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8:10 – ‘영이 살았다’는 것인가, ‘성령이 생명이 되셨다’는 것인가?
개역: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흠정역: “성령은 의로 인해 생명이 되시느니라”
KJV: “the Spirit is life because of righteousness”
▶ 개역은 "우리의 영이 산 것이다"라고 번역하여 구원받은 자의 영이 따로 살아나서 죄와 상관없어진 존재처럼 이해되게 만든다.
▶ 실제로 이 표현은 영지주의적 이단들이 주장하는 "나는 영이 구원받았기 때문에 내 몸이 짓는 죄는 상관없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해석으로 오용될 수 있다.
▶ 하지만 로마서 6장에 따르면, 구원은 단순히 영의 부활이 아니라, 성령을 통한 ‘의의 생명’의 시작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영의 생존’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 안에 생명이 되셨다는 사실이다.
결론: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셔서 생명의 주가 되신다는 것이지, 내 영이 독립적으로 의롭고 깨끗해졌다는 뜻이 아니다.
2025-05-27 15:24:12 | 관리자
롬 8:6 – ‘영의 생각’인가, ‘영적으로 생각함’인가?
개역: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흠정역: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KJV: “to be spiritually minded is life and peace”
▶ 개역은 ‘영의 생각’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마치 영(spirit)이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인격체처럼 묘사한다. 이는 인간 구성에 대한 성경적 삼분론(영–혼–몸)에 어긋난다.
▶ 성경에 따르면 판단과 사고의 주체는 ‘혼’이며, 영은 생명과 교통의 기관이다. 따라서 올바른 표현은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 즉 혼이 성령의 지배 아래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상태이다.
▶ 또한 에베소서 4:23, 딤후 1:7 등에서는 ‘생각의 영(spirit of your mind)’이란 표현이 쓰이지만, ‘영의 생각’은 성경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론: “영적으로 생각함”은 성령의 인도 아래 내면이 변화되어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는 단순한 ‘영적 추상성’이 아니다.
2025-05-27 15:23:05 | 관리자
롬 8:5 – ‘영을 좇는 자’인가, ‘성령을 따르는 자’인가?
개역: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흠정역: “성령을 따르는 자들은 성령의 일들을 생각하나니”
KJV: “But they that are after the Spirit the things of the Spirit”
▶ 개역 성경은 ‘영을 좇는다’고 표현함으로써 **구체적 대상이 없는 ‘영적인 존재 일반’**을 의미하게 만든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은 ‘성령님’을 따르는 자들이다.
▶ 세상에는 하나님께 속한 영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 영들(요일 4:1), 점치는 영, 귀신의 영들도 존재한다. 따라서 단순히 “영을 좇는다”는 표현은 은사주의, 무속 신앙, 심령술까지 포함할 수 있는 위험한 해석을 낳는다.
결론: 성경이 말하는 것은 막연히 ‘영적’인 삶이 아니라 성령님께 순복하는 삶이다.
2025-05-27 15:21:51 | 관리자
팔레스타인의 소금
예수님께서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이라는 말씀을 하신 배경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실제로 사용되던 **암염(rock salt)**의 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비유는 단지 화학적 개념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일상적인 현실에서 나온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예시이다. 다음은 이 말씀을 팔레스타인 지방의 소금 상황과 연결하여 논리적으로 정리한 요약이다:
1. 당시 소금의 중요성과 가치
예수님 당시 소금은 귀중한 자원이었다. 오늘날처럼 정제된 소금이 대량 생산되기 전에는, 소금은 노동의 대가로 지급되기도 했다. 라틴어 salarium에서 유래한 영어 ‘salary’(급여)는 실제로 “소금으로 주는 보수”를 의미하며, 소금이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생필품이었는지를 보여준다.
2. 이스라엘 지역에서의 소금 공급원: 사해의 암염
팔레스타인, 특히 사해 지역에서 소금은 암염 덩어리 형태로 채취되었다. 그러나 이 암염은 오늘날 정제염처럼 순수한 염화나트륨이 아니라 다양한 불순물과 석회질이 섞인 혼합 광물이었다.
이 암염을 물에 담가 소금기를 추출해야만 사용이 가능했고, 몇 차례 물에 우려낸 후 포화용액을 농축하는 방식으로 사용했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염분이 빠져나간 껍데기만 남는데, 이것은 외형은 여전히 소금 같지만 더 이상 짠맛이 없는 돌가루에 불과하다.
3. 맛 잃은 소금의 실제 모습과 용도 폐기
가축들에게 미네랄을 공급하기 위해 정제하지 않은 암염 원석을 그냥 땅에 던져놓았다. 시간이 지나며 가축들이 핥아먹고, 비바람에 노출되면 암염에서 짠맛이 사라지고 결국 구멍이 숭숭 뚫린 흉측한 찌꺼기만 남게 된다.
이 찌꺼기는 땅에도, 거름더미에도 쓸모가 없고, 오직 사람들과 짐승들의 발밑에 밟히는 존재가 된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맛을 잃은 소금"이다.
4. 영적 교훈과 적용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고 하시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역할을 설명하셨다. 그러나 동시에 영적 영향력을 잃은 자에 대해 경고하신다.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처럼 보이지만, 안에는 진리와 경건의 능력이 사라진 자는 결국 맛을 잃은 소금처럼 아무 쓸모가 없어지고, 세상에 밟히는 신세가 된다.
마태복음 5:13과 누가복음 14:34–35에서 반복된 이 말씀은 소금의 지속적인 본질 유지, 즉 진리와 거룩함의 보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결론
예수님께서 하신 “맛을 잃은 소금”의 비유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너무나 현실적이고 직관적인 교훈이었다. 사해에서 채취한 암염처럼, 겉모양만 남은 그리스도인은 결국 아무런 유익이 없으며, 세상에 짓밟히고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통해 소금의 본질을 유지해야 하며, 세상을 향한 정결하고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
2025-05-27 15:01:20 | 관리자
요한계시록 15장 3절 성도들의 왕 만국의 왕?
요한계시록 15장 3절은 구속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으로,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장면이다. 이 노래의 핵심 구절 중 하나가 "성도들의 왕이여"라는 표현이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표현을 "King of saints"로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지만, 다수의 현대 역본들과 로마 가톨릭에서 사용되는 사본에서 이 표현은 "King of the nations"(NASB), "King of the ages"(NIV) 등으로 바뀌어 있다. 한글 개역, 공동번역, 천주교 성경 등도 "만국의 왕" 또는 "만민의 왕"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단순한 문장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 간의 구속 언약 관계를 훼손하는 심각한 신학적 변개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만왕의 왕이자 주들의 주로 선포할 뿐 아니라, 특별히 자신의 피로 구속한 성도들의 머리이자 왕으로 계신 분으로 묘사한다(계17:14, 골1:18, 엡5:23). 요한계시록 15장 3절은 이처럼 구원받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드리는 직접적인 찬양으로, "성도들의 왕이여"라는 표현이야말로 이 찬양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핵심 문구이다.
하지만 이 표현이 로마 가톨릭 계열 사본에서 "만국의 왕"이나 "만민의 왕" 등으로 바뀌게 된 데에는 명백한 신학적 배경이 있다. 로마 가톨릭은 중세 이후 교황을 교회의 머리로 삼고 있으며, 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라 자처해왔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도들의 유일한 왕이시라는 성경의 선언은 교황의 권위와 직접 충돌하는 위험한 진리로 인식된다. "성도들의 왕"이라는 표현은 곧 교황이 결코 차지할 수 없는 자리를 가리키며, 이는 로마 가톨릭 체계 속에서 불편하고 제거되어야 할 표현이었다.
이와 함께 가톨릭 신학에서 중요한 한 축을 이루는 "보편구원론"도 관련이 깊다. 가톨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인류가 잠재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며, 그리스도를 직접 믿지 않는 자라도 양심에 따라 선을 행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입장을 채택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이러한 보편주의 신학은 급속히 확산되었고, 이는 성경 해석과 번역에도 반영되었다. 결과적으로 "성도들"이라는 특정 구원 공동체보다는 "만민"이나 "만국"과 같은 보편적 표현이 더 선호되었고, 이는 신학적 의도를 반영한 번역 선택이 되었다.
이러한 번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특정한 무리(즉, 믿는 자들, 성도들)와 맺은 언약의 관계라는 사실을 흐리게 만들고, 단지 인류 전체에 대한 보편 통치 개념만을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중심적, 언약 중심적 정체성은 점점 희석되고, 예수님의 통치는 단지 형식적이고 외적인 통치 권위로만 축소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의 머리이시며(행20:28), 성도들의 왕이시다. 그분은 성도들을 위하여 생명을 내어주신 목자이시며(요10:11), 자신의 몸으로 삼으시고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참된 왕이시다. "성도들의 왕"이라는 표현은 이 언약적 관계를 정통적으로 보여주는 유일한 구절로, 그 말씀을 지운다는 것은 복음의 핵심 교리를 삭제하는 것과 다름없다.
요한계시록 15장 3절의 "성도들의 왕"이라는 표현은 오직 킹제임스 성경에만 남아 있다. 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성도들과의 관계를 왜곡하지 않고 온전하게 보존한다. 이 한 구절은 단지 찬양 가사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교리의 수호이며, 진리의 기준이며, 변개된 사본과 왜곡된 교리에 맞서 참 진리를 수호하는 최전선이다.
오늘날 성도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성경이 이 귀중한 진리를 담고 있는지를 반드시 점검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민족을 다스리시는 통치자이심과 동시에, 자신의 피로 사신 성도들을 다스리는 언약의 왕이시다. 그분의 통치는 단지 외적인 지배가 아니라, 피로 맺어진 신적 언약에 근거한 내적이고 인격적인 다스림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왕"이라는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단어 하나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과 구속 언약의 진리를 지키는 것이다.
2025-05-27 14:51:58 | 관리자
이기는 자는 누구인가? (요한계시록 3:5)
“이기는 자 곧 그는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아니하고 그의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3:5)
이 구절은 오랜 세월 동안 오해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이기는 자가 되어야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다”는 주장은 마치 구원이 조건부이거나, 행위의 결과인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가르침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이기는 자”란 누구입니까?
1. 요한의 서신에 나타난 명확한 정의
요한일서 5장 4–5절은 "이기는 자"가 누구인지 성경 스스로 해석해주는 가장 결정적인 본문입니다.
“무릇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누가 세상을 이기는 자냐?” (요일 5:4–5)
이 구절에서 분명하게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곧 믿는 자다.
믿음이 곧 세상을 이긴 승리다.
즉, “이기는 자”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이며, 그 승리는 믿음 자체를 통해 이미 확보된 것입니다. 이는 믿는 자가 반드시 어떤 “능력 있는 업적”이나 “영적 전투에서의 승리”를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2. 요한계시록 2–3장과의 일관성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주신 약속에는 모두 **“이기는 자에게는…”**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계2:7, 11, 17, 26; 3:5, 12, 21). 여기서 주님은 교회의 상태에 따라 책망하거나 칭찬하시면서도, 이기는 자들에게는 동일하게 보상과 상속의 약속을 주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약속들은 모두 "믿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일곱 교회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이며, 그 구성원들은 이미 거듭난 성도들입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이 현재 영적으로 무기력하더라도 그들이 이기는 자임을 선언하고, 그 신분에 걸맞게 살기를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승리에 연합된 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이므로, 예수님의 승리가 곧 우리의 승리입니다. 성경은 “이기는 자”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신분(position)**으로 말하지, **노력의 결과로 얻는 상태(condition)**로 말하지 않습니다.
신분: 이긴 자 (이미 이루어진 위치, 확정된 정체성)
삶의 상태: 매일의 순종과 성장 (성화의 여정)
이 둘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신분은 믿음으로 얻으며, 상태는 순종으로 자랍니다. 그러나 신분이 상실되는 일은 없습니다.
4. 이기는 자는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다
계3:5에서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다”는 표현은 경고가 아니라, 보장의 약속입니다.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기는 자는(=믿는 자는) 결코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다.”
이 말씀은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는 자의 구원은 확실하고 안전하다는 격려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너를 결코 떠나지 아니하리라”(히13:5)고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이는 이중 부정법을 사용한 강한 보증의 말투입니다.
결론: 이기는 자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믿는 자다
이기는 자란 누구인가?
성경은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누가 세상을 이기는 자냐”(요일5:5) 이 말씀에 따라, 이기는 자는 곧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자입니다. 이는 영적 업적이나 도덕적 우수성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를 통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김은 어떻게 오는가?
이김은 우리의 행위나 노력에서 오지 않습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라는 말씀처럼, 믿음이 곧 승리의 통로이며 근거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세상을 이기셨고, 그분과 연합된 자는 그 승리에 함께 참여하는 자입니다.
이기는 자는 구별된 소수의 특별한 그룹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믿는 자는 이기는 자입니다. 일곱 교회에게 각각 주신 말씀에서도 보듯, 주님은 각 교회의 상태와 관계없이 믿는 자들에게 “이기는 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기는 자는 어떤 엘리트 영적 계층이 아니라,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5절은 어떤 의미인가?
“이기는 자는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지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위협이나 불안의 선언이 아니라, 구원의 확실성을 보장하시는 격려의 말씀입니다. 이 약속은 모든 믿는 자에게 해당하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생명은 결코 취소되거나 지워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3장 5절은 “열심히 살아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경고가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기는 자가 된 성도들에게 주어진 확정적 약속이며, 그 신분에 걸맞게 담대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라는 격려의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2025-05-27 14:42:47 | 관리자
“시험의 시간을 면하게 하리니” (계3:10)
— “keep from”의 문법적·성경적 의미에 대한 해석
들어가는 말
요한계시록 3장 10절은 말세를 살아가는 신약 교회 성도들에게 주어진 놀라운 약속이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은즉 나도 너를 지켜 시험의 시간을 면하게 하리니, 그것은 곧 앞으로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는 시간이라.” (계3:10, 흠정역)
이 말씀에서 핵심 표현은 “지켜 면하게 하리니”(keep thee from)이다. 이것은 단순히 “시험을 통과하게 해준다”거나 “시험 중에 보호해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험의 시간” 자체에 들어가지 않도록 면제하신다는 의미다. 이 점은 영어 표현, 헬라어 문법, 그리고 성경적 사용례를 통해 분명하게 입증된다.
1. 영어 표현 “keep from”의 의미
영어에서 “keep from ~ing”은 단순히 지킨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행위나 상황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다, 방지한다, 면하게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I kept him from going.
→ 나는 그가 가는 것을 막았다, 못 가게 했다.
She kept me from making a mistake.
→ 그녀는 내가 실수하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이처럼 “keep from”은 무언가 하지 못하게 하거나, 그 상태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거나, 그 일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순히 “곁에서 지켜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영어 속담에도 이런 표현이 있다:
The Bible keeps you from sin, and sin keeps you from the Bible.
→ 성경은 너를 죄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죄는 너를 성경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여기서 “keep”은 “지킨다”가 아니라 “떨어지게 만든다,”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다. “keeps you from”은 곧 단절, 회피, 면제를 뜻한다.
2. 헬라어 원문 표현: τηρέω ἐκ (tēreō ek)
계시록 3장 10절의 “지켜 면하게 하리라”는 헬라어로는 **“τηρήσω ἐκ”**이다.
τηρέω (tēreō): “지키다”, “보존하다”, “보호하다”
ἐκ (ek): “~에서부터 밖으로”, “~로부터 나와”
즉, “keep from”은 시험 속에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이 임하기 전 단계에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한다는 의미다.
만약 주님께서 환난기 중간에 성도들을 보호하시려 하셨다면 **ἐν (en, ~안에서)**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ἐκ이 쓰였고, 이는 시작 전부터의 분리를 뜻한다.
3. 동일 표현의 사용 예: 요한복음 17:15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원치 아니하옵고, 다만 악에서 저들을 지키시옵소서.”
(that thou shouldest keep them from the evil) (요17:15)
여기서도 keep from은 “악 속에서 보호한다”는 뜻이 아니라, 악과의 접촉을 막아주는 것이다. 제자들은 세상에 남아 있지만, 악에 물들지 않도록 “떼어놓은” 상태로 보호받는 것이다.
즉, 시험이나 악 속에 들어가지 않도록 막는 것, 그것이 바로 “keep from”의 의미이다.
4. “시험(the test)”이 아닌 “시험의 시간(the hour of test)”
계3:10은 단순히 “시험으로부터 면제”가 아니라, “시험의 시간(the hour of temptation)”으로부터 면제라 하셨다. 이는 시련 자체뿐 아니라 그 시련이 진행되는 시공간 전체를 포함한다.
“hour”는 문자적 시간이 아니라 심판의 시기,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는 시대적 국면을 뜻한다.
다시 말해, 계3:10의 약속은 시험을 견디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시험의 시간 자체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것이다.
5. 그 시험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본문은 분명히 말한다:
“그것은 곧 앞으로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는 시간이라.”
이 시험은 신약 교회 성도들을 연단하거나 성화시키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불신 세상 전체에 내려지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땅에 거하는 자들”은 계시록 전체에서 항상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짐승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들이다 (계13:8, 계6:16, 계16:2).
반면에 성도들은 이미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은 자들이다 (요3:36, 살전5:9, 롬5:1). 따라서 시험의 시간 자체에 들어가지 않는다.
6. 교리적 일치: 성도는 진노에서 제외됨
성경은 반복적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진노에 참여하지 않음을 증언한다.
“우리를 다가오는 진노로부터 건지시는 예수님” (살전1:10)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노에 이르도록 정하지 아니하시고…” (살전5:9)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 (롬5:1)
이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시험의 시간 그 자체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교리적 확증이다. 다시 말해, 단순한 “시험 면제”가 아니라 시험의 시간에서의 분리이다.
결론 – “keep from the hour of temptation”은 시간적 면제의 선언이다
요한계시록 3장 10절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keep from은 "시험 가운데서 보호"가 아니라 시험의 시기 자체에 들어가지 않도록 막는다는 뜻이다.
시험의 시간은 하나님의 진노가 전 세계에 임하는 환난기 전체를 말하며,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포함되지 않는 시간이다.
이 약속은 단순한 보호가 아니라 면제이며, 이는 헬라어 문법, 영어 표현, 신약 전체의 교리와 일관된다.
따라서 이 말씀은 구원받은 신약 교회 성도들이 환난기 중간이나 끝에 구출되는 것이 아니라, 환난기 시작 전에 휴거되어 그 시간 전체로부터 면제받게 된다는 확실한 약속이다.
“I will keep thee from the hour of temptation”
= “나는 너를 그 시험이 임하는 시간에조차 들어가지 않도록 막겠다”
이 진리는 성경적 문맥, 원어의 의미, 교리적 정합성, 영어 표현상의 용법에 근거한 해석이며, 킹제임스 성경이 보여주는 번역의 정직성과 정확성을 더욱 명확하게 입증해 준다.
2025-05-27 14:36:45 | 관리자
“신들을 욕하지 말라” (출애굽기 22:28) — 성경 전체에 비추어 본 정확한 번역의 근거
1. 원어 히브리어와 주요 번역 비교
출애굽기 22장 28절은 히브리어 원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לֹא תְקַלֵּ֣ל אֱלֹהִ֔ים וְנָשִׂ֥יא בְעַמְּךָ֖ לֹ֥א תָאֹֽר׃
Lo tekalel elohim, ve-nasi be-ammekha lo ta’or.
여기서 핵심은 **“엘로힘”(אֱלֹהִים)**이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히브리어 중 하나로, 다음과 같은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God) — 창1:1 외 다수
신들(gods) — 출20:3, 신6:14 등
재판장(judges) — 출21:6, 22:8~9
권위자들 — 시82:6, 요10:34 해석상
KJV(킹제임스 성경)은 이 본문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Thou shalt not revile the gods, nor curse the ruler of thy people.” (Ex. 22:28, KJV)
이에 비해, 대부분의 현대 역본은 이 “gods”를 하나님 혹은 재판장으로 번역한다. 예:
개역: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가톨릭역: “하느님을 욕하거나…”
NIV: “Do not blaspheme God or curse…”
그러나 KJV는 ‘gods’라는 원어 그대로의 의미를 보존하고 있으며, 이는 본문의 문맥, 문법, 신약의 인용구까지 고려할 때 정확한 번역이라 할 수 있다.
2. 구약에서의 “엘로힘”의 용례 분석
히브리어 성경에서 “엘로힘”은 맥락에 따라 하나님, 신들, 사람들(권위자 또는 재판장)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특히 다음과 같은 구분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지칭할 때: 엘로힘 + 단수 동사
(예: 창1:1 “엘로힘이 창조하시니라” = 단수 동사 사용)
여러 신들(gods)을 지칭할 때: 엘로힘 + 복수 맥락
(예: 출20:3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elohim)을 두지 말라”)
출애굽기 22장 28절은 "엘로힘"을 "욕하다(revile)"라는 동사와 함께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 문맥상, 하나님에 대해 쓰일 때는 보통 **“blaspheme”(신성모독)**이나 **“curse”(저주)**가 사용되며, **“revile”**은 사람이나 인간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욕설이나 경멸에 사용된다.
실제 예:
레위기 24:15–16에서는 하나님을 “curse”, “blaspheme”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명한다.
반면 **“revile”**은 신약에서 사도 바울이 대제사장을 “revile”한 것에 대해 경고받는 장면(행23:5)과 같이 사람에 대한 표현으로 사용된다.
결국 출22:28의 문장은 두 인물군을 병렬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신들(gods) → 욕하지 말라(revile)
치리자(ruler) → 저주하지 말라(curse)
문장 구조상, 앞의 “신들”이 어떤 존재이든 하나님이 아니라 ‘치리자’와 대응하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3. 성경적 문맥 — 병행체(parallelism) 구조
출애굽기 22장 28절은 구약에서 흔히 나타나는 병행체 구조를 따른다. 이는 시편, 잠언 등에서 자주 발견되는 방식으로, 전반부와 후반부가 대등하거나 유사 개념을 나란히 배치하는 형식이다.
“너는 신들을 욕하지 말며 / 네 백성의 치리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이 구조를 고려할 때, 앞의 “신들”은 뒷부분의 “치리자”와 의미상 대응한다. 이는 출애굽기 21:6, 22:8 등에서 “엘로힘”이 **사람 재판자들(judges)**을 지칭한 용례와도 일치한다.
하지만 “신들”을 단지 재판장으로 번역하는 것은 문제를 야기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구절을 인용하셨기 때문이다.
4. 신약에서의 인용 – 요한복음 10:34–35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0장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것에 대해 유대인들이 신성모독이라고 돌을 들자, 구약을 인용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율법에,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라, 하였노라, 하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자들을 그분께서 신들이라 하셨으며…” (요10:34–35)
예수님이 인용한 구절은 명확하게 시편 82:6이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라. 너희는 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시82:6)
그런데 예수님은 이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자들”을 가리켜 **신들(gods)**이라 하셨다. 이는 모세오경, 곧 율법(Law)에서 나온 구절을 지칭한 것으로, 출애굽기 22:28이 가장 직접적인 예이다. 다시 말해:
시82:6은 “시편”에 있고
요10:34에서 예수님은 “율법에 기록되었다”고 하셨으므로
예수님이 인용하신 구절은 출22:28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출22:28에서 “엘로힘”을 재판장으로 바꾸면, 예수님의 인용 근거가 사라지며 성경의 통일성이 훼손된다. 반면 KJV의 “gods” 번역은 시편 82편, 요한복음 10장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5. 이교 신(gods of the nations)들과의 관계
출애굽기 22:28의 “gods”를 이교도의 신들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한 해석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문맥상 적절치 않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신들을 언급하지도 말라고 명령하셨다.
“다른 신들의 이름은 언급하지도 말며 네 입에서 들리게도 하지 말지니라” (출23:13)
“그들의 신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말며… 섬기거나 절하지 말고” (수23:7)
따라서 하나님께서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이교 신들을 존중하라는 의미에서 “욕하지 말라”고 하셨을 가능성은 없다. 오히려 그들의 이름조차 부르지 말라는 강력한 금지가 주어진다. 그러므로 출22:28의 “gods”는 실제 존재하는 통치자들,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문맥상 정확하다.
결론 – 킹제임스 성경의 “gods” 번역이 옳다
출애굽기 22장 28절에서 “엘로힘”을 “gods”(신들)로 번역한 킹제임스 성경은 다음의 점에서 옳다.
원어적 정직성 – ‘엘로힘’은 복수형이며, 문맥상 ‘하나님’이 아닌 존재들을 가리킨다.
문법적 구조 – 병행체 문장에서 “치리자”와 대응하는 복수적 존재는 ‘신들’이 가장 자연스럽다.
신약과의 연계 – 예수님은 구약 율법에서 사람들을 ‘신들’이라 부르셨다고 하셨고, 이는 출22:28과 연결된다.
교리적 조화 –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자들을 ‘신들’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상징하며, 성경 전체 맥락과 일치한다.
따라서 “신들을 욕하지 말라”는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은 문자 그대로 정확할 뿐 아니라, 신구약을 연결하고, 신적 권위와 인간 대표자들의 위치를 올바르게 설명하는 유일한 번역이다. 현대 역본들의 해석은 이러한 본문의 문맥과 신약의 인용까지 무시하고 있으며, 결국 성경의 일관성과 권위를 훼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에만 빛을 발한다. “신들을 욕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담은 정확한 표현이며, 그 권위를 가장 충실하게 지켜낸 성경은 킹제임스 성경이다.
2025-05-27 14:29:56 | 관리자
하나님의 손가락이라는 표현 (출애굽기 31:18)
하나님의 말씀은 단어 하나, 표현 하나에도 깊은 의미와 목적이 있다. 하지만 많은 현대 번역 성경들은 이런 중요한 단어들을 의역하거나 삭제하며, 원문이 의도한 의미를 흐리거나 왜곡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손가락(finger of God)"이라는 표현도 그 중 하나다. 킹제임스 성경(KJV)과 킹제임스 흠정역은 이 표현을 네 번 그대로 번역하고 있지만, 개역 성경과 대부분의 현대역본은 이를 “친히”, “손으로”, “권능” 등으로 바꾸어버렸다.
사람의 생각에는 "손가락"이 너무 작고 연약해 보일 수 있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손가락"을 위엄과 권능의 상징으로 제시한다. 이 표현은 단순한 묘사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계시이다. 본 글에서는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손가락"이 어떻게 등장하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살펴보며, 우리가 그것을 통해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손가락"은 실제로 존재하는 성경적 표현이다
출애굽기 31장 18절은 이 표현이 처음 등장하는 중요한 본문이다.
“그분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와 대화하는 것을 마치고 증언 판 두 개를 모세에게 주셨는데 그것들은 돌 판이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쓰신 것이더라.” (출31:18, 흠정역)
히브리어 원문에는 "에쯔바 엘로힘"(אֶצְבַּע אֱלֹהִים)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며, ‘에쯔바’는 손가락을 가리킨다. KJV는 이를 정확히 **“finger of God”**으로 번역했고, 흠정역도 그에 따라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번역했다. 하지만 개역성경은 이 표현을 아예 제거하고 “친히 쓰신”으로 바꾸었다.
이처럼 원문에 있는 단어를 없애거나 다르게 바꾸는 것은 단지 번역상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 계시에 대한 신학적 존중의 결여이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단어는 인간이 임의로 바꿔서는 안 된다. "손가락"이라는 단어 하나 속에도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특별한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자신의 “손가락”으로 직접 말씀을 기록하셨다
출애굽기 31:18과 신명기 9:10에서 “하나님의 손가락”은 하나님의 율법이 단순한 영적 영감이나 선지자의 기록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친히 쓰신 직접적인 계시임을 강조한다.
“주께서 내게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쓰신 두 돌 판을 넘겨주셨느니라. 그 위에는 집회의 날에 주께서 산에서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이 기록되었느니라.” (신9:10)
이 돌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가락”으로 새기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추상적 에너지나 비물질적 인식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현실 속에 임하신 실제 계시임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굳이 “말씀하시기만” 해도 율법을 모세에게 전달할 수 있었지만, “손가락”으로 기록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으시며, 그들에게 직접 증언의 증표를 주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율법을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법적이고 인격적인 언약 관계가 성립되었음을 상징한다.
3. “하나님의 손가락”은 심판과 권능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손가락"이 또 한 번 등장하는 곳은 출애굽기 8:19, 즉 하나님께서 이집트에 재앙을 내리실 때이다.
“그때에 마술사들이 파라오에게 이르되, 이것은 하나님의 손가락이니이다, 하였으나 파라오의 마음이 강퍅해져서 그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주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았더라.” (출8:19)
이집트의 마술사들조차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두 손 들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장면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신 것을 보고, 이것이 단순한 마술이나 자연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가락”, 즉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심판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여기서 “손가락”이라는 표현은 인간적인 연약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속하고 정확하며 제한 없는 능력을 보여준다. 마치 인간이 손가락 하나로도 버튼을 누르거나 돌을 던질 수 있듯, 하나님께서도 굳이 팔이나 주먹이 아닌 “손가락 하나로도” 역사를 이루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4. 예수님도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를 내쫓으셨다
이 표현은 신약에서도 직접 등장한다. 누가복음 11:20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내쫓으면 분명히 하나님의 왕국이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눅11:20)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 곧 하나님의 손가락, 즉 하나님의 직접적인 권세로 마귀를 쫓아내셨다고 하신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손가락”이 율법을 새기고 이집트에 재앙을 내릴 정도의 절대 권능이었다면, 신약에서는 영적 전쟁의 승리와 하나님의 왕국 도래를 알리는 표시가 된다.
하나님의 손가락은 단지 문자적인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 개입,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인격적인 행위를 뜻한다.
5. 다니엘서의 “손가락” –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시는 손가락
다니엘 5장에서는 바벨론 왕 벨사살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탕한 연회를 벌이는 중에, 벽에 글씨를 쓰는 손가락이 나타난다.
“그때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촛대 맞은편 왕궁 석회벽에 글을 쓰매 왕이 그 글 쓰는 손가락을 보았더라.” (단5:5)
“그러므로 그분께서 손의 일부를 보내사 이 글을 기록하게 하셨나이다.” (단5:24)
이 손가락은 곧 하나님의 심판의 손가락이다. 그 손가락은 벽에 글을 새기며 바벨론의 몰락을 선언했다. 단지 쓰기만 하셨을 뿐인데, 그 한 줄의 글은 한 제국의 운명을 뒤흔들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손가락”의 권능이다.
6. “하나님의 손가락”은 창조의 능력도 나타낸다
시편 8편 3절에서도 “주의 손가락”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주의 하늘들 곧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작품과 주께서 정하신 달과 별들을 내가 깊이 생각하오니” (시8:3)
하늘의 해와 달과 별, 이 광대한 우주도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만드셨다. 이것은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손가락으로 만든 것”이란, 아주 쉬운 일, 정교하지만 능수능란한 손길을 의미한다. 하나님께는 하늘의 별들을 만드시는 것도 손가락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결론 – 하나님의 손가락은 하나님 자신이 친히 행하신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손가락”이라는 표현은 전능하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과 인격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그것은 율법을 새기고, 재앙을 내리며, 마귀를 내쫓고, 제국을 심판하고, 하늘과 별들을 지으신 하나님의 실제 역사이다.
이 표현을 삭제하거나 축소하거나 “손길”, “친히”, “권능” 같은 일반적이고 모호한 단어로 바꾸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섬세함과 권위를 경시하는 태도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떤 표현으로 드러내셨는지를 정확히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의 손가락은 연약함이 아니라 위엄이며, 하나님의 손가락은 은유가 아니라 실재이며, 하나님의 손가락은 기록이며, 심판이며, 구원이요 창조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들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들보다 강하니라.” (고전 1:25)
2025-05-27 14:25:00 | 관리자
새를 쪼개지 않아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다(창세기 15:10)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때때로 성경 본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해석이 강단에서 전해지는 경우가 있다. 창세기 15장 10절도 그 중 하나다.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짐승들을 중간에서 쪼개어 놓았지만 **“새들은 나누지 아니하였더라”**는 단순한 기록을 두고, 어떤 설교자들은 아브람이 하나님께 희생예물을 잘못 드려서 그의 후손들이 저주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집트에서의 400년 종살이를 희생예물 드림의 실수에 대한 결과로 해석하며, 성도들에게 ‘예배를 정성껏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다’는 두려움을 심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식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스스로 해석되며, 성경 안의 다른 말씀들과 일관되게 해석되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창세기 15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왜 이런 해석이 성경적이지 않은지, 성경은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세 가지 핵심 주제에 따라 살펴본다.
1. 창세기 15장은 “희생예물”이 아니라 “언약”의 장면이다
먼저, 창세기 15장은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의 희생예물 드림 장면이 아니라 언약 체결 장면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장차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며 그들이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창15:5,7). 아브람은 이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15:6).
그 후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짐승들을 준비하라고 명하신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해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라, 하시니라.” (창15:9)
이때 아브람은 짐승들을 중간에서 나누어 언약의 전통에 따라 양쪽에 두었고, 새는 쪼개지 않았다.
“아브람이 그분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취해 그것들을 중간에서 나누고 모든 조각을 서로 마주 보게 놓았으나 새들은 나누지 아니하였더라.” (창15:10)
이것은 당시 고대 중동 지역에서 언약을 맺을 때 사용되던 방식으로, 쪼갠 희생 동물들 사이로 언약 당사자들이 지나가면서 그 언약의 진지함을 맹세하는 의식이었다. 이를 성경은 예레미야 34장에서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또 스스로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것의 조각들 사이로 지나갈 때에 내 앞에서 맺은 언약의 말들을 이행하지 아니하고 내 언약을 범한 자들… 그들을 넘겨주리니.” (렘34:18–19)
창세기 15장의 핵심은 아브람이 하나님께 희생예물을 잘 드렸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언약의 책임을 지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시겠다는 주권적 선언이다. 실제로 아브람은 쪼갠 짐승들 사이로 지나가지 않았고, 하나님만이 연기 나는 화로와 타오르는 등불의 형태로 지나가셨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오르는 등불이 그 조각들 사이로 지나가니라.” (창15:17)
즉 이 언약은 조건적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맺으시고 책임지시는 언약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언약의 실패를 아브람에게 돌리는 주장을 무너뜨린다.
2. 새를 쪼개지 않은 것은 실수가 아니다 – 성경이 그렇게 명하셨다
새를 쪼개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브람의 희생예물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레위기의 규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레위기 1장 17절에서 분명히 명하셨다:
“그는 그것의 날개들과 함께 그것을 찢되 둘로 나누지는 말지니라.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곧 불 위의 나무 위에서 태울지니…” (레1:17)
즉 새는 찢되, 둘로 나누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따라서 아브람이 새를 쪼개지 않은 것은 성경적 규례를 따랐기 때문이지, 실수나 게으름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대로 정확히 순종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고 해석한다면, 이 사실은 결코 무시될 수 없다.
그리고 창세기 15장의 짐승들은 불로 태워 바치는 희생예물이 아니라, 언약의 희생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사체들”(창15:11), “조각들”(창15:17)이라 부르셨지, “번제”나 “예물”이라 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께 불로 바치지 않았다”는 주장은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3. 이집트 종살이는 저주가 아니라 준비된 경륜이다
또 다른 오해는 창세기 15장 13절에 나오는 400년간의 이집트 종살이를 “희생예물을 잘못 드린 벌”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아브람과 그의 후손에게 계속해서 복을 약속하셨다.
“이 일들 후에 주의 말씀이 환상 속에서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네가 받을 지극히 큰 보상이니라.” (창15:1)
“그분께서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이제 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을 셀 수 있거든 세어 보라, 하시며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씨가 그와 같으리라, 하시니라.” (창15:5)
하나님은 아브람의 씨가 번성할 것을 미리 말씀하셨고, 그들이 이집트에서 고난을 당할 것이지만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오게 될 것이며,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또한 그들이 섬길 그 민족을 내가 심판하리니 그 뒤에 그들이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오리라.” (창15:14)
“바로 그 날에 주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며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노니.” (창15:18)
이 모든 것은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이루기 위한 시간표였다. 이집트에서의 체류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훈련과 성장의 기간이었고, 후에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을 이루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결론 – 창세기 15장의 핵심은 “믿음의 의”와 “하나님의 언약”이다
창세기 15장은 희생예물을 잘못 드려서 저주받는 장면이 아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람과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은혜로운 언약의 장면이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롬4:3). 그 언약의 증표로 짐승들이 준비되었으며, 새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쪼개지 않았고, 희생물은 불에 태우지 않았으며, 하늘에서 불도 내리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이것은 희생예물을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언약 체결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예물에서 성도는 율법적 정성을 강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복은 희생예물을 잘 드린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성경 기록이 무어라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로마서 4:3)
오늘날에도 우리는 불필요한 종교적 행위에 얽매여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단순한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그 믿음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살아 있는 희생예물이며, 그 믿음을 따라 사는 자가 진정으로 복을 받은 사람이다.
2025-05-27 14:19:45 | 관리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창세기 1:24)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이 질문은 세상 사람들이 고대부터 즐겨 묻던,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대한 대표적인 수수께끼이다. 논리학에서는 이와 같은 관계를 “순환적 인과관계”라 부르며, A가 B의 원인이면서 동시에 B가 A의 원인이 되는 형식을 말한다. 즉, 닭이 있어야 달걀이 있고, 달걀이 있어야 다시 닭이 나올 수 있으니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성경을 통해 명확히 풀린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이 다가가지 못하는 창조의 기원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 곧 창세기에서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에 대해 정확하고 권위 있게 답을 제시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순서와 방식을 기록한 창세기를 살펴보면, 이 문제는 전혀 어렵지 않다.
1. 하나님께서 “조류”인 닭을 먼저 창조하셨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다섯째 날에 물고기들과 함께 날짐승들, 곧 **조류(fowl)**들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한다. 닭은 생물학적으로도 조류이며, 성경의 분류 체계에서도 분명한 날짐승으로 포함된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물들은 생명 있는 창조물을 풍성히 내며 공중에는 궁창의 얼굴 위에 날아다니는 날짐승이 있게 하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큰 바다짐승들과 물들이 풍성히 낸 모든 생명 있는 움직이는 창조물과 날개 있는 모든 날짐승을 그것의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것이 좋았더라.” (창세기 1:20–21, 흠정역)
여기서 “날짐승(fowl)”은 영어 성경(KJV)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로, 깃털과 날개가 있고 하늘을 나는 동물들, 즉 조류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다. 닭은 현대 과학에서나 고대 생태계에서나 일관되게 조류로 분류되며, 성경의 언어와 개념에 있어서도 “날짐승”에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달걀을 먼저 만드시지 않으셨다. 달걀은 보호 없이는 부화되지 못하고 생명으로 이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번식이 가능한 완전한 상태의 닭, 곧 조류를 그 종류대로 먼저 창조하셨고, 그 후 이들이 달걀을 낳아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창조의 순서이며, 자연의 질서다.
2. 식물 창조의 원리도 동일하다
하나님께서 식물도 씨앗부터 자라나도록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이미 열매 맺고 씨를 가진 식물들을 먼저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 11~12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종류대로 열매 맺는 나무, 곧 그 속에 씨가 있는 열매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땅이 풀과 씨 맺는 채소를 그것의 종류대로 내고 나무는 그 속에 씨가 있는 열매를 그것의 종류대로 내니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11–12)
이는 하나님께서 단순히 씨앗을 뿌려 자라게 하신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고 씨를 품은 채로 즉시 사용 가능한 나무를 창조하셨다는 뜻이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살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을 네가 마음대로 먹어도 되느니라”(창2:16)고 말씀하셨다. 만일 아담 앞에 열매가 아직 맺히지 않은 어린 묘목들만 있었다면, 그는 당장 무엇을 먹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식물들도 처음부터 열매를 가진 완전한 형태였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이 원리는 동물 창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나님은 생물들을 완성된 형태, 곧 기능을 갖춘 상태로 창조하셨다. 닭은 조류이며 날짐승이고, 그 닭이 달걀을 낳게 되는 것이다. 달걀이 생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미의 보호와 부화 환경이 필요한데,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생명을 유지하고 번식할 수 있는 완전한 생태계 구조를 갖추어 창조하셨다.
3. 하나님의 분류법 – 성경은 날짐승이라는 용어를 명확히 정의한다
성경에서 “날짐승”은 단지 하늘을 나는 조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날개를 가진 조류 전체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로 사용된다. 닭은 날지 못하더라도 조류이며, 따라서 날짐승에 포함된다.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부정한 날짐승들의 목록을 주시며, 다양한 조류의 종류를 제시하신다. 이는 닭과 같은 조류도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날짐승으로 간주됨을 보여준다.
또한, 신약 성경에서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육체는 종류마다 다르다”고 말하면서, “한 종류는 사람의 육체요, 다른 것은 짐승의 육체요, 또 다른 것은 물고기의 육체요, 또 다른 것은 새의 육체라”고 한다(고전15:39). 여기서 새는 조류이며, 날짐승이다. 닭은 분명히 여기에 속한다.
성경은 사람의 육체, 짐승의 육체, 물고기의 육체, 새의 육체를 명확히 구분한다. 이 분류는 창세기에서의 창조 순서와도 일치한다. 날짐승, 곧 조류는 하나님께서 다섯째 날에 물고기와 함께 창조하신 생물이며, 닭 역시 그 날에 창조된 날짐승으로 보아야 한다.
4. 결론 – 조류인 닭이 먼저다. 달걀이 아니다.
성경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인간의 논리적 수수께끼에 대해 명백하게 답을 제시한다. 하나님께서 먼저 닭을 창조하셨다. 그것도 달걀이 아닌, 번식할 수 있는 완전한 형태의 조류, 곧 날짐승으로 창조하셨다.
달걀은 어미 닭의 보호 없이 스스로 부화할 수 없고, 생명으로 연결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생명이 자립하여 존재할 수 있도록 완전한 질서와 구조를 갖춘 세계를 창조하셨다. 생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신학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적으로 닭이 먼저다.
닭은 날짐승이다. 그리고 날짐승은 창세기 1장 21절에 따라 하나님께서 다섯째 날에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믿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이 문제로 혼란스러울 필요가 없다.
“닭이 먼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2025-05-27 14:14:37 | 관리자
할례가 유아세례의 기원인가? – 성경적으로 본 분명한 차이
들어가는 말
교회 안에서는 종종 유아세례가 구약시대의 할례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곤 한다. 이는 대체신학 혹은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비롯된 해석으로, 구약의 육적 언약을 신약의 영적 교회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성경을 바르게 나누고(딤후 2:15) 구약과 신약,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별하면, 할례와 유아세례는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제도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본 글에서는 창세기 17장 12절을 중심으로 할례의 본래 의미와 배경, 그것이 왜 유아세례의 기원이 될 수 없는지를 성경적·의학적·신학적으로 고찰한다.
1. “남자”인가 “사내아이”인가 – 정확한 본문 해석의 중요성
창세기 17장 12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언약의 증표로 할례를 명령하신다. 개역성경은 이 구절을 “대대로 남자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고 번역하였으나, 킹제임스 성경(KJV)과 흠정역은 “every man child”, 즉 “모든 사내아이”로 번역하고 있다. 단순히 생물학적 남성을 뜻하는 “남자”가 아니라, 특정 시기(태어난 지 8일)에 해당하는 남자아이, 즉 “갓난 사내아이”가 그 대상임을 정확히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번역상의 차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성경의 정확한 해석과 적용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창세기 17장 전체의 문맥은 하나님께서 태어난 모든 사내아이에게 언약의 표시로 할례를 명하신 것이지, 일반적인 성인 남성이나 자란 남자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된 규례가 아니다. 실제로 처음 할례를 명하신 날에는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을 포함한 집안의 모든 남자들이 즉시 할례를 받았지만(창 17:23), 이후로는 태어난 사내아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했다.
이처럼 “사내아이”라는 정확한 표현은 할례의 대상과 시점을 분명히 규정하며, 성경 본문을 충실히 반영한다. 따라서 “남자”라는 모호한 번역은 원문적 의미와 언약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
2. 왜 태어난 지 여드레째 할례를 받는가? – 창조주의 섭리
하나님께서 왜 사내아이가 태어난 지 정확히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를 받도록 하셨는가에 대해, 우리는 과학적인 설명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확인할 수 있다.
신생아는 태어난 직후 혈액 응고 능력이 미약한 상태다. 이는 비타민 K의 부족과 관련이 있다. 비타민 K는 혈액 속에서 출혈을 멎게 하는 응고 단백질인 프로트롬빈(prothrombin)의 생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신생아는 이 비타민을 충분히 축적할 시간이나 공급원이 부족하다. 출생 직후 신생아의 프로트롬빈 수치는 성인의 약 30%에 불과하지만, 이후 빠르게 증가하여 생후 8일째에 성인의 110%에 도달하게 된다. 이 시점이 지나면 다시 안정적으로 성인의 정상 수준으로 떨어진다.
이는 놀라운 사실이다. 인간의 의학이 밝혀낸 이 생리적 현상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수천 년 전 언약의 규례를 통해 정확히 지적하신 것이다. 태어난 지 여드레째는 피가 가장 잘 응고되어 수술이나 상처에 대한 회복이 가장 안전한 시기이며, 이 날에 할례를 시행하도록 하신 것은 창조주의 정확한 생리학적 지식을 반영한 명령임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적 설계이며, 인간 생명의 구조와 회복을 꿰뚫고 계신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입증한다.
3. 할례는 신약의 유아세례로 이어지는가?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과연 이와 같은 구약의 할례가 신약 교회 시대에 시행되는 유아세례의 기원이 되는가?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명확히 말한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이 명하신 할례는 아브라함과 그의 씨, 곧 이스라엘 민족과 맺은 민족적 언약의 증표였다. 이는 신약시대 교회 성도들이 구원받기 위해 받아야 하는 의식이 아니며, 실제로 신약 성경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인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신학 체계(특히 대체신학 또는 언약신학)에서는 “신약의 교회가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주장하며, 할례의 신학적 개념이 유아세례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은 이스라엘과 교회의 정체성을 혼동하고 있으며, 성경을 바르게 나누지 못한 결과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씨를 택하셨다는 것은 그들이 메시아를 낳는 도구가 되며, 하나님의 계시를 보존하고 전달하는 민족적 사명을 수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이지, 그들 모두가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육신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모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롬 4:11-12, 갈 3:29 참조).
4. 침례는 할례가 아니다 – 그 본질적 차이
성경이 가르치는 침례는 할례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르다. 할례는 아브라함 언약의 증표로서 태어난 사내아이에게 자동적으로 행해지는 육적인 표징이다. 반면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가 자기 믿음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영적인 상징 행위다.
신약 성경에서 침례는 항상 믿음의 고백 이후에 이루어진다. 사도행전 8장 37절은 침례에 있어서 믿음이 선행되어야 함을 명확히 보여준다:
“빌립이 이르되, 만일 그대가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받을 수 있느니라, 하매 내시가 응답하여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노라, 하고는” (행 8:37, 흠정역)
이 구절은 킹제임스 성경에는 명확히 들어 있으나, 개역성경을 포함한 현대 역본에서는 이 중요한 구절이 삭제되어 있다. 이는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는 유아세례나 세례를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결과이며, 본질적으로 복음의 핵심을 훼손하는 심각한 변개다.
5. 유아세례는 비성경적 의식이다
유아세례는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 이 제도는 종교 개혁 이후 로마 카톨릭의 유습을 따라 일부 개신교 교단에서도 시행되고 있지만, 성경은 구원받은 믿음의 고백이 없는 자에게 침례를 주라고 명한 적이 없다.
유아는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고백을 할 수 없으며, 부모의 신앙이 아이에게 전가되지도 않는다. 유아세례를 통하여 “이 아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었다”, “마귀가 손대지 못한다”는 식의 주장은 모두 비성경적이며 미신적이다. 이는 행위나 의식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중생세례 교리로 이어지며,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이단적 교리이다.
결론 – 성경은 침례와 할례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성경을 바르게 나누면 분명히 알 수 있다. 교회는 교회이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육적 씨로서의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언약이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영적 공동체다. 따라서 할례는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의 민족적 언약의 표시이고,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했음을 고백하는 신약의 은혜의 표징이다.
할례는 할례요, 침례는 침례다. 둘은 같은 것이 아니며, 서로 연결되거나 대체될 수 없다. 유아세례를 정당화하기 위해 구약의 할례를 끌어오는 시도는 교회와 이스라엘을 혼동한 잘못된 성경 해석의 결과다. 성경은 오직 믿음을 가진 자가 침례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성경 말씀에 따라 믿음의 고백 이후에 침례를 받아야 하며, 인간의 전통이나 종교 의식에 근거한 유아세례와 같은 비성경적 행위를 경계해야 한다.
2025-05-27 14:08:21 | 관리자
창세기 6장 3절, "120년"의 의미는 인간 수명 제한인가, 심판의 유예기간인가?
창세기 6장 3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 영이 항상 사람과 다투지는 아니하리니 이는 그도 육체이기 때문이라. 그럼에도 그의 날들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흠정역)
이 구절은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수명을 120년으로 제한하신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훨씬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해석이 존재해 왔으며, 그중에서도 두 가지 주된 견해가 있다. 첫째는 인간의 수명을 120년으로 제한한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께서 심판(홍수)을 내리시기 전까지 인류에게 주신 유예 기간이라는 것이다.
인간 수명 제한설의 한계
일부 해석자들은 이 구절을 인간의 수명을 120년으로 제한한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이 해석에는 다음과 같은 명백한 문제점이 존재한다.
첫째, 성경의 기록은 이 해석과 명백히 충돌한다. 창세기 이후 등장하는 인물들 중 많은 이들이 120세를 훨씬 초과하는 수명을 살았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175세(창 25:7), 이삭은 180세(창 35:28), 야곱은 147세(창 47:28), 아론은 123세(민 33:39), 여호야다 제사장은 무려 130세(대하 24:15)를 살았다.
둘째, 시편 90편 10절에서는 일반적인 인간의 수명을 칠십 내지 팔십으로 제시하고 있다. "우리의 햇수의 날들이 칠십 년이요, 강건하면 팔십 년이라도..." 이는 인간 수명이 120년으로 고정되었다는 주장이 성경 전체의 흐름과 맞지 않음을 보여준다.
셋째,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수명을 120년으로 확정하셨다면 그 이후의 인류 역사에 120세가 넘는 사람이 존재해서는 안 되며, 성경이 이를 그대로 기록했다면 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무오성과 일관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유예 기간으로서의 해석
매튜 헨리와 앨버트 반즈를 비롯한 복수의 보수적인 주석가들은 이 120년을 인간 수명의 제한이 아닌, 심판의 유예 기간으로 해석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 곧 홍수 심판을 내리실 예정이었지만, 그 전에 120년이라는 유예 기간을 두셨고, 그 시간 동안 노아는 방주를 준비하며 의를 선포했다(벧후 2:5 참조).
이 해석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더욱 성경적이다:
베드로후서 3:20은 하나님께서 "노아의 날들에 방주를 준비하는 동안 오래 참고 기다리셨다"고 증언한다.
창세기 6장 5절 이후의 문맥은 곧바로 인간의 죄악이 극에 달한 상황과 이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 계획(홍수)을 설명한다.
따라서 창세기 6장 3절의 "그의 날들은 120년이 되리라"는 말씀은 당시 인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 곧 회개의 시간이었다는 것이 문맥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가장 자연스럽고 일관된 해석이다.
잘못된 교리의 위험성
창 6:3을 인간 수명 제한 구절로 오해할 때 발생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 일부 이단 교리나 신비주의적 귀신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성락교회(베뢰아) 계열에서는 인간의 수명이 120년인데, 제 명을 못 채우고 죽으면 남은 기간 동안 귀신으로 떠돈다고 가르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성경과 모순된다:
히브리서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이것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
누가복음 16:22-23: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는 죽은 후 곧바로 영혼이 천국 혹은 지옥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태복음 10:29: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사람의 죽음조차 하나님의 뜻 아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잘못된 교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며, 죽은 자의 영이 이 세상을 떠돈다는 비성경적인 무속신앙과 접합될 위험이 있다. 성경은 사람이 죽은 후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의인은 천국으로, 악인은 지옥으로 간다고 명확히 가르친다.
결론: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의 균형
창세기 6장 3절의 "120년"은 인간의 수명을 제한한 말씀이 아니라, 죄악이 넘치는 시대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극진한 인내와 긍휼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에 대해 즉시 심판을 내리시기보다는 120년의 회개 기회를 주셨고, 노아는 그 시간 동안 방주를 준비하며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였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이 어떻게 균형을 이루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서, 오늘날 우리 역시 죄악된 세상을 향한 경고와 함께 주어지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헛되이 여기지 말아야 함을 교훈한다.
2025-05-27 14:03:52 | 관리자
역청인가, 진흙인가? – 창세기 11장 3절의 번역 문제와 바벨탑 건축의 실제
창세기 11장 3절은 바벨탑 사건을 설명하면서 사람들이 어떤 재료로 탑을 쌓았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성경 번역본에 따라 상당히 상이하게 해석되며, 이것이 단순한 단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 이해와 해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번역의 오류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1. 킹제임스 성경과 개역성경의 차이
킹제임스 성경(KJV)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And they said one to another, Go to, let us make brick, and burn them throughly. And they had brick for stone, and slime had they for morter." (Gen. 11:3)
흠정역(킹제임스 성경 번역본)은 이를 다음과 같이 옮긴다: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는 돌 대신 벽돌을 취하고 회반죽 대신 진흙을 취한 뒤”
개역성경은 다음과 같이 다르게 번역한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가장 핵심적인 차이점은 ‘slime’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이다. 킹제임스 성경은 이를 ‘진흙’ 혹은 ‘끈적한 점토성 접착제’로 보고 있으며, 개역성경은 ‘역청(pitch)’ 즉 방수성 아스팔트로 해석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어휘 해석의 차이를 넘어, 본문의 건축 기술과 문맥 이해에 심각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2. 'Slime'의 원어적 의미와 문맥적 해석
히브리어 원어에서 slime에 해당하는 단어는 ‘חֵמָר (chemar)’로, 끈적한 점성을 가진 점토성 진흙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pitch(역청)을 나타내는 단어 ‘זֶפֶת (zepheth)’와 구분되어 사용된다. 즉, slime과 pitch는 서로 다른 물질이다.
출애굽기 2장 3절은 이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본문이다.
“She took for him an ark of bulrushes, and daubed it with slime and with pitch.” (KJV)
이 구절에서 모세의 어머니는 갈대 궤를 만들고, 그 겉에 slime과 pitch를 둘 다 칠했다고 되어 있다. 만일 slime이 pitch와 같은 물질이라면, 이처럼 중복해서 사용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slime은 진흙성 접착제, pitch는 방수 재료로 용도가 구분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3. 고고학적·건축학적 관점: 왜 진흙이어야 하는가?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 즉 바벨탑이 건설된 시날 평야(현재의 바빌로니아 지역)는 돌이 거의 없는 광대한 평야지대였다. 대신 점토질 흙이 풍부하여, 이 지역 사람들은 초창기부터 벽돌을 만들어 구워 건축에 사용하였다.
건축 재료로서 벽돌은 단단하고 일정한 모양을 가지기 때문에 탑처럼 높은 구조물을 만들기 적합했으나, 벽돌과 벽돌 사이를 접착시키기 위해서는 물리적 접합성이 있는 재료, 즉 회반죽 또는 진흙 성분의 모르타르가 필요하다. 오늘날에도 시멘트 모르타르가 이런 용도로 사용된다.
반면 역청(pitch)은 방수성과 내화성은 있으나, 벽돌을 접착하기 위한 용도로는 적합하지 않다. 그것은 고온에서 녹아 흐르기 쉽고, 응고되면 오히려 단단하게 굳지 않고 점성만 남아 접착제로서의 성능이 떨어진다.
노아의 방주(창 6:14)나 모세의 갈대 궤(출 2:3)에 사용된 역청은 건축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물과 습기로부터 보호하는 방수 목적이 분명하다. 바벨탑이 방수 목적의 배였던 것도 아니고, 강물에 띄우는 궤도 아니기 때문에, slime을 pitch로 번역하는 것은 전혀 문맥에 맞지 않는 선택이다.
4. 창세기 14장 10절: 또 하나의 증거
창세기 14장 10절은 slime에 대한 번역 오류를 더 확실히 보여준다:
“And the vale of Siddim was full of slimepits.” (KJV)
흠정역: “싯딤 골짜기에는 진흙 구덩이가 많았으므로…”
개역성경은 여기서도 “역청 구덩이”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전투 중에 도망치던 병사들이 발이 빠져 움직일 수 없었던 곳은 역청 덩어리가 굳어 있는 바위산이 아니라 끈적하고 질퍽한 진흙 구덩이일 것이다. 전장의 상황과 병사들의 이동을 감안할 때 slimepit은 점착성 진흙 구덩이로 해석하는 것이 당연하다.
5. 번역 오류가 남긴 오해와 교훈
개역성경이 바벨탑 건축에 사용된 재료를 “진흙 대신 역청”이라고 번역한 것은, 성경의 문맥과 고고학적 실증, 언어학적 분석에 모두 어긋나는 중대한 오역이다. 이로 인해 성도들은 바벨탑이 마치 노아의 방주나 모세의 갈대 궤처럼 방수 재료로 만들어졌다고 오해하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돌 대신 벽돌, 회반죽 대신 진흙(slime)을 사용하여 더 높은 구조물을 쌓으려 했던 인간의 교만과 자력 구원의 시도가 담긴 사건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며, 하늘에 닿는 탑을 세워 하나님을 무시하려 했다. 그런 교만의 상징인 건축물에 ‘방수’는 전혀 무관한 요소다.
결론
‘slime’은 ‘역청(pitch)’이 아니라 진흙 혹은 회반죽(mortar)에 가까운 개념이다.
‘pitch’는 성경에서 따로 구별되는 단어로 사용되며, 방수와 내화 목적의 재료이다.
고고학적·건축학적 문맥에서도 바벨탑은 진흙 접착제를 사용한 벽돌 건축이었지, 역청으로 만든 방수 구조물이 아니었다.
번역자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단어의 의미와 문맥을 충실히 반영해야 하며, 이를 오역할 경우 신학적 의미의 왜곡과 교리적 혼동을 초래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하늘에 이르려는 인간의 시도를 분쇄하신 사건으로 바벨탑을 기록하였다. 그들의 재료 선택조차도 인간의 교만과 자기 의에 대한 상징이었으며, 하나님의 도구가 아닌 인간적 수단으로 쌓아 올린 구조물은 반드시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남긴다.
2025-05-27 13:56:46 | 관리자
아브라함은 장남이 아니며, 조카 롯과의 나이 차이도 거의 없었다 –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택의 원리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아브라함이 데라의 장남이라는 생각이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창세기 11장 26절에서는 “데라는 칠십 년을 살며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고, 이어지는 27절에서도 세 아들의 이름이 동일한 순서로 반복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브람이 맏아들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문맥과 연대 기록을 따라가 보면 아브람은 분명히 데라의 장남이 아니다.
1. 아브라함은 데라가 130세 되었을 때 낳은 아들이다
창세기 11장 32절에 따르면, 데라는 205세까지 살았다. 그리고 사도행전 7장 4절은 아브람이 아버지 데라가 죽은 뒤에야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옮겨졌다고 말한다. 창세기 12장 4절에서는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75세였다고 말하므로, 이 세 구절을 종합하면 아브람은 데라가 130세 되었을 때 태어난 것이 확실하다.
즉, 205세(데라 사망 연도) - 75세(아브람 당시 나이) = 130세(데라가 아브람을 낳은 나이)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11장 26절에서 언급된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라는 구절은, 세 아들을 동시에 낳았다는 말이 아니라 70세 이후에 이 세 아들을 차례로 낳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와 유사한 표현 방식은 창세기 5장 32절에서도 볼 수 있다. “노아는 오백 세였으며 노아가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그러나 이 세 아들이 모두 오백 세 때 동시에 태어난 것은 아니며, 가장 먼저 태어난 아들이 누구였는지는 그 이후 구절들을 통해 유추해야 한다.
그렇다면 데라가 70세 때 낳은 아들은 누구일까?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인물은 세 번째로 언급된 하란이다. 왜냐하면 하란은 성경에서 갈대아 우르에서 자기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창 11:28), 이미 자녀들(롯, 밀가, 이스가)을 둔 상태였다. 즉, 상당한 연령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반면 아브람은 75세가 될 때까지 자녀가 없었고(창 11:30), 이삭을 100세 때에야 낳았다. 이런 흐름을 보면 하란은 아브람보다 최소 60살 이상 나이가 많았을 가능성이 높다.
2. 아브라함과 롯의 나이 차이는 거의 없다
아브람이 태어난 것은 데라의 나이 130세일 때였고, 하란이 데라의 70세 무렵에 태어났다고 본다면, 하란과 아브람은 약 60세의 나이 차이가 난다. 성경은 하란이 이미 성년이 되어 우르에서 죽었으며, 그에게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아브람의 조카 롯이다.
그렇다면 롯이 태어난 시점은 언제일까? 정확한 연대는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아버지 하란이 약 60세 안팎일 때 롯을 낳았다면, 롯과 아브람은 거의 비슷한 연배일 수밖에 없다. 하란이 아브람보다 60세 이상 연상이고, 하란이 60세 무렵에 롯을 낳았다면, 아브람과 롯은 나이 차이가 많아야 10살 이내, 혹은 동갑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성경에서는 아브람이 롯을 ‘조카’로서 돌보며 동행하고 인도하는 위치에 서 있지만, 단지 ‘연장자’로서가 아니라 영적 권위자요 믿음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이다. 단순히 나이 차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른 역할 분담이었다. 이것은 가족 내 연장자-연하자의 일반 구조와는 다른, 성경적 지도 체계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3. 밀가와 나홀의 결혼이 가능했던 이유
하란의 딸 밀가가 하란의 동생 나홀과 결혼했다는 기록이 있다(창 11:29). 삼촌과 여조카의 결혼은 오늘날의 감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 족장 시대의 문화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더 중요한 점은, 하란과 나홀 사이의 나이 차이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결혼이 가능한 구조였다는 것이다.
만약 하란이 장남이고 나홀이 차남이라면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10년 내외일 수 있고, 밀가가 하란의 마지막 자녀라면 나홀과 나이 차이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밀가와 나홀의 혼인은 연대적으로도 무리가 없는 결혼이었고, 아브람과 롯의 나이 차이가 작았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4. 성경은 장남보다 차남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여 준다
장자(장남)에 대한 기대와 중요성은 구약 시대부터 중대한 문화적 전통이었고, 성경은 장자의 권리와 책임을 중요하게 다룬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흐름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장남이 아니라 둘째 혹은 어린 자를 통해 더 자주, 더 크고 결정적인 일들을 이루셨다.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 첫 사람 아담이 아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 구속이 이루어짐 (고전 15:45–47)
가인과 아벨: 장남 가인 대신 둘째 아벨이 하나님께 열납됨
에서와 야곱: 에서가 장자였지만 야곱이 축복과 약속을 받음
므낫세와 에브라임: 요셉의 장남 므낫세보다 차남 에브라임이 앞섬 (창 48:19)
르우벤 대신 유다와 요셉이 족장으로 우선권을 받음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혈통이나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증거이다. 아브람이 장남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부르시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다. 이 사실은 사람의 전통과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역사의 방향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다.
5. 결론
아브라함은 데라의 장남이 아니며, 오히려 막내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선택하셨고,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다. 조카 롯과도 나이 차이가 거의 없었던 사실은, 성경의 족보가 단순한 출생 순서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따라 배치된 역사적-신학적 질서임을 보여 준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다. 누구의 아들인가, 몇 번째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지금 내가 어떤 믿음의 응답을 하며 살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장남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반응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2025-05-27 13:50:42 | 관리자
노아의 사망과 아브라함의 출생
아브라함은 노아의 사망 2년 후에 태어났다 – 연대기적 정리와 신학적 시사점
창세기에는 아담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 족장들의 연대가 상당히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노아 이후 자손들의 연대를 '노아의 나이' 기준으로 계산해 보면, 아브라함이 노아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더불어 우리는 흔히 오해하듯 아브라함이 데라의 장남이 아니라는 사실도 성경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아래에서 이 연대적 흐름을 따라 정리해 보자.
1. 노아의 홍수와 이후 자손들의 탄생 시점
성경에 따르면, 노아의 나이 600세에 홍수가 시작되었다.
“땅 위에 물들의 홍수가 있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더라.” (창 7:6)
홍수가 끝난 후 2년이 지나, 노아의 아들 셈이 100세가 되었을 때 아르박삿을 낳았다.
“셈은 백 세였으며 홍수 뒤 이 년이 지났을 때 아르박삿을 낳았고" (창 11:10)
따라서 아르박삿이 태어난 해는 노아의 나이 602세였고, 이후 아르박삿의 후손들의 출생 연대를 연속적으로 더해 가면 다음과 같은 순서가 된다.
아르박삿: 노아 602세 때
살라: 노아 637세
에벨: 노아 667세
벨렉: 노아 701세
르우: 노아 731세
스룩: 노아 763세
나홀: 노아 793세
데라: 노아 822세
데라의 첫 아들: 노아 892세
아브라함: 노아 952세
이 계산대로라면 아브라함은 노아의 사망 연도보다 2년 뒤인 노아력 기준 952년에 태어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성경은 노아가 950세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아의 전 생애는 구백오십 년이었고 그가 죽으니라.” (창 9:29)
즉, 아브라함은 노아가 죽은 지 정확히 2년 후에 세상에 태어난 인물인 셈이다.
2. 아브라함은 데라의 장남이 아니었다
이 지점에서 흔히 성도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 창세기 11장 26절에는 “데라는 칠십 년을 살며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라고 되어 있다. 이 구절만 읽으면 아브라함이 데라의 70세 때 태어난 장남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우선, 데라는 205세까지 살았다.
“데라의 생애는 이백오 년이었고 데라가 하란에서 죽으니라.” (창 11:32)
사도행전 7장 4절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데라가 죽은 후에야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다.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그분께서 그를 거기에서 지금 너희가 거하고 있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행 7:4)
또한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의 나이는 75세였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는 칠십오 세였더라.” (창 12:4)
따라서 데라가 죽은 해에서 아브라함의 나이 75세를 빼면, 아브라함의 출생 연대는 데라가 130세였을 때로 계산된다.
데라 사망 시점 = 노아력 1027년
아브라함의 나이 = 75세
→ 아브라함의 출생 = 1027 - 75 = 노아 952세
이미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데라는 노아 나이 822세에 태어났고, 데라가 처음 아들을 낳은 것은 노아 나이 892세였다. 따라서 데라가 장남을 낳은 지 60년 후에 아브라함이 태어난 셈이다.
즉, 데라는 70세 이후에 아브람, 나홀, 하란을 낳았지만, 그 순서가 나열된 순서이지 출생 순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때로 장자의 이름이 아닌, 믿음의 계보나 하나님의 선택을 따라 중요 인물의 이름을 먼저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 가인보다 아벨, 에서보다 야곱, 므낫세보다 에브라임, 그리고 첫 아담보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한 예다.
아브라함도 그러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로서 데라의 장남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서 장자의 위치를 부여받은 인물이다.
3. 정리
아브라함은 노아가 죽은 후 2년이 지난 시점인 노아력 952년에 태어났다(BC1996년).
데라는 노아 나이 822세에 태어났고, 첫 아들은 노아 나이 892세에 낳았으며, 아브라함은 그보다 60년 후인 노아력 952년에 태어났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데라의 첫 아들이 아니며, 성경에서도 장남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는 언제나 장남이 아니라 '두 번째'인 경우가 많다. 이는 인간의 전통이나 우선순위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보여 주는 구속사의 흐름과 일치한다.
결론적으로, 아브라함은 노아와 같은 시대를 살지는 않았고, 노아가 죽은 직후 태어난 인물이며, 데라의 장남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조상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 사실은 성경의 족보를 단순히 혈통의 기록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의 흐름으로 읽어야 함을 분명히 보여 준다.
2025-05-27 13:46:56 | 관리자
창세기 2장 7절: "생령인가, 살아 있는 혼인가?"
서론 – 혼(soul)을 ‘생명’ 또는 ‘생령’으로 번역하면 왜 문제가 되는가?
창세기 2장 7절은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말해 주는 구절로서, 인간론과 구원론의 기초를 놓는 가장 중요한 말씀 중 하나이다. 히브리어 원문에 따르면, 이 구절은 "호흡하는 혼(living soul)"이라는 의미를 가진 "네페쉬 하야"(נפש חיה)로 끝난다. 하지만 개역성경은 이를 "생령"으로 옮겼고, 일부 현대 번역본은 더 나아가 "생명이 되었다."라는 표현까지 사용한다. 이러한 번역은 단어 하나 차이처럼 보이지만, 성경의 인간 이해, 구원론, 그리고 성육신의 교리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치명적인 오역이다.
히브리어 '네페쉬'는 호흡하는 생명체를 뜻하는 동사 '나파쉬'에서 파생되었고, "혼(soul)"으로 가장 흔히 번역된다. 구약 전체를 통틀어 네페쉬는 짐승, 사람, 심지어 시체까지 살아 있거나 한때 살아 있었던 생명체 전체를 가리킨다. 그런데 개역 성경은 이를 '영'으로 해석해 ‘생령’이라 번역했으며, 이는 혼과 영을 뒤섞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처럼 혼과 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번역은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기록된 아담과 예수님의 비교에서도 명백하게 오류로 드러난다.
창세기 2:7의 원문과 그 구조
히브리어 원문에서 창 2:7은 매우 구조적으로 짜여 있다.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네샤마)을 그의 코에 불어넣으셨고, 그 결과 사람은 ‘네페쉬 하야’, 즉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 ‘혼’은 여기서 감정과 지성과 의지를 갖춘 전인격적 존재로서의 사람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창세기 1장에서 짐승에게도 사용된다. 바다의 생물이나 공중의 새도 '네페쉬 하야'로 불리며, 이는 네페쉬가 결코 '영적인 존재' 또는 '불멸의 혼령'을 의미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영적인 실체를 가리키는 단어는 따로 있으며 그것은 ‘루아흐’이다.
혼(soul)은 '살아 있는 사람'이다
성경은 혼이 살아 있는 인격체 자체임을 명백히 증언한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7장 37절에서는 바울과 함께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276혼"이라 불린다. 이들은 실제로 존재하고, 숫자를 셀 수 있는 사람들이다. 또 시편 107편 18절에서는 혼이 음식을 싫어하고 죽음에 가까이 이른다고 한다. 이는 혼이 단순한 정신이 아니라 감정과 생리 기능까지 가진 인격체임을 보여 준다.
혼은 빵을 먹고, 두려워하며, 침례를 받고, 구원을 얻는다. 따라서 혼을 단순한 ‘영적 기능’이나 ‘의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성경은 혼과 영을 명확하게 구분하며 언급한다. 이사야 57장 16절에서는 "이는 영과 또 내가 만든 혼들이 내 앞에서 쇠할 것이기 때문이라."라고 하며, 분명히 혼과 영을 서로 다른 실체로 구분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 – 명확한 구분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은 창세기 2장 7절을 인용하여 신약에서 재확인하는 말씀이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 여기에 나오는 ‘살아 있는 혼’은 헬라어로 프쉬케(ψυχή), ‘살려 주는 영’은 프뉴마(πνεῦμα)이다.
개역성경은 이 절에서 프쉬케를 '산 영'이라고 번역함으로써 혼과 영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 원문에서 프쉬케는 언제나 혼을 뜻하고, 프뉴마는 영을 뜻한다. 둘을 동일하게 번역하는 것은 바울의 의도된 대조를 완전히 지워 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하나님께서 이 둘을 분명히 구분하시고 말씀하셨는데, 인간 번역자가 이를 마음대로 섞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다.
‘생명, 생령’이라는 표현의 또 다른 문제점
창세기 2:7을 ‘생령이 되었다’로 번역할 경우, 혼이 아닌 어떤 ‘기능’이나 ‘에너지 상태’로 해석될 위험이 생긴다. 이로 인해 사람은 단지 호흡하는 유기체로 축소되며, 성경이 말하는 ‘혼’이라는 전인격적 존재 개념이 사라진다.
예를 들어 민수기 19장 13절에서는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그 혼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이니라.'라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혼은 사람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은 혼(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말한다. 수 10:28에서는 여호수아가 한 도시 안의 모든 혼을 칼로 멸했다고 한다. 만약 전인격적 존재를 가리키는 사람의 혼이, 생명이나 생령처럼 추상적이거나 비물질적 존재라면, 어떻게 칼로 그것을 죽일 수 있겠는가?
"몸은 죽여도 혼은 죽일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혼과 몸을 둘 다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마 10:28)
이 말씀은 둘째 사망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베레아 이단의 잘못된 교리의 뿌리
한국 교회 안에 광범위하게 퍼진 이단인 베레아(성락교회)는 창세기 1장의 사람과 2장의 사람을 구별하여, 창 1장의 사람은 ‘영이 없는 짐승 인간’이고 창 2장의 아담이야말로 최초의 ‘영을 가진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이 사설은 바로 창 2:7을 “생명이 되었다”거나 “산 영이 되었다”고 번역하는 데서 출발한다.
즉, 창세기 1장의 사람은 단순히 생물학적 생명체였고, 창 2장에서 비로소 ‘영이 들어가서’ 영적 인간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두 단계로 창조하지 않았다. 창 2:7은 ‘혼’을 지닌 인격적 인간의 창조이며, 이는 단회적이고 완전한 창조 사건이다. 이러한 이단 교리는 귀신론과 점술, 내적 치유라는 이름의 미신적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교회를 혼란케 하고 있다.
예수님의 증언과의 충돌
누가복음 24장 39절에서 예수님은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따르면 영은 물리적인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 그런데 개역 성경은 아담이 ‘산 영’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담에게는 살과 뼈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2장 21~23절에서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기록한다. 이는 아담에게 살과 뼈가 있었다는 것을 뜻하며, ‘영’이 아니라 ‘혼’이라는 해석이 맞다는 증거이다.
결론 – 혼은 살아 있는 사람이다
성경의 언어적, 문맥적, 신학적 흐름을 종합하면, 창세기 2장 7절은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라고 번역해야 옳다. 개역성경의 “생령”, “생명”은 문맥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교리적 오류를 낳으며, 이단적 주장에 악용될 소지가 크다.
혼은 단지 감정이나 의식이 아니라, 전인격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창 2:7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지으신 몸에 하나님의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살아 있는 인격체, 곧 혼이 되게 하셨다는 의미다.
성경의 단어 하나, 표현 하나가 교리와 신앙의 기초를 이룬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는 ‘혼’을 혼이라 부르고, ‘영’을 영이라 부르는 성경적인 언어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며, 이를 바르게 나누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시편 12:6–7, 킹제임스 흠정역)
2025-05-27 13:39:26 | 관리자
천주교 소수 사본들의 부패와 현대 역본들의 오류
1. 사본 알레프와 B의 실체: 고서학자들이 거부한 이유
신약 성경 본문 비평에서 바티칸 사본(B)과 시내 사본(알레프)은 종종 “가장 오래된 사본”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장 좋은 사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두 사본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부패를 내포한 문서들이라는 사실이 다수 고서학자들에 의해 밝혀져 왔다.
1) 위조 흔적과 물리적 훼손
고대 문헌 감정에 사용되는 vidicon 광전도 저속 카메라를 통한 조사에 따르면, 바티칸 사본 B는 최소 두 명에 의해 훼손되었고, 그중 한 명은 12세기경 인위적 수정을 가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2) 본문 언어의 이질성
바티칸 사본 B의 그리스어는 신약 성경이 기록된 코이네 그리스어가 아니라, 훨씬 더 고전적이며 플라톤식 그리스어에 가깝다. 이는 본문이 실용적 기록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편집된 흔적을 보여 준다.
3) 정경 부정과 외경 삽입
바티칸 사본 B는 신약 성경의 정경 일부(요한계시록,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9:14~13:25)를 성경에서 제외하였고, 대신 유디스, 토비트, 벨과 용, 바나바 서신과 같은 외경을 삽입하였다. 이 사본은 외경을 마치 정경처럼 취급하였던 것이다.
4) 오리겐 사본과의 교리적 일치
B 사본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된 여러 구절을 의도적으로 생략하였고, 이는 오리겐의 헥사플라(6난 성경)와 많이 일치한다. 이는 교리적 변개가 의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2. 사본 간의 불일치: 일치보다 불일치가 많다
버건(Burgon)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알레프와 B 사본은 두 개의 연속 구절에서 서로 일치하는 경우보다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The Revision Revised』, p. 12)
이는 이들 사본 서로 간에도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며, 비평 본문의 일관성 주장을 무너뜨리는 핵심 증거가 된다.
3. 사복음서에서의 변개 수치
사복음서에 한정하여 살펴보았을 때,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수치들이 드러난다:
B 사본(바티칸):
삭제 2,877개 단어, 추가 536개 단어, 대체 935개 단어, 치환 2,098개 단어, 부분 개조 1,132개 단어.
→ 총 7,578개 변개.
알레프 사본(시내):
삭제 3,455개 단어, 추가 839개 단어, 대체 1,114개 단어, 치환 2,299개 단어, 부분 개조 1,265개 단어.
→ 총 8,972개 변개.
D 사본:
삭제 3,704개 단어, 추가 2,213개 단어, 대체 2,121개 단어, 치환 347개 단어, 부분 개조 1,772개 단어.
→ 총 13,281개 변개.
요약: 세 사본은 사복음서에서만 총 29,831개의 변개를 포함하고 있다. 특히 D 사본은 사복음서 대부분이 누락되었음에도 변개 수치가 가장 많다.
4. 어형 변화와 이문들(특이한 본문들)
사복음서에서의 어형 변화 수는 다음과 같다:
A 사본: 842회
C 사본: 1,798회
B 사본: 2,370회
알레프: 3,392회
D 사본: 4,697회
이문(특이한 본문들)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A 사본: 133개
C 사본: 170개
B 사본: 197개
알레프: 443개
D 사본: 1,829개
이 모든 수치는 정통 공인 본문(TR)에서 얼마나 이탈했는지를 명백히 보여 준다.
5.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의 삭제 수
마가복음(총 11,646개 단어 기준):
A 사본: 138개 삭제, B 사본: 762개, 알레프: 870개, D 사본: 900개
누가복음(총 19,942개 단어 기준):
A 사본: 2,018개 삭제, B 사본: 757개, 알레프: 816개, D 사본: 1,552개
이처럼 특정 복음서 안에서 대량의 단어 삭제가 이루어졌으며, 이는 필사자의 실수 수준을 넘은 계획적인 본문 훼손임을 시사한다.
6. 누가복음에서의 특이한 변개 사례
누가복음에서 전통 공인 본문과 비교했을 때, 다음과 같은 변화가 감지된다:
B 사본: 757개 단어 삭제, 309개 단어 교체, 131개 단어가 특이 본문의 영향받음, 654개 단어 치환
알레프: 816개 단어 삭제, 115개 단어 교체, 215개 단어가 특이 본문의 영향받음
D 사본: 1,552개 단어 삭제, 1,006개 단어 교체, 4,090개 단어가 특이 본문의 영향받음
이 수치는 이 세 사본이 본문을 조작하여 만들어진 본문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7. 결론: 현대 역본들이 올바를 수 없는 결정적 이유
이처럼 알레프, B, D 사본은 가장 오래되었지만 동시에 가장 부패한 사본들이다. 이들은 단순한 필사 오류를 넘어, 계획적인 삭제, 대체, 조작, 외경 삽입, 교리적 변개 등의 특징을 지닌다.
호르트조차도 이 사본들에서 동일한 구절을 삭제한 사례가 마가복음에서 단 4회, 누가복음에서 단 3회, 총 7회밖에 없다고 인정했다. 이는 이 사본들이 서로도 일치하지 않으며, 공통된 전승이 아닌 독립적이고 불안정한 편집본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 부패한 사본들을 기반으로 한 현대 역본들(NIV, ESV, 개역개정 등)은 필연적으로 신약 성경의 본질적 진리를 왜곡할 수밖에 없다. 성경의 권위는 가장 오래된 사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 역사 속에서 보존해 주신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B 사본, 알레프 사본, D 사본은 신약 성경 본문 사본들 가운데 가장 수치스럽게 부패된 사본들이다.
이 사본들을 기반으로 한 현대 역본들은 결코 하나님의 올바른 말씀일 수 없다.
2025-05-24 20:08:53 | 관리자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의 부패: 왜 가장 오래되었지만 가장 신뢰할 수 없는가?
성경 본문 비평의 세계에서 가장 격렬한 논쟁 중 하나는 어떤 사본이 신약 성경의 가장 정확한 본문을 담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19세기 후반 웨스트코트(Westcott)와 호르트(Hort)는 당시 새롭게 재발견된 바티칸 사본(B)과 시내 사본(알레프, ℵ)을 "가장 오래되고, 가장 신뢰할 만한 사본"으로 간주하고, 이 두 사본에 기반한 비평 본문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이들 사본은 실제로는 신약의 원래 본문과는 거리가 먼, 의도적으로 편집되고 부패된 사본들이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1. 웨스트코트와 호르트: "가장 진실한 본문"이라는 주장
웨스트코트와 호르트는 1882년 출간한 『그리스 원어 신약 성경 개론(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in the Original Greek)』에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알레프 사본과 바티칸 사본은 모든 증거 자료보다 훨씬 우수하다… 그것들은 순수하고, 탁월하며, 부패로부터 자유롭다.” (pp. xxii, 210, 220, 225, 239)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뻔뻔한 과장과 잘못된 정보라는 반론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2. 사본 비평가들의 반론: 가장 오래된 사본이 가장 좋은 것은 아니다
▷ 호스키어 경(Sir Herman Hoskier)
19세기 말 사본 전문가 호스키어 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본문은 실제적으로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에 불과하다.”
(『어떤 성경인가?(Which Bible?)』, D. O. Fuller, pp. 135-136)
그는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은 이단적 흐름에 따라 초기 100년 안에 이미 부패되었으며, 사본 전체 중 1%도 안 되는 43개 사본들과 함께 정통 본문에서 벗어난 계열이라고 단언하였다.
▷ 드와이트 웨이트(D. A. Waite)
웨이트 박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 사본들이 가장 오래된 것일 수는 있어도 결코 최고의 사본들은 아니다.”
(『킹 제임스 성경의 4중 우수성(Defending the King James Bible)』)
즉, 연대가 빠르다고 해서 진리가 보존되어 있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3. 버건과 메츠거: 사본의 부패를 실증하다
▷ 존 버건(John W. Burgon)
19세기 교회사 학자 버건은 자신이 수집한 방대한 사본 자료를 근거로 이렇게 말한다:
“알레프와 B 사본은 가장 부패된 본문이다. 그것들은 진리를 왜곡하고 조작하여 모아 놓은 창고이며, 위조된 본문으로서 창피할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개정된 개역(The Revision Revised)』, pp. 16, 318, 520)
▷ 브루스 메츠거(Bruce Metzger)
비평 본문의 대표 편집자였던 브루스 메츠거 역시 바티칸 사본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바티칸 사본에 비잔틴 본문이 없다는 사실은 필사자들이 의도적으로 본문을 단순화했음을 보여 준다.”
(Jacob van Bruggen, 『신약의 고대 본문(The Ancient Text of the NT)』, pp. 30-31)
이는 바티칸 사본이 중립적인 전승을 따른 결과가 아니라, 의도적인 편집과 생략의 산물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4. 편집된 이집트 본문: P75의 영향을 받은 사본들
▷ 고든 피(Gordon Fee)
피 박사는 바티칸 사본(B)과 시내 사본(알레프)이 P75와 같은 훼손된 파피루스를 바탕으로 필사되었으며, 이 본문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편집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작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는 케년(Kenyon)의 결론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집트 본문은 편집된 본문이며, 고대 교회가 실제로 사용한 본문과는 다르다.”
(『신약 연구의 새 양상(New Dimensions in NT Study)』, R. Longenecker & M. Tenny, p. 23)
5. 피커링과 호스키어: 역사의 반증
▷ 윌버 피커링(Wilbur Pickering)
피커링 박사는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알레프와 B 사본은 고대의 비정상적 계열을 반영하는 본문이며, 현대 역본들이 이들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본문 전승에 대한 역사적 반증이다.”
(『신약 성경 본문의 정체(Identity of the NT Text)』, pp. 120, 136, 145)
즉, 이들 사본은 오히려 교회에 의해 버려졌던 비정상적인 전승의 잔재로 평가된다.
▷ 호스키어 박사의 연구 결론
호스키어 박사의 방대한 비교 연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제시한다:
“현대 역본 편집자들은 과학적 사실을 무시하고, B 사본과 알레프 사본을 ‘불완전한 증거 자료’에 기반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오리겐(Origen)이 주후 200~400년 사이 안디옥 본문(공인 본문, KJV 계열)을 개정하여 만든 이집트 본문들이 후에 방치되었다가 1881년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에 의해 다시 살아났다고 평가하였다.
(『어떤 성경인가?(Which Bible?)』, Fuller, pp. 134–143)
6. 결론: 오래된 것이 곧 참된 것은 아니다
바티칸 사본(B)과 시내 사본(알레프)은 분명 고대의 사본이지만, 내용의 부패, 의도적 생략과 삽입, 교리적 왜곡으로 인해 신뢰할 수 없는 본문임이 여러 사본 학자들에 의해 명확히 드러났다. 특히 이들 사본은 성경 본문의 보존이라는 하나님의 섭리보다 인간적 편집의 산물이라는 증거가 풍부하다.
웨스트코트와 호르트, 그리고 그 이후 현대 역본 제작자들이 이러한 사본들에 의존해 만들어 낸 성경은, 결국 비정상적인 본문을 정통인 것처럼 둔갑시킨 역사적 오류라고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참된 말씀은 부패된 사본이 아닌,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보존하신 공인 본문(Textus Receptus)과 그 열매인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발견되어야 한다.
2025-05-24 20:06:03 | 관리자
킹제임스 성경의 역사: 하나님의 말씀 보존의 발자취
1. 배경: 앵글로색슨 시대의 번역 시도들
종교 개혁 이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자국어로 이해하려는 시도들은 이어져 왔다. 영국의 기독교 선구자 베다(Bede, 주후 672–735년)는 요한복음을 앵글로색슨어로 번역했고, 앨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 주후 848–901년)은 십계명과 시편을 자국어로 옮겨 백성들에게 성경의 도덕률을 알리려 했다. 이러한 시도들은 성경 말씀을 라틴어에서 해방시키려는 초기 개혁적 움직임의 발판이 되었다.
2. 초기 개혁자들의 번역: 말씀을 자유케 하다
1) 존 위클리프 (John Wycliffe, 1329–1384)
라틴 벌게이트에서 영어로 번역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권리가 있다.”라고 주장하며 성경을 백성의 언어로 풀어낸 선구자였다. 그의 번역은 필사본 형태로 널리 유포되었고, 후에 ‘위클리프 성경’으로 불리게 된다.
2) 윌리엄 틴데일 (William Tyndale, 1494–1536)
틴데일은 그리스어 원문으로부터 직접 영어로 번역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교육받았고, 루터의 종교 개혁 정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1524년, 잉글랜드 내의 박해를 피해 유럽으로 건너가 비텐베르크에서 신약 성경을 번역했다. 1525~1528년 사이 유럽 전역에서 인쇄된 그의 신약 성경은, 무려 18,000권이나 비밀리에 영국으로 들여오게 되었다.
틴데일은 1530년경부터 구약 성경의 일부도 히브리어 원문에서 번역하였으며, 1536년 ‘친구’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의 마지막 기도는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 주소서!”였다.
킹제임스 성경(KJV)의 90% 이상이 틴데일의 번역에서 왔다는 사실은 그의 사역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보여 준다.
3) 마일스 커버데일 (Miles Coverdale, 1535년)
틴데일이 번역하지 못한 부분을 라틴어, 루터 성경 등에서 보완해 전체 성경을 영어로 출판하였다. 그는 이후에도 여러 번 성경을 개정하며, 성경 번역 역사에 중대한 기여를 했다.
4) 존 로저스 (John Rogers, 1537년)
틴데일의 제자였던 그는 '토마스 매튜'라는 필명으로 매튜 성경(Matthew's Bible)을 출판하였다. 이 성경은 틴데일의 번역과 커버데일의 번역을 결합한 형태로, 영어권 최초의 ‘합성 성경’이었다.
3. 국교회의 공식 성경들
1) 그레이트 성경 (Great Bible, 1539년)
커버데일이 매튜 성경을 개정하여 만든 것으로, 크기가 커서 ‘큰 성경’이라 불렸다. 헨리 8세 치하에서 영국 국교회의 공식 성경으로 지정되었다.
2) 제네바 성경 (Geneva Bible, 1560년)
메리 여왕의 박해를 피해 제네바로 피신한 개신교인들이 제작한 성경이다. 반가톨릭적 각주가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청교도들이 애용한 성경이었다.
3) 비숍 성경 (Bishop's Bible, 1568년)
제네바 성경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영국 국교회가 주도하여 만든 성경으로, 이후 KJV의 직접적 전신이 되었다.
4.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 (1611)
1603년,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청교도들은 국교회 내의 가톨릭적 잔재를 제거하고자 새로운 영어 성경 번역을 요청했다. 1604년 햄프턴 궁정 회의에서 청교도 대표 존 레이놀즈(John Reynolds)가 이를 제안했고, 제임스 왕은 이를 수락하였다.
총 54명의 학자가 선발되었고,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웨스트민스터 세 지역의 여섯 개 그룹으로 나뉘어 성경 각 부분을 나누어 번역하였다. 모든 번역은 상호 검토를 거쳐 6인의 위원회에서 최종 교정을 거쳤다.
사용된 주된 원문: 에라스무스의 공인 본문(Textus Receptus), 마소라 히브리어 본문, 틴데일/커버데일의 번역본.
1611년 인쇄 당시 외경(Apocrypha)은 부록으로 포함되었으나, 영감받은 정경과는 구분되었다. 번역자들은 외경이 성경이 될 수 없는 이유 7가지를 명확히 제시하였다.
5. 후속 개정과 표준화
1629년, 1636년: 간단한 철자 및 교정 수정
1762년, 1769년: 현대 철자와 문장 부호를 반영하여 표준화된 판이 정착되었다.
번역자들의 특징: 모두 성경 언어(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에 정통한 학자였고, 천주교인이나 유대인은 단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6. 오늘날의 현대 역본들과의 비교
20세기 이후 등장한 개정표준역(RSV), 현대 역본(NIV, ESV 등)은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비평 본문에서 파생된 것으로, 로마 가톨릭 추기경 카를로 마르티니(Carlo Martini)가 관여한 연합성서공회(Nestle-Aland)의 본문을 따르고 있다.
미국 국회 기록(1960년 3월 3일)은 RSV 번역자 95명 중 25명이 공산주의 지지를 표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번역들은 종종 예수님의 신성, 복음의 핵심 요소, 반로마 교리 등 중요한 구절들을 삭제하거나 약화시켰다. 이것은 17세기의 종교 개혁 정신과 정반대인 20세기 에큐메니즘 운동의 산물이다.
7. 결론: 왜 킹제임스 성경인가?
킹제임스 성경은 단순한 역사적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와 믿음 위에 세워졌고, 헬라어와 히브리어 원문에 근거하여 탁월한 신학자들에 의해 번역되었으며, 본문 비평학의 혼란 이전에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순수성과 권위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 보존되었으며, 그 결정체가 바로 흠정역(King James Bible)이다.
2025-05-24 20:03:10 |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