참아왔다. 그러나 나는 너를 구원할 것이다. 알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를 용서하리라. 나는 너를 구원하리라. 이제 됐으니 돌아서서 내게 오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16절 끝부분을 보니 바울이 본(pattern)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떠한 본을 말합니까? 비록 우리가 바울처럼 하늘로부터 음성을 듣지 못했어도, 주님을 만나지 못했어도, 쓰러져 장님이 되진 않았어도, 우리 모두는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소행을 모든 오래 참으심으로 견디어 내신 후” 그분의 긍휼을 힘 입어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바울은 우리 모두의 본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모든 오래 참으심이 여러분과 제 안에서 발휘되기를 주님께서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조금씩 더 주님의 “오래 참으심”을 받아들여 점점 더 인내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그 순간 주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래 참으심으로 역사하여 우리로 인해 죄인들이 정죄대신 구원을 받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1절부터입니다. 1 그런즉 우리가 그분과 함께 일하는 일꾼으로서 너희에게도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그분께서 이르시되, 받아 주는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구조 하였도다, 하시나니, 보라, 지금이 받아주시는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 3 이 사역이 비난을 받지 않게 하려고 우리가 어떤 일에서도 실족거리를 주지 아니하며 4 오직 모든 일에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사역자로 입증하되 많은 인내와 고난과 궁핍과 곤경과 5 매 맞음과 옥에 갖힘과 소동과 수고와 깨어 있음과 금식 가운데서 그리하고 6 순수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친절함과 성령님과 거짓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권능과 오른손과 왼손에 든 의의 병기로 그리하며 4절을 보니 하나님의 사역자로 입증되는 것이 나옵니다. 아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 모두가 그리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입증되려면 인내, 고난, 궁핍, 곤경(5절), 이러한 것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6절 중간에 “오래 참음”이 나옵니다. 이 오래 참음으로 고난, 궁핍, 곤경, 매 맞음, 옥에 갖힘, 소동, 수고, 깨어 있음, 금식 등을 다 견뎌내야 합니다. 우리 한번 솔직해 보십시다. 경건치 아니한 자들(ungodly)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보다 우리 경건한 자들(godly)이 그들에게 더 큰 영향을 끼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우리에게 못되게 굴거나 잘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오래 참지 못하고 성질을 내거나 다투어 죄를 짓고, 간증을 잃어버리는 수가 얼마나 많은지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되어서는 안 되겠죠. 오히려 그들이 우리의 오래 참음으로 인해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자주 곤경에 처하거나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때 우리에게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없으면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 오히려 우리로 죄를 짓게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우리는 이때야말로 철저히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노아의 방주를 지을 때에도 당시의 경건치 않은 자들이 회개하도록 오래 참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인류 역사 내내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이 혹시 회개할까 오래오래 참아오셨습니다. 그 동일하신 성령님께서 여러분과 제 안에서도 오래 참기 원하심을 잊지 마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인해 감사합니다. 저희 안에서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역사하여 많은 사람들이 저희 안에 주께서 살아 계심을 보게 하사 저희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09-05-01 18:18:37 | 관리자
성령의 열매: 화평 /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열매 11번을 공부하기 전에 로마서 5장과 이사야 57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성령의 열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아직도 마음속에 그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했거나, 누군가에게 쓴뿌리가 남아 있거나, 아직도 근심 걱정에 눌려 있거나, 혹은 그 어떤 죄가 여러분을 억누르고 있다면 우리가 배웠던 지난 열 번의 성령의 열매를 반복해서 여러 번 읽으시기(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패배감에 젖어서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생활이 승리로 점철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생활이 삼손처럼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삼손은 승리와 패배, 승리와 패배를 계속 반복하는 오르락내리락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8장 37절입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을 통해 정복자들보다 더 나은 자들이니라.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정복자 그 이상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원수들을 공개적으로 패퇴시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놀라운 승리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승리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 수고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승리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승리는 우리 스스로를 낮추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통제하에 순복시킬 때 가능합니다. 이때 우리가 성령님을 위해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성령의 열매가 우리를 통해 표현되어지는 것입니다. 지난번 “사랑”에 대해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 이미 우리 안에 넓게 부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열매로 맺혀진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갈라디아서 5장에 나와 있는 대로 사랑과 기쁨과 화평이라고 합니다. 이번 공부에서는 화평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아마도 화평(평안)을 얻고자 애쓰는 인간의 육신적 노력이 너무도 나약하고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는다면 우리 모두는 실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평안이든 국가적인 평화이든 간에 평화처럼 얻기 힘든 것도 없습니다. 화평(평안, 평강, 평화)에 대해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말을 합니다. 60~70년대를 거쳐 오신 분들은 온 세상이 평화, 평화, 평화를 외쳐대는 모습을 보셨을 것입니다. 반전운동, 세계평화대회, 평화행진, 데모, 각종 시위나 평화회담 등 아무리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이 땅에서 평화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더 많은 폭력, 살인, 충돌, 전쟁, 다툼 이런 소식이 신문과 방송에 넘쳐납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깨진 에덴 동산에서부터 인간은 그 화평을 되찾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 왔지만 여전히 “평화”는 갈망의 대상일 뿐 현실은 되지 못했습니다. 세계평화를 위해 창설된 유엔이 활동을 개시한 이래로 100여 개의 전쟁이 이 세상에서 일어났고, 또 일어나고 있으니 평화의 성취야말로 전도요원(前途遙遠)한 것 같습니다. 이유야 간단합니다. 평화의 통치자(Prince of peace)가 없다면 이 땅에 평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슬람교, 불교, 기독교, 카톨릭 등 온갖 종교들이 평화를 수호한다며 외쳐대고 떠들어 봐야 평화의 통치자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 줄 온갖 수단들(신경안정제, 뉴에이지 음악, 온갖 마약, 요가, 마인트 콘트롤 등)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마음이 평안해질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평화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절대로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도 주님께 나아와 구원받고 그 결과로 평강을 누리게 될 때까지 아마 애들 많이 쓰셨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가라앉히고, 죄책감을 없애고, 죄짐을 내려놓고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참된 평안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심을 저와 여러분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서 5장 1절로 가 보십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도다. 이 말씀을 염두에 두시고 이사야서 57장 19절부터 보겠습니다. 19 내가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노라. 평강(平康)이 있을지어다. 멀리 있는 자와 가까이 있는 자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주가 말하노라. 내가 그를 고쳐 주리라. 20 그러나 사악한 자들은 안식하지 못할 때의 요동하는 바다 같아서 그들의 물은 진흙과 오물을 내느니라. 21 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사악한 자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시느니라. 말씀을 보니 사악한 자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수단을 동원한다 해도 결코 평강이 없다고 합니다. 반면 로마서 5장 1절에는 여러분과 저처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화평(peace)을 누린다고(have) 되어 있습니다. 이 화평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peace with God) 누리는 마음의 평안을 말합니다. 계속해서 에베소서 2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13절부터 14절 상반절까지입니다. 13 이제는 한 때 멀리 떨어져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분은 우리의 화평이시니라. 그분께서 둘을 하나로 만드사 우리 사이의 중간 벽을 허무시고 앞서 우리는 이사야서 57장에서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평화를(화평, 평강, 평안)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장이나 가정이 반드시 평화로운 장소일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평안을 발견합니다. 장소와 환경과 여건이 어떠하든지 간에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으나 그리스도인들은 악인으로 둘러싸여진 세상에서도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평강은 전쟁의 종식도 아니고 우리의 원수들이 도말되는 것도 아니며 우리를 괴롭혔던 것들이 다 사라진 상태도 아닙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에는 우리의 화평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없다면 화평도 없습니다. 정신과 의사가 아무리 좋은 처방을 내려주더라도 그것이 화평을 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그럴싸한 종교집회에 자주 참석하든, 아무리 좋은 건강식품을 먹든지 간에 그 어떤 것들도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결코 당신에게 화평을 가져다 줄 수는 없습니다. 이제 기도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 이 시간 저희를 도우셔서 이 진리의 말씀을 분명히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저는 종종 사람들이 “예수님이 없으면 평화도 없다”(No Jesus, No peace)라는 스티커를 차에 붙이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스티커는 어떨까요? “예수님을 알게 되면 평강을 알게 된다.”(Know Jesus, Know peace) 실로 맞는 말씀입니다. 이전에 살펴본 로마서 5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데 로마서 5장에 보니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겠지요. 그러나 의롭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우리 신앙생활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고 휴거를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성령님께 자신을 내어드리지 아니하면 비록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확실하겠지만 이 땅에선 어쩌면 구원받기 전과 별반 차이 없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1절에 이어 2절을 읽겠습니다. 또 우리가 그분을 통해 지금 서 있는 이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하느니라. 말씀을 보니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with) 화평을 누리게 된 것이 끝이 아니고, 이에 더하여 무엇이 더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도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죽을 때 하늘나라로 가서 주님과 함께 있을 것만 붙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받은 후 하늘나라에 가게 될 그때까지의 중간 기간에는 주님께서 어디서 무엇을 하시는지 도무지 모르거나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현세의 삶은 엉망진창이거나 삶이 비참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구원받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확신과 기쁨과 축복을 누렸고 죽을 때도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지만 그 중간의 삶은 왜 확신과 기쁨과 평강대신 “그저 그런” 삶을 그저 그렇게 보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생의 시작과 끝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면 그 중간 동안에도 당연히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련과 어려움과 고난을 극복하여 하나님의 평강과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는데도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지 못한 것인지 저는 실로 이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고 부활시켜 하늘로 데려 가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째서 우리와 우리 주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까? 바로 로마서 5장 2절이 그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다(have access)고 말씀하십니다. 은혜가 우리의 소유는 아니지만 접근(access)이 늘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은혜는 어떤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까? 2절을 보니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은혜입니다. 이 기쁨이 다름 아닌 성령의 열매입니다. 3절에 환란도 기뻐한다고 합니다. 누가 그럴 수 있습니까? 앞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은혜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즉 1절에 나온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이 모두 다 환란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감(접근)을 얻은 자들이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이 환란을 겪으면서 기뻐하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에 동의하실 것입니다. 6절부터 9절까지는 우리 과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10절 끝부분은 미래에 대한 언급입니다. 그러나 11절을 보십시오. 그러할 뿐 아니라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now) 속죄를 받았으며 그분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또한 기뻐하느니라.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이제(now)입니다. 과거와 미래가 아닌 지금 현재에 대한 언급입니다. 우리는 속죄하면 늘 과거 생각을 하고 미래에 하늘나라 갈 생각만 하지만 이 속죄는 현재 내가 받아 가지고 있는 것이요, 따라서 현재(이 땅에 사는 동안)의 삶에 “역사”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간다는 사실,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환란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참 평안을 가져다 줄 수는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로 인해 내가 지니게 된 평강은 환란이 닥쳐오면 한계를 드러냅니다. 따라서 환란을 겪는 동안(즉 현재적 삶)에 우리는 평강을 유지할 수 있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평강으로는 인생의 우여곡절 속에서 부족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평강이 필요합니다. 인생의 항해 가운데 파도가 치고 폭풍이 몰려올 때 우리 모두는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저는 요즘 자주 비행기를 타고 설교하러 다니는 편입니다. 이륙에서 착륙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비행기가 정상적으로 날아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늘 평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나의 평강 가지고는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평강을 유지하기 위해 평강에 관한 성경구절을 암송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인생의 시련들이 닥쳐올 때면 나의 평강은 여지없이 한계를 드러내고 맙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저는 평강이 부족하고 평강을 생산할 능력이 없습니다. 마가복음 4장을 보십시오. 36절부터입니다. 36 그들이 무리를 보내고 그분을 배 안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작은 배들도 그분과 함께하더니 37 큰 폭풍이 일어나고 파도가 배 안에 들이쳐서 이제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그분께서는 배 뒤쪽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그들이 그분을 깨우며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는 것을 돌아보지A) 아니하시나이까? 하매 39 그분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신즉 바람이 그치고 매우 고요하게 되거늘 40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하여 너희가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며 서로 이르되,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심지어 바람과 바다도 그분께 순종하는가? 하더라. 36절, 37절에 보니 큰 폭풍에 배가 침몰될 지경이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주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그분의 평강이 폭풍과 파도가 일으키는 불안보다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폭풍과 파도가 일으킨 두려움과 불안보다 주님께서는 훨씬 더 큰 평강을 지니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주님의 평강을 “돌아보지 아니하심”으로 착각했습니다.(38절) 여기서 잠깐 빌립보서 4장으로 가 보십시다. 빌립보서 4장 6절과 7절입니다.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7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말씀은 우리 보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Be careful for nothing)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지 않으셨고(6절) 오히려 하나님의 평강으로 가득 하셨습니다(7절). 폭풍 속에서 제자들은 외쳐댑니다. “주여, 염려가 되지 않으십니까? 주여, 염려가 안 되시냐구요?” 그러나 주님은 말씀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아직 잘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나는 나의 염려를 내 아버지께 모두 맡겼느니라. 아버지께서는 내 염려를 다 받으셨고 내게는 아버지의 평안을 주셨느니라. 나는 이 폭풍이 두렵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내가 바다 건너편으로 갈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평안을 지니고 계셨기에 폭풍우 가운데서도 편안히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께는 가지셔야 할 염려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염려는 다 아버지에게 맡긴 후였으니까요. 예수님께서는 폭풍우 가운데서도 아버지의 평강으로 평안을 유지하고 계셨으나 제자들은 동일한 폭풍우에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환경도 여건도 상황도 동일합니다. 다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갖고 계셨고 제자들은 그 마음이 없었다는 점이 차이일 뿐입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놀랍게도 바람도 바다도 다 그분께 순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평안(peace)을 받아서 바람과 파도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peace, be still.) 여기 보니 영어로 “peace”라는 단어가 흥미롭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평강을 공급하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이 평강을 바람과 바다는 받아들여 바람이 그치고 매우 고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동일한 평강을 우리에게도 주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바람과 파도와는 달리 도무지 받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피조세계(creation)는 주님께 순종하는데 우리는 주님께서 평안(peace)이 너희에게 있으라, 하면 즉시로 “주님, 그렇지만 제가 겪고 있는 이 고난은 어떡하고요?”, “주님, 제 처지를 이해 못하시는 것 아닙니까?”, “주님, 이 상황에서 어떻게 평강을 가지라는 말씀입니까?” 우리는 이렇게 저렇게 대꾸하면서 불순종을 일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57장 20절에 보니 사악한 자들은 안식하지 못할 때의 요동하는 바다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진흙과 오물을 낸다고 했지요. 정확히 우리의 모습입니다. 결국 21절에서처럼 “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사악한 자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하십니다. 어떤 분은 “우리가 사악하다”고 하니까 즉시 “아닙니다. 저는 거듭난 사람입니다. 저는 구원 받았는데요.”라고 대답하시더군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강을 주시는 주님을 신뢰하지 않은 만큼 사악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사야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악한 자들”이란 결혼해서 일을 하며 먹고 사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와 전혀 다를 게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사악한 자들이란 의미입니다. 우리의 평안이 한계에 다다를 때 왜 우리는 더 이상은 평강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평강을 받아들일 만큼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염려를 가져온 이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서 충분히 담당하시리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로부터 보배로운 피로 깨끗이 씻기실 수 있고 우리를 지옥의 형벌에서 건져내어 하늘나라로 데려 가실 수도 있다고 믿은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이 “근심” 혹은 “염려” 같은 문제를 하나님께서 담당치 못하실 거라고 생각하다니 이런 불신이 또 어디 있습니까? “이 문제만은 하나님께 못 맡기겠어.”, “이 문제만은 아버지께 의탁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에 대한 제 감정은 절대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식의 모습들이 하나님을 제한하는 “사악함”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처럼 작은 분이시기에 당신의 그 큰 문제와 그 큰 염려는 도저히 어찌하실 수 없다는 것인가요? 이것이 여러분과 제가 삶에서 종종 부딪히는 현상입니다. 힘든 문제에 부딪치면 스스로 무진 애를 쓰다가 정작 하나님의 평강이 필요한 순간에는 “불신”의 모습을 보이는 그런 것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안을 생산해 낼 수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평안은 성령께서만이 맺으실 수 있는 열매라는 사실 말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5절을 보겠습니다.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으며 이것들을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26 위로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분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였든지 너희가 그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시리라. 27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기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세상이 주는 것과 달리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여기 보니 주님께서는 우리의 평안을 늘려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고, “나의 평안(my peace)” 즉 주님의 평안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평안이 항상 가능하다는 것 아시지요?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어떤 것을 염려하고 계신다는 것이 성립될까요? 주님께서 해결치 못한 문제가 지난 24시간 동안 있었을까요? 주께서 두려워하실 일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27절 말씀대로 주님은 평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14장 1절에도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모든 두려움, 불안, 의심, 불확실, 좌절, 초조감 등은 인간에게 신뢰를 둘 때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과연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되었건 남이 되었건 간에 인간은 “그것”을 해낼 수 있을지 확실치 않기 때문에 마음에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평안이란 인간의 행동능력에 근거하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사라져 버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안은 인간이 아닌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의탁하고, 주님을 신뢰할 때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이므로 제한이 없습니다. 이 평안은 우리 안에 항상 머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자신의 책임하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우리 안에서 살아내시는 것임을 안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를 신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중 내일 GM 자동차 회사가 어떻게 될까 걱정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 회사가 어떻게 되는가는 내게 달린 것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될지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염려할 일이 아니지요. 우리가 늘 근심과 염려 속에 살면서 평강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 중에는 얼마나 힘든 일들이 생기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머릿속엔 우리 인생의 일들로 가득 차 있으니 근심 걱정이 떠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분은 신뢰할 만한 분이시니 그분께 우리의 모든 염려를 내맡길 수 있고 그렇게 될 때에만 평안한 마음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7절에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이사야서 26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24장도 함께 보겠습니다. 만약 제가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마음이 평안했다가 갑자기 닥친 위기 상황 때문에 내 마음이 불안해졌다면 그것은 내가 주님대신 그 위기에 마음과 생각이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의사로부터 “암 선고”를 받거나, 가족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거나, 회사의 부도 소식을 듣게 되면 자연히 두렵고 불안해지며 긴장이 되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문제는 그 위기 상황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어디에다 고정시키느냐입니다. 만약 내게 닥친 그 위기만을 생각하게 되면 결국 마음의 평강은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그러한 위기 상황에서 나의 생각이 하나님께 머무르게 된다면 그분의 평강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도중 계속해서 어려움들이 닥치는 것은 우리로 그 어려움대신 주님께 생각을 고정시키도록 훈련시키셔서 우리를 영적으로 강건하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26장 3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께서는 생각을 주께 고정시킨 자를 완전한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하기 때문이니이다. 생각이 주께 고정된 자는 주님을 신뢰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주님께 고정시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모든 일이 잘 되어갈 때도 그러기가 힘든데 모든 일이 엉망으로 되어버렸다면 그 얼마나 더 어렵겠습니까? 누가복음 24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다락방에 숨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36절입니다. 그들이 이같이 말할 때에 예수님께서 친히 그들의 한가운데 서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앞서 우리는 파도와 폭풍우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파도와 바람이 잔잔해졌다는 사실(peace를 받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37절 같은 현상이 벌어진 것입니까? 그러나 그들이 무서워하고 놀라며 자기들이 영을 본 줄로 생각하매 만물이 주님께 순복하고 평안을 되찾는 반면 제자들은 무서워하고 놀랐다니, 어째서 그랬을까요? 그들의 마음이 사악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7절에 보시면 “자기들이 영을 본 줄로 생각하매”(supposed)라고 씌여 있습니다. 제자들 모두 하나같이 추측을 잘못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디모데전서에서는 악한 추측(evil surmising : 딤전 6:4)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진리와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상상이나 잘못된 추측으로 인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평강대신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추측대로 영을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내 손과 내 발을 보라. 바로 나니라. 나를 만지고 또 보아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오히려 제자들이 사실에 입각해서 생각했더라면 주님의 말씀대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이 성취되었을 텐데 자신들의 생각에 매달리다 보니 엉뚱한 결과를 가져온 셈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떻습니까? 왜 우리가 때로 그처럼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는지 아십니까? “뭐가 잘못되도 크게 잘못된 것 같아.”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면 우리도 쉽게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어떤 일이 생기기만 하면 그 일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추측하거나 상상하면서 근심 걱정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평강은 즉시 사라져 버립니다. 부활하셔서 그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즉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는 대신 자신들의 추측 때문에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우리를 포함해서)이 동일한 실수를 저지릅니다. 38절을 보겠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불안해하며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염려하느냐? 여기 보니 “마음속으로 염려한다”A)고 되어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이사야서 26장 3절대로 우리의 생각(mind)이 예수님께 고정되지 않고(stayed), 마음 안에서 일어나 엉뚱한 생각으로 발전하게 되면 악한 추측이 일어 두려움과 불안을 야기시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과 제가 처한 상황(situation)이 너무도 엄청나서 우리가 평강을 잃고 불안해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생각이 주님께 고정되어 있지 못해 떠다니며 그 상황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 어려움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 문제가 크게 잘못된 방향으로 갈 것같이 추측과 상상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생각이 주님께 머물러 있고 우리가 주님을 신뢰한다면 주님의 평강이 우리 안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살이 가운데 얼마나 자주 우리가 평강을 잃어버리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마음속에 불안, 의심, 초조, 쓴 뿌리, 미움, 절망, 고뇌 이런 것들이 떠오르게 되면 우리는 즉시 마음의 평정이 무너집니다. 이럴 때 이런 생각들을 즉시 처리하고 우리의 생각을 주님께 고정시키지 않으면 평강을 되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생각들, 추측들, 상상들이 마음 속에 떠오를 때마다 매순간마다 즉시 이렇게 선포해야 합니다. “나는 너희들과 교제할 생각이 없노라.” “나는 예수님과 교제할 시간밖에 없노라.” “나는 너희들과 시간 낭비할 수 없노라. 예수님과 교제하느라 너무도 바쁘도다.” 얼마 전 한 목사가 젊은 목사 하나를 데리고 와서 제게 상담을 좀 해줄 수 있느냐고 해서 만났습니다. 전도가 양양한 젊은 목사는 크게 낙망한 상태였습니다. 처음으로 사역하던 교회가 쪼개졌고 그는 내쫓겨난 상태였으니까요.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교회 안에서 다툼이 벌어져서 결국 일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저더러 나가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간에 있었던 온갖 희한한 일들을 다 이야기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그런 것은 다 아는 얘기니,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소. 그랬더니 고개를 숙이면서, “실은 제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교인들 간의 분쟁을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목사로서 그 정도는 할 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개입했는데 결국은 엉망이 되어 버려 이 꼴이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 과거 경험을 다 들려주면서 저도 똑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책도 쓰고, 테이프 사역도 크게 하고, 여기저기서 설교 초청도 받는 저 같은 목사가 자기와 똑같은 일을 했고 똑같은 일을 당했다니 믿기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제 이야기에 용기를 얻었는지 다른 교회에서 새롭게 사역을 해 보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님, 지금 형제님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사역이 아닙니다. 형제님이 이번 사건의 원인을 제거하지 않은 채로 새로 사역을 시작한다면 똑같은 문제가 생길 겁니다. 형제님이 말한 대로 그 교만이 남아 있다면 주변 목사들이 쫓겨난 목사라고 수군댈 때 당신은 또 평정을 잃고 또 망가지고 맙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자 그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겪은 일이라니까요. 한때 저는 4년 동안 주일학교 교사도 못하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여러 시간 동안 계속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그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역해서 믿음을 세워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의 문제는 간단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떠난 사람들에 대해 계속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고 동시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이런저런 생각들로 가득 찬 그는 주님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을 사랑했고, 헌신되어 있었으며, 뜨겁게 주님을 섬기고자 했던 그러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형제 자매들을 최선을 다해 도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문제 해결에 있어 무기력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헌신되고, 열정으로 가득 차고, 아무리 거룩하게 살고 모범적이라 할지라도 인생의 시련과 고난들을 자신의 힘으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쉽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시련이 닥치면 우리는 그 시련을 다루기는커녕 우리의 생각(mind)을 주님께 고정시키는 일마저도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어림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시련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육신은 신뢰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아무리 우리의 영이 원한다 할지라도 육신은 너무도 나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 어려움을 다룰까? 어떻게 이 위기를 넘길까?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까?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다만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화평이 너희 마음속에서 다스리게 하라. 너희도 그 화평에 이르도록 한 몸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니 감사하는 자가 되라. 우리는 구원받을 때 주님의 몸의 일부가 됩니다. 휴거가 일어나면 이 몸은 주님을 만나러 올라갑니다. 그렇다면 구원과 휴거 사이 즉 이 땅에 우리가 사는 동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화평(평강, 평화, 평안, 안녕)이 자신의 몸의 모든 지체들에게 늘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15절에 보면 “~하라”(Let)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우리가 허락(let)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화평이 항상 우리를 다스리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Let not your heart be troubled)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주님께 고정시키고, 우리의 마음으로 하여금 근심하지 않도록 하고(let), 하나님의 화평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다스리도록 허락(let)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평안을 우리 안에 지속시키실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궁리하거나 방도를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주님께서 그리하시도록 하면 됩니다(Let it happen).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하시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화평이 너희 마음속에서 다스리게 (허락)하라.”(Let the peace of God rule in your hearts.) 아멘.  
2009-05-01 18:17:43 | 관리자
성령의 열매: 부드러움/모든 것을 수용하는 친절한 태도   우리는 지금까지 성령의 열매에 관해 공부해 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메시지를 읽지(듣지) 못하신 분이 계시다면 그분들은 다음 사실을 꼭 명심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란 하나님께서 거듭난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통해 나누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으로 하나님께 속한 속성들이요 성품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성품은 그 누구에게도 저절로 생길 수 없는 것들입니다. 만약 당신이 거듭나지 않았다면 “저는 사랑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이 합당할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거듭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한다면 핑계일 뿐이며 그것도 아주 나쁜 핑계에 불과합니다. 만약 당신이 “저는 그리 기뻐하는 성격이 아닙니다.”라고 말할 때, 당신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라면야 우리는 그 주장을 받아들이겠지만 당신이 새로운 출생을 통해 구원을 받은 사람인데도,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그것 역시 나쁜 핑계에 불과합니다. 성령의 열매(단수)란 하나님의 자녀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께서 생산해 내시는 “산물”입니다. 우리는 독립침례교회에 소속된 근본주의자요, 성경을 믿는 자로서 그동안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실상은 우리의 육신으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 보려고 애쓰느라 우리 생의 대부분을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이 대부분은 거듭나지 않은 종교인들도 해낼 수 있는 종교적 의무이거나 “하나님의 일”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성령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10여 차례의 공부를 통해 우리가 기도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각을 여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이러한 육신적 종교 활동 그 이상의 것임을 보여주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알다시피 아담의 육신적 성품으로 애를 써서 하나님을 섬겨보려는 것이 대다수 그리스도인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섬김에는 성령께서 개입하신 흔적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태도와 행동을 통제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우리를 통해 살아내심으로 우리는 복된 승리를 누리게 됩니다. 이러한 삶은 가능할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러한 삶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갈 5:22, 25).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 하시고자 하는바 바로 그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 당신의 말씀을 대할 때 저희를 점검해 주소서. 우리가 얼마나 처절하게 당신을 필요로 하는지 보여 주소서. 이 중요한 사실을 깨닫도록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이끌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은 부드러움(gentleness)에 대해 살펴보면서 동시에 선하심(goodness)과 믿음(faith)을 건너뛰어 온유함(meekness)도 함께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이는 이 두 가지(부드러움과 온유함)는 성경에서 늘 함께 거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헌신되고 주님을 뜨겁게 섬기는 귀한 주의 종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은 남자답게 용기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는 용감함보다는 경건함(하나님다움, godliness)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을 뜨겁게 섬기기는 하나 육신적 성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주의 종들을 대할 때, 그들이 주님을 열심히 섬긴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증오, 악의, 세속적 행동, 폭력, 분노 및 형제들을 거칠게 대하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정당화시켜 주고 눈감아 주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를 섬기기 때문에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제가 살아온 동안 만난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 없이 레스터 롤로프(Lester Roloff)라고 말씀드릴 것입니다. 저로 말하자면 그분의 발끝만치도 못됩니다. 저보다는 백배나 훌륭한 분이시지요. 그러나 그분은 음식에 관한한 비성경적 입장을 취하셨는데 그것은 사탄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런 경우 그가 아무리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저는 그분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마틴 루터같은 위대한 주의 종도 맥주를 마셨다는 핑계로 맥주 마시는 것을 그렇게 합리화해 버리면 옳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성령의 열매의 특성은 부드러움과 온유함입니다. 성령께서는 여러분과 제 안에서 이 두 가지 모습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그런 것들은 여자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영적인 사람이 되기보다 사내다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더 이상 오늘 메시지를 들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당신을 내어 맡기기보다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을 더 좋아한다면 오늘 메시지는 안 듣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저로서는 만약 성령님께서 제가 부드럽고 온유하게 되기를 원하신다면 기꺼이 그리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저를 계집아이 같다고 놀리거나 유약하다고 조롱해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성품의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오늘 메시지는 “남성답고”, “용감하고”, “담대한” 주의 종들에게 특별한 메시지가 될 것 같습니다. “부드러운”(gentle)이란 단어의 뜻은 “친절하다”(kind)입니다. 남자라고 해서 친절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예의바른 것은 죄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친절과 부드러움입니다. 부드러움은 입장이나 방식에 있어 친구처럼(friendly) 대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아무도 당신과 어울릴 수 없고 당신도 아무와 어울릴 수 없다면 그것은 당신이 너무도 영적이고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고로 사람들이 당신을 이해 못한다거나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실상은 당신이 육신적이어서 당신의 자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고 당신의 감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면 회개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 부드러움(gentleness)은 또한 온유하고(meek), 온화하며(moderate), 엄하지 않고(not severe), 과격하지 않으며(not violent) 오히려 예의바르다(courteous)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어떤 사람이 부드러운 사람(gentle-man, 젠틀맨)인지 아시지요? 훌륭하게 태어나 훌륭한 가문에 속한 사람이 젠틀맨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듭났다면 당신은 젠틀맨(부드러운 사람)이 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거듭남이 훌륭한 출생이라면 당신은 당연히 좋은 가문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훌륭한 출생과 훌륭한 가문을 갖춘 우리는 당연히 부드러운 사람(gentle man)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거듭나기 전에 어떤 기질과 어떤 성정을 지녔던지 간에 일단 그리스도의 몸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면 성령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다정한(friendly) 사람으로 만드시고자 하십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거칠고 무뚝뚝한 사람이었을지 모르나 거듭난 사람이라면 온화한 성품을 지녀야 합니다. 엄하거나 거만하지 않고 오히려 예의바른(courteous)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몇 가지 구절들을 보여드린 후 온유(meekness)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고린도후서 10장과 디도서 3장, 그리고 디모데후서 2장을 보십시다. 사실 저는 구원받지 못한 바깥 세상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는 것에 대해 점점 더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예의바르게 끝까지 대해 준다는 것은 정말 힘이 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통제하셔서 저로 세상의 형상에 일치하지 않도록 지켜 주셔야만 가능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믿는 자들과 꾸준히 착실하게 교제를 갖는다면(하나님께서는 그리하기를 원하시지요) 아마 얼마 안 가서 여러분과 교제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예의바르고, 친구처럼 대해 준다는 것이 여러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여러분에게 지속적으로 친절하고, 예의바르고 친구처럼 대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다는 것을 느낄 테니까요. 육신과 육신끼리 마주하게 되고 육신적 성품과 육신적 성품끼리 부데끼다 보면 때로는 친절하게 대하지 못할 수도 있고 거칠게 대하거나 서로 반목이 생기기도 합니다. 교제하면서 서로의 감정을 자극하는 행동이나 말이 튀어나올 수 있습니다. 예로써 어떤 사람이 당신의 주차장소에 주차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의 좌석을 차지해 버리기도 하지요. 어떤 사람은 당신의 성경을 한쪽으로 치워 버리기도 합니다. 때론 지나친 농담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가 서로에게 친절하고 친구처럼 대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성령께서 우리를 붙들지 않으면 그 교제는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힘입어 직접 너희에게 간청하노라. 내가 너희와 함께 너희 가운데 있으면 비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를 향해 담대하지만 여기를 보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부드러움이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는 성령의 열매가 온유함과 부드러움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영적 아기들에게 편지를 쓸 때 다름 아닌 바로 이 두 가지 성품을 가지고서 대했습니다. 고린도의 어린 아이들이 하는 그 어떤 유치한 행동도 바울로 하여금 그들에게 온유하고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하지 못하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직선적으로 할 말은 했고 틀린 것을 틀렸다고 정확하게 지적했지만 그들을 잘못 대하거나 악한 감정을 품고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바울을 그리스도처럼 되도록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부드러움과 온유함이 이곳에서도 동시에 언급되고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자, 이번에는 디도서를 보십시오. 3장 1절과 2절입니다. 1 그들이 명심하여 정사들과 권능들에게 복종하며 행정관들에게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되게 하며 2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말다툼하는 자가 되지 말며 오직 부드러우며 모든 사람에게 온전히 온유함을 보이게 하라. 여기에도 두 성품이 나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온유를 보이고 부드럽게 대하라고 했지요? “모든 사람”에게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하고 부드럽게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드럽다(gentle)는 말은 친절하고 예의바르고 친구처럼 대하며 항상 받아주는 자세를 갖춘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죄인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고 형제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줄 수 있습니다. 거칠고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고는 사람들로 우리 말을 듣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어찌나 무관심한지 모르세요?”라고 말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우리는 친절해야 합니다. “콧방귀도 안 뀌잖아요?”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잘 대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고자 하는 그 일이니까요. 우리는 지금 육신적인 자들이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나오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무엇을 하시기 원하시는가 바로 그것입니다. 온유와 부드러움이 연관되어 있는 다음 구절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24절과 25절입니다. 24 주의 종은 결코 다투지 아니하며 모든 사람에게 부드러우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인내하며 25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 하리라. 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를 허락하사 진리를 인정하게 하시리니 여기 보니 우리가 온유하게 대해야 할 대상이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잘못된, 형편없는 자들입니다. 25절과 26절을 보십시오. 25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 하리라. 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를 허락하사 진리를 인정하게 하시리니 26 이것은 마귀의 뜻대로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이 마귀의 올무에서부터 자신을 되찾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마귀의 올무에 걸려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아주 잘못된 자에게 우리는 예의를 갖추어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자들에게 친절하고, 부드럽고, 품위 있게 대해 주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마저 잘못 행동하면 둘 다 마귀를 섬기게 되는 꼴이 됩니다. 당연히 올바른 사람이 잘못된 사람을 도와 주어야 합니다. 만약 올바른 사람이 잘못된 사람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잘못된 방식으로 행동해 버리면, 그야말로 둘 다 엉망이 되어버리는 셈이지요. 누가 부드럽지 못한 사람일까요? 자기 의에 가득 찬, 자기 중심적이고 자만심이 가득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가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온유하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 밑에 꿇어 엎드려 우리가 누구인지, 누가 어떻게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내어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는지를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 조금은 더 인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앞서 부드러움과 온유함이 연관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람들은 온유란 그저 겁먹은 토끼처럼 조심조심, 살금살금 돌아다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모세였다고 성경은 말씀하는데 실상 모세는 백오십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금송아지 가루를 뿌린 주스를 마시게 한 사람입니다. 상당히 터프한 사람이었죠. 그러나 그는 온유하였습니다. 사실 온유(meek)란 단어는 굉장히 재미있는 단어입니다. 스위스어로는 MIUK이고 덴마크어로는 MYG, 그리고 스페인어로는 MEGO, 포르투갈어로는 MEIGO인데 이 단어들의 첫 번째 의미는 한결같이 “흐르는 액체”라는 뜻입니다. 잠시 후에 이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해드리지요. 온유하다는 것은 성질이 온순하고, 부드러우며, 쉽게 화를 안 내고, 짜증을 안 내는 것을 말합니다. 상처를 받을 때도 잘 참아내는 것이요, 겸손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며 하나님의 경륜(사람을 다루시는 방식)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제가 만약 돌을 집어 벽에다 내던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이 되시지요? 그 벽에 돌 자국이 남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벽은 온유(meek)하지 못하니까요. 제가 또 다시 돌 하나를 집어 들어 유리 창문에다 던져보면 깨지거나 금이 가거나 할 겁니다. 왜냐하면 유리 창문 역시 온유하지 못하니까요. 그러나 제가 돌을 집어 연못이나 흐르는 시냇물에다 던져 보면 잠시 후 물은 전혀 변함없는 그대로의 상태가 될 겁니다. 상처를 입히려 하나 손상이 남지 않는 상태, 가격을 해도 변하지 않고 원상복구 되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온유입니다. 만약 제가 하나님께 온유하다면 하나님께서 제 인생에 어떤 일을 허락하시더라도 잠시 동안은 상처가 될지 모르나 곧 바로 원상태로 돌아갈 것입니다. 깊은 상흔이 남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만약 제가 당신에게 온유하다면, 당신이 제게 상처를 입히거나, 화를 내게 만들거나, 낙심하게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마음에 그 어떤 자국도 남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의 관계가 파괴되는 일은 없을 것이며 그 일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다시 원상복구가 될 겁니다. 왜 우리는 불평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을까요? 왜 형제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결혼생활이 깨지는 것일까요? 왜 깨어진 인간관계가 회복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 모두가 다 우리가 온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입은 상처를 삼켜버리고 다시 하나님께서 주신 온유함으로 복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 형제들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 그것은 다름 아닌 온유함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온유함은 성령의 열매이기에 우리가 성령님께 온전히 내어드리지 않으면 열매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온유란 성질이 온순하고, 부드럽고, 쉽게 짜증이나 화를 내지 않고, 상처를 입었으나 잘 참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온유에 대해 다음번 설교에서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믿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고도 부드러움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제가 형제로부터 상처를 입고 나의 부드러움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저는 우편함을 매일 열어보는데 그때마다 그 편지들을 개봉하기 전 꼭 기도합니다. 아니 기도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두 종류의 편지들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저를 추켜세우는 내용들이 들어 있는 것들로 때론 이것들이 제 마음에 흔적을 남겨 저를 해치고 저로 하나님께 대한 순복과 의지를 내려놓고 무엇인가 된 것처럼 우쭐하게 만듭니다. 또 한 종류는 제가 일곱 배나 더 뜨거운 지옥에서 불타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편지를 뜯어 보기 전에 기도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지 않으면 “너도 마찬가지야. 아니 더 뜨거운 지옥에 갈 거다.”라는 말이 튀어나올 것입니다. 누군가가 육신 가운데서 저를 육신적으로 만들려고 할 때, 기도 없이는 곧바로 말려들고 맙니다. 어떤 자들은 자기 신분도 밝히지 않은 채 그런 편지를 보냅니다. 제게는 도대체 어느 녀석이 그 따위 짓을 했는지 알아내려는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어느 지역 우편인이 찍혔는지 확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그 자가 누구인지 다 아시고 그 자가 무슨 문제를 갖고 있는지도 다 아시는데 제가 그 자가 누구인지 알아낸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저 기도하고 하나님께 맡길 따름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편지는 저의 아담의 성품만 들추어 내고 말 겁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성령 안에서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도 내 마음에 가득 찼던 기쁨과 평안을 한 순간에 앗아가 버리니 실로 대단한 위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원받았으나 이런 편지 몇 통으로 마치 구원받지도 않은 모습으로 그렇게 쉽게 그렇게 빨리 옛 모습으로 돌아가 버릴 수 있다니… 우리 모두 매 순간마다 겸손해야 합니다.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저는 창피하고 또 부끄럽기만 합니다. 이런 일들이 저를 겸손하게 만들어 줍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더 이상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피우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물론 감사할 일입니다. 간음과 마약과 술로부터 해방된 것도 너무너무 감사할 일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주님, 제가 더 이상 성질을 안 부리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제가 저의 부드러움을 간직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저의 온유가 지속되게 해 주셔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런 찬양을 드리고 계신지요. 실은 성령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통해 이 일을 하시기 원하십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치유프로그램을 통해 마약과 술을 끊도록 도와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독된 여인들도 치유프로그램을 통해 다시 가정으로 돌려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질을 잃지 않고 부드러움과 온유함을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 없이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야고보서 3장 13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지식을 갖추고 지혜로운 자가 누구냐? 그는 지혜의 온유함으로 선한 생활에서 나오는 자신의 행위를 보일지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가 돌아다니며 제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제가 알고 있는 그 지식이 온유함이라는 삶의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14절과 15절을 보십시오. 14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며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요, 땅에 속한 것으로 관능(官能)적이며 마귀에게 속한 것이니 여길 보니 땅에 속한 지혜, 관능적 지혜가 나오지요. 이것들은 아담 안에서 우리에게 부여된 성정입니다. 누구나 태어나면 갖게 되는 특성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귀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성품과 인격 안에서 죄가 부지런히 오랫동안 일해 온 결과 인간의 모습은 실로 마귀적이 되고 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이 시기와 다툼과 쓴뿌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아직 우리는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부드러우(gentle)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이십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 온유하셨습니다. 비록 얼마간의 지식과 지혜를 갖추고 있다손 치더라도 예수님 같은 모습을 갖지 못하면 우리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지요. 야고보서 3장 17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순수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러우며 부드럽고 간청을 잘 들어주며… 여기 끝부분을 보니 부드러움 다음에 “간청을 잘 들어주며”(easy to be intreated)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온유를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운 것이 우리의 인격 문제와 인간 관계를 배제한 채 그대로 있다면 우리는 이 문제들에 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거짓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도 예의바르게 행동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의 죄와 의와 생활에 대해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를 다 알고 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선하게 대해 주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로마서 1장 18절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라는 말이 나오며 시편 2편 12절에도 아들의 진노가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 그 어디를 살펴보아도 성령의 진노란 말은 없습니다. 참으로 기이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성경이 우리에게 명하기를 “성령 안에서 걸으라”고 하십니다. 아버지 안에서 걸으라든가 아들 안에서 걸으란 명령은 없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진노하십니다. 우리의 맏형 되시는 아들께서도 진노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위로자 되시는 성령님께는 진노가 없습니다. 실로 놀랍지 않습니까? 제게 큰 축복이 되는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어느 공산국가에 한 여자가 살았는데 그녀는 지하교회의 비밀예배에 참석하려고 가다가 공안당국의 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총부리를 겨누고 어디 가느냐고 묻는 경찰에게 그녀는 순간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제 아버지 집에 가는 중입니다. 큰 오빠께서 돌아가셔서 그분의 유언을 들으러 가는 중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 경찰은 그녀를 보내 주었다고 합니다. 실로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의 큰형님(elder brother, 큰오빠)의 유언(New Testament, 신약),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는 중이니 말 그대로 맞는 말이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과 저도 그분의 유언(Testament)을 듣고 있는 중입니다. 그분의 유언은 우리가 모든 사람을 향하여 부드럽고 온유하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7절과 8절을 보십시오. 7 유모가 자기 아이들을 돌보듯 너희 가운데서 부드러운 자가 되었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다정하게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혼까지도 너희에게 기꺼이 나누어 주고자 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소중하였기 때문이라. 여기를 보니 바울이 자신을 유모에다 비유했군요. 저런,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피식 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용맹스런 주의 군사인데 ‘유모’라니…” 어쩌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가장 남자답게 영적 싸움을 싸웠던 남자 중의 남자였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바울은 돌로 맞기를 수차례, 수많은 박해에도 아랑곳없이 담대했었습니다. 이와 다르게 데살로니가전서 2장 7절, 8절 말씀을 보니 그는 너무도 부드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어린 아들, 딸처럼 자상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을 해치거나 부서뜨리기 윈치 않았으며 바울은 그들이 불쾌해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과 사랑스러운 관계를 굳게 세워 그들을 가르치고 훈련시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돕고자 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 부드러움과 온유가 부족한 것 때문에 복음이 막혀버린 여러 경우들을 알고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형제가 자기 부인을 주님께 인도하려고 애쓰던 중 어느 찬양집회에 데려가게 되었는데 두 사람 다 청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집회 중에 설교자가 “하나님의 집에서 청바지를 입고 있는 자들이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라고 소리치며 설교하고 말았습니다. 이 부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이 부부는 그 이후로 교회에 발을 끊고 말았습니다. 이런 예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올바르게 진리를 선포하십시오. 그러나 거기에 여러분의 사랑이 담겨 있지 않다면 아무런 성과가 없을 것입니다. 책망도 하시고 권면도 하십시오. 말씀대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 속에 여러분의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지 않다면 아무런 성과가 없습니다. 바울의 성공 비결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 9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직접 우리에 관하여 보여 주되 우리가 어떤 식으로 너희에게 들어갔는지 또 너희가 어떻게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말씀에 의하면 “그들”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울이 한 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이 보여준 삶의 방식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은 크게 감명을 받은 것입니다. 2장 7절과 8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7 유모가 자기 아이들을 돌보듯 너희 가운데서 부드러운 자가 되었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다정하게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혼까지도 너희에게 기꺼이 나누어 주고자 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소중하였기 때문이라. 바울은 부드러웠고 유모처럼 사랑스럽게 그의 영적 자녀들을 대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종종 성경강연회를 열고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초청받은 사람들이 2, 3일 또는 3, 4일 정도 말씀을 들은 후 그 다음 주에도 다시 교회에 찾아오는 것은 성경강연회에서 들은 말씀보다는 이곳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중요한 이슈, 성경적 기준, 도덕적 원칙 등도 물론 다루어져야 하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가슴에 새기는 것은 그 교회 성도들이 보여준 사랑과 관심입니다. 오는지 마는지 관심도 없는 태도로 대접을 받았는데 그 교회를 다시 오겠습니까?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합니까? 그것은 그분께서 하신 말씀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그분께서는 그 어떤 말씀이라도(때론 어려운 것까지도) 우리에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저를 지적할 수도 있고, 꾸중할 수도 있고, 책망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을 하는 동기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근본주의 또는 성경만을 신뢰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들고 “이것이 옳고 저것은 틀렸다.”, “당신은 육신적이다.” 등등 비판과 지적을 잘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혼을 내어주는 사랑의 마음없이 성경구절을 들이대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두 구절만 더 찾고 말씀을 끝맺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18편과 사무엘하 16장입니다. 우선 시편 18편 33절에서 35절을 보겠습니다. 33 그분께서 내 발을 암사슴의 발 같게 하시고 나를 높은 곳들에 세우시며 34 내 손을 가르쳐 전쟁하게 하시나니 그러므로 내 팔이 강철로 된 활도 부수었도다. 35 또 주께서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부드러움이 나를 크게 만들었사오며 다윗이 어떤 사람입니까? 대단한 사람이지요. 사자를 손으로 찢고 골리앗을 눕힌 사람으로 터프하고 사내 중의 사내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보니 다윗을 크게(위대하게) 만든 것은 다윗의 용맹함이나 담대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의 부드러움(thy gentleness)이었다고 다윗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실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거칠고 터프하고 사나운 성정대신, 친절하고 부드럽고 온유하며 예의바른 마음을 주셔서 그것으로 자신이 위대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자도 곰도 거인도 다 때려잡을 수 있었던 용사인 다윗은 자신 앞에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사울을 동굴 안에서 능히 내려칠 수 있었으나 그는 사울에게 그런 식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복수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잔인하게 대하지도 않았으며 미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원수를 앞에 두고 그는 하나님의 부드러움 가운데 더욱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과 부하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기를 거절했던 나발이라는 사람을 쳐 죽이려 했었습니다. 자신을 무시한 자에게 격분하여 즉시 죽이려고 했었는데 다행히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의 지혜로운 대처로 잔인한 살인은 멈출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다윗이 이처럼 바뀌어 있으니 실로 놀랍기만 합니다. 사무엘하 16장 5절과 6절을 보십시오. 5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에, 보라, 거기서 사울의 집에 속한 가족 중에서 한 사람이 나오니 그는 게라의 아들이요, 그의 이름은 시므이더라. 그가 앞으로 나오면서 올 때에 계속해서 저주하고 6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해 돌을 던지니 그때에 온 백성과 모든 용사들은 왕의 오른편과 왼편에 있었더라. 시므이가 다윗에게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만약 돌을 맞는 당사자가 온유(앞에서 말씀드린 액체 상태의 물을 기억하십시오)하지 않다면 당연히 자국이 남고 상처가 남을 것입니다. 또한 여기 보니 다윗은 강력한 힘을 지닌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7에서 10절을 보십시오. 7 시므이가 저주하며 이같이 말하니라. 너 피를 흘리는 자여, 너 벨리알의 사람이여, 가거라, 가거라. 8 주께서 사울의 집의 모든 피를 네게로 되돌리셨도다. 그를 대신하여 네가 통치하였으나 주께서 왕국을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주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리는 자이므로 네 재난 속에 빠졌느니라, 하니라. 9 이에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이르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원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매 10 왕이 이르되, 너희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주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셨으니 그가 저주하게 하라, 그런즉 누가 이르기를,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겠느냐? 하고 말씀을 보니 시므이의 비방과 조롱이 적나라하게 나와 있습니다. 아비새라는 장군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합니다. 부드러움과 온유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태도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떻습니까? 이런 처지에 놓이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일이 우리의 삶에도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아비새처럼 행동합니까, 아니면 다윗처럼 행동합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은 아비새의 태도에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상황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고 부드럽고 온유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내 인생은 하나님의 것이고 이번 일도 그 중 하나이니 주께 모든 것을 맡기었다.” 이것이 그의 온유한 태도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11 또 아비새와 자기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보라, 네 속 중심에서 난 내 아들이 내 생명을 찾거늘 이제 이 베냐민 족속은 얼마나 더 그리하랴? 주께서 그에게 명하셨으니 그를 내버려 두고 그가 저주하게 하라. 12 혹시 주께서 내 고통을 보시리니 이 날 그의 저주로 인해 주께서 내게 선으로 갚아 주시리라, 하니라. 1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가 그의 맞은편에서 산비탈로 따라가며 그가 갈 때에 그를 저주하고 그를 향해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더라.13 왕과 그와 함께 있던 온 백성이 피곤하였으므로 거기서 기운을 차리니라. 다윗은 이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서도 기운을 차렸다(refreshed)고 되어 있습니다. 거짓 비방을 받고, 아들이 배신하고, 그때까지 성취해 온 모든 명성과 명예가 하루 아침에 무너졌으며 게다가 시므이라는 자가 저주를 퍼부으며 돌을 던지고 있던 그런 상황에서 다윗은 부드러움과 온유함을 유지한 채 목적지에 도달했고 기운을 차렸으니 실로 놀랍지 않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지금 다윗이 처한 상황에 놓였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떤 모습일까요? 아마 시므이처럼 똑같이 상대방에게 저주를 퍼붓지는 않을까요? 아마도 두 사람 다 육신적인 모습을 한 채 서로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장면으로 끝이 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께서 내 마음을 통제하셔서 내 삶을 이끄신다면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주의 뜻이니 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주여, 주 안에서 다시 기운을 내도록 도우소서.” 상황이 어떻게 되든, 다른 사람에게 어떤 취급을 당하든,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든, 혹은 억울한 비방을 당하든 이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의 영을 지켜내고 기운을 차릴(refreshed) 수 있는 것은 여러분과 제가 이곳에 와서 주의 자녀들을 만나고 함께 찬송하고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로 인해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사람들과 복된 교제와 시간을 갖게 되면 돌아갈 때쯤에는 우리가 당한 모욕이나 배신감이나 상처를 되새기지 않고 오히려 부드러움과 온유함을 회복해서 기운을 차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인 것이 자신을 위대하게(great)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자를 죽이고 곰을 죽인 것이 자신을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예루살렘에 왕국을 세운 것이 자신을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부드러움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주의 부드러움, 바로 그것이 다윗의 본노와 격정과 복수심과 성질을 통제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절함이 우리의 육신을 극복하는 그 순간은 실로 위대한 날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다윗도 다 남자답고, 담대한 분들이었습니다. 남자답고 담대하게 주님을 따르는 것은 선하고 좋은 일이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향해 예의를 갖추고, 부드럽고, 친절하고, 오래 참는 것이 “남자다움”의 결핍은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이 길이 바로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이 걷도록 원하시는 그 길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버지, 오늘날 우리는 너무도 혼란스럽습니다. 그저 성경을 손에 들고 외쳐대고 지적하고 비판하며, 때로는 교만하고 오만한 모습까지 용납되고 있습니다. 주님, 그러나 우리를 통제하사 담대함 가운데서도 부드럽고 온유한 자들로 빚으소서. 주여 저희를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09-05-01 18:16:42 | 관리자
성령의 열매: 온유/상처에 대한 빠른 회복 능력      근래에 제임스 낙스의 '성령의 열매'를 올리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교리가 가장 좋았지만 지금은 크리스천 삶이 가장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특히 주의 종에게는 온유함과 부드러움이 있어야 한다는 낙스의 설교가 가슴을 찌릅니다. 사이트에서 성령의 열매라고 치면 낙스의 글이 모두 올라올 것입니다. 하나 하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내게 적용하면 큰 은혜가 될 것입니다. 이처럼 좋은 글을 저희 사이트에 올리도록 허락해 주신 김영균 목사님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찬송가 507장 가사를 깊이 음미하고 설교를 읽기 바랍니다.   1.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후렴 주님의 마음 본 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2.  주 모습 내눈에 안보이며 그 음성 내 귀에 안들려도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3.  가는 길 거칠고 험하여도 내 맘에 불평이 없어짐은 십자가 고난을 이겨내신 주님의 마음 본 받음이라 4.  주 예수 세상에 다시 오실 그 날엔 뭇성도 변화하여 주님의 빛나는 그 형상을 다함께 보며 주 찬양하리   성령의 열매: 온유/상처에 대한 빠른 회복 능력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형제들아,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거든 영적인 너희는 온유의 영으로 그러한 자를 회복시키고 네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 너희는 서로 남의 짐들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무엇이나 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자기를 속이나니(갈 5:22-6:3) “하늘에 계신 아버지, 오늘 이 시간 온유함에 대해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저희를 도우사 저희 안에서 주님의 온유함이 표현되는 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발견하도록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선 지난번 메시지에서 인용했던 내용을 조금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성경 말씀들(words, 단어들)을 나중에 명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부드러움(gentleness)을 예로 들자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지난번 메시지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부드러움(gentleness)과 온유함(meekness)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성경구절들을 찾아 읽으면서 확인했습니다. 오늘은 온유함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지난번 메시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온유(meek)란 단어는 스위스어로 MIUK, 덴마크어로 MYG, 스페인어로 MEGO, 그리고 포르투갈어로 MEIGO라고 하는데, 이 모든 단어들은 한결같이 동일한 의미 즉, 흐르는 액체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강가로 야유회라도 가면 소년들은 신나서 강물로 뛰어들거나, 아니면 돌을 강물에 던져 봅니다. 돌을 강물에 던질 때 발생하는 현상,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가 온유를 공부하는 이 상황에서 너무도 유익한 그 무엇을 시사해 줍니다. 돌을 들어 벽에다 집어 던지면 벽은 딱딱하기(hard) 때문에 돌자국이 남습니다. 돌을 들어 유리창에 던져도 깨지거나 자국이 남습니다. 그러나 돌을 들어 강물에 던져 보십시오. 고개를 돌리고 다시 강물을 쳐다보는 순간, 그 강물 어느 곳으로 돌이 들어갔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강물이 그 돌을 집어삼켜서 그 돌이 준 타격의 흔적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마음이란 바로 이와 같은 마음입니다. 성경 말씀에 등장하는 온유의 개념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내리치실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 저를 치도록 허락하실 수도 있으며, 때론 마귀도 사람들을 선동하여 저를 칠 수 있습니다만, 만약 제가 온유한 사람이라면 그 어떤 자국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온유한 마음의 소유자라면 당신이 내 안에 어떤 상처 자국이 남아 있는지 찾아보려고 해도 상처의 흔적도, 고통의 여파도 전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는 이유는 그들에게 온유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또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슬픔을 평생 동안 가슴에 지닌 채 살다가 그 누군가가 복음전도지라도 하나 건네면, “싫소, 나는 그 까짓것 필요 없다구요!” 하고 대꾸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에 자국이 남아 있는 사람입니다. 징계를 받았든지 상처를 입었든지 간에 마음에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하거나 성경에 관련된 자료를 주면 “필요 없어요. 그따윈 필요 없다니까!” 하면서 화를 냅니다. 왜 그럴까요? 과거에 누구로부터 상처를 입었거나 마음이 상했거나 교회일로 불만이 쌓였는데 그 모든 흔적을 성령의 도움으로 지워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 흔적을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과 말씀의 설교를 통해 은혜 안에서 성장해 갈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상처나 모욕이나 불만을 붙들어 두지 않고 성령님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다 덮어버리시도록 합니다. 마치 강물이 자기에게 던져진 그 돌을 포용함으로써 아무런 흔적이 없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징계를 받되 그 징계로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온유함이란 성정이 온순하고, 부드러우며, 쉽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 온유함이 없으면 결코 양들을 돌볼 수 없고 집사나 영적 지도자로서 교회에서 봉사할 수 없습니다. 이 온유함이 없다면 좋은 가장이 될 수도 없고 자녀를 키우기도 어렵습니다. 자녀들은 온유한 부모님에 대해서 “나는 정말 훌륭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갖고 있다.”고 좋아할 것입니다. 온유함은 상처를 받을 때만 발휘됩니다. 상처를 입었으나 그 상처에 굴복하지 않고 참아냅니다. 상처 받는 일이 없다면 온유함은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온유함이 표출되려면 그곳에는 반드시 “상처 입힘”이 있어야 합니다. 온유란 겸손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며, 오만하지 아니하고 자족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에게 칭찬받고, 존경받고, 인정받고, 높임받기 원하는데 그것이 제가 원하는 바라면 여러분은 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습니다. 즉 여러분이 저에게 인사하지 않거나, 존경심을 보이지 않는 경우 저는 마음에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헛된 영광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제 안에 있는데 여러분이 그런 식으로 나오면 당연히 제 마음 안에는 상처가 생기고, 쓴 뿌리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반면 제가 여러분의 종이 되어 도와주고자 하고 축복이 되고자 하며, 즉 높은 마음을 내려놓고 낮은 마음으로 다가선다면 그 어떤 식으로 여러분이 저를 대하든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우리가 마음이 상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우리 자신을 너무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12장 16절 참조). 우리가 스스로 무언가 된 듯이 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마음만 버린다면, 모욕을 당해도 불쾌한 일을 당해도 순간 흔적을 없앨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6절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여기 보니 헛된 영광이 없으면 서로 화를 내게 만들 일도 없습니다. 자신을 이 세상에서 제일 작은 자라고 여긴다면 상처받을 일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잘 대해 주고 자신은 낮추게 될 것입니다. 교만할수록, 자아 중심적일수록 상처는 심해지고 자국은 오래 갑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만일 어떤 사람이 잘못에 빠지거든 영적인 너희는 온유의 영으로 그러한 자를 회복시키고 네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 만약 어떤 형제가 죄를 지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의 첫 반응이 경멸과 오만과 비판이라면 이 모든 것은 다 육신의 표출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그 죄 지은 자보다 더 낫다고 스스로 생각할 때 나오는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형제 자매와 함께 있는 것조차 꺼리게 된다면, 그런 사람은 그 형제 자매를 그 잘못으로부터 벗어나도록 결코 도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저지르고 잘못된 간증을 보인 그런 형제 자매를 보고 그들에게 다가가서 “형제님, 사실 저도 그런 짓을 한 적이 있고 언제든지 그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형제님이 제게 잘못한 것 때문에 저는 상처받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 함께 기도하십시다. 어쩌면 제가 그것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이렇게 말한다면 이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혹시 사역을 하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사역하는 그 형제 자매들이 죄를 짓거나 잘못을 했을 때, 그들 때문에 당신과 교회가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지 말고 오히려 그들 스스로 상처받은 것을 온유함으로 치유해 주십시오. 갈라디아서 6장 1절에 여러분이 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들을 “회복”(restore)시켜 주라고 했습니다. 비록 잘못된 행동과 간증 때문에 문제를 일으켰으나 그런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씻겨주고, 바로잡아 주고, 싸매 주고, 지탱해 주고, 그럼으로써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는 것, 이것이 바로 “회복”이며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온유가 필요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서로 남의 짐들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서로의 짐을 지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당신이, 물에 던져진 그 돌들을 당신 위에 고의로(일부러) 짊어지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제 인생의 짐도 버거운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다른 사람들 즉 상처를 입었거나, 마음이 상했거나, 울고 있거나,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의 짐을 우리로 짊어지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초월하는 권능을 주십니다. 우리는 인생살이에서 이런저런 문제들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랍니다. 우리는 죄를 지은 사람들이 우리같이 영적인 사람은 찾아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영적인 사람은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 도와줘서 회복시키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니 사람이 자기가 무엇이 된 것처럼 생각할 때는 자기가 아무것도 아님을(nothing) 깨달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거부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당신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 옆에 있는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거나, 당신의 가족이 더 영적이라고 생각하거나, 당신 교회는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고 착각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과 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즉 제로(zero)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영(zero) 더하기 영(zero)은 영(zero)입니다. 아무리 더해봐야 결국은 영, 즉 제로(zero)일 뿐입니다. 여러분, 언제 제가 마음이 상하는 줄 아십니까? 저는 제가 뭔가(Something) 된다고 생각하는데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을 때입니다. 당신 역시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평가해 주지 않으면 마음이 상하게 되지요. “아니 도대체 나를 뭘로 아는 거야?”, “아니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이야?”, “어쩜 그럴 수가,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등등. 이 모든 반응은 상처 입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 것도 아닌 목사가 아무 것도 아닌 형제 자매에게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이것이 여러분과 저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도우려는 사람은 우리보다 뛰어나거나 우리보다 더 나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여러분과 저의 마음이 낮아져서 다른 사람들을 더 낫게 여겨야 그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같은 사람을 도우시려고 모든 높은 것들을 다 버리시고 낮아지셨습니다. 그분은 왕 중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셨으며 왕좌에 계실 때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라는 찬송을 들으시던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자신을 낮추사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오셨고 온갖 죄인들 즉 창녀들, 도둑들, 살인자들, 사기꾼들, 거짓말쟁이들 아래로 자신을 굽히사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분은 이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죄인들을 섬길 수 있으려면 네 자신에 대해 더 낮은 마음을 갖고 더 낮은 자세를 취하라. 그래야 더 많은 죄인을, 더 많은 형제 자매를 도울 수 있고 교회에 덕이 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게 되리라.” 골로새서 3장을 보십시오. 이 세상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술집에 갈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주변을 돌아보기만 하면 됩니다. 교회도 좋고 교회가 아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온통 자기 사랑, 자기 높임, 자아실현에 관한 이야기뿐입니다. “당신이 최고다, 당신은 위대하다, 긍지를 가져라.” 등 이 같은 철학은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철학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자신에게만 몰두하면 할수록, 자기 생각에 빠지면 빠질수록 다른 사람들 특히 잘못된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가져다주기에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요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로서 긍휼히 여기는 심정과 친절과 겸손한 마음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 이 말씀에 의하면 여러분과 저의 삶 가운데 서로가 서로를 감당해야 할 상황이나 서로를 대적하는 다툼이 생길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의견 차이도 물론 있을 것입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끝부분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며”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던 그 순간을 한번 기억해 보십시다. 여러분과 제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주님께 나아가 “주님, 이 죄인을 용서하십시오.”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죄를 열거해 보라고 하셨습니까?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고 냉대하셨습니까? 주님께서는 그저 던져진 돌을 삼켜버리는 강물처럼 여러분과 저의 모든 죄를 받아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씻어버리시고는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수치와 모욕, 모든 죄악, 모든 불법을 다 자신의 몸 위에 얹으시고 그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망각”의 바다에 던져버리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기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군가와 다투고 계십니까? 누군가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누군가를 용서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 모든 상황에서 그저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해 주신 그대로 하십시오. 예수님은 따지지도 않았고, 책망할 기회를 엿보지도 않았고, 혼쭐을 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더 비참해져 납작 엎드리기까지 기다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셨을 뿐입니다. 14절에 보니 “이 모든 것 위에 사랑(charity)을 입으라. 사랑은 완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합니다. 이것이 해답입니다. 이번에는 베드로전서 3장 14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의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면 행복한 자니 그들이 두렵게 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고 불안해 하지도 말며 여기 보니 당신은 올바르게 행했는데도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불공평한 상황입니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므로 여러분은 얼른 익숙해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성경 그 어디에도 인생이 공평(fair)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곳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불공평하게 보입니다. 도둑질은커녕 속임수도 안 쓰고 땀 흘려 열심히 일해서 주당 200달러 받는데 어떤 자는 마약을 팔아서 백만장자가 되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오, 하나님. 이건 너무도 불공평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장 무슨 조치라도 취하셔야 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기도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다. 물론 계시록에 가면 하나님께서는 분명 어떤 조치를 취하십니다. 그런데도 기다릴 줄 모르는 우리는 이 땅에서 당장 이 불의가 시정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중에 행동을 취하실 그때까지는 우리의 인생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때까지는 베드로전서 3장에 나와 있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14절과 15절을 보십시오. 14 그러나 너희가 의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면 행복한 자니 그들이 두렵게 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고 불안해 하지도 말며 15 오직 너희 마음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에게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하며 “너희 마음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라고 하는 말씀은 쉽게 다가오질 않습니다. 일반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내가 구원 받는 순간 거룩히 구별하셨고, 또한 내가 매일의 삶 가운데서 말씀으로 거룩히 구별되어지는 법인데 여기는 내가 하나님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구별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은 내가 내 마음속에 있는 거룩치 못한 부패한 것들을 다 몰아내고 내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만 내어드린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저런 사람들 때문에 제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주님은 “저런 사람들은 한쪽으로 치우고 오직 나와만 접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자가 저에게 몹쓸 짓을 했습니다.” 이렇게 푸념하면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몹쓸 짓은 한 쪽으로 치워 버리고 오직 네 마음속에 나만을 간직하라.” 15절 끝부분에 온유함을 지니라 했는데 어떤 자들에게 그리하라는 말씀입니까? 그것은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을 비방하고, 비난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요구사항은 이런 것입니다. 즉, 나를 괴롭게 하고, 나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돌을 삼킨 물처럼 이 모든 것들을 삼켜 버리고 평소의 차분하고 온유하고 친절한 마음과 자세로 대해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모든 “나쁜” 것들이 내게로 다가올 때 그것을 내가 아닌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받아가지고 던져버리면 나는 그런 자들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고, 부드럽고 “선하게” 대해 줄 수 있는 동시에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16절 끝부분을 보십시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한 행실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아주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제가 이제껏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스스로를 옹호할 수 없다는 진리를 배웠단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에 대해 이런저런 거짓말과 비난을 늘어놓고 다니는 사람들을 일일이 다 찾아내서 항변하거나 변명할 수 있는 방법은 결코 없다는 말입니다. 오해를 일일이 다 해명하고 다닐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이 모든 일들이 닥치거든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꾸준히 유지하여 마음에 상처나 쓴뿌리가 생기지 않도록 하고 그 누군가가 여러분을 쥐새끼 같다고 욕하거나 비방하더라도, 그런 말을 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분을 만나 보니 실은 젠틀맨이라는 사실을 보고 당황하도록 만들라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사람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습니다. “당신은 내가 들은 바와는 전혀 딴 판이군요.” 이런 말을 들을 때 정말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분께서 얼마나 큰 축복을 주셨는지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거짓말이나 비난이나 욕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으나, 우리가 이 모든 경우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겨 온유함을 유지하여 상한 마음과 쓴뿌리가 생기지 않도록 한다면 주님의 때에 주님께서 그런 자들로 결국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12절, 13절입니다. 12 또 수고하여 우리 손으로 일하며 욕을 먹으나 축복하고 핍박을 받으나 그것을 참으며 13 비방을 당하나 간절히 권면하니 우리가 이 날까지 세상의 오물(汚物)같이 되고 모든 것의 찌꺼기가 되었노라. 여기 나오는 찌꺼기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음식을 만들다가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찌꺼기”, 그래서 그냥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려야 하는 음식 찌꺼기를 말합니다. 음식 찌꺼기만 따로 모아 버리는 통이 있는지 아시지요? 글쎄요, 포로수용소에서 굶어죽기 싫어 먹을까 말까한 바로 그런 것 말입니다. 놀라운 것은 깨끗한 생활을 하며, 건전한 생각을 지니고, 정직하고 품위 있게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들을 이 세상 사람들은 찌꺼기 취급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확인해 볼 필요없이 제 말을 그대로 믿으셔도 됩니다. 미국 텔레비전 토크쇼 프로그램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늘 멍청이나 도둑이나 못된 자로 묘사됩니다. 이것이 세상이 소위 “예수쟁이”들에 대해 내리는 평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오물이요 모든 것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다 자기 권리가 있어 아무리 소수 그룹(minority)일지라도 나름대로의 특권이 부여되며 그 누구도 자기 마음대로 생각할 권리가 있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들만은 예외라고 합니다. 이것이 지금 미국의 상황입니다. 포르노 중독자이건, 동성연애자이건, 성도착자이건, 아동학대자이건 이 모든 자들이 이 사회에서 다 용납되어집니다. 이들을 경계인, 또는 주변인이라 부르면서 나름대로 인정해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단 하나의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들고 죄와 지옥에 대해 경고하는 자들은 인류의 적이요, 이 세상의 오물이며, 만물의 찌꺼기라고 합니다. 미국 공립학교에선 피임약 소지가 가능하나 성경은 학교에 가져갈 수 없습니다. 복음전도지도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12절과 13절에서 바울은 이런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고백합니다. 그런 취급을 당해도 당황하거나, 상처 입거나, 신경 쓰인다거나 그런 일이 없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바울을 그런 식으로 취급하려고 하는 자들이 오히려 황당해 할 것입니다. 자신이 인간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라고 스스로를 낮추는 자에게 인간대접을 해 주지 않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미 자기 스스로를 그렇게 낮게 평가하고 있는 자에게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스스로를 세상의 오물이요 만물의 찌꺼기로 간주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런 욕을 해봐야 전혀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없고 기분 나쁘게조차도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나에게 말씀하는 그대로 “나는 아무 것도 아니요, 만물의 찌꺼기에 불과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자들에게 “너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전혀 모욕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 되시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진리를 확고히 붙들고 있는 자에게 무슨 말을 하든, 무슨 비방을 하든, 무슨 소문을 퍼뜨리든지 아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 이미 자신이 그런 비방에 딱 해당되는 자라고 인정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는데 발끈하거나, 좌절하거나, 스트레스 받을 일이 어디 있습니까? “나쁜 놈”, “더러운 놈”, “만물의 찌꺼기”와 같은 말들을 해 보아야 이미 자신을 그러하다고 간주하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 상처를 더 입힐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4장 2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아니면 사랑과 온유의 영으로 나아가랴? 여기 보니 고린도 성도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주어져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내에서 여러 가지 죄들이 드러났으므로 이에 바울은 매를 들고 가서 징계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그들에게 가서 겸손히 그들의 짐을 함께 지고 그들로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사랑과 온유의 영으로 가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24절에서 26절입니다. 24 주의 종은 결코 다투지 아니하며 모든 사람에게 부드러우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인내하며 25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워 주어야 하리라. 혹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를 허락하사 진리를 인정하게 하시리니 26 이것은 마귀의 뜻대로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이 마귀의 올무에서부터 자신을 되찾게 하려 함이라. 말씀을 보면 교리가 잘못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젊은 그리스도인을 훈련시키거나 빗나간 그리스도인들을 바로잡아 줄 때 온유함이 없다면 불가능합니다. 이들은 때로 너무도 어리석고, 거칠고, 빗나간 상태이나(때론 말대꾸도 할 것입니다) 당신이 육신적 상태에 있다면 “저런 자들에게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어디 있어?” 하면서 상대도 안 할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 보면 실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시간을 투자를 해야 합니다. 26절에 보니 이들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여러분이 충고하거나 권면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하지 말라는 짓을 하고, 가지 말라는 곳엔 가고, 성경구절을 암송하라는 권면도 무시하며 필요한 도움도 거절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사람들을 온유함으로 일깨우는 일, 즉 그들의 모든 잘못을 그대로 받아주고 계속 권면하고 계속 도와주며 지속적으로 사역해 나가는 일, 이것을 우리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마저 손을 놓으면 그들은 무너져버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제가 육신적으로 행동해 버리면 주님의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그런 자들은 상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시간 낭비 같아 보이는 그것이 그들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이 아니고는 누가 그들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그것을 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온유”한 자로 평가받은 사람을 세 사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민수기 12장을 보십시오. 한 번은 회중들이 회합을 갖고 모세를 대적하기로 결의를 했습니다. 회중들 중 한 그룹이 교회를 장악했습니다. 그 전에 아론은 이미 이들에게 굴복해서 우상을 숭배토록 했었던 금송아지 사건을 저질렀습니다. 모세는 2백만 명이나 되는 회중들을 인도하는 중에 수십만 명이 불평불만을 늘어놓곤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얼마나 비일비재했는지는 성경에서 광야생활에 대해 읽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온갖 비난, 불만, 비방... 이런 것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민수기 12장 1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이디오피아 여인과 결혼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가 결혼한 그 이디오피아 여인으로 인하여 모세를 비방하니라. 여기에 모세의 누이와 형이 등장합니다. 목사의 설교를 비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의 지도력을 문제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2절과 3절을 보니 심지어 모세의 아내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2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참으로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셨느냐?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주께서 이 말을 들으시니라. 3 (이제 이 사람 모세는 매우 온유하여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하였더라.) 말씀에 모세는 지구상의 그 누구보다도 온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모세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비방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4절부터 13절까지입니다. 4 주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세 사람은 회중의 성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세 사람이 나아가매 5 주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 내려오사 성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므로 그 두 사람이 나아가니라. 6 그분께서 이르시되, 이제 내 말들을 들으라. 너희 가운데 대언자가 있으면 나 주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려니와 7 내 종 모세와는 그리하지 아니하나니 그는 나의 온 집에서 신실한 자니라. 8 그와는 내가 입에서 입으로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또 그는 주의 모습을 보려니와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9 주의 분노가 그들을 향해 타오르며 그분께서 떠나시매 10 구름이 성막에서 떠나갔고, 보라,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같이 희게 되었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보라, 그녀가 나병에 걸렸더라. 11 아론이 모세에게 이르되, 슬프나이다. 내 주여, 우리가 어리석게 행하여 죄를 지었으나 간청하건대 그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12 부디 그녀가 자기 모태에서 나올 때에 살이 반이나 썩어 죽은 자같이 되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 13 모세가 주께 부르짖어 이르되, 오 하나님이여, 간청하건대 이제 그녀를 고쳐 주옵소서, 하니라. 놀라운 것은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에 대해 모세가 나선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서셨습니다. 주님께서는 8절 끝에 그들이 행한 짓은 비방이라고 말씀하시고 분노하셔서 미리암에게 나병이라는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얼마나 화가 나셨는가 짐작이 되십니까?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모세가 나섭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모세의 중보기도 말입니다. 자기를 비방해서 벌 받고 있는 자를 위해 기도하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그녀를 고쳐 주옵소서. 간청 드립니다.” 모세의 온유함은 실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로써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입증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있어 이런 일들이 가능하겠는지요? 제 경우를 말씀드리자면 아주 특별히 영적으로 상태가 좋은 날 하루 정도는 어쩌면 가능하겠지만 나머지 364일은 어림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이런 일을 우리 안에서 해 내심으로 우리로 그분이 원하는 그 모습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절로  가겠습니다.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힘입어 직접 너희에게 간청하노라. 내가 너희와 함께 너희 가운데 있으면 비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를 향해 담대하지만 “비천하고”(base)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와 연관이 있는 단어가 다름 아닌 “지하실”(basement)입니다. 지하실이란 건물의 맨 밑바닥을 말합니다. 지하실보다 낮은 곳은 없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온유함을 주셨기에 그는 그처럼 부패한 고린도교회로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분열, 다툼, 이단들, 음행, 법정 다툼, 이혼, 우상숭배, 영적 은사를 남용함, 남녀노소의 무질서 등 이런 “엄청난” 교회가 고린도교회였습니다. 그런 상황을 알면서도 바울은 주님의 온유함을 지닌 채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 모두보다 나은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를 도우려 왔을 뿐이라.” 만약 여러분이 그런 교회에 들어갈 때 눈에 띄는 것이 죄뿐이라면 여러분은 육신적인 상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런 교회에 들어가 여러분을 통해 그들을 도우시려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들을 눈여겨 본다면 여러분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11장과 21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2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주님께서는 자신이 온유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이제껏 내게 행한 일들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의 모든 죄들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의 모든 범법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이 할 일은 내게로 오는 것이다. 내가 너희의 모든 짐을 짊어지리니 이는 내가 온유함이라.” 이것이 주께서 말씀하신 핵심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21장 8절, 9절을 보겠습니다. 8 매우 큰 무리가 자기들의 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무에서 가지를 베어 길에 흩어 깔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던 무리들이 외쳐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놀랍습니다. 왕께서 왕의 도시에 들어오시는 장면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시온의 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느니라. 그분은 온유하사 나귀 위에 앉으시나니 나귀 새끼 곧 어린 수나귀니라, 하라, 하였느니라. 나귀 위에 앉으신 주님에 대해 “온유하사”(meek)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교만한 분이셨다면 호산나 소리와 종려나무 가지와 군중들 속에 파묻혀버렸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십자가는 제쳐놓고 바로 왕좌에 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유하신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도 이 환영은 기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는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죄들로 인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온유하다면 여러분은 비방을 받고도 계속 섬길 수 있고 또한 칭찬을 받아도 우쭐대지 않고 계속 섬기는 자리에 머물 수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비방에 대해 쓴 뿌리를 내지 않으며 칭찬해도 우쭐대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항상 종의 마음과 섬기는 자세를 유지합니다. 우리 한번 솔직해 보십시다. 지난 메시지에서 말씀드린 부드러움도 우리의 능력을 벗어난 일입니다. 오늘 다룬 온유함도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불가능을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가능하게 하시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해지는지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고(willing) 그저 주님께 고백드리십시다. 주여, 도우소서. 아멘.    
2009-05-01 18:15:46 | 관리자
성령의 열매: 믿음/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는 삶   우리는 지금 성령의 열매에 대해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 열매는 하나님께 속한 속성과 특성들로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원하시는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가족 구성원이 된 사람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즉 우리를 맏아들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들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선 오늘 메시지의 기초가 되는 구절부터 읽고나서 나머지 12구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25절입니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성령 안에서 걷는 것이야말로 거듭난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바는 성령 안에서 살고 있는 자들이 성령 안에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실제적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영의 통제하에 놓여 있음을 의미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 말씀 속에 우리 모두의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이 말씀이 우리에게 해당됩니다. 문제는 이 말씀을 우리가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 자신의 아내가 죽은 사람이 내일 아침에도 예전처럼 자기 아내가 아침도 차려주고 와이셔츠도 다려줄 것을 기대한다면 그 사람은 정상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보고 싶기도 하고 빨리 하늘나라에 가서 다시 만나고 싶기도 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아내에게 그 어떠한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아내와 무언가를 함께하고 아내로부터 무언가를 기대한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하나님 말씀에 죽었다고(dead) 되어 있는 그 무엇과 계속해서 관계를 맺으려고 합니다. 언급했듯이 이는 미친 짓이며 실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24절 말씀을 잘 읽어 보십시오. 어떤 것이 죽어 있습니다. 어째서 여러분과 저는 육신적 삶으로부터 아무런 만족을 얻지 못합니까? 어째서 육신을 따라 사는 생활로부터 참다운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죽은 것 하고는 그 누구도 아무런 교제(관계)를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미친 짓이요,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육체는 언젠가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 언젠가 우리의 애착들과 정욕들도 못 박히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에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우리는 이 시체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자. 나를 만족시켜다오. 자! 어서 일어나 나에게 무언가 말 해다오!”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만약 그 누군가가 죽은 사람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그 사람은 무엇이 잘못되도 크게 잘못된 사람입니다. 누군가가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사진을 쳐다보며 그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 어머니에게 아침을 차려드린다면, 그 누가 봐도 그 사람은 정상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죽은 육신을 위해 살고, 육신을 섬기고, 육신과 교제하며 사는 것입니까? 이것은 미친 짓입니다. 무엇이 잘못되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옛사람 때 지녔던 애착들(affections), 정욕들(lusts)과 교제를 나누고자 한다면 실로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과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며 우리는 옛 생활로부터 결코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은 그 동안 살펴온 성령의 열매의 특성들 아홉 가지 중 믿음(faith)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1장을 먼저 보십시오. 로마서 1장에는 혼란스런 구절 하나가 들어 있는데 오늘 우리는 그 구절을 읽고 기도하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더 이상 이 구절이 혼란스러운 구절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럼 로마서 1장 16절부터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그것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인에게로다.       16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권능이라고 되어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권능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교회들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나 그들은 복음을 믿지 않기 때문에 지옥을 갑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믿고, 위대한 스승이요 위인이신 그리스도도 믿으며, 선한 행위들도 믿지만 복음은 믿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들로 인해 죽으시고 묻히셨고 셋째 날 다시 살아나신 사실, 즉 복음을 믿지 아니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누구도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16절에 말씀하기를 복음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권능이라고 한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제부터 제가 좀 이상한 것 하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누구든지 간에 칭의(의롭게 됨)를 얻기 전에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는 의롭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그런데 로마서 1장 17절에는 의인(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미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는데 또 “믿음”으로 살다니요? 그러니까 내가 구원받은 그 믿음과 살아야 할 믿음, 그 두 가지가 뭔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을 때 갖고 있던 믿음에서 생활을 위한 믿음으로(from faith to faith)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이 진리를 깨닫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시여, 오늘 이 진리를 저희에게 알려주소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늘 이 시간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깨닫도록 도와주시기를 간구 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로지르는 흔들다리가 처음에 어떻게 건설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기술자들이 케이블로 묶는 방식의 다리를 설치하려고 설계를 했으나 어떻게 그 일을 진행시켜야 할지를 몰랐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바람이 잘 부는 어느 날 줄 하나를 연에 매달아 강 건너편으로 띄웠고 건너편에 있던 사람이 그것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에 조금 더 무거운 줄을 매달아 다시 이쪽으로 보냈고 여기서 다시 더 무거운 줄을 매달아 보내는 방식을 썼습니다. 결국에는 큰 케이블로 된 다리를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연줄은 다름 아닌 우리의 믿음을 대표합니다. 우리의 믿음 역시 처음에는 클 필요도 없고 강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건너편으로 건너갈 정도면 됩니다. 그러면 건너편에서 이 작은 믿음을 누군가가 받아서 그 위에 좀 더 강한 것을 매달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자그마한 믿음이 이쪽저쪽을 오가며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 내게 됩니다. 마가복음 11장 2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라. 고가도로를 지나가면서 그 도로가 우리가 타고 있는 자동차를 지탱해 주리라는 믿음은 누구라도 갖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것을 믿지 않고는 아무도 고가도로 위로 차를 몰고 가진 않을 것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이런저런 형태로 믿음을 행사합니다. 가게 가서 복숭아 통조림을 사면서 그 안에 과연 복숭아가 들어 있을까,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문을 읽으면서도 그 기사 내용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도 우리는 잘 믿습니다. 어디 가면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다는 말을 친구가 해 주면, 그 친구 말을 믿고 그곳으로 갑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매일 매일 믿음을 행사하면서 살아갑니다. 마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갖고 있고 매일 사용하는 그 믿음을 다름 아닌 “하나님께 두라(have faith in God)”고 하십니다. 신문을 읽을 때, 물건을 살 때, 버스를 탈 때, 고가도로를 올라갈 때 행사했던 그 믿음만큼이라도 하나님께 믿음을 얹어놓으라는 말입니다. 커다란 기관차에는 엄청난 마력의 엔진이 달려 있고 엄청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그 뒤에 연결되어 있는 객차들은 단지 이 기관차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레일 위를 달릴 수 있습니다. 객차들이 스스로 레일 위를 달릴 수는 없습니다. 오직 기관차의 힘에 의해 레일 위를 힘차게 달리는 것입니다. 이 시간 현재 저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나의 죄들은 다 처리되어서 지금 죽더라도 지옥에 가지 않고 하늘나라에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내 스스로의 힘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니고 오직 내가 예수님께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분의 권능으로 영생을 얻었고, 그분의 권능으로 죄사함을 받았으며, 그분의 권능으로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현재 나는 주님과 연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가시는 그곳에 언제든지 갈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 14절에서 16절을 보십시오. 14 너희가 거룩하신 분 곧 의로우신 분을 거절하고 살인자를 너희에게 달라고 구하여 15 생명의 통치자를 죽였도다. 그분을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셨으니 우리가 그 일에 증인이라. 16 그분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분의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강건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그분으로 말미암은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그를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우리 신앙의 첫 단계는 물론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포함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saving faith)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다시 일어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장을 보시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구원이 성립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로마서 3장 24절, 25절입니다. 2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 25 그분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한 화해 헌물로 제시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참으심을 통해 과거의 죄들을 사면하심에 관한 자신의 의를 밝게 드러내려 하심이요. 하나님께 나의 믿음을 얹어놓고 나면 자연히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그분께서 우리를 그분의 피를 믿도록 하시므로 그 피가 우리를 구원하게 됩니다. 잘 보십시오. 그분의 피에 대한 믿음(faith in His blood)이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지 산상설교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나 위대한 가르침, 기적들,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행위들이 구원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자, 잘 들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채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생명도 없고 죄와 범법으로 죽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신의 죄값을 치루시고자 피를 흘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통해 그 사람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즉 구원받은 우리 모두는 거듭나는 순간 영생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그분의 흘리신 피를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을 보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말씀을 보니 믿음에서 믿음까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무슨 뜻일까요? 즉 “믿음에서”(from faith)가 말하는 믿음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그 믿음을 말합니다. 구원을 가져다주는 그 믿음 말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에서 멈추고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까지”(unto faith)가 또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이 믿음은 바로 17절 하반 절에 나와 있듯이 “믿음”으로 살기 위한 믿음입니다. 제 간증으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구원받기 위해 저를 위해 피를 흘리신 하나님의 아들과 그분의 피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나 그 후 주님께서 저의 생활을 통제하시도록 허락할 만큼의 “믿음”은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의 특성 중 하나인 믿음에 대해 공부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구원을 가져다주는 믿음은 갖고 있었으나 그 후 믿음으로 사는(live) 믿음은 갖고 있지 못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나의 생각, 나의 마음, 나의 행실, 나의 감정을 주님께서 주시는 믿음으로 통제하지 못한 채 살아왔단 말입니다. 그렇지만 로마서 1장 17절을 보니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구원의 믿음뿐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살아가는 믿음까지 얻도록 하셨습니다. 이제껏 여러 시간에 걸쳐 살펴본 대로 성령의 열매는 사랑(하나님의 사랑(롬 5:5)), 기쁨(주의 기쁨(느 8:10)), 평안(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요 14:27)) 등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열매란 하나님의 성품이었고 그 성품이 믿는 자들에게 공급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로마서 3장 22절을 보십시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자에게 미치고 믿는 모든 자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의니 거기에는 차별이 없느니라. 우리가 주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유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the faith of Jesus Christ)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즉 아드님께서 아버지에 대해 갖고 계셨던 그 큰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의 알량한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크신 믿음을 가지고 산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얇은 줄에 연을 매달아 나이아가라 폭포 건너편으로 보낸 것으로 과연 그 폭포를 건너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작은 믿음(줄) 위에 더 굵은 줄(큰 믿음)이 더하여져서 튼튼한 다리가 완성될 때 그 다리 위로 건너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큰 믿음 즉 성령의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이 구절을 잘 보십시오. 이 구절에도 나의 믿음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 나오고 있습니다. 내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의롭게 되어 죽을 때 지옥이 아닌 하늘나라로 갈 것이 분명하지만, 이 땅에서의 생활 가운데서 “너는 탐내지 말라”는 말씀을 믿고 있으면서도 때론 이런 짓을 한다는 데 나의 신앙생활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왜 탐심을 갖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충분히 신뢰하지 않아서 내가 처해 있는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탐을 내는 것이요, 하나님을 신뢰치 않기 때문에 만족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셨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되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만족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분께서 하늘 아버지를 철저히,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신뢰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저의 작은 믿음대신 예수님께서 아버지에 대해 가지고 계셨던 그런 믿음을 갖고 있다면 저 역시 지금보다 훨씬 나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와 계신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면 성령께서는 그 “믿음”을 우리 안에서 생산해 내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아버지에 대해 갖고 있는 나의 믿음대신 예수님께서 갖고 계셨던 믿음으로 산다면 우리의 영적 생활이 훨씬 좋아질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빌립보서 3장 9절을 보십시오. 율법에서 난 내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소유한 채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이 구절을 통해 바울의 간증을 들어 보십시오. 여러분은 왜 사람들이 구원을 의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구원받은 이후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할 만큼 충분한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분명히 구원받을 수 있었는데, 어쩌면 올바르게 기도를 안 했을지도 몰라. 해와 달과 날은 기억하는데 시간과 분과 초는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니 혹시...” 이런 생각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이 모두는 여러분과 저의 믿음이 너무 보잘것없어 “실패”할 때가 자주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도록 그분을 신뢰하게 되면 그분의 믿음이 내 안에 들어오게 되고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해 영원히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이런 확신 가운데서 살아간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오르락내리락 하거나, 좌로 갔다 우로 갔다 하거나,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가 하는 신앙들은 우리의 “실패 잘 하는” 알량한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디도서 1장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의 믿음에 따라 하나님의 성품을 따르는 진리를 인정함에 따라 말씀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분의 믿음이 나옵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예수님의 믿음입니다.A) 이 예수님의 믿음 때문에 우리는 단지 구원받은 것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에 이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게 됩니다. 예수님의 믿음에 따라 종이 되고 사도가 되었다는 고백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번 솔직해 보십시다.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 구원받은 이래로 죄를 지어 본 적이 없으신지요? 구원받은 후 성경이 그리스도인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되는데 실패한 적이 한번도 없으신지요? 여러분과 제가 여러 번 믿음 생활에서 실패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여러분과 제가 자유롭게 주님을 지금 이 순간 섬길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우리로 전능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계속해서 있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에 의해 의롭다고 선언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에 의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내가 “내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대신 예수님의 믿음을 붙들고 산다면 “내 믿음”의 실패로 인해 패배감이나 좌절감에 빠져 있는 시간은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내 믿음”은 보잘것없지만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은 대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오늘 저녁 “제 믿음”이 실패하더라도 내일 아침 저는 다시 믿음 생활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주님의 지체요, 살의 일부요, 뼈의 일부이며,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녀이며, 그분의 눈동자요, 기뻐하시는 자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택하신 분의 믿음 때문입니다. 나의 믿음은 쉽게 실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믿음에서(from faith) 믿음으로(unto faith) 이끄십니다. 나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것은 나의 믿음이고, 나를 하늘나라로 데려가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믿음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우리의 믿음이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해 줍니다. 그러나 그후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남아 있도록 지켜주는 것은 우리가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우리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는 순간 “주여, 주께서 원하시는 그 뜻을 행하고자 합니다. 내 나머지 인생을 주님을 섬기는 데 드립니다. 오 주여, 구원하소서.”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후 우리가 이 약속을 지켰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주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여러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여전히 그분을 찬양할 수 있고 어찌하여 주님은 우리로 주님을 증거하도록 하시는 것입니까?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주님을 믿는 순간, 갖고 있던 우리의 작은 믿음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큰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우리의 믿음이 항상 강력하고 실패가 없으며 일관성 있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같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끄시고자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실패하고, 좌절하고, 무너지는 그곳에서 일어나 예수님과 완전한 교제 가운데 이르도록 이끄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한때 뜨거웠다 금방 식었다 합니다. 때로는 의롭게 살다가 때로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주님과 완전한 교제에 머물게 되면 주님의 믿음이 내 믿음이 되고 내 믿음이 주님의 믿음이 되어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만 신뢰하고, 의지하고, 확신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앤드류 머레이, 토저, 윗치만 니 등과 같은 분들의 책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이 분들이 말씀하는 “머문다”, “거한다”는 말들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짐작컨대 바로 지금 말씀드린 그런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루는 믿음 따라 살다가 하루는 환경에 따라 살고, 하루는 충만하게 살다 하루는 육신대로 살고, 하루는 뜨거웠다 하루는 축 쳐졌다 하는 이런 방식의 삶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의 믿음과 완전히 하나로 엮어져서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그분들이 말하고 있는 “거한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바로 이 상태가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나와 있는 성령의 열매가 맺힌 상태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을 보겠습니다. 11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11 그것은 신실한 말이로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리라. 12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또한 그분과 함께 통치하리라. 우리가 그분을 부인하면 그분도 우리를 부인하시리라. 13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그분은 항상 신실하시니 자신을 부인할 수 없느니라. “그분과 함께 죽으면”이라고 했는데 여러분과 저는 이미 십자가에 못박혀 있다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분과 함께 살 것은 100% 확실합니다. 절대적으로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을 보십시오. 12절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들이 이 구절을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고난은 선교지에서 당하는 고난이나 거리설교 하다가 당하는 고난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다 고난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suffer). 주의 일을 하다가 당하는 고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겪는(suffer) 고난을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그분과 함께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을 보니 “우리가 그분을 부인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생활 가운데 자주 그분을 부인합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그런 우리를 부인하십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주 믿음에 있어 실패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그런 법이 없습니다. 항상 믿음으로(faith) 가득 차(full) 계십니다. 이는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비록 작은 믿음이긴 하지만 당신의 믿음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피에 대해 행사하였고 이에 그분께서는 “내가 네게 영생을 주리니 결코 멸망치 않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 당신은 10년 전 주님에 대해 지녔던 그 믿음을 잃고 말았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때 내 믿음은 떨어졌지만 내가 믿을 때 내 안에 제공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결코 실패하거나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분께서 약속하신 그것을 저버리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인 동시에 완성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부인할 수 없으십니다. 따라서 저는 여전히 구원받은 상태로 여전히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그 하늘나라에 도착하는 동안 나의 “믿음”은 여러 번 실패하겠지만 그분의 믿음은 결코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좋은 여건에서는 내 믿음도 한 몫할지 모르지만 어렵고 힘든 여건, 즉 고문을 당하는 상황이라도 온다면 아마 쉽게 믿음을 포기할지도 모릅니다. 육신이 얼마나 나약한지 잘 아시지요? 그러나 이 믿음의 실패마저도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에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가 그분을 믿을 때 저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주님은 그 약속을 지키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저를 아시면서도 “나는 너를 결코 안 적이 없다.”라고 말씀하실 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제 안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아십니까? 성령의 열매 곧 믿음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사라졌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참으로 희한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우리의 육신은 너무도 지쳐 있고 축 늘어져 있어 성경을 믿고 있는지 아닌지조차도 모를 지경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신지 안 계신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심신이 다 고갈된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과 저는 어떻게 합니까? 성경을 꺼내들고 읽고나서 기도합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우리의 믿음”은 고갈되고 없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아무도 구원받을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거리설교도 하고 전도지도 나누어줍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우리의 믿음은 사라져 버리고 없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도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우리를 그렇게 이끌고 계신 분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이성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하나님의 약속을 더 이상 믿고 있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을지라도 여전히 그 약속들에 근거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의심이나 불안이나 불신보다도 훨씬 큰 그 무엇, 즉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4장으로 보충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4장 35절을 보십시오. 바로 그 날 저녁이 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건너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라. 때론 이 말씀들을 그냥 지나치기 쉬운데 실은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건너편으로 건너가자고 제안하셨고 이에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 그대로 순종하여 함께 배를 탔습니다. 36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무리를 보내고 그분을 배 안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작은 배들도 그분과 함께 하더니 37절을 보니 곧 큰 폭풍이 일어났고 파도가 배 안에 들이쳐 배에 물이 가득 차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아마 주님과 함께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 같이 간 제자들은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건은 터졌습니다. 폭풍이 일어났지만 주님은 배 안에서 주무셨습니다. 파도가 배 안으로 들이쳐 물이 차도 주님은 그대로 계셨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주무시는 주님을 깨우면서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는 것(perish)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님께서 “건너 가자”(Let us pass over)라고 하셨는데 죽는다니 이것이 무슨 망발입니까? 주께서 함께 계신데도 불안과 의심으로 가득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답은 한 가지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실패한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39절과 40절을 보십시오. 끝부분에 보니 “믿음이 없느냐”고 하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전혀 믿음이 없었음을 보게 됩니다. “어째서 그렇게 믿음이 적으냐?”고 하신 것이 아니고 “어째서 믿음이 그렇게 약하냐?”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단언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너희가 믿음이 없느냐?”(no faith) 처음 주님께서 건너가자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 믿음이 분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가는 도중에 믿음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즉 믿음이 바닥이 나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5장 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바다 저편으로 가서 가다라 사람들의 지방으로 들어가니라. 말씀에 그들이 바다 저편으로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건너가자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은 동이나 버렸지만 그래도 그들은 바다 건너편으로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건너왔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이는 제자들과 달리 주님의 믿음은 여전히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믿음은 그들을 배에 타도록 만들었으나 그들을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게 만든 것은 주님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수 있게 하지만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는 것은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하늘로 가는 도중 우리의 그 알량한 믿음은 흔들거리기도 하고, 부서지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고, 비틀대기도 하고, 머뭇거리기도 하고, 사라져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자신이 시작하신 그 선하신 일을 달성하기 위해 성령님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우리에게 공급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갈 2:20)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일을 여러분과 제가 노력하거나 계획을 짜서 이루어 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프로그램을 짜서 단계별로 성취해 가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과 제가 우리 자신을 그분의 통제하에 놓아 우리가 거의 본능적으로 그분께서 우리의 삶을 통제하시는 그 수준까지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리도록 우리를 이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비록 그 수준에 도달하기까지는 험난하고 먼 길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surrender) 또 내려놓고 또 내려놓고 또 내려놓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능히 그리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믿음이 없을지라도 우리의 깊은 속에서 “주여, 아무런 소망도, 아무런 도움도, 빠져나갈 구멍도, 아무런 해결책도 없지만, 그래도 주님을 신뢰합니다.” 이렇게 외치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과 저의 믿음이 아니고 여러분과 제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일찌감치 고갈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가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그 작은 믿음을 받으셔서 그때부터 나를 믿음에서(from faith) 믿음으로(unto faith) 이끄시는 역사를 하고 계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고 너무도 기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나의 믿음으로부터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인도받고 있는 삶,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사도 바울의 고백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는 삶,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저는 이제 확신과 담대함과 자신감을 갖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비록 제가 이런저런 실수나 잘못이나 불신을 저지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아무리 그 과정을 방해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일단 시작하신 그 일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나의 믿음은 결국은 나를 저 건너편 즉 하늘나라로 데려갑니다. 이상한 교리 같지만 사실입니다. 이제껏 살펴본 성경구절들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분명 우리의 믿음이 있지만 또한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믿음이 아닌 그분의 믿음을 의지하도록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난 못해요.”, “할 수 없어요.”, “안 돼요.”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어째서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믿음에 사로잡혀 있어야 합니까? “그분께서 하실 수 있어!”, “그분은 하실 수 있다고.”, “그분은 하실 수 있는 분이고 말고!” 이것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죄에 대해, 악한 습관에 대해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기뻐할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을 내 안에서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살펴본 성령의 열매는 우리의 열매가 아니고 성령의 열매이며 우리의 믿음이 아닌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그분의 믿음인 것입니다. 아멘.  
2009-05-01 18:14:37 | 관리자
성령의 열매: 선함/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      성령의 열매가 지닌 아홉 가지 특성을 대할 때마다 근본주의를 자처하고 복음주의를 자처하는 그룹들에서조차 이런 것들을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것이 우리 모두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사랑, 기쁨, 화평(평안, 평화, 평강)과 같은 단어들이 진리를 고수하는 대신 타협을 일삼는 자유주의자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겨지는 현실이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사실 사랑과 기쁨과 화평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더라면, 우리 모두는 영원한 멸망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주에 이에 대해 계속해서 묵상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자리에 앉아 하나님 노릇을 하고 싶어 합니다. 악한 자들을 심판하고 지옥문을 열어 그 안으로 죄인들을 집어던지는 그런 하나님이 된 것처럼 우리는 자주 그렇게 행동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이처럼 하나님 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사탄이 하나님이 되고자 했기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사랑을 나타내기를 원하시고, 또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반면, 우리는 하나님처럼 되어 이 세상의 악을 심판하고 바로잡고 싶어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기쁨을 표현하기 원하시지만 우리는 이단을 정죄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셔야 할 일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내적인 모습에 대해 주님께서는 우리가 본래는(by nature)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씀하시고 마귀에게서 난 자들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말씀하신 대로 육으로 난 것은 육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 주신 위치에 머물지 않으려고 하는 그 무언가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새사람에게는 동시에 그 자리를 고수하고자 하는 그 무언가가 또한 존재합니다. 우리는 지난번 메시지를 통해 오래 참음이란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자들을 대하시는 방식임을 배웠습니다. 또한 우리는 부드러움과 온유함이란 잘못이나 부당한 대우를 참아내고 그로 인해 타격을 입거나 상처를 받지 않고 즉시 은혜로운 모습을 갖출 수 있는 능력임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선함(goodness)”에 대해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이 단어 역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의미와는 사뭇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그마한 아이에게 “자, 말 잘 들어야지. 그래야 착한(good) 아이지.”라고 말합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을 착하다고 우리는 생각하지만, 그것은 선하거나 착하기보다는 의로운(righteous) 것입니다. 좀 더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만약 그분께서 의롭기만 하시고 선하지 않으시다면, 우리 모두는 아마 굶어 죽든지 죄 가운데 죽거나 지옥에 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기만 하시고 선하지 않으시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 갇혀 고통을 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므로 의로운 일을 하시지만 동시에 선하시므로 복을 베푸십니다. 아마 여러분과 저도 의로운 사람들로만 가득 찬 교회보다는 착하고 선한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를 더 좋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로운 사람들은 옷차림도 단정하고, 말도 점잖으며, 영화도 연극도 안 보고, 술도 안 마시고, 올바른 성경도 사용하는 올바른 사람들이지만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사람은 못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의로운 삶을 살려고 합니다. 저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죄를 짓지 않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의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실 뿐 아니라 우리로 주 안의 다른 형제, 자매들에게 좋은 사람(선한 사람)이 되어 축복을 가져다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의롭기는 하나 선하지는 못한 사람들로부터 구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잘 믿는 사람들 중에는 율법의 글자만 알지 율법 뒤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영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물론 저도 의로운 사람이 되고 싶고 의로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는 선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해병대의 교관은 의로운 사람이면 족합니다. 그가 병사들의 친구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의롭고 진리를 가르칠 뿐 아니라 선한 사람이어야 하고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교회학교(주일학교) 교사나, 나이 드신 자매님들, 나이 드신 형제님들은 올바른 행실은 물론 선한 행실도 당연히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일뿐만 아니라 선하신 분이라는 것이 너무도 기쁩니다. 이 세상에는 참으로 안타까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선함(goodness) 즉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가난한 사람을 돕고, 이웃에게 선하게 대하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처녀 탄생과 신성을 부인하며 엉터리 “성서들”을 사용합니다. 그들에게 선함은 있지만 그들에게 의로움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의로우신 하나님과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로 성령님을 통해 균형을 잡게 해 주셔야만 의로우면서도 선하게 될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근본주의자들처럼 의롭기는 하나 선하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도와주시지 아니하면 그 누구도 균형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도우셔서 저희로 자신을 부인하고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일 없이 우리 자신의 몸을 성령을 통해 죽이도록 하소서. 주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려 우리로 가족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된 사람들과 우리 이웃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창세기 1장 12절을 보십시오. 땅이 풀과 자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자기 종류대로 열매 맺는 나무 곧 열매 속에 씨가 있는 나무를 내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여기에 나오는 나무나 씨나 풀은 의롭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죄를 짓지도 않고 깨끗한 삶 또는 더러운 삶을 살지도 않습니다. 이것들은 “옳고 그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풀, 열매, 씨, 나무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들이 복을 가져오고, 도움이 되며 유익이 되는 좋은 것(선한 것)임을 보셨습니다. 주께서 보시니 해, 달, 별들도 다 좋았다고 하십니다(18절). 20절, 21절에서는 하늘의 새들, 물 속의 피조물을 다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24절, 25절에도 하나님께서 보셨을 때 좋은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만드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분들은 이것을 단순히 진화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먹이사슬 정도로 이해하고, 그것을 생명의 순환이라고 말합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 하나님의 피조물들과 피조세계로(creatures and creation) 서로가 서로에게 복을 가져다주고 유익을 끼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물은 식물을 키우고, 식물은 동물에게 자신을 먹이로 제공하고, 동물들도 서로에게 생명을 제공하고, 죽고 나면 다시 식물에게 영양을 공급합니다. 모두가 모두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보시고서 “좋았더라”(good)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보시고 “의롭더라”(righteous)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는 피조물들이 그 어떤 계명도 규례도 율법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 18절에 보니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합당한 협력자를 만들리라, 하시니라. 바로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자를 합당한 협력자(help meet)로 만드신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합당한(meet)”이란 단어를 보십시오. 이 단어는 “무엇에 딱 맞는”이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선하지 못하므로 선하게 만들어 줄 무엇인가가 필요했고 이제 그 남자에게 딱 맞는 여자를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결혼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결혼은 서로가 서로에게 복(blessing)을 가져다주고자 제정하신 것입니다. 누가 가정을 책임지고 누가 속박 아래 놓이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좋지 않은 것(남자가 혼자 있는 것)을 좋게 만들려고 복을 가져오는 것이 결혼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온 몸이… 꼭 맞게 함께(fitly joined together) 결합되고”(엡 4:16) 여기에 나오는 꼭 맞게(fitly)라는 말은 방금 살펴본 “딱 맞는”(meet), “합당한”(meet)과 같은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딱 맞는 자들, 즉 축복을 가져오는 자들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피조세계와 피조물들에게 복을 주는 분이신 것처럼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복을 주는 그런 자들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만약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진노와 심판과 규례와 규범에만 근거한 것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랑과 축복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니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분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시니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므로 우리는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선하시므로 우리는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서 있는 기초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자신의 수준에 맞는 자, 즉 자신의 거룩한 수준에 맞는 자들과만 관계를 맺으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같은 사람은 그분과 그 어떤 관계도 맺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과 제가 우리와 같은 수준의 사람, 우리의 거룩함에 도달하는 사람과만 관계를 갖고자 한다면 아마 우리는 교회에서나 그 어디에서도 친구를 하나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친구 관계는 의로움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고 선함에 기초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꼭 맞게 결합시켜 주는 것은 각자의 선함(goodness)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선하게 대하면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로 단지 의롭기는 하나 선하지 않은 그런 사람들로부터 구출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의로움을 내세우나 선하지는 못한 자들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보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 역시 의로움에 기초하지 않고 선함에 근거해야 함을 보여주십니다. 느헤미야 9장 2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견고한 도시들과 기름진 땅을 취하고 모든 좋은 물건으로 가득한 집과 파서 만든 우물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과 많은 과일 나무를 소유하여 이로써 먹고 배가 불러 살이 찌고 주의 큰 선하심을 즐겼사오나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끝부분에 주의 큰 선하심(great goodness)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주의 큰 선하심은 어떤 선하심이었을까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의 왕국에서, 주께서 자기들에게 베푸신 큰 선하심 속에서 자기들 앞에 주신 넓고 기름진 땅에서 주를 섬기지 아니하며 자기들의 악한 행실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과 그 땅이 가져다주는 복을 말하고 원수들에 대해 승리할 수 있게 해 주신 그것을 말합니다. 에베소서 5장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선하심과 의로우심 간의 차이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9절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모든 선함과 의와 진리 안에 있느니라.) 9절을 보면 두 가지가 다르다는 것이 확실해 집니다. 우리는 의롭지만 선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의롭지 못하지만 선할 수도 있습니다. 즉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로 의로우면서도 동시에 선하게 해 주시는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란 말입니다. 교리에서 올바르고 다른 사람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진리를 사모합니다. 그런데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정말 없습니다. 아무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요.” 혹은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오! 저는 친구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은 제가 하나님 앞에 올바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둘 다 잘못됐습니다. 이 둘 사이의 중간이 존재하고 거기가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올바른 사람인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럴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19장과 전도서 7장 그리고 로마서 3장을 보겠습니다. 만약 바리새인들이 오늘의 메시지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바리새인들의 관심사는 “의로움”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이 메시지를 들으면 “오, 그래요. 만약 내가 의로운 동시에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맞다면 좋습니다. 저는 선한 사람이 되렵니다.”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명령(계명)에 의해 선한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규례를 정해 놓고 지키겠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지금부터 좀 더 많은 미소를 짓고 조금 더 친절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잘 해 주어야지. 그래야 내가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될 테니까.” 이런 식으로 선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기적인 사람이며 우리는 아담의 후손입니다. 우리는 옛사람 아담을 선한 사람으로 만들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할 수도 없습니다. 비록 아담이 선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손 치더라도 2주일도 못되어 자신의 선한 모습을 인정해 주지 않는 모든 사람을 미워하고 말 것입니다. 선하고자 노력한다는 것 그것은 전혀 먹혀들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9장 16절을 보십시오. 보라, 어떤 사람이 나아와 그분께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이까? 하매 오늘 저는 여러분께 아마 이제껏 여러분이 생각지 못했을 그 무엇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17절부터 예수님의 답변이 나옵니다. 17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다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거든 명령들을 지키라, 하시니 18 그가 그분께 이르기를, 어느 명령이니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너는 살인하지 말라, 너는 간음하지 말라, 너는 도둑질하지 말라, 너는 거짓 증언하지 말라, 19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또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절에 그 청년이 이렇게 답변합니다. 그 청년이 그분께 이르기를, 이 모든 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지켰사오니 아직도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니이까? 이 답변의 내용은 한 마디로 “저는 계명(명령)을 지켰습니다. 저는 의로운 사람입니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1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완전하게 되려거든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매 그런데 22절을 보십시오. 그 청년이 많은 소유를 가졌으므로 그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여기서 그는 자신이 선하지 못함을 입증하고 맙니다. 그는 의로웠습니다. 율법의 명령들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율법을 넘어서서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네가 다른 사람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오! 그럴 수 없습니다. 내 재산은 내 것입니다.”라고 반응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안 계신다고 하셨는데 이 청년은 자신이 선한 사람(좋은 사람)인 줄 알고 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 시험을 하십니다. “간음했느냐?”, “아닙니다.”, “도둑질은?”, “안 했습니다.”, “부모님은 공경하였느냐?”, “물론입니다.”, “좋다. 너는 의로운 자로구나. 그러나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자가 없느니라. 그러니 네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네 자신이 그들에게 복이 되도록 하라.” 결국 청년은 이 말씀에는 순종치 못하고 떠나 버렸습니다. 우리는 의로운 사람인 동시에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하나 육신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안 마시고, 욕설도 안 하고, 속임수도 안 쓰는 착실한 몰몬교도들을 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지옥에 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님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듭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 안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의롭게 살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없이도 성령님 없이도 얼마든지 의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 없이는 결코 선하게 될 수는 없습니다. 전도서 7장을 보십시오. 20절입니다.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은 땅 위에 하나도 없느니라. 이 말씀을 이해하십니까? 의롭지 못한 것은 죄입니다. 선하지 않은 것도 죄입니다.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지옥에 가야 합니다. 오직 은혜로만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어떤 날은 제가 선할 때도 있지만 의롭지 못합니다. 반대로 어떤 날은 의롭기는 한데 선하지는 못합니다. 의로우면서 동시에 선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전도서 7장 20절이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세상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3장 1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다 길에서 벗어나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 하나님 말씀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자기의 선함(goodness)을 선언한다고 합니다. 잠언 20장 6절을 보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의 선함을 외치려니와 누가 신실한 사람을 찾을 수 있으리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자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하십니다. 인간의 선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로마서 7장 18절을 보십시오. 바울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성령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내 안에(곧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그것을 어떻게 행할는지는 내가 찾지 못하노라.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to will)은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의로운(올바른) 마음 자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행함은 없다고 했습니다. 구원받고 거듭났지만, 여전히 육신적인 영적 아기들이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 보신 적 있습니까? 새사람의 모습을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선한 사람이 되고자 애쓰고 선한 행위를 하려고 애쓰나 늘 결과는 “아니올씨다”입니다. 선하게 사는 것이 마땅하기에 선하게 살려고 결단하는 것은 의로운 결단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동의해 주고 나에게 반응해 주는 사람과는 잘 지내지만 나에게 수군대거나 나의 선함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우리 자신도 그들을 비판하고 지적하며 때론 정죄를 해 버립니다. 즉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긴 하나 그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선한 사람은 못 된다는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도 옳고 그름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과 악이 무엇인지는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실제 행동은 어떤가요? 하고자 하는 것은 안 하고, 반대로 원하지 않는 그것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대해주시는 그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선하게 대해 주는 그것은 우리 육신 안에 거하지 않는다고 바울의 고백을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아담의 본성과 다릅니다. 그렇다면 그 선함을 누가 행할 수 있을까요? 출애굽기 33장 17절과 18절입니다. 17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한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네가 내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또 내가 너를 이름으로 아느니라. 18 모세가 이르되, 간청하오니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 주소서, 하매 그런데 주님의 답변은 어떠했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함을 네 앞에 지나가게 하고 주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할 것이요, 또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풀리라,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보여달라는 간청에 선함(goodness)을 보여주시겠노라고 하십니다. 모세는 천지개벽할 만한 기상현상이나 하늘의 징조 같은 것을 염두에 두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 지구에 있는 인간들, 술과 담배에 빠져 있는 인간들, 더러운 영화에 탐닉하는 인간들, 저 욕설과 거짓과 저주를 일삼는 인간들, 시기, 질투가 가득한 인간들, 이들 모두에게 내가 오늘 저녁을 제공하리라. 저 농부들에게도 비를 보내 작물을 수확하게 하리라. 자식을 팽개치고, 쾌락에 빠져 있는 여인네들 내가 그들도 돌보리라. 그들에게도 일자리를 주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곧 그분께서 우리 같은 자들을 선하게 대해 주시는 것, 곧 그분의 선하심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하면 곧바로 하늘, 태양, 별, 무지개와 같은 것들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런 놀라운 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내 아이가 굶어 죽는 것을 내버려 두고 내가 죄 가운데 죽도록 방치해서 지옥에 가게 한다면 그런 영광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내 대신 죽게 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렇게 좋으신(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천지창조를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 같은 죄인에게는 너무도 멀기만 한 분이실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다고 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그들은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었고 하늘에서 만나를 받아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들은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항변하고 고집부리며 완악한 마음을 보였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려 보내셨습니다. “모세야, 네가 내 영광을 보고자 하느냐? 잘 보거라. 나는 좋은 하나님이다. 나는 자격이 없는 백성들에게 선하게 대해 주노라. 복 받을 자격도 없고, 그 축복을 존중하지도 않고 거부하려는 자들에게도 복을 주노라. 나는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들에게도 복을 주노라. 이것이 나의 영광이니라.”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과 제 안에 계신 이유는 엄청난 위대한 일을 하게 하시고자 함도 아니요, 위대한 설교를 하게 하시고자 함도 아니요, 대형 교회를 세우게 하시고자 함도 아니요, 수많은 사람을 구령하게 하고자 함도 아니요, 다만 그분이 없으면 우리가 결코 할 수 없는 그것을 우리로 할 수 있도록 하시려고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선하게 대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선하게 대하지 않는 사람에게 선하게 대해 주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술주정뱅이에게 가서 “이봐요, 술은 나쁜 거야. 마귀의 음료수라고. 결국은 당신을 망치게 하고 지옥으로 보내 버린다고. 정신 차려 이 사람아.” 이렇게 말한다면 당신은 옳은(right) 일을 한 것입니다. 진리를 전파했으나 당신이 그 사람에게 선하지 못하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결코 주님께로 인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그 자에게 갔고 진리를 선포하였습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안 한 것보다는 나은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2장 4절을 보십시오. 혹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함을 알지 못한 채 네가 그분의 선하심과 관대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이 말씀을 보니 죄인을 진정한 회개로 인도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 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 저는 저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옥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저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고 저를 하늘로 데려가 주세요.”라고 기도했다면 그것은 참 회개라 할 수 없습니다. 참 회개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에게 너무도 큰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밀려 왔을 때 “나에게 그처럼 선하게 대해 주신 하나님께 내가 어쩌면 그렇게도 악할 수 있었을까? 나를 그토록 사랑하신 그분을 이제껏 거부해 왔다니… 나를 항상 사랑과 친절로 대해 주신 유일한 존재이신 그분을 멸시하고 거부하고 내 멋대로 살아오다니, 오… 이래서는 안 돼지.”라고 마음 먹었다면 이것은 우리로 진정한 회개를 하게 해서 주님께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받은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을 주님께 인도한 사람들은 여러분들에게 좋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해 주고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고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보여 주었을 때, 그 사람은 여러분에게 좋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인정하고, 너무도 더럽고 추하고 악해서 자신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 같은 자를 어찌 그리 선하게 대해 주실 수 있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행한 모든 ‘소행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좋게 대해 주시다니.” 이런 마음이 곧 우리를 회개하도록 만듭니다. “나같이 이기적이고, 욕심 많고, 자신만 알고, 교만하고, 우쭐대고, 내세우고, 결국 이 모양 이 꼴이 되어버린 나를 그렇게도 사랑하시다니… 오, 하나님.” 이것이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물론 우리는 전도지를 들고 나가 목소리를 높여 복음을 전해야 하고 때를 얻든 못 얻든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자동차 범퍼에도, 티셔츠에도 말씀을 새겨 놓는 것도 말씀을 전파하는 방법입니다. 다 올바른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들은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여기 보니 눈물을 흘린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선한 마음(good heart)을 가지고 말씀을 전한다는 것입니다.(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여(엡 4:15)) 다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올바르지만 선하지 못하거나 선하지만 올바르지 못하면 사람들로부터 반응을 얻어 낼 수 없습니다. 의로움(righteousness)과 선함(goodness)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민수기 10장 29절에서 32절을 보시겠습니다. 29 모세가 자기의 장인 미디안 족속 라구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주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그것을 주리라, 한 곳으로 우리가 이동하니 당신은 우리와 함께 가소서. 우리가 당신을 선대하리이다. 주께서 이스라엘에 관하여 선하게 말씀하셨나이다, 하매 30 그가 모세에게 이르되,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땅 내 친족에게로 떠나가리라, 하니 31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을 쳐야 할지 아나니 우리에게 눈을 대신하리이다. 32 당신이 우리와 함께 가면 참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어떤 선한 일을 행하시든지 우리도 당신에게 그렇게 행하리이다, 하니라. 무척이나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나서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 미디안 사람인 모세의 장인은 약속의 백성이 아니요, 하나님의 축복과 언약과는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이 미디안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하신 것처럼 자신들도 그들에게 선하게 대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성령을 통해 이와 같은 일을 행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선하신 분이셨습니다. 저는 선하지 못한 자이나 하나님께서 선하게 대해 주신 대로 당신에게 선하게 대하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앞서 인용한 민수기 구절을 잘 살펴보십시오. “참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어떤 선한 일을 행하시든지 우리도 당신에게 그렇게 행하리이다.” 이 말씀,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잘못에 대해 긍휼을 베푸십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쁜 행실을 오래 참고 계십니까? 당신이 실족하거나 실패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다 참고 계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입니다. 모세의 발언 요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대해 주시는 그대로 당신을 대하겠습니다. 그러니 저와 함께 가시면 좋으실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그런 교회에 다니고 싶습니다. 저는 제 가족이 사람들이 기뻐할 그런 가족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 또한 사람들이 “제임스 형제는 내 친구입니다.”라고 말하기를 기뻐하게 될 그런 형제가 되고 싶습니다. 모세는 장인에게 “우리와 함께 가면 기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하셔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실 것이고, 우리는 당신에게 그 율법도 보여주고 가르쳐 줄 것이니까요.”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오히려 “당신은 우리와 함께 가시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도 선하신 분이시므로 우리도 당신에게 선한 사람이 되고 돕는 자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편 16편 1절, 2절을 보십시오. 1 오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신뢰하오니 나를 보존하소서. 2 오 내 혼아, 네가 주께 아뢰기를, 주는 나의 주시니이다. 나의 선함이 주께는 미치지 못하오나 말씀을 보니 우리의 선함이 하나님에게는 미치지 못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 전혀 유익을 가져다 드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만약 당신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여 자기 의를 붙들고 있다면 어쩌면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필요로 하신단 말씀이야.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찾아내 우리 마을에 보내셨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우리 동네는 엉망이 되었을 거야.”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돕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유익을 드리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하신 그 선하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선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게 선하시므로 그분께서 내게 주신 그 선하심이 나에게서 이 땅의 여러 성도들에게 퍼져 나갈 수는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으시어 하시고자 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을 다른 사람들에게 더 확장시키기를 원하십니다. 호세아 6장 4절을 보십시오. 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오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선함은 아침 구름 같고 사라지는 새벽이슬 같나니 말씀에 인간의 선함(goodness)이라고 해 봐야 오래 가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고 합니다. 아침 구름이나 새벽 이슬은 잠시 있다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좋은 설교를 들으면 마음의 결단을 내리는 기도를 종종 드립니다. “주님, 오늘 말씀 너무 좋습니다. 앞에 나가 무릎 꿇고 기도드립니다. 주여! 당신께서 저에게 선하라고 명하시니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는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제부터 선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문제는 이런 결심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한 후 몇 시간도 안 돼서 우리의 못된(나쁜, 악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시편 52편 1절을 보십시오. 오 강한 자여, 어찌하여 네가 해악(害惡)을 자랑하느냐? 하나님의 선하심은 항상 지속되는도다. 여기 보니 우리에게 성령님이 왜 필요한지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내 안에 머물면 오래 동안 지속적으로 선한 모습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이 옳기 때문에 선해지려고 노력한다면 얼마 안 가 나의 선함은 멈추고 맙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심은 지속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필요합니다. 이 선하심은 곧 성령의 열매의 특성 중 하나입니다. 세 구절만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5장 13절, 14절을 먼저 보십시오. 13 이제 소망의 하나님께서 믿는 가운데 드러나는 모든 기쁨과 평강으로 너희를 충만하게 하사 성령님의 권능을 통해 너희에게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4 내 형제들아, 나 스스로 또한 너희에 대하여 확신하거니와 너희 역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충만하여 능히 서로를 훈계할 수 있느니라. 앞서 말씀드린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보십시오. 자유주의자들은 선하긴 하나 옳지 못합니다. 반면 근본주의자들은 옳기는 하나 선하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께서만 우리를 옳으면서 선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이 원하시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로마서 15장 13절, 14절에 보니 지식에 앞서 선함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결과로 서로가 훈계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제가 당신에게 항상 무엇이 옳은 것인지만을 말한다면 저는 당신에게는 선하지 못한 것이고, 이렇게 되면 당신은 제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서로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관계는 결코 서로를 훈계해 줄 수 있는 좋은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옳기도 하고 선하기도 하다면 쇠(iron)가 쇠(iron)를 날카롭게 한다는 말씀대로 서로 훈계를 해도 관계가 나빠지지 않는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끼리 서로 훈계하고 서로에게 의에 대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서로에게 선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선하다면 제가 당신의 잘못을 지적하여 바로잡아 주더라도 우리의 관계는 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항상 당신에게 의로운 말만을 해댄다면 우리의 관계는 성립되지 않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을 보십시오. 요즘 논쟁거리 중 하나는 우리가 자식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훈련 교관이 되어야 하는가입니다. 이 역시 우리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옳은 말만 해서는 안 되고 동시에 좋은(선한) 부모가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둘 다 갖추지 못하면 실패하고 맙니다. 좋은 아버지이면서 올바른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11절, 12절을 보십시오. 11 그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께서 너희를 이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자신의 선하심의 모든 선한 기쁨과 또 믿음의 일을 권능으로 성취하시게 하려 함이며 12 또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너희 안에서 영광을 받고 너희가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앞서 살펴본 내용이 여기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시내산에서 나누셨던 대화가 기억나십니까? “영광”에 대한 말씀 말입니다. 여기 보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너희 안에서 영광을 받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십니까?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에서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십니까?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가족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십니까? 그러려면 당신이 올바르게(의롭게) 사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의로운 동시에 선하게 사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축복을 가져다주고 유익을 제공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시편 107편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저를 통제하셔서 당신에게 축복이 될 수 있을 만큼 하실 수 있을까요? 반대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충분히 통제하셔서 저에게 축복이 되도록 하실 수 있을까요? 시편 107편 9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사모하는 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혼에게 선하심으로 채워 주시는도다. 말씀에 따르면 만약 당신의 마음이 성령께서 당신의 삶에서 열매 맺으시기를 갈망한다면 주께서는 그 갈망을 채워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를지라도 일단 “갈망”(desire)은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채우실 수 있습니다. 저는 올바른 사람이 되고 싶고, 올바른 성경을 갖고 올바른 교리로 올바른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을 대할 때도 의롭게 대하며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저를 통해 표현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가 더 나아가 선한 자(착한 사람)가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선하게 만들기 원하십니다. 우리 교회 안의 소년소녀들에게 우리가 “그만 둬라” 하면 그만두고, “하지 마라”고 하면 하지 않고, “하라” 하면 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을 잘 듣는 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선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올바름(의)과 선함 두 가지가 합쳐져야 우리 인생에 허락하신 그분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둘 중 하나가 빠지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영광을 얻으시려면 우리는 의로운 사람 이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올바른 동시에 선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우리가 노력해서 될 수 있는 그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수 있는 그 수준만큼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엄위한 말씀에 근거하여 말씀드립니다. 만약 당신이 진정 선한 사람이 되기를 갈망한다면,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축복(blessing)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기를 갈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아멘.  
2009-05-01 18:12:54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추천의 글      잘 잘라진 다이아몬드의 여러 면이 햇빛에 찬란한 색으로 반짝이듯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비춰진 성경말씀 역시 여러 가지 영광스러운 진리의 빛을 발한다. 신약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대다수의 입으로만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체험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고 생각되는지 이들은 이런 삶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러한 놀라운 삶은 성경 안에 계시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러한 삶을 발견했다. 그들은 이러한 삶을 사랑했으며 그러한 삶을 “믿음의 삶”, “승리의 삶”등으로 묘사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여러 종들을 통해 축복된 메시지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셨다. 예를 들면 Lawrence 형제, William Law, Hudson Taylor, Hannah Whitall Smith, Charles G.Trumbull 및 여러분들이 있다. 이 분들은 진리의 여러 가지 측면들을 강조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평안, 기쁨 그리고 능력의 삶으로 인도했다.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어떻게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쓰임을 받을 수 있을까를 알고 싶어 한다. 어떻게 우리는 염려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또한 어떻게 우리의 지각을 초월하는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주일학교와 강단에서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관성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는 것인가? 우리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제시하고자 할 때 어떻게 하면 능력 있게 전달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인가? 이와 같은 승리의 삶을 살기위한 가장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는 다름 아닌 십자가의 길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있어 그분과 성도가 하나되었다는 진리를 인식하고 사는 것이다. 캐나다의 앨버타 주 쓰리힐즈의 프레리 바이블 인스티튜트(The Praire Bible Institute)의 창설자인 맥스웰 목사는 지난 25년간의 사역을 바탕으로 바로 이 핵심적인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는 은사를 지닌 분이시다. 그분은 Sunday School Times의 요청으로 1944년 초 약 7주간에 걸쳐 일곱 편의 글을 쓴 바 있었다. 이 글들에 일부를 더 보충하여 이 책이 독자 여러분의 손에 들리게 된 것이다. 본 책의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생활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다. 맥스웰목사께서는 성경을 자세히 분석하고 여러 예화를 통해 그 진리를 잘 조명해준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죄에 대해 승리할 수 있으며 능력 있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오늘날처럼 차지도 덥지도 않은 이시대의 교회들에게는 너무도 필요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불법이 판을 치고 무질서가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살아갈 바가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 꼭 배우시기를 바란다. -Philip E.Howald, Jr.-   
2009-05-01 18:03:54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1 장 성도의 신원 확인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죠지 위야트라는 사람이 전선으로 소집을 당했다. 그는 아내와 여섯 자녀를 둔 상태였다. 그래서 리챠드 프랫이라는 청년이 그 사람대신 가겠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그는 죠지 위야트라는 이름을 가지고 군대에 합류하였다. 얼마후 이 청년은 전사했다. 당국은 후일 죠지 위야트를 다시 소집하였다. 그러자 위야트씨는 자신은 프랫이라는 사람으로 이미 죽었음을 알리고 항의하였다. 그는 자기를 대신했던 프랫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전사한 사실을 확인해 줄 것을 당국에 요청하였다. 당국은 그의 신원을 확인하였고 그 결과 위야트씨는 군복무로부터 면제를 받았다. 이는 그가 그를 대신했던 사람안에서 죽었기때문이었다. 군법도 죽은 사람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관한 진리를 잘 조명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구출하시는 방법 역시 죽음을 통해서이다. 즉 우리의 대속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우리자신이 동참하여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사실을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진리(롬5장)를 증거한 후 계속해서 우리를 로마서6장으로 안내한다. 이곳에서 바울은 믿는 자들의 신원확인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발견됨을 제시한다. 로마서5장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음을 보여주고 있다면 로마서 6장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사실은 복음의 기초요 핵심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즉시 그 다음 장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로마서 6장에서 우리는 우리의 칭의가 단순한 형식적 혹은 법적인 문제만이 아니라(물론 칭의는 본질적으로 법적인 문제이다) 여기에는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경건치 아니한 죄인을 의롭다고 선포하실 때 그분은 단순히 법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신 것만은 아니다. 그 순간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실재적이고 심오한 생명의 연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생명의 연합을 무시한 칭의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경건치 않은” 사람을 의롭다고 선포하셨을 때 그리스도 밖에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다. 즉 그분의 대속(속죄)의 죽음을 믿음으로써 우리 믿는자들은 그리스도와 유기체적인 생명의 연합관계로 들어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것이다. 우리는 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롬5:20에서 바울이 선언하자 이에 대해 롬6:1의 질문이 등장한다: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는 절대적인 부정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을 때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은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연합되었기 때문에 (롬5장의 우리의 칭의) 우리의 위치는 “그분 안에서” 죽은 자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다면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고후5:14)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모두를 대신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불가피하게 모두의 죽음을 포함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해 죽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계속해서 죄에 거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죄 안에 있든지” 혹은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둘 중 하나이다. 이 얼마나 서로 모순된 일인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은 필연적으로 그분과 함께 죽은 나의 죽음을 동반한다.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이룩하신 그 사역의 근본 성격은 이와 같이 단번에 완전히 성취된 속죄의 양면을 지니게 된다. “하나님께서 합치신 것은 사람이 나눌 수 없느니라”.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이 두 측면을 “분리시킨 십자가와 목이 잘려진 복음으로 불리는 복음”으로 불리는 왜곡된 모습을 지니고 있음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크게 손상을 입고 있는 것이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방법 외에는 그분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나를 자신 안으로 집어 넣으셔서 그분과 하나 되도록 만드셨다. 이로써 나는 법적으로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필연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것이다. 이것이 나의 법적인 위치이다. 잠시 생각해보자. 나는 구원을 받기위해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나는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서 그분의 죽음을 신뢰하였다. 그리스도의 죄에 대한 죽음은 곧 죄에 대한 나의 죽음이다. 하나님께서 승리와 구원을 주시는 방법은 우리를 옛 아담의 나무로부터 잘라내서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죽음 안에서 그분께로 연합된다. 믿는 자로서 내가 스스로 어떤 선택을 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즉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필연적으로 “나를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하도록 만든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이것은 무슨 심오한 영적인 삶이라기보다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한 옛 신학자가 말한 대로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태어난 것이다”(즉 내가 거듭나는 순간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 버렸다). 독자 여러분 중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애쓰고 고뇌한 적이 있을 것이다. 당신은 더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기위해 성경을 읽으려고 결심해 보았겠지만 모든 것이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 당신은 의식적으로 실패와 패배를 이겨보려고 애쓰고 있을 것이다. 당신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계명들은 당신에게 너무 고통스럽다. 당신은 그 계명들을 기쁨으로 받을 수가 없다. 당신은 주 예수께서 정상적인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세워 놓으신 기준과는 전혀 모순되는 삶을 살고 있음을 알고 있다. 어쩌면 당신은 구세주께서 어째서 그러한 요구들을 하셨을까 의아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러한 계명들이 당신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괴롭히고 고문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 문제로 아무리 고통을 당하고, 부끄러워하며, 회개를 하더라도 당신의 영적투쟁은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그리스도의 요구사항은 성취될 수가 없다. 당신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사실을 배워야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연적인 생명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초월적인 요구를 하고 계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단순히 그분을 모방하라고 요구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그분께서 당신의 무능력을 잘 알고 계시며 또 한편으로 그분께서는 완전히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믿는 자라면 그리스도께서 요구하고 있는 수준은 육신이 달성할 수 있는 범주를 훨씬 벗어나 있음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놀랄 일인 반면 동시에 당연한 일이기도하다). 도대체 누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으며, 박해를 기뻐할 수 있으며, 자신을 미워할 수 있으며, 악을 선으로 갚을 수 있는가?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본질적인 것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요구 사항 앞에 완전히 무력한 존재임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의 요구사항과 인간의 능력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격이 놓여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은 무익하기 때문이다. F.J.Huegel은 그의 책 “그분의 뼈의 뼈”(Bone of His Bone)에서 우리의 실패를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는 잘못된 기초위에서 우리의 삶을 시작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그리스도를 닮는(모방하는)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사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에 참여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다(벧후1:4). 그리스도의 생명을 체험적으로 우리 삶에 참여시키려면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있어 그분과 하나 되었음을 깨닫고 믿음으로 살아가야한다. 죠지 위야트씨는 군법과 맞싸우거나 당국을 기쁘게 하고자 노력해서 전쟁으로부터 구출된 것이 아니다. 그는 정부의 기록에 나와 있는 그의 사망기록에 근거해서 군대를 가지 않았다. 즉 그는 “기록된 사실”에 근거해서 행동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의 대리인을 통해 이미 전쟁에서 전사하였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나를 대신하시고 대리하시는 분을 갖고 있다. 그분께서는 치열한 전투에 참가하셔서 나의 죽음을 죽으셨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사시는 것이라”(갈2:20). 이것은 위대한 사실이다. 내 쪽에서 그 어떠한 노력을 하더라도 이 사실을 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나는 그리스도께 실제로 참여한 사람이요 따라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도 참여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내 안에 살고 계신다. 그분의 삶은 죄에 대해서는 죽는 삶이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살아있는 삶이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나의 모든 것을 그분께 복종시키고 그리스도를 믿고, 기뻐하고, 그분 안에서 안식하는 것뿐이다. 한 옛 선교사는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으로서 패배의 삶을 살았다. 그는 절망 가운데 있었는데 갑자기 그의 눈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라는 말씀에 닿았다. “뭐라고? 그리스도께서 정말 내 안에서 사신다고?” 그는 외쳤다. 그는 철저한 장로 교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기뻐 껑충껑충 뛰면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단말이야!”라고 외쳐댔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께서 자기 안에 내주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그의 옛 삶 즉 자아 중심적인 삶에서 해방 받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된 삶은 모든 필요를 채우고, 충만하며 승리하는 삶이다. 이것이 감정이나 격정으로 흥분된 삶과 혼동되어서는 안되지만 그래도 여전히 “모든 기쁨과 평안이 믿음속에 거하는” 그러한 삶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의지하며 살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오도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진리를 알게 되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허드슨 테일러라고 하는 위대한 선교의 선구자의 체험은 이 진리를 잘 조명해 준다. 그는 자신의 혼에 더 많은 능력을 얻고, 더 많은 생명과 거룩함을 얻기 위해 수개월간 고뇌가운데 투쟁하고 있었다. 그는 드디어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실하신 분을 신뢰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누이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읽어보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인생에 있어 다른 것보다 더 달콤한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그중 가장 달콤한 것은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 됨으로써 맛보게 되는 안식일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 어떤 것에 대한 염려를 가지고 있지 않다. … 왜냐하면 나는 그분께서 자신의 뜻을 수행하실 수 있음과 그분의 뜻이 곧 내 뜻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나를 어디에 놓든지 아니면 어떻게 하시든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내가 그분의 뜻을 이루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분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려 하심으로 그분께서는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가장 쉬운 곳에 두셔야하며 가장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그분의 은혜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나를 매우 당혹스러운 처지에 놓으신다면 그분께서는 훨씬 더 나를 잘 인도하셔야만 하지 않는가? 어려운 처지에서는 크신 은혜를 주시고 압력과 시련가운데 놓일 경우에는 크신 능력을 주셔야만 한다. 사역에 관해서도 나의 일은 너무도 많고, 어렵고, 책임은 산더미처럼 늘었어도 나의 짐과 긴장은 다 사라지고 없다. 그분의 자원이 내 것이니 이는 그분께서 내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믿는 자와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oneness)에서 나온다.” 나 비록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는 받아들이네. 당신의 최고의 선물을. 당신과 나 사이에 이젠 한 생명뿐이니 당신께서 주신 그 한 생명뿐이라네. -Lucy A. Bennett-    
2009-05-01 18:00:20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2 장 죄에 대한 승리 비결   한 사병이 상관에게 “제가 포로를 잡았습니다”라고 보고를 했다. 그의 상관은 그에게 “포로를 데리고 오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그 병사는 “그가 안 오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장교는 “그렇다면 너만 오라”고 다시 명령했다. 그러자 그 병사는 “저도 갈 수가 없습니다. 그 포로가 저를 못 가게 하거든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역시 죄에 대한 승리의 삶에 있어 이 병사와 같은 꼴이 아닌가 싶어 매우 안타깝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형벌로부터 해방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죄의 능력(권능)으로 부터는 어떠한가?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는가? 혹시 칭의라고 하는 진리 주변을 맴돌면서 마냥 서성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만 흥얼대면서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법적으로 안전을 보장받기위한 칭의만 쟁취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삶이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건전한 수준까지 와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선포 받은 것은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대다수의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미 의롭게 된 후에는 우리자신을 위해 살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이 선택에 달려 있다고 하는 입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불안하고 동요된 양심은 자주 우리자신이 거룩하지 못하다는 사실로 우리를 괴롭히곤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법적인 위치를 내세워 이미 의롭게 된 사실에 만족해 하곤 한다. 우리는 이미 “만일 누가 죄를 지으면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있는 한 변호인이 있으니 곧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2:1)는 말씀을 잘못 사용해 왔고 또 남용해 왔다(물론 이 말씀 자체는 축복된 진리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우리는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우리 스스로에게 진부하고 패배로 가득 찬 그리스도인의 삶 즉 상습적으로 거룩하지 못한 삶을 살도록 이미 마음을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구원의 대장되시는 분께서 우리로 넉넉히 승리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고 계시며 모든 곳에서 승리를 쟁취하며 포로를 사로잡기를 기대하고 있는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죄악된 삶을 순종에게로 이끌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때 대장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너 혼자만이라도 오라” 그러나 내주하고 있는 죄악된 자아는 “나를 가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완벽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에 대해 공포에 떨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들이 두려워하는 데에는 아주 근거가 없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독자 여러분에게 A.J. 고든 박사의 현명한 충고를 묵상하도록 제안한다. “성경에 계시된 영적 진리는 자주 두 가지 극단적 주장 사이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우리가 죄 없는 완벽한 삶이라는 교리를 이단이라고 부른다면 죄로 물든 불완전한 삶에 만족하는 것은 더 큰 이단이라고 불러야할 것이다. 우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아무 죄도 없다고 말하면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요일1:8)라는 사도 요한의 말씀을 그리스도인으로서 낮은 수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에 대한 정당화 수단으로 삼고 있는 사실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거룩하게 되고자하는 열망으로 성화의 가능성을 과장되게 말하는 것이 습관적인 거룩치 못함에 “기분 좋게” 만족하고 있으면서 성화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된다. 그리스도인 완벽주의자에게 돌을 던지면서 세상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본다는 것은 결코 믿음을 세우고 있는 상황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롬6:1,2). 혹시 독자 여러분 자신은 포로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자아와 내주하고 있는 죄의 희생물 즉 노예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는 그러한 사람 중에 하나는 아닌가 묻고 싶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두 마음을 품고 있으며 모든 일에 있어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닌가? 당신은 바울처럼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도다”(롬7:19)라고 고백하고 있는가? 당신은 깨어 기도했다. 당신은 죄와 싸웠고 자아와 투쟁도 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하는 당신의 노력이 소용없다는 사실에 여러 번 울었다. 어쩌면 당신은 밤새도록 기도하려고 애썼을지도 모르고 “축복을 얻기 위해” “밤새” 기도했을 수도 있다. 당신은 얼마나 자주 당신의 내적인 악에 대해 불쾌해했고, 부끄러워했으며 몰래 울었던가! 그러나 이러한 고뇌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결심들은 한 가닥 가느다란 끈처럼 끊어지고 마는 것을 수차 경험했을 것이다. 자아는 결코 자아를 내쫓을 수 없다. 당신은 이제 죄에 대한 싸움에 있어 점점 더 나약해져가고 있다. 심지어는 당신의 믿음마저 사라져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이 죄를 포로로 “잡고자 할 때”, 그리하여 그를 데려와 감옥에 넣고 그의 자유를 제거하고자 할 때 당신은 실상 당신 자신이 포로임을 발견하게 된다. 죄와 자아는 당신의 삶 전체에 있어 실제적인 통치자가 되어 있다. 이 얼마나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패배인가? 자아의 노력은 실로 어리석고 무용하다! 그러나 여기에 구원의 손길이 있다. 믿음은 종종 절망 가운데서 태어나는 법이다. 우리가 보기에도 지나치게 죄악된 상태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바울처럼 마음을 찢는 고백을 할 것이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낼 것인가?”(롬7:24) 하나님은 계단이 없는 망대시라. 그분의 완전함은 절망을 사랑하네. 무엇이 문제인가? 도대체 왜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잘못된 근거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에 대해 승리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을 놓쳐버렸다. James H. McEonkey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그분의 기초를 깊은 곳에 놓으신다. 죄에 대한 승리는 죽음이라는 깊은 곳에 놓여 있다. 성령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죄에 대한 승리를 가르치실 때 단 한 문장(간단하고, 충격적이며, 생생한 문장), “죄에게 죽었음”으로 하신다.” 로마서 6장에서 성령께서는 죄에 대한 죽음을 강조하고 계신다. “죄에게 죽은”(2절), “죄에게 단번에 죽으심”(10절), “정녕 죄에게는 죽은 자요”(11절). 우리는 10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의 죄 때문에 (for sins) 죽으신 것뿐 아니라 “죄에게”(unto sin) 죽으셨음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셨을 때”(고후5:21)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형벌을 철저히 요구하셨다. 그 형벌은 다름 아닌 죽음이었다. 죽음으로 죄의 능력과 형벌은 끝이 났다. 죄의 능력도 죄의 요구도 죽음과 더불어 끝나버린 것이다. 이에 바울은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롬6:14)라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에게 죽으셨다. 이제 그분께서는 죄가 손댈 수 없고 다가설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원히 살고 계신다. 바울은 이렇게 묻고 있다.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게 죽은 우리가 어떻게 더 이상 그 가운데 살겠느냐?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 받은 우리가 그의 죽으심 안으로 침례받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롬6:1-3). 바울은 우리가 실제로 죽었다고 말하거나 우리가 문자적으로 “죄에게 죽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바울이 모든 믿는 자에게 해당되는 바를 말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죄에게 죽었다”는 것이다. 모든 성도는 성령님에 의해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았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17). 다시 말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분과 하나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같은 인간이 되셨을 때 (그렇지 않고서는 그분께서 내 죄의 대가를 담당할 길이 없다.) 그분께서는 나를 그분과 하나 되게 하신 것이다. 나는 그분과 일치되었다. 그분께서는 나를 자신과 함께 죽음 안으로 데리고 갔으며 그분의 죽으심은 곧 죄에 대한 나의 죽음이 된 것이다. 그분께서는 나를 십자가를 통과해서 무덤으로 데려가셨다가 죄의 지배가 미칠 수 없고 죄의 능력을 초월하는 무덤 밖으로 나를 데리고 나오셨다. 바로 이것이 위대한 기초이다. 성령께서는 당신과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너와 같이 인간이 되셔서 너를 그분께 묶으신 채로(즉 너의 인성 안에 놓아지셔서) 너를 죽음으로 데리고 갔고 죽음으로부터 영광스러운 부활과 죄의 지배로 부터의 자유함으로 이끌어 오셨다. 이 사실을 깨달으라”. 우리의 느낌이 어떠하든 간에 우리는 이 위대한 사실 즉 죽음과 부활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것을 믿어야한다(사실로 여겨야 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정녕 죄에게는 죽은 자요, 예수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는 산 자로 여기라”(롬6:11). 바울은 죄가 당신에 대해 죽었다고 여기라고 말하지 않았음을 유의하라.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승리를 이룩하시는 방법은 죄악된 욕망을 억제함으로써가 아니고 옛 성품을 제거함으로써도 아니며 원죄를 깨끗케 씻으심으로써도 아니다. 하나님의 승리 방법은 십자가에 못 박음 즉 죽음을 통해서이다. 내가 죄에 대해 죽었다고 여기는 것과 죄가 나에게 죽었다고 여기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자신의 노력, 투쟁, 혹은 축복, 믿어 보려는 마음 등을 통해 죄가 나에게 죽은 것으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는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죄에 대해 죽었다고 여기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이 죄로부터 해방 받고자 한다면 당신의 실제 생명이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당신이 죄에게 죽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붙들어야 한다. 당신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분 안에 있다는 사실은 “죄에게 죽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믿으면 된다. 결코 감정을 염려하지 말라. 어떤 특정한 죄가 당신에게 다가올 때마다 당신은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죄에 대해 죽었다”라고 선포하기만 하면 된다. 만약 이 세상이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면 “그리스도에 의해 세상이 나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도 세상에게 그러하니라”(갈6:14)라는 사실을 믿으면 된다. 만약 교만 즉 자만이 다가오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다면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5:14)는 말씀을 믿으면 된다. 그렇게 하면 나는 내 자신을 위해 살아서도 안 되고 살 필요도 없게 된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이기적인 교만과 자만심과 스스로를 높임에 대해 죽었기 때문이다. 두 젊은 그리스도인 여성이 파티에 초대를 받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우리가 참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난주에 이미 죽었거든요”. 바로 이것이다. 우리 모두도 이렇게 대답해야만 한다. 두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전 주에 침례로 신앙을 간증했다. 그들은 죽었고, 장사되었다가, 다시 살아나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 사람이라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윌리엄 황제는 독일계 미국인의 알현 요청을 거절하였다고 한다. 황제는 “독일에서 태어난 독일인이 미국으로 귀환했으면 미국인이 된 것이다. 나는 미국인도 알고, 독일인도 알지만 독일계 미국인은 모른다”라고 선언하였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나도 한 때는 아담의 속박 안에 있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속박으로부터 벗어났다. 십자가가 나를 죽여 옛 시민권과 생활로부터 나를 잘라내 버린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아담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신분을 지닌 채 나의 왕 되신 분을 알현하려고 하면 그분은 거절하신다. 이런 상태로는 옛 사람의 속박으로부터 해방 받을 수 없다. 더 이상 거룩하지 못한 이중적인 신분을 집어 던지고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위한 존재임을 선포하자. “죄에게는 죽은 자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하나님께는 산 자”(롬6:11)로서 우리 자신을 온전히 그분께 바치도록 하자.     
2009-05-01 17:59:19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3 장 죄에 대한 승리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에게 있어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는 사실 즉 죽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완전히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은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나의 죄들은 영원한 죽음에 처해져야 마땅하나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도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말고는 실로 죽은 사람인 것이다. 그분께서는 나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가 친히 나무에 달린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죄들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벧전2:24). 나는 “죄 가운데 죽거나” 아니면 “죄에 대해 죽어야만”하는 존재이다. 나는 아담 안에서는 잃어버린바 된 존재이며 “죄 가운데서” 죽은 자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다면 나는 “죄에 대해서” 죽은 존재이다. 내 죄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음을 내가 받아들였다면 나는 내 자신이 죄에 대해 죽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받아들여야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인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죄에 대해 죽으셨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십자가에 맡겨진 인생이다. 그 외의 다른 입장을 취한다면 나는 수치스러운 도덕적 모순 가운데 빠진 것이다. 나의 논리적인 위치는 죽음의 위치이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원칙인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기계적인 일도 아니고 법적인 픽션도 아니다. 나는 실제로 사실적으로 그리스도께 연합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성경의 진리가 그러한 것처럼 이 사실은 나의 마음의 동의를 요구한다.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내 안에 사신다”는 사실은 영광스러운 진리이다. 만약 내가 구원받았다면 이 진리는 더 이상 냉랭하고 생명이 없는 그러한 “여김”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진심에서 우러나는 “아멘”을 요구하는 진리이다. 내가 그분께서 내 안에 내주하심을 깨닫기 위해 나는 내 자신이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해서는 산 자로 여길 것을 명령받았다. 이 “여김”은 단순이 믿는 척 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지 않은 사실을 믿어 보려고 노력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여김”은 일상적으로 이해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살아 있는 믿음을 말한다. “여김”(reckon)이 실재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포기(self-renunciation)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여김은 우리가 “자아”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능력으로 나의 옛 삶을 포기해야 한다. 갈보리의 십자가와 그분의 죽음 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음을 근거로 해서 나는 나의 자아가 나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나는 추악한 괴물인 자아에 의해 지배되느냐 아니면 그리스도에 의해 지배되느냐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삶은 그 중심부에 “그러나 내가 아니오”라는 것이 있어야만 한다. 내 길을 여전히 고집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음의 이익을 얻을 수 있겠는가? 자아는 보좌에서 물러나야만 한다. 나는 실로 생명의 새로움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내 옛 생명을 벗어버린다는 근거 하에 가능하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포기하는 심연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셨다면 나도 나의 옛 자아를 그분의 비참한 상태와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만 한다. 사무엘 러더포드의 고백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의 손을 모아서 그리스도께서 나의 복종과 결의에 찬 아멘을 받으시도록” 하자. 우리가 이런 식으로 우리의 자아를 포기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이것이 주로 가족 안에서 혹은 직장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순복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가정에서의 사역(Home missions)도 좋고 해외 선교(Foreign missions)는 더 좋지만 순복(submissions)은 가장 좋다(해외에서든지 가정에서든지 다른 사람에게 순복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훈련이다). 남편의 엄청난 성질에 순복함으로써 실질적인 승리를 쟁취하는 여자들도 있고 아내들의 바가지를 받아들임으로써 승리하는 남자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핸디캡이나 약점을 받아들임으로써 승리를 얻는다. 우리는 흔히 이와 같이 실제적인 복종을 통해서 승리를 얻을 수 있다. 바로 이때 우리의 자아가 포기되기 때문이다. 실제적인 포기 없이 “여기는 것”은 그저 믿는 체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다만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이요, 더욱 스스로 애쓰는 것이므로 아무 것도 아니다. “여김”은 또한 죄의 거부를 포함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 자신을 정녕 죄에게는 죽은 자로··· 여기라”.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러므로 죄가 군림하지 못하게 하여”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 말대로 우리는 죄가 군림하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이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죽었고 죽음을 통과하여 죄의 지배 저쪽으로 부활하였기 때문에 죄가 군림하도록 내버려둘 필요가 한층 더 없다. 죄는 그리스도와(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연합된 자들 위에는 요구사항이 없으며 따라서 자신을 성령께 온전히 굴복하는 자들 위에는 “군림할 수”가 없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롬8:2). 그러나 우리가 성령과 어떤 논쟁이라도 갖게 된다면 우리는 죄의 지배를 피할 수가 없다. 이에 관해서 하나님의 영은 분명한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성경 역시 확고하다. “실족하는” 지체는 사망에 처해져야 한다. 이것을 소중히 여기거나 심지어는 이를 놓고 기도해서는 안 된다. 물론 복을 위해 기도하고 정결한 마음을 위해 울부짖는 것은 실로 좋은 일이나 하나님께서 “끊어버리라” 그리고 “뽑아버리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그런 식의 행동은 좋은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모든 악으로부터 끊으셨다. 그분께서는 이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이제는 네가 죄와 관계를 끊을 차례니 죄가 군림하지 못하도록 하라”. 하나님과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지 않는 그러한 양심을 갖기 위해서 오래 전부터 나는 내 자신을 낮추고 “공개적인 수치”에 내 자신을 맡겨야 했었는가? 나의 가족, 나의 직장 동료, 혹은 나의 주일학교 수업, 혹은 나의 교회 회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할 때 우리는 십자가를 체험할 수 있다. 나는 아무도 불쾌하게 하지 않았으며 성령께서 그러한 상황에서 나로 하여금 그분께 복종케 하시기 위해 나에게 간청하신 적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자원해서 무시당하셨고, 자원해서 내게서 죄를 제거하시기 위해 죽으셨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모든 교만을 소중히 여길 것이 아니라 경멸해야만 할 것이다. 지금 당장 우리 스스로를 낮추도록 하자. 만약 내가 내 죄를 수치스러운 위치에 놓지 않는다면, 그 죄를 없애기 위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모든 것을 끊을 수 있는 갈보리의 능력을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나는 십자가와 아무런 조화를 이루고 있지 않은 셈이다. 죄의 고백은 죄의 거부를 의미한다. 우리가 십자가와 조화를 이룰 때만이 죄의 능력은 부서진다. 그러나 십자가는 숨기는 곳이나 죄를 덮어버리는 곳이 아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죄와 관계를 끊고 죄를 드러내는 곳이며 죄책을 담당하는 곳이요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는 장소이다. 자신의 체면을 버리고 십자가의 모든 결과를 따르도록 하자. 그리스도께서 나에게서 죄를 제거하시려고 죽으셨다면 죄를 붙들고 있기보다는 죽는 편이 낫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를 제거 할 만큼 죄에 대해 충분히 싫증내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죄로 가득한 우리 자신이 “죽음에 이르도록 싫증”이 날 때까지, 죄에 굴복하고, 피 흘리고, 우리의 쇠사슬을 껴안을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거룩하지 못한 표리부동함으로부터 해방되어야만 하며 이중적인 마음을 내던져야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한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질투가 많은 연인이시다. 그분께서는 모든 성도가 다 해방 받기를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십자가에서 당신을 위해 생성된 능력을 맛보도록 하시기 위해서라면 당신을 수치와 절망으로 몰아가는 데 주저하지 않으실 것이다. 당신은 주님의 이러한 교훈을 순종을 통해 그분의 친절로 배우든지, 불순종으로 인해 그분의 징계에 의해 배우든지 간에 어쨌든 배워야만 한다. 하나님의 섭리의 칼이 당신을 죄와 자아에 묶고 있는 모든 묶음을 하나하나 끊어내실 것이다. 부, 건강, 친구 등도 당신으로부터 그 칼에 의해 끊어져 나갈지도 모른다. 당신의 내적인 자아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당신의 기쁨도 떠나가 버릴 것이다. 안팎으로 얻어맞고, 깎이고, 불타고, 분쇄되고 나서야 당신은 비로소 “무시무시한 침례” 가운데서 당신만을 위해 살아가던 죄악된 모순으로부터 드디어 해방될지도 모른다. 그때서야 당신은 비로소 갈보리의 십자가의 승리와 파멸에게 자아를 내어놓을 준비가 될 것이다(준비가 되다 혹은 각오가 되다 라는 표현이야말로 축복된 말이 아닐 수 없다. - 이것은 어쩌면 “달콤한 강요”일 것이다). 오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능력이여! 어떻게 우리가 이 능력을 대항하여 지탱할 수 있겠는가? 갈보리에서 생성된 모든 능력이 이제 당신의 손안에 놓이게 된 것이다. F.J. Huegel은 그의 책 “그의 뼈 중의 뼈”(Bone of His Bone)에서 라듐과의 접촉이 불가피한 연구소(실험실)에 고용된 젊은 여성의 이상한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여인들은 그 공장에 들어가자 자신들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죽을 것이다. 그녀들은 얼마 간의 기간이 지나자 만 달러씩을 보상으로 받고 그 실험실에서 나오게 되었다. 의사들은 라듐과 접촉하며 일했던 소녀들을 검사하였고 X레이에 의해 생명을 소멸시키는 이상한 불이 그녀들의 뼈에서 불타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 엄청나게 집중된 힘이 그 여자들을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훨씬 더 집중된 힘이 갈보리에서 발생했다. 저 하늘의 라듐이 인간의 죄와 수치라고 하는 커다란 암 덩어리 위에 집중되었다. 라듐은 죽이는 일을 한다. 하늘 아래 이 집중된 힘을 견딜 수 있는 힘은 없다. “십자가는 죽이는 일을 한다. 자신을 갈보리에 노출시킨 사람은 곧바로 숨겨진 어떤 불이 그의 뼈 안에서 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오! 그렇다면 이 엄청난 힘에 대해 내편에서 제한을 두지 말도록 하자. 죽음을 다루고, 생명을 주며, 치료하는 광선이 나의 가장 은밀한 삶에 침투하여서 그 숨겨진 불이 나의 가장 깊은 존재의 모든 뼈들 안에서 타오르도록 한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라듐이 계속해서 내 안에서 적용되도록 하자. 이것은 계속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치료법에 내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되고 가식적인 자아에 진실로 지쳤다면 - 만약 나의 마음이 해방 받기를 원하는 “간절한 갈망”으로 타오르고 있다면 - 나의 영혼이 생명수의 샘을 마시고자 갈증을 일으키고 있다면, 갈보리의 충만한 메시지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의 충만함으로 당신에게 환영을 받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승리의 기쁨으로 거듭 거듭 말하노니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래서 지금 현재 못 박혀있고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나 같은 자 안에서도 그분이 사신다) 그분께서 부활의 삶(자신의 죽음) 즉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사는 그러한 삶을 사시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죽음은 그분의 죽음으로 내 것으로 여겨진다네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이라네.    
2009-05-01 17:57:39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4 장 십자가와 세상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는 옛 고대 세계가 십자가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었는지를 이렇게 요약하였다. “십자가를 로마 시민 앞에 보이지 않도록 하고 그들의 생각과 눈과, 귀로부터 그 이름이 들리지 않도록 하라”. 이처럼 2000년 전에는 십자가에 관하여 아무런 영광의 후광도, 아름다운 역사적 연관서도, 영웅적 희생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어떠한가? 아무나 십자가를 들먹거리는 세상이 아닌가! 심지어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 “십자가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고상한 그 무엇을 의미한다”. 그러나 역사의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20세기말을 맞이한 오늘날도 십자가는 멸시의 대상일 뿐이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극심한 수치와 경멸의 장소가 되기를 그만두자마자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화시키는 셈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그 당시에는 제자들은 범죄자들, 살인자들 및 반역자들이 십자가를 지고 형틀로 행렬을 벌이며 가는 것을 자주 바라다보았을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처형)은 너무도 악명 높고, 수치스럽고, 저주스러운 것이기에 옛 시대에 십자가에 대한 보편적이고 깊은 혐오감은 달리 표현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이 모든 것에 더하여 성경은 십자가에 대해 결정적인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나무에 매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은 자라”(갈3:13). 이 말씀은 십자가가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에 대해 가차없이 극에 달한 증오심을 표현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 바로 십자가였다. 십자가에서 이 교만한 세상은 단번에 그들의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었다. 한마디로 십자가는 이세상이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완벽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세상이여, 그리스도에 대해 너희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내놓아 보거라! 이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외쳐댔다. “··· 처단하소서, 처단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소서”(요19:15). 친구여, 속지 말라. 비록 비수가 이 세상의 옷 밑에 숨겨져 있기는 하지만 비수는 여전히 있다. 결코 없어진 것이 아니다. “한 시대 혹은 한 영혼 혹은 한 그룹의 영성을 참으로 측정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그들이 ‘세상’이란 단어에 대해 얼마만한 혐오감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있다”(D.M. Panton)는 이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리이다. “세상”이란 단어를 정의 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성경은 “세상의 통치자”(요12:31)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이 세상의 풍조(course)”(엡2:2)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세상의 신”(고후4:4)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 세상의 영”은 하나님의 영과 반대(원수)되고(고전2:12), 이 “세상의 형체”(fashion)는 사라져간다. 또한 이 세상의 지혜는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전2:8). 따라서 하나님께서 “세상도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요일2:15)고 말씀하신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겠다. 세상은 이때 자연인의 삶과 전 과정을 말한다. 이 마지막 표현 즉 “세상에 있는 것들”(things)이라는 말에 주목하라. 이 책을 읽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세상적이지 않은 것은 사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혹시 단 한 가지라도 세상적인 것을 붙들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세상의 물건은 무엇인가? 당신은 아마 젊은이들이 춤과 쇼와, 연극을 사랑하는 것을 비난할지 모른다. 사실 그것은 옳다. 그러나 당신은 어떠한가? 정치, 예술, 과학, 돈, 야망, 사회적 인정, 혹은 사업에서의 영향력 등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은가? 세상은 젊은이, 중년, 그리고 노년에 따라서 그 내용이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모두에게 치명적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를 죽였고 하나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야망, 열정, 자랑, 인기, 쾌락 그 밖의 수많은 유혹거리들이 십자가와 모순되며 “아버지의 사랑”을 배제한다. 사도 요한은 “세상을 너무 사랑하지 말라” 라든가 “세상을 지나치게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대신 단순히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라고 선포했다.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이 세상의 세 가지 뿌리를 정의내리고 있으며 이 세 가지는 전설에 등장하는 세 개의 금사과 이야기처럼 우리를 미혹한다(아틀란타는 이에 미혹되어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이요 아버지께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요일 2:16). 이기적인 사람은 이 세 가지 형태의 욕망(정욕)으로 인해 만족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 가지 모두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십자가에서 내려와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그 육신을 애정과 정욕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하였느니라”(갈5:24).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를 지배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분을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는, 그러한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정과 욕심들이 얼마나 우리 주위에 많은지! 그러나 이 세상의 영이 어찌나 교활하고 속임수에 뛰어난지 자연적인 타고난 지성으로는 그것을 포착해 낼 수가 없다. 그것은 너무도 유혹적인 마술 같고, 마법같이, 우리마음을 쉽게 사로잡는다. 이 세상적 사고방식은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의 종교생활의 체질 깊숙이 그 암세포의 뿌리를 심어놓았다. 그것은 마치 치명적인 문둥병이면서도 고통을 동반하지 않아 알아차리지 못하는 동안 뼈를 갉아먹는다.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집의 뼈대를 먹어 치워버릴 하얀 개미와 같다. 그것은 바로 지성숭배주의의 온상이요, 현대주의의 시녀이다. 그것은 속에서부터 도려 나오는 스파이로서 십자가의 영을 쫒아 내버려 사라지게 만든 장본인이다. J. Gregory Mantle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몇 년 전에 천연 자석인 한 산에 대해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산은 엄청난 흡인력을 가지고서 그 영향력 범위 내에 들어오는 모든 쇳조각을 엄청난 힘으로 끌어당겼습니다. 그 지역의 연안을 항해하는 배들은 닻과 체인 그리고 쇠로된 막대기들이 이끌리는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들이 산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거의 감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약간 기울어짐을 느끼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더니 그 흡인력은 점점 더 커져서 결국 엄청난 속도의 증가로 배는 점점 더 산 쪽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 배의 모든 볼트와 못이 배의 기둥과 갑판에서 빠져나가 산에 달라붙고 말았고 결국 배는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 파선하고 말았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를 바위로 이끌고 가서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간증을 파괴시키는 교묘한 형태의 세상적인 것들 몇 가지를 제시해 보도록 하자. 세상적인 사람들의 얼굴과 그들의 찡그린 모습에 대한 두려움, 반면에 세상 사람들의 호의와 아첨은 얼마나 달콤한지! “시간을 사서 얻는” 대신 보잘것없는 취미에 허비해 버리는 부당한 사간들! 우리는 때로 이것을 휴식이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상당히 세상적인 것들이 들어 있을지 모른다. 잃어버린 사람에게 “복음”을 줄 수도 있는 그때에 세상뉴스에 느슨한 마음을 지닌 채로 동참하는 우리의 느긋함. 사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들로서 고난을 견뎌내기를 거부하고 있다. 우리의 부드럽고 작은 “세상”이 우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저녁 늦게 야식을 먹으며 허영에 찬 농담을 늘어놓고 싶은 욕구, 이것 때문에 우리는 다음날 아침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데 필요한 시간을 낭비해버린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전신갑주를 입지 못한 채로 세상을 만나러 나갈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비밀스러운 내적인 세속성 때문이다. -우리가 좋아하고, 싫어하며, 개인의 선택으로 결정해 버리는 많은 것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성경적 원칙이 아닌 대중의 의견, 혹은 어쩌면 종교적 의견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는지! -우리는 얼마나 쉽게 이것 저것을 용납해 버리는지!(비록 그것이 악의가 없거나 혹은 사랑스러운 것일지라도) 그렇게 되면 세상이 쉽게 틈을 탈 수가 있게 된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위해 수치를 당하는 것을 얼마나 적게 특전으로 여기는지! -어떤 세상적인 편안함들로부터 오는 커다란 만족감을 얼마나 우리는 기대하고 있는지! -우리는 좋은 것들과 화려한 것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기 위하여 그러한 것들을 포기하기를 우리는 얼마나 꺼려하는지! -우리는 괴짜로 보이기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우리는 얼마나 쉽게 유행에 무릎을 꿇는지! 그 스타일이 합리적이거나 옳거나 혹은 품위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유행이기 때문에 따르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그런데 종종 유행은 비합리적이고 품위가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너무도 세상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다르게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품위 없이 보이기를 원한다. 욕망이라는 옛 임금이 “그것을 하라”고 말하자 많은 사람들이 로마의 백부장의 종이 채찍이 무서워 순종하듯이 순종하고 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우리자신을 처리할 때까지는 거짓교리, 현대주의적인 사역, 가련한 교회치리, 혹은 교회 안에서의 부패한 실행들에 대해 놀랄 필요가 없다. 우리가 파산하는 모든 뿌리는 세상적인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William Law는 이렇게 잘 표현하였다. “이단들 중의 이단은 세상적인 영이다. 오늘날 기독교회들의 타락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나는 그 모든 것을 세상적인 영에서 비롯된다고 말해야만 할 것같다.”    
2009-05-01 17:56:12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5 장 십자가와 세상   나는 한때 이 세상 깊은 곳에 빠져 정죄 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그분께서 위로부터 구세주를 보내셔서 나를 이끌어 많은 물들로부터 나를 끄집어 내셨다.” 구세주께서는 이 세상 속으로 깊이 가라 앉으사 -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내위에 넘쳤나이다.”(욘2:3) - 우리를 악한 현 세상(갈1:4)에서 “구출(구원, 구조)하셨다”. 우리의 구원은 이처럼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원에 덧붙여 더 큰 승리를 얻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로부터 그 바다를 떨어 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승리는 구조된 자들이 다른 멸망해가고 있는 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다. 즉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승리를 쟁취한 후, 그리고 이 어두운 세상의 불결한 요소들을 떨쳐버리는 승리를 쟁취한 후에는 이 세상의 구렁에서 멸망해 가고 있는 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그 세상으로 다시 보내심을 받는 놀라운 승리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이번 승리야말로 상급을 얻을 수 있는 승리이다. 그러나 이 악한 세상으로 다시 들어가는 데 있어서는 세상과 우리와의 관계가 수정처럼 맑아야함이 전제된다. 위로부터 태어난 우리는 우리의 시민권을 하늘에 가지고 있다. 우리는 “영적으로는 이 세상으로부터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간단히 말씀하셨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또한 우리에게 못 박혔다. 십자가에 못 박힌 제자와 십자가에 못 박힌 세상 사이에는 얼마나 도덕적으로 거리가 먼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하늘 보좌가 지옥의 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듯이 늑대들의 무리 속에 있는 양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 우리는 이 비뚤어지고 사악한 세대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담대하게 굳게 서서 이 세상에서 빛을 발하는 자들이 반드시 되어야만 한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진”(6절) 것으로 말씀하셨고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들”이며(14절), “세상의 악으로부터 보호받고 있지만”(15절) 그러나 이 세상에 남겨져 있으며(11절), “이 세상에 말씀을 전파하도록 보내졌고”(18,20절), 그 결과 “세상에 의해 미움을 받으며”(14절) 살고 있는 자들로 말씀하셨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이 십자가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이 마지막 사항 즉 “세상에 의해 미움을 받는”이란 이 표현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오 그리스도인들이여 이 사실을 마음에 새기라.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세상은 “너희”(당신과 나를)를 미워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진리를 향한 증오심을 축소시키지 말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은 당신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의 것들은 당신을 심하게 다룰 것이다. 그리스도의 수치가 사방에서 당신에게 떨어질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그것이야말로 참된 제자의 도의 표시이다. “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하는 모든 사람은 박해를 받을 것이라”(딤후3:12). 우리를 “박해에 대해 병적인 욕망”을 지닌 자들이라든가 “스스로 만들어 낸” 순교를 지지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우리는 결코 그런 위선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몇몇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의 넘어지게 하는 것이 중단된 것은 분명히 그들의 삶이 너무도 세상과 쉽게 타협적이 되었기에 그들의 생활이나 증거에 대해 이 세상이 더 이상 책망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와 세상은 삼손과 들릴라처럼 부정하고 더러운 관계에 있을 뿐이다.   교회에 속한 자들, 그리고 세상에 속한 자들서로 손에 손잡고 가까이서 살아가네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외에 그 누구도이 둘을 구별할 수 없다네. 구세주의 입술에서 나온 말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징책하는 표현중의 하나는 그의 믿지 않는 형제들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그것은 “세상은 너희를 미워할 수 없으나”(요7:7)이다. 만약 내가 이 세상과 너무도 가까이 하나가 되고, 이 세상의 영과 분위기를 너무도 쉽게 포용하여 더 이상 세상을 책망하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세상의 증오와 그리스도에 대한 적의를 불러일으킬 수 없게 된다면 다시 말해 이 세상이 내 안에서 나를 미워하여 그들의 무리에서 나를 쫒아버릴 구실을 찾을 수 없다면 그렇다면 나는 이미 그리스도를 배반한 것이요. 그분의 친구들의 집에서 그분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그분을 나무에 못 박은 세상에 그처럼 밀접하게 다가섰다는 말이다. 이런 일은 생각조차 말아야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이 세상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 외에는 달리 쓸모가 없다고 여겨야한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저주받아 못 박혀서 죽어가는 범죄자로부터 미소를 기대하고 찾아내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이 세상의 호의를 더 이상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친구들의 비밀결사에 입회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우리가 이 세상의 재판정 앞에 그분과 함께 서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그분과 함께 조롱을 당하고, 세상의 권력, 종교, 문화로부터 오해를 받게 된다. 이것들은 이 세상이 실재(Reality)를 정죄하기위해 그 기준으로 세운 인위적인 고안물들이다. 우리가 세상은 우리에게 그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왕국을 줄 수 없다고 선언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환심을 내던지고 세상의 상식을 저버리게 된다. 세상은 우리 가운데 있는 반역자는 지혜롭게 다루고 바보들은 용납해 준다. 그렇게 되면 무지, 게으름, 비겁함이 우리를 ‘느긋하게’ 정죄하게 된다.”(S.M. Zwemer가 The Glory of the Cross에서 James Cordilier로부터 인용한 것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지니고 있었던 지난 세대의 영적 스승들 중 한 분인 Dr. A.J. Gordon씨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로마제국을 그리스도 앞에 승리의 제물로 바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세계로부터 온 침입자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 귀화하기를 절대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이웃들을 당혹감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이세상의 삶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반면 양심에는 신경을 곤두세웠으며 그들 자신의 피에 대해 괘념치 않았고 어린양의 피가 갖고 있는 능력을 철저히 신뢰하였으며 그들이 기거하고 있는 나라의 풍속에 동화되지 않았고 그들이 귀화한 그 하늘나라의 생활방식을 고수하였다. 그들은 이 세상의 도움, 통치자들의 성원, 세상으로부터의 빚, 세상적인 방법의 사용 등을 철저히 거부하였다. 이는 그런 것들을 용납하게 되면 그들의 왕 되신 그리스도를 배반할까 함이었다. 이 “침입자들”은 보이지 않는 기지로부터 병참 지원을 받았고, 로마제국이 제공하는 도움보다는 보이지 않는 대장의 지도력을 훨씬 더 신뢰하였다. 이 사실은 이방인(이교도)들을 너무나 화나고 불쾌하게 만들었다(사실 이들은 그들의 잡신들을 버리지 않은 채 그리스도인들과 친구가 되기를 원하였던 자들이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시대야말로 기독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를 구가했던 시대라고 하는 사실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 H.B. Norkman교수는 로마제국하의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기독교 초기시대 약 200년 동안은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많은 것의 포기를 뜻하였고 멸시받고 박해받는 이단 종파에의 가입을 의미했으며 인기 있는 세상물결을 거슬러 수영하는 것을 의미하였고, 로마제국의 금기사항이었고, 어느 순간이든지 투옥과 죽음이 가혹한 방식으로 다가오는 것을 의미하였다.” 초기 200년 동안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가를 치러야 했고 그것도 자신의 자유와 생명으로 치러야만 했다. 처음 200년 동안은 기독교신앙을 고백하는 것 자체가 범죄였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말은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을 향해 선포되는 말이었고 그 선언 하나면 정죄받기에 족했다. 그 선언이 내려진 사람은 변명의 기회나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기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터툴리안에 따르면 대중의 증오는 단 한가지만을 요구하였는데 그것은 범죄에 대한 책임여부의 조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고백이었다.   이처럼 사나운 이리들의 증오심에그리스도인이라는 죄목으로 숨을 헐떡이며몸을 움츠린 양들이 희생 제물로 바쳐졌도다. 로마인, 헬라인, 혹은 이방인들은 다같이 “첫 번째 종족”이라고 불린 반면 유대인들은 이와는 달리 “두 번째 종족”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특별나게도 “이 세상으로부터 모든 것을 박탈당한 채”, 이 세상의 영과 분위기에 철저히 무관심하고, 이 세상과는 너무도 대조적이고 비세속적인 모습으로 살았기에 “제삼의 종족”이라고 낙인이 찍혔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칭호를 기꺼이 수용하였다. 죄보다 더 나쁜 것은 없기 때문이었다. 이교도들이여, 마음껏 떠들라!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세상에 속해 있도다. 그들은 “온 세상에 대해 죽었고” 이 모든 세상과는 끊어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더 이 제삼의 종족을 내버려두어야 하겠는가?” 라고 외쳐댔던 것이다.(카르타고의 한 서커스의 대사를 인용하였음) 이러한 승리의 간증(비타협에 의해 쟁취한 것임)이 가져올 결과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오늘날 교회는 저 순교자들의 화형 때 타오르는 불길을 견딜 수가 없다. “그 빛나고 불타는 불빛”은 오늘날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분명히 보여 준다. 오, 인기에 영합하는 크리스천이여! 오, 세상적으로 똑똑한 설교자들이여! 이 세상을 얻기 위해 얼마나 이 세상과 함께 멀리까지 나아갔는지 잘 확인해보라. 교회는 이 세상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어찌해서 그처럼 이 세상에 영향을 주려고 애쓰는가?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채 다시 그 가라앉은 로마제국 안으로 뛰어들어 그 제국을 뿌리째 뽑아내서 세계사의 흐름을 뒤바꿔 놓았다. 당시의 표현대로 하자면 터툴리안의 기록 그대로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그 생명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 사람들로서 이러한 투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2009-05-01 17:55:08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6 장 십자가와 헌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빛을 보여 주신 주시니 끈으로 희생 제물을 제단 뿔들에 맬지니라”(시 118:27). 본서의 저자는 한 젊은 사역자를 잘 알고 있었는데 그는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려 했지만 계속해서 실패를 하고 있었다. 그는 진지하게 헌신을 하고자 했으나 계속해서 실패하였고 비참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그런 젊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드디어 그는 자신에게 헌신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것이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구약의 제사장들을 하나님께서 “성결하게” 하시는 방법을 통해 조명을 받게 되었다. 제사장들의 귀, 엄지손가락, 엄지발가락에 발려진 피를 보았을 때 그리고 제사장이 온통 피 뿌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았을 때 그는 “죄가 되신 그리스도”와 자신과의 연합을 이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는 자신이 온통 죽음으로 뒤덮여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는 갈보리 사건이 그에게 가져다 준 엄청난 운명과 죽음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음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과 하나된 자신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와 죽음과 삶을 통한 연합을 이루게 된 사실을 깨달은 그는 그리스도께 자신을 드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갖게 되었고 성공적이고 지속적인 헌신의 삶을 위한 기초를 다질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체험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드문 일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속뜻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상당히 훌륭한 교회들에서 로마서 5장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칭의를 가르친 후 곧바로 로마서 12장 1,2절에 제시된 헌신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을 잘못되었다거나 이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로마서 6-8장 사이에 제시된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관한 놀라운 가르침을 간과한다는 것은 헌신에 대한 올바른 접근 방식은 아니다. 이 중요한 진리들을 간과함으로써 앞서 언급한 젊은 사역자들은 많은 세월을 비참하게 보내게 되었다. 그는 죄성으로 가득한 자아에 대한 승리의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제단위에 자기의 모든 것을 올려놓으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합을 통해 그가 이미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 즉 그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일어났으며 “죄에 대해서는 죽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는 살아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확고한 근거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그는 성공의 비결을 찾아내었고 실로 큰 축복을 받게 된 것이다. 좀 더 부연 설명을 해보도록 하자. 아브라함 링컨은 1863년 11월 19일 게티스버그에서 전사자 묘지를 봉헌하며 행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들의 생명을 바친 분들의 영원한 안식처로서 이 들판의 일부를 바치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는 우리는 이 땅을 봉헌할 수도 없고, 성별할 수도 없고 거룩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싸웠던 용감한 분들, 이분들 중에서 살아 계신 분도 있고 이미 고인이 된 분도 있을 터 인데, 바로 이분들이 이 땅을 이미 성결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 이제는 오히려 우리 살아 있는 사람들이 남겨진 과업을 온 힘을 다해 완성해야할 것이며 그분들이 다 이루지 못한 그 일에 우리 자신을 헌신해야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의 헌신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더 깊은 의미로 보자면 우리는 이미 구속된 생명이므로 “이 땅을 봉헌하거나, 성별하거나 거룩케 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께서 자신이 내놓으신 그 생명 안에서 이미 우리를 봉헌하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더하거나 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께로 고정시키십시다. 우리가 그와 함께 죽었다면 또한 그와 함께 살 것을 믿도록 합시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축복된 진리들은 로마서 6장부터 8장에 제시되어 있으며 성공적인 헌신에 대한 근거를 제공한다. 이 근거위에서 우리는 로마서 12장 1,2절에 제시된 헌신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완전히 구속되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분 안에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무한하고 풍성하신 자비로 우리에게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하고 합당한 산 제물로 바치라고 권고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신성한 번제물 되신 그분 위에 우리의 손을 얹을 때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께 달콤한 향기가 되는 것이다. 이는 완전한 순종, 완전한 헌신, 그리고 완전한 희생제사의 달콤한 향기이며 “우리로서는 이에 무엇을 더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다”. 이 얼마나 놀라운 능력이며 얼마나 놀라운 확신이며, 이 얼마나 놀라운 평화인가! 그분은 불에 의해 드려지는, 달콤한 향기가 나는 제물로서 하나님을 완전히 만족시키는 번제물이며 우리는 그분을 위해 불태워지는 달콤한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이런 분을 우리가 신뢰할 수 없단 말인가? 그분께서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우리를 이끄시도록 내맡겨야 되지 않겠는가? 오 주저하는 성도들이여, 어서 와서 우리의 권리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나머지 여생동안 그분께 내맡겨 드리자. 어서 와 그분께 모든 걸 드리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도다”. 주님께서는 기꺼이 바치는 사람을 사랑하신다. 고난의 시기에 난관을 헤쳐 가는 자들은 위대한 왕이신 그분께 자신을 내어맡겨야 한다. “주여, 당신의 명령대로 당신을 섬기오니 받아 주소서” 죠지 휫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위해 십자가위에 매달린 그분을 위해 순교자가 되기 위해 나는 내 자신을 포기하노라. 나는 무조건적으로 내 자신을 드려서 그분의 전능하신 손에 나를 완전히 위탁하노라.” 한국의 안이숙 여사는 일본 국회에 가서 일본의 신도교 우상들에게 절하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그 나라에 경고를 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두고 무려 7년간을 하나님과 논쟁하였으나 결국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복종하기로 마음을 먹고 모든 것을 팔아 일본행 편도 배표를 하나 사고 죽을 각오로 일본을 향해 떠났었다. 우리는 헌신은 “봉사 혹은 희생”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 이 안 여사에게는 두 가지 모두 해당된 셈이다. 그녀의 일본행은 죽음으로의 여행이었다. 그녀는 돌아올 생각을 안했기에 편도로 배표를 산 것이다. 그녀는 주님의 사랑에 의해 순종하기로 마음먹었고 가서 그분의 뜻을 행하고 필요하다면 죽음을 각오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갈보리 십자가의 강력한 힘에 이끌려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분의 사랑의 손길에 내어 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위대한 희생 제물에 대한 식욕으로 가득 찬 죽음으로 이끌린 것이다. 아! 바로 이것이야말로 참된 인생이며, 풍성한 인생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진 그 생명인 것이다. “나를 먹는 그 사람은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헌신에 관한 너무도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더 언급하고자 한다. 프란세스 리들리 하버갈(Frances Ridley Havergal)은 이렇게 말했다. “완전한 헌신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 순간의 행위일지 모르지만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평생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헌신이 실제적이 되려면 완전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적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항상 완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한순간의 결정이지만 지속적인 진행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헌신이 단번에 끝났다고 생각하면 속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주 시편기자처럼 고백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빛을 보여 주시니(회심), 끈으로 희생제물을 제단 뿔에다 맬지라(헌신).’ 이 헌신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요구하며 우리는 이와 같은 헌신된 생각으로 온전히 모든 것을 드려야한다. 우리가 번제드릴 불과 제물을 잡을 칼을 보고 무서워할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외쳐야만 할 것이다. ‘오 복되신 구주시여 저를 제물로서 묶으소서. 제가 제 인생여정을 수치스럽게 마치지 않도록 당신의 강력한 사랑의 줄에 저를 묶으소서. 제가 육신을 위해서는 그 어떤 기회도 제공치 말도록 하시며 계속 타오르는 온전한 번제물로 남게 하소서. 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도록 하소서. 저를 당신 자신의 끈으로 갈보리에다 묶으소서, 저를 꽉 묶어서 계속해서 타오르는 제물이 되게 하소서?? 한 선교사가 선교지로 돌아가면서 배안에서 신선한 기름부음을 받고자 애를 쓰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께서는 내가 그분보다 다른 어떤 것에 더 마음이 끌리는지를 보시기 위해 내 마음과 내 소유를 살피셨습니다. 그분이 ‘네가 나를 이것들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분은 내 아내와 자식을 염두에 두고 계셨습니다. 나는 주저했습니다. 나는 그분께서 사형 집행서를 내 앞에 내밀고서 내 서명을 기다리고 계신 것처럼 느꼈습니다. 내 마음에는 심한 갈등이 생겼습니다. 주님께 항복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였습니다. 오랜 갈등 끝에 나는 그분의 은혜로 그분께 항복했고 나는 이때 내 결정은 곧 내 아내와 아이의 지상생명의 종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 있는 작은 집으로 혼자서 돌아가고 있을 때 몇 주 후 나에게는 ‘아이가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아이는 내가 집을 떠나올 때 괜찮았었습니다. 그는 건강히 잘 있었습니다. 내가 집에 도착하자 아내가 마중을 하고서는 ‘고든이 아파요’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알고 있었소, 드디어 그 일이 닥쳤구려”라고 대답했습니다. ‘네가 네 아이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고통스러운 갈등이 드디어 코앞에 닥친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승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아이에게로 가서 작별을 고했습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의 작고 하얀 얼굴은 심하게 병든 모습으로 베게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참된 순종은 죽음에까지 순종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실로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이 가장 좋습니다. 저를 이제부터 이 지상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붙들겠습니다’라고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때 나에게는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였을 때 그에게 일어났던 동일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이 그리고 나의 아이인 내 자식을 되돌려 주신 것입니다.” “끈으로 희생제물을 제단 뿔들에 맬지라”.
2009-05-01 17:54:12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7 장  십자가와 십자가에 못 박힌 자   어느 가정에 항상 불화가 있었다. 한 젊은이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그들 부부가 보트를 타다가 남편의 실수로 배가 뒤집혔고 부인이 익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사법당국에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 집행이 있기 바로 전날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그와 함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그 다음날 사법당국은 그 아들을 사형에 처했다. 잠시 후 마음이 심히 상한 그의 아버지는 이미 생명이 떠나버린 불쌍한 아들의 시신 앞에서 이렇게 절규했다. “오! 내 아들아, 내가 내 생명을 너에게 나누어 줄 수만 있다면---. 내가 너에게 생명을 넣어 주어 네가 내가 원했던 그러한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바로 그렇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대신하여 풍성하고 충만한 생명을 갖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내가 그분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기를 갈망하고 계신 것이다. 이는 나로 그분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함이다. 바로 이를 위해 그분께서는 천사들의 본성을 취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씨로서 나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그분은 나와 동일한 육신을 입고서 인간이 되셔서 나를 그분과 함께 사형 틀로 데리고 가신 것이다. 그렇다. 그분께서는 나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분의 죽음 안에서 나는 죄로부터 해방을 받았다. 이를 두고 바울은 “죄로부터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했다. 나는 그리스도의 죽은 몸에서 죄의 요구와 능력이 다 소진해 버렸음을 보게 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제 “죽음이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죄가 너를 주관하지 못할 것”이라는 약속을 주신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죽었다. 또한 나는 다시 일어나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였다. 그러나 그분은 모든 죽음의 표시를 부활 안으로 지니고 가셨다. 그분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그분은 부활하실 수가 없었다. 그분은 이제 자신의 전능한 죽음의 능력과 효력을 제공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으로 살고 계신다. 그리고 나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그분께 접붙여져서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가 되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첫 번째 아담은 나와 그의 생명의 연합에 의해(유전) 그의 불순종으로 야기된 치명적인 결과들은 나에게 전달해 주었다. 마찬가지로 나와 그분의 생명의 연합에 의해, 그분께서 죽기까지 보이신 그 순종의 위대한 결과들은 나에게 자동으로 전달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인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죄에게 죽으셨다. 그분은 죽음으로 죄가 지니고 있던 그 권능의 마지막 흔적마저 깨끗이 지워 버리셨다. 십자가의 조명하에서는 죄는 “더 이상” 군림할 수가 없다. 나는 그분과 연합되어 있음을 생생히 인식하면서 죄의 유혹에 대해 “아니오”라고 해야만 한다. 이 “아니오” 속에는 부활하신 주님의 내적인 임재로부터 나오는 능력이 담겨 있다. 주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상한 그 어떤 아버지보다도 자신의 생명 즉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한 그 생명을 나누어 주시기를 갈망하신다. 이 생명은 심한 유혹과 시험 속에서도 죽기까지 순종했던 그 생명이다. 로마의 법에 따르면 어떤 종류의 살인죄에 대해서는 혐오스러운 방식으로 사형을 집행한다고 한다. 이 사형수는 자기가 살해한 자의 시체 얼굴을 마주본 채로 묶여 죽어간다고 한다. 그가 그 시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죽는 길 뿐이었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께서도 나를 죽음보다 더 강력한 사랑의 줄로 그에게 묶으셔서 십자가로 데려가셨다. 나는 이 십자가에서 그분과 “함께 못 박힌 것이다.” 펜 루이스(Penn-Lewis)여사는 한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는 너무도 충격적인 꿈을 꾸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꿈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피를 흘리는 구원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도 추한 어떤 것이었는데 너무도 역겹고 너무도 추잡해서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를 이처럼 혐오스럽게 했던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얼마 후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다는 메시지를 듣게 되었는데 바로 그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던 그 추한 것이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성령께서 그가 꿈에 본 그 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계시해 주신 것이다”(F.J.Huegel in Bone of His Bone). 그러나 우리는 죽음과 부활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이 진리를 단지 입술로 고백하거나 확고히 인정한다고 해서 체험할 수 있지는 않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실행에 옮겨보겠다는 결심으로 흉내 내거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삶은 그 어떤 모방으로도 살아낼 수가 없다. 오직 성령께서 내가 자아에 대해 죽었음을 깨닫게 해 주시는 살아 있는 방식으로 역사하셔야만 이 삶은 가능하다. 그분의 죽음 안에서 그분과 새롭고도 확고한 교제가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고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생명을 내 것으로 할 수는 없다. 내가 십자가에서 옛사람을 부인하는 만큼 나는 새로운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분의 죽음의 능력에 온전히 내 자신을 항복시킬 때 나는 “그의 부활의 모양” 안에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있다고 상상하거나 십자가에 있기 위해 일하고, 애쓰고, 노력하기는 쉽다. 우리는 자아를 동원하여 우리의 육신에 십자가가 못 박힌 것처럼 상상하고서는 그분의 죽음의 효력이 우리에게 나타날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육신의 어리석음이요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십자가는 프로테스탄트에게나 카톨릭에게나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무시한 채 그분께서 사셨던 것처럼 살아 보려고 애를 쓰며, 그분의 본을 따라 “예수님처럼” 행하고 말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 역시 그분과의 진정한 연합을 가져올 수 없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한다. 우리는 오직 그분의 죽음 안에서 그리고 죽음을 통해서 그분과 연합될 수 있다.   그리스도 없는 십자가 내게 피난처 될 수 없었고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 내게 구세주 될 수 없었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당신 안에 안식하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이요, 기쁨이며, 모든 것 되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할 수 있게 되기에 앞서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는 일에 기꺼이 동의하기 전에 자신과의 싸움, 실망, 패배등과 같은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경험하게 된다. 자아를 내버리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죄의 사망에 이르도록 아플 때까지 자신을 죄에게 죽은 자로 여기려는 많은 노력을 하게 된다. 우리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보려고 온갖 방법을 써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게 된다. 자아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드디어 자아라는 “시체”에 사로잡히게 된 우리는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외치게 된다. 바로 그때에야 비로소 주 예수께서는 몸을 굽히시고 “내 아들아, 나의 부활의 생명의 영을 너에게 넣어주노니 이는, 네가 ‘진정한 자유를’ 즉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받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제는 내가 네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던 그러한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분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그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에 의하여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것은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죽음 안에서 그리고 부활안에서 연합되는 것으로 이것만이 그리스도인이 승리의 삶을 사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 삶이야말로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이요, 그분의 능력 있는 죽음이 실제가 되는 삶이다. 한 그리스도인 부호에게 매우 사랑하는 외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은 아주 품위 있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이 부자는 자기 아들의 미래와 성공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어렸을 때부터 죄 된 삶을 살던 한 소년이 집에 침입해와 그 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며칠 동안 그 아들은 살아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의식을 회복했고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되었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 했던 소년의 모습을 보고서는 그 앳된 모습에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이 아들은 이 소년을 죄악 된 삶에서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결국 아버지는 그 죄 많은 소년을 집으로 데려오자는 아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소년을 양자로 맞아들여 아들의 형제로 삼기로 했다. 그는 때가 되면 상속을 받게 될 신분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소년은 이들의 진지한 제안을 받아들이는데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다.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가 갖고 있던 악한 습관들은 너무도 뿌리가 깊었는지 그는 계속해서 악한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결국 아버지는 더 이상 그를 도울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친 아들은 큰 실망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애를 썼고 그 소년에게 아낌없이 복을 베풀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너무도 실망한 나머지 그 소년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는 거기서 자기 아들의 그림을 보게 되었다. 그는 그 그림을 집어들고 살펴보았다. 그 그림에는 누가 만진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 뒤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 형님, 저는 형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형은 나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해 주었으니까요. 그러나 나는 결코 착한 아이가 될 수 없는 것 같아요”. 이 글을 읽은 아버지의 마음에는 희망이 샘솟기 시작했다. 한때 죄인이었던 자가 “선한 사람”이 되었을 때 그의 노력은 결국 보상받게 되었던 것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열망한 적이 있는가? “오, 주님, 저는 당신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저에게 너무도 큰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저는 결코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은 주님께 이렇게 고백해 본 적이 있는가?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과 부활을 거쳤음을 믿기 바란다. 당신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실을 순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감정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오직 단호한 믿음의 행위로 다가서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그분과 생명의 연합 관계에 놓으셨으며 그 연합이 실재로 체험되도록 하실 것을 신뢰하하. 당신의 생명을 그분의 생명 안에 던지시고 그분께서 당신의 생명, 당신의 빛, 당신의 승리, 당신의 모든 것이 되도록 하라.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지금도 살아 계신, 당신의 머리되신 분께서 하늘에 계심을 기억하라. 머리와 지체는 한 몸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와 여러분은 “그분의 뼈 중의 뼈”이다. 이 놀라운 연합을 온전히 붙들라. 당신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수학의 법칙이 무너지고 만다. 일반적으로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하나 더하기 하나가 하나이다. “그들 둘이 한 육체가 되리라”. 이 신비를 바울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런 까닭에 남자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것은 위대한 신비라. 다만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1,3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그 한 몸의 모든 지체가 많아도 한 몸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또한 그러하시니라”(고전12:12). “온전한 그리스도는 머리와 몸 둘 다를 포함한다”(어거스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나 자신을 둘로 여기는 순간 나는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실제로 관심과 섬김과 관점에 있어 즉 모든 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과 하나 되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두 개의 심장을 갖고 있으나 하나의 심장처럼” 박동하는 것이다. A.T.피어슨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나이 드신 경건한 어머니를 얼마 전에 잃은 한 경건한 부인을 위로하기 위해 그녀를 찾아갔는데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난 40년간 저의 어머님의 마음은 늘 하늘에 가 있으셨어요.’ 그 순간 나는 골드 스미스의 아름다운 시구를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 무서운 모습으로 치솟은 높다란 절벽처럼 계곡에서 떠오르다 도중에 폭풍우를 내려놓고 구름은 그 가슴을 돌아 퍼져가지만 영원한 햇빛은 그 머리위에 내려쬐네 ” 지상에 있는 우리의 거주지는 찔레와 가시가운데 놓여 있고 우리의 하늘은 구름으로 덮여 있을지라도 우리의 믿음은 “영원한 햇빛이 우리의 머리 위에 비추고 있다”는 사실로 자라난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숨겨져 있다”. 그분과 나는 하나이며 “그분의 어떠하심같이(저쪽 영광가운데 계심)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다”(요일4:17) 우리학교 졸업생이 보낸 편지에는 이 놀라운 진리가 잘 예시되어 있다. 여기에 그 일부를 인용한다. “나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이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완성된 그 은혜에 의해 내 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저는 늘 오르락내리락 하지 않는 그런 신앙수준에 도달하고자 오랫동안 애써왔습니다. 저는 승리하는 삶을 간절히 원했지만 내가 애를 쓰면 쓸수록 나는 더욱 비참해졌습니다. 저는 기도와 순종과 결단과 서원을 통해 그와 같은 삶을 달성하고자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허사였습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저의 행위로 죄의 능력으로부터 구원을 받고자 애를 썼던 것이지요. 왜 그처럼 어리석게 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받아들일 때 오직 믿음을 통해 죄의 능력으로부터 해방된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지요. 금년 1월에 와서야 내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하나 되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저는 다음과 같은 바울의 고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분에 의해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달려 있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나는 십자가로 인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속박을 결코 털어버릴 수 없다는 절망 속에서 내가 십자가를 통해 죄의 능력을 물리치고 일어섰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것도 소용없었을 때 죽음이 나를 해방시켰던 것입니다.”  
2009-05-01 17:53:14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8 장 십자가와 자아   교계에는 수많은 교사, 사역자, 성도, 전도자, 선교사 등이 일하고 있고 성령의 은사들이 이들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록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복이 전달되는 것이 사실이긴 하나 “좀 더 가까이서 살펴보면” 이러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자아로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을지도” 모르며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님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드러나지 않은 개인의 삶에는 자아라고 하는 어둡고 불길한 세력이 웅크리고 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어째서 자신들이 상처받은 자존심, 까다로운 성미, 탐욕, 사랑스럽지 못함과 같은 것들을 극복하지 못하는지, 어째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수의 강”을 체험하지 못하는지 의아스럽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비밀은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은 그들이 비밀리에 그리고 습관적으로 “사당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섬기는 사당은 다름 아닌 자아라고 하는 사당이다. 그들은 이 사당에서 매일 절을 하며 예를 올린다. 바로 이것이 모든 문제의 근본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를 자랑할지 모르나 내적으로는 다른 신을 경배하고 있다. 그들은 동정을 받고 싶고, 응석을 부리고 싶으며, 제멋대로 하고 싶은 자아를 숭배하고 있다. 외적인 십자가, 죄의 형벌에 대한 대가 지불, 대속자의 죽으심 다시 말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이 십자가가 갖고 있는 놀라운 신비가 지닌 꿈에도 생각지 못할 깊은 의미에 대해서는 모른다. 이 십자가가 그리스도인의 내적인 삶에 적용될 때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는 전혀 모른다. 우리는 외적 십자가는 물론 ‘내적 십자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서 내적인 십자가로 역사하셔서 당신을 자아도취로 부터 벗어나게 하사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연합을 이루기까지는 그 어떤 ‘신령한 것’들도 당신에게 참 평안을 줄 수 없다.(F.J. Huegel in Cross of Christ). 하나님께서 내 자아를 거슬러 나를 단련하시니 내 자아는 병든 목소리를 지닌 비겁자로서 평안, 안식, 기쁨만을 열망한다네. 자아, 내 자신을 가장 잘 배반하는 자. 나의 가장 힘 있는 친구요, 치명적인 대적, 내가 어디로 가든지 나를 방해하는 자. 그러나 나의 자아를 억제할 수 있는 분이 계시니 그분은 나를 억누르는 무거운 짐을 벗기실 수 있으며, 멍에를 부수시고 나를 해방시키신다네. - Christina Rossetti- 인간은 하나님 안에 원래의 집과 거처를 갖고 있었으나 그분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아라고 하는 먼 나라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빛과 생명이 되셨고 그의 호흡을 제공하셨으며 모든 것의 중심이 되셨지만 그 놀라운 곳에서 빠져나온 인간은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소외된 자가 되고 만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내버렸고 자아가 인간의 왕좌를 차지하고 말았다. 결코 자리를 내놓으려하지 않는 권위와 찬탈자 바로 그가 자아인 것이다. 이제 자아는 인간에게 새로운 그러나 거짓된 중심이 되고 만 것이다. 자아는 해아래 그 어떤 것보다 자신을 사랑한다. 인간의 가장 훌륭한 행위마저도 숨겨진 자아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더러운 걸레 같은 것으로 다만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나타날 뿐이다. 그는 자기의 오른손으로 뭔가를 행할 때 자기의 자아 만족이라고 하는 왼손을 의식한다. 윌리암 로(William Law)는 이렇게 말했다. “자아는 타락한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악의 뿌리요, 가지요, 나무이다.” 이와 같은 막강한 자아가 전능하신 하나님(El Shaddai)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말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 그분께서는 그 무엇으로도 충격을 받으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분께서는 이 비극 중의 비극을 어떻게 해결하셨을까? 하나님께서는 더럽고 거짓된 자아의 충만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시기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하나님은 결코 인간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발적인 경배에 의해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원칙과 목적을 무너뜨리고 행동하시겠는가? 실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지혜를 펼쳐 보이셨다. 십자가는 실로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이다”. 갈보리는 최초의 인류의 뿌리를 내리친 도끼였다. 여기서 옛사람 아담은 끝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아담이 보좌에 오르게 되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인류의 새로운 머리로서 세상에 오셨다. 그분께서는 자발적으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셨다. 그분께서는 자아가 완전히 배제된 사랑의 끈으로 우리를 자신에게 묶으셨고 우리를 죽음의 깊은 곳으로 그분과 함께 데리고 가셨다. 이 모든 것은 죄의 형벌을 척결하고 우리로 자아 대신 하나님을 선택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분께서 죽음을 택하신 것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은, 다시 말해 우리의 죽음을 죽으신 것은 우리를 죄악 된 자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오 성도 여러분이여, 사람의 아들께서 죄가 되셨고, 저주가 되셔서 놋 뱀처럼 높이 들리셨다. 십자가 아래에 서 있었던 그의 어머니와 함께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자: “실로 칼이 네 자신의 혼도 찔러 꿰뚫으리라. 이는 많은 자의 마음의 생각(그렇다. 바로 당신과 나의 생각을)을 드러내려 함이라” 어떤 사람은 “어째서 꼭 뱀이어야 하는가? 왜 백합이나 장미는 될 수 없는가?”라고 물을지 모른다. 왕과 그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하는 것이라면 왜 더 사랑스러운 다른 것이 될 수는 없었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묘사하시고자 했던 것은 죄악 된 자아생명(self-life)의 저주받은 모습이고 보면 그분께서는 가장 적합한 것을 택하신 것이다. 오직 뱀만이 이 진리를 상징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나에게 무서운 빛을 비추었다. 나는 이 빛 앞에 내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이 빛은 나의 죄악들만 비춘 것이 아니고 내 자신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내가 행하는 행동(what I did)은 내 자신(what I am)으로 부터 나온다. 분명한 사실은 모든 문제의 근원이 나 즉 바로 자아라고 하는 사실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십자가를 응시해보자.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받아들이도록 하자. 나는 빌라도의 뜰에 모인 군중을 보네. 나는 그들의 분노에 찬 모습을 확인하네;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그들의 외침소리 신성모독과 함께 소름을 끼치게 하네. 그 외쳐대는 군중 속에서 나도 그 중 하나임을 느낀다네; 그 거칠고 떠들썩한 음성 중에서 나는 내 음성을 확인한다네. 그 신성한 피를 흘리게 한 자는 바로 나였네, 내가 그분을 나무에 못 박았다네, 내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네, 내가 바로 그분을 조롱한 자였네. 나는 십자가 주변에서 군중들을 보고 있네 고통당하는 분의 신음소리를 조롱하는 소리; 그 역시 나의 음성처럼 들려오니 마치 나 혼자서 조롱하고 있는 것 같다네. -Horatius Bonar- 당신은 이와 같은 고백이 두려운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가? 이와 같은 자아를 떨쳐버리고 싶은가? 그러나 내가 이와 같은 자아의 모습을 인정하기까지는 자아를 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높이 들린 십자가의 보좌로부터 나는 자아를 먼저 인정하고 그리고 나서 그 자아를 내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제 자아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그치고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나는 가지만 쳐진 것이 아니고 완전히 몸통이 베어져 넘어진 것이다. 즉 나는 저주를 받은 것이다. 이제 나는 나의 모든 과거와 단절되었고 자아 자체와도 단절되었다. 나는 완전히 저주받기로 정해진 자다. 그리하여 어떤 다른 분께서 나를 대신하여 합법적인 처형을 당하셨을 때 나도 처형을 당한 것이다. 나는 그분과 함께 완전히 끝났으며 수치스러운 종말을 맞이했다. 나는 이와 같은 법적인 사형 집행을 진실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나는 내가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집행서류에 서명을 해야 한다. 내가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일은 너무도 무서운 일로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음에 이미 넘겨졌다.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을 받아들여 사형 집행서에 서명을 해야만 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일에 동의해야 하며 그분의 죽음의 능력으로 자아에서 내려와 자아를 부인해야 한다. 실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 죽음에 연합될 때에만 그 능력을 발휘한다. 나는 이 신성한 죽음이 나에게 행동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와 같은 자아 부인은 한두 가지 악한 행동을 근절하는 것 뿐 아니라 자아라고 하는 나무의 그 뿌리에 십자가의 도끼를 갖다 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아의 가지만을 치신 것이 아니고 나무 밑동을 완전히 잘라 버리신다. 모든 자기의 자기존중, 자기옹호, 자기영광, 치명적인 자기연민 이밖에 수없이 많은 자아의 표출은 자아라고 하는 나무의 깊이 박힌 뿌리에서 뻗어 나온 육신적 가지들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가지들만 친다는 것은 자아라는 생명이 더욱 추한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도록 만들뿐이다. 하나의 가지가 잘려 나갔지만 더 추한 바리새인적 가지가 더 왕성하게 자라나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겉으로는 멋있게 보일 수 있고 사람들 간에도 높이 평가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뒤 안에서 보자면 그의 주변 사람들은 자아라는 나무에서 맺힌 쓰디쓴 열매들을 증언하게 된다. 그러나 나에게는 풍성한 소망이 있다. 이는 내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안으로 접붙여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신성한 성품에 동참자가 된 것이다. 나에게 부여된 새 생명은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이며 자아에게 죽은 생명이다. 자아는 자아를 극복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되었으니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께 복종하기만 하면 그분의 전능하신 죽음이 내 안에서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실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께서 나를 더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나는 자아에 대해 더욱더 완전히 죽게 된다. 누군가가 조지 뮬러에게 그의 사역의 비밀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에게는 내가 죽은 날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말을 하면서 거의 바닥에 닿기까지 고개를 숙였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날은 내가 조지 뮬러, 그의 의견, 선호, 취향, 의지에 대해 죽은 날이요, 세상과 세상의 인정 혹은 비난에 대해서 죽은 날입니다. 나는 심지어 나의 형제들 혹은 친구들의 인정과 비난에 대해서도 죽었습니다. 그때로부터 나는 오직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꾼으로 드러나기 위해 공부했습니다.” 비록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는 기뻐한다네. 당신의 신성한 완전함 안에서, 또한 절대적인 순복에서 나오는 깊고, 신비로운 기쁨을 맛본다네. 나는 비록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는 즐거워하네 나의 모든 것을 당신안에서 발견하므로: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라, 영원토록 그리하리: 아멘! 그렇게 되기를 바라옵니다! -Lucy A. Bennett-
2009-05-01 17:52:00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10 장 십자가와 두 가지 본성   D.M 팬튼(Panton)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사나운 사람일지라도 수용소에서 혼자서 지낸다면 부드럽고, 온순하고, 조용하며 합리적이고 신사처럼 행동한다. 그는 그 수용소 안에서 자기의 뜻에 따라 자기 방식으로 마음대로 살면서 평안하게 지낸다. 그러나 그 수용소에 훌륭한 신사를 한 사람 들여보내 보라. 그러면 이 사나운 사람의 얼굴빛은 변할 것이고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어느 순간에는 그 침입자에게 대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두 사람은 치열한 갈등을 겪게 될 것이다.” 나와 친한 한 동역자가 이렇게 말했다. “구원받기 전에 나는 내가 성질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이 여자 동역자는 늘 자기 방식대로 살면서 아무런 성질을 내지 않으면서 자신의 뜻에 따라 절제 있는 삶을 살아갔었다. 그녀는 결코 내적 갈등을 가져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자 그녀는 타락한 아담으로 부터 물려받은 이기심이 독버섯처럼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라” 그렇다. 육신은 결코 영적인 영역 안에 들어갈 수가 없다. 육신은 회심이 불가능하고, 치료가 불가능하며, 갱생이 불가능한 존재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직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는 옛 사람(육신)과 새 사람(거듭난 영)이 존재하게 된다. “첫째 사람” “자연인” 그리고 “정욕에 따른 썩어진 옛 사람”이라는 성경적 표현들은 “아담”안에 있는 우리 즉 우리가 육으로 태어난 때 물려받은 자아를 말한다.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거듭난 사람은 “새 사람”을 옷 입은 것이다. 믿는 성도로서 나는 “내 안에 (즉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육신적 생각은 사망이며 “하나님의 법에 복종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실로 할 수도 없다”(롬8:7). 육신적 생각은 성령의 일들을 철저히 배척한다. 육신은 단순한 대적이 아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화해가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신은 “하나님께 대한 대적”이므로 화해가 있을 수 없다. 이에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육신은 성령을 거슬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할 수가 없느니라.” 그러나 나에게 있어 실로 엄청난 충격은 “내가 육신적이서 죄 아래 팔린 것과 동시에 속사람을 따라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이중적인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거의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느 때인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간에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부르짖을 것이다. 성경말씀과 우리의 체험에 따르면 이 전쟁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전쟁이요 지독한 내란인 셈이다. 이 전쟁은 외부의 적과 벌이는 전쟁이 아니다. 이 전쟁은 인간의 내부에 숨어 있는 “간첩”과의 싸움인 것이다. 따라서 이 치열한 전쟁이 그 어느 쪽도 이길 수 없는 교착상태에 빠져 버린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또한 패배주의적인 입장을 택한 채 자신들의 매일의 실패를 “옛 사람”에게만 탓을 돌리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은 아마 일부 성경 교사들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두 인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옛 사람과 새 사람이라고 하는 두 개의 개체가 완전히 분리되어 독립된 개체로 존재한다. 새 사람은 선한 천사처럼 완벽하고 온전한 반면 옛 사람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악한 자이다.”(H. Bonar).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오직 하나의 개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의지에 따라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은 두 개의 독립된 서로 다른 인격이 아니다. 다만 단 하나의 인격 안에 존재하는 두 가지 측면인 것이다. 모울 주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몸은 결코 독립된 존재 즉 별도의 인격이 아니다. 만약 우리의 몸이 ‘음모를 꾸민다면’ 그것은 독립된 외부인의 죄가 아닌 나의 죄인 것이다.” 앞서 우리는 ‘독일인-미국인’이 요청한 알현을 윌리암 황제가 거부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었다. 그 알현이 거부된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독일에서 태어났으나 미국에 귀화한 사람은 미국인이 되었다.” 황제는 이렇게 답변했던 것이다. “짐은 미국인도 알고 독일인도 알지만 ‘독일인-미국인’은 알지 못하노라” 나는 한 개체로서 한때 “아담 안에” 있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오해하지 말라. 나는 “아담 안에”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동시에 있을 수 없다. 내가 아담 안에 있었을 때 나는 “육신 안에” 있었으며 저주 받고 멸망 받은 상태에 있었다. 그때 나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아담으로부터 베어졌고 십자가에서 생명의 연합으로 인해 그리스도께로 연합하였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왜 못 박힐 수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치유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함으로써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즉 거듭난 사람들은 이제 ‘아담-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약 내가 이와 같은 신분이라면 나의 왕께서는 결코 알현을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다. 구약 성경에 보면 어떤 죄인들은 율법을 피하기 위해 “주의 장막으로 피신하여 제단의 뿔들을 붙들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정당한 보음을 받았다. “너는 그를 나의 제단에서 끌어내어 죽일지니라”(출21:4). 마찬가지로 모든 육신은 저주아래 있다. 우리의 옛 사람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더 정확히 말하면 못 박혀 있다. I am crucified라고 되어 있는 권위역본의 번역이 얼마나 정확한가?- 역자 주). 우리는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왕께서 알현하실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두 가지 본성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다가 갈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육신에게는 더 이상 자비가 있을 수 없다. 육신은 성소에 다가설 수가 없다. 만약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그를 나의 제단에서 끌어내어 죽일지니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우리가 그분께 다가설 때 육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상태로 다가서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왕을 알현할 수가 없다. 십자가는 우리와 옛 사람 사이의 영원한 분리를 선포한 것이다. 오직 이와 같은 자세로 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그분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예를 한 번 들어 보도록 하자. 유대인과 힌두교도가 기독교로 개종하면 그들의 친척들은 이들을 파문시키기 위해 그들의 장례식을 거행한다고 한다. 그들을 완전히 축출해 버렸다는 것을 공포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장례식이후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된다. 우리는 개종한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부터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다. 이 장례식이 끝나자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마지막 작별 키스를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를 가로막고 서서 “당신은 저 죽은 개 같은 녀석에게 키스하려고 하세요?” 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오셨을 때 그분께서는 나를 자신에게 붙들어 매시고 나를 저주받은 나무로 데려 가시고 무덤에다 내려 놓으셨다. 이로써 그분께서는 나와 나의 “옛 사람”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키신 것이다. 만약 내가 그 “죽은 개”에게 키스하기 위해 되돌아간다면 내 영혼의 신랑에게 얼마나 모욕을 드리며 실망시키는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제는 나의 사형 선고문에 엄숙하게 서명을 하고 영원한 장례식을 지낼 때이다! 얼마 전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설교했을 때 이 설교를 들은 한 멋쟁이 친구가 이렇게 평을 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아니 그렇게 못됐단 말이야!!” 이에 대해 한 성도는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질투나 공허감이나 교만 같은 것으로 괴로워한 적이 없단 말이오?”(이와 같은 것들은 누구나 다 갖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적이 있지요” “그렇다면 이런 일을 당할 때 당신은 어떻게 합니까?” 이에 대해 그는 “오! 그거야 주님의 보혈이 담당하는거지요.” 라고 너무도 쉽게 대답하였다. 그러니까 이 가련하고 자기 만족에 물든 청년에게는 죄가 아직은 “심히 죄된 상태가 아닌 것이다.” 그에게는 주 예수께서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편리한 도피처이며 그분의 보혈은 피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든 책임을 면케해 주는 만병통치약인 셈이다. 자, 이제 로마서 5장에서 다루는 칭의와 로마서 6장에서 다루는 성화와의 밀접한 관계를 면밀히 주목하기 바란다. 로마서 5장이 신앙 생활의 기초라고 한다면 로마서 6장은 그 후에 이어진 신앙 생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죄가 넘친 곳에 은혜가 더욱더 넘쳤나니”(롬5:2). 그러나 로마서 6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죄안에 거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떻게 더 이상 그 가운데 살겠느냐?”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의 죽으심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므로” 우리와 아담 그리고 우리와 죄와의 모든 관계는 영원히 끝났다고 선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죽으심으로 나의 옛 사람과 새 사람 사이에 “갈보리의 죽음”이라고 하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음을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이룬 나로서는 그 십자가의 죽음에 완전히 연합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나의 법적인 위치이다. 바로 이 사실에 근거해서 나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되었고 하나님과는 하나 됨을 누리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Huegel). 이것이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에 얻게 된 나의 지위인 것이다. 의롭게 된 성도가 회심 직후부터 자신은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 수 있는 성경적 근거는 충분하지만 실제로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자기 안에(즉 자기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배울 때까지는 광야 길에서 헤매게 된다(로마서 7장). 그러나 우리가 진정 절망과 좌절 가운데서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고백을 하게 될 때면 비로소 우리는 열매 맺을 수 있는 순종의 삶이라고 하는 축복된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로마서 8장에도 아직 싸움은 남아 있다. 그러나 로마서 7장에서처럼 가련하고 비참한 싸움이 아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가장 비극적인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이곳에는 “나”와 “자아”로 가득 차 있다. 반면 로마서 8장의 영적 싸움은 바울의 승리의 모습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이 그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두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육신을 따라가는” 길이 있다. 반면 다른 쪽에는 “성령을 따르는 길”이 놓여 있다. 가장 승리를 잘 하는 그리스도인 역시 항상 이 두 가지 길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에 따르면 성령의 법에 따라 해방 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제 “성령을 따를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선택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선택을 하는 주체는 우리 각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빚진 것이 아니니 육신을 좇아 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이야말로 커다란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졌던 옛 채무는 이미 청산되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3절에서 경고와 더불어 격려를 덧붙이고 있다.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은 것으로 처리하면 살리라.” “너희가 죽을 것이나”라는 표현은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즉 “죽게 된 것이다.” “죽음의 길에 서 있는 것이다” 혹은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리라” 등이 그것이다. 정욕에 이끌려 사는 자들에게 경고하면서 야고보가 말했던바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리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육신을 따라” 행하는 자들에 대한 강력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메튜 헨리는 이렇게 말했다. “한마디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에 처해 있다. 즉 육체를 불쾌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영혼을 파멸로 몰고 가야 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셋과 브라운은 그 유명한 주석에서 “만약 우리가 죄를 죽이지 않으면 죄가 우리를 죽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육신과 전쟁은 교착상태에서 지속되는 전쟁이 아니라 그 누군가가 상대방의 생명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결투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간 후(이 사건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상징한다) 그들은 열매로 가득한 땅으로 들어갔을 뿐 아니라 치열한 전투의 땅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들 앞에 놓인 딜레마는 “만약 너희가 가나안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그들이 너희를 죽이고 말 것이다”였던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은 육신과 성령과의 전쟁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엄연한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권면의 말씀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자 한다.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죽이면 이란 단어는 죽음에 처한다는 것이요 몸의 행실이란 저주받은 가나안적인 육체를 뜻한다.      
2009-05-01 17:49:59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9 장 십자가 - 본성과는 반대됨   스펄젼은 총을 수리하기 위해 대장장이에게 갔던 한 시골 농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대장장이는 농부가 가져온 총을 검사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총은 매우 낡았고 다 망가졌으며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상태입니다. 이 총을 어떻게 수리해 드릴까요?” 이에 대해 농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총의 모든 부분이 다 낡았다면 전부 새로 만들어야겠군요” 그러자 대장장이는 “뭐 하러 전부 뜯어고칩니까, 아예 새 총을 하나 사시는 것이 낳을 겁니다”. 이에 농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 미처 그 생각을 못했군요. 바로 그것이 내가 원하던 바입니다. 내가 총의 모든 부분을 수리하라고 한 것은 새 총을 갖고 싶다는 뜻이었지요. 나는 새로운 총을 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련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의도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즉 “완전히 새로운 사람을 만드셔서 인간으로 새로운 본성을 갖게 하시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농부가 매우 어리석은 것 같지만 사실 우리의 영적 분별력에 비하면 매우 분별력이 많은 셈이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를 수리하려는 것이 아니고 옛 인류 전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다. 하나님께서는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지혜로 아담에 속한 인류에 대한 완벽한 처방으로 십자가를 선택하셨다. “그리하여 어떤 육체도 그분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리라” 십자가는 우리의 뜻과는 어긋난다. 그리스도께서는 “내 뜻이 아니옵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씀하셨다. 십자가는 또한 우리의 지혜와는 반대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지혜는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정과도 반대된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육신과 함께 그 애착 정욕을 십자가에 달아 버렸느니라” 십자가는 또한 우리의 자긍심과도 모순된다. 우리는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 즉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던 그 생각을 가져야만 한다. 십자가는 우리의 자아에 반대된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산 자들이 이제 부터는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후 5:14, 15). 이처럼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본성과 모순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따라야 할 확고하고도 변함없는 원칙은 이러하다: “사람이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목숨마저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가셨을 때 “도끼는 이미 뿌리에 놓였다.” 옛 아담이라는 나무줄기는 완전히 잘려 나가고 만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 옛 사람이 완전히 파산하였음을 보여 주며 아담에 속한 옛 사람은 사망하였음을 선언한다. 십자가는 인간의 자연적인 생명(즉 육으로 난 것)을 제거하는 방법이며 이로써 초자연적인 새 생명이 대신 자리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우리를 “강화”시켜주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다듬기 위해서가 아니라 베어 버리시려고 오신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행하도록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행함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십자가는 모든 육신적인 행동에 반대하며 하나님의 방식으로 죽은 것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포도주를 옛 부대에 담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새 천을 낡은 옷에 대고 깁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옛 사람의 누더기를 완전히 벗겨 버리기 위해 오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계명은 우리가 아담으로 부터 물려받은 모든 도덕적 영적인 유산을 완전히 청산해 버리는 것이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핵심적인 본질이다. “우리의 자아야말로 타락한 인간이 지닌 모든 악의 요소들의 뿌리이며 나무요 가지들인 것이다”(율법). 자아 부인이란 그저 이런 저런 방종을 절제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A.T. 피어슨 박사가 말한 대로 모든 방종 -크고 작은 여러 종류- 이라는 가지들의 뿌리인 자아에 도끼를 대는 것이다. 자기 의, 자기 심리, 자아 추구, 자기 만족, 자기 의지, 자기 방어, 자기 영광 등. 이 뿌리에서 자라나온 수천 개의 가지들 중 그저 몇 개의 가지만을 제거한다 할지라도 또 다른 가지들이 더욱 왕성하게 뻗어 나간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따라서 도끼가 자아의 뿌리에 놓일 때까지 그리하여 우리의 자연적인 생명이 성령의 생명에게 자리를 양보할 때까지는 “우리의 모든 미덕은 그저 썩은 뿌리에 접붙여진 그럴싸하게 보이는 가짜 가지들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린 이후에도 옛 자아의 뿌리와 샘물로부터 가끔씩은 옛 모습이 들어나는 것은 어쩐 일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능력을 배워야할 때가 바로 이 순간인 것이다. 자 예를 들어보자 예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옛 아담의 줄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로서 “야생포도”를 맺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에게 참여한 자로서 그분께로 접붙여진 것이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으로 믿음을 통해 들어가게 되었을 때 나는 아담의 줄기로부터 차단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살아 계신 포도나무인 그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진 것이다. E. J. 페이스(Pace)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얼마 전 내 고향인 플로리다에서 감귤 농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농장 주인에게 과일을 어떻게 접붙이는지를 보여 달라고 청했다. 그는 나를 묘목원으로 인도했다. 그는 끝에 갓 나온 싹이 난 작은 가지를 묘목에서 조심스럽게 잘라냈다. 그는 근처에 있던 다른 나무쪽으로 가서는 그 위에 칼로 십자가 모양을 파고서 그 안에다 그 어린가지를 능숙하게 집어넣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옛 줄기에서 베어져서 십자가에서 영원한 신성 안으로 접붙여진 것이다. 이제는 믿음으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상속자이다”라는 사실을 붙들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동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접붙임은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접붙이는 방식은 이러하다. 즉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가지를 이보다 못한 줄기에다가 접을 붙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자연의 법칙과는 반대로 죽은 나무에다 접붙여졌다. 참 포도나무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 구속주의 찢겨진 옆구리에 우리는 접붙여진 것이다. 즉 나쁜 열매 맺는 자가 좋은 열매 맺는 분께 접붙여진 것이다. 이외에도 너무도 중요한 “본성을 거스르는” 또 한 가지 요소가 있다. 자연에 있어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연합이 이루어지면 가지는 여전히 “종류대로” 즉 원래 가지고 있던 그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 보자면 나는 아담 안에서 죽었다. 나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생명으로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 따라서 “하나님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이 자연적인 생명은 죽어야하고 “숨”을 거두어야만 한다. 십자가의 형을 받게 된 나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이제는 본성에 따라 살기에는 적합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십자가는 이 사실을 보여 주며 나는 이에 동의해야만 한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심을 인정해야 한다. 이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의 생명이 접붙여진 가지인 나를 통해 표출되어야 하며 나의 본성과는 너무도 어긋나는 의로운 생명의 열매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그분의 본성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에 이르도록 표출되어야 하는 것이다. 에이미 카미카엔씨는 코힐라(Kohila)라는 간호사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 안에 있는 뭔가와 맞닥뜨렸다. 그것은 우리가 난탄(Nan than)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난(Nan)은 나(I)를 뜻하고 탄(than)은 이 대명사를 강조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자아를 포기한 사람을 통해 주님께서 이루시지 못할 일은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난탄(Nan than)은 무척이나 자신에 대해 염려를 한다. 코힐라는 그녀의 탄을 포기하였고 이에 다른 사람을 돕는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시게 되면 그분은 그 생명을 전적으로 장악하셔야 한다. 그분은 “나의 자아”를 완전히 몰아내실 때까지 끝까지 “연좌 농성”을 벌이실 것이다. 십자가는 “내가 아니고.....”라는 고백이 나올 때까지 나를 궁지로 몰고 갈 것이다. 자연에 따른 접붙이기와 열매 맺기의 법칙에는 반대되는 방식으로 “너희가 내 안에”라는 고백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먼저 이루어지고 나서야 “내가 너희 안에”가 이루어져 합당한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길은 자연의 의지를 가로질러 뻗어 있고; 예수님의 발은 육신이 지배하지 않는 곳을 밟는다네 노예의 족쇄를 뒤로 하니 복된 일이로다. 우리의 자아를 뒤로하니 수의와 무덤만이 남아있네! -Ter Steeegen-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근거하여 접붙여진 어린 가지의 고백을 들어보자. “저는 저의 혈통에서 잘려졌습니다. 저는 이전의 모든 관계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저는 옛 가문으로부터 철저히 축출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옛 것들에 대해 죽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살고 있으며 - 저는 여전히 작은 야생가지일 뿐입니다- 여전히 내 자신일 뿐입니다. 저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살고 있는 것은 제가 아닙니다. 제 안에서 다른 분의 생명이 살고 있기에 제가 맺은 모든 아름다운 열매는 제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다른 분의 생명이 맺은 열매이며 이 생명은 계속해서 저의 옛 생명을 거슬러 위대한 농부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고귀한 열매를 저를 통해 맺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이와 같은 원칙들을 끊임없이 거스르게 됩니다. 이에 대해 F.J. Huegel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아에 매여 있고 뒤덮여 있고 얽혀 있고 충만해 있어서 우리의 영적인 본성이 하나님 안에 중심을 두려면 우리의 옛 성품을 완전히 거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깊은 사랑의 연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인 것이다. 십자가는 부패한 인간의 본성을 거칠게 대한다. 즉 옛 생명을 죽여 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죄가 우리를 씻긴다거나 옛 성품을 뿌리 뽑는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종종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자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종종 간과한다. 프랜시스 데 살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기성복처럼 이미 만들어진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또한 아무런 어려움도 가져다주지 않는 거룩함을 얻는다는 것도 환상이다. 이와 같은 피상적인 거룩함은 인간의 본성과 매우 잘 어울릴 것이다. 우리는 성결에 이르는 비결만 발견한다면 쉽고 빠르게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우리 인생동안 십자가가 놓여야할 옛 모습이 우리의 본성 안에 얼마나 남아 있는지 계속해서 찾아내야만 한다. 만약 독자 여러분께서 자아와 죄에 대해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자아의 부산물을 발견하고 있지 못하다면 여러분의 취향, 선택, 선호하는 것 등에 분명한 갈보리 십자가의 표시가 찍혀야만 할 것이다. 자연적으로 타고난 모든 요소에 십자가의 죽음의 표시가 찍혀 있어야만 한다. 자, 우리 모두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자연적인 선택위에 그분의 십자가를 표시하시도록 기도하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여 오 당신의 거룩한 십자가를 표시하소서. 자아가 엿보이는 그 모든 요소위에 당신의 상실의 표식을 찍으소서 우리가 보기에는 가장 고귀한 것 위에 죽음의 표시가 이곳저곳에 놓이게 될 때 우리 모두 기이히 여기지 않고 이것이 기도의 응답임을 인정하리이다. -Army Carmichael- 그러나 “내가 아니고”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일생 내내 장례를 치르는 사람처럼 우울한 삶을 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결코 그럴 수가 없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는 자는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광스럽고 영원하신 분, 만물의 창조자,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그분”께서 나를 자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그분의 성전을 삼으시고는 내가 살아 있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사신다”는 고백을 실제로 할 수 있게 하신다는 이 사실보다 더 놀라운 일이 이 세상 그 어디에 있겠는가? 그분께서는 “내가 사니 너도 살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라는 신비한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인 것이다. 가지는 포도나무 안에 있는 것이다. 실로 생명과 사랑과 자유의 영광스러운 연합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그분과 함께 살아났고 그분과 함께 일으켜 졌으며 그분과 함께 앉혀졌다. 나는 영원하신 분 안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다시 말해 나의 생명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진 것”이다. J Gregory Mantle은 이렇게 말했다. “퍼트셔 골짜기에는 작은 개울의 바위 위에서 자라고 있던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곳에는 뿌리를 뻗은 흙도 없었고 영양분을 흡수할 흙도 없었다. 이 나무는 오랫동안 성장을 방해받았고 건강하게 자라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식물이 갖고 있는 놀라운 본성에 의해 근처에 있던 좁은 다리를 통해 수염뿌리를 건너 쪽으로 보냈다. 그리고서 실개천 건너 쪽 둑에 있는 옥토위에 뿌리를 박았다. 나무는 수액과 자양분을 빨아들여 급속히 건강하게 성장했다. 이 작은 다리가 나무에게 생명을 제공했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믿는 자에게는 생명의 원천인 것이다.” 만약 우리의 생명의 뿌리가 부활하신 주님께 놓여있기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 안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열매를 맺어 보려고 노력해 본 적이 없는가? 그리하여 쓰라린 체험을 맛본 적은 없는가? 우리는 열매를 맺기 위해 애써 봤고, 노력해 보았고 기도해 보았고, 애통해 보았다. 그러나 이 모두가 허사였다. 우리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명의 흐름은 불순물과 뒤섞여 우리의 거룩하지 못한 동기들을 통해 혼탁해지고 만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풍성한 충만함이 있음을 알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이것을 얻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허드슨 테일러가 고백했듯이 우리도 이렇게 고백하게 된다. “나는 뿌리 안에 풍성한 충만함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나의 보잘 것 없는 가지를 뿌리에 박을 수 있는 지가 문제이다.” 이와 같은 절망의 극에 달할 때 결국 우리는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감사드리는 것은 완전히 신성하고 능력 있는 생명이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참된 살아있는 힘을 찾으려면 나와 나의 생명에서는 하지 말라. 이는 자아는 자신만을 사랑하며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함이라 씨가 뿌려진 땅에서 열매를 구하듯이 살아있는 생명을 찾되 죽임당한 생명으로부터 구하라 그리고 나서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서둘러 그 생명에 치명타를 가하라. 그리하면 상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던 것에서 무한한 보물을 발견케 되리니 씨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어디서 새로운 부활의 싹이 발견되겠는가? -T.C. Upham
2009-05-01 17:47:44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