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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2장 18절 "보지 아니한" 삭제   골로새서 2장 18절은 거짓 종교적 체험과 외형적 경건을 앞세우며 성도들을 미혹하려는 자들을 경고하는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이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거짓 겸손(humility)과 천사 숭배(worshipping of angels)를 말하는 자들이 실제로는 자기가 보지도 않은 것들을 근거로 삼아 헛되이 우쭐대는 자들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이 핵심 문장에서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음과 같이 명확히 말합니다: 1. 골로새서 2:18 (KJV) “Let no man beguile you of your reward in a voluntary humility and worshipping of angels, intruding into those things which he hath not seen, vainly puffed up by his fleshly mind,” 한글 킹제임스 흠정역 “아무도 꾸며 낸 겸손과 천사 숭배로 너희를 속여 너희 보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그런 일을 하는 자는 자기가 보지 아니한 그것들 속으로 들어가 자기의 육신적 생각으로 말미암아 헛되이 우쭐대며” 여기서 핵심은 “he hath not seen” – ‘자기가 보지 아니한 것들’이라는 문구입니다. 이 문장은 그 거짓된 체험과 종교적 주장들이 실제 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폭로하며, 이단적 체험주의, 신비주의, 천사 숭배의 허구성을 명확히 드러냅니다. 2. 현대 역본(NIV, 개역, 천주교 사본)의 왜곡 개역성경: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NIV: “…such a person also goes into great detail about what they have seen…” 이 번역들은 ‘보지 아니한 것들’이라는 본래 의미와 정반대로, ‘자기가 본 것’을 주장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가 실제로 본 것”에 근거해서 우쭐댄다는 뜻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 그 결과, 거짓 체험이 아니라 실제 체험에 근거한 교만으로 의미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3. 사본 증거 KJV 및 다수 사본(Textus Receptus, Byzantine Majority Text): 헬라어 “ἃ μὴ ἑόρακεν” → “그가 보지 아니한 것들” 소수 사본(알렉산드리아계열: 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 “ἃ ἑόρακεν” → “그가 본 것들” 이처럼 단어 하나, “μὴ(부정어 not)”의 유무가 본문의 의미를 180도 바꾸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4. 신학적 문제점 이단적 체험주의에 대한 경고가 사라진다 → 바울은 자기가 보지도 않은 것들을 근거로 종교적 권위를 주장하는 자들을 경고했으나, 현대 역본은 이들을 자신의 체험을 자랑하는 자로 묘사하며 오히려 그 체험의 정당성을 암시하게 됩니다. 성경의 교리적 일관성 훼손 → 성경은 신비주의적 체험이나 개인적 환상에 기초한 신앙을 배격합니다(신 13:1–3, 골 2:8). → 그런데 “그가 본 것에 의지한다.”라는 번역은, 그 체험이 사실임을 전제로 하여 교만만 문제 삼는 구조로 바뀝니다. 문맥의 흐름이 왜곡됨 → 앞 구절(골 2:16~17)에서는 율법주의와 형식적 절기 관찰을 경고하고, 이어서 거짓 겸손과 천사 숭배로 넘어가는데, 여기서 “보지 못한 것들을 근거로 우쭐대는 자”라는 맥락이 명확해야 거짓 체험과 허위 종교의 본질을 폭로하는 구조가 완성됩니다. 5. 결론 골로새서 2:18은 신비주의, 체험주의, 천사 숭배 등 거짓 영적 주장에 대한 직접적인 경고 구절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본 것도 아닌 것들에 대해 말하면서 헛되이 교만하게 구는 자들이라고 선언합니다. 킹제임스 성경(KJV)과 다수 사본은 이 진리를 “he hath not seen(보지 아니한 것들)”이라는 결정적 문구로 정확히 보존하고 있으며, 이단과 체험주의의 허구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천주교 라틴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소수 부패 사본을 따라 ‘보지 않은 것들’을 ‘본 것들’로 정반대의 의미로 번역함으로써, 이 경고의 본래 의도를 완전히 왜곡해 버렸습니다.   이 구절 또한 킹제임스 성경이 왜 가장 신실하게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인지 확실히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2025-05-24 17:06:42 | 관리자
에베소서 5장 9절 "성령" 오역   에베소서 5장 9절은 성도들이 어둠이 아닌 빛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는 삶의 증거를 말하면서, 무엇이 그 증거인가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구절이다. 이 말씀에서 킹제임스 성경(KJV)은 “성령의 열매(the fruit of the Spirit)”라고 기록하며, 성령께서 성도 안에서 맺으시는 선함, 의, 진리를 열거한다. 이는 갈라디아서 5장 22절과도 연결되는 성경 전체의 일관된 흐름이다. 그런데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이 구절을 “빛의 열매(the fruit of the light)”라고 바꾸어 번역하며, 본문의 핵심 영적 주체인 성령(Spirit)을 제거하고, 대신 빛(light)이라는 비인격적 개념을 넣는다. 이는 단순한 단어 선택의 차이가 아니라, 의도적 사본 변개로 인해 본문의 교리적 중심을 흐리게 하는 중대한 문제다. 1. 킹제임스 성경(KJV) Ephesians 5:9(KJV): “(For the fruit of the Spirit is in all goodness and righteousness and truth;)” 흠정역 “(성령의 열매는 모든 선함과 의와 진리 안에 있느니라.)” 여기서 강조점은 분명히 “성령”이다. →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성도 안에 맺히는 도덕적 결과들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 이는 갈라디아서 5:22의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라는 구절과도 직접 연결되며, 성령 중심의 성화 교리를 지지하는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2. 현대 역본의 왜곡 – 개역성경, NIV 등 개역성경: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NIV: “(for the fruit of the light consists in all goodness, righteousness and truth)” 3. 사본 증거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 사본 계열(Textus Receptus 및 다수 비잔틴 사본)에 근거하여 헬라어 “τοῦ πνεύματος” (of the Spirit) — 즉 성령의 열매라는 표현을 확고히 포함하고 있다. 반면, 소수 사본(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 등)에서는 이 부분이 “τοῦ φωτός” (of the light) — 빛의 열매로 변경되어 있다. 현대 역본(NIV, NRSV, 개역성경 등)은 이 소수 사본의 비성경적 변경을 반영하여 “빛의 열매”로 번역했으며, 그 결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령 사역이 이 본문에서 삭제되었다. 4. 신학적 문제점 이들은 모두 “빛(light)”을 주어로 삼고 있으며, 성령(Spirit)이라는 표현은 완전히 삭제되어 있다. 이로 인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성령의 인격성과 사역이 가려진다 → “빛의 열매”는 추상적 개념이지만, “성령의 열매”는 삼위 하나님의 인격적 사역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 성도 안에 맺히는 선한 열매가 성령의 역사임을 강조해야 함에도, 그 영적 출처가 모호해진다. 갈라디아서 5:22와의 연결성이 단절된다 → 성령의 열매는 성도 내면에 맺히는 도덕적·영적 결과로 성화 교리의 중심 개념이다. → 이 흐름이 “빛”이라는 비인격적 개념으로 바뀌면, 성경 전체의 일관된 교리 구조가 약화된다. 변개 목적이 보인다 → 앞 구절(엡 5:8)에서는 성도들을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라고 한다. 이에 영향을 받은 서기관들이 연속성만을 고려하여, 성령의 열매라는 표현을 ‘빛의 열매’로 임의로 바꾸었을 가능성이 높다. → 이는 교리적 신중함보다 문학적 흐름에 집착한, 심각한 본문 변개의 예다. 5. 신학적 연계 갈라디아서 5:22: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 열매는 빛의 결과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의 산물이다. 요한일서 1:5: “하나님은 빛이시며” — 빛은 하나님 존재의 속성이지만, 빛이 사람에게 직접 열매를 맺게 하지는 않는다. 에베소서 5:8–9의 흐름: 8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니…” 9절: “(성령의 열매)는 선함과 의와 진리…” → 성도가 “빛의 자녀”로 살기 위해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는 구조임. 6. 결론 에베소서 5장 9절은 성도 안에 맺히는 열매의 근원이 빛이라는 추상 개념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인격적 사역자임을 선포하는 본문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본래의 성경적 교리 흐름에 충실하여 “성령의 열매”라는 표현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이는 성화와 삼위일체 교리의 맥락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소수 사본의 변개를 따라 “빛의 열매”로 수정함으로써, 본문의 교리적 깊이와 성령님의 역할을 축소하거나 제거해 버렸다. 이 구절 역시 킹제임스 성경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명백한 예이다. 빛이 아니라 성령께서 열매를 맺게 하신다.
2025-05-24 17:03:06 | 관리자
갈라디아서 5장 21절 "살인" 삭제   갈라디아서 5장 21절 말씀에서는 육신의 행위들을 열거하면서, 그러한 행위들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한다는 매우 중대한 경고를 하고 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육신의 행위 목록에 “살인(murders)”을 분명히 포함시키고 있다. 1. KJV – 갈 5:21: “Envyings, murders, drunkenness, revellings, and such like…”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니라.…” 하지만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이 “살인”이라는 중대한 단어를 완전히 생략하고, 그 결과로 본문의 도덕적 무게와 경고의 강도를 심각하게 약화시키고 있다. 2. 현대 역본 예시 개역성경: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envy, drunkenness, orgies, and the like… those who live like this will not inherit the kingdom of God.” 이처럼 살인(murder)이라는 가장 명백한 죄가 이 목록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있다. 3. 사본 증거 분석 KJV는 다수 사본(Textus Receptus, Byzantine Majority Text)을 따른다. 이 사본들은 “φθόνοι, φόνοι, μέθαι, κῶμοι…” — 즉, “시기, 살인, 술 취함, 흥청댐…”이라는 순서를 포함하고 있다. “φόνοι” (폰오이): “살인들”(복수형 murders) → 다수 사본에는 명확하게 포함되어 있음. 반면, NIV, ESV, 개역성경 등은 소수 사본 계열(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을 따르는데, 이들 일부 사본에서는 “φόνοι”가 완전히 누락되어 있다. 이 소수 사본의 삭제는 고의적일 가능성도 있다. “살인”이라는 죄를 지나치게 노골적이거나 반복적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 혹은 필사자의 실수로 인한 생략 등이 지적된다. 4. 본문 해석의 중요성 살인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명확한 죄 중 하나 →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라는 명령은 도덕법의 근간이다. → 이를 육신의 행위 목록에서 삭제한다는 것은, 그 죄의 심각성을 흐리는 일이다. 경고의 강도 약화 → 바울은 “그런 것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할 것”이라 경고한다. → 이 경고는 살인 같은 명백한 죄를 포함시켜야 더욱 무게를 갖는다. 도덕 기준의 누수 → “시기(envy)”나 “술 취함(drunkenness)”만 열거하면, 도덕적 판단이 흐려지고, “최악의 죄”인 살인조차 포함되지 않는 불균형이 생기게 된다. 5. 결론 갈라디아서 5장 21절은 신자의 삶에서 버려야 할 육신의 행위들을 열거하고, 그러한 일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한다는 매우 엄중한 선언을 담고 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여기에 “살인”을 분명히 포함시켜, 그 경고의 무게와 영적 기준을 정확히 보존하고 있다. 반면, 개역성경, NIV, 천주교 계열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소수 사본을 따름으로써 “살인”이라는 중대한 죄를 삭제하였고, 그로 인해 본문의 신학적 강도와 경고의 분명성이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이 구절 역시, 왜 킹제임스 성경이 정확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믿고 따를 가치가 있는지를 분명히 증언해 준다.
2025-05-24 16:57:53 | 관리자
고린도후서 4장 4절 "그들에게" 삭제   고린도후서 4장 4절은 복음이 세상에서 어떻게 가려지고 있는지를 설명하며, 사탄(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한다는 중대한 영적 진리를 담고 있는 구절이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킹제임스 성경(KJV)은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to them)” 비치지 못한다고 명확히 대상(불신자들)을 반복하여 지칭하는 반면,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이 “그들에게”라는 표현을 생략함으로써 본문의 명료성과 논리적 구조, 그리고 영적 진단의 대상을 흐리게 만들고 있다. 1. 킹제임스 성경(KJV) 고후 4:4(KJV): “In whom the god of this world hath blinded the minds of them which believe not, lest the light of the glorious gospel of Christ, who is the image of God, should shine unto them.” “그들 속에서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하였느니라."   여기서 핵심은 “unto them(그들에게)”라는 말이다. → 이 표현은 복음의 빛이 누구에게 비치지 못하는지를 명확히 다시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 이는 곧 복음의 사역 대상과 사탄의 활동 대상이 동일함을 강조하는 구조다. 2. 현대 역본의 생략 – 개역성경, NIV 등 개역성경: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3. 본문 해석의 중요성 여기서는 “그들에게”라는 직접적 대상이 생략되어 있다. →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긴다: 복음이 누구에게 비치지 못하는지 불분명해진다 → 앞에서 “믿지 않는 자들”이라고 말했지만, 다시 한번 대상을 반복해 지칭하지 않음으로써 복음의 빛이 막힌 대상이 누구인지 강조 효과가 줄어든다. 복음의 실패가 불분명해진다 → KJV에서는 복음이 “그들에게 비치지 못한다.”라고 하여 영적 전쟁의 현실과 사탄의 간계가 복음 전파를 직접 방해하는 것을 명시한다. 그러나 현대 역본은 이 비침의 대상이 모호하게 표현되어 메시지의 날카로움이 둔해진다. 문장 구조의 논리성이 약화된다 → KJV는 “믿지 않는 자들” →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함” → “그들에게 비치지 못함”이라는 정확하고 자연스러운 대명사 연결 구조를 갖추고 있다. 현대 역본은 그 중간 고리를 생략함으로써 흐름이 불분명해진다. 4. 사본 증거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 사본 계열(Textus Receptus)에 따라 헬라어 원문 “πρὸς τοὺς ἀπίστους” → “그들(믿지 않는 자들)에게(to them who believe not)”, 그리고 “μὴ αὐγάσαι αὐτοῖς” →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라는 구조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반면, 소수 사본 계열(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에서는 후반부 “그들에게(to them, αὐτοῖς)”라는 표현이 누락되거나 축약되어,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에는 이 표현이 반영되지 않았다. 5. 결론 고린도후서 4장 4절에서 바울은 복음이 불신자들에게 비치지 못하는 이유를 영적 실명(blinding)과 사탄의 간계로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이 말씀에서 “그들에게(to them)”라는 표현은 복음의 빛이 누구에게 미치지 못하는지, 즉 복음의 전달 실패 대상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알려 주는 결정적 요소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표현을 명확히 보존하고, 본문의 논리 구조, 영적 교훈, 대상의 명료성을 모두 충실히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소수 사본을 따라 이 중요한 표현을 삭제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적 경고와 복음 전도의 긴박성을 약화시킨다. 이 구절 역시, 킹제임스 성경이 왜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 예가 된다.
2025-05-24 16:54:05 | 관리자
고린도전서 10장 23절 "나를 위해" 2회 삭제   고린도전서 10장 23절은 신자들의 자유와 행동의 기준에 대해 바울이 교훈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모든 것이 적법하다.”라는 일반 원칙을 인정하면서도, 그 행동이 자신에게 유익한가, 그리고 다른 사람을 세워 주는가를 따져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한다.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KJV)은 여기서 매우 중요한 표현인 “나를 위해”(for me, unto me)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하여, 이 구절이 단순히 일반 원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적용과 바울 자신의 양심의 기준에 따른 교훈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반면,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이 “나를 위해”(for me)라는 표현을 모두 생략하고, 단지 “모든 것이 가하다.”라는 식의 일반화된 진술로 축소함으로써 본문의 맥락과 목적을 흐리고 있다. 1. 킹제임스 성경(KJV) 1 Corinthians 10:23(KJV): “All things are lawful for me, but all things are not expedient: all things are lawful for me, but all things edify not.”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적법하나 모든 것이 적절하지는 아니하며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적법하나 모든 것이 세워 주지는 아니하나니” 여기서 “for me(나를 위해)”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됨으로써, 바울은 개인의 자유와 행동이 단순히 객관적으로 허용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기준과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구절은 단순한 일반 규범이 아니라, 신자의 양심, 자기 절제,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를 포함한 실천적 적용이다. 2. 현대 역본의 생략 – 개역성경, NIV 등 개역성경: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NIV: “I have the right to do anything,” you say — but not everything is beneficial. “I have the right to do anything” — but not everything is constructive. 여기서 “나를 위해(for me)”라는 말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표현이 일반적 진술로 축소되어, 본문의 핵심인 개인적 적용과 책임 의식이 사라진다.   3. 본문 해석의 중요성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개인적 양심의 적용이 흐려진다 → 바울은 "나에게는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가 내게 유익하지 않으면 제한하겠다."라는 입장을 밝힌다. 그러나 현대 역본은 이를 객관적 진술로 돌려 버림으로써, 자유의 절제와 자기 훈련의 요소를 흐린다. 책임과 자기 절제의 강조가 사라진다 → “나를 위해”라는 표현이 있어야, 자기 자신이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할 수 있다. 이 점은 자기 부인의 삶을 사는 신자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이다. 본문의 반복 구조가 깨진다 → KJV에서는 “for me”가 두 번 반복되어 구조적으로도 강조되지만, 현대 역본은 이 반복을 없애고 내용을 납작하게 균등화시켜 본문의 강약 조절이 사라진다. 4. 사본 증거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 사본 계열(Textus Receptus)에 따라 본문에 다음과 같이 “μοι πάντα ἔξεστιν” – “모든 것이 내게 적법하다(for me)”라는 표현이 두 번 반복되어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소수 사본(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에서는 “μοι”(나를 위해, for me)라는 표현이 한 번 또는 두 번 생략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개역성경, NIV 등 현대 역본들은 해당 표현을 모두 삭제하거나 생략하고 있다. 이처럼 소수 사본을 따른 현대 역본은 본문의 개인적 적용, 신학적 강조점, 구조적 리듬감을 약화시키는 번역을 한 것이다. 5. 결론 고린도전서 10장 23절은 신자의 자유가 무제한이 아니라, 그 자유가 자기 자신에게 유익한가,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가를 따져야 한다는 성경적 절제와 책임의 원리를 담은 구절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중요한 구절에서 “나를 위해”라는 표현을 두 번 반복함으로써, 이 구절이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개인 적용의 모델임을 분명히 보여 준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소수 사본을 따라 이 핵심 문구를 삭제함으로써, 본문의 윤리적 긴장감과 실천적 깊이를 손상시켰다. 이 구절에서도 킹제임스 성경이 정확하고 온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 입증된다. 신자의 자유는, 성령 안에서 책임 있게 사용될 때만 유익하다.
2025-05-24 16:49:50 | 관리자
고린도전서 4장 6절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 삭제   고린도전서 4장 6절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 교만을 경계하며, 사람을 높이거나 편당하는 태도를 버리라고 권면하는 핵심 구절이다. 이 본문에서 킹제임스 성경(KJV)은 매우 중요한 교훈, 즉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not to think of men)."라는 교리를 분명히 포함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한 사람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분열을 막으려는 목적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천주교 라틴 계열 등 현대 역본들은 이 구절의 핵심 문장 —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 것"이라는 표현을 통째로 삭제하거나 생략하고 있어, 본문의 의미를 약화시키고 문맥의 논리 흐름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1. 킹제임스 성경(KJV) 1 Corinthians 4:6(KJV): “… that ye might learn in us not to think of men above that which is written, that no one of you be puffed up for one against another.” “… 너희가 기록된 것 이상으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 것을 우리 안에서 배우게 함으로 너희 중 아무도 한 사람 편을 들고 다른 사람을 반대하며 우쭐대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바울은 기록된 것(성경 말씀) 이상으로 사람을 평가하거나 존경하거나 높이지 말라고 가르친다. 이 말은 고린도 교회 내의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등의 분열을 경고하는 것으로, 누가 더 나은 지도자인지에 대한 인간적 평가를 금지하는 것이다. 2. 현대 역본의 삭제 – 개역성경, NIV 등 개역성경: “…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NIV: “… learn from us the meaning of the saying, ‘Do not go beyond what is written.’” 이처럼 현대 역본들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라는 표현 전체를 생략하고, 단지 “기록한 말씀 이상으로 넘어가지 말라.”라는 일반적인 교훈으로 축소한다. 3. 본문 해석의 중요성 발생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본문의 경고 대상이 사라진다 → KJV에서는 분명히 사람들을 기준으로 삼아 판단하거나 우쭐대지 말라고 말하지만, 현대 역본은 무엇에 대해 넘어가지 말라는 건지 불명확해진다. 교회 내 편당 문제의 핵심이 흐려진다 → 바울이 말하는 교만은 단순한 일반 교만이 아니라, 사람(지도자) 중심의 파당 형성에서 비롯된 교만이다. 그러나 현대 역본은 이 부분을 명시하지 않아, 본문의 목적과 경고 대상이 모호해진다. 앞뒤 문맥의 연결성이 약화된다 → 바로 앞 장들(고전 1–3장)에서는 계속해서 사람을 따라 나뉘는 문제(“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를 지적했는데, 이 흐름이 4장 6절에서 절정에 이른다. 하지만 이 절에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라는 표현이 빠지면, 앞의 문맥과 직접 연결되는 구조가 사라지고, 주제 흐름이 끊긴다. 4. 사본 증거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 사본 계열(Textus Receptus)에 따라 헬라어 “μὴ ὑπὲρ ἃ γέγραπται φρονεῖν ὑπὲρ τοῦ ἑνὸς” — “기록된 것 이상으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라는 표현을 충실히 번역했다. 반면, 소수 사본(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에서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라는 내용이 생략되어 있거나, 모호한 구조로 축소되어 있다. 이러한 소수 사본을 기반으로 한 NIV, 개역, NRSV 등 현대 역본들은 본문의 교훈이 가진 초점(사람 평가 금지)을 흐리게 만들었다. 5. 결론 고린도전서 4장 6절은 고린도 교회 내에 만연한 사람 중심의 분열과 교만을 정면으로 지적하고 고치는 말씀이다. 그 핵심은, 성경에 기록된 것을 넘어서서 사람을 평가하고, 사람을 기준으로 삼아 우쭐대는 것을 금지하는 데 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점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 것”이라는 표현을 통해 정확히 전달하고 있으며, 본문의 앞뒤 흐름, 신학적 목적, 교회 내 문제에 대한 정확한 경고를 보존하고 있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천주교 계열 등 현대 역본은 소수 사본에 의존해 이 중요한 표현을 삭제하고, 본문을 단순한 일반 교훈으로 축소시킴으로써 본문의 핵심 교리를 약화시키고 있다. 이 구절 또한 킹제임스 성경이 왜 하나님의 완전한 보존된 말씀인지를 보여 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2025-05-24 16:48:48 | 관리자
고린도전서 2장 4절 "사람의" 삭제   고린도전서 2장 4절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역 방식과 그 근거를 설명하면서, 복음 선포가 단순한 말재주나 철학적 설득력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과 실증에 기초했음을 강조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이 구절에서 킹제임스 성경(KJV)은 복음 선포가 “사람의 지혜의 유혹하는 말들”(enticing words of man's wisdom)이 아니라고 분명히 진술한다. 즉, 그 지혜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속한 지혜이며 성령의 권능과 대조되는 인간적인 접근과 철학적 설득력을 의미한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이 표현에서 ‘사람의’(man's)라는 중요한 한 단어를 삭제하거나 생략하고 있다. 이 삭제는 단어 하나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문맥의 흐름과 신학적 메시지에 있어서는 매우 중대한 손상을 초래한다. 1. 킹제임스 성경(KJV) 고전 2:4(KJV) “And my speech and my preaching was not with enticing words of man's wisdom, but in demonstration of the Spirit and of power:” “또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를 사람의 지혜의 유혹하는 말들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과 권능을 실증함으로 하였으니” 여기서 바울은 두 개의 지혜를 대조한다: – 하나는 사람의 지혜(man’s wisdom), 다른 하나는 성령의 권능이다. 이 대조는 단순한 수사법이 아니라, 당시 헬라 철학적 변증과 복음의 본질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즉, 복음은 사람의 이성이나 철학으로 설득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권능에 의해 깨달아지는 진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2. 개역성경 및 현대 역본의 번역 문제 개역성경: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NIV: “My message and my preaching were not with wise and persuasive words…” 여기에서는 ‘사람의’(man's)라는 수식어가 빠지고, 단지 ‘지혜의 말’, ‘설득력 있는 말’로 번역된다. 3. 본문 해석의 중요성 다음과 같은 문제를 낳는다: 문맥의 대조 구조가 무너진다 → 바로 다음 구절(고전 2:5)에서는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권능에 있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 여기서 “사람의 지혜 vs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명확한 대조 구도가 등장한다. → 그런데 2:4에서 “사람의”라는 말이 빠지면, 앞뒤 연결성과 대조 구조가 흐려지고 본문의 논리가 약화된다. ‘지혜’ 자체가 나쁜 것처럼 보이게 한다 →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도 성경에 분명히 존재한다(약 3:17). 따라서 지혜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사람의 지혜가 문제라는 것이 본문의 핵심이다. → 그런데 단순히 “지혜의 말”이라고만 하면, 성경의 다른 지혜와 충돌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복음 전도의 본질이 약화된다 → 바울은 자신의 복음 선포가 철학적 논증이나 웅변이 아니라, 성령의 실증과 권능에 기초했다고 강조한다. → 이것은 복음의 초자연적 본질을 드러내는 진술인데, “사람의 지혜”라는 표현이 빠지면 바울의 전도 방식의 본질적인 차별성이 흐려진다. 4. 사본 증거 KJV는 Textus Receptus(수용 본문) 및 다수 사본 계열에 따라 헬라어 원문 “σοφίας ἀνθρώπων λόγοις” — “사람의 지혜의 말들”을 정확히 번역했다. 반면, 소수 사본 계열(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에서는 “ἀνθρώπων(사람의)”라는 단어가 누락되었거나 다른 형태로 변경되어 있다. NIV, NRSV, 개역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이 소수 사본의 흐름을 따라 ‘사람의’라는 본질적인 수식어를 생략함으로써, 성경 본문의 교리적 명확성과 문맥의 논리성을 손상시킨 것이다. 5. 결론 고린도전서 2장 4절은 바울이 복음을 선포할 때, 사람의 지혜에 의존하지 않고 성령의 권능에 의지했음을 분명히 밝히는 중요한 구절이다. 이 구절의 핵심은 “사람의 지혜”라는 표현으로, 복음과 세상의 철학적 지혜를 명확히 구분하는 신학적 대조 구조의 중심 축을 이룬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천주교 성경 등 현대 역본들은 소수 사본의 오류를 따름으로써, 이 중요한 대조 구조를 흐리게 만들고 본문의 신학적 핵심을 약화시키고 있다. 이 구절에서도 오직 킹제임스 성경(KJV)만이 말씀의 깊이와 정확성을 손상 없이 보존하고 있다. 하나님의 권능은 사람의 지혜가 아닌, 성령의 실증으로 증언된다.
2025-05-24 16:22:08 | 관리자
사도행전 25장 16절 "죽게 하는 것" 삭제    사도행전 25장 16절은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로마 총독 베스도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이송해 재판하자고 요청한 것에 대해 베스도가 로마법의 원칙을 설명하는 장면이다. 이 구절에서 핵심은, 피고가 변명할 기회도 갖기 전에 그를 "넘겨주어 죽게 하는 것"(KJV)이 로마 사람들의 관례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중요한 내용, 즉 “죽게 하는 것(to die)”이라는 법적·형벌적 결과를 명확히 포함시키고 있는 반면, 개역성경, NIB, NIV, 천주교 라틴 벌게이트 계열 등 현대 역본들은 이 중요한 표현을 생략하고 있다. 1. KJV 원문: 죽음의 결과까지 명확히 표현 Acts 25:16 (KJV): “To whom I answered, It is not the manner of the Romans to deliver any man to die, before that he which is accused have the accusers face to face, and have licence to answer for himself concerning the crime laid against him.” “내가 그들에게 응답하되, 고소당한 어떤 자가 고소인들과 얼굴을 마주 보고 자기가 고소당한 범죄에 대하여 자기를 위해 답변할 기회를 갖기도 전에 그 사람을 넘겨주어 죽게 하는 것은 로마 사람들의 관례가 아니라, 하였나이다.” 여기서 “to deliver any man to die”(누군가를 죽도록 넘겨주는 것)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그를 넘겨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법적 절차 없는 처형을 말하며, 로마법의 정당한 절차주의(principle of due process)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 현대 역본의 생략 – 개역/NIV/NIB/천주교 성경 개역성경: “내가 대답하되 무릇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고소 사건에 대하여 변명할 기회가 있기 전에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NIV: “I told them that it is not the Roman custom to hand over any man before he has faced his accusers and had an opportunity to defend himself.” 여기서는 “죽게 하다(to die)”, 즉 형벌의 결과에 대한 언급이 완전히 빠져 있다. → 이는 독자로 하여금 그저 일반적인 송환이나 인도 문제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으며, 본문의 긴박성과 위법성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게 한다. 3. 사본 증거 비교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 사본 계열(Textus Receptus)을 따르며, 본문에 “παραδοθῆναι εἰς θάνατον”(넘겨져 죽게 하다)라는 표현이 분명히 존재한다. παραδοθῆναι = 넘겨주다 εἰς θάνατον = 죽음에 이르도록 반면, 소수 사본 계열(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 알렉산드리아 본문)에서는 “죽게 하다”라는 부분(εἰς θάνατον)이 빠져 있거나 생략되어 있다. 이에 따라, 현대 역본들(NIV, NRSV, 개역 등)은 이 소수 사본을 반영하여 단지 “내주다”, “인도하다” 정도로 번역하고, 본문이 지닌 법적·도덕적 긴박성과 바울의 위기 상황을 무디게 만든다. 4. 신학적·문맥적 분석 본문의 핵심 논점은 ‘죽음’이다. → 유대인들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압송하여 암살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행 23:15, 25:3). → 따라서 베스도의 이 말은 단순한 행정적 거절이 아니라, 바울을 사형으로 몰아가려는 불법적 요청을 거절한 로마법의 원칙 선언이다. “넘겨주는 것”과 “죽게 넘겨주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 생명을 걸고 있는 상황에서, 단지 “내주는 것은 로마법에 맞지 않는다”라는 표현은 결정적인 맥락 설명이 부족하다. 로마법의 정당성 vs 유대인의 모략이 대조되는 장면이다. → 로마는 적어도 원칙적으로 재판 없는 처형을 금지했으며, 바울의 로마 시민권은 그 원칙 안에서 보호되어야 했다. 이 구절은 바로 그 정당한 법의 적용을 선언하는 절정이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결과가 반드시 명시되어야만 본문의 의미가 온전히 전달된다. 5. 결론 사도행전 25장 16절은 로마 총독 베스도가 유대인들의 불법적 바울 인도 요청을 거절하며, 재판 없는 사형 집행은 로마법의 관례에 맞지 않음을 강조하는 장면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넘겨주어 죽게 하는 것”이라는 표현을 통해 바울이 어떤 위협 속에 있었는지, 그리고 로마법이 어떻게 그의 생명을 보호했는지를 정확히 보여 준다. 반면, 개역성경, NIV, 천주교 사본 기반 현대 역본들은 소수 사본에 따라 이 중요한 문장을 축소하거나 삭제함으로써, 본문의 법적 논리, 긴박성, 신학적 의미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도, 오직 킹제임스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손상 없이 보존하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2025-05-24 15:45:55 | 관리자
사도행전 24장 7절 전체 삭제   사도행전 24장 7절은 바울이 벨릭스 총독 앞에서 고소당하는 재판 장면에서 등장하는 구절로, 유대인 측 고소장 내용의 핵심 흐름을 구성하는 부분이다. 이 본문은 킹제임스 성경(KJV)에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개역성경, NIV, 천주교 라틴 벌게이트 계열 성경들에서는 완전히 생략되어 있다. 이 생략은 단순한 문장의 누락이 아니라, 본문의 논리적 흐름과 법적 정황의 설명력을 크게 훼손하는 문제를 낳는다. 1. KJV의 본문 내용 Acts 24:7(KJV): “But the chief captain Lysias came upon us, and with great violence took him away out of our hands,” “그러나 총대장 루시아가 우리를 기습하여 큰 폭력으로 우리 손에서 그를 빼앗아 데리고 간 뒤” 이 구절은 당시 유대인 고소자들이 자신들의 실패를 로마 총독 앞에서 정당화하기 위해 한 주장으로, 바울을 체포하고 조사하려 했던 자신들의 행위를 로마 군대의 개입으로 인해 중단당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이 말은 총대장 루시아(천부장)가 우리를 방해하고, 폭력적으로 바울을 빼앗아 갔다는 식의 책임 회피와 불만 제기이며, 동시에 로마 당국자에 대한 정치적 비난을 우회적으로 담고 있다. 이 내용이 포함되어야만 8절에서 벨릭스 총독에게 진상을 직접 확인하라고 하는 논리가 이어질 수 있다. 2. 개역/NIV 등 현대 역본의 누락 개역성경: 사도행전 24장 7절 자체가 없음(6절에서 바로 8절로 넘어감) NIV 등: 동일하게 7절이 통째로 빠져 있으며, 간혹 각주로만 처리됨 3. 누락의 문제점 법정 진술의 완성도가 무너진다 → 고소 내용이 중간에서 갑자기 끊기고, 로마 총독 벨릭스에게 진실 여부를 확인하라는 8절의 요청이 맥락 없이 튀어나오게 된다. 총대장 루시아의 등장이 사라진다 → 이 장면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루시아의 행동과 개입이 사라지면, 바울의 체포 경위에 대한 설명과 책임 구도가 흐려지게 된다. 로마 권력 비판의 뉘앙스가 사라진다 → 유대인 측은 루시아의 강제 개입을 ‘폭력’이라 규정하여 은근히 고소를 로마 당국 쪽으로 돌리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 부분이 누락되면, 고소인의 동기와 전략이 보이지 않게 된다. 4. 사본 증거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 사본(Textus Receptus) 및 비잔틴, 안티오크 계열의 그리스 사본들을 근거로 본문의 7절 전체를 보존하고 있다. 그러나 소수 사본(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는 사도행전 24장의 7절 전체가 생략되어 있으며, 현대 역본들(NIV, ESV, 개역 등)은 이러한 소수 사본을 기반으로 해당 구절을 본문에서 삭제하거나 각주 처리하고 있다. 이는 본문의 신뢰도와 정경성 판단에서 매우 신중해야 할 부분임에도, 중대한 서술 논리의 축을 제거한 것으로 평가된다. 5. 본문의 논리적 정합성 사도행전 24장 6–8절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연결된다(KJV 기준): 6절: 우리가 바울을 붙잡아 율법에 따라 재판하려 하였으나, 7절: 그러나 총대장 루시아가 우리를 기습하여 바울을 강제로 데려갔다. 8절: 그래서 당신(벨릭스 총독)이 직접 조사해 보면 이 모든 일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7절이 빠진다면, 6절과 8절은 이렇게 이어지게 된다: 바울을 붙잡았고... → 벨릭스 총독이 직접 조사해 보십시오 → 중간의 사건 설명이 누락되어 논리적 비약이 발생한다. 6. 결론 사도행전 24장 7절은 단지 하나의 설명 절이 아니라, 사건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역사적·법적 문맥을 제공하는 절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 사본과 정경적 일관성에 따라 총대장 루시아의 개입과 유대인들의 고소 논리를 정확히 보존하고 있으며, 본문의 흐름과 법정 상황을 논리적, 사실적으로 완성시킨다. 반면, 개역 성경과 NIV, 천주교 계열 현대 역본들은 소수 사본을 따라 해당 구절을 삭제하거나 생략함으로써, 본문의 일관성과 신학적 깊이를 축소하고, 독자에게 왜곡된 문맥과 흐름을 제공하고 있다. 이 구절 역시 킹제임스 성경만이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주는 증거이다.
2025-05-24 15:42:31 | 관리자
사도행전 20장 24절 "이 일들 중 어떤 것도 나를 움직이지 못하며" 삭제   사도행전 20장 24절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 메시지를 전달하며 자신의 사역에 대한 결단과 자세를 밝히는 매우 중대한 본문이다. 이 구절은 바울이 어떠한 시련이나 위협도 자신의 사명을 막지 못한다는 고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심에는 바로 “이 일들 중 어떤 것도 나를 움직이지 못하며”라는 선언이 있다. 그런데 이 핵심 표현은 킹제임스 성경(KJV)에는 분명히 포함되어 있으나, 개역성경, NIV, 개역개정 등 현대 역본들에서는 완전히 삭제되거나 축소되어 있다. 이로 인해 바울의 의지와 결심의 맥락이 약화되고, 본문은 단지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의 고백처럼 변질된다. 1. KJV 본문: 명확한 의지와 결단의 표현 Acts 20:24(KJV): “But none of these things move me, neither count I my life dear unto myself, so that I might finish my course with joy, and the ministry…” “이 일들 중 어떤 것도 나를 움직이지 못하며 내가 나의 생명을 내게 귀한 것으로 여기지도 아니하노니…” 여기서 바울은 앞서 말한 결박, 고난, 박해 등 온갖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 일들 중 어떤 것도 나를 움직이지 못한다”라고 단호히 말한다. 이 표현은 단순한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바울이 외적 환경이나 육체적 위험에 흔들리지 않고 사명에 집중하며, 기쁨으로 자기 길을 마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2. 현대 역본의 번역 생략 – 개역성경, NIV 등 개역성경: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여기서는 KJV의 앞부분인 “이 일들 중 어떤 것도 나를 움직이지 못하며(But none of these things move me)”가 완전히 삭제되었다. 3. 문맥상 문제점 바울의 고백이 내면적 결심이 아니라, 단순히 생명에 대한 체념처럼 보인다. → 즉, 사역은 중요하니 죽어도 상관없다는 식의 소극적인 표현으로 전락한다. 위협과 사명 사이의 갈등과 결단이 표현되지 않는다. → KJV에서는 “고난이 닥치지만 나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는 의지의 선언이 명확하다. 그러나 현대 역본에는 그 결단의 전제 자체가 없다. 본문 흐름이 단절된다. → 사도행전 20장 23절에서는 성령께서 각 도시마다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경고하셨다. 바로 그에 이어서 바울은 “그러나 그런 것들은 나를 움직이지 못한다”는 선언으로 대답해야 논리적이고 문맥상 일관되다. 그런데 이 핵심 문장이 빠지면, 앞뒤 흐름이 뚝 끊기고 중심이 사라진다. 4. 사본 증거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 사본 계열(Textus Receptus)에 따라 다음과 같은 원문을 따른다: “ἀλλ᾽ οὐδενὸς λόγου ποιοῦμαι οὐδὲ ἔχω τὴν ψυχὴν τιμίαν ἐμαυτῷ…” 번역: “그러나 나는 이 일들 중 어떤 것도 내게 의미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내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노라…” 여기서 “οὐδενὸς λόγου ποιοῦμαι”는 문자적으로 “어떤 것도 나를 움직이지 못한다”, “나는 아무것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라는 강한 부정 표현이다. 반면, 소수 사본(알렉산드리아계열)에서는 이 구절의 첫 문장 일부가 생략되었거나 압축된 형태로 등장하여, 현대 역본들은 이러한 부패된 소수 사본을 따라 이 중요한 구절을 생략하고 있다. 5. 신학적·영적 맥락의 핵심 바울의 사역 태도와 고난에 대한 자세 → KJV는 바울이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려는 결연한 자세를 강조한다. → 이는 바울 서신 전체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신학적 중심이다(참고: 고후 4:8–11, 빌 3:8–14). 성령의 예언과 인간의 반응 → 사도행전 20:23에서 성령께서 경고하셨고, 24절에서 바울은 그에 대해 반응한다. → 현대 역본에서는 그 반응(“나를 움직이지 못한다”)이 생략되어 하나님-사람 사이의 대화 구조가 파괴된다. 복음을 향한 결단의 모범 → 이 구절은 오늘날 사역자들에게 생명보다 사명이 중요하다는 바울의 모범을 보여 주는 핵심 말씀이다. → 이 고백은 “죽어도 좋다”라는 수동적 자세가 아니라, “죽음조차 나의 사명을 막지 못한다”라는 능동적 결단이어야 한다. 6. 결론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난과 결박 앞에서도 사역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믿음의 고백을 드러낸다. 이 고백의 중심은 “이 일들 중 어떤 것도 나를 움직이지 못한다”는 선언이며, 이는 성령의 경고에 대한 믿음의 반응이자, 복음 전파를 향한 헌신의 절정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결단의 본질을 명확히 보존하고 있는 반면, 개역성경, NIV 등 현대 역본들은 소수 사본에 따라 이 중요한 문장을 생략함으로써, 본문의 논리, 문맥, 신학, 영적 교훈을 심각하게 축소시켰다. 이 구절에서도, 오직 KJV만이 바울의 마음 속 깊은 결단을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보존하고 전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2025-05-24 15:37:15 | 관리자
사도행전 18장 17절 "그리스 사람들" 삭제   사도행전 18장 17절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던 중, 유대인들이 그를 고소하려다 실패한 후에 일어난 장면을 기록한다. 이 본문에서 킹제임스 성경(KJV)은 바울을 고발한 유대인들의 시도가 실패하자, “모든 그리스 사람들이(Greeks)”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잡아 재판석 앞에서 때렸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등 현대 역본들은 이 중요한 표현인 “그리스 사람들(Greeks)”을 완전히 삭제하고, 단지 “모든 사람들이” 혹은 “그들 모두”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대체하고 있다. 이 번역상의 생략은 단순한 어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본문의 문맥, 인물 구도, 역사적 상황의 이해에 중대한 혼란을 초래한다. 1. KJV의 정확한 번역과 문맥 “Then all the Greeks took Sosthenes, the chief ruler of the synagogue, and beat him before the judgment seat. And Gallio cared for none of those things.” “이에 모든 그리스 사람들이 회당의 우두머리 치리자 소스데네를 붙잡아 재판석 앞에서 때리니라. 그러나 갈리오는 그 일들 중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아니하였더라.” 여기서 “Greeks(그리스 사람들)”은 바울을 고소한 유대인들의 행동에 반발하여, 법정 앞에서 그들을 대표한 회당장 소스데네를 직접 응징한 인물들이다. 즉, 이 구절은 그리스 헬라인들(이방인들)이 유대인의 선동과 폭력을 거부하며 분노를 표출한 역사적 장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Gallio(갈리오)”는 당시 고린도의 총독으로서 이방 재판권자가 유대인의 종교 분쟁에 개입하지 않고 무관심했다는 정치적 중립성을 드러내는 배경이 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그리스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절대 생략될 수 없는 핵심 정보다. 2. 현대 역본의 왜곡 – 개역, NIV 등 개역성경: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현대 역본에서는 “모든 사람들”이라는 불분명한 표현만 남기고, 행위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는 다음과 같은 혼란을 유발한다: 유대인들이 자기 회당장을 때린 것처럼 보인다. → 이는 본문 바로 앞 절(행 18:14–16)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한 당사자들이었음을 고려할 때, 자기들이 고소에 실패했다고 해서 자기 회당장을 구타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어색하다. 문맥의 흐름이 끊긴다. → KJV에서는 유대인들이 실패하고, 그리스 헬라인들이 그들의 폭력적 종교 분열에 분노하여 응징한 것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명확하게 나와 있다. 하지만 현대 역본은 이 장면을 단순한 폭력 사건처럼 축소시켜, 법정 앞에서 무작위 군중이 폭동을 일으킨 것처럼 표현한다.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역사적 사실이 가려진다. → 본문의 핵심은: 복음을 반대한 유대인들이 실패하고, 헬라인 사회 전체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는 거침돌이 되었으나, 이방인 세계로 점점 확장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3. 사본 증거 킹제임스 성경은 다수 사본(Textus Receptus)을 따른다. 이 사본에는  “πάντες οἱ Ἕλληνες” – “모든 그리스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명확하게 존재한다. 반면, 소수 사본(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에서는 “πάντες(모든 사람들)”이라는 단어만 남아 있거나 “Ἕλληνες”(그리스인)가 누락되어 있다. 현대 역본들(NIV, ESV, 개역 등)은 이러한 소수 사본에 기반하여, ‘그리스 사람들’을 삭제하거나 중립화시켜 본문 의미를 축소시킨 것이다. 4. 결론 사도행전 18장 17절에서 “그리스 사람들(Greeks)”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민족 정보가 아니라,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들과 복음을 향해 열린 이방인 헬라인 사회의 반응 차이를 보여 주는 중요한 역사적, 신학적, 문맥적 요소이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등 현대 역본들은 이 표현을 생략함으로써, 독자에게 사건의 전말과 인물 구도, 복음의 전파 방향성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그 결과,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이방 세계로 향하는 복음의 역사가 가려지고, 본문이 말하는 핵심이 흐릿해지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 구절에서도, 오직 킹제임스 성경(KJV)만이 본문의 전체 구조와 흐름, 역사성, 교리적 맥락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 성경을 성경답게 이해하려면, 정확히 보존된 말씀에 기초해야 한다.
2025-05-24 15:32:33 | 관리자
사도행전 17장 5절 "믿지 아니하는" 삭제   사도행전 17장 5절은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발생한 사건을 다루며,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명확히 구분하여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이 본문에서 킹제임스 성경(KJV)은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the Jews which believed not)”이라는 형용사절 구조를 통해 유대인 전체가 아니라, 믿지 않은 일부 유대인들이 시기심으로 폭동을 일으켰다는 정확하고 제한된 묘사를 한다. 하지만 개역성경과 현대 역본들(NIV 등)은 “유대인들은 시기하여…”라고 단순히 일반화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모든 유대인들이 동일하게 복음을 반대한 것처럼 오해를 유발하고, 본문의 인물 구분과 신학적 맥락을 손상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1. KJV 번역과 본문의 명확성 Acts 17:5(KJV): “But the Jews which believed not, moved with envy…”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은 시기심에 동요되어…” 여기서 핵심은 “which believed not”이라는 형용사절이다. 이 표현은 유대인들 중에서도 믿음을 가지지 않은 자들만을 특정하여 행동의 주체로 명확히 지정한다. 즉,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기로 작정한 자들이 시기심에 사로잡혀 불량배들을 동원해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 구조 덕분에 독자는 유대인들 전체를 일반화하지 않고, 오직 불신자들만이 악한 행동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2. 현대 역본의 축소된 번역 개역성경: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여기서는 “믿지 아니하는”이라는 중요한 수식어가 생략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모든 유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시기하고 폭력을 주도한 것처럼 보이게 되는 중대한 번역상의 오류를 낳는다. 이는 단순한 문장 간략화가 아니라, 본문의 역사적 인물 구도와 복음의 수용/거절 구분을 없애는 심각한 왜곡이다. 3. 사본 증거 킹제임스 성경은 다수 사본 계열(Textus Receptus)에 따라 해당 구절에 “οἱ δὲ Ἰουδαῖοι οὐ πειθόμενοι”라는 헬라어 구절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οὐ πειθόμενοι: “믿지 않은, 설득되지 않은”이라는 분사 표현으로, 형용사처럼 앞의 명사 “유대인들”을 수식하는 구조이다. → 정확히 번역하면: “믿지 않은 유대인들” 그러나 소수 사본 기반의 현대 역본들(NIV, 개역 등)은 이 표현을 생략하거나 일반화하여, 본문이 가진 신학적·역사적 뉘앙스를 무너뜨리고 있다. 4. 신학적·문맥적 중요성 복음 앞에서의 분명한 반응 구분이 사라진다 → 본문에서는 어떤 유대인들은 믿었고, 어떤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다(행 17:4 참조). → 그런데 “믿지 아니하는”이라는 수식어가 빠지면, 독자는 마치 모든 유대인들이 복음을 반대하고 폭력을 일으킨 것처럼 오해하게 된다. 바울 사역의 성과가 희석된다 → 사도행전 17장 4절은 바울의 말씀을 듣고 “많은 헬라인들과 귀부인들” 그리고 유대인 중 일부가 믿었다고 말한다. →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믿지 않은 자들의 행동을 특정하지 않고 “유대인들” 전체로 일반화하면, 바울의 사역 결과가 부정적으로 왜곡될 수 있다. 유대 민족 전체에 대한 불필요한 반감이나 오해 유발 → 본문의 원래 목적은 복음에 대한 불신과 그 결과를 보여 주는 것이지, 유대 민족 전체를 악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다. → 따라서 문맥상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라는 표현은 필수적이다. 5. 결론 사도행전 17장 5절은 복음을 거절한 자들이 어떻게 행했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본문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 사본에 따라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라는 표현을 정확히 번역함으로써, 믿은 자들과 믿지 않은 자들을 구분하고, 악한 행동의 주체를 명확히 제한하고 있다. 반면, 개역성경 및 현대 역본들(NIV, NRSV 등)은 이 구절에서 형용사 수식을 생략함으로써 전체 유대인들을 싸잡아 일반화하고 있으며, 이는 본문의 진의와 신학적 분별력을 무너뜨리는 심각한 번역적 오류이다. 이 구절에서도 킹제임스 성경만이 정확하고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25-05-24 15:29:19 | 관리자
요한복음 20장 29절의 "도마야" 삭제   요한복음 20장 29절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직접 말씀하시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믿음의 본질을 가르치기 위한 예수님의 의도적인 교훈 장면이며 그 중심에는 의심 많은 도마(Thomas)라는 인물이 서 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킹제임스 성경(KJV)과 현대 역본들(개역, NIV 등) 사이에 중대한 번역 차이가 있다. 특히 현대 역본은 예수님이 도마를 직접 지칭하신다는 중요한 요소를 생략함으로써 본문의 인물 중심성과 문맥 흐름, 그리고 신학적 강조점을 흐리게 만들고 있다. 1. 킹제임스 성경의 본문(John 20:29, KJV) “Jesus saith unto him, Thomas, because thou hast seen me, thou hast believed: blessed are they that have not seen, and yet have believed.”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도마야,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었으나 보지 않고도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도마의 이름을 직접 부르신다: “Thomas”(도마야). 이는 단순한 언급이 아니라, 말씀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부각시키는 중요한 요소다. 예수님은 도마의 의심을 아셨고, 도마가 자기 손으로 예수님의 못 자국을 만지기 전까지는 믿지 않겠다고 말한 것을 아셨다(요 20:25). 따라서 예수님은 그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때, 이름을 부르시며 정면으로 대면하신다. 2. 현대 역본의 번역 문제(개역, NIV 등)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 번역에서는 “도마야”라는 예수님의 직접 호명이 생략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에게 말씀하시는지 문맥적으로는 알 수 있지만, 그 대화의 강도와 인격적 대면성은 약화된다. 독자는 이 말씀이 도마 개인에게 한 말인지, 혹은 제자들 모두에게 한 말인지 불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3. 사본 증거 헬라어 본문에서 KJV가 따르고 있는 다수 사본(Textus Receptus)에는 다음과 같이 명확히 “Τόμᾶ”(Thomas)라는 호칭이 포함되어 있다. Λέγει αὐτῷ ὁ Ἰησοῦς· Θωμᾶ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도마야,…” 이 구절에서 Θωμᾶ(도마)는 호격으로 쓰인 이름으로,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부르심을 나타내며, 예수님이 도마를 지목하여 책망과 동시에 사랑으로 교훈하고 계심을 드러낸다. 반면, 소수 사본(알렉산드리아 계열)에서는 이 이름이 누락되거나 일부에서 생략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 소수 사본을 기반으로 한 현대 역본들(NIV, 개역 등)은 이를 그대로 반영하면서 본문의 인물성과 대화의 강렬함을 상실하게 된다. 4. 신학적·문학적 중요성 도마의 회복 → 예수님께서 도마를 직접 부르신 것은 그를 향한 회복과 권면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며, 단지 책망이 아니라 개별적 인격적 접근을 통해 믿음을 회복시키는 장면이다. 복음의 대상은 개인이다 → “도마야”라고 부르심으로써, 예수님은 복음이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교훈하신다.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이 있다’라는 선언은 모든 세대의 신자들에게 주는 교훈이지만, 이 교훈은 도마라는 실존 인물을 정면으로 대하며 시작된다. 문맥적 강조의 유지 → 이름을 부름으로써 문맥의 초점이 흔들리지 않고 정확히 유지되며, “보지 않고 믿는 자”와 “보고서야 믿은 도마”의 대조가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5. 결론 요한복음 20장 29절에서 “도마야”라는 직접 호칭은 예수님께서 도마의 의심을 아시고도 친히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사랑과 권위의 표현이며, 그가 어떻게 믿음을 회복하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강력한 성경적 드라마의 정점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중요한 요소를 다수 사본에 근거하여 정확하게 보존하고 있으며, 독자들이 본문의 감정적, 신학적 깊이를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해 준다. 반면, 개역성경과 NIV 등의 현대 역본들은 이 이름을 생략함으로써, 말씀의 초점, 감정, 교훈의 깊이, 인격적 강조를 약화시키고 있으며, 그로 인해 도마와의 직접적 대면을 통한 믿음의 회복이라는 본문 핵심 메시지를 흐리게 만들고 있다. 이 구절에서도 킹제임스 성경만이 주 예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손상 없이 전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25-05-24 15:23:14 | 관리자
요한복음 9장 11절 실로암 "못" 삭제   요한복음 9장 11절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가 자신의 시력을 회복하게 된 과정을 간증하는 매우 중요한 본문이다. 이 구절에서 그는 예수님이 자신의 눈에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라고 명령하셨으며, 자신이 그 명령대로 행했을 때 시력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표현인 “실로암 못(The pool of Siloam)”이 킹제임스 성경(KJV)에서는 명확히 포함되어 있으나, 개역성경을 포함한 현대 역본들(NIV, NRSV 등)에서는 단순히 “실로암”이라고만 번역하여 문맥의 명확성과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를 희석시키는 번역 오류를 범하고 있다. 1. KJV 본문과 의미 John 9:11(KJV): “He answered and said, A man that is called Jesus made clay, and anointed mine eyes, and said unto me, Go to the pool of Siloam, and wash: and I went and washed, and I received sight.”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예수라 하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에게 이르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내가 가서 씻고 시력을 받았노라, 하니” 여기서 킹제임스 성경은 “the pool of Siloam”, 즉 실로암 못이라는 구체적인 장소를 명확히 밝혀 준다. “못(pool)”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지명 설명이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의 실제 수행 위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본문의 상황 묘사, 역사성, 그리고 순종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전달한다. 2. 현대 역본들의 번역 문제 개역성경, 개역개정, NIV, ESV 등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축소하여 번역한다: “진흙을 내 눈에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여기서는 “못(pool)”이라는 중요한 단어가 빠져 있다. 그 결과, 독자는 실로암이 어떤 곳인지, 물과 관련된 곳인지, 특정 지명인지조차 알기 어렵게 된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실로암을 동네 이름이나 막연한 지역명으로 오해할 수 있다. 이것은 성경의 역사적 현실성과 예수님의 기적의 구체성을 흐리는 중대한 번역 오류다. 3. 사본 증거와 본문 일치 헬라어 원문에서도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ὕπαγε εἰς τὴν κολυμβήθραν τοῦ Σιλωάμ “Go to the pool of Siloam” — 여기서 κολυμβήθραν(kolymbēthran)은 분명히 ‘못’ 또는 ‘연못’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 5장에서도 베데스다 못을 지칭할 때 사용된 동일한 단어이며, 요한복음 9장 7절에서도 다시 한번 사용된다. 따라서 본문 자체가 “실로암이라는 이름의 연못(pool)”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음에도, 현대 역본들이 이를 생략한 것은 본문 삭제 혹은 의도적 축소 번역에 해당한다. 4. 성경적·신학적 맥락에서의 중요성 기적의 구체성 → 예수님께서 명확히 지정한 물의 장소, 즉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것은 그 자체로 상징성과 순종의 의미가 담긴 역사적 행위였다. 순종의 강조 → 단순히 “실로암”에 간 것이 아니라, 지정된 못에서 씻는 것이 핵심이었고, 그 결과로 시력을 얻은 것이다. 구약과의 연결 → 실로암 못은 이사야 8:6에서도 등장하며, 예루살렘 성의 생명의 근원으로 상징되는 곳으로 중요한 신학적 연결 고리를 제공한다. 성경 지리와 신뢰성 → 실로암 못은 오늘날 고고학적으로도 확인된 유적지로, 성경의 역사성과 정확성을 지지해 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그런데 이 “못”이라는 단어가 빠지면 그 장소성과 실제성이 사라진다. 5. 결론 요한복음 9장 11절에서 “실로암 못(pool of Siloam)”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이 정확히 어디서 어떻게 수행되었는지를 밝히는 본문 핵심이다. 그러나 현대 역본(NIV, 개역 등)은 소수 사본의 영향이나 번역 의도에 따라 “못”이라는 단어를 삭제함으로써, 본문의 의미와 역사성, 신학적 깊이를 축소하고 왜곡하였다. 반면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수 사본의 전통을 따라 “the pool of Siloam”이라는 표현을 온전히 보존함으로써, 성경 본문을 읽는 독자들에게 정확한 지리적 정보와 명확한 기적의 구조를 전달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도 킹제임스 성경만이 말씀의 본래 의미를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2025-05-24 15:17:51 | 관리자
요한복음 6장 69절 "그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변개   예수님은 “그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1. John 6:69(KJV): “And we believe and are sure that thou art that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우리는 주께서 그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확신하나이다.” 킹제임스 성경은 여기서 베드로가 고백한 내용을 두 가지로 분명히 나타낸다. 첫째, 예수님은 “그 그리스도”, 즉 구약에서 예언된 유일한 메시아(기름 부음을 받은 자)시며, 둘째,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의 대리자나 선지자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즉 본질상 하나님과 동일하신 신성을 지닌 분이심을 확고히 고백한 것이다. 2. 현대 역본(개역, NIV 등):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 개역 / NIV / NIB 등: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현대 역본들은 이 구절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번역한다. 이 표현은 예수님의 신성과 유일성을 선명하게 드러내지 못하며, 본문이 가진 교리적 강도를 약화시킨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는 마가복음 1:24 등에서 귀신들도 사용하는 표현이지만, 그 의미는 모호하고 제한적이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과 비교할 때, 이 표현은 예수님의 본질을 포괄하지 못하는 불충분하고 축소된 칭호일 뿐이다. 3. 사본 증거: 소수 사본의 왜곡 킹제임스 성경은 다수 사본 계열(Textus Receptus)에 따라 “that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이라는 표현을 충실히 보존하고 있다.   반면, 현대 역본들(NIV, 개역 등)은 소수 사본(Alexandrian Text), 특히 시내 사본(Codex Sinaiticus)과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을 따르고 있는데, 이들 사본에서는 본문이 축소되어 “the Holy One of God”으로만 나타난다. 이러한 사본은 역사적으로 오리겐과 유세비우스 등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의 영향 아래에서 철학적 관념과 인간 중심 해석이 혼합된 부패 사본들로 평가되며, 복음의 신성과 절대성보다는 인간적 도덕성과 상징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4. 신학적 차이의 핵심 이 구절에서 나타나는 신학적 차이는 다음과 같다. 킹제임스 성경은 베드로의 고백을 마태복음 16장 16절과 동일한 구조로 유지하며, 예수님을 예언된 '메시아(그 그리스도)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선언한다. 이 고백은 단순한 칭호를 넘어, 예수님의 신성, 유일성, 구원자로서의 정체성을 정확히 드러내며, 초대 교회가 전한 복음의 핵심을 충실히 담고 있다. 반면, 현대 역본들은 이 고백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축소함으로써 예수님의 정체성을 애매한 신적인 인물 수준으로 낮춘다. 이로 인해 독자들은 예수님을 단지 거룩한 선지자, 혹은 하나님의 쓰임받은 사람 정도로 인식할 수 있으며, 그분이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하신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는 복음의 핵심 교리가 흐려지게 된다. 이와 같은 번역은 신학적으로 볼 때,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정체성이라는 핵심 교리 두 가지를 동시에 은폐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5. 결론 요한복음 6장 69절은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고백한 핵심 본문이며, 이 고백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메시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성경 전체 복음의 핵심 진리를 선포하는 구절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고백을 충실히 보존하고 있으며, 구속사적 흐름과 사도적 신앙 전통에 맞게 정확하고 강력한 진리를 선포한다. 그러나 개역, NIV, NIB 등의 현대 역본은 소수 사본에 따라 고백의 핵심을 축소하거나 삭제하여, 예수님의 유일성과 신성을 가리는 결과를 낳는다. 이 본문 또한, 검증되고 보존된 킹제임스 성경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복음의 중심을 온전히 선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2025-05-24 15:12:39 | 관리자
마태복음 19장 20절에서 "어려서부터" 삭제   젊은 청년이 “이 모든 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지켰는데 내게 아직도 부족한 것이 무엇이니이까?”라고 한 이 진술은 단순한 설명을 넘어, 이 청년의 마음 상태와 자기 의(義), 교만함을 드러내는 중요한 신학적 열쇠가 된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천주교 소수 사본에 기초한 현대 역본들(NIV, 개역, 개정 등)은 이 구절의 핵심 구문인 “어려서부터(from my youth up)”를 삭제하거나 생략한다. 1. KJV 번역: “from my youth up”의 중요성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The young man saith unto him, All these things have I kept from my youth up: what lack I yet?” “그 청년이 그분께 이르기를, 이 모든 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지켰는데 내게 아직도 부족한 것이 무엇이니이까? 하므로" 이 구절에서 청년은 율법을 어릴 때부터 철저히 지켜 왔다고 주장한다. 이 표현은 자기 자랑, 자기 의(義), 그리고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교만을 보여 주는 핵심 진술이다. 예수님은 곧 이어서 “네가 완전하게 되려거든...”이라고 말씀하시며, 그 청년의 진짜 문제는 율법적 외면이 아니라 마음 중심의 탐심임을 드러내신다. 2. 천주교 소수 사본 기반 현대 역본의 삭제 NIV, ESV, 개역개정 등은 이 구절을 단지, “이 모든 것은 내가 지켰나이다” 혹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습니다. 무엇이 부족합니까?” 등으로 번역한다. → “from my youth up”이 아예 빠져 있다. 이로 인해 독자는 이 청년이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율법을 지켜 왔다고 주장하는지, 그리고 그의 내면의 교만한 자세가 얼마나 깊은지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3. 사본 증거 KJV는 다수 사본(다수 본문, Byzantine Text), 특히 Textus Receptus(수용 본문)를 따르고 있으며, 여기에 “ἐκ νεότητός μου(from my youth up)”라는 문구가 명확히 존재한다. 반면, 천주교 사본 기반의 소수 본문(알렉산드리아 사본 계열)에서는 이 문구가 누락되어 있거나 의도적으로 생략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문장 생략이 아니라, 이 청년의 인격과 신앙의 본질을 판단할 수 있는 핵심 맥락이 제거된 것이다. 4. 신학적·교리적 해석의 차이 KJV(올바른 번역) → 청년은 자신이 오래전부터 율법을 지켜 왔다고 주장 → 이것은 자기 의에 대한 자부심,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교만의 증거 → 예수님은 이 청년의 외적 율법 준수 속에서도 드러나는 내적 탐심과 불신을 지적하심 현대 역본(삭제 번역) → 청년의 말이 짧고 단정하게 들리며, 마치 단순히 율법을 지켰다고 보고하는 듯한 인상 → 교만함, 자기 의에 대한 과시라는 본문의 신학적 뉘앙스를 약화시킴 5. 결론 마태복음 19:20의 “어려서부터(from my youth up)”라는 표현은, 이 부자 청년의 신앙적 교만과 자기 의를 드러내는 핵심 문구로서, 예수님께서 율법의 외형만이 아니라 마음의 진실함과 순종을 요구하신다는 진리를 설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천주교 소수 사본에 기반한 현대 역본들은 이 핵심 구절을 생략함으로써, 본문의 신학적 깊이와 도전, 경고의 힘을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이 구절에서도 검증된 다수 사본을 따르는 킹제임스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보존하고, 그 뜻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믿음을 갖되, 하나님의 말씀 전체가 온전하게 보존된 성경을 붙들라.
2025-05-23 19:41:15 | 관리자
마가복음 16장 9–20절: 성경에서 삭제되어야 하는 구절인가? 현대 역본들 가운데 대표적인 NIV(New International Version)는 마가복음 16장 8절과 9절 사이에 다음과 같은 주석을 삽입하고 있다: "[가장 신뢰할 만한 고대의 사본들과 다른 증거들에 의하면 막16:9-20은 없다.]" 이러한 주석은 독자들로 하여금 마가복음 16장의 마지막 12절이 성경에 없어야 할 구절이라는 인식을 갖게 만든다. 본문 비평학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이 12구절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이 일종의 학문적 유행이 된 듯하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9–20절을 마가복음 본문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몇몇 그리스어 사본(실제로는 바티칸 사본 B와 시내 사본 א 뿐)과 일부 초기 저술가들이 이 구절들을 포함하지 않는다. 9–20절의 문체와 어휘가 마가복음의 다른 부분들과 다르다. 누군가가 이 구절들을 후대에 첨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진짜 상황은 정반대다. 실제로 존재하는 증거들은 마가복음 16장 9–20절이 100%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보여 준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사본의 증거 19세기의 한 학자에 따르면, 마가복음 16장 9–20절은 600개 이상의 소문자 사본과 20개 고대 대문자 사본 중 18개 사본에서 발견된다. 즉, 총 618개의 그리스어 사본이 이 구절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고대 대문자 사본 중 알렉산드리아 사본(A), 에프래미 사본(C), 베자 사본(D) 등은 9–20절을 포함하고 있으며, 반대로 이를 생략하는 사본은 바티칸 사본(B)과 시내 사본(א) 단 두 개뿐이다. 그런데 이 두 사본은 본문 전체에서 심각한 훼손과 부주의한 누락을 보이는 신뢰할 수 없는 사본들이다. 실제로 바티칸 사본은 사복음서 전체에서 1,490회 이상 단어나 구절을 삭제하고 있으며, 시내 사본은 반복, 누락, 부정확한 필사의 흔적들이 가득하다. 특히 시내 사본의 마가복음 마지막 부분을 보면, 막 16:9–20이 들어갈 수 있는 빈 공간이 남겨져 있으며, 이는 이 구절이 본래 포함되어 있었으나 고의로 지워졌거나 빠졌음을 보여 준다. 데이비드 L. 브라운 목사는 직접 대영박물관에서 이 사본을 관찰한 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막 16:9-20 말씀이 누락되어 있었고, 그 부분에 무언가가 있었으나 지워졌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했다." 2. 초기 교회 저술가들의 증거 초대 교회의 18명의 저술가들이 마가복음 16:9–20절을 인용하고 있으며, 그 중 일부는 상세한 주석까지 남겼다. 이들은 다음과 같다: 파피아스 (주후 100년) 터툴리안 (145–220년) 저스틴 마터 (151년) 타티안 (150년) 이레니우스 (180년) 히폴리투스 (190–270년) 빈센티우스 (256년) 어거스틴 (400년) 니고데모 복음서 (250년경) 사도들의 헌장 (300년경) 유세비우스 (325년) 아프라아테스 (337년) 암브로스 (374–397년) 크리소스톰 (400년) 제롬 (331–420년) 네스토리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 (410년) 안디옥의 빅터 (425년) 빅터는 유세비우스의 의심을 인용하면서 반박하였고, 자기가 가진 팔레스타인 사본에도 9–20절이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이처럼 고대의 다양한 지역과 시기에 걸친 일관된 증거는 이 구절이 초대 교회에서 성경으로 인정받았음을 보여 준다. 3. 고대 역본들의 증거 고대 세계의 13개 주요 성경 역본들이 9–20절 말씀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그 대본이 되는 그리스어 사본들이 본래 이 구절을 포함하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2세기: 구 라틴역, 페시타 시리아역 3세기: 콥트역, 사히드역, 보하이르역, 파이움역, 큐레톤 시리아역 4세기: 제롬의 라틴역, 고트역 5세기: 아르메니아역, 이집트역, 필록세니아나 시리아역 6~7세기: 그루지아역, 에티오피아역 4. 성구집의 증거 교회 공예배에서 성경을 낭독할 때 사용하던 성구집(Lectionaries)들도 마가복음 16:9–20을 포함한다. 대표적으로 60, 69, 70, 185, 547, 1761번 사본 등에서 확인된다. 당시 관습에 따라 낭독 시작 지점에는 '아르케'(시작), 종료 지점에는 '텔로스'(끝) 라는 단어를 표기했는데, 마가복음의 한 필사자는 8절 후에 있는 '텔로스'를 오해하여 거기서 복음서가 끝났다고 잘못 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사본 24번은 8절 후에도, 20절 후에도 각각 '끝'이라는 표시를 모두 가지고 있어 9–20절이 정식 본문으로 포함되어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5. 신학적·문학적 일관성 마가복음이 16장 8절에서 다음과 같이 끝난다면: "그들은 무서워 떨며 도망하였고,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이는 지나치게 부정적이고 마가복음의 전체 흐름, 곧 예수님의 부활과 승리의 메시지와 전혀 맞지 않는다. 또한 다른 세 복음서들의 결말과 조화를 이루지도 않는다. 마가는 독자들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과 믿음을 남기고자 했으며, 이 절정은 바로 9–20절을 통해 성취된다. 6. 결론 마가복음 16:9–20은: 618개의 그리스어 사본에 포함되어 있고 18명의 초기 교회 저술가들이 인용하고 주석하였으며 13개 고대 성경 역본들이 이 구절을 포함하고 있고 성구집과 교회 예배 전통 속에서 사용되었으며 문학적, 신학적으로도 복음서의 완전한 결말을 제공한다. 반면, 이 구절을 제외한 사본은 오직 두 개뿐이며, 그마저도 신뢰하기 어려운 부패된 사본이다. 당신은 무엇을 믿을 것인가? 618개의 일관된 사본들과 초기 교부들의 역사적 증언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두 개의 손상된 사본과 일부 현대 비평가들의 주장을 믿을 것인가? 마가복음 16장 9–20절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2025-05-23 19:35:48 | 관리자
신약 성경 본문 역사와 관련해서 다수 본문이 모든 사본의 98%를 차지한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오늘날 신약 성경 본문과 관련된 가장 중대한 사실 중 하나는, 전체 현존 사본들 가운데 약 98%가 '다수 본문'(Majority Text) 계열에 속한다는 점입니다. 이 본문 계열은 킹제임스 성경(KJV)의 원문이 되는 ‘공인 본문’(Received Text, Textus Receptus)과 거의 일치하며, 1,000년 이상에 걸쳐 동방 교회와 정통 신자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낭독되고 복사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현대 역본들(NIV, NASB, ESV 등)의 기초가 되는 소수 사본들(예: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은 전체 사본의 불과 1~2%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소수 사본이 오늘날 학계와 출판사에서 더 “신뢰할 만하다”라고 여겨지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논점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1. 다수 본문은 원본에서 나왔다 다수 본문이 전체 사본의 98%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단순한 수의 문제가 아니라, 본문 보존의 흐름과 그 기원을 가리키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초대 교회는 사도들의 서신과 복음서를 신중하게 복사하고 전달했으며, 각 지역 교회들 간에 말씀을 교환하고 낭독하였습니다. 사본의 대다수가 동일한 본문을 담고 있다는 것은, 그 공통된 원형이 있다는 것이며, 바로 그것이 자필 원본(original autographs)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믿는 자들에 의해 신실하게 보존되었으며, 이 보존의 결과물이 바로 다수 본문입니다. 2. 루시안 개정 이론: 호르트의 허구 19세기 본문 비평학자인 호르트(Hort)는 다수 본문의 압도적 존재를 불편하게 여겼고, 그래서 이를 설명하기 위해 ‘루시안 개정설’이라는 이론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는 주후 250년경 안디옥의 루시안(Lucian)이라는 인물이 신약 성경을 고의적으로 "수정"하여 다수 본문을 만들어 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이론은 단 하나의 역사적 증거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루시안이 실제로 그런 작업을 했다는 기록은 고대 교부들 가운데 누구도 남기지 않았고, 그에 대한 논쟁이나 반박, 혹은 교회 회의에서의 언급조차 없습니다. 만일 루시안이 신약 성경 전체를 ‘개정’하고 그것이 전체 교회에 퍼졌다면, 교부들 사이에서 분명히 격렬한 반발이나 논쟁이 있었어야 합니다. 초기 교회는 성경의 권위에 극도로 민감했기 때문에, 고의적인 변개는 결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시안 개정설은 아무도 저항하지 않았고, 아무 기록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는 호르트의 이론이 단지 다수 본문을 제거하기 위한 조작된 가설에 불과했음을 보여 줍니다. 결국 이 이론은 학문적으로 폐기되었습니다. 3. 다수 본문 내부의 일치성과 소수 본문의 불일치 다수 본문은 사본의 수만 많은 것이 아니라, 본문 자체의 일치율도 매우 높습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다수 본문 사본들은 놀라울 정도로 본문의 내용이 일관되며, 구절의 존재 여부나 구문의 위치, 문장 구조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습니다. 반대로, 소수 본문들은 사본 간 차이가 너무도 심각합니다. 바티칸 사본(B), 시내 사본(א), 알렉산드리아 사본(A)은 서로 다른 수천 개의 이문들을 지니며, 동일한 구절조차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따라서 소수 사본들끼리도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것들이 결코 ‘원본’에 가까운 계열이 아님을 입증합니다. 4. 역사적으로도 다수 본문에 대한 저항이 없었다 다수 본문은 자발적이고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으며, 교회 전체가 이를 사용해 왔습니다. 만일 다수 본문이 루시안이나 다른 어떤 개인에 의해 고의로 만들어진 결과였다면, 그 과정에서의 논쟁, 교회적 저항, 문서 기록이 반드시 남아 있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클레멘트(주후 96년)는 이미 신약의 27권 중 16권에서 인용하고 있으며, 베드로(주후 70년 이전)는 바울의 서신을 “다른 성경기록”으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신약 성경 본문이 일찍부터 정리되고 전승되어 왔음을 보여 줍니다. 5. 실제 사본 증거: 마가복음 16장 삭제 사건 소수 사본이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보여 주는 한 가지 예는 마가복음 16장 9–20절의 삭제 사건입니다. 시내 사본(Codex Sinaiticus)은 이 구절이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본을 직접 확인한 데이비드 L. 브라운(David L. Brown) 목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나는 대영 박물관에 가서 시내 사본을 직접 확인했으며, 마가복음 16장 9–20절이 누락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구절이 있었던 자리에 빈 공간이 남아 있고, 지워진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의도적으로 그 구절을 제거한 것임을 보여 준다.” 출처: logosresourcepages.org/Versions/uncials.htm 이는 단순한 필사 실수가 아닌 고의적 변개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5. 결론: 다수 본문이 98%를 차지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와 교회의 신실함 때문이다 결국 다수 본문이 전체 사본의 98%를 차지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증명합니다. 1) 본문의 기원이 자필 원본에서 시작되었음을 입증한다. 2) 교회가 이 본문을 신실하게 받아 보존해왔음을 보여 준다. 3) 변개된 소수 사본은 중심에서 밀려나 변두리로 사라졌음을 드러낸다. 현대 본문 비평학은 때로 다수 본문을 무시하고 소수 사본을 절대시하지만, 이것은 논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매우 취약한 입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신다는 약속(시 12:6–7; 마 24:35)은 다수 본문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다수 본문은 우연히 많아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교회의 신실한 사본 보존 역사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 성경의 진정한 본문을 찾으려 할 때, 킹제임스 성경이 기반한 전통적 다수 본문 계열을 신뢰해야 하며, 알렉산드리아의 소수 사본과 그에 기초한 현대 역본들에 대해 경계해야 합니다.
2025-05-23 18:21:21 | 관리자
신약 성경 본문 역사와 관련해서, 만일 신약 성경 사본들의 전달 과정이 정상적이었다면 살아남은 사본들은 어떤 모습이 될까?   이 질문은 매우 본질적인 문제를 다룹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 이후, 교회 역사 속에서 그 말씀이 어떻게 전달되고 보존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본들의 흐름과 특징을 살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신약 성경의 전달 과정이 정상적이었다면, 즉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말씀을 신중히 보존하셨다면,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사본들은 어떤 형태를 이루고 있어야 할까요?   1. 다수와 중심: 큰 물줄기의 형상 정상적인 전달이란, 처음부터 진리를 받은 사람들이 정직하게 사본을 필사하고, 이 사본들이 신속하게 널리 퍼져 나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흐름이 있었다면, 우리는 하나의 굵은 본문 전통이 중심이 되고, 그 주변에 비교적 작고 흩어진 변개된 사본들이 존재하는 구조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큰 강이 한 방향으로 흐르며 중심 물줄기를 이루고, 그 주변에 일부 잔물결이나 소용돌이가 가장자리에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즉, 사본의 다수는 중심의 본문을 반영하고, 그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일부 사본들만이 오류나 변개를 담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구조는 성경 본문 역사에서 실제로 그대로 관찰됩니다. 우리가 보는 다수 사본(Majority Text)은 거의 동일한 형태로 수많은 사본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며, 이 본문이 전통적으로 ‘공인 본문(Received Text)’ 혹은 ‘TR(Textus Receptus)’이라고 불려 온 것입니다. 이는 정통 교회들이 사용해 온 본문이며, 하나님께서 섭리로 보존하신 말씀의 흐름이기도 합니다. 2. 역사적 근거: 다수 사본의 압도적 우위 실제 전해진 신약 성경 사본들 가운데 95% 이상이 이 다수 본문 계열에 속해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 소아시아, 시리아, 동방 교회들에 의해 보존된 본문들로, 킹제임스 성경(KJV)과 루터 성경, 종교 개혁자들이 사용했던 성경들이 모두 이 본문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반면, 변개된 소수 사본들(예: 시내 사본 Codex Sinaiticus, 바티칸 사본 Codex Vaticanus)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지역에서 주로 등장하며, 전체 사본 중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주류에서 벗어난 본문을 담고 있으며, 구절 생략, 단어 변경, 의도적인 왜곡이 빈번하게 발견됩니다. 이는 이미 정상적인 전달 과정에서 벗어난 흔적들입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초대 교회가 사도들의 권위를 따르며 본문을 신중하게 전파했던 지역에서는 이러한 사본들이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교회가 신속히 거부하거나 사용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신학적 분별: 살아남은 사본은 교회의 선택을 반영한다 본문 보존은 단지 기술적 필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교회의 분별이라는 신학적 틀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안에서 말씀을 보존하셨고, 교회는 성령님의 조명을 따라 진리를 분별해 왔습니다. 정통 교회는 다수 사본의 본문을 채택하여 이를 낭독하고 설교하는 중심 본문으로 삼았으며, 신자들도 이 본문을 통해 구원을 얻고 신앙을 지켜 왔습니다. 반면, 변개된 소수 사본은 초기부터 교회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고, 이단들이나 불신자들의 철학적 해석을 더 잘 반영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결국 어떤 사본이 ‘살아남는가’라는 문제는, 단순한 종이의 수명이나 환경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본문과 교회의 선택이라는 요소가 결정짓는 것입니다. 살아남은 사본이 다수 본문 중심이라는 사실은 이 선택과 섭리를 확실하게 반영합니다. 4. 변개 사본은 왜 주변부에 머무는가? 역사적으로도 변개된 본문이 중심을 차지하지 못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초대 교회는 원본과 일치하지 않는 사본을 적극적으로 거부했다. 폴리캅과 같은 초대 교부들은 여전히 원본 구절을 확인할 수 있었고, 기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 지역과 소아시아의 교회들은 원본에 충실한 사본을 신속히 확산시켜 다수 사본군을 형성했다. 부패한 사본들은 필사자들과 독자들에 의해 신뢰를 얻지 못했고, 시장성도 없었기에 점차 사멸되었다. 5. 결론: 정상적 전달의 본모습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만일 신약 성경의 전달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정상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면, 살아남은 사본들은 다수로 존재해야 하며, 본문은 대체로 일관되고 안정적이어야 하며, 일부 변개된 사본들이 주류의 바깥쪽에서 제한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가진 사본들의 분포와 본문 간의 차이는 이러한 흐름을 잘 보여 줍니다. 킹제임스 성경과 전통 본문(공인 본문)은 이 중심적인 계보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알렉산드리아 본문 계열과 그 위에 세워진 현대 역본들은 본문 전통의 주변부에서 벗어난 일종의 소용돌이에 불과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정상적 본문 전달 과정이 이루어졌다는 가장 확실한 외적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혼란 속에 묻히지 않았으며, 역사의 강물 속에서 섭리적으로 보존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보존된 말씀 위에 우리의 신앙과 삶을 세워야 합니다.
2025-05-23 18:17:57 | 관리자
신약 성경 본문은 누구에 의해, 어디에서 가장 충실히 전달되었는가?   신약 성경의 본문은 수 세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모든 지역의 교회들이 동일한 위치에서 이 본문을 전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역사적 증거는 자필 원본을 소유한 지역들이 본문 전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는 본문의 보존과 정통 신앙의 유지를 논할 때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1. 자필 원본의 보관 지역 신약 성경의 자필 원본은 전 지역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특정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에는 총 12권의 자필 원본이 있었다: 요한복음,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빌레몬서, 베드로전서, 요한1서, 요한2서, 요한3서, 요한계시록. 그리스에는 6권: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도서(크레타 포함). 로마에는 2권: 마가복음, 로마서. 소아시아 또는 로마에는 4권: 누가복음, 사도행전, 베드로후서, 유다서. 소아시아 또는 팔레스타인에는 2권: 마태복음, 야고보서. 로마 또는 팔레스타인에는 1권: 히브리서. 이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소아시아와 그리스: 18권에서 24권의 자필 원본 소유 로마: 2권에서 7권 팔레스타인: 3권 이집트(알렉산드리아): 0권 결국, 자필 원본의 수가 가장 많은 곳은 소아시아와 그리스, 가장 적은 곳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였던 것입니다. 신약 시대의 가장 초기에, 가장 신뢰할 만한 사본들은 자필 원본이 존재하던 이 지역들, 즉 소아시아와 그리스 지역에서 가장 많이 보급되었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는 본문 보존에 있어 최악의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신약 성경 사본의 즉각적인 필사와 확산 신약 성경이 기록되자마자 사본 제작도 바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의 교회들은 원본에서 정확하게 필사된 사본을 원했을 것입니다. 주후 96년경 클레멘트는 신약 27권 중 16권의 말씀을 인용하였으며, 이는 신약 성경 사본들이 그 시기까지 널리 보급되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또한, 사도 베드로는 주후 70년 이전에 바울의 서신들을 ‘다른 성경기록들’로 간주하며 그 권위를 인정했습니다(벧후 3:16). 원본을 소유하고 있던 지역의 성도들은 다른 지역의 성도들을 위해 원본에서 충실히 복사한 사본들을 마치 수증기처럼 분출해 냈습니다. 초기에 필사된 사본들은 원본과 직접 대조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변개 없이 정확히 복사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컨대 에베소 교회는 주후 200년경에도 요한복음의 자필 원본이나, 최소한 아주 좋은 상태의 초기 사본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3. 다수 사본군의 형성과 변개 방지 좋은 상태의 사본들이 초기에 널리 퍼지면서 ‘다수 사본군’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다수 사본군은 이후 수 세기에 걸쳐 신약 성경의 본문 전통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사본들이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변개된 본문들이 넓게 수용되는 것을 막았고, 전통 본문의 권위가 굳건하게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초창기의 견고한 형성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지속되었고, 결국 공인 본문(Received Text)이 탄생하게 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4. 비정상적인 본문 전달과 이단들의 시도 그러나 모든 본문 전통이 신실하게 전수된 것은 아닙니다. 일부 사람들은 악한 동기로 성경 본문을 의도적으로 변개하였습니다. 신약 성경과 초기 교부들은 이러한 변개자들에 대해 강하게 경고하였습니다. 이들은 성경의 단어들을 자기들 교리에 맞추어 고쳐 쓰며, 경솔한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려 했습니다. 5. 주후 200년까지의 심각한 변개 성경 본문이 가장 심각하게 부패한 시기는 신약이 기록된 지 100년 이내였다고 스크리브너(Scrivener)는 말합니다(『신약의 비평학에 대한 명백한 개론』, 4판, vol. 2, p. 264). 킬패트릭(Kilpatrick)은 체스터 비티 파피루스와 보드머 파피루스(p45, p66, p75 등)가 요한복음의 70구절에서 서로 73번이나 다른 이문들을 보인다고 지적하였습니다(『The Bible Translator』, 1958년 7월호, pp. 128–129). 쥰츠(Juntz)는 “현대 본문 비평학은 2세기경, 즉 성경 본문을 제멋대로 고치는 시기가 되기 전에 멈추고 만다.”라고 말합니다. 킬패트릭은 “새로운 이문들을 만드는 작업은 주후 200년경에 끝났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성경 독자들이 잘못된 사본들을 더 이상 구입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리겐 같은 사람도 마태복음 19장 19절을 변개하려 했으나, 이는 단 한 개의 사본에만 영향을 미쳤을 뿐 다수 사본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3세기 이후로는 본문을 변개하는 자유도 제한되기 시작했습니다. 6. 이단들과 그들의 실패 가이우스는 주후 190년경에 네 명의 이단들을 지목하며, 이들이 자기 사본의 원본을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변개한 사실을 부인하지 못했다고 증언했습니다(버건, 『The Revision Revised』, p. 323). 만약 가이우스 역시 자신의 원본을 제시할 수 없었다면, 그의 고발은 공허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변개 시도들이 광범위하게 퍼지지 못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폴리캅은 주후 150년에도 여전히 원본 구절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자필 원본이 존재했기 때문에, 부패한 사본들에 대한 비교 기준이 있었습니다. 다수 사본군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사본이 더 많이 유통되었습니다. 시리아어 역본이나 구 라틴역 같은 고대 번역본들이 다수 사본과 일치했기 때문에, 전통 본문을 뒷받침했습니다. 초기 교부들이 이단이나 불신자들의 공격에 맞서 성경을 광범위하게 인용한 것이, 전통 본문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7. 결론 신약 성경의 본문은 단지 우연이나 혼란스러운 필사 전통으로 전승된 것이 아닙니다. 자필 원본이 보관되었던 지역에서 정확하고 신실하게 사본이 제작되었고, 초기 교회는 변개된 본문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그것을 분별해 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증거들은 다수 사본군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실제로 자필 원본과 가까운 본문을 보존한 신실한 전통임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귀중한 본문을 통해 오늘날도 하나님의 변개되지 않은 말씀을 손에 들고 있게 된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본문은 단지 우연이나 혼란스러운 필사 전통에 의해 전해진 것이 아닙니다. 자필 원본을 보유했던 소아시아와 그리스 지역의 교회들은 본문 전달에 있어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정확하고 신실한 사본들을 적극적으로 제작하고 널리 퍼뜨렸습니다. 이들은 본문을 보호하고 정통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실제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며, 다수 사본군의 형성과 전통 본문의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반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는 자필 원본을 단 한 권도 보관하고 있지 않았던 지역이었으며, 이곳에서 만들어진 사본들—대표적으로 Vaticanus와 Sinaiticus—은 본문 변개가 심각하게 이루어진 흔적들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들 알렉산드리아 사본은 본문이 삭제되고, 구절이 생략되며, 왜곡된 문장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본들은 후에 로마 가톨릭의 영향 아래에서 소수 사본(Textus Corruptus)으로 보존되었고, 19세기 서구 비평학자들(웨스트코트, 호르트 등)에 의해 재등장하면서 현대 역본들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결국, 소수 사본의 정체는 자필 원본과 거리가 멀고, 초기 교회의 보편적 전통에서도 배제되었으며, 천주교적 전통과 연결된 이질적 본문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결국 우리가 신뢰해야 할 본문은 다수 사본들, 즉 전통 본문(공인 본문)입니다. 이 본문은 자필 원본에 가까운 사본들을 기반으로 형성되었으며, 교회사 전반에 걸쳐 성령님의 섭리 아래 교회가 받아들여 온 본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킹제임스 성경(KJV)과 그 전통은 바로 이 다수 사본군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는 신실한 본문 보존의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사본은 최악의 본문 전통이며, 이것을 기초로 삼은 현대 역본들은 진리를 온전히 보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성경관은 반드시 ‘어떤 본문인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하며, 진리의 말씀을 보존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성경관 위에 서야 합니다.
2025-05-23 18:14:04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