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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믿음/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는 삶   우리는 지금 성령의 열매에 대해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 열매는 하나님께 속한 속성과 특성들로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원하시는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가족 구성원이 된 사람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즉 우리를 맏아들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들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선 오늘 메시지의 기초가 되는 구절부터 읽고나서 나머지 12구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25절입니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 성령 안에서 걷는 것이야말로 거듭난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바는 성령 안에서 살고 있는 자들이 성령 안에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실제적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영의 통제하에 놓여 있음을 의미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 말씀 속에 우리 모두의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이 말씀이 우리에게 해당됩니다. 문제는 이 말씀을 우리가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 자신의 아내가 죽은 사람이 내일 아침에도 예전처럼 자기 아내가 아침도 차려주고 와이셔츠도 다려줄 것을 기대한다면 그 사람은 정상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보고 싶기도 하고 빨리 하늘나라에 가서 다시 만나고 싶기도 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아내에게 그 어떠한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아내와 무언가를 함께하고 아내로부터 무언가를 기대한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하나님 말씀에 죽었다고(dead) 되어 있는 그 무엇과 계속해서 관계를 맺으려고 합니다. 언급했듯이 이는 미친 짓이며 실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24절 말씀을 잘 읽어 보십시오. 어떤 것이 죽어 있습니다. 어째서 여러분과 저는 육신적 삶으로부터 아무런 만족을 얻지 못합니까? 어째서 육신을 따라 사는 생활로부터 참다운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죽은 것 하고는 그 누구도 아무런 교제(관계)를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미친 짓이요,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육체는 언젠가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 언젠가 우리의 애착들과 정욕들도 못 박히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에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우리는 이 시체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자. 나를 만족시켜다오. 자! 어서 일어나 나에게 무언가 말 해다오!”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만약 그 누군가가 죽은 사람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그 사람은 무엇이 잘못되도 크게 잘못된 사람입니다. 누군가가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사진을 쳐다보며 그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 어머니에게 아침을 차려드린다면, 그 누가 봐도 그 사람은 정상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죽은 육신을 위해 살고, 육신을 섬기고, 육신과 교제하며 사는 것입니까? 이것은 미친 짓입니다. 무엇이 잘못되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옛사람 때 지녔던 애착들(affections), 정욕들(lusts)과 교제를 나누고자 한다면 실로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과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며 우리는 옛 생활로부터 결코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은 그 동안 살펴온 성령의 열매의 특성들 아홉 가지 중 믿음(faith)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 1장을 먼저 보십시오. 로마서 1장에는 혼란스런 구절 하나가 들어 있는데 오늘 우리는 그 구절을 읽고 기도하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더 이상 이 구절이 혼란스러운 구절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럼 로마서 1장 16절부터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그것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인에게로다.       16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권능이라고 되어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권능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교회들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나 그들은 복음을 믿지 않기 때문에 지옥을 갑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믿고, 위대한 스승이요 위인이신 그리스도도 믿으며, 선한 행위들도 믿지만 복음은 믿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들로 인해 죽으시고 묻히셨고 셋째 날 다시 살아나신 사실, 즉 복음을 믿지 아니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누구도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16절에 말씀하기를 복음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권능이라고 한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제부터 제가 좀 이상한 것 하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누구든지 간에 칭의(의롭게 됨)를 얻기 전에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는 의롭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그런데 로마서 1장 17절에는 의인(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미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는데 또 “믿음”으로 살다니요? 그러니까 내가 구원받은 그 믿음과 살아야 할 믿음, 그 두 가지가 뭔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을 때 갖고 있던 믿음에서 생활을 위한 믿음으로(from faith to faith)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이 진리를 깨닫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시여, 오늘 이 진리를 저희에게 알려주소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늘 이 시간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깨닫도록 도와주시기를 간구 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로지르는 흔들다리가 처음에 어떻게 건설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기술자들이 케이블로 묶는 방식의 다리를 설치하려고 설계를 했으나 어떻게 그 일을 진행시켜야 할지를 몰랐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바람이 잘 부는 어느 날 줄 하나를 연에 매달아 강 건너편으로 띄웠고 건너편에 있던 사람이 그것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에 조금 더 무거운 줄을 매달아 다시 이쪽으로 보냈고 여기서 다시 더 무거운 줄을 매달아 보내는 방식을 썼습니다. 결국에는 큰 케이블로 된 다리를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연줄은 다름 아닌 우리의 믿음을 대표합니다. 우리의 믿음 역시 처음에는 클 필요도 없고 강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건너편으로 건너갈 정도면 됩니다. 그러면 건너편에서 이 작은 믿음을 누군가가 받아서 그 위에 좀 더 강한 것을 매달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자그마한 믿음이 이쪽저쪽을 오가며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 내게 됩니다. 마가복음 11장 2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라. 고가도로를 지나가면서 그 도로가 우리가 타고 있는 자동차를 지탱해 주리라는 믿음은 누구라도 갖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것을 믿지 않고는 아무도 고가도로 위로 차를 몰고 가진 않을 것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도 이런저런 형태로 믿음을 행사합니다. 가게 가서 복숭아 통조림을 사면서 그 안에 과연 복숭아가 들어 있을까,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문을 읽으면서도 그 기사 내용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도 우리는 잘 믿습니다. 어디 가면 물건을 싸게 살 수 있다는 말을 친구가 해 주면, 그 친구 말을 믿고 그곳으로 갑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매일 매일 믿음을 행사하면서 살아갑니다. 마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갖고 있고 매일 사용하는 그 믿음을 다름 아닌 “하나님께 두라(have faith in God)”고 하십니다. 신문을 읽을 때, 물건을 살 때, 버스를 탈 때, 고가도로를 올라갈 때 행사했던 그 믿음만큼이라도 하나님께 믿음을 얹어놓으라는 말입니다. 커다란 기관차에는 엄청난 마력의 엔진이 달려 있고 엄청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그 뒤에 연결되어 있는 객차들은 단지 이 기관차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레일 위를 달릴 수 있습니다. 객차들이 스스로 레일 위를 달릴 수는 없습니다. 오직 기관차의 힘에 의해 레일 위를 힘차게 달리는 것입니다. 이 시간 현재 저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나의 죄들은 다 처리되어서 지금 죽더라도 지옥에 가지 않고 하늘나라에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내 스스로의 힘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니고 오직 내가 예수님께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분의 권능으로 영생을 얻었고, 그분의 권능으로 죄사함을 받았으며, 그분의 권능으로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현재 나는 주님과 연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가시는 그곳에 언제든지 갈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 14절에서 16절을 보십시오. 14 너희가 거룩하신 분 곧 의로우신 분을 거절하고 살인자를 너희에게 달라고 구하여 15 생명의 통치자를 죽였도다. 그분을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셨으니 우리가 그 일에 증인이라. 16 그분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분의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강건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그분으로 말미암은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그를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우리 신앙의 첫 단계는 물론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포함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saving faith)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다시 일어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장을 보시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구원이 성립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로마서 3장 24절, 25절입니다. 2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느니라. 25 그분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한 화해 헌물로 제시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참으심을 통해 과거의 죄들을 사면하심에 관한 자신의 의를 밝게 드러내려 하심이요. 하나님께 나의 믿음을 얹어놓고 나면 자연히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그분께서 우리를 그분의 피를 믿도록 하시므로 그 피가 우리를 구원하게 됩니다. 잘 보십시오. 그분의 피에 대한 믿음(faith in His blood)이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지 산상설교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나 위대한 가르침, 기적들,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행위들이 구원을 가져오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자, 잘 들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채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생명도 없고 죄와 범법으로 죽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신의 죄값을 치루시고자 피를 흘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통해 그 사람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즉 구원받은 우리 모두는 거듭나는 순간 영생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그분의 흘리신 피를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을 보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말씀을 보니 믿음에서 믿음까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무슨 뜻일까요? 즉 “믿음에서”(from faith)가 말하는 믿음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그 믿음을 말합니다. 구원을 가져다주는 그 믿음 말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에서 멈추고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까지”(unto faith)가 또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이 믿음은 바로 17절 하반 절에 나와 있듯이 “믿음”으로 살기 위한 믿음입니다. 제 간증으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구원받기 위해 저를 위해 피를 흘리신 하나님의 아들과 그분의 피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나 그 후 주님께서 저의 생활을 통제하시도록 허락할 만큼의 “믿음”은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의 특성 중 하나인 믿음에 대해 공부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구원을 가져다주는 믿음은 갖고 있었으나 그 후 믿음으로 사는(live) 믿음은 갖고 있지 못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나의 생각, 나의 마음, 나의 행실, 나의 감정을 주님께서 주시는 믿음으로 통제하지 못한 채 살아왔단 말입니다. 그렇지만 로마서 1장 17절을 보니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구원의 믿음뿐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살아가는 믿음까지 얻도록 하셨습니다. 이제껏 여러 시간에 걸쳐 살펴본 대로 성령의 열매는 사랑(하나님의 사랑(롬 5:5)), 기쁨(주의 기쁨(느 8:10)), 평안(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요 14:27)) 등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열매란 하나님의 성품이었고 그 성품이 믿는 자들에게 공급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로마서 3장 22절을 보십시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자에게 미치고 믿는 모든 자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의니 거기에는 차별이 없느니라. 우리가 주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유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the faith of Jesus Christ)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즉 아드님께서 아버지에 대해 갖고 계셨던 그 큰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의 알량한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크신 믿음을 가지고 산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얇은 줄에 연을 매달아 나이아가라 폭포 건너편으로 보낸 것으로 과연 그 폭포를 건너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작은 믿음(줄) 위에 더 굵은 줄(큰 믿음)이 더하여져서 튼튼한 다리가 완성될 때 그 다리 위로 건너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큰 믿음 즉 성령의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이 구절을 잘 보십시오. 이 구절에도 나의 믿음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 나오고 있습니다. 내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의롭게 되어 죽을 때 지옥이 아닌 하늘나라로 갈 것이 분명하지만, 이 땅에서의 생활 가운데서 “너는 탐내지 말라”는 말씀을 믿고 있으면서도 때론 이런 짓을 한다는 데 나의 신앙생활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왜 탐심을 갖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충분히 신뢰하지 않아서 내가 처해 있는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탐을 내는 것이요, 하나님을 신뢰치 않기 때문에 만족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셨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되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만족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분께서 하늘 아버지를 철저히,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신뢰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저의 작은 믿음대신 예수님께서 아버지에 대해 가지고 계셨던 그런 믿음을 갖고 있다면 저 역시 지금보다 훨씬 나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와 계신 성령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면 성령께서는 그 “믿음”을 우리 안에서 생산해 내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아버지에 대해 갖고 있는 나의 믿음대신 예수님께서 갖고 계셨던 믿음으로 산다면 우리의 영적 생활이 훨씬 좋아질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빌립보서 3장 9절을 보십시오. 율법에서 난 내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소유한 채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이 구절을 통해 바울의 간증을 들어 보십시오. 여러분은 왜 사람들이 구원을 의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구원받은 이후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할 만큼 충분한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분명히 구원받을 수 있었는데, 어쩌면 올바르게 기도를 안 했을지도 몰라. 해와 달과 날은 기억하는데 시간과 분과 초는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니 혹시...” 이런 생각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이 모두는 여러분과 저의 믿음이 너무 보잘것없어 “실패”할 때가 자주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도록 그분을 신뢰하게 되면 그분의 믿음이 내 안에 들어오게 되고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해 영원히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이런 확신 가운데서 살아간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오르락내리락 하거나, 좌로 갔다 우로 갔다 하거나,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가 하는 신앙들은 우리의 “실패 잘 하는” 알량한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디도서 1장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의 믿음에 따라 하나님의 성품을 따르는 진리를 인정함에 따라 말씀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분의 믿음이 나옵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예수님의 믿음입니다.A) 이 예수님의 믿음 때문에 우리는 단지 구원받은 것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에 이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게 됩니다. 예수님의 믿음에 따라 종이 되고 사도가 되었다는 고백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번 솔직해 보십시다.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 구원받은 이래로 죄를 지어 본 적이 없으신지요? 구원받은 후 성경이 그리스도인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되는데 실패한 적이 한번도 없으신지요? 여러분과 제가 여러 번 믿음 생활에서 실패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여러분과 제가 자유롭게 주님을 지금 이 순간 섬길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우리로 전능하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계속해서 있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에 의해 의롭다고 선언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에 의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내가 “내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대신 예수님의 믿음을 붙들고 산다면 “내 믿음”의 실패로 인해 패배감이나 좌절감에 빠져 있는 시간은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내 믿음”은 보잘것없지만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은 대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오늘 저녁 “제 믿음”이 실패하더라도 내일 아침 저는 다시 믿음 생활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주님의 지체요, 살의 일부요, 뼈의 일부이며,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녀이며, 그분의 눈동자요, 기뻐하시는 자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택하신 분의 믿음 때문입니다. 나의 믿음은 쉽게 실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믿음에서(from faith) 믿음으로(unto faith) 이끄십니다. 나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것은 나의 믿음이고, 나를 하늘나라로 데려가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믿음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깨닫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우리의 믿음이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해 줍니다. 그러나 그후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남아 있도록 지켜주는 것은 우리가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우리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는 순간 “주여, 주께서 원하시는 그 뜻을 행하고자 합니다. 내 나머지 인생을 주님을 섬기는 데 드립니다. 오 주여, 구원하소서.”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후 우리가 이 약속을 지켰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주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여러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여전히 그분을 찬양할 수 있고 어찌하여 주님은 우리로 주님을 증거하도록 하시는 것입니까?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주님을 믿는 순간, 갖고 있던 우리의 작은 믿음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큰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우리의 믿음이 항상 강력하고 실패가 없으며 일관성 있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같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끄시고자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실패하고, 좌절하고, 무너지는 그곳에서 일어나 예수님과 완전한 교제 가운데 이르도록 이끄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한때 뜨거웠다 금방 식었다 합니다. 때로는 의롭게 살다가 때로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주님과 완전한 교제에 머물게 되면 주님의 믿음이 내 믿음이 되고 내 믿음이 주님의 믿음이 되어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만 신뢰하고, 의지하고, 확신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앤드류 머레이, 토저, 윗치만 니 등과 같은 분들의 책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이 분들이 말씀하는 “머문다”, “거한다”는 말들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짐작컨대 바로 지금 말씀드린 그런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루는 믿음 따라 살다가 하루는 환경에 따라 살고, 하루는 충만하게 살다 하루는 육신대로 살고, 하루는 뜨거웠다 하루는 축 쳐졌다 하는 이런 방식의 삶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의 믿음과 완전히 하나로 엮어져서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그분들이 말하고 있는 “거한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바로 이 상태가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나와 있는 성령의 열매가 맺힌 상태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을 보겠습니다. 11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11 그것은 신실한 말이로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리라. 12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또한 그분과 함께 통치하리라. 우리가 그분을 부인하면 그분도 우리를 부인하시리라. 13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그분은 항상 신실하시니 자신을 부인할 수 없느니라. “그분과 함께 죽으면”이라고 했는데 여러분과 저는 이미 십자가에 못박혀 있다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분과 함께 살 것은 100% 확실합니다. 절대적으로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을 보십시오. 12절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들이 이 구절을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고난은 선교지에서 당하는 고난이나 거리설교 하다가 당하는 고난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다 고난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suffer). 주의 일을 하다가 당하는 고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겪는(suffer) 고난을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그분과 함께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을 보니 “우리가 그분을 부인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생활 가운데 자주 그분을 부인합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그런 우리를 부인하십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주 믿음에 있어 실패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그런 법이 없습니다. 항상 믿음으로(faith) 가득 차(full) 계십니다. 이는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비록 작은 믿음이긴 하지만 당신의 믿음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피에 대해 행사하였고 이에 그분께서는 “내가 네게 영생을 주리니 결코 멸망치 않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 당신은 10년 전 주님에 대해 지녔던 그 믿음을 잃고 말았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때 내 믿음은 떨어졌지만 내가 믿을 때 내 안에 제공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결코 실패하거나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분께서 약속하신 그것을 저버리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인 동시에 완성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신을 부인할 수 없으십니다. 따라서 저는 여전히 구원받은 상태로 여전히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그 하늘나라에 도착하는 동안 나의 “믿음”은 여러 번 실패하겠지만 그분의 믿음은 결코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좋은 여건에서는 내 믿음도 한 몫할지 모르지만 어렵고 힘든 여건, 즉 고문을 당하는 상황이라도 온다면 아마 쉽게 믿음을 포기할지도 모릅니다. 육신이 얼마나 나약한지 잘 아시지요? 그러나 이 믿음의 실패마저도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에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가 그분을 믿을 때 저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주님은 그 약속을 지키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저를 아시면서도 “나는 너를 결코 안 적이 없다.”라고 말씀하실 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제 안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아십니까? 성령의 열매 곧 믿음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사라졌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참으로 희한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우리의 육신은 너무도 지쳐 있고 축 늘어져 있어 성경을 믿고 있는지 아닌지조차도 모를 지경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신지 안 계신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심신이 다 고갈된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과 저는 어떻게 합니까? 성경을 꺼내들고 읽고나서 기도합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우리의 믿음”은 고갈되고 없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아무도 구원받을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거리설교도 하고 전도지도 나누어줍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우리의 믿음은 사라져 버리고 없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도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우리를 그렇게 이끌고 계신 분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이성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하나님의 약속을 더 이상 믿고 있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을지라도 여전히 그 약속들에 근거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의심이나 불안이나 불신보다도 훨씬 큰 그 무엇, 즉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4장으로 보충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4장 35절을 보십시오. 바로 그 날 저녁이 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건너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라. 때론 이 말씀들을 그냥 지나치기 쉬운데 실은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건너편으로 건너가자고 제안하셨고 이에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 그대로 순종하여 함께 배를 탔습니다. 36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무리를 보내고 그분을 배 안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작은 배들도 그분과 함께 하더니 37절을 보니 곧 큰 폭풍이 일어났고 파도가 배 안에 들이쳐 배에 물이 가득 차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아마 주님과 함께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 같이 간 제자들은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건은 터졌습니다. 폭풍이 일어났지만 주님은 배 안에서 주무셨습니다. 파도가 배 안으로 들이쳐 물이 차도 주님은 그대로 계셨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주무시는 주님을 깨우면서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는 것(perish)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님께서 “건너 가자”(Let us pass over)라고 하셨는데 죽는다니 이것이 무슨 망발입니까? 주께서 함께 계신데도 불안과 의심으로 가득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답은 한 가지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실패한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39절과 40절을 보십시오. 끝부분에 보니 “믿음이 없느냐”고 하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전혀 믿음이 없었음을 보게 됩니다. “어째서 그렇게 믿음이 적으냐?”고 하신 것이 아니고 “어째서 믿음이 그렇게 약하냐?”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단언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너희가 믿음이 없느냐?”(no faith) 처음 주님께서 건너가자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배에 올랐습니다. 믿음이 분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가는 도중에 믿음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즉 믿음이 바닥이 나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5장 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바다 저편으로 가서 가다라 사람들의 지방으로 들어가니라. 말씀에 그들이 바다 저편으로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건너가자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은 동이나 버렸지만 그래도 그들은 바다 건너편으로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건너왔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이는 제자들과 달리 주님의 믿음은 여전히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믿음은 그들을 배에 타도록 만들었으나 그들을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게 만든 것은 주님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수 있게 하지만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는 것은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하늘로 가는 도중 우리의 그 알량한 믿음은 흔들거리기도 하고, 부서지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고, 비틀대기도 하고, 머뭇거리기도 하고, 사라져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자신이 시작하신 그 선하신 일을 달성하기 위해 성령님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우리에게 공급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갈 2:20)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일을 여러분과 제가 노력하거나 계획을 짜서 이루어 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프로그램을 짜서 단계별로 성취해 가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과 제가 우리 자신을 그분의 통제하에 놓아 우리가 거의 본능적으로 그분께서 우리의 삶을 통제하시는 그 수준까지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리도록 우리를 이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비록 그 수준에 도달하기까지는 험난하고 먼 길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surrender) 또 내려놓고 또 내려놓고 또 내려놓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능히 그리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믿음이 없을지라도 우리의 깊은 속에서 “주여, 아무런 소망도, 아무런 도움도, 빠져나갈 구멍도, 아무런 해결책도 없지만, 그래도 주님을 신뢰합니다.” 이렇게 외치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과 저의 믿음이 아니고 여러분과 제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일찌감치 고갈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가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그 작은 믿음을 받으셔서 그때부터 나를 믿음에서(from faith) 믿음으로(unto faith) 이끄시는 역사를 하고 계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고 너무도 기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나의 믿음으로부터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인도받고 있는 삶,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사도 바울의 고백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는 삶,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저는 이제 확신과 담대함과 자신감을 갖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비록 제가 이런저런 실수나 잘못이나 불신을 저지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아무리 그 과정을 방해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일단 시작하신 그 일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나의 믿음은 결국은 나를 저 건너편 즉 하늘나라로 데려갑니다. 이상한 교리 같지만 사실입니다. 이제껏 살펴본 성경구절들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분명 우리의 믿음이 있지만 또한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믿음이 아닌 그분의 믿음을 의지하도록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난 못해요.”, “할 수 없어요.”, “안 돼요.”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어째서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믿음에 사로잡혀 있어야 합니까? “그분께서 하실 수 있어!”, “그분은 하실 수 있다고.”, “그분은 하실 수 있는 분이고 말고!” 이것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죄에 대해, 악한 습관에 대해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기뻐할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을 내 안에서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살펴본 성령의 열매는 우리의 열매가 아니고 성령의 열매이며 우리의 믿음이 아닌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그분의 믿음인 것입니다. 아멘.  
2009-05-01 18:14:37 | 관리자
성령의 열매: 선함/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      성령의 열매가 지닌 아홉 가지 특성을 대할 때마다 근본주의를 자처하고 복음주의를 자처하는 그룹들에서조차 이런 것들을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것이 우리 모두의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사랑, 기쁨, 화평(평안, 평화, 평강)과 같은 단어들이 진리를 고수하는 대신 타협을 일삼는 자유주의자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겨지는 현실이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사실 사랑과 기쁨과 화평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더라면, 우리 모두는 영원한 멸망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주에 이에 대해 계속해서 묵상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자리에 앉아 하나님 노릇을 하고 싶어 합니다. 악한 자들을 심판하고 지옥문을 열어 그 안으로 죄인들을 집어던지는 그런 하나님이 된 것처럼 우리는 자주 그렇게 행동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이처럼 하나님 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사탄이 하나님이 되고자 했기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사랑을 나타내기를 원하시고, 또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반면, 우리는 하나님처럼 되어 이 세상의 악을 심판하고 바로잡고 싶어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기쁨을 표현하기 원하시지만 우리는 이단을 정죄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셔야 할 일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내적인 모습에 대해 주님께서는 우리가 본래는(by nature)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씀하시고 마귀에게서 난 자들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말씀하신 대로 육으로 난 것은 육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 주신 위치에 머물지 않으려고 하는 그 무언가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새사람에게는 동시에 그 자리를 고수하고자 하는 그 무언가가 또한 존재합니다. 우리는 지난번 메시지를 통해 오래 참음이란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자들을 대하시는 방식임을 배웠습니다. 또한 우리는 부드러움과 온유함이란 잘못이나 부당한 대우를 참아내고 그로 인해 타격을 입거나 상처를 받지 않고 즉시 은혜로운 모습을 갖출 수 있는 능력임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선함(goodness)”에 대해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이 단어 역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의미와는 사뭇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그마한 아이에게 “자, 말 잘 들어야지. 그래야 착한(good) 아이지.”라고 말합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을 착하다고 우리는 생각하지만, 그것은 선하거나 착하기보다는 의로운(righteous) 것입니다. 좀 더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만약 그분께서 의롭기만 하시고 선하지 않으시다면, 우리 모두는 아마 굶어 죽든지 죄 가운데 죽거나 지옥에 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기만 하시고 선하지 않으시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 갇혀 고통을 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므로 의로운 일을 하시지만 동시에 선하시므로 복을 베푸십니다. 아마 여러분과 저도 의로운 사람들로만 가득 찬 교회보다는 착하고 선한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를 더 좋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로운 사람들은 옷차림도 단정하고, 말도 점잖으며, 영화도 연극도 안 보고, 술도 안 마시고, 올바른 성경도 사용하는 올바른 사람들이지만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사람은 못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의로운 삶을 살려고 합니다. 저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죄를 짓지 않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의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실 뿐 아니라 우리로 주 안의 다른 형제, 자매들에게 좋은 사람(선한 사람)이 되어 축복을 가져다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의롭기는 하나 선하지는 못한 사람들로부터 구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잘 믿는 사람들 중에는 율법의 글자만 알지 율법 뒤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영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물론 저도 의로운 사람이 되고 싶고 의로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는 선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해병대의 교관은 의로운 사람이면 족합니다. 그가 병사들의 친구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의롭고 진리를 가르칠 뿐 아니라 선한 사람이어야 하고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교회학교(주일학교) 교사나, 나이 드신 자매님들, 나이 드신 형제님들은 올바른 행실은 물론 선한 행실도 당연히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일뿐만 아니라 선하신 분이라는 것이 너무도 기쁩니다. 이 세상에는 참으로 안타까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선함(goodness) 즉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가난한 사람을 돕고, 이웃에게 선하게 대하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처녀 탄생과 신성을 부인하며 엉터리 “성서들”을 사용합니다. 그들에게 선함은 있지만 그들에게 의로움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의로우신 하나님과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로 성령님을 통해 균형을 잡게 해 주셔야만 의로우면서도 선하게 될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근본주의자들처럼 의롭기는 하나 선하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도와주시지 아니하면 그 누구도 균형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도우셔서 저희로 자신을 부인하고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일 없이 우리 자신의 몸을 성령을 통해 죽이도록 하소서. 주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려 우리로 가족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된 사람들과 우리 이웃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창세기 1장 12절을 보십시오. 땅이 풀과 자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자기 종류대로 열매 맺는 나무 곧 열매 속에 씨가 있는 나무를 내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여기에 나오는 나무나 씨나 풀은 의롭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죄를 짓지도 않고 깨끗한 삶 또는 더러운 삶을 살지도 않습니다. 이것들은 “옳고 그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풀, 열매, 씨, 나무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들이 복을 가져오고, 도움이 되며 유익이 되는 좋은 것(선한 것)임을 보셨습니다. 주께서 보시니 해, 달, 별들도 다 좋았다고 하십니다(18절). 20절, 21절에서는 하늘의 새들, 물 속의 피조물을 다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24절, 25절에도 하나님께서 보셨을 때 좋은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만드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분들은 이것을 단순히 진화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먹이사슬 정도로 이해하고, 그것을 생명의 순환이라고 말합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 하나님의 피조물들과 피조세계로(creatures and creation) 서로가 서로에게 복을 가져다주고 유익을 끼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물은 식물을 키우고, 식물은 동물에게 자신을 먹이로 제공하고, 동물들도 서로에게 생명을 제공하고, 죽고 나면 다시 식물에게 영양을 공급합니다. 모두가 모두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보시고서 “좋았더라”(good)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보시고 “의롭더라”(righteous)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는 피조물들이 그 어떤 계명도 규례도 율법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 18절에 보니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합당한 협력자를 만들리라, 하시니라. 바로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자를 합당한 협력자(help meet)로 만드신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합당한(meet)”이란 단어를 보십시오. 이 단어는 “무엇에 딱 맞는”이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선하지 못하므로 선하게 만들어 줄 무엇인가가 필요했고 이제 그 남자에게 딱 맞는 여자를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결혼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결혼은 서로가 서로에게 복(blessing)을 가져다주고자 제정하신 것입니다. 누가 가정을 책임지고 누가 속박 아래 놓이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좋지 않은 것(남자가 혼자 있는 것)을 좋게 만들려고 복을 가져오는 것이 결혼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온 몸이… 꼭 맞게 함께(fitly joined together) 결합되고”(엡 4:16) 여기에 나오는 꼭 맞게(fitly)라는 말은 방금 살펴본 “딱 맞는”(meet), “합당한”(meet)과 같은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딱 맞는 자들, 즉 축복을 가져오는 자들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피조세계와 피조물들에게 복을 주는 분이신 것처럼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복을 주는 그런 자들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만약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진노와 심판과 규례와 규범에만 근거한 것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랑과 축복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니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분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시니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므로 우리는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선하시므로 우리는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서 있는 기초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자신의 수준에 맞는 자, 즉 자신의 거룩한 수준에 맞는 자들과만 관계를 맺으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같은 사람은 그분과 그 어떤 관계도 맺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과 제가 우리와 같은 수준의 사람, 우리의 거룩함에 도달하는 사람과만 관계를 갖고자 한다면 아마 우리는 교회에서나 그 어디에서도 친구를 하나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친구 관계는 의로움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고 선함에 기초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꼭 맞게 결합시켜 주는 것은 각자의 선함(goodness)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선하게 대하면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로 단지 의롭기는 하나 선하지 않은 그런 사람들로부터 구출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의로움을 내세우나 선하지는 못한 자들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보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 역시 의로움에 기초하지 않고 선함에 근거해야 함을 보여주십니다. 느헤미야 9장 2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견고한 도시들과 기름진 땅을 취하고 모든 좋은 물건으로 가득한 집과 파서 만든 우물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과 많은 과일 나무를 소유하여 이로써 먹고 배가 불러 살이 찌고 주의 큰 선하심을 즐겼사오나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끝부분에 주의 큰 선하심(great goodness)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주의 큰 선하심은 어떤 선하심이었을까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의 왕국에서, 주께서 자기들에게 베푸신 큰 선하심 속에서 자기들 앞에 주신 넓고 기름진 땅에서 주를 섬기지 아니하며 자기들의 악한 행실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과 그 땅이 가져다주는 복을 말하고 원수들에 대해 승리할 수 있게 해 주신 그것을 말합니다. 에베소서 5장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선하심과 의로우심 간의 차이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9절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모든 선함과 의와 진리 안에 있느니라.) 9절을 보면 두 가지가 다르다는 것이 확실해 집니다. 우리는 의롭지만 선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의롭지 못하지만 선할 수도 있습니다. 즉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로 의로우면서도 동시에 선하게 해 주시는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란 말입니다. 교리에서 올바르고 다른 사람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진리를 사모합니다. 그런데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정말 없습니다. 아무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요.” 혹은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오! 저는 친구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은 제가 하나님 앞에 올바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둘 다 잘못됐습니다. 이 둘 사이의 중간이 존재하고 거기가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올바른 사람인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럴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19장과 전도서 7장 그리고 로마서 3장을 보겠습니다. 만약 바리새인들이 오늘의 메시지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바리새인들의 관심사는 “의로움”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이 메시지를 들으면 “오, 그래요. 만약 내가 의로운 동시에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맞다면 좋습니다. 저는 선한 사람이 되렵니다.”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명령(계명)에 의해 선한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규례를 정해 놓고 지키겠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지금부터 좀 더 많은 미소를 짓고 조금 더 친절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잘 해 주어야지. 그래야 내가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될 테니까.” 이런 식으로 선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기적인 사람이며 우리는 아담의 후손입니다. 우리는 옛사람 아담을 선한 사람으로 만들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할 수도 없습니다. 비록 아담이 선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손 치더라도 2주일도 못되어 자신의 선한 모습을 인정해 주지 않는 모든 사람을 미워하고 말 것입니다. 선하고자 노력한다는 것 그것은 전혀 먹혀들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9장 16절을 보십시오. 보라, 어떤 사람이 나아와 그분께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이까? 하매 오늘 저는 여러분께 아마 이제껏 여러분이 생각지 못했을 그 무엇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17절부터 예수님의 답변이 나옵니다. 17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다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거든 명령들을 지키라, 하시니 18 그가 그분께 이르기를, 어느 명령이니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너는 살인하지 말라, 너는 간음하지 말라, 너는 도둑질하지 말라, 너는 거짓 증언하지 말라, 19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또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절에 그 청년이 이렇게 답변합니다. 그 청년이 그분께 이르기를, 이 모든 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지켰사오니 아직도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니이까? 이 답변의 내용은 한 마디로 “저는 계명(명령)을 지켰습니다. 저는 의로운 사람입니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1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완전하게 되려거든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매 그런데 22절을 보십시오. 그 청년이 많은 소유를 가졌으므로 그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여기서 그는 자신이 선하지 못함을 입증하고 맙니다. 그는 의로웠습니다. 율법의 명령들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율법을 넘어서서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네가 다른 사람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오! 그럴 수 없습니다. 내 재산은 내 것입니다.”라고 반응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안 계신다고 하셨는데 이 청년은 자신이 선한 사람(좋은 사람)인 줄 알고 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 시험을 하십니다. “간음했느냐?”, “아닙니다.”, “도둑질은?”, “안 했습니다.”, “부모님은 공경하였느냐?”, “물론입니다.”, “좋다. 너는 의로운 자로구나. 그러나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자가 없느니라. 그러니 네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네 자신이 그들에게 복이 되도록 하라.” 결국 청년은 이 말씀에는 순종치 못하고 떠나 버렸습니다. 우리는 의로운 사람인 동시에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하나 육신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안 마시고, 욕설도 안 하고, 속임수도 안 쓰는 착실한 몰몬교도들을 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지옥에 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님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듭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 안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의롭게 살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없이도 성령님 없이도 얼마든지 의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 없이는 결코 선하게 될 수는 없습니다. 전도서 7장을 보십시오. 20절입니다.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은 땅 위에 하나도 없느니라. 이 말씀을 이해하십니까? 의롭지 못한 것은 죄입니다. 선하지 않은 것도 죄입니다.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지옥에 가야 합니다. 오직 은혜로만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어떤 날은 제가 선할 때도 있지만 의롭지 못합니다. 반대로 어떤 날은 의롭기는 한데 선하지는 못합니다. 의로우면서 동시에 선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전도서 7장 20절이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세상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3장 1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다 길에서 벗어나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 하나님 말씀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자기의 선함(goodness)을 선언한다고 합니다. 잠언 20장 6절을 보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의 선함을 외치려니와 누가 신실한 사람을 찾을 수 있으리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자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하십니다. 인간의 선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로마서 7장 18절을 보십시오. 바울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성령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내 안에(곧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그것을 어떻게 행할는지는 내가 찾지 못하노라.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to will)은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의로운(올바른) 마음 자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행함은 없다고 했습니다. 구원받고 거듭났지만, 여전히 육신적인 영적 아기들이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 보신 적 있습니까? 새사람의 모습을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선한 사람이 되고자 애쓰고 선한 행위를 하려고 애쓰나 늘 결과는 “아니올씨다”입니다. 선하게 사는 것이 마땅하기에 선하게 살려고 결단하는 것은 의로운 결단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동의해 주고 나에게 반응해 주는 사람과는 잘 지내지만 나에게 수군대거나 나의 선함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우리 자신도 그들을 비판하고 지적하며 때론 정죄를 해 버립니다. 즉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긴 하나 그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선한 사람은 못 된다는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도 옳고 그름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과 악이 무엇인지는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실제 행동은 어떤가요? 하고자 하는 것은 안 하고, 반대로 원하지 않는 그것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대해주시는 그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선하게 대해 주는 그것은 우리 육신 안에 거하지 않는다고 바울의 고백을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아담의 본성과 다릅니다. 그렇다면 그 선함을 누가 행할 수 있을까요? 출애굽기 33장 17절과 18절입니다. 17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한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네가 내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으며 또 내가 너를 이름으로 아느니라. 18 모세가 이르되, 간청하오니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 주소서, 하매 그런데 주님의 답변은 어떠했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함을 네 앞에 지나가게 하고 주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할 것이요, 또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풀리라,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보여달라는 간청에 선함(goodness)을 보여주시겠노라고 하십니다. 모세는 천지개벽할 만한 기상현상이나 하늘의 징조 같은 것을 염두에 두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 지구에 있는 인간들, 술과 담배에 빠져 있는 인간들, 더러운 영화에 탐닉하는 인간들, 저 욕설과 거짓과 저주를 일삼는 인간들, 시기, 질투가 가득한 인간들, 이들 모두에게 내가 오늘 저녁을 제공하리라. 저 농부들에게도 비를 보내 작물을 수확하게 하리라. 자식을 팽개치고, 쾌락에 빠져 있는 여인네들 내가 그들도 돌보리라. 그들에게도 일자리를 주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곧 그분께서 우리 같은 자들을 선하게 대해 주시는 것, 곧 그분의 선하심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하면 곧바로 하늘, 태양, 별, 무지개와 같은 것들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런 놀라운 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내 아이가 굶어 죽는 것을 내버려 두고 내가 죄 가운데 죽도록 방치해서 지옥에 가게 한다면 그런 영광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내 대신 죽게 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렇게 좋으신(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천지창조를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 같은 죄인에게는 너무도 멀기만 한 분이실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다고 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그들은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었고 하늘에서 만나를 받아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들은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항변하고 고집부리며 완악한 마음을 보였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려 보내셨습니다. “모세야, 네가 내 영광을 보고자 하느냐? 잘 보거라. 나는 좋은 하나님이다. 나는 자격이 없는 백성들에게 선하게 대해 주노라. 복 받을 자격도 없고, 그 축복을 존중하지도 않고 거부하려는 자들에게도 복을 주노라. 나는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들에게도 복을 주노라. 이것이 나의 영광이니라.”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과 제 안에 계신 이유는 엄청난 위대한 일을 하게 하시고자 함도 아니요, 위대한 설교를 하게 하시고자 함도 아니요, 대형 교회를 세우게 하시고자 함도 아니요, 수많은 사람을 구령하게 하고자 함도 아니요, 다만 그분이 없으면 우리가 결코 할 수 없는 그것을 우리로 할 수 있도록 하시려고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선하게 대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선하게 대하지 않는 사람에게 선하게 대해 주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술주정뱅이에게 가서 “이봐요, 술은 나쁜 거야. 마귀의 음료수라고. 결국은 당신을 망치게 하고 지옥으로 보내 버린다고. 정신 차려 이 사람아.” 이렇게 말한다면 당신은 옳은(right) 일을 한 것입니다. 진리를 전파했으나 당신이 그 사람에게 선하지 못하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결코 주님께로 인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그 자에게 갔고 진리를 선포하였습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안 한 것보다는 나은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2장 4절을 보십시오. 혹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함을 알지 못한 채 네가 그분의 선하심과 관대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이 말씀을 보니 죄인을 진정한 회개로 인도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 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 저는 저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옥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저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고 저를 하늘로 데려가 주세요.”라고 기도했다면 그것은 참 회개라 할 수 없습니다. 참 회개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에게 너무도 큰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밀려 왔을 때 “나에게 그처럼 선하게 대해 주신 하나님께 내가 어쩌면 그렇게도 악할 수 있었을까? 나를 그토록 사랑하신 그분을 이제껏 거부해 왔다니… 나를 항상 사랑과 친절로 대해 주신 유일한 존재이신 그분을 멸시하고 거부하고 내 멋대로 살아오다니, 오… 이래서는 안 돼지.”라고 마음 먹었다면 이것은 우리로 진정한 회개를 하게 해서 주님께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받은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을 주님께 인도한 사람들은 여러분들에게 좋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해 주고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고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보여 주었을 때, 그 사람은 여러분에게 좋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인정하고, 너무도 더럽고 추하고 악해서 자신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 같은 자를 어찌 그리 선하게 대해 주실 수 있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행한 모든 ‘소행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좋게 대해 주시다니.” 이런 마음이 곧 우리를 회개하도록 만듭니다. “나같이 이기적이고, 욕심 많고, 자신만 알고, 교만하고, 우쭐대고, 내세우고, 결국 이 모양 이 꼴이 되어버린 나를 그렇게도 사랑하시다니… 오, 하나님.” 이것이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물론 우리는 전도지를 들고 나가 목소리를 높여 복음을 전해야 하고 때를 얻든 못 얻든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자동차 범퍼에도, 티셔츠에도 말씀을 새겨 놓는 것도 말씀을 전파하는 방법입니다. 다 올바른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들은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여기 보니 눈물을 흘린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선한 마음(good heart)을 가지고 말씀을 전한다는 것입니다.(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여(엡 4:15)) 다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올바르지만 선하지 못하거나 선하지만 올바르지 못하면 사람들로부터 반응을 얻어 낼 수 없습니다. 의로움(righteousness)과 선함(goodness)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민수기 10장 29절에서 32절을 보시겠습니다. 29 모세가 자기의 장인 미디안 족속 라구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주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그것을 주리라, 한 곳으로 우리가 이동하니 당신은 우리와 함께 가소서. 우리가 당신을 선대하리이다. 주께서 이스라엘에 관하여 선하게 말씀하셨나이다, 하매 30 그가 모세에게 이르되,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땅 내 친족에게로 떠나가리라, 하니 31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을 쳐야 할지 아나니 우리에게 눈을 대신하리이다. 32 당신이 우리와 함께 가면 참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어떤 선한 일을 행하시든지 우리도 당신에게 그렇게 행하리이다, 하니라. 무척이나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나서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 미디안 사람인 모세의 장인은 약속의 백성이 아니요, 하나님의 축복과 언약과는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이 미디안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하신 것처럼 자신들도 그들에게 선하게 대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성령을 통해 이와 같은 일을 행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선하신 분이셨습니다. 저는 선하지 못한 자이나 하나님께서 선하게 대해 주신 대로 당신에게 선하게 대하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앞서 인용한 민수기 구절을 잘 살펴보십시오. “참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어떤 선한 일을 행하시든지 우리도 당신에게 그렇게 행하리이다.” 이 말씀,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잘못에 대해 긍휼을 베푸십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쁜 행실을 오래 참고 계십니까? 당신이 실족하거나 실패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다 참고 계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입니다. 모세의 발언 요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대해 주시는 그대로 당신을 대하겠습니다. 그러니 저와 함께 가시면 좋으실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그런 교회에 다니고 싶습니다. 저는 제 가족이 사람들이 기뻐할 그런 가족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 또한 사람들이 “제임스 형제는 내 친구입니다.”라고 말하기를 기뻐하게 될 그런 형제가 되고 싶습니다. 모세는 장인에게 “우리와 함께 가면 기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하셔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실 것이고, 우리는 당신에게 그 율법도 보여주고 가르쳐 줄 것이니까요.”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오히려 “당신은 우리와 함께 가시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도 선하신 분이시므로 우리도 당신에게 선한 사람이 되고 돕는 자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편 16편 1절, 2절을 보십시오. 1 오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신뢰하오니 나를 보존하소서. 2 오 내 혼아, 네가 주께 아뢰기를, 주는 나의 주시니이다. 나의 선함이 주께는 미치지 못하오나 말씀을 보니 우리의 선함이 하나님에게는 미치지 못합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 전혀 유익을 가져다 드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만약 당신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여 자기 의를 붙들고 있다면 어쩌면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필요로 하신단 말씀이야.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찾아내 우리 마을에 보내셨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우리 동네는 엉망이 되었을 거야.”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돕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유익을 드리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하신 그 선하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선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게 선하시므로 그분께서 내게 주신 그 선하심이 나에게서 이 땅의 여러 성도들에게 퍼져 나갈 수는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으시어 하시고자 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을 다른 사람들에게 더 확장시키기를 원하십니다. 호세아 6장 4절을 보십시오. 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오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선함은 아침 구름 같고 사라지는 새벽이슬 같나니 말씀에 인간의 선함(goodness)이라고 해 봐야 오래 가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고 합니다. 아침 구름이나 새벽 이슬은 잠시 있다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좋은 설교를 들으면 마음의 결단을 내리는 기도를 종종 드립니다. “주님, 오늘 말씀 너무 좋습니다. 앞에 나가 무릎 꿇고 기도드립니다. 주여! 당신께서 저에게 선하라고 명하시니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는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제부터 선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문제는 이런 결심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한 후 몇 시간도 안 돼서 우리의 못된(나쁜, 악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시편 52편 1절을 보십시오. 오 강한 자여, 어찌하여 네가 해악(害惡)을 자랑하느냐? 하나님의 선하심은 항상 지속되는도다. 여기 보니 우리에게 성령님이 왜 필요한지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내 안에 머물면 오래 동안 지속적으로 선한 모습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이 옳기 때문에 선해지려고 노력한다면 얼마 안 가 나의 선함은 멈추고 맙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심은 지속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필요합니다. 이 선하심은 곧 성령의 열매의 특성 중 하나입니다. 세 구절만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5장 13절, 14절을 먼저 보십시오. 13 이제 소망의 하나님께서 믿는 가운데 드러나는 모든 기쁨과 평강으로 너희를 충만하게 하사 성령님의 권능을 통해 너희에게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4 내 형제들아, 나 스스로 또한 너희에 대하여 확신하거니와 너희 역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충만하여 능히 서로를 훈계할 수 있느니라. 앞서 말씀드린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보십시오. 자유주의자들은 선하긴 하나 옳지 못합니다. 반면 근본주의자들은 옳기는 하나 선하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께서만 우리를 옳으면서 선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이 원하시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로마서 15장 13절, 14절에 보니 지식에 앞서 선함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결과로 서로가 훈계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제가 당신에게 항상 무엇이 옳은 것인지만을 말한다면 저는 당신에게는 선하지 못한 것이고, 이렇게 되면 당신은 제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서로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관계는 결코 서로를 훈계해 줄 수 있는 좋은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옳기도 하고 선하기도 하다면 쇠(iron)가 쇠(iron)를 날카롭게 한다는 말씀대로 서로 훈계를 해도 관계가 나빠지지 않는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끼리 서로 훈계하고 서로에게 의에 대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서로에게 선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선하다면 제가 당신의 잘못을 지적하여 바로잡아 주더라도 우리의 관계는 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항상 당신에게 의로운 말만을 해댄다면 우리의 관계는 성립되지 않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을 보십시오. 요즘 논쟁거리 중 하나는 우리가 자식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훈련 교관이 되어야 하는가입니다. 이 역시 우리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옳은 말만 해서는 안 되고 동시에 좋은(선한) 부모가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둘 다 갖추지 못하면 실패하고 맙니다. 좋은 아버지이면서 올바른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11절, 12절을 보십시오. 11 그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께서 너희를 이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자신의 선하심의 모든 선한 기쁨과 또 믿음의 일을 권능으로 성취하시게 하려 함이며 12 또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너희 안에서 영광을 받고 너희가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앞서 살펴본 내용이 여기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시내산에서 나누셨던 대화가 기억나십니까? “영광”에 대한 말씀 말입니다. 여기 보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너희 안에서 영광을 받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십니까?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에서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십니까?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가족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십니까? 그러려면 당신이 올바르게(의롭게) 사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의로운 동시에 선하게 사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축복을 가져다주고 유익을 제공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시편 107편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저를 통제하셔서 당신에게 축복이 될 수 있을 만큼 하실 수 있을까요? 반대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충분히 통제하셔서 저에게 축복이 되도록 하실 수 있을까요? 시편 107편 9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사모하는 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혼에게 선하심으로 채워 주시는도다. 말씀에 따르면 만약 당신의 마음이 성령께서 당신의 삶에서 열매 맺으시기를 갈망한다면 주께서는 그 갈망을 채워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를지라도 일단 “갈망”(desire)은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채우실 수 있습니다. 저는 올바른 사람이 되고 싶고, 올바른 성경을 갖고 올바른 교리로 올바른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을 대할 때도 의롭게 대하며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저를 통해 표현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가 더 나아가 선한 자(착한 사람)가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선하게 만들기 원하십니다. 우리 교회 안의 소년소녀들에게 우리가 “그만 둬라” 하면 그만두고, “하지 마라”고 하면 하지 않고, “하라” 하면 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을 잘 듣는 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선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올바름(의)과 선함 두 가지가 합쳐져야 우리 인생에 허락하신 그분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둘 중 하나가 빠지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영광을 얻으시려면 우리는 의로운 사람 이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올바른 동시에 선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우리가 노력해서 될 수 있는 그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수 있는 그 수준만큼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엄위한 말씀에 근거하여 말씀드립니다. 만약 당신이 진정 선한 사람이 되기를 갈망한다면,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축복(blessing)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기를 갈망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능히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아멘.  
2009-05-01 18:12:54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추천의 글      잘 잘라진 다이아몬드의 여러 면이 햇빛에 찬란한 색으로 반짝이듯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비춰진 성경말씀 역시 여러 가지 영광스러운 진리의 빛을 발한다. 신약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대다수의 입으로만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체험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고 생각되는지 이들은 이런 삶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러한 놀라운 삶은 성경 안에 계시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러한 삶을 발견했다. 그들은 이러한 삶을 사랑했으며 그러한 삶을 “믿음의 삶”, “승리의 삶”등으로 묘사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여러 종들을 통해 축복된 메시지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셨다. 예를 들면 Lawrence 형제, William Law, Hudson Taylor, Hannah Whitall Smith, Charles G.Trumbull 및 여러분들이 있다. 이 분들은 진리의 여러 가지 측면들을 강조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평안, 기쁨 그리고 능력의 삶으로 인도했다.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어떻게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쓰임을 받을 수 있을까를 알고 싶어 한다. 어떻게 우리는 염려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또한 어떻게 우리의 지각을 초월하는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주일학교와 강단에서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관성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는 것인가? 우리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제시하고자 할 때 어떻게 하면 능력 있게 전달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인가? 이와 같은 승리의 삶을 살기위한 가장 중요한 것들 중의 하나는 다름 아닌 십자가의 길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있어 그분과 성도가 하나되었다는 진리를 인식하고 사는 것이다. 캐나다의 앨버타 주 쓰리힐즈의 프레리 바이블 인스티튜트(The Praire Bible Institute)의 창설자인 맥스웰 목사는 지난 25년간의 사역을 바탕으로 바로 이 핵심적인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는 은사를 지닌 분이시다. 그분은 Sunday School Times의 요청으로 1944년 초 약 7주간에 걸쳐 일곱 편의 글을 쓴 바 있었다. 이 글들에 일부를 더 보충하여 이 책이 독자 여러분의 손에 들리게 된 것이다. 본 책의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생활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다. 맥스웰목사께서는 성경을 자세히 분석하고 여러 예화를 통해 그 진리를 잘 조명해준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죄에 대해 승리할 수 있으며 능력 있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오늘날처럼 차지도 덥지도 않은 이시대의 교회들에게는 너무도 필요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불법이 판을 치고 무질서가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살아갈 바가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 꼭 배우시기를 바란다. -Philip E.Howald, Jr.-   
2009-05-01 18:03:54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1 장 성도의 신원 확인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죠지 위야트라는 사람이 전선으로 소집을 당했다. 그는 아내와 여섯 자녀를 둔 상태였다. 그래서 리챠드 프랫이라는 청년이 그 사람대신 가겠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그는 죠지 위야트라는 이름을 가지고 군대에 합류하였다. 얼마후 이 청년은 전사했다. 당국은 후일 죠지 위야트를 다시 소집하였다. 그러자 위야트씨는 자신은 프랫이라는 사람으로 이미 죽었음을 알리고 항의하였다. 그는 자기를 대신했던 프랫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전사한 사실을 확인해 줄 것을 당국에 요청하였다. 당국은 그의 신원을 확인하였고 그 결과 위야트씨는 군복무로부터 면제를 받았다. 이는 그가 그를 대신했던 사람안에서 죽었기때문이었다. 군법도 죽은 사람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관한 진리를 잘 조명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구출하시는 방법 역시 죽음을 통해서이다. 즉 우리의 대속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우리자신이 동참하여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사실을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진리(롬5장)를 증거한 후 계속해서 우리를 로마서6장으로 안내한다. 이곳에서 바울은 믿는 자들의 신원확인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발견됨을 제시한다. 로마서5장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음을 보여주고 있다면 로마서 6장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사실은 복음의 기초요 핵심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즉시 그 다음 장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로마서 6장에서 우리는 우리의 칭의가 단순한 형식적 혹은 법적인 문제만이 아니라(물론 칭의는 본질적으로 법적인 문제이다) 여기에는 또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동반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경건치 아니한 죄인을 의롭다고 선포하실 때 그분은 단순히 법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신 것만은 아니다. 그 순간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실재적이고 심오한 생명의 연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생명의 연합을 무시한 칭의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경건치 않은” 사람을 의롭다고 선포하셨을 때 그리스도 밖에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다. 즉 그분의 대속(속죄)의 죽음을 믿음으로써 우리 믿는자들은 그리스도와 유기체적인 생명의 연합관계로 들어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것이다. 우리는 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롬5:20에서 바울이 선언하자 이에 대해 롬6:1의 질문이 등장한다: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는 절대적인 부정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을 때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은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연합되었기 때문에 (롬5장의 우리의 칭의) 우리의 위치는 “그분 안에서” 죽은 자의 위치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다면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고후5:14)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모두를 대신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불가피하게 모두의 죽음을 포함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해 죽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계속해서 죄에 거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죄 안에 있든지” 혹은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둘 중 하나이다. 이 얼마나 서로 모순된 일인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은 필연적으로 그분과 함께 죽은 나의 죽음을 동반한다.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이룩하신 그 사역의 근본 성격은 이와 같이 단번에 완전히 성취된 속죄의 양면을 지니게 된다. “하나님께서 합치신 것은 사람이 나눌 수 없느니라”.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이 두 측면을 “분리시킨 십자가와 목이 잘려진 복음으로 불리는 복음”으로 불리는 왜곡된 모습을 지니고 있음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크게 손상을 입고 있는 것이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방법 외에는 그분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나를 자신 안으로 집어 넣으셔서 그분과 하나 되도록 만드셨다. 이로써 나는 법적으로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필연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것이다. 이것이 나의 법적인 위치이다. 잠시 생각해보자. 나는 구원을 받기위해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나는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서 그분의 죽음을 신뢰하였다. 그리스도의 죄에 대한 죽음은 곧 죄에 대한 나의 죽음이다. 하나님께서 승리와 구원을 주시는 방법은 우리를 옛 아담의 나무로부터 잘라내서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죽음 안에서 그분께로 연합된다. 믿는 자로서 내가 스스로 어떤 선택을 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즉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필연적으로 “나를 십자가에 못 박힌 생활을 하도록 만든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이것은 무슨 심오한 영적인 삶이라기보다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이다. 한 옛 신학자가 말한 대로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태어난 것이다”(즉 내가 거듭나는 순간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 버렸다). 독자 여러분 중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애쓰고 고뇌한 적이 있을 것이다. 당신은 더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기위해 성경을 읽으려고 결심해 보았겠지만 모든 것이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 당신은 의식적으로 실패와 패배를 이겨보려고 애쓰고 있을 것이다. 당신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계명들은 당신에게 너무 고통스럽다. 당신은 그 계명들을 기쁨으로 받을 수가 없다. 당신은 주 예수께서 정상적인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세워 놓으신 기준과는 전혀 모순되는 삶을 살고 있음을 알고 있다. 어쩌면 당신은 구세주께서 어째서 그러한 요구들을 하셨을까 의아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러한 계명들이 당신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괴롭히고 고문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 문제로 아무리 고통을 당하고, 부끄러워하며, 회개를 하더라도 당신의 영적투쟁은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그리스도의 요구사항은 성취될 수가 없다. 당신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사실을 배워야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연적인 생명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초월적인 요구를 하고 계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단순히 그분을 모방하라고 요구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그분께서 당신의 무능력을 잘 알고 계시며 또 한편으로 그분께서는 완전히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믿는 자라면 그리스도께서 요구하고 있는 수준은 육신이 달성할 수 있는 범주를 훨씬 벗어나 있음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놀랄 일인 반면 동시에 당연한 일이기도하다). 도대체 누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으며, 박해를 기뻐할 수 있으며, 자신을 미워할 수 있으며, 악을 선으로 갚을 수 있는가?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본질적인 것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요구 사항 앞에 완전히 무력한 존재임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의 요구사항과 인간의 능력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격이 놓여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은 무익하기 때문이다. F.J.Huegel은 그의 책 “그분의 뼈의 뼈”(Bone of His Bone)에서 우리의 실패를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는 잘못된 기초위에서 우리의 삶을 시작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그리스도를 닮는(모방하는)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사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에 참여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다(벧후1:4). 그리스도의 생명을 체험적으로 우리 삶에 참여시키려면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있어 그분과 하나 되었음을 깨닫고 믿음으로 살아가야한다. 죠지 위야트씨는 군법과 맞싸우거나 당국을 기쁘게 하고자 노력해서 전쟁으로부터 구출된 것이 아니다. 그는 정부의 기록에 나와 있는 그의 사망기록에 근거해서 군대를 가지 않았다. 즉 그는 “기록된 사실”에 근거해서 행동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의 대리인을 통해 이미 전쟁에서 전사하였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나를 대신하시고 대리하시는 분을 갖고 있다. 그분께서는 치열한 전투에 참가하셔서 나의 죽음을 죽으셨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사시는 것이라”(갈2:20). 이것은 위대한 사실이다. 내 쪽에서 그 어떠한 노력을 하더라도 이 사실을 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나는 그리스도께 실제로 참여한 사람이요 따라서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도 참여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내 안에 살고 계신다. 그분의 삶은 죄에 대해서는 죽는 삶이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살아있는 삶이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나의 모든 것을 그분께 복종시키고 그리스도를 믿고, 기뻐하고, 그분 안에서 안식하는 것뿐이다. 한 옛 선교사는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으로서 패배의 삶을 살았다. 그는 절망 가운데 있었는데 갑자기 그의 눈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라는 말씀에 닿았다. “뭐라고? 그리스도께서 정말 내 안에서 사신다고?” 그는 외쳤다. 그는 철저한 장로 교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기뻐 껑충껑충 뛰면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단말이야!”라고 외쳐댔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께서 자기 안에 내주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그의 옛 삶 즉 자아 중심적인 삶에서 해방 받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된 삶은 모든 필요를 채우고, 충만하며 승리하는 삶이다. 이것이 감정이나 격정으로 흥분된 삶과 혼동되어서는 안되지만 그래도 여전히 “모든 기쁨과 평안이 믿음속에 거하는” 그러한 삶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의지하며 살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오도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진리를 알게 되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허드슨 테일러라고 하는 위대한 선교의 선구자의 체험은 이 진리를 잘 조명해 준다. 그는 자신의 혼에 더 많은 능력을 얻고, 더 많은 생명과 거룩함을 얻기 위해 수개월간 고뇌가운데 투쟁하고 있었다. 그는 드디어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실하신 분을 신뢰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누이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읽어보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인생에 있어 다른 것보다 더 달콤한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그중 가장 달콤한 것은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 됨으로써 맛보게 되는 안식일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 어떤 것에 대한 염려를 가지고 있지 않다. … 왜냐하면 나는 그분께서 자신의 뜻을 수행하실 수 있음과 그분의 뜻이 곧 내 뜻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나를 어디에 놓든지 아니면 어떻게 하시든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내가 그분의 뜻을 이루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분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려 하심으로 그분께서는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가장 쉬운 곳에 두셔야하며 가장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그분의 은혜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나를 매우 당혹스러운 처지에 놓으신다면 그분께서는 훨씬 더 나를 잘 인도하셔야만 하지 않는가? 어려운 처지에서는 크신 은혜를 주시고 압력과 시련가운데 놓일 경우에는 크신 능력을 주셔야만 한다. 사역에 관해서도 나의 일은 너무도 많고, 어렵고, 책임은 산더미처럼 늘었어도 나의 짐과 긴장은 다 사라지고 없다. 그분의 자원이 내 것이니 이는 그분께서 내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믿는 자와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oneness)에서 나온다.” 나 비록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는 받아들이네. 당신의 최고의 선물을. 당신과 나 사이에 이젠 한 생명뿐이니 당신께서 주신 그 한 생명뿐이라네. -Lucy A. Bennett-    
2009-05-01 18:00:20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2 장 죄에 대한 승리 비결   한 사병이 상관에게 “제가 포로를 잡았습니다”라고 보고를 했다. 그의 상관은 그에게 “포로를 데리고 오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그 병사는 “그가 안 오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장교는 “그렇다면 너만 오라”고 다시 명령했다. 그러자 그 병사는 “저도 갈 수가 없습니다. 그 포로가 저를 못 가게 하거든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역시 죄에 대한 승리의 삶에 있어 이 병사와 같은 꼴이 아닌가 싶어 매우 안타깝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형벌로부터 해방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죄의 능력(권능)으로 부터는 어떠한가?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는가? 혹시 칭의라고 하는 진리 주변을 맴돌면서 마냥 서성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만 흥얼대면서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법적으로 안전을 보장받기위한 칭의만 쟁취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삶이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건전한 수준까지 와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선포 받은 것은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대다수의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미 의롭게 된 후에는 우리자신을 위해 살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이 선택에 달려 있다고 하는 입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불안하고 동요된 양심은 자주 우리자신이 거룩하지 못하다는 사실로 우리를 괴롭히곤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법적인 위치를 내세워 이미 의롭게 된 사실에 만족해 하곤 한다. 우리는 이미 “만일 누가 죄를 지으면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있는 한 변호인이 있으니 곧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2:1)는 말씀을 잘못 사용해 왔고 또 남용해 왔다(물론 이 말씀 자체는 축복된 진리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우리는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우리 스스로에게 진부하고 패배로 가득 찬 그리스도인의 삶 즉 상습적으로 거룩하지 못한 삶을 살도록 이미 마음을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구원의 대장되시는 분께서 우리로 넉넉히 승리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고 계시며 모든 곳에서 승리를 쟁취하며 포로를 사로잡기를 기대하고 있는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죄악된 삶을 순종에게로 이끌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때 대장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너 혼자만이라도 오라” 그러나 내주하고 있는 죄악된 자아는 “나를 가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완벽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에 대해 공포에 떨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들이 두려워하는 데에는 아주 근거가 없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독자 여러분에게 A.J. 고든 박사의 현명한 충고를 묵상하도록 제안한다. “성경에 계시된 영적 진리는 자주 두 가지 극단적 주장 사이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우리가 죄 없는 완벽한 삶이라는 교리를 이단이라고 부른다면 죄로 물든 불완전한 삶에 만족하는 것은 더 큰 이단이라고 불러야할 것이다. 우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아무 죄도 없다고 말하면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요일1:8)라는 사도 요한의 말씀을 그리스도인으로서 낮은 수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에 대한 정당화 수단으로 삼고 있는 사실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거룩하게 되고자하는 열망으로 성화의 가능성을 과장되게 말하는 것이 습관적인 거룩치 못함에 “기분 좋게” 만족하고 있으면서 성화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된다. 그리스도인 완벽주의자에게 돌을 던지면서 세상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본다는 것은 결코 믿음을 세우고 있는 상황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롬6:1,2). 혹시 독자 여러분 자신은 포로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자아와 내주하고 있는 죄의 희생물 즉 노예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고 있는 그러한 사람 중에 하나는 아닌가 묻고 싶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두 마음을 품고 있으며 모든 일에 있어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닌가? 당신은 바울처럼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도다”(롬7:19)라고 고백하고 있는가? 당신은 깨어 기도했다. 당신은 죄와 싸웠고 자아와 투쟁도 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하는 당신의 노력이 소용없다는 사실에 여러 번 울었다. 어쩌면 당신은 밤새도록 기도하려고 애썼을지도 모르고 “축복을 얻기 위해” “밤새” 기도했을 수도 있다. 당신은 얼마나 자주 당신의 내적인 악에 대해 불쾌해했고, 부끄러워했으며 몰래 울었던가! 그러나 이러한 고뇌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결심들은 한 가닥 가느다란 끈처럼 끊어지고 마는 것을 수차 경험했을 것이다. 자아는 결코 자아를 내쫓을 수 없다. 당신은 이제 죄에 대한 싸움에 있어 점점 더 나약해져가고 있다. 심지어는 당신의 믿음마저 사라져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이 죄를 포로로 “잡고자 할 때”, 그리하여 그를 데려와 감옥에 넣고 그의 자유를 제거하고자 할 때 당신은 실상 당신 자신이 포로임을 발견하게 된다. 죄와 자아는 당신의 삶 전체에 있어 실제적인 통치자가 되어 있다. 이 얼마나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패배인가? 자아의 노력은 실로 어리석고 무용하다! 그러나 여기에 구원의 손길이 있다. 믿음은 종종 절망 가운데서 태어나는 법이다. 우리가 보기에도 지나치게 죄악된 상태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바울처럼 마음을 찢는 고백을 할 것이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낼 것인가?”(롬7:24) 하나님은 계단이 없는 망대시라. 그분의 완전함은 절망을 사랑하네. 무엇이 문제인가? 도대체 왜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잘못된 근거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에 대해 승리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을 놓쳐버렸다. James H. McEonkey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그분의 기초를 깊은 곳에 놓으신다. 죄에 대한 승리는 죽음이라는 깊은 곳에 놓여 있다. 성령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죄에 대한 승리를 가르치실 때 단 한 문장(간단하고, 충격적이며, 생생한 문장), “죄에게 죽었음”으로 하신다.” 로마서 6장에서 성령께서는 죄에 대한 죽음을 강조하고 계신다. “죄에게 죽은”(2절), “죄에게 단번에 죽으심”(10절), “정녕 죄에게는 죽은 자요”(11절). 우리는 10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의 죄 때문에 (for sins) 죽으신 것뿐 아니라 “죄에게”(unto sin) 죽으셨음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셨을 때”(고후5:21)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형벌을 철저히 요구하셨다. 그 형벌은 다름 아닌 죽음이었다. 죽음으로 죄의 능력과 형벌은 끝이 났다. 죄의 능력도 죄의 요구도 죽음과 더불어 끝나버린 것이다. 이에 바울은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롬6:14)라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에게 죽으셨다. 이제 그분께서는 죄가 손댈 수 없고 다가설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원히 살고 계신다. 바울은 이렇게 묻고 있다.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게 죽은 우리가 어떻게 더 이상 그 가운데 살겠느냐?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 받은 우리가 그의 죽으심 안으로 침례받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롬6:1-3). 바울은 우리가 실제로 죽었다고 말하거나 우리가 문자적으로 “죄에게 죽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바울이 모든 믿는 자에게 해당되는 바를 말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죄에게 죽었다”는 것이다. 모든 성도는 성령님에 의해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았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17). 다시 말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분과 하나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같은 인간이 되셨을 때 (그렇지 않고서는 그분께서 내 죄의 대가를 담당할 길이 없다.) 그분께서는 나를 그분과 하나 되게 하신 것이다. 나는 그분과 일치되었다. 그분께서는 나를 자신과 함께 죽음 안으로 데리고 갔으며 그분의 죽으심은 곧 죄에 대한 나의 죽음이 된 것이다. 그분께서는 나를 십자가를 통과해서 무덤으로 데려가셨다가 죄의 지배가 미칠 수 없고 죄의 능력을 초월하는 무덤 밖으로 나를 데리고 나오셨다. 바로 이것이 위대한 기초이다. 성령께서는 당신과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너와 같이 인간이 되셔서 너를 그분께 묶으신 채로(즉 너의 인성 안에 놓아지셔서) 너를 죽음으로 데리고 갔고 죽음으로부터 영광스러운 부활과 죄의 지배로 부터의 자유함으로 이끌어 오셨다. 이 사실을 깨달으라”. 우리의 느낌이 어떠하든 간에 우리는 이 위대한 사실 즉 죽음과 부활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것을 믿어야한다(사실로 여겨야 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정녕 죄에게는 죽은 자요, 예수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는 산 자로 여기라”(롬6:11). 바울은 죄가 당신에 대해 죽었다고 여기라고 말하지 않았음을 유의하라.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승리를 이룩하시는 방법은 죄악된 욕망을 억제함으로써가 아니고 옛 성품을 제거함으로써도 아니며 원죄를 깨끗케 씻으심으로써도 아니다. 하나님의 승리 방법은 십자가에 못 박음 즉 죽음을 통해서이다. 내가 죄에 대해 죽었다고 여기는 것과 죄가 나에게 죽었다고 여기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자신의 노력, 투쟁, 혹은 축복, 믿어 보려는 마음 등을 통해 죄가 나에게 죽은 것으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는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죄에 대해 죽었다고 여기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이 죄로부터 해방 받고자 한다면 당신의 실제 생명이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당신이 죄에게 죽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붙들어야 한다. 당신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분 안에 있다는 사실은 “죄에게 죽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믿으면 된다. 결코 감정을 염려하지 말라. 어떤 특정한 죄가 당신에게 다가올 때마다 당신은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죄에 대해 죽었다”라고 선포하기만 하면 된다. 만약 이 세상이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면 “그리스도에 의해 세상이 나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도 세상에게 그러하니라”(갈6:14)라는 사실을 믿으면 된다. 만약 교만 즉 자만이 다가오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다면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5:14)는 말씀을 믿으면 된다. 그렇게 하면 나는 내 자신을 위해 살아서도 안 되고 살 필요도 없게 된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이기적인 교만과 자만심과 스스로를 높임에 대해 죽었기 때문이다. 두 젊은 그리스도인 여성이 파티에 초대를 받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우리가 참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난주에 이미 죽었거든요”. 바로 이것이다. 우리 모두도 이렇게 대답해야만 한다. 두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전 주에 침례로 신앙을 간증했다. 그들은 죽었고, 장사되었다가, 다시 살아나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 사람이라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윌리엄 황제는 독일계 미국인의 알현 요청을 거절하였다고 한다. 황제는 “독일에서 태어난 독일인이 미국으로 귀환했으면 미국인이 된 것이다. 나는 미국인도 알고, 독일인도 알지만 독일계 미국인은 모른다”라고 선언하였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나도 한 때는 아담의 속박 안에 있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속박으로부터 벗어났다. 십자가가 나를 죽여 옛 시민권과 생활로부터 나를 잘라내 버린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아담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신분을 지닌 채 나의 왕 되신 분을 알현하려고 하면 그분은 거절하신다. 이런 상태로는 옛 사람의 속박으로부터 해방 받을 수 없다. 더 이상 거룩하지 못한 이중적인 신분을 집어 던지고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위한 존재임을 선포하자. “죄에게는 죽은 자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하나님께는 산 자”(롬6:11)로서 우리 자신을 온전히 그분께 바치도록 하자.     
2009-05-01 17:59:19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3 장 죄에 대한 승리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에게 있어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는 사실 즉 죽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완전히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은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나의 죄들은 영원한 죽음에 처해져야 마땅하나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도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말고는 실로 죽은 사람인 것이다. 그분께서는 나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가 친히 나무에 달린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죄들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벧전2:24). 나는 “죄 가운데 죽거나” 아니면 “죄에 대해 죽어야만”하는 존재이다. 나는 아담 안에서는 잃어버린바 된 존재이며 “죄 가운데서” 죽은 자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다면 나는 “죄에 대해서” 죽은 존재이다. 내 죄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음을 내가 받아들였다면 나는 내 자신이 죄에 대해 죽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받아들여야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인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죄에 대해 죽으셨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십자가에 맡겨진 인생이다. 그 외의 다른 입장을 취한다면 나는 수치스러운 도덕적 모순 가운데 빠진 것이다. 나의 논리적인 위치는 죽음의 위치이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원칙인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기계적인 일도 아니고 법적인 픽션도 아니다. 나는 실제로 사실적으로 그리스도께 연합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성경의 진리가 그러한 것처럼 이 사실은 나의 마음의 동의를 요구한다.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내 안에 사신다”는 사실은 영광스러운 진리이다. 만약 내가 구원받았다면 이 진리는 더 이상 냉랭하고 생명이 없는 그러한 “여김”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진심에서 우러나는 “아멘”을 요구하는 진리이다. 내가 그분께서 내 안에 내주하심을 깨닫기 위해 나는 내 자신이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해서는 산 자로 여길 것을 명령받았다. 이 “여김”은 단순이 믿는 척 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지 않은 사실을 믿어 보려고 노력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여김”은 일상적으로 이해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살아 있는 믿음을 말한다. “여김”(reckon)이 실재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포기(self-renunciation)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여김은 우리가 “자아”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능력으로 나의 옛 삶을 포기해야 한다. 갈보리의 십자가와 그분의 죽음 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음을 근거로 해서 나는 나의 자아가 나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나는 추악한 괴물인 자아에 의해 지배되느냐 아니면 그리스도에 의해 지배되느냐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삶은 그 중심부에 “그러나 내가 아니오”라는 것이 있어야만 한다. 내 길을 여전히 고집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음의 이익을 얻을 수 있겠는가? 자아는 보좌에서 물러나야만 한다. 나는 실로 생명의 새로움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내 옛 생명을 벗어버린다는 근거 하에 가능하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포기하는 심연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셨다면 나도 나의 옛 자아를 그분의 비참한 상태와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만 한다. 사무엘 러더포드의 고백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의 손을 모아서 그리스도께서 나의 복종과 결의에 찬 아멘을 받으시도록” 하자. 우리가 이런 식으로 우리의 자아를 포기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이것이 주로 가족 안에서 혹은 직장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순복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가정에서의 사역(Home missions)도 좋고 해외 선교(Foreign missions)는 더 좋지만 순복(submissions)은 가장 좋다(해외에서든지 가정에서든지 다른 사람에게 순복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훈련이다). 남편의 엄청난 성질에 순복함으로써 실질적인 승리를 쟁취하는 여자들도 있고 아내들의 바가지를 받아들임으로써 승리하는 남자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핸디캡이나 약점을 받아들임으로써 승리를 얻는다. 우리는 흔히 이와 같이 실제적인 복종을 통해서 승리를 얻을 수 있다. 바로 이때 우리의 자아가 포기되기 때문이다. 실제적인 포기 없이 “여기는 것”은 그저 믿는 체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다만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이요, 더욱 스스로 애쓰는 것이므로 아무 것도 아니다. “여김”은 또한 죄의 거부를 포함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 자신을 정녕 죄에게는 죽은 자로··· 여기라”.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러므로 죄가 군림하지 못하게 하여”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 말대로 우리는 죄가 군림하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이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죽었고 죽음을 통과하여 죄의 지배 저쪽으로 부활하였기 때문에 죄가 군림하도록 내버려둘 필요가 한층 더 없다. 죄는 그리스도와(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연합된 자들 위에는 요구사항이 없으며 따라서 자신을 성령께 온전히 굴복하는 자들 위에는 “군림할 수”가 없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롬8:2). 그러나 우리가 성령과 어떤 논쟁이라도 갖게 된다면 우리는 죄의 지배를 피할 수가 없다. 이에 관해서 하나님의 영은 분명한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성경 역시 확고하다. “실족하는” 지체는 사망에 처해져야 한다. 이것을 소중히 여기거나 심지어는 이를 놓고 기도해서는 안 된다. 물론 복을 위해 기도하고 정결한 마음을 위해 울부짖는 것은 실로 좋은 일이나 하나님께서 “끊어버리라” 그리고 “뽑아버리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그런 식의 행동은 좋은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모든 악으로부터 끊으셨다. 그분께서는 이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이제는 네가 죄와 관계를 끊을 차례니 죄가 군림하지 못하도록 하라”. 하나님과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지 않는 그러한 양심을 갖기 위해서 오래 전부터 나는 내 자신을 낮추고 “공개적인 수치”에 내 자신을 맡겨야 했었는가? 나의 가족, 나의 직장 동료, 혹은 나의 주일학교 수업, 혹은 나의 교회 회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할 때 우리는 십자가를 체험할 수 있다. 나는 아무도 불쾌하게 하지 않았으며 성령께서 그러한 상황에서 나로 하여금 그분께 복종케 하시기 위해 나에게 간청하신 적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자원해서 무시당하셨고, 자원해서 내게서 죄를 제거하시기 위해 죽으셨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모든 교만을 소중히 여길 것이 아니라 경멸해야만 할 것이다. 지금 당장 우리 스스로를 낮추도록 하자. 만약 내가 내 죄를 수치스러운 위치에 놓지 않는다면, 그 죄를 없애기 위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모든 것을 끊을 수 있는 갈보리의 능력을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나는 십자가와 아무런 조화를 이루고 있지 않은 셈이다. 죄의 고백은 죄의 거부를 의미한다. 우리가 십자가와 조화를 이룰 때만이 죄의 능력은 부서진다. 그러나 십자가는 숨기는 곳이나 죄를 덮어버리는 곳이 아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죄와 관계를 끊고 죄를 드러내는 곳이며 죄책을 담당하는 곳이요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는 장소이다. 자신의 체면을 버리고 십자가의 모든 결과를 따르도록 하자. 그리스도께서 나에게서 죄를 제거하시려고 죽으셨다면 죄를 붙들고 있기보다는 죽는 편이 낫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를 제거 할 만큼 죄에 대해 충분히 싫증내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죄로 가득한 우리 자신이 “죽음에 이르도록 싫증”이 날 때까지, 죄에 굴복하고, 피 흘리고, 우리의 쇠사슬을 껴안을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거룩하지 못한 표리부동함으로부터 해방되어야만 하며 이중적인 마음을 내던져야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한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질투가 많은 연인이시다. 그분께서는 모든 성도가 다 해방 받기를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십자가에서 당신을 위해 생성된 능력을 맛보도록 하시기 위해서라면 당신을 수치와 절망으로 몰아가는 데 주저하지 않으실 것이다. 당신은 주님의 이러한 교훈을 순종을 통해 그분의 친절로 배우든지, 불순종으로 인해 그분의 징계에 의해 배우든지 간에 어쨌든 배워야만 한다. 하나님의 섭리의 칼이 당신을 죄와 자아에 묶고 있는 모든 묶음을 하나하나 끊어내실 것이다. 부, 건강, 친구 등도 당신으로부터 그 칼에 의해 끊어져 나갈지도 모른다. 당신의 내적인 자아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당신의 기쁨도 떠나가 버릴 것이다. 안팎으로 얻어맞고, 깎이고, 불타고, 분쇄되고 나서야 당신은 비로소 “무시무시한 침례” 가운데서 당신만을 위해 살아가던 죄악된 모순으로부터 드디어 해방될지도 모른다. 그때서야 당신은 비로소 갈보리의 십자가의 승리와 파멸에게 자아를 내어놓을 준비가 될 것이다(준비가 되다 혹은 각오가 되다 라는 표현이야말로 축복된 말이 아닐 수 없다. - 이것은 어쩌면 “달콤한 강요”일 것이다). 오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능력이여! 어떻게 우리가 이 능력을 대항하여 지탱할 수 있겠는가? 갈보리에서 생성된 모든 능력이 이제 당신의 손안에 놓이게 된 것이다. F.J. Huegel은 그의 책 “그의 뼈 중의 뼈”(Bone of His Bone)에서 라듐과의 접촉이 불가피한 연구소(실험실)에 고용된 젊은 여성의 이상한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여인들은 그 공장에 들어가자 자신들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죽을 것이다. 그녀들은 얼마 간의 기간이 지나자 만 달러씩을 보상으로 받고 그 실험실에서 나오게 되었다. 의사들은 라듐과 접촉하며 일했던 소녀들을 검사하였고 X레이에 의해 생명을 소멸시키는 이상한 불이 그녀들의 뼈에서 불타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 엄청나게 집중된 힘이 그 여자들을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훨씬 더 집중된 힘이 갈보리에서 발생했다. 저 하늘의 라듐이 인간의 죄와 수치라고 하는 커다란 암 덩어리 위에 집중되었다. 라듐은 죽이는 일을 한다. 하늘 아래 이 집중된 힘을 견딜 수 있는 힘은 없다. “십자가는 죽이는 일을 한다. 자신을 갈보리에 노출시킨 사람은 곧바로 숨겨진 어떤 불이 그의 뼈 안에서 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오! 그렇다면 이 엄청난 힘에 대해 내편에서 제한을 두지 말도록 하자. 죽음을 다루고, 생명을 주며, 치료하는 광선이 나의 가장 은밀한 삶에 침투하여서 그 숨겨진 불이 나의 가장 깊은 존재의 모든 뼈들 안에서 타오르도록 한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라듐이 계속해서 내 안에서 적용되도록 하자. 이것은 계속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치료법에 내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되고 가식적인 자아에 진실로 지쳤다면 - 만약 나의 마음이 해방 받기를 원하는 “간절한 갈망”으로 타오르고 있다면 - 나의 영혼이 생명수의 샘을 마시고자 갈증을 일으키고 있다면, 갈보리의 충만한 메시지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의 충만함으로 당신에게 환영을 받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승리의 기쁨으로 거듭 거듭 말하노니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래서 지금 현재 못 박혀있고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나 같은 자 안에서도 그분이 사신다) 그분께서 부활의 삶(자신의 죽음) 즉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사는 그러한 삶을 사시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죽음은 그분의 죽음으로 내 것으로 여겨진다네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이라네.    
2009-05-01 17:57:39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4 장 십자가와 세상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는 옛 고대 세계가 십자가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었는지를 이렇게 요약하였다. “십자가를 로마 시민 앞에 보이지 않도록 하고 그들의 생각과 눈과, 귀로부터 그 이름이 들리지 않도록 하라”. 이처럼 2000년 전에는 십자가에 관하여 아무런 영광의 후광도, 아름다운 역사적 연관서도, 영웅적 희생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어떠한가? 아무나 십자가를 들먹거리는 세상이 아닌가! 심지어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 “십자가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고상한 그 무엇을 의미한다”. 그러나 역사의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20세기말을 맞이한 오늘날도 십자가는 멸시의 대상일 뿐이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극심한 수치와 경멸의 장소가 되기를 그만두자마자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화시키는 셈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그 당시에는 제자들은 범죄자들, 살인자들 및 반역자들이 십자가를 지고 형틀로 행렬을 벌이며 가는 것을 자주 바라다보았을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처형)은 너무도 악명 높고, 수치스럽고, 저주스러운 것이기에 옛 시대에 십자가에 대한 보편적이고 깊은 혐오감은 달리 표현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이 모든 것에 더하여 성경은 십자가에 대해 결정적인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 “나무에 매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은 자라”(갈3:13). 이 말씀은 십자가가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에 대해 가차없이 극에 달한 증오심을 표현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 바로 십자가였다. 십자가에서 이 교만한 세상은 단번에 그들의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었다. 한마디로 십자가는 이세상이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완벽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세상이여, 그리스도에 대해 너희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내놓아 보거라! 이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외쳐댔다. “··· 처단하소서, 처단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소서”(요19:15). 친구여, 속지 말라. 비록 비수가 이 세상의 옷 밑에 숨겨져 있기는 하지만 비수는 여전히 있다. 결코 없어진 것이 아니다. “한 시대 혹은 한 영혼 혹은 한 그룹의 영성을 참으로 측정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그들이 ‘세상’이란 단어에 대해 얼마만한 혐오감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있다”(D.M. Panton)는 이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리이다. “세상”이란 단어를 정의 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성경은 “세상의 통치자”(요12:31)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이 세상의 풍조(course)”(엡2:2)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세상의 신”(고후4:4)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 세상의 영”은 하나님의 영과 반대(원수)되고(고전2:12), 이 “세상의 형체”(fashion)는 사라져간다. 또한 이 세상의 지혜는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전2:8). 따라서 하나님께서 “세상도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요일2:15)고 말씀하신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겠다. 세상은 이때 자연인의 삶과 전 과정을 말한다. 이 마지막 표현 즉 “세상에 있는 것들”(things)이라는 말에 주목하라. 이 책을 읽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세상적이지 않은 것은 사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혹시 단 한 가지라도 세상적인 것을 붙들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세상의 물건은 무엇인가? 당신은 아마 젊은이들이 춤과 쇼와, 연극을 사랑하는 것을 비난할지 모른다. 사실 그것은 옳다. 그러나 당신은 어떠한가? 정치, 예술, 과학, 돈, 야망, 사회적 인정, 혹은 사업에서의 영향력 등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은가? 세상은 젊은이, 중년, 그리고 노년에 따라서 그 내용이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모두에게 치명적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를 죽였고 하나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야망, 열정, 자랑, 인기, 쾌락 그 밖의 수많은 유혹거리들이 십자가와 모순되며 “아버지의 사랑”을 배제한다. 사도 요한은 “세상을 너무 사랑하지 말라” 라든가 “세상을 지나치게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대신 단순히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라고 선포했다.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이 세상의 세 가지 뿌리를 정의내리고 있으며 이 세 가지는 전설에 등장하는 세 개의 금사과 이야기처럼 우리를 미혹한다(아틀란타는 이에 미혹되어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이요 아버지께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요일 2:16). 이기적인 사람은 이 세 가지 형태의 욕망(정욕)으로 인해 만족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 가지 모두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십자가에서 내려와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그 육신을 애정과 정욕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하였느니라”(갈5:24).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를 지배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분을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는, 그러한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정과 욕심들이 얼마나 우리 주위에 많은지! 그러나 이 세상의 영이 어찌나 교활하고 속임수에 뛰어난지 자연적인 타고난 지성으로는 그것을 포착해 낼 수가 없다. 그것은 너무도 유혹적인 마술 같고, 마법같이, 우리마음을 쉽게 사로잡는다. 이 세상적 사고방식은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의 종교생활의 체질 깊숙이 그 암세포의 뿌리를 심어놓았다. 그것은 마치 치명적인 문둥병이면서도 고통을 동반하지 않아 알아차리지 못하는 동안 뼈를 갉아먹는다.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집의 뼈대를 먹어 치워버릴 하얀 개미와 같다. 그것은 바로 지성숭배주의의 온상이요, 현대주의의 시녀이다. 그것은 속에서부터 도려 나오는 스파이로서 십자가의 영을 쫒아 내버려 사라지게 만든 장본인이다. J. Gregory Mantle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몇 년 전에 천연 자석인 한 산에 대해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산은 엄청난 흡인력을 가지고서 그 영향력 범위 내에 들어오는 모든 쇳조각을 엄청난 힘으로 끌어당겼습니다. 그 지역의 연안을 항해하는 배들은 닻과 체인 그리고 쇠로된 막대기들이 이끌리는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들이 산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거의 감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약간 기울어짐을 느끼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더니 그 흡인력은 점점 더 커져서 결국 엄청난 속도의 증가로 배는 점점 더 산 쪽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 배의 모든 볼트와 못이 배의 기둥과 갑판에서 빠져나가 산에 달라붙고 말았고 결국 배는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 파선하고 말았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를 바위로 이끌고 가서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간증을 파괴시키는 교묘한 형태의 세상적인 것들 몇 가지를 제시해 보도록 하자. 세상적인 사람들의 얼굴과 그들의 찡그린 모습에 대한 두려움, 반면에 세상 사람들의 호의와 아첨은 얼마나 달콤한지! “시간을 사서 얻는” 대신 보잘것없는 취미에 허비해 버리는 부당한 사간들! 우리는 때로 이것을 휴식이라고 부를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상당히 세상적인 것들이 들어 있을지 모른다. 잃어버린 사람에게 “복음”을 줄 수도 있는 그때에 세상뉴스에 느슨한 마음을 지닌 채로 동참하는 우리의 느긋함. 사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들로서 고난을 견뎌내기를 거부하고 있다. 우리의 부드럽고 작은 “세상”이 우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저녁 늦게 야식을 먹으며 허영에 찬 농담을 늘어놓고 싶은 욕구, 이것 때문에 우리는 다음날 아침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데 필요한 시간을 낭비해버린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전신갑주를 입지 못한 채로 세상을 만나러 나갈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비밀스러운 내적인 세속성 때문이다. -우리가 좋아하고, 싫어하며, 개인의 선택으로 결정해 버리는 많은 것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성경적 원칙이 아닌 대중의 의견, 혹은 어쩌면 종교적 의견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는지! -우리는 얼마나 쉽게 이것 저것을 용납해 버리는지!(비록 그것이 악의가 없거나 혹은 사랑스러운 것일지라도) 그렇게 되면 세상이 쉽게 틈을 탈 수가 있게 된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위해 수치를 당하는 것을 얼마나 적게 특전으로 여기는지! -어떤 세상적인 편안함들로부터 오는 커다란 만족감을 얼마나 우리는 기대하고 있는지! -우리는 좋은 것들과 화려한 것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기 위하여 그러한 것들을 포기하기를 우리는 얼마나 꺼려하는지! -우리는 괴짜로 보이기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우리는 얼마나 쉽게 유행에 무릎을 꿇는지! 그 스타일이 합리적이거나 옳거나 혹은 품위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유행이기 때문에 따르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그런데 종종 유행은 비합리적이고 품위가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너무도 세상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다르게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품위 없이 보이기를 원한다. 욕망이라는 옛 임금이 “그것을 하라”고 말하자 많은 사람들이 로마의 백부장의 종이 채찍이 무서워 순종하듯이 순종하고 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우리자신을 처리할 때까지는 거짓교리, 현대주의적인 사역, 가련한 교회치리, 혹은 교회 안에서의 부패한 실행들에 대해 놀랄 필요가 없다. 우리가 파산하는 모든 뿌리는 세상적인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William Law는 이렇게 잘 표현하였다. “이단들 중의 이단은 세상적인 영이다. 오늘날 기독교회들의 타락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나는 그 모든 것을 세상적인 영에서 비롯된다고 말해야만 할 것같다.”    
2009-05-01 17:56:12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5 장 십자가와 세상   나는 한때 이 세상 깊은 곳에 빠져 정죄 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그분께서 위로부터 구세주를 보내셔서 나를 이끌어 많은 물들로부터 나를 끄집어 내셨다.” 구세주께서는 이 세상 속으로 깊이 가라 앉으사 -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내위에 넘쳤나이다.”(욘2:3) - 우리를 악한 현 세상(갈1:4)에서 “구출(구원, 구조)하셨다”. 우리의 구원은 이처럼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원에 덧붙여 더 큰 승리를 얻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로부터 그 바다를 떨어 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승리는 구조된 자들이 다른 멸망해가고 있는 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다. 즉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승리를 쟁취한 후, 그리고 이 어두운 세상의 불결한 요소들을 떨쳐버리는 승리를 쟁취한 후에는 이 세상의 구렁에서 멸망해 가고 있는 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그 세상으로 다시 보내심을 받는 놀라운 승리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이번 승리야말로 상급을 얻을 수 있는 승리이다. 그러나 이 악한 세상으로 다시 들어가는 데 있어서는 세상과 우리와의 관계가 수정처럼 맑아야함이 전제된다. 위로부터 태어난 우리는 우리의 시민권을 하늘에 가지고 있다. 우리는 “영적으로는 이 세상으로부터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간단히 말씀하셨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또한 우리에게 못 박혔다. 십자가에 못 박힌 제자와 십자가에 못 박힌 세상 사이에는 얼마나 도덕적으로 거리가 먼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하늘 보좌가 지옥의 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듯이 늑대들의 무리 속에 있는 양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 우리는 이 비뚤어지고 사악한 세대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담대하게 굳게 서서 이 세상에서 빛을 발하는 자들이 반드시 되어야만 한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진”(6절) 것으로 말씀하셨고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들”이며(14절), “세상의 악으로부터 보호받고 있지만”(15절) 그러나 이 세상에 남겨져 있으며(11절), “이 세상에 말씀을 전파하도록 보내졌고”(18,20절), 그 결과 “세상에 의해 미움을 받으며”(14절) 살고 있는 자들로 말씀하셨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이 십자가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이 마지막 사항 즉 “세상에 의해 미움을 받는”이란 이 표현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오 그리스도인들이여 이 사실을 마음에 새기라.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세상은 “너희”(당신과 나를)를 미워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진리를 향한 증오심을 축소시키지 말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은 당신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의 것들은 당신을 심하게 다룰 것이다. 그리스도의 수치가 사방에서 당신에게 떨어질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그것이야말로 참된 제자의 도의 표시이다. “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하는 모든 사람은 박해를 받을 것이라”(딤후3:12). 우리를 “박해에 대해 병적인 욕망”을 지닌 자들이라든가 “스스로 만들어 낸” 순교를 지지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우리는 결코 그런 위선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몇몇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의 넘어지게 하는 것이 중단된 것은 분명히 그들의 삶이 너무도 세상과 쉽게 타협적이 되었기에 그들의 생활이나 증거에 대해 이 세상이 더 이상 책망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와 세상은 삼손과 들릴라처럼 부정하고 더러운 관계에 있을 뿐이다.   교회에 속한 자들, 그리고 세상에 속한 자들서로 손에 손잡고 가까이서 살아가네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외에 그 누구도이 둘을 구별할 수 없다네. 구세주의 입술에서 나온 말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징책하는 표현중의 하나는 그의 믿지 않는 형제들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그것은 “세상은 너희를 미워할 수 없으나”(요7:7)이다. 만약 내가 이 세상과 너무도 가까이 하나가 되고, 이 세상의 영과 분위기를 너무도 쉽게 포용하여 더 이상 세상을 책망하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세상의 증오와 그리스도에 대한 적의를 불러일으킬 수 없게 된다면 다시 말해 이 세상이 내 안에서 나를 미워하여 그들의 무리에서 나를 쫒아버릴 구실을 찾을 수 없다면 그렇다면 나는 이미 그리스도를 배반한 것이요. 그분의 친구들의 집에서 그분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그분을 나무에 못 박은 세상에 그처럼 밀접하게 다가섰다는 말이다. 이런 일은 생각조차 말아야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이 세상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 외에는 달리 쓸모가 없다고 여겨야한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저주받아 못 박혀서 죽어가는 범죄자로부터 미소를 기대하고 찾아내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이 세상의 호의를 더 이상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친구들의 비밀결사에 입회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우리가 이 세상의 재판정 앞에 그분과 함께 서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그분과 함께 조롱을 당하고, 세상의 권력, 종교, 문화로부터 오해를 받게 된다. 이것들은 이 세상이 실재(Reality)를 정죄하기위해 그 기준으로 세운 인위적인 고안물들이다. 우리가 세상은 우리에게 그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왕국을 줄 수 없다고 선언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환심을 내던지고 세상의 상식을 저버리게 된다. 세상은 우리 가운데 있는 반역자는 지혜롭게 다루고 바보들은 용납해 준다. 그렇게 되면 무지, 게으름, 비겁함이 우리를 ‘느긋하게’ 정죄하게 된다.”(S.M. Zwemer가 The Glory of the Cross에서 James Cordilier로부터 인용한 것임)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지니고 있었던 지난 세대의 영적 스승들 중 한 분인 Dr. A.J. Gordon씨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로마제국을 그리스도 앞에 승리의 제물로 바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세계로부터 온 침입자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 귀화하기를 절대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이웃들을 당혹감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이세상의 삶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반면 양심에는 신경을 곤두세웠으며 그들 자신의 피에 대해 괘념치 않았고 어린양의 피가 갖고 있는 능력을 철저히 신뢰하였으며 그들이 기거하고 있는 나라의 풍속에 동화되지 않았고 그들이 귀화한 그 하늘나라의 생활방식을 고수하였다. 그들은 이 세상의 도움, 통치자들의 성원, 세상으로부터의 빚, 세상적인 방법의 사용 등을 철저히 거부하였다. 이는 그런 것들을 용납하게 되면 그들의 왕 되신 그리스도를 배반할까 함이었다. 이 “침입자들”은 보이지 않는 기지로부터 병참 지원을 받았고, 로마제국이 제공하는 도움보다는 보이지 않는 대장의 지도력을 훨씬 더 신뢰하였다. 이 사실은 이방인(이교도)들을 너무나 화나고 불쾌하게 만들었다(사실 이들은 그들의 잡신들을 버리지 않은 채 그리스도인들과 친구가 되기를 원하였던 자들이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시대야말로 기독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를 구가했던 시대라고 하는 사실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 H.B. Norkman교수는 로마제국하의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기독교 초기시대 약 200년 동안은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많은 것의 포기를 뜻하였고 멸시받고 박해받는 이단 종파에의 가입을 의미했으며 인기 있는 세상물결을 거슬러 수영하는 것을 의미하였고, 로마제국의 금기사항이었고, 어느 순간이든지 투옥과 죽음이 가혹한 방식으로 다가오는 것을 의미하였다.” 초기 200년 동안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가를 치러야 했고 그것도 자신의 자유와 생명으로 치러야만 했다. 처음 200년 동안은 기독교신앙을 고백하는 것 자체가 범죄였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말은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을 향해 선포되는 말이었고 그 선언 하나면 정죄받기에 족했다. 그 선언이 내려진 사람은 변명의 기회나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기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터툴리안에 따르면 대중의 증오는 단 한가지만을 요구하였는데 그것은 범죄에 대한 책임여부의 조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고백이었다.   이처럼 사나운 이리들의 증오심에그리스도인이라는 죄목으로 숨을 헐떡이며몸을 움츠린 양들이 희생 제물로 바쳐졌도다. 로마인, 헬라인, 혹은 이방인들은 다같이 “첫 번째 종족”이라고 불린 반면 유대인들은 이와는 달리 “두 번째 종족”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특별나게도 “이 세상으로부터 모든 것을 박탈당한 채”, 이 세상의 영과 분위기에 철저히 무관심하고, 이 세상과는 너무도 대조적이고 비세속적인 모습으로 살았기에 “제삼의 종족”이라고 낙인이 찍혔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칭호를 기꺼이 수용하였다. 죄보다 더 나쁜 것은 없기 때문이었다. 이교도들이여, 마음껏 떠들라!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세상에 속해 있도다. 그들은 “온 세상에 대해 죽었고” 이 모든 세상과는 끊어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더 이 제삼의 종족을 내버려두어야 하겠는가?” 라고 외쳐댔던 것이다.(카르타고의 한 서커스의 대사를 인용하였음) 이러한 승리의 간증(비타협에 의해 쟁취한 것임)이 가져올 결과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오늘날 교회는 저 순교자들의 화형 때 타오르는 불길을 견딜 수가 없다. “그 빛나고 불타는 불빛”은 오늘날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분명히 보여 준다. 오, 인기에 영합하는 크리스천이여! 오, 세상적으로 똑똑한 설교자들이여! 이 세상을 얻기 위해 얼마나 이 세상과 함께 멀리까지 나아갔는지 잘 확인해보라. 교회는 이 세상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어찌해서 그처럼 이 세상에 영향을 주려고 애쓰는가?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채 다시 그 가라앉은 로마제국 안으로 뛰어들어 그 제국을 뿌리째 뽑아내서 세계사의 흐름을 뒤바꿔 놓았다. 당시의 표현대로 하자면 터툴리안의 기록 그대로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그 생명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 사람들로서 이러한 투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2009-05-01 17:55:08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6 장 십자가와 헌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빛을 보여 주신 주시니 끈으로 희생 제물을 제단 뿔들에 맬지니라”(시 118:27). 본서의 저자는 한 젊은 사역자를 잘 알고 있었는데 그는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려 했지만 계속해서 실패를 하고 있었다. 그는 진지하게 헌신을 하고자 했으나 계속해서 실패하였고 비참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그런 젊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드디어 그는 자신에게 헌신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것이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구약의 제사장들을 하나님께서 “성결하게” 하시는 방법을 통해 조명을 받게 되었다. 제사장들의 귀, 엄지손가락, 엄지발가락에 발려진 피를 보았을 때 그리고 제사장이 온통 피 뿌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았을 때 그는 “죄가 되신 그리스도”와 자신과의 연합을 이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는 자신이 온통 죽음으로 뒤덮여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는 갈보리 사건이 그에게 가져다 준 엄청난 운명과 죽음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음을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과 하나된 자신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와 죽음과 삶을 통한 연합을 이루게 된 사실을 깨달은 그는 그리스도께 자신을 드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갖게 되었고 성공적이고 지속적인 헌신의 삶을 위한 기초를 다질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체험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드문 일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속뜻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상당히 훌륭한 교회들에서 로마서 5장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칭의를 가르친 후 곧바로 로마서 12장 1,2절에 제시된 헌신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을 잘못되었다거나 이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로마서 6-8장 사이에 제시된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관한 놀라운 가르침을 간과한다는 것은 헌신에 대한 올바른 접근 방식은 아니다. 이 중요한 진리들을 간과함으로써 앞서 언급한 젊은 사역자들은 많은 세월을 비참하게 보내게 되었다. 그는 죄성으로 가득한 자아에 대한 승리의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제단위에 자기의 모든 것을 올려놓으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합을 통해 그가 이미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 즉 그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일어났으며 “죄에 대해서는 죽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는 살아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확고한 근거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드디어 그는 성공의 비결을 찾아내었고 실로 큰 축복을 받게 된 것이다. 좀 더 부연 설명을 해보도록 하자. 아브라함 링컨은 1863년 11월 19일 게티스버그에서 전사자 묘지를 봉헌하며 행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들의 생명을 바친 분들의 영원한 안식처로서 이 들판의 일부를 바치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는 우리는 이 땅을 봉헌할 수도 없고, 성별할 수도 없고 거룩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싸웠던 용감한 분들, 이분들 중에서 살아 계신 분도 있고 이미 고인이 된 분도 있을 터 인데, 바로 이분들이 이 땅을 이미 성결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 이제는 오히려 우리 살아 있는 사람들이 남겨진 과업을 온 힘을 다해 완성해야할 것이며 그분들이 다 이루지 못한 그 일에 우리 자신을 헌신해야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의 헌신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더 깊은 의미로 보자면 우리는 이미 구속된 생명이므로 “이 땅을 봉헌하거나, 성별하거나 거룩케 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께서 자신이 내놓으신 그 생명 안에서 이미 우리를 봉헌하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더하거나 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께로 고정시키십시다. 우리가 그와 함께 죽었다면 또한 그와 함께 살 것을 믿도록 합시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축복된 진리들은 로마서 6장부터 8장에 제시되어 있으며 성공적인 헌신에 대한 근거를 제공한다. 이 근거위에서 우리는 로마서 12장 1,2절에 제시된 헌신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완전히 구속되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분 안에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무한하고 풍성하신 자비로 우리에게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하고 합당한 산 제물로 바치라고 권고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신성한 번제물 되신 그분 위에 우리의 손을 얹을 때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께 달콤한 향기가 되는 것이다. 이는 완전한 순종, 완전한 헌신, 그리고 완전한 희생제사의 달콤한 향기이며 “우리로서는 이에 무엇을 더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다”. 이 얼마나 놀라운 능력이며 얼마나 놀라운 확신이며, 이 얼마나 놀라운 평화인가! 그분은 불에 의해 드려지는, 달콤한 향기가 나는 제물로서 하나님을 완전히 만족시키는 번제물이며 우리는 그분을 위해 불태워지는 달콤한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이런 분을 우리가 신뢰할 수 없단 말인가? 그분께서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우리를 이끄시도록 내맡겨야 되지 않겠는가? 오 주저하는 성도들이여, 어서 와서 우리의 권리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나머지 여생동안 그분께 내맡겨 드리자. 어서 와 그분께 모든 걸 드리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도다”. 주님께서는 기꺼이 바치는 사람을 사랑하신다. 고난의 시기에 난관을 헤쳐 가는 자들은 위대한 왕이신 그분께 자신을 내어맡겨야 한다. “주여, 당신의 명령대로 당신을 섬기오니 받아 주소서” 죠지 휫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위해 십자가위에 매달린 그분을 위해 순교자가 되기 위해 나는 내 자신을 포기하노라. 나는 무조건적으로 내 자신을 드려서 그분의 전능하신 손에 나를 완전히 위탁하노라.” 한국의 안이숙 여사는 일본 국회에 가서 일본의 신도교 우상들에게 절하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그 나라에 경고를 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두고 무려 7년간을 하나님과 논쟁하였으나 결국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복종하기로 마음을 먹고 모든 것을 팔아 일본행 편도 배표를 하나 사고 죽을 각오로 일본을 향해 떠났었다. 우리는 헌신은 “봉사 혹은 희생”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 이 안 여사에게는 두 가지 모두 해당된 셈이다. 그녀의 일본행은 죽음으로의 여행이었다. 그녀는 돌아올 생각을 안했기에 편도로 배표를 산 것이다. 그녀는 주님의 사랑에 의해 순종하기로 마음먹었고 가서 그분의 뜻을 행하고 필요하다면 죽음을 각오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갈보리 십자가의 강력한 힘에 이끌려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분의 사랑의 손길에 내어 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위대한 희생 제물에 대한 식욕으로 가득 찬 죽음으로 이끌린 것이다. 아! 바로 이것이야말로 참된 인생이며, 풍성한 인생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진 그 생명인 것이다. “나를 먹는 그 사람은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헌신에 관한 너무도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더 언급하고자 한다. 프란세스 리들리 하버갈(Frances Ridley Havergal)은 이렇게 말했다. “완전한 헌신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 순간의 행위일지 모르지만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평생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헌신이 실제적이 되려면 완전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적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항상 완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한순간의 결정이지만 지속적인 진행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헌신이 단번에 끝났다고 생각하면 속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주 시편기자처럼 고백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빛을 보여 주시니(회심), 끈으로 희생제물을 제단 뿔에다 맬지라(헌신).’ 이 헌신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요구하며 우리는 이와 같은 헌신된 생각으로 온전히 모든 것을 드려야한다. 우리가 번제드릴 불과 제물을 잡을 칼을 보고 무서워할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외쳐야만 할 것이다. ‘오 복되신 구주시여 저를 제물로서 묶으소서. 제가 제 인생여정을 수치스럽게 마치지 않도록 당신의 강력한 사랑의 줄에 저를 묶으소서. 제가 육신을 위해서는 그 어떤 기회도 제공치 말도록 하시며 계속 타오르는 온전한 번제물로 남게 하소서. 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도록 하소서. 저를 당신 자신의 끈으로 갈보리에다 묶으소서, 저를 꽉 묶어서 계속해서 타오르는 제물이 되게 하소서?? 한 선교사가 선교지로 돌아가면서 배안에서 신선한 기름부음을 받고자 애를 쓰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께서는 내가 그분보다 다른 어떤 것에 더 마음이 끌리는지를 보시기 위해 내 마음과 내 소유를 살피셨습니다. 그분이 ‘네가 나를 이것들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분은 내 아내와 자식을 염두에 두고 계셨습니다. 나는 주저했습니다. 나는 그분께서 사형 집행서를 내 앞에 내밀고서 내 서명을 기다리고 계신 것처럼 느꼈습니다. 내 마음에는 심한 갈등이 생겼습니다. 주님께 항복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였습니다. 오랜 갈등 끝에 나는 그분의 은혜로 그분께 항복했고 나는 이때 내 결정은 곧 내 아내와 아이의 지상생명의 종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 있는 작은 집으로 혼자서 돌아가고 있을 때 몇 주 후 나에게는 ‘아이가 아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아이는 내가 집을 떠나올 때 괜찮았었습니다. 그는 건강히 잘 있었습니다. 내가 집에 도착하자 아내가 마중을 하고서는 ‘고든이 아파요’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알고 있었소, 드디어 그 일이 닥쳤구려”라고 대답했습니다. ‘네가 네 아이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고통스러운 갈등이 드디어 코앞에 닥친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승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아이에게로 가서 작별을 고했습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의 작고 하얀 얼굴은 심하게 병든 모습으로 베게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참된 순종은 죽음에까지 순종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실로 정직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이 가장 좋습니다. 저를 이제부터 이 지상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붙들겠습니다’라고 하나님께 말씀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때 나에게는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였을 때 그에게 일어났던 동일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이 그리고 나의 아이인 내 자식을 되돌려 주신 것입니다.” “끈으로 희생제물을 제단 뿔들에 맬지라”.
2009-05-01 17:54:12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7 장  십자가와 십자가에 못 박힌 자   어느 가정에 항상 불화가 있었다. 한 젊은이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그들 부부가 보트를 타다가 남편의 실수로 배가 뒤집혔고 부인이 익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사법당국에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 집행이 있기 바로 전날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그와 함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그 다음날 사법당국은 그 아들을 사형에 처했다. 잠시 후 마음이 심히 상한 그의 아버지는 이미 생명이 떠나버린 불쌍한 아들의 시신 앞에서 이렇게 절규했다. “오! 내 아들아, 내가 내 생명을 너에게 나누어 줄 수만 있다면---. 내가 너에게 생명을 넣어 주어 네가 내가 원했던 그러한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바로 그렇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대신하여 풍성하고 충만한 생명을 갖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내가 그분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기를 갈망하고 계신 것이다. 이는 나로 그분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함이다. 바로 이를 위해 그분께서는 천사들의 본성을 취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씨로서 나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그분은 나와 동일한 육신을 입고서 인간이 되셔서 나를 그분과 함께 사형 틀로 데리고 가신 것이다. 그렇다. 그분께서는 나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분의 죽음 안에서 나는 죄로부터 해방을 받았다. 이를 두고 바울은 “죄로부터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했다. 나는 그리스도의 죽은 몸에서 죄의 요구와 능력이 다 소진해 버렸음을 보게 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제 “죽음이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죄가 너를 주관하지 못할 것”이라는 약속을 주신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죽었다. 또한 나는 다시 일어나신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였다. 그러나 그분은 모든 죽음의 표시를 부활 안으로 지니고 가셨다. 그분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그분은 부활하실 수가 없었다. 그분은 이제 자신의 전능한 죽음의 능력과 효력을 제공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으로 살고 계신다. 그리고 나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그분께 접붙여져서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가 되었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첫 번째 아담은 나와 그의 생명의 연합에 의해(유전) 그의 불순종으로 야기된 치명적인 결과들은 나에게 전달해 주었다. 마찬가지로 나와 그분의 생명의 연합에 의해, 그분께서 죽기까지 보이신 그 순종의 위대한 결과들은 나에게 자동으로 전달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인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죄에게 죽으셨다. 그분은 죽음으로 죄가 지니고 있던 그 권능의 마지막 흔적마저 깨끗이 지워 버리셨다. 십자가의 조명하에서는 죄는 “더 이상” 군림할 수가 없다. 나는 그분과 연합되어 있음을 생생히 인식하면서 죄의 유혹에 대해 “아니오”라고 해야만 한다. 이 “아니오” 속에는 부활하신 주님의 내적인 임재로부터 나오는 능력이 담겨 있다. 주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상한 그 어떤 아버지보다도 자신의 생명 즉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한 그 생명을 나누어 주시기를 갈망하신다. 이 생명은 심한 유혹과 시험 속에서도 죽기까지 순종했던 그 생명이다. 로마의 법에 따르면 어떤 종류의 살인죄에 대해서는 혐오스러운 방식으로 사형을 집행한다고 한다. 이 사형수는 자기가 살해한 자의 시체 얼굴을 마주본 채로 묶여 죽어간다고 한다. 그가 그 시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죽는 길 뿐이었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께서도 나를 죽음보다 더 강력한 사랑의 줄로 그에게 묶으셔서 십자가로 데려가셨다. 나는 이 십자가에서 그분과 “함께 못 박힌 것이다.” 펜 루이스(Penn-Lewis)여사는 한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는 너무도 충격적인 꿈을 꾸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꿈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피를 흘리는 구원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도 추한 어떤 것이었는데 너무도 역겹고 너무도 추잡해서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를 이처럼 혐오스럽게 했던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얼마 후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다는 메시지를 듣게 되었는데 바로 그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던 그 추한 것이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성령께서 그가 꿈에 본 그 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계시해 주신 것이다”(F.J.Huegel in Bone of His Bone). 그러나 우리는 죽음과 부활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이 진리를 단지 입술로 고백하거나 확고히 인정한다고 해서 체험할 수 있지는 않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실행에 옮겨보겠다는 결심으로 흉내 내거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삶은 그 어떤 모방으로도 살아낼 수가 없다. 오직 성령께서 내가 자아에 대해 죽었음을 깨닫게 해 주시는 살아 있는 방식으로 역사하셔야만 이 삶은 가능하다. 그분의 죽음 안에서 그분과 새롭고도 확고한 교제가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고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생명을 내 것으로 할 수는 없다. 내가 십자가에서 옛사람을 부인하는 만큼 나는 새로운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분의 죽음의 능력에 온전히 내 자신을 항복시킬 때 나는 “그의 부활의 모양” 안에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있다고 상상하거나 십자가에 있기 위해 일하고, 애쓰고, 노력하기는 쉽다. 우리는 자아를 동원하여 우리의 육신에 십자가가 못 박힌 것처럼 상상하고서는 그분의 죽음의 효력이 우리에게 나타날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육신의 어리석음이요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십자가는 프로테스탄트에게나 카톨릭에게나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무시한 채 그분께서 사셨던 것처럼 살아 보려고 애를 쓰며, 그분의 본을 따라 “예수님처럼” 행하고 말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 역시 그분과의 진정한 연합을 가져올 수 없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한다. 우리는 오직 그분의 죽음 안에서 그리고 죽음을 통해서 그분과 연합될 수 있다.   그리스도 없는 십자가 내게 피난처 될 수 없었고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 내게 구세주 될 수 없었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당신 안에 안식하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이요, 기쁨이며, 모든 것 되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할 수 있게 되기에 앞서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는 일에 기꺼이 동의하기 전에 자신과의 싸움, 실망, 패배등과 같은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경험하게 된다. 자아를 내버리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죄의 사망에 이르도록 아플 때까지 자신을 죄에게 죽은 자로 여기려는 많은 노력을 하게 된다. 우리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보려고 온갖 방법을 써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게 된다. 자아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드디어 자아라는 “시체”에 사로잡히게 된 우리는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외치게 된다. 바로 그때에야 비로소 주 예수께서는 몸을 굽히시고 “내 아들아, 나의 부활의 생명의 영을 너에게 넣어주노니 이는, 네가 ‘진정한 자유를’ 즉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받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제는 내가 네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던 그러한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분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그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에 의하여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것은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죽음 안에서 그리고 부활안에서 연합되는 것으로 이것만이 그리스도인이 승리의 삶을 사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 삶이야말로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이요, 그분의 능력 있는 죽음이 실제가 되는 삶이다. 한 그리스도인 부호에게 매우 사랑하는 외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은 아주 품위 있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이 부자는 자기 아들의 미래와 성공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어렸을 때부터 죄 된 삶을 살던 한 소년이 집에 침입해와 그 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며칠 동안 그 아들은 살아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의식을 회복했고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되었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 했던 소년의 모습을 보고서는 그 앳된 모습에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이 아들은 이 소년을 죄악 된 삶에서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결국 아버지는 그 죄 많은 소년을 집으로 데려오자는 아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소년을 양자로 맞아들여 아들의 형제로 삼기로 했다. 그는 때가 되면 상속을 받게 될 신분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소년은 이들의 진지한 제안을 받아들이는데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다.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가 갖고 있던 악한 습관들은 너무도 뿌리가 깊었는지 그는 계속해서 악한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결국 아버지는 더 이상 그를 도울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친 아들은 큰 실망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애를 썼고 그 소년에게 아낌없이 복을 베풀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너무도 실망한 나머지 그 소년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는 거기서 자기 아들의 그림을 보게 되었다. 그는 그 그림을 집어들고 살펴보았다. 그 그림에는 누가 만진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 뒤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 형님, 저는 형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형은 나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해 주었으니까요. 그러나 나는 결코 착한 아이가 될 수 없는 것 같아요”. 이 글을 읽은 아버지의 마음에는 희망이 샘솟기 시작했다. 한때 죄인이었던 자가 “선한 사람”이 되었을 때 그의 노력은 결국 보상받게 되었던 것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열망한 적이 있는가? “오, 주님, 저는 당신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저에게 너무도 큰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저는 결코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은 주님께 이렇게 고백해 본 적이 있는가?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과 부활을 거쳤음을 믿기 바란다. 당신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실을 순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감정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오직 단호한 믿음의 행위로 다가서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그분과 생명의 연합 관계에 놓으셨으며 그 연합이 실재로 체험되도록 하실 것을 신뢰하하. 당신의 생명을 그분의 생명 안에 던지시고 그분께서 당신의 생명, 당신의 빛, 당신의 승리, 당신의 모든 것이 되도록 하라.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지금도 살아 계신, 당신의 머리되신 분께서 하늘에 계심을 기억하라. 머리와 지체는 한 몸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와 여러분은 “그분의 뼈 중의 뼈”이다. 이 놀라운 연합을 온전히 붙들라. 당신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수학의 법칙이 무너지고 만다. 일반적으로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하나 더하기 하나가 하나이다. “그들 둘이 한 육체가 되리라”. 이 신비를 바울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런 까닭에 남자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것은 위대한 신비라. 다만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1,3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그 한 몸의 모든 지체가 많아도 한 몸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또한 그러하시니라”(고전12:12). “온전한 그리스도는 머리와 몸 둘 다를 포함한다”(어거스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나 자신을 둘로 여기는 순간 나는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실제로 관심과 섬김과 관점에 있어 즉 모든 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과 하나 되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두 개의 심장을 갖고 있으나 하나의 심장처럼” 박동하는 것이다. A.T.피어슨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나이 드신 경건한 어머니를 얼마 전에 잃은 한 경건한 부인을 위로하기 위해 그녀를 찾아갔는데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난 40년간 저의 어머님의 마음은 늘 하늘에 가 있으셨어요.’ 그 순간 나는 골드 스미스의 아름다운 시구를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 무서운 모습으로 치솟은 높다란 절벽처럼 계곡에서 떠오르다 도중에 폭풍우를 내려놓고 구름은 그 가슴을 돌아 퍼져가지만 영원한 햇빛은 그 머리위에 내려쬐네 ” 지상에 있는 우리의 거주지는 찔레와 가시가운데 놓여 있고 우리의 하늘은 구름으로 덮여 있을지라도 우리의 믿음은 “영원한 햇빛이 우리의 머리 위에 비추고 있다”는 사실로 자라난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숨겨져 있다”. 그분과 나는 하나이며 “그분의 어떠하심같이(저쪽 영광가운데 계심)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다”(요일4:17) 우리학교 졸업생이 보낸 편지에는 이 놀라운 진리가 잘 예시되어 있다. 여기에 그 일부를 인용한다. “나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이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완성된 그 은혜에 의해 내 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저는 늘 오르락내리락 하지 않는 그런 신앙수준에 도달하고자 오랫동안 애써왔습니다. 저는 승리하는 삶을 간절히 원했지만 내가 애를 쓰면 쓸수록 나는 더욱 비참해졌습니다. 저는 기도와 순종과 결단과 서원을 통해 그와 같은 삶을 달성하고자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허사였습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저의 행위로 죄의 능력으로부터 구원을 받고자 애를 썼던 것이지요. 왜 그처럼 어리석게 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받아들일 때 오직 믿음을 통해 죄의 능력으로부터 해방된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지요. 금년 1월에 와서야 내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하나 되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저는 다음과 같은 바울의 고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분에 의해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달려 있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나는 십자가로 인해 주님을 찬양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속박을 결코 털어버릴 수 없다는 절망 속에서 내가 십자가를 통해 죄의 능력을 물리치고 일어섰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것도 소용없었을 때 죽음이 나를 해방시켰던 것입니다.”  
2009-05-01 17:53:14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8 장 십자가와 자아   교계에는 수많은 교사, 사역자, 성도, 전도자, 선교사 등이 일하고 있고 성령의 은사들이 이들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록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복이 전달되는 것이 사실이긴 하나 “좀 더 가까이서 살펴보면” 이러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자아로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을지도” 모르며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님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드러나지 않은 개인의 삶에는 자아라고 하는 어둡고 불길한 세력이 웅크리고 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어째서 자신들이 상처받은 자존심, 까다로운 성미, 탐욕, 사랑스럽지 못함과 같은 것들을 극복하지 못하는지, 어째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수의 강”을 체험하지 못하는지 의아스럽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비밀은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은 그들이 비밀리에 그리고 습관적으로 “사당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섬기는 사당은 다름 아닌 자아라고 하는 사당이다. 그들은 이 사당에서 매일 절을 하며 예를 올린다. 바로 이것이 모든 문제의 근본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를 자랑할지 모르나 내적으로는 다른 신을 경배하고 있다. 그들은 동정을 받고 싶고, 응석을 부리고 싶으며, 제멋대로 하고 싶은 자아를 숭배하고 있다. 외적인 십자가, 죄의 형벌에 대한 대가 지불, 대속자의 죽으심 다시 말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이 십자가가 갖고 있는 놀라운 신비가 지닌 꿈에도 생각지 못할 깊은 의미에 대해서는 모른다. 이 십자가가 그리스도인의 내적인 삶에 적용될 때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는 전혀 모른다. 우리는 외적 십자가는 물론 ‘내적 십자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서 내적인 십자가로 역사하셔서 당신을 자아도취로 부터 벗어나게 하사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연합을 이루기까지는 그 어떤 ‘신령한 것’들도 당신에게 참 평안을 줄 수 없다.(F.J. Huegel in Cross of Christ). 하나님께서 내 자아를 거슬러 나를 단련하시니 내 자아는 병든 목소리를 지닌 비겁자로서 평안, 안식, 기쁨만을 열망한다네. 자아, 내 자신을 가장 잘 배반하는 자. 나의 가장 힘 있는 친구요, 치명적인 대적, 내가 어디로 가든지 나를 방해하는 자. 그러나 나의 자아를 억제할 수 있는 분이 계시니 그분은 나를 억누르는 무거운 짐을 벗기실 수 있으며, 멍에를 부수시고 나를 해방시키신다네. - Christina Rossetti- 인간은 하나님 안에 원래의 집과 거처를 갖고 있었으나 그분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아라고 하는 먼 나라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빛과 생명이 되셨고 그의 호흡을 제공하셨으며 모든 것의 중심이 되셨지만 그 놀라운 곳에서 빠져나온 인간은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소외된 자가 되고 만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내버렸고 자아가 인간의 왕좌를 차지하고 말았다. 결코 자리를 내놓으려하지 않는 권위와 찬탈자 바로 그가 자아인 것이다. 이제 자아는 인간에게 새로운 그러나 거짓된 중심이 되고 만 것이다. 자아는 해아래 그 어떤 것보다 자신을 사랑한다. 인간의 가장 훌륭한 행위마저도 숨겨진 자아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더러운 걸레 같은 것으로 다만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나타날 뿐이다. 그는 자기의 오른손으로 뭔가를 행할 때 자기의 자아 만족이라고 하는 왼손을 의식한다. 윌리암 로(William Law)는 이렇게 말했다. “자아는 타락한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악의 뿌리요, 가지요, 나무이다.” 이와 같은 막강한 자아가 전능하신 하나님(El Shaddai)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말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 그분께서는 그 무엇으로도 충격을 받으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분께서는 이 비극 중의 비극을 어떻게 해결하셨을까? 하나님께서는 더럽고 거짓된 자아의 충만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시기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하나님은 결코 인간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발적인 경배에 의해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원칙과 목적을 무너뜨리고 행동하시겠는가? 실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지혜를 펼쳐 보이셨다. 십자가는 실로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이다”. 갈보리는 최초의 인류의 뿌리를 내리친 도끼였다. 여기서 옛사람 아담은 끝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아담이 보좌에 오르게 되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인류의 새로운 머리로서 세상에 오셨다. 그분께서는 자발적으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오셨다. 그분께서는 자아가 완전히 배제된 사랑의 끈으로 우리를 자신에게 묶으셨고 우리를 죽음의 깊은 곳으로 그분과 함께 데리고 가셨다. 이 모든 것은 죄의 형벌을 척결하고 우리로 자아 대신 하나님을 선택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분께서 죽음을 택하신 것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은, 다시 말해 우리의 죽음을 죽으신 것은 우리를 죄악 된 자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오 성도 여러분이여, 사람의 아들께서 죄가 되셨고, 저주가 되셔서 놋 뱀처럼 높이 들리셨다. 십자가 아래에 서 있었던 그의 어머니와 함께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자: “실로 칼이 네 자신의 혼도 찔러 꿰뚫으리라. 이는 많은 자의 마음의 생각(그렇다. 바로 당신과 나의 생각을)을 드러내려 함이라” 어떤 사람은 “어째서 꼭 뱀이어야 하는가? 왜 백합이나 장미는 될 수 없는가?”라고 물을지 모른다. 왕과 그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하는 것이라면 왜 더 사랑스러운 다른 것이 될 수는 없었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묘사하시고자 했던 것은 죄악 된 자아생명(self-life)의 저주받은 모습이고 보면 그분께서는 가장 적합한 것을 택하신 것이다. 오직 뱀만이 이 진리를 상징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나에게 무서운 빛을 비추었다. 나는 이 빛 앞에 내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이 빛은 나의 죄악들만 비춘 것이 아니고 내 자신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내가 행하는 행동(what I did)은 내 자신(what I am)으로 부터 나온다. 분명한 사실은 모든 문제의 근원이 나 즉 바로 자아라고 하는 사실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십자가를 응시해보자.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받아들이도록 하자. 나는 빌라도의 뜰에 모인 군중을 보네. 나는 그들의 분노에 찬 모습을 확인하네;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그들의 외침소리 신성모독과 함께 소름을 끼치게 하네. 그 외쳐대는 군중 속에서 나도 그 중 하나임을 느낀다네; 그 거칠고 떠들썩한 음성 중에서 나는 내 음성을 확인한다네. 그 신성한 피를 흘리게 한 자는 바로 나였네, 내가 그분을 나무에 못 박았다네, 내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네, 내가 바로 그분을 조롱한 자였네. 나는 십자가 주변에서 군중들을 보고 있네 고통당하는 분의 신음소리를 조롱하는 소리; 그 역시 나의 음성처럼 들려오니 마치 나 혼자서 조롱하고 있는 것 같다네. -Horatius Bonar- 당신은 이와 같은 고백이 두려운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가? 이와 같은 자아를 떨쳐버리고 싶은가? 그러나 내가 이와 같은 자아의 모습을 인정하기까지는 자아를 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높이 들린 십자가의 보좌로부터 나는 자아를 먼저 인정하고 그리고 나서 그 자아를 내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제 자아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그치고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나는 가지만 쳐진 것이 아니고 완전히 몸통이 베어져 넘어진 것이다. 즉 나는 저주를 받은 것이다. 이제 나는 나의 모든 과거와 단절되었고 자아 자체와도 단절되었다. 나는 완전히 저주받기로 정해진 자다. 그리하여 어떤 다른 분께서 나를 대신하여 합법적인 처형을 당하셨을 때 나도 처형을 당한 것이다. 나는 그분과 함께 완전히 끝났으며 수치스러운 종말을 맞이했다. 나는 이와 같은 법적인 사형 집행을 진실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나는 내가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집행서류에 서명을 해야 한다. 내가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일은 너무도 무서운 일로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음에 이미 넘겨졌다.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을 받아들여 사형 집행서에 서명을 해야만 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일에 동의해야 하며 그분의 죽음의 능력으로 자아에서 내려와 자아를 부인해야 한다. 실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 죽음에 연합될 때에만 그 능력을 발휘한다. 나는 이 신성한 죽음이 나에게 행동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와 같은 자아 부인은 한두 가지 악한 행동을 근절하는 것 뿐 아니라 자아라고 하는 나무의 그 뿌리에 십자가의 도끼를 갖다 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아의 가지만을 치신 것이 아니고 나무 밑동을 완전히 잘라 버리신다. 모든 자기의 자기존중, 자기옹호, 자기영광, 치명적인 자기연민 이밖에 수없이 많은 자아의 표출은 자아라고 하는 나무의 깊이 박힌 뿌리에서 뻗어 나온 육신적 가지들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가지들만 친다는 것은 자아라는 생명이 더욱 추한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도록 만들뿐이다. 하나의 가지가 잘려 나갔지만 더 추한 바리새인적 가지가 더 왕성하게 자라나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겉으로는 멋있게 보일 수 있고 사람들 간에도 높이 평가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뒤 안에서 보자면 그의 주변 사람들은 자아라는 나무에서 맺힌 쓰디쓴 열매들을 증언하게 된다. 그러나 나에게는 풍성한 소망이 있다. 이는 내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안으로 접붙여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신성한 성품에 동참자가 된 것이다. 나에게 부여된 새 생명은 십자가에 못 박힌 생명이며 자아에게 죽은 생명이다. 자아는 자아를 극복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되었으니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께 복종하기만 하면 그분의 전능하신 죽음이 내 안에서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실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께서 나를 더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나는 자아에 대해 더욱더 완전히 죽게 된다. 누군가가 조지 뮬러에게 그의 사역의 비밀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에게는 내가 죽은 날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말을 하면서 거의 바닥에 닿기까지 고개를 숙였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날은 내가 조지 뮬러, 그의 의견, 선호, 취향, 의지에 대해 죽은 날이요, 세상과 세상의 인정 혹은 비난에 대해서 죽은 날입니다. 나는 심지어 나의 형제들 혹은 친구들의 인정과 비난에 대해서도 죽었습니다. 그때로부터 나는 오직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꾼으로 드러나기 위해 공부했습니다.” 비록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는 기뻐한다네. 당신의 신성한 완전함 안에서, 또한 절대적인 순복에서 나오는 깊고, 신비로운 기쁨을 맛본다네. 나는 비록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는 즐거워하네 나의 모든 것을 당신안에서 발견하므로: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라, 영원토록 그리하리: 아멘! 그렇게 되기를 바라옵니다! -Lucy A. Bennett-
2009-05-01 17:52:00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10 장 십자가와 두 가지 본성   D.M 팬튼(Panton)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사나운 사람일지라도 수용소에서 혼자서 지낸다면 부드럽고, 온순하고, 조용하며 합리적이고 신사처럼 행동한다. 그는 그 수용소 안에서 자기의 뜻에 따라 자기 방식으로 마음대로 살면서 평안하게 지낸다. 그러나 그 수용소에 훌륭한 신사를 한 사람 들여보내 보라. 그러면 이 사나운 사람의 얼굴빛은 변할 것이고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어느 순간에는 그 침입자에게 대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두 사람은 치열한 갈등을 겪게 될 것이다.” 나와 친한 한 동역자가 이렇게 말했다. “구원받기 전에 나는 내가 성질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이 여자 동역자는 늘 자기 방식대로 살면서 아무런 성질을 내지 않으면서 자신의 뜻에 따라 절제 있는 삶을 살아갔었다. 그녀는 결코 내적 갈등을 가져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자 그녀는 타락한 아담으로 부터 물려받은 이기심이 독버섯처럼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라” 그렇다. 육신은 결코 영적인 영역 안에 들어갈 수가 없다. 육신은 회심이 불가능하고, 치료가 불가능하며, 갱생이 불가능한 존재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직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는 옛 사람(육신)과 새 사람(거듭난 영)이 존재하게 된다. “첫째 사람” “자연인” 그리고 “정욕에 따른 썩어진 옛 사람”이라는 성경적 표현들은 “아담”안에 있는 우리 즉 우리가 육으로 태어난 때 물려받은 자아를 말한다.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거듭난 사람은 “새 사람”을 옷 입은 것이다. 믿는 성도로서 나는 “내 안에 (즉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육신적 생각은 사망이며 “하나님의 법에 복종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실로 할 수도 없다”(롬8:7). 육신적 생각은 성령의 일들을 철저히 배척한다. 육신은 단순한 대적이 아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화해가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신은 “하나님께 대한 대적”이므로 화해가 있을 수 없다. 이에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육신은 성령을 거슬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할 수가 없느니라.” 그러나 나에게 있어 실로 엄청난 충격은 “내가 육신적이서 죄 아래 팔린 것과 동시에 속사람을 따라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이중적인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거의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느 때인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간에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부르짖을 것이다. 성경말씀과 우리의 체험에 따르면 이 전쟁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전쟁이요 지독한 내란인 셈이다. 이 전쟁은 외부의 적과 벌이는 전쟁이 아니다. 이 전쟁은 인간의 내부에 숨어 있는 “간첩”과의 싸움인 것이다. 따라서 이 치열한 전쟁이 그 어느 쪽도 이길 수 없는 교착상태에 빠져 버린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또한 패배주의적인 입장을 택한 채 자신들의 매일의 실패를 “옛 사람”에게만 탓을 돌리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은 아마 일부 성경 교사들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두 인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옛 사람과 새 사람이라고 하는 두 개의 개체가 완전히 분리되어 독립된 개체로 존재한다. 새 사람은 선한 천사처럼 완벽하고 온전한 반면 옛 사람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악한 자이다.”(H. Bonar).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오직 하나의 개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의지에 따라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은 두 개의 독립된 서로 다른 인격이 아니다. 다만 단 하나의 인격 안에 존재하는 두 가지 측면인 것이다. 모울 주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몸은 결코 독립된 존재 즉 별도의 인격이 아니다. 만약 우리의 몸이 ‘음모를 꾸민다면’ 그것은 독립된 외부인의 죄가 아닌 나의 죄인 것이다.” 앞서 우리는 ‘독일인-미국인’이 요청한 알현을 윌리암 황제가 거부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었다. 그 알현이 거부된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독일에서 태어났으나 미국에 귀화한 사람은 미국인이 되었다.” 황제는 이렇게 답변했던 것이다. “짐은 미국인도 알고 독일인도 알지만 ‘독일인-미국인’은 알지 못하노라” 나는 한 개체로서 한때 “아담 안에” 있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오해하지 말라. 나는 “아담 안에”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동시에 있을 수 없다. 내가 아담 안에 있었을 때 나는 “육신 안에” 있었으며 저주 받고 멸망 받은 상태에 있었다. 그때 나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아담으로부터 베어졌고 십자가에서 생명의 연합으로 인해 그리스도께로 연합하였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왜 못 박힐 수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치유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함으로써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즉 거듭난 사람들은 이제 ‘아담-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약 내가 이와 같은 신분이라면 나의 왕께서는 결코 알현을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다. 구약 성경에 보면 어떤 죄인들은 율법을 피하기 위해 “주의 장막으로 피신하여 제단의 뿔들을 붙들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정당한 보음을 받았다. “너는 그를 나의 제단에서 끌어내어 죽일지니라”(출21:4). 마찬가지로 모든 육신은 저주아래 있다. 우리의 옛 사람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더 정확히 말하면 못 박혀 있다. I am crucified라고 되어 있는 권위역본의 번역이 얼마나 정확한가?- 역자 주). 우리는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왕께서 알현하실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두 가지 본성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다가 갈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육신에게는 더 이상 자비가 있을 수 없다. 육신은 성소에 다가설 수가 없다. 만약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그를 나의 제단에서 끌어내어 죽일지니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우리가 그분께 다가설 때 육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상태로 다가서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왕을 알현할 수가 없다. 십자가는 우리와 옛 사람 사이의 영원한 분리를 선포한 것이다. 오직 이와 같은 자세로 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그분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예를 한 번 들어 보도록 하자. 유대인과 힌두교도가 기독교로 개종하면 그들의 친척들은 이들을 파문시키기 위해 그들의 장례식을 거행한다고 한다. 그들을 완전히 축출해 버렸다는 것을 공포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장례식이후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된다. 우리는 개종한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부터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다. 이 장례식이 끝나자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마지막 작별 키스를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를 가로막고 서서 “당신은 저 죽은 개 같은 녀석에게 키스하려고 하세요?” 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오셨을 때 그분께서는 나를 자신에게 붙들어 매시고 나를 저주받은 나무로 데려 가시고 무덤에다 내려 놓으셨다. 이로써 그분께서는 나와 나의 “옛 사람”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키신 것이다. 만약 내가 그 “죽은 개”에게 키스하기 위해 되돌아간다면 내 영혼의 신랑에게 얼마나 모욕을 드리며 실망시키는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제는 나의 사형 선고문에 엄숙하게 서명을 하고 영원한 장례식을 지낼 때이다! 얼마 전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설교했을 때 이 설교를 들은 한 멋쟁이 친구가 이렇게 평을 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아니 그렇게 못됐단 말이야!!” 이에 대해 한 성도는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질투나 공허감이나 교만 같은 것으로 괴로워한 적이 없단 말이오?”(이와 같은 것들은 누구나 다 갖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적이 있지요” “그렇다면 이런 일을 당할 때 당신은 어떻게 합니까?” 이에 대해 그는 “오! 그거야 주님의 보혈이 담당하는거지요.” 라고 너무도 쉽게 대답하였다. 그러니까 이 가련하고 자기 만족에 물든 청년에게는 죄가 아직은 “심히 죄된 상태가 아닌 것이다.” 그에게는 주 예수께서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편리한 도피처이며 그분의 보혈은 피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든 책임을 면케해 주는 만병통치약인 셈이다. 자, 이제 로마서 5장에서 다루는 칭의와 로마서 6장에서 다루는 성화와의 밀접한 관계를 면밀히 주목하기 바란다. 로마서 5장이 신앙 생활의 기초라고 한다면 로마서 6장은 그 후에 이어진 신앙 생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죄가 넘친 곳에 은혜가 더욱더 넘쳤나니”(롬5:2). 그러나 로마서 6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죄안에 거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떻게 더 이상 그 가운데 살겠느냐?”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의 죽으심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므로” 우리와 아담 그리고 우리와 죄와의 모든 관계는 영원히 끝났다고 선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죽으심으로 나의 옛 사람과 새 사람 사이에 “갈보리의 죽음”이라고 하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음을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이룬 나로서는 그 십자가의 죽음에 완전히 연합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나의 법적인 위치이다. 바로 이 사실에 근거해서 나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되었고 하나님과는 하나 됨을 누리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Huegel). 이것이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에 얻게 된 나의 지위인 것이다. 의롭게 된 성도가 회심 직후부터 자신은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 수 있는 성경적 근거는 충분하지만 실제로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자기 안에(즉 자기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배울 때까지는 광야 길에서 헤매게 된다(로마서 7장). 그러나 우리가 진정 절망과 좌절 가운데서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고백을 하게 될 때면 비로소 우리는 열매 맺을 수 있는 순종의 삶이라고 하는 축복된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로마서 8장에도 아직 싸움은 남아 있다. 그러나 로마서 7장에서처럼 가련하고 비참한 싸움이 아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가장 비극적인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이곳에는 “나”와 “자아”로 가득 차 있다. 반면 로마서 8장의 영적 싸움은 바울의 승리의 모습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이 그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두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육신을 따라가는” 길이 있다. 반면 다른 쪽에는 “성령을 따르는 길”이 놓여 있다. 가장 승리를 잘 하는 그리스도인 역시 항상 이 두 가지 길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에 따르면 성령의 법에 따라 해방 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제 “성령을 따를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선택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선택을 하는 주체는 우리 각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빚진 것이 아니니 육신을 좇아 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이야말로 커다란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졌던 옛 채무는 이미 청산되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3절에서 경고와 더불어 격려를 덧붙이고 있다.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은 것으로 처리하면 살리라.” “너희가 죽을 것이나”라는 표현은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즉 “죽게 된 것이다.” “죽음의 길에 서 있는 것이다” 혹은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리라” 등이 그것이다. 정욕에 이끌려 사는 자들에게 경고하면서 야고보가 말했던바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리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육신을 따라” 행하는 자들에 대한 강력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메튜 헨리는 이렇게 말했다. “한마디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에 처해 있다. 즉 육체를 불쾌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영혼을 파멸로 몰고 가야 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셋과 브라운은 그 유명한 주석에서 “만약 우리가 죄를 죽이지 않으면 죄가 우리를 죽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육신과 전쟁은 교착상태에서 지속되는 전쟁이 아니라 그 누군가가 상대방의 생명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결투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간 후(이 사건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상징한다) 그들은 열매로 가득한 땅으로 들어갔을 뿐 아니라 치열한 전투의 땅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들 앞에 놓인 딜레마는 “만약 너희가 가나안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그들이 너희를 죽이고 말 것이다”였던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은 육신과 성령과의 전쟁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엄연한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권면의 말씀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자 한다.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죽이면 이란 단어는 죽음에 처한다는 것이요 몸의 행실이란 저주받은 가나안적인 육체를 뜻한다.      
2009-05-01 17:49:59 | 관리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제 9 장 십자가 - 본성과는 반대됨   스펄젼은 총을 수리하기 위해 대장장이에게 갔던 한 시골 농부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대장장이는 농부가 가져온 총을 검사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총은 매우 낡았고 다 망가졌으며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상태입니다. 이 총을 어떻게 수리해 드릴까요?” 이에 대해 농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총의 모든 부분이 다 낡았다면 전부 새로 만들어야겠군요” 그러자 대장장이는 “뭐 하러 전부 뜯어고칩니까, 아예 새 총을 하나 사시는 것이 낳을 겁니다”. 이에 농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 미처 그 생각을 못했군요. 바로 그것이 내가 원하던 바입니다. 내가 총의 모든 부분을 수리하라고 한 것은 새 총을 갖고 싶다는 뜻이었지요. 나는 새로운 총을 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련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의도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즉 “완전히 새로운 사람을 만드셔서 인간으로 새로운 본성을 갖게 하시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농부가 매우 어리석은 것 같지만 사실 우리의 영적 분별력에 비하면 매우 분별력이 많은 셈이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를 수리하려는 것이 아니고 옛 인류 전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다. 하나님께서는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지혜로 아담에 속한 인류에 대한 완벽한 처방으로 십자가를 선택하셨다. “그리하여 어떤 육체도 그분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리라” 십자가는 우리의 뜻과는 어긋난다. 그리스도께서는 “내 뜻이 아니옵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씀하셨다. 십자가는 또한 우리의 지혜와는 반대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지혜는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정과도 반대된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육신과 함께 그 애착 정욕을 십자가에 달아 버렸느니라” 십자가는 또한 우리의 자긍심과도 모순된다. 우리는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 즉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던 그 생각을 가져야만 한다. 십자가는 우리의 자아에 반대된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산 자들이 이제 부터는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후 5:14, 15). 이처럼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본성과 모순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따라야 할 확고하고도 변함없는 원칙은 이러하다: “사람이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목숨마저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가셨을 때 “도끼는 이미 뿌리에 놓였다.” 옛 아담이라는 나무줄기는 완전히 잘려 나가고 만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 옛 사람이 완전히 파산하였음을 보여 주며 아담에 속한 옛 사람은 사망하였음을 선언한다. 십자가는 인간의 자연적인 생명(즉 육으로 난 것)을 제거하는 방법이며 이로써 초자연적인 새 생명이 대신 자리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우리를 “강화”시켜주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다듬기 위해서가 아니라 베어 버리시려고 오신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행하도록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행함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십자가는 모든 육신적인 행동에 반대하며 하나님의 방식으로 죽은 것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포도주를 옛 부대에 담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새 천을 낡은 옷에 대고 깁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옛 사람의 누더기를 완전히 벗겨 버리기 위해 오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계명은 우리가 아담으로 부터 물려받은 모든 도덕적 영적인 유산을 완전히 청산해 버리는 것이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핵심적인 본질이다. “우리의 자아야말로 타락한 인간이 지닌 모든 악의 요소들의 뿌리이며 나무요 가지들인 것이다”(율법). 자아 부인이란 그저 이런 저런 방종을 절제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A.T. 피어슨 박사가 말한 대로 모든 방종 -크고 작은 여러 종류- 이라는 가지들의 뿌리인 자아에 도끼를 대는 것이다. 자기 의, 자기 심리, 자아 추구, 자기 만족, 자기 의지, 자기 방어, 자기 영광 등. 이 뿌리에서 자라나온 수천 개의 가지들 중 그저 몇 개의 가지만을 제거한다 할지라도 또 다른 가지들이 더욱 왕성하게 뻗어 나간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따라서 도끼가 자아의 뿌리에 놓일 때까지 그리하여 우리의 자연적인 생명이 성령의 생명에게 자리를 양보할 때까지는 “우리의 모든 미덕은 그저 썩은 뿌리에 접붙여진 그럴싸하게 보이는 가짜 가지들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린 이후에도 옛 자아의 뿌리와 샘물로부터 가끔씩은 옛 모습이 들어나는 것은 어쩐 일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능력을 배워야할 때가 바로 이 순간인 것이다. 자 예를 들어보자 예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옛 아담의 줄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로서 “야생포도”를 맺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에게 참여한 자로서 그분께로 접붙여진 것이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으로 믿음을 통해 들어가게 되었을 때 나는 아담의 줄기로부터 차단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살아 계신 포도나무인 그 그리스도 안으로 접붙여진 것이다. E. J. 페이스(Pace)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얼마 전 내 고향인 플로리다에서 감귤 농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농장 주인에게 과일을 어떻게 접붙이는지를 보여 달라고 청했다. 그는 나를 묘목원으로 인도했다. 그는 끝에 갓 나온 싹이 난 작은 가지를 묘목에서 조심스럽게 잘라냈다. 그는 근처에 있던 다른 나무쪽으로 가서는 그 위에 칼로 십자가 모양을 파고서 그 안에다 그 어린가지를 능숙하게 집어넣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옛 줄기에서 베어져서 십자가에서 영원한 신성 안으로 접붙여진 것이다. 이제는 믿음으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상속자이다”라는 사실을 붙들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동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접붙임은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접붙이는 방식은 이러하다. 즉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가지를 이보다 못한 줄기에다가 접을 붙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자연의 법칙과는 반대로 죽은 나무에다 접붙여졌다. 참 포도나무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 구속주의 찢겨진 옆구리에 우리는 접붙여진 것이다. 즉 나쁜 열매 맺는 자가 좋은 열매 맺는 분께 접붙여진 것이다. 이외에도 너무도 중요한 “본성을 거스르는” 또 한 가지 요소가 있다. 자연에 있어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연합이 이루어지면 가지는 여전히 “종류대로” 즉 원래 가지고 있던 그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 보자면 나는 아담 안에서 죽었다. 나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생명으로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 따라서 “하나님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이 자연적인 생명은 죽어야하고 “숨”을 거두어야만 한다. 십자가의 형을 받게 된 나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이제는 본성에 따라 살기에는 적합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십자가는 이 사실을 보여 주며 나는 이에 동의해야만 한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심을 인정해야 한다. 이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의 생명이 접붙여진 가지인 나를 통해 표출되어야 하며 나의 본성과는 너무도 어긋나는 의로운 생명의 열매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그분의 본성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에 이르도록 표출되어야 하는 것이다. 에이미 카미카엔씨는 코힐라(Kohila)라는 간호사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 안에 있는 뭔가와 맞닥뜨렸다. 그것은 우리가 난탄(Nan than)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난(Nan)은 나(I)를 뜻하고 탄(than)은 이 대명사를 강조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자아를 포기한 사람을 통해 주님께서 이루시지 못할 일은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난탄(Nan than)은 무척이나 자신에 대해 염려를 한다. 코힐라는 그녀의 탄을 포기하였고 이에 다른 사람을 돕는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시게 되면 그분은 그 생명을 전적으로 장악하셔야 한다. 그분은 “나의 자아”를 완전히 몰아내실 때까지 끝까지 “연좌 농성”을 벌이실 것이다. 십자가는 “내가 아니고.....”라는 고백이 나올 때까지 나를 궁지로 몰고 갈 것이다. 자연에 따른 접붙이기와 열매 맺기의 법칙에는 반대되는 방식으로 “너희가 내 안에”라는 고백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먼저 이루어지고 나서야 “내가 너희 안에”가 이루어져 합당한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길은 자연의 의지를 가로질러 뻗어 있고; 예수님의 발은 육신이 지배하지 않는 곳을 밟는다네 노예의 족쇄를 뒤로 하니 복된 일이로다. 우리의 자아를 뒤로하니 수의와 무덤만이 남아있네! -Ter Steeegen-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근거하여 접붙여진 어린 가지의 고백을 들어보자. “저는 저의 혈통에서 잘려졌습니다. 저는 이전의 모든 관계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저는 옛 가문으로부터 철저히 축출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옛 것들에 대해 죽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살고 있으며 - 저는 여전히 작은 야생가지일 뿐입니다- 여전히 내 자신일 뿐입니다. 저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살고 있는 것은 제가 아닙니다. 제 안에서 다른 분의 생명이 살고 있기에 제가 맺은 모든 아름다운 열매는 제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다른 분의 생명이 맺은 열매이며 이 생명은 계속해서 저의 옛 생명을 거슬러 위대한 농부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고귀한 열매를 저를 통해 맺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이와 같은 원칙들을 끊임없이 거스르게 됩니다. 이에 대해 F.J. Huegel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아에 매여 있고 뒤덮여 있고 얽혀 있고 충만해 있어서 우리의 영적인 본성이 하나님 안에 중심을 두려면 우리의 옛 성품을 완전히 거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깊은 사랑의 연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인 것이다. 십자가는 부패한 인간의 본성을 거칠게 대한다. 즉 옛 생명을 죽여 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죄가 우리를 씻긴다거나 옛 성품을 뿌리 뽑는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종종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자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종종 간과한다. 프랜시스 데 살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기성복처럼 이미 만들어진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또한 아무런 어려움도 가져다주지 않는 거룩함을 얻는다는 것도 환상이다. 이와 같은 피상적인 거룩함은 인간의 본성과 매우 잘 어울릴 것이다. 우리는 성결에 이르는 비결만 발견한다면 쉽고 빠르게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우리 인생동안 십자가가 놓여야할 옛 모습이 우리의 본성 안에 얼마나 남아 있는지 계속해서 찾아내야만 한다. 만약 독자 여러분께서 자아와 죄에 대해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자아의 부산물을 발견하고 있지 못하다면 여러분의 취향, 선택, 선호하는 것 등에 분명한 갈보리 십자가의 표시가 찍혀야만 할 것이다. 자연적으로 타고난 모든 요소에 십자가의 죽음의 표시가 찍혀 있어야만 한다. 자, 우리 모두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자연적인 선택위에 그분의 십자가를 표시하시도록 기도하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여 오 당신의 거룩한 십자가를 표시하소서. 자아가 엿보이는 그 모든 요소위에 당신의 상실의 표식을 찍으소서 우리가 보기에는 가장 고귀한 것 위에 죽음의 표시가 이곳저곳에 놓이게 될 때 우리 모두 기이히 여기지 않고 이것이 기도의 응답임을 인정하리이다. -Army Carmichael- 그러나 “내가 아니고”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일생 내내 장례를 치르는 사람처럼 우울한 삶을 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결코 그럴 수가 없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는 자는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광스럽고 영원하신 분, 만물의 창조자,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그분”께서 나를 자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그분의 성전을 삼으시고는 내가 살아 있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사신다”는 고백을 실제로 할 수 있게 하신다는 이 사실보다 더 놀라운 일이 이 세상 그 어디에 있겠는가? 그분께서는 “내가 사니 너도 살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라는 신비한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인 것이다. 가지는 포도나무 안에 있는 것이다. 실로 생명과 사랑과 자유의 영광스러운 연합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그분과 함께 살아났고 그분과 함께 일으켜 졌으며 그분과 함께 앉혀졌다. 나는 영원하신 분 안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다시 말해 나의 생명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겨진 것”이다. J Gregory Mantle은 이렇게 말했다. “퍼트셔 골짜기에는 작은 개울의 바위 위에서 자라고 있던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곳에는 뿌리를 뻗은 흙도 없었고 영양분을 흡수할 흙도 없었다. 이 나무는 오랫동안 성장을 방해받았고 건강하게 자라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식물이 갖고 있는 놀라운 본성에 의해 근처에 있던 좁은 다리를 통해 수염뿌리를 건너 쪽으로 보냈다. 그리고서 실개천 건너 쪽 둑에 있는 옥토위에 뿌리를 박았다. 나무는 수액과 자양분을 빨아들여 급속히 건강하게 성장했다. 이 작은 다리가 나무에게 생명을 제공했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믿는 자에게는 생명의 원천인 것이다.” 만약 우리의 생명의 뿌리가 부활하신 주님께 놓여있기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 안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열매를 맺어 보려고 노력해 본 적이 없는가? 그리하여 쓰라린 체험을 맛본 적은 없는가? 우리는 열매를 맺기 위해 애써 봤고, 노력해 보았고 기도해 보았고, 애통해 보았다. 그러나 이 모두가 허사였다. 우리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명의 흐름은 불순물과 뒤섞여 우리의 거룩하지 못한 동기들을 통해 혼탁해지고 만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풍성한 충만함이 있음을 알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이것을 얻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허드슨 테일러가 고백했듯이 우리도 이렇게 고백하게 된다. “나는 뿌리 안에 풍성한 충만함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나의 보잘 것 없는 가지를 뿌리에 박을 수 있는 지가 문제이다.” 이와 같은 절망의 극에 달할 때 결국 우리는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감사드리는 것은 완전히 신성하고 능력 있는 생명이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참된 살아있는 힘을 찾으려면 나와 나의 생명에서는 하지 말라. 이는 자아는 자신만을 사랑하며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함이라 씨가 뿌려진 땅에서 열매를 구하듯이 살아있는 생명을 찾되 죽임당한 생명으로부터 구하라 그리고 나서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서둘러 그 생명에 치명타를 가하라. 그리하면 상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던 것에서 무한한 보물을 발견케 되리니 씨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어디서 새로운 부활의 싹이 발견되겠는가? -T.C. Upham
2009-05-01 17:47:44 | 관리자
지금까지 저는 킹제임스 성경을 쓴다고 하면서 또 근본주의를 한다고 하면서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한때 저 자신도 비난받을 일들을 많이 한 사람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이제 우리가 - 저와 우리 근본주의 성도들이 - 바르게 행하자는 취지의 글을 몇 번 썼습니다. 그랬더니 맹비난이 들어오더군요. 한 마디로 너나 잘하라는 것입니다. 너나 교만 떨지 말고 남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라는 댓글을 받고 참으로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좀 더 사랑을 담아 글을 쓰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제 모습이 그랬음을 시인하고 지금도 그런 면이 있음을 시인합니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날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고 나아지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근본적인 믿음을 갖기로 작정해서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식 독립침례교회 혹은 장로교 개력주의 교회 등만을 유일한 근본주의 틀로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거기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근본적인 것을 이야기할 때는 성경에 있는 것을 따르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도 한때 침례교 목사였고 앞으로 기회가 주어지면 분명히 다시 '제대로 된 목사' - 과거에는 잘 몰라서 형편 없는 목사였음 - 의 길을 갈 것입니다. 시간이 가면서 많이 느끼는 것은 제가 생각하거나 알던 것 이상으로 근본주의가 폭이 넓고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결코 타협하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을 그렇게 편협한 존재, 획일화된 존재로 만들지 않았으므로 폭 넓게 사고하고 바르게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독자께서는 앞으로 본 사이트에서 제가 근본주의라고 할 때는 성경에 있는 것을 따르자는 것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름도 남기지 않고 악성 댓글을 올리면 마음이 후련해지는 분이 여럿 있는 것 같습니다. 이름은 없어도 접속하는 순간 이미 IP Address가 기록됩니다. 그러므로 제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누가 이런 악한 일을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댓글을 쓰도록 한 것은 성도들 간의 대화를 유도하고자 함인데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사이트에 들어와서 항상 욕을 하고 악성 댓글을 남기는 것은 신사가 할 일이 아니지요. 더욱이 여기의 제 글을 수시로 모니터링해서 상부에 보고하는 분들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참 제가 이렇게 유명하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인 줄은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아무 힘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저를 무서워하지 말기 바랍니다. 할 말이 있고 정말로 그것이 마음에 걸리고 저를 사랑해서 충고하고 싶으면 전화나 e-mail을 주면 안 될까요? 이미 저를 거쳐간 사람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데 그러면 더더욱 신사가 아니지요. 우리 모두 Gentlemen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어쨌든지 도전을 주고 교만하지 말라고 충고를 주어서 감사합니다. 깊이 새기겠습니다. 내 편이든 반대 편이든 내게 도전이 되는 글을 주었으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 아닙니까?   부탁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우리 모두가 성경대로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고 가끔씩 이런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틀렸으면 알려주십시오. 바른 의견이면 고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제와 오늘 많이 묵상한 찬송가입니다.   인자한 말을 가지고 사람을 감화시키며갈 길을 잃은 무리를 잘 인도하게 하소서.   이것을 책상 앞에 붙여 놓고 매일 되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이런 사람이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09-05-01 17:39:28 | 관리자
저는 이번 겨울에 미국 노쓰캐롤라이나주에 있는 앰배서더 칼리지를 방문했습니다. 지금 거기서 공부하고 있는 한 젊은이와 그분의 멘토이신 존스턴 목사님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존스턴 목사님은 한국에서 10년 이상 침례교 선교사로 일했고 캐나다 뱅쿠버에서 몇 년 동안 한인 목회를 했는데 놀랍게도 로버트 할리 수준으로 한국말을 유창하게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 명의 미국 선교사들을 봤지만 한국에 선교를 하러 왔다고 하는 이들의 주장이 무색할 정도로 이들은 거의 한국말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너무 놀랍게도 우리말을 유창하게 했습니다. 현재 그곳에서 선교학 교수를 하면서 주변의 한인 교회에서 목회를 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좋은 만남이었습니다.   그 날 그 학교 총장님께서 제게 아침에 10여 분 정도 학생들 앞에서 간증할 기회를 주어서 킹제임스 성경 사역을 알리고 왔습니다. 그 후에 한 연세드신 교수님이 나와서 학생들에게 마음을 잘 지켜야 한다고 충고를 주는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70세 먹은 노인이 20세 아이들에게 자기의 인생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성경으로 우리의 마음을 풀어 주는데 너무 말씀이 달았습니다.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 나 주는 마음을 살피며 속 중심을 시험하여 각 사람의 길들과 그 사람의 행위의 열매대로 그 사람에게 주느니라(렘17:9,10).   우리의 모든 것이 마음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까? 좋은 것, 싫은 것, 믿고 싶은 것, 믿고 싶지 않은 것, 비난하는 것, 칭찬하는 것, 주님 밑에서 순종하려는 것, 내 뜻을 세우려는 것, 결혼하는 것, 이혼하는 것, 말을 곱게 하는 것, 말을 막하는 것 등 우리의 모든 삶이 마음에 의해 결정됩니다. 한 번 가만히 앉아서 그런가 안그런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이런 차원에서 잠언을 기록한 솔로몬의 마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열심을 다하여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서 나오느니라(잠4:23).   우리의 믿음 생활 특히 성화 과정은 단적으로 한 마디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바른 것과 그른 것이 종잇장처럼 얇은 마음의 생각 하나에 의해 결정됩니다. 부부 관계, 연인 관계도 그렇지 않습니까? 다윗의 큰 아들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겁탈한 이후에 그의 마음 속에는 이전의 사랑이 다 없어지고 순식간에 미움이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 미움의 정도는 그가 품었던 사람보다 훨씬 강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삼하13:15 참조). 이게 사람의 마음이지요.   그러므로 이제 킹제임스 성경을 읽는 저와 여러분은 더더욱 마음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마음의 묵상이 필요합니다. 깊이 생각하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여기서 성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2009-05-01 17:36:55 | 관리자
독신생활   지난 달 통계청이 발표한 ‘2005∼2030년 장래가구 추계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총 가구 수는 독신가구의 증가에 힘입어 2030년에는 올해보다 300만여 가구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이 된다. 이는 독신주의자들의 증가와 함께 만혼 및 이혼율의 증가, 그리고 기러기 아빠처럼 가족과 떨어져 혼자서 살아가는 가장들이 급격히 늘어가고 있는 세태를 확인해 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혼자 살아가는 것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요즈음, 오히려 독신을 부추기기까지 하는 교계 안팎의 주장들도 제법 듣게 된다. 그러나 독신생활은 우리의 육적, 영적 건강에 모두 해가 됨을 알아야 한다(창2:18; 딤전4:3; 5:14).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합당한 협력자를 만들리라, 하시니라.”(창2:18) 최근 독신생활이 흡연보다 더 건강에 나쁠 수 있다는 영국 워릭대학교의 연구결과를 비롯하여 독신생활이 우리의 몸에 갖가지 이상을 초래한다는 많은 연구보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왜냐하면 기혼자의 경우 사회적 지지자로서 배우자가 스트레스를 덜어주고, 건강한 생활습관을 갖는 데 도움을 주는 반면 독신자는 상대적으로 나쁜 생활습관에 물들기가 쉽기 때문이다(전4:9-12). 보통 독신생활을 하게 될 경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불규칙한 생활과 장기간 혼자 지내면서 생기는 외로움이다. 독신 남성들의 경우 먼저 식생활이 불규칙해지기 쉬운데 단순히 식사를 한 끼 때운다는 생각으로 지내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양섭취의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 그리고 인스턴트식품을 많이 먹다보면 비만을 비롯한 고혈압, 당뇨병 등 각종 성인병의 위험도 높아지게 되고 또 불규칙한 식사로 인해 위염, 위궤양 등 소화기 질환도 잘 발생할 수 있다. 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렇지 않겠지만 혼자라는 이유로 잦은 술자리를 가질 개연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필요이상으로 칼로리 섭취량을 높여 비만이 될 수 있으며, 알코올로 인해 간질환 등 건강을 쉽게 해칠 수 있다. 아울러 혼자라는 심리적 소외감과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면 심한 경우 우울증을 유발하며, 극단의 경우에는 자살까지 이어지게 된다. 미국 워싱턴 대학의 토머스 홈스 박사와 리처드 라헤 박사가 고안한 ‘스트레스 지수’(life change scale; stress scale)에 따르면 43개의 스트레스 항목 중 어느 것보다도 강도가 높은 세 가지가 ‘독신’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즉 배우자의 죽음(100), 이혼(73), 별거(65) 등 독신생활에 대한 항목들이 수감(63), 근친 사망(63), 실직(47) 등 우리가 심한 스트레스라 생각하는 다른 항목들에 비해 높은 스트레스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러한 스트레스 점수가 높을수록 병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지고, 질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독신생활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신체적 건강에까지 문제를 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결혼 후 마누라의 잔소리가 독신자의 자유보다 낫다’는 말이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 여겨진다. 아울러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홀로 있기보다는 넘어질 때 일으켜주고 차가운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동료를 두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전도자의 고백이 시대를 초월한 진리임을 다시 한번 확인케 된다(전4:10,11). “누구든지 아내를 얻는 자는 좋은 것을 얻고 주의 은총을 얻느니라.”(잠18:22)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자기들의 수고로 인하여 좋은 보상을 소유할 것이기 때문이라.”(전4:9)          
2009-05-01 17:34:24 | 관리자
채식주의 날로 건강에 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는 오늘날,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채식을 하여야 진정한 건강을 누릴 수 있다는 주장을 심심치 않게 접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최초로 허락한 음식은 과일과 곡식과 견과류의 채식 식단이었다(창1:29). 그래서 최근 들어 과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는 채식 식단의 우수성은 이미 성경적 창조원리에 의한 것이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이것은 또한 다니엘과 세 친구의 예에서도 입증이 된다(단1:1-21). 즉 열흘 동안 물과 콩으로만 식사를 한 다니엘과 세 친구의 얼굴은 왕이 정해 준 음식을 먹은 모든 아이들보다 더욱 아름답고 살이 기름지게 보였다(단1:15). 그리고 삼년 뒤에 채식만 한 이 네 소년은 느부갓네살의 시험을 받았는데 바벨론의 모든 지혜로운 자들보다 열배나 더 총명하였다. 따라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우리의 신체구조나 유전정보와 별 차이가 없는 다니엘과 세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채식을 하게 되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가공된 인스턴트식품의 범람과 육식위주의 식생활문화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채식이 웰빙식일 뿐 아니라 이처럼 성경적이라고까지 하는 얘기를 들으면 더욱 귀가 솔깃하게 된다. 그러면 이와 같은 성경적(?) 채식예찬론자들의 주장은 정말 성경적인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 후 우리에게 육식을 허락하셨다. 즉 지구 전체에 대격변이 일어나 이전과 달라진 자연환경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육식이 필요함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먹을 것이 될 것이요, 푸른 채소와 같이 내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었노라.”(창9:3) 그리고 다니엘과 세 친구는 채식이 창조원리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채식을 택한 것이 아니었다. 즉 왕이 주는 음식은 먼저 우상에게 드려진 것이며 또 왕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버금가는 충성을 왕에게 바친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거절한 것이다. 아울러 다니엘이 평소 육식도 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단10:3). 만일 쇠고기가 해롭다면 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두 천사와 함께 방문하셨을 때 그분을 위해 쇠고기를 준비하였으며 또 왜 하나님께서는 그 고기를 드셨을까(창18:1-8)? 그리고 육식이 잘못된 것이라면 예수님께서는 빵만으로도 수많은 이들을 먹이실 수 있었을 터인데 왜 빵과 물고기로써 따르는 이들을 먹이셨으며(마14:13-21; 15:32-39) 부활하신 후에도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먹으라고 하셨을까(요21:1-14)? 우리가 구약성경을 자세히 공부해보면 하나님께서 영적 전쟁을 치루는 전사들로 레위 자손들을 세우신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들의 식사는 기름진 양과 쇠고기가 대부분이었다(레7:6-34; 신18:3-5). 또 구약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바알의 대언자들을 대면하기 바로 전에 주님께서 그를 위해 마련하신 식단에는 물론 고기가 포함되어 있었다(왕상17:1-7). “까마귀들이 아침에 빵과 고기를 그에게 가져오고 저녁에 빵과 고기를 가져왔으며 그가 시냇물을 마셨더니”(왕상17:6) 우리가 영적 전쟁에 들어가면 엄청난 단백질 소모가 있음이 최근 여러 사역자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그래서 만약 사탄이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고기를 못 먹게 한다면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르는 동안 우리 몸의 면역기능이 급속히 떨어져 사역을 중단해야 되는 일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힌두교인들이나 뉴에이저들은 채식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요가를 하는 이들은 고기로부터의 진동(vibration)은 유해하며 영적 감도를 감소시킨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능력을 받기 위해서 몸 안에 아카사(akasa)라고 불리는 물질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채식을 하고 성욕을 금함으로써 고갈되지 않게 된다고 그들이 믿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고기는 건강에 좋지 않으며 채식 위주의 식사가 콜레스테롤수치를 낮추고 심장병, 암, 고혈압, 당뇨병 등 성인병의 발병 위험을 줄여준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기름이 많지 않은 양질의 (붉은) 고기 자체가 건강에 직접 해를 준다는 보고는 없다. 오히려 극단적인 채식주의는 영양학적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건강에 해가 될 수 있다. 식단에서 동물성 식품이 배제되면 철, 칼슘 같은 무기질, 비타민 B12, 비타민 D, 엽산 등의 공급이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적혈구 생산에 관여하는 비타민 B12는 동물성 식품에만 존재하므로 채식을 할 경우에는 비타민 B12 첨가 두유, 시리얼 등 비타민 첨가식품을 따로 먹어야 한다. 이제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자.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셨으니 이들은 위선으로 거짓말을 하며 자기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진 자들이라. 이들이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삼가라고 명령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사 진리를 믿고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은 선하고 감사함으로 받으면 거부할 것이 전혀 없나니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히 구별되었느니라.”(딤전4:1-5)
2009-05-01 17:33:44 | 관리자
오캄의 면도날(Ockham's Razor)   중세 철학의 일반적인 원리인 ‘오캄의 면도날’은 오늘날까지 인문학뿐 아니라 과학 분야에서도 주요한 논리적 잣대가 되어 왔다. 즉 ‘복잡한 의견을 불필요로 하는 원리’(the principle of unnecessary plurality), ‘절약의 원리’(the principle of parsimony), ‘단순성의 원리’(the principle of simplicity) 등으로도 불려지는 이 ‘오캄의 면도날’은 사실 의학적 판단을 비롯한 모든 이성적 사고의 영역에서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사용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마이코플라즈마 폐렴의 경우를 보자. 이 폐렴에서는 다형홍반, 간염, 용혈 빈혈, 수막뇌염 등 호흡기 이외의 장기들에도 합병증이 잘 생길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여러 가지 다른 원인들에 의해서 이와 같이 다양한 질환들이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단지 마이코플라즈마 균 하나에 의해 다양한 합병증이 생겼다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논리적이다. 다시 말해 동일한 현상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면 그 중 가장 간단한 가설이 가장 진리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 ‘오캄의 면도날’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개념은 모든 질병의 원인을 찾는데도 적용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현대의학에서는 우리가 겪는 온갖 유형의 질병에 대해 환원론적인 이해만 있을 뿐 그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고찰은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왜 질병을 앓게 된 것인지 그 근본이유에 대해 명쾌히 설명을 하고 있다(창3:17-19). 즉 아담의 범죄,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로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냄과 동시에 인간에게 유해한 마이코플라즈마 같은 균들이 창궐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각종 질병에 걸리게 됨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창조의 질서가 깨지면서 무질서도(entropy)가 증가하는 열역학 제2법칙이 이 지구상에 시작됨으로 인해 우리 몸도 쇠퇴하기 시작하여 건강을 잃게 됨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해하게 된다. 원인을 알면 치료가 쉬워진다. 우리가 온전한 건강을 얻으려면 먼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한다(롬3:23; 6:23; 10:9,10). 그렇게 되면 우리가 언제 어떠한 모양으로 이 세상을 떠나가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며 어떠한 질병도 존재하지 않는 천국에서 건강한 삶을 영원토록 누릴 수 있다(계21:4; 22:3,4). 아울러 우리는 구원받은 후 주님께서 허락하신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갈 때에 아담의 불순종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앞으로 이 성서건강학 칼럼들을 통해서 계속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게 건강한 삶을 보장받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에게 진정한 치유자가 되어주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출15:26; 23:25). “이르시되, 네가 주 네 하나님의 음성에 부지런히 귀를 기울이고 그의 눈앞에서 옳은 것을 행하며 그의 명령들을 귀담아 듣고 그의 모든 법규를 지키면 내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내린 이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를 치유하는 주니라, 하시니라.”(출15:26)
2009-05-01 16:31:12 | 관리자
광우병   광우병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 미국 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한 언론매체의 보도로 촉발된 이번 사태는 촛불집회와 인터넷 서명운동 등을 통해 순식간에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되어버렸다. 또한 연일 각 매스컴에서 쏟아지는 광우병 관련 뉴스들은 단지 건강에 관한 논쟁의 영역을 벗어나 정치, 경제, 사회 등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광우병의 기저에 놓여 있는 영적인 문제점들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간과해버리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광우병은 잘 알려졌다시피 양의 시체를 먹은 소에게서 처음으로 발견이 되었는데, 이 광우병 걸린 소를 인간이 먹으면 광우병을 일으키는 변형된 단백질 ‘프리온’이 인간에게 들어와 치명적인 인간광우병(vCJD)을 일으키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온 우주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해 주셨다(창1:28). 그리고 노아의 홍수 이후 육식을 허락하시면서 동물이나 식물이나 어떠한 사물이든지 ‘섞지 말라’고 명령하셨다(창9:3; 레19:19).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정한 창조의 질서를 무시하면서 초식동물인 소에게 육식을 시킨 결과 이처럼 광우병이란 새로운 역병의 심판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된 것이다(출9:15; 시78:50; 렘21:6; 합3:5; 히12:23). 특히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공장형 집단사육을 하면서 잘못된 사료를 준 것은 창조주 하나님 대신 맘몬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다름이 아니다(마6:24; 롬16:18).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많은 인수 공통 전염병 중 특별히 소의 역병을 통해 우상숭배의 죄악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라 여겨진다. 왜냐하면 고대로부터 소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주로 섬기던 대상이며, 또 타락한 루시퍼의 얼굴도 소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출32:1-6; 왕상12:25-33; 겔1:10; 10:14; 28:14).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독교문화권의 대표 지역으로서 시간, 공간, 언어 등의 절대적 기준이 있는 영국에서 광우병이 처음 발견되도록 하신 사실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광우병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갖지 못함을 꾸짖는 것이라 생각된다(롬3:11,12; 눅18:8). 그렇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작금의 광우병 파동을 목도하고 있는 우리에게 우리가 위치한 이 시대의 좌표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셨다고 생각한다(마24:7; 눅21:11). 이제 우리는 광우병의 공포에 사로잡혀 이에 대한 갖가지 대책을 강구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영혼의 건강 상태를 철저히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 그리할 때 우리는 이 두렵기 짝이 없는 광우병의 시대를 진정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의 심판자이시며 우리의 진정한 치료자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히12:23; 마9:10-13). “몸은 죽여도 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혼과 몸을 능히 지옥에서 멸하시는 분을 두려워하라.”(마10:28).   국민일보 5월9일자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22:41 | 관리자
회춘    계절의 여왕 5월이 왔다. 곳곳에서 봄기운이 넘쳐나고 있다. 왕성한 수정활동을 보이는 자연계뿐 아니라 황금연휴 기간 성형을 통해 젊음을 되찾아보려는 회춘족에게서도 완연한 봄을 느낄 수 있다. 최근 들어 웰빙과 건강이 행복의 기본조건으로 떠오르면서 이와 같이 적극적으로 회춘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단순히 몸매와 피부관리 등을 통해 젊음을 유지하려던 과거와 달리 회춘은 현대의학의 발달과 함께 놀랄 만큼 구체적인 성과를 구가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노화는 생리적 자연현상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질병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의학적 기술들과 약제들이 중요한 회춘법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이 중 가장 선두주자격인 회춘법은 '비아그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비아그라는 원래 협심증 치료제로 개발된 것이었으나 임상실험 과정에서 발기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져 발기부전 치료제로 쓰이게 되었다. 이후 비아그라의 폭발적인 인기에 편승하여 시알리스, 레비트라, 자이데나, 야일라, 엠빅스 등등의 발기부전 치료제가 국내외에서 개발되어 회춘을 열망하는 많은 이들에게 애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약제는 심혈관계와 시력 등에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으며 심지어 사망에까지 이르렀던 경우도 보고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의사와 상담한 후 복용하여야 한다. 그런데 성경 속에서는 비아그라의 효과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완벽하기 이를 데 없는 한 회춘의 사건이 소개되고 있다(창 18:9∼15; 21:1∼8). 아브라함과 사라는 연로하여 아이를 낳을 수가 없었다. 사라는 여인들의 관례에 따른 것이 멈춘 상태였다(창 18:1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폐경이 된 사라의 난소에서 다시금 배란이 되게 하셔서 이삭이 태어나도록 하셨다(창 21:1∼3).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137세에 사라와 사별한 후 재혼을 하여 아들을 무려 6명이나 더 낳을 수 있도록 아브라함에게도 회춘을 허락하셨다(창 17:17; 23:1; 25:1∼4).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와 같은 초자연적인 회춘을 허락하신 것일까? 그 까닭은 세상의 방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 생명의 열매가 맺혀질 수 있음을 그들에게, 또한 그들과 동일한 믿음을 소유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롬 4:16∼25; 갈3:5∼9). 아울러 아브라함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날마다 회춘하는 놀라운 복을 덤으로 주시기 위함이었다(롬 4:23,24; 고후4:16; 갈3:14). 이제 우리도 이와 같은 믿음을 소유하여 매일매일 회춘의 복을 누리는 건강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자.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썩어 없어져도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고후 4:16)   국민일보 <차 한 박사가 쓰는 성서건강학> 칼럼에서
2009-05-01 16:22:08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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