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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결과 약866개
안녕하세요? 어떤 분이 다음 구절을 보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14 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있을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15 그분께서 자신의 때에 그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그분은 찬송 받으실 유일한 권능자이시요 왕들의 [왕]이시며 주들의 [주]시니라. 16 오직 그분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그분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아무도 그분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나니 그분께 존귀와 영존하는 권능이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질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글 성경을 보면 16절의 ‘그분’은 문맥상 14절부터 이어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아무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였다는 말은 사실과 다릅니다. 33년 반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이에 대한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14, 15절을 보면 여기의 그분은 ‘앞으로 나타나실 예수님’ 즉 찬송 받으실 유일한 권능자이시요 왕들의 [왕]이시며 주들의 [주]이신 예수님입니다. 다시 말해 2,000년 전에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하나님이신 그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샬롬
2018-03-05 19:53:54 | 관리자
안녕하세요?  요한복음 4장 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요한보다 더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침례를 주신다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시고...When therefore the Lord knew how the Pharisees had heard that Jesus made and baptized more disciples than John, 왜 여기에 '그러므로'가  나오느냐고 물어서 잠시 적습니다. 사실 안 나와도 문제는 없습니다. 기존의 다른 성경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원어와 영어에는 이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러므로가 나오는 것은 요한복음 3장의 구조와 상관이 있습니다.  3장 22절에는 예수님이 침례를 주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일들 뒤에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은 유대 땅으로 들어갔고 그분은 거기서 그들과 함께 지내시며 침례를 주시더라(22). 그리고 23절부터 3장의 끝 절인 36절은 침례자 요한의 이야기입니다. 즉 23-36절은 괄호로 보면 됩니다. 괄호를 빼면 4장 1절은 3장 22절과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4장 1절의 그러므로는 22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 유대 땅에서 침례를 주셨으므로(이것이 그러므로임) 예수님께서 요한보다 더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침례를 주신다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님께서 아셨습니다. 설명이 필요하다 하여 간단히 올렸습니다. 참조하세요. 샬롬 .      
2018-02-06 16:24:18 | 관리자
욥기 분석 책 소개(1-2장)욥과 친구들의 논쟁(3-42장)  I. 첫 번째 논쟁 시리즈(3-14장)   (1) 욥이 자기의 출생을 저주하며 논쟁을 시작함(3장)   (2) 엘리바스의 말(4-5장)   (3) 욥의 대답(5-6장)   (4) 빌닷의 말(8장)   (5) 욥의 대답(9-10장)   (6) 소발의 말(11장)   (7) 욥의 대답(12-14장)  II. 두 번째 논쟁 시리즈(15-21장)   (1) 엘리바스의 말(15장)   (2) 욥의 대답(16-17장)   (3) 빌닷의 말(18장)   (4) 욥의 대답(19장)   (5) 소발의 말(20장)   (6) 욥의 대답(21장)  III. 세 번째 논쟁 시리즈(22-31장)   (1) 엘리바스의 말(22장)   (2) 욥의 대답(23-24장)   (3) 빌닷의 말(25장)   (4) 욥의 대답(26-31장)  IV. 엘리후의 말(32-37장)  V. 논쟁의 귀결(38-42장)   (1) 전능자 하나님의 말씀(38-41장)   (2) 욥의 회개와 축복(42장) 
2018-02-03 10:10:34 | 관리자
안녕하세요? 어떤 분이 judgment라는 단어를 왜 판단 혹은 재판으로 하지 않고 판단의 공의 혹은 판단의 법규 혹은 판단의 규범 등으로 번역했느냐고 물어서 간단히 글을 올립니다. 이는 내가 그를 알기 때문이라. 그가 자기 자녀들과 자기 뒤에 있을 자기 집안사람들에게 명령할 터인즉 그들이 {주}의 길을 지켜 정의와 판단의 공의를 행하리니 이로써 {주}가 아브라함에 관하여 말한 것을 친히 그에게 이루리라, 하시고(창18:19) For I know him, that he will command his children and his household after him, and they shall keep the way of the LORD, to do justice and judgment; that the LORD may bring upon Abraham that which he hath spoken of him.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15134 여기에 나오는 judgment는 히브리어 미스팟을 번역한 것입니다. 제가 가진 원어 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습니다. 4941  fP;v]mi   mishpat  {mish-pawt'}8199에서 유래; 본래 의미는 법률적으로 선언된 ‘판결’(호의적으로나 비호의적으로) 특히  ‘언도’나 공식적 선언(인간의 ‘법’, 혹은【특히】거룩한 ‘율법’, 개체적으로나 집합적으로), 그 행위, 장소, 소송, 범죄, 형벌을 포함함; 추상적으로 ‘정의’, ‘권리’나 ‘특권’(법령에 의한 것이나)이나 ‘양식’까지도 포함하여:-+반대자, 의식(예법), 고발, ×범죄, 관습, 결정, 분별, 결정하는, 부과금, 유행, 형태, 재판받다, 재판, 정당한(정의, 바르게), 법(적인)(태도),  방법, (정당한)절차, 규례, 권리, 판결, ×가치있는, +잘못된 성경에 나오는 judgment라는 말은 영어에서도 매우 특별합니다. 그래서 옥스퍼드 사전은 아예 이 단어의 성경적 용례를 다음 그림에서 보듯이 Biblical usage로 10번 항목으로 따로 떼어 놓았습니다.    가서 보니 말씀드린 대로 이 말은 정의/공의/공평을 말합니다(justice, righteousness, equity).  그런데 judgment라는 말이 판단 혹은 재판을 뜻하므로 이 말은 판단하거나 재판할 때 공의롭게 정의롭게 공평하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판단의 공의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사실 성경에 가서 보면 judgment는 말은 많은 경우 justice와 함께 나옵니다(위에 있는 창세기 18장 19절 참조, 왕상10:9; 대상18:14; 대하9:8 등 다수)).그러면서 옥스퍼드 사전은 2개의 예를 보여 줍니다. 하나는 틴데일 성경의 마태복음 23장 23절입니다(1526 Tindale).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되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인 판단의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하였도다. 너희가 마땅히 이것들을 행하였어야 하거니와 다른 것도 행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 Woe un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for ye pay tithe of mint and anise and cummin, and have omitted the weightier [matters] of the law, judgment, mercy, and faith: these ought ye to have done, and not to leave the other undone. 다른 하나는 1611 Bible 즉 킹제임스 성경의 이사야서 61장 8절입니다. 나 {주}는 판단의 공의를 사랑하며 번제 헌물에 쓰기 위해 강도질하는 것을 미워하노니 내가 진리 안에서 그들의 일을 지도하며 그들과 영존하는 언약을 맺으리라. For I the LORD love judgment, I hate robbery for burnt offering; and I will direct their work in truth, and I will make an everlasting covenant with them. 보시다시피 이런 데를 그냥 재판 혹은 판단이라고 하면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다른 성경들도 모두 공의나 공도 혹은 의로 번역하였습니다.  대저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영한 언약을 세울 것이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그런데 단순히 공의 혹은 의라고 하면 righteousness로 생각이 되며 실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judgment를 righteousness의 의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재판할 때 공의롭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판단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원래 의미를 살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공의롭게 판단된 것들이 판단의 법규 혹은 판단의 규범입니다. 이것들 역시 judgment입니다.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샬롬 패스터
2018-02-02 11:19:57 | 관리자
안녕하세요?어떤 분이 앞으로 있을 성전에 대해 물으셔서 잠시 대답합니다. 1. 천년왕국의 성전은 재림 이후에 있습니다. 겔40-48장을 보세요. 2. 그런데 성경을 보면 7년 환난기에도 성전이 있고 적그리스도가 후반부 3년 반 시작되는 때에 거기로 들어갑니다.어떤 이들은 이것을 환난기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7년 환난기 바로 전에 혹은 시작되면서 건축될 것입니다.  그는 대적하는 자요, 또 [하나님]이라 불리거나 혹은 경배 받는 모든 것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로서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가 [하나님]인 것을 스스로 보이느니라(살후2:4). 1 또 내가 막대기 같은 갈대를 받으매 그 천사가 서서 이르기를,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2 성전 밖에 있는 뜰은 내버려 두고 측량하지 말라. 그것을 이방인들에게 주셨은즉 그들이 그 거룩한 도시를 마흔두 달 동안 발로 짓밟으리라(계11:1-2).  그가 많은 사람과 한 이레 동안 언약을 확정하리니 그가 그 이레의 한중간에 [후반부 3년 반 시작되는 때에] 희생물과 봉헌물을 그치게 하며 또 가증한 것들로 뒤덮기 위하여 심지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그것을 황폐하게 할 것이요, 작정된 그것이 그 황폐한 곳에 쏟아지리라, 하니라(단9:27). 샬롬
2018-02-01 10:32:39 | 관리자
안녕하세요?어떤 분이 히브리서 4장 12절 번역에 마치 주어가 2개인 것처럼 보이는데 그 이유가 무어냐고 묻기에 간단히 글을 적습니다.12절의 주어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12절 끝에 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으로 하였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을 주어로 잘못 생각하여 번역한 결과가 아니냐는 것이 아마도 의문의 핵심인 것 같습니다.영어를 보면 답이 쉽게 나옵니다. 12절의 전체 주어는 the word of God입니다. 그런데 킹제임스 역자들은 뒷부분에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인화하였습니다. The word of God is a discerner of the thoughts and intents of the heart.다른 성경처럼 ‘의도를 분별하니’로 하려면 다음과 같이 해야 합니다.The word of God discerns the thoughts and intents of the heart.그러나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말씀을 높이기 위해 a discerner라고 의인화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라고 바르게 번역하였습니다.13절의 그분은 말씀으로 봐도 되고(discerner) 하나님으로 봐도 됩니다. 물론 discerner가 3인칭 단수이므로 아무 문제없습니다.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으며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둘로 나누기까지 하고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이시니13 그분의 눈앞에서 드러나지 아니하는 창조물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우리와 상관하시는 그분의 눈에 벌거벗은 채 드러나 있느니라.12 For the word of God is quick, and powerful, and sharper than any twoedged sword, piercing even to the dividing asunder of soul and spirit, and of the joints and marrow, and is a discerner of the thoughts and intents of the heart.13 Neither is there any creature that is not manifest in his sight: but all things are naked and opened unto the eyes of him with whom we have to do.샬롬패스터
2017-12-21 10:19:58 | 관리자
요아스와 여호아스열왕기하 11-12장에는 유다의 여호아스(Jehoash) 왕의 기사가 나옵니다. 여호아스는 요아스(Joash)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주로 여호아스라 불립니다.그러나 기존 한글 성경에서 여호아스를 대개 요아스로 번역하다 보니 킹제임스 성경이 여호아스와 요아스 둘로 번역한 것을 두고 오류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한 사람의 이름이 여럿인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왕하11-12장을 읽을 때 유다의 여호아스이면 유다의 요아스와 같은 인물로 이해하면 됩니다.뉴킹제임스, NASB 등도 킹제임스 성경과 같이 왕하 11-12장에 여호아스로 기록하였습니다.이런 것은 오류의 문제가 아니라 이름에 대한 용례에 대한 것이니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여호아스인지, 남 왕국 유다의 여호아스인지 분별해서 읽으면 됩니다.  다음 예는 두 여호아스를 구분하기 위해 남 왕국 유다의 여호아스를 요아스로 지칭한 사례이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왕하13:10 ¶ 유다 왕 요아스의 제삼십칠년에 여호아하스의 아들 여호아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시작하여 십육 년 동안 통치하며 샬롬패스터-------------왕하11장여호아스가 통치하기 시작할 때에 나이가 칠 세였더라(왕하11:21).왕하 12장1 예후의 제칠년에 여호아스가 통치하기 시작하여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 동안 통치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브엘세바의 시비아더라. 2 제사장 여호야다가 여호아스에게 교훈을 주던 모든 때에는 그가 {주}의 눈앞에서 올바른 것을 행하였으나 3 산당들은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들에서 희생물을 드리며 분향하니라. 4 ¶ 여호아스가 제사장들에게 이르되, {주}의 집으로 가져와 봉헌한 물건들 중에서 모든 돈 곧 계산이 끝난 모든 사람의 돈이나 모든 사람에게 정해 준 돈이나 {주}의 집에 가져오려고 어떤 사람이 마음에 정한 모든 돈을 5 제사장들이 각각 자기가 아는 자들에게서 취하여 그 집의 어느 곳이든지 무너진 곳을 발견하거든 그 무너진 곳을 보수하라, 하였으나 6 여호아스 왕의 제이십삼년이 될 때까지 제사장들이 그 집의 무너진 곳을 보수하지 아니하므로 7 여호아스 왕이 제사장 여호야다와 다른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그 집의 무너진 곳을 보수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이제 너희가 아는 자들에게서 더 이상 돈을 받지 말고 그 집의 무너진 곳을 보수하도록 그것을 넘겨주라, 하니 8 제사장들이 다시는 백성에게서 돈을 받지도 아니하고 그 집의 무너진 곳을 보수하지도 아니하기로 동의하니라. 17 ¶ 그때에 시리아 왕 하사엘이 올라와서 가드와 싸워 그곳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자기 얼굴을 고정하고 올라오려 하였으므로 18 유다 왕 여호아스가 전에 자기 조상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봉헌한 모든 거룩한 것과 자기의 거룩한 것과 또 {주}의 집의 보고와 왕의 집에서 찾은 모든 금을 취하여 시리아 왕 하사엘에게 보내었더니 그가 예루살렘에서 떠나갔더라.
2017-12-02 09:16:41 | 관리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는가?   (*) 이 글은 한마음 미션의 고정인 자매님께서 번역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속박에서 구출하기 위해 파라오를 방문한 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곧 해방될 것이라고 모세에게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주}니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 곧 [전능자]의 이름으로는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나를 알리지 아니하였느니라.”(출6:2-3)   성경학자들뿐만 아니라 대다수 성도들이 이 구절을 읽으면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대다수 역본들에서 주(LORD)로 번역된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이 창세기에 이미 160번이나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여호와’ 즉 ‘주’(LORD)라는 이름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가족을 주로 다룬 창세기 12-50장에서 100번 이상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희생 제물을 바칠 수 있도록 양을 미리 준비하셨고 이에 대해 창세기 22장 14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이 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주}의 산에서 그것을 보리라, 하느니라."   수년 뒤, 이삭은 축복을 받기 위해 자기를 속인 자기 아들 야곱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그것을 이같이 속히 찾았느냐? 하거늘 그가 이르되, {주} 아버지의 [하나님]께서 그것을 내게 보내 주셨나이다, 하니”(창27:20)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이 여호와 즉 ‘주’(LORD)라는 이름을 잘 알고 있었고 심지어 일상적인 대화에서 스스럼없이 사용했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모세에게 “내가 나의 이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나를 알리지 아니하였느니라.”(출6:3)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거짓말쟁이신가요? 성경은 이 점에 대해 모순을 보이나요? 합리적인 대답은 무엇인가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창15:7; 22:14; 24:35, 40, 42, 48, 50, 51, 56; 26:22; 27:20; 49:18 등 참조).   성경 비평가들과 불신자들이 이런 구절을 두고 시비를 걸 수 있지만 우리는 성경에 의거하여 논리적인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여호와(주)라는 이름을 아는 것(To know the name of the LORD’ 혹은 단순히 ‘여호와(주)를 아는 것’(To know the LORD)이라는 표현은 종종 그분의 이름과 존재에 대해 단순히 아는 것 혹은 인식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어 ‘야다’(yada)에서 유래된 ‘알다’(To know)라는 말은 종종 경험으로 확실히 습득하여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무엘이 소년이었을 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가 {주} 앞에서……{주}를 섬겼더라.”(삼삼2:18; 3:1) “그가 {주}와 사람들에게 호의를 입었더라.”(2:26)   그런데 바로 다음 중에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무엘은 아직 {주}를 알지 못하였고 {주}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계시되지 아니하였더라.”(삼상3:7).   어떤 의미에서 사무엘은 인생에서 매우 일찍 여호와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무엘기상 3장 7절에서부터 전격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시점부터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기 시작했습니다(참조 삼상3:11-14; 8:7-10, 22; 9:15-17; 16:1-3 등). 이 사건 전에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가 그분에 대해 알았던 것을 이 시간 이후에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 및 그가 그분에 대해 알게 된 것과 비교하면서 사무엘기상의 저자는 이 사건 전에는 “사무엘이 아직 {주}를 알지 못하였다.”(3:7)라고 합리적으로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아처(Gleason Archer)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주라는 것을 알다’(to know that I am the LORD)나 또는 ‘주라는 이름을 안다’(to know the name of LORD)는 표현은 구약에서 적어도 26번 나타나며 이 모든 경우에 이 표현은 실제 경험에 의해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깨달아 알게 된 것을 의미한다.”(하단 참조 문헌, Archer 1982, pp. 66-67)   데이비스(John Davis)는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출애굽기에만 ‘알다’(야다)라는 표현이 주(여호와)와 관련하여 5번 나타나는데 이 “모든 경우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암시한다. 이 모든 경우에 여호와(혹은 여호와라는 이름)를 아는 것은 그분의 인격과 능력을 나타내는 여호와의 어떤 행위나 행동과 관련이 있다.”(하단 참조 문헌, Davis, 4[1]:39).   예를 들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취하여 내게 한 백성으로 삼고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이 되리니 내가 이집트 사람들의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는 {주}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출6:7)   나중에 하나님께서 이미 이집트 사람들에게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고(출7:4~12:30), 홍해를 가르셨으며(출14), 기적으로 쓴 물을 달콤하게 만드셨습니다(출15:22-25). 그 이후에 그분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이 불평하는 것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저녁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빵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주}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출16:11-12)   몇 주가 지난 뒤에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려고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온 {주} 그들의 [하나님]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나는 {주} 그들의 [하나님]이니라.”(출29:46)   이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서 누구신지 알지 못했나요?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은 그분이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그들은 구원자로서의 여호와 하나님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제 그들은 그분이 자기들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모세 시대 이후 수백 년이 지난 뒤 이사야가 대언했던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주}가 말하노라. 내 백성이 아무것도 받지 아니하고 잡혀갔으니 여기서 내게 남은 것이 무엇이냐? {주}가 말하노라. 그들을 다스리는 자들이 그들로 하여금 울부짖게 하며 날마다 계속해서 내 이름을 모독하는도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내 이름을 알리로다.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을 알리니, 보라, 그것이 곧 나니라.”(사52:5-6)   이 예언이 있은 지 100년도 더 지난 뒤에 유다가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게 되면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대언자를 통해 그들이 유다 땅으로 돌아갈 것을 예언하시고 이렇게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보라, 내가 이번에 그들에게 알리리니 곧 내가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리리라. 그리하면 내 이름이 {주}인 줄 그들이 알리라.”(렘16:21)   이러한 진술들은 다 무엇을 말할까요? 이스라엘과 유다가 그들의 역사에서 이 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이름 즉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말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주 즉 여호와라는 이름을 안다’(to know the name of Jehovah)는 표현은 단순히 아는 것 이상의 무언가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그것은 히브리어 관용어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다루실 때에 드러나는 특정한 행위나 속성에 대해 아는 것을 나타냅니다.” (Davis, 4[1]:40).   현시대에서도 누군가가 사람을 정말로 ‘알지’ 않고서도 (또는 그 사람의 직업 혹은 특징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고서도) 그 사람의 이름이나 직업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농구 선수 마이클 ‘에어’ 조던(Michael ‘Air’ Jordan)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외국인들이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그들이 그가 미국프로농구(NBA)에서 은퇴한 지 몇 년 뒤 어떤 대회에서 그를 만났다고 상상해 봅시다. 이 경우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조던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의 이름 마이클 ‘에어’ 조던으로 그를 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와 함께 경기장에 가서 그가 자유투 라인에서 덩크슛을 넣거나 혹은 공기(에어)처럼 가볍게 날아서 슛을 넣는 것을 보고 - 그래서 그의 가운데 이름인 Jeffrey 대신 공기처럼 가볍게 몸을 놀린다는 의미의 에어(Air)가 붙었음을 알고 - 그가 나이키 신발회사에서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오리지널 ‘에어 조던’ 신발은 신은 것을 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 외국인들은 ‘에어 조단’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알고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아 그래서 그의 이름이 ‘에어’ 조던이구나!”   언뜻 보기에 출애굽기 6장 3절은, 창세기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족장의 지식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다’(특히 이름을 ‘안다’)라는 히브리어 관용구가 단순히 사람을 인식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 문제는 더 이상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이 우주의 주권자이자 창조주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몇 백 년 뒤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속박에서 구출함으로써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을 성취하셨을 때,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지키시는 분 여호와라는 이름의 온전한 의미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 다음 2구절을 통해 안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창4:1,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매 그녀가 수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주}로부터 남자를 얻었다, 하니라. 아담은 그 전에 이브를 몰랐을까요?  2. 요17:3,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는 것일까요? 개인적으로 습득해서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서 아는 것입니다.   참고 문헌:   Archer, Gleason L. (1982), An Encyclopedia of Bible Difficulties (Grand Rapids, MI: Zondervan).   Davis, John J. (1963), “The Patriarchs’ Knowledge of Jehovah: A Critical Monograph on Exodus 6:3,” Grace Theological Journal, 4[1]:29-43, Winter.   출처: http://apologeticspress.org/apcontent.aspx?category=6&article=1051  
2017-10-24 10:16:31 | 관리자
질문 : 수아는 여자입니까, 남자입니까?  대답 : "유다가 거기서 수아라는 이름의 어떤 가나안 족속의 딸을 보고 그녀를 취하여 그녀에게로 들어가니"(창38:2)  And Judah saw there a daughter of a certain Canaanite, whose name was Shuah; and he took her, and went in unto her.   "유다의 아들들은 엘과 오난과 셀라니 이 세 사람은 수아의 딸 곧 가나안 족속 여인이 유다에게 낳아 준 자들이더라."(대상2:3)   The sons of Judah; Er, and Onan, and Shelah: which three were born unto him of the daughter of Shua the Canaanitess. And Er, the firstborn of Judah, was evil in the sight of the LORD; and he slew him.   이 두절을 얼핏 보면 수아라는 인물이 가나안 족속 남자 같기도 하고 가나안 족속 여자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구절도 자세히 살펴보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대상2:3의 가나안 족속 여인은 수아의 딸이며 결코 수아가 아닙니다. 창38:12에도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에 유다의 아내 곧 수아의 딸이 죽으매"(창38:12) And in process of time the daughter of Shuah Judah's wife died;  히브리말로도 수아는 남성 명사입니다.   물론 모든 성경 사전들도 수아가 가나안 족속 남성이라고 말하며 그의 딸을 유다가 아내로 취하였다고 기록합니다. SHUA: A Canaanite whose daughter Judah took to wife (Gen 38:2,12; 1 Chron 2:3). (from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aedia).   그러므로 유다의 아내는 수아의 딸이며 수아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대상2:3에서 가나안 족속 여인은 곧 수아의 딸입니다. 그러므로 수아는 남자이지 여자가 아닙니다(The Book of Bible Problem by G. D. Bouw, Ph.D.).
2017-10-04 14:06:13 | 관리자
안녕하세요?   얼마 전에 어떤 분이 야고보서 4장 5절의 영에 대해 질문하셨습니다.   너희는 성경 기록이, 우리 안에 거하는 영이 시기하기까지 욕심을 내느니라, 하고 헛되이 말하는 줄로 생각하느냐?(약4:5)   Do ye think that the scripture saith in vain, The spirit that dwelleth in us lusteth to envy?(KJV)   킹제임스 흠정역은 ‘우리 안에 거하는 영’으로 되어 있는데 반해 다른 성경들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되어 있어 어느 것이 맞는지 알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바른 성경/공동 번역 등: 너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시기할 정도로 사모한다고 하신 성경 말씀을 헛된 것으로 생각하느냐? 이런 구절은 앞뒤 문맥과 그 안에 사용된 단어를 보고 이해해야 합니다. 문맥을 이해하기 위해 4-6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4 너희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   5 너희는 성경 기록이, 우리 안에 거하는 영이 시기하기까지 욕심을 내느니라, 하고 헛되이 말하는 줄로 생각하느냐? 6 그러나 그분께서 더 많은 은혜를 베푸시나니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은 물리치시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시느니라.   ---------매튜 헨리 주석: 사람이 마음에서 상상하는 것은 항상 악하다(창6:5). 본성적 부패는 욕심을 부리며 시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람 속의 영은 늘 악한 생각들을 만들어 낸다.   앨버트 반즈 주석: 야고보는 사람의 시기에 대해서 말한다(약3:16). 4절의 ‘세상과 친구 되는 것’(즉 세상과 친해지려는 영)은 곧 사람 속의 영의 시기로 말미암은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여기의 영을 성령님으로 해석하곤 하는데 이를 위해 그들은 끝 부분의 “lusteth to envy”를 “lusteth against envy”로 바꾼다. 이리 되면 성령님께서 시기를 반대하여(against) 욕심을 내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자연스러운 해석이 아니며 주관적으로 그리 해석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말이 허용하는 해석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것은 여기의 영을 우리 안의 영 혹은 속성으로 보는 해석이다. 즉 우리 안의 영은 다른 사람의 행복과 번영 등을 시기할 정도로 욕심을 낸다.   재미슨 파우셋 주석: 세상과 친구가 되면 우리 영이 다른 사람들을 시기할 정도로 욕심을 낸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데 쓰이는 질투는 envy가 아니라 jealousy입니다. 하나님의 질투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열심(zeal)으로도 번역되었습니다. 즉 주님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열심을 내므로 질투하십니다.   또한 lust라는 말은 음욕을 품는 데 사용되는 좋지 않은 말입니다. 성경은 성령님에 대해 lust란 말을 쓰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은 lust를 정욕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은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나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17절을 보겠습니다.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너희가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For the flesh lusteth against the Spirit, and the Spirit against the flesh: and these are contrary the one to the other: so that ye cannot do the things that ye would.   여기서도 육신은 욕심을 부리지만(lust) 성령님은 그냥 육신을 대적하지, 육신을 대적하며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 6절은 시기하지 않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 사람을 겸손한 자라고 하십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므로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야고보서 4장 5절의 영은 문맥으로 보나 같이 나오는 용어들(욕심, 시기 등)로 보나 사람의 영이지 성령님이 아닙니다.   샬롬   패스터
2017-10-04 13:47:15 | 관리자
여러 명의 다리오   성경에는 다리오라는 이름의 왕이 여럿 나옵니다.   특히 바빌론의 벨사살 왕을 멸망시킨 다리오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는 분명히 메데 사람이고 페르시아 왕국의 초대 왕으로 유대인 귀환을 명령한 왕은 고레스인데 이 둘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다음은 에스라 사전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성경에 대해 확신을 갖기 바랍니다.   1. 메대 사람 다리오(단5:31; 9:1; 11:1). 이 사람은 아스티가게스의 아들로서 메대 사람들의 왕이었으며 어머니 쪽으로 에빌므로닥과 고레스의 삼촌이었다. 그는 BC 539년에 갈대아 사람들의 벨사살 왕을 폐위시키고 2년 후에 죽을 때까지 왕좌를 차지하였으며 그 후에 왕좌는 고레스에게 넘어갔다. 그의 통치 때에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졌다(단6:1-28). 고레스는 BC 536년에 유대인 귀환을 선포하였고 그 결과 유대인들은 BC 606년에 있었던 바빌론의 1차 침공 이후 70년 만에 본토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다리오는 고레스 밑에 있던 대장으로 메대-페르시아 왕국의 일부인 갈대아 사람들의 영역을 다스리도록 세워진 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KJB에는 분명하게 그가 왕으로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단9:1). https://www.biblegateway.com/resources/encyclopedia-of-the-bible/Darius-Mede   2. 다리오 히스타스피스. 에스라와 학개 그리고 스가랴 대언자에 의해 언급된 이 왕은 고레스가 유대인들에게 칙령을 내려 성전을 지으라고 했으나 그 후에 유보된 것을 다시 회복시켜 유대인들이 공사를 하도록 허가한 인물이다(스4:1-24; 5:1-17; 6:1-22; 7:1-28). 그는 주전 521년경에 마기승족의 왕위 찬탈자 스메르디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고 36년 동안 통치하였다. 그는 정부를 수사(수산)로 옮겼고 바빌론이 자기를 대적하여 반역을 일으키자 반역을 제압하고 바빌론의 성벽을 무너뜨려 렘51:58의 예언을 성취했다.   3. 다리오 코도마누스. 느12:22에 언급된 이 왕은 페르시아의 왕들 중에서 가장 용맹스럽고 인자한 왕이었다. 알렉산더 대제는 여러 차례 그를 패배시켰고 마침내 260년의 역사를 가진 페르시아 왕국을 무너뜨렸다. 다리오는 6년간 통치한 뒤에 자기의 장군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며 이로써 단8:1-27에 나오는 예언이 성취되었다. 다니엘은 숫양이라는 상징으로 페르시아 왕국이 거대해지는 것을 예언했고 이 양이 뿔로 서쪽과 북쪽과 남쪽을 밀고 들어가나 아무도 그를 저지하지 못하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이 숫양은 서쪽에서 나와 땅에 닿지 않고 온 세상을 휘저으며 다닌 염소 즉 눈과 눈 사이에 큰 뿔을 가진 염소인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파멸되었다. 다니엘의 예언은 역사상 일어난 일을 너무나 명확하게 보여 주기 때문에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다.
2017-08-12 14:36:28 | 관리자
하나님은 무엇을 주셨나요?   안녕하세요?   어떤 분이 요한일서 4장 13절이 이상하다고 하여 잠시 답을 드립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영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이로써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4:13).   Hereby know we that we dwell in him, and he in us, because he hath given us of his Spirit.   질문은 “그분께서 자신의 영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셨으므로”에 대한 것이며 초점은 하나님이 무엇을 주셨는지 목적어가 없다는 것입니다.   네, 맞습니다. 이 구절에는 목적어가 없습니다.   그러면 영어는 어떤가요?영어에도 “because he hath given us of his Spirit.” 목적어가 없습니다.   이것을 “그분께서 자신의 영을 우리에게 주셨다”로 번역하면 안 됩니다 그러려면 영어 ‘of his Spirit’에서 ‘of’를 빼내야 하는데 원어에도 ‘of’가 들어 있으므로 빼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생략된 목적어는 성령님의 은혜, 영향력, 열매, 은사(선물) 등 그분의 영이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7절 이후부터 보면 그분의 영이 주신 것 중 하나가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는 줄 압니다.   주님의 큰 평안이 임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7-07-26 10:54:07 | 관리자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인가요?   안녕하세요?   어떤 분이 자기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확실히 믿지만,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냐고 누가 물으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기에 간단히 답을 드립니다.   답: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아주 간단한 예를 두 개만 들겠습니다.   1. 이사야서 6장 1-13절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또한 내가 보니 [주]께서 높이 들린 왕좌에 앉으셨는데 그분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고 2 그것 위에는 스랍들이 저마다 여섯 날개를 가진 채 서 있더라. 그가 두 날개로는 자기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자기 발을 가리며 두 날개로는 날더라. 3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외쳐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주}여, 그분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그 외치는 자의 음성으로 인해 문기둥들이 흔들리며 그 집이 연기로 가득하더라.  여기서 이사야는 [주](Lord) 즉 여호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이사야가 자기의 부정한 상태를 고백하자 주님은 그를 정결하게 해 주셨습니다(5-8절). 그리고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9 ¶ 그분[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말하기를, 참으로 너희가 듣되 깨닫지 못하고 참으로 너희가 보되 알지 못하느니라, 하며 10 이 백성의 마음을 우둔하게 하고 그들의 귀를 둔하게 하며 그들의 눈을 닫을지니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여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기에 11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매 그분께서 대답하시되, 도시들이 피폐하게 되어 거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땅은 완전히 황폐하게 되며 12 또 {주}가 사람들을 멀리 옮겨서 이 땅 한가운데에 버림당하는 일이 심히 많을 때까지니라.   12절의 {주}(LORD)와 1-11절의 [주](Lord)는 같은 분입니다.   이 구절들에는 신약 성경에 자주 언급되는 매우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9 ¶ 그분[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말하기를, 참으로 너희가 듣되 깨닫지 못하고 참으로 너희가 보되 알지 못하느니라, 하며 10 이 백성의 마음을 우둔하게 하고 그들의 귀를 둔하게 하며 그들의 눈을 닫을지니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여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기에   자, 이에 대해 우리 주 예수님은 수난 당하기 1주일 전 쯤에 요한복음 12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7 ¶ 그러나 그분[예수님]께서 이렇게 많은 기적들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전히 그분을 믿지 아니하였으니 38 이것은 대언자 이사야의 말씀이 성취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말하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 그러므로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하였으니 그 까닭은 이사야가 다시 말하였기 때문이라. 이르되, 40 그분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으니 이것은 그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여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더라. 41 이것들은 이사야가 그분[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에 대해 말하였을 때에 이른 것이더라.  39-40절에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한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들은 바로 이사야서 6장 9-10절입니다. 여기서 41절은 참으로 굉장한 이야기를 보여 줍니다.   사도 요한은 39-40절이 이사야가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에 대해 말한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구약의 이사야는 그 당시 누구를 보았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그분이 곧 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구절은 신구약의 여러 군데에서 발견됩니다.   예수님은 재림 시에 올리브 산에 오실 것입니다. 행1:11-12를 보기 바랍니다. 11 또 그들이 이르되, 너희 갈릴리 사람들아, 너희가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바라보느냐? 너희를 떠나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이 동일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분께서 하늘로 들어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니라. 12 그때에 그들이 올리벳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안식일에도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있더라.   스가랴서 14장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강림이 기록되어 있습ㄴ다.   1 보라, {주}의 날이 이르리니 사람들이 네게서 노략한 물건들을 네 한가운데서 나누리라. 2 내가 모든 민족들을 모아 예루살렘을 대적하여 전쟁하게 하리니 그런즉 그 도시가 함락되며 집들이 강탈을 당하고 여인들이 강간을 당하며 그 도시의 반이 포로가 되려니와 백성의 남은 자들은 그 도시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3 그때에 {주}께서 나아가사 그 민족들과 싸우시되 전에 전쟁의 날에 싸우신 것 같이 하시리라. 4 ¶ 그 날에 그분의 발이 예루살렘 앞 동쪽에 있는 올리브 산 위에 설 것이요, 올리브 산이 거기의 한가운데서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지므로 심히 큰 골짜기가 생길 것이며 그 산의 반은 북쪽으로, 그 산의 반은 남쪽으로 이동하리라.   4절을 보면 {주}(LORD)  곧 여호와 하나님이 올리브 산에 강림하시며 주의 날(재림)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과 비교해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여러 구절들을 모아서 교리를 만드는 것을 우리는 조직 신학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큰 평안이 임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7-07-26 10:36:09 | 관리자
안녕하세요?   성경 번역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원어, 영어의 많은 단어들이 복수의 뜻을 가진 경우가 많아 기계적인 번역이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가 말하는 바는, 우리의 구원이 사람의 행위와 상관없이 오직 우리 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거기서 그분께서 흘려주신 고귀한 피를 믿는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물론 부활 믿음도 추가될 수 있으나 요점은 우리의 구원이 사람의 행위와 100% 전혀 상관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예배 출석, 새벽기도, 철야, 헌금, 구제, 선교, 전도, 침례(세례), 주의 만찬(성만찬) 같은 사람의 행위가 전혀 우리의 구원에 일조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이런 것들은 구원받은 이후에 주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자발적으로 하는 것들이며,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이에 대한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은 이것을 잘 보여 줍니다.  8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0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선한 행위를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가 그 행위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도서 3장 역시 이를 잘 보여 줍니다.   3 우리도 한때는 어리석고 불순종하며 속임을 당하고 여러 가지 정욕과 쾌락을 섬기며 악의와 시기 가운데 살고 증오하며 서로 미워하였으나 4 사람을 향한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의 친절과 사랑이 나타난 뒤에 5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로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자신의 긍휼에 따라 다시 태어남의 씻음과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고 6 예수 그리스도 곧 우리의 [구원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성령님을 풍성히 부어 주셨으니 7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은혜로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의 소망에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성경에는 마치 침례 같은 행위가 사람의 구원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것으로 보이는 구절이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파/교단은 이런 구절을 사용해서 반드시 물 침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미국의 캠벨파 그리스도의 교회).   이런 분들이 이를 위해 사용하는 구절은 사도행전 2장 38절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을 얻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니   베드로의 말만 떼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을 얻으라.   여기서 뒷부분만 보면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을 받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연히 물 침례가 구원의 수단 혹은 구원에 일조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 신약성경의 전체적인 구원관과 전적으로 배치됩니다.   베드로의 말을 다시 보겠습니다.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을 얻으라.   여기서 중간에 들어 있는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를 빼 보면 어떨까요?   “회개하여 죄들의 사면을 얻으라.”   이렇게 하면 말이 됩니다. 참된 회개와 믿음은 항상 같이 다니므로 믿음으로 회개하여 죄들의 사면을 받는 것은 신약성경의 구원관과 일치합니다.   실제로 그리스어 구조를 보면 “회개하라”가 주동사로 되어 있고 “침례를 받아”는 보조동사로 되어 있으므로 죄들의 사면이 “회개하라”에 걸려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데가 여기만 있을까요? 아닙니다. 적어도 두 군데가 더 있습니다.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으려니와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막16:16).   여기도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맨 앞에 “믿고”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간에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구원 받는 믿음 이후의 일이지 ‘믿는 것’과 ‘침례를 받는 것’, 이 두 가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님을 누구라도 알 수 있습니다.   바울과 관련된 구절을 보겠습니다. 아나니야의 말입니다. 이제 네가 왜 주저하느냐? [주]의 이름을 부르며 일어나 침례를 받고 네 죄들을 씻어 버리라, 하더라(행22;16).   여기도 뒷부분만 보면 침례를 받아 죄들을 씻는 것으로 오해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맨 앞에 “[주]의 이름을 부르며”라는 주요 조건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부르면 그는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에는 믿음과 회개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도 중간에 낀 “일어나 침례를 받고”를 빼면 자연히 말이 됩니다.   이런 구절들을 대하면서 신약성경의 구원관이라는 차원에서 전체 문맥에 맞게 이해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 행2:38을 오역이라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므로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회개하고 죄들의 사면으로 인해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이것을 얼핏 보면 침례교 교리에 맞는 것 같지만 그리스말이나 영어의 구조와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for the remission of sins’라는 말은 다른 데서 모두 “죄들의 사면을 위해”로 번역되었습니다. 이것을 그런 식으로 하려면 다음처럼 해야 더 정직한 것입니다.   죄들의 사면으로 인해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러나 이렇게 하면 구원 교리가 깨지므로 안 됩니다. 회개하지도 않았는데 죄들의 사면이 있다고 하면 말이 안 됩니다. 가장 좋은 길은 그리스말, 영어 등에 있는 것처럼, 지금 흠정역 번역처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번역하고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구절을 가지고 물 침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누가 주장하면 설명해 주고 그래도 믿지 않으면 벗어나면 됩니다. 우리는 어떤 특정 교리나 교파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문맥에 벗어나게 번역하는 일은 결코 할 수 없습니다.   위의 세 가지 예를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큰 평안이 넘치기를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17-06-22 13:03:12 | 관리자
안녕하세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이며 이를 조금 더 풀면 즉 지나침은 부족함과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예 1: 영어습득과 학습적응에서 유학은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는 믿음에 갓 초등학생에 입학한 어린아이까지 머나 먼 유학길에 오르더니 이젠 태아들도 덩달아 유학(?)을 떠나고 있다. 실로 ‘과유불급’이다.   예 2: 아무리 학생들의 사기를 높여주는 뜻이라 해도 지나친 칭찬은 자제하십시오. 과유불급입니다.   이런 종류의 과유불급의 예가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우리 성경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성경의 모든 단어를 영감으로 주시고 섭리로 보존해 주셨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 무오성이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먼저 이것을 알라. 성경 기록의 대언은 결코 어떤 사적인 해석에서 나지 아니하였나니 대언은 옛적에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아 나오지 아니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자기들을 움직이시는 대로 말하였느니라(벧후1:20-21).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모든 단어들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나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보다 더 위에 두면 과유불급이 됩니다.   이런 종류의 과유불급을 유발하게 하는 유명한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편 138편 2절입니다. 미국의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보다 더 크다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주의 거룩한 전을 향해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진리로 인하여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니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로 크게 하셨나이다(시138:2).   I will worship toward thy holy temple, and praise thy name for thy lovingkindness and for thy truth: for thou hast magnified thy word above all thy name.   이것을 아무 생각 없이 읽고 또 말씀을 높이려는 선한 의도를 지닌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들으면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하나님의 모든 이름 위로 크게 만드셨다고 이해하게 됩니다.   물론 이들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구약의 여호와나 신약의 예수입니다. 그 결과 이들은 성경의 모든 단어들 혹은 성경 자체가 여호와 하나님보다 혹은 예수님보다 크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해석과 결론이 이렇게 나면 이것은 아무리 좋은 의도로 말씀을 해석하였다고 해도 심각한 과유불급입니다. 특히 미국의 경우 근본주의자들이 이런 예를 사용하곤 합니다.   일단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문장의 구조를 보기 바랍니다.   말씀을 이름보다 위로 더 크게 만든 분이 있으니 당연히 그분은 말씀과 이름보다 크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하나님 지체보가 더 크다는 것은 문장 자체가 허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하나님과 동일하게 놓거나 그 이상으로 놓는 것은 과유불급이요, 합당한 해석이나 처사가 아닙니다.   자, 그러면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로 크게 하셨나이다’의 뜻은 무엇일까요?   이를 이해하려면 이름의 용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름은 어떤 존재를 다른 존재에게 알리는 데 사용되는 수단입니다. 예를 들어 정동수라는 이름을 말하면 저의 모든 것(집안, 학력, 직업, 가족 관계, 행한 일, 하고 있는 일, 성품)이 이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138:2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을 알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과 그분의 성품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삼하8:13을 봅시다.   다윗이 소금 골짜기에서 시리아 사람 만 팔천 명을 치고 돌아올 때에 이름을 떨치니라.   이럴 때 다윗의 이름은 그가 소금 골짜기에서 시리아 사람 만 팔천 명을 치고 승리한 후 얻은 명성을 뜻합니다.  성경에는 이런 식으로 이름이 사용된 예가 많습니다.   다음 예는 이름이 주님의 성품 즉 거룩한 성품을 표현한 것입니다.   높고 높으며 영원에 거주하고 이름이 거룩함인 이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겸손한 영을 지닌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것은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들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57:15). For thus saith the high and lofty One that inhabiteth eternity, whose name is Holy;   그러므로 시편 138편 2절은 다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또 인류를 향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계시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자신에 대해 알리고자 했던 모든 현현, 발표, 행위, 자신의 성품보다 명확성과 중요성 등에서 훨씬 더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창조 세상이나 여러 가지 기적들도 다 주님의 이름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 그분의 완벽함에 대해, 그분의 목적에 대해 성경보다 더 확실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을 시편 19편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1 하늘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고 궁창이 그분의 손으로 행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보이니 3 그것들의 음성이 들리지 않은 말이나 언어가 없도다. 4 그것들의 줄이 온 땅에 두루 나갔고 그것들의 말들이 세상 끝까지 이르렀도다. 그분께서 해를 위하여 하늘들 안에 장막을 세우셨으므로 5 해는 자기 침소에서 나오는 신랑 같고 경주하려는 힘센 자 같이 기뻐하는도다. 6 해가 하늘 끝에서부터 나아가며 그것의 순환 회로는 하늘 끝들에까지 이르나니 해의 열기에서 숨을 것이 없도다.   7 {주}의 율법은 완전하여 혼을 회심시키고 {주}의 증언은 확실하여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주}의 법규들은 올발라서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의 명령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하는도다. 9 {주}의 두려움은 깨끗하여 영원토록 지속되고 {주}의 판단들은 진실하고 전적으로 의로우니 10 그것들은 금보다, 참으로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해야 할 것들이며 또 꿀과 벌집보다 더 달도다. 11 주의 종이 또한 그것들로 경고를 받나니 그것들을 지킬 때에 큰 보상이 있나이다.   12 누가 능히 자기 잘못들을 깨달으리요? 주께서는 은밀한 허물에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13 또 주의 종을 지키사 고의로 짓는 죄들에서 떠나게 하시고 그 죄들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곧바르게 되어 큰 범법에서 벗어나 무죄하리이다. 14 오 나의 힘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주}여, 내 입의 말들과 내 마음의 묵상이 주의 눈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1-6절은 창조 세상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 즉 그분의 이름입니다. 7-11절은 하나님의 말씀들이며 이 구절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들이 창조 세상보다 큼을 보여 줍니다. 사람의 혼을 회심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 결과가 12-14절입니다.   시편 138편은 특히 하나님께서 다윗의 혈통을 메시아 혈통으로 삼고 그의 왕좌를 메시아 왕좌로 삼으실 것에 대해 다윗이 감사의 찬송을 드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삼하7 참조).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모든 것 즉 그분의 이름을 드러내는 모든 것보다 그분의 메시아 왕국에 대한 말씀이라는 계시가 더 크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138:2에서 기초는 하나님의 이름 즉 하나님의 모든 명성과 성품이고 그 기초 위에 놓인 것은 즉 약속의 말씀을 그분께서 친히 지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말한 시138:2의 의미입니다.   여기의 이름은 예수나 여호와가 아니고 여기의 말씀은 성경책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심각한 과유불급이 됩니다.   샬롬   패스터
2017-05-31 16:25:12 | 관리자
안녕하세요?   시편 49편 5절에는 조금 이상한 말이 있습니다.   5 내 발꿈치의 불법이 나를 에워쌀 그 악한 때에 내가 어찌하여 두려워하랴? Psalm 49:5 Wherefore should I fear in the days of evil, when the iniquity of my heels shall compass me about?   다른 성경들은 이것을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개정: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바른: 나를 속이는 자의 악이 나를 둘러쌀 때에 어찌 내가 재앙의 날들을 두려워하랴? 공동: 악을 꾸미는 자들이 나를 뒤쫓고 노려보아도 이 곤경에서 나 어찌 두려워하리.   킹제임스 성경은 히브리어 성경에 있는 대로 발꿈치(스트롱 번호 6120)를 그대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직역해 놓으니 조금 이상하지 않느냐고 묻는 분이 있어 글을 씁니다.   일단 1-5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너희 모든 백성들아, 이것을 들으라. 세상의 모든 거주민들아, 너희는 귀를 기울이라. 2 낮은 자나 높은 자나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함께 들을지어다. 3 내 입이 지혜를 말하리니 내 마음의 묵상은 깨달음에서 나리로다. 4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하프를 타며 나의 은밀한 말을 열리로다. 5 내 발꿈치의 불법이 나를 에워쌀 그 악한 때에 내가 어찌하여 두려워하랴?   먼저 요약을 하고 설명하겠습니다.   요약: 하나님 앞에서 내 죄들이 처리된 이후에 성도는 다시는 그것들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15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5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 혼을 무덤의 권능에서 구속하시리니 그분께서 나를 받아 주시리로다. 셀라.   중요 단어: 불법(iniquity, 즉 내가 부당하게 행한 것), 발꿈치: 발의 뒷부분   설명: 내가 불법을 저지른 뒤 거기서 도망가면 내 불법은 내 뒤에(발꿈치) 있습니다. 그럼에도 내 죄들은 어느 날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나를 찾아낼 것입니다. 내가 뒤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 내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5절의 compass라는 단어의 뜻) 나를 에워쌌고 나는 과거의 죄들에 의해 에워싸이게 되었으므로 그 죄들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1-2절에 있듯이 이 일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납니다.3-4절 역시 같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죄들이 우리 뒤에 있고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내(시편 기자) 비유 혹은 가르침은 그것이 틀림을 입증합니다. 모든 사람은 다시 자기 죄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내가 이 죄들을 대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 모두는 다 이 죄들을 처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 죄들을 다 해결하였습니다.   49편 5절: 내가 그날이 오는 것을 두려워해야만 할까요?49편 6-11절: 이 세상의 재물 등은 이것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49편 15절: 오직 하나님께서 내 혼을 구속하실 것입니다.49편 16절: 그러므로 재물이 많은 부자들이 심판 날에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잠언 11장 4절을 보기 바랍니다.   재물은 진노의 날에 유익을 끼치지 못하나 의는 사망에서 건지느니라.   이런 것을 기억하면서 시편 49편을 쭉 읽어 보기 바랍니다. 특별히 발꿈치의 불법이 우리를 에워쌀 때에도 주님이 우리의 변호자가 되심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큰 평안이 있을 줄 믿습니다.   샬롬   패스터   시편 49편   1 너희 모든 백성들아, 이것을 들으라. 세상의 모든 거주민들아, 너희는 귀를 기울이라. 2 낮은 자나 높은 자나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함께 들을지어다. 3 내 입이 지혜를 말하리니 내 마음의 묵상은 깨달음에서 나리로다. 4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하프를 타며 나의 은밀한 말을 열리로다. 5 내 발꿈치의 불법이 나를 에워쌀 그 악한 때에 내가 어찌하여 두려워하랴? 6 자기 재물을 신뢰하고 자기의 많은 부를 자랑하는 자들 중에 7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 형제를 구속하거나 그를 위해 [하나님]께 대속물을 바쳐서 8 (그들의 혼을 구속하는 일은 귀중하며 그것은 영원토록 멈추어 있도다.) 9 그가 여전히 영원토록 살게 하며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할 자는 아무도 없도다. 10 지혜로운 자들이 죽고 어리석은 자와 짐승 같은 자도 그와 같이 멸망하여 자기 재물을 남들에게 남기는 것을 그가 보는도다. 11 그들은 속으로 자기들의 집은 영원히 지속되며 자기들의 거처는 모든 세대에 이를 줄로 생각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기들의 이름을 따라 자기들의 땅을 부르는도다. 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귀함 가운데 거하는 사람이 계속 머무르지 못하나니 그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 13 이처럼 그들의 길이 곧 그들의 어리석은 일이로되 그들의 후손은 여전히 그들의 말에 찬동하는도다. 셀라. 14 그들이 양같이 무덤에 놓였은즉 사망이 그들을 먹을 것이요, 곧바른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지배하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이 그들의 거처를 떠나 무덤에서 소멸되리로다. 15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 혼을 무덤의 권능에서 구속하시리니 그분께서 나를 받아 주시리로다. 셀라. 16 사람이 부하게 되고 그의 집의 영광이 늘어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17 그가 죽을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며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하리라. 18 그가 비록 살면서 자기 혼을 축복하였을지라도 네가 네 자신에게 잘 행하면 사람들이 너를 칭찬하리로다. 19 그가 자기 조상들의 세대에게로 가리니 그들이 결코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20 존귀함 가운데 거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
2017-05-23 14:24:48 | 관리자
출2:18의 르우엘과 민10:29의 라구엘은 같은 이름입니다. 히브리어로 רְעוּאֵ֣ל 동일한데, 민수기의 라구엘은 영어로 번역하는데서 르우엘(출2:18의 사람 이름과 같음)을 라구엘로 번역한 것입니다. 두 단어 모두 strong number 7467로 같습니다. 역대상1:35절의 르우엘과도 정확히 동일한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참고하시기바랍니다.
2017-02-07 11:29:45 | 황규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