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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치사 in의 또 다른 용례   또 전치사 in은 ‘안에서’로 번역하면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영한사전에서 in의 용례를 보면 다음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경우 in은 어떤 점에서, 어떤 측면에서를 뜻합니다.   b) ⦗수량·성질·능력·분야의 한정⦘ …점에서는, …에 있어서; …을 〔이〕   ┈┈• ten feet in length 〔height, depth, width〕 길이〔높이, 깊이, 너비〕가 10피트 ┈┈• seven in number 수(數)가 일곱 ┈┈• equal in strength 힘이 같은 ┈┈• vary in size 〔color〕 크기가 〔색깔이〕 각기 다른 ┈┈• be weak in 〔at〕 Latin 라틴어에 약하다 ┈┈• rich in vitamin C 비타민 C가 풍부한.   c) ⦗최상급 형용사를 한정하여⦘ …면에서 ┈┈• the latest in cars 최신형의 자동차.   베드로후서 3장 18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But grow in grace, and in the knowledge of our Lord and Saviour Jesus Christ. To him be glory both now and for ever. Amen.   우리 성경 이전 판이나 기존의 다른 성경들은 대개 in grace, and in the knowledge를 ‘은혜 안에서 자라고 지식 안에서 자라라(성장하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의 in은 '안에서'가 아니고 ‘어떤 측면에서’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맞습니다.   오직 은혜 면에서 성장하고 우리 주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면에서 성장하라.    즉 은혜와 지식 측면에서 성장하는 성도가 되라는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것이 고린도후서 8장 7절에도 있습니다.   Therefore, as ye abound in every thing, in faith, and utterance, and knowledge, and in all diligence, and in your love to us, see that ye abound in this grace also.   이런 경우도 in을 ‘안에서’로 번역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모든 것 즉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열심과 우리를 향한 사랑 면에서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로운 일도 풍성히 할지니라.   요한일서 4장 18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There is no fear in love; but perfect love casteth out fear: because fear hath torment. He that feareth is not made perfect in love.   맨끝을 보면 in love라는 말이 있고 대다수 성경들은 이를 ‘사랑 안에서’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사랑 면에서가 맞습니다.   사랑에는 결코 두려움이 없고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나니 이는 두려움에 고통이 있기 때문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면에서 완전하게 되지 못하였느니라.   즉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이라는 측면에서 완전하지 못한 자라는 뜻입니다.   딤전3:13, 딤1:13에는 in the faith가 나오며 이런 경우도 ‘믿음 안에서’가 아니라 ‘믿음 면에서’가 맞습니다.    For they that have used the office of a deacon well purchase to themselves a good degree, and great boldness in the faith which is in Christ Jesus.   집사의 직무를 잘 수행한 자들은 자기를 위해 좋은 지위를 획득하며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 면에서 큰 담대함을 획득하느니라.   This witness is true. Wherefore rebuke them sharply, that they may be sound in the faith;   이 증언이 참되도다. 그러므로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것은 그들이 믿음 면에서 건전한 자가 되어   우리는 킹제임스 마제스티 에디션을 가능한 한 바르게 번역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은혜와 평안을 주실 줄 믿습니다.      
2021-12-22 13:57:40 | 관리자
영어 단어 in의 용례((rejoice, glory, pleased, glad)   우리말과 달리 영어 단어들은 여러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례를 잘 살펴보지 않으면 번역이 잘못될 수 있습니다.   번역하기 어려운 말 중에 하나가 전치사 in입니다.   며칠 전에 어떤 분이 쓴 글을 보았습니다.   나는 내 아내를 기뻐합니다.   이것을 그분은 영어로 I rejoice my wife라고 적었습니다.   rejoice를 영한사전에 가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1. 기뻐하다, 좋아하다, 축하하다《ɑt; in; over; on》   ┈┈• ~ ɑt the news 그 소식에 기뻐하다 ┈┈• They all ~d over the victory. 그들은 모두 승리를 축하했다 ┈┈• She ~d to hear of his success. =She ~d (to hear) thɑt he (had) succeeded. 그의 성공을 듣고 그녀는 기뻐했다.   여기서 전치사 《ɑt; in; over; on》이 사용되고 있음을 눈여겨보기 바랍니다.   2. 누리고 있다, 부여되어 있다《in》   ┈┈• ~ in good health 건강을 누리다.   이 경우는 rejoice 다음에 반드시 in이 와야 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내 아내를 기뻐합니다’는 영어로 I rejoice in my wife라고 적어야 합니다. 즉 rejoice 다음에 in을 붙여야 합니다.   이렇게 in이 동사와 붙어서 하나처럼 번역되는 말이 영어에는 많습니다.   rejoice in, pleased in, joyful in, glory in, joyful in 등   마태복음 3장에는 예수님이 침례받는 장면이 있고 이때에 아버지께서는 3장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킹제임스 마제스티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영어 KJV   And lo a voice from heaven, saying,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영어를 보시면 맨 끝에 in whom I am well pleased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의 whom은 아들이므로 이것을 풀어 쓰면 다음과 같습니다.   I am well pleased in my Son.   이것을 나는 내 아들 안에서 매우 기뻐한다고 하면 오역입니다.   나는 내 아들을 매우 기뻐한다고 해야 합니다. 즉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자라는 것입니다.   개역성경을 포함하여 대다수 성경들은 이를 잘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씀보존학회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습니다.   보라, 하늘에서 한 음성이 있어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 안에서 내가 기뻐하노라."고 하시니라.    이 번역처럼 ‘그 안에서 내가 기뻐하노라’로 하면 오역입니다. 일단 우리말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 안에서 내가 기뻐한다는 말이 우리말로 가능할까요? 의미 자체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이 직역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직역이 아니라 오역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이것을 직역한다고 ‘그 처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한 마디로 오역입니다.   In the beginning은 그냥 처음에입니다. 즉 만물의 시작이 될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빌립보서 3장 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Finally, my brethren, rejoice in the Lord. To write the same things to you, to me indeed is not grievous, but for you it is safe.   여기에는 rejoice in the Lord가 있습니다.   개역성경(개정), 말씀보존학회 한글 킹제임스 등 대다수 한글 성경들은 이를 ‘주 안에서 기뻐하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도 rejoice와 in을 하나로 묶어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를 기뻐하라’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은 주님 자체 즉 주님의 모든 것을 누리라는 말입니다.    고후12:9의 glory in도 보겠습니다.   And he said unto me, My grace is sufficient for thee: for my strength is made perfect in weakness. Most gladly therefore will I rather glory in my infirmities, that the power of Christ may rest upon me.   여기도 끝에 glory in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연약한 것들 안에서가 아니라 연약한 것들을 자랑한다고 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나의 강한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되느니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물게 하려 함이라.   glad도 in을 취합니다.   시편 118편 24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This is the day which the LORD hath made; we will rejoice and be glad in it.   개역(개정), 말씀보존학회 한글 킹제임스 등은 맨 끝의 glad in it을 다음과 같이 '안에'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그러나 여기도 glad in을 하나로 묶어서 그날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마제스티   이날은 주께서 만드신 날이니 그날을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리로다.   원래 이 구절은 rejoince와 glad가 둘 다 in it에 붙습니다. 그래서 그날을 기뻐하고 그날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rejoince, glad, pleased, joyful 등 무엇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을 표현할 때 영어에서는 동사나 형용사 다음에 in이 붙음을 우리는 알 수 있고  이 경우  in은 '안에'가 아니라 동사/형용사와 하나가 되어 무엇을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표현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킹제임스 마제스티 에디션을 가능한 한 바르게 번역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은혜와 평안을 주실 줄 믿습니다.
2021-12-22 12:10:42 | 관리자
...거니와, ...려니와, ...ㄹ진대, ...시사 등 어미 교정    우리말 성경에는 기본적인 체가 있습니다.   창8:15-17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또 너와 함께한 네 아들들의 아내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모든 육체 중에서 너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날짐승과 가축과 땅에서 기어 다니는 모든 기는 것을 너와 함께 데리고 나와 그것들이 땅에서 풍성히 번식하며 땅 위에서 다산하고 번성하게 하라, 하시니   말씀하여 이르시되 등은 장엄함을 주고 권위를 느끼게 해 줍니다.  즉 이런 부분을 낭독해 보면 웅장한 감이 듭니다.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이런 문체를 사용하여 웅장하고 권위 있게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이런 문체는 19세기 조선 시대 국어(개화기)의 형태를 띕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내용(위에서 파란색 부분)은 거의 현대 말로 되어 있습니다.   즉 킹제임스 흠정역 마제스티 에디션 성경에는 19세기 국어와 21세기 국어가 혼용되어 있습니다.   19세기 국어체는 권위적 문체 혹은 짧게 권위체라 불릴 수 있습니다.   권위체의 어미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할지니라. ...할지어다. ...거니와 ...려니와 ...진대 ...하시사 ...니이다, 니이까?   이런 권위체 사용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 자라나는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과연 이런 것들을 읽고 이해할 수 있을까?”   또한 이전에는 ‘...하였음이더라’, ‘...하실 것임이라’ 등 학교에서 전혀 배우지 않은 어미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이미 오래 전에 이런 것들을 ‘...하였기 때문이더라’, ‘...하실 것이기 때문이라’ 등으로 바꾸어서 더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킹제임스 마제스티 에디션을 내면서 우리는 어른들만 이해하는 성경을 내면 안 되고 가능하면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는 성경을 내야 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2021년 7월 4일 크리스천투데이에는 <읽을 줄만 알지 이해 못하는 시대,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라는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읽을 줄만 알지 이해 못하는 시대,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예: 최근 어느 고등학교 2학년 교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교사가 한 학생에게 “너 참 이지적(理智的)이다”라고 칭찬했다. 그러자 해당 학생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 학생은 이지를 ‘easy’로 알아듣고 ‘내가 쉬워 보이나?’라며 불만을 나타낸 것이었다.   이 교사의 또 다른 일화다. 융통성 없어 보인다는 뜻으로 학생에게 “좀 고지식한 면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해당 학생은 이를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고지식하다는 말을 ‘고(高, High)+지식(knowledge)’으로 이해했던 거다.   고등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느 교수가 리포트를 “금일(今日)까지 제출하라”고 했다. 이 말을 ‘금요일(金曜日)까지 제출’로 알아듣고 리포트 제출을 하지 못한 학생이, 교수에 따졌다. 왜 헷갈리는 표현을 썼냐고.   이런 상황이므로 이번에 킹제임스 마제스티 에디션을 내면서는 중고등학교에서 영어/국어를 배우는 아이들이 가능하면 이해할 수 있도록 문장(특히 어미)을 현대화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다만 전통적인 권위체 스타일은 유지하면서 이 일을 해야 하기에 다음과 같이 작업을 하였습니다.   1. 할지니라.   영어 Shall을 살려야 할 때가 많으므로 가능한 한 그대로 두었다. Thou shalt not kill. 법적인 용어. 강한 금지    2. 할지어다.   이것은 하라의 옛 국어 형태, 역시 어떤 경우에는 웅장하게 표현해야 하므로 살리는 경우가 많았다.   3. 거니와   예스러운 표현으로 앞 절의 사실을 인정하면서 관련된 다른 사실을 이어 주는 연결 어미(322구절)   창22:7  이삭이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하매 그가 이르되, 보소서,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있는데로 바꿈) 번제 헌물로 쓸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하니   창31:6 당신들도 알거니와(아는 바와 같이) 내가 내 힘을 다해 당신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4. 려니와   앞 절의 사실을 추측하여 인정하면서 관련된 다른 사실을 이어 주는 연결 어미(182구절)    창20:7 그러므로 이제 그 남자에게 그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대언자이므로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살 것이나) 만일 네가 그녀를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모든 것이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하시니라.   막16:16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으려니와(받을 것이나)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   5. ㄹ진대   (예스러운 표현으로) 앞 절의 일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뒤 절 일의 조건이나 이유, 근거로 삼음을 나타내는 연결 어미. 장중한 어감을 띤다((87절).   무엇을 하려 할진대(하려 하거든)   6. 어미 사   (예스러운 표현으로) ‘-시어’의 뜻을 나타내는 어미.   선생님은 우리를 염려하사 밤잠도 설치신다. 염려하시어, 염려하셔서   예수님께서 오사 그들에게 말씀하시며...등의 표현이 있습니다. 여기의 오사 등은 운율을 살리며 어미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가끔씩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시사 등의 표현은 안 됩니다. 시와 사의 두 번 존칭을 쓰는 경우가 됩니다. 오시사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왕하6:20, 엘리사가 기도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여시사(여사) 그가 보게 하옵소서, 하니 주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보라,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이 외에도 ...거니와 등도 모두 고쳤습니다.   이런 식으로 킹제임스 마제스티 에디션에서는 꼭 필요한 경우에만 권위체 어미를 사용하고 다른 것들은 중고등학교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는 현대체 어미로 순화하였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화평을 기원합니다.   샬롬
2021-12-21 16:42:46 | 관리자
가능한 한 같은 단어를 동일하게 번역해야 한다(deliver, save, oppress 등)   성경을 성경으로 풀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같은 단어를 동일하게 번역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deliver라는 단어가 630여 회 나옵니다.   영한사전에서 보듯이 이 말은 넘겨주다와 구출하다의 두 가지 의미로 가장 많이  쓰입니다.   개역성경은 넘겨주다는 의미의 이 말을 이상하게 붙이다로 번역하였습니다.   창14:20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개역성경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영어 KJV   And blessed be the most high God, which hath delivered thine enemies into thy hand. And he gave him tithes of all.   킹제임스 마제스티   네 원수들을 네 손에 넘겨주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하매 아브람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니라.   개역성경/개역개정에는 이렇게 deliver를 붙이다로 번역한 구절이 매우 많습니다. 아마도 아이들이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deliver의 또 다른 의미는 구출하다입니다. 그래서 구출하는 분 혹은 구출하는 사람은 구출자로 번역됩니다. 마치 구원하는 자를 구원자로 번역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사기 3장 9절을 보겠습니다.   킹제임스 마제스티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한 구출자를 일으키사 그들을 구출하게 하셨으니 곧 갈렙의 동생이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더라.   영어 KJB And when the children of Israel cried unto the LORD, the LORD raised up a deliverer to the children of Israel, who delivered them, even Othniel the son of Kenaz, Caleb's younger brother.   개역/개역개정은 이를 구원자와 구원하다로 번역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말씀보존학회 한글 킹제임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구원자를 일으키시어 그가 그들을 구원하였으니, 곧 칼렙의 아우 크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니라.   그러나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그대로 살리려면 여기는 구출하다, 구출자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하다(save), 구원자(saviour)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킹제임스 마제스티 에디션은 deliver를 대개 두 가지 용례로 구분하여 일관성 있게 번역하였습니다. 그래야 성경을 성경으로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영어에는 oppress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한사전을 보면 이 단어는 압박하다, 억압하다, 학대하다의 의미를 갖습니다.   press라는 말이 ‘누르다’, ‘압박하다’를 뜻하므로 이 단어는 1차적인 뜻이 ‘권력이나 폭력으로 남을 꼼짝 못하게 누름’을 뜻하는 ‘압제하다’입니다.   그래서 이런 뜻을 살려서 킹제임스 마제스티 에디션에서는 oppress를 대부분 ‘압제하다’로 통일하였습니다.   이렇게 동일한 단어를 동일하게 번역해야 소프트웨어나 앱을 통해 같은 단어를 찾아서 그 뜻을 성경으로 풀 수 있게 됩니다.   킹제임스 마제스티 에디션에서는 이런 것이 가능합니다.   마지막으로 구세주 혹은 구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어 saviour를 번역한 것인데 사실 이것은 옳지 않은 말입니다. save에서 나왔으므로 구원자라고 해야 맞습니다.   누가복음 1장 47절을 보겠습니다.   킹제임스 마제스티   내 영이 하나님 곧 내 구원자를 기뻐하였나니   And my spirit hath rejoiced in God my Saviour.   개역/개역개정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말씀보존학회   내 영이 하나님 내 구주 안에서 기뻐하였도다. (*) 이런데 나오는 rejoice in은 기뻐하다는 한 단어로 번역해야지 구주 안에서 기뻐하다는 완전히 틀린 번역입니다.   공동 번역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   save, saviour를 다 구원하다, 구원자로 번역해야 용어 색인이 가능하고 같은 단어를 다 찾아서 성경을 성경으로 풀 수 있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에서 같은 단어를 동일하게 번역하여 성경을 성경으로 풀 수 있게 하였고 킹제임스 마제스티 성경 역시 우리말의 범위 안에서 이런 것이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에게 예수님의 은혜와 화평이 충만히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샬롬
2021-12-21 16:16:05 | 관리자
영어 단어 win은 ‘이겨 오다’인가?   지난 20년 이상 어떤 사람들이 이상한 말을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잠언 11장 30절을 보겠습니다.     의로운 자의 열매는 생명나무니 혼들을 얻는 자는 지혜로우니라.   The fruit of the righteous is a tree of life; and he that winneth souls is wise.     이 구절을 영어로 보면 soul을 win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 중학생 정도면 win이라는 단어를 영어 시간에 배울 것입니다.   영한사전에서 보듯이 이 단어의 1차적 의미는 이기다가 맞습니다.   1. (경쟁·경기 따위에서) 이기다   ┈┈• ~ the election 〔a contest〕 선거〔콘테스트〕에 이기다. He won the election.   이 경우 우리말 번역은 선거에서 이기다이지 선거를 이기다나 이겨 오다가 아닙니다.   2. 상을 타는 경우   He won the Nobel prize.   그는 노벨상을 탔다고 해야지 노벨상을 이겼다거나 이겨 왔다고 하면 안 됩니다.   상을 탔다는 말은 경쟁해서 이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냥 상을 탔다고 해야 합니다.   3. win의 세 번째 용례는 “(노력해서) 손에 넣다, 얻다, 확보하다”입니다.   ┈┈• ~ fame 명예를 얻다 ┈┈• ~ security 〔a livelihood〕 안전을〔생계를〕 확보하다 ┈┈• By his discovery he won himself honors 〔honors for himself〕. 그는 발견에 의해서 명예를 얻었다.   이 경우 명예를 이기다나 이겨 오다, 안전을 이기다나 이겨 오다로 하면 말이 안 됩니다. 이것은 오역입니다.   4. 네 번째 용례는 “친구〔결혼 상대〕를 얻다; (적을) 만들다; …의 지지를〔애정을, 결혼 승낙을〕 얻다”입니다.   ┈┈• ~ a friend 친구를 얻다.   이 경우 친구를 이기거나 이겨 오면 안 됩니다. 이렇게 같은 win이라도 우리말에 여러 용례가 있으므로 용례에 따라 합당하게 번역해야 합니다.   자, 그러면 잠언 11장 30절의 win은 위의 4가지 용례 중 어떤 용례에 해당할까요?   이 구절의 win은 세 번째나 네 번째 용례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혼들을 얻는 자는 지혜롭다고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말씀보존학회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습니다.     말씀보존학회 한글 킹제임스   의로운 자의 열매는 생명의 나무니, 혼을 이겨오는 자는 현명하니라.     도대체 ‘이겨온다’는 말이 우리말에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졸역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뇌 현상입니다.   번역은 수용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그 언어의 용례에 맞아야 합니다.   성경은 심지어 수용 언어의 표준말 어법에도 맞아야 합니다. 성경이 모든 것의 표준 잣대이기 때문입니다.   대체 우리말에 이겨오다가 어디에 있습니까?   다시는 이런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번역은 좋고 아름다운 한국말을 망치는 것이며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에게 수치를 안겨 주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실력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느냐?'는 손가락질을 받게 됩니다.   참고로 미국 사람들은 전도해서 사람을 지옥에서 구원해 내는 것을 soul winning이라고 말합니다.   행2:41을 보면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3,000 혼가량이(명이 아니라 혼이) 지옥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그때에 그의 말을 기쁘게 받아들인 자들이 침례를 받으니 바로 그날 삼천 혼가량이 그들에게 더해졌더라.   잠언과 사도행전의 winning soul 구절들을 그대로 인용해서 그들은 전도하러 가자는 것을 soul winning하러 가자고 말합니다.   전도보다는 soul winning이라는 말이 더 강력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혼들을 얻는(지옥에서 구출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샬롬   (*)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혼들을 싸워 이겨 온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앞으로 말이 안 되는 이런 말은 안 쓰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추하게 만드니까요.
2021-12-21 15:26:13 | 관리자
오소리인가? 해달인가?   출애굽기에는 성막을 짓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6장 14절을 보면 그들은 성막을 덮기 위해 앙장 위에 오소리 가죽으로 덮개를 만들었습니다.   너는 붉게 물들인 숫양 가죽으로 장막 덮개를 만들고 오소리 가죽으로 그 위에 덮개를 만들지니라.   And thou shalt make a covering for the tent of rams' skins dyed red, and a covering above of badgers' skins.   오소리 가죽은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성막과 관련해서 10차례 이상 나옵니다.   그런데 개역성경 NIV 등은 이것을 다 해달의 가죽으로 바꾸었습니다.   개역성경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지니라   NIV Make for the tent a covering of ram skins dyed red, and over that a covering of hides of sea cows.   오소리는 육상 동물이고 해달(NIV의 sea cow)은 해상 동물입니다.   더욱이 다음의 오소리 서식처 분포도에서 보듯이 오소리는 아프리카와 중동 지방에 사는 육상 동물입니다.     반면에 다음의 해달 서식처 분포도에서 보듯이 해달은 베링 해협과 알래스카 근처에 사는 수상 동물입니다.     이집트 땅에서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제 알래스카 베링 해협까지 가서 해달의 가죽을 가져왔을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에 널려 있는 오소리 가죽으로 성막의 덮개를 만들었을까요?   아니면 알래스카 산 해달의 가죽으로 만들었을까요?   자명하지 않습니까?    여러 사람들이 킹제임스 성경에 나오는 오소리라는 단어는 오역이라고 말합니다. 해달이나 물 돼지 혹은 바다소(sea cow)가 맞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사실에 근거하여 옳지 않습니다.   구글에 가서 Badger habitat. sea cow habitat이라고 치면 위의 두 그림이 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킹제임스 성경이 옳고 다른 현대 역본들이 틀리다는 것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주변지역에는 오소리가 있으며 19세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에스겔서의 말씀처럼 오소리 가죽신을 신었습니다.   겔16:10 또한 수놓은 것으로 네게 옷을 입히며 오소리 가죽신을 신기고 고운 아마포로 너를 두르며 비단으로 너를 덮어 주었고   롬11:33-34   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은 깊도다! 그분의 판단들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들은 찾아내지 못하리로다!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았느냐?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되었느냐?  
2021-12-21 14:57:03 | 관리자
잠언에는 어리석은 자, 어리석은 자들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단수 37, 복수 19번 총 56회   이 말은 영어로는 fool이고 우리말로는 바보 멍텅구리라는 말입니다.   동시에 단순한 자들이라는 말도 9번 나옵니다.     다음은 메인 아이디어로 푸는 잠언에서 맥스 앤더스가 이에 대해 설명하는 글입니다.   메인 아이디어로 푸는 잠언   세 종류의 어리석은 자   잠언서의 많은 내용들은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를 대비해서 설명한다. 즉 지혜롭지 않은 사람은 지혜롭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 즉 세상일을 단순하게 생각하고 사는 사람, 삶의 기술이 없는 사람, 어리석은 자이다. 그래서 단순한 자와 어리석은 자가 동일시되고 있다(잠1:22).   지혜로운 사람은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지만 어리석은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잠1:7). 잠언에서는 세 가지 히브리 단어가 어리석은 자로 번역되고 있다.    첫 번째 단어는 케실(kesil)인데, 이는 생각이 꽉 막힌 완고하고 고집 센 사람을 의미한다(잠1:22, 1:32 등). 이렇게 어리석은 자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얻는 지식과 조언을 거부하고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의 얘기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잠언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어리석은 자에 대한 의미이다.    두 번째 단어는 나발(naball) 인데, 이는 '영적인 감각이 없는 사람' 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잠언에서 3번 사용되었다(잠17:21: 30;22). 이 단어는 아비가일의 남편 이름(삼상 25장)과도 동일하다. 그는 자기 부하들을 위해서 식량과 음료를 요청했던 다윗의 부탁을 모욕적으로 거절하였다. 다윗은 그의 태도로 인해  크게 분노하였고 복수하기 위해서 살육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아비가일이 다윗의 부하들을 위해서 식량과 음료를 준비하였고 그에게 나아가 그의 분노를 달랬다. 그녀는 다윗에게 이렇게 말했다.   원하건대 내 주께서는 이 벨리알의 사람 나발을 눈여겨보지 마소서. 그의 이름과 같이 그가 그런 사람이니 나발이 그의 이름이요, 어리석음이 그에게 있나이다(삼상 25:25).   어리석은 자를 지칭하는 세 번째 단어는 에윌(ewil)이다. 이 말은 행동이 교만하고 난폭하며 강퍅한 사람을 뜻한다. 이 말은 잠언에서 19번 사용되었고, 다른 데서도 7번 사용되었다. 잠10:21 참조, 이것은 잠언 1장 7절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교만하고 난폭하며 행사가 강퍅한(괴퍅한) 자, 즉 지혜가 없어서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그분이 주시는 지혜를 멸시한다. 잠언 1장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지혜를 얻는 지혜로운 자와 하나님을 거부함으로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는 어리석은 자(단순한 자)를 대비시키고 있다.  
2021-12-18 14:50:12 | 관리자
잠언 1장 17절의 의미 잠언에는 처음 읽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들이 있습니다.   솔로몬은 1장 6절에서 이런 것을 은밀한 말(dark saying)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어둠 속에 감추어진 말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말들 중 하나가 잠언 1장 17절입니다.   잠언 1장 8-19절은 솔로몬이 자기 아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6-16절은 악을 행하자고 주변 친구들이 꾀어도 거기에 빠지지 말 것을 말합니다. 18-19절은 그런 악을 행하여 얻은 이득이 결국은 그 사람의 생명을 앗아감을 말합니다.   이 두 부분의 중간에 17절 말씀이 나옵니다.   새가 보는 데서 그물을 치는 것은 확실히 허사니라.   이것은 참으로 묘한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1. 자기 앞에서 자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치는데도  거기에 빠져드는 어리석은 새들이 있다. 그러므로 그런 새와 같은 자들에게 경고를 주는 것은 허사다.   2. 새들 앞에서 그물을 치면 새는 절대로 거기에 안 들어 간다. 그러므로 새 새냥꾼의 수고가 허사다.   잠언 1장 17절 주석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는데 다수는 후자를 선택하는 것 같습니다. 이 경우 의미는 매우 명확합니다.   새도 자기 앞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면 거기에 절대로 안 빠지는데 새보다 훨씬 나은 지성의 사람은 더더욱 그런데 빠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친구들이 꾀고 악한 일을 시키는 것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거기에 빠져들면 새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샬롬
2021-12-18 14:38:51 | 관리자
ward의 번역(대상25:8 등)   영어 성경에는 번역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습니다.   단어들을 이해하지 못해서 번역이 어려운 데도 있고 문맥을 파악하지 못해서 번역이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대상25:8, 대상26:16에는 ward against ward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를 제대로 번역하려면 ward라는 단어를 알아야 합니다.   And they cast lots, ward against ward, as well the small as the great, the teacher as the scholar.   ward라는 단어는 무엇을 뜻할까요?   영한사전을 보면 뜻이 다음과 같습니다.   1. 보호; 감독, 감시; 억류, 연금, a child in ~ 보호〔후견〕받고 있는 아이. 2. 집합적⦘ 보호〔감독〕자들 3. 〖법률학〗 피보호자; 피후견인 4. (교도소의) 감방; (구빈원 따위의) 수용소; (모르몬교의) 지방 분회. 5. 병실, 병동 6. (성·요새의) 안뜰. 7. 구(區)《도시의 행정 구획》. 8. (복수) (열쇠 따위의) 홈; 돌기.   그런데 아무리 봐도 영어 성경의 이 구절의 ward는 이런 뜻들과는 잘 맞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히브리말이나 영어에서 ward는 1차적으로 파수 보는 사람을 뜻하고 파수 보는 일, 그런 직무를 수행하는 것, 보호자를 뜻합니다. 그리고 어떤 직무를 수행하는 것, 직무 등을 뜻합니다. 그리고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 혹은 사람들을 뜻합니다. 영어 옥스퍼드 사전을 보면 용례가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대상25:8을 보겠습니다.   And they cast lots, ward against ward, as well the small as the great, the teacher as the scholar.   킹제임스 마제스티   그들이 작은 자와 큰 자, 스승과 배우는 자를 막론하고 직무조와 직무조가 대응하게 제비를 뽑았는데   왜 직무조로 번역하였는지 설명하겠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매튜 풀과 존 길에 대한 주석을 보면 이런 설명이 있습니다. 참고로 매튜 풀(1624-1679)과 존 길(1697-1771)은 킹제임스 성경이 나온 직후에 살았던 분들이라 당시의 영어를 가장 잘 이해한 사람들입니다. 현대 신학의 때가 묻지 않은 분들이라 저는 자주 그분들의 주석을 참고합니다.   매튜 풀   존 길   여기의 ward는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노래하는 자들의 직무조입니다(course). 대상25장 8-31절에는 음악하는 사람들의 24조가 나오고 제사장들도 24조(대상24:1-5), 레위 사람들도 24조로 나뉘어서(24:6-19)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ward against ward란 음악하는 사람들 1조는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의 1조, 2조는 2조, 3조는 3조 이런 식으로 세 부류의 사람들이 같은 조끼리 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400주년 기념판에서는 이것을 단순히 ‘분반 별로’로 번역하였는데 이것도 비슷한 뜻입니다. 다만 마제스테 에디션에서는 ward를 다 살려서 이런 의미가 되도록 번역하였습니다.   한편 개역성경 등은 이런 부분을 직임을 얻었다고 번역하였습니다.   대상이 무리의 큰 자나 작은 자나 스승이나 제자를 막론하고 다같이 제비 뽑아 직임을 얻었으니   이런 원칙에 따라 대상26:18도 이런 식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수빔과 호사는 서쪽을 맡도록 뽑혀서 위로 올라가는 둑길 옆 살레겟 문에서 직무조와 직무조가 대응하며 파수하였더라.   ward의 다른 용례를 보겠습니다.   창40:3, 그들을 호위대장의 집에 감금하여(in ward) 감옥에 두었는데 그곳은 요셉을 묶어 둔 곳이더라.   And he put them in ward in the house of the captain of the guard, into the prison, the place where Joseph was bound.   이런 용례는 창40:4, 7; 41:10 ; 42:17; 레24;12; 민15;34 등에 있습니다.   한편 대상12:29는 다음과 같이 직무로 번역되었습니다.   베냐민 자손 곧 사울의 친족 대다수가 이때까지 사울의 집을 지키는 직무를 지켰으므로 그들 중에서 나온 자들이 삼천 명이요,   And of the children of Benjamin, the kindred of Saul, three thousand: for hitherto the greatest part of them had kept the ward of the house of Saul.   느12;24, 25는 파수 보는 직무를 뜻합니다.   끝으로 렘37:13은 파수대를 뜻합니다.   그가 베냐민 문 안에 있을 때에 하나냐의 손자요 셀레미야의 아들로서 이리야라는 이름을 가진 파수대 대장이 거기 있었는데 그가 대언자 예레미야를 붙잡고 이르되, 네가 갈대아 사람들에게 항복하는도다, 하매   같은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달리 번역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화평이 성경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에게 충만히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2021-12-18 12:43:42 | 관리자
시편만의 고유한 특징   이 글은 도서출판 디모데에서 나온 메인 아이디어 시리즈 주석 중 시편 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메인 아이디어 시리즈 주석   시편만의 고유한 특징   시편은 성경에서 가장 특이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특징들이 많이 있어 특별한 한 권으로도 사실상 손색이 없다. 아래의 몇 가지 특별한 요소들을 주목해서 보라.   • 시편은 150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경에서 가장 분량이 많은 책이다.   • 각 시편을 하나의 장으로 인정할 경우 150개의 시로 이루어진 시편은 성경에서 가장 많은 장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사야서(66장)가 그 뒤를 잇지만 시편에는 크게 미치지 못한다.   •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긴 장으로서 176개의 절로 되어 있고 이는 성경에 나오는 많은 짧은 책들보다 더 많은 수이다.   • 시편 117편은 성경에서 가장 짧은 장이며 고작 두 절로 되어 있다.   • 시편 117편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총 1,189장 중 한가운데 위치한 장이다.   • 시편 103편 1,2절은 전체 성경의 총 31,173절 중 가장 중앙에 위치한 절이다.   • 시편은 성경의 어느 책보다도 많은 저자들이 기록했다. 다윗, 아삽, 고라의 아들들, 솔로몬, 모세, 혜만과 에단, 그 밖의 인물 등 많은 저자들이 공동 저작권을 주장하는 문학 모음집이다.   • 시편은 완성되기까지 약 1000년이 소요된 장기 프로젝트였고 모든 정경들 중 기록되는 데 가장 오래 시간이 걸렸다.   • 시편은 이사야서를 제외하고 다른 어떤 구약 성경보다 많은 메시아 예언을 담고 있다. 메시아를 하나님의 아들(시 2편), 사람의 아들(시 8편)로 계시하며 그의 순종(시 40:6-8), 배신당함(시 41:9), 십자가 처형(시 22편), 부활(시 16편), 승천(시 68:18), 왕좌에 앉으심(시 110편)에 대해 계시하고 있다.   시편의 저자   대부분의 다른 성경책들은 한 저자가 기록을 했고 그 중 일부는 여러 명의 저자들이 기록했는데 잠언이 그러한 예 중 하나이다. 시편은 성경에서 여러 저자들이 기록한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로서 많은 저자들이 인생의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기록한 합작품이다. 그러므로 시편의 여러 저자들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며 “이스라엘의 달콤한 시편 기자”(삼하23:1)인 다윗은 시편의 주된 저자이다. 그는 150편의 시편 중 75편 즉 시편의 정확히 절반을 기록한 인물이라는 인정을 받고 있다(3-9, 11-32, 34-41, 51-65, 68-70, 86, 101, 103,108-110, 122, 124, 131, 138-145편, 또한 사도행전 4장 25절은 시편 2편을 다윗이 기록했다고 확인하고 있으며 히브리서 4장 7절은 시편 95편도 다윗이 기록한 것이라고 확인하고 있다).   • 고대 이스라엘의 예배 인도자로 섬긴 제사장인 아삽은 열두 편의 시편을 기록했다(50, 73-83편).   • 가수와 음악 작곡가들의 조합이었던 고라의 아들들은 열 편의 시편을 쓴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42, 44-49, 84, 85, 87편).   • 이스라엘의 제3대 왕이며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은 두 편의 시편을 썼다(72, 127편).   • 이스라엘의 대언자이며 출애굽을 주도한 강력한 지도자 모세는 한 편의 시편을 기록했다(90편).   • 현자이며 음악가, 에스라 사람, 고라의 자손이며 고라 찬양대의 창설자(대하 5:12, 35:15)인 헤만은 한 편의 시편을 썼다(88편).   • 현자이며 에스라 사람이자 레위 가수로 추정되는(대상 6:42, 15:17, 19) 에단은 한 편의 시편을 썼다(89편).   • 나머지 마흔여덟 편의 시는 작자 미상이다.   시편의 기본 유형   • 지혜시: 이러한 교훈적인 시들은 경건한 삶에 대한 실제적인 지침을 제공하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경건한 생활을 하도록 확실한 방향을 제시한다(1, 37,119편).   • 메시아시: 그리스도의 메시아 통치가 도래함을 묘사하는 제왕시들은 그를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확실한 주권적 왕으로 묘사한다(2, 18, 20, 21, 45, 47, 68, 72,89, 101, 110, 118, 132, 144편).   • 탄식시: 감정이 아주 고조되어 있는 탄식시들은 저자가 고통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건져주심을 바라며 부르짖는 마음을 담고 있다(3-7, 12-13, 22, 25-28, 35,38-40, 42-44, 51, 54-57, 59-61, 63-64, 69-71, 74, 79-80, 83, 85-86, 88, 90, 102, 109,120, 123, 130, 140-143편).   • 저주시: 하나님의 영광에 맹렬하게 열심을 내며 도전적이고 때로는 논쟁적이기까지 한 이 시들은 하나님의 원수이자 저자의 적인 자들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간구한다. 저자는 주 여호와께서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박해자들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한다(7, 35, 40, 55, 58-59, 69,79, 109, 137, 139, 144편).   • 감사시: 개인적이든, 민족적이든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풍성한 축복에 대한 심오한 자각과 깊은 감사를 표현하는 시들이다(8, 18, 19, 29, 30, 32-34, 36, 40, 41, 66,103-106, 111, 113, 117, 124, 129, 135-136, 138-139, 146-148, 150편).   • 순례시: 이 절기 시편들은 이스라엘이 연중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회상할 때 그분을 찬양하도록 축제분위기를 내고 있다(43, 46, 48, 76, 84, 87, 120-134편).   • 즉위(통치)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이 장엄한 시들은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장엄함과 그분이 만드신 모든 것을 유지하고 통제하며 인도하는 섭리적 돌보심을 묘사하고 있다(48, 93, 96-99편).
2021-12-17 16:40:37 | 관리자
원본에 없는 것을 집어넣으면 안 된다:역대기상 25장 3절, 5명인가, 6명인가?   오늘 한 분이 역대기상 25장 3절에 대해 질문이 있다고 하며 글을 보내 주었습니다.   역대기상 25장에는 다윗 시대에 악기를 잡고 대언한 사람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의 조상들로는 2절의 아삽, 3절의 여두둔, 4절의 헤만이 있고 이들에게서 나온 자들이 2-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3절에 보면 여두둔의 아들들이 5명인데 왜 6명이라고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3절 여두둔에게서는 여두둔의 아들들인 그달리야와 스리와 여사야와 하사비야와 맛디디야, 이렇게 여섯 사람인데 이들이 자기들의 아버지 여두둔의 손 밑에서 하프를 연주하며 대언을 하고 주께 감사하며 찬양을 드렸고   Of Jeduthun: the sons of Jeduthun; Gedaliah, and Zeri, and Jeshaiah, Hashabiah, and Mattithiah, six, under the hands of their father Jeduthun, who prophesied with a harp, to give thanks and to praise the LORD.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것은 개역성경, NIV 등에는 네 번째 인물로 시므이가 들어가서 총 6명이 되어 명단의 6명과 여섯 사람이라는 말이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개역: 여두둔에게 이르러서는 그의 아들들 그달리야와 스리와 여사야와 시므이와 하사뱌와 맛디디야 여섯 사람이니 그의 아버지 여두둔의 지휘 아래 수금을 잡아 신령한 노래를 하며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NIV: As for Jeduthun, from his sons: Gedaliah, Zeri, Jeshaiah, Shimei, Hashabiah and Mattithiah, six in all, under the supervision of their father Jeduthun, who prophesied, using the harp in thanking and praising the LORD   즉 킹제임스 성경에는 명단에 5명이 있고 그 뒤에 6명이라고 하고 개역성경과 NIV에는 명단에 6명이 있고 그 뒤에 6명이라고 합니다. 얼핏 보면 킹제임스 성경이 틀리고 개역성경 등이 맞는 것 같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어떤 성경의 번역이 맞을까요?    여러 사람들의 주석을 보면 답이 우스울 정도로 간단합니다.   역대기상 25장 3절 주석   원래 히브리 성경에는 명단에 5명이 있고 그 뒤에 6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명단에 5명밖에 없는데 6명이냐고 물으니까 후대에 70인역과 알렉산드리아 사본을 만든 자들이 친철하게 독자들을 위해 시므이를 추가하여 6명, 6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시므이는 어디서 나올까요? 밑에 있는 17절을 보면 시므이가 나옵니다.   25장 8-31절에는 음악하는 사람들의 24조가 나옵니다. 아시는 것처럼 제사장들도 24조(대상24:1-5), 레위 사람들도 24조로 나뉘어서(24:6-19) 주님을 섬겼습니다.    1. 아삽의 아들들과 친척들(2, 9절 상반절, 10-11, 14), 24개 중 4개 2. 여두둔의 아들들과 친척들(2절, 9절 하반절, 11, 15, 17, 19, 21), 24개 중 6개 3. 헤만의 아들들과 친척들(4절, 13, 16, 18), 24개 중 10개   그러면 왜 명단에 5명만 있는데 6명이라고 했을까요?   시므이는 계수될 당시 어려서 노래를 할 수 없었지만 그 조의 우두머리로 선택이 되었고 마침내 성장하여 그 일을 맡게 되었기 때문에 명단에 이름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존 길 등은 유대인 학자들의 의견을 참작하여 말합니다.   결론은 무엇일까요?   히브리 성경 3절에 5명, 6명으로 되어 있고 시므이의 이름이 없으므로 있는 그대로 명단을 5명으로 두고 총 6명이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그대로 두어야 합니다.   명단에 5명, 실제 6명, 이렇게 다른 것은 목사나 교사가 대상25:17을 가지고 설명을 해 주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 임의로 시므이를 넣어 명단에 6명, 총 6명으로 하면 이것은 성경을 변개하는 것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역대기상에는 여러 사람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대상2:8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에단의 아들들은 아사랴더라.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들들인데 명단에는 아사랴 하나밖에 없습니다.   영어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The sons of Ethan; Azariah.   즉 원어와 영어는 에단은 아들이 여럿인데 아사랴 하나만 성경에 기록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영어는 이것을 세미콜론으로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말은 세미콜론 등으로 처리가 안 되므로 지금처럼 그대로 번역하였습니다.   이것이 히브리말을 정직하게 번역한 것입니다. 히브리말은 분명히 아들들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개역성경은 에단의 아들은 아사랴더라라고 단수로 처리하였습니다. NIV, NKJV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참고로 역대상에는 이런 부분이 10여 군데는 더 있습니다.   그러므로 독자들을 위해 번역자가 친절하게 사람의 말을 집어넣거나 이해가 안 된다고 복수를 단수로 하거나 하면 안 됩니다.   조금 어색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들(단어들)만 성경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번역자가 취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또 이것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영원히 높이는 일일 것입니다.   샬롬 
2021-12-17 14:18:04 | 관리자
여러 해석이 가능한 구절들의 번역(골로새서 2장 23절 등)   어떤 분들은 영어 성경과 영한사전만 있으면 번역이 되는 줄로 압니다.   그리고는 어떤 성경을 보다가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달리 번역된 한두 군데를 지적하고는 의분을 터뜨립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참으로 묘한 구절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뛰어난 성경학자들, 목사들, 주석자들도 의견을 달리할 때가 많습니다.   더욱이 영어나 원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는 문맥적으로 살펴보고 그런 분들의 여러 가지 의견을 고려해서 최종적으로 한 가지 번역으로 확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A, B, C를 추종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자기 스스로 자기 생각이 맞는다고 주장하는 D와 E가 있습니다.   그런데 번역자가 앞뒤 문맥과 역사적 상황 등을 고려해서 C가 설명한 대로 번역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A나 B의 주장을 따르는 분들과 D나 E처럼 자기 해석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C의 설명이 번역으로 채택되었다는 이유로 그 성경 전체를 폄훼합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여러 주석을 읽어 보면 의견이 분분한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이런 주석가들은 평생을 성경만 읽은 분들입니다. 그런데도 같은 구절을 놓고 해석을 달리 합니다.   따라서 이런 어려움이 있는 구절들이 성경에 다수가 있으니 성경의 어떤 구절 번역이 나와 의견이나 생각과 달라도 이것을 오역이라고 폄하하지 말고 이역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이런 부분 중 하나가 골로새서 2장 23절입니다.   22 이것들은 다 사용함에 따라 없어질 것들이며 사람들의 명령들과 교리들에 따른 것들이니라.   23 이런 것들은 의지대로 경배하고 자기를 낮추며 몸을 경시하는 데는 참으로 지혜가 있는 것같이 보이나 아무 가치가 없으며 육체를 만족시킬 뿐이니라.   23 Which things have indeed a shew of wisdom in will worship, and humility, and neglecting of the body: not in any honour to the satisfying of the flesh.   이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붙잡고 있는 초보적 규례들(예를 들어 18절의 천사 숭배, 꾸며낸 겸손)을 언급하며 23절에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견이 분분한 부분은 맨 뒤 즉 ‘아무 가치가 없으며 육체를 만족시킬 뿐이니라’입니다.    2021년에 나온 킹제임스 흠정역 마제스티 에디션과 달리 2011년 400 주년 기념판은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습니다.   ... 육체를 만족시키는 데는 아무 가치가 없느니라.         기존의 개역성경, 말씀보존학회 한글 킹제임스 성경 등도 이와 비슷하게 번역하였습니다.   개역개정: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말씀드린 대로 이 부분은 여러 사람의 의견이 다릅니다.   어떤 분들은 마제스티 에디션처럼 번역해야 옳다고 하고 몇몇 분들은 기존 성경들처럼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들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골로새서 2장 23절 주석   마제스티 에디션을 따르면 이런 초보적인 것들은 육체를 만족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기존 성경들을 따르면 이런 초보적인 것들은 육체를 만족시키는 데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얼핏보면 이 둘이 서로 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여하튼 초보적인 그런 일들은 아무 가치가 없다는 면에서는 동일합니다.   주석을 보면 아시겠지만 반즈 주석과 스코필드 주석을 보면 마제스티 에디션처럼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영어는 다음과 같이 but이 추가된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not in any honour but to the satisfying of the flesh.     즉 맨 뒤의 문장을 not...but의 용례로 보면 마제스티 에디션 같은 번역이 나오게 됩니다.   반즈의 해설을 보면 무슨 말인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반즈는 [Not in any honour]와 [To the satisfying of the flesh]를 따로 분리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not...but으로   [Not in any honour] That is, there is no real honor in these things; there is nothing to ennoble and elevate the soul; nothing that is to be commended.   [To the satisfying of the flesh] The only effect is, to satisfy or please the flesh; that is, the carnal and corrupt nature, for so the word "flesh" is often used in the Scriptures. The effect of these observances, on which so much stress is laid as if they would promote piety, is merely to gratify pride, self-righteousness, the love of distinction, and the other carnal propensities of our nature. There seems to be a great deal of humility and piety in them; there is really little else than pride, selfishness, and ambition.     매튜 풀, 존 길 등 유명한 주석가들도 이와 비슷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스코필드도 비슷하게 적고 있습니다.   : which do not really honour God, but only satisfy the flesh" (i.e. by creating a reputation for superior sanctity).   즉 이런 초보적인 것들은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지 않고 자기를 높임으로써 자기의 명성을 드높여서 자기 육체를 만족시킬 뿐이다.   물론 어떤 분들은 honour와 to가 붙어 있는 것으로 봅니다. 이 경우 기존의 번역으로 귀결됩니다.   우리는 전체적인 문맥을 고려하고 여러 주석가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이번에 나온 마제스티 에디션의 번역을 택하였습니다.   즉 “이런 초보적인 것들은 하나님께 전혀 영광과 존귀를 돌리지 않고 (혹은 그 사람의 몸에 전혀 존귀가 되지 않고)  자기를 높임으로써 자기의 명성을 드높여서 자기 육체를 만족시켜줄 뿐이다.”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요점이라고 믿습니다.   전자든 후자든 여러분이 판단해서 번역을 취하면 됩니다.   우리는 전자만 옳고 후자는 그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맥과 여러 사례를 볼 때 전자가 조금 더 문맥에 맞는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더욱이 이런 것은 성경의 완전성이나 충분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둘 다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화평을 기원합니다.   샬롬
2021-12-16 15:01:30 | 관리자
구약 성경 인용 시 현재 시제 사용 사례(로마서 10장 19-21 등)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신약성경 기록자들은 자기들이 말하는 바를 확증하려고 구약성경을 자주 인용합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0장 19-21절을 보겠습니다.   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기를, 내가 백성이 아닌 자들을 시켜 너희의 질투를 일으키며 어리석은 민족을 시켜 너희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리라, 하며   20 더욱이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이르기를,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들이 나를 발견하였나니 내게 묻지 아니하던 자들에게 내가 나타났노라, 하되   21 이스라엘에게는 이르기를, 내가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백성을 향해 종일토록 내 손을 내밀었노라, 하느니라.   19 But I say, Did not Israel know? First Moses saith, I will provoke you to jealousy by them that are no people, and by a foolish nation I will anger you.   20 But Esaias is very bold, and saith, I was found of them that sought me not; I was made manifest unto them that asked not after me.   21 But to Israel he saith, All day long I have stretched forth my hands unto a disobedient and gainsaying people.   이 부분을 보면 사도 바울은 19절에서는 모세의 말을, 21절에서는 이사야의 말을 인용합니다.   모세와 이사야는 여기서 인용된 말을 700-1500년 전에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리스어, 영어 성경은 이 두 사람이 지금도 말하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현재 시제로 그들이 말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9, 20, 21절의 saith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 마제스티 에디션은 이것을 그대로 살려 이런 데를 다 현재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래야 그 두 사람이 지금 21세기에 사는 우리에게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개역 개정, 말씀보존학회 한글 킹제임스 등 거의 대부분의 우리말 성경은 이런 것들을 다 과거로 번역하였습니다.   개역 개정 등   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20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21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신약성경에는 구약 성경을 인용할 때 현재 시제로 인용하는 데가 의외로 매우 많습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이런 것들을 살리는 것이 합당하다고 믿고 킹제임스 마제스티 에디션은 이런 인용 부분을 가능한 한 다 현재로 번역하였습니다.   NIV 등도 현재로 하였습니다.   19 Again I ask: Did Israel not understand? First, Moses says, "I will make you envious by those who are not a nation; I will make you angry by a nation that has no understanding."   20 And Isaiah boldly says, "I was found by those who did not seek me; I revealed myself to those who did not ask for me."   21 But concerning Israel he says, "All day long I have held out my hands to a disobedient and obstinate people."   NIV의 19, 20, 21절의 says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즉 영어 성경들은 원어대로 이런 시제를 현재로 표현하고 잇습니다.    우리말로 조금 어색할지 모르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신약성경에는 성경기록이 직접 말하는 데가 몇 군데 있습니다.   요19:37; 롬9:17, 10:11, 11;2; 딤전5:18; 약4:5   또 다른 성경기록이 다시 이르되, 그들이 자기들이 찌른 자를 보리라, 하느니라.   KJV: And again another scripture saith, They shall look on him whom they pierced.   NIV:  and, as another scripture says, "They will look on the one they have pierced."   그런데  개역 개정 등 거의 대부분의 우리말 성경은 이런 것들을 다 과거로 번역하였습니다.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영어 성경, 그리스어 성경, 킹제임스 마제스티 성경처럼 이런 부분을 현재로 번역해야 그 성경 말씀이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이런 것을 이해하고 성경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샬롬
2021-12-16 11:35:01 | 관리자
성경 번역에서 시제의 어려움(갈라디아서 2장 20절 등)   그리스어나 영어는 우리말과 달리 시제가 복잡하고 다양해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말은 이런 다양한 것들을 그대로 다 담을 수 없으므로 성경 번역 시 가능한 한 우리말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바르게 번역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복음서를 보면 I am come이라는 말이 10번 정도 나옵니다.   마5:17   내가 율법이나 대언자들의 글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폐하러 오지 아니하고 성취하러 왔노라    Think not that I am come to destroy the law, or the prophets: I am not come to destroy, but to fulfil.   요9:39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으니 이것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눈멀게 하려 함이라, 하시매   And Jesus said, For judgment I am come into this world, that they which see not might see; and that they which see might be made blind.   우리말로 ‘내가 왔다’고 하면 영어로는 ‘I came’이 머릿속에 떠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런 부분이 그리스말과 영어 모두 ‘I am come’으로 되어 있는 데가 더러 있습니다.   이것을 조금 더 직역하면 ‘내가 와 있다’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뜻을 살리기 위해 ‘내가 와 있다’로 번역 하면 이미 우리말로는 어색함을 금세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은 우리말 성경에서 ‘내가 왔다’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렇게 해도 뜻에 큰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명확히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는 데도 있습니다.   갈2:20을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I am crucified with Christ: neverthless I live; yet not I, but Christ liveth in me: and the life which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킹제임스 성경으로 이 절의 앞부분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로 되어 있습니다.   개역성경을 포함하여 다른 성경들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번역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말의 한도 내에서 어떤 것이 더 기록자의 의도를 잘 반영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번역자의 의중이 무엇이냐에 따라 전자로 해도 되고 후자로 해도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로 하면 과거에 못 박혀서 지금도 그대로 그 상태가 유지가 되고 있다는 것이 표현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로 하면 과거에 못 박혔다는 사실만 보여 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구원 받은 뒤 지금 자기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보여 주려 하므로 킹제임스 마제스티 에디션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로 하였을 뿐입니다.   갈6:14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나니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있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개역 성경, 말씀보존학회 한글 킹제임스 등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렇게 ‘못박히고’로 하면 뜻이 제대로 살지 않습니다.   적어도 공동번역이나 바른 성경처럼 해야 합니다.   공동: 그러나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5절과 6절을 보면 이런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5 그들은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할 준비가 되신 분께 회계 보고를 하리라.   6 이런 까닭으로 죽어 있는 자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나니 이것은 그들이 육으로는 사람들을 따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5 Who shall give account to him that is ready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6 For for this cause was the gospel preached also to them that are dead, that they might be judged according to men in the flesh, but live according to God in the spirit.   5절의 죽은 자들은 단순히 the dead이고 6절의 죽어 있는 자들은 them that are dead입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않으면 6절도 죽은 자들로 번역되어야 하고 이러면 5절과 6절의 죽은 자들과 죽어 있는 자들이 동일한 사람들이 되어 독자가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다음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4장 5-6절   그래서 킹제임스 마제스티 에디션에서는 I am come, I am crucified 같은 표현을 과거로 번역하기도 하고 필요한 때에는 과거에 이루어졌지만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형태로도 번역하였습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더 미묘한 차이는 영어 성경이나 원어 성경을 보고 각자 판단하기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큰 은혜와 화평을 기원합니다.   샬롬
2021-12-16 10:50:04 | 관리자
창세기 33장 18절은 ‘평안히’와 ‘살렘’ 중 어떤 번역이 맞는가?   창세기 33장은 야곱이 자기 외삼촌 라반과 함께 밧단아람에서 살다가 가족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서 먼저 세겜이라는 사람의 도시 중 하나인 살렘 앞에 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올 때에 가나안 땅에 있는 세겜의 도시 살렘에 이르러 그 도시 앞에 자기 장막을 쳤고   And Jacob came to Shalem, a city of Shechem, which is in the land of Canaan, when he came from Padan-aram; and pitched his tent before the city.   야곱에게는 많은 가축들이 있어서 그는 도시 안으로 들어가 살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창30:43).   그런데 개역성경 등은 살렘이라는 도시를 밝히지 않고 그가 '평안히' 도착했다고 합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원래 살렘이라는 말은 스트롱 번호 8003에서 나왔는데 이 말은 스트롱 번호 7999에서 유래된 말로 형용사로 보면 평화롭다는 말이 되고 명사로 보면 살렘이라는 말이 됩니다.   매튜 풀, 존 길 등은 여기의 살렘이 요3:23의 살림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 많은 물이 있었으므로 요한도 거기에서 침례를 주고 있었으며 사람들이 와서 침례를 받았으니(요3:23)   즉 살렘 혹은 살림 근처에는 많은 물이 있어서 야곱이 자기의 많은 가축들을 키우기에 적합하였을 것입니다.   참고로 여기의 살렘(Shalem)은 멜기세덱의 출신지 살렘(Salem)과는 다른 곳입니다.    세겜의 도시라는 말에서 세겜은 하몰이 건축한 도시이고 그의 아들 세겜의 이름으로 불리는 곳입니다. 여러 사람들은 이 세겜이 요4:5의 수가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이곳은 요르단 강 서쪽에 있습니다.   여하튼 세겜과 살렘 그리고 살림과 수가는 다 같은 곳(거의 같은 지역)이 아닐까 여러 사람들이 추측합니다.   성경의 여러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여기의 살렘은 세겜에 있는 살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평안히'라고 번역하면 신구약성경 전체의 윤곽을 잡기에 부족합니다.   창세기 33장 18절 주석
2021-12-15 14:56:58 | 관리자
창세기 36장 24절에서 아나는 정말로 온천을 발견했나?   창세기 36장은 야곱의 형 에서의 계보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24절을 보면 킹제임스 성경은 아나라는 사람이 노새들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개역성경 등은 노새들이 아니라 온천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킹제임스 마제스티    시브온의 아이들은 이러하니 곧 아야와 아나인데 이 아나는 자기 아버지 시브온의 나귀들을 먹일 때에 광야에서 노새들을 발견한 그 아나더라.   And these are the children of Zibeon; both Ajah, and Anah: this was that Anah that found the mules in the wilderness, as he fed the asses of Zibeon his father.   개역개정 등   시브온의 자녀는 아야와 아나며 이 아나는 그 아비 시브온의 나귀를 칠 때에 광야에서 온천을 발견하였고   여기서 노새들로 번역된 말은 스트롱 번호 3222(남성 복수)이고 원어 사전에 가서 보면 분명하게 노새들로 되어 있습니다.   3222  !yE   yem {yame} 3117의 동형에서 유래;‘따뜻함’봄 :- 노새   존 길, 매튜 플 등의 주석을 보면 여기의 아나는 자기 아버지의 나귀들을 먹이다가 수나귀와 암말과의 잡종인 노새를 만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24절에서 노새로 번역된 말은 성경 전체에서 여기 한 군데만 나오는데 이 말이 새 역본들에서 온천으로 번역되는 이유는 엘리콧 등의 주석이 말해 주듯이 라틴어 카톨릭 성경을 만들어 준 제롬이라는 천주교 학자가 그렇게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귀중히 여기는 노새가 이때에 아나에 의해 (교배되어) 발견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문맥이 나귀, 노새로 이어지는 것이 마귀와 온천으로 이어지는 것보다 당연히 월씬 더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NKJV도 마찬가지로 노새들로 번역하였습니다.   창세기 36장 24절 주석 참조
2021-12-15 14:08:10 | 관리자
창세기 42장 24절에서 왜 요셉은 시므온을 가두었을까?   창세기 42장 24절을 보면 요셉이 자기 형들을 가나안으로 다시 돌려보내면서 시므온을 인질로 잡아두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그들을 떠나 돌아서서 울고 그들에게 다시 돌아와 그들과 대화하다가 그들로부터 시므온을 취해 그들의 눈앞에서 결박하였더라.   왜 요셉은 여러 형들 중에서 그를 인질로 잡아두었을까요?   여러 주석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은 시므온이 그의 형들 가운데 가장 성격이 포악한 자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34장 25절 이하를 보면 시므온과 레위가 잔인하게 세겜과 그의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25 셋째 날 그들이 아플 때에 야곱의 아들들 중 두 아들 곧 디나의 오라비들인 시므온과 레위가 각각 자기 칼을 취한 뒤 담대하게 그 도시를 습격하여 모든 남자들을 죽이고   26 칼날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며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밖으로 데리고 나왔더라.   또 창세기 49장 5-6절을 보면 그의 아버지 야곱도 그가 잔인한 자임을 인정합니다.   5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들이며 잔인한 도구들이 그들의 거처에 있도다.   6 오 내 혼아, 너는 그들의 은밀한 모임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내 존귀야, 너는 그들의 모임에 연합하지 말지어다. 이는 그들이 분노하여 사람을 죽이고 자기들의 의지대로 벽을 파 내려갔기 때문이라.   창세기 37장 18절 이하에는 요셉의 형들이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고 그를 죽이려고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19 서로에게 이르되, 보라, 이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20 그러므로 이제 오라. 우리가 그를 죽여 어떤 구덩이에 던지고 말하기를, 어떤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들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가 보리라, 하매    여기서 요셉을 죽여 구덩이에 던지자고 말한 장본인이 아마도 시므온일 가능성이 크다고 학자들은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자인한 자가 인질로 남겨지면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덜 고통스러워하지 않을까 라고 요셉이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 일을 통해 시므온은 크게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창세기 42장 24절 매튜 풀 등의 주석   Simeon, partly, because next to Reuben he was the eldest, and, as it may be probably gathered from his bloody disposition, Genesis 34:25 49:6, the most fierce and forward against Joseph, when Reuben was for milder counsels, as we see here, Genesis 42:22 38:29; and partly, because the detainment of one of so perverse and furious a temper would least afflict his father, and most secure Benjamin, who was to come with his brethren. He bound him before their eyes, that it might make deeper impression upon their hard hearts, and make their repentance more effectual.  
2021-12-15 12:19:49 | 관리자
창세기 46장 34절의 가증한 목자들   창세기 46장 34절에 보면 요셉이 자기 형들에게 파라오를 만나면 해야 할 말을 일러 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의 끝에는 ‘모든 목자가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가증한 존재’라는 조금 이상한 표현이 나옵니다.   당신들은 고하기를, 주의 종들의 생업은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가축을 치는 것이었는데 우리와 또한 우리 조상들이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그러면 당신들이 고센 땅에 거하리니 이는 모든 목자가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가증한 존재이기 때문이니이다, 하니라.   That ye shall say, Thy servants' trade hath been about cattle from our youth even until now, both we, and also our fathers: that ye may dwell in the land of Goshen; for every shepherd is an abomination unto the Egyptians.   존 길(John Gill) 등의 주석을 보면 그 이유가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1. 목자들이 자기들이 기르는 짐승들의 젖이나 고기를 먹어서가 아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당시에 고기를 먹었다(창43:16). 2. 이집트 사람들이 신들로 여기는 짐승들을 목자들이 먹어서도 아니다. 당시에는 그런 우상 숭배가 편만하지 않았다.   당시 이집트에는 왕 밑에 세 부류의 사람들 즉 제사장, 군인, 그리고 목자들이 있었으므로 목자들은 경멸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것들과 역사적 증언들을 종합해서 볼 때 당시 이집트 사람들은 페니키아, 에티오피아 등에서 쳐들어오는 외국인 목자들 부대로 인해 큰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래서 이런 표현이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요셉의 형들 역시 외국인 목자였으므로 아마도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큰 미움이 대상이었을 것이므로 요셉은 신중하게 형들에게 이런 조언을 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Every shepherd is an abomination unto the Egyptians   영어에서 every shepherd로 표현된 것은 '목자들은 모조리'를 뜻하는 매우 강력한 표현이라고 합니다. 아마 외국인 목자들에 대한 심한 거부감이 이런 표현에서도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창세기 46장 34절 주석 존 길 등   for every shepherd is an abomination unto the Egyptians; not because shepherds ate of the milk and flesh of the creatures they fed, which the Egyptians abstained from; for the Egyptians in those times did eat the flesh of slain beasts, see Genesis 43:16; nor because they fed, and slew, and ate those creatures, which the Egyptians worshipped as gods, as Jarchi; for it does not appear that the Egyptians were so early worshippers of such creatures; nor is this phrase, "every shepherd", to be understood of any other than foreign shepherds; for one of the three sorts of the people of Egypt, as distinct from, and under the king, priests, and soldiers, according to Diodorus Siculus (d), were shepherds, and were not despised on that account; for, as the same writer says, all the Egyptians were reckoned equally noble and honourable (e); and such it is plain there were in Egypt, in the times of Joseph, see Genesis 47:6; and goat herds were had in esteem and honour by those about Mendes, though swine herds were not (f): wherefore this must be understood of foreign shepherds, the Egyptians having been greatly distressed by such, who either came out of Ethiopia, and lived by plunder and robbery (g), or out of Phoenicia or Arabia; for, according to Manetho (h), it was said that they were Arabians or Phoenicians who entered into Egypt, burnt their cities, &c. and set up kings of their own, called their Hycsi, or pastor kings: and therefore Joseph might the rather fear his brethren and father's family would be the more contemptible in that they came from Canaan, which was near to Arabia and Phoenicia; but Dr. Lightfoot (i) is of opinion, that the Egyptians, being plagued for Abraham's and Sarah's sake, made a law, that for the future none should converse with Hebrews, nor with foreign shepherds, so familiarly as to eat or drink with them.
2021-12-15 12:01:11 | 관리자
베드로전서 4장 5-6절의 죽은 자들과 죽어 있는 자들   베드로는 자기의 죽음을 앞두고, 당시 로마 제국에서 큰 핍박을 받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베드로전후서 편지를 기록하였습니다.   4장 1-3절에서 그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욕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함을 말합니다.   1 그런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하셨으니 그와 같이 너희도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라. 이는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한 자가 이미 죄를 그쳤기 때문이니   2 그러므로 그는 육체 안에 거할 자기의 남은 때를 더 이상 사람들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리라.   3 이는 우리가 색욕과 정욕과 과음과 환락과 연회와 가증한 우상 숭배 속에서 걸어 이방인들의 뜻을 이룬 것이 우리 삶의 지나간 때로 우리에게 족하기 때문이라.   1절을 보면 구원받은 사람은 죄를 그쳤다고 하는데 이 말은 의도적으로 죄 짓는 것을 그쳤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2-3절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4절에서 보듯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뀌면 이들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4절 이 점에서 그들이 너희가 자기들과 함께 달음질하여 동일하게 과도한 방탕에 이르지 아니함을 이상히 여기며 너희를 비방하나   그러나 5절에서 보듯이 그런 사람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회계 보고를 해야 합니다.   5절: 그들은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할 준비가 되신 분께 회계 보고를 하리라.   5절에서 살아 있는 자들은 구원받는 자들이고 죽은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전자는 휴거 이후 곧바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보상을 결정하기 위한 회계 보고를 하고(고전3:11-15) 후자는 그 뒤 약 1007년(7년 환난기+1000년 왕국) 쯤 지나서 크고 흰 왕좌 앞에서 회계 보고를 합니다(계20:11-15).   그런데 6절에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6절 이런 까닭으로 죽어 있는 자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나니 이것은 그들이 육으로는 사람들을 따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이런 까닭으로’는 ‘모든 것을 회계 보고해야 하기 때문에’를 뜻합니다.   죽어 있는 자들에게 복음이 선포되었다는 것은 결코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짐을 뜻하지 않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히9:27).   6절의 죽어 있는 자들과 5절의 죽은 자들은 영어를 보면 완전히 다릅니다.   5 Who shall give account to him that is ready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6 For for this cause was the gospel preached also to them that are dead, that they might be judged according to men in the flesh, but live according to God in the spirit.   즉 5절의 죽은 자들과 6절의 죽어 있는 자들은 다릅니다.   그러므로 5절과 6절의 죽은 자들(The dead)과 죽어 있는 자들(them that are dead)을 달리 바르게 번역해야 합니다.   그러나 개역, 말씀보존학회 한글 킹제임스 등 거의 모든 성경들은 둘 다를 그냥 죽은 자들이라고 번역하여 제대로 성경을 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개역 5.6절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보존학회 한글 킹제임스   그들은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시게 될 그 분께 설명하게 되리라. 이런 연유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과 일치하여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과 일치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한번 읽어 보기 바랍니다.    이런 식의 번역으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직고하다, 설명하다, 사람과 일치하여, 하나님과 일치하여 등 번역 자체가 난해합니다.   6절의 죽어 있는 자들은 베드로 당시에 이미 구원받고 죽어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육신으로는 사람들의 판단을 받고 고난을 당했지만 영으로는 살아서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2-3절과 비교해 보시면 대비가 쉽게 될 것입니다.   6절을 말하면서 베드로는 지금 살아 있는 성도들이 6절의 성도들처럼 지금은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것들을 상속받을 것을 말하며 이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7절의 시작이 조금 이상합니다.   7절 그러나 모든 것의 끝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라   7절에 ‘그러나’가 나온 것은 이렇게 고난을 당하지만 주님의 재림이 가까우니 소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바울과 베드로 등 그 당시 사도들은 다 자기들 시대에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임박한 재림 신앙을 가지고 핍박을 견디며 믿음 생활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베드로전서 4장 1-7절을 이해하면 전체를 이해하는 일이 조금 쉬워질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6절 등 주석: 반즈 주석 좋음    샬롬 
2021-12-15 10:57:21 | 관리자
히브리서 6장 9절의 바른 번역   히브리서 6장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애용하는 말씀입니다.   6장 15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5절 이런 식으로 그(아브라함)가 끈기 있게 견딘 뒤에 그 약속하신 것을 얻었느니라.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15절의 그 약속하신 것이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끈기 있게 견뎌야 구원을 받는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13-14절을 보면 여기의 약속은 구원이 아닙니다.    당시 아브라함의 구원은 이미 오래 전에(약 50년 전에) 확고하게 이루어졌고 그는 이삭을 이미 낳았습니다. 14절의 약속은 이삭을 바침으로써 그가 번성하게 됨을 보여 줄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이삭을 바친 뒤 그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창22:16-18절을 보기 바랍니다.   16 이르되,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내가 나를 두고 이것을 맹세하였노라. 즉 네가 이 일을 행하여 네 아들 곧 네 유일한 아들을 바치기를 마다하지 아니하였으므로 17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복을 주며 내가 네 씨를 하늘의 별들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니 네 씨가 자기 원수들의 문을 소유하리라. 18 또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내 음성에 순종하였기 때문이라, 하니라.   10-12절을 보면 여기의 주제가 구원이 아니라 성도들이 누릴 복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10 하나님께서는 불의하지 아니하사 자신의 이름을 위해 너희가 보여 준 너희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 곧 너희가 성도들을 섬겨 온 것과 또 섬기고 있는 것을 잊지 아니하시느니라. 11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열심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충만한 확신에 이르기를 우리가 바라노니 12 이것은 너희가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인내를 통해 약속들을 상속받는 자들을 따르는 자들이 되게 하려 함이라.   13-15절은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10-12절을 설명합니다. 즉 여기의 주제는 구원이 아니라 구원 뒤에 따라오는 복입니다.   7장뿐만 아니라 10장도 다 구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에 받게 될 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꾸준히 견딘 자들(예를 들어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복을 누렸지만 나머지는 구원은 받았어도(이집트 탈출 시 믿음으로) 광야에서 멸절되어 가나안의 복을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를 떠나 예수님을 믿게 된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가 이제 구원받았지만 여러 가지 핍박과 환난을 견지디 않고 중도에 미끄러지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이집트를 떠난 구약 시대 이스라엘 성도들같이, 성도가 누릴 가나안의 복을 잃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잃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누릴 복을 잃는 것입니다.   6장에서 사도는 이것을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1-3절은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이 또다시 기초적인 교리를 놓는 일을 할 필요가 없음을 말합니다.   4-8절에서 사도는 이미 구원받은 자들이 구원을 잃었다가 다시 구원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8절을 보면 사도는 구원을 받고 나서 심각한 배도의 길을 가면 목숨을 잃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고전5장에서 심각한 음행을 범한 자(성도)를 죽음에 내주는 것과 같습니다.   또 이것은 요일5:16-17이 말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짓는 것을 보거든 그는 간구할 것이요, 그러면 그분께서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짓는 자들을 위해 생명을 그에게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는데 나는 그가 그것으로 인해 기도하라고 말하지 아니하노라. 모든 불의가 죄이지만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느니라.   바울은 이렇게 강력하게 경고를 주고 나서 9절에서 히브리 성도들에게는 그런 일이 닥치지 않을 것을 확신 있게 말합니다.   9절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9절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비록 우리가 이같이 말하지만 너희에 관하여는 더 좋은 것들과 또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이 있음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But, beloved, we are persuaded better things of you, and things that accompany salvation, though we thus speak.   9절이 바르게 번역되지 않으면 구원 상실 교리가 생길 수 있습니다.   개역 등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제대로 번역된 킹제임스 성경에 따르면 바울의 말 즉 9절은 그들에게 구원의 증거 있다고 말합니다. 구원에 동반되는 선한 행위가 그들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10절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10절 하나님께서는 불의하지 아니하사 자신의 이름을 위해 너희가 보여 준 너희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 곧 너희가 성도들을 섬겨 온 것과 또 섬기고 있는 것을 잊지 아니하시느니라.   그러므로 6장은 구원의 상실이 아니라 영원한 구원을 보여 주고 다만 구원받는 자가 심각한 배도의 길로 들어서면 복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목숨을 잃을 위험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런 중요한 부분에서 개역 성경은 9절을 이상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개역 성경처럼 그들에게 구원에 가까운 것이 있다고 하면 그들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린양의 피를 의지하여 이집트(세상)를 떠난 사람들입니다.   다만 지금 광야에서(세상에서)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의 갈림길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가나안의 복을 누리느냐, 누리지 못하느냐의 문제입니다.   10장 26-39절도 구원을 잃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으나 순종하지 않다가 광야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문맥을 잘 보고 성경을 읽으면 영원한 구원의 의미가 확실해질 것입니다.
2021-12-14 10:52:42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