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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 왜 믿음의 장에 기록되었는가? 오늘은 사사기에서 가장 강하고도 가장 연약했던 인물, 삼손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삼손이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장에 이름을 올린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삼손, 믿음의 장에 기록된 사람? 히브리서 11장 3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느냐? 기드온과 바락과 삼손과 입다와 또한 다윗과 사무엘과 대언자들에 관하여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라. – 히브리서 11:32 (흠정역)   이 말씀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합니다. 왜냐하면, 삼손은 겉보기에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라기보다는, 육신에 끌려다니는 인물로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창녀를 찾아가고, 이방 여인을 사랑하고, 분노로 사람을 죽이고, 자신의 사명을 가볍게 여긴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믿음의 사람이라고 증언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2.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나실인 즉 나사르 사람 삼손의 이야기는 사사기 13장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자였습니다. 주의 천사는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제 포도즙이나 독주를 마시지 말고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 그 아이는 태에서부터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친 나사르 사람이 되리라, – 사사기 13:7 (흠정역) 삼손은 나실인 즉 나사르 사람으로 구별된 자였고, 그는 자라면서 주의 영이 그를 감동시키셨습니다. (13:25) 그는 신체적으로 초인적인 능력을 받았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블레셋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3. 삼손의 반복된 타락과 육신적인 삶 하지만 삼손은 그 거룩한 부르심에 온전히 순종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였으며, 여인들에게 마음을 빼앗긴 삶을 살았습니다. 딤낫의 블레셋 여인과의 결혼 요구 (14장) 창녀와 함께 있음 (16:1) 들릴라와의 육신적 사랑 분노에 따른 폭력과 보복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기 능력을 신뢰함 특히 들릴라와의 관계는 삼손의 인생을 완전히 무너뜨린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세 번이나 들릴라의 유혹을 거짓말로 피했지만, 결국 진실을 말해버렸고, 그의 머리털이 깎였고, 주의 영께서 그를 떠나셨습니다. “그가 잠에서 깨며 말하기를, 내가 예전의 다른 때와 같이 나가서 내 몸을 흔들리라, 하였으나 그는 주께서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 사사기 16:20 (흠정역) 삼손은 잡혀서 두 눈이 뽑히고, 블레셋의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수치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온 자가, 이제는 적국의 포로가 되어 조롱거리가 된 것입니다.   4. 믿음의 반전, 마지막 기도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다시 나타납니다. 삼손은 회개하며 기도합니다. “오 주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나를 기억하옵소서. 오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이번 한 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들이 내 두 눈을 뺀 것을 내가 단번에 원수 갚게 하옵소서.” – 사사기 16:28 (흠정역) 삼손은 죽음을 각오하며 블레셋의 신 다곤을 섬기던 큰 절기 가운데 서 있던 두 기둥을 밀어 무너뜨립니다. 그 결과, 그는 살아 있을 때보다 더 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완수합니다. 삼손의 마지막은 비참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한 회개의 승리였습니다.   5. 왜 믿음의 장에 기록되었는가? 삼손은 우리가 보기에 연약하고 실수투성이의 인물이지만, 결코 믿음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비록 육신에 끌려 넘어졌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떠나지 않았고,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완벽한 자들의 명단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끝까지 하나님께 부르짖은 자들의 기록입니다. 삼손은 자기 힘을 자랑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기도는 진정한 믿음의 표현이었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결론   하나님은 삼손을 통해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너의 실수와 연약함이 너의 인생을 규정하지 않는다. 믿음으로 내게 부르짖는 자를 나는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우리도 때때로 삼손처럼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께 돌아오고, 그분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장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실수를 덮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기억하신다." 삼손의 인생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끝까지 하나님을 붙드는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2025-05-16 17:43:08 | 관리자
1. 디모데전서 3장 16절의 차이: "그"냐, "하나님"이냐? 킹제임스 성경(KJV): God was manifest in the flesh.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셨고…” 예수님이 단지 어떤 인간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 육체로 나타나신 분이라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을 단 하나의 구절로 요약하는 위대한 진리입니다. 현대 역본(NIV, 개역 등): He appeared in a body. “그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고…” 주어가 “God(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그'(He)**로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암시하는 어떤 표현도 없습니다. 마치 일반적인 인간이 “육체로 태어났다”는 정도로밖에 읽히지 않습니다. 2. 본문의 사본적 배경: 누가 이 구절을 바꿨는가? 이 변화는 단순한 오타나 착오가 아닙니다. 소수 사본, 특히 천주교 전통에 영향을 받은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을 따른 결과입니다. 현대 역본은 대부분 웨스트코트와 호르트가 편집한 ‘소수 사본 기반의 그리스어 비평본문(Nestle-Aland, UBS)’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본학적으로 보면, “하나님(theos)”이 원래 본문이었다는 증거는 다음과 같이 압도적입니다. (1) 다수 사본의 증거 약 300개의 그리스어 사본들이 이 구절을 “하나님(theos)”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단지 몇 개(5개 내외)의 사본만이 “그(who)” 또는 “그는(he)”로 되어 있습니다. 특히, 초기 교회 시기의 대문자 사본들 중에서도 “ΘΣ”(하나님)를 약어로 기록한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약어의 가운데 선이 지워지거나 희미해졌기 때문에 후대 필경자들이 이것을 "os"(관계대명사 "그")로 잘못 읽은 것이 오늘날의 변개로 이어졌습니다. (2) 고대 교회 교부들의 증언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디모데전서 3장 16절을 인용하며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셨다”고 명확히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1세기: 이그나티우스, 바나바 2~3세기: 히폴리투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 타우마투르구스 4~6세기: 아타나시우스, 크리소스톰, 키릴, 바실 등 수많은 교부들이 동일하게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3) 고대 역본의 지지 초기 라틴어 성경, 시리아 페시타 역본, 고딕역, 에티오피아 역본 등도 모두 이 구절을 “하나님(theos)”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3. 신학적 파장: 왜 이게 중요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는 기독교 복음의 중심입니다. 만약 그분이 단지 “대언자”나 “메신저”였다면,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속죄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한 속죄를 이루실 수 있고, 완전한 구원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육체로 나타났다”고만 번역하면, **성육신의 비밀(mystery of godliness)**은 흐려지고, 그분의 신성이 모호해집니다. 이 구절은 성경 전체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가장 명확하게 선포하는데, 현대 역본들은 이 진리를 희석시켜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4. 결론: 우리는 어떤 성경을 믿어야 하는가? 성경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에서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 (요한계시록 22:19) 디모데전서 3장 16절은 단순한 구절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론의 핵심, 즉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육체로 나타나신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이 진리를 바꾸는 것은 기독교 복음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수 사본에 근거한 공인본문(Textus Receptus)**을 따르고, 그 본문을 충실히 번역한 **킹제임스 성경(KJV)**을 믿고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딤전 3:16, KJV) 이것이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단지 “그”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2025-05-15 19:39:41 | 관리자
요한복음 3장 13절: 예수님의 신성과 편재성   예수님의 신성과 편재성을 지운 성경들 — 요한복음 3장 13절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든 성경은 다 똑같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현대 성경 역본(NIV, NASB, 개역성경 등)은 예수님의 신성과 관련된 핵심 진리들을 끊임없이 축소하거나 삭제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요한복음 3장 13절입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가지 아니하였느니라.” (요 3:13, 흠정역)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에서 니고데모에게 직접 말씀하고 계시면서도, 동시에 하늘에 계신 분으로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이것은 곧 편재성(Omnipresence), 즉 동시에 어디에나 계실 수 있는 하나님만의 속성을 보여주는 강력한 본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증거 구절입니다. 그런데 현대 역본은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가? NIV와 개역성경은 이 구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하늘에 있는(the Son of man which is in heaven)”**을 삭제해 버립니다. NIV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 (하늘에 계신다는 말은 빠져 있음) 이처럼 NIV와 개역성경은 예수님의 편재성과 신성을 삭제하고, 단지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만 해도 감사해야 할 정도입니다. 실제로 NIV는 요한복음 곳곳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번역들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 삭제가 문제인가?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자리에 계시면서 동시에 “하늘에 있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를 삭제하면 예수님은 단지 하늘에서 내려온 한 인물, 혹은 인간 교사로 전락하게 됩니다. 신성은 사라지고, 인성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사본적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 구절의 완전한 형태, 즉 **“하늘에 있는”**이라는 구절은 거의 모든 고대 사본에서 발견됩니다. 단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소수 몇 개의 사본에서만 이 부분이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방대한 증거들이 이 구절이 원래부터 있었던 말씀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995개 이상의 사본들이 이 구절을 포함하고 있음 모든 라틴어 역본, 시리아어 역본, 콥트어, 에티오피아어, 아르메니아어, 그루지아어 역본들이 이 구절을 유지 오리겐, 디디무스, 키릴, 아타나시우스, 암브로스, 제롬, 히폴리투스 등 초대 교부들이 이 구절을 언급함 이처럼 절대다수의 사본과 교회 역사가들이 이 구절의 존재를 확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역본은 불과 몇 개의 부패한 소수 사본들에 따라 예수님의 신성을 삭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성경을 선택해야 하는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한 단어도 변개되어서는 안 됩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더하거나 빼지 말라”는 신명기 4장 2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고 변개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수 사본에 근거한 현대 역본들(NIV, NASB, 개역성경 등)을 조심해야 합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다수 사본을 통해 보존하신 공인본문(Textus Receptus)**을 기반으로 번역된 **킹제임스 성경(KJV)**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늘에 있는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가지 아니하였느니라.” (요 3:13, KJV) 이 한 구절만으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하나님 되심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것이 삭제된 성경으로는 그분이 누구신지 알 수 없습니다. 결론 우리가 믿고 읽는 성경의 본문이 무엇인지에 따라 우리의 신앙과 신학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3절은 예수님이 단순한 선지자나 인간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심을 보여주는 핵심 본문입니다. 이 진리를 삭제하거나 약화시키는 성경은 결코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성경,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보존한 성경, 그것이 바로 킹제임스 성경입니다.
2025-05-15 19:35:07 | 관리자
고린도전서 15:47 — 예수님의 신성을 지운 현대 성경들 “하늘로부터 나신 주”는 누구이신가?   오늘날 대부분의 현대 성경 역본들(NIV, NASB, 개역성경 등)은 예수님의 신성을 교묘히 지우고 있습니다. 이런 본문 왜곡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고린도전서 15장 47절입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에서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땅에서 났으며 흙에 속하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로부터 나신 주시니라.” (고전 15:47, 흠정역) 여기서 '둘째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은 하늘로부터 오신 주님, 즉 신성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현대 성경 역본들은 이 중요한 진술에서 핵심 단어인 **‘주(Lord)’**를 아예 삭제해 버립니다. 현대 역본의 변개된 본문 예를 들어 NIV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The second man is from heaven.”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왔다.)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일 수 있지만, 결정적인 단어인 ‘주(Lord)’가 빠져 있습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표현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단순히 “하늘에서 온 사람”이라고만 하면, 예수님을 단지 위대한 스승이나 선지자, 특별한 인간 수준으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원문 사본의 차이 — 또 다시 등장하는 소수 사본 이 문제의 핵심은 사용된 **그리스어 사본(Textual Base)**에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의 본문은 ‘Textus Receptus(공인본문)’라는 다수 사본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여기에선 “ὁ Κύριος ἐξ οὐρανοῦ”, 즉 “주께서 하늘로부터 나셨다”는 표현이 정확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면, NIV, 개역성경 등 현대역본은 천주교에서 중시하는 소수 사본인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을 따릅니다. 이 사본들에서는 고의적으로 “주(Lord)”라는 단어가 누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주’라는 단어는 다음과 같은 압도적인 사본 증거에 의해 확증됩니다: 대문자 사본들(Uncials): 알렉산드리아 사본, K 사본, P 사본 등 소문자 사본들(Minuscules): 81, 104, 326, 614, 1241 등 20개 이상 고대 역본들: 시리아 페시타역(170년), 고딕역(341년), 아르메니아역(400년) 등 초기 교부들: 오리겐, 크리소스톰, 키릴, 바실, 다마스쿠스의 요한 등 이 모든 증거는 이 구절의 본래 형태가 **“둘째 사람은 하늘로부터 나신 주(Lord)”**라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 줍니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신학적으로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 땅에서 났고, 죄인의 혈통을 따라 태어난 존재임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조차 육체적으로는 마리아를 통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그분의 본질은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를 보여주는 장입니다. 첫째 사람 아담은 흙에서 났고, 죄를 가져왔습니다. 둘째 사람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신 주님으로, 의와 생명을 가져오십니다. 그런데 ‘주(Lord)’를 삭제하면 이 중요한 그리스도의 신성과 구속 사역의 대조 구조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문제는 단지 한 단어의 삭제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흐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피조물처럼 보이게 만드는 심각한 교리적 훼손입니다. 결론: 우리는 어느 사본을 따라야 하는가? 이처럼 반복되는 삭제와 변경의 배경에는 언제나 천주교 소수 사본이 있습니다.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을 근거로 한 네슬레-알란트 비평본문은 수많은 교리적 진리를 제거하고 약화시켰습니다.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성경은 하나님께서 5,000개 이상의 일치하는 다수 사본 속에 보존하신 말씀을 따르는 **킹제임스 성경(KJV)**입니다.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구속, 승천, 재림까지 온전한 복음의 진리가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둘째 사람은 하늘로부터 나신 주시니라.” (고전 15:47, KJV) 이 진리를 지키는 것이 곧 우리 믿음의 핵심을 지키는 것입니다. 삭제된 성경은 진리를 온전히 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올바른 사본을 따라야만 합니다.
2025-05-15 19:30:55 | 관리자
예수님의 승천, 성경에서 사라지다? — 요한복음 16장 16절과 천주교 소수 사본의 조작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24:35) 하지만 오늘날 많은 현대 성경 역본들은 놀랍게도 예수님의 승천이라는 중요한 진리를 의도적으로 삭제하거나 변경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요한복음 16장 16절입니다. 원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무엇인가? **킹제임스 성경(KJV)**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다시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라.” (요 16:16, 흠정역)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아버지께로 승천하실 것이라는 예언을 분명히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는 십자가 죽음을 의미하며, “다시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니”는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라.” 이 마지막 표현은 예수님의 승천, 즉 하늘로 올라가심을 분명하게 선포하는 복음의 핵심 진리입니다. 그러나 현대 역본에서는 어떻게 되었는가? NIV, NASB, 개역성경, 공동번역 등 현대의 대부분 역본들은 이 구절의 뒷부분인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라”**를 삭제하거나 각주 처리해 버렸습니다. NIV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다시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게 될 것이다.” (NIV, 요 16:16)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말씀이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다. 그 결과, 이 말씀은 마치 단순히 잠시 떨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정도의 말로 축소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주님의 승천과 그 신성을 흐리는 해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러한 삭제는 단순한 번역상의 실수가 아닙니다. 이는 **천주교의 소수 사본(Textus Corruptus)**이라 불리는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과 **시내 사본(Codex Sinaiticus)**에 근거한 것입니다. 현대 성경들이 번역의 기초로 삼은 네슬레-알란트(Nestle-Aland) 비평본문은 바로 이 소수 사본을 중심으로 편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삭제되지 않고 포함되어 있는 사본들은 다음과 같이 圧도적으로 다수입니다: 모든 대문자 사본들 (Uncials) 모든 소문자 사본들 (Cursives) 모든 고대 번역본들 (Versions) 3세기 교부 노나스(Nonnus), 4세기의 크리소스톰(Chrysostom)과 키릴(Cyril)의 저술 이는 이 구절이 초대교회부터 확실히 존재해 온 정경 본문임을 의미합니다. 단지 두 개의 불완전한 사본에 이 구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삭제한 것은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 훼손 행위입니다. 왜 이 구절은 중요한가? 예수님의 승천은 단지 한 사건의 묘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분의 신성, 속죄 사역의 완성, 그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의 중보 사역과 연결된 구속사적 핵심 진리입니다. 이 구절이 삭제되면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진리들이 위협받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이 흐려진다. 그분이 아버지께로 가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희미해진다. 부활 후 승천이라는 구속사의 흐름이 단절된다. 십자가 – 부활 – 승천 – 재림이라는 순환 구조가 끊어진다. 믿음의 대상이 모호해진다. ‘보지 못하게 되었다가 다시 본다’는 표현만 남으면, 그것이 단순한 인간적 만남처럼 오해될 수 있다. 결론: 하나님의 말씀은 지켜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항상 말씀을 삭제하거나 변개하는 방식으로 역사해 왔습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구속 사역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구절이 사라지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6장 16절의 삭제는 단지 단어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승천 진리를 침묵시키는 심각한 교리적 변개입니다. 우리는 소수 사본을 따르는 현대 역본들이 아닌, **하나님께서 다수의 사본 속에 보존해 오신 킹제임스 성경(Textus Receptus)**을 믿고 따를 때에야 비로소 온전한 진리를 보존할 수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다시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라.” (요 16:16, KJV) 이 진리는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음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2025-05-15 19:27:34 | 관리자
왜 마태복음 18장 11절은 사라졌는가? —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러 오셨다는 말씀, 지워지다 성경은 한 단어도, 한 구절도, 하나님의 뜻 없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신명기 4장 2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더하거나 거기에서 빼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개역성경, NIV, ESV, NASB 같은 현대역본들은 중요한 복음 진술을 담은 마태복음 18장 11절을 통째로 삭제하고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에는 이렇게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것을 구원하려고 왔느니라.” (마 18:11) 이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즉 잃어버린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복음의 핵심 진리를 요약한 구절입니다. 그러나 현대 역본들에는 이 구절이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NIV 성경을 보면 10절 다음에 곧바로 12절이 이어지며, 그 어디에도 11절은 없고, 단지 각주로 “어떤 사본에는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려고 왔다’가 있습니다”라고 설명을 달고 넘어갑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것은 단순한 문장 삭제가 아닙니다. 이 구절의 삭제는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를 초래합니다: 예수님의 사역 목적이 사라진다. 예수님이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러 오셨다는 구절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말씀은 단지 반복된 진술이 아니라, 구원의 목적과 방향을 확정짓는 핵심 교리입니다. 성경의 통일성과 일관성이 깨진다. 누가복음 19장 10절에도 동일한 표현이 나옵니다: “인자(사람의 아들)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그런데 마태복음 18장에서 동일한 진술이 삭제되면, 이는 성경 내에서 동일한 진리를 반복 강조하는 구조를 흐트러뜨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보존 약속에 대한 도전이다. 주님은 마태복음 5장 18절에서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현대역본들은 “적은 단어 하나쯤”이라는 사고방식으로 이 약속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왜 이 구절이 삭제되었는가?   이 구절이 삭제된 이유는 현대역본들이 의존하는 천주교 소수 사본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시내 사본(Codex Sinaiticus)**과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이 있습니다. 이 두 사본은 4세기경에 만들어졌고, 후에 웨스트코트(Westcott)와 호르트(Hort)가 이 사본을 기반으로 새로운 그리스어 성경 비평본을 만들면서 그들이 의도적으로 이 구절을 제거했습니다. 웨스트코트와 호르트는 다음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졌습니다: “가장 오래된 사본이 가장 정확하다.” 그러나 오래되었다고 해서 더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그 사본이 오히려 보존되지 않고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상태가 좋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구절은 후대 사람들이 누가복음 19장 10절을 바탕으로 추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역사적, 사본학적 증거 없이 단지 추정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다수의 사본들 — 대략 44개 이상의 사본 — 은 이 구절을 포함하고 있으며, 오직 소수의 사본만이 이 구절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역본들은 이 소수사본을 따라 이 구절을 삭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성경을 따라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다수 사본을 기반으로 번역된 **킹제임스 성경(KJV)**은 마태복음 18장 11절을 그대로 온전히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의 본질, 예수님의 사역 목적,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가장 명확히 보여 주는 핵심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삭제되어서는 안 됩니다. 삭제는 진리를 침묵시키는 것이며, 침묵은 결국 거짓을 조장합니다. 결론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이 말씀은 절대로 삭제될 수 없는 복음의 선언입니다. 한 구절이라도 빠지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소수 사본에 따라 삭제된 현대역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보존한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진리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어버린 것을 구원하려고 왔느니라.” (마 18:11, KJV) 이 진리를 지키는 것이 곧 복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2025-05-15 19:23:25 | 관리자
갈라디아서 4장 7절: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진리, 삭제되다   성경은 단순한 종교서적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과 구속, 그리고 하나님의 상속에 관한 하나님의 유일한 게시입니다. 그 중에서도 복음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말씀이 갈라디아서 4장 7절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현대역본들(NIV, 개역성경, NASB 등)**은 이 말씀의 핵심을 삭제하고 있습니다. 원래의 말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상속자 킹제임스 성경(KJV)은 갈라디아서 4장 7절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네가 아들이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상속자니라.” (If a son, then an heir of God through Christ. Gal 4:7, KJV) 이 말씀은 우리가 단지 하나님의 자녀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기업을 함께 상속받는 자가 되었음을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복음의 영광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의 상속자가 될 수 없습니다. 현대 역본의 변개: "그리스도를 통한" 상속이 사라지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ESV, NASB 등의 현대역본들은 이 말씀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바꾸었습니다: “네가 아들이면 하나님의 상속자니라.” (NIV: “Since you are a son, God has made you also an heir.”) 여기서 결정적인 표현인 “through Christ”, 즉 **“그리스도를 통해”**라는 구절이 아예 빠져 있습니다. 이는 사소한 문구 생략이 아니라, 복음의 근거를 빼버리는 심각한 오류입니다. 사본의 차이: 다수사본 vs. 소수사본 이 차이는 단순한 번역 차이가 아닙니다. 어느 사본을 기준으로 성경을 번역했는가에 따라 달라진 결과입니다. 다수사본(Textus Receptus, 공인본문) 기반의 킹제임스 성경: “…κληρονόμος Θεοῦ διὰ Χριστοῦ” (하나님의 상속자, 그리스도를 통해) 소수사본(Nestle-Aland, UBS, 바티칸/시내 사본) 기반의 현대 역본: “…κληρονόμος διὰ θεοῦ” 또는 그 자체도 생략 (하나님의 상속자 [그리스도 없음]) 이처럼, 다수 사본은 '그리스도를 통한 상속'을 명확히 전하고 있지만, 소수 사본은 이 중요한 구절을 삭제하거나 모호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현대역본들이 이 소수사본을 따라가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신학적 문제: 그리스도 없는 상속?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상속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아무런 언약적 관계가 없습니다. 성경 전체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을 받는다는 구조로 짜여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고…” (요일 5:12) “상속자들이라면,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공동 상속자니…” (롬 8:17) 그리스도를 제거한다면 이 모든 구조가 무너져 버립니다. 결국 현대역본들은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그리스도를 제거한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표현은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빠진 갈라디아서 4장 7절은, 단순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로 그쳐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그 이상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한 기업을 이을 자녀로의 신분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생명력을 잃지 않도록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다수사본 기반의 킹제임스 성경을 붙들어야 합니다. 복음은 절대 단어 몇 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단어 안에 복음 전체의 구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아들이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상속자니라.” (갈 4:7, KJV) 이 고백을 지키는 것, 그것이 참된 성경 보존의 시작입니다.
2025-05-15 19:18:04 | 관리자
그리스도를 지운 성경 — 빌립보서 4장 13절과 천주교 소수 사본의 문제 성경의 한 구절이 바뀌었다고 해서 무슨 큰 문제가 생길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단순한 종교 문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기록해 우리에게 주신 유일무이한 진리의 책입니다. 따라서 단어 하나의 차이, 이름 하나의 유무가 교리 전체를 뒤흔들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대표적인 예로 빌립보서 4장 13절을 살펴보려 합니다. 원래 말씀: 내가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 KJV) 이 구절은 단순히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긍정적 사고나 의지의 선언이 아닙니다.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라는 구절이 분명히 들어가 있으며, 바울 사도는 자신의 모든 사역과 인내와 능력의 근거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 역본들의 문제: 그리스도의 이름을 삭제하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NASB 등 현대 역본들에서는 이 중요한 문장이 이렇게 바뀌어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한글개역, NIV: “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표현만 보면 괜찮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목하십시오.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빠져 있습니다. "나를 강하게 하시는 자"가 누구인지를 문맥이 아닌 독자의 해석에 맡긴다면, 이는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특히 뉴에이지(New Age) 운동이나 자기계발 중심의 복음에서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변형해서 사용합니다: “I can do all things through ____.”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빈칸에 원하는 것을 채워 넣으라.) 즉, 사람들은 이 빈칸에 “내 잠재력, 우주, 신념, 긍정적 사고, 성공 원리” 등을 채워 넣고, 결국 이 말씀을 자기 의지와 열정의 응원문구 정도로 탈바꿈시켜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전한 말씀의 본질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의 고백이었습니다. 사본상의 차이: 텍스트스 리셉투스 vs. 네슬레/알란트 이처럼 구절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빠지게 된 이유는 바로 성경 사본(Text)의 차이 때문입니다. 텍스트스 리셉투스(Textus Receptus, 다수 사본 기반) “πάντα ἰσχύω ἐν τῷ ἐνδυναμοῦντί με Χριστῷ” →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네슬레/알란트(Nestle-Aland, UBS, 소수 사본 기반) “πάντα ἰσχύω ἐν τῷ ἐνδυναμοῦντί με ______.” → ‘그리스도’라는 단어가 삭제됨. 즉, 킹제임스 성경은 다수 사본을 기반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현대 역본들은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천주교 계열의 소수 사본을 따르다 보니 이러한 중요한 구절에서도 핵심을 삭제하거나 흐리게 만든 것입니다. 신학적 의미: 능력의 원천은 오직 그리스도이심 빌립보서 4장 13절은 단순히 어떤 감정적 위로나 응원의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능력의 근원이시다라는 믿음의 선언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기근에 처하든, 풍요 속에 있든, 박해를 받든, 자유하든 간에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빠지면 이 구절은 완전히 의미가 바뀌어 버립니다. 그것은 신앙의 고백이 아니라 자기긍정의 문장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결론: 왜 킹제임스 성경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한 단어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번 사례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고백을, 그리스도 없는 능력으로 바꾸어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천주교 소수 사본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시편 12:6-7: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다수 사본 기반의 킹제임스 성경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 성경만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우지 않고, 우리의 믿음을 흐리지 않으며, 성경의 원래 의도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KJV) 이 말씀의 고백이 오늘도 우리의 삶을 이끄는 진리이길 바랍니다.
2025-05-15 19:14:10 | 관리자
사도행전 3장 13절 등: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종으로 바꾼 성경? — 천주교 소수 사본의 위험한 왜곡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시에는 하나님 자신이시고, 또한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이(child)**이십니다. 하지만 오늘날 널리 퍼진 현대 성경 역본들은 이 근본 진리를 은밀하게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종(servant)으로 격하시킴으로써, 그분의 신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습니까? 문제의 본문들: 사도행전에서의 왜곡 사도행전 3장과 4장에는 이 문제가 아주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Son) 혹은 **하나님의 아이(Child)**라고 부르며 그분의 독특한 신분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개역성경, NIV, NASB 등 현대 역본들은 이 구절들을 다음과 같이 변개합니다: 행 3:13 킹제임스 성경: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느니라." 개역/NIV 등: "자신의 종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행 3:26 KJV: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일으키시고" NIV/개역 등: "자신의 종을 일으키시고" (심지어 "예수"라는 이름 자체도 빠진 경우가 있음) 행 4:27 KJV: "주의 거룩한 아이 예수" (thy holy child Jesus) NIV/개역 등: "주의 거룩한 종 예수" 행 4:30 KJV: "주의 거룩한 아이 예수의 이름으로" NIV/개역 등: "주의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처럼 반복해서 ‘Son’(아들) 또는 **‘child’(아이)**라는 단어가 **‘servant’(종)**로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아들’과 ‘아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신성(divinity)**과 독특한 정체성을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용어입니다. 이는 요한복음 3:16에서 말하는 바로 그 독생자(only begotten Son)를 의미하며,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의 도구가 아닌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지닌 분이심을 강조합니다. 반면에 ‘종(servant)’이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신성보다는 피조물적인 모습 혹은 도구적인 역할을 부각시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종의 모습을 입으신 것은 맞지만(빌립보서 2:7), 그렇다고 해서 그분의 본질적 신분을 종으로 격하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교리 왜곡입니다. 더군다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증거할 때 사용한 단어는 일반 성도들이 쓰는 ‘종’과는 전혀 다른 표현, 바로 거룩한 아이(holy child)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성을 직접 드러내는 교리적 선언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러한 번역의 차이는 단순한 표현 방식의 차이가 아니라, 성경의 사본(text) 자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현대 역본들(NIV, NASB, 개역 등)은 대부분 천주교 계열의 소수 사본(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사본들은 수많은 구절에서 예수님의 이름, 신분, 권능을 삭제하거나 약화시키고 있으며, 그 결과 많은 현대 성경에서 핵심 교리가 흐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킹제임스 성경(KJV)과 흠정역은 다수 사본(Textus Receptus), 즉 초대 교회에서 실제로 사용되었던 본문을 기반으로 번역되었으며, 예수님의 신성을 바르게 보존하고 있습니다. 결론 –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물론 예수님은 겸손히 종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빌 2:7), 그분은 단순한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창조주이자 구원자이십니다. 이런 진리는 성경의 단어 하나하나에 담겨 있으며, 그 단어들을 바르게 보존한 성경만이 온전한 진리를 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하나님의 종’으로 격하시키는 성경이 아니라,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는 **킹제임스 성경(KJV)**을 믿고 사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마 3:17, KJV) 이 고백이 성경 전체에 흐르는 진리이며, 우리는 그 진리를 변질되지 않은 성경을 통해 지켜야 합니다.
2025-05-15 19:08:53 | 관리자
  에베소서 3장 9절: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다    – 왜 이것이 사본 문제와 연결되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은 구원자이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창조주이시다라고도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이 놀라운 진리는 단순한 신학 이론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명백히 선언하는 복음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중요한 사실이 일부 성경 역본에서는 완전히 삭제되거나 희미하게 처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에베소서 3장 9절 – 결정적인 구절 이 문제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본문이 바로 에베소서 3장 9절입니다. 킹제임스 성경(KJV)과 흠정역 성경은 이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신비의 교제를 모든 사람에게 밝히려 하심이라.”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단지 하나님의 사역을 돕는 존재가 아니라, 직접 창조의 주체이심을 분명히 말해 주는 핵심 본문입니다. 하지만 NIV, 개역성경, NASB 등 현대역본들은 이 구절에서 “by Jesus Christ”,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라는 문구를 삭제해 버렸습니다. NIV의 번역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God, who created all things.”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예수님 언급 없음)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창조의 주체가 예수님이심을 가려버린 것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면서도 심각합니다. 현대역본들은 대부분 천주교 계열의 소수 사본, 즉 알렉산드리아 사본,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을 기반으로 번역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본들은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권능에 대한 언급을 약화시키거나, 완전히 제거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킹제임스 성경(KJV)과 흠정역은 **다수 사본(Textus Receptus)**을 기반으로 번역되었고, 이 사본들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실제로 사용하던 본문을 일관되게 보존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3장 9절의 그리스어 원문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다수 사본 (Textus Receptus) “…τῷ τὰ πάντα κτίσαντι διὰ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하신…” 소수 사본 (Nestle-Aland / UBS) “…τῷ τὰ πάντα κτίσαντι” → “모든 것을 창조하신” (예수님 언급 없음) 이처럼 본문 자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라는 말이 삭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번역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번역의 근거가 되는 사본 자체가 이미 변질된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창조주 되심이 중요한가?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창조주이심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1:3 – “그에 의해 모든 것이 만들어졌고 만들어진 것 중에 그가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느니라.” 골로새서 1:16 – “그분에 의해 모든 것이 창조되었으니,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예수님이 창조주가 아니시라면, 그분은 피조물입니다. 그리고 피조물은 결코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구속을 이루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속하신 분이라는 사실은, 곧 그분이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전제 아래에서만 온전한 의미를 갖습니다. 즉, 창조주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친히 창조물을 위해 죽으셨기에, 그 희생은 무한한 가치가 있고 온 인류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본문 문제는 교리 문제다 에베소서 3장 9절은 단순한 문구 하나가 빠졌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창조주 되심, 즉 그분의 신성을 지우는 심각한 교리 변개입니다. 현대역본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런 본문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확신 없이 성경을 읽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문학적 아름다움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핵심 교리가 흔들리는 중대한 영적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다수 사본 기반의 킹제임스 성경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신다고 하셨습니다(시12:6-7), 그리고 그 보존된 말씀이 오늘날 우리 손에 킹제임스 성경이라는 형태로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속자이실 뿐 아니라 창조주이십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하나님의 정확한 말씀 속에 보존되어야 하며, 그것을 믿는 것이 곧 바른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2025-05-15 19:03:03 | 관리자
“경배하다”와 “절하다”는 완전히 다르다 – 현대역본들이 감추고 있는 진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께 나아와 “경배”했습니다. 이 ‘경배’는 단순히 몸을 굽히는 ‘절’이 아니라,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그분께 영적으로 엎드리는 행위였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경배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proskuneo (Strong's #4352)인데, 이 단어는 본질적으로 **“신적 존재 앞에서 엎드려 절하며 섬김을 드리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만 드릴 수 있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개역성경, NIV, NASB 등 현대역본들은 이 proskuneo를 ‘경배하다’로 충실하게 번역하지 않고, 일부 구절에서는 ‘절하다’, ‘무릎 꿇다’, ‘엎드리다’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문제는 단순한 단어 선택의 차이가 아니라, 예수님의 신성을 흐리는 방향으로 바뀌었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8장 2절에서는 한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경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정확하게 **“한 나병 환자가 와서 그분께 경배하며”**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현대역본들은 이 장면을 “무릎을 꿇고”, 혹은 **“절하고”**라는 말로 약화시켜, 경배의 본질적인 의미를 가려버립니다. 같은 일이 마태복음 9장 18절, 마태복음 15장 25절, 마태복음 18장 26절, 마태복음 20장 20절, 마가복음 5장 6절에서도 반복됩니다. 이 구절들 모두 킹제임스 성경에는 **‘경배하다(worshipped)’**로 되어 있지만, 개역성경과 NIV 등은 ‘무릎을 꿇다’ 혹은 ‘절하다’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특히 NASB는 일부 구절에서 아예 ‘경배하다’를 삭제해버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경배하다’와 ‘절하다’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경배하다(worship)’는 영적 의미를 포함한 말입니다. 그것은 곧 마음과 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낮추고 드리는 행위입니다. 반면에 ‘절하다’ 혹은 ‘무릎 꿇다’는 단순히 신체적 자세를 묘사할 뿐이며, 경배와 같은 신학적 깊이나 의미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이 차이는 헬라어 원문을 통해서도 확연히 드러납니다. ‘경배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proskuneo입니다. 이는 신에게 바치는 경배를 말하며, 예수님께 드리는 것이 정당한 행위임을 전제합니다. 반면, ‘절하다’ 혹은 ‘엎드리다’에 해당하는 다른 헬라어 단어들은 kampto, klino, tithemi 등인데, 이는 단순히 몸을 굽히는 행위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15장 19절을 보면 예수님을 조롱하던 군인들이 무릎을 꿇으며 경배하는 척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원문에는 **‘무릎을 꿇고(tithentes)’와 ‘경배하더라(prosekunoun)’**가 같이 나오는데, 이는 몸의 자세와 영적 행위가 분리되어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왜 현대역본들은 이처럼 ‘경배하다’는 표현을 ‘절하다’, ‘무릎 꿇다’ 등으로 의도적으로 바꾸었을까요? 그 이유는 이들 역본이 **천주교 계열의 소수사본(알렉산드리아 사본,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을 기반으로 번역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본들에는 곳곳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흐리거나, 삭제하거나, 모호하게 만드는 본문 변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NIV는 동일한 단어 proskuneo를 사용하는 다른 구절들, 예컨대 마태복음 2장 11절(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함), 마태복음 28장 9절(부활하신 예수님께 경배함), 요한복음 9장 38절(소경이 경배함) 등에서는 ‘경배하다’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왜 어떤 구절에서는 ‘경배하다’라고 번역하고, 또 어떤 구절에서는 ‘절하다’로 약화시키는 것입니까? 이것은 의도적인 불일치이며, 일관성 없는 번역 방식입니다. 결국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명백히 드러내는 장면을 흐리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훌륭한 선생이나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경배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히브리서 1장 6절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또한 마태복음 4장 10절에서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경배를 받으셨다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가장 분명한 본문 중 하나입니다. 이를 삭제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거나 흐리는 심각한 문제로 이어집니다. 결론   경배는 하나님께만 드릴 수 있는 신적 행위이며, 예수님께서 그것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입증합니다. 그런데 현대역본들은 일부 구절에서 그 경배를 단지 ‘절하다’로 바꾸거나 아예 삭제해, 예수님의 신성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번역은 단순한 해석의 차원이 아니라, 본문 자체가 변개된 소수사본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보존되어야 하며, 경배는 결코 단순한 절과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드려진 ‘경배’를 ‘절’로 바꾸는 그 어떤 시도에도 속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의 보존된 말씀인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주님의 신성을 바르게 이해하고 믿어야 합니다.
2025-05-15 18:58:13 | 관리자
누가복음 2장 33절: 요셉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니다 – 소수사본이 만든 치명적 왜곡 누가복음 2장 33절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처녀 탄생 교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킹제임스 성경(KJV)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요셉과 그의 어머니는 그분에 관해 말한 것들에 놀라더라.” (And Joseph and his mother marvelled at those things which were spoken of him.) 그러나 개역성경과 NIV, NASB 등 현대 역본들은 이 구절을 “그 아이의 아버지와 어머니” 또는 **“예수의 부모”**라고 번역하면서, 요셉을 예수님의 친아버지인 것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번역은 단순한 문장상의 차이가 아니라, 예수님의 본성과 사역 전체를 뒤흔드는 심각한 신학적 오류로 이어집니다. 1.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만약 예수님이 요셉의 혈통을 그대로 받았다면, 아담의 죄성과 저주 아래 있게 되고, 결국 죄 없으신 속죄 양으로서의 자격을 잃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실 수 없는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번역상의 문제로 넘길 수 없는 치명적인 교리 왜곡입니다. 2. 킹제임스 성경은 원문에 충실하다 누가복음 2장 33절의 원어 본문(Textus Receptus, 공인본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헬라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καὶ ἦν Ἰωσὴφ καὶ ἡ μήτηρ αὐτοῦ θαυμάζοντες (“요셉과 그의 어머니는 놀라더라”) 여기에서 **‘요셉(Ἰωσὴφ)’**이라는 고유 명사가 명확히 나와 있고, **‘그의 어머니(ἡ μήτηρ αὐτοῦ)’**라고 하여 마리아만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즉, 성경은 요셉을 예수님의 아버지라 부르지 않으며, 그저 ‘요셉’이라고 구분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반면, 소수사본을 근거로 한 Nestle-Aland(UBS) 헬라어 본문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변경합니다. καὶ ἦν ὁ πατὴρ αὐτοῦ καὶ ἡ μήτηρ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놀라더라”) 여기서는 ‘요셉’이란 이름이 삭제되고, 대신 **‘그의 아버지(ὁ πατὴρ αὐτοῦ)’**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변경은 단순한 문장 수정이 아니라 예수님의 처녀 탄생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중대한 위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아버지이시며, 예수님은 신성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바꾸어 요셉을 아버지라 부르게 만들면, 곧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3.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셨다 누가복음 2장 49절에서 열두 살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어찌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반드시 내 아버지 일을 수행해야만 함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명백히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아버지였다면, 예수님은 요셉의 일을 도왔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심을 정확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4. 왜 이런 번역 차이가 생겼는가? 현대역본들이 이렇게 번역한 이유는 모두 **소수사본(Alexandrian text,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을 본문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본들은 천주교의 벌게이트 라틴 성경과 연관되어 있으며, 다수의 본문 변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면, 킹제임스 성경은 **다수사본(Textus Receptus, 안디옥 계열)**을 기반으로 하여, 초대 교회에서 실제로 사용되었던 본문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41절과 같은 구절에서도 KJV는 예수님의 **“부모(parents)”**라고 했을 때, 그것이 요셉과 마리아를 함께 지칭할 뿐, 요셉이 예수님의 친아버지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성경은 여러 번 요셉을 예수님의 후견인이나 보호자로 묘사할 뿐, 한 번도 예수님의 아버지라 하지 않습니다. 결론 요셉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신성과 처녀 탄생을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그런데 현대역본들이 요셉을 예수님의 아버지라고 번역하는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소수사본에서 유래한 고의적 변개입니다. 이것은 다음의 교리적 재앙을 초래합니다. 예수님의 죄 없는 본성을 부정하게 되며 예수님의 신성을 무너뜨리게 되고 구속 사역 전체가 근본부터 흔들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영원히 보존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순수한 다수사본과 그것을 따른 킹제임스 성경에서 온전히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말씀, 변개되지 않은 본문을 따라야 하며, 예수님의 신성과 사역이 분명히 드러나는 킹제임스 성경을 붙잡아야 합니다.
2025-05-15 18:52:44 | 관리자
왜 ‘소수 사본’은 교리적으로 위험한가? 요한일서 4장 3절은 단순한 문장 하나로 적그리스도의 영을 식별하는 기준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런데 이 결정적인 본문이 **소수사본을 따르는 현대 성경들(NIV, 개역, NASB 등)**에서는 심각하게 삭제되었고, 교리적 파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공인본문 / 다수사본 기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나니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그 영이니라.” (요일 4:3) 이 말씀은 기독론의 핵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 적그리스도의 영임을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현대 역본 (NIV, 개역, NASB 등)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나니…” (요일 4:3, 개역 / NIV) ▶ 핵심 삭제: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셨다”**는 고백이 완전히 사라짐 ▶ 결과: 단순히 ‘예수를 시인하는가’로 바뀌어, 정체불명의 다른 예수도 통과 가능 왜 이것이 심각한 문제인가? 성육신을 부정하는 ‘적그리스도의 영’ 요한은 성육신을 부정하는 자들이야말로 적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현대 역본들은 이 시험 기준의 본질을 삭제해 버립니다. "모든 영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는지 아닌지를 시험하라." (요일 4:2 요약) 삭제되면 어떻게 되는가? 단순히 "예수"라는 이름만 외치면 통과가 됩니다. 다른 예수(고후 11:4), 다른 복음(갈 1:6), 다른 영(고후 11:4)도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헬라어 본문 비교: 삭제의 실체 Scrivener’s Textus Receptus (다수사본) τὸν Ἰησοῦν Χριστὸν ἐν σαρκὶ ἐληλυθότα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 Nestle-Aland / UBS (소수사본) τὸν Ἰησοῦν [공란] (그저 ‘예수를 시인하는가’만 남고, 성육신은 삭제됨) 소수사본은 고의적으로 성육신이라는 핵심 교리를 삭제하고 있음 이 본문 삭제는 결코 ‘사소한 차이’가 아니다 구분 : 다수사본 (TR / KJV)소수사본 (NIV, 개역, UBS) 핵심 고백 :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음. 단순히 ‘예수를 시인함’ 적그리스도 기준 : 성육신 부정 불분명함, 기준이 무너짐 기독론 명확히 보호 : 흔들림 발생 신앙, 시험 ,영적 분별력 제공: 오류 가능성 증가 결론: 왜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을 붙들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보존된다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24:35) 말씀을 ‘삭제’하면 저주가 따른다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생명책에서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 (계 22:19) 성경 번역은 교리를 지켜야 한다 성경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교리의 구조물이다. 핵심이 빠지면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할 수 없다. **소수사본(Nestle-Aland, UBS)**은 천주교의 라틴 벌게이트에서 파생된 왜곡된 본문으로, 성육신, 예수님의 신성, 십자가 피, 부활 등 핵심 교리를 삭제하고 있다. 믿음을 지키는 길: 바른 성경, 바른 본문 **킹제임스 성경(KJV)**은 성육신, 예수님의 피, 그리스도의 신성, 지옥의 실재 …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하나님의 보존된 말씀입니다. 오늘날 진리의 시험은 성경 본문 자체에 있습니다. 소수사본을 따르는 현대역본은 진리를 희석시키고, 적그리스도의 영에 속한 것들과 타협하도록 유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은 다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나니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그 영이니라.” ― 요한일서 4:3, 킹제임스 성경
2025-05-15 17:25:02 | 관리자
이사야서 14장 12절 루시퍼   현대 역본이 루시퍼를 지운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에서 마귀, 곧 사탄의 타락에 대해 가장 분명히 묘사된 구절 중 하나가 이사야 14장 12절입니다. 이 구절에서 킹제임스 성경(KJV)은 마귀의 고유 이름인 **루시퍼(Lucifer)**를 분명히 언급합니다. 킹제임스 성경 (흠정역) “오 아침의 아들 루시퍼야, 네가 어찌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민족들을 약하게 한 자야, 네가 어찌 끊어져 땅바닥으로 떨어졌는가!” (사 14:12) 그러나 개역성경, NIV, NASB, 공동번역 등 현대 역본들은 이 단어를 모두 **‘계명성’ 또는 ‘새벽별(Morning Star)’**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 번역의 심각한 교리적 문제 ‘루시퍼’는 마귀의 고유명사이다 히브리어 원어: Heylel (הֵילֵל) 어근: Halal (הָלַל) — "빛을 내다, 찬양하다" 의미: “빛나는 자” 또는 “영광을 지닌 자” → 이는 타락 전 천사장 루시퍼를 지칭 그러나 현대 역본들은 이를 **‘계명성(Morning Star)’**으로 둔갑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칭호와 동일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빛나는 새벽별’**이라 하셨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 빛나는 새벽별이라.” (요한계시록 22:16, KJV) 따라서 이사야 14장에서 마귀를 지칭하는 말로 **‘Morning Star’**를 사용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마귀를 동일시하는 신성 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문맥상, 결코 예수님일 수 없다 12절: “하늘에서 떨어진 자” — 예수님이 아니라 타락한 루시퍼 13–14절: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아지리라” —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심 (요1:1), 이 말씀은 교만한 피조물의 언어 15절: “지옥으로 끌려 내려가리라” — 예수님이 아니라 심판받을 마귀 그런데 현대 역본들은 이 존재를 그리스도처럼 보이게 번역하여 전면적인 교리 왜곡을 초래합니다. 현대 역본의 왜곡 요약 항목킹제임스 성경 (KJV)현대 역본 (NIV, 개역, NASB 등) 본문 인물루시퍼 (마귀)계명성/새벽별 (예수님의 칭호) 정체성교만하여 하늘에서 쫓겨난 마귀의미 모호, 그리스도와 혼동 가능 결과지옥으로 내려감무덤(스올)로 완화 신성 모독 여부없음 예수님을 마귀와 동일시하는 신성 모독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이 모든 문제는 현대 역본들이 따르는 본문이 **천주교 소수 사본(Alexandrian Text)**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본은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로마 카톨릭이 보존해온 조작된 사본들 사탄의 정체를 흐리게 하고, 예수님의 신성을 훼손하는 방향으로 편집됨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다수사본(공인본문)**에는 Lucifer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음 결론: 왜 킹제임스 성경(KJV)을 사용해야 하는가? 루시퍼라는 마귀의 고유 이름을 유일하게 지켜낸 성경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명확히 구별하며, 신성 모독을 방지 수천 개에 달하는 다수사본의 일치된 전통을 따름 마귀의 정체를 분명히 드러내어 교리의 순수성을 지킴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더하거나 빼지 말고…” ― 신명기 4:2 말씀을 지우고 바꾸는 자는 마귀의 편이며, 말씀을 보존하고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2025-05-15 17:17:50 | 관리자
하나님의 말씀은 보존되어야 한다 — 왜 천주교 소수사본은 신뢰할 수 없는가?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다음의 질문을 진지하게 던져야 합니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참된 말씀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번역체나 문체의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의 삭제와 추가, 즉 교리의 왜곡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친히 보존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분은 자신의 말씀을 끝까지 보존하신다고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 시편 12:7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 마태복음 24:35 그렇다면 오늘날 어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것일까요? 현대 역본들, 왜 문제가 되는가? 현대 성경 번역(NIV, NASB, 개역개정, 공동번역 등)은 모두 천주교 소수사본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이 소수사본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티칸 사본 (Codex Vaticanus, B) 시내 사본 (Codex Sinaiticus, א) 알렉산드리아 사본 (Codex Alexandrinus, A) 이 사본들은 로마 카톨릭에 의해 오랫동안 보관·관리되어 왔고, 다수사본(안디옥 계열)과는 전혀 다른 본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소수 사본들의 특징은? 많은 구절들이 아예 삭제되어 있음 예수님의 신성, 보혈, 부활, 천국 등 핵심 교리와 관련된 내용이 희미하게 되어 있음 사도적 전통이 아니라 후대 종교 권력(카톨릭)의 영향 아래 편집됨 대표적 왜곡 사례: 누가복음 11장의 주기도문 삭제 킹제임스 성경 (흠정역 기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 눅 11:2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시며, 악에서 우리를 구출하옵소서.” ― 눅 11:4 개역개정/NIV/공동번역/NASB 등: “하늘에 계신” 생략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생략 “악에서 구출하옵소서” 생략 이 모든 삭제는 네슬레-알란트(Nestle-Aland)의 소수사본을 따른 결과입니다. 이는 천주교 계열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비(非)사도적 본문입니다. 이것이 왜 심각한가? 성경은 말씀을 더하거나 빼면 안 된다고 엄중히 경고합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더하거나 빼지 말고…” ― 신명기 4:2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 ― 계시록 22:19 이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말씀을 훼손한 자들에게 임할 무서운 심판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왜 킹제임스 성경인가? 킹제임스 성경(KJV, 흠정역)은 안디옥 계열의 다수 사본(Textus Receptus, 공인본문)에 기초하여 만들어졌습니다. ✔ 이 본문은 5,800개 이상의 일치하는 사본들이 존재하고 ✔ 초대 교회 시대부터 계속 사용되어 온 역사적 전통을 지니며 ✔ 교리적으로 완전한 일관성을 보여 줍니다. 반면 소수사본은? 문장의 흐름이 어색하고, 중요한 구절이 삭제되며, 복음의 핵심인 부활·승천·하늘의 왕국·예수님의 신성이 흐려집니다. 결론: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말씀을 주셨을 뿐 아니라 보존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말씀을 빼앗아 가며, 종교 권세는 말씀을 교묘히 바꾸었고, 오늘날 지식인들은 그것을 합리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네 조상들이 세워 놓은 옛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 (잠 22:28) 그 지계표는 바로 보존된 말씀, 다수사본에 기초한 킹제임스 성경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곧 믿음을 지키는 길입니다.
2025-05-15 17:06:09 | 관리자
누가복음 24장 51절, 왜 어떤 성경에는 빠져 있을까? ― 승천 사건을 삭제한 현대 성경들의 심각한 문제   “예수님의 승천이 성경에서 빠져 있다고?” 이 말을 처음 듣는다면 아마 의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개역성경, NASB, ESV, NIV 등 현대 성경들은 누가복음 24장 51절의 중요한 내용을 삭제하거나 각주로 밀어 넣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승천 사건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명확한 승천 묘사 누가복음 24:51 (KJV 흠정역) “그들을 축복하실 때에 그분께서 그들을 떠나서 위로 들려 하늘로 들어가시니라.” 이 구절은 예수님의 승천 사건을 누가복음 마지막 장에서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기록은 사도행전과도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동일한 저자, 동일한 기록: 사도행전 1:1–2 “...그분께서 친히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님을 통해 명령들을 주신 뒤에 들려 올라가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한 것이라.” (사도행전 1:2)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분명히 자신이 쓴 누가복음에 **“예수님의 승천까지”**를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 승천 구절이 빠져 있다면, 사도행전 1:2의 진술은 거짓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역본은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가? 역본누가복음 24:51 개역개정“그가 그들을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 “하늘로 들려 가심” 괄호(삭제의 의미로 보임) NIV / ESV / NASB대부분 “he left them” 또는 “was taken up” 구절에 각주: “일부 사본에는 없음” 공동번역 / 천주교 성경유사하게 삭제 혹은 약화된 표현 사용 이로 인해 예수님의 승천이라는 복음의 핵심 사건이 모호하거나 삭제되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사이의 연결 고리가 단절됩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는가? 문제의 핵심은 어떤 사본을 근거로 삼았는가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근거: 다수사본 (공인본문, Textus Receptus) 전체 필사본의 99% 이상이 포함 승천 구절이 명확히 기록   현대역본의 근거: 소수사본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사본 자체가 불완전하거나 편집 흔적 있음 역사적 신뢰성 낮고, 가톨릭 중심의 편집 경향 강함   중요한 논리적 모순 사도행전 1:2는 분명히 “승천까지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4:51에서 “들려 올라가셨다”는 구절을 지우면 어떻게 됩니까?   결과적으로 누가가 거짓말을 한 것이 되고, 성경의 권위는 무너집니다. 그러나 다수사본 기반의 킹제임스 성경은 이 모든 모순 없이 정확하게 승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론: 우리는 어떤 성경을 선택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승천은 복음의 완성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고, 지금도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중재자로 계시기 때문입니다(히 9:24, 롬 8:34).   승천이 빠진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말씀이 맞지 않는 성경은 하나님의 책이 아닙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복음의 시작부터 끝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네 조상들이 세워 놓은 옛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 ― 잠언 22:28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하거나 삭제한 성경이 아니라, 그분의 뜻과 계시가 온전히 담긴 보존된 성경, 킹제임스 성경을 붙들어야 합니다.
2025-05-15 15:11:34 | 관리자
마가복음 16장 9–20절은 원래 성경에 없는가?   ― 왜 오직 킹제임스 성경만 온전히 보존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성경은 다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 사본을 근거로 성경을 번역했느냐에 따라 말씀의 내용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마가복음 16장 9–20절입니다. 현대 성경들의 각주 개역성경, NIV, NASB, 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 심지어 여호와의 증인 성경까지 모두 이렇게 각주를 달고 있습니다: “9–20절은 오래된 사본에 없다.” “후대에 첨가된 구절로 보인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KJV) 은 이 12구절을 온전히 담고 있으며, 어떤 주석도 없이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구절은 나중에 누가 집어넣은 것일까? 이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사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1. 문맥을 살펴보자 마가복음은 1장 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선언합니다. 복음(Gospel)은 기쁜 소식, 즉 예수님의 죽으심, 부활, 승천, 복음의 위임을 포함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16장 8절에서 끝나면 내용이 이렇습니다: 여인들이 무서워 떨며 도망가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과연 “복음의 끝”이 될 수 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제자들의 복음 전파 사역이 빠진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2. 9–20절에 담긴 핵심 요소들 구절내용 요약 9–11절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심 12–13절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심 14절제자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심 15–16절복음 전파 명령: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 17–18절믿는 자들에게 따를 표적들 19절예수님 승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심 20절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며 주께서 함께 역사하심 이 구절이 없다면 복음의 완결이 사라집니다. 3. 사본 증거는 어떠한가? 마가복음을 포함한 사본은 약 1,500개 이상 존재 그중에서 단 2개의 사본(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에서만 9–20절이 없음 사본의 99.9%는 9–20절을 포함하고 있음 즉, 소수 사본을 근거로 9–20절을 빼거나 의심하는 것은 명백히 비논리적이고 불신앙적인 태도입니다. 사진 증거: 시내 사본의 편집 흔적 영국 대영박물관에서 클라우드 선교사가 직접 촬영한 시내 사본에는 9–20절을 기록할 공간이 남아 있고 지운 흔적이 있음이 분명히 보입니다. 즉, 이 구절은 애초에 있었지만 누군가의 의도로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왜 이 구절을 빼려 하는가?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교리를 담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복음 전파 사명 기적과 표적의 약속 예수님의 승천과 권위 이것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복음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말씀의 핵심과 권위를 공격해 왔고, 이러한 공격은 성경 사본과 번역의 역사 속에서도 계속되어 왔습니다. 결론: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의 ‘지계표’다 “네 조상들이 세워 놓은 **옛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 (잠언 22:28) 킹제임스 성경은 **다수사본(공인본문)**을 근거로 하며, 수천 년간 보존되어 온 정통 기독교의 말씀의 유산입니다. 반면, 소수사본에 근거한 개역성경, NIV, NASB 등은 반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삭제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마가복음 16장 9–20절은 복음의 완성입니다. 이 구절이 없다면 복음은 중단된 이야기일 뿐입니다. 믿는 자는 의심하지 말고 보존된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시편 12:6–7)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존하신 말씀”을 손에 들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킹제임스 성경입니다.
2025-05-15 14:55:52 | 관리자
마가복음 10장 24절, 구원이 어려운가?   정말 모든 성경은 다 똑같을까요? – 킹제임스 vs 현대역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어차피 다 하나님의 말씀인데, 어느 성경이나 다 똑같지 않나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매우 순진하거나, 사실을 모르는 데서 비롯된 주장입니다. 실제로는 ‘어떤 사본을 근거로 하여 번역되었는가’에 따라 성경은 핵심 교리에서조차 큰 차이를 보입니다. 이는 단지 단어 선택의 차이가 아니라, 예수님의 정체성과 구원 진리에 관한 문제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매우 심각합니다. 킹제임스 성경 vs 개역성경 vs 현대역본(NIV 등)의 예시 비교   킹제임스 흠정역 (다수사본 기반) 제자들이 그분의 말씀들에 깜짝 놀라더라.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응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얘들아, 재물을 신뢰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은 심히 어렵도다! (마가복음 10:24, 흠정역) 핵심 요점: 어려운 이유를 명확히 밝힘 → “재물을 신뢰하기 때문에” ‘믿음’과 ‘신뢰’에 대한 교리적 핵심을 보존 개역성경 / NIV / ESV / 공동번역 등 (소수사본 기반)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문제점: 왜 어려운지 설명 없음 중심 교리가 삭제됨 → ‘재물을 신뢰하는 자’라는 조건이 빠짐 마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식으로 일반화 이런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구분다수사본 기반소수사본 기반 대표 역본킹제임스 성경(KJV), 루터 성경 등개역성경, NIV, ESV, 공동번역 등 사본 계통안디옥 계열 (전통 교회 사용)알렉산드리아 계열 (천주교 벌게이트 기반) 수량약 5,000개 이상 다수 필사본소수의 사본 (바티칸 사본, 시내 사본 등) 교리 보존성정확한 교리 보존중요한 구절 누락 또는 변경 예시 문제 : 마10:24, 요일5:7, 마18:11 등에서 명확하게 드러남 단순 번역 문제가 아니다 — 교리 문제다   이 문제는 단지 “의역”이냐 “직역”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의 조건, 예수님의 신성, 성령님의 역사, 믿음과 은혜의 관계 등 핵심 진리들이 사라지거나 왜곡되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2:33 – 킹제임스는 ‘요셉과 그의 어머니’, 현대역본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 예수님의 신성을 흐림 요한일서 5:7 – 킹제임스에는 삼위일체의 가장 명확한 구절이 있음. 대부분 현대역본에서는 아예 삭제됨 마태복음 18:11 –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사역 목표 구절 → 개역성경과 NIV에서는 삭제됨 결론: “모든 성경이 같다”는 말은 무지에서 나온 착각이다 오늘날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다양한 한글 성경들은 서로 다른 사본을 근거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단어 선택이나 번역 스타일이 아니라 신학과 교리의 핵심을 흔드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왜곡 없이 진리를 보존한 번역본이다 다수사본(공인본문) 기반 교리적으로 신성, 구원, 믿음, 성령에 대한 핵심이 살아 있음 수백 년 동안 성도들이 실제로 사용해 온 성경 개역성경, NIV, ESV 등은 천주교 소수사본에 근거한 잘못된 요소가 많다 중요한 단어 삭제, 문장 왜곡 예수님의 신성을 흐리게 하고 은혜가 아닌 행위 중심 해석으로 흐르게 만듦 말씀은 정확히 번역되어야 하며, 교리를 왜곡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다수사본에 기초한 킹제임스 성경을 붙들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시편 12:6–7, KJV)
2025-05-15 14:50:13 | 관리자
‘아마’와 ‘세마’는 다르다 – 성경 번역은 원어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성경 번역에서 우리 문화에 맞는 단어를 끼워 넣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역사와 지역, 언어 속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 단어 하나하나도 그 당시의 맥락과 환경에 맞게 정확히 번역되어야 마땅합니다. 오늘은 많은 성경 독자들이 혼동하는 **‘아마’(亞麻)와 ‘세마’(細麻)**의 차이를 통해 왜 성경 번역에서 식물 이름조차도 원어에 충실해야 하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성경의 ‘아마’는 린넨(Linen)이다 성경에서 ‘아마’(Heb. pishteh, 그리스어 linon)는 린넨, 즉 아마 식물의 섬유로 만든 천을 의미합니다. 영어 KJV 성경: "fine linen" / "linen cloth" 용도: 제사장의 옷, 성막의 휘장, 의로운 행실의 상징 (출28:39, 계19:8) 아마(Linum usitatissimum)의 특징: 유대 지역과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 고대 중동에서 널리 재배 키 1m 내외, 푸른 자주색 꽃, 줄기 섬유로 린넨을 짐 성경에서 고운 옷, 의식용 옷감으로 매우 중요하게 사용됨 “또 너는 고운 아마로 속옷을 만들어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입히며...” (출28:42, 흠정역) 2. 그러나 ‘세마’는 고운 ‘삼’ 또는 ‘마’로 오해되기 쉽다 한국어 성경에서는 종종 ‘세마포’ 또는 ‘고운 세마포’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세마’를 **‘마’(삼, Hemp)나 ‘삼베’**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세마포’는 실제로 ‘fine linen’, 즉 고운 아마 천을 가리킵니다. 성경 시대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삼(마, Hemp)**이 재배되지 않았습니다. ‘마’(삼)의 정의 (한국어 사전 기준): 삼과 식물, 중앙아시아 원산 주로 동아시아에서 재배 (중국, 한국 등) 줄기에서 섬유를 얻어 삼베를 짜는 용도 반면 성경 시대의 이스라엘은: 삼을 재배하지 않았고 아마를 사용해 린넨 옷감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즉, **성경에서 ‘세마’는 마(Hemp)가 아니라 아마(Linen)**입니다. 그런데도 번역자가 문화적 친숙성이나 언어 감각에 따라 ‘마’로 번역하면 성경 본래의 맥락이 심각하게 왜곡됩니다. 3. 왜 이런 번역 실수가 심각한가? 역사적/지리적 정확성 결여 성경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역사적 배경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한국에서 자라는 작물과 구분해야 합니다. 교리적 의미 왜곡 고운 아마 옷은 성경에서 의로움을 상징합니다 (계19:8). 만약 ‘세마’를 삼베나 마로 오역하면, 구원의 상징을 잘못 이해하게 됩니다. 성경 해석에 혼란을 준다 번역이 불일치하면, 같은 헬라어 linon이 어떤 곳에서는 ‘아마’, 어떤 곳에서는 ‘세마’, 또 다른 곳에서는 ‘삼’으로 바뀌며 일관된 해석이 어려워집니다. 4. 동일 단어는 동일하게 번역해야 한다 이것은 성경 번역의 기본 원칙입니다. 같은 원어는 같은 번역어로 유지해야 하고, 당시 유대 지역에서 실제로 존재하던 사물이나 작물의 이름을 다른 문화권의 것으로 바꾸면 안 됩니다. ▶ pishteh 또는 linon = 아마 (Linen)  '세마포', '마', '삼베'와 혼용 NO 결론: 성경은 문화적 번역이 아니라 정확한 전달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특정한 시공간 속에 기록하신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유대인의 문화, 역사, 언어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우리는 그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문화에 접근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말씀을 더하거나 빼지 말라” 하신 경고는 단어 하나도 소홀히 번역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2025-05-15 14:42:31 | 관리자
마태복음 26장 3절 수제사장과 대제사장은 다르다 – 오역이 만든 교리 혼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 중 일부는, **‘대제사장’(High Priest)**과 **‘수제사장들’(Chief Priests)**의 개념을 혼동하거나 통일해버리는 심각한 오역을 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이 여러 명 있었다는 잘못된 인상을 주고, 유대 사회와 제사 제도의 본질을 왜곡하게 됩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두 용어의 차이를 분명히 밝히고, 왜 이것이 중요한지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1. 대제사장은 항상 한 명이다 성경에 따르면, **대제사장(High Priest)**은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제사장의 수장으로서, 이스라엘에 한 명만 존재했습니다. 그는 오직 속죄일에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레16:17),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아론의 직계 혈통에서 이어지며, 레위기의 제사장 규정 안에서 가장 높은 영적 책임자였습니다. “...아론을 취하여 그에게 기름을 부어 거룩히 구별하여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게 하라.” (출 28:1)   2. 그런데, 왜 복수의 '대제사장들'이 나올까? 개역성경을 보면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그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저에 모여...” (마 26:3, 개역) 여기서 문제는 복수 표현인 **‘대제사장들’**입니다. 한 나라에 왕이 둘일 수 없듯, 대제사장도 한 명만 존재합니다. 그런데도 복수형으로 번역해버리면, 독자들은 마치 여러 명의 대제사장이 함께 존재했던 것처럼 오해하게 됩니다.   3. 킹제임스 성경은 명확하게 구분한다 킹제임스 성경은 정확히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en assembled together the chief priests, and the scribes, and the elders of the people, unto the palace of the high priest, who was called Caiaphas.” (Matt. 26:3) 그때에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저에 함께 모여(킹제임스) 기존의 개역성경을 따르면 한 해에 대제사장이 다수였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즉, 가야바는 유일한 대제사장(High Priest)이고, 함께 모인 이들은 수제사장들(Chief Priests), 즉 고위 성전 지도자들입니다.   4. 수제사장(Chief Priests)은 누구인가? **‘수제사장’**이란 대제사장을 보좌하는 고위 제사장들로, 다음과 같은 성전 직책자들을 포함합니다: 성전 대장 (대제사장의 후계자) 주간 계열 책임자 (24제 계열) 매일 계열 책임자 (156제 계열) 성전 감독자 성전 재무관 이들은 단지 종교의식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산헤드린 공회의 일원이 되어 정치, 사회, 종교적으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자들 중에도 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마 26:3-4).   5. 카톨릭 성경은 ‘수석 사제’라고 번역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카톨릭 성경이 **‘수제사장’**을 **‘수석 사제’**로 번역하여 대제사장과 구분하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카야파라는 대사제의 저택에 모여...” (카톨릭 성경) 비록 카톨릭 교리가 다른 부분에서 오류가 있지만, 이 부분의 번역만큼은 역사적 사실과 맞는 정확한 구분을 보여 주고 있는 셈입니다.   6. 왜 이 구분이 중요한가? 구분대제사장 (High Priest)수제사장들 (Chief Priests) 숫자항상 한 명복수 가능 역할속죄일 지성소 출입, 백성 중보자성전 행정과 재정, 교사, 공회원 지위제사장의 최고 수장고위 참모진, 보좌역 대표 인물가야바가야바 주변의 성전 엘리트들 만일 이 구분이 흐려지면 예수님 당시의 영적 권력 구조, 제사장 계급의 부패, 그리고 예수님께서 왜 그들과 부딪히셨는지 등의 이해가 모호해집니다.   성경 해석의 원칙: 동일 용어는 동일하게 번역되어야 한다 성경 번역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원칙 중 하나는 같은 단어는 항상 같은 의미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King (왕)은 King, Priest (제사장)는 Priest, Kingdom (왕국)은 Kingdom, 그리고 High Priest는 대제사장, Chief Priests는 수제사장으로 정확하게 구분되어야 합니다.   결론: 우리는 왜 바른 번역 성경을 사용해야 하는가? 복수의 ‘대제사장들’이라는 번역은 역사적 사실에도 맞지 않고, 예수님 당시의 정확한 권력 구조와 교리적 이해를 왜곡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수제사장들과 대제사장을 명확히 구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원형 그대로 전달하는 데 충실합니다.   적용: 오늘날 우리 안에 참된 제사장의 정신이 있는가? 마태복음 26장 3-4절에서 수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사람들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기로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거룩했지만, 속은 타락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교회 안에서 어떤 기능이나 직분을 맡고 있다면, 그 책임이 영적 위치에 맞는 순전한 헌신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진리를 정확히 알고 가르치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첫 걸음입니다.” 지금 이 시간, 정확한 말씀을 사랑하는 일이 우리 삶을 바르게 세울 수 있습니다.
2025-05-15 14:33:20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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