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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 분리의 몰이해와 오용인류 역사 최초의 ‘정교 분리’, 왜 미국에서 시작되었을까? 중세 로마 카톨릭부터 청교도까지 이어지는 국가 교회(State Church) 역사와 양심의 자유 이야기     크리스천투데이 오피니언/컬럼 기사 오늘날 한국에서도 ‘정교 분리’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런데 정교 분리라는 원칙이 왜 만들어졌고, 누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사실 정교 분리의 본래 의미는 매우 단순합니다.   정교 분리는 대형 교회(교단 혹은 교파, 이하 동일함)의 종교 독재로부터 소수 신앙인의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입니다. 이 글에서는 중세 카톨릭, 루터교, 장로교, 성공회 등 유럽 국가 교회의 역사, 그 속에서 등장한 분리주의자들, 그리고 미국에서 탄생한 정교 분리의 원래 의미까지 설명하려 합니다. 1. 중세 카톨릭 교회 — 국가와 종교가 하나였던 시대   중세 유럽은 ‘국가 교회’ 체제였습니다. 교황은 왕과 황제를 지배했고, 종교 재판소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양심의 자유를 억압했습니다. 알비파, 왈도파 같은 성경 중심의 무리들은 투옥, 고문, 화형으로 죽었습니다. 이것은 국가 교회의 본질적 문제, 즉 대형 교회가 ‘정통’을 자처하며 소수 신앙을 억압하는 구조를 잘 보여 줍니다. 2. 종교 개혁 이후에도 국교회 체제는 계속됐다   루터교(독일, 스칸디나비아 3국), 개혁교회와 장로교(스위스, 스코틀랜드), 성공회(영국) 등은 성경을 되찾았지만 ‘국가와 교회의 분리’에는 실패했습니다. 각 나라의 정부는 특정 교단을 국교로 삼고 다른 신앙을 억압했습니다. 3. 유럽 전역에서 분리주의자들 등장   이런 억압 속에서 “국가는 국가 교회를 만들거나 지정할 수 없다”,  “신앙은 강제로 될 수 없다”라고 믿는 이들이 등장했습니다. 재침례파로 불리는 스위스 형제단, 영국의 분리주의자들 등은 성경적인 교회를 찾다가 결국 박해를 받았습니다. 4. 일부는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1) 미국에서 청교도들의 국가 교회 1620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102명의 청교도 분리주의자들이 영국을 떠나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할 자유를 얻기 위해’ 출발했지만, 그 자유는 오직 자신들과 같은 신앙을 가진 자들만을 위한 자유였습니다.  그들이 신대륙에 도착해 세운 플리머스와 이후의 매사추세츠 베이 식민지(1630)는 성경을 표방했으나 사실상 청교도 국가 교회 체제로 운영되었습니다. 예배 방식, 신앙 고백, 교회 회원 자격 등이 모두 식민지 정부에 의해 규정되었습니다. 교회는 국가의 손에 있었고, 국가가 교회를 세우고, 교회가 시민을 규제하는 구조였습니다. 즉, 청교도들은 로마 카톨릭과 영국 국교회를 떠나왔지만 새로운 형태의 국가 교회를 다시 세우고 말았습니다. (2) 침례교인들의 양심의 항거 이런 신정 정치 국가 교회 통제 속에서, 영국 출신 청교도 목사 로저 윌리엄스(1603–1683)가 등장했습니다. 그는 1631년 매사추세츠 식민지에 도착한 뒤 곧바로 그곳의 교회-국가 결합을 비판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습니다.   “강제된 예배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가증한 것이다.” “국가는 인간의 몸을 다스릴 수 있으나, 양심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다.”   윌리엄스는 다음 세 가지를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첫째, 국가는 국교회를 세울 권리가 없다. 둘째, 신앙은 강제로 만들어질 수 없다. 셋째, 모든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섬길 자유가 있다.   1635년에 매사추세츠 당국은 그를 ‘이단적 분리주의자’로 규정하고 추방했습니다. 추방당한 윌리엄스는 눈 덮인 숲속을 헤매다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생존했고, 1636년 로드아일랜드에 프로비던스 식민지를 세웠습니다.  로드아일랜드 헌장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이 땅에서는 어떤 사람도 종교 문제로 박해받지 않으며, 모든 사람은 각자의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길 자유를 가진다.”   이것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와 교회의 분리 즉 ‘정교 분리 원칙’이 실제 사회에 제도적으로 구현된 사례였습니다. 그는 1638년에 미국 최초 침례교회를 설립하고 양심의 자유에 따라 믿는 자들만의 침례 및 교회를 실행하였습니다. (3) 17~18세기 버지니아 주 침례교도의 고난과 투쟁 1700년대 초, 버지니아 주 식민지의 국교는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였습니다. 모든 시민은 국교회에 세금을 내야 했고, 비국교도들은 심지어 예배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침례교 설교자들은 허가 없이 설교했다는 이유로 채찍질당하거나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러한 고난을 겪으며 침례교인들은 “국가는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는 신념을 더욱 굳게 붙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청원서를 제출하고 정치 지도자들을 설득하였습니다. (4) 미국 헌법 수정 조항 제정 버지니아 주의 침례교 목사들은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며 청원했고, 토머스 제퍼슨(미국 3대 대통령)과 제임스 매디슨(미국 4대 대통령)은 그들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1777년에 제퍼슨은 “어떤 사람도 종교적 예배나 믿음을 강요받을 수 없고 종교적 예배나 믿음 때문에 박해받거나, 불이익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규정한 버지니아 주 종교 자유법을 초안했고 이것은 1786년에 통과되었습니다. 그다음 해인 1787년에 미국 헌법 초안이 마련되었고 그것은 1788년의 비준을 거쳐 1789년에 발효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시민들이 헌법 초안에 개인의 자유가 명시되지 않아 국가 교회의 탄압이 재현될 수 있다고 우려하며, 개인의 권리를 명문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2년 후인 1791년, 마침내 '권리장전'이라 불리는 헌법 수정 조항들이 제정되었습니다.   수정 조항 제1조는 다음과 같이 정교 분리를 명시하였습니다.    “미국 국회는 국교를 세우지 못하며,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를 금지하지 못한다.”   이 조항은 종교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형 교회가 국가 권력을 이용해 소수 교회를 억압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항입니다. 즉 정교 분리는 소수 신앙인의 양심을 지키는 방패입니다. 5. 인류 최초로 종교의 자유가 인류에게 준 혜택   국가가 국가 교회를 세우거나 다수의 종교 집단이 소수의 양심의 자유를 탄압할 수 없도록 규정한 미국 헌법 수정 조항들은 다음과 같은 혜택을 전 인류에게 주었습니다.   (1) 영혼의 자유 — 믿음은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 선택이다.  (2) 복음 전파의 자유 — 선교와 전도의 문이 열렸다.  (3) 교회의 자율성 — 교회의 머리는 교단이나 교파나 목사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4) 문명 발전 — 신앙의 자유가 사상의 자유로, 인권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양심의 자유는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 20-21세기 문명사회의 기틀을 놓았다. 6. 한국에서 반복되는 오해 오늘날 한국에서는 대형 교단이 일방적으로 이단을 규정하고는 “정교 분리 원칙상 정부는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사실 대한민국에서는 지금까지 정교 분리라는 보호막 아래에서 이단감별사라 불리는 자들이 대형 교단의 이단 대책 위원장이나 위원을 역임하며 교단의 이름으로 소수의 개인이나 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2021년에 출간된 <한국교회를 30년 동안 농락한 이단감별사들의 한국교회 대 사기극>(황규학 저, 616쪽)은 이런 문제점을 상세히 기록하며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이단감별사들의 자의적인 기준에서 벗어나면 모두 이단이 되었다. 지난 한국교회의 30년간은 그야말로 이단감별사들이 한국교회에 대한 사기극을 연출한 기간이기도 하다.…이단감별사들의 공통점은 교리감별을 근거로 항시 돈과 연결을 했다. 교리의 전쟁이 아니라 교리를 빌미로 쩐의 전쟁을 하였다.…돈을 주면 정통이고, 기사도 삭제하고, 강의도 해주고, 돈을 주지 않으면 자신들이 갖고 있는 언론과 소속교단의 이대위를 통하여 이단으로 낙인찍는다. “   사실 이런 일은 정교 분리 원칙의 본래 의미를 완전히 뒤집은 것입니다. 정교 분리는 다수 교단이나 정부를 보호하는 법이 아니라, 다수 교단의 종교 독재로부터 ‘소수의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법이기 때문입니다. 7. 마무리 정교 분리는 중세 천주교, 루터교, 장로교, 성공회 등의 국가 교회 체제 아래에서 고통받던 신앙인들이 흘린 피와 눈물 위에 세워진, 인류 최초의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장치입니다.   그 목적은 하나입니다. “소수 신앙인의 양심의 자유를 보호하라.”   정교 분리의 이러한 진짜 의미를 이해하면 오늘날 한국에서 이 원칙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도 분명히 보이게 됩니다.   나의 양심의 자유를 인정받으려면 다른 사람의 양심의 자유도 탄압해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너무나 상식적인 일이 인류 역사에서 오랫동안 제대로 실천되지 못하였으나 1791년에 미국 헌법 수정 조항 제1조에서 대형 교회가 소수의 양심의 자유를 탄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규정하면서 온 인류에게 종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등을 주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대형 교회가 자기들 마음대로 특정 개인이나 소수 집단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야만적인 일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영혼의 자유를 빼앗는 일입니다. 이런 일은 중세 천주교나 16-18세기의 프로테스틴트 교회에서나 가능한 것이며, 개인의 행복 추구권과 양심의 자유를 명기한 대한민국의 헌법을 위배하는 것입니다.
2025-11-19 14:02:00 | 관리자
킹제임스 성경 목회자 협의회 장로교 합동총회 ‘정동수 목사 이단 규정’에 대한 입장 크리스천투데이 본문   2025년 9월에 장로교 합동 제110회 총회는 인천 사랑침례교회의 정동수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성경과 원칙에 대한 자기모순이다.  1. 성경 본문에서 드러나는 근본 모순  장로교 합동총회는 홈페이지의 대요리문답 본문에서 요한일서 5장 7절과 마가복음 9장 44, 46절을 킹제임스성경(KJV)에 있는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합동의 공식 예배 성경(대한성서공회의 개역 및 개역/개정판)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총회는 자기들이 사용하는 성경에는 없는 구절을 공식 문서에 인용하면서, 그 구절이 포함된 킹제임스성경을 옹호하고 번역한 정동수 목사를 ‘성도들에게 성경의 혼돈을 초래했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것이야말로 성경 본문 차원에서 드러나는 자기모순이다.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성경 보존의 일치점 합동총회의 교리 근간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 8절은 이렇게 말한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님의 직접 영감을 받았고, 그분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에 의해 만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어 왔으므로 신뢰할 만하다. …성경은 모든 백성의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 정동수 목사의 신앙고백 역시 이 문장과 동일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들을 보존하셨다”는 믿음을 강조하며, 단지 “어느 사본이 그 보존된 말씀인가”를 논의했을 뿐이다. 즉, 그는 성경의 영감, 보존, 번역을 모두 믿는 개혁파 정통 신앙고백의 범주 안에 있다. 이것을 이단의 근거로 삼는 것은, 합동이 자기 신앙고백서의 교리적 토대와 충돌하는 행위가 된다. 정동수 목사는 중세암흑 시대 천주교를 반대하며 개혁신학 장로교를 창시한 칼빈이 믿고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인용하는 다수 사본 킹제임스 성경이, 천주교 소수 사본에서 나와 합동의 공식 예배 성경으로 쓰이는 개역 및 개역/개정판 성경과 교리 면에서 현저히 다르며, 바로 그 다수 사본 성경이 원래 루터, 칼빈 등 프로테스탄트들이 천주교를 물리치기 위해 사용한 올바른 성경임을 보이려 하였을 뿐이다. 3. 절차와 원칙의 위배 – ‘소명 절차 없는 반헌법적 결의’ 합동총회는 「이단·사이비 규정 지침서」에서 이렇게 명시했다. “명백한 증거에 근거하고, 당사자의 소명을 들은 뒤에 결의한다.” 그러나 정동수 목사는 소명기회조차 부여받지 않은 채, 총회 보고서의 일방적 판단으로 이단 결정을 통보받았다. 이는 합동총회가 스스로 세운 공정 절차 원칙을 위배한 사건이며 결국 자기들이 만든 법을 자기들이 깬 셈이다. 4. 정동수 목사를 이단이라 부를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정동수 목사를 이단이라 부르려면 그가 실제로 삼위일체 하나님, 그리스도의 신성, 구속사, 성경의 무오성 같은 핵심 교리를 부정했는지를 문서로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교리적 이탈의 증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어느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성경에 근거하여 설명하였다. 최근 장로교 10개 교단이 공동으로 마련 중인 「이단 규정 설정 표준안」(기독교연합신문, 2025.10.11.)에 따르면, 이단 판단의 기준은 다음 아홉 가지로 명시되어 있다: 계시론, 성경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성령론, 종말론, 그리고 기타 윤리적 이탈. 이 기준에 따라 판단해 보면, 정동수 목사는 새 계시를 말하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지도 않았으며, 교회나 구원의 질서를 해체한 적도 없고 더더욱 윤리적 이탈을 한 적도 없다. 오히려 그는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며 ‘어느 사본이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이냐’를 연구하고 기존 한글 성경의 명백한 오류들을 고쳐야 한다고 말하였을 뿐이다. 즉, 이단 규정 표준안의 어떤 항목으로도 정동수 목사의 ‘이단성’을 입증할 수 없다. 그런데도 합동총회는 일부 이단 감별 세력의 여론에 휘둘려, 정통 신학 안의 견해 차이를 이단으로 몰아가며 대형 교단으로서의 권위를 스스로 실추시키며 중대한 오판을 범했다. 정동수 목사는 프로테스탄트로 분류되는 교단 중 세상에서 가장 많은 성도를 보유한 침례교 목사로서, 성경 그대로 믿고 그대로 가르쳤을 뿐이며 이것은 교단을 포함한 모든 단체의 상위법인 대한민국 헌법이 종교와 양심과 표현의 자유로 보장하는 개인의 권리이다. 결론 성경과 교리, 절차, 기준, 네 측면에서 볼 때, 이번 결의는 합동총회가 스스로 세운 원칙을 무너뜨린 자기 모순적 결정이다. 따라서 이러한 결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경을 지킨다”는 기치를 내걸고는 정작 성경과 신앙고백, 그리고 절차를 어긴 대형 교단의 무법한 판단으로 남게 될 것이다. 킹제임스 성경 목회자 협의회 회장 구정민 목사 외 목사 일동
2025-11-17 14:31:40 | 관리자
대한성서공회는 개역 및 개역개정 성경을 문법에 맞게 신속히 교정하기 바란다.   “…음이라/임이라”, “…께로부터/께로서”, “…을 인하여/힘입어” 등 수천 구절 크리스천투데이 본문    개역 및 개역개정 성경의 언어적 오류와 신속한 교정의 필요성 개역과 개역개정 성경은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 독보적인 성경이다. 그러나 그 오랜 역사와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언어적 측면에서는 시대적 교정이 필요한 부분들이 있다. 내 부모님, 나와 내 아내, 내 아이들, 우리 교회 대다수 성도들 역시 개역성경으로 구원을 받고 믿음 생활을 했으므로 먼저 이에 큰 감사를 드린다.  그런데 너무 오래 전에 번역되었거나 기존 틀을 유지하다 보니, 현시대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문장과 단어들이 심히 많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장로교 신학대학의 대학원장을 지낸 나채운 교수님도 <우리말 성경 연구>(기독 교문사, 712쪽)에서 이런 문제를 상세히 기술하였다. 신약 성경은 2,000년 전 보통 사람들의 언어인 코이네 그리스어로 기록되었고, 루터의 독일 성경이나 틴데일의 영어 성경도 어린 학생들을 포함해서 농부나 시장에서 일하는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로 번역되어 독일어와 영어의 표준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성경은 신앙과 삶의 모든 기준이다. 그러므로 성경 번역은 반드시 한 나라의 표준 문법과 어법에 맞아야 한다. 그래야 그 나라의 모든 세대, 즉 아이들과 청년들 그리고 어른들이 성경을 읽고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교회가 수십 년간 사용해 온 개역 성경과 최근에 나온 개역개정에는 문법적으로 맞지 않거나 오늘날 한국어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표현들이 적지 않다. 성경이 진리의 표준이라면 그 언어 또한 정확한 문법과 자연스러운 어법 위에 서야 한다. 성경 발행의 목적은 원본의 말씀들을 정확히 번역하면서도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하여 구원받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성서공회가 이 점을 기억하고, 최소한 현시대 문법에 맞게 개역과 개역개정의 본문을 교정하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다음은 그 교정을 위한 몇 가지 사례들이다. 1. “…음이라/임이라” ― 문법에 맞지 않는 어미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4),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같은 문장은 오늘날의 국어 문법에 맞지 않는다. “찾는 자가 적기 때문이라”, “능력에 있기 때문이라”가 올바른 표현이다. 개역에는 “…음이라”가 284회, 개역개정에는 380회 나오고 “…임이라”는 각각 53회, 111회 나온다. 문법에 맞지 않는 이런 비문(非文)은 속히 교정해야 한다. 성경이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비함이 아니라 의사소통의 실패다. 더욱이 많은 수고와 재정을 들여 개역의 수많은 구절들을 교정해서 훨씬 잘 만들었다는 개역개정에 이런 비문이 더 많이 들어 있다는 사실은 교정자들의 부실 작업이나 태만을 뜻한다. 2. “…께로부터/께로서” ― 존재하지 않는 존칭형 조사 개정: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렘 7:1) “여호와께로부터”, “예수께로서” 같은 표현은 우리말 문법에 존재하지 않는다. 올바른 표현은 “여호와로부터”, “예수님에게서” 등이다. 개역에는 “…께로부터”가 20회, 개역개정에는 63회 그리고 “…께로서”는 각각 42회, 2회 등장한다. 이것은 존칭을 강조하려다 문법을 파괴한 결과이며, 실제로는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성경 언어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오류다. 3. “…을(를) 인하여” ― 문법에 맞지 않음 개역: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 2:8) 이 구절의 “…을 인하여”는 한문식 표현으로 문법에 맞지 않는다. 오늘의 표준어로는 “은혜로”, “은혜 때문에”, “은혜로 말미암아”가 맞는다. ‘…을(를) 인하여’는 개역에서 무려 509회, 개역개정에서도 여전히 7회 나온다. 이런 문장들은 문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의미의 명료성을 잃는다. 4. “…을(를) 힘입다” ― 문법에 맞지 않음 개역의 사도행전 24장 3절은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무지하옵나이다.” ‘당신을 힘입어’, ‘선견을 인하여’는 문법에 맞지 않고 ‘감사무지하옵나이다’는 현시대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다. 오늘날의 문법으로 바꾸면 대체로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각하의 돌보심으로 말미암아 이 민족에게 귀한 일들이 이루어졌으므로 우리가 전적으로 감사를 드리며 항상 모든 곳에서 그것을 인정하나이다.” “…을(를) 힘입다”는 개역과 개역개정에 각각 31회 나오는데 “…을(를) 힘입다”로 써야 한다. 이처럼 고어적 존칭체를 유지하려는 관행은 현시대 성경 독자들에게 오히려 성경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5. “너로/너희로” ― 문장 구조를 무너뜨리는 조사 개역이나 개역개정의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창 12:2)라는 표현은 “내가 너로부터 큰 민족을 만들고” 혹은 “내가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가 맞다. 이런 구조는 국어 문법의 기본을 벗어나 있으며, 중고등학생조차 문장을 분석할 수 없다. 성경을 읽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문법으로 이해할 수 없다면, 번역은 반드시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 6. “행하다”로 번역된 ‘walk’ ― 삶의 걸음을 잃은 오역 개역과 개역개정의 갈라디아서 5장 16절과 25절은 이렇게 되어 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성령으로 행할지니.” 그러나 원어의 walk는 ‘일하다(do)’가 아니라 ‘걸어가다’이다. 즉, 이는 성령님 안에서 삶의 걸음을 걷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올바른 번역은 “성령 안에서 걸으라”,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라”가 되어야 한다. 또한 시편 86편 11절의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역시 “주의 진리 안에서 걸으리니”로 옮겨야 정확하다. ‘행하다’로 바꾼 것은 신앙을 생활의 걸음이 아닌 행위 중심의 윤리로 오해하게 만든다. 7. “기쁘시게 하다” ― 목적어 높임의 문법 오류 개역이나 개역개정의 히브리서 11장 5, 6절은 다음과 같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다”는 표현은 문법적으로 틀렸다. 어미 ‘시’는 주체 높임 접사로 목적어에 붙을 수 없다. 따라서 올바른 말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다”이다. “기쁘시게”는 개역에 14회, 개역개정에 15회 나온다. 존중은 감정이 아니라 문법의 질서로 드러난다. 존칭의 남용은 오히려 언어의 질서를 깨뜨린다. 8. “하나님의 신” ― 샤머니즘적 오해를 낳는 표현 개역의 창세기 1장 2절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는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를 움직이시니라”로 번역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신을 영어로 번역하면 “God of God”이지만 원래는 “Spirit of God”이기 때문이다. 영이 아니라 ‘신(神)’은 한국어에서 토속 신앙이나 샤머니즘적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강신(降神)의 개념이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개역의 사사기 11장 29절은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로 되어 있어 강신의 개념이 진하게 들어 있다. 개역에는 하나님의 신이 13회, 여호와의 신이 21회, 주의 신이 7회 등장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미숙했던 초기 번역자들의 시대적 한계는 이해할 수 있으나 지금까지 이 표현이 유지되는 것은 언어적·신학적 책임 회피다. 결론: 대한성서공회는 문법에 맞게 성경을 신속히 교정해야 한다. 위에서는 시급히 고쳐야 할 문법 교정 사례들을 몇 가지만 언급하였다. 이 외에도 중고등학교 아이들을 위해서는 “…려니와”, “…거니와”, “…진대” 등 개역 및 개역개정에 수백 회 나오지만 현시대에는 거의 쓰지 않는 표현들도 같이 교정하면 좋을 것이다. AI 시대에는 문법 교정이 어렵지 않다. 대한성서공회는 성경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표준 문법에 맞는 교정 작업을 즉시 시작해야 한다. “…음이라/임이라”, “…께로부터/께로서”, “…을(를) 인하여”, “…을(를) 힘입다”, “너로/너희로”, “행하다(walk)”, “기쁘시게 하다”, “하나님의 신” 등 수천 구절을 대상으로 교정자들을 투입하고, 우리말 문법과 의미에 맞는 성경으로 다듬어야 한다. 성경의 권위는 진리의 정확성과 언어의 명료성 위에 선다. 개역개정이 존재하지만 여기에도 이런 오류들이 많이 존재하고 아직도 수많은 교회가 개역 성경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대한성서공회는 이러한 표현들이 문법적으로 부정확함을 알리고 좋은 교정 팀을 조직해서 전면적인 교정 작업을 시작하고 오류 구절 목록과 교정 방침을 투명하게 공지해야 한다. 그러면 모든 성도들이 두 손을 들고 이런 작업을 환영하고 기뻐할 것이다. 성경은 최소한 중고등학생이 읽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우리말답게 쓰여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가진 거룩한 권위를 오늘의 세대에게 전달하는 첫걸음이다. 대한성서공회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이러한 교정을 추진함으로써 공회 발행 성경이 한국어의 표준으로 자리 잡기를 간절히 바란다. 사랑침례교회 정동수 목사
2025-11-17 14:26:33 | 관리자
안녕하세요? 저희 출판사는 2009년 10월 31일 <천주교의 유래>(원제목 : Babylon Mystery Religion )(저자 Ralph Woodraw)를 출간하여 무료 PDF 책으로 저희 사이트(KeepBible.com)에서 제공하였습니다. 이 책의 역자 서문에도 쓴 바와 같이 저는 1985년에 처음 미국에서 만난 구영재 선교사님 (2013년 8월 소천)께서 1992년 제가 귀국 한 뒤 번역 허가를 받아 번역과 출판을 의뢰하였기에, 저작권과 관련한 법적인 권리를 갖추고 있다고 판단하여, 번역과 출판을 진행하고, 무료로 대중에 제공하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원저자인 Ralph Woodraw 목사님께서 한국의 지인을 통해 번역 허가를 한 바가 없다고 밝혀왔습니다.  원저자인 Ralph Woodraw 목사님께서는 1966년 『Babylon Mystery Religion: Ancient and Modern』 을 출간한 이후에 카톨릭과 관련한 연구를 지속하셨고, 그 연구의 결과 자신의 책이 부정확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카톨릭이 바빌론 기원이라는 내용은 그 근거가 부정확하고 논증의 한계가 있다는 결론입니다. 이에 1997년 자신의 저서의 내용을 전면 철회를 결정하였고, 자신의 기존 주장을 비판한 대체서인 『The Babylon Connection?』를 출간하였습니다. Ralph Woodraw 목사님께서는 카톨릭의 압력이나, 협박 때문이 아니라 양심상의 확신 때문에 자신의 책을 철회하였고, 재정적으로는 손해를 감수한 결정을 한 것입니다. 원저자가 책의 내용을 전면 철회한 시점은 1997년이고, 저희 출판사가 번역, 출간한 시점은 2009년으로, 저자가 자신의 책을 철회하고, 자신의 주장을 비판한 새로운 책을 출간한 사실을 감안할 때, (지금은 확인할 수 없지만), 구영재 선교사님의 번역 허가 여부와 관계없이, 이 책의 한국 출간은 적절하지 못했음을 밝힙니다. 저작권자인 원저자의 의견을 존중하여, ‘천주교의 유래’는 킵바이블 사이트에서 내렸고, 블로그 등의 글에서도 내렸습니다. 앞으로 이 책의 내용이 우리 사이트나, 블로그, 유튜브 등에 언급되어 있으면 발견되는 대로 내릴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운로드 하여, 보유한 천주교의 유래 PDF 파일로 폐기할 것을 부탁드립니다 또한,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신 천주교의 유래 PDF 파일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은 원저자의 의도에 반하고, 저작권법에 저촉되어 문제가 될 수 있으므로, 타인에게 공유하지 말아 주실 것을 당부합니다. 감사합니다.
2025-10-31 09:38:11 | 관리자
안녕하세요?   지난해에 사랑침례교회는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365 주제별 핵심 구절을 필사할 수 있는 필사노트를 만들어 모두가 무료로 다운받아 사용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365구절 필사노트 그런데 필사노트가 A4 사이즈라 크고 무거워서 사용에 제약이 있다고 해서 이번에는 암송 구절들만 모아서 옆에 두고 암송하고 자기 노트에 필사할 수 있게 일반 신국판 책 사이즈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365 주제별 핵심 구절(교리 요약+구원 계획 설명)>을 만들어서 올리니 마음대로 다운받아 쓰시고 원하시면 책으로 제본해서 쓰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히 넘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샬롬   패스터              
2025-10-29 16:28:05 | 관리자
글 잘 읽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성막과 성전 언급 부분의 맥락과 의미를 명쾌하게 짚어주셔서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곳에 거하지 않으신다"는 스데반의 외침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얼마나 강력한 메시지인지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글을 읽으며, 저 역시 신앙의 본질보다는 눈에 보이는 형식이나 건물, 직분 같은 것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안주하려 하지는 않았나 하는 깊은 성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광야의 '움직이는 성막'과 예루살렘의 '고정된 성전'의 대비가 인상 깊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는 곳마다 함께하셨던 하나님의 임재가, 어느 순간부터는 거대한 건물 안에 갇혀버린 듯한 모습에서 신앙의 경직성을 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도 교회라는 건물 안에서만 유효하고, 세상 속에서는 힘을 잃어버리는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성도들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마지막 말씀이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스데반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진리는 건물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 자신이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삶의 모든 순간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순종하는 '살아있는 성전'으로 살아가야 함을 마음에 새깁니다. 신앙의 본질을 꿰뚫는 귀한 글을 나눠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2025-09-18 09:46:54 | 오광일
스데반 설교에서 성막과 성전 언급의 의미(사도행전 7:44–50) 사도행전 7장 44-50절에는 스데반이 성전을 언급하는 내용이 있다. 앞뒤 본문의 이해 없이 이 부분을 읽다 보면 왜 갑자기 스데반이 성막과 성전을 언급하는지 알 수 없다.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한 긴 설교를 기록한다. 6장에는 종교 지도자들과 스데반을 반대하는 자들이 거짓 증인들을 매수하여 그들이 다음과 같이 거짓 증언을 하게 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대적하여 신성모독 하는 말들을 하는 것을 그치지 아니하는도다. 그가 말하기를,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모세가 우리에게 전해 준 관례들을 고치리라,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행6:13-14)   스데반의 설교는 이런 고발에 대한 변증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시 요약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조상들에게 나타나시고, 인도하시고, 말씀하셨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한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요셉, 모세, 광야 생활, 다윗과 솔로몬까지 구속사의 주요 사건을 되짚는다. 그 목적은 단순히 역사 강의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거부해 왔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설교의 흐름에서 44절부터는 성막과 성전 이야기가 등장한다. 스데반은 이렇게 말한다.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언의 성막이 있었는데...”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동식 장막 안에서 그들과 함께 계셨다.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장소에 묶이지 않고, 순종하는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다윗이 하나님께 집을 지어 드리려 하였고,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였지만, 하나님은 그곳에만 갇혀 계신 분이 아니다.  스데반은 이어서 이사야 66장의 말씀을 인용한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곳들에 거하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은 나의 왕좌요, 땅은 나의 발 받침이라.”  하나님의 임재는 성전 건물에 제한되지 않는다. 온 우주가 하나님의 집이며, 하나님은 성전보다 크신 분이다. 스데반은 이 말을 통해 자신이 성전을 모독한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오히려 성전을 우상처럼 여기는 유대 지도자들의 태도를 책망한다. 그들은 성전을 지켰지만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거역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거부했던 조상들의 역사처럼, 지금 그들 역시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스데반은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역한다”(51절)고 직설적으로 청중을 정죄한다. 결국 그들의 분노가 폭발해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한다. 스데반의 설교는 단순한 역사 강의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특정한 장소에 갇히신 분이 아니며, 성전 건물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한다. 성전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유지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도 건물이나 형식만을 붙잡고 하나님과의 실제 관계를 놓치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보다 순종하는 마음을 기뻐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성도들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 3:16). 스데반의 설교는 우리에게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께 마음을 드리고, 그분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도전한다.
2025-09-17 07:46:29 | 관리자
안녕하세요?   이번에 사랑침례교회에서는 <할머니가 들려주는 성경 이야기: 구약 및 신약> 컬러 책을 무료 PDF로 올려 드립니다.   구약 508쪽, 신약 212쪽   부모님과 아이들 모두에게 유익이 되기를 원합니다. 서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너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2;15). 많은 사람들이 성경 말씀이 가장 중요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지만 정작 자기 아이들에게 성경을 읽게 하는 것은 실생활에서 어려운 일입니다. 제 마음속에는 아이들에게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들을 요약해서 전해 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늘 있었습니다. 특히 주일학교를 통해 최소한 이 정도의 이야기는 듣고 배워야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목사의 설교를 듣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 명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혜영 자매님께서 자신의 손주들을 위해 신구약 성경의 여러 이야기를 요약해서 알기 쉬운 문체로 직접 노트에 적어 제게 주셔서 제가 살펴보고 <할머니가 들려주는 성경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으로 내면 우리의 필요를 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것을 더 확장해 주실 것을 부탁드렸고 자매님께서는 2년여에 걸쳐 여러 이야기들을 써 주셨습니다.   그 뒤 이것들을 정리하다 보니 구약부터 신약까지 중요한 이야기들을 할머니가 설명해 주는 방식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제가 김지훈 형제님께 부탁을 드렸고 김 형제님께서 자매님의 글들을 중심으로 더 추가해야 할 것들을 이야기 형태로 만들어 최종 원고를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구약에서 62개, 신약에서 30개, 총 92개의 이야기들이 정리되고 편집되었습니다. 주일학교나 부모님들의 교재로 쓰일 것도 감안해서 각 장의 끝에는 각 이야기의 요약과 적용을 추가하였습니다.   비록 아이들을 위해 쓰였지만 이 책은 신구약 성경 전체의 맥을 잡아 주는 좋은 안내서이므로 어른들도 한번 읽어 보시면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랑침례교회 미디어 선교를 통해 이 책이 무료 PDF 파일로 여러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한 열매를 풍성히 맺기를 기도합니다.   책이 나오기까지 오랫동안 수고해 주신 박혜영 자매님, 김지훈 형제님 그리고 교정에 참여해 주신 모든 형제/자매님들께 감사를 드리고 이것을 잘 편집해서 보기 좋게, 읽기 좋게 만들어 주신 김재욱 형제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들을 열렬히 사랑하는 귀한 성도들이 이 땅에 많이 생기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샬롬 사랑침례교회 목사 정동수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수하며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시느니라(잠30:5).          
2025-09-11 20:17:59 | 관리자
예수와 예슈아 논쟁 종식 이 주제는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슈아'라는 이름을 열정적으로 옹호하고, 다른 이들은 '예수'라는 이름을 굳건히 지지합니다. 예수님을 '예슈아' 대신 '예수'라고 부르는 것이 진리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단순히 번역의 문제일까요? 이번에는 성경과 역사가 이 주제에 대해 말하는 모든 것을 차분하고 성경적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명확하게 생각하고, 진심으로 기도하며, 열린 마음으로 공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예수'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름은 이교적일 뿐만 아니라, '예슈아'라고 말하지 않으면 기도가 들리지 않는다면서 말입니다. 전 세계 수백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많은 이들이 경건하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라는 이름에 정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기 오래전에 천사가 요셉에게 마리아가 낳게 될 아이의 이름을 알려 주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라, 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작위적인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예슈아' 또는 '여호슈아'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문자적으로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 또는 '주는 구원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구원이라는 사명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초기 제자들과 사도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예수님의 이름을 그리스어로 '예수스'(Yesus)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예슈아'를 그리스어로 말하는 방식일 뿐이며,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관행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혼란스럽거나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에 대해 쓰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이 복음서를 그리스어로 기록할 때 예수님의 이름을 매번 히브리어로 바꾸어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스'를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에게 이교적이거나 잘못된 이름을 주셨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의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매우 히브리적인 이름의 그리스어 형태이며, 거룩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예슈아'와 매우 유사하게 동일한 의미를 지니며, 하나님에 의한 구원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예수'라고 말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구원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초점은 전혀 어떤 이방 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세상에서 사셨습니다. 그분은 히브리어와 그와 관련된 언어인 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리스어는 당시 고대 세계에서 널리 통용되던 사실상의 공용어였습니다. 사실 신약 성경의 거의 모든 부분이 히브리어가 아닌 그리스어로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널리 퍼질 수 있도록 그리스어로 기록된 것입니다. 성경 자체도 이름 번역이 허용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요한복음에서 안드레가 그의 형제에게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하는데, 이는 "그리스도"로 번역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 1:41). 즉, 성경 본문에서 히브리어 단어 '메시아'를 그리스어 칭호인 '크리스토스'(그리스도)로 번역하며,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이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그에게 아람어 이름 '게바'를 주셨지만, 성경은 이 이름이 그리스어 '페트로'(베드로), 즉 '돌'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성경 자체가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 자유롭게 언어를 전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의 인간 언어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히브리어든, 아람어든, 그리스어든, 메시지는 동일합니다. 신약 성경 저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그리스어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것을 알려 줍니다.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후안이라는 친구가 영어권 나라를 방문했을 때 사람들이 그를 '존'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은 언어가 달라지면서 형태는 바뀌었지만, 그분의 정체성은 변함없이 유지되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예슈아'(여호수아)였습니다. 아람어로 말할 때는 매우 비슷하게 들렸습니다. 이 이름이 신약 성경의 언어인 그리스어로 옮겨졌을 때, '예수스'(Yesus)가 되었습니다. 이는 그리스어 문자와 소리가 히브리어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예수스'라는 이름은 라틴어로 기록된 후 영어로 기록되면서 결국 '예수'(Jesus)라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각 단계는 마치 하나의 멜로디를 다른 악기로 연주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멜로디(이름)는 동일하지만, 소리는 언어에 따라 달리 표현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언어적 적응이 충분히 허용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줍니다. 만일 ‘예슈아’라는 히브리어 이름 외의 어떤 형태로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잘못된 것이었다면, 그 이름을 그리스어로 ‘예수스’라고 기록한 사도 베드로나 요한, 바울 역시 잘못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들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다른 알파벳으로 옮겨 적는 것(음역)이나 의미를 담아 번역하는 일이 때로는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신약 성경 시대의 성도들은 히브리어 이름을 고집하지 않고, 그리스어로 옮긴 형태를 자유롭게 사용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확장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할 때, ‘예수’, ‘지저스’, ‘이수’, ‘예슈아’ 중 어떤 이름을 사용하든 주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억양이나 발음이 아닌,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가진 의미, 곧 ‘구원자’라는 진리는 모든 언어를 통해 빛나며, 문화와 언어를 초월하여 동일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영어권에서 ‘Jesus’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수 세기에 걸쳐 수많은 영어권 그리스도인들이 해 온 일이며, 하나님께서는 잘 이해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본래 이름을 정확히 발음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들으시지 않을까, 실수로 다른 신을 부르는 것이 아닐까 걱정합니다. 구원은 혀가 꼬이는 말이나 비밀스러운 암호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완벽한 발음으로 이름을 말함으로써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자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언어적 기술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종종 '여호와'로 발음되는 이름을 생각해 보십시오. 고대 히브리인들은 이 이름을 너무나 신성하게 여겨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확한 원래 발음은 사라졌습니다. 만약 구원이 하나님의 이름을 100% 정확하게 말하는 것에 달려 있었다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을 아십니다. 그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 '주님' 또는 '하늘 아버지'라고 말하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누구에게 말을 걸고 있는지입니다. 우리가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모든 음절을 정확하게 발음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성품을 사랑하고,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일까요? 성경은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면 이것에 의해 우리가 그분을 알고 있음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2:3)라고 답합니다. 그분의 성품과 우리의 순종이야말로, 우리가 참되신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어떤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그분과 맺은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만약 누군가 "이름을 정확히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실 거야"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성경이 결코 묘사하지 않은 방식으로, 즉 언어에 지나치게 까다로운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번역이나 약간의 잘못된 발음일지라도, 전능하신 분이 우리의 진심 어린 부르짖음을 듣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마음을 보십니다(삼상 16:7). 따라서 우리가 '예수', '예슈아', 아랍어권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이사' 혹은 또 다른 언어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더라도, 참되신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믿는 자녀들의 음성을 모두 알아들으십니다. 구원은 이름을 정확히 발음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가리키는 분, 곧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고 신뢰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군중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이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 안에는 구원이 없나니 하늘 아래에서 우리를 구원할 다른 어떤 이름도 주께서 사람들 가운데에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하였더라."(행 4:12)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읽고 "예수님의 다른 형태의 이름을 사용하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의미인가?"라고 묻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다른 이름"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예수님을 거부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답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위해 의지할 수 있는 다른 이는 없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과 그분의 권위를 나타냅니다. 마치 우리가 "법의 이름으로 멈춰라"라고 말할 때, '법'이라는 단어 자체가 마법의 단어가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권위를 나타내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순한 발음이나 형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그분을 우리의 주님이시며 유일한 구원자로 믿고 신뢰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이나 어떤 권세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참된 구원자이십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그리스어로 기록했는데, 원문 그리스어 본문에는 '예수스 크리스토스'라는 이름이 주어져 있습니다. 오늘날 누군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베드로가 말했던 바로 그 구원자를 고백하는 것이며, 단지 그분의 이름을 영어 형태로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성도의 진심 어린 기도를 '예슈아'가 아닌 '예수'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거부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베드로가 전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를 완전히 오해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새로 믿는 사람이 '예수'(Yesu)라고 부를 때, 하나님께서 "안 돼, '예슈아'라고 말해야 해."라고 말씀하실까요? 물론 아닙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은 우리가 어떤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를 불러야 하는지,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강조점은 오직 예수님만이 그분이 누구신지, 그리고 무엇을 행하셨는지로 인해 구원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이름, 곧 주 예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받을 것입니다. 이름의 형태는 언어마다 다를 수 있지만, 모두 동일한 주님을 가리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다양한 민족들에게, 다양한 언어로 전파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그분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라고 말합니다. '누구든지'는 어떤 언어로든 주님을 부르는 자를 의미합니다. 다른 어떤 이름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다시 살아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라는 이름이 분명히 참된 구원자를 가리키는데, 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이교적이라고 생각할까요? 불행히도 인터넷 등지에서 '예수'가 이교와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한 가지 널리 퍼진 오해는 '예수'라는 이름이 그리스 신 '제우스'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또 다른 황당한 주장들로는, '예수'라는 이름이 '제우스에게 만세'를 의미한다거나, 심지어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억지로 혼합하여 '예수'라는 단어가 '땅돼지'를 뜻한다고 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역사학자나 성경 어디에서도 지지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근거가 전혀 없는 종교적 낭설에 불과합니다. '예수스'(Yesus)라는 그리스어 이름은 기독교가 이교 국가들로 퍼지기 훨씬 전부터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에 의해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들이 존경했던 바로 그분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이교적인 요소는 전혀 없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이름과 칭호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그 각각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며, 그분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 3:14)로 불리는데, 이는 그분이 영원하고 스스로 존재하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엘로힘'(하나님 또는 전능자)(창 1:1)은 창조주로서의 그분의 능력을 강조합니다. '아도나이'(주님)는 권위와 존경의 칭호입니다.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는 그분의 궁극적인 힘을 가리킵니다. '아바'(아버지)는 매우 개인적인 용어입니다(롬 8:15). 하나님의 아들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 또한 다른 이름과 칭호를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논의했던 '예슈아'(히브리어), '예수스'(그리스어), '예수'(영어)는 '주님은 구원이시다'를 의미합니다.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마 1:23)은 예수님이 인류와 함께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은 우리 죄를 위한 희생으로서의 예수님의 역할을 가리킵니다(요 1:29). '하나님의 아들'(눅 1:35)과 '사람의 아들'(마 8:20)은 그분의 신성과 인성을 보여 주는 칭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단 하나의 이름이나 특정한 인간 언어에 국한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과 모든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소통하시는 분이십니다. 오순절 날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은 기적적으로 각기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행 2:5–11).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가 있는 자리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다가오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의 단 한 가지 형태만이 옳고, 다른 모든 언어 표현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실제 사례들과 분명히 어긋납니다. 성경 자체도 하나님을 가리켜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고 그리스어의 다양한 이름과 호칭을 사용합니다. 이후 신실한 번역자들은 라틴어, 영어, 그리고 수많은 다른 언어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전파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영어로 드리는 기도나 중국어로 올리는 찬양을 듣지 않으셨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언어를 말씀하시고, 모든 언어를 들으십니다. 그분께서 보시는 것은 우리의 발음이나 억양이 아니라, 우리 말 속에 담긴 의미와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요 4:24), 한 가지 특정한 언어나 방언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심지어 하늘에 있는 큰 무리, 곧 모든 민족들과 족속들과 백성들과 언어들에 속한 큰 무리가 나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계 7:9). 그들 중 일부만 히브리어를 사용하겠지만, 하나님은 그 어떤 언어라도 모두 들으시고 이해하십니다. 많은 언어로 찬양을 드릴지라도, 그 모든 찬양의 대상은 동일한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자녀의 목소리를 사랑으로 알아보시는 부모처럼, 각기 다른 언어로 부르짖는 자녀들의 음성을 분명히 들으십니다. 우리가 ‘아버지’, ‘아바’, ‘파드레’, 혹은 ‘바바’라고 부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부르짖음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를 아시며 응답하십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능력을 지니는 것은 단지 글자의 배열이나 소리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이름이 능력을 가지는 이유는, 바로 그 이름을 가지신 분, 곧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지금도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입술에 있는 음절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에 있는 구원자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아는지, 사랑하는지, 그리고 따르는지입니다. 예수님 자신께서 "내게, 주여, 주여, 하고 말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는 아니하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루 종일 '주님, 주님'이라 부르거나 이름을 정확히 말할 수 있다고 해도,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다면, 즉 그저 이름을 부르기만 하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비밀번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삶의 주님으로 삼지 않는다면,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르기만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알고,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분으로 그분을 신뢰하며, 사랑으로 그분께 순종할 때,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요 1:12). 그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누구시며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철자나 발음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이자 우리의 구속자이며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어떤 친한 친구를 가지고 있다면, 중요한 것은 그 이름을 정확히 어떻게 발음하느냐가 아니라, 그 친구와 나누는 깊은 유대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는 전 세계에 수많은 제자들과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예수님을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지만, 주님은 그 모든 사람을 알고 계시며, 동일한 사랑으로 그들을 품으십니다. 당신이 영어로 "사랑하는 예수님"이라고 기도할 때, 그분께서는 "내 자녀가 나를 부르고 있구나."라고 들으십니다.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성도가 "예슈아"라고 부르짖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똑같이 "내 자녀가 나를 부르고 있구나."라고 들으십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알고, 양들은 그의 음성을 압니다(요 10:14). 그렇다면 '예수'는 이교적인 이름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치유와 구원을 가져다준 이름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들이 쫓겨났고,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삶이 변화되었으며, 병든 자가 치유되고 죄인이 구원받았습니다. 특별한 소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부르짖었던 그리스도의 능력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에 언어에 대한 사소한 논쟁을 넘어 예수님의 이름의 진정한 능력, 즉 구원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에 집중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예배가 영과 진리 안에서, 그분의 영으로 충만하고 변화된 마음에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내가 그분의 이름을 올바르게 발음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개인적인 나의 구원자로 알고 있는가'입니다. 길과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을 알고 있습니까(요 14:6)? 그분은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이해하면 '예수'라고 말해야 할지 '예슈아'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단순히 사랑과 믿음으로 그분께 부르짖을 것이고, 그분은 응답하실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풍부한 히브리적 뿌리를 존중하고 '예슈아'라는 이름을 소중히 여깁시다. 그러나 '예수'라는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을 결코 판단하지 맙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그분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성경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것에 의해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리라, 하시니라."(요 13:35)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올바른 히브리어 발음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예슈아’, ‘예수스’, ‘예수’라 부르든, 혹은 어떤 언어로 표현하든지 간에 진리는 분명합니다. 그분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 모두의 유일한 구원의 소망이 되는 분입니다. 그분께 우리의 믿음을 두며, 우리의 삶으로 그분을 존경하고, 그분의 이름을 자신감 있게 부를 수 있음에 기뻐합시다. '주 예수님'이라고 말하든 '예슈아 하마시아흐'라고 말하든, 우리가 진정으로 믿음을 가지고 그분을 부르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 봅시다. 하늘 아래에서 우리를 구원할 다른 어떤 이름도 주께서 사람들 가운데에 주지 아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분의 이름입니다. 오늘날 음절에 대해 걱정하기보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아는 데 전념합시다. 그분께 마음을 여십시오. 그분은 당신의 말을 들으시고 당신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입술에 있는 이름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에 있는 주님이야말로 모든 차이를 만듭니다.
2025-06-13 14:11:49 | 관리자
혼전 성관계: 성경적 정의와 오늘날의 적용 1. 혼전 성관계는 성경에서 어떻게 정의되는가? 성경은 명확하게 음행(forni­cation), 간음(adultery), 그리고 성적 부도덕(sexual immorality)을 죄로 정죄한다. 이 중 '혼전 성관계'라는 단어 자체가 성경에 명시되어 있진 않지만, 그 개념은 음행이라는 용어 안에 포함된다. 고린도전서 7:2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행을 피하기 위해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둘지니라.” (고전 7:2, 흠정역) 이 구절은 혼전 성행위가 음행임을 전제하고 있으며, 음행을 피하는 유일한 정당한 방법이 결혼을 통한 합법적 성적 결합임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히브리서 13:4은 다음과 같이 명확히 말한다: “결혼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존귀한 것이니 잠자리를 더럽히지 말라. 그러나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라.” (히 13:4, 흠정역) 성경은 결혼 밖에서의 모든 성적 행위를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하며, 이는 당연히 혼전 성관계도 포함한다. 2. 성경 전체에서의 일관된 정죄 혼전 성관계는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들에 포함된 성적 부도덕 안에 포함되며,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죄악이다: 사도행전 15:20 고린도전서 5:1, 6:13, 6:18, 10:8 고린도후서 12:21 갈라디아서 5:19 에베소서 5:3 골로새서 3:5 데살로니가전서 4:3 유다서 1:7 요한계시록 21:8 이 모든 구절은 음행과 성적 부도덕을 포함한 죄 목록에서 혼전 성관계를 분명히 죄로 포함시키고 있다. 3.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성(性)의 목적 하나님은 결혼 제도 안에서만 성관계를 허락하셨고, 이는 쾌락뿐 아니라 출산과 자녀 양육이라는 목적을 내포하고 있다. 잠언 5:18–19, 아가서 4장 등은 결혼 안에서의 성관계가 기쁨의 선물임을 말한다. 그러나 결혼 없이 성관계를 할 경우: 하나님의 언약 없는 남녀가 성의 결실을 즐기고 책임지지 못할 생명을 낳게 되는 위험을 감수하며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 구조 밖에서 죄를 짓게 된다. 4. 혼전 성관계의 결과와 사회적 해악 현대 사회는 혼전 성관계를 '개인의 자유'로 미화하지만, 그 결과는 실로 참담하다: 성병의 확산 낙태 증가 미혼모 문제와 원치 않는 임신 양육자 없는 아이들 성경적 순결을 지키는 것은 단지 개인 윤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유익하며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길이다. 5. 결론 혼전 성관계는 성경 전체가 명확히 정죄하는 음행이다. 이는 결혼 언약 없이 하나님의 선물인 성(性)을 남용하는 죄이다. 성경은 혼전 성(性)을 죄로 간주하며, 이를 피하고 거룩한 결혼 안에서만 성관계를 하라고 명령한다. 참된 신자는 성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절제하며,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곧 너희가 거룩히 구별되는 것이라. 너희는 음행을 삼가고” (살전 4:3, 흠정역) “너희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 (롬 12:1, 흠정역) 하나님은 결혼 안에서의 순결을 기뻐하시며, 혼전의 정결함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믿음의 길이다.
2025-05-29 12:02:42 | 관리자
히브리서 13장 5절, 도박은 죄인가?: 성경적 관점에서 본 노름과 탐욕   1. 성경은 도박을 직접적으로 금하는가? 성경은 "도박"이라는 단어 자체를 사용하지 않지만, 돈을 사랑하는 마음, 탐욕, 부정한 재물, 그리고 일확천금의 유혹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한다. "이는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기 때문이라.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믿음에서 떠나 잘못을 범하고 많은 고통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 (딤전 6:10, 흠정역) "너희의 행실을 탐욕이 없게 하고 너희가 가진 것들로 만족하라." (히 13:5, 흠정역) 도박은 본질적으로 일하지 않고 얻으려는 시도이며, 성경은 분명히 수고를 통해 얻는 부를 칭찬한다: "헛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들 것이나 수고하여 모으는 자는 재물을 늘리리라." (잠 13:11, 흠정역) "누구든지 일하려 하지 아니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였노라." (살후 3:10, 흠정역) 2. 제비 뽑기와 도박은 다른가? 성경에는 제비 뽑는 장면들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고, 재물의 이전이나 내기를 위한 행위는 아니었다. 죽어야 할 희생물 염소와 산 채로 풀어 주는 속죄 염소 구분 (레 16:8) 이스라엘의 땅 분배 (수 18:10) 예루살렘 거주자 선정 (느 11:1) 가룟 유다의 후계자 선정 (행 1:26) "제비는 겹친 옷자락 속에서 사람이 뽑지만 그것에 따른 전체적인 판결은 주께서 하시느니라." (잠 16:33, 흠정역) 이것은 오늘날 도박처럼 우연을 노려 재물을 얻는 행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오히려, 도박의 진정한 본질은 마태복음 27:35에서 드러난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두고 제비를 뽑는 장면이다: "그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뒤에 그분의 옷들을 제비 뽑아 나누니..." (마 27:35, 흠정역) 이 장면은 세속적 탐욕과 영적 무관심의 극단적 표현이다. 3. 도박은 타인의 손해를 기반으로 한 죄악이다 도박은 기본적으로 다른 이의 손해 위에 자신의 이익을 세우는 행위다. 한 사람이 돈을 따려면, 반드시 다른 이들이 져야 한다. 이는 단순한 어리석음이 아니라, 비윤리적 행위다. "의로운 사람은 자기 짐승의 생명을 중히 여기지만 사악한 자들의 친절한 긍휼은 잔인하니라." (잠 12:10, 흠정역) 이는 이웃의 약점을 이용하고,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며,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기준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4. 카지노, 스포츠 도박, 복권 등 카지노는 마케팅을 통해 가능한 많은 돈을 걸게 만든다. 술을 공짜로 제공하며 분별력을 흐리게 하고, 온갖 화려함으로 탐욕을 자극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게임은 구조적으로 이용자에게 불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스포츠 도박 또한 마찬가지로 점점 대중화되고 있으며, 일부는 이것을 단순한 오락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 역시 탐욕과 중독의 위험을 동반하며, 경기의 공정성도 훼손할 수 있다. 미국 도박 문제 위원회(NCPG)에 따르면, 미국인 약 500만 명이 강박적 도박자에 해당한다. 복권은 공익 명목으로 운영되지만, 실제로 가난한 계층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한다. 한 조사에 따르면, 최하위 소득 가정은 연소득의 13%를 복권에 쓰는 반면, 고소득층은 단 1%만 소비한다. 이는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시스템이다. 5.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분별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돈을 사랑하지 않는가? (히 13:5)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진리를 기억하는가? (마 6:24) 청지기로서 맡은 것을 잘 관리하고 있는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고 있는가? "그러므로 탐욕은 우상숭배니라." (골 3:5, 흠정역) 그리스도인은 믿음 안에서 책임감 있게 판단하며, 탐욕과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단순한 재미나 여가라는 명목으로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지 말라. 6. 결론 성경은 도박을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탐욕과 돈에 대한 사랑, 부정한 재물에 대해 강력히 경고한다. 도박은 타인의 손해를 기반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로, 윤리적으로도 비성경적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청지기적 책임, 간증,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판단해야 하며, 돈을 사랑하지 말고 경건과 자족함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만족하면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큰 이득이니" (딤전 6:6, 흠정역)
2025-05-29 11:58:59 | 관리자
방언의 은사: 성경적 정의와 오늘날의 적용   1. 방언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방언(speaking in tongues)은 처음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사건에서 등장한다. 성령이 임하시자 제자들이 자신들이 배우지 않은 실제 외국어(타언어)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주변 여러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이 “저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우리 언어들로 말함을 우리가 듣는도다”(행 2:11)고 반응했다. 여기서 ‘방언’으로 번역된 헬라어 “글로싸이”(glōssai)는 문자 그대로 ‘언어들(languages)’을 뜻하며, 알 수 없는 소리나 황홀경의 음성이 아니라, 구체적인 외국어를 말한다. 이는 “그런데 어떻게 우리 각 사람이 우리가 태어난 곳의 우리 언어로 듣느냐?”(행 2:8)라는 사람들의 반응으로도 분명히 확인된다. 2. 방언의 목적은 무엇인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의 목적과 한계를 명확히 설명한다: 방언은 외국어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표적이었다. “그러므로 타 언어들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아니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고전 14:22)이라고 했고, 이는 사도행전 2장의 사건과 정확히 일치한다. 교회 안에서는 방언을 사용할 경우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한다고 했으며(고전 14:27–28), 통역이 없을 경우에는 “교회 안에서 잠잠하고 자기에게와 하나님께만 말하라”고 명령했다. 따라서 방언은 개인의 경건을 위한 기도 언어나 자기만족의 수단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타언어를 사용하는 특별한 은사였다. 3. 방언은 오늘날에도 유효한가? 고린도전서 13:8은 “타 언어들도 있다 해도 그칠 것이며”라고 명시하고 있으며, 교회사적 맥락과 맞물려 방언의 은사는 사도 시대에 그 기능을 다하고 사라진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방언은 교회의 기초를 세우기 위한 은사였으며(엡 2:20), 교회가 완성된 이후 더 이상 반복될 필요가 없었다. AD 70년 예루살렘 멸망은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성취였으며, 방언은 이 심판이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징조로 주어졌던 것이다(사 28:11 참조). 바울은 “ 모두 타 언어들로 말하겠느냐?”(고전 12:30)라고 반문하며, 모든 성도가 방언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배격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오늘날 복음적 신학자들과 침례교, 개혁주의, 보수적 복음주의 교단들은 방언의 은사는 사도 시대에 끝났으며 오늘날에는 유효하지 않다고 본다. 4. 오늘날의 ‘방언 기도’ 또는 ‘신비 방언’은 성경적인가? 오늘날 많은 오순절파 및 은사주의 교회에서 알 수 없는 소리나 황홀한 경험을 ‘방언’이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방언과는 전혀 다르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실제 외국어였으며, 듣는 이들이 자기 언어로 알아듣는 것이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비판한 것은 의미 없는 방언 남용과 질서 없는 예배였다. 오늘날 ‘신비한 방언’을 성령충만의 증거로 삼는 주장 또한 성경 어디에도 명령되어 있지 않으며, 성령충만은 말씀에 순종하고 거룩함 가운데 걷는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방언 여부로 판단할 수 없다. 5. 방언 은사에 대한 오늘날 교회의 태도 방언은 교회의 기초가 세워지던 특별한 시대의 은사였으며 지금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오늘날 사용되는 방언은 심리적·감정적 현상일 가능성이 높으며, 성경의 방언과는 형태, 목적, 본질이 다르다. 오늘날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존 맥아더(John MacArthur), 존 파이퍼(John Piper), 웨인 그루뎀(Wayne Grudem) 등도 방언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하며, 신약 성경의 방언은 타언어이며 오늘날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방언 현상은 성경적인 것이라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결론: 방언은 성령께서 교회의 초창기에 주신 실제 외국어의 은사였으며, 복음을 전파하고,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한 표적이었다. 성경적으로 볼 때, 방언은 이미 사도 시대에 그 목적을 이루고 사라진 은사이며, 오늘날 나타나는 방언 현상은 성경의 방언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방언이 아닌, 말씀에 대한 순종과 거룩한 삶으로 성령 충만을 나타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은 항상 질서 가운데 역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전 14:33).
2025-05-29 11:54:37 | 관리자
민수기 12:1-9, 성경은 인종 간 결혼을 어떻게 보는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다른 민족, 다른 인종 간의 결혼은 옳은가?" 하는 문제에 대해 혼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으며, 결론적으로 인종 간 결혼은 죄가 아니며, 오히려 믿음 안에서의 하나 됨을 더욱 풍성히 보여 줄 수 있는 결혼임을 가르칩니다. 아래에서는 구약과 신약의 원리를 바탕으로, 성경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약에서 이방 결혼 금지 명령의 진짜 이유는 '종교적 순결' 때문임 신명기 7:3-4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하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그들과 결혼하지도 말지니... 그들이 네 아들을 빗나가게 하여 나를 따르지 못하게 하므로 네 백성이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기 때문이니..." 여기서 금지된 것은 '인종 간 결혼'이 아니라, 우상 숭배자들과의 결혼입니다. 하나님은 이방 민족들의 우상 숭배로 인해 이스라엘이 미혹되어 떠나게 될 것을 우려하신 것입니다 (말라기 2:11 참조). 신약의 동일한 원리: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고린도후서 6:14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들과 공평하지 않게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 이 구절도 피부색이나 민족이 아닌 영적 상태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결혼의 핵심은 상대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인가, 즉 중생한 성도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종 간 결혼의 긍정적 예 룻과 보아스: 룻은 모압 여자였고, 보아스는 유다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룻기는 이들의 결혼을 정죄하기는커녕 오히려 다윗 왕의 조상으로 연결되는 은혜의 계보로 높이 평가합니다 (룻기 4:13-22). 모세와 구스 여인(에티오피아 여자): 민수기 12장에서 모세가 구스 여인과 결혼했을 때, 미리암과 아론이 그를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책망하시며 모세를 변호하셨습니다 (민수기 12:1-9). 에스더와 아하수에로 왕: 에스더는 유대 여인이며, 남편은 페르시아 왕입니다. 이 결혼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에스더기 전체). 이와 같은 예들은 하나님께서 피부색이나 민족이 아니라, 그분의 뜻과 믿음을 따라 이루어지는 결혼을 귀히 여기신다는 증거입니다. 인종 차별은 성경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음 야고보서 2:1–10은 외모나 지위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죄로 규정합니다. 또한 바울은 로마서 10:12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이는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라. 모든 사람 위에 계신 같은 주께서 자신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니" 갈라디아서 3:28에서도: "그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 없고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가 없으며 남자나 여자가 없나니 이는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라."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는 민족, 인종, 계급의 구분이 무의미합니다. 우리가 아담과 이브로부터 유래한 하나의 인류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이를 더욱 뒷받침합니다. 실용적 고려 사항 인종 간 결혼은 성경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지만, 현실적으로는 사회적 편견과 차별, 문화적 차이로 인한 도전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커플은 이에 대해 신중한 기도와 준비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결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신성한 제도이며 (히브리서 13:4), 창세기 2:24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은 민족을 초월한 하나님의 창조 질서입니다. 또한 에베소서 5:25–33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통해 결혼의 신비와 영광이 설명되듯, 인종 간 결혼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을 드러내는 복음의 상징이 될 수 있습니다. 결론: 결혼의 기준은 '피부색'이 아닌 '믿음' 결국 결혼 상대자를 선택할 때의 핵심 기준은 그 사람의 민족이나 피부색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인가입니다.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결혼은 인종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일 뒤에 내가 보니, 보라,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 곧 모든 민족들과 족속들과 백성들과 언어들에 속한 큰 무리가 흰 예복을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든 채 왕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요한계시록 7:9) 하늘에서 모든 민족과 언어가 함께 예배드릴 그날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의 결혼 또한 복음의 일치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2025-05-29 11:39:57 | 관리자
구원의 영원한 안전보장 – 참된 성도는 구원을 잃을 수 있는가?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인가? 혹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도 어떤 경우에는 그 구원을 잃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수많은 성도들에게 신앙의 본질과도 같은 문제입니다. 감사하게도 성경은 참으로 구원받은 자는 결코 그 구원을 잃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 진리를 흔히 “구원의 영원한 안전보장”이라고 부릅니다. 1.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입니다 요한복음 3:3: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다시 태어남의 씻음과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으며” 구원은 단순히 기도를 따라하거나 감정적인 결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중생(重生)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입니다. 이 새 생명은 누구도 끊거나 취소할 수 없습니다. 2. 구원은 하나님의 작정 속에 이루어지는 완전한 계획입니다 로마서 8:30: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예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자신이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자신이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신 자는 반드시 영화롭게 하십니다. 중간에 떨어져 나가거나 취소되는 구원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합니다. 3. 하나님의 자녀는 그 누구도 정죄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33: “누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무슨 일로 고소하겠느냐? 의롭다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요한복음 10:28–29: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무도 내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누가 그 판결을 뒤집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언자(Advocate)이시며, 동시에 우리의 구속자이십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성도를 끌어낼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4. 영원한 생명은 “잠시 생명”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16: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이 도중에 사라질 수 있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영원한 생명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생은 영원히 지속되는 구원입니다. 5. 진정한 성도는 결코 완전히 믿음을 떠나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2: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신앙을 떠나거나 죄 가운데 지속적으로 거하는 자는 처음부터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았던 자일 수 있습니다. 참된 구원은 변화된 삶의 열매로 증명됩니다. 마태복음 7:16: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니” 6. 하나님의 봉인은 결코 파기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1:13–14: “... 너희가 믿은 뒤에 또한 그분 안에서 약속의 저 거룩하신 영으로 봉인되었는데... 값 주고 사신 그 소유물이 구속받을 때까지 우리 상속 유업의 보증이 되사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봉인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로서 성령님의 인도와 보호 아래 확실히 지켜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보증과 봉인은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으로 보장된 것입니다. 한 번 봉인된 자는 결코 영원한 상속 유업에서 제거되지 않습니다. 7. 존 맥아더, 존 파이퍼, 웨인 그루뎀, 그리고 대다수 침례교 목사들의 공통된 신앙고백 이 진리는 오늘날 미국 복음주의 진영의 주요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신학적으로 견고하게 믿어지고 가르쳐지고 있는 진리입니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끝까지 지켜진다. 만일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한다면, 처음부터 참된 성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존 파이퍼(John Piper): “하나님의 은혜는 시작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이루신다. 참된 성도는 반드시 견디고, 반드시 영화롭게 된다.” 웨인 그루뎀(Wayne Grudem): 그의 조직신학에서 이 진리는 성경적 구원론의 핵심으로 다루어지며, 거듭난 성도는 결코 구원을 상실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침례교(Baptist) 교회와 목사들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진리를 성경적 교리로 고백합니다. 이는 단순한 교리적 주장이나 위로가 아니라,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결론 구원은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로 확증된 은혜의 선물입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자는 절대로 그 구원을 잃지 않으며,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끝까지 붙들립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어떤 창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8–39, 킹제임스 흠정역) “이제 너희를 보호하사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유다서 1:24) 구원의 안전은 내게 달린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행위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담대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2025-05-29 11:34:37 | 관리자
로마서 14장 23절, 성경은 문신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오늘날 문신은 더 이상 특정 계층이나 반항의 상징이 아닙니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문신을 예술, 개성, 또는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믿는 자로서 문신을 해도 되는가?, 성경은 이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신약 성경은 문신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문신에 대해 직접적으로 금하거나 허용하는 명령이 없습니다. 따라서 문신을 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문제는 일종의 '그레이 존(회색 영역)'에 해당하며, 각자가 믿음 안에서 자기 양심에 따라 결정해야 할 영역입니다. 로마서 14:23 (흠정역): “무엇이든지 믿음에서 나지 아니하는 것은 죄니라.” 자신의 결정이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문신에 적용할 수 있는 원칙들을 제공합니다 1. 부모에게 순종하는가? 에베소서 6:1–2: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그것은 약속 있는 첫째 명령이니).” 미성년자가 부모의 동의 없이 반항심으로 문신을 하려 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죄입니다. 반항에서 비롯된 문신은 죄입니다. 2. 외적 치장이 내적 경건보다 앞서는가? 베드로전서 3:3–4: “너희는 머리를 땋고 금으로 치장하거나 옷을 차려입는 그런 외적 단장으로 단장하지 말고 오히려 마음의 감추어진 사람으로 단장하라. 그것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지극히 값진 것이요, 썩지 아니하는 것이니 즉 온유하고 조용한 영의 장식이니라."   문신을 통해 사람들의 시선을 끌거나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동기가 있다면, 그것은 자기 숭배이고 허영이며 죄가 될 수 있습니다. 3.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고린도전서 10:31: “그러므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문신을 하려는 동기가 단지 ‘유행이니까’, ‘나만의 개성이니까’라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결정인가를 진지하게 자문해야 합니다. 4.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고린도전서 6:19–20: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전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가 그분을 하나님에게서 받았고 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믿는 자의 몸은 자기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문신이 성전의 정결함과 거룩함을 훼손하지 않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단순한 문신을 넘어서, 과도하거나 신체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죄가 될 수 있습니다. 5.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입니다 고린도후서 5:20: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가 되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너희에게 간구하노니...” 문신은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인식하게 하는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자로서, 문신이 복음의 전달에 도움이 되는가, 혹은 걸림돌이 되는가? 이 기준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6. 문신이 미신적 요소나 세속 문화를 따르는 것은 아닌가? 레위기 19:28: “죽은 자로 인해 너희 살을 베지 말며 너희 몸에 아무 표도 새기지 말라. 나는 주니라.” 이 구절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으로, 오늘날 신약 성도에게 율법 그 자체로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율법은 이방인의 우상 숭배나 미신적 상징과 관련된 문신을 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어떤 이유로든 미신적 상징, 우상 숭배적 요소, 또는 세속 철학을 담은 문신을 해서는 안 됩니다. 결론: 문신은 죄가 아닐 수도 있지만,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문신 자체가 항상 죄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왜 하려는가, 무엇을 새기려는가, 어떤 태도로 하려는가는 반드시 성경의 원칙에 따라 점검해야 합니다. 반항에서 비롯된 문신은 죄입니다 허영과 자기 과시를 위한 문신은 죄입니다 미신적 또는 우상적 문신은 죄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문신은 죄입니다 믿는 자는 자기 양심과 믿음 안에서 판단해야 하며, 자신의 결정이 하나님께 합당한 것인지 늘 기도와 말씀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믿음에서 나지 아니하는 것은 죄니라.” (로마서 14:23, 흠정역)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전서 6:20)
2025-05-29 11:23:29 | 관리자
동성애는 왜 하나님 앞에 특별히 가증한 죄인가?   오늘날 많은 사회가 동성애를 인권의 문제로 보며, 도덕적 판단을 넘어서 받아들여야 할 개인의 성향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성애를 가증한 죄로 정죄하며,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로 규정합니다. 이 문제는 문화의 변화나 시대 흐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거룩하게 여기시고 무엇을 미워하시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동성애는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죄입니다 레위기 18:22 (흠정역): “너는 여자와 함께 눕는 것같이 남자와 함께 눕지 말라. 그것은 가증한 것이니라.” 레위기 20:13: “또한 남자가 여자와 함께 눕듯이 남자와 함께 누우면 그들이 둘 다 가증한 짓을 행하였으므로 반드시 그들을 죽일지니 그들의 피가 그들에게 돌아가리라.” 동성애는 단순한 도덕적 일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증한 일(abomination)’이라는 강력한 표현을 사용하여 다른 죄들과 구별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것), 결혼 제도(한 남자와 한 여자의 연합),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동성애는 심판의 징조이며, 사회의 타락을 드러냅니다 로마서 1:26–27 (흠정역): “이런 까닭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수치스러운 애정에 내주셨으니...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보기 흉한 짓을 행함으로 자기 잘못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자기 속에 받았느니라.” 동성애는 단순한 개인적 취향이나 기질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고 인간이 스스로를 최종 권위로 삼을 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로마서 1장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자들을 ‘그들의 정욕에 내어주신 것’ 자체가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시대를 ‘노아의 날들과 롯의 날들’에 비유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28–30 (흠정역): “마찬가지로 롯의 날들에도 그와 같았으니... 그날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같이 쏟아져 그들을 다 멸하였느니라.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바로 그와 같으리라.”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가 노아의 날들과 롯의 날들과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대표적인 죄는 동성애였으며, 유다서 1:7은 이를 “다른 육체를 따르는 음행”이라고 밝힙니다. 마지막 시대에 동성애가 창궐하는 것은 단지 사회의 타락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표지입니다. 동성애적 유혹은 죄가 아니지만, 그 유혹을 따르는 행동은 죄입니다 야고보서 1:14–15: “오히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유혹을 받을 때에 시험을 받나니... 그런즉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완료되면 사망을 낳느니라.” 동성애적 유혹이나 경향은 죄가 아닐 수 있습니다. 유혹은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이고, 그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유혹에 순복하고 그것을 삶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며 실천하는 것은 명백한 죄입니다. 어떤 죄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9–11 (흠정역): “불의한 자들이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여성화된 남자나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욕되게 하는 남자나... 너희 중에도 이 같은 자들이 얼마쯤 있었으나 너희가 우리 하나님의 영에 의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씻기고 거룩히 구별되어 의롭다고 인정받았느니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과거에 동성애자로 살았던 자들이 있었음을 분명히 밝히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고 용서받았으며, 더 이상 그 죄로 정의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복음은 동성애자에게도 열려 있으며, 예수님의 보혈은 모든 죄를 정결케 할 능력이 있습니다. 새로운 창조물로 살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 (흠정역):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신을 과거의 죄로 정체화하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구원받은 사람은 동성애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거룩한 백성,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적 타락으로부터도 완전한 자유와 회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결론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가증히 여기시는 죄입니다. 이는 단지 개인적 취향이나 성적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 결혼 제도, 생육과 번성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죄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는 표지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복음은 모든 죄인에게 소망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와 용서는 가능합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유혹을 이기고, 진정한 정결과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죄를 합리화하거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되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내가 그들의 불의에 대하여 긍휼을 베풀고 다시는 그들의 죄들과 그들의 불법들을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느니라.” (히브리서 8:12, 킹제임스 흠정역)
2025-05-29 11:19:57 | 관리자
디모데전서 3장 여성 목사,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는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여성이 목사나 교회 지도자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이는 단순한 성 평등의 문제도 아니고, 여성의 재능과 영적 성숙을 폄하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서 교회의 질서를 어떻게 정하셨는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성경은 여성의 목회 사역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11–12절 (흠정역): “여자는 전적으로 복종하며 잠잠히 배울지니라. 더욱이 나는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여자는 잠잠히 있을지니라.” 사도 바울은 남녀 간의 사회적 지위나 시대적 배경 때문에 이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닙니다. 그 근거는 창조 질서 자체에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13–14절: “이는 아담이 먼저 지어지고 그 뒤에 이브가 지어졌으며 아담이 속지 아니하고 여자가 속아 범법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는 남자에게 영적 지도력과 공적 가르침의 책임을 맡기셨고, 여자는 조용함 가운데 배우며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정하셨습니다. 감독(목사)과 집사의 자격은 남성으로 제한됩니다 디모데전서 3장 2절, 12절 (흠정역): “그러므로 감독은 반드시 책망받을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을 잘 다스릴지니”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표현은 성경적으로 감독(목사)과 집사의 자격이 반드시 남성에게만 해당됨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여성이 남편이 될 수 없듯이, 여성이 이 직분을 맡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결코 여성이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지만, 공적 가르침과 영적 권위는 남성에게 주어진 책무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브리스길라, 뵈뵈, 드보라 등의 사례는 목회 권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 속 여성 인물들—예: 드보라, 미리암, 브리스길라, 뵈뵈 등—을 근거로 여성도 목사로 세워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공적 예배에서 남성을 가르치거나 영적 권위를 행사한 사례가 없습니다. 드보라는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인도했지만, 이는 국가적 재판 사역이며, 교회 목회 사역과는 다릅니다. 브리스길라는 아굴라와 함께 아볼로를 개인적으로 지도했지만, 공개적으로 교회를 가르치거나 다스린 것이 아닙니다. 뵈뵈는 교회의 "섬기는 자(servant)"로 칭송받았을 뿐, 장로나 감독으로 인정된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예외적 사역 사례들을 교회 직분의 원리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여성은 교회 안에서 귀중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여성들이 다음과 같은 사역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장합니다: 다른 여자를 가르치는 사역 (디도서 2:3–5) 자녀들을 가르치는 사역 (딤후 1:5) 복음을 전파하고 간증하는 일 (마 28:18–20, 행 1:8) 성령의 은사를 통한 섬김 (고전 12장) 공적인 기도와 대언 (고전 11:5) 봉사와 긍휼 사역 (롬 16:1–2, 딤전 5:10) 하나님께서는 여성에게도 성령의 은사를 주셨으며, 교회 안팎에서 귀히 쓰임 받을 사역의 길을 열어 두셨습니다. 단지 남자를 가르치거나 교회를 다스리는 공적 권위는 허락하지 않으셨을 뿐입니다. 교회 역사와 복음주의 진영의 일치된 입장 현대 복음주의 진영의 대표적인 신학자들과 목회자들도 이 점에서 한 목소리를 냅니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 여성이 목사가 되는 것은 “성경에 대한 공개적 반역”이라고까지 말하며, 교회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존 파이퍼(John Piper): 남녀의 차이는 단순한 역할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복된 질서임을 강조합니다. 웨인 그루뎀(Wayne Grudem): 여성의 목회는 성경에 위배될 뿐 아니라, 교회와 가정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 최대 복음주의 교단인 남침례교단(Southern Baptist Convention, SBC)은 공식적으로 “여성은 목사직을 맡을 수 없다”는 입장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으며, 최근에도 이 원칙을 어긴 교회를 제명시킨 사례가 있습니다. 즉, 성경적 보수주의를 따르는 전통적인 교회들과 신학자들은 모두 여성 목사의 불가를 동일하게 주장하고 있으며, 그 입장은 성경의 명확한 계시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결론 성경은 분명하게 여성의 목회직 수행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성을 차별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세우셨는지를 그대로 따르려는 순종의 문제입니다. 여성이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여성의 가치가 낮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광스러운 질서와 역할을 각 성별에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수하며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시느니라.” (잠언 30:5, 킹제임스 흠정역) 오늘날 교회가 이 질서를 무시하면 결국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가 무너지며,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의 역할도 약화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성경의 가르침 위에 바로 서서,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 안에서 겸손히 각자의 자리에서 충성해야 합니다.
2025-05-29 11:12:01 | 관리자
가인의 아내는 누구였는가? – 성경이 주는 분명한 답 성경을 읽다 보면 창세기 4장 17절에서 가인이 아내를 알았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런데 아직 세상에 사람이 많지 않았을 그 시점에 도대체 가인의 아내는 누구였는가? 이 질문은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신뢰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고, 믿지 않는 자들이 성경의 오류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그대로 따라가면 이 문제는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습니다. 1. 모든 인류는 아담과 이브의 후손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 “그러므로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창세기 3장 20절: “아담이 자기 아내의 이름을 이브라 하였으니 이는 그녀가 살아 있는 모든 자들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더라.” 사도행전 17장 26절: “또 그분께서 사람들의 모든 민족들을 한 피에서 만드사 온 지면에 거하게 하시고…” 성경은 아담이 인류의 첫 사람이고, 이브가 모든 사람의 어머니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계열의 인류가 따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는 아담과 이브에게서 나왔습니다. 2. 아담과 이브는 여러 아들과 딸들을 낳았습니다 창세기 5장 4절: “아담이 셋을 낳은 뒤 그의 생애는 팔백 년이었으며 그가 아들딸들을 낳았더라.” 흔히 알려진 가인, 아벨, 셋 외에도 아담과 이브는 수많은 자녀를 낳았습니다. 따라서 가인은 자신의 누이 또는 가까운 친척과 결혼하였을 것입니다. 이는 인류 초기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3. 초기에는 근친혼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근친혼은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모세 율법이 주어지기 전까지는 성경에서 근친혼을 금지한 바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복 누이 사라와 결혼하였습니다 (창 20:12) 이삭은 사촌 리브가와 결혼하였습니다 (창 24:15)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딸인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았습니다 창조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당시에는 사람의 유전자가 지금보다 훨씬 더 순수하였기 때문에, 유전적 결함이 생길 가능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근친 간의 결혼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근친혼을 금지하신 것은 유전적 돌연변이가 누적된 시기, 즉 모세 시대부터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아담의 후손으로 오셔야 했습니다 성경은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씨로 오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아담을 통해 세상에 들어왔고, 구속도 반드시 아담의 자손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2장 16절: “진실로 그분께서는 자기 위에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 위에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도다.” 누가복음 3장: 예수님의 족보는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만약 아담 외에 다른 인류 계열이 있었다면, 그들은 구속의 대상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류 전체가 아담에게서 나왔으며,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한 구속자로 오셨습니다. 결론 가인의 아내는 그의 누이 또는 가까운 친척이었습니다. 성경은 아담과 이브가 많은 자녀를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에는 근친혼이 자연스럽고 허용된 일이었습니다. 성경은 이 문제를 숨기지 않고 분명히 밝혀주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바르게 믿고 따르면 혼란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105, 킹제임스 흠정역)
2025-05-29 11:02:27 | 관리자
지옥의 위치 및 지하 세계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지옥'(헬, 스월)은 때로는 넓은 의미의 '지하 세계'를 가리키기도 하고, 좁은 의미로는 뜨거운 불이 있는 고통의 장소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지하 세계는 문자적으로 땅 아래에 위치해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지하 세계에는 두 가지 주요 장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뜨거운 불이 있는 지옥으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가 갔던 곳입니다. 다른 하나는 낙원(파라다이스) 또는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이 두 장소는 지하 세계 안에 있었지만, 서로 왕래할 수 없는 깊은 구렁텅이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의인이나 악인이나 모두 죽으면 지하 세계로 내려갔는데, 의인들은 아브라함의 품/낙원으로 갔고, 악인들은 뜨거운 지옥으로 갔습니다. 사무엘상 28장의 사무엘이 엔돌의 무당에 의해 '위로' 올라오는 것처럼 묘사된 것은, 구약 시대에는 모든 혼이 땅 아래 지하 세계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사무엘의 경우는 특별하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로 설명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분의 육체는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혼은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시편 16편을 인용하여 설명하듯이, 지옥(지하 세계)으로 내려갔습니다. 이것은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지옥 뱃속 같은 고래 뱃속에 있었던 것과 같은 표적이며,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합니다. 예수님의 혼이 내려간 지하 세계의 특정 부분은 누가복음 23장에서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바로 그 낙원(아브라함의 품)이었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도 예수님께서 "땅의 더 낮은 부분들로 내려가신 것"이 언급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면서 이 지하 세계의 낙원에 갇혀 있던 구약 시대의 성도들, 즉 아브라함이나 다윗, 모세, 아담, 이브와 같은 사람들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로 인해 지하 세계에 있던 낙원(아브라함의 품)은 이제 비어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셋째 하늘로 채 올라갔다고 말한 장소가 바로 옮겨진 낙원이라고 설명됩니다. 따라서 신약 시대에는 성도가 죽으면 예수님과 함께 바로 하늘에 있는 낙원(셋째 하늘)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사 선포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영들은 노아 시대에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 불순종하던 자들로, 하나님의 아들들(타락한 천사들)이나 그들과 사람들 사이에 태어난 거인들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감옥은 탈타로스라고 불리는 곳으로 언급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곳에 갇힌 영들에게 승리를 선포하신 것으로 해석됩니다.   결론적으로, 성경의 지하 세계 개념에서 지옥은 계속해서 땅 아래에 있는 뜨거운 고통의 장소로 존재하며, 구약 시대의 낙원(아브라함의 품) 또한 땅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지하 세계의 낙원에 있던 구약 성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옮겨졌으며, 이제 낙원은 셋째 하늘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지하 세계의 뜨거운 지옥은 장차 천년 왕국이 끝나고 흰 왕좌 심판 이후에 사망과 함께 불 호수로 던져져서 둘째 사망이 될 것이라고 요한계시록은 이야기합니다.
2025-05-28 20:39:00 | 관리자
롬 8:13 – ‘영으로 몸을 죽인다’는 것인가, ‘성령을 통해 죽이는가’?   개역: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흠정역: “성령을 통해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KJV: “through the Spirit do mortify the deeds of the body” ▶ 여기서 개역은 ‘영으로써’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마치 우리 안에 있는 ‘영’이 몸을 제어하는 능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한다. ▶ 그러나 성경은 그 어떤 ‘인간의 영’도 죄의 행위를 죽일 수 없다고 말한다.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만 죄의 정욕을 이길 수 있으며, 성령 안에서 걷는 삶만이 육신을 이기는 삶이다(갈 5:16–17). ▶ 이 구절은 영과 몸 사이의 대결이 아니라, 성령 대 육신의 대조다. 개역의 번역은 독자로 하여금 영지주의적 이원론(몸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을 떠올리게 하며, 행위의 주체가 왜곡된다. 결론: 죄를 이기는 능력은 인간의 영이 아닌 성령의 권능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따라서 번역은 ‘성령을 통해’로 정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2025-05-27 15:25:01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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